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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

이 대륙의 역사 속에서 간신 중의 간신으로 손꼽히는 자.

성정이 유약한 황제의 측근이 되어 정치와 군사 활동, 각종 사업을 독점한 지 어언 60년. 그의 영지 '베노피스'에 있는 그의 저택은 황성보다도 더 거대하고 화려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가문의 상징인 '히드라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 아래엔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된 예술품과 조각상이 즐비했고, 다른 한쪽엔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면서 만든 마법 설비까지 동원한 금화가 흐르는 강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각종 희귀 마물과 동물로 채워 놓은 동물원과 저택 한쪽엔 그 동물, 마물들과 노예나 검투사들이 경기를 하게끔 투기장도 세워져 있었고, 그곳은 매일같이 비명 소리와 죽음의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도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하고 탐욕스러운 비인외도의 삶을 보냈으며, 보물고엔 백성들과 다른 귀족들에게서 뜯어낸 수많은 보물들이 가득했다.

또한 그는 간신이라곤 하나 정치적 수완이나 사업성, 음험함의 지혜는 모자라지 않아서 그의 아래 수많은 악당들이 그가 제공하는 권세와 성적, 물적 탐욕에 물들어 그를 지켜 주고 있었다.

거기에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는 성향 때문인지 온갖 방법으로 불로장생을 연구하던 터라 연금술과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독살 같은 시도도 무효화하며 역으로 자신이 독으로 암살을 해낼 정도로 뛰어났다.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위치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던 압도적인 권력자. 영원할 것 같았던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의 전횡은 병약한 선대 황제와 어린 현 황제까지 포함해서 2대 동안 이어졌고, 그렇게 약 60년 동안 제국의 2인자로서 군림했으나 결국 성인이 된 황제와 수많은 충신들의 활약으로 그 권세는 막을 내리게 된다.

"…천하의 간신, 악독한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 저지른 죄목은 이뿐만 아니라...."

'결국 이렇게 가는 건가?'

그렇게 대륙과 제국의 2인자였던 백발의 머리칼을 한 노년의 베오날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간신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건장하고 인상도 좋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인간 내면의 선악은 외모와 관계없다는 걸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지금 넝마 쪼가리 죄수복 한 벌을 입은 채로 사형대 앞에 올라서서 처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앞과 뒤에선 여러 귀족들과 백성, 신관들이 앞다퉈서 자신의 죄목을 떠들어 대고 있었고, 모여 있는 사람들은 죄목을 읊는 사람에게 호응하며 뭐라 뭐라 외치는 중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는 모든 게 허무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이 평생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죽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귀족의 의무를 다하는 게 너무나 힘들군. 하~'

죽음의 공포는 모든 생명체에게 똑같은 것이었지만 그는 가주가 된 이후부터 평생을 대귀족으로 살아왔기에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고고한 척, 태연한 표정으로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울고불고한다든가, 아니면 고해성사라든가, 자신의 인생사를 끝까지 읍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말이 왜 저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군. 다들 보이는 모습은 나와 다를 바 없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난 듯 이야기하는 건지. 참 나~'

사형을 기다리면서 그는 지루한 나머지 연설 소리에 신경을 끄고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일궈 낸 '베노피스 영지' 곳곳이 불타고 있었으며, 병사들과 백성들이 그가 평생을 노력하여 모은 재보를 가지고 싸우거나 분주히 옮기는 모습들이 보였다.

또 자신에게 협력해서 잘 먹고 잘살던 가신들이 이미 처형당해 목이 매달린 광경도 보였고, 건물들이 폭발하고 무너지는 소리도 이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우스워지는군.'

그 광경은 자신의 처형을 위해서 정의니 신벌이니 떠들어 대는 것과 너무나 대조되어 아이러니했다.

놈들도 결국 자신처럼 되고 싶어 했던 자들이다.

부와 명예, 권력, 여자, 모든 것을 가진 자신을 우러러볼 땐 언제고, 지금은 신과 정의의 이름을 빌려서 빼앗는 꼴이라니. 웃음을 참는 게 너무나 힘든 베오날드였다.

'그런데 저렇게 망가뜨리는 걸 보니 여기는 아예 싹 폐허로 만들 생각인가 보군. 쯧쯔쯔, 기왕 만들어 둔 거 누군가 차지해서 쓰지. 참~ 돈 많이 들었는데 말이야. 보아하니 싹 폐허로 만들 생각인가 보군.'

"아버지...."

자신이 힘들게 만든 작품이 부서지는 것이 좀 아까운 베오날드 공작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 처형의 증인으로 앉아 있는 자신의 아들놈 모습이 보인다.

'저 망할 녀석....'

자신의 전횡을 끝내게 한 자들 중 하나이며, 엄연히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가주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배신자. 귀족으로 태어났으면서 가문보다는 충성이니 백성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가치를 주장하던 멍청이였지만, 그래도 똑똑하고 재능도 있어서 차기 가주로 낙점해 놓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었던 거야?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군. 백성이니 황제니 하는 게 그렇게 소중한가?'

이상주의가 좀 있긴 했지만 그건 세상 물 좀 먹으면 바뀔 줄 알았는데, 그 전에 배신을 때릴 줄이야. 베오날드 공작에겐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그래도 가문의 대는 안 끊기게 되었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군. 아니, 어쩌면 저 멍청함 때문에 자기 목을 죄게 되어서 죽을 수 있으려나?'

"…이상으로! 죄인의 처형을 시작하겠노라!"

'오늘 죽는 나에게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겠지. 드디어 마지막 의무를 다하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겠군.'

어느덧 시간이 된 듯 건장한 사형 집행인들에게 붙들려서 단두대에 고정이 된 베오날드 공작이었다.

이제 시야는 많이 낮아져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자신의 머리와 목에서 쏟아질 피를 담는 통뿐. 고개를 들자 앞에 보이는 것은 서서히 떨어져 가는 해뿐이었다.

그렇게 저문 해를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채 그의 의식은 그대로 끊어지게 된다.

제국 역사상 최악의 '간신'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은 향년 94세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한다.

***

죽음을 맞이한 베오날드 공작은 사후 세계의 존재를 딱히 믿지 않는 편이었다.

신관들이 떠드는 여신의 존재를 비롯해서 그런 것이 있다면 왜 굳이 현실 세계를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 멍청한 백성들을 조련하기엔 쓸모 있는 도구이며 신관들과도 대화를 나누어야 했기에 나름 신학에 대해 공부는 했는데, 설마 죽고 나니 진짜로 존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오… 이거 참~"

"죄인 베오날드 폰 노이멀, 사망 나이 94세, 노이멀 백작가의 서자들 중 하나로 태어났으며...."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헌금 좀 열심히 할 걸 그랬군. 여신관들을 너무 안 보내 줘서 신경 안 썼는데 말이지."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자 구름 위의 재판정 같은 곳에 자신이 서 있었고, 눈앞에는 아름다운 천사가 쪽지를 든 채 자신의 이력과 죄목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수많은 영혼들이 도깨비불 형태로 줄지어 있었고, 한쪽에선 인간 시절 보았던 마족과 닮은 '악마'들이 창을 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마 지옥에 갈 영혼을 데려갈 자들이리라.

"이 신성한 영혼의 재판정에서… 어찌 이런 불경한!"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핫, 신께서 정말 전지전능하셨다면 저 같은 인간을 만들지 말았어야 할 텐데요. 아무튼 지옥의 선고를 내려 주는 게 당신처럼 아름다운 천사님이라 역으로 다행이군요. 사내놈들은 아무래도 질색이라서. 허허허."

"…판결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1만 년의 시간 동안 지옥에서 고통받으시지요. 죄목이 너무 많으니… 형벌은 돌아가면서 말이죠."

"어우… 이런."

그렇게 베오날드는 그가 산 생애대로 악마들의 인도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졌다.

유황이 불타는 구역으로 된 지옥. 그곳에서 베오날드는 각종 고문을 받으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대체 인간들은 어떻게 지옥에 대해서 보고 들은 건지 책에서 본 그대로의 풍경과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으으으으윽!"

"키히히힛! 이제 혀를 뽑았으니! 그 잘난 입도 못 놀리겠지. 나으면 다시 오라고! 키히히힛!"

"끄으으으...."

대부분의 악인들은 보통 하나의 죄에 따른 고문을 받지만, 베오날드처럼 한 세상에 거대한 민폐를 끼친 거물급 악인(惡人)은 하나의 고문만 받는 게 아니라 지옥 전체를 돌면서 각종 고문을 받았다.

혀를 뽑히고 나면 이번엔 산 채로 기름에 튀겨지고, 고통에 일정 시간 절규하고 난 뒤엔 다른 악마가 또 다른 지옥으로 데려가서 또 다른 고문을 하는 것이다.

"먹어! 먹어! 먹어! 더 먹으라고! 키히히힛! 영체(靈體)는 의식을 잃지 않고 구토도 못하니! 아마 끊임없이 괴로울 거다!"

"우웁! 우웁! 우우웁!"

그리고 그중에서도 베오날드가 가장 큰 벌을 받는 곳은 바로 그의 여성 편력으로 인한 간음, 간통과 관련된 벌을 받는 지옥이었다. 

호색가로서 평생 여자를 밝혔고, 권력으로 세계의 미녀들을 모아 첩으로 거느린 채 살아오던 베오날드에겐 다른 방법도 필요 없었다.

그냥 쇠사슬에 묶어 두고 아리따운 서큐버스들이 매혹적인 포즈로 돌기만 해도 그의 영혼은 절규하면서 괴로워했으니 말이다.

"우훗~ 이 반응 좀 봐. 후후훗!"

"아쉽지만 영체 상태에선 '그걸' 할 수 없어서 더 괴로울걸? 후후훗."

"으어어어어어억! 어어어어억!"

외적인 고통보다 내면의 욕구가 자신을 태우는 고통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영혼이 타 버릴 것 같은 고통. 차라리 그냥 혀를 뽑거나 칼로 난도질당하거나 다시 끓는 기름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을 정도였다.

아무튼 다른 고통받는 영체들이 죗값을 치르고 풀려나 환생하거나 아예 영혼이 견디지 못해 그대로 영기(靈氣)로 변하는 것을 수없이 지켜보며 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느끼던 베오날드는 그렇게 지옥의 고문을 돌아가며 받는 시간을 계속해서 보낸다.

"…끄허아가각아아악!"

아무리 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에 그의 영혼은 또 울부짖으며 혀가 뽑혔다.

혀를 생으로 뽑은 악마는 그대로 다른 악마에게 그의 영혼을 넘기며 낄낄 웃어 댔다.

"키히히힉! 또다시 날 때까지 다른 곳에 다녀와라. 키히히힛!"

"자, 기름통은 지금 만석이라서 안 되니까 서큐버스들이 기다리는 색욕지옥을 한 번 더 가자!"

"으어어억! 히러! 허히느으 시허러러러(으어어억! 싫어! 거기는 싫어어어어어)!"

이미 아는 고통을 또다시 겪을 생각에 혀가 뽑힌 채로 절규하며 발버둥 치는 베오날드였지만, 악마는 그를 잔혹하게 쇠사슬로 매단 채 질질 끌고 간다.

이게 지옥의 일상, 끝이 없는 무한한 고통의 순환. 보통이라면 진작 영기(靈氣)로 불타 버렸어야 할 영혼이었지만 역시 악인이더라도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건지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고통받는다.

"으어어억!"

그렇게 혼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지독하게 시달리고, 다시 기름통을 향해 던져지는 베오날드.

그가 산 채로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집행하는 지옥의 악마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끄아아아아아악!"

"크흐흐, 대체 저 영혼은 살아생전 얼마나 악독했던 거야? 대체 몇 번을 튀겨도 돌아오는 건지.... 크흐흐. 으응? 이건 뭐야?"

치이이이익!

한창 업무에 몰두하던 중 지옥의 악마는 자기보다 작은 악마가 가져온 스크롤 한 장을 받게 되고, 그것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끓는 기름통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베오날드의 영혼을 갑자기 삼지창으로 건져 냈다.

"끄헉! 하아… 하아… 하아...."

"끄으응~ 이런 경우는 또 오랜 지옥 생활 중 처음이군. 따라와!"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으으윽!'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이 튀겨지는 고통을 겪던 베오날드는 또 다른 지옥의 코스로 가는 줄 알고서 잠시나마 안정된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자 했다.

조금 있으면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릴 테니 말이다.

'뭐지?'

다른 고통이 생기기 전까지 쉬는 시간을 누리며 질질 끌려가던 베오날드는 갑자기 지옥에서 불어오던 불쾌한 냄새와 작열하는 열기가 아닌 따스한 바람과 함께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눈을 떴다.

"…뭐지? 여기는 새로운 지옥인가? 희망고문이라도 하려는 건가?"

[여긴 지옥이 아닙니다. 베오날드, 간신 중의 간신, 욕망의 화신으로 인세를 혼란으로 이끈 대악인이여....]

동시에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맑고 청명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소리만 들어도 무수한 자애와 보드라움이 느껴지는 그 존재를 바라보자, 거기엔 무장한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리고 새하얀 구름으로 된 옥좌에 앉은 자애로운 모습을 한 여성이 있었다.

"여신… 님?"

한눈에 봐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고, 기억 한구석에서 대주교가 준 디자인대로 장인이 만든 신전에 있던 석상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까지 떠올린 베오날드였다.

'어째서 날? 아… 그러고 보니 대주교에게 헌금을 1.5배로 줄 테니 좀 더 야시시하게 만들어 달라고 한 것 때문인가?'

신은 믿지 않지만 여신상의 디자인이 참 예뻐서 거기에 자신의 취향을 좀 첨가하려고 대주교에게 뇌물을 쓴 일이 떠올랐다.

당시엔 황제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른 것 같았지만, 아무튼 당시 대주교는 화내면서 거절하긴 했었다. 

'아니면 석공에게도 몰래 돈을 찔러 주면서 야시시한 버전으로 따로 만들어서 우리 영지에 놔 달라고 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충분히 신성 모독이지만, 그것 때문에 한참 지옥에서 벌 받고 있는 당신을 부른 건 아닙니다.] 

"오… 역시 여신님이시군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던 이 사악한 영혼에게 어떤 용무이십니까? 가능하면 아주아주 길고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해 주시죠. 오랜만에 평온해진 이 시간을 가능한 오래 끌고 싶습니다만?"

[당신에게 시킬 일이 있습니다.]

"이 우매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게 아주아주 자세하고 꼼꼼하고 세세하게 설명을 해 주십시오."

승낙하고 말고는 모르겠고, 일단 베오날드는 간신답게 지옥의 고문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이 순간을 좀 더 오래 즐기기 위해 여신을 상대로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다.

[…후우~]

여신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럴 시간도 없다는 듯 금방 자신을 진정시키고 지옥에서 고문받던 그를 꺼내 온 이유와 그가 할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2화]

[당신이 죽고 난 이후 약 50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큰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파괴와 멸망을 부르는 암흑신 세력이 마족들과 마왕들을 불러내어 암약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것을 막아야 할 인간의 나라들은 아무리 신탁을 내려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살아 있을 때의 당신과 같은 간신들 때문입니다.]

"아, 예. 그… 500년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군요. 그보다 저 같은 자라니요. 누가 봐도! 지성과 귀족의 품위를 겸비한 제가 월등한데 말이죠!"

[....]

"죄송합니다. 입 다물겠습니다."

여신의 눈빛에 바로 깨갱한 베오날드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반응을 본 여신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크흠! …그들은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만을 위해 전횡을 펼칠뿐더러 이미 나라의 운영 전반을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신관에게 신탁을 보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데 그동안에도 세상 아래에서 암약하는 암흑은 점점 커지는 중입니다.]

"저도 대륙의 역사라든가 신화, 전설 같은 걸 여기저기 봐서 아는데, 그런 긴급 사태의 경우 보통은 '용사' 같은 걸 보내시지 않으셨나요? 물론 저희 시대는 너무나 태평성대라서 그런 게 없어서 전혀 모르지만 말입니다."

베오날드는 간신이지만 귀족 중의 톱. 황제 및 황가는 물론 다른 귀족가의 환심을 사야 했기에 연금술 외에도 대륙의 역사, 신화, 전설을 모티브로 한 연극과 오페라 공연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서 여러 가지 지식에 대해 빠삭한 편이었다.

'가끔 몬스터나 이교도들이 난리 치려고 하면 미리미리 제압하긴 했는데… 이상하네?'

전설에 따르면 암흑신 세력이 커질 때마다 그들을 처단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는 용사라고 하는 존재가 분명 있다고 나와 있었다.

[물론 용사도 보낼 생각입니다. 하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용사 하나의 무력만으론 부족합니다. 용사가 아무리 강하고 유능하다고 해도 한 사람의 인간이며 그가 가장 위험하고 큰 핵심적인 일을 해야 하고, 암흑신의 추종자와 다른 인간들이 벌이는 일은 각 나라와 인간들이 해결해야 하죠.]

"아하, 그렇군요. 하하핫. 하지만 천국에도 아마 저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요?"

[이미 성군과 재상, 영웅들의 영혼 중에서도 몇 명을 보냈습니다. 하나 지금 세상의 상황을 생각하면 밝은 면의 사람만 배치해선 이 다급한 시간 내에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어두운 면의 내부에서 도움을 줄 자가 필요하죠. 그래서 간신으로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만 했지만 다양한 방면에서 유능했던 당신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간신들은 능력이 없는 주제에 욕심만 커서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불법을 일삼으며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뇌물을 바치면서 붙어 있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베오날드의 경우 자신의 능력도 좋았기에 황제를 구워삶고 한 나라의 2인자로서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귀족으로서도 대단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연금술과 약학뿐만 아니라 실증 학문은 물론 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점이 지금 상황에서 특히나 필요합니다. 제국을 뒤흔든 간신이지만 단순히 권력에 기댄 기생충이 아니라는 점이 특별하지요.]

"그거야 가문에서 가주가 되기 위한 일을 하다 보니 익힌 거라.... 허허허, 아무튼 능력을 알아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습니다."

어차피 베오날드에겐 다른 선택지라곤 해 봐야 지옥으로 돌아가서 바삭하게 튀겨지는 일밖에 없었기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여신이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뭘 하든, 어떤 상황이 오든 간에 지금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보단 나으니 말이다.

[하아~ 1만 년 지옥형을 받은 악인이기에 믿기가 심히 어렵지만, 지금 세상이 큰 위기이니 믿기로 하겠습니다. 만약 세계를 지켜 내는 데 성공하면 당신에게 내려진 지옥형 1만 년을 모두 제하고, 당신의 소원 하나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배신할 시엔 제 '이름'을 걸고서 영혼이 소멸할 때까지 무간지옥의 고통에 빠지게 해 드리지요.]

'간신'이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신용 점수가 너무나 낮은 베오날드였기에 여신은 자신의 '이름'을 건 협박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수작 부리면 끝장난다는 거군.'

[그럼 이제 다시 세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자, 잠시만! 여신님?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실 거면 그냥 보내시면 안 되죠. 뭐로 태어나는지도 중요하고, 어떤 신분, 어떤 인물로 태어나느냐가 심각하게 중요하니 일단 조건 같은 걸 고려해서 위치부터...."

베오날드는 급하게 여신을 불러 세우며, 아무리 자신이라고 한들 노예나 평민으로 태어나면 그 힘을 펼치기가 힘들다는 것을 어필했다.

상황이 급하다고 했으니 기왕이면 공작이나 후작, 그게 무리라면 다시금 백작가 정도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품은 채 여신을 바라본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저는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아니아니아니! 믿지만 마시고요!"

[역시 안 된다는 건가요? 그럼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내야겠군요. 형이 아직 9,500년이나 남은 걸로 아는데요?]

"뭐, 뭐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9,500년 동안이나 지옥에서 고통받을 걸 생각하니 끔찍해진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지금 자신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그래, 노예로 태어나 이승을 굴러도 적어도 지옥에서 구르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좋은 태도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할 장소는 아닌 곳으로 배정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곳에서 누굴 돕고, 누구를 처리해야 할지를 모를 수 있으니 제가 보낸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조치하지요.]

"예, 옙!"

[그럼 가 보세요. 부디 이번 생(生)엔 좀 착하게 사시길.]

마지막 당부이자 충고 같은 말과 함께 여신이 손을 흔든 그 순간, 베오날드의 의식은 스위치를 끈 기계처럼 멈춰 버렸다.

....

....

....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잠에서 깨듯이 서서히 감각과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베오날드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응애! 응애! 으, 응애(잠깐! 이거! 뭐, 뭐야)?"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고, 몸을 아등바등 놀리려 하지만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앙증맞고 작은 손만이 자신의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게 나… 아기인가?'

그렇게 역사에 길이 남을 간신 중의 간신, 지옥에서 1만 년의 형을 받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은 여신이 내린 사명을 받아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그는 본능에 따른 건지 유모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시중을 받으면서 주변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다시 태어난 상황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전통 귀족이었던 베오날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자신이 어느 신분, 어느 계급으로 태어났느냐? 였다.

'일단 천장이 수풀이나 나무로 된 게 아닌 걸 봐선 평민이나 농노 집안은 아닌 것 같고, 차려입은 유모를 보아하니 확실히 귀족 집안 혹은 못해도 상인 가문으로 짐작할 수 있겠군.'

일단 집 천장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안심했다.

'하긴 여신이 이 '베오날드'를 되살려서 써먹을 생각이 있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세력이 되는 집안에 태어나게 하는 게 정상이겠지.'

베오날드의 옛… 아니, 이젠 전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전생에 태어났던 노이멀 백작 가문은 그가 가주가 되기 전에도 이미 황실 기사단에 자식들을 보낼 정도로 뛰어난 명문가이자 왕당파의 기둥 중 하나였다.

다만 그 순위가 위의 후작이나 대공들에게 밀려서 후위였을 뿐, 그것을 베오날드가 가주가 되어서 병약한 황제를 등에 업고서 기세를 올렸던 것이었다.

'물론 배경이 아무리 좋아도 집안에 경쟁자가 많다든가, 권력이 약해 빠진 기반의 가문이면 난감할 따름이고.... 아무튼 세계의 위기니 뭐니 하는 상황이니 여신이 장난을 치진 않겠지?'

"Aga… miinn...."

'음? 어? 잠깐? 설마 이거 내 어머니인가?'

그때, 자신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품에 껴안고 젖을 물리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챈 베오날드는 자신의 몸이 본능에 따라 젖을 빠는 것을 느끼면서 모친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그 얼굴을 본 순간 낭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얼굴에 화상이라니!'

왼쪽 얼굴은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자애로운 미녀의 모습이었지만, 다른 쪽 절반이 화상 자국이 남아 흉측하게 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귀티 나는 얼굴에서 일단 귀족 집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과 별개로 화상 자국에서 베오날드는 그 집안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모친… 그러니까 이번 생의 어머니가 가진 저 상처를 결혼 전이든 결혼 후든 간에 저렇게 안 고치고 놔두는 거 자체가 신전에 기부 액수가 적고 집안의 권세나 돈이 부족하다는 뜻인데.... 안 그랬으면 진작 고쳤겠지. 반대편을 보니 충분히 미인인데....'

귀족 가문에 있어서 '여성 혈족'은 혈맹과 동맹을 늘리거나 사교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가문의 큰 재산이다.

귀족 남성의 전장은 정치와 전쟁터라고 한다면 여성의 전장은 바로 사교계. 거기에 여러 가문이 그나마 믿고 맺을 수 있는 혈맹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관리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미인일수록 그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거기에 지성과 교양, 예법은 사교계에서의 싸움을 위해서 익혀야 하는 것인데, 애초에 얼굴 반쪽을 저렇게 화상으로 태워 먹으면 그 가치는 땅으로 떨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본판이 좋으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고쳐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의 가문의 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가문 내에서 혈족 간에 분쟁이나 암투로 인해 저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 저런 상태로 보낸 시점에서 끝이지.'

가문을 위해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없는 혈족은 그야말로 농노만도 못한 밥버러지 그 자체. 팔려 갈 곳도 없이 결국 평생 집에 갇혀 있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모친은 그런 운명에서는 벗어나서 어딘가에 시집이라도 온 모양이지만, 그 집안도 결국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좋은 집안이긴 글렀고, 그렇다고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여간 망할 여신 같으니....'

쭙쭙....

머리로는 이 복잡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몸은 알아서 엄마 젖을 쭉쭉 빨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의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이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려는데,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눈이 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갓 태어난 아기의 몸으로 너무 많은 연산을 했더니 뇌가 피로해진 것과 동시에 배가 부르니 자연스럽게 잠이 오는 것이리라.

'으으… 역시 너무 어린 몸이라. 잠이… 쏟아지려고 해.'

갓 태어난 몸은 주인의 혹사에 자연스럽게 의식을 끊어 버리고, 베오날드는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

3개월 뒤.

베오날드는 어린 아기 상태에서도 열심히 눈치를 살피고 곳곳에서 정보를 모으고 말을 배워서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겨우겨우 이 저택과 집안 부모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언어였는데, 자신이 살던 때에서 500년이나 지난 만큼 체계가 많이 바뀌어서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린 게 문제였다.

'뭐, 아기 상태에선 자는 거 빼곤 남는 게 시간이니....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쭙쭙....'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베오날드는 자신이 태어난 이 집안에 대해 생각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가문은 더스티클록 자작가, 변방의 아주 작은 귀족 가문이다.

일단 가문 이름에서부터 정말 빈궁함이 느껴지고 있었는데.... 더스티클록(Dustycloak), 즉 '먼지투성이 망토'라는 뜻으로 선대 가주가 가문의 시초인, 아주 근본 없는 벼락출세한 귀족 가문이었다.

'…대강 떠드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가문의 시초인 할아버지가 본래는 근본도 없는 용병이었지만 당시 대전쟁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대귀족 양반을 망토가 더러워지고 아주 해질 정도로 고생해서 구한 다음 그 공훈으로 기사 서임과 동시에 귀족 작위를 받은 것이라는 거군.'

거기에 덤으로 그 대귀족은 자신의 딸과 그의 아들을 연결시켜 주었고, 자신이 바로 그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었다.

즉, 외가는 나름 권세가 있는 대귀족이었지만, 어머니의 상태로 보아서 딱 봐도 이건 땡처리에 가까운 혼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대귀족님의 은혜로 벼락출세한 양반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겠지. 그냥 사람 하나 데리고 돌본다는 느낌이지. 아무튼 이제부터인데....'

"으으음~ 우리 천사님, 대체 뭐가 불만이라서 또 인상을 찌푸리시나요? 젖은 아까 줬고, 잠도 잘 재우고, 트림도 했고, 실례는 안 한 것 같은데… 으음~"

'그런 거치고는 모친의 성향은 온화해 보이는군. 하긴 흠집이 좀 났지만 그래도 대귀족이 내려 준 은혜인데 무시할 순 없겠지.'

어린 아기 얼굴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냉정한 생각을 품는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고민을 모르는 듯 모친은 한없이 천사 같은 자신의 아이의 볼을 쿡쿡 찌르며 미소 짓는다.

"뭐~ 가~ 그렇~ 게~ 불만이세요? 후후훗, 다른 애들은 막 울고 난리를 부리는데~ 너무 조용해도 불안한데~"

"여보, 나, 나 왔소. 베오날드는 잘 있었소?"

갑자기 들어온 것은 이 더스티클록 가문의 가주이자 현생의 아버지인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 진한 갈색 머리칼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다부진 체격의 건장한 남성으로, 바깥일을 보고 온 듯 갑옷 차림에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베오날드와 모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요! 우리 베오날드가 어찌나 착한지~ 오늘도 잘 안 울고 잘 있답니다. 역시 신의 축복이 틀림없다니까요."

참고로 현생의 이름이 똑같이 베오날드인 것은 아기일 때 들어 본 결과, 자신이 태어난 날 수행하던 신관과 성기사가 계시를 받고 이 집에 들러서 이름을 점지해 주고 축복해 준 결과물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베오날드는 그것이 여신의 농간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말이다.

"오오~ 귀여워. 허허허, 우리 아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하하하하~"

"죽다니요. 후후후~ 하긴 그 정도로 귀여우니 무리도 아니죠."

하하호호 웃으면서 행복해하는 부모를 본 베오날드는 화목한 가정인 것 하나는 그래도 과거보단 낫다는 생각을 했다.

왕실의 측근이자, 전형적인 귀족 가문이었던 노이멀 백작가 시절, 나름 명문 라인에 올랐지만 그래 봐야 왕당파에서 후순위였던 가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선대 가주, 즉 그 시절 아버지는 정말 지독한 인간이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나도 한 악명을 쌓았지만, 그 인간이 가문과 영지 내에서 한 짓은 더욱 지독했지.'

그 악명 높은 자의 이름은 바로 벨릭스 폰 노이멀 백작.

영지 내에 초야권 행사는 물론이고, 영지 내 첫 아이는 무조건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해서 세금으로 갖다 바치게 만든 악독한 인간이다.

물론 표면적으론 자유롭게 부과하라고 했지만 '아이 세금'을 낸 자와 내지 않은 자의 차이가 명백할 정도로 영지민들을 대우했기에 안 바치곤 살 수 없었다.

'나도 그 세금으로 바쳐진 아이 중 하나였지. 후우~ 그래서 모친의 얼굴도 몰랐고 말이야.'

아무튼 벨릭스 폰 노이멀은 이 방식으로 수백, 수천 명의 아이를 모아서 그저 최고의 차기 가주를 만들고자 생각했고, 마치 동방의 고독인 양 무수히 낳고 낳아서 그 안에서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어서 정점 경쟁을 시킨 잔혹하고 미친 자였다.

'내가 가주가 되고 바로 그 미친 짓을 멈추게 했지만, 아무튼 그것에 비하면 지금 가정은 아주 천국이지.'

당연하지만 그 미친 부모들에 비하면 지금 이 부모들은 천사에 가까웠다.

'…화목하고, 죽을 위험이 없는 거 하나는 좋은 거겠지.'

그런 거치고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았지만, 그래도 현 상황을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니 베오날드는 이 자작가 집안에서 어떻게 권력의 중추로 올라갈지 본격적으로 고민에 들어갔다.

물론 고민하니 금방 배가 고파져서 어린아이의 몸은 저절로 밥을 달라고 울기 시작했고, 다시 엄마 젖을 물었지만 말이다.

'젠자아아아아아앙!'

쭈웁쭈웁!

그건 그거고, 몸은 아기이지만 정신은 이미 어른이라서 자괴감이 컸기에 하루라도 빨리 크고 싶은 베오날드였다.

[3화]

하지만 아무리 어린 아기로 있는 시간이라고 해도 베오날드는 이 시간을 단순하게 먹고 자는 것만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도 오래 살았지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그는 어린아이 때도 무언가 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었다.

'으음, 지금 이 상태론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뿐이군. 생전에 안 해 본 무예의 길이자, 마나 수련법뿐인가?'

책은커녕 펜도 못 잡는 어린 아기이다 보니 정말 숨 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였다.

사실 그는 생전에 무인(武人)의 길을 가진 않았었다.

애초에 노이멀 가문 자체가 무공보다는 지략, 행정, 정치 쪽으로 강한 가문이라서 무재(武才)가 있는 아이는 황실 기사단, 근위대로 보내곤 했었다.

하나 최고의 가문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조 때부터 이미 노이멀 가문은 황실 기사단에서 나온 탈락자들을 대상으로 영입을 하거나 기술을 얻어 내는 것을 시도했었다.

하나 그 진전은 매우 힘들었고, 기껏해야 훔친 기술인 '노이멀 가문 검법' 정도만 만들어 내는 게 다였다.

베오날드 대에 와서 병약한 황제를 낫게 함으로써 베오날드가 2인자로 군림하면서 정국을 휘두를 수 있게 되자,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황실 기사단 출신들과 황족을 매수해서 드디어 황실 기사단과 황가(皇家)에만 전승되어 내려오는 마나 수련법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익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가주라서 알고 있지. 근데 후우~ 안 가 본 길을 가려고 하니 난감하지만.... 지금 가문의 기반이 약한 만큼 일단 필요한 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력(武力)이니 바로 수련을 하자.'

어린 아기 때는 자고 먹고 깨어 있어도 조용히 있으면 가만히 놔두기에 수련법 수행을 하기에 딱 좋았고, 벼락출세한 변방 시골 가문에서 어린 자신이 마나를 모은들 알아챌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선대와 다르게 용병이자 기사로서 일하는 아버지가 문제였지만, 바깥일이 더 많기에 마주치는 일이 적어서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할 일을 정했으니 그럼 하나뿐이군. 후우우~'

베오날드는 곧바로 마나 수련법을 시작했다.

하나 쉽지 않은 것이 구결과 방법을 다 알아도 그는 전생에 무력을 갈고닦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일을 하던 자였고, 어린 아기의 몸으로는 자세도 잡을 수 없었기에 감을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름 연금술사로서 한 분야에서 대성을 이룬 자이며, 그 또한 마법에 소양이 있었던 덕분에 마나를 느껴 본 경험이 있었다.

또한 달리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점 덕분에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마나 수련법을 계속해서 시행했고, 그 결과 약 한 달쯤 더 지난 뒤에 결국 마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음… 뭔가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잘되는지를 모르겠네.'

생전엔 무인이나 기사가 아니었기에 베오날드는 마나 수련법을 수련하면서도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론과 실제는 너무나 다르며, 애초에 무인의 길을 직접 가 보지 않았기에 모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기사나 수련생, 황실 기사단의 아이들에 대해서 보고받기도 했지만 직접적인 수련 과정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 계속하는 수밖에....'

그렇게 베오날드는 유아 상태에서 마나 수련법을 꾸준히 수련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

그리고 5년 뒤, 베오날드는 검은 머리칼에 파란 눈을 똘망똘망 빛내는 꼬마 아이로 성장했다.

'음, 이제야 좀 낫군.'

마나 수련법으로 인해 신체 활성화가 잘돼서인지 5살이지만 7~8살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그는 본격적으로 유모에게서 글과 셈법 같은 기초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전생에 엄연히 공작까지 오를 정도로 뛰어난 지식과 두뇌를 갖춘 베오날드에게 그녀의 교육은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어린아이인 척을 하기 위해서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 베오날드였다.

'어린아이의 메리트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스스로 버릴 순 없지. 천재라는 기믹도 나쁘진 않지만, 그건 오히려 시샘과 경계를 낳을 수 있어.'

"으음… 도련님, 아직 좀 더 노력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루한뎅~ 밖에서 칼싸움 놀이하고 싶당~"

"영지를 다스리려면 검술도 중요하지만 지식도 중요합니다. 도련님, 엄연히 후계자로서...."

"네에에~ 열심히 할게요."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아는 문제도 일부러 틀려 가면서 천진난만한 5살 아이답게 애교도 부리고 칭얼대며 철저히 자신을 감추려 애썼다.

'큭! …자괴감 든다. 바로 내가, 제국의 뱀이라 경외를 받던 이 베오날드가! '지루한뎅~'이라니.... 우엑.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답이지.'

물론 부모님에게도 이런 모습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어린애처럼 굴면서 애교도 부리고 떼도 쓰는 등등 할 수 있는 한에선 어린아이인 척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민인 것은 슬슬 본격적으로 자신의 본래 능력인 '연금술사'로서의 지식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을까? 였다.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대륙의 정세에 관한 건데.... 이런 근본도 없는 시골에선 뭘 알 수가 없으니, 원~'

일단 더스티클록 가문이 지배하는 영지… 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 시골. 말만 영지이지, 마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영지에다 변방이었다.

어느 정도로 작느냐면 여행자들이 들르는 여관조차도 운영되지 않는 곳이었으며 주 수입원은 농사와 산에서 사냥감을 잡아 가죽과 뼈를 가공해서 파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 만큼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원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정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깡촌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나니 아주 심각한 깡촌이었네. 에휴~'

"어머? 베오날드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

외부에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어 답답해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저택 내의 하녀가 말을 걸어왔다.

땋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수수한 외모의 소녀로 이 집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순간 깜짝 놀란 베오날드는 얼른 천진한 표정으로 바꾸고 그녀에게 금방 생각해 낸 변명을 떠들어 댔다.

"오늘 공부 시간에 내준 숙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그러셨군요. 그래도 열심히 하셔야 해요. 베오날드 님은 이 영지의 주인이 되실 몸이니까요."

"엑~ 맨날 다들 유모랑 같은 소리를.... 아무튼 갈게~"

"예, 도련님. 힘내세요~!"

그렇게 어찌어찌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남겨 주면서 베오날드는 저택 내부를 열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이제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귀족 도련님인 탓에 아직 혼자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아기 때와 달리 계속 사람이 붙다 보니 혼자서 마나 수련법 같은 것도 마음대로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집 안 탐험! 밖에 절대 안 나갈 테니 걱정 마!"

"예, 도련님. 그렇지만 조심하셔요."

"으응!"

자신만의 비밀 장소… 그래, 어린아이니 비밀 기지를 찾기 위해 열심히 저택을 뛰어다니며 노는 베오날드였다.

빨리 좀 더 커서 개인 방이나 자신만의 공간이 확보되었으면 했지만, 어느 정도 권세가 있는 귀족이 아니고서야 방이 풍족할 리 없었다.

실제로 이 집도 고작 2층에 방이 채 10개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저택이라서 자기 수련실을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벼락 귀족인 탓에! 수련 과정이나 가문의 비기를 지킬 비밀 연습실이나 수련실을 안 만든 가주 탓이지. 하긴 뺏길 게 없으면 만들 필요도 없지만...! 후우~ 정말 앞길이 깜깜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자기 방에서 얌전히 공부한다는 핑계로 마나 수련을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부모들이 자주 왔다 갔다 하거나 자기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하는 등등 애정이 넘쳐서 쉽지가 않았다.

'수련이라는 건 꾸준히 해야 하는데.... 큭! 그저께는 아버지와 놀러 다니다가 그분 방에서 잤고, 어제는 어머니가 방을 분리하니까 외롭다면서 데리고 잤고.... 하아아~'

현생의 부모인 이 영지의 주인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과 그 부인은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니 오죽하겠냐마는, 기본적으로 성품 자체도 좋은 자들 같았다.

왜냐하면 전생의 베오날드는 부모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도 옛 기억과 너무나 비교되는군.'

'항아리 장인은 최고의 작품 하나를 만들 때까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만든다. 나는 너희 중 오직 최고의 한 명만을 건져서 가문의 영광을 세울 것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모조리 깨부수고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알았나? 내 아이들아?'

다시 떠올려도 최악의 부모인 벨릭스 폰 노이멀과 비교해 볼 때 여기 둘은 천사 같았지만, 너무나 최악의 부모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가주가 되고 노이멀 백작가를 공작가까지 끌어올린 베오날드라는 결과가 따랐기에 방식은 틀릴지언정 결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흐… 베오날드, 내 최고의 작품. 흐흐흐… 부디 우리 가문을… 제국 최고의 자리로… 부탁한다. 흐흐흐흐흐....'

'죽을 때까지도 가족이라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지. 하지만 결국 내가 증명했으니까… 정말 성가시면서도… 쩝....'

최악의 부모였지만 그래도 그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경쟁과 미친 짓 덕분에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 탄생한 만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지금의 부모가 정말 좋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오오! 베오날드구나! 공부는 끝났니? 아버지도 막 순찰을 끝내고 왔단다. 하하하! 읏쌰아!"

'으악! 땀 냄새! 또야?'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이곳 더스티클록 가문의 가주이자 영지의 주인인 레이온 자작은 베오날드를 발견하자 밖에서 돌아온 그대로 뛰어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진한 땀 냄새와 중년 남성 특유의 체취, 거기에 긴 수염이 아기 얼굴을 긁어 대서 베오날드는 괴로웠지만 그래도 그의 눈빛엔 행복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구구~ 귀여워. 우리 아들~ 배고프지? 아빠가 순찰하다가 덫에 걸린 멧돼지를 잡아 왔단다. 바로 잡아서 구워 줄 테니 기다리렴. 하하하하핫!"

'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쩝… 유아 땐 그렇다 쳐도 이젠 5살… 음, 어린애군.'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만연한 레이온 자작을 보며 베오날드는 아직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자신도 아이를 가지긴 했었다. 

'솔직히 아닌 건 바꾸긴 했지만....'

물론 선대 가주의 그 미친 정책은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재력으로 정당(?)하게 처와 첩들을 늘려서 아이들을 만들었지만, 전생의 아버지처럼 귀족 가문의 아이란 결국 가문의 '도구'라는 생각엔 공감하고 있었기에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별로 가져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알테리오 녀석, 날 실각시키곤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생각을 하니 자신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배신한 아들이 문득 떠올랐다.

세월이 500년이나 지난 지금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겠지만, 어떻게 살다가 갔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은 시골이라 잘 모르지만, 나중에 도시로 가면 아들의 소식에 대해 알아보자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

아무튼 마나 수련법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환경이다 보니 검술 수련은 어불성설인 상황.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에 베오날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민에 들어갔다.

슬슬 손과 발도 움직이니 본격적으로 검술도 수련하고 싶었고, 무엇이든 빨리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음, 자연스러운 곳이라면 연병장인데… 며칠 동안 지켜보니 낮에 2~3시간가량은 비워져 있는 것 같으니까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작은 영지이지만 그래도 연병장은 있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며칠간 관찰한 결과 비어 있는 시간이 꽤 길었기에 베오날드는 혼자 연병장으로 가 목검을 휘두르면서 몰래 검술을 시작하고 마나 수련법도 병행했다.

그 전에 먼저 몸을 풀기 위해 기초적인 휘두르기와 뜀박질을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베오날드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거… 왜 안 힘들지? 마나 수련법 때문인가?'

육체 성장이 빠른 것도 빠른 것이었지만, 열심히 뛰고 목검을 휘두르는데 몸이 지치질 않는 것이었다.

벌써 3시간째. 곧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숨이 거칠어지기는커녕 아직도 쌩쌩했다.

아무리 어린애들이 회복력이 좋다곤 하지만 이 스태미나와 근력은 확실히 이상했다.

'음… 이래서야 단련이 안 되잖아? 근력과 스태미나 이전에! 지치고 힘든 것에 대한 저항을 키워야 한다고! 아...! 그래서 그 근육뇌 놈들이 몸에다 사슬을 얹고, 쇳덩이를 붙이면서 훈련했구나!'

몸에 부하가 가해지지 않으니 뭔가 단련을 해도 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인생을 살아 본 베오날드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왜 힘든 수련과 역경을 만들어 가며 훈련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낭패라고 생각했다.

'…젠장! 개인 수련실이 필요해! 결국 어린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뭔가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저녁때가 되었기에 얼른 씻고 부모님들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러면서 일단 시도나 해 볼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수련실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기, 아빠… 혹시 저희 저택엔 수련실이 없나요?"

"수련실? 베오날드, 아직 어린데 벌써 수련을 생각하는 거니? 그건 좀 더 나이를 먹어서 몸이 커지고, 근력이 붙고 난 다음에 해도 된단다."

놀란 얼굴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는 부친 레이온 자작. 5살짜리가 벌써 수련을 위해 개인실을 갖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자 당황하여 물은 것이다.

그러자 소심하게 몸을 움츠리는 척하며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말하는 베오날드였다.

"예, 그… 공부도 공부지만, 슬슬 단련하고 싶어서요. 몸을 움직이고 싶어요. 검도 휘두르고 싶고요. 그런데 주변엔… 그러니까… 못하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으음, 몸을 움직이길 좋아하는 걸 보면 역시 할아버지의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지만 그러면 연병장을 사용하면 될 걸 굳이 수련실까지...."

"아뇨. 당신, 오히려 베오날드의 말이 일리가 있어요. 벼락출세 귀족이라곤 해도 엄연히 귀족. 당신과 다르게 베오날드는 태어나면서부터 귀족이기에 바깥에 미숙하고 약한 모습을 최대한 감춰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모친의 지원이 들어오자 베오날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더구나 이 가문은 아직 2대밖에 되지 않아서 더욱 약하지요. 또 만약에 재능이 없다는 걸 들키게 되면 곤란하고요."

그래도 역시 나름 명문가 귀족 출신인 어머니 쪽이 갑자기 끼어든 것이 효과적이었다.

아들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귀족 가문의 상식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지만, 지원 사격을 해 주고 있어서 고마웠다.

"베오날드는 이 가문의 후계자니까요. 이건 아이가 장난감을 사 달라는 레벨을 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끄으으응… 그렇지만 갑자기 수련실이라니.... 우리 영지의 사정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새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힘들다면 저택의 방 하나를 비우고 거길 개조하죠. 방 내부를 보강하고, 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려놓으면 될 거예요. 아니, 잠금장치를 이중으로 하죠."

"하긴 그렇게 한다면 문제없겠군. 당신 말대로 합시다. 당신 말은 대개 틀린 적이 없으니 말이오. 게다가 베오날드가 원하는데 못해 줄 게 어디 있겠소? 하하하!"

천만다행으로 모친 덕분에 수련실을 마련할 수 있게 된 베오날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아, 이거 안 됐으면 그냥 밖에 비밀 기지라도 만들려고 했는데… 잘됐군.'

일단 남이 못 들어오는 자신의 개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베오날드는 이제 단순히 그 공간에서 검술 수련과 마나 수련법 단련뿐만 아니라, 여유 공간을 사용해서 도구들을 갖다 놓으면 몰래 연금술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휴우~ 그래도 진짜 모친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 정도 현명함이면 필시… 화상을 입기 전엔 상당한 재녀(才女)로 소문나 있었겠지.'

"응? 베오날드, 그렇게 좋니?"

"예! 엄마. 너무 좋아요. 저 열심히 수련할게요!"

속으론 모친에 대해 귀족의 시선으로 판별하면서도 겉으론 귀여운 아들의 연기를 하는 베오날드는 드디어 검술 수련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안도했다.

[4화]

그로부터 2주 뒤.

방 하나를 레이온 자작이 직접 공사를 해서 치우고 안에 가벼운 무장들과 또 검술 수련책 몇 권과 단련 기구 몇 개를 들여놓으면서 수련실은 빠르게 완성됐다.

이중 잠금 구조로 된 문에 환기는 창문으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목검을 비롯해서 진검까지 놔두고, 체구엔 좀 안 맞고 낡았지만 기사들이 단련용으로 쓰는 사슬 갑옷 조끼와 팔다리에 채우는 족쇄도 있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베오날드가 원하는 것이 싹 다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모친은 베오날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능한 것 같았다.

"그… 아직 베오날드는 5살인데, 이런 것까진 필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진검을 놔두다니.... 혹시라도 가지고 놀다가 다치면...."

"당신도 이젠 엄연히 기사잖아요. 이 정도 단련 도구는 기본이에요."

'그렇지. 기본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외가는 제대로 된 귀족 가문이라서 정말 다행이군. 좋은 물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책을 비롯해서 단련용 도구를 모두 보내 줬으니 말이지. 어쩌면 보험 같은 건가? 아니면 은혜 베풀기? 아니, 상관없지. 지금 필요한 것을 얻었으니 상관없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베오날드에겐 홀로 고독히 수련할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검술 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모가 하는 교육을 성실히 받는 척하면서 본격적으로 검술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제야 검술을 시작할 수 있겠군. 후우~"

베오날드가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검술은 총 세 가지.

빼돌리는 데 정말정말 고생했던 '황실 기사단 검법'과 '황가 전승 검법', 그리고 기존의 노이멀 가문 출신의 황실 기사단 인원들이 은퇴해서 가문에 전달하고 개선하여 전해지는 황실 기사단 아류 검법, 속칭 '아류-노이멀 가문 검법'이 있었다.

'아류라도 나름 밥값을 하는 물건이었지.'

그중 아류-노이멀 가문 검법은 베오날드의 선조들이 핵심은 훔치지 못했고, 그래서 조각조각으로 모은 황실 기사단 검법을 다듬은 것으로 말 그대로 아류였다. 

그러나 결국 베오날드 대에 이르러서 공작으로 승격하고 2대 황제에 걸쳐서 집권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황실 기사단 검법과 마나 수련법을 비롯해 황가(皇家)의 비전 검법을 훔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는 가주의 기본 소양이며, 다른 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보물인 만큼 구결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억하는 베오날드였다.

'으음… 그냥 들었을 때만 해도 좋았는데, 이젠 직접 익히게 될 줄이야. 아주 신나는군.'

감동에 젖은 베오날드는 곧바로 마나를 끌어 올려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먼저 '아류-노이멀 검법'. 조각 모음을 했다지만 그래도 선조들이 오랫동안 개선했기에 노이멀 가문의 체질과 성향에 가장 알맞게 개조된 검법이었다.

강맹하고 패도적인 황실 기사단 검법과 황가 전승 검법과 다르게 유연하고, 비겁한 허수를 많이 섞는다던가? 

정통 검사들이나 기사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기술을 많이 쓰는 검법으로 무인의 긍지 같은 게 없는 노이멀 가문에서 만들어진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황실 기사단 아류 검법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횡으로 휘둘러지던 검이 베오날드가 의식을 집중하자 그대로 위력적인 찌르기로 변화해서 들어갔다.

'뱀'의 이미지. 노이멀 가문은 오래전부터 '뱀'과 인연이 깊었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가문의 문장도 다수의 뱀 머리를 가진 신화 속의 생물 히드라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개발된 검법의 이름은 모두 '뱀'에서 딴 것이었다.

'대체 뱀이 어때서....'

남들은 불길하다거나 간교하다고 하지만 노이멀 가문은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상징이었다.

"후우~ 보는 건 많이 봤는데… 직접 하는 건 또 신기하군. 후우우~ 게다가 역시! 이 정도 소모는 있어야지 몸에 부담이 가지!"

단순히 휘두르고 뛰는 걸 넘어서 식(式)을 펼치니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에 만족하며 베오날드는 곧바로 순조롭게 수행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중으로 쳐진 잠금 덕분에 안심할 수 있게 된 그는 검술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빠르게 기량을 길러 갔다.

정치판과 영지 운영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무(武)의 길은 생소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신체가 활성화되고 젊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과거 저택에 있을 때 좀 똑똑하답시고 곧바로 지옥 같은 교육관에 갇혀서 강제 교습을 받을 땐 정말이지 지옥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연금술을 발견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가주 베오날드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

***

5년 뒤.

"후우~ 시간이란 참 안 가는 듯하면서도 빨리 간다니까~"

개인 수련실을 받은 베오날드는 그렇게 어느덧 10살이 되었다.

여전히 부모들은 사랑으로 베오날드를 보살폈지만 그래도 수련실 덕분에 큰 방해 없이 이곳에서 마나 수련법과 검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제 학문에 대해선 어리숙한 티를 벗고, 곧바로 유모의 교육을 졸업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희로선 더 이상 가르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새로 교사를 알아보지 않는 이상은...."

'흠, 이 정도 가지고.... 아무튼 수련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좋군.'

수련실은 기초 설계대로 육중한 철제문으로 이중 잠금을 해서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나중엔 아예 미리 식사를 다 챙겨 와 오로지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분야에서 이미 대성을 한 자답게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를 가차 없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성과는 확실히 나타난 것일까? 10살 소년이라곤 믿을 수 없는 키와 체격을 가진 베오날드가 오늘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우우...."

키 약 170센티미터, 체중 약 68킬로그램. 도저히 10살 소년으로 보이지 않는 진한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한 미소년은 사슬 갑옷과 그 위에 하드 레더를 한 번 더 껴입고는 계속해서 땀을 흘리며 '황실 기사단 검법 아류-노이멀식'을 연마하고 있었다.

'내가 무예(武藝)를 너무 우습게 봤어. 이거 형(形)만 익히는 건 쉽지만 완전히 진의에 닿는 건 되게 어렵네. 특히 나는 연금술사라 도저히 그 추상적인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것 같아. 젠장!'

연금술은 이성과 합리, 그리고 반응의 학문이다.

약품에 원소, 마력을 넣으면 작용해야 할 반응이 곧장 튀어나와서 바로 결과를 내 준다.

소금에 물을 넣으면 소금물, 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물. 이렇다 보니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이 '무예'라는 것은 결국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기도 했고, 기술을 익힐 때까지 계속 반복해 가며 경험과 수련을 해야 하는 점에서 정말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똑같아. 결국 연금술도 최적의 수식과 결과를 찾을 때까지 끝없는 실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처럼 이것도 그렇게 될 때까지 수련을 해야 해. 아무튼 황실 기사단 검법의 찌꺼기로 만든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마스터할 때까지 절대 다른 검법엔 손대지 말자.'

오기가 생긴 베오날드는 지난 5년간 계속해서 노이멀 가문의 검법만 집요하게 팠다.

대귀족의 자존심, 엄연히 황가 전승 검법까지 모두 손에 넣은 노이멀 가문 역사상 최고의 가주인 자신이 자신의 가문 검법 하나를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를 먹어도 황실 기사단 검법이나 황가 전승 검법에서 막혀야지! 고작! 고작! 백작가에서 머물던 그 무능한 인간들이 개선하고 조각 모음해서 만든 '아류'인 노이멀 가문 검법에 막혀서 도망칠 순 없지!'

철그럭! 철컥! 철컥!

그렇게 계속해서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연마하던 중 밖에서 수련실의 이중 잠금장치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군.'

베오날드는 당장 수련을 멈추고, 몸에 부하를 주기 위해 덧입었던 체인 메일과 가죽 갑옷 등등… 쇳덩어리들을 모두 제거해서 순식간에 자리에 놔두고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다.

"뭐야? 영감님 아냐? 무슨 일이야?"

"저녁 시간이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주인님과 안주인님께서 같이 식사하시자고...."

아무리 수련실에 음식을 들고 들어가도, 여건이 되면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건 당연했다.

아직도 이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는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생전 즐겨 보지 못한 것이기에 그는 가능한 한 지금의 가족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수련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말이지. 후우우~ 마무리 몸풀기만 하고 바로 내려갈게. 몸의 근육을 풀어 줘야 하거든...."

연금술을 공부하면서 의학에도 밝아진 터라 베오날드는 운동 뒤에 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예, 도련님. 욕실에 씻을 준비를 해 두었으니 하고 오시면 됩니다."

'그 큰 물통 하나만 있던 거 말이지? 마구간에서만 보던 물건이라 처음엔 놀랐지. 하하하.'

욕실에 있는 것은 달랑 큰 물통 하나와 2~3개의 비누, 그리고 안 쓰는 천으로 만든 비누 거품을 내기 위한 조잡한 타월뿐이었다.

옛날 자신이 즐기던 거대한 욕탕을 잠시 상상하던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한숨을 쉬고는 물바가지를 끼얹으며 비누로 칠한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나와서 준비된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하자 그곳에선 이미 부모님들이 먼저 식사 중이었다.

"어머, 베오날드 왔니?"

"예, 어머님. 죄송합니다. 씻느라 늦었습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너 참… 빨리 크는구나. 하하. 성년식까진 5년이나 남았는데, 누가 봐도 성인으로 보일 정도라니...."

레이온 자작은 이제 10살밖에 되지 않은 베오날드의 성장을 보면서 처음엔 기묘함을 느꼈지만, 선대 가주이자 시조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거구의 체구를 가졌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그쪽 영향 혹은 진짜 귀족인 외가 쪽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 거라고 합리화하며 금방 납득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도 성장이 빠르다고 했었던가? 으음… 그 유전이라 생각하면....'

"이게 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보살핌 덕분이죠. 세상엔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10년간 배를 곯지도 않고, 또한 충분히 단련할 수 있었으니 다를 수밖에요."

"베오날드, 아무리 그래도 넌 아직 10살이란다. 너무 그렇게 빨리 어른스러워지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편하게 엄마~ 아빠~ 라고 하렴. 나중엔 하고 싶어도 못할 거란다."

베오날드의 빠른 성장이 좀 기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정은 아주 화목했다.

한데 레이온 자작은 무언가 근심거리가 있는지 영 식사에 집중 못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치가 빠른 베오날드는 굳이 묻지 않고는 식사를 일찍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러면 전 먼저 올라가서 계속 수련할게요. 엄마, 아빠."

"응. 너무 무리하진 말렴. 베오날드."

"예에~"

하지만 베오날드는 올라가지 않고 벽 뒤로 숨어서 부모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베오날드가 먼저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 두 사람은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살짝 쉬면서 본격적으로 근심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우~ 오늘 또 그 망할 도적놈들이 마을을 습격했소. 이걸로 벌써 세 번째, 납치된 영지민만 14명이요."

"방비를 더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하긴 했소. 최초에 파울 형… 크흠! 아니, 파울과 샨테에게 마을 방비를 더 탄탄히 하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했는데… 놈들이 어떻게 된 건지 벌써 그걸 뚫고 세 번이나.... 후우~ 진짜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오. 이 작은 영지에 대체 뭘 그리 노릴 게 있다고...."

"정말 걱정이네요. 아니면 아버님께 이야기해서 병사를 빌려 달라고 해 볼까요?"

어머님의 외가 측은 그래도 나름 이 지역에서 힘이 있는 귀족인 캘러메인 백작가였고, 결국 이 시골 영지도 본래 그들의 소유였기에 병사를 요청할 만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레이온 자작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반대했다.

"상대는 도적놈들이오. 고작 그런 놈들을 상대로 힘을 빌려 달라고 하면 내 평가가 어떻게 되겠소? 상대 규모는 고작해야 20명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오."

"하지만 그 20명이… 탈영 혹은 패잔병이나 기사 출신이라면 또 다를 수 있는데...."

"아무튼 사안이 심각한 만큼 아예 토벌대를 조직해서 처리할까 생각 중이긴 하오. 놈들이 식량만이 아니라 사람을 납치한 걸 보면 분명 이 부근에 본거지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소. 그러니 당분간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산적, 도적놈들의 출몰이야 이런 시골 영지라면 늘 앓고 있는 문제였다.

탈영병이나 패잔병, 혹은 전쟁에서 패배해 영지를 잃은 기사들이 무법자로서 산적, 도적이 되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영지 간의 전쟁이나 분쟁은 통일 제국 시대에도 넘쳐 나던 일들이었다.

'20명 규모에게 세 번이나 털려?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베오날드는 대귀족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평가하길 근본은 없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근면하며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로서는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선대가 용병이었기에 나름 체계화된 전투 기술과 기마술은 물론 전투 지휘 및 진지 구축 등등, 군사학 지식은 물려받아서 어중이떠중이 병사나 산적 같은 자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였다.

'이 영지가 작다곤 해도… 어머니의 서류를 보면 마을의 장정들로 이루어진 민병까지 합치면 병력이 약 60명. 거기에 목책까지 쌓고, 감시 체계까지 갖추면 놈들은 오히려 물러나야 정상인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군.'

적들이 강한 것도 아니고, 영주의 성정 문제도 아니며, 충분한 조치를 취했고, 그렇다고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내부자의 배신.'

내통자의 존재, 즉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평가를 잘못 내린 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에 대해 잘못 볼 요소는 전혀 없었다.

아무튼 베오날드는 아버지가 원정을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 큰 위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놈과 함께 밖을 나간다? 그러다 자작이 죽으면?'

이 작은 시골 영지는 그대로 보호자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도적과 산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영지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려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오날드는 이제 귀족의 혈통이라는 최소한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유랑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할 판국.

그는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자신이 움직이기로 했다.

[5화]

같은 시각, 더스티클록 자작 영지 외곽.

파울과 샨테. 선대인 레이온 자작의 부친과 함께 용병 생활을 하던 자들로, 그가 작위를 받자 가신의 형태로 같이 이 영지에 정착하게 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신이라는 것은 말이 좋아 가신이지 부하였으며, 오히려 이 촌구석 영지에 묶여서 이동만 제약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용병으로 돌아가자니 이미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서 기량도 떨어지고 모은 재산도 별로 없어서 결국 싫어도 레이온 자작을 따라서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준비할 테니...."

올해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파울, 그 옆에 있는 샨테는 40대 후반으로 이 둘은 모두 오랜 세월 용병으로 굴러서인지 얼굴을 비롯해서 곳곳에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용병이라는 듯 눈빛엔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나이가 이미 오십과 40대에 접어든지라 힘은 떨어져 보였다.

현재 이 둘 앞에는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젊은 남성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는 파울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자, 칸젤에게 전하게. 이게 오늘과 내일 병력 배치표일세. 오늘도 신나게 흔들어 주게."

"히히히, 이게 있으면 신나게 흔드는 힘도 필요 없을 정도로 쉽죠. 도적질 생활 5년에 손꼽을 정도로 쉽습니다요."

그와 이야기하는 남성은 도적으로 이 파울이라는 남성과 내통하여서 영지 순찰 루트의 약점과 방어의 틈을 뚫고 그동안 실컷 도적질을 한 것이었다.

베오날드가 예상한 대로 이들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제아무리 방비를 다지고, 순찰을 강화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고 말이다.

서찰을 챙겨서 나가려는 도적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파울이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레이온 놈이 슬슬 화가 난 걸 보니… 아마 곧 토벌대를 보내려고 할 게야."

"오오? 정말입니까?"

"놈의 성격은 내가 어릴 때부터 봐서 잘 아네. 혹시나 이번엔 참아도 아마 한 번 더 털리면 확실할 게야. 확실해지면 내가 알려 주겠네."

"알겠습니다. 히히히."

"후후, 드디어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깡촌 생활을 벗어나겠군."

파울과 샨테, 둘은 용병 출신들과 손을 잡고 이 영지를 없앤 뒤 한몫 잡아 좀 더 큰 도시 영지로 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망할, 레시크 형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일해도 술집 하나 안 들어오는 깡촌이라니!"

레시크 더스티클록. 선대 더스티클록 자작이자 이 더스티클록 가문의 선조였다.

용병으로 전쟁터에서 뛰다가 우연치 않게 대귀족 하나를 구한 덕분에 작위와 이 영지를 받고 자신들을 꼬드겼는데, 아무리 바쁘게 일해도 영원히 깡촌이며 그렇다고 보수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불만이 쌓여 있던 것이었다.

"처음에 레시크 형님이 정착하자고 했을 때 좋아했던 게 누군데유?"

"이런 깡촌 영지를 받을 줄은 몰랐지! 어떻게 여관, 선술집 하나 없는 영지가 있냐고! 술 한잔 먹으려면 캘러메인 영지까지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레시크 형님은 우리랑 먹으려고 술을 상시 보관했지만 저 미련퉁이 레이온은 술도 많이 안 마셔서 접대용만 쌓아 두고!"

"아무튼 조질 거니까 이제 불평 그만해유. 흥분하면 계획이 흐트러지니까유."

"그래, 샨테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튼 이번에 크게 한탕해서 한몫 잡고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떠나자고! 뭐, 이 영지의 병력 중 3분의 2는 사실상 우리 병력이니 말이야."

벼락출세해서 귀족이 된 레시크를 따라온 자들은 파울과 샨테뿐만이 아니었다.

나이라든가, 체력이라든가, 부상의 문제로 용병 생활을 접어야 할 법한 인원들이 다른 귀족보다는 그래도 안면이 있고 같은 부대 용병 출신이었던 레시크를 따라온 경우도 있던 것이었다.

레이온과 결혼한 외가 쪽 집안인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처음에 지원해 준 병력과 용병들이 이 영지의 기본 병력이 되었지만 역시 절대 다수는 용병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백작가에서 지원해 준 병력은 노병들이라서 금방 죽었거나 아니면 은퇴한 상태였다.

거기에 레이온 자작은 의심도 적어서 자신들이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가 일을 못한다는 둥 끙끙대기만 했기에 계획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 남은 건 그가 토벌대를 꾸리자는 의견을 내는 것뿐이었다.

"근데 혹시라도 캘러메인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거 아니에유?"

"그러면 레이온 놈은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돼. 그러니 걱정할 거 없어. 아무튼 토벌대 꾸려서 나가기만 하면 끝이야. 흐흐흐."

파울은 그렇게 토벌대로서 나가서 레이온과 측근 병사들을 모두 죽인 다음 도적들과 힘을 합쳐서 영지를 털고 도망쳐 팔 수 있는 건 다 팔고 도시로 흩어지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웃었고, 샨테도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약 15분 전, 더스티클록 가문 저택.

베오날드는 일단 어머니의 집무실로 간 다음 거기서 지도를 확인하고 그대로 저택을 뛰쳐나갔다.

애초에 시골 영지라서 저택에 경비병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 대부분의 병력들은 모두 영지를 습격하는 도적 때문에 수비에 차출되었기에 아무도 베오날드의 밤놀이를 목격하거나 감시할 만한 이는 없었다.

'아주 수월하긴 한데… 지도가! 지도가 정말 쓰레기 같았어. 젠장! 어린아이가 개발새발로 그려도 그거보단 낫겠다.'

베오날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어머니의 집무실에 있던 지도를 떠올렸다.

축척이나 거리 표시는 없고, 거의 어린아이에게 우리 집 주변을 그리라고 했을 때 만들 법한 그림 지도였다.

대체 자신이 죽고 난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더더욱 궁금해지는 베오날드였다.

'하아~ 도시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지도가 있길 바라야지. 들키면 곤란…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빨리 움직이자.'

어차피 다들 자신이 수련실에서 수련하거나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었다.

혹은 들키면 그냥 잠시 밤바람을 쐬었다고 하면 될 일이다.

'아무튼 보자… 먼저 가 볼 곳은… 파울이라는 놈의 집인가?'

일단 영지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베오날드는 투덜대면서도 조심스럽게 마을을 거닐면서 지도의 풍경과 대입시키며 주변을 파악해 나갔다.

다행히도 이 영지는 자신이 살던 저택을 중심으로 주변의 길과 모든 장소가 뻗어져 나가고 있었기에 어려운 구조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납득이 안 가. 그 지도, 분명 외가 쪽인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만든 것일 텐데 말이야.'

지도에 이 '더스티클록 가문'의 망토 문양이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가의 상징인 산맥 그림이 그려져 있던 것을 짚어 낸 베오날드였다.

그러자 뭔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단순히 여기가 시골이라서 기술이나 설비 같은 게 낙후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지도를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려진 지도가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살던 때에 보던 것보다도 훨씬 조잡했다.

'캘러메인 백작가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지도를 만든 놈이 멍청이였나? 500년이나 지났으니 훨씬 더 좋은 물건이 나와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단 말이지. 아니, 어쩌면 혹시....'

현재 대륙은 자신이 살던 통일 제국 시기와 다르게 여러 나라로 분열된 혼란기가 찾아왔다고 했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그렇다고 치면 오랜 대전쟁으로 지식과 문명, 기술이 후퇴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봄 직했다.

베오날드가 살던 시대의 역사 자료에도 과거에 찬란한 마도 문명 같은 게 있었다가 전쟁으로 유실되었다던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즉, 싸우면서 문명이 후퇴해 버린 건가? 찬란한 마도 문명에서… 통일 제국으로, 거기서 또 한 번 더 후퇴를 한 게 지금 시대? 이러다간 정말 인간들이 다시 원시인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기묘한 상상을 하는 사이, 베오날드는 금방 파울의 집에 도달했다.

목재로 된 집과 마구간엔 말 2마리, 그리고 밖의 상황을 모르는 건지 안에선 쩌렁쩌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크니 엿듣기가 좋군.'

"아, 그리고 레이온 놈이 슬슬 화가 난 걸 보니… 아마 곧 토벌대를 보내려고 할 게야."

"오오? 정말입니까?"

"놈의 성격은 내가 어릴 때부터 봐서 잘 아네. 혹시나 이번엔 참아도 아마 한 번 더 털리면 확실할 게야. 확실해지면 내가 알려 주겠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자마자 이렇게 작당 모의하는 걸 들을 줄이야. 아~ 딱 봐도 부친과 함께 저 둘이 움직였으니 돌아와서 쉬는 것도 같았던 건가?'

정말 운이 좋은 건지 베오날드는 오자마자 자신이 예상한 대로 가신들 중에 내통자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 그사이에 파울의 집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잽싸게 빠져나갔다.

베오날드는 몰래 그를 쫓으면서 생각했다.

'으음… 추적을 하는 건 좋은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놈 다 배신자라는 것을 알아내고 직접적으로 외부의 산적과 작당하는 걸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긴 한데, 당장 손을 써야 할지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보자… 이대로 두면 자작인 아버지가 죽고 이 영지가 망하겠지? 그러면 부랑자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하면 어머님과 함께 먼저 캘러메인 백작가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모친의 외가인 캘러메인 백작가는 나름 큰 집안인 만큼 갈 만할 것이다.

'일단 혈족이기도 하고… 나름 재녀인 만큼 거둬서 써먹을 구석은 있을 거고. 나도 큰물에서 재능을 보이면 더스티클록 자작가의 도련님이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가의 일원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귀족의 감각으로 냉정하게 주판을 굴리는 베오날드. 어떻게 보면 저들의 행위를 내버려 둬서 아버지를 죽게 놔둔 다음 어머니와 도망쳐서 캘러메인 백작가에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굴러들어온 돌의 처지는 그리 좋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깡촌에서 생활하는 것보단 나을 수 있고, 또 그런 귀족가에서의 내부 분쟁은 오히려 베오날드의 홈그라운드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단점도 만만치 않지.'

가뜩이나 역사도 짧은 벼락 귀족의 후손이라서 그걸로도 말이 많을 텐데, 거기에 가신 관리도 잘못해서 배신당한 오명까지 가지고 있으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였다.

게다가 이 반란이 적어도 자신이 성년이 되고 일어나면 모를까,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기에 금방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 '무능한 레이온 자작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따라다닐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아직 검사이자 기사로서 실력을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못한 시점에서 가 봐야 수련하는 걸 견제당할 가능성도 크고, 머리 아픈 일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여기는 아무런 견제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으니… 결정됐군.'

그렇게 주판을 두드려 본 결과 이 반역자들의 계획을 부수고 아버지와 이 영지를 지키기로 결정한 베오날드였다.

그사이에도 열심히 추적을 했는데, 놈들은 정말로 내통을 잘하고 있는 건지 목책과 경비를 아주 손쉽게 뚫었고, 약 한 시간 정도 숲을 지나자 불이 피워져 있는 야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가 본거지인가? 으음… 도적놈들의 본거지는 500년 전이나 후나 다를 게 없군. 그리고 사람들도… 묶여 있고. 노예로 팔 생각인가 보네.'

"여기 파울 형씨가 준 배치도입니다, 형님."

"아주 잘했어. 흐흐흐."

야영지엔 32명의 도적들이 각자 모닥불 곁에서 술판을 벌이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주변엔 물자를 실어서 다니는 듯한 수레가 보였으며, 그 옆엔 노예들이 손과 발이 묶여서 서로 끌어안은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판단한 베오날드는 어떻게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 다 구하는 건 무리이려나? 음… 하지만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데, 뭔가 이용할 게 있나?'

섣불리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베오날드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면서 이용할 것이 있나 찾아보았다.

다행히 술판을 벌이는 통이라 자신이 숨죽인 채 주변을 돌아다녀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들의 짐에서 슬쩍 검 한 자루를 빼돌렸다.

'썩 좋은 검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집에서 가져온 검은 날이 제대로 안 서 있으니 말이야. 아무튼 이제....'

"거기까지다, 꼬맹아."

한참 방안에 대해서 고민하던 사이,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돌자 거기엔 자신을 향해서 활과 무기를 겨누고 이미 포위하고 있는 산도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자신이 완벽하게 한 방 먹은 것이었다.

"음? 어떻게 안 거지?"

"킬킬킬, 그런 어설픈 추적 실력으로 쫓아왔는데 당연히 들킬 수밖에… 킬킬킬, 숲에서 진작 알아챘다! 이 꼬맹아!"

'과연… 하긴 생전에도 암살자나 도적들이 배우는 추적 기술 따위와는 인연이 없었지. 전공이 아니다 보니.... 그럼 어쩔 수 없나?'

추적을 한다고 했는데 어설픈 솜씨여서 들켰다는 말에 베오날드는 단번에 납득했다.

안 해 본 일은 역시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베오날드의 존재를 이미 눈치챈 이 산도적들은 자기들끼리의 수신호와 눈짓으로 그의 위치를 공유했고,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에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었다.

"음, 피부도 곱고 생긴 것도 곱상하니 남색가들에게 비싸게 팔리겠군. 흐흐흐, 얌전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목숨만은? 살려? …푸훕! 흐흐흐… 흐흐흐… 푸하하하!"

도적 대장의 협박에 베오날드는 마치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뭐, 뭐야?"

"미쳤나?"

그러고서 일어난 베오날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오만과 위엄을 담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어린이 연기가 아닌 본래 자신의 말투로 그들에게 말했다.

"시체나 파먹고 다니는 구더기 놈들이, 겁도 없이 방자하게 구는구나. 푸후후훕, 내가 쫓는 걸 알아챘다고 해서, 그리고 먼저 포위했다고 해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꼴이! 푸하하하!"

"뭐, 뭐라고?"

"하려면 적어도… 내가 이 검을 줍기 전에 했어야지. 아, 못 주웠어도 물론 가지고 있는 게 있어서 상관은 없었겠지만.... 그러니까 한 번에 잡초를 베느냐와 손으로 둘을 뽑느냐의 차이지."

베오날드는 즉시 검을 뽑아 들었고, 도적 하나가 수상한 짓을 하는 그에게 바로 화살을 날렸지만 그는 가볍게 쳐 냈다.

"…마, 말도 안 돼!"

"이제 좀 감이 오나?"

놀란 얼굴을 한 도적들의 눈앞에서 베오날드는 마나를 끌어 올렸고, 그의 몸에서 보랏빛 오러가 흘러나오자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은 자신들이 베오날드의 의표를 찔러서 포위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오히려 청소하기 쉽게 모인 꼴이나 다름없었다.

[6화]

"이런 젠장! 하, 하지만 상대는 비무장이고 한 명뿐...."

도적들의 대장은 슬금슬금 물러나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보랏빛 잔상과 함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이 분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목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보랏빛 그림자는 동시에 5명을 모두 베었고, 순식간에 32명 중에 6명이 죽어 버렸다.

그것을 본 다른 도적들을 경악했지만 베오날드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쉽군. 날벌레를 잡는 게 이거보다 더 쉬울 지경이야.'

'마나 수련법을 익힌 검사'로서의 실전이 처음일 뿐, 대귀족이었던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은 엄연히 전쟁터를 밥 먹듯이 다녔으며, 가문의 주인이 되기 전에는 잔혹한 선대 노이멀 백작에 의해 '배다른 형제'들끼리 죽였던 경험까지 포함해서 생명을 빼앗는 일엔 너무나 익숙했다.

"히익! 뭐야? 이거! 보이지가 않잖아!"

"대, 대장이 죽었는데 어떻게 하지?"

"상대는 마나 수련법을 익힌 기사인 것 같다. 이, 일단 빨리 방진을 짜! 놈은 무장이 가벼워! 그러니 공격해서 맞히면 승산이 있...!"

운이 없게도 입을 놀리는 자의 목이 또다시 허공에 굴렀다.

마나 수련법을 다루는 기사와 일반 병사는 어린아이와 어른만큼이나 신체 능력의 차이가 컸다.

그 점은 베오날드도 익히 알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마나 수련법으로 10년간 쌓아 온 마나의 힘으로 뿜어내는 오러, 이건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극 혹은 베오날드의 벌레 사냥이었다.

'음, 사냥은 여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건 꽤 할 만하군.'

스스로 마나를 소모하고 육체를 괴롭히던 수련에 비하면 너무나 시시한 싸움이었다.

애초에 도적놈들에게는 강자와 싸울 용기가 있을 리 없었지만 말이다.

"이 개자식! 멈춰! 이 영지민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무기를 버려… 컥!"

서걱!

묶여 있는 영지민을 인질로 잡은 도적 하나가 그 목에 칼을 대었지만 도적의 목이 먼저 날아갔다.

하나 그사이에 다른 도적들이 영지민들을 방패로 삼으며 인질극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다, 당장 멈춰! 이 개자식! 지금 이거 안 보여? 움직이면 진짜 죽는다! 죽는다고!"

"멈추라고! 우리 말 안 들...! 아아악!"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무슨 생각으로 인질을 잡은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도적들의 비겁한 행위에 대해서 규탄을 했겠지만, 전통 대귀족이자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베오날드에겐 말도 안 되는 거래로 보일 뿐이었다.

그의 기준에선 귀족의 생명은 당연히! 평민의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이었고, 대귀족인 자신의 목숨이라면 수십만의 평민 정도는 되어야 비벼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 젠장! 너 뭐냐고! 제정신이 아니냐고! 여기! 여기 놈들이 죽는 걸 그대로… 억!"

"저, 저 자식, 말이 안 통해! 제기라아아아알!"

인질 작전에도 베오날드가 눈 하나 깜짝 안 하자 도적들은 결국 그 작전을 포기했고, 19번째 도적의 목이 베인 시점에서 싸울 의지를 잃고 모두 흩어져서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사, 살려 줘어어!"

'이제야 도망을 치는군. 하지만....'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오식(五式)-사이드와인더'.

사막에 사는 기묘한 뱀의 움직임을 딴 검. 마나를 응집시킨 검기가 S자로 파도를 타듯이 굽이치면서 나무를 피해 날아가 그대로 도망치는 도적의 뒤통수에 꽂히자 머리가 펑 터져 버렸다.

사실 굳이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쓸 것도 없이 술에 취한 도적 따위 그냥 쫓아가서 베어도 되었지만, 혼자서 익히기만 한 검법의 실전 테스트를 하기에 딱 좋지 않은가?

그러던 중 수레 아래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는 도적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벌레는 도망치지 않고 숨어 있었네?"

저택에서는 귀엽고 착한 10살 아이를 흉내 내느라 속내를 드러낼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피를 봐서인지 베오날드는 점차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수천, 수만의 사람을 죽게 놔두고,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겐 비정하고 잔혹했던 대귀족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의 본성 말이다.

인간 위의 인간. 아랫것들을 버러지로 생각하는 그 시선에 살기를 담자 정말로 포식자에게 노림받는 듯한 살기를 느끼는 도적이었다.

"제,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럼 얌전히 있어 줄래? 사냥이 끝날 때까지 무기는 버리고 옷 싹 벗은 채로 양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있으면 살려 주지."

"예! 아, 알겠습니다!"

'영주 체면도 돌려놔야 하니 말이지.'

세 번이나 속수무책으로 습격을 당한 터라 아버지의 권위가 좀 내려갔을 터였다.

그래서 영주인 아버지에게 넘겨서 영지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시킬 생각으로 살려 둔 것이었기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압도적인 유린을 한 베오날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후~ 이걸로 끝이군. 생각보다 힘 좀 썼는걸? 실전은 역시 다르군."

결국 전투… 아니, 베오날드의 사냥은 손쉽게 끝이 났다.

항복한 자 6명, 시체 23구, 도주 3명. 쫓아가서 모두 참살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몸을 돌려 잡혀 있던 영지민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면서 베오날드에게 감사의 인사와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젊은 기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로요. 이대로 노예로 팔려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요. 엉엉어엉!"

"봐. 역시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했잖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 나를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파견 나온 기사로 생각하나 보네. 하긴 내가 워낙 저택에서 안 나가기도 하고… 오러를 쓰는 걸 보고 그리 짐작했나 보군.'

외양은 충분히 15세쯤으로 보일 법한 키와 체구였지만 현재 베오날드는 귀여운 10살. 가끔 추수감사제나 축제에 얼굴을 보이긴 했지만 성년이 아닌지라 대부분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가 연설하는 것만 지켜보던 역할이었고, 저택에서 계속 수련만 했던 터라 영지민들과의 대면은 극히 적었다.

'하긴, 날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아무튼 그 오해를 풀지 말지는 좀 더 주판을 두드려 봐야 했지만, 베오날드는 일단 현장부터 정리하고자 했다.

"다들 아직 긴장을 늦추어선 안 됩니다. 도망친 자들이 지원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어서 이동할 준비를 합시다."

"아, 예! 알겠습니다, 기사님."

그렇게 사람들은 즉시 베오날드의 명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잡은 산적들을 구속한 채로 영지로 돌아갔다.

그동안 혹시나 도망친 도적들이 정말로 보복하러 올까 싶었지만 다들 그 두려움 덕분에 발걸음을 빨리한 덕인지 약 45분 만에 영지 경계의 목책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나 완전히 도달하기 전에 베오날드는 잠시 일행을 멈추게 하곤 잡혀갔던 사람들 중 가장 연장자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사님."

"아, 그게… 사실 전 캘러메인 백작가의 기사가 아니라서요. 그냥 방랑하던 기사입니다. 미리 오해는 풀고 싶어서 말이죠." 

오면서 주판을 튕긴 결과, 캘러메인 백작가의 기사로 오해하게 둘 순 없다고 생각한 그는 빠르게 정정을 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는 수레에 실은 도적들의 두목과 파울, 샨테와 접촉했던 전령의 수급과 포로 하나를 챙기며 말했다.

"그리고… 이 수급들이랑 이 친구는 제가 좀 쓸 곳이 있어서 그런데 괜찮으시죠?"

"예? 뭐… 예, 그러십시오, 기사님."

"그럼 이만… 아, 쓸데없는 소리는 가능한 한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

보랏빛 오러를 슬쩍 일으키면서 노려보자, 영지민은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위는 이미 30명이 넘는 도적들을 상대로 지치지도 않고 손쉽게 이긴 것으로 충분히 겪었기에 거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 예! 물론입니다요!"

그렇게 베오날드는 일행과 헤어져 곧바로 도적 포로 둘을 데리고 파울의 집 쪽으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영지민들이 돌아온 떠들썩한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그는 가자마자 포로와 함께 파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어떤 자식이 이런 시간에 무슨… 어? 도, 도련님?"

그래도 영주의 가신인 만큼 영주의 아들인 베오날드와는 몇 번 인사를 나누고 면식이 있었던 만큼 파울은 금방 그를 알아보고 놀라는데, 베오날드는 인사를 나눌 새 없이 그에게 선물을 바로 내밀었다.

"이 사람들, 아는 얼굴이지?"

"으아악!"

아닌 밤중에 웬 손님이 왔나 싶어 신경질 내면서 문을 열었던 파울은 눈앞에 죽은 도적 두목과 몇 시간 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전령의 목이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뭐, 뭐야? 대체?'

사람의 시체엔 익숙했지만, 작당 모의를 한 두 사람의 수급이 보이자 심장이 덜컥하는 공포와 함께 그는 덜덜 떨었다.

"가가, 가가갑자기 뭡니까? 이런 시간에 사람 목을 내밀고… 그, 그놈들은...."

"아아~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여기 자네가 도적들과 짜고서 이 영지를 약탈할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랑 증인도 있는데?"

"허, 헉! 그건!"

베오날드가 내민 서찰을 본 파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래, 몇 시간 전에 자신이 전령에게 준 이 영지의 방비에 대해 써 놓은 서찰이다.

필적도 자신의 것인 데다, 정말로 뒤의 나무에 묶어 놓은 증인인 도적을 보여 주자 더는 발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이런 제길...! 그나저나 도련님이… 설마 그놈들을 잡으신 겁니까?"

"그랬다면?"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곤 하지만 그래도 베오날드는 10살이다.

저택에서 보았을 때도, 그는 몸은 성장했지만 천진난만한 눈빛과 어린 말투로 자신을 맞이했는데, 지금 눈앞의 베오날드는 영락없는 귀족 어르신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숨 막힐 것 같은 살기와 위압감. 용병 생활하면서 정말 가끔 본 높으신 분들이 내뿜는 그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아, 아무튼 직접 체포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아, 않은데. 그, 그걸 들고 오셨다는 건 저에게… 뭔가 원하시는 게 있어서 아닙니까?"

"원하는 거? 딱히 없어. 그냥 조용히 떠나길 바랄 뿐이야. 무슨 이유를 대든 간에 상관없어. 떠난다고 편지를 남기고 얌전히 여길 떠나."

"그, 그거면 되, 되는 겁니까?"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걸 알면 아버지가 상처 받잖아. 빨리 쓰고 떠나. 안 그러면 그냥 죽일 거다."

'저, 저게 어떻게 10살짜리란 말인가?'

숨 막히는 살기와 위압감, 은은히 피어오르는 보랏빛 오러를 보아선 마나 수련을 거친 기사 같기도 했다.

특히 저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고압적인 눈빛이 두려웠던 파울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재빠르게 손을 놀려서 이곳을 떠난다는 편지를 써 내려갔다.

"그, 그럼 가… 가 보겠습니다. 도, 도련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래, 다신 오지 마라."

"예, 그럼...."

그렇게 파울은 뒤도 안 보고 잽싸게 길을 나섰다.

저 눈빛, 예전에 용병 생활을 하면서 많이 보아 온 눈이었다.

거물 중의 거물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 다른 인간의 목숨을 코 후비는 것보다 더 쉬운 일로 생각하는 거물 중의 거물들이나 보이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것은 정통 귀족도 아닌 이런 시골의 10살짜리가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고, 절대로 무조건 피해야 할 존재였기에 파울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후욱… 후욱… 후욱! 이, 일단… 일단 캘러메인 영지로...."

쐐액! 퍼엉!

그렇게 영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 나간 순간,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 옆에 있는 나무가 '펑!' 하고 터져 나갔다.

'빌어처먹으으으을!'

그것을 본 파울은 안색이 파래진 채로 더욱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이미 한참을 숨도 안 고르고 뛰어온 터라 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안 돼. 제발… 사, 살려...."

두려움에 떨던 파울은 결국 베오날드 도련님이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고는 두려움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데, 보랏빛 오러로 된 검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생애 마지막 풍경이 되면서 그대로 머리가 터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7화]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육식(六式)-아나콘다'.

'오식-사이드와인더'의 연장으로 더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검법.

하지만 그것을 펼쳐서 파울을 죽인 베오날드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죽은 파울은 두 번 만에 자기를 맞힌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베오날드는 총 여섯 번이나 노이멀 육식-아나콘다를 펼친 끝에야 맞힌 것이었다.

"흐음, 역시 멀리서 움직이는 타깃은 맞히기가 어렵군. '노이멀 오식-사이드와인더'는 그럭저럭 맞힐 만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니~ 이번엔 세 번 이내로 성공하지, 뭐."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을 다른 가신인 샨테의 집을 쳐다보면서 베오날드는 미소 지었다.

그래, 기회는 아직 한 번 더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자신의 실력 향상의 양식이 되도록 이용하는 게 좋은 거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샨테의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실패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아마 지금 구해 낸 사람들과 잡아 온 도적들로 인해서 바쁠 테니 시간 여유는 충분하다.'

물론 영주의 가신인 샨테를 부르러 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사람들을 구한 영지 병사들과 민병들은 우선적으로 영주에게 보고하러 갈 것이고, 돌아온 사람들을 보호하고 조치를 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샨테를 처리할 시간은 충분했고, 만약에 누가 온다고 하여도 '검'으로 설득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이 방법이… 최선이겠지.'

사실 낮에 정당하게 증거를 가지고 체포해서 처벌해도 좋았지만, 이렇게 한 이유는 바로 파울과 샨테의 부하들 때문이었다.

정당하게 처벌하면 이 영지 병력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그들의 부하들이 반발하거나 혹은 다들 일을 그만두고 영지를 떠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냥 우두머리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게 하는 게 영지의 미래나 상황을 생각해서 가장 좋은 선택지였던 것이다.

'자기들 의사로 도망친 거니 남은 인원들도 뭐라 못할 거고, 또 그들의 부하도 자신들을 배신하고 갔다고 생각할 테니.... 그럼 남은 일을 하러 가 볼까?'

그리고 베오날드는 샨테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고 도망치게 만든 다음 '노이멀 육식(六式)-아나콘다'로 두 번 만에 처리했다.

또한 증인으로서 보여 주기 위해 데려간 도적 한 놈도 결국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깔끔하게 제거했다.

그러고 나서 완벽하게 해결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베오날드는 해가 뜨기 전에 몰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

얼마 뒤.

결국 영지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냐면 편지를 남기고 도망친 파울과 샨테에 대해선 처음엔 다들 놀랐지만 잡아 온 도적들의 진술로 그들이 내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자 빠르게 이해했다.

"감히 내 영지와 백성들을 노리고 침략한 죄,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으로 갚아라. 강제 노역형에 처한다."

포로로 잡혀 온 5명은 곧바로 레이온 자작의 분노 어린 판결로 영지 노예형에 처해졌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하루 종일 서부에 있는 숲의 나무를 베고, 돌을 캐는 일을 맡게 될 것이다.

결국 둘씩 짝지어져 손과 발을 일정 이상 쓰지 못하게 사슬로 묶인 채 곧바로 일을 하러 끌려가는 도적들이었다.

'무르네. 백성들 앞에서 쳐 죽여서 권위를 회복할 생각을 해야지. 쯧~!'

베오날드는 분노한 영지민들의 돌에 맞아 죽게 하거나 아니면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이온 자작은 이 시골 영지에 조금이라도 득이 될 행위를 시키는 게 낫다고 본 것이었다.

또 레이온 자작은 도적들을 없애고 백성들을 무사히 구해 준 방랑 기사에 대해서 알아내고자 했지만 야밤이라는 점과 젊다는 것밖에 특정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결국 단기적인 화젯거리로 끝나고 만다.

"하아앗! 흡!"

그리고 베오날드는 홀로 다시 검을 휘두르면서 계속해서 수련에 매진하는 나날로 돌아왔다.

게다가 이번 일로 확인한 것은 여전히 '검'이란 신묘하며 더욱더 단련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기에 그는 한눈팔지 않고 끝없이 수련에 열중했다.

'마나 수련법은 10년이지만, 검은 고작 5년밖에 안 했으니 말이지!'

보통 기사들은 평생을 걸고 휘두르는 '검'의 길이었기에 베오날드는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견실하게 연습에 힘썼다.

물론 계속 수련실에 꽁 박혀 있는 것을 부모가 가만히 둘 리는 없었는데, 일단 부친인 레이온 자작이 이제 어느 정도 육체가 크다 보니 수련 성과를 본다는 빌미로 대련하자고 할 때가 가장 난감했다.

"하하핫, 마음껏 덤벼 보려무나!"

'…그러면 죽어요, 아버지.'

자세를 잡는 것만 봐도 이미 마나를 끌어 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그래선 곤란했다.

자식이 현 가주보다 강하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곤란할뿐더러 엄연히 시골 촌구석 영지라곤 해도 가주는 가주. 그 권위와 자존심이 상해선 곤란했고, 수련하는 자신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으리라.

"허업!"

"끄으으으으으응!"

그래서 철저히 접대 대련으로서 지친 모습을 연기하며 쓰러지는 베오날드였다.

그가 쓰러지자 레이온 자작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격려해 주었다.

"하하하핫!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그래도 자질은 있는 것 같아서 기쁘구나!" 

"예! 하아… 하아… 그러니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네요. 하하하하."

"그럼!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거라."

'노력은 할 건데!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이 시골 촌뜨기! 벼락 귀족 자식아. 으아아아!'

현생의 아버지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귀족의 자존심이 삐걱거리는 게 문제였기에 베오날드는 속으로만 삭일 뿐이었다.

이럴 때 위안이 되어 준 것은 바로 어머니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검술 수련에만 빠진 그가 지식이 너무 없어서 다른 이에게 쉽게 속거나 아니면 힘만 가진 무뢰배가 되지 않도록 그에게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쌓게 해 주려고 개인 교습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도 흥미를 가져 줘서 고맙구나. 사실 무예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보통 학문을 지루해하거나 싫증 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베오날드가 이토록 집중해 줄 줄이야. 훌쩍…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교육을 할 걸 그랬어.... 이 엄마가 몰라봐서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어머님."

베오날드의 모친은 검술에만 푹 빠져 수련하던 베오날드가 학문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거나 힘들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수업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노력하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등등… 문무 양도의 자질을 보여 주고 있어서 매우 놀라는 동시에 감동하고 있었다. 

'…아버지 접대에 비하면 이건 선녀나 다름없지. 그렇게나 알고 싶었던 이 나라와 대륙의 정세, 내가 죽고 난 뒤의 역사를 다 알려 주는데… 내가 더 감사할 지경이지요, 어머님.'

반대로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어머니가 알려 주는 현재 이 대륙에 대한 지식은 고맙기 짝이 없었다.

국가의 정세, 주요 귀족 가문, 역사, 교양, 유행 등등… 내실은 좀 얕아도 지금까지 이 깡촌에서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던 것에 비하면 답답하던 배오날드의 두뇌를 아주 시원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지금 대륙이 6개의 나라로 갈라지기 전엔 이 대륙 전체를 하나로 통일한 거대한 제국이 존재했단다. 하지만 그 대륙은 어느 날 서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했고… 처음엔 하나에서 둘… 이런 방식이 아니라 갑자기 그 거대한 제국이 무너져서 여러 나라로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흡수된 끝에 지금의 6개의 나라가 되었지.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싸운 탓인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하더구나."

'여신의 말로는 500년이라고 했으니 그럼 그동안 계속 분열한 채로 서로 전쟁만 했다면… 지도가 어째서 저 모양인지 이해가 가는군.'

물론 500년 내내 전쟁만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고 서로의 영토를 뺏고 빼앗기고 각종 기록과 기술이 유실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 의문이 남은 것이, 적어도 6국이 되기 직전 결국 흡수되는 과정 중에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뭔가를 발전시켰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보통 전쟁으로 경쟁이 심화되면 오히려 기술이나 문명은 더 빠르게 발달할 텐데 말이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더 많은 병력과 자금이 있어야 하니까. 어디서 뭔가 대륙을 거의 멸망시킬 만한 짓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암흑신교 놈들이 뒤에서?'

"…그리고 이후 각 나라가 분열하는 동안 여신을 섬기는 교단이 종교를 통해서 전쟁으로 지친 각지의 사람들을 돕고, 지금까지의 이 대전쟁은 모두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통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며 사람들이 더 이상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이끌고 있단다." 

'교단?'

"특히 지식의 검열과 제약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지. 그릇된 지식은 무지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뜻을 알리고 대륙의 위험이 될 기술과 지식을 없애기 위해서 교단과 성기사단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그렇군… 범인은 교단이었군. 그럴 만하지. 그놈들은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걸 싫어했으니....'

"이들의 주장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가 지금도 교단을 통해서 내려오고 있는데, 통일 제국 시대 말기에 위독한 황제를 꼭두각시 삼아 권력을 쥐고 수십 년 동안 대륙 전체에 전횡을 휘두른 간신에 대한 것이란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인데?'

왠지 귀가 가려워졌지만,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들었다.

"그는 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고, 금지된 지식을 탐구하여 끝없이 자신의 배를 채우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 황금이 녹아서 물처럼 흐르는 강, 보석으로 치장된 정원, 세계의 미녀들을 모두 모아서 장식장에 가두거나 황금 물을 씌워 장식물로 만들어서 즐겼고, 세상에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 나는데도 창고에 쌓아 둔 고기가 썩어 가는 향기를 즐기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각종 고문을 해 대는 것을 즐기는 등등… 셀 수 없을 만큼의 악행을 저지른 자란다."

'…이건 아니네. 엄연히 내가 한 일이 아니야. 나는 금화로 강을 만들고, 정원을 장식하는 건 예술품만 취급했고, 미녀들이야 그냥… 첩으로 다 삼았고… 우리 영지 사람들만큼은 모두 배부르게 먹고 살게 해 줬지. 검투 경기장은 유희용으로 지었고 말이야. 암~ 그렇지.'

"그 악마 같은 간신은 도저히 용서 못한 정의로운 성직자와 용사의 손에 잡혀서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수치스러운 제국 역사에 도저히 남길 수 없는 존재였기에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하여 '이름 없는 간신'이라고 불린단다." 

'솔직히 저건 너무 심했지. 나 같아도 기록을 삭제할 법해. 그나저나 역시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베오날드를 뛰어넘는 간신이 나타났을 줄은 몰랐군. 역시 인간은 우습게 볼 수 없어.'

'이름 없는 간신'에 대해 들은 베오날드는 자신이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면서 계속해서 모친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난 뒤에 무언가를 묻든가 해도 될 것이다.

"하나 문제는 그 뒤로 사람들이 그 '이름 없는 간신'이 남긴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였는데… 이게 지금까지 대륙을 분열시킨 대전쟁의 서막이었단다. 교단이 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대전쟁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니까. 그래서 교단이 그 '이름 없는 간신'을 악의 원흉이라고 하는 거지."

'과연, 그래서 교단이 문명을 퇴화시켰다는 건가? 음~ 정말 누구지? 그 '이름 없는 간신'이라는 놈은.... 거참, 얼굴이나 보고 싶네.'

"그리고… 그 '간신'의 기록을 삭제했다곤 하지만 가문, 영지에 대해선 조금씩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인해서 교단의 주장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단다. 그래서 용병이나 트레저 헌터들은 지금도 과거의 기록을 찾고 또 찾아서 그 '이름 없는 간신'의 영지라고 이름만 내려져 오는 '베노피스'라는 영지를 찾아 헤매고 있단다. 세계의 대전쟁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보물들이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뭐? 지금 어디라고?'

'베노피스'. 바로 자신의 전생의 가문인 노이멀 가문 영지의 이름.

그 이름이 나오자 베오날드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후훗, 재미있었니? 물론 어디까지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 같은 이야기이니 너무 그렇게 진심으로 반응할 필요 없단다, 베오날드. 수업은 여기까지 할 건데, 엄마랑 이제 차나 한잔 마실까? 응? 베오날드? 베오날드?"

'그러면 그… '이름 없는 간신'이 바로… 나였던 거야?'

더 충격적인 것은 방금 전 모친이 한 이야기의 간신이 자신의 전생이라는 것이고, 그 내용이 아주 심각하게 과장되었다는 점이었다.

[8화]

자신의 영지가 아닌 다른 '베노피스' 영지일 거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간신'이라는 키워드와 합쳐지면 결국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면 자신의 뒤를 이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한 짓을 해서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자신이 죽은 시점에 이미 베노피스 영지는 약탈과 파괴로 멸망할 운명이었고, 금지된 땅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과거에 이 분열을 초래한 '대전쟁'의 원인이 되는 '이름 없는 간신'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 자신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데, 간신이라는 점은 맞지만 교단 놈들이 자신의 행적을 너무 과도하게 부풀려서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게 화가 났다.

'…망할 교단 새끼들, 아무리 내가 아니꼬워도 그렇지, 내가 헌금한 돈이 얼만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해? 하긴 그 새끼들은 늘 그랬어.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냥 주는 것만 낼름 받아 처먹고!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고!'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은 생전에 '교단'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일단 과거 제국의 의료 시스템은 모두 '신성력'을 위주로 한 '교단'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베오날드가 연금술과 의학으로 황제의 병환을 완화시키는 바람에 교단이 제국 황실에서 차지하고 있던 영역을 침략당했으며 그 이후 다양한 사건으로 분쟁이 있었기에 교단과는 거의 척을 진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관계 개선을 해 보려고 했는데.... 하여간 쪼잔한 새끼들 같으니! 여신관도 좀 보내 달라고 하니까 안 보내고! 젠장! 가만두지 않을 테다!'

"베오날드? 어디 안 좋니?"

"아, 아뇨. 괜찮습니다, 어머님! 조금 생각을 정리하느라 멍 때렸습니다. 한 번에 많이 알려고 하니… 하하하."

"그러니? 내가 의욕이 과했구나. 외양의 성장이 아무리 빨라도 아직 10살인데.... 아무튼 차를 마시러 가자꾸나."

자애로운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을 느끼면서 베오날드는 그녀를 따라서 티타임을 가졌다.

찻잎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전생에도 주지육림에 온갖 사치를 다 했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차를 나누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저택에서 갖는 티타임 하나도 마음 편히 못할 정도로 거대한 가문을 통솔하는 가주의 책임은 막강했으니 말이다.

'과연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별거 아닌 찻잎이지만 분위기와 상황만 바뀌었는데, 맛이 변할 줄이야.'

'우리 아들에게도 캘러메인 가문의 피가 확실히 흐르고 있구나. 어쩜~ 저리 우아한지.'

차의 맛이 예상치도 못하게 좋아서인지 베오날드는 자신이 지금 10살 아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채로 그것을 음미했고, 대귀족의 기품과 자세가 여과 없이 나오자 모친은 베오날드를 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혈통 덕이라 생각하면서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베오날드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아까 전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와 교단에 대한 내용이 요동치고 있어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차 한 잔 마시는 걸 가지고 특별히 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단 지금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교단이라. 5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세력이 강성할 것 같은데. 500년 전에는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것들이었지만 그건 내 영지와 내가 이끄는 다른 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서였지.'

정국을 주름잡은 것뿐만 아니라,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의 세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애초에 장기 집권을 위해선 다른 귀족들의 세력보다 압도적인 무력이 받쳐 줘야만 가능한 것. 거기에 황제를 쥐고 있으니 황실 기사단과 근위대까지 포함시킬 수 있어서 베오날드의 군대에게 감히 대항할 자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상당히 골치 아픈데 말이… 음? 엄마는 왜 저래? 내가 뭐 이상한 짓을… 설마? 차 마시는 걸 보고 뭔가 낌새를 차린 건가?'

'정말 좋은 아이지만 그러니 더 가슴이 아프구나.'

베오날드가 생각에 너무 잠겨서 그녀가 바라본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것과 반대로 모친은 총명함과 기품, 거기에 오만하지 않고 노력에 열중하는 집중력 등등… 모든 자질이 우수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이 시골 벼락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이 슬퍼졌다.

나름 이 지역의 명문가인 백작가의 핏줄이긴 하지만 모친은 화상을 입고, 부친은 근본도 없는 벼락 귀족. 그것이 어쩌면 이 아이가 가진 재능과 찬란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문득 떠오른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음? 눈물?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가엾은 아이...."

"어머님,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 너는 잘못되지 않았단다. 그저… 엄마가 미안할 뿐이야.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생각하면...."

"어머님, 슬퍼 마십시오. 황태자 전하든, 대귀족님의 자식이든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죠. 그것이 진짜 삶입니다. 게다가 제겐 이렇게나 훌륭한 부모님이 계시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최대한 어수룩하게 위로를 해 보려고 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10살짜리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언변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는 것을 놔둘 수 없었기에 위로를 한 다음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제럴 가문'의 영지.

제럴 가문.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의 기사로서 일해 왔지만 아직 작위는 받지 못한 채 '하급 기사'로서 작은 영지를 받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백작가에 헌신한 덕분인지 완전 시골인 더스티클록 자작가보다는 살짝 큰 영지였지만, 그래 봐야 도긴개긴. 마을에 딱 역참이 되는 여관 하나와 상점 몇 개가 있을 정도만큼만 우월했다.

그리고 현재 이곳 영지의 주인으로 건장한 체격에 인상이 험악한 케지르 제럴 경은 눈앞에 엎드려 있는 2명의 도적이 말한 내용을 곱씹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웬 '오러'를 사용하는 방랑 기사가 나타나서 너희를 모두 죽이고 납치한 영지민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파울 놈이랑 샨테 놈도 영지에서 사라졌다고?"

"예, 예! 저희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제럴 경. 정말 억울합니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 방해를 한 거지? 젠장! 젠장!"

쿵!

케지르 제럴 경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분을 못 이긴 듯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가 바로 더스티클록 가문의 영지에 도적들을 보내고 파울과 샨테를 포섭한 배후였다.

몇 대에 걸쳐서 봉사한 자신의 가문은 아직도 '하급 기사'에 머물고 있는데, 저 벼락 귀족은 일개 용병에서 단숨에 자작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것은 비단 제럴 경뿐만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의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다들 제럴 경에게 처리하도록 지시하고 절대 실패하지 않을 작전을 짰는데, 예상 밖의 방해로 실패해 버린 것이었다.

"…고작 시골 벼락 귀족 하나 처리 못할 줄이야! 이러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는데!"

'그 촌구석 영지 하나 빼앗아 봐야 괜히 전선만 관리하기 까다롭지. 다만 근본도 없는 용병 놈이 귀족입네 하는 꼴은 볼 수 없으니, 제럴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 땅은 제럴 경에게 줄 테니....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거요. 안 그러면 하급 기사로 남는 건 경의 가문에서 이제 경이 마지막이 될 것이오.'

'젠장! 이렇게 되면 내 입지가… 큭!'

제럴 가문은 현재 가주의 아이들이 가문에 내려오는 마나 호흡법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음에도 체내에 마나를 전혀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마나 호흡법 자체가 잡스러운 것이라서 그것이 문제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마나를 깨우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백작가의 '하급 기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후계자가 될 아이들이 전혀 마나를 깨우치지 못하자 기사 자격이 박탈될까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젠장! 그래서 이번에 저 망할 더스티클록 자작을 처리하고 내가… 우리 제럴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는데!'

원래는 더스티클록 자작의 시조가 작위를 얻은 그 전쟁이 끝나면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가를 위해 봉사한 제럴 가문이 작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적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백작을 그 망할 용병이 구해 주었고, 그로 인해 백작은 '더스티클록'이라는 가문명을 직접 내리고 자작으로 명한 것이었다.

"아무튼 빨리… 내가 죽기 전에 작위를 얻어야 해. 그래야 우리 가문이 산다!"

똑같이 영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작위를 받은 가문이 되는 것과 기사 가문으로 남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작위를 받은 가문이 된다는 것은 이 지역을 주름잡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인정을 받아서 가문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기사의 자리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기 때문에 불분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케지르 제럴 경은 자신의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해 더스티클록 자작가를 없앨 계획을 짜고 실행했는데, 대실패한 것이었다.

"젠장, 도대체 그 기사는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 얼굴 태워 먹은 자작 부인이 불렀나? 아냐. 그럴 리 없어. 기껏해야 병사 몇 명 정도나 가능하지, 기사를 보냈다간 백작의 다른 부인들과 자식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이 근방을 모두 통솔하는 백작답게, 정략결혼과 개인적인 첩실까지 들인 것을 합치면 부인이 모두 9명이었다.

그중 5명은 첩이니 뺀다고 쳐도, 남은 4명의 부인들이 이미 버림패로 쓴 딸에게 신경 쓴다는 걸 알면 그를 달달 들볶고, 자신들의 가문에 알려서 백작의 머리를 아프게 할 터였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지? 젠장! 다시 같은 짓을 하려고 해도… 안에 내통자가 없으면 무리인데!"

이번 계획은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의 가신인 파울과 샨테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그들이 사라지니 이제 다시 똑같은 짓은 못하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직접적인 무력행사를 하든가, 아니면 윗선의 귀족에게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무력행사를 할까? 마나 호흡법도 몰라서 오러 하나 못 쓰는 벼락 귀족 놈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려면 판을 다시 짜야 하는데....'

그래도 다 같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수하들인 만큼 무턱대고 전투를 걸 수는 없으니, 다른 계략을 생각해 보는 케지르 제럴 경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없었기에 빠르게 해결할 방안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이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고 직접적으로 움직여야 해서 위험부담도 너무나 컸다.

'하지만 이미 짜 놓은 계획이 어긋난 이상, 위험부담을 지어야 한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우리 가문은… 끝. 기사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상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거나 전투 기술을 가지고 용병 생활을 하겠지.'

물론 수대에 걸쳐 모은 재산이 약간이나마 있어서 그걸 밑천 삼아 다른 사업을 하거나 상단을 차리는 것도 가능은 했지만, 제럴 경에겐 그런 지식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결국 용병 일일 것이고, 현재 대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대륙의 어느 전쟁터에서 쓸쓸히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혼자서 과감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지. 차라리 약간의 수고와 비용을 쓰더라도 빌릴 수 있는 힘을 빌리는 게 맞다.'

제럴 경은 곧바로 서랍에서 빈 서찰을 한 장 꺼내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성을 마치고 밀랍으로 봉인한 뒤, 자신의 옆에 대기하고 있던 가신에게 그것을 넘겼다.

"…안델, 이 서찰을 곧장 델마인 남작가로 가서 전해라."

델마인 남작가.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의 두 기둥 중 하나로 백작의 셋째 부인의 처가이기도 했는데, 그곳의 주인인 델마인 남작은 '델마인 파벌'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자 제럴 경을 가신으로 부리는 자였다.

즉, 제럴 경은 지금 이 엉클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오나 괜찮으시겠습니까? 경에 대한 남작님의 평가가 떨어질지 모릅니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괜히 아끼다가 가문을 잃는 것보단 낫다. 금전적 비용이 뇌물로 좀 깨지더라도 지금은 가문이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제럴 경."

다소 무능하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이대로 가문이 사라지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 판단한 제럴 경이었고, 그의 가신인 안델은 곧바로 저택을 나서서 델마인 남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 뒤, 안델은 델마인 남작의 성에 도달했다.

다소 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성벽으로 둘러진 성이 영지에 지어진 시점에서 델마인 남작의 영지가 얼마나 중요한 땅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 남작의 위상을 증명했다.

[9화]

"흐으음… 제럴 경이 일을 실패한 모양이군."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님. 이유는 아시다시피… 갑자기 난입한 '방랑 기사' 때문에...."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 중요한 건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이니 말이지. 안 그러나?"

2미터에 가까운 키에 비대한 몸을 가진 중년 남성인 델마인 남작은 심드렁한 얼굴로 전령인 안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를 보면서 슬쩍 질문을 던지는데, 거기엔 허름한 거적때기를 걸치고 손과 발이 사슬로 묶인 깡마른 남성 둘이 엎드린 채로 델마인 남작에게 깔려 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나리...."

"마, 마… 맞습니다… 남작님."

이들은 델마인 남작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혹은 반역을 꾀한 자들로, 잡아 와서 이렇게 의자로 삼은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벌써 몇 시간째 거구인 델마인 남작의 아래에 깔려 있었기에 손발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으으윽!"

하지만 그들은 이 자세를 결코 풀 수 없었다.

이 자세를 푸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끝장나는 것이며 가족과 아이들은 영주의 하인이 되거나 노예가 되어 다른 지방으로 팔려 나갈 것이다.

"물론 제럴 경은 아주 귀중한 인력이니 이런 꼴은 안 당하겠지만… 끌끌, 아무튼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하다는 거군. 음, 현명한 선택이야. 자존심이나 본인의 평가가 깎일지언정 결과를 얻겠다는 판단. 역시 우리 영지에서 오랫동안 일한 기사다워. 껄껄껄."

"그, 그러시다면...?"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을 보내 주도록 하지. 둘 다 하급 기사이지만 제럴 경보다는 강할 거고, 둘을 포함해서 셋이면 그런 근본 없는 벼락 귀족의 영지쯤은 아무 문제없겠지."

말이 하급 기사이지, 마나를 모으고 '오러'를 사용할 수 있기에 일반 병사 100명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사가 전혀 없는 영지라면 단숨에 먹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조용히 처리해야 하네. 내가 배후라는 건 당연히 비밀이고, 그리고 이번엔 방랑 기사니 뭐니 하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걸세. 내가 이번에 기회를 다시 주는 건 결과를 위해서 리스크를 짊어지는 태도 때문이지, 이해를 한 것이 아니니 말이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남작님!"

고개를 조아린 안델은 남작의 말을 전하기 위해 즉시 영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델마인 남작은 곧바로 파견할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몇 시간 뒤, 그의 집무실로 판금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등에 창을 멘 두 기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회색빛 머리칼에 수염을 기른 중년 기사가 갈슨 경, 갈색 단발머리를 한 20대 중반의 여기사가 엔시아 경이었다.

둘 다 델마인 남작의 가신으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었다. 

둘은 오자마자 남작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차렸다.

"명령하신 고블린 토벌은 거의 마쳤고, 놈들의 본거지만 소각하면 끝날 예정입니다, 남작님."

"좋아. 아주 잘하고 있군. 하나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늘~ 아니꼽게 생각하던 더스티클록 자작에 대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근본도 없는 천한 용병 주제에 전쟁에서 운이 좋아서 귀족이 된 가문이죠."

갈슨 경이 대답을 하자 흡족한 듯 미소 짓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이들도 거의 몇 대에 걸쳐서 기사 혹은 가신들로서 영지를 위해 일하고 전쟁에 참여해서 공훈을 세웠는데, 갈슨 경은 작은 영지, 엔시아 경은 자신의 봉토도 없어서 급여를 받고 일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고작 돈에 불려 와서 일이나 하는 용병 따위가 작위라니,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좋은 대답이야. 아무튼 그 근본 없는 벼락 귀족을 처리하기 위해 제럴 경에게 지시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조금 틀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대가를 지불할 터이니 도와 달라고 하더군."

"제럴 경이라면 기사로선 별로지만 잔머리는 좋아서 충분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갈슨 경, 자네 말대로 제럴 경의 재주는 충분했지만 이번엔 운이 따라 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둘이 그를 도와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제게만 맡겨 주시면 될 것을...."

"혹시 모른다. 이번에 또 방해가 나타날 수 있으니, 엔시아까지 부른 거다. 나도 이딴 문제로 기사를 둘이나 쓰고 싶진 않았다."

은근슬쩍 옆에 있는 엔시아 경을 견제하는 갈슨이었다.

일단 자신보다 어린 기사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여성의 몸으로 기사를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

같은 주군 아래에 있어도 성별, 나이, 직위 등등 여러 이유로 시샘과 질투, 견제는 상시 있는 것이었다.

하나 엔시아 경은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러니 둘은 곧바로 제럴 경의 저택으로 향하도록. 엔시아 경, 고블린 토벌은 라우켈 경비대장에게 지시를 내리겠다. 지금 즉시 제럴 경의 저택으로 가라."

"예, 알겠습니다."

"아,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나가려던 중 갑자기 델마인 남작이 다시 부르자 두 기사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남작이 의자로 쓰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기력이 다해서 땅에 엎어져 있었다.

제아무리 의지가 있다고 한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 법이었다.

남작은 마치 물건이 부서진 양 그 남자를 발로 툭툭 차면서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는 길에 이 부서진 '의자'도 처리해 주게. 그리고 감옥에 가둬 놓은 다른 놈을 갖다 주고. 당연히 사후 조치도 말이지. 아! 경비대장에게 같이 전하면 되겠군."

"옙! 남작님."

"그동안은 이 친구에 앉아 있을 텐데, 그사이에 죽을 수 있으니 2명으로."

"물론입니다. 하핫."

이런 일이 일상인 듯 갈슨 경은 웃으면서 기진맥진한 죄수를 질질 끌고 남작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휴식을 맛본 다른 죄인은 이제 혼자서 거구인 델마인 남작를 받쳐야 됐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끌려가는 이를 슬쩍 보고는 빨리 자신과 이 무게를 나눌 다른 죄인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

며칠 뒤, 더스티클록 자작 영지.

베오날드의 일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워낙 총명해서 어머니의 수업도 잘 따라갔고, 검술 수련에 매진하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제안으로 최근 기마술 수련을 시작했지만 기마술은 진작 경험이 있었기에 아주 능숙하게 말을 타는 모습을 보여 주자 가끔 확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빼먹을 수 없는 게 있으니 영지 순찰이었다.

정말 볼 거 없는 시골의 농지, 그리고 몇몇 집은 사냥꾼들의 것인지 동물 가죽을 말리거나 해체하고 있는 풍경이 자주 보였다.

주로 사냥과 농사를 병행하는 이 작은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레이온 자작은 베오날드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힘들지 않느냐? 말을 다루는 걸 배웠다곤 해도 오랫동안 타면 힘들 수 있는데...."

"괜찮습니다, 아버지."

"오오… 그것참 다행이구나. 하지만 언제든 힘들면 말하렴, 베오날드."

"예, 아버지."

"물론 힘들 만큼 큰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아도 소중한 우리 가문의 땅이란다. 그리고 너는 가주로서 이 땅을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물론 아들에게 멀쩡한 교육을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거 듣기가 참 묘하군. 아무튼 온 김에 이거저것 봐 둔 다음에 지도나 다시 만들어야겠군. 대체 뭘 어쩌려고 그따위로 만든 건지. 참 내~'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의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베오날드의 기준에선 너무 비현실적인 이상론이었기에 듣기가 좀 괴로웠다.

하지만 딱히 반론해 봐야 좋지 않을 이야기였기에 그냥 어머니의 집무실에 있던 지도나 자신이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변 풍경과 거리를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나, 나리! 나리!"

"뭔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렇게 영지를 돌아다니던 중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베오날드와 레이온 자작이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달려온 하인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용건을 말했다.

"그, 그게, '제럴 경'이 지금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제럴 경이? 무슨 일로?"

"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도적 패거리들 같은 자들을 끌고 온 걸 보면 아마 그 문제 같습니다."

"알았네. 내 지금 바로 가지. 베오날드, 손님이 오셨으니 돌아가자꾸나."

손님이라는 말에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갔다.

레이온 자작은 '무슨 용건으로 왔을까?'라고 혼잣말을 하며 태평한 얼굴로 고민했지만, 베오날드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제럴 경이라면 어머니의 교육 때 들었어. 여기서 남쪽에 있는 이웃 영지, 우리보다 아주 살짝 큰 영지의 주인. 그리고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에서 일해 온 하급 기사이며 백작 아래 델마인 남작 파벌의 인간. 그래서 이 더스티클록 가문을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자이지. 그자가 먼저 도적들을 데리고 왔다? 이거 참~'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제럴 경이 딱 도적들의 배후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아닐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따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거의 확정적이었다.

'예외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안 때문에 오는 것뿐인데.... 그런 일은 아닌 것 같아.'

고작 도적 문제로 싫어하는 귀족의 영지를 친히 방문하는 건 자존심이 없거나 다른 숨겨 놓은 속셈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제럴 경이 이 촌구석 영지에 욕심부릴 것은 오직 '자작'의 작위 하나 외엔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영주의 가신인 파울과 샨테가 일개 도적들과 손잡고 배신하기엔 근거가 부족하군. 그 도적놈들이 인질과 돈을 그냥 먹튀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뒤에 제럴 경이 보증을 서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튼 일단은 경계하면서 지켜볼까?'

"다 왔다. 베오날드, 속도를 줄이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둘은 금방 저택에 도달했고, 레이온 자작은 하인에게 말을 맡기고 곧장 손님을 맞으러 저택 내부로 향했다.

그사이 베오날드는 자신이 말을 집어넣겠다고 한 다음 말 2마리를 마구간에 넣고서 슬쩍 바깥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일단은 수행원으로 온 게 병사 다섯. 저건 내가 처리할 때 도망친 도적 둘… 먼저 들어온 아버지에게 시선이 가 있던 덕분에 날 못 알아본 건가? 하긴 그때가 밤이었으니 모를 수밖에… 아니면 설마 근본도 없는 용병 혈통의 아들내미가 기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거나. 흠… 그리고 보자, 주변에 뭔가 데리고 온 게 없나?'

일단 직접 데려온 병사 쪽은 아무런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필시 병력을 더 데리고 왔을 터. 그러니 베오날드는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언가 있나 살펴보았지만, 역시 저택 주변만 보는 시야로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거 나가서 찾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도, 도련님,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손님이 오셨으니 올라가서 인사드리셔야지요. 아무리 아직 성인이 아니시지만… 아, 아무튼 얼른 올라가십시오."

'어쩔 수 없지. 귀족으로서 손님맞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 말이야.'

하인이 온 탓에 더 이상 주변 수색을 하지 못하게 된 베오날드는 아쉬워하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래도 대비할 건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하인에게 옷을 갈아입고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수련실로 향했다.

거기엔 예전에 도적들의 본거지와 샨테, 파울의 집을 털어 모아 둔 무기와 각종 도구가 숨겨져 있었다.

[10화]

그렇게 베오날드가 자신의 수련실로 들어간 사이, 레이온 자작은 급히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제럴 경을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들어가니 이미 아내가 다과를 준비해서 제럴 경과 가벼운 사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곧바로 바통 터치한 레이온 자작이 제럴 경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지 시찰 중이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럴 경."

"죄송할 게 있겠습니까? 영지를 돌보는 것은 귀족의 의무인데요. 사전에 연락도 없이 온 제가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제럴 경. 저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서로 이웃지간 아닙니까? 하하하하."

'이웃 같은 소리 하네. 벼락 귀족 주제에!'

사심 하나 없이 사람 좋은 호인의 웃음을 지으며 대응하는 레이온 자작이었지만, 이미 속이 꼬일 대로 꼬인 제럴 경에겐 비아냥거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레이온 자작은 신경이 둔한 건지 제럴 경이 슬쩍 노려봐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눈치챈 것은 오히려 자작 부인으로, 그녀는 최대한 경계하고 있었다.

'좋은 목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온 거지?'

'저 흉측스러운 암여우 년은 역시 경계하고 있군.'

제럴 경도 자작 부인의 눈빛을 보곤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단순하고 사람 좋은 자작은 경계 대상이 아니지만, 역시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자란 그녀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점은 이미 고려한 상황이었고, 어차피 눈치를 챈다고 한들 삽으로 산사태를 막을 순 없는 법이다.

"아무튼 제가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는 근래에 잡힌 도적들 때문입니다. 저희 영지 쪽으로 도망 온 놈들을 잡고 나서 알아보니 캘러메인 영지에 현상금이 걸려 있던 놈들이더군요. 그리고 놈들에게서 동료들이 이곳에 잡혔다는 걸 듣고 왔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역시 보통 도적놈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악랄했군요."

"그래서 놈들을 데려가려고 하는데… 마침 이쪽에도 잡혀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 부탁이 있는데… 놈들에 대한 현상금을 제가 자작님에게 지불해 드릴 테니, 놈들을 제게 넘겨주실 수 없을는지요?"

"음? 그건 어째서인지요?"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이… 지금 상당히 위험한 처지라서 작은 공이라도 더 추가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물론 자작님이 잡으신 도적의 공을 돈 주고 산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라도 쓰고 싶을 만큼 사정이 힘듭니다."

"아… 그렇군요."

제럴 경 가문의 사정은 이미 이 캘러메인 백작가 세력이라면 다 알 정도로 소문이 난 만큼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된 레이온 자작과 부인이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필요한데, 자식들이 아무리 해도 제럴 경 집안에 내려오는 마나 수련법을 깨우치지 못해서 가문이 존속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뭐, 기꺼이 현상금만 받고 공을 드리겠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하니 말이죠. 하하핫."

'어리숙한 놈. 어차피 이건 그냥 밑밥일 뿐이야. 이렇든 저렇든 넌 오늘 끝장나게 된다.'

"그럼 바로 하인을 시켜서 노역 중인 도적들을 부르겠습니다. 증거가 되어 줄 놈들의 소지품은 저택에 있으니 그것도 금방 챙겨 올 겁니다."

레이온 자작은 어차피 도적들을 노역시켜서 보상금을 뱉어 내게 하는 거니, 현상금을 받아서 일정 부분 자신들이 세금으로 가지고 영지민들에게 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안을 받아들인 거였다.

물론 제럴 경에게 있어 이 거래는 그냥 이 영지에 사전 정찰을 올 핑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스티클록 자작님. 원래라면 제가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아닙니다. 서로 작은 영지인 것을 아는데, 이럴 때 돕고 살아야죠. 하하핫."

"저, 정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차림에 신경 쓰느라… 으아악!"

덜컹! 쾅!

이야기가 좋게 끝나려는 순간,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넘어진 건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레이온 자작과 부인, 그리고 제럴 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대(大)자로 뻗은 베오날드가 있었다.

"어머! 베오날드! 괜찮니?"

"아고고고… 저,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 인사드려야 하는데… 옷 갈아입느라 늦어서 급히 오다가… 아파라아아… 아! 코, 코피! 어, 어머님?"

"이, 일단 치료하러 가자꾸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앤데, 이를 어째...."

코피를 흘리는 베오날드를 보자 깜짝 놀란 자작 부인은 그를 데리고 얼른 응접실을 나섰다.

'…저게 레이온의 아들인가 보군. 근데 듣기론 10살이라던데, 상당히 커 보이는데?'

"죄송합니다, 제럴 경. 평소엔 똘똘한 아이인데, 오늘 손님이 왔다고 해서 긴장한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10살이라고 소문으로 들은 것 같은데… 꽤 커 보이는군요."

"예. 하하… 할아버지를 닮은 건지 쑥쑥 크더군요. 뭐, 그래도 10살은 10살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하긴 선대 더스티클록 자작, 그 용병 할배가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

제럴 경은 선대 더스티클록 자작을 만나 보았다.

기억 속의 그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덩치와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의 성장이 빠른 것을 기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전 칠칠맞은 모습을 보아선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되었다.

'애새끼가 조금 더 커 봐야 애새끼지. 훗.'

그사이, 밖에 있는 우물에서 흘린 코피를 닦고 옷을 추스르는 베오날드에게 모친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수업 때라든가 수련할 때의 태도를 봐서 그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이미 10살의 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기품과 현명함을 겸비한 아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제럴 경을 만나는 순간 넘어지다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베오날드, 왜 굳이 이런 짓을 했니?"

"일전에 어머니께서 제럴 경의 가문은 후계자가 마나를 깨우치지 못해서 가문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거기서 제가 평소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필시 부러움과 질투가 생길 거고, 그러면 원래부터 원망하고 있던 감정이 있는데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아! 거,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베오날드의 현명함에 모친은 박수를 치면서 감탄했다.

영지의 관계까지 생각해서 추한 모습을 보이거나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또 한 번 놀랄 따름이었다.

'거기에 그 제럴 경이라는 자, 보기보다 간교해 보였으니까.'

추가로 베오날드는 그가 도적의 배후로서 생각 이상으로 간교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점도 있었다.

본인이 도적의 배후임에도 뻔뻔하게 영지에 들어온 점부터 이미 보통 놈이 아니었으므로, 총명한 모습을 보여 줘서 경계심을 높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전 이만 쉬러 갈게요. 속였다는 걸 알면 더 화낼 테니까요."

"그래, 그러렴."

베오날드의 생각을 이해한 모친은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응접실로 돌아온 자작 부인의 눈에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건지 웃으면서 사담을 나누는 자작과 제럴 경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식사라도 하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뇨. 이야기가 길어지면 모를까, 너무나 흔쾌히 승낙해 주셔서 여기 현상금을 바로 드리고 먼저 가겠습니다."

"어허,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아닙니다. 영지의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럼 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금화가 든 자루를 건네고서 제럴 경은 레이온 자작이 넘긴 도적들을 데리고 재빨리 영지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제럴 경으로선 이건 그저 정찰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이 영지에 그 '방랑 기사'인지 뭔지가 있다거나 혹은 다른 변수가 있는지 알아보러 온 것이었다.

"왔군요, 제럴 경. 그래서 상황은?"

그리고 영지의 경계를 넘자, 이미 무장을 한 채로 야영지를 만들어서 대기하고 있던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의 모습이 보였다.

말에서 내린 제럴 경은 곧바로 델마인 남작의 명으로 온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별거 없습니다.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저와 이 친구들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델마인 남작님의 명령을 받은 이상 저희도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럴 경.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두 분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일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일을 진행하다가 저희끼리 만나서 싸울 수 있으니 그것만 조심하죠. 그리고 너희도 이번에 같이 일할 테니 준비해라. 이번엔 그 '방랑 기사'니 뭐니 하는 것도 없으니 실패할 일이 없을 거다."

도적들에게도 준비를 시키는 제럴 경. 현재 병력은 영지에서 데리고 온 병사 10명과 하급 기사 셋, 거기에 도적들 넷까지 합쳐서 총 17명.

애초에 기사가 셋이나 있는 이상 시골 자작 영지 따위엔 너무나 과도한 전력이었지만, 제럴 경은 실패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그들과 밤이 되길 기다리며 무기를 정비하고 휴식을 취했다.

"오? 기사가 셋이나? 이거 소 잡을 칼로 쥐 잡는 격인데.... 아주 날을 잡았네?"

그리고 그들에게서 꽤 먼 거리인 더스티클록 영지의 경계에 베오날드가 있었다.

저번의 실패를 의식해서인지 이번엔 정말 충분한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추적을 했고, 다른 도적들에게 들키지 않은 걸 보아서 성공한 것 같았다.

'셋 다 하급 기사라고 쳐도… 이런 영지엔 엄청난 과투자인데, 진짜 무서운 놈이군.'

베오날드는 제럴 경의 준비와 같이 자고 있는 기사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그 칼날은 엄연히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이대로 놔둘 순 없었다. 그는 어떤 방안을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어머니께 알려도 지원 병력이나 저걸 상대할 기사를 부르는 건 무리겠지. 으으음, 아무튼 오늘 밤 온다고 했으니....'

하루나 이틀의 시간이 더 있다면 어머니께 이야기해서 조치를 취할 수 있겠지만, 오늘 당장 들어온다고 하면 딱히 대응할 방안이 없었다.

결국 베오날드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이것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후속 대처가 달라지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잡을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기왕이면 다 잡는 게 좋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러면 영지 밖이나 경계에서 잡으면 역시 도망칠 가능성이 높으니까 저택 안으로 끌어들여서 족쳐야겠는데… 음, 어쩐다?'

기왕 자신이 손을 쓴다면 철저하게 소식을 감출 수 있는 방안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밤에 손님이 온다고 했으니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베오날드는 빠르게 영지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