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홀린 듯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땀방울이 흘렀다.
마누스는 요 며칠, 아나이스를 봐주며 생각했다.
자신은 마투학에서, 어떤 형태의 무기를 쓸 것인가.
제니퍼는 무형의 기운을 날린다고 했고, 멜라니는 정령의 힘을 빌려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마누스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매체 속에서 자랐다.
로망을 실현할 모습들은 머릿속에 한가득 쌓여 있다는 말이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게냐?"
"...방금 생각났습니다."
심플한 것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상상하기 편하고, 다루기 편한 것.
그러면서도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
마누스는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갔다.
쉬익-!
손을 펴, 날을 만들어 휘두르자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 생성되었다.
"좋은 발상이군. 막는 건 어떻게 할 거지?"
"그건 조금 더 연구해 봐야겠군요."
재밌었다.
제니퍼 역시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투학에 재능이 있는 이들을 가르쳐 보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에 빠져, 무언가 특별한 것을 자꾸만 만들려고 한다는 것.
제니퍼가 가장 우려한 부분이었으며, 그걸 뜯어고치는 데 시간이 가장 많이 들기도 했다.
익숙하면서도 강력하고, 또 인간이 다루기에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
그건 바로 인간의 신체, 그 자체였다.
"잘 생각했다. 인간의 신체는 잘 다루면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마나를 충분히 다루고 마투학을 완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전제하에."
"...예."
"전사, 수호자들이 익히는 격투는 호신용으로 가치가 높지. 실제로 마나가 담긴 주먹은 갑옷도 우그러뜨릴 정도이니. 하지만, 격투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거고."
주 무장으로 싸우다 변수를 만들기 위해, 혹은 주, 부무장까지 모두 사용 불능이 되었을 때나 격투술을 이용하는 전사와 수호자.
반면, 마투사는 주 무장도, 부무장도 없이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갈고닦았고, 결국 그 신체를 100% 활용하기 위해 끝없는 연구를 거쳤다.
날붙이와 마법을 상대해야 하는 맨몸 격투가들.
"주입식 교육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군. 내일부터는 나와 투닥거리면 된다."
"알겠습니다."
"숙제는 알지? 공격은 해결했으니, 방어를 고민해야 할 게다."
아니면 꽤 아플 거야.
제니퍼는 흐흐, 이상한 웃음을 흘리고 연무장을 나섰다.
멜라니는 마투학에 속성 마법을 더한, 본인만의 무기를 완성시키는 중이었다.
원작에서보다 강해지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콰르륵-!
마치 해적 만화의 불 주먹을 보는 것 같은 정권이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이미 그녀가 수련하는 모습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명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정령의 힘을 이용해 마투술을 펼치는 마법사.
"늬들-! 지금 당장 안 꺼지면 강제로 내 수업 듣게 한다!"
"죄송합니다아-!"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제니퍼에게 걸렸다.
학생의 집중을 헤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녀는 웬만하면 구경하는 걸 불허했다.
이따금 연무장 근처까지 와서 몰래 보는 이들은 저런 식으로 쫓아내곤 했다.
얼마나 지옥 같은 수업이면 저런 반응을 보일까.
제니퍼 역시 씁쓸했는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오늘도 뿌듯한 수련이 끝났다.
멜라니는 땀을 훔치며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슬슬 몸에 익는 것 같군."
"네. 탑에서 시험해 보고 싶어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조금 낮은 층부터 시작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몸으로 하는 건, 역시 반복 숙달이 최고였다.
마누스 역시 오늘 탑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아나이스를 데리고 올라가야 하니, 오늘만큼은 홀로 탑을 올라가 볼까 싶었다.
파수꾼을 상대로 마투학이 얼마나 먹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슬슬 장비도 맞춰야 하니.'
두 번째 데모니움부턴, 난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니까.
가문의 일도 있고 하니, 슬슬 장비를 맞출 때가 되었다.
파수꾼은 확정으로 드롭하는 장비 몇 개가 있었지 아마?
"재밌겠네."
오늘의 파티원은 아나이스, 알비온, 그리고 아덴이었다.
목욕이라도 할까.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인이 보였다.
"...오늘도 상담인가."
그의 중얼거림은 그저 허공에 헛되이 흩날릴 뿐이었다.
제103화
- 선배 노릇은 힘들어
* * *
케일.
그녀의 눈빛이 요 며칠 사이 탁해졌다.
항상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세상의 근심과 걱정, 사람들의 탐욕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힐링이 필요한 때라는 걸, 마누스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예전, 출근을 위해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던 자신의 표정이 생각났다.
온갖 곳에서 시달렸던, 그래서 팍 죽어 버린 생기.
케일도 학생회장 건으로 여기저기서 시달렸겠지.
"선배-."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
"네에-."
케일은 배시시 웃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이따금 보이는 이들은 케일과 마누스를 바라보곤, 자기들끼리 숙덕이기 바빴다.
그마저도 마누스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뻣뻣하게 굳어 도망가기 일쑤였지만.
아카데미 내에서 마누스를 가지고 험담을 한다는 건, 아카데미 생활 내내 자체 하드 모드로 지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것이었으니.
얼마 전엔 아나이스, 오늘은 케일.
'결국, 모두 날 찾아오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은 영 익숙하지 않단 말이지.'
마누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초한 일이니 불평하진 않겠지만, 여전히 사람의 감정을 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행동과 표정, 그리고 눈빛은 대면한 이에게 많은 것을 전달한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진심 어린 표정과 눈, 그리고 행동일 것이다.
케일에겐 어떤 표정이, 어떤 행동이, 어떤 눈동자가 필요할까.
그녀가 듣고 싶은 위로는 무엇일까.
마누스는 걸으며 생각했다.
"선배."
"음?"
"선배는 평민과 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새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나.
하긴, 케일은 그런 것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녀는 밖에서 나고 자라, 정치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당사자가 되어 핍박을 받거나 누굴 깔아뭉개는 것엔 아무 거리낌이 없다가, 제3자가 되면 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마련.
케일도 평민과 함께 지내며 항상 피해자의 입장만 들었을 것이다.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겠지."
"선배도 평민들이 천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귀족 중에도 천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 있다."
마치 예전의 나처럼.
마누스는 뒷말을 삼켰다.
자아가 다르니 '원래의 마누스'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평민이라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결국, 사람 개개인의 인성에 달린 것이겠지.
케일은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마누스의 소매를 두 손가락으로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더 해 주시면 안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자세한 얘기는 마시면서 하지."
그녀가 웃었다.
"네에."
같은 장소, 다른 사람.
마누스는 오늘도 다른 이의 말을 들어 주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선배일지도.
그게, 열심히 하고 싶은 후배를 위한 자세일지도....
* * *
케일은 마누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이 생글생글, 밝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생각을 말하니 개운해지다 못해 청량감이 들었다.
앞으로 그녀가 취해야 할 마음가짐 역시 다잡을 수 있었다.
<평민, 귀족. 규율이 만들어 낸 선은 언제든지 넘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사람의 됨됨이. 위에 있는 자라고 모두 악하지 않고, 밑에 있는 자라고 모두 선하지 않다.>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 네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그가 했던 주옥같은 말이 케일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마누스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씁쓸했던 웃음.
저도 모르게 나왔던, 가면 뒤의 표정.
'선배는 어떤 인간관계를 겪으셨을까.'
<이유 없는 선의는 때로, 널 파멸로 이끌 거다. 항상 명심해라.>
독수리반 아이들을 떠올렸다.
웃는 얼굴로 와서,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은근슬쩍 던졌지.
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밖은 생각보다 더 치열했고, 더러운 곳이었으니까.
저 밑바닥, 하층민의 삶이 선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아카데미라서.
아카데미니까.
비교적 안전할 거라 생각했을 뿐.
'여기도 똑같구나.'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여기도 눈 뜨고 코 베일 곳이구나.
그래도 의지할 사람 한 명 없던 생활은 없다.
지금은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그녀가 더 성장한다면, 결정권과 영향력이 생길 것이다.
이쯤 되니, 케일 본인도 슬슬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생회장이 된다면, 많은 영향력을 얻을 수 있겠지.
"나도 제대로 도전해 보고 싶어."
아나이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 참가했던 학생회장 선출.
다양한 일을 겪고, 다양한 말을 들으니 목표가 바뀌었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이야말로,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필수 요소라는 걸 실감했다.
마누스를 보라.
그 누구도 그의 행보를 막지 못하잖은가.
"응, 열심히 공부하자."
그녀는 다짐하듯 두 주먹을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한편, 케일의 상담을 끝내 준 마누스는 눈앞에 뜬 창을 확인했다.
놀라울 정도로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시스템이 돌아가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런 문구는 처음이었다.
[강력한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세계선이 변화합니다.]
['메시아의 마음가짐' 스킬의 습득 시간이 10% 줄어듭니다.]
[신체 능력, 마나, 마법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상담 좀 해 줬다고... 너무 퍼 주는 거 아닌가?"
이러면 상담소만 차려도 보스 몇 개는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겠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그저 쏟아 냈는지도 모른다.
엉터리에 상대방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런 대화에 이런 보상이라니.
마누스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선이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건, 그다지 반가운 얘기가 아니긴 한데.'
변수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거다.
언제나 그렇듯, 변수에 대항하는 법은 하나.
마누스는 자정에 있을 격전을 위해 푹 쉬어 두기로 했다.
다음 달.
모두가 성장해 온 결과를 시험받게 될 것이다.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재앙.
그걸 극복하기 위해선 1초라도 허투루 쓸 순 없었다.
'모두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
모두가 쓰러져도 홀로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늘어만 가는 전력은, 다시 말해 지켜야 하는 자가 늘어 간다는 뜻이었다.
그는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누스는 의뭉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사라지는 실루엣이 보였다.
또 자신이 나설 사건이 일어나겠구나.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가던 길로 향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을, 그리고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예방은 컨트롤할 수 없을 것들에나 하는 것이지.
마누스에겐 저런 것보다 더욱 큰 일이 남아 있었다.
당장 낭떠러지에서 아등바등, 어떻게든 올라가려 하는 이들이 눈에 보였으니까.
* * *
자정이 되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지,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아나이스와 함께 지구라트 로비에 모였다.
좀비 같았던 모습 대신, 질끈 머리를 묶은 그녀의 포부가 보였다.
조만간 친구들이 다시 탑을 오를 것 같았다.
그 전에, 어떻게든 최대한 실력을 끌어내고 싶었다.
아나이스는 심호흡을 하며 마나를 점검했다.
독식하다시피 한 마석은 그녀의 배를 두둑이 채워 주었다.
'능력만 되면 계속 혼자 오고 싶은걸.'
"출발하지."
"-네."
마누스의 말을 시작으로, 탑 탐사가 시작되었다.
전송기를 타며, 마누스가 말했다.
"오늘 사냥은 나도 참가한다."
"마석 때문에요?"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아나이스는 그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추측이 맞는다면, 요새 수련하고 있는 마투학이겠지.
알비온도 든든했지만, 그보다 더 든든한 마누스가 전위를 맡아 준다니.
아나이스는 오늘, 제대로 날뛰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단 세 번의 전투 만에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크엑!]
"싱겁군."
"...선배?"
평가에 나섰던 기예르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나이스는 허탈감에 젖은 목소리로 마누스를 불렀다.
덩그러니 마석만 남기고 죽어 버린 데몬.
심취한 건 아닌지, 아나이스가 영창할 새도 없이 죽여 버린 마누스.
항상 냉정하고 차분했던 마누스 선배였는데, 의외의 면모를 보였다.
뒤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아덴이 풉, 웃음을 흘렸다.
"공자님이 새로운 무술에 심취하셨나 보군요."
"저도... 할 수 있는데...."
아나이스가 울상을 지었다.
애써 잠재워 두었던 무력감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투학이라고 했나?
본래 대단한 무술인 건지, 아니면 마누스가 특출 난 건지 모를 정도로 깔끔하고 화려한 모습이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손발을 휘두르는 마누스의 모습은, 책에서 봤던 용사의 모습이었다.
그와 별개로, 아나이스는 선배의 엄청난 활약 속에 묻힌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했다.
트라우마.
그 깊은 마음의 상처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 것.
"어이."
"네? 아얏!"
아나이스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양 볼을 잡은 마누스를 보며 기겁했다.
그것도 잠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한 고통이 볼을 타고 흘렀다.
"으아아아아아-!"
"정신 똑바로 차려라. 언제까지 징징거리기만 할 건가, 응?"
"제성해여! 자모해써여-!"
"너도 머저리 취급받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나이스는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트라우마고 나발이고, 당장 눈앞에 있는 주먹이 훨씬 무서운 법이었다.
마누스는 거침없었다.
왜 피어슨이 마누스만 보면 주눅 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리치료를 끝낸 마누스는 고통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주눅 들지 마라. 어차피 이 위는 네가 말하지 않아도 꼭 필요할 테니까."
"아으으... 네. 죄송해요."
"파수꾼을 잡으러 갈 거다. 거기서, 나는 방어만 할 거고."
"...네?"
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파수꾼을 잡는다고?
흘끔, 그녀는 뒤에 있는 아덴을 바라봤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단둘이, 아니지 알비온까지 합치면 셋이서 파수꾼을 잡는다 이거지?
"그, 그게 말이 되나요?"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널 가두고 있는 한계를 부숴야 할 거야. 왜냐하면...."
아나이스는 마지막 말에 혼절할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마누스는 걸었다.
알비온이 그 뒤를 따랐다.
아덴이 아나이스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아나이스 영애는 할 수 있어요. 항상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대의 가문처럼."
아덴의 말 한마디가, 아나이스의 가슴에 자그마한 불씨를 던졌다.
제104화
- 한계를 정하는 건, 자신뿐이다
* * *
탑 77층.
파죽지세로 올라온 일행은 드디어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본래 하루면 재생되는 탑이지만, 파수꾼은 재생되지 않는 것이 특징.
저 앞에 강렬한 마나 반응이 감지되었다.
즉, 케일과 다른 이들이 아직 이곳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77층.
보스는 연인 아르카나의 3번.
고정 보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패턴 설명을 하지."
"-네."
"약점 속성은 불. 하지만 모든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달고 있는 녀석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거야."
아나이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뱀처럼 생긴 데몬이 언뜻 보였다.
그 괴물은 단단한 비늘과 한 번 맞으면 그대로 다진 고기가 될 것 같은 두께의 꼬리를 지녔다.
"꼬리를 이용한 공격을 주로 할 거다. 공격은 대부분 내가 막을 테지만, 파편을 처리하는 건 네가 직접 해야 한다."
"후우우... 할 수 있겠죠?"
"그래야 할 거다. 안 그럼 죽을 테니까."
아나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마누스는 그녀에게 목숨을 맡겼다.
부담스러울 거다.
하기 싫을 수도 있다.
허나, 포기하진 않겠지.
마누스를, 아덴을, 알비온을 진짜 동료로 생각한다면,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 책임감이 한계를 부술지 없을지는 이번에 판가름 나겠지.
걱정과는 달리, 아나이스는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 굳게 먹은 상태였다.
마누스가 실제로 죽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자신을 믿고 저런 발언을 해 준다는 것.
그 믿음에 보답하는 것이 자신이 해내야 할 과제였다.
"꼭 해낼 거예요. 제 마법의 위력이 통한다는 걸 입증하겠어요."
"-그래."
[강력한 간섭을 시작합니다.]
마누스는 미소 지었다.
자신감 있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실 극단적인 처방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나이스의 재능은 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기껏 피운 재능의 꽃이 곤충을 잡아먹는 식인식물이라면, 재능을 피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마누스는 그녀의 재능이 열등감이라는 감정 위에 핀 라플레시아가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방향을 잘 잡아 줘야 할 인도자가 필요했다.
"가지."
빠직-.
전신에 마나를 두르고 버프 마법을 활성화했다.
졸졸 따라오던 하얀 드래곤, 알비온의 눈이 빛났다.
[에리고]
신체를 단단하게 해 주는 마법과-.
[콘솔리다티오]
강력한 일격을 위한 버프 마법.
[신수의 숨결]
사역마 전용 스킬이 아나이스와 마누스의 몸을 휘감았다.
'신수의 숨결'.
적의 약점을 공략할 시, 공격력 보정이 들어가는 버프였다.
화염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아나이스에겐 상성이 좋은 스킬.
활력이 깃들었다.
몸은 더없이 가벼웠고, 앞서 치렀던 전투로 몸도 잘 풀렸다.
마누스는 제니퍼의 말을 떠올렸다.
'방어에 쓸 형상을 연구하라고.'
이미 생각해 둔 바는 있다.
완전한 무에서의 창조는 신만 가능한 것이라 배웠다.
인간은 학습과 경험을 통해 발전되고 변형된 것을 창조할 뿐.
마누스는 영화가 떠올랐다.
'간단하군.'
언젠가 기예르모의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왜 무장에는 방패가 빠지질 않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하는 무장이었으니까.
[크르르륵-!]
뱀의 시선이 세 존재를 향했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압박감.
거대한 꼬리는 한 대만 직격당해도 상체와 하체가 분리될 것 같았다.
아나이스는 숨을 고르고 마나를 이끌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마나가 그녀의 의지를 따랐다.
공부했던 것들을 상기하고 적을 눈에 담았다.
파수꾼.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강인한 마법 저항력이라도 뚫고 들어가, 적의 심장을 꿰뚫을 마법.
화르르르-!
그녀의 의지에 반응해, 불꽃이 피어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색 화염.
언제든지 적의 살갗을 태우기 위해 장전되었다.
전투의 시작은 순식간이었고, 뱀의 꼬리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쇄도했다.
"흐읍!"
마누스는 마나를 끌어 올려, 왼팔을 들었다.
두 발을 넓게 벌려 단단히 고정하고, 땅을 마나로 움켜잡았다.
방패 형상으로 넓어지고 단단해지는 마나.
진짜 방패에 마나를 두르는 것보단 효율이 떨어지겠지.
허나 그는 효율 따위를 씹어 먹을 수 있는 양의 마나를 보유했다.
연비는 최악이나 다른 슈퍼카에 비해 연료통이 월등히 크다면?
콰아아아아아-!
"크으읍-!"
마누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파수꾼.
피지컬이며 담겨 있는 마나 하며, 마누스라도 벅찼다.
주르륵 밀려났지만, 유효한 타격은 없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
마나가 뭉텅뭉텅 갈려 나갔지만, 버틸 수는 있었다.
이런 날을 위해 조금씩 쌓아 올렸던 내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스킬들이 서로 맞물려 최상의 시너지를 내, 파수꾼의 일격을 버텼다.
[이그니오]
[알투스]
아나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지기로 했다.
콰르르륵-!
그녀가 흩뿌린 화염이 사냥꾼의 화살처럼 뱀의 머리에 꽂혔다.
[크으으으으으-!]
고통받고 있는 모습, 그러나 움직임은 변함없었다.
아니, 오히려 분노에 차서 날뛰는 모습이었다.
뱀의 얼굴에 쓰인 가면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몰아쳤다.
"눈 감아!"
지잉-.
설명했던 패턴 중, 마주 보고 있던 대상에게 혼란과 매혹을 거는 스킬.
게임에선 가장 마지막에 공격했던 대상을 향해 스킬이 시전되는 패턴이었다.
아나이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위로, 붉은 광선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누스는 혹시 몰라 [플람마]를 준비해 뒀지만, 아나이스는 또렷한 눈동자로 파수꾼을 응시했다.
이제 다시 꼬리 치기 패턴.
마누스는 어그로를 확실히 잡기 위해 일부러 버프 마법을 사용했다.
버프를 쓰거나 포션을 먹거나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캐릭터에게 어그로가 끌린다는 건, 모든 플레이어가 아는 사실.
[크으으으으-!]
마누스의 마나에 반응한 파수꾼이 다시 그를 쳐다보며 새로운 패턴을 선보였다.
적중하면 확정으로 다운 및 스턴이 걸리는 박치기 패턴.
그 무시무시한 질량이 마누스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쿠르르르-!
방 안을 기어 다니며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게 하는 움직임.
모니터 안에서의 연출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면 전신이 으스러질 것이다.
'피하면 안 된다.'
카이사르의 냉철한 판단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크고 단단한, 그리고 땅에 박아 넣을 수 있는 방패를 상상했다.
타워 실드.
공성전에서나 쓰일 법한 거대한 방패가 즉각 떠오르며 마나가 반응했다.
무형의 기운이 단단하게 앞을 막았다.
시험 삼아 하는 실전치곤 너무 빡셌지만, 원래 죽기 직전까지 가는 실전이야말로 실력 상승의 밑거름 아니던가.
콰아아아앙-!
거친 소음이 공간을 때렸다.
"크헉-!"
"선배! 괜찮죠!"
마누스는 말하지 않고 아나이스를 돌아봤다.
그의 푸른 눈빛이 흉흉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꿀꺽, 아나이스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급습하는 공포심.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
그것들이, 거대한 장막을 만들어 그녀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죽기 전에 어서 적을 쓰러뜨리라는 협박을 받는 것 같았다.
질끈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
친구들이, 선배가, 피어슨이 피를 흩뿌리며 죽는 건, 절대 보기 싫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앞길을 막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파괴해야 한다.
절박한 눈동자를 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로막는 것들을 태울 강력한 불꽃이 필요했다.
[이그니오]
3클래스 마법.
4클래스를 사용하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아나이스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화력을 올리기로 했다.
[알투스]
한 번, 불꽃의 크기를 키우고-.
[알투스]
두 번, 불꽃의 온도를 올리며-.
[알투스]
세 번, 불꽃의 색을 바꿨다.
태양처럼 찬란하게 타오르지 않아도 된다.
광범위하게 적들을 쓸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단한 것을 태울 초고열의 힘.
가로막는 것만을 불태우는, 집요한 겁화였다.
콰르르르륵-!
그녀의 집요한 생각이, 갈망이 새로운 길에 발을 들이게 해 주었다.
"...검은 불꽃이라니."
아덴이 나직이 감탄했다.
알비온 역시 힘차게 날갯짓하며 그녀에게 버프를 걸어 주었다.
한 단계 진화한 회복 마법이 두 사람에게 닿았고, 아나이스는 제 컨디션의 120% 이상을 뿜어냈다.
[아나이스 전용기 : 디솔루트]
검은 불꽃은 환한 빛을 뿌리지 않았다.
요란하지도 않았고, 굉음을 내지도 않았다.
칙칙한 검은 불꽃은 거대한 뱀처럼 달라붙어, 끈질기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크으으으-!]
파수꾼이 고통스러워했다.
콰앙-!
마투학으로 단련된 주먹이 뱀의 뺨을 후려쳤다.
마누스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무리 지어라."
"-네!"
아나이스는 보았다.
온몸을 뒤틀며 서서히 죽어 가는 파수꾼.
무기력하게 고통에 허덕이며 녹아내리는 장애물.
짜릿한 쾌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
이게, 내가 연마해야 할 진짜 마법이구나.
아나이스의 가슴에 벅찬 감정이 치솟았다.
쿠오오오-!
거센 마나가 일어났다.
케일은 예전에 이 현상을 겪었지.
조금 늦었지만,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다아아아-!"
자신감을 얻은 그녀의 마나가 요동쳤다.
마누스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가 드디어, 열등감이라는 껍질을 부수고 세상으로 나왔다는 걸.
콰르르르르-!
벽을 부수고 도달한 곳은 아득히 높은 경지였다.
태양.
아직 그만큼의 열기와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진 못했지만, 적어도 파수꾼에겐 태양처럼 느껴질 것이다.
"가라아-!"
그녀아 카랑카랑한 외침이 동공을 울렸다.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숙달했던 마법.
케일이 먼저 오른 경지.
아나이스도 그녀와 같은 곳에 올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불꽃의 소용돌이가 파수꾼의 몸을 덮쳤다.
전용기가 아닌, 순수한 클래스 마법.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고, 확실하게 적을 분쇄하는 화염계 4클래스.
[이그니스]
[크으으으으으-!]
뱀의 거체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나이스의 전용기는 적을 서서히 태워 버리는 도트딜 형식의 마법.
거기에 화염 속성의 저항력을 깎아 내리는 효과까지 겸했다.
마른 장작이나 다름없는 곳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핀 것과 마찬가지.
급격하게 꺼져 가는 생명 속에, 파수꾼이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캬아악!
거대한 입을 벌리고, 불길에 휩싸인 채로 마누스를 찍어 내린 것.
"선배-!"
사고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앙-!
아나이스는 보았다.
그녀가 존경하는 선배가 거대한 입에 삼켜지는 장면을.
제105화
- 무슨 일 있었니?
* * *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방심하던 찰나, 사신이 낫을 들고 목을 그어 버리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
아나이스가 본 광경이 그러했다.
방심했다.
새로운 경지에 닿아, 신나게 마법을 퍼부은 것만으로도 죽을 줄 알았다.
마지막 발악을 저런 식으로 할 줄은-.
"선배! 마누스 선배!"
아나이스의 전신에 분노가 차올랐다.
한 발자국 떼려 할 때, 그녀의 손에 얹어지는 손.
"영애,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가 먹혔잖아요!"
"저길 보세요."
쿠웅-!
거체가 들썩였다.
분명 안쪽에서 으스러졌어야 할 무언가가, 도리어 엄청난 체급 차이를 극복하고 반항하는 중이었다.
쿠웅-!
뱀의 목구멍이 볼록 솟았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쿠웅--!
다시 한번.
쿠우웅-!
또다시 한번.
거대한 뱀이 꼼짝도 못 하고 얻어맞고 있는 걸 보면, 미증유의 힘이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겠지.
"...저게 저렇게 쉽게 되는 일이었나요?"
"지금의 공자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아덴이 웃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는 마나가 한 줌밖에 안 되던 사내였는데.
지금은 홀로 괴물을 때려잡고 있지 않은가.
[크으우으으으우으으-!]
파수꾼은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리려 했다.
하지만, 그 턱은 무언가에 꽉 잡힌 듯,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마나로 된 재갈을 물린 것 같은 상황.
콰르르르륵-!
안쪽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대한 뱀의 육체는 불꽃에 휘감겨 잿더미가 되었다.
마치 뱀이 불꽃으로 탈피하듯 없어진 곳엔, 마누스가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그래."
마누스는 덤덤하게 답했다.
아나이스는 순간적으로 뿜어졌던 마나를 보곤 속으로 감탄했다.
방금 사용했던 마법은....
"돌아가지. 고생 많았다."
"선배야말로, 못난 후배를 이끌어 주셔서...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툭, 어느새 다가온 마누스의 손이 아나이스의 머리에 얹혔다.
정말 잠시였지만, 부드러운 손길에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알면 됐다."
투덜거리듯, 무심하게 던지는 말에 따스함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아나이스는 어렴풋이 그의 표현 방식을 이해할 것 같았다.
이래서 케일이 그토록 빠져들었구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마음속에서 그녀를 끌어내리고 있었던 굵은 족쇄가 사라진 것 같았다.
시야가 확 트인 기분.
조금이지만, 어른이 바라보는 눈높이에 자신도 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어렴풋이 보여.'
전리품을 챙기고 전송기를 찾는 그의 모습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마나의 잔재.
그것만으로 마누스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눈앞에 있는 작은 것보다 큰 걸 노려야지.
"다음은...."
딱 1년.
내년, 이 날짜, 이 시각에 선배보다 더 높은 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길 바랐다.
고된 일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달려 나가고 싶었다.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그건, 아나이스 본인에게 있어 삶을 살아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정진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
'나도,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어.'
그녀가 웃었다.
그건, 너무도 당당하고 화려한 웃음.
플로이스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전투 종료]
<탑 77층>
『연인 3 : 비페라』
<아나이스의 레벨이 올랐다.>
<아나이스는 전용기 : 디솔루트를 익혔다.>
<아티팩트 : 메모라이즈 링을 습득했다.>
<아나이스 : 40>
<사역마의 레벨이 올랐다.>
<알비온 : 28>
[강력한 간섭을 확인했습니다.]
....
* * *.
오늘도 하루가 끝났다.
마석을 분배하고 오는 길에 쓸 만한 전리품 몇 개를 챙겨 두었다.
이따금, 보스나 강력한 개체들은 '감정된 아이템'을 드롭했다.
미아를 죽인 후부터 활성화되는 기능이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77층에 서식하는 파수꾼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정 보상 : 메모라이즈 링.
많은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했던 '메모라이즈'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였다.
77층에서 나온 장비치고는 보잘것없는 효과를 지닌 물건.
'게임에서는 하루에 한 번, 5클래스까지의 마법 하나를 아무런 리스크 없이 써먹을 수 있는 마법이었지.'
반투명하게 떠오른 창.
그곳에 적힌 것은 마누스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내용의 텍스트였다.
초반에야 3클래스, 4클래스 수준의 마법을 저장하고 쓰겠지.
하지만 이 메모라이즈 링은 버프와 공격 간에 텀을 없애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버프를 돌리고 한 턴을 소모.
적의 공격을 버티고, 한 턴을 소모해서 공격.
이런 사이클을 완전히 무너뜨려 주는 아티팩트라는 것.
"다시 생각해 보니,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한데."
미리 저장해 둔다면, 카덴차로 만든 마법 역시 사용이 가능한 사기 아이템.
막대한 마나 소모를 줄일 뿐만 아니라 그럭저럭 쓸 만한 버프 + 막대한 위력의 공격 마법을 한 턴 만에 조합해서 뿌려 댈 수 있었다.
지금부터 1년 정도는 넉넉하게 쓸 만할 거다.
다가올 보스전에 대비하자는 마음도 있었고.
'나머지는 뽑기인가.'
아티팩트를 늘어놓으니, 제법 수가 되었다.
이 중에서 원하는 옵션이 뜰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
내일 에머슨에게 감정을 부탁하면 될 테고... 적당히 분배하면 되겠지.
지금은 아무 장비나 뿌려 주고 나중에 파밍해서 옵션을 맞추는 형태로 진행하면 될 일.
알비온은 마석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다.
보드라운 털을 한 번 쓸어 주니, 기다란 꼬리가 살랑거렸다.
'나도 이만 잘까.'
자리에 누워 보상 말고 진짜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간섭.
그것도 강력한 간섭이라지.
그에 따른 보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강력한 보상을 확인했습니다.]
[아나이스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플로이스 가문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위대한 업적에 한 발자국 다가가셨습니다.]
[보상 : 마나 소폭 증가, 화염계 마법 공격력 30% 증가]
[보상 : 플로이스의 마음가짐의 효과 추가]
[보상 : 플로이스의 마음가짐의 총 습득 시간 70% 감소]
'덕분에 플로이스의 마음가짐 스킬 습득 시간이 9년으로 줄어들어 버렸고....'
아마 다음 서브 퀘스트를 끝내거나 DLC 스토리를 마무리한 쿠폰으로 바로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점점 더 강해진다.
지구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성장.
지지부진했던, 그래서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성장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주인공 케일을 넘어서 세계관 최강이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각인된 정복자의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내가 이빨을 드러내면 너무 많은 것들이 어그러진다.'
흉포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이성으로 덮었다.
지구에서 살았던 것처럼.
말로 사람들을 죽였던 시대에 살았던 마누스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건 퍽 익숙한 일이었다.
사실, 이제 정치적인 것과는 먼 삶을 살고 싶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그걸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은 꼭 있을 테지.
'그냥 본편이 끝나면 가문이나 다른 곳에 박혀서 조용히 살까.'
마누스는 눈을 감았다.
수마가 그의 몸을 꿈속으로 끌어 내리듯,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잠에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는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건들지 못하게 강해져야겠노라고.
* * *
드르르륵-.
경쾌하게 문이 열렸다.
붉은 머리칼이 흩날리며 아나이스가 도도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불과 하루 전, 좀비 같은 모습으로 어기적거리던 그녀였는데-.
지금 보이는 그녀의 피부에는 광택이 좌르르 흘렀다.
은은하게 흐르는 마나는 그 기품을 더했다.
하루 만에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야- 아나이스."
"응? 왜?"
피어슨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차가운 반응, 아니면 무시를 감수하고 부른 한마디.
기대와 달리, 돌아온 것은 화사한 눈망울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피어슨이 기억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너, 무슨 일 있었니?"
"무슨 일? 어젠 좀 피곤하긴 했지."
"그래에-."
"아 참, 마누스 선배가 오늘 수업 끝나고 동아리실에서 기다린대."
아나이스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피어슨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흘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케일이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피어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됐든, 아나이스가 전보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으니까.
그가 아나이스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바로 앞 자리였으니.
"걱정했잖아. 다음부턴 말 좀 하고 다녀라."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피어슨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이 찰랑이며 긍정의 답을 내놓았으니까.
아나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피어슨의 마음에 평화를 찾아 주었다.
반면, 케일은 뭔가 변한 것 같은 아나이스를 보며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나이스는 귀족이고, 밝은 성격으로 인간관계를 이어 가던 사람이었다.
함께 아카데미를 거닐면, 꽤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던 장면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칼은 영향력 있는 가문의 상징, 그 자체였으니.
'아니야. 선배가 이런 생각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제, 그녀가 산송장 상태로 들어왔을 땐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몰랐으니까.
어딜 다녀왔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두 반가워요.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교수님의 말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케일, 그리고 아나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일 학생, 아나이스 학생. 학생회장 후보로 신청했더군요."
"네-."
아나이스는 대답했고, 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교수는 그 모습을 보더니 오히려 좋은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어른의 입장으로서 한마디 해 주기로 했는지,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교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야기의 내용은 '경쟁을 하다 보면, 친구 사이가 틀어질 수 있으니 항상 유의하라는 것.'이었다.
<교수님.>
<응? 아니, 자네....>
누군가, 아침부터 그를 찾아왔었지.
항상 냉정하고 무자비했던 그가 직접 찾아와 그런 부탁을 할 줄이야.
참, 자신도 오래 살진 않았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것이 확 와닿았다.
"-그러니, 여러분도 항상 그 점을 명심하세요. 미토스 아카데미는 경쟁의 장이지만, 여러분의 인격을 수양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쳐다보고 싶었지만, 둘 다 움찔거리는 것이 교수의 눈엔 다 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저 나이 때, 나는 어땠더라?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따금 드는 생각이었다.
이번 1학년은 2학년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재능들을 모아 두었다고 하지.
"경쟁을 하며 서로를 알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자, 그럼 오늘 배울 내용부터 살펴봅시다-."
교수의 잔잔하고 무덤덤한 말이 경직되어 있던 두 사람의 마음을 두들겼다.
그 이면엔 누가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간섭을 시작합니다.]
교수에게 말을 건넸던 '누군가'.
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케일과 아나이스의 마음을 대변했다.
제106화
- 돌을 던지다가 끌려간다
* * *
방과 후 동아리실.
아나이스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수업을 마친 니아와 마누스가 들어오는 것으로 집합이 끝났다.
붉은 머리칼이 없는 동아리실은 왠지 모르게 허전함이 느껴졌다.
"다 모였네? 이렇게 모인 거 꽤 오랜만이잖아?"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에머슨은 소집의 주동자인 마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누스는 아공간 주머니를 펼쳐, 그 안에 있던 아티팩트들을 모조리 쏟아 냈다.
쿠당탕탕-!
와르르르-!
하나에 몇 골드나 할 법한 마법 도구들이 거대한 테이블로 무참히 쏟아졌다.
"이, 이게...."
"언제 이런 걸 다 모아 둔 거야? 이거, 탑에서 나온 거 맞지?"
"그렇습니다."
장비 분배의 시간이 왔다.
에머슨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걸 다 하라고요?"
"그래. 불가능한가?"
마누스가 피식 웃으며 에머슨을 바라봤다.
마치, '이것도 못하나?'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에머슨의 성격을 아주 잘 이용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울컥한 표정을 짓더니 아티팩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에머슨의 감정 능력은 한 번에 하나씩 감정하는 것.
실제로 감정을 의뢰하는 것 자체가 아주 대차게 욕먹었던 시스템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감정을 요구한다.-
<감정? 응, 해 줄게. 어떤 아티팩트를 감정해 줄까?>
-아이템 선택-
<맡겨 둬!>
-감정 후 옵션 설명-
감정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 두었던 터라, 한 번에 수십 개의 아티팩트를 감정하려면 똑같은 대사를 수십 번 봐야 했던 것.
나중에 편의성 패치를 한다고는 했는데....
'그게 이게 될 줄은 몰랐지.'
마누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실제로 에머슨은 하나하나, 천천히 감정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마누스는 실시간으로 옵션의 텍스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옵션은 나오지 않았다.
열 개가 넘어가니, 슬슬 에머슨의 집중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모든 아이템을 감정해 냈다.
서른두 개.
그녀는 땀을 훔치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아아... 끄, 끝났어요!"
"제법이군. 앞으론 개수를 좀 더 늘려도 되겠어."
"진짜, 너무 악질 아니에요? 저 죽어요!"
에머슨은 빼엑 소리를 질렀다.
마누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다."
"으휴.... 어째 더 능글맞아지시는 것 같네요."
에머슨은 용돈만 아니었다면 당장 때려치웠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그녀는 감정뿐만 아니라 아티팩트의 효과별로 착착 분류까지 마쳤다.
70층에서 77층 사이에서 나오는 아이템은 주로 액세서리류.
반지, 팔찌, 목걸이, 초커 등등-.
세련되었으면서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아티팩트가 주를 이뤘다.
마누스는 그중, 『마법 위력 증폭』과 『마나 소모 감소』 옵션이 붙어 있는 장신구를 각 두 개씩 챙겼다.
"에머슨, 분배를 해 줘라."
"네. 일단-."
다재다능한 케일에겐 마나 소모를 감소시켜 주는 옵션이 부여된 팔찌를 건넸다.
중복된 옵션이 많아, 가장 효과가 좋은 놈으로 골라 준 것.
피어슨은 『버프 마법 효과 증폭』이 붙은 반지를, 멜라니와 기예르모에겐 『물리, 마법 방어력 상승』 효과가 붙은 목걸이를 건넸다.
"나는 특정 마법만 잘 쓰면 되는데, 맞는 게 있을까?"
니아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흘끔, 마누스를 바라보고는 다시 아티팩트 쪽으로 시선을 건넸다.
다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기예르모와 자신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
솔직히, 많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나 혼자 독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쩝, 입맛을 다시며 아티팩트를 하나 받아 들었다.
에머슨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건 마법을 한 번 저장해서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아티팩트 같아요."
"흐응, 그렇구나."
마법을 아티팩트에 저장, 그 후 다시 같은 마법을 쓰면 위력이 증폭되어 나타나는 아티팩트였다.
이런 마도구는 몇 골드, 아니 수십 골드를 호가하는 물건이었다.
요즘이야 아티팩트를 가공하는 기술이 발달되어 비교적 대중화되었다지만....
"역시 탑이 좋아. 이런 것도 받고, 그치? 약간~ 우리만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
그녀가 아티팩트를 착용하며 말했다.
마누스는 니아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착용하고 남은 것은 이사장에게 건네주면 될 터다.
알라노 역시 마음에 드는 아티팩트 하나를 고른 뒤, 마누스를 바라봤다.
이제 또 수련하러 가겠지?
요새 통 바빠, 접점이 없었다.
"마누스."
"음?"
"오늘 같이 탑에 오르지 않을래?"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진득하게 탑을 오르지 않았었지.
장비 파밍도 할 겸, 알라노의 레벨도 올려놓을 겸,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말에, 니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나도 갈래!"
마누스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동아리실을 나섰다.
"알아서 모아 와라."
그가 사라진 뒤, 니아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변의 분위기를 살며시 살핀 뒤, 투덜거리듯 말했다.
"2학년인데 완전 제멋대로네. 마치 자기가 리더처럼- 으응? 다들 왜 그래?"
니아는 싸늘한 시선에 주변을 둘러봤다.
1학년들의 기세, 거기다 알라노까지.
모두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마누스를 따라 수련하러 가야 하는 멜라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서, 선배. 이건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 모두가 마누스 선배의 도움을 받았어요."
"...."
"맞아요. 마누스 선배의 성격이 부드럽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덕분에 이만큼 성장하고 있는걸요?"
피어슨 역시 멜라니의 말에 거들고 나섰다.
니아는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들은 이미 단단하게 묶여 있구나.
마누스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더 교묘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구나.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 미안-. 그래도 난 내기를 통해서 온 거잖아? 잘 몰랐지."
"알게 모르게 신경 많이 쓰고 있어요. 마누스는."
알라노까지 거들며 니아를 압박하니, 입장이 정말 난처해졌다.
결국,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자그마한 돌을 던지고 나가길 원했다.
호수에 이는 잔잔한 물결은 바람을 받아 격렬한 파도로 변할 것이다.
니아는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삶은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 다짐은 마누스에 대한 의심과 독립심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 하지만 난 아직 모르겠어. 너희 말대로 난... 외부인이잖아."
"선배, 그게 아니라-."
니아는 순진한 이들에게 작은 돌멩이를 던져 주곤 밖으로 나왔다.
이것도 꽤 재밌잖아?
생각보다 더 단단하게 묶인 이들이라니, 제대로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카이사르.
그 위대한 가문에서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잖은가.
아니면 아카데미가 잔혹하고 무서운 사실을 숨겨 놓고 있는 건가.
이사장까지 완전히 한패이니, 쉽지 않은 조사가 될 거다.
'그렇지만, 잘만 이용하면-.'
자신이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을 제치는 것.
다른 하나는-.
* * *
여러 날이 지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니아는 마누스와 제법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나이스와 케일 역시 학생회장 선발을 준비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다.
케일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과목인 면담을 준비했다.
알라노에게 조언을 많이 받았는데, 그녀는 친절하게 공략 방법을 알려 주었다.
<교수들의 성격을 파악할 것.>
<네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어필할 것.>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되, 얼마든지 조언을 받아들일 태도를 보여 줄 것.>
케일은 선배의 말을 명심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아나이스는 무력에 중점을 두며 수련을 계속했다.
케일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했으니까.
두 사람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마누스는 동료들의 장비를 얼추 맞춰 주기 위해 뺑뺑이를 돌렸다.
알라노는 물론이고 니아와 기예르모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불만이 가장 심한 사람?
당연히-.
"선배에-! 전 감정 자판기가 아니라구요!"
"...미안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으아아아-!"
에머슨이었다.
그녀는 게임에서처럼 굴려지고 있었다.
탑을 같이 오르는 것이라면 말도 안 한다.
매일!
방과 후에 동아리실에서 마누스에게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누스는 미안하다고 말은 했지만,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문제는 에머슨에게 들어오는 돈이 쏠쏠해진다는 것과 하면 할수록 감정 실력이 늘어 간다는 것.
그 때문에 에머슨은 툴툴거리면서도 감정을 빼먹지 않고 해 나갔다.
"계속하다 보면 실력이 늘 거다."
"알겠어요. 맡겨 두세요."
"앞으로는 네 몫의 마석도 챙겨 오지."
"정말요?"
마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하기 위해선 마나가 필요하고, 한 번에 많은 작업량을 소화하기 위해선 마석의 흡수는 필수적이었으니.
그 정도의 투자야, 충분히 해 줄 수 있었다.
노가다를 조금 더 많이 하면 될 테니까.
시간은 공평하게 지나갔고, 대망의 면담 날짜가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오늘은 모두가 탑에 올라가지 않았고, 평화로운 밤을 보냈다.
아나이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
'그나저나, 탑의 이면은 언제 끝나는 걸까?'
어느새 잊고 있었다.
본래 그녀가 살던 일상에, 탑은 없었다는 걸.
아카데미는 교양과 지식을 쌓는 곳이었으며 사회에 나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곳일 뿐이었다.
거쳐 지나가는 곳에서, 이렇게 중요한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도 아카데미에서 만나셨다는데.
그들은 탑의 존재를 알고 계실까?
"모르겠다-."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아나이스 역시, 처음에 울컥했던 것들이 많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녀는 케일을 뛰어넘고 싶었다.
자신의 한계 역시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아직, 케일은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너무 많아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어-."
"...쟤는 참 세상 편하게 자네."
배를 까고 이불을 발로 차며 자고 있는 룸메이트를 보니, 자신이 진짜 비일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케일을 뛰어넘어, 학생회장이 된다면-.
자신은 어떤 1학년을 만들고 싶은지.
앞으로 4년 동안,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그녀는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깊은 생각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제107화
- 너는 어떤 리더가 되고 싶으냐?
* * *
아카데미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큰 행사가 있거나 무언가 일이 생겼을 때의 분위기를 기억하는가.
1학년 회장의 선출 기간이 다가왔다.
자신이 지지하는,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바라보는 어린 영혼들.
이미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후보들은 아침부터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교정에 들어섰다.
숙덕거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나아갔다.
"준비는 됐나."
"네. 자신 있어요."
마누스는 교문 앞에서 아나이스와 함께 걷는 중이었다.
케일은 먼저 등교한 것인지, 아침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오늘도 밝은 얼굴을 유지했다.
마음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응어리가 많이 없어진 모양새.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가졌다.
시간을 투자하고 감정을 소모해서 상담해 주었던 일들이 헛되지 않은 것 같으니.
함께 탑을 오르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했던 시간들이, 한 인간의 인격과 실력을 완성시켜 간다는 게 눈에 보였다.
"무운을 빌지."
"네. 먼저 본선에 올라가야겠지만요."
"방심하지 마라."
아나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마누스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미 한 꺼풀, 자신을 가두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진 그녀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나이스는 마누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저 검은 머리의 선배는 마치 부모님 같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저 든든한 거목 같은 존재.
옛이야기 중에 그런 동화가 있었지.
갈 때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 나무의 이야기.
'선배는, 그저 날 후배로만 바라보겠지?'
"어이-! 아나이스! 혼자 가기냐?! 내가 저쪽에서 계속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어? 너 괜찮-그악!"
"닥쳐. 아침부터 시끄럽게-."
피어슨이 오도도 달려오다 아나이스에게 그대로 얼굴을 손으로 밀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를 바라보던 아나이스가 피식 웃었다.
멀거니 그녀를 쳐다보던 피어슨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던 아나이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해? 안 와?"
"어? 어어-. 간다 가. 몸은 좀 어때?"
"컨디션? 아주 좋아. 누구한테도 안 질 것 같은데?"
아나이스는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당당하게 걸었다.
아침부터 어수선한 분위기가 아카데미에 만연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직 케일은 오지 않은 모양.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요샌 각자 탑에 올랐기에 같은 교실에 있는 걸 제외하면 마주칠 일도 없었다.
또다시 몰려오는 죄책감, 걱정,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
'후우우-. 괜찮을 거야. 또 불안해하지 말자. 아나이스.'
그녀는 한숨 한 번으로 불안감을 털어 냈다.
케일은 방황했던 자신과 달리, 강하고 올곧은 아이니까.
잘해 내리라 믿었다.
당당히 그녀 앞에 서서, 진득하게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으니까.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면, 산전수전 다 겪은 케일이 아닐 테지.
하지만 그녀의 다짐과는 달리, 케일은 수업이 시작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나이스의 표정이 점점 불안과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 * *
[1학년 학생회장 후보들은 모두 33층 강당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탑.
마법이라는 신비하고도 오묘한 힘으로 지어진 탑.
그 내부에는 다양하고도 많은 시설이 잠들어 있었다.
33층.
다양한 내부 행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베일에 감춰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설이었다.
아나이스는 33층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푸른 머리칼은 아직도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 간 거야? 얘 설마 탑에 들어갔다가 못 나온 건 아니겠지?'
그 맹한 애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걸음 하며,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 하며, 그녀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였다.
아나이스를 보는 시선들이 날카로워졌다.
약자를 노리는 건 사냥꾼의 본능.
학생회장 자리를 노리는 이들 역시 사냥꾼의 자질을 타고난 학생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아나이스를 압박했다.
"아나이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떨리냐?"
"킥킥, 플로이스도 별거 아니구만?"
"...."
물론, 아나이스는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반응이 없는 것이 잔뜩 주눅 들어서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나불거리는 이들.
기세를 탄 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야, 그냥 신청한 거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지 그래? 우리가 학생회로 뽑아 줄게~."
"맞아. 아직 플로이스는 학생회장 하기엔 좀 이르지 않은가?"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인지, 이곳이 아카데미라는 걸 인식해서 의도적으로 공격한 것인지 모를 발언.
가문을 들먹이는 건, 사회에 나가서 해당 가문과 척을 지겠다는 의미였다.
아카데미의 불문율이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
아나이스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고개를 돌려, 입을 놀린 이를 바라봤다.
어렴풋이 들려온 단어들은 그녀의 가문을 모욕하는 것.
그런 언사를 들었음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왜일까?
"이상하네."
그녀의 멍한 말에 움찔하는 이들.
"왜 늬들이 말하니까 화가 안 나냐. 신기한 일이야."
"...저 자식이-."
"너희들끼리 잘해 봐. 어차피 실력으로 증명하는 게 아카데미니까."
아나이스는 그 말을 남기고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히 어쭙잖은 도발을 걸었다가 무시만 받게 된 이들이 으르렁거렸다.
얼쩡거렸다가 진짜 맹수에게 한 방 얻어맞은 하이에나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아나이스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케일을 계속 찾았다.
그녀의 걱정을 무시라도 하듯, 케일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후보생이 모두 자리에 앉아, 면접을 대기하는 순간까지도.
"다들 도착했습니까? 그럼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평민 케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각 학년 교수들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학생회장 선발은 학년 전체를 대표하는 이.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사에 미리 참여해 준비하는 것도 회장의 업무였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크나큰 감점 요인.
케일이라고 하면, 요새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입생이었지.
마법 실력만 믿고 자만심에 빠진 건 수많은 이들이 보여 준 행태였다.
'평소 수업을 들어 보면 그럴 아이가 아니긴 했는데-.'
1학년 전임 교수, 트렌트는 케일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냈다.
수업 시간에 보였던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자만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니.
무언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 했을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당의 문이 열렸다.
그곳엔, 상당히 놀라운 모습으로 서 있는 푸른 머리가 있었다.
깔끔하게 잘라 낸 단발.
옅은 화장으로 아름다움을 더한 얼굴.
항상 풀어 헤쳤던 제복의 단추를 단정하게 잠근 모습까지.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작은 마누스를 보는 것처럼 영롱했다.
"죄송합니다."
"케일, 너-."
"안녕, 아나이스."
그녀가 생긋 웃었다.
아나이스는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멍하니 친구를 바라봤다.
'어쩜 저렇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아나이스는 짧은 시간,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그녀는 착각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자신만 성장하고, 계단을 올라간다고.
자신이 오르는 계단은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갔던 것이라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친구는, 자신과는 다른 길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 확 보였다.
"딱 맞춰 왔군요. 어서 앉으세요."
"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케일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다 모였군요.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름을 호명하면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마치 취업 면접처럼 변한 공간에는 묘한 긴장감이 어린 분위기가 맴돌았다.
첫 번째 후보생이 호명되어 들어간 후, 아나이스는 옆자리에 앉은 케일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케일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그 총명한 눈동자로 아나이스를 바라봤다.
"이제 괜찮아?"
"너야말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지?"
"응, 그냥, 조금 생각해 봤어. 여러 사람에 대해서."
케일은 덤덤히 말했다.
아나이스는 마치 영혼이 바뀐 것 같은 모습에, 위화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어디로 보나 그녀는 케일이었다.
"걱정해 줬다며, 고마워."
"아니, 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 지금은 서로 경쟁해야 하니까?"
생긋 웃는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찬란해 보였다.
아나이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맹했던 친구는 어디 가고, 이렇게나 당찬 학우가 나왔는지....
그녀가 놀랐던 건, 이렇게나 걱정했는데 튀어나온 케일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답답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마음속 응어리가 케일의 웃음으로 인해 녹아내렸다.
죄책감이 조금씩 옅어지는 느낌은, 마치 성수로 샤워를 하는 것 같았다.
"응, 그리고... 미안해."
"나도."
잠시 뜸을 들인 케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탑, 같이 올라 줄 거야?"
"응. 나, 꽤 강해졌거든."
두 사람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감정을 교류했다.
케일은 그때가 떠올랐다.
함께 탑을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사흘간 사라졌던 때.
그때 친구는 무얼 했을까?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시간 속에서, 친구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케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 어땠어?"
"...강해지고 싶어서, 혼자 탑에 들어갔어."
"혼자?"
"응.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피어슨이랑 같이 가도 됐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케일은 그날의 아나이스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밝은 모습도 아니었고, 그 누구도 그녀를 구원해 주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역시,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준 건....
"마누스 선배에게도 사과해야 했으니까."
"...."
"아나이스 학생, 들어오세요."
입술을 달싹이는 케일의 말을 무참히 끊어 버리는 조교의 목소리.
아나이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케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잘 다녀와."
케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가 면담을 위해 들어간 직후, 케일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부럽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지만,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케일은 잠시 응시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기대감에 찬 누군가의 감정 역시,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제108화
- 보이지 않는 저주
* * *
케일은 가만히 앉아,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 알라노와 니아.
같은 기숙사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밤에 찾아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숙사 사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덴이 자신들의 후원자였으니-.
밤에 돌아다니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넌 어떤 회장이 되고 싶니?>
두 학생회장이 물어 온 질문에, 케일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어떤 회장이 되고 싶은 걸까?
케일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질문을 바꿔서 물어봤다.
<그럼, 넌 누구를 닮고 싶어? 예를 들면 부모님이라든가-.>
그 말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항상 동경하며 따랐던 남자.
그녀가 보아 왔던 마법사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또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
항상 아버지처럼 뒤에서 챙겨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
'선배.'
<그래, 마누스처럼 되고 싶다면 그와 조금은 닮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
<지금의 넌, 너무 맹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적나라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그래서 밤새 생각했다.
마누스를 닮아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
아나이스에게 강한 무력이 과제였다면, 케일에겐 무력을 휘두를 동기와 삶의 방향성이 중요했다.
깜빡 잠이 들고 일어났을 때, 케일은 이대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기분.
<머리, 자르러 왔어요.>
게임 내에서도 '헤어스타일'은 제법 중요한 커스터마이징 요소였다.
마누스라면, 거슬리는 것들은 가차 없이 쳐 냈을 거다.
앞길을 막는 건 모두 배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케일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 치렁한 머리와 꿉꿉한 기분.
항상 맹하게 보이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확 질러 버렸다.
단발로 자르고, 머리를 예쁘게 말고, 화장을 하고-.
'마누스 선배는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하지.'
알라노나 마누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절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케일도 지금부터 맹한 모습을 버려야 할 거다.
언젠가 두 사람을 넘어서기 위해.
다른 동료들로부터 질타받지 않기 위해.
친구와 다투는 건, 으레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친구와 다투는 건....
"케일 학생, 들어오세요."
"-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당당히 포부를 밝히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던 자신은 없다.
이 학생회장 선발전이, 그녀의 행보를 당당하게 알리는 효시가 되리라.
* * *
'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마누스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한가롭게 창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학생회장 선발.
직후 또 월말 평가.
5월에는 무려 중간고사가 있다.
한시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일정이었지만, 마누스는 그사이에 붕 뜬 느낌을 받았다.
사건은 주인공과 그 일행을 기준으로 돌아가니까.
2학년인 마누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살짝 발을 걸친 정도이니.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야 하나.... 당장은 수련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마투학은 제법 그럴싸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재능인지, 아니면 버클리의 재능인지 알 수 없는 능력으로.
그가 추측건대, '모든 마법'엔 몸을 쓰는 마법도 포함이 되어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학생회장을 뽑는 기간에 자신은 무얼 해 둘까.
마석으로 마나를 축적하는 것도 슬슬 이 구간에선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임에서 일정 레벨에 다다르면 더 높은 레벨의 사냥터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마누스가 흡수하는 마석의 효율이 급감한 것.
'가문의 일을 조금 물어볼까.'
지금 당장 눈을 돌릴 곳은 디레 교단의 움직임이었다.
그 끈질긴 작자들이라면, 대륙 어디서든 암암리에 세력을 키우고 있을 테니.
카이사르 공국은 절대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인식했을지라도, 다른 곳은 아닐 테지.
마누스는 걸음을 옮겼다.
오후 수업까지는 수 시간이 남은 상황.
여유롭게 식사하고 도서관에 가서 한 권의 서적을 읽고, 짬 내서 운동까지 해도 될 정도의 시간이었다.
"호잇-! 호이잇-!"
"...."
저건 또 뭐야.
웬 1학년 명찰을 달고 있는 이가 지나가는 사람 앞에서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앞에 있는 이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
이상한 현상이었다.
"안 보여?! 나 안 보여?!"
그가 열심히 말을 했지만-.
"오늘도 카페나 갈까?"
"그럴까? 가서 책이나 좀 읽자."
깔끔하게 무시하고 지나가는 이들.
마누스는 신기한 현상에, 조용히 그 아이를 관찰했다.
작은 체구.
등허리에 걸려 있는 두 자루의 검.
숏 소드 계열의 단검으로, 망토에는 독수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뭐 하는.... 왜 애들이 쟤를 무시하는 거지?'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이는 이내 풀썩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앳된 얼굴로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는 꼬마.
마누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런 캐릭터가 원작에 있었던가?
비상해진 머리를 뒤져 기억을 찾아봐도 저런 친구는 없었다.
마누스는 딱히 눈에 걸리지 않는 이를 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원작에 방해되지 않는다면, 굳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이제 생각했던 것들이 완성되고 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오! 이 사람이 그 폭군인가! 엄청 잘생겼다! 와... 나도 이렇게 주목받고 싶은데...."
마누스는 흘끔,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옆에서 그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연신 떠들었다.
시끄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마누스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어슨에 버금가는 속도로 말을 쏟아 내는 아이.
말만 하는 피어슨과 달리, 얘는 주변에서 얼쩡거리기까지 하니 더 불쾌했다.
"와, 때깔 고운 거 봐-. 나도 이런 피부를 가지고 싶은데, 어디 한번...."
"적당히 하지."
"-어?"
손을 뻗어, 마누스의 피부를 살짝 만지려던 소년이 흠칫 굳었다.
그 싸늘하고도 무시무시한 눈빛이 전신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모님 외엔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해 같은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마누스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주변을 얼쩡거리며 품평한 것도 모자라, 감히 멋대로 손을 대려 하다니-."
"아, 저, 그, 그게-."
소년이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마누스는 폭군이라는 이명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제대로 사과하고 꺼져라."
"아 그... 죄, 죄송합니다! 제가 보이는 줄 몰랐어요!"
학생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하기 바빴다.
폭군 마누스.
그 자비 없는 선배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오죽하면 신입생들에게도 그 사실이 퍼져 있을까.
하지만-.
"다들 눈깔이 삐었나 보군.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니."
그가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소년은 보았다.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정상적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걸.
누군가와 대화하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나?
소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 아닙니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꾸벅,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마누스는 멀어져 가는 소년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 발자국 걸으려 하다, 문득 생각이 닿아 소년을 바라봤다.
아무도 볼 수 없었다면, 어떻게 학교엔 들어온 걸까?
입학은 어떻게 했고, 정복은 어디서 얻을 수 있었지?
머릿속에 의문점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알아볼까.'
마침 할 일도 없겠다, 여흥거리로는 괜찮지 않을까?
막말로 저 소년이 나쁜 마음을 먹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해코지하고 다닌다면?
마누스는 어느 정도 대비책은 필요하겠다 싶어 걸음을 옮겼다.
1학년 조교 중에 명단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
보기만 하는 거라면, 딱히 상관없을 터다.
이름과 반 정도야 기밀 사항도 아니었으니까.
"원작에서도 저러고 다녔던 건가? 아니면...."
게임은 한정적인 시야를 보여 주지만, 현실은 게임에서 보여 주지 않았던 것까지 보여 준다는 걸 상기했다.
대체 원작에서, 저 아이는 어떤 존재로 지냈을까.
지독한 외로움과 홀로 싸우며, 쓸쓸히 살아갔겠지.
그 괴로움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다면, 현실에서 조용히 퇴장했겠고.
괜히 이상한 애와 엮여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보다야, 조용히 예방하는 것이 나으리라.
저 아이가 변수가 되어도 의연히 대응할 수 있게끔.
* * *
니아는 수업이 끝난 후, 조용히 누군가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항상 무슨 계획이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후배.
압도적인 마법 실력은, 왜 위대한 가문인지 알 수 있는 후배지만-.
'조금은 못마땅하단 말이야.'
이면 세계와 탑.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솔직히 배신감마저 들었다.
누군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일상 속에서 노력하고 있는데-.
저들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몰래 힘을 키우고 있었다.
누구 말로는 탑에서 계속 데몬들이 내려온다던데....
자신들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던 자신도 이면 세계에 잘 적응하고 있는걸?
'아무래도 수상해. 수상하단 말이야.'
저렇게 애들을 키워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혹시 카이사르 가문에서 특별한 지령이 내려온 건가?
사람들을 꼬셔, 비밀 전력으로 만든다든가.
아니면 각 가문으로 퍼뜨려서 스파이로?
'이렇게 생각하면 심각한 일이긴 하네. 설마 나도... 그런 건 아니겠지?'
그녀는 헛된 망상임에도 묘하게 현실성 있다고 타협했다.
한참을 멈춰 서 있던 마누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니아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가려다, 문득 급격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드래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던 니아 본인이었다.
한 번의 패배 이후, 그녀 역시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 불합리함을 찾아, 남을 끌어내리려는 묘한 감정.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과제나 하러 가자."
3학년부터는 쏟아지는 과제의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마누스를 쫓아다닐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니아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도서관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 내준 과제가 뭐였더라?
보통 까먹지 않는데, 오늘따라 기억력이 영 흐릿했다.
그녀는 지나가는 동기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내내, 니아는 단 한 명의 동기도 마주칠 수 없었다.
그걸 이상하다고 느낀 건, 조금 더 나중 일이었다.
제109화
- 주먹다짐이 꼭 그른 건 아니다
* * *
면담을 마친 후, 아나이스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머릿속을 헤집었던 무언가가 싹 걷힌 느낌.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꽤 깔끔하게 했다.
<저는, 모두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나이스가 생각한 아카데미.
앞으로 그녀가 이끌어 나가야 할 학생회의 테마.
그건 조화였다.
마지막에 교수들의 은은한 미소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케일은 어땠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강당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니, 문득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염치도 없지, 아나이스. 무슨 낯짝으로.... 에휴.'
그래도 받아 주어서 다행이었다.
마누스 선배가 그랬지.
감정이 상한 부위엔 시간을 발라 주면 된다고.
흉터는 남을지언정, 상처는 아물 수 있다고.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 사이에 있었던 격렬한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증오, 욱했던 감정이 없어지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법.
둘은 그렇게 각자를 돌아보았고, 충분히 반성한 뒤였다.
아나이스가 홀로 사색에 잠겨 기다리고 있자, 케일이 나왔다.
꽤나 밝은 얼굴이었다.
"잘 봤어?"
"응, 너는?"
"나도. 할 말은 다 하고 나온 것 같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아나이스의 말에 케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가 끊겼다.
복도는 두 사람이 걷는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케일은 잠시 생각하다,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누가 이기더라도 이번엔 원망하기 없기."
"-응. 당연하지. 그땐 내가... 미안해."
"나도 잘한 거 없는걸. 사실 그런 마음이 진짜 있었는지도 몰라."
자신의 허물을 발견한 이들이 어찌 고개를 빳빳하게 들 수 있을까.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기엔, 둘은 자신의 허물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게 더 위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게 친구지.
감정이 상했어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
케일과 아나이스는 친구라는 의미를 조금씩 깨닫는 중이었다.
"서로에게 나쁜 감정이 있었던 건, 본선에서 털어 버리자."
"좋아. 지더라도 시원하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한번 물꼬가 트인 화해의 순간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이제 조금 더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를 굳건히 믿을 것이다.
* * *
한편 그 시각, 마누스는 조교실에 들러 명단을 확인한 후였다.
그 꼬마의 명찰에는 분명 '그라디'라고 적혀 있는 걸 보았다.
그의 이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복은 어디서 얻은 거람.
마누스는 왠지,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야겠지.
주변 사람에게 해코지할 아이로는 안 보였으니.
"저기, 마누스!"
도서관으로 향하던 도중, 니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무슨 일일까.
그녀는 항상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꽤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큰일 났어!"
다급한 표정으로 마누스의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니아.
마누스는 살풋 인상을 찌푸리곤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고 기억을 헤집었다.
그럴 만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네.
니아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어제 과제가 생각 안 나. 어떡해?"
"...."
이 느낌은 뭘까?
한 대 때려야 하나?
마누스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니아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둔 건지, 필사적으로 답했다.
저건 진짜다.
괜히 자극했다간 건물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았다.
"아니아니아니! 내 말 들어 봐! 이건 진짜 심각한 일이라니까?!"
"유언은 끝났습니까?"
"흐이이이익! 내 말 좀 들어 봐아아아아-!"
니아는 나름대로 심각한 일로 마누스를 찾은 것이었는데, 반응이 이렇게 격렬할 줄 몰랐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똑똑해야 한다.
마법진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던가.
웬만한 이론은 모두 머릿속에 있어야 하고 수많은 지식을 욱여넣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마법사가 과제 하나를 까먹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기억하고 있는 걸 홀로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러니까, 알려 줘."
한참을 도망 다닌 후에야 겨우 사정을 말할 수 있었던 니아.
마누스는 그녀가 진짜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자, 진정하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과제부터 알려 줘야겠지.
"과제는 원소 마법의 위력 증폭에 관한 걸 연구하고, 자신만의 마법식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양피지 열다섯 장 분량이군요."
"아, 그랬나?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알았어. 고마워."
니아는 혀를 내밀며 눈웃음을 지었다.
몇 발자국 걸어가다, 그녀는 휙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누스가 한 번에 잡을 수 없는 거리였다.
"너, 엄청 수상한 거 알아?"
마누스는 답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 며칠, 계속 그를 따라다니던 건 니아였겠지.
그녀는 또 어떤 이유에서 자신을 불신하고 있을까.
"난 널 계속 주시할 거야. 그리고 너보다 강해질 거야. 귀여운 애들한테 수상한 짓 하지 말라고."
"...망상이 지나치면 병입니다."
"망상 아니거든! 계속 따라다니면서 널 견제할 거야. 혹시 알아? 내가 네 원대한 야망을 막고 영웅이 될지."
마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몸을 돌렸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말에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요새 이상한 일들이 정말 많이 일어난다 싶었다.
두 개의 달이 모두 차오르는 시기.
사람의 감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
아마도 그 영향이지 않을까.
그의 눈에 저 멀리, 나란히 걷는 두 여인이 보였다.
'그새 화해했나.'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서로의 감정은 생각보다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양.
정렬의 붉은 머리.
냉정의 푸른 머리.
상반된 성격의 둘이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거면 된 거지.
원작 속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앞으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될 거다.
저 우정이 평생 가길 기원하며-, 마누스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있으면 되겠어.'
지식의 탐닉은 언제나 그를 들뜨게 한다.
예전, 현실에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하게 해 주는 힘이었으니.
고지가 눈앞이었다.
* * *
두 개의 탑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
온통 암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세상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보이는 죽음의 탑.
그는 히죽 웃으며 붉게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삼 개월에 한 번씩 찾아오는 두 개의 보름달.
이제 머지않았다.
"아아...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곧, 제물을 바칠 수 있겠군요."
그는 두 팔을 쫙 벌리며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하듯, 펼쳐진 정경을 바라봤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멸망을 향해 하루하루 나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발버둥 치며 절규하는 이들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두 세상의 경계가 가장 희미해지는 시간.
갇혀 있던 세상의 주민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남자는 그날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물은 어떻게 되고 있죠?"
"적당한 곳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신을 강림시키기 전에, 대변자들부터 내려와야 할 겁니다. 첫 번째 대변자께서, 곧 이 땅에 강림하십니다."
그러니 실수 없이 철저히 준비하시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두어 걸음을 옮긴 그가 자신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문서를 바라봤다.
사락-.
별빛이 괴상하게 쏟아지는 밤.
조용히 문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샛노란 양피지에 적힌 이름 중, 몇몇은 붉은 선으로 찍찍 그어져 있었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사사건건 방해하는 인물이로군요."
"그곳에 갔던 이 중, 아무도 살아온 자가 없습니다."
"마침 그곳의 자제분이 이곳에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아카데미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카이사르.
인류를 지키는 위대한 가문 중 하나.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제거해야 할 집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리슨이라는 가문 역시 이곳에 자제를 보냈다지.
공교롭게도 두 자제의 나이까지 똑같았고.
"...재밌겠어요."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대가 있었군요.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할 준비는 되었나요?"
고개를 숙인 남자가 긍정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조금 뒤틀려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사람.
실패를 맛보면 분한 감정이 들고 오기가 치솟는 사람이었다.
망가져 있을지언정 아예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그 역시 두 번의 실패로 만회해야겠다는 심정이 그득했다.
오히려 뒤틀려 있기에, 그 감정은 더욱 폭발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집행자시여."
"좋습니다. 이번엔 조금 더 나은 도구를 준비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집행자라 불린 이는 지도 한 장을 건넸다.
언젠가 건네주려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지금에서야 전달한 지도.
드레이크를 잃은 부하의 심정은 절절하게 느꼈다.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을 남기는 부하를 위해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었으니.
그는 자비로운 편이라고 믿었고, 부하를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진행했다.
아주 희귀한 물건이었다.
병기로 만들기만 한다면, 지난번과 같은 실패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기대에 부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떠도는 자여."
"그럴 겁니다. 아니, 반드시 그리해야 합니다. 저는 못다 한 일이 있으니까요."
히히-.
반쯤 실성한 듯 웃는 그의 모습이 집행자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떠도는 자, 나그네는 지도를 바라보며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머리를 땅에 대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의 오체투지.
충성의 대가로 나그네는 항상 좋은 것들을 얻어 왔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들도 저분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충성을 멈추지 않았다.
보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은총을 내려 주고 있지 않은가.
"저는 기한에 맞춰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망가진 인성이지만, 자신을 보듬어 주는 이 앞에서는 항상 정상처럼 보이고 싶은 나그네.
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복수?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정당한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거다.
'기다려라.'
누군가의 독한 마음이 감정을 비틀리게 한다.
비틀린 감정의 끝은 어디일까.
나그네는 오늘도 길을 걸었다.
제110화
- 평범해 보이는 나날
* * *
다음 날.
학교 로비에 커다란 대자보가 붙었다.
아카데미의 큰 행사 중 하나인 1학년 학생회장 선발.
후보자 모집이 끝났고, 면담을 통해 인원을 추려 낸 것.
각 반별로 세 명씩.
총 아홉 명의 명단이 큰 대자보에 걸렸다.
마누스는 명단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 없는 엔트리로군.'
요주 인물은 독수리반의 '카스트로'와 '드아린.'
그리고 뱀반의 '아나이스'와 '케일'이었다.
드아린.
아나이스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아이였지.
그의 검술 실력은 또래에 비해 월등한 수준.
2학년, 잘하면 3학년까지 노려 볼 수 있는 수준이지?
'그러고 보니-.'
곧 소식이 들려올 터다.
에레시스 역시 보름달이 뜨는 밤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마침 다음 주엔 외부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날이 또 찾아왔다.
기회와 시간은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렸지.
"저기."
"네, 부르셨나요 공자님."
로비에 서 있던 하녀 한 명을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하자, 치마 앞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준비해 주는 하녀.
마누스는 펜을 휘갈겨 대충 내용을 전했다.
인비데아라면 서신의 뜻을 잘 알고 있을 터.
거기다 자신의 어머니 역시 사교계에서 끗발 좀 날리는 것 같았다.
그걸 잘만 이용한다면, 생각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터다.
"카이사르 가문에 전해 다오."
"알겠습니다. 공자님."
하녀가 명을 받들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걸려 있으니, 제대로 전달은 되겠지.
마누스는 다시 대자보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조교와의 결투가 있고, 일주일의 끝자락에는 학생회장을 결정하는 대결이 남았다.
아나이스와 케일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다른 등장인물들은 얼마나 강한지 가늠해 볼 기회였다.
특히 케일의 숙적이 되는 인물.
'미리 싹을 잘라 둬도 좋겠지만-.'
숙적의 존재는 주인공의 각성을 이끌어 내는 클리셰다.
마누스는 그런 중요한 키 캐릭터를 함부로 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학살을 자행한다거나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거나 하는 인물이라면 가차 없이 죽였겠지.
하지만 케일의 숙적은 나름 선한 영향력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굳이 건들지 않아도 순리대로 흘러가리라.
[크릉-!]
옆에서 알비온이 꼬리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새하얀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하고 나서는 처음 하는 외출.
신기한 것이 많은지, 연신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학생들의 시선을 즐기기도 하며 바깥세상의 공기를 즐겼다.
그런 알비온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향했다.
포니테일이 제법 인상적인 남자.
다 큰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는 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곳 학생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약간 어리바리한 것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상이었다.
그가 하하 웃으며 마누스에게 질문을 건네 왔다.
"다행이군요. 오늘 새로 부임하게 된 역사 교수, 트레버라고 합니다. 혹시 이사장실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55층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수업에서 뵐 수 있겠군요. 잘 부탁해요."
그는 슥, 손을 내밀었다.
마누스는 물끄러미 트레버의 손을 바라보다 살짝 맞잡았다.
"그럼, 전 이만-."
그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미아 교수가 탑 안에서 사망했으니 새로운 역사 교수를 부임시켜야겠지.
수소문 끝에 적절한 인물을 찾은 모양.
미리 죽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세계선의 변화 때문에 뒤틀려 버린 걸까?
원작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대륙에 역사를 가르칠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마누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늘도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 오전 수업에 역사학이 있었으니, 실력을 볼 수 있겠군.
벌써 장내는 떠들썩했다.
한껏 들뜬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조잘조잘 떠드는 학생들의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마누스는 그들의 얼굴을 살피며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즐겼다.
"와... 부럽다. 나도 구경해야지."
예의 소년이 보였다.
허리에 찬 쌍검이 인상적인 소년.
여전히 그를 알아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설마, 유령인가?
마누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증을 넣어 두었다.
원작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소년.
저 소년이 변수가 되는 일은 되도록 없어야 할 테니까.
'그래도... 지켜보긴 할까.'
"선배! 안녕하세요!"
생각을 끊어 내는 발랄한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오랜만에 다 같이 뭉친 1학년이 우르르 다가오고 있었다.
마누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이스가 새하얀 드래곤을 발견하곤 꺄악-! 소리쳤다.
알비온.
그녀와 합을 맞춰 사흘간 고생했던 파트너.
그녀가 알비온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절친한 친우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알비온! 드디어 나왔구나! 오구, 잘 있었어?"
[크릉-!]
알비온 역시 그녀를 발견하곤 머리를 부볐다.
절친한 모습에, 나머지 1학년들이 벙 찐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 마누스의 사역마와 이렇게 친밀감이 생겼었나?
놀란 피어슨이 황급히 알비온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예전, 솜사탕 시절에도 알비온에게 깨물릴 뻔한 적이 있었기에.
아직도 그 일은 피어슨에게 짙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뭐, 뭐야. 너 뭔데 알비온이랑 그렇게 친해? 언제 그렇게 친밀감을 쌓아 둔 거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치, 알비온?"
[킁!]
알비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친밀함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니, 케일은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 사흘간 탑에 올라갔구나-.'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살 방안을 모색한 거겠지.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과연 아나이스는 얼마나 강해졌는지.
자신을 뛰어넘었는지.
여전히 투덜거리는 피어슨, 입을 살짝 늘어뜨린 케일, 반가움에 몸서리치는 아나이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 짓는 멜라니.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제법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한 가지의 사건이 끝나면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이 찾아오는 법.
"얘들아, 안녕?"
"아, 니아 선배."
니아가 로비로 들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1학년 후배들은 그녀를 알아보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모두가 3학년 선배를 자연스럽게 대했다.
하지만 마누스는 묘하게 그녀를 감싼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정확히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지만, 무언가 달라졌음엔 틀림없었다.
마누스는 그녀를 잠시간 바라봤지만,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그녀를 맞이하는 이들은 평소와 같았고, 니아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대하고 있었으니까.
"오늘 학생회장 선발전이지? 힘내 둘 다."
"네. 감사합니다."
"누굴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네-. 난 미움받기 싫으니까, 둘 다 응원할게. 알았지?"
헤헤 웃는 두 사람을 본 니아는 마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는 니아.
그녀의 눈빛은 아직 마누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믿지 못하는 자에겐 어떤 말을 해도 들어가지 않는 법.
좋은 말을 전해 주어도 머릿속에서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는 거다.
마누스는 구태여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행동들이 정당하게 납득될 때가 있을 터다.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서로 원망 마라."
"네. 이미 그러기로 했는걸요."
케일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단발로 깔끔하게 정돈한 그녀의 머리를 발견했다.
마누스는 잠시 그녀의 면모를 살펴보더니 몸을 돌렸다.
"-잘 어울리는군."
그의 별것 아닌 한마디에, 케일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야!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는 거니?! 진짜 너무하네!"
물론, 관심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도 있었다.
* * *
요새 마누스는 원소학 수업에 푹 빠져 있었다.
마투학, 소환학 교수가 자신을 노렸지만, 마법사의 근본이자 근원은 바로 원소를 이용한 마법 아니겠는가.
벽을 뚫겠다는 일념하에서 안 하던 필기까지 해 가며 이론을 욱여넣는 마누스.
원소학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이론을 내포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카이사르라 해도 고작 몇 달의 시간만으론 수 세기 동안 쌓아 온 이론을 완벽하게 쌓을 수 없었다.
방대한 지식이 있다 한들, 그걸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그저 켜켜이 쌓인 지식일 뿐이니.
'단순한 게임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긴 하지.'
복잡하게 얽인 술식, 그 안에 마나를 집어넣는 이론.
의지의 발현, 원소의 이해와 접촉.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거대한 이론은 여전히 많았다.
5클래스.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들 하는 경지.
물론, 대륙 곳곳을 구석구석 찾아본다면 5클래스 정도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들 모두 고수로 취급되고 있었으며, 대륙 어딜 가도 한자리를 꿰찰 수 있는 이들이었다.
'게임 안에 있는 이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거지.'
마누스는 지금, 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인비데아는 스무 살에 5클래스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티란니스 역시 스물한 살 초입에 5클래스를 완숙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그들은 시스템도 없었고, 스킬의 보정도 받지 않았겠지.
혜택을 받는 만큼, 적어도 그들보단 빨라야겠지.
개인적으로 3학년에 들어가기 전까지 5클래스를 완숙하게 다루는 것이 목표.
지금도 억지로 펼치라면 펼칠 수는 있겠지.
'탑에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까진 완벽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지.'
죽음의 문턱에서 능숙하게 마법을 다루는 것.
마누스가 생각한 마법사의 제1순위 소양이었다.
트레일 교수는 열정적으로 지식을 쏟아 냈고, 마누스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짤막한 과제를 하나 내주도록 하지요."
학생들의 눈이 똘망똘망하게 변했다.
트레일 교수가 내주는 과제는 언제나 생각을 요구한다.
멍하니 수업을 듣고 있던 니아가 헛, 하고 놀라며 얼른 필기를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의 사태는 대비하는 것이 좋았으니, 그녀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 과제는 두 가지의 원소가 왜 합성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서술하는 것.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생각을 뒤틀어 버릴 수도 있지요. 여러분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그가 뒷말을 이었다.
마법사는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
기존 법칙을 뒤틀어,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
마누스는 왠지,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