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란 걸 잘 아시면서."
* * *
라온은 실내 훈련장에서 여러 기구와 장비들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왔다.
'나쁘지 않군.'
훈련기구나 장비는 리메르의 말대로 최고이자, 최신 기종들이었다. 따라온다면 확실하게 키워주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단련장이었다.
훈련 자체를 오후에 시작했기 때문에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기숙사로 가기 위해서 연무장을 나와 길을 돌아가려 할 때였다.
"어이."
우측 골목에서 울린 낮은 목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오전에 시비를 걸었던 방계 네 명이 살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이 지나기도 전에 영약을 먹었다면서?"
"그래놓고 잘난 척한 거냐."
"내가 그 정도로 영약을 먹었으면 너 정도는 한참 전에 추월하고 버렌 님의 바로 뒤까지 쫓아갔을 거다."
네 명은 있지도 않은 무게를 잡으면서 다가왔다.
-저런 꼬맹이들에게도 우습게 보이는 건가. 혀 깨물고 죽고 싶도다.
'걱정 마.'
라온의 눈동자가 화로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번엔 네가 보고 싶은 장면이 나올 테니까.'
제12화
"음…."
라온은 잔잔한 마음과 달리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가볍게 대화나 하자는 거니까."
가장 앞에 있던 장발의 방계가 다가왔다. 저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다. 크레인 지그하르트. 오전에 시비를 걸었고, 판별식에서 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녀석이다.
"어이."
크레인의 턱짓에 그의 옆에 있던 세 명의 아이가 자신의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에 붙었다.
"대화?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세 명이 동시에 길을 막아 빠질 수가 없었다.
"따라오면 알게 될 거야."
"조용히 와."
크레인이 히죽 웃으며 손짓하자, 옆에 붙은 놈들이 어깨로 밀기 시작했다.
나이보다 몸집이 작은 라온과 또래보다 덩치가 큰 방계들이 함께 움직이니, 성인이 아이를 데려가는 모습 같았다.
"자, 잠깐만. 여기서 말하는 게…."
"이젠 늦었어."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라온은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움츠리자, 방계의 아이들은 낄낄 웃으며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웠다.
-보고 싶은 장면을 보여준다고 해놓고, 지금 무엇을 하는 거냐.
'밥도 뜸을 들여야 맛있는 법이야. 좀 기다려.'
라온은 겉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윽!"
라온은 무기력하게 연무장 외곽으로 끌려가서 벽에 던져졌다. 구석지고 어두운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영약빨 새끼."
"뭐?"
"직계에서 버림받은 주제에 운 좋게 먹은 영약으로 건방을 떨어?"
"성자께 받은 영약이 아니었다면 오늘 넌 뛰지도 못했겠지!"
"비겁한 놈!"
방계들의 표정이 먹잇감을 보는 맹수처럼 사나워졌다.
'뭔 저따위 이유로….'
어린애임을 증명하듯 덤비는 이유가 참으로 유치하고 초라했다.
'거기다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모양이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일인가.'
12살인 자신과 달리 방계의 나이는 13살이고, 덩치도 훨씬 컸다. 한참 전부터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티 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
"우리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교관님 말 들었잖아. 동기끼리 대화 좀 하자는 거지"
방계들이 주먹을 돌리며 다가왔다.
"맞는 말이네."
라온이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처맞는 말."
조금 전까지 그의 눈빛에 어려 있던 공포와 당황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오른쪽에 있던 바가지 머리가 주먹을 내질렀다.
어깨를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오른쪽 팔꿈치로 놈의 오른쪽 가슴을 후려쳤다.
"꺼어억!"
바가지 머리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꺽꺽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뭐, 뭐야!"
좌측에 있던 실눈이 앞으로 발을 차올렸다.
퍼어억!
왼손으로 올라오는 발을 쳐냈다.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명치를 찍었다.
"끄으윽…."
실눈의 아이가 명치를 부여잡은 채 자빠져 눈을 까뒤집었다.
빠악!
뒤에 있던 녀석이 주먹을 뭉쳐서 내리쳤다. 손바닥으로 흘려낸 뒤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허어업!"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너, 너희 뭐 하는 거야! 왜 저딴 놈에게 당하는 거냐고!"
홀로 남은 크레인이 뒷걸음질 쳤다. 말을 더듬으며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대화잖아. 네가 말한 동기간의 오붓한 몸의 대화."
라온은 크라인이 물러난 만큼 다가갔다.
"오지 마!"
크레인이 악을 내지르고서 왼 주먹을 뻗어왔다. 바로 오른 주먹이 따라간다. 제대로 단련한 연계 공격이었다.
다만 그걸 받는 사람은 평범한 12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뿌득!
라온의 손이 독사처럼 꼬여 올라갔다. 크레인의 왼팔을 휘감아서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끄아악!"
팔이 꺾인 고통에 크레인이 오른팔을 다 내지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이야."
왼손으로 수도를 세워 크레인의 우측 허리를 내리쳤다.
"컥! 커어억!"
크레인이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훌륭한 비명이다. 다만 아직 대가리를 깨지 않았다. 당장 부수거라.
'그놈의 대가리….'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네 명의 방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라온이 목을 돌리며 방계들에게 다가갔다.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흐윽!"
"으으으!"
"뭐, 무슨…."
방계들은 오한이 걸린 듯 몸을 떨었다. 그들의 표정엔 당황을 넘어선 공포가 어려 있었다.
"으으…."
크레인은 추위를 탄 것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이놈은 대체.'
직계인 버렌도,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직계들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기세였다. 라온에게는 오러 따위가 아닌, 어둑한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어, 어른들을 보는 것 같아….'
그것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 가문의 기둥이 된 어른들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서늘한 감각이었다.
"대화는 깊게 나눌수록 좋은 법이지."
"으어억!"
"제, 제발!"
라온이 웃으며 다가가자, 방계들은 사신을 만난 듯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퍽! 퍼어억!
그의 주먹질에 방계들이 비명도 뱉지 못하고 굼벵이처럼 몸을 구겼다.
-시원하게 잘 패는군. 처음으로 네놈이 마음에 든다.
'그거 고맙네.'
라온은 라스가 감탄할 정도로 방계들을 두들겨 팼다. 그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고통이 가장 심할 곳만 골라서.
"끄흡!"
"으어어억…."
방계들은 이제 라온의 눈도 쳐다보지 못했다. 뭍에 나온 새우처럼 몸을 움츠릴 뿐이다.
"제,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으으윽!"
라온은 방계들이 자신의 발끝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교육한 뒤 일어섰다.
"오늘 우리가 한 건 동기간의 대화다. 맞지?"
"에, 예!"
"그, 그렇습니다!"
"동기간의 대화를 어디 가서 털어놓진 않겠지?"
"다, 당연히!"
"물론입니다!"
그만 맞고 싶었던 크레인과 방계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를 끝내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마, 마무리?"
"그게 무슨 소리인지…."
"너희를 자극해서 내게 보낸 놈은 누구지? 버렌인가?"
"어…."
"예? 그, 그건 아니고요."
방계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버, 버렌 님은 지시를 내린 적이 어, 없으십니다."
"예.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셨죠. 저희가 그냥…."
"그래?"
라온이 픽 웃었다. 다급한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니다. 정말 버렌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아예 썩진 않았군.'
버렌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입이 험한 건 분명하지만, 구제불능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내일도 나랑 대화하기 싫으면 알아서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예!"
"물론입니다!"
"그, 그림자도 밟지 않겠습니다!"
라온은 방계들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골목을 나가려고 할 때 알림음이 울렸다.
띵!
* * *
턱.
라온과 방계들이 떠난 골목 구석으로 리메르가 내려섰다.
"흐음!"
그는 빌빌대며 떠나가는 방계들을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걸 보게 되었군.'
평소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아주 좋은 구경을 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야.'
오늘 본 라온은 글렌과 실비아에게 들었던 불쌍한 환자의 모습과는 달랐다.
'천재인가?'
라온은 무학을 배운 적이 없다.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적도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준 움직임은 그와 달랐다.
첫 번째 주먹을 최소한의 거리로 회피한 뒤 바로 상대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적이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급소를 쳐서 단숨에 끝내버렸다. 투박한 면은 있지만, 처음 싸운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주먹질이었다.
정신력만 대단할 줄 알았는데, 무학에 대한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피는 어디 가지 않는군.'
리메르는 방계들을 후려 팬 뒤 역으로 협박까지 하는 라온의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한때 세상이 좁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최강이라 생각할 때 만난 글렌도 저랬다. 평범해 보였지만 나서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인간을 무시하던 자신이 감명받아 따를 정도였으니,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방계들의 말을 역이용해서 협박하는 라온의 모습은 더더욱 글렌과 닮아 있었다.
"최고의 재능들 사이에 껴 있는 알 수 없는 재능이라…."
리메르가 피아노를 치듯이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심장이 뛰는군."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꼬여 올라갔다.
* * *
라온은 기숙사 앞에서 대기하던 교관이 내어준 열쇠 번호대로 405호실로 들어갔다.
별관에 있던 자신의 방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큼지막한 개인실이었다. 침대는 푹신해 보였고, 연공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럼.'
방 구경은 간단하게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금 전에 보았던 메시지를 불러왔다.
[<분노>가 당신의 행동에 만족했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만족했다는 내용과 함께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런 방식으로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건가?'
라스의 견제를 버틴 것만이 아니라, 만족시켜도 능력치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다만.
[<분노>가 악을 내지릅니다.]
-착각이다! 본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모자라! 놈들의 목이라도 따야 만족한단 말이다!
라스가 난리를 부리는 걸 보니, 본인과 상관없이 전해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전해지는 저 능력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추가로 오르는 능력치가 어디서 왔는지는 라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도 모르는 건가? 네 능력이라면서 아는 게 없네."
-네놈이 본왕의 것을 가져가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어쨌든 모르는 건 맞잖아."
-끄으윽….
라스는 아까 기분 좋았던 것이 모두 사라진 듯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좋다. 알아보고 돌아오마. 기다리고 있어라.
라스는 그 말과 함께 존재감을 감췄다. 팔찌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혼이 어디론가로 날아간 것 같았다. 손을 붕붕 휘둘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랜만에 조용하네."
라온이 손을 내렸다. 라스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씻을 준비를 하고, 4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목욕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보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네.'
손목에 걸린 꽃팔찌를 보며 픽 웃었다. 인정을 받거나, 방해를 견디는 걸로 능력치를 주다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겐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어서 라스에게 질 일도 없다. 여러모로 이득뿐이었다.
'돌아오기 전에 연공이나 할까.'
라온은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운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고오오오!
집중력을 끌어올린 뒤 연공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크으윽!
"벌써 왔나?"
혀를 차며 눈을 뜨자, 손목에 걸린 라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도둑놈!
"도둑?"
-네놈은 본왕이 본체에 남겨둔 힘을 훔치고 있었다!
'본체?'
그러고 보니, 라스는 어딘가의 왕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본왕(本王)이라 칭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았지만.
-마계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였다!
'그러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뿌드득!
라스에게서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답은 무엇이냐. 본왕에게서 힘을 얻어가는 똥파리 주제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란 말이다.
"어차피 네가 원해서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고마워할 필요가 있나?"
-끄으윽….
라스는 할 말이 없는지 신음만 흘렸다.
-건방짐 하나는 정말이지 하늘을 찌르는구나.
"딱히."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라스는 평생을 떠받들어 살아왔기 때문에 조금의 단호함도 견디지 못하는 것뿐이다.
-현재 본왕의 육체는 네놈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상태창의 능력이 네놈에게 전해진 것이지.
'흐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제안?"
-본왕과 내기를 하자. 네가 이긴다면 능력치를 넘겨주마. 다만 진다면 본왕의 분노를 가져가라.
라스의 목소리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분과 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분노>가 당신에게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제13화
"내기?"
라온의 눈매가 가늘게 내려갔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갑작스럽게 내기를 하자고 하니, 라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 본왕은 거짓말을 하지도, 널 속이지도 않는다. 직접 보여주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첫 번째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정식 수련생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
성공 시: 모든 능력치 +2, 임의선택 특성.
실패 시: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읽어보니,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내기를 해서 이긴다면 라스의 능력을 넘겨준다는 것 같았다.
"리메르가 말했던 정규수련생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라는 건가?"
-그렇다. 놈이 수석은 반드시 뽑는다고 했으니, 결과는 확실하게 나오겠지.
"음…."
다만 몇 가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임의선택 특성은 뭐지?"
-본왕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가 네게 주어질 거다. 물론 네 하등함에 맞춰 단계가 격하하겠지만.
"특성이라…."
라온은 기름을 부은 듯 푸른 불길로 타오르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번 스스로를 마계의 왕이라 칭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했다. 임의로 주더라도 쓸모 있는 능력이 나올 가능성은 높았다.
"하나 더. 이게 가장 중요한데 실패 시에 분노의 감정 10포인트가 생긴다는 건 뭐지?
-말 그대로다. 본왕이 가진 분노의 감정이 네게 생성된다.
"그 말은 네가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니다. 본왕이 네게 넘기는 분노의 감정은 티끌에 가깝다. 가랑비 수준이지. 다만….
라스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기대감이 녹아내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본왕의 분노를 받아들이다 보면 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언젠가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다.
"그걸 노리는 거였나?"
라온이 차가운 눈으로 라스를 내려보았다. 놈은 자신의 육체를 한 번에 빼앗는 것을 포기하고, 차근차근 강탈하려는 것 같았다.
-너도 상태창의 능력치에 따라, 네 육체가 변한다는 건 깨달았겠지. 이 내기를 받아들인다면 네 복수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
라스는 분노의 왕답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로 내기를 받아들이라 말했다. 처음으로 이놈에게 짜증이 일어났다.
'그런데 왜 이런 내기를 하지?'
본체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그 힘을 끌어와서 자신의 정신을 불복시키면 그만일 텐데, 왜 이런 귀찮은 수를 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했듯이 본왕의 본체 능력은 네게 연결되어 있다. 그 힘을 끌어 올 수만 있다면 당장에 네 몸을 가져갔겠지.
라스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꾸했다.
"거짓말한 건 없나?"
-본왕은 마계의 군주다.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 따윈 하지 않는다.
"후…."
라온이 가는 한숨을 뱉어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라스는 분명 미친놈이었지만, 질문에 대해서는 항상 솔직하게 답을 말했다.
"먹을 수밖에 없는 독 사과인가."
모든 능력치가 2나 올라가고 특별한 능력 하나가 생긴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반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물론 쌓이면 위험하겠지만.
"흐음…."
5 연무장엔 뛰어난 아이들이 많았다. 루난과 버렌은 말할 것도 없고, 방계와 추천생들도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아이라면 수석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자신은 환생자다.
시험이 무엇이든, 아이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전생의 삶을 이용한다면 절대 지지 않는다.
"좋다. 받아들이지."
-좋은 선택이다.
[<분노>와의 내기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라온은 떠오르는 메시지 사이로 라스와 눈을 마주쳤다. 놈은 웃고 있었다. 본인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담긴 미소였다.
그래서 똑같이 웃어주었다.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 * *
다음날 새벽.
버렌이 연무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뜨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의 머리는 곱게 빗어 올라갔고, 훈련복은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귀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음?"
볼 때마다 과하게 인사를 하던 크레인과 몇 명의 방계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왜 저러는 거지?'
왜 저러나 생각할 때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건드린 건가?'
버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라온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건드리는 건 위대한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거리다.
'한심한 것들.'
멍청이들에게 한마디 해주려고 다가가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라온이 들어왔다.
"음?"
그런데 너무 멀쩡했다. 한대도 얻어맞지 않은 것처럼 멍이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보다 오히려 더 당당해 보였다.
"흡!"
"힉!"
반대로 크레인을 비롯한 방계들은 라온을 보자마자, 꼬리를 만 개처럼 몸을 돌려 구석에 처박혔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버렌이 마른침을 삼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봐."
참지 못하고 덜덜 떠는 방계들에게 다가갔다.
"버, 버렌 님!"
크라인을 비롯한 방계들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떠는 거냐."
"그, 그게…."
"으음!"
방계들은 자신이 아닌 그 뒤에 서 있는 라온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드리운 건 확연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아니라, 라온을 두려워한다고?'
라온이 무엇을 했기에 이들이 이렇게 겁에 질렸단 말인가.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별일 아닙니다."
"헤헤!"
방계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역으로 얻어맞은 건가?'
그것 말고는 없다.
방계 녀석들은 라온을 교육하겠다고 찾아가 역으로 맞고 온 게 분명했다.
버렌은 등을 돌려 라온을 보았다. 그는 어제와 똑같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나름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코웃음이 나왔다. 재능도 없는 환자 놈이 힘을 숨겨봐야 티끌일 뿐이니까.
'발악해봐라.'
어차피 밑바닥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
* * *
라온은 목을 풀다가 어제 '대화'를 나눈 방계들과 눈을 마주쳤다.
"윽!"
"끕!"
방계들은 악마라도 마주한 듯 기괴한 신음을 흘리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
"뭐지?"
어제만 해도 대놓고 욕하던 방계들이 주춤하는 모습에 다른 임시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의문이 비쳤다.
라온은 코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버렌이다. 조롱 혹은 비웃음이 어린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버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훤히 보였다. 재능 없는 놈이 발악해봐야 의미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아주 큰 착각이지.'
불의 고리가 있는 자신에게 재능 따위는 의미가 없다. 임시 수련 기간이 끝날쯤에는 버렌 정도는 한참 추월해 있을 거다.
-저 뱀 눈깔이 짜증 나는구나. 뽑아버려라.
'또 시작이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함부로 눈깔을 돌리는 놈들은 모조리….
'좀 조용히 해.'
라온이 팔찌를 툭 쳤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스의 말이 끊겼다.
-이, 이놈이 진짜!
'말 진짜 많네.'
라스의 말을 무시하며 불의 고리를 운용하려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쿠웅!
삐걱거리는 문이 넘어 리메르와 교관들이 들어왔다.
교관들은 정확하게 오와 열을 맞췄지만, 리메르는 잔걸음을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잤나?"
리메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예!"
임시 수련생들은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너희가 평소 체력을 단련했다고 해도 나름 전력으로 달렸으니, 꽤 힘들었을 거다. 그러니까…."
리메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뛰어라. 전력으로!"
"네?"
"오, 오늘도요?"
"인간의 체력은 끝까지 사용하면 할수록 그 한계가 늘어난다. 전력으로 달려라. 내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아이들이 찡그리고 있을 때 어제처럼 두 사람이 먼저 땅을 박찼다. 루난과 버렌이었다.
파아앙!
두 사람은 어제와 달리 체력을 비축하지 않고, 가진 전력을 다해 뛰었다.
"으으!"
"또 달리기라니!"
오늘은 무언가를 배울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짜증을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또 뜀박질인가? 지루하다. 이따위 수련 없이도 강해질 수 있다. 너와 적의 피를 보면….
'난 좋은데.'
라온이 라스의 말을 끊었다. 폐에 새벽 공기를 담아내고서 땅을 박찼다.
-좋다고? 모래를 마시며 끝없이 달리는 게?
'달릴수록 강해질 수 있으니까.'
-멍청한! 네가 본왕에게 몸을 넘긴다면 1년 안에 최강자가 될 수도….
'그게 내가 아니면 아무 소용도 없지.'
라스의 헛소리를 한마디로 끊어내고 발을 놀렸다.
'어제보다 더 빨라졌어.'
민첩성과 체력이 올랐기 때문인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어제 훈련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던 방계와 몇몇 추천생들의 속도를 처음부터 따라갈 수 있었다.
"어?"
"으음…."
"라, 라온?"
중하위 그룹의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네가 왜 여기에 붙어 있냐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성장이 빨라.'
라온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나란히 달렸다. 불의 고리만이 아니라, 능력치가 있으니, 성장 속도가 가히 마법과도 같았다.
다만 전력으로 뛰고 있음에도 버렌과 루난은 점점 멀어져갔다. 확실히 저 둘의 재능과 수련양은 지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환경이 나쁘지 않아.'
전력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주고, 앞에는 따라잡아야 할 아이들이 많았다. 수련하기엔 최고의 환경이었다.
라온은 단상에서 졸고 있는 리메르를 보았다. 한없이 가벼운 듯한 남자지만, 수련 방법은 확실했다.
'당신의 수련. 잘 이용해주지.'
* * *
"그만!"
새벽부터 시작된 달리기는 태양이 뜨고 나서야 멈추었다.
"끄어억!"
"허어억!"
"하악!"
아이들은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연무장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어제와 달리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새벽 수련은 이걸로 끝이다."
"새, 새벽…."
"오전도 아니고, 새벽…."
새벽 수련이 끝났다는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새벽은 공기도 맑고, 마나를 더 쉽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너희가 정식 수련생이 된 이후에도 계속 달릴 테니,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리메르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끝없이 달리는 아이들을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그럼 아침 식사를 해라."
"이렇게 달렸는데, 무슨 식사…."
"바, 밥 못 먹어!"
"들어가겠냐고!"
아이들은 드러누운 채로 앓는 소리를 읊었다.
"힘들어도 먹는 게 좋다. 이후에도 수련이 계속되니까. 속이 비면 버티지 못해. 다만 이번에도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리메르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알아서 하라는 듯 사라졌다.
"이렇게 뛰고 바로 밥을 먹이다니…."
"머, 먹긴 먹어야겠어. 나중에 토하더라도."
아이들은 비틀거리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훈련이 거셌기 때문인지 식사는 기름지지 않고, 가벼웠다.
따뜻한 스프와 부드러운 빵, 담백한 고기와 몇 가지 채소가 전부였다.
"음식 한 번 처참하군."
"그래도 이거면 먹을 수는 있겠어."
방계의 아이들은 식판에 든 음식을 가만히 보고 있는 라온을 보았다.
"저기 봐라."
"안 먹고 있네."
"별관에서 귀하게 크셨는데, 저런 게 들어가겠냐."
"하긴 서열은 최하위면서 환자라 대우만 받았을 테니까."
아이들은 낄낄대며 라온을 비꼬았지만, 라온은 이번에도 그들의 예측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을 줘?'
훈련이 끝났다면 모를까. 훈련 중에 식사를 받은 적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잡초를 뜯어 먹든, 짐승을 사냥하든 직접 해결했기 때문에 밥을 주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여기 정말 최곤데?'
제14화
라온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더럽게 맛없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이런 쓰레기 음식이 나왔다면 셰프의 머리통을 뭉개버렸을 것이다.
'어? 맛을 느꼈어?'
-간접적이지만, 본왕은 네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특히 미각에 치중되어 있지.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미식가로 이름이 높아서….
'말 더럽게 많네. 미각이 공유되어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면 되는 걸 가지고.'
-입 다물어라! 본왕은 과묵하기로 이름 높은… 윽!
'소화 안 되니까. 좀 조용히 해.'
라온은 팔찌를 툭 쳐서 라스의 입을 막고, 단상 위를 보았다.
리메르가 낮잠을 자듯 단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동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었다.
-참으로 꼴 보기 싫은 놈이로다. 저 뾰족한 귀를 뽑아버리고 싶다.
라스는 리메르만 보면 화가 솟구치는지 입에서 냉기를 내뿜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무력을 지녔지만, 성격이 가볍다 못해 경박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리메르의 모습을 보니, 그 정보는 무섭도록 정확했다.
'다만 빈틈은 없어.'
저렇게 퍼질러 자고 있어도 그에게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은퇴했다고 해도 한때 마스터였던 무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모양이다.
-본왕이 네 몸을 먹어 치우는 순간 저 귀부터 뽑겠다.
'그러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으하함!"
리메르는 임시 수련생들이 전부 모이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일어나서 느릿하게 기지개를 폈다.
"밥은 잘 먹었나?"
"예."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대답은 새벽보다 축 늘어졌다.
"그럼 바로 다음 훈련을 시작한다."
리메르는 씩 웃었다. 그의 시선이 연무장 한편에 놓인 목검을 향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검은 됐고, 내가 하는 자세를 따라 해라."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놀리듯이 목검이 아니라,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굽혔다.
"거, 검을 배우는 게 아닙니까?"
방계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외쳤다.
"아닌데?"
"저희는 검을 배울 줄 알고…."
"맞습니다. 광검께선 검으로 이름 높으신데 왜…."
"검? 검 좋지. 근데 너희는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뛸 수 있나?"
리메르의 입꼬리가 꼬여서 올라갔다. 시원하게 웃고 있지만, 오싹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체력도, 정신력도, 자세도 갖춰지지 않은 너희가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을까?"
"아…."
"매번 말하지만, 내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책임도 본인이 지면 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연무장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다른 수련을 하고 싶은 사람은 우측으로 빠지도록."
물론 빠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그 자리에 서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후 허벅지가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무릎을 굽혀라."
"예!"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그 자세를 따라 했다.
"이 자세를 마보라고 한다. 말에 타는 자세라는 뜻이고, 검, 도, 창, 권. 모든 무학의 기본이 되는 자세지. 지금부터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마보를 유지해라."
"예!"
아이들은 우렁차게 외치고서 팔을 올렸다. 기본자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못 따라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런 품위 없는 자세로 육체를 단련하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군.
'넌 그런 인간의 몸조차 뺏지 못했고.'
-끄윽, 그건 다른 경우….
'나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
라온은 꽃팔찌를 치고, 눈을 감았다.
'중요한 시간이야.'
불의 고리를 이용하면 이런 기본 수련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다른 아이들과 얻는 게 달랐다.
"그럼 난 좀 잘게."
리메르는 다시 드러누워서 졸기 시작했고, 마보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끄으응…."
"으윽!"
"이,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건데!"
아이들은 지진이 난 것처럼 사지를 벌벌 떨었다. 마보가 기본자세라곤 해도 이렇게 오랜 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루난과 버렌을 비롯한 상위 그룹의 아이들 그리고 라온은 정자세를 유지했다.
"저, 저놈 대체 뭐야."
"어떻게 이걸 버틸 수 있냐고!"
"체, 체질이 최악이라며!"
"분명 환자라고 들었는데…."
라온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정확한 자세만큼은 연무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위였다.
"끄아아아!"
"지, 질 수 없어."
"저놈이 저러고 버티는데 어떻게 멈추냐고!"
마보를 풀고 포기하려던 아이들은 하위 그룹의 라온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자세를 유지했다.
다만 이번에도 그들의 생각과 달리 라온은 여유로운 상태였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전생에선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허벅지와 등에 돌을 매고 마보를 섰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훈련 정도야 가뿐했다.
물론 지친 육체 위로 퍼지는 냉기의 고통은 지독했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이건 더 강해질 기회였다.
우우웅.
라온은 마보를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서 퍼져나가는 냉기를 육체로 받아들였다.
많은 고통을 준 만큼 상당한 양의 냉기가 흡수되었고, 불의 고리의 성취가 또 한 번 높아졌다.
이대로라면 라스와의 내기도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놈은 모르겠지만.
고오오오.
라온이 마보의 수련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단상 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정신을 차려보니, 리메르가 일어서서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은 주저앉아서 허벅지를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고 있었다.
-본 왕의 말을 언제까지 무시하는 거냐!
'미안. 못 들었어.
-이, 이 하찮은 놈이 정말….
라스는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던지 이제야 반응하는 자신을 보고 욕을 내뱉었다.
"후욱…."
라온은 라스가 뭘 하든 말든 상쾌한 호흡을 하며 허벅지와 허리에 뭉친 근육을 풀었다.
띵!
[자신의 체력을 넘어서는 극한의 수련을 완료하셨습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이번에도 체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부들거리는 허벅지에 활력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허리를 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버틴 녀석도, 포기한 녀석도 있다."
리메르는 끝까지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난 지시를 내릴 뿐 너희의 훈련에 직접 관여하진 않는다. 스스로 한계를 넘어라. 할 만큼 했다고 말하는 정신을 후려쳐서라도 버텨야 6개월 후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을 거다."
그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이 말도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포기하든, 끝까지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리메르는 내일 훈련을 위해 허벅지를 풀어주라고 한 뒤 사라졌다.
-자연의 신을 믿는 뾰족귀 주제에 정신론을 외치다니, 어처구니가 없도다. 정신력 따위는 압도적인 힘 앞에 무너지거늘.
'아닌데.'
-뭐가 아니라는 게냐.
'정신력은 중요하다고.'
라온은 다리를 풀어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넌 진정한 힘을 느껴본 적이 없는 하룻강아지라 그렇다. 본왕의 힘을 느낀다면 당장 경배하게 될….
'난 정신력으로 네 공격을 버텼는데?'
-보, 본왕은 아직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
'난 어린아이일 뿐인데?'
-그, 그건….
라스의 목소리가 젖은 수건처럼 축 가라앉았다.
'정신력이 의미 없을 리가 없지.'
정신력과 체력은 근육과도 같다. 한계가 있지만,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위기 상황을 겪었지만,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발휘하여 살아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가볼까.'
라온은 허벅지와 엉덩이의 근육을 풀어준 뒤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갔다.
단련장 안에는 근력과 민첩성을 올릴 수 있는 단련 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또 수련이냐?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오징어를 쥐어짜듯 육체와 정신력을 한계까지 몰아내야 능력치가 오른다.
자신에게 추가 훈련은 지루하거나, 힘든 일이 아니라, 기대감 가득한 순간이었다.
라온은 맨몸운동인 팔굽혀펴기와 플랭크를 비롯한 기본적인 단련부터 시작했다.
-정말이지 답답하도다. 나무에 매달린 애벌레를 보는 듯해.
'나뭇가지를 기는 애벌레도 언젠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법이지.'
-네가 나비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본왕에게 몸을 넘기는 방법뿐이니라.
'그건 나비가 아니라, 독을 가진 나방이지. 꿈 깨.'
손을 휘휘 젓고서 다시 팔을 굽혔다. 단순히 많은 횟수가 아니라, 근육에 자극이 되도록 팔을 느리게 굽혔다가 폈다.
가슴 근육이 끊어질 듯 아렸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반가웠다. 지금의 통증이 훗날의 능력치와 체력이 되어줄 테니까.
팔굽혀펴기 이후에 복부 단련을 하고 있을 때 단련장으로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을 힐끔 쳐다보고서 각자 떨어져 단련을 시작했다.
루난과 버렌도 들어와서 기구들을 둘러보았다.
루난은 홀로 떨어져서 기구를 잡았고, 버렌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목검이 놓인 곳으로 가서 목검을 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우웅!
평소 버렌을 따르는 방계들은 그를 따라 목검을 잡고 각자 배웠던 검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저놈은 검을 잡았다.
'그러네.'
-넌 잡지 않는 건가?
'지금은 필요 없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 민첩성이다.
거기다 버렌을 포함한 아이들의 검술 실력은 걸음마 수준도 되지 않았다. 어설픈 실력으로 지도자 없이 검술을 수련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라온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지루하면서도, 힘든 단련을 계속했다. 내일은 더 많은 발전을 이루길 바라면서.
* * *
루난 슬리온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본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너무도 큰 실망을 하게 된 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시선을 끄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건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렸던 엘프 리메르도, 남들이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버렌 지그하르트도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직계에서 쫓겨나, 방계가 된 실비아의 아들인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왜 눈이 가는 거지?'
처음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는 것도, 그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냉기 때문인가.'
라온의 마나 회로에는 지독한 냉기가 맴돌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능력인 서리가 그의 냉기에 친숙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네.'
이유를 안 루난은 이제 그에게 관심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장이 빨라.'
라온의 성장 속도는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났다.
한 달 전 알현실에서 봤을 땐 근육 하나 없이 바짝 말랐지만, 지금은 약간이나마 근육이 붙은 상태였다.
'거기다.'
어제 최하위권이었던 그는 오늘 중하위권 그룹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하늘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자신도 저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건 무리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다.
"흡!"
루난은 60kg짜리 기구를 가뿐하게 들어 올리면서 힐끔힐끔 라온을 살폈다.
"정말 이상해."
제15화
라온은 정규 훈련을 끝낸 뒤 바로 실내 수련장으로 향했다.
다른 아이들은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었지만, 그는 가볍게 숨을 뱉어내고 바로 가슴 근육을 단련하는 기구에 앉았다.
'괜히 전설로 내려오는 연공법이 아니야.'
몸은 지친 상태였지만, 불의 고리가 심장을 휘돌며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시켜주었다.
체력을 끝까지 쥐어짜서 훈련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전력으로 움직이게 만들다니, 대륙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후욱…."
라온은 어제보다 무게를 5kg 높게 맞추고 기구를 들어 올렸다. 대흉근이 제대로 자극받을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이고, 가동범위는 최대한으로 늘렸다.
탁.
여섯 세트를 끝내고 일어났을 때 옆 기구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평소 주변에 오는 사람은 배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니는 요상한 녹색 머리뿐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난?'
옆 기구에 앉은 사람은 긴 은발을 쓸어내리는 루난 슬리온이었다.
루난은 라온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를 설정하고서 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그녀가 기구를 들어 올리는 자세는 라온과 거의 흡사했다. 횟수나, 무게가 아니라, 근육의 자극에 신경을 썼다.
-저건 무엇이냐.
'나도 몰라'
라온은 루난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근육에 세밀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다른 운동 기구에 앉았다.
"흐읍!"
무게를 조절한 뒤 기구를 들어 올렸다. 최대한의 무게 이상을 치면서 불의 고리를 돌렸다.
"후욱!"
원래라면 현재 무게에서 10kg을 빼야 하지만, 불의 고리 덕분에 지금의 무게를 들어 올리면서 더 많은 횟수를 시행할 수 있었다.
팔과 가슴이 떨릴 정도로 운동한 후 기구를 내려놓았을 때 또 옆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루난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설정한 뒤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래?'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수련생은커녕 리메르에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루난이 왜 자신을 따라 같은 자세로 기구를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착각인가?'
생각해보면 큰 근육 다음에 작은 근육을 단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저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났다.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어깨 단련용 기구로 향했다.
끼이익!
무게를 맞추고 어깨의 자극을 느끼며 기구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한 세트를 끝냈을 때 앞으로 루난이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다가 옆자리에 앉아서 무게를 조절했다. 이번에도 더 무거운 무게였다.
"흐읍!"
그리고선 앞만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저런 도발을 받고서도 가만히 있다니!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꼬리를 말 셈이냐.
'도발이라….'
라온이 고개를 돌려 루난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듯 앞만 보면서 기구를 사용했다.
'무슨 생각이지?'
처음과 두 번째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 운동까지 쫓아오는 걸 보면 따라오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데, 그 빛은 맹해서 의도를 모르겠다.
-모른다고? 너보다 내가 낫다고 시비를 걸고 있지 않느냐. 당장 면상에 주먹을 날려라!
라스에겐 애고, 어른이고, 여자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이름답게 모든 것에 분노했다.
'좀 가만히 좀 있어.'
라온은 라스의 분노를 무시하고 일어서서 스쿼트를 시작했다. 역시나 루난은 옆에 따라와서 더 무거운 무게로 허벅지를 굽혔다.
"뭐, 뭐지?"
"왜 저 둘이 붙어 있는 거야?"
"루난 님이 왜 저 떨거지를 신경 쓰는 거냐?"
단련장에서 훈련하던 아이들은 라온의 옆에 붙어서 훈련하는 루난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뿌득.
검술 수련을 끝낸 뒤 방계들과 함께 단련장으로 들어온 버렌은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으음!"
"루난이 왜 저기에…."
방계들은 라온의 옆에서 단련하는 루난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흐음."
라온은 옆에서 모두의 관심을 받는 루난을 보았다.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새하얀 피부. 이목구비는 얇으면서도 뚜렷하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빛은 나사가 빠진 듯 맹하게 보인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루난이 한 세트를 끝냈을 때 다가가서 물었다.
"...."
그 말을 들은 루난은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이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게를 더 늘려서.
'나도 모르겠다.'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기구에서 일어섰다. 곧 질릴 테니, 그냥 놔두고 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루틴이 변해서 무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루난이 보라색 눈동자로 자신의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
루난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과 눈만 마주쳤다. 낮잠 한숨 때린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하."
라온은 낮게 숨을 뱉고서 다른 운동 기구를 향해 다가갔다. 루난은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라가서 똑같은 기구를 사용했다.
* * *
루난 슬리온이 라온 지그하르트를 관찰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음."
그녀는 실내 단련장에 들어오자마자 라온을 찾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가장 빠르게 단련실에 들어가서 기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제보다 무게가 더 올라갔어.'
라온이 들어 올리는 기구의 무게는 어제보다 5kg이 늘어났다. 사실 그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면 무게를 늘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무게가 하루마다 늘어난다면? 그건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대부분은 모르겠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는 지난 일주일 동안 10kg가 넘는 무게를 올렸다. 아이의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수치다.
'환자라고 했는데….'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약했다. 하지만 버티고 견디는 건 이 연무장의 그 누구보다 끈질겼다.
'자세 때문일까?'
라온이 기구를 들어 올리는 자세는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다. 특이한 자세 때문에 저런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정한 루난은 가슴 운동을 하는 라온의 옆 기구에 앉았다. 그리고서 라온이 보여주었던 자세대로 기구를 들어 올렸다.
'음.'
딱히 별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근육이 조금 더 자극되는 정도일까.
'별거 없네.'
딱히 큰 의미 없다는 생각에 원래 자세대로 무게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어?'
라온에게서 풍겨오는 뭔지 모를 시원한 향기를 들이마시자, 들고 있던 기구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뭐지?'
근력과 민첩성이 단숨에 늘어난 듯한 기분. 원래라면 힘겹게 들어야 할 무게가 가뿐해졌다.
다만 잠시간 자신을 바라보던 라온이 떠나가자 그 특이한 감각이 바로 사라졌다.
"아…."
루난은 아쉬운 얼굴로 다음 기구로 향한 라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혹시.'
루난은 라온을 따라 바로 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평소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설정한 뒤 들어 올렸다.
"으윽…."
무리였던지 기구를 들어 올리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라온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기운에 다시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진짜였어.'
평소에 들 수 있는 무게보다 10kg은 무거운 기구를 들다니, 기분만이 아니다. 정말 능력이 강화된 것 같았다.
"흐읍!"
능력 이상의 무게를 치고 있지만, 어깨와 팔에 조금의 부담도 없었다.
기분 좋게 운동을 끝내고 나니 앞에 라온이 서 있었다.
"할 말 있어?"
금발적안. 지그하르트의 증거를 그대로 담은 소년이 물었다.
"아니."
루난은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잠깐 자신을 쳐다보다가 다음 기구로 향했다.
'계속 붙어 다녀봐야겠어.'
루난은 고양이처럼 긴 눈을 빛내며 라온의 뒤를 쫓았다.
더 무거운 기구로 단련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가 더 끌렸다.
* * *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본관을 뒤에 솟구친 산을 올랐다.
"쯧."
산 중턱에 놓인 평평한 바위로 올라가려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제 낮잠 바위에 매일같이 오시다니, 손주가 어지간히 걱정되시는 모양이네요."
그의 말에 바위 위에서 한 자루 검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 글렌 지그하르트가 내려왔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흥."
리메르는 콧방귀를 끼고서 바위에 등을 기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에휴. 그냥 물어보면 되지. 꼭 그렇게 무게를 잡으셔야 합니까?"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고 글렌이 앉아 있는 바위로 뛰어올랐다.
"아이들은 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빡세게 단련하고 있죠."
"의외?"
"훈련을 아이들의 자율에 맡겼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사실 12살에서 13살인 아이들의 의지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주일만 지나도 대부분 설렁설렁 수련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처음 이 훈련을 결정했을 때 160명 중 20명만 뽑을 생각으로 결정했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의 손자 덕분에요."
"손자? 버렌말이냐?"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좀 하지 마세요. 라온 말입니다."
"난 연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네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 진짜."
리메르가 붉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손주가 걱정되어서 기다리던 노인네가 아무것도 모른 척하는 게 답답했다.
"그 녀석. 가주님이나, 실비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글렌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는 확연하게 변했다.
"육체도, 정신도 약하니, 다치지 않도록 빠르게 떨어지기를 바라셨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다. 차별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
"어쨌든 저도 라온을 최대한 빨리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리메르의 푸른 눈동자에 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 아이 괴물이었어요. 정신력이 일반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수십 혹은 수백 번의 전장을 다녀온 무인보다 뛰어난 수준입니다."
라온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봐온 수많은 재능 중에서도 특별했다. 매일 아침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야 할 정도로.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라온은 160명 중 최하위권이었지만, 3주가 지난 지금 중위권에 안착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 라온이 사실 환자 아니라,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상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아이의 몸엔 지금도 지독한 냉기가 흐르고 있으니까."
요즘은 훈련 중에 라온에게만 시선이 간다. 그 아이는 정말 수련의 한순간, 한순간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요즘엔 라온만 따로 불러서 개인 훈련을 시켜볼까 고민이 될 정도입니다."
열심히 준비한 수련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임해주니, 라온에게 조금 더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인가?"
"녀석은 겨울나무처럼 몸에 서리가 올라와도 멈추질 않아요. 다른 녀석들도 그 모습에 자극받아서 더 열정적으로 수련하고 있죠. 5연무장의 자극제랄까요."
"흐음…."
글렌이 무표정으로 턱을 긁적였지만, 입꼬리가 옅게 올라서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제 예상과 다르게도 합격할 아이들의 숫자가 상당할 것 같습니다."
그는 귀찮게 되었다고 중얼거렸지만, 눈매는 웃고 있었다.
"라온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은 건가?"
글렌은 침묵하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음…."
리메르는 들리지 않게 침을 삼켰다.
'예상 이상이군.'
글렌이 라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따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막내딸에게 주지 못한 애정이 라온에게 옮겨 간 것 같았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무리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신기할 정도로 금방 회복되더군요."
"너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니까요. 제 눈을 피하는 건 대륙십천 빼고, 처음입니다."
리메르가 대답을 하며 턱을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의 잠재력이나, 상태를 누구보다 잘 봐왔지만, 라온은 예외다.
솔직히 말해서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오른 글렌보다 라온이 더 신기했다.
"리메르."
"예?"
"넌 라온의 담당 교관이 아니라,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이다. 라온만 생각하지 말고, 가문에 힘이 되어줄 아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가져라."
글렌은 위엄 가득한 말을 내뱉고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하."
리메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라온 이야기만 듣고 가면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래?"
제16화
거대한 검을 갈아 세운 듯한 예기를 뿜어내는 지그하르트의 가주전.
그 웅장한 저택의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는 옥좌에 앉아 눈매를 좁혔다.
'그러고 보니….'
넝마의 성자라는 이름을 얻은 돌팔이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있었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경우가 있다고 했었지.'
페드릭은 혹한의 저주라는 체질을 가진 아이 중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있다고 했었다.
'그 재능이 발현된 건가.'
그게 아니고선 바로 탈락하리라 생각했던 라온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리가 없었다.
"흐음…."
글렌이 탁한 숨을 뱉어냈다. 북방의 무신으로 떠받들어지는 그가 남 앞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실수였다. 너무도 큰.'
과거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을 때 사막의 모래처럼 감정이 메마른 적이 있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실비아에겐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혈육의 정을 주지 않았다. 아비가 아니라, 사육사처럼 할 일만 정해줬을 뿐이다.
아비의 정도, 어미의 사랑도, 형제간의 우애도 얻지 못한 막내는 실 달린 인형처럼 삐걱이며 살아가다가 외부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가문을 떠났다.
'그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지.'
실비아가 떠난 이유에 형제간의 이간질과 부하들의 하극상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실비아가 어찌 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더 강해져야겠다고, 가문을 더 크게 키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마의 벽을 넘어 다시 인간의 감정을 되찾고 나서야 깨달았다. 되돌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호위들을 보내 실비아와 뱃속의 라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위와 손녀딸은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핏물이 되었다.
'한심하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그하르트의 가주, 북패왕, 검의 제왕. 그 어떤 이름으로도 과거를 돌릴 수는 없었다.
실비아와의 감정의 골은 깊고도 깊었고, 그걸 회복하는 건 무리였다.
'라온.'
그렇기에 막내 손자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실비아와 라온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하여도.
똑똑.
또 한 번 다짐할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글렌은 지쳐 보였던 안색을 지우고, 차가운 위압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 * *
라온은 들뜬 숨을 가라앉히며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몸이 풀린 기분이네.'
2주 동안 꾸준히 단련한 덕분에 대부분의 훈련에서 중간그룹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지금 속도로 성장한다면 시험 전에 버렌이나 루나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시작해볼까.'
어깨 단련용 기구를 들자마자, 왼쪽 자리로 루난이 다가왔다.
"읍!"
그녀는 침이라도 질질 흘릴 것 같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벙한 얼굴의 계집이 또 왔군.
'놔둬.'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무시하고 단련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번엔 오른쪽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나요?"
배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니는 동그란 얼굴의 수련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유일하게 말을 거는 녀석이다.
'도리안이라고 했었지.'
매번 리메르의 지시에 빌빌대면서 겁을 집어먹지만, 끈기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녀석이다.
"드실래요?"
도리안은 이번에도 배 주머니에서 동그란 과자를 꺼내 내밀었다.
"어…."
얼떨결에 과자를 받았다. 다시 돌려주려고 할 때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루난의 보라색 눈동자가 설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맹한 계집이 저런 눈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과자를 좋아했던가.'
그녀의 시선은 과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먹을래?"
"...."
라온은 손에 든 과자를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야생고양이처럼 손을 까딱이며 고민하다가 과자를 훌쩍 받아 갔다.
"…고마워."
그녀는 라온과 도리안에게 차례로 고맙고 한 뒤 토끼가 풀잎을 뜯듯이 과자를 베어 물었다.
과자가 맛난지 굳은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가져갈 땐 고양이, 먹을 때는 토끼, 평소에는 맹한 강아지 같다.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다.
"저기 라온 님?"
도리안이 나머지 과자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렸다.
"저도 옆에서 수련해도 되나요?"
그는 자세를 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상관없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빠른 성장은 불의 고리와 전생의 경험 덕분이다. 옆에서 자세를 따라 하는 정도는 상관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없고."
도리안의 인사에 손을 저어주고, 다시 단련에 집중했다.
끼익!
최대로 집중하여 근육을 자극하고 있을 때 도리안에게서 같은 속도와 범위로 기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난이 있는 왼쪽도 마찬가지였다.
'별난 놈들이군.'
-본왕은 저 녹색 너구리 같은 놈이 마음에 든다.
'왜?'
-본왕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더냐. 깨어난 이후 처음 받아보는 경배이니라.
'....'
라온은 그거 너한테 한 거 아니라고 하려다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애가 셋이야.'
* * *
5주 차.
라온은 새벽 달리기에서 중위 그룹을 추월하여 중상위 그룹에 합류했다.
그날 저녁 자율 훈련을 할 때 그의 옆에는 루난과 도리안 말고도 한 명이 더 늘어났다.
10주 차.
라온은 중상위 그룹의 가장 앞에서 달렸고, 그날 저녁 또 한 명의 수련생이 그 옆에 붙었다.
15주 차.
라온이 최상위 그룹에 들어갔다. 그의 옆에 붙은 6명의 성적도 수직으로 상승했다.
* * *
제5연무장의 임시 훈련이 시작된 지 4달이 지났다.
리메르가 지시하는 훈련은 점차 다양해졌고, 그 난이도 역시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새벽부터 시작된 훈련은 저녁까지 이어져서 체력이 출중했던 상위 그룹의 아이들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을 드러났다.
물론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리메르가 지시를 내리는 새벽부터 오후까지의 훈련도, 저녁부터 행해지는 개인 단련도 전부 자율이었다.
훈련 중에 힘들다고 포기해도, 자율 훈련을 하지 않아도 리메르와 교관들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자세나, 지도를 부탁하면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그뿐이다. 더 열심히 하라던가, 꾸준히 하라는 말도 없었다. 교관이 아니라, 관찰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자율로 맡기는 훈련 방식이라니, 혁신적이라면 혁신적이었다.
실제로 실력에 자신 있는 방계들이나, 추천생들은 훈련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자율 훈련은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런 수준 낮은 훈련 따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정식 수련생이 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아이들의 행동이 바뀌는 계기가 하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좋지 않은 의미로 유명한 그가 5 연무장에 좋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 훈련이 시작되었을 때 라온의 체력은 하위권이었다.
첫 번째 달리기에서 끝까지 달렸을 뿐 중위권에는 닿지 못했고, 곧 죽을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었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체력 좋은 아이들도 떨어져 나가는 훈련을 끝까지 이겨냈고, 자율 훈련 역시 가장 먼저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해냈다.
라온은 헐떡거리는 걸로 모자라, 하얀 김을 뿜어내면서도 끝까지 육체를 단련했고, 다음 날 바로 단련의 결과를 바로 보여주었다.
체력도, 근력도, 민첩성도 눈에 띄게 성장해서 하위권이었던 그의 순위는 이제 160명 중 10위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직접 봐온 아이들은 경악했다.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 추천생들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훈련했고, 자율 훈련도 무조건 참여했다.
그저 놀림감으로만 생각했던 라온을 라이벌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직계 버렌과 그를 따르는 방계의 아이들은 극한의 체력 단련 따윈 필요 없다고 무시하면서, 가문에서 배워온 검과 권을 수련했다.
그렇게 각자가 최선을 다한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 * *
"후욱!"
라온은 새벽 뜀박질을 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간이 지나며 체력과 민첩성이 많이 늘어났지만, 항상 전력으로 뛰고 있으니 지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달라진 건 있지.'
첫 달리기에서 앞을 막고 있던 수많은 아이의 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상승한 능력치와 불의 고리 덕분에 자신의 앞에 있는 수련생은 이제 10명도 남지 않았다.
-한심하구나. 한 달이 지났는데도, 네 앞에 저리 많은 버러지들이 있다니.
'이렇게 빨리 발전한 게 대단한 거다.'
라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불평불만만 많아서 매일같이 몸을 넘기라고 아우성이다.
'금방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저 둘은 다르군,'
라온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서 달리는 루난과 버렌을 향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아이들과 수준이 달랐다.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정신력도 단단했으며, 가문의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구석이 있지만, 이제 12살인 아이들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늘은 조금 더 뛰어볼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최대한으로 운용하며 땅을 박찼다.
폐가 종잇장처럼 찢어져서 흩어질 것 같았지만, 불의 고리를 버팀목 삼아 계속 달렸다.
"뭐, 뭐야!"
"라온 지그하르트!"
"이런!"
순식간에 추월당한 최상위 그룹의 아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후우웅!
뒤에서 들려온 바람 소리에 버렌과 루난도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
"...."
버렌은 나무껍질처럼 인상을 찡그렸고, 루난은 보석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동자를 반짝였다.
두 사람은 얼마든지 따라오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 다르지만.'
라온이 두 사람의 등을 보며 가늘게 입매를 올렸다.
'남은 시간이면 충분하겠어.'
지금 성장 속도로 볼 때 시험을 볼 시기가 되면 저 둘의 체력과 근력, 민첩성 모두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저쪽에서 오러를 사용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일이지만.
'오러라….'
루난과 버렌을 비롯한 직계와 방계, 봉신 가문의 아이들은 이미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불의 고리라는 천고의 단련법을 익히고 있지만, 오러는 한 톨도 없었다.
'익히긴 해야 하는데….'
오러를 익혀야 할 때가 되어가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전 것도 나쁘진 않아.'
전생에서 익혔던 그림자 오러 연공법도 꽤 좋은 연공법이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고, 은밀하며, 날카로워 암살과 대인 전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림자 오러 연공법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암살자가 아닌 무인으로 살기로 정한 이상 그 이상의 오러 연공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려면 공을 세워야겠지.'
지금까지 봐온 글렌 그리고 정보로 들었던 글렌은 똑같았다. 가문만을 생각하는 냉혈한. 그렇기에 상과 벌은 확실한 사람이다.
기초 훈련을 수석으로 졸업한다면 분명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것이다.
'다시 목표가 확실해졌군.'
실비아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좋은 연공법을 익히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무엇을 하는 게냐. 버러지들을 넘어선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저 둘을 잡아라. 본왕보다 앞에서 달리다니, 참을 수가 없도다.
라스의 분노가 요동치면서 가슴이 울컥거린다. 꾹 참고 달리니, 한참 뒤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자극을 견뎌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으음, 또!
라온은 짜증을 터트리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도 잘 이용하면서 말이야.'
* * *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자율 훈련할 녀석은 하고, 말 녀석은 말도록."
리메르는 오후 단련을 끝낸 뒤 거침없이 연무장을 떠났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러 간다고 중얼거렸다.
"후욱…."
버렌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짜증 어린 숨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리메르가 광검이라 불렸던 건 알고 있지만, 최근 그의 모습은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정규 수련 시간에도 드러누워서 대충 구경이나 했고, 자율 훈련에도 관심 없었다.
그런 주제에 정규수련생이 되는 시험을 치르겠다니, 엘프가 아니라, 날뛰기만 하는 메뚜기를 보는 것 같았다.
"버렌 님. 오늘 자율 수련은 안 하십니까?"
리메르의 뒤통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크레인과 방계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상당히 친해진 녀석들이었다.
"해야지."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목검을 잡았다.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딱딱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작하자."
"예!"
버렌과 방계의 아이들은 각자 떨어져서 이곳에 오기 전에 배웠던 검술을 수련했다.
버렌은 검술 수련에 빠져 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검을 내려놓았다.
'역시 검술 수련할 때가 가장 마음에 편해.'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주신 검술로 단련을 하자, 짜증 났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예!"
"수고하셨습니다."
버렌의 지시에 아이들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중 가장 어렸지만, 직계라는 위치와 절대적인 재능 덕분에 자연스럽게 리더의 위치에 올랐다.
"추가 수련을 할 사람은 따라오도록."
버렌은 목검을 내려놓고,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
라온은 기구로 근력 단련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루난과 몇몇 수련생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후우…."
버렌이 열기가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를 정말 화나게 만드는 건 리메르나, 교관들이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가문 서열 최하위 놈이 점점 더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저놈 옆에 붙는 거지?'
루난. 직계인 자신과 맞먹는 재능에, 봉신 가문 중 최강이라 불리는 슬리온의 딸이 라온에게 붙은 이유를 모르겠다.
'젠장.'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루난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라온만 따라다니는 모습에 속이 끓어 올랐다.
요즘에는 나름 괜찮게 본 추천생들도 라온의 옆에 모여 있어 더 짜증이 일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모자란 것들끼리 붙어 있을 뿐이니까요."
"최고라고 해도 봉신 가문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저렇게 모여서 뭘 하겠다고."
방계들이 라온과 루난을 보며 코웃음을 쳤지만, 버렌은 웃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뒤에 있는 방계들보다 루난이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확실하니까.
"쯧."
버렌은 혀를 차고서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하체를 단련하는 라온과 루난의 옆자리로 가서 두 사람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어 올렸다.
"오오!"
"역시 버렌 님!"
"어떻게 저런 무게를…."
방계만이 아니라, 수련장에 있는 모두가 탄성을 터트리고, 박수를 보냈다.
감탄과 경악이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버렌의 표정은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저놈들이!'
라온과 루난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단련만 계속했기 때문이다.
쿠우웅!
버렌이 기구를 거칠게 내려놓고 일어섰지만, 두 사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서로를 라이벌로 삼았는지 기구를 들어 올리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크으…."
버렌의 얼굴이 사과처럼 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고, 연무장을 나갔다.
'내가 압도적으로 수석을 차지해도 그딴 얼굴을 할 수 있는지 보자!'
제17화
라온은 세면을 마치고, 물기에 젖은 눈으로 햇살이 내려서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오늘인가."
6개월이 지나 5연무장의 수련생을 선발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원래라면 연무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달리고 있을 시간이지만, 시험 당일인 덕분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라스가 말을 걸어왔다.
"왜?"
-본왕과의 내기를 기억하고 있느냐.
"물론."
라온이 훈련복을 입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호구가 되어주겠다는데 그걸 잊을 리가 있겠는가.
-네 성장이 인간치고 빠름은 인정하지만, 그 둘을 따라잡지는 못했지. 본왕의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느냐.
라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3달 동안 뛰었음에도 루난과 버렌을 추월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시험은 다르다. 그들과 대련을 하든, 지금까지 단련한 체력을 보여주든 상관없다.
자신에겐 전생의 경험과 불의 고리가 있다면 시험이 무엇이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그렇게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다. 본왕이 네놈의 영육을 차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도다.
'그니까 그렇게 되면 말하라고.'
-그 자신감이 언제 꺼질지 기대하고 있으마.
'그럴 일은 없어.'
라온은 손을 휘휘 저었다.
'적과의 동거도 쉽진 않네.'
요즘엔 라스가 훈련 중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보다, 말이 많은 게 더 귀찮았다.
마계의 군주라는 놈이 왜 저렇게 말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물론 장점도 있지만.'
라스의 방해를 이겨낸 덕분에 꽤 많은 능력치를 얻었다. 고통이 좀 있긴 하지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여덟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근력 : 25
민첩성 : 24
체력 : 23
기력 : 15
감각 : 44
상태창의 수치만 오른 게 아니다. 실제 육체 능력도 크게 성장해서 예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끄음, 본왕의 상태창….
신음을 흘리는 라스와 달리,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로비로 나갔다.
-곧 죽을 얼굴들이로군.
'그러게.'
라스의 말대로 로비에 있는 아이들은 전장에 끌려가는 병사들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 시험 때문이겠지.'
리메르는 어떤 시험을 낼지, 시험의 난이도가 어떻게 될지, 얼마나 통과할지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통과할 수 있다고만 했으니, 아이들이 저렇게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도 환생자가 아니었거나, 불의 고리가 없었다면 저들과 같은 표정으로 침울하게 앉아 있었을 거다.
-전장에 서기 전부터 패배한 닭의 얼굴을 하다니, 한심하도다.
'쟤들은 어리잖아.'
라온은 음울한 분위기의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네놈도 어리지 않느냐.
'나는 달라.'
-흥. 인간들은 항상 본인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법이지.
'....'
라스의 도발에 답하지 않았다. 환생자라는 비밀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스르륵.
숙소 옆에 붙어 있는 5 연무장으로 걸어갈 때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질리지도 않고 오는군.
"흠…."
라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뒤를 돌았다. 은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보랏빛 눈동자의 여자아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루난."
루난 슬리온이었다. 그녀는 자율 훈련에 따라붙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숙소에서도 쫓아오고 있었다.
"할 말 있어?"
"없어."
루난이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뒷짐을 진 채로 어색하게 눈동자를 돌렸다.
"후."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완전히 돌렸다. 루난은 여전했다. 말없이 따라붙은 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훈련을 똑같이 따라 했다.
'왜 날 따라다니는지 원.'
실제로 보여주는 능력은 자신보다 버렌이 더 위다. 화려한 검술, 뛰어난 육체 능력에 나름 리더십도 있다.
하지만 루난은 그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자신만 쫓아다녔다. 먹이를 주고 난 뒤 따라붙는 골목의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근데 난 먹이도 주지 않았잖아.'
과자를 주긴 했지만, 그 주인은 도리안이다. 해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어미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따라오는 건지 모르겠다.
'특이한 녀석이야.'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녹색 머리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도, 도련님…."
루난 다음으로 자신의 옆에 붙은 도리안이었다. 그는 오한이 든 것처럼 손발을 바들바들 떨었다.
"넌 또 왜 그래. 어디 아파?"
"그, 그게 아닙니다. 오늘이 시험이지 않습니까. 걱정돼서 진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으으."
도리안의 눈 밑은 숯덩이를 바른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었다. 피곤이라는 단어 자체가 눈 아래에 박혀 있었다.
"너 정도면 충분할 텐데?"
라온이 도리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항상 덜덜 떨면서 겁을 먹지만, 재능과 끈기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제 능력을 발휘하면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험이 뭔지도 모르겠고, 전 무지하게 약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엑!"
도리안은 손톱을 씹으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헛구역질까지 한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버리지 중에 상 버러지다. 당장 저놈의 대가리를 부수거라.
'언제는 마음에 든다며.'
-본왕에게 겁쟁이는 필요 없도다.
"괜찮을 거다."
라온은 격려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서 도리안을 지나갔다. 그는 소심한 성격과 달리 토하면서도 훈련을 완수해왔다. 무슨 시험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리, 리메르 님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옥석을 고른다고 하셨으니, 저 같은 돌멩이는 바로 떨어질 겁니다."
"그럼 떨어지던가."
"엑! 라온 님!"
라온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타인이다. 필요 이상의 조언을 해줄 필요는 없었고, 녀석과 말을 하다 보니 그 우울함이 옮을 것 같았다.
"음."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옆에서 다가오는 버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과 루난, 도리안을 보고 눈에 불꽃을 피워냈다.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아."
라온이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어.'
전생에도 미친 놈이 많았는데, 이번 생도 별 차이 없는 것 같았다.
-저놈의 눈깔을 뽑아라.
'이놈까지 포함해서….'
* * *
"라온!"
"라온 도련님!"
라온이 연무장에 돌아가서 몸을 풀고 있을 때 우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헬렌?"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별관의 시녀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라온!"
실비아는 달려오자마자, 새가 알을 품듯이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세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되었잖아! 괜찮니? 아픈 곳은 없어?"
그녀의 가는 눈동자에 둥그런 눈물이 고였다. 다만 그녀의 말과 다르게 근육과 살이 쪘으면 쪘지, 마르진 않았다.
"아니, 엄마 난…."
"힘들었지! 정말 고생 많았어. 흡!"
6개월이 지났음에도 실비아는 여전했다. 자신의 말은 듣지 않고, 몸만을 걱정했다.
-어미 앞에서는 네놈도 애 같기는 하군.
'시끄러.'
라스는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며 클클 웃었다.
"도련님. 고생 많으셨어요."
헬렌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에 있던 시녀들도 대단하다고 말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시험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무슨."
라온이 얼굴을 긁적였다. 별것도 아닌 일을 칭찬하니, 민망해서 볼이 간지러웠다.
"6개월이나 버티신 거죠."
"그게 대단한 거예요!"
"맞아요. 대단한 일을 해내셨어요."
헬렌과 시녀들은 멈추지 않고 칭찬을 해왔다. 바로 탈락해서 돌아올 줄 알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라온은 얼굴을 비비는 실비아를 밀어내며 헬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시험은 보호자도 참관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습니다. 저희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오셨죠."
헬렌의 손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연무장 곳곳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근데 이 아이는…."
실비아는 라온의 뒤에 서 있는 루난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난은 실비아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얘도 참 대단하네.'
루난은 실비아와 헬렌 앞에서도 뒤를 따라다니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재능보다 저 성격이 더 놀랍다.
"루난!"
루난과 실비아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좌측에서 두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워 보이는 은발을 뒤로 넘긴 중년인이었다.
'로칸 슬리온.'
봉신 가문 슬리온의 가주이자, 루난의 아버지인 로칸 슬리온이었다.
-저 맹한 꼬마의 표정은 끝까지 변하질 않는구나.
라스의 말대로 루난의 눈빛은 아버지인 로칸을 6개월 만에 보고도 맹했다.
"아빠?"
"여기서 뭘 하는 게냐. 가자!"
로칸 슬리온은 자신과 실비아를 노려보고서 루난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많은 인간을 봐왔지만, 저건 참 특이하다.
'그러게.'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보고 있는 루난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루난이면 슬리온가의 막내지? 너랑 판별식 같이한."
"맞아."
"친구가 됐나 보네?"
실비아가 방긋 웃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려달라며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친구는 아니야."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가 아니라고? 그럼 무슨 사인데?"
"글쎄…."
솔직히 루난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친구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아들. 다가오는 사람들하고는 친하게 지내.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실비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적 없어."
다가오든, 말든 그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지 말고 나중에 별관에 한 번 데리고 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어우, 정말 죽겠… 어? 라온 도련님의 어머니십니까?"
적당히 넘어가려고 할 때 헛구역질을 하던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맞아. 넌 누구니?"
"도, 도리안이라고 합니다! 도련님께 많은 신세 지고 있습니다! 인사 박겠습니다!"
도리안은 정말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어머!"
"오,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이 헤벌쭉 웃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가 있다는 게 기쁜 것 같았다.
"라온 도련님이 왜 이렇게 잘 생겼나 했더니 어머님을 닮으셨군요. 정말 미인이십니다!"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꽃을 꺼내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겁먹었을 때는 한마디도 못 하더니, 이럴 때는 말도, 행동도 청산유수다.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호호, 고마워."
실비아가 꽃을 받으며 웃었다. 눈이 반달이 된 걸 보니, 정말 좋아하고 있었다.
"그만 가라."
"왜 그래."
라온이 도리안을 툭툭 쳐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도리안. 라온이 어떻게 지내는지 좀 말해줄 수 있니?"
"무, 물론입니다. 라온 도련님은 최하위 그룹에서 최상위 그룹으로 올라가 5 연무장의 역사를 새로 쓰신 분입니다. 보는 사람이 감동하게…."
"후우!"
시험의 긴장을 수다로 풀 생각인지 도리안의 말이 끊기질 않았다. 시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해졌다.
-말이 더럽게 많은 인간이로다.
너만큼은 아니야.
"…그렇게 저와 하위 그룹의 추천생들은 라온 도련님이 자세를 알려주신 덕분에 중상위 그룹으로 올라올 수 있었죠. 다, 다른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급해서!"
도리안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세상에나…."
"라온 도련님!"
헬렌과 시녀들은 감격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조금만 더 들었으면 눈물을 흘렸을 기세였다.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것도 좋지만, 넌 괜찮아? 아직 추위를 많이 타잖아. 숙소는 따뜻해? 아픈 곳은 없어?"
하지만 실비아의 눈동자에는 감동보다 걱정이 더 드러났다. 정말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건강해."
라온이 씩 웃으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도 실비아의 걱정 어린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힘들면 언제라도 그만둬도 돼.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을 따라야 해. 알겠지?"
"응."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의 얼굴에 드러나던 걱정이 조금 가셨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들의 몸만 걱정하는 어머니였다.
"근데 헬렌."
살짝 고개를 튼 실비아의 눈매에 작은 장난기가 돋아났다.
"네. 실비아님."
"라온 말이야. 못 본 사이에 더 귀여워진 것 같지 않아?"
"물론입니다. 누구 아들인데요."
"그렇지! 라온! 엄마가 한 번만 더 안아…."
"윽! 자, 잠깐만!"
라온이 다가오는 실비아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려고 할 때였다. 연무장 입구 쪽에서 막대한 기파가 일어났다.
'이 기운….'
라온이 이를 악물고 연무장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문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쿠웅!
연무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가 나타났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글렌이었다. 지그하트르의 주인을 마주한 사람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길.'
"아버지?"
"으음!"
실비아와 헬렌 역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느껴지던 기운이 저 인간이었나. 이 시대에도 저런 놈이 있었다니….
라스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그에게도 글렌이라는 남자의 무력은 놀라운 모양이다.
-이미 격을 달리하는 무력이다. 극과 탈을 넘어섰군.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시간? 그게 무슨 말이지'
-....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글렌을 바라만 보았다.
"음."
라온이 다시 눈동자를 돌려 글렌을 보았다. 그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찬찬히 둘러본 후 단상 위로 올라가 리메르가 앉던 의자에 앉았다.
"엑?"
연무장 담벼락을 넘어오던 리메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가주님이 여길 왜…."
글렌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가문의 미래를 선발하는 행사다. 내가 오지 못할 곳에 왔나?"
"그건 아니죠. 아주 잘 오셨습니다."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글렌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종종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느긋하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가주님께서 오셨으니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겠네요. 바로 수련생 선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뒤로 물러나라 말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잘하라고 말한 뒤 멀찍이 물러섰다.
"라온."
실비아의 부름에 라온이 뒤를 돌았다.
"다치면 안 돼."
"도련님. 무리하지 마세요."
실비아와 헬렌은 여전히 잘해라가 아니라, 몸을 조심하라는 걱정을 남기고 물러났다.
-나약하기 그지없다.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걸 원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만을 걱정해주었다.
'여전히 적응이 안 돼.'
실적만이 중요하던 전생의 사육사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자신을 보면서 씩 웃고 있었다.
"그럼 남녀노소. 지그하르트 모두가 궁금해하던 수련생 선발 시험의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리메르가 단상 위에 선 채로 손을 털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모습이었지만, 그에서 피어나던 작은 기세가 광활한 날개를 펼쳤다.
쿠구구구!
글렌 지그하르트만큼은 아니지만, 연무자 전체를 휘감은 막강한 기세에 부모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아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터억!
리메르는 경쾌하면서도, 웅장한 걸음으로 연무장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내 기세를 뚫어라."
그는 바로 앞에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안광을 빛냈다.
"그게 나의 시험이다."
제18화
"기세?"
라온이 입매를 찡그렸다.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리메르가 지시했던 훈련을 생각해보면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야 하건만, 그의 선택은 기세였다.
"기세라고?"
"저 아이들에게 기세를 시험한다니…."
"저자는 여전히 정도를 모르는군."
아이들의 부모들도 시험의 내용이 의외였던지 목소리를 높였다.
"교관은 저니까 전부 조용히 해주시죠."
리메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무인들의 삶에서 기세라는 건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는 요소. 그 중요한 능력을 시험하겠다는데, 왜들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틀린 말은 아니다. 기세란 무인이 가진 기질과 격의 조화. 강력한 기세를 가진 무인이 싸우기도 전에 적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흔했다.
"아이들은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기세의 시험이라니, 이치에 맞지 않아."
"오러 자체를 익히지 않은 아이도 있지."
"시험이 너무 불공평합니다!"
"역시 잘 모르시네요. 기세라는 건 단순한 오러의 발현이 아닙니다."
리메르가 긴 손가락을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진정한 기세란 무인이 이뤄낸 업적(業績)이 쌓여 만들어진 격(格). 오러 없이도 발현할 수 있는 무인의 증명이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녹풍이 연무장 전체를 휘감았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방금 리메르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기세를 펼쳐냈다. 스스로 뱉은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래도 불만이면 가주님께 여쭈어보시죠."
리메르가 획 몸을 돌렸다. 언제 진지했냐는 듯 히죽 웃으며 글렌 앞에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가주님. 무인의 기세라는 건 오러로 만들어지는 겁니까?"
'허.'
라온이 헛바람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가주를 끌어들이다니, 리메르라는 인간. 아니, 엘프는 움직임이 예측되질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러를 익히지 않은 자도 살아온 방식에 따라 각자만의 기세를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이야, 역시 가주님!"
리메르는 뒤를 돌면서 손뼉을 쳤다.
"으음…."
"이런."
"가주님께서 저리 말씀하신다면…."
글렌이 직접 말했기 때문에 직계든, 방계든 더 이상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저 뾰족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는 하는구나. 마나, 마기, 오러 따위로 만드는 기세는 가짜다. 영혼에 업적을 쌓은 기세만이 진짜이니라.
라스는 옳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제대로 되지 않은 마족들이 설치기 시작했을 때 본왕은 막대한 기세를 끌어 올려 그 가짜들을 굴복… 윽!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팔찌를 쳤다.
"지난 6개월간 아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한계를 끝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제 디테일한 훈련 덕분에…."
"거짓말하지 마라."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리메르에게 노려보며 일어섰다.
"정규 수련 시간에 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는 걸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제대로 훈련을 시키긴 했나?"
"저도 들었습니다. 훈련 시간에 나타나기만 할 뿐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매일 잠만 자고, 훈련은 알아서 하게 놔둔다고 했습니다!"
"오, 잘 아시네요."
리메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력이 대단하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것 역시 제 훈련의 일환입니다."
"그게 훈련이었다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와 타인의 지시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자다."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아이들에게 바란 게 바로 그 정신력이었습니다. 체력도, 기술도 키워줄 수 있지만, 의지를 높이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전 정신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해서 육성하고 싶었습니다."
리메르는 평소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엔 현기가 담겨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극복한 아이들은 작게나마 나름의 격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아이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겠죠."
그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말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아이들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기대감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다들 이해하신 듯하니, 시험을 시작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카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매에 내려앉았던 불신은 여전했다.
"수련생들이 전부 같은 수련을 했다고 해도 각자가 가진 격의 수준은 다르다. 그걸 어떻게 시험한다는 거지?"
"초기에 아이들이 가진 기질에서 얼마나 성장했냐를 볼 겁니다. 그중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임시 수련생이 수석입니다."
"초기라면 6개월 전 아이들을 말함인가? 160명이 넘는 아이들의 기질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도 못 하면 교관 때려치워야죠."
리메르가 씩 웃었고 카룬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 방해꾼. 아니, 부모님들도 다 인정하셨으니, 바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루난은 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서도록."
루난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앞에 섰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뒤로 빠졌다.
"루난 슬리온. 내가 내보낼 기세는 네가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해왔다면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이다."
리메르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말을 이었다.
"내 기세를 뚫고 내 몸을 닿는다면 합격이다."
"네."
루난이 작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마."
리메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빛에 어린 녹광이 번쩍이며 강대한 기세가 일어났다.
쿠구구구!
갑작스럽게 불어온 위압적인 기파에 루난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으윽!"
루난이 입술을 깨물며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오러를 사용하면 실격이다. 네가 지금까지 수련하며 버텨온 정신력을 일깨워라."
"흐읍!"
그녀는 운용하려던 오러를 가라앉히고, 발을 내디뎠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끝까지 참고 잔걸음을 걸어 앞으로 향했다.
타악.
루난은 느리지만 정확하게 손을 내뻗어 리메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여유로운 합격이다. 그간 최선을 다해선 수련한 성과가 보인다."
리메르는 씩 웃고서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루난은 거친 숨을 흘리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다음 도리안."
"아, 저요? 벌써요? 정말 저예요?"
라온의 뒤에 숨어있던 도리안이 바들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불안한지 배에 찬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 이거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건…."
"내 맘이다. 빨리 나와."
"으흐윽!"
도리안은 찔끔 눈물을 흘리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엑!"
다시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루난이 하는 걸 봤겠지. 네가 단련을 하며 쌓아온 정신력으로 내가 펼치는 기세의 벽을 뚫어라."
"그, 그게 될까요? 전 정신력이 없기로 유명한데…."
"안 되면 떨어지는 거지."
리메르가 두 번째 기세를 뿜어냈다. 루난 때보다는 확연히 약해진 기세. 아이들마다 다른 수준의 기세를 보낸다는 게 진짜였다.
"우헤헥!"
도리안은 너구리 같은 소리를 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 이상으로 물러나면 바로 실격이다."
"어우욱…."
"마지막 조언을 해주지. 넌 겁이 많지만, 수련엔 진심으로 임했다. 너를 믿고 들어와라."
"아, 알겠습니다."
리메르의 안정된 목소리에 도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이가 걸음마를 하듯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가 손을 내뻗었다.
타악.
도리안의 손이 리메르의 허리춤에 닿았다.
"합격이다. 넌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너무 없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꾸에엑!"
아쉽게도 도리안은 토하느라 바빠서 리메르의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흠. 계속하지."
리메르는 곧바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 *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 있던 태양이 서쪽으로 처지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 통과한 아이들의 숫자는 꽤 되었지만,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울음을 터트렸다.
신기하게도 라온에게 자극을 받아 그의 근처에서 체력 단련을 했던 소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합격했다.
하지만 버렌을 따라 체력이 아니라, 검술이나, 권법을 다듬은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떨어졌다.
시험이 진행될수록 버렌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고, 마지막 순서인 라온을 남기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라."
"예."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리메르의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당연하겠지.'
라온이 픽 웃었다. 버렌의 예상과 달리 그와 함께했던 수련생들이 많이 떨어져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자."
리메르가 웃음기를 유지한 채 기세를 펼쳐냈다. 루난과 같은 급의 막강한 기세가 녹색의 바람이 되어 버렌에게 밀어닥쳤다.
쿠구구구!
몰아치는 기세의 폭풍에 버렌을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걸 견디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옆에서 보는 기세와 앞에서 직접 느끼는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루난. 자신과의 경쟁을 포기한 겁쟁이가 이 정도 기세를 뚫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끄으윽!"
입술을 깨물어도 발이 나아가질 않았다. 너무도 힘겨웠다.
'설마 나에게만 더 강하게 하는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 아버지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시험에 잘못된 부분이 없다는 소리였다.
"너의 재능은 특별해. 160명의 인재 중에서 널 따라갈 사람은 손에 꼽는다. 다만."
리메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와 널 따르던 아이들은 시간을 낭비했어. 진의를 알지도 못하는 형태뿐인 검술을 수련할 시간에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했어야 했다."
"끄으으윽!"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전의 오러가 절로 일어나고 있었다.
"넌 어려울 때마다 오러를 사용했지. 이번에도 오러를 사용하면 바로 실격이다."
"사, 사용하지 않습니다."
솟구치는 오러를 억지로 잠재우며 발을 굴렀다. 한 발을 걸을 때마다 용암 위를 걷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등 뒤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그것이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버려진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림받은 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버렌은 직계로서 보여선 안 될 추한 목소리와 표정을 드러내며 기다시피 걸어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리메르의 옷을 움켜쥐었다.
"합격이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기세를 꺼뜨렸다.
"후억억!"
버렌은 그대로 자빠져서 거친 숨을 마구 내뱉었다. 항상 여유롭던 그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넌 아직 12살이다.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고, 그 나이에 맞는 단련을 해. 위만 보고 걷다간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야."
리메르는 버렌에게도 조언을 해주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네."
그의 부름에 라온이 앞으로 나아갔다.
"준비는 됐나?"
"물론입니다."
"그럼 시작하지."
리메르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루난, 버렌에게 뿜어낸 그 이상의 기세가 폭풍이 되어 라온을 휩쓸었다.
"라온!"
"라온 도련님!"
뒤에서 실비아와 헬렌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거 제 시험 맞습니까?"
라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의 격은 루난이나 버렌은커녕 중하위권 아이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기세는 너무 강대했다.
"글쎄?"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본 네 재능은 루난이나 버렌 이상이거든. 한 번 견뎌봐."
"그렇습니까?"
녹색 바람에 잠긴 라온의 눈동자에서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럼 그 기대를 배신해선 안 되겠군요."
제19화
저벅.
라온이 한발을 내디뎠다. 리메르에게 다가갈수록 그에게서 뿜어지는 기세가 급격하게 강대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루난이나, 버렌 조차 뚫기 힘든 기세였지만, 웃음이 나왔다.
'알아서 판을 깔아주는군.'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엔 가진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재능을, 능력을 보여줄 판이 열렸으니, 자신은 그 안에 들어가서 놀기만 하면 되었다.
"어때? 버티기 힘들면 말을…."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미소 짓고, 발을 굴렀다.
'지금의 격만으로는 무리야.'
격이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그릇에 담기는 법. 자신에겐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쌓아온 격만이 아니라, 최고의 암살자 라온으로서 살아온 격도 함께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라온 지그하르트의 작지만 단단한 기세 위로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암살자 라온의 격이 내려섰다.
저벅.
연무장의 모래를 밟는 발걸음 소리가 달라진다. 어깨 위로 업은 라온의 격이 진중한 의지를 발했다.
찌지지직!
칼날처럼 벼려진 기세가 리메르가 펼쳐낸 녹풍의 기세를 반으로 찢었다.
"너 무슨…."
리메르가 눈을 부릅떴다. 여유로웠던 그의 눈동자에 당황이라는 두 글자가 담겼다.
우우우웅!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나아갔다. 거친 바람을 갈라내고 다섯 걸음을 걸어 리메르의 앞에 섰다.
툭.
가볍게 손을 뻗어 리메르의 어깨를 쳤다.
"시험은 끝났습니까."
"어? 어…."
당당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에 리메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손을 내리며 불러온 암살자의 격을 흩뜨렸다. 무리했는지 정신이 멍했다.
"...."
리메르는 그때까지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라스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깃들었다. 항시 분노만을 간직한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흠."
라온은 리메르의 반응을 기다리며 조용한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야유를 보내던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도, 함께 수련한 정으로 응원해주던 아이들도, 그들의 부모들까지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웅장하기까지 했던 연무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뭐, 뭐야. 저걸 뚫었다고? 저 녀석이?"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오러조차 익히지 않은 환자가 어찌!"
수련생의 부모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숨을 내쉬었다.
"라온? 너 몸은!"
"도련님.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실비아와 헬렌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동한 표정이지만, 입으로는 또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만 글렌 지그하르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얼음장을 씌워놓은 듯한 서늘함은 그대로였다.
'저 사람은 진짜로군.'
라온은 글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너 정체가 대체 뭐야."
리메르는 차분한 라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6개월 동안 지켜보시지 않았습니까. 라온입니다."
"그걸 뛰어넘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난 네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의 기세를 내보냈다. 일부러 장난을 친 건데, 그걸 뚫어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어."
라온이 숨기고 있는 능력을 보기 위해서 그가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한 기세를 뿜어냈다.
아무리 많은 힘을 감춰뒀다고 해도 뚫어내지 못하리라 확신했는데, 라온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기세를 갈라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음…."
리메르가 라온의 뒤에 있는 직계와 방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건 마음에 드는군.'
시끄럽던 그들의 입은 자신처럼 꽉 닫혀 있었다. 연무장 전체가 라온이 보여준 놀라운 모습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크흠, 수석 교관으로서 잠시 한눈을 팔았네요."
리메르가 꺼져가는 녹색 바람에 몸을 맡겨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마지막으로 정식 수련생을 뽑는 시험은 종료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중요한 행사가 하나 남았습니다."
중요한 행사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리메르의 입에 꽂혔다.
"수련생 중에서 대표이자, 수석을 정해야겠죠."
수석 수련생은 훗날 가문의 주역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이들과 부모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망이 어렸다.
'정해진 그대로지만 상황은 많이 변했군.'
사실 수석은 처음부터 라온 지그하르트로 결정되어 있었다. 임시 수련생 기간 중 가장 많은 발전을 이뤄냈으니, 시험의 취지에도 걸맞았다. 물론 이렇게 압도적으로 합격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준비해둔 돌발 이벤트는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군.'
픽 웃으며 수련생을 훑어내리던 리메르의 시선이 루난과 버렌을 지나 라온에게서 멈췄다. 그리고.
"라온 지그하르트. 오늘부터 네가 5연무장의 수석 수련생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오오! 라온 님!"
"...."
도리안이 박수를 보냈고, 루난은 묘한 표정으로 박수를 딱 세 번 쳤다.
"라, 라온 도련님이 수석이래요!"
"어우…."
"실비아 님!"
헬렌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실비아를 부둥켜안았다.
"어?"
"지, 진짜?"
"저 아이가 정말 수석이라고? 믿을 수가…."
"가장 강한 기세를 넘은 건 라온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실비아의 자식이라고! 도망자 실비아!"
"그것과 아이의 실력은 상관없지."
"리메르랑 짜고 사기 치는 거 아니야? 그럴만한 놈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논쟁을 벌였다.
"거, 거짓말!"
버렌이 입술을 떨며 일어섰다.
"이건 아닙니다!"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리메르가 뚱한 얼굴로 버렌을 돌아보았다.
"라온은 저보다 체력도, 근력도, 재능도 떨어집니다. 그런 놈이 수석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도 봤지 않나. 라온은 네가 간신히 통과한 것보다 훨씬 강한 기세를 가볍게 돌파했다. 수석의 이름을 받기에 충분해."
"술수를 부렸던 게 분명합니다!"
"버렌 지그하르트. 지금 내 판단을 의심하는 건가?"
리메르의 입에 걸린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선선했던 바람에 각이 선 느낌이다.
"그,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이 사기를 쳤다는 겁니다! 어제 수련에서도 절 따라오지 못한 라온이 저런 강대한 기세를 뚫었다는 게 말이 되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교관님도 제대로 믿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버렌과 함께 다니는 방계의 아이들이 일어서서 버렌의 옆에 붙었다.
"흐음…."
리메르가 턱을 긁적였다. 확실히 라온이 자신의 기세를 그렇게 쉽게 뚫고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투정도 이해는 갔다.
"맞는 말이야."
"혹한의 저주를 앓으면서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오러조차 없잖아."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시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 나도 깜짝 놀라긴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작은 기대감을 가진 버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저희는 지그하르트 무인들의 가문입니다. 이런 시험보다는 제대로 맞붙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라온이랑 대련이라도 해서 수석 자리를 가지고 가고 싶다는 말인가?"
"제,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눈에 욕심이 가득한데 거짓말할 필요 없어."
리메르가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버렌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시험은 끝났거든. 가주님. 이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버렌 지그하르트."
글렌은 라온과 버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예!"
"이미 결정 난 사항을 바꾸려면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하다. 넌 그 대가를 치를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버렌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답했다. 무슨 대결을 하든 라온을 이길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번엔 글렌이 라온의 이름을 불렀다.
"예."
라온이 차려자세를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넌 버렌과 대결할 생각이 있느냐."
"없습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헉!"
"어?"
"어어…."
"저, 저놈이 미쳤나!
바로 거절을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시험은 끝났고, 결과는 나왔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대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
"직계가 어쩌구 저쩌구, 명예가 이렇고 저렇고 하더니, 결과에 승복도 못 할 줄은 몰랐다."
"끄으윽!"
라온의 비아냥에 버렌의 얼굴이 더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글렌의 쇳덩이를 얹은 듯한 음성에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수석의 자리를 걸고 대련을 해라. 네가 이긴다면 동(銅)급의 패를 내어주마."
'동급의 패!'
지그하르트는 무인이 이룬 실적에 따라 금, 은, 동의 패를 수여한다. 동급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내어주는 패이니, 괜찮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복이 절로 굴러들어왔군.'
수석 수련생이 되어 라스와의 내기도 이겼는데, 동급의 패까지 준다고 하니, 얻을 보상이 2배가 되었다.
글렌은 직계인 버렌이 수석이 되었으면 하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라, 라온!"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실비아가 다가왔다. 걱정하는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버렌은 감격한 표정으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되었으니, 시작해라."
"예!"
버렌이 벌떡 일어서서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 직접 맞붙게 되다니, 네놈의 운도 여기서 끝이로군."
그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직계와 버림받은 버러지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지."
"승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이 혓바닥은 왜 이리 길어."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손목을 돌렸다.
"이 자식…."
"싸움은 대련에서 해라."
리메르가 둘 사이를 막고, 고개를 저었다.
"대련은 단판. 무기와 오러를 사용하면 실격이다. 본인의 육체만을 사용하도록."
"알겠습니다!"
"네."
"좋아. 그럼…."
리메르가 라온과 버렌의 시야를 막고 있던 손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시작!"
"흐아압!"
시작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가기 전에 버렌이 뛰어들었다. 명치를 향해 매서운 주먹을 내질렀다.
타악!
라온이 손등을 돌려 버렌의 주먹을 쳐냈다. 놈의 주먹에 어린 회전력에 손목이 지끈거렸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내 주먹을 막을 수 없다!"
버렌이 차갑게 웃으며 자신의 복부를 향해 두 번째 주먹을 찔러넣었다.
터엉!
손아귀로 주먹을 막아냈지만, 통증이 팔뚝까지 전해져왔다.
"아버지께서 직접 전수해주신 공호권이다. 권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 반칙은 아니지."
"공호권…."
공호권은 주먹에 회전을 넣어 상대를 방어를 뚫어내는 지그하르트의 권법이었다.
'어떻게 할까….'
위력은 있지만, 어설프다.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냥 이기기엔 좀 아까운데.'
쉽게 끝내기엔 이렇게 만들어진 판이 너무도 아쉽다. 모두에게 능력을 증명하며 이기고 싶었다.
"어딜 보는 거냐!"
버렌이 주먹을 뻗어왔다. 상체를 젖혀 주먹을 피해낸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능의 차이를 보여주마!"
놈은 보법까지 밟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도, 발걸음도 어설프지만, 가진 신체 능력이 뛰어나니, 나름 위협적이었다.
'재능이라.'
라온이 옆으로 물러나며 두 눈을 빛냈다. 타고난 재능만 따지는 지그하르트의 머저리들의 머리통을 후려칠 방안이 생각났다.
무학.
저들은 무가의 일원답게 무학에 관한 재능을 최고로 친다. 저들에게 그 재능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좋은 게 있으니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운용했다. 세 개의 고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순간 버렌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그가 펼치는 권법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포기한 거냐!"
버렌이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살벌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럴 리가."
라온의 손이 반달을 그렸다. 그 회전에 맞닿은 버렌의 주먹이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그가 펼쳤던 공호권과 같은 회전이었지만, 그 방향이 반대였다.
"이익!"
밀려나간 버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타악!
주먹을 쳐내고, 어깨로 밀어쳤다. 뻐억 소리와 함께 버렌이 뒷걸음질을 쳤다.
터엉!
라온이 땅을 박차고 당황한 버렌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이놈!"
버렌은 당황한 상태에서도 왼 주먹으로 턱을 노려왔다. 하지만 이미 그의 권은 모두 파악된 상태였다.
파앙.
역회전으로 버렌의 주먹을 밀어낸 뒤 녀석의 복부를 후려쳤다.
"커헉!"
버렌이 거품 무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네, 네가 어떻게 공호권을 쓰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턱으로 침을 질질 흘렸다.
"바, 방금 어떻게 된 거지?"
"저 아이가 어떻게 공호권을…."
"실비아나 리메르가 알려줬을 리도 없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대련을 지켜본 사람들 역시 경악한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네가 보여줬잖아."
라온이 차가운 눈으로 버렌을 내려다보며 손을 털었다.
"난 네 권법을 따라 했을 뿐이다."
제20화
"허…."
리메르가 본인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벌어진 입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라온과 버렌의 대결은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대로였다.
라온을 수석으로 임명하는 순간 버렌이 이의를 제기해서 두 사람이 대련까지 갈 거라 예상했다.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버렌의 버릇을 고치고, 라온의 특별함을 모두에게 선보이는 정도로 끝나는 상황. 그게 자신이 원한 전개였다.
하지만 라온이 그 모든 계획을 바꿔버렸다.
아니, 스토리 라인은 그대로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라온은 단순한 힘과 민첩성, 기술이 아니라, 공호권의 묘리를 역이용해서 버렌을 날려버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아무리 오러가 실리지 않다고 해도 버렌의 뛰어난 재능은 공호권의 묘리를 적절하게 살렸다.
하지만 라온은 버렌이 만들어낸 권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회전을 역으로 펼쳐냈다.
아무런 무학도 익히지 않은 아이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뒷골목 술집에서 말해도 뺨을 얻어맞을 정도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음…."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가주님까지?'
동상이라도 된 듯 무표정만 고집하던 글렌조차 놀라움에 눈매를 좁히고 있었다.
"라온."
리메르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에게 다가갔다.
"예. 교관님."
"너 방금 뭘 했지?"
이 단순한 질문에 담긴 건 많았다. 정말 공호권을 본 것만으로 따라한 건지 혹은 누군가에게 배운 건지, 아예 다른 권인지를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버렌의 주먹에서 회전이 보였습니다. 회오리처럼 나선으로 돌아가고 있더군요."
맞는 말이다. 공호권의 특성 자체가 나선의 회전이니까.
"제 주먹이나, 방어하는 손등조차 밀려날 정도로 빠른 회전이라, 그냥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기대감에 대련을 시켰으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도망치면서 싸울까도 했지만, 버렌의 주먹을 보다 보니,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느껴졌다?"
"네. 그의 주먹에서 이루어지는 흐름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왠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역으로 회전을 걸어서 버렌의 회전을 지워버렸습니다."
"아!"
리메르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진짜야!'
북채로 가슴을 내려친 듯 심장이 울렸다. 상대의 무학을 보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천재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지만 라온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상대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다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고의 재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엔 진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버렌의 경지가 낮다고 해도 한눈에 공호권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났는데요?"
리메르가 라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버렌의 훈련을 훔쳐봐서 미리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혹은 누가 알려줬던가!"
카룬의 살벌한 눈동자가 실비아와 라온에게 돌아갔다.
"일단 난 게을러서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니고, 별관에서 사는 라온이 과연 누구에게 공호권에 대해 배웠을까요? 말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버렌이 공호권을 훔쳐 배우는 걸 그냥 놔둘 아이도 아니죠."
"으음…."
그는 바득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글렌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라온에게 도전하고 싶은 사람 있니?"
리메르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앞에서 본 게 있으니, 그 누구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루난?"
"...."
루난은 고개를 저으며 라온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보여주었던 역회전의 공호권을 따라 했다.
"훗."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예상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결과 자체는 훨씬 좋아졌다.
"라온. 네 승리다."
"감사합니다."
리메르가 방긋 웃었고,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네가 알아서 한 거지. 동급의 패는 가주님께서 잘 챙겨주실 거다."
"네."
리메르는 대답하는 라온을 잠시 훑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그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 오러 같은 건 없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돌렸다.
"가주님. 끝났습니다."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간 라온, 버렌, 루난을 비롯한 아이들을 살피고서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조언 한마디만 해주고 가시지."
리메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서 아이들을 불렀다.
"합격자는 일주일 동안 휴식을 한 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불합격자도 너무 실망하지마라. 곧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 그럼 해산! 모두 가족이랑 좋은 시간 보내라."
리메르는 손뼉을 짝 치고서는 연무장의 담벼락을 넘어갔다.
"라온!"
"라온 도련님!"
그가 떠나자마자 실비아와 헬렌이 달려와 라온을 껴안았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련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두 사람은 여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했냐가 아니라, 지겨울 정도로 몸이 괜찮은지를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라온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제 집에 가자. 오랜만에 스튜가 먹고 싶어."
"스튜? 아, 알겠어! 가자!"
"전 먼저 가서 준비해놓겠습니다!"
헬렌은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고, 라온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쫓았다.
"허어…."
"대체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라온 지그하르트…."
"저런 재능이 존재했다니…."
연무장에 남은 사람들은 벙찐 표정으로 라온과 실비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끄읍…."
그리고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땅만 바라보았다.
* * *
연무장 외벽의 끝. 새가 간신히 앉을 법한 얇은 담벼락 위에 다섯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불길에 타오르는 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봤어?"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가 물었다.
"천재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저게 정말이라면 그 녀석 이상의 재능이겠어."
"흐름을 넘어 재현이라. 어처구니가 없군."
"...."
네 명의 남녀는 각자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대답했다.
"루난이랑 버렌을 보러 온 건데, 좋은 구경했네."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최근 우리 적운대에 피해가 많았잖아. 그래서 말인데 버렌이나 루난은 너희가 알아서 데려가고, 라온은 내가 찜…."
"죽고 싶나?"
"저 천고의 재능을 날름 삼키겠다고?"
"여기서 피를 보기 싫으면 말을 잘 골라라."
"…!"
네 명의 남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당장에 칼을 뽑을 기세였다.
"노, 농담이야. 농담."
장발의 남자는 핼쑥해진 미소로 손을 저었다.
"어찌 됐든 저 아이로 인해 많은 게 변하겠네."
"...."
네 명의 남녀는 연무장을 나서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으로 동의했다.
지그하르트 무력의 중심인 대(隊) 그들의 눈에도 라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리메르는 교관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글렌을 따라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점점 약해지는 놈이 뭐 하러 직접 나선 거냐."
글렌은 옥좌에 몸을 묻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제가 수석 교관인데 할 일은 해야죠."
"리메르 님."
가주전에서 대기하던 집사 로엔이 차를 건네주었다.
"오랜만이네. 로엔."
"예."
겉보기엔 로엔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리메르가 훨씬 많았기에 말을 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글렌이 금색 팔걸이에 턱을 괴며 물었다.
"라온과 버렌을 왜 붙인 거냐."
"뭐, 어쩌다 보니…."
"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을 텐데, 어쩌다?"
"와, 역시 가주님은 속일 수가 없네요."
리메르는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버렌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편협합니다. 라온은 특별한 무언가를 가졌지만, 밝혀지지 않았죠.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대련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
"가주님도 보셨다시피 라온의 육체는 여전히 냉기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력만큼은 이미 경지를 이룬 무인과도 맞먹을 정도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도 가주님도 몰랐던 게 있습니다."
리메르는 검질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천재성입니다. 사실 제가 보고 싶었던 건 라온의 정신력이었습니다. 뛰어난 무학을 배운 버렌을 상대로 어떤 대응을 보여줄지를 기대했습니다."
리메르의 눈동자가 별을 박아 놓은 듯 반짝였다.
"다만 이번에 라온이 보여준 건 정신력이 아니라, 재능. 그것도 천고의 재능이었습니다. 한번 본 것으로 상대 권법의 흐름을 파악해서 역습을 가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수많은 전장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재능입니다!"
"이전에 돌팔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있다. 혹한의 저주에 걸린 아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돌팔이라면 넝마의 성자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냉기 마법이나 오러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거나, 경국지색의 외모를 얻게 된다고 하더군."
"바로 그겁니다!"
리메르가 쿵하고 발을 굴렀다.
"그 재능이 발휘된 거라구요! 그 녀석은 무학에 절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흐음…."
"버렌이나, 루난 그리고 다른 손자, 손녀들도 특별하지만, 라온은 그 이상입니다. 대륙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기질이에요!"
신이 난 리메르와 달리 글렌의 표정은 덤덤했다.
"저 역시 그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대주분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재능이었죠."
글렌과 함께 대련을 보았던 로엔 역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합니다. 라온에게 동색의 패가 넘어갔지만, 은패 이상의 보상을 내어주시면…."
"그럴 일은 없다."
글렌은 단호함이 깃든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유치한 계략 덕분에 라온에게 선물을 주게 되었지만, 단계까지 올려서 보상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엑! 하지만…."
"너도 그 아이를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다.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도록."
"진짜 정 없다니까…윽!"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에 리메르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라온은 진짜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껴안고 있지만 말고, 제대로 키워줘야 해요. 100년 만의 천재라던 가주님의 둘째 손자나 슬리온 가문의 첫째보다 위일지도 모르니, 잘 생각해주세요."
"말이 많아졌구나."
"진짜를 봤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별은 없다. 그 아이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다면 모를까."
"에이, 그래도 냉기를 지울 수 있는 최상급 영약이나, 연공법…."
리메르는 글렌이 올린 손에 입을 다물었다.
"돌팔이가 말했다. 이 이상 화속성 영약을 사용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하더군."
"이야! 관심 없는 척하시더니, 다 알아보고 계셨군요!"
"헛소리. 그 말 많은 놈이 혼자 주절거렸을 뿐이다."
"오…."
"흐음!"
리메르와 로엔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글렌은 쯧 혀를 차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등 뒤로 금색 불꽃이 타오르며 지그하르트 보고의 철문이 솟구쳤다.
"난 보고를 정리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라."
글렌은 그렇게 말하고서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전에 남은 리메르와 로엔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가 이제와서 보고 정리를 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 * *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 실비아와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가 워낙에 많은 것을 궁금해해서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자정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으니, 6시간 이상 말만 한 것 같았다.
'힘드네.'
라온은 방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마음이 편하지만, 수련 이상으로 힘들었다.
-크흠,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도다. 앞으로 네놈은 매일 이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거라.
리메르는 별관의 음식과 간신이 마음에 들었던지 오랜만에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연무장의 그 개밥 같은 식사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미안하지만, 그거 계속 먹어야 하는데."
이제 정식 수련생이 되었으니, 몇 년 동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맛을 따지는 기생 마왕이라니, 어이가 없는 놈이다.
-그러고 보니 네놈에게 물을 게 있었지.
"물을 거?"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팔에 걸려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 형태로 돌아갔다.
-본왕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보았고, 인간의 육체로 산 세월도 수백 년이 넘는다. 하지만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라스의 불길이 폭발할 듯 타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이상의 불꽃이었다.
-본왕은 느낄 수 있다. 네놈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말하라. 네놈의 정체를….
"야 라스."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내 정체나, 네 이름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무슨…."
"생각보다 기억력이 나쁘네."
라온이 라스를 내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와의 내기는 끝났다. 헛소리 말고 보상부터 가져와."
제21화
"설마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라온이 어깨 위에 떠 있는 라스를 툭 쳤다.
-본왕은 마계를 지배하는 분노의 군주다.
라스에게서 푸른 냉기가 뿜어진다. 뼈가 시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었다.
-존재를 갖게 된 이후로 거짓을 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존재를 가지게 된 이후라는 말은 한 번도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본왕과 네놈은 내기라는 계약으로 묶여 있다. 싫다고 해도 넘어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그니까 뜸 그만 들이고 달라고."
-그 전에 하나만 묻겠노라.
"뭘?"
-네놈이 그 뾰족귀의 기세를 뚫은 방법 그리고 그 건방진 놈의 무학을 따라한 방법이 무엇인냐.
라스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질문을 해왔다.
"일단 보상부터 줘. 그게 먼저야."
-음, 알겠다.
라스의 푸른 불꽃이 나비처럼 팔랑이자,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오르면서 솟구치는 육체의 희열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노>가 가진 특성 중 하나가 임의로 생성됩니다.]
[<설화의 감각>이 선택되었습니다.]
[특성 <설화의 감각(1성)>이 생성되었습니다.]
"설화의 감각?"
라온은 특성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하찮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특성이 걸렸군.
"능력이 뭐지?"
-감각의 범위를 늘려주는 능력이다. 1성이니, 대략 1할의 거리가 늘어나겠지.
"1할이라…."
현재 기감으로 10M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범위가 11m가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감각 범위가 늘어날수록, 그 효용이 급상승할 특성이었다.
-본왕의 경우엔 원래 가진 감각의 10배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노라.
"그래?"
그러고 보니, <설화의 감각> 뒤에 1성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그 말은 저 특성도 불의 고리처럼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은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암살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력 이상으로 감각을 중요시해왔다. 감각의 범위가 늘어난다고 하니, 어떤 특성도 부럽지 않았다.
"근데 왜 설화의 감각이지?"
-취향이다. 존중해라.
"허."
얼음꽃 팔찌도 취향, 설화라는 이름도 취향. 센스가 참으로 구렸다.
-본왕과의 내기는 끝이 났으니….
라스가 다가오려 할 때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칭호 <최초의 승리>가 생성되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어?"
-이런!
라스는 상태창을 볼 수 없는 대신 메시지는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이 쥐새끼 같은! 본왕의 능력치를 또 빼가다니!
"내가 한 게 아니라, 네가 만든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고 있는 거잖아. 거기다 네 본체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능력치 1 정도는 눈곱만큼도 안 되는 거 아닌가?"
-무, 물론이다!
"그럼 별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라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됐다. 이제 네 차례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라.
"싫어."
-뭐? 지금 뭐라고….
"싫다고."
라온은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왕을 능멸하는 것이냐! 분명 네 능력을 알려준다고….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일단 보상부터 달라고 했지."
-어….
기억을 되새기던 라스가 입을 쩍 벌렸다.
"맞지? 난 네게 답을 준다고 한 적이 없어."
라온이 옅게 웃었다.
'환생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없지.'
암살자 라온의 격을 끌어온 걸 말하려면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라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환생만큼은 꺼내선 안 된다.
'불의 고리도 마찬가지.'
불의 고리에는 육체와 정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효과 말고도 무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건 자신의 무학만이 아니라, 적의 무학도 포함되기에 대련에서 버렌의 공호권을 따라 할 수 있었던 거다.
물론 상태창의 강화 효과와 버렌의 공호권 성취가 불의 고리보다 낮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라스에게 정보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은 적이니까.'
조금 가까워진 것 같지만, 라스는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노리고 있다. 자그마한 정보라도 넘겨줘선 안 된다.
-본왕을 농락한 것이냐!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꽃을 내뿜었다. 수만 개의 얼음 칼이 피부를 꿰뚫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참을만해.'
수속성 저항력을 얻은 이후에 라스를 만나 다행이었다. 저항력이 없던가, 라스가 화속성을 가졌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거다.
라온은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라스의 냉기를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학습 능력이 낮군.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서 공격해봐야 너만 손해야."
-닥쳐라!
라스의 불꽃이 한층 더 거세졌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오한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화아아!
외부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인지,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까지 살아나 더 죽을 맛이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조금씩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독한 놈!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거냐!
"정신력."
가볍게 대꾸해줬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음에도 견디기 힘들다. 전생에서 지옥 수련을 견딘 경험이 없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바득 깨물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을 때 눈앞에 푸른 창이 올라왔다.
[<분노>의 공격에서 극한의 정신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정신과 육체에 활역이 차올랐다. 마나 회로를 짓누르던 냉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라스가 악을 지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제 살 깎아 먹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본왕의 지켜본 인간의 역사에 너 같은 건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놀리는 말이 아니다.
왜 환생을 했는지, 왜 지그하르트에서 태어난 건지, 왜 라스와 엮인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본왕을 얕보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육체와 영혼을 씹어 삼킬 테니까!
"계속 말했잖아. 할 수 있다면 해보라고."
미소를 짓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오늘도 한 건을 해주었다.
"그런데…."
창밖을 보는 라온의 눈빛이 서리를 덮은 듯 차갑게 일렁였다.
"저건 뭘까."
* * *
카룬 지그하르트가 머무는 중무전.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방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
벌써 네 시간 가까이 차려자세로 서 있는 버렌 지그하르트의 입에서 참고 참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책상에 앉아 있던 카룬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버렌 지그하르트."
"예엑."
긴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버렌의 입에서 탁하고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네게 무엇을 지시했지?"
"수, 수석 수련생 자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지지 말라고 하, 하셨습니다!"
"그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슬리온 가의 계집을 꺾고, 라온을 짓밟은 후 수석에 이름을 올리라고 말했지."
카룬의 눈동자가 뻘겋게 타올랐다.
"그런데 그 계집도 아니고, 직계에서 떨어져 나간 버러지의 자식에게 패해? 그것도 모두의 앞에서?"
방을 울리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심장이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날 어디까지 망신시키고 싶은 거냐. 셋째나 넷째처럼 되고 싶은 건가?"
"아, 아닙니다!"
버렌이 덜덜 떨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젠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두 형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넌 이미 첫 번째 기회를 상실했다."
카룬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 대한 반가움은 없었다. 분노와 짜증만이 가득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버렌은 그 섬뜩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발끝만 보며 입술을 씹었다.
"기초 수련을 끝낸 후 수련생을 졸업할 때 그간의 성적을 매겨 다시 수석을 뽑을 거다. 그 자리를 가져와라."
"예…."
버렌은 마른침을 꾹 삼키고서 피를 토하듯 대답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답게 살고 싶다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카룬이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가, 감사합니다."
버렌은 6개월 만에 만난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왔다.
"젠장!"
중무전을 나온 버렌이 악을 내지르며 벽을 후려쳤다.
"그 망할 놈 때문에…."
이가 바드득 갈린다. 평생 칭찬만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꾸중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라온이라는 버러지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됐다는 게 너무도 화가 났다.
"후욱!"
가슴을 가득 채운 짜증을 한숨으로 뱉어냈지만,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기분을 전환 시키기 위해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여기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5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벽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버렌이 코웃음을 쳤다. 외부 문은 닫혀 있었지만, 실내 단련장이나, 휴게실의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멍청한 교관들."
입을 삐죽이며 휴게실로 향했다. 열린 문을 닫으려고 할 때 라온의 이름이 걸려 있는 사물함이 보였다.
"음."
보기만 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라온의 사물함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밑에 둔 상자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상자를 여기다…어?"
상자를 열어본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이 신발 숫자는!"
상자 안에는 밑창이 다 닿거나, 뜯어진 수련용 단화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켤레가 아니라, 열 켤레 넘게.
'이걸 6개월 만에 썼다고?'
믿을 수 없어서 신발들을 살펴봤지만, 전부 크기와 형태가 똑같았다. 모두 보급받은 라온의 신발이었다.
"허."
버렌이 헛웃음을 흘렸다. 라온과 같은 수련용 단화를 보급받았지만, 교체한 건 고작 2번이다.
'이게 말이 되나?'
자신이 신발을 두 번 바꾸는 동안 라온이 10번 이상 교체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친…."
몇 년은 신은 듯한 신발들을 보자,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가 맑아지자, 억지로 무시했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라온이 그 누구보다 빨리 연무장에 나와서 그 누구보다 늦게 들어갔던 것.
식은땀을 흘리고, 입에서 냉기를 내뿜으면서도 단 한 번도 훈련을 포기한 적이 없던 것.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 단련을 끝낸 뒤 깜깜한 연무장을 홀로 달리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내가 겉멋으로 검을 휘두르고, 숙소에서 쉬는 동안 놈은 매일 한계를 넘은 거야….'
라온의 기세가 임시 수련생 누구보다도 뛰어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거야말로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인데.'
5연무장에서 가장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준 건 라온이었다.
'그리고 난 반대로….'
라온을 비꼬고, 조롱했으며, 시험에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다가 추하게 패배까지 해버렸다.
"끄으으!"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질투에 눈이 멀어 추잡하고 더러운 짓만 해온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버렌은 텅 빈 휴게실에서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는 연무장에 들어올 때와 달리 정광이 어려 있었다.
"다시는…."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고, 지금이라도 추구해야 할 자세였다.
"후우!"
버렌은 깊은숨을 내뱉어 마음속에 쌓인 아집을 비웠다. 연무장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리메르의 그것처럼 가벼웠다.
* * *
별관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지 이틀째. 라온의 일과는 연무장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새벽부터 별관 주변을 달렸고, 아침을 먹은 뒤엔 기구 대신 맨몸운동으로 근력을 단련했다.
어제 실비아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방해할 놈은 딱 하나뿐이었다.
-또 수련인가. 정말이지 지겹도다. 본왕을 위해 다른 재롱이나 부려보아라.
아낌없이 주는 라스를 무시하고 계속 수련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가주전의 수석 집사 로엔이라고 합니다."
머리의 반이 구름색으로 물든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호출하셨습니다."
그는 공손한 예를 다하여 고개를 숙였다.
"호출이라고 하셨습니까? 절 왜…."
"동색의 패를 수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그냥 사람을 보내서 패를 줄줄 알았는데, 직접 부를 줄은 몰랐다.
"헙!"
건물 안에 있던 실비아가 창문을 넘어서 뛰어나왔다.
"로, 로엔 님."
"실비아 님."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를 알고 있었기에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버. 아니, 가주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저기 혹시…."
"특별한 일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수여식일 뿐이니까요."
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선하게 웃었다.
"라온…."
"괜찮아. 다녀올게."
라온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서 겉옷을 걸쳤다.
"잠깐만! 옷은 갈아입고 가!"
"이대로도 괜찮아."
글렌은 천생 무인이다. 수련하다가 왔다는 티를 내면 싫어하진 않을 거다.
"그럼 가시죠."
로엔은 빙긋 웃고서 앞장을 섰고, 라온은 실비아에게 눈짓을 보내고서 가주전으로 향했다.
* * *
"...."
라온은 금빛 옥좌에 앉은 글렌을 올려보며 손끝을 떨었다.
수백 명이 들어와도 넉넉한 알현실에서 글렌과 일대일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저놈 조금 강하다고 재는 것이냐. 붉은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도다.
물론 아예 정신이 나간 라스는 예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약속은 지켜야겠지."
글렌은 필요 없는 말을 앞에 걸치고서 로엔에게 손짓했다.
"예."
로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은은하게 빛나는 동색의 패를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로엔의 손에서 전해지는 동색의 패를 받았다. 패의 중앙엔 지그하르트의 문양인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이 그려져 있었다.
"네게 동색의 패를 수여한다. 넌 동패를 반납하며 그에 합당한 물건을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당장 말씀드려도 됩니까."
라온은 패를 움켜쥔 채 글렌을 올려보았다. 이 패를 어떻게 사용할지 이미 생각해놓았다.
"…말해보라."
글렌은 잠시 침묵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지그하르트."
"음?"
"제 어머니를 원래의 직위로 올려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로엔만이 아니라, 글렌도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내려보았다.
"원래의 직위라면 직계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글렌이 입을 다물었다. 진의를 알아보려는 듯 전신을 훑었다. 그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 심장이 우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실적이다."
"실적이라 하시면…."
"나만이 아니라, 가문 모두가 인정할 실적을 쌓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럼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불가능에 가깝다. 다양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힘들 테니."
그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절대 이루지 못하리라 장담을 하는 것 같았다.
-시건방지도다. 본왕이 본체를 찾는다면 수천 합 안에 죽일 수 있는 놈이 감히!
라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글렌을 노려보았다. 다만 수천 합을 겨룬다는 건 라스에게도 버거운 초강자라는 뜻이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라온은 로엔에게 동패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실적 쌓기는 전생에서 숨 쉬는 것처럼 해온 일이다. 어떤 임무를 완수해서라도 실비아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잠깐."
돌아가려 할 때 단상 위에서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 보상을 말하지 않았다."
"예?"
"넌 질문을 했을 뿐이다. 그런 건 패 없이도 들려줄 수 있는 말이다."
뒤를 돌아보니, 글렌이 차가운 눈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변한 것 같았다.
'뭐지?'
글렌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패를 받아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소원을 말하라."
"…."
라온은 아로엔의 손에 들려 있는 동패를 보며 눈을 빛냈다.
'다음 소원이 정해져 있긴 하지.'
실비아의 복귀 질문 이후 무엇이 필요한지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오러 연공법.'
불의 고리는 분명 천고의 연공법이지만, 육체와 영혼을 단련시켜 줄 뿐 오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전생에서 익혔던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했다.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오러 연공법? 그건 기초 수련을 진행하며 교관들이 전수해줄 거다."
그 말은 맞았다. 기초 수련에서 주어지는 연공법도 대륙 전체로 본다면 중상급의 연공법이다.
하지만 그 수준으론 안 된다.
실비아의 지위를 회복하고, 데루스의 목을 베기 위해선 그 이상의 연공법이 필요하다.
"그것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동급의 패에 해당하는 연공법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계속 느끼지만, 그는 암살자인 자신 이상으로 감정 표현이 적었다. 냉혈이라는 별명이 참 잘 어울렸다.
딱!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을 튕기자, 가주전 바닥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쿠구구구!
바닥에서 금색 불꽃이 돋아났다. 나선을 그리며 타오른 불꽃 속에서 원형의 책상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이건…."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책장은 알현실의 높고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고, 칸막이마다 형형색색의 책이 꽂혀 있었다.
"지그하르트의 책장 중 하나다. 중앙에 손을 올린다면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책이 내려올 거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였고 책의 개수는 셀 수도 없었다.
'그림자 연공법보다 좋은 거면 돼.'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나오길 바라면서 책장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책장이 진동한다. 책들이 들썩이며 추위를 타듯 덜덜 떨었다.
책장은 바람을 탄 듯 회전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파앙!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첫 번째 칸의 첫 번째 책이 저절로 빠져나와 펼쳐졌다.
화아악!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금빛 불꽃을 뿜어내면서.
"이 무슨!"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옥좌의 손잡이를 으깨며 벌떡 일어섰다.
제22화
"저 책은…."
라온은 불타오르는 책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책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낡았지만, 장대한 금빛 서광을 뿜어내 알현실을 밝혔다.
우우웅!
여름의 끝을 알리는 꽃잎처럼 떨어진 책이 손끝에 닿았다. 불길에 타오르고 있음에도 뜨겁지 않고, 체온처럼 따스했다.
'만화공?'
책 표지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를 넘기려고 할 때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더 큰 불길을 일으켰다.
스스스.
순식간에 끝 페이지에 도달한 책은 수명을 다한 장작처럼 재가 되어 흩어졌다.
"어?"
라온이 사그라지는 책을 움켜쥐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종이는 가루가 되었고, 불꽃은 연기가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화공(萬火功) : 만겁의 불길과 마주했습니다.]
[만화공이 기억됩니다.]
그 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뇌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누군가가 뇌에 거대한 침을 쑤셔 넣는 듯한 느낌이다. 라스의 정신공격보다 더한 통증에 무릎이 휘청였다.
"후욱…."
다행히 고통은 찰나의 순간에 끝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도련님!"
바로 옆에 있던 로엔이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너 방금 뭘 한 거냐.
'나도 몰라. 그런데….'
기억난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만화공의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그마한 떨림이 깃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글렌이 평소와 달리 화등잔만 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무엇을 한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손에서 사라진 연공법의 내용은 기억납니다."
"그 책의 이름은?"
"만화공입니다."
"...."
라온의 대답을 들은 글렌은 눈을 내리감았다. 석상이라도 된 듯 한참 동안 멈춰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이상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내용이 기억난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되었다."
글렌은 평소처럼 냉담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동색 패의 보상은 이루어졌다. 이만 나가보거라."
"음…."
라온이 슬쩍 로엔을 보았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황급하게 평소같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뒷걸음을 걸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글렌과 로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만화공의 내용이 내 기억에 박힌 것도 시스템의 능력인가?'
-시스템이 네 기억력과 사고력을 높여주긴 하지만 강제로 뇌에 집어넣는 능력은 없다.
라스의 목소리에도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음….'
라온은 가주전의 복도를 걸어가며 머리에 박힌 만화공의 정보를 훑어보았다.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그림자 오러 연공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묘하고 정심한 연공법이었다.
'거기다….'
만화공 안에는 오러 연공법만이 아니라, 하나의 검술과 옛 세상의 정보도 담겨 있었다.
머리에 각인된 만화공을 제대로 익힌다면 전생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걸 왜 넘겨줬지?'
만화공은 동패 따위로 얻을 수 있는 오러 연공법이 아니다.
은패. 아니, 금패를 줘도 바꾸지 않을 물건인데, 왜 넘겨준 건지 모르겠다.
-이미 받아놓고, 뭘 그리 걱정이 많은 게냐.
'하긴.'
글렌 정도 되는 사람이 준 물건을 뺏을 리 없다. 이미 날아가서 달라고 해도 줄 수도 없지만.
'돌아가자.'
지금은 기억만 있을 뿐 습득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돌아가서 연공을 하고 싶었다.
라온은 가주전을 나가자마자 별관으로 뛰었다. 전력으로 달리가는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라온이 떠난 알현실은 밤과 같은 침묵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 가주님. 라온 도련님이 가져가신 연공법이 설마…."
"그래. 그분의 것이다."
글렌은 책장 첫 번째 칸의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을 가져가다니….'
지그하르트 역사상 아무도 꺼내지도, 읽지도 못했던 초대 가주의 연공법이 바로 라온에게 넘어간 만화공이었다.
동패가 아닌, 은패 수준의 연공법을 넘겨주기 위해서 최초의 책장을 꺼냈는데, 만화공을 가져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꿀꺽.
로엔은 재가 되어버린 연공서의 조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알려졌다간 라온 님과 실비아 님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만화공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만화공에 대해 전해지는 건 가주가 된 이후다. 가문의 역사를 샅샅이 뒤지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음, 그럼 연공서가 아예 사라져 버린 건 어떻게…."
"그것도 괜찮다. 사람에게 전해졌지 않느냐."
라온의 연공서의 내용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런 현상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전해졌다면 그만이다.
"그래도 만화공은 지그하르트의 가주에게 전해지는 연공법인데…."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연공법이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기서 썩어 문드러졌겠지."
놀란 건 사실이다.
아니, 경악했다는 게 맞다. 다만 판별식에서 금색 불꽃을 만들어낸 라온이기에 오히려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을 얻었으니, 라온 도련님은 그 누구보다 강해지시겠군요."
"아니."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재능도, 무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인간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도, 강한 인간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지."
글렌이 마의 벽은 넘은 이후에도 판별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재능을 발현한 아이들에게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단순한 재능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운 걸 봤더니, 저도 모르게."
로엔이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글렌은 재능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물론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뛰어난 무학과 재능만을 따졌지만.
"앞으로 무언가가 변할 것 같구나."
글렌은 옥좌의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만화공. 가문에서 딱 한 번만 나왔던 금색 불꽃. 모두 라온이 가져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신의 손자이지만, 대놓고 사랑을 줄 수 없는 그 아이 때문에 가문 내외로 많은 변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이지. 글렌은 그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 * *
라온은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몰라서 문까지 잠갔다.
-거창하구나.
'너도 알 텐데. 오러 연공을 하는 중에 방해를 받으면 죽을 수도 있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연공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개인 침대에서 잘 때까지 불의 고리를 연성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너도 방해하지 마."
-흐음!
"너 설마…."
-딱 한 번이다.
푸른 불꽃 사이로 빙글거리는 미소가 피어났다.
"한 번?"
-본왕은 네놈이 그 연공인가 뭔가를 하는 동안 딱 한 번 방해하겠다.
"그러다가 네가 내 몸을 가져가기 전에 폐인이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다.
라스에게서 짐승의 목 울림 같은 비웃음이 들려왔다.
-넌 극복하지 못하겠지만, 본왕은 네놈의 사지가 잘리고, 단전이 터져도 살려낼 수 있다.
사이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함이 등골을 스쳤다.
-네가 폐인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가 본왕에겐 기회가 되겠지.
'이놈은 역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라스는 아군이 아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마계의 악마이자, 분노의 화신이었다.
"한 번이라고 했나?"
-본왕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터. 그 연공법을 습득할 때까지 딱 한 번만 끼어들겠다.
"어쩔 수 없겠네."
라온이 손목을 문질렀다.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라. 본왕이 언제 네놈의 정신을 찌를지 모르니까.
라스의 목소리에 격한 흥분이 담겼다. 처음으로 놀릴 기회가 생겨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왕이라는 놈이 고작 이런 거 가지고.'
매번 본왕이라는 유치한 호칭법을 사용하고, 마계의 군주이니, 분노의 왕이니 하는 놈이 이런 사소한 것에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만 했다.
'그렇지만….'
라스가 한 번의 방해만 한다고 해도 위험한 건 사실이다.
만화공은 자연의 마나를 흡수해서 단전에 오러를 쌓는 연공법.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았다간 마나 회로나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마나 회로에 냉기가 박혀 있는 자신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래도 밀릴 순 없지.'
라스는 약하게 나오면 더 세게 밀고 들어오는 성격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래. 해봐."
라온은 속마음을 감추고 여유롭게 웃었다.
-그 건방진 표정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지.
"그럼 평생 지켜만 봐야 할 텐데."
-…지금 당장 네 정신을 부수고 싶군.
"해봐. 난 가만히 있다가 능력치만 받아먹으면 되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버러지가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이 버러지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두드려라."
-끄으윽!
손을 휘휘 젓고서 침대 아래에 앉았다. 라스가 폭주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시원하게 무시했다.
'놈이 생각이 있다면 지금 건드리진 않겠지.'
찬찬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들이키는 숨결에 자연의 마나를 담았다. 청량함으로 전신을 채우고, 다시 날숨. 마나 회로에 깃든 탁한 기운을 뱉어냈다.
'좀 겹치는데.'
만화공의 흐름과 불의 고리의 흐름은 그 이름처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인 마나를 마나 회로에 가라앉혔다.
우측 손목에서 만화공의 흐름이 시작된다. 그 기운은 불처럼 과격하면서도 물처럼 도도했다.
고오오오!
뜨거운 마나가 전신을 질주한다. 장중한 흐름에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들이 쓸려나갔다.
'이것도 놓칠 순 없지.'
저 순수한 냉기를 버리기엔 아까웠다. 만화공의 기운과 함께 단전까지 이끌었다.
후우웅.
순식간에 단전까지 내달린 만화공의 기운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당연하겠지.'
한 번의 연공으로 만화공을 습득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만화공의 흐름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지면 그 기운이 자연스럽게 단전에 안착할 것이다.
'거기다.'
만화공의 기운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의 냉기도 흡수하고 있으니, 냉기 저항력도 빠르게 성장하게 될 거다.
"후…."
한 번의 순환을 끝낸 라온이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눈을 떴다.
-화속성인가.
"단일 속성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연공법 자체는 굉장히 뛰어나."
-너 치고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뭐?"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놈들이 문제지.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은 만능자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냉기로 하나의 성을 얼려버린 이야기는 역사에도 남았지….
"음."
라온은 자기 자랑을 시작하는 라스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그가 전에 했던 말에 주목했다.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이라.'
그의 말이 맞다.
한 가지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자들은 반푼이 취급을 받지만, 격을 넘어선 사람들은 절대자 취급을 받는다.
한 번의 연공으로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특별하다. 전설로 내려오는 불의 고리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제대로 익혀봐야겠어.'
한동안 만화공에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그 전에."
-이제 처리하려는 거냐?
"그래. 밤마다 찾아오는 걸 보면 우연은 아니니까."
라온의 빨간 눈동자가 사신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오랜만에 복직 좀 해볼까.
* * *
주디엘은 한 달 전 별관에 들어 온 신입 시녀다.
좋은 인상과 밝은 성격, 깔끔한 일 처리 덕분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별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다만 하루 업무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러 간다던 그녀는 정원의 나무 위에 숨어 라온의 방을 엿보고 있었다.
'또 혼잣말인가.'
주디엘은 방에서 중얼거리는 라온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영향일 지도 모르겠다.
허공과 대화하던 라온이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자, 주변 마나의 흐름이 급변했다.
저렇게 명상에 빠진 적은 많았지만, 마나의 파동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역시 가주전에 가서 오러 연공법을 배워왔군.'
라온은 동색의 패를 이용해서 오러 연공법을 얻어 온 것 같았다. 마나의 흐름이 굉장히 격렬했다. 생각보다 강한 연공법이었다.
'보고할 게 늘었어.'
주디엘은 라온이 다시 눈을 뜨고, 방에 불이 꺼지고 나서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정원의 끝에 있는 작은 호수에 가서 땅에 숨겨둔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그 종이에 라온이 별관에 돌아온 이후의 행적과 파악한 내용을 전부 적었다.
신기하게도 종이는 글씨를 적자마자, 바로 사라져서 옆에서 보기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짓도 할 게 못 된다니까."
주디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약점이 될 정보들을 보고하다니, 갑작스럽게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래도 해야지."
씁쓸함은 잠시였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허무한 마음을 채웠다.
툭.
주디엘은 종이를 엄지손톱 크기로 접어 호수 위에 띄웠다. 저 종이는 내일 아침에 카룬 지그하르트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다.
"그럼 돌아가…아!"
몸을 일으키다가 황급히 멈춰 섰다. 뒷목에 닿는 서늘한 날붙이의 감각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입을 열면 죽는다."
어쩔 줄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릴 때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움직여도 죽는다."
죽음을 담은 듯한 목소리에 솜털이 우수수 돋아났다.
"눈을 내려 호수를 봐라."
목소리의 지시에 눈동자를 깔아, 호수를 보았다.
"아…."
밤하늘을 머금은 어둑한 호수 위. 라온 지그하르트의 붉은 눈이 떠 있었다.
제23화
꿀꺽.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째서 저 아이가 여기에….'
침대에 누워 자고 있어야 할 라온 지그하르트가 왜 자신의 뒤에. 그것도 칼을 겨눈 채로 나타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으으….'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호수에 비치는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생각은커녕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생명을 베어낸 살인마와 눈을 마주친 기분이다. 심장이 꾹 우그러들었다.
"별관에 돌아온 첫날부터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더군."
"흡…."
첫날이라면 자신의 시선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렸을 때부터 첩자 교육을 받아와서 기척을 죽이고, 존재감을 감추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정체가 발각되고, 뒤를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을 벌려라."
"아아…."
라온 지그하르트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주디엘은 어깨를 덜덜 떨며 입을 벌렸다.
"끄어억…."
벌어진 입을 통해 라온 지그하르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 손가락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넘어갔다.
"캬학!"
송곳으로 식도와 위를 뚫어버리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으흑…."
불을 삼킨 것처럼 뱃속의 열기가 식질 않았다. 복부를 쥐어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차박.
라온 지그하르트는 배를 잡고 버둥거리는 자신을 놔두고, 호수로 들어가서 감색 종이를 가지고 왔다.
스르륵.
종이를 펴는 그의 눈동자는 어둠을 담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범한 종이가 아니로군."
"크흡…."
주디엘은 입을 꽉 다물었다. 통증이 지독했지만, 첩자로서 자존심이 있다. 이대로 굴복할 수는 없었다.
"...."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 흙, 불, 바람."
그는 갑자기 원소를 말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내용을 살필 방법을 찾는 것 같았다. 다만 그걸 왜 입으로 내뱉는지는 모르겠다.
"…햇빛, 달빛."
"…."
답은 달빛이었지만, 주디엘은 반응하지 않았다. 혀를 씹으며 뱃속을 으깨는 듯한 고통을 견뎠다.
"달빛이었군."
"어…?"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정답을 말했다.
'뭐, 뭐야! 어떻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참고만 있었을 뿐이다. 종이의 비밀을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는 몸을 돌려서 종이에 한참 동안 달빛을 쏘아낸 뒤 그 내용을 확인했다.
"여러모로 조사 한번 잘했군. 이건 어디로 가는 거지?"
"으…."
라온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젠 고통보다도 무서움이 더했다. 목덜미를 조여오는 듯한 공포감에 허리가 아려왔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첫째 딸 이름을 불렀다.
"카룬 지그하르트, 데니어…. 카룬 지그하르트였군."
"허억!"
주디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트렸다.
"다, 당신 뭐야!"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에 턱이 덜덜 떨렸다.
'이, 이 아이는 대체!'
표정 관리와 인내력은 첩자가 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요소다.
저런 어린아이가 훈련받은 자신의 눈빛을 보고 정보를 빼가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
라온 지그하르트는 여전히 말없이 자신을 굽어본다. 서슬 퍼런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표정으로 읽는 게 아니라면?'
그의 눈은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그저 고통받는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배를 찢을 듯한 고통 그리고 생각을 읽는 듯한 라온의 모습에 머릿속으로 저주 하나가 스치고 갔다.
"내, 내게 레이지 웜을 먹인 겁니까?"
"레이지 웜을 알고 있었나?"
라온 지그하르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너 따위가 그걸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끄어어억!"
구역질이 나왔다.
'레, 레이지 웜이라니!'
레이지 웜은 최악이라 불리는 저주 중 하나다. 술자가 먹인 벌레가 몸에 들어가면 위치만이 아니라,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도 파악된다.
가장 지독한 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술자가 원할 때 지독한 고통을 주면서 죽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밖에 없어. 레이지 웜이야!'
이 지독한 고통, 생각을 읽는 듯한 라온 지그하르트의 모습으로 볼 때 입에 들어간 건 레이지 웜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레이지 웜을…."
이제 13살이 된 아이. 그것도 평생 병을 앓아온 아이가 레이지 웜을 사용했다는 게 의심 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라온 지그하르트가 종이를 흔들며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으…."
그 말이 맞다. 레이지 웜이 몸에 들어간 이상 반항도, 도주도 생각할 수 없으니까.
"카룬 지그하르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는 건 중무전의 첩자라는 뜻이겠지. 계획은 7달 전 판별식 때부터였을 테고."
"...!"
주디엘이 눈을 부릅떴다. 그것도 맞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7달 전 판별식에서부터였다. 다시 한번 레이지 웜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아주 자세히 조사했군. 나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와 헬렌, 다른 시녀들까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달빛에 반짝이는 글씨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어린 살기에 등골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거, 건드려선 안 될 인간을 건드렸어.'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별관엔 무인도 없고, 사람들은 선하다. 어린 라온과 폐인이 된 실비아의 정보를 모아오는 임무이니, 누워서 떡 먹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별관엔 괴물이, 그것도 지독한 살의를 가진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당장 목을 매달고 싶었다.
"끄으윽…."
팔의 살을 쥐어뜯었다.
라온에게서 전해지는 창백한 살기에 얼굴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았고, 레이지 웜이 있는 장기는 터질 지경이었다.
"내, 내용을 바꾸겠습니다. 사실이 아닌…."
"그럴 필요 없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종이를 아래로 내려 달빛에 비치는 글자를 지웠다. 다시 종이를 접은 뒤 호수 위에 띄워놓았다.
"어, 어째서…."
"지금 정보를 수정해도 내 정보는 결국 카룬에게 전해진다. 그리되면 네가 무능하다는 것만 알리는 꼴이 되겠지."
"흡!"
그가 무릎으로 앉으며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피처럼 뻘건 붉은 눈. 손발이 바르르 떨렸다.
"보고 주기는?"
"저, 정기보고는 2주일입니다."
"오늘 내가 버렌을 꺾었으니, 정기보고가 더 빨라질 거다. 아마 1주일로 바뀌겠지."
"아, 예…."
주디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라온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지금부터 넌 이중 첩자다. 바로 들킬 정보는 내어주고, 들키지 않을 중요한 정보는 숨겨라. 반대로 그쪽의 중요 정보는 내게 가져와."
"아, 알겠습니다."
지금의 공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돌아왔을 땐 쓸만한 정보가 있길 기대하지."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으윽…."
하지만 아직도 그의 붉은 눈이 자신의 심장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털썩.
주디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 고통이…."
어느새 고통도 사라졌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레이지 웜을 제어한 것 같았다.
'괴물….'
반항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존재가 별관의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었으니까.
"으으!"
주디엘은 입술을 깨물고서 숙소로 달려갔다. 라온이 남긴 공포는 목덜미에 돋아난 닭살처럼 그녀의 심장에 깊게 박혔다.
* * *
-언제 레이지 웜을 소환한 거냐.
"그건 레이지 웜이 아니야."
방으로 돌아온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뭐?
"일시적으로 극한의 통증을 일으키는 독을 먹였을 뿐이다."
전생에 레이지 웜에 당하긴 했지만, 기억도 없을 때라 소환 방법 따윈 모른다. 주디엘에게 먹인 건 고문에 사용하는 독일 뿐이었다.
"레이지 웜 따위는 있어도 안 써."
그런 지독한 저주를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앞에 그 벌레가 있었다면 발로 으깨버렸을 거다.
-그럼 그 독은 어디서 났지?
"만들었다."
-아까 주방이랑 창고에 갔던 게 그럼….
"맞아."
독의 조합법 정도는 외우고 있기에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로 변형된 독을 만들었다.
-잠깐. 넌 그놈의 생각을 모두 읽지 않았느냐.
"그랬지."
-레이지 웜도 없이 그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몇 가지는 예측, 몇 가지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상태를 보았다? 놈은 계속 같은 표정이었는데?
라스의 푸른 불꽃이 요동쳤다. 상태를 보고 정보를 알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난 알 수 있어."
전생에서 20년 넘게 암살자로 살아왔다. 고문을 해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주디엘의 생각을 읽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3살짜리가 인간에게 공포를 심는 방법을 알다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본 적 없는 일이다.
맞는 말이다.
전생에서 암살자로 살아온 시간이 없었다면 주디엘이 정보를 모으는 걸 알지도 못했고, 이런 방법을 쓸 수도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전생의 삶이 나름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카룬 지그하르트였단 말이지."
라온이 침대에 앉으며 카룬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가 왜 주디엘을 넣었는지, 대충 예상은 간다. 판별식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이쪽의 정보를 파악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선택을 잘못했다.
자신만을 관찰했다면 모를까 별관에 있는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까지 관찰범위에 끼워 넣다니,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왜 정보를 바꾸지 않았지?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그 여자가 적은 종이엔 네가 냉기를 많이 이겨냈다는 정보와 뛰어난 오러 연공법을 구해왔다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걸 지워야 하지 않나?
"그건 어차피 피라미 정보야. 뒤통수를 치려면 그 정도는 넘겨줘야지."
그는 손가락으로 침대보를 쓱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내 진짜 정보를 중무전에 보내다 보면 정보에 대한 신뢰가 쌓일 거야. 그렇게 쓸모없는 정보를 보내주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거짓 정보를 보내면 카룬 지그하르트를 잡아먹을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야."
-허….
라스가 헛바람을 흘렸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 역시나 이놈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네놈은 역시 13살이 아니다. 뱃속에 백 년 묵은 능구렁이가 가득 차 있어.
"고작 능구렁이?"
라온은 라스를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능구렁이가 아니라, 암살자지.'
그것도 최고의 암살자.
* * *
루난 슬리온은 본가로 돌아왔어도 단련을 쉬지 않았다.
시험 날 라온 지그하르트가 보여준 움직임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 돼."
집에 있는 기구로 단련을 하자, 연무장에 있을 때와 다르게 들 수 있는 무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기구만이 아니다. 오래달리기나, 다른 체력 단련도 평소보다 잘 되질 않았다.
"음…."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하나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없다. 항상 옆에 붙어 다니던 그가 없기에 평소처럼 힘을 내기 힘들었다.
최근엔 라온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가 더 좋아져서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맡는데, 그 탓도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해.'
루난 슬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단련장을 나왔다.
"루난?"
슬리온 가의 가주 로칸 슬리온은 가문의 연무장을 떠나는 루난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아빠랑 같이 수련하기로 했잖아. 어딜 가는 거니?"
"라온한테."
"라온? 서, 설마 라온 지그하르트?"
"응."
"그, 그 녀석에게 왜 간다는 거니? 그것도 아빠랑 같이 훈련하기로 한 지금?"
로칸 슬리온은 평소의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말을 더듬었다. 간신히 시간을 내서 막내딸과 놀려고 했는데 갑자기 라온에게 간다고 하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냄새도 있고, 수련도 있어."
"어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갈게."
루난은 의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치고서 단련장을 나갔다.
"자, 잠깐만! 수련은 여기서 아빠랑 하면 되잖아!"
"가서 해야 해"
루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계속 간다고만 하다니, 서, 설마 라온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게냐?"
"무슨 짓?"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내려 라온과 함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도와줬지.'
라온이 직접 도움을 주진 않았지만, 그의 옆에 있기만 해도 훈련이 잘되었으니, 도움받은 게 맞았다.
"응. 했어."
"끄으윽! 라온. 네 이놈!"
로칸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내 딸을 협박해?'
루난의 짧은 대답에 로칸의 상상력이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라온에게 협박을 당해서 덜덜 떠는 딸의 불쌍한 모습이 그의 뇌리를 잠식했다.
"아이고! 가주님!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업무는 절대 미뤄서는 안 되는…."
"당장 내 검을 가져오라!"
로칸은 자신을 찾으러 온 집사에게 호통을 쳤다.
"엑? 거, 검이요?"
"루난. 나도 가마! 그놈을 그냥 둘 수는 없겠어!"
로칸이 눈을 부라렸다. 당장에 지그하르트의 별관을 박살 낼 기세였다.
"어? 어?"
집사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딸 바보가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하는 게냐! 내 검을 가져오라 하지 않았느냐!"
"자, 잠시만요! 가주님! 저랑 이야기 좀…."
"이야기는 필요 없다! 검과 징벌만이 있을 뿐!"
"어후…."
집사는 루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맹한 눈으로 로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 말수 없는 아가씨로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걸 해결할 사람은 그분밖에 없어.'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서 저택으로 들어가 검 대신 마님을 찾아갔다.
* * *
"그러니까 라온 도련님이 네 수련에 도움을 줬다는 거지? 협박이 아니라."
"응."
어머니인 클라라의 말에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클라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하며 좌측으로 돌아갔다.
"아, 아니, 난 당연히 혀, 협박이라도 당한 줄 알았지. 그냥 간다고만 하니까. 이건 누구라도 오해를 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금방이라도 지그하르트로 돌격할 것 같았던 로칸은 어깨를 반으로 접은 채 구석에 쭈그려 있었다.
"시끄럽고. 가서 일이나 해요."
"아니, 오늘은 우리 루난이랑 놀기로…."
"쓰읍."
"아, 알겠어."
"이따가 가서 확인할 테니까. 일 처리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각오하세요."
"으, 응. 걱정하지 마."
로칸은 그 큰 덩치를 축 늘어뜨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루난."
"응?"
"라온 도련님께 고맙다고는 했니?"
"과자 받았을 때 했어."
"수련을 도와줬을 때는?"
"안 했어."
"후후."
클라라는 고개를 젓는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만났을 땐 고맙다고 하렴."
"근데 아빠가."
"음?"
"아빠가 남자한테는 먼저 말을 걸지 말라고 했어."
"아하!"
클라라가 빙긋 웃었다. 집사는 그 웃음을 보며 오늘 로칸이 밤새 잔소리를 들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아빠 말은 잊으렴. 남자도, 여자도 상관없어.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당연한 예의란다. 알겠니?"
"응."
"그럼 오늘은 아빠 말고, 엄마랑 수련할까?"
"응."
루난은 클라라와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가며 라온의 덤덤한 얼굴을 생각했다.
'고맙다고 해야지.'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을 하자, 아주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24화
라온은 창가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렵군.'
휴가 동안 잠을 아끼며 연공해 봤지만, 오러를 만들지 못했다.
'보통 연공법이 아니야.'
글렌의 표정을 봤을 때도, 뇌리에 박힌 만화공을 살폈을 때도 느꼈지만, 이 연공법은 동색의 패 따위로 얻을 무학이 아니다.
은패. 아니, 금패 수십 개를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왜 그냥 줬을까.'
글렌이 자신과 실비아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데, 이런 대단한 오러 연공법을 그대로 넘겨준 이유를 모르겠다.
가장 놀라운 건 책이 가루가 되고, 그 지식은 자신에게만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러 연공법에 문제가 있는 건가?'
완성된 연공법이 아니라, 어딘가 하자가 있는 오러 연공법이라 실험을 위해 그냥 주었을지도 모른다.
"음…."
라온은 머릿속에 저장된 만화공의 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해보았다.
'별문제는 없는데.'
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히 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펄떡이며 치솟았다.
-본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간, 네 영혼과 육신은 분노에 삼켜질 것이다.
"그러던가."
라온은 끌끌 웃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도 보지 못한 건방짐이로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콧대를 찍어 눌러주마.
"계속 말하잖아. 할 수 있으면 하라고."
손을 휘휘 젓고서, 방을 나갔다. 라스에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명경지수. 한밤의 호수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온."
"라온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얘기도 별로 못 했는데, 밥도 별로 안 먹었고…."
실비아가 아쉬운 점을 쏟아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주말마다 올 수 있잖아."
임시 수련생일 때와 달리 정식 수련생이 된 덕분에 주말에는 별관에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실비아의 우울한 감정이 시녀들에게도 옮았는지, 로비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 다녀올게."
이런 민망한 감정과 상황은 쥐약이다. 재빠르게 손을 흔들고서 별관의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여는 중에 시녀들의 끝자리에 서 있던 주디엘과 눈을 마주쳤다.
"흡!"
주디엘이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을 막았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 공포라는 괴물에 잡아 먹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공포로 인간을 지배하는 건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녀가 카룬 지그하르트가 있는 중무전의 중요 정보를 빼 온다면 제대로 거두어 줘야겠다.
-괴물 같은 놈.
주디엘의 표정을 본 라스가 탄식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괴물에게 듣는 괴물 칭찬도 나쁘진 않군.'
라온은 옅게 웃으며 일주일간 떠나 있던 5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집합 시간보다 10분 정도 빨리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이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160명 중 남은 아이는 42명밖에 되지 않아서 연무장이 텅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4분의 1만 남기다니, 리메르는 평소 보여주는 가벼움과 달리 결과에 대해서는 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으음!"
"또 무언가 달라진 거 같은데…."
아이들이 라온을 보는 눈빛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6개월 전 그들의 눈빛에 조롱과 비웃음, 약간의 동정이 담겨 있었다면 지금은 질시와 놀라움, 동경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만화공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몸을 풀고 있을 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냄새를 맡는 듯한 흥흥거리는 콧소리까지 이어졌다.
'이 걸음 소리는….'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눈을 맹하게 뜬 루난이 있었다.
-저 계집 이젠 냄새를 맡으며 따라온다.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나?
'글쎄. 강아지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해서.'
라온은 어색한 표정으로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 걸음 더 다가와서 멈춰 섰다.
"고마워."
"어?"
뭐지?
갑자기 왜 고맙다는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
루난은 고맙다고 말하고선 밥 주기를 기다리는 고양이 눈이 되었다. 평소와 달리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 응."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루난은 고개를 작게 꾸벅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제 평소와 같은 거리였다.
"음!"
그러고선 해냈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맙다는 말은 왜 한 거지?"
"고마우니까."
"아…."
오히려 루난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모양새를 보니, 더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뭐, 뭐야? 저 계집 뭘 하고 싶은 거냐!
'나도 모르겠어.'
전생과 현생을 모두 뒤져도 루난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저 맹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모닥불을 보고 있을 때처럼 정신이 탁 풀린다.
다만 방해하는 것도,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감정을 모르기 때문인가?'
상대의 감정을 잘 몰라서 루난이 고맙다고 말한 이유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도 함께 당황했지만, 저 녀석은 성격 파탄자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당황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는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도리안이 녹색 머리칼을 날개처럼 펄럭이며 달려왔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관이라도 만난 것처럼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왔다.
"자,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임시 수련생일 때도 죽을 것 같았는데, 정식 수, 수련생이 된 지금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가서 쉬는 동안 계속 악몽만 꿨습니다. 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