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

***

"커널 대령님, 총공격을 준비해 주십시오."

"뭐? 지금 말인가?"

내 말을 들은 커널 대령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진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진 기지 내부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시민들과 용병, 영지 사냥팀, 교대할 병사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모여서 성문을 열라는 시위가 한창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기간트로 압박한다면, 스스로 문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커널 대령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라그르 중령도 입을 열었다.

"제 기간트로 우측 뿌리를 타고 올라가 성벽을 공격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령관께서 성문을 두들긴다면 저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좋다!"

커널 대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라그르 중령! 지금 당장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게!"

"네! 사령관님."

기이이잉! 쿵! 쿵! 쿵!

기간트와 병사들이 전진 기지 성문 앞에 섰다.

커널 대령의 룩급 기간트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당장 성문을 열지 않으면, 카야킨 전진 기지의 신임 사령관 권한으로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겠다!]

하지만 내부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군 앞으로!]

[전군 앞으로!]

쿵! 쿵! 쿵!

라그르 중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먼저 우측 뿌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4대의 기간트가 그 뒤를 따랐다.

[성문을 부숴라!]

[성문을 공격해라!]

커널 대령이 명령하자, 도끼를 든 기간트들이 성문 앞으로 이동했다.

쾅! 콰앙!

거대한 도끼가 성문에 내려칠 때마다 불꽃이 튀고,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저렇게 해도 괴수를 막기 위한 성문이라 워낙 튼튼했기에 단시간에 부서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부가 소란한 지금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쿵! 쿵! 척!

라그르 중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뿌리 위에서 동쪽 성벽 위를 향해 창을 겨눴다.

[자! 누가 먼저 내 창을 받겠느냐?]

성벽 위에 있던 기간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분명 누군가 다칠 것이고, 아무리 대수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이 일에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했다.

[공격을 멈춰라! 문을 열겠다!]

그때 성문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잉! 쿠웅!

문이 열리자, 커널 대령이 명령했다.

[모두 진입하고, 기간트의 무장을 해제하라! 반항하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

[네!]

쿵! 쿠쿠쿵!

기간트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 들어갔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성문이 열렸다는 것은 저들이 농성을 포기했다는 뜻이기에 큰 싸움은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안에서 라그르 중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밖으로 나왔다.

[커널 사령관님, 모두 제압했습니다.]

상황이 종료됐다.

커널 사령관의 기간트가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일러 중위, 함께 들어가지.]

커널 대령이 날 찾았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내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전진 기지로 입성했으니 당연한 거다.

난 커널 대령의 기간트를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 한쪽엔 농성에 참여했던 기간트들이 세워져 있었고, 기사들은 모두 제압된 상태였다.

그리고 기지 입구 쪽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분위기가 꽤 흉흉했다.

그들은 전진 기지의 시민들과 병사, 용병들이었다.

그때 눈에 익은 붉은 머릿결의 용병이 보였다.

'응? 용병이 기간트도 있어?'

그녀는 타냐 블랙이었고, 그녀의 뒤에는 특이하게 생긴 나이트급 기간트가 서 있었다.

쿵! 철컥! 치이이익!

커널 대령이 기간트에서 내렸다.

난 커널 대령 바로 뒤에 섰다.

그러자 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다가왔다.

어깨에 3개의 금색 줄.

전임 사령관인 프랭크 대령이었다.

"커널 대령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프랭크."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선배님은 생도 시절에도 절 그렇게 괴롭히시더니, 이젠 대수림까지 쫓아오셨군요."

"뭔가 기억의 오류가 있군. 난 선도부로 말 안 듣는 후배를 교육한 것뿐이지, 괴롭힌 적은 없네."

"그야 당하는 사람과 괴롭히는 사람의 기억이 달라서겠죠."

갑자기 커널 대령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당해? 자네에게 괴롭힘을 받았다는 동기생과 후배가 수십 명이야! 그리고 레인만 가문의 삼남을 괴롭힐만한 간 큰 생도가 어디 있겠나?"

"아니, 지금도 보십시오. 선배가 절 기지에서 내쫓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내쫓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인사이동이네."

커널 대령은 품에서 윌리엄 사령관의 명령서와 임명장을 꺼냈다.

프랭크 대령은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 장벽 사령관님께서 바뀌셨군요. 전 모르고 있었습니다."

뻔뻔한 상판대기를 보고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이미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전진 기지로 향하는 영지 사냥팀을 통해 통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프랭크는 전혀 모르는 척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건가?"

"후후! 그래도 무력 충돌은 피하지 않았습니까. 선배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대수림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죠. 특히 아리칸 공국의 전진 기지가 여기서 겨우 두 달 반 거리에 있습니다. 그놈들은 우리와 같은 기간트를 쓰고 있고, 우리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교대하는 제국군으로 위장해 카야킨 전진 기지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선배도 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조언 고맙군."

"하하! 뭘요. 우리 사이에 이런 정보는 알려드려야죠."

프랭크 대령은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자넨 말이야 생도 시절부터 옹졸하고 추잡한 짓만 하더니,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군."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커널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때문에 기지에서 빨리 치료받았으면 살 수 있는 병사가 다섯이나 죽었어. 그건 어떻게 책임질 건가?"

"책임이요? 제가요? 그들이 제 병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막말로 그깟 병사 몇 명 죽었다고 제국의 대령이 처벌받겠습니까?"

순간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이번에 죽은 병사 중에는 나와 함정을 만들고 표범 괴수를 잡다가 크게 다친 할버드병도 있었다.

그는 나와 함께 큰 공을 세웠으니, 제대로 된 치료와 포상을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너무 짜증 나고 괘씸하지만, 그는 이젠 장벽으로 돌아갈 테니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었고, 이대로 상황은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런데 뒤에 있는 정보국 장교는 뭡니까? 상급자에게 경례도 하지 않다니요."

프랭크 대령이 내 앞에 섰다.

짜악!

"헛!"

순간 별이 보이고,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마나를 품은 기사의 손은 정말 매웠다.

"건방진 새끼! 어디서 눈을 부라려? 너도 내가 만만해 보여? 너 같은 중위 새끼 하나 끝장내는 건 일도 아니야. 어쭈! 그래도 경례를 안 해?"

프랭크 대령이 다시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턱!

커널 대령이 프랭크 대령의 손목을 잡았다.

"황제 폐하께서 임명한 장벽 사령관의 권한으로 전진 기지에 부임한 나를 막아선 범죄자에게 경례라니, 아직도 자네 죄를 모르겠나?"

"범죄자라니? 계속 선배 대접을 해줬더니 말이 지나치군! 난 군인이지만 또한, 제국의 귀족이다. 정당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지. 내가 장벽으로 돌아가거든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게."

프랭크 대령은 고개를 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커널 대령은 프랭크의 손목을 놓았다.

"자네 말이 맞아. 제국의 귀족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지. 그리고 비싸고 실력 좋은 변호사를 쓰면 바로 풀려날 테고."

"잘 아는군."

"그럼 그 전에 내가 조사를 좀 해야겠어."

"조사라니?"

"나와 제국의 기간트를 막은 것을 보면, 자네가 아리칸 공국과 내통했을 수도 있고. 또 불법으로 마석과 부산물을 빼돌린 것이 들통날까 봐 우리를 다시 장벽으로 보내려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와 부하들은 조사가 다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 거야."

"뭐라? 그럴 순 없다. 재판을 받기 전까진 난 자유의 몸이다."

"그럴 순 없긴? 여긴,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대수림이 아닌가."

"그, 그건."

프랭크 대령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우리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도록 하지."

커널 대령이 손짓하자, 호프만 대위와 병사들이 다가왔다.

"프랭크 대령과 장교들이 아리칸 공국과 내통했는지 조사해야겠다. 모두 감옥에 가둬라!"

"네!"

병사들이 프랭크 대령과 기사들을 끌고 갔다.

그 상관에 그 부하인가?

어째 커널 대령의 일 처리 방식이 윌리엄 사령관을 많이 닮았다.

"자네 괜찮나?"

"네?"

"얼굴 말이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커널 대령은 끌려가는 프랭크 대령을 쳐다봤다.

"물론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장벽까지 빨라도 한 달 반이야. 저놈 가문이나 수도에 연락이 닿으려면 한두 달은 더 걸릴 거고. 그리고 누군가 명령을 받고 대수림을 통과해 전진 기지에 다시 오는데, 또 몇 달은 걸리겠지. 그리고 윌리엄 사령관께 이번 일을 상세히 보고할 생각이네. 그럼 사령관께서 과연 그 누군가를 쉽게 통과시키실까?"

"아무리 짧아도 1년은 꼼짝할 수 없겠군요."

"또 모르지, 그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다가 사고로 죽는다면, 다음 전진 기지 사령관이 부임할 때까지 여기 있다가 나와 함께 돌아갈 수도 있고."

"하긴, 이곳은 대수림이니까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수림에선 힘이 곧 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도 이런 일 처리 방식은 배워야 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마법인형을 만드는데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전생엔 정말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법인형을 만들었는데...

그때 끌려가는 프랭크 대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짹, 보고 있지?'

[네, 마스터. 죽일까요?]

'뭐?'

[조금 전에 저자를 향한 마스터의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살기를 느껴? 암살자의 스킬 같은 건가?

'아니야. 그냥 어디에 갇히는지 장소만 알아내.'

[네, 마스터.]

***

쾅! 콰앙!

휘둘린 커다란 앞발에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으악! 괴수다!"

"기간트를 불러라!"

병사들과 간수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난 순식간에 3개의 쇠창살을 부수고 프랭크 대령이 갇혀 있는 감옥 문을 부쉈다.

콰앙!

"뭐, 뭐냐?"

프랭크 대령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크앙!"

퍼억!

"으헉!"

쿠웅!

앞발 후려치기 한방에 프랭크 대령이 날아가 쓰러졌다.

프랭크는 마나를 다루는 기사였지만, 좁은 감옥에 무기도 없이 괴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난 기절한 놈의 몸통을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프랭크 대령님!"

"괴수가 대령님을 잡아먹는다! 어서 구해라!"

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부하 장교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 누가 나서겠는가.

난 순식간에 감옥을 빠져나왔다.

'짹! 놈을 옮겨.'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짹에게 프랭크 대령을 넘겼다.

그리고 표범 꼭두각시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렇게 프랭크 대령 납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18. 진짜 속셈.

18. 진짜 속셈.

뚝! 뚝! 뚝!

동굴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폐광산 한구석.

꽤 넓은 공간이지만, 램프 하나에 의지한다.

"으! 으윽!"

프랭크 대령이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뭐, 뭐야?"

밧줄에 결박당한 프랭크 대령이 굼벵이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힘 빼지 마. 너만 힘들어."

프랭크 대령이 날 쳐다봤다.

"너, 넌! 그 정보국 장교?"

"그래, 네놈에게 처맞은 타일러 중위다."

마나를 담아서 때렸는지 놈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욱신거린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결박을 풀어라!"

"참! 분위기 파악 못 하네. 너 지금 납치된 거야."

"뭐? 납치?"

프랭크 대령이 날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갑자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주변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커널 대령!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

"······?"

"날 납치하려고 기간트에 괴수 탈까지 쓰고, 이 이상한 연극을 꾸민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프랭크는 지금 커널 대령이 시켜서 자신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커널! 대체 원하는 것이 뭐냐? 내 사과를 원하나?"

"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여긴 나와 너밖에 없어."

"뭐라?"

프랭크가 몸까지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곧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고작 뺨 한 대 맞았다고 복수라도 하려는 거냐?"

"글쎄. 그것만이 아닐 텐데······."

"어허! 난 아베르크 제국의 대령이다. 일개 중위 따위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응! 난 무사할 것 같은데?"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프랭크 대령이 호통을 쳤다.

"죽고 싶은 건 네놈 같은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헉!"

프랭크 대령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까지 묶여 있었기에 바닥을 구르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령이 소리쳤다.

"젠장! 내가 졌다! 마석과 부산물을 숨긴 장소를 말하겠다. 그러니 커널 대령에게 그만하라고 전해라."

이 새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카야킨 사령관이 새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기지에서 챙긴 마석과 부산물을 빼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입구를 막은 거지 결코, 커널 대령의 부임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 물건은 지금 어딨어?"

"그 전에 이것부터 풀어라. 아니면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

프랭크 대령이 입을 다물었다.

푹!

"으악!"

놈의 허벅지를 찔렀다.

"다음엔 오른쪽 어깨다."

칼을 뽑아 어깨로 향했다.

"6, 6번 게이트로 나가서 오른쪽 통로로 2km쯤 이동하면 작은 폐광산이 하나 있다. 그곳에 모두 숨겼으니, 다 가져가라고 해라. 나도 지쳤다. 이제 그만하자. 어서 상처를 치료해다오. 하아!"

프랭크 대령이 신음 같은 한숨을 쉬었다.

놈이 우리를 막은 진짜 속셈을 이제야 알았다.

나도 따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 결국, 네놈 욕심 때문에 다섯이나 되는 병사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죽었다는 거군."

"······뭐? 병사?"

"내가 원하는 건 마석이나 부산물 따위가 아니야."

단검을 다시 들었다.

"그, 그럼 죽은 병사들의 복수를 하려는 거냐?"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사죄하겠다. 그리고 병사들의 가족에게 크게 사례하마. 그러니 날 살려다오."

"미안하지만, 내 진짜 속셈은 네놈 몸뚱어리야."

"뭐? 내 몸?"

놈을 죽이려 할 때였다.

[마스터, 제가 하겠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망을 보고 있던 짹이 말했다.

'뭐?'

[이런 일은 제가 전문입니다. 마스터의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뭐지? 날 생각해주는 건가?

피식 웃었다.

내가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면 실망하겠군.

'아니야. 이미 피는 묻었어.'

프랭크 대령의 목을 향해 단검을 가져갔다.

"사, 사람 살려······."

쓰윽!

"커, 커헉!"

대령이 몸을 부르르 떨며 땅바닥에 한쪽 얼굴을 처박았다.

지금 놈의 눈동자는 너무나 억울해 보였다.

제국의 대령이자, 레인만 공작가의 삼남이고, 카야킨 전진 기지의 전 사령관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겠지.

난 그와 연결된 운명의 실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프랭크 대령에게 말했다.

"강한 괴수 마법인형이 생겨서 신체 능력이 약한 병사들은 마법인형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더그는 달라. 그는 내 명령을 받고 괴수와 싸우다가 크게 다쳤지. 그리고 한 달 이상 끔찍한 고통을 참고 여기까지 왔어. 고향에 홀어머니와 기다리는 동생들이 있었거든."

"······?"

"그러니 전진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데 네놈이 성문을 막는 바람에······."

그 순간 프랭크의 눈동자가 완전히 풀렸다.

"에이! 관두자."

더 떠들어도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도 나쁜 놈들 천지고, 힘없고 약한 자는 당하기만 한다.

당하지 않으려면 나도 강해져야 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선 강한 마법인형이 필수고.

이 세상에서 강한 마법인형은 기간트에 타는 마법인형이다.

"대령,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 몸은 내가 좋은 일에 써주지."

말을 내뱉자마자, 프랭크의 몸이 축 처지고 연결한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기사회생(lv.3) 스킬을 사용합니다.]

성공 확률은 35%.

하지만 왠지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성공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살리고 싶은 더그는 기사회생에 실패하고, 죽어 마땅한 놈은 내 마법인형이 되었다.

순간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아! 전생 트라우마 오지네······."

내가 사랑했던 동료와 내가 괴수를 잡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사방에선 괴수가 쫓아오고, 폐허가 된 도시로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그녀의 상처는 더 깊어지고 가망이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그녀를 버리고 가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산 채로 괴수들의 밥이 될 테니까.

그때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게 부탁했다.

자신을 죽이고 마법인형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곁에 남겠다고 했다.

결국, 내 손으로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마법인형으로 만들려 했다.

그땐 기사회생 성공 확률이 70%나 됐지만 실패했다.

물론 성공했다고 해도 더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괴로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주변 사람이 죽으면 마법인형으로 만들려는 것은 인형술사의 숙명 같은 것일지도······.

허수아비가 날 멀뚱멀뚱 쳐다본다.

이제 프랭크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놈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치밀어 인형의 집에 넣어버렸다.

치료가 끝나도 당분간은 구석에 처박아 둘 생각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애써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렸다.

좋은 생각을 떠올리자.

'그래! 오늘 처음으로 이 세계 마나를 다루는 첫 마법인형을 만들었지!'

그러니 이제 영혼 이동을 하다 보면, 나도 마나를 배울 수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내가 기간트에 탈 날도 올 것이다.

이건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 기간트만 구하면 되는 건가?

행복한 이계 생활이 다시 그려졌다.

'잠깐, 대령이 마석과 부산물을 폐광산에 숨겼다고 했지!'

***

[카야킨 전진 기지 6번 게이트]

"이렇게 이른 새벽에 정보국 장교가 무슨 일이십니까?"

6번 게이트를 지키는 콜벳 대위가 물었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지금은 새벽 4시로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타일러 중위입니다. 전진 기지 실태를 조사하는 조사관이자, 장벽 사령관께서 임명한 특별 수사관이지요."

"네? 특별 수사관이요?"

난 윌리엄 장벽 사령관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을 보여줬다.

콜벳 대위는 마른침을 삼키며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잠깐 저쪽으로 가시죠."

난 대위를 병사들과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무슨 일이시죠?"

난 진짜 수사관처럼 수첩과 펜을 꺼내 적는 척을 했다.

"지금 거주 구역에 괴수가 출몰해 난리가 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아니요!"

"네?"

"전진 기지 사령관이셨던 프랭크 대령께서 조금 전 괴수에게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프, 프랭크 대령님께서요?"

콜벳 대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조사를 나온 겁니다."

콜벳 대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령이 괴수에게 당했는데, 왜 이곳에 조사를 나왔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대위님과 병사들은 게이트를 24시간 지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항상 3교대로 철통같이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최근에 자리를 비운 이유는 뭡니까?"

"뭐, 뭐요? 자리를 비우다니, 절대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래요?"

콜벳 대위를 보며 피식 웃어줬다.

프랭크 대령이 이 게이트를 통과해 마석과 괴수 부산물을 옮겼다고 했다.

그러니 콜벳 대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프랭크 대령과 한패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네? 한패라니요?"

"프랭크 대령의 부하들이 6번 게이트를 이용해 전진 기지의 물건을 빼돌렸다고 이미 실토했습니다."

"헉! 전 몰랐습니다. 그저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시기에 그랬을 뿐입니다. 부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유도 신문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아마도 대위님과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괴수가 이곳 6번 게이트를 통해 전진 기지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어, 억울합니다. 전 일개 게이트 책임자일 뿐입니다. 제가 전진 기지 사령관님의 명을 어찌 거역한단 말입니까."

콜벳 대위는 흥분했고, 두려움에 손까지 떨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것은 인정하시는군요."

그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고향에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자식들이 있습니다."

"여우 같은 자식이요?"

"그리고 예순이 넘은 노모도 제가 부양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되면 모두 굶어 죽습니다."

"자! 일단 진정하시고, 한 대 피우시죠."

대수림의 벌레를 쫓기 위해 가지고 있던 담배를 내밀었다.

콜벳 대위가 담배를 피우자, 조금 진정 된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비운 것과 그사이에 괴수가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까?"

"하아! 다른 게이트가 전부 닫혀있었다면, 우리 게이트로 괴수가 들어왔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프랭크 대령이 시켜서 한 것입니다."

이미 전진 기지 안에 괴수가 출몰했다고 다들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내가 정리해야 했다.

아니면 기간트와 많은 병사가 괴수를 찾겠다고 고생하고, 시민들은 계속 두려움에 떨 테니까.

'표범 꼭두각시 출동!'

인형의 집에 있던 표범 마법인형을 6번 게이트 입구에 등장시켰다.

"크르르릉!"

"으헉! 괴, 괴수다!"

병사들은 기겁했고 놀라 몸을 숨기기 급급했다.

게이트는 밖에서 들어오는 괴수를 막는 용도지, 지금처럼 안에 괴수를 막을 수 있는 장치는 없었다.

콜벳 대위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한쪽에 세워둔 자신의 폰급 기간트를 쳐다봤다.

기간트에 탄다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신과 기간트 사이에 괴수가 있다는 것이고.

사실 내가 그를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지만.

"대위님!"

"예?"

"이건 기회입니다. 게이트를 여세요."

"네?"

"저 괴수를 보십시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콜벳 대위가 괴수를 쳐다봤다.

괴수는 정말 나가고 싶은지 입구를 어슬렁거리며 문을 할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저놈을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어집니다. 차라리 문을 열어 주고 밖으로 내보낸다면, 그건 대위님이 괴수를 처리한 것이 됩니다."

"제가요?"

"그렇습니다. 만약 대위님이 괴수를 처리한다면, 그건 큰 공이고, 앞에 했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됩니다."

"아!"

콜벳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게, 게이트를 열어라!"

"네?"

"어서! 시키는 대로 해!"

"네!"

쿵! 철컥!

끼이이이잉!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반쯤 열리자, 표범 꼭두각시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됐다! 문을 닫아라! 어서 문을 닫아!"

다시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전 괴수를 뒤를 쫓겠습니다."

"네?"

"방금 괴수가 프랭크 대령을 물고 있는 걸 봤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일단 내가 뒤를 쫓을 테니, 대위님은 여기서 있었던 일을 커널 사령관께 보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밖은 위험······."

난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입구를 빠져나왔다.

'휴! 이렇게까지 했으니, 더는 괴수 때문에 떨지 않겠지.'

내가 벌인 일은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처리해다.

괴수가 전진 기지로 들어온 것도 프랭크 대령이 게이트를 열어 놓고 물건을 옮기다가 생긴 일로 정리했고, 프랭크 대령은 괴수가 물고 갔으니 잡아먹은 것으로 알 것이고, 방금 콜벳 대위가 괴수를 게이트 밖으로 쫓아냈으니 이제 전진 기지 내부에 출몰한 괴수 문제는 전부 해결됐다.

남은 것은 프랭크 대령이 마석과 부산물을 숨긴 장소를 찾는 일!

물건을 숨긴 장소를 아는 사람은 프랭크 대령과 물건을 옮긴 기간트 기사들, 그리고 대령의 최측근 장교들이다.

하지만 프랭크 대령이 괴수에게 당했으니, 이제 부하들에겐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마석과 부산물 위치를 커널 대령에게 모두 고하고 선처를 구할 것이다.

그러니 아침이 되면 마석과 부산물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 뻔했다.

내가 윌리엄 중장이나 커널 사령관과 좋은 관계에 있는 건 맞지만, 앞으로 세상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심심하면 뒤통수를 친다.

그리고 독단적이고.

전생에도 헌터들이 다 말렸지만, 핵폭탄을 수백 발이나 쏜 각국 지도자들처럼.

결국은 내가 잘되고, 내가 힘이 있어야 좋은 관계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석과 부산물은 모두 내가 챙긴다!'

표범 꼭두각시의 등에 올라탔다.

"자! 가자! 치타!"

"크앙!"

팟! 파파파팟!

표범 꼭두각시가 땅을 박차고 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치타? 이름 좋은데!

난 바로 폐광산을 향해 달렸다.

19. 또 다른 이계 난민.

19. 이계 난민.

괴수의 시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지하 통로엔 가끔 발광석이 박혀 있기도 했고, 이름 모를 벌레와 지하 식물들이 빛을 뿜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미미한 수준이고, 인간의 눈으론 사물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그런데 표범 꼭두각시는 이런 지하 통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표범 마법인형의 야간 시력을 스킬로 배우면 대박이겠는데!'

그러니 표범 꼭두각시에 자주 영혼 이동을 시도해야겠다.

헌터가 없는 이 세상에선 인간보다 괴수가 가진 신체 능력을 스킬로 배우는 것이 좋아 보였으니까.

물론 이 세계 마나를 느끼기 위해선 프랭크 마법인형에게 영혼 이동을 해야 했지만.

'이름이 너무 구린데.'

얼굴은 바꿀 수 없어도 이름은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프랭크 대신 당장 떠오른 이름은······?

더그!

이놈 때문에 죽은 병사의 이름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더그 허수아비는 지금 인형의 방에서 자연스럽게 치료되고 있었다.

'슬슬 입구가 보일 때가 됐는데?'

그런데 프랭크 대령이 거짓말을 했으면 어떡하지?

괜히 혼자 설레발을 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콜벳 대위가 프랭크 대령의 명령으로 자리를 비웠다고 자백했으니, 마석이나 부산물을 이쪽으로 나른 것은 분명했다.

혹여 시간이 부족해 빼돌린 양이 적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지금 내겐 큰 이득이 된다.

그렇게 칠흑 같은 지하 통로를 계속 달렸다.

그러다 표범 괴수가 입구를 발견했는지 속도를 줄이더니, 갑자기 멈췄다.

램프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자, 곧 커다란 폐광산을 발견했다.

'사마귀는 입구에서 누가 오는지 경계하고, 짹은 오른쪽을 살펴. 난 왼쪽을 찾아보지.'

[네! 마스터.]

전진 기지 밖은 위험했고, 진짜 괴수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표범 꼭두각시와 통로를 따라 조금 이동하자, 큰 동공이 나왔다.

그리고 중앙에 뭔가 시커먼 것이 보였다.

램프를 들어 자세히 보니,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마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바위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엔 가공되지 않은 괴수의 뼈와 가죽, 뿔, 발톱 같은 부산물이······.

"미친! 이거 너무 많잖아!"

그동안 얼마나 해 처먹은 거야?

산처럼 쌓여 있는 괴수 부산물을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왜 빼돌린 물건을 옮기기 위해 전진 기지 입구까지 막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혼자 꿀꺽하긴 너무 많은데······!'

한쪽 길이가 20미터로 넓어진 내 인형의 집이 있었기에 솔직히 아무리 많아도 싹 다 쓸어 담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괴수 부산물이 너무 많기도 하고 또, 부피도 너무 컸다.

게다가 표범 꼭두각시의 힘도 한계가 있었고, 한번 인형의 집에 들어가면 다시 밖으로 배치하는데, 600초를 기다려야 했기에 시간도 부족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면 커널 대령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날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도 곧 발견되겠지.

시간이 없었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 마석! 일단 마석부터 다 챙기자!'

한눈에 봐도 살루스 야영지에서 봤던 마석보다 훨씬 질이 좋은 상급 마석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가장 좋은 물건들만 빼돌렸겠지.

먼저 가장 큰 마석을 밧줄로 감고, 짹을 불러 표범 꼭두각시와 힘껏 위로 들어 올리게 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인형의 집에 넣었다.

다행히 통과!

전생엔 이렇게까지 인형의 집에 물건을 넣을 필요가 없었기에 마법인형들이 협동할 일도 없었다.

'자식, 너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인형의 집에 손을 넣어 표범(lv.6) 마법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감정 없는 꼭두각시라 내가 자길 칭찬하는 것도 모르겠지만.

방금 넣은 마석 바위는 성인 허리 높이의 크기에 족히 300, 400kg은 나갈 것 같았다.

표범 마법인형이 없었다면, 정말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600초가 지났다.

'어서 나와! 서둘러야 해!'

작은 마석들은 준비한 그물에 몰아넣고 한 번에 옮겼고, 그렇게 계속해서 여러 번 반복하자 어느새 내 인형의 집 삼 분의 일이 마석으로 가득 찼다.

와! 이게 얼마나 될까?

수십만 골드? 아니, 수백만 골드?

마석 시세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비쌀 것 같았다.

많이 해먹은 프랭크 대령에게 감사해야 하나?

돈이 필요하면 마석을 팔아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럼 마석 배터리를 만드는 것도 연구하고 투자해봐야겠다.

마석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곳도 기간트 생산공장이 있는 다섯 곳밖에 없었으니, 비슷하게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대박이었다.

물론 이 일은 아주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테니까.

'시간이 너무 흘렀네.'

마석은 모두 옮겼지만, 괴수 부산물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황.

사실 너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차피 큰 부산물은 옮기지도 못할 테니, 크기가 작고 등급이 높은 물건을 고르기로 했다.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열심히 부산물을 살폈다.

[메지낙의 뿔(★★★등급)]

별 3개짜리!

이건 챙겨야 해!

사람 키만 한 뿔을 가리켰다.

"짹, 저거 챙겨!"

[네, 마스터]

짹이 표범 꼭두각시를 시켜 메지낙의 뿔을 그물에 올려놓았다.

[안당고낙의 부리(★★등급)]

이건 등급은 낮지만, 크기가 작다!

그리고 꽤 숫자가 많았다.

이런 거로 기간트 관절 같은 걸 만들려나?

"짹, 일단 이것도 다 챙겨!"

[네!]

[모셀로의 힘줄(★★★등급)]

'이것도 무조건 챙겨!'

내가 정신없이 부산물을 살피고, 짹과 표범 꼭두각시가 인형의 집으로 옮겼다.

그렇게 몇 시간을 쉴 새 없이 일했다.

이제 챙길 수 있는 부산물은 거의 다 챙겼다.

나머진 너무 부피가 크고 무거운 것들이라 어차피 힘이 부족해 인형의 집에 넣을 수도 없었다.

이미 인형의 집도 거의 포화상태였고.

'이 정도 부산물이면 드워프들이 연구할 재료는 충분하겠네.'

이제 살루스 야영지에 있는 드워프들만 구해 돌아간다면, 연구나 생산 인력도 충분할 것이다.

뭔가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야.

천장을 올려다봤다.

밖은 지금 해가 환하게 떴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괴수 발자국이나 물건을 옮긴 흔적만 지우면 완벽하겠지.

표범 꼭두각시는 인형의 집에 넣고, 짹과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응?'

그런데 통로 안쪽으로 이어져 있는 기간트 발자국을 발견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뭐야? 안쪽에 다른 것도 숨겼나?'

인형의 집이 꽉 차서 더는 들어갈 자리도 없었지만, 안에 더 좋은 물건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짹, 여기 다 치우고 있어!"

[네, 마스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헉! 뭐야? 엘프?"

쇠창살에 갇혀 있는 십여 명의 엘프 난민이 보였다.

게다가 모두 젊은 여자 엘프였다.

"하아! 프랭크 대령, 생각보다 더 개새끼였네······."

쇠창살 안엔 물통 몇 개와 빵이 담긴 작은 상자 하나가 전부였다.

물론 화장실이 있을 리도 없었고, 내가 오기 전까진 램프 하나 없는 암흑이었다.

만약 괴수가 한 마리라도 들어왔다면 이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엘프 난민들은 날 보더니,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그나저나 정말 바비인형처럼 생겼네.'

뒤늦게 이들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머리는 산발에 옷은 허름하고 진흙투성이였지만, 주먹만 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는 감추지 못했다.

다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진짜 엘프 같았다.

'귀족들이 엘프 난민을 노리개로 삼는다고 하더니······.'

그 엘프를 공급하는 것이 프랭크 대령이었네.

그러고 보면 전진 기지 사령관과 장벽 사령관이 서로 입을 맞추면 대수림에선 정말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어째 사건이 기승전결 없이 계속 터지는 거지?

대수림에 오기 전부터 계속해서 사건에 휘말렸고, 전진 기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이러다간 정말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분신인형 마렵네······.'

그래도 지금까진 결과가 전부 좋았기에 다행이었다.

일단 엘프 언어부터 배워볼까.

캉! 캉!

난 주변에서 작은 바위를 찾아와 자물쇠를 내려쳤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자물쇠를 부술 순 없었다.

이 두꺼운 쇠창살과 커다란 자물쇠를 부수려면 기간트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니면 표범 괴수나.

쾅! 쩌억!

오히려 내려친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밖으로 나갔다가 괴수 부산물 중에서 한 손에 들만한 뼈 하나를 챙겨서 다시 돌아왔다.

깡! 깡! 탱!

괴수 뼈는 단단했지만, 역시나 힘이 부족했기에 자물쇠를 부수진 못했다.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 @#!"

그제야 엘프들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언어를 탐지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역시, 갓태창이야!

자물쇠는 부술 수 없었어도 이들의 언어를 배워두면 나쁠 것이 없었기에 계속 돕는 척을 했다.

깡! 깡!

"#$%#$%@?"

"$*[email protected]

#."

힐끔힐끔 나를 보면서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도 내가 누군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email protected]

$%@!"

깡! 깡!

"&%#$%@."

"*#$%@."

[언어 분석이 끝났습니다.]

됐다!

난 이제 엘프의 말도 할 수 있었다.

뼈 몽둥이를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쉬었다.

너무 지치기도 했고,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렀기에 더 내려칠 수도 없었다. 참 나약한 몸뚱어리였다.

역시 신체 단련이 필요했다.

이쯤 했으면 도와주고자 하는 내 마음은 전달됐겠지?

이제 뭐라고 하는 지 들어보자.

그때 가장 어려 보이는 엘프가 손을 들었다.

"마르실님, 저 인간이 우릴 도와주려는 것 같습니다."

"에테나, 내가 가르쳐주지 않았니. 세상에 착한 인간은 없단다."

"하지만 손이 찢어질 정도로 자물쇠를 내려쳤는데요?"

마르실이란 여자가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속지 마라! 인간은 모두 악한 존재다. 시노우엘님을 납치한 것을 잊었느냐?"

"아! 맞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오크보다 사악하다."

"네, 마르실님."

여기 갇힌 엘프들은 인간을 불신하고 저주하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자신들을 노리개로 팔려는 인간을 혐오했을 것이다.

그때 에테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저기!"

"뭐지?"

"마르실님, 지금 우리가 잘하는 일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시노우엘님을 찾으려고 일부러 잡히긴 했지만, 장벽으로 가지도 못하고 이런 깜깜한 동굴에 갇히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그 인간들이 오지 않으면 여기서 굶어 죽을 수도 있고요."

마르실이 부드럽게 말했다.

"에테나,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들은 우릴 팔아넘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온다. 그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장벽을 넘어가기 전까진 어떤 수모라도 참아야 한다."

"네. 마르실님."

허! 이것 봐라.

이제 보니 이들은 잡혀간 시노우엘이란 엘프를 구하려고 일부러 사로잡혔다는 거네.

에테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런데 인간들에게 도망치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뭐?"

"인간들이 지금처럼 우릴 도망치지 못하게 가둬둔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자신감을 가져라! 너희는 샤이닝족 최고의 전사들이다. 아무리 우리가 정령 마법을 쓰지 못하더라도 인간 대여섯 명쯤은 혼자 제압할 수 있다. 그러니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일제히 공격해 죽이고 도망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마르실님."

에테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저기!"

"또, 뭐지?"

마르실의 목소리에 약간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제국은 아주 넓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시노우엘님을 어떻게 찾죠?"

"시노우엘님께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하이엘프시다. 엘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고. 그러니 분명 그 분의 소문이 널리 퍼져있을 거다."

"아! 알겠습니다."

에테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에테나, 그만! 더는 질문하지 마라."

"네. 마르실님."

에테나가 입을 삐죽거리며 작게 말했다.

"우린 인간 말도 못 하는데 소문을 어떻게 듣는담?"

"방금 뭐라고 했느냐?"

"히익! 아닙니다. 마르실님."

엘프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혈압이 오르고 복장이 터질 것 같다.

머리가 작아서 지능지수가 낮은가?

탈출 계획도 황당하고, 그렇다고 시노우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니!

제국이 얼마나 넓은데······.

게다가 황족이나 귀족에게 팔려갔을 테니, 소문도 나지 않을 것이다.

보니까 제국어를 아는 엘프도 전혀 없는 거 같고.

운이 좋아 탈출한다고 해도 저 모습으로 다니다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로잡힐 것이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

엘프 차원이 망한 게 머리가 나빠서가 아닐까?

그나마 가장 어려 보이는 에테나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도와줄까?'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들 역시 나와 같은 처지.

자신들의 차원은 망했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 세상에 넘어온 이계 난민들이었다.

다행히 내가 프랭크를 죽었으니, 이대로 있다가 기사들이 오면 구해질 거다.

하지만 또 쓸데없이 장벽을 넘어 시노우엘이란 하이엘프를 구하겠다고 계획을 짤 것 같았다.

'에이, 그만두자.'

난 고개를 흔들었다.

동료는 드워프로 충분했다.

마법인형을 늘리는 것은 환영이지만, 동료를 늘리는 것은 별로였다.

전생에도 동료들이 있었지만 결국 괴수에게 죽거나 내 마법인형이 됐으니까.

지금은 그마저도 모두 사라졌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드워프와 달리 내게 별 쓸모가 없다.

엘프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아니 한 명쯤은 있으면 좋으려나?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커널 사령관에게 맡기자.

"저기, 마르실님."

에테나가 또 손을 들었다.

마르실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테나! 내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아니라, 저기 인간이 우리가 하는 엘프어를 알아듣고 있습니다."

"뭐?"

엘프들이 나를 쳐다봤다.

'응? 고 녀석, 똘똘한데?'

20. 정보원.

20. 정보원.

방금 내 제스처를 보고 판단한 건가?

그런데 언제 그걸 살폈지?

난 에테나가 날 지켜보는 줄도 몰랐다.

"무슨 말이냐? 인간이 엘프어를 알아듣는다고?"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우리 대화를 들으며 상황에 맞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좌우로 흔드는 등 알아듣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

마르실이 철창에 바짝 붙어 날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푸른 눈동자가 램프 불빛에 일렁거린다.

고작 1미터도 안 되는 거리.

부끄럽게.

"인간, 우리말을 알아듣는 것이냐?"

마르실이 대 놓고 물었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마르실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휴! 에테나, 인간은 엘프어를 모른다. 아니 엘프어는 정령이 내는 소리를 언어로 만든 것이라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란다. 그리고 이곳 세상엔 정령도 살지 않고."

"하지만 저 사람은 분명······."

"어허! 그만해라."

"네. 마르실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른 엘프들도 에테나의 말을 듣곤 뭔가 찜찜했는지 더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난 바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정은 딱하지만 더는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잠깐만 고생하면 곧 기간트가 구하러 올 거야."

제국어로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응?"

뭔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에테나가 팔을 뻗어 내 제복 바지 밑단을 살짝 잡고 있었다.

"저기, 저희를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

"보다시피 저희 실수로 못된 인간들에게 잡혔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장벽 너머로 팔려갈 겁니다."

그때 마르실이 소리쳤다.

"에테나!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에테나는 내 바지를 잡은 손은 놓지 않고, 고개만 돌려 말했다.

"마르실님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그동안 장벽 너머로 끌려간 엘프가 수백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이라도 돌아온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거야······."

마르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에테나가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우린 장벽 너머 인간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요. 이대로 운 좋게 장벽을 넘어간다고 해도 시노우엘님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인간들의 노예로 살다가 끝나겠지요."

"하아!"

마르실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테나,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노우엘님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원정대가 세계수 씨앗을 구해 온다고 해도 그것을 품고 키울 수 있는 것은 하이엘프밖에 없어."

"저도 압니다. 시노우엘님을 구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방법은 아닌 거 같아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엘프들이 일제히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에테나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마르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와 에테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테나, 미안하구나. 어린 너에게까지 이런 짐을 지우게 해서.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한다. 시노우엘님께서 잡혀가신 지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 그 순수한 분께서 잘못되실까 나는 한숨도 잘 수가 없단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만 놔주거라. 여기에 온 것을 보면, 그놈들과 같은 편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차피 그 인간은 우릴 구하지 못해. 방금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하지만 에테나는 내 바지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닙니다. 이분은 그놈들과 같은 편도 아니고, 우릴 구할 능력도 있어요. 그러니 이분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마르실과 엘프들이 안타까움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헉!"

"뭐야?"

엘프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르실은 뒤로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이, 인간이 엘프어를?"

난 에테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내가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거야 우리를 처음 봤을 때,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엘프를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셨습니다."

"표정으로 그게 다 보여?"

"네. 전 다른 재주는 없지만, 사람이나 동물의 표정을 보고 생각이나 감정을 잘 느끼는 편이에요."

오! 눈썰미가 대단한데!

"그럼 왜 내가 너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방금 봤다시피 난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평범한 인간이 전진 기지 밖을 혼자 다닌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밖에 동료분이 있거나 그 강철인형에 타고 오신 게 분명합니다."

강철인형? 아! 기간트를 말하는구나!

그녀는 내가 기간트를 타고 온 기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발 우릴 도와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지?"

"네? 방금 우릴 도와주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서 꺼내주는 건, 아주 쉬운 일이야. 그리고 너희를 장벽 밖으로 내보내 줄 수도 있고, 너희가 말하는 시노우엘이란 하이엘프를 찾아줄 수도 있어."

"네? 정말입니까?"

에테나와 다른 엘프들의 눈동자가 배로 커졌다.

"그런데 이젠 마음이 바뀌었다."

"대체 왜?"

"너희를 도와줘서 내가 얻는 것이 없잖아."

"네?"

"설마, 내가 아무런 이익도 없이 너희를 도와줄 거로 생각한 거야? 그럼 진짜 실망인데······."

이건 사실이었다.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괴수 부산물을 가공하는 모습을 보이며 인간들의 호감을 샀다.

비록 결과는 나빴지만, 최소한 대수림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이 일의 끝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불나방과도 같았다.

에테나가 아니었다면, 난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그때 에테나가 뭔가를 결심했는지, 내 다리를 꽉 붙잡았다.

"제, 제가 곁에서 평생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엘프들을 도와주십시오."

"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엘프 같은 미인이 눈물을 흘리고 내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래서 미인계 미인계 하나 보다!

"에테나! 그만하고 이리 오렴."

마르실은 에테나를 붙잡아 당겼다.

하지만 에테나는 한 손으로 내 다리를 잡고, 다른 손으론 철창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엘프들까지 달려들어 당기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끌려갔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에게 현실을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너희를 이곳에 가둔 자는 내가 죽였다. 그리고 그 부하들은 모두 감옥에 갇혔지. 그 말은 너희는 이제 이곳에서 죽을 거라는 거다!"

"뭐, 뭐라?"

"하지만 방금 에테나가 너희를 살렸다."

표범 괴수 꼭두각시를 꺼냈다.

"크아앙!"

"조심해요!"

괴수를 보자마자, 에테나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엘프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괴, 괴수다!"

"아! 우린 이제 끝났어!"

다들 바닥에 주저앉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치타! 철창을 부숴라!"

일부러 엘프어로 명령을 내렸다.

"크앙!"

쾅! 콰앙!

치타가 앞발 휘두르자 자물쇠가 박살 나고, 철창이 찌그러졌다.

"잘했어. 치타!"

난 표범 꼭두각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괴수가 저 인간의 말을 듣고 있어?"

엘프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치타, 들어가!"

"크릉!"

표범 꼭두각시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괴수가 허공에서 사라지자, 엘프들은 다시 입을 떡 벌렸다.

"뭐해? 너희는 이제 자유다!"

난 몸을 돌려 먼저 통로를 빠져나왔다.

내 실력은 보여줬고.

이제 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볼 차례였다.

동공으로 나오자 짹은 이미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 후였다.

난 짹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잠시 후.

엘프들이 동공으로 나왔다.

마르실이 곧장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척!

그녀가 날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다."

"······응?"

"분하지만 당신 말이 모두 맞다. 우린 능력도 부족하고,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내 한 몸 희생해 시누엘라님을 구할 방법이 생긴다면 기꺼이 당신을 따르겠다."

"희생이라니?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난 엘프가 필요 없다니까."

마르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이건 어떠냐? 난 이래 봬도 샤이닝족 최고의 전사다. 1초에 화살 2발을 쏘고, 검을 든다면 인간 병사 열을 상대할 수 있다. 데려가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군."

"그럼 허락하는 거냐?"

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일단 일어나라."

마르실을 일으켰다.

"난 노예도 필요 없고, 너희 누구와도 종속 관계 같은 것을 맺을 생각도 없다. 대신 내가 너희를 고용하는 계약을 하지."

"고용 계약?"

"일단 첫 번째 계약으로 내가 너희 모두를 장벽 너머로 데려다주지. 대신."

"대신?"

"너희가 대수림에서 날 보호해라. 어차피 내가 죽으면 계약은 끝나는 거니까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야."

"설마, 그게 다인가?"

"그래. 그리고 제국에서 시노우엘을 찾는 것은 장벽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 다시 조건을 맞춰서 계약하자."

마르실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만약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를 다른 인간들에게 팔아넘기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아무튼, 계약하고 안 하고는 너희 자유다. 난 강요할 생각은 없어."

내 답을 들은 마르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에테나를 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테나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기 이분은 절대 약속을 어기실 분은 아닙니다."

이 녀석 앞에선 거짓말도 못 하겠군.

사실 처음부터 이들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게 큰 이득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스스로 돕지 않은 자들을 동료로 받아들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자신을 희생하며 동료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날 움직였다.

그리고 앞으로 치를 비밀임무와 살루스 전진 기지에서 드워프들을 구할 때, 뛰어난 병사들보다 내 손발이 되고 날 지켜줄 믿을만한 병사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로 이들의 절실한 상황은 꽤 믿을 만했다.

거기에 전진 기지에 엘프어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어디 가서 내 비밀을 말할 위험도 적었고.

"좋다! 하겠다!"

마르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하지."

난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타일러 빈스. 제국의 중위고, 방금 봤다시피 괴수를 부릴 수 있다."

"난 마르실 트란도스. 숲의 정령사이자, 샤이닝족의 족장이다."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엘프와 단기 고용 계약을 맺었다.

어차피 나로서는 드워프 200여 명을 장벽 밖으로 옮기는 거나 엘프 12명 추가해서 옮기는 거나 큰 차이는 없었다.

아직 방법은 고민 중이지만······.

파드드득!

'때맞춰 왔군.'

입구에서 사마귀 꼭두각시가 누군가 온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난 사마귀 꼭두각시도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엘프들을 데리고 폐광산 입구에서 기다렸다.

'열두 명의 여전사와 있으니까 든든한데!'

마르실의 말대로라면 엘프 전사 한 명이 인간 병사 대여섯 명을 상대할 수 있다니, 지금 난 소대 병력을 거느린 셈이었다.

"히이이잉!"

"워어"

먼저 말을 탄 병사들이 도착했다.

"타일러 중위님!"

글래디스가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야."

난 가볍게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뒤에 여자들은?"

"모두 내 정보원들이야."

"정보원이요?"

글래디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쿵! 쿠쿠쿵!

뒤를 이어서 기간트 한 대가 양어깨와 이마에 불빛을 비추며 달려왔다.

[타일러 중위! 괜찮나?]

라그르 중령이 직접 비숍급 기간트를 타고 날 찾으러 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는 양반일세.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기 폐광산 안에 들어가 보십시오."

[괴수가 이 안으로 들어갔나?]

"아니요. 프랭크 대령이 빼돌린 괴수 부산물이 이 안에 있습니다."

[뭐? 괴수 부산물?]

상황이 종결됐다.

부산물을 다 챙기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안에 있는 괴수 부산물도 내가 찾은 것이니, 이 또한 큰 공이 된다.

장벽으로 돌아가면 윌리엄 사령관이 또 포상을 해주겠지?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다.

"글래디스, 기지로 돌아가면 여기 내 정보원들에게 숙소를 내주고, 음식도 나눠주게."

"네? 아! 네."

"그리고 옷도 좀 알아서 챙겨 주고."

"네. 알겠습니다."

이제 난 좀 쉬자!

***

파드드득!

타타탁!

사마귀 꼭두각시가 문을 두드렸다.

여긴 복도 끝쪽에 있는 방.

사마귀가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누군가 내가 있는 방으로 온다는 뜻이었다.

'인형의 집에 들어가 있어.'

난 사마귀 꼭두각시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몸을 일으켜 조끼만 챙겨 입고, 침대 옆에 검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인형의 집을 열었다.

짹은 산처럼 쌓인 부산물 위에 홀로 앉아 고독을 씹고 있었다.

'짹, 신호하면 나와!'

[네, 마스터.]

짹이 단검과 손도끼를 챙겨 들었다.

누군진 모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똑똑똑!

"네."

끼이익!

반소매와 반바지로 된 군복.

전진 기지만의 개량 군복을 입은 글래디스였다.

아쉽게도 사마귀 꼭두각시는 아직도 글래디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꼭두각시와 자동인형의 차이.

"아무리 피곤해도 이틀을 주무시다니요. 정보국 장교가 너무 게으른 거 아닙니까?"

"그래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

"그러게 평소 체력 운동 좀 하십시오."

난 글래디스를 쳐다봤다.

성난 그녀의 근육질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반해 내 몸은······.

그러게 체력 단련을 좀 하긴 해야겠다.

"무슨 일이야?"

"커널 사령관께서 이번 임무 때문에 중위님을 찾으십니다."

"벌써? 며칠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몸은 욕실을 향해가고 있었다.

군인은 참 피곤한 직업이다.

21. 길잡이.

21. 길잡이.

[카야킨 전진 기지 사령관실]

시원한 냉기가 나오는 사령관 집무실.

나도 이런 방을 원했는데······.

이래서 계급은 높아야 제맛인가보다.

이렇게 대수림에서 개고생하는 데 헬다임 장벽으로 돌아가면 대위는 달 수 있겠지?

일단 이번 임무만 잘 끝내고 돌아가면, 당분간 집에 틀어박혀서 드워프들과 기간트 연구에 몰두할 생각이었다.

'근데 왜 안 오는 거야?'

잘 쉬고 있는 날 불러 놓고, 커널 사령관은 아직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틈은 없었다.

[인형의 집]

한 평밖에 되지 않은 좁은 구석에서 더그(lv.3) 꼭두각시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원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지만 마나를 품고 있는 기사여서 그런지 운동신경이 뛰어나 동작을 가르쳐주면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습득했고, 꼭두각시 하루 만에 벌써 검술을 훈련할 정도였다.

녀석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더그를 마법인형으로 만든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어제 상처 치료가 끝난 더그를 꼭두각시로 만들자마자, 참지 못하고 영혼 이동 스킬을 사용해봤다.

다행히 영혼 이동은 단번에 성공했고, 한 시간 동안 마나 기사의 몸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은 이 세계의 마나와 헌터의 마나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나 기사의 몸엔 마나홀이 없었다.

처음에 마나홀을 찾다가 없어서 어찌나 당황했던지······.

하지만 곧 이유를 찾아냈다.

[타일러 빈스(23)]

[클래스 – 인형술사(E)]

[레벨 – 12]

[고유 스킬 – 운명의 실타래(lv.4), 기사회생(lv.3), 영혼 이동(lv.3), 병렬사고(lv.1)]

[특수 스킬 – 도약(lv.1)]

[마나량 – 1]

[인형의 집]

'후후! 내가 이 세계 마나를 느끼다니!'

미소가 지어진다.

몸속에서 마나를 찾을 땐 없더니, 체념하고 더그에게 걷기와 같은 신체 동작을 가르치다가 아주 미세한 마나를 느꼈다.

뭔가 공명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주 잔잔한 호수 중앙에 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수면 전체로 퍼져가며 일렁이는 것처럼, 신체를 움직일 때마다 더그의 피부와 뼈, 근육, 혈관, 혈액, 신경 등 온몸 구석구석에 무언가 일렁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난 이것이 마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몸 전체가 마나홀인 것이다.

그리고 영혼 이동이 풀리자마자, 그 느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고 아주 미약하지만 나도 마나를 느꼈다.

'이제 마나를 축적하는 방법만 알아낸다면, 나도 기간트에 탈 수 있다!'

희망 회로가 팍팍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마나 마법인형을 만드는 건데······.

아무튼, 이 세계 마나를 느꼈으니 이제 시작이었다.

조금 날로 먹은 느낌이 있지만, 원래 마법인형의 능력은 인형술사가 갖는 것이다.

'짹, 더그에게 다른 검술 동작도 가르쳐줘.'

[네, 마스터.]

짹이 부산물 위에서 내려와 구석에 있는 더그에게 다가갔다.

자동인형이 있어서 좋은 점이 또 있다면, 꼭두각시의 동작이나 검술을 내가 직접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끼익!

커널 대령이 안으로 들어왔다.

"충!"

"미안하군. 회의가 좀 길어졌어."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실제론 30분쯤 앉아 있었지.

"그래, 푹 좀 쉬었나?"

"아니요. 며칠 더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필터를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커널 대령이 편해지긴 한 모양이다.

순간 멈칫했던 커널은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하하! 나도 더 쉬게 해주면 좋겠지만, 윌리엄 사령관께서 시키신 일이라 어쩔 수 없네. 이미 일정이 많이 늦어지기도 했고."

어쩌겠는가.

군인이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

까라면 까야지.

"그보다 보고서는 언제 줄 건가?"

"네? 보고서요?"

"프랭크 대령이 숨긴 괴수 부산물 말이네.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괴수를 어쩌다 쫓게 됐는지, 프랭크 대령은 또 어떻게 죽었는지, 자네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내게 보고할 게 많을 텐데?"

젠장, 내가 힘들게 상황을 정리하고 부산물까지 찾았는데, 보고서는 좀 알아서 써주면 안 되나?

내 마음을 읽었을까? 커널 대령이 미소를 짓는다.

"귀찮아도 어쩌겠나? 우리 둘 다 명령을 받는 처지니, 자료는 남겨야지."

"네. 내일까지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또 적당히 말을 만들어야 했기에 벌써 피곤함이 몰려왔다.

"참! 그 엘프 난민들은 다 뭔가? 프랭크 대령이 납치해 숨겨 놓은 것을 자네가 풀어준 건가?"

"네! 맞습니다."

사령관의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저기, 전에 말씀하신 포상 말입니다."

"포상? 전진 기지에 소문을 퍼트린 일에 대한 포상 말인가?"

"네. 그 포상으로 엘프 난민들을 제 정보원으로 쓰고 싶습니다."

"정보원?"

커널 대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보원이란 말은 정식 병사로 쓰겠다는 건가?"

"네. 제국의 모든 전진 기지에 출입할 수 있도록 사령관님께서 신분증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임무에도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네. 하지만 어떻게 관리할 건가? 말도 통하지 않을 텐데?"

"조금 미흡하지만 제가 엘프어를 배웠습니다."

"뭐?"

커널 대령의 눈이 배로 커졌다.

"다른 난민 언어와 달리 엘프어는 수도의 언어 학자들도 두손 두발 다 들었다고 하던데?"

"제가 언어적 능력이 좀 탁월합니다."

"하긴, 자넨 드워프들의 말도 금방 배웠다고 했지."

"아직 둘 다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합니다."

커널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사람을 매번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한 가지 확실히 하자면, 대수림에서 엘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괜찮네. 하지만 장벽 너머로 데려가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내 권한 밖이야."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았네. 내가 모두 3등 하사관급으로 신분증을 만들어 주지. 그 정도는 돼야 정보를 모으기 편할 거야."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커널 사령관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여기 자네와 함께 갈 팀원들을 내가 골라봤네."

커널 사령관이 명단이 담긴 문서를 건넸다.

난 문서를 천천히 살폈다.

'비숍급 기간트 2대에 나이트급 기간트 3대, 폰급 기간트 5대, 작업용 기간트가 5대라······'

글래디스 하사와 100명의 병사도 명단에 있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영지 사냥팀보다 전력이 높은 수준이었다.

"안전 책임자는 보리스 소령이지만, 실질적인 리더는 중위 자네야."

"네. 감사합니다. 저기 폰급 기간트 기사 한 명을 더 추가하고 싶은데요. 괜찮겠습니까?"

"한 명 정도야. 허락하지."

밀어준다고 하더니, 확실하네.

"저, 그런데 명단에 길잡이를 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잘 봤네. 실은 나도 고민 중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내 부하들은 대수림 경험이 없잖은가. 그렇다고 부사령관인 라그르 중령을 보낼 수도 없고······."

이번엔 커널 사령관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래서 말인데, 감옥에 있는 프랭크 대령의 수하 중에서 하나 뽑을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키진 않는군요."

"그렇지? 나도 내키진 않았어."

커널 사령관이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 사냥팀 중에서 한번 알아보지."

"길잡이는 제가 직접 구해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자네도 이곳이 초행인데 어떻게 구한다는 건가?"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

[트라스의 개]

똑똑똑!

"짹을 찾고 있소."

타냐 블랙이 피식 웃으며 부하 용병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어이! 여기 이 사람이 짹을 찾는데?"

"타냐 용병대장! 짹이 용병을 뜻하는 은어라는 건 알고 있소."

"어?"

타냐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용병들도 웃을 타이밍을 놓쳤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렇게 됐소?"

가까이서 보니,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인 그녀의 눈 한쪽이 시퍼렇게 멍들었고, 윗입술이 터져 있었기에 물었다.

쾅!

그녀가 갑자기 테이블을 내려쳤다.

"어떤 비겁한 새끼에게 기습을 당했소. 잡히면 아주 그냥 사지를 찢어 죽일 거요."

타냐가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았다.

순간 뜨끔했다.

타냐 용병대장의 얼굴을 저렇게 만든 것이 내 자동인형 짹인 것 같았다.

어떻게 용병들을 자극해 장교 식당까지 유인했는지 궁금했는데, 이젠 알 것 같았다.

짹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놈이었다.

이름을 괜히 짹이라고 지었네······.

"여기가 어딘지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젊은 장교님께서 우리 용병대엔 무슨 일이시오?"

"실력이 뛰어난 길잡이를 구하고 있소."

"오호! 잘 오셨소. 대수림에서 뛰어난 길잡이는 목숨과도 같지."

그녀가 갑자기 엄지를 검지 위에 올리더니, 손가락을 비비며 금화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우리 용병대는 가격이 좀 비싼데?"

"그래서 금액은?"

"하루에 30골드! 절대 에누린 없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턴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오."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어딜 가는 것이오? 대략 위치는 알아야 우리도 준비를 하지."

"얼음 계곡."

타냐 블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의뢰는 못들은 걸로 하겠소."

"응? 용병이 의뢰를 거부하는 거요?"

타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 타인스 영지의 사냥팀이 그곳에서 전멸했소. 기간트가 7대에 병력도 2백이었는데, 생존자는 단 한 명뿐이었소.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거긴 너무 위험한 곳이오."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의 정보 출처가 그 유일한 생존자인 호르반이란 마부였으니까.

지금은 그 역시 고인이 됐지만.

"허! 100년 전통의 용병대라고 하더니, 다 헛소문이었군."

타냐 블랙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험! 미안하지만 전통 때문에 내 부하들의 목숨을 걸 순 없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오."

"아쉽게 됐군."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쩝. 처음부터 라그르 중령님의 말을 들을 걸 그랬어."

"······?"

"그럼 쿠훌린 용병대를 찾아가야겠군."

"뭐요? 그 오크 패거리를 찾아가겠다고?"

"라그르 중령께 전진 기지 최고의 용병대는 쿠훌린 용병대라고 들었소. 하지만 오크보다야 인간이 나을 것 같아 이리로 왔는데······."

내가 고개를 흔들자, 타냐 블랙이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인간이 돈은 우리한테 빌리고, 오크 패거리가 최고라고 하다니!"

그녀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 있었고, 살짝 흥분한 모습이었다.

흥분한 상대와 흥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

"잘 들으시오! 우린 기간트가 있지만, 오크 놈들은 맨몸이오! 절대 우리 상대가 아니지."

"그래도 오크 30명이면 폰급 기간트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놈들은 짐꾼이나 적당하지. 괴수가 나타나면 인간이나 오크나 어차피 한 입 거리에 불과하오. 하지만 내 나이트급 기간트는 다르지."

그녀는 자신이 기간트에 탄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긴 나이트급 기간트 기사는 어느 영지를 가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이건 어떻겠소. 얼음 계곡에 도착하면 위험수당을 더해 하루에 50골드를 주겠소."

"50골드?"

금액이 올라가자 그녀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전진 기지의 용병대에 대해 뒷조사를 좀 했다.

트라스의 개는 100년이나 되는 긴 전통이 있는 카야킨의 터주대감 용병대였고, 소속된 용병 숫자는 모두 48명.

기간트는 모두 3대, 나이트급 하나와 폰급 기간트가 2대였다.

셋 다 아베르크 제국의 기간트는 아니었고, 100년도 더 된 골동품이라 실제 전력은 많이 떨어졌다.

장점으론 기간트를 가진 유일한 용병대로 대수림에서 단독임무가 가능하고, 역사가 긴 만큼 대수림의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점으론 기간트 유지비가 비싸 의뢰비가 너무 비싸다.

특이사항으로 최근 1년간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들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쿠훌린 용병대가 있다.

이들은 오크로만 구성되어 있고, 다른 이계 난민들처럼 10여 년 전에 갑자기 등장했다.

소속된 용병 숫자는 무려 300여 명에 달했고, 인간보다 체격도 좋고, 전투 능력도 제법 뛰어나 오크 하나가 인간 병사 서넛을 상대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들은 기간트가 없어도 진짜 용병처럼 대수림에서 괴수와 전투까지 수행할 수 있었고, 가격대비 효율이 높아 최근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큰 장점은 역시 가격이 싸다는 것이고, 단점으론 다른 이계 난민들처럼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있었다.

최근 트라스의 개 용병대가 적자를 보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쿠훌린 용병대에게 일감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꽤 좋은 조건일 텐데······.'

타냐가 계속 망설이는 것을 보면, 정말 얼음 계곡이 위험한 곳인가 보다.

뭔가 추가 결정타가 필요했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쪽 기간트의 마석 배터리는 우리가 대주겠소. 그리고 성공 보수로 1,000골드를 주지."

돈도 많이 벌었는데, 쓸 땐 좀 쓰자.

그리고 어차피 임무가 끝나면 이들에게 다른 의뢰도 맡겨야 했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타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의뢰자님, 언제 출발할까요?"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겠지.

22. 보물섬(1).

22. 보물섬(1).

[카야긴 전진 기지 6번 게이트]

게이트 책임자 콜벳 대위가 나를 보자마자 기간트 해치를 열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내게 달려왔다.

"아이고! 타일러 중위님, 오셨습니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충! 별일 없으시지요?"

"그날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얼굴은 미소 짓고 있지만, 어딘가 살짝 불편한 기색.

콜벳 대위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특별 수사관이라고 했으니, 조심하는 것이겠지.

"콜벳 대위님, 오늘 비번 아닙니까?"

"하하! 게이트 책임자에게 비번이 어디 있습니까. 전진 기지의 시민들이 불안해하니, 다시 괴수가 들어올 수 없게 솔선수범하여 게이트를 굳건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지요."

내가 보기엔 잘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거로 보이는데?

그리고 나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계속 높임말만 쓰니 조금 어색했다.

콜벳 대위가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내 팔을 잡았다.

"저기 이쪽으로 잠깐만."

콜벳 대위가 날 기간트 뒤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대뜸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언젠간 한번은 들리실 줄 알았습니다. 약소합니다."

뇌물?!

주머니를 살짝 만져보자, 대략 30골드 정도 들어 있었다.

정말 약소하네······.

마석과 부산물이 인형의 집 가득 쌓여 있는데, 이런 푼돈을 받아서 뭘 하겠나.

"전 뇌물 같은 건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렵습니다. 금화는 집어넣으세요."

콜벳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뇌물이라니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날 게이트를 열어 괴수를 내보내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크게 문책받거나 감옥에 갇힐 뻔했습니다. 다행히 6개월 감봉 정도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모두 타일러 중위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이 정도 금화는 받으셔도 됩니다."

난 정색하며 말했다.

"그런데 누가 6개월 감봉으로 마무리한다고 하던가요?"

"네? 사령관실 하사관들이 하는 이야기를······."

"미안하지만 그 일은 아직 마무리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

"곧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진 기지 장교들과 하사관들까지 전수 조사가 있을 겁니다."

"대체 왜?"

콜벳 대위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방금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프랭크 대령은 너무 많이 해 먹었다.

문제는 프랭크 대령의 부하들이 증언한 부산물 양과 발견된 양이 너무 차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석은 하나도 발견하지도 못했고.

물론 그건 절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인형의 집에 있으니까.

"이번에 발견된 장물의 규모가 너무 컸습니다. 아무래도 관련자들이 더 있을 거로 보고, 대규모 보강조사를 시작 있습니다."

"그럼, 조사 때문에 여기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프랭크 대령이 마지막에 이곳 게이트를 이용해 괴수 부산물을 빼돌렸으니, 어느 정도 책임은 지셔야 할 겁니다."

콜벳 대위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중위님, 도와주십시오. 전 고향에 여우 같은 어머니와 토끼 같은 마누라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자식들도 있고요."

전에도 같은 레퍼토리를 쓰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대위님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고향에 홀어머님과 부인, 그리고 쌍둥이 자녀가 있으시더군요."

"맞습니다. 혹여 제가 군대에서 잘리면 모두 굶어 죽습니다."

"그래요? 그 홀어머님 재산이 상당하시던데요."

"예?"

콜벳 대위가 몰래 사탕을 훔쳐먹다 걸린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그, 그걸 어떻게?"

난 대위의 손을 뿌리치고, 수첩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노모께서 저택도 있으시고, 또 상점도 몇 개 가지고 있으시네요. 어? 땅까지! 와! 정말 부자시군요."

콜벳 대위가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려?

어디서 약을 팔아!

거짓말이 탄로 났으니 뭐라 할까?

"그러니까 그건······."

"콜벳 스팅 대위님, 정보국 장교를 우습게 보셨군요."

"그, 그건 아닙니다. 다른 사정이 있어서······."

콜벳 대위는 말까지 더듬었다.

사실 이건 정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콜벳 대위는 친분이 있는 장교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자신이 군대를 무사히 제대하면 어머니가 재산을 다 물려준다고 자랑하고 다녔기에 수소문이 쉬워도 너무 쉬웠다.

"이번에 징계를 받아 군대에서 강제 전역하시면 재산은 둘째 아드님께 돌아가겠군요."

정신이 번쩍 든 콜벳 대위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타일러 중위님, 거짓말한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염치없지만 딱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제대까지 이제 고작 반년 남았습니다. 동생 놈은 싸가지도 없고, 성질도 포악합니다. 분명 재산을 상속받으면 어머니를 잘 모시지도 않을 겁니다."

"뭐, 대위님만의 사정이 있으시겠죠."

"이번엔 정말입니다. 그리고 처자식도 있는데, 제대하고 알거지로 살순 없지 않습니까."

"하긴 처자식이 문제긴 하겠네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콜벳 대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하아!"

내가 깊은 한숨을 쉬자 콜벳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번 한 번만 잘 좀 처리해주십시오. 제가 나중에 재산을 상속받으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콜벳 대위의 눈이 똥그래졌다.

"방법이 있어요?"

"혹시 대수림에 가보셨습니까?"

"대수림이요?"

"제가 이틀 후에 조사관 일로 대수림에 가게 됐습니다. 그때 어떻게든 대위님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네? 자리요? 그게 무슨?"

콜벳 대위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는 얼굴이었다.

차분히 말해줬다.

"옛말에 소나기는 피하란 말이 있습니다."

"소나기요?"

"이곳에 계시면 어쩔 수 없이 조사를 받겠지만, 저와 함께 대수림에 가시면 조사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하! 그렇군요."

환하게 웃던 콜벳 대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대수림이라고요? 거긴 많이 위험한데······."

장벽 너머에 근무한다는 것은 어디서나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대수림은 어디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괴수는 시도 때도 없이 기습하니까. 그래서 다른 곳보다 급여도 많이 받았다.

콜벳 대위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한 게이트에 근무하면서 꿀을 빨고 있었기에 대수림으로 간다는 말에 두려움이 드는 것 같았다.

"뭐, 선택은 대위님께서 하십시오. 이곳에 있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군에서 잘려서 알거지로 살던가. 아니면 저와 함께 대수림에 가서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시던가요."

콜벳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출발이 이틀 후라 오늘 상부에 명단을 넘겨야 합니다. 보급품도 준비해야 하고, 기간트도 점검해야 하니까요."

"가, 가겠습니다."

콜벳 대위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조금 미안하긴 했다.

제국이 활동하는 대수림 구역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위님을 제 비밀 정보원으로 쓰고 싶습니다."

"비밀 정보원이요?"

내가 그를 포섭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위험하고 먼길을 떠나는데, 기간트 기사 중에서 내 편이 한 명쯤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커널 대령의 부하들은 믿을 만했지만, 내 부하들도 아니었고, 계급도 대부분 나보다 위고, 내가 장벽 사령관과 전진 기지 사령관에게 인정을 받다 보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정보가 사실이라면 혹여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으니, 확실한 내 편이 하나쯤 필요했다.

사람 욕심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

이제 소대급 능력을 지닌 엘프 경호원들도 구했고, 대수림에 이골이 난 능력 있는 길잡이도 구했다.

방금 내 손발이 되어줄 기간트 기사까지 포섭했으니, 원정 준비는 거의 끝났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준비하면 끝이었다.

기지 숙소로 돌아왔다.

"허! 대체 이 옷은?"

엘프들의 복장을 보고,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사령관님께서 엘프들에게 하사관급 신분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사관 옷을 입혔는데요?"

글래디스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

"그건 그렇지만, 연미복을 입히다니 무슨 짓이야?"

"이런 몸매로 연미복을 입지 않은 것은 죄악입니다."

"뭐?"

어이가 없었다.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걸까?

글래디스는 엘프들에게 하사관용 연미복을 입혔다.

문제라면 굴곡진 몸매가 너무 드러난다는 것과 너무 아름답다는 것, 너무 눈에 띈다는 것 정도였다.

"모두 남자 하사관들이 입는 군복으로 갈아입혀!"

"네?"

"대수림에 저런 복장으로 갈 순 없잖아."

"이 엘프 하사관들도 이번 임무에 함께 가는 겁니까?"

"물론, 모두 내 정보원들이니까 함께 가야지. 그리고 사령관님께 허락받았으니까, 무기고에 가서 쓸만한 활과 무기들도 챙겨서 나눠주고."

"네. 알겠습니다."

글래디스는 뭔가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저기!"

항상 질문이 많은 에테나가 손을 들었다.

"왜?"

"전, 이 옷이 마음에 드는데요!"

"뭐?"

그녀는 내 표정과 말투만 보고 지금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표정을 읽는 에테나에겐 사실 언어가 따로 필요 없었다.

"나도 이 옷이 마음에 든다. 뭔가 활동적이며 기품이 느껴지는군. 이 옷으로 하겠다."

마르실도 연미복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옷이야 예쁘지만.

"그걸 입고 싸울 수 있겠어?"

"문제없다. 허리에 검과 단검까지 찰 수 있어 더 마음에 드는군."

"우리도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다른 엘프들도 한목소리를 냈다.

"허! 마음에 든다니, 알아서 해."

난 에테나를 쳐다봤다.

"저 여자 성격이 어떤 거 같아?"

글래디스를 향해 살짝 턱짓했다.

"음! 뭔가 우직하기도 하고, 믿음직한 아빠 같기도 하고, 아! 타일러님을 매우 신뢰한다는 건 확실합니다. 표정에 보여요."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나, 너에겐 따로 임무를 주지. 앞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잘 살펴보고 성격을 파악해. 특히 거짓말할 때 특징이나 버릇 같은 게 있나도 살피고."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장점을 잘 이용하면 사람들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글래디스는 내가 엘프어로 엘프들과 거침없이 대화하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래디스, 다들 그냥 입는다니까. 야전용 망토나 챙겨줘."

"그래요? 잘됐네요."

글래디스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대리만족인가?

난 서둘러 기간트 격납고로 향했다.

"여! 타일러 중위!"

라그르 중령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충!"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그냥 견학 중이었습니다."

"견학? 여긴 기간트 기사들과 정비사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임을 모르는 건가?"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이네. 자네가 전진 기지에서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농담이 지나치시네.

라그르 중령은 날 직접 데리고 다니며, 기간트와 정비 시설들을 구경시켜줬다.

"자네가 트라스의 개를 길잡이로 고용했다고 들었네. 잘한 일이야. 내 이야기도 좀 하지 그랬나?"

"네?"

"내가 뒤에서 힘 좀 써줬다. 뭐, 그런 이야기 말이네."

"아! 안 그래도 중령님 이름을 대서 쉽게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 잘했군."

아마 타냐가 라그르 중령을 만나면 돈 갚으라고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라그르 중령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이 작업용 기간트의 무게가 얼마나 됩니까?"

"그건 한 3톤 정도 나가지."

"3톤이요? 그렇게 무거운가요?"

"정비 작업용이라 그래도 가벼운 거야. 기간트 조립용이나 운반용 기간트는 4, 5톤은 나가네."

"아! 그렇군요."

살짝 실망했다.

"혹시 더 가벼운 기간트는 없는 겁니까?"

"더 가벼운 건 없네."

원정 준비 마지막으로 할 것은 내 인형의 집에 작업용 기간트를 넣는 것이었다.

이건 더그(lv.4) 꼭두각시를 위한 것.

더그의 신체는 비숍급 기간트에 탈 수 있는 마나를 가졌기에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이 추세면, 신체적 한계까지 성장하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머지 원정 기간은 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작업용 기간트를 인형의 집에 넣고, 조종 연습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진짜 기간트에도 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작업용 기간트가 너무 무거워 넣을 수 없었다.

내 표범 꼭두각시는 몸무게가 300kg이나 나가고 자기 몸에 5배나 되는 먹이를 물고 나무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작고 가벼운 작업용 기간트도 3톤이라니, 짹과 더그가 도와줘도 도저히 넣을 수준이 아니었다.

"아! 더 가벼운 기간트가 하나 있긴 하지. 훈련기가 한 1톤쯤 나갈 거야."

"훈련기요?"

"훈련용 더미 기간트를 줄여서 그렇게 부르지."

"그게 어디 있습니까?"

"황립 사관학교에 있겠지."

여기 없는 걸 왜 말하는 거야?

김빠지게.

"자네 혹시? 마나를 느낀 건가? 그래서 기간트로 연습하려는 거야?"

웬일로 눈치 없는 라그르 중령이 핵심을 찔렀다.

"네. 아주 미약하지만 마나를 느끼긴 했습니다."

"오! 축하하네. 기간트를 타기엔 너무 늦었지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폰급 기간트까진 탈 수 있을 거야."

칭찬인데 기분이 좋진 않았다.

"충!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쉽지만 더그의 기간트 조종 훈련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아! 골동품 가게에 한번 가봐! 거긴 있을지도 모르지."

"골동품 가게요?"

"그래 거긴 200여 년 전 기간트부터, 타국의 기간트까지 없는 게 없지. 초창기엔 전진 기지에서 기간트 생도 훈련을 했다니까. 옛날 훈련기 모델이 있을 수도 있어."

"정보 감사합니다."

"그리고 혼자 가지 말고, 타냐와 함께 가게. 그녀가 그곳 단골이야."

"네!"

***

[보물섬]

이게 어디 봐서 보물섬이야? 고물섬이지.

타냐 블랙을 쳐다봤다.

"여기가 정말 그 골동품 가게라는 거요?"

"그렇소. 내 기간트도 이곳에서 수리하지. 겉으로 보기엔 쓰레기장 같지만, 없는 게 없소."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있어도 멀쩡한 게 없을 거 같은데?

부서진 기간트 더미가 수십 개나 쌓여 있었다.

전진 기지 안에 왜 이런 곳이 존재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찾다 보면 옛날 훈련기 한 대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자! 들어갑시다."

타냐 블랙과 안으로 들어갔다.

23. 보물섬(2).

23. 보물섬(2).

내부는 겉에서 볼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걸어 다니는 길에 기간트 머리가 굴러다니지 않나.

가끔 주먹만 한 바퀴벌레도 보이고.

'아무리 봐도 고물상이야.'

어두컴컴한 몇 개의 쓰레기 산을 지나자, 중앙에 커다란 창고가 하나 보였다.

다른 곳보다 유난히 조명이 밝은 곳.

파지지직! 파지직!

마석 용접기 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덩치 큰 사내가 운반용 기간트를 수리하고 있었다.

제대로 일은 하는 건 같은데······.

아까 낮에 기간트 격납고에서 봤던 풍경과 비슷했다.

"케네스 영감, 나 왔어!"

타냐가 소리쳤지만, 일하는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영감! 나왔다니까!"

팍!

창고 입구에 있는 상자 안에서 여자아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아씨! 깜짝이야!"

타냐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나도 좀 놀라긴 했다.

"타냐 언니, 포기해! 할아버지가 일할 땐, 나도 안 쳐다봐."

10살쯤 됐을까?

작고 귀여운 것이 주인장의 손녀인 것 같았다.

"앨리슨, 너 자꾸 어른 놀리면 혼나!"

"놀린 거 아닌데! 그냥 반가워서 나온 건데!"

"휴! 그래, 알았다. 할아버지 일은 언제쯤 끝날 것 같으냐?"

앨리슨이 작업장을 쳐다봤다.

"음. 15분 후에."

"어쩔 수 없군. 잠깐 앉아서 기다립시다."

기간트 팔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

잠시 앉아 있자 점점 시야가 적응하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서지고, 팔다리가 없는 기간트와 상체나 하체만 남은 기간트, 머리와 가슴까지 반으로 갈라진 기간트도 보였다.

여긴 기간트의 무덤 같았다.

"50년 전에 대수림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제국 사람들을 모를 거요."

"대수림에서 전쟁이요?"

"거 보슈. 댁도 모르지."

타냐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기간트들은 그때 부서진 것들이오. 그나마 50년밖에 안 된 것들이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저렇게 쌓아뒀지."

"왜 수리하지 않는 거요?"

타냐가 날 빤히 쳐다봤다.

몰라서 하는 질문이냐는 뜻이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흔들자, 타냐가 입을 열었다.

"그야 구형이잖소."

"아!"

"지금까지 기간트는 40, 50년에 한 번씩 크게 변화했소. 한 마디로 물갈이를 하는 거지."

"기간트 재료는 같을 텐데, 왜 그러는 거요?"

"그야 기간트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지."

"효율?"

"예를 들면 과거엔 마석 배터리 하나로 작업용 기간트를 열흘간 굴릴 수 있었다면, 요즘 나온 신형 기간트는 그 1.5배를 쓸 수 있소."

기간트도 기술 개발을 계속하는구나.

"기간트는 몰라도 정보국 장교니 이건 알 것이오. 최근 50년 사이 마석 수급이 계속 줄어들고 있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효율을 올려야 더 많은 기간트를 굴릴 수 있지 않겠소. 성능보단 효율에 집중하고 있는 거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기간트 개발 트렌드는 기간트 연비를 올리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글래디스에게 최근 대수림에서 대형 마석 광산을 발견하지 못해, 수급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디서 마석 광산 하나 안 떨어지나?

그럼 초대박일 텐데.

혹시 드워프들이 방법이 없을까?

그들은 뛰어난 광부니까 어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어차피 저기 있는 기종들은 단종돼서 부품을 구할 수도 없고."

"그럼, 여기선 뭘 하는 거요?"

"짜깁기지. 다리가 없는 놈은 다리가 있는 놈의 다리를 잘라다가 붙이고, 머리가 없는 놈은 머리를 찾아다가 붙이는 거요. 물론 붙인다고 다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니까 보물섬은 정비소가 아니라 재활용 센터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여긴 뭘 구하러 오셨을까?"

"훈련용 더미 기간트가 있을까 해서 왔소."

"응? 훈련용 기간트? 그런 게 있나? 난 그냥 작업용 기간트를 타다가 바로 폰급 기간트를 탔는데?"

그래, 너 잘났다.

"난 마나양이 미약해서 작업용 기간트에도 탈 수 없소. 그래서 훈련용 기간트를 찾는 거요."

"오! 정보국 장교께서 기간트도 타시려고?"

그때 소녀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나 그거 어디 있는지 아는데."

"뭐? 아저씨?"

"그 기간트 내가 찾아다 줄까?"

그때 타냐가 끼어들었다.

"앨리슨,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드는 거 아냐. 그리고 영감이 너 일 시킨 거 알면, 다음에 내 기간트 안 고쳐준다. 저리 가라."

타냐가 앨리슨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난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주 착하구나. 마음만 받으마."

그리고 품에서 1골드를 꺼냈다.

"맛있는 거 사 먹어."

1골드를 손에 받은 앨리슨은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눈치를 보니, 할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녀석.

"괜찮아. 어서 집어넣어."

"고맙습니다."

앨리슨은 고개를 숙이더니, 금화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어째 하는 행동이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거 같소."

"그야 여기가 전진 기지라 그렇지. 말이 시민들이지, 반은 범죄자 출신이고, 나머진 군인들인데, 누가 어린애 교육을 하겠소. 사실 아이도 거의 없고."

타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이곳 출신이었다.

파지직! 툭!

작업하던 사내가 마석 용접기를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이고 허리야!"

"케네스 영감!"

"기다려!"

수염이 덥수룩한 케네스는 작업대에서 내려와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마석 배터리가 4개나 들어있는 큰 상자에서 선을 가져와 방금 수리한 뚜껑 열린 기간트에 연결했다.

그리고 수리한 기간트에 올라탔다.

끼잉! 끼이잉!

방금 연결한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자세히 보니 다리가 움직이긴 했지만, 무릎 아래론 관절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타냐가 다가가 물었다.

"영감, 뭐가 문제야?"

"부품이 좀 달라. 기체는 드로리안 왕국의 5세대고 다리는 엘리아스 영지의 4세대거든. 연결 부위가 똑같이 생겨서 될 줄 알았는데······."

케네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제길! 오늘 허탕 쳤군."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그래도 내가 손님을 데려왔어."

"손님?"

자기가 데려와?

뻔뻔하군.

내가 함께 가달라고 했는데······.

케네스가 내게 물었다.

"젊은 장교께선 뭘 찾으슈?"

"훈련용 더미 기간트를 찾고 있소. 오래된 구형이라도 괜찮소."

케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한테 그런 게 있나?"

케네스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타냐가 말했다.

"가끔 깜빡깜빡하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오."

"할배! 12번째 산에 있잖아!"

옆에서 앨리슨이 끼어들었다.

"응? 12번째 산에? 아! 맞아. 거기서 본 거 같군."

케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얼마에 사실 건가?"

"일단 움직이는 걸 보고 흥정합시다."

"뭐, 좋소. 여기서 기다리시오."

케네스가 타냐를 쳐다봤다.

"뭐해?"

"왜?"

"저기 있는 작업용 기간트를 끌고 따라오게. 난 마나가 바닥이야."

"젠장! 이젠 나까지 부려먹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타냐는 케네스가 시킨 대로 작업용 기간트에 타더니, 뒤를 따라 이동했다.

'응?'

그때 나와 운명의 실이 연결된 꼬마 숙녀가 작업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앨리슨은 작은 체구로 작업대에 힘겹게 올라가더니, 방금 연결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러다 떨어지면 위험하겠는데.

"야! 내려와!"

그때 앨리슨이 손가락으로 연결부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 순간 뭔가 빛이 반짝였다.

'어? 방금 그건 마나?'

놀랄 틈도 없이 소녀가 기간트에 올라탔다.

끼잉! 철컥!

끼이잉! 철컥!

'뭐야? 기간트를 고쳤어!'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움직이지 않던 관절까지 모두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소녀가 기간트를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장면은 지금 나만 보고 있었다.

기간트 공학자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까무러치지 않았을까?

앨리슨이 기간트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쉿! 착한 아저씨, 비밀이야."

"어, 그래."

앨리슨은 다시 상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케네스는 손녀가 저런 엄청난 능력이 있는지 알고 있을까?'

호기심에 수리된 기간트에 다가가 앨리슨이 손가락으로 만진 부분을 살펴봤다.

난 아무리 봐도 뭘 한 건지 모르겠다.

앨리슨이 들어간 상자 옆으로 이동했다.

"앨리슨, 방금 어떻게 한 거니?"

"안쪽에 끊어진 선이 있었는데, 내가 연결해줬어."

"그게 보여?"

"응! 집중해서 보면 보여."

어떻게 한 거지?

마나를 눈에 집중한 건가?

그리고 어떻게 안에 있는데 연결한 거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소녀는 천재라는 거다!

"그런데 넌 왜 그 상자 안에 있는 거니?"

"할아버지가 작업할 때나 어디 갈 땐 이 안에 숨어 있으라고 했어."

"왜?"

"그야 돼지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

"돼지?"

"있어. 크고 못생긴 돼지. 맨날 찾아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끼잉! 쿵! 쿵! 쿵!

그때 케니스와 타냐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이가 운이 좋군."

타냐가 양손에 들린 훈련기를 조심스럽게 작업장에 내려놓았다.

'이게 훈련기라고? 너무 허접한데?'

높이는 2.5미터에 관절과 연결부가 그대로 보이는 것이 꼭 헐벗은 것 같았다.

다른 기간트도 장갑이나 보호구를 모두 제거하면 이런 모양이 될까?

아무튼, 무게는 확실히 적게 나가 인형의 집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당장 비숍급 기간트에 탈 것도 아니고, 더그가 훈련하기엔 충분하겠지.

"잠깐 기다리시오. 금방 확인시켜 드리지."

케니스는 훈련기를 쇠사슬에 걸어 작업대에 걸었다.

그리고 등 쪽 작은 해치를 열더니 선을 연결했다.

치이이익! 철컥!

"타냐 시범을 좀 보여주게."

"내가?"

"난 마나가 바닥이라니까."

"쩝."

타냐가 훈련기에 올라탔다.

해치가 닫히고, 훈련기는 공중에 매달린 채로 걷기 시작했다.

"타냐, 이제 팔을 들고 돌려봐!"

[알았어.]

훈련기가 팔을 돌리기 시작했다.

끼이잉! 붕! 붕!

내가 살 기간트를 테스트하는데 난 앨리슨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만 내리게."

타냐가 훈련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케니스가 내게 말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아직 생생한 것 같은데?"

"좋소. 구매하겠소. 얼마요?"

케니스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100골드."

"정말이요?"

"그렇다니까. 대신 선금이오."

생각보다 너무 싼 가격에 놀랐다.

아무리 오래된 훈련기라곤 해도 움직이는 기간트가 100골드라니!

내 인형의 집엔 이번에 받은 포상금까지 1,000골드가 넘게 있었기에 부담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을 하며 100골드를 꺼내 건넸다.

"이제 이 기간트는 당신 것이오. 타냐, 이 기간트를 좀 옮겨주게."

"뭐? 내가 왜?"

"싫은가? 그럼 그동안 밀린 외상값······."

타냐가 날 보며 말했다.

"당신 숙소까지 옮겨주면 되겠지?"

"그래 주시오. 그리고 시운전도 할 겸 당신이 훈련기를 타고 옮겨 주시오."

"그러지."

그때 케네스가 내게 말했다.

"참! 미리 말을 안 했군. 마석 배터리 가격은 별도요."

"알겠소. 얼마를 주면 되지."

"200골드요."

"뭐요? 배터리 가격이 기간트보다 2배나 비싸다고?"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난 타냐를 쳐다봤다.

"요즘 마석 배터리 시세가 얼마요?"

"100골드가 기준이오."

"그리고 다 소모된 마석 배터리를 가져가 주면 20골드는 돌려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소. 그럼 대략 80골드면 충분하지 않소?"

"영감, 어차피 손님도 없잖아. 좀 싸게 해줘야 나처럼 단골이 되지."

옆에서 타냐가 지원 사격을 해줬다.

케네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타냐와 나를 번갈아봤다.

"마석 배터리 시세야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 기간트는 150년 전에 만들어진 구형이야. 마석 배터리 모양도 다르고, 충전방식도 전혀 다르지. 내가 이 구형 마석 배터리를 만든다고 5년이나 고생했으니, 그 정도는 받아야 하오. 대신 재충전 가격은 150골드만 받지."

나 지금 덤터기를 맞은 거야?

호구 된 거야?

순간 짜증이······.

내 표정을 본 케네스가 얼른 금화를 품에 넣었다.

"방금 판매한 훈련기는 환불이 불가하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인형의 집 가득 마석과 비싼 부산물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영감의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5년 동안 연구해서 만든 것을 나한테 한방에 만회하려는 건가?

'어? 잠깐만. 방금 저 영감이 자기가 마석 배터리를 만들었다고 했어?'

손녀는 기간트를 수리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고, 영감은 마석 배터리를 만들었다고?

순간 몸에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이 보물섬의 진짜 보물은 두 사람이로구나!'

이 두 사람은 내가 기간트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없어도 드워프가 있으니, 언젠가 기간트를 만들고 마석 배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건 덤터기가 아니라 로또 당첨 수준이었다.

"배터리 하나면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공손하게 물었다.

"뭐요?"

"마석 배터리를 사용 기간 말입니다."

"아! 이 훈련기에 쓴다면 하루에 10시간씩 열흘은 사용할 수 있소. 물론 격렬한 움직임이나 무거운 물건을 옮기면 더 빨리 소모되고."

"이곳에 이 구형 마석 배터리가 몇 개나 있습니까?"

"충전된 건, 1개뿐이요."

"내일까지 몇 개나 준비될까요?"

"빈 배터리는 있으니, 밤새 충전하면 5개까진 준비할 수 있소."

"그럼 그렇게 준비해 주십시오."

"모두 말이요?"

"네."

케네스와 타냐, 둘 다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단단히 화를 낼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기술자들은 응당 좋은 대접을 받아야지. 가격을 깎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뭐요?"

케네스가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 계획은 이미 시작됐다.

이 영감과 손녀를 살살 꼬드겨 장벽 너머로 데려간다!

뭐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니, 일단 친절과 물량 공세다.

"@#[email protected]

#$!"

갑자기 들리는 괴이한 소리!

[새로운 언어를 탐지했습니다.]

[분석을 시작합니다.]

'어?'

"&%$!^&!"

소란한 곳을 쳐다봤다.

녹색 피부, 2미터의 키.

우람한 근육.

일곱 명의 오크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계 난민들하고 무슨 악연이 있나?

가는 곳마다 만나네.

"@#[email protected]

!^&!"

"%^#^%!"

험상궂은 오크들이 큰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몰려왔다.

놈들은 당장이라도 손에 들린 커다란 칼과 도끼를 휘두를 것처럼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씨발! 오크 새끼들 뭔데?"

타냐 블랙은 바로 작업용 기간트에 올라타 해치를 닫았다.

케네스 영감은 작업용 공구를 집어 들었고, 앨리슨은 상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앨리슨이 말한 돼지가 오크였어!'

그때 가장 덩치가 큰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타냐가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저놈이 쿠훌린이오! 아주 난폭한 놈이지.]

그는 오크 용병대장 쿠훌린이었다.

"@#[email protected]

#$!"

"&^$%%@!"

무슨 일이야? 왜 저렇게 화났어?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아! 이건 기회야!

오크들을 물리치고, 케네스와 앨리슨에게 은혜를 베풀 기회!

'짹, 더그와 전투 준비해!'

[네, 마스터.]

'둘 다 후드와 마스크도 쓰고.'

[네, 알겠습니다.]

짹이 더그를 챙기고, 둘 다 무기를 들고 대기했다.

오크가 일곱이나 됐지만, 우리 쪽엔 작업용 기간트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짹과 더그를 뒤쪽에 배치해 기습할 생각이었다. 그럼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표범과 사마귀 마법인형까지 내보내면 되고.

어찌 됐든 오크에게 두 사람을 구해 신뢰를 쌓는 것이 목적이다.

[언어 분석이 끝났습니다.]

쿠훌린이 위협하듯 커다란 도끼를 앞으로 내밀었다.

"쿠오크! 인간! 왜 금화를 줬는데, 우리 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는가! 이 빠진 내 도끼를 봐라! 이거론 괴수와 싸울 수 없다."

"쿠오크! 우리가 준 금화가 부족한가? 그럼 더 줄 수 있다. 그러니 오크에게 더 크고 강한 무기를 만들어다오!"

뭐지? 이 상황은?

24. 세 번째 이계 난민.

24. 세 번째 이계 난민.

"쿠오크! 내 칼은 금이 갔다. 무기를 다오!"

"쿠오크! 내 도끼는 자루가 부러졌다!"

"오오크! 더 강한 무기 필요하다!"

다른 오크들도 자신의 무기를 보이며 소리쳤다.

대부분 이가 나가고,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무기들.

내가 오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거구의 오크 깡패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나약한 인간을 겁박하는 것으로 오인하기 좋은 장면이었다.

일단 이들의 사정을 알아봐야겠다.

"조용!"

"쿠옥?"

"쿠오오크?"

오크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쿠훌린 용병대장은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후볐다.

"쿠오크!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야! 제대로 들었어. 내가 한 말이다."

"쿠옥? 어, 어떻게 인간이?"

"쿠오크! 인간이 오크 말을 한다!"

오크들은 경악했고, 타냐는 기간트 해치까지 열었다.

치이익! 철컹!

"뭐, 뭐야? 당신, 어떻게 저놈들 말을 하는 거지?"

"타냐 용병대장 일단 기다리시오. 오크들과 대화부터 하고."

내가 앞으로 나서자, 쿠훌린이 도끼를 겨누며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쿠오크! 너는 누구인가? 어째서 오크 말을 아는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상태창으로 배웠다고 하면 믿을까?

아니면 다른 오크 무리에게 배웠다고 해?

그때였다.

무리 뒤쪽에서 한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오오크! 당황하지 마라! 오크여!"

그는 온몸에 주렁주렁 장신구를 매달고 있었고, 얼굴에 붉은 칠을 한 특이한 오크였다.

"쿠오크! 레드불 제사장, 무슨 가르침이 있는가?"

그는 오크들의 제사장이었다.

레드불 제사장이 들고 있던 메이스로 날 가리켰다.

그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오오크! 저 인간의 몸에 선조의 영혼이 강림했다!"

뭐?

선조의 영혼? 무슨 말이야?

"쿠옥? 레드불이여! 그게 말이 되는가? 인간에게 오크 선조의 영혼이라니?"

쿠훌린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오오오크! 의심하지 마라! 쿠훌린 족장이여! 그럼 어떻게 인간이 오크 말을 저리 잘하는가? 게다가 그의 말투는 우리 사이얀족과 같지 않은가! "

"맞다! 그의 말투는 우리와 같다."

"인간의 몸에 사이얀 선조의 영혼이라니! 불가능하다!"

"아니다! 저건 선조의 영혼이다!"

이거 제사장이 날 도와주네!

오크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슬쩍 살펴보니, 제사장의 말을 믿는 오크와 의심하는 오크가 반반 정도 섞여 있었다.

그럼 나머지 반도 완전히 믿게 해줘야지.

"들어라! 레드불 제사장의 말이 맞아! 내 몸엔 오크 선조의 영혼이 깃들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신분의 오크다."

"쿠오크? 설마, 대족장인가?"

오크들이 살짝 입을 벌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선조의 영혼을 잇는 자! 오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인간의 몸에 직접 강림했도다."

"쿠오오오크!"

"쿠오오크!"

쿵! 쿵! 쿵!

오크들이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자신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눈치를 보니 이건 좋은 징조였다.

쿠훌린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쿠오크! 선조의 영혼을 잇는 자여! 우리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쿠훌린이여! 그렇다."

이제 오크들이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하긴 내가 오크 입장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 완벽한 오크어를 그것도 그들과 똑같은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쓰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오크어의 반은 침을 튀기면서 하는 말이었다. 인간이 흉내 낼 순 있어도 더러워서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쿠훌린이여! 어찌하여 오크가 이곳에 왔는가?"

"쿠오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길에 휩싸였다. 숲은 사라지고, 산은 무너지고, 강은 메말랐다. 땅에서 솟아오른 용암이 대지를 뒤덮고, 불타는 거수가 온 세상을 파괴했다."

'아니! 오크가 여기 보물섬에 왜 왔는지 물은 건데?'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끊지도 못했다.

다시 물었다.

"쿠훌린이여! 여기엔 왜 왔는가?"

쿠훌린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케네스를 가리켰다.

"쿠오크! 한 달 전 우리가 저 인간에게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금화를 주었다. 그런데 아직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왜 저자에게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가?"

"쿠오크! 오크 대장장이 모두 죽었다. 오크 대장간 없다. 오크 무기 필요했다. 그래서 요새 지키는 인간들에게 물었다. 골렘인형처럼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물었지?"

"쿠오크! 그림을 그렸다. 그랬더니, 이곳을 가르쳐줬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림이 제일 낫지.

그림도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제 대충 오크들의 말뜻은 알아들었다.

그럼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할 차례.

고개를 돌렸다.

"케네스, 당신이 이들에게 금화를 받았는가?"

"뭐, 뭐요?"

나도 모르게 오크의 말투를 그대로 내뱉었다.

이래서 통역이 힘든 거구나!

"당신이 오크들에게 무기를 만들어 주기로 했고, 그래서 금화도 지급했다고 말하고 있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케네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저놈들에게 금화를 왜 받아? 그리고 무슨 무기를 만들어? 기간트 수리하기도 바쁜데!"

뭐지?

케네스가 너무 당당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오크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때 타냐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오크 새끼들 말을 믿는 거야? 딱 보니 저것들이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케네스 영감에게 생떼를 쓰는 모양인데, 오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지!"

철컥!

기이잉! 쿵! 쿵!

타냐가 탄 기간트가 작업용 공구를 겨눴다.

"쿠오오오!"

쿠훌린이 타냐의 반응을 보곤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이얀족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가리에 도끼 박혀도 약속 지킨다! 하지만 인간들은 약속 지키지 않는다!"

"쿠오크! 쿠오크!"

갑자기 오크들이 성난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딱 봐도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대론 좋지 않다.

곧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일단 오크부터 제압하고 보자.'

사실관계를 떠나 케네스와 앨리슨은 내가 꼭 데려가야 할 사람들.

그러니 그들부터 지킨다.

"아닌데!"

"응?"

상자에서 앨리슨이 튀어나왔다.

"할아버지가 돼지들한테 돈 받았는데!"

"뭐?"

모두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케네스가 앨리슨에게 말했다.

"앨리슨, 왜 거짓말을 하는 거니? 난 이 자들에게 받은 게 없단다."

케네스가 소녀에게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아닌데! 돈 받아서 저기에 넣었는데!"

앨리슨이 작업장 구석에 있는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케네스는 작업용 공구를 들고 상자 모서리를 힘껏 내려쳤다.

부웅! 콰앙!

촤르르르르!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반짝이는 금화가 바닥에 쏟아졌다.

"헛!"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오크들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판단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타냐가 기간트 해치를 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금화가 정말 있잖아!"

그 순간 보았다.

케네스의 등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을.

"내, 내가 받았구나······."

뒤돌아 있었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왜 그랬지? 내가 왜? 이젠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건가?"

케네스는 자책하고 있었다.

그때 앨리슨이 상자에서 나와 케네스를 뒤에서 꼭 안아줬다.

케네스도 한쪽 무릎을 꿇고는 앨리슨을 제대로 안아줬다.

"크흐흑! 앨리슨 미안하구나."

"할배,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까먹으면 내가 알려줄게."

아! 치매구나!

가끔 깜빡깜빡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케네스의 치매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오크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런데!

케네스가 눈물을 훔치더니, 일어나 오크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90도로 몸을 숙였다.

"미안하군!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쿠옥?"

케네스는 지금 오크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음이다.

케네스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오크들도 더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고개를 든 케네스가 나를 쳐다봤다.

"미안하지만, 내 말을 전해 주겠소?"

"알겠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금화는 모두 돌려주겠다. 그리고 지금부턴 다른 일은 모두 중지하고, 오크들의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날 용서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고개를 끄덕였다.

"쿠훌린이여! 여기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에 걸려서 그런 거다."

"쿠오크! 나도 가끔 괴수에게 머리를 맞으면 기억을 잃어버린다. 인간도 머리를 맞았나 보군."

"그리고 인간이 오크에게 받은 금화는 모두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오크들의 무기를 최선을 다해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쿠오크! 정말인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믿어도 좋다. 선조의 영혼을 잇는 내가 보증하겠다."

내 말에 쿠훌린이 도끼를 든 손을 번쩍 들었다.

"쿠오크! 오크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긴다!"

"쿠오크! 쿠오크!"

이건 기쁨의 함성이었다.

쿠훌린이 말했다.

"쿠오크! 선조의 영혼을 잇는 자여! 인간에게 말해달라! 오크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한다. 금화는 받지 않겠다."

"뭐?"

난 방금 오크가 한 말을 케네스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케네스는 오크들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좋다! 그럼 2배로 좋은 무기를 만들어 주지!"

그는 지금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타냐가 기간트에서 내렸다.

"쩝! 오크 놈들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리가 있네."

케네스 때문인지 그녀의 눈가도 촉촉해져 있었다.

"응? 그런데 영감이 방금 일을 까먹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있는데! 내가 알려주면 되는데!"

케네스의 손을 잡은 앨리슨이 말했다.

"그래! 영감도 네 말이라면 믿을 거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잘못은 케네스 영감이 했지만, 치매라는 특수한 상황을 오크들이 이해하며 넘어갔다.

그리고 케네스는 곧바로 오크의 무기를 만들겠다며,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타냐가 옆에서 물었다.

"무기는 어떻게 만들려고?"

"여기서 룩급 기간트 동체가 가장 단단하니 잘라서 날카롭게 다듬으면 된다. 어차피 괴수와 싸우기 위한 무기니, 모양보단 살상력 위주로 만들어 줄 생각이야."

그때 쿠훌린이 다가왔다.

"쿠오크! 선조의 영혼을 잇는 자여! 말해 다오! 오크 전사. 인간 대장장이 돕는다."

거구의 오크 셋이 케네스 뒤에 기립했다.

"여기 오크들을 조수로 써달라고 합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땐, 오크들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잘 됐군."

"저기, 그런데 내 훈련기 마석 배터리는 내일까지 준비 가능합니까?"

"물론이오. 그보다 바쁘니까 그만 돌아가시오."

케네스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열심히 일하는 케네스를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치매는 사형선고가 아니다.

치매에 걸리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이유가 있고, 또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고.

머리를 많이 쓰면 치매도 덜 진행되겠지.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전진 기지에서 구할 것은 다 구했으니, 임무를 완료하고 다시 돌아와서 이 할아버지와 손녀를 어떻게 장벽 너머로 데려갈지 고민할 생각이었다.

"쿠오크! 선조의 영혼을 잇는 자여!"

쿠훌린이 날 불렀다.

"고맙다!"

"오오크! 인간에게 대족장의 기운이 느껴진다!"

제사장이 손을 번쩍 들더니, 가운데 있는 손가락을 내게 뻗었다.

순간 당황했다.

지금 엿 먹으라는 건가?

그러자 쿠훌린과 다른 오크들도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무슨 뜻이야?"

"쿠오크! 잊었는가? 이건 오크 가운데 우뚝 솟은 자! 대족장을 추앙한다는 뜻이다!"

뜻은 알겠는데,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쿠훌린이 말했다.

"쿠오크! 대족장의 영혼이 깃든 자여!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르쳐다오!"

"뭐?"

***

내 호위대장인 글래디스는 연병장에서 엘프 하사관들과 한창 호위 방법이나 호위 시 서로의 위치나 동선을 맞추고 있었다.

통역은 필요 없었다.

에테나가 눈치껏 알아들을 테니까.

'엘프 호위대라, 보기는 좋네.'

든든하기도 하고.

이 정도면 대수림에서 객사할 리는 없겠지?

"타일러 중위님!"

글래디스가 날 보자마자, 달려왔다.

"왜?"

"사령관님께서 아까부터 찾고 계십니다."

"어디 계시지?"

"이번 원정대 장교분들과 회의실에 계실 겁니다."

"알았네."

회의실로 가려다 몸을 돌렸다.

"글래디스! 인원을 더 추가해야겠는데!"

"네? 누가 또 같이 갑니까?"

"오크 용병들."

"오크요?"

글래디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사실 좀 황당하다.

"나중에 말해 줄게. 이야기하자면 사연이 길어."

"몇 명이나 추가되는 겁니까?"

"한 30명 정도."

"네? 30명이요?"

"그것도 많이 줄인 거야. 원래는 300명이 넘었어."

"네에?"

난 쿠훌린의 간절한 초청으로 전진 기지 외곽에 있는 오크 용병대에 찾아갔다.

오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길래, 대수림에 정착하고 잘살려면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날 따라다니며 인간과 인간의 언어에 대해 배우고 싶다나?

내가 일 때문에 대수림에 가야 한다고 했더니, 모두 따라가겠다고 난리였다.

물론 나야 병력이 늘면 좋다.

지금 가는 곳은 여태껏 가보지 못한 미지의 환경이고, 제국이 진출한 대수림 영역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니까.

하지만 300명은 너무 많다.

이들이 먹을 식량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 되고, 통제가 가능할지도 아직 모르겠다. 숫자가 많아지면 인간 병사들과 마찰도 생길 수도 있었기에 쿠훌린에게 정예병으로 딱 30명만 추려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오크들은 레드불 제사장의 지휘하에 무기를 만들고 있는 케네스를 도우라고 했다.

"아! 그러고 오크들이 도착하면 무기나 좀 챙겨줘. 사령관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네, 알겠습니다."

사령관실로 향하는데, 에테나가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살짝 손을 들어줬다.

엘프들은 지금 마차 주변에서 열심히 경호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계약도 끝이니까.

드워프와 엘프, 그리고 이제 오크까지.

이거 이러다가 이계 난민들의 영주가 되는 거 아냐?

내가 한 농담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드디어 내일이면 출발하는구나!'

난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25. 얼음 계곡 원정대(1).

25. 얼음 계곡 원정대(1).

[카야킨 사령부 회의실]

날 보는 눈길들이 매섭다.

"충!"

출발 전에 작전 회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크들 때문에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말했다.

"타일러 중위, 작전 회의가 장난으로 보이나?"

작은 눈에 날카롭게 생긴 인상.

엘다크 소령이었다.

"여기서 자네가 계급이 제일 낮아. 그런데 1시간이나 늦어? 제정신이야? 나 때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럼 잔소리가 더 길어지니까.

내가 잘못하기도 했고.

"그만하게."

커널 사령관이 끼어들었다.

"타일러 중위는 따로 준비할 게 많아. 그래서 내가 천천히 오라고 했네."

"아! 그렇습니까."

엘다크 소령이 곧바로 수긍했다.

다행히 커널 대령이 내 편을 들어줬다.

"타일러 중위가 왔으니, 1차 목적지까지 다시 작전을 점검해보겠습니다."

보리스 소령이 두 번째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 내용은 별거 없었다.

원정대 담당 직책을 설명하고, 어떤 경로로 이동하고, 보급 물자는 어디서 받고, 또 전투 상황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법 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역할은 기간트에 맞춰져 있었기에 병사들은 보급품을 나르고, 보호한다는 간단한 설명만 있었다.

사실 말이 작전 회의지 상급자들끼리 이미 다 정해놓고 커널 대령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작전 설명이 끝나자, 커널 대령이 날 쳐다봤다.

"타일러 중위 할 말 없나?"

"이동이나 작전에 대해서는 따로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지휘 체계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무슨 지휘 체계?"

장교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커널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미 약속된 상황이었다.

"이번 원정대의 총지휘관은 타일러 중위네."

사령관의 말에 장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엘다크 소령이 손을 들고 말했다.

"보리스 소령님이 있는데, 타일러 중위가 총지휘를 한다는 말씀입니까?"

보리스는 곧 중령 진급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엘다크는 이제 막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였다. 둘이 꽤 친한 선후배 사이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네. 이미 보리스 소령과는 이야기를 끝냈네."

그때 보리스 소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정대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가령 괴수와 전투 상황이 발생할 때, 기간트의 전투 지휘는 제가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상황에 대해서는 여기 타일러 중위가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위가 어떻게 연대 규모와 맞먹는 기간트 부대를 지휘합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타일러 중위는 기간트 기사도 아니지 않습니까?"

장교들은 곧바로 반발했다.

물론 엘다크 소령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쾅!

커널 대령이 책상을 내려쳤다.

그러자 장교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이번 작전은 윌리엄 장벽 사령관님과 헬다임 정보국에서 진행하는 것이네. 나도 그대들도 그 명령에 따르는 것이야. 그리고 전투 지휘는 보리스 소령이 할 것이니 문제가 없네. 혹여 장벽 사령부의 결정에 의문이 있는 장교는 지금 말하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주지."

커널 사령관의 말에 장교들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 총지휘관은 타일러 중위고, 전투지휘관은 보리스 소령이네. 혹여 원정 기간 동안 총지휘관에게 실수하는 장교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알았나?"

이미 길잡이도 구했고, 보급과 이동 동선도 모두 결정된 상태였다.

지금 이 자리는 커널 사령관이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자리였다.

"왜 다들 대답이 없나?"

"충! 알겠습니다."

이 전진 기지에서 비밀 임무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커널 대령과 나밖에 없었다.

부사령관인 라그르 중령조차 모르고 있었고, 물론 보리스 소령도 우리가 가는 위치는 알아도 우리가 뭘 찾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은 기밀을 요하는 일이었다.

작전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커널 대령이 개인적으로 물었다.

"엘다크 소령이 불편하면 빼줄까? 진급도 빠르고 능력도 출중한 사람이지만, 너무 고지식한 게 문제야."

"아닙니다. 비숍급 기간트 기사가 어디 흔합니까. 보리스 소령님이 잘 관리하시겠죠."

"알았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게."

"네."

우리는 다음날 얼음 계곡으로 출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