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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며칠 후.

내가 나포한 비공정의 마장기를 모두 내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부서진 강습 마장기도 모두 챙겼다.

수리하면 쓸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으니까.

이 모든 것을 대 놓고, 챙겼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사령관과 시안 황자는 지금 수도로 갔으니까.

가디언 제국은 조용했다.

병력은 카불 요새에 집결했고, 비공정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난 지금 거대 비공정을 수리하고 있었고.

늦은 밤이었다.

똑똑.

"접니다!"

에테나의 목소리였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지?

살짝 설렜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누구지?"

"안드레아스 원수입니다. 비공정을 타고 접근하는 것을 우리 드워프 비공정이 발견해 데리고 왔습니다."

'안드레아스가 직접 왔다고?'

가디언 제국에서 누군가 올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안드레아스 원수가 직접 올지는 몰랐다.

"회의실, 아니 선수 갑판으로 모셔라."

"네!"

174. 내 조건은?

174. 내 조건은?

거대 비공정 선수 갑판으로 왔다.

'언제 봐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별다른 동력도 없이 이 거대한 비공정이 하늘에 떠 있다니.

비행석이 전생에 있었다면 에너지 산업에 혁명이 됐을 텐데 말이지.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에테나에게 안드레아스를 천천히 선수로 데려오라고 했다.

'안드레아스가 왜 온 거지?'

머릿속에 예상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항복?

고개를 흔들었다.

비공정을 많이 잃긴 했지만, 우리에게 대적할 수준은 된다. 마장기는 아직도 우리 기간트보다 더 많고.

그리고 아베르크 제국군이 이대로 전쟁을 끝내고 진군을 멈출 거로 생각진 않을 거다.

그러니 그는 가디언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울 사람이었다.

'그럼 협상?'

문제는 그가 나와 거래할만한 것이 없다.

안드레아스의 책략 때문에 우리가 엘프 차원에서 몰살당할 뻔했다. 그때 전사한 기사들이 지금 내 마법인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그걸 보상받으려면 대체 얼마를 받아야 할까?

그리고 가디언 제국이 아베르크 제국을 침공해 또 얼마나 많은 기사와 병사가 죽었나······.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카드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았다.

마장기와 비공정을 내놓고, 가디언 제국의 영토를 순순히 줄 것 같지도 않고.

'아니면 루이스가 시켜서 억지로 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음번 전투가 벌어지면 십중팔구는 자신들이 밀릴 테니, 가디언 제국의 백작인 나와의 인연을 말하며 인정에라도 호소할 생각일지도.

그 외에 몇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려봤지만, 딱히 지금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때 에테나와 안드레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타일러님, 모셔왔습니다."

난 안드레아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먼저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안드레아스는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구려. 반갑소. 타일러 후작."

"왜 왔냐고 묻질 않소?"

안드레아스가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이라고 할까?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모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왔소."

"호기심?"

의외의 대답이었다.

"괴수를 어떻게 길들인 거요? 그리고 그 불을 뿜는 무기는 대체 어디서 난 것이고? 또 오크를 어떻게 대했길래 타일러 후작을 왕처럼 따르는 거요? 난 타일러 후작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 많소."

안드레아스는 주름진 얼굴로 아직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내가 내 비밀을 말해줄 것 같소?"

"어떻게 하나만 말해주면 안 되겠소?"

"여기까지 용기를 내 왔으니, 하나만 말해주겠소. 그 불을 뿜는 무기는 대포라고 하는 무기로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오. 내가 드워프 차원으로 가서 직접 그들을 구하고 얻은 것들이지."

"아! 역시 다른 차원의 무기였어."

안드레아스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살짝 쳤다.

"오크도 그렇고, 드워프도 그렇고, 타일러 후작은 이계 난민들의 힘을 잘 이용하셨구려."

안드레아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가 뭐요?"

"타일러 후작과 협상을 하러 왔소."

"나와 협상이 될 거로 생각하시오?"

"협상이 될지 안 될지는 일단 협상 조건을 들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겠소?"

안드레아스는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내게 어떤 제안을 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좋소. 한번 들어나 봅시다."

"항복하겠소."

"뭐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항복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솔직히 더 싸워봤자,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 아니오. 몇 년을 준비하고, 다른 세력을 설득하고, 비공정과 강습 마장기까지 최선을 다해 만들었소. 하지만 모두 허사였고, 겨우 전투 한 번에 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전력의 70%를 잃었소. 그러니 다음 전투는 해 보지 않아도 결과는 같겠지요. 그래서 항복을 택한 것이오. 그리고 기사들의 죽음을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소."

안드레아스를 빤히 쳐다봤다.

날 기만하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루이스 황자도 허락했소?"

"루이스 황자 저하께는 곧 허락을 받을 참이오. 먼저 타일러 경이 항복을 받을 것인지, 알아보고 수도로 갈 생각이라······."

"항복 조건은?"

"아로카 산맥과 델라스 강까지 가디언 제국의 서쪽 영토를 내놓겠소."

"그건 나쁘진 않군."

도시나 마을은 적지만 방대한 땅이었다.

가디언 제국의 1/10이나 되는 서부 지역을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론 어림도 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병력이 아니겠소. 지금 가디언의 병력 규모는 강대하니, 언제든 아베르크 제국을 넘볼 수 있으니 쉽게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요."

안드레아스는 낮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우리 현 전력의 30%를 아무 조건도 없이 내놓겠소. 물론 비공정과 강습 마장기까지 포함해서 말이오."

"정말이오?"

"다만 우리가 내놓은 병기들은 타일러 경께서 맡아 주시오."

"그러니까 가디언 제국의 전력을 아베르크가 아니라 내게 맡긴단 말이오?"

"그렇소. 솔직히 난 아베르크 제국에 졌다곤 생각지 않소. 난 타일러 후작에게 진 것이오. 그러니 우리 전력을 맡기더라도 타일러 후작에게 맡기고 싶소."

이게 무슨 소리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쥐새끼는 어디에나 있군.

"내가 제국에서 독립할 거라는 정보를 들었군."

"그렇소. 아주 비싼 정보였소."

며칠 전 지휘관들이 모인 공군 회의실에서 했던 말이 안드레아스까지 넘어간 것 같았다.

"아베르크에 비공정과 마장기가 넘어간다면, 그건 곧 개조되어 우리를 향해 다시 진군하겠지만, 타일러 경에게 간다면 당분간 아베르크가 가디언을 공격할 순 없을 것이고, 어느 정도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오. 뭐 영토를 꽤 잃긴 하겠지만······."

"하지만 내가 가디언 제국의 병기를 챙기면, 아베르크 제국의 화살은 내게 향할 것이오."

"어차피 제국에서 독립하면 그건 필연적이오. 황제가 입안에 생긴 가시를 그냥 놔두겠소? 그럴 사람이면 아리칸 공국을 진작 왕국으로 승격시켜줬겠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우리에게 가져간 병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제국을 견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망하는 것보단 어느 정도 힘을 유지해야 타일러 후작에게도 좋을 것이고."

안드레아스는 마치 내 생각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마르틴 국왕에게 내가 한 이야기를 안드레아스가 그대로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전후 복구 비용은?"

"우리도 군사력을 너무 빨리 증강해 재정이 어렵소. 그러니 단번에 줄 순 없고, 10년에 걸쳐서 아베르크에 지급하겠소."

안드레아스가 협상이 될지 안 될지는 조건을 들어봐야 한다고 하더니, 정말 들어보니 그 조건에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흔들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소."

"이건 아베르크 제국과 타일러 후작에게 나쁠 게 없는 조건이오. 어차피 타일러 후작의 비공정이 없으면, 아베르크 제국은 우리 상대가 아니니, 타일러 후작의 말을 들을 것이오."

"가장 중요한 조건이 빠졌잖소."

"······?"

"당신 말이오."

안드레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나이가 일흔이 훨씬 넘었소. 이 늙은이를 포로로 삼고 싶다는 거요?"

"물론이오. 당신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내 마지막 조건은 바로 당신이오."

"하아! 다른 건 다 루이스 저하를 설득할 자신이 있는데, 과연 내가 가는 걸 허락하실진 모르겠소. 마지막 병력 하나까지 결사 항전을 하실지도 모르오."

"그건 내 알 바는 아니고. 당신이 가져온 협상 조건에 내 조건은 그거 하나요."

안드레아스의 한숨이 깊다.

"시간이 없소. 최소 보름 안에 답을 주시오. 그 기간이 지나면 나도 진군을 막을 순 없소."

"휴우! 알겠소."

안드레아스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자, 좀 쓸쓸해 보였다.

안드레아스의 조건은 내게 나쁠 게 없다.

아니 이보다 좋은 조건은 있을 수 없었다.

계속 전쟁을 한다고 해서 내가 가디언 제국의 땅을 넘겨받을 것도 아니고.

이번에 공왕에 자리에 앉게 되면, 차분히 독립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가디언 제국의 마장기와 비공정은 모두 내 전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아스가 가디언 제국에 남아 있다면, 그는 분명 내게 대항할 무기부터 만들고, 다시 세력을 규합해 아베르크와 나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반드시 포로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포로가 된 그를 윌리엄 총사령관이 살려둘 리가 없었다.

결국, 내가 말한 협상 조건은 그의 죽음이었다.

'운이 없군.'

멀어지는 안드레아스 원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내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아베르크 제국을 점령하고, 대륙을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운이 좋아 이겼을 수도 있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밤늦게까지 프로펠러를 수리하는 드워프들이 보였다.

그리고 당직을 서는 엘프와 보초를 서는 오크도 보였다.

과거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았지만, 이젠 다른 세상에서 힘을 합쳐 살아간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종족이 힘을 합치니, 그 힘은 배가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계 난민들을 구하고 힘을 합하고자 한 내 선택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젠 수인족을 구할 차례였다.

'암 드로운과 기사들은 잘하고 있을까?'

수인족 차원에 있는 기사들이 걱정됐다.

그리고 수인족 대수림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복제인형인 여왕개미도 걱정이 됐고.

하루빨리 이곳 전쟁을 마무리 짓고, 수인족 차원으로 넘어가야 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안드레아스가 찾아온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만 루이스가 안드레아스를 포기할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휘이이잉!

안드레아스가 타고 온 비공정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잘 되겠지?'

그는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 루이스 황자를 설득하러 간다.

물론 나도 윌리엄 총사령관과 시안 황자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그들이 과연 순순히 가디언 제국의 30%나 되는 전력을 내게 넘겨줄지가 문제였다.

절대 안 주려고 할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

거대 비공정의 수리를 마쳤다.

하지만 아직 윌리엄과 시안 황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앨리슨은 어디 있지? 또 드워프 공방에 있나?'

거대 비공정 안에 새로 만든 드워프 공방.

이곳에선 기간트와 대포, 여러 장비를 수리할 수 있었다.

앨리슨은 요즘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고 싶다며 전장까지 따라와선 공방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공방으로 다가가자, 에테나와 앨리슨, 드워프들이 모여서 대화는 모습이 보였다.

'에테나까지? 다들 작당해서 뭘 만드는 것 같은데······.'

몸을 돌렸다.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앨리슨은 제국 남부에서 삼황자와 연합군들을 제압할 때, 드워프 대포에 무슨 영감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저렇게 뭔가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선미 갑판으로 다시 올라와 인형의 집을 열었다.

'짹, 잘 돼가고 있어?'

'네. 잘 진행 중입니다.'

내 분신인형인 짹은 지금 인형의 집에서 20명의 다크 엘프 꼭두각시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주로 침입과 은신, 그리고 암살까지 다양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병과가 다양한 것은 좋은 것이다.

암살단이 병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야 꼭두각시라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서밖에 쓰지 못하지만, 다크 엘프 꼭두각시들이 자동인형이 된다면, 그 활용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암살단의 이름은 짹과 그림자.

에테나는 이름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정작 짹은 상관없다고 해서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영주님, 비공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

고개를 돌리니 서쪽에서 지휘 비공정 한 척이 공군 본부가 아니라 내가 있는 기함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왔구나!'

윌리엄 총사령관과 시안 황자가 수도에서 돌아온 것이다.

일단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까?

175. 이미 끝난 협상.

175. 이미 끝난 협상.

윌리엄 총사령관과 시안 황자는 정확히 보름 만에 돌아왔다.

이야기가 잘 끝났다면 더 일찍 왔겠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난 내 선실에서 기다렸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머리가 살짝 복잡했다.

뭘 어떻게 해!

엿 먹으라고 병력을 물리면 되지.

아리칸 왕국의 병력도 함께 돌아갈 것이다.

마르틴 국왕과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다만 저들이 또 다른 조건을 내걸 수도 있었다.

똑똑.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윌리엄 사령관과 시안 황자가 들어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난 두 사람을 편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비공정에 식당도 있어 간단한 요깃거리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오. 괜찮소."

궁금한 건 많지만 서둘진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이미 결정이 내려진 상태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휴우! 황제 폐하께서 순순히 허락할 거로 생각하셨소?"

윌리엄 총사령관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잘 안됐나 보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윌리엄은 시안 황자를 쳐다봤다.

"시안 저하께서 말씀하시지요."

시안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께 허락을 받았으나, 조건부 허락이오."

"결국, 우리 약속은 깨졌군요."

"조금만 들어보시오. 어렵지 않은 조건이오. 황제께선 타일러 경의 영지만큼의 가디언 제국의 땅을 요구하셨소. 그러니까 제국을 땅을 내어 주는 대신 가디언 제국의 땅을 점령하면 되는 것이오. 그리고 지금 우리 제국군의 기세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고."

순간 머리가 복잡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시안 황자가 아니라 케인 황제가 계속 황제 자리에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앞에 두 사람이 제국의 실세는 맞지만, 제국의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내가 침묵하자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여기 황제 폐하께서 보증한 문서도 가지고 왔소. 이번엔 진짜요. 일단 카불 요새만 점령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가디언 제국군을 밀어내겠소. 그러니 타일러 경은 이번 전투만 도와주면 끝이오."

역시, 아베르크 제국도 그렇고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자신뿐이었다.

지금은 내가 힘이 있으니까, 저렇게 쩔쩔매고 있지만 내가 힘이 약해지거나 저들이 힘이 강해지면 공왕의 자리는 언제든지 사라질 자리라는 뜻이었다.

내 영지민들과 이계 난민들이 계속 편히 살려면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했다.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이.

그리고 그건 앞으로 3, 4년 후면, 완성될 것이고.

"일단 약속은 깨졌으니, 새로운 조건을 말하겠습니다."

"새로운 조건이요?"

두 사람은 내 입에 집중했다.

"일주일 안에 가디언 제국의 항복을 받아내겠습니다."

"뭐요?"

"저들의 항복을 받지 못한다면, 윌리엄 총사령관님의 뜻대로 카불 요새 점령전에 참여하지요."

시안 황자가 영문모를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디언의 항복을 받아봤자, 전쟁이 끝나는 것뿐이지 않소?"

"전후 복구 비용을 받아내지요."

"그거야 당연한 것이고."

"그리고 제가 가져갈 제국의 영지보다 훨씬 큰 땅을 받아내겠습니다."

"저들의 영토를 말이오?"

시안 황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들이 전투에서 패했다곤 하지만 마장기는 아직도 우리보다 더 많소. 땅까지 줘가면서 항복할 리가 있겠소?"

"그거야 제가 할 일이죠."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윌리엄 총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저들의 영토를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해도 문제는 병력이오. 가디언이 우리 아베르크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언제든 제정비를 해서 다시 공격한다면, 기껏 땅을 얻었더라도 금방 내줄 수 있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언 제국의 전력 30%를 가져오겠습니다. 비공정과 마장기를 포함해서요. 그럼 저들은 감히 새로운 아베르크의 땅을 노리지 못할 겁니다."

윌리엄 총사령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 뭔가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30%의 전력이 빠지면, 당장 아베르크 제국의 병력이 조금 더 우세했다.

거기에 전후 복구 비용까지 떠맡는다면, 가디언 제국은 당분간 아베르크를 따라오지 못할 테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다만······."

"······?"

"가디언 제국의 30% 전력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뭐요?"

윌리엄과 시안 황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그걸 용납할 리도 없겠지만, 가디언 제국의 전력을 왜 타일러 경이 가져간단 말이오? 우리 제국의 병사들이 희생됐고, 우리 제국의 병력이 저들과 싸우고 있소."

시안 황자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황자의 말에서 벌써 제국과 나를 편 가르기 하는 걸 느꼈다.

나도 아직 제국 소속인데······.

"약속을 깬 보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뭐요?"

"제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만약 저들의 영토를 점령했는데, 그때 가서 지금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른 조건을 내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엔 확실하오."

"전에도 그러셨습니다. 확실하다고."

시안 황자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도 자신이 곧 물려받을 제국의 땅을 빼앗기기 싫은 건가?

"우리 군의 피를 흘리지 않고, 가디언 제국의 항복을 받아낸다면 우리 모두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가져가야 저도 억울함이 좀 풀리겠지요."

난 말을 하면서 윌리엄을 쳐다봤다.

그가 이곳 전선의 결정권자였다.

제국의 영토를 주는 건 할 수 없었지만, 지금 내 조건을 받아들이는 건 온전히 윌리엄 총사령관의 재량이었다.

"만약 우리가 그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윌리엄 총사령관이 물었다.

"일단 제 병력을 물리는 거야 당연하고······. 그렇게 되면 어차피 지금 전선이 이대로 굳어질 겁니다. 하늘에서도 압도하지 못할 거고, 지상군 역시 불리한 상황에서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지요."

윌리엄 총사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 두 분께서 약속을 지키리라 믿고 있었거든요. 다만 우리 사이가 아주 험악해질 거라는 건 분명하겠지요."

"우리와 싸우겠다는 말이오?"

난 손을 흔들었다.

"제가 어떻게 거대한 제국과 싸움이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눈물을 머금고 이계 난민과 제 병력을 제국에서 완전히 철수시켜야겠죠. 그리고 나면 조금은 반항할지도 모릅니다."

난 말을 끝내고 두 사람을 노려봤다.

알아서 상상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제국을 어떻게 망가트릴 수 있을지를······.

당장 비대칭 전력이 둘이었다.

괴수를 부리는 나와 드워프 비공정.

그러니 하늘에선 도저히 내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의 어디든 가서 타격을 입히고 유유히 도망쳐도 아베르크 제국의 전력으론 날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병력이 더 많은 가디언 제국이 국경을 다시 넘을 것이고.

"하아! 외통수군."

윌리엄 사령관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타일러 경이 방금 내용으로 항복을 받아온다면, 받아들이겠소.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안드레아스! 그는 반드시 포로로 넘겨받아야 하오. 그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오."

"그건 쉽지 않은 조건이군요. 일단 저들을 최대한 압박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조건으로 윌리엄과 시안 황자와 협상했다.

사실 이미 끝난 협상이었다.

안드레아스 건만 해결되면, 가디언에서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셈이었고, 아베르크 제국엔 좋은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중재하는 척하며 양쪽에서 다 받아낸다.

결국, 난 공왕의 자리도 받아내고, 가디언 제국의 전력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완벽한 독립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세상에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

내 비공정 부대를 이끌고, 카불 요새 근처에 멈췄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물 생각이었다.

안드레아스가 루이스 황자를 잘 설득했다면, 이쪽으로 올 것이고, 아니라면 난 병력을 몰아 요새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안드레아스 원수가 올까요?"

에테나가 물었다.

"글쎄······."

왔으면 좋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루이스 황자가 강력하게 반대한다면, 또다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반대로 안드레아스가 잘 설득한다면,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사실 점점 대수림 장벽과 가까워지는 차원 균열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가 차원 균열이 대수림 장벽을 넘어 이 땅에 열릴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차원 균열은 다른 차원을 공격한 괴수들이 나오는 차원 균열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불길한 생각을 하면 왜 항상 이루어지는지······.'

그때마다 잘 대비했고, 위기를 잘 넘겼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 땅에 차원 균열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은 분명하고, 다른 차원들처럼 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장벽 너머 대륙은 제국과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서로 싸우기 바쁘니까.

그런 의미로 가디언 제국이 망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칸의 비공정이 거대 비공정 옆으로 붙었다.

그리고 마르틴 국왕이 내게 다가왔다.

"타일러 경, 잘될 것 같으신가?"

"글쎄요."

"잘 됐으면 좋겠군. 나야 큰 손해를 보겠지만."

"비공정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로 20척의 비공정을 챙겨놨습니다."

"오! 역시 타일러 후작이시오."

"그리고 비행석은 엘프 차원에 한 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뭐요? 거긴 괴수가 득실거린다고 들었소만?"

마르틴 국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랬지요. 일단 정찰부터 할 겁니다."

전에도 괴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동면에 든 것처럼 일제히 한 방향을 쳐다보며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벌써 상당한 기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다시 동면에 들었는지도 몰랐기에 한번 가볼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진 비행석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초거대 비공정과 25미터짜리 거대 기간트를 만드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비행석이 필요했다.

특히 비공정은 점점 더 튼튼해지고, 더 거대해 졌기에 완성만 된다면, 이제 대륙에선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이 되는 셈이다.

거기에 알리사가 준비하고 있는 거신 마법병단이 탄다면 하늘 위에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 금상첨화였고.

"엘프 차원에 갈 때 우리도 함께 가겠소."

"빈손으로 올지도 모릅니다."

"양손 가득 비행석을 챙겨올 수도 있지 않소."

"하하! 그럼 함께 가는 것으로 하지요."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단이 함께 가준다면야 든든하지.

***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지만, 안드레아스는 오지 않았다.

아베르크의 지상군은 국경에 집결했고, 내 후미로 아베르크의 공군 비공정도 합류했다.

다들 내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카불 요새를 공격하는 총지휘관이었으니까.

에테나가 살짝 내 눈치를 봤다.

"벌써 정오가 지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안드레아스 원수의 비공정이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 황자가 허락하지 않았어도 그는 전장으로 돌아올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오지 않아도 조금만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한쪽으론 요새를 어떻게 제압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저들의 비공정을 제압하고, 후미에서 요새를 향해 대포를 쏘는 게 효과적이겠어.'

나이트급 이상의 기간트나 마장기는 대포에 맞아도 심한 손상을 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포탄이 떨어지고 요새가 부서진다면, 기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보급 창고나 병참 기지를 찾아 타격하면 그것도 효과가 좋았고.

우리 피해도 생기겠지만, 승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휘 비공정에서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슬쩍 후미 상공을 쳐다봤다.

되게 보채네!

윌리엄은 내가 공격하는 것을 원할 것이다.

그래야 가디언 제국의 힘도 줄이고, 내 힘이 늘어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도 어떻게 보면 안드레아스처럼 제국을 위해 사는 사람일 지도.

"어? 저기 보십시오. 가디언의 비공정이 이쪽으로 옵니다."

에테나의 말에 전방을 쳐다봤다.

가디언의 소형 비공정 한 척이 요새에 들리지도 않고, 곧장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한때 날 위기로 몰아넣은 그였지만, 저렇게 홀로 날아오자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늙은 노장이 죽으러 오는군······.'

176. 타일러 대공.

176. 타일러 대공.

이번엔 직접 안드레아스를 맞이하기 위해 거대 비공정 후미에 있는 착륙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안드레아스 경."

"휴! 다행히 시간에 맞춰왔소."

비공정에서 내린 안드레아스는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마치 지난 보름 동안 한 끼도 안 먹은 사람처럼.

"들어갑시다."

안으로 들어간 그에게 차를 대접했다.

안드레아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기다려주어 고맙소."

"기다리는 게 뭐가 어렵겠소. 설득하는 게 어려운 거지. 그리고 난 약속을 지켰을 뿐이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이오. 나부터도 그렇고."

말을 하는 안드레아스의 얼굴 살은 많이 빠졌는데, 왠지 표정은 편해 보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 저럴까?

"그래, 루이스 황자의 허락은 받으셨소?"

"내가 경에게 말한 것들은 전부 허락하셨소. 우리가 이기지 못한 이유가 타일러 경이란 소리에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짓기도 하셨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소."

"그런데 루이스 황자가 안드레아스 경을 그냥 순순히 보내주다니 그건 좀 의외인데?"

안드레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사실 내가 포로로 가는 건 말하지 않았소."

"뭐요?"

"그걸 말했다간 날 보내지 않으실 게 뻔한데, 어떻게 말하겠소. 그냥 내 발로 투항한 것으로 해주시오. 그럼 덜 속상하시겠지."

"투항이라······."

"어차피 포로로 가나, 투항해서 가나 다시 가디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가 아니요. 윌리엄 원수가 날 살려 둘 것 같지도 않고."

그는 이미 자기 죽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루이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군주된 자가 자기 부하를 적국의 포로로 보내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지금처럼 투항이라면 루이스의 자존심을 조금은 지켜줄 수 있었다. 물론 루이스나 부하들은 모두 사실을 알겠지만.

"알겠소. 투항으로 말해두겠소."

안드레아스가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 마셨다.

"차향이 아주 좋소. 내 나이면 이런 차나 마시며 소 일거리나 해야 하는데 전장이라니······."

안드레아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동안 너무 힘들었소."

난 왠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가끔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벌여놓은 일이 태산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 나도 유유자적한 영주 생활은 당분간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안드레아스도 더는 그런 고민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아베르크 제국과 항복 협상은 누가 할 것이오?"

"라몬 후작과 세르게이 대장이 맡게 될 거요."

"라몬 후작이라면 큰 손해는 보지 않겠군."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소."

"안드레아스 경의 얼굴이 반쪽이 된 거 보면, 루이스 황자에게 뭔가 남긴 것이 아니오? 예를 들어 앞으로 제국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계획 말이오."

안드레아스가 피식 웃었다.

"남기긴 했소. 절대 타일러 경의 적이 되지 말라고 말이오."

나도 피식 웃었다.

왠지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언제 우리 쪽 이데아 제국 발굴지에 한 번 찾아가 보시오."

"······?"

"누가 발굴지 입구 기지와 지키는 병력을 초토화해서 발굴 작업은 중지됐소."

살짝 뜨끔했다.

내가 다 박살 냈거든.

"그런데 거긴 왜?"

"발굴지 중간쯤에 신전 같은 것을 발견했소. 우리 마도 공학자들은 도저히 뭔지 모르겠다고 하더이다."

"신전?"

"지하로 이어진 길을 발견했는데, 계속 따라가다 보니 거대한 신전 입구 같은 장소가 나오지 뭐요. 그런데 문에 무슨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지 기간트로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소. 경이라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걸 왜 내게 말해주는 것이오?"

"어차피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고, 거신들이 그렇게 깊숙이 신전을 지은 것을 보면 뭔가 안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지 않겠소?"

"그러니까 그걸 왜 내게?"

"일종의 뇌물이오."

"뇌물?"

"좋은 보물이라도 나오면, 우리 가디언 제국과 루이스 저하를 잘 봐달라는 뇌물이오."

"허!"

안드레아스는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줄 알았더니, 마지막까지 루이스와 가디언 제국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정말 좋은 보물이라도 발견한다면, 그냥 내가 아주 잘 써주지.

"한번 가보긴 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나도 들어갈 수 있을진 모르니까."

거신 마법사인 알리사에게 물어봐야겠다.

안드레아스가 차를 마시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허황된 꿈을 꾸었나 보오. 아베르크 제국을 점령하고 대륙을 장악하는 꿈을 꾸다니."

안드레아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다니······."

"전쟁을 누가 막겠소. 인간이 있는 이상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요. 차라리 내가 가진 것, 내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힘쓰는 것이 낫지."

"하하! 타일러 경의 말이 맞소."

안드레아스가 크게 웃더니 날 쳐다봤다.

"경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소만?"

"?"

"대륙 정복 말이오."

"에이! 옆에서 헛바람 넣지 마시오."

난 손을 휘휘 저었다.

"차 잘 마셨소. 타일러 대공 저하."

"뭐요?"

"이제 공국의 왕이 아니시오. 그러니 대공으로 불러야지."

"듣기는 좋군."

안드레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공 저하, 그만 갑시다."

"그럽시다."

안드레아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제 아베르크 제국에 투항하러 가는 것이다.

난 전진했던 병력을 뒤로 물렸고, 안드레아스를 윌리엄 총사령관에게 인계했다.

그렇게 가디언 제일의 노장은 내 손을 떠났다.

***

항복 협상은 생각보단 빠르게 진행됐다.

물론 난 그 자리에 참석하진 않았다.

아베르크는 하나라도 더 빼앗으려 하고, 가디언은 하나라도 더 주지 않으려는 싸움이었다.

아베르크와 가디언은 자신들의 정보를 이용해 서로의 전력을 알아보았고, 실사 같은 작업도 병행했다.

그렇게 약 500기의 마장기와 중형 비공정 15척, 소형 비공정 20척을 인계받았다.

룩급 마장기와 비숍급 마장기도 제법 많았기에 오리지널 마장기는 넘겨받지 않았다.

이것이 가디언 제국의 전력의 30%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베르크 제국 협상단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100개의 강습 마장기가 생겼다.

이제 당분간 기간트 생산은 필요 없었다.

마장기의 마석 배터리 부분만 개조해서 쓰면 충분하니까.

그럼 남은 괴수 부산물은 오로지 초거대 비공정과 오리지널 기간트 생산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

[아베르크 제국 수도 에르가드]

수도 외곽에 내가 탄 거대 비공정이 멈춰 섰다.

마르틴 국왕이 찾아왔다.

"타일러 후작, 아! 아니지. 타일러 대공, 그럼 우린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전승절 기념일이 내일입니다. 참석하시고 가시죠."

"내가 있으면 케인 황제가 얼마나 불편하겠소.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오."

"제가 있으니 제 뒤에 숨을 겁니다."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튼, 우리 기사들도 집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소. 타일러 경이 오기 전까지 휴식을 줄 생각이오."

"하긴 이번에 다시 대수림으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그게 좋겠네요."

사람이 매일 싸울 순 없으니까.

쉴 땐 쉬어야지.

"비공정은 잘 쓰겠소.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오."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고생하시오."

아리칸의 병력이 내게 올 땐 중형 비공정 20척이었지만, 돌아갈 때, 중형 비공정이 40척이 되어 돌아갔다.

그리고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 공방도 내가 곧 아리칸으로 옮겨줄 테니, 그들은 나와 함께 해서 많은 것을 얻어 갔다.

그래서 다시 수인족 차원으로 넘어갈 때,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단은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전승절 기념일]

아베르크 제국이 가디언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가디언 제국의 서부 일대와 18개의 도시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지난 300년 역사 동안 역대 황제 중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케인 오르도 황제가 해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고.

그리고 황제가 직접 참가하는 논공행상과 대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랬기에 아침부터 헬가우스 호가 부산했다.

"조금 어색하긴 하네요."

어깨가 훤히 드러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에테나가 자꾸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오늘만 참아."

"네······."

"근데 나는 왜 드레스를 입으라는 거야?"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마르실 족장이 미간을 좁혔다.

"넌 내 경호야. 옆에 딱 붙어 있어."

"칫! 지가 젤 강하면서."

마지막으로 앨리슨이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 잘 어울리는데!"

"아이참! 어색해 죽겠어요."

"아니야. 키가 커서 그런지,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려."

"그럼 다행이고."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

"삼촌부터 먼저 가시죠. 이제 서른이 되신 건 아시죠?"

"어? 기념일에 늦겠다. 어서 가자."

난 먼저 비공정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 미녀도 함께 비공정에 타고 황궁 외성에 마련된 기념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있었다.

황제와 황실에서 이혼녀인 6황녀와 이제 14살인 11황녀까지 동원해 나와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를 찰스 그레빌 전 정보국장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귀족 가문에서 미인계를 써서 나와 혼담을 추진하려고 수작을 부릴 것이다.

그게 귀찮아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에테나는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엘프계 최고의 미녀로 거듭났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고, 마르실은 섹시하고 농염한 매력이 풍기는 미녀 엘프였다.

그리고 앨리슨은 나이도 어리고, 젊고 귀여운 미녀를 담당했다.

이름하여 미녀 군단.

이렇게 세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웬만한 여자는 오징어가 되기 때문에 감히 옆으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잘생김 때문에 날파리가 꼬이는 것도 방지하고.

"세상에!"

"오! 타일러 후작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무슨 소리야. 이미 제국을 구했잖아!"

"아! 그런가? 아무튼, 너무 부럽다······."

나와 세 미녀가 지날 때마다 주변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래서 옛날 판타지 소설에서 하렘물이 인기가 있었나 보다.

왠지 함께 걷는 내 어깨도 올라가는 것 같고.

난 윌리엄 사령관과 시안 황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하고, 황제가 나오길 기다렸다.

우리 셋이 모이자, 주변엔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다.

차세대 제국의 실세들이 모인 것이니까.

물론 차세대라고 하기엔 윌리엄 사령관의 나이가 좀 많긴 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 납시오!"

케인 오르도가 자신의 딸인 6황녀의 부축을 받고 걸어 나왔다.

논공행상과 연회를 겸하는 자리라, 그 역시 화려한 복장과 평소에 너무 무거워 잘 쓰지 않던 황제관까지 쓰고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논공행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먼저 윌리엄 총사령관의 활약상을 법무관이 십분 넘게 떠들었고.

"윌리엄 호세스 원수를 육해공군 통합 사령관에 임명하고, 공작의 작위를 내린다."

마지막에 황제가 치하했다.

"와아아아!"

사방에서 박수 세례가 터졌다.

내가 일등공신 어쩌고 하더니, 상은 높은 사람부터 받았다.

두 번째 역시나 공을 먼저 한참을 떠들고.

"시안 오르도를 동부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새로 영입된 동부 영토의 국왕으로 임명한다."

"와아아아!"

왕이라······.

황태자가 아니라 시안에게 왕이란 자리를 주었다.

그건 자신의 후계자가 시안 오르도란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계속 황제를 해 먹겠다는 소리였고.

"타일러 빈스 후작은 앞으로 나오시오."

척척척!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법무관이 내 공을 먼저 나열했다.

그런데 달랑 1분 만에 끝났다.

요약하면 그냥 공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내가 한 일이 훨씬 더 많은데, 뭔가 많이 빠진 것 같다.

뭐, 상관은 없었다.

난 받을 것만 받으면 되니까.

"타일러 빈스 후작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 록체스터 대영지와 북서부 6개 영지를 하사한다."

황제가 대공을 상징하는 반지를 내 손에 직접 끼워주었고, 공식 문서를 건네주었다.

짝짝짝짝!

"와아아아!"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고, 함성이 가장 컸다.

내가 대공이라니······.

기분이 살짝 묘했다.

177. 이렇게 또 앞서가는군.

177. 이렇게 또 앞서가는군.

아쉽게도 헬다임 장벽 사령관 자리는 물 건너갔다.

그 자리는 시안 오르도가 황제에 앉으면 주기로 했기에 시간이 더 걸렸다.

대신 장벽 사령관 자리는 윌리엄 총사령관의 작전 참모였던 커널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며, 부임했다.

나와는 카야킨 전진 기지 사령관 시절부터 함께 했고 꽤 친분이 있었기에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찰스 그레빌 전 정보국장은 추밀원장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아베르크 제국의 주요 자리는 모두 시안 황자의 측근으로 꽉 채워졌다.

그 이후로도 계속 지루한 논공행상이 이어졌다.

각 군과 군단장들에게도 작위가 내려졌고, 동부와 남부에 영지를 하사했다.

그리고.

"개리 해링턴 빈스 백작에게 후작의 작위를 내리고, 향후 5년간 바이마르 대영지의 관리를 맡긴다."

개리 백작의 몸이 좋지 않았기에 블리언 남작이 대신 참석해 받았다.

기한을 5년으로 제안한 것이 좀 찝찝하긴 했지만, 일단은 블리언이 대영지의 관리를 맡았기에 내 세력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3시간가량 이어진 논공행상 자리가 끝나고, 대연회가 시작됐다.

황실과 귀족, 군부까지 높은 사람은 전부 모이는 자리였기에 그 인파가 천여 명에 달했다.

황제가 퇴장하기 전에 자신의 딸과 내게 다가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타일러 공작, 이쪽은 내 딸인 아리엘 오르도네.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거야. 또 아나? 그대가 내 사위가 될지도 모르지."

"······?"

"난 먼저 들어가 보겠네. 연회는 젊은 사람들이 즐겨야지."

"들어가십시오."

케인 황제는 무거운 왕관을 벗고, 호위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을 떠났다.

우린 황제가 연회장을 나갈 때까지 지켜봐야 했다.

황제가 나가자, 아리엘 오르도에게 가슴에 주먹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아리엘 황녀 저하를 뵈옵니다."

"이제 대공이시니, 황제 폐하와 시안 전하께만 예를 취하시면 됩니다. 그 외에 황족은 가벼운 묵례면 충분하지요."

"아! 그렇군요."

"그리고 황제 폐하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이혼한 딸이 보기 싫어서 그냥 여기저기 찔러보는 거니까요."

난 이미 그녀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부의 대귀족이자, 기간트 생산 공방이 있는 로드니 공작 가문에 시집을 갔다.

켈링턴 로드니 공작의 장남이자, 장차 로드니 대영지를 이어받을 카엘 로드니 백작이 그의 남편이었다.

그런데 카엘 백작에겐 크나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남자 애인들이 많았고, 아리엘 황녀는 뜻하지 않은 생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이혼한 이유는 카엘 백작이 말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가 됐기 때문이었다.

대를 잇지 못하는 후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차남이 후계자로 올라섰고, 카엘은 뒷방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가 대를 잇지 못하면 황녀가 로드니 가문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황태자 주도로 그녀는 이혼하게 되었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조용히 살고 있었다.

"대공 저하의 주변엔 미인들이 많네요. 영웅은 자고로 많은 미인을 거느린다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아리엘 황녀는 나를 따라온 미녀 군단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녀도 미인이긴 했지만, 엘프와 견줄 순 없었다.

나도 그냥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여자들을 조심하세요. 어떻게든 타일러 저하와 혼담을 성사시키려고 안달이니까."

"충고 고맙습니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주변 여자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시간 되세요."

아리엘 6황녀는 내게 묵례를 하곤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주변의 여자들이 하나둘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난 재빨리 미녀 군단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여자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지금 다가오면 확 비교가 될 테니까.

"타일러 대공 저하. 경하드립니다."

"오셨습니까. 찰스 추밀원장."

찰스 그레빌 추밀원장이 말끔한 검정 연회복 차림으로 다가왔다.

찰스 그레빌은 정보국장에서 잘리더니, 보리스 추밀원장이 목이 잘리고 그 후임으로 임명됐다.

시안 황자가 후계자에 오르고, 윌리엄 원수가 득세하니, 가까운 사람을 앉힌 것이지만, 여전히 나와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전엔 아무 자리도 아니었다면, 이젠 황제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도 말을 높였다.

"정보국장 자리엔 누굴 앉히실 겁니까?"

"글쎄요. 마땅한 인물이 없어 고민입니다. 웬만큼 쓸모 있는 자들은 이번에 다 휩쓸려 갔으니까요."

황태자와 전 추밀원장을 따르던 세력이 많았기에 인재의 공백기가 생긴 것이었다.

"개인적으론 다니엘 소장을 추천합니다."

"나쁘진 않군요. 시안 황자님 라인이니 임명에 무리도 없을 거고. 대공께서 따로 추천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엘프 차원 원정 때 보니까. 머리도 좋고, 나름 공정한 사람인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왕이면 함께 전장에서 구르던 사이가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습니다."

찰스 추밀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날 암살하려는 계획은 없습니까?"

"네?"

찰스 추밀원장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가진단 말입니까."

"누군가에겐 입안의 가시가 된 것 같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타일러 대공을 상대로 대 놓고 일을 벌일 사람은 없습니다."

"숨어선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사람 속마음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만 제가 주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차라리 옷을 벗고 말지."

피식 웃어줬다.

찰스 추밀원장은 정보국장 시절부터 한쪽 라인에 살짝 걸치긴 했어도 완전히 넘어가진 않았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거래는 유효합니다.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가져오세요. 저도 그에 맞는 정보를 드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장벽 가까운 차원 균열에 들어가 보셨더군요."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정보가 너무 부족하군요."

난 고개를 흔들었다.

찰스 추밀원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휴! 대수림에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도움을 좀 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내가 얻는 게 있어야 정보를 드리지요."

"그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만 살짝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요. 아베르크 제국에 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어디 공으로 먹으려고.

"조만간 고급 정보가 생기면 찾아뵙겠습니다."

"날 찾으려면 대수림으로 와야 할 겁니다. 조금 전에 말한 차원 균열 안에 있을 테니까요."

"험한 길이 되겠군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말했다.

"혹시 말입니다. 차원 균열 같은 것이 제국 내에 생겼단 보고는 듣지 못했습니까?"

"제국 내에 차원 균열이요?"

찰스 추밀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국 전역을 잘 살피는 게 좋을 겁니다."

"장벽 너머 제국에 차원 균열이 생긴다는 말입니까?"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차원 균열에선 이계 난민은 나오지만, 괴수들은 나오지 않았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차원 균열에서 괴수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휘 비공정같이 속도가 빠른 비공정도 있으니, 제국을 순찰하기 좋지 않습니까."

찰스 추밀원장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타일러 대공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뭔가 위험의 조짐이 보이신 것 아닙니까?"

"노파심인진 모르겠는데, 아주 좋지 않은 예감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지금까지 거의 맞았습니다."

"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정보국에 별도의 감시 기구를 만들고 순찰을 강화하겠습니다."

"이야기가 통해서 다행입니다."

내 영지를 순찰하는 일이야 시키면 되지만, 제국 전역을 순찰할 순 없는 일이다.

마르틴 국왕에게도 아리칸 왕국을 자주 살피라고 말해 놓은 상태였다.

찰스 추밀원장이 자리를 옮기자, 갑자기 군단장들과 귀족들이 우르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도.

미녀 군단도 소용없었다.

***

연회를 도망치듯 나오고, 거대 비공정으로 향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제 11살밖에 안 된 딸을 데리고 와서 주겠다는 미친놈이었다.

연회장이 아니었다면 주먹을 날려줬을 거다.

비공정에 내리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타일러 대공 저하!"

"경하드립니다. 대공 저하!"

펠릭스 단장과 50명의 기사가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벌써 소식이 전해졌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블리언 빈스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타일러 대공 저하!"

"블리언, 잘 해주었네."

"아닙니다. 대공 저하께서 시킨 대로 기간트 공방과 영주성, 각 대도시에 기간트 병력을 파견하고, 테레니스 병사들을 풀어 영지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 가문의 귀족들과 기사들, 이번에 반란군에 가담한 영주들까지 모두 포박해 수도로 압송했습니다."

"대영지를 장악하는데 저항은 없었나?"

"네. 펠릭스 단장께서 야간에 기습해서 손쉽게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격납고에서 기간트 60기와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 1기를 확보했습니다."

"그래?"

난 블리언 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지금 타는 기간트 기종이 뭐지?"

"룩급 기간트입니다."

"오! 꽤 노력했군. 어때?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에 탈 수 있겠나?"

블리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아. 비숍급 오리지널 기간트는 블리언 남작에게 주지. 그리고 기간트 50기를 추가로 줄 테니, 테레니스 영지의 기사들을 추가하게. 그럼 그곳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충! 감사합니다."

블리언이 내게 경례를 했다.

"그리고 당분간 간 보려고 황실이나 추밀원, 지방 영주들까지 여기저기서 바이마르 대영지를 많이 방문할 거야. 얕잡아 보이다간 그대로 빼앗길 거야. 그러니 확실히 점거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혹시나 황실에서 누가 오면, 내 이름과 가문의 이름을 팔아! 당분간은 먹힐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비공정 20척은 놓고 갈 테니까. 영지를 자주 순찰하고, 테레니스 영지와 잘 연계하게. 다시 말하지만, 난 부하는 필요 없어. 세력이 필요하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영지를 안정시키고 반드시 지켜보시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비공정과 기간트는 넘쳐난다.

하지만 기간트에 태울 기사가 부족하니, 비공정과 기간트가 남아돈다.

그러니 일단 이쪽에 조금 밀어주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보처럼 떠먹여 줘도 지키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라!"

"네. 알겠습니다. 타일러 대공 저하!"

대공 저하라······.

계속 들으니까 뭐, 나쁘진 않네.

난 하얀 악마 기사단과 이제 공국이 된 내 영지로 향했다.

***

[발레리온 공국]

도시 크기는 록체스터 대영지보다 작지만, 이곳에 기간트 공방이 있었기에 공국의 수도는 발레리온이었다.

그리고 비공정이 많았기에 영지를 오가는 것에 제약은 없었다.

과거라면 기차를 타도 열흘은 걸리는 넓은 영지가 내 것이 되었고, 난 대공의 작위를 받았다.

물론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발판은 마련한 셈이었다.

"삼촌! 빨리 와봐요!"

이른 아침부터 앨리슨과 에테나에게 납치당했다.

기간트 공방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하하하! 타일러 저하! 드디어 마석 무전기를 만들었습니다."

케네스 영감이 자신 있게 말했다.

"오! 힘들 것 같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하더니······."

"솔직히 말하면 앨리슨이 도와줬습니다."

"아!"

난 앨리슨을 쳐다보았다.

역시 천재는 곁에 둬야 하는 법이다.

"앨리슨, 잘했다!"

"에이, 할아버지가 다 만들어 놓은 거에 살짝 소스만 뿌린 거예요."

착한 녀석!

"근데 크기가 좀?"

"크지요."

큰 정도가 아니었다.

높이가 2미터짜리 책장과 비슷했다.

"가능성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초기 모델이라 그렇습니다. 최대한으로 줄이면 절반 정도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큰데?"

"이건 장거리용입니다. 최대 10km까지 가능한 모델이고, 개량하고 마법진을 축소하면, 배낭 크기 정도까진 줄일 순 있을 겁니다. 대신 성능은 2, 3km가 최대일 겁니다."

"배낭 크기라······."

무전기가 한 종류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큰 무전기는 비공정에 장착하고, 작은 무전기는 기간트에 장착하면 되겠네."

앨리슨이 말했다.

"그리고 기간트는 마석 안테나를 머리에 달고, 양쪽 허리에 증폭과 송수신 장치를 연결하면 내부에 장착할 필요가 없지요."

"그럼 아무 기간트나 다 장착할 수 있는 거네."

"네, 규격으로 맞춰서 생산하면 당장 모든 기간트나 마장기에 장착할 수도 있고, 고유 마나 주파수를 맞추는 기능이 있어서 부대원들만 따로 통신도 가능합니다."

"오오! 딱 내가 찾던 그 무전기네."

기간트 통신 문제도 해결됐다.

그동안은 기간트에 증폭 마법진이 달려 있긴 했지만, 전장같이 주변이 소란스러운 곳에선 명령을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비공정끼리 깃발이나 거울, 램프를 이용했기에 한 번 명령을 내리면, 다시 번복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마석 무전기가 완성되면 실시간 명령이 가능하다!

'훗! 이렇게 또 앞서가는군.'

케네스 영감이 말했다.

"대수림에선 테스트를 해봐야겠지만, 거리가 확 줄어들 겁니다. 워낙 마나 간섭이 많은 곳이라······."

"그건 내가 테스트해보지."

그때 앨리슨이 웃으며 말했다.

"삼촌! 이제 내가 만든 걸 보러 가요."

"너도 뭘 만들었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해줬다.

"아주 삼촌 마음에 꼭 들 거야!"

천재, 아니 앨리슨이 만든 거라면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178. 마나 대포.

178. 마나 대포.

앨리슨은 나를 공방이 아닌 밖으로 데려갔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고, 크고 기다란 대포와 드워프 포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대포에 뭔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한 눈으로 봐도 엄청나게 무거워 보였다.

"이게 뭐야? 큰 대포네?"

난 또 무슨 대단한 걸 만들었나 싶었다.

"앨리슨, 이게 내가 마음에 꼭 들 그거야?"

앨리슨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니까. 한번 쏴보면 다를걸."

드워프 포병대장인 하버 족장이 다가왔다.

"타일러여! 앨리슨은 천재가 분명하다!"

"응? 왜?"

"크고 강한 대포를 만들었으니까!"

난 영문모를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 포병대! 시작하자!"

"가자!"

드워프 넷이 마석 배터리 2개를 들고 왔다.

그러더니 마석 배터리를 대포 양쪽에 장착했다.

착! 치이익!

화약 대포와 마석 배터리?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포탄 탑재!"

"포탄 탑재!"

드워프 하나가 대포의 후미 뚜껑을 열었다.

'어? 뒤에 다 포탄을 넣는 방식이야?'

왠지 전생에 현대식 대포를 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드워프 둘이 커다란 포탄을 들고 왔는데, 그 모양이 꼭 현대 포탄 같았다.

포탄을 넣고 후미 뚜껑을 닫았다.

"에테나 언니!"

에테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대포 중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대포 후미로 와서 다시 손을 올렸다.

딱 보니 마나를 주입하는 거 같은데······.

아! 대포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나 보다.

"발사 준비 끝!"

"이제 타일러 삼촌이 여기 발사 장치를 당겨!"

"그럼 펑! 나가는 거야?"

"응!"

앨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후미 오른쪽에 있는 발사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철컹!

팟! 우우우웅!

퍼어어엉!

굉음과 함께 포탄이 쏘아지고, 거대한 포신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뒤로 밀린 포신은 다시 앞으로 당겨졌다.

기름을 칠했나?

포신이 너무 부드럽게 움직여 살짝 놀랐다.

"자! 망원경으로 저기 산을 바라봐!"

망원경으로 앨리슨이 가리킨 민둥산을 보았다.

콰아아앙! 화아아아!

폭음과 함께 민둥산에 화염과 먼지가 치솟았다.

"오! 대단한데! 앨리슨,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돼?"

"2km 정도야. 포신을 올리면 더 멀리 나가."

지금도 드워프 대포보다 최소 4배 이상 멀리 날아간 것이었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어렵지 않았어. 포신 내부에 마찰력을 줄여주는 마법진을 설치했고, 발사 장치엔 4개의 압축 마법진과 뚜껑엔 충격 완화 마법진을 그러넣었지."

"그러니까 내가 점화를 하면 내부에서 화약이 폭발하고 압축해서 마찰력을 줄인 포신을 통과해 날아간 거네."

"그치! 아주 쉽지. 그리고 포신은 괴수 부산물로 만들어 내구성을 높였지. 포신 아래쪽엔 완충장치와 복원 장치도 만들었고."

이게 어렵지 않다고?

천재는 사고방식이 다른가 보다.

복잡한 대포를 마법진과 드워프의 기술을 합쳐 만든 것이었다.

"그럼 마나 대포로군! 마석 배터리는 얼마나 쓸 수 있어?"

"마석 배터리 2개면 한 300발쯤 쏠 수 있어. 마나를 다루는 사수 한 명이 꼭 필요하고."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방금 터진 포탄은 어떻게 된 거야? 화약을 넣은 거야?"

이번엔 드워프 하버가 말했다.

"타일러여! 화약과 점화장치를 넣었다! 앞부분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점화되고 후미에 있는 화약이 폭발하는 거지."

"위력은?"

"아직 개발 중이라 위력이 그렇게 크진 않다. 기간트는 전면으로 맞을 때만 충격을 줄 수 있고."

"그럼 기간트를 없애는 무기는 아니네?"

앨리슨이 대답했다.

"응! 이건 포탄이 터지며 파편과 화염으로 주변에 있는 작은 괴수를 죽이는 용도야. 에테나 언니가 그러던데? 작은 괴수가 엄청나게 많을 때, 숫자를 줄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뭐?"

난 에테나를 쳐다보았다.

에테나가 말했다.

"전에 우리 차원을 멸망시킨 괴수를 보며 큰 괴수야 기간트가 상대하면 된다지만, 작은 괴수가 너무 많다고 고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작은 괴수의 숫자를 줄일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영주님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말했더니, 앨리슨과 드워프들이 새로운 대포를 함께 만든 겁니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네. 잘했어. 원거리 무기야 있으면 좋지. 그런데 이 큰 대포를 어떻게 들고 다니면서 쏘려고? 기간트가 이 대포에 매달리기엔 효율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냥 검으로 잡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그래서 저도 생각해 봤는데요. 전에 거대 병정개미를 몇 마리 길들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이용해 끌고 다니거나 병정개미 위에 장착해 다닐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래, 병정개미가 있었지."

크기도 크지만, 힘도 좋아서 전투 중 부서진 기간트를 옮기는 데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말처럼 병정개미 위에 마나 대포를 장착하면 인형의 집에 넣고 빼기도 간단하고, 별도로 보관할 장소도 필요 없었다.

난 바로 병정개미(lv.7) 꼭두각시를 하나 꺼냈다.

"하버 족장! 여기 위에 이 대포를 올릴 수 있겠어?"

"타일러여! 가능하다. 그리고 드워프와 사수가 함께 탈 수 있게 넓은 공간도 만들 수 있다."

"좋아! 나도 도와주지. 그리고 이 대포를 최대한 빨리 5개만 더 만들어 주게."

"알았다! 타일러여!"

"포탄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주고."

마나 대포는 다수의 소형 괴수를 상대할 때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리고 잘하면 거대 비공정에도 탑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포탄의 화력이었다.

기껏해야 포탄 바로 근처에 있는 소형 괴수 2, 3마리를 없앨 수준이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포탄의 화력을 높일 순 없을까?'

폭발력이 지금의 2배만 더 커져도 더 많은 괴수를 죽일 수 있을 텐데······.

이곳 차원에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 혹시? 거신들에게도 폭발력이 강한 물질이 있지 않을까?'

암 드로운과 알리사 엘가가 썼던 빙결의 오브가 떠올랐다.

그 얼음 폭탄의 위력은 엄청났다.

혹시나 화염의 오브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수인족 차원으로 가면 알리사에게 물어봐야겠다.

"앨리슨, 고맙다. 이 대포는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

"헤헤! 앞으로 더 필요한 거 있음, 말해요. 내가 다 만들어 줄게."

"그래 너만 믿으마."

앨리슨이 있으니, 왠지 말만 하면 바로바로 어떤 것이든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또 하나의 괴수 퇴치용 신무기가 개발되었다.

***

[영주관 알현실]

오늘 이곳에 발레리온 영지의 중요한 인재들이 다 모였다.

"프레디 존슨, 앞으로."

에테나가 호명하자, 프레디가 걸어 나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프레디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리고, 내무대신으로 임명한다."

내가 다가가 작위 반지와 함께 휘장을 달아주었다.

"앞으로 발레리온 공국의 내정을 잘 부탁하네."

"충! 감사합니다. 대공 저하."

프레디의 첫인상이 떠올랐다.

붉게 충혈된 두 눈과 책상 위엔 빈 술병과 잔이 있었고, 재떨이엔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땐 내 하늘 같은 상관이었지만, 이젠 발레리온의 내무대신이다.

다음으로 클린드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곳이 아니었다면, 추밀원의 정보국장이 됐을 인물이었다. 역시 과거엔 내 상관이었고.

"클린드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리고, 외교와 외부 정보를 담당할 외무대신으로 임명한다."

"충! 감사합니다. 대공 저하!"

"앞으로 두 제국의 정보를 많이 수집해야 할 거네."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작이 주는 작위와 대공이 주는 작위는 그 권위나 상징성이 다르다.

그래서 작위를 다시 주고 임무도 제대로 배정했다.

"펠릭스는 근위 기사단장으로 임명하고, 공국 수비를 맡는다."

"충! 감사합니다. 대공 저하."

도슨 남작은 법무대신에 임명했고, 케네스 영감은 기간트 공방장에 앨리슨은 기술 위원장이란 자리를 만들어 임명했다.

쿠훌린은 오크 해병대장에 임명했고, 서리 족장인 호빌테는 오크 강습부대와 돌격부대를 맡겼다.

공군은 마르실과 엘프들에게 맡겼고, 드워프는 기간트와 비공정 등을 생산하는 부서와 건축부, 포병대로 셋으로 나누었고, 글러드 왕자와 호르갈, 하버 족장을 각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발루아의 영주였던 오웬 베르가니 백작은 아베르크 제국과 인접한 록체스터 대영지의 관리와 국경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영웅 기사들과 트라스의 개 기사단은 마르틴 국왕의 크루세이더 기사단처럼 나와 함께 다니며 공국을 수호하고, 대수림과 외부 활동을 주로 하는 기사단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겐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를 지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암 드로운을 거신 기사단장으로 임명했고, 알리스 엘가를 거신 마법병단장에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에테나는 내 부관으로 임명했다.

발레리온은 이젠 작은 영지가 아니라 공국이었기에 확실한 체계가 필요했기에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구멍가게가 대형마트로 진화한 셈이었다.

공국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록체스터 대영지의 기간트 공방을 분해해서 거대 비공정을 이용해 아리칸 왕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워낙 규모가 커 여러 번 왕복해야 했기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앨리슨과 드워프들의 도움으로 마나 대포 6기를 거대 병정개미의 등에 탑재할 수 있었다.

한 달 후.

우린 10척의 드워프 비공정을 이끌고 아리칸 왕국의 크루세이더 기사단과 합류해 수인족 차원으로 향했다.

***

[수인족 차원]

차원 균열을 통과하자마자, 암 드로운에게 병렬 사고 스킬을 사용했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암 드로운(lv.7) 분신인형과 의식을 연결합니다.]

순식간에 공유된 암 드로운의 의식!

그런데!

주변에 화염이 번쩍였다.

그리고 암 드로운이 달리고 있었다.

'암 드로운 무슨 일이야?'

암 드로운이 내게 의식을 전해왔다.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이 공격해 왔다고?'

그것도 벌써 다섯 번째라고 했다.

대체 왜?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수인들이 자신들의 노예도 아닌데, 괴수 부산물과 마석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도시를 공격한 것이다.

자신들이 훨씬 강하니 대수림에 가서 괴수를 직접 사냥하고 구하면 될 것을······.

게다가 지금 수인들은 대군주와 전갈 괴수들을 막을 준비에 바빴다.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잘 지키고 있어!'

암 드로운은 자신들이 막을 수 있다고 했지만,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난 에테나에게 소리쳤다.

"에테나! 각 비공정에 속도를 최대로 올리라고 해!"

"네!"

에테나가 마석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전 함대는 테오아칸 왕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진한다."

각 비공정으로부터 명령을 수신했다는 답신이 들려왔다.

마석 무전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빠르고 정확히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다만 아리칸의 비공정은 아직 마석 무전기가 없었기에 깃발이나 거울로 알려야 했다.

"에테나, 먼저 갈 테니까 아리칸 함대와 최대한 빨리 쫓아와!"

"네! 조심하세요."

난 괴조인형을 타고, 곧바로 테오아칸 왕국으로 향했다.

"끼이이이아!"

쉐에에엑!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이 수인들을 도와 괴수를 막으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는 진작 버렸다.

하지만 방해하고 수인들을 공격하다니, 이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괴수를 막기 전에 코린트 왕국을 먼저 뒤집어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날아갔을까.

저 멀리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쏜살같이 날아갔다.

[테오아칸 왕국]

'전투는 끝났나?'

상공에서 바라보니,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난 왕궁 앞 광장으로 내려갔다.

거대 괴수의 등장에 수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괴조에서 내리니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주군 오셨습니까!"

암 드로운이 투구를 벗고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한 달 전에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이 이곳에 왔습니다. 수인족을 공격하길래 우리가 나섰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날 놈들은 크게 패해서 물러갔고, 며칠 전에 다시 와서는 마법사들이 화염 마법을 쏟아붓고는 우리가 달려가면 자신들 진지로 도망치는 수법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저들의 숫자는?"

"마법사가 10명, 거신 기사가 9명, 그리고 거신 병사가 100명 정도입니다."

"많진 않군."

"문제는 우리 쪽 원거리 마법사가 전부 외부에 있어, 저들을 상대하기 너무 까다롭습니다."

원거리 마법사라······.

마법사는 없어도 다른 원거리 무기는 있었다.

마나 대포를 시험해 볼 시점인가.

179. 받은 대로 돌려주자!

179. 받은 대로 돌려주자!

거신 마법사의 마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워낙에 거구였고, 마나량도 많았기에 가장 낮은 등급의 마법인 파이어 에로우만 해도 그 길이가 인간 키 정도였다.

그리고 파이어 볼의 경우 화염 덩어리만 지름이 50cm나 됐고, 이글거리는 불꽃까지 더하면 지름이 1미터가 넘었다.

그런 불꽃에 제대로 맞으면 나이트급 기간트도 박살 날 정도였다.

게다가 숙련된 마법사의 경우 사정거리가 상당히 길었기에 거신 기사와 병사가 앞을 막고 뒤에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쏘면, 완전 사기 조합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리사에게 거신 용병 중에서 마나에 소질이 있는 거신을 뽑아 마법병단을 만들라고 한 것이다.

[주군이 오셨다!]

기이잉! 쿵! 쿵!

마키아스 단장과 트라스의 개 기사들의 기간트가 다가왔다.

[주군! 오셨습니까.]

"다들 고생했다. 다친 사람은?"

[기간트 3기가 부서지긴 했지만, 부상자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난 암 드로운을 다시 쳐다봤다.

"알리사는 어디 갔지?"

"드워프들이 수인족들의 갑옷과 무기를 만들 괴수 부산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알리사 경이 두 달 전에 비공정 2척에 마법병단과 기간트 5기를 이끌고 대수림으로 갔습니다."

이곳의 괴수는 우리 차원의 괴수와 비슷했기에 괴수 부산물을 쓸 수 있었고, 마석을 품은 괴수도 있었다.

내가 테오아칸을 떠나기 전 알리사에게 마법병단을 만들면, 실전 훈련도 병행하라고 지시했기에 기간트 기사들과 대수림에 괴수 사냥하러 간 것이다.

그사이에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이 공격한 거고.

"오! 타일러님, 오셨습니까!"

수왕 라이진이 다가왔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암 드로운 경과 이계 거신들이 도와줘서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막았다곤 하지만 도시 곳곳이 불에 타고 있었다.

지금도 수인들이 물을 길어 불에 탄 건물을 끄고 있었다.

거리엔 시커멓게 온몸을 그을린 채로 죽은 수인들도 보였다. 그리고 보이진 않았지만,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인들도 많을 것이다.

'자신들 뜻대로 하지 않았다고 수인들을 죽이다니!'

씁쓸한 마음과 함께 분노가 끓어 올랐다.

"지금 코린트 거신들은 어디에 있지?"

암 드로운이 대답했다.

"이곳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수인족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인들을 모두 내쫓고,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허! 이 새끼들 완전 깡패네."

이젠 수인족의 집과 마을까지 빼앗았다.

아무래도 가만히 둘 순 없었다.

이젠 코린트 왕국을 지배하는 거신 마법사들과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았다.

그전에 우릴 공격한 놈들부터 처리하고.

"우리 비공정이 도착하면 놈들을 공격할 테니까. 다들 준비해."

"네! 주군."

[네! 주군.]

***

"오호! 거신하고 전투라, 기대되는데!"

마르틴 국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저들의 시선을 끌겠습니다. 저들의 후미를 공격해 주십시오."

"오랜만에 우가스에 타서 싸우니, 실력을 발휘해 보겠소."

"해치를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신 마법사들의 마법에 직통으로 맞으면 아무리 기간트라도 위험합니다. 겉은 멀쩡해도 안에 탄 기사는 크게 다칠 수 있고요."

"알겠소. 그럼 조금 이따가 봅시다."

"그리고 혹시나 거신 마법사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사로잡아 주십시오."

"하하! 무슨 말인지 알고 있소. 괴수를 길들인 것처럼 거신 마법사도 길들일 생각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마르틴 국왕은 나와 많이 다녔기에 이제 내 비밀을 꽤 알고 있었다.

크루세이더 기사단이 먼저 비공정에 올라탔다.

내 제자인 릴리안의 파이어 에로우에 해치를 직통으로 맞아 죽은 기사도 있었다.

거신들도 몇 번의 전투로 기간트의 약점을 알고 있을 테니, 해치를 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조심해야 했다.

"자! 우리도 승선해라! 저들을 공격하러 간다."

[네! 모두 승선하라!]

트라스의 개 기사단과 영웅 기사들이 차례로 비공정에 올라탔다.

그때 라이진 수왕이 다가왔다.

"저희도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는 수백 명의 고양잇과 수인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우리끼리도 충분합니다."

"이들은 타일러 경께서 만들어 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쉽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라이진과 수인들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왕국과 수인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비겁하게 뒤로 숨을 수는 없습니다.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신 제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수인들이 거신들을 겁내지 않고 싸울 수 있다면, 괴수와 전투에서도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비공정에 자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두 타십시오."

수인들이 차례로 올라탔다.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전투 전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

우린 수인족 마을 1km 지점에서 멈췄다.

거신 마법사들이 마법 사정거리가 500, 600미터에 달한다는 말을 들었다.

역시 숙련된 마법사들은 무섭다.

그러니 그보다 멀리 자리를 잡아야 했다.

"모두 자리를 잡아라!"

[서둘러라!]

기이잉! 쿵! 쿵!

낮은 언덕 위에 트라스의 개 기사단과 영웅 기사들의 기간트가 대형을 잡았다.

"가자! 우리 왕국은 우리가 지킨다!"

라이진과 수인족들이 기간트 대형 뒤쪽으로 정렬했다.

'나와라! 병정개미!'

"끼릭! 끼리릭!"

쿵쿵쿵!

여섯 마리의 거대 병정개미가 인형의 집에서 나왔다.

"드워프 포병대와 사수는 모두 올라가라!"

"가자!"

병정개미 꼭두각시 위쪽엔 거대한 마나 대포가 있었다.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고, 대포 주변엔 앉아서 쉴 의자도 있었다.

"마석 배터리를 장착하라!"

치이익! 철컹!

"포탄을 장착하라!"

드워프 포병들은 능숙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각 마나 대포엔 한 명의 사수가 있었다.

그들은 기사 수준까진 아니지만, 작업용 기간트에 탈 수준은 되는 병사들이었다.

마나 대포를 쏘는데 많은 마나는 필요 없었다.

마법진을 활성화하기 위한 소량의 마나만 주입하면 됐다.

그리고 마나를 주입하면 10초 안에 발사해야 한다.

아니면 마법진의 효과가 사라진다.

"1km 지점이다! 높이를 조절해라!"

하버 족장이 거리를 측량하고 소리쳤다.

촤르르르륵!

드워프가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포신이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km 눈금에 도달하자 멈췄다.

하버 족장이 날 쳐다봤다.

내 최종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버! 저들에게 받은 대로 돌려주자!"

"옛썰!"

하버가 드워프 포병에게 명령했다.

"1번 마나 대포 발사!"

"발사하라!"

사수가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발사 손잡이를 당겼다.

퍼엉! 휘이이잉!

콰아앙!

포탄이 마을 어귀에 적중했다.

망원경으로 보자, 마을 안에 있던 거신 병사들이 깜짝 놀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1.1km 지점이다! 눈금을 올려라!"

촤르륵!

한 칸의 눈금은 50m.

2칸을 더 올렸다.

"2번 마나 대포 발사!"

"발사!"

퍼엉! 휘이이잉!

콰아아앙!

이번엔 마을 안쪽에 폭탄이 터졌다.

"적중이다! 모든 대포는 일제히 발포하라!"

"발포하라!"

펑! 펑! 펑!

마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앙! 콰앙! 콰앙!

터지는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그 충격은 상당했다.

거신 기사들과 병사들이 마을 건물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인족 마을을 공격했던 패턴과 똑같은 공격을 받았기에 더 당황한 것 같았다.

"계속 쏴라!"

펑! 퍼펑! 펑!

조준만 끝내면, 1분에 3발을 쏠 수 있었기에 6개의 마나 대포는 쉴새 없이 쏘았다.

건물 뒤에 숨었던 거신 병사가 포탄에 건물이 무너지면서 아래에 깔리는 모습도 보였고,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져 거구의 몸이 날아가 담벼락에 처박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자 거신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마을에서 나와 이쪽으로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됐다! 놈들이 온다! 전투를 준비!"

"전투를 준비해라!"

[전투태세를 갖춰라!]

기이잉 쿵! 쿵!

지금 이곳엔 거신 용병들도 일곱이나 있었다.

모두 암 드로운에게 검술을 배우는 거신 기사 후보생들이었다.

대부분 마나가 미약했기에 거신 갑옷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드워프들이 상체를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만들어 주었기에 그걸 입고 있었다.

"공격하라!"

"와아아아!"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이 순식간에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거신 기사들의 갑옷은 오리지널 기간트와 성능이 똑같았고, 움직임은 훨씬 더 뛰어났기에 방심할 순 없었다.

포격은 멈췄다.

마키아스가 먼저 소리치자, 트라스의 개 기사들도 일제히 소리쳤다.

[거신들에게 인간들의 힘을 보여주자!]

[인간들의 힘을 보여주자!]

[와아아아!]

다들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최종 명령권자인 암 드로운이 검을 높이 들었다.

"놈들을 공격하라!"

"가자!"

거신 용병들과 트라스의 개 기간트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렇게 코린트 거신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쾅! 콰콰쾅!

위에서 아래로 몰아치는 기간트의 위력은 상당했다.

우리 기사들은 오리지널 기간트를 꽤 보유하고 있었기에 거신 기사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5미터 거신 병사들은 비숍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기갑 부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신 병사들은 마법진이 전혀 없는 일반 갑옷이었기에 방어력이 형편없었으니까.

"더는 거신들에게 자유를 빼앗기지 말자!"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키자!"

"크아앙!"

고양잇과 수인족 수백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역시 숫자가 깡패였다.

암 드로운과 오리지널 기간트가 거신 기사를 막고, 기간트와 수인들이 거신 병사를 상대하자, 우리에게 밀리고 있었다.

내 마법인형은 쓸 필요도 없었다.

"타일러님! 마법사들이 나왔습니다."

에테나가 말했다.

망원경을 보자, 마을에서 마법사들이 나왔다.

하버 족장이 물었다.

"타일러여! 포격할까?"

"아니야. 아리칸 기간트가 벌써 움직였어."

비공정으로 저들의 후미에 내린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들이 그들의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마법사들이 몸을 돌려 마법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을 막아줄 기사가 없다면, 마법사들은······.

"으악!"

"크악!"

기간트 3기가 화염과 얼음 창날에 부서졌지만, 크루세이더 기사단을 막진 못했다.

순식간에 마법사들을 덮쳤고, 여덟을 죽이고 둘을 사로잡았다.

마법사들은 가까운 거리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안전하게 제압하다 보니, 많이 생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쪽도 이미 전투는 끝났다.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라!"

[길목을 막아!]

거신 기사 하나와 거신 병사 몇 명이 도망쳤지만, 뒤에서 달려온 마르틴 국왕과 크루세이더 기사들이 마무리했다.

"이겼다!"

"와아아아!"

수인들의 함성이 유난히 컸다.

거신 기사 넷과 거신 마법사 둘을 생포했다.

거신들을 고문하거나 코린트 왕국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 마법인형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운명의 실을 연결합니다.]

[운명의 실을 연결합니다.]

.

.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합니다.]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합니다.]

.

.

운명의 실이 끊어졌다.

거신들도 괴수와 같네.

인간형 마법인형은 95%라는 엄청난 성공확률이었지만, 거신들은 괴수처럼 마법인형으로 만들기 힘들었다.

[거신(lv.1) 허수아비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두 실패하나 했더니 거신 기사 하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마나는 암 드로운보다 많이 떨어졌기에 마전사처럼 마법을 쓸 순 없어 보였지만, 11미터의 룩급 거신이었고 자동인형까지만 키우면 암 드로운의 보조로 꽤 쓸 만할 것이다.

그리고 거신들의 오리지널 갑옷은 모두 챙겼다.

***

며칠 후.

알리사와 사냥팀이 돌아왔다.

난 암 드로운을 인형의 집에 넣었고, 알리사와 함께 비공정에 타고 코린트 왕국이 있는 구름 산맥으로 날아갔다.

알리사와 에테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군,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포섭한 원로 마법사가 한 명이 있다고 했지."

"네. 다른 원로들에게 우릴 도와 괴수들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해준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라면 믿을 만합니다."

"코린트 왕국에 도착하면 그 원로에게 말해서 다른 원로들과 마법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 내가 직접 설득한다고."

"하지만 마법사들은 주군의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주군을 공격하고 가둘까 봐 걱정입니다."

난 피식 웃어줬다.

"저들은 아직 내 능력을 모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일단 최대한 많은 마법사가 한곳에 모이게 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내 인형술사의 힘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마지막 설득에 실패한다면 내 모든 힘을 다 써서라도 한 번에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180. 코린트 왕국.

180. 코린트 왕국.

"허! 여긴 완전 천혜의 요새로군."

비공정에서 내려다본 구름 산맥.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골짜기와 뾰족하고 날카로운 산등성이가 줄지어 있었다.

저길 오르고 넘는 건 괴수라고 해도 불가능할 듯 보인다.

그리고 유일한 입구는 협곡을 지나 굽이진 절벽 길.

저 길은 거신 둘이 걸으면 꽉 찰 것 같다.

'저러니 괴수가 몰려온다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지.'

지킬 자신이 있는 거다.

하지만 세상이 망하면 거신이라고 버틸 수 있을까?

일찍 죽느냐 조금 늦게 죽느냐의 차이지.

고도를 높여 산맥 위로 올라오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짙은 구름이 우릴 막아섰다.

알리사가 말했다.

"주군,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에테나 고도를 낮춰."

알리사와 난 절벽 길에 내리고, 에테나는 비공정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조심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무전기를 켜세요."

"그래. 다녀올게."

내 인형의 집엔 대형 무전기가 한 대 있었다.

그러니 10km 안이라면 연락을 취할 순 있었다.

하지만 굳이 연락할 일이 있을진 모르겠다.

알리사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알리사, 이거 자연적인 구름 아니지?"

"자연적인 구름도 있지만, 이렇게 진한 것을 보면 어딘가 안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비공정으로 코린트 왕국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실패했겠네."

"마법진을 먼저 찾아서 파괴하고 들어가는 방법은 있습니다. 다만 마법진은 저 골짜기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알리사가 가파른 골짜기를 가리켰다.

마법진이 어디 있는지 알더라도 저길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이 구름만 보더라도 코린트 왕국을 공격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나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있을 때, 이번에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한참을 오르자 곧 넓은 길이 나왔다.

"이제 곧 성문에 도착합니다. 제가 일단 말을 할 테니, 주군은 그냥 따라오십시오."

"알았어."

"저기 거신들을 설득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말은 해봐야지."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자들이라 이야기가 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심해?"

"휴우! 이곳의 마법사들은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몇몇은 마치 자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허! 설득은 쉽지 않겠군."

고개를 흔들었다.

"원로들의 마법 실력은 어느 정도야?"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부분 저보다 떨어집니다. 마나량도 높진 않고요."

"뭐?"

살짝 어이가 없었다.

이곳 차원으로 탈출한 마법사들은 차원 마법진까지 쓸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들이었다.

"오랜 세월과 여러 세대를 거쳐오면서 실력이 많이 퇴보했군. 선조들이 지하에서 통곡하겠어."

눈앞에 그 선조인 알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사라진 마법이 너무 많습니다. 한 계열에만 해도 수백 개의 마법이 있는데, 지금 코린트의 마법사들은 평생토록 겨우 십여 개의 마법을 익힌다고 합니다. 아마 머지않아 이곳 마법사들의 시대도 끝날 겁니다."

"그 전에 괴수들에게 끝날걸."

알리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주군께서 마법서를 잘 챙겨 놓으셔서 다행입니다."

내 인형의 집엔 메제트의 탑에서 챙긴 마법서가 많았다.

화염과 얼음 관련 마법서가 수백 권이었고, 다른 계열 마법서도 다른 왕국의 관문으로 간다면 얼마든지 챙길 수 있었다.

다만 아베르크 제국 메제트의 탑에 있던 대지 마법책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허! 정말 거대하군!"

구름이 걷히자마자, 거대한 검은색 성벽과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은 200미터가 넘어 보이고, 성문의 높이도 50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입구에 기사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알리사는 기사에게 다가가 뭔가를 건넸다.

"데마르 원로님의 손님이시군요.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가 성문 옆에 작은 쪽문을 열어 주었다.

알리사가 내게 손짓하자, 난 앞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기사와 병사들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상에! 수인보다 더 작아."

"그런데 우리와 똑같이 생겼는데?"

"그러게 신기하다."

자신들과 생긴 건 똑같이 생겼는데, 크기가 작으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한땐 10만이 넘는 거신이 이곳에 살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권력을 잡으며 강제로 인구수를 조절하는 정책을 펼쳤고, 수 세대가 지나자 지금은 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넓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거신이 별로 없었다.

"주군, 이쪽입니다."

알리사를 따라 걸었다.

길거리에서 가끔 마주치는 거신들은 모두 날 내려다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거인국으로 간 걸리버의 기분이 나 같을 것 같다.

우린 알리사가 알고 있는 원로 마법사의 저택으로 향했다.

***

우린 거대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알리사님, 또 오셨군요."

"원로님, 오늘은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원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역시 인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타일러 대공 저하십니다.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알리사님께서 모시는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마르라고 합니다."

"데마르 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허! 타일러님께서 거신어를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데마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리사에게 들으니 우리를 도우려고 하셨다고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저쪽 차원의 거신들이 멸망했고, 이곳에 남은 거신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서서히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오래전부터 느껴졌습니다."

"그래요?"

"인구 1만 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철저한 계급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마법사들은 마법사들끼리 결혼하고, 기사들은 기사들끼리만 결혼합니다. 병사는 병사들끼리 하고요. 거기서 일정 숫자가 늘어나면 남녀 간의 만남을 아예 통제해 버립니다."

"독재나 마찬가지군요."

"그렇습니다. 철저한 통제로 이루어진 사회와 국가에 미래는 없습니다. 실제로 거신의 마법은 점점 퇴화하고, 기사들은 마나를 쌓는 일조차 게을리하고 있어 실력이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거신들은 꿈도 희망도 없고, 그저 의미 없는 삶이 반복되는 겁니다. 전 이것을 탈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원로들과 마법사들의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듣기만 해도 암울한 사회였다.

"그런데 알리사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선조 거신들이 거대 장벽을 만들어 대수림의 확장과 괴수를 막고, 인간으로 진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쪽 차원의 인간은 우리 거신들의 후예니까 도와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원로들이 반대했군요."

"네. 저들을 설득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거신들과 코린트 왕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알리사가 말했다.

"제가 주군께서 받아주실 거라고 말했습니다."

"날 너무 잘 아는군."

거신이 많을수록 괴수를 막아낼 확률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이제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제가 마탑의 원로들과 마법사들을 만나 직접 설득하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마르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원로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선조이신 알리사님의 말도 듣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수석 원로인 데스몬드는 괴수 군단을 믿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차원에 거신 기사와 병력을 보내는 것에 무조건 반대하고 있습니다."

난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알리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데마르에게 말했다.

"다른 차원에 병력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대군주와 괴수 군단은 이곳 차원에 와 있습니다."

"네?"

"벌써 수인들을 공격했습니다."

데마르는 경악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가! 알리사님께서 말하는 재앙이 결국 이곳에 왔군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차원도 공격받고 멸망했으니, 이곳 차원도 위험할 거라고요."

"그래도 원로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일단 제가 설득할 수 있게 자리만 마련해 주십시오."

내 말에 데마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 이제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이틀 후 마탑 전체 회의에서 원로 자리를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마탑 전체 회의요?"

"네. 수인들이 마석과 괴수 부산물을 가져오지 않아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는데,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수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자는 안건을 전체 회의에서 다룬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 해임안도 다룰 예정이고요."

"그럼 원로들이 다 오겠네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원로들의 제자들과 중급 마법사들까지 거의 다 모일 겁니다. 소규모 병력이 아니라 코린트 왕국 전력의 절반을 보내자는 투표를 하는 중요한 자리니까요."

"잘됐네요. 그럼 저를 그곳에 데려다주십시오."

데마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외부인을 극도로 꺼립니다."

"괜찮습니다. 건물 안으로만 들여보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휴! 좋습니다. 제 가방에 숨겨서 들어가지요."

데마르가 또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주군, 그럼 전 어떻게 할까요?"

"회의장 밖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의 접근을 막아줘."

"네? 설마?"

"그래 더는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을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지금은 수인들의 힘을 모으고 방비를 철저히 할 때야."

"저들을 살려 주실 순 없겠습니까?"

"나야 그러고 싶지. 하지만 이대론 이곳의 거신들도 모두 전멸할 거야. 마법사들을 살리려다 왕국의 거신들을 다 죽일 건가?"

알리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타일러님께서 원로들과 마법사들을 다 죽여요?"

난 데마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소. 대신 데마르 경께서 남은 거신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어 주시오. 그리고 함께 괴수 군단을 막읍시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원로들은 코린트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중급 마법사까지 수십 명이 모이는 마탑 전체 회의입니다. 알리사님 같은 고위 마법사 10명이 오면 모를까, 그들을 죽일 순 없습니다."

데마르 원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데마르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그럼 주군께서 최대한 설득해주십시오."

"나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괴수를 막는 데 쓰고 싶은 사람이야. 내 의식을 들여다봐서 잘 알 텐데?"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살려주십시오."

"노력해 보지."

"감사합니다."

알리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데마르는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타일러 경께서 그럴 능력이?"

알리사가 피식 웃었다.

"저 같은 마법사는 10초면 죽이실걸요."

"네? 저, 정말입니까?"

"10초는 그렇고, 한 30초는 걸리지 않을까? 알리사는 워낙 얼음 방어 마법이 뛰어나니까."

"허!"

데마르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난 데마르를 보며 말했다.

"혹여 잘 아는 마법사나 뜻을 같이하는 마법사가 있다면, 그 전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솔직히 원로들과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빙결의 오브 하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진짜 위험할 때 사용해야 할 비밀 무기였기에, 이번엔 내 마법인형을 쓸 생각이었다.

물론 내 설득이 잘 통한다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그리고 이곳에 기사들의 갑옷을 만드는 거신이 따로 있습니까?"

"뱅커스 가문이 대대로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주인 스텐 뱅커스도 원로입니다."

하긴, 갑옷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갑옷에 마법진을 새겨 넣는 것이 중요한 거다.

마법을 알아야 마법진을 새길 수 있었고.

"혹시, 그 스텐 뱅커스를 따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네?"

181. 거신 대장장이.

181. 거신 대장장이.

데마르 원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는 온종일 공방에서 틀어박혀 있어,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전체 회의도 잘 참석하지 않고요."

"그 공방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시 북쪽 끝에 만년설에 덮인 거대한 산이 있습니다. 그 산 깊숙한 지하에 용암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공방이 있습니다. 직접 찾아가 보시려고요?"

"네."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원로 신분이라 절 만나줄 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남았으니, 그를 먼저 만나봐야겠다.

다른 원로들은 모르겠지만, 그는 꼭 포섭하고 싶었다.

거신 기사들의 갑옷을 만드는 장인이니까.

그 말은 스텐 뱅커스가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

늦은 밤.

침대가 너무 커서 어색하다.

앞으로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 잠도 오지 않고.

똑똑.

"들어와!"

알리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가 올 것을 아셨습니까?"

"아니, 발걸음 소리가 워낙 커서 다 들려."

"아! 죄송합니다."

알리사의 키가 10미터다.

그리고 내 귀가 워낙 좋았기에 복도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왜? 잠이 안 와?"

"그건 아닌데······."

알리사가 뭔가 고민이 있는 표정이었다.

"잠깐 여기 앉지."

"고맙습니다."

알리사는 침대에 앉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녀와 이렇게 단 둘이 차분히 대화한 적이 없었다.

"잠을 못 자는 건가?"

"잠들기가 두렵다고 할까요? 실은 거의 매일 악몽을 꿉니다."

"그날 꿈을 꾸는 거야? 화산이 터지던 날?"

"네. 그리고 꿈에 레기우스와 불카누스가 자주 나타납니다. 솔직히 전 그놈들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하긴, 나도 그 녀석들을 볼까 두렵다.

알리사의 의식에서 본 괴수들!

이데아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 중에서 여섯 기사와 이십여 명의 거신 영웅들이 초거수를 죽이고, 그곳에서 나온 포자를 마시고 끔찍하게 변했다.

영웅 기사들은 S급 괴수인 대군주로 변했고, 제국의 위대한 여섯 기사는 SS급 멸망급 괴수로 변이했다.

내가 엘프 차원에서 직접 본 멸망급 거신 괴수는 100여 미터의 지네 괴수를 타고 다녔는데, 둘 다 SS급 괴수였다.

하지만 불카누스는 그 멸망급 괴수보다 더 크고 강력했다.

SSS급 괴수!

불카누스는 몸길이가 3km나 됐고 입에서 화염을 뿜어내면 산도 단숨에 녹일 정도였다.

그런 괴물하고 싸우질 않길 바라지만, 왠지 언젠간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장벽 너머에 내 영지로 가 있는 건 어때?"

"네?"

"내가 볼 땐, 알리사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 얼음 절벽에서 깨어난 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잖아."

"하지만 이곳도 곧 그 괴수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한 명이라도 힘을 모아야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괴수들은 한꺼번에 병력을 공격하진 않아. 엘프와 드워프, 오크 차원에서도 먼저 소수의 병력을 보내서 전력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 병력을 보내는 방식이지. 그러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해. 이곳을 공격하기 전에 대수림에 있는 중간 기지들부터 다 박살 내고 올 테니까. 그러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마법병단을 이끌고 내 영지로 가서 그곳에서 좀 쉬면서 재충전을 가져."

"알겠습니다."

알리사도 지쳤을 거다.

사람도 그렇고 거신도 좀 쉬어야 하지.

매일 긴장감을 가지고 살면 병나는 거다.

"혹시 폭발력이 강력한 물질을 찾는데, 아는 것 좀 있어?"

"폭발력이요?"

"빙결의 오브 같은 거 말이야. 화염 능력이 있으면 더 좋고."

알리사가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화염 마도구는 있는데, 빙결의 오브 같은 못 본 것 같습니다."

"그래? 아쉽군."

마나 대포의 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포탄의 폭발력을 늘리고 싶었지만, 알리사도 아는 것이 없나 보다.

"아! 광부들이 마석 광산을 캐다가 너무 단단한 바위를 만나면 폭발을 시킨다고 들었습니다."

"광부라고? 거신들도 광부가 있어?"

"네! 마석을 캐는 광부가 있죠."

"그럼 폭탄도 있겠군."

실마리가 생겼다.

문제는 이데아 제국 발굴지에서 광부들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거다.

"폭탄은 매우 위험해 황궁에서 특별 관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황궁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네?"

"네. 위험한 물질이라 마법 실드가 처진 지하 창고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데아 황궁에 다시 가 봐야겠다.

전에는 거신 갑옷을 챙기고 제국으로 급하게 돌아간다고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혹시나 제조법이 있을 수도 있고.

생각난 김에 안드레아스에게 들은 지하 신전에 관해서 물었다.

"지하 신전이요? 그건 저도 처음 듣는데요."

"그래? 그럼, 거기도 직접 가봐야겠군."

"혹여 암흑 마법사들의 본거지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곳곳에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암흑 마법사도 있어?"

"네 원래는 저희의 마법 계열은 암흑 마법까지 일곱 가지였는데, 그들의 마법은 너무 위험하고, 다른 차원의 괴물을 불러들이기도 하기에 배척당했습니다. 특히 초거수의 등장이 그들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이데아 제국에서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신전이 암흑 마법사들 본거지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 이데아 제국과 마법사들은 신을 믿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암흑 마법사들은 다른 차원에 신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소환이나 차원 마법진을 계속 만드는 거죠."

"차원 마법진을 만든 게 암흑 마법사들이야?"

"네! 그래서 이데아 제국에선 차원 마법진의 이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차원 마법진의 유례를 알았다.

그리고 입구가 신전과 비슷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암흑 마법사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하 깊숙이 만든 것을 보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고.

"혹시 그 신전이 암흑 마법사들의 본거지라고 하면, 문을 열 방법이 없을까? 기간트도 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잠겨 있다고 하던데, 열쇠 구멍도 없고. 이상한 문양만 가득하고."

"그 정도면 암흑 마법사들의 본거지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엔 암흑 마법을 사용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제로 문을 부순다면 함정이 발동되거나 무너질 수 있으니, 절대 삼가야 하고요."

"암흑 마법이라, 들어가긴 틀렸군."

"저도 암흑 마법은 잘 몰라서 도움을 드릴 순 없군요."

"알았어. 오늘은 여기서 잘래?"

"네?"

알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군주님과 한 침대에······."

"난 소파에서 잘게."

"아!"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피곤했는지 알리사는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거신 마법사가 아기처럼 잠자고 있었다.

홀로 살아남은 이데아 제국의 마지막 생존자.

얼마나 외롭겠나.

암 드로운도 거신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내 마법인형이었고, 거신 용병들이나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그녀보다 까마득한 후대 사람이었다.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일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녀와 난 공통점이 많았다.

소파에 누워 나도 잠을 청했다.

그렇게 코린트 왕국의 첫날이 저물었다.

***

뱅커스 가문의 공방까진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괴조인형을 타거나 비공정을 이용했다면 순식간일 텐데.

기차도 없고 별다른 이동 수단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이동해도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마치 죽은 자들의 도시 같았다.

거신들은 수명이 매우 길었고, 최근에 사망한 사람이 없었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 내게 죽은 거신들이 많으니, 그만큼 다시 아이를 낳겠지······.'

아이를 낳는 걸 통제하다니, 씁쓸한 일이었다.

"다 왔습니다. 저깁니다!"

데마르 원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좀 많이 걷긴 했다.

주변에서 가장 큰 산의 아래쪽에 공방의 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건물과 다르게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마르 원로가 다가가 뭐라고 말하자, 병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젊은 여자 거신이 밖으로 나왔다.

"데마르 원로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스텐 뱅커스 원로와 긴히 할 말이 있소."

젊은 여자 거신은 뒤에 있는 알리사와 나를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오. 그리고 스텐 원로께서 좋아하실 만한 정보도 가지고 왔소."

"정보요?"

"하늘을 나는 배 말이오. 여기 이분이 그 배를 직접 만드신 분이시오. 구름 산맥 입구까지 타고 왔고."

여자 거신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제 데마르가 말하길 요즘 코린트 마법사들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가 바로 하늘을 나는 비공정이었다.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지만, 원로들과 마법사들은 수인족 상공에 나타난 비공정에 대해서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좋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대신 다른 길로 새거나 물건을 만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우린 여자 거신을 따라 통로로 들어갔다.

데마르 원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죠?"

"스텐 원로의 딸인 트레이시 뱅커스입니다. 뛰어난 대장장이자, 마도 공학자죠. 스텐의 뒤를 이을 차세대 원로 후보입니다."

어쩐지 어깨가 남자 거신들보다 더 넓고,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트레이시의 키는 11미터에 체격은 알리사보다 2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녀도 오리지널 거신 갑옷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아래로 이어진 길을 한참 내려가자, 곧 커다란 공동이 나왔다.

캉! 캉! 캉!

치이익! 치이익!

망치 소리와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기가 거신의 공방이구나!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트레이시가 공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이건 수인족의 무기로군."

공방 한쪽에 수인들 크기에 맞는 무기와 방패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많으면서 한꺼번에 주지. 그들이 마석과 괴수 부산물을 가져오면 찔끔씩 내주고 있었다.

"알리사, 누가 오면 말해줘."

"네! 주군."

난 마나를 눈으로 뿜어냈다.

"오! 마나 탐색도 하실 줄 아셨습니까!"

데마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신들은 다 할 줄 아는 거 아닙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마나의 재능이 있는 일부 마법사들이나 쓰는 기술입니다. 저도 쓸 수 없고요."

그건 좀 의외였다.

아무래도 암 드로운이 마나의 재능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영혼 이동을 통해 그걸 내가 이어받았고.

난 마나 탐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내부에 일하는 거신 대장장이는 모두 열일곱.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곳곳에 거신 갑옷도 보이고, 마석과 무기도 보였다.

그리고 바퀴 달린 거대한 수레가 보였다.

'훗! 이동 수단을 만들려고 했나 보군.'

옛날에 거신들은 이족 보행 하는 커다란 공룡 같은 파충류를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끌게 했다. 하지만 초거수가 죽고 대수림이 변화하면서 파충류들의 크기가 더 커지고, 사나워졌기에 더는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 대수림에서도 마땅한 괴수가 없었기에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그냥 걸어 다녔다고 들었다.

스텐은 거신들을 위해서 이동 수단이나 운송 수단을 만들고 싶은 거 같았다.

그리고 바퀴 달린 수레는 한쪽에 방치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스텐 뱅커스는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어.'

이동 수단으로 비공정을 이용하면 되니까.

그리고 지상 이동 수단도 비행석으로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면, 안당고낙 같은 작은 괴수로도 얼마든지 커다란 수레를 끌 수 있었다.

"어이! 위험해!"

"저리 비켜!"

거신 대장장이들이 시뻘건 쇳물을 가지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이곳 공방은 코린트 왕국에서 가장 활기찼다.

뭔가를 만드는 것은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까.

그리고 13미터의 거신 대장장이가 다가왔다.

"응? 이 작은 인간이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들었다고?"

스텐은 생각보다 더 거구였다.

"그렇소."

"오호! 신기한 일이로군. 이렇게 작은 인간이 말도 하고."

스텐은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인데······.

그래서 인형의 집에서 거대 토우 인형을 꺼내면서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한 기를 꺼냈다.

계속 올려다보기에 고개가 아프기도 했고.

쿵! 쿵!

"뭐,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이게 무슨 마법이야?"

스텐 뱅커스와 거신 대장장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82. 기계쟁이들이란······.

182. 기계쟁이들이란······.

이번엔 룩급 기간트의 해치를 열자, 스텐 뱅커스와 대장장이들이 매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갑옷이 열렸어?"

"아니, 이게 갑옷이긴 한 거야?"

위이잉! 치익!

난 해치를 닫았다.

"오! 안으로 들어갔어."

[어때? 이제 키가 좀 비슷해졌지?]

스텐과 그의 딸인 트레이시는 신기한 듯 다가와 기간트를 만져 보기까지 했다.

난 그들이 말을 편하게 하기에 똑같이 편하게 말했다.

그리고 기간트를 움직였다.

"대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야?"

"이 갑옷으로 어느 정도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보여주지.]

난 등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달리며 허공에 검을 찌르고 휘둘렀고, 일부러 반쯤 만든 갑옷을 검으로 잘라버렸고, 앞구르기까지 했다.

"허! 저건 기사들의 움직임이잖아!"

"그럼 저 작은 인간이 거신 기사들과 동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말이네?"

"와아!"

다들 입을 떡 벌렸다.

기계쟁이들이란······.

한바탕 오리지널 기간트의 능력을 보여주자,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건 거신 갑옷으로 만든 기간트란 병기다. 이걸로 우린 대수림의 괴수와 싸우지.]

스텐이 입을 열었다.

"기간트라······, 이런 기간트가 많은가?"

[지금 보고 있는 기간트는 고대의 거신 선조들이 만든 갑옷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저쪽 세상에도 100여 기밖에 없는 귀한 물건이지. 그리고 이것보다 성능이 조금 떨어지는 기간트는 수십 배는 더 많고.]

텅! 텅!

내 말을 들은 스텐이 내 기간트를 두들겼다.

그리고 보호 장갑을 힘으로 뜯어보며 이음새와 관절 부분까지 자세히 살폈다.

"정말 우리가 만드는 갑옷하고 비슷하네. 움직임을 보니 안에 마법진도 제대로 있는 거 같고."

"세상에! 우린 우물 안 개구리였어. 갑옷으로 이런 걸 만들다니······."

아니, 거신 갑옷을 만드는 너희가 대단한 거야.

인간은 아직 흉내 내는 것뿐이고.

난 다시 해치를 열고, 알리사를 쳐다봤다.

"원로들한테 기간트 이야기는 안 한 거야?"

"했습니다. 다만 여기 거신들이 그 자리에 없어서 그렇죠."

옆에 있던 데마르 원로가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뱅커스 가문은 원로회에 잘 참석하지 않습니다."

난 그들이 오리지널 기간트를 더 살펴보게 놔뒀다.

한참을 살펴본 스텐과 트레이시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방금 어디서 이 갑옷을 꺼낸 건가?"

"그건 내 능력이네. 나만의 아공간이라고 할까?"

"오! 대단하군. 어째서 우리가 이런 인간과 기간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지?"

데마르 원로가 나섰다.

"그거야 원로원이 정보를 통제해서 그런 것입니다."

데마르가 나와 알리사 대신에 원로회와 마법사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곧 괴수들이 몰려올 텐데, 원로들과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지배력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오히려 마석과 괴수 부산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고, 수인들을 공격할 생각입니다. 이러다 코린트 왕국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지요."

그런데, 그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우린 그런 머리 아픈 건 모르겠고, 그보다 그대가 정말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들었다는 건가?"

"물론이다. 원리는 간단하지. 이 비행석만 있으면 아무리 무거운 물건도 가볍게 만들 수 있다."

난 비행석이 담긴 병 하나를 꺼냈다.

"이 작은 것이?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지금처럼 물에 잠겨 있으면, 그 능력이 거의 사라지고, 물을 빼면······."

쪼르르륵!

병에 물을 조금 뺐다.

그러자 원형 비행석 윗부분이 물 밖으로 드러나며, 병을 들고 있는 내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어? 정말이네. 신기하다."

"한번 들어볼 텐가?"

"내게 줘보게."

스텐이 손을 내밀었다.

난 비행석이 담긴 병을 건넸다.

스텐이 엄지와 검지로 병을 집었는데!

챙캉!

"헛!"

힘 조절을 못 해 병이 깨지며 비행석이 위로 떠 올랐고, 스텐은 재빨리 비행석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스텐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 스텐 공방장이 하늘을 난다!"

"우와!"

고오오오! 쿵!

비행석을 잡은 스텐이 순식간에 공동 천장까지 올라갔다.

"세상에! 저런 물질이 있다니!"

그 모습을 본 트레이시와 대장장이들은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물질로 비행석이란 돌이다. 저 비행석 몇 개면 거대한 배도 공중으로 날 수 있는 거지."

트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에 잠기는 부분을 조절하면 고도를 높이거나 낮추게도 만들 수 있겠군."

"벌써 원리를 파악했군. 저렇게 하늘을 나는 배를 우린 비공정이라고 부른다."

"음! 저 비행석이면 만들 수 있는 게 엄청나게 많겠어!"

트레이시가 비행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좋아! 걸려들었어!

"저 비행석은 선물로 주지."

"정말인가?"

"물론이야. 앞으로 날 도와준다면 더 많은 비행석을 줄 수도 있다. 물론 마석과 괴수 부산물도 제공해주지."

"그럼,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지?"

"원래 하던 것처럼 거신 갑옷이나 무기 같은 걸 만들어 주면 된다. 물론 하늘을 나는 초거대 비공정이나 25미터짜리 기간트를 만드는 걸 도와주면 더 좋고."

"뭐? 초거대 비공정? 25미터짜리 기간트라고? 그런 것도 있다니!"

트레이시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오! 어서 만들어 보고 싶군!"

천장에 붙어 있는 스텐이 말했다.

"좋아! 우리도 도와주지."

너무 쉽게 허락했기에 조금 얼떨떨하긴 했다.

"딸아! 나 좀 내려주면 안 될까?"

"아부지, 알아서 좀 내려와요."

"하지만 이 비행석을 놓을 순 없잖으냐! 그럼 비행석이 천장에 붙어 내리기 더 힘들 거다!"

지금 비행석이 문제가 아닐 텐데······.

비행석을 놓치면 약 70미터 아래 바닥에 추락한다.

트레이시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병을 좀 살살 잡지. 누가 아부지 좀 도와드려!"

"가주를 내려라!"

대장장이들이 달려들어 밧줄과 장대로 스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겨우 비행석을 물통에 넣었다.

"다들 가까이 모여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난 지금 밖에 상황을 뱅커스 가문의 대장장이들에게 상세히 말했다.

밖에 있는 장벽이며 대수림, 차원 균열과 지금 이곳에 온 괴수 군단까지.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로지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비행석을 이용해 뭘 만들어야 할지 이미 머릿속이 가득 찬 상태였다.

정말 코린트 왕국에서 대장장이들만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

"뭐? 이 공방을 떠나야 한다고?"

"아니! 코린트 왕국을 떠나야 해. 이곳에선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그리고 내 기간트 공방이 차원 너머에 2개나 있다. 물론 둘 다 이곳보다 훨씬 규모가 크지."

스텐 뱅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우리 모두 다 코린트 왕국을 떠나겠다."

"응? 그렇게 바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물론이다. 내가 가주니까. 내 결정을 따라야지."

난 다른 거신 대장장이들을 쳐다봤다.

"너희는?"

"나도 가겠다!"

"나도 간다!"

"망치는 당장 챙겨야지."

"언제 출발하면 되지?"

트레이시 뱅커스가 물었다.

"난 내일 원로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서 다른 원로와 마법사들을 설득할 생각이다. 그러니 그 이후에 출발하지."

"짐을 싸려면 시간이 빠듯하겠군."

"그리고 내일 원로원의 마탑 전체 회의엔 아무도 참석하지 마라. 설득이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응? 설마 원로들과 마법사들을 혼자 상대하려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 원로들이 꽉 막힌 놈들이긴 하지만 코린트 왕국을 장악할 만큼 강하다. 그대가 죽으면 우린 누구에게 비행석을 받는 건가?"

"내 걱정은 하지 마. 공방의 짐이나 많이 챙겨. 가지고 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스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일 정문에서 저녁까지만 기다리겠다."

난 뱅커스 가문의 공방을 나섰다.

데마르 원로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잘됐습니다. 뱅커스 가문이 코린트 왕국을 떠나면 원로든 마탑이든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 거신 대장장이들이 도와준다면, 거대 기간트 생산을 앞당길 수 있었다.

일반 기간트의 경우 드워프들이 힘을 합쳐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지만, 거대 기간트는 너무 커서 만들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엄청나게 무거워 비행석까지 이용해야 했다. 그랬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렸고.

하지만 스텐 뱅커스는 키가 13미터였고, 트레이시는 11미터에 다른 대장장이들도 9미터에 달했다.

힘도 충분했고, 높이도 높았기에 거대 기간트를 훨씬 빨리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들 수 있었으니, 거신 기사를 위한 또 다른 거대 기간트를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재료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원로들도 이들처럼 단순하면 좋을 텐데······.'

거신 대장장이들만 데리고 가도, 이곳에 온 목적은 충분히 이루었다.

하지만 난 내일 원로원 마탑 전체 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

[원로원]

원로원은 마탑 바로 옆에 거대한 돔형 건물이었다.

이곳은 과거에 수백 명의 거신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던 장소였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돔 안에 돔이 또 있었다. 저기가 회의실 같았다.

회의실로 들어가려는데, 마법사들이 데마르 원로를 막아섰다.

"허! 오늘 해임될 원로께서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설마 투표라도 하시려고요?"

"그렇소. 아무리 오늘 해임된다고 해도 아직은 원로고, 나도 코린트 왕국의 마법사요. 이곳에 올 권리는 있소."

"꼭 그렇게 직접 수모를 당하고 싶으시다면야······."

마법사들이 길을 비켜줬다.

내부 공간은 매우 넓었다.

앉을 수 있는 의자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겨우 육십여 명의 마법사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데마르 원로는 가장 앞쪽에 있는 12개의 의자 끝에 앉았다.

지금 난 그의 배낭 속에 숨어 있었다.

잠시 후 원로들이 원로원 안으로 들어왔다.

열 명의 원로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먼저 온 데마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데마르 원로, 이 자리가 무슨 자린 줄 알고 오신 거요?"

"그렇습니다. 데스몬드 수석 원로님."

데스몬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문을 닫아라!"

끼이이잉! 쿵!

출입문이 닫혔다.

"자! 가장 급한 안건부터 처리합시다."

데스몬드가 말하자, 원로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아시다시피 수인들이 가져오는 마석과 괴수 부산물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그리고 수인들이 상황을 알아보러 간 우리 병사들을 공격했고 죽였습니다."

"건방진 수인놈들!"

"감히 우리를 공격하다니요."

거신 마법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체 모를 적들을 끌어들여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허! 외부 세력까지 끌어들이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법사들이 분개했다.

"이미 일부 병력을 테오아칸으로 보냈으나, 그곳에 상당한 숫자의 외부 적들이 주둔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추가 파견하고자 합니다."

"병력을 얼마나 보낼 것이오?"

한 원로가 물었다.

"코린트 전체 병력의 절반과 마법사들을 보내서 외부 세력을 제압하고, 테오아칸의 수인들을 본보기로 처형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찬성입니다."

"우리 코린트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합니다!"

원로들과 마법사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그럼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마르 원로가 일어섰다.

"난 반대합니다."

원로들과 마법사들이 데마르를 노려봤다.

"제가 알아보니, 우리 코린트 병사들이 수인들을 먼저 공격했기에 수인들이 반격한 것이라고 합니다."

데마르는 오탈리마와 테오아칸의 수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감히 수인들이 반격이라니!"

"놈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수석 원로인 데스몬드가 마법사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수인들은 열등한 존재요. 우리가 다스리는 존재지. 그들은 도구도 만들지 못하고, 생김새가 가축이나 짐승과 다름없소.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명 수준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오."

"그렇다고 그들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허허! 데마르 원로는 그게 문제요. 모든 것은 우리 거신들과 코린트 왕국을 위해서 하는 일이오. 수인들이 기어오르면 우리에게 마석과 괴수를 잡아 오겠소?"

"하지만 전에 알리사님의 말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괴수들이 옵니다. 우리 선조인 이데아 제국을 멸망시킨 그 괴수가요!"

데스몬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오래된 신화일 뿐이오. 그리고 설사 괴수가 온다고 해도 이곳은 천혜의 요새요. 우린 놈들을 막을 수 있소."

내가 나섰다.

"그럼 수인들은 다 죽게 될 겁니다."

내가 난간 위로 올라가자, 원로들과 마법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마르가 날 가리켰다.

"이분은 인간들의 왕이요! 우리와 협상을 하기 위해 차원 균열을 넘어왔습니다."

데스몬드가 날 노려봤다.

"인간들의 왕이라고?"

183. 사고사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183. 사고사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공왕이긴 하지만, 그래도 왕은 왕이지.

"타일러 빈스라고 합니다."

"허! 거신어를 하는군."

난 거신 선조들의 후예임을 밝히고, 저쪽 차원의 장벽에 대해 다시 한번 말했다.

대부분은 알리사에게 들었던 말이라, 별 감흥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지금 이곳 차원에 그 괴수들이 온 것입니다. 벌써 수인들의 거점 도시와 개척촌 수십 개가 사라졌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수인들이 다 죽으면 괴수 부산물을 어떻게 얻으려 하십니까? 그리고 수인들 다음엔 코린트 왕국 차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진짜 괴수가 온다고 해도 우린 스스로 지킬 수 있다. 한동안 힘들긴 하겠지만, 버티다 보면 괴수들은 물러갈 것이고, 그때 다시 나가면 된다."

"그보다 수인들과 힘을 합쳐 괴수를 막는 게 더 쉽지 않습니까?"

데스몬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외부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건 코린트의 오랜 전통이다."

"하지만 이번에 병력을 파견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그 병력으로 괴수들을······."

"그만! 그건 수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들을 설득하려던 알리사가 왜 포기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옛날처럼 마석과 괴수 부산물을 충분히 가져다줄 테니, 병력은 파견하지 마시오."

"건방진 놈! 인간들의 왕이라고 하기에 들어줬더니, 네깟 놈이 뭐라고!"

데스몬드가 호통을 쳤다.

"수인들은 우리의 노예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지배하고 우리 명령을 들으면 되는 것이지."

"맞습니다. 이번에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수인 수천 명을 죽여도 수백만 명이 있습니다. 본보기로 저들을 처형해, 두 번 다시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옳소!"

원로와 마법사들이 한목소리로 떠들었다.

난 데마르를 쳐다봤다.

"데마르 원로, 아무래도 더는 설득이 힘들 것 같소. 그만 밖으로 나가시오."

데마르 원로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앞으로 나갔다.

"여기 타일러 왕은 무서운 분이시오. 이 자리에서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전부 죽게 될 것이오!"

"뭐라? 저 쪼그만 인간이 우리를 모두를 죽인다고?"

"내 마법 한 방이면 형체도 남지 않을 텐데? 푸하하!"

"크하하하!"

"하하하하!"

데스몬드와 마법사들은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데스몬드는 마법사들을 진정시키고, 데마르를 노려봤다.

"데마르, 당장 나가라! 넌 이제 코린트의 원로가 아니다. 그리고 코린트 왕국에서 영원히 추방하겠다."

데마르는 고개를 흔들며 데스몬드를 쳐다보았다.

"당신과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입니다. 아버지."

뭐야? 데스몬드 수석 원로가 아버지였어?

데마르는 몸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 아버지를 포기했다.

아버지가 먼저 포기하긴 했지만.

"그리고 저 인간의 왕도 사로잡아라! 볼모로 삼아야겠다."

"네!"

마법사 셋이 내게 다가왔다.

'웨슬리, 다들 준비시켜!'

'네! 주군!'

난 아까 회의실 문이 닫힐 때부터 내 마법인형들과 기간트를 회의실 밖에 차례로 꺼내 놓았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안에 드라우켄하고, 20미터의 대군주와 거대 병정개미, 괴조인형까지 모든 괴수인형을 풀 생각이었다.

***

문밖을 나선 데마르 원로는 깜짝 놀랐다.

입구의 거신 기사와 경비는 모두 쓰러져 있었고, 수십 기의 기간트가 회의실 외부에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어디서 이 많은 기간트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일러 대공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주군의 명이다! 안에 있는 거신들을 모두 죽여라!]

[가자!]

기이이잉! 쿵쿵쿵!

50기의 기간트가 안으로 들어갔다.

쾅! 콰콰쾅!

"뭐, 뭐야?"

"막아!"

"괴수다!"

"으아아악!"

펑! 화르르르!

거신 마법사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데마르는 원로원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곳엔 알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설득은 불가능했군요."

"하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신들은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며 살았기에 눈과 귀를 닫고 있습니다. 그저 저들의 명복을 빌어줄 수밖에요."

콰아앙! 화아아아!

원로원 건물 위쪽 돔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연기와 불꽃이 치솟았다.

엄청난 화염이 원로원을 덮쳤다.

그렇게 한동안 시끄럽더니,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타일러가 밖으로 나왔다.

"휴우! 다 끝났습니다. 시신은 모두 불태웠으니, 증거는 남지 않을 겁니다. 사고사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코린트 왕국의 거신들은 모두 당신 책임입니다. 데마르 원로."

"하아! 알겠습니다. 타일러 대공 저하."

데마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폭발 소리와 검은 연기를 보며, 거신 기사들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곧장 데마르 원로에게 다가왔다.

"데마르 원로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거신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원로원 안에서 큰 사고가 있었소. 누군가 마법을 잘 못 사용해 폭발한 것 같소."

"그럼 다른 원로분들은?"

"스텐 뱅커스 원로님을 뺀, 수석 원로님과 9명의 원로님은 폭발로 모두 죽었소. 그리고 안에 있던 마법사들도 다 죽었소."

"네? 그럼 우린 이제 어찌합니다."

"일단 위험하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주변을 막고, 병사들과 주민들을 진정시키시오."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불에 타고 있는 원로원을 통제했다.

그리고 데마르의 말을 듣고, 마탑 전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의 제자들과 그와 함께 코린트 왕국을 떠나기로 했던 마법사들도 달려왔다.

그들은 원로원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 경악하면서도 한쪽으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데마르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화염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럼 우린 먼저 가보겠습니다. 잘 수습하십시오."

데마르가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코린트 왕국은 이제 타일러 대공 저하와 함께할 겁니다."

"고맙소."

난 알리사와 정문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뱅커스 가문의 대장장이 거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휴! 결국, 저리되었군."

스텐 뱅커스는 원로원 위로 치솟는 화염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저들은 거신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희생한 거니까."

"상심은 무슨 어서 가지! 난 그 비공정에 타고 싶어 죽겠군."

"그런데 왜 여섯뿐이지? 트레이시도 안 보이고?"

"가져갈 공구와 짐이 너무 많아! 트레이시와 다른 대장장이들은 거대 수레에 비행석을 장착해, 그 안에 짐을 싣고 뒤따라 오기로 했네."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여섯 명의 대장장이를 데리고 문을 나서 비공정이 있는 절벽 길로 이동했다.

***

[테오아칸 왕국]

비공정이 내리자 수왕 라이진과 수인들이 몰려왔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잘 됐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스텐 뱅커스와 대장장이 거신들이 비공정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코린트 왕국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오오! 대단 합시다!"

"타일러 대공께서 거신들을 설득하셨다!"

"와아아아!"

"타일러 대공 만세!"

라이진과 수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인들의 사기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졌다.

코린트 왕국의 거신이 적이 아니라 아군이 됐었기에 이곳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스텐과 대장장이들은 일단 이곳에 지어진 기간트 공방으로 안내해 주었고, 짐을 풀게 했다.

"허! 정말 대단하오! 거신들을 설득하고, 거신 대장장이까지 데리고 오다니요."

마르틴 국왕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사실 설득은 실패했습니다."

"뭐요? 그럼?"

"원로들과 대다수 마법사를 모두 죽였습니다."

"허! 결국, 일이 그리됐군."

마르틴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며칠 동안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그것이 거점 도시 세 곳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비공정 수색팀에서 알려 왔소."

"놈들의 공격이 시작됐군요."

난 라이진 수왕에게 다가갔다.

"이곳 마석 광산 말입니다."

"네."

"혹시, 광산에서 바위를 깰 때,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드워프들도 광산에서 바위를 부술 때 폭탄을 사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 차원이 망하면서 폭탄을 만들 물질을 더는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대 이데아 제국의 거신들도 폭탄을 이용했고, 이곳의 수인들도 마석 광산을 개발했으니, 폭발물이 있을 것 같았기에 물은 것이다.

라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사용합니다."

"그래요?"

눈이 똥그래졌다.

"하지만 워낙 불안정하고 사고가 자주 발생해 지금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 폭발물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희 도시 외곽에 동굴 창고가 있습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일단 좀 보죠."

난 라이진과 폭발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곳에 있는 걸 몰랐다니.

물론 이데아 발굴지에 있는 거신 광부들이 쓰던 폭발물이 훨씬 더 위력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까지 갈 시간이 없었다.

언제 괴수들이 이곳을 공격할지 모르니까.

난 조심스럽게 폭발물을 드워프 공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포병대장 하버 족장에게 폭발물을 안정화하고, 포탄에 폭발물을 넣어 위력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폭발물은 우리 전문이다! 맡겨다오. 타일러여!"

"터질 수 있으니, 특히 조심하고."

"알았다."

그렇게 하나둘 괴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마르틴 국왕이 아리칸 왕국의 기간트 100기를 더 데리고 왔다.

괴수의 공격으로 오아시스 도시 왕국인 나바후가 멸망했고, 수천 명의 수인이 테오아칸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었다.

나바후를 공격한 괴수들의 병력이 10만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는 병력이 부족하다며 기간트를 더 끌고 온 것이다.

그래도 부족했기에 오크 해병대와 발레리온을 지키는 최소한의 기간트만 남기고, 하얀 악마 기사단과 발루아 기사단의 기간트들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영웅 기사들과 트라스의 개 기사단에게 모두 오리지널 기간트를 지급했다. 숫자는 아직 30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발레리온의 최정예 오리지널 기간트 군단이었다.

"모래 폭풍이다! 모래 폭풍이 몰려온다!"

사막에서 거대한 모래 폭풍이 휘몰아쳤다.

"저건 모래 폭풍이 아니야! 괴수 군단이 오는 거야!"

"네?"

난 알 수 있었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전투태세!"

"괴수가 온다!"

"서둘러라!"

기간트들이 이중 성벽 사이에 배치되고, 양쪽 성벽 위엔 수인족 전사들과 궁수들이 배치됐다.

성벽 바로 위쪽 상공엔 20척의 비공정이 대기 중이었고, 비공정엔 엘프 궁수들과 드워프제 대포가 겨눠지고 있었다.

난 도시 안에서 작은 비공정에 타고 있었고, 내 아래쪽엔 거대 병정개미 포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자, 작은 괴수들 사이로 20미터 크기의 대군주가 보였다.

모두 여섯 마리의 대군주.

그리고 가장 뒤쪽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거대한 괴수가 보였다.

엘프 차원에서 우릴 전멸시킬 뻔했던, SS급 괴수이자 100미터 길이의 거대 지네 괴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지네 괴수를 타고 있는 SS급 거신 괴수.

그는 한때 제국의 위대한 열두 기사였다가 변이한 괴수였다.

지금은 이곳 세상을 멸망시킬 괴수 군단장이었고.

'SS급 괴수가 둘에 S급 괴수가 여섯이라······.'

그리고 괴수 군단의 숫자는 적어도 수십만은 되어 보였다.

에테나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저놈들은 우리 차원을 멸망시킨 괴수들이에요!"

나도 안다.

한번 싸워 봤기에 놈들의 무서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았다.

역시 저 괴수들은 다른 차원을 이동하면서 세상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중엔 장벽 너머에도 차원 균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것들을 막지 못하면, 다음은 분명 내 영지가 있는 장벽 너머 세상이 되겠지.

"놈들이 멈췄어요!"

수십 만에 달하는 괴수 군단이 일제히 멈췄다.

거대한 사막은 그야말로 괴수 반 모래 반이었다.

거대 지네에 타고 있던 괴수 군단장이 손을 뻗자, 가장 오른쪽에 있던 대군주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대군주는 3미터의 전갈 괴수와 15미터 크기의 거대 철갑딱정벌레 괴수를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허! 저놈들을 다 잡으면 3레벨은 올라가겠어······.'

"끼이이이아!"

군단장이 괴성을 지르자, 검은 물결이 사막을 뒤덮으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의 전갈 괴수가 몰려옴이다.

놈들은 차원을 점령할 때마다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놀고 있진 않았다.

"하버 족장! 대포를 쏴라!"

"타일러여! 알았다."

거대 병정개미 위에 6대의 마나 대포가 발사를 준비했다.

추가로 내 인형의 집에서 일개미 꼭두각시들이 6개의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두 마리의 일개미가 1기의 마나 대포를 탑재한 수레 끌었다.

수레를 바닥에 고정하고 대포를 이동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총 12기의 대포가 전방을 겨눴다.

그리고 오늘 신형 포탄의 위력을 선보일 작정이었다.

184. 테오아칸 방어전(1).

184. 테오아칸 방어전(1).

전갈 괴수가 사막을 새카맣게 물들이며 달려왔다.

대포의 조준은 이미 끝났다.

그때 하버의 목소리가 울렸다.

"포탄을 장전하라!"

"포탄 장전!"

드워프들이 커다란 포탄을 마나 대포 후미에 밀어 넣었다.

철컹!

그러자 사수가 차례로 포신과 후미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발사 손잡이를 잡았다.

"발사 준비 완료!"

이제 10초 안에 발사해야 한다.

하버는 서둘지 않았다.

망원경으로 사막 위에 자신이 쌓아 놓은 작은 돌담과 깃발을 쳐다봤다.

2km 지점.

'7, 6, 5, 4······.'

이제 막 괴수가 돌담과 깃발을 무너트렸다.

"발사하라!"

"발사!"

철컥!

사수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위이이잉!

퍼어엉! 퍼엉! 퍼엉!

12대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고생했던가.

하퍼는 이를 악물었다.

콰앙! 콰앙! 콰앙!

"쿠엑!"

"쿠아아악!"

화아아! 화아아아아아!

거센 폭발과 함께 화염과 파편, 모래가 사방으로 퍼졌다.

기존 폭발력에 수인족의 폭발물이 추가됐다.

포탄 한 발의 위력으로 10여 마리의 전갈 괴수를 한 번에 휩쓸었다.

이는 전보다 4, 5배나 폭발력이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모래사막, 엄폐할 곳이 없었다.

"끼이이아!"

화염을 뚫고, 전갈 괴수가 다시 달려온다.

"장전하라!"

"장전하라!"

드워프들과 인간 사수가 순식간에 장전을 완료했다.

"발사 준비 완료!"

철컥!

"드워프들이여! 다시는 괴수들에게 고향을 빼앗기지 마라! 발사!"

펑! 퍼펑! 펑!

쾅! 콰쾅! 쾅!

"장전하라! 서둘러!"

발레리온의 포병대장이자, 드워프 족장인 하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드워프의 세상은 지키지 못했다.

그랬기에 수많은 드워프가 죽었다.

전우도, 자신의 가족도 그리고 친구도.

"준비된 포대는 계속 발사하라! 이들에게 우리의 아픔을 느끼지 않게 하라!"

펑! 퍼퍼펑!

쉴새 없이 포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전갈 괴수들을 전부 막을 순 없었다.

놈들은 포화를 뚫고 기어이 300미터 지점까지 밀고 올라왔다.

하버 족장은 병정개미 위에 설치된 무전기를 들었다.

치직!

"전 함대 발포하라!"

"전 함대 발포!"

펑! 퍼퍼퍼퍼퍼펑! 퍼펑!

20척의 드워프 비공정에서 320개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쾅! 콰콰콰콰쾅!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쿠악!"

"쿠에엑!"

전갈 괴수들이 포탄에 구멍이 뚫리고, 다리가 날아가고, 껍질이 함몰되며 쓰러져갔다.

원래 한쪽 선체에 8개의 대포만 설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반대쪽 갑판에 대포를 상부 갑판으로 올려 갑판 난간에 설치해서 비공정 한 척에 16개의 대포를 쏠 수 있었다.

"쉬지 말고 쏴라! 드워프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발사!"

펑! 퍼퍼펑!

드워프는 필사적으로 괴수들을 성벽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전갈 괴수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기에 죽어가면서도 꾸역꾸역 밀려와 결국, 해자 앞에 도착했다.

"수인들이여! 우리의 도시는 우리가 지키자! 화살을 쏴라!"

"쏴라!"

3미터의 수인족 궁수들이 성벽 위에서 일제히 화살을 쐈다.

탱! 태탱! 푹! 푹!

"꾸아악!"

전갈은 E등급 괴수!

수인들의 화살에 제대로 맞으면 전갈 괴수가 쓰러졌지만, 단단한 껍질에 튕겨 나가는 화살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들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전갈 괴수들이 해자를 건너기 시작했다.

곧 100미터 넓이의 넓은 해자를 전갈 괴수들이 가득 메웠다.

"지금이다! 괴수 기름을 부어라!"

"기름을 부어라!"

쏴아아아아!

콸콸콸콸!

"불을 붙여!"

화아아아아!

"끼이아악!"

"쿠에에엑!"

괴수들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지금 뿌려진 것은 대수림의 괴수를 잡아 얻은, 화력 좋고 비가와도 잘 꺼지지 않는 괴수 기름이었다.

해자에 뿌려진 기름이 불타오르며 전갈 괴수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불에 탄 전갈 괴수의 껍질이 곧 붉게 익어갔다.

"아주 잘 타는군."

난 지휘 비공정 난간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테오아칸의 성벽은 견고하고 해자까지 있었다.

자신이라면 차라리 길을 멀리 돌아서 후미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괴수들은 오로지 전진밖에 없었다.

굳이 길을 돌아갈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병력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래도 벌써 수천 마리는 죽인 것 같았다.

전갈 괴수는 불에 약해 해자로 뛰어들지 못했고, 집게발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버! 해자 앞에 놈들이 몰려 있다! 싹 쓸어버려!"

난 마석 통신기로 하버 족장에게 명령했다.

"알았다. 타일러여!"

하버는 드워프 비공정에 무전기로 명령했다.

"투척용 포탄을 해자 앞쪽에 떨어트려라!"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비공정 10척이 날아왔다.

그리고 밑에 뚫린 구멍으로 포탄을 떨어트렸다.

휘익! 휘이익!

쾅! 콰콰콰쾅!

그러자 해치 앞쪽에 몰려 있던 전갈 괴수 수천 마리가 삽시간에 불에 타올랐다.

"큰 괴수가 온다!"

망원경으로 보자, 15미터 크기의 거대 철갑딱정벌레 괴수가 이제야 마나 대포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놈들은 전갈 괴수처럼 빠르지 않았다.

펑! 펑!

콰앙! 콰앙!

마나 대포에서 쏘아진 포탄이 철갑딱정벌레 위에 직통으로 맞았다.

쾅! 화르르르르!

'허! 멀쩡하군!'

몇 배나 강화된 포탄에도 딱정벌레 괴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화염이 몸을 덮치고, 포탄 파편이 수십 개가 박혔지만, 워낙 단단하고 두꺼운 철갑 때문에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약점은 있었다.

포탄이 바로 옆에 터지자, 한 놈의 몸이 뒤집혔다.

그런데 다리가 짧아 다시 뒤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포탄이 배에 떨어지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죽었다.

놈들의 약점은 밑바닥이었다.

포탄을 계속 쏘았지만, 수백 마리의 철갑딱정벌레를 전부 막을 순 없었다.

놈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이동했고 기어이 해자까지 도착했다.

'설마, 저 불길을 뚫고 올까?'

딱정벌레 괴수는 불에 강했다.

죽은 전갈 괴수의 시체를 밀어내더니 해자를 건넜다.

그리고 성문 앞에 섰다.

서걱! 서걱!

딱정벌레 괴수 두 마리가 날카롭고 뾰족한 턱으로 성문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끄어어어어!"

뒤쪽에서 대군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다른 철갑딱정벌레 괴수들이 아직도 불타고 있는 해자를 몸으로 덮으며 일자로 섰다.

놈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다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전갈 괴수들이 그 몸을 타고 성문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치직!

"성문이 곧 부서질 것 같습니다!"

성벽 위에 통신병에게 다급한 무전이 들려왔다.

에테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거에요."

"괜찮아! 기간트를 믿고! 계속 전갈 괴수를 줄이라고 해!"

"네!"

뒤에서 계속 마나 대포를 쏘고, 하늘에선 드워프 포탄이 쏟아졌다.

3미터나 되는 수인들이 쉴새 없이 화살을 쏘자, 전갈 괴수는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들었다.

콰앙! 콰아앙!

쿠우앙!

성문 한쪽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틈으로 딱정벌레 괴수와 전갈 괴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기이잉! 쿵! 쿵!

[우리가 놈들을 막는다!]

[죽여라!]

기간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쾅! 푸푹!

"끼아악!"

"쿠엑!"

3미터의 전갈 괴수는 기간트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기사는 아리칸의 정예로 베테랑이었고, 대부분 비숍급 기간트 이상의 거대 기체뿐이었다.

기간트가 발로 밟고 방패로 찍어도 전갈 괴수는 힘없이 죽었다.

[오리지널 기간트는 거대 괴수를 맡아라!]

[네!]

마르틴 국왕의 퀸급 기간트 우가스가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콰앙! 쩌억!

그 단단한 딱정벌레 괴수의 허리를 낫으로 그어 반으로 잘라버렸다.

우가스는 A등급 괴수도 한 방에 처리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등급이 비숍급 기간트는 딱정벌레 괴수를 공격해도 등에 자국만 날 뿐, 단번에 죽이진 못했다.

마르틴이 소리쳤다.

[이 거대 괴수는 속도가 느리다! 창을 가진 기간트가 놈들을 뒤집어라!]

[가자!]

팟! 팟!

창대로 철갑딱정벌레의 배와 바닥 사이를 찌르고 창을 들어 올리자, 괴수가 뒤집혔다.

그다음엔 매우 쉬웠다.

[죽어!]

푹! 푹!

괴수의 밑바닥 창과 검이 박혔다.

철갑딱정벌레 괴수는 다리가 매우 짧기에 턱만 조심하면 됐다.

'이거 잘하고 있군!'

기간트들이 안으로 들어온 전갈 괴수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었다.

"끄어어어!"

그런데 대군주가 소리를 지르자, 전갈 괴수들이 갑자기 기간트에게 달려들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두 번째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기간트가 지나가지 못하게 무기를 휘둘러보지만, 놈들의 숫자는 많았기에 순식간에 두 번째 성벽 밑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닥부터 한 마리씩 엎드려 그 위를 타고 성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쿠훌린! 오크 차례다!"

내 무전을 받은 쿠훌린이 커다란 도끼를 들었다.

"쿠오크! 이제 오크 차례다!"

"쿠오크! 괴수에게 복수하자!"

"쿠오크! 쿠오크!"

두 번째 성벽 위에는 강습 갑옷을 입은 오크 해병대 오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수인족 전사들이 긴 창과 화살을 들고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끼이아!"

다다다닥!

"끼릭?"

전갈 괴수가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부아앙! 콰직!

"퀘엑!"

쿠훌린의 도끼가 괴수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쿠오오오오오크!"

"쿠오크! 죽여라!"

오크 해병들이 일제히 성벽 위로 올라온 전갈 괴수를 공격했다.

그들의 도끼는 사납고, 칼은 날카로웠다.

게다가 인정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오크는 지금 자신들의 차원을 멸망시킨 괴수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인족 전사들도 기다란 창으로 전갈 괴수를 찌르고 성벽 밑으로 떨어트렸다.

궁수들도 차분이 아래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생각보다 수인들이 잘 싸우는군.'

전투력은 낮지만, 강습 갑옷을 입지 않은 오크보단 강했다.

그리고 노인과 아이들은 후방 도시와 마을로 피신하였고, 현재 이곳엔 싸울 수 있는 수인족만 남았고, 그 숫자가 3만에 달했다.

[인형술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71 -> lv.72)]

'뭐야? 진짜 레벨이 올랐어!'

난 1년 전 여왕개미를 잡고 71레벨이 됐고, SS급 헌터로 올라섰다.

그 이후로는 대수림의 괴수를 잡아도 거의 경험치가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레벨이 더 오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 자동인형이 탄 50기의 기간트가 나와 가까운 중앙에서 괴수들을 잡고 있었기에 경험치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괴수들은 모두 다른 차원의 괴수였기에 경험치가 몇 배나 높았다.

'벌써 괴수 숫자가 절반은 줄었군.'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데, 벌써 밀릴 순 없지.

5만은 되어 보이던 전갈 괴수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지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었고.

"대군주가 움직입니다!"

에테나의 말에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폈다.

전갈 괴수와 철갑딱정벌레 괴수를 지휘하던 대군주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 보인다는 뜻이었다.

엘프 차원에서도 자기 병력이 거의 떨어질 시점에 대군주가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그때 대군주는 죽어 현재 내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고.

대군주 옆에는 높이가 비슷한 20미터짜리 풍뎅이처럼 생긴 거대 괴수 십여 마리가 함께 있었다.

모두 A급 괴수였고, 딱정벌레 괴수보다 강해 보였다.

"모두 힘을 내라!"

놈들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물론 이번이 끝나도 또 다른 괴수가 오겠지만.

"하버! 작은 괴수를 계속 줄여라!"

"알았다! 타일러여!"

하버는 마나 대포의 눈금을 조금씩 낮추며 계속해서 달려오는 전갈 괴수만을 공격했다.

"끄어어어!"

대군주가 첫 번째 성벽 가까이 다가왔다.

놈은 괴이한 거대 몽둥이를 휘두르며 전장을 지휘했다.

거대 풍뎅이 괴수가 해자로 뛰어들어 길을 만들고, 전갈 괴수가 풍뎅이를 타고 해자를 건너 첫 번째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전갈 괴수가 순식간에 100미터 높이의 거대 성벽 위로 올라와 수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두 개의 성벽 위는 지금 혼전이 벌어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꾸엑!"

"크아악!"

첫 번째 성벽 위에 수인 전사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수인들의 숫자가 너무 빨리 줄고 있어!'

괴수와의 전투였다.

피해가 없을 순 없었다.

다만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수인족 전사들에게 튼튼한 갑옷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에테나! 첫 번째 성벽에 거신병을 투입해!"

"네!"

에테나가 마석 무전기를 들었다.

"1군단 거신 병사들을 첫 번째 성벽으로 파견해라!"

벌써 밑천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수인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후미에서 30척의 비공정이 날아왔다.

비공정은 첫 번째 성벽 위에 새로 만든 탑승장 옆에 붙었다.

그리고 해치가 내려갔다.

185. 테오아칸 방어전(2).

185. 테오아칸 방어전(2).

비공정 안에 있던 거신 기사가 외쳤다.

"코린트 왕국의 병사들이여! 괴수들을 죽여라!"

"공격하라! 와아아아!"

"어서 내려!"

쿵! 쿵! 쿵! 쿵!

거신 병사들이 우르르 비공정에서 내려 전갈 괴수를 공격했다.

500명이나 되는 거신 병사들이 투입되자, 성벽 위에 전갈 괴수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성벽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에 기간트나 거신 기사가 싸우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5미터의 거신 병사들이라면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거신 병사들과 수인들이 힘을 합치자, 성벽 위에 전갈 괴수를 잘 막고 있었다.

수송용 비공정은 다시 후방으로 날아갔다.

"마나 대포, 포격 중지!"

"포격을 중지하라!"

마나 대포의 사정거리는 500m에서 3km 정도였다.

정확도와 효율이 좋은 거리는 2km였고, 포격을 중지하라는 이유는 500m 내에 더는 전갈 괴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좋아! 드디어 첫 번째 웨이브의 끝이 보인다!'

대군주가 해자를 건너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끄어어어!"

거대 풍뎅이 괴수도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아리칸의 기사들이여! 우리가 저놈들을 맡는다!]

[가자!]

마르틴 국왕의 우가스와 아리칸의 기간트가 중앙으로 몰려와 거대 괴수들을 상대했다.

기이잉! 쿠쿠쿵!

[죽어라!]

부아앙! 태앵!

"끄어어?"

대군주가 우가스의 공격에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놈은 왠지 당황한 것 같았다.

대군주는 20미터의 거신 괴수였기에 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오리지널 기간트 여럿이 덤벼야 했다.

과거에 엘프 차원에서도 대군주를 잡기 위해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와 일반 기간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겨우 잡았다.

하지만 우가스는 13미터의 퀸급.

힘이 남달랐다.

게다가 우가스를 조종하는 기사는 현존하는 기간트 기사 중에서 제일 강하다는 마르틴 국왕이었다.

[내가 놈을 맡겠다! 거대 괴수를 처리해라!]

[네!]

기이잉! 쿵! 쿵!

마르틴 국왕의 우가스가 다시 달려들었다.

쉐에엑! 캉!

낫이 휘둘리자, 대군주가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막아섰다.

주변의 거대 괴수는 크루세이더 기사단의 기간트들이 달려와 처리하고 있었다.

'허! 손에 땀을 쥐게 하는군.'

우가스와 대군주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대군주가 살짝 밀리는 것 같았지만, 놈이 정신을 차리고 거대 몽둥이를 휘두르자, 우가스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 S등급 괴수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웨슬리! 가서 마르틴 국왕을 도와라!'

'네! 주군!'

자동인형들을 지휘하던 웨슬리가 자신의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 비브르에 타고 달렸다.

자신의 원수를 갚고 다시 찾아온 기간트.

마법인형이 되기 전까지 쭉 타던 모델이었기에 자신의 손발과 같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고맙소!]

웨슬리가 마르틴 국왕과 힘을 합치자, 금방 유리하게 흘러갔다.

두 오리지널 기간트가 대군주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야!]

태앵!

우가스의 거대한 낫을 대군주가 몽둥이로 막았다.

그 순간.

기잉! 쿵쿵!

촤악!

비브르가 검으로 대군주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끄어어!"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대군주가 거대 몽둥이로 낫을 밀어내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비브르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부아앙! 콰앙!

웨슬리는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옆으로 기체를 굴려 피했다.

[어딜 보는 것이냐!]

쉐엑! 촤악!

날카로운 낫이 대군주의 어깨에 박혔다.

"크아아!"

대군주가 몸을 돌리며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마르틴 국왕의 기체는 이미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그사이 일어선 비브르가 달려들어 대군주의 등에 검을 찔렀다.

쩌억! 푸욱!

"쿠아아아!"

검이 절반이나 박혔다.

대군주가 몸을 돌리려 하자, 이번엔 마르틴의 우가스가 낫을 휘둘렀다.

콰앙!

대군주가 몽둥이로 막았다.

비브르가 검을 더 깊게 찔렀다.

고통에 휩싸인 대군주가 몸을 틀며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주먹에 맞은 비브르가 날아가 20미터 뒤에 떨어졌다.

쿠우웅!

충격이 컸으나, 내 마법인형은 고통을 모른다.

다시 벌떡 기체를 일으켰다.

[으아아!]

웨슬리가 기합을 내지르며 비브르 왼쪽 발목에 붙어 있는 단검을 꺼내더니 다시 달렸다.

웨슬리가 자동인형에서 분신인형으로 업그레이드된 후로 그의 몸놀림은 거의 생전 실력까지 올라갔다.

아베르크 제국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웨슬리 슈나이더의 실력과 마르틴 국왕의 실력이 더해지자, 다시 대군주를 몰아쳤다.

그리고!

취링! 촤악!

"끄억!"

우가스의 낫이 대군주의 머리를 잘랐다.

쿵! 쿠쿵!

대군주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크아아아!"

"끼이이아!"

대군주가 죽자, 남아 있는 괴수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건 괴수가 그저 혼란스러워 발광하는 것이었다.

지휘를 받는 괴수가 위험한 것이지, 머리가 없는 괴수 군단은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거대 괴수들은 아리칸의 기간트들이 거의 처리한 상태였기에 남은 괴수들은 차례로 손쉽게 처리했다.

"우리가 괴수를 막았다!"

"와아아아아!"

겨우 한 번의 웨이브를 막은 것이었지만, 수인들의 함성은 컸다.

"부상자를 후방으로 옮겨라!"

[마석 배터리를 새로 갈아라!]

[다음 전투를 준비해라!]

난 아까부터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사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다른 괴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은 누가 올 것이냐?'

"끄아아아아!"

SS급 군단장 괴수가 후미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또 다른 대군주가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엔 아주 익숙한 놈들이었다.

"비행 괴수다! 비행 괴수가 온다! 준비해!"

가장 까다로운 괴수인 메뚜기 괴수가 움직였다.

놈들은 이 군단의 유일한 비행 괴수였다.

"끄어어어!"

대군주가 소리치자, 메뚜기 괴수들이 일제히 날개를 파닥거렸다.

파드드득! 파드드드드득!

한눈에 봐도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은 메뚜기 괴수가 날개를 흔들자, 그 바람이 이곳까지 날아오는 것 같았다.

"비공정을 뒤로 물려라!"

"궁수대를 준비해라!"

"수인 장창병들을 배치하라!"

수인전사들이 테오아칸 곳곳에 배치됐다.

이미 엘프 차원에서 메뚜기 괴수들과 싸워 봤기에 준비는 해 놓았다.

놈들은 5미터 크기의 괴수로 비행이 가능했기에 이제 성벽이 아니라 전 도시가 전투 지역이었다.

난 거대 병정개미와 개미 포병대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이번 전투엔 포병대는 필요 없었다.

괴수들은 하늘을 날아서 올 테니까.

"놈들이 온다!"

"전투를 대비하라!"

난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번만 잘 먹으면 된다!'

메뚜기 괴수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성벽 앞으로 다가왔다.

"발사 준비!"

수인족 궁수들이 화살을 겨눴다.

"기다려라!"

이미 메뚜기 괴수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왔지만, 발사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더 기다려!"

메뚜기 괴수들이 순식간에 첫 번째 성벽을 지났고, 두 번째 성벽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금이다! 화살을 쏴라!"

"발사!"

파파파파팟!

쏴아아아아!

양쪽 성벽 위에 있던 수인족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푹! 푸푸푹!

"끼이악!"

"까악"

쿵! 쿠쿠쿵!

선두에서 날아오던 메뚜기 괴수들이 화살에 맞고,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놈들의 약점은 뒤쪽 배였다.

머리와 가슴은 단단해 괴수 부산물로 만든 화살촉도 박히지 않았다. 하지만 배 부분은 연한 편이었기에 화살에 취약했다.

전에 엘프 차원에서 싸워 봤기에 그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날개도 약점이었는데, 날개가 찢어지거나 큰 구멍이 나면 놈들은 추락했다.

"배와 날개를 맞춰라!"

"쉬지 말고 쏴라!"

쏴아아아! 푸푸푹!

수인족 궁수들의 활약으로 상당히 많은 메뚜기 괴수가 떨어졌다. 하지만 괴수는 아직도 많았다.

"쿠아아악!"

착! 차차착!

메뚜기 괴수가 성벽을 넘어 땅에 내려앉았다.

"창을 겨눠라!"

"하아!"

수인족 장창병들이 10미터에 달하는 긴 창을 겨누며 접근했다.

키가 3미터나 되는 수인족이었지만, 10미터에 달하는 길고 묵직한 창을 들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메뚜기 괴수의 접근을 막기 위해선 이 정도 길이는 돼야 했기에 그동안 꾸준히 연습하고 단련했다.

"공격하라!"

"와아아아!"

5명이 한 조가 된 장창병들이 메뚜기 괴수를 공격했다.

메뚜기 괴수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쾅! 콰쾅!

장창이 2개가 부러졌고, 2개는 힘에 밀려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하나가 메뚜기 괴수의 눈에 박혔다.

"끼이아!"

메뚜기 괴수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또 다른 조가 메뚜기 괴수의 배를 향해 장창을 찔렀다.

푹! 푸푸푹!

"쿠에엑!"

배가 뚫리고, 내장이 쏟아져 나오며 메뚜기 괴수가 쓰러졌다.

순식간에 모두 내려앉은 메뚜기 괴수의 공격에 테오아칸 전체가 전장이 됐다.

잘 막은 수인들도 있었지만, 메뚜기 괴수의 턱에 몸이 잘리고 강하고 긴 뒷발에 찔려 죽은 수인들도 많았다.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행히 성벽 위는 거신병과 오크 해병들이 있었기에 꽤 효과적으로 막았고, 기간트들은 메뚜기를 손쉽게 처리했다.

문제는 테오아칸 안쪽에 내려앉은 괴수들이었다.

그 숫자가 너무 많았기에 수인들만으론 벅차 보였다.

"괴수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창을 겨눠라! 화살을 쏴!"

곳곳에 궁수들이 괴수의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움직임이 둔해지면, 창으로 찔러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테오아칸의 대다수 나무 건물들은 이미 다 헐어버린 상태였고, 왕궁과 기간트 공방, 그리고 벽돌로 지은 튼튼한 집들만 남겨 놓았다.

이건 다 메뚜기 괴수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이야! 후방의 수인들을 모두 투입해!"

"네!"

테오아칸의 후문 성문이 열리며, 또 다른 수인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탈리마 왕국의 크로카일 악어 수왕과 파충류 수인들이었다.

괴수들이 테오아칸 왕국의 근처 오아시스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쪽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창 대신에 도끼와 큰 칼을 들고 있었다.

"괴수들을 죽여라!"

"와아아!"

"올라타라!"

장창병 수인들이 앞을 막고, 파충류 수인들이 뒤에서 달려들어 메뚜기 괴수를 공격했다.

5미터 크기의 메뚜기 괴수였지만, 3미터의 수인이 몇 명씩 달라붙자 제압당하기 시작했다.

3천 명의 오탈리마 왕국의 수인이 합류하자, 성안 쪽도 조금씩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치가 3, 4배는 큰 거대 메뚜기 괴수와 대군주가 성으로 달려왔다.

놈들이 왔다는 것은 이번 웨이브도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얼마 남지 않았다!"

"괴수를 죽여라!"

수인족과 인간, 오크, 엘프, 드워프, 거신병이 모두 힘을 합쳐 괴수를 물리치고 있었다.

대군주와 거대 메뚜기들이 성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거대 메뚜기들은 대군주를 보호하고 있었다.

[저놈들은 우리가 처리한다!]

[가자!]

마르틴과 아리칸 기사들이 또다시 괴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웨슬리가 이끄는 자동인형 기간트 50기도 함께 달려들었다.

숫자가 오히려 많은 기간트가 괴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난 마르틴과 내 자동인형들을 믿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대군주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이제 어쩔 거냐?'

난 사막에 괴수들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이번엔 2개의 대군주가 움직였다.

그건 2개의 군단이 온다는 뜻이었다.

"끄어어어!"

"끄아아아!"

2개의 괴수 군단이 또다시 사막을 가득 메우며 달려들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에테나! 비공정을 모두 불러!"

"네?"

에테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머뭇거렸다.

"어서!"

"네!"

에테나가 무전기로 비공정을 불렀다.

그러자 후미에서 70척이나 되는 비공정이 곧장 날아왔다.

"이제 여기 지휘를 맡아!"

"타일러님! 제발 조심하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래도······."

난 지휘 비공정에서 뛰어내렸다.

"끼아아아아!"

괴조를 타고 앞으로 날아가 기간트에 타고 있는 자동인형들을 모두 인형의 집에 넣었다.

그리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자!"

내가 앞으로 나가자, 뒤쪽에 70척의 비공정이 따라붙었다.

우린 사막 위를 날며, 테오아칸으로 몰려가는 괴수들 위로 날아갔다.

이제 비행 괴수가 없었기에 놈들은 우릴 공격하지 못했다.

난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다.

우리 힘으로 저 많은 괴수 군단을 모두 막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벌써 피해가 상당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머리를 잡는 것이다.

SS급 군단장과 SS급 지네 괴수를!

우린 순식간에 지휘관들의 머리에 도착했다.

이곳엔 두 대군주도 함께 있었다.

"포탄을 떨어트려라!"

"마구 쏟아부어라!"

500명의 서리 오크 강습병들이 포탄을 던졌다.

휘익! 휙! 휙! 휙!

콰콰콰콰쾅! 콰아앙!

화아아아!

수척 개의 포탄을 괴수 군단장과 대군주 주변에 뿌렸다.

주변 일대가 화염에 뒤덮이며 작은 괴수들이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비행 괴수가 있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격당해 추락했을 테니까.

그리고 피해를 받으면서도 두 번의 웨이브 끝까지 이들을 내보이지 않고, 꼭꼭 숨긴 것은 다 이번 공격을 위해서였다.

군단장과 대군주들은 두 손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고, 거대 지네 괴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는데, 모두 타격이 거의 없어 보였다.

"지금이다! 거신 기사들을 내려라!"

비공정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암 드로운이 이끄는 거신 기사단 50명을 지상에 내렸다.

그리고.

[트라스의 개 기사단이여! 강하하라!]

[가자!]

기이잉! 쿵! 쿵!

마키아스 단장과 30명의 오리지널 기간트 군단이 강하했다.

"우리도 가자!"

마지막 비공정이 지상에 착륙하며, 알리사 엘가와 20명의 마법병단이 내렸다.

그사이 인형의 집에서 웨슬리와 자동인형 50명을 드워프 비공정에 나눠 태웠다.

그들은 비공정에 미리 배치해둔 기간트에 올라탔고, 지상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주변 괴수의 접근을 막고, 마법병단은 우두머리 괴수를 공격해라!"

그리고 난 드라우켄과 대군주, 그리고 괴수인형을 준비해 괴수 군단장 머리 위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