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0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4)

방 안은 화려했던 1층과는 다르게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였다. 귀족의 집무실이라고 하면 꼭 이럴 것 같은.

"아."

멜리나는 더 이상 이 방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왔냐?"

저 앞쪽에서 아벨이 손을 흔들었기 때문에.

"-!"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차지한 거대한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그 아래 놓인 의자에 앉은 그가 보였다.

"멜리나."

그의 입술이 움직여 제 이름을 발했다.

빳빳하게 깃을 살린 흰 셔츠와 광택이 흐르는 고급 원단으로 만든 조끼. 그 모든 것은 날 때부터 아벨을 위해 만들어진 듯 완벽하게 어울렸다.

"늦었네."

아벨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이지적인 그 모습은 흠잡을 곳 없는 귀족가 도련님 바로 그 자체였다.

"아, 아벨 도련님?"

멜리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햇빛을 받으며 서류를 응시하는 아벨이 너무 눈부셨다.

지난 오베스트 영지에서의 모습은 모두 잊혀지고, 지금 이 순간만이 멜리나의 망막에 새겨졌다.

"아...."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작 몇 주 만에 아벨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음산하게 일렁이던 낯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목소리에는 청년답지 않은 노련함이 깃들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아벨을 봤던 마지막 날, 어쩐지 그가 멀리 떠날 것 같다는 예감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 수도에 올라와 있을 줄은, 이렇게 거대한 건물의 주인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 안녕하세요."

멜리나는 일단 정신을 다잡고 허리를 숙였다. 손을 가슴 위에 얹자, 여전히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멜리나.'

계속해서 얼빠진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이쪽으로."

아벨은 멜리나의 인사를 들은체 만체 하며 손짓했다. 그런 모습은 여전히 그다웠다.

멜리나가 탁자 옆 의자에 앉자마자,

"키는 좀 컸나?"

아벨이 놀리는 듯한 말투로 묻자 멜리나는 발끈했다.

"컸어요!"

"그래? 그대로인 것 같은데."

"컸다니까요!"

아벨이 피식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킨 건 잘 가져왔겠지?"

그가 멜리나의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어...."

멜리나는 잠시 당황했다. 아벨이 앉는 순간, 훅 하고 나른한 향기가 끼쳐왔기 때문이다.

"멜리나?"

아벨이 재차 묻자 멜리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제대로 가져왔어요."

아벨을 향해 뻗어가려는 시선을 애써 배낭에 고정했다. 입구의 끈을 풀고 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벨이 의뢰한 물품인 만큼,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늘 몸에 끼고 다녔던 것이다.

그 사이 멜리나를 안내했던 여성이 조용히 걸어 와 아벨의 뒤에 섰다. 꼭 그를 보좌하는 듯한 태도였다.

"여기요."

멜리나가 자루를 꺼내자, 아벨이 턱을 까딱거렸다.

"꺼내 봐."

멜리나는 자루를 열고 그 속에서 보석을 몇 개 골라 내려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에메랄드 컷까지 성공했어요."

아벨이 보석을 하나씩 집어들곤 살펴보기 시작했다. 점수를 매기듯이 면밀한 시선이었다.

꿀꺽.

멜리나는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벨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가슴이 마구 콩닥거렸다.

"나쁘지 않군."

마침내 아벨이 모든 보석의 평가를 마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멜리나의 자루를 향했다.

"이게 끝은 아닐 것 같은데."

"...!"

제 속을 꿰뚫는 듯한 한 마디였다.

"사실은...."

멜리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진실을 털어 놓았다.

"너무 신이 나서 이런저런 컷을 시도해 보았어요...."

"이런 저런 컷이라면, 어떤?"

"마르퀴즈나 쿠션 컷도 따라해 봤어요. 광석의 종류에 따라서 굴절률이나 광채가 다르니까요."

처음엔 우물쭈물했으나, 어느 샌가 신이 나서 줄줄줄 말하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정말로 보석 세공에 진심이었다.

"그러다가 이 광석엔 이 커팅이 어울리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가 새롭게 커팅을 시도해 본 것도 있어요."

그 순간 아벨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원하던 먹잇감을 드디어 붙잡은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한 번 꺼내 봐."

"네? 하지만 남에게 보여줄 만한 수준은 아닌데...."

"얼른."

아벨의 채근에 멜리나는 마지 못해 주섬주섬 보석들을 꺼냈다. 웅얼웅얼 변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고 비웃으시면 안 돼요.... 그냥 연습 삼아 한 거에요. 아셨죠?"

"그건 내 마음이고."

"...."

차르르르.

멜리나가 꺼낸 보석들이 탁자 위로 흩어졌다. 아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보석 하나하나를 살폈다.

"이건...."

아벨의 옆에서 여성이 신음 같은 탄식을 흘렸다. 아벨과 멜리나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벨이 묻자 여성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좀, 놀라서요."

"왜."

"현재 수도에서 이 정도 커팅을 해낼 수 있는 세공사는 없을 겁니다."

잔뜩 긴장한 채 여성의 말에 집중했던 멜리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네?"

"멜리나 양의 나이가 아직 스물이 안 되었을 텐데.... 이런 섬세한 세공이라니요."

여성이 보석 중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보십시오, 이 휘광을. 이 정도 빛이 나오려면 굴절률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연마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여성의 손가락이 보석을 집어들고 천천히 돌렸다.

"이 섬광, 보이십니까? 보석의 크기에 따라 적절한 커팅을 정확하게 했을 때 발생되는 것입니다."

"어어...."

멜리나는 쏟아지는 칭찬에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닌데."

아벨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가 턱을 괴고는 멜리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난 멜리나가 해낼 줄 알았거든."

원작을 본 아벨에겐 별 의미 없는 발언이었으나, 듣는 멜리나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어, 어어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울컥, 뜨거워지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보석을 붙잡고 씨름하는 멜리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떠올랐다.

'두고 봐. 멜리나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보석 세공 장인이 될 거다.'

그 위로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아벨의 얼굴이 겹쳐졌다. 자신의 실력을 처음으로 믿어주고, 처음으로 응원해준 그가.

"...."

이 기분이 대체 무엇인지, 멜리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 하리라는 것이었다.

멜리나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조용히 모아쥐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입을 열었다간 떨리는 음성이 나올 것 같았다.

"멜리나."

아벨의 차분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네."

멜리나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이건 뭐지?"

고개를 들자, 아벨이 투명한 보석을 들고 있었다. 그가 의뢰했던 것 외의 보석이었다.

"그건 빛을 가장 많이 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거예요."

"패싯(보석의 면)이 총 몇 개가 나오는데?"

"음...."

멜리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대답했다.

"맨 위의 평평한 면까지 포함하면 58개요."

"그렇군."

아벨이 옆의 여성에게 눈짓했다. 여성은 잠시 서 있다가 아까 아벨이 앉아 있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서랍에서 꺼내온 것은 동그란 회색 돌이었다. 멜리나가 받아들어 살펴봤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이건 왜요?"

"그 돌을 이것처럼 커팅하도록 해."

아벨이 신중한 말투로 말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가장 빛을 많이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멜리나는 아벨이 이 작업을 무척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일의 성과에 따라 자신을 향한 대우가 달라질 것이라는 점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아벨이 멜리나의 단호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알레시아에게 맡긴 것은?"

"아, 여기요."

멜리나는 가방에서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달그락.

그 속에 들어있던 반지, 귀걸이 등 은으로 된 악세사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레시아가 공들여서 만들어낸 작품들이었다.

"흠."

아벨이 반지를 들어 손가락에 끼웠다. 그의 건틀렛을 만들었던 경험 덕분에 알레시아는 정확한 크기의 반지를 만들어냈다.

"딱 맞군."

아벨의 눈이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가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좋아, 제대로 만들었네."

"휴우."

멜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께서 만들 때 빛이 보였다고는 하셨지만,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어디 보자...."

아벨은 반지에 보석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을 살핀 뒤, 이번에는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어떻게 끼우는 거지?"

그가 귀걸이를 붙잡고 씨름하는 걸 보며 멜리나는 생각했다.

'내가 해드린다고 할까?'

하지만 선뜻 나서기가 애매해서 망설였다. 그 순간,

"제가 해드릴까요?"

곁에 서 있던 여성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맡겨주신다면, 귓불을 뚫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아벨이 여성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럼 부...."

"제가 해드릴게요!"

멜리나는 참지 못하고 그만 외치고 말았다.

"음?"

아벨의 의아한 눈길과 중년 여성의 시선이 동시에 닿았다. 멜리나는 뒷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했다.

"제가 해드릴게요."

"네가?"

아벨이 미심쩍다는 듯 멜리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러 번 해 봤어요. 잘 할 자신 있어요."

"내 귀에 피 나면 어떡할 건데?"

"피 안 나게 귀를 어떻게 뚫어요!"

"아, 것도 그러네."

아벨이 피식 웃더니 여성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 물러나 있어."

"예."

여성이 조용히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시선이 멜리나에게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어디, 한 번 해봐."

아벨이 멜리나를 향해 몸을 슬쩍 기울였다.

"-!"

멜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벨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살며시 감은 눈 아래 긴 속눈썹이 도드라졌고, 약간 창백한 피부는 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어...."

멜리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 책상 위의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중년의 여성이 가져다준 솜으로 침을 소독한 뒤 아벨의 귀를 붙잡았다.

"...."

그 부위는,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칼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늘 강하고 단단해 보이던 아벨에게도 이런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놀랄 정도로.

게다가 아까 그가 앉는 순간 훅 풍겨왔던 향이 한결 강해졌다. 가까이서 맡으니 달콤하기까지 했다.

'진정하자, 진정.'

멜리나는 코를 벌름거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아벨의 귓불을 팽팽하게 잡아당긴 뒤 침 끝을 가져다 댔다.

"약간 따끔할 거에요."

"응."

"하나, 둘, 셋."

마지막 수를 세는 것과 동시에 힘있게 귓불을 찔렀다.

뚝.

살점이 뚫리는 소리와 함께 침이 푹 들어갔다.

"별로 아프진 않군."

아벨이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죠?"

멜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을 고정시켰다. 약간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물러났다.

"다 됐어요."

"어디 보자...."

아벨은 중년의 여성이 가져다 준 거울에 제 귀를 비추어 보았다.

"괜찮네."

푸른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올리자 귓가에서 찰랑이는 은빛 귀걸이가 더 잘 보였다.

멜리나는 귀걸이가 반사하는 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 옆으로 보이는 아벨의 날렵한 콧날과 섬세한 입술에도.

'...아.'

의식하지 못한 새 가슴이 다시 두방망이질 쳤다. 아무래도 오늘 제 심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으으, 제발.'

심장 소리가 몸 밖으로 튀어나올 까봐 걱정스러웠다.

"저런, 긴장했나?"

아벨이 멜리나를 보며 픽 웃었다.

"또 얼굴이 빨간데."

"아, 아니요."

멜리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벨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귀걸이는 또 왜 저렇게 잘 어울리는 거람?'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5)

일찍이 악세사리는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럼 다음 작업을 설명하지."

아벨이 멜리나를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해서, 커팅을 마친 돌은 귀걸이와 반지에 세공해서 넣도록 해. 그럼 악세사리의 힘과 돌의 힘을 결합할 수 있을 거다."

그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는 은빛 광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음으론 이 보석을 커팅하는데, 투명함을 끌어올려서 빛을 많이 투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

그 와중에 아벨이 푸른 빛의 원석을 보여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멜리나의 귀에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본격적인 판매는 수확제 이후인데, 그 전에 홍보용으로 명품 목걸이와 귀걸이 한 세트가 필요해. 일단 그걸 제작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멜리나는 결국 아벨이 하는 말을 거의 놓치고 말았다.

"이해했나?"

"...네?"

새된 목소리로 되묻는 멜리나를 보며, 아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어려운 내용이었나? 알기 쉽게 말한 것 같은데."

그가 물러서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손짓했다.

"엘리체."

멜리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이름 하나만은 또렷하게 제 귀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의 이름이, 엘리체.'

엘리체가 조용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네, 주인님."

"뒷일을 맡긴다."

명령을 내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가시게요?"

멜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벨은 엘리체가 내미는 겉옷을 몸에 걸쳤다.

"두 번 설명하는 취미는 없다. 바쁘기도 하고."

"하지만...."

"다음에 보지."

아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늘 멜리나에게 보여주었던 바로 그 뒷모습이었다.

"아...."

멜리나는 못내 아쉬운 뒷맛을 삼켜내야 했다.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엘리체가 앉았다.

"일단 멜리나 양, 이 종이를 봐주세요."

팔락, 하고 한 장의 서류가 멜리나의 앞에 놓였다.

"이게 뭐죠?"

멜리나의 질문에 엘리체가 생긋 웃었다.

"계약서랍니다. 멜리나 양과 우리 상단 사이의."

곧 전 제국을 강타할, 멜리나 보석 상단의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수도 마기오레의 중앙 광장.

수도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이곳은, 현재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줄을 맞추시오!"

"이 선 밖으론 넘어오지 마시오!"

기사들은 인간의 벽을 만들어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축성제.

수확제의 첫날을 여는 상징과도 같은 행사로 황실과 신전이 함께 주관했다.

평소 얼굴조차 보기 힘든 거물들을 볼 수 있는 기회인 지라 평민을 비롯해 많은 인파가 몰리곤 했다.

"어휴, 많기도 하네."

물론, 나와는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나는 여유롭게 귀족 전용 관람석에 앉아 밀려드는 사람의 파도를 구경했다.

이곳은 축성제가 진행되는 임시 무대의 바로 옆으로, 행사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직 오려면 멀었나."

높이 쌓아 올린 단 위에는 아직 행사 준비 인원들만 오갔다. 마찬가지로, 맞은 편 황족들의 자리 또한 텅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아벨 공자!"

등 뒤에서 미켈이 나를 툭 쳤다.

"미켈 영주님."

"정말 오랜만일세. 이제 몸은 괜찮은 겐가?"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이제는 쌩쌩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미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죽을상을 하더니만. 아무튼 얼굴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군."

"미켈 영주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이래저래 바빴지. 관리하는 곳을 방문해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런저런 물건도 구매했다네."

미켈이 친근한 태도로 내 옆에 다가섰다.

"아벨 공자는 뭘 하고 지냈나?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는가."

약간의 책망이 담긴 질문에,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나름 바빴습니다. 미켈 영주님과 비슷한 이유로요."

"호오, 벌써? 수도에서 할 일이 그리 많았단 말인가?"

"그럼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리하는 곳을 방문하고,"

마레 길드가 뒤를 봐주던 도적단을.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내 뒤를 캐고 다니던 놈, 좋은 지갑이 되어줄 호구 후보까지.

"이런저런 물건도 구매했지요."

어디까지나 남의 돈으로.

미켈은 이런 내 속뜻도 모르고 감탄했다.

"대단하군. 하긴, 카인 공자와 그 친구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대충 예상했다네."

그렇게 뜻이 통하는 듯하면서 미묘하게 어긋난 대화를 마쳤다.

미켈이 자리에 편히 앉으며 물었다.

"못 본 새 장신구가 좀 늘었군?"

"어울립니까?"

씩 웃으며 귓불에 매달린 귀걸이를 툭 쳤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샀습니다만."

"허허, 이게 요새 젊은이들의 유행인 겐가?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미켈은 입버릇처럼 자신을 늙은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그는 나이에 비해 꼰대 기질이 덜한 편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경박해 보이는 내 장신구에도 저런 칭찬을 건넬 정도니.

'내 손을 보곤 저리 못 말할 텐데.'

지금은 건틀렛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열 손가락에 모두 은반지를 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 드디어 수확제가 시작되는군. 준비는 잘 했는가?"

"준비라면, 어떤?"

"하하, 모르는 척할겐가? 사흘 뒤 열릴 사냥대회 말일세."

"잘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켈이 생각하는 준비와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다르지만.

"잘 해보게나. 우승자에게는 엄청난 상품이 기다리고 있으니."

미켈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행사에 참여하긴 너무 늙었다네. 이젠 구경할 때지."

"그런 말씀 마시지요. 몇 년간 연속 우승을 차지하시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건 또 어찌 알았는가?"

과하지 않은 아첨성 발언에 미켈이 민망한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때야 뭐... 연모하는 여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컸었다네."

"그러셨군요."

"아벨 공자도 그 목적으로 나가는 것일 테지?"

미켈의 눈동자에 일순 서슬 퍼런 빛이 지나갔다. 심상치 않은 눈빛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 저번에 보니 비올렛 황녀 전하와 사이가 꽤 좋아 보여서 말일세."

어째서인지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말투였다.

"설마 비올렛 황녀 전하와 혼담이라도 오가는 겐가?"

...이 영감탱이까지, 정말?

엘리체가 물어온 소식도 그렇고, 왜 사람들은 다들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데 말이다. 내게 비올렛 황녀는 놀려먹기 좋은, 그리고 카인을 자극할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전혀 아닙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황가의 혼사가 그리 쉽게 진행될 일이겠습니까. 황녀 전하와는 잠시 친분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흠, 그런가?"

미켈이 눈에 띄게 안심한 기색을 내비쳤다.

"험험, 거참 다행.... 아니, 아닐세. 그러고 보니 아벨 공자는 수확제를 맞이하는 게 처음이지?"

"그렇습니다."

"허면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잘 모르겠군. 내 말해 줌세."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수확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 열릴 축성제가 끝나면 사흘간 축제와 연회가 이어진다네. 이날 만큼은 황실에서 물 쓰듯 돈을 뿌리니 맘껏 즐기도록 하게나."

사실 다 알고 있지만, 딱히 막을 필요가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그 다음날엔 귀족들이 참가하는 사냥 대회, 그리고 평민들이 참가하는 무투 대회가 이어진다네. 다들 우승을 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켤 테지."

"참으로 풍성하군요."

"그리고 다음 해의 풍작을 비는 기원제를 끝으로 수확제가 마무리 된다네. 거진 일주일 정도 걸리는 셈이지."

이후 그와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다른 귀족들이 슬슬 입장하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저기 오는군.'

카를로와 카인 부자도 위풍당당하게 입장했다. 그들의 세력은 여전히 굳건해, 많은 귀족들이 다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카인의 시선이 나를 슬쩍 스쳤으나, 그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돌렸다.

그렇게 귀족들의 자리가 거의 채워질 무렵,

"곧 시작하겠군."

미켈이 내 옆구리를 툭 쳤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황족들이 차례로 입장해 자리를 찾아 앉고 있었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테오도어 황제였다.

몸에 딱 맞는 예식용 의복은 그의 탄탄한 몸을 여실히 드러냈다. 우뚝 솟은 콧대 아래 드리운 음영 속엔, 핏물이 고인 듯한 붉은 눈동자가 번득였다.

'오늘도 여전히 쌩쌩하시군.'

그의 젊음에 찬사 아닌 찬사를 보내며 뒤를 확인했다.

제 1황후인 헤일리아 황후와 그녀의 소생인 비올렛 황녀를 비롯해, 나머지 황비와 황녀들이 입장했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구성원이 여성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아주 백년 천년 제위를 이어갈 생각인가 본데.'

테오도어 황제의 끝없는 욕심에 혀를 내둘렀다. 하긴, 세레나드가 있는 이상 그것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신전에서도 다들 도착한 모양이군."

미켈은 해설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말대로, 신관 여럿과 주교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쯤 라헬은 저 무대 뒤에 있겠지.'

원작에서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레퀴엠과 세레나드의 만남. 그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일정한 박동으로 뛰었다. 레퀴엠은 곧 무슨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쿨쿨 잠들어 있었다.

'자, 얼른 모습을 드러내시지.'

차분히 성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손 마디마디에 느껴지는 반지의 감각을 되새기며.

❖ ❖ ❖

"성녀님, 곧 입장하셔야 합니다."

정복을 차려 입은 기사가 다가와 말했다.

"네."

라헬은 차분히 대꾸한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현재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무대의 뒤쪽이었다. 보통 입장할 사람만 홀로 서 있는 곳이지만, 그녀의 양옆엔 기사가 서 있었다.

라헬이 잠시도 혼자 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테오도어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빌어먹게 철저한 놈.'

평소였다면 그보다 다섯 배는 길게 욕을 짓씹었을 테지만, 라헬은 그쯤 해두었다.

지금은 황제를 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무대 저편에서 엄청난 인파의 존재가 느껴졌다. 수도의 사람 절반 이상이 여기 몰려든 것 같았다.

라헬은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데 모이는 날을.

그리고....

'레퀴엠, 그 녀석도 왔겠지.'

레퀴엠의 주인이 여기 와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레퀴엠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서 느꼈던 그 날 이후, 라헬은 틈틈이 레퀴엠의 상태를 살폈다.

레퀴엠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것처럼 지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결코 조용할 리가 없는 존재였는데.

하지만 최근, 레퀴엠이 미친 듯이 날뛰었던 때가 있었다.

'주인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군.'

그때 라헬은 레퀴엠이 드디어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고 주인을 잡아먹은 줄 알았다.

그 순간 어찌나 기쁘던지 예배 중인 것도 잊고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이제 곧 수도로 돌아와 학살극을 펼치겠지?'

그 광경을 상상만 해도 너무 짜릿했다. 특히, 테오도어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질 걸 상상하니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제 죽을 수 있어.'

황제는 신변의 문제가 생기는 순간 성녀인 그녀를 확보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한낱 인간이 레퀴엠의 살육을 막을 리 없었다.

'그놈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나도 죽어야지.'

아니, 순서가 뒤바뀌어도 상관없었다.

과정이 어떻든 이 불유쾌하고 무의미한 삶이 끝나기면 한다면, 라헬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어? 어어어?'

레퀴엠은 다시 조용해졌다. 잘못 느낀 건가 싶어서 열 번도 넘게 시도해봤지만 그대로였다.

레퀴엠의 주인은, 다시 레퀴엠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니, 이 썩을 놈의 새끼가?'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1)

지금껏 레퀴엠을 쥐고 살아있는 것도 신기한데, 저렇게 폭주하는 레퀴엠을 다시 붙잡아 누르기까지 하다니.

자신처럼 몇백살 먹은 인간도 아니면서, 어떻게 레퀴엠의 속삭임을 버텨내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인간의 정신력으로 가능한 건가?'

진짜 어떤 놈인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그놈 얼굴은 보고 죽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라헬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버텼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아직 믿을 구석이 남아 있었다.

고대하던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성녀님."

기사의 말에 라헬은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장막을 들어 올렸다.

사락-

벌어진 틈 사이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게 꼭 오늘을, 오늘을 맞이한 자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라헬은 그 빛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무대 위엔 이미 테오도어 황제, 그리고 대주교가 서 있었다. 황제의 눈길이 제 베일 위를 스쳤다.

뚜벅, 뚜벅.

라헬은 사뿐사뿐 제 자리를 찾아 나아갔다.

벌써 몇 년째 축성제에 참여해 온 만큼, 진행에 대해서는 정확히 꿰고 있었다.

"오오오!"

"성녀님이시다...."

"진짜 성녀님이셔!"

사람들의 흥분에 가득 찬 웅성거림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대신 열띤 시선을 보냈다. 어찌나 강렬한지 베일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라헬은 한숨을 삼키며 제 자리에 가서 섰다.

'하아, 또 시작이네.'

세레나드의 기운이 활발해진 게 느껴졌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 흥분하는 것은 레퀴엠과 비슷했으나 이유는 확연히 달랐다.

레퀴엠이 생명들을 집어삼키고 싶어 한다면, 세레나드는 모두에게 제 생명력을 나눠주고 싶어 했다.

무한한 공허를 채우려 드는 성질과 무한한 생명을 나누어 주려는 성질은 서로 반대 극점에 서 있었다.

'싫어, 그만.'

라헬은 눈을 질끈 감고 세레나드의 힘을 꺼 버렸다.

타인의 신체 상태를 알게 해주는 전능한 힘. 누군가는 심장이 거멓게 물들어 있었고, 누군가는 복부 쪽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밀려드는 불필요한 정보. 그 때문에 라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 남들과 달랐다.

'필요 없다고.'

그 때문에 라헬은 혼자 지내는 것을 선호했고, 사람이 많은 곳을 극도로 꺼렸다.

미사에 참석하는 걸 싫어하는 이유 중엔 이것도 있었다. 한 번 다녀오면 몸에 과부하가 걸려 앓아야 했으니까.

'망할 고집불통 같으니.'

라헬은 세레나드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오늘은 미사 때의 몇 배는 되는 인파가 모여들어 세레나드를 억누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지금부터 축성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대주교의 진행에 따라, 테오도어 황제가 단상 앞에 섰다.

"친애하는 제국민들이여."

그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한 뒤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부디 만수무강하시기를!"

모여있던 인파 속에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존경과 선망이 어린 눈길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장의 흑사자, 테오도어 마기오레 임페로.

그는 유례없이 강력한 황권을 구축하여 안정적인 치세를 펼쳤다. 게다가 그의 훌륭한 외양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감명을 주곤 했다.

"...바, 무사히 수확제를 맞이하게 되었노라."

테오도어 황제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라헬은 제 귀를 파내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개자식.'

제국민들에겐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옥음이 그녀에게는 역겨운 벌레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게 지척에서 들려오니 더 그러했다.

저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황후와 황비, 그리고 황녀들이 보였다.

모두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나, 라헬에겐 그저 역겹기만 했다. 테오도어의 피가 닿은 이들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일 분 일 초가 고문처럼 느껴졌다.

'아, 숨 넘어 갈 거 같아.'

라헬은 이 시간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겨우 참았다.

"그럼, 축성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대주교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황족과 귀족들 모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인간 장벽을 이루고 있던 기사들조차 고개를 숙였다.

신성한 기도 시간엔 모두가 그래야만 했다.

"...."

라헬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로지 단 한 사람, 대주교만이 성서를 바라보며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해주시옵소서. 다만 저희를 악에서 구원하시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 그의 나직한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숨 쉬는 소리마저 소음이 될 정도로 고요했다.

스윽.

라헬은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머리 위부터 덮은 긴 베일 덕분에, 누군가 그녀를 보더라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터였다.

'어디 보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 대신 정수리만이 보였다. 따라서 누군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바로 눈에 띌 터였다.

라헬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세레나드.'

라헬은 천천히 세레나드의 힘을 일으켰다. 극도로 집중해, 형제검 레퀴엠을 부르기 시작했다.

'레퀴엠, 레퀴엠. 어서 일어나렴.'

이곳에 레퀴엠의 주인이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있다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또 신원도 파악해야 했다.

라헬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세레나드의 문양이 새겨진 어깻죽지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

어느 순간,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쪽!'

얼른 고개를 틀어 그 느낌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 방향은 놀랍게도, 단상과 꽤 가까운 귀족 전용 관람석이었다.

'설마....'

귀족들의 무리 속에서, 홀로 고개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푸른 머리칼과 자수정 같은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

앳된 얼굴은 보기 드물게 수려했고,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선 까다로운 성정이 엿보였다.

남자는 어깨 바로 아래쪽을 붙잡고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그곳에 레퀴엠의 문양이 있을 거라 짐작되었다.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선 속내를 읽어낼 수 없었다.

'디에고... 킨드리얼?'

아주 오래전 보았지만, 그의 강건한 체격과 특유의 외모는 잊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냐, 아냐. 디에고가 아냐.'

라헬은 이내 거칠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디에고가 세레나드의 힘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저 모습일리 없었다.

'그럼, 디에고의 아들인가?'

그 또한 놀라웠다. 제국 서쪽에서 레퀴엠을 쥐고 버텨낼 만한 인물은 디에고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고작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저 애송이가 레퀴엠을 손에 넣고,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니.

'너무 예상외인데.'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라헬은 얼른 세레나드의 힘을 거둬들였다.

남자는 잠시 멈춰있다가 팔을 거두곤 다시 기도에 열중했다. 이 자리를 떠날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레퀴엠에게 형제검 세레나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세레나드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를 터였다.

어깻죽지가 뜨거워지는 것도 종종 일어나는 기현상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한낱 평범한 인간이 어찌 사계절의 검에 대해 알고 있겠어.'

운이 좋아 레퀴엠을 손에 넣고 여기까지 왔겠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라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될 테니까.

'그동안 고생했겠지만, 이제 슬슬 가야지.'

라헬의 입가에 메마른 웃음이 맺혔다. 황무지처럼 버석하게 말라붙은, 수분이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미소였다.

"-하길 바라옵나이다."

대주교가 긴 기도문을 마치고 성호를 그었다.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사람들도 이어서 성호를 그은 뒤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를 것이다.

라헬이 방금 재앙의 씨앗을 확인했고, 그것을 움트게 하기 위한 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조차.

"다음으로, 성녀님께서 올해 마지막으로 수확한 작물에 축복을 내리시겠습니다."

대주교가 말을 마치자, 신관들이 작물을 들고 와 연단에 올려두었다.

'드디어.'

라헬은 그 앞으로 걸어가며 전율했다.

'드디어!'

그녀가 고대하던 바로 그 순간이 다가왔다.

작물에 축복을 내릴 때는 약간의 힘만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오늘은 세레나드의 온 힘을 끌어내 퍼부을 예정이었다.

어마어마한 생명력의 맥동을 느낀 레퀴엠은 흥분해 날뛸 것이고, 이를 억누르지 못한 레퀴엠의 주인은 살육의 악마로 변모할 테니까.

그것이 라헬의 계획이었다.

전대미문의 학살극을 일으키는 것. 일 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수확제의 첫날에, 레퀴엠을 폭주시킴으로써.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레퀴엠은 생명력을 먹어 치울수록 더 다음 생명을 갈구할 테니.

그래서 이곳에 모여든 모든 이를 죽이고, 또 죽여서, 황제까지 죽여주길. 끝내는 자신을 죽여주길 바랐다.

'드디어, 죽을 수 있어....'

자신이 원했던 종말의 순간이 이토록 가까웠을 줄은 몰랐다. 이 지독한 삶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열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행운이라는 건 이토록 기대하지 않는 때에 갑자기 선물처럼 찾아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에게 감사하진 않을 거야.'

아니, 만나면 신의 면상에 주먹을 휘둘러 줄 테다.

라헬은 작물 위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심호흡했다.

파앗!

손바닥 아래로 빛이 번지고, 그 아래 희게 일렁이는 검의 형체가 드러났다.

세레나드.

섬세한 덩굴 무늬가 그립 위를 휘감고, 단도 정도 길이의 블레이드는 눈부시게 하얗다.

그 어떤 결점도, 흠도 없을 것처럼 완벽한 순백. 그것은 세레나드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끝없는 생명력을 의미했다.

세레나드는 타인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기에, 이런 작고 가냘픈 형태를 갖게 되었다.

라헬은 지금껏 빛을 강하게 뿜어내 검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손끝에서 성력을 발휘하는 성녀라고 굳게 믿었다.

슥.

세레나드의 끝이 작물에 닿았다.

"...."

라헬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흰빛이 두 손바닥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작물 위로 흰빛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오오!"

"성녀님께서 축복을 내리신다!"

"이 영광된 순간을 볼 수 있다니!"

사람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레나드의 힘이 스며들수록, 수확한 후 조금 시들었던 작물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오오, 저게 축복의 힘!"

"아아, 눈이 부셔...."

평민들은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기사들의 철통같은 방어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귀족들은 예의를 지켜 얌전히 앉아 있었으나, 시선만은 흰빛에서 떼지 못했다.

"이번에 바네스 가문에서...."

"크루델레 병을 깨끗하게...."

그들 사이로 축복을 받았던 소피아 바네스 영애의 이름이 술렁술렁 번졌다.

라헬은 레퀴엠의 주인을 힐끗 살폈다.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단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계절의 검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

근본적인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는 그와 대화 한 번 못 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잘 가, 레퀴엠의 주인.'

들리지 않을 인사를 남긴 뒤, 라헬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라헬의 손에서 나오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손바닥을 물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물 위를 넘쳐흘러, 단상 아래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저렇게 빛이 강한 건 처음 보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람?"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슬슬 커졌다. 귀족과 황족들도 소리 죽여 수군거렸다.

"서, 성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주교와 신관들도 난리가 났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2)

몇 년간 축성제를 해왔지만 이런 이변은 처음이었다.

파아아앗!

라헬의 손에서 퍼져나온 빛이 끝내 그녀의 전신을 물들였다.

이 순간의 그녀는 마치 빛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몹시도 성스럽고, 거룩한 광경이었다.

"이, 이이 이것은 설마!"

대주교가 문득 깨달은 듯 외쳤다.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신께서 성녀님의 기도에 응답하셨도다!"

대주교가 흥분한 얼굴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께서 우리를 친히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넙죽 절했다.

"디오 베네디카!"

대주교의 고함이 단상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오오, 맙소사."

"성녀님께서 기적을!"

"신께서 직접!"

군중들 사이에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다들 대주교처럼 허둥지둥 몸을 낮추었다.

"디오 베네디카!!"

우렁찬 함성이 중앙 광장을 휩쓸었다. 광적인 믿음의 분위기가 스멀스멀 번져나갔다.

"이를 어쩌지요?"

"아니, 거 참...."

귀족들이 난감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의 답을 찾기 위해,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황제를 쳐다보았다.

"...."

테오도어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꾹 쥔 채 기적의 현장을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 거요?"

"왠지 화가 나신 것 같지 않소?"

"이 기적 같은 상황에 그럴 리가? 조금 당황하신 것 아니오?"

그 탓에 귀족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웅성거리기만 했다.

"...."

라헬은 테오도어 황제의 찌를 듯한 시선을 느꼈다.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당장이라도 라헬의 팔을 붙들고 싶지만, 주변을 의식해 참는 기색이었다.

'흥. 제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라헬은 그런 황제를 무시했다. 지금 그가 달려든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더, 더더. 더욱더!'

생명력을 끌어내고 또 끌어냈다. 무한한 바다에서 퍼내고 또 퍼내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샘을 만들었다.

그렇게 퍼져나간 생명의 기운이 이 무대를 다 엎고, 중앙 광장 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온 주변에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걸 레퀴엠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이 생명의 샘에 주둥이를 박고 꼴깍꼴깍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아하하하!'

라헬은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베일을 집어 던지고, 황제 놈의 면전에 대고 종말을 고하고 싶었다.

이제 전부 끝이었다.

신전에 갇혀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도, 황제 놈의 손에 놀아나는 것도,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삶을 이어가는 것도.

"하하...."

라헬은 작게 웃으며 귀족 관람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기서 레퀴엠의 주인이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

라헬의 입이 스륵 벌어졌다.

레퀴엠의 주인은 그녀가 예상했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

그는 삐딱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오, 저게 축복의 힘?'

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성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바라보듯 평온한 낯. 요동치는 레퀴엠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라 보긴 힘든.

그는 믿을 수 없게도, 너무나 차분했다.

'어째서? 왜?'

라헬은 몹시 당황했다. 순간 세레나드의 힘을 쓰는 것을 잊고, 빛을 꺼뜨릴 뻔 할 정도로.

'...그럴 리 없어!'

다시 생각해 보니, 남자는 레퀴엠을 지배한 데다 지금껏 이성을 유지해왔다. 그 말인즉슨, 보통 사람보다 심지가 훨씬 굳다는 의미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텐데.'

라헬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를 악물고 세레나드의 힘을 더욱 이끌어 냈다.

화아아악!

광채에 가까운 빛이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오오, 맙소사...."

"신이시여...."

군중들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디, 디오 베네디카."

귀족 중 한 명이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앞서 성녀의 축복을 체험했던 소피아 바네스였다.

그녀를 시작으로 해서,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다른 귀족들까지 차차 두 손을 모았다. 그런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황족들까지 결국 두 손을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단, 테오도어 황제는 예외였다.

그는 이제 보는 눈이 없게 되자 대놓고 성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중앙 광장은 말 그대로 신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득했다. 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을 것이다.

"으윽!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너무 눈부셔서 성녀님이 보이질 않아!"

"이러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실제로는 주변에서 신관과 기사들의 비명이 터졌지만.

'자, 어때.'

라헬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 만큼의 힘을 쏟아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벅찼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레퀴엠의 주인이....

"-!"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퀴엠의 주인은 뺨을 긁적이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은 꼭,

'나도 기도해야 하나?'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태평한 모습이 라헬의 속에 불을 질렀다.

'어째서! 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라헬은 절규했다.

이토록 거대하고 강력한 생명력을 느끼고도 레퀴엠이 가만히 있을 수 있다니.

그건 라헬의 상식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진작 레퀴엠의 학살이 시작되었어야 마땅했다.

'이렇게 된 이상....'

확인해야 했다.

라헬은 입술을 질끈 깨문 다음, 눈에 힘을 주었다.

팟!

순식간에 사람들의 몸이 형형색색의 빛깔로 물들며 온갖 정보를 전해왔다.

"으윽."

과도하게 밀려드는 정보 때문에 눈동자가 쥐어짜이는 듯이 아팠다.

'레퀴엠의 주인은.'

라헬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귀족 관람석의 그를 찾은 순간,

"...!"

소리 없는 비명을 뱉었다.

어둡고 또 어두워, 빛조차 모조리 삼켜버릴 것 같은 공허가 보였다. 깊이 모를, 그 끝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

레퀴엠이 분명했다. 레퀴엠 외엔 저런 걸 몸에 품을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격하게 진동하거나 소용돌이치는 대신,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꼭, 주인의 통제를 따르는 것처럼.

'이게, 어떻게, 된....'

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눈동자가 터져버릴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윽!"

라헬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망막 안쪽으로 열감이 치밀었다. 상상 이상의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라헬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이미 그녀의 흰자위는 충혈된 뒤였다.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레퀴엠의 주인은 이토록 생생하게 물결치는 생명력의 파동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유지한다. 철저히 자의에 의해서.

더이상 세레나드의 힘을 뿜어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라헬의 손에서 빛이 사그러 들었다. 한쪽 손으로 감싸고 있던 세레나드가 손바닥 안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라헬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축성의 대상이었던 작물은 씨앗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많은 생명력을 부여받은 덕에, 시간을 거슬러 끝내는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오오오오오!"

"저걸 봐!"

군중들은 그제야 성녀의 앞에 놓인 씨앗을 확인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에 흥분의 도가니가 펼쳐졌다.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셨어!"

"올해의 농사가 풍년인 것에 기뻐하신 게야!"

"맙소사! 이런 축성제는 처음이야!"

그들이 기뻐 날뛰든 말든, 라헬은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었다.

레퀴엠의 폭주를 기대하고 이 모든 일을 저질렀던 것인데. 이제 정말 종말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

테오도어 황제의 따가운 시선이 얼굴로 쏟아졌다. 라헬을 찢어발긴 뒤 그 속을 파헤치고도 남을 눈빛이었다.

'아아, 완전히 망했네.'

허탈한 심정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가 꽤 길 것 같았다.

❖ ❖ ❖

"오오, 정말이지 놀랍군."

미켈이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붙인 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것이 정녕 신의 힘이란 말인가?"

신의 힘은 무슨.

콧방귀가 나왔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아벨 공자는 신전의 미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가?"

"아직 없습니다."

"미사에서 종종 성녀님의 축복을 받는다고는 들었는데, 저토록 강한 빛은 처음 보는군."

미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내년은 엄청난 풍년이 될 모양일세."

그리 말하는 미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북부의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딱히 그러진 않을 텐데.'

속내와는 다르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무대 위로 옮겼다.

"성녀님! 오오 맙소사!"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대주교와 신관들이 호들갑을 떨며 성녀에게 들러붙었다.

"...."

성녀는 말없이 한쪽 손만 들어 올렸다. 그 끝이 힘에 부친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셔와!"

"뭐해! 어서 성녀님이 앉으실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약간의 소란 후, 성녀가 신관들이 준비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지러우십니까?"

"마실 물을 가져올까요?"

성녀는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그 모습에 신관들은 더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군.'

그토록 공들여 준비한 무대가 허사로 돌아갔으니 아니 그럴까. 하지만 이 무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착각했겠지.'

내가 어쩌다 운 좋게 레퀴엠을 손에 넣었고, 꾸역꾸역 그 녀석을 버텨내고 있다고.

그래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였다. 바로 코앞에서 세레나드의 힘을 일으켜, 레퀴엠을 폭주시키려는 시도를.

'죽고 싶어 안달이 났네.'

그 수작에 어울려줄 생각 따윈 없엇다. 그래서 성녀와 조우하기 전에 알레시아의 반지를 챙겼다.

건틀렛 안쪽은 여전히 따끈따끈했다. 손가락에 낀 반지들이 레퀴엠으로부터 날 보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게 아니었다면 이토록 손쉽게 세레나드의 유혹 아닌 유혹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수호자의 뽕맛 죽인다.'

나의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성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원작에서 레퀴엠을 쥔 아벨이 이성을 유지한 채 수도에 온 적은 없었다. 따라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순전히 기존의 정보만으로 유추해야 했다.

'다행히 잘 들어맞았군.'

수도에 온 첫날, 서로의 존재를 느낀 이후. 나는 라헬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했다. 그녀가 처한 상황과 소망, 그리고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직접 신전에 갈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레퀴엠의 주인이 수도에 왔다는 걸 알려야 했으니까.'

다행히 서로 스쳐 지나간 덕분에 직접 가는 수고를 덜었다.

라헬은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었다. 아까 미사 시간에 그녀가 레퀴엠을 부를 땐 좀 놀랐지만.

'저렇게 대놓고 확인해 볼 줄은 몰랐네.'

모르는 척 달아오른 어깻죽지에 당황한 척을 좀 해주었다. 내 탁월한 연기에 라헬은 오늘 거사를 치르겠다는 결심을 세웠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오오...!"

소란스러운 가운데, 대주교가 단상 앞에 나섰다.

"이토록 거룩한 날에 신의 영광 있으라!"

그는 씨앗이 되어 버린 작물을 번쩍 쳐들고 외쳤다.

"마기오레 제국의 앞날에 축복을!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군중들이 두 손을 흔들며 열광했다.

"신의 축복을!"

"성녀님께 영광을!"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저 집 장사 잘하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3)

저 대주교는 딱히 신실하지 않은 사제 기간을 보낸, 불량 신관이었다. 다만 혓바닥만큼은 몹시 유능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도가 터 있었다.

일찍이 테오도어 황제는 그의 탐욕스러운 성정과 재능을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

그는 성녀를 향한 제국민의 지지를 황가에 대한 충성으로 치환했으며, 성녀의 축복을 원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뜯어냈다.

지금도 보라.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중앙광장은 그야말로 신앙의 도가니였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도 불구하고, 저 대주교는 재치 있게 상황을 넘겼다. 게다가 그걸 역으로 이용해, 군중들의 호응까지 이끌어냈다.

테오도어 황제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니, 짐은 기쁘기 한량없도다."

그는 단상에 서서 위엄 있는 얼굴로 중앙 광장을 쭉 둘러보았다.

"오늘의 일을 기념해, 사흘간 축제에서 배부하는 식량의 양을 2배로 늘리도록 하겠다."

"우와아아아!"

파격적인 발언에 군중들의 함성이 두 배로 커졌다.

"황제 폐하 만세!"

"만수무강하소서!"

테오도어 황제는 관대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과연, 이 제국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라면 저 정도는 해야하는 법인가.

'표졍 관리 잘하네.'

성녀 라헬이 저지른 돌발행동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을 텐데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주교가 깔아준 판 위에 올라타, 제국민들의 지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저런, 저런.'

혀를 쯧쯧 차며 라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미동이 없었다. 두터운 베일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것 같았다.

'오늘 밤 고생 좀 하겠는걸.'

원작에서 묘사된 테오도어 황제의 성질머리와, 라헬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어느새 무대 위가 정리되고 있었다.

테오도어 황제를 선두로 한 황족들이 자리를 떠나고, 그 뒤를 성녀와 신전 일행들이 뒤따랐다.

성녀는 마지막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축 늘어진 어깨가 유독 기운 없어 보였다.

'꽤 무리를 한 모양이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미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벨 공자, 슬슬 가세."

"예."

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미켈이 앞장서서 나가며 물었다.

"이후에 일정이 있는가? 좋은 술을 구했는데 함께하지 않겠나?"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그러한가? 정말 많이 바쁜 모양이로군."

미켈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 내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술고래 영감이라는 별명이 있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럼 내일은 어떠한가?"

"내일도 선약이...."

"허허, 그런. 그렇다면 모레는 비어 있겠지?"

"죄송하지만 모레도...."

"아니, 아벨 공자!"

미켈이 소리를 낮추어 버럭 외쳤다.

"그럼 다음 날은? 사냥 대회니까 못 마신다고 할 텐가?"

"앗, 어찌 아셨습니까?"

"...."

미켈이 입을 뻐끔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해도해도 너무하는 구먼. 날 이렇게 바람맞히는 위인은 공자가 처음일세."

"하하하."

"그럼 나는 언제 자네와 또 술을 마실 수 있는 겐가?"

그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번졌다.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랑 술대결을 했던 게 그리 마음에 들었던 건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뭐,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대기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초대장을 보내려 했는데 내 공자의 저택도 모르더군. 이러니 내가 답답하지 않겠는가."

"아아,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제가 수도에 소유한 저택이 없습니다."

"으응?"

미켈이 서운함을 토로하던 것도 잊고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떻게 귀족의 신분으로 수도에 저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아, 갑자기 뼈 때리네. 지금쯤 열심히 일하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일부러 처량한 표정으로 한숨을 후우, 흘렸다.

"저희 아버지께서 유독 청렴결백하시지 않습니까. 기사들에게 쓰는 돈을 아끼지 않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렸지 뭡니까."

미켈의 얼굴이 삽시간에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런.... 아벨 공자, 정말 미안하네. 내 자네가 그리 검소한 생활을 하는 줄은 몰랐네."

그는 가난함을 검소함으로 포장해주는 대인배적인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그럼 어디서 기거하는 겐가? 난 전혀 몰랐네. 공자가 너무나 멀끔한 모습으로 다니는 바람에."

"중심가의 고급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사실은 나온 지 오래지만.

회의가 끝난 직후, 호텔에서는 짐을 싸서 나왔다. 마레 길드가 내 뒤를 캘 게 분명했기 때문에.

사는 곳 주변에 사람을 심어 나를 감시할 텐데, 그걸 신경쓰는 게 너무 귀찮았다.

지금은 새 상단을 꾸릴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히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내가 그 상단의 주인이라는 것은, 조금 나중에 밝혀져야 했으니까.

"그랬군. 그래서 그렇게 바쁜 게였어...."

미켈이 애잔해 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아 하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내 저택에서 지내는 건 어떠한가? 내 집사에게 일러 손님맞이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네."

"...예?"

미켈이 소탈함으로 유명하긴 했는데, 이정도로 친절한 줄은 몰랐다. 자신의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확실히 챙기는 성격이었다.

"제가 어찌 그런 실례를 범하겠습니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거절을 표했다.

"미켈 영주님의 따뜻한 마음만 받겠습니다. 제 앞가림은 잘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여전히 아쉬움과 걱정이 그득한 얼굴의 미켈을 향해 말했다.

"사냥 대회 끝나고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진심인가?"

그제야 미켈의 얼굴이 활짝 폈다.

"이렇게까지 말해놓고 무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미켈이 만족한 듯 내게서 몸을 뗐다.

"그럼 약속 장소는 어디인가? 우리 가문의 마차로 데려다 주겠네."

"성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자네, 참."

미켈이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알기 쉬운 듯 하면서도, 참 어려운 사람일세."

그가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돌아섰다.

"방금 했던 약속 잊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를 떨궈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미 귀족 관람석은 휑했고, 구름처럼 모여 있던 관중들만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워낙 그 수가 많아 아직도 절반 이상 남았지만.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는 듯 하며 자리에 서 있었다. 사실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선약이 있는 건 아니니까.'

다음 약속은 아직 계획의 단계였다. 미켈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누구를 만날지 알면 뒤집어 질텐데.'

철통보안에 싸여 있는 성녀를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바로 황가의 핏줄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비올렛 황녀를 알뜰살뜰하게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조금만 약 올려도 발끈하는 기질이 있으니 다루기도 쉬울 터였다.

'문제는 황궁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방법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황궁을 방문해 그녀를 만났다는 정식적인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이 만남을 황제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사전에 약속을 하지 않고서는 황궁을 방문하기 어렵다. 거기에 비올렛 황녀는 사교계 최고의 유명 인사.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이윽고 짓궂은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오랜만에 가봐야겠군.'

답은 카지노였다.

❖ ❖ ❖

"성녀님! 몸은 괜찮으신지...."

"부디 성녀님을 돌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헬은 제게 달라붙는 신관들을 물리치고 기도실로 향했다.

"신께 기도드릴 테니 방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성녀님...."

쾅!

그들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곤 방 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으윽."

혼자 남게 되자 가냘픈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파...."

라헬은 베일을 젖히고 벌겋게 달아오른 두 눈을 감쌌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몸은 작은 상처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레나드의 능력을 과다 사용하여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하아, 하아."

라헬이 잘게 헐떡이며 고통을 가라앉혔다.

"이건, 말도 안 돼...."

이윽고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세레나드는 티없이 순수한 마음, 한없이 자애로운 마음을 탐한다.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일 때 소유자가 되기 싶다.

실제로 라헬은 지금 겉보기의 나이인 열 네 살에 세레나드를 손에 넣었다.

반면 레퀴엠은 세레나드의 반대 속성. 즉 지독한 공허를 품고 있다. 그래서 나이 어린 자가 쥐면 거기 휘둘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버티냐고, 어떻게!"

라헬은 거칠게 울부짖었다. 기도실의 방음 기관만이 그녀의 울분을 홀로 받아내었다.

공들인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도,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눈의 고통도.

모든 것이 다 화가 났다. 머릿속이 뜨겁게 익어 하얗게 작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오늘을 기대했는데!"

어째서 신은 제게 이렇게도 가혹한 것일까. 오늘 만나면 그 신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어주려 했건만.

"이제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정말로 자신은 죽음의 안식에 들 수 없는 것인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한낱 애송이가! 그 쥐방울만한 게! 나에게 이런 엿을 먹여?!"

방향 잃은 분노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오늘 일을 그르치게 만든 원흉에게.

"개새끼! 빌어먹을 황제 새끼!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자신을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넣은 악마에게.

한참을 펄펄 뛰던 라헬이 기도실 바닥에 픽 쓰러졌다.

"아아...."

엎드린 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제발...."

노인의 음색 위로, 소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제발, 죽여줘...."

라헬의 흐느낌만이 기도실 안을 가득 채웠다. 눈의 고통이 고통스럽도록 느리게 잦아들고 있었다.

"-!"

문득 라헬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온다.'

기도실을 향해 접근하는 생명이 느껴졌다. 그녀가 구역질 나도록 증오하는 자의 기운이었다.

"...아, X발. 그 새끼가 안 올 리가 없지."

라헬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베일을 바르게 덮은 뒤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잠시 뒤.

벌컥!

노크도 없이 기도실의 문이 열렸다.

"폐, 폐하!"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탕!

거칠게 문이 닫히는 서슬에 그마저도 묻혔다. 싸늘한 침묵이 기도실 안을 감싸 안았다.

터벅, 터벅.

다소 거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라헬."

이를 사려문 듯한 낮은 음성이었다. 라헬은 못들은 척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라헬, 날 보아라."

"...."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한숨이 흩어진 뒤,

"아악!"

라헬은 머리채를 잡혀 강제로 뒤를 봐야 했다. 머리카락이 온통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내 말 안 들리나?"

음절마다 분노가 새겨진 음성이 물밀듯이 번지고,

"응? 라헬."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 제국의 태양, 테오도어 마기오레 임페로 황제였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4)

그가 라헬의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응?"

머리카락이 바싹 당겨져 더욱 고통스러웠다. 라헬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테오도어 황제의 입가로 비싯,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하하."

그가 손을 휘둘러 라헬을 바닥에 내팽게쳤다. 라헬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갑자기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는 어쩔 수 없었다.

"욱!"

억눌린 신음과 함께 입 안의 살이 터져 피가 났다.

"라헬."

테오도어 황제가 라헬의 뒤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거대했다.

"아깐 어떻게 된 것이냐? 왜 갑자기 세레나드가 폭주한 것이지?"

"...."

"전에 없던 일이지 않은가. 원인이 무엇이냐?"

라헬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꿋꿋하게 황제의 물음을 무시했다.

턱.

테오도어 황제가 손을 뻗어 라헬의 턱을 붙잡았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하거라, 응? 알고 있지 않느냐."

황제의 음성은 몹시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그가 치미는 화를 억눌러 참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레나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네가 그걸 통제하지 못할리 없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라헬은 끝까지 입이 없는 인형 흉내를 냈다. 지속되는 침묵에, 결국 테오도어는 몸을 일으켰다.

짝!

베일이 홱 젖혀지고, 라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새하얗던 뺨이 순식간에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뺨을 내리친 테오도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

그가 극도로 화가 났을 땐, 오히려 얼굴의 감정을 완전히 도려내곤 했다.

"...."

라헬은 이를 악물고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팟!

라헬의 몸에서 흰 빛이 터져 나왔다. 붉게 물들었던 뺨이 어느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 그래. 세레나드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빈정거림이 끝난 뒤,

짝! 짝!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뺨을 맞아도, 라헬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방 제 모습을 회복했다.

세레나드는 제 주인이 조금도 상한 모습으로 있게 두지 않았다.

"그래, 계속 참아 보거라."

테오도어 황제가 비웃음을 흘렸다.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니지 않느냐? 어디까지 버티는지 해보자꾸나."

테오도어 황제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그는 뺨을 내리치는 것도 모자라, 라헬의 연약한 몸을 마구 짓밟고 걷어차기 까지 했다.

퍽! 쿵! 퍽!

기골이 장대한 데다 한창 때의 30대 몸인 그와 다르게, 라헬의 몸은 여리고 약한 10대 소녀의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라헬은 폭풍우를 만난 돛단배처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렸다.

"...."

라헬은 이를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발을 막을 법도 한데,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실수라도 테오도어의 몸에 닿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그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이 폭풍우가 멈출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그것은 그녀가 이러한 폭력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이만한 폭력에는 비명조차 참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뻑!

기어이 테오도어의 발이 라헬의 명치를 걷어찼다.

"컥!"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고 눈앞이 노래졌다. 라헬은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 벽에 처박혔다.

"우욱...."

라헬이 가슴을 붙잡고 켁켁거렷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라헬의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면 테오도어가 더 즐거워한다는 것을. 이 지난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을.

"오늘은 제법 버티는구나."

테오도어 황제가 저벅저벅 걸어와 라헬의 앞에 섰다.

"이제 맞는 것엔 슬슬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그의 입가에 저열한 미소가 스쳤다.

"즐기기라도 하는 건가?"

"...!"

라헬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눈가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걸 확인한 테오도어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어울려주마, 응?"

속삭이는 음성에 상대를 자극하기 위한 비웃음이 스몄다. 그는 라헬이 무반응일 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분간 축제 기간이라 한가할 테니까."

아무리 때려도 금세 회복하고, 죽여도 죽지 않는다. 테오도어 황제에게 라헬은 너무나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너...!"

라헬이 눈에서 불똥을 튀겼다.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지 안다면 저리 말할 수 없었다.

"개자식!"

극도로 분노한 라헬의 손이 테오도어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아.'

문득 이성을 차렸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짝.

마지막 순간 힘을 뺀 덕분에, 라헬의 손찌검은 미약한 소리로 끝났다.

"...!"

라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것은 감히 황제의 뺨을 쳤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라헬은 덜덜덜 떨며 테오도어의 뺨에 닿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아악!"

라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스스스-

테오도어에게 닿았던 손바닥이 끔찍하게 변했다. 온 혈관이 바짝 조여들고, 피부가 모조리 벗겨져 근육과 살점이 드러났다.

"아악, 아아아-악!"

그것은 절대 산 채로 맛 보아서는 안 되는 참혹한 고통이었다.

뼈가 우그러들고, 피부가 불타오르는 것 같으며, 살점을 송곳으로 찔러대는 것 같은.

"끄으으윽!"

라헬이 제 손을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이미 그녀의 입술은 터져 피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파아앗!

주인의 이상을 알아챈 세레나드가 움직였다. 어깻죽지에서부터 흰 빛줄기가 뻗어 나와 손바닥을 감쌌다.

서서히 뼈가 재생되고, 살과 근육이 차오르며, 피부가 자라나 그 위를 덮었다.

그 과정은 지독하게 느리고, 고통스러웠다.

"하으, 하악."

라헬이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낯은 시퍼렇게 질려있었으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테오도어 황제는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런 라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으나 온기가 없었으며,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나 지독하게 무기질적이었다.

그가 라헬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은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어가 라헬의 한쪽 손을 잡고 말 그대로 들어올렸다.

"뺨이 아프구나."

그는 그렇게 라헬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단 채 말했다.

"치료해라."

무심한 명령은 사물, 내지는 도구에게 내리는 것에 불과했다.

"...."

라헬의 눈가에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서글픔이 어렸다. 그녀가 천천히 테오도어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앗!

라헬의 손에서 흰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테오도어의 뺨에 남았던 옅은 자국마저 사라졌다.

"흥."

테오도어가 손을 놓자,

털썩.

라헬의 몸이 끈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테오도어 황제는 그런 라헬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와 나 사이의 계약을 알면서도, 뭘 믿고 그리 구느냐?"

라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놈의 계약.

라헬의 영혼을 강력하게 구속하는 이 마법의 계약은, 을인 라헬이 갑인 테오도어 황제에게 절대 해를 끼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라헬이 테오도어 황제를 다치게 한다면 그것은 10배 이상의 고통으로 제게 돌아왔다.

보통 이상의 인내심을 가진 라헬마저 굴복할 만큼 지독한. 온몸이 재구축되는 듯한, 맨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그래서 라헬은 테오도어에게 절대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를 해하려고 해도 온몸의 세포가 그것을 거부했다.

테오도어의 말이 이어졌다.

"내겐 시간이 많다. 더 즐기고 싶다면 얼마든지 어울려주마."

"...."

"하지만 난 자비로우니 기회를 주지.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계속해서 대답을 거부한다면, 테오도어는 라헬의 손을 잡고 자신을 때릴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빨리 라헬의 입을 여는 길이기에.

"...너도 알다시피,"

라헬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숨을 골랐다.

"세레나드는 인간이 많은 곳에서 몹시 활발하게 움직여. 제 생명력을 나누어 주고 싶어하니까."

"그래서?"

"터져 나오는 힘을 조절하기 어려웠던 것 뿐이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물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는 의심이 많았고, 무엇이든 확인해 본 후에야 직성이 풀렸다. 라헬은 그런 테오도어 황제의 성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네가 화를 낼 게 분명하니까."

라헬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근조근히 대답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 근방의 많은 인간에게 생명력을 뿌릴 뻔했어."

"흠."

"겨우겨우 억눌러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아까운 생명력을 소진하게 되니까...."

라헬은 힘에 겨운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걸 네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황제를 향한 두려움 때문인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렇군."

테오도어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로소 풀렸다. 그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라헬의 턱을 움켜쥐었다.

"잘 알고 있군."

그가 라헬의 파리한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너의 힘, 너의 생명력, 그리고 세레나드까지."

그것은 지배자이자, 주인의 목소리였다. 결코 항거할 수 없는.

"네 모든 것이 짐의 것이다. 오로지 나만이 가질 수 있단 말이다."

주문을 외는 듯한 음성이 사슬처럼 라헬의 목에 감겼다. 끊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잘라낼 수 없을 만큼 진득하게.

"헛된 생각은 하지 말 거라. 얌전하게 굴면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

테오도어 황제가 혀를 쯧쯧 찬 뒤 돌아섰다.

"다음에 또 오겠다."

원하는 것을 얻은 그는 홀가분하게 기도실을 떠났다.

"...."

홀로 남은 라헬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입가에 남은 핏자국 외에 그녀가 방금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알려주는 흔적은 없었다.

"아아."

완벽하게 말끔해진 얼굴 가운데, 녹안이 체념과 고독으로 짙게 흐려졌다.

"죽고 싶어...."

눈을 뜨고 있는데도 감은 듯이 깜깜했다. 자신의 세상에서 빛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라헬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 ❖ ❖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가면을 착용하는 과정까지 끝나자 소리 없이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푸른 깃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아벨 킨드리얼이잖아?"

"세상에."

나를 본 귀족들의 반응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저 푸른 깃털의 가면, 그 사람 아니에요? 비올렛 황녀님과 거하게 한 판 한."

"판돈 다 걸고 한 블랙잭 말이죠? 그날 황녀님이 뒤로 넘어가실 뻔 했다던데."

"저 그거 봤어요. 정말 세기의 대결이었죠."

카지노에서의 그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귀족 회의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던데요? 혀를 어찌나 잘 놀리던지 남아나는 귀족들이 없었다더군요."

"심지어 미켈 영주님과 술 마시기 대결까지 했다지요? 그런 참패는 처음이었습니다."

"검술 실력도 굉장하던걸요. 조슈아 단장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걸 들었습니다."

회의장에서의 일을 입에 담기도 했다.

'소문이 정말 빨리 퍼지는군.'

귀족들 사이의 입소문이란 굉장한 것 같다. 아무튼 달라진 위상을 체험하는 것이 썩 나쁘진 않았다.

내가 다가서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밀려나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로 걷고 있자니 꼭 주인공, 카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환전을 마친 뒤 17번 방 앞에 섰다.

'포커.'

오늘의 목표는 돈을 따는 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골랐다. 물론 잃을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흠?'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를 흘끔 보고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지만,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는 딜러들 때문이었다.

딜러 한 명이 서둘러 본부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아하.'

역시, 카지노에 온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인물이 곧 올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5)

"베팅하시겠습니까?"

빈자리를 찾아 앉자 딜러가 공손히 물었다.

"그래."

카드를 받고 게임을 시작했다.

텍사스 홀덤은 개인별 카드 2장, 그리고 참가자들이 공유하는 카드 5장 중에 5장을 골라 최종 공개할 카드 조합을 만드는 게임이다.

가장 높은 조합인 참가자가 승리하므로, 전략적으로 베팅 해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게임이기도 하지.'

오늘은 기억력보다는 두뇌를 이용한 싸움을 주로 할 예정이었다.

"레이즈."

"레이즈."

경기가 순조롭게 이어졌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 패배하고,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났다.

승률도 좋았다. 칩을 잃을 때보다 얻을 때가 훨씬 많았다.

괜찮은 패가 들어오면 과감하게 판돈을 키우고, 나쁜 패가 들어오면 적당히 때를 봐서 접었다.

"역시 푸른 깃털의 가면...."

"오늘도 돈을 몽땅 쓸어가는군."

귀족들이 나를 바라보며 소리 낮춰 수군거렸다.

나는 그런 반응을 태연히 흘려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의 게임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잠시 딜러를 교체하겠습니다."

새로운 딜러가 들어오고, 기존에 앉아 있던 딜러가 나갔다.

새로 앉은 딜러는 젊은 미남자로, 제법 반반한 직원들을 고용하는 이곳에서도 꽤 눈에 띄는 미모였다.

"어머."

"얼굴이 제법...."

귀족 여성들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나는 별다른 감상을 갖지 못한 채 게임에만 집중했다.

"난 폴드."

"레이즈."

그러던 어느 순간,

'흐음.'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는 작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정확하게 잡아낼 수는 없는 사소하고 미묘한 무언가.

그 느낌을 받은 것은, 어느 순간부터 승률이 미세하게 하락하는 것을 감지한 때부터였다.

'저 딜러가 들어온 이후인가?'

내게 절대적으로 나쁜 패가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대적인 압승을 거두기 힘든 패만이 손에 들어왔다.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승부수를 던져도, 기대 만큼의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곤 했다.

'어디 보자.'

그때부터는 게임보다는 딜러에게 집중했다.

"콜하시겠습니까?"

그의 시선, 호흡, 손의 움직임 등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다른 소리가 섞여 있네.'

그가 카드를 섞거나 내밀 때, 미묘한 소음이 섞였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동작만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재밌군.'

카지노에는 특정 손님들을 상대하기 위한 딜러들이 준비되어 있다. 근데 이 딜러를, 고작 두 번째 참가하는 내게 붙였다는 건....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거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사실을 알아챈 후에도 일부러 반응하지 않고 게임에 참여했다. 그 대신 방 밖의 소리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이번 게임은 붉은 보석의 가면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지 딜러의 수작질은 계속되었다. 그가 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흔히 여우상이라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잠깐."

지금껏 계속 참여했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딜러가 멈칫했다.

"그만하시겠습니까?"

"아니, 그거 말고."

손을 뻗어 딜러의 손목을 탁 잡았다.

"-!"

벽 쪽에 붙어 서 있던 경비원들이 몸을 바로 세웠다.

종종 술에 취하거나 게임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제지하기 위한 배치였다.

"...."

딜러가 그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몸을 일으켜 딜러에게 슥 다가갔다.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손목 아래에서 뭔가 느껴지네."

"-!"

딜러의 눈이 흠칫 크게 뜨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혼자 한 일 아니지? 누가 시켰어?"

정곡을 찔린 듯 딜러가 입술을 떨었다. 그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흐흠, 그래."

그가 대답을 못 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인 줄도 알고 있었고.

"뭐야, 이 분위기는?"

기가 막히는 순간에, 그 '누군가'가 등장했다.

"왜 딜러를 붙잡고 협박질이야?"

비올렛 황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또각, 또각.

높은 하이힐 소리와 함께.

'그새 옷이 달라졌군.'

축성제에 참여할 때는 나름 예의를 차린 모양이었다.

살결이 드러나지 않게 감췄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곧게 뻗은 어깨를 시원스레 드러낸 드레스 차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올렛 황녀는 얼굴 절반을 덮는 새카만 가면을 착용했다. 다만 오늘은 가발을 쓰지 않고 흑발을 그대로 틀어 올렸다.

'하여간 꾸미는 거 좋아하네.'

비올렛 황녀가 어떤 드레스나 보석을 한 번 걸치고 등장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옷차림은 수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그래서 수도의 의상실이나 귀금속 상점은 비올렛 황녀에게 물품을 진상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좋은 홍보 수단이 되어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잘 구슬려 봐야겠네.'

일단 딜러의 손목을 천천히 놔주었다.

"협박이라니, 그런 심한 말씀을."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비올렛 황녀를 보며 웃어 보였다.

"그냥 이야기 좀 한 것뿐인데."

딜러의 몸이 바짝 굳어졌다. 그가 핏기 없는 얼굴로 황녀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딜러 얼굴이 저래?"

비올렛 황녀가 팔짱을 끼곤 나, 그리고 딜러를 샅샅이 살폈다.

사람들은 이제 비올렛 황녀와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저 가면 속에 표정을 감춘 채 둘의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글쎄. 여기서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내 말투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비올렛 황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상황을 물을 이를 찾아 옆을 돌아보았다.

"저, 그것이."

아까 방에 들어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지배인이 나섰다. 이곳에서 일어난 소란이 이미 본부 쪽에 전해진 모양이었다.

비올렛 황녀가 그를 향해 거만하게 손짓했다.

"설명을."

지배인이 비올렛 황녀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주변에 안 들리도록 한껏 소리를 낮추었지만, 내 귀를 피해갈 순 없었다.

"선수를 붙였는데, 들키고 말았습니다."

"뭐라고?"

비올렛 황녀가 발칵 성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아니, 황녀님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습니까. 저 푸른 깃털의 가면께서 오시면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아니, 그럼 정정당당하게 찍어 누를 생각을 해야지. 이런 방법을 쓰면 어떡해?"

지배인의 억울하다는 듯한 항변에 비올렛 황녀가 뒷목을 잡았다.

"카지노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그게. 저번 손해도 막심하고 그래서...."

비올렛 황녀가 지배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돌아섰다. 내 입가에 머무른 웃음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좋아."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얼어붙어 있는 딜러의 어깨를 한번 꾹 쥐었다.

"운 좋은 줄 알아."

뼈있는 말을 남긴 뒤 그 방을 떠났다.

비올렛 황녀는 이미 방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뒤에 언제나처럼 호위 둘을 붙인 채.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곳을 보자,

"호오?"

몹시 즐거워졌다.

비올렛 황녀는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발코니로 향하고 있었다.

비올렛 황녀가 턱짓하자 호위들이 양쪽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도도하게 그 안으로 들어서는 비올렛 황녀를 뒤따랐다.

"...."

가면의 틈새로 호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저번 일로 해고를 당한 건지, 그때 봤던 호위와는 다른 자였다.

탁.

등 뒤에서 발코니 문이 닫혔다.

"오랜만이네."

비올렛 황녀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돌아보았다. 자줏빛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흥."

내 옷차림에서 흠잡을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비올렛 황녀님."

서로의 정체를 아는 마당에 인사치레는 생략했다.

"여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일부러 지어낸 곤란하다는 목소리에, 비올렛 황녀의 입가에 신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그녀가 손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네가 내 뒤통수를 친 곳이잖아."

그녀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왜, 다시 오니까 마음에 좀 걸리나 봐?"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 단둘이만 있는 다는 게, 좀 그렇다는 뜻이었는데요."

눈가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귀족들이 이곳을 무슨 용도로 이용하는지 모르진 않으실 텐데."

"무, 무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상대로 비올렛 황녀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녀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냥 다른 사람 눈을 피해서 이야기하려고 부른 거야!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전 그런 말 안 했는데요?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황녀님 아니신지?"

"아 진짜!"

비올렛 황녀가 빽 비명을 질렀다.

아, 역시 재밌었다.

새침한 듯 보여도 살짝 찌르기만 하면 저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는 게.

"아무튼, 저번 일은 그만 잊으시지요."

비올렛 황녀 쪽으로 다가가며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방금 딜러 건도 눈감아 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거기서 딜러의 속임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면, 카지노는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그건, 흠. 그래."

비올렛 황녀가 귀밑으로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랫것들이 의욕이 앞선 모양이야. 오늘 일은 잊어줬으면 좋겠군."

"오늘 일이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깐 딜러의 손목에 뭐가 붙어 있길래 떼준 것 뿐입니다만."

"풋."

비올렛 황녀가 슬며시 웃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마음이 풀렸는지 그녀의 자세가 한결 느슨해졌다.

"비올렛 황녀님께선 정말 이 곳에 즐겨 걸음하시는군요.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내 말에 비올렛 황녀의 몸이 다시 뻣뻣해졌다.

"...연회는 보통 저녁에 해서 그때까진 여유로워."

"아, 그럼 그때까지 계속 카지노에 계실 생각이셨습니까?"

"...음, 그렇지."

대답 또한 뻣뻣하기 그지 없었다.

'귀엽네.'

비올렛 황녀의 딱딱하게 굳은 입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도 너무 없군.'

비올렛 황녀는 사교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걸 좋아했다. 따라서 이런 날엔 황궁 연회장을 마구 누비고 다니곤 했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빨리 카지노에 나타난 이유는 뻔했다.

'카지노 측에 내가 오면 알리라고 해놨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낼 리 없었다.

나와의 승부를 재개할 생각에 헐레벌떡 달려왔을 비올렛 황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럼, 들어가서 저와 겨루시겠습니까? 종목은 뭐든 좋습니다."

이미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했다. 카지노 측에서 전문 딜러를 고용하지 않고서는 날 꺾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종목을 고르더라도 황녀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흐음. 글쎄."

좋다고 선뜻 나설 줄 알았던 비올렛 황녀는 의외로 미적거렸다. 그녀의 눈길이 발코니 너머의 바깥 풍경을 담았다.

길을 따라 펼쳐진 포장마차와 가랜드, 흥겹게 울려 퍼지는 음악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광대 같은 것들을.

"처음엔 그럴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비올렛 황녀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가면을 슥 밀어 올리고 물었다.

"너, 내일 뭐해?"

자줏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 빛났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6)

비올렛 황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 일정은 왜 궁금해하십니까?"

"대답이나 해."

"뭐, 일단은 비어 있습니다만."

미켈에게 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시간을 비워뒀었으니까.

"흠, 그래? "

비올렛 황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보석 같은 광채를 발했다.

"그럼 내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예전에 '제안'을 하겠다며 다가온 카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흠, 과연.'

저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 좋은 제안을 들고 온 경우는 없던데.

"어떤 제안입니까?"

"내일 저녁, 축제에 나가볼까 하는데."

비올렛 황녀가 팔짱을 끼며 나를 응시했다.

"그때 내 길안내를 맡도록."

제안치고는 몹시 명령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길잡이도 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호위도 겸하고."

비올렛 황녀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이번에 미켈 영주와 대련을 했다면서? 검술 실력이 상당하다던데. 그 정도면 믿을만하겠지."

"...."

요컨대, 잡일꾼이란 말이었다.

대답은 일단 보류하고 질문을 던졌다.

"황녀님께서 평민들의 축제엔 무슨 볼일이십니까?"

"평민들의 생활이 궁금할 뿐이야. 황족으로서 그들에 대해 정확히 아는 건 중요하잖아?"

몹시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발언이었다.

비올렛 황녀의 인생 목표는 황녀로서 즐길 수 있는 사치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있었으니까.

"그냥 놀고 싶어서 나가시는 건 아니고요?"

"아니거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요. 평민들의 문화를 체험해보려는 것 아닙니까?"

"아니라니까!"

비올렛 황녀는 극구 내 말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축제, 특히 야간 축제를 향한 열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니긴 퍽이나.'

비올렛 황녀의 새침한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내가 이토록 확신하는 것은 단지 비올렛 황녀의 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작의 큰 사건 중 하나였지.'

비올렛 황녀는 축제날 호위들을 따돌리고 몰래 놀러 나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카인을 만난다.

카인은 바른 생활 청년답게 그녀를 황궁으로 되돌려 보내려 하지만, 비올렛 황녀가 순순히 따를리 없었다.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여러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점 감정이 깊어지게 되는데....

'라는 전개지만.'

문제는 원작에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원래는 황녀의 승부욕을 자극해서 게임을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거기서 이긴 뒤, 성녀와 접선할 핑계를 만들어 보려 했는데.

'기회가 오면 잘 이용해 주는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시커먼 속내를 숨긴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흐음, 그러시군요. 그런 깊은 뜻이."

"이제 이해했어?"

비올렛 황녀의 낯에 황족 특유의 오만함이 서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상대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는, 이 제안에 감사해하리라는 표정.

"내일 적당히 평범한 마차를 구해 오도록 해. 황궁에서 탑승할 계획이야."

방금 떠올린 것치곤 퍽 매끄러운 계획이 술술 흘러나왔다.

"거기서 마차를 갈아타고 바로 출발하지. 단단히 준비해오도록."

물론, 나는 이 제안을 곱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제가 왜요?"

"...뭐?"

비올렛 황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를 향해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아직 하겠다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만."

"...."

비올렛 황녀는 기가 막힌 듯 잠시 숨을 멈추었다.

"...하!"

이윽고 그녀가 크게 소리 내어 웃더니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이게 어떤 자린 줄 알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감추려는 듯 앙칼진 눈빛이었다.

"어떤 자리긴요. 철없는 황녀님 뒤치다꺼리를 하는 자리죠."

그 상처를 보듬긴커녕 오히려 헤집었다.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말투에 순간 비올렛 황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가 표정을 가다듬곤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

"왜 거절하는데?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가?"

"저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바빠요."

"아깐 내일 일정 비어 있다면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이득이라서요."

"제정신이야?"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기 어려운지 황녀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내 곁에서 직접 나를 수행하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거절하겠다고?"

비올렛 황녀가 턱을 바짝 쳐들고 자부심을 내보였다.

"이건 모두가 탐내는, 다들 하고 싶어도 못 해서 안달인 자리야."

"그럼 그 사람들 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비올렛 황녀의 회유에도 나는 콧방귀만 뀌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그러시지 말고, 그 안달 났다는 사람들 시키시지요."

"그 사람들은...!"

비올렛 황녀가 씩씩대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사람들은, 뭐요?"

"아, 진짜!"

비올렛 황녀가 왈칵 성을 내며 가면을 다시 써버렸다. 제 표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발코니 바깥 풍경만 바라보았다. 약간 거칠어진 숨소리가 고요한 발코니를 메웠다.

나는 황녀를 자극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 스스로 입을 열기까지.

"그 사람들이랑 가면...."

이윽고 비올렛 황녀가 나직한 음성을 내었다.

"...별로, 재미없단 말이야."

마침내 드러난 솔직한 속내였다.

"호위 기사들은 늘 내 눈치만 살펴.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날 뜯어 말리지."

비올렛 황녀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놈들하고 같이 가봤자 시시하기만 할 뿐. 게다가 본 것을 전부 폐하나 어머니께 일러바친다고. 짜증나게."

"그 사람들의 임무가 그거니 어쩔 수 없죠."

"지금 걔네 편드는 거야? 너 때문에 저번 호위 기사들 잘린 거 몰라?"

비올렛 황녀가 나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휴우,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다른 놈을 고르자니 성에 안 차고."

"이 제국에 훌륭한 영식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십니까."

"흥, 다 속이 시커먼 인간들 뿐이지."

비올렛 황녀가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안 그래도 카를로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제 아들을 밀어 넣던데."

"카인 수드 아르단테 말입니까?"

"그래. 공식 일정의 수행원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던데."

비올렛 황녀가 내 반응을 살피듯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일단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별로 내키지 않았거든."

왠지, 나 잘했지? 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비올렛 황녀의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너랑 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

"흠."

"너도 수확제는 처음이잖아? 제법 재미있을 거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한풀 꺾인 비올렛 황녀의 제안은 꽤 들을만했다. 오만하기 짝이 없던 처음보다도 훨씬.

'어디, 그럼....'

지금껏 밀기만 했으니, 슬슬 당길 차례였다.

"흐음...."

고개를 기울이고 고심하는 척하자 비올렛 황녀의 낯에 미미한 초조감이 어렸다.

"자꾸 그렇게 튕기면 그냥 다른 사람한테 넘긴다?"

"그러시든지요?"

"...."

도발이 역효과로 돌아오자 비올렛 황녀가 미간을 모았다.

"황녀님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신다면,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이 있습니다."

"...부탁?"

일부러 제안 대신 부탁이라는 단어를 썼다. 황녀가 보다 솔깃해할 수 있도록.

"네. 오직 황녀님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죠."

'황녀님만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자 비올렛 황녀가 눈을 반짝 빛냈다.

"뭔데? 어떤 건데?"

"그게...."

고심하는 척 말 끝을 흐리다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아, 뭔데!"

비올렛 황녀가 조바심을 내며 바짝 다가왔다.

"빨리 말해 봐! 뭐길래 그래?"

당장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흉흉하게 번득이면서.

"제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있으시고요?"

"뭔지 알아야 들어주든가 하지."

"들어준다고 해야 말씀드릴 겁니다."

"아, 진짜."

비올렛 황녀가 잠시 갈등했다. 내가 터무니없거나 이상한 부탁을 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염려 마시지요. 황녀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그런 부탁은 아니니까."

"흐음...."

비올렛 황녀가 나를 가늠하듯 꼼꼼히 살피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짓 거. 말해 봐. 뭔데?"

...드디어.

마침내 떨어진 허락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의 말장난만으로 황녀에게서 이런 기회를 얻어내다니, 정말이지 굉장한 이득이었다.

"사실은...."

망설여지지만 용기내어 말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간, 썩 신실하지 못한 삶을 살아오긴 했습니다."

"음."

"그걸 황녀님께 직접 말씀드리려니 썩 망설여지더군요. 황가가 신실하다는 것은 제국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비올렛 황녀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껏 한번도 신전에서 주최하는 미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귀찮고 시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카지노에서 한 게임이라도 더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그녀였다.

"흠흠, 그래서?"

비올렛 황녀는 애써 태연한 척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아까 축성제를 보면서, 신의 기적이라는 게 정말 실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몹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연기했다.

"그래서 성녀님과 단독 기도회를 갖고 싶습니다."

"단독 기도회?"

"네. 그 기회는 황족이나 고위 귀족에게만 오는 것이라, 몹시 탐나더군요."

"흐음."

비올렛 황녀가 잠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단독 기도회라...."

그 말은, 그녀 또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도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녀로썬 썩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 됩니까?"

비올렛 황녀를 g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고 달빛을 받았을 때 가장 잘생겨 보이는 각도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비올렛 황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돼."

"정말입니까?"

눈가를 접으며 웃자 비올렛 황녀가 다시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짓 거. 그 정도쯤이야 쉽지."

과연, 저 말괄량이 황녀가 스스로 미사에 가겠다고 하다니. 황후가 알면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그럼 내 제안을 수락하는 거지?"

"좋습니다. 내일 오전에 미사에 다녀온 뒤, 저녁에 뵙지요."

"좋아."

비올렛 황녀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만족스러운 거래 성립이었다.

❖ ❖ ❖

성녀 라헬은 어제부터 세상의 모든 게 싫어졌다. 원래도 싫었지만 더, 더 싫어졌다.

'아, 짜증나.'

의욕도 없고 입맛도 없었다. 어제 종일 울었다 화냈다를 반복했더니 진이 빠졌다.

그냥 방에 드러누워 숨만 쉬었다. 그 와중에 주변 상황은 그녀의 성질을 더욱 돋우었다.

"맙소사! 사제로 들어오겠다는 이가 2배로 늘었습니다!"

"기부금도 엄청나게 늘었어요! 역대급 금액을 찍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위세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신관들이 호들갑을 떨며 라헬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다 성녀님의 덕분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

"아아, 성녀님을 모신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신전의 인간들부터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그러긴커녕 교단의 이름만 드높여줬으니,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아! 짜증나!'

신관들 앞에서는 자애로운 성녀의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결국 애꿎은 치마만 꾸깃꾸깃 움켜쥐어야 했다. 생각할수록 암담하여 밤잠도 설쳤다.

'아, 피곤해.'

겨우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아침 미사를 끝내던 중이었다.

"소, 속보입니다!"

한 신관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고 왔다.

"황녀님께서 미사를 드리시겠다고 합니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7)

미사를 마무리짓던 인원들이 사이에 비상 경보가 울렸다.

"이 시각에요?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어떤 황녀님이 행차하십니까?"

다른 신관들의 질문에 그가 성호를 그었다.

"오, 디오 베네디카."

들썩이는 가슴을 가라앉힌 뒤 희열에 싸여 외쳤다.

"무려 비올렛 제1황녀님입니다!"

"세상에, 신이시여!"

"이럴 수가!"

신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허허.... 결국 비올렛 황녀님 마저도 움직이시는군."

"신전의 경사입니다."

늙수그레한 신관들은 점잔을 떨었지만,

"1 황녀님이라니! 단 한 번도 미사에 안 오셨는데!"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시는 그분이?!"

"그뿐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잖습니까!"

"우와! 당장 청소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아직 젊은 신관들은 신나서 재잘거렸다. 그 모습을 본 라헬은 짜증이 더욱 치솟는 것을 느꼈다.

'비올렛 황녀라고?'

라헬은 모든 황족들을 싫어했지만 그 중에서도 비올렛 황녀는 예외였다. 단 한 번도 미사에 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왜 안 하던 짓거리를 하고 지랄이지?'

라헬은 테오도어의 피가 닿은 황족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런데 이제 얼굴까지 닮은 비올렛 황녀마저 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신의 뜻이 비올렛 황녀님께 닿은 것이지요."

라헬은 부글거리는 속내를 감추며 조용히 말했다.

"비록 갑작스러운 행차지만, 미사에 차질이 없도록 꼼꼼히 준비하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열렬한 충성심을 보이는 신관들을 보아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황족들은 신전과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주기적으로 미사에 참여했다. 그것도 보통은 오후 늦은 시간대였다.

'무슨 이 시간부터 미사 타령이야? 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지런했다고?'

라헬은 제 베일을 몹시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즉, 입술을 한껏 삐죽거리며 예배실을 향해 나아갔다.

오늘따라 예배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신관들이 먼지 한톨 없도록 부지런히 쓸고 닦은 덕분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라헬은 쉼 없이 투덜거리며 연단 앞에 섰다. 피로함에 눈가를 찡그린 순간,

"비올렛 제1황녀 전하 드십니다!"

신관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또각, 또각.

굽 소리와 함께 비올렛 황녀가 입장했다.

오늘 황녀는 비교적 얌전한 검은색의 온몸을 감싸는 드레스를 입었다. 최고급 원단을 아낌없이 쓴 덕분에 전신에서 윤이 났다.

사슴처럼 쭉 뻗은 늘씬한 팔다리와 훤칠한 키, 그리고 매혹적인 낯이 사람을 압도했다.

아직도 어린 소녀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과는 퍽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흥, 천하절색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라헬은 입가를 비틀면서도 황녀의 미모만은 인정했다.

"허...."

"와...."

철없는 젊은 신관들은 황녀가 제 옆을 지나치자 입을 헤벌레 벌렸다. 그래도 그건 참아줄 수 있었다.

"허어...."

"호오...."

하지만 노신관들마저 그러는 데는 기가 막혔다.

"주교."

라헬은 주교에게 넌지시 눈치를 주었다.

"쯧쯔."

뜻을 알아들은 주교가 낮게 혀를 찼다. 신관들은 그제야 무례를 깨닫곤 황급히 표정을 단속했다.

"...."

다행히 비올렛 황녀는 그들을 나무라는 일 없이 계속 걸어왔다. 그리하여 그녀가 연단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라헬은 비올렛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지 애비를 똑 닮았네.'

테오도어 황제의 핏빛보다 다소 어두운, 요요하게 빛나는 자수정빛 눈동자.

비올렛 황녀는 지금껏 라헬이 봐온 어떤 황녀들보다도 가장 테오도어 황제를 닮았다. 무심한 표정마저도.

"어서 오세요, 비올렛 황녀님."

라헬의 인사에 비올렛이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반갑소."

그리곤 중앙 통로를 기준으로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지 애비를 닮아서 싸가지가 없군.'

라헬은 속으로 그녀를 있는 힘껏 깎아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다음 순간, 문으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시선이 멎었다.

푸른 머리카락, 희고 수려한 낯, 약간 비스듬하게 치솟은 입가. 무엇보다도, 아침 이슬을 맞은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

레퀴엠의 주인이었다.

'어어어어?'

라헬은 하마터면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킬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버려서였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이십니다."

레퀴엠의 주인, 즉 아벨이 신관의 호명이 끝난 뒤 예배실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걸어 연단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라헬의 입가로 나직한 탄식이 터졌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이라고.'

그였다. 지금껏 그녀를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든, 레퀴엠의 주인이.

젊은 시절의 디에고와 외모는 닮았으나 눈빛이 완전히 달랐다.

디에고의 것이 냉혹한 늑대 그 자체라면, 아벨은 이지적이면서 나른하게 흩어졌다.

그러나 그 안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반짝이는 무언가가 사람을 매혹했다.

그것은 원하는 바를 반드시 얻는 자의 눈빛이었다. 흔들리지도, 타협하지도 않는.

라헬은 신관이 제 앞에 성서를 가져다 줄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세레나드의 힘으로 그를 비출 생각도,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성녀님?"

"아."

그녀는 신관의 부름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손 끝에 땀이 배어 손이 미끄러졌다.

'후우.'

겨우 성서를 붙잡고는 연단 위에 올려두었다.

그 사이 아벨은 연단에 가까이 다다라 있었다. 그가 라헬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

라헬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 온몸의 세포를 그에게 집중시키고 귀를 기울였다.

"...."

이윽고, 아벨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인 뒤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비올렛 황녀의 반대쪽인 왼편 자리였다.

"아...."

긴장했던 게 무색해졌다. 라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전하."

비올렛 황녀를 따라온 시녀가 성녀를 꺼내어 내밀었다. 희게 센 금발에 차분히 가라앉은 벽안의 중년 여성이었다.

"음."

비올렛 황녀가 성서를 펼치고, 아벨도 준비를 마쳤다. 그제야 주교가 연단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막 시작을 알린 순간,

"잠깐."

비올렛 황녀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오늘 이 자리를 찾은 것은 어제 축성제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오."

황녀의 시선이 라헬을 향했다.

"하여 성녀님과 단독으로 미사를 진행했으면 하는데, 어떻소?"

"성녀님과 단독으로요?"

예상치 못한 요구에 주교가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껏 미사는...."

"내 이 자리에 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님과의 시간을 위해서요. 그걸 방해받고 싶진 않군."

비올렛 황녀가 자줏빛 눈동자를 번득였다.

"혹시, 안 될 이유라도 있소?"

눈빛에서 전해져오는 압박감이 황제 못지 않았다. 숱한 권력자들을 만나왔던 주교마저 쩔쩔맬 정도였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성녀님의 뜻도 여쭈어봐야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는 성녀에게 결정의 화살을 돌렸다.

"좋아요. 제가 진행하도록 하지요."

라헬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주교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눈치였다. 지금껏 성녀가 이토록 적극성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황녀 전하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주교가 뺨을 긁적이고는 물러났다. 내심 라헬의 축객령이 반가운 눈치였다.

"그럼 밖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부터 일이 많이 밀려서요."

"그러도록 해요."

주교가 예배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저들은 왜 서 있는 것이지?"

비올렛 황녀가 손을 들어 연단 양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을 가리켰다.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녀 님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기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비올렛 황녀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성녀님께 무슨 위해를 가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사의 음성은 그저 의무를 말하듯이 담담했다.

"그저 황명을 따를 뿐입니다."

"...."

비올렛 황녀가 입가를 슬쩍 비틀었다.

"폐하의 뜻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군."

비올렛 황녀의 시선이 라헬을 향했다.

"시작하시오."

그사이 라헬은 성서의 표지에 손을 얹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흥미롭다는 듯이 성서를 팔락거리는 아벨을 바라보면서.

'여긴 왜 온 거지? 뭘 알고 온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의 일치?'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말을 걸면....'

틀림없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아니지.'

라헬은 불현듯이 떠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 레퀴엠을 폭주시키면 되잖아?'

레퀴엠에게 가장 먼저 살해당하는 게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유혹적인 가능성이었다.

레퀴엠의 주인이 코앞에 있는데 왜 이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나 멍청인가?'

어제와는 달리,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라면 레퀴엠을 자극하기 충분할 것이다.

'그래, 지금이라면...!'

라헬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

"-!"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청보랏빛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반짝였다. 라헬의 속내를 꿰뚫고 있다는 듯이.

그 순간 라헬은 왠지 모를 예감을 느꼈다. 지금 시도해봤자 어제와 똑같은 결말에 다다를 것이라는 그런 예감.

"...."

오한이 밀려왔다. 시커먼 구덩이가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어쩐지 아벨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스쳤다.

"성녀님?"

비올렛 황녀의 목소리가 라헬을 깨웠다.

"아."

비올렛 황녀가 의아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라헬이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사이 아벨은 다시 성서로 시선을 내린 채였다.

'...잠시 상황을 살피자.'

라헬은 일단 행동하는 것을 보류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뒤 성서를 펼쳤다.

"12조 4항부터 시작할게요. 신의 말씀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이지요."

나직한 목소리로 성서를 읽어나갔다.

"...하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널리 이롭게 하고...."

몇 십번 반복해서 들은 구절이라 이미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라헬은 기계적으로 성서를 읽어나갔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해 볼까?'

머릿속으론 딴 생각을 하면서도, 입만은 충실하게 성경을 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께서 말하시길...."

한동안 예배실은 성서를 읽는 라헬의 목소리로만 가득했다. 그 고요함에 잠겨 있던 라헬은 문득,

'...어?'

주변이 고요해도 너무 고요하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리라...."

봉독을 멈추지 않고 슬쩍 얼굴을 들어 올렸다.

"-!"

라헬의 눈가가 꿈틀했다. 비올렛 황녀가 성서를 든 채 졸고 있었다.

'하, 그럼 그렇지.'

저 황녀가 미사에 충실히 참여할 리가 없었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것이다.

콧방귀를 뀌며 옆을 본 순간,

"-!"

라헬은 흠칫 놀랐다.

황녀의 시중을 들어야 할 시녀조차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뭔가... 이상해.'

심상찮음을 감지한 라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방에서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이게...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사실 제게 세이렌의 재능이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든 순간,

"신의 말씀이 너무 지루했나 보죠."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들려왔다. 라헬은 소스라치게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흐아아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는 아벨이었다.

"하마터면 나도 잠들뻔했네."

내용과는 달리 잠기운이라곤 조금도 없는 목소리였다.

"사실 살짝 졸았지만."

그가 라헬을 향해 씩 웃었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8)

"...!"

라헬은 아벨이 이 상황을 만들어 냈음을 깨달았다. 즉, 이 예배실에서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과 그뿐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죠?"

라헬은 온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성녀 특유의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약을 좀 썼죠. 무색무취의 연기를 뿜어내는."

아벨이 중앙 통로로 나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예배실을 울렸다.

"다들 정신이 들고나면 잠들었었다는 것도 모를걸요."

아벨이 옷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어 확인한 뒤 말했다.

"지속시간은 한 10분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뭐가 충분하다는 거죠?"

라헬은 잔뜩 날을 세운 채 그를 대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를 대하려니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할 시간 말입니다."

아벨의 느른한 목소리가 흩어졌다.

"그런데 이거 좀, 섭섭한데요."

지끈, 지끈.

라헬의 어깻죽지, 세레나드의 문양이 있는 곳에 열감이 서서히 번졌다. 아벨이 다가올수록 점점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강해졌다.

상황은 마찬가지일 텐데도, 아벨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섭섭하다니, 뭐가요?"

라헬은 베일이 오늘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엉망으로 일그러진 낯을 낱낱이 보여야 했을 테니까.

"성녀님이 너무 모르는 척을 하시니까요."

아벨의 목소리는 라헬의 것과 달리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어제 직접 불러놓고선."

아주 얄밉게도.

그가 자신의 어깻죽지를 톡톡 두드리자,

"아...!"

라헬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깻죽지를 붙잡았다. 이제는 화끈화끈하게 느껴질 지경인 그곳을.

"성녀님께서 신성한 기도 시간에 그리 딴짓을 하시면 되겠습니까."

라헬의 심장이 쿵, 바닥에 추락했다.

'날 봤어?'

그뿐이 아니었다.

아벨의 말투는 마치 라헬이 어제 뭘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들렸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뚜벅, 뚜벅.

마침내 아벨의 걸음이 멈추었다.

"...."

그는 연단 아래에서 잠시 멈춰있다가, 이내 쑥 하고 연단 위로 올라왔다.

라헬의 바로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오롯이 라헬을 담았다.

"아...."

라헬의 입가에서 부지불식간에 탄식이 터졌다.

느껴졌다. 이 압도적인 존재감,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끌림.

그는 명실상부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레퀴엠의 주인이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그 순간 아벨이 슬며시 미소 지은 것 같다고, 라헬은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사락.

아벨의 손가락이 제 베일에 닿았기 때문에. 이윽고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베일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

순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깎아 지른듯한 턱이 보이고, 얇고 섬세한 입술과 수려한 콧날을 지나쳐, 마침내 청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

라헬은 느꼈다.

멈춰있던 자신의 시계 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반갑습니다, 성녀님."

아벨의 입가에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 ❖ ❖

라헬의 베일을 쥐고 있던 나는 그 진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도,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의 박동까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라헬의 목소리는 심경을 대변하듯 잔떨림을 머금었다.

"아, 궁금했거든요. 그 베일에 감춰진 '성녀님'의 얼굴이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보겠습니까?"

라헬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렇게 실제로 보니...."

약간 물러나서 보니 라헬은 정말 작았다. 자그마한 얼굴, 가냘픈 어깨와 아담한 신장.

"...정말, 신기하군요."

그 누구도 이 속에 몇백 살 먹은 여자가 들어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테니까.

원작의 등장인물 중, 라헬은 내게 색다른 의미를 가졌다.

레퀴엠의 형제검 세레나드를 가진, 내가 최초로 만난 검의 소유자.

'나머지 둘은 아직 검을 쥐지 못했으니.'

건틀렛 속이 뜨끈했다. 세레나드의 존재감을 느낀 레퀴엠이 몸을 꿈틀거리는 탓이었다.

녀석은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혹은 세레나드를 탐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안 될 일이지.'

세레나드를 취하는 것은 나중의 일.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

그동안 라헬은 속을 알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요."

다시 나를 향하는 라헬의 얼굴에선 당황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당신을 불렀어요."

신도를 가르치듯이 조근조근한 말투였다.

"당신의 몸에 깃든, 사악한 악령 때문에요."

"...악령이라."

와, 이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과연 몇백 년 먹은 짬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 찰나에 감정을 가다듬고 연기를 시작하다니.

'순발력이 대단하신데.'

저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그 '자애로운' 성녀의 말투를 어디까지 써먹을 수 있을까.

"네. 검의 형태를 한 악령이지요. 그것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던가요? 사람의 몸을 가르고 피를 취하라 속삭였지요?"

라헬이 내게 한 걸음 다가섰다. 오랜 기간 성녀로서 지내며 갈고 닦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그것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어요. 악령이 그대를 지배하지 않을까 걱정했지요. 하여 늘 그대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

"내가 도와줄게요. 내 도움을 받으면, 그대는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열성적인 말투와 진심 어린 표정은 그녀가 정말로 나를 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와주다니, 어떻게요?"

"그 검으로, 저를 찌르세요."

소녀의 청순한 낯 위로 천진한 매혹이 번졌다.

"제가 그것을 '정화'하도록 돕겠습니다. 제게 깃든 신의 힘이라면 가능합니다."

예배실의 빛처럼 흩어지는 목소리는 신의 그것처럼 경건했다. 꼭 그 말을 따라야 할 것처럼.

"어제 축성제에서 보았지요? 신께서는 제게 그대의 악령을 정화하라고 이르셨습니다."

"...."

"그것이 어제 그대가 본 강렬한 빛의 정체입니다."

라헬이 손을 들어 제 가슴에 얹었다.

"자, 어서 그 검을 꺼내세요. 그리고 이곳을 찌르세요."

"그랬다간 성녀님이 위험해질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라헬의 낯은 마땅한 의무를 행한다는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군요. 신께서 저를 이곳에 내려보내신 이유를."

"...."

"전부 그대를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대의 몸에 깃든 악령을 정화하여, 이 세상을 구하라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명연설이요, 심금을 울리는 속삭임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저 하나의 희생 따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라헬이 양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왔다.

선명한 녹안이 광기로 일렁였다. 봄볕처럼 순후해야 할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내 손이 움찔, 움직였다. 그것을 발견한 라헬의 눈이 더욱 번득였다.

"자, 어서요."

그녀는 내가 자신의 말에 감화되어 따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긴, 스무 살의 애송이가 무얼 알겠냐 싶었겠지.

문제는 내가 원작의 아벨 킨드리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짝짝짝....

나는 레퀴엠을 꺼내는 대신 손을 들어 크게 박수쳤다.

"...?"

라헬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지금, 무슨...."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서 계속 들어봤는데."

계속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성녀 짬밥을 헛으로 먹은 건 아니네. 아니면 몇백 살 먹어서 혀가 그리 잘 굴러가는 건가?"

라헬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성녀님."

씩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아니, 라헬이라고 불러야 하나?"

"...!"

라헬의 녹안이 크게 부릅떠졌다. 얼굴에 걸쳤던 성녀의 가면이 순식간에 깨어져 나갔다.

"어, 어떻게...."

라헬의 입가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어떻게."

라헬이 두 손을 꼭 모아쥐었다. 떨림을 감추지 못한 손등이 잘게 흔들렸다.

"그건, 그 이름은 몇백 년간 아무도. 오직 테오도어만이...."

"당신만 사계절의 검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마."

충격으로 요동치는 그녀의 녹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만큼, 아니 어쩌면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사계절의 검까지 알고 있다니...."

라헬이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아는 걸 더 말해줘?"

손을 하나씩 꼽아 가며 말해주었다.

"일단 첫째. 내가 손에 넣은 것이 레퀴엠이고, 가을의 검이라는 것. 공허의 속성을 갖고 생명을 탐한다는 것."

라헬은 숨도 못 쉬고 쌕쌕거리기만 했다.

"둘째. 당신이 몸에서 뿜어내는 그거, 성력이 아니라 세레나드의 힘이라는 것. 레퀴엠의 형제인 봄의 검이지."

라헬의 손이 꾸욱 우그러들었다. 그 아래 잡힌 치마가 구겨졌다.

"마지막으로... 셋째."

내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보다 강해져, 한결 싸늘한 색채로 변했다.

"당신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

"-그건!"

라헬의 낯에 잠시 밀어두었던 지독한 절망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건 오직...."

"말했잖아. 당신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

정작 중요한 질문엔 회피해버리는 내 화법에, 라헬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레퀴엠을 쥐고 지금껏 버텼나 했는데.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군요."

라헬이 강렬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당신, 정체가 뭐죠?"

"기억력이 나쁘네? 아까 신관이 말해줬잖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해줬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그 뜻이 아니잖아요!"

라헬의 음성이 격앙되었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사계절의 검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라헬이 끝내 이를 악물었다.

"...나에 대해서, 그만큼 알고 있냐는 거죠!"

"...."

"이건 불가능해! 말이 안 된다고요!"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귀를 후비적 파는 시늉을 한 뒤 말을 돌렸다.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

라헬의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그건...."

"사기를 너무 심하게 치는 거 아니야? 짚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던데."

팔짱을 끼며 대놓고 빈정거렸다.

"악령, 정화라던가 신의 뜻이 어쩌구 저쩌구.... 그런 건 일단 넘어가지. 아마 당신도 말하면서 혀를 깨물고 싶었을 테니."

라헬의 얼굴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나랑 비올렛 황녀가 여기 온 걸 신전이 뻔히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당신을 죽여?"

라헬의 입가가 순간 꿈틀했으나, 그녀는 그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돼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제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

"헛소리. 당신, 황제의 허락 없인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

라헬이 입을 다물었다. 일그러진 눈가에 분노와 의혹이 스쳤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 아무것도 없잖아?"

"...."

"해봐야 성녀 살해범이라는 칭호나 얻겠지. 퍽이나 명예롭겠군."

신랄한 비꼼에 라헬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황제의 추격까지 감당해야 하잖아. 하, 이런 제안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하셨네?"

"...."

"내가 이렇게 밑지는 장사를 왜 해야 하지? 손해가 너무 압도적인데."

라헬이 입술을 꾹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세레나드를 취하라고?"

나는 그보다 우스운 말은 없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그거, 나한테 죽으라는 소리잖아?"

"...."

"알잖아. 자격 없는 자가 세레나드를 쥐면 어떻게 되는지."

레퀴엠을 쥔 자가 무지성의 살인마가 되듯, 세레나드를 쥔 자 또한 파멸에 이른다.

넘쳐나는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는 태초의 생명체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완전한 죽음을 의미했다.

"당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라헬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새파란 애송이라 맘껏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나 본데. 생각만큼 쉽진 않지?"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9)

"너!"

라헬이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려 들었다.

"어이쿠."

눈 감고도 피할 수 있는 공격을 슥 피해준 뒤,

"실례."

라헬의 양 손목을 잡고 뒤로 밀어붙였다.

"윽!"

여린 소녀의 몸이 순식간에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내 손에 잡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라헬이 나를 찌릿 쏘아보았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야?"

"그럼 뺨을 얻어맞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어?"

"이익...!"

라헬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거 안 놔?! 이 빌어먹을 새끼가!"

오, 벌써 나왔군.

라헬의 전매 특허는 저 얼굴에서 나오는 거라곤 믿기 힘든 걸쭉한 욕설이었다.

"죽여버린다! 좋게 말할 때 이거 놔라, 새끼야!"

순식간에 악귀 같이 변한 얼굴로 욕설을 퍼붓는다. 씹어뱉는 목소리가 어찌나 서슬 퍼런지 흉악하기까지 하다.

"날 어떻게 죽일 건데? 그것 참 궁금하네."

"이 개새끼가!"

라헬이 온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힘은 나를 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단단히 붙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놓으라고 했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라고 가만 있을 줄 알아?!"

라헬이 앙칼지게 외치며 위협적인 눈빛을 보였다.

"오호."

그녀가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아 픽 웃었다.

"뭘할 건데? 아, 그거?"

라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속삭였다.

"레퀴엠 자극해서 폭주시키기?"

"-!"

속내를 찔린 라헬이 움찔했다. 이내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감췄지만.

"해 봐."

그런 라헬을 보며 유들유들한 말투로 말했다.

"설마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오면서 그 정도 대비도 안 했을까?"

"...."

"너무 안이한 발상이야, 라헬. 어제 해 봐서 알잖아?"

라헬의 손목을 놓아주고 물러섰다.

"정 궁금하면 시도해보든지."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비스듬하게 섰다.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아, 쫄린다.'

속은 그렇지 않았지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세레나드의 힘이 나를 덮친다면,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수호자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면, 결국 레퀴엠이 나를 비집고 나올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이런 나의 태도는 궁지에 몰린 라헬에게 효과가 있었다.

라헬은 이를 악물면서도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제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그녀를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여유로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의심의 싹을 활짝 피울 것이다.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것은 없는지,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건지.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라헬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더러 어떡하라는 건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

서글픔으로 흐려진 목소리가 바닥을 적시며 번져나갔다.

"여긴 왜 온 거야? 날 더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라헬이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다.

"이젠 아무 희망도 없다는, 그 말을 하려고 온 거냐고!"

"...."

"그거라면 네가 안 해도 충분히 알고 있어! 너무 잘 알아서, 이젠 지긋지긋할 정도로!"

치렁거리는 녹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분노로 얼룩진 눈빛이 들끓었다.

"말해봐, 아벨 킨드리얼! 여긴 대체 왜 온 건데?"

라헬은 지독한 울분을 내보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몇십년간 축적된 그것이 방향을 잃은 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으이구."

툭.

그런 그녀의 이마를 살짝 쳤다.

"할머니, 너무 열 내지 마세요. 그러다 쓰러집니다."

"무, 무뭐뭐? 할, 할머니이?"

라헬이 이보다 황당한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는 듯 새된 비명을 질렀다.

"눈 삐었어?! 내가 어딜 봐서 할머니야?"

"겉모습만 어린 애지 속은 할머니 맞잖아? 아니지, 몇백살 살았으면 해골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라헬이 버럭 소리쳤다. 얼굴의 분노가 씻긴 듯이 사라지고 황당함만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 감히, 나, 나한테...."

"그리고, 왜 엉뚱한 데다 화를 내고 지랄이야?"

라헬을 지긋이 바라보며 일침을 날렸다.

"네가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잖아? 테오도어 때문이지."

"...."

라헬의 기세가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꾹 움켜쥐었던 주먹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누가 그걸 몰라? 나도 알아. 아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 그 계약 때문에?"

힘을 잃고 처지던 라헬의 고개에 힘이 들어갔다. 라헬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 계약까지 아는 거지?"

"난 모르는 게 없다니까."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때, 아직도 날 휘두르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나?"

라헬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내가 라헬을 이용한다면 모를까.

"...."

라헬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풍을 만난 들판처럼, 그녀의 녹안이 휩쓸렸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것 저것 재느라 바빠 보이는군.'

고민에 잠긴 라헬을 보며 미소를 감췄다.

그녀가 지금 죽고 싶어 하는 것은 테오도어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인 신세가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오도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빌어먹을 '계약'을 무효화 한다면?

'혹은....'

세레나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내 머릿속엔 다양한 계획이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보를 미리 알려주지는 않았다.

'아직 라헬을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언제든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인간들 많은 데서 레퀴엠을 폭주시키려고 하는 것만 봐도, 그녀의 냉혹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겐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은 소용이 없다. 철저하게 합리적인 이유와 근거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라헬, 잘 생각해 봐."

라헬을 향해 부드러운 음성을 냈다.

사락-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

뜻밖의 행동에, 라헬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어."

"...."

"어떻게 하면 레퀴엠을 자극할 수 있을까, 황제에게 내 이야기를 해서 압박해볼까, 하는 고민들이겠지."

라헬의 눈이 더욱 커졌다. 흠칫, 옆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힘주어 붙잡았다.

"아."

"눈 피하지 마."

마구 요동치는 라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잘 생각해. 이게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기회라고?"

"그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

내 입에서 나오는 기회라는 것은, 다른 이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는 궤가 달랐다.

기회는 유일한 것일 때 더욱 큰 힘을 갖는다.

"사계절의 검들은 참으로 지독한 존재야. 그렇지?"

"...."

"틈만 나면 소유자를 닦달하고, 제 뜻대로 휘두르려고 들잖아. 꼭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지독한 폭군처럼."

라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입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벌어졌다.

"그래, 정말 고약한 녀석들이지. 그런데 이 고통을 아는 사람은?"

머리카락을 넘겨준 손으로 라헬의 뺨을 살짝 붙잡았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라헬, 너."

다른 손으로 라헬의 손을 붙잡아 내 가슴에 얹었다. 그녀의 신장으론 내 뺨에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 뿐이야."

라헬은 그 어떤 거부의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멍하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려고 든다. 라헬이라는 새앙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적절히 숨통을 틔워주는 게 필요했다.

"이런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도울 수 있을까?"

그녀의 벌어진 분홍빛 입 안으로, 독을 흘려 넣듯 감미롭게 속삭였다.

"신전? 그들의 신실함은 바닥에 구르는 쓰레기와도 같지. 돈을 주면 발이라도 핥을 자들이니까."

"...."

"대주교? 그 자식은 황제의 개야. 널 돕기는커녕 황제에게 일러바칠 궁리나 할 테고."

라헬의 낯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황제? 그거야말로 네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지."

독과 같은 치명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가 네 말을 믿을까? 설령 믿더라도,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까?"

"...."

"계약으로 묶인 너와는 달리, 황제는 날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어쩌면 날 제 편에 세우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심장을 겨냥하듯, 날카롭게 푹 찔렀다.

"혹시 모르지? 황제의 입에서 내가 혹할 만한 좋은 조건이 나올지도."

"아, 안돼."

라헬의 입가에서 절망스러운 탄식이 터졌다.

"그러지 마. 그 자식은...."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라는 거야."

라헬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물러났다.

"나와 손을 잡아. 그게 네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야."

내가 자신보다 한참 우위에 있음을 주지시키고, 한정된 정보를 주어 생각을 제한시킨다.

내 말에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막다른 벽에 몰리게 되면, 제게 내밀어진 것이 독이 든 사과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입에 넣고 만다.

지금의 라헬처럼.

"너와 손을, 잡으라고...."

라헬은 석상처럼 굳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흐려진 눈동자가 여러 가능성을 점쳐보듯 복잡하게 일렁였다.

"...너와 손을 잡으면,"

마침내 라헬이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소원을 들어줄 건가?"

저런.

아직도 라헬은 내가 자신을 곱게 죽여줄 거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착각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

"그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라헬은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없었다. 아까 내가 한 말, 그리고 지금의 발언까지 이것저것 곱씹어보고 있는 듯했다.

째깍, 째깍.

품속에 넣어둔 회중시계가 소리를 냈다.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이 정도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라헬에게서 몸을 돌려 내 자리를 향해 걸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두 가지야."

라헬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

"첫째, 당신을 만나는 것."

"...."

"그래서, 결정은?"

자리에 앉아 라헬을 응시했다. 라헬은 나를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 같진 않네."

"잘 생각했어."

씩 웃은 뒤 손을 들어 비올렛 황녀의 옆자리에 앉은 시녀를 가리켰다.

"두번째 용건은, 저 여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것."

시녀인 척 이곳에 들어온 엘리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건, 좀 의외네."

라헬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인간은 보통 이 힘을 자신을 위해서 쓰거든."

"그게 결국 나를 위한 거야."

"흐응."

라헬의 입가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비올렛 황녀에게 점수라도 따고 싶은 모양이지?"

"마음대로 생각해."

말을 마치곤 잠시 덮어 두었던 성서를 다시 폈다.

"아, 근데 어디 읽고 있었더라?"

라헬이 입술을 씰룩이더니 마지못해 말해주었다.

"12조 7항, 막 들어가려고 했어."

"그렇군."

"근데 저 여자에게 축복을 어떻게 내리라는 거야? 내 축복은 주교의 엄격한 기준 아래 선발한 사람에게만 주어지게 되어 있어."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라헬에게 픽 웃어 보였다.

"당신, 성녀잖아? 아까 나한테 하던 대로만 해보라고. 사람들이 끔뻑 넘어가겠던데?"

"...."

라헬이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그런 라헬을 향해 이마를 툭툭 쳐 보였다.

"베일 내리는 거 잊지 말고."

"흥.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

라헬이 입을 삐죽이며 베일을 내렸다. 뾰로통한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기억해 둬. 우린 오늘 여기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거야."

"...흐응."

"황제가 우리의 만남을 알아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건 알고 있겠지?"

"알았어."

째깍, 째깍, 째깍.

라헬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회중 시계의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 참, 다음엔 어떻게 만날 건데?"

성서를 펼치던 라헬이 막 생각난 듯 물었다.

Chapter 19.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긴다. (10)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어차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

"평소처럼 조용히 있어. 괜히 황제 심기 거슬러서 처맞지 말고."

라헬이 기가 막힌 듯이 멈추어 있다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 찍찍이야?"

"그럼 예의를 지켜서 존댓말 쓸까요, 할머니?"

"...그냥 반말 써."

"하하."

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흩어지고, 라헬이 꿍얼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주둥아리하고는.... 너 어디 가서 함부로 나불거리지 마라. 칼 맞기 딱 좋겠다."

"아, 그건 걱정 마. 난 칼침을 맞기 보다는 놓고 다니는 편이니까."

"쪼끄만 게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네. 아무튼, 알았어."

라헬이 콧방귀를 크게 한번 뀌고는, 다시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로 인도하셨노라.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서서히 주변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성서를 들고 졸고 있던 비올렛 황녀도, 시녀로 분장한 채 잠에 빠진 엘리체와, 선 채로 잠에 빠져들었던 기사들까지.

"...."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시 성녀의 봉독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 그들을 곁눈질로 보곤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재밌네.'

성녀 라헬과의 대화는 썩 흥미로웠다. 준비했던 으름장이 잘 먹히기도 했고.

'이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까?'

과연 라헬이 어떤 식으로 축복을 내릴지 기대되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온 엘리체의 반응도 궁금했다.

라헬은 한동안은 순순히 미사의 모든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이름에 찬미와 영광이 되길...."

비올렛 황녀는 쏟아지는 졸음과 지루함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엘리체는 그저 고요히 서 있을 뿐이고, 기사들은 익숙한 상황에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다 미사의 마침 예식에 이르자,

"...잠깐."

갑자기 라헬이 한 손을 들어 예식을 중지시켰다.

"...?"

비올렛 황녀가 흐리멍덩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이미 반쯤 잠의 세계로 떠나 있었다.

"무슨 일이오?"

황녀의 물음에 라헬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연단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느껴져요."

"무엇이?"

"신께서... 신께서 말하고자 하십니다."

"신께서?"

비올렛 황녀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헬은 그런 비올렛 황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아아... 들려요. 그분의 기쁨에 가득 찬 음성이."

"???"

비올렛 황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라헬을 바라보았다. 라헬은 비올렛 황녀의 앞에 서서 두 팔을 천천히 쳐들었다.

"나의 아이가 내 품으로 돌아왔구나."

신의 말을 전하듯 위엄 넘치는 음성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목소리가 여러 명으로 겹쳐 들려, 그 순간엔 나도 깜빡 속을 뻔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아이야."

라헬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신에서 폭발하듯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그 시큰둥하던 비올렛 황녀마저 놀라 얼어붙었다.

"아아...."

라헬이 양팔을 감싸 안고 전율했다.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비올렛 황녀에게 말했다.

"신께서 이르셨어요. 내 아이가 드디어 돌아왔음에, 이 기쁨을 감출 길이 없노라고."

"...아아, 그, 그렇소?"

비올렛 황녀는 크게 벌어진 두 눈을 끔벅거릴 뿐이었다.

'신이 날 그렇게 반긴다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여, 이 자리를 찾은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라고 하셨어요."

"축복을?"

"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에게요."

라헬이 비올렛 황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비올렛 황녀는 반사적으로 흠칫했으나, 곧 자신을 감싸는 흰 빛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과연 어떤 느낌일까.

원초적인 생명력. 그 어떤 상처도, 질병도 모두 완벽하게 치유해버리는 끝없는 생명력이 닿는다는 것은.

"...."

의외로 레퀴엠은 잠잠했다. 라헬이 세레나드의 힘을 조절하고 있는듯했다.

비올렛 황녀는 라헬이 손을 뗄 때까지 멀거니 서 있었다. 그녀의 겉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라헬이 걸음을 옮겨 그 옆의 시녀, 엘리체에게 향했다.

"아, 저, 저도요?"

엘리체는 드물게 당황한 듯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놀라지 마세요. 신의 은혜는 햇살과도 같아 모두에게 공평하게 뿌려진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코웃음을 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했다.

'혀에 침도 안 바르고 저런 말을 하네.'

아까 주교의 엄격한 기준 하에 선발 어쩌고 한 게 누구더라?

그 엄격한 기준이라는 건 아마 신전에 내는 기부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 일터.

'햇살도 마찬가지지.'

부자들의 높은 건물 유리창으론 쉽게 비쳐들면서, 하층민들의 그늘지고 음습한 지하엔 한 줄기도 비치지 않는다.

그러니 라헬의 말은 어찌 보면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앗...."

라헬의 손이 제 목덜미에 닿자, 엘리체가 어깨를 움츠렸다.

"놀라지 마세요."

라헬은 자애롭게 속삭이더니, 세레나드의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덜커덩.

레퀴엠이 크게 몸을 한 번 들썩였다. 하지만 수호자의 힘이 녀석을 지긋이 내리눌렀다.

라헬이 곁눈질로 나를 한번 훑는 게 느껴졌다.

'과연, 시험해 봤다 이건가.'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여자다.

라헬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엘리체에게 마저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흰 빛이 더 이상 강해지지 않고 엘리체의 몸에 스며들었다.

"아, 아...."

엘리체의 주름진 목덜미가 팽팽하게 펴지고, 얼굴 곳곳에 피었던 검버섯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희게 세었던 머리카락들이 원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금빛이었다.

"...호오."

비올렛 황녀마저도 놀라서 신음을 내뱉었다. 말로만 듣던 성녀의 축복이 진정으로 발휘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다.

내가 처음 엘리체를 데리고 왔을 때.

비올렛 황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오늘만이라는 소리에 일단 시녀로 받아들였다.

'왜 이런 나이 든 여자를 데리고 왔나 싶었겠지.'

엘리체와 나의 관계는 철저히 숨겨져야 했다. 비올렛 황녀의 시녀인척 들여온 것도 그래서였다.

테오도어 황제처럼 의심이 많은 이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읍... 아아...."

엘리체는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켰다. 새파란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바다처럼 짙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체의 눈가에서 쏟아진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라헬의 얼굴엔 미동이 없었다. 세레나드의 힘을 경험한 자들이 보이는 경외를, 이미 질리도록 겪어온 탓일 터였다.

"신께서는 언제나 모든 이들을 굽어살피십니다."

그저 그리 답하고는 엘리체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

기사들은 평소와 다른 라혤의 행보에 다소 당황한 듯했으나, 제지할 핑계가 없어 자리를 지켰다.

"그대는...."

라헬은 내 앞에 서서 마치 나와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푸른 늑대의 후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엘리체에게는 선뜻 축복을 내리던 라헬은, 정작 내 앞에서는 뜸을 들였다.

"그간 킨드리얼 가문에서 기도를 올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던데."

신을 향한 믿음이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새침한 돌려묻기였다. 아까의 일에 대한 보복성이 다분한.

어쭈, 기회는 이때다 하고 딜을 넣네?

"제 목숨을 지켜주는 것은 신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한 자루의 검이더군요."

라헬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무래도 제 기도가 부족했나 봅니다. 검을 쥘 때마다 신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짖었는데 말이죠."

한결 낮아진 음성에 라헬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신의 자비로움에 감사하도록 하세요. 신께서는 공평한 분이시니까요."

그녀가 내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 말씀하시니 이런 큰 선물을 받는 것이 과분하게 느껴지는군요. 저는 오늘 여기를 처음 찾았는데 말입니다."

라헬이 멈칫 굳어버리고, 내 옆으로 비올렛 황녀가 급히 다가왔다.

"야, 미쳤어?"

내 몸을 끌어당기고 귓가에 속삭였다.

"성녀의 축복을 받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덥석 받아."

"아니, 그간 미사에 안 왔다고 뭐라 하시잖습니까."

비올렛 황녀에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옆에 있는 라헬이 듣기 충분한 목소리 크기였다.

"오늘 여기 처음 온 건 황녀님도 마찬가진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이거죠."

"너랑 내가 같아? 일개 귀족하고 황녀랑 같냐고!"

비올렛 황녀가 어휴, 한숨을 쉬곤 내 등을 떠밀었다.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나는 불퉁한 얼굴을 감추지 않고 라헬을 바라보았다. 라헬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손을 뻗었다.

물론, 이런 연기는 나와 성녀의 관계를 가리기 위한 연막이었다. 불신자와 성녀의 조합이라니, 의심을 거두기 딱 좋지 않겠는가.

파앗-!

라헬의 손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피부에 맞닿은 부위부터 청량한 느낌이 번지기 시작했다.

'호오.'

레퀴엠은 다소 당황한 듯했다. 다른 생명체의 살갗에 이빨을 박아 넣지 않았는데도, 생명력이 흘러들어오는 이 상황에.

'호오, 이 맛은....'

과연 세레나드.

무한한 생명력을 담은 검답게, 그 안에 품은 생명력은 불순물 따위 없이 그저 정순했다.

맑고, 투명하고, 시원하다.

오랜 기간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 이러할까?

'뭔가 인간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인간의 생명력이 불순물이 있을지언정 생생하다면, 세레나드의 것은 불순물은 없으나 생동감 또한 없었다.

그저 오랜 기간 고여있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을 뿐.

왜 뱀파이어가 인간의 목에서 흡혈하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막 뽑아낸 인간의 생명력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맛이 있었다.

어쨌건 내 평과는 별개로, 세레나드의 생명력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스으으-

레퀴엠은 몇 번 입을 쩝쩝대더니 잠잠해졌다.

그간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할수록 더 미쳐 날뛰었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즉, 세레나드의 힘이 레퀴엠을 잠재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메말라 있던 땅을 적시고, 깊이 모를 공허를 채우는 힘. 그것도 다른 생명을 취할 필요 없이.

'성녀만 있다면....'

더 이상 레퀴엠을 쥐고도 살육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생명력을 채우면 되니까.

이룰 수 없는 탐욕이 몸을 일으켰다가 스러졌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 라헬을 탈취하는 것은 악수.눈이 뒤집힌 테오도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황제조차도 쉽게 수습할 수 없는 재앙. 그런 일이 벌어져야 비로소 그의 눈에서 성녀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

라헬이 내게서 손을 떼고 멀어졌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아무리 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느낌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일을 계기 삼아, 신에 대한 믿음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세요."

"...예, 성녀님."

라헬이 홱 돌아서서 연단으로 돌아갔다. 그 위에 서서 우리를 쭉 둘러보곤 말했다.

"길을 잃은 자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왔음에, 여전히 우릴 향한 신의 보살핌이 건재함을 느낍니다."

소녀의 앳된 음성인데도 듣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오늘 미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헬이 두 손을 모았다.

"디오 베네디카."

멍하니 서 있던 비올렛 황녀가 급히 손을 모았다.

"디오 베네디카."

울음을 억누르고 있던 엘리체도 손을 모았다.

"디오 베네디카."

나 역시, 미적미적한 태도로 손을 모았다.

"디오 베네디카."

내 시선은 라헬에게 못박혀 있었다. 베일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또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