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환락의 도시 (2)
먼저 해야 할 것은 카오틱을 찾는 것이었다.
이수경에게서 받은 아이템, 위장의 베일을 사용할 대상을 찾아야 한다. 어쨌든 카오틱으로 위장해야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위장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긴 하겠군."
"예. 그쪽이나 저나 유명하니까요."
"흠, 나보다 네가 더 유명하지 않겠나?"
진현우든 임호석이든 너무 유명하다.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예 얼굴부터 몸까지 다 바꿔 버려야 한다.
그걸 위해 가져온 것이 위장의 베일이었다.
[위장의 베일 (영웅)]
· 설명: 특수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베일. 겉모습을 원하는 대로 위장할 수 있다. 스스로 해제하기 전까지는 지속된다.
· 사용 제한: 없음.
· 옵션: 위장.
* 위장: 원하는 모습으로 위장한다.
원하는 모습으로 위장하게 해 주는 아이템.
이수경이 준 베일은 총 네 개였다.
"전부 다 해서 네 개인가."
"두 개는 카오틱의 외형을 복제하는 데 쓰고, 나머지 두 개는 마인을 복제하는 데 씁시다."
"좋은 생각이다."
마인으로 위장한 상태에서 마기 증폭 장치까지 쓴다면 의심받는 건 피할 수 있을 터.
카오틱의 외형만 복제해도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면 마인의 외형이 필요해질 것이다.
진현우는 대도둑의 은신을 사용했다.
"그럼...."
진현우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발달한 시야가 어둠을 꿰뚫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 다르게는 환락의 도시라 불리는 곳에서 많은 카오틱이 나가고 있다.
- 사냥을 나가는 것 같구나.
"그렇겠지."
도시 주변에는 던전과 사냥터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1층과 비슷한 구조다. 중앙에 큰 마을이 있고, 인근 지역에 여러 던전과 사냥터가 있던 층. 이 층의 구조가 그와 비슷했다.
"옛날 일이 떠오르는데...."
진현우는 불쑥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개미 굴이라는 던전을 공략할 때, 네메시스의 플레이어 파티를 공략했던 카오틱의 기억.
그뿐만이 아니다.
'카오틱 놈들이 잘하는 게 배신이었지.'
평범한 플레이어인 척 위장하다가 기회가 생기면 본색을 드러내면서 배신하는 것.
그게 카오틱들의 주특기였다.
"이번에는 내가 해 봐야겠군."
그걸 되갚아 줄 때가 됐다.
진현우는 도시를 나서는 카오틱들의 모습을 확인한 후, 그중의 한 파티를 추적했다.
그 뒤를 임호석이 쫓았다.
* * *
어두운 숲을 카오틱들이 걷고 있었다.
서로 안면이 있거나,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잠깐 협력하게 된 사이.
'이 새끼들, 믿어도 되나?'
'언제 태도가 바뀔지 모르니 경계해야겠군.'
같은 플레이어끼리도 믿기 힘들 때가 많은데, 카오틱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못할 건 없다.
그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음에도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저쪽이었나?"
"그래. 도시의 NPC가 퀘스트를 주더군. 그 목표가 저쪽으로 가면 아마 있을 텐데...."
"확실한가? 함정을 설치해 둔 건 아니겠지?"
"날 의심하는 건가?"
오가는 대화도 곱지 않았다.
애초에 스스로 카오틱이 될 정도의 인물들이다. 성격적인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을 모았으니 삐걱거릴 수밖에.
"싸우는 건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하지."
"...."
다른 이들도 이 상황이 익숙한 눈치였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니까.
카오틱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날아갔다.
- 쿠후훗.
"뭐야? 네가 웃었나?"
"뭔 개소리야?"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웃음 가득한 소리. 그 소리를 들은 카오틱들이 의아해했다. 그리고 일부 카오틱은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눈동자의 초점이 사라졌다.
카오틱 하나가 검을 들었다.
"목표가 낸 소리인가? 그... 커헉!"
검이 카오틱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파티원이 내지른 칼날이었다. 카오틱은 경악과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파티원을 보면서 쓰러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크아아악!"
"이, 이 미친놈이...!"
일부 카오틱들이 파티원을 공격했고, 공격당한 이들도 반격했다. 카오틱 파티는 순식간에 무너진 채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숲속에 핏물이 요란스레 튀었다.
"환각 성능 확실하네."
- 나는 매 순간 강해지고 있느니라.
"그러시겠지."
미호가 가진 매혹의 효과였다.
어차피 카오틱 놈들이다. 살짝 균열만 만들어 주면 알아서 분열해서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런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헉, 허억!"
"크흑, 빌어먹을...."
남은 카오틱은 단둘.
서로를 보며 거친 숨을 내뱉던 그들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파도처럼 솟구친 그림자가 그들의 사지를 붙잡고 땅에 고정했다.
"뭐, 뭐야! 크아악!"
"말이 많군. 셰이드, 입도 막아 줘."
"읍, 으으읍!"
그들의 앞에 진현우와 임호석이 나타났다.
입가를 가리며 비웃고 있는 미호도. 진현우는 온몸이 구속된 카오틱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른 시체들은 치우면 되겠나?"
"예. 핏자국도 일단은 지워 두죠. 뭐, 놔둬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놔둬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긴 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나서 죽은 줄 알 테니까. 카오틱의 사회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기에 놀랄 일도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치워 두기로 했다.
"흠, 이 정도면 체격도 비슷하고 괜찮네."
카오틱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둘뿐.
하나는 진현우와 체격이 비슷하면서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고, 또 하나는 근육질의 체구를 가졌으면서 투구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둘 다 위장하기에 적합한 카오틱들이었다.
"미호, 일 좀 해라."
- 오랜만에 일하는 것 같구나.
진현우는 미호를 이용해서 카오틱들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그들의 이름이나 신분 같은 것.
그리고 도시의 정보들까지 캐냈다.
- 흠, 흠. 마지막으로... 그래, 이걸 깜빡했구나. 어딜 가면 마인들을 만날 수 있느냐?
"지하, 투기장...."
- 투기장이라고 하는구나.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이명이 괜히 환락의 도시인 게 아니다. 그 내부에는 환락가에서 볼 법한 것이 다수 설치되어 있다.
진현우는 베일을 꺼냈다.
"너희 외형은 우리가 잘 써 주마."
"뭐...."
카오틱은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목도했다.
그의 앞에 선 진현우의 신형이 진흙처럼 질퍽거리더니 누군가 빚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
카오틱과 똑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순간 거울을 보는 건가 착각할 정도로 완전히 똑같은 형상이. 카오틱이 넋을 잃었다.
칼날이 그 목을 베어 냈다.
"이놈도 처리했다. 음, 흔해 빠진 놈이군."
"흔해 빠진 게 눈에 안 띌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어쨌든 눈에 안 띄는 것이 중요하다.
진현우와 임호석은 위장의 베일을 사용하여 이름 모를 카오틱의 외형으로 위장했다.
"자, 외웁시다. 그 몸뚱어리 이름은 다리온. 나이는 34살. 말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 네 몸은 자밀. 나이는 27살...."
임호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미호를 이용해서 돌려보내야죠.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합시다. 어쩔 방법도 없으니까."
"일단 알겠다."
둘은 남은 시체까지 다 처리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환락의 도시로 향했다.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검은 성벽. 그리고 주변의 어둠을 가득 밝히는 빛이었다.
"더럽게 넓군. 엄청난 크기의 도시야."
그리고 더럽게 넓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몇 개의 도시를 이어 놓은 것 같은 규모의 도시였다.
여태껏 탑에서 본 것 중에는 제일 컸다.
"경비가 있군."
"우릴 검문하지는 않을 겁니다."
도시의 성문에는 경비가 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격하게 검문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플레이어가 온다고는 생각도 못 하겠지.'
카오틱과 마인만이 올 수 있는 곳이니까.
진현우와 임호석은 성문을 지나갔다. 경비들이 무심한 눈으로 보더니 눈을 돌렸다.
딱히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없었다.
'생각보다 쉽군.'
'치안이 그리 좋지는 않을 테니까요.'
카오틱들을 모아 둔 곳이 치안이 좋을 리가.
둘은 성문을 지나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도시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놀랍군."
임호석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도시 내부의 풍경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탑에서 본 것은 중세풍의 도시들.
하지만 여기는 현대풍에 가까웠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잘 만들어진 도로, 현대풍에 가까운 건물 양식. 마법 공학으로 작동하는 전등들까지.
타락한 자들의 도시는 임호석이 여기로 오기 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시의 풍경이 이런 이유는 간단했다.
'여긴 카오틱들이 만든 도시니까.'
탑에 있는 다른 도시들은 탑의 거주민들이 만들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카오틱과 마인이 대적자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곳이다.
그러니 도시가 현대적일 수밖에.
"탑에 처박혀서 사는 카오틱 놈들도 많다고 하던데, 이걸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군."
"이 정도면 놈들도 살 만하겠네요."
"음...."
애초에 여긴 카오틱들을 위한 곳.
놈들이 자신들이 살기 편하게끔 도시를 만들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걸 막을 거주민들도 없으니까.
- 흐, 흐흐....
- 우웨에엑!
- 길 막지 말고 꺼져!
- 뭐? 이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카오틱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약에 잔뜩 취해 헛웃음을 짓고 있었고, 누구는 취기에 구토를 하고 있었다.
서로 부딪쳐서 싸우고 있는 이들까지.
하지만 그건 이 도시에서는 너무도 흔한 풍경이었기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건...."
그렇게 카오틱들이 일상으로 여기면서 지나가던 풍경 중에 이질적인 것이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던 임호석이 얼굴을 구겼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저 너머에 있는 광장.
"...."
광장에 매달린 이들이 있었다.
온몸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죽어 가는 이들. 그 주변에는 바닥을 기는 이들도 있었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로 목줄을 찬 이들을, 마인들이 목줄을 쥔 채 끌고 다녔다.
"아는 사람입니까?"
"모를 리가 있나. 저 남자는...."
- 커헉, 으으윽...!
임호석이 마인에게 복부를 걷어차인 남자를 보더니 인상을 험상궂게 찡그렸다.
모를 수가 없다.
"옛날에 봤던 랭커다. 탑을 공략하던 도중에 어느 순간 행방불명됐었지. 모두가 던전을 공략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중갑을 입은 채 언제나 최전선에서 싸우던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갑옷도, 가득 찬 근육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앙상궂게 마른 몸만 보일 뿐.
"다른 사람들도 아마 플레이어일 거다."
"어디서 납치해 왔겠군요."
"납치라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인가.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마인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랭커씩이나 되는 인재라면 마인이 됐을 때에도 큰 힘을 기대할 수가 있다.
여기로 납치해서 정신을 무너트리고 세뇌하면 충실한 마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걸 노린 것이다.
'설령 마인으로 못 만들더라도....'
한때 유명했던 랭커를 노예처럼 굴린다는 것 자체가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될 요소다.
임호석이 분노에 이를 갈았다.
"일단 참고 넘어갑시다."
진현우는 한숨을 삼켰다.
지금은 저걸 건드릴 때가 아니다.
"나중에 되갚아 줄 때가 올 겁니다."
"...그래."
임호석이 분노를 씹어 삼켰다.
193화
투기장 (1)
타락한 자들의 도시는 대도시였다.
여러 도시를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형태. 각 방향으로 여러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카오틱이 접근할 수 있는 구역은 그중에서 상업 구역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상업 구역은... 굉장히, 역겹군."
임호석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상업 구역에는 잡혀 온 플레이어들을 이용한 상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카오틱의 세력이 워낙 세니까.'
탑의 초반 층은 플레이어로서 제대로 활동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많은 이가 자의든 타의든 카오틱으로 전향할 정도로.
이 도시는 놈들의 세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도 타격을 꽤 입긴 한 것 같더군요."
"음, 아까 카오틱이 그랬었지."
진현우와 임호석은 상업 구역을 돌아다니면서 도시의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예를 들자면, 술집에 있던 카오틱이 화장실에 가는 걸 따라가서 매혹을 거는 식으로.
- 상업 구역에 오는 카오틱들도 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여긴 그나마 양반이지. 다른 구역은 경비 병력도 줄였다더군....
'왜지?'
- 왜긴 왜겠나? 침공에 실패해서지. 거기에 많은 카오틱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갔어....
대침공에 실패한 여파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피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업 구역의 얘기.
대침공에 데리고 갈 정도로 실력이 좋았던 카오틱들은 상당수가 사망한 모양이었다.
"카오틱 놈들이 저렇게 바글거리는데 이게 많이 줄어든 거라니. 얼마나 많았던 건지."
임호석이 상업 구역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찌 됐든,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다.
"상업 구역은 노릴 만한 게 없군."
"예. 경계가 괜히 약한 게 아니었어요."
성문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의 검문이 유독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상업 구역에는 크게 대단할 게 없었다.
대신 다른 구역으로 가는 길목은 경비들이 철저하게 검문을 서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일반 카오틱의 신분으로는 상업 구역 말고는 갈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어쩔 건가?"
"새 신분을 얻어야겠죠."
"마인 말이지."
이 도시를 제대로 살피려면 카오틱의 신분으로는 제약이 많다. 다른 구역까지 확인하려면 좋든 싫든 마인의 신분이 필요했다.
임호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군."
처음부터 예견한 일이기도 했다.
진현우는 카오틱에게서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지하 투기장에서 마인을 찾을 수 있다.
- 살벌한 곳이라고 하더구나. 그 투기장을 관리하는 것이 마인들이라고 했다.
"그렇단 말이지."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기장으로 가야겠네."
그 방법밖에 없다.
* * *
투기장으로 가는 법은 간단했다.
상업 구역에 화려한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의 지하로 가면 투기장으로 갈 수 있다.
"지상은 도박장인가? 화려하군."
- 인간, 저걸 보거라! 구슬이 데굴데굴 굴러가는구나. 저 인간은 왜 환호하는 것이냐?
"돈을 벌어서 환호하는 거겠지."
건물의 지상은 도박장이었다.
꽤 전문적인 도박장이었는데, 당장은 갈 필요가 없었다.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진현우는 곧바로 지하로 향했다.
"...."
"...."
지하로 내려가던 계단을 가드들이 지켰다.
이 투기장은 회원증이 필요한 곳. 가드들은 회원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진현우와 임호석이 위장한 카오틱들은 다행히도 회원증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었다.
"들어가라."
가드들이 둘을 지하로 내려보냈다.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열자, 지하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사람들의 함성이었다.
- 싸워! 죽이라고!
- 저 새끼 발악하는 게 제법인데!
- 크아아아악!
지하는 굉장히 넓은 지하였다.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원형 투기장. 관중석에는 전투를 보러 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투기장에서 싸우는 이들은....
- 커허어엉!
- 크윽, 으아아악!
"저건... 사람하고 몬스터인가?"
사람과 몬스터였다.
낡은 장비를 입은 사람이 웨어 울프처럼 생긴 몬스터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임호석이 혀를 내둘렀다.
"놀라운 짓을 하는군."
사람들은 제각기 손에 쥔 티켓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에게 돈을 걸었는지 적힌 티켓이다.
지금 투기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과 몬스터, 둘 중에 누가 이길지 돈을 거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끄아아아아!
- 예! 멍청한 플레이어가 몬스터한테 잡아먹혔군요! 세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설마 플레이어한테 돈을 건 사람은 없겠죠?
- X발, 내 돈!
- 그거 참 안됐군요!
세 번째 경기가 잔혹한 결과로 끝나고, 금방 네 번째 경기가 이어졌다.
투기장의 형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 바로 다음 경기로 이어집니다! 네 번째 경기는 플레이어들 간의 경기입니다! 이번 경기는 특별히 같은 파티인 놈들로 골라 왔죠!
투기장은 사람과 몬스터 간의 전투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전투도 벌어졌다.
그것도 같은 파티였던 사람끼리의 전투.
- 같이 던전을 탐험하던 파티는 과연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있을까요? 기대되는군요!
- 빨리 싸워, 멍청아!
- 저놈! 난 저놈한테 걸겠어!
광기에 젖은 관중들이 외쳤다.
진현우의 어깨 위에서 미호가 비웃었다.
- 인간은 어딜 가든 똑같구나.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는 투기장만이 아니라 온갖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현우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투기장이면 충분하다.
"이제 어떡할 거지? 보니까 누가 이길지 돈을 거는 것 같은데, 우리도 돈이나 걸까?"
"보상이 꽤 좋기는 하네요."
진현우는 투기장의 보상을 봤다.
투기장은 골드를 포인트로 바꿔서 베팅하는 곳. 그 포인트를 모아서 원하는 보상으로 바꿀 수 있는데, 보상이 꽤나 괜찮았다.
가장 비싼 것은 100만 포인트.
"관심 가져서 뭐 하려고?"
"음?"
진현우와 임호석이 100만 포인트의 보상에 관심을 기울이자 누군가가 비웃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었다.
"관심 가져서 뭐 할 거냐고. 100만 포인트짜리 아이템은 아무도 못 가져간 보상이야."
"지금까지 아무도 못 가져갔다고?"
"그래. 저만큼 번 놈이 없었거든."
직원이 연초를 길게 피웠다.
그러고는 그 연기를 진현우에게 내뱉었다.
"100만 포인트만큼의 골드를 가진 놈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여긴 골드로 포인트를 바꿀 수 있는 데 제한이 있거든. 즉...."
"저건 여기서 번 포인트로만 살 수 있다."
그래서 여태껏 바꾼 놈이 없었던 모양이다.
직원은 여전히 진현우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 너희가 얻을 일은...."
"근데 넌 뭐가 잘났다고 비웃고 난리야?"
"뭐? 으윽!"
직원의 몸이 갑자기 굳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놈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미호가 직원에게 매혹을 건 탓이었다.
-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보거라.
"주변에 사람 오는가 좀 봐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지."
마침 잘됐다 싶었다.
마인이 어디 있는지 정보를 알아내야 하니까. 여기 직원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이 투기장에 마인이 있다던데."
"...그렇다. 여기 투기장의, 주인이다."
"투기장에 매일 있나?"
"아니, 필요할 때만... 온다."
직원이 넋을 잃은 채 대답했다.
아직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 필요할 때라는 게 언제지?"
"돈을, 회수할 때. 그리고... 직원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투기장에서 일어났을 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정확히 뭐지?"
"관중들이, 난동을 피울 때가... 있다."
난동이 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돈을 크게 잃은 관중들이 난동을 피우고, 다른 이들이 휘말리면서 소동이 일어날 때.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넌 지금 일은 아예 잊는 거다."
"알겠다."
미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직원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투기장의 직원답게 꽤 유용한 정보를 가르쳐 줬다.
진현우는 투기장의 보상을 봤다.
"정직하게 얻을 필요는 없겠지."
정직하게 베팅해 가면서 포인트를 모을 이유가 없다. 진현우의 목적은 단 하나.
마인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포인트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도 가던 길에 찾아내서 훔치면 될 일이다.
'카오틱 놈들인데, 뭐.'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지 않았다.
임호석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는 다 얻었군. 이제 어쩔 건가?"
"글쎄요. 여긴...."
진현우는 투기장을 돌아봤다.
넓은 투기장. 관중석도 그 못지않게 넓었는데, 정말 많은 관중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네요. 운 좋게도."
"음?"
진현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아 있는 영체 상태의 미호를.
녀석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 쿠후훗! 내가 나설 차례인 것이냐?
미호가 나서기에는 최적의 무대였다.
진현우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계획을 구상했고, 이윽고 실행할 준비를 갖췄다.
* *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투기장에 여러 번의 피가 흐르고 난 후, 관중들이 기대하던 오늘의 경기가 열렸다.
- 예! 오늘의 메인 경기입니다! 늑대들 사이의 양! 우선 늑대들부터 먼저 보시죠!
아무도 없는 투기장.
오른쪽에 있던 철창이 덜컹 열리더니, 그 너머에서 다수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웨어 울프와 다수의 늑대였다.
- 그리고 양까지!
왼쪽의 철창이 열렸다.
다수의 몬스터가 나온 오른쪽의 철창과는 달리, 왼쪽의 철창에는 남자 하나만 있었다.
불쌍할 정도로 비쩍 마른 남자가.
- 한때 탑에서 이름을 날렸던 플레이어입니다! 원래는 근육도 빵빵했었죠! 그러면 뭐 하나, 지금은 살 하나 없는 멸치인데!
사회자가 남자를 가리키며 비웃었다.
- 카오틱이 되라는 제안을 거절한 아주 건방진 놈입니다! 마인님께서도 저놈은 처절하게, 아주 처절하게 죽여 달라고 했었죠!
"...."
남자, 플레이어의 이름은 칼레드.
탑 2층에서 나름 이름을 날렸던 플레이어다. 그러던 도중에 카오틱의 전향 권유를 받았고, 칼레드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나.'
거절한 대가는 지독했다.
카오틱들은 칼레드와 그 동료들을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서 압박했고, 포획했다.
그러고는 이 도시로 납치했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일주일 넘도록 굶은 늑대한테 저놈이 처절하게 죽을 날!
- 와아아아아!
환호성이 들렸다.
다른 동료들은 고문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카오틱으로 전향했다.
칼레드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있었는가?'
칼레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살 바에야 다른 동료들처럼 카오틱으로 전향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바에야....
- 그럼!
철컹!
철창이 굉음을 내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 우리 양이 얼마나 버티는가, 지금...!
- 이 개새끼가! 날 건드려? 죽어!
- 우아아아악!
환호성이 듣기 싫어서 귀를 막으려던 칼레드는 불현듯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게 환호성인가? 아니.
- 뭐, 뭐야? 이 새끼들 왜 이래!
"이건...."
칼레드는 멍하니 관중석을 바라봤다.
고함을 내지르면서 서로를 죽일 각오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관중석의 사람들을.
- 쿠후훗!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194화
투기장 (2)
흐르는 피가 투기장을 적시고 있다.
"끄아아악!"
"이 새끼가... 죽어!"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저리 안 꺼져?!"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피가 투기장이 아닌 관중석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
관중석에 있던 카오틱들이 제각기 무기와 스킬을 이용해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개, 커헉...!"
"흐아아아아!"
마법에 당해 불타고 있는 카오틱.
뒤에서 심장을 찔려 바닥을 기는 카오틱. 수많은 관중이 관중석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가드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이것들 왜 이래!"
"왜 갑자기 서로 싸우고 지랄이야!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싸우고 있냐고!"
"마, 막아! 일단...!"
가드들은 관중석에서 일어난 소동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관객들은 오히려 그들을 공격해 왔다.
"진정, X발! 진정 좀 하라고!"
"어, 어이!"
관객의 공격에 침착하게 대응하려던 가드의 눈이 갑자기 시뻘겋게 물들었다.
분노에 잠식된 가드가 관객의 목을 쳤다.
튀어 오르는 피가 동료의 얼굴을 적셨다.
"너, 너 대체 무슨...!"
"크아아아아!"
"우아아악!"
분노한 가드가 동료를 공격했다.
그런 식으로, 처음에는 일부에서 발생했던 난동이 관중석 전체로 퍼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가드들 사이에서도.
- 쿠후후! 이게 육미의 힘이니라!
"오늘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잘했다."
무엇이 저 사태를 일으켰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미호의 힘이었다. 녀석이 가진 광란과 마안, 매혹을 활용한 결과물이었다. 그게 카오틱들을 저렇게 만들었다.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미호의 꼬리도 어느새 여섯 개.
여러 특성과 스킬의 등급이 많이 올랐다. 미호 개인의 힘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다.
꼬리가 6개에 도달한 지금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아니면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카오틱이라고 해 봤자....'
수준이 높은 카오틱은 거의 없었다.
투기장에서 시간을 때울 정도의 놈들. 그런 놈들 상대로 매혹이 실패할 리가 만무했다.
미호의 모든 스킬이 성공했다.
"야, 저 몬스터들 상대로도 가능하냐?"
- 흠! 저런 놈들이 어려울 리가 있느냐!
투기장에 있는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미호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 크하아아아아!
- 끼익! 끼이이이!
"뭐, 뭐야? 저것들은 또 왜 저래?"
광란에 빠진 몬스터들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칼레드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끝까지 생존한 것은 상처 없이 멀쩡한 칼레드.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몬스터 하나였다.
칼레드가 멍하니 몬스터를 응시했다.
- 키, 키이이....
휘청거리는 몬스터.
지금이 자신이 이길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한 칼레드는 돌진했고, 창을 내질렀다.
그 창이 몬스터의 목을 꿰뚫었다.
"빌어먹을! 아무나! 아무나 좀 말려 봐!"
"어이! 루이스 님을 모셔와라! 얼른!"
"예, 예!"
투기장의 승자가 가려졌지만, 지금 투기장에 신경 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가드와 직원들이 황급히 관리자를 불렀다.
이곳의 주인인 마인을.
"슬슬 움직이죠."
"음. 아이템을 써야겠군."
투기장에는 더 깊은 지하가 있었다.
루이스라는 자를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은 가드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진현우와 임호석이 그 뒤를 쫓았다.
- 스으윽!
그림자 속으로 녹아드는 두 신형.
진현우와 임호석은 가드들과의 거리를 절묘하게 조절하면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가드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X발, 루이스 님이 아셨다가는...."
"몇 명 본보기로 죽이시겠지. 그렇다고 이걸 보고도 안 하고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
"미치겠네, 진짜."
이 투기장의 주인인 루이스라는 마인은 꽤 잔혹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었다.
가드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주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긴 통로를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
보이는 것은 거대한 문.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가드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 거대한 문을 두들겼다.
"루, 루이스 님. 시급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 들어와라.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천천히 열리는 문. 가드들이 방으로 들어갔고 진현우와 임호석은 문 주변에 섰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킬 수도 있다.'
마인의 감각을 생각한다면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가드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것. 진현우와 임호석은 문 주변에 대기하면서 방 내부를 살폈다.
- 더럽게 넓구나.
보이는 것은 넓은 방.
놀라울 정도로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가구나 장식, 그 모든 것이 그러했다.
그곳의 중심부에 거대한 침대가 있었으며, 거기에 거구의 마인이 누워 있었다.
여러 여자가 그를 보필하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모, 모르겠습니다. 관중석에 있던 놈들이 갑자기 미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야, 역배라도 제대로 터졌나?"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아서...."
그 말에 루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관중석에서 난동이 일어났다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약이라도 빨았나? 이해가 안 되는군."
투기장에서 싸움이 일어난 건 처음이 아니다. 여태껏 여러 번 싸움이 일어났었다.
대부분 큰돈을 잃은 누군가가 난동을 부리면서 그게 큰 소란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가드가 말을 더듬었다.
루이스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말을 더듬던 가드가 황급히 말을 끝마쳤다.
"가드들과 직원들도, 서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놈들은 또 왜?"
"모, 모르겠습니다."
루이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관중들끼리 서로 죽이는 걸로 모자라서 가드들과 직원들까지 그러고 있다고?
뭔가 잘못됐다.
'어떤 놈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가?'
이 투기장을 탐내는 마인 놈들은 많다.
어쩌면 그놈들이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멍청한 놈들. 투기장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해서 내가 움직이게 만들다니...."
"죄, 죄송합니다. 루이스 님!"
"됐다. 안내해라!"
가드들이 황급히 앞장섰다.
루이스는 이번 일이 끝나거든 본보기로 몇 놈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따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야, 지금.'
- 알고 있느니라.
진현우의 어깨에 있던 미호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 눈빛을 받은 가드들의 눈동자가 일순간 멍해졌다.
놈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으, 으으...."
"뭐 하고 있나? 움직이지 않고!"
가드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환각.
그들의 기억 속에 있던 공포가 환각으로 구현되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아아악!"
"...!"
가드들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무기를 휘둘렀다. 그 무기가 향하는 곳은 그들의 등 뒤.
그들이 보기에는 환각이 있는 곳. 실제로는 그들을 뒤따르는 루이스가 있던 곳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하나, 가드들의 공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루이스가 지독한 독기를 내뿜었다. 다가오는 무기를 순식간에 녹일 정도의 독기였다.
"크흐으윽!"
"으, 으으... 손, 내 손이!"
"죄다 미친 거냐? 왜 날 공격하고 지...!"
분통을 터트리는 루이스.
그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쏘아진 할버드가 루이스의 배를 노렸다. 마인의 직감으로 그걸 느낀 루이스는 할버드를 녹이려고 했다.
그의 정신이 할버드에 집중된 순간.
- 푸우욱!
"커, 헉!"
루이스의 심장에 칼날이 꽂혔다.
그가 할버드에 정신이 팔리는 걸 이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각지대에서 쏘아진 칼날.
떨리는 눈동자가 칼날의 주인을 봤다.
"너, 넌... 누구...."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끄윽, 끄아아아아!"
진현우가 심장을 뚫은 칼날을 비틀었다.
마인의 심장이 완전히 짓이겨졌다. 루이스는 끔찍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두 눈이 분노로 물들었다.
"이, X자식이...!"
루이스가 가진 마기를 모두 일으켰다.
마기는 닿는 이를 단숨에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극독으로 변했고,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어, 째서...."
독기는 진현우에게 아무 해도 못 끼쳤다.
그가 가진 특성, 만독불침 때문이었다. 자신의 독이 진현우에게 아무런 피해도 못 입히는 것을 본 루이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커헉!"
마지막 발악마저 무용으로 돌아가자, 루이스가 절망 가득한 얼굴로 쓰러졌다.
그 얼굴에서 금방 생기가 사라졌다.
"꺄, 꺄아아아악!"
"루, 루이스 님!"
여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게 들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드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드들은... 어차피 죽겠군."
가드들은 거리가 가까운 탓에 루이스가 내뿜은 극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다.
저기 있는 여자들만 처리하면 된다.
- 여기서 본 것은 모두 잊거라.
미호를 이용해서 여자들의 기억을 지웠다.
마인과 가드들의 시체는 셰이드를 이용해서 처리했고, 방에 남은 전투의 흔적도 제거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위장의 베일을 사용합니다.
진현우는 마인, 루이스로 변장했다.
그의 모습이 거구의 뚱보로 변했다. 그의 변한 모습을 본 임호석의 표정이 묘해졌다.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군."
"적응하시죠."
"음, 근데 마인이 하나밖에 없지 않나."
가능하면 마인이 둘 정도는 있기를 바랐는데, 여기 있는 마인은 루이스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카오틱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건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시종 같은 느낌으로요."
"이젠 시종 노릇까지 해야 하나."
"마인을 또 찾아서 죽이는 건 위험할 것 같고, 일단은 그 모습으로 되는 데까지 해 보죠."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마기를 얻었다는 메시지를 지우면서 방을 떠났다.
투기장은 여전히 관중들이 싸우는 중이었다. 저들이 한동안 시선을 끌어 줄 것이다.
"빠르게 움직입시다."
"음."
* * *
진현우와 임호석은 상업 구역을 떠났다.
새로이 얻은 마인의 신분은 다른 구역을 돌아다닐 수 있게끔 해 줬다. 투기장의 주인인 루이스를 본 경비들이 검문을 통과시켜 줬다.
- 꽤 복잡한 도시로구나.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는 여러 구역이 존재했다. 첫 번째로 상업 구역, 그다음으로 생산 구역, 행정 구역 그리고 중앙 구역.
진현우와 임호석은 도시를 정찰했다.
"흠, 이 정도면 대강...."
"정찰할 수 있는 데는 다 한 것 같군요."
긴 시간이 흐르고, 정찰이 끝났다.
진현우와 임호석은 정보를 교환했다.
"고위 카오틱이나 마인은 행정 구역에 몰려 있는 것 같더군. 흑림의 일원이라든가."
"이 도시의 방어 체계를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도 행정 구역에 있었고요."
"그랬지."
가장 중요한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라도 행정 구역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도시의 방어 체계가 가동되면 기껏 침입한 플레이어들이 무력하게 당할 수도 있으니까.
'대침공 때 카오틱들이 당했던 걸 우리가 역으로 당할 이유는 없지.'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 구역은...."
"플레이어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지."
도시의 중심에 있는 중앙 구역.
그곳에는 플레이어나 심한 죄를 저지른 카오틱들이 갇힌 대형 감옥이 존재했다.
그걸 지키는 카오틱들도.
"마지막으로 생산 구역인가."
"여긴 크게 중요한 건 없어서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근데...."
진현우는 상업 구역을 떠올렸다.
아이템이나 여러 마도 공학 장치를 만드는 곳. 그런 만큼 위험한 시설이 많았다.
만약 그것들을 폭발시킬 수 있다면.
"거길 폭발시키면 적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 같아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계획을 짜 봐야겠군."
"예. 일단 장치부터 설치하죠."
진현우와 임호석은 타락한 자들의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장치를 설치했다.
이수경이 준 좌표를 표시하는 장치였다.
단순히 좌표만 표시하는 기능이 있는 게 아니라 포탈을 연결해 주는 기능도 들어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나."
"네. 이제 남은 건...."
진현우는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돌아봤다.
"사지로 들어갈 사람들을 구하는 거겠죠."
적들의 본거지인 타락한 자들의 도시.
여기로 공격할 이들을 어떻게 구하느냐. 그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큰 문제였다.
195화
자살이나 다름없는 (1)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 있는 행정 구역.
그 중심부에는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의 최상층에 도시의 시장이 머무는 방이 따로 있다.
"...."
그 방에 마인이 홀로 서 있었다.
방은 별다른 가구도 없이 삭막하다. 있는 것은 넘치는 서류들뿐.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서류들을 보던 마인이 창밖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내가 왜 남의 똥을...."
마인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분을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커진다.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마인의 이름은 반.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주인이자, 흑림이라는 대형 카오틱 길드를 이끄는 자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만든 자.
- 멸망의 목도자가 만든 최초의 마인.
마인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업적을 이뤄 온 반은 끔찍한 두통을 느꼈다.
이 도시를 만들려고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두통이다.
'지구를 침공하지만 않았더라도!'
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침공. 지금 그가 느끼는 두통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반은 다시금 도시를 돌아보면서, 도시의 인원이 크게 줄었음을 새삼 느꼈다.
'행정 구역의 인원도, 도시의 경비도, 상업 구역을 돌리던 이들도... 너무 많이 죽었다.'
카오틱, 마인 가릴 것 없이 그러했다.
중요한 일을 하던 정예들이 너무 많이 죽은 탓에 도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뭐가 원인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실패한 대가가 너무 크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자신의 주인, 대적자의 명령에 따라서 이 도시에 있던 정예들을 대다수 지구로 보냈다.
결과는 참혹했다.
여태껏 겪은 적이 없는 처참한 실패.
'그런 주제에 자기는 모습도 안 드러내?'
반은 대적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불경한 생각이지만, 지금은 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를 침공하는 데 실패한 대적자는 그 뒤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반에게 명령조차 내리지도 않았다.
'지구에 강림했다는 소식이 사실이라면, 거기서 큰 피해를 입어서 그런 걸 텐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이 탑에 있는 대적자는 멸망의 목도자만이 아니다. 더 높은 층에 다른 대적자도 있었다. 아직은 제약 때문에 활동하지 못하는 이들.
'우리 실패를 기뻐할 놈들이지.'
대적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다.
멸망의 목도자가 한 말이었다. 모두 '탑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관계라면서.
놈들이 이 실패를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한다.'
반은 멸망의 목도자가 만든 최초의 마인.
좋든 싫든 주인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대적자 간의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반은 한숨을 내쉬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들어온 것은 그를 오랫동안 섬긴 비서였다.
비서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상업 구역의 일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투기장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관중들끼리 서로 죽이고 난리였다더군요."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흔히 있는 일이군. 보고할 필요가 있나?"
"이번에는 좀 피해가 큽니다."
"내게 직접 보고해야 할 정도로?"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건넸다.
투기장의 피해 규모가 적힌 서류였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사상자가 거기 적혀 있었다.
"이만큼이나 죽었다고? 루이스는 뭘 하는 거지? 이전에 소동이 일어났을 때는 그놈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지 않았었나."
"모르겠습니다.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도시 경비들의 말로는 여러 구역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봤다고 하는데요...."
"허, 자기 사업장이 박살이 나고 있는데 다른 구역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당하군. 일단 투기장은 폐쇄해라. 생존자를 상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지."
"알겠습니다."
비서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떠났다.
다시금 조용해진 방. 홀로 남은 반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를 떠올렸다.
'진현우.'
침공을 막고 대적자와 싸웠던 플레이어.
반의 두 눈이 자색으로 일렁거렸다.
"그놈은 반드시... 처리해야겠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은 침공으로 인한 손해를 복구할 방법과 함께 진현우를 처리할 방법을 떠올렸다.
* * *
진현우와 임호석은 지구로 귀환했다.
귀환하자마자 한 일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아그니스 길드의 도움을 받아서 개조된 진현우의 집 지하에 사람들이 모였다.
"멤버가 쟁쟁하네. 뭐 마실 거 없니?"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것이냐?"
"네가 여기 식구니까."
"직접 떠다 마시거라, 계집."
윤서희, 임호석, 화련, 샬럿, 데이비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수경이 지하에 모였다.
화련은 인간 형태를 취한 미호에게 마실 것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중이었다.
미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요즘 자주 보는 멤버로군."
"콜록! 비밀리에 오라고 하셔서 꽤 고생했습니다. 미국에서 오는 게 쉽지 않더군요."
"누구한테 알리지는 않았겠죠?"
"오늘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데이비드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윤서희가 떨떠름하게 봤다.
"이미 알고는 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 같아서 흠칫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서...."
"직업병...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데이비드의 클래스, 혈전사는 강력하지만 대신 일상 생활에 페널티가 많았다.
스킬을 발동하지 않으면 골골대는 클래스.
그걸 알기에 윤서희도 더 말하지 못했다.
"자, 그래서."
진현우가 계단을 내려왔다.
지하로 내려온 그는 모인 이들을 돌아봤다.
"다 모이신 것 같네요. 빠진 분은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론은...."
"이것부터 보시죠."
진현우가 기록용 수정구를 꺼냈다.
그와 임호석이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본 것을 기록한 수정구였다.
화련이 팔짱을 낀 채 영상을 봤다.
"도시 크기치고는 사람이 적은데?"
"마인도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저번 침공의 규모가 제법 컸습니다. 쿨럭! 미국에도 그 정도로 쏟아부었으니, 아무리 세력이 강한 카오틱이라도 피해가 크겠죠."
보이는 것은 도시의 풍경.
많은 카오틱이 돌아다녔지만, 대부분 수준이 높지 않은 카오틱들이었다.
플레이어로 치자면 2, 3층에서 활동할 정도. 크게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저건...."
"옛날에 행방불명된 랭커야."
수정구에 도시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노예가 되어 짐승처럼 대접받고 있는 이들. 그걸 본 이들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데이비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쿨럭, 쿨럭! 미국 소속의 플레이어도 있군요. 저 사람을 찾겠다고 길드 하나가 탑을 들쑤셨었지요. 결국은 못 찾았지만."
"납치된 거였나."
임호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부터 꽤 있었던 일이지. 카오틱과 마인이 플레이어 유망주나 랭커를 암살하고, 납치하는 것. 진현우, 너도 겪지 않았나?"
"예. 한밤중에 쳐들어오던데요."
"내가 전부 처리했느니라!"
새삼 옛날 일이 떠올랐다.
한밤중에 기습해 왔던 마인들. 서울 한복판에 있던 마인과 내통하고 있던 길드까지.
카오틱에 의한 납치는 예전부터 있었다.
"저런 플레이어들이 중앙 구역의 감옥에 있습니다. 중범죄를 저지른 카오틱들도 있는데, 다 같이 풀어 줘서 이용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려면 도시의 방어 체계부터 어떻게 해야겠군요. 이건 내부로 잠입하는 수밖에...."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지 않니?"
얘기를 듣던 화련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거, 지원할 사람이 있나?"
"...."
이번 일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었다.
적의 본거지를 친다는,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는 일에 지원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
"최대한 은밀하게 모집해야 합니다."
"내통자들한테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
이것도 문제였다.
내통자, 유신과 같은 무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최대한 은밀하게 인원을 구해야 한다.
이번 일은 기습에 성공해야지만 승산이 있다. 들킨 상태로 싸운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
수정구를 보던 이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탈을 이용해서 도시가 있는 층에 진입하고 각자 할당된 좌표로 전이할 겁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전이할 수는 없을 거고요."
"소수 정예로 가야겠군."
"예. 윤서희 님처럼 무언가를 소환할 수 있는 분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좋을 겁니다."
누군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모으는 게 문제겠군요. 은밀하게, 믿을 수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만 모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흠."
지하에 침묵이 감돌았다.
조건이 하나같이 까다로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미호가 불쑥 화련에게 물었다.
"계집, 넌 없느냐? 믿을 수 있는 사람."
"나?"
화련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나한테 믿을 사람이 있을 것 같니?"
"그건...."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부길드장에게도 배신당하지 않았던가. 화련이 신뢰하는 길드원이 있을 리가 없다.
"뭐, 그래도 방법이 없지는 않아. 정령왕한테 부탁해 볼게. 생각나는 게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게 정령뿐인 것이냐?"
"넌 아까부터 왜 자꾸 시비니?"
화련과 미호가 서로 싸웠다.
데이비드가 작게 기침을 터트렸다.
"저희는 애국심이 깊은 멤버가 많습니다. 이번 침공으로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쿨럭! 그 사람들에게 협력을 구하겠습니다."
수정구에 비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본 데이비드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저 플레이어들과 친분이 있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아마 흔쾌히 도와줄 겁니다."
"그럼 잘됐고요. 다만 그 전에."
진현우는 아이템을 꺼냈다.
일찍이 쓴 적이 있는 계약 아이템.
"기밀을 유출하지 않게 계약부터 하시죠. 데려올 사람이 있으면 사정은 설명하지 말고, 먼저 여기 데리고 온 다음에 설명하는 걸로."
"먼저 너한테 보여 주라는 건가?"
"여러분이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내통자가 아닐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진현우는 미호의 머리를 짚었다.
"이 녀석을 이용해서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사정을 설명하죠."
"철저하네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지하에 모인 이들은 흔쾌히 허락했다.
자신을 의심한다고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최대한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
- 촤르륵!
모두가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아이템이 발동하면서 각자의 심장에 사슬이 얽매였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사슬은 계약을 위반했을 때 당사자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이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근데 그 전에, 진현우. 이전의 그 대적자가 개입할 가능성은 없나?"
"없지는 않지만, 그리 높지는 않을 겁니다."
대침공은 대적자에게도 큰 힘을 소비하는 일. 지구로 이어지는 수많은 포탈을 만드는 데 가진 힘을 적잖게 소비해야만 한다.
거기서 무리하게 강림까지 했던 상황.
'한동안은 힘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겠지.'
만약 그러지 않고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구하러 온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
약해진 놈에게 치명상을 입힐 기회니까.
"뭐, 만약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대적자와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서 든든하군."
임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빠르게 움직이지. 시간이 생명이다. 각자 사람을 모아서 여기로 오는 걸로."
"예."
카오틱에게 당했던 대침공.
그걸 갚아 주기 위한, 자살이나 다름없는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화
자살이나 다름없는 (2)
지하의 회동으로부터 3일이 지났다.
진현우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길드장들은 각기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중에는 진현우가 아는 이들도 있었다.
"이야, 진현우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응? 3층에서 만났을 때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 기분이...."
이대건과 정지유, 박동욱. 그리고 정수현.
네메시스의 길드원들이었다. 동시에 진현우와 오랫동안 안면을 터 온 이들이기도 했다.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길드장님이 진현우 님께서 저희를 찾는다고 하시더군요. 뭔지 말씀은 안 해 주셨습니다."
"근데 느낌은 안 좋네요. 오빠하고 관계 있는 일이면 이번 것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부정하기는 힘드네."
3층에서 엘프 측에 서서 싸웠을 때도 위험했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위험했다.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이죠. 저희는 카오틱들한테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 빚을 갚을 기회라고나 할까."
"실력은 충분히 길렀습니다."
이대건 파티를 만난 건 1층이었다.
거기서부터 10층까지 올라왔으니, 이대건 파티의 실력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충분히 전력이 될 것이다.
"하이드."
"음. 이런 일은 빠질 수 없지."
하이드와 그의 동료들도 합류했다.
윤서희는 몇 명의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중에 그녀와 닮은 여자가 있었다.
"저분은?"
"제 동생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혈연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윤하연. 윤서희의 동생이었다.
네메시스의 부길드장. 전생에서는 윤서희와 끝까지 운명을 같이했던 플레이어다.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가워요. 저희 언니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예전부터 얼마나 말이...."
"윤하연."
"네, 네."
윤서희가 도끼눈을 뜨자 윤하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밖에도 임호석과 이수경이 데리고 온 랭커들, 그리고 샬럿의 지인들도 왔다.
"네가 아는 사람도 있었냐?"
"현우야, 넌 대체 날 뭘로 보는 거니?"
"알코올중독자."
"그건, 부정할 수 없긴 한데...."
샬럿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탑의 하위 층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이라고 했다. 카오틱에게 협력할 이들은 아니라면서.
그녀가 진현우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모두 카오틱들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야. 예전에 좀, 심하게 당했거든."
"나쁘지 않네."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는 미국에 있는 길드의 길드장들, 그리고 여러 국가의 랭커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 중 일부는 확실한 동기가 있었다.
"쿨럭! 수정구에 나왔던 플레이어들 기억하십니까? 그들과 친분이 깊던 사람들입니다."
"동기부여는 확실하겠군요."
"예. 직접 검증해 보시지요."
일본, 영국, 독일.
온갖 국가의 랭커들이 있었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은 카오틱과 마인에 의해서 가족이나 연인,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복수심은 확실한 동기가 된다.
"다 모였나. 슬슬 검증해 봐야겠군."
진현우가 플레이어들을 검증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가장 먼저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것.
전생에서 오랫동안 최전선에서 활동해 왔고, 그렇기에 수많은 플레이어를 만나 왔다.
배신자들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했다.
"저 세 명은 빼고, 나머지는 괜찮긴 한데... 미호. 저 사람들 머릿속 좀 읽어 봐."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로구나. 내 꼬리는 이제 여섯 개니까! 쿠후후!"
그런 식으로 한번 걸러 낸 후, 미호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심층 의식을 읽었다.
상황 설명은 그 뒤에 이어졌다.
"뭐 그런 위험한 일을...."
"그 새끼들한테 복수할 기회라는 거군. 나는 참가하겠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 인원이 전부입니까?"
제각기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흔쾌히 수락하는 이들도, 고민하는 이들도, 지나친 위험성에 꺼리는 이들도 있었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시로 가는 포탈에는 인원 제한이 없지만, 전이 마법진에 인원 제한이 있습니다."
"각 마법진마다 최대 30명만 가능합니다."
"30명...."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30명은 적어도 너무 적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게 아닙니다. 적들의 핵심 시설을 타격해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탈출하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전이 마법진으로 진입하고 빠지겠다?"
"예. 그럴 수 있게끔 마법진을 짜 뒀습니다."
전이 마법진은 딱 두 번 작동한다.
도시 안으로 진입할 때, 그리고 진입했던 이가 되돌아와서 포탈 쪽으로 되돌아갈 때.
"적들이 핵심 시설을 공격받으면서 무력해졌을 때,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존재를 일반 대중에게 알리고 인원을 모집할 겁니다."
"흠, 기습이 성공하고 나면 은밀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지. 내통자들이 알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 이건가."
플레이어들에게 상황을 알려서 최대한 많은 지원자를 받아 도시를 공격해야 하니까.
기습 때문에 무방비해진 도시를.
"내통자가 있든, 놈들이 뭘 하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일 겁니다."
"기습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인원이 적은 게 더 낫겠군. 많을수록 통제가 힘들 테니까."
진현우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번 기습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분들은 부담 없이 손을 드시면 됩니다. 불참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
지하에 침묵이 감돌았다.
네메시스 쪽의 인원을 제외하면, 여기 있는 이들은 대부분 카오틱에 원한을 가진 이들.
지금이 놈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그리고 복수할 좋은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 위주로 데려왔으니까.'
잠깐 기다렸지만,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그럼, 모두 참석하는 걸로 알고."
진현우는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지도를 꺼냈고, 타격해야 할 시설들을 표시했다.
플레이어들은 시설의 위치를 기억했다.
"생산 구역에는 인화성 물질이 많아서 화재를 일으키면 크게 번질 겁니다. 적들의 시선이 쏠릴 테니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그거 재밌겠네."
얘기를 듣던 화련이 웃었다.
"생산 구역은 내가 갈게. 태울 게 많아 보여서 마음에 드네. 다 태워도 되는 거잖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불태우는 건 그녀의 전문이기도 했다.
화련이 생산 시설 공격대의 리더를 맡기로 했고, 그에 적합한 플레이어들이 동참했다.
"중앙 구역에는 플레이어들과 중범죄를 저지른 카오틱들이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 무방비해졌을 때 플레이어들을 풀어 줘야 합니다."
"그건 제가 하죠."
윤서희가 손을 들었다.
"사람을 구조하는 일을 우선시하고 싶군요. 샬럿 씨도 같이 가 줬으면 좋겠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어, 괜찮아?"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현우가 자신을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지금까지 호흡을 맞춘 일이 많았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다.
"나머지 분들은...."
임호석과 데이비드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다른 핵심 시설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부는 포탈 근처에 남아서 전이 마법진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행정 구역에는 동력원이 있는데... 여긴 저 혼자 가죠. 나중에 합류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오히려 혼자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다른 플레이어가 같은 말을 했다면 막았겠지만, 진현우의 말이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은 100명...."
모집한 인원들이었다.
지금 진현우가 모을 수 있는 플레이어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만 모았다.
하지만 이걸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내일 기습합니다. 준비해 주세요."
* * *
그리고 다음 날.
진현우가 찾아낸 숨겨진 통로를 통해서 100명의 플레이어가 포탈로 진입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지독하게 어두운 세상. 그 너머에 요란스레 밝은 도시가 보였다.
"이 근처는 마법으로 숨겨 뒀으니 적들이 쉽게 접근하지는 못할 겁니다."
포탈 근처에는 이수경을 비롯한 이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전이 마법진이 있었다.
진현우는 그중의 한 마법진 위에 섰다.
"성공하면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생산 구역을 맡은 조는 미리 가서 대기하고, 나머지는 신호를 보냈을 때 전이하면 됩니다."
사라져 가는 진현우의 몸.
"그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진현우는 전이했다.
파아앗!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가 나타난 곳은 행정 구역의 지하였다.
- 정말로 혼자서 괜찮겠느냐?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귀찮아.'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거기에 적합한 건 진현우였다.
'이쪽이었던가.'
진현우는 더 깊은 지하로 향했다.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 유독 엄중한 경계로 지켜지고 있는 장소가 있었다.
루이스의 신분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신분을 바꿔야겠군.'
진현우는 미호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영체 상태로 주변을 돌아다니더니, 경계를 서고 있던 경비들을 매혹했다.
경비들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음, 으음...."
"...."
진현우는 그중 한 명을 골라서 위장의 베일을 썼다. 원래는 임호석이 쓸 것이었지만, 쓸 일이 없어서 남게 된 물건이었다.
그의 모습이 경비로 바뀌었다.
-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니라. 저놈들은 수준이 꽤 높아서 오래는 못 갈 것이다.
'상관없어.'
그 전에 끝날 거니까.
진현우는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경비들이 지키던 곳을 지나가자 넓은 시설이 나타났다.
경비와 마법사들이 있는 시설이.
'여기 심층부에 마석이 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동력원이다.
이 도시는 마법 공학을 이용해 설계한 곳이다. 도시의 시설들이나 방어 시스템, 그 모든 것이 마석이라는 동력원을 써서 돌아간다.
그 마석들을 파괴한다면?
'도시는 동력원을 잃게 된다.'
물론 도시를 만든 이도 바보는 아니다.
동력원이 파괴될 때를 대비한 예비 동력원이 있다. 하지만 그 예비 동력원은 가까스로 도시를 유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의 방어 시스템 전체를 가동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위치는....'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그의 감각이 주변에 자욱한 마력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고 있는지도.
그는 재빠르게 마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석의 상태는 어때?"
"평소대로. 다음 주면 새 마석들을 가져와서 마력을 좀 보충해 줘야 할 것 같긴 해."
"행정부에 미리 말해 둬야겠군."
마법사들이 떠드는 것이 들렸다.
진현우는 시선을 피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뭐야, 이놈들 왜 이래? 야, 정신 차려!"
"무슨 일이 있었나? 빨리 말해!"
"끄, 끄응... 가, 갑자기 정신이...."
"정신이? 매혹에 당했나?"
경비들이 외치는 것이 들렸다.
미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 매혹이 풀렸느니라.
"나도 알아."
시설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경비들이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서 시설 곳곳을 뛰어다니는 것이 들렸다.
지하를 울리는 경보도.
- 우우우우웅!
그보다 빨리 진현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시설의 심층부. 가장 깊은 곳에 찬란한 빛을 내뿜는 거대한 마석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그 안에 가득 찬 마력이 느껴졌다.
-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떻게 하기는."
진현우는 마창을 쥐었다.
저런 마석들은 부서질 정도로 강한 자극을 줄 경우, 내부에 담긴 마력이 폭주한다.
그렇게 폭주한 마력은 폭발한다.
"다 때려 부숴야지."
파지지직!
마창에 강렬한 흑뢰가 어렸다. 진현우는 팔을 젖혔고, 그때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저, 저놈!"
"안 돼! 막아!"
상황을 파악한 경비들의 목소리였다.
"이미 늦었어."
진현우는 공격해 오는 경비들을 비웃으며, 마창을 쥔 손을 내질렀다.
거대한 흑뢰가 마석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잠시 후.
-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지하를 가득 울렸다.
197화
한밤중의 기습
- 콰아아앙!
행정 구역에 거대한 기둥이 솟구쳤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기둥이었다. 그 반경에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듯이 사라졌고, 지하에서부터 폭음과 함께 거센 폭발이 일어났다.
- 퍼어어엉!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굉음이었다.
그 위력도 폭탄과 다를 게 없었다. 지하에서 일어난 폭발이 땅을 뒤흔들었고, 그 위에 있던 구조물들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우아아아악!"
"포, 폭발? 지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설마!"
행정 구역의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카오틱들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틀리지 않았다.
- 위이이잉... 쿠웅!
어둠을 밝히던 도시의 불빛이 꺼졌다.
이 도시의 가로등은 모두 마력을 이용해서 작동하는 마도 공학의 산물이었다. 그 동력원인 마력이 사라졌기에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돼! 시설이!"
"보, 보조 동력원으로 돌려! 어서!"
도시 전체가 일순간 정전되었다.
화려한 빛도, 돌아가던 시설들도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시의 카오틱들이 당황했다.
그때, 지하에서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 키아아아아아!
괴물의 노성이 사방을 울렸다.
폭발에 휘말린 행정 구역. 그 상공에 온몸을 천둥으로 휘감은 비룡이 날고 있었다.
그 노성에 화답하듯 하늘이 번쩍였다.
- 콰르르르! 콰아앙!
하늘에서 쏟아지는 낙뢰가 지상을 덮쳤다.
천둥 비룡은 도시 위를 날아다녔고, 브레스를 내뿜으면서 지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남자가 있었다.
"저, 저거!"
카오틱 하나가 비룡에 탄 남자를 가리켰다.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최근 플레이어든, 카오틱이든 가리지 않고 유명한 남자였으니까.
"진현우! 진현우다!"
"저 새끼가 여긴 왜 있는 거야!"
"반! 반 님한테 빨리 보고해! 어서!"
진현우라는 특급 먹이를 본 카오틱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죽을 뻔했네.'
- 나, 나도 죽는 줄 알았느니라!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한 외면과는 다르게 진현우의 가슴은 벌렁거리고 있었다.
수호자의 갑옷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 믿고 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아슬아슬했다.
"뭐, 어쨌든."
진현우는 마창을 쥐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흑뢰가 피어올랐다.
"시선이나 좀 끌어 볼까."
콰아앙!
진현우는 천둥 비룡에 올라탄 채, 놈과 함께 상업 구역을 비행하며 적들을 공격했다.
그 소식이 도시 곳곳으로 퍼지고, 사방의 카오틱들이 행정 구역으로 몰리려 했지만.
- 화르르륵!
"저건 또 무슨...!"
그때, 생산 구역에서 거센 불길이 솟구쳤다.
어둠을 가득 밝힐 정도로 강렬한 불길. 그 불길이 솟구친 순간, 생산 구역의 구조를 아는 카오틱들은 무슨 일이 이어질지 눈치챘다.
- 콰아아아앙!
"꺄아아악?!"
"부, 불이! 안 돼!"
지척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불길이 일어난 지점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주변 건물을 집어삼켰다.
삼켜진 건물에 있던 인화성 물질들이 폭발하면서 폭발을 더더욱 거대하게 만들었다.
- 아하하하하하!
어디선가 광소가 들렸다.
동시에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 반응. 사방을 뒤덮은 불길이 마력과 반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력과 반응한 불길들이 변화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 화르르!
- 시이이익...!
어떤 불길은 뱀의 형상으로, 또 어떤 불길은 박쥐의 형상으로, 다양한 형상을 갖췄다.
그걸 본 카오틱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 정령?"
그건 정령이었다.
수많은 불의 정령. 강력한 정령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하위에서 중위급의 정령들.
하지만 그 숫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 보이는 건 다 불태우렴, 정령들아! 너희를 소환하느라고 엄청난 대가를 치렀으니까!
불로 뒤덮인 생산 구역의 환경이 강력하지는 않은 정령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정령들은 자신의 속성과 비슷한 환경에 있을 때 강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숫자의 정령을 어떻게!"
"잠깐, 저기...!"
솟구친 불길에서 한 여성이 나타났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저 여자가 누군지 모르는 카오틱은 없었다.
"화련?! 저년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뒤에 있는 놈들도 플레이어다!"
"적이다! 적습!"
화련. 그리고 플레이어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카오틱들은 이것이 사고가 아니며 계획된 공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련이 당황한 카오틱들을 비웃었다.
"받은 건 갚아 줘야지, 안 그래?"
"저년...!"
화련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그에 화답하듯, 그녀의 등 뒤에 솟구친 불길이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불의 상위 정령, 이프리트.
- 화아아악!
"크아아아악!"
이프리트가 일으킨 화염 폭풍이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불태우며 나아갔다.
그 경로에 있던 카오틱들마저도.
"화련을 지원해라!"
"무리하지 마! 우리 할 일만 하면 돼!"
다른 플레이어들도 화련을 지원했다.
그녀는 화려하게 불타는 생산 구역을 바라보면서, 성벽 너머에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화려하게 날뛰어야 시선이 끌리겠지."
화련은 불길을 일으켰다.
도시 내부와 바깥, 안팎을 동시에 공격해야지 적들이 크게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야 이 기습이 성공한다.
"다 불태워!"
화련의 마법이 생산 구역을 뒤덮었다.
* * *
카오틱들은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태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사태가 일어난 곳을 지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 성벽! 성벽 바깥에!"
"또 뭐야!"
성벽에 있던 보초들이 바깥을 가리켰다.
도시의 불빛이 꺼진 탓에 사방이 어둡다. 하지만 뭔가가 움직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저건...."
도시의 성벽 바깥.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어둠 속에서 수많은 형체가 얼핏 보였다.
그 형체들이 일제히 도시를 공격했다.
"미친!"
"저 새끼들, 얼마나 몰려든 거야!"
콰아앙!
마법이 격돌하면서 성벽이 크게 요동쳤다. 그 위에 서 있던 카오틱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방어막이 막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크으으윽!"
"젠장, 이걸 어떻게...!"
카오틱들은 혼란에 빠졌다.
도시 내부에는 사방에서 폭발과 화재가 일어나는 상황. 분명 침입자가 있는 것일 터.
하지만 그걸 지원하러 가자니, 저 너머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놈들이 거슬린다.
"이, 일단 기다려!"
"뭘 기다리라는 겁니까!"
"X발, 상층부 지시를 기다리라고! 그리고 도시에서 노는 새끼들보고 올라오라고 해!"
도시를 포위한 적들의 숫자가 심상치 않다.
지금 성벽을 지키는 이들로만은 막기 힘들 정도. 지원군을 불러서 방비를 보강해야 한다.
"일단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버틴다!"
성벽을 책임지는 카오틱은 그리 판단했다.
어차피 적들은 이쪽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 성벽의 방어를 보강하면서 지키기만 하면 된다. 성벽이 뚫리지만 않으면 이쪽이 유리하다.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어떻습니까, 잘 속인 거 같습니까?"
"콜록, 콜록!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도시를 포위한 게 진짜 사람이었다면.
이수경과 데이비드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이비드는 주변을 돌아봤다.
"생김새는 이 정도로 완벽하니...."
그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갖춘 '인형'들이.
"꽤 잘 만든 인형이군요. 쿨럭!"
"겉모습에 엄청 신경 썼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움직이는 것 말고는 기능이 없답니다."
도시의 카오틱들은 이 인형들을 사람으로 착각했고, 수많은 플레이어가 쳐들어와서 도시를 포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5분 뒤에 스크롤을 써서 다시 공격할 겁니다. 모두 지정된 위치에 설치해 주십시오."
사방에서 쏟아진 것 같았던 마법도 미리 준비해 둔 스크롤들을 이용한 것이었을 뿐.
불빛이 사라지면서 적들의 시야가 없어졌다는 것을 제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명심하세요. 도시 안으로 침입한 아군이 무사히 나오려면 우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를 봤다.
"슬슬 흑림이 움직일 겁니다."
이 정도로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
흑림의 수장이자, 저 도시의 지도자인 반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 * *
도시가 불타고 있다.
행정 구역의 가장 높은 건물, 그 최상층에서 반은 도시가 불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바, 반 님! 동력원이 파괴됐습니다! 보조 동력원으로 전력을 돌리고 있기는 한데, 도시의 방어 체계를 유지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새, 생산 구역이 불타고 있습니다! 화재를 진압하고 있지만 정령들이...!"
"진현우가 행정 구역에 나타났습니다!"
도시의 동력원은 파괴되었고, 생산 시설에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진현우는 행정 구역 상공을 누비면서 도시를 파괴하는 상황.
"하."
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일했다면 안일했다고 할 수도 있다. 적이 이런 식으로 침입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억울한 면은 있었다.
"이 층을... 발견했단 말인가."
탑은 불공정하면서도 공정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탑은 그러하다.
탑은 카오틱과 마인에게 '타락한 자들의 도시'라는 층을 준다는 혜택을 줬다.
'주인님에게 얘기는 들었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플레이어가 이 층을 찾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플레이어들에게도 이 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한쪽에 불공정한 혜택을 주면서, 그 혜택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탑은 불공정하면서 공정하다.
'왜지?'
반은 불타는 도시를 보며 생각했다.
탑은 플레이어들이 층을 오르는 걸 막는다. 대적자들도 그걸 위해서 선정한 존재들.
그런데 왜 플레이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가. 그 모순이 지금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내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언젠가 의구심이 들어 대적자에게 물어봤었지만, 그조차도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발악'이라고 했던가.
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 반 님! 지금...!"
"적들이 공격해 온 건 알고 있다. 진정해라."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카오틱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긴급한 보고는 질리도록 들었다. 반은 카오틱의 보고를 듣지 않고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보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중앙 구역의 감옥이!"
"뭐?"
반이 고개를 홱 돌렸다.
두려움에 질린 카오틱의 얼굴이 보였다.
"적들이 감옥에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투옥된 놈들을 모조리 풀어 주고 있습니다!"
"...!"
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곳에 투옥된 카오틱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같은 카오틱임에도 아군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빌어먹을."
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시 곳곳이 불타고, 적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최악의 상황.
"마인들을 불러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그래도 움직여야만 한다.
반은 황급히 행동에 나섰다.
198화
유인
행정 구역과 생산 구역.
두 구역에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 윤서희와 플레이어들은 중앙 구역에 와 있었다.
그들은 중앙 구역에 있는 한 건물에 숨은 채, 진현우가 보낼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진현우 씨가 따로 처리해 뒀더군요. 일단 포박해서 지하에 가둬 놨습니다."
"흠, 그럼 남은 건...."
윤서희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높은 건물이 서 있었다. 표면이 기분 나쁠 정도로 매끄러우면서, 창문이랄 것은 하나도 없는 건물.
건물 주변에는 다양한 방어 시설이 위치했고, 카오틱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거겠군요."
"예. 경계가... 굉장히 삼엄한데요."
경계가 삼엄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 건물은 감옥이며, 수많은 플레이어와 중죄를 저지른 카오틱이 갇혀 있으니까.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끔 감옥 내부도 외부도 삼엄한 경계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길드장님, 이 인원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플레이어, 이대건이 걱정스레 말했다.
여기 있는 이들이래 봤자 이대건과 하이드의 파티 그리고 윤서희와 샬럿이 전부였다.
저 감옥을 공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야겠죠. 다른 플레이어들이 시선을 끌어 줄 겁니다. 우리는 그 틈을 이용해서 저 감옥으로 잠입할 거고요."
그리고 또 하나.
"저 감옥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카오틱들이 갇혀 있다더군요. 그놈들을 이용하죠."
"중범죄 말입니까? 카오틱이?"
"정확하게는 세력 다툼에서 졌다더군요. 이 도시를 지배하는 흑림 길드한테 말입니다."
진현우가 알려 준 정보였다.
옛날에는 타락한 자들의 도시에 여러 세력이 있었고, 그들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고.
거기서 승리한 것이 흑림이었다.
"패배한 세력들은 대부분 숙청했는데, 그중에 일부러 살려 둔 놈들이 있다고 합니다."
"일부러 살려 둔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어떻게든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장난감으로 삼고 싶었거나."
정확한 이유는 윤서희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 쿠우웅!
도시 전체의 불빛이 꺼졌다.
감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감옥 안에 보조 동력원이 있다는 것.
그것들 덕분에 감옥의 불빛이 다시 켜졌다. 하지만 방어 시설을 가동하기에는 부족했다.
- 뭐, 뭐야? 저 폭발은....
- 행정 구역과 생산 구역이 공격받고 있다!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쪽으로 가!
- 중앙 구역에 적들이 나타났다!
- 도대체 얼마나 침입해 온 거야!
카오틱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도시의 온 구역에서 적들이 나타나는 상황. 중앙 구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임호석 길드장이 시선을 끌어 줄 겁니다."
임호석이 윤서희가 감옥에 진입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그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중앙 구역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감옥의 카오틱들이 그에 반응했다.
- 너희는 여기 남고 나머지는 날 따라와라! 중앙 구역을 공격하는 놈부터 처리한다!
- 예!
떠나는 카오틱들.
그들이 떠난 뒤, 상업 구역에서 거대한 비룡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왔다.
비룡 위에 올라탄 진현우가 보였다.
- 저, 저놈은!
카오틱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챘지만, 그보다 먼저 천둥 비룡이 지상에 착지했다.
진현우는 곧바로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그 손아귀에는 거대한 깃발이 쥐여 있었다.
- 쿠우웅!
땅에 꽂히는 깃발.
불길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그걸 본 카오틱들은 다음에 뭐가 일어날지 눈치챘다.
저 스킬도 이제는 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 언데드!
- 제길, 저 새끼 도망치잖아!
- 추적, 크으으윽! 보조 동력원을 방어 시설로 돌려! 언데드들부터 처리하라고!
마법진에서 나타나는 불사자의 군세.
해골마를 탄 기사들이 돌진했고, 그들을 리치를 비롯한 해골 마법사들이 지원했다.
이 사태를 일으킨 진현우는 곧장 떠났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가죠."
"예, 길드장님. 너희는 샬럿 님을 지켜!"
"말 안 해도 알아, 오빠."
지금이 기회라 판단한 윤서희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감옥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보석을 하나 깨트렸다.
- 파아아앗!
부서진 보석에서 새어 나온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 빛은 보조 동력원으로 작동하려던 방어 시설을 완전히 무효화했다.
안에 담긴 마력을 제거한 것이다.
"안 돼! 마력이!"
"크아아악!"
돌진하던 해골마가 적들을 짓밟았다.
동시에 감옥의 입구에 결계가 만들어지더니, 거대한 강철 갑옷이 여럿 나타났다.
윤서희가 소환한 갑옷들이었다.
"진입! 모두 진입하세요! 먼저 플레이어들부터 구조한 다음에 카오틱들을 해방합니다!"
"저, 적! 적이다!"
콰아앙! 강철 갑옷들이 감옥의 입구를 단번에 짓이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입구로 플레이어들과 언데드들이 함께 진입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최대한 빠르게! 언데드들을 이용해서 안쪽으로 진입합니다! 모두 나를 따르라!"
윤서희는 감옥 안으로 진입했다.
* * *
진현우는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행정 구역에서 상업 구역까지, 그리고 중앙 구역을 들러서 영역 전개까지 사용했다.
그러면서 천둥 비룡의 번개 숨결과 흑뢰를 이용해서 지상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흐어어어...!"
"이, 이건... 마기? 플레이어가 어떻게!"
"피, 피해!"
그에 당한 카오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사실 진현우가 하는 행동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니까.
"저쪽이다!"
"저 새끼부터 떨어트려!"
애초에 그걸 노린 것이기도 했다. 진현우는 더욱 요란스럽게 날뛰며 적들을 유인했다.
"빌어먹을, 망할 놈이!"
- 키아아아악!
진현우를 잡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른 카오틱들이 있었다. 비행 마법을 쓴 것이다.
놈들은 사방에서 진현우를 포위하면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반격이 더 빨랐다.
- 퍼어억!
"커억!"
분열하는 도끼가 적들의 사지를 꿰뚫었고, 곧 이어지는 화살이 심장에 적중했다.
격추당한 카오틱들이 추락했다.
"고, 공격! 쏴라!"
그와 교차하듯이 지상에서 스킬이 쏘아졌다. 궁술 계통, 그리고 온갖 마법까지.
원래는 날아오른 카오틱들과 협력해서 진현우를 공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카오틱들이 너무 빨리 격추당한 것.
"...!"
또 하나는 진현우에게 막을 수단이 있다는 것. 그는 부서진 검으로 유수를 펼쳤다.
신묘한 움직임을 보이던 검이 닥쳐 오던 스킬들을 흘려 내고 역으로 되돌려 보냈다.
- 콰아아앙!
지상에 폭발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현우는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봤다.
'확실히, 적들의 수준이 낮아.'
한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침공 때문에 카오틱이 큰 피해를 입은 건 분명했다.
이 정도 난리를 부리고 있음에도 마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미호."
- 알고 있느니라.
진현우는 아래에 모인 카오틱들을 가리켰다. 미호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고, 그걸 마주한 카오틱들의 눈빛이 붉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크아아아악!"
"흐으, 으하아아!"
"저, 저놈들 왜 저래!"
미호가 쓴 광란이 효과를 발했다.
지상에 있던 카오틱들이 광란에 빠졌고,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혼란은 금방 사방으로 퍼졌다.
'이 정도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진현우는 행정 구역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 조금 전 행정 구역에 있을 때 저기서 강한 기척을 느꼈다.
아마도 이 도시를 지배하는 자의 기척.
지금은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히 날 노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지상을 공격하던 진현우는 전투 감각이 무언가를 강렬하게 경고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바로 비룡의 등을 박찼다.
- 스으으으!
- 키하아아악!
비룡의 등 위, 조금 전까지 진현우가 있던 곳으로 자욱한 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안개에 닿은 비룡의 등이 단번에 비쩍 말라 버렸다. 마치 수분을 다 뺏긴 것처럼.
"드디어 왔나."
진현우는 천둥 비룡을 역소환하면서 근처에 있던 건물의 옥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안개가 날아온 방향을 봤다.
- 직접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진현우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핏빛으로 물든 자욱한 안개가 보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붉고, 거대한 안개가.
거기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인님께서 하셨던 침공의 복수라도 하려고 온 것이냐, 인간... 아니, 진현우.
"네가 반이냐?"
진현우는 저 안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자, 안개가 옅은 비웃음을 지으면서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압축한 안개는 창백한 남자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특이한 느낌의 남자였다.
- 인간, 저 마인... 뭔가 묘하구나.
기분 나쁠 정도로 창백한 마인.
피가 흐르기는 하는 건지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도시를 다스리는 마인, 반은 핏빛의 눈동자로 진현우를 직시했다.
- 원래 이름은 그것보다 더 길다만, 줄여서 반이라고 칭하고 있지. 네놈 같은 인간에게 불리기 위해서 줄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기분이 상하셨나?"
- 이 상황에서는 너무 사소한 문제지.
반은 도시를 돌아봤다.
불타고, 파괴되고 있는 도시를. 이 피해를 복구하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 네놈의 동료가 있는 곳으로 마인들이 가고 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반이 이를 드러냈다.
그 이빨은 기이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 그리고 네놈도.
아직 주변에는 안개가 남아 있었다.
그 안개가 일순간 커지더니, 안에서 마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해도 수십.
하나같이 강한 힘을 가진 마인이었다.
- 먼저 네놈부터 죽이겠다. 이 사태를 일으킨 중심은 네놈일 게 틀림없으니.
이 자리에서 진현우를 죽이겠다는 뜻.
그는 중앙 구역을 바라봤다. 아마 지금쯤 윤서희가 플레이어들을 구출하고 있을 터.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 * *
중앙 구역의 감옥 내부.
윤서희를 비롯한 플레이어들과 언데드들은 감옥 내부를 불도저처럼 나아갔다.
적들은 어떻게든 방어 태세를 구축해서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기다!"
"언데드를 이용해서 밀고 들어가!"
플레이어들은 방어를 뚫으면서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바로 플레이어들이 갇힌 감옥에.
"이건...."
"끔찍하네요."
감옥 안의 풍경은 끔찍했다.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짙은 죽음의 기운. 그리고 코를 찌르는 피 냄새였다.
사방에 철창이 있었는데, 그 너머에 플레이어들이 흡사 짐승처럼 가둬져 있었다.
"카오틱 놈들, 무슨 짓거리를...."
"몸이 성한 사람이 없어요."
그걸 본 샬럿이 인상을 찌푸렸다.
갇힌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수백. 그런데 그중에서 멀쩡하다 싶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으, 으으... 흐아악!"
"그만, 그만해. 난, 더는...."
감옥 속의 플레이어들이 신음했다.
누군가는 팔이 없었으며, 누군가는 다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눈을 잃은 상태였다.
그 모든 걸 잃은 사람도 있었다.
바닥은 그들의 핏물로 흥건했고, 제대로 처치도 못 받았는지 상처는 썩어 가고 있었다.
"샬럿,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는 있지만, 결손 부위는 어쩔 수 없어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넋을 놓은 이들도 있다는 것.
저들은 전력이 되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는 없죠."
"네, 맞아요."
일행은 구조한 플레이어들을 넓은 공간에 모았고, 샬럿이 두 손을 모아서 기도했다.
그녀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나타나면서 신성한 빛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 빛이 플레이어들을 치료했다.
"너희는 여기를 지켜."
윤서희는 자신이 소환한 강철 갑옷들에게 이 공간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언데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건 씨, 여러분은 여기서 샬럿을 엄호해 주세요. 다른 분들은 저와 같이 가죠."
"예, 길드장님."
플레이어들을 치료하는 게 샬럿이 할 일이라면, 윤서희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감옥의 심층부로 향했다.
199화
마인, 반 (1)
중앙 구역의 감옥.
그 심층부는 위쪽보다 삼엄한 경계로 지켜지고 있었다. 내부에 있는 적들의 숫자도, 설치된 방어 시설의 수준도 격이 달랐다.
"동력원을 마비시켜서 다행이군요."
"예, 길드장님. 저 방어 시설들을 정면에서 상대할 생각을 하면… 깜깜합니다."
"동감이다."
하이드는 주변을 돌아봤다.
심층부는 카오틱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드물지만 마인도 존재했다.
놈들도 이곳이 중요하기는 중요했는지, 목숨을 걸고서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다.
"카오틱을 풀어 준다라...."
감옥에는 플레이어들만 투옥된 게 아니다.
카오틱들 역시 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중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이들도 있었고, 범죄가 아닌 다른 이유로 갇힌 이들도 있었다.
하이드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꼭 저놈들을 풀어 줘야겠나?"
"저도 동감입니다, 길드장님. 카오틱이면서 감옥에 갇힐 정도의 놈들입니다. 그냥 풀어 주지 말고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게...."
"일반적인 카오틱이라면 그렇겠지만, 진현우의 말이 맞는다면 풀어 줘도 될 겁니다."
윤서희는 피로 젖은 복도를 나아갔다.
좌우로 넓은 감옥이 보였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카오틱들이었다. 사지가 묶여 있지만, 상층의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멀쩡했다.
"저놈들은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꼴에 동료라고 손속에 자비를 뒀겠죠."
"카오틱한테 그런 자비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윤서희와 네메시스의 길드원이 나누던 대화에, 하이드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여기 있는 카오틱들을 다른 방식으로 쓰려고 했을지도."
윤서희는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광란을 비롯한 여러 정신 계열의 마법이 깃든 스크롤이었다. 그녀는 주변의 카오틱들을 한번 돌아본 후, 바로 스크롤을 찢었다.
"크, 으으으윽...!"
"으아아아, 흐아악!"
카오틱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피부도 마찬가지였다. 윤서희는 강철 갑옷들에게 여기 머무르게끔 한 다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놈들의 구속을 풀어 주라 명령했다.
"저놈들이 시간을 벌어 줄 겁니다."
"흠, 나쁘지 않군."
일행은 감옥의 심층부에 도달했다.
그곳에 유독 삼엄한 방비하에 지켜지고 있는 감옥이 있었다. 윤서희는 감옥 내부의 기척을 감지한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늘은… 유독 소란스럽군...."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이가 보였다. 온몸은 만신창이에 얼굴은 흉측하게 짓무른 남자.
탁한 목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
"네놈들은... 누구냐?"
"보면 모르나? 플레이어다."
"플레이어... 허, 반 그 새끼. 뭘 어쨌길래 저 새끼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지?"
남자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하이드는 남자의 흉측한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는 넌 누구지?"
"패배자다. 한때는 충견의 자리를 놓고 반과 경쟁했었지만, 패배하고 이 꼴이 됐지. 이 근처에 있는 놈들도... 비슷한 처지다...."
지금 타락한 자들의 도시를 이끄는 흑림, 그 수장인 반에게 대적했던 카오틱들도 있다.
원래라면 진작에 죽였어야 할 놈들이지만, 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을 살려 뒀다.
'충견... 대적자를 말하는 건가?'
꽤 오래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남자의 흐릿한 눈동자가 윤서희를 봤다.
"여기 온 건, 나한테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일 거 같은데... 뭘 바라는 거냐?"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남자의 눈이 증오로 번들거렸다.
"내 몸을 봐라. 그놈이 날 장난감으로 삼으면서 이 꼴이 됐지.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복수하는 것. 그 흡혈귀 새끼한테...."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있다. 하지만 놈을 죽이기에는 부족하지. 그러니까 너희들한테 협력하겠다는 거다."
핏발 선 눈동자.
카오틱은 믿을 수 없는 존재지만, 눈앞의 남자가 가진 증오만큼은 진심이었다.
남자의 간절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윤서희는 스크롤을 꺼내서 던졌다.
회복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여기 갇힌 카오틱들한테 광란 마법을 걸어 뒀습니다. 때가 되면 밖으로 내보내세요."
"난 이 감옥의 지리를 안다. 어렵지 않아. 그 뒤에 곧바로 그 흡혈귀 놈한테 가지."
윤서희는 등을 돌렸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그녀를 뒤따랐다.
"카오틱을 믿어도 괜찮겠나?"
"이 도시의 주인인 반을 죽일 수 있다면 향후의 일이 편해질 겁니다. 저 남자가 그걸 가능케 할 수단이 된다면, 믿을 가치가 있죠."
"음...."
윤서희도 남자를 믿는 건 아니었다.
저 남자가 거짓말을 했더라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러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현우, 그 사람의 짐이 너무 커.'
혼자서 다수의 마인을 상대해야 하는 진현우의 짐이 무겁다. 저 남자가 반을 죽이는 걸 도울 수 있다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질 터.
그걸 바라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빠르게 움직이죠. 서쪽으로 가서 신호를 보내면 데이비드가 성벽을 부술 겁니다."
"예, 길드장님."
윤서희는 빠르게 움직였다.
* * *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수십의 마인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저 포위하는 수준에 그칠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저 마인 놈 특성을 생각하면....'
그 너머에 있는 반이 보였다.
멸망의 목도자가 만들어 낸 최초의 마인이자 이 도시를 다스리는 마인. 전생에도 유명했고 마주친 적이 있는 놈이기에 잘 안다.
저놈이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반 님!"
"빨리 저놈을 죽여 주십시오!"
주변에 모여 있던 카오틱들이 외쳤다.
그 숫자만 해도 수백. 놈들은 반을 비롯한 마인들이 진현우를 죽여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반의 생각은 달랐다.
- 네놈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반의 눈동자가 카오틱들을 훑었다.
눈동자가 불길한 빛을 내뿜었다. 그 눈동자를 직시한 카오틱들이 순간 넋을 잃었다.
놈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어렸다.
- 그리고 네놈들이 그 제물이 되겠지.
"으, 어어어...."
카오틱들의 표정에서 이성이 사라졌다.
진현우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광경이다. 그의 어깨에 있던 미호가 황급히 말했다.
- 인간, 저 마인 놈이 인간들을 매혹했느니라. 분하지만 내 매혹보다 더 강하구나.
"나도 알아. 넌 감옥 쪽으로 가라."
- 혼자서 괜찮겠느냐?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미호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미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빠르게 중앙 구역의 감옥으로 향했다.
"크아아악!"
"으아아아아!"
적들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진현우는 쏟아지는 마법들을 피하면서,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적들의 숫자를 봤다.
수백의 카오틱 그리고 수십의 마인.
'나 혼자서 상대할 수 있나?'
불가능하다.
마인들에게서는 꽤 강한 힘이 느껴졌고, 그들을 이끄는 반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시간을 끄는 건 가능하다. 최선은 반, 저놈을 여기서 죽이는 건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하게 거리를 벌리는 건 위험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들 한복판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낫다.
그는 카오틱들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포위해! 포위해서 죽여!"
"이 새끼가!"
카오틱들이 동시에 공격해 왔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다. 진현우를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서로 공격하게 될 상황.
놈들의 공격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 콰아아앙!
"크아악!"
진현우가 노린 게 그것이었다.
그는 땅을 힘껏 짓밟았다. 강력한 충격이 땅을 갈라지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쳐 사방의 카오틱들을 덮쳤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공간이 열렸다.
- 촤르륵!
진현우는 곧바로 환검을 펼쳤다.
수많은 환검이 사방으로 쏘아지면서 그를 포위하고 있던 카오틱들을 도륙했다.
핏물이 주변을 적셨다.
"흐읍!"
진현우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셰이드가 주변의 적들을 구속했고, 도끼가 놈들을 덮쳤다.
카오틱과 그와의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수준이 그리 높은 놈들은 아니야.'
진현우는 마인들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흑림의 길드장, 반이 있는 곳을. 놈은 여유로운 자태로 상황을 지켜봤다.
- 쥐새끼처럼 남의 도시에 쳐들어와서, 이런 같잖은 짓을 하고 다닐 줄이야.
수많은 피와 살점이 뿌려졌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반이 팔을 뻗었다. 그 팔이 검붉은 안개로 변하더니, 진현우와 카오틱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안개가 바닥에 고인 피와 살점을 흡수했다.
검붉은 안개가 불길할 정도로 붉어졌다. 피를 한껏 머금은 탓에 습기마저 느껴질 정도.
반이 손가락을 튕겼다.
- 콰드득! 철퍽!
피를 머금은 안개가 한데 뭉쳤다.
살점이 짓이겨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기체였던 안개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괴물의 형태로.
'블러드 골렘.'
피와 살점을 이용해서 만든 골렘이었다.
그 숫자만 해도 수십. 죽은 카오틱들로 만들어 낸 블러드 골렘이 진현우를 포위했다.
"자기 부하를 쉽게도 죽이는군."
- 저 정도 수준의 카오틱들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너를 죽일 힘이 없는 놈들이니, 이런 식으로 쓰는 게 맞겠지.
지극히 마인다운 생각이었다.
애초에 놈이 카오틱들을 매혹해서 진현우와 싸우게끔 만든 이유가 그것이었다.
블러드 골렘을 만들기 위한 제물.
- 쿠웅, 쿵!
- 우, 우우우....
블러드 골렘이 진현우를 향해 다가왔다.
처리 못 할 정도의 괴물인가? 그건 아니었다. 지금의 진현우라면 처리할 수 있을 정도.
문제는.
'끝이 없다.'
수십의 블러드 골렘을 소환했음에도 주변에는 아직 핏물과 살점이 가득했다.
저놈들을 다 처리하는 건 의미가 없다. 반이 새로운 블러드 골렘을 소환하면 되니까.
'흡혈귀로 유명한 놈이었지.'
반은 피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마인이다.
데이비드와 비슷하지만, 데이비드는 피를 이용해서 자신을 강화하는 것만 가능하다.
저놈은 피로 생물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주변의 피를 다 없애는 수밖에.
진현우는 이전에 얻은 스킬을 떠올렸다. 도플갱어를 죽이면서 얻었던 감정 아이템.
- '흉내 내기 (S)'를 사용합니다. 마인, 반이 직전에 사용한 스킬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 '블러드 골렘 소환'을 발동합니다.
그 아이템에 깃든 스킬, 흉내 내기를.
진현우에게서 안개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의 반이 그랬던 것처럼 안개가 주변으로 흩어졌고, 사방의 핏물을 흡수했다.
- 저건....
진현우가 무슨 잔재주를 부리나 싶어서 지켜보던 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 구어어어어!
반이 그랬듯이, 핏물을 흡수한 진현우의 안개가 금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 블러드 골렘을.
- 쿠우우웅!
- ...!
진현우가 만들어 낸 블러드 골렘들이 일제히 돌진하더니 반의 블러드 골렘과 충돌했다.
맞부딪치는 블러드 골렘들.
- 네놈, 기이한 재주를 가졌구나.
"뭘 그리 놀라?"
진현우는 순간 정신을 집중했다.
두근, 그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내면에 깃들어 있던 신성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놀랄 일은 남았는데."
진현우를 중심으로 신성한 빛이 터졌다.
200화
마인, 반 (2)
세계수의 도움을 받은 이후로 신성의 파편에서 힘을 끌어 쓰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여태껏 성멸권을 강화하는 용도로만 썼던 것을 다른 스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상황.
그중 하나가 광휘였다.
- 파아아앗!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진현우가 일으킨 빛이자, 신성의 힘으로 더욱 강해진 광휘였다.
마인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 빛은...!"
"제길, 눈이!"
마인들의 눈이, 그리고 몸이 일순간 불탔다. 그리고 그 시야가 채 회복되기도 전에 해일처럼 쏟아지는 검기가 놈들을 덮쳤다.
- 카드득!
"끄으으윽!"
마인들을 덮치려는 검기를 안개로 만들어진 장막이 막아 냈다. 하지만 모두 막을 수는 없었고, 놓친 검기가 마인들을 베어 냈다.
그 뒤를 잇듯 섬광이 쏘아졌다.
- ...!
섬광이 마인들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서걱! 한발 늦게 절삭음이 들리더니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마인들의 몸이 갈라졌다.
진현우는 곧바로 부서진 검을 스사노오의 형태로 바꾼 후 마인들에게로 투척했다.
- 콰아아아아!
검에 압축된 바람이 해방되면서 반으로 갈라진 마인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 쉬이익!
진현우는 곧바로 활을 쥐어서 유성을 쏘아 냈고, 그 틈을 타서 검을 회수했다.
유성이 반에게 집중되어 쏟아졌다.
- 한심한 놈들.
반의 몸이 안개로 변했다.
쏘아지던 유성은 목표를 잃은 채 안개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개로 변함으로써 화살을 피한 반은 다시금 형체를 갖추었다.
'안개화.'
마인, 반이 가진 힘 중 하나다.
안개로 변함으로써 공격을 피하는 것. 신성력을 담아서 안개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게 아니면 놈에게 제대로 피해를 입히는 건 힘들다.
- 콰아아앙!
"끄으윽...!"
유성을 피한 반 대신에 마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마인들에게 다가간 안개가 그들을 휘감았고, 마인들이 입은 부상을 순식간에 치료했다.
'자기 피를 이용해서 회복시킨 건가.'
마인들을 회복시킨 안개가 박쥐의 형태로 바뀌더니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날아간 박쥐는 도시 곳곳에 있던 카오틱들의 목을 물어뜯고 피를 흡수했다.
그 피가 반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카오틱이 있는지 알고 있나? 직접 써먹기에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지만, 이런 식으로 써먹을 수 있지.
여기는 도시. 놈이 피를 흡수할 수 있는 대상이 다수 존재하는 곳이었다.
- 스으으으.
반이 만들어 낸 안개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 안개는 땅에 널브러진 카오틱들의 시체에 닿았다. 그 순간, 액체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나더니 안개가 시체의 피를 빨아들였다.
안개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 가라.
"키아아악!"
안개가 주변의 마인들에게 스며들었다.
마인들이 가진 마기가 증폭되는 것이 느껴졌다. 피를 이용해서 마인들을 강화한 것이다.
놈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 카아앙!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마인.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
'어중간하게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진현우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었다.
그는 공격해 오는 마인들을 주시했다. 그의 눈이 마인들이 가진 약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놈들이 코앞까지 왔을 때.
"...!"
놈들의 약점을 정확히 검으로 타격했다.
푸욱! 살점을 베는 칼날. 일부는 팔이, 일부는 다리가 베였다. 강한 신성력이 담긴 칼날이 놈들에게 지울 수 없는 성흔을 남겼다.
- 이건....
반의 안개가 마인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성흔에 당한 부위는 치료 속도가 몹시 느렸다. 성흔의 디버프 때문이었다.
'대적자와 맞선 이유가 있었군.'
반은 부상당한 마인들을 뒤로 보내서 원거리 지원을 맡긴 후 본인이 직접 나섰다.
안개가 진현우 주변을 포위했다. 사방에 자욱하게 낀 안개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 쉬이이익!
그 안개 속에서 기다란 손톱이 쏘아졌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 전투 감각으로 미리 파악한 진현우는 곧바로 손톱을 쳐 냈다.
그리고 반격하려고 했지만.
- 스으으....
손이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안개화한 상태에서 몸 일부분만 구현해 공격하고, 반격당하기 전에 다시 안개화한다.
반격의 기회를 아예 차단하고 있었다.
'그럼 강제로 형체를 갖추게 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다시금 신성을 일으켰다.
그를 중심으로 터지는 광휘. 찬란한 빛이 주변을 자욱하게 메운 안개를 덮쳤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이 움직였다.
- 한번 당한 거에 또 당할 것 같나?
형체를 갖춘 반이 핏물을 일으켰다.
놈을 중심으로 모인 핏물이 방벽이 되어 광휘를 차단했다. 하지만 놈이 형체를 갖추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진현우는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마 접근하면....'
진현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반이 어떤 식으로 싸웠던가. 그는 반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동시에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본 반이 히죽 웃었다.
- 멍청한 놈.
파앗! 반에게 모인 핏물이 폭발했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핏물. 워낙 양이 많았기에 진현우도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핏물이 진현우의 갑옷에 닿았고, 그 순간 갑옷에서 푸쉬익 하는 타는 소리가 들렸다.
'산성.'
반의 피에 담긴 산성 때문이다.
그것도 보통 산성이 아니다. 핏물이 묻은 건물과 땅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그나마 수호자의 갑옷이라서 버틴 것이다.
아니었으면 갑옷도 녹아내렸을 터.
'전생에서도 생각했던 거지만....'
핏물이 사라지면서 그 너머에 있던 반이 보였다. 놈의 핏물을 머금은 손톱이 진현우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진현우는 땅을 짓밟았다.
'더럽게 까다로운 놈이군.'
어지간한 공격은 몸을 안개로 바꾸는 것으로 회피한다. 그걸 뚫어서 기껏 상처를 입히면 흡혈하는 걸로 금방 회복한다.
거기다가 부하들을 강화하는 힘까지.
- 죽어라!
반, 그리고 마인의 공격이 닥쳐 온다.
그것들이 진현우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에 그가 나타난 것은 그를 포위한 마인들의 곁이었다.
공간 도약으로 이동한 결과물이었다.
"펜리스!"
거센 눈보라가 마인들을 덮쳤다.
안개로 변해 진현우를 쫓으려던 반조차도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눈보라였다.
그 눈보라 너머로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 커허어엉!
펜리스가 마인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곧바로 놈들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반의 대응이 더 빨랐다.
눈보라를 헤치고 다가온 안개가 마인들을 회복시켰다. 순식간에 회복한 마인들이 펜리스와 진현우에게 협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포위해라! 동시에 공격해!"
반은 진현우를 공격하는 동시에 안개와 박쥐를 사방으로 보내 피를 흡혈했다.
진현우는 공격을 막으며 빠르게 생각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괜히 이 도시의 수장이 된 게 아니다.
반은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마인이었다. 특히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라면 더더욱.
진현우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순간.
- 콰아아앙!
"응?"
어디선가 굉음이 들렸다.
중앙 구역에 높이 서 있는 감옥. 그곳의 문이 파괴되면서 일어난 굉음이었다.
반의 시선이 감옥으로 향했다.
- 도움이 되는 놈들이 하나도 없군.
반이 인상을 구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옥에서 수많은 죄수가 뛰쳐나오고 있었으니까.
* * *
감옥에서 수많은 죄수가 튀어나왔다.
뒤늦게 감옥으로 뛰어온 경비들이 죄수들의 앞을 막았다. 하나 공격하려는 건 아니었다.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만! 지금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시에 침입자가 있다! 방어를 도와준다면 너희의 죄를 감형해 주마!"
"크르르르...."
"뭐?"
경비대장이 크게 외친 말에 돌아온 대답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였다.
그들은 그제야 죄수들의 얼굴을 봤다.
"크아아아악!"
"우, 우와아악?!"
짐승처럼 흉악한 얼굴을.
시뻘건 눈동자에서는 이성의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광란에 빠진 죄수들이 자신들을 막고 있는 경비들에게로 돌진했다.
"제, 제길! 말을... 좀 들으라고!"
"그아아아아!"
경비들의 말을 듣는 죄수는 없었다.
두 무리가 서로 부딪쳤다. 죄수들의 무장은 빈약했지만, 목숨을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었기에 경비들도 가볍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장님!"
"죽여! 빌어먹을, 다 죽여라!"
중앙 구역이 혼란스러워졌다.
감옥 내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윤서희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지금 움직이죠."
보초를 비롯한 카오틱들의 시선이 광란에 빠진 죄수들에게 쏠린 그때.
- 콰아아앙!
"뭐, 뭐야!"
감옥 1층의 벽이 폭발하면서 무너지더니 수많은 플레이어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서쪽으로 돌진했다.
"플레이어! 플레이어들이 도망친다!"
"멍청한 놈들, 거긴 성벽이다! 성벽 위에 있는 놈들한테 죄다 쏴 버리라고 전달해!"
하지만 서쪽에 길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성벽뿐. 성문도 없는 곳이었기에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제 발로 죽으러 왔나?"
"화살 장전해!"
윤서희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서쪽의 성벽에 도달했다. 성벽 위에 있던 카오틱들은 그들을 비웃으면서 각각 스킬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스킬을 쓰려는 순간.
- 흐으읍!
"어?"
성벽 너머로 거인이 나타났다.
온몸을 피로 칠갑한 거인, 데이비드. 혈전사의 힘을 최대로 발휘한 그가 검을 내질렀다.
핏빛 칼날이 성벽 위를 베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내, 내 팔! 내 팔이!"
성벽 위의 카오틱들이 순간 무력화됐다.
데이비드는 온 힘을 검에 담아 성벽을 내리쳤다.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한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에 휘말린 카오틱들이 추락했다.
- 이쪽으로!
"성벽을 돌파합니다!"
모든 힘을 쓴 데이비드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 카오틱들은 성벽이 무너진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
플레이어들은 무너진 성벽을 지나갔다.
"안 돼! 크으윽!"
"저 새끼들, 또 공격을...!"
"규모가 심상치 않다! 방어해라!"
서쪽을 지원하려던 카오틱들에게 마법이 쏟아졌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이수경과 플레이어들이 쓴 스크롤에서 발현된 마법이었다.
아껴 뒀던 스크롤들을 모두 사용했기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규모였다.
"신호탄! 이제 빠집니다!"
"예!"
누군가가 신호탄을 터트렸다.
기습이 성공했으니 탈출해야 한다는 신호. 도시 내부의 플레이어들이 신호탄을 봤다.
"신호탄입니다!"
"할 일은 끝났다!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상업 구역과 중앙 구역 그리고 성벽 근처에서 뭔가를 준비하던 이들도 모두 물러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떠난 건 화련이었다.
"더 못 태워서 아쉽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가시죠."
"나도 알아."
화련은 왔던 전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전이 마법진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뒤늦게 카오틱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중앙 구역, 죄수들이 카오틱들과 싸울 때를 이용해서 탈출한 남자가 길거리에 섰다.
얼굴이 완전히 짓무른 남자였다.
"내 영혼을 바치겠다."
남자는 피로 새긴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저 너머, 진현우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반이 있는 곳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증오로 번들거렸다.
"나를 먹어라."
남자와 진현우의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그는 씨익 웃더니 칼날을 높이 들었고.
- 푸욱!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201화
마인, 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