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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루튼 코호트의 개인 별장.

그 주위로 여러 건물이 둘러싸여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담벼락과 여러 마법 보안 장치까지. 곳곳에서 상회의 경비들이 경계를 서거나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주 돈을 덕지덕지 쏟아부었구만. 역시 정면을 뚫고 들어가는 게 좋겠어. 자신은 있겠지, 베뎃?"

"물론이죠, 로윈 단장. 제가 화염구로 아예 박살을 내 놓겠습니다."

"좋아. 입구를 부순 다음에 재빠르게 제압해서 끝내 버린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귀티 나는 놈 보이면 그 상회주라는 놈일지도 모르니까 실수로라도 죽이지 말라고. 모두 알겠나?"

"예, 단장."

로윈의 명령에 용병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때, 마법사 베뎃이 말했다.

"그나저나 백작이 따로 불렀다는 마법사는 아직 안 온 모양이네요."

"아, 그... 애셔라고 했었나? 시간 되면 알아서 오겠지. 뭐, 애초에 나설 기회조차 없겠지만."

이번 의뢰만 잘 끝내면 돈은 물론이고 백작의 눈에도 들 수 있을 터. 그 기회를 넘겨주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로윈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잿빛 머리에 청안. 그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용병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단장으로 보이는 로윈에게 다가갔다.

"로윈 용병단의 단장, 로윈이 맞습니까? 마법사 애셔라고 합니다."

"아, 어... 크흠. 딱 시간 맞춰 오셨군. 만나서 반갑소, 애셔. 로윈이라고 부르시오."

로윈이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심상찮은 느낌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파이를 같이 나눠 먹을 수는 없다. 전력은 자신들 쪽이 훨씬 위니까.

침을 삼킨 그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오자마자 이런 말 해서 뭐하긴 하나, 이미 계획은 준비되었소. 우리 쪽 마법사가 입구를 뚫고 신속하게 저 별장을 장악할 예정이지. 솔직히 말해 그쪽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

그 말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페일의 정보에 따르면 스윈들이란 자는 꽤 강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용병단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설마 모르는 건가?'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백작이 원하는 건 생포가 아닌 상대의 전력을 줄이는 것. 로윈 용병단은 베르덴처럼 정보상을 통해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베르덴이 별말을 하지 않자, 자신의 기세에 밀렸다고 생각한 로윈이 당당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방해가 되지 않게 후방에서 지원해 주시오. 자칫 계획이 틀어지면 우리 둘 다 손해니까. 이해해 주면 고맙겠군."

베르덴이 잠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 로윈이 바라는 대로 뒤에서 지켜보기로. 페일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로윈의 계획이 틀어지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하하하! 말이 통해서 좋군! 나중에 일 끝나고 술이나 한잔 살 테니 이번만 양보 좀 해 주시오!"

로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별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

우우우웅!

경계를 지나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베뎃이 나서서 화염구로 정문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소란을 듣고 경비들이 정문으로 몰렸다. 입고 있는 장비들을 보니 타국의 용병단이 분명했다.

그 수는 대략 30명 남짓.

로윈이 이끄는 용병단과 비슷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 전력 차이는 로윈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쩌어엉!

"크윽?!"

순간 시야가 흔들릴 정도의 묵직한 일격.

가까스로 막아 낸 로윈이 다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팔이 후들거리며 검 끝이 심하게 흔들렸다.

전투망치를 어깨에 멘 사내가 크게 비웃었다.

"크하하하하! 갑자기 습격이라길래 놀라서 나와 봤더니, 이건 뭐 개잡놈들이었군.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곱게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후우웅. 후웅.

사내가 전투망치를 휘두르며 서서히 다가왔다. 로윈은 검을 꽉 잡으며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확실히 자신의 용병단이 밀리고 있었다.

'거기다 베뎃까지...!'

3위계 하위 마법사이자 부단장인 베뎃. 그는 상대 마법사에게 밀려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니, 저건 그냥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건 베뎃을 몰아넣고 있는 마법사는 최소 3위계 중위 이상이라는 뜻.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고작 상회를 지키는 개들이 이렇게나 강한 거야?!'

부정해 봤지만 상황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이대로 가단 전멸이다.

그렇게 로윈이 뒷걸음질 치던 그때, 뒤에서 얼음 구체가 날아오더니 전투망치와 부딪쳤다.

"응? 이건 또 뭐야?"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얼굴의 로윈을 지나친 베르덴이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서로 간의 용병들 수준은 비슷하다. 문제는 저 망치하고 마법사.'

그러나 이들 중에 스윈들은 없다. 아마 상회주 곁을 지키고 있겠지.

그 전에 저 둘을 처리하면 보다 제압하기 쉬울 터. 이미 후방에서 전력 파악은 끝낸 지 오래다.

<암석강타>

베르덴의 마법.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를 본 사내가 씨익 웃더니, 정면에서 쪼개 버릴 생각으로 전투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꽈앙!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 단단했다. 그리고 무거웠다.

"이, 이런 씹...!"

뿌드득. 이 악물고 밀어냈지만 무리다.

이내 사내가 튕겨져 나가며 바닥을 굴렀고, 암석은 멀리 있던 건물을 무너뜨렸다. 흙투성이가 된 사내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개새끼가아아!"

전투망치를 든 용병이 육박했다.

후웅! 후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육중한 무게로 휘둘러진 망치는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물론 정통으로 맞았을 경우에 말이다.

<겨울 돌풍>

<스톤 볼트>

혹한의 바람이 용병을 얼렸고, 돌조각이 머리를 가격했다.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틈에 접근한 베르덴이 스태프로 얼굴을 후려쳤다. 얼굴에서 터진 피가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연이은 충격에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끄윽...! 이 좆만 한 마법사가 잔재주를...!"

그런 그의 눈앞에 스파크가 튀었다.

<전격>

파지지직!

사내의 몸이 푸른 전류에 집어삼켜졌다. 검게 그을린 그가 흰자를 드러내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위력을 조절했기에 죽지는 않았다.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위쪽에 마법사. 3위계.'

하늘에서 마력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베르덴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의 창. 똑같은 마법으로 대응했다. 최대한의 마력을 쏟아부은 데다가 마법서로 강화까지 된 마법과 평범한 마법 중 무엇이 이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어, 어?"

퍼억!

베르덴의 창이 마법을 박살 내고 마법사의 다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추락해 건물 지붕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부단장과 용병단의 수석 마법사가 당하는 걸 목격한 용병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야...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꼴깍꼴깍 침을 삼킬 뿐이다.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하나둘씩 퍼져 나갔다.

로윈 용병단 또한 베르덴의 눈치를 보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순간, 저택의 문이 열렸다.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이지?"

"단장님!"

* * *

용병단장 스윈들.

베르덴은 그가 아닌, 뒤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향했다.

'상회주 루튼 코호트가 분명하군.'

무기 한번 제대로 쥐어 보지 않은 듯한 매끈한 손, 그 손가락에 끼어 있는 상회의 인장 반지, 옷 밖으로도 보이는 뱃살, 고급 양복. 어느 모로 보나 루튼 코호트임이 틀림없었는데, 그는 베르덴을 보며 겁에 질린 듯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베르덴이 스윈들에게 고개를 향했다.

주위의 참상을 확인한 스윈들이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보아하니 다 알고 온 모양이군.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죽기 전에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죽는다는 게 날 보고 얘기한 건가?"

"그럼 당연하지. 내 부하들 몇 죽였다고 네가 이긴 줄 알았나? 새파랗게 어려서 그런지 자만심이 가득하군. 나 혼자서도 너희 전부를 죽일 수 있거늘."

스윈들이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내가 주제를 알려 주마."

스윈들은 상급 용병답게 노련했다.

대인전 경험이 많았기에 페인트를 섞은 움직임으로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했다. 레이피어로 급소를 노리는 정확도 또한 수준급이었다.

베르덴이 스태프로만 상대했다면 몇 분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마법사다.

그것도 동일 위계의 마법사를 단번에 쓰러뜨릴 정도로 독보적인.

서걱.

몇 번의 교전 끝에, 스윈들의 팔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억눌렀지만 역부족이었다. 대량 출혈로 인해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 고통 때문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기 힘겨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급 용병이었던 자신이 저렇게 어린 마법사에게 졌다고? 그것도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이건 말이 안 된다.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야 한다니. 스윈들이 간신히 신음을 참으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 살려...."

콰드드득.

땅이 솟아나더니 스윈들의 육체를 구속했다. 당장 죽이는 것보단 사로잡아 백작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다음은 상회주.'

"히, 히익!"

베르덴의 시선을 받은 루튼 코호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흘러넘친 뱃살이 출렁거렸다. 수년간 인신매매를 일삼은 악질적인 범죄자치고는 허무한 끝맺음이었다.

* * *

대기하고 있던 백작의 기사들이 왔을 땐,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베르덴은 아무렇지 않게 루튼 코호트와 스윈들 등을 인도했고 로윈과 그 용병단은 말없이 손을 거들었다.

그 결과 깎이긴커녕 생포에 대한 추가 보수까지 받았다. 페일이 말하길, 백작이 불만이 좀 많아 보였지만 나름대로 일 처리에 만족한 모양이라고.

'돈이 꽤 많이 쌓였어.'

계좌가 두둑해졌다. 한동안 돈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며칠이 지나, 다시 대장간에 들렀다.

다행히 기한이 연장되는 일 없이 반지의 수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음에 또 오슈!"

대장장이의 배웅을 받고, 베르덴은 반지에 다시 감정을 사용했다.

여전히 효과는 읽을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흔적들의 간격이 줄어든 상태.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왔다.

단순히 마력만으론 해결할 수 없고 여러 재료가 필요하다. 그리 귀한 것들은 아니라 코헨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겠지.

"...음?"

베르덴은 거리를 지나던 도중,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근처로 가 보니 수십 명의 인파가 구석에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꽤 시끌벅적한 게 평소 삭막한 분위기의 코헨에서 느낄 수 없는 활기였다.

가까이 가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다.

"친구와 크게 다투셨군요.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서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발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걸 어떻게.... 아, 아니 그 말대로 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예언가 님!"

"불행을 사서 만들고 계시네요, 과거에도 똑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좀 더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평생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알... 겠습니다, 예언가 님."

돗자리를 펴고 카드를 뽑아 점을 봐 주는 노인과 옆에서 구경하는 어린 소녀.

얼마 전에 여관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38화 운명 (1)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예언가라니.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특이한 조합이군.'

베르덴은 가만히 노인의 행동을 관찰했다.

소정의 복채를 받고는 카드를 잘 섞어 위에서부터 한 장씩 내려놓으며 눈앞에 있는 사람의 운명을 예견하고 나름의 조언을 내린다.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사람 본인이 결정하고.

그렇게 결국 본인의 운명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미신이지.'

베르덴은 운명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일은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니. 그것은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마탑에서 살아남아 끝내 역천을 이룬 그 과정들. 그 노력은, 그 절박함은. 결코 운명이었다는 말로는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흥미를 잃은 베르덴이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던 그때,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혹시 할머니께 점 보러 오셨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 봐요! 저희 할머니 진짜 잘 맞혀요! 할머니!"

"아, 그때 그 마법사님이시군요. 덕분에 아이샤가 아이스크림을 잘 먹었답니다. 그 답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점을 좀 봐 드리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모였다.

차례 기다린다고 빨리 하라는 눈초리였다. 아이샤도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이고.

베르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한 장씩, 총 세 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첫 번째는 사신(역).

두 번째는 신(역).

세 번째는 인간(역).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노인이 베르덴에게 말했다.

"지금처럼만 살면 된다는군요. 아주 좋은 점괘입니다."

"...그렇군요."

어차피 믿을 생각은 없지만.

베르덴은 대충 감사하다고 전한 뒤, 제 갈 길을 갔다.

노인의 점은 계속 이어져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이샤가 자리를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노인에게 물었다.

"아, 할머니. 그 잘생긴 마법사님 점괘 말인데요. 정말로 그 뜻이 맞아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라서요."

"그럼 당연하지. 할머니 솜씨가 어떤지는 아이샤가 잘 알고 있잖니?"

"네, 알고 있어요!"

아이샤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노인은 그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손길이면서도 미안함이 담겨 있는 따스함이었다.

'미안하다, 아이샤.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노인은 마법사의 점괘를 떠올렸다.

사신은 죽음을, 신은 탄생을, 인간은 생명을 뜻한다.

거꾸로 된 죽음.

거꾸로 된 탄생.

거꾸로 된 생명.

즉, 그것은 혼돈이다.

거기에 엿볼 수 있는 미래 같은 게 존재할 리 없다. 본인의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그 앞은 무엇도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질 수 있고.

모든 것을 손에 넣어 군림할 수 있다.

'신이시여,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노인은 잿빛 마법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신에게 기도했다.

부디 그가 가진 가능성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며.

* * *

재료를 구해 여관으로 돌아온 베르덴은 반지를 수리하는 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마법 물품 감정은 많이 해 봤지만, 제작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전부였다.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복원을 실패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 정도만 알자며 붙잡고 매달렸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수리에 진전은 전혀 없었다.

'며칠 더 해 보고 안 되면 전문가를 찾는 게 좋겠어.'

머리도 식힐 겸 창가로 가서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보니 어두운 하늘에는 작은 별빛이 반짝거렸고, 구름 사이에서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꽤 좋은 풍경이군.'

충분히 밤공기를 즐기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려던 순간.

'빛...?'

반지에서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들어서 확인해 보니 가운데 있는 문양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작용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로 한 발짝 다가서자 빛이 한층 더 밝게 발광했다.

"달빛인가?"

곧바로 초승달에 반지를 비추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에서 달빛과 같은 은은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신기한 현상이긴 했으나 그 이후로 변화는 없었다.

'껴 볼까?'

본디 반지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니.

조심스레 검지에 착용하자 보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커져 가는 달빛이, 이내 환하게 터져 나오며 방 안을 조사했다.

"...지도?"

베르덴 앞에 나타난 건 빛으로 만들어진 지도였다.

그것도 얼마 전에 본 듯한 기억이 있는, 눈에 익은 지형의.

'공국의 지도로 보이는데.'

영지나 도시는 없었지만, 산맥과 물길 등 각 지형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표기되어 있다. 주변 환경만 알 수 있다면 자신이 대충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이런 걸 반지 안에 새긴 거지?

이 정도의 세공술이 가미된 장신구는 마탑의 보물고를 뒤져 봐도 한 손 안에 들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도 우측 최하단.

산맥 사이에 보이는 작은 불빛이 점멸했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지도 전체를 둘러봤지만 이런 불빛은 오직 한 곳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베르덴은 말없이 지도를 바라봤다.

혹여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 몰라 반지를 흔들어 보거나, 문질러 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동이 트기 시작했다.

초승달은 구름 뒤에 모습을 감췄다. 달빛이 사라지자 반지의 빛이 서서히 꺼져 갔고, 지도는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베르덴의 기억 속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불빛이 뭘 의미하는지, 그곳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호기심이 강한 족속이며, 미지란 호기심으로 가득 찬 것이니. 설령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법사인 이상 갈 수밖에 없다.

리비안트 공국, 바르드산맥.

베르덴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 * *

천장이 뻥 뚫린 동굴 속.

노인, 하르칸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 별은 무엇이냐.'

하르칸은 별자리를 보고 생명이 가진 운명의 조각을 예견해 왔다.

그가 읽은 미래 중 틀린 것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운명에 굴복해 왔다. 무슨 짓을 하든 피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정체불명의 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빛나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 별은 다른 별에게까지 영향을 줘 수많은 운명을 비틀었다.

진즉에 떨어졌어야 별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사라지지 않았어야 할 운명이 사라졌다.

처음 보는 현상에 하르칸은 두려움을 품었다.

하늘을 거역하는 역천의 별이라니.

"이래서는...."

쿨럭, 쿨럭! 검붉은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하르칸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운명의 끝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일궈 온 모든 것을 넘겨줄 사람을 찾는 것.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운명에 단 한 번의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정해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르칸은 그 변화가 자신의 염원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부디 저 별이 내 운명을 비틀지 말기를.'

노인은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

우리가 만든 것들이 무참하게 세상을 짓밟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에.

* * *

베르덴은 조용히 코헨을 떠났다.

반지가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굳이 페일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정보상인 이상 베르덴의 정보를 판매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코헨에서 바르드산맥까지.

그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베르덴은 비행으로 갈 것을 포기하고 장거리 마차를 하나 고용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예산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리고 일부를 현금으로 뽑아 따로 품속에 챙겼다.

'산맥 아래엔 도시가 없다고 했으니, 당연히 은행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중간중간 말을 쉬게 하며 약 3주 만에 변방 도시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3일을 날아 바르드산맥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행이었다. 피로를 느끼며 마을 안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열악하지는 않군.'

동물 모피를 가득 실은 마차가 고용한 용병들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갔다.

산맥 바로 아래라 사냥꾼이 많은 건가? 귀족 중엔 모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사업을 잘만 벌이면 마을 하나 번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지.

'적당히 입맛에 맞는 음식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이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거닐었다.

먼저 식사를 한 뒤, 산맥 지리를 잘 아는 사냥꾼을 고용할 생각이다. 반지가 가리킨 장소는 이 산맥일 뿐, 어디라고 콕 집지는 않았으니까.

혼자서 무턱대고 산맥 전체를 뒤졌다간 몇 개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걸어왔다.

스쳐 지나가며 서로가 눈을 마주했는데, 이렇다 할 마찰 없이 서로 갈 길을 갔다.

'...수상한데?'

어느 모로 보나 이 마을과 맞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잠깐 마주친 시선은 미약한 한기를 띠고 있기도 했고, 순간 불쾌감이 들 정도로 끈적한 눈빛이 베르덴에게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덴은 곧 흥미를 끊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반지가 가리킨 장소에 몰두해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데 시간을 쓸 때가 아니었다.

베르덴은 자리에 앉아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 * *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여자, 페리스가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 앞니로 입술을 짓씹으며, 부끄러운 듯 자신의 볼을 부여잡은 페리스는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여인과도 같았다.

"야, 야. 아까 그 남자 봤어? 엄청 잘생겼던데?"

"잘생기긴 무슨. 좀 반반한 거지."

"저게 좀 반반한 거면 첸, 넌 그냥 쓰레기야. 아, 그나저나 어떡하지? 내 컬렉션에 무조건 넣고 싶은데. 카르딘, 나 잠깐만 갔다 오면 안 될까? 금방 갔다 올게, 응?"

페리스가 깍지를 끼고 아양을 떨었다.

그녀는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릴 만큼 귀여운 외모였지만, 카르딘은 꿈쩍도 안 했다.

"시끄럽다, 페리스. 일을 끝내기 전에 개인행동은 불허한다."

"그럼 일을 끝내면? 그 하르칸이라는 배신자만 죽이면 가도 돼?"

"그땐 상관없겠지. 이런 곳에서 사람 하나 없어졌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때, 옆 골목에서 술에 취한 사내와 마주쳤다.

얘기를 들은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들으라고 하는 거였으니.

사람을 죽일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첸."

촤아악!

염력으로 날린 단검에 사내의 목이 뎅강 떨어졌다. 그리고 페리스가 손을 튕기자 화염에 휩싸여 시체가 타올랐다.

잠깐 사이에 사람이 있던 흔적은 사라지고, 골목에는 검은 재만이 남았다.

카르딘이 바람을 일으켜 재를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살인의 쾌락에 셋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로브가 펄럭이며 가려져 있던 손목이 드러났다.

역삼각형과 그 안에 담긴 섬뜩한 시선.

죽음의 마법사 집단, '블랙 아워'의 그림자가 바르드산맥에 드리웠다.

39화 운명 (2)

마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특히 여러 사람과 자주 맞닥뜨리는 식당이나 여관의 종업원이 그렇다.

식사를 마친 베르덴이 한가히 시간을 때우고 있는 직원을 불렀다.

"네, 손님. 더 주문할 거 있으세요?"

"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 누굽니까?"

베르덴이 10만 엘크짜리 지폐 한 장을 식탁 위에 올렸다.

무려 직원의 반달 치 월급에 준하는 거금. 팁이라고 치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었지만, 이미 직원의 눈은 돌아간 지 오래였다.

고용주에게 들킬세라 냉큼 돈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쪽 외곽에 브랜 아저씨라고 계시는데, 뛰어난 사냥꾼이기도 하지만 술꾼으로도 유명해요. 특히 도수가 높은 걸 좋아하세요."

술꾼이라.

돈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도 있으니, 기호 식품으로 호의를 사는 편이 좋겠지. 쓸 만한 정보였다.

베르덴이 다시 한번 같은 지폐를 꺼내 직원 앞에 보였다.

"가장 좋은 술을 파는 곳이 어디죠?"

* * *

과일 향이 첨가된 보드카.

마을에서 파는 것치곤 꽤나 비싸긴 했지만, 이런 데 돈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돈이란 쓰라고 있는 거니까. 그게 반드시 써야 할 때라면 더더욱.

돈은 결국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순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베르덴이기에 그에게 구두쇠 같은 면은 없었다. 그렇다고 물 쓰듯 낭비하는 성격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이건 투자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넉넉히 보드카 두 병을 사 외곽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과 떨어져 있는 낡은 집. 주위에 동물 가죽을 말리고 있는 걸 보아 사냥꾼의 집이 확실했다.

다가가 문을 두들겼다.

"...누구요?"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의뢰?"

문이 열리자 미약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짐승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불쑥 얼굴을 내민 브랜이 베르덴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봤다.

"처음 보는데...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요?"

"바르드산맥을 안내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마을에서 제일 뛰어난 사냥꾼이라더군요."

"뭐, 그렇긴 합디다. 이래 봬도 한때 모험가 출신이었으니, 야생동물 잡는 건 쉬운 일이지. 그런데 산맥을 안내해 달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찾을 게 있습니다."

물론 찾는 게 무엇인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야 베르덴도 모르니까.

브랜이 턱을 쓸며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그런데 보수는 뭘로 줄 거요?"

베르덴이 봉투를 열어 보드카를 보여 줬다.

눈을 동그랗게 뜬 브랜이 값비싼 술에 시선을 멈추곤, 침을 꼴깍 삼켰다.

"선금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수도 따로 챙겨 드리죠."

이게 선금? 그리고 보수도 더 챙겨 준다고?

보드카를 받은 브랜이 문을 쾅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가죽옷부터 시작해, 활과 화살까지 완전무장을 한 브랜이 밖으로 나왔다.

"당장 가시죠, 손님."

말투까지 바뀌었다.

역시 돈은 협상에 있어 최고의 수단이었다.

* * *

반지가 가리킨 장소가 대체 어디 있을까.

간단한 곳에 숨겨져 있지는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산을 이 잡듯이 돌아다니는 사냥꾼들이 진즉에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브랜의 말로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사냥꾼 짓을 하고 있는데, 딱히 뭔가 특별한 것이 발견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럼 먼저 동굴과 절벽부터 확인한다.'

아무리 사냥꾼이라고 해도 절벽을 오르진 않으니까. 동굴 안에 어떠한 장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자신이 손수 제작한 지도를 가지고 온 브랜이 특정되는 장소를 몇 짚었다. 의욕이 넘치는 사냥꾼을 앞세우고 베르덴이 뒤따랐다.

모험가 출신이란 게 진짜인지, 가파른 곳을 올라도 그리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브랜이 살짝 뒤를 돌아봤다.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고 있음에도 베르덴은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마법사였다니. 비행을 쓸 정도면 최소 3위계 이상인가?'

스태프를 떡하니 매고 있는데, 신비스러운 외모와 보드카 때문에 정신이 팔려 못 알아봤다.

나이도 젊고, 외모도 좋고 재능까지 타고나다니. 딱히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근처에서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옆으로 화살을 겨누었는데, 어느새 날아간 바람의 칼날이 멧돼지의 목을 잘랐다. 눈을 깜빡이는 브랜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주변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길 안내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앗, 넵."

브랜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고블린과 짐승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곧 사라졌다. 전 동 등급 모험가인 브랜의 태도는 갈수록 더 정중해졌다.

* * *

베르덴과 브랜의 동행은 며칠간 이어졌다.

아침에 출발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강행군. 바르드산맥에 있는, 이렇다 할 동굴과 절벽은 대부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브랜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틈틈이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며 조는 게,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며칠 쉬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사냥꾼을 고용하든가.'

마력감지를 넓게 펼쳐도 잡히는 게 없으니, 원.

반지를 끼고 움직여 봐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찾을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여기 잠시 계시죠."

브랜에게 말을 남긴 베르덴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그가 산맥을 굽어봤다.

유심히 살펴봤지만 역시나 전부 나무들뿐이었다.

'...확 뒤엎어 버리면 반응이 오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 정도로 미친 마법사가 아니었다.

고개를 저은 베르덴이 한숨을 내쉬었는데....

'잠깐.'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숲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고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이. 그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지만 배치 간격이 눈에 익숙했다.

허공에 대고 마력의 실로 나무들의 위치를 어림잡아 하나씩 이어 봤다.

"...은폐 마법진."

그것도 자연과 완전히 일체화되는 고등급의 것이었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틀렸다.

여기 산맥과 산맥 사이에 있는 숲 전체가 반지가 가리키는 장소였다.

'이렇게 거대한 마법진이라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보헤미른 마탑주라고 해도 혼자서 작업한다면 최소 2주 이상은 걸릴 법한 규모였다.

지상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브랜에게 말했다.

"찾았습니다."

"...예?"

"여기 추가 보수입니다. 전 볼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시죠."

50만 엘크라는 돈을 받은 브랜.

뭔가 개운치 않았지만 고용주가 찾았다고 했으니 이 지옥 같은 길 안내는 끝이라는 소리다. 당장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며 잠이나 잘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작별 인사를 건넨 브랜이 쏜살같이 사라지고, 베르덴은 마법진의 중심으로 향했다.

짙은 녹색 나뭇잎을 지닌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가 요추인가."

확신한 베르덴이 가볍게 손을 풀고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아무리 마법진에 대해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베르덴조차 긴장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도중에 잘못되면 이 숲 전체를 갈아엎지 않는 이상, 영영 마법진을 파훼할 수 없다.

'예상 시간은 1시간.'

마법진을 파고드는 한 줄기 마력.

베르덴이 작업을 시작했다.

* * *

잠에서 깬 하르칸이 낡은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갈수록 몸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겨 기절하듯 잠들고, 눈을 뜨면 격통이 먼저 반겨 온다.

비척거리며 책상 앞으로 향했다. 직접 제조한 포션을 잡아, 단번에 들이켜고 나서야 고통이 잦아들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을 복용했음에도 손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견뎌라, 하르칸.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방을 나섰다. 천장이 없는 넓은 공간. 언제나 그랬듯 소파에 몸을 누이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가 수십 년간 반복해 왔던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 달랐다.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잿빛 머리와 청명한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입구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어떻게 침입자가! 왜 마법진이 반응하지 않았지?!

하르칸이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회로가 망가져 본래의 실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방심한 상대를 같이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정도는 되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하르칸이 소리쳤다.

"네놈...! 블랙 아워에서 왔느냐?!"

'블랙 아워? 그 범죄자 집단이 갑자기 왜 나오지?'

고개를 갸웃거린 베르덴이 손에 낀 반지를 보여 줬다.

"이 반지를 따라 왔습니다."

"반지...?"

설마.

하르칸의 시선이 베르덴의 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도 눈에 익은 반지가 껴져 있었다. 옛날, 자신이 잃어버린 한 쌍의 반지 중 하나인 '크레센트'.

이걸 들고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의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드디어...!"

울컥! 긴장이 풀리자 하르칸이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베르덴이 드물게 당황했다.

* * *

잠깐 의식을 잃었던 하르칸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지 10초도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운명이 찾아왔는데 골골댈 시간 따위 없다. 그가 소파를 짚고 힘겹게 올라왔다.

"...부축해 주면 안 되겠나?"

"설명부터 해 주면 부축해 드리죠."

다짜고짜 자신을 보고 마력을 끌어올린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다 거대한 은폐 마법진에 숨은 노인이라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설령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도.

베르덴의 단호한 대답에 하르칸이 피식 웃었다.

"조심스럽군. 아주 마음에 들어."

겨우 소파에 몸을 뉜 하르칸이 의자를 가리켰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 반지, 자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전에... 하나 묻겠네. 어떻게 은폐 마법진을 통과했지? 동굴 입구에도 여러 마법진이 있었는데 말이야."

"전부 파훼했습니다."

담담히 말했지만 베르덴도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1시간이나 걸려 은폐 마법진에 작은 구멍을 내 통과했더니, 입구에는 살상력이 높은 마법진이 산재해 있었다.

장장 4시간. 덕분에 빌어먹을 마법진 파훼가 전보다 더 능숙해졌다.

"그걸 전부 없애 버렸다고...?"

그 정도의 마법진에 대한 지식을 저 나이에 쌓았단 말인가?

아, 하르칸은 확신했다. 역시 저 재능 넘치는 사내, 마법사가 그 운명이라는 것을. 하르칸은 마음속 깊이 하늘에 감사했다.

"대답했으니 저도 묻겠습니다. 이 반지는 대체 뭡니까?"

"운명이지. 서로 일면식조차 없는 자네와 나를 연결해 준 운명."

작게 웃은 하르칸이 고개를 들어 베르덴과 마주했다.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지 않겠나?"

40화 운명 (3)

마도에 이른 5위계 마법사이자 연금술, 마법진 등 다양한 마법 분야와 점성술에 뛰어난 지식을 겸비하고 있는 현인(賢人) 하르칸 다제스트.

수십 년 전, 그는 주변 마법사들의 우상이었고, 동료들에겐 굳건한 버팀목이었다. 거기다 인성도 좋아 사람들을 돕는 걸 좋아했었기에, 시민들도 하르칸을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인해 한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마법에 깃든 신비를 탐구하고 미지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지극히 마법사스러운 집단. 하르칸을 포함한 최초 구성원들은 이를 '블랙 아워'라고 명명했다.

"순수한 동기였지. 우린 그저 마법을 보다 깊게 연구하고 싶어 모인 마법사들이었으니. 그런데 하나둘씩 가입하는 마법사가 점차 늘더니, 걷잡을 수가 없더군."

8명이었던 작은 모임은 몇 년 뒤, 수많은 국가와 권력 집단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하르칸의 친구이자 블랙 아워의 수장인, 6위계 마법사가 이끄는 수백 명의 마법사 집단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작은 국가와 전면전을 펼치더라도 능히 압도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수장은 결코 블랙 아워를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하는 일이 많아졌을 뿐, 본래의 목적을 잃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가 한 제자, 다히트 웨스로엘을 받기 전까지는.

"다히트... 놈은 영리했네. 철저하게 발톱을 숨기고 순진한 마법사를 연기했지. 우리는 품에 들인 게 뱀 새끼인 줄도 모르고 정성을 다해 길렀네."

다히트의 성장 한계는 무려 7위계. 수장과 하르칸을 비롯한 마도사들은 그에게 자신들이 쌓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렇게 최초의 구성원들이 중년을 넘어 노년에 다다랐을 때, 다히트는 무려 6위계에 도달했고 차기 수장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놈은 애초부터 블랙 아워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지. 지금의 블랙 아워가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블랙 아워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네."

현 수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한 전날.

다히트는 암암리에 모은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퇴임식에 참석하러 온 여러 마법사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뒤늦게 알아챈 최초의 구성원들이 진압에 나섰으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다히트는 이미 7위계에 도달한 초월자였으며, 그에게 동조한 이는 최초의 구성원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참혹했네. 블랙 아워의 수장은 결국 다히트에게 당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고, 나는 놈에게 마력회로가 난자당했으며, 다른 동료들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지."

그러나 수장이 비밀리에 만든 탈출구 덕분에 끊겨 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르칸을 비롯한, 살아남은 최초의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블랙 아워의 추적을 피했다.

무려 수십 년을 지나 지금까지.

"그 후 블랙 아워를 완전히 장악한 다히트는 지금의 블랙 아워를 만들었네.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온갖 사악한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소굴로 만들었지. 그저 마법을 연구하던 모임이 세상에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뒤바뀐 걸세."

"운명을 예견해 피할 수는 없었습니까?"

"내가 볼 수 있는 건 운명의 극히 일부분일세,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그래서 나는 기다리기로 했네. 내가 가진 운명의 마지막 변화... 바로 자네를 말이지."

쿨럭, 쿨럭!

하르칸이 급히 입을 막았지만 출혈이 너무 극심했다. 손아귀 사이에서 흘러넘친 핏물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없다. 변화가 찾아왔으니 곧 죽을 터. 아마 오늘조차 넘기기 힘들 것이다.

하르칸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 반지는 오래전에 내가 잃어버린 물건일세. 한 쌍으로 이뤄진 반지였지. 이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제 기능을 낼 수는 없지만... 그게 자네의 손에 들어가 이렇게 우리가 만났으니,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부탁하겠네. 다히트와 그에게 동조한 최초의 구성원들을 막아 주게...! 우리가 만든 블랙 아워로 세상을 짓밟지 않도록...!"

수많은 감정이 감긴 절절한 목소리.

베르덴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가는 뭡니까?"

그러자 하르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냉철하군. 내 유언을 남기기에 더할 나위 없어. 그래, 당연히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네. 그들을 막아 준다고 약속만 해 준다면, 그 한마디만 해 준다면... 내가 일궈 온 모든 것을 넘겨주도록 하겠네."

마법사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을.

* * *

'복수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라....'

잘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이다.

베르덴이 바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였으니까.

베르덴이 무심히 하르칸을 주시했다.

동정심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정을 느낄 정도로 감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르칸의 제안에는 관심이 있었다.

마도에 이른 마법사가 저리도 자신 있게 말하는 대가가 대체 무엇일까.

수상하다고 그냥 무시해 버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일단 뭔지 확인이라도 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르칸이 당황한 것으로 봐 그가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베르덴이 곧장 마력감지를 펼쳤다.

'마법?'

상당한 위력의 마법들이 숲을 헤집고 있다.

일대가 불에 타고 무너지며 은폐 마법진에마저 영향을 줄 정도. 이윽고 숲의 태반이 박살 나며 마법진이 기동을 중지했다.

"여기 누구 올 사람 있습니까?"

"전혀. 살아남은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이런 식으로 올 이유도 없고. 그렇다는 건...."

블랙 아워.

그때, 베르덴의 뇌리에 마을에서 스치듯 마주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이 떠올랐다.

직감에 불과했지만 확신에 가깝기도 했다.

'하필이면 지금인가.'

수십 년간 도망쳤던 하르칸을 왜 이제 와서 블랙 아워가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닥뜨리게 된다면 분명 하르칸뿐만 아니라 베르덴조차 죽이려 들겠지.

"...싸울 생각인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를 든 그가 마력을 끌어올려,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동굴 입구에서 들리는 발소리.

곧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블랙 아워가 말없이 베르덴과 하르칸을 주시했다.

카르딘이 양피지를 꺼내 하르칸의 얼굴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늙긴 했지만 본인이 맞는 것 같군. 한 명이 더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지만."

"어머? 저 사람, 마을에서 본 잘생긴 남자 아니야? 꺄아! 어떡해, 이거 진짜 인연 아니야? 아니, 운명인가?"

"시끄럽다, 페리스. 사심을 채우는 건 모든 일을 끝낸 후부터다."

페리스를 쏘아붙인 카르딘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피부와 정돈된 몸가짐. 그러나 결코 숨길 수 없는 추악한 악의가 시선에서 느껴졌다.

"확인하지. 블랙 아워의 배신자, 하르칸 다제스트가 맞나?"

"배신자? 다히트가 그렇게 말하더냐?"

"존칭을 붙여라."

카르딘의 마력이 주위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일반인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할 압력이었으나 다 죽어 가는 하르칸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저놈은 왜 멀쩡하지?'

무표정하게 서 있는 베르덴. 마법사로 보이나, 나이는 카르딘보다 10살은 더 어려 보였다.

설마 4위계의 마력 위압에 저리 쉽게 저항했을 리는 없을 테고, 특수한 마법 물품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의문도 잠시, 하르칸이 말했다.

"존칭은 무슨. 그놈을 키운 사람 중 하나가 나다. 그게 평생의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여긴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너희 같은 놈들 따위가 눈치챌 정도로, 허술하게 만든 마법진이 아닌데."

"다히트 님 앞에는, 뭐든 한낱 잡술일 뿐이지."

카르딘이 손짓하자, 첸이 주머니에서 작은 나침반을 건넸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작은 마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력추적. 블랙 아워에서 생산 중인 '인공 아티팩트'다. 여기에 마석을 넣으면 지침이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주인을 가리키지. 아직 미완성이라 거리에 따른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성능은 보다시피."

다히트가 하르칸의 마력회로를 망가뜨릴 때 채취했던 마력.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추적이 가능한 걸 보면 상당한 성능이다.

베르덴이 남몰래 눈을 빛냈다.

'갖고 싶군.'

그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수적으로 열세하기에 당장이라도 선제공격을 하는 게 유리했지만, 그러기엔 상대가 말하는 정보가 흥미롭고 중요해 보인다.

베르덴은 한 발짝 물러나 대화를 지켜봤다.

"하르칸 다제스트. 이렇듯 다히트 님은 언제고 너를 찾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지. 그분께선 패배자의 발버둥 따윈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존재이니."

"그런데 이제 와 나를 찾는 이유가 뭐지? 갑자기 잠자리가 무서워졌다고 하더냐?"

"...본론으로 들어가지."

카르딘이 나침반을 첸에게 돌려줬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마탑이 무너졌다."

"...뭐?"

"말 그대로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이 폭주해 탑 전체가 기동을 정지했지. 그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고농도의 마력에 노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0개의 마탑 중 하나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경악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주변 국가나 마탑까지 소식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각국의 고위층들이 세계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숨길 정도로.

아마 그 소식이 리비안트 공국까지 닿으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야 하겠지. 보헤미른 마탑이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카르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분노가 가득했다.

"어떤 개같은 새끼가, 그 모든 걸 블랙 아워에게 뒤집어씌웠다...!"

그 탓에 마탑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보헤미른 마탑주가 이끄는 척살대가 부순 지부만 해도 벌써 여섯 곳이 넘어간다.

난데없이 공격을 받은 블랙 아워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굴욕이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아무리 사악한 마법사가 많은 집단이라지만, 하지도 않은 일에 죽임을 당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히트 님은 이걸, 블랙 아워를 적대하는 자들이 꾸민 일이라고 확신하셨다. 그래서 정보를 모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추적했지. 그중 하나가 너다, 하르칸 다제스트."

사실 여기엔 하르칸과 같은 수준의 5위계 마법사가 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보헤미른 마탑주가 날뛰는 탓에 전력을 빼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히트 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르칸은 죽어 가고 있어, 손쉽게 처리할 수는 있겠지만.

"묻겠다, 배신자. 보헤미른 마탑의 붕괴와 너는 관계가 있나?"

"없다. 그럴 만한 힘이 있었으면 진즉에 네놈들에게 썼겠지."

카르딘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벌이기엔 하르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고, 마탑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란 듯 보이기도 했으니.

어차피 범인이든 아니든 죽일 생각이니 딱히 관계는 없지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저거 내 얘기 아닌가?'

41화 운명 (4)

'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그렇게 된 거지?'

마탑과 블랙 아워가 전쟁이라니.

베르덴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탑주가 어떤 단서를 잡았길래 그렇게 확신을 하고 블랙 아워를 직접 척살하는지.

아무리 보헤미른 마탑이라고 해도, 마탑이 붕괴된 상태에서 블랙 아워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텐데 말이다.

'잘된 건가?'

마탑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다면 좀 더 편히 움직일 수 있다. 성장할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주요 전력의 일부를 잃어 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베르덴은 보헤미른 마탑 자체를 적대하고 있었으니.

'...로벨린.'

문득 그녀가 떠올랐지만, 걱정은 잠깐이었다.

로벨린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단순히 뛰어난 게 아니라 '특별한' 마법사다. 적어도 화염 계열에 있어서는 지금의 베르덴조차 넘어설 정도다.

시선을 앞으로 향해 블랙 아워를 바라봤다.

저 창백한 남자는, 직전의 마력 위압으로 어림잡았을 때 4위계 정도. 나머지는 아직 판단이 불가능하지만 그에 준하거나 밑도는 수준일 것이다.

'화력이 밀린다.'

그렇다고 패배하지는 않겠지만, 이쪽에는 지킬 사람이 있다.

소모전을 벌이면 더 승산이 높겠지만, 하르칸을 데리고 빠져나가려면 단기 결전으로 끝내야만 한다.

이제 더 이상 들을 만한 정보는 없다. 거기다 놈들은 지금 방심하고 있는 상태. 베르덴이 천천히 손끝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때, 카르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지? 수집한 정보에는 전혀──"

<화염기류>

작열하는 기류가 블랙 아워를 덮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들이 눈을 부릅뜨며 방벽을 펼쳤다.

상당한 내구성이다. 하지만 베르덴의 마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이스 스피어>

트리플 캐스팅. 빙결의 창들이 각기 다른 표적을 가리켰고, 이내 놈들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스피어류는 관통력이 강한 터라, 4위계라 할지라도 마력 방벽으로 막아 내는 모험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예상대로 마력을 거두고 마법으로 대응했다.

카르딘은 바람으로, 페리스는 불꽃으로, 첸은 염동력을 둘러 마법의 궤도를 비틀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트리플 이상의 캐스팅은 블랙 아워에서도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까.

복잡한 연산과 마력 조작을 동시에 이루면서도 해당 속성에 대한 적합한 마력회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노력이 있더라도,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예다.

'하르칸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자신들이 숭배하는 다히트 님의 스승 중 하나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즉, 차후 블랙 아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살기를 띤 카르딘이 페리스와 첸에게 명령했다.

"우선순위를 바꾼다. 저 잿빛머리부터 처리해라. 죽이진 말고 사지만 잘라 내도록."

"뭐? 그렇게 되면 내 컬렉션이 엉망이 되잖아!"

"상관없잖나. 어차피 가루로 만드는 건 매한가지니."

"칫. 그 과정이 중요한 건데...."

페리스가 뽀로통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화염 장막>

4위계 마법. 그녀의 주위로 붉게 타오르는 막이 생겨났다.

고열에 닿은 바닥과 벽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히죽 웃은 페리스가 그대로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그와 맞서 푸른 뇌격이 그녀에게 쏘아졌다.

파지지지직!

화염과 전류가 서로 뒤엉켰다. 그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고위 속성 사용자였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능력도 있네? 그러니까 더 갖고 싶은걸!"

화염 장막과 뇌격이 동시에 사라지자마자, 페리스가 화염 채찍을 만들어 베르덴의 어깨를 노렸다. 그와 동시에 양옆에서 염력으로 움직이는 단검들과 무거운 풍압이 날아왔다.

'역시 정면으론 무린가.'

그렇다면 틈을 만든다.

<지형조작>

지면이 솟아올라 베르덴의 주위를 감쌌다.

세 방향에서 오는 마법과 부딪치자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생각보다 손쉬운 사냥이 되겠다는 사실에 페리스가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베르덴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미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상태. 가장 가까이 있는 페리스를 타깃으로 삼았다.

<어스 스피어>

"또 스피어야? 할 줄 아는 속성은 많은 것 같은데 레퍼토리가 뻔하네?"

페리스는 자신 있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화염 장막을 둘렀다. 고작 3위계 마법 따위는 열에 녹아 사라져 버릴 테니.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베르덴이 스스로 마법서를 개방하고 소유한 마법사라는 것이다.

촤아악!

바위의 창이 화염 장막을 찢어발겼고, 그대로 날아온 베르덴이 페리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녀를 방패로 삼자, 화들짝 놀란 카르딘과 첸이 급하게 마법을 멈췄다.

"에?"

후웅────콰앙!

바닥에 내리꽂힌 페리스가 숨을 토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잠깐 의식이 날아간 그녀의 머리에, 마력 집중을 더한 스태프가 단두대처럼 떨어졌다.

쩌엉!

단검에 부딪혀 궤도가 비틀렸다. 부서진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페리스가 튕겨 나가듯 도망쳤다. 따끔한 느낌에 얼굴을 만져 보니 고운 피부가 일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 감히...!"

이마에 핏대를 세운 그녀의 마력이 들끓었다. 열기에 공기가 일그러졌다.

<염열파동>

그녀를 중심으로 화염의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별하지 않았다.

베르덴이 하르칸을 막아서곤 파도를 시전해 열기를 막아 내자, 수증기가 터져 나오며 동굴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 틈을 타 베르덴이 동굴을 분단하는 벽을 만들어 냈다.

하르칸은 확실히 확보했으니 힘을 조절할 필요는 없다. 지형조작으로 벽 전체를 강하게 밀어 내었다.

"뭣...?!"

쿠구구구구! 진동과 함께 수증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움직이는 벽.

당황한 카르딘이 재빨리 벽에 구멍을 내었고, 페리스는 강렬한 화염을 둘러 몸을 지켰다. 유일한 3위계인 첸은 염동력을 두른 채, 휩쓸려 벽에 처박혔다.

압사당하지는 않았는지 첸이 잔해를 비집고 기어나왔다.

'지형조작...? 어떻게 비주류 마법 따위가 이런 위력을...!'

카르딘, 첸 그리고 페리스.

이들은 블랙 아워에 들어가기 전, 각국의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는 범죄자들이었다.

하나같이 천만 단위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는데.

특히 페리스는, 취향에 맞는 남자들을 잡아다 고문을 하며 산 채로 태워 버린 뒤에, 그 잿더미를 컬렉션으로 모으는 악취미가 있었다.

그런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멀쩡히 살아남을 정도로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우수했다. 그 외 두 명도 마찬가지.

그런데 수적으로도 앞서는 상황에, 한참이나 나이도 어린 마법사에게 밀리다니.

'4위계 마법을 쓰지 않는 걸로 보아 3위계임이 분명한데.'

이건 치욕이다.

당장 저 잿빛 머리를 제압하지 못하면 블랙 아워로서의 체면이 떨어진다. 설령 임무를 완수한다 한들 다히트 님을 볼 면목이 없다.

그렇게 양측 간의 전면전이 펼쳐졌다.

마법의 화력 자체는 카르딘 쪽이 앞섰지만, 베르덴이 가진 다양한 속성 마법과 방대한 마력 그리고 마법서의 힘은 무너지지 않는 성벽과도 같았다.

콰과광! 콰앙!

마법과 마법이 서로 부딪치며 백중세를 이뤘다.

그 여파에 동굴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일부가 무너져 하르칸 옆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졌다.

베르덴은 하르칸을 보호하며 상대의 마법에 대응했다.

그때부터 염동력으로 움직이는 단검이 교묘하게 하르칸을 노렸다. 변수가 늘어나 베르덴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던 순간.

하르칸이 말했다.

"잘 견뎌 줬네."

쿠궁!

동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발광하며 바닥을 무너뜨렸다.

베르덴이 하르칸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고개를 아래로 향하니 빛이 닿지 않는 무저갱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함정? 비행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었겠어.'

동굴 전체가 무너져 가고 있는 탓에 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빠져나가기 위해 하늘로 향하려 하자, 하르칸이 벽에 나 있는 작은 틈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야 하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하르칸의 안내에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작은 공간이 하나 나왔다.

온갖 마법과 관련된 물건이 산적해 있는 연구실이었다. 베르덴이 조심스레 하르칸을 바닥에 눕혔다.

* * *

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해 남은 마력을 쥐어짜 냈다.

얼마 남지 않았던 수명이 급격히 짧아지자, 하르칸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

하르칸이 힘겹게 팔을 들어 벽을 짚었다. 숨겨져 있는 버튼이 눌리자 벽이 작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놓여 있는 한 포션. 하르칸이 평생에 걸쳐 만든 두 개의 역작 중 하나였다.

"그건...."

"쿨럭, 쿨럭! 하... 자네도 느껴지나 보군. 저 포션 안에 담긴 생소하고도 기묘한 마력이. 이걸 만드느라 자그마치 15년이 걸렸지."

5,000일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희귀한 약초를 갈아낸 뒤, 달빛과 별빛으로 빚고 또 빚었다.

그 탓에 하르칸의 수명이 더욱 줄어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고한 빛을 담은 포션을 연단하는 건 누구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을 일이니.

그런 수명과 맞바꾼 노력을 통해 겨우 만들어 낸 이 포션은, 일종의 아티팩트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건... 마법사에게 '기존에 없는 속성'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열쇠네. 복용한다면 어떤 마법사도 이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렇기에 이 포션은 아무나 복용할 수 없다.

정말로 운명에 선택받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작용은 없네. 단언하지. 맞지 않는 운명은 그저 지나쳐 갈 뿐이니."

가능하면 보다 확신을 갖고 싶지만, 마지막이 눈앞에 다가왔다.

하르칸이 포션을 들어 베르덴에게 보였다.

"이제 시간이 없네. 동정심을 빌려 내 바람을 약속받진 않을 테니... 부디 받아 주게. 나는 그저 보고 싶네... 내 운명이 과연 어디까지 정해져 있는지."

찬란한 과거를 뒤로하고, 잔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마법사의 마지막.

베르덴이 하르칸이 건네준 포션을 건네받았다.

생소한 마력 이외엔 별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거기다 하르칸이 자신을 죽일 이유도 전혀 없었으니.

하지만 마시기 전에, 이 말만은 해야 했다.

"하르칸."

"...."

"세상에 정해진 운명 따윈 없습니다."

그것이 베르덴의 본질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르칸을 일별하고 단숨에 포션을 들이켰다. 청량한 무언가가 체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베르덴에게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새겨져 있던 역천의 마법진에서.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다.

하르칸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무너진 틈새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빛이...."

운명을 뜻하는 별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어느새 새카만 어둠만이 남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운명도 읽히지 않았다. 그제서야 하르칸은 베르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역천의 별!'

운명이, 뒤틀렸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선택 탓에 모든 생명의 운명이 사라졌다는 것이 확실했다.

즉, 세상의 멸망.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하르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후회와 허망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그때, 어둠의 중심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작고 미약하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정해지지 않는 유일한 운명.

인류는 그것을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설마....'

하르칸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포션의 힘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전보다 더욱 강력한 마력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작게 숨을 내쉰 베르덴의 올곧은 시선이 하르칸에게 향했다.

"성공한 겁니까?"

성공이다. 성공이고말고.

'정해진 운명 따윈 없다라....'

하르칸이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운명에 휘둘리고 순응해 왔는데, 눈앞에 있는 젊은 마법사는 이미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운명을 뒤엎어 버렸다.

애초에 운명을 읽는다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듯이.

'이 사내를 더 일찍 만났다면 내 인생도 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신한다.

이 잿빛 머리의 마법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에 충분하고 넘친다는 것을.

하르칸이 베르덴의 손을 잡았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네. 결코 해가 될 일은 없을 테니 온전히 받아들이게."

새로운 속성을 깨우쳤으니, 그에 맞는 마법을 배워야 하는 법.

미완성에 불과하나 수십 년간의 노력이 담겨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마법을 완성해 나가겠지. 하르칸은 베르덴을 믿었다.

그리고 마력을 전개했다.

<기억전이>

마도에 이른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유물.

기억의 일부를 타인에게 통째로 줄 수 있지만, 그 대신 시전자의 뇌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준다.

먼 옛날, 한 마도사가 자신의 제자에게 마법을 물려주고자 만든 마법이었다.

베르덴은 순순히 기억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새로 얻은 속성과 그 지식 그리고 마법까지.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회색의 마력이 잔상을 남겼다.

'벌써 첫 번째 마법을 깨우친 건가.'

터무니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역천의 별이라는 거겠지.

"커억...!"

힘이 다한 하르칸이 바닥에 쓰러졌다. 베르덴이 서둘러 상태를 살피려 했지만, 하르칸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군."

"베르덴... 이라고 합니다."

애셔가 아닌 본명.

베르덴, 좋은 이름이다.

하르칸은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시곤, 밤하늘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겨야 할까. 아니, 남길 필요는 없겠지.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베르덴은 스스로 나아갈 테니까.

"시체는 태워 주게."

천천히 하르칸의 눈이 감겼다.

이내 마지막 숨을 내뱉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베르덴은 잠시 그 옆을 지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하며 자신의 상태를 관조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해 블랙 아워를 막아 달라고 했던가.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 주지."

화르륵! 하르칸의 몸이 불에 휩싸였다. 그가 남겼던 반지도 같이.

곧이어 하르칸이 남긴 것들에 화염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게 베르덴의 머리에 담겨 있었기에 아깝지는 않았다.

이제 밖으로 나갈 차례다.

새롭게 얻은 힘을 시험하기에 쓸 만한 쥐새끼들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스태프를 바닥에 짚었다.

4위계 속성 마법.

<어스퀘이크>

42화 운명 (5)

"찾았나?"

"아니, 전혀 안 보이는데."

페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갔는지.

그녀는 비상용으로 챙겨 둔 포션을 상처에 바르면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마력감지는 해 봤어?"

"반응이 없더군."

대규모 마력 감지는 소모가 극심해 이 주변 일대에만 마력을 퍼뜨렸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면 경우의수는 총 세 가지다. 상대가 범위 바깥에 있거나 또는 죽었거나, 아니면 모종의 방법으로 감지를 피했거나.

'나침반의 반응도 사라졌다.'

하르칸이 죽었나? 그렇다 해도 시체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뭐가 됐든 귀찮아진 상황에 카르딘이 혀를 찼다.

"혹시 바위에 깔려 죽은 게 아닐까?"

"네가 말하고도 이상하지 않나? 그 기이할 정도로 많은 마력과 다중 속성. 놈은 3위계 이하의 마법만으로 우리 세 명을 상대로 버텨 냈다. 고작 떨어지는 바위 하나 못 피하고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돼. 생각 좀 해라."

"아, 그럼 어쩌라고! 마력으로 감지도 안 되는데 밤새 땅이라도 파자는 거야, 뭐야? 내 피부 상한 것 안 보여?"

"지금 피부가 문젠가?"

"그럼 뭐가 문젠데? 아, 네 얼굴 태워 버리는 게 문젠가?"

페리스가 화염을 일으키며 카르딘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이들은 블랙 아워라는 울타리에 묶여 있긴 했지만, 언제든 서로를 죽여도 무방할 만큼 인격이 뒤틀린 자들이었다. 혹여 불똥이 튈라, 첸은 멀리서 바라만 봤다.

'미친년.'

한숨을 쉰 카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페리스를 손봐 주는 건 나중에 해도 될 일. 지금 당장은 임무가 급선무였다.

"하르칸의 시체부터 찾는다."

그러던 그때 나뭇가지들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동굴이 다 무너진 게 아니었나? 그런데 지진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서히 진동이 커져 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잠깐, 이 감각은....'

익숙한 느낌.

눈을 부릅뜬 카르딘이 첸과 페리스에게 소리쳤다.

"전부 비행을 써라!"

그렇게 날아오른 순간, 땅이 무너졌다.

산맥 사이에 있는 숲이 갈라져 뿌리를 드러냈고 이내 확 가라앉았다. 지면 아래로 지상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끌려 내려갔다.

지진에 휘말린 일대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직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지진? 이래선 시체 찾기는 글렀는데?"

"아니, 이건 마법이다."

4위계 마법 <어스퀘이크>.

지진을 일으키는 광범위 마법으로, 위력만 따지면 같은 위계 중 상위에 속한다. 마법의 한계치까지 마력을 쏟아부으면 최상위에도 준할 정도.

카르딘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기에 그 특징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발생한 마법이 얼마나 수준 높은 것인지.

'누군가 개입했다.'

하르칸도 아니고, 잿빛 머리는 더더욱 아니다. 둘에겐 4위계의 마법을 쓸 힘이 없었으니.

그렇게 제멋대로 확신하는 순간, 흙이 솟구치며 블랙 아워를 덮쳤다.

"꺄악! 뭐, 뭐야?!"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눈알을 바쁘게 굴려 가며 두리번거리던 중. 흙 속에서 스태프가 나타났다.

"첸!"

우지직!

어깨를 강타당한 첸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이내 흙먼지가 폭풍에 휘말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넌...!"

잿빛 머리의 마법사, 베르덴.

그의 두 눈에선 이전에 없던 강렬한 마력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하르칸이 평생을 바쳐 만든 포션은 달리 말해 '운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1위계 마법사든, 6위계 이상의 대마법사든 무관하게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으니. 말 그대로 선택받지 못한다면 실패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이었기에 성공, 그 이상의 기적을 일으켰다.

마탑의 동력원, 무한한 마력으로 재구성한 육체엔 한계란 없었다. 그것이 베르덴의 바람이었고, 역천의 목적이었으니까.

'마력회로가 확장됐다.'

바다와 같던 마력 또한 한층 더 깊어졌다.

그리고 하르칸이 만들어 낸 생소한 속성까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연 그 자체였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베르덴이 단계를 밟으며 이루었어야 할 성장이 몇 년이나 앞당겨지게 된 것이니.

그렇게 도달한 경지가 무려 4위계 중위.

그 사실에 하르칸에게 깊이 감사했다.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바람을 이뤄 줄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어차피 블랙 아워와 마찰은 생겼으니.'

이후에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다 보면 블랙 아워의 수장, 다히트와 배신자인 최초의 구성원들 또한 만나게 되겠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복수가 아니더라도 강력한 존재는 그 위로 나아갈 훌륭한 발판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준비가 되면 베르덴 스스로 갈 생각이다. 뜻하지 않게 습격을 받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세 명은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경악한 표정으로 베르덴을 바라보고 있던 카르딘이 입을 열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왜...?"

베르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폭풍>

대기가 휘몰아친다.

뿌리 뽑힌 나무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구름이 뒤엉켜 하늘을 가렸다. 잔해에 휘말린 페리스가 나가떨어지고, 카르딘이 이 악물고 버티며 마법을 시전했다.

<폭풍>

그는 땅과 바람, 두 속성의 4위계까지 다다른 마법사.

베르덴의 폭풍과 역방향으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완전히 마법을 상쇄할 생각이었겠지만, 상황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런...!"

화아악! 카르딘의 폭풍이 버티지 못하고 집어삼켜졌다. 이내 폭풍이 그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막강한 압력에 순식간에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콰앙! 콰앙! 콰과과광! 뒤늦게 방벽을 펼쳐, 몇 번이고 바닥에 튕긴 카르딘이 깊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 화염 장막을 펼친 페리스가 베르덴을 향해 돌진했다. 첸이 조종하는 무기들과 함께.

'얼굴이 잘생겨서 봐줬더니, 감히 나를 땅에 처박아?'

용서 못 해.

피부를 녹여 모든 구멍을 막아 버린 뒤, 바닥을 기게 하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페리스가 핏발 선 눈으로 베르덴의 마력방벽과 격돌했다. 붉게 타오른 화염이 점점 마력을 잠식하며 방벽을 손상했다.

이것이 그녀의 전력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차라리 죽고 싶어질 정도로 태워 줄 테니까. 왜냐하면-"

"그게 다인가?"

태연한 베르덴의 물음에 페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별 볼 일 없군."

화악! 마력방벽이 사라지고, 베르덴의 주위에 페리스와 같은 화염 장막이 생겼다.

그러나 그 화력은 페리스를 훨씬 웃돌았다. 서서히 뜨거워져 가는 열기에 페리스의 머리끝이 검게 타올랐다.

"이...!"

도망가려 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 찐득한 화염이 피부와 근육에 스며들어 뼈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페리스의 눈동자에 베르덴이 비쳤다.

무정한 눈으로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공포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끅."

<플레어>

손에서 터져 나온 화염이 페리스의 몸을 감췄다.

고온의 광선이 쓸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페리스도, 나무도. 그저 용암만이 고요히 흘러내렸다.

하나는 죽였으니, 나머지는 둘.

차례는 이미 정했다.

아까부터 무기를 이리저리 날려 보내며 급소를 노리는 마법사. 동굴에서부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마력을 일으켜 염동력이 깃든 무기를 강제로 멈추곤, 방향을 바꿔 주인에게 날려 보냈다.

"끄아아아악!"

다리와 복부에 칼이 박힌 첸이 주저앉았다.

'이, 이럴 리가...!'

염력으로 움직이는 무기의 권한을 강제로 빼앗다니. 마력 조작 능력이 어지간히 차이가 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데.

저 어린놈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말인가? 고통은 현실이었으나,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다.

첸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치 별처럼 수놓인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턱끝에 식은땀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그것들이 일제히 첸의 몸을 꿰뚫었다.

푸부부부부북!

죽은 첸의 주머니에서 나침반이 툭 떨어졌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들어 올려 손에 쥐었다.

'복잡한 구성이군.'

연구할 가치가 있다. 나침반을 챙기고 마지막 타깃인 카르딘을 찾았다.

예상대로 놈은 동료들을 희생양 삼아 도주하고 있었다. 4위계 마법사가 전속력을 내면, 베르덴이라 해도 따라잡기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쪽에는 마법이 있지.'

바로 하르칸이 만든 마법이.

베르덴의 손에 회색의 마력이 맺혔다.

흐릿하고 반짝이는 잔상이 천천히 별자리를 그리자, 갑작스레 마력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큭...!"

털썩. 극심한 탈력감에 한쪽 무릎을 꿇은 베르덴.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 순간, 별이 떨어졌다.

* * *

페리스의 죽음 직후, 카르딘은 있는 힘을 다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첸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그 정도로 동료애가 깊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규율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뿐.

'저건 나 혼자선 이길 수 없다.'

페리스는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화염 마법사였다.

그런데 손쓸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그녀가 자랑하는 화염 계열에 의해서.

대체 잠깐 사라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잿빛 마법사의 힘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사이에 4위계에 올랐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래서 카르딘은 모종의 이유가 있다고 확신했고, 블랙 아워의 주력이 되는 마법사가 와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둘러 연락을 해야 한다.

만약 놓치기라도 한다면, 훗날 블랙 아워를 가로막는 거대한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카르딘은 마력을 쥐어짜 내며 숲을 가로질렀다.

그러던 그때, 등 뒤에서 빛이 쏟아졌다.

'동이 틀 시간이 아닌데...?'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무언가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단순히 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했다.

기분 탓인지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아니, 가까워지고 있다.'

오싹. 카르딘의 피부에 소름이 끼쳤다.

다급하게 속도를 내며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벗어나려 했지만, 빛은 여전히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항거할 수 없는 미증유의 압력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죽음이 다가올수록 카르딘의 정신이 무너졌다.

피할 수 없다. 그 사실이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혹시 착각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저런 마법은 들어 본 적조차 없었으니, 잘못 본 게 분명했다. 반드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카르딘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자.

"아...."

빛이, 떨어졌다.

하르칸이 만든 다섯 별 중 하나.

흐르는 별, 유성流星.

번쩍이는 섬광과 폭발에 이은 후폭풍.

바르드산맥 일부를 소멸한 유성은, 거대한 크레이터 외에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았다.

43화 콘 상회 (1)

암월(暗月) 다히트 웨스로웰.

그는 블랙 아워의 추종자들에게 패도적인 지도자였으며 곧 신이였다. 7위계에 다다른 대마도사의 힘 앞에 맞설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런 다히트가 다스리는 블랙 아워가 현재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악명이 드높다고 하나,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마탑들과 전쟁을 벌이게 될 줄은 말이다.

"...하르칸에게 보낸 놈들이 실종됐다고?"

"예, 흔적도 없이. 하지만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한 인간이 기절한 채 줄에 묶여 끌려왔다.

다히트가 손을 뻗자 인간이 그대로 끌려와 머리를 잡혔다. 어두운 마력이 피부와 뼈를 넘어 뇌 속을 파고들었다.

<기억전이>

인간이 보고 느꼈던 장면들이 다히트에게 흘러들어 왔다.

본래 이 마법은 시전자가 피시전자에게 일방적으로 기억을 넘겨주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나, 블랙 아워에선 여러 연구를 통해 그 반대를 가능케 만들었다.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기 위해서.

"끄어어... 끄어어억...!"

마치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것처럼 인간이 몸부림치다, 곧 축 늘어졌다.

겉모습은 멀쩡했으나 안은 완전히 곤죽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겠지.

편히 죽게 할 수도 있었으나 다히트가 그런 배려를 베풀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다히트가 눈을 감았다.

블랙 아워의 마법사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인간의 기억. 잠시 후, 바르드산맥에 있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의 흔적이군.'

중량이 산맥을 무너뜨리고, 고열이 숲을 불태웠다.

이런 종류의 마법이 화염 계열에 있긴 한데....

'생각이 지나쳤나.'

그걸 쓸 수 있을 정도면 하르칸을 죽이라고 보낸 놈들쯤은 한순간에 지워 버렸을 것이다.

'마법이란 법칙에 얽매인 자'인 마법사와 '법칙을 벗어나 마도의 길을 걷는 존재'인 마도사의 격은 말 그대로 천지 차이니.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경우를 생각했을 때 하르칸이겠지.

그 늙은 스승은 복수를 바라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마도사라 할지라도 마력회로가 완전히 조각이 난 이상, 무엇을 하든 벌레의 몸부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루아스교의 성녀.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광신적인 그 여자는 죽은 존재마저 살린다고 전해졌으니.

물론 그런 성녀가 하르칸을 만날 일은 전무했다.

<소멸>

검은 불꽃이 인간의 몸을 뒤덮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도 남지 않고 사라진 시체. 부하가 내준 수건으로 손을 닦아 낸 다히트가 입을 열었다.

"하르칸, 그 늙은이의 짓인 것 같군."

"곧바로 추적하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죽었을 테니. 실종된 놈들은 찾지 마라. 옛 스승에게 저승 길동무로 줬다고 생각할 테니까."

4위계 둘과 3위계 하나. 있으나 마나 블랙 아워의 전력엔 차이가 없다.

오히려 하르칸이 다히트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한 함정에 대신 빠진 셈이니,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다.

애초에 하르칸이 범인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 고지식한 스승은 그런 술수에 능하지 않았다. 거기다 마탑의 동력원을 부술 힘조차 없다. 그건 다히트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찾은 거긴 했지만.

'나침반이 아깝긴 하지만 스승의 목숨을 거두는 대가로는 딱 알맞군.'

그러한 결론으로 하르칸에 대한 건은 끝을 냈다.

더 이상 죽은 이에게 할애할 시간 따윈 없었으니. 다히트는 생각을 옆으로 치워 내곤 현재에 집중했다.

보헤미른 마탑이 척살대를 구성한 이후, 근처에 있는 지부들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무리 은폐해도 보헤미른을 돕는, 다른 마탑들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일단 후퇴는 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쪽도 제대로 준비를 갖춰야만 했다. 그걸 위한 새로운 지부가 거의 완성 직전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놈들의 전력을 분산해야 한다.'

그런 뒤에 다히트가 직접 마탑주를 처단하면 상황은 끝.

그다음엔, 블랙 아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범인과 그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면 된다.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마탑에 몰래 투입했던, 일이 터지자 자취를 감춘 부하까지.

다히트는 겉은 냉정했으나, 그 속은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검은 로브를 두른 마법사가 다급하게 달려와 다히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 보고드립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뭐지?"

"현재 제국 근방에서 완성 직전이었던 지부가, 보헤미른의 척살대에 의해...!"

전멸.

투입한 블랙 아워의 일원들은 모조리 죽었고, 보내 놨던 포션을 비롯한 물품들을 전부 빼앗겼다. 제일 중요한 건, 다히트가 세운 계획이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는 것이었다.

콰직.

의자의 손잡이가 박살 났다. 다히트가 겨우 분노를 삼키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전선을 뒤로 물린다."

시시가각 블랙 아워의 세력권이 줄어든다.

그러나 보고만 있을 다히트가 아니었다. 준비만 갖춰지면 언제든 직접 나서서 마탑 놈들을 찢어 죽이리라.

'그러니 기다려라.'

마탑과 블랙 아워.

그들 사이에는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한편, 베르덴은.

"음, 향이 좋군."

최고급 차를 마시며, 공국의 휴양도시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베르덴이 눈가를 비비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었고, 아래로 시선을 향하니 활기찬 도시가 보였다.

리비안트 공국 휴양도시, 브리엔테.

블랙 아워를 전부 처리하고 곧장 지도를 펼쳐 이곳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아온 터라 몰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걸로 추적은 피했겠지.'

흔적은 없다. 마을에 베르덴을 본 목격자가 있긴 했지만, 인상착의 하나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을 추적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블랙 아워라도. 하물며 한창 마탑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주력을 보낼 여력은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내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좋겠지만.'

책상에 앉은 베르덴은 여관에서 준 아침 식사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4위계에 오른 것과 새로운 속성과 마법.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진 능력을 갈무리해야만 했다.

우선, 4위계.

1위계와 2위계는 기초. 3위계는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마법이 많은 반면, 4위계는 보다 파괴적이고 다양한 마법이 가득하다.

베르덴에게 부족했던 화력이, 한 차원 위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하르칸이 준 속성과 마법.'

베르덴의 손에 회색 마력이 맺혔다.

이 생소한 마력이 마법이라는 신비를 일으키는 작용은, 수많은 마법 이론을 공부한 베르덴조차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마력의 잔상과 잔상이 연결되어 하나의 형식을 이루곤, 서로 증폭되어 기존에 없던 힘이 발생한다. 그 모습은 마치 별자리와도 같았다.

어떻게 속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법을 만들어 냈을까.

하르칸의 기억은 답했다. 이것이 그가 걸어온 마도라고.

마법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법칙에서 벗어난 마도사만이 가능한, 일종의 기적이었다. 아무리 마력이 방대하고, 습득한 마법이 많다고 한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지만, 베르덴은 달랐다.

그 또한 역천이라는 기적을 이룬 유일한 존재였으니.

하르칸과 달리 무한한 마력을 가진 마탑의 동력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기적을 일으킨 건 분명했다.

세상의 시점에선 베르덴은 마도에 한 발짝 걸친 존재였다.

그러나 베르덴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마탑의 심장과 마탑주의 컬렉션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으니까.

아직 그의 마도는 시작되지 않았다.

베르덴이 회색 마력을 이리저리 놀리며 생각했다.

'하르칸이 만든 마법은 개량할 필요가 있겠어.'

하르칸의 다섯 개의 별, 오성(五星).

지금의 수준으론 첫 번째 별밖에 다룰 수 없었는데, 그조차도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도 심각했다. 파괴력이 압도적이라고 한들, 이래서야 실전에서 쓰는 건 무리였다.

"거대한 하나보다 여러 개로 나뉘었으면 좋겠는데...."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했는데 번뜩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개량의 방향성을 정하며 천천히 연구할 수밖에. 블랙 아워의 나침반도 해체해야 하고. 이곳 브리엔테는 그런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도시였다.

기지개를 켠 베르덴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럼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뭘까.

그러다 문득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스태프가 보였다. 전 모험가 도적에게 빼앗은 지팡이를 스태프로 재가공한 뒤에 글러트니, 통곡의 기사, 블랙 아워 등과의 전투에서까지 써왔던 무기.

곳곳에 흠집이 나 있었고, 스태프의 보석도 멀쩡하지 않았다.

"새로운 장비라."

안 그래도 곧 날씨가 추워질 테니 새로운 로브를 맞출 필요도 있었다.

돈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모험가들도 휴식차 많이 오기에 시설도 꽤 좋은 편이고.

할 일을 결정한 베르덴은 곧바로 움직였다.

* * *

아직 오전임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평범한 가족, 짐을 옮기는 일꾼, 두툼한 지갑을 들고 대장간으로 향하는 모험가와 고급스러운 마차에 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베르덴도 그중 하나로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군. 누가 안내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다못해 추천하는 상점이라도.

그렇게 턱을 매만지며 두리번거리던 도중, 본 듯한 간판이 하나 보였다.

'콘 상회?'

파이테 남작령에서 만난 콘라드가 말한 상회였다.

분명 가족 사업이라고 그랬지. 훗날 방문하게 되면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마침 잘됐다.

베르덴은 주저 없이 콘 상회의 건물로 들어섰다. 카운터로 향하자 근처에 있던 경비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계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콘 상회에 어서 오십시오. 저희 상회는 일반적으로 도매를 전문으로 하며, 때론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특수한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손님께선 무엇을 주문하러 오셨습니까?"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물건을 구할 일이 생기면 콘 상회에 들르라고."

"아, 소개를 받으셨습니까? 혹시 그분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콘라드라고 합니다."

콘라드?

사내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말을 이었다.

"파이테 영지에서 제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콘 상회에 자신의 이름을 대면,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들어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콘라드가 보낸 편지에서, 파이테 영지로 가던 중 도적과 아인종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를 구해 준 마법사가 있었다고도.

잿빛 머리에 푸른 눈동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은인.

"혹시... 애셔 님이십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몸을 세우더니 다시 인사를 전했다, 보다 정중하게.

"제 이름은 콘도르. 콘 상회의 브리엔테 지부를 맡고 있습니다. 제 사촌을 구해 준 은인을 몰라보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괜찮-"

"아, 이런! 은인을 이렇게 오래 세워 두면 안 되는데. 자, 따라오시지요. 애셔 님을 위해 최고급 차와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후에 원하시는 상품이 무엇인지 차차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콘라드의 말마따나 분명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생부터 상인 집안인 콘라드가의 가훈.

이 정도의 대접은 당연하고 또 당연했다.

'콘라드의 가족이 분명하군,'

외모는 별개로, 말이 많은 게 아주 판박이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고 콘도르를 따라 콘 상회의 특별 접대실로 향했다.

44화 콘 상회 (2)

콘도르는 베르덴을 극진히 대접했다.

잘나가는 상회라 그런지 웬만해선 구할 수 없는 간식들이 많았다. 마탑에서 취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근데 말이 많아.'

앞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콘도르.

콘라드보단 덜하긴 했으나 베르덴이 견디기엔 버거웠다. 마력으로 청각을 일부 차단하고 과자와 차에 집중했다.

그러다 콘도르가 입을 멈출 즈음, 선수를 쳤다.

"마법 물품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마법 물품? 아, 매직 아이템 말이시군요!"

현대에선 매직 아이템. 옛말로는 마법 물품.

마탑을 비롯한 고지식한 마법사들은 죄다 후자로 말한다. 매직 아이템이란 이름은 고상하지 않다나 뭐라나.

베르덴은 딱히 명칭에 신경을 쓰지 않아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러나 상인 콘도르는 달랐다.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버릇을 비롯한 정보를 알아내는 건, 거래를 보다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단초가 되니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고.'

하지만 마탑 출신은 더더욱 아닐 터. 독립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도 젊다.

추측에 불과하나 작은 마을에서, 은퇴를 한 고명한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저 정도의 외모를 갖춘 데다가 전도가 유망하기까지 한 마법사가 도시에 있었다면 어디선가 소문이 날 법도 했으니.

콘도르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브레엔테는 귀족님뿐만 아니라 모험가분들 또한 즐겨 찾는 곳입니다. 여러 장비나 장신구가 즐비하지요. 구입하실 생각이십니까?"

"주문 제작을 할 생각입니다."

"주문 제작이라... 그에 딱 맞는 장인이 하나 있긴 한데. 좀 하자가 있어서...."

"하자?"

"모르트라고, 실력은 이 근방에서 따라올 사람은 없는데, 술주정뱅이에다가 도박 중독이라 빚을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신용 높은 장인인데도 은행에서 대출을 안 해 줄 정도니. 최근엔 사채업자가 기웃거린다더군요."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베르덴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콘도르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의뢰는 전부 제시간 내에 끝냈으니까요.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요.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저희가 책임지고 원하시는 매직 아이템을 구해 드릴 테니 한번 믿어 보시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못 갈 거야 없지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베르덴은 곧장 콘도르가 알려 준 주소로 찾아갔다.

일인 공방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거리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도시의 소음이 점차 멀어지던 그때, 낡은 건물 한 채 앞에 도착했다.

똑똑.

문을 두들겼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마력감지로는 한 사람이 침대 방에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염력으로 낡은 잠금장치를 톡톡 건드리자 문이 열렸다.

"...."

난잡하게 어질러진 공방.

취급에 주의해야 할 마수의 가죽이 널브러져 있고, 갖가지 물건이 먼지에 싸여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게 장인?'

갑자기 의뢰할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꾹 참고 방으로 향했다.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시끄럽게 코를 고는 중년의 남자, 모르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발로 가볍게 몇 번 차고 나서야 반응을 보였다.

눈가를 비비며 일어난 모르트가 베르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다, 당신 누구야?!"

"모르트 맞습니까? 제작 의뢰를 하러 왔는데."

"아... 손님? 난 또 빚쟁이들인 줄 알았네. 하아암, 지금은 졸리니까 나중에 다시 와서 주문해. 올 때 술 한 병 챙겨 오는 것도 잊지 말고."

모르트가 침대로 기어들어 가 이불을 푹 덮어썼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불을 빼앗을까 아니면 다시 찾아올까 고민하고 있던 중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웬일로 문이 열려 있네?"

"또 도박장 간 것 아니야?"

인상이 험악한 놈들이 하나둘씩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베르덴과 마주치자, 얼굴에 흉터가 나 있는 덩치 큰 사내, 베딘이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거기, 잿빛 머리 친구? 여긴 무슨 볼일이지?"

"주문 제작하러 왔는데."

"아, 손님이었나? 미안한데 지금은 좀 바빠. 저 도박쟁이가 우리에게 줄 게 있거든. 어이, 모르트! 자는 척 그만하고 일어나지?"

몸을 움찔거린 모르트가 실눈을 떴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으며 모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갚을 때가 됐나?"

"갚을 때가 된 게 아니라 이자까지 붙은 지 오래다."

"그런데 지금 난 돈이 없는데."

"없으면 끝인가? 당장 일해서 갚든가, 존나게 두들겨 맞고 정신 차리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지. 800만 엘크가 뉘 집 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베딘이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치며 으르렁거리자, 모르트가 손을 내저으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덴이 품에서 현금 다발을 꺼내 침대에 던졌다.

"...뭐야?"

"800만 엘크다. 그 돈 내가 대신 갚지."

어차피 제작 비용으로 대략 4,500만 엘크 정도를 예상했다.

모르트에게 줄 돈이었으니 빚을 갚아 주는 대신에 그만큼 제작 비용에서 빼면 될 일이다.

베딘이 돈다발로 손을 내밀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던져 버렸다.

수백 장의 지폐가 허공에 휘날렸다.

"이런 시발, 어린놈의 새끼가 싸가지 없게. 내가 사채업이나 하고 있으니 만만하게 보이냐?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아 죽겠는데. 야, 이 새끼 끌어내."

베딘이 씩씩거리자 부하들이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나무 조각과 날카로운 유리 파편 그리고 지폐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들의 목을 겨누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 마법?"

"시발, 여기 왜 마법사가...!"

사채업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비켜라."

베딘이 부하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굳은 얼굴로 성큼 다가오는 게 뭔가 한 수가 있는 것 같았다. 부하들이 선망 어린 눈길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염력으로 띄운 물건들이 일제히 베딘을 가리켰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덴 코앞까지 걸어왔다.

서로가 마주하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가 움직였다.

털썩.

"살려 주십쇼."

"...?"

* * *

옛날 브리엔테는 지금처럼 활기찬 도시가 아니었다.

공국이 독립하기 전, 왕국과 공화국의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곳엔 온갖 범죄자가 득실거렸다.

힘이 전부인 야생과도 같은 환경이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후 어느 날, 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약해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 빼앗고 죽이려고 했다. 그게 브리엔테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눈을 감고 떴을 때, 시체 1구가. 다시 떴을 때, 시체 10구가.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땐, 피바다가 만들어져 있었다.

덤벼든 자들은 전부 죽었다. 악랄한 살인마도, 전직 용병도 그리고 전 백금 등급 모험가였던 뒷골목의 지배자까지도.

모조리 뼈와 살이 분리되어서 말이다.

사내, 베딘은 그저 주저앉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그를 흘긋 보더니 그냥 지나쳐 갔다. 마치 죽일 가치가 없다는 듯이. 뒤에선 또 다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왜 세간에서 미친 마법사를 두려워할까.

당연했다. 전혀 강하지 않을 것 같은 외모로, 어떤 무기도 없이 누구보다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족속들이니.

베딘은 다짐했다.

절대 다시는 마법사와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마법사와 관련된 일이면 결코 참견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외모는 다르지만 그때 본 미친 마법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애매하게 굴면 뒈진다.'

직감.

그래서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쇼."

"...?"

"마법사신 줄 몰라뵀습니다. 이렇게 빌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다시는 마법사님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제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비비는 사내의 모습에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아무리 상대가 마법사라고 하지만,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줄이야.... 애초에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지만 위협할 마음마저 싹 사라졌다. 딱히 베르덴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마력을 거두어들이곤 베딘에게 말했다.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나?"

"아, 예! 있습니다! 큰형님이라고 계시는데 저희가 하는 사업의 총책임자 되십니다."

"그럼 길 안내 좀 부탁하지."

"...예?"

* * *

브리엔테에서 사채업을 하고 있는, 니스.

하는 일이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 있는 만큼 주위에 약을 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씨발. 경비대장, 이 돼지 새끼는 몇 인분을 처먹어야 만족하는지, 원."

돈 빌려주고 이자 받으면 뭐하나. 남의 배때기만 불리고 있는데.

그래도 참아야 한다. 얼마 안 있으면 큰돈이 들어와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 있으니까. 이런 지긋지긋한 비즈니스는 이제 안녕이다.

'그래. 그때까지 참자, 참아.'

니스는 한숨을 내쉬고 사업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애들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부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저, 큰형님. 베딘 형님께서 서둘러 방으로 와 달라고 하십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수금 갔던 애새끼들 얼굴은 왜 이리 죽상이고. 너희 혹시 사고 쳤니?"

"저는 잘...."

부하가 눈을 피했다.

큰형님은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문을 열자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고, 베딘은 기립한 채 얼어 있었다.

'누구지?'

아! 혹시 상인의 자식이라든가 귀족의 자제분이신가?

그렇다면 부하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역시 내가 사업 하나는 잘한단 말이야. 이러다 부자 되는 거 아니야?'

니스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는, 웃는 얼굴로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그때, 베딘이 다가왔다.

"큰형님."

"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면 진즉에 연락을 했어야-"

"무릎 꿇으시랍니다."

...?

니스가 베딘의 얼굴을 주시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고 식은땀까지 흘리는 게 장난이 아닌 것 같다. 베르덴과 베딘을 번갈아 본 니스가 작게 속삭였다.

"귀족 자제나 상인 같은... 손님 아니야?"

베딘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 한 컵이 날아와 니스의 손에 쥐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 잿빛 머리의 사내는 마법사라고.

그것도 자신의 부하들과 마찰이 생긴 듯한.

'마법사? 그게 뭐 대수라고.'

니스가 물을 단번에 들이켜고 당당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베딘보다 배짱이 두둑했으며, 눈치 또한 빠르고 처세술에 능한 인간이었다.

털썩.

"말씀하십쇼, 마법사님."

낯선 마법사는 위험한 법.

간 보다 뒈지는 것보단 무릎 한번 꿇는 게 훨씬 나았다.

45화 방주

베르덴은 아주 간단히 말했다.

모르트 대신 돈 줄 테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거기에 염력으로 가볍게 위협하자 베딘과 니스는 머리가 떨어질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채업 문제는 이걸로 끝났다.

다시 공방에 찾아가자 공방을 청소하고 있는 모르트가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마법사님! 자 자, 들어오시죠."

모르트가 의자를 가져와 베르덴을 앉혔다.

급하게 차도 끓여 왔는데 영 식기의 상태가 별로라 입에 대지는 않았다. 헛기침을 한 모르트가 입을 열었다.

"크흠, 콘도르가 사람을 보냈더군요. 애셔라는 이름의 마법사 한 분이 갈 테니 극진히 모시라고. 하하, 진즉에 말씀 좀 해 주시지...."

콘 상회는 모르트에게 있어서 훌륭한 중개소였다.

덕분에 사람과 대화하다 마찰을 일으킬 일 없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면 돈이 들어오는 간단한 구조로 삶을 연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없다면 모르트는 성격 탓에 제대로 장사도 못 하고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극진히 모시라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법사인 것도 좀 걸리고.

안 어울리게 미소를 짓고 있는 모르트를 보며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주문받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원하는 매직 아이템이 뭔지 말씀만 해 주시죠."

베르덴이 원하는 건 스태프와 로브.

스태프는 둔기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해야 하고, 보다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있어야 했다. 현재 예산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마법 물품은 그 외의 능력이라면 베르덴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실력이 마법 물품의 효과를 훨씬 웃돌았으니까.

"무기로 쓸 수 있는 스태프라. 알겠습니다. 그럼 로브는 어떤 걸로...?

"체온 유지가 되는 걸로 부탁합니다. 내구성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고요."

"그럼 마수의 가죽이 좀 필요하겠군. 적당히 효과도 부여하고... 좋습니다. 그럼 전부 다 해서 얼마냐...."

모르트가 안경을 쓰고 계산기를 두들겼다.

"재료비 3,120만 엘크에다가 인건비 1,330만 엘크...."

"인건비?"

"인데! 빚을 대신 갚아 주시고 제가 흠씬! 얻어맞을 뻔한 걸 막아 주셨으니 재룟값만 받는 걸로."

모르트가 슬쩍 눈치를 봤다.

총액은 얼추 예상한 금액의 범위 내였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르트가 숨을 내쉬었다. 잔금을 지불하고 공방을 나섰다.

한 3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으니 느긋이 기다려야겠지.

어차피 할 일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근처 대장간에서 공구를 구입한 베르덴이 여관으로 향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베르덴은 하르칸의 마법을 연구하면서도 블랙 아워에게서 빼앗은 나침반을 분해하고 해석했다.

하나같이 난해한 것들이라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방에 틀어박혀서 집중을 하니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회색의 마력이 잔상을 남기며 공명했다.

이내 빛이 잠깐 번쩍이더니 소리 없이 사라졌다.

'871번째 패턴도 실패. 그럼 다음은...."

하르칸이 만든 속성, 베르덴이 성신(星辰) 속성이라 이름 지은 회색의 마력은 잔상이 남긴 패턴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여 줬다.

하르칸의 기억을 토대로 패턴을 분석해 보기도 했으나, 주체가 되는 마력회로가 서로 다르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위로 패턴을 시험했다.

조금만 위치가 달라도 다른 패턴으로 인식되다 보니 경우의수가 무한에 가까웠다. 이미 1,000번에 가까울 정도로 시도했지만 아직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머지 하나는 끝냈으니 다행인가.'

나침반 분석은 끝났다.

복잡한 기계식 구조는 그 안에 담긴 마법진과 마석을 연결하기 위한 구조였다. 그중 특히 중요한 건 마법진의 구조였다.

'마력 증폭을 여기에 이용하다니, 기발하긴 하군.'

생물이 가진 마력은 서로 비슷해 보여도 아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특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양이 클수록 더.

마력 감지를 펼치고 난 뒤에, 별다른 노력 없이 마력이 회수되는 것도 이러한 원리다.

이 나침반은 그걸 이용했다.

마석을 넣고 마력을 안에 가둔 다음, 마법진이 이를 증폭한다. 안에 갇힌 마력은 자연스레 특성을 띠게 되고, 그와 연결된 나침반의 지침이 그 방향을 가리킨다.

언뜻 보면 쉬운 원리이지만, 그를 이루기 위한 구성은 상당히 복잡했다.

일단 마법진을 정확히 본떠 옮겨 놨으니 또 분석해야 한다.

숙제를 하나 해결하니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

'근데 조립 언제 다 하지.'

부품만 수백 개.

잊어버리지 않게 순서대로 놓긴 했지만 앞이 막막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쉬며 공구를 들고는 재조립을 시작했다.

이윽고 자신의 마력을 넣은 마석을 넣어 작동하자,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다.

문득 바깥을 보니 해가 밝아 있었다.

분명 시작하기 전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거울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쉬다 와야겠군."

바깥 공기가 필요하다.

여관을 나선 베르덴은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슬슬 마법 물품도 완성될 때니 브리엔테를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중,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정장을 입은, 흑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착각했나 싶었지만 지금 베르덴의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리스너."

사내가 미소 지었다.

"방주에서 왔습니다."

* * *

방주. 글러트니와 적대하고 있는 집단.

그 이름에 피로가 확 달아났다.

신경을 곤두세운 베르덴이 리스너를 보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안광에 맺힌 마력에 리스너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셔 님. 해코지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글러트니의 박사를 죽이셨으니 저희는 한배를 탔다고 볼 수 있죠.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고요."

"왜 날 찾아왔지?"

"대화를 나누면서 얘기해 드리죠.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베르덴이 침묵하자 긍정이라고 해석한 듯 리스너가 맞은편에 앉았다.

느긋한 태도로 음료까지 주문한 그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자, 그럼 어디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요."

"접근한 이유부터 말해."

손에 맺힌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것이 단순히 위협용이 아니란 걸 리스너는 알고 있었다.

"저희는 지난 몇 년간 박사를 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잘 숨어 다니는 통에 찾을 수가 없었죠. 글러트니 내부에서도 급진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라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박사가 이름도 모르는 마법사에게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연구 일지까지 몽땅 불타 버렸다고도."

방주가 해야 할 일을 베르덴이 대신 해 준 셈이다.

그 자그마한 보답으로 그의 정보가 글러트니에게 최대한 늦게 들어가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베르덴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롭니다. 마르테스와 그 주변에 있는 도시까지 포함해, 글러트니에 속한 자를 전부 제거했습니다. 애셔 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 탓에 글러트니가 더 깊이 숨어 버렸지만, 박사의 죽음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죠."

그 후, 방주는 베르덴을 멀리서 주시했다.

직접 감시하지 않고 그 행적을 따라 뒤에서 움직였다. 너무 돌발적인 부분이 많아 중간에 놓치기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찾아왔다.

"...."

그 말을 들은 베르덴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적을 파악당하는 것. 페일의 경우에는 정보상이니 이해는 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러나 방주는 다르다.

제대로 된 정체도 모르는 조직에게 미행당하는 건, 그걸 본인 앞에서 떠벌리며 느긋하게 구는 리스너의 태도가 베르덴은 몹시 불쾌했다.

설령 베르덴을 위해서 글러트니를 막아 준 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애셔 님...?"

"조용히."

화아악! 베르덴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유형화될 정도로 높은 밀도의 마력. 실질적인 물리력을 갖게 된 마력이 주위에 영향을 주었다.

쩌적.

카페의 유리가 갈라지고 지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대한 마력이 리스너에게 오로지 집중되었다.

전혀 상정하지 못한, 그 위압적인 마력에 리스너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베르덴의 청안이 리스너를 차갑게 주시했다.

"어떻게 날 미행했는진 모르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지금 이후로 내 뒤를 캐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상당히 불쾌하니까.

베르덴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리스너는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베르덴이 마력을 거뒀다.

마력의 중압감은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스너가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먼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후에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리도록 하죠."

리스너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 같은 건 없었으나, 미행하지 말라고 각서 같은 걸 쓴다고 해서 실질적인 효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마법을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경고는 했으니 당장은 이대로 넘어갈 수밖에.

물론 이후에 선을 넘으면 그때는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리스너가 슬쩍 물었다.

"그럼... 대화를 이어 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감사합니다."

짝!

리스너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종합해서 말하자면, 방주 내부에는 애셔 님에게 호의적인 시선이 많다는 겁니다. 박사를 제거한 것도 그렇지만, 특히 그 행적에 대해서요."

리스너가 말을 이었다.

"애셔 님, 당신은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게 방주와 무슨 상관이지?"

"글러트니는 섭식을 통해 인간은 한층 더 진화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인 이념을 내세우고 있지만, 저희 방주는 다릅니다. 방주의 이념은 좀 더 뿌리에 가깝죠."

인간이란 적응하는 생물.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

"인간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 이것이 언제나 변하지 않는 방주의 이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애셔 님은 이념에 적합한 분이십니다. 가능하다면 바로 방주에 들어오라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거절하지."

모험가 길드도 안 들어갔는데 정체가 불분명한 집단에 발을 디딜 이유가 없다.

그런 베르덴의 단호한 거절에도 리스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이념에 맞는 인물이란 게 날 찾아온 이유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방주 내에서 후보를 모집하는 일도 하고 있거든요. 적합한 인재를 찾았는데 못 보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애셔 님이 당장 방주에게 들어올 마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온 건 전해 드릴 게 하나 있어서 그렇습니다."

리스너가 다 마신 음료를 옆으로 치우곤, 작은 액세서리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은색 팔찌가 들어 있었다.

"'리커버리' 시리즈 중에서 상급품입니다. 마력 재생 속도와 더불어 체력 및 상처 회복을 가속화해 주죠. 약소하긴 하나 저희를 대신해 박사를 처리해 주신 보답입니다."

베르덴이 팔찌를 바라봤다.

리키버리 중 상급품이라면 최소 7,000만 엘크는 될 터. 마력을 소모해 상처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에 시세가 꽤나 높다. 신성력에 비해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베르덴은 무턱대고 받는 대신, 리스너에게 물었다.

"호의가 과한 거 같은데. 이념에 맞는 인물이란 게 그렇게 방주에게 중요한 건가?"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애셔 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드물게 글러트니와 적대했던 분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이후로도 그럴지 모르고요."

리스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물건을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라도 저희 방주와 얘기를 나눠 볼 생각이 있으시다면! 늦어도 한 달 안에 북서쪽에 있는 도시, 로리엔으로 오십시오."

"로리엔?"

"예, 로리엔. 악마의 숲이 있는 도시죠. 거기서 기다릴 테니 꼭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혹시 그 외에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지금 답해 드리죠."

질문이라.

베르덴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왜 방주와 글러트니는 서로 적대하는 거지? 단순히 이념 차이인가?"

"이념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글러트니는 어떤 종족보다 뛰어난 신인류를 만들어 구인류를 지워 버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방주는 결코 인류를 버리지 않는다. 숱한 시련을 넘어 인류를 이끌 선장이 될 사람을 찾고 키우는 것.

"그것이 저희의 이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스너는 떠났다.

베르덴과 방주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그걸로 끝이 났다.

46화 룬의 반지 (1)

"어서 오시죠, 마법사님! 연락드렸던 대로 아주 성공적으로 완성했습니다!"

모르트가 거치대에 장식해 둔 로브와 스태프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베르덴의 눈이 마법 물품에 담긴 효과를 읽어 냈다.

<감정>

◇ 블루 미스릴 스태프

⦁ 마력 회복 속도 증가(소)

⦁ 마법 시전 속도 증가(중)

⦁ 마력 충전

⦁ 마력 증폭(소)

고급 마석을 가공해 만든 푸른 보석, 소량의 미스릴이 포함된 합금으로 이뤄진 뼈대.

이 두 가지로 만들어진 스태프는 전에 쓰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력 전도율이 한층 더 높아지고, 담을 수 있는 마력량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리고 스태프 자체에 마력을 충전해 언제든지 스태프를 강화할 수 있으며, 그 위력이 소폭 증폭된다.

방대한 마력량을 가진 베르덴에겐 항시 스태프를 강화하는 게 가능하단 얘기.

거기다 베르덴의 키를 약간 넘는 길이와 무게중심마저 손에 딱 맞는 게, 당장 실전에서 사용해도 문제없을 정도다.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아.'

마법 자체를 강화하는 효과가 없는 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타협할 만하다.

4위계 중위에 다다른 데다가 마법서까지 있으니 애써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다음으로 로브에 시선을 향했다.

◇ 매지션 케이프

⦁ 체온 유지

⦁ 물리 내성(소)

⦁ 화염 및 냉기 내성(소)

⦁ 상태 보존

내성을 제외하면, 체온 유지와 별도의 관리 없이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는 심플한 효과.

대부분의 비용이 스태프에 들어갔으니 당연한 성능이다. 지금 가진 재산으로 더 좋은 로브를 구하기엔 가격 대비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다.

베르덴은 당장 돈을 쓰는 것보단, 아껴서 나중을 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로브 자체에 보호막이 부여된 걸 구할 기회가 올 수도 있고.'

그 전에 최소 억이 넘는 재산을 모아 둬야겠지만.

물론 베르덴은 자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하고도 넘쳤으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예, 확실히."

확실히 마법 물품은 재료가 같을지언정 제작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 같다.

베르덴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모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 가격대에서 구할 수 있는 마석 중에 최고 품질을 썼습니다. 콘도르가 준비해 주더군요. 이야, 그 덕에 오랜만에 괜찮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자, 어서 입어 보시죠."

베르덴이 로브를 걸치고 스태프를 손에 들었다.

보석의 푸른색에 로브의 회색, 로브 안쪽으로 살짝 보이는 가죽 장비의 남색은 은은하게 위압감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베르덴의 눈과 머리칼과 잘 아우러졌다.

"하하,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그럼 저기...."

"여기 잔금입니다."

전에 보니 카드 리더기가 없었기에 즉석에서 현금으로 지불했다.

돈다발이 담긴 봉투에 모르트가 함박웃음을 짓고는 눈대중으로 액수를 가늠했다. 얼추 맞는 걸 확인한 그가 베르덴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마법사님!"

베르덴은 모르트의 인사를 받으며 바깥으로 나섰다.

이후 콘 상회에 잠깐 들러 콘도르와 만나고 여관으로 향했다. 더 이상 브리엔테에 볼일은 없으니 다음날 아침에 도시를 떠날 생각이다.

베르덴은 심장에서 울렁이는, 마치 바다와 같은 마력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으니 더 과감하게 움직여도 문제없겠어.'

갈리아크와 함께 토벌했던 통곡의 기사. 지금이라면 혼자서도 압도할 수 있다.

마력 소모가 큰 마법이 많기에 베르덴의 장점 중 하나인 방대한 마력량을 좀 더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대일이라면 5위계 마법사와 정면으로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만큼 성장 속도가 더뎌진다는 건 분명하다.

하늘을 넘어설 수 있다고 해서 하늘을 오르는 것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으니. 보다 높이 올라갈수록 힘겨워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베르덴이 역천으로 이뤄 낸 건,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 남들보다 편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베르덴은 침대에 누워 다음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평소처럼 훈련은 지속하되, 외적인 부분에 집중한다.'

무기와 방어구는 갖췄다.

가진 재산 내에서 만족스러운 장비들을 얻었으니, 후에 기회가 올 때나 상황에 맞게 더 성능이 좋은 걸로 바꿀 계획이다.

'남은 건 마탑에서 가져온 보물들뿐인가.'

우선 마법서.

강화할 마법을 등록하려면 중상급 이상의 마석을 구해야 하나, 정보상 페일을 이용하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터. 말 그대로 돈만 있다면 땅 속성의 원소 마법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

이 두 개로 스태프의 재료인 '오브(Orb)'를 만들 수 있지만, 마법 물품 제작에 정말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라면 감히 손도 댈 수 없다. 자칫 실패하기라도 하면 전부 가루가 되어 사라질 테니.

'거기다 그에 맞는 뼈대도 없고 제작 비용마저 부족하니까.'

아직 이 둘을 활용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렇게 위 세 가지를 제외하면 남은 건 단 하나뿐.

룬의 반지(Ring Of Rune).

잠들어 있는 룬 문자를 깨울 차례다.

* * *

룬 문자.

그 기원은 오랜 연구에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대에 사용하던 마법 물품 제작 기술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문자 자체에 마력을 품고 있으며, 문자의 배열에 따라 부여되는 가지각색의 마법적인 효과. 그저 문자를 새기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발현되니, 어떻게 보면 현대의 제작 기술보다도 더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용화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룬 문자를 새기는 방식을 재현해 내지 못했으니까. 이미 잊혀 버린 고대의 기술을 어느 누구도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100년이 넘도록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기껏해야 시동이 중지된 룬 문자를 다시 일깨우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잠재 가치가 높더라도, 성과가 없으면 버려지기 마련이다.

이미 마탑에선 연구를 중지한 지 오래. 현대에 이르러서는 고대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자들만이 연구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베르덴이 가진 '룬의 반지'.

복잡한 룬 문자 배열이 새겨진 이 반지는 마탑의 보물고에 보관될 정도로 귀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그 대신 룬의 효과를 견뎌 낼 수 있는 육체가 필요한데, 베르덴이 4위계에 오름으로써 최소한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제 룬의 반지를 깨워 줄 사람만 찾으면 된다.

본래 수소문해서 찾을 생각이었으나, 정보상이라는 수단이 생긴 이상 적극 이용할 생각이었다.

브리엔테를 떠난 베르덴은 곧장 코헨으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애셔 님. 마침 의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잘됐군요."

"오늘은 의뢰가 아니라 정보를 구하러 왔는데. 무슨 일이지?"

"아, 그러셨군요. 그럼 먼저 애셔 님의 용건을 해결한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건 룬 전문가의 소개.

베르덴의 정보 의뢰를 받은 페일이 턱을 쓸었다.

"룬이라... 물론 정보는 있습니다. 정확히는 룬 전문가의 소재에 대해 알고 계신 분에 대해서 말이지만요."

"소재? 직접 만나는 방법은?"

"없습니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더 멀리 보면 있기야 할 테지만, 애셔 님이 원하는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겸비하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알다시피 룬이 새겨진 마법 물품은 희소하기도 하고, 룬 자체는 돈벌이에도 영 적합하지 않기에, 대부분 취미 수준에 그치는 정도니까요."

"그렇다는 건, 앞서 말한 전문가는 다르다는 뜻인가?"

"애셔 님이 무슨 이유로 룬 전문가에 대해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 소견으로는 '그렇다'라고 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베르덴은 고민했다.

정보를 구입해 룬 전문가의 소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도, 순순히 베르덴에게 협조할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베르덴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페일이 작게 미소 지었다.

"마침 애셔 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명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지명 의뢰?"

"의뢰인 쪽에서 애셔 님을 고용하길 원하십니다. 물론 거절하셔도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룬 전문가의 소재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 바로 그 의뢰인입니다. 꽤나 깐깐하신 분이시긴 한데, 의뢰를 받아 주신다면 흔쾌히 애셔 님의 요구를 들어주실 겁니다. 물론 보수는 별도고요. 그리고 의뢰에 관련된 일이니 제게 정보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의뢰 하나에 룬 전문가의 소재 정보, 보수, 정보료 면제라.

무슨 의뢰인지가 관건이겠지만, 베르덴이 의뢰를 수락할 이유는 충분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페일이 의뢰서를 건넸다.

의뢰 내용을 주욱 읽어 내리다 의뢰인 이름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 사람은....'

로든마이어 백작.

의뢰인은 전에 노예 상인인 루튼 코호트의 생포를 의뢰했던 귀족이었다.

* * *

로든마이어 저택.

회색 저택은 고풍스러웠고 사방을 둘러싼 정원은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다.

백작의 자택이라기엔 다소 검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의 장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르덴이 앞으로 고개를 돌려, 길을 안내해 주는 기사를 바라봤다.

강철에 금빛이 옅게 스며든 갑옷. 그 특징으로 보아 물리와 마법 내성이 뛰어난 다마스 강철을 사용했음이 분명했다.

'엄청난 재력이군. 웬만한 부호들은 발끝도 못 따라가겠어.'

로든마이어 백작은 겉치레보단 실질적인 힘을 중시하는 귀족인가. 그게 아니라면 휘하 기사들의 수준을 높여 그 주인인 백작 자신을 더 빛나게 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페일이 말하길 로든마이어 백작은 실리주의자라고 했고, 실리주의자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뜻하니.

잠시 후, 기사를 따라 백작의 앞에 당도했다.

흰색에 가까운 금색 머리칼, 중년의 나이를 뜻하는 주름 그리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욕망이 담긴 금안.

야외에서 차를 마시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네가 페일이 보낸 마법사인가?"

"애셔라고 합니다."

"알고 있다. 루튼 코호트와 그 일당을 '직접' 생포해 내 주머니를 털어 간 마법사. 뭐, 들은 대로 얼굴 하난 번지르르하군."

백작이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베르덴이 그와 마주 앉자, 노년의 집사가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향기를 맡아 보니 '골드 버즈' 종류의 찻잎을 쓴 것 같은데, 역시 귀족다운 사치였다.

이어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과 설탕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퓨리 골드 버즈. 비싸기도 하지만 까다롭기까지 한 찻잎이지. 마시고 싶다고 마실 수 있는 게 아니니, 지금 제대로 맛을 음미하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차 맛을 알기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백작의 권유에 베르덴이 자연스레 손을 움직였다.

먼저 설탕을 반 스푼 차에 섞고는,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차를 머금어 치즈 케이크의 맛과 차의 풍미를 동시에 음미했다.

이것이 골드 버즈 차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었다.

마탑에서 가끔씩 맛보기도 했으며, 베르덴은 골드 버즈 차를 직접 달인 적도 있었으니 차 맛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베르덴의 행동에, 백작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과에 조예가 있었나?"

"어디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베르덴의 대답에 백작이 이내 피식 웃었다.

"바닥에 널린 용병들처럼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모양이야. 나쁘지 않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47화 룬의 반지 (2)

일반적으로 백작은 자신보다 하위 계급인 자작을 보좌관으로 두는데, 주로 백작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맡거나, 다른 귀족과의 중요한 거래나 협상 등에 나서서 백작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백작의 대리인 그리고 자작이라는 귀족 계급.

당연하게도 그를 호위하는 수행원들은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더군다나 로든마이어 백작이 엄선한 자들이기에 장비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몇 번이나 다른 영지에 방문하며 짧지 않은 시간을 바깥에 있었으나, 작은 마찰이 있었을지언정 자작은 언제나 생채기 하나 없이 로든마이어 백작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 보좌관, 베일론 자작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곧 돌아오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본래라면 이틀 전에 여기에 도착했어야 했지. 그런데 오기는커녕 연락 자체가 두절됐다. 말 그대로 실종이지."

이미 수색대는 보냈다.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직속 기사단 '로드론'의 부단장과 여덟 명의 기사. 요인 보호, 대인전 그리고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한 그들을 말이다.

하지만 백작은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기사들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작에게 닥친 위험이 상정했던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작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그래서 로드론 기사단장을 비롯한 주력들을 추가로 보낼 계획이다. 백작가에 여러 잡음이 생기긴 하겠지만 감수할 수밖에."

백작가가 가진 전력 중 태반에 가까운 무력. 아무리 자작을 찾기 위한 수색대라곤 하지만 과잉 전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베르덴은 의문이 들었다.

"굳이 의뢰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백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 정도면 베르덴을 고용해 봤자 큰 메리트는 없을 터. 오히려 백작가의 기사들하고 마찰이 일어날 수 있으니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런 베르덴의 물음에 백작이 답했다.

"당연히 없지. 적어도 무력에 대해서는. 하지만 이번 건 섬멸이 아니라 실종자의 수색이다. 그런 이유로 너는 꽤 특이하더군."

"제가 말입니까?"

"그래. 저번에 루튼 코호트를 잡고 난 이후로, 네가 지금까지 해결한 의뢰들을 확인했지. 누구길래 혼자서 전직 상급 용병이 이끄는 용병단을 그리 쉽게 제압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로든마이어 백작은 페일에게 정보를 요청했다.

물론 제공된 정보에는 의뢰 과정에 대해 단편적으로 적혀 있을 뿐, 의뢰인이나 의뢰 장소는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정보상 페일의 규칙이었다.

백작이 말을 이었다.

"로어 울프를 고작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찾아내 토벌. 그리고 페일이 위치 정보를 제공했다고 해도, 도망가는 데 도가 튼 수배범들을 깔끔하게 생포했지. 꽤 신선했다."

요즘 시대에 추적술에 일가견이 있는 마법사는 굉장히 드문 편이니.

로든마이어 백작은 이 애셔란 마법사가 자작을 찾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페일을 통해 그를 지명했다.

베르덴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추적술이랄 건 없는데.'

마력감지로 흔적을 찾아내는 게 전부니까.

물론 이러한 방법은 마법사로서 기피되는 건 알고 있다.

마력감지는 소모되는 마력에 따라 감지되는 영역과 사물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단편적으로 주변을 식별하는 데 쓸 만해도 장기적인 추적에는 적합하지 않다.

마력감지로 추적을 이어 나가는 건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자칫하다간 도중에 마력이 고갈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단점들이 있기도 하고.

그렇기에 마력감지의 숙련도를 깊게 쌓는 마법사는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베르덴은 그 소수에 속했다.

"너는 기사단장이 이끄는 2차 수색대에 합류하게 될 거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니 아마 오늘 저녁쯤이 되겠군. 질문이 있다면 지금 받아 주지."

"독자적으로 움직여도 괜찮습니까?"

"되도록이면 수색대를 보조해 주는 형태로 갔으면 좋겠군. 그러나 여의치 않으면 혼자 움직여도 상관없다. 미리 기사단장에게 말을 해 두지. 대신 성과가 없으면 보수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물론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의뢰에 대한 이야기는 끝. 이제 룬 전문가에 대해 물을 차례였다.

"페일을 통해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룬 전문가 말인가? 미리 준비해 뒀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지만."

백작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집사가 한 사람을 데려왔다.

말끔한 복장을 갖춘 중년의 사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서기관, '페른 로난데르'라고 합니다."

"젊었을 적에는 룬 연구가로 오랜 기간 활동하기도 했으니, 네 용건을 해결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그럼 볼일 보고 저녁에 다시 저택으로 오도록."

그 말을 남기고 로든마이어 백작은 자리를 떠났다.

남은 건 서기관 페른과 베르덴뿐. 물론 호위 기사가 몇 남아 있었으나 그리 거슬릴 정도로 가깝게 있지는 않았다.

의자에 앉은 페른이 물었다.

"룬 전문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지식은 있다고 자부하니, 룬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딱히 물어볼 건 없습니다."

"예? 그럼...."

베르덴이 반지를 꺼내 페른에게 보였다.

보석 하나 없이, 몸체에 복잡한 룬 문자만이 새겨진 회색의 반지. 그것을 본 페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 룬의 반지? 대체 이 귀한 걸 어떻게...?"

"어쩌다 보니 손에 들어왔습니다. 어쨌든 제가 부탁드릴 건 이 룬의 반지를 다시 시동하는 겁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보수는 원하는 대로 드리죠."

로든마이어 백작은 어디까지나 룬 전문가를 소개했을 뿐, 페른을 설득해 협조를 구하는 건 베르덴의 몫이다. 납득할 만한 정도의 보수라면 마땅히 지불할 생각이다.

페른은 룬의 반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룬의 반지를 재시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별도의 재료조차도 필요가 없죠. 그리고 백작 각하께서도 협조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그러니까 보수는 필요 없지만... 그 반지, 좀 자세히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페른에게 룬의 반지를 건넸다.

그가 이리저리 반지를 들여다보는 동안, 베르덴은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마탑에서 가져온 룬의 반지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기에 빼앗으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지만, 그렇다고 백작가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반지의 관찰을 끝낸 페른.

그가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 룬 문자의 배열... 혹시 어떤 마법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베르덴이 가진 룬의 반지에 부여된 것은 바로 '감각'.

착용자의 감각을 전반적으로 강화해 주는 효과인데, 그런 간단한 설명과 달리 그 효용성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룬 문자의 해석에 따르면, 이 반지의 명칭은 '엑시드(Exceed)'. 그리고 여기에 새겨진 룬 문자의 배열은 '고등(高等)'으로 분류된 것들 중 하나로 보입니다. 일반적인 룬 문자와 궤를 달리하는 효과를 착용자에게 부여하죠. 하지만 그렇기에... 이 반지를 시동하는 건 절대로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육체의 부담 때문입니까?"

"알고 계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재시동한 룬의 반지를 착용하면, 착용자의 육체에 룬 효과가 각인이 됩니다. 평범한 반지처럼 손가락에서 빼낼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착용자의 임의대로 룬 효과를 조작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 엑시드라는 룬의 반지는 상시 발동형. 착용한 순간부터 감각이 강화된다. 만약 그 강화된 감각을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신체의 모든 감각이 뒤섞일 겁니다. 제대로 서 있기는커녕 기절과 각성을 반복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반지를 착용한 손가락을 통째로 잘라야 합니다. 감각을 회복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구요. 자칫 평생 감각 장애를 앓을 수도 있습니다."

베르덴은 마법사.

아무리 육체를 단련했다고 해도 기를 깨우친 자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몸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그렇다면 육체가 아닌 마력회로에 직접 각인해 주시죠."

"...!!"

페른이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그 방법을... 아, 아니. 아무튼. 그건 전자의 경우와 비교하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실패한다면 손가락이 아닌, 한쪽 팔을 잘라 내야 할 겁니다. 마력회로의 손상은 당연하고요. 3위계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결코 그 정도로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알고 있다. 마탑에는 갖가지 정보가 가득하니까.

애초에 몰랐다면 마탑의 보물고에서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덴의 위계는 3위계가 아니라 4위계 중위.

최소한의 기준은 넘어섰으니 남은 건 베르덴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강화된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당연히 있지.'

이건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일 뿐.

지금까지 이루었던 것과 앞으로도 이뤄야 할 것을 생각하면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다.

베르덴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페른이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하지?'

로든마이어 백작으로부터 룬에 대해 도와주라고 듣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에 없었는데.

실패한다면 당연히 의뢰는 무산될 것이다. 그 책임에서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해 보고 싶었다.

고등의 룬 문자를 시동하는 건 삶을 통틀어 이번이 두 번째며, 마력회로에 직접 각인하는 건 최초였으니. 룬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으로서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결국 페른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후우. 심호흡을 한 페른이 베르덴에게 반지를 끼웠다.

그러곤 반지에 새겨진 룬 문자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대화가 아닌, 오로지 마법을 위한 언어.

그 뜻은 룬에 대한 지식이 얕은 베르덴은 알 수 없었다.

자연에 퍼져 있던 마력이 집결한다. 룬에 반응한 것이다.

그렇게 모인 마력이 서서히 반지에 스며들더니 룬 문자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베르덴의 몸속에서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베르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고, 페른은 룬의 반지를 깨우는 데 더욱 집중을 가했다.

그렇게 마력회로 쪽의 통증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베르덴의 감각이 강화되었다.

시각, 촉각과 같은 오감.

움직임을 지각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평형감각.

인간이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내장감각.

그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이 느껴지는, 마치 마력감지를 펼쳤을 때와 비슷한 느낌.

다만, 그 범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어지럽다.

시야가 흔들린다.

선선한 바람은 피부를 찌르는 듯하고, 페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혈관에 흐르는 피와 장기의 움직임마저 신경을 자극한다.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

'그렇다고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베르덴이 마력을 움직였다.

심장에 있던 방대한 마력이 마력회로 전체로 뻗어 나갔다. 자리를 벗어난 감각들이 마력에 강제로 이끌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뒤엉킨 감각이 풀어지자, 피잉──── 뇌리가 번쩍이며 베르덴은 고개를 떨궜다.

깜짝 놀란 페른이 다급하게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평온한 목소리.

고개를 든 베르덴의 눈동자에는 마법사답지 않은 날카로운 기세가 담겨 있었다.

* * *

로든마이어 백작의 저택, 2차 수색대로 엄선된 기사들이 군마를 이끌고 집결해 있다.

로드론 기사단장 '발칸'과 그 기사단의 마법사인 '클라크'가 서로 대화를 나눴다.

"방금 연락이 들어왔다. 1차 수색대의 소식까지 끊긴 것 같더군."

"부단장까지 말입니까? 설마...."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 부단장이니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거겠지. 수색 도중 교전을 했다든가, 그 이상의 위험에 처해 있다든가. 어찌 됐건 우리는 최단 시간 내에 자작님과 수색대를 찾아내는 게 관건이다."

자작이 실종된 위치는 카제르단 능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갈 생각이다. 극도로 훈련된 기사들과 군마의 체력으론 문제없다.

그때, 클라크가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런데 백작 각하께선 무엇이 부족해서, 고작 3위계 마법사를 고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상급 용병을 처리했다고 하지만, 여기 수색대 중에 그 정도도 못 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해도 대부분 그렇겠지. 아마 각하께선 전력보단 능력에 의미를 두신 걸 거다. 추적술에 능한 마법사라고 했으니... 어쩌면 그 방면에서는 우리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그럴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클라크는 영 못마땅했다.

그는 백작가의 마법사로 자부심이 가득했으니까. 얼굴만 번지르르한 마법사 따위에게 좋은 생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뭐,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보아하니 준비는 끝난 모양이니 서둘러 출발하도록 한다. 기사들에게 전해라."

48화 백작의 의뢰 (1)

1차 수색대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 베일론 자작은 카제르단 능선 아래에 있는 마을을 나선 이후에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수색대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2차 수색대가 향할 곳은 당연히 마을밖에 없다. 거기서 필요한 단서를 찾은 다음에 신속하게 움직일 계획이었다.

베르덴은 기사 한 명과 동승했다.

백작가에서 특별히 훈련한 군마라 그런지, 속도가 비행 마법을 쓴 것보다도 빨랐다. 그 흔들림은 승마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긴장을 놓으면 튕겨 나갈 정도.

'그런데 이 마법사는 대체 뭐지?'

기사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본래라면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애셔란 마법사는 어딜 잡기는커녕 아예 거꾸로 앉은 채,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떨어지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마법사라고 했으니 어떤 마법이나 매직 아이템을 사용한 거겠지.'

기사는 관심을 끊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베르덴은 주변을 바라보며 룬의 반지, 엑시드의 효과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게 고등으로 분류된 룬 문자 배열인가.'

모든 감각의 강화.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도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식별할 수 있으며, 지금처럼 말을 타는 도중에도 한결같이 육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등 느껴지는 세상이 달라졌다.

마법의 정밀도나 반사 신경 또한 마찬가지.

엑시드를 마력회로에 각인함으로써 베르덴은 마법적인 능력뿐만이 아닌, 인간 자체로서 한 단계 성장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전에서 얼마나 유용할지 기대되는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맥 바로 아래에 있는 목책을 두른 작은 마을.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근육질의 군마를 본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수군거렸다.

"흩어져서 자작님과 수색대와 관련된 단서를 찾는다. 셋은 말을 지키고, 나머지는 2인 1조로 움직여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신호탄을 터뜨리도록."

"예, 단장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사단장 발칸이 홀로 남은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자넨 나하고 같이 가지."

"알겠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되도록 수색대에 협조해 달라고 했으니, 굳이 지금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발칸과 함께 마을을 거닐며, 실종자들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성과는 있었다.

잠시 후, 기사들이 들은 정보를 한데 모았다.

"숲속에 망가진 마차가 한 대 있다라. 특징을 들어 보니 베일론 자작님이 타고 가셨던 마차인 걸로 보이는군."

"1차 수색대도 마을에 말을 맡기고 그곳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현지인들이 겁을 먹어 안내해 줄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 복잡한 위치는 아닌 것 같으니 찾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알겠다. 우리도 마을에 말을 맡기고 전부 도보로 이동한다."

위치가 숲속이니 군마를 타고 가면 오히려 기동성이 떨어질 터. 감히 백작가의 군마를 건드릴 멍청이는 없을 테니,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도 문제는 없다.

그렇게 베르덴과 기사들이 마을을 나서기 직전, 지팡이를 든 노인이 길을 막아섰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발칸이 묻자, 노인이 지팡이로 마을을 주욱 가리켰다.

"나는 여기서 무려 70년을 살았네. 이곳 카제르단 능선 일대는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훤히 꿰고 있지. 위험한 아인종이나 마수도 없는, 내가 나고 자란 이 마을은 아주 평화로웠어. 그런데... 그런데, 최근부터 숲이 이상해졌네."

"숲이?"

"숲이 소란스럽네. 새, 사슴, 멧돼지, 고블린 할 것 없이 생명을 가진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단 말이네. 마을 누구도 그걸 아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나만큼은 느낄 수 있지."

노인이 몸을 떨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숲이 울고 있네, 죽음을 앞에 둔 아이처럼. 그러니 휩쓸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이로울 걸세. 사라진 사람들은 잊고 말이야."

노인은 몸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발칸이 입을 열었다.

"...출발하지.'

고작 마을 노인의 몇 마디 말로 실종자들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기사들의 가슴 한편에는 뭔지 모를 꺼림직함이 남아 있었다.

* * *

기사들이 대형을 이뤄 일제히 숲을 내달렸다.

기운으로 신체를 강화한 그들의 속도는 말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마법사인 베르덴과 클라크는 비행으로 하늘을 통해 움직였다.

'숲이 울고 있다라....'

베르덴은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숲을 내려다봤다.

산에 빼곡하게 들어찬 침엽수들. 고요한 분위기는 여타 숲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엑시드가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베르덴의 감각에는 기묘한 느낌이 잡히고 있다.

뒷목이 서늘한 게, 오싹하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숲에 뭔가 있다.'

베르덴은 그렇게 확신했다.

곧이어 부서진 마차가 있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발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일이 심각해졌군."

대체 무엇에 습격당했는지 마차의 절반가량이 사라져 있었다.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걸 보면 폭탄이나 마법인 것 같은데... 근방을 수색해 봤지만 마차의 잔해 외에는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 흔적이 없다니.... 애셔, 백작 각하께 듣기로는 마수나 현상 수배범을 추적해 처리했다던데, 그 추적술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니까.

<마력감지>

베르덴이 마력을 퍼뜨렸다.

그러자 클라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 뭔가 했더니 마력감지로 추적을 한다고? 마법사로서 기본도 못 배웠나? 그리고 그런 식으로 범위를 넓히면 마력이 순식간에 고갈될 텐데, 그때 습격이 오면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클라크, 그만."

"아니, 단장님도 아시잖습니까? 1위계인 마력감지로 저희조차도 찾지 못한 흔적을 발견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단장님!"

"백작 각하께선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애셔를 고용하셨다. 마력감지로 인해 마력 고갈이 일어나면 우리가 챙기면 그만일 터. 할 말이 있으면 추적을 끝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발칸은 클라크의 불만을 일축했다.

베르덴은 그들을 무시하고 마력감지의 범위를 더욱더 넓혔다. 감각이 강화된 탓인지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흘려보낼 필요 없이 대부분 읽어 내는 게 가능했다.

'...이건?'

실종자의 흔적을 찾아낸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주목한 건 숲 그 자체. 그중 몇몇 나무에게서 기이하리만치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이건 일반적인 식물에게서 느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찾은 건가?"

"설마 찾았을 리가...."

"찾진 못했지만 다른 걸 발견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스태프를 든 베르덴이 앞장섰다.

비행 마법을 써서 기민하게 나무 사이를 지나쳐 가는데, 발칸이 봐도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뛰어난 반사 신경과 마법 조작 능력이야. 비행 마법 하나만큼은 클라크보다 우수하겠어.'

수색대가 베르덴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베르덴이 멈춰 섰다. 그제서야 발칸은 숲에 만연한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나무를 노려보던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뿌리가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발칸을 덮쳤다.

"역시 트런트였나."

서걱!

섬광이 번쩍이더니 나무의 뿌리와 몸통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백작가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만큼 재빠른 검격이었다.

트런트를 베어 낸 발칸이 혀를 찼다.

"이런 대낮에 트런트라. 이해가 안 되는군. 트런트라는 나무 형태의 이형종은 햇빛을 싫어해 어둡고 습한 지역에서만 발생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 근방에서 흘러들어 온 건가?"

베르덴이 물었다.

"이 근방이라면?"

"모르나? 공국에서 꽤 유명한데 말이야. '악마의 숲'이라고 모험가 길드와 공국에서 법적으로 접근을 금지한 숲인데, 한낮인데도 어두워서 트런트가 자생하기 좋은 장소라고 하더군."

'악마의 숲?'

들어 본 적이 있다.

브리엔테에서 만난, 방주에서 온 리스너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트런트 때문에 자작님과 1차 수색대가 실종됐다고 하기엔 이유가 빈약하다. 부서진 마차의 흔적을 봐도 그렇고.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

그때,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베르덴과 발칸이 거의 동시에 반응했으며, 뒤따라 클라크와 기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와라."

발칸이 난폭한 기세를 내뿜었다.

숲 안쪽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윽고 숨어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넌?"

그는 실종된 1차 수색대 기사 중 한 명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