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먹구름 사이로 형형한 달빛이 내리비친다.
높은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우거진 숲속.
샬럿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등 뒤에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아몬?'
이름일까?
의아함도 잠시였다.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아주 잠깐의 휴식, 그리고 겨울철의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 주었다.
샬럿이 다급히 외쳤다.
"도망쳐요!"
상대는 모험가로 보였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모험가라고 해도 혼자 오크 수십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엔 역부족일 터.
하지만 왤까?
그를 보자 묘하게 안심이 됨과 동시에 그리운 느낌도 들었다.
"후우…."
샬럿의 조언에도 그는 듣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강철 부츠가 눈밭을 짓밟는다.
낡고 허름한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장신의 키 때문인지 발걸음이 묵직해 보였다.
「겁먹지 마라! 우리는 위대한 전사들이다!」
오크들이 주춤하기를 잠시, 무기들을 움켜쥐었다.
「전사의 격을 보여-!」
아몬이 발을 뗐다.
쿵-!
쌓여진 눈이 비산하며 시야가 가려진다.
오크들은 멈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허리를 낮춘 아몬이 그들 사이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전사의 격이 어떤 건지."
인간의 눈빛이라고 하기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황적색 눈동자.
"똑똑히 봐라."
워로드 스킬.
[절단].
절단력을 증폭시키는 스킬.
묵빛 대검이 휘두른다.
대검을 휘두르자 그 주변이 휘몰아친다.
「마, 막아-!」
오크들이 방패, 손도끼, 장검 등으로 자신의 우측에서 휘둘러지는 대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막아 세웠던 병장기들은 차례차례 과자 부스러기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대검은 병장기들을 꿰뚫고 오크들의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갈라 버렸다.
샬럿은 눈을 부릅떴다.
'일격?!'
4마리의 오크가 일격에 두 동강이 났다.
아몬의 사거리에서 벗어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크들이 움찔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죽은 동료들을 내려다봤다.
'뭐냐…?'
'방금 병장기들을 부쉈다!'
그냥 부순 것도 아니다.
오크들의 자랑인 근력을 압도한 일격이다.
아몬이 고개를 들어 오크들을 노려봤다.
「....」
오크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싸울 의지가 없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무기들을 들어 올리며 물러섰다.
그들은 영리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을 상대할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아몬도 그들을 따라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 급한 것은 퀴리 영지이니까.
아몬은 힐끗 샬럿을 쳐다봤다.
샬럿이 움찔했다.
"저, 저기…."
"다쳤나?"
"…네? 아, 네, 다리를 조금."
샬럿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칠 듯한 공복이 찾아왔고, 잊고 있었던 겨울철 추위에 뼈가 아려왔다. 피로감에 잠에 빠져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쉬어서는 안 된다.
빨리 퀴리 영지로 복귀해야 했다.
"그런가."
아몬은 샬럿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자, 잠깐만요. 무엇을…!"
샬럿이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 아몬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른 손으로 양 무릎을 감싼다.
그리고 들어 올렸다.
"...!"
샬럿은 흠칫하며 아몬을 올려다봤다.
이 장면.
로맨스 소설에서 읽으며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공주님 안기!'
샬럿이 아몬을 바라볼 때, 그가 무심히 말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위험할 테니."
***
샬럿은 옛날부터 동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험 이야기.
그것도 위험에 빠진 공주님과 그걸 구하러 오는 백마 탄 왕자님 이야기다.
뻔한 클리셰부터 뻔한 엔딩까지.
하지만 샬럿은 그러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좋았다.
낭만과 로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로망의 첫 대상자가.
'아서….'
망나니 황자라고 불렸던 아서였다.
13년 전, 10살이었던 그녀는 황가의 사냥 대회에 참관했었다.
그때 혼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꾀를 내어 혼자 숲속에 있었고.
작은 새끼 늑대에게 위협을 받았다.
그때 도와준 게 아서였다.
샬럿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맹세했었지.'
-아서! 다음엔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이 샬럿 엘스포드가 맹세할게!
4황자 아서를 지키겠다고.
그다음부터, 그녀는 강함에 집착하였고, 빠르게 성장했다.
자신의 또래의 사내들과 다수로 겨루어도 거뜬히 이겨 냈다.
강함에 있어 샬럿을 따라올 자는 없었고,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보기 드물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위협에 빠진 자신을 지켜 주게 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건만.
어느덧 23살이 되고, 두 번째 경험을 겪게 되었다.
그 대상자가.
"몸을 데우는 게 좋을 거다."
눈앞에 있는 모험가 사내였다.
모피 망토를 벗어 살럿의 어깨에 둘러 주고, 장작불을 피워 주었다.
다정함.
그 따뜻한 온기에 샬럿은 안도감을 느꼈다.
"먹어 둬라."
그가 내민 건 육포였다.
"고, 고맙습니다."
샬럿은 감사를 뜻하며 육포를 받았다. 그리곤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 그리고 많이 들어 본 듯한 목소리다.
"아서?"
아몬이 샬럿을 쳐다보자, 샬럿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착각이겠지.'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뭐랄까, 무겁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있다.
거친 모험가나 용병과는 다른 느낌이다.
게다가 오크를 쓸어버릴 실력자인 만큼, 아서와 동일 인물일 리가 없었다.
샬럿은 육포를 입에 넣어 씹었다.
'맛있어.'
사실 맛은 평범했다. 다만, 오랜만에 맛보는 식량이다.
그녀가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삼키는 순간.
'뭐지…?'
피로와 함께 마나가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걸 느꼈다.
'착각… 인가?'
오랜만에 먹는 달곰한 식량에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따듯한 망토와 간소한 식량. 은은한 불빛과 장작 타는 소리.
샬럿은 점차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설마 모험가가…. 이런 깊숙한 곳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샬럿은 말을 하면서도 하품을 했다.
졸음을 참아 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퀴리 영지로 향하던 중이었다."
"퀴리 영지요?"
샬럿의 날카로운 눈매에 힘이 풀렸다.
피로에 의한 몽롱한 시선이 계속 깜박거려진다.
"…어디서 오시는 겁니까?"
"리바이트 영지."
"…저는 퀴리 영지를 지나온 것이로군요."
샬럿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퀴리 영지를 지나친 모양이다.
"졸린가?"
"네, 하지만…. 잘 수는…."
"괜찮다. 1시간 정도 자도록."
낮은 속삭임에 샬럿은 정신이 희미해지며 눈이 감겼다.
"푹 쉬어라. 샬럿 엘스포드."
'내…이름을…?'
"...."
샬럿은 조용히 기절했다.
정신을 잃은 샬럿을 보며 아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아이템 창에서 포션을 꺼냈다.
'눈치챘나?'
샬럿이 눈치채면 위험한데 말이지.
아몬은 혀를 내둘렀다.
샬럿은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듯했지만, 아서에게만은 정석대로 행동하는 듯했다.
그럼 자신의 행동 범위가 황실에 알려질 위험성이 있다.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줄까?'
그리고 좀 더 분위기를 무겁게 잡는 것도 좋겠지.
'나중에 변조 마법이라도 배워야겠군.'
아몬은 그녀의 다리를 살폈다.
금속 부츠를 벗겨 내자,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잔뜩 생겨나 터져 있고 피부는 헐어 있었다.
'끔찍하군.'
게임상에서도 이렇게 생생하게 재현되지는 않을 텐데.
샬럿이 얼마나 오크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건지 알 수 있었다.
'카리스의 미끼 명패를 준 게 정답이었다.'
아몬이 숲속에서 샬럿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얼마 전 샬럿에게 귀수산에 대한 정보를 말하며 부적으로 명패 하나를 주었다.
[카리스의 미끼 명패]는 원래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몬스터의 사체에 명패를 숨기고, 그걸 꿀꺽한 몬스터를 추격할 때 사용한다.
'운이 좋았군. 샬럿 엘스포드.'
샬럿은 운이 좋았다.
그녀의 근처에 아몬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감지할 수 있었다.
만약 정반대 방향으로 갔다면 그녀는 오크들의 먹이가 되었을 터.
과연, NPC이라도 전설적인 영웅은 운도 격이 다른 모양이다.
운명이 그녀를 지켜 준 거겠지.
아몬은 포션을 그녀의 다리에 바른 뒤, 기절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마저 흘려보냈다.
그녀의 창백했던 안색이 되돌아왔다.
'체력은 회복되었을 터.'
다만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여전히 누적되었을 것이다.
1시간 정도는 재워도 될 터.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아몬은 대검을 아이템 창에 넣고 샬럿을 등에 업었다.
'퀴리 영지로 간다.'
***
칠흑 같은 어둠 속.
샬럿은 포근한 잠에 빠져 있었다.
-네?
-약혼 말이야. 정략혼보단 훨씬 어감이 좋잖아?
-....
황태자 루시안. 그가 오래전 제안했었다.
-적어도 정략혼보단 가볍게 진행할 수 있어. 파기도 정략혼보단 더 쉽게 이룰 수 있고. 나는 엘스포드 대공가의 힘으로 형제들을 견제하고. 넌 슈하림 황가의 힘으로 롬 왕국의 왕실을 보호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아서를 지켜 주마.
-....
-그러니 샬럿. 나의 것이 되어….
쾅-!
"...!"
갑작스러운 폭음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쾅-! 쾅-! 쾅-! 쾅-!
거대한 폭음이 들려온다.
그것은 대포의 폭발음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함성.
코끝을 자극하는 타는 냄새.
샬럿은 또렷해진 시야를 앞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수풀 너머로 퀴리 영지가 보였다.
'퀴리 영지?'
저 멀리 장벽 위에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창을 높이 드는 게 보인다.
쾅-! 쾅-!
머스킷의 총성, 마법 대포의 포화 소리.
챙-! 챙-!
"와아아아-!"
병장기가 부딪치고 사람이 절규하며 울부짖는 소리까지.
「쿼오오오오오-!」
또한 괴물들의 포효도 들린다.
눈을 맵게 만드는 시커먼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모든 게 생생했다.
꿈은 아닐 터.
잠에서 깨어난 샬럿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인지하기 위해 고개를 틀고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을 업어 준 사내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겁니까?"
"깨어났나? 어떻게 된 거긴, 퀴리 영지에 도착한 거지."
"...."
"다만,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군."
아몬… 이라고 했던가?
샬럿은 자신과 사내가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언덕 아래에 수천 마리의 오크 떼가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조잡한 나무들을 엮어 만든 투석기에 돌을 올려 던지고 있었다.
돌덩이들은 퀴리 영지의 장벽을 가격했다.
"공성 병기…?'
혹시나 소리가 샐까 봐 샬럿은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오크가 어떻게 공성 병기를…?'
투석기뿐만이 아니다.
사다리와 공성탑도 보였다.
또한 충차를 이용해 퀴리 영지로 입성할 수 있는 단단한 외문을 공격하기도 했다.
"막아-!"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민병대가 활과 석궁을 외문 근처에 있는 오크들에게 쏘았지만, 단단한 강철 투구는 화살과 볼트를 튕겨 냈다.
간간히 오크들의 조잡한 나무 갑옷이 관통당할 때나 그나마 오크들이 사납게 울부짖었을 뿐, 두껍고 질긴 가죽 때문에 그마저도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었음에도 놈들은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광폭화]로 인해 더욱 괴력이 상승했다.
충차로 인해 외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가…. 얼마나 잔 겁니까?"
"1시간 정도. 몸은 어떻지?"
샬럿은 팔을 들어 어깨를 돌려보았다.
"가벼워…?"
몸이 가볍다.
개운하다.
수면을 취한 것 치곤, 육체의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최상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포션 효과가 발휘된 모양이로군."
아몬은 샬럿을 내려놓았다.
샬럿은 두 발로 바닥을 지탱하며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아프지 않아?'
발목을 접질렸던 것 같았었는데, 회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떻게?
"포션… 치료를 한 겁니까?"
"그래."
"그 비싼 것을…."
샬럿은 아몬을 쳐다봤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
아몬이 퀴리 영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보였다.
샬럿도 분위기를 파악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몸을 낮추고 아몬과 나란히 앉아 상태를 살폈다.
"수가…. 엄청나군요."
퀴리 영지의 앞에만 해도 어림잡아 수천 마리의 오크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 숲속엔 안광을 번뜩이는 오크들이 존재했다.
"일부일 뿐이다."
아몬의 시선이 장벽 위로 향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몇몇의 오크가 마구 날뛰자, 민병대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군사 훈련을 받은 에인헤르들이 대신 막아섰지만, 그마저 역부족.
기사들이 나서야 겨우 제압 가능했다.
샬럿이 말했다.
"영지에 가야 합니다."
대부분 지휘 체계가 엉망이다.
지휘관이 부족해서이리라.
"동감이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 장벽 근처에 빠르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 같다만."
"장벽 근처에 빠르게…. 말입니까?"
아몬은 샬럿을 힐끗 쳐다봤다.
샬럿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건틀렛을 벗고는 손가락을 깨문다.
뚝뚝 떨어지는 피로 바닥에 룬을 그려 나갔다.
"그건?"
"정령 소환술입니다. 원래라면 재주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라 마나를 아끼기 위해 소환 스크롤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만, 이미 다 써 버린 직후라."
그녀가 떨어뜨린 피들이 서리가 끼며 얼어붙는다.
이윽고 주변 안개가 서서히 모여들며 얼음 조각들이 생겨났다.
밑바닥부터 맹수의 발바닥이 생겨나며, 우람한 덩치와 용맹한 갈기가 달린 얼음 사자가 소환되었다.
"얼음의 정령인가?"
"얼음의 정령 '샴'입니다."
샬럿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사자 위에 올라탄 뒤 손을 뻗었다.
"아까 말씀했던 것, 정말로 가능합니까?"
"물론. 나에겐 기마 스킬과 특성도 있으니."
"스킬? 특성?"
샬럿이 의아해했지만, 아몬은 얼음 사자 위에 올라탈 뿐이었다.
어느새 아몬이 샬럿을 감싸 안은 듯한 자세가 되자 샬럿은 흠칫했다.
그녀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럼 가도록 하지."
그럴 틈이 없었다.
***
쿵-!
오크들이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쿵쿵쿵쿵-!
육중한 맹수가 인간 둘을 태우고 가파른 언덕에서 질주해 달려오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 있던 오크 군세가 멍하니 있기를 잠시,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입을 벌렸다.
「콰와와와와와와와-!」
「진을 펼쳐라!」
오크들이 대열을 이룬다.
빈틈없이 일렬로 정렬. 허리를 숙이고 방패를 어깨에 기댄다.
길고 조잡하게 만들어진 창들을 치켜들었다.
"...!"
샬럿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틀어 뒤에 있는 아몬에게 외쳤다.
"정면으로 들어간단 말이었습니까!?"
"외문은 두 곳이다. 다른 곳은 포위된 상태지. 지금 상태로는 오크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순 없어. 오히려 싸움에 지휘 체계가 혼잡한 오크 떼에게 달려가는 게 좋다."
"혼잡한 지휘 체계?"
샬럿은 앞을 바라봤다.
「자세 낮춰-!」
오크 지휘관의 외침.
오크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춘다.
이로써 하체에 힘이 실린다.
「파이크-!」
치켜든 창날을 내리며 앞으로 겨냥했다.
「아처-!」
그 뒤로 오크 궁병들이 도열했다.
방패와 창을 이용한 고슴도치 진형. 그 뒤에 배치된 궁병까지.
인간들이 기병대를 대항할 때의 진형과 흡사했다.
"저게 말입니까!"
"잠시 조종하지."
아몬은 얼음 사자의 갈기를 잡았다.
「쿼어어어어어! 쏴-!」
오크들이 화살을 뿜어냈다.
정면에서 빗발치는 화살들.
아몬은 투구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영광의 질주]"
기마 스킬, 돌격력을 30% 일시적 상승. 체력의 10%가 강화된 방어막 일시적 생성.
샬럿은 자신을 품에 안은 아몬의 눈빛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걸 느꼈다.
얼음 사자에 황금빛 마나가 깃들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샬럿은 눈을 부릅떴다.
'뇌 속성?'
얼음 사자의 발끝과 온몸에 황금빛 번개가 흐른다.
탑승자인 샬럿과 아몬을 보호하듯 번개가 보호막처럼 감쌌다.
또한 얼음 사자의 뜀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맹렬한 질주가 시작되었다.
빗발치는 화살들이 번개에 의해 튕겨 나갔다.
간혹 보호막을 뚫고 날아왔지만, 아몬의 갑옷에 막혀 버렸다.
샬럿이 움찔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달랐다.
분명 자신의 소환수이건만.
지금 조종하는 건 다름 아닌 아몬이라는 사내였다!
질주하던 얼음 사자가 뛰어올랐다.
얼음 사자가 향한 곳은 오크들이 진을 친 파이크 진형의 한가운데.
"뭉개라."
아몬의 한마디를 끝으로.
얼음 사자가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제24화
-플레이어는 대수림에서 밀려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자유도가 높은 오픈 월드이기에 인류의 편을 들어도 되고, 반대로 인류를 몰락시켜도 됩니다. 플레이어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플레이어의 힘은 상당히 강합니다. 일반 NPC. 그다음 마수. 그다음 몬스터 별로 강함이 존재하며. 그들을 훨씬 뛰어넘는 강함을 가진 마족과 플레이어, 전설적 영웅들이 동급. 그리고 그들보다 월등히 강한 보스몹. 이렇게 힘이 나뉘어 있습니다.
-게임은 역시 속도감이 있어야겠죠. 그래야 타격감이 있고 무쌍을 위한 액션을 찍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드한 난이도도 좋지요. 하지만 그건 적의 물량과 보스몹의 압도적인 힘으로도 난이도 조절이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전투 퀄리티가 존재합니다.
-게임상, 제일 중요한 요소는 컨트롤이고, 두 번째는 특성, 그 세 번째는 레벨과 스킬 등이지요. 그렇게 탄생한 게 전투 퀼리티입니다. 바로 플레이어의 '컨트롤'에 따라 힘의 격차를 단숨에 좁힐 수 있죠. 컨트롤도 고인물인데 특성과 스킬이 뒤받쳐 준다면? 그럼 말 다 한 겁니다.
-플레이어는 컨트롤과 특성에 따라 능력만 갖추어진다면, 저렙이라도 고렙 몬스터를 사냥 가능합니다. 어쩌면 일당백 또한 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물론, 저렙 플레이어가 수천, 수만을. 그리고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고렙 보스몹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요! 하하하!
=[판타지 월드] 디렉터의 말=
***
샬럿은 눈을 부릅떴다.
갈고리 같은 맹수의 발톱. 얼음 발톱과 더불어 번개 속성이 더해졌다.
뛰어오른 얼음 사자를 향해 오크들이 창을 내질렀지만.
창날은 단단한 얼음 사자의 가죽에 부서졌다.
오히려 번개가 몰아치며 오크들의 몸에 내리꽂혔다.
「…몸이…. 안 움직여!」
「뭐야…. 몸이…. 느려진….」
오크들의 몸에 서리가 깃들고 번개의 잔해가 남아 근육을 수축시켰다.
마나에는 여러 속성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마나의 속성에 따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화 속성은 불꽃을, 수많은 속성 중 가장 파괴력이 높다고 알려진 마나다.
풍 속성은 바람을, 사용자를 빠르게 만들거나 혹은 속도감 있는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뇌 속성은 번개를, 피격자의 신체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
빙 속성은 얼음을, 상대를 둔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샬럿의 앞에 존재하는 오크들은 뇌와 빙, 두 개의 마나 영향으로 마비와 둔화에 걸려 있었다. 두 속성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훌륭한 조합이야.'
샬럿은 환상적인 조합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공격 준비. 뚫는다."
"네? 아, 넵!"
샬럿이 허리춤에 있는 샤벨을 꺼내 들었다.
아몬은 아이템 창에서 대검을 소환해 들어 올렸다.
「막아-!」
사방에서 오크들이 달려들었지만. 그걸 얼음 사자가 몸으로 튕겨 냈다.
좌우로는 아몬과 샬럿이 대검과 샤벨을 휘두르며 오크들을 베어 냈다.
「크아아아악!」
오크들도 반격을 시작했다.
창날이 날아오고, 도끼도 던져 왔다.
얼음 사자를 감싼 방어막이 깨져 몸뚱이에 상처가 났다.
날아온 화살이 드워프의 갑옷을 통과하여 어깨에 박혔다.
아몬이 화살을 쏜 상대를 노려보자 오크들이 경직되었다.
녹색 아인들에게 공포를 심어 준다는 [녹색 학살자] 특성 때문이다.
오크들은 쉽사리 아몬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아몬이 대검을 휘둘러 오크 하나의 머리를 깨부쉈을 때.
그의 몸에서 휘황찬란한 황금빛 오라가 터져 나왔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박혀 있던 화살이 뽑힌다.
샬럿은 놀란 눈빛으로 아몬을 바라봤다.
따스하고 눈부신 황금빛 오라.
마나가 요동치며 아몬의 다친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샬럿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적의 진형 한가운데를 치고 들어와서는 황금빛 마나를 뿜으며 대검을 휘두르는 사내.
'이 사내의 정체가 도대체 뭐길래…!'
"뭐야?!"
"지원군?"
"아니야! 한 명이야! 아니, 두 명!"
"누구야? 설마 슈하림 황실에서 보낸 영웅이…!"
장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에인헤르 중 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샬럿 님?!"
얼음 사자를 탄 채 질주하며 오크 진형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남녀.
"살아 계셨다니!"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가 외쳤다.
"마법사들! 공성용 대포를 준비하도록…! 머스킷 부대 도열!"
머스킷을 든 에인헤르들이 장벽 앞에 일제히 정렬했다.
마법사들이 대포를 옮겨 장벽 난간에 걸쳤다.
"마법 폭격-. 쏴─!"
격발음이 울려 퍼지며 얼음 사자 양 좌우로 폭격이 쏟아졌다.
오크들이 터지며 그 누구도 아몬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사다리를 준비하라!"
밧줄과 판자를 엮은 사다리를 장벽 아래로 던진다.
아몬과 샬럿이 수십 마리의 오크들을 격퇴하며 앞쪽을 바라봤다.
"여기! 여깁니다!"
장벽에 밧줄 사다리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얼음 사자가 장벽에 가까워졌다.
그 뒤를 오크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장벽 앞에 서 있던 오크들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뛰어!"
"날아!"
아몬과 샬럿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얼음 사자가 뛰어올랐다.
그 순간 얼음 사자의 배에 오크들의 창과 화살들이 박히더니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결국 소멸하고 만 것이다.
소멸하는 얼음 사자를 밟고 뛰어오른 아몬과 샬럿.
샬럿은 허공에서 사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짧아!'
길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사다리 길이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아몬이 그런 샬럿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어?"
"후우-!"
아몬이 숨을 들이켰다.
"잠-!"
그리고 있는 힘껏 샬럿을 휘어잡아 던졌다.
샬럿이 장벽 위로 날아가, 난간에 걸쳐졌다.
'무슨 힘이…!'
샬럿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몬은 장벽에 대검을 박아 거리를 조율하고, 사다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사다리를 잡고 올라오고 있었다.
샬럿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몬에게 손을 뻗었다.
"다행입니다! 이제 안전…."
콰직-!
샬럿과 아몬의 사이로 도끼날이 날아와 꽂혔다.
오크가 날린 도끼였다.
순간 밧줄로 이어진 사다리가 끊겼다.
아몬은 눈을 부릅떴다.
몸이 허공에 떠 아래로 추락한다.
'이런!'
밑에는 오크들이 우글거린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오크를 떼거지로 상대하는 건 무리다.
아몬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른 생존 루트를 생각할 때.
누군가 아몬의 손을 움켜잡았다.
샬럿이 몸을 던져 잡은 것이다.
"이런!? 샬럿 님!"
"샬럿 님이 떨어진다! 붙잡아!"
병사들이 급히 손을 뻗어 장벽 아래로 떨어지는 샬럿의 발목을 잡았다.
"끌어 올려!"
민병대들이 샬럿을 올리기 시작했다.
「놈들을 잡아라!」
오크들이 창과 도끼 등을 계속해서 던졌지만, 명중력이 떨어져 맞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막아! 방패! 방패!"
병사들이 난간에 걸치며 방패로 샬럿을 감쌌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아몬과 샬럿은 서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마주 봤다.
"…하, 하하, 하하하하!"
아몬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릴 넘친다. 유쾌하다.
그래, 이게 게임이지! 아니, 이제 게임이 아닌 현실인가?
워로드의 특성을 가진 채, 마법사가 되고, 새로운 모험을 즐긴다.
죽을까 조마조마해 살이 떨린다.
지구에서는, 그리고 게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이런 흔하지 않은 일을 지금 체험하고 있다니!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로군!'
"지금 웃을 때입니까?!"
샬럿이 힘을 주며 아몬을 겨우 끌어 올렸다.
'이 사람은 미쳤어!'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런 멘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샬럿은 질색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
샬럿 자신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퀴리 영지에 입성했다.
***
퀴리 영지에서 떨어진 언덕 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가죽 책을 들고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든다.
「음…. 누구지?」
오크들을 지휘하는 마인.
바힐론 리벨리.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크들이 포위하고 있던 퀴리 영지를 뚫고 2명의 인물이 들어갔다.
그것도 무력이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슈하림 황실에서 보낸 인물들인가?'
소수 정예?
그럼 골치 아프다.
'아니, 그럴 리가.'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했다.
슈하림 황도는 현재 눈보라로 인해 연락이 끊긴 상태.
열차도, 전화 통신도, 전서구도 끊겨 이곳 퀴리 영지에 대해 알 수 없다.
'텔레포트 마법도 못 하게끔 방해하고 있다.'
오크 샤먼들이 영지를 둘러싸 마나의 흐름을 흩트리고 있다.
그렇기에 마나에 민감한 텔레포트 마법으로는 누군가가 안으로 진입하지도 못한다.
'선로도 막아 놓았다.'
얼마 안 가 뚫리긴 하겠지만, 열차 선로도 산사태로 막힌 상태였다.
'리바이트 영지는 도와주지 않을 터.'
지원이 없는 퀴리 영지는 무너뜨리기 쉬운 모래성이다.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걸까?'
며칠 전부터 퀴리 영지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장벽을 보강하고 군대를 소집해 훈련했다. 거기에 새 장비들마저 갖춰지고 공성 병기마저 마련해 두었다.
덕분에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눈보라가 그치고 열차 선로가 다시 연결된다면.
퀴리 영지에 있는 인간들은 무사히 피난에 성공하겠지.
자신의 수년간 세운 계획을, 한순간에 파악한 누군가가 존재한 것일까?
'알 수 없군.'
뭐, 상관없다.
그가 해야 할 건 하나다.
'마족 소환.'
자신을 마인으로 만들어 준 마계의 마족을 이 세계에 소환하는 일.
그리고 퀴리 영지를 소환하는 제물로 점찍어 둔 상태였다.
「군대를 물려라.」
오크들이 마인 리벨리를 쳐다봤다.
「놈들을 지치게 만들 것이다. 다음날, 다시 침공한다.」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뿔 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우웅-!
퀴리 영지를 침공하던 오크들이 서서히 물러섰다.
「천천히 먹어 보자꾸나.」
리벨리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땅따먹기만큼 재밌는 유희 거리도 없었다.
***
"샬럿 경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퀴리 영지의 영주, 세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한은 저택에서 영지 도면을 보고 있었다.
지원이 올 때까지 어떻게 버틸 것인지, 혹은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을 때, 어떻게 영지민들을 피난시킬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 다다른다면 열차를 이용해 대규모 수송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지상은 포위된 상태. 그럼 오래된 지하 선로를 이용하면 된다.
지하 선로는 유지비가 까다로워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얼마 전 후원금으로 재정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보수 작업이 완료될 터.
"네, 그리고 지원 병력이 지금 열차로 수송되고 있다고 합니다. 금일 중으로 산사태를 뚫은 후, 지하 선로를 이용해 들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샬럿 경의 생존. 그리고 지원군이 온다는 희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세한은 밝은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봤다.
"몇 명, 몇 명이나 오는 겐가!"
"그, 그게…."
집사는 엉성한 차림의 갑옷을 입고 장검을 허리에 찬 상태였다.
80이 넘어 은퇴 준비를 하던 그이건만.
이 영지를 지키겠다고 무장한 상태였다.
그래도 예전 군 경험이 있어, 일손이 모자란 만큼 민병대를 지휘하기엔 적합했다.
"몇 명이나? 어디서? 설마 리바이트의 에인헤르들인가? 아니면 슈하림 황실? 모두 정예겠지? 500명? 1,000명?"
기대감에 최소치를 불렀다.
열차로 콱콱 욱여넣어도 최대 수송 인원은 2,000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선로가 무사한 상태로 계속해서 병사를 수송할 수만 있다면.
퀴리 영지를 지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용병과 모험가로 이루어진 60여 명 정도입니다."
"...."
"듣자 하니 피난을 위한 병력이라고…."
세한은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빌어먹을!'
설마 리바이트 영지가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왜? 어째서!
세한은 한탄했지만 사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리바이트 영지에서는 퀴리 영지를 구해 줄 병력이 없다는 걸.
대마법사 프롤론이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여태껏 영지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다.
황제의 명으로 실행된 '대개척지 혁명' 때에도 나간 적이 없었다.
이런 퀴리 영지 따위, 눈여겨보지도 않을 터.
"하,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리바이트 영지에서 피난민을 받겠다고…!"
"…그런가."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피난민을 받아 준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12만의 피난민은 보통이 아니다.
프롤론 공작이 형식상, 영지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 말한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대규모 피난도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는 퀴리 영지에 있는 12만에 이르는 이들이 과연 모두 도망칠 수 있냐는 거다.
'열차와 마법사들의 인력이 부족하다.'
적어도 3주.
그 정도는 버텨야 한다.
그래야 대규모 피난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저희 영지를 후원한 인물이 샬럿 경을 구해서…."
"뭐?"
세한이 고개를 돌려 집사를 쳐다봤다.
"아몬이라는 자가 영지에 입성했습니다."
"아몬? 그리치 가문과 연이 있는 그자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수수께끼의 후원자가 직접 찾아왔다?
"그는 어디에…."
"안 됩니다!"
갑자기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문짝이 뜯겨 나갔다.
"아몬! 그렇게 막무가내로…!"
샬럿 경?
세한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 벽에 장식된 검을 뽑아 들었다.
샬럿이 안절부절못하며 한 사내를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선 사내.
허름한 전신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등에는 묵빛 대검을 짊어진 사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장신의 사내가 쓴 투구 사이로 황금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세한은 그를 보며 굳어졌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의 이름은 아몬."
퀴리 영지의 후원자.
"일부라도 좋다."
그가 지금.
"지휘권을 나에게 양도하라."
지휘권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제25화
이자가 아몬?
세한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영지를 후원한 인물.
그리고 그리치 가문과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세한은 아몬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일까를 몇 번이나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인물이라고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게다가.
"무례하군."
아무리 후원금을 지원했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휘권을 달라 말하다니?
이는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게다가 자신의 권한을 강제로 빼앗겠다는 말투처럼 들렸다.
세한은 장검을 내려놓고는 답답한 목깃을 풀며 불쾌하다는 듯 아몬을 노려봤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함부로 지휘권을 줄 수는 없다."
"그렇군. 그럼."
아몬이 손을 뻗어 세한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집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영주님!"
세한 또한 당황스러웠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춘 인물일 줄 알았건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이야!
세한이 반사적으로 장검을 다시 들려 할 때.
"슈하림 황가의 황명이라면 듣겠나?"
아몬이 세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
세한은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슈하림 황가를 언급한단 말인가!
"…황실과 연이 있나?"
"4황자와는 연이 있지."
"4황자?"
세한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당황해하는 샬럿과 집사. 그리고 아몬이 일으킨 소동으로 병사들도 집무실에 모여들었다.
아몬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다는 것은 분명,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몬의 행동에 당황한 집사와 샬럿이 말리려 하자, 세한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습니까?"
세한은 4황자에 대해서는 모른다.
'황족 존엄법'이 있는 만큼, 3황자 밑으로는 모두 베일에 싸여 있었으니까.
"이거면 되겠나?"
아몬은 품에서 흰 장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새겨진 문양.
세한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이 휘장은…!'
슈하림 황가의 훈장!
그것도.
"로한 그리치…. 후작님의 유품."
대혁명 시대의 영웅, 로한 그리치의 유품이다.
휘장을 알아본 건 세한뿐만이 아니었다.
샬럿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몬을 쳐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험가다. 또한 강했다.
그런 그가 온 곳은 다름 아닌 카를라가 있던 리바이트 영지였다.
그녀가 넋을 놓길 잠시.
기억의 파편들이 끼어 맞춰지는 걸 느꼈다.
'설마 이자가?'
카를라 그리치의 그림자 수호 기사!
샬럿은 흥분했다.
'그래, 이자야! 아카데미에 침입한 괴한 둘을 제압한 게…!'
그럼 앞뒤가 맞았다.
그리치 가문은 옛부터 퀴리 영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영웅인 로한 그리치가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게 퀴리 영지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카를라를 지키던 수호 기사가 퀴리 영지를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세상에…!'
이 얼마나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기사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리치 가문에 대한 충성심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수호 기사의 칭호에 걸맞은 자였다.
'그럼 내 이름을 아는 것도 이해가 돼.'
그림자 수호 기사라면 이미 아카데미의 교수와 생도들의 정보를 수집했을 터였다.
샬럿의 이름을 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세한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를라의 휘장을 쳐다봤다.
-싫어! 아빠! 아빠-! 가지 마━!
어린 카를라 그리치가 유해 없는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절규하며 저 장갑을 끌어안았었다.
그런 카를라가 소중히 여기던 아버지의 유품을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맡기다니….
"...."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그리치 가문에서 영웅의 유품을 맡길 정도라면.
그리고 이 상황을 예측하고 조언하며, 미리 대처하기 위해 거액의 후원금마저 서슴없이 내건 이 사내라면.
조금, 아주 조금은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권을 위임할 수는 없습니다."
세한은 말투를 달리했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어떤 신분인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지휘권은 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전권을 위임해도 병사들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전권을 맡긴다면 사기가 떨어지리라.
"말했을 텐데. 일부라도 좋다고."
아몬이 수긍하자 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네."
"죠세핀에게 전하도록. 1개의 기사단과 30명의 모험가와 용병. 민병대를 지휘하는 백인장 2명은 앞으로 이 사내의 명령에 따르라고."
"하, 하지만…."
"슈하림 황가에서 보낸 인물이다."
"슈하림 황실?!"
집사는 놀라 반응했고. 샬럿은 아몬을 지그시 쳐다볼 뿐이었다.
'아몬이 황실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세한은 이 아몬이라는 자가 단순히 그리치 가문과 연관된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거액의 후원금.
이는 그리치 가문에서 마련할 수 없는 자금이다.
분명 황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4황자라고 했던가?'
4황자와 연관되어 있을 터.
"그의 신원은 나와 그리치 가문이 보장하지."
집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단 아몬 경에게 휴식처를 안내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그, 그럼 따라오시지요."
"부탁하지."
아몬은 집사를 따라갔다.
"하아…."
아몬이 자리를 뜨자, 세한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느낌이다.
"퀴리 백작님. 죄송합니다."
샬럿이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일단 아몬을 이곳에 데려온 건 샬럿이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하핫!"
세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런데 샬럿 경은 그…. 아몬이라는 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샬럿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리고 아몬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치 가문의 그림자 수호 기사입니다."
그리치 가문의 그림자 수호 기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아몬은 집사에게 개인 귀빈실을 안내받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방이 보인다.
어두운 밤이었기에 집사가 촛불을 든 채 아몬에게 고개 숙여 말했다.
"누추한 곳이지만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고맙군."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아몬은 주변을 둘러봤다.
벽에 걸린 촛대의 불빛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귀빈실이라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화려하게 꾸미는 게 정석이건만. 귀족의 저택치곤 밋밋했다.
검소함이 남다른 거겠지.
'휴식도 필요하겠지만.'
아몬은 자리를 옮겨 곧바로 근처 책상에 앉았다.
아이템 창에서 스킬북을 소환했다.
[언령 기초학]
보통 서포트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지는 마법 기초 스킬이다.
바드나 음유시인, 혹은 통솔자가 마나를 이용한 '목소리'로 군대에게 버프를 주는 스킬이다.
스킬이 더욱 발전하면 상대에게 공포를 주어 둔화, 경직 등을 일으키고 사기를 낮출 수도 있었다.
'분명히….'
아몬은 책 내용을 훑어봤다.
'있다!'
목소리 변조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일정 마나를 소모하면 하루 동안 지속 효과가 이루어진다.
'배워 두면 좋겠지.'
아서가 아닌, 아몬의 생활을 위해서라면 목소리도 변조하는 게 좋을 듯하다.
아몬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시야를 비스듬히 기울자, 책의 두툼한 두께가 보였다.
'…미쳤어.'
이걸 반나절 만에 익혀야 하는 건가? 아니, 무리겠지. 적어도 하루는….
'해 보지 않으면 모르겠군.'
아몬은 투구를 벗어 한쪽에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노가다 게임 같으니.'
아몬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책을 펼쳤다.
'집중. 집중.'
아몬은 촛불에 의지해 책을 읽어 나갔다.
어느덧 촛대의 초는 다 녹아 꺼져 버리고.
어둠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떠올랐다.
똑똑-!
"아몬 님.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를…."
집사의 말에 아몬은 가볍게 답했다.
"필요 없네.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네? 아…. 그…. 네. 알겠습니다. 그…. 말씀하신 지휘권 임명에 관해서도…."
"나중에. 긴급 상황이 아닌 이상 들어오지 말도록."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아몬은 몸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책에 집중했다.
"[고도의 집중력] 특성이 생성됩니다."
"책 읽는 속도가 증가합니다."
"[게으름] 특성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었을 때.
아몬은 책을 덮었다.
"축하합니다! [언령]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스킬북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아몬에게 흡수되었다.
'끝났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잠을….'
아몬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오크 떼를 상대하고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으니….
'가끔 여길 게임으로 착각하게 된단 말이지.'
아몬은 침상에 쓰러졌다.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그에게 내리쬐었다.
이럴 때만 눈이 그치고 해가 뜬다.
강렬한 햇빛에 아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커튼을 치고 싶지만, 몸을 움직이기 싫었다.
"...."
아몬은 망토로 얼굴을 덮은 채 잠에 빠졌다.
***
'포근해!'
샬럿은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푹신한 침대. 따뜻한 이불. 장작이 타고 있는 난로까지.
'밥도 맛있었어.'
그녀가 퀴리 영지에 다시 들어오고 한 일은 군의 재정비였다.
피로에 찌들어 몇 번이고 선 채 잠들 뻔했지만 겨우 버텨 냈다.
오후가 돼서야 겨우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제야 식사를 하고, 씻고 이렇게 침상에 누울 수 있었다.
샬럿은 풀어진 얼굴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빨리 쉬자.'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래, 잠깐 동안이라도 모든 걸 잊고 휴식을….'
샬럿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댕-! 댕-! 댕-!
"...!"
샬럿은 번쩍 눈을 떴다.
어두운 밤.
도심 전역에 울리는 웅장한 종소리.
"모두 움직여-!"
"놈들이 다시 움직인다!"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도심마다 횃불이 밝혀지고 저 멀리 장벽에서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아…. 씨…!'
샬럿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던 욕을 내뱉었다.
이제 깊게 잠든 참이었건만, 놈들은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샬럿 님!"
쿵쿵!
집사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샬럿은 급히 의복을 갈아입고 부스스한 머릿결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네! 갑니다!"
샬럿은 문을 열었다.
그곳엔 에인헤르들과 엉성한 군복 차림의 집사가 서 있었다.
"놈들입니다! 오크 놈들이 다시 공격을-!"
샬럿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몬은요?"
"그, 그것이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알겠습니다. 제가 가 보죠."
샬럿이 발걸음을 옮길 때, 집사가 말했다.
"아! 그리고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샬럿은 멈칫 놀라며 고개를 틀어 집사를 쳐다봤다.
"선로가 복구된 모양입니다! 지하 선로를 이용하면 백성들의 피난이 가능합니다!"
샬럿은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된 일입니다. 당장 세한 백작님께…."
"세한 백작님은 이미 열차역으로 가셨습니다. 피난민을 돕고자…."
"알겠습니다. 집사님도 세한 백작님을 도와주시길. 저는 장벽으로 가 병사들을 지휘하겠습니다."
"네!"
집사는 급히 자리를 옮겼고, 샬럿 또한 걸음을 재촉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아몬이 머무는 개인 귀빈실에 도착했다.
주먹을 움켜쥔 샬럿은 '쿵쿵-!' 문을 두들겼다.
"아몬! 아몬!"
하지만 반응이 없다.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샬럿은 허리춤에서 샤벨을 뽑아 들었다.
기다란 곡도를 휘둘러 문고리를 부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주무십니까?"
아몬은 침상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망토에 덮은 채였다.
가슴이 위아래로 옅게 움직이는 걸 봐서는 깊게 잠든 상태일 터.
"...."
샬럿은 그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그리고 아몬을 내려다봤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기절한 듯 잠들어 있다.
전날에 보였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무리한 거였나 보다.
샬럿은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스쳐 가는 한 가지 생각에 멈칫거렸다.
아몬은 지금 투구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저 망토로 얼굴을 가렸을 뿐.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겼을까?'
샬럿은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아몬의 얼굴을 가린 망토를 움켜잡았다.
제26화
부우우우우우우웅-!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했다.
"모두 빨리 움직여-!"
"의뢰받은 내용을 잘 숙지하도록!"
용병과 모험가들이 열차역에서 내렸다.
그들이 맡은 의뢰는 단순했다.
리바이트 영지에 있는 부유한 '가족과 지인의 구출'이었다.
"살려 주세요!"
"비켜!"
퀴리 영지의 피난민들은 열차에 타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그런 플랫폼의 입구를 에인헤르들이 막아섰다.
"모두 순서를 기다려 주십시오!"
"뭘 기다려! 저기 봐! 저놈들이 타잖아!"
피난민들이 열차에 올라타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모두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인 듯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열차에 탑승하며 코웃음을 쳤다.
"흥, 천한 것들이 발악하기는…."
"뭐? 뭐-?!"
그 한마디가 방아쇠가 된 것일까?
피난민들이 에인헤르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폭동이 시작되었다.
"모두 그만하도록-!"
세한은 영지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리쳤지만.
"꺼져!"
그러한 세한에게 날아오는 건 돌멩이뿐이었다.
에인헤르들이 방패를 들어 돌멩이를 막아 냈다. 그리고 검을 뽑으려 하자 세한이 막았다.
"그만하게! 폭동이 더 커지면 안 돼!"
"그럼…."
"순서, 순서를 정하게나! 우선 움직이기 힘든 아이들부터. 그리고 노인, 노파들을 태우게!"
세한의 말에 에인헤르들이 영지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소동 속에서 열차에서 내린 인물이 있었다.
"...."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기사학과 3학년 생도.
직스 라인하르트.
전신을 감싼 판금 갑옷을 입은 그는 투구를 쓴 채였다.
그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슈하림의 백성들을-.'
직스는 각오를 다지며 검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밀려오는 긴장감에 손이 떨려왔다.
'지킨다!'
***
"...!"
샬럿은 눈을 부릅떴다.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자신의 손을, 사내의 손이 붙잡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망토에 가려진 얼굴에서 아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샬럿은 큰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스, 습격입니다. 오크 떼가…. 또…."
샬럿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가?"
아몬이 얼굴을 가린 망토를 붙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을 끝까지 가리고 있자 샬럿이 말했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샬럿은 그렇게 질문한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그림자 수호 기사다.
당연히 정체를 숨겨야 할 처지겠지.
아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 투구를 집어 들었다. 투구를 쓰고는 뒤를 돌아 샬럿을 쳐다봤다.
"이유를 말해야 하나?"
"…아니요. 죄송합니다."
샬럿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아몬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올곧은 여인이다.
부하를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고,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한다.
이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오크의 군세가 공격 중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을 뿐이랍니다. 공격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군."
아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몬은 샬럿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지휘할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
퀴리 영지.
세한의 휘하인 25명의 기사. 그리고 30명의 용병과 모험가.
200명의 민병대가 모여 있었다.
기사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다름 아닌 이방인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장벽을 바라봤다.
전쟁이 시작된 듯,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지금 장벽을 지켜야 하건만, 우린 왜 여기에…?"
"듣자 하니 아몬인지 뭔지 하는 자를 보호하는 임무인 듯해. 그의 지휘에 따르라고 하더군."
"아몬?"
"퀴리 영지의 후원자라고 하더라."
"젠장! 귀족을 지키겠다고 이 정도 병력을 빼낸다는 게 말이 돼?!"
지금은 비상사태다.
간혹 장벽을 넘어온 오크 떼가 도심에 들어오기도 했다.
도심에는 피난이 늦어지거나 도망치지 못해 문을 잠근 채 집에만 있는 영지민들이 있었다.
단 한 마리의 오크만 들어와도 영지민들은 저항조차 못 한 채 몰살당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 병력을 분산해 이곳에 배치하다니!
"영주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불만이 많은가 보군."
기사들이 고개를 틀었다.
쿵-!
묵직한 발걸음에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이 움찔했다.
얼굴을 뒤덮은 투구.
낡은 쇠사슬과 판금으로 된 갑주.
묵빛 대검을 든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자는?"
"아-, 장벽을 뚫고 들어왔던 기사님이야!"
기사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벽을 지키던 이들 중 몇몇이 그가 샬럿과 함께 영지에 입성하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뭐야, 설마 저분이 우리를 지휘하는 거야…?"
기사들의 불만스러웠던 눈빛이 사그라들었다.
수천의 오크 떼 사이를 돌파해 장벽을 넘어온 사내다.
그 폭풍과도 같은 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불만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이 아몬에게 다가갔다.
'…크군.'
기사단장은 고개를 들어 아몬을 올려다봤다.
원래도 장신이건만, 철갑 때문에 더 커 보인다.
"아몬 님이십니까?"
"그렇다."
기사단장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슴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실버 울프 기사단 25명. 용병 및 모험가 30명. 민병대 200명. 세한 퀴리 백작님의 명으로 소집 완료하였나이다!"
아몬이 기사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물었다.
"세한 퀴리 백작의 권한으로 너희의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불만 있는 자가 있는가?"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일제히 자세를 잡았다.
그의 무력은 어제부로 증명되었다.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샬럿을 구해 준 인물.
세한 영주 또한 신분을 보증한다고 하니, 불만 따윈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아몬이 기사단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따르겠는가?"
"세한 퀴리 백작님의 명으로, 아몬 님의 지휘를 받들겠나이다!"
[축하합니다! 일시적 지휘권이 생겼습니다!]
[일시적으로 255명을 지휘할 명령권이 부여됩니다.]
[파티를 생성합니다. 경험치가 나누어 분배됩니다.]
아몬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게임의 지휘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
"모두 집결."
병사들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작은 중얼거림이건만.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해 그의 명령에 따르게 되었다.
모두 아몬의 앞에 정렬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기사단장은 멈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절도 있게 병사들이 서 있었다.
기사단은 몰라도, 지휘 체계가 허술한 용병, 모험가, 민병대마저 훈련받은 군대 같았다.
"그럼 지금부터."
아몬은 아이템 창에서 깃발 하나를 소환했다.
기사단장의 시선이 아몬이 소환한 깃발로 향했다.
금색 자수와 붉은 바탕, 태양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그것은 [영광의 깃발].
노멀, 레어, 유니크, 고대, 전설, 신화급의 순서 중.
고대에 이르는 아이템.
아몬은 아직 이 아이템을 잡고 이동할 수 없는 레벨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제약이 걸려 움직일 수 없어도 상관없다.
이건 서포터 아이템이니까.
[영광의 깃발(고대급) +3강]
고대 영웅들의 망토를 이어 붙인 깃발. 영광스러운 지휘관의 깃발 아래에 병사들은 용맹함을 가진다. (인원 제한 300)
사용자 중심으로 300m, 혹은 지정된 파티원들에게 힘 +10%. 민첩 +5%. 체력 회복 및 스태미나 회복력 +10%.
고대 효과 - 데미지에 따른 5% 흡혈 부여.
[특전] 용맹함 - 용기를 잃지 않는다. 병사의 공격력을 5% 증가.
[특전] 굳건함 - 굳건한 의지는 그들의 마음을 강철로 만든다. 방어력과 사기 10% 증가.
[특전] 발악 – 발악하여 죽는 순간에도 상대를 물어뜯는다. 죽음과 동시에 상대에게 공격력의 5%의 데미지를 입힌다.
아몬이 깃발을 들었다가 내려찍었다.
쿵-!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기사와 병사들은 움찔거렸다.
'뭐야!'
병사들은 숨을 들이켰다.
몸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샘솟았다.
두려움이 사라진다. 마나를 쓸 줄 모르는 병사들마저 몸속 혈관을 타고 마나가 퍼져 나갔다.
곧이어 근력이 향상되고 시야도 또렷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병사들이 미지의 힘에 당황하기를 잠시.
"자, 그럼."
병사들은 아몬을 쳐다봤다.
"게임을 시작하지."
아몬은 아이템 창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퀴리 영지의 지도였다.
그 모습에 기사단장이 다가와 말했다.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이곳 지형에 대해 모르실 테니…."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통신용 수정구는 가지고 있나?"
아몬의 말에 기사단장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 지휘관이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와의 통신은 불가능하지만.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다.
아몬은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서 한 사람이 지형지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기사단장이 '이곳 지형을 모르니 보좌하겠다.'라 말을 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지휘관은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병사들의 보고에 따라 그 한정된 정보를 입체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정보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판단하긴 힘들었다.
적들은 지형과 미끼를 이용해 시야를 어지럽히고, 거짓 정보를 흘려보내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한다.
한정된 정보조차 조작하여 함정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지휘관이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거짓'이 되기도 한다.
그럼 곤경에 빠진 지휘관은 한탄할 것이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하늘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며 적의 위치, 지형 등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대마법사가 되어 하늘을 날거나, 혹은 높은 탑을 건설하여 위에서 내려본다 해도 결국엔 지휘 체계는 한정되어 있는 법이니까.
그것이 평범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다.
'그럼 나는 어떤가?'
아몬은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혼이 흘러들어 온 이방인이요, 이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초월하는 시스템의 법칙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퀴리 영지에 존재하는 모두 인간들을.'
이는 영주가 허락한 고유 권한.
'아군으로 생각한다.'
영주 휘하의 병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다.
'동료이자 파티원으로서.'
그러면 시스템은 인식할 것이다.
'파티 멤버'로서 NPC를 휘하에 넣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그들의 위치, 병과가 머릿속에 각인된다.
'나의 휘하가 되리라.'
아몬의 머릿속에 퀴리 영지의 지형이 그려지고 푸른색 반점들이 생겨났다.
아몬은 투구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자, 디펜스 게임의 시작이다.'
***
마인 리벨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크의 군세가 퀴리 영지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센 공격에 인간들은 장벽 수비에 급급해했다.
'멍청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퀴리 영지를 향해 오크들이 땅을 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땅은 지하수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의 군세가 지하를 뚫고 나갈 것이다.'
총 7갈래의 땅굴이다.
오크 수십 마리가 영지 안으로 들어갈 것이고, 내부에서 혼란을 주어 장벽 쪽 역시 기껏 잡은 지휘 체계를 흔들어 버릴 것이다.
'양쪽에서 포위해 외문을 뚫는다.'
외문만 뚫린다면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벨리는 책을 펼쳤다.
오크 중 시체를 이용해 시야를 공유했다.
오크들이 땅굴을 파 지하수로와 연결된 통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됐군!'
오크들이 숨을 죽였다.
여기서 들켜서는 안 된다.
그들은 조용히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오크들이 철문을 부수더니,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공했-!'
"여기다!"
"궁수 부대-!"
리벨리의 눈이 커졌다.
조종하던 좀비 오크의 시야 속에 지붕 위에 올라 서 있는 인간 궁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리벨리는 입을 다물었다.
'포위당했다?'
제1 침입조인 오크들을 향해.
"쏴-!"
화살이 빗발쳤다.
오크들이 고슴도치가 됐다.
「콰와와와와-!」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급히 화살을 피하고자 골목길로 들어서지만.
"막아-!"
민병대가 방패를 들어 막아섰다.
리벨리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인간들의 반응이 빨랐다.
"겁먹지 마라-!"
민병대가 함성을 지른다.
'뚫어-!'
「뚫어-!」
리벨리의 생각이 좀비 오크에게 전달되었다.
명령을 받은 오크들이 민병대를 밀어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콰직-!
하지만 민병대는 좁은 통로를 이용해 방패로 막아 냈다.
리벨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막았다?'
뭐야? 저놈들…. 그냥 평범한 민병대가 아닌 건가?
민병대가 발악한다.
육중한 오크들이건만, 민병대는 겁조차 먹지 않았다.
오히려 악을 쓰며 막아 내기까지 했다.
간혹 오크가 도끼를 휘둘러 병사의 머리를 깨부쉈지만, 병사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검을 휘둘러 오크의 가슴을 베어 냈다.
'뭐야? 좀비?'
죽은 자가 반격을 해?
아니,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리벨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훈련된 정예병인 에인헤르가 아니다. 그럼에도 겁에 질리지 않고 오크의 괴력을 버텨 내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죽어 가면서도 일격을 날렸다.
'무슨 괴물들인지…!'
"견뎌!"
민병대가 버티자, 오크의 뒤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등가죽에 수십 발의 화살이 꿰뚫리며 하나둘씩 쓰러졌다.
오크 좀비 또한 화살에 맞아 주춤거렸다.
'묵직하다!'
리벨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다. 보다 더 강력했다!
이윽고 오크들이 모두 쓰러졌다.
남아 있던 좀비 오크 또한 머리에 화살이 꽂히며, 리벨리의 시야 또한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리벨리는 당황하기를 잠시.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직이다."
6개의 침입조가 더 남아 있다.
운이 나빠 발각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이다!"
리벨리는 좀비 오크로 남은 침입조를 지휘했다.
***
기사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손에 통신용 수정구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앞을 쳐다봤다.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며 4m가 넘는 창대를 가진 사내, 아몬이 서 있었다.
그는 그저 지도를 바라보며 지휘를 내리고 있었다.
"동쪽 사거리, 1조 궁병대 이동."
기사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크 무리 발견했습니다! 수는 15마리! 지금 서….』
"서쪽 길목을 3조 방패병이 가드한다."
…지금 보고를 듣기 전에 위치를 파악한 거야?
기사단장은 소름이 돋았다.
아몬이라는 저 사내.
지금 퀴리 영지 내부를 실시간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27화
리벨리는 황급히 지도를 펼쳤다.
「제6조. 그대로 전진하라! 7구역 지상으로 향한다!」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기어 올라가는 오크들.
리벨리는 확고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 도심만이 방비가 굳건하다.
외문과 상당히 떨어진 곳은 경비가 허술….
"기사단, 7구역 지하수로와 연결된 통로. 10시 방향이다."
"여기다!"
리벨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단을 올라온 오크들이 뒤를 돌아봤다.
갑옷을 입은 육중한 기사들이 후위에서 오크들을 덮쳐 쓰러뜨렸다.
메이스로 후려치고, 마나가 담긴 검으로 베어 냈다.
좀비 오크의 시야를 통해 모든 걸 지켜본 리벨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상으로 나오던 오크들이 헐레벌떡 다시 지하수로로 도망치듯 들어갔고, 기사단이 그 뒤를 쫓았다.
「제, 젠장! 6조, 5조와 합류. 3구역으로 향한다!」
리벨리는 퀴리 영지 설계도를 보며 외쳤다.
3구역은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다. 이런 좁은 길이라면 놈들이 군을 운영하기 힘들뿐더러, 복잡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기도 힘들 터!
오크들이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지하수로를 걸으며 지상으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됐-!」
"오크들이 3구역으로 이동 중, 기사단은 반으로 쪼갠다. 지상으로 연결된 건축물을 붕괴시키도록."
쿵-!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오크들이 고개를 들었다.
좁은 골목길의 좌우, 건물들에서 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좌우로 금이 가 있는 건물들.
기사들이 메이스로 찍어 누른 흔적들이다.
「어…? 어…?!」
건물은 무너져 내리며 오크들 위로 쏟아졌고.
그대로 지하수로까지 붕괴되어 매장되었다.
「쿠어어어어!」
돌덩이에 깔렸던 오크들은 발버둥 쳤고.
"죽여!"
민병대는 돌덩이 위에 올라가 생존한 오크들을 창으로 내려찍어 죽였다.
'뭐냐? 어떻게…!'
리벨리가 다급히 외쳤다.
「제1조! 24구역 통로로! 2조. 3구역으로 가 민병대의 발을 묶어라!」
"용병과 모험가는 3구역에서 민병대를 돕도록, 기사단은 24구역 통로로 가라. 지붕 위에서 머스킷으로 거리를 유지하여 일제 사격하라."
리벨리는 입을 벌려 버럭 소리쳤다.
지휘를 내릴 때마다 오크들이 움직였다.
부대를 나뉘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했으니 인간 지휘관 놈들도 혼란에 빠질 터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걸까?
지휘를 내릴 때마다 마치 자신이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훤히 꿰뚫어 보는 것처럼, 반드시 그곳에 적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번에도 지붕 위에 기사들이 머스킷을 든 채 마나를 충전하고 있다.
"쏴-!"
격발음과 동시에 오크 떼가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민병대와 용병, 모험가들이 오크들을 밀어붙였다.
'뭐냐….'
"죽여!"
'뭐냐고!'
용병과 모험가가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용병과 모험가의 긴 창은 오크들의 어깨를 꿰뚫었고 검은 가슴에 박혀 들었다.
오크들이 저항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오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빌어먹을 오크 놈들!"
"이놈들 별거 아니잖아? 놈들은 우리보다 약해!"
병사들은 흥분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근력이 강해졌으며, 몸도 민첩해졌다. 게다가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었다.
그뿐인가? 두려움은 사라지고, 적을 공격할 때마다 몸의 상처가 낫는 듯한 기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놈들의 뒤를 언제나 기습하여 전략적 우위를 겸하고 있다는 게 제일 큰 쾌감을 안겨 주었다.
'이건 기적이야!'
기적. 마치 전장의 신이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준 느낌이었다.
"오오오오-!"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올라갔다.
리벨리는 할 말을 잃었다.
무식할 정도의 힘을 가진 오크다.
그런 오크들을 리벨리가 지휘해 그들의 무지함을 보강해 주고 있었다.
수적으로 부족하다 해도 압도적인 전력 차가 있거늘.
하지만 그런 자신이 밀리고 있었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인간 병사들 따위에게 말이다!
「안 돼! 지, 지하수로에 있는 오크들은….」
리벨리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 입을 다물었다.
좀비 오크의 시야를 통해, 바로 눈앞에 기사단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머스킷을 겨눈 채, 방패와 창을 들고 도열해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리고 오크들이 달려들자 기사단이 순식간에 오크들을 도륙했다.
「....」
단순한 패턴이 반복되고, 또한 발견 시기까지 비슷하다.
아니, 한 발짝 더 앞서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 수준이었다.
'시야를 밝혀 주는 마법이라도 쓰는 건가?'
오크들의 진로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궤도 자체가 들통나고 만 것이다.
와이번이라도 길들여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럼 말이 되지 않는다. 놈들은 지하수로의 위치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리벨리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일괄된 단순한 패턴.
'지휘자는 한 명이다!'
도시 내부를 지휘하는 자는 한 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놈은 이번 퀴리 영지 함락에 있어서 분명 엄청난 방해물이 될 것이 확실했다.
「놈을 찾아라!」
리벨리가 버럭 소리치자 오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놈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오크들은 기사와 민병대, 용병과 모험가에게 죽임을 당했다.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놈이 모든 걸 파악하고 있으니, 이미 작전은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존재.
그 존재만 찾아내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리벨리가 조종하는 꼭두각시 좀비 오크가 우뚝 섰다. 그 주변에 헐레벌떡 달라붙은 오크 두 마리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70여 마리의 오크 떼가 영지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겨우 셋만이 남았다.
그리고 리벨리는 드넓은 광장을 보며 확인할 수 있었다.
제1 광장 한가운데.
지휘관의 깃발을 휘날리며 우뚝 서 있는 인물을.
'…찾았다.'
리벨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에게 밀어닥치는 감정은 희열보다는 모멸감이었다.
'지휘관이….'
리벨리는 이를 악물었다.
이가 깨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호위도 없이.'
눈앞에 있는 자는 홀로 우뚝 서 있었을 뿐이었다.
호위라고 해 봤자 기사단장 단 한 명만이 서 있을 뿐.
그자는 고개를 들며 리벨리의 좀비 오크를 쳐다봤다.
"오호…? 찾는데 꽤나…."
그는 투구 속에서 눈웃음을 지었다.
"오래 걸렸군."
'감히 날 조롱하다니…!'
리벨리는 분노했다. 그가 입을 열자 좀비 오크가 그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였다.
「네놈이 지휘관인가!」
긴 지휘용 깃발을 든 사내.
그 사내가 고개를 치켜들며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오만. 그 자체였다.
'젠장! 이따위 인간에게 농락당하다니!'
아무리 봐도 단순한 인간….
"불사의 마왕, '슈펠의 종자'여."
…이 아니다.
「…뭐?」
리벨리는 소름이 돋았다.
슈펠 아르디아.
바로 마계의 7대 마왕 중 하나.
그리고 리벨리가 섬기는 마족이기도 했다.
리벨리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넋이 나가 멍하니 있을 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녀석 정체가 뭐냐? 네가 어떻게 그분의 진명을…!」
아몬이 깃발을 바닥에 꽂아 놓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대검을 뽑아 들며 좀비 오크에게 다가갔다.
"잘 알고 있지. 내가 마왕 중 그놈을 가장 먼저 '사냥'했었으니까."
「뭐?」
리벨리의 감정을 대변하듯, 좀비 오크가 뒷걸음질 쳤다.
"참으로 끈질긴 놈이었지. 불사라는 이명에 걸맞게 쉽게 죽지 않았으니까."
이 자식….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처음엔 워해머로 심장을 터트렸다. 안 죽더군."
아몬이 점점 다가왔다.
"그다음 머리를 터트렸다."
이놈은 지금,
"그래도 안 죽더군. 그래서."
아몬이 투구 속에서 눈웃음을 지었다.
"35번을 몸을 터트렸지. 그제야 놈이 죽더군."
…불사의 마왕 슈펠 님을 죽였다고 하는 거냐?
'미친놈!'
헛소리다. 정신이 나간 놈이다!
그분은 지옥에 존재하시어, 지금도 자신에게 마력의 은총을 내리고 계신다.
위대한 그분께서 죽지 않는 불사의 은총을 하사하시는 덕에 그분을 섬기는 마인과 마족들은 모두 불사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근데 이놈이,
절대로 죽지 않는 그분을 죽였다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이건 신성 모독이자 감히 자신이 숭배하는 슈펠 님에게 향하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화를 낼 수가 없다.
「....」
리벨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몬의 눈을 마주 보자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밀어닥쳤다.
두려움이 이성을 집어삼켜 정신을 장악했다.
아몬의 특성 중 하나인 [마인 도살자].
수천의 마인을 사냥한 아몬의 특성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리벨리는 본능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번엔 그놈을 만나면… 과연 몇 번 만에 죽을까?"
아몬의 대검이 들어 올려지며 좀비 오크의 목에 겨누어졌다.
그럼에도 오크들과 좀비 오크는 움직이지 못했다.
미지의 공포 앞에, 생명체들은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검을 끌어당기고,
"놈이 이 세계에 들어오는 즉시."
검날이 번뜩였다.
"다시 사냥해 주마."
그리고 좀비 오크의 목을 베어 버렸다.
***
「으아아아아아악-!」
리벨리는 비명을 질렀다.
덜컹하고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으로 다급히 목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고통이 없는 좀비 꼭두각시이건만.
마치 자신이 고통을 그대로 전달받은 듯 싸늘한 느낌이었다.
'허억-! 허억-!'
리벨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지 몇 분을 마주한 채 짤막한 대화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극악의 공포가 머릿속 깊숙이 각인 되었다.
'나는…. 놈을…. 알고 있는 건가!?'
마치 예전에도 죽임을 당한 듯한, 그런 알 수 없는 불안감.
리벨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우우욱-!」
그리고 위에 있는 내용물들을 뱉어 냈다.
「...?」
그를 호위하던 오크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리벨리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물러서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다.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을 위해 수년을 준비해 왔다. 게다가….
'놈이 감히 내가 모시는 신을 모독해?'
자신을 섬기는 신앙의 근원인 슈펠 아르디아를 모독했다.
그런 자를 두고 어찌 등을 보일 수 있을까!
게다가 놈은 직접 나서지 않고 병사를 지휘만 할 뿐이었다.
겨우 그 정도가 한계라는 거겠지.
'오히려 놈을 살려 두면 위험하다!'
리벨리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빠득 갈았고 결국 이가 부서졌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오크들에게 말했다.
「모든 병력을 이곳에 집결시켜라!」
최대한 희생 없이 퀴리 영지를 장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 영지들을 공략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놈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정신 나간 놈이지만, 자신이 느낀 공포는 진짜였다.
'놈을 처리해야 한다!'
아니면 나중에 큰 화가 될 터!
「총공격에 나선다! 모두 남김없이-!」
리벨리는 퀴리 영지를 노려봤다.
「쓸어버려라!」
***
"이제 준비해야겠군."
아몬은 죽은 좀비 오크를 내려다봤다.
"후우…. 후우….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준비라니요?"
아몬을 호위하던 기사단장은 오크 둘을 베어 내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몬은 힐끗 기사단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세한 퀴리 백작에게 전하도록."
"...?"
아몬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모든 백성을 피난시키라고."
바힐론 리벨리.
레벨 180에 이르는 괴물.
보스몹이 찾아올 것이다.
***
콰콰쾅-!
포화가 쏟아진다.
마법사들이 응용하는 대포들이,
마나를 쓸 줄 아는 에인헤르들이 사용하는 머스킷이,
민병대의 석궁과 화살들이.
어마무시한 화력으로 외벽 밖을 초토화시켰다.
수천 마리의 오크 떼가 제대로 다가오지도 못했다.
화살과 볼트 따위는 방패로 가볍게 막아 낼 수 있지만.
마나로 응용되는 포탄과 마탄은 제아무리 오크라도 버틸 수 없었다.
'막을 수 있어!'
샬럿은 희망을 품었다.
지휘 체계가 어느 정도 안정을 갖추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아몬이 오크 떼를 뚫고 들어왔다는 것에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생존.
단지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병사 징집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
"...!"
샬럿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숲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거대한 돌덩이가 포물선이 아닌 직격으로 날아와 그대로 외벽 위, 난간에 부딪혔다.
콰직-!
쾅!!
에인헤르들이 돌덩이에 깔리고, 부서진 외벽 파편이 민병대를 꿰뚫었다.
샬럿은 눈을 부릅떴다.
숲속 너머로 거대한 거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쿵-!
7m에 이르는 몸집과 강철과 같은 녹색의 피부.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성난 악귀와도 같았다.
손에는 커다란 돌덩이들을 거머쥔 거인들.
눈을 번뜩이며 입에서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 그리고 돌덩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오우거…!'
쾅!
폭발과 함께 외벽에 돌덩이가 박히며 뒤흔들렸다.
「쿼아와와와와와와와━!」
숲속에서 수천의 오크 떼가 파도처럼 밀려 나왔다.
"쏴, 쏴-!"
기사들이 소리치자 폭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광폭화]가 이루어진 오크 떼에겐 더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었다.
폭격 속에 오크가 뭉쳐지며 수십 마리씩 죽어 나갔다.
'어리석은…!'
마치 희생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침이 없다.
6m에 이르는 오톨도톨한 가죽을 가진 녹색의 거인들도 그사이에 끼어 있다.
트롤들.
그들은 커다란 무쇠 망치를 든 채 외문에 달려들어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쾅-!
콰직-!
외문이 뒤틀리며 균열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내뱉는 비명과도 같았다.
"맙소사-!"
샬럿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외문이 뚫리면 모든 게 끝난다.
안 그래도 며칠간의 공성추 공격에 외문에 균열이 생겼건만.
저런 거인까지 나서 일격을 날리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급히 마법사와 에인헤르들에게 외쳤다.
"모든 화력을 트롤들에게-!"
외문 위에 걸쳐진 마법 대포가 아래를 겨누었다.
마법사들이 마나를 불어넣자, 포탄이 생성되며 그대로 트롤들에게 쏟아졌다.
콰콰쾅-!
트롤들의 머리가 불타오르더니 이내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언제 불탔냐는 듯 머리의 피부가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가진 특성.
[고속 재생].
"다시 한번-!"
마법사들이 대포를 재정비하는 동안, 주변에 사다리가 걸쳐지며 오크들이 기어 올라왔다.
"자, 잠깐, 아, 안 돼-!"
오크 떼가 손도끼로 마법사들을 난도질했다.
비명이 울려 퍼지자 샬럿이 이를 악물었다.
"모두 외문을 사수하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재생 능력이 뛰어난 트롤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무쇠 망치를 든 채 외문을 가격함과 동시에.
쾅-!
외문이 폭발하며 뚫려 버렸다.
제28화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3학년 생도, 직스 라인하르트는 눈을 부릅떴다.
"뚤, 뚫렸어!? 외문이 뚫려 버렸다고!"
투구를 눌러쓴 병사가 버럭버럭 소리쳤다.
직스는 병사의 외침에 외문 쪽을 바라봤다.
시커먼 먼지구름이 피어올라 시야를 방해했다.
외문 사이로 모여든 병사들이 긴장한 채 창을 겨누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병사들은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런 먼지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거인들이 튀어나왔다.
「쿠오오오오오오오-!」
트롤!
무쇠 망치를 휘두르자, 외문 사이에 있던 병사들이 맞아 튕겨 나갔다.
"트롤이다!"
"막아!"
「고기다!」
「고기들이 있다!」
녹색 피부를 가진 오크들이 대량으로 밀려 들어왔다.
커다란 외문조차 좁은 듯 자기들끼리 밀거나 짓밟기도 했다.
"쏴!"
콰콰쾅-!
외문 앞에 설치된 대포들이 포격을 시작했다.
외문에 뭉친 오크들이 단체로 폭발에 휘말려 비명과 괴성을 질렀다.
남은 오크들은 불타 죽은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우르르 넘어와 사방으로, 도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오크들이 외문을 통과했다.
"으아악-!"
트롤들이 병사 하나를 잡아 입을 벌려 머리를 물어뜯었다.
오크들이 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고기 타는 냄새, 피가 흩뿌려지고 시체가 굴러다니는 전장.
직스는 굳어져 있었다.
'나는….'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광경이 싫었다.'
전쟁터.
5년 만에 이런 전쟁터에 나온 것이다.
직스는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외문이 뚫렸다! 후퇴-! 후퇴하라-!"
직스는 고개를 들었다.
외벽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백색 머리카락과 자색 눈동자. 눈물점이 매력적인 여인.
'샬럿 님!'
무사했었구나!
그녀가 계단을 통해 장벽 아래로 내려왔다. 오크들과 병장기를 부딪치며, 병사들을 지휘해 후퇴하고 있었다.
기쁨도 잠시, 그녀는 한순간에 고립되어 버렸다.
장벽 밖에서는 사다리와 공성탑을 이용해 오크들이 기어 올라오고.
영지 내부에서는 계단을 타고 오크들이 올라가며 그녀와 그 주변의 병사들을 압박했다.
"도, 도망쳐-!"
도심으로 도망치던 병사들을 직스가 손을 뻗어 불러 세웠다.
"잠깐!"
그의 손이 도망치는 병사의 뒷덜미 잡았다.
"어? 어?"
붙잡힌 병사는 직스를 쳐다봤다.
"나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기사, 직스 라인하르트다! 나와 함께 싸워 장벽의 병사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틀어라!"
"지, 직스 선배님?"
선배?
이 병사, 나를 아는 건가?
붙잡은 병사는 앳된 청년이었다.
한 20살 정도 되었을까? 리바이트 아카데미 신입생과 비슷한 또래였다.
설마, 아카데미 생도인가?
그럼 기사학과에서 유명한 자신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조잡한 갑옷을 입은 모습이 일반 병사와 달리 농노 병사 같다.
"잠깐, 이 손 놓으시오! 우린 싸우지 않소…!"
중년 사내가 급히 직스의 손을 잡았다.
당황한 농노 병사가 말했다.
"아, 아버지?"
"셀롬! 도망치자꾸나!"
부자로 보이는 농노들.
그들이 직스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직스는 그 부자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젠장!"
할 수 없다.
'나 혼자서라도…!'
직스는 검을 뽑아 든 채 장벽으로 향했다.
***
"으아악-!"
농노 병사, 셀롬 아스톤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도망치는 중이었다.
지금 퀴리 영지는 끔찍한 지옥이 되어 있었다.
"위치를 사수해!"
"아직 영지에 시민들이 있다! 그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끌어라!"
방어하라니? 미친 개소리 하지 마!
셀롬은 속으로 외쳤다.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1분 1초도 버틸 수 있을 리 없잖아!
도심에 비명이 메아리친다.
오크들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셀롬은 머리를 감쌌다.
등 뒤에서 오크들이 쏘는 화살과 볼트가 빗발쳤다.
화살은 그렇다 쳐도 왜 오크 놈들이 석궁마저 다룰 줄 아는 건데!
그 복잡한 기계적 구조를 가진 석궁을 만들 줄도, 다를 줄도 안다는 거야?!
그때 돌덩이들이 날아왔다.
건물들이 돌덩이에 꿰뚫려 무너져 내린다.
머리 위로 돌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재앙, 그 자체였다.
셀롬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녹색의 거인들.
오우거가 장벽을 짓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장벽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렸지만, 무너진 장벽마저 발판으로 지탱한 오우거들은 부서진 장벽의 잔해를 잡아, 있는 힘껏 던졌다.
콰콰콰쾅-!
도심의 건물들이 폭격에 맞은 듯 무너져 내렸다.
저것이다.
인류가 저런 괴물들에게 져 황무지로 밀려났고, 그리고 장벽 세워 살아왔다.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이 나라의 황제는 옛 인류의 터전을 되찾겠다고 다시 전쟁을 한다고 한다.
'미친 개소리야!'
이 나라의 황제는 미쳤어!
차라리 쥐 죽은 듯 살아갈 것이지!
아니, 어쩌면 쥐 죽은 듯 숨어 살아도 마찬가지의 결과일 것이다.
인류가 미개척지를 원하는 것처럼.
몬스터들은 인류의 개척지를 원할 테니까.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질 뿐이었다.
"엄마! 엄마!"
정신없이 달리던 셀롬은 멈칫했다.
눈앞에 곰 인형을 든 채 울부짖는 아이가 보인다.
"엄마 어딨어…!"
셀롬은 그 아이를 스쳐 지나갔다.
-엄마! 어딨어…?
그리고 셀롬은 눈을 부릅떴다.
아주 오래전 일이건만, 그 아이가 자신과 겹쳐 보였다.
그 사이 오크들이 병사들을 밀어붙인 채 달려왔고 그대로 아이 앞에 우뚝 섰다.
"어? 엄… 마…?"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곤 고개를 들어 오크를 올려다봤다.
오크가 미소 짓는다. 그리고는 아이보다도 훨씬 큰 손도끼를 들었다.
놈들에게 있어 인간은 그저 고기일 뿐이었다.
아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었다.
그 모습에 셀롬은 넋이 나가기를 잠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셀롬!"
멀리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식칼로 만든 창이 오크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어?"
셀롬은 고개를 들었다.
창은 생채기만 겨우 낼 뿐, 오크의 가죽조차 꿰뚫지 못했다.
'나 뭐 하는 거냐?'
오크는 고개를 돌려 셀롬을 노려봤다.
'미친 거야?!'
「....」
오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 표정을 보자 셀롬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뭐!"
셀롬은 이성을 잃어버렸고, 오히려 오크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치기까지 했다.
"뭐, 이 녹색 개자식아-!"
셀롬은 이미 이성을 놓아 버린 직후였다.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걸로 찌르게? 찔러! 찔러 보라고-!"
버럭버럭 소리치자 오히려 당황한 건 오크였다. 웬 정신 나간 인간이다.
이런 놈은 먹으면 탈이 난다.
하지만 거슬렸다.
매우!
그러니 죽인다!
오크가 도끼를 휘둘렀다.
셀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컁-!
오크의 도끼날이 튕겨 나갔다.
셀롬이 눈을 뜨자 병장기를 튕겨 낸 불꽃과 펄럭이는 망토가 보였다.
거대한 대검을 짊어진 낡은 갑옷을 입은 기사.
"…변변치 못한 생도 주제에."
흑기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크의 복부를 향해 후려쳤다.
쿵-!
오크가 피를 토해 냈다.
육중한 몸이 허공에 들려지며 그대로 수 미터를 떠올라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꽤 훌륭한 행동을 하는구나."
셀롬은 그를 올려다봤다.
"시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하도록 시간을 끌어라!"
그 뒤로 낡은 갑옷의 기사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달려와 길목마다 진을 쳤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셀롬은 갑자기 나타난 기사, 아몬에게 감사를 표하곤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이, 이 미친놈아-! 네가 지금 제정신인 게냐? 그런 천한 것 하나 때문에…!"
아버지가 셀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하, 하지만…."
아몬은 멀어지는 부자를 바라봤다.
'이곳에 있었나?'
아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첫 번째 악연이었던 셀롬 아스톤.
그의 특성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특성들은 역시 그대로 부정적이다. 하지만 예상외의 특성들이 늘어나 있었다.
[근성], [순종적] 등등.
농노 생활이 가혹하긴 했나 보다.
그의 자존심이 꺾이고 저러한 특성들이 나오다니 말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아몬은 앞을 바라봤다.
오크 떼가 도심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
퀴리 영지의 마지막이 보였다.
'원래 이러한 운명이었다.'
원래라면 첫 수성전이 시작되었을 때, 퀴리 영지는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버텨 냈다.
자신이 보낸 후원금으로 장벽을 보강하고 공성 병기를 배열했으며, 병사들을 단기간 훈련해 미래를 바꾸었다. 성과는 있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한 것이다.
다만 결과는 바뀌지 않을 터.
'이제 남은 건 피난.'
어차피 막지 못할 결과라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최대한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살리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뒤돌아선 아몬의 등 뒤엔, 불타오르는 퀴리 영지가 보였다.
***
"에리? 아! 무사했구나!"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다.
기적이다.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용케 아이의 부모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셀롬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젠장, 내가 왜…!'
이런 귀찮은 짓거리를…!
셀롬이 아이를 원망하며 노려볼 때.
"아저씨!"
아이가 셀롬을 보며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쳇."
셀롬은 이를 악물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죽으려고 이곳에 모인 거냐?
셀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모여 있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었다.
셀롬은 시선을 돌렸다.
"으윽…."
아버지가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도망치다 오크의 화살에 맞은 것이다. 화살이 다리를 꿰뚫고 뼈를 박살 냈단다.
치료사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불구가 된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을뿐더러, 치료사들은 다른 이들을 살펴야 했다.
농노의 상처를 봐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열차 충전까지 3시간 남았습니다."
퀴리 영지의 영주.
세한은 보고를 들었다.
아몬이 피난길을 올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열차가 마나를 충전 중이다. 지금 당장은 벗어나지 못한다.
최소 3시간을 버텨야 한다.
하지만 외문이 뚫리고, 오크들이 들어온 상태.
민병대의 절반이 이미 오크에게 당한 상황이고, 남은 반마저도 후퇴 중.
상황은 최악이었다
'피난하라고?'
세한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열차 플랫폼 앞, 광장에 모인 수만의 인원들을 바라봤다.
'불가능해.'
세한은 절망을 느꼈다.
이 많은 인원이 열차를 타고 리바이트 영지로 향할 수는 없었다.
-오크들의 포위가 풀렸습니다!
조금 전 들렸던 소식이었다.
또 다른 외문.
정반대편 외문의 포위가 풀렸다는 말이었다.
놈들은 퀴리 영지를 고립시켜 모래성처럼 가지고 놀다 무너트리는 걸 포기했다.
대신 한곳에 병력을 모아 한쪽 외문을 박살 내 버렸다.
아마 이곳을 향해 진격 중이겠지.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기사는 무언의 결정을 종용하고 있었다.
백성들을 방패 삼아 자신만이라도 열차에 타 도망치라고.
세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윽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럴 순 없다.'
이곳의 영주는 자신이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리라!
하지만 백성들마저 이 땅에 살았단 이유만으로 이곳에 묻힐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었다.
"미개척지를 횡단한다."
"...!"
이는 자살행위다.
10만에 가까운 시민들.
그들이 아무런 장비도 없이, 미개척지를 횡단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영주님!"
"이대로라면 단 한 명도 살지 못해. 놈들에게 얌전히 잡아먹히느니, 살기 위해 발버둥 치겠다."
오크 떼가 이 광장에 온다면 모두 죽는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가벼운 짐만 챙기도록! 추위를 견딜 방한 도구, 3일은 버틸 수 있는 식량. 어서!"
오크들의 추격을 피해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횡단한다면.
최소 3일이면 리바이트 영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기사가 물었다.
"열차는…."
"혹시 모르니 충전하게. 지금 영지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으니. 마나 충전까지 3시간. 그때까지 버티게 만들어야지."
열차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
혹여 영지에 남아 있는 이들이 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아몬과 샬럿 경에게 전하도록. 염치없지만 최대한 시간을 벌어 달라고."
"영주님은…?"
"...."
세한은 말없이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10년 전, 나는 이 땅을 한 번 포기하고 도망쳤다."
세한은 검을 뽑아 들었다.
10년 전, 그는 도망쳤다.
그리고 그 책임을 그리치 가문이 지며 영지를 지켜 냈다.
"내가 또다시 이 땅을 포기할 성싶으냐."
이번에도 도망칠 수는 없다.
로한 그리치가 목숨을 걸고 지켜 낸 영지.
"퀴리는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땅이오, 로한 그리치 후작께서 지켜 내신 땅이다."
세한은 이를 악물며 걸어 나갔다.
"내 땅을 놈들에게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야."
<모두 미개척지를 횡단할 것입니다!>
마법사들이 증폭 마법을 이용, 광장에 알렸다.
시민들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몬스터와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미개척지를 횡단한다고?
그것도 이 혹한기 속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시민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항의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이곳에 남아 놈들의 먹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인지. 그건 당신들의 선택입니다!>
일일이 설득할 시간이 없다.
이곳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
이제 시민들 스스로가 선택해야 했다.
***
"후우…!"
아몬은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앞으로 질주했다.
거대한 대검의 검날이 오크들을 도륙했다.
"아몬 님을 따르라!"
움직여야 했기에, 영광의 깃발은 아이템 창에 넣은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의 파티원으로 인식된 기사와 민병대, 용병과 모험가들은 여전히 사기가 올라간 상태였다.
플레이어 파티원의 보너스 스탯 증가 덕분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
아몬은 투구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통신용 수정구를 바라봤다.
-보고 드립니다! 열차로 인한 피난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대검을 든 채 심호흡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달라는 명령이…!
'NPC 주제에 건방지게.'
세한 퀴리 백작.
자신에게 오크들을 막아 달라는 명령이다,
[오만함]의 특성과 [거만함]의 특성을 가진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악의]가 세한의 부탁을 거부하기를 청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워로드의 특성들이.
그리고 [녹색 학살자]의 특성이 사냥과 전투를 원하고 있다.
마침 눈앞에는 수많은 오크 떼가 달려오고 있었다.
"방진."
아몬의 한마디에 지휘하에 놓인 병사들은 게임 유닛처럼 정렬해 대열을 이루었다.
"우-!"
기합 소리와 함께 자세를 낮추며 방패와 병장기들을 올렸다.
빈틈없는 방어 대형.
삐져나온 긴 창들.
팔랑크스 대형.
달려오던 오크들이 멈칫하더니 질주를 멈췄다.
아몬을 바라보며 달려들기보단 경계하며 거리를 뒀다.
200명의 병사와 수천의 오크들이 대립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듯 힐끗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놀랍군.」
고요한 침묵을 깨는 자가 있었다.
「오크들이 공포에 질렸어. 그리고.」
오크들이 좌우로 길을 틀자, 그 중앙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녹색 머리, 그리고 가죽 책을 든 장신의 사내.
마인, 바힐론 리벨리.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조차 네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정말로 불쾌해! 도대체 네놈이 뭐길래!?」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인의 분노에 오크들이 몸을 떨었다.
평범한 마인이 아니다.
마왕의 은총을 받은 사도이며, 게임상의 보스 몬스터에 이르는 인물이다.
그가 직접 선봉에 나섰다.
「네놈은 대체….」
리벨리가 분노한 듯 아몬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체가 뭐냐?」
제29화
"정체?"
굵고 낮은 목소리에 리벨리는 애써 가다듬었던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상대방은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법학과 생도다."
「뭐?」
바힐론 리벨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당혹감을 표했다.
놈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내뱉고 있다.
겨우 200명의 인간 따위가 수천의 오크를 상대로 길목을 막아 세우고 있었음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위풍당당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뿐만이 아니다. 병사들마저 마치 '세뇌' 된 듯 두려움이 없었다.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정신 나간 미친 집단이다.
하지만 코웃음은 칠 수도 없었다.
수천의 오크들이,
그리고 자신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단 하나의 사내 때문에.
압도적 전력 차가 남에도, 살아남는 건 물론 더불어 자신마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허세다!'
놈은 허세를 부리는 게 뻔해!
리벨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생도?」
"그래. 그러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중간고사거든. 성적이 떨어져 제적당하면 곤란해."
아몬의 소리를 들은 병사들마저 움찔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과는 거리감 있는 대화라 리벨리는 상당히 당황해했다.
아몬은 이러한 반응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세한이 말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끌 수 있었다.
현재 아몬은 마인 리벨리의 특성을 볼 수 없었다.
정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이름을 그 스스로가 밝히지 않았으니까.
레벨이 한참 높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아몬이 기억하는 한, 리벨리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특성이 있다.
자신보다 낮은 레벨인 대상자의 거짓말을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놈은 혼란스럽겠지.
아몬은 진실만을 말했으니까.
「인간이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네놈은 슈하림의 개… 황제의 기사인가?」
"아니다."
「그럼 떠돌이 전사겠군.」
"나는 마법사다."
리벨리가 멈칫했다.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법사?'
리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마법사가 갑옷을 입고, 전장 한가운데서 대검을 짊어지고 서 있다?
저자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
자신이 이 퀴리 영지를 점령한 뒤엔 마왕을 소환해야 한다.
단순히 제물만 있어서는 안 된다.
슈하림의 백성들을 타락시켜, 그들을 마족 숭배자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의식을 진행해야 하는, 상당히 오랜 시간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그에겐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짓된 믿음은 소환 의식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능력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아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
일반적인 민병대와 기사치곤 너무나도 강력했다.
또한 병사의 움직임이 마치 지휘관의 생각 그대로를 행동하는 것 같았다.
'고도의 텔레파시 마법. 그리고 병사들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보조 마법, 모두 현재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다.'
그것도 이미지를 연상케 해 병사들을 단결시키는 건 지금까지 본 적도 없었고, 이처럼 장기간 병사를, 그것도 200명이 넘는 대규모로 능력치를 향상하는 마법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아마도 새로 창조된 마법일 터.
'마법의 제국답군. 슈하림은 이런 괴물 같은 마법들을 창조해 내고 있는 건가!'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아몬이라는 사내는 그런 괴물 같은 마법을 쓰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서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탈진으로 쓰러지고도 남을 터이건만.
리벨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
리벨리는 미소를 지었다.
'손에 넣어야 한다.'
제국에서 육성 중인 괴물이다. 이자가 마족 숭배자가 되면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전에 자신과 마왕 슈펠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부터 먼저 알아야 했다.
「놈을 잡아라. 저항하면 팔다리를 잘라도 좋다!」
오크들이 움직일 준비를 했다.
'더는 대화가 불가능한가?'
시간 끌기는 무리인 듯했다.
병사들이 경계하고 아몬이 영광의 깃발을 소환할 준비를 할 때였다.
"샴, 뚫어-!"
소음과 함께 옆 건물, 골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골목길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리벨리가 고개를 돌려 좁은 건물 사이를 바라보는 순간.
쾅-!
쓰레기 더미가 폭발하며 그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얼음 사자.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샬럿.
갑작스레 등장한 그녀를 바라보며 리벨리와 아몬의 눈이 커졌다.
***
20분 전.
"저리 비켜-!"
샬럿이 샤벨을 꺼내 들었다. 가느다란 곡도에 마나가 실리며 오크들의 두꺼운 가죽을 꿰뚫었다.
오크가 괴로워하며 비틀거렸지만 죽지는 않았다.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기 짝이 없었다.
샬럿은 그대로 발로 오크를 밀어냈다.
오크가 뒤로 넘어가며 그 뒤에 계단을 오르던 오크들이 우르르 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동료 오크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난간이 없는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다.
쿵-!
오크가 장벽 아래로 떨어지며 낙사했지만, 다른 오크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샬럿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끝이 없어!'
샬럿은 품에서 소환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퀴리 영지로 오고 나서 세한 영주에게 부탁해 받은 얼음의 정령 소환 스크롤이었다.
샬럿은 마나를 주입해 정령 스크롤을 찢어 냈다.
마나가 스크롤에 깃들고 그 속에 담긴 정령들이 소환됐다.
얼음 늑대들과 얼음 사자가 소환되고, 냉기가 흐르는 맹수들이 오크들을 덮쳐 쓰러뜨렸다.
오크들이 멈칫했다.
얼음 늑대는 몰라도, 얼음 사자는 그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몬이 그 위에 올라타 전장을 휘젓고 다닌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수천의 오크 떼를 돌파했던 얼음 사자였기에, 오크들은 경계하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야 한다!"
샬럿이 외침에 병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샬럿 님을 따르라!"
얼음 사자 '샴'이 장벽의 계단 밑으로 질주했고, 오크들을 계단 밑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르며 창을 휘젓고 검을 휘둘렀다.
"샬럿 님!"
샬럿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깁니다!"
도심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골목길.
쓰레기 더미가 쌓인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황갈색 피부와 하얀 머리를 가진 사내가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리바이트 아카데미의 기사학과 생도, 직스 라인하르트였다.
'직스가 왜 이곳에…?'
샬럿은 의아해했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쪽으로-!"
샬럿이 오크들을 베어 내며 골목길로 접어들었고,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놓치지 마라!」
오크들이 그 뒤를 추격하려는 그때, 마지막 병사가 골목길에 접어든 걸 확인한 직스가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를 넘어뜨리고 횃불을 던졌다.
불길이 치솟으며 오크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직스는 마나를 이용해 다리를 강화했다.
풍(風) 속성이 그의 민첩을 올려 줘서, 덕분에 일시적으로 말과 같은 기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직스가 골목길을 질주하며 샬럿에게 나란히 따라붙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샬럿 님. 무사하셨군요!"
"직스?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당연히 살럿 님과 슈하림의 백성들을 구하러 왔지요!"
직스가 감정이 북받친 듯 감격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에 샬럿은 부담을 느꼈다.
샬럿은 품에 있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수정구에 금이 가 망가진 상태.
전투 중에 부서진 모양이다.
'현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샬럿은 직스에게 말했다.
"일단 광장으로 가죠! 세한 퀴리 백작님. 그리고 아몬과 합류해야 합니다!"
"아몬?"
직스가 의아해했지만 샬럿은 설명할 틈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광장으로 가려면 큰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아마도 큰길 쪽에도 오크들이 있겠지. 그 길을 돌파해야 했다.
퀴리 영지의 지리를 암기했던 샬럿은 앞을 바라봤다.
앞에 골목길의 빛이 들어오는 입구가 보인다.
쓰레기 더미가 둘러싸인 그곳으로 얼음 사자 샴이 돌격했다.
"샴, 뚫어-!"
쾅-!
쓰레기 더미가 폭발했다.
'으으윽-! 정말 싫어!'
온갖 악취 나는 쓰레기들. 특히 음식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휘날렸다.
바나나 껍질이 그녀의 삼각모의 챙 위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진을 치고 있는 200명의 인간 군대와 그들과 대치한 오크 수천 마리.
아몬이 있는 걸 확인한 샬럿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몬!'
무사했구나!
가장 먼저 드는 건 안도감.
그리고….
샬럿의 시선이 아몬의 반대편, 넋이 나가 있는 녹색 머리의 사내에게 향했을 때.
"어?"
…불쾌감이 밀려왔다.
샬럿은 뛰어오른 얼음 사자 위에서 당혹하기를 잠시, 리벨리를 향한 그녀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마인!'
미개척지에서 자신을 밀어붙였던 오크들의 수장!
'왜 이곳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샬럿은 샤벨-곡도-을 뽑아 들었다.
"샴, 죽여-!"
그녀의 살벌한 한마디에 얼음 사자가 그대로 리벨리를 덮쳤다.
「이건 또 뭐야-!」
리벨리가 말을 다 하기 전, 얼음 사자의 앞발이 리벨리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커다란 앞발이 리벨리의 머리를 깨부쉈고,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리벨리의 몸을 날카로운 발톱이 반으로 갈라 버렸다.
「컥-!」
리벨리의 머리와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얼음 사자 샴은 빈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입을 벌려 리벨리를 덥석 물었다.
「크아아아악! 뭐야? 뭐냐고-!」
오크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아몬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어찌 된 건지 몰라도-!'
지금이 기회다!
리벨리는 마법사다. 그런 그가 지금, 근접전에 들어갔다. 마법을 쓸 여유가 없을 터!
아몬은 투구 속에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마디 했다.
"쳐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200명의 병사들이 앞으로 질주했다.
또한, 골목길에 있던 직스와 병사들도 함께 튀어나왔다.
「쿠, 쿠엑?」
오크들이 당황해하다가 이윽고 흥분해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인간과 오크들이 서로 뒤엉켜 충돌했다.
"뭡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샬럿 님. 저자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직스가 오크들을 베고 발로 밀어냈다.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내뱉는 말에, 샬럿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외쳤다.
"마인입니다!"
"네?"
직스가 마인 리벨리를 쳐다봤다.
「크아아아악-!」
머리가 깨지고, 몸에 커다란 발톱의 상흔이 생겼음에도, 리벨리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으로 자신을 물어뜯는 얼음 사자의 이빨을 움켜잡고 버티고 있었다.
직스는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무슨 괴력이…!"
마법사치곤 괴력이 상당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인 바힐론 리벨리, 그는 레벨 180대의 괴물이었고 보스 몬스터였으니까.
마법사라도 근력은 초인 수준에 이르렀다.
'젠장, 마법을 쓸 수가…!'
리벨리는 힐끗 바닥에 흘린 마법서를 쳐다봤다.
마왕 슈펠의 은총이 담긴 마서(魔書).
저것이 있어야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저리 비켜-!」
마인 리벨리가 얼음 사자를 향해 힘을 쓰자, 맹수의 육중한 몸체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샬럿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샤벨을 들어 휘둘렀다. 마나가 담긴 날카로운 칼날이 리벨리의 왼팔을 파고들었다.
푸욱-!
인간치곤 너무나도 질긴 가죽. 팔의 반절도 베지 못하고 뼈에 걸려 버렸다.
'역시 인간이 아니야!'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인간! 그따위 식칼로는 나를 벨 수 없다. 나는 슈펠 님의 은총을 받-!」
"그럼 같은 곳을 계속 베면 되겠군."
리벨리의 시선을 옆으로 돌아갔다.
뛰어오른 사내가 보인다.
"아몬!"
샬럿이 그를 보고 외쳤고,
"어? 아, 아몬?"
직스는 열차역에서 봤던 모험가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아몬의 대검이 리벨리의 왼팔을 향해 내리꽂혔다.
쾅-!
폭발과 함께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얼음 사자의 송곳니를 붙잡은 팔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몬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과연.'
리벨리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남은 오른손으로 마법서를 들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왼팔을 포기하고 10m가량의 거리를 두었다.
"레벨 180짜리 보스몹답군."
마법사 주제에 강력한 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응 속도 또한 뛰어났다. 방어력도 얼마나 높은지 마나가 담긴 대검과 괴력으로 찍어 짓눌러야 했고, 그렇게 함에도 한쪽 팔을 베어 냈을 때 묵직한 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마법사'였다.
'렙 차이가 크게 난 결과인가?'
거기다.
잘려 나간 팔뚝은 꿈틀거리더니 촉수들이 뻗어 나와 리벨리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초고속재생]의 특성마저 가지고 있다.'
마왕 슈펠의 가호겠지.
'놈이 마법사이니만큼.'
마법을 쓸 틈을 줘선 안 된다.
게임상의 공략도 그랬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상황인 건지…."
직스가 말꼬리를 흐릴 때, 아몬은 고대 아이템, [영광의 깃발]을 소환했다.
"받아라."
그리고 직스에게 던졌고 직스는 '어어?' 거리며 가볍게 날아오는 [영광의 깃발]을 잡았다.
그 순간-.
"...-!"
직스의 무릎은 그대로 꿇리더니, 곧 그의 위장 속 음식물들이 역류하며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제30화
'으아아아악-!'
직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수백 개의 손바닥이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겁다!'
'현기증이 나!'
'이, 이런 걸 어떻게…!'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걸 들고 있어라. 놓치면 아군의 희생이 많아질 테니."
아몬은 직스의 태도를 보며 만족했다.
그가 부담감 느낀다는 건 [영광의 깃발]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따로 지정하는 유닛 대신, 근처 아군에게만 그 효력을 발휘할 터였다.
직스가 쥔 영광의 깃발 주변으로 오라가 퍼져 나갔다.
영광의 깃발 사거리 안에 있는 자들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했다.
'놓치지 말라고?'
직스는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마법 도구이기에…!'
"병사들은 직스 라인하르트를 보호하라! 그리고 샬럿…!"
아몬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직스의 주변에 진을 쳤다.
샬럿이 아몬을 쳐다봤다.
"마인을 사냥한다."
"…네!"
아몬과 샬럿이 주춤거리는 리벨리에게 질주했다.
***
아몬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많이 봐 온 광경이다.
불타는 도시, 포화 소리.
게임상에서 봤던 그대로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NPC는 사람이요,
그런 NPC를 사냥하는 몬스터 또한 생명체였다.
그들이 내뱉는 함성과 비명은 감정이 담겨 있으며,
타는 냄새는 코끝을 찔러 왔고,
영혼이 담긴 그들의 표정은 자신의 감정마저 자극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아몬 자신 또한 이 세계의 주민이 되었다.
감정을 느끼며,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았다.
[녹색 학살자]
[마인 도살자]
두 가지의 특성이 그를 흥분시켰다.
워로드의 특성이 그의 성격마저 변화시키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폐 끝으로 탄 공기가 들어왔다.
순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수많은 적들 앞에서도 그를 전장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겁쟁이] 특성이 소멸하였습니다!"
"[불굴의 의지] 특성이 생성되었습니다!"
[불굴의 의지].
온갖 곤경과 시련에 굳히지 않는다. 압도적인 레벨 차가 나는 능력자와 싸울 경우 모든 능력치의 10% 증폭.
"――――――!"
아몬이 기합을 내지르며 리벨리에게 질주했다.
내디딘 지면이 부서졌다. 그가 리벨리의 품에 파고들며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절단] 스킬.
대검에 황금빛 마나가 담기며 검날의 날카로움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쿵-!
리벨리가 촉수로 재생하는 왼팔을 들어 대검을 막아 냈다. 놈의 왼손에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날을 막아 내려는 듯 뼈가 뭉쳐지며 이형의 톱날을 만들어 냈다.
리벨리가 가진 스킬 중 하나인 [변형].
하지만 뇌 속성의 황금빛 마나가 흘러들어 와 리벨리의 근육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 괴물 놈!」
"누가 할 소리!"
아몬이나 리벨리나 마법사 주제에, 전혀 마법사 같지 않은 스킬과 특성을 보여 주었다.
아몬은 양팔에 힘을 주며 대검을 밀어붙였다.
리벨리가 내디딘 지면이 폭삭 무너진다. 그럼에도 균형을 유지하며 버텨 냈다.
180레벨의 마법사.
바힐론 리벨리가 오른손에 든 마법서를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중얼거린다.
마법 영창!
"그렇겐 안 돼-!"
리벨리의 눈이 돌아갔다.
바로 뒤에서 얼음 사자를 탄 샬럿이 덮쳐 온 것이다.
"물어, 샴!"
덥석-!
리벨리의 뒤쪽을 얼음 사자가 물어 버렸다.
맹수의 송곳니가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샬럿은 그 위로 뛰어올라 몸을 회전하며 샤벨을 휘둘렀다.
서리가 깃든 날카로운 칼날이 리벨리의 오른팔로 향했다.
꺙-!
평범한 피부 가죽에서 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날이 리벨리의 뼈에 맞아 고정된 것이다. 마치 마나가 담긴 강철을 후려친 감각이었다.
두 사람의 공격에도 마인의 뼈는 무기들을 견뎌 낼 정도의 경도를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검들이었다면 오히려 날이 부러졌을 것이다.
「이, 이 인간 따위가-!」
리벨리가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힘이 안 들어간다!'
가볍게 상대하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그래, 마법조차 쓰지 않고 맨손으로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이라면 쉽게 나가떨어질 터였다.
하지만.
괴물의 근력을 가진 사내 하나.
그리고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마법서를 든 오른팔을 공격하는 빙 속성의 여자 하나.
이 둘은 격이 달랐다.
지금껏 만난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 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뇌 속성과 빙 속성의 마나는 근육을 마비시키고, 둔화시켰다.
또한 빙 속성의 정령, 얼음 사자가 옆구리 물고 있어 재생조차 힘들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점차 피부를 뚫고 폐부를 압박했다. 덕분에 마법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오크 놈들은 뭐 하는 거야!'
리벨리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오크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려는 그때였다.
"이 땅은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땅이오."
오크에게 향했던 리벨리의 시선이 도심가의 가도로 향했다.
말을 탄 중년 사내와 그를 따르는 군마를 탄 기사들.
그리고 무기를 든 인간 병사들이 있었다.
리벨리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뭐야? 저것들은 또…!'
"이 땅을 넘보는 괴물 놈들에게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세한 퀴리 백작.
그는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백성을 위해!"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외쳤다.
"황제 폐하를 위해-!"
오크들이 주춤거렸다.
"놈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라-!"
세한 백작이 발뒤꿈치로 말의 아랫배를 내려찍었다.
군마가 앞발을 휘저으며 앞으로 질주하자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지며 병사들이 오크들이 있는 곳으로 질주했다.
「쿼와와와와와와-!」
오크들의 성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들도 흥분해 인간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선두로 달리는 세한과 군마를 탄 기사단.
육중한 몸을 믿고 달려드는 오크들.
두 세력이 충돌했다.
콰직-!
기병들은 바위에 부딪힌 듯 군마들과 함께 고꾸라졌고, 오크들은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10년 전 전장에서 네놈들을 베어 냈다!"
세한은 원래 군 출신이었으며, 또한 10년 전 있었던 '대개척지 혁명' 시대의 인물이기도 했다.
즉, 오크들에게 영지를 그냥 넘겨줄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 세한 퀴리! 로한 후작님이 지켜 준 이 도시와 함께 잠들리라!"
세한은 죽을 각오로 오크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
'세한이 왜 이곳에…?'
대검으로 리벨리를 압박하던 아몬은 고개를 틀어 세한을 쳐다봤다. 그는 오크들 사이를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며 괜찮은 무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모하기도 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다.
'기껏 살려 주려 했더니.'
하지만 덕분에 살았다. 사실상 지금 후퇴할 생각이었다.
분명 지금쯤 시민들이 피난에 올랐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벨리가 이끄는 오크들에게 추격당해 모두 죽을 터였다.
겨우 수천 명만이 열차로 수송되어 살아남을 테고, 역사 또한 그렇게 기록될 터였다.
'하지만.'
세한과 병사들의 합류에 기회는 생겼다.
샬럿 또한 생각보다 강했고, 직스 또한 [영광의 깃발]의 위력을 아는지 피를 토해 내면서도 억지로 잡아 버티고 있었다.
목숨을 저버리며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들이 모여, 이들 모두를 신화 속 영웅처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게임 속 메인 스토리가 뒤바뀌었다.
'영지의 모든 인원이 전멸할 운명.'
지금.
'수만 명을 살릴 기회를 얻었다.'
아몬은 양손에 힘을 가했다.
[불굴의 의지]가 그의 능력을 대폭 상승시켜 주었다.
바힐론 리벨리, 그리고 오크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사기가 높다고 해도 결국 병사들은 지칠 것이며, 수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하게 학살당하겠지.
하지만 그 전에 군대를 막을 방법은 있었다.
'단 1페이즈.'
게임상의 마인 바힐론 리벨리.
그는 2페이즈를 가진 보스몹이다.
'단 1페이즈만 버틴다!'
'놈은 2페이즈로 접어들 때.'
마왕의 가호 아래, 놈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완벽한 마족으로 각성하게 된다.
'그때를 노려 후퇴한다!'
놈이 2페이즈로 접어들 때, 폭주가 일어난다.
주변에 아군 적군 가릴 거 없이 모두 죽일 것이며, 부풀려진 몸집은 상당히 느려질 것이다.
게다가 놈이 각성하기까지 10분 이상.
주변의 모든 생명체는 [공포]에 걸려 도망치게 된다.
그건 인간도, 오크들도 마찬가지. 상태 이상에 걸려 패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를 노려 후퇴한다!'
그동안 군을 퇴각시켜, 열차의 지하 통로로 빠져나간다면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
폭주한 놈도 멀리 있는 놈보단 가까운 생명체를 노리겠지.
"그러니."
아몬이 샬럿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의 검날이 더는 리벨리의 뼈를 파고들지 못했다. 그만큼 단단했고 상처가 빠르게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한 번으로 안 된다면….'
'수십 번을 벤다!'
아몬과 샬럿은 단 한마디의 말도, 신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서로가 무엇을 하려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두 사람의 검날이 동시에 뽑혔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 없이 다시 휘둘러졌다.
꺙-!
리벨리가 신음을 흘리면서도 양팔을 휘저어 날아오는 검격들을 막아 냈다.
아몬과 샬럿이 번갈아서 공격하자 뇌광과 서리가 주변으로 튀겼다.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놈이 마법을 쓰는 순간, 이 전장은 학살이 시작될 테니까!
「비, 빌어먹을…!」
꺙-! 꺙-!
리벨리의 어깨가, 가슴이, 머리가, 옆구리, 다리, 팔이 베이고 베였다.
가죽이란 가죽은 모두 검날에 찍혔다. 뼈대는 검날들을 튕겨 냈지만, 휘두르는 마나가 담긴 힘에 금이 갔다.
리벨리는 불사였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도 재생하는데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또한 그 에너지를 모두 소모했다간 죽게 될 터였다.
「겨우 인간 따위가…!」
아몬이 리벨리를 노려봤고, 리벨리는 눈을 부릅떴다.
"한심하군."
순간 리벨리의 양팔이 베였다.
왼팔을 벤 건 아몬, 그리고 오른팔을 벤 건.
리벨리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새하얀 설백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매서운 자색 눈동자가 리벨리를 노려봤다.
그녀가 샤벨을 끌어당기는 게 보였다.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칼날 끝에 집중되었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열광하고 사랑하는 '얼음공주'.
그리고.
"영웅을 우습게 보지 마라."
아몬은 리벨리를 비웃었다.
후에 레벨이 300에 이르는.
"조용히 죽어라. 바힐론 리벨리."
전설적 영웅 NPC. 샬럿 엘스포드!
그녀의 칼날이 리벨리의 미간에 꽂혔고, 아몬의 대검은 그런 샤벨의 칼등에 올려졌다.
「네, 네놈 내 진명을 어떻…!」
아몬과 샬럿은 기합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콰직-!
리벨리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
"어, 어두워!"
"횃불을 더 나눠 주세요!"
"앞이 보이질 않아요!"
퀴리 영지의 생존자는 약 8만이었다.
12만 중 2만 정도가 군에 징병 되어 오크와 장렬히 싸우고 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퍼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2만은 남는 걸 택했다. 떠나길 두려워해 각자의 집에서 웅크린 채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후회하게 될 터였다.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농노가 된 셀롬 아스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름과 헝겊을 아껴야 한다!"
"벽을 짚고 걷도록!"
이제 8만의 퀴리 영지의 시민들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틀, 아니,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3일 동안 '리바이트 영지'를 향해, 미개척지를 횡단해야 했다.
그리고 횡단하는 방법은 지하에 만들어진 수년간 방치된 비밀 통로였다.
열차 레일이 이어진, 이제 막 정비가 끝난 곳이었다.
비록 지상은 오크들의 포위가 풀렸다고 하나, 그 개체 수가 많아 조우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젠장, 앞을 보기가 힘들군."
소수의 병사들이 혀를 찼다.
세한의 마지막 명령.
-백성들을 지켜 리바이트 영지까지 무사히 이동하라!
과연 그 명령을 지킬 수 있을까?
"마법사들, 주변을 밝혀 주면 안 되겠나?"
기사가 횃불을 들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지하의 어둠 속, 뒤에 군마가 끄는 수레에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대거 탈진해 누워 있었다.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마법사조차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장에서 너무 많은 마나를 소모했습니다. 지금 마나를 사용할 시, 마나가 역류해 폭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마나의 서클이 파괴될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군."
이 지하 속에서 대열에 이탈해 낙오된 자들은 불쌍하지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 챙길 여유가 없으니까.
병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였다.
"...."
고요한 침묵 속에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라이트."
셀롬이 손을 들어 마법을 시전했다.
주변이 밝아졌다.
병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셀롬을 쳐다봤다.
밝고 환한 구.
"후우…."
가정교사에게 배웠던 마법이 이럴 때 유용했다.
셀롬이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병사들의 뒤를 쫓으려 할 때.
병사들의 시선이 셀롬에게 모였다.
"어?"
병사들뿐만이 아니다.
셀롬은 뒤를 돌아봤다.
난민들의 시선이 자신이 소환한 라이트에 닿아 있었다.
마치 구원의 빛을 보는 듯한 모습들.
"자네! 농노가 어떻게 마법을…!"
"네? 아, 그, 그게…."
셀롬은 쭈뼛거렸다. 그리고 아차했다.
빌어먹을…! 마법사라는 게 알려지면…!
"자네가 앞장서게. 자네가…!"
"...."
"우리를 인도하게나!"
가장 선두로 서야 될 터였다.
그것이 전장이든, 피난길이든.
"무리입니다! 불가능해요! 제, 제가 어떻게…!"
셀롬은 불안감에 벌벌 떨었다.
하지만 셀롬의 그런 말이 통할 리 없었다.
"명령일세. 자네, 보아하니 몰락 귀족 같은데 가문을 부흥시키고 싶지 않은가!"
"네?"
기사는 머리를 굴렸다. 이 어벙하기 짝이 없는 농노를 회유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난민들을 구해 낸다면 자네는…!"
셀롬은 시선을 돌려 백성들을 쳐다봤다.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이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다.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라네!"
"...."
"아니면 미개척지의 개발에 쓰이는 일개미가 되고 싶은 겐가?"
"저, 저는…."
셀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던 미개척지의 벌목꾼. 직접 그 일을 해 오지 않았던가.
가혹한 노동과 미개척지에서 튀어나오는 마수와 몬스터들 때문에 평균 수명이 한 달에서 1년밖에 되지 않는 노동 지옥에서.
'자유'란 단어는 매우 달콤했다.
"무리하게 시키지는 않을 거라네. 자네가 선두로 서고, 마법사들이 회복하면 서로 교대하며 우리를 이끌어 주게!"
…이게 뭔 개소리야?
셀롬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31화
"됐다-! 성공했습니다. 아몬!"
샬럿의 입에서 희열이 담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몬은 반으로 갈라진 리벨리를 쳐다봤다.
하지만 리벨리의 몸은 곧 기이한 모습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몸이 반으로 갈라졌음에도 피가 튀기지 않았다. 그저 시커먼 먼지가 흘러나오고, 피부가 검게 물들며 칠흑이 될 뿐이었다.
샬럿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놈이 각성하는 거지."
"네?"
"지금의 우리로는 부활하는 저놈을 죽이지 못해."
마인 리벨리는 너무나도 난이도가 쉬운 보스몹이다.
맷집만 본다면 보스몹임에도 같은 180레벨의 몬스터보다도 더 약할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리벨리를 도전하는 플레이어들은 상당히 낮은 난이도에 어리둥절해한다.
하긴, 당연했다. 난이도면에서도 리벨리의 가장 어려운 점은 '오크의 군세'이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난이도가 쉽다는 건 '1페이즈'일 때만이었다.
놈이 한 번 죽고, 각성해 2페이즈에 돌입하면.
"후퇴한다."
아몬은 대검을 등에 짊어지며 뒤를 돌았다.
"무슨…? 부활? 마인이 다시 부활한단 말입니까? 그럼 부활하기 전 저 마인을 완전히 죽여야만…."
이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까?
샬럿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몬은 리벨리의 잘려 나간 오른손에 있는 마법서를 가리켰다.
저걸 파괴시켜야 놈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지만, 현재 아몬과 샬럿의 레벨로는 무리일 터였다.
레벨 차가 너무 날뿐더러, 저 고대급 아이템을 오랫동안 쥐게 되면 주인이 아닌 이상 저주에 씌어 살이 썩어 문드러지게 될 테니까.
"저걸 파괴해야 해. 아니면 압도적인 힘으로 놈의 육체를 소멸시키던가. 둘 다 지금의 우리로는 무리다. 게다가."
'쾅-!' 소음이 울리며 도시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세한과 피를 토해내며 [영광의 깃발] 움켜쥔 직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도심에서 오우거와 트롤들이 건물을 밀어붙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것들마저 개입하면 승산이 없어."
운이 좋았다.
오우거와 트롤의 레벨이 상당히 높은 탓에, 리벨리가 근처에 있지 않은 한 제멋대로 설치게 설정되어 있다.
저 대형 몬스터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지금쯤 전멸했을 터였다.
"하지만 마인이…!"
"저걸 지금 우리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몬이 고개를 틀어 리벨리를 쳐다봤고, 그의 시선에 따라 샬럿 또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세한과 직스, 병사들.
그리고 오크들과 진격하던 오우거, 트롤마저 몸이 경직되었다.
그들 모두가 공포를 느꼈다.
마인 리벨리의 몸이 꿈틀거리며 녹아 버리더니 그 자리에 시커먼 홀을 만들어 냈다.
마치 지옥의 심연을 보는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소용돌이친다.
『끼에에에에에에엑―!』
귓가에 울리는 기괴한 음성.
처음 느낀 것은 불쾌감과 혐오감이었다.
그리고.
시커먼 손들이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튀어나오기 시작하며 공포와 불안, 두려움의 부정적 감정들이 모든 이들에게 깃들었다.
"저…건 뭡니까?"
"...."
아몬은 따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건 더는 마인이 아니라는 것을.
침묵하기를 잠시.
"후, 후퇴! 후퇴하라-!"
샬럿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군의 후퇴를 명령했다.
병사들이 재빨리 눈치를 보며 오크들에게서 떨어졌다.
오크들 역시 병사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지능이 낮은 오크들조차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것이다.
눈앞에 있는 고기를 노리다간, 자신들이 고기가 될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한 백작님! 어서 후퇴를!"
샬럿이 세한을 불렀다.
세한은 눈을 부릅떴다.
"…저놈이다."
"네?"
"예전 퀴리 영지를 습격했던 괴물 놈."
세한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로한 그리치 후작님을 죽인…. 괴물 놈-!"
『끼에에에에에에엑―!』
10년 전.
미개척지 숲에서 군대를 단신으로 괴멸시켰던 존재.
로한 그리치마저 집어삼켰던 괴물!
그것이 이 정체불명의 괴물이었다.
세한은 이를 악물었다. 잇몸 사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네놈이었구나!'
로한 그리치를, 퀴리 영지를 구해 낸 영웅을 죽인 장본인.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마인이었다.
'네놈은 또…!'
그리고 이번에도 놈은 퀴리 영지를 넘보고 있었다.
저 시커먼 수백, 수천 개의 팔로 병사들을, 그리고 자신의 영지를 집어삼키겠지.
세한은 분노한 듯 병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떠나도록! 어서!"
세한은 고개를 돌려 아몬을 쳐다봤다.
"아몬 경!"
"...."
아몬은 세한을 쳐다봤다.
세한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개죽음일 뿐이다."
"그래도 1분, 1초라도 더 시간을 벌어 줄 순 있겠지요."
"...."
"영지는 넘겨줄 순 있어도, 나의 백성들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몬은 세한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찾아오지."
"…그때는 퀴리 영지를 부탁합니다. 또한, 카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아몬은 탈진해 쓰러져 버린 직스에게 다가갔다.
[영광의 깃발]을 아이템 창에 넣고 축 늘어져 있는 직스를 어깨에 둘러메었다.
"모두 대피하도록."
이제 해야 할 건 하나.
피난민과 합류하여 리바이트 영지로 가는 것이다.
샬럿은 잠깐 세한을 바라보곤 자리를 떴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건히 버티는 모습에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한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따르던 기사단이 함께 서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도망치지 않고!"
"우리의 임무는 영주님을 지키는 것과 백성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
"영주님이 전사하시는 곳이, 저희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미련한 것들!"
세한은 고개를 돌렸다.
질타하며 돌려보내고 싶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꿈틀거리는 리벨리의 시커먼 심연은 점차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세한과 기사단은 경직되었다.
이미 오크들과 오우거, 트롤마저 본능에 따라 자리를 내뺀 지 오래다.
그리고 마인, 바힐론 리벨리가 '마족'으로 각성했다.
『끼에에엑―!』
『끼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에엑―!』
그것은 거대한 연체동물 같았다.
검은 안개와 같은 그림자가 몸을 감싸고, 그 주변에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손들이 다리 역할을 하듯 바닥을 짚었다.
세한과 기사단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 머리 위로 점차 그림자가 졌다.
'저것이 마족…?'
마족은 인간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마족들도 존재했다.
그저 시커먼 검은 그림자를 억지로 엉겨 붙게 한 듯한 모습.
수백 개의 입이 기괴한 소리를 내뱉었다.
부활한 리벨리.
세한은 식은땀을 흘렸다.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려 한다.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움찔거렸다.
막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몸이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말고삐를 잡고 억지로 튼 뒤, 열차 역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가자-!"
그 뒤를 기사단이 따랐다.
리벨리의 시커먼 그림자가 세한을 쫓았다.
수천 개의 촉수 같은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주변의 도심을 파괴했다.
『끼에에엑―!』
이제는 언어 능력마저 상실한 모양이다.
그림자의 손이 주변 건물을 부수고, 그 잔해를 잡아 집어 던졌다.
뒤따르던 기사단이 건물 잔해에 폭삭 깔려 버렸다.
「오, 온다! 온다-! 쿠에에에엑!」
어느새 세한은 도망치던 오크들을 따라잡았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세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공포에 질린 웃음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지를 어지럽힌 침략자를 길동무 삼아 내뱉는 통쾌한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한이 도망치는 오크들 사이를 질주했고, 검은 그림자의 손들은 오크들을 붙잡고 뭉개 버렸다.
거대한 몸집 그대로 오크들을 밀어 버리며 세한을 쫓았다.
그리고….
세한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세한은 뒤를 돌아봤다.
시커먼 덩어리 속 커다란 눈알이 보였다.
바로 코앞까지 도달한 거대한 입.
세한은 눈을 부릅떴다.
"…아몬 경."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퀴리 영지를, 그리고 카를라를…. 부탁하오."
검은 그림자는 세한을 집어삼켰다.
***
열차에 병사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열차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마나 충전이 아슬아슬합니다. 리바이트 영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근처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에인헤르가 열차에 탄 샬럿에게 보고했다.
"피난민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현재 상황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전진했을 겁니다. 지하 선로를 통해 갔을 테니, 1시간 정도 가다 보면 합류가 가능할 것입니다."
샬럿은 안도했다.
열차가 합류하면 그나마 난민들의 행군도 편해진다.
열차 안에 있는 보급품들을 도중에 내려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상자나 지친 자들을 열차에 태워 먼저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또한 당장은 오크들의 추격도 없을 것이다.
리벨리가 한 번 죽고 난 후, 오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고 손잡이를 잡아 주십시오."
느린 열차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위험에 안정을 취해야 했다.
굴뚝에 마나가 내포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견고한 장갑으로 덮인 열차가 점차 출발하기 시작하며, 지하와 연결된 선로로 접어들었다.
전조등이 켜지며 지하를 밝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지하 선로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밤의 달빛이 비치고, 하얀 눈이 덮인 나무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병사들은 창가를 바라봤다.
저 멀리, 불타오르는 퀴리 영지가 보였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집. 그리고 지옥으로 변한 그곳에서 벗어난 것이다.
"살…았다."
병사들이 안도했다.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쓴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설마 그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오크들에게서 살아남을 줄이야!
그것도 영지 자체가 점령당하고도 이 정도로 많은 생존자가 생긴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만약 난민들마저 리바이트 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난민 이동으로 기록될 터였다.
샬럿은 안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직스를 쳐다봤다.
"우욱…!"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건지 비틀거리며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게 뭐였길래?'
직스가 가지고 있던 [영광의 깃발]을 떠올린 샬럿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어떤 마법 도구이기에 그걸 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간 것일까?
게다가 직스는 왜 이토록 괴로워할까?
'정말로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샬럿은 고개를 돌렸다. 열차의 맨 뒤 칸, 아몬이 있다.
그는 그저 열차 끝의 창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혹 세한 영주를 기다리는 걸까?
무리다. 세한 백작님은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
지금쯤 아마도….
샬럿이 아몬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뚝뚝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분명 정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자신에게 그만큼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했으니까. 또한 잠깐 몇 마디 한 세한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저렇게 상념에 빠졌으니까.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었다.
"아몬."
샬럿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칫하며 망설였다.
위로의 몇 마디를 해 줘야 할 텐데, 생각나지 않았다.
"세한 백작님에 관해서는…."
그때, 아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릴 줄 알았더니…."
샬럿의 시선이 아몬을 따라 지하 선로 뒤 칸을 바라봤다.
후방 전조등에서 밝게 빛나는 밤의 선로. 그곳에 비치는 시커먼 그림자.
"생각보다 빠르군."
아니, 어쩌면 열차가 생각보다 느린 걸지도 모른다.
쿵!
콰직-!
열차 뒤편에 무게가 실렸다.
끼이이이이이익―!
거대한 그림자는 그대로 열차의 뒤 칸을 강제로 뜯어냈다.
레일이 열차의 바퀴를 억지로 잡은 채 지탱하면서 선로에 불꽃이 튀기기 시작했다.
콰직-!
마법의 방어 룬이 새겨지고, 드워프들이 가공한 열차의 합금 장갑판이 뜯겨 나갔다.
『끼에에엑!』
시커먼 그림자가 열차 뒤 칸에 달라붙었고, 그로 인해 달리던 열차가 더욱 느려졌다.
"끈질겨."
"저, 저건 뭡니까? 문어!?"
샬럿이 당황해 외쳤다.
의외라는 듯 아몬은 샬럿을 바라봤다.
"참으로 귀엽게도 생각하는군."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
샬럿이 창백하게 질려 뒷걸음질 쳤고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열차가 느리다고 해도 저런 게 달라붙은 상태로 질주하다간, 언젠간 피난민 대열과 합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비무장 상태인 난민들의 대학살이 시작될 것이다.
"저, 저걸 막아야…!"
"당연하지."
아몬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쳐다봤다.
"뭐, 뭐야!?"
"괴물!"
"마, 마족이다!"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나타난 괴물에 패닉에 빠진 것이다.
"뭣들 하는가? 저지하지 않고!"
아몬이 버럭 소리치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부랴부랴 움직였다.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머스킷을 쥔 채 열차 뒤 칸을 뜯어내고 있는 괴물에게 겨누었다.
샬럿의 표현이 맞았다.
혹이 달린 커다란 머리, 검은 그림자로 된 촉수는 연체동물처럼 열차 뒤 칸에 딱 달라붙어 있다.
마치 거대한 문어 같다.
다른 게 있다면 빨판이 없다는 것과 촉수 끝의 손 모양이 수백, 수천 개라는 것. 수많은 톱니바퀴 입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먹물이 아닌 독을 뿜어낸다는 것.'
쿠아아아아악!
수많은 입이 독기를 뿜어냈다.
병사들이 기침을 하며 하나, 둘씩 쓰러졌다.
리벨리의 그림자가 마치 크라켄처럼 열차에 딱 달라붙었다.
괴력을 이용해 더욱더 열차를 감싼다.
아예 열차에 올라탈 생각인가?
마음만 먹으면 놈은 열차를 파괴하고 전복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올라타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난민들마저 집어삼킬 생각인 거겠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조준-!"
아몬의 말에.
머스킷, 그리고 열차의 지붕 위, 장갑으로 덮인 마법 대포가 리벨리의 문어 머리를 겨누었다.
"쏴-!"
포화 소리가 울리며 리벨리의 그림자가 터져 나갔다.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나갔지만, 다시 재생했다.
'…미치겠군.'
놈이 떨어질 생각하지 않았다.
딱 달라붙어 있을 뿐 열차를 더 부수거나 하지 않았다.
부수다간 자신이 떨어진다는 걸 아는 것이다.
'열차 뒤 칸을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수백의 병사가 함께 타고 있다. 그들을 미끼 삼아 던져 주는 꼴이 된다.
또한 시간 끌기도 되지 않을 터.
"촉수를 잘라!"
기사단이 검을 뽑아 열차를 잡은 검은 촉수들을 향해 내려찍었다.
"으윽…. 빌어먹을-!"
직스 또한 제정신을 차리고 검으로 그 작업을 도왔지만, 제대로 된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검은 그림자의 손이 휘둘러지며, 수십이나 되는 병사의 몸을 찢어 터트렸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직스의 발을 붙잡았다.
"어?"
콰직-!
"크아아아악!"
발이 부러진 듯 비명을 지르는 그때, 아몬이 대검 들어 내려찍었다.
하지만, 그림자의 손에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오히려 방해된다는 듯 직스의 발을 놓고 채찍처럼 휘둘러 아몬의 대검과 충돌했다.
쾅-!
아몬이 튕겨 나가고 대검이 부서졌다.
'…더럽게 세네!'
하긴 레벨 180짜리다. 그냥 180도 아닌, 보스몹으로 분류되는 만큼 웬만한 마족들보다도 강하리라.
놈이 몸을 늘리며 들이댔고, 점자 열차 위에 올라탔다.
창가마다 촉수가 휘젓고 들어왔다.
그때마다 병사들이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촉수마다 달린 톱니바퀴 입에서 눈알이 튀어나와 병사들을 관찰했다.
마치 인간들의 발버둥을 비웃는 듯 수백, 수천 개의 눈알이 눈웃음을 짓고 있다.
역시 평범한 무기로는 먹히지 않았다.
'최악이야.'
열차가 난민들에게 가게 된다면, 놈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그럼 아몬이 바라던 난민 구조가 헛수고가 된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어.'
아몬은 아이템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휘두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단 한 번.
단 한 번만 휘두를 수 있다면 생존 가능성이 있다.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아몬은 아이템 창에서 아이템 두 개를 소환했다.
하나는 카를라가 빌려준 휘장.
[슈하림의 훈장].
아몬은 건틀렛을 벗어 던지고 [슈하림의 훈장] 장갑을 손에 꼈다.
능력치가 증폭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소환한 아이템.
순간, 리벨리의 모든 눈알이 커졌다. 동요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연했다.
아몬, 그가 뽑은 무기.
가로 60cm, 세로 40cm가 넘는 투박하고 묵직한 무쇠 머리. 2m에 이르는 손잡이를 가진 워해머.
아몬이 '워로드' 때, 마족과 마왕을 사냥하는 데 사용했던 '신화급' 무기.
게임 설정상 천공(天空)의 신, 모든 신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눌러 굴복시키고 신들의 왕좌에 앉은 주신, 자우스가 사용했다던 그 무기를 움켜쥐었다.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무기를 쥘 수 없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기 장착 해제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페널티로 [과로] 상태에 빠져듭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30% 하락합니다."
"[쇠약]에 빠집니다. 생명력이 급감합니다. 90%…. 89%…. 87%…."
"모든 포션 효과가 일시적 무효화가 됩니다."
"[마나 폭주]에 빠져듭니다. 일시적으로 마나를 사용할 때마다 생명력이 반비례로 소모됩니다."
워해머를 움켜쥔 아몬이 리벨리를 노려봤다.
제32화
샬럿은 갑자기 어둠이 찾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하늘이 어둠으로 덮였다.
새벽을 밝히는 달이 시커먼 먹구름에 집어삼켜져 그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무언가의 분노를 피하고자 겁을 먹은 듯 숨은 느낌이다.
그리고 번쩍하고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귓가에 울리는 우렛소리.
또한.
"...!"
열차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체온이 내려가고 그와 반대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열차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온몸이 짓눌리는 압박감을 느꼈다.
콰직…. 콰지직-!
어둠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빛이 발했다.
열차 전체에 미미한 황금빛 전류와 함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뭐야…?'
주변의 모든 어둠을, 열차에 매달린 검은 그림자, 리벨리의 어둠조차 몰아낼 듯한 눈부신 휘광이 뿜어져 나왔다.
샬럿은 눈을 부릅뜨며 아몬을 쳐다봤다.
그가 양손에 쥔 물건은 긴 창과 같은 손잡이, 묵직하고 거대한 무쇠 머리를 가진 전쟁 망치였다.
하지만 그것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너무나도 성스럽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마치 신을 눈앞에 맞이한 것처럼 아득한 무언가.
그 빛에 매료된 나머지, 샬럿은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쿨럭!
아몬의 투구 사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
기침 소리에 샬럿은 아몬을 쳐다봤다.
그의 투구 사이에서 붉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뿐인가.
몸에서는 온갖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양손에 낀 하얀 장갑.
[슈하림의 훈장]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 장갑 안의 손 또한 너덜너덜하리라.
'맙소사…!'
"빌어…먹을…."
아몬은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무기를 움켜쥐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판타지 월드]가 현실이 되고, 그 현실에서 '장착 불가' 무기를 억지로 쥐려니 부작용이 발생했다.
게임상에서 옴짝달싹 못 했을 뿐인 무기가, 현실이 되며 진짜 '신의 무기'가 됨으로써 그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나타낸 것이다.
미천한 인간이 신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대가는 참으로 참혹했다.
"양쪽 시야가 손상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눈의 시력이 사라지고.
"왼쪽 청각이 손실되었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귀조차 멀었다.
"전신의 피부가 불타며 손상됩니다."
"감각이 미미해집니다."
온몸에 피가 통하지 않는 듯 감각이 무뎌졌다.
'미치겠군. 과연 신의 무기라는 건가?'
주신, 자우스가 직접 용과 마신을 사냥해 그 뼈를 번개로 다리고 수많은 마족의 시체를 쌓아, 그 피로 담금질을 해 만들었다는 무시무시한 무기다.
덕분에 머릿속에 수십 개의 상태창이 떠오른다.
2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하면서도 겪지 못했던 안내 문구마저 떠올랐다.
'나는 지금 [뮬라임]을 쥐고 있는 건가? 아니면 놓친 건가?'
신의 무기, [뮬라임]을 쥔 손가락 감각이 무뎌져 느끼기 힘들었다.
"[쇠약]에 빠집니다. 생명력이 급감합니다. 50%…. 49%…. 47%…."
3초당 생명력이 1퍼씩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진짜 죽음을 맞이하리라!
'젠…장…!'
그때 무언가가 그를 감싸는 감각이 느껴졌다.
차갑고 서늘하며 부드럽다.
타오르는 양손을 조금이나마 식히는 그 차가운 감각에 아몬은 몸을 맡겼다.
***
샬럿은 아몬을 바라봤다.
그의 온몸에서 뇌광이 뿜어져 나왔다.
전류가 바닥을 타고 흘러가며 주변의 모든 걸 검게 태웠다.
움켜쥔 워해머가 열차의 바닥을 점차 녹였고, 그걸 억지로 잡은 아몬은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샬럿은 뒤에서 아몬을 끌어안았고, 온몸에 뇌 속성 마나가 퍼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양팔이 감전되며 검게 타들어 갔다.
'...!'
샬럿은 비명을 질렀다.
양손이 불타 버릴 거 같다. 황금빛 스파크는 그녀의 양손뿐만 아니라 전신을 뒤덮으며 그녀의 생명력마저 갉아먹어 치우고 있었다.
샬럿의 시선이 돌아갔다.
『끼익!? 끼에에엑! 끼에에엑!』
리벨리의 수많은 입이 버럭버럭 소리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어?'
아몬을?
아니다.
저 괴물이 두려워하는 건 아몬이 움켜쥔 무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겁 많은 맹수가 상대를 살피는 거처럼 보였다.
두려운 거겠지.
아마도 저 무기를 든 상대를 '죽일 수 있을까?'를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반대로 '도망친다'라는 선택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러한 망설임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겁많은 맹수는 도망가기보단 공격을 선택할 때가 많으니까.
"아몬! 아몬!"
"…둘…러야 한다."
"네?"
"휘둘…러야 한다."
아몬이 억지로 워해머를 움켜쥐었다.
샬럿은 아몬을 바라봤다.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넋이 나가 있었다.
'설마 앞이 보이지 않는 거야!?'
그럼에도 이 워해머를 놓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 열차에 있는 산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도망치고 있는 피난민을 위해.
눈앞에 있는 '마족'을 퇴치하기 위해서겠지.
샬럿 또한 손을 뻗어 워해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쾅-!
하늘에서 천둥이 친다.
샬럿은 어느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비명이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비록 천둥소리에 그 비명이 묻혀 버렸지만.
아몬이 쥔 무기.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느끼는 고통.
이 끔찍한 고통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들어."
그의 작은 속삭임에 샬럿은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녀의 빙 속성 마나가 아몬과 샬럿의 타오르는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 주었다.
두 사람의 마나가 폭주하며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천둥이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워해머가 서서히 들리고, 그 모습을 본 리벨리의 눈알들이 커졌다.
두려움에 부르르 떨던 그는 다급해졌는지 공격을 시도했다.
수백 개에 이르는 검은 손들이 두 사람을 덮쳤다.
마치 집어삼키듯이, 그들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뭉개 버리겠다는 듯이…!
하지만.
-작은 아이여.
샬럿 주변으로 물방울이 생기더니 솟구쳤다.
-이 귀한 약초를 주는구나. 그 보답으로 축복을 내리니.
그 성스러운 물들은 샬럿을 감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몬과 샬럿 두 사람을 지키듯 감싸 검은 손들을 튕겨 냈다.
-나의 가호가 너를 지켜 주리라.
"[귀수산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일시적으로 보호막을 형성합니다!"
"모든 자연 속성의 저항력 20%가 일시적으로 증폭됩니다!"
"뇌 속성을 튕겨 냅니다!"
귀수산의 가호!
그리고.
"쏴!"
병사들이 그 둘을 보호했다.
마탄과 포탄이 리벨리를 가격했고.
그 잠깐의 틈이.
두 사람의 일격을 허용했다.
"끝이다."
아몬의 한마디를 끝으로,
아몬과 샬럿은 들어 올려진 워해머를 내려찍었다.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샬럿의 눈이 커졌다.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 사이에서 환한 빛과 함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걸 볼 수 있었다.
내려찍은 워해머 앞으로 하늘을 꿰뚫는 빛기둥이 내리꽂히고, 그 빛 속에서 열차의 뒤 칸의 절반이 소멸했다.
신의 응징처럼 내려꽂힌 천공의 번개에 리벨리마저 그 빛 속에 잠식되어 어둠의 그림자가 소멸되어 갔다.
샬럿은 청각이 손실되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어처구니없는 굉음이 터져 나왔겠지.
샬럿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벌려 외쳤다.
-아몬!
성공했어요!
자신의 목소리마저 나오는지 몰랐기에,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모른다.
살았다는 희망.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나와 아몬을 바라봤을 때.
샬럿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커먼 손이 아몬의 어깨를 잡았다.
-아!
아몬이 고개를 돌려 샬럿과 시선을 마주했다.
황적색 눈이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볼 때, 아몬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빛무리에 집어삼켜지는 리벨리는, 길동무로 삼겠다는 듯 아몬을 잡고 열차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몬! 아몬―!
샬럿은 손을 뻗어 울부짖었다.
그런 그녀를 병사들이 붙잡으며 만류했다.
빛이 모여든다.
압축된 빛이 폭발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그 충격파가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열차가 뒤흔들리며 그 폭발 속에 휘말렸다.
…
..
.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을 분배해 주십시오!"
"명성 4500이 올랐습니다."
"'퀴리의 구원자'의 칭호를 습득하셨습니다."
[퀴리의 구원자]
구원자의 믿음 아래, 모든 이들은 희망을 가진다.
100인 이상 대규모 전투 시 아군의 방어력 +10. 근력+5. 생명력+5%. 사기 +20%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 빌어먹을 문어 새끼-!"
거대한 크레이터 속.
아몬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 시체를 짓밟았다.
점차 소멸해 가는 그림자는 마족 리벨리였다.
"이 개자식-!"
워로드의 특성과 4황자의 특성 때문일까?
아몬은 성격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의 본래 성격이라도 지금같이 처참한 꼴을 당했다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워로드였을 때라면 일격에 죽었을 문어 따위에게 자신이 이토록 생고생했으니 말이다.
드워프가 준 갑옷과 투구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대검은 부러졌다. 그뿐이던가? 전신은 완전히 걸레 조각이 될 뻔했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느끼는 그 감각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도중에 레벨업을 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야!'
천운이다.
레벨업으로 '완전 회복'과 '일시적 무적' 상태에 접어들지 않았다면, 아몬은 빛무리, 휘몰아치는 번개의 폭발 속에 휘말려 죽었을 것이다.
아몬은 기침을 해 댔고 부서진 투구를 벗어 던지곤 이마를 짚었다.
온몸에 고열이 흐름에도, 추위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몸이 무겁게 짓눌러졌다.
"페널티로 [과로] 상태에 빠져듭니다."
"모든 능력이 일시적으로 40% 하락합니다."
"모든 포션 효과가 일시적으로 무효화 됩니다."
과로인가?
모든 상태가 회복되었음에도 피로는 누적된 모양이다.
하긴 정신적 피로가 쌓인 걸 레벨업 형태의 회복으로도, 포션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썩을!"
아몬은 손을 뻗어 구덩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열차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리바이트 영지까지 가는 데 며칠이 걸릴까?'
리바이트 영지까지 가는데 미개척지를 행군해야 한다.
금요일이 수업인데, 수업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돌아 버리겠네!'
아몬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리벨리에게 욕을 내뱉으려는 순간.
리벨리가 소멸한 구덩이 속에서 한 권의 책이 보였다.
[고대 지옥의 마도서(슈펠의 신자 전용)]
마왕 슈펠 아르디아의 가호가 깃든 마법서. 죽은 망자의 군세를 만들어 낸다.
사용자의 마력 + 15%. 마력 회복력 +5%. 언데드 소환수의 능력 +10%. 언데드 소환수 체력 +8%. 좀비 및 스켈레톤 소환 개체수 +50.
"…네크로맨서 마법서?"
고대급 아이템. 그것도 리벨리에게서 나올 확률이 1% 채 되지 않는 아이템이다.
"고대급 아이템을 얻는 건 좋지만."
아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슈펠의 신자 전용.
자신은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템이었다.
***
"호외예요! 호외! 퀴리 영지의 난민들이 생존하여-!"
신문지를 파는 소년이 길거리에서 목청껏 소리쳤다.
그 모습을 저택의 발코니에서 지켜본 카를라는 퀴리 영지의 소식을 들었다.
8만의 피난민이 퀴리 영지에서 나와 미개척지를 횡단했고, 그중 7만 8,000명 정도가 리바이트 영지에 도착했다.
퀴리 영지에 가족이 있던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난민 생존 소식을 들은 리바이트 영지민들은 환호했다.
비록 퀴리 영지가 함락당하긴 했지만 역사상 이토록 많은 난민이 생존해 타 영지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패배했지만, 인류는 생존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안겨다 준 사건이었다.
카를라는 그러한 희소식과 함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카를라 그리치."
카를라는 눈이 내리는 밤.
문 앞에 찾아온 이를 바라봤다.
설백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자수정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매력적인 눈물점을 가진 여인이 우뚝 서 있다.
그녀는 제복 차림이었으며, 퀴리 영지가 어떠했는지 알려 주는 듯, 그녀의 뺨과 왼쪽 눈에는 의료용 밴드와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왼손은 사용하지 못하는지 깁스를 한 상태다.
오른손으로 삼각모를 눌러 쓴 그녀는 입을 열어 퀴리 영지에 있던 일을 말했다.
카를라는 세한 퀴리 백작의 희생 소식을 들었다.
"그…런 가요?"
카를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낯을 가리던 그녀에게 세한 퀴리 백작은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조카처럼 대하듯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생일 때마다 매번 선물을 보내 주고, 매번 안부 인사차 편지를 보내 줬으니까.
그런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얼라?"
카를라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죄, 죄송해요. 뭔가…. 눈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카를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조금씩 목소리마저 떨려 왔으며 점차 가슴의 웅얼거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카를라의 눈물을 보자 샬럿은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소식 또한 전해 줘야 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본 샬럿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으니까.
"또 한 가지."
샬럿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똑바로 카를라를 직시했다.
"당신의 그림자 수호 기사."
눈물을 흘리던 카를라가 고개를 들어 샬럿을 쳐다봤다.
"아몬 경이…."
카를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사하셨습니다."
…누구?
제3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