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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크리스탈 미믹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리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펜리가 내 앞에 나타나길 빌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왜 나쁜 가정은 늘 현실이 되냐고.'

환상 마법진을 떠올렸을 때부터 무작위 이동이 이뤄질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지금 시간이면 펜리가 진즉 들어왔을 시간인데,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녀도 구덩이에 떨어지는 순간 제단 내부의 무작위 장소로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럼, 먹이로 던져진 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건데.'

며칠 전에 수백 명이 던져졌다고 했다.

그중 생존한 이들이 있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몰살당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구조 파악이 먼저라는 건가?'

소설에선 이곳을 복잡한 미로라고 표현했다.

'제단을 먼저 찾아야 해.'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제단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앞뒤를 제외하곤 사방이 붉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일방통행의 구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방향을 정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아, 시발."

이동 중 부서지는 소리에 욕이 절로 나왔다. 밟는 곳마다 뼛조각투성이라 소리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기분도 더럽지만, 소리가 울릴 때마다 놈이 나타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상자 따위에게 겁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빌어먹을."

본래 미믹(Mimic)이란 몬스터는 보물 상자로 위장해 다가오는 탐험가들을 잡아먹는 위장형 몬스터였다.

접근만 조심하면 위협적이지도, 별 볼 일도 없는 몬스터에 불과한데, 제단에 머무는 크리스탈 미믹은 달랐다.

'고대의 힘을 먹어 치운 미믹이니까.'

미믹은 탐욕이 강해 물건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것들을 소화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크리스탈 미믹은 고대의 힘을 먹어 치운 데다, 수년간 도미닉이 갖다 바친 먹이를 포식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놈이기에 몬스터의 궤를 한참 벗어났다고 봐야 했다.

홀로 마주치는 상황에선 무조건 튀어야 하는 상황.

'나보다 느려야 할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통로에 한가득 쌓인 뼛조각을 보면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고개를 흔들며 통로를 한참 동안 걸었다.

뼈 부서지는 소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쿵―

"...!"

바닥이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바짝 엎드린 채 앞뒤를 쉴 새 없이 돌아봤다. 길게 뻗어 있는 일방통로, 애초에 숨는 건 불가능한 공간.

뭐라도 튀어나오면 주저 없이 반대쪽으로 튈 생각이었다.

쿵― 쿵― 쿵―

"...."

하지만 소리만 몇 차례 울릴 뿐 주변에 변화는 없었다. 다시 조용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치겠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쿵쿵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축이 미약하게 울렸다. 분명 묵직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고, 이곳에 그럴만한 존재는 하나뿐이다.

설마 이 근처에서 놈이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놈을 떠올리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다른 소리를 기대한 것이었다.

바로 비명 소리.

'안 들려. 생각보다 멀리 있는 건가?'

비명이 들렸다면 생존자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확인이 힘들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소리가 막혔을 수도 있다.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앞에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갈림길이다.

일단 갈림길 주변 벽을 빠르게 살폈는데, 수많은 글자와 그림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너저분한 낙서를 보는 기분이랄까.

누가 이런 낙서를 해둔 거지?

고민도 잠시, 갈림길 중 오른쪽 통로를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똑같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오른쪽 통로만 고집했다.

미로 형태라 나름 기준을 정한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붉은 통로.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배경이 펼쳐졌다. 같은 공간을 계속 맴도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쿵쿵쿵 소리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줬다.

잠시 후, 눈앞에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난 자연스레 우측 통로로 걸어갔다.

그런데,

"...."

수많은 낙서 중 눈에 띄는 표식에 미간을 잔뜩 좁혔다.

이건 한참 전에 내가 남겨둔 표식이었다.

곧장 바닥을 살피며 부서진 뼛조각의 흔적을 살폈다. 내가 밟았던 흔적들이 떠오르자,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새긴 표식을 다시 응시했다.

[1]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했던 갈림길이야.'

돌고 돌아 첫 번째 갈림길로 다시 돌아왔다. 똑같은 공간을 맴돌고 있다는 뜻.

"육포 주머니를 괜히 줬나?"

왠지 이곳에서 긴 시간을 헤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이동을 멈춘 채 고민했다.

우측으로 다섯 번의 갈림길을 지나쳤을 때 다시 첫 번째 갈림길로 돌아왔다.

'확인이 필요해.'

일단 표식을 남긴 우측 통로로 똑같이 걸어갔다.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난 우측 벽을 빠르게 확인했다.

[2]

'있네.'

내가 남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으로 우측 길은 출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때부턴 표식이 된 통로를 피해 이동을 시작했다.

다른 통로를 선택하니, 새로운 갈림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마다 숫자로 새로운 표식을 남기며 걷고 또 걸었다.

같은 공간, 같은 움직임.

시간 감각이 사라진 공간에서 난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변화는 없었다.

쿵쿵쿵 울리는 소리까지도.

반나절? 하루?

체감상 무척 오랜 시간을 걸었다고 느꼈을 때, 난 다시 갈림길과 마주했다.

"...시발."

[21]

21번째 갈림길, 한참 전에 내가 표시해둔 것이었다. 오른쪽과 왼쪽 통로를 살피니 두 곳 모두 한 번 이상 지나갔다는 표식이 남겨져 있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길을 잃었다.

복잡한 미로라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곳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봤다.

"애초에 길이 없는 거라면?"

미로에서 헤매다가 크리스탈 미믹에게 잡아먹히는 구조인 건가?

아니,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 있었다.

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목걸이는 키메라에게 먹히기 전에 펜리가 준 것으로,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제단 안에 들어왔다면 필히 날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분명 한 번쯤 마주쳤을 시간인데, 여전히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건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그녀가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고민을 하며 벽에 채워진 낙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설마….'

낙서들을 살필수록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낙서들 전부 표식이었다.

이곳에 떨어진 이들이 나처럼 표식을 남기며 움직인 게 분명했다.

그 흔적이 바로 이 낙서였다.

'그 결과가 이곳 바닥에 널브러진 뼛조각이라는 건데.'

이 방법은 실패한 방법이었다.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쿵―!

그때 신경에 거슬리는 익숙한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잊을 만하면 귀를 두드리는 섬뜩한 소리.

"…어째 불안한데."

전보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졌다. 이젠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

놈이 나와 점점 가까워지는 거라면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펜리와 합류하기 전에 놈과 마주치면 죽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뭐지? 뭘 놓친 거지?"

갈림길에 남겨진 흔적은 낙서가 유일하다.

난 빽빽이 새겨진 낙서들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욕설을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 많다.

갈림길도 많았고, 갈림길 벽들에 그려진 낙서들은 더 많았다.

이 낙서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이동하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순간 울컥 올라오는 짜증에 오른손을 추켜들었다.

번쩍―

황금빛을 소환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붉은 풍경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으니까.

더 보다간 미칠 것 같았거든.

황금빛 물결이 벽을 노랗게 물들였다.

"좀 살 것 같네."

빛을 마주하자 흔들렸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잠시 멍하니 낙서들을 살피고 있는데,

"...응?"

내 눈에 한 가지 특이점이 포착됐다.

벽에 그려진 낙서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보였다.

낙서 대부분이 내가 소환한 빛에 노랗게 물들었는데, 오직 하나의 그림만이 황금빛을 밀어내며 붉게 번뜩였다.

붉은 벽 위에서라면 절대 알아보지 못했을 작은 변화였다.

게다가 익숙한 그림이다.

"불타오르는 심장."

도미닉의 연구 일지에 그려진 문양이 분명했다. 이곳 제단과 도미닉의 힘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 난 그림이 그려진 통로를 올려다봤다.

왼쪽인가?

고민은 짧았다.

판단이 내려진 순간 난 그림이 새겨진 통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쿵―!

소리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내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빨라졌다. 아니,

"헉. 헉. 헉…."

언젠가부터 난 다급히 뛰기 시작했다. 본능이 지금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자,

번쩍―!

난 낙서벽 앞에 빛을 소환해 그림을 찾았다.

불타오르는 심장은 어디 있지?

'오른쪽!'

역시나 있다.

이 그림이 이곳을 벗어나는 이정표라면? 판단이 서자,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아껴둔 마나를 끌어올렸고, 내 신형은 점차 빨라졌다.

쿵! 쿵!

"...시발!"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소리의 간격이 점차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울릴 때마다 이젠 통로 바닥이 거칠게 꿀렁거렸다. 지독히 무거운 존재가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놈이 날 인지한 건가?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난 그림이 표시된 통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대략 십여 차례, 그림이 가리킨 통로를 지나쳤을 때, 갑자기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통로 너비가 두 배는 넓어지고, 뼛조각이 없는 잘 닦인 길이 펼쳐졌다.

통로 너머 처음 보는 빛이 나를 반겼다.

미로를 빠져나온 건가? 출구?

확신이 들었을 때,

그어어어어어―!

"...!"

쇠 긁는 섬뜩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다급히 뒤를 돌아봤다. 이미 지나쳐왔던 길목은 붉은 통로와 흐릿한 어둠만 자리했다.

그 어둠이 무언가에 꿀렁이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쿵―!

"큭!"

뭔가 온다!

충격이 터지고 바닥 진동이 부르르 느껴지자, 난 이를 악물곤 다급히 문양의 빛을 터트렸다.

번쩍―

그아아아아아악―!!!!

눈앞의 광경에 두 눈이 찢어질 듯 떠졌다.

"시, 시발!!"

언제 코앞까지 놈이 왔는지 모르겠다.

불과 다섯 걸음 거리.

입을 쩍 벌린 거대한 입이 내 코앞까지 짓쳐와 있었다.

수백 개의 뾰족한 이빨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지독한 악취가 훅 올라왔다.

빛에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며 주춤 물러나는 모습.

빛이 아니었다면 쿵! 소리를 듣는 순간 잡아먹혔을 것이다.

정체를 드러낸 괴물의 모습은 한눈에 담기지 않았다.

통로를 꽉 채운 거대한 크기.

아니, 쩍 벌어진 입밖에 안 보인다.

쿵!

그 입이 굳게 닫힌 순간 거대한 상자와 마주했다.

25톤 덤프트럭과 마주한 느낌.

어두운 색을 띠었고, 표면에 빛나는 돌들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크리스탈 미믹.

놈이다.

상자 형태를 띤 거대한 괴수 모습인데, 팔다리가 없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의문이 든 순간 상자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거대한 혀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왔다. 혀가 바닥을 깊게 누르고 튕긴 순간,

쿵―!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음이 터졌다.

그 진동에 휘청거릴 정도.

거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재차 문양을 쓸 여유조차 없는 상황.

바로 엎드린 선택이 날 살렸다. 피하거나, 부딪치려고 했다면 저 입에 그대로 삼켜졌을 것이다.

거대한 그림자가 내 머리카락을 쓸며 스쳐 지나갔다.

"아아악!"

왼쪽 어깨 살점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쿠우웅―!

바닥에 떨어진 크리스탈 미믹이 앞으로 쿵쿵 굴렀다.

지금까지 들렸던 쿵쿵 소리의 정체가 저거였나.

놈의 사냥 방식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비명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도.'

비명이 터질 틈도 없었던 거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잡아먹혔으니까.

50화 피의 제단

"제길!"

한순간의 판단이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새로운 공간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위압적인 미믹의 동체.

크다.

이대로 등을 돌려 도망갈까?

'아니, 죽어.'

본능은 등을 돌리고 도망치라 외치고 있지만, 그 순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좁은 통로에서 놈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정면 돌파뿐인데.'

저 괴물을 뚫어야 했다.

뒷모습을 드러낸 채 미동 없이 서 있는 미믹이 보인다.

으적―

뜯어간 내 살점을 음미하는 것인지, 재수 없게 씹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대로 인챈트를 실어 단검을 투척했다.

워낙에 큰 덩치라 정확도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카앙―!

우스울 정도로 단검이 가볍게 튕겨 나왔다.

몸체가 통짜 쇠보다 단단해 보였다.

그래도 충격은 있었는지 미믹이 육중한 몸을 틀었는데,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미믹을 향해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반대편 공간으로 통하는 틈새!

이 기회를 놓치면 끝이었다.

"...큭!"

아슬아슬하게 구석 벽을 스치며 미믹을 통과했다. 뜯어먹힌 어깨 때문인지 지나온 바닥이 핏물로 흥건했다.

출혈로 어지럼증이 올라왔지만,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앞으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좁은 통로는 미믹의 사냥터나 다름없는 곳.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통로 너머 새로운 풍경이 드러나는 찰나였다.

쿵―!

"...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출렁댔다. 또 온다! 다급히 등을 돌려 손을 뻗었다.

움직이는 데 마나를 모조리 퍼붓는 상황이라, 마나가 아슬아슬했다.

번쩍―!

"...!"

황금빛이 터졌을 때, 불결한 숨결이 머리카락을 훅 쓸고 지나갔다.

소름 돋는다. 시발.

'무, 뭐가 이렇게 빨라!'

다시 다섯 걸음 앞.

미믹이 코앞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멈춰있었다.

피하고 자시고가 없었다.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데 그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통로를 꽉 채운 저 빌어먹을 입을 보니 등골이 서늘했다.

그아아아악―!

이번에도 문양이 날 살렸다.

빛에 노출된 순간, 놈의 혀가 튀어나오더니 훌쩍 물러났다.

스릅!

"그 입 다물어! 새꺄!"

거리를 벌린 미믹은 재차 입을 벌리며, 미끄럼틀처럼 긴 혀로 바닥을 쓸었다.

마나 부족으로 숨이 턱 막혔지만, 문양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빛을 수거한 순간, 저 혀를 이용해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까는 운이 좋아서 살점으로 끝났지. 두 번의 행운을 바라기에는 솔직히 피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간 빛을 유지하는데도 팔다리가 마약 중독자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마나를 한계 이상 사용한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고 있었다.

3성에 올라 문양의 힘이 강해진 점은 좋은데, 가성비가 안 좋았다.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난 조금씩 조금씩 출구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으!"

마나 고갈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출구를 벗어났다.

확 트인 공간.

그대로 입구를 벗어나 우측으로 몸을 던졌다. 혀를 날름거리던 미믹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쿵―!

미믹이 움직였다!

허겁지겁 일어나 그대로 달렸다.

놈이 어디로 떨어졌지? 공격 타이밍을 보고 움직이면 늦는다.

그 전에 움직여야...!

뒤를 홱 돌아봤을 때, 내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뭐?"

미믹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날 쫓아온 게 아니었나?

한동안 미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놈을 처음 마주했던 통로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휑한 공간만 보였다.

내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물러난 것 같았다.

'어째서 돌아간 거지?'

미믹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크…."

벽에 상처가 쓸리자 통증이 올라왔다. 욱신욱신하는 상처를 살피니 뼈가 드러날 정도로 어깻죽지가 파여 있었다.

이렇게 깊었다고?

다급한 상황이라 상처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네.'

이빨에 스친 게 이 정도였다. 물렸다면 팔이 통째로 사라졌을 것이다.

칼이 챙겨준 포션이 떠오르자, 다급히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어깨에 부었다.

따끔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앉아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긴장감이 풀리니, 짙은 탈력감이 몰려왔다.

"역시 육포 주머니를 주면 안 됐어."

펜리, 이 망할 년.

생명 보험으로 곁에 착 달라붙어 왔는데, 막상 필요할 땐 곁에 없었다.

몇 차례 욕을 더 퍼붓고는 헥헥거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탈탈 털린 상황.

상처에 붓고 남은 포션을 마시니, 기운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자고 싶었다.

쿵―!

"...."

어디선가 울리는 오싹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비틀거리며 힘없이 일어났다.

이젠 저 쿵 소리의 의미를 잘 안다.

통로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쿵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미믹이 주변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호고, 그 이유는 먹이 사냥일 것이다.

즉, 이곳도 안심할 수 없는 장소였다.

비웃기라도 하듯 돌아와서 날 낼름 삼킬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이 장소가 좁은 통로가 아니라 확 트인 장소라는 점이었다.

난 주변부터 천천히 둘러봤다.

오래된 동굴 형태의 공간.

동굴은 축구장을 떠올릴 만큼 넓었다.

동굴 곳곳에는 통로들이 뚫려 있었다. 조금 전 내가 빠져나온 통로와 같은 크기다.

십여 개 정도 됐는데, 마치 이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구조처럼 보였다.

'설마 여기인가?'

한 곳을 떠올리며 걷기 시작했다.

통로 말고 눈에 띄는 장소를 발견했는데, 동굴 한가운데에 고여있는 웅덩이의 존재였다.

'웅덩이.'

난 웅덩이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웅덩이를 보자 더 확신이 생겼다.

징그러운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의 풍경은 온통 붉었다.

그래서 웅덩이도 붉게 비쳐 보였다.

지난 며칠간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보통 웅덩이를 발견했다면 짙은 목마름부터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웅덩이에 가까워질수록 목마름은커녕 갈증이 싹 사라졌다.

"이곳이 제단...."

내가 상상했던 그 제단이 맞았다.

내용대로 제단의 외형은 아주 엿 같았다.

눈앞에서 본 웅덩이는 멀리서 본 붉은 색감보다 더욱 짙었다.

비릿한 냄새도 맡아졌다.

피 웅덩이.

놀이터 크기의 웅덩이는 전부 핏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웅덩이 안에 작은 무덤처럼 자리한 돌무덤들이 보였다.

쌓인 돌들은 공간보다 더 짙은 핏빛을 흘리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 저 돌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제단의 상징이라 불리는 것들.

'생체 마석.'

도미닉의 힘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들의 동력 원천이 이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아니, 더 많을지도.

"으…."

여러 개의 돌무덤을 마주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처음에는 마나 고갈로 생긴 후유증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빈속인데도 구토감이 올라오자, 결국, 난 바닥에 신물을 게워냈다.

'이 고통... 어째 익숙한데.'

키메라 배 속에서 무려 6일에 걸쳐 마석 가루를 흡수했다. 그때마다 자신을 매일같이 괴롭혔던 증상이 있었다.

광인 전조 현상.

몸이 기억하는 고통.

그래서 해결책도 잘 알고 있었다.

우웅―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미약하게 울어댔다.

오롯이 내 몸에만 문양의 힘을 집중시킨 것인데, 마석 복용으로 3성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숙달된 기술이었다.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지자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마석의 부작용 맞네.'

복용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원인은 눈앞의 저 마석 더미밖에 없었다.

'마석이 대량 쌓인 장소에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받는 건가?'

펜리가 말하길 마석에선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소량이라면 그 기운이 미약할 테지만, 엄청난 개수가 한곳에 쌓여 있다면 기운이 짙게 흘러나올 터였다.

그럼, 이 동굴로는 생명체가 접근하기 힘들었다.

'설마 미믹이 물러난 것도?'

이 사실을 알고 다른 먹이에 관심을 돌렸을 수도 있다. 아니 이것으로는 이유가 부족한가? 하지만 이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난 피 웅덩이를 자세히 바라봤다.

백 개의 심장을 탄생시킨 시발점.

이 제단에서 미치광이 도미닉이 탄생했다.

눈에 띄는 것을 두 가지 발견했는데, 한 가지는 웅덩이 안에 드문드문 굴러다니는 보랏빛 마석이었다.

붉은 것에 비해 극소량이었는데, 느껴지는 존재감은 붉은 것들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했다,

처음에는 보랏빛 마석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함께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감이 왔다.

'아레나의 임시 동력 원천이었나?'

도미닉이 이따금 아레나에게 먹였던 동력 원천이 이 보랏빛 마석 같았다.

그리고 그 마석들 곁에 쓰러져 있는 자들이 보였다.

당장 눈에 띄는 것만 열 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온전한 몰골이라 웅덩이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웅덩이의 깊이는 얕았다.

발목을 담글 수준 정도?

첨벙, 첨벙, 웅덩이를 가로질러 핏물에 묻혀 있는 이들을 조심스레 뒤집었다.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인간은 없었다.

모두 드워프나 엘프, 사자나 늑대인간으로 이뤄진 이종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상태를 보니 미믹에게 당한 것 같진 않고, 왜 이곳에 전부 방치되어있는 거지?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일어나려는데, 순간 죽은 드워프의 손톱을 보곤 멈칫했다.

'붉다?'

손톱이 붉었다.

마석의 부작용, 광인(狂人)의 중독 현상이었다.

다시 이종들의 몸을 살펴보니 자잘한 자상이 가득했다.

서로를 향해 할퀴고 물어뜯은 상처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붉은 손톱이었다.

이 장소에 발을 들이면 마석의 기운에 오염되어 광인으로 변하는 건가?

한 가지 의문이 풀리자,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미믹은 왜 이들을 놔둔 걸까?'

시체를 이리 놔두는 놈이 아니었다. 지금껏 온전한 시체를 찾기 힘들었다. 통로에 죄다 깔린 건 뼛조각뿐이었는데, 웅덩이에서 죽은 이들만 온전히 시체 형태였다.

'이 주변에 확인된 시신만 서른 구, 그런데 미믹이 건드렸던 흔적은 없어.'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잠시 비릿함을 잊고 그 이유에 빠져들었다.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마석 더미를 응시했다.

"…설마!?"

그때였다.

쿵―!

"...헉!"

뒤쪽에서 오싹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피부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시선을 천천히 돌린 순간,

피 웅덩이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시, 시발!'

난 그대로 시체 곁에 코를 박고 누웠다. 토할 것 같은 비릿한 맛과 냄새, 끔찍한 감촉이 온몸을 적셨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쿵―

크리스탈 미믹이 마석 더미 위로 떨어졌다.

51화 도르네프의 반려, 샤르바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장소가 제단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크리스탈 미믹이 언제고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쌓여 있는 마석 더미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제단은 도미닉이 미믹을 처음 발견한 장소였고, 미믹에겐 둥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리 갑작스럽게 올 줄은….'

쿵쿵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했고, 놈이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심하고 있었다.

타이밍도 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어디로 도망치지?'

웅덩이 바깥으로 나가는 건 틀렸으니, 일단 미믹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쌓인 마석 더미 뒤로 기어갔다.

'빌어먹을, 피 웅덩이 위에서 각개전투를 하게 될 줄이야.'

놈이 날 인지했을까?

겉으로 드러난 미믹 외형은 거대한 보물 상자였다. 눈과 코가 없었고, 커다란 입과 이빨, 징그러운 혀가 생명체라 말할 수 있는 흔적의 전부였다.

시선을 살폈는데, 다행히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놈의 입이 들썩거리자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냥을 한 흔적.

그 흔적을 통해 이곳에 아직 생존자가 있음을 파악했다.

'체취? 진동? 오감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는 건가?'

영화에서 보던 괴물들의 습성을 떠올리며 최대한 느리고 소리 나지 않게 웅덩이 사이를 기었다.

그렇게 시야를 벗어나 마석 더미 뒤쪽으로 우회했을 때였다.

"...!"

갑작스레 마주한 존재 때문에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한 사발 들이켰지만, 느낄 새도 없었다.

처음에는 죽은 시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죽은 척하던 존재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바라본 그 존재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아!"

'안 돼!'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 난 다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엘프, 그것도 여자 엘프였다.

펜리였다면 두려운 눈동자로 날 볼 게 아니라 입을 막은 순간 내 손을 짐승처럼 물었을 것이다.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지닌 엘프.

핏물로 붉게 물들었지만, 태는 얼핏 보였다.

가만, 여자 엘프?

그 단어를 인지한 순간, 난 다급히 그녀의 머리 부분을 확인했다.

눈앞의 존재가 내가 찾던 그 여인이라면 '그것'이 있을 것이다.

도르네프가 그녀에게 선물로 건네준 베네타의 상징과도 같은 보석이 있다.

흑요석이 달린 머리 장신구.

샤르바딘의 유해 속에 발견됐던 물건.

그 흑요석이 눈앞의 엘프 머리에 달려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발, 찾았다!

'사, 샤르바딘!'

펜리가 그토록 찾던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살아있는 데다 미믹이 자리한 제단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만남이었지만, 난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펜리, 펜리.'

입 모양으로 한 이름을 반복적으로 알렸다.

샤르바딘은 푸른 장미 출신으로, 베네타와 펜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펜리가 일상처럼 차고 다니던 목걸이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잠시 후, 내 입 모양과 목걸이를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곧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내 메시지가 통한 것 같았다.

두려움에 물들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진정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씨, 울면 곤란하다고.

쿵―

"...!"

그때 피 웅덩이 위로 거친 파동이 일었다.

미믹이 행동할 때 나는 소리.

바짝 엎드린 채 죽은 듯이 누웠다. 샤르바딘은 온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미믹의 존재를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별다른 변화가 없자 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미믹을 살폈다.

미믹이 거대한 몸체를 거칠게 털어내고 있었다.

후두두둑―

미믹이 몸을 털 때마다 몸체에 붙어 있는 돌들이 떨어져 나왔다.

붉은빛을 띤 돌.

생체 마석이었다.

크리스탈 미믹은 먹이를 먹고 그 보상으로 마석을 도미닉에게 제공했다.

도미닉과 미믹 간에 이어진 수년간의 거래.

그 일부를 직접 목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으적―!

새로운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붉은 마석 일부를 게걸스럽게 삼키고 으적으적 씹더니, 보랏빛 마석 하나를 툭 뱉어냈다.

'보랏빛 마석이 저렇게 만들어지는 건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

보랏빛 마석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난 미믹의 행동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을 때 짧게 호흡을 내뱉고 천천히 일어났다.

내 행동에 샤르바딘이 다급히 내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곤 마석 더미 앞으로 나왔다.

미믹 앞에 나를 완전히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짝 굳은 채 반응을 기다렸다.

나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었다.

으적― 으적―

붉은 보석들을 삼키고 보랏빛 마석 소량을 뱉어내던 미믹이 어느 순간 몸을 틀더니 나를 마주 봤다.

저도 모르게 움켜쥐는 주먹.

솔직히 쫄린다.

그 순간, 미믹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쿵―!

소리와 함께 미믹이 허공으로 쇄도했다.

"...."

그대로 나를 지나쳐 통로 한 곳으로 사라지는 미믹을 한동안 지켜봤다.

"날 못 봤어."

의문스러웠던 미믹의 행동 패턴들을 떠올려봤다.

이곳으로 발을 들이자 미믹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유.

유독 이 장소의 시신들이 멀쩡했던 이유.

'그리고 지금껏 샤르바딘이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유.'

여러 가지 의문을 묶어 생각하니, 붉은 마석이란 결론이 나왔다.

미믹에겐 눈이 없다.

그럼 어떻게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일까.

방금 그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붉은 마석이 쌓인 곳에선 미믹이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난 마석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그러곤 바깥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타타타타탁―

바닥에 떨어진 마석들이 소음을 내며 울렸다.

소리가 제법 컸는데, 미믹은 나타나지 않았다. 몇 차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청각도 아니라면.'

미믹은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오감(五感)이 아니라, 특정 기운을 쫓아 먹이를 사냥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마석의 기운이 짙어 감지를 못하는 것이었고.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

등을 돌려 웅크린 채 숨어 있는 엘프에게 다가갔다.

일단 사실 확인부터.

"샤르바딘, 맞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나 됐습니까?"

"모, 모르겠어요. 굉장히 긴 시간이었는데...."

하긴, 이 공간에서 시간 개념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구덩이에 던져진 후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럼 최소 사흘 가까이 됐다는 건데.

'이곳에서 사흘?'

마석 더미를 잠시 본 나는 샤르바딘을 살폈다. 광인이 되었어도 진즉 될 시간. 그럼에도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의문이 든 순간, 그녀의 머리에 달린 흑요석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아, 흑요석에 드워프의 축복이 걸려 있다고 했지?'

도르네프가 직접 세공한 흑요석은 검은 장미를 닮아 있었다.

그녀가 푸른 장미 출신이기에 마음을 담아 장미를 선물한 것이었다.

어떤 축복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 보석 덕에 그녀의 정신이 지금껏 유지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미믹의 먹이로 희생된다.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버티고 버티다가 탈출을 위해 제단을 벗어났을 것이고, 사냥당했을 것이다.

"호, 혹시 펜리 님이 오신 건가요?"

"네. 함께 왔습니다."

"그럼 이곳에…!"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장미의 주인, 펜리 체이서가 직접 왔다.

그 소식에 샤르바딘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감정이 터지려는 것을 꿋꿋이 참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무척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르네프의 마음을 훔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가?'

도르네프는 드워프의 영웅이다.

그런 존재의 마음을 단순한 미모로 뺏는 게 가능할까.

마석의 부작용과 상관없이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사흘을 버텨냈다.

어떤 마음으로 구조를 기다렸을까.

그리고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무엇을 먹고 버텼을까.

잠시 피 웅덩이를 바라본 후, 붉게 물든 그녀의 입가를 쓰윽 닦아냈다.

"펑펑 울어도 됩니다. 놈은 오지 않을 테니까."

내 말에 봉인이 풀린 듯, 안도와 절망이 뒤섞인 표정은 곧 한 맺힌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샤르바딘이 나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 *

난 샤르바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소설에서도 희생당한 인물로 표현될 뿐, 알려진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도르네프의 반려, 샤르바딘.

그녀의 존재감은 소설에서 미약한 편이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벌어진 사건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관련된 스토리를 떠올려봤다.

반려의 죽음으로 원망에 사로잡힌 도르네프는 도미닉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몰락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다.

미래를 알고 있는 카멜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블라이어의 군대가 곧장 베네타를 공격해왔고, 도르네프는 그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와 함께 생을 마감하게 된다.

베네타의 몰락.

그 뒤로 펜리가 아지트를 옮기면서 도르네프의 유언을 따라 제단을 찾게 된다.

'제단이 무너지면서 샤르바딘의 위치가 알려지니까.'

저 머리 장신구에도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다만, 이곳에선 그 위치 추적 기능이 소용없었다.

구덩이 바깥과 이곳은 결계로 막힌 전혀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훗날 결계가 무너진 후에야 펜리는 폐허가 된 이곳에서 흑요석를 지닌 유해를 발견하고 샤르바딘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검은 장미를 닮은 저 흑요석 장신구는,

'훗날 스페셜에 오른 펜리 체이서의 상징물이 되지.'

다크 로즈(Dark Rose).

훗날 펜리가 붙인 장신구의 이름이었다.

즉, 이 이야기는 샤르바딘의 죽음으로 시작된 메인 스토리였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서 하소연하듯 조잘대고 있으니 신기했다.

내가 그녀의 운명을 바꾼 것일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니 판단하긴 이르지만, 그녀의 생존으로 스토리의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이 당신의 호위대란 말입니까."

"...네."

샤르바딘은 슬픈 눈으로 쓰러진 이들을 바라봤다.

도르네프가 붙여준 친위대들로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했다.

"베네타 인근 마을에서 습격을 받았어요. 호위대 절반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이들과 함께 잡혀 왔죠."

범인은 작은 소녀라고 했다.

샤르바딘은 그 소녀를 떠올리며 두려운 듯 몸을 웅크렸다.

그 소녀의 두 손에 호위대 절반이 찢겨 죽었다고 했다.

괴력의 소녀라,

'아레나 후아튼.'

그 여자가 분명했다.

라웁 숲을 지나치다 재수 없게 도미닉의 본대에 걸린 것 같았다.

그 후에 실험체 감옥을 거쳐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과정을 들었다.

"미믹과 싸우면서 이곳까지 왔다고요?"

그중 내가 크게 관심을 보인 건, 구덩이 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부 호위대와 합류하게 되면서 함께 움직였는데, 미믹과 여러 번 전투를 벌이며 도망쳤다고 했다.

미믹과 전투가 가능했다고?

인챈트가 실린 단검마저 가볍게 튕기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친위대라도 맨손으로 미믹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을 텐데.

"친위 대장인 에비라트는 마법사였어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마력에는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고요."

"미믹이 마법 공격에 취약하다는 말입니까?"

"네. 하지만 죽일 순 없었어요."

마법을 아무리 퍼부어도 고통만 줄 뿐 쓰러트릴 순 없다고 했다.

그리고 소통이 가능한 괴물이라고 했다. 마법사와는 어느 정도 의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교전 끝에 미믹과 잠시 소통한 에비라트가 피 웅덩이 쪽으로 일행을 이끌고 왔다고 했다.

"출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에비라트도, 그를 따르던 전사들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녀를 제외한 친위대는 전부 광인이 되어 죽어버렸다.

미믹이란 놈, 제단의 힘을 알고 이용한 것이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영악한 괴물일 수도 있겠다.

그녀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믹에 관해 정보를 얻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극악의 난이도라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미믹을 피부로 느껴보니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미믹을 제거하는 게 쉽지 않겠어. 방법이 없을까?'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문득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가만, 크리스탈 미믹에 대한 정보라면....'

누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까?

'도미닉 후아튼!'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다급히 가방에서 한 권의 공책을 꺼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여기에 해답이 있을지 몰랐다.

52화 육포 가져와!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고 제단을 무너트린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도미닉 후아튼, 그 미치광이 본인이지.'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실험체 감옥들을 폐쇄하면서 엄청난 실험체들이 끌려왔다.

그 수가 수천이 넘어갔다.

도미닉은 이들 전부를 마석이나 키메라 전력으로 바꾼 후 미믹에게 손을 뻗칠 것이다.

'그 시간과 기회를 주면 안 돼.'

놔두면 도미닉의 전력이 두 배가량 증가한다. 잡혀 온 이들의 희생을 막으면서, 도미닉에게 큰 타격을 주려면 지금 미믹을 제거해야 했다.

'문제는 미믹을 제거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단 말이지.'

소설에선 미믹의 제거 과정보단 미믹이 제거된 직후를 더 자세히 다뤘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이벤트, 백 개의 심장의 클라이맥스 부분으로 넘어가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카멜 블레이저의 비상과 베네타의 몰락.

내 목표는 클라이맥스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미믹은 쉽게 제거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야. 분명 오래전부터 제거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거야.'

도미닉의 연구 일지.

그 방법이 이 책에 있는지 살피기 위해선 일단 책에 걸어둔 봉인 작업부터 풀어야 했다.

난 마석 더미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쉽사리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뭘 하시는 건가요?"

샤르바딘은 내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붉은 돌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단검 자루로 빻고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다.

"괴물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요."

"괴물이요? 펜리 님이 오셨으니 곧 해결되지 않을까요?"

펜리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녀는 펜리가 곧 나타나 미믹을 없애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게 가장 베스트이긴 하지.'

나야 코도 안 풀고 미믹을 제거할 수 있으니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처음부터 펜리에게 그걸 기대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미믹을 상대해보면서 펜리도 쉽지 않겠단 판단이 들었다.

'펜리는 하이 엘프가 아니라 다크 엘프거든.'

마력의 축복을 타고난 하이 엘프는 마법으로 극강의 파괴력을 만들 수 있는 전투 마법사였다.

마법에 취약한 미믹을 죽일 수 있는 한 방이 있다는 뜻.

하지만 다크 엘프는 마력으로 육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육체파였다. 지속력이 뛰어난 물리력을 자랑했지만, 절삭력 외엔 큰 한 방이 없어서 무식하게 단단한 미믹과는 상성이 안 좋았다.

펜리가 미믹에게 당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의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혹시 모르니까요."

마석을 붉은 가루로 만든 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이제 책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데.

"저… 감사해요."

"네?"

갑자기 샤르바딘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해왔다. 그녀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이고 있자, 그녀가 어물쩍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 울음을 터트린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

"절 구하러 오신 거잖아요. 감사 인사가 늦은 것 같아서…."

"아, 괜찮습니다. 하하하…."

그녀의 생사에는 관심이 적었던 터라,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목적은 그녀보단 다른 것에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호감 어린 눈빛에 살짝 부담감이 올라왔는데, 그녀가 결심한 듯 날 올려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은인으로 생각할게요."

"...은인?"

"네. 제 이름을 걸고요."

엘프의 약속은 귀하다.

게다가 그 약속을 한 엘프가 도르네프의 반려라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어색한 웃음?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 마음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

이럴 때 육포라도 있었으면 양심이라도 덜 찔렸을 텐데.

펜리 이 망할 년, 설마 육포를 다 먹은 건 아니겠지?

"혹시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쿵 소리가 크게 들리면 바로 알려주세요. 놈이 근처에 있다는 신호니까."

"알겠어요!"

엘프는 청각이 뛰어나니 믿고 맡길 만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쫑긋거렸다.

표정이 제법 진지했는데,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확실히 이쁘긴 하네.'

긴 시간 씻지 못하고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 이 정도라면 작정하고 꾸미면 살 떨릴 것 같았다.

진짜 외모 하나로 도르네프의 마음을 훔친 거 아니야?

'뭔 쓸데없는 생각을….'

잡생각을 털어내고 책에 집중했다.

첫 장을 펼치고 그 백지 위에 붉은 가루를 조금씩 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백지 위로 붉은 가루가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주군! 봉인 해제에는 생체 마석이 열쇠였습니다!]

주술사들의 둥지, 장로 렌구아가 카멜에게 연구 일지의 봉인을 풀며 했던 말이었다.

우웅―!

책 겉표지에 붉은빛이 감돌길 잠시, 백지 위로 글자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장에 떠오른 글귀에는 비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복수를 위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했다. 그날을 절대 잊을 수 없다. 베르센 클라크! 대공이라 불리는 그 악마 같은 자가 내 딸에게 한 짓은....]

펜리가 태운 첫 장에 적힌 글귀라, 중간에 내용이 잘려 버렸다.

연구 일지는 도미닉이 일기 형식으로 적은 듯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다음 장을 넘기려고 하는데,

"가, 가까이 왔어요!"

샤르바딘이 다급히 미믹의 접근을 알려왔다.

쿵―

소리가 들린 순간, 어느새 미믹이 피 웅덩이 중앙으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다급히 웅덩이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어어어어어―

덩치는 25톤 트럭만 한 게 더럽게 빨랐다. 게다가 강철 같은 내구성까지.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사냥을 마친 것인지 미믹은 재차 마석을 털어낸 후 보랏빛 마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쿵―

한 번.

쿵―

두 번.

쿵― 쿵― 쿵―

그리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미믹의 똑같은 행동이 반복됐다. 미믹은 마치 본능이 아닌 지시를 받고 일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우리 근처로 다가오는 것 외에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절 믿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마석의 기운에 대항할 방법이 있다는 조건하에 제단은 미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미믹으로부터 도망칠 능력이 없다면 제단을 벗어나 통로로 향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샤르바딘의 말대로라면 굳이 펜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겠지.'

미믹은 영악하게도 사냥이 버겁다고 느끼는 존재들을 제단으로 유인하는 듯 보였다.

펜리 같은 괴물은 미믹에게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위협하는 강자였다.

그녀라면 무조건 제단 쪽으로 흘러들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걸이의 위치를 감지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을 테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바깥이 아니라 같은 결계 장소라면 목걸이에 걸린 위치 마법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몰랐다.

즉, 이제부터 버티는 것이 내 일이었다.

'지루할 틈은 없겠네.'

난 주변을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피 웅덩이, 끔찍한 시체들 그리고 음울한 분위기의 마석 더미까지.

악몽보다 더 끔찍한 환경 속에서 때아닌 독서를 하게 생겼다.

혼자가 아닌 게 어디냐.

"배고프죠? 조금만 참으세요."

조만간 육포를 가져간 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미믹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연구 일지에 집중했다.

* * *

태양도 달도 없는 꽉 막힌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제단에서 하루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꼬르륵―

"...."

배고파.

뱃가죽이 들러붙는 느낌이다.

이 정도 상태면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은 굶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펜리라면 제단을 금세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문제는 샤르바딘의 몸 상태다.

오랜 굶주림과 갈증이 그녀의 몸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나를 만날 때부터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은 부축 없이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먼저 펜리 님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이곳에서 벗어나면 큰일 납니다."

"하지만 펜리 님이 위험하신 상황이라면…."

펜리가 위험하다라.

그녀가 미믹에게 잡아먹힐 확률은?

'와이번 알에서 드래곤이 태어날 확률이겠지.'

미믹의 공격이 강력하긴 하지만, 단조로운 공격으로는 그녀를 잡을 수 없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소리다.

"그럴 리가요. 차라리...."

[혼자 처먹으니, 맛있니?]

[샤르바딘이 살아있길 기도해야 할 거야. 보름 동안 굶고 싶지 않다면.]

그 일에 앙금을 품고 날 굶기려고 뭉그적뭉그적 움직이는 것이 더 확률이 높았다.

독사 같은 년이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됐다.

"...저."

나를 부르는 그녀의 숨이 무척 가빠 보였다.

한계였다.

고작 하루 굶주린 나와 달리 그녀는 오랜 시간 공포와 굶주림 그리고 갈증과 싸웠다.

역시나, 그녀의 시선이 피 웅덩이로 향했다.

갈등 어린 표정.

눈앞의 피로 고통을 해결하고픈 갈망이 커 보였다.

"마셔봤습니까?"

"도망치다가 의도치 않게...."

내 물음에 샤르바딘은 쓰게 웃었다.

나도 의도치 않게 피를 마셔봤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피를 마시게 하면 힘이 난다고 했던가. 실제로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녀라면 살기 위해서라도 마시면서 버텼을 것이다.

"그 후로 입에 댄 적은 없어요. 함께 온 이들이 웅덩이에 묻혀 있거든요."

"아…."

"근데 전 꼭 살아남아야 해요. 저를 위해 죽은 이들과 약속했거든요. 어떻게든 벗어나 그들의 희생을 알려야 해요."

난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피 웅덩이에는 그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 흔적조차 마시면서 버티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그녀의 처절한 생존 과정은 소설에 없었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죽음까지도.'

실제로 경험해보니 알겠다.

현실과 소설의 체감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피 웅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말려야 하나?

하지만 이대로는 당장 죽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그때였다.

콰앙―!

"...!"

통로 사이로 묵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서너 번의 충격음이 들리고,

그어어어어어어―!

미믹의 소리마저 통로를 뚫고 이곳까지 들려왔다.

지금껏 들려왔던 미믹의 소리와 달랐다. 고통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미믹에게 큰 변화가 발생한 것 같았다.

미믹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맛없는 거 먹으면 탈 납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녀 앞에 미소를 비춘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쉬곤 매섭게 내뱉었다.

"망할 년! 육포 가져와!"

내 목소리가 제단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미친 짓 같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외침이 터진 순간, 수많은 통로 중 한 곳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후, 뒷덜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방금 뭐라고 했냐?"

어째 섬뜩한데 미치도록 반가웠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분명 육포 머시기 미친년이라고 들었는데?"

"미친년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

"무, 뭐가 됐든 목소리를 듣고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맞아."

뒤를 천천히 돌아봤다.

암고양이가 털을 삐쭉 세운 것처럼 까탈스럽게 서 있는 한 여인.

손에 들린 곰방대.

곰방대를 뻐끔대며 그녀가 날 바라봤다.

"용케 버텼네? 그리고…."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뱉어낸 그녀의 시선이 샤르바딘을 향하자 부드럽게 풀렸다.

"용케 살린 것 같고."

펜리 체이서.

그녀가 우리를 찾아왔다.

53화 새로운 개화 속성, 성력(聖力)

펜리가 이렇게 반가운 존재였나?

아니 정확하게 그녀보단 육포 주머니가 더 반가웠다.

육포 하나에 이리 행복해질 상황이 올 줄이야.

"넌 왜 먹어?"

"제 것 아닙니까?"

"이미 많이 먹었잖아. 나 굶을 때 키메라 배 속에서."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무서운 년이었다.

그나저나 주머니에 일주일 분량의 육포를 넣어놨는데,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그녀의 식탐을 욕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틀이 다 지나갔어. 조금 있으면 삼 일째야."

"…삼 일? 그렇게나 흘렀습니까?"

구덩이에 떨어진 후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삼 일이면 좋든 나쁘든 입질이 와야 하는데?'

제단으로 오고 있는 두 개의 세력, 도르네프와 도미닉.

이들 중 도착한 이가 있다면 제단에도 어떤 변화가 있어야 했다.

'아직은 조용하단 말이지.'

바깥 상황이 궁금해졌다.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는 도르네프의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잡혀 온 이들도 살 수 있고, 도미닉이 도착했을 때 함께 싸울 수 있었다.

'반대로 도미닉이 먼저 도착한다면….'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물론,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펜리 체이서의 개화 특성, 그림자 주술(Shadow Magic).

그 능력이라면 나와 샤르바딘 정도는 쉽사리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기할 것들이 생긴다.

'더 급한 건, 도미닉이 도착하기 전에 제단을 벗어나야 한다는 거지.'

펜리의 주술이 과연 결계 안에서도 통할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당장은 힘들어."

"마법진 때문입니까?"

"맞아."

"시간을 준다면요?"

펜리는 미간을 구기곤 잠시 고민에 빠졌다.

구덩이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봤다. 하지만 그렇다 할 방도를 지금까지 찾지 못한 상황.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확신할 수 없어."

"그 정도입니까?"

"도미닉 따위가 만든 곳이 아니야. 예부터 존재했던 공간일 거야."

"고대 시절의 결계 같은 겁니까?"

"확실해."

"어떻게 확신합니까?"

"내 감각에 교란을 주는 뭔가가 있거든. 인간의 지식으로 나올 수 없어."

출구는 물론, 목걸이의 위치를 느끼고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고 했다.

3일이 넘도록 그녀가 날 찾지 못한 이유였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건데.

그 전에 보험이 필요했다.

"뭐냐?"

내가 손을 내밀자, 펜리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잊으신 거 없습니까?"

"뭘?"

"눈앞에 샤르바딘 님을 대령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생존한 채로."

"...."

조건부 거래.

난 펜리와의 약속을 완벽히 지켰으니, 대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다.

생명의 징표를 내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선 당장이라도 받아놔야 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는데,

"억!"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내뱉던 펜리가 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내 눈을 어지럽혔다.

"…무, 뭡니까?!"

"가만히 있어. 단검으로 확 찔러버리기 전에."

설마, 날 죽이려고?

이 육포 같은 년이 설마…!

"응?"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단검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베어낸 후 내 이마 중앙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도장을 찍듯 자신의 핏자국을 남긴 후 주문을 작게 읊조리자, 시원한 감각과 함께 핏방울이 이마 안쪽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표식을 각인한 거야. 징표를 달라며?"

"두 번 하다간 심장 떨어지겠네요."

"각인 효과를 불러오려면 날 떠올리면서 이름을 불러."

"그럼 어떻게 됩니까?"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생명의 징표.

단 한 번, 목숨이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녀만의 맹약이었다. 이건 그림자 능력 중 하나인 그림자 표식을 이용한 것인데, 표식을 남긴 이의 흔적을 쫓는 추적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대신 네놈 주변에 그림자가 선명하게 존재해야만 해."

"그림자를 타고 온단 말입니까? 거리와 상관없이?"

"그랬다면 세상 놈들이 날 가만히 뒀을 리 없지. 제약이 존재해."

"제약? 그 제약이 뭡니까?"

"알면 죽을 텐데, 듣고 죽을래?"

"즈, 증표를 준 사람한테 할 말입니까?!"

"그럼 묻지 말든가."

"그럼 불렀는데 제약으로 못 오게 되면 어떡합니까?"

"뒈져야지."

"생명의 징표라면서요?"

"내가 부르면 막 나타나는 램프의 요정인 줄 알아? 부르지 말고 직접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야. 위치 알잖아?"

더 따지다간 들고 있는 단검에 죽을 것 같아서 한발 물러났다.

사실 생명의 징표를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그 제약이란 조건.

'난 알고 있거든.'

당연히 비밀로 해야 했다. 그 제약 조건은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으니까.

"천천히 씹어 먹어요."

"…고마워요."

새로 느낀 건데, 여긴 엘프도 육식을 하나 보다.

참 복스럽게 먹네.

샤르바딘의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눈에 띄는 건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였다.

펜리가 내게 줬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빠르게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엘프에게만 적용되는 효과라고 들었는데, 미리 알았다면 좋을 뻔했다.

샤르바딘이 천천히 배를 채우는 사이, 펜리와 나는 그동안의 일을 간략히 공유했다.

그 전에 난 통로 쪽을 잠시 둘러봤다.

"미믹과 교전한 거 아니었습니까?"

"미믹? 그놈을 미믹이라고 부를 수 있나? 이미 종을 넘어선 것 같던데."

"오랜 시간 변이 과정을 겪은 것일 뿐, 본질은 같으니까요."

"고루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묻고 싶은 게 뭐야?"

"미믹과 몇 번 부딪쳤습니까?"

"세 번."

"제거는 무리였나 보네요."

"이런 건 눈치가 빠르네."

"미믹이 살아있으니까요."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는 영악한 놈이야. 쉽게 잡기 어려워."

세 번 부딪쳤고, 세 번 모두 미믹이 먼저 도망쳤다.

강철 같은 내구성에 도망치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하긴, 놈이 더럽게 빠르긴 하지.

슬슬 본론으로 가볼까?

"사실 제단에서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탈출 방법? 네가 어떻게?"

펜리의 물음에 난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흔들었다. 책을 살핀 펜리는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치한 장난질을 책에 해놨네? 어떻게 풀었지?"

"붉은 보석이 해답이더군요. 이곳을 뒹굴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흠, 그래서 방법은?"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는 것."

"크리스탈 미믹?"

"녀석의 이름 같습니다."

난 크리스탈 미믹과 제단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를 그녀에게 모두 풀었다.

계획을 실행하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쿵―

"...!"

이놈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로 한 군데서 모습을 드러냈다.

웅덩이 한쪽에 철퍼덕 떨어진 미믹은 여느 때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입가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어디서 또 누군가를 사냥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생존자들을 보셨습니까?"

"제법 마주쳤지. 지금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함께 움직일 생각은요?"

"저 괴물 새끼가 입 벌리고 돌격해오면 지키는 것이 무의미해. 반격이 고작이었거든. 추격하면 복잡한 길로 사라져 버리고."

"이곳 무척 넓겠죠?"

"네가 알던 것 이상으로 이곳은 넓어. 그리고 복잡하지. 지리 파악은 포기해."

답을 하는 펜리의 시선은 크리스탈 미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곰방대를 뻐끔뻐금 피우며 팔짱을 끼고 한동안 미믹의 행동을 살폈는데, 내가 알려준 정보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겁나서 못 본 척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코앞에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미믹을 보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그 사이, 미믹이 다른 통로로 사라져 버렸다.

"진짜네. 인지를 못 해."

"그래서 말인데, 괜찮습니까?"

"뭐가?"

"손톱이 붉어진다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거나 부작용을 말하는 겁니다."

"널 죽이고 싶긴 한데. 이것도 부작용인가?"

"…아닐 겁니다."

곰방대를 털어낸 펜리는 마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변을 살핀 그녀가 다시 곰방대를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거슬려.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당신도 오랜 시간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겁니까?"

"그래."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굶어 죽는 게 더 빠를걸?"

펜리가 텅 빈 육포 주머니를 흔들었다.

부작용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5성급 정신 방벽이 평범할 리 없지.

그런데 언제 다 먹었지?

샤르바딘을 내려다보자, 오물오물하던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 할 수도 없고.

확실히 시간은 우리가 아니라 미믹의 편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굶으면 답이 없었으니까.

"저 상자 괴물을 죽여야 출구가 나온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결국,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네."

"기습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통짜 쇳덩이 같은 놈이라 내 무기로 단시간에 죽이는 건 불가능해. 놈의 움직임을 누군가 잡아준다면 해볼만한데...."

"얼마나요."

"반나절 정도?"

반나절? 이 엘프가 미쳤나.

그녀가 날 보며 눈을 흘기자, 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반나절이 아니라 1분도 빡세 보였다.

대신,

"얼마 전부터 작업해둔 게 있습니다."

"작업?"

"도미닉의 연구 일지에 미믹에 대한 사냥법이 적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방법은 지금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인데."

"키메라 체액."

붉은 보석에 키메라 체액을 묻혀 마비시킨 후 사냥하는 방법이 일지에 적혀 있었다.

보랏빛 마석 생성에 붉은 마석을 삼키는 행위를 이용한 것인데, 우리에겐 키메라 체액 같은 마비독이 수중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작업을 해놨다는 거지? 체액이 없다면서?"

"체액은 아니지만, 대체할 만한 것이 있거든요."

"대체할 만한 것?"

펜리의 물음에 난 대답 대신 마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을 살며시 감고 꿈틀대는 힘을 방출했다.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마석에 백광(白光)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샤르바딘은 그 빛을 한눈에 알아봤다. 일지를 읽는 데 한나절 빠져있던 사람이 돌연히 마석을 붙들고 이것저것을 하던 것을 봤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그래서 그가 빛을 소환할 때 곁에 바짝 붙어 빛을 감상하기도 했다.

펜리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마석을 둘러싼 빛을 살폈다.

'속성인가?'

그녀는 눈앞의 빛에 속성이 깃들었음을 눈치챘다. 속성을 띤 빛에는 성질이 존재한다.

흐릿한 기운을 지녔지만 어디든 물들 수 있는 자신의 속성과 달리, 눈앞의 빛은 무척 곧고 단단했다.

'그리고 안정감이 놀랍도록 강해.'

부술 수 없는 벽과 마주한 기분이다.

무질서인 혼돈과는 상극인 힘이었다.

"이게 뭐지?"

"제 속성입니다."

"설마 개화 특성?"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1성은 새싹, 2성은 꽃봉오리, 3성은 '개화'로 표현됐다.

마나 유저의 일생(一生)이 특성과 무특성으로 갈리는 단계.

이 중 선택받은 소수만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

칼의 위기 직감력.

엘튼의 불꽃검.

펜리의 그림자 주술처럼 나 또한 특성 개화자로서 새로운 속성을 각성했다. 그리고 인챈터로서 난 그 속성을 다른 사물에 심어놓을 수 있게 됐다.

"마석에 제 속성을 심어놨습니다. 미믹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절해놨는데, 그 기운이 미믹의 내부를 천천히 갉아먹겠죠."

"갉아먹는다고? 속성이 뭔데?"

미믹에게 악영향을 끼칠 정도라면 사(四)대 속성처럼 일반적인 속성은 아닐 것이다.

난 짧게 숨을 내쉬곤 기운을 끌어올렸다.

우웅―

마석에 깃든 빛무리가 번뜩이더니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

붉었던 마석의 색이 서서히 옅어졌다. 부르르 떨리는 것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 보였다.

마석이 평범한 돌로 변했을 때, 펜리는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바라봤다.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석에 깃든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잡은 것뿐입니다."

"바로잡았다고?"

"네."

무질서한 것들을 바로잡는 힘.

깨달음을 통해 난 내 속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성력(聖力)이라고.

54화 크레이지 모드 발동이다

돌무덤처럼 쌓인 마석 더미가 빛을 머금고는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인챈트로 성력(聖力)을 마석에 씌우는 작업인데, 얼마 전부터 난 이 과정을 일정 간격마다 반복해왔다.

마석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미약한 성력만 부여한 탓에 시간이 지나면 금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냥을 마친 미믹이 돌아왔다.

으적―

미믹은 붉은 마석을 여러 차례 삼켰고, 보랏빛 마석을 하나씩 뱉어냈다.

그 광경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던 펜리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처먹은 양이 상당한데, 언제쯤 반응이 나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네놈 특성인데 왜 몰라. 특성 개화자가 됐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거 아니야."

"얻었죠."

"잊어버렸냐? 머리가 그렇게 나빠?"

아, 주둥이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데, 무력이 깡패였다.

특성을 개화했을 때 성력(聖力)에 관한 지식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행하고 있는 작업은 인챈트와 성력을 동시에 작업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 능력을 응용하는 작업이었고, 테스트 또한 제단에서 마석을 가지고 처음 해본 것이었다.

'연습할 기회가 너무 없었어.'

키메라 배 속에서 3성을 개화했다.

그땐 키메라가 죽을까 봐 섣불리 힘을 드러내지 못했다.

탈출했을 땐 살아남기 바빴고, 피 웅덩이에 도착한 뒤에야 특성을 연습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속성의 강도를 올려보는 건?"

"그럼, 바로 알아챌 겁니다."

성력이 강해지면 마석에 영향을 준다. 마석을 가지고 테스트해본 결과 미약하지만 지금 정도가 적당했다.

난 일지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미믹 내부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성력이 누적되면 반응이 나타날 겁니다."

"누적?"

"삼킨 것을 몸속에 저장한 후 천천히 소화시킨다고 적혀 있었거든요."

"그대로 성력이 소멸해서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수를 떠올려봐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느 정도 계획에 확신이 있었다. 미믹의 소화 속도보다 누적되는 기운이 더 빠르면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닉은 이 방법을 통해 체액으로 미믹을 마비시키고 제거했다.

그러니, 기다리면 원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반나절이 흘렀다.

"후...."

쌓인 마석 더미에서 손을 떼자,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특성 발현에는 마나와 체력이 소모됐다. 반복적인 속성 부여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음을 느꼈다.

'슬슬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지금껏 미믹이 마석을 삼킨 횟수는 다섯 회, 그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성력이 놈에게 먹히지 않은 것일까.

'아니, 분명 먹혀.'

마석과 미믹의 성질은 강약의 차이일 뿐 혼돈으로 동일했다.

미믹에게 타격을 줄 정도로 성력을 더 누적시켜야 한다는 말인데, 결국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문제는 시간을 오래 끌면 막상 전투 때 체력이 부칠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흘렀다.

미믹이 마석을 삼킨 횟수가 다섯에서 열 번이 넘어갔을 때, 묵묵히 지켜보던 펜리가 나를 불렀다.

"미믹의 사냥 횟수가 줄어들고 있어. 느껴지지?"

"네."

"먹잇감이 줄고 있는 거야. 보다시피 먹이가 있어야 미믹은 마석을 생산해. 놈은 일정량의 붉은 마석을 항시 남겨놓고 있어. 여기서 먹이가 사라지면 더는 마석을 삼키지 않을 거야. 어떡할래?"

미믹이 마석 흡입을 멈추면 성력의 누적이 멈춘다. 그럼 더는 계획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어떡하지?

더 기다려봐야 하나?

"굶은 지 하루 지났어. 시간을 끌수록 우린 점점 약해져. 먼저 치자."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까?"

"네가 미믹의 발목을 잡아준다면?"

"반나절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10분, 그 정도만 잡아봐."

"그 정도면 충분합니까?"

떨떠름한 내 물음에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양손을 살며시 모았다.

은은한 구체가 그녀의 손안에 뭉치기 시작했다.

"전력을 드러낸다면 가능할지도?"

"전력이요?"

"확신은 못 해. 저놈이랑 난 상성이 너무 안 좋거든."

"처음부터 전력으로 싸우지 그랬습니까?"

"너 같으면 타인 앞에 전력을 드러내고 싶겠냐?"

"징표를 지닌 저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지랄하네."

그때였다.

…! 그, 그아아아아아아!

"…뭐!?"

막 사냥을 하고 돌아온 미믹이 몸을 털고 있다가 괴성을 질러댔다.

거대한 몸체가 부르르 떨렸다. 한동안 조용히 몸을 떨던 미믹은 돌연 난동을 부리며 혓바닥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앙―! 쾅―!

"까아아아악!"

"미, 미친!"

난 다급히 샤르바딘을 업고 웅덩이 바깥으로 물러났다.

크고 단단한 혀에 휩쓸린 것들이 부서지고 찢어졌다.

마석 파편이 허공에 튀어 오르고, 웅덩이에 고인 핏물이 동굴 전체를 적시며 붉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중앙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미믹.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동시에 미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빛.

빛을 본 순간 확신했다.

성력이 미믹의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신호가 왔습니다!"

"엥? 전력을 다해야 하나?"

"장난해요! 당연하죠!"

펜리의 전력?

그림자 주술을 공개하는 것을 꺼린 모양인데, 그건 그녀의 판단 미스였다. 내 계획은 처음부터 그녀의 전력을 염두에 두고 짜인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요!"

샤르바딘을 구석으로 밀어낸 나는 다급히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 각인된 신비한 문양이 점멸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쿵― 쿵―!

미믹이 웅덩이를 벗어나려는 듯 혀로 바닥을 힘껏 찍었다.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

펜리는 미믹 쪽으로 몸을 튕기며 소환한 구체를 위쪽으로 날렸다.

"움직임을 막아!"

허공에 두둥실 뜬 구체는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닮았다.

샛노란 빛.

마치 작은 태양을 보는 듯했다.

그 빛이 피로 물든 땅을 환하게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그림자는,

쿵―!

미믹의 그림자였다.

그림자와 함께 미믹이 사라진 순간, 난 그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시, 시발!"

이곳의 내 모토가 살아남는 것인데,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크레이지 모드 발동이다.

* * *

번쩍―!

그아아아아악―

동굴에서 눈 부신 빛이 터지자, 미믹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황금빛을 피해 미믹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물러나는 장면.

직진밖에 못 하는 불도저가 다급히 물러나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미친놈...."

펜리는 미믹을 막아선 사내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서 클레이튼.

자신도 나름 토바른 지역에서 뒤가 없는 미친 엘프로 통하는데, 저놈은 더한 미친놈이었다.

'발목을 저렇게 잡는 거였어?'

미믹이 도주할 경우 발목을 잡아둘 자신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던 녀석이었다.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해줬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런데,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나."

미믹의 이동 경로를 몸뚱이로 막아서는 놈이라니.

녀석이 소환한 황금빛에 미믹이 거부감을 보인다고 하지만, 입을 쩍 벌린 채 질주해오는 미믹 코앞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는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아니, 보통은 마주 보는 순간 오줌을 지렸을지도.

"으아악!"

"미친놈 맞네."

한 번 더 빛이 터졌을 때, 펜리는 황금빛에 의문이 생겼다.

녀석의 손목에 새겨진 신비한 문양.

키메라에게 극악인 능력이라 들었는데, 눈앞의 미믹에게도 통했다.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과 상극인 기운이 분명했다.

지켜본 것만 세 가지 능력을 보였다. 하나 갖기도 힘든 능력들을 고작 3성이 지니고 있었다.

'신기한 놈이란 말이지.'

생명의 징표까지 준 녀석이니, 이번 임무가 끝난다면 길드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었다.

"무, 뭐 해요! 쫄았습니까?!"

"건방지기도 하고."

펜리는 눈을 빛내며 양손에 먹빛의 크로우를 소환했다.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검게 물든 순간,

꿀렁―

미믹의 그림자가 물감처럼 출렁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올라왔다.

펜리의 그림자 주술이 펼쳐졌다.

* * *

"으아악!"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쩍 벌린 입이 악취와 함께 코앞까지 훅 왔다가 물러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이 비명이 절로 이해가 된다.

"헉, 헉, 헉."

몇 차례 막아선 지금,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황금빛을 소환하면 미믹은 정신없이 물러났다.

날 그대로 삼키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미믹은 황금빛을 마주한 순간 삼키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독이 든 음식을 보는 것 같달까.

본능적으로 삼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안쪽에서 터트리면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미믹도 키메라와 같이 문양에 상극인 반응을 보였다.

거대 키메라처럼 내부에서 빛을 노출시키면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쩍 벌린 입에 달린 수백 개의 이빨을 본 순간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먹힌 순간, 삼켜지는 게 아니라 갈가리 찢겨 걸레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쿵― 쿵― 쿵―

미믹은 우리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마석의 기운 때문인지, 우리 위치를 제대로 감지를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주를 시도했는데, 그 움직임이 성난 황소 같아서 나만 죽어 나갔다.

미믹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동안 미믹의 행동 패턴을 꾸준히 살피고 연구했다.

놈의 이동에는 혀가 필요했고, 오직 혀를 통한 직선 이동만 가능했다.

혀를 튕기기 전에 놈의 정면에 서야 한다는 뜻. 당연히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을 메워주는 게 바로 펜리였다.

"서둘러!"

미믹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손이 미믹의 동체와 혀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믹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림자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 육체를 튕겼을 땐 그 정면에 내가 있었다.

번쩍―!

그아아아아아악!

미믹이 황금빛을 피해 물러나면 펜리의 공격이 쏟아졌다.

그그그그극―! 그극!

인상이 절로 구겨지는 철판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펜리의 크로우가 미믹의 피부를 찢는 소리였다.

허공에 든 신기루처럼 두 개의 크로우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미믹의 그림자를 통해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움직임.

그녀의 공격은 마치 귀신같았다.

엄청난 공격 속도와 순발력.

눈 깜짝할 사이에 미믹의 신체에 할퀸 흔적이 가득 메워졌다.

미믹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해서 큰 타격을 줄 수 없었지만, 성력이 내부에서 분탕질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먹힌다!"

처음으로 미믹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할퀸 흔적에 미믹의 혈흔이 미세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할 때는 피부 조각이 뭉텅이로 떨어졌고, 상처가 벌어지면서 핏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성력의 부작용이 만들어낸 육체 약화.

치명타는 아니지만, 대미지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면서 큰 타격을 받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다만,

"으아악! 시발!"

번쩍―

크아아아아악!

순간순간 쩍 벌어진 미믹의 입을 구경하는 내 입장에선 공포 특집이 따로 없었다.

55화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

제단 주변이 미믹의 혈흔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흔적이 짙어질수록 승리를 예감했지만, 내 표정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딱!

"…헉!"

멈칫하던 놈이 순간 입을 쩍 벌리더니 코앞에서 입을 매섭게 닫았다. 강렬한 빛에 다시 물러나긴 했지만, 조금 전 자칫 팔이 잘릴 뻔했다.

벼랑 끝에 몰린 미믹이 행동에 변화를 보인 것인데, 이때부턴 막는 데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돌아서 날 그대로 삼켜버리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개 같은 난이도!'

펜리 체이서를 데리고 움직이는데도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도미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 지랄이라고?

차라리 학살자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 밑으로 들어갈 걸 그랬다.

'카멜에게 미래 내용을 툭툭 던져주고 가치를 증명하면 호의호식은 누워서 떡 먹기일 텐데.'

어쩌다 이리 사서 고생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시작부터 꼬였다고 해야 하나.

"뭐 해! 막아!"

"비, 빌어먹을! 시간 지났다고요!"

미믹을 붙잡고 늘어진 지 10분을 지나 15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펜리가 부탁했던 시간에서 5분이 더 지난 것이다. 전력으로 움직였던 내 마나와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 쿨럭!"

호흡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린다.

그럼에도 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미친 사람처럼 미믹의 발목을 붙잡아야 했다.

미믹이 통로로 도망치는 순간 절대 잡을 수 없다.

놓치면 끝이었고, 기다리는 건 굶주림이었다.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난 목숨을 걸고 미믹을 막아섰다.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망할 년아, 어떻게 좀 해봐!'

펜리를 보며 욕설을 퍼부었는데, 크게 가슴을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녀도 지친 듯 보였다.

펜리 체이서는 강하다.

다만, 상성이 최악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가 미믹이 아니라 대인전이었다면 펜리는 악마처럼 날아다녔을 것이다.

단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는 상황.

먼저 지친 쪽이 패배하는 그림이었다.

다행인 건 지속적인 타격으로 미믹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점이었다.

'뒈져라, 쫌!'

성력의 부작용으로 모든 상처가 썩어가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미믹은 틈만 나면 혀를 움직이며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진짜 맷집 하나는 미친 새끼였다.

'한 방이 부족해.'

미믹의 내부까지 타격을 줄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다만, 우리 쪽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사용한 상황이라, 서로 눈치를 보며 다른 방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추… 출.]

"…뭐?"

머릿속에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목소리보단 의지에 가까웠다. 또 다른 의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출구를… 가라. 떠나라.]

움찔한 나는 자세를 잡고 가늘게 눈을 뜬 채 미믹을 노려봤다.

입을 벌린 채 나와 대치하고 있는 녀석.

목소리가 울린 순간 미믹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이 내게 메시지를 보낸 건가?

펜리 또한 공격을 멈칫했는데, 샤르바딘도 움찔하는 것을 보니, 이 공간에 있는 전부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출구를 만들어 준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미믹의 메시지에 의문이 든 순간,

우우우웅!

"...!"

동굴의 풍경이 티비 화면 오류처럼 뒤틀리더니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동굴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셋 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가 처음 내려왔던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믹이 스스로 결계를 풀었다.

지금까지 버티던 놈이 갑자기 왜?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특히, 펜리의 분위기.

기세가 줄어든다.

난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어서 공격해야 합니다!"

"...."

내 외침에도 펜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샤르바딘과 구덩이 위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시선을 보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있냐는 신호.

그녀의 목적은 샤르바딘의 구출이지 미믹의 제거가 아니었다. 출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미믹과 대치할 필요가 있을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나 혼자서 미믹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저 위에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구덩이는 진짜야."

"도미닉이 도착했다면...!"

"결계 밖이라면 큰 위험은 없어."

그림자 주술이라면 어떤 위험이든 회피할 수 있다.

결계가 새장처럼 막고 있었는데, 벗어날 문을 미믹이 열어준 것이다.

어느새 크로우를 해제한 그녀는 천천히 샤르바딘에게 접근했다.

'…망했다!'

잘되나 싶었더니, 역시나 변수가 발생했다.

미믹을 보니 분명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단순히 위협 때문에 우리를 보내주는 것일까.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의도와 별개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믹을 죽여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계승자의 시험을 시작하기 위한 장치.

그게 바로 미믹의 죽음이었다.

평범한 몬스터였던 미믹이 크리스탈 미믹으로 진화한 것은 미믹이 옛적에 삼킨 고대의 힘 덕분이었다.

고대의 힘,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권능.

미믹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힘이 깨어나는 순간 권능의 계승을 위한 시험이 시작된다.

그 시험은 전투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부지리 작전이 아니면 심장을 얻는 건 불가능해.'

이번 시험은 내 능력으로 절대 얻을 수 없었다.

주인공 카멜도 포기한 힘인데, 오죽할까.

본래 주인이었던 도미닉과 상잔시켜야 했다.

백 개의 심장.

그 힘을 얻기 위해 도미닉은 인간이길 포기하며 수년을 준비했다. 눈에 불을 켜고 시험에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 그 타이밍인데, 저년이 문제였다.

"펜리!"

"쓸데없는 곳에 힘 빼지 말고 너도 서둘러."

샤르바딘을 부축한 펜리가 심드렁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구덩이 높이는 고작 5미터.

한 번의 도약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이였다.

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생명의 징표.

징표를 쓰고 내가 미믹에게 달려든다면 그녀도 미믹과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펜리가 추후 내 행동에 반감을 드러내거나 의심을 품을 것이고,

'아레나 후아튼을 대비할 카드도 사라지겠지.'

칼의 가르침대로라면 분위기상 포기하는 게 맞았다. 생존만 한다면 다른 기회가 또 찾아올 테니까.

샤르바딘의 생존에 만족해야 하나.

찰나의 갈등.

잠시 이마에서 손을 뗀 순간이었다.

구덩이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갑자기 환상이 보이는데?"

"네놈이 아니라 우리겠지. 내 눈에도 마님이 보이거든."

"너도?…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분이 샤르바딘 님이 맞는 건가?"

"아까 전까지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함정 아니야? 여긴 마법사의 소굴이잖아."

갑작스레 들려온 대화 소리에 고개를 들었는데, 구덩이 주변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우리 쪽을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두터운 목선, 풍성한 수염, 각자 쥐고 있는 거대한 둔기보다 작은 키까지.

"드워프…?"

내 입에서 그들의 존재가 작게 흘러나왔다.

대화 소리를 시작으로 구덩이 주변으로 고개를 내민 드워프들이 점차 많아졌다.

결계가 풀리면서 나타난 우리 모습에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들인데, 시선이 모두 샤르바딘에게 향해 있었다.

다만, 함정을 경계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모습.

"나토네 경!!!"

그때 샤르바딘이 한 드워프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기사 나토네.

도르네프의 친위대를 이끄는 친위대장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외침이 시발점이 됐다.

나토네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둔기를 들고 구덩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나, 나토네 님이 움직였다!"

"...정말 샤르바딘 님?"

"주, 주군께 알려라!!!!"

나토네의 움직임에 드워프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나토네를 따라 구덩이로 몸을 던졌고, 일부는 주군을 부르기 위해 움직였다.

기사급 드워프들의 등장.

그 모습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도르네프의 군대가 도미닉보다 이곳에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도르네프가 샤르바딘을 찾고 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괴물이 샤르바딘 님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목청껏 외친 나는 단검에 기운을 담아 미믹에게 던졌다. 전과 달리 단검은 미믹의 몸체에 살짝 박혔다가 튕겨 나갔다.

성력으로 강철 피부가 약해지면서 타격이 들어간 것이다.

그아아아아악―!

고통에 미믹이 다시 성난 황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샤르바딘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드워프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감히…! 고철 덩어리 따위가!"

"죽여!!!"

"으아아아아!"

단단하게 무장된 드워프 기사들은 바닥에 내려선 순간 미믹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둔기들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콰앙―! 쾅! 쾅쾅!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드워프들이 미믹을 포위하고 몸체를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묵직한 공격 세례에 미믹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둔기 공격에는 먹히는 모습.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인지, 미믹이 발광하기 시작하자, 드워프들은 일제히 방패를 꺼내 들었다.

카앙―! 캉!

"...컥!"

"큭!"

충격음과 함께 일부 드워프가 미믹의 공격을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미믹의 이빨은 날카롭고 매서웠지만, 드워프제 갑옷과 방패를 일격에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다시 벌떡 일어나 미믹에게 성나게 돌격했다.

"하여튼 약았다니까."

상황이 유리하게 펼쳐지자, 펜리는 나를 쏘아본 뒤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난 혀를 찼다.

"망할 년. 이제 나서네."

승리 시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사냥에 동참하려는 게 분명했다.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한 엘프였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징글징글하네.'

펜리가 그림자 주술로 미믹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기사급 드워프 열댓 명이 둔기로 미친 듯이 때리고 있는데도 미믹은 버텨냈다.

'불사자의 힘 때문인가.'

레토니칼스의 권능 일부를 흡수했다면 지금의 맷집이 이해가 됐다.

불사자는 죽지 않는 자를 뜻했으니까.

하지만 미믹은 불사자가 아니었다.

[계약자... 계약자...!]

미믹의 의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의지에 두려움과 고통,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

계약자?

미믹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시발, 그런 거였냐?"

도미닉에게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결계를 해제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지금 상황을 도미닉이 알게 됐다는 건데.

일이 급하게 됐다.

당장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악!

"피, 피해!"

"...미친!"

미믹의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았다. 혀를 이용해 몸체를 띄워 구덩이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모습.

다급히 문양을 소환했지만, 미믹은 빠르게 빛을 피해 솟구쳤다.

"아, 안 돼!"

통로가 아닌 바깥으로 튄다고?

이건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다.

미믹을 한 번 놓치면 잡기 어렵다.

모두가 닭 쫓던 개처럼 구덩이로 솟구치는 미믹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구덩이 위에서 한 드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눈빛으로 솟구치는 미믹을 내려다보던 드워프가 거대한 둔기를 천천히 추켜올렸다.

푸른색을 띤 거대한 망치.

그 망치의 겉면이 빠르게 얼어붙으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호, 혹한의 망치!"

난 한눈에 그 망치를 알아봤다.

아니, 모두가 알아봤다.

샤르바딘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도르네프!"

베네타의 군주.

"놈!!!!!"

콰아아아앙―!

도르네프가 막 구덩이 바깥으로 올라온 미믹을 혹한의 망치로 내리찍었다.

56화 붉은 혹

거대한 동체가 구덩이 위에서 추락했다.

"피, 피해!"

쿵―!!!

미믹은 피 웅덩이 중앙에 매섭게 내리꽂혔다. 처박힌 미믹은 움찔움찔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몸체 절반 이상이 얼어붙어 있는 모습. 혹한의 망치에 맞은 흔적이었다.

크아아아아!!!

우렁찬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도르네프가 망치를 움켜쥔 채 구덩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낙하 그리고 공격. 푸른빛의 망치가 미믹의 머리를 벼락처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눈이 질끈 감길 정도의 폭음.

동굴이 흔들리며 차가운 공기가 훅 불어닥치자, 난 몸을 움츠렸다.

순간 입김이 드러날 정도로 온도가 차갑게 떨어졌다.

추락 지점을 바라보니 웅덩이가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그 얼음 중앙에 비스듬히 자빠져 있는 미믹이 보였다.

상자 대가리가 움푹 찌그러진 흔적.

머리가 터진 것처럼 보였다.

그 머리를 짓밟고 서 있던 도르네프가 천천히 망치를 들어 올렸다.

분이 안 풀린 듯 섬뜩한 빛과 함께,

쾅! 콰앙! 쾅!

망치가 쉴 새 없이 미믹을 내리쳤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미믹은 혀를 내뺀 채 미동 없이 축 늘어졌다. 개고생하며 누적시킨 대미지가 도르네프에 의해 터지면서 숨이 끊어진 모습이었다.

부족했던 한 방을 채워준 존재. 그 존재는 미믹의 숨이 끊어졌음에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 매서워졌다.

광전사가 따로 없었다.

"감히, 감히 내 피앙세를! 크아악!"

"주, 주군!"

"그만하셔도!"

드워프들이 도르네프를 말리기 위해 황급히 움직였다.

성격 급한 군주로 통했는데, 딱 봐도 다혈질이라는 것을 알겠다.

상황이 정리되자, 난 샤르바딘에게 다가갔다. 펜리도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 난쟁이, 불똥 같은 건 여전하네."

"덕분에 위기는 넘기지 않았습니까."

"난쟁이들에게 잘 말해. 저 미믹은 우리 거야."

워낙 희귀한 미믹이다 보니 뭔가 있을 거라 판단한 건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혼자 처먹겠다는 말은 안 했다.

'이 여자, 헛다리 제대로 짚었네.'

미믹의 부산물을 얻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미믹의 죽음 이후 상황을 나도 잘 알지 못하거든.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다.

오랜 시절 고대의 힘을 품고 살던 숙주가 죽었고, 곧 그 힘이 깨어나며 레토니칼스의 계승 시험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난 웅덩이 쪽으로 다가가 미믹의 시체를 조심스레 살폈다.

고대 문양을 쉽게 얻은 것처럼 혹시나 심장도 쉽사리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 샤딘!!!!!"

"도네프!"

눈물겨운 해후가 펼쳐졌다.

서로의 애칭을 부르짖으며 종족을 넘어선 두 연인은 꼭 부둥켜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했던 샤르바딘도 이때만큼은 아이처럼 울었다.

그녀의 생존 과정은 그만큼 처절하고 힘겨웠다.

난 턱을 긁적이며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길쭉길쭉하고 아름다운 엘프가 자신의 허리보다 작은 드워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 둘 주변에 모인 우락부락한 드워프들은 코를 훌쩍이고 있다.

참으로 언밸런스한 모습인데 난 그 모습에서 무척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상상만 해봤던 건데, 이런 광경을 실제로 보게 되네."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샤르바딘과 도르네프의 해후는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샤르바딘이 생존했을 때의 스토리를 상상해보긴 했다. 그럼 토바른의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 손에 그리고 내 선택에 의해.

이 간질간질한 감정을 더 느껴보고 싶었지만,

쩌저저적―!

"...어?"

웅덩이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내 눈동자는 서서히 커졌다.

혹한의 망치로 얼어붙었던 피 웅덩이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미믹의 시체도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시발, 뭔가 시작됐다.

* * *

"고맙다. 암고양이."

"고마우면 의뢰비를 더 올려주든가. 고생을 제법 했거든."

"숙고해보지."

"짠돌이 난쟁이가 웬일로?"

펜리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봤다. 만나면 항상 으르렁대는 사이였는데, 샤르바딘의 생존 때문인지 도르네프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근데 저 인간은 누구지?"

도르네프는 괴물 시체 주변을 배회하는 인간을 가리켰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단검으로 뭘 파고 있는 모습인데, 이종들로 이뤄진 파티에 유일한 인간이라 시선이 갔다.

"아, 저 녀석? 이 의뢰의 가장 큰 공헌자."

"뭐?"

"도네프! 제 은인이에요!"

샤르바딘이 힘 있게 자신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인간을 바라보는 도르네프의 눈동자가 경계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인간이 자신 쪽을 바라보며 손을 크게 흔들자, 도르네프는 허허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샤르바딘을 구해준 은인.

이 정도 답례는....

"시발! ㅈ같은! 아니 ㅈ됐어!"

"…원래 입이 저리 거친 친구인가?"

"아니. 뭔가 일이 터진 거지. 이곳에선 저 녀석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살아나가서 이쁜 마누라 궁둥이를 구경하지."

"뭐? 그게 무슨...."

"여, 여기요! 여기!! 어서!"

내 다급한 외침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부었다. 내 부름에 펜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쩌저적―

얼음이 빠르게 녹더니, 피 웅덩이 위로 작은 혹 하나가 볼록 튀어나왔다.

붉은 혹 하나.

그 혹은 손가락 하나 크기였다가 급속도로 커지며 자라났다.

그 모습에 펜리의 눈가가 가늘어지더니 나를 바라봤다.

이게 뭐냐는 눈빛.

"뭔가 나오려는 것 같습니다. 웅덩이의 부피가 줄어들고 있어요."

"…시체는? 시체는 어디 갔어?"

"웅덩이에 녹아서 없어졌습니다."

"젠장. 헛고생했잖아."

짜증 내는 펜리를 뒤로한 채 난 웅덩이를 살폈다.

피 웅덩이의 부피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반대로 붉은 혹은 점점 커졌다.

웅덩이의 핏물을 흡수하면서 자라나는 모습.

'내 공격은 안 통해.'

자라나기 전에 내 모든 능력으로 공격해봤다. 인챈트, 성력, 문양의 능력을 써보며 단검을 찔러봤지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지독히 단단하다는 표현보단 타격 자체가 안 들어갔다.

충격 자체를 튕겨낸다고 해야 하나.

'펜리나 도르네프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눈앞의 존재를 제거하고 심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베스트였다.

"더 자라나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이대로 걍 튀는 건?"

"도미닉이 이것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음."

내 말에 펜리가 크로우를 소환했다. 그녀의 크로우가 교차하며 자라나는 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르네프와 드워프들이 나를 찾아왔다. 군주가 직접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 모습인데, 지금 인사 따위나 받고 헤헤거릴 때가 아니었다.

펜리의 공격도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당장 제거해야 합니다!"

펜리가 혀를 차며 물러나자, 도르네프는 흔쾌히 혹한의 망치를 집어 들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냉기의 기운.

콰아아아아앙―!!!!

큰 폭음과 함께 웅덩이 주변이 다시 얼어붙으며 파괴됐다. 미믹마저 일격에 빈사로 만들어버린 파괴력이다.

혹한의 망치가 붉은 혹 위를 무식하게 때렸지만,

"...."

붉은 혹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금세 꿀렁거리며 부피를 키워나갔다.

이젠 팔 크기까지 자라난 상황.

그 뒤로 다른 드워프들이 합세했지만, 자라나는 속도를 잠시 저지할 뿐, 큰 타격을 받는 모습이 아니었다. 물리력 자체가 통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길, 미리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

공격을 무시하고 붉은 혹이 내 키만큼 커지자, 펜리와 도르네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았다.

"...이거, 정체가 뭐야?"

"미믹을 진화시킨 힘 같은데, 다른 형태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 선택은?"

"당장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 이거 위험한 건가?"

도르네프의 물음에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뭐 해? 이 녀석 말 못 들었어? 어서 움직여."

내 의견에 펜리가 힘을 실어줬다.

내가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완벽히 숙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인정한 것이다.

이럴 땐 저 성격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가방을 단단히 갈무리했다.

전보다 훨씬 묵직해진 탓에 신경을 써야 했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랏빛 마석을 가방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특별히 쓸데가 있다기보단, 귀중한 자원이기에 챙겨놓은 것이었다.

가방끈을 움켜잡은 후 거칠게 발을 굴렀다.

구덩이 깊이는 깊지 않았기에 손쉽게 나올 수 있었다.

구덩이를 벗어난 즉시 곧장 입구 쪽으로 달렸다.

다른 이들도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엉?"

입구를 나온 순간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원래는 이종들을 끌고 온 마차가 가득 실린 풍경이었는데, 그 자리를 드워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도르네프가 이끌고 온 병력이었는데, 펜리가 말했던 것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펜리가 바삐 움직이는 드워프들을 둘러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식하게도 끌고 왔네. 얼마나 데리고 온 거야?"

"2천."

"2천? 정예병 전체를 끌고 온 거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주변에 너부러진 키메라 시체들.

관리인들도 모조리 드워프의 맹공에 무너진 모습이었다.

서 있는 키메라를 보기 힘들 정도로 정리가 이미 끝난 상황.

드워프들은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잡혀 온 이들을 바깥으로 빼내고 있었다.

샤르바딘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구출 작업도 진행했던 것인데, 좋은 선택이었다. 그 덕에 구출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나토네, 작업을 끝내라. 서둘러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도르네프의 지시가 떨어지자, 나토네가 드워프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발 앞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통로를 내달리며 급한 것부터 떠올렸다.

'문제는 도미닉인데.'

도미닉의 현재 위치가 무척 중요했다.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쯤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을 풀어줄 이가 다행히 이곳에 있었다.

난 앞서 달리는 도르네프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호의적인 눈빛.

이럴 땐 샤르바딘의 은인 신분인 게 다행이었다. 굳이 질문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까?"

"땅굴에서 길 찾는 건 드워프 전문이지. 이미 지도도 만들어놨어."

드워프들의 움직임에는 주저가 없었다. 마치 이곳 길을 훤히 꿰뚫은 것처럼 움직였다.

벗어나는 건 드워프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난 중요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곳까지 오시면서 도미닉의 군대와 맞닥뜨린 적 있으십니까?"

"부딪칠 뻔했지."

"언제입니까?"

"이틀 전이네. 그 미치광이 군단과 이동 방향이 겹쳐서 선택해야만 했지. 길게 우회를 해서 돌아가거나, 기다렸다가 그 뒤를 쫓거나."

펜리의 예측처럼 도르네프는 도미닉의 군단을 피해 움직이려고 했다.

아레나 후아튼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겠지.

"우회하신 겁니까?"

"아니. 우회했다면 지금도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어. 우린 우회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았지."

"…그럼."

"그대로 지나쳤어. 갑자기 나타난 대규모의 군대가 미치광이의 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거든. 그사이에 키메라 군단을 가로질렀지."

"네? 누구의 군대이기에."

"블라이어를 중심으로 한 에토르 연합군."

"...!"

블라이어 가문.

카멜 블레이저가 움직였다는 소식에 난 순간 멈칫했다.

57화 고립

"무슨 일이야?"

"아, 별일 아닙니다."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자, 일행들이 나를 돌아봤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움직였다.

미소도 잠시, 내 미소는 빠르게 굳어졌다.

'블라이어와 에토르가 도미닉을 습격했다고?'

기존 스토리를 빠르게 되새겨보며 미간을 좁혔다.

'도미닉의 후퇴 과정에서 두 가문의 개입은 없었어.'

없던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개입으로 스토리의 흐름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사건의 발생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두었다.

에토르의 주인, 톰자엘 자작은 마석 수집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 인물, 키메라를 습격해도 예상 범주 안이었다.

하지만,

'블라이어는 절대 아니야.'

학살자 카멜은 회귀한 주인공이다.

지금 군대를 움직이면 흙탕물에 발을 담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에토르와 함께 움직였다.

'학살자의 군대가 움직이는 시기는 백 개의 심장을 얻은 도미닉이 베네타와 상잔할 때야.'

그 전까지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정복 야심을 드러냈는데, 스스로 흙탕물에 발을 담근 것이다.

'카멜이 톰자엘 자작을 움직였어.'

가만히 있던 에토르가 움직인 데는 카멜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톰자엘 자작은 경험 많은 노회한 귀족이다. 절대 목적 없이 움직일 위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 손해 보는 성격도 아니지.'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예측을 완전히 벗어난 카멜의 움직임.

무엇이 주인공의 행동에 변화를 준 것일까.

'뭘 노리는 거지?'

학살자의 변칙적인 움직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만, 내겐 그 고민을 숙고할 시간이 없었다. 새로운 골칫거리가 나타난 것 같았으니까.

"주, 주군!"

"응? 저 난쟁이들은 뭐야?"

"부단장이다. 구조의 책임자지."

바깥으로 통하는 통로에서 일련의 드워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르네프를 발견하곤 허겁지겁 달려왔다.

"주군! 큰일 났습니다!"

도르네프 앞에 선 드워프들은 납치당한 이들을 연구실 바깥으로 탈출시키던 병력이었는데, 그 임무를 맡던 부단장이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로 나타났다.

"구출 작업이 마무리 단계라 숲으로 길을 낸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게...!"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포위를 당한 것 같습니다."

"뭐? 포위? 누가?"

"아무래도 이곳 주인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

심드렁하던 도르네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고, 난 신음을 흘리며 멈춰 섰다.

'타이밍이 참 뭐 같네.'

반나절의 시간만 더 주어졌어도 충분히 준비하고 도미닉을 맞이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상황이 급하게 꼬여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단장에게 물었다.

"키메라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이 인간은 누구...?"

"묻는 말에 답이나 해줘."

손짓으로 입을 막은 도르네프가 지시를 내리자, 부단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세 방향의 숲으로 척후조를 여러 번 보냈는데 전부 소식이 끊겼습니다."

"척후조 전부?"

"네. 열 명으로 이뤄진 파티로 두 차례 보냈지만,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빌어먹을.

포위당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절벽을 둘러싼 숲은 무척이나 넓었다. 척후조로 나선 드워프 중 기사급이 한 명씩 포함됐다는 걸 감안하면 키메라들의 수가 백 단위는 가볍게 넘어갈 것 같았다.

'최소 수천 단위.'

지금 숲으로 진입하면 도미닉의 손에 죽는다.

의문이 든 난 도르네프를 바라봤다.

"대규모 연합군이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을 습격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 큰 전투가 벌어졌어. 두 세력 전부 피해가 엄청날 만큼."

"그럼 키메라의 수가 줄어들어야 정상 아닙니까?"

"그 전투의 결과는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해. 우리는 이동에만 집중했으니까."

블라이어와 에토르.

토바른 3강 중 두 곳의 연합군이 맥없이 패배할 리 없을 텐데, 키메라 수가 이 정도라고?

'카멜이 질 싸움을 할 리 없어.'

머리가 워낙 뛰어난 놈이라, 의도 파악이 힘들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여기서 고민해봤자 뚜렷한 답은 안 나왔다. 바깥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았다.

"일단 움직이시죠."

내가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하자, 일행들이 빠르게 뒤따랐다.

의견을 묻지 않고 움직였는데 도르네프도 펜리도 내 말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도르네프에게 난 반려의 은인이었고, 펜리에겐 생명의 징표자로 선택받았다.

그 영향력 때문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이 파티를 이끄는 통솔자가 되어 있었다.

"저기요!"

"왜 자꾸 부르… 무, 무슨 일이십니까?"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책임자는 도르네프의 따가운 눈빛에 즉각 말투를 바꿨다.

"바깥 상황을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게...."

상황을 간략히 전달받았다.

연구실에서 탈출시킨 이들이 대략 4천에 달했다. 그들은 현재 입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절벽 틈새에 고립된 상태였다.

'연구실에 남은 친위대장 나토네가 남은 구조 병력까지 데리고 복귀한다면….'

도르네프의 군대.

구조된 사람들.

전부 합치면 대략 7천 정도 될 것 같았다.

머릿수로 따지면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과 엇비슷할 것 같았다.

'이거 골치 아픈데.'

문제는 전투력의 부재다.

7천 중 절반 이상이 비전투 인원에 해당했다. 아니, 발목만 안 잡아도 다행이려나.

그런데 포위당한 상태.

상황이 좋지 않다.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자, 달리던 샤르바딘이 도르네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괜찮을까요? 도네프?"

그녀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보인 도르네프가 곧 표정을 굳히곤 내게 물었다.

"방법이 있나?"

"제게 방법을 묻는 겁니까?"

"암고양이가 그러더군. 의견을 들어봐도 손해는 안 볼 거라고."

암고양이란 말에 펜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인간 전부를 사기꾼으로 보는 난쟁이가 인간에게 의견을 구하다니, 샤르바딘 때문에 겁먹은 거야?"

"시비 거는 거냐? 돈 받기 싫어?"

"이 사기꾼 똥자루 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돈에 환장한 년 같으니라고."

달리면서도 둘은 티격태격했다.

암고양이와 난쟁이.

서로 부르는 호칭이나 태도를 봤을 때, 제법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온 느낌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친구 사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타이밍을 봐서 돌파를 시도할 겁니다."

"돌파? 우린 상관없어. 하지만 잡혀 온 이들 대부분이 죽을 거다."

잡혀 온 이종들도 상당수 섞여 있으니 우려를 표한 것이겠지. 단순하고 다혈질인 줄 알았더니, 군주는 군주라는 건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타이밍?"

"빠져나갈 상황이 분명 생길 겁니다. 문제는 그 골든타임이 무척 짧다는 거죠."

"상황? 무슨 상황 말이지?"

"제단에 있는 그것."

"그것? 자라나는 혹 말인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혹을 떠올렸다.

지금도 계속 자라나고 있을 붉은 혹.

그 존재에 해답이 있었다.

혹의 정체가 도미닉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레나의 동력 원천임을 알게 된다면 도미닉은 우리 따윈 눈에 뵈지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동력 원천을 확보하려고 할 텐데, 그 타이밍이 중요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숲에서 키메라의 공격을 받게 될 테고, 너무 늦어 입구에 고립된다면 앞뒤로 포위를 받게 될 테니까.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

몰살을 피하려면 그 찰나의 골든타임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

'모르면 만들어야지.'

기다리는 건 하책이다. 도미닉을 자극해서라도 먼저 움직이게 해야 했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입구입니다!"

환한 빛이 통로 끝자락에 나타났다.

연구실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 중 하나.

절벽이 만들어낸 쩍 벌어진 틈새에 도착했다.

틈새 너머로 펼쳐진 푸른 숲이 보인다. 틈새에 다다르니 거대한 공터가 펼쳐졌다. 다만, 그 공터는 이미 다른 이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공터를 채운 인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드워프 기사단과 인간들의 대치도 이뤄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척 험악했다.

"입구를 왜 막아서는 거야!"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하다. 인간."

"숲을 코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괴물 놈들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척후조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려봐야…."

"상관없으니 비켜! 여기부턴 우리가 알아서 갈 테니까!"

구출된 인간 중 일부가 입구에서 드워프들과 실랑이 중이었다.

잡혀 온 이들을 살펴봤는데, 전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액의 부작용이 전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시장통이 따로 없네.'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꼭 말썽이 벌어진다.

조용히 드워프의 지시를 따르는 이종들과 달리 인간들은 길을 막고 있는 드워프들에게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말해줘도 이종인 탓에 불신하는 모습이었다.

"구해줘도 인간들은 만족을 모르지. 내가 이래서 인간들을 싫어해."

도르네프가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내가 그 앞을 잠시 막아섰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같은 인간이라고 편드는 건가?"

"설마요."

편은 무슨.

곧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전투가 벌어질 텐데, 통제도 안 되는 폭탄들을 데리고 함께 움직이라고?

인간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설득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도주할 골든타임은 찰나처럼 짧았고, 그 타이밍을 놓치면 앞뒤로 휩쓸려 몰살당할 것이다.

난 악당도 영웅도 아니다.

그저 내 목숨이 소중한 하나의 인간일 뿐.

통제할 수 없다면 이용이라도 해야 했다.

난 곁에 있는 부단장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뒤 입구를 막고 있는 드워프들 앞에 섰다.

부단장이 돌아오자, 드워프들이 막던 무기를 거두었는데, 난 물러나는 드워프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넌 뭐지?"

"당신의 주인이 보낸 사람입니다."

내가 부단장을 바라보자, 부단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단장의 긍정에 드워프들은 미련 없이 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드넓은 숲이 펼쳐지자, 인간들이 틈새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략 오백 정도 되려나?

하지만 정작 나가려고 하니 주저하는 표정들이었다.

"길을 열어줬는데, 안 갑니까?"

"저들이 왜 네놈 말에 길을 열어준 거지?"

어느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드워프들을 움직였으니 내 정체가 궁금했겠지.

"용병입니다."

"용병? 그럼 우리랑 같은 편이잖아? 어디 출신이야?"

"블라이어 C급 용병 알입니다."

내가 C급 용병패를 내밀자, 덩치 큰 사내들이 코웃음을 치며 내 앞에서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전부 용병들이었는데, 잡혀 온 이들 중 용병끼리 합심해서 뭉친 듯 보였다.

선동질하는 놈들이 이들인가?

"드워프들에게 뭐라 말한 거야?"

"안쪽 상황을 드워프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연구실을 언급하자, 용병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지옥을 경험했다면 확실히 저런 표정이 가능하지.

"무슨 상황인데?"

"붉은 괴물이 제단에서 나타났는데, 드워프들이 힘겹게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곳까지 뚫릴지도 모르죠."

"뚜, 뚫린다고? 어떤 괴물이길래?"

"죽여도 죽여도 계속 살아납니다. 그 괴물은 자신을 불사자의 심장을 가진 존재라 했습니다."

"불사자의 심장?"

붉은 괴물의 존재가 용병들을 통해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괴물 소식에 주변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해졌다.

난 그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이곳은 곧 방어진을 치고 붉은 괴물과 싸울 준비를 할 겁니다. 당신들은 어쩌실 겁니까?"

58화 고립(2)

함께 싸울지, 이곳을 벗어날지의 선택.

용병들은 고민도 없이 당장 벗어나는 선택을 주장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드워프와 함께한다면 숲을 벗어날 때까지 보호를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드워프들의 통제에 무조건 따라주십시오!"

"흥! 이 상황에 이종들을 믿으라고?"

"구해준 이들 아닙니까? 못 따를 것도 없지요?"

"지금 대낮이야.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없어. 해가 지면 이곳에 갇히겠지. 그때 더 많은 괴물이 돌아온다면? 게다가 붉은 괴물이 곧 나타날지 모른다며? 위험한 거 아니야?"

용병들은 내가 준 소식이 기회인 듯 재차 선동에 들어갔다.

이곳은 인간들 외에 이종들도 무척 많았다.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과연 드워프들이 인간들을 지켜줄까?

"드워프들은 이종들을 먼저 보호하려고 할 거야!"

종족 간의 불신을 강조하며 선동에 들어간 용병들.

어느새 공터에는 드워프를 믿어보자는 인간들과 보내줄 때 탈출해야 한다는 인간들로 의견이 나뉘었다.

다만, 드워프의 구조를 받았기 때문인지 용병들보단 드워프의 통제를 따르려는 인간들이 더 많아 보였다.

물론, 용병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이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저들은 어쩔 수 없나?'

용병들의 시커먼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용병들이 전투 인원도 아닌 일반인들을 선동해 함께 움직이려는 이유.

키메라들과 마주칠 시, 시간을 벌어다 줄 제물이 필요한 것이었다.

함께하면 위기 시 가장 먼저 죽게 될 거다. 하지만 선동에 휩쓸리는 이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머릿수가 충분히 채워졌다고 판단한 건가.

천여 명이 모여 입구로 다가왔다. 그중 통솔자로 보이는 얄팍한 용병이 내 앞에 섰다.

기세를 보면 무력이 용병 사이에서 중간쯤 되어 보이는데, 저 세 치 혀로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고 이곳 통솔자가 된 녀석이었다.

어딜 가든 오래 살 놈 같은데, 이번에는 번지수가 틀렸다.

쭉 찢어진 눈가가 날 보며 휘었다. 명백한 비웃음.

"남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죠."

"드워프들을 등에 업더니 간땡이가 부은 건가? C급 용병 알, 기억해 두지."

날 지나치며 비아냥거리던 용병은 긴 행렬을 이끌고 틈새 바깥으로 움직였다.

드넓은 숲속으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행렬.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데, 펜리가 슬쩍 다가왔다.

"너, 저들의 운명을 알고 있지? 대부분 죽을 거야."

"그럴 확률이 높겠죠."

"악당이 된 소감이 어때?"

"선택은 저들이 한 겁니다."

"일부는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용병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런 데 드잡이할 시간 없습니다."

"붉은 괴물, 불사자의 심장은 네가 지어낸 거야? 마치 저들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던데."

"...."

"설마 도미닉? 용병 머저리들에게 메시지를 딸려 보낸 거 그냥 한 짓 아니지?"

정말 눈치 하난 귀신같단 말이지.

지금 선택이 남은 이들을 살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자, 입에서 곰방대를 뗀 펜리가 씨익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랑 친구 어때?"

"갑자기 친구? 기준이 뭡니까?"

"돈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은 오래 살아남고 크게 한탕 하더라고."

"감입니까?"

"감이든 뭐든 친구 할 거야? 말 거야? 두 번은 제안 안 해."

"후회하실 텐데?"

대답과 달리 난 그녀의 손을 냉큼 잡았다.

지금 친구라도 되어놔야 나중에 친구니 뭐니 하며 살려달라 부탁을 할 수 있다.

잠시 후, 내가 어떤 짓을 벌일 건데, 그 일로 그녀가 날 죽이려고 하면 곤란하거든.

"친구가 된 기념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금액만 맞는다면?"

"…친구한테까지 돈을 받습니까?"

"할인은 해주지."

망할 년, 진짜 돈 귀신이 붙었나.

다행히 내 곁에는 도르네프라는 돈줄이 있었다.

"이곳의 안전과 직결되는 일이라고?"

"네. 펜리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망할 암고양이."

도르네프는 펜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 하나를 살살 흔드는 그녀가 보인다.

천 골드.

도르네프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펜리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숲 어디에 위협이 존재하든 빠르고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녀에게 주변 수색을 부탁했다.

'연합군이 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이 필요해.'

카멜의 존재는 내 계획에 늘 치명적인 변수 덩어리였다.

연합군이 숲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적으로 나타난다면?

'예측 불가능한 개판으로 상황이 흘러가겠지.'

카멜이 이 주변에 없길 간절히 바랐다. 일이 복잡해지는 건 사절이었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구실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친위대장 나토네가 남은 이들을 모두 이끌고 복귀했다.

공터에 한데 모인 머릿수를 가늠해보니 6천 정도 되어 보였다.

난 바쁘게 인파를 누비는 나토네에게 다가갔다.

떠날 때 한 가지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제단에 있는 붉은 혹을 살피는 것.

"마지막에 어떻던가요?"

"붉은 혹은 이제 미믹의 덩치보다 커진 상태야. 거대한 바위처럼 계속 자라나고 있네."

더 커졌다.

곧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데, 일단 펜리가 오기 전까진 판단을 보류해야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며 내 뒤 그림자가 늘어졌을 때, 누가 내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을 돌리니 하품을 하는 펜리가 보였다.

반가우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주변에 인간 군대의 흔적은 없어."

"키메라들은요."

"예상보다 훨씬 많아. 사방이 키메라 천지야."

카멜이 이곳에 없다.

다행히 최악은 면했다.

"도미닉은 보셨습니까?"

"그 녀석은...."

인상을 살짝 찡그린 펜리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푸드득―!

가리킨 방향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드넓은 숲 위로 지는 붉은 노을, 그 위로 새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그저 하나의 장면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하나의 신호를 읽었다.

용병들이 사라진 방향이다.

내 예측을 증명하듯,

"도미닉이 사냥을 시작했다. 벌써 반수 이상이 죽거나 잡혀갔어."

펜리가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골든타임이 조만간 찾아온다.

난 서둘러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상황이 급해졌다.

* * *

에토르 영지의 접대실.

화려한 식탁에 만찬이 준비됐다.

보기 드문 귀한 음식들 앞에 두 명이 자리했다.

"푹 쉬었나?"

"덕분에."

"귀한 손님이라 신경 써서 준비했네. 앉지."

에토르의 성주, 톰자엘 자작은 와인잔을 들며 눈앞의 사내를 맞이했다.

카멜 블레이저.

육십에 이른 자신의 나이에 절반도 안 되는 새파란 애송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상대라 경계가 필요했다.

자작이 보랏빛 잔을 흔들며 말했다.

"렛샤포 블랑, 이 와인을 아나?"

"엘레토르 성곽에서 넘어온 귀한 술이군요. 클라크 대공이 가장 즐겨하는 기호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견식이 제법이군."

"부친이 좋아하셨습니다."

"부친 일은 유감이네. 형도 함께 잃었다지?"

"운이 없었습니다."

"운이 없었다라…."

자작은 카멜의 의자 뒤에 시립한 리옹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으로 호위를 서고 있는 블라이어의 대표 기사.

감정을 읽기 힘들자, 자작은 짧게 혀를 차곤 식기를 들었다.

딸그락― 딸그락―

무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십수 명의 기사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은 기사들을 지나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어제 두 가문의 군대가 큰 피해를 입고 에토르 영지에 입성했다.

언제든 책임 공방이 험악하게 나올 수 있는 자리.

침묵 속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 잠시 후, 디저트가 식탁에 올라왔을 때, 자작이 와인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보고 받았네. 피해가 상당하더군."

"키메라 수가 예상을 훨씬 웃돌았습니다."

"정예병을 2천이나 잃었다지? 속이 쓰리겠어."

"기사단 하나를 잃으신 자작님만큼 하겠습니까?"

톰자엘 자작은 카멜의 대답에 눈썹을 찌푸렸다.

며칠 전 카멜이 키메라들의 이동 경로가 그려진 라웁 숲 지도를 내밀며 합동 토벌을 제안했다.

최소 천 개 이상의 마석 수급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던 토벌 계획.

당연히 구미가 당겼고, 제안을 받아들인 자작은 상당히 신경 써서 토벌대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천오백 개에 달하는 마석을 전리품으로 가져왔으니, 성공적인 토벌이었다.

다만, 피해가 무척이나 뼈아팠다.

"그 안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단 정보는 못 들었는데?"

"저도 알지 못했던 존재입니다."

토벌에 큰 피해가 난 이유는 작은 괴물의 존재였다.

작은 체구의 여인.

그 괴물 앞에 이백(二百) 인으로 구성된 기사단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살육에 연합군의 사기가 곤두박질쳤고, 토벌은 큰 피해를 남기고 끝이 났다.

본래라면 서로의 책임을 물으며 고성이 오가는 살벌한 식사 자리가 돼야 했었다.

하지만 톰자엘 자작이 만찬에서 카멜을 미소로 맞이한 건 그가 정예병 2천을 희생해 퇴로를 열었고, 어젯밤 보내온 교섭 제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들고 제안한 그대의 책임이 크긴 하지."

"그래서 다시 제안드린 겁니다."

"들었지. 붉은 마석을 내게 모두 넘기겠다고?"

"대신 다른 것을 원합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밀 1만 포대를 원합니다."

"밀 1만 포대라."

약조한 대로라면 50대 50 비율로 마석을 나눠야 했지만, 카멜은 마석 대신 식량을 원하고 있었다.

자작은 고민하는 척했다. 그는 이미 속으로는 계산을 끝내고 카멜의 제안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밀 1만 포대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지급 가능한 양이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직 애송이로군.'

식량이야 반년 안에 밀 추수가 끝나면 배로 충당될 소비재였다.

하지만 마석은 다르다.

마석은 제한적인 만큼 무척이나 귀했다. 게다가 기사들을 대거 잃은 자작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게다가 더 기대되는 건,

'천오백 개의 마석이라면 5성급 각성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수백 수천의 희생이 따라도, 단 한 명의 5성 각성자만 추가로 배출시킨다면 블라이어 성주조차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두 명이 나온다면?

'더 큰 욕심을 낼 수 있겠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자작은 기사 단장을 바라봤다.

단장은 주군의 시선에 리옹 마트레인을 살피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신과 동급인 5성 기사라는 것을 확인한 건데, 리옹은 몇 달 전까지 4성을 전전하던 부단장 출신이었다.

정보 조직이 알아 온 소식에 의하면 최근 5성에 오른 리옹이 무언가 복용했다고 했는데, 마석일 확률이 높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최근에 확보한 마석 실험으로 3성까진 각성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지.'

이번에 확보한 천오백의 마석이라면 5성도 가능하지 않을까 판단하고 있었다.

전혀 손해가 없는 거래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자작은 쉽게 그 조건을 수락할 생각이 없었다.

"큰 희생으로 확보한 마석을 포기하다니, 혹여 마석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건가?"

"그저 가문의 재정이 좋지 않아 내린 판단입니다."

"어려운 상황인가 보군?"

"아실 텐데요?"

자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와인을 따랐다.

'큰 화재로 광물 창고들이 모두 불타 궁핍하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지금 카멜의 상황에선 마석보단 식량이 더 중요한 자원일 수도 있었다. 승계가 불안정한 상황에선 내실이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밀 7천 포대로 하지. 1만 포대는 너무 과해."

"마석을 원하는 성주들은 많습니다. 편지도 여럿 받은 상태죠. 제 몫이 750개였던가요?"

"8천 포대."

"그럼 8천 포대에 추가로 골동품 하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골동품?"

"판매를 거절하신 그 물건 말입니다."

"아, 그 지팡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59화 쌍둥이 잭과 하우엘 형제

자작은 골동품 창고에서 나뒹굴고 있는 낡은 지팡이를 떠올렸다.

어제 오찬을 함께 하고 골동품에 흥미를 보여 구경을 시켜줬는데, 블라이어 성주는 골동품 중 유독 그 지팡이에 관심을 보였다.

그땐 내키지 않아서 지팡이를 팔지 않았는데, 그 지팡이를 밀 2천 포대와 맞바꾸자고?

자작으로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

농부 하나가 밭을 갈다가 발견한 골동품인데, 밀 다섯 포대를 포상금으로 퉁친 물건이었다.

마탑에서 마법사들을 초빙해 여러 차례 감정을 해봤는데, 2천 포대는커녕 백 포대의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

혹여 마음이 바뀔까, 자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대의 부탁이니, 더는 거절이 힘들군. 거래하지."

순간, 카멜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그는 조용히 자작의 손을 맞잡았다.

거래 성립이었다.

잠시 후, 자리를 털고 나가려던 카멜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작을 돌아봤다.

"어젯밤, 방으로 보내주신 여인들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여인들? 시중을 거부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됐네. 그 정도는 거래 선물로 줄 수 있지. 영지로 돌아갈 텐가?"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고 떠날 생각입니다."

"집사에게 말해놓도록 하지."

카멜은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왔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자작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카멜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자작은 와인을 음미하며 조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놈, 네놈이 포기한 마석으로 곧 네 영지를 짓밟아주마."

오늘 획득한 마석으로 잃은 기사들을 보충할 수 있는 자신과 달리 정예병 2천을 잃은 블라이어는 한동안 전쟁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예산이 빠듯해 보였으니까.'

전력을 더 벌린 뒤 그 약점을 물고 늘어진다면 큰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자작의 머릿속에 블라이어 영토를 손에 넣은 달콤한 상상이 그려졌다.

* * *

카멜은 리옹과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적막한 통로를 단둘이 걷게 됐을 때 카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상단주들은 모두 호출했나?"

"별관에 모여 있을 겁니다."

"지시한 작업은?"

"주군의 지시에 상단주들이 따를 수밖에 없도록 작업해놨다고 렌구아가 자신하더군요."

"좋아."

별관에 모인 상단주들은 에토르 내에서 대규모 식량을 취급하는 대상인들이었다.

자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에토르에 유통 중인 곡물들을 천천히 블라이어로 수송시킬 계획이었다.

한 달쯤 식량에 압박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쯤 마석을 이득을 봤다고 시시덕거리고 있겠지?"

"그럴 겁니다."

"멍청한 늙은이, 조금 전 목숨줄을 내놓은 것도 모를 테지."

식량은 전쟁의 중요한 자원이다.

특히, 성 안에서 농성을 하며 버틸 때는 더더욱 중요했다.

방금 전 거래로 에토르는 장기간 공성이 불가능하게 됐다. 게다가 추후 마석의 부작용까지 자세히 알게 된다면 크게 당했다는 걸 깨닫게 될 테지.

'숨통을 조일 준비는 끝났고.'

톰자엘 자작은 늙은 너구리다.

그런 자를 속이기 위해선 큰 제물이 필요했고, 카멜은 토벌에서 정예병 2천을 키메라 먹이로 던져줬다.

정예병 2천이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큰 병력.

큰 타격을 입은 블라이어가 전쟁을 먼저 일으킬 것이라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자작이 알고 있는 정예병은 오십 명도 안 되는 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단기간 훈련시킨 농노병이었는데, 전원 값비싼 장비들을 걸친 탓에 누구도 2천 병력이 정예병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크게 손해 본 것은 값비싼 2천 명 분량의 장비뿐.

하지만 금광 개발이 끝난 카멜에겐 그 정도 손해는 별것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내가 말인가?"

붉은 카펫을 걷는 카멜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조금 전 자작을 상대했던 거짓 미소와 상반된 표정.

하지만 주군 곁에 늘 머물던 리옹은 주군의 미묘한 변화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물건을 손에 넣었거든."

"밀 2천 포대와 맞바꾼 물건 말입니까?"

"밀 2천 포대를 포기하고 그 지팡이를 얻을 수 있다면 백배 남은 장사지."

백배라면 밀 20만 포대의 가치다.

리옹은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그 지팡이가 뭡니까?"

"주술사들의 둥지에 큰 힘이 될 물건. 렌구아의 전력이 두 배 이상 늘어날 거다."

"…두 배 이상 말입니까?"

리옹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렌구아의 전력이 두 배 이상 늘어난다면 자신이 이끄는 친위대조차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하나의 물건이 그 정도 파급력을 일으킬 수 있으면 보통 물건이 아닐 터였다.

'기대도 안 했는데 쓸만한 고대 아티팩트를 찾았어.'

전쟁 때 유출이 된 건가?

과거 에토르 영지를 손에 넣었을 땐 발견하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블러드 오크 지팡이(Blood Orc Staff).

훗날 블랙 마켓에 경매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물건이었는데, 설마 에토르 자작의 골동품 창고에 잠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블러드 오크의 지팡이는 백 마리의 오크 피를 한데 모아 보름 정도 담가두면 봉인이 풀리는데, 고대 시절 오크 대샤먼이 사용하던 주술사의 지팡이로 알려져 있었다.

주술 효과는 격노(rage).

병사들을 일순간 광전사로 만드는 피의 폭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대체할 물건을 찾아서 다행이야.'

도네콜린트의 능력인 '세이렌의 비명'은 카멜이 앞으로 정복 전쟁을 이끌어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광의의 예언자를 통해 고대 문양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세이렌의 찬가라….'

세이렌의 '비명'이 '찬가'로 바뀌었다.

세이렌의 찬가는 과거 신명의 목록에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세이렌의 비명이 바뀐 것일까.

예측하기 어려웠다.

자신은 도네콜린트의 능력만 알고 있을 뿐, 능력 획득 경로에 대해선 듣지 못했으니까.

영입했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도네콜린트는 이젠 죽어버린 인간이었다.

즉, 세이렌의 찬가를 얻은 주인은 회귀자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인물이란 뜻이고, 카멜은 그 주인의 정체로 한 사람을 의심했다.

과거 시절에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

그리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위협적인 존재.

'그.'

카멜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라는 존재.

이 신명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더라도 신명의 주인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사라진 암살자놈의 흔적을 쫓아야 했다. 전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가장 가까이 접해있는 미끼였으니까.

즉,

'전달자와 신명의 주인, 이들을 찾는다면 '그'의 흔적을 잡을 수 있겠지.'

방법은 찾았지만, 토바른 내 자신의 영향력으로 언제 이들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사방에 자신의 눈을 깔아놔야 한다.

'영향력을 빠르게 넓혀야 해.'

카멜은 그 첫 단추로 에토르를 선택했다. 그가 톰자엘 자작을 직접 방문해 긴 시간 작업을 펼친 데에는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자리했다.

'놈은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을 지녔어.'

용아의 망토를 얻을 거란 사실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자신이 에토르 영지를 노리고 있을 거란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면 방해를 할 게 분명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미래를 예측하는 그가 방해를 시작하면 부담스럽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것.'

미래를 알고 있어도, 전쟁 같은 큰 사건을 막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폭풍처럼 몰아쳐서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본래 에토르 점령 계획은 8개월이었다.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몰아친다면 아무리 '그'라도 막기 힘들 것이다.

'무리하게 막으려다가 흔적을 드러낸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운 좋게 '그'의 흔적이 드러난다면 전력을 풀어 죽일 생각이다. 그러려면 실력 좋은 사냥개들이 필요했다.

"쌍둥이는 수소문 해봤나?"

"잭과 하우엘 형제라면 위치 파악이 끝났습니다. 주군의 말씀처럼 에토르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이 직접 오라고 했겠지."

"잡아 올까요?"

"아니. 직접 간다. 기사들을 다치게 할 순 없지."

"그 정도입니까?"

카멜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통로로 걸어갔다.

잭과 하우엘 형제는 카멜도 인정하는 사냥개들이다. 독과 암습, 살인 격투에 최적화된 살인귀들.

'오르도르 숲의 마녀를 상대로 살아남은 녀석들이지.'

상황 판단도 뛰어나고, 영악하기도 해서 쓰임에 따라 리옹에 버금가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 정도 가치를 지닌 녀석들이니, 자신이 직접 얼굴을 비추고 영입해야 했다.

붉은 카펫이 끝나자 별관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가 나타났다.

"상단주들을 만나시겠습니까?"

"쌍둥이들이 먼저다. 기다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내성 출구에 도착했을 때, 에토르의 집사가 카멜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작의 지시를 받았는지, 공손히 예를 표한 집사는 곧 미모의 여인들을 카멜 앞에 데려왔다.

어젯밤 카멜을 시중하러 온 여인들이 한껏 치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두 네 명.

"여인들을 준비시켜 놨습니다."

"자작께 감사하다고 전해."

카멜은 그녀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른 마차에 태우게 했다.

마차 앞에 선 카멜이 집사에게 물었다.

"지팡이는?"

"그거라면 떠날 때 드리려고 포장을 해 두었는데…."

"지금 가져와라."

잠시 후, 시종들이 기다란 상자를 가져오자, 리옹이 직접 그 상자를 챙겨 카멜의 마차에 실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목적지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떠나기 전에 에토르의 명소들을 잠시 둘러볼 생각이다. 받은 선물들도 풀어봐야지."

"자작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카멜이 여인들이 탄 마차를 가리키자, 집사는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카멜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들을 태운 마차를 시작으로 블라이어 기사들이 마차 행렬에 붙어 따라왔다.

마차 안에서 상자를 뜯어 지팡이를 확인한 카멜은 소파에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곧 시작인가?'

도미닉이 백 개의 심장을 얻게 되는 큰 전투가 곧 라웁 숲에서 벌어진다. 그 후 각성한 아레나 후아튼이 토바른 전 지역을 혼란으로 빠트리는 시기, 그 시기가 바로 최적의 전쟁 타이밍이었다.

'변수는 없을 테지.'

자작의 방심을 불러오기 위해 도미닉의 키메라 군단을 이용했다.

처음부터 도미닉에게 큰 타격을 줄 생각은 없었다.

예상대로 아레나 후아튼은 괴물이었고, 그쪽으로 자작의 기사단을 밀어 넣었다. 변수라면 하루 정도 도미닉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건데, 그 정도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두두두두―

리옹은 쌍둥이들이 머무는 에토르의 빈민가로 말을 몰았다.

범죄자들의 뒷골목으로 유명한 빈민가, 하지만 기사단이 모습을 보이자, 빈민가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침묵 중심에 카멜이 마차에서 내렸다.

"쌍둥이들은?"

"저곳에 있을 겁니다."

허름한 술집, 낡은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주인이 왔다고 전해. 그리고 여인들을 데려와라."

"그녀들을 어찌할 생각입니까?"

"사냥개들을 키우려면 먹이가 필요한 법이지."

쌍둥이, 잭과 하우엘 형제.

그들은 돈과 여인에 미친 살인귀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두 가지를 원 없이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를 떠올린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광의의 예언자를 통해 '그'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게 됐다.

이젠 그 흔적을 쫓을 사냥개를 구할 시간이었다.

60화 소리 없는 찬가

"괴, 괴물! 오지 마!"

"아아아아악―!"

피로 물든 숲 너머로 비명 섞인 바람만 불어닥쳤다.

대지에 너부러진 시신들은 모두 찢기고 갈라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중 살아남은 이들은 괴물들에게 잡혀 사지가 뜯기는 중이었다.

"먹이들이 도망쳤군요."

메마른 표정의 중년인이 큰 책을 들고 앞에 섰다.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눈앞의 용병에게 물었다.

"불사자의 심장이라고 했습니까?"

"사, 살려주시… 아악!!!"

"전 죽음을 싫어합니다."

눈앞의 용병을 심문하는 건 용병이 이 행렬의 책임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소식이 그 용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불사자의 심장.

왜일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도미닉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물음에 답하신다면."

"부, 분명 들었습니다! 제단에서 붉은 괴물이 튀어나와 드워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제단? 방금 제단이라고 했습니까?"

용병은 조금 전까지 천여 명의 행렬을 이끌고 라웁 숲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키메라 무리가 나타났을 때, 제물로 던져줄 이들이 수백이 넘어갔다.

시선을 돌리고 도망치기 충분해서 용병들은 탈출을 자신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드, 드워프들의 말이 맞았어.'

제물을 던지고 던져도 키메라들은 끝도 없이 몰려왔다.

제물마저 부족해지자 키메라들은 용병들로 만찬을 시작했고, 목줄이 풀린 키메라들은 먹잇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천여 명이 몰살당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곳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그리고 아직 삶의 희망을 놓지 못했다. 살기 위해 그는 떠오른 모든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나타난 드워프들과 연구실에 남은 자들.

지금 연구실의 상황.

소식을 전달한 C급 용병 알이란 이름까지.

두서없이 그는 입을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눈물범벅이 되고, 표정에 절망이 서렸다.

간절히 삶을 원하는 용병을 도미닉은 감정 없이 바라봤다.

인간은 식용돼지를 보며 가여움을 느끼던가?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도미닉은 아레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영원한 삶을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머리는 필요 없으니 몸통만 가지고 가지요."

"그 무슨 개소… 끄아아악!"

아레나의 손에 용병의 머리가 뽑혔다.

그녀는 잘린 머리를 한쪽에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에게 살육당한 용병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도미닉은 피로 물든 그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

그 사이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연구실 방향을 응시하는 소녀.

작은 변화였지만 도미닉은 그녀의 반응에 눈을 반짝였다.

인형처럼 움직이던 그녀가 연구실에 가까워질수록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끌림을 느끼는 듯한 반응.

저 공허한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불사자의 심장."

그 단어를 중얼거리자, 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 반응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도망친 먹이들이 전해온 한 가지 정보.

딸의 반응은 불사자의 심장과 분명 관련이 있었다.

'미믹이 죽고 붉은 괴물이 나타났다라.'

미믹과 교감이 끊긴 순간, 미믹의 죽음을 눈치챘다.

드워프들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로 미믹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강력한 실력자가 존재한다.

"도르네프. 베네타의 군주가 직접 움직인 건가?"

도르네프가 어떻게 자신의 연구실을 찾은 것인지, 왜 급습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아니, 더는 알 필요 없다.

도미닉의 신경은 오직 하나, 붉은 괴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미믹에 대한 정보를 캐내며 마석의 비밀을 파악했다.

'마석은 부산물에 불과해.'

마석을 생산해내는 고대의 힘.

그 힘이 크리스탈 미믹의 진정된 가치였다.

미믹은 마석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은 건 아레나의 육체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이 배를 가르고 나왔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아레나의 신(新)동력 원천.'

그 붉은 괴물은 자신의 것이다. 누구도 욕심내선 안 됐다.

동력 원천을 손에 넣고, 아레나가 진정한 힘을 각성한다면 도미닉은 딸과 함께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베르센 클라크! 기다려라.'

클라크 대공을 떠올린 순간, 감정 없던 도미닉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언제고 대공을 키메라로 만들어 복수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도착하는 대로 일지부터 챙겨야겠어.'

손을 내밀자, 아레나가 그 손을 잡고 따라왔다.

"오늘이 너의 생일이구나. 탄생을 기념하는 파티를 시작해야겠다."

도미닉이 책을 활짝 펼쳐 들자, 숲에 흩어져 있던 키메라들이 멈칫하더니 동시에 절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엑!

쿠웩!

잠시 후, 키메라들이 신호를 받은 것처럼 절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구름이 숲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숲을 뚫고 드넓은 들판을 밟았다.

그 순간,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눈앞의 절벽에서 섬뜩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키메라 떼가 일순간 멈춰 설 정도로 울부짖음이 담고 있는 기운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기운.

도미닉은 그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체다.

본체가 나타났다!

이곳 키메라들은 저 본체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실험체들이라, 기운이 터진 순간 움츠러들었다.

오직 아레나만 그 기운에 대항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렵다.

그런데 미칠 듯이 기뻤다.

'드디어!'

도미닉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 찼다.

그는 빠르게 책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에는 미믹에게서 얻은 많은 고대 지식이 담겨 있다. 잠시 후, 책이 떨리더니 보랏빛 운무가 키메라들을 둘러쌌다.

운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라."

키에에에에엑!

멈칫하던 키메라들이 입을 벌린 채 울부짖는 방향으로 사납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울부짖음에도 더는 주춤하지 않는 모습.

쿠쿠궁―!

울부짖음에 절벽이 흔들리며 비명을 토했다. 절벽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움직임.

"...."

도미닉은 저 멀리 절벽 입구에 고립된 먹이들을 발견했다.

숫자가 많지만, 그에겐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손짓 하나.

처형 명령이 떨어졌다.

* * *

"이봐."

"네."

"내 눈에는 네가 말한 골든타임이 끝난 것 같은데?"

"무슨 뜻입니까?"

"ㅈ된 거 같다고."

펜리는 바깥을 나와 절벽을 등졌다. 팔짱을 낀 그녀는 숲 너머 기운을 살폈다.

좌우 그리고 정면, 세 방향에서 광폭한 키메라들의 기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했는지, 바람 사이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드넓은 숲이 괴물들을 토해내는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일반인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것이다.

"저 안쪽도 난리가 난 것 같고."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입구 쪽을 바라봤다. 난리인 건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득―! 두둑!

"까아아악!"

"저, 절벽이!!!"

수천 인파가 한데 모인 공터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 전체가 쩌적 갈라지며 돌조각을 토해냈는데, 흔들림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

사람들은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무, 무너지기 전에 나가야 해!"

"멈춰라, 신호를 기다려!"

"하, 하지만…!"

"통제를 따른다고 약조했을 텐데?"

나가려는 이들을 드워프들이 무기로 가로막았다.

드워프들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도르네프가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터라 표정을 숨긴 채 통제에 들어갔다.

입구 쪽에 홀로 서 있는 존재.

저 인간이 신호를 보낼 때까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한참 전부터 뭘 살피고 있는 거지?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입구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붉게 저무는 하늘을 감상하듯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처음에는 그 뒷모습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이젠 두려움으로, 나중에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기다려 주세요. 우리는 모두 살아서 나갈 거예요."

샤르바딘이 나섰다.

"그를 믿을 수 없다면 베네타를 믿어 주세요. 당신들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그대들의 군주입니다."

토바른 지역의 3강이자, 이종들의 정신적 지주.

그녀의 입에서 도르네프가 언급되자,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설득이 먹힌 모습.

모인 이들의 시선이 샤르바딘 쪽을 향했다.

정확히 큰 키의 샤르바딘을 어부바하고 있는 도르네프를 바라본 것이었다.

군주의 위엄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모습.

도르네프도 어색했는지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업은 건 이유가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대다수 드워프들이 곁에 여인과 아이를 끼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바로 업고 달리기 위해서였다.

'전투보단 전력 질주가 될 것이라 했지.'

샤르바딘의 불안정한 숨결이 느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도 이곳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피앙세를 불안하게 만든 괘씸한 존재.

도르네프는 입구 쪽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샤르바딘의 은인이라지만, 펜리 체이서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미친 짓은 안 했을 것이다.

돈만큼이나 자신의 목숨에 민감한 다크 엘프.

도르네프는 아서보단 펜리의 감을 믿었다.

그녀는 아서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모든 이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 확신했다.

무엇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도르네프는 아서란 인물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이 미친놈아, 너만 살려고 하는 거면 미리 말해. 나라도 살아야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이밍은 찰나일 거라고."

"그 찰나가 어느 정도인데? 네놈 짝짓기 시간보다 짧아?"

"당연히 짧죠."

"조루는 아니지? 1분도 안 되면 곤란하잖아."

"절 못 믿으십니까?"

"내가 어떻게 믿어. 너랑 짝짓기도 안 해봤는데."

"...."

이 상황에 저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도르네프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한마디 하려고 움직이려는데,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거친 바람과 함께 안쪽 통로에서 매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찌릿찌릿―!

그 울부짖음에 도르네프는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평범한 소리가 아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이 담겨 있다.

절대적 존재인 드래곤 피어와 비교할 순 없지만, 비슷한 압박을 느꼈다.

"…이런."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맞았다.

샤르바딘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나 유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표정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도르네프는 마나를 퍼트려 샤르바딘의 몸을 풀어줬다.

굳은 몸은 마나로 풀어줘야 한다.

도르네프가 서둘러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크에에엑―!

"고, 괴물입니다!"

"도미닉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바깥에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하필 이 타이밍에!"

도르네프는 순간 당황했다.

울부짖음에 굳어버린 이들만 수천에 달했다. 기사들이 움직여도 현 상황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이대로라면 신호가 떨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그런데 그 녀석은 이미 안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수천이 모인 공터 중앙에 선 녀석이 갑자기 소매를 걷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잠시 두 눈을 감던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뜬 순간,

번쩍―!!

"...!"

황금빛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화려한 빛의 물결이 허공을 따라 빠르게 퍼져나갔다.

빛에 뒤덮인 순간, 등에 업혀 있던 샤르바딘이 막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빛의 물결이 한데 모인 이들을 살포시 훑고 지나갔다.

순간 사방에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모두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두려움도 잠시, 사람들의 표정에 안정감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본능처럼 두 눈을 감고 빛을 받아들였다. 마치 빛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

"…이건."

도르네프는 그 광경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빛은 마치,

소리 없는 찬가 같았다.

61화 골든타임

공터를 채우던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을 둘러본 나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거친 호흡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문양이 살짝 그을릴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아, 진짜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네.'

단말마의 울부짖음.

내가 기다리던 신호였다.

근데, 울부짖음에 담긴 기운까진 예상치 못했다.

미믹의 것과 비슷하지만, 더욱 짙고 끈적한 기운.

뱀과 마주한 쥐가 공포에 몸이 굳듯, 울부짖음에는 포식자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기운에 삼켜져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다행히 효과가 있다.'

미믹과 같은 기운이라 주저 없이 움직였고, 예상한 대로 고대 문양의 힘이 기운을 소멸시켰다.

사람들은 하나둘 머리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원망 섞인 감정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다음 행동이나 말을 기다리는 모습인데, 방금 전 능력으로 확고한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괜찮나?"

"…혹시 포션 있습니까?"

"포션?"

"네. 꼭 필요합니다. 이럴 때 쓰려고 한 힘이 아니라서."

도르네프가 다가오자, 난 바로 포션을 떠올렸다.

수천에 이르는 이들을 빛 안에 담기 위해 문양의 힘을 한계치까지 터트렸더니, 몸에 부담이 커졌다.

키메라 군단을 가로지르려면 문양의 힘은 필수였다. 컨디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 말에 도르네프는 잠시 갈등하더니,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오렌지 색감을 띤 맑은 액체가 든 병이었다.

"샤르바딘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것인데, 쓰게."

"뭡니까?"

"요정의 눈물."

"...!"

병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난 눈을 번쩍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을 잡았는데, 도르네프가 쉽게 놓지 않았다. 내가 힘을 주자, 탄식을 내뱉으며 병을 놨는데 굉장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물약을 마시지 않고 품 안에 넣었다. 그 모습에 도르네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건가?"

"이런 물건을 지금 쓰면 욕먹습니다."

"그럼 언제…."

"어련히 잘 쓰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요정의 눈물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샤르바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꾸 피앙세, 피앙세 하며 소름 돋게 했는데, 이젠 인정해준다.

'목숨 코인이 하나 더 늘었네.'

요정의 눈물은 최상급 포션보다 효과가 좋은 진귀한 물건이었다.

도르네프 정도의 이종 군주쯤 돼야 일 년에 한두 병 얻을 수 있는 치료제.

몸에 부담이 가는 정도로 복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손끝에 힘조차 안 들어갈 때 마셔도 늦지 않았다.

뭔가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르네프.

쿵! 쿵! 쿵!

하지만 그 표정도 곧 동굴 안쪽을 돌아보며 딱딱하게 굳었다.

울부짖음이 멈추더니 이내 바닥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오고 있다.

"뭐가 나타난 거지?"

"그겁니다."

"그것? 설마…."

굳이 뭐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쿵쿵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더니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빠르게 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나오려고 하고 있다.

난 길게 숨을 내쉬곤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긴장한 것 같았다.

붉은 혹, 아니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시작됐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휘말린다.

"골든타임입니다."

어서 튀어야 했다.

"빌어먹을, 빨리도 말하는군."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움직인다!!!"

도르네프의 외침.

그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다급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분명 울부짖음이 터졌을 때 키메라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바깥을 나와 펜리에게 물으니,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다시 움직인다."

숲 주변을 둘러본 나는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군데군데 채우던 키메라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검은 그림자 떼가 순식간에 숲 전체를 채우며 절벽을 에워쌌다.

완벽히 포위한 채 빠르게 좁혀오는 모습.

"시발, 진짜 너무하네."

"망한 거야? 얼른 말해."

"왜요? 혼자 튀려고요?"

"혼자 튀긴 그렇고, 서넛 정도는 가능해."

나와 도르네프 그리고 샤르바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생명의 징표가 있으니 그나마 나까지 신경 써주는 거겠지.

"어쩔 거야?"

"움직여야죠. 골든타임입니다."

"뭐? 도망칠 공간이 어디 있다고?"

키메라 떼가 사나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키메라 떼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운무에 집중했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면 돌파 할 거라고."

"미친놈. 저걸 보고도?"

"저쪽입니다."

난 다가오는 키메라 떼 좌측을 가리켰다. 다가오는 키메라 떼 중 좌측에서 흘러나오는 운무가 가장 옅었다.

운무가 가장 짙은 우측에 도미닉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고, 좌측을 뚫고 가야 도미닉과 마주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앞장서라고 말 안 할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그 힘으로 뚫고 가려고?"

"알면서 물었습니까?"

"머릿수가 달라.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다."

"저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방금 해결됐습니다."

내가 품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하자,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동굴에서 백 단위 키메라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능력이 떠올랐다.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수도 많았고,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녀석이 버티면서 돌파할 수 있을까?

"확실해?"

"제가 헛소리하는 거 봤습니까?"

단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 없는 녀석의 확신.

곰방대를 집어넣은 펜리가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웬일입니까? 돈도 안 받고 움직이다니."

"의뢰금을 줄 저 난쟁이 새끼가 빠져나가야 돈을 받지. 추가 수당까지 합쳐서 청구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더럽게 고맙네요."

문양을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했기에 펜리에겐 호위를 부탁했다.

입구 쪽을 돌아보니 도르네프가 샤르바딘을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업혀!"

"이제부터 앞만 보고 달린다!"

"서둘러!"

도르네프를 선두로 드워프들이 여인과 아이들을 업고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 뒤로 건장한 이들이 자리했다.

이제 길잡이인 나만 바라보는 상황.

난 고개를 끄덕이곤 키메라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떼거리로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의 좌측.

방향을 잡은 후 숨을 길게 들이켠 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이끌자, 내 뒤로 기다란 행렬이 만들어졌다.

이젠 멈춰도 죽고, 잘못돼도 죽는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도르네프의 한마디에는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번 탈출의 결과에 따라 베네타와 내 관계가 정해질 것이다.

솔직히 요정의 눈물을 끝까지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쓰지 않고 버티다, 계획에 실패하면 베네타를 등에 업을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낙오자는 버리고 갑니다."

"이미 다 전달했다."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 등에 탄 상황으로 멈춘 순간 죽는다.

난 사람들에게 경고의 쐐기를 박은 뒤 속도를 점차 올리기 시작했다.

바깥 상황을 모르던 사람들은 시야에 드러난 광경에 기겁했다.

성벽처럼 똘똘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

그 아가리 속으로 내가 주저 없이 질주를 시작하자, 뒤쪽에서 당황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뭐야!?"

"아아아악…! 괴물!"

"앞사람 뒤통수만 봐! 멈춘 순간 버리고 갈 것이다!"

도르네프의 매서운 외침.

미리 언질을 줬음에도 막상 키메라 군단과 마주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는 빠르게 전염이 된다.

삼삼오오 분열되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병따개를 따곤 병을 입에 물었다.

요정의 눈물.

아껴 마셔야 하는데, 남을지 모르겠다.

"시발! 오늘 한번 죽어보자!"

번쩍―!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온 숲.

그 숲을 가로막은 키메라 떼 사이에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황금빛 물결.

그 빛에 닿자 키메라들의 육체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키메라들이 비명을 지르며 퍼드득 발광하며 물러났다.

좌측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빛을 따라가라!"

내가 요정의 눈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오른손을 번쩍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빛에 머물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비명과 거친 숨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사람들은 홀린 듯 빛을 따라 발을 미친 듯이 굴렀다.

번쩍―!

전보다 더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연달아 터지는 빛은 마치 폭죽을 연상케 했다.

포위망이 홍해가 갈라지듯 빠르게 갈라졌다.

도르네프의 등에 업혀 움직이던 샤르바딘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빛이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기적(奇蹟) 같다고.

* * *

"...."

도미닉은 굳은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어둠을 밀어내는 황금빛 물결.

그 물결 사이로 키메라들이 튕겨 나오고 있었다. 공격을 지시했지만, 키메라들은 마치 막힌 벽을 둔 것처럼 빛 가까이 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수백 수천의 샘플 연구.

도미닉은 수많은 연구를 행하고 수집하며 키메라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펼쳐진 키메라들의 반응은 그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빛을 거부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거부감이 드는 빛이다. 저 황금빛은 확실히 자신에게 위협적이었다.

빛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아레나를 그쪽으로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

"...."

코앞에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도미닉은 빛에서 시선을 떼곤 정면을 응시했다.

좌측에서 키메라의 비명이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반응하는 대신 책을 들어 올리곤 눈앞의 전투에 들어갔다.

쿵―!!!!!!!!

절벽 틈새를 비집고 붉은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부리는 거대 키메라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엄청난 덩치.

물컹거리는 육체를 지닌 이족 보행의 괴물이었다.

인간의 형태 같은데, 얼굴 부분이 붉은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블러드 골렘?'

고대 시절에 개발된 액체 골렘을 닮은 형태.

하지만,

그어어어어어어어―!

괴물의 넓은 가슴이 쩍 벌어지며 그 안에서 사나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 기괴하고 큰 입이 달렸다.

게다가 벌어진 입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심장.

불타는 심장을 본 순간 도미닉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동력 원천!'

도미닉은 책을 펼치고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좌측, 우측에 넓게 퍼져 있는 키메라들이 도미닉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포위하던 진형이 삽시간에 무너지며 먹이들이 숲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봤지만 진짜 목표가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개체들이 뭉치고 뭉쳐 거대한 무리를 이뤘다. 붉은 괴물의 덩치보다 수배는 커다란 진형이 완성됐다.

"아레나."

도미닉의 딱딱한 한마디에, 본능적으로 앞서 나가던 작은 소녀가 멈칫하더니 도미닉 곁으로 다가왔다.

아레나가 점점 멀어지자 붉은 괴물이 분노한 듯 괴성을 질러댔다.

붉은 괴물도 아레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익숙하면서 닮은 기운.

먹음직스럽다.

아니, 먹고 싶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잡아먹은 자가 '진짜'가 되는 전투.

도미닉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먹어 치워라."

명령이 떨어진 순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침을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키에엑!

크아앙!

붉은 괴물이 사납게 포효하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붉은 괴물과 키메라들이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은 같았다.

먹이다.

포식 시간이었다.

62화 헤어질 시간이다

"어서! 서둘러요!"

난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리킨 숲 방향으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갔다.

돌파 시에는 가장 선두였지만, 이젠 포지션 변경이 필요한 상황.

도르네프에게 앞서 신호를 보내곤 난 후방으로 뛰었다. 워낙 사람들의 수가 많다 보니 후방까지 도달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추적이 온다면 뒤쪽부터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후미에 다다른 순간 키메라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다.

숲을 따라 들어오는 키메라들이 없다.

'됐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니, 키메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헐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닉이 추적을 포기했다는 건, 그의 신경이 온통 붉은 괴물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가장 큰 위기를 넘긴 셈.

행렬 꼬리 끝에 붙어 난 사람들을 독려했다.

안전거리 확보가 우선이었다.

콰앙―! 콰아아앙!

"…이크!"

어느 순간부터 피떡이 된 키메라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처박혔다.

끔찍하게 뭉개진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쏟아지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끔찍한 몰골에 구역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거리까지 시체가 날아온다고?

아직도 살벌한 전투 현장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무식하게 싸우네.'

붉은 괴물이 얼마나 무식하게 강한지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그어오오오오오―!!

멀찍이 터져 나온 성난 울부짖음에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정신없이 달렸다.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고 긴 행렬.

얼마나 달렸을까.

"커, 커억!"

"헉, 헉...."

일부 사람들이 헐떡이며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그 수가 빠르게 늘어나자, 난 정지 신호를 보내곤 쓰러진 이들을 추스르게 했다.

주저앉아 쉬는 이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대부분 며칠간 음식은커녕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이들이었다. 여기까지도 드워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젠 안전거리라 판단했기에 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주변에 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펜리에게 묻자, 그녀는 고민 없이 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과 달리 나는 여유를 가지고 일행들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 큰 냇가와 마주하자 지쳐 쓰러져 갔던 사람들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물!"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허겁지겁 냇가로 다가가 얼굴을 처박았다. 그건 드워프들도 마찬가지.

갈증이 해결되자, 일행의 표정에 생기가 차올랐다.

"용케 이런 데를 찾았네요?"

"천 골드 값은 해야지."

그녀에게 수색을 맡긴 건 확실히 잘한 선택이었다.

모두가 냇가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도르네프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신세를 졌어."

샤르바딘을 구해주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탈출도 성공시켰다.

탈출에 실패했다면 도르네프의 군대는 도미닉과 부딪쳤을 것이고,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았으니, 도르네프 입장에선 내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난쟁이, 상도덕도 없냐?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

"내가 너 같은 줄 아나?"

펜리의 핀잔에 도르네프는 미간을 구기더니 품에서 작은 패를 내게 던졌다.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 그 패를 본 펜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의 정원을 열려고?"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럼 나는?"

"돈으로 달라며?"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말이 다르지!"

"하나만 해. 이 암코양이년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난 손바닥보다 작은 황금패를 만지작거렸다.

'대장장이의 정원.'

인물들의 대화 속에 익숙히 언급됐던 장소였다.

학살자의 손에 베네타가 무너지면서, 대장장이의 정원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도르네프가 정원을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난 정원이 숨겨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안다고 들어갈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도르네프 가(家)의 조상들이 대대로 모아 놓은 장비들이 수집된 장소, 드워프의 허락 없이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내 손에 들어온 황금패는 그 대장장이의 정원에 수집된 장비 하나를 소유할 수 있는 일회용 교환권 같은 것이었다.

나에 대한 베네타의 평판이 신뢰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대박인데.'

탈출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도르네프와 함께 한 것인데,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안 그래도 쓸만한 장비를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좋은 장비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니까.'

그 시작이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분에 넘치는 수준이었다.

어떤 장비가 좋으려나?

'행복한 고민이긴 한데, 지금 고민할 때는 아니지.'

난 도르네프에게 감사를 표하곤 황금패를 품에 넣었다. 지금 이렇게 한가히 다리를 뻗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진짜 목적은 이곳에 없었으니까.

얼른 계획의 피날레를 찍으러 가야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제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소리입니다."

투덜거리던 두 사람은 멈칫하곤 나를 바라봤다. 내 의도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막 위기를 벗어났는데 헤어지자고 하니 궁금하겠지.

"베네타로 움직일 거 아니었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 설마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펜리가 절벽 쪽을 가리켰다.

멀찍이 숲 한가운데 솟구친 가파른 절벽.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진행 중인 도미닉이 자리한 장소로, 한창 끔찍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펜리와 눈을 마주치자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파악하려는 저 엘프의 눈, 완벽히 속일 수가 없으니 확실히 거슬렸다.

"눈치 한번 빠르시네요."

"혼자서는 위험할… 아니지. 네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괜찮으려나? 이유가 뭐야?"

"저곳에 모인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저리가 난 줄 알았는데?"

"제 능력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존재들 아닙니까?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켜본다면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죠."

"단서라…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지?"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인 그녀가 집요하게 내 행보를 캐물었다. 생명의 징표를 의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친 척 도미닉 앞에서 개지랄 떨면 보호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당연했다.

이런 리스크가 있으니 되도록 징표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겠지.

"지켜만 볼 겁니다."

"정말이지?"

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켜만 볼 것이다. 그 후에 대해선 교묘히 말을 돌렸다.

머릿속에 있는 내 계획을 이 여자가 알게 된다면 날 기절시킨 뒤 베네타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어디로 통통 튈지 모르는 여자라 일단 안심시킨 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소환하면 그만이니까.'

징표의 효력은 일방적이다.

내가 갑이란 소리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도르네프를 중심으로 베네타로 갈 행렬이 만들어졌다.

그 행렬에서 제외된 건 나뿐이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샤르바딘이 떠나기 전, 날 찾아왔다.

"이걸 왜 제게…."

"제 옆에는 이제 도네프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내민 것은 검은 장미로 세공된 흑요석 장신구였다.

다크 로즈(dark rose).

본래라면 펜리 체이서의 상징물이 될 보석이지만, 샤르바딘의 생존으로 그 가치가 바뀌어 버린 물건.

다크 로즈에겐 뛰어난 축복이 걸려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왜 내게?

"위험한 곳에 가신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이 물건은 도르네프님이 주신 선물 아닙니까?"

"허락받았어요. 도네프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받으세요."

다크 로즈를 거부하면 미친놈이지.

다만, 보는 눈들이 워낙 많아서 냉큼 가져오진 못하고 몇 번 생색낸 후에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았다.

황금패에 이어 다크 로즈까지 얻었다.

불운 덩어리에게 이런 날도 오나?

갑자기 불안한데?

"꼭 베네타에 방문해 주세요."

"조만간 방문하겠습니다."

"꼭이에요! 꼭!"

그녀는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뒤 돌아갔다.

제단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이 그녀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낌없이 퍼주는 미모의 엘프라니.

좋은 호ㄱ… 아니 좋은 인연을 얻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도르네프의 힘찬 외침.

그 외침에 드워프들이 힘찬 함성으로 답을 했다. 그 뒤를 따르던 이들도 도르네프의 외침에 많은 감정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 같았다.

비탄의 감정은 안도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동질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위로를 보내던 사람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사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샤르바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앳된 청년.

길에서 마주한다면 그냥 지나칠 평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사람들의 눈동자에 담긴 청년은 가슴 속에 큰 존재로 다가왔다.

이름은 알지 못했다.

아니, 물어봤지만 그는 미소로 답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사내가 이뤄낸 기적만큼은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되었다.

황금빛의 기적.

그리고 구원.

'기적을 부르는 사내.'

'구원의 성자.'

베네타로 돌아가는 길.

생존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사내의 존재감이 퍼지고 있었다.

* * *

"많이도 살아남았네."

숲으로 사라지는 6천의 인파를 배웅하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스토리 상 악당 도미닉에게 죽음이 예정됐던 이들이었다. 저들 하나하나가 살아남아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면 기존 스토리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당장 샤르바딘의 생존만 해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미래 사건을 아는 건 내게 엄청난 힘이 된다.

그 미래가 내 선택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가 되냐고?

"아니, 전혀."

난 등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암살자 신분으로 카멜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세상은 더는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스토리는 이미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난 그 사이에서 이용할 것을 추슬러 내 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해 세상을 손에 넣거나, 군림하거나 그런 헛된 망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살아남는 것.'

그게 내 목표이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백 개의 심장'도 마찬가지.

이 메인 이벤트도 학살자를 위한 이벤트로 놔둘 생각 없었다.

'날 위한 이벤트로 만들어주마.'

강해질수록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렇다 보면 차차 다음 목표도 생각나겠지.

가방을 챙긴 후 장비를 정비했다.

단검 세 자루와 석궁 하나.

도미닉을 상대하기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손에 닿을 수 있을 만큼 도미닉 숨통까지 다가갔지.'

호흡을 길게 들이쉰 뒤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움직일 시간이다.

* * *

그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은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했다.

힘 또한 마찬가지.

팔다리를 붕붕붕 휘둘러 키메라들을 벌레처럼 짓뭉갰고, 여러 마리를 한 번에 움켜쥐고 허공에 매섭게 내던지기도 했다.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질 때면 허공에 피가 튀고 수많은 키메라가 잡아먹혔다.

일방적인 살육.

인간이라면 그 압도적인 위용에 움츠리며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키메라들은 달랐다.

이지를 상실한 부정한 존재들.

그들은 지시만 따르는 인형에 불과했다.

키에에엑!

쿠어억!

한 마리가 죽으면 두 마리가.

두 마리가 죽으면 네 마리가.

네 마리가 죽으면 그보다 더 압도적인 머릿수가 붉은 괴물에게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마치 벌레 떼 같다.

콰작―! 콰자자작!

그리고 키메라들은 그 작은 벌레 떼처럼 찢기고 터져나갔다. 수많은 혈흔에 주변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악취에 코를 틀어막으며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발, 미쳤네."

눈앞의 전투를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끔찍한 전투.

광기가 깃든 사투였다.

63화 주술 인형, 반다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