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언데드 역병 (4) >
'방금 말이 뭔가 이상했는데.'
울리케는 특유의 경험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챘지만, 그 정체를 알아채는 것까지는 무리였다.
"선물을 전해드려라."
"예."
요한의 하인이 장신구를 갖고 나왔다. 비나쉬팀에서 갖고 온 화려한 장신구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지위에 상관없이 감탄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늙고 쇠락한 장님 취급을 하더라도 비나쉬팀에는 오랜 전통과 권위가 있었고, 제국의 귀족들은 그걸 선망했다. 비나쉬팀의 물건은 괜찮은 선물이었다.
"자르펜 가문의 카치아 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안 그래도 구해주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감사할 뿐입니다. 카치아가 기뻐할 겁니다."
"..."
울리케의 말에 요한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저 구석에 앉아 있던 스테판은 새하얗게 얼굴이 질렸지만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는 얼굴색이라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뭐야. 알고 있었나?'
담담한 울리케의 반응에 요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해보니 소식이 아예 안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몇몇인데 요한이 자르펜 가문의 카치아를 구했다는 사실 정도는 귀에 들어왔으리라.
"긴장할 것 없네. 태도를 보아하니 모르는 게 분명해."
"워낙 얼굴을 읽기 힘든 사람이라 안심하기가 힘듭니다."
"걱정 말게. 자존심 있는 귀족인 이상 그런 오해를 했다면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수에틀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울리케가 아무리 필요해서 요한을 초대했다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감정을 보였으리라.
"그러니 태연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게나."
"수에틀그 님께서 저 같은 상황이 되어보시고 그런 말을 하시죠."
"하하. 나는 이런 염문 사이에 끼기에는 너무 늙었네."
수에틀그는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요한 같은 기사가 이런 상황에 처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울리케는 계속해서 이젤리아에게 말을 걸고 칭찬을 던졌다.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요한 본인을 설득해서 호감을 사는 것보다는 요한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설득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요한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안 하는 짓을 하는 울리케의 행동이 기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울리케 공이 이젤리아를 유혹하려는 거 아닙니까?"
"어... 그럴 거 같지는 않네만."
수에틀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가능성이 낮았다. 일단 요한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젤리아가 그렇게 고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자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저러는 거겠지."
"울리케 공이 하기에는 너무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귀족으로 살면 안 어울리는 짓도 해야 하는 법 아닌가. 자네가 저번에 만났을 때의 울리케 공과 지금의 울리케 공은 상황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지. 호의를 베푸니 그냥 즐기면서 받게나. 왜. 별로인가?"
"솔직히 울리케 공이 저러니 좀 소름끼칩니다."
"..."
수에틀그는 울리케를 동정했다. 나름 친절을 베푼 것 같은데 저런 취급을 받다니.
원래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으로 필요에 따라 호의를 베풀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했다. 요한이야 저번에는 기사로서 울리케를 만나서 이럴 일이 없었지만, 대등한 영주가 된 이상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젤리아한테 울리케를 대할 때 조심하라고 경고해놓을까요?"
"질투심 많은 배우자처럼 행동하지 말게나. 겉으로 보기 별로 좋지 않을 테니."
귀족들의 품위란 건 여러 관습으로 결정되는 법. 배우자가 바람을 핀다고 속박하는 건 품위 없는 짓이었다. 올바른 행동은 자기 자신도 다른 애인을 만들어서 뒹구는 것이었다.
"...그딴 관습 이야기 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만..."
"울리케 님! 언데드들이 숲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
연회 도중에 들려온 소식에 울리케는 눈썹을 찌푸렸다. 기껏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에 훼방이 들어온 것이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백작 각하."
"마물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 좋고 나쁜 때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전혀 죄송할 일 없습니다."
요한은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여기서 계속 먹어봤자 별로 소화도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테판은 아직도 빵 한 점 먹지 않고 있었고...
"여기서 싸울 생각인가?"
"아니. 남의 진영에 남의 자리지. 멋대로 나서면 여기 기사들에게도 모욕이 될 거다."
"그런가."
이젤리아는 시무룩해졌다. 새로 얻은 장비들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울리케 공은 생각보다 친절해보였으니 부탁하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요한이 저렇게 말하는데 나설 수는 없었다. 기사라면 주군의 명령에 충성하는 미덕을 지켜야 했다.
"언데드들이 그렇게 우글거렸으니 슬슬 터져 나올 때가 되긴 했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불행히도 언데드들은 요한의 진영이나 엘프 왕의 진영이 아닌, 울리케의 진영을 향해 오고 있었다.
"숫자는 어느 정도지?"
"수십 정도입니다."
"별 일 아니로군. 울리케 공의 기사들 실력을 볼 수 있겠는데."
기껏해야 구울 수십 마리로는 진영에 흠집도 낼 수 없었다. 숲에 있던 언데드들 중 일부만 기어 나온 모양이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귀하신 분들은 안쪽으로 모셔라! 쇠뇌 들고 와!"
"진영 가까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해!"
진영 바깥쪽에서 울리케 밑의 기사들이 뛰쳐나와 병사들을 닦달하며 전투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병사들은 눈치 없는 언데드들을 욕하며 무기를 준비했다.
"쏴!"
볼트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구울의 썩은 육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더 무거운 공성 병기를 쓸 필요도 없이 구울 열댓 마리가 쓰러졌다.
-카르르르릉!
"?"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요한은 카라마프의 울음소리에 의아해했다. 카라마프가 미친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이거..."
"...이상하군."
오랫동안 카라마프를 봐왔던 수에틀그였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수에틀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바로 일어나서 기사들에게 외쳤다.
"구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조심해라!"
"예? 백작님. 구울 무리입니다."
"비켜봐라."
요한은 기사를 밀치고 초소 위로 올라갔다. 이교의 축복으로 인해 강화된 시력이 멀리서 다가오는 구울 사이에 숨은 자를 보여줬다.
그건 한 번 본 적 있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푸르게 번쩍이는 안광에, 겨울의 추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추위를 뿌리고 다니는 기사.
죽음의 기사였다.
'대낮에?!'
"죽음의 기사다! 구울 사이에 죽음의 기사가 있다. 성수와 은을 갖고 와라!"
"예!!"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백작이 내린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일단 움직였다. 요한의 목소리에는 반문을 허용치 않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죽음의 기사가 왜 대낮에 돌아다닙니까?"
"태양의 힘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
"규칙이라고는 지키지 않는 마물 놈들 같으니..."
요한은 불합리한 불평을 하며 검을 뽑았다. 적은색(赤銀色)의 검신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거인살해자보다는 브르뒤헤 공작이 내린 황혼이 언데드를 상대할 때 유리할 것이다.
"둘은 안쪽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저도 들어가 있어도 되나요?"
"들어가라고 했잖나."
눈치 없이 한 번 더 물었다가 날 선 구박만 들은 쟈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요한은 생각에 잠겼다.
'햇빛을 무시하고 나올 정도면 저번에 만난 놈보다 더 강할 가능성이 높다.'
"저번처럼 원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생각하지 말게. 그건 정말 운이 좋았던 거니까."
"???"
쟈니나는 둘의 대화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이 인간들 설마 죽음의 기사도 쓰러뜨린 적이 있나?
"원래 죽음의 기사가 가진 원한을 풀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그 원한이 불합리할 때가 대부분이고. 보통은 퇴치하는 식으로 가야 하네."
"예를 들어?"
"저 숲을 싹 쓸어버려서 죽음의 기운을 없애버린다면 훨씬 약해지겠지."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군요."
언데드 역병이 무서운 점이 이런 거였다. 구울 떼들만 돌아다니다가도, 구울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기운에 더욱 강한 마물이 깨어나곤 하는 것이다.
"게르돌프. 수에틀그 님을 모셔라. 만약 위험할 경우 바로 빠져나가도 좋다."
"예."
"울리케 밑의 기사들이 저지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하면서도 요한은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사실로 나타났다.
* * *
구울들은 일제히 쓸려나갔지만 죽음의 기사는 묵묵히 전진했다. 놈이 든 방패는 썩어 빠진 나무방패였지만 부스러지지도 않고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했다.
"진영 문을 잠그고 놈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은화살을 갖고 와!"
용병들은 기름과 성수를 준비하며 죽음의 기사를 요격하려고 했다.
그 순간 죽음의 기사가 안개 흩어지듯 사라졌다.
"...?"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영 안쪽에 죽음의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 있는 마법사들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놀라운 재주였다. 죽음의 기사는 소름끼치는 함성으로 하인과 노예들을 비켜나게 만들었다. 놈은 하찮은 자들의 생명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았다.
-■?
죽음의 기사가 달려오기 시작하자 울리케는 검을 뽑았다. 그리 잘 쓰지는 않지만 귀족으로서 제대로 훈련을 받은 그녀였다. 추하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와라!"
그 말과 함께 죽음의 기사는 옆으로 날아갔다. 마치 말에 치인 것처럼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
* * *
요한은 거인살해자를 들고 죽음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저 멀리 날아가 처박힌 놈에게서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르르릉!
"카라마프. 너하고는 상성이 안 좋다. 물러서 있어라."
전력을 다해 후려친 덕분에 죽음의 기사가 탁자와 집기들을 부수고 저 멀리 날아갔지만, 이 일격 하나로 죽을 거라고는 요한도 생각하지 않았다.
원하는 건 놈을 물러나게 만드는 거였다.
몬스터라고 무조건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지는 않았다. 놈도 힘이 빠지고 지치면 저 숲 안으로 물러나리라.
"...고마워."
"경이 아니라 백작입니다. 공."
요한의 말에 울리케는 얼굴을 붉혔다. 정신이 없어서 예전에 대하던 말버릇이 나온 것이다.
"실언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니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편하게 말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먼저 편하게 하신다면 저 또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걸 원한다면야."
요한이 바로 격식 없이 말을 놓자 울리케는 당황했다. 기사였을 때의 기억 때문에 요한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 할 줄 알았나?"
"..."
"불편하면 다시 격식을 차려서..."
"아니. 아니야. 어찌되었든 다시 한 번, 감ㅅ..."
제대로 진지하게 말을 하려는 찰나 죽음의 기사보다 더 시끄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엘프 왕이 이끄는 기사들이었다.
"도와주러 왔소! 백작!"
"저 새끼가 진짜..."
"...?"
요한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울리케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 * *
"덤벼봐라, 추악한 마물아!"
앙골도라프는 죽음의 기사를 몰아붙였다. 들고 있는 검에 담긴 마법의 힘이 죽음의 기사에게 상처를 입혔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죽음의 기사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엘프 왕의 공격은 격렬하고 사나웠고, 죽음의 기세는 연신 수세에 몰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 번 상대해 본 적 있는 요한은 알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와 벌이는 대결은 정당한 기사로서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는 몇 번을 패배해도 굴복하지 않지만 이쪽은 한 번 패배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
계속 두들겨 맞던 죽음의 기사의 안광이 번쩍이더니 사악한 기술을 보여주었다. 놈이 앞으로 기묘하게 걸음을 밟더니 엘프 왕의 검을 가슴팍으로 받아내고 검을 후려갈긴 것이다.
이미 죽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특한 검술이었다.
"!"
검격이 엘프 왕 위로 작렬했지만 엘프 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엘프 기사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싸움을 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엘프 왕이 받아야 할 부상을 나눠 가진 것이다.
'무슨 저런...!'
요한은 감탄했다. 수에틀그가 비술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이다.
죽음의 기사도 엘프 왕의 비밀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놈은 뒤로 물러서더니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놈! 어딜 도망치는 거냐! 돌아와라!"
엘프 왕이 애타게 불러도 죽음의 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놈은 숲이 아니라 펠헤임 성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 230 언데드 역병 (4) > 끝
< 231 언데드 역병 (5) >
"놈이 펠헤임 성으로 가고 있다!"
요한이 말을 잡아타고 달려가면서 외치자, 엘프 왕도 지지 않고 말 위에 올라타서 외쳤다.
"놈이 펠헤임 성으로 향하고 있다. 쫓아라!"
"아클라다, 유클리아, 먼저 달려가서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아?"
엘프 왕은 요한의 말에 당황해서 요한을 쳐다보았다. 정말 생각치도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아니오."
'저 백작은 다 좋은데 사제들한테 너무 물들었군.'
엘프 왕이었다면 굳이 성 앞에 있는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딱히 그들에게 원한이 있거나 적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무엇보다 기사들을 그런 일에 써서 힘을 낭비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건 기사가 아니라 수도사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기사로서 상대를 인정했다면, 상대의 어리석은 행동도 존중해야 하는 법. 엘프 왕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 * *
"썩 꺼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으아아아아악!"
죽음의 기사는 이야기에 나올 공포였지만 켄타우로스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저 동부에서나 나올 법한 유목 전사들이 여기 나타나자 행상인들은 깜짝 놀라서 달아났다.
"성문에서 꺼져라! 언데드가 온다!"
"꺼지지 않는 놈에게는 채찍질을 해주마!"
성벽 위에 있던 경비병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지만 감히 나서지 못하고 고개를 낮췄다. 켄타우로스의 화살에 맞을까 두려워서였다.
"어헉!"
도망치다 넘어진 행상인은 벌벌 떨었다. 발이 묶였으니 이제 저 무시무시한 반인반마 놈들이 그를 도륙내리라.
탓!
행상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 뒷목을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그건 켄타우로스였다.
"꺼지라고 했지 고개 땅에 박으라고 했나? 다리라도 부러졌나?!"
"예? 예?"
"뛰라고! 이 정신 놓고 다니는 머저리 놈아! 뛰라고!"
"예... 예!"
켄타우로스들은 말과 양을 몰던 것처럼 사람들도 능숙하게 몰아 공간을 만들었다.
옆으로 흩어진 사람들과 성벽 위의 경비병들은 켄타우로스들이 왜 갑자기 어설픈 공격을 시도했는지 곧 깨닫게 되었다.
시퍼런 한기를 내뿜으며 죽음의 기사가 도개교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너무 조용히, 너무 말없이 다가와서 처음에 사람들은 죽음의 기사가 여행자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죽음의 기사가 순리를 거부한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쏴, 쏴라!!"
켄타우로스들이 날뛸 때는 괜히 자극할까봐 공격을 하지 않고 있던 경비병들이었지만, 죽음의 기사가 다가오자 명령도 듣지 않고 쇠뇌를 꺼내들었다.
"소용없다. 앞에 불을 질러라!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멀리서 달려오던 엘프 왕이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볼트를 발사했다.
죽음의 기사는 뒤로 몇 번 흔들리더니 이내 균형을 되찾고 도개교 위를 뛰어서 성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혼자서 닫힌 성문으로 돌격하는 어처구니없는 만용에도 불구하고 경비병들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놈이 성문을 어떻게 돌파할 것 같소?"
"놈은 한 번 유령으로 변해서 요새의 문을 통과했소. 두 번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
요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죽음의 기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성벽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엘프 왕은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놈이 유령으로 변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들었겠소."
'매우 긍정적인데.'
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걸 보고서 아무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자! 이런 상황이니 성주도 감히 우리의 도움을 거절하진 못할 거다!"
앙골도라프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평소에 군대를 이끌고 멋대로 성문을 침입했다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겠지만, 몬스터가 난동을 피울 때는 예외였다.
용맹무쌍한 백작과 명예로운 왕이 직접 죽음의 기사를 처리한다면, 그리고 그 와중에 기사들이 내성 앞까지 도착해 있다면, 어떤 귀족이 감히 무례를 저지르겠는가?
"성문을 열어라!"
"펠헤임 성의 병사들아! 죽음의 기사를 처치하기 위해 누가 왔는지 보란 말이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요한은 뒤늦게 경비병들이 도망쳤다는 걸 깨달았다. 최소한 성문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성문은 도르래로 올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격자 형태였다. 저런 형태라면 이미 예전에도 한 번 열어 본 적이 있었다.
"운이 좋게 됐소."
"...뭔 소리를 하는 것이오 백작!? 병사들이 다 도망간 것 같은데?!"
담대하던 엘프 왕도 요한의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당황은 머지않아 황당과 경악으로 바뀌었다.
드드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쇠로 된 문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요한의 병사들은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 들어가 도르래를 당기고 고정시켰다. 한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됐습니다, 백작님! 고생하셨습니다!"
"들어오시오!"
"어... 어. 어. 고맙소."
엘프 왕은 홀린 표정으로 말을 몰아 도개교 위를 달렸다. 그는 몰랐지만 뒤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우거를 어떻게 잡았나 했더니 저 정도라면 잡을 만 하겠구나!
* * *
펠헤임의 외성 성벽 안은 혼란 그 자체였다.
성벽 안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났고, 경비병들은 필사적으로 동료를 부르며 진형을 만들려고 했다.
"기사님은 언제 오는 거냐!"
"입 닥치고 창 들어!"
내성 안에서 성주의 기사들이 오기 전까지는 병사들이 버텨야 했다.
죽음의 기사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길을 막고 있으니 치워야 하긴 하는데, 마치 누구부터 죽여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비켜라, 하찮은 것들아!"
그리고 엘프 왕이 기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병사들은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
성 밖에 있을 때는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서 두려웠는데,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되니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도 없었다.
"같이 싸웁시다, 백작!"
엘프 왕의 간절한 외침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앙골도라프는 검을 겨누며 죽음의 기사에게 외쳤다.
"이 비겁자 놈아! 네놈은 기사의 자격이 없는 놈이다. 치졸하게 대결을 피하고 도망을 치다니!"
-■■■■ ■ ■■■?
"어디 한 번 이번에도 도망쳐봐라!"
엘프 왕의 검격이 다시 한 번 죽음의 기사 위로 작렬했다. 동시에 요한의 적은색 검 또한 미끄러지듯이 기사의 목덜미를 노렸다.
두 젊은 전사의 맹공은 살벌하고 강력해, 죽음의 기사는 겨우겨우 피하고 막아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몇십번의 합이 지나가는 동안 죽음의 기사는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기사들끼리의 대결이었다면 이쪽의 압승이었지만 이건 언데드와의 싸움.
상대는 아무리 몰리고 다쳐도 되지만, 이쪽은 한 번의 실수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 왕은 제대로 신이 난 것 같았다. 믿을 수 있는 기사에게 등을 맡기고 적과 맞서는 지금 상황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한 흥분 때문에 앙골도라프는 만용을 부렸다. 죽음의 기사와 가까이 붙은 다음 번개처럼 은 단검을 뽑아들어 갑주 사이를 찌른 것이다.
-■■!!!
확실히 갑주 안을 파고든 은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오히려 죽음의 기사를 자극했다.
죽음의 기사가 포효하며 검을 바닥에 내려찍자 그 사이한 기운이 퍼지면서 서늘함으로 변했다. 그 서늘함은 순식간에 추위로 바뀌어 주변을 휩쓸었다.
"!!"
엘프 왕은 경악했다. 뒤따르던 기사들의 얼굴에 고통 섞인 빛이 떠올랐다. 죽음의 기사가 뿌린 사특한 기운을 나눠 받은 탓이었다.
날에 맞지 않는 혹독한 추위에 자리에 있던 기사들의 발걸음이 느려졌지만, 요한은 이를 악물고 가까이 접근했다.
심장에서 뜨거운 기운이 타고 나와 겉을 휘감는 냉기를 물리쳤다. 테슈카가 들고 있는 검을 내려놓으라고 외쳤다. 요한은 얼어붙은 검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추위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앙골도라프는 발이 묶인 채 요한을 응시했다. 젊은 백작이 이 냉기 속에서 움직인 건 경탄스러운 일이었지만, 검을 두고 어떻게 저 자를 쓰러뜨릴지 짐작가지 않았던 것이다.
콱!
요한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두 손으로 죽음의 기사를 붙잡고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기사도 어지간히 어이가 없었는지 안광이 파르르 떨렸다.
파고들려는 죽음의 기운을 테슈카가 찢어발기며 물리쳤다. 요한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사나워지며 죽음의 기사의 숨통을 졸랐다.
자리에 있는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요한은 분명히 들었다. 상대의 목뼈가 우드득하고 부러지는 소리였다.
콰득!
그 소리와 함께 죽음의 기사가 뿜어내던 안광이 사라지고 추위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남은 건 낡고 박살난 갑옷과 죽음의 기사가 날뛰고 가며 남기고 간 흔적뿐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엘프 왕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엘프의 모습에 요한은 주먹을 쥐었다 펴다 말고 기겁을 했다.
'미쳤나?'
설마 죽음의 기사를 요한이 끝냈다고 저렇게 우는 건 아니라 믿고 싶었다. 다행히도 아니었다. 저건 감동의 눈물이었다.
"정말... 정말 대단한 싸움이었소. 백작."
"...폐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잡을 수 없었소."
"그게 정말이오?"
엘프 왕은 요한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보통의 칭찬이라면 이렇게 기뻐하지 않겠지만, 직접 같이 싸운 백작의 말이라면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내 고향에는 아름다운 숲이 하나 있소. 백작."
검을 집어넣으며 앙골도라프는 입을 열었다. 요한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의아해했다.
"그 숲에는 아주 오래 된 괴물이 하나 있지. 나는 그 괴물을 잡으려고 했었지만, 혼자 멋대로 잡지는 않겠소. 백작이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아니..."
갑자기 생각도 없는 괴물 사냥에 끌어들이는 엘프 왕의 초대에 요한은 황당해했다.
엘프 왕은 숨겨 놓은 보물을 권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요한은 별로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겠소."
"그래. 내 수락할 줄 알았소! 백작은 저 애브너 가문의 모략꾼과는 다르지!"
'귀가 망가졌나?'
* * *
앙골도라프와 울리케는 서로를 경멸했지만, 이번 상황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기왕 외성 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렇게 된 거 성주를 압박해서 끌어내자.
남의 영지에 들어가서 이러는 게 무례한 일이긴 했지만, 죽음의 기사 정도 되는 마물을 남의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잡아줬으니 충분히 할 만한 주장이긴 했다.
들어온 기사들은 내성 성문 앞에 자리 잡고 주변을 통제했다. 남아 있던 병사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얌전히 따랐다. 죽음의 기사한테 기껏 건진 목숨을 엘프 기사한테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 크게 외치도록."
"예."
목청 좋은 병사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명예로운 기사들이 사악한 언데드와 싸웠는데 성주는 끝까지 얼굴을 내밀지 않을 생각이오?!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이대로 돌아가면 이 성의 명예를 조롱하겠소!"
성주 들으라고 외치는 게 아니었다. 성 안의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외침이었다.
영주로서 체면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느 누구도 겁쟁이에 약속을 어기는 영주를 신뢰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들어와서 죽음의 기사를 쓰러뜨려줬는데 계속 나오지 않는다면 성 안 사람들도 영주를 불신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효과가 있었다. 성 안에서 시종이 나온 것이다. 시종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주님께서는 손님들을 맞이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진작에 그랬어야지!"
엘프 왕은 사납게 외쳤다. 죽음의 기사와 벌인 일전 때문에 피가 뜨거워져 있던 것이다. 울리케도 앙골도라프의 말을 막진 않았다. 그녀도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가당찮은 조건은 낼 생각도 하지 마라. 무장을 해제하라고 한다면 네 목을 죽음의 기사 부러뜨리듯 부러뜨려버리겠다."
"...?"
엘프 왕의 말에 울리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저게?
"아, 아닙니다. 당연히 무장한 채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다만... 예이츠 백작님을 먼저 접견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
< 231 언데드 역병 (5) > 끝
< 232 언데드 역병 (6) >
뜻밖의 말에 젊은 왕은 척수반사적으로 내뱉었다.
"함정이다!"
그리고 다시 말을 바꿨다.
"아니, 함정이면 울리케 공 같은 사람을 불렀겠지. 굳이 백작을 부르진 않았겠군."
"...무슨 뜻이십니까?"
"아... 그게... 음..."
앙골도라프는 훌륭한 검술과 지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었지만, 말재간은 그닥 훌륭하지 않았다.
울리케도 그걸 잘 알았기에 굳이 캐묻진 않았다. 엘프 왕을 경멸하긴 했지만 서로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확실히 함정 같지는 않은데. 무장한 채 들어와도 된다고 할 정도면."
요한은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장한 기사들을 들어오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하는 함정은 없었으니까.
그보다는 요한에게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가능성이 컸다. 요한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앞서서 협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냥 무시합시다. 괜히 백작을 보낼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엘프 왕은 울리케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울리케가 들어가면 모를까 요한이 들어가는 건 반대였다.
"확실히..."
놀랍게도 울리케도 생각이 비슷했다. 엘프 왕이 들어가면 모를까 요한이 들어가는 건 좀...
"됐소. 성주의 명예를 존중합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절한다면 성주도 더 이상 길이 없을 것이오."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는 쥐ㅅ..."
"쉿. 쉿."
요한은 엘프 왕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성주의 시종이 대놓고 앞에 있는데 그런 모욕을 했다가는 바로 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주가 아무리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모욕을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사람이란 게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발끈하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으니까.
"들어갔다 오겠소."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여봐라. 들어가서 다른 귀족을 접견하면 안 되겠냐고 전해봐라. 제대로 전하면 네게 상을 내리겠지만,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네놈에게 책임을..."
"됐소. 그만하시오."
요한은 말리고 호위들과 함께 내성 성문으로 향했다. 울리케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 여기 있는 다른 귀족은 나밖에 없잖아?'
이 새끼가 진짜...
* * *
정작 요한은 침착했지만 요한을 호위하는 중장병들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하인들의 조그만 동작에도 으르렁거릴 정도로.
"침착해라."
"...예. 죄송합니다."
-그릉.
오히려 카라마프가 더 침착해보였다. 카라마프가 보여주는 태도가 요한이 침착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카라마프는 요한보다 더 날카로운 본능을 보여줄 때가 많았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펠헤임의 성주는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한의 가슴팍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의 신장을 갖고 있는 성주는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어찌나 무너져있는지 옆에 있는 시종이 헛기침을 하며 성주를 도와줄 정도였다.
"...성주. 인사부터 합시다. 예이츠의 요한이오. 몸이 불편하면 자리에 앉아도 좋소."
요한은 일단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상대에게서 원하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정신상태부터 회복시켜줘야 할 것 같았다.
"백, 백작 각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존대할 것 없소. 여기는 성주의 땅이고 나는 성주의 권리를 존중하오."
"고... 고맙소."
요한의 말에는 따뜻한 힘이 담겨 있었고, 그 말이 한 번씩 고막을 두드릴 때마다 성주는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어지럽던 시야도 돌아오고 메슥거리던 속도 사라지자, 성주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백작 각하... 제가 감히 백작 각하를 먼저 접견하자고 한 이유를 짐작하고 계시오?"
"모르겠소."
"저 밖의 두 분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
요한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성주는 진지했다.
요한이야 울리케의 성질머리는 알아도 그녀를 그렇게 진지하게 두려워 한 적은 없었다.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데다가 그 뒤로부터는 워낙 먼 곳에 자리 잡아서 소식 듣기도 힘들었으니까.
그에 비해 중부 귀족들에게 애브너 가문은 야심가의 가문이라는 인식이 확고했다.
그 애브너 가문의 후계자가 군대를 이끌고 영지를 돌아다니는 이상, 그걸 완전히 순수하게 믿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성주. 울리케 공은 언데드 토벌을 하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았소?"
"백작 각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새어나가지는 않겠지요...?"
"명예에 맹세코 침묵을 지키겠소. 말해보시오."
"솔직히 말해서, 애브너 가문의 후계자가 하는 맹세는 믿을 수 없었소."
"..."
울리케가 들었다면 검을 뽑았을 소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주가 좀 특별히 겁이 많긴 했지만, 다른 귀족들도 여럿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오?"
"그렇소."
나와서 맞이하는 것도, 들어가서 접견을 요청하는 것도 거절한 데에는 두려움이 컸다. 애브너 가문의 후계자가 무슨 계략을 꾸밀지 몰랐던 것이다.
"최소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괜찮았을 텐데."
성주가 나오지 않더라도 금화 정도는 지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건 각하께서 애브너 가문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걸 빌미로 무슨 계략을 꾸밀지 모르오."
"허..."
요한은 울리케가 좀 안쓰러워졌다. 물론 가문의 업보긴 했지만, 정말 아무 의도 없이 친목을 다지려고 하는 일에 저런 의심을 받다니.
하긴 사슴을 몇 마리나 물어 죽인 여우가 다른 사슴에게 찾아와서 굴의 다른 적들을 치워주겠다고 말하면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으리라.
아예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틀어박힌 건 좀 심하긴 했지만...
"그런데 그게 나와 먼저 접견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오?"
"그야 백작 각하라면 믿을 수 있으니...?"
"...어, 고맙소."
요한은 당황했지만 성주는 진심이었다.
호전적이고 사나운 엘프 왕이나, 악명 높은 애브너 가문의 후계자에 비교하면 요한은 성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백작 각하께서 내 권리를 약속해준다면 마땅히 내성의 성문을 열고 다른 분들도 대접하겠소. 마땅히 지불해야 할 값 또한 낼 수 있소."
"어... 뭐,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소. 도와주리다."
요한은 얼떨떨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상대가 뭘 보고 그를 이렇게 신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이렇게 믿어준다는데 '난 믿을 수 없는 놈이외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예이츠의 요한은... 애브너 가문의 울리케 공이 계략으로 이 성을 뺏고 성주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맹세코 가운데에서 중재하겠소."
"앙골도라프 폐하에 대해서도 말해주시오."
"알겠소. 알겠소. 만약 젊은 엘프 왕이 뺏으려고 한다면 그 또한 마땅히 가운데에서 중재하겠소."
"고맙소! 이제 좀 마음이 놓이오!"
성주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지만 성주가 좋다니 일단 요한은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성주. 성주께서 성물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앗. 알고 계셨소?"
"괜찮다면 빌리고 싶소만. 언데드 토벌이 끝나면 돌려주겠소."
"...빌려주는 건 괜찮지만 내 안사람이 아프오. 지금 그 성물을 다루는 사제도 건강이 편찮아서 기다리고 있소."
"흠. 그런 거라면... 내 진영에 뛰어난 마법사가 한 분 계시오. 그 분을 만나게 해봅시다."
연락을 받은 수에틀그는 의아해하며 달려왔다. 그는 성주의 안사람을 진맥한 다음 말했다.
"흐음... 최근에 유독 어지러워하거나 입맛이 없고, 성격이 괴팍해지고 신경질이 잦아졌나?"
"맞... 맞습니다!"
"안 좋은 악령이 들렸군. 다행히 내가 쫓아낼 수 있겠네."
"!"
성주는 감격한 표정으로 수에틀그의 양손을 잡고 몇 번을 흔든 다음에야 물러났다. 요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딱히 마법적 기운이 없었는데요?"
"악령은 무슨.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술과 과일만 먹으면 저렇게 되네."
수에틀그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게 아니었는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술과 식사 때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악령의 핑계를 대는 게 더 좋았다.
몸의 피를 덥혀주는 뜨거운 물을 좀 마시게 한 다음 정해진 식사를 하면 악령이 도망쳐 갈 거라고 하면, 어떤 귀족이라도 그 말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사제는 진짜 편찮은 게 맞더군. 안 그래도 나이로 약해진 몸에 감기가 제대로 들었어. 낫더라도 더 요양을 해야 할 것 같네."
"성주에게 말해서 사제를 새로 준비해야겠다고 해야겠습니다."
"성물은 빌렸나?"
"예. 덕분에 수월하게 빌리게 되었군요."
"그래서 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건가?"
요한은 성주와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에틀그는 몇 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가네."
"뭘 이해가 가십니까?"
"자네야 사이가 어느 정도 가까우니 괜찮겠지만 아닌 영주들에게 애브너 가문은 꺼림칙할 수밖에 없지. 당장 자르펜 가문과도 분쟁이 붙지 않았었나."
"됐습니다. 가서 들어와도 된다고 전해야겠습니다."
"충격 받지 않게 잘 전해주게."
수에틀그의 조언은 정곡을 찔렀다. 두 자존심 강한 귀족들은 진실 그대로 듣는 걸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 * *
"...그리하여 성주가 소문 때문에 약간의 오해를 했던 것이오. 그것에 대해 사죄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하겠다고 약속했소. 나를 먼저 부른 건 차마 두 분을 먼저 볼 면목이 없어서라고 하더군."
"그런 거였소? 참으로 유약한 사람이군. 알겠소. 들어가자!"
앙골도라프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엘프 기사들을 불렀다. 애초에 그에게 이런 곳의 성주는 별로 관심도 가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대접하지 않은 게 괘씸하긴 했지만 잘못을 뉘우친다면 넘어갈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러나 울리케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대번에 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분이 나쁠까 싶어 말을 좀 숨기긴 했지."
"뭘 숨긴 거지?"
"둘이 두려워서 성문을 열지 못했다더군. 값을 지불하는 건 물론이고."
"...?"
울리케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민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성을 뺏을까봐 두려워서...!?
"아니. 잠깐만. 그런데 백작은 믿었다고??!"
"뭐, 날 믿는다는데 거기서 믿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울리케는 기가 막혔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성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지를 갖고서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가문의 후계자.
그에 비해 여기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이 몇 번이고 몬스터를 사냥한 적 있는 명예롭고 신앙심 돈독한 기사.
'개새끼가 진짜...'
물론 이해는 간다 하더라도 속에서 욕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못 믿겠으면 말이라도 해서 서로의 거리를 좁혀나가야지 '대답을 하는 순간 계략에 휘말릴지도 모른다'하면서 틀어박혀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제대로 된 값도 받았겠다, 준비되는 대로 숲의 언데드들을 마저 토벌하지."
울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한 일과 별개로 얻은 게 있었다.
'생각보다 경계심이 강한데.'
미친듯이 날뛰는 황제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부의 귀족들이 좀 온건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중부 영주들에게는 그놈이 그놈처럼 보일 가능성이 컸다.
뒷일을 생각해보면 이들을 미리 달래놔야 했다.
힘으로 억누를 수 없는 상황이니 남은 건 회유. 울리케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가진 경계심이 상당하니 쉽게 넘어오진 않겠지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 * *
...그런 울리케의 결심이 허무하게도, 성주는 매우 사교적이고 친근한 태도였다.
"그 때 예이츠 백작이... 듣고 있나? 듣고 있나?"
"듣고 있습니다. 폐하."
"그래.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놈의 목을 부러뜨렸지."
"신이시여! 세상에 그런 일이!"
요한을 사이에 두고 엘프 왕과 성주가 앉았다. 젊은 왕이 한 잔 꺾으면서 떠들면 성주가 감칠맛나게 받아줬다. 그러면 왕은 또 신이 나서 한 잔 더 들이켰다. 원액에 가까운 독한 포도주를 물에 타지도 않고 들이키는 게 엘프식 풍습이었다.
요한은 지겹고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있었지만 둘은 좋다고 계속 요한을 붙잡고 떠들어댔다. 아주 머리끝까지 제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무슨 치정극이냐?'
울리케는 혐오스러워서 시선을 돌렸다. 주는 거 없이 미운 두 놈이 요한에게 달라붙은 걸 보니 자연스레 질색하게 됐다.
< 232 언데드 역병 (6) > 끝
< 233 언데드 역병 (7) >
하지만 울리케가 속으로 욕한다고 해서 엘프 왕이 안 달라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욕했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의 심장을 모르는 모략꾼답게 질투한다고 신나면 신나했지...
그걸 울리케도 알고 있었기에, 울리케는 조용히 시선만 돌렸다.
'진짜 꼴보기 싫다!'
엘프들은 연회를 흥겹고 질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들은 술을 좋아했고 술을 거칠게 마시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벌써 몇몇 엘프 기사들은 취해서 술잔을 집어 던지고 술통째로 술을 마시고 하인들의 손에 들린 쟁반을 뺏어 게걸스럽게 먹어 삼켰다.
좋게 말하면 대접해주는 사람 기분 좋게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앞뒤 못 가리고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제국 기사들도 술을 싫어하진 않지만 엘프 기사들처럼 미친듯이 흔들어재끼지는 않는 것이다.
"진짜 미친 것처럼 먹고 마시는군요."
"제 밑의 기사들이 적게 먹는 자들이 아닌데 소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울리케 밑의 기사들이 질린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성주가 가진 불안을 풀어주고 서로 간의 사이를 좁힌 게 컸다. 이런 연회 한 번 하고 나면 어색하던 사이가 좁혀지고 의심이 풀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기사들이 가진 불만도 이런 연회가 끝나면 같이 사라졌다.
기사들이란 한없이 단순한 족속들인지라(울리케가 보기에는), 그 전날까지 으르렁거리다가도 연회에서 뜻이 맞으면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저 꼴보기 싫은 작자들도 넘어가줄 수 있었다.
* * *
"...술병이 났다고?"
울리케는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엘프 시종은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성주가 술에 뭘 탄 건 아니겠지?"
"이미 확인해봤는데 아니었습니다."
'그걸 또 확인해봤나.'
울리케만큼이나 엘프 왕도 성주를 잘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병이 났을 때 바로 성주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언데드와 그렇게 싸웠는데 몸을 챙기지도 않고 술을 마셔댔으니 몸살이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술 많이 처먹어서 쓰러진 놈들을 그렇게 멋들어지게 말해주는 것도 재주야."
그렇게 말했지만 울리케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일단 엘프 왕이 그녀의 밑도 아닌데다가, 무엇보다 실제로 언데드와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던 것이다.
"흠... 그러면 이대로 출발하겠나?"
요한의 말에 울리케는 반색했다.
그렇게 한다면 확실히 좋았다. 며칠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이고, 꼴 보기 싫은 엘프 기사들과 같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죽음의 기사라는 언데드가 처리된 이상 숲에 남은 언데드들은 별 거 아닌 놈들이었다.
"...아니. 그래도 엘프 왕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내버려두고 가면 원한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명예에 관해서 사소한 일은 없었다. 점령한 성벽 위에 누구의 깃발을 먼저 꽂느냐, 성문을 누가 먼저 지나느냐, 토벌에 누굴 두고 가느냐 같은 것들은 충분히 원한을 품고도 남는 일이었다.
"내가 물어보니까 괜찮다던데? 가도 된다고 하더군."
"...그러면 괜찮겠네."
울리케는 할 말을 잃고 수긍했다. 그 앙골도라프가 저리도 쉽게 보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 * *
꼭 엘프 왕이 참가하지 않더라도 토벌대의 전력은 충분했다. 은과 성수를 챙기고, 종군하는 사제와 함께 기도를 올린 다음 토벌대는 숲으로 출발했다.
"수도회에서 보내기로 한 전력이 아직 오지 않아서 아쉽군."
"용케도 빌렸는데..."
구석진 곳에서 청빈과 정결로 무장하고서 기도에 몰두하는 수도자들은 귀족의 요청도 먹히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저렇게 군말 하나 없이 성기사들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도착하지 않아서 아쉽긴 했지만, 요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이 근처의 숲을 토벌하는 데에는 필요 없을 테니까.
뒤에는 성주에게서 받은 성물이 있었고, 대(對) 언데드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이 있었다. 너무 과할 정도였다.
"블루아 가문 출신의 이젤리아 공은 어디 계시지?"
"아. 이젤리아도 좀 쉬고 있지."
"음? 그렇게 많이 마셨었나?"
"뭐 이래저래..."
요한은 말끝을 흐렸다. 연회 자리에서는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았지만, 돌아가고 나서 단둘이 있을 때 꽤나 들이킨 것이다.
취한 이젤리아가 달라붙는 게 재밌어서 술을 더 권한 것도 있었기에 요한은 살짝 미안했다.
어차피 전력도 충분한데 이젤리아까지 와서 도와달라고 할 필요는 없는 상황. 요한은 쟈니나나 수에틀그 같은 마법사들은 진영에 남겼다. 굳이 그들까지 험한 숲에서 고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금슬이 좋네. 이젤리아 공이 미인이긴 하지."
"고맙군."
요한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울리케가 진심으로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든, 칭찬은 감사한 법.
"엘프 왕보다야 못하지만, 원래 가장 중요한 건 내면에 있는 법이지."
엘프들에게 중요한 건 균형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간 정도 되는 키에, 너무 마르지도 너무 살찌지도 않고,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는 앙골도라프는 완벽한 엘프식 미인이었다.
물론 요한 입장에서는 키 좀 크고 살집 좀 있다고 가차 없이 자르는 기준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참. 카치아 공도 미인이더군."
안사람 칭찬을 들었으면 이쪽도 관습적으로 해줘야 하는 법. 요한은 울리케의 배우자 칭찬을 해줬다. 울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인이긴 하지. ...잠깐. 갑자기 칭찬을 하는 거 보니 좀 이상한데. 혹시 정말로 잔 거야?"
-크릉.
카라마프가 컹컹 짖었다. 요한의 감정 변화를 읽은 탓이었다. 요한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말했다.
"난 카치아 공과 잔 적이 없다."
"그래? 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백작은 배우자와 자고서 얼굴을 당당히 들이밀 사람은 아니긴 해."
요한은 울리케가 소문에 관한 보고를 뒤늦게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이 주변에서 머무른 지가 며칠인데 소식이 아직까지 안 왔으면 그건 그거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울리케의 표정에는 분노가 보이지 않았지만, 요한은 안심하지 않았다. 울리케는 얼마든지 속으로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오해한 모양이네. 떠본 거 아니니까 정말 편하게 대답해도 돼. 떠보려면 뭐하러 이렇게 물어봤겠어? 백작이 카치아하고 잤어도 딱히 화를 낼 생각은 없어."
요한이 울리케 밑에서 종군하는 기사도 아니고, 저 먼 곳에서 연합군을 이끌고 올라온 백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낼 정도로 울리케는 멍청하지 않았다.
"카치아 공과 사이가 안 좋은가?"
"아니... 나쁘지 않은 사람이지. 좀 멍청하긴 하지만, 얼굴은 예쁘장하고 살결은 부드러워.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더 못생겼을 수도 있었으니까. 왜 물어보지?"
"잤어도 화를 안 낸다는 말이 좀 놀라워서."
"아. 물론 대놓고 붙어먹었으면 화를 냈겠지. 그건 가문의 명예와 체면 문제니까. 하지만 들어보니까 백작은 선을 잘 지킨 모양이던데. 그러면 그건 둘의 자유 아니겠어?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동방의 술탄 이야기인데, 크게 공을 세운 기사에게 자기의 첩을 내려줬다더라.
비슷하지 않겠어? 백작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카치아가 아니라 카치아 어머니하고 잤어도 난 신경 쓰지 않을걸."
"술탄 이야기는 내가 직접 들었는데 그건 헛소문이라더군."
"...그랬어? 참 많이도 돌아다녔네."
비나쉬팀까지 갔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렇게 들으니 새삼 신기했다.
"내가 카치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줘. 정말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 다만 카치아는 아름답고 욕구가 왕성한 사람이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많으니까. 서로 존중하는 거지."
"공도 꽤나 아름답고 욕구가 왕성한 사람이니, 둘은 잘 어울리는데."
"...어울리지 않는 농담은 하지 말라고."
멈칫하던 울리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한의 입에서 저런 능글맞은 소리가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난 이젤리아만으로 충분하니 카치아는 공께서 만족시키는 게 낫겠군."
"그 정도야? 그렇게 밤일을 잘 해?"
울리케는 순수한 놀라움으로 물었다. 아무리 봐도 요부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것이다.
"...그건 밝히지 않는 게 낫겠군."
"아. 왜?"
"내 배우자의 명예니까."
"다 들어놓고 이러기야?"
"난 카치아 공이 밤에 얼마나 뜨거운지 물어본 적 없다."
-크릉.
"?"
말하던 도중 요한은 멈칫했다. 카라마프가 이상하다는 듯이 짖었던 것이다.
"뭔...?"
요한은 경악했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보통 일행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 자리 잡는 곳은 가운데였다. 선발대와 척후가 앞으로 가서 위험을 확인하고, 혹시 모를 뒤에서의 습격을 방어하고.
울리케와 요한이 위치한 곳도 당연히 그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둘과 카라마프만 딱 떨어져 있고 일행이 싹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울리케는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몬스터?"
"...아닌 것 같은데."
요한은 몬스터가 이런 짓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일단 카라마프와 요한 모두의 본능을 속여야 했다. 게다가 요한이 타고 있는 카르디리안도 만만찮은 마물인 것이다.
"짓궂은 정령이나 악령, 아니면 숲의 현상 같군."
"이런 현상에 대해 정말 잘 아는데?"
"마법사와 같이 움직이다 보면 마법을 배우게 되는 법."
요한은 일단 말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 울리케 옆에 서서 그녀가 내리는 걸 도왔다.
여기 생명체 중 가장 겁이 많은 울리케의 말은 숲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 때문에 푸르륵거렸다.
"카르디리안. 저 말 좀 안심시켜줘라."
-푸흥.
"...이름이 꽤 짓궂은데."
"성질머리가 비슷하긴 하지."
요한은 검을 뽑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숲의 모습은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사람은 숲의 풍경과 지형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지나온 적 없는 곳인데.'
"흠... 내가 주도해서 움직여도 되겠나?"
"마땅히 따르겠어. 백작."
울리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 * *
"이런 병신머저리새끼들! 해가 질 때까지 못 찾으면 다시는 잘난 척을 못하게 해주마!"
드워프들과 용병들은 펄펄 뛰며 켄타우로스들과 두 불쌍한 동부 순찰자들을 구박했다.
평소에 그렇게 숲의 달인이라고 떠들던 놈들이 주군 하나 못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구박 받고 있는 숲의 달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하게. 지금 각하께서 안 계시는데 싸우면 어쩐단 말인가."
씩씩대던 용병들도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다. 중요한 건 백작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그들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멀쩡하게 행군하다가 두 귀족만 어디로 끌려갔는지 휙 사라진 것이다.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숲의 정령에 대해 했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성격이 고약하고 짓궂어서 들어오는 사람을 일부러 헤매게 만든다고."
"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그 숲의 정령을 꾀어내서 토막 쳐 죽이는 방법도 알려주셨나?"
"...그건 아니오."
"그럼 씨발 왜 말을 해!"
"그만하라니까! 젊은 놈들은 뒤로 꺼져 있어라!"
감정적인 대응은 그만하고, 일행은 백인대장 이상과 울리케 휘하의 기사들끼리 모여서 침착하게 회의에 들어갔다.
마법사는 없었지만 마법은 살면서 한 번도 겪기 힘든 신비였다. 나름 구전으로 내려오는 대비법들이 있었다.
"일단 야영지를 차립시다. 두 분께서 돌아올 수 있으니."
"사람을 보냈소. 전력으로 달려서 마법사님을 모시고 올 것이오."
"숲에 불을 지르는 건 어떻겠소?"
"아예 백작 각하를 태워 죽이라고 해라."
"...미, 미안하오."
울리케 밑의 기사가 사과하자 빈정거린 켄타우로스가 더 당황했다. 요한의 군영에서는 이 정도 말은 보통 받아쳐 줬던 것이다.
"아니오. 내가 말이 심했군."
"기다리는 동안 사방으로 수색을 보냅시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보고를 하시오. 정령의 낌새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예!"
* * *
-크르릉.
"길이 이리로 돌아오나?"
-크릉.
"그렇구나. 고맙다."
요한은 카라마프를 쓰다듬었다. 쭉 나아갔던 놈이 뒤에서 나타나는 걸 보니 빙빙 도는 길인 모양이었다.
< 233 언데드 역병 (7) > 끝
< 234 언데드 역병 (8) >
"뭘 알아냈어?"
"앞으로 쭉 나아가면 돌아온다는 것."
"별로 기쁜 내용은 아니네."
"아니. 덕분에 확신이 서는군. 정령이나 악령이 저지른 짓 같다."
깊은 숲은 자연스레 신비를 품고 있기 마련이었고, 가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다른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정도는 납득한다 치더라도 이렇게 앞뒤가 계속 이어지는 길은 지나치게 악의적이었다. 숲의 현상보다는 정령이나 악령이 이치에 맞았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게 좋겠지."
놀랍게도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이었다.
정령이나 악령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었고, 가만히 기다리면 자기가 먼저 움직임을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괜히 허둥거리며 헤매는 건 상대의 만족감만 채워주는 짓이었다.
요한은 뛰어난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배운 사람이었고, 숲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능했다. 며칠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었다.
"길어봤자 하루에서 이틀이야."
요한은 능숙하게 임시 야영지를 만들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암벽을 뒤로 두고, 나무를 모아 불을 붙였다. 울리케는 말 위에 모포를 올려놓았었고 덕분에 잠자리도 나쁘지 않게 완성되었다.
"방랑하던 시절에 익힌 기술이야?"
"그렇지. 공은 해본 적이 없나?"
"사냥이나 야영은 해봤지만 내 손으로 차려본 적은 없어."
방랑기사도 재산과 가문에 따라 차이가 심했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자신이 준비해야 했지만, 하인이나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 자는 그렇지 않았다.
지위 높은 울리케라면 더더욱 손수 차릴 일이 없었다.
"저런. 걱정 말라고. 내가 하루 이틀 정도는 공의 손발이 되어줄 테니."
"쓸데없는 소리를... 시킬 일이 있으면 말해. 뭐든 도와줄 수 있으니까."
"아니. 이건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카라마프를 데리고 사냥을 갖다 올 생각이거든."
"건량은 있으니 굳이 움직일 필요 없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거 없지."
말과 함께 요한은 카라마프를 데리고 훌쩍 숲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요한은 토끼 몇 마리와 사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워. 카라마프. 진정해라. 네 몫은 따로 챙겨줄 테니까."
-크릉.
요한은 개울가에서 단검을 뽑아 털을 처리하고 가죽을 벗겼다. 사슴 같은 경우는 내장과 간을 들어 카라마프에게 던졌다. 카라마프가 신이 나서 물어뜯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돌아온 요한은 울리케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 미궁 같은 길에, 이런 들짐승들이 있는 게 신기해서."
"우리가 이쪽으로 흘러 들어온 것처럼 들짐승들도 흘러왔겠지. 좀 들라고."
"소금도 갖고 있었어?"
"켄타우로스들과 같이 다니면 이런 준비를 하고 다니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하나에 다 실어 놓으면 언제든지 훌쩍 떠날 수 있으니까."
"켄타우로스처럼 까다로운 이들과 친해진 걸 보면 백작도 사교력이 참 대단한 것 같아."
울리케는 고기를 물어뜯으며 말했다. 호화롭게 조리하지 않았는데도 맛이 괜찮았다. 오늘 꽤 움직여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같이 하는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였거나.
"과찬이군."
"아니. 과찬이 아니야. 이번에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스테판도 그런 경우에 들어가긴 하겠네. 왜 스테판 쪽에 섰던 거지?"
"이미 한 번 말하지 않았나? 딱히 스테판 편에 선 게 아니라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을 뿐이라고."
요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물론 제안이야 탐이 났지만, 애브너 백작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런 제안을 받았다가 뒷감당은 어떻게 하겠나."
"백작 각하는 이미 벌어진 일 때문에 무리하게 보복할 정도로 냉정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야."
"글쎄. 냉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어느 부분에는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지. 내가 보기에 애브너 백작의 그런 부분이 바로 스테판이었고. 완벽한 사람이더라도 언제나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공에게는 없나?"
"..."
요한의 질문을 받은 울리케의 표정이 흔들렸다. 언제나 완벽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던 애브너 백작이 감정적일 수 있다는 말이 새삼 다시 놀라웠고...
그 때문에 요한의 질문도 괜히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그녀 본인에게도 그런 게 있나?
"내가 켄타우로스들이나 엘프 왕과 비교적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이런 점을 이해하고 있어서 같군. 물론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감정적이지 않나?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중요하지."
-■■■...
"...저런 언데드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지만."
요한은 무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들짐승뿐만 아니라 숲을 떠도는 언데드들도 이 주변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구울들의 모습에 둘은 무기를 겨눴다.
"이 숲에서 죽은 용병들인가 보군."
낡고 헤진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생전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요한은 앞을 쳐다 보며 짧게 함성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거인살해자를 휘둘렀다.
살아 있을 때보다 무른 살과 뼈를 갖게 된 구울들에게, 요한의 폭력은 과잉 수준이었다. 한 차례 거인살해자가 돌고 나자 주변의 구울들은 태풍에 휘말린 것처럼 찢겨 나갔다.
곧이어 다음 파도가 왔다. 수풀 사이사이에서 몰려나오는 구울 떼들을 보며 요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숫자가 몰리는 부분에는 악의가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서 화를 내는 건가?'
요한은 거인살해자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황혼을 뽑아들었다. 이미 죽어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텐데도, 울리케는 분명 구울들이 한 번 멈칫거리는 걸 본 것 같았다.
"와라."
* * *
싸움이 끝나고 나자 주변의 나뭇잎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어떤 정령이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도, 이걸 지켜봤다면 질려하고 있을 것이다.
백에 가까운 구울을 보냈는데 한 명도 쓰러지지 않다니.
"괜찮나?"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요한은 한참 싸우던 도중에 울리케가 낸 신음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여럿을 해치우다가 기습적으로 당한 게 분명했다.
"발목을 당했나?"
"해치운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어."
"원래 언데드가 끈질기긴 하지. 손 치워."
요한은 울리케의 손을 치운 다음 부츠를 벗기고 바지와 갑옷을 올렸다. 하필이면 구울이 갑옷의 약한 틈새를 물었는지 발목이 부어 있었다. 요한은 발목에 입을 가져다대고 독을 빨아낸 다음 뱉었다.
"!!!"
울리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울리케는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말았다.
독을 대충 빨아낸 다음 요한은 깨끗하게 물로 닦아내고 수에틀그의 비전을 꺼내 상처 부위에 발랐다. 붕대로 감은 뒤 단단히 고정하자 처리가 끝났다.
"괜찮나?"
"...매우, 정말 고마워."
"말에 독이 담겨 있는 것 같군. 기분 탓인가?"
"오해겠지. ...진심으로 고마워. 돌아가면 금화로 보답하지."
"그거 고맙군."
더 말해봤자 스스로만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울리케는 화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어떤 것 같아?"
"땀을 좀 흘려서 짜긴 했지만 감염은 안 됐을 거 같군."
"...내 발목 말고 이 숲의 상황을 말한 거야."
"아. 미안. 이 정도 치웠으면 더 못 보내지 않겠나? 더 보낼 수 있었다면 진작 보냈겠지."
아무리 요한이라도 백에 가까운 구울 상대로 학살을 펼치는 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교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뻐근하고 폐가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요한은 피곤을 내색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 없었으니까.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이 찾아왔다. 뼈만 남은 시체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해골을 달그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실력을 내 인정하노라. 지금 밖으로 나가서 다시는 숲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겠다.
"!"
울리케는 놀랐다. 정말로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수락하는 게 낫지 않겠어?"
"들어오기 전에 그랬다면 고민해봤겠지만 이미 할 짓을 다 저지른 다음에 저러는 놈은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지."
울리케는 정령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정령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정령도 사람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자기네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불리해지면 꾀를 부리며, 폭력에 굴복하는 게 정령이었다.
심지어 이놈은 말도 없이 둘을 미로에 가둔 다음 강제로 공격했던 놈 아닌가.
"건방진 놈 같으니. 난 예이츠의 요한이다. 발칼무르와 테슈카의 이름으로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최소한의 용기가 있다면 얼굴을 내밀 수 있을 터!"
-...나에게는 아직 많은 군대가 있다는 걸 명심해라.
해골은 달그락거리며 말했지만 요한은 코웃음쳤다.
"언데드들을 말하는 거냐? 가장 강한 놈인 죽음의 기사는 이미 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구울들의 군대는 아무리 보내봤자 내가 끌고 온 정예들의 일부도 쓰러뜨릴 수 없을 거다. 명심해라! 내가 타고 온 말 위에 있는 게 무엇인지."
요한은 카르디리안 뒤에 실린 성물을 들먹이며 경고했다. 상대가 정령이라면 성물에 담긴 힘 정도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계속 도발하는 게 좋은 짓인지 모르겠는데.'
울리케는 의아했지만 침묵했다. 요한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으니 그럴 뿐이었다.
"정당한 협상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얼굴을 내밀어라! 네놈은 감히 우리를 암습하고 숲의 미로로 밀어 넣었다. 명예를 아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이러진 않는다."
-...알겠다. 그건 사과하겠다. 내가 얼굴을 내밀면 협상하겠는가?
요한이 성질을 내며 완고하게 굴자, 상대도 한 걸음 물러섰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 정도 지나자, 저편에서 무언가가 걸어왔다.
그건 나무였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더니...!'
나무답게 상대는 매우 느릿했다. 울리케가 경이로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대는 숲의 나무 정령이었던 건가?"
"정령은 무슨. 악령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무 정령은 꾸준히 걸어서 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나 도착했노라.
"이름을 밝혀라. 비겁자."
-나는 비겁자가 아니다. 나는 잉골, 이 숲의 나무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네가 여기 이 모든 짓들을 꾸민 것이렷다?"
-그렇다고 볼 수 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한은 달려들어서 잉골을 붙잡았다. 울리케는 당황해서 외쳤다.
"협상한다면서?!"
"지금 하고 있지 않나?"
잉골은 웬 미친 인간이 자기를 뿌리 뽑으려고 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깊게 뿌리박힌 거목을 뽑을 수 없듯이, 정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잉골은 이 괘씸한 인간을 혼내주기 위해 요한을 꽉 붙잡았다. 둘이 마치 레슬링이라도 하는 것처럼 딱 맞붙었다.
-어... 어... 어...?
"잉골. 이 무례한 정령 놈아. 감히 정당한 요청 한 번 없이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네가 그러고도 명예를 아는 놈이더냐?"
급박하지 않은 상황이라 망정이었지, 만약 상황이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었다면 잉골을 산 채로 불태워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복속시킨 발칼무르가 킬킬대며 잉골을 비웃었다. 감히 까불다가 호되게 두들겨 맞은 발칼무르 입장에서는 잉골이 가소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드득!
거목의 힘을 빌리는데도 요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잉골의 몸만 점점 뜨기 시작했다. 잉골은 느릿한 목소리를 최대한 빠르게 해서 입을 열었다.
-사과하겠다! 사과하겠다!
"이대로 뽑아버리면 너는 어떻게 되나, 잉골?"
-뿌리 뽑힌 나무처럼 되어버린다!
떠돌이 악령 발칼무르와 달리, 잉골은 숲에 뿌리 내리고 사는 나무와 같은 정령이었다. 나무들이 파괴되면 사라지고, 나무가 번성하면 강해지는 정령.
"반성하나? 무례하게 협박한 것을?"
-반성한다!
"내가 이대로 내려놓더라도 감히 도망치거나 수작을 부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나?"
-맹세하겠다!
항복을 듣고 나서야 요한은 붙잡은 손을 놓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잉골의 옆에서 수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은 협상이었다."
"...황제파와 협상할 때 꼭 백작이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 234 언데드 역병 (8) > 끝
< 235 언데드 역병 (9) >
울리케는 손수건을 꺼내 요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안 그래도 한 차례 싸운데다가 나무 정령과의 난투 때문에 엉망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야 백작이 줬던 거니까 그렇겠지."
"아아..."
요한은 손수건의 정체를 떠올렸다. 하녀가 줬던 걸, 울리케의 피를 닦아주느라 선물했었던 것이다.
"백작에게 돌려주지."
"고맙군."
-...
"눈치 보지 마라. 잉골."
요한은 나무 정령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잉골은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움찔했다.
-나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하물며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은 더더욱.
잉골의 목소리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숲을 지키는 나무 정령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숲은 개척되고 나무는 잘려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무를 잘라서 연료로 쓰고 집의 재료로 쓰는 이들에게 나무 정령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요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전부터 이 근처에 살면서 나무를 잘라가고 숲을 태워 온 것들은 이 주변에 사는 성주와 그 밑의 부하들이지 내가 아니다. 잉골."
-내게 침입자는 다 똑같이 보인다.
"그러면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해야지. 지금 몸통에 강철이 박히기 싫다면."
-...
살벌한 협박에 잉골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마법사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흘리며 정령을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가 숲에 들어온 건 정령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은 자들을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다. 나무 정령들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도 없었겠지."
-죽은 자들은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우리가 왜 돌려보내야 한단 말이냐?
"그게 싫으면 계속 침입자들과 같이 지내면 되겠군. 아니. 그보다 협상한다는 놈이 뭐 이리 태도가 건방진 건지 모르겠군. 울리케 공. 원래 이렇게 상대가 건방져도 되는 건가?"
"제국의 관습에 따르면 상대가 이렇게 건방지면 보통 협상이 결렬되지."
인간의 관습을 들고 오는 침입자들에게 잉골은 불퉁스럽게 나뭇잎을 흔들었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숲에 들어오고 있다. 우리들은 그걸 막기 위해 죽은 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이용한 거겠지."
-...
"말은 그만 돌려라. 잉골. 너는 정당한 요청을 하지 않고 함정에 빠뜨렸다. 그걸 인정하는가?"
-인정한다. 침입자.
"그에 대한 보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줄 게 없다. 열매와 이파리 말고는.
"그건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언데드 놈들부터 숲에서 치워라. 길을 비틀어서 이쪽으로 보냈다면 남은 놈들도 싹 몰아낼 수 있겠지."
이렇게 된 이상 나무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제국의 숲들은 문명을 위협할 정도로 드넓은 편이었고, 여기를 누비며 언데드 무리들을 하나씩 찾는 건 아무리 뛰어난 수색자들이라 하더라도 힘든 일인 것이다.
요한이 괜히 성물까지 빌려 온 게 아니었다.
-...알겠다. 언데드들을 숲에서 모조리 쫓아내겠다.
* * *
"확인했나?"
"확인했다. 여긴 아니다."
두 동부 순찰자는 지루한 확인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겨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고 손놀림에는 조금의 게으름도 보이지 않았다.
동부 순찰자들은 마법을 쓸 줄 모르지만, 신비를 마주하는 일들은 많았다. 그들은 나름의 경험으로 신비를 상대했다.
서로를 길게 줄로 묶고 주변에 표식을 남겨가며 닥치는 대로 확인에 들어가는 것이다. 단순한 방식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나?"
"!!"
그러던 도중 앞의 수풀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걸어 나왔다. 요한과 울리케였다. 말을 끌고 나오는 두 귀족을 본 순찰자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뻐했다.
"각하!! 각하!!!"
"나 귀 안 먹었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나?"
"그렇게 사라지셨는데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런. 마음고생이 많았겠군. 내가 없었어도 알아서 잘 하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랬겠지?"
요한의 질문에 두 순찰자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그랬었나?
요한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우두머리가 사라지자 그 밑의 한 성질 하는 놈들은 서로 치고 받으며 '이건 네 탓이다'만 했던 것 같은데...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나? 그랬으면 됐다. 고생했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울리케를 부축했다. 발목을 다친 탓에 움직임이 영 어색했던 것이다.
말 위에 태워도 되긴 하겠지만, 울창한 숲에서 겁먹은 말 위에 다친 사람을 태웠다가 일이 꼬이는 수가 있었다. 카르디리안 위에 태우고 싶긴 했지만 놈이 울리케를 너무 싫어했고...
급히 달려와서 상황을 듣고 고민하던 수에틀그는 무사히 나타난 요한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둘의 행방불명은 꽤나 긴장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수에틀그 님! 저기 백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마주하러 가지 않으십니까?"
"흠. 그냥 이렇게 오게 두게나. 그게 더 나아 보이는군."
"??"
"그냥 이 늙은이의 말을 따라주게."
"알겠습니다."
요한이 울리케를 부축하면서 오는 걸 본 수에틀그는 굳이 달려가서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순찰자 놈들이 찾았다고??"
"역시 동부 순찰자 출신은 다르다니까. 내가 놈들이 찾을 줄 알았지. 동부 순찰자잖아. 숲에서 태어나고 숲에서 죽는 놈들."
"..."
켄타우로스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두 동부 순찰자는 '사실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백작 각하가 그냥 나오셨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사실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각하께서..."
"...쉿. 돈 걸었으니 조용히 해라."
* * *
"그런 일이 있었나? 운이 없었군. 하필 자네한테 화살이 돌려지다니."
"당황하긴 했지만 무사히 나왔으니 괜찮습니다. 대가도 받았고."
요한은 나무뿌리 나팔을 꺼내며 말했다. 언데드를 치우기로 합의를 본 다음 잉골과 협상으로 얻어낸 물건이었다.
나무정령들은 협상하려는 의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가진 것들이 정말 없었다.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잉골은 몸으로 때우기로 결정했다.
"정령들을 부르는 나팔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네. 다만 신비한 힘이 느껴지고, 나무정령들이란 게 원체 가난한 이들이니 직접 나와서 싸우는 걸로 때우지 않았을까 생각한 거지."
"정말 가진 게 없더군요."
제국의 숲들은 워낙 울창해 서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숲에 한해서 나팔을 분다면 정령들이 부름에 응하기로 둘은 약속했다.
"울리케 공은 어떻게 된 건가?"
"아. 다쳐서 도와줬습니다. 수에틀그 님이 주신 치료약도 좀 썼고요."
"공에게 쓰는 거라면 아쉬울 게 없겠지. 다행히 꽤 친해 보이더군."
수에틀그는 요한이 울리케와 가까워진 것에 기뻐했다. 애브너 가문과 사이가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제국에서의 앞일을 생각해봤을 때 친분은 쌓을수록 좋았다.
다행히 울리케도 꽤나 호감이 있어 보였다. 냉정한 공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이건 행운이라고 봐야 했다.
"발목을 다치다니. 넘어지셨나?"
"아니요. 언데드에게 물렸습니다."
"저런. 독을 뽑아내야 했을 텐데?"
"제가 뽑아냈습니다만?"
"...입으로??"
"그럼 뭐 칼로 쨌어야 합니까?"
"아니... 그... 잘했네."
수에틀그는 뭐라고 말하려다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둘 사이의 공기가 꽤나 친근하게 느껴져서 신기해했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니.
'설마 거기서 몇 걸음 더 간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니 좀 수상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그랬고, 울리케 공 또한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렸으며, 요한도 드물게 피곤해 보인데다가...
무엇보다 혈기 넘치는 두 젊은 남녀가 으슥한 곳에서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 뒷일은 자연스러운 법 아닌가.
짐승을 암수 맞춰서 우리에 넣어 놓으면 새끼를 치듯이 당연히...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 아니네."
아무리 수에틀그라도 요한에게 울리케 공과 잤는지 물어보는 건 좀 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쉽지만 수에틀그는 질문을 참기로 결정했다.
* * *
숲 밖으로 밀려나온 언데드들은 깔끔하게 토벌됐다. 기다리고 있던 토벌대는 살벌하게 공격을 퍼부었고, 멍하니 밀려나온 언데드들은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미리 준비된 무덤에 언데드들을 묻고 사제들의 기도가 끝나고 나자 요한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긴 했지만 한 건 끝낸 것이다.
'결국 성물을 안 썼군.'
정령들을 부린 덕분에 성물을 쓰지 않게 되었지만, 펠헤임 성주는 고개를 저으며 성물을 요한의 손에 쥐어주었다. 생각치도 못한 반응이었다.
-백작 각하. 제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각하에게 더 필요할 것 같소.
-...어, 고맙소. 잘 쓰겠소.
펠헤임 성주가 보이는 친근함은 요한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호의는 호의였다. 요한은 성물을 카르디리안 뒤에 잘 실어 놓았다. 카르디리안은 불만스럽게 뒷발굽을 차댔지만 요한은 무시했다.
토벌대는 화려한 배웅을 받고 성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동쪽으로 가도를 타고 가면 나오는 할브론 남작령이었다.
엘프 왕은 아직도 머리가 좀 아픈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성주가 질 떨어지는 술을 섞은 게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는 죽음의 기사 때문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소."
"백작이 멀쩡한데 이 내가 그깟 언데드 하나 때문에 빌빌거린다는 게 말이 되오?"
"나도 싸우고 나서 며칠을 앓았소. 왕께서 몰랐던 것뿐이지."
"아. 그게 정말이오?"
엘프 왕은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통증도 죽음의 기사가 남긴 것 같았다. 술로 인한 숙취치고는 지나치게 오래 갔던 것이다.
"할브론 남작은 정세를 볼 줄 알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펠헤임에서 있었던 것 같은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근처에 숲도 적으니 토벌도 훨씬 쉽겠지. 빠르게 끝낼 수 있겠지."
울리케의 말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속삭이는 모습을 본 엘프 왕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요한만 있을 때 슬쩍 속삭였다.
"울리케 공과 무슨 이야기를 했소?"
"할브론 남작령은 비교적 수월할 거라고 말했소."
"..."
엘프 왕은 갈등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도 할브론 남작령은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울리케의 말에 트집을 잡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설마 이 사람...?'
요한이 어이없어 할 무렵, 저 멀리서 척후를 나갔던 켄타우로스들이 돌아왔다.
"각하! 남작령에 군대가 와있습니다! 쉬리벡 가문의 군대라고 합니다!"
"!"
쉬리벡 백작은 제국 북부의 영주. 즉...
황제파 봉신 중 하나였다.
"뛰어난 자인가?"
"전사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사람인데...? 하긴 그래서 온 건가?"
이 근처에 황제파 군대가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생각해보니 저쪽에서도 몇몇 귀족들이 나설 법했다.
언데드 역병을 막지 않으면 황제파도 피해를 입는데다가 중립을 지키고 있는 귀족들이 갈아탈 수도 있는 것이다.
"잘 됐지 않소!"
엘프 왕은 기쁨을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온몸에서 기쁨이 드러났다.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손은 검을 뽑기 위해 떨리고 있었다.
"황제의 군대도 아닌 기껏해야 전사도 아닌 백작의 군대. 거기의 기사들이 우리를 상대할 수나 있겠소? 백작?"
"어... 뭐 맞는 말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좀 더 신중을 기울여서 싸우는 게 좋겠소."
여러 갈래로 척후를 보내고 정보를 얻은 다음 종합해서 판단한 다음 행동하는 건 요한에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이걸 지키지 않는 기사들이 절반이 넘었다.
스스로의 무력을 믿는데다가 상대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지니 돌격하고 보는 것이다.
저쪽에서도 정보를 들었는지 먼저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은 공손하게 서신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귀공들의 드높은 명성과 신분을 존중하시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십니다."
백작의 제안은 그다지 놀라운 제안은 아니었다.
서로 군대를 부딪치지 말고 기사들끼리 결투해서 패자는 물러서고 승자는 남도록 하자!
제국에서는 흔한 관습이었고 이렇게 끝나는 전투도 많았다. 보낸 서신 또한 그런 관습에 관한 미사여구였다.
"...?"
요한은 눈을 깜박였다. 서신의 끝에 익숙한 문양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뱀의 문양이었다.
< 235 언데드 역병 (9) > 끝
< 236 뱀의 귀환 (1) >
"쉬리벡 백작의 가문 문장에 뱀이 있었나?"
요한의 질문에 울리케는 고개를 저었다.
'뭐지? 낙서, 아니면 얼룩인가?'
문양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별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서로 다섯 명을 보내서 승자를 가리자고?"
"예."
무기가 전부 부러지거나, 낙마할 경우에도 패배로 인정되었다. 기사들 간의 결투는 용병들 간의 싸움처럼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던 것이다.
"쉬리벡 백작께서 결투 전에 대면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건..."
"함정 아닐까?"
"함정 같소."
울리케와 엘프 왕은 서로 혐오하는 것치고는 의견이 일치할 때가 많았다. 둘은 굳이 백작과 대면하고 싶지 않아했다.
엘프 왕은 명예로운 기사였지만 머저리는 아니었다. 상대가 명예롭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당연히 하고 있었다.
그냥 기사들끼리 내보내서 승패를 가리면 될 일을 굳이 대면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두 귀족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사신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명예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런 함정은 절대 펴놓지 않았습니다."
"더 수상하군."
"근처 평원에는 매복할 숲도 없을 뿐더러 저희 주인님께서는 혼자서 나오실 겁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무장도 상관 없습니다."
"..."
"....."
생각보다 빈틈없는 사신의 말에 둘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정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사신은 안심했다.
'이 정도면 받아들이겠지.'
그러나 사신은 아직 엘프 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엘프 왕은 '흥'하고 냉소를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못 믿겠다."
"..."
'뭐 이런 새끼가...?'
지위 있는 사람이 그냥 못 믿겠다고 어깃장을 놓으면 사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엘프 왕은 기사로서 존중하지도 않는 상대의 명예를 신경 쓸 정도로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못 믿겠는데."
울리케 또한 저 멀리 있는 황제파 영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쓸데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됐다. 내가 나가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사신은 눈물을 살짝 글썽거릴 정도로 감동했다. 이런 제안을 들고 가서, 셋 중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면 이건 사신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백작은 너무 관대하오. 저런 자에게까지 뭐하러 자비를 보여주는지 모르겠군."
"그건 나도 동의하지."
"...그냥 무슨 말 하는지 듣고만 오지."
엘프 왕이야 그렇다 쳐도 울리케는 정세를 읽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저렇게 무시하는 건 이익이 아니라서였다.
설사 정말 일이 잘 풀려서 상대가 넘어오더라도 그런 수작의 진의에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그냥 무시하고 할 일 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그에 비해 요한은 길에 떨어진 동전도 일부러 허리 굽혀 줍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백작이라면야 최소한 은화 하나는 나오지 않겠는가.
* * *
"다른 분은?"
"대표해서 나 혼자 왔소."
쉬리벡 백작은 안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라마프가 컹컹대며 쉬리벡 백작에게 짖어댔다.
'뭐야. 꿍꿍이가 있나?'
요한은 의아해졌다. 카라마프의 반응을 보니 백작이 뭔가 꾸미는 건 확실해보였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어 보였다. 탁 트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땅 밑에서 누군가 나오거나, 아니면 쉬리벡 백작이 검을 뽑고 요한에게 덤벼드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정말 없습니까?"
"없다고 말했잖소."
"...각하. 도와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그 뜻이 아닙니다."
말과 함께 쉬리벡 백작은 소매를 걷어 문신을 보여주었다. 뱀의 문신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길드의 문신에 요한은 경악했다.
"백작, 네소스 소속이었나?!"
"...그게 아니라 각하께서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요한은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브르뒤헤 공작의 자식과 도시를 토벌하러 갔을 때 만났던, 네소스의 맹독 소속의 암살자였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저주를 받았던 암살자!
목숨을 구해준 대신 황제의 목숨을 노리라고 보냈었고, 그 이후 소식이 없어서 실패했거나 도망갔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요한이었다.
"설마 잊고 계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언제쯤 자네에게 소식이 들어올까 매일 기다리고 있었는데."
"..."
요한의 말에 암살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 자신은 신성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뱀의 문양을 남긴 건가?"
"예. 각하께서 알아보신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까?"
암살자는 요한이 문양을 알아차리고 혼자 나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혼자 나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알아보긴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
"...??"
암살자는 왜 요한이 못 알아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길드 특유의 뱀 문자였는데...
"어쨌든 시간이 많지 않다. 있었던 일들을 말해봐라."
"예."
들어보니 암살자의 행적도 요한 못지않게 파란만장했다.
일단 암살자가 가장 먼저 고민한 건,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황제에게 접근하는 건 도시의 집정관을 노리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황제의 주변에는 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득시글거렸다.
게다가 황제 본인도 의심이 많고 사나운 인물이었다. 신분이 신분인 만큼 몸에 거느리고 있을 마법도 만만치 않았고...
무턱대고 접근했다가는 그 주변에 있는 마법에 묶여 비참하게 죽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암살자는 황제파의 귀족을 노리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제국이 혼란스러운 탓에 영주들은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지를 떠나는 일이 잦았다.
끈질긴 기다림과 몇 번의 시도,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따른 끝에 암살자는 쉬리벡 백작의 숨통을 끊고 그로 변장할 수 있었다.
백작을 따르는 병사들은 원래 주인의 시체가 저 여관 지하실 밑에 처박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생각 외로 뛰어난 암살자의 능력에 요한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황제의 목을 딸 수 있는 건가?"
지금 황제파가 유지되는 건 황제 본인의 카리스마 때문이 컸다. 카르디리안은 일신교도로서도 몇 번의 파문을 받은 사람이었고, 황제로서도 그 밑의 영주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킨 함량 미달의 통치자였지만, 강한 기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부와 남부의 귀족들, 그리고 엘프 기사들이 몰려들 때만 해도 누구나 황제파의 패퇴를 예상했었지만 그 불리한 상황에서 번개 같은 기습으로 승리한 게 바로 카르디리안이었다.
다 늙고 중병에 걸린 황제가 그렇게 움직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 카리스마로 유지되고 있는 파벌이었으니, 황제만 죽으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자식들은 그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다.
"...몇 번을 시도했습니다만 무리였습니다."
암살자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소스의 다른 신참 암살자나, 혹은 검술 길드 출신의 다른 암살자들 몇몇을 몰래 고용해서 카르디리안의 숙소로 보낸 적이 있었다.
허점을 파악하고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는 대실패였다.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줄이야. 암살자 본인도 예상치 못한 실패였다.
"암살자를 가려내는 마법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흠..."
요한은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당장 요한도 카라마프가 옆에 있지 않은가. 카라마프의 예민한 후각이 적을 찾아내듯이, 황제 곁에 저런 수단이 몇 가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역시 무리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가능한 정보를 최대한 전해 들으려 했다.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몰랐으니까.
들어보니 황제는 편집증적으로 의심이 많아, 매일 자는 방이 바뀐다고 했다. 야영을 할 때면 천막 여러 개를 두고 몇 명의 대역을 따로 둔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까다로워 죽겠는데 이제 여기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매번 바뀌었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닌, 황제의 호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저번에 황제의 자식이 아끼는 시종을 급히 보냈는데 기사가 단칼에 베어버려서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고맙군. 나중에 황제의 천막에 들리게 되면 참고할 수 있겠어."
"...농담에는 재주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각하. 지금 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궁정에 있는 가신들 중 암살자가 가장 꺼려하는 게 그 궁정마법사들이었다.
일반적인 궁정마법사들이 아닌, 얼굴을 가리고 남몰래 드나드는 수상쩍은 마법사들.
악명이 높거나 수상쩍은 일들을 저지른 범죄자였지만 카르디리안은 신경 쓰지 않고 불러댔다. 이들은 온갖 사악한 마법과 신비를 바쳐 올렸다.
이건 암살자의 감이었지만, 그들이 쉬리벡 백작이 수상하다고 이야기를 올린 것 같았다. 아직은 의심 정도였지만...
"아. 그래서 도와달라고."
"예! 맹세에서 저를 풀어주십시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자네가 사라지면 난리가 나지 않겠나?"
"그거야 그렇겠습니다만..."
"안 돼. 조금만 더 버텨보도록."
"아니... 돌아갔다가 잡히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도록 내가 생각해보겠다. 계략을 꾸며보도록 하지."
"..."
암살자는 매우 싫은 눈빛을 보냈다. 쉬리벡 백작은 꽤나 훤칠한 장부의 얼굴을 갖고 있었기에 암살자의 눈빛이 영 어색했다.
"그보다 황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요즘 분위기가 어떻지?"
"승리한 덕분에 예전보다는 낫습니다만, 여전히 칼날 같은 분위기입니다."
요한 측 연합이 서로 느슨하게 자율권을 갖고 있다면, 황제파는 황제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상하관계가 구분되어 있었다.
아무리 주군이라 할지라도 봉신에게 필요 이상의 명령은 할 수 없는데, 카르디리안은 무시하고 철권을 휘둘렀다. 그만큼 분위기는 살벌했다.
전형적인 폭군의 공포통치였다.
"중병이 있다면서?"
"그게... 좀 이상합니다. 마법사 놈들이 뭔 수상쩍은 비법을 갖고 온 게 분명합니다."
카르디리안은 애초에 봉신들 앞에도 그리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다. 자식을 보내거나 시종을 보내는 식으로 일을 해결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가다가 한 번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었는데, 그 때면 그 살벌한 눈빛과 살기에 봉신들 중 심약한 자는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암살자도 나름 담력으로는 자신이 있었는데 긴장할 정도였으니...
'무슨 꺼지기 직전에 타오르는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요한은 어이없어했다. 사실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카르디리안의 안 좋은 건강이었던 것이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늙은이라, 버티는 것도 전략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뭘 잘못 처먹었는지 저렇게 쌩쌩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덕분에 황제가 앞에 있을 때는 다들 한 마디도 하기 힘들어합니다."
"협상 이야기가 나오긴 하나보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 그런 이야기가 있긴 있습니다. 황제의 첫째 아들에게 가문을 넘기고, 황제 계승은 포기하는 것으로..."
"전쟁이 이렇게 길어졌는데 그런 생각이 안 나오면 이상한 거지."
당장 이쪽도 협상을 하고 싶어 하는데 저쪽이라고 그렇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물어보니 황제파의 전략도 이쪽과 비슷했다.
언데드 역병 마무리 짓고, 군대 추스르고, 병사 충원하고, 물자 모으고, 다시 남부로 진격해서 성 공격.
어떻게든 남부를 확실하게 갈아버려서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의 목을 잘라버리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느껴졌다.
'사람이 저렇게 흔들림 하나 없이 미친놈이기도 힘들 텐데.'
요한의 상식에서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남부에 뭐 고대 제국 보물이라도 묻어놨나?
암살자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계략은 생각해내셨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암살자라고 죽음 앞에 초연하고 그런 건 없었다. 누구나 살고 싶은 건 똑같았다.
암살자의 오랜 경험이 경고하고 있었다. 황제 옆에 오래 있다가는 정말 비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앞의 백작이야 일말의 자비심이 있으니 그나마 깔끔하게 죽여줬겠지만 황제는 온갖 잔혹한 고문을 실험하고도 남았다.
"물론 생각해냈다."
"아! 다행입니다.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너와 내가 결투하는 거다."
"..."
암살자는 정색하고 요한을 노려보았다.
< 236 뱀의 귀환 (1) > 끝
< 237 뱀의 귀환 (2) >
"아니. 오해하지 마라. 널 죽여서 입을 다물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암살자들이 가장 쉽게 맞이하는 직업상 위험은 역시 고용주의 배신이었다. 죽은 암살자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소스의 암살자는 숏소드를 다루는 데에 재주가 있었고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암기를 던져 열 걸음 떨어진 적의 숨통을 끊을 자신이 있었지만 요한과 결투하고 싶지는 않았다.
맨몸일 때 기습해도 위험할 텐데 서로 제대로 갖춰 입고 싸우자니. 끔찍하게 죽을 미래만 보였다.
"가짜로 결투하자는 거지."
"아니... 기사시잖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넌 암살자면서 암살 못 하고 있는데, 나라고 가짜 결투 하면 안 되리란 법이 있나?"
암살자는 요한을 속으로 욕했다. 겉으로 말했다가는 목이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가짜 결투를 하자니.'
결투는 신성한 것이었고 특히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기사들에게 가짜 결투는 생각치도 못하는 일인 것이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가짜 결투를 하고, 너는 패배해서 내 인질이 되는 거다. 그러면 한동안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나쁘지 않은 계책 같습니다. 가문이 몸값을 준비할 때까지 좀 걸릴 테니 말입니다."
"아. 몸값도 얻을 수 있겠군. 이건 좀 기쁜데."
"..."
마치 상인 같은 모습을 보이는 요한의 태도에, 암살자는 떨떠름한 눈빛을 보냈다.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쉬리벡 백작의 가문이 돈이 많나?"
"많지도 적지도 않습니다. 출정하느라 빚이 있고, 상인들에게 내준 권리들도 좀 있고..."
"백작의 안사람이 백작을 아꼈으면 좋겠군."
"하는 짓을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겠지. 어쨌든 알겠으니 귀환하게. 가짜 결투를 벌여야 하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야말로."
"정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왜 자꾸 강조를 하지?"
"..."
암살자는 할 말은 많지만 참았다. 힘조절을 해야 하는 건 요한이었으니까. 괜히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가 힘조절에 실패한다면 그의 머리통이 터져나갈 수도 있었다.
* * *
암살자, 아니 쉬리벡 백작은 돌아오자마자 외쳤다.
"예이츠 백작과 직접 결투하겠다!"
"...예???"
밑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기겁했다. 너무 예상 밖의 말이었던 것이다.
쉬리벡 백작은 기사도 아니었고 결투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상대는 지금 그 위명이 쟁쟁한 젊은 기사.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었다.
결투가 귀족의 특권이자 권리였지만 그걸 모두가 행사하는 건 아니었다. 늙고 병든 사람이 결투를 거절한다고 해서 그게 모욕 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직접 나서지 않고 대전사를 내보내면 되는데 왜 저런단 말인가.
"놈이 폐하를 모욕하고 내 가문을 모욕했다. 직접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각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각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부관의 말에도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말려도 고집을 피우자 다들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원래 그렇게 충성스러우시던 분이 아니었는데...'
'평소에 불만을 토로하시던 것과 달리 마음 속에는 충성심이 있으셨던 것인가?'
백작을 따르던 서기관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기사들은 존중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병대장들은 한 마디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감히 끼지 못했다.
"내 갑옷과 검을 가져와라! 명예와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싸움이다. 신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겠는가?"
'신앙심으로 따져도 상대한테 밀릴 것 같은데.'
* * *
"돌아버린 것 같은데..."
"아니. 백작이 명예를 조금 알았던 모양입니다. 내가 보는 눈이 틀렸다니."
울리케의 중얼거림에 엘프 왕이 반박했다. 누구든 간에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선 전사는 존중 받을 권리가 있었다.
쿵!
단 한 합에 쉬리벡 백작은 낙마했다. 상대 쪽 진영에서 이마를 감싸 쥐고 탄식을 내뱉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도 백작이 당당하게 나서서 숨겨진 수가 있나 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쉬리벡 백작의 가문도 미래가 걱정되는데."
"인질로 올 사람에게 너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
"...앞으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예이츠 백작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
'예이츠 백작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
둘만 있으니 그냥 서로에 대한 짜증만 늘었다.
요한은 위풍당당하게 귀환했다. 진영에 있는 기사들의 박수갈채를 받자 요한은 살짝 좀 민망해졌다. 관습적인 축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워낙 상대였던 것이다.
'심지어 가짜였고.'
"괜찮나?"
"뼈가 좀 울리는 것 같소..."
"안 죽었으면 됐지."
저쪽 진영에서 백작의 수행원 몇 명이 달려오고, 나머지는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두머리가 인질이 됐는데 여기 그대로 남아 있을 사람은 없었다.
엘프 왕은 먹이를 빼앗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철수하는 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명예를 지켜야 하기에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어떻게든 돌격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쉬리벡 백작이 요한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하자, 엘프 왕은 미련 넘치는 표정을 지우고 시선을 돌렸다.
"좋은 결투였소. 쉬리벡 백작. 명예와 관습에 따라 그대의 권리를 보장하겠소."
"...고맙소. 괜찮다면 들어가서 쉬고 싶군."
"그러시오."
쉬리벡 백작이 안으로 들어가자 엘프 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그렇게 약한 전사 같지는 않은데, 소문이 잘못되었나?"
"...!"
요한은 엘프 왕의 육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암살자가 걸음걸이도 분명히 따라하고 있을 텐데 거기서 눈치를 채다니.
'조심해야겠군.'
허술한 모습을 보여줘서 방심하고 있었지만 엘프 왕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요한은 마음을 다잡았다.
* * *
상대가 물러서자 남작령에서의 토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 영주의 병사들은 깔끔한 움직임으로 언데드 무리를 포위해서 섬멸했다.
네 개의 마을을 타고 움직이면서 기세 좋게 토벌을 끝낸 원정대는 남작의 성 앞에서 멈췄다.
"...?"
"가문의 깃발이 바뀌었나...?"
울리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성 위를 쳐다보았다.
할브론 남작의 깃발이 아닌, 처음 보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건 귀족 가문의 깃발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규격과 양식도 없이 거칠게 그려놓은 저 깃발은...
"각하. 각하."
"?"
"저 깃발은 잘린 횃대 용병단의 깃발입니다!"
암살자, 아니 쉬리벡 백작이 작게 속삭였다.
잘린 횃대 용병단을 그가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용병단이 황제에게 고용된 적이 있던 용병단이었던 것이다.
그 성질이 거칠고 잔혹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해 여러 군공을 세워 총애를 받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 쫓겨난 건가?"
"정확히는 스스로 떠난 겁니다."
"왜지? 황제의 명령을 어겼나?"
"아니요. 황제가 봉급이 밀렸었습니다."
"아아..."
요한은 바로 납득했다. 저번의 전투에서 이기기 전까지 황제파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용병들 봉급이 몇 번씩 밀리고 그랬으니 탈주도 당연했다.
'그러면 저건...'
용병단이 저렇게 깃발을 내걸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고용되었으면 감히 저런 짓을 하지 못할 테니, 저건...
점령!
평화로운 시대라면 저런 짓을 감히 하지 못하겠지만,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용병대장이나 도적기사들이 성이나 마을을 점령하고 새 영주 노릇을 시도했다.
대부분은 잘 풀리지 않았지만, 운 좋게 잘 풀리면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는 게 가능한 것이다.
요한은 다른 이들과 정보를 공유했다. 엘프 왕은 벌컥 화를 냈다.
"감히 하찮은 용병 놈들이 정당한 귀족의 권리를 건드리다니!"
제국의 남작이라 하더라도 엄연한 귀족이었다. 그런 남작을 도적떼들이 습격해 성을 뺏었다니 믿겨지지가 않았다.
"토벌을 진행하면서 어떤 연락도 오지 않은 걸 보면 남작 가문 전원이 붙잡혀 있는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울리케의 말에 요한도 동의했다. 할브론 남작과 가문의 일원들은 저 안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왕에게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저 성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면 매우 귀찮아질 수 있어."
"그게 동의... 아니다. 됐다."
울리케가 노려보자 요한은 짐짓 모르는 척을 했다. 울리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았다.
'용병단이 궁지에 몰리면 황제를 부를 수도 있겠군.'
암살자, 아니 쉬리벡 백작이 몰랐던 걸 보니 그 이후로 딱히 접촉은 없었던 것 같지만 저런 부류들은 원래 얼마든지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었다.
나중에 상황이 꼬이거나 궁지에 몰리면 인연이 있던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봉신을 자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 성격은...
'받아줄 거 같다.'
중부 귀족들이 뒤에서 무슨 욕을 하더라도 황제는 받아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성이 너무 단단하고 공략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협상을 시도할 수는 없나?"
"백작의 그런 발상을 내가 좋아하긴 하지만 저런 작자들하고 협상을 했다가는 명예에 먹칠을 할 수가 있어."
"그렇다면 협상을 시도한다고 해놓고 불러낸 다음에 처리하는 건?"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듯한 요한의 말에 울리케는 살짝 감동했다. 요한 없이 엘프 왕하고만 있었다면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겠는가.
"나쁘지 않지만 엘프 왕이..."
"내가 처리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쪽에서 의심할 가능성이 높아."
"그게 문제겠군."
엘프 기사 한 명이 무장한 채 성문 앞까지 말을 몰고 나갔다. 그러자 바로 성벽 위에서 쇠뇌가 날아왔다. 엘프 기사는 방패로 막은 다음 소리를 한 번 치고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니. 고생했다. 협상할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이는군."
군대가 왔다는 소식이 성 안에도 전해졌는지, 성벽 위에 용병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용병들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들어라! 귀족들아! 할브론 가문의 귀하신 몸들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만약 접근하면 이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얼굴을 보여라!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용병들은 욕설을 좀 내뱉더니 밑으로 내려가 남작을 데리고 왔다. 새파랗게 질리고 수척해지긴 했지만 남작과 가문의 이들은 멀쩡해보였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이군..."
요한은 중얼거렸다. 수에틀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기서도 상대를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상대는 자기네들이 원정대보다 전력이 약하다는 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남작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협박할 이유가 없었다. 저런 거친 행동은 명확한 상황 인식에서 나오는 두려움이었다.
게다가 남작 가문의 일원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유사시에 몸값을 받고 풀어주거나 인질로 쓰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머리 없이 날뛰는 놈이었다면 그렇게 활약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겠군. 드워프들을 불러라."
* * *
"으으음..."
"끄으응..."
드워프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요한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너무 무리한 말을 했나보군. 마음 쓰지 말도록."
군주의 저런 배려심이 가끔 더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드워프들은 굴욕감에 떨었다.
하지만 할브론 가문의 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기본적으로 성은 공격하는 쪽보다 수비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수비하는 쪽이 약점을 철저히 없애면 공격하는 쪽은 방법이 없는 것이다.
고지(高地)에 위치한데다가, 단단한 암반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땅굴을 파는 것도 여의치 않고, 성벽은 두꺼워서 타격을 주려면 일정 크기 이상의 투석기가 필요한데 각도도 나오지 않고...
"옛날에 드워프들이 만든 성이라 그런지 단단한가보군."
"그렇습니다. 드워프들이 만든 성이라..."
"지금 기분 좋아할 때냐??"
듣고 있던 켄타우로스들이 핀잔을 줬다. 드워프들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게다가 성벽과 성문을 때려 부숴도 인질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각하. 명령만 내리신다면 저희가 밤에 성벽을 타고 올라보겠습니다."
용병 몇 명이 호기를 부렸다. 요한을 따르는 용병들은 말이 용병이었지, 봉급 없이도 싸울 정도로 그들의 군주에게 매료된 상태였다.
어둠을 틈타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 말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쉬리벡 백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 237 뱀의 귀환 (2) > 끝
< 238 뱀의 귀환 (3) >
그 눈빛에 쉬리벡 백작은 질색했다. 저 눈빛의 뜻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지 마십시오."
"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백작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간청했다. 누가 보면 둘이 진지하게 회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의 말을 듣지 않았나. 그냥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지."
사실 밤을 틈타 성벽을 기어오르는 건 그렇게까지 미친 짓은 아니었다.
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웠고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의 경계는 아무리 채찍질 같은 형벌로 다스려도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훈련 받지 않은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경험 많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주일, 몇 달이 갈지 모르는 일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전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한 일이긴 했다. 실수 한 번 하면 그대로 도륙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이런 방면의 전문가가 나서야 하지 않겠나? 혼자 조용히 올라가서 성벽의 취약한 틈새를 알아내고 길을 안내할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 같군."
암살자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궁리를 했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저라도 처음 오는 성을 그렇게 제 집 드나들듯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최소한 그 성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좀 듣고..."
"각하! 근처 마을의 일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반 년 전에 성에 가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
암살자는 세상을 저주했다.
* * *
암살자는 요한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할지도 몰랐지만, 요한은 암살자가 무사히 돌아오길 원했다. 지금 쉬리벡 백작이 사라지면 여러모로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용병대장의 목을 따고 남작과 가문 사람들을 구출해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원하는 건 침입로였다.
오래 된 성에는 지하 통로나 성벽 사이의 균열, 잊혀진 옛 문 등 다양한 구멍들이 있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라 그런 건 없을 겁니다. 각하."
"...그 후로는 인간들이 보수했으니까 있을 수도 있잖나."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건 영주도 놓치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하물며 강제로 성을 점령한 용병단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 구멍을 찾아내는 게 암살자의 일이었다.
며칠 동안 암살자가 몰래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사이, 요한은 다른 귀족들과 진지하게 회의에 나섰다.
할브론 남작의 성을 점령하고 싶은 건 모두가 똑같았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지나치게 잘 만들어진 성입니다."
창 하나 들고 성문으로 돌격하는 걸 꺼리지 않는 엘프 기사들도 이 성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난색을 표했다.
공성 병기의 각도도 나오지 않고 성문도 견고했다. 정면으로 들이박았다가는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것이다.
"포위해서 굶겨 죽이는 건 어떻습니까?"
"일꾼의 말을 들어보니 창고에 쌓아 놓은 물자가 풍족해 일 년은 족히 버틸 겁니다."
"밤에 성벽을 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엘프 왕의 말에 울리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겁 없는 기사들이야 그런 짓을 한다지만 울리케 본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이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옆에서 듣고 있던 요한은 살짝 찔렸다. 당장 본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프 왕은 울리케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는 살짝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무슨 방법이 좋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남작 가문의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면 성벽을 넘는다 하더라도 참사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 방법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성벽을 넘는 것도 넘는 거지만 안의 남작 가문 사람들을 구할 방법부터 생각해야 했다.
엘프 왕은 뭐라 할 말이 없었는지 요한을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눈빛이었다.
'침입이 그나마 답이긴 해.'
그 눈빛을 피하며, 요한은 암살자가 괜찮은 답을 가지고 오기를 빌었다.
* * *
놀랍게도 암살자는 괜찮은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요한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은 길이 있다고?"
"...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니. 없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옆에 앉아 있던 수에틀그는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보고도 좋지만 먼저 좀 씻고 오게. 백작. 어딜 기어 다닌 건가?"
비밀을 지켜야 해서 하인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암살자는 혼자 쓸쓸히 씻고서 돌아왔다.
"성의 하수구에 틈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화장실을 새로 추가하느라 하수구를 만들어 놓은 모양인데, 그쪽 보수를 허술히 한 모양인지 드나드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성벽에서도 사각이니 밤을 틈타 들어가면 얼마든지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암살자의 말에 요한과 수에틀그, 이젤리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꼭...
하지만 의외의 길이긴 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성의 화장실의 하수구는 확실한 입구긴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그러실 것 같아서 노예가 청소하는 날짜도 확인해 왔습니다. 비교적 깨끗할 때 들어가시면 될 겁니다."
"걱정 말게나. 내 비전의 마법이 있으니, 그걸 두르고 가면 더러움이 범하지 못할 걸세."
수에틀그의 말에 암살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게 있다면 왜...?
"암살에 방해될 줄 알았네."
-그르르르릉.
"마법사님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카라마프가 싫어하지 않나. 어쨌든 다른 것들은 다 확인해왔나?"
"예."
일주일 정도 성에 머무르면서 암살자는 알뜰하게도 조사해왔다. 들어가는 침입로는 물론이고 남작 가문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까지도.
"고생했다. 이거라면 해볼 만하겠군."
"바로 출발할 생각인가?"
"아니오. 아마 설득이 필요할 겁니다."
* * *
"같이 가겠소!"
역시나 엘프 왕이 나설 줄 알았다. 암살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성 안에서 탈출한 노예를 잡았다고 이야기를 섞어 말하자 왕이 바로 나선 것이다.
요한이 용병들과 함께 침입한다고 하자 엘프 왕은 눈을 빛내며 나섰다. 하수구를 기어가 화장실로 나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추위와 더러움을 감내하는 게 기사였던 것이다.
물론 요한도 마음 같아서는 엘프 왕과 기사들을 앞장세우고 싶었지만...
'암살자를 앞장세워야 한단 말이지.'
물론 남들 앞에서는 얼굴도, 복장도 바꾸고 성 안의 노예처럼 굴 테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엘프 기사들은 묘한 부분에서 예리한 것이다.
수에틀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요한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요한이라도 저 완고한 왕을 설득할 수 있을까?
요한은 한 마디로 상황을 일축했다.
"왕이시여. 만약 내가 포로로 잡힌다면 누가 나를 구하겠소?"
"...그건 그렇소."
엘프 왕은 기쁜 표정으로 납득했다. 요한은 득의양양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물러서려고 했다.
...울리케가 낮게 속삭이기 전에는.
"설마 나보다 저 엘프를 믿는 거야??"
"...공까지 왜 이러나 정말?"
* * *
성벽을 기어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에틀그의 마법 덕분에 요한과 이젤리아는 손쉽게 하수구를 통과해 성 안의 화장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먼저 들어온 암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맞이했다.
"문제없나?"
"예. 없습니다. 용병들은 이 층을 잘 쓰지 않습니다."
백인대장들은 용병들이 성의 높은 층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에 바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놀더라도 낮은 층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성의 높은 층에 있는 것들은 주로 영주의 숙소거나 신전 같은, 용병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장소였다.
덕분에 수십 명이 넘는 중장병들이 하수구를 타고 올라와 그 주변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여기 옆은 신전이잖아?"
"들키지 않고 놈들의 모가지를 딸 수 있게 기도 올리자고."
용병들은 가볍게 긴장은 해도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들이 모시고 있는 고용주 덕분이었다. 뒤에서 기다리지 않고 가장 앞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고용주는 언제나 존중 받기 마련.
하물며 그게 요한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놈들의 숫자는 이백에서 삼백 정도. 성문만 열어버리면 별 거 아닌 놈들이다.'
상대가 정예라고 하더라도 이쪽이 더 정예였다. 기사들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문제는 남작 가문의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
"어때. 노예 같나?"
"어... 노예... 같습니다?"
"평소 백작님의 모습을 알다 보니 전투 노예 같은데요."
요한은 암살자와 함께 하인처럼 위장했다. 네다섯 명 정도 데리고 내려가서 조용히 데리고 올라올 생각이었다.
용병들은 곳곳에 흩어져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데다가 하인들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면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이젤리아. 이 신전에 용병 놈들이 굳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의 경우가 벌어지면 칼을 써도 좋아. 전투가 벌어지면 신호를 보내."
"알겠다."
이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밖에서도 공격을 개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성문을 무너뜨리지는 못해도 공격이 시작되면 신경은 온통 바깥으로 쏠릴 것이다.
"가자!"
* * *
...암살자의 자신만만한 말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처음부터 예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래층 복도에서 마주친 용병들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잠깐."
"..."
암살자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요한과 다른 병사들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보는 사람도 없겠다 여차하면 단칼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괜찮지 않나?"
"음... 괜찮은데? 정말 괜찮군. 이런 노예가 있었나?"
"무, 무슨 일이십니까?"
암살자는 겁먹어하는 하인을 연기하며 물었다. 이미 잘린 횃대 용병단 중 몇몇 이들을 확인한 암살자였다.
"하우트 백인대장께서 술과 먹을 것을 갖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빨리 갖고 오지 않으시면 저를 채찍질하실 겁니다!"
"녀석. 겁먹기는. 걱정 마라. 이건 하우트 백인대장보다 더 위의 명령이니까."
"야. 그런데 이 놈 그냥 데리고 갔다가 사고치는 거 아니냐?"
오래 일한 하인들은 격식과 관습에 능했지만, 새로 사 온 노예들은 그런 걸 알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한지 오래 됐나?"
무슨 상황인지는 몰랐지만 요한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런... 그러면 좀 그런데."
"야. 그냥 다 데리고 가자. 옆의 하인 놈은 오래 일한 놈이니까 알아서 잘 가르치라고 하면 되지."
"그럴까? 그러자."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떠들더니 결정해버렸다. 그리고는 옆의 하인, 아니 암살자에게 말했다.
"우리 대장이 귀족 대접 받는 걸 아주 좋아하니까, 알지? 귀족 대하듯이 잘 대해. 그러면 포상이 있을 거야. 용병 출신이라고 건방 떨었다가는..."
용병은 목에 대고 손을 그었다. 암살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냐?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병대장이 적당한 노예를 찾는 모양인데...
"자. 들어가라."
용병들은 성 아래의 연회장 문 앞에 서더니 안을 가리켰다.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들은 하품을 하며 두꺼운 나무문을 열어줬다.
안에서는 용병대장과 부관, 백인대장 등이 모여서 질펀하게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
"..."
"오! 데리고 왔나! 이리 와라. 어디 한 번 보자! 이렇게 기다리게 한 이상 아주 잘생긴 놈이어야 할 거다!"
뒤따르고 있던 요한의 병사들은 설마 싶었다.
저것들 설마... 지금 백작님을...?
'저런 재수 없는 놈들 같으니.'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은 고생하라는 듯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문을 닫았다. 워낙 문이 두꺼워서 닫으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이리 오라니까! 뭐하는 거냐?"
요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 상대는 거나하게 취한 상황. 통로는 지금 들어온 문 하나뿐.
거창하게 노는 꼴을 보니 어지간해서는 밖에서 문을 안 열 게 분명했다.
-칼을 뽑을까요?
그걸 눈치 챘는지 병사들도 물었다.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행동한 다음에 뽑아라.
상대가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굳이 싸움을 오래 끌 필요 없었다. 한 번에 죽일 생각이었다. 요한은 술잔을 하나 들고 용병대장 앞에 섰다.
"오! 제법..."
용병대장은 취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용병대장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났다.
< 238 뱀의 귀환 (3) > 끝
< 239 뱀의 귀환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