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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럴 수가!'

제갈규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창고를 둘러보았다. 옆에 있는 포쾌의 속마음과 달리 제갈세가의 젊은 무인은 누가 도사인지 의심할 여유도 없었다.

정말로 냉기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빙석... 빙석은?'

제갈규는 허겁지겁 진법을 확인했다. 다행히, 세가의 장로가 해준 말이 틀리지 않았다. 빙석 중 하나에 아주 미세한 실금이 가있었다.

"그래도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 빙석에 금이 가있었던 게 원인이었습니다. 이 빙석을 바꾸면 앞으로 냉기가 쌓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공 총관은 어딘가 뚱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제갈규는 아차 싶었다. 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이런 실수를...!'

방금 공 총관이 전장에서 나온 도사의 체면을 존중해달라고 했는데, 도사의 방법을 정면에서 부정한 셈이 됐다.

먼저 도사가 한 일은 쌓인 냉기를 몰아낸 일이고, 그건 대단한 일이 맞지만 이 진법은 제갈세가의 진법이라 아주 사소한 간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빙석에 실금이 가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대뜸 원인을 찾았다고 하면 상대의 체면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빙석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규는 부끄러움과 굴욕감을 참고 빙석을 바꿨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 여기서 화를 내면 세가의 명성에 누를 끼쳤다.

억울하더라도 마무리 짓고 나가야했다.

"훌륭하십니다. 대협!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원인을 찾아내시다니. 언제나 제갈세가의 명성을 흠모해왔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한 번 보게 되니 개안한 기분입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 있는 포쾌가 아첨에 능하다는 것이었다.

평소 아첨이나 아부만 할 줄 아는 자를 경멸하는 제갈규였지만 오늘만큼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까 들어갈 때도 도움이 되더니, 창고 안에서도 도움이 됐다.

제갈규는 연우혁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아랫사람으로서 기특한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 꼭 보답하겠다는 눈빛이었다.

"?"

그러나 연우혁 입장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서 아첨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감사하는 반응을 두 번이나 보이다니.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한한 놈이로군. 제갈세가의 무인이면 이 정도 아부는 많이 듣지 않나?'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전갈을 보내주십시오. 제갈세가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공 총관은 예의 바르게 제갈규를 배웅했다. 제갈규도 절도 있게 총관에게 인사했다. 둘은 생각은 다를지언정 겉으로는 완벽한 예의를 지켰다.

"이봐. 따라오게."

"?!"

연우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제갈규가 자신을 부른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따라오면 알아. 오게."

제갈규는 둔한 포쾌에게 눈치를 줬다.

보는 사람이 많은 대로에서 은 조각을 고맙다고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머무는 객잔에 가서 쥐어주면 포쾌도 눈치껏 이해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리라.

"...예."

연우혁은 수많은 생각을 하며 제갈규의 뒤를 쫓았다. 머릿속으로 여기서 도망친다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지, 혹은 제갈규가 어떤 공격을 해올 것인지 등등을 떠올리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안으로 훑어 본 제갈규의 모습이 매우 평온하고 적개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봤다고 확신할 수 있나?'

연우혁은 상대방의 무공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단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갈세가는 좌도방문의 수법에도 능하지 않은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둘은 객잔 근처에 도착했다. 연우혁은 생각보다 호화롭지 않은 객잔의 모습에 놀랐다. 허름한 객잔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대세가의 무인이 머물 객잔은 또 아니었다.

물론 무림인들이 심심찮게 풍찬노숙하는 자들이라지만 도시에서도 그럴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그게 제갈세가의 무인이라면 더더욱.

제갈규도 신경이 쓰였는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급하게 달려와서 다른 객잔은 방을 구하기 어렵더군."

'아하.'

"훌륭하십니다. 허례허식에 집착하지 않는 검소함이라니. 다른 세가는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갈규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이 포쾌는 정말로 아부가 뛰어났다. 아첨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세가의 일꾼으로 부르고 싶을 정도군.'

수입은 포쾌가 많아도 세가의 일꾼은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제갈규는 한 번 권해볼까 생각했다.

"도, 도련님!"

"?"

객잔 안에서 제갈규가 데리고 온 하인이 뛰쳐나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전... 전낭이 사라졌습니다!"

"...!!"

* * *

객잔은 'ㅁ'자 형태의 작은 2층 건물이었다. 네모로 배치된 건물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는 오래된 떡갈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2층에는 여행자들이 짐을 풀고 숙박하고 있었었다.

당연히 제갈규가 머무는 곳도 2층의 남는 방 중 하나였다.

하인이 제갈규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차를 준비하려고 우물에 갔다 온 사이, 누군가 방 안의 전낭을 가져간 것이다.

"당장 불러와라!"

제갈규는 붉어진 얼굴로 객잔주인에게 명령했다. 상대가 제갈세가의 무인이라는 걸 알아챈 객잔주인이 허겁지겁 뚱뚱한 몸을 놀리며 손님들을 불러왔다.

쉬고 있던 사람들은 짜증이나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내려왔다. 그걸 본 제갈규가 물었다.

"사라진 자는?"

"없, 없습니다."

"다행이군. 1층에 다른 손님은?"

"없었습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1층에서는 점소이가 혼자 졸고 있었을 뿐이었다.

제갈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제갈규가 빨리 돌아온 덕분에 도둑놈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2층에서 머물던 사람들 중 한 놈이 전낭을 훔쳐간 게 분명했다.

"나는 제갈규다. 여기 있는 누군가가 내가 없는 사이를 틈타 전낭을 훔쳐갔다. 너희의 짐을 확인하려 하는데, 거부할 자가 있으면 나와라."

검을 찬 무인이, 그것도 제갈세가의 위세를 앞세우며 저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절하는 순간 사생결단을 하자는 뜻이 되었으니까.

손님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거절하진 못했다.

"샅샅이 뒤져라."

"예!"

하인은 제갈규의 명령을 받고 손님들의 짐을 뒤지고 방 안을 뒤졌다.

그러나 전낭은 나오지 않았다.

"..."

예상이 빗나간 제갈규의 얼굴이 흐려졌다. 멍청한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훔쳐간 전낭을 숨길 정도의 기지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대협. 저희 중에 훔쳐간 도둑이 있다는 법이 꼭 어디 있습니까? 신투라면 벽을 타고 훌쩍 날아와서 훔쳐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재주를 가진 신투가 할 일이 없어서 이런 객잔을 털겠느냐?"

제갈규는 날카롭게 반론했다. 연우혁은 이 제갈세가의 무인이 대다수의 포쾌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신투가 뭐하러 이런 객잔을 털겠는가. 아마 같은 객잔에 묵는 무인이 제갈규의 옷차림을 보고 탐심을 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빨리 캐물어 봐줬으면 좋겠는데.'

연우혁이 해결한 객잔 안 절도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이 중 무엇인지 경우를 좁히려면 수상쩍은 손님들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야 했다.

영안을 써서 훑어봐도 되겠지만, 이제 연우혁도 마구잡이로 능력을 쓰지 않았다. 무림인이 내공을 낭비하지 않듯이 신통력도 마찬가지였다.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익혀야 했다.

"한 명씩 신분을 밝히도록."

제갈규의 으름장에 손님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자기가 뭐하는 사람인지 털어놓았다.

키가 작고 눈매가 가는 남자는 행상인이었다. 봇짐 안에는 우모붓과 황모붓, 먹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필묵을 갖다 파는 사람이었다.

보통 키에 근육이 있는 남자는 야장이었다. 친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 짐 안에는 끌이나 정 같은 도구가 있었다.

마지막 숙객(宿客)은 기녀였다. 짐 안에는 옷가지 한 벌과 화전(花鈿, 화장품의 일종)에 쓰는 가루가 전부였다.

설명을 들은 제갈규는 바로 기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객잔에 머물고 있는 거냐?"

"대협. 그저 객잔에 머문다고 해서 소녀(小女)를 이렇게 핍박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무슨 이유인지 밝히면 그만일 뿐. 나를 우롱할 셈이냐?"

"정인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기녀는 제갈규의 기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고백에 제갈규가 움찔했다.

"정인이라고? 어느 자가..."

"대협.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어떻게 정인의 이름을 팔 수 있겠나이까? 설령 그렇게 해서 정인의 이름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리하면 정인께서 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

제갈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지금 이 기녀는 '정인의 신분을 듣고서 후회하지 않겠느냐'라고 되레 협박하고 있었다. 허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다른 손님이나 객잔주인은 감탄한 눈빛으로 기녀를 쳐다보았다. 기녀가 보여준 신의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대협. 저는 의심가는 분이 한 분 있사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저 분입니다."

기녀는 웃으며 하인을 가리켰다. 하인의 낯빛이 납색으로 변했다.

"모두의 짐을 뒤지고 방을 찾았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면 저 분을 의심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닥쳐라!"

제갈규는 흔들리지 않고 기녀를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갈규를 모셔 온 하인이었다. 저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손님이나 객잔주인은 설득된 모양이었다.

"대협. 혹시 모르니..."

"차라리 포두를 부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제갈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옆에서 가만히 서있는 포쾌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혼란하게 흘러가는데도 포쾌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 거냐? 혹시 의심가는 자가 없느냐?"

"아. 죄송합니다.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저 야장이 은자를 어디에 숨겼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보십시오. 야장이라면 손톱에 철녹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자의 손톱은 깨끗하지 않습니까. 저건 다른 일로 굳은 살이 배긴 자입니다."

손님을 듣고 범인을 바로 깨달은 연우혁은 가짜 야장의 수상쩍은 점을 뽑아서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가짜 야장에게 쏠렸다.

지낭 제갈규 (4)

'손톱이!'

제갈규는 야장의 손톱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오랫동안 시뻘건 화로 앞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쇠를 만지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흔적이 영구적으로 남고, 그 중 하나가 손톱의 색이 변한다는 것이라는 건 제갈규도 이미 알고 있었었다.

그러나 야장의 손톱을 확인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손톱의 색을 어느 누가 확인한단 말인가. 그저 몸이 단단하고 근육이 있으니, 그리고 야장이 쓸 법한 도구를 갖고 있으니 야장이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제갈규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세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자가 이런 것 하나 발견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옆에 있는 포쾌한테 감탄했다. 이걸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리다니.

'설마 공 총관이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나?'

제갈규는 총관이 대체 왜 그렇게 저 젊은 포쾌의 칭찬을 늘어놓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칭찬에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면?

정말 저 포쾌가 명석한 판단으로 도둑을 붙잡은 거라면?

그렇다면 총관의 칭찬도 말이 됐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은 포쾌가 도둑을 붙잡았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부끄러워졌다. 아랫사람들을 부리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 제갈규였다. 그런 만큼 아랫사람이 가진 재주를 보는 눈이 필요했는데, 눈앞에서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정작 한 번에 도둑을 알아맞힌 포쾌는 여상한 표정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반응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그, 그러게! 대협! 저놈의 손톱이 깨끗합니다!"

"어머... 참으로 놀라운 일이나이다. 대협."

"아,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제 손톱은 원래 특이해서 철녹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 짐을 확인해보셨잖습니까!"

야장은 당황해서 변명했다. 그제야 생각에 잠겨 있던 연우혁이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떠올랐습니다. 저 야장을 도와준 건 점소이입니다. 야장도 방 안에 있었던 만큼 하인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볼 수 없는 상황이지요. 점소이가 1층에서 신호를 보냈을 겁니다."

야장과 달리 점소이는 얼굴을 관리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려움과 긴장으로 점소이는 꺽꺽 소리를 냈다.

연우혁은 머릿속에서 해결한 사건 중 어떤 사건이었고 또 그 사건의 내막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느라 조금 시간이 걸린 거였지만, 주변 사람들 눈에는 저 포쾌가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유추해낸 것처럼 보였다. 행상인은 숫제 두려운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점소이의 방을 잘 뒤져보십시오. 전낭이 나올 겁니다."

"점소이의 방을? 창밖으로 던져서 다른 놈에게 주워가게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닙니다. 대협. 저 둘은 한두번 도둑질을 한 게 아닌 자들. 밖으로 던졌다가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목격한다면 대번에 들킬 수 있습니다. 저들은 객잔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던졌을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말입니다."

연우혁은 'ㅁ'자 구조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무를 가리켰다. 2층에서 1층으로 던지면 받기 쉬웠다. 게다가 손님도 없는 한적한 상황 아닌가. 아마 저 둘은 그것도 노렸을 것이다.

"큭!"

점소이가 의자를 옆으로 밀치고 달려 나갔다. 몸은 제법 날랬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였다. 제갈규는 바로 보법을 펼쳐 객잔의 문 앞을 막고 점소이를 제압했다.

"움직이면 베겠다!"

그러는 사이 야장도 움직였다. 야장은 한 손에는 끌, 다른 손에는 정을 들더니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연우혁은 급히 영안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무공을 익힌 자였다.

경지는 연우혁과 같은 삼류였지만, 삼류도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나름 심법으로 내공을 쌓고 초식을 펼칠 줄 알아야 인정받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삼류는 무공을 익히는 무림인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경지였다. 이것도 안 되는 흑도의 무뢰배나 왈패들이 수두룩했다.

연우혁은 속으로 후회했다.

'범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바로 확인부터 할 걸 그랬군.'

옆에 제갈규가 있어서 괜찮겠지 싶었는데, 설마 상대가 그냥 도둑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도둑일 줄이야.

연우혁은 삼류에 갓 들어선, 굳이 따지자면 삼류 초입.

상대는 무공의 경지는 똑같은 삼류였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지 움직임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삼류 중입과 말입 사이의 경지였다.

하지만 연우혁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상단전으로 사용하는 신통력이었다.

'움직임을 본다!'

"죽어라, 포쾌새끼야!"

야장은 눈앞을 막는 연우혁을 죽이고 창문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끌과 정이 위협적으로 휘둘러졌다.

무림의 병기는 길어지면 강해지고 짧아지면 위험해지는 법.

연우혁이 무림 경험은 적었지만 저런 부류의 기문병기에 잘못 당하면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가 남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았다.

'다행히 독 같은 건 없다.'

달려드는 야장을 피해 연우혁은 뒤로 보법을 밟았다. 위국보법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보법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야장은 당연히 전진하면서 연우혁의 공간을 뺏으려고 들었다. 앞으로 전진하는 기세를, 뒤로 물러서는 보법이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그 때 야장의 앞을 탁자가 막았다. 연우혁이 탁자가 있는 쪽으로 유도한 탓이었다. 야장은 분노해서 탁자를 걷어찼다. 객잔주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틈을 타 연우혁은 조금 더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연우혁은 이번에는 의자를 끌어왔다. 걷어찬 탁자가 가볍게 막히고 다시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됐다.

야장은 짧은 사이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저 젊은 포쾌 놈이 혓바닥을 놀려 일을 망친 것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무슨 운이 어찌나 좋은지 물러나는 곳마다 집물들이 늘어져서 길을 막아댔다.

'통한다!'

연우혁은 안도했다.

영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꿰뚫어보면 어느 방향으로 투로를 뻗칠지도 예상이 가능해졌다. 그 예상을 바탕으로 의자나 탁자를 다급히 끌어왔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매우 좋았다.

'아직 두통은 없다. 더 쓸 수 있겠군.'

연우혁은 심호흡을 하며 집중했다. 심안을 사용하는 요령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너무 집중해서 쓰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요 운만 믿는 개새끼가!"

'허점!'

탁자를 밀어낸 야장의 자세가 노골적으로 무너졌다. 초식을 펼칠 때 나오는 내공의 흐름이 끊기고,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렸다.

만약 상대가 훨씬 더 고수였다면 의도된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했겠지만 상대의 경지는 연우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우혁은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결심했다.

'일격에 제압하는 게 가장 좋다!'

물론 연우혁은 저번처럼 상단전의 내공을 끌어다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 하단전에 쌓은 얼마 안 되는 내공만을 최대한 끌어다 쓸 생각이었다.

그래도 상대의 급소에 맞으면 제압은 충분하리라.

'최대한...!'

연우혁이 갑자기 달려들자 야장은 당황해서 끌을 휘둘렀다. 포쾌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서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포쾌의 주먹이 번개처럼 뻗어져 나왔다.

"컥!"

야장은 가슴팍을 두드리는 강한 타격에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야장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야장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늦게 달려 온 제갈규는 놀라워하는 눈으로 포쾌를 쳐다보았다.

"무공을 익힌 거냐?! 어떤 무공이지?!"

"위국권법을 익혔습니다."

"아."

그제야 포쾌들한테 주어지는 허섭스레기 무공이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제갈규는 민망해했다.

"...그래도 자질이 뛰어나군. 경지가 같아 보이는데, 이렇게 단숨에 제압하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무림에서는 운도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초식이었지?"

"진충보국입니다."

말도 안 되는 초식 이름에 제갈규는 물어본 걸 후회했다.

* * *

객잔주인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사죄했다. 점소이가 손님의 물건을 훔쳐갔으니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객잔주인을 도와줬다.

"이 점소이는 보통 교활한 게 아니라 눈치 채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고맙구려, 포쾌!'

객잔주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생각했다.

평소 포두와 포쾌 놈들은 돈 뜯어가는 도적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되니 돈을 바친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저 포쾌한테 돈을 바친 적은 없었지만...

제갈규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전낭도 도로 찾았고. 이번은 넘어가도록 하지."

"대협께서는 실로 협의지사십니다! 제 자식의 자식에게도 대협의 은혜를 말하겠습니다!"

제갈규는 무시하고 하인이 갖고 온 전낭에서 은자를 꺼냈다. 원래 쪼개서 조각을 줄 일이었지만, 오늘 전낭을 찾아준 솜씨를 보자 제갈규는 은자를 쪼갤 생각이 사라졌다.

"받게."

"이, 이건..."

포쾌가 당황하자 제갈규는 왠지 모를 쾌감이 들었다. 아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착해하던, 통달한 도사 같은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아무 이유 없이 보상을 후하게 주진 않네. 자네는 받을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대협.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갈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연우혁은 객잔주인에게 도구를 빌려 은자를 아주 얇게 잘라냈다.

"이거 받으십시오. 탁자와 의자를 부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아니! 이건..."

객잔주인은 연우혁보다 더 당황했다.

살면서 은 조각을 주는 포쾌는 만나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들도 다 나갔는데 받으십시오."

"이런 은혜를..."

객잔주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런 포쾌를 보니 평소 속으로 포쾌들을 싸잡아 욕한 게 부끄러웠다.

"자네 뭐하나?"

"탁자와 의자를 부순 것에 대한 사죄로 은자를 조금 나눠드렸습니다."

"허."

제갈규는 포쾌의 말에 살짝 멍해졌다.

저런 부분은 생각치도 못했을 뿐더러,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포쾌가 저런 걸 배려해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은자는 다시 포쾌한테 돌려줘라. 내가 지불할 테니."

제갈규는 은자를 쪼개서 내밀었다.

원래라면 점소이도 관리 못해서 전낭을 도둑맞게 한 객잔주인에게 불쾌해야 했지만, 막상 객잔주인의 얼굴을 보자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은자를 베푸는 것만으로도 유쾌할 수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규 아우 있나?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

한동안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던 객잔 입구에 낯선 방문객이 나타났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무공. 그리고 제갈규를 편하게 부르는 사이. 연우혁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오대세가 무인이군.'

인싸 팽주성 (1)

물론 그것만으로 연우혁이 상대를 판단한 건 아니었다.

등에 찬 커다란 도(刀)와 제갈규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근골. 심후한 내공보다는 단련된 외공이 먼저 느껴지는 외양.

'오대세가 중 하북팽가 아닌가?'

"팽 형 오셨습니까?"

추측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죄 없는 객잔의 손님들을 깨워서 윽박지르던 제갈규였지만 하북팽가의 팽주성 앞에서는 꽤나 예절을 따졌다. 팽주성은 객잔 안을 둘러보더니 수염 난 뺨을 긁적였다.

"신기하군! 규 아우가 이런 곳에서 머무를 줄은 몰랐는데. 나야 이런 곳에서도 발 뻗고 잘 수 있다지만..."

"일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그리고 원래 이 정도로 어지럽혀진 객잔은 아니었습니다."

제갈규는 난장판이 된 1층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다급히 변명했다. 객잔주인은 눈치를 보더니 슬쩍 부서진 잔해를 치웠다. 연우혁은 객잔주인의 일을 도왔다. 객잔주인은 아직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제 이런 곳에서도 잘 수 있다면 규 아우에게도 좋은 일이지. 잘 수 있는 객잔이 많은 게 좋지, 적은 게 좋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팽주성도 무림인인 만큼 객잔 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갈규 같은 오대세가의 무인이 있는데도 소란을 피울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실은 그게 말입니다."

제갈규는 살짝 민망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교묘한 두 도둑놈이 객잔에 들어온 손님의 전낭을 훔치는 수법을 들은 팽주성은 깜짝 놀랐다.

"그럼 객잔주인이 시킨 건가? 아니, 왜 저렇게 내버려둔 건가?"

부서진 나뭇조각을 싸리비로 쓸어내던 객잔주인은 깜짝 놀라서 떨었다.

"그게 아닙니다. 팽 형. 그러니까 도둑 놈은 야장하고 점소이였다는 겁니다. 점소이가 위에 신호를 보내고, 도둑 놈이 훔친 거죠."

"으음. 모르겠군."

팽주성은 다시 한 번 수염 난 뺨을 긁적였다. 그걸 본 제갈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북팽가 출신으로 도(刀)의 재능이 뛰어난 팽주성은 호탕하고 의협심 강한 성격으로 벗들이 많은 무인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건 아니지만 제갈규는 가풍 때문에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싫어하는 기색을 잘 숨기지 못했다.

때문에 무림에 벗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벗 중 하나가 이 팽주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팽주성에게도 단점이 있었으니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는 영 둔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팽 형에게는 나 같은 벗이 있으니 상관없다.'

제갈규는 그런 단점이 팽주성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본인 같은 벗이 옆에서 도와주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묻는 호탕함이야말로 팽주성의 장점이었다.

"하여간 도둑놈들은 다 잡았습니다. 이 연 포쾌 덕분입니다."

"그래. 포쾌가 대단하단 거 아닌가."

대충 긴 대화의 앞과 뒤만 들은 팽주성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런데 팽 형께서는 여기는 무슨 일로?"

"으핫핫! 규 아우. 전낭을 누가 가져갈 뻔해서 아직 얼이 빠져 있나보군. 내가 여기 왜 있겠나?"

"그게... 아. 설마 백면신투 때문입니까??"

"그래."

"그런 허황된 소문 때문에 오시다니."

"나만 온 게 아니야. 다른 친우들도 같이 왔다네. 참. 당령 소저도 왔고."

잔해를 치우며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우혁은 제갈규의 표정이 변화하는 걸 보고 속으로 씩 웃었다.

제갈규가 당가의 소저한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영안이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백면신투는 오년 전에 한창 무림을 시끄럽게 했던 도둑일세."

묻지도 않았는데 제갈규는 연우혁에게 설명을 했다. 그 어조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존중이 담겨 있었다.

무림에는 주기적으로 도둑들이 생겨났다. 당장 제갈규의 전낭을 노린 도둑만 봐도 생각보다 도둑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붙잡혀서 손목이 잘리거나 목이 잘리거나 둘 중 하나를 맞이하게 됐다. 가끔 둘 다 같이 맞이하는 도둑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극복하고 악명을 쌓으면 그 도둑은 나름 투(偸)가 들어가는 별호를 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백면신투는 그런 영광스러운 도둑놈 중 하나였다. 만약 오년 전에 남궁세가의 담벼락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좀 더 영광스러운 도둑놈이 되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처참하게 죽은 도둑과 관련된 소문 따위는 오년 정도면 사라져야 했지만, 근 반년 사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백면신투가 생전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베껴갖고 나왔다더라.

-백면신투가 그 무공의 비급을 어딘가에 숨겨놨다더라.

연우혁이 받은 어정쩡한 무공도 원칙적으로는 외부에 유출하면 안 되는 무공이었는데, 명문정파의 무공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 번 밖으로 유출되었다가는 인근에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아무리 정파라 하더라도 문파의 무공이 걸린다면 목격자를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소문은 무림인들을 자극했다.

비(非) 명문정파 출신 무림인들은 혹시라도 모를 비급서에 대한 탐욕으로.

명문정파 출신 무림인들은 혹시라도 모를 비급서를 회수하고 사문의 인정, 다른 문파의 감사를 받을 목적으로.

물론 제갈규는 심드렁했다.

"팽 형. 몇 번이고 말했잖습니까. 그 소문은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됩니다. 백면신투는 죽었고, 설령 백면신투의 부하나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무엇하러 그런 소문을 내겠습니까. 아마 어느 호사가나 괴팍한 놈이 헛소문을 낸 겁니다. 세간에는 남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서 웃으려는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음. 저 사람은 친구가 적을 거 같군.'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갈규의 말은 얼핏 보면 논리적이었지만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팽주성이 나름 먼 길을, 그것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달려왔는데 거기다가 '그거 헛짓거리요'라고 말하는 게 좋게 들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중책(中策)은 '힘내십시오 팽 형은 꼭 찾으실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거였고 상책은 '저도 같이 가서 도와드리겠습니다'였다.

연우혁은 제갈규가 참 친구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으핫핫! 맞네. 맞아. 말이 안 되지."

그러나 팽주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박장대소했다.

"나도 들으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나. 그리고 다른 벗들이 오고 싶어 하는데 또 말릴 수는 없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팽주성은 제갈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여기 규 아우가 있으니 설령 헛소문이라 하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때. 나를 도와주겠나?"

"알겠습니다. 팽 형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저 사람은 친구가 많을 것 같군.'

"그리고 저 포쾌도 도와달라고 하면 어떤가?"

"?!"

팽주성이 갑자기 부르자 연우혁은 기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름이었던 것이다.

"연 포쾌 말입니까?"

"그래. 규 아우 말을 들으니 아주 똑똑한 거 같던데."

"똑똑한 수준이 아닙니다. 팽 형은 신통력에 대해 좀 아십니까? 옛날에 고서에서..."

"아. 아. 그건 모르겠고."

팽주성은 제갈규를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책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재주가 좋은 거 아닌가?"

"으음. 맞습니다. 데려가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규 아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가보군. 꼭 데리고 가세."

졸지에 갑자기 동행하게 되자 연우혁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물론 연우혁의 상황을 보면 무림인과 친분을 맺긴 해야 했다.

계속해서 무공을 수련하고 높은 경지를 엿봐야 하는데 이건 무림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의 원래 구상은 좀 더 차근차근 준비해서 접근하는 것에 가까웠다.

포쾌로 공을 세워서 포두의 자리를 받은 다음, 잔뜩 뇌물을 바쳐서 판관이나 추관 같은 제대로 된 관직을 따내고, 관직을 앞세워 무림인들과 만나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이라니.

심지어 평화로운 만남도 아닌 탐욕에 눈이 벌게진 무림인들이 우글거리는 자리 아닌가!

"제, 제안해주신 건 영광스럽습니다만 저는 포쾌로서 맡아야 할 직무가 있습니다."

"잠깐 빠지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제 직위가 낮다지만 엄연히 나랏일을 하고 녹봉을 받아가는 사람입니다. 감히 어떻게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어... 포쾌가 말인가?"

팽주성은 당황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포두나 포쾌들은 쇄은 하나만 줘도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팽주성을 칙사 대접하던 자들 아닌가?

"맞습니다. 대협! 이 연 포쾌는 한경에서 보기 드문 명포쾌이자 진정한 충신입니다! 관리들에 이런 사람만 있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을 겁니다!"

"..."

객잔주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 떨면서 나서자 연우혁은 더 당황했다.

고맙긴 했는데 좀 과한 것 같았다.

"팽 형. 여기 주인의 말이 맞습니다. 이 연 포쾌는 뇌물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 사재를 털어서 불쌍한 상인들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건..."

연우혁은 제갈규의 말을 말리려고 했다.

무언가 와전이 있었던 것이다.

객잔 기물을 부순 걸 물어주는 일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이걸 사재를 털어서 도와줬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연우혁이 백성밖에 모르는 청백리 같지 않은가.

기회를 봐서 적당히 은자를 모아야 하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사양하고 싶은 착각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런 포쾌가 있었다니. 세가에 있었을 때 수십 명이 넘는 포쾌를 봤었지만, 그 중 연 포쾌 같은 포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연우혁은 지적하는 대신 빠르게 이 자리를 빠져나온 다음 한동안 무림인들을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제갈세가의 이름을 너무 우습게보고 있었다.

"그러니 팽 형. 포두한테 직접 가서 말하고, 연 포쾌의 재주를 빌리도록 합시다. 소문이 돈 마을이라면 한경에서 그리 멀지 않을 텐데 그 마을의 혈사를 막는 것도 마땅히 포쾌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규 아우. 아우는 정말 내 지낭일세!"

"과찬이십니다. 팽 형."

'무림인들 진짜 개짜증나는군.'

* * *

포쾌들은 연우혁을 데려가도 좋다고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포쾌들이 무림인의 옷자락만 보고서 모두 숨어버린 탓에 오 포두가 수락했지만, 어쨌든 수락은 수락이었다. 오 포두는 매우 감탄하며 연 포쾌를 쳐다보았다.

-낭중지추라더니. 옛말에 틀린 말이 없군 그래!

-신부작족(信斧斫足)이란 말도 있긴 합니다만...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문이 돌고 있는 팔강촌 근처에는 벌써 무림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갈규는 포쾌에게 매우 깊은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수상쩍은 무림인이 보이면 바로 말하게."

"저기 걸어오는 무림인은 방금 사람 셋을 죽였습니다."

"뭐라!? 잠깐, 혹시 정파의 무인을 죽였나? 혹은 양민들을?"

"아닙니다. 낭인 셋을 죽였습니다."

"다행이군. 저건 수상쩍은 무림인이 아닐세. 다른 수상쩍은 무림인을 보면 말하게."

인싸 팽주성 (2)

제갈규는 연우혁의 말에 평정을 되찾았다.

원래 정파 출신이 아닌 무림인들이 열 명 이상 모이면 시체가 최소 한 구는 나오는 법이었다.

지금 팔강촌처럼 욕심에 눈이 먼 무림인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면 칼부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무림인이 누구에게 칼을 휘두르냐였다.

정파의 무인이면 모를까 낭인들끼리 싸움 붙은 것까지 일일이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건 판관이나 현령이 할 일이었지 제갈규가 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무림인들이 제갈규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팽주성이 깜짝 놀라 외쳤다.

"잠깐, 잠깐. 규 아우! 그게 무슨 소린가?"

'역시.'

연우혁은 팽주성의 반응에 안도했다. 딱 봐도 친구 없을 것 같은 제갈규와 달리 팽주성은 벗들이 많은 협객답게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낭인 셋을 죽인 걸 알아낸 건가?"

"..."

연우혁이 정파무림의 미래에 대해 고뇌하는 동안 제갈규가 대신 대답했다.

"팽 형. 여기 있는 연 포쾌는 평범한 포쾌와 다릅니다. 상대의 옷차림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낭인 셋을 죽인 걸 알아낸 건가?"

"...그 답은 연 포쾌가 할 겁니다. 연 포쾌?"

제갈규는 팽주성의 질문에 자신도 답을 모른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다행히 팽주성은 제갈규가 모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연우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연우혁이 설명을 위해 대답했다.

"저기 무림인은 왼손잡이입니다."

"어째서?"

"왼쪽 어깨가 내려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 그래."

"그런데 저 무림인의 왼쪽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습니다."

제갈규는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은 이해를 못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오른손잡이나 그렇게 차고 다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그래."

"게다가 걸음걸이가 어색하고 자꾸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는 게, 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권사(拳士)일 겁니다."

팽주성은 감탄했다. 실로 이 포쾌에게는 신통력이 있었다.

"그걸로 낭인 세 명이 죽은 걸 알아낸 거군!"

"팽 형. 한 명만 나왔습니다."

"아. 그렇군 그래."

"저 자의 발목을 보면 검녹색 피가 엉겨 붙어 있습니다. 독이 묻은 암기에 맞았다는 건데, 멀쩡히 걸어 나온다는 건 해독제를 먹었다는 겁니다. 저런 낭인이 이 상황에서 해독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상대를 죽이고 뺏은 거로군."

독을 쓰는 무림인들은 언제나 그 독에 중독됐을 때를 대비해 해독제를 가지고 다녔다. 팽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하나는?"

"주먹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방금 죽인 두 낭인의 피일수도 있지 않나?"

"허리춤에 찬 검이나 발목에 난 상처 모두 시간이 좀 됐습니다. 검의 검올(劍兀, 검의 검신과 손잡이를 연결하는 부분)이나 상처에 묻은 피는 모두 말라붙었지만 주먹의 피는 아직 뚝뚝 떨어지니 한 명을 더 쓰러뜨린 게 분명합니다."

팽주성의 눈동자가 부릅떠지고 두 뺨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만큼 감탄한 것이었다.

"규 아우! 아우가 왜 그리 극찬을 했는지 알 것 같네. 이 포쾌는 앉아서 천 리를 보겠군그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연우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상대방의 정보를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읽어내는 영안과, 해결한 적 있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조합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뭐하는 놈인지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던 것이다.

당장 걸어오는 상대도 기억에 있었다.

이건 원래라면 무림인의 시체 네 구가 쓰러져있고 이 네 구가 왜 생긴 건지 맞혀야 하는 사건이었다. 어쩌다보니 우연히 죽었어야 할 무림인이 운 좋게 살아나서 걸어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크헉..."

팽주성이 감탄해서 탄성을 내뱉는 사이 걸어오던 무림인이 옆으로 쓰러졌다.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넘어진 무림인은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 수풀에 처박혔다.

팽주성과 일행이 내려가서 보니 그 주변에는 난잡한 싸움의 흔적과 시체 네 구가 놓여 있었다. 굴러 떨어진 무림인은 숨통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

"실로 안타깝군 그래. 관신여말(觀身如沫), 환법야마(幻法野馬). 단마화부(斷魔華敷), 불도사생(不覩死生)."

팽주성은 합장하며 불경의 구절을 외웠다. 그리고 시체들을 잘 눕혀 양지 바른 곳에 안치했다.

'잠깐. 네 구의 시체면 그게 있지 않나?'

연우혁은 시체 중 독이 묻은 암기를 썼다가 목이 베인 시체를 찾았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시체에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시체의 바지춤 속을 뒤지자 다른 무인들이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연우혁은 재빨리 찾던 것을 꺼냈다.

"보십시오."

"이게 뭔가?"

"장보도입니다. 아마 이 인근 무림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림인들은 단순히 소문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문은 쉽게 무성해지지만 또 쉽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장보도는 욕망에 눈이 먼 무림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해주었다. 설령 헛소문이라 하더라도 장보도를 확인하지 않고 넘길 수 있는 무림인은 많지 않았다.

'따라온 이상 공은 세워야지.'

이렇게 끌려왔으니 공이라도 세워서 돌아갈 때 뭐라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손해보는 장사였다.

"팽 형. 보십시오. 가짜 장보도까지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한 짓이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장보도일 수도 있지 않나? 가짜라 하더라도 누군가 이득을 보려고 가짜를 만들어 판 걸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자. 자.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다른 친우들과 합류하세나.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림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연우혁은 시체에서 잔돈푼을 챙기고 암기와 비도를 챙겼다. 가난한 포쾌는 무기를 살 돈도 마땅치 않으니 이럴 때 챙겨놔야 했다.

* * *

지금 팔강촌 주변에는 평소 보이던 행상인이나 떠돌이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이 재빠른 사람은 무림인들이 보였을 때부터 멀리 도망쳤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 힘든 사람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팔강촌 안에서 무슨 살벌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모인 무림인들 중 믿을 구석이 있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마을 안에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잃을 것 없는 낭인들이나 떠돌이 무림인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하며 서로 치고받았지만, 마을 안에서는 암묵적인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름이 조금 되는 무림인들끼리 부딪쳐서 좋을 게 없는 만큼 서로 싸움을 일으키지 말자는 규칙이었다.

팽주성이 데리고 온 친우들은 마을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촌장이 직접 쑤어 온 죽을 먹던 무림인들은 팽주성과 제갈규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팽 형. 이제야 오셨습니까."

"팽 형!"

"아니, 저건 제갈규 아닌가? 저 자는 왜?"

"쉿. 조용히 하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갈세가의 지혜는 꼭 필요한 것 아닌가. 팽 대협도 그걸 알고 데리고 온 거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팽주성만 보고 반가운 얼굴로 일어난 것에 가까웠다.

반갑게 환대하던 무림인들은 연우혁을 보고 의아해했다.

"포쾌? 포쾌가 이런 자리에는 왜 온 거냐?"

"설마 주제 넘게 무림인을 추포해가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

무림인들 중 몇은 노한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다.

사람들이 많은 저잣거리라면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가진 무림인이라도 포쾌를 베기에는 눈치가 보였겠지만, 여기는 보는 눈이 별로 없는 외진 곳이었다. 건방진 포쾌 하나 정도는 베어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림인들에게 포두나 포쾌는 탐욕스럽게 은자를 밝히면서 정작 눈이 마주치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쥐새끼들이었다. 호의를 보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다들 내 말을 들어보게. 이 포쾌는 정말이지 경국지재(經國之才)를 가지고 있네."

"아닙니다. 팽 대협."

팽주성이 지나치게 칭찬하려고 하자 연우혁은 대화를 끊기 위해 나섰다.

포쾌를 좋아하지 않는 무림인들 앞에서 그런 칭찬은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마뜩찮게 보는 자들이 있었다. 팽주성을 따르는 무인 중 하나인 염일림은 분노해서 외쳤다.

"이 자식. 한낱 포쾌가 어디 감히 팽 형의 말을 끊는 것이냐!"

"염 아우! 그게 무슨 말인가. 당장 사과하게! 녹봉을 받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아,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염일림이 원한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자 연우혁은 팽주성을 말리려고 했다. 사과를 받아봤자 딱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원수만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팽주성은 엄격한 얼굴로 염일림에게 사과를 시켰다.

'가시방석 같군.'

연우혁은 싸늘해진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팽주성의 친우거나 팽주성의 부하에 가까워보였다. 물론 팽주성은 후자도 친우라고 하겠지만, 그건 본인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컸다.

'오대세가 출신들은 몰라도 다른 가문 출신들은 맞먹기 쉽지 않을 테니.'

당장 염일림 같은 무인만 봐도 부하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팽주성이 아무리 호인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모여 있지는 않았다. 하북팽가라는 이름과 그 가문에서 나올 떡고물들을 기대하는 건 사람인 이상 당연했다.

'저들은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고, 그럼...'

연우혁은 팽주성의 부하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진짜 친우들을 둘러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칼에, 어딘가 애교스럽게 보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소매 끝으로 드러나는 단련된 손가락을 가진 여자.

'사천당가겠군. 제갈규의 표정을 보니 저 사람이 당령 소저고.'

오대세가 출신의 귀한 핏줄들을 구분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본인의 겉모습도 그렇지만 오대세가 출신이 아닌 무림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잡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팽주성과 맞먹거나 그보다 조금 더 큰 키. 그리고 외공에서 더 단련되었다는 게 느껴지는 근육질의 겉모습. 여자는 당장이라도 옆 마루에 놓인 대도(大刀)를 들고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아보였지만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북팽가? 팽주성의 가족인가?'

"내 동생일세. 앗. 이미 알아챈 건가?"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하. 겸손은. 자. 들어보게. 이 포쾌는 왜 데리고 왔냐면..."

팽주성은 마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 포쾌가 어떤 포쾌인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제갈규가 한 설명과 자신이 직접 본 걸 섞은 다음 허풍을 삼 할 정도 섞은 설명이었다.

제갈규는 끼어들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포쾌인 것이지. 대단하지 않나?"

"그... 그렇군요."

"놀랍습니다."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못 믿는 이들은 팽주성이 교활한 포쾌에게 속았거나 허풍에 속은 게 아닌가 의심의 눈빛을 던졌다.

"포쾌라고 하셨습니까?"

"앗. 예."

팽주성의 여동생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을 걸어왔다. 연우혁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들어보니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재주입니다. 팽 대협께서 과하게 평가해주셔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가 예전에 불가사의한 일을 하나 겪었는데, 혹시 포쾌께서 이걸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뭐지?'

"일단 경청해보겠습니다."

"포목점을 운영하는 어느 내외가 하루는 친족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났는데..."

"혹시 바깥양반이 아내를 죽인 겁니까?"

팽주성의 여동생이 놀라서 눈을 떴다.

인싸 팽주성 (3)

사실 팽주희는 이 불가사의한 일에 대한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인근의 포두와 현령은 무능하여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대충 넘어갔지만 팽주희는 듣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포목점을 운영하는 어느 내외가 하루는 친족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났는데, 밤을 보내기 위해 근처 마을에 들렀다가 아내가 변을 당했다. 누가 이런 흉악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무능한 현령은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서 심문했지만 당연히 쓸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팽주희는 처음부터 남편을 붙잡아서 심문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런 상황에서 아내를 죽일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마을 사람들 중에 남편이나 아내와 원한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재물을 탐해서 죽인 거라면 남편도 같이 죽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편을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능한 현령과 포두들은 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버렸다. 그 덕분에 남편은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포목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팽주희는 놀라워하며 포쾌를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소문으로 이 일에 대해 들었다 하더라도, 어떤 일인지 다 듣기도 전에 팽주희의 생각을 알아맞히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정말 팽주성의 말대로 이 포쾌에게는 신통력이 있는 것일까?

'아니. 하지만...'

어리숙한 양민들과 달리 오대세가의 직계쯤 되면 신통력에 이상한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살면서 신통력을 가진 무인을 한두번 정도는 만나보는 것이다.

무슨 눈만 마주쳐도 마음 속 깊은 생각을 읽어내고, 백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은 수상쩍은 약장수나 할 소리였다.

정말로 뛰어난 불승(佛僧)도 고작해야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알아차리는 정도였고 이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신통력이었다.

당연히 눈앞의 포쾌가 팽주희의 속마음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연우혁은 상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바로 말을 이어갔다.

포쾌 노릇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법은 이미 체득한 상태였다.

먼저 강렬하고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다음 상대가 너무 놀라거나 수상해 할 경우,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붙여준다.

그러면 이제 상대가 알아서 연우혁의 능력을 상상 속에서 비범하게 부풀려줬다.

연우혁의 신통력이라는 건 결국 주변에 있는 정보들을 세밀하게 흡수하는 능력. 딱 거기까지였지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하거나 읽어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연우혁이 무림에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해결해봤다지만 가끔 논리보다는 힘이 우선일 때가 있는 법.

'사실 가끔도 아니지.'

그럴 때 연우혁이 언제나 주변을 다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부풀리고 상상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멋모르는 상대라면 알아서 겁먹고 자백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포쾌는 너무 인식이 안 좋아.'

대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포쾌라는 직업의 인식은 연우혁이 파악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안 좋았다.

양민이고 무림인이고 만나면 질색부터 하는데 고관대작들은 어떻겠는가.

나중에 뇌물을 바쳐서 더 높은 관직을 노린다 하더라도 수많은 경쟁자가 있을 텐데, 그럴듯한 명성은 든든한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저 같은 포쾌한테 물어보실 정도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하신 걸 보니, 누군가 죽은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먼 길을 떠났을 때 누군가 죽었다면 도적을 만나거나 중병에 걸렸을 경우를 생각하기 쉬운데, 그랬다면 저한테 물어보시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내외 중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고 위장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내가 죽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팽주희는 자신도 모르게 편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연우혁은 공손히 대답했다.

"친족을 만나러 갔으니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남편일 것이고, 그렇다면 남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지만 내가 내막을 알고 있는 건 어떻게 짐작했나?"

"그건 간단합니다. 대(大) 하북팽가의 피를 이으신 분께서 이런 일을 짐작하지 못하고 물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연우혁의 아첨에 팽주희는 싱긋 웃었다. 아첨인 걸 알면서도 기분 좋게 들리는 아첨은 드문 법이었다.

"아첨이 심한데? 하북팽가의 위세는 대단하지만, 그 위세에 지혜가 들어가 있지는 않거든."

그 말에 연우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은 대답이었으니까.

팽주희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말을 이어갔다.

"놀랍군. 내 오라비가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허풍을 잘 걸러듣는 건 또 아니거든. 정말 능력 있는 포쾌를 데리고 왔... 아. 하긴. 제갈 소협이 데리고 왔지."

"팽 대협도 데리고 오자고 하셨습니다."

팽주희는 별로 믿지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그래서, 아까 그 남편 말인데.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현령은 무능해서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렸고, 내가 들었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지. 아무 근거도 없이 남편을 불러와서 심문할 수도 없었고."

질문을 받은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기억 속에서 사건을 다시 떠올렸다.

포목점을 운영하는 내외, 마을에 들렸다가 아내가 칼에 당해 쓰러짐, 그렇다면 분명 수상했던 점은...

"시체를 누가 가장 먼저 발견했습니까?"

"응?"

"시체 말입니다. 아내의."

"으음... 남편이 발견했지."

"위치는?"

"마을 근처의 수풀이었나?"

"주변 지리에 익숙한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남편이 먼저 발견한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라면 그걸 이유로 심문했을 겁니다."

"...제갈세가보다 뛰어난데!"

팽주희는 연우혁의 등을 후려쳤다. 내력을 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컥...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미 다 해결해 본 사건으로 이렇게 칭찬을 듣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제갈세가보다 뛰어나단 말은 제갈세가의 무인들한테 찔리기 좋았다.

"아. 정작 들어야 할 이야기를 안 들려줬군. 앉아봐."

팽주희는 옆을 탁탁 치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이 정도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에 대해 알고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지금 백면신투의 보물이 어딨는지는 대충 알고 있어."

"예? 그렇습니까?"

팽주성을 따르는 무인들과, 팽주성과 친한 무인들로 구성된 이 일행은 생각보다 능력이 있었다.

다른 낭인 나부랭이들이 지나가는 나무꾼을 붙잡고 '아는 대로 불어라'라고 윽박지르는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은 먼저 소문이 언제부터 돌았는지를 확인했고, 그 소문이 어디서 돌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했으며, 장보도 몇 장을 얻어서 어딜 가리키는지도 확인해 놓은 상태였다.

'아니, 생각보다 유능하군!'

연우혁은 놀랐다.

그냥 생각 없는 무림의 젊은 후기지수들 모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긴 오대세가의 일원쯤 되면 생각이 없어도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당장 가문의 힘으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 새로 갖고 온 장보도도 확인했는데 위치는 똑같더군. 산채야. 팔강산에 자리 잡은."

팽주희는 손가락으로 마을 저편의 산을 가리켰다. 꽤 크고 울창한 산이었다.

"위치는 파악하셨는데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다는 건... 의견이 갈리시는 겁니까?"

포쾌의 예리한 말에 팽주희는 즐거운 기색으로 대도의 날을 두드렸다. 똑똑한 자들과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산채까지 들어가서 싸우는 건 계산을 하게 되니까."

산적들은 생각보다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무공은 떨어질지 몰라도 타고난 잔혹성과 야만성이 그걸 벌충했다.

특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들에게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약초꾼이나 사냥꾼 등등이 주로 피해자였다. 한 번 잡히면 목이 잘리고 시체가 나무에 매달렸다.

날 밝고 탁 트인 곳에서 오대세가의 위엄을 앞세우며 비급을 찾는 일과, 어둡고 습하고 길 없는 곳에서 끈질긴 산적들과 사투를 벌이는 일은 전혀 달랐다. 들어가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와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러니까 장보도도 수상하고, 소문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지 않나! 분명 장보도를 갖고 온 놈 때문에 소문이 퍼진 거겠지. 다른 장보도는 장물아비가 그려서 판 것일 테고.

-팽 형! 결정을 해주십시오.

-팽 형!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아. 저래서 다투는 거였나.'

그러는 사이 제갈규가 일갈했다.

"멍청하기는. 백면신투의 부하나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멍청하겠나? 그런 수상쩍은 뜨내기 장물아비한테 물어볼 정도로?"

"떠돌이가 백면신투의 안가(安家)나 숨겨놓은 거처를 발견한 걸 수도 있지!"

"백면신투가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했겠냐!"

"안 할 건 또 뭐요!"

'이런.'

연우혁은 제갈규의 등장으로 반전되는 분위기를 보며 아차 싶었다.

반으로 갈려 있던 의견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갈규의 반대 편으로.

산채에 들어가기 싫어서 미적거리던 자들도 제갈규가 멍청하다고 하자 오기가 생겼는지 들어가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얌전히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후회해봤자 분위기는 이미 끝장난 뒤였다. 팽주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가서 확인해보세. 설령 아무것도 없더라도 산적을 토벌해서 나쁠 건 없겠지."

* * *

'산채, 장보도, 비급...'

연우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해결했던 사건들 사이에서 단서를 뽑아보려고 애썼다.

연우혁이 해결했던 사건들은 지금처럼 '백면신투가 숨긴 비급에 대한 소문이 왜 돌고 있을까?'같은 거대한 질문에 대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급을 찾으러 왔다가 죽은 네 사람에 대한 사건, 말을 할 때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신기한 무림인에 대한 사건 등 이런 식으로 쪼개져서 알려줄 뿐이었다.

이렇게 해결한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 이 중 어떤 게 비급과 관련된 사건들인지 떠올리는 건 오로지 연우혁의 몫이었다.

'산채에서 일어난 사건이 뭐가 있었지? 산적 전원 독살... 주변 지형을 보니까 아니고. 미동(美童)을 두고 결투한 산적들인가? 아니... 아닐 것 같군. 비급 때문에 무림인들이 돌아다니는데 그런 한가한 짓을 하진 않겠지.'

팍, 파파팍-

길도 없는 산을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았지만, 무림인들의 체력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선두에 선 무림인들이 병장기를 휘두르자 없던 길이 만들어졌다.

팽주희는 화승(火繩)처럼 보이는 노끈을 꺼내 불을 붙였다. 말린 쑥으로 만든 일종의 모기향이었다.

사천당문에서 나온 당령은 향낭(香囊)을 꺼내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벌레들이 감히 접근하질 못했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주변에 날아드는 벌레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슬금슬금 염일림 쪽으로 이동해서 벌레들을 피했다. 염일림은 벌레들이 많이 달라붙는 체질이었다.

충신 연우혁 (1)

그런 움직임을 염일림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벌레 때문에 다가왔다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염일림은 눈엣가시인 포쾌가 가까이 붙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꺼져라. 포쾌 새끼야."

'상황 파악이 좀 더디군.'

상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면 모를까 듣도 보도 못한 정파의 군소 가문 출신인 이상 연우혁은 별로 두렵지가 않았다.

물론 연우혁이 그냥 포쾌였다면 염일림 같은 무림인도 두려워해야 했겠지만, 연우혁은 그냥 포쾌가 아니었다.

팽주성을 비롯해 여러 오대세가 무인들에게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다고 평가 받는 신통력 포쾌 아닌가!

"염 대협."

"뭐냐?"

"팽 대협께서 저를 꽤 좋게 봐주신 건 알고 계십니까?"

"어쩌라는 거냐? 네가 말도 안 되는 낭설로 팽 형을 속인 걸 모를 줄 아느냐?"

"제가 팽 대협에게 가서 염 대협이 의형(義兄)을 배신할 상을 타고 났다고 말하는 게 좋으십니까, 아니면 염 대협의 사주가 의형을 수생목(水生木)의 이치로 살리는 사주라고 말하는 게 좋으십니까?"

"...미친 새끼가!"

무시했던 포쾌한테 일격을 당한 염일림은 경악했다.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포쾌는 아랑곳하지 않고 염일림을 마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염일림의 폐부까지 꿰뚫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뭘 원하는 거냐? 뭘??"

"그저 저를 너무 핍박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입니다. 포쾌로서 일을 하러 왔는데, 염 대협께서 계속 핍박하시면 제가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염일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굴욕적이었지만 포쾌 놈이랑 드잡이질을 벌여서 염일림에게 좋을 게 없었다. 심지어 저 포쾌를 마음에 들어하는 무림인이 팽주성 말고도 더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염 대협!!"

연우혁은 감사하다 말고 염일림의 뒷목을 붙잡고 힘차게 잡아당겼다.

생각보다 포쾌의 힘이 강하자 염일림은 깜짝 놀랐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힘이었다.

'뭐야 이 놈?'

쉬이익!

염일림 발 앞에 화살이 하나 꽂혔다. 팽주희는 그걸 보고 놀라워했다.

아무리 염일림의 경지가 팽주성이나 팽주희 같은 오대세가의 무인에 비하면 낮다지만, 그래도 포쾌보다 반응이 늦을 줄이야.

염일림은 화살이 나온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포쾌 놈이 잡아당긴 것에 화를 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고마워해야 할지 헷갈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제갈규는 화살을 뽑았다. 화살 끝에는 서찰이 하나 묶여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녹림의 이름으로 더 걸어오면 죽이겠다는군."

"하!"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모두 비웃는 기색을 보였다.

녹림을 우습게 봐서가 아니었다. 사실, 녹림의 세력은 무림에서 무시하기 힘들었다. 오대세가나 구파일방도 굳이 충돌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녹림칠십이채라는, 정식으로 혈맹을 맺은 이들의 이야기였다. 무림에는 이 혈맹에 들어가 있지 않은 무허가 녹림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원래 녹림(綠林)이란 말은 녹림칠십이채가 혈맹을 맺기 전부터 존재했던 만큼 사실 산적들이 자기들을 녹림이라고 해도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녹림칠십이채도 관대하게 자기들의 이름을 산적들에게 허락해줬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산적들이 녹림칠십이채의 이름을 팔던 말던, 누구에게 습격을 당하거나 토벌을 당하던, 녹림칠십이채는 혈맹을 맺지 않은 산채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여기 팔강채는 녹림칠십이채와 아무 상관없는 산채.

당연히 무림인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녹림의 이름을 팔아봤자 가소로울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어도 모자랄 판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입니다."

"빠르게 들어가서 처리한다."

연우혁은 팽주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적 놈들의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요?"

"글쎄, 우두머리가 이류쯤 되지 않을까."

팽주희는 화승을 빙글 돌려서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것도 높게 쳐준 거고."

무공을 익힌 무림인과 익히지 못한 사람은 꽤 큰 차이가 났다. 그리고 무공서를 본 적도 없고 심법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산적들은 당연히 그 실력이 일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의 산적들은 우두머리가 이류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것이었다.

"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서 함성이 터지자 무림인들이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연우혁은 주먹을 움켜쥐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팽주성은 커다란 도를 움켜잡고 앞에 나타난 산적을 쳐다보았다.

"무기를 내려놔라.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다."

"산에 들어와 놓고 무슨 염병할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이 어르신께서 네놈의 혀를 뽑아주마!"

산적은 수부(手斧)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놈은 팽주성에게 바윗돌을 하나 차서 날리더니 재빨리 옆의 나무로 빠졌다.

"팽 형! 조심하십시오!"

제갈규가 재빨리 외쳤다. 산적 놈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팽주성의 애병(愛兵)은 그 커다란 크기 때문에 좁은 곳에서는 위력이 반감됐다.

산적 놈은 지형에 능한 걸 이용해서 팽주성을 빽빽한 나무 사이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팽주성은 싱긋 웃었다.

"규 아우. 걱정 안 해도 되네!"

도가 번뜩이더니 나무가 잘려나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팽주성은 보법을 밟으며 돌진했다. 남은 나무들이 튕겨나갔다.

"이런 멧돼지 같은 새끼가!"

산적은 경악했다. 생각보다 상대의 무공이 강했던 것이다.

'일류의 경지!'

이립(而立)을 조금 넘긴 놈이 일류의 경지라니. 내공과 외공이 빈틈없이 어우러진 팽주성은 석탑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산적은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잘못 생각했다!'

산적은 보법을 밟으며 물러나려고 했지만 팽주성이 한 발 더 빨랐다. 앞에 도달하더니 전력을 다해 베어버렸다. 피가 튀고 산적이 즉사했다. 이 주변을 주름잡던 놈의 허무한 최후였다.

"조심하게, 다들! 무공을 익혔어!"

팽주성은 산적이 이류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는 걸 눈치챘다.

이 산적이 우두머리일 수도 있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큭!"

아니나 다를까 염일림은 고전하고 있었다. 앞에 나타난 산적이 제법 난적이었던 것이다.

무공의 경지는 서로 삼류로 비슷했지만 산적이 든 창이 제법 길었다. 먼저 선공을 당하자 거리를 좁히기 쉽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 얕은 흠집만이 늘어났다.

'이런 젠장. 강한 사람 옆에 붙어 있었어야 했다.'

연우혁은 염일림이 창수(槍手)한테 쩔쩔매는 걸 보고 한탄했다.

지금 눈앞에 적이 연우혁에게 덤벼드는데 하필이면 도와줄 사람이 염일림밖에 없었던 것이다.

염일림은 평소에 무공 단련을 소홀히 했는지 산적도 하나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아무리 창이 길이에서 유리하고, 선공을 뺏겼다지만 무림인으로서 산적 하나 이기지 못하다니.

'아니, 아니다. 이 산적 놈들...?'

연우혁은 영안을 켜고 사방에서 덤벼드는 산적들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전원이 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오대세가의 자제들보다는 낮은, 삼류의 경지였지만 산적들이 이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뭐야. 포쾌? 포쾌 놈이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토벌이라도 하러 온 거냐?"

"..."

그리고 연우혁 앞에 선 산적은 무려 이류의 경지였다. 오대세가의 자제들과 맞붙어도 그리 밀리지 않는 경지.

하필 그런 상대가 다른 무림인들이 아니라 자기 앞에 나타날 줄이야. 연우혁은 이를 악물었다.

후웅!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산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산적은 곤봉 끝에 철편이 달린 편곤을 사용했는데, 초식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위력이 살벌했다.

초식 하나의 형(形)을 온전히 따라할 수 있어야 이류의 경지라고 쳐주는 법.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산적의 초식은 그냥 휘두르는 것 같아 보여도 연우혁의 숨을 막고 퇴로를 지워댔다. 영안은 연우혁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연우혁의 마음을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침착하자.'

연우혁은 영안을 극대화시켰다. 상대의 정보가 더욱 더 깊게 들어왔다.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과, 경맥을 타고 흐르는 내력의 흐름.

'아니?'

편곤을 찌르던 산적은 의아해했다.

포쾌 놈이 생각보다 잘 피했던 것이다.

포쾌 주제에 무공을 익힌 것도 신기했지만, 자기보다 수준이 낮아 보이는데 공격을 저렇게 피하는 게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주변의 지형은 산적에게 익숙하면 익숙했지 포쾌한테 익숙할 리가 없는데,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마냥 공격을 피해댔다.

퍽!

처음으로 연우혁의 공격이 산적에게 들어갔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묵직한 통증에 산적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포쾌 새끼가 감히...?"

'괜히 쳤나?'

연우혁은 상대가 격노하자 잘못 선택했나 후회가 들었다.

방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달아 무기를 휘두른 탓에 호흡이 가빠진 산적이 초식 사이에 빈틈을 보인 것이다.

이 때다 싶어서 주먹을 내질렀는데 부위가 부위라 타격을 크게 주지 못했다.

"뒤져라!"

산적이 편곤을 움켜쥐더니 비장의 초식을 펼쳤다. 호혈호자(虎穴虎子)라고 불리는, 곤법의 마지막 초식이자 주변을 일격에 제압하는 초식이었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그 초식을 읽어냈다. 그 범위가 생각보다 넓자 연우혁은 경악했다.

창이나 편곤 같은 무기는 실로 그 위력이 사기적이었다.

'물러서기엔 늦었다. 몸을 숨길 바위는 없다. 그렇다면...!'

영안 덕분에 느려진 시야 속에서 사고만이 빠르게 가속하고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미 한 번 해봤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위국권법의 첫 초식이 준비되고 주먹이 뻗어져 나왔다. 머리 쪽이 열리는 감각과 함께, 연우혁이 쌓은 내공과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주먹에 실리는 게 느껴졌다.

콰직!

맹렬하게 날아든 편곤을 박살낸 것은 연우혁의 주먹이었다. 산적의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연우혁의 눈도 비슷하게 충격으로 흔들렸다.

쓰러질 각오를 하고 상단전의 내공을 끌어내자 아직 단련되지 않은 단전과 혈도가 조금씩 찢어지며 기혈이 흔들린 것이다.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보법을 밟고 다음 초식을 펼쳤다. 편곤이 박살난 산적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슴에 권격을 적중당했다.

가슴뼈가 박살나는 감각이 느껴졌다. 연우혁은 다시 한 번 머리 쪽이 열리면서 연우혁이 쌓은 내공과 다른 내공이 주먹에 실리는 감각을 맛봤다.

'큭. 내상이...!'

상단전의 내공은 무공에 쓰지 말라고 들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쓰게 될 줄이야.

연우혁은 숨을 헐떡이며 심법의 구절을 되뇌며 내력을 운기했다. 다행히 내상이 심하진 않았다.

"대, 대체 그게 무슨 초식이냐?"

꼴이 엉망이 된 염일림이 경악의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딱 봐도 다른 산적보다 더 강해보이는 놈이었는데 일개 포쾌가 제압한 것이다.

"충...군애국입니다."

"뭐라고?"

"못 들으셨으면 됐습니다."

냉수사 고송 (1)

연우혁이 한 명을 쓰러뜨리고, 염일림도 다른 한 명을 때려눕히자 다른 무림인들도 산적들을 일제히 끝장냈다.

가장 이 전장에서 여유가 있는 팽주성은 대도를 풍차처럼 가볍게 돌리며 산적들을 긋고 조각냈다.

"아까 편곤을 든 놈이 제법이던데. 염 아우가 상대한 건가?"

팽주성은 피 묻은 도를 털어내며 물었다.

아까 뒤쪽에서 편곤을 휘두르던 산적 놈이 제법 뛰어나 보여서 신경이 쓰였는데, 급히 달려오니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여기 포쾌가 상대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대단하군!"

팽주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주변에서 산적들을 눕히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다른 무림인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포쾌가 신통력이 있어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류의 경지는 되어 보이는 산적을 쓰러뜨리다니?

"숨겨둔 구명절초가 있었습니다. 운도 좋았고 말입니다."

"생사를 건 싸움에 무슨 운이 있나. 승자가 강했을 뿐이지. 그렇게 안 봤는데, 숨겨진 한 수가 있었군그래. 한경의 양민들은 참으로 든든하겠어."

"나는 짜증이 나고 말이다."

싸늘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아무도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상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일제히 기겁해서 무기를 붙잡았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여기 있는 무림인들은 전부 제압할 자신이 있는 것처럼.

"냉수사(冷手蛇) 고송!!"

상대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본 제갈규가 고함을 질렀다. 말이 고함이지 사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고송은 흑색 무복을 걸치고 있는, 깡마른 체구의 무인이었다. 살짝 늙수그레해 보이는 이 평범한 중년이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냉수사 고송이라고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무림인이라면 무복 소매 끝에 튀어나온 비쩍 마른 두 손이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시푸른 색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두 손은 빙요수(氷妖手)라는 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손이었다.

하지만 고송의 악명은 마공을 익혀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무림에 사공이나 마공은 많았지만 모두가 악명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고송의 악명은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에서 나왔다.

누군가 자신의 일을 한 번 방해하면 양쪽 뺨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墨刑)을 가하고, 두 번 방해하면 코를 자르는 의형(劓刑)을 가하며, 세 번 방해하면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을 가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명문세가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적에서 고송의 지랄 맞은 성질머리를 알 수 있었고, 또 그 무공 실력도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무림인은 저런 짓을 했다가는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처절하게 척살당했을 테니까.

꿀꺽-

오늘 팽주성이 처음으로 침을 삼키며 긴장한 기색을 내보였다. 이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 중 가장 경지가 높은 만큼 고송의 경지에 대한 압박감도 컸다.

'냉수사 고송이 절정의 경지였군...!'

게다가 고송 정도 되면 온갖 싸움에 이골이 날 정도로 경험이 많은 고수.

이제 막 일류의 경지에 오른 팽주성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여기 있는 무림인들이 다 같이 덤벼도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큰일났다.'

그리고 유일하게 팽주성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뒤에도 있었다. 바로 연우혁이었다.

고송이 나타나자마자 영안으로 상대를 확인한 연우혁은 기겁했다. 팽주성은 가볍게 뛰어넘는, 아무리 봐도 사악해 보이는 마두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승산이 없어보였다.

상대가 경험이라도 일천하면 빈틈을 만들어서 도망을 쳐보겠는데, 괜히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니라는 듯이 고송은 허랑한 듯 서있으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없나? 빠져나갈 방법이?'

"선배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팽주성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리자 고송은 제갈규를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내 별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나?"

화살이 겨눠지자 제갈규는 신음소리를 냈다. 설마 하니 마두가 그걸 듣고 겁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 선배님. 규 아우를 데리고 온 것은 저입니다! 부디 화가 있다면 저에게만 풀어주시길!"

"닥쳐라. 어차피 죽는다면 다 같이 죽을 놈들이."

고송의 말에 무림인들은 더욱 더 긴장도를 높였다. 누군가 철전이라도 하나 떨어뜨린다면 바로 터질 것처럼 팽팽한 공기였다.

"고 선배님. 여기서는 하북팽가, 그리고 제갈세가와 사천당문의 이름을 봐서라도 제발!"

"...흥."

태도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고송은 기세를 살짝 거뒀다.

상대가 오대세가의 이름을 존중하겠다는 기색을 보이자 팽주성은 안심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부하들을 너희가 죽인 거냐?"

"부하... 셨습니까?"

"그래."

무림인들의 얼굴이 다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산적들의 솜씨가 어째 예사롭지 않다더니 고송의 부하였단 말인가?

만약 산적들이 고송의 부하였다면 서로 대화로 일을 마무리하기는 힘들었다. 고송도 사파에서 체면이 있는 만큼 웬 어린놈들이 자기 부하들을 도륙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연우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선배님. 부하라고 하지만 다 같은 부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은 이번에 새로 들인 부하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맞다."

고송은 선선히 인정했다.

무림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당혹스러운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산적들의 허리춤 뒤편에 노끈으로 만든 덧신과 밧줄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고, 피부가 똑같이 검게 탔으며, 손가락에는 산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잡혀 있었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이 아니라 이 산채에 원래 있던 산적입니다. 아마 고 선배께서 산채에 방문하신 뒤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허..."

상황도 잊고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설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건 무림인들만이 아니었다. 고송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짐승을 보듯이 연우혁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고송은 그제야 연우혁이 포쾌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무림인 놈들이 포쾌는 왜 데리고 다니는 거냐? 설마 포쾌에게 잡히기라도 한 거냐?"

"그게 아닙니다. 선배님."

팽주성은 배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여기 포쾌가 사실 한경에서 손꼽히는 명포쾌인데...

'음. 칭찬도 수치스러울 수 있군.'

연우혁은 고송이 그들을 쳐다보는 눈빛에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고송은 지금 팽주성을 비롯해서 여기 있는 무림인들을 모두 머저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대세가 출신이라 그런지 웬 사기꾼 놈의 수작에 홀딱 넘어간 게 분명하다고!

"내가 무림에 오래 살았지만 뛰어난 포쾌는 들어본 적 없고, 정직한 포쾌는 더더욱 들어본 적 없다. 뛰어나고 정직한 포쾌 같은 소리 하고 있군."

"하오나..."

"닥쳐라. 한 가지는 믿어줄 만하군. 신통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여기 놈들의 정체를 맞췄겠지."

고송은 홱 돌아섰다.

"따라와라."

"예?"

고송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에서는 거역할 경우 오대세가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팽주성은 다른 무림인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네들을 빠져나가게 해주겠네.'

'무슨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죽겠지.'

팽주희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팽주성은 못난 동생을 한 번 노려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 후미진 산채에는 왜 머무르고 있는지 아느냐?"

"정말 궁금합니다."

연우혁은 냉큼 대답했다.

괴팍한 마두긴 해도, 이럴 때 재깍재깍 대답해서 호감을 사두는 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팽주희는 연우혁을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백면신투가 숨긴 비급 때문이다."

"...!!!"

"모르는 척 할 것 없다. 너희들도 소문을 듣고 왔겠지. 안 그러면 이딴 아무것도 없는 산채를 토벌하러 오대세가 출신의 후기지수들이 오겠나."

고송은 오대세가 출신 후기지수들을 보는 순간 여기 일행이 무슨 목적으로 온지 알아차렸다. 고송 본인도 그것 때문에 온 거였으니 더더욱 알아차리기 쉬웠다.

"그 산적 놈들은 내 수발을 들라고 살려놓았다. 몇 초식 가르쳐줬더니 지깟 놈들이 무슨 녹림이라도 된 것마냥 침입자를 죽이겠다고 달려 나가더니... 크핫핫!"

고송은 진심으로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주제 파악도 못하는 잡배 놈들이 무공 실력 조금 늘었다고, 이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천하제일인이 된 것마냥 사냥꾼을 죽이고 약초꾼을 죽여대더니 마침내 적수를 만난 것이다.

이런 놈들이 처참하게 죽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드물었다. 이 맛에 무공을 가르치는 걸지도 몰랐다.

"으핫핫핫핫!"

연우혁은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팽주성도 연우혁을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이게 다 계산된 행동인데.'

아까부터 계속 영안으로 고송을 훑고 있었는데, 대답을 맞춰주고 같이 웃어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도 모르고 저런 시선을 보내다니.

뚝!

산채 앞에 도착하자 고송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팽주성을 보며 말했다.

"이봐. 팽가의 애송이 놈아. 아까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문의 이름을 봐달라고 했었지?"

"그랬습니다."

'위험하다.'

연우혁은 등에 진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송의 감정이 위협적으로 변했던 것이다.

"맞게 봤다. 내가 아무리 마두라 불려도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문 세 곳을 적으로 돌릴 순 없지. 한 곳도 버거운데."

"..."

팽주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땀을 흘리며 경청했다.

"하지만 전부 다 죽여 버린다면 누가 알까? 응? 이 어르신이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전부 죽어버렸는데 말이다."

"살인멸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고민하고 있다."

고송은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진심으로,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을 죽이고 잘 처리해도 훗날 들킬 수도 있으니까. 아까 내 별호를 함부로 부른 건방진 놈에게도 손찌검 하나 하지 않았지? 이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비급은?"

"...예?"

"비급 말이다. 너희 애송이들이 돌아가서, 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여기로 다시 온다면? 내가 찾는 비급을 뺏어간다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고송은 비웃었다.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믿을 만큼 내가 머저리라면, 난 이미 땅 속에 묻혀서 썩어가고 있었을 거다. 이 어르신을 본 순간 너희들은 지금쯤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백면신투의 비급이 소문이 아니라 정말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그런데 그냥 넘길 리가 있나!"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지른 고함은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에게 강렬한 압박을 줬다. 별다른 무공이 아닌 그냥 살기를 담은 고함일 뿐인데도.

심령에 타격을 받은 무림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자. 너희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다. 백면신투의 비급을 찾아내라! 찾아낸다면 살려주겠다. 너, 제갈세가의 애송이. 네놈에게 손 하나 대지 않은 건 네 머리를 믿어서다."

"하, 하지만..."

제갈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흔히 제갈세가의 명성에 대해 오해하곤 했지만, 제갈세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었다. 지혜를 사용하더라도 최소한 사용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아는 정보라고는 여기 위치가 전부인데, 냉수사가 찾지 못한 비급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장보도 말고 다른 단서라도 있습니까?"

"없다. 있었으면 장보도를 여럿 뿌리지도 않았겠지."

"단... 단서가 더 필요합..."

"찾았습니다."

"!??!"

포쾌의 말에 고송까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냉수사 고송 (2)

"찾았다고?"

"예."

"하!"

고송은 기뻐하는 대신 살기를 드러냈다.

절정의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는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다른 자들의 근육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방금 고송의 고함에 비틀거렸던 무림인들은 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지만 이렇게 집요한 살기라니.

'고송의 경지가 이 정도일 줄이야!'

팽주성은 심장의 맥박이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정파 출신의 무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파 출신의 무인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근거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기초와 내실을 탄탄하게 다지고 내공의 정순함을 중요시하는 정파의 무공과 달리, 사파의 무공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식들과 빠르게 쌓이는 내공의 양을 중요시했다.

이런 탓에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파의 무공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 초식의 불균형과 내공의 불순함이 고수로 올라가는데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런 만큼 사파 출신의 고송도 정파 출신의 다른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그 경지가 반 수에서 한 수 아래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방금 보여준 살기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경지와 상관없이 저런 식으로 살기를 날카롭게 쏘아 보내 사지를 제압하다니. 다른 절정의 고수에게서는 본 적 없는 고송만의 재주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팽주성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른 친우들을 빠져나가게 하겠다는 결심을 후회했다. 고송의 실력을 얕본 오만한 결심이었다.

아무리 사파의 고수라 하더라도 어떤 재주가 있을지 쉽게 예단해서는 안 됐었는데.

"놀랐나보군?"

화를 내던 고송은 팽주성이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고 씩 웃었다. 화를 냈다가 웃는 모습이 마치 광인 같았다.

"보자. 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오호라! 설마 일이 틀어지면 내 앞을 막아서 시간을 끌 생각이었는데,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달은 거냐? 내 인귀공(人鬼功)에 어지간히도 놀랐나보군."

고송은 팽가의 자제가 자신의 초식에 놀란 것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예전 남궁세가의 제왕검형(帝王劍形)을 본 적이 있었지.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낭인들을 점혈한 것마냥 멈춰 세우는 그 검법. 아느냐? 그걸 따라한 거다."

신나서 떠들던 고송은 갑자기 화를 벌컥 냈다.

"이 포쾌 놈아! 이 어르신은 일을 한 번 방해하면 묵형을, 두 번 방해하면 의형을, 세 번 방해하면 월형을 가한다. 하지만 네놈은 특별히 나를 화나게 만들었으니 거열형이다. 알겠느냐?"

연우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단전에 쌓인 내공이 두려움을 없애고 마음을 안정시켜줘서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물러서는 건 죽음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송 같은 괴팍한 마두 앞에서는 오히려 허세를 부려야 했다.

"고 대협께서 저를 거열에 처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저처럼 미천한 포쾌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기에 고 대협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겁니까? 알려주신다면 저승에 가서도 곱씹으며 반성하겠습니다."

화를 내던 고송은 기름이라도 바른 것마냥 포쾌의 말에 피식 웃었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면 더 화가 치솟았을 텐데 저렇게 말하니 오히려 침착해졌다.

"오냐. 혀만 산 포쾌 놈아. 내 알려주마. 여기 산채에 머문 지가 몇 년이다. 알겠느냐? 몇 년 동안 이 산채 주변을 샅샅이 뒤진 거다. 아까 뒤진 산적 놈의 아비가 누구랑 붙어먹어서 나갔는지, 작년에 죽인 약초꾼의 자식이 몇 살인지, 내가 이걸 왜 알고 있겠느냐? 응?"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네놈이 찾았다고 나를 우롱해? 이게 네놈이 거열에 처해질 이유다!"

"하지만 대협. 제가 정말 찾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가 찾았다고? 정말로?"

"예."

"너는 지금 여기 산채에 와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고,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았고. 그런데 찾았다?"

"예."

"그럼 말해봐라!"

"먼저 여쭙겠습니다. 혹시 백면신투는 이 산채 출신이 아닙니까?"

"...!"

고송의 눈빛이 변했다. 고송과 백면신투를 제외한다면, 심지어 여기 산채 놈들도 모르는 정보였던 것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고 대협께서 이 산채에 오랫동안 머무르셨다는 건, 그만큼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장보도 한 장으로는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그보다 더 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변 출신이라거나..."

"그것만으로?"

"예. 그리고 도둑이 보물을 숨긴다면 자신한테 익숙한 곳에 숨기지 않겠습니까."

"...맞다! 백면신투 놈한테 들었지. 놈에게 직접. 재주가 없지는 않구나."

고송은 눈앞의 포쾌를 인정했다.

발자국 하나 떼지 않고 백면신투의 출신을 맞히는 솜씨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왜 명문세가의 코흘리개들이 포쾌를 데리고 다니나 했는데, 저 정도 재주라면 오히려 이해가 갔다.

고송은 생전의 백면신투와 나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어쩌다 우연히 목숨을 구해주게 되어서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데, 잔뜩 취한 백면신투가 이런 말을 했더랬다.

-내 고향... 내 고향에, 훔친 것들을 숨겨놨지.

-금붙이? 숨기지 말고 쓰는 게 나을 거다. 내가 보기에 너는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테니까.

-금붙이 따위는 무슨. 나도 그런 건 얻는 대로 던진다고.

백면신투는 킬킬대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비급이야. 비급.

-네깟 놈이 훔친 비급이 얼마나 대단하면 대단하다고...

-과연 그럴까? 범망공도 내 손아귀에 들어왔는데.

-...네놈이 그걸 어떻게?!

범망공(梵網功).

서장(西藏)의 불승들은 무림의 불승들과 다른 기묘한 무공들을 익히고 수련했다. 범망공은 그 중 가장 기묘하고 독특한 무공에 속했다.

불순하고 탁한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내가기공!

고송처럼 빠르게, 하지만 불순물이 많은 내공을 쌓아올린 사파의 무인에게 범망공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실제로 고송 본인은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서 점점 더 내공의 한계를 느끼고 신음하고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올랐지만 계속해서 이런 내공을 유지했다가는 발전이 없었다. 점점 육신의 노화가 찾아오는 나이에 무공의 발전이 멈추는 건 치명적이었다.

-소림의 장경각에서 베꼈지. 땡중들은 내가 가지고 나온지도 모를 걸.

-내게 팔아라. 천금을 주겠다!

-천금은 내게도 있어.

-팔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죽인다면 평생 찾지 못하겠지. 너는 장경각에 들어가지도 못할 테니까.

-...원하는 게 뭐냐? 뭐냔 말이다!

-아무것도! 내가 왜 목숨을 구해준 네게 모질게 굴겠나?

-그러면 설마 그냥 주겠다는 거냐?

-아니. 그럴 순 없지. 너는 내 목숨을 구해줬지만, 내 실력을 모욕하기도 했으니까. 십 년 안에 죽는다고?

-그건...

고송은 사과하려고 했지만 백면신투는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내기를 제안했다.

-십 년 후. 내가 그 때까지 살아있으면 백면신투 어르신의 솜씨를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라고. 그러면 범망공을 내주도록 하지.

-좋다. 좋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범망공을 준다는데. 하지만 자네가 죽는다면? 나는 어디서 받지?

-그것도 당연히 생각해놨지. 팔강채. 내 보물은 팔강채에 다 숨겨놨어. 내가 죽는다면 거기 가서 찾으라고.

그런 내기가 허망하게 백면신투는 오대세가를 잘못 건드려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고송이 사람을 제대로 본 거였지만, 고송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을 찾을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강채에 도착해서 찾기 시작했는데도 도무지 나오는 게 없었다. 해가 뜨고 달이 떠도 달라지는 건 한 수씩 던져줬던 산적 놈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뿐.

약이 오르기도 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때, 찾아온 포쾌가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맞춰버리니 고송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것만으로 모든 걸 알아낸단 말인가?

'대충 됐나?'

연우혁은 고송의 감정을 확인했다. 분노가 사라지고 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이제 알려줄 때가 된 모양이었다.

사실, 아까 고송이 비급을 찾아내라고 소리를 질렀을 때부터 연우혁은 비급이 어디 있는지 깨달은 상태였다.

산채 뒤에 위치한, 낭떠러지 너머의 하늘을 찌를 듯한 가파른 절벽과 그 위의 기묘한 새들을 보자마자 사건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절벽 아래에 스물 두 구의 시체가 있다. 사인은 낙사. 전원이 무림인이다. 무림인들은 왜 여기서 죽어있는가?

밥 잘 먹고 할 일 많은 무림인들이, 절벽 위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 아래에서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은 기묘한 현상.

대체 이 무림인들은 왜 기어오르다 죽은 것일까?

'진짜 말도 안 되는 답이었다.'

정답은 절벽 위 새 둥지에 비급이 숨겨져 있었고, 그 비급을 챙기러 갔다가 새들에게 습격을 받아서였다.

저 새들은 평범한 새가 아닌, 석획조(石獲鳥)였던 것이다.

이 새들은 단단한 돌을 먹고 부드러운 나무껍질로 둥지를 만드는 요괴에 가까운 새였는데,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적이 있으면 가차 없이 돌을 쏘아내고 부리로 찍어서 낙사시켰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저런 드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며 기습당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 이 사건은 '대체 어떤 미친 놈이 절벽 위 둥지에 비급을 숨겨놓나'정도였지만, 지금 이 절벽과 날아다니는 석획조를 보니 모든 게 연결되었다.

저걸 누가 숨겨놨겠는가?

백면신투가 숨겨놨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백면신투는 여기 출신일 것이고, 고송이 여기 매달리는 것도 직접 들어서일 것이고...

"저기 보십시오. 고 대협. 저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무슨 새라니... 그냥 새 아닌가?"

"혹시 산적들이 저 절벽 쪽에는 가까이 가는 걸 피하지 않았습니까?"

"!"

"저 새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석획조입니다. 돌을 먹고, 돌로 사냥감을 죽이는 포악한 놈이죠."

"지금 말 돌리는 거냐?"

"놈은 둥지를 지을 때 나무의 껍질을 파헤쳐 부드러운 속껍질로 둥지를 만듭니다. 먹는 건 딱딱해도 부드러운 둥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백면신투는 여기서 오래 산 산적이었습니다. 석획조의 성질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거고요."

"설, 설마!"

고송 대신 제갈규가 비명을 질렀다.

"저 둥지가?!"

"예. 비급을 찢어서 석획조에게 물려준 겁니다. 둥지 자체가 비급이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어떻게 말이..."

"절벽에 생긴 둥지의 색들을 한 번 확인해보십시오. 색이 다른 둥지가 분명 있을 겁니다."

고송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놀랍게도 이 포쾌의 말대로 다른 둥지와 색이 다른 둥지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냉수사 고송 (3)

굉음과 함께 고송이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고송은 약초꾼처럼 손으로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꾸역꾸역 올라가지 않았다. 마치 절벽을 평지처럼 뛰듯이 수직으로 달려서 올라갔다.

그 놀라운 신법에 아래에 있던 무림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정도였다.

석획조들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무림인을 죽이기 위해 돌을 쏘아내는 석획조들의 기세는 어지간한 군대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고송도 만만치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펴자 강한 기류의 흐름과 함께 허공에서 북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먼 거리의 적을 장력으로 타격하는 상승의 수법, 격공장(隔空掌)이었다. 탄궁으로 쏜 것처럼 살벌하게 날아드는 돌멩이들이 허공에서 박살나고 떨어졌다.

고송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연달아 공중을 찌르자 날카로운 지력이 석획조들의 급소를 찔렀다. 몸이 돌처럼 단단한 새였지만 고송이 뿜어낸 지력은 그 껍데기를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

고송은 일갈하며 허리춤에서 채찍을 하나 꺼내들었다. 흰 뱀의 껍질을 엮어서 만든 채찍이 쭉 늘어나더니 마침내 목표로 했던 둥지에 닿았다. 돌처럼 단단하게 절벽에 고정되어 있던 둥지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고송도 뛰어내렸다. 고송은 정신없이 둥지를 파헤치더니 한 줌의 종이뭉치를 들어올렸다.

"찾았다!"

고송의 눈빛에는 광기 어린 환희가 엿보였다. 늙은 고수는 체면도 잊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찾았다, 찾았어! 범망공이다. 범망공이야! 포쾌, 네가 나를 살렸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고 대협!"

저 멀리 절벽 아래에서 외치는 고송의 모습에, 연우혁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사파의 무인은 기분이 좋을수록 더 조심해서 접근해야 했다. 언제 감정이 뒤집힐지 알 수 없었으니까.

"괜찮은 건가? 냉수사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제갈규는 고송이 살인멸구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범망공은 고송이 몇 년 넘게 노리고 있었던 무공이었고, 강호에는 자신의 무공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림인들이 즐비했다.

"그러진 않을 겁니다."

물론 영안으로 고송을 확인한 연우혁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송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고송은 난폭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주판을 튕기는 성격이었다. 당장 아까도 오대세가의 핏줄들은 일부러 손을 대는 일을 피했었다.

범망공이 희귀한 무공이라지만 소림의 정식 무공도 아닌 서장의 무공, 게다가 필사본이니 소림의 추적이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오대세가의 무인들을 죽여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받아라!"

고송은 아까 둥지를 수확할 때 썼던, 흰 뱀 같은 채찍을 꺼내더니 연우혁에게 던졌다.

"무공에 대한 보답이다. 하하!"

"받을 수 없습니다!"

연우혁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러나 고송은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라 포쾌의 거절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백사격각편(白蛇隔角鞭)이다. 오행산에 사는 커다란 흰 구렁이를 잡아서 독에 절이고 절인 놈이지. 소싯적에는 이 놈 덕을 많이 봤다. 가지고 가서 써라! 목숨을 한 개 정도는 구해줄 테니까."

"대협. 정말로 받기 어렵..."

"아. 편법(鞭法)이 없겠군. 옛다."

고송은 '백사편법'이라고 쓰여 있는 꼬질꼬질한 무공서를 하나 던졌다. 누가 봐도 고송이 직접 쓴 것 같은 무공서였다.

"내가 채찍을 쓰면서 만든 수법들을 기록했다. 심법은 따로 없지만 이것만 해도 쓸만할 거다. 저잣거리의 어지간한 삼류 무공 따위보다야 훨씬."

"그게 대협..."

연우혁은 계속 거절하려고 했지만 고송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순식간에 경공을 펼치더니 저 멀리 날아가서 사라졌다.

옆에 있던 팽주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둘 다 쓸만하잖아?"

백사편법은 명문정파의 무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무공은 아니었다. 고송 정도 되는 고수가 자신의 수법들을 기록해 넣은 무공이라면 제법 괜찮은 무공일 것이다.

물론 초식들이 지나치게 실전적이고 살기가 넘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저 포쾌에게는 그게 장점일 수 있었다. 비교적 무공 수준이 낮은 적들과 치고받고 싸우려면 저런 수법들이 더 유용했다.

낭인들은 단전 안에 정순한 내공을 쌓으며 커다란 깨달음을 줄 대기만성의 무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 날 바로 쓸 실전 무공이었고 저 편법은 바로 그런 무공이었다.

그리고 저 백사격각편은 편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보물이었다. 오행산의 영물이나 요괴를 잡아 만든 게 분명한 저 채찍에는 독기와 함께 서기(瑞氣)도 번뜩였다.

"그게 말입니다."

"아. 혹시 냉수사에게 받았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건가?"

팽주성은 누이동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거라면 전혀 신경 쓸 것 없네. 심법 하나 없는 편법에 무슨 마기(魔氣)라도 있겠나? 또, 저 채찍은 독 기운이 좀 강하긴 해도 그건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세. 만약 누가 냉수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시비를 걸어온다면 팽가의 이름을 대도 좋네."

팽주성은 듬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에서 저 포쾌가 보여준 활약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모자랐다.

흔히 뛰어난 무림인은 검으로 자신의 동료를 지킨다지만 이 포쾌는 그런 것 하나 없이 자신의 머리만으로 여기 있는 무림인 전부를 지킨 것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아마 고 대협께서 가져가신 무공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연우혁은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남들 앞이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이지 연우혁은 고송이 가져간 무공이 가짜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발견된 스물 두 구의 무림인 시체.

실제 사건에서는 여기에 몇 가지 단서가 더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닥에 떨어진 색다른 둥지였다. 이 둥지를 잘 확인하면 가짜 무공이라는 게 바로 나왔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백면신투는 남궁세가의 담장을 넘으려다가 붙잡혀서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소림의 장경각에 들어갔겠습니까."

"..."

자리에 있던 무인들은 너무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팽주희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러면? 냉수사가 가져간 무공은?"

"아마 백면신투가 만든 가짜 무공일 겁니다. 나중에 고 대협이 이 주변을 뒤져서 가져갈 때를 대비해 저 둥지만 색을 따로 물들였겠지요. 애초에 백면신투 같은 노련한 도둑이 자신의 보물을 숨기는데 들키기 쉽게 색을 달리 만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진짜 무공 비급들은 다른 둥지들일 겁니다."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말에 조심스럽게 절벽 위에 있는 나머지 둥지들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종이를 하나하나 뜯어 기름을 먹인 뒤 꽁꽁 싸매놔서 전체 내용을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백면신투가 따로 남긴 겉표지 위의 글자를 보니 글자를 알 수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공은 아니었다. 팽주성은 인상을 찡그리며 집중하듯이 기억을 떠올렸다.

"이 태둔권법은 분명..."

"우가장의 권법입니다. 팽 형."

제갈규가 슬쩍 조언했다. 우가장은 무림에 그리 이름이 널리 퍼지지 않은 중소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태둔권법은 나름 괜찮은 무공으로 제갈세가 내에서 평가받고 있었다.

"아하. 고맙군. 규 아우. 그래. 우가장의 권법이었어."

다른 무공들도 이름을 확인해보니 대부분 중소 가문들의 무공이었다.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무공이 없다는 걸 확인한 제갈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제갈세가나 당문, 혹은 팽가를 제외한 다른 명문정파의 무공이 발견되었다면 꽤나 귀찮아졌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들 상대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을 테니까. 제갈규도 입장이 바뀌었다면 의심을 버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중소 가문의 무공이라면 별다른 오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그쪽에서 감사하면 감사했지 오대세가 무인을 상대로 무공을 도둑질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진 않았다.

'백면신투의 실력이 부족해서 다행이군.'

"이 무공들은 나와 규 아우, 그리고 당 소저가 책임지고 주인에게 돌려주겠네."

"냉수사만 안타깝게 됐네? 잔뜩 기대를 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교훈을 얻었겠어. 도둑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 말이야."

팽주희는 고송이 허탕을 쳤다는 게 재밌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팽주성은 고개를 저으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틀렸다. 진짜 교훈은, 연 포쾌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멋대로 힘으로 겁박해서 부리려고 하면 화를 당한다는 거지."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염일립마저도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일행은 주변을 정리한 뒤 하산을 시작했다. 산을 다 내려오고 나자 팽주성은 산채 쪽을 쳐다보았다.

오대세가 출신이라 하더라도 오늘처럼 생과 사가 팽팽하게 오가는 상황은 자주 겪지 않았다. 아까 고송과 기세를 맞부딪쳤던 게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오늘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옆의 포쾌는 무심한 표정으로 염일립 뒤에 바짝 붙어서 내려오고 있었다. 팽주성은 새삼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 포쾌. 혹시 백면신투가 왜 가짜 무공을 숨겨놨는지도 알겠나?"

"이유 말입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딱히 백면신투가 무슨 생각으로 가짜 무공을 숨겨놨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알 필요 없는 일이었으니까.

"백면신투도 무림인인 만큼, 무시받은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 연 포쾌보다 아둔한 생각이지만 들어주겠나?"

"경청하겠습니다."

"백면신투는 부끄러웠던 걸세. 허세를 떨어놓고 사실 범망공이 없다는 걸 들키는 게 말이야."

"...!"

"일단 가짜 무공을 숨겨놓고, 나중에 진짜 무공을 찾으면 냉수사 앞에서 '이렇게 숨겨놨는데도 못 가져가다니'하며 허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었겠나?"

"흥미로운... 생각이십니다."

연우혁은 팽주성의 말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둥지의 색이 다르다고 해서 실제로 찾아서 가져가기는 쉽지 않았다. 당장 고송도 연우혁이 도와주기 전까지는 찾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진짜 무공을 찾았을 때 상대를 놀려주기 위한 용도라면 그럴듯했다.

"그런가? 그럴듯하다고 해주니 기쁘군. 실은 범망공이 남궁세가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해본 생각일세. 백면신투가 왜 남궁세가에 들어가려고 했는지 계속 궁금했었거든."

"도역유도(盜亦有道)군요."

"그래. 포쾌의 도보다는 한참 아래지만 말일세."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 * *

무사히 돌아온 연우혁은 바로 오 포두에게 산채를 토벌했다고 보고부터 정리해서 올렸다.

쪼잔해보여도 이렇게 차곡차곡 공적을 최대한 부풀려서 남겨놔야 나중에 더 높은 지위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용맹무쌍하게 산채의 산적들을 토벌하고 온 부하의 모습에 오 포두의 입가는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자네. 곧 포두가 될지도 모르겠군. 이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가끔씩은 쓸만하군."

"아닙니다. 포두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건 아주 위험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연우혁은 혹시라도 나중에 무림인을 상대하는 일을 시킬까봐 정색하고 대답했다.

무림인들과 엮이는 건 오늘 일만으로 충분했다.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목숨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았을 일 아닌가.

무공의 수준을 올리고, 관직의 직위를 올리기 전까지는 무림인들과는 정말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예! 포두님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으음. 사실은..."

오 포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팽주성과 팽주희가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직 대화중이었다니."

"아!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

연우혁이 상관에게 배신당한 부하의 눈으로 오 포두를 쳐다보자, 오 포두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북팽가 출신인데 예의까지 바른 청년이라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

갈모 팽주희 (1)

사실 오 포두의 잘못은 아니었다.

포두란 게 인근 양민들한테나 공포의 대상이었지 오대세가 출신의 직계한테는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비슷한 존재였으니까.

지금 하북팽가에서 나온 두 남매라면 포두를 부리는 판관은 물론이고 그 윗선인 지부까지도 독대 가능했다.

그냥 오 포두가 머무르는 정방 문을 걷어찬 다음 '포쾌 놈을 데려오지 못할까'하고 외쳐도 포승줄로 곱게 묶어서 바쳐야 하는데, 저렇게 공손하게 말하면 오 포두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관무를 방해하다니.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인들이란 거친 야인과 같아서 도무지 예의범절이란 걸 모릅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팽가 남매의 사과에 오 포두는 평소 부하들에게 보여주던 근엄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연우혁은 오 포두가 어떻게 경쟁 치열한 한경에서 포두로 오랫동안 살아남은 지 알 것 같았다.

"자. 어서 데려가십시오! 대화 끝났습니다. 자네, 여기까지 찾아온 두 분에게 절대 소홀히 대접하면 안 되네. 알겠나?"

"포두님. 제가 아직 순찰을 못 돌았습니다만."

"그건 내 조카놈 시키면 되니까 어서 가게."

오 포두는 연우혁의 등을 힘차게 떠밀었다.

연우혁은 언젠가 고관의 자리에 오르면 오 포두에게 무림인을 상대시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 *

다행히 팽가의 남매는 연우혁에게 시킬 새로운 일거리를 갖고 온 게 아니었다. 둘이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하하. 연 포쾌가 무공 수련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네. 내가 연 포쾌보다 지혜는 부족하지만, 무공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

팽주성은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확실히 팽주성 같은 고수에게 무공을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연우혁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산채 토벌에서 입은 내상은 회복된 뒤였다.

"한 번 초식을 보여주겠나?"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식을 펼쳤다.

위풍당당한 이름을 가진 권법이 연우혁의 손끝에서 펼쳐 나왔다. 권법의 이름을 알고 있는 팽주희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팽주성은 진지하게 연우혁의 초식을 관찰했다.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초식의 이해도는 나무랄 부분이 없지만 역시 내공이 많이 부족하군. 그 부분만 해결되면 능히 이류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네."

흔히들 무림에서 초식 하나의 형(形)을 제대로 재현해내면 이류의 경지는 된다고 평가해주곤 했다.

멋모르는 이들은 밥 먹고 주먹질만 해대는 무림인들이 초식 동작 하나 따라하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초식 동작 하나를 제대로 따라하는 건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초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외공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안의 기혈을 따라 흐르는 내기(內氣)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초식의 위력이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무공의 초식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비유, 고사(故事), 선문답 등 온갖 난관들이 추가되었고 이 정도까지 가면 깊은 소양 없이는 무공 수련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를 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내공을 사용해서 초식을 펼쳐야 하는 만큼 이 내공이 부족하면 아무리 초식을 제대로 이해했어도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뻗어서 바위를 부숴야 하는 일격이라도 내공이 부족하면 손이 떨려서 자기 주먹을 부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이 포쾌는 전형적인 후자였다. 초식의 이해도는 완벽에 가까웠지만 내공이 부족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문정파 출신의 무림인들은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내가기공으로 단전에 정순한 내공을 쌓고 혹독한 수련을 통해 그 내공의 양을 점점 늘려나갔다. 이들은 무공이 일정 경지에 오른다 하더라도 수련을 쉬지 않았다.

그에 비해 사파의 무림인들은 무공을 늦게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수련 시간도 차이가 났다. 배운 무공을 휘둘러 적을 죽이기도 모자란데 느긋하게 수련에 몰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연 포쾌가 사파의 무림인은 아니었지만 처한 상황은 비슷했다. 무공을 늦게 익히기 시작했고, 익힐 시간도 부족했다.

"저도 내공의 부족함은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서..."

"방법이 있네!"

"!"

팽주성의 자신만만한 말에 연우혁은 놀랐다.

대(大) 하북팽가에는 이런 내공 부족을 해결할 방법이 있단 말인가?

'뭐지? 심법인가? 하지만 가문의 심법을 나 같은 외인한테 주진 않을 텐데. 다른 심법이라도 있나? 동공(動功) 같은 건가?'

앉아서 축기하는 정공(靜功) 계열의 심법과 달리 동공 계열의 심법은 연우혁처럼 바쁘게 일하고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에게 알맞았다.

만약 팽가의 직계 심법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구한 심법이라면 연우혁은 감사히 받아서 익혀 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위국심법은 효율이 너무 안 좋았던 것이다.

달칵!

팽주성은 나무로 된 작은 함의 뚜껑을 열더니 녹색 빛의 둥그런 영약을 꺼냈다.

"바로 이걸세. 우리 가문의 취옥단이지."

"..."

연우혁은 매우 놀랐다.

일단 수련 방법 대신 영약이 튀어나온 것도 놀랐지만, 그 영약이 하북팽가의 영약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이걸 받아도 되나?

'팽가 가주가 친위대 보내는 거 아닌가?'

웬 요상한 술사가 기묘한 술법으로 아들딸을 홀렸다고 목이라도 잘라오라고 한다면 연우혁의 모가지는 그냥 날아가는 것이다.

"괜찮습니까?"

"당연히 괜찮지. 가문의 비전으로 만든 영약인데. 이 영약 하나면 십 년 내공은 너끈할걸세."

"그걸 묻는 게 아니잖나."

팽주희가 한심하다는 듯이 오라비를 쳐다보았다.

"먹어도 상관없어. 가문의 비전으로 만든 영약이긴 하지만 외인한테 못 줄 정도의 영약은 아니니. 그러고 보니 저번에 공을 세운 사람이 받아가기도 했군."

"아. 그걸 걱정한 거였나?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네. 내 몫으로 받은 영약이니까."

'이 둘을 믿어도 되나?'

팽주희는 몰라도 팽주성은 걱정할 필요가 있어도 없다고 할 사람이라 연우혁은 괜히 망설여졌다.

다행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팽주성이 바로 환약을 연우혁의 입에 던져 넣은 것이다.

"컥!"

"자. 운기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취옥단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더니 강한 기운으로 변했다. 마치 상단전에 있던 기운을 강제로 끌어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취옥단의 기운은 별다른 내상을 입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상단전의 기운을 억지로 끌어왔을 때는 날뛰는 말처럼 흉포하게 움직이며 내상을 입혔는데 취옥단의 기운은 그런 게 없었다. 부드럽게 온몸의 경맥과 혈도를 타고 흘렀다.

"심법의 구결을 떠올리게!"

팽주성은 평소와는 다른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중 상태에 빠져든 연우혁의 귀에는 아득하게 들려왔다. 기경팔맥을 따라 취옥단의 기운이 순환하며 내공을 축기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팽주성은 연우혁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아니?'

보통 취옥단을 하나 먹으면 십 년 내공을 쌓을 수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약의 내공을 온전히 흡수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영약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 내공을 온전히 흡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일부는 날숨을 따라 자연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몸속으로 들어가 선천진기로 화했다.

상승의 심법은 이런 낭비와 소모를 줄이고 영약의 내공을 최대한 단전에 쌓았기에 상승의 심법이라고 불렸지만, 연 포쾌가 익힌 심법은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든 하급 심법.

그런데 지금 연 포쾌는 영약의 내공을 한 줌도 흘리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마치 노회한 고수가 내공을 운기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자연스러웠다.

'상단전이 열린 것 때문인가?'

연 포쾌가 상단전이 열려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지혜를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공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

운기를 끝낸 연우혁은 눈을 뜨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팽주성은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가. 달라진 게 느껴지나?"

"...예!"

연우혁은 단전에 충만한 내공을 느끼며 외쳤다.

몸은 오랫동안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피곤하고 땀으로 푹 젖어 있었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지금 권법을 펼치면 아까와는 다른 일격이 뻗어져 나올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팽 대협!"

내공이 충만해서 그런지 팽주성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일어서게. 내공이 갑자기 생겼을 때는 바로 몸을 움직여야 적응되네."

"윽. 지금 몸에 힘이 안 들어갑니다만."

"그건 몸이 거짓말을 하는 걸세. 하하. 연 포쾌. 범인들이 거짓말하는 건 잘 알아차리면서 몸이 거짓말을 하는 건 못 알아채는군?"

"..."

팽주성이 나무로 만든 도(刀)를 들고 재촉하자, 연우혁은 방금 느꼈던 감사의 마음이 좀 줄어들었다.

* * *

연우혁을 다섯 번 땅바닥에서 뒹굴게 만들고 난 다음에야 팽주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땀을 씻으러 떠났다.

그에 비해 연우혁은 지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냥 드러누워서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취옥단도 받았겠다 연우혁은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드러누운 채라서 별로 효과는 없을지언정.

팽주희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 위국보법은 딱히 특별한 구석이 없는 보법인데, 연 포쾌가 쓰는 위국보법은 조금 달라보이는군. 뭘 한 거지?"

아까 팽주성이 휘두르는 도에 맞서서 간신히 피하던 포쾌의 움직임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좌나 우, 혹은 뒤로 빠지는 움직임은 평범했지만 앞으로 전진할 때는 상승무공다운 쾌속함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쾌나 관졸들한테 뿌리는 위국보법으로 보여줄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 고 대협한테 받은 백사보법입니다."

연우혁이 고송에게 받은 백사편법에는 내가기공은 따로 없었지만 보법은 있었다. 당연히 위국보법보다는 훨씬 괜찮은 보법이었다.

문제는 이 보법이 매우 공격적이라는 점이었다. 채찍을 휘두르는 초식과 함께 끝까지 전진해서 숨통을 끊으라는 원래 주인의 뜻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고송이야 실력이 되는 고수니까 저런 보법을 써도 됐지만 연우혁 같은 하수가 저런 보법을 썼다가는 목이 여러 개여도 부족할 터.

그래도 없는 처지에 저런 보법이라도 아까워서 연우혁은 전진할 때는 백사보법을, 나머지 상황에서는 위국보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섞었다.

"그러니까 지금 두 보법을 섞었다?"

"예. 역시 많이 이상합니까?"

"..."

팽주희는 진심으로 놀랐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무인이 이런 묘기를 보여줄 줄이야.

흔히 고담(古談)에서야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학사가 머릿속으로 높은 경지를 이뤄 논검으로 고수를 쓰러뜨린다지만, 무공을 좀 익혀 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허황된지 알았다.

직접 땀 흘려 익히지 않고 상상만으로 해결이 된다면 무림인들이 그 고생을 무엇하러 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포쾌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허황된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무공을 얼마 익히지도 않은 무인이 머릿속으로만 무공을 조합해 새 무공을 만들어 내다니.

"상단전이 열려서 가능한 건가. 진심으로 부럽군."

"저, 팽 소저. 상단전이 열리면 보통 단명합니다."

갈모 팽주희 (2)

연우혁의 말을 들은 팽주희는 매우 멋쩍어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수습을 위해 말을 꺼냈다.

"미안하군. 그런데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가 꼭 학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라서."

팽주희는 진지하게 말했다.

무림인으로서 진정 높은 경지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단명할 운명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당장 상단전이 열려서 오락가락하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헛소리처럼 들렸다.

'장난하나.'

연우혁에게 하북팽가의 직계로 태어나겠느냐 혹은 상단전 열린 포쾌로 태어나겠느냐 물으면 무조건 전자였다.

"하지만 연 포쾌한테는 조금 무례하게 들렸겠군. 사과하지."

"하하. 아닙니다."

"사과를 받아줄 수밖에 없는 연 포쾌가 사과받게 만든 상황도 사과하지. 이거는 대답할 필요 없어."

"..."

팽주희는 확실히 팽주성보다 영특한 구석이 있었다. 팽주성도 뛰어난 무인이었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팽주희를 따라갈 수 없어보였다.

'제갈규보다 머리 쓰는 게 나아 보이는데.'

연우혁은 팽주희가 왜 명석한 두뇌로 명성을 쌓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당장 제갈규 정도만 되어도 나름 명성이 있지 않은가.

"사과하는 김에 이걸 주지. 원래 주려고 갖고 온 거였지만."

팽주희는 낡은 서책을 하나 꺼내서 선물했다. 겉표지도 없는 특이한 책이었다.

"무당의 도사에게 받은 책이야."

"!!"

연우혁은 너무나도 놀라서 바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팽 소저. 은혜에 진심으로 감읍드리겠습니다.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 연 포쾌. 미안한데, 혹시 이걸 무당파의 무공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팽주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연우혁이 기대하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닙니까?"

"무당파의 무공을 멋대로 외인한테 전수할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이건 도술이야."

구파일방 중에서 도가 계통의 무공을 쌓고 있는 문파는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 도술(道術)까지 그 맥을 이어가는 문파는 많지 않았다.

무공과 달리 술법이란 건 그 전수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효과도 들쭉날쭉했다. 게다가 때로는 방문좌도에 빠져 요술(妖術)이라고 몰리는 술사도 나왔으니 이런 술법의 진전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당파는 도술의 명맥을 진지하게 이어가고 있는 문파 중 하나였다. 안으로는 무당파의 서고를 찾아 흩어진 고서에 적힌 술법을 기록하고, 밖으로는 술법에 관한 서책을 긁어모아 잊힌 부분을 보완하려고 했다.

"당연히 무당의 술법은 아니고 외부의 술법이야. 팔월문이란 문파였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서책이었다는군.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서 무당에 부탁한 거지."

"그런데 이렇게 갖고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예전에 오라버니하고 같이 무당파의 도사를 도와 같이 싸운 적이 있었거든. 오라버니는 보상으로 도(刀)를 골랐지만 나는 술법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썼지."

팽주희는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제갈규 정도만 됐어도 우수에 찬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팽가의 무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먹이를 두고 고뇌하는 맹수 정도로 보였다.

"술법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응.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 명성 높은 제갈세가의 수준이 이 정도인데 나라면 술법도 쓸 수 있지 않나?"

연우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결말이 짐작 갔기 때문이었다.

술법이나 이능 같은 건 의외로 지혜와 큰 상관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영성(靈性), 그러니까 상단전이 선천적으로 열린 정도와 상관이 깊었다.

연우혁처럼 그냥 상단전을 활짝 열고서 안에 영기를 가득 담은 채 시작하면 마구잡이로 신통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 아무리 머리가 비범해도 신통력을 쓸 수가 없었다.

후천적으로 무공 수련을 통해 상단전을 개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쯤 되려면 몇 단계는 더 올라가야 할 테니...

"아무리해도 안 익혀지는 건 안 익혀지더군. 버리기도 뭐해서 갖고 있었는데, 연 포쾌한테는 잘 맞을 것 같아서 이렇게 갖고 왔어. 잘 익혀봐. 위험한 좌도(左道)의 술법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괜찮은 건가?'

연우혁은 서책을 받아들면서도 조금 머뭇거려졌다.

물론 담풍호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음 여러 실험을 통해 상단전과 이능에 대해 나름 파악한 상태긴 했다.

하지만 술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상단전이 열려 있고 영성이 충만하다지만 잘 익혀질지 의문이었다.

"듣기로는 강신술(降神術) 비슷한 술법이라더군."

"귀신을 부르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듣기로는 신선의 힘을 조금 빌리는 거였는데..."

팽주희도 자신이 없었는지 살짝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원래 도가에서는 사람의 몸에 수많은 신(神)들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이 신을 수명이나 영혼처럼 생각해 잘 간수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렇다면 뛰어난 도사들은 역으로 밖의 신들을 자신의 몸에 불러와 그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제가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지. 일단 읽어나 봐."

연우혁은 팽주희의 말에 서책을 펼쳤다. 올챙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복잡한 글자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연우혁은 무심코 영안을 열고 서책을 확인했다.

그 순간 뇌에 강렬한 충격이 몰려왔다. 마치 무공 하나의 복잡한 이치를 순간에 때려 박은 것 같은 일체감이었다.

'큭...!!'

충격의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방금 배운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이 술법이 어느 신선에게 힘을 부탁하는 건지 깨달았다.

"알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팽주희는 기쁘면서도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익혀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술법을 저리 한 번에 터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건 신선 중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힘을 빌리는 술법입니다."

"그럼 어떤 효능이 나타나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해봐! 한 번 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팽 소저."

연우혁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팽주희는 놀랐다.

혹시 이 술법에 무슨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었다.

설마 무당파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비밀이?

"저 정말 이제 순찰 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러라고."

* * *

팽주희에게 받은 술법은 연우혁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다.

무림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꼭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남두성군의 힘을 빌리는 강신술은 한 번 사용하면 힘이 사라질 때까지 내공과 체력이 배가되게 만들었다. 연우혁처럼 내공이 부족해서 골골대는 무림인에게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술법에 소모되는 힘이 영안을 한 번 쓰는 것보다 훨씬 적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공은 내팽개치고 적성에 잘 맞는 술법만 익히고 싶을 정도였다.

'무공이 술법의 반만큼만 쉬웠으면 소원이 없겠군.'

빈약한 몸을 느끼자 제정신이 돌아왔다. 상단전의 기운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얼마나 하단전에 내공이 부족한지 실감이 됐다.

영약을 한 번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오 포쾌님. 저 대신 순찰을 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당연히 해줄 수 있지."

"?"

연우혁은 덩치 큰 선배 포쾌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저런 마음 따뜻한 말을 해줄 사람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일은 무슨."

오 포쾌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이 근질거렸는지 잠깐 참은 것을 끝으로 바로 입을 열었다.

"곧 포두가 될 것 같다면서? 사숙께서 그렇게 칭찬을 하시던데?"

"에이. 아직 멀었습니다."

연우혁은 속으로는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먼저 승진해야 할 하급자가 해야 할 태도를 취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겸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오 포쾌는 이미 연우혁이 포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 포두나 육 포두, 구 포두가 있긴 하지만 다들 사숙에 비하면 경험도 부족하고 시원찮은 작자들이지. 판관 어르신한테 은자를 적게 바쳤으면 옛날에 쫓겨났을 자들이거든."

한경에서 나름 오래 구른 오 포쾌의 금과옥조 같은 이야기에, 연우혁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지금 연우혁이 보기에 좀 더 높이 올라가려면 일단 포두가 좀 필수적이었다. 포쾌로는 아무리 공을 세워도 다른 관료들과 공을 나눠가지게 되어 있었다.

일단 포두가 된 다음, 공을 세워서 포두를 부리는 판관 자리를 노려보고, 그 다음에는 지부 나으리의 부관까지...

'부관 자리는 너무 터무니없나?'

하여간 판관 정도만 되어도 연우혁은 최대한 은자를 긁어모으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무림인들을 불러 모아 무공 수련에 몰두해 볼 생각이었다.

한경의 판관이 되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림인은 무리더라도 적당한 명성의 무림인들 몇 정도는 부를 수 있을 테니까.

하여간 이런 모든 계획의 시작은 포두가 되는 것부터였다. 뇌물을 바쳐야 한다면 바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아낄 수 있다면 당연히 아껴야겠지만.

"그런데 판관 어르신도 위의 눈치가 보이거든. 동지(同知, 지부의 부관)님들이 길거리의 소문만 안 좋아져도 바로 판관 어르신을 부르는데..."

오 포쾌의 말에 따르면 판관 입장에서도 똘똘한 포두 한두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문제가 터졌을 때 뇌물만 바치는 멍청한 포두들만 있으면 판관도 같이 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 포두 혼자서 그 역할을 해왔지만 판관이 보기에 좀 아슬아슬하긴 할 터.

젊고 뛰어난 포두 한 명을 늘리는 것도 해볼 만한 선택이었다.

"...그런 거란 말이지."

오 포쾌는 말하면서 참새 꼬치 세 개를 끝장냈다. 노점 주인은 증오를 넘어 감탄의 눈빛으로 오 포쾌를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자기가 대신 철전을 내밀었다.

"그럼 이대로만 있으면 포두가 될 수 있단 겁니까?"

"후후. 물론 아니지. 다른 포두 놈들이 끈질기게 방해를 할 테니까. 네가 올라가면 한 놈은 내려가게 될 것 아니야?"

"그럼 다른 포두 한 명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겁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오 포쾌는 깜짝 놀라서 꼬치를 떨어뜨렸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그런 뜻인가 해서 말입니다."

"무림인들도 아니고!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하다니."

'호들갑은 참.'

그냥 질문 하나 던졌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오 포쾌의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판관한테 뇌물을 바쳐야 하나?'

하지만 당장 연우혁이 쓸 돈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약방에 가서 영약부터 찾아야 하는데 무슨 뇌물이란 말인가.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역시 실력 승부였다.

'쓸만한 사건이 하나만 더 있으면...'

지금도 판관이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을 텐데, 다들 관심 있는 사건 하나만 더 해결하면 쐐기를 박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 포쾌님. 혹시 최근에 무슨 수상쩍거나 이상한 일 들으신 것 없습니까?"

"이상한 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어시장에서 통통한 생선 몇 마리를 사가지고 왔는데, 돌아와 보니 영 시원찮더라고."

"그건 팔기 전에 물을 잔뜩 먹인 겁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런 거였구나!"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오 포쾌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갈모 팽주희 (3)

'아니. 돈 안 내고 먹으면서 그런 걸 예상 못했단 말인가?'

연우혁이 해결한 사건들이 살인사건만 있지는 않았다. 절도나 사기 같은 사건들도 많았다.

그런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느낀 건 이 대환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이들은 사실 장사하는 상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산장에서 벌어진 살인의 범인은 쉽게 찾아도, 산 짐승을 사들이지 않는 푸줏간 주인이 주변 장정들의 배가 터질 때까지 고기를 팔 수 있었던 비법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정답은 죽고 썩은 짐승들을 구해와 특제 양념에 절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오 포쾌가 먹은 음식들 중에서도 상인의 비법이 몇 개는 들어가 있으리라.

"잠깐. 설마 이것도?"

"아이고, 포쾌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감히 포쾌님을 속여 넘기겠습니까?"

좌판 주인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양심 없는 상인들은 썩은 고기를 가져다가 팔고, 밀과 쌀에는 모래와 먼지를 섞었지만, 좌판 주인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물을 좀 먹였을 뿐이었다.

"하긴. 내가 주인장의 실력을 알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은 굽신거리면서 오 포쾌에게 꼬치 하나를 더 내밀었다. 출출했던 연우혁이 다 구워진 다른 꼬치를 하나 집으려고 하자 주인은 그건 집지 말라고 눈빛을 보냈다.

"..."

"이걸 드시지요."

주인은 다른 불 위에서 굽던 꼬치를 따로 꺼내줬다.

영안으로 꼬치의 상태를 확인한 연우혁은 오 포쾌와 같이 다닐 때는 더더욱 입에 넣는 걸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 여기서 대협을 만나게 될 줄이야..."

"?"

연우혁과 오 포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기녀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누구지?'

기억은 곧바로 떠올랐다. 저번 제갈규를 따라갔던 객잔에서 범인으로 의심받았던 손님 중 하나인 기녀였다.

그러나 연우혁은 의아함을 느꼈다. 기녀의 이목구비가 저번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부끄럽사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번과 인상이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야, 야...! 미인의 얼굴은 원래 해가 뜨고 달이 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걸 모른단 말이냐?"

오 포쾌는 연우혁의 무례한 발언에 기겁했다.

기녀의 분칠을 지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한경의 기녀는 번영한 도시의 특성 상 어느 고관이나 유지와 친할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고작해야 포쾌 정도 되는 놈이 한경의 기녀에게 원한을 샀다가는 베갯머리송사 한 번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 기녀의 복장을 보니 붉은 비단을 넉넉하게 쓴 게 절대 작은 기루의 기녀가 아닌데...

'아차.'

뒤늦게 오 포쾌의 뜻을 깨달은 연우혁이 급히 사과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저번에는 워낙 황망했던지라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절대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뜻으로 이해했사옵니다."

기녀가 웃으면서 넘어가자 오 포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 젊은 포쾌가 쓸데없이 자존심이나 고집을 세우지 않은 덕분에 잘 끝날 수 있었다.

가끔 다른 구역의 포쾌들 중에는 요패를 받은 탓에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마냥 까부는 놈들이 나왔지만, 이런 놈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포쾌로 오래 가기 위해서는 유연한 허리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소저의 미모는 침어낙안이고 폐월수화입니다. 절세대미에 천지지미입니다."

"..."

"..."

오 포쾌는 살면서 자기보다 더 자존심이 없는 놈은 또 처음 보았다. 기녀도 당황했는지 할 말을 잃은 채였다.

"고... 고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유능한 포쾌님한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사옵니다."

"연 포쾌한테 말인가?"

연우혁은 자기 자신을 찾아왔을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오 포쾌의 모습에 감탄했다. 마치 포쾌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예."

"흠. 잠시만..."

오 포쾌는 기녀에게서 등을 돌린 뒤 연우혁에게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청탁은 조심해서 받아야 한다. 특히 기녀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거일 가능성이 있단 말이다. 이거."

오 포쾌는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한경이 치안이 안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만한 대도시에 사파나 흑도의 무리가 없을 리가 없었다.

고관대작에 명문정파 출신의 속가제자들도 여럿 있는 곳이라 거칠게 활동하진 못해도, 이들은 나름 견실한 곰팡이처럼 음지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포쾌가 가장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대가 바로 이런 사파나 흑도의 무리들이었다. 기녀라면 십중팔구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포쾌로 오래 해먹으려면 이런 놈들에게 부탁을 받을 때 제일 조심해야 한다."

'보통 받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나?'

연우혁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포쾌 노릇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는 '하면 안 된다'가 없었다. '적당히 하면 된다'가 전부였다.

"누구에게 주먹질을 한 걸 덮어달라느니, 누구를 집에서 쫓아냈다느니, 누구의 호패를 위조했다느니... 이런 건 괜찮아. 근데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 같은 건 위험하다."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일까요?"

"그게 아니면 저런 기녀가 왜 널 찾아와서 부탁하겠냐?"

"으음."

연우혁은 그 말에 영안을 열고 기녀를 훑어보았다.

딱히 위협적이거나 사악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들고 있는 짐도 별다른 게 없었고, 느껴지는 감정은 지루함과 오 포쾌에 대한 적당한 한심함 정도가 다였다.

'그런 수작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뭐? 여기서 거절하면 안 되지. 따라가서 핑계를 대야지."

"과연...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오 포쾌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오 포쾌는 단단히 의자를 붙든 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 한 명은 살아야지 나중에 복수를 해주지 않겠냐. 잘 갔다 와라."

"..."

* * *

"누굴 죽인 걸 덮어달라는 부탁은 절대로 아니옵니다."

기녀는 오 포쾌가 멀어지자마자 바로 말했다. 연우혁은 목청 큰 선배 포쾌를 속으로 원망했다.

"포쾌님께서는 제가 경험이 부족해서 걱정을 하신..."

"그렇지 않사옵니다."

기녀는 단칼에 잘랐다. 연우혁은 좀 머쓱해졌다.

물론 오 포쾌가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외부인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은 또 몰랐던 것이다.

"하북팽가나 제갈세가의 콧대 높은 무림인들이 저렇게 후한 평가를 하는 일은 드문 일이오니..."

말을 하던 기녀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렸다.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영안을 열고 기녀를 확인했다. 아까와는 다른 무림인의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용술을 쓸 줄 아는 무림인에 기녀로 위장할 줄 안다면?

연우혁은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을 말했다.

"혹시 하오문에서 나오신 겁니까?"

"!"

기녀는 놀란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하오문의 이름을 알아맞힐 줄이야.

"어떻게 아신 겁니까?"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신데 기녀로 위장하신다면..."

"맞습니다."

기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하오문은 무림의 하찮은 이들이 모여서 만든 점조직 형태의 문파였다. 마부, 짐꾼, 점소이, 기녀 등 이런 이들이 주요 구성원들인 만큼 외부에서 봤을 때는 비웃음을 사기 쉬웠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하오문 내에도 고수는 있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취봉(醉鳳) 이교가 바로 그런 고수 중 하나였다.

연우혁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상대가 그냥 기녀여도 굽신거릴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하오문의 고수라는 걸 들으니 더욱 준비하게 됐다.

"하오문의 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제가 무림인들의 일을 곁든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파악했을 줄이야."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번루에서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취해서 떠들었으니."

"..."

연우혁은 팽주성과 친우들을 욕했다.

술에 취할 거면 가문에 돌아가서 취할 것이지 남들의 귀가 많은 곳에서 왜 취한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연 포쾌님을 불러온 것은 뛰어난 지혜가 필요해서입니다."

"그렇습니까."

상대의 말에 연우혁은 솔직히 안심했다.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수상쩍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터졌는데 범인을 찾거나 하는 일이 분명했다.

"혹시 누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보물이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뭐지?'

살인도 절도도 아니면 남는 게...

"기루의 기녀 중 한 사람이 상사병에 걸렸는데,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주셨으면 합니다."

"...제, 제가 남녀 간의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만."

"포쾌님께서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포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사실 남녀 간의 일이라 하더라도 세상일과 무릇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 *

연우혁은 휘황찬란한 기루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는데도 일층에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그 손님들의 돈을 노리고 온 악사와 행상들로 몸을 부딪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오 포쾌가 질색해하는 이유를 알겠군.'

오 포쾌는 '이런 곳은 발만 디뎌도 돈을 내야 한다'며 치를 떨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봐도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전낭만 다 털어도 수십년치 내공의 영약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관직보다는 거상이 더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몰랐다.

'집중하자.'

연우혁은 자신의 기억을 차분히 점검했다.

해결했던 사건들 중에서 기녀들이 나왔던 사건은?

쌍둥이 기녀 실종사건, 패물 도난사건, 정인을 납치해서 가뒀던 기녀 사건 등등.

'너무 많은데.'

연우혁은 방향을 바꿔서 접근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굳이 사건을 떠올릴 필요 없이 영안으로 관찰만 해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기녀라면 정인을 만날 경우 확연히 감정이 드러날 터.

영안의 사용에 익숙해진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려낼 수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팽가 남매였다.

"..."

연우혁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팽주성이 물었다.

"취봉은 만나봤나?"

"하오문의 사람을 알고 계셨습니까?"

"어? 그야 알지. 내가 취봉한테 자네를 추천했는데."

옆에 있던 팽주희가 '나는 안 했다'라는 뜻으로 손을 작게 내저었다.

청월루 살인사건 (1)

"하오문의 무인하고도... 아는 사이셨습니까?"

"음. 원래 흔한 일은 아니지. 나도 우연하게 친해지게 됐네."

팽주성의 말에 동생은 질린 듯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사실 하오문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여서 좋을 게 별로 없었다.

정파에 소속된 중소문파들도 하오문에 의뢰를 맡길 때에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비밀리에 맡기는데, 하물며 오대세가 출신의 팽주성이라면 더더욱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팽주성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

덕분에 졸지에 휘말리게 된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팽주성은 해맑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취봉은 여기 한경에서 제법 힘이 있네. 연 포쾌를 소개시켜준다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오문의 사람 상대로 퍽이나 그렇겠군."

팽주희는 혀를 쯧쯧 찼다.

물론 팽주성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연우혁처럼 영리한 사람이라면 포쾌에서 끝날 생각이 없을 테니 아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

관직을 얻고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명성이나 능력도 중요했지만 인맥이나 가문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연우혁처럼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면 지원해 줄 사람이라도 구해야 했다.

문제는 하오문이 순수한 선의로 지원해 줄 문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겠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다만은, 하오문처럼 손익에 철저한 이들도 드물었다. 괜히 잘못 엮였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수가 생겼다.

"연 포쾌가 속거나 배신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동생의 말에 팽주성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럴 리 없지."

"왜? 취봉이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아니. 연 포쾌처럼 똑똑한 사람이 속을 리가 없잖나. 앉아서 천 리를 보는데."

"..."

"...감, 감사합니다."

* * *

청월루는 호화로운 번루들이 성업하는 한경에서도 손꼽히는 기루 중 하나였다. 총 사층까지 되어 있는 이 기루는 하오문에서도 매우 신경을 쓰고 있는 수입원이었다.

평범한 주루도 한경 같은 도시에서는 은자가 쌓이는데, 여러 고관들이 방문하는 기루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기루의 기녀들은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에 능하고 악기와 가무의 달인이었다. 동시에 한경이나 대환국 전역에서 최근 일어난 일들을 파악해둬야 했으며 가끔은 조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품평할 줄 알아야 했다.

이 정도 되는 기녀들은 말 그대로 기루의 얼굴 역할을 했다. 주루는 점소이와 숙수와 악사와 전기수 등 여러 이들이 제 몫을 해줘야 그 인기가 유지됐지만 기루는 기녀 한 명의 명성으로 인기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니 기루를 운영하는 상인들 입장에서도 이런 기녀들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저자세로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기루로 가버릴 수 있었으니, 이런 관리도 기루를 운영하는 상인의 몫이 됐다.

"화희는 청월루의 기녀들 중에서도 가장 명성 높은 기녀입니다."

이교는 연우혁을 안쪽의 숨은 방으로 안내했다. 기녀와 손님이 대화하는 걸 엿볼 수 있는 방이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놀랐다.

'이런 곳도 있었나?'

괜히 하오문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은자는 은자대로 모으면서 별개로 정보를 긁어모으는 것이다.

이교는 연우혁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설명했다.

"원래 수상쩍은 손님을 감시하기 위한 곳이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하하.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청월루가 선량한 손님들을 엿볼 리 없지 않습니까."

"..."

가끔은 완벽한 아부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금 연우혁처럼 이미 지혜로 명성을 날린 사람의 경우, 완벽하게 아부를 해도 조롱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차.'

취봉은 아픈 곳을 찔렸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화희 같은 기녀가 상사병에 걸렸다는 건 청월루 입장에서도 심히 걱정되는 일입니다."

'아내로 삼으면 되는 것 아닌가?'

가끔 거상이나 고관대작 중에는 기녀를 데리고 나와서 아내로 삼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녀의 막대한 몸값을 기루에 지불해야 하는데 이는 거상이나 고관대작한테도 만만찮은 지불이었다.

게다가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세간의 인식에는 여색에 빠져 흥청망청 낭비하는 멍청이로 보일 테니...

오히려 더 많은 건 이제 기녀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는 이들이었다. 기루에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열정적인 청년들이 이런 선택을 자주 했다.

'아하.'

연우혁은 왜 불려왔는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기녀의 상사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기녀나 의원을 불러왔어도 되는 일이었다.

아마 하오문 쪽은 찾고 싶은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떤 호로잡놈이 기녀를 꼬드겨서 몰래 도망치려고 하는가?

"화희라는 분이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교는 놀라움을 속으로 삼켰다. 이 포쾌의 영민함을 믿고 데리고 온 거지만,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하오문의 생각을 알아차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사랑에 빠진 걸 숨기는 기녀는 보통 그런 짓을 하는 편입니다."

침착을 되찾은 이교는 기녀의 연인으로 의심 가는 상대 세 명을 설명했다. 다른 기녀나 시종의 증언으로 확실하게 좁힌 세 명이었다.

이 세 명을 대할 때만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오종곤.

한경에서 비단을 크게 취급하는 포목점의 둘째 아들이었다.

방탕하고 씀씀이가 컸지만 청월루의 기녀를 데리고 나올 만큼의 은자는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집안에서 다리를 부러뜨려 하천에 처박을 것이다.

"흠. 하지만 연심이란 가끔은 칼보다도 강력하지 않나?"

"..."

"..."

옆에서 끼어드는 팽주성에, 연우혁과 이교 모두 멈칫했다. 이교는 팽주희에게 부탁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만 참견해달라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팽주희는 못 본 척 무시했다.

팽주성의 어리석음을 이용해먹었다면 이것도 감당해야 할 노릇이었다.

두종.

한경의 통판 어르신과는 먼 친척으로 이 주변에서는 나름 반반한 얼굴과 뛰어난 시재로 유명했지만 그게 돈이 되진 않았다. 당연히 기녀를 데리고 나갈 돈은 없었다.

"얼굴이 잘생겼고 시에 뛰어나다면 기녀를 반하게 했을지도 모르겠군."

팽주성의 고뇌 어린 추측에 팽주희가 물었다.

"방금은 오종곤 같다고 했잖나?"

"그랬지. 음. 연 포쾌는 누구일 거 같나?"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취봉. 남은 한 명은 누구지?"

혁숭월.

셋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서, 무려 부천호(천인장의 부관)의 관직을 갖고 있었다. 한경에서 군관은 일반 관직보다 덜 선호되긴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둘은 마땅한 관직도 없지 않은가.

"하긴. 무림인들에게는 자유분방하고 야성적인 매력이 있어서 규중의 부녀자들도 취하게 만들 때가 있지. 군관은 무림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매력이 있을지도 모르네."

"..."

어지간해서는 참으려던 팽주희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교는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손님들을 모셔올 테니, 포쾌님께서 직접 보고 판단해주십시오."

말과 함께 이교는 비밀방의 문을 열고 나갔다. 팽주성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잡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일, 꼭 해야 하는 일인가?"

"이제와서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네가 연 포쾌를 끌어들였잖나!"

"자세히 듣기 전에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인 줄 알았지. 하지만 이건 좀... 그렇잖나."

팽주성은 동생에게 항변했다.

취봉의 사람됨이 그리 악하지 않아 믿고 맡겼는데, 이건 사랑하는 두 남녀를 찢어놓는 일 아닌가.

"기루에 찾아와서 맺어진 인연에 뭘 그리 의미를 부여해? 만약 둘이 도망친다고 해서 잘 풀릴 것 같나? 아마 사내놈은 기녀가 질리면 갖다버린 뒤 자기 가문으로 돌아올걸."

팽주희는 심드렁했다.

기녀와 젊은 청년의 사랑은 이야기나 시에서나 애틋하지 실제로는 처참하게 끝났다.

도망친 둘은 세파에 부딪치게 되고, 그러다보면 곱게 자란 청년은 따뜻한 저택이 그리워지기 마련.

하북팽가 인근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팽주희가 취봉을 신뢰하진 않았지만 이건 취봉이 맞았다. 기루의 기녀들은 콧대가 높다 하더라도 새장 속의 새라 감언이설에 쉽게 속아 넘어갔다.

지금이야 연정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 들어오지 않겠지만 나중에 열병이 나으면 분명히 감사해하리라.

가만히 있던 연우혁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잠깐. 팽 대협. 그럼 아까 이상한 소리를 하신 것도 일부러 일을 망치려고 하신 거였습니까?"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나? 뭘 말하는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연우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팽주희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연 포쾌. 자네를 후원해줄 사람이라면 내가 한경에서 찾아보겠네. 아직 아는 사람은 없지만..."

"관둬. 연 포쾌. 이건 그냥 해결해버리라고. 여기서 거절해봤자 하오문하고 안 좋은 감정만 남을 텐데."

"연 포쾌는 사랑하는 남녀의 사이를 갈라놓는 걸로 이득을 얻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 아니다."

"연 포쾌는 불쌍한 기녀가 속아서 객사하는 걸 내버려둘 만큼 냉정한 사람도 아니지."

두 남매가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안 그래도 좁은 방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둘이 으르렁대자 공간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음. 두 분."

연우혁은 헛기침을 했다. 팽주성과 팽주희가 연우혁을 짓누르기라도 할 것처럼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무서웠다.

"제 말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경청하겠네."

"그, 사실 화희란 분은 상사병에 걸린 게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냥 정신이 나간 거니까."

팽주희의 빈정거림에 팽주성이 노려보았다.

"상사병이 아니라면? 그냥 순수한 연심이란 말인가?"

'이 사람, 연애담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연우혁은 팽주성의 취향에 의아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화희란 분이 아까 세 명을 만날 때만 태도가 달라지는 이유는 그냥 그 세 명을 죽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

"..."

"손님 맞이하는 걸 구경할 시간에 화희란 분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니, 잠깐, 잠깐만. 설명 좀 듣자고."

"맞네! 설명 좀 듣는다고 그 사이에 죽겠나?"

팽가 남매는 의와 도리를 내팽개치고 연우혁의 양쪽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꼭 듣고 싶었다.

청월루 살인사건 (2)

기루의 기녀와 비단 포목점의 둘째 아들. 통판의 먼 친척과 부천호의 군관.

이걸 듣는 순간 연우혁은 어떤 사건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기녀가 복수를 위해 세 명을 비수로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술에 몽혼약을 타서 먹인 뒤 세 명을 찔러 죽이고, 겉으로는 연적 관계인 셋이 치정 때문에 서로 죽인 것으로 위장한 사건.

솔직히 연우혁은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감탄했었다. 기녀의 얼굴도 몰랐지만 그 수법이 제법 대담했던 것이다.

말이 술에 몽혼약을 타는 거지, 기녀가 기루에서 손님을 죽이는 건 쉽지 않았다.

먼저 옷을 입혀주고 치장시켜주는 시비의 눈을 속이고 비수를 챙겨야 했다. 들키지 않게 깊숙이 감추는 데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그 뒤에도 난관들은 여전했다.

청월루 같은 기루의 기녀는 손님을 대접하면서도 결코 단독으로 대면하지 않았다. 시를 읊을 때는 뒤에 악사들이 들어오고, 비파를 연주할 때는 무용수들이 들어왔다.

예인(藝人)의 우두머리나 지휘자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었으니 손님과 단독으로 대면한다 하더라도 절대 보는 눈이 적지 않았다.

악사들이 나가고 하인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를 노리려면 몽혼약이 언제 효과를 발휘할지 그 양을 정확히 계산해야 했다.

화희란 기녀는 그걸 해낸 것이다.

'아차.'

연우혁은 자신의 양쪽 어깨에 들어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는 팽가 남매가 연우혁을 벽에 파묻어버릴지도 몰랐다.

"기녀가 사랑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거동이 수상해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심지어 청월루의 간판 기녀 아닙니까."

"하긴 그렇지."

"아니 어째서?"

팽주희와 팽주성의 반응은 차이가 심했다. 연우혁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럴듯하게 우기기만 하면 됐다.

"게다가 세 명한테 동시에 거동이 수상해진다니. 그러면 세 명한테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가능성 낮은 가정은 보통 다른 진실이 숨어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죽이려고 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죽일 이유가 있나?"

팽주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포쾌의 두뇌는 감히 팽주성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걸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비약이 심한 것 같았다.

연정이 아니면 살의라니.

연우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내막을 다 아는 입장에서 한 번에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런 식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확신을 전염시키는 것.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이유도 짐작이 갑니다. 하오문의 무림인들처럼 기루의 기녀들도 그 의리가 강합니다. 한 기녀가 아프면 다른 기녀들이 돌봐주고, 한 기녀가 험한 일을 당하면 다른 기녀들이 그 원통함을 풀어주지요. 오종곤은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입니다. 청월루에 올 정도라면 다른 기루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겁니다. 원한 하나 정도야 충분히 쌓았겠지요."

두 남매는 홀린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모든 일의 진상을 밝히는 포쾌의 모습은 마치 설법을 풀어가는 소림의 고승 같았다.

"두종이나 혁숭월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이 꽤 친분이 깊다는 게 공교롭지 않습니까."

연우혁은 아픈 어깨를 슬며시 주무르며 말했다. 다른 둘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아까 취봉께서 손님들을 모셔온다고 했잖습니까. 친하지 않으면 그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청월루 같은 기루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은자를 아끼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당연히 친분이 없는 손님들을 서로 같은 곳에 몰아넣지 않았다.

취봉이 확인을 위해 손님들을 불러온다는 건 셋이 친분이 깊다는 뜻이 됐다.

"...!"

"이러고 있을 게 아니군. 불러와서 확인해보자고!"

팽주성이 일어나자 연우혁이 당황했다.

"그 셋을 말입니까?"

"하하. 연 포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렇게 무모해보이나? 당연히 기녀 쪽일세."

"셋을 곧 대접하기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건 어렵지 않네. 기다리게 하면 그만이지."

팽주성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도(刀)를 툭툭 치더니 밖으로 나갔다. 연우혁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팽주희에게 물었다.

"하북팽가의 이름을 쓰겠다는 뜻이겠지요? 도를 휘두르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겠지. ...아니다. 도를 휘두를지도."

"..."

연우혁은 빠르게 달려 나가 팽주성을 붙잡고 확인했다.

놀랍게도 팽주성은 도를 쓸 생각이었다.

"제발 말로 해결해주십시오."

"하지만..."

"대협께서 기녀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하면 저쪽도 체면이 설 겁니다."

"무공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제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전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알겠네. 알겠네. 자네가 하라는 대로 전하지."

* * *

취봉 이교는 생각에 잠긴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열심히 준비를 하긴 했지만 과연 저 포쾌가 정말로 화희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는 반신반의 중이었다.

남녀의 연정은 살인이나 절도를 찾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물론 저 포쾌가 보기 드문 신통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직접 그 편린을 보기도 했고.

하지만 팽주성이나 다른 무림인들은 기본적으로 허풍이 좀 심했고, 심지어 그들이 허풍을 떨지 않았다 하더라도 포쾌 본인이 허풍을 떨었을 수도 있었다.

이교는 무림에 신통력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 중 가짜가 칠 할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특유의 신비로움 때문에 허풍을 떠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저 포쾌도 그냥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아첨하는 걸 보면 꽤 약은 구석이 있는 건 확실했으니 말이다.

'화희는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지?'

이교가 하오문의 무인으로서 기녀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위치긴 했지만, 이교는 기녀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화희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만약 화희가 정말로 도망치고 싶다면 이교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오문에서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화희는 이교에게 말을 하는 대신 그 상대하고만 연심을 키워갔다. 아무리 연심이 무쇠도 녹인다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춘초명년녹(春草明年綠), 왕손귀불귀(王孫歸不歸)..."

"이교 님!"

"무슨 일이냐?"

이교가 중얼거리는 사이 복도 끝에서 하녀 한 명이 당황해하면서 달려왔다.

"말씀해주신 세 분 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이교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셋이 친하기도 한데다가 이 주루의 점소이는 언변이 좋아서 한 자리에 모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술에 취한 이들은 예상 밖의 행동을 저지르기 마련.

떠들다가 한 명이 괜히 성을 내며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 팽가에서 나오신 분이 화희를 데리고 갔습니다."

"...누구지? 사내더냐, 여인이더냐?"

이교는 그나마 팽주희가 데리고 갔기를 살짝 기대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사내분이셨습..."

"가자!"

욕설을 내뱉고 이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팽주성은 둔한 소와 같은 무인이라 한 번 마음먹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다.

"셋은 어떻지?"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았지만, 아시잖습니까. 하북팽가의 이름은..."

"그렇겠지."

전낭이 두둑한 셋이라지만 결국 실제로 가진 힘은 별로 없는 이들이었다. 기녀 하나 때문에 하북팽가의 후계자와 입씨름을 벌일 리 없었다.

원한이 생겨도 팽주성한테 생길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교는 대체 팽주성이 화희를 왜 데리고 간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걱정이 됐다.

'설마 자신이 길을 막을 테니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충동질하는 건 아니겠지?'

-흑. 흐흑.

"!"

이교는 비밀 복도 끝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내공을 일으키고 기척을 죽였다. 이교가 익힌 은현회혼공(隱現廻魂功)은 내공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인기척을 없애는 효능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귀를 기울이자 화희가 울면서 팽가 남매에게 말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래서 복수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화희는 어렸던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기녀를 벌레 죽이듯 죽인 셋에게 복수하려고 했다고 토로했다. 그걸 들은 이교는 깜짝 놀랐다.

친구의 목적이 복수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걸 처음 보는 셋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대체 무슨 대화를 했길래 화희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단 말인가?

"연 포쾌의 말이 사실이었군."

'대체 저 포쾌가 무슨...?!'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맞힌 거지?"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팽주성과 팽주희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이교의 속마음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고 궁금함만 커져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서 묻고 싶었지만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 * *

"음. 이런 이유라면 죽여도 될 것 같군."

"확실히 이런 이유라면야..."

"?"

가만히 듣고 있던 연우혁은 살벌한 말에 당황했다.

팽주성은 그렇다 쳐도 팽주희까지?

"잘못 들었습니다?"

"예양이 지백을 위해 조양자를 죽이려 했고, 섭정도 엄중자를 위해 협루를 죽이려고 했잖나. 내가 보기에 이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일세. 오히려 저 둘보다 훨씬 낫지. 연 포쾌도 못 들은 척 해주면 안 되나?"

"어..."

무림인들의 사고방식에 당황하던 연우혁은 빠르게 생각에 잠겼다.

기녀의 고백을 못 들은 척 숙소로 돌아간다면?

장점은 팽가 남매가 만족하고, 하오문 쪽에서는 불만을 가지더라도 팽가 남매한테 가질 것이고...

단점은 언젠가 사람 셋이 죽는 걸 막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우혁은 일말의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

생각해보니 한경에서 하루에 몇 명은 죽을 텐데 거기에 몇 명 추가된다고 뭐 달라지겠는가. 연우혁은 자기 앞에서 어떤 이유든 간에 사람이 죽으면 안 된다고 막아서는 정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 셋이 하는 짓을 보니 기녀가 안 죽여도 언젠가 누군가 죽일 가능성이 높았다.

순간 연우혁은 영기가 상단전에 축적되는 것을 느꼈다. 전혀 기대치 못한 보상이었기에 연우혁은 놀랐다.

"?!"

"혹시 이 기녀한테 도움이 될 조언이라도 있나?"

"..."

팽주성의 질문은 놀라던 연우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 조언이 어딨겠는가!

팽주희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담대하게 마음을 먹으라는 것 말고는 없지 않나...?"

"어허. 아까도 결국 연 포쾌가 맞았잖나. 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조언이 나올 거다."

'들킬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것밖에 없는데.'

일단 원한 관계가 있다는 점부터가 위험했다. 깊게 찾아보면 저 셋 때문에 죽은 기녀가 화희와 친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입 무거운 무림인을 몰래 고용한 다음 밤길에 습격시키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들키더라도 셋을 반드시 확실하게 죽이겠다는 기녀한테는 의미가 없는 조언이었다.

"그럼 나부터 조언하도록 하지. 내 생각에는, 일이 끝나는 순간 바로 자결하는 게 좋을 걸세. 괜히 관졸들에게 붙잡힐 필요 없지. 비단에 이유를 적고 당당하게 죽게."

"..."

연우혁은 자신이 생각한 조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녀는 팽주성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 눈물을 닦으며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연 포쾌가 화희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죽일 것 같나?"

* * *

질문이 떨어지자 다른 셋의 시선이 포쾌에게 쏠렸다.

이교도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포쾌를 쳐다보았다. 저 포쾌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쾌는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가만히 있겠다고? 어째서인가?"

"그건..."

"이교 님! 이교 님! 손님이 죽었습니다!"

"?!!!"

계단 아래에서 달려오며 외치는 하녀의 목소리에 이교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저 포쾌는 설마 이것까지 예측했단 말인가??

청월루 살인사건 (3)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라! 어서!"

"그, 그러니까 그게..."

하녀는 충격적인 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든 털어놓았다.

먼저 시비가 붙은 건 오종곤과 혁숭월이었다.

평소에 셋이 친하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였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미묘한 알력이 있었다.

통판 어르신의 친척인 두종, 그리고 한경에서 비단을 취급하는 포목상의 아들인 오종곤. 이 둘은 친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통판의 힘이 필요할지 모르는 게 상인인 만큼 오종곤은 종종 자신의 은자를 꺼내가며 두종을 대접했다.

그에 비해 군관인 혁숭월은 미묘하게 거리감이 있었다. 원래 문관들은 군관을 비웃고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강했는데, 두종 또한 숨기려고 해도 은연중에 티가 났다.

두종과 친한 오종곤 또한 그랬다. 상인 입장에서도 거칠고 못 배워먹은 군관은 별로 어울리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알력이 있는 셋이 어울리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셋이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관직에 연줄을 원했고, 누군가는 은자를 원했으며, 누군가는 여차할 때 칼을 휘둘러 줄 병졸들을 원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언제든지 계기만 생기면 터져나갈 수 있는 법.

그 계기는 바로 하북팽가의 팽주성이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대인어른! 하북팽가의 팽 대협께서 화희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아주 푹 빠지셔서...

-허!

생각치도 못한 하북팽가의 젊은 놈이 기녀를 데리고 가자 술에 취한 셋은 놀라워하면서도 불쾌해했다.

그 불쾌함은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기녀의 춤과 악공의 연주를 들어도 더 부글거리기만 했다.

미간이 찌푸려진 두종의 눈치를 본 오종곤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혁 형은 군관이시면서 저런 야인 놈을 그냥 내버려두실 겁니까?

-뭐라?

-군관이시잖습니까! 기루 밖에는 부하가 다섯이나 있고 말입니다. 저깟 야인 놈은 대번에 혼쭐을 내주셔야죠. 저번에 그렇게 화희한테 절절히 연정을 고백하셨으면서!

그 말에 혁숭월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같은 무림인이어도 하북팽가 출신의 무림인은 결코 야인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명문가와 맞먹는 권세를 갖고 있었다.

부천호 따위가 덤벼들었다가는 단번에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상대였고, 그건 오종곤도 알고 있었다.

그런 놈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네놈이 날 모욕하려는 것이냐? 네놈이 먼저 들어 가봐라! 어디 네놈이 사내대장부인가 보겠다!

-흥! 저는 화희한테 그렇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 그래서 그런가? 네놈이 저번에 읊은 시는 기억나냐? 대구(對句)도 틀렸고 자도 틀린 시였다. 그깟 시를 읊어놓은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냐! 그러니 비단도 못 팔아먹고 빌빌대고 있는 거겠지!

-어허. 혁 형.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두종은 혁숭월을 말렸지만, 그 표정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저번에 오종곤이 읊었던 시는 두종이 지어줬던 시였던 것이다.

-종곤 아우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그렇게 받아들이시니 너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부(武夫)들이 난폭하고 법도를 모른다고 떠들어도 뭐라고 못 할 겁니다.

두종의 비꼼은 혁숭월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혁숭월은 참으려고 했다. 두종은 한경 통판의 먼 친척이었으니까.

그러나 옆에서 거드는 오종곤이 기어코 혁숭월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혁 형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번에도 은자가 없어서 제가 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은자는 대체 언제 갚아주실 겁니까? 길가의 거지도 이렇게 돈을 안 갚진 않습니다.

-이 개자식이 무인이 필요할 때는 굽신거리며 내 힘을 빌리더니 이제 와서 망신을 줘?!

폭발한 혁숭월은 오종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넘어진 오종곤이 악 소리를 지르자 두종이 깜짝 놀라 부지깽이로 혁숭월을 찔렀다.

-이 자식이!

혁숭월은 발목에 숨겨놨던 단도를 뽑아들어 오종곤을 푹 찔렀다. 기겁한 두종은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악사들과 기녀들이 사방으로 달려가는 탓에 혁숭월은 두종을 바로 잡지 못했다.

-군호(軍戶)는 당장 달려와라! 기생오라비 놈이 날 죽이려고 했다!

혁숭월은 기루 밖의 부하들을 불러 두종을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 이미 한 번 피를 본 탓에 눈이 벌게져있었다.

그러나 두종도 만만치 않았다. 하필이면 두종이 기루에 데리고 온 손님들 중에 통판을 만나러 온 무림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 * *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팽주성은 지금 긴박한 상황도 잊고 연우혁을 보며 외쳤다.

옛날에 한 재상이 복숭아 두 개로 무인 세 명을 죽였는데, 지금 이 포쾌는 말 한 마디로 무인 세 명을 죽음에 빠뜨린 것이다.

"이걸 예측하고 나한테 말을 전하라고 한 거군! 도를 쓰지 않고 팽가의 이름을 전하라고 한 게 그래서였나!"

"...아닙니다!"

연우혁은 기겁해서 부정했다. 뭔 미친 개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하북팽가의 이름을 그리 멋대로 이용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다!"

"아니. 이용해도 되네!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에 이용된다면 영광일세!"

"대인...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뒤에 있던 기녀가 눈물 어린 목소리로 연우혁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교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이 포쾌를 쳐다보았다.

정말 말 한 마디로 셋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환장하겠군.'

연우혁은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물론 하북팽가나 하오문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지금 말 한 마디로 셋을 죽였다고 오해를 받는 건 그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지금 연우혁은 한낱 포쾌 아닌가.

나중에 소문이라도 잘못 퍼져서 두종이나 혁숭월의 친족에게 원한이라도 사면...

"그만해라!"

다행히 팽주희가 있었다. 연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줄 사람이었다.

"연 포쾌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이런 소문이 퍼지면 얼마나 곤란하겠나!"

"아... 아아! 그렇군!"

팽주성은 알았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다들. 오늘 일은 비밀을 지키게! 만약 오늘 일이 누설된다면 팽가의 이름을 걸고 그 자를 죽이겠네."

이교와 하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팽가 남매는 연우혁을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보냈다.

연우혁이 해준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정말 돌아버리겠군!'

연우혁은 해명에 나서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래에서 우지끈 박살나는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팽주성과 팽주희는 바로 도(刀)를 뽑아들고 달려 나갔다.

"팽 대협. 그쪽은 계단이 아닌...?"

연우혁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기루 이층의 바닥을 박살낸 뒤 아래로 낙하했다.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한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연 포쾌는 계단으로!"

이교의 외침에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 * *

쌍비홍검(雙飛紅劍) 담온과 쌍비청검(雙飛靑劍) 담기는 무림에서 제법 유명한, 정사지간을 오가는 고수 형제였다.

이류 말입 정도 되는 무위도 무위였지만, 둘의 합격술이 특히 뛰어난 덕분에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어찌나 합격술이 뛰어났는지 일류 고수 하나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꺾었을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고 합격술이 뛰어나도 그것만으로 무림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당장 이 두 형제도 통판에게 청탁할 것이 있어 한경에 와있지 않은가.

통판의 먼 친척을 만나 어렵게 부탁을 하고, 없는 살림에 은자를 꺼내 기루까지 대접해줬는데...

"빌어먹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일단 등을 떼지 마라!"

둘은 달려드는 군관과 병졸을 베어서 쓰러뜨렸다. 그걸 본 혁숭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보통 고수가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저 자를 죽여요! 저 자를 죽이란 말입니다!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알겠소!"

두종이 외치자 담온은 검을 뻗었다. 쾌속한 검법이 붉은 선을 그리며 혁숭월의 몸을 푹 찔렀다. 혁숭월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퉷!

그걸 본 두종은 후다닥 달려들어 침을 뱉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혁숭월이 놓친 검을 붙잡아 휘둘렀다.

"이 하찮은 무부 놈이 어디서! 어디서!"

"진, 진정하십시오. 공자님!"

"이 자식이 감히!"

안 그래도 피 때문에 단단히 독기가 오른 두종이 자신을 말리려 드는 하인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인이 쓰러지자 담온과 담기 두 형제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지금 뭐하는 거요!? 하인을 베다니!"

"나, 나를 치려고 했다고!"

"치긴 뭘... 일단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좋겠소. 정신 차리시오!"

두 무림인 형제의 기세가 살벌해 두종은 성질을 내려다가도 압도되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이 자리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었다. 한동안은 한경을 빠져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 순간 위에서 팽가의 남매가 떨어졌다. 담온과 담기는 예상 외의 습격에 혼비백산해서 두종을 붙잡고 온몸을 앞으로 날렸다.

'크윽...!'

"두 공자. 달리시오! 빠져나가야 하오!"

"너희들은 두 공자를 데리고 빠져나가라!"

두 무림인 형제는 두종의 하인들에게 외쳤다. 노회한 둘과 달리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두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 날 공격한 거냐! 어떤 놈이냐고!"

"하북팽가의 팽주성이다. 감히 대낮에 기루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당장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베겠다!"

"팽주희다. 마찬가지다."

"...가자!! 도망가자!!"

두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하인들과 함께 기루 문으로 달려 나갔다. 팽주성은 쫓으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두 무림인 형제가 길을 막은 것이다.

"쌍비홍검?!"

"맞소. 팽가의 젊은 호랑이가 이름을 알아주다니 영광이오."

"지금 누굴 비호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팽주성이 고함을 지르자 둘은 살짝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얼마 어울리지 않아도 두종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던 것이다.

"두 공자를 쫓고 싶으면 우릴 꺾어야 할 거요."

"연 포쾌. 우리가 상대할 테니 취봉과 함께 두종 놈을 쫓아가게."

"알겠습니다. 팽 소저. 참고로 저 분들이 펼치는 진법은 칠성(七星)의 방위를 쓰고 있습니다. 천추(天樞) 쪽이 생문입니다!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

"..."

두 무림인 형제는 기절할 듯이 놀라서 포쾌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청월루 살인사건 (4)

"저... 저게... 대체 어떤... 뭐하는..."

나름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담온과 담기였지만 지금 일어난 일에는 대응하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합격술이란 것은 수준이 낮다면 그저 손발을 같이 맞추는 선에서 끝나지만 그 수준이 높아지면 사실상 진법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깊은 이치가 들어가기 마련.

당연히 두 형제의 합격술에도 진법이 응용되어 있었다. 북쪽의 일곱별을 따온 이 합격술은 요광(搖光) 쪽이 사문이고 천추(天樞) 쪽이 생문이라 이걸 들키는 순간 쉽게 무력화가 됐다.

하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난전을 치르면서도 이걸 꿰뚫어보는 무림인은 만난 적이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혹시 포쾌로 위장한 제갈세가의 사람인가 싶었다.

"포, 포쾌가 말이 됩니까 형님? 방금 분명 포쾌라고..."

"정신 차려라!"

두 형제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커다란 두 도(刀)가 살벌하게 공간을 압박하며 짓쳐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