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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2 타인의 심장

무언가를 해냈다면 그에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이 명제는 비단 학교나, 사회나, 나라와 같은 커다란 시스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개체나 개인 간의 관계처럼 더욱 좁은 개념에서 보상은 더 큰 의미가 있다.

운동하고 난 뒤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주어야 하며, 탈진한 몸에는 영양소를 공급해주어야 한다. 오랜 노동으로 피로를 느끼면 당분을 요구한다. 한쪽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으로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보상체계가 신체를, 정신을, 인간관계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

따라서 나는 아지에게 보상을 주어야 했다.

딸랑딸랑.

"자아. 바비큐 파티다."

"멍!"

아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꼬리를 흔들었다. 꼬리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일어난 바람 때문에 불꽃과 연기가 다 나에게 향할 정도였다. 조금만 더 빠르게 흔들면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겠다.

꼬챙이로 고기를 푹 찔렀다. 저항 없이 들어가는 걸 보니 속까지 다 익은 듯하다. 부피를 키우기 위해 물에 오래 불리는 바람에 반쯤 삶은 것처럼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가 먹을 게 아니니 신경을 껐다.

꼬챙이로 넓적한 고기를 집어 든 뒤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아지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자세를 낮췄다. 헤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팔을 힘껏 당기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넓적한 고기를 저 멀리 날려보냈다.

"받아라! 특제 고기 원반!"

"멍! 머머멍! 멍!"

압도적인 풍미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날아가는 고기 원반. 눈이 돌아간 아지가 부리나케 고기를 쫓았다. 날아가는 고깃덩이를 허공에서 낚아챈 아지는 행복하게 웃으며 고기를 뜯었다.

이게 놀이와 식사를 동시에 하는 놀이식사. 아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보상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지 않지만, 나를 위해 흡혈귀와 싸워준 개라면 고기를 먹을 자격이 있지.

다음 고깃덩이를 석쇠 위에 올리며 소리쳤다.

"앞으로도 말 잘 들어야 한다!"

"멍멍! 응!"

단순하지만 충분한 보상을 받은 아지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퍼진다. 역시 개는 참 좋은 친구라니까. 혈마와 사투를 벌이고도 고깃덩이 몇 개면 행복해하니.

피식 웃던 나는 문득 무언가 잘못된 점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냈는데. 왜 나에게는 보상이 없을까?"

어라?

나는 분명 성과에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나만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지? 보상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가 정작 남 보상을 챙겨주는 꼴이라니?

이건 뭔가 불공평해. 뭔가, 뭔가가….

"멍멍멍! 맛있어! 멍멍멍!"

어느새 고기를 다 처먹은 아지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나는 아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지야. 나 좀 칭찬해줘."

"너, 착해! 고기 줘!"

"칭찬으로 밥 벌어먹을 생각 말고, 가슴으로 우러나오는 칭찬 말이야. 진심이 보이는."

그러자 아지가 팔을 허리에 얹고는, 가슴을 쭉 펴며 외쳤다.

"너, 착해!"

"그래. 너에게 비유나 관용구, 혹은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기대한 게 잘못이지. 고맙다, 야."

"고기 줘!"

"밥 벌어먹을 생각은 여전하구나."

다시 고기에 꼬챙이를 꽂고 날려 보내자 아지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곧장 달려갔다. 그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니 자기 몫만 챙기면 된다 이거지?

새삼 아무런 걱정이 없는 아지의 모습이 아니꼬워지려고 할 때였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느냐?"

보상이 필요한 것은 음의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는 그것을 벌이라고 부른다.

고작 핀레이 따위에게 지배되어 그 난리를 피운 흡혈귀는 나의 지엄한 분노에 마주했고, 벌로 일단 자기가 저지른 파괴를 수습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탓에 흡혈귀는 망가진 콘크리트 땅을 다지며, 처참하게 파괴된 불사자의 오른팔 살점들을 회수했다. 흡혈귀의 권능은 불사자와 닿아선 안 되었기에 흡혈귀는 오랜만에 자기 손을 움직여 하나하나 주워야 했다.

흡혈귀가 불사자의 팔, 정확히는 팔을 이루었던 살점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토인의 팔은 사실 네가 파괴한 게 아니더냐?"

"어허! 손뼉이 맞부딪혀야 소리가 나지. 거기에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흑기사들이 없었다면 불사자의 팔이 과연 그토록 상했을까요? 그러니 책임은 양쪽에 있고, 특히 제멋대로 일을 저지른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책임이 크죠!"

어딜 감히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려고. 어림도 없지. 나는 눈을 부릅뜨며 흡혈귀를 추궁했다.

그리 말하니 흡혈귀가 시선을 내리며 작게 말을 흐렸다.

"면피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살점을 꼬챙이로 긁어내어 사방에 흩뿌린 이 끔찍한 몰골마저 내가 저지른 일이라 하면, 그건 조금 억울하니 말이다."

조금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으나, 세상에는 나보다 더 찔려야 할 사람이 많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당당해졌다.

"그거 조금 억울한 거 가지고 그래요? 지금 저는 얼마나 억울한지 아세요? 몸이 부서져라 일했는데 남은 건 전후처리에요! 내가 요리했는데 음식도 다 못 먹고 설거지까지 다 떠맡겨진 꼴이야!"

"그것이 그토록 분하느냐?"

"당연하죠! 이번 상황에서 제가 잘못한 게 어디있어요? 아무 잘못도 없이 일만 했는데 제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어요! 하다못해 누가 잘했다고 칭찬해주지도 않는데!"

"잘했다."

엥? 뭐라고?

느닷없이 들려온 말에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동안, 흡혈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고맙구나. 너희는 정말 잘해주었다. 덕분에 나도 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어. 전부 너희들 덕분이다."

느닷없이 칭찬을 들었으나, 사람 마음이 이런 칭찬으로 기분이 좋아졌다면 '엎드려 절 받기'라는 속담이 따로 생기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개는 밥 달라고 칭찬하더니,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또 뭘 뜯어내려고 이럽니까?"

"나를 그런 속물로 보는 게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다. 고맙다고 했는데 무엇이 불만이냐?"

"당연히 고마워해야죠. 웬 듣도 보도 못한 멍청이에게 조종당할 뻔한 걸 구해줬는데. 그건 상수고요."

"칭찬이 고픈 것 같아 해주었더니 불만만 듣는구나. 그러면 나보고 어찌하라는 말이냐?"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교육생 말대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면, 전기 마사지는 필요 없겠네요? 그렇죠?"

내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흡혈귀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았다. 잠시 머뭇거린 흡혈귀는, 내 싸늘한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와. 진짜 중독이네."

"중독이라니. 그 어떠한 독도 내 몸에는 듣지 않는다. 나는 그저, 잠시라도 뛰는 심장을 바랄 뿐이다. 그러니 조금만."

"몸이 망가지는데도 계속 원하는 걸 중독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중독된 걸 모르니까 부끄럽게 권속에게 조종당하는 거 아니에요. 잘 살고 계시는 분이 왜 그리 심장을 못 뛰게 만들어서 안달이세요?"

계속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꾸하자, 결국 몸이 안달 난 흡혈귀는 원망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때문이잖느냐."

"네에?"

이건 또 무슨?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철 지난 만우절 농담이지?

장난삼아 노인네에게 자극적인 놀이를 알려준 내 잘못이라고 한탄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걸 댁이 말하면 배은망덕이야!

흡혈귀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내 팔을 꼭 붙잡고는 말했다.

"나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어떤 감정을 느끼더라도 금방 사라지고야 만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욕구도, 감정도, 추억도 무채색으로 덧칠한 것처럼 희미하다. 심지어 너희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고기를 입에 한가득 문 아지가 살랑살랑 걸어오다가, 흡혈귀를 보고는 그냥 제 자리에 앉아서 남은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흡혈귀는 먼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아련하게 아지를 보았다.

"배를 곯지 않으니 음식을 필요치 아니하며, 그렇기에 향을 느끼고 맛을 보더라도 행복하지 않다.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어도 개의 왕처럼 기뻐할 수 없다."

"피 맛은 보잖아요."

"그게 진정 맛보는 거라고 여겼느냐? 맛은 비유일 뿐, 어디까지나 나와 가장 가까운 피를 찾아 취하는 것이다. 피의 성질이 내 것과 비슷할수록 나를 충족시키니."

나를 가볍게 나무란 흡혈귀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나의 감정에는 온기가 없다. 머릿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일 뿐. 어둑한 밤하늘의 별빛은 아련히 아름다우나 차가운 대지를 데우지 못하니, 나의 감정은 온기 없이 그저 한순간 명멸하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토록 악명 높은 흡혈귀가 세간의 소문과 다르게 인자하였던 것은, 그녀의 성격이 그러한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다른 이유 역시도 무시할 수 없다.

본디 인간은 자기를 해칠 수 없는 것에는 관대해진다.

정확히는, 무감각해진다.

흡혈귀는 몸의 상처는 물론, 마음의 상처 역시 받지 않는다. 누군가 그녀를 향해 칼과 창을 찔러넣는다고 한들, 저주하고 원망하며 죽어간다고 한들, 어젯밤 지저귀던 새의 노랫소리와 비슷하게 흘려들을 수 있다.

잔인하다? 아니, 인간은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시조 티르칸쟈카가 매일 같은 일상에서조차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잔잔히 흐르는 별빛을 보며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소녀가 아니었더라면.

인류는 지금보다 몇 배나 냉정하고 잔혹한 흡혈귀의 여왕을 상대해야 했을 테니.

"핀레이가 나를 원망하여도 괘념치 않았다. 그를 죽이면서도 나의 마음은 낡은 서랍장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너를 꽤 좋아하는 편이나, 만일 네가 돌연히 죽어버린다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이러한 사내가 있었지, 하며 잠시 아쉬워하고는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비유라고 해도 그렇지, 왜 나를 죽이고 그래, 무섭잖아. 눈은 안 깜빡여도 좋으니까 살려주면 안 될까?

무심코 한 비유에 내가 겁을 집어먹은 것도 모른 채, 흡혈귀는 양산을 쥔 손을 가슴께로 다소곳이 모았다.

"허나, 심장에 손가락이 닿은 그 짧은 순간에만은. 나는 몸을 흐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때 나의 몸은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 심장은 제멋대로 튀어오르고, 그러할 필요도 없는데 허파가 멋대로 공기를 빨아들인다. 한평생 차가웠던 가슴이 따뜻해진다."

지금 가슴을 양손으로 품어도 만져지는 건 싸늘함뿐. 흡혈귀는 쓸쓸하게 손을 펴 내려다보았다.

"아예 몰랐으면 모르되, 아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오랜 밤이었어. 동이 트고 희미한 온기가 비추었는데, 다시 시계를 돌려 캄캄하고 추운 밤으로 돌아가라니.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

그리고는 다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피처럼 붉은 눈이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나를 찌른다.

오래된 생각을 담담히 풀어놓으며, 마음속으로, 그리고 입 밖으로 흡혈귀는 하나의 바람을 들려주었다.

"부탁이다, 나의 심장이 되어다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땅조차 저버린 무저갱에서 오랜 소망이 흘러나왔고.

나는 공포에 질렸다.

말은 참으로 로맨틱하다. 그 안에 담은 감정은 심장이 멈춘 흡혈귀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절절하여, 나조차 순간 혹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독심술이 있지.

독심술로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읽고는 그 잔인한 속내에 혀를 내둘렀다.

심장이 되라고?

그건 말 그대로, 원하는 때에 자기 가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전기를 흘려주는 외부 부착형 심장이 되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나는 네 이름도…."

"됐어요."

더 뭔가 나타나기 전에 나는 냉큼 말을 잘랐다.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말이 끊긴다. 한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원망이 가득 담겼다.

"그렇게 데여 놓고도 아직 정신 못 차리셨어요? 남한테 심장 함부로 내주고 다니다가 또 큰일 난다니까요."

"그러니 네가 하면 되지 않느냐."

"아니, 글쎄. 나는 어떻게 믿고? 제가 냉큼 조종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완곡한 거절을 할 겸 한껏 으름장을 놓았으나 흡혈귀의 반응은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너라면, 상관없다."

담담히 전하는 그 말은, 독심술을 가진 나조차도 잠시 넋을 잃고 생각을 다시 읽어보게 만들 정도로 의아했다.

설마 흡혈귀가 그새 농담이라도 배운 걸까 싶어서 다시금 똑바로 생각을 읽었으나.

'어차피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천칭 위에 나를 반드시 올려놓아야 한다면. 차라리 내 마음에 드는 쪽에 나를 맡기겠다.'

아니. 제정신인가. 호구여도 이런 호구같은 마음가짐이 또 있을 줄이야.

세상에는 정도가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도박쟁이들도 구태여 코흘리개 돈을 빼앗아가지는 않듯, 호구도 이 정도면 털어먹기도 미안할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흡혈귀의 애원을 단호하게 쳐냈다.

"제가 상관있어요. 저는 누군가의 심장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게 교육생이더라도."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에, 흡혈귀는 크게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토록 처참한 심정 역시도 찰나.

실망감도 금방 사라지고, 곧이어 다가온 건 체념. 포기가 아닌, 그저 강처럼 모든 걸 흘려보내는 흐름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럴 때는 독심술이 참 안 좋아.

쳐내야 하는데, 그냥 보내면 되는데.

빤히 보고 있으면 정작 나도 미련이 남는다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심장을 포기하지 않으실 거죠?"

내 말에 흡혈귀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반드시 긍정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나, 저울에 올려둔다면 분명 긍정으로 기운다.

핀레이 같은 종자에게 심장을 맡기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예상하건대 그에 살짝 못 미치는 바보짓을 저지르고 다닐 거다.

후우. 진짜.

나는 이마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네."

"하겠다, 고 하였느냐? 그 말은."

잠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화색이 도는 얼굴.

확신했다. 이토록 알기 쉬워서야 또 어떤 사기꾼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지도 모른다…. 물리적으로 말이지.

어쩔 수 없다. 나는 손을 내밀어 흡혈귀의 손을 붙잡았다.

"희망이 자꾸 손아귀 틈으로 사라지는 건,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손이 터무니없이 커서도, 희망이 그토록 작고 고와서도 아니에요."

이제는 대놓고 손을 잡으려고 들어도 무어라 나무라지 않는다. 위기감은 무슨. 정이 조금 들었다고 간단한 무례도 무시하는 거다.

나는 작고 차가운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가지런히 붙였다.

소지와 약지를, 약지와 중지를, 중지와 검지를, 그리고 검지와 엄지까지.

"그냥, 손가락 사이에 힘을 덜 주었을 뿐이죠."

필요한 건 절실한 바람.

꾹. 다섯 손가락을 꽉 붙인 뒤, 그걸 흡혈귀의 가슴팍으로 밀었다. 가슴께에 양손을 모으게 된 흡혈귀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후우. 진짜,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저는 교육생의 심장이 아니에요. 되고 싶지도 않고요. 왜냐면 저는 매 순간 열심히 뛰고 싶지도 않고, 내키지 않으면 안 뛰어줄 거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교육생이랑 떨어져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의 소망을 이리 가까이서 맞아버리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미래를 보는 이가 거기에 얽매이다 파멸하는 것처럼.

마음속을 보는 이 역시, 타인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대신, 그 심장이 다시 뛰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EP.73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 속

탄탈로스 4층의 교육실. 그곳에서 회귀자는 불사자의 소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자라고 한들, 대지모신과 연결이 끊긴 이곳에서 신체를 좀먹는 저주는 치명적이다. 어쩌면 과거 수십 개의 마을을 집어삼킨 불사의 시체 골렘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아직도 그만한 양의 시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불사자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따라서 회귀자는 가지고 있는 회복 아이템을 털어서 불사자의 팔을 잠식한 저주를 해주하고 몸을 회복시키기로 했다.

'내가 개입해서 불사자가 지금 눈을 뜬다면 원래 역사에서 멀어지는 셈이지만…. 이미 충분히 꼬였어. 불사자가 어떻게 저주받았는지 아는 것으로 충분해.'

불사자와 흡혈귀가 이런 식으로 엮인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자체가 커다란 수확.

더 캐내려면 캐낼 수야 있지만…. 현 상황에서, 회귀자는 다른 의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지난 회차 의선에게 배운 레시피를 참고하여, 세계수의 이파리까지 넣은 귀중한 회복약을 만들면서도 회귀자의 머릿속에선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천앵을 튕겨낸 것, 내 위장을 간파한 것, 핀레이의 공격을 묘기처럼 피해낸 것. 다 보통 실력은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고하기로, 그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열세 번의 회귀 동안 온갖 것을 봐온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하지만.

'뭐라고 할까…. 왜, 압박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거야? 얼핏 보면 그냥 약골처럼 보인다고!'

잠깐, 타임.

약골이라니. 사실이어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기야?

'달음박질도 느려. 반응은 가끔 나조차 섬뜩할 정도로 빠른데, 그런 것치고도 동작이 하품이 나오도록 둔해! 힘이 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 검술을 보여준 적도 없어. 불사자의 오른팔도, 레이피어처럼 톡톡 건드리기만 했지 제대로 휘두른 적도 없잖아!'

어어? 마지막에 핀레이 후려갈길 때, 나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쳤는데? 핀레이 이빨도 하나 나갔는데?

내 인생 최고의 스윙을 봤으면서 제대로 휘두른 게 아니라고?

'으으으으으.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야. 한 번, 딱 한 번만 대련해보면 알 거 같은데! 아니면 벗은 몸을 살펴볼 기회만 있어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더 이상한 생각으로 빠지기 전, 나는 참지 못하고 복도를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셰이 교육생. 준비는 끝났습니까?"

"어? 응, 대충."

회귀자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것이, 그렇게 보면 옷이라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보급형 셔츠…. 으음. 역시 셔츠 위쪽으로는 몸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망할 군국. 의복 패킷은 쓸데없이 잘 만들었어.'

정말, 세상 사람들이 독심술 못 쓰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아니었으면 너는 가장 먼저 어디 갇히거나 했다. 자비로운 나니까 그냥 읽고도 넘어가는 거지….

'꿰뚫어 보는 눈은 사람한테 써봤자 뼈밖에 안 보이고…. 내려다보는 눈도 가린 곳은 못 보고…. 그러면 역시 갈아입을 때나 목욕할 때 멀리 보는 눈으로 훔쳐보는 수밖에 없나….'

취소. 나도 못 넘어가겠다.

안 되겠다. 이 관음 회귀자의 생각이 우주까지 날아가기 전에 충격 요법을 좀 시행해야지.

아직도 뚫어지게 나를 보는 회귀자를 향해 크게 호통쳤다.

"셰이 교육생!"

"어? 왜? 갑자기."

회귀자를 부른 나는, 곧장 양팔을 X자로 포갠 뒤 수줍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저. 부끄러우니까 그런 시선으로 저를 보는 건 삼가주실래요? 보는 것만으로도 더럽혀지는 기분이라."

회귀자의 고개가 삐그덕거렸다. 순간적으로 과한 정보량이 들어온 탓에 이성이 잠시 마비된 탓이다.

'…저건 무슨 개소리야? 왜 얼굴을 붉혀? 저 소름끼치는 자세는 뭐야? 뭐? 부끄러워? 내 시선에 더럽혀진다고? 나는 단순히 육체를 엿보려고. 어? 잠깐만. 혹시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파편화된 정보를 짜 맞추고, 자기 상황과 내 언행을 연결하고는.

드디어 내 말의 진의를 깨달은 회귀자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뭔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야!!"

"방금 제 몸을 봤잖아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할 수만 있다면 벗기고 싶다는 음탕한 눈으로!"

"음탕한 눈으로 안 봤거든!"

"벗기고 싶다는 건 진짜야? 세상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셰이 교육생이 제 옷을 벗기려고 해요!"

"야!"

내가 냅다 달아나며 외치자, 회귀자는 상황도 잘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쥐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본능적으로 나를 쫓아왔다.

"잠깐! 멈춰!"

"싫어요! 오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리는 그만둬!"

"우와아아아악!"

내가 소리치는 걸 멈추지 않자, 이를 악문 회귀자는 가까이 따라붙으며 천앵을 쥐었다.

'안 되겠어! 일단 공기를 베어서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 뒤에 손을 쓰자!'

아니, 비겁한! 정정당당한 여론선동 도중 치사하게 힘을 쓰려고 하다니.

칼을 들면 내가 질 거 아니야? 달아나는 와중 우뚝 멈추고는 그 자리에서 반 바퀴 돌았다. 공기를 베려고 하다가 내 가슴에 거의 부딪힐 뻔한 회귀자가 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에이. 장난에 너무 크게 반응하지 말아요, 셰이 교육생. 진심인 줄 안다고요."

"…뭐? 갑자기?"

"설마, 저처럼 볼품없는 몸을 진짜 훔쳐보려는 건 아니죠? 셰이 교육생도 최소한의 도덕은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그렇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건 아니야!!"

빽 소리 지르는 회귀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어? 저번에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아지 씻겼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기묘한 컨셉이 잡혀버린 회귀자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는 둘러댔다.

"아니, 아닌 게 아니라!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나에게 있어서 너는…! 그래! 화장실 변기나 다름없어!"

"…아니, 그건 좀 여러모로 선정적인데."

"그런 뜻이 아니고! 그만큼 불결하다는 뜻이야! 아씨, 뭐라고 말해야 해?!"

'지나가던 사람? 오히려 신경 쓰는 것 같잖아! 길가의 돌멩이? 무저갱에는 돌멩이가 없는데!'

"그, 저를 뭐에 비유할지는 하나도 안 중요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보잘것없는 무언가라고!"

"네에네에. 일단 교육실로 돌아가죠? 우리가 팔을 빌려쓰느라 신세를 진 라쉬 씨를 되살려야 할 거 아니에요?"

"우리라니? 네가 썼겠지!"

나는 씩씩거리는 회귀자를 다독여 다시 교육실까지 돌아갔다.

그제야 커다란 솥단지에서 보글보글 끓는 회복약에 생각이 미친 회귀자는 이제야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해냈다.

"아, 맞아! 불사자의 오른팔은?"

"여기요."

상자 안에 한가득 모아 든 살점을 건넸다. 회귀자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으으. 끔찍해. 세상에서 이런 꼴을 당한 불사자는 이 사람이 처음일 거야."

"재생할 수 있겠죠?"

"가능해. 저주만 해주하면 나머지는 대지의 정수만 공급해줘도 알아서 붙을 테니….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상자를 챙겨 솥단지 옆에 내려놓은 회귀자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르칸쟈카는? 이걸 줍겠다고 하지 않았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지금 지하 무기고로 돌아가 있어요."

"그래? 피곤한가? 하긴, 그럴 수도."

"그리고 셰이 교육생, 부탁이 있는데요."

부탁이라는 말에 회귀자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네가? 뭔데?"

"이것 좀."

나는 준비해두었던 쪽지를 회귀자에게 건넸다.

"제가 잠시 어디 갔다가 올 예정이니까, 제가 없을 때 읽어보세."

그렇게 말을 끝마쳤을 때 회귀자는 이미 쪽지를 펴고 첫문장을 읽어내려가던 상태였다. 약간 미안한 듯 나와 편지를 번갈아 보던 회귀자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너무 느려서 그래. 경고는 내가 읽기 전에 했어야지."

"댁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닐까요? 뭐, 별 내용은 없으니 펼친 김에 읽어보세요."

'뭐야. 나는 또 쪽지를 주기에 엄청 중요한 내용인 줄 알았잖아.'

퉁명스럽게 나를 노려본 회귀자는 남은 반절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아지에게 세끼 밥을 차려주기. 불사자를 재생시키기. 그리고 중요, 안에서 누군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 지하 무기고의 문을 열지 않기…?'

쪽지의 내용이 끝났다. 회귀자는 쪽지를 팔락팔락 흔들며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 문장은 무슨 뜻이야?"

"아아. 말 그대로예요. 저 안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식을 치를 테니까, 절대 문을 열거나 의식을 방해해서는 안 돼요."

"…거기에는 지금 티르칸쟈카가 있다며."

"네."

"무슨 의식인데?"

"심장 소생의 의식이요."

"그건 누가 하고?"

"바로 저."

음음. 작게 고개를 끄덕인 회귀자가 즉각 날을 세우며 나를 추궁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역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구나. 예상했다.

어차피 회귀자의 참견은 예상한 바다. 회귀자가 나와 흡혈귀 단둘이 고립된 장소에 있는 걸 가만히 보지는 않겠지.

그것 말고도 의식 동안 방해받지 않아야 하기에, 다른 이들의 접근으로부터 지켜줄 사람도 필요하다.

회귀자를 설득하는 건 필수불가결.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말을 시작했다.

"셰이 교육생. 만일 제가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기꾼, 이라고 단언할 거야, 이 사기꾼아."

예상대로 회귀자는 즉각 지적하고 나섰다.

"그 딜레마 때문에?"

"…알면서 왜 물어? 너도 알 거 아니야. 모든 흡혈귀는 호문클루스야. 죽었음에도 멈춘 심장 대신 시조의 피를 받아서 몸을 아득바득 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종류의 호문클루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제약에 묶이죠. 혈주를 거스를 수 없다든지, 혈마법을 제외한 마법을 쓸 수 없다든지."

나의 입에서도 술술 나오는 대답. 회귀자는 아리송한 얼굴로 나를 캐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티르칸쟈카에게 그런 제안을 한 거야? 진심이야, 아니면 장난이야? 나는 이제 네가 진짜 뭘 노리는지 잘 모르겠어."

"진심으로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소생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네 그런 태도가 영 모르겠다는 거야.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지금껏 주기적으로 티르칸쟈카의 심장을 건드리면서도 아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 도리어 그 위험을 경고하고, 핀레이로부터 보호하기도 했지…. 아마 나쁜 의도는 없을 거야. 만일 있었다면, 핀레이보다도 먼저 움직였을 테니까.'

천성인지 여전히 날을 세우고 있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나를 향한 경계심은 옅었다. 핀레이와 함께 싸운 것이 나름 긍정적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적의를 거둔 회귀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나에게 전했다.

설득인지 아니면 정보를 알려주는 건지 자기도 모르는, 애매한 태도로.

"마법으로 죽음을 극복한 순간… 끝이야. 그건 절대 돌이킬 수 없어. 목숨을 이어붙이는 신비가 끝나는 순간, 그 육체는 지연된 죽음을 맞이하게 돼…. 치료고 소생이고 할 틈 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거야. 타인의 마법으로는, 결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으니까…."

"네. 바로 그거예요."

불가능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으나, 회귀자. 좋은 지적이다.

바로 거기에 단서가 있으니까.

"호문클루스의 딜레마, 타인의 마법으로는 절대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담았죠."

"…? 다 아는 말은 왜?"

"옛말이 다 그렇듯, 경고 속에는 충고가 숨어있습니다."

"마법을 조심하라는 거 아니야?"

"하하.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셰이 교육생만큼 단순하게 생각하면 딜레마나 속담 같은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금 싸우자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내가 질 테니.

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강조했다.

"타인의 마법으로는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자기를 구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

"그거야 당연한 말이잖아."

"이제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들어올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많고 많은 흡혈귀 중 단 한 명, 호문클루스가 아닌 존재가 있습니다. 타인의 권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죽어가는 몸을 되살린 존재가 있죠. 누굴까요?"

모든 걸 알지는 못하겠지만, 회귀자는 낯선 지식이라도 녹여내는 법을 안다.

13번의 회귀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를 접한 회귀자는, 아무리 믿기 힘든 정보라도 말만 된다면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흡혈귀, 시조 티르칸쟈카?"

정답, 보상이다. 훌륭하게 정답을 맞춘 회귀자에게 박수를 쳐줬다.

"참 잘했어요. 정답이에요."

"죽음이 찾아왔을 때 스스로 몸을 움직였으니, 다시 소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확실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자신의 힘은 되돌려도 자신의 것이니…."

그러나 회귀자의 중얼거림도 잠시였다.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 계산하던 회귀자는 결국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만 않을 뿐, 불가능에 근접할 정도로 어려워. 힘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목표는 1200년 전에 사라졌잖아. 거기다 티르칸쟈카의 힘은 혈조술이야. 그것으로 수도 없이 많은 것을 손에 넣고, 지배하고, 다스려왔어. 심장을 밖에 꺼내도 아무런 문제 없을 정도로 자기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진 티르칸쟈카는…."

죽음이란 자신과 세상의 경계가 엷어지는 것.

시조 티르칸쟈카는 아직 죽지 않은 것 중 죽음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전 세계에 자신의 피를 뿌려 권속을 늘려가며, 그에 닿은 온갖 것을 지배하는 피의 여왕. 그녀보다 개념적인 죽음에 다가간 생명은 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조가 삶을 되찾기 위해… 되돌아가야 할 거리는,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멀다.

"안 될 거야."

굳이 종말을 보고 되돌아온 회귀자가 아니더라도 절로 비관주의자가 될 법한 상황이다. 사실상 불가능, 그게 모두가 보는 이 계획의 전망이다.

하지만 나라면?

"해보려고요. 그러니까 그동안 문을 지켜주세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보던가."

수긍하려던 회귀자는, 문득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이런 걸 어떻게 안 거야?"

'나도 생각지 못했던 건데, 한낱 군국 교관이 마법사도 아니면서 이걸…?'

아니, 왜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냐고. 네가 모른다고 다 모르는 게 아니잖아.

우매함의 골짜기에 갇힌 영혼 같으니. 교정해주마.

옛날을 떠올리며, 최대한 재수 없는 표정을 하나 골라 따라한다. 그러면서 피식 비웃음을 던지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 중등군사학교 전교 1등만 알 수 있는 거예요. 초졸은 죽었다 깨어난 다음 때려 죽어도 알 수 없답니다."

"야!"

예상대로 회귀자가 냅다 화를 내는 바람에 후다닥 도망쳤다. 솥단지를 붙잡고 있던 회귀자는 으르렁대기만 할 뿐 따라오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전해졌겠지. 나는 뒤편 문을 통해 교육실을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일단 하루나 이틀 정도 걸릴 거예요. 그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아, 쪽지는 너무 뚫어지게 보지는 마시고요!"

"칫. 빨리 끝내!"

교육실의 문을 닫고는, 나는 흡혈귀가 기다리고 있을 지하 무기고로 향했다.

*****

'핀레이가 만일 저번 회차에 왔다면, 그가 성공했을까, 아니면 실패했을까? 여기부터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 하지만 핀레이와 교관이 서로 대립했지. 이후에 결국 전쟁까지 일어난 걸 보면, 교관은 실패했던 것 같아. 흥, 왠지 못 미덥더니만.'

'그렇다면 티르칸쟈카를 소생시키겠다는 시도는 핀레이의 등장 이후 위기감을 느껴서 강구한 해결책일까?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확실히, 0%는 아니니까. 가능성은 있어.'

'만약, 그럴 리 없겠지만 아주 만약에…. 혹시 그게 가능하다면, 다음 회차부터는 티르칸쟈카를 조금 더 빨리 회유할 수 있을 거야. 믿고 지켜보자.'

'…그나저나 쪽지를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이야? 또 의미 모를 말을. 어? 눌린 자국?'

'…설마, 이 자식!'

'깊이를 보는 눈. 이걸로 눌린 자국을 보니 숨겨진 글씨가 떠올라. 뭔 쓸데없는 짓에 이리 공을 들이고 다녀…? 에잇. 일단 읽어보자.'

'식당에 가지 말 것, 끝나고 내 상태가 이상해져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그리고 혹여나 보급품이 도착하면, 그것을 자신에게 사용할 것…?'

'뭐야?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EP.74 티르칸쟈카의 책 - 구약(상)

지하 무기고, 그 가장 깊은 곳. 흉한 조각이 어둠을 경배하는 마지막 방.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공기는 죽은 듯 멈추어있다. 바람 소리조차 하나 나지 않게 고요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아래, 고급스러운 제향나무 관을 침대 삼아 한 소녀가 누워있다. 희미한 은발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흡혈귀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 속에 다소곳이 누운 흡혈귀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나에게 말했다.

"정말, 이걸로 되는 것이냐? 심장을 드러낼 필요는 없느냐?"

"지금은 심장을 드러낼 필요 없어요. 대신, 이걸 쥐고 계세요."

흡혈귀의 손에 카드 한 장을 쥐여주었다. 하트 1, 카드의 문양을 확인한 흡혈귀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필 심장이로구나. 왜, 부적이라도 되느냐?"

"아니요. 인사하세요. 앞으로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새로운 심장이 될 거예요."

"으응?"

흡혈귀가 다시 카드를 바라보았으나, 카드에서 별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저 설명했다.

"당연히 진짜 심장은 아니죠. 암시를 위해 비슷한 모양으로 준비해둔 거예요. 그거 양손에 꼭 쥐고 가슴에 모으세요."

흡혈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말에 따랐다.

한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말에 복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역시 그냥 독심술 정도만 쓰면서 사는 게 좋아.

"자아. 티르칸쟈카 교육생. 눈을 감고 숨을 편히 내쉬세요. 피가 고요히 흐르도록 몸에서 힘을 빼시고요…. 이 점은 딱히 제가 시키지 않아도 되겠지만."

어차피 흡혈귀의 피는 고요하게 흐르니까. 나나 신경 쓰는 편이 낫겠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이 나의 몸을 꽉 조인다. 전혀 반갑지 않지만, 내가 직접 맞이한 손님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제향나무 관 머리맡, 흡혈귀의 머리와 가장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얼굴이 가깝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새빨간 눈은 여전히 붉게 빛났다.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당신은 심장이 뛰지는 않지만, 피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심장이 필요하지 않은 셈입니다. 심장을 되찾는다고 당신이 가진 능력이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요. 어찌 보면, 당신은 무용한 것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심장을 되찾기를 원하십니까?"

"…바란다."

"어째서입니까?"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모순적인 말. 하지만 그 안에는 흡혈귀의 응어리진 소망이 담겨있었다.

"어째서입니까? 누군가가 원망스러울 때, 아무런 고통 없이 그들을 잘라내는 능력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위정자라면 더더욱 탐을 낼 능력인데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나를 시험하려 하느냐?"

흡혈귀가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나도 인간일 적이 있었다. 비록 과거에 놔두고 왔으나, 무수한 낮과 밤이 지나도 그 시절이 나를 잡아끈다. 그 불티처럼 짧은 시간은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랬지만,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 시간이었다.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안 되었기에 나는 바뀔 수 있었고… 죽은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었지."

"그런가요."

이미 읽은 내용이지만, 나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흡혈귀의 목적은 피를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기 의지대로 피를 조종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원래 있던 심장을 갈아버리고 똑같은 모양의 심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단순히 자기 심장을 쥐어 짜는 방식으로 심장이 뛰게 할 수도 있다.

혈조술의 극에 달한 그녀는, 그녀의 신체에 한해서는 조물주나 다름이 없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그게 싫었기에.

조종하는 능력으로 조종당하지 않는 것을 만들 수가 없었기에, 자꾸 타인에게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접수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바람을 이루어드리죠."

바람은 본디 스쳐 지나가는 것이나, 가끔 이렇게 고이고 고인 바람이 있기 마련이다.

독심술을 가진 나는 마음의 창을 멋대로 열어보다가 가끔 그런 바람에 정면으로 얻어맞고는 만다.

이번에도 당해버렸고.

나는 눈을 감고는, 내면의 어둠 속으로 깊게 침잠했다.

희미한 촛불이 어둠을 밝힌다.

잊힌 이들의 책이 빼곡히 꽂힌 초라한 도서관에는, 사서를 위해 예비한 작은 촛불이 있다. 눈앞 한 페이지나 비출 법한 아련한 촛불. 이건 책과 책을 지키는 이를 구분하는 작은 빛이며, 사서가 관리인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초를 들어올렸다.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듯 연약하고 흐릿하다. 한 줄기 바람이 불면 바로 꺼져버릴 듯 가녀린 불꽃.

그에 비해, 눈앞에 있는 책은 두껍고 무겁다. 백과사전도 이토록 방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권이면서도 서사시를 엮은 듯한 서적. 이 조그만 초로 다 읽으려면 이러한 초가 몇십 개는 더 필요할 것이다….

하나,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을 하기 위해선 사서는 필요치 않다.

내려다보는 것으로는 책에 쓰인 글자만 읽을 수 있을 뿐. 그렇기에 객관적이나…

그래서야 종이에 밴 냉기와, 아련한 향기와, 눌린 자국과, 여백에 두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잠깐 사서를 그만두기로 했다.

촛불을 향해 입바람을 불었다.

훅, 불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에는 어둠이 있었다.

달조차도 고개를 돌려 버린 그믐날. 세상에는 빛 한 점 없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집안으로 숨어들며,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채 그것이 물러가기만을 기도한다.

그런 칠흑 같은 밤에, 한 부녀가 달구지를 끌고 어둑한 밤길을 걷고 있다.

밤길을 걷는 이들은 둘 중 하나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위협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급하거나.

아니면 어둠이 그들의 모습과 더불어, 죄를 가려주기를 바라거나.

이들은 후자였다.

"티르, 미안하다. 네가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소녀는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며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밤 산책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걸요. 알다시피, 저는 밤하늘 올려다보는 걸 좋아하잖아요."

그러나 그 미소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위해서라는 것을, 소녀와 아버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죄책감에 흐려진 얼굴로 말없이 달구지를 끌었다.

나무 달구지는 부드럽고 미끄럽게 나아갔다. 혹여나 소리가 날까, 가죽으로 바퀴를 씌우고 삐걱거리는 축에 기름칠을 잔뜩 했기 때문이다.

새어나가는 소리마저도 감추려는 의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그들은 이토록 조심스레 움직이는 걸까.

그 답은 달구지 안에 있다.

흔들거리는 달구지, 모포 하나로 뒤덮은 그 안쪽에는.

저번 주에 매장한 시체 한 구가 늘어져 있었다.

생명을 잃은 시신은 대지모신의 품에서 안식을 얻는다.

따라서 그 안식을 방해하는 것은 대단히 사악한 행위로 여겨졌다.

그마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파낸 시체를 훼손하는 것은? 이를 데 없다. 돌팔매나 화형처럼, 모두의 본보기가 되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그러나 죄악은 언제나 저지르는 자가 있는 법.

"티르. 보렴. 피가 흐르는 길은 이렇게 나 있단다."

아버지가 칼로 시체를 벗겨냈다. 고기를 다루는 것과는 상이한, 그렇기에 더욱 끔찍하고 역겨운 방식으로.

피부부터 근육까지 한 겹 한 겹 걷어낸다. 몸을 빈틈없이 싸맨 가죽을 벗겨내면, 끈적한 막이 그 뒤를 따른다. 칼로 막을 자르고 잡아 찢어야 진짜 시작이다.

근막이 붙은 뼈를 억지로 잡아 뜯으면 죽은 피가 고인 내장이 그들을 반긴다. 이것들은 부패해있거나 상해 있기에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조심스레 잘라 밖에 떼어 내거나 한쪽으로 밀어두며 점점 몸 깊숙이 들어선다.

그리고 드러난 심장과, 핏줄.

아버지는 기다란 막대로 핏줄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곳은 심장이다. 우리 몸의 근원이자,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내는 곳이지. 모든 피는 이곳에서 시작한단다. 심장이 뛸 때, 피가 출발하여 전신을 돈단다. 심장에서 나가는 피는 안쪽에,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돌아오는 피는 바깥쪽에. 그렇게 몸은 커다란 고리를 이루며 순환하는 거란다."

이미 수십 번 들은 내용이었으나, 아버지는 꼭 새로운 시체를 뒤적일 때마다 강조하곤 했다.

아비가 말한 내용을 당장이라도 달달 외울 수도 있었지만 소녀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중간 과정을 잘 모르겠단다…. 아무래도 들어오는 피가 잠시 내장에 고였다가 빠지는 것 같은데, 이미 죽은 몸에서는 확인하기 어렵구나. 네 도움이 필요하다, 티르."

"알았어요."

소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안쪽에서 새빨간 핏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몸속 깊숙이 숨었던 핏물들. 딱딱하게 굳었던 혈액이 소녀의 부름을 받아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움직인다.

소녀는 피를 끌어올리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밀어넣으면 될까요?"

"부탁한다. 늘 고맙구나, 티르."

흙장난하던 제 나이대의 아이들과 달리, 치료사인 아버지와 함께 무덤과 시체를 파헤치곤 했던 소녀는 기이한 힘을 얻었다.

피를 조종하는 능력.

기껏해야 까진 상처의 피를 멎게 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이는 그의 아버지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딸이 자신의 범죄에 함께하는 것을 꺼렸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소녀가 일을 돕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능력은 특별했고,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아버지를 도왔다.

"이 길을 따라, 이대로 피를 흘려보내면 되는 거죠?"

"그래. 네가 피를 밀어 넣으면, 내가 내장에 피가 고이는지 보마."

꽤 유능한 치료사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을 계기로 점점 발전하는 치료사가 되었다. 어찌나 용하다고 소문이 났는지 건너 마을에서도 알음알음 찾아올 정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마을의 자랑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내심 그를 자랑스레 여겼다.

"…네 어머니가 죽었던 건, 허파에 피가 가득 고였기 때문이란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피의 통로가 망가져 있었지. 이 껍데기가 꼭 성긴 삼베처럼 구멍이 나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소개할 때면, 불행한 병으로 아내를 잃고 나서 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질 않았다.

지병이 있던 아내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이후 각성한 치료사. 얼마나 알기 쉽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티르, 만일 우리에게 다친 피의 통로를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할 능력이 생긴다면…. 우리는 병을 정복할 수 있단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를 계속 봐온 소녀는 알고 있었다.

그 각성은, 시체들의 산 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네 어머니를 죽인 병을…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어."

그리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기이한 광기와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치료사였다.

의원이라 하기도 뭣하다. 직업에 맞추어 일을 정하기보다는 주어진 일에 맞추어 살아가던 이 시절, 마을에는 굉장히 복합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었다.

티르의 아버지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귀족 출신이나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가문의 칠남이었던 그는, 가문에서 물려받은 건 반반한 외모와 고급스러운 언변 그리고 책 몇 권 분량의 지식이 가진 전부였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정확히 설명한 순서대로 유용했다.

떠돌다가 어느 마을의 여인과 눈이 맞았고, 정이 들었으며, 그대로 결혼하여 정착했다.

그는 아이들의 선생이기도 했으며, 치료사이기도 했고,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교섭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가 마을에 녹아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오랜 지병이 있었다. 아이를 낳은 이후 병색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책 몇 권에서 얻은 지식도 그녀를 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슬픔의 시간은 다가오기만 할뿐 멀어지지를 않았다.

어느 날, 차가운 눈이 내리던 밤. 소녀의 어머니는 소복이 쌓인 눈 위에 붉은 피를 흩뿌렸다. 세찬 바람이 아버지의 비통한 외침을 가려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시체에 손을 대게 된 것은.

처음에 아버지는 소녀 몰래 행동했다. 그러나 억척스럽게 집안을 꾸려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연스레 그 일을 이어맡게 된 소녀는 금방 아버지의 일탈을 눈치챘다.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소녀도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시체를 해부하고 해체하는 모습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를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소녀는 꾹 참고는 곁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녀는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아직 어려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배워서였을까. 그때부터였다.

소녀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는, 시체를 해부하는 기행을 저지른다는 것 말고는, 대단히 훌륭한 어른이었다. 다친 사람을 보살피고 낫게 했으며 뭇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누구보다도 많은 시체를 만졌으나, 정작 아버지가 누구를 죽인 건 없었다. 환자를 구하면 구했지.

시체를 파헤치는 건 중죄다. 악마의 종자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이미 죽은 육신, 어차피 짐승이 뜯어먹거나 벌레나 곰팡이가 갉아 먹을 것. 그걸 아버지가 사용해서 죽어갈 사람을 살린다면.

어느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즈음, 소녀는 피를 다루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협력자를 넘어, 대등한 동료가 되었다.

EP.75 티르칸쟈카의 책 - 구약(하)

소녀와 아버지는 곤란에 빠졌다.

죽음은 그 무거움만큼 드물게 찾아왔고, 그중에서도 시신이 온전히 남는 종류의 죽음은 더욱 적었다. 짐승에게 물려가거나 물에 빠져 죽으면 시체조차 남지 않는 탓이다.

시체가 남는 종류의 죽음이라고는 병사(病死)밖에 없는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사소한 상처나 병에도 냉큼 아버지를 찾아오게 된 이후, 어지간한 병은 사인(死因)이 되지 못했다.

거기다 우연히 심한 병으로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모신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매장을 선호하였으나, 시체 묻을 돈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성교회가 장려하는 화장을 받아들였다. 불타 사라지는 시체들 앞에서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토가 된 시신을 해부할 수 없는 노릇이며, 그렇다고 진찰을 게을리하여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이 근방에서는 도저히 시신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티르,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갔다가 오마."

이제는 앞뒤가 바뀌어버린 집착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소녀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으나, 그것은 걱정으로만 끝났다. 아버지를 뛰어넘어버린 소녀는 이미 훌륭한 치료사였기 때문이다.

"저도 도울게요."

"되었다. 멀고 험한 길이다. "

"괜찮아요. 저는 밤 중에 걷는 것도 좋아해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저는 아무리 걸어도 숨이 가쁘지 않아요."

"고개를 두 개나 넘는 먼 길이다. 너까지 데리고 가는 게 도리어 더 눈에 띄니, 오늘은 집을 지키도록 해라."

아버지의 뜻은 완고했고 합리적이었다. 소녀는 금방 수긍했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표정은 다 드러났는지, 외투를 챙기던 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랄리온의 발굽에 천을 씌워주겠니? 먼길이니, 오늘은 달구지를 끌 노새가 필요하니 말이다…."

어둑한 밤이었다.

떠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었기에, 아버지는 저녁이 훨씬 지나서야 출발했다. 소녀는 마을에서 가장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아버지를 배웅하고,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흘러갔다. 저 달이 지는 속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소녀는 저무는 달과 반짝이는 별을 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

잔혹한 병, 그 야속한 죽음. 그것만 없었다면 어머니는 살아있었을 텐데. 그러면 아버지도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복했을 텐데.

그러니 나쁜 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정말로 사악한 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잔혹한 병마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티르.'

한 줄기 바람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깜빡 졸았었던 모양이다. 먼 곳에서 동이 트고 있었고, 나무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다급히 몸을 추스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이 다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까? 만일 그녀를 보았다면 분명히 깨웠을 텐데.

아니, 너무 지쳐서 옆으로 눈을 돌릴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을 바라보던 소녀는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직 안 계시면 다시 나오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길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작은 오두막집에 도착할 무렵.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커다란 말이 집 근처에 매여 있었다. 랄리온보다도 두 배나 크고, 갈기가 멋들어져 아름다운 준마였다.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 안장에는 성교회의 인장인 십자가가 있었다….

그걸 알아본 순간, 소녀는 다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문을 열자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그리 넓지 않은 집이라 소녀는 들어가자마자 모든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건, 차가운 강철 갑옷을 입은 세 명의 괴한.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쥐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과.

그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버지까지.

"아버지!"

소녀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아버지의 옆에 주저앉았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눈에 잠시 초점이 돌아왔다.

잠시 반가움에 흐려지던 눈가가 크게 떠오르며 경악과 공포에 물들었다.

"티르…. 도망…."

"안 돼요! 아버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 그러나 아버지는, 죽기 직전 모든 힘을 끌어내어, 피거품과 함께

"어떻게… 든…. 살…거라. 내… 희망…."

"아버지!"

큰 상처다. 굳이 치료사가 보지 않더라도 가망이 없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을까? 모른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이토록 힘을 크게 써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테니까. 소녀는 눈을 감고는, 흘러나오는 핏물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관이시여. 이 소녀는 어찌할까요?"

"두고 돌아간다. 우리는 징벌자이지 살인자는 아니다. 필요한 건 전부 얻었으니…."

그리 중얼거리던 신관이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소녀의 손가락을 따라 피가 움직인다. 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솟구친 피는, 소녀의 인도 아래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핏물이 용솟음친다.

엎어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나, 피는 그러할 수 있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피를 돌이켰다.

"…신관이시여. 저건."

훅. 신관이 손을 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내리눌렀다.

하늘이 내리누르는 듯한 묵직한 어조로, 신관이 소녀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이름이 무엇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소녀는 정신을 차렸다. 저 사람들은, 분명 아버지를 벌하러 온 사람들. 소녀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면 아버지는 죽는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여전히 혈조술을 펼치며, 소녀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티, 티르에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안 할 테니까,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티르, 그래. 티르. 좋은 이름이구나. 아버지가 지어주셨니?"

"네, 네.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에요. 많은 사람을 도와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말릴 테니까…."

효심이 지극한 소녀의 애원이었다. 눈앞의 괴한에게 자비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신관. 신앙과 의무감으로 지은 갑옷에는 자비가 스며들 수 없으니.

"나는 네 아버지를 살릴 수 없다. 다만."

푸욱.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신관의 검이 소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 하는 얼빠진 소리. 살갗을 가르고 들어오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 두근거리는 심장 끝으로 요동치는 칼날.

어느 순간 끔찍한 고통이 뒤이었다. 관통당한 허파에서 올라온 피거품을 쏟으며, 티르는 마루 위로 허물어졌다.

세상이 흐릿하다. 고통만이 머리를 뒤흔든다. 소녀의 의식이 점점 가라앉는다.

이즈음 해서 소녀의 기억이 희미해졌다.

소녀의 쓰러진 몸 위로 신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네 아버지와 같은 곳으로 보내주마."

신관이 칼날을 흩뿌렸다. 핏자국이 나무로 된 마루에 검의 궤적을 그렸다.

그게 소녀가 살아있을 적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반성하겠다. 필요없는 동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했어."

"정화합니까? 횃불을 가져올까요?"

"아니다. 우리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 건물 밑에 있는 시체를 들추어내고 떠나자."

"예. 신관님."

"위험했구나. 이런 곳에 마신(魔神)의 씨앗이 있었다니 말이야…."

"선생님, 저 오늘 팔이 뻐근한데…. 꺄아악!"

"살인이야! 살인이야! 선생님이 죽었어! 티르도!"

"어? 시…체?"

"잠깐, 이거 저번 달에 돌아가신 아주머니…."

"여기! 다른 시체도 잔뜩…!"

"설마 요즘 들어 무덤이 파헤쳐진 게 다 선생님, 아니, 이 악마가…."

"악마…."

"천벌을 받은 거야…."

"불길해. 아무도 오지 못하게…."

"…."

"쯧쯧. 아무리 죽은 자의 무덤을 욕보이는 대죄를 저질렀다곤 하나, 이들의 육신도 죄악도 모두 대지에서 왔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 아니한가. 지모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이리 놔둬 저주받게끔 할 수가 없구나."

"아비와 딸이 죽으면서까지 마주 보고 있구나. 필시 서로에게는 상냥한 가족이었을 터. 후우, 오랜만에 장례나 치러볼까."

"좋아. 다 묻었다. 후우. 오랜만에 힘을 쓰니 힘들구나."

"부디, 지모신의 품 안에서는 안온하기를."

그러나.

소녀의 심장을 찌른 신관도.

그들을 방치한 마을 사람들도.

소녀를 아비와 함께 묻은 매장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장에 찔린 소녀가,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직 죽지 않았음을.

인고의 시간이었다. 소녀는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덤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을 이어갔다. 눈앞에서 아버지의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소녀는 삶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원초적인 본능 때문일까.

소녀는 몸 밖으로 흘러나가려는 피를 붙잡으며, 다가오는 죽음을 악착같이 밀어냈다.

'어두워….'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아비랑 나란히 관 속에 누워서 땅 아래에 묻혀있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다.

그러할진대 색이 필요할까? 빛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색소가?

필요없다. 모든 색을 지워내라.

'배고…파.'

먹을 것이라고는 눈앞에 있는 아버지뿐….

소름이 끼친다. 먹으라고? 아버지의 시체를?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도 패륜과 식인을 요구하는 허기가 야속하기만 하다.

차라리 굶주림을 느끼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목, 말…라.'

굶주림이 없는데 침이 필요할까? 잃을 것이 없는데 눈물이 필요할까?

다 필요 없는 것들이다. 버려라.

'아파….'

어째서 아픔을 느껴야 하는가? 어떤 늙은 철학자가 말한 대로라면,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생명을 잃은 소녀에겐 아픔은 무의미하다.

끝까지 자신을 쫓아와 괴롭히는 아픔이 야속하다. 버려야 한다.

색조 따윈 필요 없다. 지워내라.

욕망 따윈 필요 없다. 잘라내라.

눈물 따윈 필요 없다. 비워내라.

고통 따윈 필요 없다. 긁어내라.

그렇게, 소녀는 자기가 가졌던 피와, 아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흔적과 나란히 누워 인고의 세월을 견뎠다.

그러는 동안 혈조술은 날이 갈수록 극에 이르렀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멈추고, 오직 피만 움직여서 몸을 꾸려왔다. 한때 가정을 악착같이 꾸려오던 소녀는, 그녀의 몸을 대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징수관이 되었다.

그렇게, 필요 없는 것을 전부 버려가며, 자신의 손끝 발끝의 핏줄 하나하나 천천히 지배하게 된 소녀는.

점차 범위를 넓혀나가, 땅 위에 흩뿌려진 모든 피를 손에 넣은 그녀는.

어느 순간, 관 뚜껑을 열고 세상에 나왔다.

"아아."

건조한 중얼거림이 흘렀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말을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다른 것을 다 버려냈어도 언어는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다.

사방이 어두웠으나, 소녀의 눈에는 어둠이 익숙했다. 매일같이 어둠 속에서 살아온 결과였다.

소녀가 깨어났을 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마을도.

세상도.

사람도.

달라지지 않은 건 소녀뿐….

아니, 어쩌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일지도.

수많은 것을 버렸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있었다. 차갑게 타오르는 정제된 분노. 그건 소녀의 눈앞에 아버지의 시체 모습으로 남은 덕분에, 그 영겁의 시간 동안 잊지 않을 수 있던 감정이었다.

소녀는 피를 움직여 몸을 걷게 만들었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어색한 발걸음이었으나,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익숙해졌다.

목적지는 없으나 목적만이 남은 길을 걸으며, 소녀는 그녀의 업을 되뇌었다.

천신의 사도들에게, 그녀가 잃었던 것만큼을 빼앗아 갈 것이었다.

-그러한 이야기.

소녀는 그렇게 버려낸 것을 한 데 모아 벼려내었다.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고통스러워 잊어야 했던 인고의 기억. 아버지의 시체와 마주 보며 몸을 하나씩 덜어냈던 시간을 모아 한 장의 카드에 담았다.

마법은 자기 세상의 발현이다. 소녀는 1200년 전 사라지고 없는 자신을 떠올리며 유품을 만들었다.

하얀 카드 위에 그려진 붉은 하트가 핏빛으로 빛났다.

소녀는 소녀의 가슴에, 붉은 카드 한 장을 찔러넣었다. 한없이 아프고, 다정하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EP.76 나상실

두근, 두근.

낯선 소리가 고요한 방에 울려퍼진다.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을, 갓 태어난 새가 연주할 법한 작고 연약한 박동이다.

심장이 들려주는 가장 원초적인 음악.

규칙적인 리듬과 거기서 뻗어나오는 독특한 변주를 가진, 하나의 생명이 갖는 고유한 박자.

그 운율 속에서 티르칸쟈카는 눈을 떴다.

티르칸쟈카는 너무 오래 자버린 아이처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던 티르칸쟈카는, 곧 황망한 얼굴로 자기 몸과 얼굴을 더듬었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분명히 중간까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앞에는 그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으나, 티르칸쟈카는 그동안의 경험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티르칸쟈카는, 가만히 누워서 그를 지켜보았다.

티르칸쟈카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긴 세월을 버틸 수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음에도 흘러가는 밤하늘을 온종일 가만히 본 적도 있고, 내키면 지하로 파고 들어가 백 년 정도 잠들곤 했다.

고작 몇 시간, 며칠 정도 사람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기도 했고.

어느 순간, 죽은 듯이 앉아있던 그가 움직였다. 예고 없는 행동에 티르칸쟈카가 잠시 의아해하는 동안, 그의 손이 티르칸쟈카가 쥐고 있는 카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카드에, 그리고 티르칸쟈카의 몸에 닿았고.

그 순간 티르칸쟈카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잠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를 깨운 건, 몸속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규칙적인 박동.

오랜만에 귀향한 떠돌이처럼, 낯설면서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듯한 흔들림이었다….

"심…장?"

그걸 깨달은 순간, 티르칸쟈카는 급히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손바닥을 포갠 채 조용히 박동을 느끼던 그녀는 곧 경악에 찬 탄성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심장이 뛰고 있다.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느리지도 않다. 기계처럼 규칙적이지도 않다.

티르칸쟈카조차 잠시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자연스러웠으며, 동시에 먼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리운 떨림이었다.

심장에 전기를 흘려보냈을 때처럼, 잠시 일어나다가 사그라드는 반짝임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그녀의 박동이었다.

예전에 뛰었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티르칸쟈카는 본능으로 그것을 알았다.

"설마. 정말로 해내다니…. 도대체 어떻게."

티르칸쟈카는 자기 몸을 점검했다. 혈조술의 극의에 이르러 전신의 피 하나하나를 조종할 수 있는 그녀는, 심장을 망가뜨리지 않게 주의하며 흔적을 되짚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영영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1200년 동안 혈조술을 갈고 닦으며, 몸 바깥의 피까지 조종하곤 한 티르칸쟈카는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다.

그리고는 의문에 휩싸였다.

"혈조…술? 흡혈귀도 아니면서 어떻게? 나는 분명 셰이에게만 가르쳤는데…."

혈조술은 배우고자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생전의 티르칸쟈카도 스스로 터득했고, 셰이도 몇 주 걸리지 않아서 금방 익혔으니까.

뿌리만 따지자면 혈조술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공의 일종이었다.

다만, 아무리 혈조술을 익힌다고 한들 보통 자기 몸 안의 피를 조종하는 게 한계이다. 셰이도 그것을 알고 실혈을 멈추거나 자기 몸을 강화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티르칸쟈카처럼 재능과 우연, 그리고 경험이 합일하여 개화하지 않는 이상, 혈조술을 타인의 몸까지 뻗어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는 혈조술로 티르칸쟈카를 바꾸었다. 그것도.

"내가 버린 것을…. 예전, 살아남기 위해 버렸던 것들을…."

한참 전,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버려야 했던 것들.

기억 한편에 밀어두고는 영겁의 세월 방치한 것들.

너무나도 오래되어 나중에는 그러한 게 있는지조차 까먹은 것들.

그 모든 것이, 가슴에 있는 한 장의 카드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서랍장 한구석에 고이 보관해두었던 낡은 일기장처럼, 추억을 담아 땅속 깊숙이 파묻은 보물상자처럼.

아득한 향수(鄕愁)가 티르칸쟈카의 가슴을 스쳤다.

눈물이 나왔다.

이 역시, 분명 티르칸쟈카가 잃어버린 것.

기쁨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티르칸쟈카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되뇌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정말, 해주었구나…."

당연히, 의문은 많았다.

어째서 그러한 추억을,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릴 수밖에 없던 몸의 기억을 알아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한 장에 카드에 담아 티르칸쟈카에게 새겨넣을 수 있었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혈조술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전부 궁금했으나… 그건 부차적인 것이었기에.

"고맙다. 이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말만 하려무나."

글썽거리는 눈물. 한때 잊어버렸던 그것을 눈가에 맺고는, 티르칸쟈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주겠다. 말해다오."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게 해주고 싶지만, 변변한 침대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그리 잘 자지 못하리라. 티르칸쟈카는 그를 깨울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그의 어깨에 닿는다. 그에 반응하여,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티르칸쟈카와 마주했다.

"…세요."

티르칸쟈카는 어떤 요구가 나오더라도 흔쾌히 수락할 생각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은, 그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누구…세요?"

그러나.

애틋함도 잠시.

그 입에서 나온 말에는 티르칸쟈카조차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셰이는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하 무기고를 감시 중이었다.

교관이 티르칸쟈카와 무슨 의식을 치르겠다고 말한 지 벌써 사흘이었다. 그날 이후, 저 굳건한 강철 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는 조그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내부가 통짜 강철이라서 꿰뚫어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바깥에서 언제 문이 열리나 기다려야 했을 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설마 엄한 짓은 아니겠지…?'

셰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한 생각이다. 애초에 흡혈귀는 흡혈욕구나 혈주를 향한 경애 말고는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그도 지금껏 의심스러운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비약이다.

하지만, 솔직히 셰이가 의심이 많아진 데에는 교관의 책임도 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의식을 하길래 저토록 의뭉스럽게 군다는 말인가.

'치잇…! 사흘이나 갈 거면 설명이라도 좀 더 자세히 해주고 가라는 말이야! 나는 궁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가 없어 괜히 그를 탓하고 있을 때쯤.

"멍멍!"

아지가 입에 공을 문 채로 다가왔다. 회귀자가 마당에 자리 잡고 문을 지켜보는 동안, 심심했던 아지는 그걸 놀이의 전조로 여기고 셰이에게 공놀이를 요구하고는 했다.

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셰이도, 그러한 요청이 올 때마다 응해주었고.

다만, 놀아주는 과정과 결과는 평소 그가 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공을 쥔 셰이가 다른 손으로 천앵을 들어올렸다.

"천검기, 순풍."

"멍?"

아지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셰이가 천앵을 휘둘러 공을 날려 보냈다. 바람을 두른 공은 스스로 솟구치거나 떨어지면서 마당을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그렇게 잠시간 여유를 얻은 셰이가 다시 닫힌 문을 노려볼 때였다.

아지가 공을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저앉더니 셰이의 발밑을 탁탁 두드렸다. 셰이의 시선이 다시 아지에게로 향했다.

"아지? 왜?"

그러자 아지가 못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멍! 너, 안 놀아! 나만 놀아!"

"어?"

"멍멍! 멍멍멍! 너, 재미 없어!"

"아니, 아니, 잠깐."

불만이 어지간히 쌓이고 쌓인 모양이다. 지금껏 알아서 놀다가 슬쩍 사라지곤 하던 아지는, 이번에는 단단히 벼른 듯 셰이를 향해 쉴 새 없이 짖었다.

인간에게는 한없이 호의적인 개의 왕.

그 왕의 불만에 직면하자 셰이는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야, 나는. 그, 조금 쉽게 하려고."

"멍멍머멍!"

인간에게 호의적인 개의 왕이라고 너무 쉽게 본 걸까?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셰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공을 불러들였다.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온 공이 셰이의 손에 붙잡혔다.

"알았어. 지금부터는 잡기술 쓰지 않고 손으로 던질게. 그럼 만족하니?"

"왈! 아냐! 왈왈!"

아지가 크게 한 번 짖고는 셰이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그 착하다는 개의 왕에게 거부당한 셰이는 멍청하게 그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셰이가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으으. 잘 모르겠어. 도대체 그 녀석은 어떻게 아지와 그리 잘 지낸 거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셰이도 은근히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산재한 여러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도,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할 사람도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조금은 정이 들었을 수도 있고.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EP.77 상실의 시대

굳게 닫힌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아지와 셰이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흘간의 칩거를 끝내고 그와 티르칸쟈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멍! 멍!"

"야!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둘이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갈 때였다.

그보다 더 빠르게, 좁은 문틈을 비집고 티르칸쟈카가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티르칸쟈카는 셰이를 보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셰이! 셰이! 큰일이다! 그가!"

언제나 관 위에 우아하게 앉은 채 느긋하게 행동하던 티르칸쟈카였다. 흡혈귀의 시조이자 그림자의 여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품을 가졌던 그녀가, 지금은 엉망이 된 얼굴로 뛰고 있었다.

티르칸쟈카의 낯선 모습에 셰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쩐 일이야, 티르칸쟈카? 늘 타고 다니던 관이랑, 그 남자는…?"

의문은 금방, 그리고 동시에 풀렸다. 마침 철문이 완전히 열리고, 커다란 관과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티르칸쟈카의 전용석이었던 곳을 차지한 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있는 교관.

그 뻔뻔한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새삼 화가 치밀었다. 셰이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마침 잘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의식을 치른 거야? 그 쪽지에 썼던 건 또 무슨 뜻이고? 빨리 내려와서…."

"그게 문제가 아니다, 셰이!"

티르칸쟈카가 셰이를 붙잡았다. 평소의 그녀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급한 움직임이었다.

도대체 무얼까. 왜 티르칸쟈카가 이리 당황해하고, 저 남자는 멍하니 관 위에 앉아있기만 하는 걸까?

셰이의 머릿속에 이러한 의문이 들 때쯤.

"그가 기억을 잃었어!"

"뭐어?"

생각을 싸그리 날려버리는 말이 들려왔다.

티르칸쟈카는 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티르칸쟈카 역시 아는 바가 많지 않았기에 설명은 금방 끝났다.

결과를 전해들은 셰이가 반신반의하여 물었다.

"정말 심장이 뛰는 거야? 저 남자가 해냈다고?"

"그렇다! 정말로 뛰었어!"

"말도 안 돼. 마법사라도 못할 텐데, 마법사도 아닌 저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정말 다시 뛰는 게 맞아? 착각한 게 아니라?"

어찌 보면 타당한 물음이었으나, 그건 소망을 이루었다는 기쁨과 그에 대한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티르칸쟈카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티르칸쟈카가 옅게 남아있던 들뜬 감정을 싹 지우며 셰이를 노려보았다.

"설마 내가 이런 중대한 일로 너에게 거짓을 말하겠느냐? 아니면 그가 나를, 나의 혈조술을 속였다는 말이냐? 어찌, 펄떡거리는 심장이라도 보여주어야 믿겠느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심장을 되살리는 게 이토록 쉬웠다면…."

쉬웠다면 도대체 왜 이전 회차에서는 도달하지 못한 걸까, 셰이는 그렇게 말하려다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아직 회귀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티르칸쟈카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했다.

"쉬워? 지금 저 아이의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티르칸쟈카의 호통에 셰이가 찔끔했다. 셰이가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티르칸쟈카는 관 위에 놓인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음식 하나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곡기를 끊고, 티끌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채, 관 속에 있는 흡혈귀보다도 고요하게 앉아있다가! 마지막에 나의 심장을 되살리고, 그 대가로 기억을 잃었다! 이런 무모한 일을 감수하였는데, 쉬웠다고?"

하지만 1200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것 치고는 쉬웠잖아.

라고 투덜거리기엔, 티르칸쟈카의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했다. 셰이는 입을 다물며 수긍하는 척했다.

'그래도… 흥분하는 걸 보면, 정말 심장이 다시 뛰나 봐.'

만일, 여전히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면 티르칸쟈카는 셰이의 말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했을 거다. 차가운 피를 지닌 흡혈귀는 쉽사리 흥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게 되니까.

저토록 흥분한다는 사실이 곧 그녀가 감정을 되찾았다는 증거.

'좋은 일이야. 빨리 그 남자의 기억을 되찾게 해서 방법을 알아내자! 그러면 다음 회차부터는 티르칸쟈카를 설득하기 훨씬 쉬울 거야. 만일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음 회차에 그를 동료로 삼으면 되니까! 어쨌든 공략의 방도를 찾았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회귀자라는 입장에서 계산을 끝마친 셰이는 순순히 기뻐했다.

"어쨌든 축하해! 이제 그 녀석만 깨우면 되겠네!"

"후우. 셰이,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티르칸쟈카는 눈을 감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심장이 멈춰있을 적에는 이러한 과정도 필요치 않았으나, 되찾은 지금은 마음 먹은 대로 감정이 흘러가지 않았다.

새삼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되찾았는지 되새긴 티르칸쟈카는 다시 한번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되었다. 지금 너와 입씨름하려고 여기 있는 건 아니니. 어때. 그의 기억을 다시 돌려놓을 방도가 있겠느냐?"

"으음, 나 같은 경우는 천반경으로 대부분을 해결하는 편이지만…."

특정 동작을 몸에 새겨서 대응하는 궁극의 방어기공, 천반경.

낮은 성취에서는 단순히 불의의 접근에 대한 반사적인 반격을 행할 뿐이나, 성취가 높아질수록 그 진가가 발휘된다.

마음은 몸을 따라가기 마련.

몸에 익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정신과 영혼을 안정된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다. 천반경 덕에 셰이는 심장을 멈추게 하는 저주나 혼 빼놓기 등 정신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정신계통 공격을 방어하고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돌연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셰이는 매 회차마다 가장 먼저 천반경을 극성으로 익혔다.

"…하지만 아마 그에게는 그런 방도가 없겠지. 설마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 수 없고."

티르칸쟈카의 표정이 절망으로 무너졌다. 흡혈귀답지 않게 표정이 참 다채로워졌구나, 새삼 깨달은 셰이는 마침 사흘 전에 받은 쪽지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그 의미 모를 말이?

셰이가 포켓을 뒤적거리는 동안 티르칸쟈카는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계속 기억을 잃은 채로…. 세상에, 나를 구하기 위해…."

"잠깐만. 티르칸쟈카. 기다려 봐."

"정말,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나는 나의 미망을 이루기 위해 그의 미래를 빼앗았다…."

"이것 좀 봐봐."

"어쩔 수 없구나…. 내가 그의 평생을 빼앗아간 만큼, 그것을 보상해야겠지…. 내가 평생을 곁에 두고 보살피도록 하마…."

점점 이야기가 무거워지는 티르칸쟈카를 만류하며, 셰이는 쪽지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잠깐! 기다려 봐! 그 녀석이 나한테 남긴 쪽지가 있어!"

티르칸쟈카의 눈이 쪽지에 향했다. 셰이는 그녀의 눈앞에 쪽지를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쪽지에는 별 내용이 적혀있지 않아. 아지를 보살피고 지하 무기고에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이야기뿐이야. 하지만 여기, 눌린 자국에는 다른 글씨가 적혀있어!"

"눌린 자국?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 그러겠네. 그럼 내가 읽어줄게."

식당에 가지 말 것.

끝나고 내 상태가 이상해져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혹여나 보급품이 도착한다면, 자신에게 사용할 것.

깊이를 보는 눈으로 글씨를 또박또박 읽은 셰이가 쪽지를 다시 접고는 으스대며 말했다.

"그 녀석도 자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한 거야. 봐봐. 끝나고 자기 상태가 이상해져도, 라고 적혀있잖아. 아마 이때를 위해 나에게 맡긴 모양이야."

"…왜 굳이."

"여기에는 식당에 가지 말라고 적혀있지만, 어디 가지 말라는 건 그곳에 꼭 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지. 아마 식당에 가면 뭔가 있을…."

쪽지를 가리키며 설명하던 셰이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티르칸쟈카는 심통이 난 얼굴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셰이는 티르칸쟈카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단서를 찾았다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불만스러운 기색이지?

"어찌하여 그 쪽지를 굳이 너에게 건넸다는 말이냐?"

어라. 셰이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티르칸쟈카는 셰이를 흘겨보며 불만을 토해냈다.

"그냥 나에게 건넸어도 될 것을. 어찌하여 한 차례 건너 너에게 맡겨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눈을 뜨면 바로 보는 게 나였을 것인데, 내가 쪽지의 내용을 미리 알았다면 이리 걱정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어?"

잠깐만. 도대체 저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셰이는 너무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티르칸쟈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손을 말아쥐어 손바닥을 쳤다.

"아아. 드디어 알겠구나. 필시 식당에 가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셰이, 너인 것이 분명하다. 네가 식당에 가지 못하게 막기 위하여 너에게만 그 쪽지를 건넨 것이야.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너에게 맡길 이유가 없으니까."

"어어어?"

"더불어, 어찌 되었건 바깥에 남은 건 셰이 너 하나뿐이니 겸사겸사 그리 전한 게 아니겠느냐? 좋다. 내가 그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마. 가보면 무언가 나오겠지."

티르칸쟈카는 곧장 달려갈 기색이었다. 멍하니 있던 셰이가 다급히 말을 붙였다.

"잠깐, 티르칸쟈카. 나도 갈게! 너는 아마 찾기 힘들…."

"쪽지의 내용을 어길 셈이냐? 기다리고 있거라. 도움이 필요하거든 내쪽에서 부르마."

'아니, 쪽지의 내용이 뭐라고 따르려는 거야? 어차피 저 녀석이 쓴 건데, 이 정도는 어겨도 상관없잖아!'

그러나 티르칸쟈카의 태도는 완고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셰이를 떨어뜨려놓고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셰이는 괜히 억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가볼걸. 괜히 쪽지에 적힌 지시를 그대로 따랐어!'

셰이는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었던 사흘 전의 자신을 크게 나무랐다. 혹시나 있을 다음 회차에서는 이 남자가 시키는 짓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멍멍! 멍멍!"

그때 아지가 즐거이 짖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며칠 만에 듣는, 만족감에 가득 찬 소리였다. 셰이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지가 그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아지의 뒤를 쫓으며 공을 던졌다. 공이 힘없이 올라갔다가 떨어진다. 아지가 좋다고 그것을 물고 돌아가면, 그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아지가 신이 나서 몸을 기대자, 그 충격에 그는 힘없이 비틀거리다 땅 위로 넘어졌다.

아지가 화들짝 놀라 짖었다.

"멍멍멍! 멍멍멍!"

티르칸쟈카가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개, 개의 왕. 잠시 그를 놓아두거라!"

"멍멍멍! 어떡해? 어떡해?"

"놓으래도!"

난리가 났다. 놀라서 짖는 아지와, 어찌할 줄 모르는 티르칸쟈카. 둘은 쓰러진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셰이는 저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진짜인 모양이네…. 혹시나 했는데, 장난은 아닌가 봐."

그리 말하던 셰이는, 문득 이 와중에도 의심하는 자신이 조금 너무한가 반성하고 말았다

EP.78 되찾은 것

개의 왕을 간신히 진정시킨 티르칸쟈카는, 쓰러진 그를 추스르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땅을 구르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느릿하게 티르칸쟈카를 따라왔을 뿐이다.

"괜찮으냐?"

끄덕.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뿐, 달리 대답하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티르칸쟈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디.

"소리는 들리고, 말뜻도 이해하는 것 같은데…. 백치라도 된 듯하구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티르칸쟈카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언제나 유쾌한 언행을 유지하며 쓰잘데기없는 내용도 청산유수처럼 말했던 그가 이리되다니.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앗아간 게 아닌가.

"일단 식당으로 가보자꾸나. 무언가가 있다면 금방 나오겠지."

만일 나오지 않더라도. 평생을 백치로 보내더라도 괜찮다. 티르칸쟈카는 그를 책임질 생각이었으니까.

그는 티르칸쟈카의 은인이었으며, 심장이 다시 뛴다고 영겁을 지낸 인내심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식당이… 4층의 교육실 근처에 있었으렷다."

혈조술로 관을 이끌던 티르칸쟈카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의지를 가진 순간 관이 제 몸처럼 매끄럽게 움직였을 텐데, 심장이 뛰고 나서부터는 몸 밖의 것을 다룰 때 미묘한 저항감이 생겼다.

조종이 어려워진 건 아니었다. 단지, 사소하나마 무게감이 느껴졌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손을 움직이는 것과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움직이는 것의 차이일까.

"심장을 되찾은 탓일까. 혈조술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구나."

천 년 가까이 함께한 제향나무 관이다.

티르칸쟈카의 침대였고, 보금자리였으며, 수족이나 다름없던 것이 이제는 독립한 자식처럼 뻣뻣하게 구니 조금 섭섭한 감도 있었다.

그러나 콩닥콩닥 뛰는 가슴과 함께 옆자리에 앉은 이의 온기를 상기하자, 그러한 섭섭함도 잠시 흐려졌다.

"그래. 무언가를 얻는다면 잃는 것도 있어야겠지."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다,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소하고 소중한 것이 밀려나다 떨어질 수도 있으니. 티르칸쟈카는 감정을 얻은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둘을 나란히 태운 관이 매끄럽게 떠올랐다. 순식간에 4층에 도달한 그들은 곧 식당에 도착했다.

의무적으로 마련한 듯한 단출한 식탁 하나와 의자 넷이 한구석에 놓여있었고, 커다란 들통 하나과 그보다는 작은 냄비 다섯 정도가 선반에 크기 순서로 늘어져있었다. 좁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누군가 신경 써서 관리한 듯한 생활감이 느껴졌다.

티르칸쟈카가 식당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식당에 오는 것은 처음이구나…. 하긴, 내가 여기 올 필요는 없었으니."

흡혈귀가 취하는 것은 오직 피. 그렇기에 티르칸쟈카는 지금껏 식당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실혈이 곧 흡혈귀의 양식이었으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티르칸쟈카에게는 신경 써야 할 입이 하나 더 생겼다.

티르칸쟈카는 그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힌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구경도 식후경이라 하였다. 사흘간 굶주려 배가 많이 고플 터이니, 일단 무어라도 먹고 하자꾸나."

그렇게 요리를 하려던 티르칸쟈카는, 새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식 자체를 필요치 않던 몸이다. 1200년도 전에 했던 요리의 기억 따위 날 리 없었다. 물에 재료를 넣고 끓이면 대강 스튜가 된다는 상식 정도만 남아있을 뿐.

"…일단 재료부터 찾는 편이 낫겠구나."

티르칸쟈카가 주변을 기웃거리다 높이 있는 찬장을 발견했다. 까치발로 찬장을 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티르칸쟈카의 키로는 가장 낮은 칸만 간신히 눈에 들어올 따름이었다.

낮은 칸에는 컵과 접시 같은 물품만 있었다. 티르칸쟈카는 자신의 몸을 띄워 보다 높은 칸으로 향했다.

중간 칸에는 남겨둔 기름이나 쓰다 만 재료 등이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티르칸쟈카는 그것을 기억에 넣어두며 그 위쪽에도 시선을 던졌다.

가장 높은 칸에 이른 티르칸쟈카가 본 건.

묶인 채 꿈틀거리는 소형 골렘이었다.

"응?"

골렘의 자세는 기묘했다. 아니, 단순히 기묘하다고 하기에는 악의와 장난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골렘은 유기체의 꿈이라도 꾸는지, 양다리를 180도로 벌린 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마치 요가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게 자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는데, 발목이 철사에 단단히 매여 오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골렘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위치엔 그 입에서 떼어낸 스피커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다리가 묶인 골렘은 스피커를 회수하고 싶어 필사적으로 팔을 내밀었으나 영 닿지를 않았다.

설계한 이가 거리 계산을 기가 막히게 한 것이다.

고문이라고 하기엔 좀 가벼우나 장난이라 하기엔 무거운, 정신이 나가게 하기 딱 좋은 동작.

티르칸쟈카는 골렘이 낑낑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번에 보았던 장난감 골렘이 아니더냐?"

티르칸쟈카의 시선을 알아차린 골렘은 필사적으로 자기 양팔을 흔들었다. 스피커가 없는 탓에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누가 봐도 구조요청이었다.

"풀어달라는 말이냐?"

끄덕끄덕.

스피커 없는 골렘은 대신 그만큼 열렬한 동작으로 동의했다.

티르칸쟈카는 골렘을 묶고 있는 철사를 풀어주었다. 골렘이 벌어진 다리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오므린 뒤, 양팔로 허벅지를 부여잡고는 잠시 땅을 뒹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낸 골렘이 스피커를 입가에 이어붙였다. 다시 이어붙인 스피커에서 고장 난 것처럼 드문드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빌어… XX가 기어코 월권을…! 이건 반역…!』

파지직거리며 언어와 욕 사이의 무언가가 흐르고, 간신히 진정한 골렘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티르칸쟈카를 마주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시조 티르칸쟈카. 이러한 상황에서 외람되나, 본관은 귀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마침 나도 물을 것이 있었다. 먼저 너의 요청을 듣겠다. 서로 하나씩 교환하자꾸나."

티르칸쟈카는 느긋하게 제안했다.

『본관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일 경우에 한해 답변하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나도 답하기 어려운 물음에는 침묵할 것이다. 비밀스러운 내용을 어찌 입 밖으로 꺼내며, 설사 말한다고 한들 거짓인지 아닌지 어찌 구별하겠느냐?"

『우문이었군요. 수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본관부터 질문하겠습니다.』

골렘이 주먹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딱딱한 몸체에서 감정이 느껴질 리 없건만, 티르칸쟈카는 왠지 골렘이 이를 데 없는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골렘이 말을 토해냈다.

『그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자?"

골렘이 지칭할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밖에 없다. 티르칸쟈카는 금방 알아들었고, 그 탓에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너희들이 보낸 그 교관이라면, 으음. 그것이, 내가…. 약간, 문제가 생겼다."

『대답할 수 없는 내용입니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단 이곳에 있으니. 허나…."

티르칸쟈카의 잃어버린 심장을 되돌려주려다 기억을 잃어버렸다, 라고 전후관계를 생략한 채 말할 수야 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교관이라고 했다. 그 끝도 없는 능력을 생각하면 필시 군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훌륭한 재목이었을 터. 그런 존재를 망가뜨렸으니, 티르칸쟈카는 군국에게도 커다란 손해를 입힌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여럿에게 폐를 끼쳤구나. 티르칸쟈카는 새삼스레 죄책감을 느꼈다.

"이야기할 것이 많다. 너의 군국의 대표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겠느냐?"

그를 다치게 한 것에 대해 보상을 치르고, 그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해서라도 군국과 교섭해야 할 것이다. 티르칸쟈카는 그럴 생각으로 말했으나.

『그 반동분자가 무슨 일이라도 벌였습니까?』

돌아온 대답은 너무 의외의 것이라, 티르칸쟈카는 눈을 끔벅였다.

"반동… 분자라고?"

『긍정! 본 기체를 구속한 그 반동분자 말입니다!』

골렘이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 탓일까. 티르칸쟈카는 자신이 예전보다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잘 짚어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정을 되찾은 시조는 생소한 감각에 흥미를 느끼며 골렘의 말에 집중했다.

『본관은 탄탈로스 내부를 관찰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노역자에 불과한 그가, 본관의 임무에 장애를 초래한 겁니다! 이것은 5레벨 보안시설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것이며, 그 정도에 따라 최소 4레벨 범죄로 인정됩니다! 심지어 그자는 이미 한 번 죄를 저질러 노역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소한의 유예도 없습니다!!』

골렘을 구속했다, 그리고 달아났다. 공무를 방해하여 죄를 저질렀다.

이미 한 번 죄를 저질렀다고? 군국에게 밉보였다는 뜻일까?

티르칸쟈카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변호했다.

"너무 화내지 말 거라. 본디 군주는 장수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 법이다. 필시 무언가 깊은 뜻이 있었겠지."

『그딴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곳은 격전지도 아닐뿐더러, 그는 장수조차 아닙니다!』

"너희 나라가 그를 이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이 영지의 영주로. 한 영지를 책임지는 기사라면 장수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부정! 그는 기사는커녕 집사조차 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노예 그 이하의 존재!』

아무리 그래도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노예로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거기다 감히, 그보고 노예라니.

티르칸쟈카는 반쯤은 훈계로, 반쯤은 이유 모를 분노를 담아 호통치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귀하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겐 숨기고 있었지만! 실은 범죄를 저질러 탄탈로스 노역형을 받은 범죄자이기 때문입니다!』

골렘이 의외의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면, 분명 입 밖으로 꺼냈을 것이다.

EP.79 설명서는 꼼꼼히

티르칸쟈카의 입술이 벌어지다 멈췄다. 골렘은, 물론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금 기대하는 듯 티르칸쟈카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티르칸쟈카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무어라고?"

『그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범죄자이며, 이곳에 들어온 것은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함입니다. 아미텐그라드에서 사기와 도박 혐의로 체포되었고, 군정판사의 공정하고도 신속한 언도 하에 탄탈로스 노역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귀하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그는 군국의 교관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행동은… 너희 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냐?"

『긍정. 그가 본관의 눈을 가리고 무슨 짓을 벌였든, 그것은 군국의 진의가 아닙니다. 일개 미친 범죄자가 돌발행동한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했던가. 제복이 꽤 어울리는 인상이었는데.

정말 의외인 사실을 전해들었으나, 티르칸쟈카는 그에 아무런 유감도 갖지 않았다. 정작 티르칸쟈카는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죄인 이상의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말을 듣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냥, 기뻤다.

"정말이렷다."

『긍정.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교육생이라고 불렀던 건."

『군국을 사칭하여 생존확률을 조금이나마 올려보려는 수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이 이곳에 강제로 내던져졌다, 이 말이냐?"

『노역할 의무는 있었습니다만. 그런 범죄자가 자기 먹을 식사 만드는 것 말고 노역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로군요.』

헐뜯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 티르칸쟈카는 점점 들뜨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냥.

순수하게.

호의로.

목숨을 걸어가며, 심장을 되찾아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후훗."

가슴을 죄는 듯 미안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기쁨이 혈관을 따라 질주한다. 심장부터 허파까지 한 바퀴 돌아서 기쁨의 탄성을 만들고는, 울컥거리는 목을 따라 머리에 닿았다.

잠시 얼굴이 따뜻해진다. 온기는 활기이고, 활기는 움직임이다. 예전에는 영 뻣뻣하던 입꼬리가 부드럽게 늘어졌다.

"후후, 아하하."

『…무엇이 그리 우스운 겁니까?』

티르칸쟈카는 즐거이 미소를 짓다, 한꺼번에 거두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사라져도 군국이라는 나라에는 아무런 문제도, 아쉬움도 없겠구나."

『긍정.』

"좋다. 내가 그를 거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

『긍정…?』

"그게 군국의 덕이 아니었구나. 하물며 그는 고아라 하였으니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몸. 내가 따로 몸값을 치를 이유도 없지."

『…?』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골렘이 의문을 표할 때. 티르칸쟈카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헌데, 의문이 하나 있다."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우아하게 턱을 괸 티르칸쟈카는 골렘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핀레이가 떨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둘은 같이 있지 않았느냐. 마치 오누이라도 된 것마냥 정겹게 업힌 채로."

『오누이라니오! 부정, 절대부정합니다! 본관은 그딴 녀석을 오빠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발작적인 반박에 티르칸쟈카는 눈을 끔뻑였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어찌하였건 너도 그의 등에 신세를 지지 않았느냐. 그러할진대 그가 갑자기 왜 너를 묶어놓았던 것이냐?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터."

『…그건.』

골렘이 대답을 회피하려고 하자, 티르칸쟈카는 집요하게 그를 추궁했다.

"그에게 물어보면 끝날 문제이다. 솔직하게 털어놓거라. 이러한 물음마저 대답하지 않는다면 무얼 믿고 문답을 나누겠느냐?"

정작 그는 백치가 되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겠지만, 따라서 이 물음에 답할 존재는 골렘밖에 없지만. 이곳에 묶인 채 갇혀있던 골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티르칸쟈카의 주장에 골렘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본관으로부터 무저갱의 탈출 방법을 캐내려고 시도했습니다.』

"호오."

저번에 핀레이를 내보내준다는 말은 허풍이었던 모양이다. 티르칸쟈카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더 기억에 넣었다.

『본관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였으나, 그는 그에 대해 불만을 품고 반역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본 기체의 스피커를 파손하고는, 본관이 탄탈로스 내부를 감시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구속했습니다.』

"그게 전부이냐? 단지 불만을 품었다고 지금껏 잘 지내던 너를 묶어두느냐?"

느긋한 추궁. 골렘은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곧 의미 없음을 깨닫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군국은 모든 부분에 대해 늘 대체품을 준비합니다.』

"대체품이라. 꼭 물건만을 말하는 건 아닌가 보구나."

『긍정. 지금까지는 무저갱이라는 특수성과, 노역자인 그의 협조적인 태도를 고려하여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에게 반동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군국의 입장에서 그는 리트머스 종이다. 안쪽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스스로 붉어져서 경고하는 일종의 시험지.

리트머스는 충분히 오래 살았다. 이제 군국은 이 무저갱에 인력을 파견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 리트머스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도리어 미룰 이유가 없다.

"오호라. 알겠다. 그는 낌새를 눈치채곤, 너희와 척을 지기로 한 것이로구나."

이제 흘러가는 상황을 대강 알아차린 티르칸쟈카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자격도 없는 이가 귀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을 것이나,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자의 돌발행동은 군국의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면피를 위해 둘러대는 말.

도리어 티르칸쟈카 입장에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얻은 건 은혜밖에 없어 군국에게도 커다란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저쪽이 알아서 치워주지 않는가.

"마음대로 하거라. 다른 무언가가 이곳에 와도 신경 쓰지 않겠다. 대신."

오히려 노역자로 그를 보내주어 감사할 따름이었다.

티르칸쟈카는 우연히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식탁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너희가 버린 것은, 내가 꼭 주워가도록 하마."

『…? 탄탈로스에 있는 모든 물품은 본국의 자산입니다. 양도 혹은 구매를 원하시면 관리당국에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참 까다롭구나."

『아무래도 그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귀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리가. 나도 꽤 놀랐다. 단지 잘 모르는 이야기가 많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뿐."

누군가가 범죄자라는 건 티르칸쟈카에게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혹여나 셰이라면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몰랐지만.

혹, 셰이 보고 식당에 가지 말라는 게 그 때문이었을까. 티르칸쟈카는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자꾸만 엇나가는 이야기에 골렘이 다시 흐름을 다잡았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본 기체가 구속된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브리핑해주십시오. 특히, 흡혈귀 침입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어려울 것 없었다. 티르칸쟈카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조종당했다는,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은 빼고.

"핀레이는 나를 설득하려고 했고, 솔깃하여 반쯤 넘어갔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를 뜯어말리지 않느냐? 꽤 오래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는데, 핀레이가 격렬하게 그들을 비난하더니 서로 싸우지 않더냐. 모든 힘을 다 쏟은 핀레이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게 전부입니까?』

당연히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말해줄 필요도 없을 터.

티르칸쟈카가 짐짓 화난 기색을 보였다.

"입 아프다. 내가 무엇을 더 설명해야겠느냐?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느냐?"

『확인했습니다.』

골렘의 수긍은 빨랐다. 그건 티르칸쟈카의 말을 온전히 신뢰했다기보단, 현시점 그녀가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딱딱하게 원칙을 지키는 골렘이었으나, 아직 울분을 다 식히지는 못했는지 한마디 강조했다.

『순순히 협조한 귀하를 위하여 다시 한번 경고하겠습니다. 그자를 신뢰하지 마십시오. 사기와 도박을 일삼는 군국의 해충입니다.』

이미 늦었다, 는 대답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티르칸쟈카는 간신히 그것을 삼키고는 대충 대답했다.

"내 알아 하겠다. 아,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과거는 과거. 그가 범죄자이든, 핀레이가 무얼 노렸든,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티르칸쟈카는 이제 조금 더 중요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앞으로 훨씬 커다란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질문을.

"혹, 남은 재료로 요리하는 법을 알고 있느냐?"

골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본관은 군국 통신병이며, 콩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는 군국특선조리법 99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호오. 대단하구나."

『부정. 평범합니다. 통신병은 고립된 공간에서 장기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잦으며, 특성상 그러한 정보와 접하기 쉬운 위치이기 때문에 아는 것일 뿐.』

그리 말하고는 있지만, 어조에는 숨기지 못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골렘은 한발 앞서 제안하기까지 했다.

『본 기체를 이 찬장에서 내려주십시오. 말로만 해선 착오가 생길 수 있으니 직접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냐."

티르칸쟈카는 손을 휘둘렀다. 어둠이 흘러가더니 골렘의 전신을 붙잡았다.

골렘을 꺼내려던 티르칸쟈카는 문득 앉아있는 그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골렘이 혹여나 저 모습을 보았다간 무슨 반응이 나올지 모른다.

티르칸쟈카는 손을 휘둘렀고 손에서 나온 새카만 어둠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그의 모습을 가렸다. 빛을 막아내는 어둠이니, 골렘의 눈으로는 꿰뚫어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위험합니다!』

그러느라 골렘 쪽 조종이 소홀해진 바람에 떨어뜨릴 뻔했다. 혈조술이 예전만큼 자연스럽지 못한 탓이었다.

어둠을 붙잡고 버틴 골렘은 고개를 빤히 들며 흡혈귀를 나무랐다.

『취급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본 기체는 이 이상의 손상을 받으면 위험합니다.』

떨어뜨릴 뻔했으니 앞으로는 취급을 주의해달라는, 어찌 보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

분명 그에게는 통했을 말이나, 아쉽게도 시대에 비켜 선 티르칸쟈카에게는 전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골렘을 뭐 그리 애지중지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냐? 골렘의 몇 안 되는 장점이라고 하면 튼튼하다는 것뿐인데 고작 떨어지는 것 가지고."

티르칸쟈카는 골렘 따위에게 꾸지람을 듣고도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원시적인 진흙골렘 말고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있어, 골렘이란 망가지는 것을 전제로 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간조차 인형처럼 주무를 수 있는데 감히 골렘이 말대꾸를 하다니.

그 말에서 위기감을 느꼈는지, 골렘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본 개체는 싱크로 타입입니다. 본 기체는 현재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으며, 프레임의 비틀림이 더욱 커졌다간 동조할 수 없게 됩니다. 또 본관의 몸과 동조하여 조종하는 것이라 충격을 받았다간 그 고통이 본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골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나머지 하나가 조종자의 안전인데, 그마저도 없다고? 그러면 왜 그러한 골렘을 쓰느냐?"

차가운 시선이 골렘을 향했다.

군국의 최신식 싱크로 타입 골렘은 12세기 전의 흡혈귀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야 했다.

『보십시오.』

골렘이 손가락 하나를 서로 다르게 까닥였다. 티르칸쟈카는 신기한 얼굴로 골렘이 재롱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골렘은 내친김에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팔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진짜 인간에 비하면야 가동범위가 한참 좁았지만, 골렘 치고는 대단히 세밀한 움직임이었다.

『싱크로하지 않으면 이토록 먼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조종할 수 없습니다. 감도를 조절할 수 있으나, 마침 그 부분이 고장 난 터라.』

"신기하구나. 그러면 너의 본신은 지금 골렘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느냐?"

『긍정. 골렘과 같은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면 싱크로가 해제되기에, 너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위험합니다.』

최신 장난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티르칸쟈카는 문득 물었다.

"아까 다리를 벌린 채 꼴사납게 있던 것도?"

골렘의 동작이 뚝 멈췄다.

『…긍…정….』

스피커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골렘의 다리를 찢어놓은 일은, 명확한 장난기를 담은 괴롭힘이었다.

골렘 너머의 사람은 골렘과 동조하기 위해서라도 제 자리에서 다리를 찢어야 했던 것이다.

"고통스러웠을 텐데, 구태여 왜 계속 동조하고 있었느냐?"

『계속은 아닙니다. 잘 때나 식사할 때, 혹 다른 업무가 있을 때는 해제하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 골렘은 한 점 주저없이 말했다.

『탄탈로스를 관찰하고, 그 내용을 보고하는 것. 그것이 본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티르칸쟈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골렘의 무례도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존재가치를 인정받은 골렘은 드디어 눈을 돌릴 여유를 얻었다. 골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식당이 기묘하게 어두워진 것 같습니다만.』

"내가 있을진대 어찌 밝겠느냐."

그 말만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티르칸쟈카이기 때문이다. 골렘도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확인했습니다. 일단 창고로.』

EP.80 심장의 다른 반쪽

티르칸쟈카는 직접 요리를 하려고 했으나, 12세기 동안 주방에 들어간 적 없는 소녀에게 주방이란 낯선 물건의 천국이었다. 그녀는 주걱보다는 메이스가, 국자보다는 할버드가, 집게보단 톱날검이 더 익숙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기를 향해 겨누어지는 쪽으로.

어쩔 수 없이 골렘이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골렘은 놀랍도록 요리에 능숙했다.

유일한 문제점이 있다면 크기가 작아서 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으나, 그건 티르칸쟈카가 간단히 해결했다.

티르칸쟈카가 대충 손을 휘젓자, 골렘을 중심으로 새카만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건 아래쪽부터 차근차근 형체를 이루어나가더니, 골렘의 몸을 부드럽게 밀어 올리며 그 몸을 감쌌다.

골렘은 잠시 높아진 시야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골렘의 머리 위쪽으로 솟아난 그림자도 두리번거리는 동작을 따라했다. 골렘이 팔을 들면 그림자도 팔을 들었고, 한 걸음 내디디면 똑같이 한 발을 내밀었다. 마치 그림자 인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건…! 아니, 군국의 기술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림자로서 맺힌 상은 본래보다 한없이 커질 수도, 티끌만큼이나 작아질 수도 있기 마련. 너의 딱 세 배 크기 되는 그림자다. 네가 행동하는 그대로 따라 할 것이다."

그림자를 몸에 익힌 골렘이 손을 뻗었다. 그림자는 그 움직임에 따라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고 수도꼭지를 열었다. 그림자이지만 실체가 있다는 의미.

자신보다 세 배 큰 동작을 재현하는 그림자에 골렘은 크게 당황했다.

"놀랐느냐? 마음껏 놀라거라. 지배와 조종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힘. 너희들의 깡통인형 놀이나 흙장난과는 궤를 달리하지."

『…깡통…. 큭, 부정,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몸을 얻게 된 골렘은 손과 발을 바쁘게 놀렸다. 콩을 물에 불리고, 체에 밭쳐 물기를 쭉 뺀 뒤, 빼낸 물을 냄비에 담아 끓이는 동시에 콩은 팬 위에서 바짝 졸였다. 티르칸쟈카는 주의깊게 골렘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머리에 담았다.

온갖 노력을 들인 끝에, 골렘이 완성한 요리를 내놓으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콩 통조림 콩조림과 육수 스프입니다.』

"요리란 이렇게 하는 것이로구나. 고맙다."

『별말씀을. 본관은 귀하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할 생각이 있습니다.』

골렘에게도 나름의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노역자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다른 교육생은 의지할 대상이 못 된다. 거기다 현재 탄탈로스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이 큰 존재가 티르칸쟈카이니, 내부의 정보가 필요한 골렘 입장에서 끈을 대려고 하는 것도 당연한 일.

"좋아. 일을 끝낸 깡통은 치워야겠지."

『깡…?』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티르칸쟈카는 처음부터 군국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

"이제 다시 잠들거라."

『읍? 잠…?!』

툭. 그림자가 스피커를 떼어냈다. 골렘이 눈앞에서 멀어지는 스피커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그림자가 몰려들더니 그 팔과 다리를 구속했다.

처음부터, 정확히는 골렘이 그에게 적의를 보였을 때부터. 이 미래는 예견된 것이었다.

티르칸쟈카는 어둠에 파묻힌 골렘을 내려다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성심성의껏 알려주었으니 망가뜨리지는 않으마. 대신, 쓸데없는 소리는 못 하도록 해야겠다. 보아하니 이것이 없으면 말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

"정답인 것 같구나. 내 필요할 때 다시 찾으마."

딱.

손가락을 튕기자, 골렘의 몸이 어둠에 휘감겨 공처럼 굴러갔다. 티르칸쟈카는 떼어낸 스피커를 찬장 가장 높은 곳에 두었다.

골렘이 홀로 어둠 속에서 바둥거리는 동안, 티르칸쟈카는 접시를 양손에 들고는 그에게로 향했다.

"자. 음식을 내왔다."

그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있는 채였다. 그러나 음식 냄새가 그를 자극했는지, 초점 없는 눈이 희미하게 접시를 따라왔다. 입가에서 침이 반짝였다.

식욕은 삶의 의지. 그에게서 그것을 확인한 티르칸쟈카는 크게 기뻐했다.

"다행히 식욕은 남아있나 보구나. 밥이다."

"…밥."

"그래. 밥. 맛있게 먹거라."

그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은 티르칸쟈카는 맞은 편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음식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곧장 음식을 향해.

"잠깐!"

그의 동작이 딱 멎었다. 그 상태로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가만히 쳐다보았다. 티르칸쟈카는 숟가락을 그의 손에 고이 쥐여주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잠시 숟가락을 낯설어하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앞에 놓인 수프를 떠먹었다. 처음에는 넘친 수프가 식탁 위로 몇 방울 흘렀으나 숟가락질을 반복할수록 흐르는 양이 줄어들었다.

티르칸쟈카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모든 걸 잊지는 않았구나. 참 잘 된 일이다. 어쩌면 금방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평생 이대로 있어도, 티르칸쟈카는 그를 영원히 돌볼 것이다.

그러나 별개로 티르칸쟈카는 그의 이전 모습이 그리웠다.

건방지기는 했다. 아닌 척했지만, 은근히 무례했다. 타인의 깊은 고뇌를 매우 우습게 취급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상을 웃도는 유쾌함과 티 나지 않는 배려가 숨어있었다.

그런 그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백치가 되었다는 사실은 티르칸쟈카의 가슴을 옥죄었다.

"네가 그런 모습이 된 것은, 필시 나의 심장에 네 영혼을 불어넣었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가슴에 손을 올리면 그가 전해준 박동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녀의 심장과 구분할 수 없는, 새빨간 핏빛 하트가 그려진 카드 한 장이 그녀의 가슴 속에 박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단 하나의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득한 감정이 없이는, 그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아까도 개의 왕이 나를 향해 짖지 않았구나.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내 너에게 딱히 준 것은 없는데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차마 셀 수도 없다. 흥미로운 이야기부터 시작되어, 심장 마사지, 그리고 그렇게 이렇게 뛴 가슴까지. 일련의 선물이 자연스러워, 받은 그녀마저도 되짚기 전까지는 받았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그녀가 준 것은 얼마나 적은가.

몸과 마음을 다해 갚아야 했다.

탁. 숟가락 내려놓은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그릇은 전부 비워져 있었다.

그를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티르칸쟈카는, 다시 일어나며 일일이 말을 걸었다.

"다 먹었느냐?"

끄덕.

물음에는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온다. 간단한 말은 할 줄 안다. 먹는 법, 걷는 법, 움직이는 법은 대강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잊은 건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려주면 된다.

"손을 내다오."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 손을 양손으로 꼭 감싼 티르칸쟈카는 자기 가슴을 향해 잡아당겼다.

"너는 기억할지 모르나, 너는 나의 은인이다."

그의 손은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왔다. 그것을 가슴에 소중히 품은 그녀는, 그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나의 심장이 멈춰있을 적, 이 손으로… 내 심장을 만져 뛰게 해주었지. 멈춰있던 나의 시간을 네가 깨워주었어."

조금 커다란 손. 갈비뼈 사이를 지날 때마다 곤란한 듯 멈칫거리던, 그러면서도 결국 심장에 닿아서 많은 것을 선물해주던 손길.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소녀로 돌아온 티르칸쟈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찬찬히 기억을 되찾거라. 나는 네가 가라고 하기 전까지 떠나지 않을 테니."

다짐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사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에 가까웠다.

티르칸쟈카의 심장이 뛴다고 해서 이 생각이 바뀌리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기에.

그리 말하던 티르칸쟈카는, 그녀의 가슴팍에 닿은 손을 보고는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막상 심장을 되찾았음에도, 심장에 전기를 흘려보내던 그때가 조금 그립구나. 그때는 매순간 심장에 닿을 손가락을 기다렸는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리 중얼거리던 티르칸쟈카가 이상을 느낀 건 그때였다.

분명 심장은 혈조술 없이도 뛰고 있다. 그의 손을 가져다 대든 그러지 않든, 심장은 똑같이 뛸 터.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왠지 모르겠으나, 그의 손을 가슴 가까이에 댈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그 손에 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혈조술을 가졌기에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뛴다. 잃어버린 반쪽이라도 되는 듯.

예전, 심장이 멈추었을 때. 다가올 때마다 자신을 향해 강렬한 것을 쏘아낸 손. 그때를 기억하고 반기는 것 같다. 떨림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간다. 이러다 소중한 심장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티르칸쟈카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녀의 몸과 마음이 이대로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점.

쿵. 쿵. 쿵.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절로 붉어진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이상해질 것 같아, 티르칸쟈카는 급히 손을 밀어냈다.

진한 아쉬움이 멀어져간다. 이상사태에서 벗어낸 티르칸쟈카는 황망한 얼굴로 자기 얼굴을 한 번, 그리고 심장 위쪽을 한 번 매만졌다.

"고장…난 건가…?"

지금 티르칸쟈카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EP.81 관측하지 못한 이야기. 창문이 없는 방

동조 마법을 해제하면 아득히 멀어지는 감각이 찾아온다. 그건 마치 좁고 긴 터널을 거꾸로 빠져나오는 것 같다. 외로운 몸이 자신의 의식을 잡아당기면, 골렘과 에이비 사이의 연결이 한계에 달한 거미줄처럼 늘어지다가.

툭, 하고 끊기고.

에이비 대위는 현실로 돌아왔다.

에이비는 매트 위에서 눈을 떴다. 혹여나 싱크로 중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있을까 싶어 방에 깔아둔 것.

또한, 스트레칭을 위해서 따로 깔아둔 것이기도 했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쉰 에이비는 잠시 자기 팔을 껴안았다. 제복 아래에서 말랑말랑한 살결이 만져진다.

감각에는 이상이 없다. 골렘이 아니라, 그녀의 본신이 확실하다. 동조 마법을 자주 사용하면 가끔 자기가 골렘인지 본신인지 헷갈리기에, 이런 간단한 방식으로 테스트를 해주어야 했다.

확인을 끝마친 그녀는 푹신한 매트를 무릎걸음으로 기어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나오면 좁고 어두우며 번잡한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임무에 필요한 것만 가득한, 그리고 그 의외의 것은 병적일 정도로 배제한 무미건조한 방.

한쪽 벽에는 손바닥만 한 '창문'이 벌집처럼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밤을 비추는 것처럼 어두웠다. 빛의 잔재라도 보이는 '창문'은 오직 두 개.

그중 하나에는 푸른 하늘과 널따란 황야가 비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둡고 흐릿했다.

에이비는 자신의 생체 말단에서 키를 뽑은 뒤, 흐릿한 '창문' 옆에 있는 홈에 꽂았다. 그러자 회색빛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더니 점차 어떤 풍경을 이루었다….

이윽고 그 창문에는 탄탈로스의 식당이 비치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전체적으로 뿌옇게 보이는 전경이 창문 너머로 보이고 있었다.

"시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시조는 무저갱에 여전히 남아있으며, 요리를 배우고자 했다는 것.

요리를 배우고자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당분간 무저갱에서 지내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터.

그보다 지금 탄탈로스 내부의 골렘이 구속되었기에 대처가 필요하다. 에이비는 다음 업무로 돌입했다.

'창문'을 마주 보고 앉은 에이비는 눈을 감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공기가 부르르 떨리며, 그녀 주변의 세상에 또 다른 법칙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군국의 군인이었으나, 그녀가 쓰는 마법은 제식 마법과는 다르다. 세계를 바꾸어내기 위해 어떠한 스펠이나 영창도 필요하지 않은 자기 세상의 발현.

고유마도. 나팔꽃.

아침에만 피어나며 낮에는 저무는, 한해살이 꽃.

마력으로 이루어진 나팔꽃 줄기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건 아름다운 덩굴식물이 그녀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 같기도, 혹은 배고픈 뱀이 그녀를 집어삼키기 위해 똬리를 트는 것 같기도 했다.

전자든 후자든 상관없다. 맡은 소임만 할 수 있다면.

에이비는 마력을 끌어올렸고, 그 마력을 양분 삼아 자란 나팔꽃은 그녀의 볼 옆쪽에서 꽃봉오리를 맺었다. 그것은 곧 풋풋한 자줏빛 빛깔을 선보이며 아름답게 피어났다.

준비는 끝났다. 눈을 뜬 에이비는 나팔꽃의 암술에 대고는 말했다.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유엘, 에이비로부터 호출."

아무도 듣지 못할 말.

이 오지에, 고립된 장소에서 해보았자 결코 전해지지 않을 말.

그러나 '동조'의 힘을 지닌 나팔꽃은, 세상 어딘가에 피어났을 다른 꽃에 그 소식을 전해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저 아득히 멀리 있는 누군가로부터 목소리가 날아든다.

『에이비! 기다렸어!』

유난스러운 목소리는 며칠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이비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답했다.

"유엘. 연결 확인했습니다."

『오랜만이야! 정확히는, 6일 21시간 34분일까!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일주일을 채울 뻔했어! 걱정하게 하지 마, 에이비!』

"염려해주신 건 고마우나, 연락할 일이 없었습니다. 본관이 가진 유일한 '창문'이 구속되는 바람에 갱신되는 정보가 없었습니다."

짝, 하고 너머에서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맞다! '창문'이 거의 다 깨졌다고 했지? 혹시 남은 두 개도 깨졌니?』

"부정. 다만, 탄탈로스 내부를 감시하는 마지막 한 개체가 구속되었습니다. 혹, 다른 '창문'을 보급해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아쉽지만 기다려야 해. 알다시피, 우리 '창문'은 워낙 만들기 힘들어서 말이야. 쉽게 안 만들어준다니까…. 하물며 그게 쉽게 부서졌으면 더더욱.』

본래 에이비가 가졌던 '창문'은 총 마흔아홉. 그녀가 다룰 수 있는 한계치이자, 무저갱 탄탈로스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군국에서 넉넉하게 지급한 수였다. 인간조차 쉽게 찢어버리는 탄탈로스의 무법자들이 골렘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테니 예비해두라는 뜻으로.

예상이 잘 들어맞은 건지, 그토록 많았던 '창문' 중 마흔일곱이 손쉽게 부서지고, 남은 것은 단 두 개.

그러나 에이비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본관의 소관이나, 온전히 본관의 책임은 아닙니다. 탄탈로스에서 '창문'을 부수는 교육생이 드문 건 아니었으나, '그'처럼 편집증적으로 정성스레 부수는 이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범죄자를 체포하면서 무장조차 해제하지 않은 파트락시온 장군 책임이…."

『아하하. 큰일 날 소리를. 아무리 우리가 그쪽 소속이 아니어도 장성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유엘이 타이밍 좋게 말을 끊었다. 애꿎은 유엘에게 감정을 토해낼 뻔한 에이비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냐아냐~.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통신병이지, 감정 없는 흡혈귀는 아니잖아! 햇빛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별 차이는 없긴 하지만!』

자학이 섞인 농담이 흘러나왔다. 경직된 분위기를 흐리려는 유엘의 노력이다.

새삼 상대방에게 폐를 끼쳤다는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에이비는 화제를 돌렸다.

"저번에 요청했던 마력초의 보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응! 곧 출발할 것 같아! 하지만, 알지? 통신병은 절대 마력초를 쓰면 안 돼! 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감시관이 파견될 거야!』

매사에 부드러운 유엘은 에이비에게 강한 어조를 쓰지 않는다. 그런 유엘이 '절대'라고 강조할 정도라면, 그건 정말로 피해야 할 일이라는 뜻.

그러나 에이비는 알고 있었다.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유엘이, 에이비에게 마력초를 보급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노역자가 배신했으니 마력초 보급을 취소해달라, 는 말을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에이비의 부탁에 기뻐했을 유엘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잠시 말을 고르던 도중 유엘 쪽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명령서가 접수된 것이다.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나팔꽃 너머로 전해졌다.

『앗. 잠깐만. 긴급 명령서가.』

보고라고 치기에는 너무 길었고, 사담이라 하기엔 너무 짧았다. 이제 둘만의 이야기는 끝낼 시간이었다.

에이비는 입고 있던 옷을 고치며 말했다.

"바쁘신 와중 실례했습니다, 유엘 대위."

『아니야. 오랜만에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어.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그리움을 담은 목소리가 멀어지며, 나팔꽃의 꽃잎이 힘없이 지기 시작한다. 아릿하게 남은 잔향으로 유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군국 통신병 유엘 대위입니다…. 귀하의 요청서를….』

흐려지는 목소리. 그것을 끝으로, 에이비의 어깨에 핀 나팔꽃이 시들었다.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가닥가닥 끊어지는 덩굴 줄기.

그것들은 땅에 떨어지면서 안개처럼 허공에 녹아들었다.

고유마법은 고유하다. 한 명이 가진 하나의 심상은 다른 것과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법이라는 신비가 인간의 몸에 깃든 순간부터 생겨난 지상명제.

그러나.

비슷한 적성을 가진 이들을 모아, 엄격하고 규격화된 교육으로 그들의 심상을 연마한다면.

같은 마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군국은 그것을 실제로 해냈다. 중등군사학교에서부터 엄선한 인재를 모아, 특별히 교육해서 육성한 통신병.

그들의 마법은, 물론 형태는 다 다르나, 공통으로 갖는 특성이 있었다.

동조.

이 마법으로 통신병은 기계장치나 마법진 없이 다른 통신병과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으며, 생체 단말과 키를 이용해 특수제작 된 골렘에 접속할 수 있었다.

가장 쓰레기 같은 통신장비조차 건물과 비견될 만큼 거대하며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점을 생각하면, 통신병이란 그런 부담을 크게 완화하는 동시에 유동성까지 부여한 군국의 성공작이었다.

다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손에 꼽기에, 통신병은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임관 즉시 대위가 된다.

대위가 되어봤자 다룰 수 있는 건 오직 골렘이 전부라, 장교라기보단 말단 병사에 가깝지만.

"고생하십시오, 유엘."

가장 친했던 이의 행복을 바라며 에이비는 고개를 돌렸다.

작은 전등 하나만이 이 답답한 공간을 비춘다. 좁은 책상, 그 위에는 서류나 암호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의복 패킷이 있으니 옷장조차 필요 없고, 콩 통조림이 있어 다른 식량도 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은 찬장 하나에 전부 들어있다.

그 이외에는, 삶을 장식할 그 무엇도 없다.

잠시 몸을 뉠 안락한 쇼파도.

웃음보단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 흘러나오는, 시답잖은 내용이 든 잡지도.

하다못해, 잠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조차도.

아무것도.

이곳은 창문 없는 방. 바깥으로 난 문 따위는 없다. 설사 그것이 창문이라도.

커튼을 열고 내리쬐는 햇빛을 맞이하는 것, 창문을 열고 바람을 안에 들이는 것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통신병 에이비 대위,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창문'은, 바깥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구는 오직 골렘뿐.

통신병의 방은 무미건조해야 한다. 만일 눈 돌릴 것이 있다면, 필시 통신에 소홀하게 되니까.

보급물자를 받으려면, 업무를 처리하려면, 혹, 기분전환 삼아 세상을 관찰하고 싶다면, 그들만의 창문인 골렘을 통해야 했다.

오직 그것만이 세상과 교류할 유일한 방법.

그나마 유일하게 허락된 안식이… 다른 통신병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다.

세면대로 가 세수를 했다. 수건 패킷으로 얼굴을 닦은 에이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제복과 모자, 그에 맞추어 깔끔하게 자른 단발이 찰랑거린다. 햇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흐린 조명 아래서도 피부가 하얗다.

예전에는 조금 누렇게 뜬 느낌이 있었으나, 최근 본의 아니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사라졌다.

그렇다고 고맙게 여기고 싶지는 않지만.

새삼 다시 '창문'에 생각이 미쳤다. 에이비는 다시 의자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먼 황야를 바라보는 지상의 골렘,

그리고 식당 한구석에 앉아, 어두컴컴한 식당을 가만히 바라보는 탄탈로스의 골렘.

골렘처럼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비가 문득 중얼거렸다.

"…돌아갈까."

에이비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남은 두 개의 창문 중, 잠깐 고민하다가, 탄탈로스 안에 있는 골렘의 키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칭을 시작하고 말았다. 지난 사흘 간, 동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했던 스트레칭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다리를 풀던 에이비 대위는 문득 어떤 사실을 상기해냈다.

"아. 풀렸었지."

에이비는 과거의 치욕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동조율은 동조하려는 대상과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높아진다. 싱크로 타입 골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유사한 감각을 지닌 것은 그 때문.

당연히 싱크로를 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최대한 비슷한 동작을 취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다리를 찢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체 단말에 키를 꽂으면, 그녀와 공명하는 동조 마법이 다리를 찢어야 한다고 알렸다. 그러면 에이비 대위는 주먹을 꼭 말아쥐고 부들부들 떨며 다리를 벌려야 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있다. 딱딱한 골렘을 매일같이 조종하던 에이비 대위의 몸은 어느샌가 골렘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방에 박혀 골렘이나 조종하고 있으니 유연성이 없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유연하지 못한 그녀에게 새로이 주어진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창문 없는 방에 갇힌 에이비에게는 이겨낸다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첫날.

양발을 벽에 대고 몸을 밀어젖혔다. 숨을 참고 벽을 잡아당겼을 때, 에이비의 두 다리는 애매한 둔각을 이루었다.

골렘에겐 다리찢기란 그저 부품의 배치일 뿐이다. 고통을 느끼는 건 오직 에이비의 몸뿐. 골렘보다 본신이 아프다는 생소한 경험을 하며 에이비는 비명을 질렀다.

둘째 날.

하루종일 스트레칭 아닌 스트레칭을 한 덕분일까. 전날보다 가동범위가 늘었다. 부작용으로 아침부터 다리를 오므리지 못했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어쨌건, 동조율이 비교적 높아 접속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골렘에 접속한 에이비 대위가 처음으로 본 건.

손이 간신히 닿지 않을 위치에 놓인 스피커였다.

빠직. 에이비 대위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셋째 날.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 스트레칭을 반복하면 몸이 유연해지나, 다리를 벌린 채 엎드리기까지 하는 건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육체는 정직하여 벼락치기를 허용하지 않는 탓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계속 갇혀있다간 임무도 실패할뿐더러, '창문' 하나가 완전히 닫히는 건 끔찍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에이비는 자신을 묶은 그를 떠올리며 복수의 다리찢기를 계속했다.

"잡범…. 이 수모는 잊지 않겠어."

비록 지금 골렘을 구속한 건 시조였으나, 그에게 쌓인 것과 비교하면 티끌도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구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비는 복수를 다짐하며 탄탈로스의 골렘에게 접속했다.

EP.82 머리 속의 지우개

아무리 그래도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방에서 밤을 지낼 수는 없다. 티르칸쟈카에게 그건 감히 의심할 수도 없는 상식이었다.

티르칸쟈카는 그를 방에 들여보낸 뒤 침대에 눕혔다. 차마 그녀가 직접 옷을 벗길 수는 없었기에, 불편하더라도 옷을 입은 채 눕게 해야 했다.

사흘동안 피로가 쌓인 탓일까.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순식간에 잠들었다.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고 나온 티르칸쟈카는 그의 방 앞에 자리를 잡았다. 관 위에서 양산을 어깨에 걸친 채, 안쪽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배경 삼아 밤을 지샜다.

그러던 도중, 딱 주간등이 켜지기 직전 개의 왕이 나타났다. 저 먼 복도에서부터 가볍게 걸어오는 개의 왕 아지. 티르칸쟈카는 잠깐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줬으나.

"멍?"

아지는 티르칸쟈카를 보고도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새삼스레 자신이 되찾은 것이 무엇인지 상기했다. 티르칸쟈카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개의 왕이 짖지 않는다는, 고작 그뿐인 이야기였으나 그녀에겐 그런 조그만 것도 기쁨이 되었다. 되찾은 감정이란 이토록 사소한 부분에서도 와닿는 것이었다.

"정말로 짖지를 않는구나…."

아지는 문 앞을 막고 있는 티르칸쟈카를 향해 말했다.

"멍! 아침이야! 깨워야 해!"

"기다리거라. 내가 깨우겠…."

"멍! 멍!"

티르칸쟈카가 문을 연 사이, 열린 문틈으로 아지가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그리고는 사방을 날뛰며 맹렬하게 짖었다.

화들짝 놀란 티르칸쟈카가 아지를 따라 들어갔다.

아지는 충분히 시끄러웠다. 기억을 잃은 이도 잠에서 깰 만큼.

그가 미라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숨 자고 일어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티르칸쟈카는 어제처럼 말을 걸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일상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하는 말.

그때.

"안녕, 하세요…."

침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티르칸쟈카는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다.

"셰이! 셰이!"

그 길로 그를 관에 앉혀 날아온 티르칸쟈카는 곧장 셰이를 찾아왔다. 셰이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자, 티르칸쟈카는 셰이에게 멀뚱거리는 그를 보여주며 외쳤다.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 같다!"

"응?"

"금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더냐. 필시 기억이 되돌아오는 중인 게 틀림없다!"

티르칸쟈카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비해 셰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아직 한참 멀어 보이는데. 저 멀뚱멀뚱한 얼굴을 봐. 평소의 그 녀석하고는 완전 딴판이잖아."

"작일보단 나아지지 않았느냐? 작일은 드문드문 내 말을 따라 하는 정도였는데, 금일은 직접 말하기까지 했다. 말을 기억해내는 게 분명하다!"

신이 난 티르칸쟈카를 보고 셰이는 잠시 고민했다. 진실을 말하면 실망할 텐데.

그러나 셰이에게는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할 능력이 없었다. 그럴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저런 식으로 기억을 잃는 건, 정보로서의 기억을 잃는 게 아니야. 지식이나 언어 같은 정보는 머릿속에 그대로 있어. 단지 그것을 자기 자신과 결부시키고 끌어낼 자아가 사라진 거지."

자기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관 위에서 멀뚱거릴 뿐이니.

셰이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봐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잖아. 아마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걸."

"하지만, 조금 다르다. 보거라."

티르칸쟈카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멀뚱히 앉아있던 그는 티르칸쟈카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반응했다. 티르칸쟈카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더니, 셰이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자, 저기. 셰이에게 인사를 해보려무나."

아기처럼 멀뚱거리며 앉아있기만 한 그와, 그를 극진히 보살피는 티르칸쟈카.

그 모습을 본 셰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인지 부조화 올 것 같아.'

겉으로만 보면 다 큰 성인 남성과 소녀다. 그런데 소녀가 마치 어머니처럼 그를 돌보고 있다.

심지어 그 성인 남성은 며칠 전만 하더라도 능글맞게 웃으며 수상한 분위기를 팍팍 흩뿌리던 군국의 교관. 셰이를 몇 번이고 긴장하게 만든 그가, 세상 순진한 얼굴로 앉아서 티르칸쟈카의 시중을 받고 있으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티르칸쟈카의 심정은 이해가 가. 자기 심장을 고쳐주다가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니 큰 책임을 느끼고 있겠지.'

하지만 셰이는 아직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읽어내고, 쪽지로 사람을 들었다가 놓았다 하는 저건 셰이가 가장 질색하는 흑막 타입이었다.

차라리 흑막 같기만 하면 또 모른다. 그러나 시조의 심장을 뚝딱 고쳐버린 탓에 셰이는 그 진의조차 짚을 수 없었다.

그냥 흑막도 아니고 완전한 백색도 아닌 것 같은, 혼돈에 가까운 존재.

'진짜, 진짜로 저게 연기는 아니겠지? 할 이유가 딱히 없기는 한데….'

아무런 이유가 없더라도, 그라면 미친 짓을 태연히 저지를 사람이었다. 의심을 거두고 싶어도 계속 한구석에 자국처럼 남는다.

셰이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볼 때였다.

"인…사."

그는 티르칸쟈카의 말을 알아듣고는, 셰이를 향해 소극적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아, 안녕하세요…."

지금 보여주는 저 태도조차 의심스러운 건, 그의 행실 탓이리라. 셰이가 손을 내저었다.

"이건 의미 없어. 기억을 잃어도 인사는 할 수 있다니깐…."

"…언니."

"?!?!"

셰이의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와 더불어, 생리적인 거부감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셰이는 다급히 외쳤다.

"뭐뭐무뭐, 뭔 소리야! 누나겠지!"

티르칸쟈카가 지적했다.

"셰이, 형이 맞지 않겠느냐?"

"아차, 그래, 형, 아니, 내가, 연하, 그보다! 잠깐! 다들 제자리에 멈춰!"

급격하게 당황했을 때, 셰이가 취하는 태도는 하나였다. 셰이가 머리맡에 띄워둔 천앵을 쥐고는 바람을 일으켰다.

후우웅. 압축된 공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셰이를 중심으로 복잡한 기류가 생겨나며, 좁은 문틈을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닷없이 무슨 일이냐?"

양산을 내려서 바람을 막아낸 티르칸쟈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바람을 막은 탓에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셰이는 애검 천앵을 만지작거리며 안정을 되찾았다.

"후우. 잠깐 머리 좀 식히려고."

"두 번 식혔다간 감옥이 뿌리째 뽑히겠구나. 조심하거라. 어쨌건, 이제 알겠느냐? 내가 왜 다르다고 말했는지?"

"응. 알긴 알겠어…."

언니라는 호칭은, 손아래 여자가 손윗 여자를 부르는 말. 자신과 상대 사이의 거리를 객관적으로 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물론 상대방을 인지하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뜻인데….

"그런데 왜 하필 언니인데?! 완전 정반대잖아!"

'저 자식은 남자인데 왜 자기를 여자라고 인식하는 거냐고!'

어디까지나 그를 겨누고 한 말이었지만, 반대로 알아들은 티르칸쟈카는 턱에 손을 괴고는 셰이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흐음. 네가 조금 곱상하기는 하지. 여자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자로...."

갑자기 말이 길어지며, 티르칸쟈카의 미간이 급히 좁아진다. 티르칸쟈카는 심각하게 셰이와 교관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곤 무언가 걱정스러운 듯이 신음했다.

그러고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조곤조곤 설명하는 것이었다.

"헷갈리지 말거라. 셰이는 비록 체구도 작고 팔다리도 가늘며 얼굴도 곱상하나, 그는 분명한 사내이다. 명실상부한 남자란 말이다."

"남…자?"

"그래. 사내이니, 꼭 명심하거라. 언니는 아니고, 누나도 더욱 아니니. 그것을 틀리는 건 실례 중의 실례란다."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단, 경계하는 느낌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셰이는 자신을 흘겨보는 티르칸쟈카를 보며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느꼈다.

'어제 보여줬던 태도도 그렇고. 에이, 설마. 정말로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거나 했다고? 내가 했던 의심이 정말 현실이 된 거야?'

그러던 셰이는 한참 뒤늦게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티르칸쟈카의 말마따나, 지금 셰이는 남자로 가장하고 있다. 이것은 아티팩트에 의한 것이라, 셰이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작동한다.

그런데 그는 셰이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 달리 말하면,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할 수 있는 말.

'잠깐. 아가르타의 가면을 꿰뚫어 보았어? 어떻게?'

순간 새로이 의심이 들었다. 설마, 그는 처음부터 셰이의 남장을 꿰뚫어 본 것일까?

하지만 셰이는 금방 의심을 지웠다.

'그럴 리 없지. 아가르타의 가면은 분명히 효과를 가지고 있어. 티르칸쟈카나 다른 사람이 아직도 나를 남자로 믿을 정도로. 그리고 남장을 꿰뚫어 봤다면 지금 밝히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셰이는 금방 합리적인 가설을 찾아냈다.

'맞아. 내 아티펙트, 아가르타의 가면은 첫인상을 결정짓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첫인상은 이후의 만남에도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아티팩트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첫인상. 이미 만난 이에게는 통하지 않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는 셰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나, 첫인상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

즉,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기억을 잃기는 잃은 모양이네. 의심은 풀어도 되겠어…. 아니, 어쩌면 이걸 계기로 내가 남자라는 오해를 자연스럽게 풀 수도….'

무저갱에 들어오기 위해 남장을 하였지만,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그것을 유지했지만…. 셰이는 의외로 남장에 목매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남장했다는 사실을 자주 깜빡할 정도였으니.

굳이 남장을 유지하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고 편히 관계를 맺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옷을 벗어 던지면서까지 억지로 성별을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것으로, 자연스럽게 셰이가 여자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남…자."

"그래. 남자다. 기억했지?"

티르칸쟈카의 말이 끝나자, 그가 크게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왠지, 애매호모하더라."

왠지. 애매.

언어로 빚어내지는 않았으나, 그 사이에 들어갈 말이 귓가에 울렸다, '여자라고 보기도' 애매하다는 뜻. 아가르타의 가면과도 관계없이….

셰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았다. 그녀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손짓했다.

"야. 잠깐만 너, 일로 와 봐. 너 기억 있지!"

위기를 감지하는 본능이 자아보다 먼저 나타났다. 그가 겁을 집어먹고는 티르칸쟈카 뒤에 숨었다. 그러자 티르칸쟈카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다독이고는, 곧 셰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셰이. 너무 겁주지 말거라. 그가 무서워하지 않느냐?"

"아니, 저거 수상하지 않아? 말하는 꼬라지를 봐! 슬슬 긁는다니까?"

"네가 애매한 건 사실이지 않느냐. 사내치곤 선이 가늘어, 나도 가끔은 헷갈리곤 했다."

"헷갈리는 게 끝이야?!"

'잠깐만. 조금 전 저 자식, 애매모호…말고 다르게 말하지 않았어?!'

셰이가 눈을 부라리자, 티르칸쟈카는 한결 더 가까이 붙어서 그를 감쌌다. 티르칸쟈카가 걸친 양산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예전이면 모르나, 나를 도우려다 기억을 잃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찌 그를 탓할 생각을 하느냐?"

"내 성별 헷갈리는 것도 수상한데, 애초에 자기 자신을 여자로 인식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야! 너 솔직히 얘기해. 기억 안 잃었지?! 속으로 웃고만 있지?!"

"이제는 모함이더냐? 사내가 품이 그리 좁다니. 너무하구나. 그렇지 않느냐?"

티르캰자카가 끝까지 교관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셰이는 씩씩거리기만 할 뿐 손을 쓰지 못했다. 다만 노려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던 터라, 본능만 남은 그는 겁을 먹고 티르칸쟈카의 등 뒤에 숨었다.

그리고 티르칸쟈카는 그 사실을 은근히 즐겼다. 그녀가 굳이 셰이를 호통치지 않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옷깃을 꼭 쥐는 손길이 느껴지자 티르칸쟈카는 다시 그를 다독였다.

"걱정 말거라.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하지 않았느냐."

"저, 감사, 합니다. 어…."

그가 말끝을 흐리자 티르칸쟈카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까 알려주지 않았느냐. 티르, 라고 부르거라."

"네, 티르."

"그래, 착하구나."

셰이는 기가 막혀서 입만 딱 벌렸다.

'나도 딱히 공격할 생각도 없었거든! 남을 악역으로 쓰지 말라고!'

점점 가관이었다.

의심하고 싶지 않아도 불쑥불쑥 솟아난다. 만일 그가 자아를 잃은 척하는 중이라면 그것도 기가 찰 일인데, 혹 진짜 잃었다고 해도 대단하다. 어떻게 사람이 기억을 잃어도 수상하게 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참 이를 갈던 셰이는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만일 진짜 기억을 잃었다면,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할 것이다.

만일 기억을 잃은 척하는 중이라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말을 흐릴 것이다.

'전자라면 그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알아낼 수 있고, 후자라면 그의 연기를 간파할 수 있어. 이건 기회야!'

어찌 되었든 손해볼 게 없다. 셰이가 신나서 말했다.

"티르칸쟈카. 지금이야. 지금이 그에게서 정보를 캐낼 기회야!"

물론 티르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셰이는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티르는 즉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보라니? 기억을 잃은 이 상대로 심문을 하겠다는 뜻이냐? 또 무엇을 캐내려고. 절대 불가…."

"그의 이름이나, 계급, 아니면 여기 오게 된 계기나 능력 같은 거! 지금 아니면 알 기회가 없어!"

하지만, 만일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셰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어때?"

극렬히 반대하려던 티르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이름, 이름이라."

작게 중얼거리던 티르는, 호기심과 죄책감이 반반 섞인 얼굴로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눈을 살짝 감고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셰이를 향해 소극적인 동의의 뜻을 표했다.

"…앞으로도 보살피려면, 최소한은 알아야겠지. 그의 이름 같은. 음음."

그를 감싸주던 벽이 사라졌다. 그는 티르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티르는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EP.83 이름이 뭐예요

임시 심문은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티르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는 동안, 책상과 의자를 끌어온 셰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양손에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자. 먼저. 지금까지 영 기회가 안 생겨서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셰이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직면한 그는 불안한 듯이 티르를 쳐다보았지만, 티르는 입을 꾹 닫고는 양산을 내려 시선을 가릴 뿐이었다.

독대하게 된 셰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셰이의 위압적인 기세에 압박을 받은 그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티르."

"응? 나를 불렀느냐?"

티르가 양산을 살짝 올렸다. 셰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

셰이는 다시 한번 그를 노려보며 보다 또박또박하게 물었다.

"아니, 네 이름 말이야."

"티르…."

한 번은 실수라고 쳐도 두 번부터는 필연이다. 자기 이름을 두 번 연속 티르라고 소개하니, 티르는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혹 나와 이름이 같느냐? 티르? 그것 참 굉장한 우연이로구나."

"아닐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방금 티르라는 이름을 들어서 헷갈리는 모양이야. 잠깐."

셰이가 천앵을 쥐고는, 곧게 들고는 옆면을 앞으로 향했다.

천검기, 천경(天鏡).

신기루는 하늘에 비친 땅의 그림자. 충분히 멀리 펼쳐진 불균등한 공기는 빛을 이리저리 휘게 만든다.

압축된 공간 그 자체인 천앵이 빛을 굴절시켜 그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었다. 셰이가 거울에 비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봐! 티르 말고, 이 사람! 거울에 비친 너 말이야!"

"나…. 내, 이름."

순간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 나타나는 격렬한 변화였다. 그는 고통에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급격하게 들이쉬었다.

셰이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보다 못한 티르가 나섰다.

"여기까지 하자꾸나. 아무래도 마음만 너무 앞섰던 것 같다. 물어볼 게 있으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알아내도록 하자꾸나."

그러나 셰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봐. 분명히 기억해낼 거야. 아무리 자아를 잃었어도 이름처럼 오래되고 자주 쓰인 정보는 쉽게 잊지 않아. 평생 함께 해온 이름마저 잊을 정도면 언어도 잊겠지."

"허나…."

"그리고 다른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묻는 건 필요해. 이름이란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

지식은 확신을 주고, 확신은 자신감을 만든다.

셰이의 말이 의외로 논리정연하고 자신만만했던 터라 티르는 아무 말 못하고 물러났다. 대신 그의 안녕을 바라며, 양손을 꼭 맞잡은 채 걱정하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끊어질 듯한 신음이 계속되며, 티르의 마음이 도화선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갈 때.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힘겹게 한마디를 뱉었다.

"…휴."

둘은 그게 생각 끝에 나온 말인지, 아니면 그냥 내뱉은 신음인지 헷갈렸다. 그 이후 신음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은 티르가 되물었다.

"휴, 라고 했느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그게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은 셰이가 의아해했다.

"휴? 그게 네 이름이야?"

다시 한번 이어지는 끄덕임. 셰이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성씨는 없나? 아, 고아라고 했었지. 그래도 군국 고위직이면 성씨 정도는 만드는 편인데…. 왕국이 사라진 뒤 성씨에 큰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 자기가 만든 이름이라 애착이 없는 걸까?'

셰이가 고민하느라 잠시 침묵하자, 티르가 조심스레 다가오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휴?"

이름이 불리자 그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것이다.

티르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 화답했다.

"휴, 그게 네 이름이구나. 너무 늦게 알았다. 진작 알았다면 더 자주 불렀을 것을."

한 점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티르에 비해, 세이는 여전히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다.

'반응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자기 이름이 맞는 것 같은데. 가명은 아니겠지? 아니야. 이런 생각까지 하면 끝이 없어.'

셰이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참 그 이름을 되짚었다. 회귀의 기억 속에서 그 비슷한 이름이라도 찾기 위해.

"휴. 휴. 휴라…."

"아는 이름이느냐?"

"잠깐만. 휴머니스트, 휴리스틱, 휴…. 설마."

"설마?"

한참을 고민하던 셰이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들어. 딱히 비슷한 이름도 발견하지 못했고."

티르가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뭘 그리 질질 끄느냐? 모르면 처음부터 모른다고 하지."

"더 수상하단 말이야. 내가 모르는 이름이라니? 어지간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특히 군국 교관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을 텐데…."

셰이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이었다.

이미 13번의 회귀를 겪었으며, 그중 절반 정도는 군국과 마찰을 빚었던 그녀는 유명한 군국 인사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그토록 대단한 능력을 지닌 교관이라면 이쪽에서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일 무저갱에서 객사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러나 셰이의 혼잣말을 들은 티르는 잠시 눈치를 보았다. 골렘의 발언을 통해, 그가 교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티르 자신은 그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셰이에게 알려도 되나 확신이 없었던 그녀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네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 자, 그보다."

티르는 양산을 거두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휴."

그가 고개를 돌려 티르를 쳐다보았다. 티르는 즐거운 듯이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휴."

"네."

"휴."

아무런 용건 없이 이름만 두 번. 조금 높은 음으로 한 번, 살짝 낮게 깔아서 한 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도 고개를 갸웃하며 부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티르."

"후후. 이것이 네 이름이로구나, 휴."

티르는 그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이름 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오늘 온종일 이름을 부르느라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루함을 모르는 티르가 다 즐길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셰이는 다시 이름을 부르려는 티르를 제지하고는 물었다.

"그래, 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뭐라고 부를지는 알겠어. 그러면 계급은 뭐야?"

그 질문은 티르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는 셰이의 질문을 받고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계…급?"

"만일 네가 진짜 교관이라면 계급이 있을 거 아니야."

"어…."

그가 대답을 못하고 어물쩍거리자, 티르가 급히 끼어들어서는 그를 감쌌다.

"계급이라니.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하더냐? 괜히 헷갈리기만 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그렇지만, 군국에서의 위치를 알려면 계급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없잖아."

"계급은 바뀌기 나름 아니겠느냐. 그런 불안정한 기억은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자꾸나. 휴?"

재빨리 질문을 넘긴 티르는 셰이가 다시 묻기 전에 그를 불렀다. 그러나 무슨 질문을 할지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기에, 눈앞에 떠오르는 의문을 바로 내뱉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느냐?"

세상은 상대적이라 누군가에게는 참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건 최소한 셰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셰이가 불만을 표했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계급보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더니, 정작 더 쓸데없는 질문이잖아."

"질문하는 사람이 너 하나는 아니잖느냐."

"아니, 나도 따지고 보면 이름 말고는 별거 안 물어봤는데…."

"쫑알쫑알 시끄럽구나. 스승의 일에 일일이 딴지를 걸 테냐?"

"이럴 때만 스승이래…."

억지를 부려 셰이의 입을 다물게 한 뒤, 티르는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마디 단어를 뱉어냈다.

"콩."

"콩?"

콩이라고 하면 식당에 잔뜩 있던 통조림이었다. 티르는 기뻐했다. 최소한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잔뜩 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때 엉뚱한 곳에서 의문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무엇이 말이냐?"

"콩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이상하구나. 콩을 좋아하는 게 어찌하여 문제란 말이냐?"

티르가 아는 콩이란 대단히 유용한 곡식이었다.

그렇지만 셰이는 세상 모두가 콩을 싫어하는 게 상식이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군국의 콩 통조림의 원재료는 군국 7대 발명품 중 하나, 심는 비료 '키메라 콩'이야. 휴경지에 심는 건데, 한 번 심으면 땅이 비옥해져서 내후년 농사까지 풍년이 들어."

"풍년이라. 그러면 대단히 좋은 것이잖느냐?"

"맞아. 비료로써는 좋지, 하지만 그 콩은, 아니야. 음식으로썬 절대 아니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인지, 셰이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차라리 비료가 더 나은 음식일지도 몰라. 키메라 콩을 심으면 커다란 콩이 밭에 가득 맺히는데, 알이 굵은 것에 비해 맛은 더럽게 없어. 진흙이랑 비슷한 식감에, 비릿하고 독한 향이 나고, 혀에는 잔뜩 달라붙어서 물 없이는 삼키지도 못해. 오죽하면 사흘 굶은 소도 거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사흘 굶은 소가 거른다고 하기에, 식당에 있던 통조림은 산더미였는데.

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에 비해, 다들 깡통 안에 든 콩을 자주 먹는 것으로 보인다만."

"그야 그 어마어마한 양의 키메라 콩은 군국에서 취합한 뒤 배급하니까! 그나마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맛이 백 배는 나아진 거야. 아니었으면 군국은 이미 몇 번 뒤집혔어. 그건 대단한 발명이지만, 음식으로썬 고문이니까!"

"…그래서 지금껏 너만 콩 통조림을 먹지 않는 것이냐?"

"어? 그러긴 했는데."

티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셰이를 나무랐다.

"나도 알지 못했으니 할 말은 아니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셰이, 너는 먹을 것을 가지고도 나누지 않았느냐?"

"어라?"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이 콩을 먹던 도중 혼자만 맛난 것을 먹었냐는 추궁이었다.

눈을 끔뻑이던 셰이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니야. 나는 아지에겐 같이 먹자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어! 단지, 내 아이템은 향신료나 소금을 강하게 쓴 음식이라 아지에겐 안 맞았을 뿐이야!"

"그러면 휴에게는 한 번도 제안하지 않았으렷다."

"어? 응…."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셰이. 티르의 시선이 한층 차가워졌다. 셰이는 찔끔 겁을 먹고는 몸을 움츠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티르는 걸쳤던 양산을 내려놓고는 그 앞에 섰다.

"그만하자꾸나. 마음이 아픈 이에게서 대답을 캐내다니. 애초에 이래서는 안 되었다."

"어? 아직 그의 능력을 물어보는 것도 안 끝났는데…."

"쪽지의 내용을 잊었느냐? 그의 상태가 이상해져도 건드리지 말라고 강조하지 않았느냐. 평소에도 음식을 나누지 않을 만큼 서먹했는데, 어떤 자격으로 대답을 바라겠느냐?"

"그러긴 했는데, 그걸 굳이 따를 필요가…."

"신뢰의 문제이잖느냐. 네 손에 쥐여준 쪽지마저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느냐? 앞으로도 가면을 쓰고 그를 마주할 것이냐?"

티르의 말은 정론이었다.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다만, 셰이도 할 말이 있었다. 셰이는 드물게도 티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 녀석이야말로 가면을 쓰고 있잖아!"

느닷없이 지목당한 그가 눈을 끔뻑이는 동안, 셰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토해내듯 외쳤다.

"그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대로 속 터놓고 이야기해준 적 있어? 나는 오늘 그가 말하기 전까지, 그의 이름조차 몰랐어! 솔직히 말해 봐. 정 네 말대로라면, 서로 가면도 쓰지 않고 얼굴을 보려면! 처음부터 그 말해주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셰이."

"거기다 지금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단 말이야! 그걸 해결하면 좀 마음이 편해질 거 같은데! 궁금해하면 쫓아내지를 않나, 물어보면 비밀이라고 하지를 않나, 좀 캐물으려고 하니 기억을 잃었다지 않나.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셰이도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다투기도 하고, 놀림당하고, 같이 협력해서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제법 정도 들었다.

그러나 미래를 보고 온 자에게, 장막 너머를 엿본 자에게…, 현재란 도화선이 사방에 가득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고.

그라는 이름의 그는 군국의 교관이기에, 셰이는 언제나 그를 경계하면서 지내야 했다. 어쩌면 그는 이 모든 종말의 조각들을 타락시킨 장본인일 수도 있었으니까.

"의심받기 싫으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알려주던가! 자기가 온갖 의문스러운 짓은 다 해놓고…! 나도, 믿고 싶다고!"

"믿고 싶다면 이렇게 캐묻기보단, 차근차근 다가가서 신뢰를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

"의미 없어! 어차피…!"

'되돌아갈 테니까.'

셰이는 뒷말을 삼켰다.

티르는 새삼 셰이를 다시 보았다. 비록 겉모습은 티르와 크게 차이는 없으나…. 그 몸은 한참 어린 나이.

어리다는 생각을 몇 번 했지만, 셰이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어렸다.

마음을 가라앉힌 티르는,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셰이를 타일렀다.

"서로 말하기 힘든 것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잖느냐. 쪽지에 적힌 내용을 보건대, 그는 자기 자신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잠시 기다려주지 않겠느냐?"

"…흥. 됐어. 어차피 지금 알아낸 것들, 아무런 신뢰성이 없어. 자기 이름을 티르라 부르지 않나,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콩이라고 하질 않나."

셰이는 몸을 휙 돌렸다.

"나는 이만 갈게. 나머지는 알아서 해."

셰이의 몸이 저 방 안으로 사라지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세게 닫혔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휴'라는 이름 하나뿐. 겸사겸사 콩을 좋아한다는 사실마저도.

티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뇌리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휴. 너는, 어째서 처음부터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것이냐?"

티르는 '휴'를 향해 그리 물었다.

당연히,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EP.84 진짜 교관, 가짜 교관

쪽지에 적힌 마지막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보급품이 도착하면, 자신에게 사용할 것.'

주어진 모든 의문에 대답할 존재는 오직 그뿐이나, 그는 지금 자신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다. 이제 남은 단서라고는 보급품밖에 없었다.

티르는 식당에 묶여있는 골렘에게 향했다.

골렘은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림자로 된 사슬에 발목이 묶여있었다. 티르칸쟈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 사슬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자유를 되찾은 골렘에게 티르가 스피커를 건넸다. 골렘은 하도 잡아 뜯기는 바람에 이제 헐렁해진 스피커를 입 부분에 끼워 넣고는 힘없이 말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물을 것이 있다. 보급품에 대해서다."

골렘의 몸체가 분노로 삐걱거렸다. 천천히 티르를 올려다본 골렘은 주먹을 콱 움켜쥐며 말했다.

『보급품은 곧 도착할 것입니다. 다만.』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통신병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보급품은 본관이 수령하겠으나, 탄탈로스로 보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보급품만 기다리고 있던 티르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어, 어째서? 보급품을 우리에게 건네는 게 너의 의무 아니더냐?"

『탄탈로스 내부의 교육생이 본관에게 비협조적일 경우, 본관의 직권으로 보급을 지연하거나 지급을 정지할 수 있습니다. 본관은 본관에게 주어진 권한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 비협조적이라니. 내가 언제 그러하였다고."

『본 기체를 구속하고 스피커를 떼어낸 것은, 초등시민학교를 나온 아이도 비협조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상황입니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티르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골렘에게 협조할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비겁한 수를."

『그러한 권한도 없다면, 귀하와 같은 강대한 존재를 어떻게 컨트롤하겠습니까?』

티르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무수히 많은 흑기사가 일어나 식당을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무수한 군세를 다루는 시조의 지배력, 그 일부를 세상에 선보이며, 시조 티르칸쟈카는 골렘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다. 그림자의 여왕이며, 모든 흡혈귀의 뿌리. 세계를 삼킬 괴물이라는 칸쟈카의 이름을 받은 존재.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그러나 골렘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본관은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통신병은 지휘부 이외에는 그 어떤 명령도 받지 않습니다.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불굴의 의지를 담은 말. 골렘은 죽음 따위는 겁먹지 않는다는 듯 장렬하게 말했다.

『만일 보급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 본 기체를 파괴하십시오. 본관은 탄탈로스를 지켜볼 눈을 잃겠지만, 귀하는 앞으로 존재하는 모든 보급품을 잃을 것입니다.』

"네까짓 게…! 골렘 주제에…!"

『설사 본관의 본신을 부수더라도, 본관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관은 군국의 통신병이기에!』

다급한 쪽은 티르였다. 보급품이 없다면 그가 당부한 바를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고한 존재이자 모든 흡혈귀의 뿌리인 시조 티르칸쟈카가, 고작 골렘 하나의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티르는 삶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흡혈귀였지만, 그는 그렇지 않으므로.

"하나만 묻겠다. 보급품이 너에게 있는 것은 확실하렷다?"

『긍정. 조금 전, 해당 보급품은 감시관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감시관의 주변 평가가 끝난 이후 본관이 해당 보급품을 수령할 예정입니다. 그 시점부터 보급품을 지급할지 여부는 온전히 본관의 재량! 만일 귀하가 보급품을 받고 싶다면, 본관의 지시에 협조하십시오!』

"…그래. 어떻게 협조하기를 원하느냐?"

『일단! 본 기체에 대한 그 어떤 적대적 행위도 중지할 것. 본관이 질문하는 사안에는 성심성의껏 답변할 것. 주기적으로 탄탈로스의 상황을 관찰할 기회를 마련할 것! 그 이외에도 48가지 세부사항이…!』

그때였다.

팡!

허공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불보처럼 넓고 두꺼운 천을 털 때 들릴 법한 소리였다.

혹은, 낙하산이 펴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골렘도, 티르도 말을 멈추었다. 잠시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둘. 티르는 창문을 열고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 밖으로 보급 상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낙하산 하나에 의지한 채.

『…어?』

골렘의 마이크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상자가 콘크리트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희망을 깨부수는 소리.

『어째서? 멋대로 보급품을?』

우열이 뒤바뀐다. 티르는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낙하산을 눈에 담으며 찬찬히 창문을 닫았다. 철컥, 하고 걸쇠 걸리고, 식당은 다시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완전히 어둠에 잠긴 식당에서, 티르의 음산한 목소리만이 공기를 울렸다.

"보급품이 도착했구나. 이제 어찌할 거냐?"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골렘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뻔뻔해지는 것이었다.

『보, 본관은 귀하의 협조적인 태도를 높이 사, 해당 보급품을 선지급하였습니다. 그러니 귀하도 아까 합의한 내용을 지켜주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합의? 우리가 합의에 비슷한 것이라도 한 적이 있더냐?"

그러나 완전히 뻔뻔해지기엔 목소리에 자신감이 부족했고, 합의했노라 부르짖기엔 보급품이 너무 일찍 내려왔다.

사실, 어떻게 하더라도 통하지 않았겠지만.

"유언은 그게 끝이냐?"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저건 뭔가 착오가.』

"착오는 너에게 생긴 것 같구나. 쓸모없는 입에서 여전히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 안 돼…. 읍!』

그림자로 만들어진 채찍이 골렘의 전신을 휘감았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채찍에 속박당한 골렘은 티르가 식당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셰이는 보급 상자가 투하된 곳으로부터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급품이 왔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탄탈로스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 보급품이 도착하고는 한다.

또 그가 이미 쪽지로 예고한 일이기도 하니, 언젠가 도착하리라는 건 예견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셰이는 지금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보급 상자 안에서는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왜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걸까?

"도착했느냐?"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해."

어둠을 두르고 날아온 티르가 셰이의 옆에 내려앉았다. 마음이 앞선 티르가 곧장 상자를 확인하려고 다가가다 셰이에게 저지당했다.

"잠깐, 티르칸쟈카. 저 안에는 뭔가가 있어."

"…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안에 무언가를 담아두기 위한 상자 아니더냐."

"아니,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말이야."

셰이가 그리 중얼거릴 때였다.

상자의 뚜껑이 들썩이며 그 안에서 딱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탄탈로스에는 관리인력으로 배치된 노역자가 있다고 들었다. 아직 근무시간일 텐데, 어째서 보급품을 수령하러 오지 않는 것이지?"

철컥철컥. 상자의 안쪽에서 잠금쇠가 풀렸다. 보급상자의 뚜껑이 열고 나타난 건 군국의 제복을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빳빳한 제복에는 한 점의 구김도 없었으며, 어깨선은 각이 잡혀있었고, 제복 위로도 확연히 보이는 가슴에는 반짝이는 훈장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자기가 군국의 장교라고 모두에게 주장하는 듯했다.

어딘가의 수상한 교관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야말로 장교의 본보기 같은 차림이었다. 셰이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만한….

정모를 옆구리에 낀 채로 나온 그녀는, 모두를 둘러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쯧, 군국의 기강도 해이해졌군. 자기들을 위한 보급품이 도착해도 수령하러 나서지 않는 꼴이라니."

듣기만 해도 싫증이 차오르는 목소리. 딱딱하고, 권위적이며, 틀에 박힌 듯한 말투가 세이의 귓가를 때린다.

'자를까….'

셰이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장교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정모를 썼다. 그러자 칼처럼 잘라낸 단발이 선을 만들어낸다. 장교는 각을 맞춘 다음, 턱을 한껏 든 채로 말했다.

"반갑다. 본관은 오늘부로 이 탄탈로스의 교관으로 부임한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다. 금일부로 이곳의 총책임을 맡게 되어, 이에 신고한다."

"교관이라고?"

"그렇다, 교육생."

의문이 들었다.

탄탈로스 정도 되는 규모에 교관이 두 명이라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 이 안에 있는 교육생은 기껏해야 넷이며, 그마저도 판단에 따라 줄어들 수 있다. 조각 난 불사자나 개의 왕은 사람으로 취급하기 모호한 탓이다.

그런데 교관이 둘이나 파견된다니?

"안심하라. 본관은 교육생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여기 남아있는 '모범적인' 교육생들은 장차 군국의 협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들. 제군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끌기 위해 본관이 이곳에 임한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 있던 교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새로 부임했다면, 지위와는 관계없이 먼저 존재하는 책임자에게 신고하는 게 정상일 텐데.

솟아오르는 의구심이 막연한 적의를 억눌렀다. 셰이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는 무렵.

티르는 사람에겐 관심도 두지 않고, 그림자를 부려서 보급 상자를 뒤지고 있었다.

"그보다, 보급품은 어디 있느냐?"

티르는 보급품을 찾았다. 그림자로 된 거대한 손이 아예 보급상자를 뒤집고 탈탈 털었지만, 보급품은커녕 먼지 한 톨도 떨어지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티르는 이내 묘한 시선을 칼리스에게 보냈다.

"혹시 네가 보급품이냐…? 흐음. 사람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기계처럼 딱딱한 군국의 장교라도 생명의 위협 정도는 느낀 탓일까. 칼리스는 장교답지 않게 서둘러 품 안을 뒤졌다.

"보급품이라면, 아마 이것을 말하는 것일 터."

칼리스가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종이 갑을 꺼냈다. 엄지로 툭하고 위쪽을 밀자, 뚜껑이 벌어지며 종이로 동그랗게 말린 두꺼운 엽궐련이 나타났다.

"마력초. 3레벨 사치 물품. 쯧, 장교조차도 상부의 허가 없이는 피우기 힘든 기호품이거늘, 일개 노역자를 위해 배급하다니…. 군부도 이곳이 탄탈로스라고 특별취급하고 있군. 그래봤자 사람 사는 곳이거늘."

불만스러운 듯이 중얼거리던 그녀는 마침 근처로 다가온 그림자의 손에 마력초 갑을 건넸다. 그림자의 손은 마력초를 낚아채고는 곧장 티르에게로 날아갔다.

마력초는 몸을 이완시키며 신경을 안정시키는 향정신성 약초. 미약한 마력 회복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보통 종이에 말아 궐련의 형태로 사용한다.

아마 저게 '그'가 요구한 보급품일 것이다…. 셰이는 그렇게 판단했다.

과연 저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또 모른다. 무언가를 숨겨두었을 수도.

"잠깐. 그보다. 노역자라고?"

그제야 셰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노역자라니? 무슨 말인가. 이곳에서 마력초가 필요한 사람은 영 믿지 못할 교관이 하나….

영 믿지 못할….

설마.

"그래. 노역자. 아무도 모르고 있었나?"

칼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셰이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그에 대한 진실을.

"휴즈. 그 남자는 탄탈로스에 배치된 노역자다. 아미텐그라드 13-3구역에서 내기 도박을 하다가 긴급체포된 이후 탄탈로스 노역형을 선고받았지."

EP.85 진짜 노역자, 가짜 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