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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차가운 눈으로 나와 아지를 번갈아보던 회귀자. 나는 온갖 말솜씨를 발휘한 끝에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나에게서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회귀자는 일단 지켜보기로 결정했는지 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내심 한숨을 쉰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셰이 교육생."

"왜."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설마 저희를 미행한 겁니까?"

"미행이라니! 너를 찾다가 뒤따라왔을 뿐이야!"

천앵을 다시 머리 위에 띄워둔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티르칸쟈카가 궁금해하더라. 네가 말했던 수업. 몇 시에 어디서 하는지를."

"네? 그거 진짜로 하는 거였어요?"

'네가 한다고 말했잖아!'

회귀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찔끔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 알았어요. 준비하면 되잖아요."

"열심히 준비해 봐. 기대하고 있을게."

나에게서 등을 돌리며, 회귀자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나도 들을 테니 말이야."

뒷골목을 전전하며 벌어먹던 내가 수업이라니? 나에게는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지식이 없는데.

내가 이곳에서 고학력자인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초등 시민학교 졸업과 중등 군사학교 중퇴가 끝이다.

중등 군사학교까지 진학한 시점에서 평범한 1레벨 시민보다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건 독심술로 전교 2등의 생각을 읽은 덕분이다. 만일 합법적인 독심술 컨닝이 아니었다면 내 학력도 시민학교 졸업에서 끝났겠지.

왜 전교 2등의 생각을 읽었냐면, 전교 1등이 나였거든.

순수 실력으로 1등을 차지한 건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나에게 생각을 보여주었던 전교생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모든 수험생들아, 나에게 지식을 빌려줘!

나 때문에 등수가 하나씩 밀리게 된 학생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회상을 계속 하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과하게 높은 성적 덕분에 교관들이 군국을 빛낼 천재가 탄생했다 뭐다 떠받들었지만 실기에서 처참하게 조지는 바람에 고등 사관학교는 물 건너가 버렸지. 그래서 도망치듯 중퇴해버렸고. 결국 이 꼬라지.

잘못 나이 먹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학생 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읽는 능력만으로 날로 먹던 시절. 그립구나.

나이 먹으며 단물이 다 빠졌다고 생각한 옛 추억도 되새김질하니 씹는 맛이 난다. 정작 가르칠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뼉을 쳤다.

"아! 그게 있었지!"

이거면 되겠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탄탈로스의 1층부터 3층까지는 죄수를 가두는 수감실이다. 보통의 감옥이라면 억압된 질서가 불러일으키는 답답한 분위기가 떠오르나, 감독관 없이 죄수만 있는 감옥이었던 탄탈로스는 일반적인 감옥의 아키타입에서 미묘하게 비켜나가 있었다.

돌벽이 무너지고 철창들이 제멋대로 휘어져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 갇힌 죄수들에게 철창과 돌벽은 방해물도 안 되었던 모양이다. 돌벽은 부수어져 있고 강철 문은 얇게 편 수제비 같은 모양이 되어 있었으며, 죄수를 가두어야 할 철창살은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휘어져있었다. 어떤 벽에는 철창살 세 가닥을 꼬아 만든 창이 박혀 있었고, 어떤 수감실은 네모 반듯하게 잘려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철창살이 꼬이기도 하고 방 하나가 도려내지기도 하는구나.

미친.

아무래도 이곳의 죄수들에게 감옥이란 장난감과 다를 바 없었나 보다.

섬뜩하네. 이딴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평범한 노역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담.

아! 못 살아서 다 죽었구나!

비밀을 풀어낸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4층부터는 노역자들의 공간이었다. 현재 마땅히 머물 곳 없는 내가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잠글 수는 없지만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고, 식당이나 세탁실 같은 편의시설도 구색이나마 갖춰놓은 곳.

나는 4층 복도 끝에 있는 노역자 교육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곳에는 '교육생' 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관이 책걸상을 밀어낸 채 둥둥 떠 있다.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불량스럽게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지는 교육실 한구석에서 배를 깔고 누워있다. 쟤는 그냥 놀러 온 눈치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교단에 섰다. 비록 사람 한 명 시체 한 구, 개 한 마리밖에 없는 조촐한 교실이지만 앞에 서니 묘하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말을 시작하기 전, 숨을 깊이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괜찮아. 이런 경험 많잖아. 호구한테 약을 판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하자.

실제로 별반 다를 것도 없고.

"자. 일단 교육 목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틀 동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비인간적인 힘을 지닌 여러분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합니다. 이대로 사회에 내보내봤자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만, 그랬다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죠? 그러니까."

[잠깐.]

관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혈귀는 언짢은 투로 말을 걸었다.

[…가르치러 왔다는 놈이, 복장이 그게 무어냐?]

"네? 제 옷이 어때서요?"

군국 보급형 셔츠에 속옷 일체형 반바지. 가벼운 차림이지만 이 정도는 흔한데.

허나 천 년 묵은 꼰대 흡혈귀에게는 이런 가벼움조차 불만인 듯했다.

[가르침은 물과 같다. 높은 위치에서 흘러내려야 아래쪽에서 받아들이는 것. 따라서 교육자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럴 권위를 갖추어야 하거늘. 그런 품위 없는 차림이어서야 들을 마음이 생기겠느냐?]

"어이가 없네. 내가 살다 살다 관에 들어간 사람한테 복장 지적을 받을 줄이야."

[…이건.]

"아, 알아요, 알아. 휠체어 비슷한 거잖아요. 저도 그것 가지고 너무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콜록! 콜록!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회귀자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격하게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훨체어 이야기를 듣고는 터져버린 모양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불량한 자세가 고쳐졌으니 만족하도록 하자.

'…휠체어?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데 그게 무엇이지? 왠지 기분이 나쁜데.'

좋아. 앞으로는 절대 휠체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아야지.

나는 교탁을 세게 집고는 둥둥 떠 있는 관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티르칸쟈카 교육생, 제가 이 복장을 하고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거든요?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교관을 의심하지 마세요."

[옳아. 보여보아라. 그 말이 단순히 면피를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놀라 까무러치지만 마세요."

이 구시대 흡혈귀에게 최신 기술의 대단함을 보여주지. 나는 왼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군국의 시민은 만 18세, 성장이 끝날 무렵 일괄적으로 생체등록을 실시합니다. 키, 체중, 체형, 골격, 팔다리의 두께와 길이까지. 전부 기록하여 몸에 새겨넣죠."

휙, 하고 손목을 돌렸다. 내 왼쪽 손목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나 있었다. 피부를 파내 만든 홈에는 꼭 무언가를 끼워넣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군국은 가장 선진적인 개인식별 시스템을 지니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몇 가지 효용성을 가진 발명품을 만들어냈죠."

관리실에서 아지와 찾은 물건을 꺼냈다. 검푸른 빛으로 빛나는 작은 구슬은 내 손목에 난 홈에 딱 들어맞을 크기였다.

이제 슬슬 대부분 눈치를 챘다. 이미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던 회귀자도, 내 몸에 난 구멍이 이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흡혈귀도.

이 구슬을 어떻게 쓰는 건지 대강 유추했다.

"군국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 이게 연금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군국의 연금의복기술."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손목에 난 구멍에 검푸른 구슬을 끼웠다. 찰칵, 하고 딱 들어맞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청색 실이 내 전신을 뒤덮었다.

피부를 따라 두껍고 단단한 섬유가 골격을 잡고 지시선을 그린다. 그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청색 실이 겹겹이 오간다. 연금 패턴에 따라 즉각적으로 옷이 지어진다. 실은 천이 되고, 천은 원단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제자리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한 세 바퀴 쯤 돌았을 때, 내 몸에 딱 맞는 교관복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순식간에 숙련된 교관의 모습이 된 나는, 제식에 맞춰 경례하며 말했다.

"의복 패킷입니다."

빳빳한 교관복이 내 몸을 둘러싸기까지 걸린 시간, 단 10초. 생체 단말에 기록된 정보를 토대로 내 몸에 딱 맞는 옷으로 바뀌는 세기의 발명품.

찢어져도, 더려워져도. 패킷으로 바꾸어 닦아내면 그만.

군국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7가지 발명품 중 수위를 다투는 물건, 의복 패킷.

나는 어깨선을 내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며 한껏 으스대었다.

"의복 패킷의 발명으로 군국민들은 빨래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죠. 또한 피복 구입비도 극적으로 줄어들었고요. 일인당 의복 패킷 두세 개만 있으면 계속 번갈아가면서 쓸 수 있으니까."

[호오.]

"이제 아셨죠, 티르칸쟈카 교육생? 제가 왜 가벼운 차림으로 왔는지. 의복 패킷을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보급형 속옷만 입어두는 게 좋기 때문이죠."

관에서는 흐음, 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흡혈귀의 생각이 똑똑히 들렸다.

'신기하다…! 내가 잠든 사이 정말 많은 게 바뀌었구나!'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최신 문물을 어려워한다는 건 착각이다. 오히려 더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며 깊은 관심을 쏟는다. 원래 호기심이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더욱 탐구하는 법이니까.

다만 향수인지 익숙함인지 때문에 '그래도 예전의 그 맛이 있지.' 이러면서 원점회귀를 하는 게 문제일뿐.

흡혈귀의 관심은 지금 생체 단말과 의복 패킷에 향해 있었다.

"교관복…. 흥."

회귀자는 내 옷차림을 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흡혈귀가 회귀자에게 물었다.

[아이야. 너의 손목에는 저런 것이 없지 않았느냐?]

"나는 저딴 것 안 만들어."

회귀자가 삐딱하게 대답했다.

"저건 감시용이야. 군국민 전부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통제주의의 산물이라고."

[통제주의?]

"전국민을 지켜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뜻이야. 주요 도로나 기관에 출입하려면 생체 단말이 필요하니까. 혹 누군가 가서는 안 될 도로로 간다면 즉각 체포하기 위함이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미래를 보고 온 회귀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 흡혈귀 진짜 옛날 사람이다. 왕정도 제대로 안 돌아갈 무렵부터 살아왔다고. 그때 인권이란 게 있었겠니? 있었다면 그 나이에 죽어 흡혈귀가 되지는 않았겠지.

그 사실을 알아차린 회귀자는 작게 혀를 차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생체 단말에는 이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어."

EP.15 필요하기에, 어머니는 발명하였다.

회귀자는 삐딱하게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생체 단말을 새겨넣으면 좋으나 싫으나 군국에 매인 몸이 되어버려. 이 정보를 토대로 군국에서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 군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볼 거야. 제국이나 연방처럼 군국과 적대적인 국가에서는 감시가 붙을 수도 있어."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나 역시 삐딱한 자세로 지나가듯 말했다.

"타국으로 망명할 사람이 아니라면 별로 상관없는 문제죠."

회귀자가 나를 노려본다. 마주 노려봐주었다.

군국을 욕하는 건 괜찮아. 그 나라는 애꿎은 죄인도 무저갱에 떨어뜨리는 유사 국가니까.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생체 단말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나는 군국에 충성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편리해서 생체 단말이랑 의복 패킷을 사용하는 거라고!

"…거기다 생체 단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약점이야. 내 몸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법적인 장치. 그건 모양만 다르지 과거에 있었던 노예각인과 다를 게 없어."

뭐? 그러면 내가 노예라는 거야?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네.

나도 군국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 바랐던 사람이고, 탄탈로스에 갇히고 나서는 군국 욕이 입에 붙었다. 뒷골목에서 내로라 하는 잡범으로 어긴 죄의 가짓수만 따지면 너의 몇 배는 될 거다. 사기, 도박, 횡령, 협박, 뇌물수수 등등으로!

그런 나를 군국의 노예 취급해? 아니, 나는 군국 최악의 경범죄자! 너와는 죄질이 다르지만, 가짓수는 훨씬 많다고!

나는 한껏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그건 너무 나갔죠.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뭐가 안전하죠? 꽉 끼는 정장을 보고 나를 옥죄는 감옥이고, 넥타이를 보고 내 목에 차는 목줄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만년필도 회수해가야 하겠네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니까요."

회귀자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눌어붙은 적의가 나를 콕콕 찌르고 있다. 만성적인 증오다. 지긋지긋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열세 번의 죽음을 거치는 동안 늘 따라붙었던 어두운 그림자. 군국의 그늘에서 찌든 때는 아직도 그녀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너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회귀자는 몇 회차의 감정을 담은 싸늘한 시선을 건넸다. 그녀의 마음은 너무 차가워서 다시는 불타오를 일 없어 보였다.

그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군국. 너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회귀자에게 미운털이 박혔니? 조심해야지. 세상은 넓고, 어딘가에 나라와 맞설 수 있는 개인도 있는 법이야. 예를 들면 무한히 회귀하는 회귀자 같은.

앞으로는 사람들 좀 작작 고문하고, 좀 잘 좀 대해….

"군국에서 생체 단말을 가지고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이… 고문이라는 사실을."

희미한 흔적, 짧고 굵은 회상. 나는 독심술로 회귀자가 떠올린 과거를 읽었다. 꽤 오래 전, 초회차. 그때의 해묵은 기억이 떠오른다.

거기서 느껴지는 건 오직 단편적인 고통뿐이었다.

뇌리에 담긴 생각이라고는 '아파.' 두 글자가 끝. 그것은 질 나쁜 행위예술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새카맣게 채우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상흔과 함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군국, 너희는 이미 늦은 것 같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야겠다. 아디오스.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생체 단말은 연금술과 마법을 통해 외부에서 강제로 연 아키 아바타. 내 몸의 분신이야. 생체 단말을 강제로 열어젖혀서, 특별히 제작한 독성물질을 집어넣으면…. 훗, 감각은 살리면서 고통만 줄 수 있지. 전기를 흘리면 한순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가. 분명 철침은 내 손목에 닿는데, 발끝이 제멋대로 오그라들지. 큭. 군국은 평범한 기술만 발달시킨 게 아니야. 가장 빠르고 급격하게 발달한 건 무기를 만드는 기술과… 고통을 주는 기술이었지."

어두컴컴한 감정이 밀려온다. 흡혈귀가 할 말을 잊고, 둔한 아지마저 꼬리를 쫑긋 세우고 눈치를 볼 정도로.

흡혈귀는 침묵하고 있다.

다만, 그 마음이 어디로 기우는지는 명백했다. 마음이 나침반으로 표현된다면, 흡혈귀의 자침은 회귀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회귀자는 고통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생각을 되뇌었다.

'그 고문에 당한 사람은 다 죽었어. 나도 버티지 못하고 자살했지. 그날 이후, 나는 언제든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독을 가지고 다녔고.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 군국….'

조졌다.

나도 알았으면 교관을 사칭하지는 않았지. 이런 아픈 기억은 못 읽었다고!

왠지 칼부터 날리더라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회귀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 떨림을 멈추기 위해,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이래도, 생체 단말이 필요할까?"

'이 남자가 군국의 어둠을 알고도 그들을 편든다면. 이르든 늦든 부딪히게 되겠지.'

회귀자는 지금 나를 가늠하고 있다. 여기서 섣불리 행동했다간, '적'으로 낙인이 찍혀 영겁토록 고통받을 것이다. 회귀자에게는 이번 회차가 끝이 아니니까.

지금 와서 교관이 아니라고 해봤자 안 믿어주겠지?

그렇다면.

목소리를 깐다. 반 톤 정도 높았던 유쾌한 목소리를, 변검이라도 하듯 한순간에 갈아 끼운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의식을 초기화시켰다. 뚝, 하고 대화의 맥을 억지로 끊는다. 만일 대화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그 죽음은 이것일 터. 이전까지와는 상관이 없다 주장하듯 침묵의 벽을 두어 간격을 벌렸다.

한 대화의 끝, 다음의 시작.

채비를 마친 뒤, 새로이 대화를 펼쳤다.

"처음에 생체 단말과 의복 패킷이 만들어졌을 때. 그런 용도는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한참 먼곳에서 바라보듯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온정을 담은 목소리로.

가능한 깊은 울림을 담아 옛이야기를 읊었다.

"의복 패킷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은 며느리를 둔 한 노파입니다. 작은 포목점을 꾸려나가던 한 노파는, 손재주 없는 며느리가 손이 부르트도록 바느질과 빨래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았습니다. 활달하고 밝았던 며느리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깃들었죠. 하지만 아들을 도와 가업을 이어나가야 할 며느리에게는 재봉과 세탁은 반드시 짊어져야 할 업이었습니다. 노파는 며느리가 집안일에 익숙해질 방법을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죠. 그러는 와중, 노파는 한 귀족에게서 옷을 의뢰받습니다."

가파른 비탈도 날카로운 바윗조각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운 풍광을 꾸미는 하나의 섬세한 묘사일 뿐이다. 이야기만으로는 그동안에 흘렸던 눈물과 고통을 다 담을 수 없겠지.

하지만 감정 중 일부만 담더라도, 하나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감정을 움직일 수 없다.

"그 귀족은 노파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주문했습니다. 주문을 들은 노파는 대경실색했죠. 온갖 장식을 이어붙인 그것은 어찌 보아도 의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노파는 귀족 앞에 부복하여 대답했습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이 옷을 지을 수 없나이다.

지어라.

천과 실이 뒤엉켜 싸우는 개새끼처럼 이리저리 꼬여있으니, 이대로 지었다간 입고 벗을 수가 없나이다.

문제없다. 지어라.

천자락이 너무 많아 바늘을 잡을 줄 아는 아이 중 가장 작은 아이도 그 틈을 비집을 수 없으니, 옷이 해지고 찢어져도 고칠 수가 없나이다.

문제없다. 지어라.

무릇 태생이 다른 비단과 천이 한몸처럼 얼기설기 얽혀있으니, 더러워져도 물에 닿아서는 안 되며 붓에 묻힌 안수로도 닦아낼 수 없나이다.

문제없다. 지어라.

귀인께서는 어이하여 다시 입을 수 없고, 고칠 수 없고, 닦을 수 없는 옷을 바라시나이까?

하루, 단 하루만 쓰기 위함이다. 그날이 지나면 벗을 것이고, 찢을 것이고, 땅에 묻을 것이니. 네 걱정은 불필요하다.

그것은 옷이라 부를 수 없는 흉물입니다.

문제없다. 지어라.

소리꾼이라도 된 것처럼 문답을 홀로 이어간다. 타는 목을 침으로 축이고 말을 이어갔다.

"변덕스러운 귀족의 별난 주문이었죠. 세상 그 누구도 쉬이 수락하기 힘든 주문이었습니다. 기벽이라며 무시할 수도, 무리라며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느리를 위해 한참 궁리해왔던 노파에게는 기적과 같이 찾아온 영감이었죠."

손재주가 없어 빨래와 바느질이 영 신통치 않은 며느리. 겉으로는 타박했지만, 소맷자락에 찍힌 피와 물방울을 보고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던 노파는.

"옷을 하루만 쓰고 버리면, 빨래도 바느질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천의무봉에 이른다.

"불가능했죠. 불가능할 터였습니다. 입을 때마다 옷을 새로 짓고, 벗는 대신 연금술로 해체한다니요. 말이나 됩니까? 그렇게 쉬웠을 리 없습니다. 매우 힘들었겠죠. 노파는 남은 수명을 전부 불태웠어야 했을 겁니다. 눈이 침침해져 은퇴를 고려할 나이에 다시 바늘을 잡았을 겁니다. 기예에 가까운 솜씨를 가지고 있으나 그 나이가 애석합니다. 힘이 없어 떨리는 손에 수십 개의 바늘 구멍이 났고, 젊었을 때와는 달리 쉬이 아물지 않았죠. 피가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의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 몸에 난 구멍을 들어 보였다.

이 자그마한 구멍에 담긴 것을 알려주기 위해.

"생체 단말의 본질, 그것은 바늘에 찔려 난 상처입니다. 의복 패킷의 정체는 며느리를 위해 지어준 옷입니다. 단지, 군국은 이것을 조금 더… 마도공학적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을 만들어낸 건 군국이다.

그러나 나쁜 것이 나쁘게 되기 전까지는.

훨씬 더 사소하고, 더욱 소중했던 마음이었다.

나는 회귀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면서 의복 패킷을 역소환했다. 누군가 전신에 난 실밥을 한꺼번에 잡아당기는 것처럼 섬유가 올올히 풀려나가 내 왼손으로 몰려들었다.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거미가 먹잇감을 감싸듯. 가느다란 실은 반투명에서 불투명을 거쳐 자그마한 구슬로 돌아왔다.

몇 걸음 걸었을 때, 나는 다시 보급형 셔츠와 반바지의 차림으로 돌아와 있었다.

톡, 하고 생체 단말에서 교관복 패킷이 빠져나왔다. 나는 그것을 낚아채고는 회귀자의 책상 앞에 섰다.

"저는 군국을 대신할 수도 없고, 셰이 교육생도 모든 고통 받은 이들을 대변하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다만, 나 역시 거기 속해있기에, 나의 몫만큼 용서를 구하겠다.

그런 뜻을 가지고 회귀자의 손을 잡았다. 생체 단말을 찾기 위해.

회귀자는 말없이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업적을, 지옥불로 달구어 끌어올린 이들의 죄를."

그렇게, 생체 단말이 있어야 할 곳에, 손가락을-.

어라, 매끈한데. 구멍은커녕 폴짝폴짝 뛰는 맥박만 느껴진다.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뭐야. 생체 단말이 없잖아요?"

왜 없지? 이상하다. 분명 고문 당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려는 때, 회귀자가 당황해서는 손을 휙 잡아뺐다.

"아, 아니. 잠깐."

'내가 고문을 당했던 건 2회차, 뭣도 모르고 날뛸 때…. 지금은 애초에 시술을 받지 않았어.'

아, 맞다.

고문을 받은 건 이전 회차였지? 들리는 생각과 기억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워낙 강렬한 기억이었어야 말이지.

상황을 파악한 나는, 말을 멈추고 떨떠름하게 회귀자를 보았다. 회귀자 역시도 이 분위기가 대단히 어색한지 어렵사리 나를 보고 있었다.

어라. 그러면 내 꼴이 우스워지는데.

멋대로 생각을 읽고 과하게 공감해서 분위기 잡은 거잖아. 나는 회귀자가 고문당했는지 알았다고. 아니, 고문당한 건 맞지. 저번 회차 때.

이번 회차는 오히려 깽판을 쳐대고 왔지만.

이야기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회귀자는 회귀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거짓말을 했고, 나는 독심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알아버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지? 만일 내가 독심술사라는 것을 들키면?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양팔을 휘저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거짓말쟁이! 고문당한 것처럼 말해놓고는! 나는 고문 당한 사람이 당신인 줄 알았잖아!"

도리어 화 내기!

회귀자에게 속았다는 티를 팍팍 내기 위해 나는 발을 크게 구르며 외쳤다.

"고문은 무슨! 생체 단말도 없구만! 엉? 여기에, 이 매끈한 손목에 어떻게 뭘 집어넣겠다는 거야!"

"이, 이건."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싶었어? 아니면 고문당했다는 아픈 상처마저 빼앗아가려는 거야? 그걸 당신의 삶을 장식할 표창장으로 삼아서? 이 얼마나 파렴치한! 가난에 이어 고문과 고난까지 도둑맞다니!"

"기, 기다려! 나는 분명!"

"분명?"

내가 고개를 쳐들고 추궁하자, 회귀자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채 언어로 빚어내지 못했다.

'아직… 내가 회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말 못 해!'

당연하겠지. 회귀자의 회귀란 가장 나중에까지 숨겨야 할 비밀일 테니.

그러면 어떻게 설명하려고? 내가 몰아넣은 지금 이 곤경을 어떻게 탈출할 생각이지?

해답은 은근히 간단했다.

쾅!

회귀자는 몸을 날려 도망쳤다. 탈출(물리)를 해버린 셈이다.

후. 내가 대항할 수 없는 수단으로 튈 줄이야. 한 방 먹었군.

[참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흡혈귀는 내 오늘 수업이 참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하게 다가왔다.

[칩거를 깨고 나들이 나온 보람이 있구나. 하나, 아직 이야기의 결말을 듣지 못했구나. 그리하여 그 노파는 어떻게 되었지?]

"아하하."

[…왜 웃느냐?]

"아니요. 왜 노파라고 부르시는지 의아해서. 그분은 그래도 근대에 계셨던 분이에요. 지금까지 살아계셨어도 200살이 채 안 될 거예요. 티르칸쟈카 교육생보다 훨씬 어리죠. 그러니 노파라 부르지 말고 꼬마라고 불러주세요. 이야, 세상에. 그런 분을 꼬마 취급할 수 있다니…."

쾅!

흡혈귀는 건물 외벽을 부수고 나가버렸다. 도망친 거다.

후. 입만 털어서 여자 한 명과 시체 한 구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누군가 나를 보면 자랑스러워하겠구나.

그나저나 저 관은 재질이 나무인데 어떻게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멀쩡하담. 상식이 어긋나는 기분이다.

"이거 기물파손인데…. 에이,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내가 군국 예산부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적당히 잘 곳만 있으면 된다.

"자, 이제…."

교실 뒤쪽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지를 향해 다가갔다.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아지의 꼬리가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 귀가 쫑긋 서고, 아지가 고개를 들더니, 내 접근을 알아차리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입가에 침이 흐른 걸 보니 오늘도 개팔자 상팔자를 실현한 모양이다. 내 손에 침을 비벼 닦으려는 아지를 피하며 말했다.

"아지야. 수업은 잘 들었니?"

"멍!"

"오늘은 내가 무슨 수업을 했는지 말할 수 있니?"

"멍!"

"아예 기대도 하지 말라는 거구나?"

"응!"

"…이럴 때만 사람 말하는 거 좀 화나네."

"화나?"

"그래! 화난다, 이 똥개야! 들을 생각은 좀 해!"

"똥개?! 왈! 왈!"

에휴. 이 똥개를 진짜 어쩌지.

엄청 온순하고 인간을 잘 따르지만, 회귀자의 미래에서 본 바에 따르면 이 녀석도 인간을 잡아 찢는 흉수로 변해버린다.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건 막아야 하는 미래. 아지에게도 상식을 좀 넣어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내가 미쳤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격언을 만든 사람도, 진짜 개를 데려다 놓으면 비유도 모르냐며 타박할 텐데."

내가 머리를 긁적이는 때, 아지가 상체를 쭉 뻗고는 맹렬하게 짖었다.

"멍! 멍멍! 멍!"

아지의 시선은 내 왼쪽 손목을 향해 있었다.

혹시? 수업을 듣고 이것이 뭔지 알아차렸단 말인가?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왼쪽 손목을 아지에게 보였다.

"왜. 혹시 기억이라도 나니? 그래. 봐봐. 이게 바로 생체 단말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여기에 의복 패킷을 꽂으면."

"앙!"

"끄아아아아아아악!!"

날카롭고 딱딱한 송곳니가 내 몸에 난 구멍을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P.16 인간의 적은 자명종이 아니라 아침

군국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상 모든 분야를 연구하는 군국 연구소.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인체공학자들과 재료의 특성을 탐구하는 재료공학자들이 같은 건물을 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실수로 서로의 방에 잘못 들어가고는 하는데, 퇴근할 때까지 자기가 잘못된 방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정말, 별로 재미도 없는 우스갯소리이다.

찌르르르르르-.

고통스러울 정도의 소음이 내 고막을 때렸다. 매일 아침 이렇게 혹사당하는 데도 멀쩡한 걸 보면 내 고막이 생각보다 일을 잘해주고 있거나, 아니면 군국 과학자들이 제대로 만들었다는 뜻이겠지.

휘어지되 부러지지는 않도록. 군국 재료공학자들의 모토. 저 소리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이 들었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으으, 진짜 싫어…."

왜? 왜 나는 매일 아침을 저 자명종이 맞이해줘야 해? 어째서 나는 괴로움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나는 딱딱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외쳤다.

"제발 누가 저 빌어먹을 자명종 좀 꺼줘!"

"멍!"

"어?"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누가?

멍청하게 한 마디를 흘리고 고개를 들자, 내 눈에 보인 건 하늘을 나는 아지의 모습이었다. 아지는 단숨에 뛰어올라, 벽을 한 번 박차고 솟구친 뒤. 앞발을 들어 시끄럽게 우는 자명종을 후려쳤다.

와장창!

내가 언제 자명종을 강철로 된 매미에 비유한 적이 있던가.

매일 아침 시끄러운 울음소리로 나를 괴롭히던 강철 매미는, 네발 달린 짐승의 발 아래 짓이겨졌다. 내장과 닮은 톱니바퀴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얇고 넓적한 철판이 최후의 단말마를 내지르며 찌그러졌다.

자명종이 납작해지다 못해 벽에 반쯤 틀어박혔다. 저걸 해체하려면 돌벽을 파내야 할 것이다.

허공으로 톱니바퀴와 철판 잔해들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에게 아지가 다가왔다. 칭찬을 받고 싶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뭐, 칭찬이라도 해 줘?"

"멍! 멍멍!"

"그래, 잘했다. 잘하기는 했어. 매일 아침마다 나를 괴롭히는 사악한 자명종을 끝장내줬구나…. 아예 고칠 수도 없게…."

주요 부품이 아예 박살 나버렸다. 탄탈로스 안에 대장간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살리기는 불가능할 터.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아지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그거 아니, 아지야? 사실 나를 괴롭히는 건 아침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명종이 아니야. 자명종은 첨병일 뿐, 진정한 흑막은 그 자명종을 울게 만드는 아침 그 자체란다."

"멍?"

"그래. 모든 흑막은 바로 아침이야. 간신히 끝낸 하루를 다시 반복하게 만드는 빌어먹을 아침. 너의 고결한 행동은 고맙지만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나를 보고, 아지가 처음으로 한 말은.

"바보?"

"…?"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입을 떡 벌리고 가만히 있는데 아지가 천장을 보고는 말했다.

"해, 안 보여. 여기 어두워. 아침, 안 와!"

"아니. 해가 안 떠도 아침은 아침이지."

"멍! 안 보여, 아침 아니야!"

해가 안 보이니 아침이 없다니. 이걸 실증주의적인 표현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개소리라고 해야 할지.

"졸려우면, 자! 나, 자는 거 좋아!"

"그래. 나도 한없이 자고만 싶다. 그런데 일이 쌓여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멍? 일?"

"요리나 청소 같은 거 말이야. 내가 아침에 안 일어나면 네 아침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는데?"

그러자 아지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침대 위로 뛰어올라서는 내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몸이 침대 밖으로 속절없이 끌려나온다.

"안 돼! 일어나! 밥! 바-압!"

"알았어! 챙겨줄 테니까 놔! 기다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아지를 뒤로 하고 채비를 갖추었다. 부서진 자명종을 발로 한구석에 대강 쓸어버리고는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하아. 자명종이 부서졌으니 내일부터는 어떻게 일어나지."

내가 그토록 고통받는 동안에도 자명종을 깨부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그게 없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햇빛도 수탉도 없는 무저갱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시간이 의미가 없는 곳. 아침이 마중을 나오지 않으니 이쪽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챌 도리가 없다. 그나마 신세 지고 있던 자명종은 웬 개가 박살을 냈고.

"알람 비슷한 거 없나…."

아지의 이마를 한 대 툭 치려다, 단념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래도 나를 생각해줘서 한 일인데 뭐. 솔직히 자명종 깨부술 때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한 대 툭 치려던 손을, 방향을 바꿔 턱을 간질였다. 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 위에 무게를 얹었다.

천진난만하기는…. 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니까 가능한 거겠지.

이게 애완동물의 장점이겠지만.

입고 있던 의복 패킷을 역소환하고 새로운 패킷을 꺼냈다. 역소환한 패킷은 세탁실에서 빨거나, 아니면 물에 담근 뒤 닦아내면 깨끗하게 다시 쓸 수 있다. 전자는 새 옷처럼 깨끗하지지만 특수한 장비가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고, 후자의 경우 말리는 데 시간이 좀 들지만 어디서든 가능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지의 턱에서 손을 뗐다. 마치 끈끈이라도 붙은 듯, 아지의 얼굴이 잠깐 내 손을 따라오다가 멈췄다.

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그만하냐는 듯 눈으로 묻는다. 더 하라는 투로 내 손을 향해 턱을 쳐들고 있다. 나를 쓰다듬는 기계 공 던지는 기계 아니면 밥하는 기계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에고. 내 팔자야. 내가 왜 개 식모 역할이나 하고 있담.

그래도 어쩌겠어. 키우는 개인데. 밥은 줘야지.

"멍?"

"가자. 밥 먹으러."

"멍!"

세상에서 가장 착한 개가 있다면, 그건 밥 먹으러 가는 아지일 것이다. 하루에 세 번만 착해지는 개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 해놓은 콩스튜를 데워서 아침으로 먹고, 오후에는 다른 음식을 해줘야지. 오랜만에 고기나 요리해볼까. 저번에는 환심을 얻기 위해 고기를 구웠지만, 사실 고기라는 게 구이보다는 다르게 먹었을 때 더 만족감이 큰 재료….

어라.

왜 냄비가 비어있지? 분명 어제 남은 음식이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증스럽게도, 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정한다. 아지는 단 한 순간도 가장 착한 개인 적이 없다. 힘만 무식하게 센 똥개는 세상에 풀어놔서는 안 될 재앙이다.

"야! 너 어제 해놓은 스튜 몰래 먹었지!"

"멍멍?! 멍!"

"시치미 떼지 마! 너 아니면 먹을 사람도 없어!"

"멍!"

"오늘 아침은 압수다아앗!"

"아우우우우우!"

굶주린 개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오늘 수업은 은혜도 모르는 짐승 다루는 법에 대해서입니다!"

"멍!"

교육실 뒤쪽에 엎드려있던 아지는 내 말에 반항하듯이 크게 짖었다. 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자 콧방귀를 뀌더니 픽 하고 고개를 돌렸다.

흥.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빡할 줄 알고.

"본디 짐승은 은혜도 모르고 지성도 없기 때문에 뭘 해줄 필요 없습니다. 손해에요! 알아서 살라고 하세요!"

"멍! 멍! 으르르!"

나와 아지의 신경전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회귀자가 의무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또 별 시답잖은 일이겠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물어보는 척이라도 할까.'

들리는 생각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나의 이 애통함을 터놓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가슴을 쾅쾅 두들기며 말했다.

"저 똥개가 전날 남겨놓은 음식을 다 먹었다고요!"

"왈! 으르, 멍!"

아지가 반항하듯 짖었다.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 썼지만 밖으로 나오는 건 짐승의 울부짖음이니, 이게 정녕 개소리이리라.

으으, 정말. 사고방식이 개만 아니었어도 생각을 낱낱이 읽어서 피할 수 없는 물증을 들이대는 건데. 이럴 때는 저 녀석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게 한이다.

그러나 회귀자는 이 사안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개가 음식 좀 먹으면 어때서?"

"음식, 좀? 좀 이라니요?"

나는 이마를 짚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모르는 모양인데, 셰이 교육생. 인간과 개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잔반으로 녀석들의 끼니를 때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개가 요구하는 음식량도 그리 많지 않고요. 하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식충이를 가리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저건 내가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을뿐더러, 두 배나 처먹습니다! 심지어 저와 겸상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좀 먹이면 되잖아. 그거 가지고 쪼잔하게."

"쪼잔? 쪼오잔?"

자기는 기연이다 뭐다 다 독식해서 재산도 많고 아이템도 뒤지게 많으니까 그런 말 나오는 거지! 나처럼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에게 그런 말이 나와?!

심지어 아지에게 볼 일은 그쪽이 더 많으면서! 아지도 종말의 한 조각이라며! 그러면 회귀자인 네가 책임지고 관리해야지! 회귀라는 큰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큰 책임도 지라는 말이야!

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생각을 읽는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으니, 내 입으로 나온 건 투정일 뿐이었다.

"그러면 댁이 먹이던가!"

"아, 미안. 그건 불가능해."

'만한전석에서 나온 음식을 건네보았더니…. 영 먹지 않던걸. 가짓수는 많지만 하나하나의 양이 적어서, 아지가 먹을 양도 부족하고.'

회귀자의 기억 속에 떠오른 건 만한전석. 매 끼니마다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이 가득 차는 한 상이었다.

수많은 접시에 젓가락질 한 번이면 없어질 음식들이 담겨 있다. 한 끼 식사, 한정된 뱃속에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게 설계된 거다. 허기마저도 자원으로 만들어버리는 사치스러움의 극치.

다만, 누가 만한전석 아니랄까 봐 맵고 짠 음식 투성이다. 비싼 향신료를 그따위로 처박으면 아지가 못 먹을만하지. 너무 귀해서 개가 못 먹으니 확실히 개밥은 아닌 모양이구나.

나는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개랑 겸상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손 뗍니다. 아지랑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수업 끝."

[잠깐. 끝이라고?]

"네. 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건 제 억울함을 들어줬으면 해서였거든요. 자, 오늘은 휴강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 이 귀중한 순간을 즐기세요."

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그것은 바로 휴강. 놀라운 사실은 공급자인 교사마저도 휴강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휴강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절대선이 아닐까.

나는 절대선을 발휘하고는 곧장 문으로 향했다.

EP.17 정답이다 연금술사

오늘 수업도 좋았다. 한껏 기지개를 편 내가 문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흡혈귀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느냐?]

"아무것도라니요?"

[말 그대로 아무거나. 무언가 신기한 거 말이다.]

'어제 들었던 이야기, 옷과 바늘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는데. 녀석에게도 제법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다른 이야기는 무어 없으려나?'

몇백 년 동안 관 속에서 세상과 거리두고 있었던 흡혈귀는, 어제 내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여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꼭 적적한 할머니처럼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기대해보았자 내가 할 이야기가 다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깃거리도 딱히 없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기한 거라. 그러면 뭐, 마법이라도 가르쳐드릴까요?"

[마법?]

별로 관심 없을 줄 알고 건넨 말인데. 흡혈귀와 회귀자가 동시에 관심을 보였다. 어라, 이렇게 큰 관심은 부담스러운데.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가르쳐드릴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해봤자 중등학교에서 배우는 군국 제식마법뿐이니까요."

'에이. 쯧. 나는 또 고유마법이라고.'

회귀자의 관심은 금방 꺼졌다. 저 여자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나 같은 사람이 쓰는 평범한 기술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정작 자기도 '그들' 사이에 끼면 '재능을 앞당겨 쓴 범재' 평가를 들으면서. 흥, 기연빨 템빨 범재 회귀자. 잘 해보라지.

그에 반해 어떤가. 모범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흡혈귀의 반응이란.

[네, 네가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인간은 자기보다 위쪽을 보며 의욕을 고취하고, 아래쪽을 보며 자신의 안정감을 찾곤 한다. 나에게 있어 아래쪽은 수상할 정도로 나이만 많은 흡혈귀.

아아. 자긍심이 채워진다. 현대인 천재론은 실재한다. 왜냐면 고대인인 흡혈귀는 내가 꼭 천재라도 된 듯 대단하게 여기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네. 마법, 쓸 수 있습니다."

그러자 회귀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개나 소나 배우는 군국 제식마법이잖아.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법 가지고 으스대기는….'

자기는 1회차 때 개나 소도 못 되었으면서. 소 뒷발에 차여 죽은 쥐쯤 되려나?

너는 그냥 가라. 왜 아직도 여기서 내 말을 듣고 있니.

남아서 수업을 들을 거면 흡혈귀의 반응을 참고해줬으면 좋겠다. 저렇게 반응해주어야 설명할 맛이 나지.

[마법이란 신비의 산물이며, 깊은 현자들만이 다가갈 수 있던 외법! 나조차도 쓰지 못한 그것을, 너 같은 것이 다룬다고?]

"너 같은 것이라니요. 저 이래 보아도 원래 있던 곳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거든요?"

내가 군국에서는 범죄자고 여기서는 빌빌 기어다니고 있지만, 중등군사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 중퇴하고 난 이후에도 뒷골목 마술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현자보다는 광대 같은 느낌으로 유명했던 거지만….

"그리고 딱히 제가 특별한 건 아니에요. 저 말고도 마법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중등학교만 들어가면 다 한 번씩 써보는 게 마법이에요."

평범한 '상식'을 말했을 뿐인데, 흡혈귀는 마치 세계의 종말이라도 마주한 듯이 놀랐다.

[다… 한 번씩 써본다고? 마법을?]

"물론이죠."

[그들이, 몇 명이나 있느냐?]

"제가 다니는 중등학교는 한 학년에 이백 명이었고, 그런 학교가 열 개 있으니…. 네. 최소한 이천 명의 마법 인구가 있네요."

[이, 천….]

흡혈귀는 진심으로 놀라 혀를 내둘렀다.

[이천 명의 마법사라니. 어지간한 도시의 인구보다도 많구나.]

"요즘은 인구 이천은 도시 축에도 안 껴요.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데. 저 시골 변두리에 가야 이천 정도 될 걸요. 그리고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한 학년에 이천 명이라고.

아차. 그때는 학교와 학년이라는 개념이 없었구나. 그 오해를 정정해주어야 했다.

"전체 마법 인구가 이천 명이 아니라, 중등군사학교에 다니는 13세 아이들, 그들만 이천 명이에요. 그보다 한 살 많은 14세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숫자의 마법사가 있고, 그보다 한 살 많은 이들도 역시…."

[말도 안 돼! 그럼, 물경 십만에 이르는 마법사가 있다는 말이냐?!]

"마법사까지는 아니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구? 그중에서도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얼마 없고요."

[그래도, 십만이라니. 십만….]

옛날에는 한 나라 인구가 십만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요 정도? 천 년의 시간이란 이 정도의 간극이 있네요."

고맙다, 문명이여. 나를 흡혈귀보다 천 년은 앞서게 해준 소중한 인류의 역사여.

한참 으스대는 중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꾸 오해를 부추기지 마. 그들 중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들은 극소수잖아."

회귀자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나 참, 자기도 마법은 익혔으면서 왜 이리 내려치기를 하지? 그녀는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처럼 핀잔을 줬다.

"정작 마법을 시켜보면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도 태반일걸. 무엇보다 재능이 중요한 영역이니, 마법은 기초만 익히고 아예 뒷전으로 놓는 사람도 많아. 그거 배울 시간에 전투나 전략을 배우는 편이 나으니까."

제 딴에는 평가절하를 노리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흡혈귀에게는 그마저도 신기한 일이었다.

[마법을 익힐 기회를 잡고도 포기하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아,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음."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다.

"지식이 길가의 돌멩이보다 흔해지면, 사람들 역시 지식을 돌보듯 하게 되는 법이죠."

[익히면 힘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

"힘 역시 경제 논리에 따르는 하나의 상품이라는 뜻이겠죠. 귀하지 않으면 얻을 필요 없는."

[허어. 희한한 시각이로다….]

"뭐, 그것이 바뀐 세상 아니겠어요?"

[그으, 그러면. 혹여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관 안쪽에서 흡혈귀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마치 바라서는 안 될 것을 탐하는 욕심쟁이, 아니, 단순히 욕망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욕심쟁이라고 자책하는 소심한 소녀처럼.

[나 같은 이라도 배우기를 청한다면… 가르쳐주느냐?]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마법을 못 익히지 않나요?"

[내가 사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한 번 배워보고 싶구나. 그 학교라는 곳에서, 다른 이들이 배우는 것처럼….]

"아아. 만학도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제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미련을 갖고는 하지.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선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미련이란 지나온 세월만큼 얹히는 법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 가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주민등록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겠지만…."

그건 어렵다. 군국의 주민등록은 꽤 깐깐하니까. 뭐, 흡혈귀 정도라면 깐깐한 군국도 신분 정도는 어려울 것 없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꾸했다.

"배우겠다고 하면 굳이 학교를 선택할 필요는 없어요. 돈만 지불한다면야 사립학원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

지식은 흔해졌지만 그래도 돌멩이만큼의 가치가 없지는 않다. 3레벨 전술 급 마도부터는 군국에서 꽉 쥐고 알려주지 않지만 2레벨 전투 급 마도까지는 사설학원에서도 가르치고는 하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을 때.

[그렇다면. 혹 나에게 한번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

"네? 저요?"

[그렇다. 지금 내가 세상과 접하는 창은 너와 셰이밖에 없으니.]

천 년 묵은 흡혈귀이자, 행적 하나하나가 전설 속에 기록된 시조한테 마법을 가르친다고?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론은 빠삭하지만 실기는 영 젬병이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마법 선생의 생각을 낱낱이 파헤치고도 0레벨 현상 급 마도밖에 쓰지 못해 결국 중퇴해야 했던 나였거늘.

이건 겸양도 아니다. 아무리 내 전공이 마법이 아니라지만, 0레벨 마도도 간신히 써재끼는 모습을 보이면 나의 실력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고민할 필요 없이 무조건 피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거절하려고 했던 때였다.

'비용이 든다고 했던가? 상관없다. 황금은 차고 넘치니….'

돈.

언제나 그랬다. 황금이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금속.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강철로 하여금 사람의 피를 묻히게 하고는 홀로 고고하게 있다 다른 정수리에 옮겨타는 가증스러운 전리품.

점잖은 사람조차도 경멸할지언정 멀리하지는 않는 게 돈이다. 나처럼 진중하고 사려깊은 사람도 마찬가지.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는, 주먹을 말아쥐고 가슴팍에 손을 댔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도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요."

그리고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살짝 흔들었다.

"아, 그런데 이게. 아무리 교관이라도 마법은 좀 맨입으로 가르쳐드리기 그렇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보안 등급이 높아지다 보니까. 대가가 좀."

[금을 달라는 것이냐?]

"꼭 그런 건 아니고. 성의 정도만요. 제가 그럴 마음이 들게."

너무 속 보이는 말투였다. 회귀자가 칫 하고 혀를 차며 나를 노려볼 정도로. 생각을 읽을 필요도 없다. 군국 장교라는 작자가 다른 주머니를 찬다고 비난하려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거 아니?

몇백 년 전 과거에는 뒷돈이 '상식'이었단다.

[금 정도면 조촐하구나. 알겠다.]

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이 비스듬히 열렸다. 여전히 어둠이 넘실거리는 그 안쪽에서 새카만 손이 무언가를 얹고는 둥실둥실 떠올랐다.

와, 진짜? 진짜 주는 거야?

역시, 위기는 곧 기회. 천 년 묵은 흡혈귀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는 위기는, 세상물정 모르는 늙은 부자를 등쳐먹을 기회와 동등하구나!

안달을 내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검은 손이 들고 오는 물건에 집중했다. 그것은…. 딱 보기만 해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황금 왕관이었다.

횡재다. 기쁨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관에서 꺼내니까 꼭 부장품같네요. 아야!"

[잡소리는 거기까지만 해라.]

그렇다고 왕관을 던질 필요까지는. 이 귀한 물건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지문이라도 묻을까, 나는 소맷자락을 길게 빼서 소중하게 왕관을 받아들었다.

세상에. 이 묵직함. 정말 왕관? 이게 다 황금이라면, 아무리 연금술 때문에 가격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얼마….

…앗, 잠깐.

연금술, 천 년 전, 기술적 간격과 저 묘하게 호구스러운 태도….

설마. 나는 아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황금 왕관을 살펴보았다.

아, 어째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이거 가짜에요!"

[…?]

"생각해보니 연금혁명 전 황금이잖아요? 그러면 가짜 금이야! 아이고, 이걸 어째!"

흡혈귀는 진심으로 당황해했다.

[금이라면 다 같은 금이지, 어찌 가짜 금과 진짜 금이 나뉘어있다는 말이냐.]

"나뉘었어요. 백 년 전에."

[뭣, 뭣이. 설마.]

'또, 시대에 따르지 못했다는… 그런 건가? 또 그러한 패턴인 것인가…?'

사기당한 기분이 들어서 화풀이라도 할까 했지만, 생각을 읽으니 너무 불쌍해서 그럴 기력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받을 돈 조금을 잃었지만, 흡혈귀는 가진 전부를 잃은 셈이니.

이럴 때는 독심술이 애석하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그냥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때까지 탈탈 돌려버리는 건데.

에휴. 내 팔자야. 돈 좀 챙기나 했더니.

"본래라면 금화위조로 잡아가야겠지만,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살던 시절에는 연금술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으니 넘어갈게요. 자, 보세요."

나는 손가락으로 금관의 한가운데에 별표를 그렸다. 완전한 금이라면 손에 아무것도 묻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왠지 불에 달군 인두에 지져진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관이라 하면 반짝임과 무거움. 아마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서리겠군요. 음, 확실히 옛날 연금술이라 그런지 연금 레벨이 낮네요. 저라도 풀 수 있겠어요."

세 번째, 네 번째 모서리를 톡톡 건드린다. 손톱으로 앞면과 뒷면을 긁으며 한 바퀴 돌렸다. 툭. 마지막으로 선을 따라 마력을 밀어넣자, 금관이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며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기에 드러난 건, 칙칙한 빛을 내는 묵빛 금속.

황금보다 훨씬 더 쓸모 있고, 자주 쓰이며, 값싼 마력전달금속 미스릴이었다. 분명 황금보다 몇 배는 훌륭하지만… 덕분에 귀금속에서 멀어지게 된 불운의 금속.

나는 그것을 교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미스릴은 마력 전도율이 뛰어난 금속이죠. 얼마나 뛰어난지, 이걸로 연금술을 쓰면 세상 모든 금속을 흉내낼 수 있었죠. 당연하게도, 가장 많이 흉내낸 게 바로 황금. 다만, 그때는 미스릴조차도 귀해서 황금 속에 가짜 금이 섞여도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시중에 알음알음 가짜 금, 미스릴이 풀렸죠.

그러던 어느 날, 더 큰 돈을 만지고 싶었던 한 연금술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어요. 진짜 금은 만들기 어려우니, 미스릴을 만들어 금으로 바꾸고는 팔아넘기고자 했죠. 뭐, 미스릴도 만들기 어려운 금속이었으니 그의 노력은 헛고생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성공했다.

연금패턴이 밝혀졌다.

추정 3레벨. 적당히 할 줄 안다는 연금술사들은 미스릴을 찍어냈다. 비록 가내수공업 정도였지만 꾸준한 공급은 가격을 하락시켰다.

금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변화를 두려워했다.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 재산이 반감기를 걸쳐 줄어들고 있었다. 소식이 빠른 몇몇은 분개하여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힘썼고.

"그리고 진실을 깨달은 순간, 곧장 입을 다물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금을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어째서이냐? 가짜 금을 만들어낸 연금술사들을 단죄하지 않고?]

"왜냐면 자기 금이 가짜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다 처분했어야 하니까요. 단죄했다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요?"

[자기가 소유한 금이 가짜이다. 그것을 알고도, 팔았다?]

"아니까 판 거죠."

그동안 쌓아온 자기 돈이 실시간으로 증발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게 바보지.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 가짜 금을 진짜라 알고 사게 된 이들은?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정답!"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치는군.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펼쳤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단적으로 말하기 힘들어요. 산 사람은 분노하고, 판 사람은 발뺌하고, 둘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켰죠. 완전 난리도 아니었대요. 한 역사자가 평가하건대, 그때까지 존재하는 금의 무게만큼의 피가 흘렀다, 라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나는 미스릴로 만들어진 왕관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단적으로 말해, 이제 미스릴 가격은 껌값이에요. 허풍 좀 보태면 장작더미랑 비슷한 가격일걸요."

즉 흡혈귀가 가지고 있는 재산 대부분이 똥값이 되었다는 거다. 나는 아쉬움에 한탄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술이나 젓갈 아니면 골동품 같은 경우는 적당히 묵히면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섭리가 그렇듯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다 상해버리는 법이다. 천 년은 너무 길었다.

흡혈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역사에, 연금술까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설마.]

오, 이 와중에도 호기심이. 그 태도가 기꺼워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것도 '학교'에서 배웠죠."

[또!]

"연금술뿐만 아니에요. 수학, 생물학, 자연과학, 외국어, 마법학, 기계공학, 탄도학 등등. 중등학교에서 전부 가르치는 내용이에요."

[도대체… 그 학교라는 곳은 무엇이냐? 세계 각국에서 불러 모은 재능 있는 아이들이 배움을 청하는 곳인가? 현자의 탑, 그러한 곳인가?]

"아니요? 만 14세부터 17세까지, 초등시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 중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데요."

[마, 말도 안 돼.]

큰 충격을 받았는지 관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아졌다. 컬쳐쇼크가 좀 심했나 보다.

하긴 그때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고위층만 할 수 있던 시대지. 배움의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며 험난했다. 거기에 폐쇄적이기까지 해서, 길의 끝에 다다라서도 굳게 닫힌 문에 절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더 나아진 걸까.

"어쨌든. 아셨죠? 애석하게 되었네요. 후우. 힘들었다. 오늘은 역시 휴강으로."

[으, 으음. 잠깐.]

흡혈귀는 바뀐 세상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지, 기어이 회귀자에게 교차검증을 시도했다.

[셰이. 저 말이… 진짜더냐?]

"…전부 사실이기는 해. 하지만."

'배웠다고 해도, 저 남자처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군국은 전문화를 추구해. 각자 적성에 맞는 분야를 깊이 파고들지. 내 일검을 받아낼 정도이면서, 연금술과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게 이상한 거야….'

그놈의 칼날 튕겼다고 고평가는. 참 나. 칼 못 튕겨냈으면 얼마나 버러지처럼 대했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아, 그러면 팔이 잘렸겠구나. 진짜 땅을 기는 버러지가 되었겠네.

"하지만 저 녀석이 이야기한 것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야. 기대했다가는 크게 실망할걸."

회귀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제로도 평범한 곳은 맞으니까 나도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감탄하던 흡혈귀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표했다.

[셰이, 너도 중등군사학교라는 곳을 나왔느냐? 혹 둘이 동문수학한 사이더냐?]

"아니, 나는 초등시민학교만 나왔어."

[아…, 그렇구나.]

'으음. 확실히. 말본새부터 다르다. 둘의 격차가 있는 모양이로구나….'

흡혈귀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끌었다. 그 어조 속에 숨은 안쓰러움을 알아차린 회귀자가 다급히 변명했다.

"아니?! 내가 초등시민학교까지만 나온 건, 고아원 출신이라 학비가 없었기 때문이야!"

[저런.]

"아니! 내 말은! 나는 중등학교까지 나올 이유가 없었어! 그러지 않고도 충분했으니까!"

[알겠다. 걱정하지 말거라. 혈조술은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가르쳐주마.]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아, 딱히 자랑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나는 코를 쓰윽 닦으며 말했다.

"참고로 말하면, 저도 부모가 없었는데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중등군사학교까지 전교 1등이었거든요."

"너는 닥치고 있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물건이 많이 담긴 주머니일수록 흔들림에도 고요한 법…. 그토록 원하신다면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게 닥치는 거냐?!"

이래서 못 배운 사람들은. 하아.

시킨 대로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는데, 회귀자는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EP.18 마법은 장난이 아니야

그렇게 외친 회귀자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회귀자의 팔이 팔꿈치에서 잘려나갔다.

아니, 잘린 게 아니다. 다시 보니 회귀자는 공간을 찢고는 그 균열에 손을 박아넣고 있었다. 팔꿈치 위쪽은 보이는데 그 아래쪽이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마치 창문 밖으로 팔을 내민 것처럼.

차이점이 있다면,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는 점.

개인용 아공간, 포켓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회귀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회귀자는 공간의 균열을 한번 휘적여 동그랗고 단단한 것을 꺼냈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보자!"

팅, 하고 꺼낸 물건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받으려고 무심코 손을 뻗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손이 뒤로 확 젖혀졌다. 몸 전체가 딸려나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인대가 살짝 늘어난 것 같다. 간신히 그것을 잡아낸 나는 회귀자를 흘겨보며 손 안에 잡힌 물건을 보았고.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금화다. 그것도 연금가치 1만 알케가 넘는 고순도 연금화야. 이걸 어떻게?"

연금술사들이 물질을 마음껏 바꾸어내던 시대. 화폐뿐만 아니라 물건의 가치마저도 급변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다. 금조차도 제 가치를 지키지 못했으니, 금고 속 재산이 언제 고철더미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불안감이 넘실거릴 때였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연금화.

연금에 필요한 리소스 자체를 화폐로 빚어낸,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

그걸 적선하듯 건넨 회귀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개인 자산이야."

"개인 자산은 체포되는 순간 전부 압류되었을 텐데요?"

"내 아공간 아이템, 포켓에 들어있던 거니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지."

회귀자가 짧게 일축했다.

포켓이라니. 별별 보물을 다 모으는 회귀자답게 주머니도 뭐에 비할 수 없는 보물이잖아.

나는 연금화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가짜는 아니겠지…."

"포켓도 갖고 있는데 급 떨어지게 가짜 금화를 가지고 다니겠어?"

그건 그러네. 포켓이라면 연금화 백 장을 주더라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니까. 나도 딱히 의심한 건 아니었다. 그저 감탄사의 일부였지.

애초에 연금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복제하기 가장 어려운 화폐.

연금술이 보편화 된 이후, 지상의 모든 국가는 연금술로 만들어진 위조화폐를 막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당연하게도 가장 쉬운 방법은 화폐 자체가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 연금화. 연금화를 이루는 물질 자체가 연금술 재료로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

연금화는 세상 어디에서나 통용되며, 마법진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연금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 화폐를 분해하여 마도구도 만들 수 있다.

현금화와 현물화가 동시에 가능한 최고의 화폐, 연금화.

연금가격 1만 알케라면… 군국에게 빼앗긴 내 마술 도구까지 다시 만들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답은?"

나는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금화에 대해 잊었다.

원래 금화는 주머니 속에 들어간 순간 이전 은원은 전부 사라지는 법. 그게 뒷골목의 법칙. 괜히 금분세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지.

"어허! 자랑스러운 군국의 교관이 뇌물에 넘어가리라 생각했습니까? 오산입니다! 부정청탁 법에 의거, 이 돈은 압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린 회귀자는, 허공에서 금화 두 개를 더 꺼내며 흔들었다.

"티르칸쟈카에게 제대로 알려주면 금화 두 개를 더 주지."

"그와 별개로, 사실 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마법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왠지 마법 같은 날이었거든요. 오늘은 마법에 대해 배워보도록 하죠."

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나는 즉시 교탁 앞으로 서서 수업을 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동안 회귀자는 흡혈귀에게 자꾸만 무언가를 납득시키려고 들었다.

"…티르칸쟈카, 다시 말하는 데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니까. 저거 봐. 중등학교 나와봤자 금화 하나면 뜻대로 움직이는걸…."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나는 내 주머니 안에 금화만 들어오면 돼. 자존심은 잠시 접어두고,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수업을 시작했다.

"마법이란, 기본적으로 세계에 규칙을 덧씌우는 행위입니다…. 라고 말해봤자 이해할 수 없겠죠?"

어차피 흡혈귀가 원하는 건 호기심 충족이다. 기초부터 시작되는 지루한 배움의 길이 아닌 것이다. 이론은 집어치우자.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겁니다. 하지만 뭐 말은 쉽지 그게 시킨다고 되나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진학하는 중등학교에서는 신체를 매개로 한 마법을 가르칩니다. 신체는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분리된 일종의 세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손가락을 들어올리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핏줄을 타고 움직이는 마력이 느껴진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한 번 쓸어올리고, 손바닥을 탄주하듯 톡톡 두들겼다.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있겠습니다. 자. 보세요. 세트, 리, 체크."

적절한 동작과 주문, 그리고 마력의 배치만 한다면 뭣도 모르면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군국이 만들어낸 합리주의의 산물.

0 레벨 마도.

"볼트."

검지에서 전류가 번쩍였다. 나는 허공에 스파크를 일으킨 뒤 팔에 문질러 방전시켰다.

"피렌하이트."

중지에서 불꽃이 일었다. 불꽃은 형태를 갖추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서 손가락을 흔들어 꺼야 했다.

"아쿠스."

약지가 얼어붙었다. 물기를 모으는 마법인데 자칫하다간 손가락이 얼어붙는 게 단점이다. 다른쪽 손으로 감싸서 녹였다.

"파스칼."

새끼손가락에서 팡 하고 공기가 터졌다.

후, 인생업적 중등학교 전교 1등(독심술 사용) 실력은 어디 안 가네. 나는 양팔을 벌리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이 정도. 신체를 매개로, 손가락을 통해 발사하는 마법입니다. 심상을 구축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저기,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다만?]

흡혈귀가 내 손가락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마법을 일으킨 내 손가락을 돌아보았다.

전기를 썼던 내 검지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불꽃을 쐈던 내 중지는 검게 그을렸고,

얼음이 맺혔던 내 약지는 퉁퉁 부풀어 올랐고,

바람을 일으켰던 내 소지는 붉게 물들어 쭈글쭈글해졌다.

아, 쓰읍. 다시 생각해보니 아프네. 네 가지 고통이 동시에 느껴져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픈 티를 냈다간 가오가 떨어지니, 나는 허세를 부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는 말했다.

"제가 말했죠? 마법은 세계에다가 규칙을 덧씌우는 행위라고요."

[그래.]

"저는 제 신체를 매개로 규칙을 덧씌웠습니다. 검지에는 정전기가 더 강하게 일어난다는 규칙을, 중지에는 불꽃이 훨씬 낮은 온도에서 타오른다는 규칙을, 약지에는 물이 잘 들러붙는다는 규칙을, 소지에는 바람이 평소보다 더 거세게 움직인다는 규칙을."

현상 그 자체를 국소적인 범위에서만 일으키는 기초 마법. 이게 0레벨 마도.

손가락을 펼쳐 그 흔적을 내보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죠."

흡혈귀는 큰 호기심을 보였다.

[확실히, 신기하구나. 헌데 손가락은 반드시 다쳐야 하는 것이냐?]

"신체를 매개로 써서 어쩔 수 없어요. 규칙이 달라지는 곳은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하필 제 몸이 그 경계선이었으니까. 대가도 제가 받을 수밖에 없죠."

나는 쓰라린 손가락을 몸 뒤로 숨기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신체 매개 마법은 이렇기에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몸 말고 다른 매개를 찾죠. 지팡이나 완드 같은 물건을 쓰는 사람도 있고, 사역마를 쓰는 사람도 있고. 경지에 이르면 세상 그 자체를 주무른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봤네요. 실력이 뛰어날수록 더욱 넓은 범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신비하고 위력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해요."

내가 그렇게 설명을 끝마쳤을 때였다.

"딱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이네."

이제는 회귀자가 치고 들어오는 것도 슬슬 익숙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이니까요."

"그래. 유용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어. 심지어 약하기까지 하지."

"기초니까요. 수학으로 따지면 구구단 수준이잖아요."

"그래. 확실히 기초는 잘 다졌어. 0레벨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와 완성도야. 하지만 내 생각에 신체 매개 마법밖에 쓰지 못하는 너는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데?"

한껏 으스대며 흘리는 비웃음에는 유치한 우월감이 드러나 있었다.

아니, 설마. 회귀자면서 지금 나한테 경쟁심을 느끼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네. 너는 똑같은 인생을 열세 번 반복한 프로잖아. 나는 내 인생이란 무대의 아마추어라고. 나와 경쟁하고 싶으면 공평하게 1회차 상태로 찾아와.

"저는 마법이 전공이 아니니까요."

"흐흥. 나 역시 마법은 전공이 아니지만, 전술 급 마도까지는 쓸 수 있다구?"

"아. 그래요."

"너는 현상 급 마도가 끝. 헤헹. 이게 재능 차이려나?"

솔직히 안 부끄럽나? 몇 번 죽어가며 어거지로 배운 마법을 꼭 자기 재능인 것처럼 말해?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걸 온전히 홀로 이룩했다면, 재능 차이겠죠."

차가운 눈으로 회귀자를 보며, 말에 뼈를 담아 한마디 했다. 그러자 회귀자는 움찔하고는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회귀를 거치며 목숨을 대가로 배운 거지만. 그래도 회귀도 능력이니까. 이 정도 잘난 척한다고 잘못될 건 없겠지! 맞아, 그래! 회귀도 능력, 스펙이야!'

다행히 아직 양심은 있는지 자기 변명은 하는구나. 진짜 양심이 없는 사람은 변명도 안 한다. 그런 의미에서 회귀자는 아직 부끄러움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회귀자도 딱 그 정도에서 끝내고는 흡혈귀에게로 몸을 돌렸다.

"티르칸쟈카. 마법은 내가 가르쳐줄게. 저깟 녀석보다는 내가 마법은 더 잘할 거야."

그러자 흡혈귀는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마치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하지 않았더냐?]

"나올 필요가 없어서 안 나왔던 거라니깐!"

[아, 그래. 그렇지. 괜찮다, 얘야.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단다.]

흡혈귀 딴에는 배려한다고 한 말이다. 다만 배려심이 너무 깊은 나머지, 배려 받는 대상도 그것을 알아차렸을 뿐. 회귀자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흡혈귀를 꼬박꼬박 노인네 취급하던 저 남자의 심정이 격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

말했잖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노인이라니까. 흡혈귀는 나를 흘긋거리며 말을 끌었다.

[굳이 가야 하느냐? 여기서 보여주면….]

"마법은 비장의 수단이자, 내가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세상이야. 내 힘이면서 동시에 약점이기도 해. 남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어."

[저 녀석은 보여주지 않았느냐.]

"저딴 거랑 비교하지 마! 저건 군국 제식 마법. 일정한 조건만 만족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보편적인 거야! 나의 마법은 이 세상에서 나만 쓸 수 있는 고유 마법이니까!"

[아, 음. 알겠다. 알겠어. 가자꾸나.]

회귀자가 쿵쿵거리며 방을 나섰고, 새카만 관이 둥실둥실 떠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아 나를 흘긋 보았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이… 더 대단한 것 아닌가? 음. 잘 모르겠구나. 모르는 것 투성이야.'

나이를 허투루 드시지는 않았네. 현명하셔라.

'그렇더라도, 이미 죽은 나는… 저 마법조차 쓰지 못하겠지만.'

…뭐, 둘이서 열심히 해보시기를 바란다. 회귀자는 마법 가르칠 생각에 신나겠지만, 실망하는 것도 자유지. 나야 할 일 줄었으니 좋지….

어? 잠깐만. 뭔가 깜빡한 게 있는데.

아, 맞다. 내 돈! 내 연금화 두 장!

나는 급히 그들의 뒤를 따라나서며 소리쳤다.

"셰이 교육생! 제 돈은 주고 가셔야죠!"

그러나 돌아온 건 귀찮다는 투의 대답 뿐이었다.

"티르칸쟈카는 나한테 배울 건데 왜 너한테 돈을 줘야 해?"

"연금화 두 장 주겠다고 했잖아요! 약속을 어길 거예요?"

"약속?"

회귀자는 몸을 빙글 돌리고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조언 하나 해줄게. 누구와 약속했든, 얼마를 받기로 했든…, 자기 주머니 속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네 돈이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딴 게 어딨어요! 주겠다고 했으면 줘야지!"

"선금으로 만족하라구. 그것도 큰돈이니까… 너한테는 말이지."

회귀자는 한 점 미소를 남기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지금 읽히는 저 생각을 가장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면 '메롱' 정도일까. 잔뜩 약이 오른 나는 씩씩거리며 다시 교육실 안으로 들어왔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내가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심지어 저거, 중반까지는 그냥 주겠다고 마음 먹은 상태였다! 그러다 내 강의 듣고는 마음을 바꿔먹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종이 저렇게 변덕스러운 것들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때그때 머리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이들. 1초 전 생각이랑 지금 생각이랑 다르니 알 수가 있어야지! 폭풍우 치는 밤바다의 파도도 저것보다는 읽기 쉬울 거다.

"젠장. 내가 저 말을 듣는 입장이 되다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배로 화가 난다. 내가 교육실 문을 거세게 닫아버렸을 때였다.

"멍."

불만스럽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저 뒤쪽에 배를 깔고 앉은 아지가, 여전히 토라진 채 꼬리를 흔들고 있다.

슬슬 심심하니 관심 좀 달라는 표시다. 생각을 못 읽어도 개 마음이야 뻔하지.

짜증이 치밀어서 손을 내저었다.

"뭐. 어쩌라고."

"멍."

"오늘은 끝이야. 너도 네 방으로 돌아가."

"멍."

"왜? 너만 기분 나쁘냐? 나도 기분 나쁘거든. 지금 손가락도 아파서 놀아줄 기분 아니야. 알아서…."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있을 때, 아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느릿하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여전히 무언가 불만스러운 티를 팍팍 내면서도 결국 다가온다.

지조도 없는 짐승 같으니. 자기는 잘못은 없지만 화해는 하고 싶다 이거지? 내가 받아줄 줄 알고.

"손가락 안 보여? 다쳤다니까?"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든 네 손가락을 보여주며 윽박질렀다. 아지는 뭔가 새초롬한 눈으로 가만히 내 손가락을 보고는, 얼굴을 들이대며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뭐야? 다쳤다고 핥는 거냐?"

아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할짝거렸다. 미끈한 혀가 손가락을 핥아 올린다. 따뜻하고 몰캉한 촉감이 손가락을 마사지한다. 나는 콱 얼굴을 찌푸리려다, 그 다정한 몸짓을 보고는 인상을 풀었다.

"너…."

짐승은 상처가 나면 핥는다. 감염을 막기 위해, 간지러움이 느껴져서, 혹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에.

하지만 관념의 존재인 짐승의 왕에 이르러서 핥는다는 행위 자체가 구체적인 치유력을 가진다. 모든 상처에 유효한 건 아니지만 효력은 포션을 바르는 것보다 뛰어나다고 전해진다.

"치료해주는 거구나."

"멍."

작게 대답한 아지는 남은 손가락도 꼼꼼하게 핥았다. 본질이 개일지언정 겉모습은 인간이라 그런가, 작고 도톰한 혀가 구석구석 파고 든다.

사람들이 화를 불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근거 없이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손가락이 젖으면서 고통도, 화가 가라앉았으니까.

에휴. 그래. 화를 내서 뭐해.

"그래. 사람보다는 개가 낫지."

손을 뺐다. 질척한 침이 길게 늘어진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은, 어느덧 다 나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인간이며, 개는 언제나 아군이었지.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밤에 몰래 밥 좀 먹으면 어떠냐! 배고프면 먹을 수도 있지. 먹으라고 만든 음식인데 말이야! 안 그래?"

"멍."

"좋아. 기분이다! 오늘은 고기 통조림이나 뜯자!"

"고기?"

아지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까지 토라진 상태였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들썩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오늘 점심은 고기다!"

"멍! 나, 고기 좋아!"

"가자, 식당으로!"

"아우우우우!"

신이 나서 먼저 달려나가는 아지의 뒤를 따라갔다.

나간 돈은 잊자. 연금화 하나를 효율적으로 분해하면 카드 한 벌은 만들 수 있다. 운이 좋다면 한 장에 인챈트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뭐, 어차피 회귀자는 실패할 테니까. 그때 이자까지 쳐서 받지 뭐.

식당으로 향한 나는 경쾌하게 고기 통조림을 뜯고는 온갖 솜씨를 부려 요리했다. 그리고.

"이 똥개가! 고기만 건져 먹지 마!"

"깨갱?! 아우우우우!"

결정했다. 개밥은 앞으로 콩으로 고정이다.

EP.19 할아버지의 명예만 걸고

꾸욱. 꾹.

달콤한 잠에 취해 있던 도중 허리춤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나의 단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팔을 휙 휘젓자, 나를 내리눌렀던 것이 순식간에 물러갔다. 안정을 되찾은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꾸우욱.

다시금 허리춤에 묵직한 게 얹혔다. 한껏 사나운 기세로 팔을 휘두르니 서둘러 사라졌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꾸우우욱.

이제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건방진 존재가 이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예 혼쭐을 내줘야겠다. 나는 무게가 실리는 틈을 타 몸을 휙 들어서, 내 몸을 내리누르는 발을 낚아채고 당겼다. 이대로 꼼짝도 못하게 제압을.

어라. 왜 안 움직이지? 이상하네.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있는데 미동도 없네.

이걸 어디서 만져봤더라.

군국은 철골과 콘크리트의 나라. 도시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는 딱딱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도, 사람도, 사상도.

언제 굴다리 밑을 지나며 교각을 만진 적이 있다. 철골로 대를 세우고 콘크리트로 굳힌 아주 튼튼하고 단단한 교각. 그 위를 지나다니는 사람과 커다란 마차까지 버텨내는 구조물의 촉감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발로 걷어차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어서, 꼭 교각이란 물체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하는 물건 같았다.

지금 나를 누른 다리는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교각과 비슷한 정도였다. 꿈쩍 안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다는 거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교각 이상이다.

괜히 다리만 잡고는 멍하니 있는데.

"멍!"

다리가 스스로 내 손을 따라왔다.

어른이 아이에게 끌려다니는 건 아이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그쪽으로 자기 마음이 향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원리로,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발이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커다란 그림자가 내 침대로 뛰어들게 되었다.

눈앞에 나타난 건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정리가 안 된 부스스한 금발에 얼굴에는 표정이 큼직하게 드러난다. 보급형 셔츠를 가슴께 밑에서 꽉 묶은 게, 탐스러운 가슴을 부각하려 한 건지 아니면 그것이 날뛰지 않도록 붙잡은 건지 잘 모르겠다. 배꼽 아래로는 반쯤 감긴 꼬리가 살랑인다.

소녀는 나를 보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손으로 내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손길에는 신뢰와 애정이 듬뿍 묻어나와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뭐지, 이거.

웬 여자가 갑자기 나를 깨우더니 애교를 부리고 있네. 암살자인가, 아니면 수금이라도 왔나….

위기감을 느낀 내가 생각을 읽은 순간이었다.

아니, 개구나.

개의 왕, 강아지.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니까 정신이 좀 든다. 잠잠했던 머릿속에 잡음이 섞여들고 시야가 안개처럼 스며들듯 넓어진다.

내가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아지는 냉큼 길을 비켜주었다.

"깨워주러 왔구나?"

"멍!"

"자명종 없으니 누가 깨워주냐는 말을 듣고?"

"멍멍!"

"그래. 고마워. 착하다."

"나, 착해?"

"아유, 착하다."

"멍멍! 나, 착해!"

짖는 것부터, 칭찬을 받고 절로 신이 나서 내 침대를 뒹굴고 있는 모습까지. 아무리 봐도 개랑 똑같다. 본질까지 따지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개'라는 종족과 가까운 존재다.

그렇지. 개지. 소녀가 아니라.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보급형 셔츠가 손목에 있는 생체 단말로 스며들고, 새로운 의복 패킷을 손목에 끼워 넣는다.

왠지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당연히 그러한 사치를 일일 배급량만으로 부릴 수 있을 리 없다. 씻다가 일일 배급된 물이 다떨어지는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옆 방으로 쳐들어갔다. 내 옆 방은 침대도 반으로 접히고 캐비닛도 부서졌지만, 수도는 살아있어서 내 방 물이 부족하면 신세 지곤 했다.

다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아지는 여전히 내 곁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말려놓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남은 배급량을 확인했다.

물이 좀 남는다. 1인분은 언제나 부족하지만 2인분은 살짝 과하지. 군국답다.

남은 물은 컵에 따라 아지에게 주니 얼굴을 처박고 할짝거렸다.

평소와 똑같은 그 모습이 오늘따라 괜히 이상해 보여 공연히 아지를 타박했다.

"아지야. 그래도 신체구조는 사람인데 손으로 들고 마셔라."

"멍?"

순수하게 내 말에 반응해서 고개를 갸웃하는 아지.

"멍? 불렀어?"

말로 해서 들었다면 아지는 개가 아니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지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입에다가 컵을 대고는 조심스레 기울였다.

계속해서 혀를 날름거리던 아지는, 찰랑이는 물이 입안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당황한 모양새였다. 괜히 몸을 뒤트는 녀석. 그래도 꾹 붙잡고,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독이니, 어느새 안심하고는 조금씩 들어오는 물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래. 잘한다. 이렇게 먹으면 얼마나 편하니. 앞으로는 이렇게 마셔 봐. 어때?"

"멍!"

"자, 어디."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나는 조심스레 잔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지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땅에 무릎을 꿇고는 얼굴을 처박고 할짝거렸다.

나는 치솟은 엉덩이 위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괜한 짓을 했네."

내 목소리에, 아지는 물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지는 해맑게 미소를 보이며 짖었다.

"멍멍!"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인간은 어째서 순진하고 단순한 짐승을 보며 위안을 얻을까.

그들보다 하등한 생물을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아니면 그들이 잃어버린 순수함을 추억하기 위해?

"뭐든."

이유야 상관없겠지. 어쩌면 후에 덧붙인 이유보다도 감정이 먼저 존재할지도.

결국 즐거우면 그만이다.

아지가 물을 다 마셨다. 나는 컵을 다시 걸이에 걸어놓고는 텅 빈 방을 나섰다.

"아침밥 먹으러 가자."

"멍!"

오늘 메뉴는 어제 만들고 남긴 고기 스튜. 고기도 얼마 안 남았지만, 아침 한 끼 정도는 때울 수 있겠지. 그리고 저녁에는… 콩. 스튜는 질렸지만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최선의 수는 콩 스튜뿐이다.

"여기는 물자 보급도 안 해주나. 신선식품 좀 얻었으면 하는데."

몇십 명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사람 두 명 개 한 마리 시체 한 구 있는데 보급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심지어 그중 한 명과 한 구는 자급자족하고 있다.

이곳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보급이나 연락이 늦네.

나는 투덜거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4층. 노역자들의 숙소는 과장을 보태도 괜찮다고 하기 힘들었다. 콘크리트 벽에는 무수한 실금이 가 있어, 지속적으로 받은 충격이 나이테처럼 자라 있었다. 좁은 통로에 잠글 수 없는 문이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다. 무심코 벽을 짚으면 문이 열리거나 벽이 흔들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나마 시설이 있는 식당 쪽은 공간도 넓고 튼튼해서 망정이다.

식당은 방보다는 넓고 필요한 장비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표준 사이즈의 냄비 몇 개와 여러 장의 접시, 그것을 나를 트레이까지 있다. 아마도 노역자들이 죄수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일까지 상정했겠지.

"음식을 나를 트레이는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그냥 걸어내려가면 그게 곧 음식 배달이었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뚜껑을 덮은 냄비로 향했다.

그리고 냄비를 들추려는 순간, 무언가 말로 형용하지 못할 예감을 느꼈다. 데쟈뷰라고 해야 할지.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에이, 설마. 또?

"아니지. 어제 그렇게 치고 받고 싸웠는데. 설마."

나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웃으며 냄비 뚜껑을 들추었고.

텅 빈 냄비만을 마주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내 미래를 보는 듯한 시커먼 냄비 밑바닥을.

"야 이 똥개야야아아아아!"

나의 포효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너에게는 학습능력도 없냐? 개의 왕이라고 개랑 다른 게 뭐야? 시골에서 소문난 천재 개가 너보다 몇 배는 똑똑하겠다!"

"아우우우우! 나, 아냐! 멍! 멍!"

인간과 개의 성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회귀자가 이마를 짚으며 말을 걸었다.

"또 무슨 일이야?"

'이번에도 같잖은 일이겠지.'

같잖기는? 의, 식, 주. 그중에서도 언제나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놀았던 건 식량이다. 즉, 이건 삶과 죽음에 준하는 문제다!

나는 냄비를 들고 회귀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빈 통조림 캔과, 역시 텅 빈 냄비를 회귀자에게 들어보이며 소리쳤다.

"봤어요? 원래 통조림 한 캔이면 한 명이 나흘을 먹을 수 있어요. 그만큼의 영양분이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이 똥개 때문에 한 캔이 하루만에 사라져요!"

저쪽에서 아지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나, 아니야!"

"거짓말! 너 아니면 도대체 누군데!"

"아니야! 아니야!"

"짐승의 왕이라면 다른 말도 해! 똑같은 단어만 지껄이는 건 개가 아니라 앵무새잖아!"

"앵무새, 아니야!"

"납득시키고 싶다면 사람의 말을 하라고!"

회귀자가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끼어들었다.

"잠깐. 둘 다 시끄러워."

나와 아지는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회귀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너는 왜 아지가 범인일 거라 확신하는 거야? 아지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면 셰이 교육생이 범인입니까?"

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흡혈귀. 피만 마실 뿐이죠. 남은 인간은 저와 셰이 교육생. 그런데 저는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양심이 없기로서니 자기가 먹어놓고 개에게 뒤집어씌우는 의미없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창고도 제가 관리하는데요, 뭐."

'자기가 양심 없는 건 알고 있어?'

"만일 범인이 아지가 아니라면, 그건 필연적으로 셰이 교육생이 음식을 훔쳐 먹었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한 말은, 당신 자신을 의심하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나는 냄비를 싱크대 안쪽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당신에게는 비상 도시락도 있다면서요! 음식 차릴 필요 없다면서요! 그런데 도시락만 먹다가 군국 소울 푸드에 혹해서 밤에 냄비를 뒤졌어요? 가난뿐만 아니라, 가난이 만들어낸 소울 푸드마저 당신에게는 진열장에 장식할 하나의 흔적일 뿐인가요!"

"흔적은 무슨. 당연히 아니지. 통조림 음식은 줘도 안 먹는다니까."

"그러면 가만히 있어요, 부르주아! 저는 오늘 저 똥개와 사생결단해야하니까!"

"기다려 봐."

회귀자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허공에 떠있던 보검 천앵이 서서히 회전하여 나를 겨누기 시작했다.

즉시 입을 다물었다.

사생결단이라고 해도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내 말은, 여기에 다른 사람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냐는 거야."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존재를 모르고 있던 누군가가 사실 범인이었단 내용, 저는 너무 편의주의적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평소에는 정론을 펼치면서도, 가끔 정신 나간 말을 한다는 말이지. 정말 알 수가 없는 남자야.'

"네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럴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거야."

"뭐, 할 수 있을 법한 의심이군요. 하지만."

너무 구멍투성이인 추리라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네. 고작 그 정도인가, 회귀자. 내가 알려주지. 아무리 복잡해보이는 일도, 진실은 언제나 가장 간단한 답이라는 것을.

나는 손가락으로 회귀자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셰이 교육생, 당신의 추리는 틀렸습니다."

"왜?"

"이곳은 무저갱 탄탈로스. 사람이 오갈 수 없는 완전히 고립된 장소. 그곳에 당신도, 저도, 아지도, 티르칸쟈카 교육생도 모르는 사람이 숨어있다가 밤에 음식이나 먹기 위해 나타난다고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완벽한 논리를 풀어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다면 귀신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귀신이 있으면 무섭잖아요. 안 믿을래요."

회귀자는 뒤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멍청해 보이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러니까, 그런 존재는 무서우니 아예 고려하지도 않겠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 무슨."

'진짜 미친 거야,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일부러라니. 무슨 소리를.

생각해봐라. 별 희한한 수단을 다 가진 회귀자, 피를 흘리는 순간 천 리 밖에서도 찾아올 흡혈귀, 개코를 가진 개의 왕.

더불어 회귀자의 은신조차 간파한 내 독심술까지.

이들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존재가 식당에 숨어있다고? 심지어 이 나에게 생각도 읽히지 않아?

그런 존재가 있다면 당장 도망가야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인데. 티르칸쟈카와 아지가 '종말의 조각'이 되는 것도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서였고, 더불어 무저갱 밑바닥에 있는 '그것'을 노리고 찾아올 '그녀'도 있으니까. 더불어 '그'도 어딘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게 왜 진짜지.

안 돼. 이런 미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이 구성원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외부의 침입자도 있으면서 저들과 비슷할 정도의 괴물이 찾아온다고?

'설명은 무슨. 나도 탄탈로스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인데 뭘 설명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아지를 휙 돌아보았다.

"아지야. 너 진짜 안 먹었냐?"

"아니야!"

"아니라고만 하지 말…. 아우. 너랑 무슨 대화를 하냐."

언제나처럼 인간과 짐승의 차이만 느끼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똥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다. 끝까지 잡아떼겠지.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나.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수밖에.

이 똥개가 냄비를 탐하는 그 순간을 노려 잡아야 한다. 그래야 완전히 몰아넣을 수 있다.

통조림 하나를 더 뜯자. 결행은 오늘 밤. 주간등이 꺼지고 야간등만 감옥을 희미하게 밝히는 때.

그때 이 똥개를 잡아넣는다.

나는 음산하게 입술을 뒤틀며 아지를 내려다보았고, 아지는 그에 맞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튄 듯했다.

'저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인간과 개 사이가 뭐 하나로 정의되냐. 좋을 때는 좋은 거고 나쁠 때는 나쁜 거지.

두고 보자, 똥개.

내가 그렇게 으르렁거릴 때였다. 회귀자가 흠칫 고개를 돌리더니, 미간을 좁히며 어느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경계심을 대변하듯 천앵이 가느다랗게 울었다.

'잠깐. 저 안쪽에서 무슨 기척이 느껴졌는데.'

아, 제발. 하지 마. 진짜 무섭다고. 왠지 네 예감이라 하니 진짜 있을 것 같잖아. 심지어 나는 같은 층에서 잔다고. 귀신이 찾아오기 딱 좋은 좁고 어두운 방에서.

밤에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나에게 경계용 알람 같은 건 없는데. 흐음.

알람은 없지만, 경비견은.

나는 아지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지야. 오늘은 같이 잘래?"

"왈!"

까였다.

EP.20 범인은 이 안에 있겠지 그럼

무저갱에서 밤을 알리는 건 저무는 태양이 아니라 깜빡거리는 주간등이다. 군국 표준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면, 태양을 대신하려는 인조등이 노을을 흉내 내듯이 붉게 물든다.

본 따 만든 것은 그 형태에 구애받기 마련이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간등의 빛이 지평선 너머로 지는 태양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나면, 무저갱 곳곳에 있는 희미한 야간등이 건물 안쪽을 비춘다.

베낀 것은 티가 나는 법이라, 야간등은 저녁 하늘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하다. 빛의 잔재가 그리는 어슴푸레한 남색 하늘 대신 침침한 조명이 무저갱을 비춘다. 안개처럼 스며드는 달과 별의 반짝임과는 확연히 다른, 어둠 속에서도 그늘을 만드는 불쾌한 빛이다.

온누리를 비추는 태양의 은총과 비교하면 뭣들 빛이 안 바래겠냐만.

주간등이 꺼지니 복도의 조명도 약해졌다. 이제 문틈에 설치해둔 거울조각은 어둠밖에 비추지 않는다. 덧붙여 내 방에 들어오는 조명도 꺼져서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는 52장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회귀자가 주었던 연금화와 오늘 하루의 시간을 몽땅 써서 만들어 낸 카드다.

나는 마술사이자, 카드와 호구를 재료로 돈을 연성해내는 연금술사. 카드 한 벌은 나의 무기.

한 손으로 책상 위를 훑었다.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던 52장의 카드는, 단 한 번의 손짓에 얌전히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네모나고, 딱딱하고, 탄력적인. 익숙한 촉감이 나를 반긴다.

뒷면을 위로 한 덱을 반으로 갈라 셔플한다. 잘 휘어지고 탄력적인 카드가 서로의 틈으로 파고든다. 섞고, 뒤집고, 비틀어서 다시 섞었다. 툭. 다 섞은 카드 뭉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이아몬드 1."

가장 위에 있는 카드를 뒤집었다. 다이아몬드 1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되도록 섞었으니까.

카드를 며칠 잡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실력은 어디가지 않았다. 내 마음속 깊숙이에서 나를 기다렸을 뿐. 나는 무심하게 다이아몬드 1을 들어올렸다. 뾰족하고 붉은 문양 하나가 카드 한 면이 자기 것인 양 다 쓰고 있다. 나는 카드를 검지와 중지로 잡은 뒤 휘릭 뒤집었다. 그 직후 양손을 펼쳤을 때, 다이아몬드 1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드의 품질도, 컨디션도 나쁘지 않다. 깊게 숨을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자. 가볼까."

차라리 아지가 훔쳐먹는 것이었으면 한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나만의 무기는 하나 챙겨야겠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어둠에 잠긴 복도는 소리마저도 삼킨 듯했다. 낮에는 조용해도 최소한의 활기는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탄탈로스라는 명칭에 걸맞게 음침하고 조용했다.

깊게 뻗은 복도로 향했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에서는 발소리도 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식당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안쪽에서 타인의 생각이 느껴지는지 살폈다.

안쪽에서는 조금의 잡음도 느껴지지 않는다. 최소한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은 없다는 뜻.

생각이 없는 건지, 인간이 아닌 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슬그머니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아지가 냄비를 탐하는 순간 검거하면 된다. 혹여나 귀신이 나오면 즉각 도망치면 되고.

본디 사냥은 기다림의 미학인 법. 그 어떤 영광스러운 샤냥도 그 뒤에는 인고의 기다림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저 냄비가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내 집중력도 떨어져 머리가 꾸벅거리며 시침질을 할 때. 몇 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걸려들었구나.

그것 봐. 역시 침입자잖아. 안쪽에 사람이 있기는 무슨. 그런 증명도 할 수 없는 음모론 따위 믿지 않아.

나는 잔뜩 힘을 주고,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며 사냥감이 함정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다. 냄비에 손을 댄 순간 빼도 박도 못 한다. 그때 되면 곧장 나가서 덮쳐야지….

식당 안으로 들어온 그림자는,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식당을 휙 둘러본 뒤.

"너, 거기서 뭐해?"

나한테로 걸어왔다.

생각을 읽는다고 내가 딱히 잘 숨는 건 아니라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회귀자를 가리켰다.

"당신이었군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뭘?"

"그렇게 궁금했다면 한 입 달라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굳이 이 밤중에 살금살금 다가와 훔쳐먹어야 했습니까? 당신의 일탈 때문에 저희 사이에는 불신이 팽배해졌습니다! 불신은 사회를 좀먹는 악. 굴러가는 톱니바퀴 사이에 낀 녹처럼 마찰과 잡음을 만들어내는 방해물! 당신이 얼마나 끔찍한 행위를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진짜 뭔 소리야."

회귀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할 일 없으면 조용히 하고 있어."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더니. 이 탄탈로스에 똥을 싸질러놓고 모른척하기는!"

"도대체 뭔 천박한 소리야?!"

반사적으로 반박한 회귀자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진짜로 내가 음식이나 훔쳐먹으라고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조금 전까지는요."

"그렇다면야, 가 아니잖아! 조금 전까지라고? 내가 너 같은 거랑 동급으로 보였어?!"

똑같지 뭘. 같이 여기 갇힌 처지면서.

어쨌든 조금 전 막 생각을 읽었다. 안타깝게도 회귀자는 음식을 탐하러 온 게 아니라, 식당을 떠나기 직전 느껴졌던 기척이 신경 쓰여서 밤에 다시 찾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러면. 정말로 이 안에 뭔가 숨어있는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아마. 확실하지는 않지만 찾아서 나쁠 건 없겠지."

"아아."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회귀자를 향해 고개를 까닥 숙여보이며 말했다.

"수고하세요."

"…너는 어디 가?"

"무서우니까 도망이요."

회귀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언제는 우리를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는 교관이라며?"

"귀신은 교육생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감옥을 조사하겠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

"누가 조사하랬습니까? 그리고 조사하지 말라면 안 할 겁니까? 말려도 할 거라면, 제가 끼어드는 의미가 있습니까?"

"와."

'말은 여전히 얄밉게 하네. 그보다 뭐지? 진심이야? 아니, 설마.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게 아닐까?'

계획이고 뭐고. 진짜 유령이라면, 생각을 읽지 못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비인간들을 상대로는 버러지 미만이라고.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식당 문으로 향했다.

"자. 그러면 가볼게요. 사후보고 하는 거 잊지 마시고. 가능하다면 샘플과 함께 보고서를 제출해주세요."

"그럴 거면 지켜보지 그래?"

"죄송합니다. 소등 시간이라 자야 해서."

"잔말 말고 거기서 지켜봐."

"네? 왜요?"

'내 칼을 쳐낼 정도의 강자가 경계하는 기색…. 혹, 이곳에 진짜 강대한 무언가가 숨어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 걸까? 그 의도가 무엇이든, 일단 방해해보자. 딱히 무서워서…는 아니고. 만약을 대비해 후방에 남겨두는 정도는 괜찮겠지.'

두려움은 전염되는 법이라, 내가 완전히 겁을 먹은 티를 내자 회귀자도 그만큼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잠정 적으로 여기는 나를 후방에 남겨둘 생각까지 할 정도로.

회귀자는 생각을 끝마치고는 둘러댔다.

"지금 저 안에 숨어서 기생충처럼 지내는 존재가 침입자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그들을 배제하는 건, 이 감옥을 관리하는 너의 몫이니까. 너도 지켜봐야지."

"그건 맞는 말이네요. 확인해보시고 침입자면, 선조치 후보고 하세요. 그때까지는 방에 가있겠습니다."

잘 해봐. 나는 이만 간다. 내가 문으로 나설 때.

'야! 가지 말라고 했는데! 칫, 일단 급한 대로 천앵을 던지자!'

그러면 안 돼. 죽어버린다고.

나는 몸을 빙글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회귀자의 등 뒤에 가까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에 회귀자는 질색하며 말했다.

"뭔 짓이야?"

진짜로 힘을 쓸까 봐 돌아왔다고는 말 못 한다.

그리고 사실, 어째 회귀자의 말대로 진짜 침입자가 있다면. 어쩌면 나 혼자 있는 것보다는 회귀자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한 거 아닐까?

아지는 지금 나한테 화가 난 상태고, 흡혈귀는 자기가 귀신이라 그런가 이번 일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지금 회귀자를 제외하면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

참 못 미덥게도 말이다.

"자, 앞장서세요. 가서 귀신을 무찌르는 겁니다! 감히 귀신 따위가 저희를 위협하게 둘 수는 없죠!"

"너…."

'그…래도 일단 뒤에 누군가 있으니 안심은 되네. 칫, 하필 저 남자라는 게 문제지만….'

어쨌건 회귀자는 나를 뒤에 두고는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칠색안 중 세 번째, 금안.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화안금정(火眼金睛). 저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야 귀신도 무섭지 않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다. 옆에서 지켜보며 팝콘을 뜯는 것뿐.

아, 응원이라도 해줄까?

"화이팅! 귀신 따위는 죽은 뒤 생기는 마력의 잔재일 뿐이에요! 무서워하지 말고 갑시다! 셰이 교육생의 검이라면 귀신도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조용히 좀 해줄래? 시끄러워서 소리를 못 듣겠잖아."

"어차피 그 삐까번쩍한 눈으로만 보고 있잖아요. 시각에 집중하세요."

"소리도 듣고 있거든?"

회귀자는 찬찬히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더불어 조금 안쪽에 있는 선반에 달린 창고까지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보여. 아무것도."

"에이. 뭐야.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럴 리 없어. 내 감에 의하면, 분명 뭐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보통 진짜로 뭐가 있기 마련이더라고."

그 감이라는 거 영 미덥지가 않은데. 내 허세를 간파하지 못했잖아.

어쨌건 그 감 덕분에 살아남은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번쩍번쩍거리는 눈으로도 안 보인다면 없다고 봐도 되겠죠."

"이상한데…."

"단념 좀 해요. 이 쪼끄만 식당에는 더 숨을 곳도 없어요. 테이블 두 개짜리 식당에 손바닥만한 창고가 전부인데 더 어디를 뒤지시려고요? 상대가 벽을 통과할 수 있다면 모를까."

"벽?"

당연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인데, 회귀자는 내 말을 듣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벽. 그곳이 있었지. 군국의 콘크리트는 두꺼워. 저 안쪽에 숨어있다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거야."

음모론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회귀자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저기. 그래서 어쩌려고요? 벽을 부수기라도 하게요? 그건 기물파손입니다만."

"부수지는 않을게."

'베어버리기만 할뿐.'

고개를 치켜든 회귀자가 손가락을 들어 자기 눈을 찔렀다.

칠색안 중 사색, 녹안.

불길한 녹색 안광을 가진 이 눈동자는 물체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금속, 그중에서도 특히 납은 꿰뚫어 보기 힘들지만.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시야 한구석을 새카맣게 차지한다는 뜻. 따라서 금속을 찾아내기에는 대단히 유리했다.

나는 독심술로 회귀자의 시야를 훔쳐보았다.

검고 흰 시야가 보인다. 세상은 얇은 실을 몇 번이고 덧그려서 만든 것처럼 어둡고 밝았다. 꿰뚫는 시야는 물체의 내부까지 볼 수 있었는데, 회귀자의 시선이 나에게 닿을 때 내 몸속에 있는 흰 뼈가 보였다. 알몸을 보이는 건 부끄럽지만 피부까지 벗겨내면 아무런 수치심이 들지 않으니, 참 묘하다.

회귀자의 시선이 벽으로 향했다. 콘크리트 벽은 흰 마분지처럼 보였고 그 안에 박힌 그물 모양의 철골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회귀자는 천천히 벽을 훑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벽 한 켠에, 자그마한 인형 같은 실루엣이 있었다. 누가 보면 콘크리트를 만들 때 인형을 실수로 집어넣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인형의 정체는.

"찾았다. 아직도 남아있었구나?"

군국 마도 골렘, 소형 모델이었다.

회귀자가 머리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천앵이 손에 잡힌다. 그 순간 이미 회귀자의 검은 출수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참격이 벽을 얇게 포를 떴다. 고목의 껍질처럼 갈라진 콘크리트가 두루마기가 되어 동그랗게 풀리더니, 끄트머리부터 흙먼지로 화했다. 드러난 공백.

그곳에서 회귀자는 얇은 검의 끝으로 마도골렘을 꿴 채 그것을 끄집어냈다. 골렘의 기체가 경련했다.

『파괴 행위를 멈춰달라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골렘에게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탄탈로스에 처음 내려왔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에이비 대위였나. 군국의 통신병. 감정이 없는 군국의 나팔수.

그 요청에 회귀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쥐새끼처럼 숨어서 나를 훔쳐보기 전에나 가능한 요구지."

『귀하의 파괴적이고 민감한 성향을 고려하면, 본 개체가 미리 나섰어도 파괴되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또한, 본 개체는 귀하가 근처에 있다 판단한 경우 작동을 정지했습니다. 귀하를 훔쳐보지 않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맞아. 맞아. 네 판단도, 요구도 다 맞아. 역시 군국 답네. 언제나 합리적이지. 그러니까."

회귀자는 다시금 검을 치켜올렸다. 검끝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회로의 일부가 타오르고, 골렘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지지직거렸다.

"부술게. 잘 가, 안녕. 벽 안에 숨은 건 좀 참신했어."

『파괴 행위를 당장 중단하십시오. 통신의 단절은 비효율을 유발합니다.』

"헤에. 다급하네. 이 골렘도 슬슬 마지막인가 봐? 하긴. 몇 개가 더 있어도 의미가 없겠지. 이제부터 나는 녹안을 발동한 채 모든 벽을 탐색할 거니까."

골렘을 괴롭히는 회귀자는 오랜만에 꽤 즐거워 보였다.

골렘이라 생각을 읽을 수 없었구나. 왠지. 휴, 다행이다. 귀신은 아니고 골렘이었잖아. 생각을 읽지 못한다는 점에서 귀신만큼이나 껄끄러운 상대지만 회귀자가 파괴해줄 테니까 상관은 없고.

가만히 지켜만 보아야겠다. 하고 느긋이 있던 순간이었다.

『반복해서 요구합니다. 파괴행위를 당장 중단하십시오. 귀하의 행위 때문에 정보전달 및 배급과 관련한 내용 전파가 불가능해집니다. 반복해서 요구합니다….』

배급이라. 문득 들린 한 마디가 나를 자극했다.

이곳에 갇힌 이상, 언젠가 물자에 한계가 온다. 지금처럼 아지가 음식을 멋대로 집어먹다가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날 것이다.

온갖 보물을 갖고 있는 회귀자면 또 모르지만, 나에게는 배급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니 골렘 파괴되면 안 되잖아!

나는 급히 회귀자의 뒤로 다가갔다.

"반복, 나는 참 싫어하는 단어야. 하지만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지."

내가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회귀자는 희열에 휩싸인 채 골렘 괴롭히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골렘을 파괴한다고 네 본체가 어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군국이 조금이나마 곤란해진다면 그걸로 된 거야."

『경고합니다. 적대 행위는….』

"안녕."

퉁.

천앵을 살짝 튕기자 조그만 골렘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회귀자는 천앵을 납도하여, 곧이어 폭풍처럼 휘몰아칠 참격을 준비했다. 한껏 웅크린 자세에서 압축된 힘이 솟구치기 직전이었다.

저 칼에 찔릴까 봐 사각으로 다가간 내가 회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기다려보세요!"

그렇게 회귀자의 어깨에 내 손이 닿았을 때였다.

내 시야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나는 미처 반응할 새가 없이 무언가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거대한 것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아니, 거꾸로다. 세상이 뒤집히며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솟구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였다.

천반경天反境. 반反.

하늘뒤집기.

어라?

반격기?

심지어 생각조차 거치지 않은, 몸이 기억하는 수준의 반격기라고?

라는 것을 읽었을 때는, 내 몸은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EP.21 진실은 언제나 하나

내 등이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면 콘크리트 바닥이 내 등으로 떨어졌던지. 사실 별 차이는 없다. 더럽게 아프다는 사실은 똑같으니까.

펑! 하고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혹여나 누군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인간 가죽으로 만든 북소리는 어떨까 궁금해한다면 지금 내 등에서 난 소리를 들으면 된다. 내 등이 바로 인간 가죽 북이었다.

비명이 나오지 않은 건 허파에 있는 공기가 한순간에 다 빠져나와 소리를 만들 호흡이 없어서. 나는 침묵으로 고통을 다스리며 가만히 있었다.

나를 내던진 회귀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스로 뛰어서 충격을 줄였어.'

너희들은 이걸 충격을 줄였다고 하니? 미쳤구나. 우리끼리 이런 공격 했으면 말이야.

'와, 존나 개쩔게 들어갔다! 나 유도에 재능이 좀 있는 듯?'

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잘못 떨어졌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스스로 뛰기는. 뭔가 낌새를 읽은 순간 너무 놀라 튀어올랐고, 그대로 메쳐졌을 뿐이다.

'내 천반경은 반격에 특화된 기공. 몸에 새긴 동작이라면, 생각하기도 전 찰나의 딜레이도 없이 발동해. 그것을 보고 같이 뛴 걸 보면 반응은 좋아. 그런데….'

신체에 녹아든 반격기라니. 이런 건 반칙이잖아. 완벽한 사각을 노리고 들어갔는데, 건드린 순간 그림처럼 완벽한 업어치기 자세가 나왔다. 교본에 나올 법한 이상적인 동작이라 도리어 어디가 잘못 접히지는 않았지만, 등을 때리는 충격이 너무 강력해서 움직이기가 힘들다.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등을 파고든 것 같다.

'반응이 좋은 것 치고는, 손맛이… 별로인데?'

이래서 인간을 쥐어패면서 살아온 이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된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떻게 손맛이야? 내가 횟감이라도 되나. 기분 더럽게.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발 치워요. 사람을 업어치기 했으면 됐지, 밟으려고까지 합니까."

"아."

회귀자는 내 쇄골을 밟고 있던 발을 치웠다. 나는 누운 채로 셔츠에 묻은 신발 자국을 툭툭 털어냈다.

"네 탓이야. 거기서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어떻게 해?"

"참나. 몸도 귀하셔. 어깨 좀 붙잡는다고 다 업어치면 일상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뭣도 모르는 사람이 나의 어깨를 탁탁 잡아대는 세상이라면 일상 따위는 필요없지."

"우리가 남입니까? 서운하게."

"…그럼 남이지. 아니면 뭔데?"

"교육생과 교관이죠.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했거늘, 업어 메친 다음 그냥 몸뚱아리를 밟네요. 와. 서러워서 살겠나."

충격이 다 해소되지 않아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나는 계속 누워있는 채로 한탄했다.

'무방비하게 다가온 게 잘못이라고 하기에…. 여기가 전쟁터는 아니긴 하지. 확실히, 선공을 한 건 내쪽이야.'

아주 조금이지만, 회귀자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회귀자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뭐든. 나를 방해한 이상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지."

이게 미안해하는 사람의 말이냐?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거 봐. 미치겠다. 내가 독심술사가 아니었다면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사실 독심술사인데도 복장이 터질 것 같다.

"이게 원통함인가요? 이게 억울함인가요? 칼로 벽을 부수고 골렘을 베어내려고 하는 시점에서 누군가 제지할 거라는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은 모양이죠?"

회귀자를 상대로 할 때 필요한 건 첫째도 정론, 둘째도 정론이다. 회귀자는 정론에 꽤 약한 경향이 있다. 도덕이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치에 맞는 말을 하면 일단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교관이었지. 군국의 눈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이 남자를 가만히 두고 골렘을 처리하려고 했네….'

알아들었다면 다행이다. 후우.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

'그냥 이 기회에 이 남자도 처리해버릴까? 왠지,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취소다. 같은 인간이라고 딱히 서로 말이 통하는 건 아닌가 보다.

이럴 때는 화제를 돌려야지. 머리 맡에 있던 소형 마도 골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에이비 대위."

『에이비 대위입니다. 현 상황 파악했습니다. 귀하의 행동에 감사를.』

"아니, 됐으니까 지금은 닥치고 있어. 부서지기 싫으면."

골렘이 입을 열면 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나는 일부러 약간 윽박지르듯 골렘의 말을 끊었다. 다행스럽게도 에이비 대위는 눈치가 빨랐다. 이 무저갱에서 자신을 도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누운 채로 골렘을 들어올렸다. 금속으로 된 몸체를 가진 골렘은 작은 인형 정도의 크기였지만 인형답지 않게 묵직했다. 얇은 금속 팔과 다리가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린다.

"셰이 교육생."

목소리를 깔았다. 회귀자가 살짝 이채를 느낄 때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말했다.

"셰이 교육생은 벽을 잘라내고 골렘을 망가뜨렸을뿐더러 저에게 폭력을 휘둘렀죠?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데?"

"좋아요. 뭐 벽은 이미 망가졌고, 골렘도 대부분 부서졌고. 제 몸이야 원래 굴리려고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 골렘에 대한 감정도 일단 내려놔요."

"뭐…."

'어차피 교관이 있는 이상, 골렘이 있든 없든 별 차이 없겠지. 둘 다 군국의 개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남겨두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고.'

짧은 시간 동안 판단을 끝난 회귀자는 검을 회수했다.

"저게 나를 감시하지만 않으면 돼."

"하라고 해도 안 해요. 아까 보셨잖아요. 식당에 숨어있던 거. 셰이 교육생을 감시할 생각이었다면, 식당에 몸을 숨기지는 않았겠죠. 남들 다 부족한 보급물자로 끼니를 때울 때 혼자 사식 까먹는 부르주아는 식당에 나타나지를 않으니."

"으음."

"알았으면 이만 가세요."

"여기서 뭐하려고?"

"골렘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보급 요청이나 해야죠. 누가 밤 중에 음식을 훔쳐먹어서 슬슬 통조림이 바닥을 보이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그래…."

'저 남자와 싸우지 않겠다고 결정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정보 유출은 피할 수 없어. 일단 두고 보자. 오히려 역으로 저 남자에 대한 정보를 캐낼 기회일 수도.'

고개를 끄덕인 회귀자는 골렘을 향해 한 번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혹 피를 보급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 티르칸쟈카가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피가 조금 부족한가 봐."

"확인해보고 연락드리죠."

그딴 걸 누가 보급해.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

"살펴 가세요."

회귀자는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두컴컴한 식당에는 이제 오직 나와 골렘만 남게 되었….

잠깐.

"셰이 교육생. 돌아간다면서요?"

흠칫. 벽 너머에서 당황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회귀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 금방 돌아가려고 했어. 잠깐 뭐 좀 하느라."

어딜 엿들으려고. 나는 문쪽을 빤히 노려보았다. 회귀자는 큼직한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나는 길게 신음하고는, 다시 골렘을 들어올렸다.

"에이비 대위. 오랜만이야."

『귀하의 생존을 확인합니다. 용케 살아계셨….』

"잠깐만."

골렘의 입을 막은 나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목이야. 바닥을 친 건 등인데 왜 목이 결리냐.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목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허공 어느 부분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 먹을 게 있다고 다시 오셨습니까? 방에 간다고 했으면 빨리 돌아가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새카만 어둠. 그곳에서 작은 일렁임이 일었다. 은신술을 쓰고 있던 회귀자는 당황했는지 숨도 멈추고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를… 눈치챘어? 어둠 속에서는 일렁거림조차 보이지 않는 이 암흑의 장막을 꿰뚫어보았다고? 아, 아니야. 설마. 저번에는 눈치채지 못했잖아.'

"장난하지 마시고요. 너무 속보이잖습니까. 누가 복도를 그렇게 소리나게 걸어요. 나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윽. 내가 너무 속 보이게 행동했나? 하지만 저 남자도 근거는 없을 거야. 그냥 찔러보는 거겠지. 여기서는 일단 모른 척….'

"아! 가라고!"

나는 탁자 위에 있던 냄비를 냅다 던졌다. 회귀자는 냄비에 맞기 직전 급히 몸을 숙였다. 빗나간 냄비가 깡깡 소리를 내며 식당 바닥을 두둘겼다.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은신술이 잠깐 풀렸고, 회귀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회귀자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으, 으으."

"셰이 교육생. 당신은 분명 마도 골렘보고 자기를 훔쳐보았다며 뭐라 하지 않았습니까? 똑같은 상황이네요. 은신술까지 써가며 남의 말을 엿듣는 건 악취미입니다."

"아, 알아. 그냥…."

"알았어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궁금할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으, 응…."

'제길, 제길, 제길! 처음부터 너무 속 보이게 행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까 느껴진 손맛 때문에 상대방을 너무 무시했어!'

회귀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뛰쳐나갔다. 도리어 화를 내어 나를 죽이려들지 않을까 했는데, 완벽주의 때문인지 자기 실수에는 자책감이 큰 편이었다. 회귀자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복도를 내달렸다.

가만히 보고 있던 골렘이 말을 꺼냈다.

『귀하에게도 능력이 있었군요.』

"내가 어떻게 벌어먹고 살았는지 대충 알잖아? 심리전이지, 뭐."

『나름 잘 생존하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뭐? 다행?"

『다음 보급품 목록에 노역자를 추가할 예정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 없다고 판단됩니다. 인적자원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아. 비용적인 측면에서 말이냐."

회귀자도 회귀자지만 군국도 참 정 붙이기 힘든 놈들만 모았다. 내가 죽을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내려보낸 거잖아.

"여기 있으면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알지? 그럼 설명할 필요 없겠네."

『부정. 본관은 교육생 '셰이'를 피해 본 개체를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있던 일 외에는 관찰하지 못했습니다.』

"아하. 그래?"

좋은 정보다. 나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는 뜻이니. 이걸 조건으로 더 뜯어낼 수 있겠다.

『귀하가 특이사항을 보고해주신다면, 본관은 귀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겠습니다.』

심지어 이해도 빠르기까지. 자기 처지와 나의 의도를 읽고는 알아서 교환조건을 제시한다. 일처리가 빠른 점은 마음에 들어.

『특이사항이나 요구사항이 있으십니까?』

"하나 있어. 내가…."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남아있어.'

아, 잠깐만. 또 이상한 생각이 들리는데

설마. 같은 짓을 두 번 당하면 바보고, 세 번 당하면 역사다. 회귀자는 기어코 역사에 이름을 한 줄 남길 생각인가.

회귀자는 1층에 있는 수감실을 멋대로 개조해서 살고 있다. 방에 돌아가서 이쪽에 관심을 끄고 있다면 생각이 읽히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이 생각이 들리는 이유는.

'7회차 때였나. 귀 좋은 수인들로부터 멀리 듣기 기술을 배웠지. 그때는 사방의 소음에 파묻혀서 쓸데없는 기술이라 여기고 폐기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쓸만하겠어. 사방이 고요하니 잡음이 섞여 들어오지 않을 거야. 자, 어디….'

"잠깐만."

나는 아까 던진 냄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찬장을 뒤져 다른 냄비도 하나 꺼냈다. 좋아, 깨진 부분 없고, 재질도 좋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며 둘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비록 수인의 귀는 듣고 있지 않지만, 바로 아래층에서 천장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으면…. 충분히 분간할 수 있.'

회귀자의 생각이 들린 순간 냄비를 힘껏 부딪쳤다.

깡!

'!!!!!!!'

둥그런 구조의 강철은 그 자체로 훌륭한 울림통이다. 심지어 냄비에 쓰이는 건 물 한 방울 새어나가지 않도록 치밀하게 단조되고 코팅까지 끝마친 연금 철. 이것들을 전력을 다해 부딪히자, 탄탈로스 전역에 들릴 법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는 복도를 내달리고 건물을 울렸다. 종소리와 비견될 정도로 장엄한 울림. 무저갱 속에서 메아리가 길게 들린다. 나는 은은한 메아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 아으. 아.'

소리없는 아우성이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콘크리트를 향해 말했다.

"셰이 교육생."

'아아, 설마.'

"무슨 소음인지 물어보러 오지도 않네요. 혹시 엿듣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믿겠습니다."

'….'

우냐? 아니, 설마. 그럴 리 없겠지. 울고 싶은 마음이랑 우는 거랑은 별개니까. 눈물이 없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흐느끼곤 한다. 서글픔과 부끄러움에 울고 싶을 정도로 격한 감정을 느끼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아깝네. 우는 걸 직접 봤다면 진짜 세계가 끝날 때까지 놀려줄 수 있는데.

어쨌든.

"이제 방해꾼도 없으니까"

『그가 엿듣고 있었습니까?』

"아마 그랬을걸."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습니까?』

"심리전이라니까. 저런 사람은 극한의 이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보상심리가 강해서, 한 번 당해도 이번에는 아니겠지 하면서 끝까지 따라오는 타입이야.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거짓말이다. 생각을 읽었다. 하지만 뒤늦게 갖다붙인 이유라도, 정답이라면 옳은 설명이 되는 법.

"그리고 뭐, 실패해서 잃을 게 없잖아. 리스크는 0에 수렴하고 이득은 충분하지."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더 엿들을 가능성은?』

"솔직히 말할까? 지금부터는 엿들어도 손해야. 포기도 제때 해야지. 도대체 얼마나 더 추해져야 해?"

'......….'

회귀자의 생각이 끊겼다. 아, 괜찮냐, 이거. 거의 기절 수준의 끊어짐인데.

너무했나 싶지만, 아직 내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야. 원래 정신적인 고통 같은 건 육체의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어쨌든 성공적으로 회귀자를 떨쳐낸 나는 남은 용건을 다 말하기로 했다.

"이 골렘, 인간의 모습을 본땄네. 감각을 공유하는 타입이지? 네 몸과 싱크로하여 조종하는."

『긍정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골렘의 몸체를 톡톡 두들겼다. 골렘이 반응하자, 나는 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넓적한 골렘의 몸체에다가 글씨를 썼다. 골렘의 배와 가슴에서 내 손가락이 일필휘지로 움직였다.

-중요한 내용은 글씨로 쓸 테니까 알아들어. 대답은 고개만 끄덕이고.

골렘의 몸체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거야 없지.

이럴 거면 왜 냄비를 부딪쳤냐 싶지만, 회귀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았으니 만족한다.

"계속 식당에 있었다고 했지?"

나는 평범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척, 골렘의 몸체에 대고 글씨를 썼다.

-이곳에서 나는 교관 행세를 하고 있어.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지.

골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입에 달린 마이크로 대답했다.

『긍정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아지가 같이 식사하는 모습은 다 보았겠네."

-그러니까 너도 내가 교관인 척 대해줘.

이번에 골렘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눈을 부라리자, 골렘은 또박또박 말했다.

『다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대로, 본 개체는 극도의 위협 속에 있었기에 활동하는 낮 동안에는 간헐적으로 작동을 정지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경고합니다. 사칭 및 허위보고는 중죄입니다.』

말 끄트머리에 덧붙이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건가.

하긴 교관 사칭은 군국이라면 결코 허용하지 않을 범죄이긴 하지. 이 상황이 되어서도 딱딱하구나. 군국 통신병.

"그러면 밤 중에는 계속 작동하고 있었겠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를 비호할 이유가 없어지는데. 그럴 권리도 없어지고. 네가 나를 돕지 않으면 나는 너를 데리고 다닐 수 없어.

골렘이 잠깐 작동을 멈추었다. 아마도 이곳을 감시한다는 임무와, 교관 사칭이라는 범죄에 협력해야 한다는 점이 충돌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골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더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긍정하겠습니다.』

좋아. 이걸로 일단 일단락 되었고, 이제 군국 당국과 탄탈로스를 잇는 창구 역할을 하며 내 이득을 챙기면 된다.

업어치기 당한 보람이 있네. 더럽게 아프지만 얻는 건 있었어.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고민하던 골렘은, 조금은 주저하듯 말했다.

『본 개체는 감각 공유를 하고 있기에. 접촉할 때 주의하기를 요구합니다.』

무슨 말이지?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서 무슨 말뜻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인가? 어조가 조금 흔들렸던 거 같은데.

나는 다시 골렘을 들고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배와 가슴에다가 글자를 써나갔다.

-알았어.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글씨로 쓰면 되는 거지?

『읏. 전혀 이해를….』

어라. 이상한 반응인데. 골렘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묘하게 부들부들 떨고, 딱히 말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한다.

그때 골렘이 내 손을 떨쳐냈다. 인형 크기의 소형 골렘이라지만 군국 마도 골렘. 강철로 만들어진 팔다리는 내 손 정도는 밀어낼 수 있었다.

『…됐습니다.』

뭐야? 무슨 반응이지? 알 수가 없네.

골렘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게 이토록 아쉬울지는 몰랐다. 이게 사람을 대하면 생각을 다 읽고 우위에 설 수가 있는데, 하필 원격조종 골렘이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심지어 표정도 없어서 어조만으로 짐작해야하고.

평범한 일반인은 다 이러고 사는 거야? 생각보다 불편하네. 팔다리 하나 떼어놓고 사는 것 같잖아.

…어, 잠깐만.

밤에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고 했지?

그러면 누가 음식을 몰래 훔쳐먹었는지도 알겠네?

딱 걸렸다.

EP.22 착한 개

잠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생명은 이토록 무방비하게, 외부의 자극을 차단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향해 침잠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허나 잠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림자를 보고 형체를 짐작하듯 잠의 부재를 더듬어서 대략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심사가 꼬이고 날카로운 바늘처럼 예민해지며, 쉬이 피곤해지고 의식이 위태롭게 점멸한다.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도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는 오만상을 찌푸리니, 분명 잠이란 정신적인 무언가를 채우는 행위이리라.

다만, 우리가 정신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잠의 역할 역시 이해할 수 없으리.

그저 무의식 속에서 유영하며, 무언가가 나를 깨우기를 기다릴 뿐….

그때 무언가가 나의 다리를 잡아챘다. 나는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있어도 상관없다. 몸이 땅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감각은, 잠은 물론이거와 모든 종류의 아늑함으로부터 나를 박탈한다. 대지모신께서 나를 저버렸다는 끔찍한 기분이 내 영혼을 몰아세운다.

대지모신의 저주란 별다른 게 아니다. 그저 대지모께서 받치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나는 떨어지면서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리고.

콰당!

찰나. 1초조차도 절반을 채우지 못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충격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황급히 일어섰다.

"허억. 허억. 허억."

경계자세를 취하며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떨어진 곳은 낮은 군용 침대로부터 50cm 밑. 잠을 자던 중 무언가가 내 발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침대에서 떨어지며 잠에서 깨버린 것이었다.

무엇이 나를 잡아당겼는지 알아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멍."

아지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짧게 짖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저번에 음식 훔쳐먹은 일 때문에 다툰 뒤로, 아직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잠은 깨워준 걸 보니, 내가 아주 싫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구나. 이상한 말을 했다.

개는 태생부터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아지야."

"멍."

아지는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내가 부르면 전신이 이쪽으로 열렸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시선만 보내고 있다.

하지만 뭐, 개는 뭘 해도 개지.

"식당으로 와."

꼬리가 움직인다. 귀가 쫑긋 선다.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비언어적 표현을 이렇게 확실하게 해내는 존재가 또 있지는 않을 테니.

"멍? 밥?"

"그래. 오늘 아주 중요한 요리가 있으니까."

"멍! 밥!"

밥이라는 말에 바로 기분이 좋아져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뛴다. 하하.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을 텐데.

오늘은 바로 너를 요리할 날이니까.

"나 씻고 갈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려."

"너, 너무 자주 씻어! 멍! 털 다 빠져!"

"나 아직 탈모 아니거든?! 네가 너무 안 씻는 거겠지! 됐고, 빨리 가서 아래층에서 걔도 데리고 와! 너랑 나 말고, 걔!"

"아래? 멍! 알았어!"

아지는 근처에 있는 창문을 깨부수고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아니, 아래층으로 가라고 꼭 최단경로를 선택할 필요는.

어쨌건 아지는 내 말을 알아듣고 회귀자를 부르러 갔다.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냐고? 아지에게 있어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나, 너, 걔로 세 개뿐이다. 참고로 '걔'라는 슬롯에는 두 명 이상 넣을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3인칭인 셈이다.

이 탄탈로스에 살아있는 인간이 둘이라서 다행이다. 한 명만 더 있어 봐. 엄청나게 헷갈렸겠지.

"자. 어디. 준비해볼까?"

나는 휘파람을 불며 배급된 물로 간단히 씻었다. 오늘, 지긋지긋하게도 나를 괴롭혔던 탄탈로스 스튜도둑 강아지와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이다.

의복 패킷을 착용하고 식당으로 향하니, 아지는 벌써 회귀자를 데려온 채였다. 둘은 완전히 대척되는 모습이었다. 밥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아지와는 다르게 회귀자는 퀭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곧 울컥하고는 소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왜 불러서….'

회귀자는 어젯밤의 치욕이 떠올렸다. 엿들으려고 했다 완벽하게 들키고, 부끄러움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운 것 같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었다는 건 아니고, 서러움과 자기혐오로 범벅이 되어 마음속으로 운 것 같다. 나에게 은신을 들킨 일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보다.

죽어도 회귀하니까 좀 대충대충 산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예민하고 완벽주의인 모양이었다.

'제길, 제길. 제길! 첫 시도가 너무 속보였잖아! 거기서 들키니까 상대가 경계하지! 셰이, 너는 언제쯤 그렇게 이득 보려는 생각을 버릴래? 한 번 한 번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아니, 그만 자책해. 어젯밤 내내 그 생각만 한 거야? 잠도 안 자고?

'상대를 너무 무시했던 것도 문제야. 저번에 내 은신술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저 남자의 능력을 그 정도로 단정해버렸어. 방심했을 때 한 번 안 들켰다고 다음에도 안 들키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미치겠네. 나를 죽이려 들 때도 곤란했지만, 자기 자신을 죽이려 들 것처럼 구니 더욱 곤란했다. 거기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도 않았다.

아이구. 별 헛짓거리를 다 한다. 분위기나 풀어줄까.

"셰이 교육생, 어젯밤에 잘 못 주무셨나요? 눈가가 퀭하네요."

회귀자는 무어라 웅얼거릴 뿐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에게 말 걸지 말라는 의사표시 같았지만, 어림도 없지.

독심술.

'치, 잇. 자기가 못 자게 해놓고 능청은….'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어차피 나밖에 못 들을 테니 오해할 리 없는 게 다행이다.

어지간히 분했나 보구나, 회귀자.

"어디까지 들으셨나요?"

"…뭐, 뭐가."

"어제 내쳤는데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와서 제가 부메랑이라도 던지는 줄 알았잖아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좀 말아주세요."

"끄윽…!"

평소라면 화를 내거나 검을 치켜들었을 회귀자는 현재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세계에는 묘한 보존법칙이 있어서 회귀자의 자존감이 낮아진 만큼 내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재미있네.

"멍! 밥!"

조금 더 놀려줄까 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지가 나를 보채고 있으니까.

"자, 아지야. 할 말이 있으니 잠깐 기다려 봐."

"싫어! 멍! 밥 먹으면서 해!"

"이게 진짜."

너는 어디서 자존감 안 낮아져 오니? 개는 풀 죽을 일이 없어?

"험험. 어쨌든. 제가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오랫동안 탄탈로스를 혼란에 빠뜨려온 식량도둑에 대한 단서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멍!"

아지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밥을 보챘다. 이 가증스러운 녀석.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그대로인가 보자.

나는 식당 한구석으로 걸어가, 거기에 놓아두었던 인형 크기의 골렘을 꺼내 들었다. 작동은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에 호응하듯 골렘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접속해있구나. 나는 골렘을 들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증인으로, 오늘은 군국 통신병이자 식당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골렘 에이비 대위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에이비 대위! 인사하세요!"

『….』

"네에, 반갑습니다!"

골렘을 보고도 회귀자와 아지의 태도는 별 달라진 바가 없었다. 회귀자야 어제 그냥 두겠다 결론을 내린 뒤로 신경 끄고 있는 중이었고, 아지는 인간이 아닌 것에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래서야 소개가 안 되겠구만. 소싯적에 꼬마 아이들에게 인형극을 해주었던 솜씨 좀 발휘해볼까.

나는 골렘의 겨드랑이를 잡고는 인형극처럼 뒤뚱뒤뚱 움직였다. 아지가 그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는 사이, 입술을 꾹 다물고 복화술을 써서 말을 걸었다.

"안녕, 아지야?"

"멍?"

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골렘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목소리는 이쪽에서 나는데 골렘이 손을 흔들고 있으니 뭔가 싶겠지.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는 골렘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복화술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에이비라고 해!"

"멍멍? 인간?"

"그래! 나는 인간이야. 지금은 이 속에 갇혔지만! 너는 강아지지?"

"멍! 맞아! 나, 강아지야!"

"너 참 착하게 생겼다!"

"고마워! 너는 참 딱딱해 보여!"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를 한 번 핥아줄래?"

"알았어!"

『…그만하십시오.』

아지가 코를 들이대자, 골렘이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내 손을 툭 쳐낸 골렘은 두 발로 서서 아지의 얼굴을 피했다.

골렘의 스피커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국에서는 감시자가 교육생과 직접 마주하는 상황을 가급적 삼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만 특수 조항 2항에 의거, 현 사태에 기해 보안 레벨 2 이하의 규정을 무시합니다.』

골렘은 그렇게 선언한 다음 두 다리로 똑바로 일어섰다. 생각보다 잘 만들었는지, 아니면 골렘에 익숙한 건지. 인간 사이즈와는 상이한 소형 모델인데도 싱크로를 이어나가고 있다.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본관은 탄탈로스와 군국 당국 간의 통신을 맡고 있으며, 본 개체를 파괴할 시 의사소통 및 귀 교육생의 평가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합니다.』

독심술이 없더라도, 그것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명백했다. 여기서 골렘에게 악의를 갖고 파괴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으니.

회귀자는 탁자 위에 선 골렘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불이익 같은 건 상관없어. 저 남자와 한 말이 있으니, 네가 식당에서 기어 나와 이곳저곳을 들쑤시지만 않는다면 딱히 건드리지 않을게."

『탄탈로스의 감시와 감독, 관찰은 본관의 의무입니다.』

"그래? 나는 감시와 도청을 일삼는 기기는 부수지 않고 못 견뎌서 말이야."

『가끔 그러한 종류의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극도로 민감한 부류가. 군병원에서는 그러한 질환을 가진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하고 있으니, 방문하여 치료받기를 권장합니다.』

"…어쭈."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귀 교육생이 군병원에 방문할 수는 없겠죠. 귀 교육생의 의사는 확인했습니다. 보안레벨 2 이하의 규정을 무시, 본 개체의 안전을 위해 관찰 임무는 잠시 유보하겠습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회귀자가 먼저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 다 봤으면 나는 간다."

어? 바로? 나는 떠나는 회귀자를 붙잡았다.

"아, 잠깐만요! 이번 일의 참관인이 되어주셔야죠!"

"관심 없어. 너나 저 골렘 잘 간수해. 만일 저 골렘이 식당 밖으로 혼자 나왔다간, 나도 모르게 부숴버릴 수 있으니까."

회귀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기운이 없는 상황에서도 군국을 향한 증오는 여전한 듯 싶었다.

그동안 말뜻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아지는 맑은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멍. 얘, 뭐래?"

얘는 골렘을 말하는 거겠지. 아지는 골렘이 하는 딱딱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기를 때리지 말래. 깨물지도 말래. 아프대."

"멍! 나, 안 물어! 나는 착한 강아지인걸!"

"그래, 그래. 나도 알지. 너는 착해."

"아우우! 나, 착해! 착해!"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그 머리를 꾹 잡고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젯밤, 냄비 속에 있던 그 고기 스튜를 다 처먹은 나쁜 강아지는 어떤 강아지일까?"

"머, 멍?"

EP.23 나쁜 개

어제 회귀자를 향해 냄비를 내던졌을 때, 분명 스튜로 가득했어야 할 그 냄비의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 냄비 안에 든 스튜를 다 먹어버렸던 것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둘. 아지거나, 아니면 식당에 숨어있는 어떤 존재거나.

그런데 식당에 숨어있던 존재는 골렘이었고, 골렘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용의자 한 명이 사라졌으니, 범인이 누군지는 이제 명약관화라 할 수 있다.

나의 추궁을 받은 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리쳤다. 어떠냐. 화들짝 놀랐지?

"밥, 다 먹었어?! 너 혼자서?!"

"네가 먹었잖아!"

"아니야! 멍! 나, 안 먹어! 배고프지만 기다려! 같이 먹어!"

내 매서운 추궁에도 불구하고 아지는 끝까지 부정했다. 범인이 확실해진 지금 상황에서도 한사코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에 내 냉철한 이성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진짜 아닌가? 아니면 개라서 불리한 사실을 그냥 잊어버리고 고집을 피우는 건가? 독심술이 안 통하니 진짜로 모르겠다. 사람이었다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바로 파악했을 텐데.

하지만 나 말고 다른 비독심술사들은 진실을 몰라도 아득바득 살아간다. 누군가 거짓말을 할 때 증거니 증인이니 찾아서 나름대로 정확한 결론을 내린다. 오늘만은 그들의 방법을 따르자.

"어쨌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에이비 대위! 어젯밤, 식당에서 계속 있었습니까?"

『긍정. 본관은 어제 4시경부터 본 개체에 접속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 냄비에 담긴 스튜를 훔쳐먹은 사람도 보았습니까?"

『긍정.』

"좋아요. 확인 들어갑니다. 짠, 짜라잔."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골렘의 겨드랑이를 잡아들었다. 왠지 골렘의 마이크에서 하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온 것 같다.

뒤쪽에서 골렘을 소중히 든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에이비 대위. 자, 여기서 골라주세요. 어젯밤,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기어나와 냄비에 담긴 스튜를 몰래 먹은 범인을!"

자, 과연. 골렘의 손가락은 누구를 가리킬까. 뭐, 가리킬 방향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약 하나 정도?

골렘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나는 그 차가운 강철이 보여줄 미래를 기대하며 바라보았고.

골렘의 손은 내 쪽을 가리켰다.

어라?

"나였어?!"

세상에. 추리물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반전이! 진짜 나라고? 내 무의식이 저지른 짓이라고?

『부정. 귀하를 가리킨 게 아닙니다.』

골렘이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을 다시 들었다. 지금 보니, 골렘의 손가락은 나를 살짝 비껴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피해도 따라오지 않았다.

뭔가 싶어서 수맥을 찾듯 골렘의 손가락을 따라 조금씩 걸어갔다. 그때마다 골렘이 가리키는 방향이 미세하게 바뀐다. 그때그때 방향을 수정하며 더듬더듬 찾아가자, 이윽고 그 끝에서 촘촘하게 구멍이 뚫린 철 마개와 그 너머에 있는 배수구가 나타났다. 남은 음식 짬처리를 할 때 물을 흘려보내는 배수구였다.

사람이 들어가기는 좀 좁아보이는데.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골렘을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음식을 훔쳐먹은 존재가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쥐새끼라도 안에 있는 겁니까?"

『우문입니다. 탄탈로스에는 그 어떤 땅밑짐승이나 벌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이곳은 곰팡이도 없지. 빌어먹을…."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아 대지모의 일꾼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땅. 그 탓에 당연히 음식을 훔쳐먹은 것이 아지라고 확신했다. 무저갱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나나 아지, 그리고 회귀자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욕망에 약하고 멍청한 개라면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1순위로 의심했을 것이다.

더불어 나는 생각을 읽으니, 회귀자가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고. 소거법, 경험적 추정법 등 모든 단서가 아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제 3자가 범인이라니. 너무나도 의외인 결과였다.

생각해보니 저번에도 식당에서 희미하게 생각이 들려왔잖아? 그때는 무심코 넘겼으나 단서는 이미 주어진 셈이었다. 탄탈로스에 다른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데.

어쨌든, 과거는 과거. 이제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판단하는 것이다. 벌집을 들쑤시고 싶지는 않지만, 이왕 처리할 거라면 아지가 있는 지금 손 쓰는 편이 낫다. 이게 괴물이라면 나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일 테니.

위험이 앞에 있을 때 개는 인간의 오랜 친구였지.

"아지야."

"멍!"

"이 아래에 너와 내 음식을 훔쳐먹은 녀석이 있대."

"멍멍! 나빴어!"

"나빴지? 그러니까 꺼내서 혼내주자. 좀 꺼내줄래?"

내가 직접 꺼내 보기에는 무서우니 아지를 시켜야겠다. 개는 인간의 가장 훌륭한 친구니까.

아지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로 배수구를 파헤치는 대신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너, 더 나빴어! 나, 안 먹었는데! 착하게 기다렸는데, 내가 먹었다고 화냈어!"

아. 그걸 기억하고 있네. 까먹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개는 금붕어보다는 나은 기억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아지는 개의 왕.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존재. 개 따위, 내 언변으로 구워삶아 주지.

"아지야. 지금 그게 중요하니? 우리에게는 공공의 적이 있잖아. 우리 음식을 훔쳐먹은 진짜 도둑 말이야."

"멍! 나, 안 먹었어!"

"그래. 의심해서 미안해. 일단."

"멍! 나, 안 먹었어!"

"그래그래. 미안하다니까.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멍멍! 안 먹었어! 그런데 먹었다고 소리쳤어! 화냈어! 안 친해!"

"그게, 아지야."

"나빴어! 멍! 나빠!"

"…."

후우. 어쩔 수 없나.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대가를 치러야겠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가죽 공을 꺼냈다. 가죽 공은 며칠 관리 안했다고 벌써 바람이 다 빠져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왼팔을 곧게 들어올렸다. 오른쪽 손가락으로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리드미컬하게 톡톡 건드렸다. 약속된 소매틱을 이행하자 비루한 몸이 마력을 짜내 왼팔로 밀려 올려보냈다.

"설마 내가 먼저 공놀이를 제안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인간의 수치다. 하지만 기억해라, 똥개. 내가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게 아니야."

마력이 모여든다. 내 몸 전체에 퍼져있던 마력이 핏줄을 타고 왼손 손가락으로 향했다.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동시에 이 전능감의 한계가 보인다. 고작 손가락 하나 정도만 채울 수 있는, 이 조막만한 마력을 다 쓰면 전능감 역시 끝난다는 아쉬움도 절절하게 느껴진다.

나는 왜 마력이 이리 적을까. 투덜거리며 손가락을 공 안에 집어넣고는 0레벨 제식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공기를 터뜨리는 현상, 그 자체를 불러일으키는 0레벨 마도.

"파스칼."

펑 소리와 함께, 가죽이 팽팽하게 잡아 당겨지며 공이 큼직하게 부풀어 올랐다. 작은 조각을 안쪽에, 큰 조각을 바깥쪽에 기워 만든 공은 단숨에 부풀어오르면 틈으로 공기가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을 빼내고 구멍을 연금술로 봉하고는 다시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보다도 눈을 반짝이는 아지가, 책상 위에 앞발을 올려놓고는 꼬리를 맹렬히 돌리고 있었다. 가죽 공을 보고는 신이 난 것이다.

나는 가죽 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공놀이면 되니?"

"멍멍! 맛있는 밥도!"

"그래. 맛있게 해줄게."

"아우우우우! 좋아! 좋아! 너, 착해! 이제 착해!"

"자, 그러면 안에 든 걸 꺼내주라."

고개를 끄덕인 아지는 곧장 배수구로 달려가더니 개가 앞발로 땅을 파헤치듯 콱콱 집어넣었다. 몇 번 바닥을 긁은 아지는 엉덩이를 쭉 빼고 배수구 안에 머리를 반쯤 처박은 끝에 기어코 무언가를 잡아챘다.

팔꿈치 아래에서 끊어진 팔 하나.

다리 하나.

이번에는 커다란 손.

그리고 아지가 낑낑거리며 마지막으로 꺼낸 건, 팔과 다리가 하나씩만 달린 커다란 몸통이었다.

골렘보다도 단단해보이는 근육질 육체에 짧은 수염과 머리카락. 고명한 무예승처럼 보이나, 팔과 다리가 하나씩 떨어져나간 그것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면에서 선명한 근육이 돋보인다.

"우웩."

구역질이 나온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ㅇㅣㄴㄱㅏㄴ 이잖아.

단면은 깔끔하다. 비틀어진 흔적만 봐서는 커다란 거인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손발을 잡아 꺾은 듯한데, 피도 안 배어 나오고 뼈도 멀쩡하게 붙어있어서 잘 만든 인체모형인가 싶기도 하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처참한 모습인데 구릿빛 피부에는 핏자국 하나 없어서 진짜로 죽은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이 한톨도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건 확실한 것 같고.

누가 공격해서 전신을 아작 내버린 다음 배수구에 던져넣었나 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며칠은 버텼지만,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죽어간 게 아닐까.

"아이고. 어쩌다 이런 곳에서 명을 달리하셨을까…."

내가 그때 들었던 생각이 마지막 단말마였던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이 조각 난 시체를 묻어줄 생각으로 잘린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지만, 그래도 묻히는 편이 낫겠지….

내가 오른팔을 잡자, 오른팔도 마주 나를 잡았다.

어.

라?

"끄아아아악!"

너무 놀라서 오른팔을 내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붙잡은 오른손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담겨 있어서 내 손과 함께 흔들릴 뿐 떨어지지가 않았다.

미친, 잘린 팔로도 이 정도의 힘이라니? 멀쩡한 상태였다면 악력만으로도 내 팔을 우그러뜨렸겠는데.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다른쪽 손바닥을 뒤집어 숨겨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1, 연금술로 금속을 촘촘하게 짜내어 튼튼하고 탄력적인 트럼프.

그 얇은 카드를, 나를 붙잡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는다. 살짝 비트는 것으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그렇게 소지부터 중지까지 하나씩 떨쳐낸 이후, 나는 간신히 오른팔을 떼어내어 던질 수 있었다.

"허, 허억. 허억. 저게 뭐야?"

바닥에 떨어진 오른팔은 손가락만으로 바닥을 기어오려고 하다가, 결국 힘이 다했는지 멈춰 섰다. 호러를 넘어선 고어 앞에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무심하게 오른팔을 쳐다보는 골렘을 향해 물었다.

"에이비 대위. 저건 뭡니까?"

『끊어져도 움직이는 오른팔. 아마 불사종족의 것이라 추측됩니다.』

"저것도 교육생이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탈옥사건이 벌어졌을 때 다른 교육생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는데, 불사성으로 인해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정도 상처에서도 소생할 수 있다니, 평가를 한 단계 높여야겠군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줘야지! 놀랐잖아요!"

아지는 호기심을 가지고 오른팔을 톡톡 건드려보고 있다. 오른팔이 꿈틀거릴 때마다 화들짝 뒤로 물러갔다가, 다시 잠잠해지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아지를 밀어내고는 오른팔을 조심히 들고 시체의 팔꿈치 아래쪽에가 갖다 대보았다.

단면이 딱 맞아 들었지만 붙지는 않았다. 오른팔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세상에. 스스로 움직이는 오른팔이라니.

"그러니까 저 오른팔이 스튜를 먹었다는 거죠?"

『긍정. 가사상태에 빠진 육신을 치유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식량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뭐야. 그게. 무서워."

이제는 잘린 손이 스스로 움직인대. 진짜 탄탈로스에는 별별 괴물들이 다 있구나.

골렘이 나를 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요?"

『불사종족 말입니다.』

"저거를요? 저걸 뭐 어떻게 합니까?"

내 신경질적인 반문에, 골렘은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기질적인, 아니, 무기질 그 자체인 수정구에서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본관은 귀하에게, 불사종족이 소생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합니다.』

네?

EP.24 행복한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