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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87 살고 싶다고 말해 - 3

슬프게 묻는 대위를 향해 나는 단언했다.

"몰라요."

"…무책임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처음의 성녀 같은 예언자가 아닌걸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몰라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알죠. 이번 사건으로 무언가를 잃을 이들에겐, 대위의 행동이 무엇보다 가치 있을 거예요. 아무리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오늘 죽을 이들에게는 무덤 위를 비추어주는 햇볕에 불과할 테니까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대답이 들려왔다.

애초에, 그녀는 외면하지 못한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굳게 결심한 대위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본관은… 저는, 임무가 아닌,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받은 임무와 해야 하는 의무. 대위는 결국 그것을 스스로 결정했다. 군국의 인형이 삶을 되찾았다.

대위는 자기가 만든 가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통신병은 제가 모르는 정보를 접했을 수도 있으며, 제 행적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제 시도는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인생 최후의 결정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대위의 말은 담담했다. 사무적인 어조의 담담함이 아닌, 각오한 자의 흔들림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어려운 일일 거예요."

"긍정.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

대위는 모자를 챙겨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림자가 뿌린 정보를 군국이 감지할지, 대위가 한발 먼저 그것을 다 알아차리고 사전에 차단할지. 시간 싸움이었다.

당장 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대위는, 문고리를 잡기 직전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몇 번 오므리다가, 주먹을 살짝 말아쥐고는 주저하듯 물었다.

"다만,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처음부터 받기만을 하였습니다. 상자에서 발견될 때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귀하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목숨을 구해졌고, 의무마저도 부여받았으니. 몸도 마음도. 귀하에게 선물받은 셈이군요.'

은혜를 아는 건 짐승도 마찬가지이라. 오히려 머리에 의심이 가득한 인간이 도리어 은혜를 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알았구나. 내가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조금 늦었네.

자기 삶이 없었던 이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만큼 의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내심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내 뒷배가 되어줄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대위는 모자를 가슴에 품은 채 나에게 물었다.

"…당신을 위해,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 이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살아만 있다면요."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다. 생각하고 행동할 수만 있다면 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통신병이라는 거, 말만 대위고 물대위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쓸만하고… 또 위협적이더라고.

특히, 군국이 원거리 감시를 하려고 통신병을 쓰면 나는 꼼짝없이 잡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에이비 대위처럼 통신병에게 큰 은혜를 입혀두면 편하지.

군국. 너희는 이런 일을 경계했겠지만… 너희들의 도구는 내가 잘 이용해주지.

내가 말을 이으려던 무렵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갑자기 뭘 알아? 말은 다 듣고 가야지.

네가 나를 위해 해줄 일이 산더미인데. 혹여나 나에 대한 수사가 들어올 경우 컷해주는 거, 위험할 때 골렘으로 경고해주는 거. 전쟁이나 그에 관련된 소식은 다 전해주는 일 등. 할 게 많은데?

'직녀가 말한 것과 똑같군요. 소원을 이루어준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저도 할 수 있는 한, 당신처럼 베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서두르겠습니다."

꾸벅 머리를 숙인 대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버렸다. 마차 안에 홀로 남은 나는 얼떨떨해서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대위의 생각이 들렸다. 대위는 골렘에 접속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마디를 되뇌었다.

'당신은 저를 보지 못하겠지만. 저는 언제나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당신에게 받은 삶을 살아가며.'

어, 언제나 바라볼 필요는 없는데…. 내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만 지켜봐 주면 되는데?

그렇게 출발하려는 대위의 시야 한켠. 그녀의 영향 아래 있는 창문 중 한가운데에서 어떤 광경이 비쳤다. 걸어가려는 대위가 발걸음을 멈추며 관측된 시야를 보고는 경악했다.

'보호소의 퇴역군인들이…! 전멸?!'

어?

그 사람들이?

12구역에 있는 가장 큰 군사학교. 그 연병장.

보호소의 퇴역군인이 불량배들을 잡아 기합을 주고 있었던 그 장소는, 지금 모종의 습격으로 인해 격변한 상태였다.

"허억, 허억, 허억. 젠, 장맞을. 10년만 더 젊었어도…."

보호소장 프론타인은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의 주름을 따라 비스듬히 흘러가다가 턱 쪽으로 떨어졌다.

전신에서 기공을 끌어올리며, 프론타인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외쳤다.

"어디냐! 늙은이 상대로 숨지 말고 나와라, 그림자!"

"숨지 않았다."

프론타인의 귀에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론타인이 고개를 홱 돌리자, 학교 입구에서 걸어나오는 한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프론타인이 외쳤다.

"네놈, 그림자!"

"기왕이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야, 군국도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테니."

감정이 없는 듯 음울한 목소리가 그림자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혹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까지 간신히 서 있는 퇴역군인들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뒤룩거리는 양아치들도.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기공인지, 아니면 그의 힘인지 모를 기묘한 능력.

"세월은 그토록 길었던가. 무상하구나. 차마 언급할 수도 없는 끔찍한 존재가 기거하는 그곳은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마경이었거늘…. 안온한 도시에서 다들 늙고 약해졌구나. 군국도, 그림자도."

울펜이 한탄하듯 말했다. 어느덧 그의 신형은 연병장 가장자리까지 나와 있었다.

그에 맞서 프론타인은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고는 달려들었다.

"네 이놈! 맞서 싸워라아아!"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갉아 먹힌 참이다.

그림자의 수장, 본그림자 울펜의 암습은 은밀하고 신속했으며 치명적이었다. 울펜은 순식간에 다섯을 쓰러뜨리고는 유유히 떠났다. 격노한 프론타인이 그를 추격했다가 역으로 습격을 당하고는 상처를 입었다.

잠깐 프론타인이 경계하는 사이, 울펜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던 퇴역군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 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울펜이 다시 몸을 드러냈을 때,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퇴역군인들이 일제히 몰아쳤다.

몇 남지 않은 퇴역군인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때.

울펜의 신형이 사라지고 대신 목소리만이 남았다.

"이미 싸움은 끝났고, 너희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너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

푹. 다가가던 도중, 외팔이 퇴역군인은 보이지 않는 칼날에 맞고는 남은 쪽 어깨를 크게 베였다. 그는 고통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눈을 부릅떴다.

"반탄기공을…! 썼는데!"

"맹신하지 말라."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외팔이 군인이 쇠도리깨로 소리 난 쪽을 노렸으나, 콘크리트도 깨부술 위력을 지닌 도리깨는 허무하게 허공만 갈랐다.

푸욱. 그리고 다시 생명이 빠져나가는 소리. 칼날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게 베인 가슴, 흐르는 피. 외팔이 군인이 천천히 쓰러지려는 때. 그가 눈을 빛내며 손을 뻗어 울펜의 옷을 붙잡았다.

존재할 리 없는, 잘린 어깻죽지에서 솟아난 오른팔로.

"기공수?"

울펜이 반응했다. 아무리 그라도 기공으로 붙잡은 손을 떨쳐내지는 못하리라.

잠시 그림자를 묶어둔 그의 곁으로 프론타인이 다가왔다.

"잡았다! 네노오오옴!"

주름진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부족한 체력 때문에 아끼고 아꼈으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

기공을 잔뜩 머금은 지팡이가 진동한다. 어둠 속에서도 섬광이 번쩍였다. 프론타인의 지팡이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뒤에 폭풍을 휘감은 지팡이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타. 만일 울펜이 몸을 피해낸다면 기운을 폭파시킬 것이다.

암살자를 붙잡고, 그 위로 가하는 일격.

"…흑정공."

그러나, 울펜의 몸에서 스며나온 어둠이 섬광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벼락이 한순간 어둠에 삼켜진다. 기묘하게 기공을 끼워 넣은 울펜은, 떨어지는 프론타인의 지팡이를 단검으로 흘려냈다.

지팡이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비껴 나간다. 프론타인의 얼굴에 절망이 감돌고, 그 순간 그림자의 칼날이 노장의 몸을 사정없이 파헤쳤다.

마른 몸에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노장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커허…. 제기랄…."

끊어져가는 호흡을 붙잡으며 노장이 신음했다.

울펜 펜슈타인은 암살자. 준비된 일격을 가하는 데 특화되었기에 정면대결에서 약하다….

"…그리, 생각했던 것이. 패착인가…."

"본이 정면으로 싸우지 않은 것은, 단지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감정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울펜. 프론타인은 피를 토하며 대꾸했다.

"나도… 안다. 세상에… 나 같은 것보다도… 훨씬 뛰어난 이들이 많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그가 키운 아이들 중에서도 나올 수도 있었다. 장성을 넘어, 육장성에 비견될 아이가 나타날 수 있다.

최근에 육장성으로 인정받은, 최연소 육장성인 총사처럼.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 저물기 전에 피워주는 게 어른들의 일.

그렇기 때문에, 프론타인은 죽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는… 네 정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 아이들은, 네 정체를 몰라…."

그가 불러온 퇴역군인들은 전부 죽었다. 이미 퇴역했음에도 여전히 군인이었던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한 채로 울펜의 앞을 가로막았다.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보험을 달아두었기에.

"살인멸구를 할… 필요는 없다…."

다 죽이는 게 네 목적은 아니지 않냐며, 프론타인은 끝까지 아이를 감쌌다.

죽어가면서도 호소하는 노장을 향해, 울펜이 감정 없는 눈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야."

어차피 울펜의 목적은 터부를 퍼뜨리는 것이었으니, 그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터부를 들킨 군국이 저들을 상대로 어찌 나올지는 모르나, 울펜이 그마저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울펜의 마음이야 어쨌든.

프론타인은 울펜의 말을 듣고, 안심한 채로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잠은 인생보다도 길었다.

노장이 죽었다. 물론 울펜은 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목표만 바라보았을 뿐.

다음은 마켓이다. 어둑한 거리로 울펜의 신형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렇게 마켓으로 향하던 울펜의 눈에.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보였다.

EP.188 살고 싶다고 말해 - 4

고난은 경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그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읽는 능력, 그건 적을 만들지 않는 데 특화된 힘이다. 마음을 읽고는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상대방의 마음과 충돌하지 않도록 절묘하게 치고 빠지는 일.

말하자면 춤을 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독심술은 전능은커녕 만능조차도 못 된다. 마음을 읽는 거지 미래를 보는 게 아니기에 변덕까지 예상할 수는 없고, 갑작스러운 사고나 재난에는 대응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사람이 상대라고 해도, 명백한 적의는 막지 못하니.

'뒷골목을 조사하고 다니던 군국의 장교가 있다고 했지. 인상착의와 일치하는군.'

저 너머에서 어두컴컴한 살의가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난 결정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을 통해서 내린 결론.

'살인멸구한다.'

차가운 살의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경악한 대위가 골렘으로 상황을 살필 시간도 없었다. 울펜은 이미 우리를 시야에 둔 채였다.

이 시커먼 어둠을 뛰어넘어, 그는 분명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나는 마차 문을 열며 외쳤다.

"세피! 대위! 마차 안으로 들어와요! 선배는 당장 출발해!"

"어? 어디로?"

"어디든!"

내가 대위와 세피를 단숨에 끌어당겨서 다시 마차 안에 태웠다. 마차에 말을 매던 선배는 급히 운전석에 뛰어올라서 말을 재촉했다.

"이랴!"

히히히힝.

힘찬 소리와 함께 마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태생이 명마라 그런가, 사자마는 몇 걸음만에 최고 속력에 도달했다.

세피와 대위는 아직 영문도 모른 채였다. 대위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설명하자면 길어요! 그림자가 붙었어요!"

'그림자? 하나, 본관의 시야에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데….'

대위는 고유마도로 가장 가까운 골렘과 동조했다. 그녀의 시야가 일렁이며, 한구석에 최고 속도로 달리는 마차가 나타났다. 어슴푸레 비치는 가로등을 지날 때마다 갈기가 휘날리는 사자마가 마차를 이끌고 내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가로등이 차례로 깜빡거렸다. 마치 어둠이 거리를 질주하는 것처럼….

'어둠?'

사태를 파악한 대위가 급히 외쳤다.

"무언가가 따라붙고 있습니다! 전신을 어둠으로 감싸는 기공을 고려할 때, 본그림자…! 울펜으로 추정!"

"그래요. 따라붙는다니까!"

나와 대위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있음에도 세피는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마차를 끄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니라, 사람의 속도로는 따라잡지 못하니까요. 또, 이 마차 역시 4레벨의 방호레벨을 지니고 있어요.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결코 뚫을 수 없어요."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듣는 내가 다 두려워!"

"그저 안심하라고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이 마차 하나를 만드는 데 건물을 지을 돈을 때려박았어요. 제가 탈 마차를 대충 만들 리 없잖아요? 골격부터 뒤덮은 천까지, 하나같이 4레벨 짜리 연금강에 연금사라고요. 도대체 뭐가 불안하다는 건지.'

이제는 생각으로 업보를 쌓네! 제발 그만해!

순간, 내 독심술에 희미한 적의가 잡혔다. 나는 급히 세피와 대위를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둘은 휘청이며 내 품안에 안겼다.

"스승님?!"

"귀하?! 이것은 무슨."

말할 틈도 없었다. 울펜의 공격의지는 곧장 현실이 되어 닥쳤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그가 쏘아낸 단검이 마차와 바퀴를 잇는 이음매를 꿰뚫었다. 동시에, 다른 단검 하나가 유리창을 비스듬히 관통하고는 앞 좌석 등받이에 틀어박혔다. 어둑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 단검은 손잡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혔다.

균형을 잃은 마차가 기우뚱 기울었다. 내가 미리 잡아당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편으로 넘어질 뻔했다.

"꺄아아악!"

세피가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와락 안겼다. 그래, 내가 네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고마움을 느끼고 내 말을 따라….

"어째서? 총탄도 간단히 튕겨내는 수정 유리라며! 이거 만든 놈들 누구야?! 지옥을 보여주겠어!"

"지금 그딴 거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세피!"

나는 날뛰는 세피를 진정시키며 정신을 집중했다. 독심술, 저 멀리 끝자락에 울펜의 생각이 느껴졌다.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적의. 그 끝에는 위태롭게 달려나가는 마차가 있었다. 이제 둘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튼튼하다. 바퀴를 아예 잘라내려고 했건만, 축이 어긋나는 정도인가.'

마차가 튼튼해도 반탄기공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바퀴 달린 마차는 특성상 움직임이 쓸데없이 정직하다.

즉, 기공을 잔뜩 불어넣은 단검으로부터 피할 수는 없다는 소리.

'두어 번만 더 하면 되겠군.'

젠장. 이대로 가면 반드시 마차가 멈춘다. 그 상태로 발이 묶이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쳇, 이거 완전 독박 쓰는 건데.

"세피. 말 탈 수 있죠?"

"뒤에 저딴 칼 던지는 놈 달고는 못 해요!"

'스승님의 제자니 말 정도는 탈 수 있지요. 다만, 추격자를 뿌리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되네요.'

급해서 그런지 본심이 막 튀어나오네. 나는 세피의 어깨를 꼭 붙잡고는, 타이르듯 단호하게 일렀다.

"세피. 대위를 본부까지 데려다줘요. 삐 대위는 아주 중요한 기밀 임무 중이라, 그것을 끝마치면 저를 도와줄 수 있어요."

세피는 즉각 되물었다.

"스승님은요?"

감도 좋네. 내가 조금 대답을 늦추자, 세피는 곧장 눈을 부라리며 나를 추궁했다.

"설마, 저거랑 맞서 싸우겠다는 건 아니죠? 시간을 끌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스승이고 뭐고 없어요!"

'헛소리도 정도껏 해요! 대책도 없이 그딴 짓이나 하고! 죽어버리면 앞으로 한 푼도 안 줄 거예요!'

요새는 제자가 스승을 다그치기도 하네. 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심지어 생각도 말도 나를 탓하고 있다. 안쪽 바깥쪽에서 찌르는 게 어지간한 고문 못지 않다.

나는 다급히 세피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피. 나 못 믿어요?"

"당연하죠."

'네. 당연히.'

빈말 어디 갔어? 알뜰살뜰 모아두었던 세피포인트는 다 어디 간 거야?

후우, 달래기 힘드네. 나는 세피의 어깨를 꼭 잡은 채 대위를 가리켰다.

"봐봐요. 저기 대위가 있잖아요. 군국의 대위라면 제가 당하기 전에 지원을 끌고 올 수 있어요.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급조한 계획 따위가 통할 것 같아요?!"

"급조한 계획이 아니에요. 사실 저는 처음부터 군국의 힘을 빌려서 그림자를 청소하려고 했어요."

사실, 계획이 어긋난 지금 와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군국마저 한발 먼저 끌어들이려고 했다.

내 계획은 이랬다.

마켓, 보호소, 패밀리. 그들을 노리는 조직을 하루 먼저 이끈다. 그와 동시에 비밀 정보를 건네 군국 역시 끌어들인다.

그러면 마침 몸이 단 그림자가 참전하고, 군국의 헌병대와 마주쳐서 소탕당한다…는 완벽한 계획이다.

이름하여 시스템은 너만 쓰냐. 나도 쓰지 작전.

그런데 군국이 영 움직이지 않았다. 이만한 떡밥을 뿌렸는데 웬일인지 평소 출동보다 늦어지고 있다. 마치 아미텐그라드 내에 있는 부대를 전부 어딘가 보내놓은 것처럼.

이 빌어먹을 나라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내 실책이라면 실책이다.

하지만.

"썩어도 군국이에요. 일련의 소동에 맞설 병력을 미리 대기시켜 놓았을 거예요. 제가 버티고 있는 동안, 병력이 출동해서 울펜과 마주치기만 한다면 내 승리. 그러니까 세피나 삐 대위가 서둘러줘야 제가 사는 거라고요."

쿠당탕. 마차가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바퀴의 흔들림이 마차로 다 전해질 정도였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나는 믿음을 가득 담은 채 대위를 바라보았다.

너라면 알겠지, 대위?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걸?

"알아들었죠, 대위?"

"위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 또 왜요."

대위의 표정은 더 이상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았다. 큼직한 눈망울에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대위는 내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상대는 탄탈로스의 탈옥수입니다. 귀하가 마술사라고 한들, 귀하의 힘으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귀하는…! 생각보다 약하잖습니까!"

"면전 앞에서 약하다 그러니까 자존심 상하네. 나도 알아요! 그래도 시간을 끌 정도는 되거든요?"

"본관보고는 살아남으라고 말했잖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말한 귀하가 위험에 처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도 진짜, 진짜 이러고 싶지 않거든요? 희생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이건 거룩한 희생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면밀하게 계산된 단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기껏해야 노역자로 끌려가는 일개 잡범. 하지만 본그림자 울펜은 무저갱에도 다녀온, 진짜배기 위험인물이다.

뭐, 티르나 아지나 회귀자에 비하면야 한참 모자라지만, 그 애매한 강함이 나에게는 더 치명적이다. 원래 도토리들이 이런 키 재기에 더 민감한 법이거든.

"차라리, 본관이 미끼가 된다면!"

"하하하하하!"

나는 격하게 웃었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몰린다. 나는 웃음을 짧게 끊고는, 표정을 싸늘하게 뒤바꾸며 대꾸했다.

"진짜 웃기지 말아요. 미끼는 낚아서 올릴 수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지. 대위는 그냥 연못에 흩뿌린 간식거리도 안 되거든요? 단칼에 울펜의 무용담 하나 늘려줄 뿐이에요."

"그렇다면 귀하는 그를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위가 제때 지원군을 가지고 오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진짜, 이게 최선이라는 점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상대는 은신술과 암습, 심리전을 주요 무기로 삼는 왕국의 그림자.

나는 내세울 건 독심술밖에 없는 잡범.

비록 그 기량이 현저히 차이가 난다고 해도, 상성상 가장 유리한 상대는 바로 나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범위는 이미 넘어섰다.

"스승님.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탄탈로스에 갇힌 이라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범죄자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그들을 상대로는!"

이제 더 설득할 시간이 없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세피를 향해 말했다.

정이니, 포인트니.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차가운 의지를 담아서.

"세피에르 바키아. 스승으로서 부탁이자, 가르침이에요. 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마요."

"하지만!"

"고집을 계속 피우겠다면, 이게 스승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이 될 거예요. 제가 살아남든, 죽어버리든."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자 세피는 숨을 삼켰다. 호되게 혼난 제자의 입에서 히끅, 하고 분한 듯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세피에르는 자기 정장을 펼쳐 대위를 감쌌다. 방탄, 방검, 방마의 효과가 있는 재킷을 대위의 어깨에 걸쳤다.

정장으로 뒤덮인 대위가 떨리는 눈으로 되물었다.

'진정으로 그를 홀로 상대할 것입니까? 하나 귀하는…!'

"나를 살리고 싶으면 살아남아요. 본부로 가서 지원군을 불러와요!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강하게 쏘아붙인 나는 곧장 마부석을 향해 외쳤다.

"선배! 탈출 준비해! 마차를 버릴 거야!"

"알았다!"

그리고 직후, 다시금 가해진 충격. 비틀거리며 어찌저찌 날아가던 마차는 그것으로 명이 다했다.

끼기기긱. 기울어진 마차가 땅과 마찰하며 비명을 토했다. 반쯤 잘린 창문 밖으로 마차의 바퀴가 마차를 앞질러 가는 광경이 보였다.

"자. 이따 뵈어요!"

나는 반대쪽 문을 열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마차의 위에 올라섰다.

저 너머로 시커먼 어둠이 보였다. 흑영기공으로 모습을 감춘 채, 이쪽을 빤히 노려보는 울펜의 생각이 똑똑히 느껴졌다.

'남자? 호위인가? 상관없지. 전부 죽일 것이니.'

누구 마음대로 죽인다 만다야? 누가 편하게 죽어준대?

인사나 해주자. 여유로운 듯이 미소를 보여주며, 나는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3 카드를 꺼냈다. 그것을 한손으로 접은 채 울펜을 겨누었다.

연금변환. 카드는 순식간에 커다란 활로 바뀌었다. 이미 한 번 쏘았던 터라 화살이 매여 있지 않지만, 원래 화살은 당겨서 쏘는 법. 나는 신중히 어둠을 노려보며, 그 너머에 있는 울펜을 정확히 겨누었다.

"피렌하이트!"

화륵. 화살촉 끝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그 뒤 팅, 하고 당겨지는 소리. 곧게 뻗은 거리에서 한 발의 화살이 어둠을 갈랐다.

화살은 정확히 울펜을 향했다. 울펜의 눈가가 움찔했다.

'화살은 별것 아니다. 하지만, 흑영기공을 꿰뚫어 보다니?'

왜 화살이 별거 아니야.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쏜 거니까 위기감을 가져줬으면 하는데.

'반탄기공.'

쳇. 그럼 그렇지.

기공이 부풀어 올랐다. 불길이 어둠에 삼켜지며, 온 힘을 다해 쏘아낸 화살이 헛되게 튕겨 나갔다.

어쨌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인사를 끝마친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지만, 바퀴가 떨어지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진 터라 간신히 설 수 있었다.

내 뒤로 마차는 점점 느려졌다. 어떻게든 운전석 너머로 옮겨가서 말 위에 올라타는 세피와 대위.

그들을 등진 나는 굳건히 서서 울펜을 마주했다.

"…시간 끌기인가."

목소리는 내 오른쪽 귓가에서 들렸다. 하지만 생각은 왼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딜, 내 앞에서 심리전을.

나는 피식 웃으며 활을 집어넣고는 다음 카드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4, 단창. 작살과 같은 창날을 그가 있는 쪽으로 내밀자 울펜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저 너머에서는 대위와 세피, 그리고 선배가 말 위에 올라타 나란히 달려나갔다. 마차에서 해방된 사자마는 빨랐고, 이미 거리가 벌어진 이상 아무리 울펜이라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을씨년스러운 거리에서, 이제 완벽하게 단둘인 상태.

그러든 말든. 울펜은 놓친 이들에게 미련조차 두지 않은 채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우연이 아니로군. 어둠 속에서, 본을 정확하게 바라보다니…."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 역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죠."

나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기습을 할 기회였음에도 울펜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나를 경계한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종류의 허례허식에 관대한 것일까.

'기량, 불명. 정체, 불명. 기감이 특출나게 뛰어난 것인가? 혹은, 알 수 없는 다른 힘?'

둘 다겠지.

울펜도 나와 마찬가지로, 심리전을 십분 활용하여 싸우는 타입이니.

좋아. 이제 시간 싸움이다.

시간을 끌면 내가 이기고, 그 전에 죽으면 끝나는. 아주 간단한 싸움.

"안녕하세요, 울펜 펜슈타인.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왕국 시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해온, 이 나라의 어둠을 상징하는 그림자라고."

"너는 누구지?"

다시 마술사 모자를 푹 눌러 쓴 나는,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중등학교 전교 수석이자 호스트계의 초신성, 맞춤형 가정교사이며 만남의 주선자, 소매치기계의 전설이자 결코 패배하지 않는 도박사. 아이들의 우상, 선량한 돌보미, 전과 1범에 빛나는 마술사 휴즈입니다."

EP.189 살고 싶다고 말해 - 5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중등학교 전교 수석이자 호스트계의 초신성, 맞춤형 가정교사이며 만남의 주선자, 소매치기계의 전설이자 결코 패배하지 않는 도박사. 아이들의 우상, 선량한 돌보미, 전과 1범에 빛나는 마술사 휴즈입니다."

멋들어진 자기소개이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사소하기 그지없다. 전부 실화 기반 이명. 과대포장을 하고 싶어도 할 게 없는, 처량한 잡범의 신세여.

내 정체를 짐작한 울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술사. 들어본 적 있다. 뒷골목에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잡범이라지."

"쑥스럽네요."

"그림자조차도 찾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허명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인생 헛살지 않았네. 탄탈로스 탈옥범도 내 이름을 들어보았다니 말이야.

어쨌건 소문은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거라 원래보다 부풀어지기 마련이다. 울펜도 내 기량을 과대평가하겠지?

"기이한 일이다. 본이 있던 시절, 전설은 그리 쉽게 붙여지는 이명이 아니었다. 한데 군국은 잡범마저도 추앙해야 할 만큼 신비가 부족한 나라였던가."

칭찬하는 척 돌려까기?

미안하지만, 트래쉬 토크로 싸우면 너는 백 번 싸워서 백 번 다 진다. 말로 싸우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유일신이다.

어딜, 독심술사의 마음 후벼파기를 보여주지.

"저도 이상하다고 느껴요. 왕국의 그림자는 겉멋이 좀 들었을지언정 그래도 한가락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포옥 한숨을 내쉬며, 실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탄탈로스에서도 꼬리를 말고 내뺀 쥐새끼라니. 탄탈로스 탈옥범이라는 브랜드를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모양이 빠지잖아요. 이래서 내가 탄탈로스 탈옥했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겠어요?"

도발로 나를 상대하려고 하다니. 한참은 멀었다. 독심술은 남에게 호의를 사기도 좋은 능력이지만 적의를 불러일으키기는 더 좋거든.

내가 탄탈로스를 언급하자,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울펜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물었다.

"…탄탈로스에 대해 아는가?"

"저도 한 번 다녀왔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요."

아, 그러네. 따지면 저쪽이 내 선배라고 할 수 있겠네.

나는 탄탈로스에 먼저 갇혔던 선배를 향해 짧은 경례를 보내며 대답했다.

"반가워요, 선배. 탄탈로스 2기 수감생입니다. 여러분이 안 계신 탄탈로스에서 평화롭게 지내다가, 3개월 정도 있다가 무저갱을 부수고 탈옥했어요. 별거 없던데 어쩌다 20년 가까이 갇혀 계셨대요?"

"…허풍이 지나치군. 무주공산이 된 탄탈로스에서 살아남은 것이 그토록 내세울 일인가?"

"정말 허풍처럼 보여요?"

쫄아라. 내 허세에 겁을 집어먹어라. 네 안에서 내가 괴물이 되어갈수록, 나는 그만한 힘을 발휘할 테니까.

나는 산보하듯 가볍게 옆으로 한 걸음씩 걸었다. 의미 없는 발걸음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울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어를 선택했다.

"혹시 여러분들은 시조 티르칸쟈카의 흑기사에 맞서본 적 있어요? 개의 왕과 투닥거린 적은? 사지가 찢긴 채 방치된 불사자를 부활시키고, 지선이 땅을 뒤집을 때 거기 매달려 봤어요?"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단, 진실이어도 너무 허무맹랑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있을 법한 일로.

상대방의 상상이 닿지 않는다면 허풍은 뜬구름일 뿐. 내가 티르칸쟈카의 심장에 꼬챙이를 꽂아 넣고 지선의 뒤통수를 쳤다고 말해봤자 의심만 사겠지.

'시조, 불사자, 짐승의 왕. 무저갱에 있던 것들이다. 들은 이야기… 같지도 않군. 요술사가 불사자의 사지를 찢었다는 사실은 직접 본 이만 알 테니.'

판단은 빨랐다. 울펜은 내가 탄탈로스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동시에 나에 대한 경계를 끌어올리며,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꽁무니를 빼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울펜은 멍청한 부하들을 두었을지언정, 생각보다 멍청하지는 않았다.

'대면한 이상 싸움은 피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라도.'

그래.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다.

이성적으로 볼 때, 대면한 이상 맞서 싸우는 게 정답이다. 내가 허세였다고 해도 싸워서 밝혀야 하고, 허세가 아니더라도 전력으로 저항해야 하니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니 두렵다고 꼬리를 내리지 않겠지.

'어차피 뒷골목의 패권을 위해서라면 한번 맞서야 할 상대.'

뒷골목 따위를 노리면서 패권? 소박하다고 해야 해, 거창하다고 해야 해?

이해해. 떵떵거리며 살고 싶겠지.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고 싶겠지.

그러면 나처럼 모두의 친절한 이웃이 되라는 말이야. 왜 굳이 죽여가면서 그렇게 군림하려고 하는 건지. 아깝게.

"본의 계획을 방해한 게 너인가, 마술사?"

"맞아요."

"어째서 본에게 저항한 거지?"

"네?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원래도 재미없을 만큼 진지한 사람이었지만, 울펜은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마술사. 너는 딱히 세력을 일구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기존 세력이 밀려나는 것 역시 네가 바라던 바 아닌가?"

"어이가 없네요. 반대로 물을게요. 왜 뒷골목을 깨끗하게 청소하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이랑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건드리면서?"

"기이한 일이군. 새로 터를 일구려면 원래 있던 것을 무너뜨려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울펜의 상식선에서, 자신이 굳이 누군가를 위해 수그리거나 조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뒷골목에서 누구보다도 강력했으니까.

나는 새삼 울펜이 왕국 시절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왕국은 약육강식, 강한 이가 결투를 통해서 모든 것을 쟁취하는 가혹한 세상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고 군림했던 울펜에게, 강한 그가 약한 이로부터 빼앗는 건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상식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러신 분이 겁쟁이의 기공을 익히셨어요? 자기보다 강해보이면 숨고, 비슷해보이면 암습으로 이기려고?"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다. 강한 자가 취하고, 약한 자는 잃는다. 약한 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다. 단, 본은 그들보다 강하며, 그들은 숨지 않았으니. 본은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취할 것이다."

말이 안 통하네. 하아, 이런 사람들은 진짜.

재미없어.

"일차원적이긴. 이러다가 군국에 머리 깨져야 정신을 차리지."

"안타깝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도, 군국에게도."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검이 날아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 군국의 골목에서, 거무튀튀한 어둠에 둘러싸여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필살의 비수.

'어디, 시험해볼까.'

목표는 내 오른발. 인간의 눈은 정면으로 오지 않는 것에 둔한 감이 있어서, 그 사각을 노리겠다는 의도였다.

'일단 오른발부터. 보이지 않는 단검이다. 어떻게 대응할 거지?'

그러나 이미 읽고 있다면 상관없다. 나는 오른발을 살짝 든 뒤, 단검이 땅에 박히기 직전 다시 내디뎠다.

콱. 내 오른발 아래 땅에 틀어박힌 단검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여유롭게 양팔을 펼치고, 그게 다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검을 가볍게 밟고 선 내 모습은, 꼭 날아오는 단검을 발로 잡아 챈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울펜이 조금 더 경계심을 더했다.

'단순한 잡범은 아니군. 신중하자. 기사를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짓밟는다.'

이제 말로 끌 수 있는 시간은 다 지났다.

지금부터 시간을 끄는 건 오직 내 역량에 달렸다.

"구시대의 전설, 울펜 펜슈타인. 슬슬 세대 교체 타이밍이죠? 이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주세요."

"너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면."

울펜은 주무장인 소도를 꺼냈다. 단검보다는 기나 장검보다는 짧은 애매한 길이의 검은 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가 기공을 끌어올린 순간, 검신에 거무튀튀한 기운이 솟구치며 칼날을 감싸더니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림자의 상징이자, 근접전 최고의 기술. 상대에게 간격을 보여주지 않는 그림자 검.

울펜의 생각을 읽은 덕분에 칼이 거기 있음을 알면서도 절로 긴장이 찾아왔다. 여차하면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내 몸속을 파고들 테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한 마술을 부려야 할 것이다. 마술사."

그에 맞서, 나에게 있는 건 한 벌의 카드뿐.

카드를 펼쳤다. 한순간 50여 장에 달하는 카드가 촤르륵 흩날리다가, 내가 섞는 척을 하며 박수를 치자 수십 장에 달하는 카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남은 건, 아까 미리 바꿔두었던 단창 한 자루뿐.

나는 단창을 양손으로 쥐며 그를 마주보았다.

"한 판 붙죠, 퇴물."

울펜의 신형이 사라졌다. 직후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소도가 내 어깨를 노렸다. 만일 나에게 독심술이 없었다면 여기서 승부가 났으리라. 칼날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아슬아슬하게 공격하여 반응을 보자. 마술사, 너는 검의 간격을 알아챌 수 있는가?'

다만, 독심술로는 상대의 의도가 똑똑히 느껴졌다. 언제든지 뒤로 빠질 수 있도록, 먼 거리에서 가볍게 건넨 참격이다.

그렇다면 겁먹을 필요 없지. 어깨를 살짝 비트는 동시에 창을 내밀었다. 다가오는 울펜의 정면으로 창날이 단숨에 향했다.

'예리하다. 반응이 빨라. 단….'

팅. 소도가 내 창을 손쉽게 튕겨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누가 창을 잡아 뽑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도와 창. 길이 차이가 압도적인데도 더 격하게 흔들린 건 내 쪽이었다. 고작 튕겨졌을 뿐인데 손아귀가 욱신거리며 창끝이 힘없이 흔들렸다.

이것조차 속임수인 것처럼, 낭창거리는 창을 다잡고는 뻗었으나. 울펜은 이제 내 공격에 과민반응하지 않았다.

'예리한 것에 비해 힘과 속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 그렇다면 힘겨루기를 해볼까.'

문득 그런 생각과 동시에 소도에 시꺼멓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들러붙었다. 검은 진흙과도 같은 기운이 창에 닿더니, 곧 창을 휘감고는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대로 순수한 힘겨루기로 넘어갈 셈이다.

칫. 약자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네. 이대로 힘을 겨루면 내 보잘것없는 힘이 들통나는데.

어쩔 수 없지. 창이 아깝지만.

움직이지 않는 창을 손에서 놓고, 소매에서 카드 하나를 꺼낸다.

다이아몬드 9, 손도끼.

던지기 좋은 모양의 손도끼가 왼손에 잡혔다. 들러붙은 단창을 무릎으로 차올리는 동시에, 창 그림자에 숨긴 채로 도끼를 내던졌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가 빙글빙글 돌며 울펜의 가슴팍을 쪼갤 듯이 덮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도끼의 모습에 울펜이 반응했다.

'카드가 무기로 바뀌었다. 연금술?'

반탄기공으로 튕겨낼까, 아니면 피할까.

고민은 짧았다. 울펜은 자기 안위를 두고 도박을 벌이지 않았다. 지근거리에서 던져진, 회전하는 도끼는 반탄기공으로 튕겨 내기는 애매했기에.

'피한다.'

울펜이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망토가 펄럭거리며 창도, 도끼도 울펜의 어깨너머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가볍게 발을 디딘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손과 발을 살폈다.

'주무기는 창이 아니군. 연금술? 혹은, 다른 무기?'

다 주무기가 아니다. 애초에 나에게는 주무기랄 게 없거든.

벌써 카드를 두 장이나 소모했다. 다시 주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겠지.

이 틈이 기회다. 그가 물러난 틈을 타, 나는 냅다 골목으로 달음박질쳤다. 내가 등을 훤히 보이고 도망치자 울펜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도망? 도저히 전술을 종잡을 수가 없군. 싸움에서 등을 보이는 게 얼마나 불리한지 모르는 건 아닐 터인데?'

싸움에서 등을 보이는 게 불리한 이유는 등 뒤를 보지 못하기 때문. 등 뒤를 보지 못하면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지 못하기에, 도망치는 건 전장에서나 결투에서나 불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독심술이 있는 나에게는, 등을 보이나 앞을 보나 별 차이가 없다. 어차피 상대의 공격은 독심술로 읽으니까.

아니, 오히려 등을 보이는 게 상대방을 방심시켜서 좋지.

'단검을 던지며 신중히 접근하자.'

저 단검은 왜 끝도 없이 나오냐. 나처럼 카드로 만들어두고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투덜대는 것도 잠시, 울펜이 쏘아낸 단검 두 자루가 내 등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떠난 순간 즉시 앞으로 굴렀다. 서늘한 감각이 등 위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이지만 내 망토가 찢겨나갔다.

나름 비싼 재료로 만든 건데, 울펜의 기공은 특히 예리하다. 아무래도 방호력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감지했다. 기감이 좋군. 그렇다면, 기운을 사방에 펼치면 어떨까. 그래도 감지할 수 있을까 보자.'

순간적으로 어둠이 피어올랐다. 사방으로 퍼뜨린 기운이 안개처럼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딘가에서 산사태라도 나는 바람에 먼지가 쏟아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넘실거리는 그림자를 몰고 그 속에 몸을 숨긴 채, 울펜은 그림자 속에서 내게 달려들려다가.

내가 망토 속에 숨기고 있던 리볼버를 보고는 멈칫했다.

'총? 연금술이 총도 만들어낼 수 있던가?'

다이아몬드 6, 리볼버.

저번에 한 발을 쏴서 남은 다이아몬드는 다섯 개. 기공을 펼치느라 반탄기공이 엷어진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철컥철컥. 은밀하게 변환시킨 리볼버를 허리춤에 가져다 댄다. 방아쇠를 당긴 채로 공이를 쳐서 다섯 개의 총알을 단숨에 뿜어냈다.

타타타타타.

짧은 간격으로,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본체를 노려 총을 쏘았다. 팔, 다리, 가슴, 이마, 다리. 울펜의 사지 곳곳에 총탄이 틀어박혔다.

단시간에 연달아 충격을 받은 울펜은 잠깐 비틀거렸다.

'모르겠다. 기량을 정확히 짚을 수가 없어. 하나 확실한 것은, 기이할 정도로 기감이 뛰어나다는 것.'

그러나 엷어진 반탄기공조차 총탄 정도는 간단하게 막아낸다. 몸은커녕 새까만 옷조차도 관통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땅으로 떨어지는 총알.

울펜은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기운이 다시금 그의 코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마치 울펜이 어둠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모습을 숨기는 것은 포기한다. 우악스러운 정면 대결…. 본의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그 방법밖에 없겠군.'

드디어 자기 우위를 깨달은 울펜은, 머리를 쓰는 대신 멍청해지기로 결정했다.

흑영기공은 빛과 소리를 삼키는 기운으로 모습을 숨겨,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암살기공. 그렇기에, 울펜처럼 사방에 흩뿌리는 방식으로 적의 감각을 속이는 게 정상적인 사용법이다.

그러나 울펜은 과감하게 그 사용법을 버렸다.

되도 않게 내뿜던 기운을 몸으로 돌린다. 사방으로 흩뿌려 시야를 가리는 대신, 몸 내부로 집중시켜 힘을 더했다.

원래의 의도 따위는 보이지 않는 우악스러운 용도. 하지만.

'오직 힘과 기공으로 승부한다.'

나한테는 쥐약이지.

아, 망했다.

EP.190 살고 싶다고 말해 - 6

울펜은 심리전을 거는 대신, 오직 힘과 기공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제길, 단순한 피지컬 싸움에 약하다는 내 약점을 간파하다니. 비겁하다.

하아. 이제 꿀 빠는 것도 끝인가.

이제는 진짜, 진짜 시간 끌기밖에 없다. 가진 수단을 전부 활용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필살!"

리볼버의 총탄은 다섯 개. 남은 건 빈 총.

총탄 없는 총은 필요 없다. 나는 과감하게 빈 총을 냅다 던졌다.

"총던지기!"

깡. 날아간 총이 소도에 가로막혔다. 총까지 던져가며 알차게 빈틈을 만든 나는 곧장 땅을 뒹굴어서 건물과 건물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사람 둘이 서로 마주치면 어색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비좁은 틈.

나는 그 골목을 냅다 달리며 다음 카드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8. 가늘고 긴 모든 것들.

사슬, 와이어, 실, 철편, 고무. 마력전선.

카드 안에 담긴 다종다양한 종류의 매듭 중, 내가 고른 건 와이어. 미리 매듭지어진 와이어를 한쪽 난간에 걸었다. 철컹, 매듭은 난간을 마술처럼 통과하고는 단단히 걸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 개의 와이어 트랩을 설치한 나는, 일부러 하나를 팅 튕겨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 뒤를 따라온 울펜은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어를 보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트랩? 골치가 아프군. 힘으로 돌파하기는 부담이 큰데.'

하하. 어떠냐. 고대부터 짐승을 가장 잘 잡았던 게 바로 함정이다. 힘만 쓰기로 한 네가, 과연 이 골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벽을 박차고 뛰어넘어야겠군.'

그건 반칙이지!

탁, 탁. 울펜은 가볍게 양쪽 벽을 박차고는 10m 위까지 솟아올랐다. 그리고 한쪽 벽에 발을 붙인 채, 경사를 내려오듯 가볍게 미끄러졌다.

가만히 구경할 틈이 없다. 회심의 함정이 무력화된 나는 즉시 골목 밖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치는 내 뒤로 울펜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잡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내가 막 모퉁이를 돌고, 울펜이 소도를 꺼내어 내 등을 노리는 차였다. 경사의 끝에서 내리뛴 그가 방향을 틀려고 땅에 착지한 순간.

풀썩, 하고 땅 밑이 꺼졌다. 멋진 착지 자세 그대로 그의 신형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주 잠깐, 발밑을 잃은 울펜은 크게 당황했다.

'함정? 어느 틈에?'

도로는 한 꺼풀만 벗겨내도 흙. 그 안쪽 흙더미를 다 치워버리니, 울펜처럼 묵직하게 착지하자 도로가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대지술로 만들어낸 싱크홀 함정. 울펜의 당혹스러움을 읽은 나는 즉각 아끼고 아껴놓았던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다이아몬드 10, 검과 방패.

왼손에는 자그마한 버클러, 오른손에는 팔 한 마디쯤 될 법한 직검이 나타났다. 버클러를 앞세워서 울펜의 머리에 들이밀고, 동시에 그의 사각으로 직검을 찔러넣었다.

전신을 밀어넣어, 상대의 허점을 완벽히 노린 그림과도 같은 일격.

투콱. 버클러가 정확히 울펜의 안면을 강타했다. 동시에 내 직검이 그의 어깨를 그었다. 옷깃이 길게 찢어지며 그 위로 튀어 오르는 피.

'한 방 먹었군.'

그러나 성취감을 느낄 새도 없다. 당황한 와중에도 명확한 공격 의지가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가볍다. 버틸 만해.'

버클러에 밀려났던 머리가 되돌아오며 울펜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동시에 왼쪽에서 새까만 칼날이 불쑥 솟구쳤다. 빛조차 삼킨 거무튀튀한 기공은 절묘하게 내 목숨을 노렸다.

살의를 읽은 나는 이를 악물며, 팔과 허리를 단단히 비틀어서 버클러를 끌어당겼다. 한 줌뿐인 기공을 아끼지 않고 내뿜어 버클러를 감쌌다.

끼기긱.

단단한 버클러가 어둠에 물든 검을 비스듬히 막아냈다. 칼과 방패의 대결, 상식적으로는 방패가 더 우세한 게 분명한 싸움이나.

기공을 두른 칼과 기공을 두른 방패의 대결은, 더 강한 기공의 승리로 끝난다.

쩌적. 잠깐 버티던 버클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얼어붙은 빵을 땅에 떨어뜨린 것처럼, 깨지고 조각나며 방패의 역할을 다했다. 단숨에 버클러를 부수고 찢어버린 소도는 내 왼팔에 길게 찢으며 자상을 남겼다.

"아야야!"

더럽게 아프네!

고통에 신음할 새도 없다.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방패보단 칼이 필요하다. 나는 울펜의 어깨를 찢었던 직검을 끌어당겨서 팔을 썰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약하군."

탁. 울펜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직검을 움켜잡았다. 칼날을, 맨손으로.

고작 그랬을 뿐인데, 직검은 어디 바위에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쳇!"

이대로 잡혔다간 죽는다. 나는 직검을 놓고는 곧장 뒤로 뒹굴었다. 짓눌린 왼팔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다스릴 틈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울펜은 어깨의 상처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걸어나오며 중얼거렸다.

"전부, 잔재주였군. 연금술부터 온갖 장난질까지, 약함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였어."

다 까발려졌구나.

하긴, 방패로 칼도 못 막고 왼팔을 내줬는데 못 느끼면 이상하지.

그래도 여전히 여유를 잃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야 하니까.

나는 여전히 여유를 가장하며 피 흘리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짜잔. 어때요. 즐거웠죠?"

"제법. 마술사여, 너는 어쩌면 본보다도 뛰어난 암살자의 자질이 있을지도."

그는 내 직검에 베인 어깨 상처에다가 손을 가져다가 댔다. 넘실거리는 기운이 상처 속으로 스며들더니, 피가 새까맣게 굳어서는 금방 출혈이 멎었다.

내 회심의 일격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려버린 울펜은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하나. 이 세상은 힘이다. 결국 힘이 없으면 꺾이기 마련이며, 힘 있는 자는 군림하지. 그게 세상의 이치이다."

"당신의 깨달음은 알겠는데, 그래서요?"

울펜은 나를 철없는 아이를 보듯, 한껏 깔보며 말했다.

"살고 싶다면, 본의 앞길을 막지 말았어야지. 너는 어리석었다, 마술사. 주제에 비해 너무 큰 꿈을 꾸었어."

"하하. 그러면 당신이 꾸는 꿈은 그토록 소박해서, 군국의 손을 빌려 뒷골목을 청소하고는 무주공산을 차지한다는 계획이나 세웠나요?"

"보다 약한 자들 한가운데 있는 것이야말로 온전히 군림하는 방법이니까."

"소시민이군요."

"주제를 아는 것이지. 너와는 달리."

진심이네. 울펜은 진짜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왕국 시절의 잔재였어.

아아. 재미없어라.

가진 힘에 비해 행동은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도 조금 더 강하고, 이성적이며, 운이 좋았을 뿐.

"재미없어. 진짜,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타입이네."

나는 한탄하며 손을 뒤집었다. 몇 안 남은 다이아몬드 카드가 손아귀에 잡혔다.

다이아몬드 7. 마술 지팡이.

카드는 순식간에 손잡이 부분이 휘어진 기다란 지팡이로 변했다. 그러나저러나, 울펜은 이제 별달리 경계하지도 않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전부 다 읽혔다. 더는 잡기술에 현혹되지 않는다. 본은 이대로 너에게 다가가 목숨을 앗아갈 것이니, 네 대단한 속임수조차 너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진짜. 이게 끝인가?

왼팔이 아려온다. 아, 마술사는 손이랑 팔이 생명인데. 이런 손해를 보고도, 이렇게 끝나야 해?

그때였다. 하늘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떨어졌다.

골렘이었다.

『피하십시오!』

그 말과 함께, 골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움직이지 않는 감시용 골렘과는 달리, 이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싱크로 타입.

이야. 오랜만에 보니까 조금 반갑네.

왼팔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을 삼키며 물었다.

"대위. 저는 시간을 충분히 끌었나요?"

싱크로 타입 마도골렘은 나를 보호하듯 서서는 외쳤다.

『긍정! 귀하,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십….』

대위가 말을 꺼낼 새도 없었다. 몸통에 울펜의 단검이 틀어박히자 골렘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흐려지더니, 곧 삐걱거리며 힘없이 허물어졌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기능이 정지된 대위를 향해 목놓아 외쳤다.

"대위이이이이이!!"

조금은 더 버텼어야지! 멋있는 등장과 함께 허무하게 퇴장하면 어쩌자는 말이야! 힘빠지잖아!

"시간을 너무 썼군."

네가 그렇게 알려주니까 울펜도 몸이 달아서 나를 죽이려고 든다고!

'더는 질질 끌지 않겠다. 죽어라.'

턱, 땅을 단숨에 박찬 울펜이 소도를 들어 올렸다. 더는 기운을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몸과 검 안에만 담은 채. 올곧게 나를 죽이려들었다.

명확한 살의와 그것을 이룰 힘. 그 앞에서, 무력한 나는 힘없이 목을 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마술의 극치.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도망칠 수 있어야… 마술사를 자칭할 자격이 있지.

"혹시, 제가 가진 카드가…."

오른팔을 뿌렸다. 그 끝에서 새로운 카드가 나타났다. 나는 능숙하게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림자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단 한 장의 카드.

다이아몬드로 빚어낸 무기는, 지금 이 한 장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무기만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그렇게 뒤집은 카드는, 클로버 1.

날카롭게 각이 진 붉은색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땅에 뿌리 박은 채 자라난 둥근 나무의 모양이 울펜의 앞에 드러났다.

'잡기술이다. 속지 않는다. 무엇이 튀어나오든, 눈을 똑똑히 뜨고 대응한다.'

나는야 양치기 소년.

반복된 거짓말은 깊은 불신을 낳고, 상대에게 하여금 흔들림 없는 태도를 강요하지.

고맙다. 내 마지막 마술을 똑똑히 지켜봐 줘서.

나는 클로버가 그려진 카드를 뒤집으며, 이 안에 담긴 마력을 해방했다. 응축해놓은 마력이 하나뿐인 클로버로 몰리며 하얗게 달아올랐다.

울펜은 빛나는 카드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빛으로 시야를 가리려고? 도대체 무엇을 숨겨둔 거지?'

틀렸다.

빛으로 시야를 가리려는 게 아니라, 숨겨둔 게 빛이거든.

점차 빛을 더해가는 클로버를 보며, 뒤늦게 울펜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마법? 설마!'

깨닫는 게 늦었다. 이미 마법은 이루어졌으니.

빛이 있으라.

"피에트 럭스."

그가 기운을 전부 갈무리했기에, 전신을 두른 어둠도 지금은 없어졌다. 사방에 기공을 흩뿌려놓지 않았으니 다채로운 대응이 불가능한 상태.

즉, 울펜은 완벽하게 무방비라는 말씀.

클로버의 한가운데에서 응축된 빛이 폭발했다.

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다. 한순간, 백열하는 백광이 카드 전면으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태양 바로 앞에 창문을 낸 듯한 압도적인 광량.

눈꺼풀조차도 빛을 걸러내지 못한다. 투명한 피부로 뼈와 핏줄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빛. 자신의 대척점에 직격당한 울펜이 급히 눈을 가렸으나, 이 빛은 그의 시야를 잠시 빼앗았다.

"기공이 어두운 속성이라 다행이에요. 눈이 멀지는 않은 것 같네요. 당분간 움직이기도 힘들겠지만."

"네놈…! 마술사!"

어둠은 눈을 가리나, 빛은 눈을 멀게 만든다. 너와 이 마법은 완전히 상하관계에 있지.

시력을 잃은 울펜은 뒤로 풀쩍 물러나며 사방으로 검을 흩뿌렸다. 그의 전신에서 다시금 어두컴컴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가해질 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직격당한 너보다야 낫지만, 나도 지금 눈앞이 잘 안 보이거든. 어차피 공격 못 해.

"큭…!"

"끝까지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펜 펜슈타인.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었지만 제법 괜찮은 관객이었어요. 하지만, 힘의 논리를 따르는 당신을 꺾을 존재는 당신보다 강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자격 미달이군요."

"죽여주마. 그림자의 명예를 걸고, 네놈과 그 주변 모두! 전부 죽여주겠다!"

"아, 네에. 그럼 안녕히."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미리 봐둔 퇴로로 달아났다. 빛이 집어삼킨 거리는 어둠 이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누구도 내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작 나도 앞이 안 보여서 달아나다가 머리를 부딪히긴 했지만, 뭐, 어쨌든. 건물 안으로 달아나는 데에는 성공했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위험했지만 어찌저찌 잘 풀렸으니.

다음은 군국의 몫이다.

EP.191 살고 싶다고 말해 - 7

빛이 잦아든 거리에는 오직 그림자뿐이었다. 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울펜은 눈을 가렸던 손을 뗐다. 그의 눈은, 먹물처럼 번진 어둠으로 물들어있었다.

"…조금 늦게 깨달았다, 마술사. 이제는, 속지 않는다."

처음에는 경계하느라.

그 다음에는 평소 하던 대로.

이후에는 방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마지막으로는 상대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일련의 흐름 모두, 과하게 조심한 탓에 마술사의 심리전에 말려들고는 말았다. 그게 마술사에게 한 방 먹은 이유였다.

"처음부터, 모든 힘을 전력으로 쏟아부어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속지 않는다. 속임수는 무한히 가능하지 않고, 준비한 손패를 다 털면 그는 무력한 맨몸이나 다름없다.

다음에 마주친다면, 아니, 지금 곧장 감각을 뻗어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는 그림자의 칼날 아래 쓰러지리라.

'기척을 죽이고 몸을 숨겼지만, 찾아내면 그만.'

마침, 울펜의 귓가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저 먼 거리에서부터 사람의 기척과 함께 여러 사람의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이한 기척에 울펜은 청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아미텐그라드 자체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많은 목소리가 한데 섞여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건물에 부딪히고, 멀리서 퍼지고, 메아리치며. 무미건조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퍼졌다.

『군국 통신병 유엘, 이 목소리를 듣는 모든 거주자에게 경고합니다. 현시점으로 레벨 5 비상사태, 오망성이 발효됩니다.』

『군국 통신병 디케입니다. 레벨 5 비상사태가 발효되었습니다. 모든 시민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전달 내용에 집중하십시오.』

『군국 통신병 시엔입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생기는 불이익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합창. 그건 어떤 건물의 옥상에서, 독특하게 생긴 가로등의 안쪽에서, 시계탑과 동상에서, 거리에 걸쳐진 빨랫줄 한가운데에서 들려왔다.

골렘을 통해 전해지기 전에도 무미건조했을 목소리는, 콘크리트 건물에 닿으며 한층 무기질적으로 바뀌어 군국 곳곳에 전해졌다.

『이 목소리를 듣는 모든 시민에게 경고합니다. 현재 거주지 안에 있는 이는,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결코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혹 밖에 있는 시민은 즉각 바닥에 엎드린 채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십시오.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마십시오. 오발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긴급상황입니다. 상황 종료 선언 전까지 시민으로서 권리가 일부 제한되며, 지시를 어길 시 귀하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군국은 농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무언가를 전하는 이 목소리는, 오직 진실만을 전하고 있었으니.

군국의 목소리인 통신병이, 소리가 닿는 모든 이에게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금일 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벌어진 일은 전부 잊으십시오.』

『저항을 멈추고, 그 자리에 엎드리십시오. 만일 저항의 의지를 보인다면, 군국의 적으로서 처분될 것입니다.』

『군국의 적에게 고합니다. 무익한 저항은 그만두고 얌전히 사살당하십시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경고의 목소리가 멈추고.

그 뒤로 청명하고 맑은 한 줄기 목소리가 더해졌다.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가 히스토리아 소장님께 보고합니다. 다섯 블록 앞. 방금 이상 광량이 관측된 장소에서 목표가 포착되었습니다. 본관이 유도하겠습니다.』

"확인했어."

그리고 이어지는 발소리.

뚜벅. 뚜벅.

콘크리트 바닥에서 징 박힌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마른 땅에 철이 부딪히며 나는, 규칙적이고 힘찬 박자가 더해졌다.

길게 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뒤쪽으로 흔들렸다. 나른하고 피곤한 표정을 한, 장신의 여성이 긴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모두가 숨죽인 거리에서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밤, 그녀의 시간만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 무대 자체가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종아리까지 올려 신은 군화, 한껏 불량하게 걸친 군복, 모자는 챙기지도 않았는지 보이지도 않고 단추는 두어 개쯤 풀려 있다. 군복만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양아치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팍에 반짝이는 하나의 별이, 그녀의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녀는, 아무런 전조 없이 자기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당겼다.

타앙. 한 줄기 소음이 어둠을 찢었다. 번쩍이는 불꽃이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번쩍였다. 총탄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반탄기공이라 하여도 멀리서 날아오는 것을 막는 기공이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총알에는 큰 효력이 없다.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여성의 태도는 침착하다 못해 나른해 보였다.

"으에… 잠도 못 자고 달려와서…. 컨디션이 말이 아니네."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훤칠한 이마와 시원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물들어있고 입술은 말라 부르텄으나, 짙은 피로를 뒤집어 써도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그녀가 총을 치우자, 툭, 하고. 힘을 잃은 총알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총알은 새것처럼 멀쩡했다.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쏘았던 그녀 역시도, 조금 피곤해보였을 뿐 총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아이고, 머리야. 술 없다고 맥주를 처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쓰으. 그냥 대기만 하라더니만. 이럴 줄 알았지. 그런데…."

한탄인지, 불평인지. 나른하게 중얼거린 여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군국 최연소 육장성.

아무런 경력 없이, 그저 강함만으로 장성에 올라간 총의 성좌.

패왕의 별 아래 태어난 폭력의 화신. 군국의 딸. 초신성.

총사, 히스토리아 소장.

"짐승의 왕이야 짐승이니 그렇다고 쳐도, 하다못해 시조도 조용히 있는데."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 그녀는, 서늘한 잿빛 눈동자로 정확히 울펜을 노려보았다.

"왜 좆밥새끼가 못 깝쳐서 안달일까? 아직 안 죽어서 그런가?"

그리고 직후, 총사는 울펜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울펜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군국의 소장이라는 여자가, 울펜을 공격하기 위해 '총'을 겨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탄기공이 존재하는 한 총은 무의미하다. 강력한 화살조차도 갑옷 한 장에 기공을 두르면 아무런 문제 없이 막아내는데, 짧고 가벼운 총알은 전신에서 뻗어 나가는 반탄기공을 결코 극복해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울펜이 총을 보고 잠깐 방심한 틈에.

한 줄기 총성이 울려 퍼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울펜의 어깨가 크게 비틀어졌다. 전신에 기공을 두른 울펜조차도 충격을 못 이기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고통에, 울펜은 내심 감탄하며 말했다.

"…강하군. 내세울 만해."

방심하지 않았다. 마술사의 경우와는 달리 반탄기공을 극성으로 발휘하고 있음에도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자칫했다간 들고 있던 소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총."

이 위력이라면, 거리를 둔 채로 일방적으로 사격받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어떤 바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도 거리를 유지할까.

그는 즉시 흑영기공을 뿜어내며 도로 가장자리를 미끄러뜨리며 달렸다. 눈앞에 있는, 총을 든 군인을 향해.

군인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달아 총을 쏘아냈다.

탕.

어둠으로 몸을 가린 덕분일까. 다음 총알은 울펜의 머리 위쪽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위력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맞추는 것조차 담보하지 못하다니. 저게 무기인가 싶다.

탕.

이번에는 반탄기공에 비스듬히 튕겼다. 반탄기공은 밀어내는 힘. 총탄이 직격하지 않으면 대부분 빗나간다.

탕.

이번에는 울펜 앞의 땅에 맞았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이 산탄처럼 그를 덮쳤으나, 그것조차 울펜의 돌진을 막는 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발….

찰칵찰칵. 허무한 소리가 들렸다. 총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총구를 눈에 갖다 대곤 그 너머를 살폈다. 안쪽을 확인한 총사가 중얼거렸다.

"아. 총알 다 떨어졌다."

얼마나 멍청한 소리인가. 군국은 과연 저런 장성을 가지고 그를 막으려고 드는 건가.

'빠르게 처리하고 몸을 숨기자, 장성 한둘 처리하는 건 쉽지만, 나라와 척을 지면 귀찮아지니. 본을 공격하는 것이 손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그렇게 어둠이 파도처럼 거리의 빛을 쓸어버리며 다가오는 때.

총알이 없는 것쯤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골렘으로부터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급이 필요하십니까?』

"됐어. 보급 전에 끝나."

중얼거린 총사는, 곧 옆에 있는 가로등을 쥐어 뜯었다.

가로등이 급격하게 휘어졌다. 희미한 불빛이 단숨에 사그라들며, 거인이 잡아 비튼 것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둠을 찢는 소리와 함께 빛을 머금던 유리가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작 움켜쥐는 것으로 가로등을 부수어버린 총사는, 가로등의 비참한 최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전투 연금."

까드드드득.

질 낮은 연금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20년 가까이 빛을 매달고 군국에 봉사해온 가로등 몸체가 총사의 손아귀에 틀어 잡혔다. 금속이 마찰하여 문드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른 연금강은 찰흙처럼 뭉개졌다.

비록 품질이 낮아 무르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철이다. 어디 가서 이토록 초라한 대접을 받아본 일 있을까.

다만 상대가 상식을 우습게 보는 존재였을 뿐.

콰득. 손바닥으로 연금강을 가볍게 주무른 총사가 다시 손아귀를 펼쳤을 때. 그녀의 손에는 불균일하게 압축된 금속 구체가 나타나 있었다.

대위가 지적했다.

『의문. 소장님께서 쓰신 기술은 연금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쳇, 깐깐하네. 모로 가도 총알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투덜거린 총사는 만들어낸 총알을 억지로 총구에 끼워 넣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손바닥으로 찰흙을 주물렀다고 균일한 모양의 구체가 나오지는 않으니, 규격에 맞을 리가 없다….

아직까지는.

총사가 중얼거렸다.

"총 안에 들어가면 그게 총알이지."

그러나 충분한 힘이 있다면, 규격은 무의미하다.

총사가 힘을 주었다. 규격에 맞지 않는 부분이 비명을 지르며 갈려 나갔다. 짓이겨진 부분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총구와 딱 맞는 모양으로 재단되어 고분고분 안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맞지 않는 부분은 잘라낸다. 들어가지 않으면 욱여넣는다. 버티면 민다.

지극히 군국다운 방식으로 총알을 만들어낸 총사는, 총을 빙글 돌려 다시 앞쪽을 겨누었다.

"됐네."

연금강을 총알로 빚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초 남짓.

그동안 울펜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어둠으로 몸을 숨긴 울펜이 몸을 미끄러뜨리며 총사의 뒤를 점했다. 차갑게 정련된 거무튀튀한 살의가 총사의 목을 노렸다….

라고 생각했을 때, 울펜의 시야에 징 박힌 군화가 나타났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인 건 무방비한 목덜미였는데, 언제 튀어나왔을지 모를 군홧발이 울펜의 시야에서 점차 커지고 있었다.

울펜이 급히 소도를 찔렀다. 이왕 발을 내민 것, 그 다리째로 갈라버릴 생각이었으나.

닿지 않는다. 순식간에 쏘아진 군홧발은 그대로 소도를 깨부수고, 팔을 꺾으며, 울펜의 머리까지 덮쳐 단숨에 날려버렸다.

EP.192 살고 싶다고 말해 - 8

'큭.'

순간 울펜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피가 튀고 골통이 흔들렸다. 아릿한 충격이 머리를 울리고는, 그마저도 충분치 않다는 듯 전신을 덮쳤다.

울펜은 정신력으로 어찌어찌 버티고 자세를 다잡았다. 애써 좁힌 거리가 멀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마치 호랑이를 앞에 둔 것만 같은, 온몸이 저리는 감각. 울펜은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 있었다. 다름 아닌 무저갱에서.

항거할 수 없는 강자를 마주했을 때 비슷한, 무엇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인간 자체의 격이 나누어진 듯한 강함.

저항의 의지조차 무의미해지는 힘의 차이.

그게 눈앞의 젊은 장성에게서도 느껴졌다.

'도망…쳤어야 했나!'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술사를 상대했을 때도 그랬듯, 상대방의 시야에 닿은 그 순간부터는 저항하는 것만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울펜은 다시금 소도를 잡으려고 팔을 들었다.

그때, 시야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왼팔이 끊어졌다.

망토 아래로 피가 튀며, 왼팔의 팔꿈치 아랫부분이 기이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울펜은 신체 중 일부가 자신을 저버리는 광경을 제 눈으로 목격했다.

탕.

뒤이어 들리는 총성. 그리고 그보다 훨씬 늦게 찾아온 고통.

"아, 쓰읍. 이제 좀 맞네."

그 궤적의 끝에는, 총구를 겨누고 있는 총사가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총에서는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아, 간단한 규칙이야. 내가 묻고, 네가 대답한다.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사지 중 하나가 날아가. 어때, 네 버러지 같은 머리로도 이해하기 쉽지?"

화약이 아니었다. 고작 화약 수준으로는 이만한 힘을 낼 수가 없다.

반탄기공의 극한. 극도로 압축된 기공을 총알에 담아, 단숨에 폭발시켜 튕겨내는 것.

화약이 약하다. 그렇다면 기공으로 쏘아낸다.

총신이 충격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다면 기공으로 강화한다.

반동이 크다. 기공으로 상쇄한다.

기술, 원리, 도구.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상회하는 기공으로 빚어낸, 최강의 무기는 반탄기공조차 극복한다.

말만 총이지, 사실상 창이나 다를 바 없다. 손가락을 까닥이는 방식으로 쏘아내는 무한한 길이의 창.

다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건 방금 만들어낸 총탄. 그렇다면, 저 총은 비어있다는 것.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처라도 입혀야 무사히 도망칠 수 있다.

그렇다면.

울펜은 왼팔을 뻗었다. 날아가는 왼팔을 기공으로 붙잡고는, 그 피를 흩뿌리며 돌격했다. 뼈와 근육이 보이는 소름 끼치는 단면을 내밀었다.

"웩.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구역질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의 아래로, 자세를 낮춘 울펜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아직 멀쩡한 오른팔로 반쯤 쪼개진 소도를 내민다. 동시에,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숨기고 있던 단검을 은밀하게 꺼내 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지며, 어둠 속에서 날을 새카맣게 칠한 검이 불쑥 솟구쳤다.

지근거리, 방심한 상대를 죽이기 위한 그림자 검. 소도의 그림자 아래 하나의 칼날이 더 숨겨진, 오직 살인만을 위해 단련한 기예…

가, 총사의 팔꿈치와 무릎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팔꿈치와 무릎 사이에서 오른팔이 조각조각 났다. 힘이 빠져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더는 쥘 수 없는 손이 되어, 박살 난 손가락 틈으로 소도와 단검이 흘러내렸다.

엄습하는 고통. 그에 비해 총사는 사람 팔 하나를 고장 내놓고도 무심했다.

"사지 두 개. 이제 다리만 둘 남았네."

중얼거린 총사가 권총 손잡이로 울펜의 등을 찍었다.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 울펜은 전신이 찢겨나가는 충격을 느끼며 땅바닥에 부딪쳤다. 대지가 솟구쳐서 그를 덮친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군홧발이 가볍게 울펜의 몸을 뒤집었다. 두 팔이 걸레짝이 된 채 누운 울펜의 시야에 높게 솟은 건물과 벌레를 보듯 내려다보는 듯한 총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제 대답할 마음이 들었냐?"

압도적인 강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 모든 것을 시야 아래 두는 광오한 태도.

울펜의 저항은 헛되이 끝났다.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한 울펜이 피를 토해내며 물었다.

"…쿨럭. 어째서, 고작 뒷골목 일에, 너 같은 게 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하층민들 몇 죽어 나간다고 파견하기엔 너무 과한 거물이다. 이만한 강자라면 분명 국가적인 전력이며,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야 할 판인데.

울펜이 묻자, 총사는 총으로 자기 머리를 긁었다.

"이상하다.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는데."

약속은 지켜야지, 하고 중얼거린 총사가 군홧발로 울펜의 무릎을 지그시 밟았다. 비틀어지는 울펜의 입가를 바라보며 총사는 나른하게 말했다.

"이번만은 너에게 말해줄 테니까, 다음 내 질문에는 잘 대답하도록 해…. 하멜른, 알지?"

알다마다. 울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국의 터부. 졸업을 앞둔 중등학교의 학생이 떼죽음 당한 사건.

울펜은 그것을 미끼로 군국을 끌어들여, 뒷골목 일대를 청소하려고 했다.

고작 뒷골목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들이 모이는,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밀려난 곳. 이곳이라면 그는 충분히 왕처럼 군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뒤이어 총사가 한 말에, 울펜은 자기가 지금까지 무언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하멜른.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배움의 동산. 거기가 내 모교야. 어때. 이제 조금 정신이 들었냐?"

"…설마. 네가, 하멜른의 마지막 졸업생…."

"닥쳐. 다음은 내 질문이다. 너에게 하멜른에 대해 말한 게 란카르트. 그 개자식 맞지?"

알다마다. 울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하멜른에 대해 이야기한 자가 바로 그였으니.

하멜른의 마지막 졸업생 중 다른 하나, 란카르트 대령.

가장 늦게 탄탈로스에 떨어졌으면서도 온갖 방식으로 죄수들을 휘어잡은 젊은 광인.

어떤 때는 힘으로, 어떤 때는 지식으로, 어떤 때는 욕망으로. 거무칙칙하게 가라앉는 탄탈로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요술사는 결국 그들을 이끌고 탈옥하기까지 했다.

탈옥하기 직전, 그는 울펜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울펜의 쓰임새를 고민하는 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울펜. 나에겐 유능한 부하가 필요해. 아주 많이. 겁 많고 음습한 너라면… 음. 아슬아슬하게 우리 파티의 염탐꾼 역할 정도는 맡을 수 있겠어!

-뭐어어? 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더 위대해질 기회를 마다하고, 그 조그만 쥐구멍으로 돌아가게?

-하아. 네가 이토록 낭만이 없는 소인배일 줄은 몰랐어. 이 세상을 바꿀 힘, 그 편린을 주겠다는데 고작 뒷골목 대장이나 하고 있겠다? 참나. 평야를 내달리는 말도 어제 못 본 땅을 눈에 담아. 그런데 쥐굴에 처박혀 똑같은 풍경을 계속 보겠다니. 우욱.

-아아, 걱정하지 마. 실망했다고 하나하나 죽이진 않아. 귀찮게 왜? 어차피 누군가 군국 뒷골목을 휘젓고 다니면 나도 괜찮거든.

-가는 김에 군국의 비밀 하나 알려줄까? 이거 떠들고 다니면 군국이 미치고 팔짝 뛸 텐데. 네가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

붉은 머리의 마법사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와 같은 괴물에게도 추억이라는 게 존재한 모양인지, 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멜른이라고, 알아? 거기서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 두 번째."

총사의 목소리가 울펜을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그 사건을 검은 고양이에 퍼뜨린 이유는 뭐지? 그것도 란카르트의 명령이냐, 아니면 독단이냐?"

이번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울펜은 의문을 표했다.

"검은… 고양이? 패밀리의 영역 말인가?"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 발뺌할 셈이냐?"

빠드득. 울펜의 무릎에 돌덩이를 얹은 듯한 무게가 실렸다. 관절이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총사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검은 고양이는 가십을 다루는 폭로지야. 가끔 군사 비리도 포착해내는 터라, 당연히 정보부 쪽에서도 그걸 살펴보고 있지. 그런데 그 이름을 대놓고 적어두면…. 도대체 뭐야? 그냥 나를 부르는 셈이잖아?"

"그… 이름… 이라니."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총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다그쳤다.

"중등학교 전교수석, 휴이. 란카르트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것까지 알려준 건지 모르는데. 그 자식 이름을 알려줬다면… 애초에 넌 놀아난 거야. 나보고 너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거나 다름이 없다고."

놀아났다는 말에는 동감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총사가 말하는 건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울펜은 의문을 표하며 대답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뭐?"

"본이 아는 건, 그들의 죽음은 자살이었다는 것. 죽기 전에 군국을 저주했다는 것. 그리고 란카르트 그가… 2등을 차지했었다는 일뿐. 그 이상은… 본이 쓰기 나름이라 하여… 대강 꾸며냈지."

"그 새끼는 3등이었어! 그것 말고는, 나름 진실이긴 한데."

울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만큼 진정성이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사실을 들은 총사는 생각에 잠겼다. 총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무언가를 찾듯 주머니를 뒤지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찼다.

"하긴, 그건 란카르트의 방식이 아니야. 너희가 할 이유도 없고. 그러면 뭐야? 그러면 도대체 누가?"

총사는 발아래 둔 울펜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깊게 생각에 잠겼다. 울펜이 길가의 돌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돌멩이 비슷한 취급을 당한 울펜은, 분함 대신 무력함을 느꼈다.

'…무력하군.'

울펜이 무저갱에서 깨달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격이 정해진 세상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무력하다.

재능이든, 신비든, 시간이든. 인간의 강함을 결정짓는 벽이 있으며, 그 벽은 결코 넘을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닿지 못하며, 극복하지 못할 경지 위에 있는 그들은 아래쪽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벽을 넘어서 절대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그러나, 그만큼 축복받은 이는 정해져 있다.

나머지는 벽에 부딪혀 사라질 뿐.

왕국 시절, 나름 그림자로 군림했던 그에게 탄탈로스의 상식은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신의 부재를 깨달은 신도처럼 울펜은 절망하고 실의에 빠졌다.

무저갱은 울펜에게 있어 그 이름대로 끝도 없이 빠져드는 지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저갱에서 탈출할 기회가 생겼을 때.

울펜은 더 높은 곳을 포기한 채,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더 강한 자의 눈에 들어 죽는 처지가 되었다.

'마술사를 상대하며 착각하고 말았다. 절대, 절대로 정면에서는 맞서서는 안 되었어.'

마술사는 나약하지만 온갖 도구를 써서 그를 속이고 기만했다. 직접 칼을 맞부딪힌 것도 고작 두 번. 만일 처음부터 그의 기량을 깨닫고 전력으로 공격했다면….

아니, 그와 싸우며 자신의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결과는 비슷했겠지만 최소한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무언가 가슴에서 톡톡 걸렸다. 그게 무엇일까 아무리 떠올려도, 울펜은 암흑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헛짚기만 했다….

그런 그의 시야. 하늘로 향하며 점점 좁아지는 건물의 옥상에.

내가 나타났다.

나는 지팡이를 들고 모자를 쓴 채 옥상 난간에 섰다. 생각에 잠긴 총사의 시야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쓰러진 이에게만 보이는 자리에서, 나는 모자를 살짝 들고 지팡이를 내밀며 인사했다.

울펜은 조그맣게 탄식했다.

"아."

기량이 부족하나, 한 명은 승리했고 한 명은 패배했다.

나는 성공적으로 도망쳤지만 울펜은 패배한 채 군홧발 아래 놓였다.

살아남고 싶다면 좀 조용히 살았어야지. 자기가 난리를 쳐놓고서는.

뭐, 굳이 자랑하진 않겠어. 나에게는 독심술이 있었으니까 똑같이 비교하기엔 공평하진 않지.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거.

쓰러져 있는 건 너지만, 너는 나보단 강했다.

EP.193 살고 싶다고 말해 - 9

울펜을 속이기 위해서는 끝까지 그를 마주봐야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눈을 감아도 스며드는 종류의 빛이라는 거.

덕분에 과한 자극을 받은 내 눈은 파업을 선언했다. 잔광이 명멸하며 내 시야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울펜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헛되이 비틀거렸다.

나는 타인의 시야를 훔칠 수 있지만, 훔칠 시야가 없다면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마침 근처에서 그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나 역시 내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응, 괜찮아. 지팡이 쓰면 돼.

미리 만들어 둔 마술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어떻게든 미리 봐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후우. 지팡이를 미리 만들어두길 다행이야. 시각장애인 체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도 길을 잃을 뻔했다.

어쨌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거주지 안까지 도망친 나는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는 도중 밖에서 쿵짝와작우드득와장창 소리가 들렸지만 어쨌건 지금은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계단이 같은 규격이라 다행이다. 한 번 발을 제대로 디디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여 꼭대기까지 이를 수 있으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와악!"

아, 마지막에 계단 다 끝난 줄 모르고 헛디뎠어!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잖아!

어쨌건, 반쯤 장님이 된 채로 계단을 오르니 어느새 옥상이었다. 그동안 시력은 천천히 회복되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옥상 문으로 나섰다.

옥상이 보였다. 콘크리트 빛 옥상은 좁고 각진 지평선 가진 채 나를 맞이했다. 물탱크와 파이프가 덩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고, 청소용 장비가 두꺼운 천 아래 쓰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주지의 평범한 옥상을 가로질러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울펜이 히스토리아에게 제압당한 채 누워있었다.

나는 쓰러진 울펜에게, 달빛 비추는 밤을 배경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울펜. 과정에 후회는 있을지언정 결말은 납득할 수 있겠지. 너는 너보다 강한 자의 손에 죽는 셈이니까.

나름 칼밥 먹고 산 사람이라, 울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무력함을 두려워했다.

규격 외의 강자에게 허무하게 짓밟히는 자신이 싫어서, 또 이보다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 분해서. 그렇지 않아도 비틀려 있던 그는 약자들 위에 군림할 계획을 세운 거다.

후. 그러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건데. 왜 꼭 깡패처럼 다 들쑤시고 다니냐고. 나처럼 조용히 슬로우라이프를 보내란 말이야.

"자. 어쨌건. 이제 어떻게 도망가냐인데."

내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 방이나 잡고 그 안에 숨어?

흐음. 그래도 안 될 거 같은데. 군국이라면 방 하나하나를 다 뒤져봐도 이상하지 않으니.

이걸 어쩐담.

에이비 대위는 내 정체를 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쟤도 내 정체를 안다는 거지.

그리고 나를 땅끝까지 쫓아올 의지도, 능력도 있고.

"체크메이트네."

후우. 내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통신병의 감시를 뚫고 군국을 탈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미 마력도 바닥이고, 몸도 만신창이라서.

에이비 대위야 몰라도 다른 통신병은 모르는 사람이라, 내 존재를 발견하면 곧장 추적할지도 모른다.

마술사, 절체절명의 위기.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세기의 대탈출 쇼를 벌여야 하나. 너무 어려운데.

그때였다.

내 그림자 아래에서 흑기사가 나타난 건.

오랜만에 보는 형상이었다. 그림자를 뭉쳐 만든 듯, 새까만 갑주를 입은 기사가 고요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너무나도 뜬금없는 등장에 할 말이 없어서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냐. 이 흙잡졸은."

흑잡졸은 처음부터 내 그림자에 숨어있었던 듯했다. 지금까지는 거리에 드리운 어둠에 가려져서 안 보였는데, 옥상으로 올라오니 돋보이는 어둠이 내 그림자밖에 없어서 드러난 것 같았다.

"어라. 저기요? 혹시 티르예요?"

손을 흔들었지만 흑기사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이쪽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거나, 거리가 꽤 멀어진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흑기사를 뿌려놓은 걸까… 내가 골똘히 생각하던 무렵.

아래쪽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네가 나를 부른 게 아니면, 누가 한 건데?"

"마술사…. 큭. 본은 결국, 끝까지 네놈에게 놀아난 것인가…."

총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울펜의 읊조림은 총사에겐 대답이 되었다.

"마술사?"

골똘히 생각하던 총사는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대로변, 한쪽 가장자리에 뒷면을 보인 채 덮여있는 한 장의 카드. 그녀는 요령 좋게도 발끝으로 카드를 튕겨내고는 낚아챘다.

클로버 1, 빛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내 마법의 매개물.

"하."

총사는 옥상에서도 다 들리도록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밖에 없지. 이딴 일을 할 사람은."

아, 저거.

매개 마법은 마법의 대가를 매개체가 대신 받는다. 그래서 방금 전 어마어마한 빛을 일으킨 카드는 아직도 반딧불이 같은 잔광이 맺혀 있었다.

주워둘 걸 그랬나? 하지만 1회용이기도 하고, 밤중에 빛이랑 마력을 줄줄 흘리는 카드를 품에 들고 있으면 나 잡아주쇼 하는 거랑 똑같다. 그래서 일부러 뒤집어서 구석에 처박아버렸는데.

들켜버렸다.

"이건 주로 네가 쓰던 방식이지, 휴이. 역시, 그때 죽은 게 아니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헛웃음을 지은 총사는 즉각 총을 뽑아 하늘을 겨눴다.

타아아아아앙.

이번 총소리는 이전과는 달랐다. 단지 총구로 기운을 흩뿌렸을 뿐인, 공기 말고는 아무것도 쏘아내지 않은 공포탄(空砲彈).

총구로 푸른 기운이 유리창처럼 깨져나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총성이 어두운 밤거리를 찢고는 널리 울려퍼졌다.

물에 잠긴 듯 먹먹한 귀로, 총사의 희열 어린 절규가 들려왔다.

"당장 튀어나와! 휴이, 이 빌어먹을 새끼야---!!!"

내 계획은 성공했다.

폭로지, 검은 고양이. 군국에서도 주시하는 가십이 담긴 잡지에다 정보를 흘렸다.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은 휴이.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들으면 절대 좌시하지 못할 이름을 미끼로 내걸었지. 덕분에 군국은 발작적으로 출동했다.

그런데 군국이 예상보다 조금 더 늦게 오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고. 왜 이리 움직임이 굼떴던 거야.

내가 위험하게 되었잖아….

본그림자 말고. 육장성에게 말이야.

쳇. 내가 혼자 그림자를 다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면 친구 찬스를 쓸 일도 없는데.

그리 중얼거리는 사이, 총사가 골렘을 향해 외쳤다.

"통신병! 관제를 시작해!"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제 술기운이고 나른함이고 뭣도 없었다. 두 눈에 격정과 분노를 가득 담은 채 총사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잡는다! 구역을 통째로 봉쇄하고 경로에 보급품 배치해! 근처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인적사항을 나에게 보내고! 헌병대보고 제 할 일 끝나면 전부 내 쪽으로 오라고 연락해!"

『피리 부는 사나이….』

잠깐 말을 끈 대위는 곧 자세를 다잡고는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소장님, 장성기를 장비하시겠습니까?』

"늦어! 대신, 골렘을 싹 다 긁어와! 그 자식은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까!!"

육장성의 명령이다. 총사가 골렘에 대고 말하자 군국이 움직였다. 밤중이라 멀리 보이지 않음에도, 어두운 도시가 웅크린 괴물처럼 꿈틀대는 것 같았다.

사냥감이 된 입장에서, 사냥꾼의 명령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아. 업보 청산의 시간인가. 너무 많이 해 먹기는 했어."

울펜과 싸운 이상, 정체를 들키는 건 상수였다. 이렇게 바로 알아낼 줄은 몰랐지만, 냄새를 엄청 잘 맡았네.

이게 다 울펜이랑 군국 때문이다. 울펜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군국이 제때 출동만 했어도 내가 나설 일 없잖아.

어쩌지? 히스토리아 상대라면 딱 한 번. 딱 한 번은 떨쳐낼 방법이 있긴 한데. 문제는 다른 추적자들은 못 떨친다는 거지.

끝장인가.

그 순간, 옥상 난간 근처에서 무언가가 목을 돌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가만히 그게 뭔지 살폈다.

골렘이었다. 머리 위만 달린, 순수한 감시용.

여기도 있냐? 와. 도대체 몇 개를 숨겨놓은 거야, 군국.

당장 도망쳐야….

『귀하. 본관입니다.』

"에이비 대위?"

『긍정. 본관이 이 골렘과 동조한 동안, 다른 통신병은 동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주는 잠시 멈추어주십시오.』

즉각 달아나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간결하게 설명한 골렘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귀하. 상황이 급박하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히스토리아 소장님께서 찾는 휴이가 귀하입니까?』

"아. 네."

『그렇다면 귀하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입니까?』

"아하하. 그, 긍정. 사실 피리를 분 게 아니라 호각을 불긴 했지만요."

어쨌든 내가 불긴 했지…. 순순히 수긍하자, 골렘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말을 끌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래쪽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위는 시간에 쫓기듯 다급히 말했다.

『…본관은 귀하를… 목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귀하가 소장님의 추적을 피해서 도주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됩니다.』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지 않는 한,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따라, 요청합니다. 귀하, 자수하지 않겠습니까?』

자수해달라고? 군국 대위가, 사상 최악의 사상범에게?

골렘 너머에서도 대위의 걱정이 전해졌다. 거 참, 약을 조금 쳤는데도 범죄자 걱정까지 다 해주네. 사람이 얼마나 순수한 거야.

하지만, 마음은 고마운데.

"군국이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요. 저는 피리 부는 사나이니까요."

억울하지. 앞에서 호각만 좀 불어주었다고 내가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고. 그래서 나도 죽은 척, 중등학교 1등 스펙조차 포기한 채 휴즈로 신분 세탁해서 수도로 올라와야 했다.

이제와서 자수해봐야 '그래, 앞으로 잘하자'라는 말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학생 161명, 국가적으로는 참 사소한 손실이나… 동시에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본관이.』

"아하하. 그러니까 열심히 잘 살아요, 에이비 대위. 저는 이만 물러날 때인 것 같네요. 가야 할 때를 아는 자는 뒷모습만 보여야 하는 법이죠."

바닥난 마력을 짜내며 다이아몬드 2 카드를 변환시켰다.

다용도 갈고리. 그걸 밧줄에 매단 채 빙빙 돌렸다. 목표는 반대편 건물. 거기에 밧줄을 연결하고, 몸을 던져서 내려가자.

『…확인했습니다. 귀하라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겠지요.』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 발버둥은 쳐봐야지요."

『무운을 빕니다.』

"저도 제법 즐거웠어요. 나머지는 부탁드릴게요. 에이비 대위, 세피한테도 안부를 전해주시고요."

빙글빙글 돌리던 갈고리를 던졌다. 철컹,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반대편 난간에 단단히 걸렸다.

그러는 동안, 대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도주할 거라면 동쪽으로 가십시오. 귀하를 도울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골렘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직후.

"찾았다."

히스토리아가 사냥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중얼거렸다.

EP.194 살고 싶다고 말해 - 마무리

"찾았다."

히스토리아가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들린 직후 나는 밧줄을 대충 몸에 두르고는 즉각 뛰어내렸다.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자유낙하. 밧줄에 매달려 있다는 건 알지만, 무시무시한 속도감과 발밑이 허전한 아찔한 느낌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그래도 내 뒤를 쫓아오는 저 히스테리한 목소리보단 덜 무섭겠지.

쿵쿵거리는 소리. 방금까지 내가 서있던 건물에서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거주지 안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하다. 지금, 히스토리아는.

건물 벽을 깨부수며 걸어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거기 서-!"

"너 같으면 서겠냐아아아!"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진다. 계산한 것에 비해 밧줄 길이가 살짝 부족하다. 밧줄의 최저점에서, 나는 밧줄을 놓고는 낙법으로 땅을 구른다.

"아야야야야야!"

사실 낙법이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방법임이 틀림없다. 배운 대로 했는데 아프잖아! 잘 떨어지는 법이라니, 애초에 사람은 날짐승이 아니라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어쨌건, 똑바로 선 나는 아려오는 왼팔을 부여잡은 채 온힘을 다해 달렸다.

뭐, 그래봤자.

"찾았다!!!"

발 디딜 데 없이 매끈한 벽을 기어오르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건, 벽에 발 디딜 데를 만들며 올라오면 된다.

한 발을 세게 내디디면 벽이 깨지면서 몸이 고정되고, 그것을 턱 삼아서 뚜벅뚜벅 걸으면 벽을 걸어오를 수 있다.

개소리 같지만, 조금 전까지 히스토리아가 한 일이다.

그렇게 거주지 벽을 걸어올라온 히스토리아는 옥상에 서서 정확히 나를 포착했다.

"휴이! 거기 멈춰! 멈추지 않으면 쏜다!"

보통 말이 먼저 나온다는 건 쏠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외쳤다.

"네가 쏘면 나는 죽는다! 하하! 톡 건드리면 죽을 선량한 시민에게 총을 쏠 셈이냐!"

"못 쏠 것 같아?"

히스토리아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손에 쥔 총탄을 장전한 히스토리아가 가늠쇠 너머로 나를 겨눴다.

아, 젠장. 괜히 도발했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쏴주지. 다리를 깨끗하게 관통하도록.'

다리에 깨끗하게 구멍을 내주겠다는 게 어떻게 친구냐. 내가 속으로 불평하며 옆으로 뛰려는 무렵이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총을 쏘기 직전, 히스토리아는 내 곁에서 달리는 인영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어? 내 옆을 누가 따라붙고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나와 보조를 맞춰 뛰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 소녀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와 비슷한 속도로 태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네 발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지는 해맑게 웃으며 짖었다.

"멍! 반가워! 반가워!"

대위. 사람이라더니. 개잖아.

심지어 도움도 안 돼. 아지는 사람 상대로 못 싸운다고!

그래도!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런데, 나도 반가워. 지금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멍! 울보!"

"아직 안 울었거든?"

'상관없다. 일단 다리를 쏘는 편이.'

히스토리아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아지의 귀가 먼저 쫑긋거렸다. 소리보단 육감으로 먼저 그 사실을 파악한 아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뛰었다. 잘 안 보이는 어둠 속, 아지 눈에 반사된 빛이 한 줄기 광선이 되었다.

타아아앙!

뒤이은 총성과 함께, 어느 순간 내 뒤로 뛰어든 아지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동시에 아지의 몸이 저 멀리 튕겨나가 등부터 떨어졌다.

아지는 펄떡펄떡 뛰며 외쳤다.

"멍! 뜨거워! 딱딱해! 아파!"

인간을 상대로는 못 싸우지만, 총탄을 상대로는 싸워주는구나. 그보다.

"너도 총에 맞으면 아파하는구나. 새삼 놀랍네."

그런 애가 총알을 이빨로 잡아내니. 그래도 육장성의 총알이라 그런지 아파하는 기색이다.

아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맺으며 외쳤다.

"이빨, 흔들려! 아파!"

"침 발라."

"멍…! 나아도 아파! 멍!"

"그러니까 누가 그걸 이빨로 잡아내니. 반탄기공 같은 거 못 쓰니?"

"멍? 반찬? 고기?"

"됐다. 개에게 무슨 소리람."

아지라도 히스토리아의 총탄을 연달아 잡아내지는 못할 거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히스토리아에게 총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

"멈춰어어어어!"

옥상에서 단숨에 뛰어내린 히스토리아가 땅에 착지했다. 기세가 어찌나 흉폭한지, 콘크리트를 타고 진동이 흘러들어온다. 바닥을 깨부수며 내려앉은 히스토리아는 짐승처럼 거칠게 눈을 빛냈다.

"거기 서!"

또로록. 그녀의 손 위로 총탄 네 발이 더 떨어졌다. 그것을 단숨에 탄창에 쑤셔 박은 히스토리아가 달려들면서 다시금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뭐, 개가 있으면 돌보는 사람도 있겠지.

"천검기!"

회귀자가 내 앞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회귀자는 즉각 보이지 않는 검을 펼쳤다.

"천경!"

반탄기공과는 다르다. 하늘의 검, 천앵을 사방으로 펼쳐서 만들어낸 순수한 공간의 휘어짐. 빛조차도 비트는 기술이다.

히스토리아의 사선에 보호막을 친 회귀자가 다급히 말했다.

"야! 너는 어쩌다가 육장성에게 쫓기는 몸이 된 거야?!"

회귀자의 말에 나는 차분히 반박했다.

"틀려요. 원래 쫓기는 몸이었는데 쫓는 쪽이 육장성이 된 거예요."

"무슨 상관이야!"

"순서가 중요하다고요, 순서가. 상대가 육장성이면 제가 저토록 밉보였겠어요?"

"하나도 중요하지 않잖아!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거 아니야?! 어쩌다가 쫓는 쪽이 육장성이 되었는데!"

"쩝. 쟤가 저렇게 진급을 빨리할지 알았나."

타, 타, 타.

연달아 쏜 세 발이 천경에 의해 비켜났다. 파앙, 파앙, 파앙. 빗나간 세 발의 총알이 콘크리트 바닥을 두부처럼 파헤치고 도려냈다.

내 양옆으로 땅이 박살나는 광경은 빗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공포스러웠다.

심지어, 아직도 안전하지 않다. 나도 회귀자도 위험을 감지하고는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회귀자는 이전 회차의 경험 때문에, 나는 히스토리아의 생각을 읽은 덕분에.

다음 번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히스토리아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겨누었다.

'영점 잡이.'

세 발로 영점을 잡으면, 다음 한 발에 필중을 약속한다. 총탄에, 총신에, 총술에 기공을 덧씌운 채로 싸우던 히스토리아만 깨우친 기공총술.

그 역시, 이치에 조금이나마 닿은 기공의 극의.

많이 강해졌구나. 그동안 나는 뭐 했지….

다음에 동창회 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수배범이라 갈 수도 없겠지만.

아니, 애초에 동창회를 열 만큼 많이 살아있지도 않구나. 헤헷.

'저건 비껴낼 수 없어! 막아야 해!'

전회차에서 겪어본 적 있는지, 회귀자는 흘려내거나 반탄기공으로 튕겨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지잔을 크게 휘저어 땅 자체를 뒤집어버렸다.

"지곤류, 땅부수기!"

지잔을 세게 내리치자, 그 근방이 풀썩 주저앉으며 조각 난 콘크리트가 가시처럼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튀어오른 콘크리트에 총사와 우리 사이가 갈라졌다.

그 사이를 꿰뚫고 나타난 총알. 그러나 콘크리트를 부수느라 기세가 죽은 총탄을 회귀자가 손쉽게 튕겨냈다. 천앵이 피잉, 하고 휘어지며 총탄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몇 번은 막아낼 수 있어. 하지만 영원히는 못 막아! 근접해서 맞서 싸울 셈이 아니면…!'

판단을 끝낸 회귀자가 즉각 소리쳤다.

"티르칸쟈카! 어둠으로 시야를 가려줘!"

"받아들이마."

나긋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 가로등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군국의 밤은 어둠을 몰랐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의 어둠은 얼굴에 줄무늬를 그어놓고 호랑이라 참칭하는 여우나 다를 바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밤이 찾아왔다. 거대한 어떤 존재가 군국의 촛불에다가 입김을 분 듯, 훅 하고 바람소리가 들린 순간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세상을 뒤덮었다.

가짜 그림자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권능, 그림자의 여왕이라 불린 재앙이 '고작' 25년밖에 안 된 나라의 밤에 찾아왔다.

내 손발조차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시조 티르칸쟈카는 양산을 어깨에 걸친 채 나긋하게 다가왔다. 독심술로 기척을 파악한 나는 깜깜한 어둠 한 곳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야. 위기의 순간 나타나니 든든하네. 내가 인사하려고 할 때였다.

"결혼 축하한다, 휴. 네가 이 나라로 돌아오고자 한 이유가 있었구나."

미묘한 적대감이 더해진 차가운 한마디가 나를 밀어냈다. 어라.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네.

어설프게 손을 내리는 나를 향해, 티르가 원망과 적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 너도 나이가 찼으니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 정도는 있을 법하지."

"미안한데, 티르.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닌 것 같아요."

"혹 저 아이가 네 신부더냐?"

흘긋. 티르는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뛰어드는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티르의 붉은 눈에는 흉폭한 기세로 뛰어오는 히스토리아가 똑똑히 보였다.

"보아하니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어떠냐. 혹 원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들어주겠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부부 아니에요. 쟤한테 그 말 했다간 진짜로 죽을 각이거든요?"

"음? 부부가 아니라고?"

그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아서, 제일 간단하고 명쾌하게 답했다.

"결혼사기를 치려다가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도망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 결혼은?"

"가짜 정보죠."

티르의 눈가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결혼으로 사기를 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어쨌든, 알겠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저갱에서는 도망쳤던 것이냐?"

"설명하자면 긴데, 그쪽이랑 같이 다니다간 제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지금도 딱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만. 어찌, 목숨이 열 개라도 되도록 흡혈귀로…."

"아니, 좀. 그러지 말고."

어둠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어둠을 찢고 들어오려는 히스토리아 앞을 회귀자가 막아섰다. 근접 박투로 접어든 히스토리아의 앞에서 회귀자는 천앵을 흩뿌리며 공격을 받아냈다.

지잔과 천앵을 쓰는 회귀자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거세게 지잔을 걷어찼다가 반동에 인상을 찌푸린 히스토리아가 외쳤다.

"비켜!"

하하. 비키라고 한다고 순순히 비켜주면 그게 회귀자겠냐? 너도 맛봐라, 고집불통 회귀자의 맛을!

"…슬슬 그럴까? 굳이 육장성이랑 싸우면서까지 데려갈 필요는 있을까…?"

야! 회귀자! 네가 그럴 때냐!

진지하게 고민하는 회귀자의 옆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발톱이 히스토리아의 옆을 노렸다. 은밀하게 습격한 그림자에 히스토리아가 발을 갖다대어 막았으나, 그 그림자는 앞발을 세차게 휘둘러서 히스토리아를 날려보냈다.

"냐아…. 소란스럽다냐. 인간은 영역을 너무 자주 바꾼다냐…."

어느샌가 나타난 나비가 투덜거리며 회귀자 곁에 섰다. 히스토리아는 갑자기 참전한 나비를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고양이의 왕…! 죽고 싶냐?!"

"냐아아! 감히 냐를 보고 죽고 싶냐고 말했다냐?!"

이를 세우는 나비는 적이었을 때는 까다로웠지만 아군이 되니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적에게 적대적인 짐승의 왕이란 이러한 존재였구나.

어쨌든, 동쪽에서 귀인들이 왔으니. 이 기회를 잡아야겠지.

"저기, 티르. 셰이. 그리고 다른 짐승분들."

나는 모두가 들리도록 소리 높여 말했다.

"저 살고 싶은데, 바쁘지 않으면 좀 구해주시겠어요?"

엉뚱한 생각이나 작전 따위는 담지 않은, 솔직한 요청.

아지나 티르는 내 말이 의외였는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아지였다. 아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 구해줄게! 목 대!"

"목덜미 물고 달려가려고? 미안한데 인간은 그걸 처형이라고 불러."

아지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부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이미 구해주는 중… 이잇!"

"네. 저도 이미 고마워하는 중이에요."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말해…! 칫! 까다롭긴!"

저쪽에서는 회귀자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총탄이 다 떨어졌는지, 총구를 잡고 거꾸로 든 채 둔기처럼 휘두르는 히스토리아를 상대로 천앵을 휘둘렀다.

"후우. 괘씸하기는 하다만."

티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나며 히스토리아를 덮쳤다. 히스토리아는 즉각 총으로 기공을 내뿜었지만, 어쨌든 헤치고 나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일단, 네게 져주마. 여기를 벗어나자꾸나."

"물러날 거지?! 적당히 하다 빠질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회귀자의 말. 그보다 더욱 너머에서 히스토리아의 발작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닥쳐! 너희들은 관계 없잖아! 휴이 그 새끼를 놓고 가!"

"미안, 리아! 나 갈 데가 있어서!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

"야아아아아아!"

동기에게 기약 없는 인사를 건네며, 나는 티르가 들고 온 관 위에 올라탔다. 어둠을 탄 관은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거리를 질주했다.

안녕, 아미텐그라드. 나를 소중하게 안아주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여.

평범한 잡범은 이만 물러갈게.

점차 멀어지는 아미텐그라드를 향해, 나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EP.195 먼 곳의 이야기. 군국에 남은 이들

어지럽히는 건 쉽지만 정리하는 건 어렵다… 는 것은, 놀랍게도 착각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어지럽히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나, 정리는 한순간이다. 단지 귀찮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 아무리 오랜 시간 어지럽힌 방도 청소 반나절만 거치면 깨끗해진다는 점에서 무엇이 더 우위인지는 명백하다.

군국은 효율적인 게으름뱅이였다. 방 청소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 안의 모든 쓰레기를 한꺼번에 청소하는.

이만한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오랜 준비와 결사의 각오가 필요했지만, 군국에 의해 정리되기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히스토리아가 이끌고 온 헌병단은 어지럽혀진 물건을 치우듯 빠르고 간단하게 간단하게 뒷골목을 정리했다. 끝내야 할 때를 모르고 소동을 이어나가던 쓰레기들은 처분당하거나 체포되었으며, 그에 관련된 이들 역시 헌병대로 끌려가 엄중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관련자들은 겁에 잔뜩 질린 채 조사를 받았다.

군국이 쓰레기를 다루는 방식은 땔감이다. 그렇게 잡아넣은 인간 쓰레기를 때워서 군국이라는 나라를 굴릴 자원으로 쓴다.

그리고 방을 정리하다 보면, 으레 쓸 수 있는 것도 같이 버려지기 마련.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도 안심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갖 험한 꼴을 당할 거라 각오하고 헌병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오며 의아해했다. 뜻밖의 행운은 당황함을 점차 기쁨으로 바꾸었다.

진상 따위 알 게 뭔가. 그들은 안전한데.

그렇게 버려지지 않은 것들은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일상을 만끽했다.

"…이것까지 계산했냐? 치밀한 새끼."

히스토리아가 담배갑에서 마력초 담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피리 부는 사나이. 군국의 터부인 하멜른의 사건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인 존재. 그가 정체를 드러낸 이상, 고작 군국 뒷골목에서 일어난 소동의 진상을 밝히는 건 뒷전이었다.

오히려 사건을 조사하다가 피리 부는 사나이에 대한 정보가 역으로 노출될 수 있다. 평범한 시민들에게 휴이, 휴즈, 혹은 마술사에 대한 정보를 캐물으면 그 자체로 단서를 노출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군국은 겉으로 드러난 죄인을 처벌하는 선에서 조사를 그만두었다. 대신 피리 부는 사나이를 추적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아니. 애초부터 그 새끼가 진상에 얽혀있겠지. 그놈만 잡으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어."

책상 위에 긴 다리를 올려놓은 채 중얼거리던 히스토리아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버릇처럼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동시에 권총의 공이를 담배 끝으로 가져다댔다. 그리고 공이를 한껏 당겼다.

따아악.

공이가 부딪치며 커다란 불똥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담뱃불을 만든 채 숨을 크게 들이쉰 히스토리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통신병."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부르셨습니까?』

히스토리아 옆에 있던 골렘이 반응했다. 히스토리아는 그쪽을 보지도 않은 채로 한껏 빨아들인 공기를 내쉬었다. 푸우우. 기다란 한숨이 색을 가지고 휘감기며 올라갔다.

바쁜 가운데 짬을 내어 담배를 즐긴 히스토리아는 멍하니 물었다.

"왜 안내를 멈췄지?"

『의문. 어떤 사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내가 어둠에 휩싸인 직후 왜 안내를 그만둔 거지?"

자신이 추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 에이비는 팔을 뒤로 모으며 대답했다.

『명령에 불응한 점, 시정하겠습니다. 다만, 본관을 포함한 통신병단이 판단했을 때. 그 이상의 추격은 무리였습니다.』

쾅. 히스토리아가 갑작스레 책상을 내리쳤다. 강철 상판 위로 그녀의 주먹 자국이 생겨났다.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담배를 물고 있어서인지 입에서는 악문 소리가 났다.

"그걸 네가 왜 정하는데?"

히스토리아의 서슬 퍼런 기색에도 골렘은 담담했다.

『상대는 짐승의 왕 2체를 제외하고서라도, 육장성급 강자가 둘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소장님께서는 비무장 상태. 이대로 맞서 싸웠다간 큰 손실이 생깁니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소장님께선 군국의 가장 강대한 전력 중 하나입니다. 그런 전력을 아무런 지원도 없이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주 그냥, 통신병이 상전이지."

『시정하겠습니다.』

골렘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더 탓할 생각이 사라진 히스토리아는 혀를 차며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이 이상 통신병을 나무라지 않는 건, 히스토리아가 생각하기에도 혼자 힘으로는 그를 추격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쯧. 그 새끼는 어쩌다 탄탈로스에 들어가게 된 거야? 피리 부는 사나이 사건으로 들어가진 않았을 거 아니야."

『불법도박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불법도박인데 탄탈로스에 갇혔다고?"

『부정. 노역형입니다.』

"똑같은 말이잖아."

『당시 탄탈로스는 란카르트 대령에 의해 대규모 탈출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습니다. 예상보다 위험한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헹. 위험한 게 중요한가. 다시는 못 올라올 처지인 게 중요하지."

히스토리아가 투덜거릴 때마다 잿불이 끔벅거렸다. 새빨간 불은 벌개졌다가 새까매지기를 반복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곤 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동안 생각을 마친 히스토리아가 중얼거렸다.

"뭔가 의구심이 있었나 본데. 나중에 사건 일지를 봐야겠어."

『준비할까요?』

"아니. 나중에. 휴이 그놈을 잡으면 다 해결될 문제니까."

담배를 태워서 쾌락을 얻는 애연가에게, 담배란 증오의 대상일까 애정의 대상일까. 일단 담배가 애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길이만큼의 봉사를 마치면 인사도 없이 새하얀 연기만 남긴 채 그녀를 떠나버리니까.

어느덧 담배는 매정하게 다 타버렸다. 짧은 만남이 있었으니 긴 이별을 기다릴 차례다.

히스토리아는 재떨이에 담배를 문대며 말했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뭐래."

연기가 자욱했으나, 호흡하지 않는 골렘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골렘은 콜록거리거나 숨을 멈추는 일 없이 말했다.

『전달합니다. 소장님의 작전계획을 받아들여, 피리 부는 사나이 외 4인을 추격한다고 결정했습니다.』

"허가가 났어? 의외네."

『부연. 피리 부는 사나이는 하멜른의 비밀을 쥐고 있는 주요 인물이며, 그는 탄탈로스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에 깊게 관여한 정황이 있고, 시조를 비롯한 이들과 친분을 맺어 위험도가 급등했다. 또한, 이는 5레벨 위험인물 란카르트와의 수법이 유사하여, 군 당국은 그를 체포하는 일에 박차를 가한다. 이것이 사령부의 판단입니다.』

담배는 떠나갔지만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렸다. 히스토리아가 히죽 웃었다.

"괜찮네.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땅에서 혼자 찾아다니기는 벅찼을 거야. 통신병들 관제가 있으면 좀 나아지겠지."

허가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자리를 이탈해서라도 직접 찾아갔으리라는 의미를 담은 발언. 에이비는 그 발언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대신 언제나처럼 명확한 사실만을 전달했다.

『금일 이후 본관은 검증을 위해 자리를 비울 예정입니다. 이 이후에는 통신병 유엘이 소장님을 보좌할 것입니다.』

"자리를 비워? 왜?"

『경고. 이 사실은 기밀입니다. 장성 권한으로 열람하시겠습니까?』

통신병에 관련된 명령사안은 상대가 장성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접근이 제한된다. 만일 히스토리아가 평범한 장교였다면 골렘으로부터 결코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토리아는 육장성이었다. 또한 자기 권한을 아끼지 않는 성격이었다.

"들어나 볼게."

『요청 승인. 그렇다면 설명하겠습니다.』

골렘은 자세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본관은 탄탈로스 담당 통신병이었습니다. 무저갱 붕괴 직후 연락 두절되었고 자력으로 복귀하였으며, 아미텐그라드에서 머무는 동안 이번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음."

『다만, 복귀 과정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와 접촉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본관은 그 사실을 부정하였습니다만 피리 부는 사나이의 경우 그 정체도 능력도 불분명한 미지의 존재. 따라서 본관은 사령부로 향해, 정신 오염의 여부를 조사받은 뒤 처우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제 일이 아닌 것처럼 사실을 전하는 골렘이었으나, 거기까지 들은 히스토리아는 입을 딱 다물었다. 말이 조사받은 뒤 처우 결정이지, 사령부까지 끌려가는 이상 이 통신병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은 분명했다.

최선의 경우라도 사령부에서 하달한 명령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는 교환소 역할을 맡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그냥 처분될 터.

"그 새끼 능력은 정신 오염 같은 게 아닌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나."

통신병의 진상을 조금이나마 아는 히스토리아는, 조금이지만 에이비를 동정했다.

장교들은 통신병을 경멸한다. 사관학교도 나오지 않은 주제에 타고난 고유마도로 대위 직위를 얻은 물대위. 동시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도 뻣뻣하게 굴기에, 장교들이 통신병을 대할 때는 온갖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너도 고생이야. 미움받는 역할을 떠맡아서."

그러나 통신병은 결국 전령에 불과하다. 그들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사령부의 목소리 혹은 편지로 본다면 그런 경멸은 허무할 정도다.

결국, 장교들은 원치 않는 명령에 대한 불만을 통신병에게 푸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히스토리아는 아주, 아주 약간의 배려를 담아 말했다.

"그 새끼와 마주쳤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번 추적 작전에서 요긴할 텐데. 내가 너를 동원하는 편이 낫지 않나?"

『불가. 통신병의 정신 오염 여부 검사는 그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통신에 잡음이 끼이면 전체적인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본관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많으니, 그들을 동원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뭐, 고생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히스토리아가 더 무언가를 해줄 의리도 없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넘쳐났다. 히스토리아는 에이비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래서일까.

『감사합니다. 본관은 힘닿는 데까지, 반드시 살아남을 것입니다.』

골렘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열기를, 히스토리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비는 동조를 그만두었다.

통신본부 내부에 있는 한 격리 통신실에서 몸을 일으킨 에이비는 히스토리아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 오염 여부.

안타깝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통신병으로서 언제나 담담해야 할 에이비의 정신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으니까.

삶에 대한 열망이 넘쳤다.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들뜬 기분을, 혼자 느끼기 아쉬운 즐거움을 모두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싶었다.

행복했던 시간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자국으로 남아있다. 그랬기에, 에이비는 죽음이 두려웠고 삶에 대한 미련이 가득했다.

이것을 정신 오염 아니면 뭐라고 할까.

분명 이전과는 완벽하게 다른데.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돌아갈 수 없다.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즐거움과 충실함을 느끼며 살아가던 그때.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행복을 골라 줍던 한때.

그 기억 덕분에 그녀는 변했다.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고유마도까지….

행복한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에이비는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그리고 그녀의 고유마도를 펼쳤다.

고유마도, 나팔꽃.

그녀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 나팔꽃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팔과 다리, 가슴과 목을 타고 왼쪽으로 감긴 덩굴에서 잎이 어긋매껴난다. 꼭 가시덩굴에 묶인 것 같다. 전신을 휘감은 나팔꽃 덩굴에서 꽃이 자라난다.

에이비의 마력을 먹고 피어난 보랏빛 꽃에서 동조가 일어났다.

그녀를 옭아맨 의무가 덩굴이며, 해야 하는 역할은 꽃.

그렇기에 에이비의 고유마도는 나팔꽃이었으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목과 얼굴을 타고 올라간 줄기 끝에서, 조그만 곧은 줄기가 새초롬하게 솟아났다. 나팔꽃 덩굴인 척 고개를 빼꼼 내민 그 줄기는 커다란 꽃봉오리를 맺었다.

그리고 그 끝에 피어난… 조그만, 하나의 해바라기.

말간 얼굴을 한쪽으로 향한 채, 따스한 빛을 연모하는 해바라기 한 송이가. 나팔꽃 줄기 위에서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 해바라기가 바라보는 곳 끝에는 그가 있을 것이다. 에이비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에이비는 언제나 행복했다.

아직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해바라기를 가슴에 품은 에이비가, 사령부를 향한 나팔꽃에 대고 말했다.

"사령부,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현 시간부로 사령부를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EP.196 탄탈로스 향우회

최선을 다해 몸속을 망가뜨려야 할 독이 가능한 한 빨리 퍼질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장 빨리 퍼지는 수단에 편승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독은 혈관을 통해서 퍼지며, 혈류를 막거나 오염된 피를 빨아내는 건 오랜 시간 동안 가장 유효한 치료법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그러나 독이 이미 혈관을 타고 흘렀다면?

신은 그때를 위해 발명된 것이다. 사람들이 힘들게 만들어두었으니까 열심히 기도하시길 바란다.

"군국. 너희도 우리가 얌전히 배설되기를 기도해라. 우리는 이미 궤도에 올랐으니!"

"너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군국의 대동맥이며, 우리는 이미 그 위에 올라탔다. 즉 군국의 몸을 흐르고 있다는 뜻.

군국 최대의 물류시설을 무단 사용하는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이야. 제가 입안했지만 아주 기발한 계획 아닙니까! 군국의 대로에 올라타서 도망치다니. 어지간하면 따라잡힐 일도 없는 이 땅 위에서 우리는 앞이랑 뒤만 경계하면 된다고요!"

그 말대로,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굉장히 안전한 교통수단이었다.

일단 포위될 걱정이 없다. 적이 나타나기 위해선 앞에서 가로막거나 뒤에서 쫓아와야 했는데, 덕분에 경계할 방향이 앞과 뒤밖에 없었다.

뭐, 기착지에 도착하면 군국 병력이 우리 앞을 가로막겠지만 그 전까지는 안전하잖아.

회귀자는 앞쪽과 뒤쪽을 번갈아 보다가 대꾸했다.

"그러네. 잘 됐다. 마침 당장 추격자도 없는 것 같으니, 묵혀둔 일을 끝내야겠어. 여기 앉아."

"네? 여기 앉으라고요? 학교 선생님이 혼내기 전에나 할 법한 말인데?"

"됐으니까 앉으라고."

서슬 퍼런 기색에 나는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바닥은 차가웠다.

내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선 회귀자는 사뭇 당당한 기세로 말했다.

"자. 슬슬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씨?"

"공유라니, 솔직히 조금 억울한데요."

하지만, 내 몸은 명령에 따를지언정 마음마저 꺾이진 않는다. 한껏 불량스러운 자세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애초에 정보 공유고 자시고, 저보다 더 비밀스러운 사람이 셰이 씨 아닌가요? 천앵이니 뭐니 전설의 검 한 자루를 들고, 뭘 노리는 건지 스스로 탄탈로스에 떨어지고. 나이도 어린데 힘도 세고 아는 것도 많고. 어디 뭐 전설적인 존재인가, 싶어도 영 짚이는 게 없고."

…라고 하면서 은근히 추켜세우는 건 내 생존본능이 한 일이다. 어쨌건 아부 아닌 아부를 살짝 건넨 나는 책임을 떠넘겼다.

"그쪽이 공개하지를 않는데 어떻게 공유가 시작돼요?"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화법!

그러나 회귀자는 세상 밖으로 나오니 조금 자신감이 찼는지 뻔뻔하게 대꾸했다.

"흥. 네가 나한테 뭔가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다 안다는 듯 능숙하게 행동했지."

"잘 아시네요. 서로서로 묻지 않았으니까 쌤쌤이죠."

"그러니까. 나도 예전 일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을게. 하지만 군국에 쫓기던 너를 도와줬는데, 대충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설마 아무런 설명도 믿음도 없이 너를 도울 수는 없잖아?"

회귀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특히, 하멜른 사건의 주범이라면 말이야. 우리가 그런 정체도 의도도 알 수 없는 흉악한 사람과 같이 다닐 수 있겠어?"

큭, 정론이다. 살다살다 내가 회귀자에게 정론으로 공격당할 줄이야. 이게 계층역전, 혁명인가?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요. 반박할 수가 없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해야겠죠."

"잘 아네. 자, 네 정체에 대해서 다 털어놔 봐."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군국에게도 들킨 몸, 더 숨겨봤자 의심만 늘어나겠지.

내가 결심하던 차, 양산 아래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티르가 문득 말했다.

"휴. 나는 네 정체가 무엇이든, 네가 무엇을 했든 너를 구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서운해한 건 말없이 떠난 일뿐이니."

그러나 내 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소리쳤다.

"하지만 대가 없는 호의도 있다는 말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거친 북풍보다는 따스한 태양입니다! 셰이 씨도 티르를 보고 반성하세요!"

"다만,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다칠까 걱정되는구나. 그럴 걱정 없게 흡혈귀가 되지 않겠느냐?"

"셰이 씨. 제 정체를 다 털어놓을 테니, 아까 한 말은 잊어주세요."

회귀자는 콧방귀를 끼며 턱짓을 했다. 단칼에 거절당한 티르가 쓸쓸히 중얼거렸다.

"그토록 싫은 것이냐? 엘더의 삶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터인데…."

흡혈귀와 삶의 동시에 나타나는 것부터 모순이다. 거기다 생명을 되찾아 자기와 세상의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 지어진 티르의 권속이 된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게 틀림없다.

말을 흐리는 티르를 외면한 채 내가 솔직하게 고백하려는 때였다.

아까부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아지가 눈을 빛내더니, 고기 통조림 하나를 입에 물고 내 앞에 떨어뜨렸다. 아지가 앞발로 통조림을 쭉 내밀며 말했다.

"멍! 밥 먹어!"

"어, 그래. 이따가 먹을게. 고맙다."

"멍멍!"

아지가, 양보를?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어쨌든, 통조림을 받아든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사실 하멜른 출신이에요."

"그게 끝?"

"몇 번 강조했다시피, 그때 저는 전교 1등이었어요. 그 기수에는 현 육장성인 히스토리아와… 과거, 최연소 마도장교이자. 마장의 후계자라고 불렸던 란카르트가 포함되어 있었죠."

히스토리아와 란카르트의 이야기가 나오자 회귀자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너. 이전 회차에서 그 둘과 마주친 적 있구나.

아직 모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읽지 못했지만, 이것저것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보면 적도 아군도 아닌 애매한 관계였던 모양이다.

'육장성 히스토리아와 마신전의 란카르트? 어째 하나같이 거물들의 이름이…. 심지어, 그 둘을 제치고 1등이었다고?'

아무래도 내 동기들은 과거 회귀자와 맞닥뜨렸을 만큼의 거물인 것 같았다. 남은 동기는 셋인데, 그중 1등이었던 내가 잡범이 되어버리다니. 이래서 애들은 커서 뭐가 될지 몰라.

결정했다. 앞으로 동창 모임은 빠지기로 하자.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 둘은 이미 국가 레벨의 강자야. 그렇다면, 혹시 너도.'

아니아니아니. 과대평가는 하지 말아줘. 곧 군국과 싸울 거잖아? 이제 그런 기대를 받으면 전선에 내몰리다가 죽어버릴 지도.

나는 다급히 말했다.

"히스토리아가 기공과 무투, 란카르트가 마법과 기술이라면. 저는 오직 머리 하나로 1등을 차지했어요. 기공과 무투에서는 히스토리아가, 마법 쪽은 란카르트가 독보적이었다면, 저는 그것을 망라한 대부분의 과목에서 1등 혹은 2등에 준하는 성적을 거두었죠."

물론 다 독심술 덕분이다. 독심술,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네가 그랬어?"

"네. 농담이 아니라, 저 진짜로 군국의 촉망받는 인재였어요. 힘이 센 건 아닌데, 뭐든 배우기만 하면 수준급까지는 금방 익힐 수 있었죠. 마법도, 기공도, 연금술도 쉽게 해냈고 전략이나 전술에도 능하고. 무엇보다 이해력이 출중해서 다른 성질의 힘도 쉽게 깨우쳤죠."

다만 독심술로 뚫을 수 있는 기술은 딱 이용자 수준까지가 한계라서, 2학년 때쯤 밑천이 다 드러났지만.

어쨌건 그 역시 재능은 재능이며, 1등은 1등.

"그래서 저는 하멜른의 만능인, 이라고 불렸어요."

"…흠."

'뭐든지 쉽게 배운다고… 뭔가 갑자기 기분이 팍 나빠지네.'

와아! 세상에. 회귀자가 저보고 뭐라고 합니다! 자기는 회귀를 거듭해서 결국 강자 반열에 올랐으면서!!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더니. 회귀라는 사기 권능을 가지고도 부족했냐! 각성해라!

"어쨌든, 우리 셋은 그렇게 하멜른의 1등, 2등, 3등을 나란히 차지했었죠. 군국은 평등한 교육을 베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있을지도 모르는 원석을 발굴하기 위해서예요. 강자 한 명이 홀로 천 명을 상대하는 세상에서 평등한 교육은 그다지 가치가 있지 않죠."

한 명에게 하는 투자가 백 명에게 하는 투자보다 더욱 좋은 결과를 낼 때가 많다.

실제로도 그것이 효율적이기에, 하멜른의 교육자원은 거의 상위권 몇 퍼센트를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나이에 영관 급 장교를 대련에서 쓰러뜨린 히스토리아나, 고유마도를 각성하고 심상을 구축해나가는 란카르트는 특별취급을 받으며 일반과와는 다른 커리큘럼을 거쳤어요. 그래서일까, 하멜른의 다른 학생들은…."

"이야기를 이상한 대로 흘리지 말고. 너는?"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나를 상대로 회귀자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1등이라면, 너에게도 특별한 커리큘럼이 있을 듯한데."

"아하하. 예리하시네요."

무저갱 바깥으로 나오니 꽤 날카로워졌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참 애매한 쪽이었어요. 대부분 두루두루 능숙하지만 빼어나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엔 재능이 아까웠죠. 그래서인가, 저는 조금 다른 쪽에서 주목했었죠."

"어딘데. 정보부?"

"비슷한데 조금 달라요. 군국 특무부 직속 신비해체부. 신비해체자는 아니었지만 될 예정이었죠."

그것으로 꽤 많은 게 설명되었다는 듯, 회귀자는 탄식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티르가 양산을 살짝 치켜들며 끼어들었다.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신비 해체자가 무엇이냐?"

그 물음에는 내가 대답했다.

"신비 해체자는 세상에 숨겨져 있는 신비를 파헤치고 그 힘을 이용하려는, 조금 다른 방식의 고고학자들이에요."

세상에는 수많은 신비가 있다.

구름의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번개의 기수나, 소용돌이치는 표류물의 섬. 정처 없이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무릉도원이나, 온갖 기괴한 생물이 사는 밀림. 코끼리의 무덤과 산군의 산 등등.

그러한 신비나 전승을, 순수하게 실용적인 목적에서 발굴하는 단체. 군국의 신비해체부.

설명을 마친 나는 티르를 위해 맞춤형으로 간략하게 요약했다.

"무저갱에 티르나 아지를 '보관'해두자는 작전을 입안한 게 바로 그들이죠. 시조 티르칸쟈카나 개의 왕 강아지의 경우 커다란 위협이지만, 그 아래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면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이름이 불리자 아지가 냉큼 달려와서 외쳤다.

"멍! 나, 불렀어?"

"아직 아니야."

"멍! 알았어! 이따 불러!"

아지는 다시 몇 걸음 물러난 채 눈을 반짝이며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얘는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나 본데. 놀아달라는 걸까? 하긴, 티르나 회귀자가 아지와 잘 놀아줄 성격은 아니지.

좋아. 내가 이따가 네 욕구불만을 풀어주마.

어쨌든.

"호오. 그렇다면. 휴, 너는 무저갱에 내려오기 전에도 나에 대해 알고 있었으렷다."

"알긴 알았죠. 이 경우의 앎이란 지식으로서의 앎과 더 가까웠지만요. 어디까지나 책상놀음으로 익힌 거라, 티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렇구나…."

'궁금하구나. 군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닐 텐데.

지식으로서의 티르칸쟈카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썩 괜찮은 등장인물은 아니었다. 성황청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을 제하고서라도 이력이 화려했으니까.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고, 손수 참한 사람의 수만 다섯 자리수는 된다. 전투가 끝나면 시체로부터 피를 취했으니, 흡혈귀들이 휩쓸고 간 전장에는 피도 비명도 빛도 남지 않았다….

나는 그때 티르칸쟈카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만 가득 써놨다. 그런데 막상 만나니 느낌이 좀 다르더라고.

이야기가 조금 샜는데 결국 무슨 말이냐. 나는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거두어내지 못했다.

사람을 상대한다면 몰라도 순수하게 책에서 정보를 끌어내는 건 내 전문이 아니었기에.

"그래서였구나. 네가 탄탈로스나,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 묘하게 익숙해 보였던 건. 특히 아지 말이야."

"그렇죠. 특히 신비해체자들에게 있어 짐승의 왕이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존재니까요."

"신비해체자 중에 만물의 영장이 꽤 많을 텐데."

"낌새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도, 저도 티를 내지 않았죠. 저는 그때 일개 학생이었을 뿐이니까요. 그쪽이 뭐가 아쉬워서 뭣도 모르는 아이에게 손을 뻗겠어요?"

앞뒤가 착착 맞아 떨어져가는 이야기. 회귀자는 내 이야기에 상당 부분 수긍했다.

"그렇다면, 대종사의 무기인 지잔의 봉인을 푼 건? 그것도 신비해체자의 힘이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심술이 없으면 설명하기 힘들었기에,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풀렸어요?"

"네가 풀어놓고 네가 몰라?"

"어떻게 알겠어요. 유물은 시험을 통과해야 힘을 허락해주는데. 저는 그냥 들고 휘둘렀을 뿐인걸요?"

'드는 것 자체가 시험을 일부 통과했다는 뜻인데?'

"…너는 그 시험에 무슨 대답을 했는데?"

"시체 주제에 자꾸 시험하지 말고 지선 님 좀 진정시켜보라고 했는데요. 제 말을 잘 들어준 모양이에요. 드니까 들리더라고요?"

"그냥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닐까?"

어쨌든 내 설명은 완벽했고 짜임새도 있었다. 회귀자의 어설픈 배경지식과 마술처럼 맞물리자, 회귀자도 의심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었고?"

"그건 진짜 억울한데요. 저는 누명을 썼어요!"

이번 일은 진심으로 항변했다. 회귀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불리며, 군국의 추적을 받는데?"

"누명을 썼으니까 추적당하죠!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제가 뭐 얻을 게 있다고 동기를 싹 다 죽여요? 그 사건 때문에 앞길 창창했던 제가 일개 잡범이 되어버렸는데! 셰이 씨는 제가 가진 거 다 포기하고 사람이나 죽이는 그런 미치광이로 보이세요?"

억울해서 죽을 것처럼 가슴을 쾅쾅 치자, 회귀자는 나를 재보듯 바라보다가 수긍했다.

"미치광이 같긴 한데, 그런 미치광이는 아니지."

'애초에 하멜른의 그 사건은 자살이었는걸. 그 사건을 후일 군국을 무너뜨릴 때 요긴하게 써먹었지.'

와. 그래도 허튼 고생이 아니었구나. 군국이 하멜른 덕분에 망하는 세계선도 있네. 갑자기 보람이 느껴진다.

어쨌건, 지금은 내가 무해하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저도 그 일에 휘말려들었다가 간신히 도망쳐서 잘 몰라요. 하나 확실한 건, 군국이 저한테 누명을 씌웠다는 거죠."

"군국이 일개 학생한테 누명을 씌웠다고? 의심스러운데."

"누명을 쓴 사람이 뭘 알겠어요. 군국 아니면 란카르트 그놈이겠지. 저는 죽을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했다니까요. 아니라면 하멜른에서 그 평가를 받고도 범죄자로 살았겠어요?"

그건 맞는 말이다. 내가 잡범이었던 것도 사실, 억울하게 잡혀왔던 것도 사실. 그 속에 숨긴, 내가 독심술사라는 교묘한 진실.

따라서 회귀자는 내 말에서 하나의 이상한 점도 찾지 못했다.

'하멜른의 마지막 졸업생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어. 행보나 능력을 설명하기도 쉽고. 이제 의구심이 조금 풀리….'

어쩔 수 없다고. 사람은 합리적이면서 감성적이니까. 믿고 싶은 부분에 딱 알맞은 설명이 퍼즐처럼 들어오면 쾌감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거든.

사실, 진실과 크게 먼 이야기도 아니고 말이지.

내가 표정 속에서 그런 감상을 숨기고 있을 무렵.

'잠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 아직 납득할 수 없어.'

또 왜?

너는 정말 사람이 아니니? 의심도 이 정도면 중병이야!

'말은 돼. 하지만 아직, 아직 뭔가 걸려. 신비 해체자면, 이것저것 수단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뭔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 내 감이 그렇게 고하고 있어.'

이래서 감이 좋은 녀석은 싫다니까, 정말로.

하지만 신뢰는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게 아니다. 회귀자는 나를 의심하는 것과 별개로, 또 나를 믿었다.

'그와는 별개로, 티르칸쟈카의 말이 맞아. 적이냐, 아군이냐 따지면… 분명한 아군이니까. 더 추궁하지는 말자.'

마음속 자그만 읊조림이 들려왔다. 내 처우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P.197 약속을 기다리는 개

거센 바람을 헤치며 둥그렇고 넓적한 원반이 하늘을 유영한다. 바람이 뒤쪽으로 거세게 부는 탓에, 슬쩍 놓았을 뿐인데도 뒤로 쭉쭉 뻗어간다. 그 속도는 메타컨베이어 벨트보다 조금 느린 수준.

"멍멍멍멍!"

그 뒤를 아지가 쫓았다. 쿵, 콱, 찍. 거센 소리를 내며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리다가, 벨트에서 뛰어내린 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른 뒤 다시 바람처럼 달린다. 그 뒤 저 멀리 사라진 원반을 기어이 잡아냈다.

그림처럼 멋있게 원반을 잡은 아지는, 그동안 멀어진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원반을 잡으러 간 동안 멀어진 거리조차 아지에게는 놀이의 대상이었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맨땅을 콱 짓밟고, 솟아오른 흙더미가 가라앉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발자국이 포탄의 흔적처럼 남는다. 부서지는 땅과 흩날리는 흙더미를 뒤에 남기며 아지는 맹렬하게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추격했다. 강처럼 흐르는 땅 위로 단숨에 올라탄 아지는 냉큼 달음박질쳐서는 내 코앞에 도달했다.

오랜만의 운동이 즐거운지 눈을 반짝인다. 감정을 보여주는 꼬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바람이 일 정도로 흔들리는 갈색 꼬리가 보여주는 건 분명한 즐거움이었다.

"멍멍멍!"

아지는 입에 문 원반을 나에게로 건넸다. 바람을 하도 맞아서인지 손끝이 차갑다. 원반이 차가운 건지, 내 손이 찬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와, 원반 잡기 자체 하드모드. 개의 왕쯤 되니까 이게 되네.

"아지야, 대단해!"

아지는 가슴을 쭉 펴며 답했다.

"멍! 나, 대단해!"

"개 중에 왕이로다! 자, 수고했으니 보상이 있어야겠지? 여기, 고기!"

"멍! 그건 괜찮아! 너 먹어!"

내가 고기 한 점을 내밀자, 아지는 단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나에게 양보했다.

그러니까, 아지가 열심히 원반을 잡아 온 다음,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를 보고선 하는 말이… 나 먹으라고? 이게 맞아?

예삿일이 아니다. 분명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물었다.

"아지야. 너 어디 아프니?"

"멍? 아니?"

"아니면 뭐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야?"

"정리? 나, 정리 안 해!"

"개라도 정리는 좀 했으면 싶다만."

그렇다면 뭘까.

고기 통조림도 아니다. 회귀자의 포켓에 있던 고기를 센 불에 빠르게 구워서 만들어낸, 육즙을 그대로 보관한 구운 고기.

인간조차 식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가에 침이 절로 고이는 요리를 양보해? 그것도 나에게?

골똘히 생각을 마친 나는, 마지막 남은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설마, 벌써 늑대의 왕과 일전을 준비하는 중이니?"

전력으로 뛴 탓에 머리털이 사정없이 뻗쳤다. 머리에 묻은 물기라도 터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든 아지가 곧장 부정했다.

"아직! 나, 인간 왕과 약속 못 맺었어! 군국, 약속 어겼어!"

"군국이 약속을 어겨? 그 나쁜 놈들, 내가 언제 그럴 줄 알고 있었지."

"멍! 맞아, 나빠! 나, 착한 왕 찾아야 해!"

인간에게는 누구보다 호의적일 아지가 답지 않게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한껏 맞장구를 치다가 단숨에 태도를 바꾸어 중얼거렸다.

"그런데 사실 예견된 사안이긴 했어."

예로부터, 개의 왕은 인간과 동맹을 맺어서 늑대의 왕과 싸워왔다.

그건 정기적인 행사 같은 것이라 몇십 년 간격으로 계속되었다. 그 전설적인 전쟁에서 개의 왕이 이길 때도 있었고 늑대의 왕이 이길 때도 있었다.

한쪽의 승리는 반대편의 죽음으로 결정된다. 다음 대 왕이 태어나 자라기 전, 승리에 취한 왕은 둥근 달에 대고 울부짖었다.

개와 늑대의 전쟁,

그 오랜 싸움은 너무 유명해서 비밀조차 되지 못한 채로 모두에게 전해졌고, 역설적이게도 그 유명세가 개와 늑대의 싸움을 방해했다.

"군국이 구태여 늑대의 왕과 일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겠지. 전쟁 한 번 하는데 드는 돈이 얼만데."

"멍? 그럼 나, 속은 거야?"

"뭘 새삼스럽게. 힘만 센 동물이 거짓말에 속는 건 동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거라고."

이 동화적이며 전설적인 전쟁은, 개를 편들어주는 인간 세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한때 제국이 개를 편든 전쟁에서는 고작 반나절 만에 개의 승리가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짐승끼리의 싸움에 국가적인 전력이 동원되어야 한다면 어떤 나란들 하고 싶을까. 나라는 점차 개의 왕을 외면했고, 그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개는 패배만 반복하였다.

몇십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대난투. 승리해도 얻을 것은 쥐뿔만 한 명예뿐이며, 패배하든 승리하든 크나큰 희생을 치른다. 흘러가는 역사 속에 사는 인간들은 그 역사적인 전쟁이 굳이 자기 세대, 자기 영토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왜 그들만 독박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인간이 전투를 회피하며 개를 방치하고, 유기하고, 버리는 동안.

"그동안 늑대 무리는 더 강성해졌지. 어지간한 나라와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멍. 맞아. 나, 혼자 못 이겨. 그래서 나, 인간 왕 필요해."

시원하게 인정한 아지는 나보고 밥이나 먹으라는 듯 눈짓했다.

"그러니까, 열심히 먹고! 너, 왕 해!"

"참나. 왕은 네가 시켜주는 거냐? 하라고 하면 그날부로 내가 왕이야?"

"아냐, 멍! 많은 인간! 대표! 왕! 왕왕!"

"짖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니까 좀 설명이나 해봐라."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생각을 읽고 판단을 내렸겠지만, 내 독심술이라도 개의 생각은 못 읽는다. 아지가 조리있게 말해주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도리가 없다.

"힘내! 왕! 할 수 있어! 많이 먹어! 산책도 해! 튼튼해져!"

"그래서 이제 네가 직접 왕을 키울 생각이냐?"

"아우우우우! 맞아! 그러니까, 너 힘 내!"

"미안한데, 우리는 많이 먹고 튼튼한 인간을 장사라고 하지 왕이라곤 안 한다."

내가 핀잔을 주자 아지도 입을 딱 다물고는 말했다.

"바보! 나도 알아! 근데, 건강, 최고야! 너, 건강해!"

"이게 뭔."

개에게 바보라고 듣는 것만큼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방금 내가 들어봤으니까 확실하다.

"너 모든 개를 대표하는 대언자라며. 이딴 식으로 말해서 알아듣겠냐? 정상적으로 말해라, 좀."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개에게 대답을 바랄까. 그러나 이놈의 개는 지 말만 하고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답답해진 내가 다그치려는 때였다.

그때였다. 우리가 숙소 겸해서 쓰고 있는 컨테이너의 뒤가 덜컹하고 열렸다. 거대한 문이 덜컥 쓰러지며 안쪽에서 고양이의 늘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아아. 멍청한 멍멍이는 인간의 왕을 찾고 있는 거다냐."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달리는 땅의 격류다. 그늘도 바람막이도 없는 그 위는 햇빛과 바람에 직접 노출되어 있다.

티르칸쟈카는 햇빛을 싫어하고, 나비는 강풍을 꺼린다. 직접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전자와는 달리 나비가 강풍을 싫어하는 건 마른 바람에 털이 부스스해진다는 사소한 이유 때문이지만, 짐승에게는 자기 기분만큼 중요한 일이 또 없다.

그래서일까. 낮이든 밤이든 비가 오든 총탄이 쏟아지든, 컨테이너 안에서 가만히 죽치고 있던 나비는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기어나왔다. 나비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피며 대답했다.

"멍멍이는 개의 왕이다냐. 개의 왕으로서, 인간의 왕과 연합을 맺어야 한다냐. 그런데 인간에겐 냐-와 같은 왕이 없다냐. 그래서 왕의 구색을 갖춘 이들을 바라는 거다냐."

"오, 나타났냐. 개의 대언자의 대언자."

"냐는 멍멍이의 대언자가 아니다냐. 멍멍이는 멍청해서, 냐가 대신 설명해주는 거다냐. "

그게 대언자 아니냐는 말은 접어두었다. 고양이를 상대로 굳이 설득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밖에 나온 나비는 영 불편한 기색으로 자기 앞발을 핥아대며 말했다.

"냐-들처럼, 인간을 다스리고 그들을 부릴 힘을 지닌 이들을 찾는다냐. 장군, 족장, 영주, 제후… 제멋대로 이름을 계속 바꾸는 왕들. 멍멍이는 없어진 인간의 왕 대신, 일부의 왕에게 약속의 이행을 바라는 거다냐."

으음, 대충 알겠다.

개의 왕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싸워줄 나라를 찾았다. 인간을 찾은 게 아니라, 최소한 군대라고 부를 만한 구색을 갖춘 이들과 함께했다. 세계 최강이라도 개인이라면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개인의 강함보다는 인간의 숫자나, 혹은 대표성을 바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나는, 도리어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냐아. 맞다냐. 너는 형편없다냐."

"짐승놈들이 말 좀 한다고 막말을 지껄이네."

"다만, 아슬아슬… 영향력만 따지면, 꽤 왕에 가까울 수도 있다냐. 신기하다냐. 너, 높은 사람이다냐?"

"높기는 무슨. 내가 가장 많이 사람을 부려본 건 고작 160명 정도라고. 그나마도 지금은 하멜른 강 아래로 사라졌는데."

뒷골목 잡범이 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아지야, 웃어봐."

"멍! 응!"

헤, 하고 아지가 해맑게 웃었다. 개에 대한 고사를 실천해낸 나는 내던지듯 말했다.

"됐다. 도망자 신세에 사상 최악의 흉악범에게 몸을 의탁하는 주제에 견주가 되는 건 무책임한 짓이지. 나는 그냥 놀아주는 존재로 만족할래. 아, 나비 너도 놀래?"

"냐. 싫다냐. 바람 냄새가 낯설다냐. 털이 찌릿찌릿 부푼다냐…. 따끔따끔, 냐아아아."

나비가 불쾌한 듯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푼 털을 어떻게든 핥으면서 가라앉히려던 나비는 곧 얼굴을 찡그리며 컨테이너 안으로 향했다.

"냐를 부르지 말라냐. 냐는 저 안에서 자고 있을 거다냐."

"너도 고생이다. 어디 한 곳에서 죽치고 살아도 모자라는데."

"냐아아. 알면 내버려두라냐."

나비는 휘적휘적 걸어가서는, 그 안에서도 특히 비좁은 상자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상자 주변에는 안에 담겨있던 게 분명한 우편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비가 상자를 차지하기 위해 밀어낸 것들이 실향민처럼 을씨년스럽게 상자 주변을 둘러싸고 었다.

상자 속으로 쏙 들어간 뒤, 살랑거리는 꼬리가 상자 뚜껑을 붙잡고 내렸다. 나비는 그렇게 우편물 상자 속에서 아늑함을 즐겼다.

어쨌건, 나비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갔다. 결국, 아지는 이곳저곳에서 거절당한 채 나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에휴, 너도 짠하다. 내가 뭐라고 기대하냐."

하지만, 애초에 나는 자격을 갖출 수 없는걸. 도망다니기 바쁜 나 따위가 왕은 무슨.

아지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자 강풍에 시달린 머리털에서 정전기가 일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간단하게 만든 머리빗으로 털을 빗겨주며 말했다.

"그러니, 아지야?"

"멍! 대충, 맞아!"

"대충 맞다니 또 무슨 말이야…. 너도 같이 셰이 씨랑 손잡고 초등학교부터 다닐래?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방금 뭐라고 했냐?"

타이밍도 좋네. 마침 도착한 회귀자가 얼굴을 콱 구겼다.

EP.198 도박묵시록 강아지

"아이고. 바깥양반 돌아오셨네."

"누가 바깥양반이야?"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온 회귀자도 강풍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보다 높은 상공에서 정찰한 탓에 꼭 먼지털이라도 당한 꼴이 되어 돌아왔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던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 셰이 씨. 어서 와요. 뭐부터 하실래요? 식사? 목욕? 아니면 수면?"

"착실한 척 말하는 거 조금 열 받네."

회귀자는 흘긋 컨테이너 안쪽을 보았다. 안에 담겨있던 화물을 들어내고 쉼터로 개조한 안쪽. 바람막이로 가려진 램프 위에서는 구운 고기가 내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으며 침낭과 천으로 만든 간이 침대가 품을 활짝 열고 있었다.

회귀자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와중에 착실한 것도 좀 열 받아."

"화를 억누르세요. 머리에 열이 많으면 머리카락 빠져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회귀자는 사납게 외치면서 못마땅한 듯 나를 흘겨보았다. 그 눈은,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식충이를 보는 것과 꼭 닮아있었다.

"방금 무슨 말 했어? 학교 이야기가 들린 것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지에게 제 찬란하던 학창생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죠."

천연덕스럽게 발뺌하자 회귀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찬란하긴. 군국 터부에 연관되었으면서."

'하멜른의 관계자였다지. 벌써 군국이랑 적대할 생각은 없었는데. 계속 같이 다니다간 군국에 발도 못 대겠어.'

어젯밤, 나는 회귀자로부터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는 죄악의 왕을 막기 위해서 여행을 다니는 중이며, 원한다면 어디 안전한 곳까지는 데려다주겠다고.

이미 군국에 찍혀버린 이상 내 평범한 일상은 물 건너간 셈이다. 나는 같이 다니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고, 회귀자도 받아 들여줬다.

'아지나 티르칸쟈카도 같이 다니길 바라는 기색이었으니, 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그러나 그때부터 회귀자는 나를 곤란한 군식구 취급하지 않는가. 덕분에 내 삶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군국은 꽤 잘 조직된 나라야. 무너뜨리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교섭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 녀석이 껴있으면 그게 될까 모르겠네.'

개랑 고양이도 같이 다니는데 인간이 유기당해서야 쓰겠냐. 나는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요리나 청소, 아지 돌보기도 그 일환이었다.

내 부단한 노력 덕분에, 회귀자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돌려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래. 티르칸쟈카나 아지를 위해서라도 같이 다니는 편이 나아. 둘 모두 이 녀석에게 정을 느끼고 있으니.'

후우. 어찌어찌 오늘은 또 넘겼다.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자, 언제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비정규직.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식충이의 심정을 과연 누가 알까.

마음속으로 안도한 나는 회귀자를 반기며 물었다.

"정찰은 어떻게 되었어요?"

코트를 벗어 던진 회귀자는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별로 무겁지 않은 무게임에도 의자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기착지를 미리 보고 왔는데 싹 비어있었어. 오늘은 조용히 넘어갈 모양이야."

"곧 해가 질 테니까요."

"그래. 저들이 미쳤다고 밤에 습격하지 않겠지."

회귀자는 저 안쪽 깊숙이 있는 어둠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어두운 기운을 풍기고 있는 새까만 목관과 그 안에서 조용히 잠든 티르가 있었다.

밤에는 만능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티르이나,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낮에는 티르가 다루는 혈조술과 어둠에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긴다. 과거 그토록 강력했던 흡혈귀의 군대가 성황청에게 몇 번이나 가로막힌 것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낮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르는 낮 동안에는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태양 아래 어둠을 허투루 사용하면, 위험한 순간에 힘이 다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낮인데. 저쪽도 분명히 낮에 찾아올 거란 말이지."

"괜찮아요. 지금의 티르는 낮에도 별반 다를 바 없으니까요. 단, 낮에도 어둠을 다루기 위해선 최대한 힘을 모아놔야 하기에 지금 잠깐 쉬고 있는 거죠."

"그래. 티르칸쟈카는 심장을 되찾았으니까."

'심장을 되찾았다는 건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확고히 구분했다는 뜻. 아마도 햇빛 때문에 몸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다만.'

나와 티르를 번갈아 바라본 회귀자는 턱에 손을 괴고 홀로 생각했다.

'어쨌건 시조 티르칸쟈카에게 심장을 되찾아 준 건 크나큰 성과야. 훗날 공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휴즈가 한 일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좋아, 같이 다니자. 군국의 추적을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동료니까….'

내가 누구? 회귀자의 동료로 인정받은 사나이.

히스토리아, 란카르트. 보고 있냐? 너희 동기는 이만큼 출세했다. 세상을 구하는 파티의 잡일꾼으로 취직했다고….

결국, 범죄자 모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놀 거면 큰 물에서 놀아야지.

"멍!"

막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아지가 다가와서 내 소매를 톡톡 건드렸다. 내가 돌아보자 아지는 다친 왼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멍! 아픈 곳 대!"

"벌써 그럴 때인가."

중얼거리며 소매를 걷어서 찢긴 상처를 보여줬다. 울펜과 싸우다가 입은 큼직한 상처는, 짐승의 왕이 가진 힘에 의해 어느새 희미한 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아지는 앞발로 내 팔을 잡고는 정성스레 상처를 핥았다.

따끔함은 간지러움으로, 간지러움은 이내 편안한 촉감으로 바뀌었다. 상처가 나아간다는 기분에 개가 팔을 핥는다는 행위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꼼꼼하게 상처를 핥아준 아지는 내 팔을 톡톡 두드리며 외쳤다.

"멍! 건강해! 건강!"

"고맙다, 아지야. 고기 먹을래?"

"너 먹어! 멍! 아플 땐 많이 먹어!"

아지가 격려하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는 배를 깔고 앉았다. 푸근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스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인간을 공격하지만 않을 뿐 거의 걸어 다니는 장난감 거치대로 보던 아지가 이렇게 기특해지다니? 세상에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개는 없다는 게 정말이었나?

아니야, 속지 말자. 이건 평소 미운 짓 하다가 한 번 착한 짓을 했다고 예쁘게 보이는 것뿐이야.

죽었다가 깨어나도 개는 어디까지나 개. 네 본성을 시험해주마.

나는 원반을 하나 꺼내서 흔들었다.

"아지야. 원반던지기 할까?"

꼬리가 먼저 흔들렸다. 반가운 제안에 아지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멍! 할래, 할래!"

"아야야. 그런데 방금 치료받아서 그런지 팔이 아프네."

"멍? 그럼, 다음에 하자!"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반쯤 일어난 몸을 다시 내려놓는다. 진짜다. 아지에게 배려심이란 게 생겨나 버렸다.

원래도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지다. 그러다 못해 고차원적인 배려까지 하다니… 이게 진정한 개인가? 개의 왕이라고 천사견의 특성을 개화해버린 거야?

인간이란 이리 작은 변화에 감동하는 존재였던가. 내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닦을 때였다.

"아지가 평소랑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너, 뭔가 했어?"

회귀자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기심을 보이는 회귀자를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했다.

"제가 딱히 뭔가 한 건 없어요. 아지가 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데요."

"뭘 기대해?"

"뭐라더라. 나비가 말하길, 약속의 이행을 저에게 바라고 있다던가."

인간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더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비와 아지의 생각은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참, 개랑 고양이가 한 이야기를 전하다니. 내가 뭐 통역사도 아니고.

"저보고 어딘가에 높은 사람이냐고 하네요. 갈 곳 없어서 도망친 잡범에게. 어이가 없는 일이죠?"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지어서 말했다. 별로 심각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멋쩍게 웃는데, 갑자기 회귀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반가운 손님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회귀자는 곧장 나에게 다가와서 외쳤다.

"너, 혹시 멸망한 왕국의 왕자야?! 레지스탕스가 비밀리에 찾고 있는 왕의 후손이라든가!"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아니거든요? 제가 왕자면 이따위로 살겠어요?"

'음, 그건 좀 비약이긴 해. 쌍둥이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지.'

잠깐 시선을 돌린 회귀자는 다시금 다그쳤다.

"그러면? 나는 모르는 어떤 비밀조직의 수장이라든가?"

"나만의 비밀조직이 있으면 벌써 썼죠. 제가 뒷골목에서 아득바득 살다가 쫓겨나듯 도망쳤겠어요?"

"너는 도대체 뭔데?"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과 같은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면 저는 그냥 저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요. 아지가 뭐 착각한 거 아닐까요?"

반쯤 농담 삼아 대답했는데 회귀자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몇 번이고 다그쳐서 확인한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짐승의 왕은 대언자야. 한 인간이 아닌, 인간 전체에 말을 전하는 존재."

"저도 대충 알아요."

"그러니까, 저 많은 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짐승의 왕은 한 인간의 영향력을 볼 수 있어. 일종의 자격을 시험한다고 해야 하나."

"자격이고 뭐고, 뒷골목 잡범에 불과한 저한테 뭘 원하는지.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잡범, 맞지?"

"맞다니까 그러네!"

평소라면 어떻게든 얼버무렸겠지만, 지금 내 포지션은 식충이. 여차하면 가장 먼저 쳐내지는 존재다. 회귀자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대강 알려줬다.

나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주 간략하게.

"그러니까, 뒷골목 시민과 두루두루 알고 지내는 친절한 이웃이었죠. 온갖 잡일을 해결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도움을 줬어요. 진짜 그게 다였다니까요."

"하멜른과 아미텐그라드 말고는 다닌 적도 없고?"

"네. 중등학교는 전원 기숙사제니까, 그때를 제외하곤 거의 아미텐그라드에서 산 셈이죠. 아주아주 잘 쳐줘야 아미텐그라드 뒷골목 촌장 정도?"

'하긴. 진짜 거물이라면 아슬아슬하다는 표현을 쓸 리가 없지. 어쨌든 자격이 달하지 못했단 뜻이니. 하지만! 어쩌면…!'

아, 슬슬 불길해진다. 식충이가 모종의 일로 번데기를 거쳐서 날아오를 준비를 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

눈치나 보면서 사는 삶은 늘 불안했지만 몸만은 안락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내 스스로 고통과 시련을 넘어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두려움은 또 다른 종류라, 당당해질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반갑지가 않았다.

회귀자가 드디어 쓰임새를 발견한 도구를 보듯 나를 살폈다.

"아슬아슬하다고 그랬지. 뭔가, 부족한 부분을 조금만 메우면 자격이 되려나?"

"안 돼요! 봐봐요, 저 같은 다 타버린 실패자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아지야, 나에게 자격이 있니?"

가만히 꼬리를 휘두르고 있던 아지는 자기 이야기가 들리자 귀를 쫑긋거리며 일어섰다.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냉큼 고개를 저었다.

"없어!"

"봐봐요. 헌병대에게 쫓기는 몸이 무슨 자격이야. 수배범 자격이나 있겠지."

"아직은!"

"여지를 주지 마! 나에게 뭘 더 기대하려고!"

"멍! 더 큰 사람이 되렴!"

"이 멍멍이가!"

저 희망에 찬 눈빛은 온전한 믿음이나 신뢰가 아니었다. 나를 하나의 먹음직스러운 작물처럼 보고는, 잘 자라도록 물과 비료를 주는 농부의 눈과 똑같았던 것이다.

제기랄! 인간이었으면 진작 알아차렸을 불순한 의도를, 개라서 미처 읽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는 개의 왕이 멀쩡하게 나왔어! 어쩌면, 이게 다음 종말의 조각을 막을 열쇠가 될지도 몰라! 수인들과의 반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개의 왕이 참전하지 않으면…!'

회귀자가 아지와 비슷하게 눈을 반짝거렸다. 나한테 무언가, 막중한 기대를 떠안으려는 얼굴.

아아, 큰일이다. 나는 정녕 알을 깨고 두려운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싫어. 저항하겠다. 알의 껍질은 단단하기 그지없으니, 너희가 섣불리 파각하지 못하도록 내가 저항해주겠다!

"아지 너, 나 이용할 생각이냐?"

"멍? 이용, 아냐! 이건, 투자!"

"투자?"

개에게서 들려선 안 될 이야기가 나온 거 같은데.

"낮은 가능성, 높은 성과!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야! 나, 멍! 너 돌봐줄래!"

"너는 사람을 뭐로 보는 거냐! 나는 도박판 위의 카드가 아니라고! 거기다, 뭐? 도망 다니는 범죄자에게 투자? 페어도 아닌 카드에 그리 지르는 바보가 어딨냐! 바보도 그렇게 투자하지는 않을 거다!"

"나, 바보 아냐! 그래서 투자해!"

"그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시점에서 네가 바보란 건 사실이야!"

벌을 줄 겸 아지의 귀를 잡고 잡아당겼는데 아지는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 버텨냈다. 귀 쫑긋거리는 힘이 내 전력을 다한 팔 힘보다 위라니, 진짜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게 격의 차이인가? 인간의 삶은 유린당할 상황인 거야?

그때 회귀자가 말했다.

EP.199 강처럼 흐르는 땅 - 1

아지가 나에게 쏟는 관심만큼, 회귀자도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회귀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은근히 물었다.

"아지. 나는 어때?"

"멍? 너, 좀 작아!"

아지의 시선이 묘하게 회귀자의 머리 즈음에서 머물렀다. 회귀자는 제 머리 위를 괜히 휘적이며 생각했다.

'영향력 이야기겠지? 그런 거겠지?'

"만일, 내가 쟤에게 힘을 빌려준다면?"

"그러면 기뻐! 멍! 다다익선이야!"

투자에다가 사자성어까지 나오니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풍월을 읊네, 저 개. 내가 없는 사이 학교라도 다녔나.

"멍, 그래도 작아. 작아 더하기 작아도 작아."

수학 개념까지? 뭐야, 내가 개를 잘못 알고 있던 건가? 개의 왕이라서 가능한 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회귀자는 홀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대충 알겠어."

'짐승의 왕이 요구하는 자격, 그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 지금까지는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지의 말을 들어보니 영향력이 꼭 권력만 있지는 않겠어.'

골똘히 생각에 잠긴 회귀자는 큿, 하고 잇소리를 냈다.

'이런 종류의 영향력이 문제야. 회귀할 때마다 모든 관계가 초기화되는 나는 쉽게 얻지 못하는…. 권력이야 힘으로 어떻게든 잡으면 되지만, 그러면 내 행보가 꼬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권력은 너무 무거운 종류라서.'

그 다음 나를 흘긋 보고는, 회귀자는 아지와 비슷한 눈을 했다. 먹잇감을 보듯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요모조모 살폈다.

'그렇다면, 만약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어떤 수를 써서 이 녀석의 영향력을 늘리면…!'

생각이 끝났다.

속으로 시커먼 속내를 숨긴 회귀자는 답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어때. 아지 말처럼 권력을 원해? 원한다면, 너에게 줄 수 있는데."

"아니, 이 사람이 말하니까 장난이 아닌 것 같아. 권력을 뭐 호주머니에 넣어둔 것처럼 말하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적당한 자리 정도는 소개해줄 수 있으니까."

회귀자의 다정한 제안은 꽤나 낯설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번 회차는 물론 다음 회차까지 시달릴 판인데.

다음 회차의 나야 나와는 다른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온 미래에 걸쳐서 회귀자에게 시달린다니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딱 탄탈로스에서 서로 목숨을 구한 뒤 헤어지면 완벽한 이별일 텐데.

어쩌지, 진짜 같이 다녀야 하나.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는데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는 회귀자를 굽어보았다.

"호오. 조금 전, 저를 돕겠다고 하셨죠? 그러면 셰이 씨는 제 부하가 되는 셈인가요?"

"뭐?"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뭐야, 깡패야? 수틀리면 화를 내?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회귀자가 생각했다.

'만일 자격을 얻는다면, 짐승의 왕과 관련된 교섭은 다 떠맡겨야지…. 뭐, 부하 정도야 해줄 순 있어.'

"협력자에 가깝지만… 그래, 일단 부하라고 해줄게."

하하. 어디. 과연 내 이런 태도를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올까?

건들거리며 발을 불량스럽게 탁탁거렸다. 입장의 우위를 이해하고, 그걸 즉각 써먹는다. 나는 한껏 삐딱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밥이랑 청소 좀 해요. 독박육아, 아니, 독박육견은 이제 질렸거든요?"

"…뭐? 독박?"

어어, 눈 희번덕하게 뜨는 것 봐. 잘하면 사람 하나 담그겠는데.

하지만 이미 나는 아지의 투자금을 받아버렸다.

"내가 독박이라면 독박이지, 감히 말대꾸를 해? 아지야, 나 이거 못 해먹겠다. 다른 투자처 알아보렴."

"머멍?! 안 돼! 멍!"

그러자 펄쩍 뛴 아지가 큼직한 눈망울로 회귀자에게 매달렸다. 나를 노려보던 회귀자는, 아지의 간절한 태도에 대단히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멍, 네가 잠깐 참아! 막 나가면 벼슬이야!"

"큭."

'도대체 조금이라도 좋아지려고 치면 별 해괴한 짓을 벌인단 말이야. 약올리는 거야? 진짜, 다음 회차 때는 처음부터 손을 봐줘야 하나?'

호감도 관리를 성공적으로 마치려는 무렵이었다.

거대한 적의가 부풀어 오른다. 그건, 회귀자가 아니라 컨테이너 바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감지한 동시에 아지가 움직였다.

아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귀가 재빠르게 움찔거렸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머리털이 뒤늦게 이어지며 사정없이 아지의 뺨을 때렸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지는 곧장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멍! 위험!"

아지가 내 옷깃을 물고 잡아당겼다. 동시에 적의를 감지한 나도 곧장 아지를 따라,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어차피 힘 차이 때문에 저항하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수많은 총격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안전해졌다.

투타타타타타.

무수한 총성이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쏴아아, 하고 이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메웠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이 컨테이너 벽면을 두들겼다. 타악기를 난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소음이 우리를 괴롭혔다.

습격을 감지한 회귀자가 천앵과 지잔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습격? 아까 앞에 갔다 왔을 때는 없었는데?"

"앞이 아니에요. 옆!"

"매복이었나? 칫. 앞쪽의 기착지를 살펴보느라 옆을 소홀히 했어."

혀를 찬 회귀자의 귀로 티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자체가 떨리며 만들어내는 듯한, 관을 거친 둔중한 울림이 컨테이너 안을 메웠다.

[밖이 소란스럽구나. 내가 나서야 하겠느냐?]

"아니, 괜찮아. 저들의 목적은 너를 깨우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잠깐 더 있겠다. 필요할 때 부르거라.]

티르는 목소리를 낮추고 잠들었다. 수면보다는 힘의 축적, 혹은 활동 시간의 보존 같은 행위였지만, 잠 이외에는 인간에게 비슷한 개념을 찾기 힘들 터였다.

어쨌건, 잠든 티르 대신 회귀자가 컨테이너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총탄 세례는 컨테이너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며 아직 여유로운 회귀자를 향해 외쳤다.

"뭐해요! 빨리 가서 처리해요!"

"독박육견은 싫다며. 그렇다면 나도 역할분담을 할 테니 바깥 일도 똑같이 해야지. 안 그러겠어?"

"지금 그렇게 따질 때예요?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내 사과가 마음에 든 것일까, 회귀자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컨테이너 벽을 툭툭 두들겼다.

"안심해. 이 컨테이너는 티르칸쟈카가 선혈의 낙인으로 강화하고 내가 결계 마법으로 보강한 물건이야. 총탄 따위로는 뚫을 수 없어."

"그 대사 좀 불길한데."

"불길하긴. 아까부터 총탄만 쏟아붓고는 올라타지 않고 있잖아. 총을 쓴다는 건 장교가 아닌 일반병. 소모해도 상관없는 일반병을 앞세운 건, 이쪽의 신경을 갉아먹으려는 속셈이야. 신경 쓰는 게 지는 거야."

회귀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일회용이나 다름없는 총탄에 고레벨 연금강을 쓸 수는 없다. 수지가 안 맞을뿐더러, 상대가 그것을 노획하여 쓰면 그것만으로도 손해니까.

그에 반해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방어구는 전설의 금속이나 고레벨 연금강을 마음껏 때려붓곤 한다. 이유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꼭 반탄기공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금속의 가치가 갖는 불균형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투사 무기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기껏해야 견제용, 혹은 버림말.

군국이야말로 꽤 별난 나라라, 만들기 어려운 총을 일반병에게 쥐여주는 전쟁에 미친 행보를 보이지만. 그래도 전투교본만큼은 그 누구보다 합리적이었다….

다만.

'소리가 들려. 철을 두드리는 총탄의 소리를 되짚어, 내부를 재구성한다.'

내 독심술에는, 조금 다른 생각이 잡히고 있었다.

'벽면을 보강했고, 안쪽은 꽤 비어있어. 거주 목적이라 그러겠지. 반향이 고르지 않은 것을 보면 벽에다가 구조물을 댄 모양. 그렇다면, 여기서 소리가 이상한 부분은.'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옆에 난, 몇 안 되는 대로. 그것을 타고 군용 자동마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포장된 땅 위로 바퀴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상회하는, 군용 자동마차가 격렬한 비명을 토하며 흐르는 땅과 경주한다.

거기에 올라탄 일반병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총을 쏘아냈다. 투두두두. 폭음 속에서 장교의 고함이 묻힌다. 물방울조차 계속되면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하건만, 붉은 낙인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컨테이너는 총탄의 세례에도 멀쩡하다 못해 아예 튕겨나고 있었다.

탄창을 두 번 갈아도 구멍 하나 내지 못하는,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 그러나 일반병은 그저 묵묵히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모든 것은 한 존재를 위해.

벌떡 일어선 나는 회귀자의 어깨를 붙잡고는 외쳤다.

"저쪽에는 히스토리아가 있다고요!"

히스토리아는 가장 앞에서 달리는 자동마차 위에 올라탄 채로, 사람 키 정도는 될 법한 긴 총을 이쪽에 겨누고 있었다. 거칠게 부는 바람에 땋은 머리가 거세게 흔들린다. 대강 입은 제복이 사정없이 펄럭였다.

바람에 시달리는 듯 보이나, 사실 그것은 바람을 읽는 그녀만의 방법.

머리카락의 무게감도, 옷소매의 펄럭거림조차도 히스토리아에겐 바람을 느끼는 감각기관이다. 철컥, 전신으로 풍향과 풍속을 계산한 히스토리아는 가늠쇠로 컨테이너의 한 부분을 겨누었다.

팔을 당겨 커다란 총탄을 장전한다. 동시에 총신과 총탄에 새파란 기운이 맺혔다.

'저쪽.'

히스토리아가 노리는 곳이 어딘지, 이 컨테이너 안쪽에서 정확히 어느 위치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높이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휴이. 맞고 죽지나 말라고.'

겨누는 곳은, 내가 서 있다면 허벅지가 있을 정도의 높이. 확실히 맞으면 어디 하나 날아가더라도 죽지는 않겠지….

안 죽으면 다냐? 이 나쁜 녀석아!!

이 높이라면 회귀자에겐 골반 쪽이다. 빗나갈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치 않다.

즉각 회귀자를 껴안은 나는 그녀를 이끌고 땅을 뒹굴었다.

타-앙!

길고 긴 총성이 울렸다.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수많은 소음 속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거대한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가 컨테이너를 두들겼다.

쿠구우웅, 옆구리를 직격당한 컨테이너가 길게 울었다.

끼이익, 덜컹.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아주 잠깐이지만 컨테이너가 살짝 흔들렸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중력이 살짝 흔들렸다가 초심을 되찾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상태로 회귀자와 데굴데굴 굴렀다. 회귀자는 나를 떨쳐내며 말했다.

"야! 무슨 짓…!"

"위나 보고 이야기해요!"

고개를 들어보니, 딱 머리 위쪽으로 컨테이너 외벽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컨테이너 안쪽에서 빛나던 선혈의 낙인은 지금 그 빛을 꽤나 잃고는 붉은 흔적만 남겨놓았다.

그 끄트머리에서 빛이 새어나왔다.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분리하는 결계조차도 일부 파손시킨 것이다.

히스토리아의 총탄은 선혈의 낙인으로 강화된 강철조차 위협하며, 결계에 구멍을 낼 정도였다!

"총사? 벌써 우리를 따라잡았어?"

"아마 벨트 위를 달렸을 거예요! 올라탄 채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고함을 외치며 땅에 떨어져있던 집기들을 사방팔방으로 내던졌다. 부딪힌 강철이 요란한 소음을 냈다. 찌그러진 컨테이너에서 난반사되는 소리가 들려오자 장전하던 히스토리아도 눈가를 찌푸렸다.

'…소리가 난잡해졌다. 벽이 찌그러진 탓? 아니면, 벌써 대책을 세웠나?'

하지만 이걸로 번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안쪽에서 반응이 없으면 같은 벽면을 아예 드러낼 수도 있겠지.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EP.200 강처럼 흐르는 땅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