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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5 진짜 노역자, 가짜 교관

"휴즈. 그 남자는 탄탈로스에 배치된 노역자다. 아미텐그라드 13-3구역에서 내기 도박을 하다가 긴급체포된 이후 탄탈로스 노역형을 선고받았지."

그가 노역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티르는 덜컥 놀라 셰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셰이가 당장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가거나 하진 않았다.

단지 셰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음, 하고 콧소리를 흘렸을 따름이었다.

"…그랬구나. 그러면 이제 설명이 돼."

그렇지 않아도 셰이는 여러모로 의구심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도저히 출처를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능력들. 군국의 장교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친근한 태도. 사생활에는 냉큼 발을 들이밀면서, 공적인 일은 나 몰라라 하는 기이한 언행.

관등성명도 신고도 없이 말만 번지르르 늘어놓았던 그는, 아무래도 평범한 교관과는 몇십 년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티르칸쟈카를 구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녀의 심장을 되살리는 행동이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군국이 시조의 심장을 되살릴 방법을 알았다면, 되살리기보단 그것을 인질로 삼고 조종하려 들었을 테니까. 그게 군국의 합리성이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전혀 군국답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속내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고.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서 확신을 못 가졌지만!'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규격화를 이룩하려는 군국에 있어, 그와 같은 혼란스러운 인물이 교관일 리가 없다. 군국의 이념에 반하는 것이다.

차라리 탄탈로스에 가둬야만 하는, 기이하고 괴상한 능력을 지닌 범죄자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잠깐. 노역자? 탄탈로스에 수감되어야 할 범죄자가 아니라?"

노역자와 죄수는 완전히 다르다. 죄수는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구금된 이들이지만, 노역자는 해당 시설에 복무하며 온갖 잡일을 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는 이들. 따라서 상대적으로 죄질이 가벼운 이들이 노역형을 받고 준 노동자 취급을 받으며 생활한다.

교관도 아니고.

탄탈로스에 갇힐 중범죄자도 아니고.

고작 잡범이라니?

심지어.

"고작… 내기 도박하다가 잡혀 와?"

"그렇다. 되먹지 못한 0레벨 시민답게, 성실하게 노동할 생각은 안 하고 일확천금만 노리는 기생충 같은 녀석이지."

칼리스는 얼굴에 맴도는 경멸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조심스레 눈치만 살피고 있던 티르는 그 태도에 발끈해서는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고작 카드 놀음을 하는 것 가지고 기생충? 말이 험하구나!"

이에 칼리스는 대답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즉각 화답했다.

"물론 그뿐이었으면 탄탈로스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박에 참여한 다섯을 따로 심문해본 결과, 그자는 평소에도 도박을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선량한 사람들을 꼬드겨 도박판에 끌어들이곤 했다."

"놀음이란 어디까지나 놀이일 터. 논 것 가지고 어찌 죄를 논하느냐?"

"심지어 나머지 넷은 입을 모아 그가 속임수를 쓴 것이 분명하다고 고발했다. 그날만 하더라도 혼자 9할의 승률을 기록했다지."

멈칫.

아무리 뛰어난 승부사라도 9할의 승률은 비정상적이다. 그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티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티르는 한결 자신 없어진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건 그냥, 그 넷이 무능한 것 아니겠느냐."

"연달아 패배한 게 분한 나머지, 마지막엔 넷이 짜고 쳤음에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확신을 가졌던 시점이지."

"...짜고 치는, 것도, 자랑은 아니렷다...."

그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이 가득한 티르도 결국 변호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완벽하게 논파한 칼리스는 한결 당당하게 소리쳤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이들은 자기 처지를 범죄를 저지른 핑계로 삼으려고 하지. 군국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온정으로 군법을 시험하는 것을 막기 위해, 0레벨 시민의 범죄는 사소한 것으로도 일벌백계하여야 한다!"

칼리스가 고개를 들고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0레벨 시민 휴즈! 지금까지는 방만한 생활을 즐겼겠지만, 오늘로 끝이다. 감독관이 왔다. 당장 나와서 현 상태를 보고하라! 그러지 않으면 근무태만으로 처벌하겠다!"

커다란 목소리가 탄탈로스를 울렸으나, 안에서는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티르가 나서서 말했다.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기억을 잃어, 반쯤 백치가 되었으니."

"기억을 잃어?"

칼리스가 조소하면서 대꾸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의무에 소홀히 할 이유가 되나? 그럴 수 없다. 만일 그게 된다면, 사람을 죽이고도 기억을 잃은 척하면 무죄가 되겠군."

"일어난 일에서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있을 일을 못 하는 것이잖느냐. 둘은 완전히 다르지. 과거와 미래가 다른 것만큼이나."

조곤조곤한 말투였으나, 동시에 듣는 이를 꾸짖는 듯한 고풍스러운 지적이었다. 칼리스가 대꾸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티르는 마력초를 소중히 챙겨 들고는 움직였다.

"이 보급품은 그를 위한 것이다. 혹 그의 정신이 돌아오면, 마저 이야기를 들어보마."

마력초를 소중히 챙겨 든 티르가 탄탈로스로 가기 전,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물었다.

"잠깐. 그의 이름이 휴즈라고 하였느냐?"

"그렇다. 무슨 문제라도?"

"…잘못 안 것은 아니고?"

"본관은 탄탈로스에 부임하기 전, 탄탈로스에 머무는 이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전부 읽어보고 왔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티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셰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것 봐. 내가 대답이 이상하다고 말했지. 애초에 콩부터가 말이 안 된다니까."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 지금 우선할 것은 휴를 깨우는 일이다."

"같이 가자. 나도 그 녀석에게 물어볼 게 있으니까."

그리 말하는 셰이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드디어 단서를 잡았어…! 이제는 도망갈 수 없을 거야…!"

티르는 그것을 탓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이 부분은 그가 감내할 문제였다. 티르가 보장할 수 있는 건 일신의 안전뿐이다.

티르와 셰이는 나란히 걸어갔다. 다시 이름 모를 그의 방을 향해.

칼리스는 군국 장교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령에 따라 탄탈로스에 오기는 했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개죽음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셰이가 살기를 내뿜었을 때, 숨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시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준 장성 급 위험인물…. 처음 보자마자 살기를 흘리다니."

시조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자연재해와 비슷한 존재.

태풍을 상대로 싸워 이길 필요가 있는가? 벼락이 내리칠 때 꿋꿋이 버텨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저 몸을 숙이고 태풍이 지나가길, 낮은 곳에서 벼락이 멎길 기다리면 된다.

시조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흡혈귀답게 만사에 무심하며, 자신 주변의 상황이 얼마나 변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군국이 관 속에서 잠든 그녀를 무저갱으로 옮길 때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단지 '어디로 가느냐'고 딱 한 번 묻고는, 옮기던 병사가 저도 모르게 무저갱이라고 대답하자 '그곳이라면 하늘이 보이지 않겠구나.' 라고 중얼거린 뒤 그대로 침묵했다는 건 군국에서도 꽤 유명한 일화였다.

시조의 역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그녀의 앞에서 천신에게 기도만 하지 않는다면 딱히 위험할 일은 없다. 어쩌면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는 이레귤러."

일단 레벨 3이라고 랭크되어 있지만… 신분이나 연원 자체가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강자, 셰이.

군국 육장성, 절창(絶槍) 파트락시온이 직접 나서서 제압해야만 했던 위험인물이다.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먼저 내려보낸 노역자… 리트머스가 아직까지 피로 붉게 물들지 않았다는 점.

잡범조차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군국의 엘리트인 칼리스라고 못할 것은 없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백치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스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정모를 벗었다. 나름 강심장이라 자부한 그녀였지만 몸은 솔직했는지, 단발 아래 드러난 목덜미에는 땀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생존, 그리고 보고."

셰이가 모든 골렘을 때려 부순 탓에, 탄탈로스 내부의 정보가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따라서 원래 올 예정이었던 그녀의 상관은 대신 그녀를 내려보냈다. 먼저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라고, 혹 위험한 일이 있다면 먼저 그 몸으로 겪으라고.

그녀의 처지가 리트머스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쓰이기 위해, 다른 숱한 장교를 제치고 중령이 된 것이니까.

"다시 인간을 위대하게."

그들의 비원을 되새기며,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

탄탈로스의 4층은 노역자의 공간이다. 식당과 세탁실처럼 그들이 일해야 할 공간이 있으며, 일을 끝낼 그들이 몸을 뉠 숙소가 바로 같은 층에 있다.

셰이는 그중 하나의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 노역자 방에서 지내고 있었네? 이런 곳에서 살다니."

"너는 지금껏 휴가 어디서 지내는지도 몰랐던 것이냐?"

"이름도 몰랐는데 어디서 지냈는지를 어떻게 알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셰이를 티르가 나무랐다.

"참 무관심하구나.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어? 솔직히 너도 심장을 되찾기 전까지는 모르지 않았어?"

"…으음."

티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는 그가 지내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멀뚱히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잠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건 자극에 대한 반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묻는 말에는 대답하고 누군가의 행동에는 반응하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 아직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그를 향해, 티르는 언제나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휴, 별일 없었느냐?"

노역자 숙소의 비좁은 방은 사람 둘만 더해졌는데도 가득 찬 것 같았다. 티르는 좁은 방을 가로질러 그의 곁에 앉았다.

셰이는 문 쪽에 기대어 서서는 중얼거렸다.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네. 자아가 없는 와중에도 가명을 댔다는 거 아니야."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 자, 휴. 이것 보아라. 네가 필요로 했던 그 보급품이다…."

티르는 종이 갑에서 마력초를 돌돌 말아 만든 엽궐련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티르는 자신이 사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태생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으며 독과 약물에 면역인 흡혈귀에겐, 손가락 크기로 돌돌 말린 담배란 너무 난해한 물건이었다. 티르는 곤란한 듯 담배를 들고 우물쭈물거렸다.

"사용이라…. 이 막대기를 어떤 식으로 사용을…. 먹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기다란 막대기를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티르의 경험상으론 하나뿐이었다.

마력초 담배를 치켜든 티르는, 그것으로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에잇. 정신 차리거라!"

그 와중에 때리는 곳이 머리도 아니고 어깨. 그마저도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 만일 그가 기억을 잃지 않았어도 이 타격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으리라.

어린애 장난 같은 광경에 셰이는 기막혀서 몇 초간 입만 뻐끔거렸다.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그리고 설사 그렇게 쓰는 거라고 해도, 어깨를 그렇게 살살 때려서야 뭐 바뀌겠어?"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것 말고는 방도가 없지 않느냐?"

"이건 피우는 용도인데…. 에이, 말로 해서 뭐해. 일단 그의 손에 쥐여 줘 봐."

티르가 반신반의하며 그의 손에 마력초를 조심스레 가져다 댈 때였다.

반응이 있었다.

손바닥에 마력초가 닿은 순간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오므려 마력초 담배를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담배를 코까지 당기더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마치 품질을 확인하는 것처럼.

"시작됐다."

굳이 셰이의 말이 없더라도, 티르 역시 그정도는 알아차렸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담배를 손에 쥔 그의 움직임은 몸에 익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손가락을 들고, 제식 마법으로 불을 당긴다. 불꽃을 머금은 손톱으로 마력초 끄트머리를 툭 긁으면 그 틈으로 시뻘건 불꽃이 스며들었다.

안쪽 깊숙이 숨어든 불꽃은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우다, 곧 넘치는 힘을 자랑하며 세상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셰이? 휴가 그것에 불을 붙였는데,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

"아니, 마력초는 원래 저렇게 쓰는 거야. 따지고 보면 향초랑 비슷한 거라서."

죽은 풀잎을 위한 뒤늦은 화장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영혼을 봤다고 하는 이들은 제각기 다른 묘사를 하나, 담뱃잎의 영혼은 오직 하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다.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세로줄무늬를 가진 회색 뱀.

애연가는 자못 경건한 자세로 그 영혼을 맞이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휘감으며 올라간 뱀이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자신의 향으로 가득 채웠다.

연기가 충분히 피어오르자, 그는 오래된 예법에 따라 두 손가락으로 담배를 잡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움직임.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뇌리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알겠다. 이걸 노렸구나?"

셰이는 천반경이라는 기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의 행동을 단번에 이해했다.

천반경의 기본 원리는 자신의 몸에 동작을 새기는 것. 머리보다 몸이 먼저 대응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심신의 안정을 유지한다.

그런 천반경에서 정신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강조하는 것이, 지금 그가 하는 것과 유사한 소매틱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향 같구나. 이 향이 정신을 돌리기 위한 의식이더냐?"

"마력초를 태운 연기도 분명 영향이 있겠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야. 지금 그가 하는 건 일종의 자기 암시야. 몸의 기억으로 마음의 기억을 재점화시키려고 한 거지."

마법으로 불을 당기는 것부터, 입가에 끌어당겨 빨아들이는 동작까지.

일련의 흐름은 기억을 잃은 자의 것이라고 보기 너무 부드러웠다. 수천, 수만 번의 시도 끝에 그에 이르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낸 뒤, 그 몸에 새긴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수천 수백 번 마력초를 피우면서 몸에 익은 동작이야. 그의 무의식 깊숙이에 남아있었기에 자신을 잃어버린 와중에도 몸이 멋대로 재현하는 거지. 이 동작으로 잠들어 있던 자아를 자극하는 거야."

"그럼, 이것으로 휴가 정말 깨어나는 것이냐?"

"그래. 자기가 쪽지에 강조했을 정도니까, 확실해."

시간이 흐를 때마다 담배는 점점 짧아졌다. 이즈음, 시가는 타오름으로써 시간을 알리는 시계였다. 매캐한 연기가 방을 가득 메우고, 담배를 반 이상 갉아먹은 불씨가 그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릴 즈음.

그가 책상 위에 시가를 놓았다.

"드디어!"

티르의 기대감 어린 시선과 함께, 그는.

"콜록! 콜록!"

크게 기침을 하고는, 여전히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티르가 배신감에 휩싸여 외쳤다.

"아니잖느냐!"

"어? 이상한데. 이게 아니야? 다른 마력초인가? 아니, 피우는 거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셰이가 마력초를 살피는 동안, 티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티르의 눈에 책상 위에 놓여있던 조그만 차임벨이 보였다.

"애초에, 나는 그가 향을 입에 문 것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도 없는데 어찌 몸이 기억하겠느냐!"

"그야 무저갱에서는 담배를 구할 수 없으니까…. 아마 지상에서는 되었을 걸…."

"혹 다른 계기가 필요한 게 아니더냐? 어디, 향을 피웠으니 이번엔 이 종을 흔들어보마."

"앗? 그 종은 아지를 부르는 종…."

셰이의 만류도 무색하게, 티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리고 몇 초 뒤.

"멍멍!"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종소리에 반응한 아지가 복도를 내달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짐승의 울부짖음이 네발짐승의 발소리를 반주 삼아 들려온다.

밥 먹을 때도 아닌데 반응하는 건 정말… 조련이 잘 되어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식충이인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아지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지야. 밥 먹자!"

EP.86 안배

"아지야. 밥 먹자!"

잠시 숨 막힐 듯한 고요가 일었다. 회귀자도, 티르도. 느닷없는 나의 외침에 나를 빤히 보았다.

동전이 뒤집히는 것처럼, 반대쪽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아가 떠오른다. 불씨만 남았던 촛불에 불이 붙었다. 세상이 환히 밝아지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정신을 되찾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쳤다.

"우와아아. 큰일 날 뻔했다! 이대로 죽을 뻔했어!"

강물에 빠져서 하류까지 떠밀려갔다가 간신히 강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물에 흠뻑 젖은 듯한 피로감이 내 몸을 덮쳤다.

제기랄. 조금만 읽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 방심하는 바람에 너무 많이 넘어갔다. 그 탓에 기억에 휩쓸려 자아가 꺼질 뻔했어.

후우. 보험을 들어놨으니 망정이지. 평소에 술 담배 게을리 안 하고 열심히 빨아 제낀 보람이 있다. 혹여나 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어라. 뭐지. 담배는 다 탔는데.

"그런데 제가 정확히 뭐로 정신을 차린 거예요?"

감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티르는, 내 질문에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아지에게 밥을 먹일 때면 울리곤 했던 차임벨. 개의 왕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해 내가 고안해낸, 일종의 심리적인 덫이다.

그 종소리를 듣자, 안쪽에서 뭔가 갑갑한 것이 솟아오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지야!"

"멍!"

타이밍 좋게도 아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나에게 다가온 아지는, 큼직한 호의를 의아한 얼굴로 바꾸며 두리번거렸다.

"멍? 밥은?"

아, 그러니까…. 감옥에 갇히고 몇 주 동안 안 피웠던 마력초 대신, 그동안 매끼 마다 울려댔던 종소리가….

아….

"멍! 밥! 멍? 밥? …밥, 어디?"

"미안, 사실 그런 건 없어. 심심해서 장난 좀 쳐봤어."

"왈왈! 왈왈왈!"

"뭐? 별로 싫지 않다고? 역시,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제 싫어! 냄새 나!"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뻗었으나, 냄새를 맡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가는 아지.

나는 쓰다듬으려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쓸모도 없는데, 이왕 그만 둔 김에 담배나 끊을까."

어쨌건, 모로 가도 목적지로만 가면 된다. 과정이야 뭐든 결과만 좋으면 됐지, 암.

부지런히 산 보람이 있다. 아지를 길들이려고 매일 종을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자아를 잃고 자신을 12세기 전에 살았던 한 명의 소녀가 된 것처럼 굴었을 테니까.

…개를 조련하기 위해 만든 종이 도리어 나를 조교한 느낌이라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한숨을 돌린 뒤 고개를 들었다.

좁은 방 안에는 회귀자와 티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상이했는데, 티르 쪽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으나 회귀자는 남은 의문을 다 털어버릴 생각밖에 없었다.

"자, 다들. 제가 의식이 없는 동안 저를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한쪽 팔은 넓게 벌린 뒤 우아하게 인사하는 척하며.

기습적으로 고개를 처들고는 외쳤다.

"…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혹시나 저들이 적반하장으로 구는 일을 막기 위해 미리 선수를 쳤다.

원근법은 인간의 마음에도 존재하는 법이라, 예전에 입은 커다란 은혜보다 최근에 베푼 자그만 친절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엔 준 것보다 받은 것을 쉽게 잊는 인간의 이기심도 조금 있지만.

하지만 나에겐 어림도 없다. 옛날에 해결사 역할을 하며 추심까지 해본 몸이다. 못 받은 빚, 설사 그것이 마음의 빚이라고 해도, 박박 긁어서 얻어내고야 만다.

"저는 티르에게 심장을 선물하려다가 이 꼴이 된 겁니다. 여러분을 위해 희생한 거라고요! 그 여파로 쓰러졌으면 당연히 여러분이 저를 돌봐야죠! 이건 상식입니다, 상식! 노동자를 고용할 때 식대를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필요 비용이라고요! 기억하세요!"

"물론이다. 어찌 잊겠느냐. 네가 나를 위해 그토록 커다란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는 것을, 나는 계속 기억할 것이다."

티르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라. 왜 이리 순순하지. 말을 이따위로 했으면 부처도 한 대 때리고 싶어해야 정상일 텐데.

"걱정 말거라. 정신을 차렸어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몸과 마음을 다해 너를 보호할 터이다."

"네? 어, 아니, 그럴 필요까진."

"괜찮다. 네가 준 것에 비하면, 내가 줄 것은 깃털만큼이나 가벼우니까."

…뭔가 살짝 이상한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마음이, 음, 살짝 무겁다. 말을 더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더 물었다간 뭔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것 같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다들, 제가 정신을 잃었을 때 뭐 이상한 짓은 안 했죠?"

티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고개를 휙 돌렸고, 회귀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둘 다 반응이 좀 이상한데.

회귀자야 내가 정신이 없을 때 별의별 것을 다 확인하려고 했을 거다. 솔직히 그건 내 예상 안의 일.

그런데 티르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빤히 노려보는데, 티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회귀자를 가리키며 일러바쳤다.

"셰이, 셰이가 너를 심문했다."

눈앞에서 밀고 당한 회귀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티르칸쟈카? 너도 협력했잖아!"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심문이 더 이어지기 전에 멈추기도 했고."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생각이라도 읽고 싶지만, 아직 독심술을 쓰기에는 자아가 좀 침침하다. 제대로 읽으려면 몇 분은 더 걸릴 거다.

그래도 내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티르는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밀고까지 하는 걸까….

일단 나중에 묻고. 나는 죄목이 정해진 회귀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셰이 교육생,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 쪽지 내용을 읽었으면서도 대놓고 무시해요? 당신에겐 약속의 소중함이라는 게 없는 겁니까!"

"지는 이중 쪽지 만들어놓고는…."

"군국에서 하루 이틀 살아 봐? 속았어도 고개를 끄덕인 이상 최소한의 이행 의무는 있는 거야! 계약서는 꼼꼼히 확인해야지! 그리고!"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불만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는 요량으로 온 힘을 다해 침대를 내리쳤다. 그러자 괜히 옆에 앉은 티르의 몸이 들썩였다.

침대도 만든 나라를 닮아서 그런지 딱딱하구나. 얼얼한 주먹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소리쳤다.

"내 입장도 생각해봐요. 댁이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그랬을까! 솔직히 이중 쪽지에 적힌 내용 별거 아니었잖아! 심신미약이 된 사람 건드리지 말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런데 그 별거 아닌 부탁도 거절할까 봐 이중 쪽지로 소소한 재미와 강조 효과를 넣었는데 우습게 무시했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내가 약해진 틈을 타 정보를 빼내려고 한 혐의는 여전하니까.

회귀자는 말을 슬쩍 흘렸다.

"…그래. 내가 성급했어. 인정할게. 하지만 너도 할 말은 없을 텐데?"

뭐지?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이 당당한 표정.

회귀자는 내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름, 휴즈. 맞지?"

"어? 그건 제 시민등록상 이름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뭐야.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이름을 다 캐내기라도 했나?

내 물음에, 회귀자는 점점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0레벨 시민, 탄탈로스의 노역자, 휴즈. 대단해. 처음부터 깜짝 속았지 뭐야. 쓸데없는 짓을 해준 덕분에 나는 뱅 돌아가게 되었잖아."

"뭐, 뭐야? 어떻게 그걸?!"

독심술! 앗. 아직 안 돌아왔어!

어쩔 수 없다. 잠깐 평범한 이들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나는 양팔을 들어 항변했다.

"이, 이건 사생활 침해예요! 개인정보 유출이에요! 도대체 누구예요? 제 시민등록명을 낱낱이 까발린 사람이!"

"본관이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문밖을 보니, 낯선 사람이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국 장교나 쓰는 커다란 정모에, 그에 맞추어 칼처럼 자른 단발을 가진 여자였다. 빳빳한 제복과, 그 가슴 위로 자랑스레 걸린 훈장이 돋보인다.

장교가 위압적인 자세로 말했다.

"이곳에 있었군. 노역자."

장교네. 심지어 제복을 입은. 군국의 엘리트인 장교가 왜 이곳에.

어라? 교관으로 왔나?

교…관?

교관이 왜 벌써!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나는 화들짝 뛰어오르며 손가락으로 장교를 가리켰다.

"와아앗! 셰이 교육생! 뭐해요? 빨리 저 사람 팔 잘라요!"

대부분은 내 말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오직 회귀자만이, 자기 이야기인 줄은 알고 얼굴을 팍 구길 뿐이었다.

회귀자가 싸늘한 태도로 대꾸했다.

"…네 팔도 안 잘랐는데 왜?"

"안 자르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자르려다가 실패한 거잖아요! 결과의 평등말고 기회의 평등! 저 팔에게도 평등하게 자기 어깻죽지와 이별할 기회를 주세요!"

"싫어. 흥미가 사라졌어."

"뭐야. 지금까지 팔 자르고 그랬던 게 흥미본위였어? 남의 팔 자르는 게 그리 가벼운 문제야?! 차라리 평등하게 의무감으로 잘라!"

회귀자는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한 뒤, 장교가 안에 들어오도록 비켜주기까지 했다. 장교를 살짝 흘겨보긴 했지만 팔을 자르진 않고 스쳐 지나갔다.

방에 들어온 장교는 눈만 슬쩍 흘겨서 방 내부를 살폈다. 트집이라도 잡으려는 듯한 태도에 나는 겁먹은 학생처럼 움찔거렸다.

"탄탈로스 꼴이 엉망이더군. 며칠 동안 방치하기라도 했나?"

"아니, 저. 잃어버린 기억 좀 줍느라고."

"그러면서 감독관을 향해 삿대질하고, 팔을 자르라는 망발을 하다니."

소시민 근성에 찌든 나는 장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장교는 그런 내 태도를 보고 자신만만해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각으로는 약간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마 자기보다 약한 유일한 존재를 보고는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호출이다. 노역자. 당장 교관실로 오도록."

"큭…!"

일반 시민은 장교의 명령에는 반항할 수 없다.

장교는 소속 시설의 노동자를 향한 명령권을 가지며, 불복종할 경우 직권으로 처벌할 권한을 지닌다.

심지어 상대는 탄탈로스의 총책임자로 온 교관. 이 무저갱에서 나를 즉결처분해도 아무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큭큭큭큭큭!"

하지만 내가 고개를 숙인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한 페이크. 다물은 이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장교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웃기지?"

"하하하! 너희가 올 때까지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가만히 있었을 것 같냐!"

군국은 언제나 예비를 준비한다.

새로운 노역자든, 아니면 교관이든.

골렘이 나에게 경고를 보냈을 때부터, 아마 군국은 나 말고도 이곳을 관리할 사람을 물색했을 것이다.

…그 장교가 이토록 빨리 온 건 예상외지만.

"이럴 줄 알고 안배해놓았지! 어디 나를 건드려 봐! 혼쭐을 내주겠어!"

"네가?"

무슨 무의미한 소리를. 내가 혼내봐야 무서워하지도 않을 거잖아.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내 곁에 선 티르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니! 나 말고, 티르가!"

EP.87 안배...?

군국 뒷골목, 그곳은 어설픈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비정한 구역. 그곳의 터줏대감인 내가 순순히 군국에 굴복할 것 같나?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티르의 심장을 살린 건, 다 이때를 위해서였다!

"티르! 당신의 힘을 보여줘요!"

흡혈귀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다고 한들, 자기 심장을 되살린 이를 외면하진 않겠지.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티르는 나를 따라 일어서서는, 나보다 반 발짝 앞에 섰다.

"그래. 그의 말대로다."

새까만 양산이 내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티르가 양산을 살짝 들어 올려 내게 기댄 것이다. 양산을 통해 자기 뜻을 알린 티르가 장교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선언하겠다. 휴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난다면, 그 몸에서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흘러나온다면…. 너와, 너의 나라에 그의 백만 배의 혈채를 거두어가겠다."

경고란, 그 경고의 현실성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질러보았자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다. 허풍인 게 당연하며, 설사 그럴 의지가 있어도 실패할 것이니까.

그런데 만일, 누구 하나를 지목해서 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지목당한 이는 밤에 잠을 푹 못 잘 것이다.

그렇기에 시조의 경고는 모두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티르에겐 그럴 능력이 있기에.

장교조차 그 기백에 질렸다.

"…그는 잡범이다. 시조, 당신은 고작 잡범 하나를 위해 군국을 척질 생각인가?"

"병사여, 내 너에게 묻노라. 너는 고작 잡범 하나를 죄인으로 남기기 위해 나라와 갈등을 빚을 각오는 되었는가?"

"나라…?"

장교가 주춤할 때, 방안을 잠식했던 연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회색빛 흐릿한 담배 연기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더니, 흡혈귀의 기운에 닿은 순간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흡혈귀의 시조, 그녀의 힘은 극에 달한 혈조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천신의 신도와 싸워가며, 혈기가 빛에 그을리고 육신이 열기에 타올랐다. 상대방의 몸에서 피를 끌어낼 때마다, 수없이 많은 권속이 새카맣게 타서 스러졌다.

마(魔)에 몸을 바치더라도 그저 살고자 했던 이들은 고통스런 단말마만 남기고 소멸했다. 그들이 남긴 메아리를, 시조는 전부 짊어졌고.

어느 순간, 그녀는 어둠을 다루게 되었다.

빛이 외면한 그림자를.

어둠이 방을 가득 채웠다. 탄탈로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티르의 오연한 목소리만이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세계를 삼킬 괴물이자, 그림자의 여왕이며, 모든 흡혈귀의 시작이다. 내가 곧 흡혈귀이며, 땅 위를 활보하는 흡혈귀는 나의 수족이니. 다시 묻노라, 군국의 병사여. 일개 병사인 너에게 그만한 힘이, 권한이, 각오가 있는가?"

"윽…!"

난다 긴다 하는 군국의 장교조차 그 힘에 감히 맞서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나름 기력을 짜내고 있음에도, 단지 티르의 존재력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와중, 티르의 양산 아래에 있는 나는 그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죄수를 가두어야 할 탄탈로스가 겁에 질려 떠는 와중에도 나는 멀쩡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무거운데.

나를 비호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 정도가 좀. 나는 해치지 못하게 엄중히 경고하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단 말이야.

"…알겠습, 아니, 알았다. 참고… 하도록 하지."

장교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도망이었지만, 그나마 끝까지 가오를 잃지 않은 게 가상하다.

장교가 달아나자, 사방을 가득 메웠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요동치던 기운이 잠잠해지고 방 안에는 나와 티르만이 남았다.

잠깐의 정적. 고요하게 문밖으로 노려보던 티르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금 어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휴."

"네?"

갑자기 내 이름은 왜.

내가 대답하자, 티르는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후후. 이 이름으로도 돌아보는구나. 그래, 네 원래 이름이 휴즈인 것이냐?"

"네. 휴즈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있거든요."

"나는 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좋다."

"왜요?"

우물쭈물, 잠시 대답을 망설인 티르는, 내 품에서 양산을 빼앗아 든 뒤 툭 내뱉었다.

"…그야, 네 입으로 직접 들었으니까. 왜, 짧아서 좋지 않느냐."

"아아."

무겁다. 다시 느끼지만, 저울 눈이 망가질 정도로 무겁다.

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바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어갈 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호구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감정이 이리 무거워졌을 줄이야. 12세기 동안 막힌 혈이 뚫려서 그런가.

"어때. 도움이 되었느냐?"

"물론, 차고 넘치게요."

그렇다고 나쁠 건 없다. 눈앞의 대상은 흡혈귀의 시조, 역사서에나 간간이 등장했던 대재앙. 걸어 다니는 군단인 그녀가 내 뒷배를 봐준다면야 나야 좋지.

그렇게 생각할 때, 티르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 그 병사가 있어서 괴롭다면, 나에게 고하거라. 고작 병사 하나 정도야 시체도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다."

그게 좀 무겁다고 해도… 말이지. 하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을 흐렸다.

"에이. 어떻게 사람을 함부로 죽여요? 큰일 날 소리. 살고 싶어 하는 사람 함부로 죽이는 거 아니에요."

티르가 의아해해서 물었다.

"그러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죽여도 무방하다는 뜻이냐?"

"뭐,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굳이 죽여야겠냐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할 것이며, 설사 있다고 한들 죽고 싶은 이와 살고 싶은 이를 어찌 구분하겠느냐?"

"아무도 못 하죠, 보통은."

"그러면 쓸모 없지 않느냐."

"하하, 그런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티르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는 상냥하구나."

"와! 엄마가 사라진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에요!"

"…고아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해맑게 대답하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티르. 그녀는 양산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는 중얼거렸다.

"알겠다. 죽이지 말라는 뜻이겠지. 당장 네 손에 커다란 힘이 주어져도, 너를 압제하던 이에게 휘두를 기회가 생겨도, 딱히 그러려고 하지 않는구나."

"나를 죽이려고 든 것도 아닌데요, 뭐."

"저 뻣뻣한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굽힐 것 같지 않구나. 언제고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

"사람 미래는 모르는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좀 있다고 미리 죽여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게 야만이지."

격렬한 조현병 환자가 아닌 이상에야, 나에 대한 살의 정도는 미리 읽을 수 있다.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그리고… 장교에게서 알아낼 것도 있으니까. 벌써 죽일 수는 없지.

그 이야기는 잠시 치우고, 마침 둘이 남은 김에 나는 티르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저 의식을 잃은 사이 아무것도 안했어요? 정말 저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무, 물론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겠느냐?!"

아까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 가고, 되려 목소리를 높이는 티르.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듯하지만, 어림도 없다.

'후우. 들키지 않아 다행이구나. 그걸 들켰다면….'

이제 슬슬 독심술이 돌아오는 무렵이다. 어디,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나 읽어볼까.

나는 티르의 기억을 거슬러 읽어들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티르는 내 방에서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있었다. 자아가 흐려진 나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채비할 때였다.

나를 일으키려던 티르는, 잠시 내 손을 보고는 동작을 멈췄다.

무슨 일인지, 한참 내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티르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물건을 훔치려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잘못을 저지르기 직전에 보여주는 수상한 태도. 뒷골목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간 나도 한몫 달라며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손짓 한 번에 다 나가떨어지겠지만.

어쨌든, 그토록 안절부절못하며 나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티르는, 결심한 듯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시조의 권능이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지고한 권능으로 세상의 눈을 가린 티르는, 텅 빈 내 손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내가 그 자극에 반응했다.

"…누구세요?"

"쉬. 나다."

"티르?"

"그래. 티르다. 잠깐만 그대로 있거라."

나를 조용히 시킨 티르는 조심조심 나의 손을 가슴께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콩닥. 콩닥. 콩닥.

내 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티르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티르의 몸이 전기 마사지를 기억해버린 것도 있고, 심장에 박은 카드가 반응하는 것도 있을 거다.

어쨌건, 티르에게 내 손은 자석이나, 난로, 혹은 마약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인류의 얄팍한 역사로는 감히 비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콩닥에서 콩으로, 콩에서 쿵으로.

수면을 흔드는 작은 파문은 어느덧 전신을 통째로 울리는 북소리가 되어 퍼졌다. 박동이 어찌나 큰지, 내 손에도 진동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런 방식으로 되찾은 생의 증거를 만끽하던 티르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이만큼 가까워진 것으로도 이런데, 만일 조금 더 가까이 닿으면…."

이미 거의 닿아있는데, 뭘 더? 어떻게 더 가까워진다는 말인가?

아.

티르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뜩였다.

"가만히 있거라, 휴."

그 당시 자아가 없던 나는 조금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한 번 더 주위의 눈치를 본 뒤, 가슴에 손가락을 올려 아래로 그었다.

아, 잠깐만. 설마.

티르의 손가락은 가슴 살가죽을 가르고 안을 드러냈다.

심장이 뛰고 있더라도 혈조술은 어디 가지 않는다. 가슴을 갈라도 여전히, 예전보다는 공을 들여야 하기는 했지만, 티르의 피는 흘러나오지 않고 그녀의 안만 맴돌았다.

그렇게 활짝 벌려진 가슴 안쪽으로, 내 손이 티르의 심장에 더 가까이….

"하으…."

그즈음, 나는 생각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원래 중요 인물의 약점 같은 걸 읽으면…. 그걸 써먹어서 뭘 뜯어낼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 거대한 비밀을 가슴 속에 묻기로 했다.

세상에는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도 있는 법이니까.

'그는 군국 출신이 아니야. 즉, 탄탈로스를 몰락하게 만든 교관과 그는 서로 다른 인물이야! 쳇, 헷갈리게 하기는!'

어둑한 방에서 음침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래. 아무리 군국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아지나 티르칸쟈카를 타락시킬 수 있을 리 없어. 그들은 극도의 통제주의자. 차라리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했으면 했지, 폭주시켜서 밖으로 내보내는 건 군국의 방식이 아니야. 그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고.'

천앵의 칼날을 비스듬히 민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티가 일며 공간과 공간이 마찰힌다.

천앵은 두께 없는 검. 따라서 무한히 예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고 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매서운 바람은 가끔 뼈를 시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창인 것은 아니니.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야…. 정확히는, 군국이 그를 죽여서 나머지가 폭주한 거겠지.'

만일 쓰는 자의 기량이 부족하다면, 칼을 이루는 공간이 흐트러지는 걸 기공으로 붙잡지 않는다면 천앵은 그냥 자루만 남은 칼이 될 뿐이다.

역으로, 사용자의 기량만 충분하다면, 세상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검.

회귀자는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서 칼날을 갈았다. 그동안 조금씩 소모되었던 공간에 예기가 돌아온다.

어둠 속에서 칼날과 함께 정신을 날카롭게 갈며, 셰이는 생각을 되뇌었다.

'…평범한 노역자라는 건 정말 예상 밖인데. 나는 교관을 사칭하는 죄수인 줄 알았어. 그런데 고작 노역자? 아니면, 이마저도 속임수…? 군국 행정부조차도 속일 수 있는? 혹은, 휴즈라는 이름의 노역자와 바꿔치기한 걸까?'

그렇게 나오는 결론이 헛다리라는 것은 애석한 일이었으나, 어쨌건 회귀자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직 그의 정체도, 목적도 불명이지만…. 아지와 티르칸쟈카를 매혹해서 뭘 하려고 한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연마가 끝났다. 회귀자는 허공에 천앵을 한번 휘둘렀다. 바람의 틈조차도 비집는 검은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그래도 괜찮아. 아직도 신뢰하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의 죽음이 비극의 트리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살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 돼.'

틱. 저울눈이 기울어진다. 작지만 비가역적으로.

한 소녀의 마음에서 내려진 이 판단은 사소했으나 동시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앞으로 존재하는 모든 미래에서, 어떤 존재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성과는 얻었어. 이제.'

이전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으면 된다.

이전보다 한 가지 더 알아갔으면 된다.

어차피 회귀자의 앞을 기다리는 건, 수십 번 더 죽더라도 결코 목표에 닿지 못할 고행의 길.

회귀자는 성취감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천앵을 꼭 쥐었다.

'마음껏 죽을 수 있어.'

EP.88 군국의 장교

"안녕하세요, 에이비 대위! 오랜만이죠?"

그림자에 묶여있던 골렘이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골렘의 꼴이 말도 아니었다. 새까만 그림자로 된 수십 개의 채찍이 골렘의 몸을 장난감처럼 잡아당기고 있었다. 당기는 힘이 기가 막히게 길항상태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골렘의 전신이 찢겨나갔으리라.

그림자를 끊는 방법은 불. 나는 제식 마법으로 손가락에 불꽃을 일으키고는 그림자를 하나하나 끊어주었다.

"아아, 미안해요. 내가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겨서, 혹시 찬장에서 떨어질까 봐 다리를 잠깐 묶어놨어요…. 그런데 그때보다 예쁘게 묶여있네요? 어떤 친절한 사람이 해줬을까?"

어디, 내 아지소리에 무슨 대답을 하나 들어볼까.

텅 빈 입에 스피커를 물리자, 저 멀리에서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드득…. 까득….』

"우와. 골렘이 이를 간다! 이빨도 없는데 이를 갈고 있어!"

나를 갈아마셔도 시원찮다는 듯 이를 가는 골렘.

하지만 복구할 수 없는 자원은 소중하기 마련이다. 영구치도 그 중 하나고.

잠시 기다리자 골렘은 이갈이를 멈추고는 드문드문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은, 귀하의… 행동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 왜 그래요. 저 없는 동안 스트레칭이나 하라고 배려해준 건데."

『까드득…. 그것 때문에 본관이.』

재미는 있는데 생각을 못 읽으니 즐거움이 덜하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용건을 꺼냈다.

"그러니까 탈출 방법 좀 캐냈기로서니 바로 장교를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정이 없게 구니까 저도 그렇게 나오는 거 아니에요."

『…본관의 눈앞에서 탈옥 방법을 캐내려 했으면서 뻔뻔하게 정을 운운하는 겁니까?』

"궁금할 수도 있죠. 에이비 대위도 찬장에서 빠져나오는 법 궁금해했잖아요? 그래서 티르와 교섭했다며… 한발 늦긴 했지만."

『그렇다면 동등하군요. 본관도, 귀하도 서로 탈출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통신병 짬이 있어서 그런가, 말 한마디를 안 지네.

마음도 안 읽히고, 경계심도 충분하고. 이거 찔러서 뭐가 나오기는 하려나.

일단 찔러나 보자.

"구태여 말 안 해주려는 걸 보니, 일개 잡범인 저도 시도해봄 직한 방법이겠네요?"

『단언. 불가합니다. 무저갱은 귀하와 같은 잡범이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헛된 희망은 놓기를 권장합니다.』

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으름장인 것 같기도 하고.

과연 탈출법은 방법을 알면 누구나 다다를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것일까, 아니면 알더라도 무능력한 이들은 걸러질 수밖에 없는 비정한 거름망일 것일까.

모른다. 왜냐면 나는 골렘의 생각은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밌네요."

확실히, 골렘과 이야기할 때가 좀 재미있다.

상대 생각은 물론, 표정이나 몸짓마저도 못 읽다 보니까 상상하고 때려 맞추는 맛이 있어. 신문에서 십자말풀이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지만 에이비 대위는 그렇게 느끼지 않겠지? 상대하기 피곤할 거야. 골렘 너머에 있을 그녀에게, 나는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일 테니까.

『귀하는… 도대체 어떻게 시조를 포섭한 겁니까? 시조 티르칸쟈카는 무저갱으로 호송되는 때조차 저항하지 않았던 무심한 존재인데, 그녀가 고작 당신 따위 잡범을 위해 움직이다니.』

"궁금해요?"

차마 아쉬운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싫었는지, 골렘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세상 해맑게 대답해주었다.

"안 가르쳐 주~지~."

『이익…!』

"하하. 농담이에요. 알려드릴게요. 무심(無心)하다면… 유심(有心)하게 되면 되는 게 아닐까요! 하하하!"

『…농담 수준이 참 높군요. 향유하는 연령층 수준이 말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가 있다. 정말 심장을 뛰게 했다니까?

뭐, 못 믿는다면 어쩔 수 없고. 너희만 손해다.

"꼭 그런 거 없어도 고립된 공간에서 몇 개월 같이 지내면 친해지지 않을까요? 우리 둘처럼?"

『귀하 스스로 반례를 언급했습니다만. 어쨌건, 확인했습니다.』

골렘은 내가 더 말해주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지 순순히 질문을 거두었다. 대신 자기 다리로 우뚝 일어서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요청. 본 기체를 칼리스 중령님께 안내해주십시오.』

"칼리스 중령? 이번에 새로 온 진짜 교관님 말이에요?"

『새로 온 교관…?』

골렘은 잠시 의문 섞인 대꾸를 하다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스 중령님께서는 교관이… 아니, 그렇게 여기십시오. 별 차이 없으니.』

"별 차이 없다고요? 칼리스 중령님도 나처럼 가짜 교관이에요?"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골렘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갖다 붙일 걸 갖다 붙이십시오! 0레벨 시민인 귀하와는 다른, 고등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신 분입니다! 귀하가 하면 사칭이지만 칼리스 중령님께서 하면 발령입니다!』

"아, 화낼 것까진 없잖아요."

뭐야, 교관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 탄탈로스까지 왔대?

『칼리스 중령님께선 보급감시관 및 해당 시설 감찰 역할로 방문하셨습니다. 본래 탄탈로스 주변을 감찰하고 보급품 분배 상황을 확인하실 예정이었습니다. 다만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지, 보급품을 들고 탄탈로스로 직접 내려오시는 바람에 그만.』

의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끔뻑였다.

"엥? 정말요? 실수로 떨어진 거라고?"

『정정. 실수가 아니라 착오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뭐야, 깐깐하게 생긴 거랑은 달리 엄청 푼수셨네."

『부정! 반복하여 강조하건대, 중령님께선 착오로 탄탈로스에 들어오신 겁니다! 중령님께서는 임관 직후에 뛰어난 공훈을 세워 영관이 되신 분. 그런 사소한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닙니다!』

골렘은 끝까지 장교의 체면을 세워주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건, 현 상황은 군 상층부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대처 방법을 논의 중이니, 별다른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중령님을 교육대장으로 여기고 명령에 따르십시오.』

"알았어요, 알았어."

나는 온건하게 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왜냐면, 장교는 실수나 착오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곳에 왔으니까.

이거, 아무래도 장교의 생각을 한번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겠다.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나, 이제 쉽지 않을 겁니다. 본 기체와는 달리, 칼리스 중령께서는 본신의 무력 또한 상당하니까요. 교관 사칭도 이제 불가능합니다.』

골렘은 내 미소를 보고는 나지막이 경고했다.

참, 나 같은 모범수는 억울해 죽겠네. 일은 장교가 꾸미는데 의심은 내가 받으니 말이야.

나는 에이비 대위를 옆구리에 끼고는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4층 한쪽에 노역자 숙소가 있다면, 반대쪽에는 삶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있다. 식당, 세탁실, 비품실, 교육실 등등.

그리고 부서진 철창 너머 저 멀리, 가장 큰 문을 가진 것이 교관실이었다.

죄질이 가볍다고 하나 노역자도 죄수. 야음을 틈타 그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4층 계단으로 향하는 곳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린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난리를 겪는 와중 볼품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그 잔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부서진 철창을 넘어 교관실로 향할 때였다.

예고도 없이, 내 그림자에서 흑기사가 솟구치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휴. 이 방향에는 군국의 병사가 있다.'

흑기사는 티르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티르. 잠시 이야기만 나누러 가는 거니까요."

'조심하거라. 나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기량이 셰이의 반의반만 되더라도 네 그림자에 숨겨둔 흑기사로는 상대가 되지 못해. 시간벌이도 힘들 것이다.'

일개 중령 따위가 회귀자 반의반만큼 강하면 군국이 예전에 세상 정복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괜찮다니까요. 따라오지 마세요. 겁 먹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알겠다. 네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그래도 조심하거라.'

흑기사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티르의 걱정을 뒤로한 나는 교관실의 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똑똑."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자 냉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관실은 거주의 공간은 아니었기에, 있는 것이라고는 소파 하나와 의자 하나, 그리고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애초에 탄탈로스는 교관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은 탓이다.

장교는 그 빈 곳에 온갖 짐과 서류를 어지러이 흩뿌려둔 상태였다. 부서진 골렘 잔해도 있는 것을 보니 바깥에 있던 관리실에 들렀다 온 듯했다.

한참 정리하던 장교는 나를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쯧. 이런 잡일은 노역자를 시켰어야 했는데. 시조는 어째서 저런 잡범을 비호한 거지?'

휴우. 다행이다. 까딱하면 저거 들고 4층을 왔다 갔다 할 뻔했네.

새삼 줄을 잘 댔다고 스스로 칭찬을 건네며 옆구리에 껴놓았던 골렘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여기요."

"…그건?"

"에이비 대위님이에요. 인사하세요."

『본관이 먼저 경례를 드려야 합니다. 놓으십시오.』

바둥거리는 골렘을 땅 위에 조심히 내려놓자, 차렷 자세로 선 골렘이 장교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경례했다.

『군국 만세.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탄탈로스 내부의 감시 및 연락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 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골렘이지만 경례 하나는 완벽했다. 작은 몸으로 애써 경례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장교에게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통신병. 아무런 재능도 노력도 없이, 순전히 마법 적성 때문에 발탁되어 대위가 된 행운아들…. 쯧. 거짓 장교가 여기도 있었군.'

어라라.

EP.89 군국의 장교들

무례할 정도로 인상을 찌푸린 장교는, 경례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골렘을 노려보았다.

손을 내릴 타이밍을 놓친 골렘은 여전히 경례를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중령님에 대한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본관은 중령님께서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중령님의 보좌를….』

"그래. 대위. 찾아오는 게 늦었군. 노역자보다도 말이야."

비꼬는 어조가 날카로웠다. 그 날 선 태도에 잠깐 머뭇거린 골렘이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시정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엔 사정이.』

"지금 변명하려는 건가?"

『…시정하겠습니다.』

골렘이 입을 다물자, 장교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골렘에게 얼굴조차 보이지 않은 채 장교가 말했다.

"귀관의 골렘이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는 관심 없다, 통신병."

거짓말이다. 관심 많다. 걱정이 아니라 비난의 의미로. 그 많던 골렘을 어따 해 먹었냐는 속뜻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골렘의 상태가 콩 통조림의 깡통보다 못하다는 것 역시도 문제 삼지 않겠다."

착각하지 말자. 크게 문제 삼고 있다. 경례하기 전에 옷차림이나 되짚어보라고 말하려다가 말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몸을 돌린 장교가 근엄하게 뒷짐을 지었다. 제복 아래에 있는 가슴과 함께, 은색으로 빛나는 훈장 두 개가 흔들렸다.

자부심을 가득 담아 훈장을 강조한 장교는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다만, 귀관의 임무가 탄탈로스의 감시와 관리라면, 최소한 그에는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제 탄탈로스에 도착한 본관은 귀관의 보고를 전혀 듣지 못했다. 지금, 노역자가 귀관을 데려온 이 순간까지 말이지."

『…시정하겠습니다.』

"귀관이 맡은 구역에 상관이 될 이가 도착했는데 만 하루가 지난 뒤 처음 마주하는군. 능력의 부족인가, 의지의 부족인가? 기강이 해이해졌다, 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군."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비난에, 나는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참아? 참을까?

아니, 나는 못 참아.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가만히 둬?

『…시정.』

골렘의 말이 끝나기 직전, 나는 즉시 몸을 숙여 골렘을 세차게 껴안고 소리쳤다.

"우리 에이비 대위에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애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장교들 하는 짓이야 뻔하지. 애꿎은 하급자 갈구면서 자기 체면을 살리려는 의도다.

한 10% 정도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두지 않는다.

그 생각 그대로 당해주면 재미가 없으니까.

"맞아요, 사실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심술을 부려 에이비 대위의 다리를 찢어놓지만 않았어도! 입에서 스피커를 떼어놓지만 않았어도 됐을 텐데! 으허엉, 미안해요, 에이비 대위!"

『놓, 놓으.』

"우쭈쭈.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요."

『….』

물을 한껏 흐려버린 나는, 골렘을 다시 휙 들어올렸다. 골렘이 급히 바둥거렸으나 나는 어린아이 달래는 것처럼 등을 토닥이며 몸을 돌렸다.

"칼리스 중령님! 바쁘신데 가오 좀 잡겠답시고 골렘에게 꼽 주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일 보세요!"

"…쯧."

더 탓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자, 장교가 할 수 있는 건 혀를 차는 것뿐이었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냉큼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히!"

장교를 뒤로한 채 나는 교관실을 나섰다. 내 품에 안긴 골렘은 어느새 움직임이 멎은 상태였다.

혹시 접속을 끊었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딱히, 귀하의 책임이 아닙니다. 중령님의 말씀대로, 기체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은 저의 관리 소홀이기에.』

골렘에게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도 너무하죠. 아니, 자기는 실수로 무저갱에 떨어져놓고 왜 안 찾아왔냐니. 이렇게 부당해서야."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익숙한 일입니다. 본관처럼 아무런 시험을 치르지 않고 통신병이 되었다면…. 노력도, 경쟁도 없이 고등사관학교의 사관생도와 같은 3레벨 시민이 된다면. 그건 사관생도들에겐 모욕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초등시민학교를 나온 사람은 1레벨 시민.

중등군사학교까지 나왔다면 2레벨 시민.

군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국의 토대를 이루는 시민들.

그러나 토대란 기본적으로 발아래 짓밟히는 것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억압받고 치이고 구르며 군국의 토양을 다진다. 이들의 피와 땀을 양분 삼아 군국은 울창하게 자란다.

그러나 3레벨부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장교, 기술자, 학자, 공장장 등.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대체하기 극히 힘든 인재가 된다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바뀐다. 시설 이용 권한이 확대되고, 수입이 많아지며, 보다 낮은 레벨의 시민은 갖지 못한 몇 가지 우선권을 얻는다.

고등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는 그 순간부터 3레벨 시민이며, 그들은 그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단순히 운이 좋아 3레벨 시민이 된 통신병을 경멸할 정도로….

…라는 척을 할 줄이야, 칼리스 중령.

나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다. 가만히 그들의 생각을 읽고 있노라면, 그러면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바람이 들려온다.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단정한 소망, 혹은 자신감에 넘쳐서 계획한 얕은 믿음.

그런 것들이 묘한 체념을 지닌 채로, 혹은 한껏 들뜬 상태로 나에게 다가온다.

거기서 내가 주로 취하는 태도는.

"칼리스 중령님이 원래 저런 분이세요?"

『본관도 직접 만나 뵌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젊은 나이에 중령까지 진급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사흘간의 작전 끝에 아오크 계곡의 짐승을 사냥한 일과, 레지스탕스 기지를 찾아내어 단신으로 제압한 이야기가 통신병들 사이에 속보로 전해졌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통신병한테 막말을 해? 뭔가 수상하죠?"

바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쪽으로 상황을 움직이는 것.

『중령님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공훈을 쌓은 분이라면, 아무런 공도 없이 편히 일하는 통신병을 꺼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니, 나는 유능함을 말하는 거예요, 에이비 대위. 그토록 유능한 사람이 왜 손해 볼 짓을 해?"

장교, 칼리스 중령은 에이비 대위를 꾸짖었다. 아니, 말이 꾸짖은 거지, 첫날부터 저러는 건 싸우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에이비 대위가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저런 태도를 보이는 칼리스 중령 옆에는 얼씬도 안 할 것이다.

"착오로 무저갱 안까지 들어와, 무례하게 통신병에게 막말해. 엉망진창이네. 그게 그 유명한 칼리스 중령의 본모습입니까?"

그게, 칼리스 중령이 노리는 것이다.

"에이비 대위, 보셨다시피 저는 시조를 포섭했어요. 셰이 씨는 골렘을 보는 족족 썰어버리는 반사회적인 사람이고요. 탄탈로스에 있는 사람 중 그녀의 아군이라고는, 모든 인간의 아군인 아지밖에 없어요. 즉 아예 없다는 말이에요."

시작해라.

설득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는 것.

어깨동무하고, 둘 모두 아는 사실을 말하며, 발 머리를 나란히 하고 걷다가.

"그런데 왜 오늘은 부임 첫날에, 탄탈로스에서 유일하게, 본인에게 우호적인 에이비 대위에게 매몰차게 굴었을까요?"

서서히, 서서히.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휘어지도록.

생각의 방향을, 본래와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트는 것이 설득이다.

"왜냐면, 칼리스 중령님에겐 당신이 아군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에이비 대위!"

조금 전 생각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건 꺼림칙함.

장교가 통신병을 싫어하는 건 분명한 진심이다.

하지만, 이 고립된 무저갱에서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통신병은 더없이 귀중한 존재. 잠시 마음을 접어두고, 싫은 티는 내지 않을 인내심도 없다는 말인가?

그런 바보였다면 중령을 달지는 못했겠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해, 중령님께서는! 에이비 대위의 눈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이 고립된 무저갱에서도 또다시 고립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설마, 저와 비슷한 정도의 외톨이일까요?"

『그게, 무슨.』

"아이, 참. 악취미시네. 다 이해해놓고. 내가 꼭 말로 해야겠어요?"

사실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다. 통신병은 정보를 다루는 이들이니까, 이상한 점을 알고는 있었겠지.

골렘의 생각은 읽지 못한다만, 나는 내 이야기가 통했다고 확신했다.

진실이 가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 논리 때문이다.

유일하니까.

세상에 거짓은 무수하나,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니까.

그렇기에, 진짜 진실은 언제나 통하는 법. 나는, 칼리스 중령에게서 읽어낸 사실을 이야기했다.

"군국의 눈을 피해, 뭔가 구린 짓을 꾸미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간질하지 마십시오!』

골렘이, 의무적으로 반박했다.

『본관은 귀하의 이간질에 당하지 않습니다. 잡범인 귀하와, 군국의 장교인 중령님! 둘 중 누구의 말이 더 무거운지는 자명한 일! 어딜, 군국의 군인은 피와 철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근거 없는 모함에…. 근거 없는….』

하나하나는 있을 수 있는 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

그러나 다 돌이켜 보았을 때, 왜 몰랐을까 믿기 힘들 정도로 수상했던 것들.

보통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누군가의 의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연관 짓기에 세상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답을 안다면, 존재하는 모든 게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이건 명령불복종을 넘어선….』

좋아. 넘어갔다.

통신병의 의무는 보고다. 내 말을 믿진 않더라도, 의심이 생긴 내용에 대해 보고 정도는 하겠지.

그러면 끝이다. 군국이 대처하기 전까지 그대로 기다리면 될 뿐.

겸사겸사, 나는 내 이득을 챙기고 말이야.

『…그러면. 칼리스 중령님께서 본관을 꾸짖은 것은 그냥 연기….』

"아니, 거기엔 진심도 섞여 있던 거 같은데요."

골렘이 나를 비스듬히 째려보았다. 그러다가 태도를 가다듬고는, 나를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본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본 기체를 안전한 곳에 놓아두십시오.』

"맡겨만 주세요."

픽. 골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싱크로를 해제한 탓이다.

나는 골렘을 식당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고는, 잠시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뭘 꾸미는지는 모르지만, 엘리트 장교님에게 사회의 쓴맛을 맛보여줘야지. 되는 대로 다 되는 인생은 너무 재미없지 않겠어?

그리고 그 편이 나에게 좋으니까.

화들짝 놀란 군국이 진위 판별을 위해 장교를 데려가게 된다면. 분명 그때 똑똑히 보일 것이다.

이 무저갱을 탈출할 방법이.

흠. 일단 의심을 심어주었으니. 나는 남는 시간에 장교 기억이나 읽어볼까. 최소한 뭘 꾸미는지 알면 대처하기 쉬울 테니.

나는 다시 식당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아서 교관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앵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린 채, 교관실 문을 부수기 직전인 회귀자와 맞닥뜨렸다.

EP.90 텃세

죄를 지으면 천신이 알고, 대지모신이 알며, 또한 자기 자신이 안다고 한다.

그 셋 중 누가 가장 먼저 아느냐고 묻는다면,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들은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은 보통 제 잘못을 알고 있다. 수상쩍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풍경에 녹아들지 못한 채, 어수선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몸에 한껏 힘을 주고 일을 저지른다.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시간을 도려낸 듯 우뚝 멈춰서는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러다 냅다 도망가거나,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죄를 인식한다는 증거이다. 죄의식의 발로라고나 할까.

애석하게도 죄의식을 갈가리 찢어 13번의 회귀 동안 흩뿌리고 온 회귀자에겐 그마저도 없었다.

"너도 찬성하지? 처리할게."

취소. 죄의식이 음수에 가까웠다.

너도 찬성하지, 는 도대체 어떤 회로를 장착해야 나올 수 있는 대답이야? 왜 나도 당연히 찬성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회귀자의 13회차 외부장착형 사고회로는 정말 상상 이상이다. 어쩌면 독심술이 절반만 통하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자칫 잘못 읽으면 내 정신이 오염될 수도.

회귀자가 엄한 짓을 못하도록 즉각 외쳤다.

"멈춰요! 이 외팔이공장장. 도대체 뭔 짓을 하려고 합니까?"

내가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하자, 회귀자가 재빨리 천앵을 휘둘렀다.

천검기, 단애(斷崖).

천앵의 검격이 허공에 경계를 그었다. 머나먼 절벽 끝, 바람이 부서지는 곳. 천앵이 구분 지은 곳에 바람의 길이 끊어졌다. 1분 동안, 저 공간으로는 바람이 그 무엇도 싣고 가지 못할 것이다. 바람에 녹아든 냄새도, 공기를 울리는 소리도.

칼 진짜 사기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회귀자가 회귀 초부터 들고 다니겠지.

내가 마음속으로 볼멘소리를 할 때, 회귀자도 마찬가지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왜? 너는 노역자라며. 비록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여기 들어온 이상 군국과 척을 진 신세 아니야?"

"사실 그렇죠. 어쨌든 갇힌 몸이고."

"그러면 답은 나왔어."

천앵이 회귀자의 손안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종횡무진 날뛰는 칼을 단숨에 잡아챈 회귀자는, 검을 똑바로 들고는 문 너머를 노려보았다.

"여기 있던 사람을 남기고, 앞으로 내려오는 군국의 개를 다 칠 거야. 하나 들어올 때마다 하나씩."

"아니. 뭘 쳐요?"

"군국의 개."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회귀자는, 앞으로 들어오는 모든 군국 소속 인물을 죽일 셈이었다. 진심으로.

"간단하게 설명할게. 잘 들어. 군국에는 두 부류가 있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놈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통제하려는 놈들. 그리고 지금 저기 있는 건 후자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놈들이야."

정말로 간단히 설명을 끝낸 회귀자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전에 죽인다."

"헐."

"중령은 끄나풀이지. 뭐 어때? 죽이면 반응이 올 거야. 눈이 돌아가서 다 내려오든가. 겁쟁이처럼 지켜만 보든가. 내려오면 죽이고, 아니면 둬. 어찌 되었든, 이제 탄탈로스에 군국은 없게 될 거야.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킬 수 있어."

아주 간단한 논리였다.

후에 종말의 조각이 될 수 있는 아지와 티르가 멀쩡하다. 그 와중, 가장 변수였던 나는 사실 군국 소속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변수는, 군국의 개입.

그걸 지운다. 통째로.

이게… 회귀자의 시선?

매듭을 푸느니 천앵으로 자르겠다. 어찌 보면 합리적이긴 한데, 좀, 뒤가 없지 않아?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러면 보급은요? 사람을 오는 대로 죽이면 보급을 끊지 않을까요?"

"내 포켓에는 식량이 있어. 비상시를 대비해서 미리 챙겨놓았지. 그걸 풀 거야."

"남들은 콩 통조림 먹고 살 때 자기 혼자 식량을 꿍쳐놓고 있었어!?"

이게… 회귀자의 준비성?

"군국이랑 싸우다가 다칠 수도 있잖아요! 저쪽에서 보급상자로 폭탄을 계속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군국이 가만히 둬도 탈 안 나는 땅에 폭탄을 쏟아부을 만큼 멍청이는 아니야. 간단한 폭탄이라면 내가 처리할 수 있고, 설사 다쳐도 내가 간단한 회복약 정도는 만들 수 있고…. 여차하면 티르칸쟈카에게 부탁해 봐. 흡혈귀라도 되면 되잖아? 티르칸쟈카도 기뻐할걸?"

이게… 회귀자의 인성?

"그렇다고 여기서 영원히 살 수는 없잖아요? 아니면, 정말 영원히 살 생각이에요?"

"영원히는 아니야. 머지않아 탈출할 방법이 생길 거야. 지상에서 '그녀'가 떨어진다면, 아마…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겠지."

'내가 죽든, 그녀가 죽든. 남은 이들은 탈출할 수 있어. 무저갱이 무너질 테니까.'

회귀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막연한 불안감과 비장한 각오. 불확실한 승부 앞에 놓인 검투사가 삶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이게 회귀자의 각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너 죽으면 안 돼. 그러면 세계가 끝나버리잖아.

세계가 되감기든, 아니면 다른 종말이 오든. 남은 사람은 어쩌라고.

일단 막자. 막고 나서 생각하자. 나는 표정을 흐리며 말했다.

"저, 그런데. 방금 제가 약을 좀 치고 왔거든요? 약발 돌 때까지 좀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해가 안 돼? 저것들은 폭탄보다도 위험한 놈들이라니까? 중령 따위라고 하더라도 무슨 수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고작 중령 따위라니? 나름 군국에서는 한 끗발 먹어주는 이들인데 따위라고.

아, 그런데 너희들은 그게 되는구나. 후우, 가끔 여기 스케일에는 적응이 안 된다니까.

내가 이해 못한 얼굴로 있자, 회귀자가 혀를 차고는 들고 있던 천앵을 거두었다.

"혹시 믿기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보여줄게. 자, 봐. 무저갱에 온 중령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때 교관실 안쪽에서 나가려는 의지를 읽었다. 중령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회귀자도 그 기척을 눈치채고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회귀자의 옆에 가까이 붙자, 회귀자는 천앵을 붙잡고 중단자세를 취했다.

천검기, 단애.

허공을 베어낸다. 하늘의 검이 바람이 전할 소식을 잘라낸다. 냄새도, 소리도. 공기를 타고 흐르는 것이 단층에서 끊긴다. 단절된 공기의 벽이 나와 회귀자를 감쌌다.

그 상태에서, 회귀자는 검을 아래로 향했다. 천앵에게서 바람이 불어나왔다.

풍운우로(風雲雨露).

압축된 공간이 풀려나가며, 갑작스레 부푼 공간에 이슬과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 본디 세상으로 퍼져나가야 할 안개가 단애에 부딪혀 튕겨나온다.

회귀자는 물안개를 불러 나와 자신의 모습을 흐리게 한 뒤 다시 검을 잡았다.

천검기, 천경.

신기루는 머나먼 공간을 지나며 휘어진 빛의 잔영. 그게 고작 1m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재현된다. 이제 나와 회귀자의 모습은 휘어지는 빛 속에 감추어졌다.

직후 교관실의 문이 열리고 장교가 나왔다. 마침 천앵에서 흘러나왔던 바람 한 줄기가 장교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저갱에 부는 바람을 느낀 장교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나와 회귀자에 닿았으나, 그녀의 시야에는 은신술로 숨은 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주억거린 장교는 군홧발을 뚜벅거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뒷짐을 진 그녀의 모습이 층계 아래로 사라졌다.

회귀자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급하게 하려니까 좀 숨이 차네."

"은신술입니까? 대단하네요. 코앞에서도 안 보일 줄이야."

내 순수한 감탄에, 회귀자는 살짝 우쭐해대서도 겉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흥. 별거 아니야. 소리와 냄새를 막고,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들어주지만, 기운을 줄기줄기 흘리고 다니는 강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저번에 저를 엿보려고 할 때도 이걸 쓴 겁니까? 능력은 대단한데 사용처가 하나같이 음습하네요."

"…닥치고 중령이나 따라가."

막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공기로 퍼진 것뿐. 혹여나 발소리가 들릴까, 나와 회귀자는 조심조심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장교는 무저갱 마당까지 나왔다. 주간등이 비치는 곳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장교는, 뒷짐 진 손에서 고무로 된 공을 꺼냈다.

탄력적이고 튼튼하며 손안에 딱 들어오는 새까만 고무 공. 내 급조한 가죽 공보다 몇 배는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통, 통. 장교가 고무 공을 땅에 몇 번 튀겼다. 탄력있는 고무 공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준비를 끝낸 장교는 아지를 불렀다.

"개의 왕!"

"멍?"

그러자 아지가 모퉁이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장교는 다시 공을 통통 튀기다가, 마당 저편을 향해 거세게 던졌다.

"선물이다!"

고무 공이 하늘 저 멀리 날아간다. 한참을 날아가던 공은 바닥에 통, 통 튕기며 탄탈로스의 반대편까지 굴러갔다.

살랑살랑. 공을 보고 꼬리를 흔들던 아지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땅을 박차고 뛰었다.

"멍멍!"

행복한 듯이 공을 쫓는 아지. 네 발로 냅다 달려 공을 다라잡은 뒤, 한 입에 물려다, 공이 얼굴에 부딪혀 튕겨 나가자 더욱 신이 나서는 뒤쫓는다.

몇 번 놓친 끝아 아지가 고무 공을 물고는 장교에게로 돌아왔다. 장교가 절도 있게 공을 줍고는 의무적인 칭찬을 건넸다.

"잘했다."

"멍멍! 공!"

"또 던지겠다. 여기!"

"멍!"

'확실히, 적힌 대로다. 개의 왕은 나를 경계하지 않아…. 예상보다 쉽게 따르게 할 수 있겠어.'

음흉한 속내를 지닌 장교가 아지를 길들이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안 돼! 아지야!"

"봤지? 중령씩이나 되어서 처음 하는 일이 개의 왕 길들이기. 수상하지 않아?"

회귀자가 팔짱을 낀 채로 중얼거렸다.

"내 예상이 맞았어. 저들은 '만물의 영장'이야. 짐승의 왕을 길들여, 제 뜻대로 다루려는 놈들…. 앞으로 뭔 짓을 할지 몰라. 미리 처리해두는 편이 나아…. 듣고 있어?"

"안 듣고 있어요!"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몇 개월 공들인 강아지를 홀랑 낚아채려고 하잖아!

내가 얼마나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길들였는데! 한계에 달하는 투구수에도 꾸역꾸역 분투했고, 매일매일 밥을 해줬고, 쓰다듬기 털 정리까지 해줬는데도! 고작 훈장 단 제복 장교에게 넘어간다고?

"저, 저 꼬리 가벼운 강아지가! 조금 더 크고 탄력적인 고무 공을 가지고 왔다고 곧장 꼬리를 흔들어?"

"어, 개의 왕이니까? 앗, 야. 움직이지 마. 너무 거세게 움직이면."

"어림도 없다! 고작 장난감 하나로 아지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이미 아지와 몇 개월 지내면서 뭘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

회귀자의 말도 무시하고 곧장 감옥 안으로 뛰어 올라갔다. 두 칸씩 뛰어올라 내 방에 도착한 뒤, 서랍에 들어있던 고무 공과 강철 원반을 한가득 챙겨 나온 나는, 아지가 보는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땅에 내던졌다.

공을 물고 오던 아지가 나와 원반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멍?"

"아지야. 이리 와! 너 공 졸업한 지 오래잖아! 우리 드디어 2원반의 벽을 깼으니 슬슬 3원반으로 가야지!"

"멍멍?"

아지는 장교와 나를 번갈아보다가, 고무 공을 탁 놓고 곧장 나에게로 달려왔다. 나는 그 앞에서 원반 세 개를 들어 올린 뒤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하늘로 던졌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아지가 원반을 하나 물었다. 그 뒤 감옥 외벽을 딛고는 그보다 높게 있던 원반을 낚아채고는, 마지막으로 몸을 쭉 뻗어서 마지막 원반을 노렸다.

"아이고. 약간 부족하네…!"

그러다 안 닿자, 그냥 손으로 잡아버렸다.

땅으로 내려온 아지의 입에서 원반을 빼내며 칭찬을 해주었다.

"손을 쓰면 반칙이긴 한데,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멍! 멍멍!"

신이 나서 팔딱거리는 아지를 곁에 두고 쓰다듬고 있는 도중이었다.

중간부터 아지를 빼앗긴 장교가, 깊게 쓴 모자챙 아래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군홧발이 땅을 쿵쿵 울렸다.

"…노역자. 왜 나를 또 방해하는 거지?"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텃세입니다, 중령님. 아지와 친해지고 싶다면 저부터 넘으십시오."

"…네놈. 정녕 죽고 싶은 건가?"

"어이쿠.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 오던 개도 도망갑니다."

"잡범 따위가 감히 군국의 장교에게…!"

분노한 장교가 한 걸음 나섰을 때.

[살기를 거두거라, 병사여.]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일었다. 그건 성대를 통해 나온다기보단, 어둠 자체가 떨리면서 만들어낸 목소리였다.

장교는 그 불길한 기운에 움찔하며 이를 악물었다.

"쯧, 시조…!"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나…. 하나 다시 확언하겠다. 휴는 나의 비호 아래에 있고, 그를 향한 어떠한 종류의 위해라도 끼칠 시. 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림자가 엄중히 경고했다. 그건 악마가 어둠을 빌어 말하는 것 같기도, 혹은 세상이 준엄한 경고를 내뱉는 것 같기도 했다.

위압감, 그 이상의 공포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장교가 움츠러들었을 무렵.

내가 그림자를 톡톡 건드리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티르. 그렇게 지켜보고 있을 거면 그냥 와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듯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흔들렸다. 잠시 뒤, 그림자에서 티르의 조금 힘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니다. 네 말마따나, 어찌 사람이 매일 같이 지내겠느냐.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

"어떻게 사람이 맨날 붙어 다니냐, 제가 그렇게 말 했다고 삐진 거예요?"

[삐진 것이 아니라, 네 말이 맞다 생각하여.]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어차피 그림자에 눈 심어놓고선."

[…그럼, 가도 되겠느냐?]

"물론이요."

[금방 가마.]

곧이어 지하 무기고의 문이 열렸다. 둥실거리는 관 위에 팔다리를 모아 다소곳이 앉은 티르는 금방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지금까지 문 뒤에서 기다리며 당장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스타가 다 모였다. 회귀자는 못마땅한 듯 팔짱을 낀 채 숨어있지만 어쨌건 내 편.

아지의 호감도는 아직 내 쪽이 훨씬 더 높고.

티르에 있어선 말할 것도 없다.

장교도 알았으리라. 그녀가 넘어야 할 벽을.

"아지는 못 줍니다. 할 수 있다면, 저보다 더 재미있게 놀아주시던가요!"

장교는 서슬 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이 면면 앞에서 날뛰어봤자 자기만 손해. 머지 않아 단념한 장교가 몸을 휙 돌렸다.

'나를 대놓고 견제하고 있다. 혹시 내 정체를…? 아니, 일개 잡범이 알 리가 없지. 그냥 주도권 싸움인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장교는 결심을 내렸다.

'벌써부터 쓰기에는 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분이 위급할 때 쓰라고 주신 세 개의 꾸러미, 그중 하나를 써야겠어…!'

EP.91 왕따 놀이

칼리스 중령은 군국의 장교다.

그녀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중등군사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드러낸 그녀는 당연한 듯이 고등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끝에 군국의 명예로운 장교가 되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순간 3레벨 시민 자격을 부여받는다. 생체 단말에 3레벨 시민권을 새겨넣으며 칼리스는 가슴 북받치는 설움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3레벨 시민이 가진 여러 가지 특혜가 있지만, 그중 가장 압권인 것은 상속권의 획득이다.

3레벨 시민부터,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장교가 된 칼리스는 가장 먼저 보훈처를 향했고, 아버지의 유산이 소각되기 전 그것을 상속받았다.

마당 딸린 집,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자동마차, 금박이 붙은 칼과 특수한 군장.

만일 칼리스가 손에 넣지 않았다면, 그대로 국고에 환수되었을 것들. 공병들의 삽 아래 파헤쳐졌을 어린 날의 추억들.

칼리스는 그것을 온전히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콘크리트 아래 파묻혔을지도 모르는 추억을 그녀의 손으로, 그녀의 능력으로 지켜낸 것이다.

'거기서 멈출 수 없어.'

아득바득 노력하여 이곳까지 왔다면, 당연히 그 위를 노려야 하지 않겠는가.

4레벨은 군국에 존재하는 모든 시설을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다. 토지마저 소유할 수 있으며, 사적으로 사용인을 부릴 수 있고, 결혼 시 배우자에게 한시적으로 3레벨의 시민 레벨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3레벨은 일방적으로 상속받을 권리만을 가지나… 4레벨부터는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부터 온 유산을, 이 위에 그녀가 쌓아갈 모든 재산을 손실 없이 그대로 후대에 전할 수 있다.

남긴다.

4레벨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도전할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4레벨이 되기 위해선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적절한 기회, 충분한 행운, 그리고 그것을 움켜잡을 실력이 있어야만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 4레벨.

훌륭한 장교였던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죽을 자리를 제대로 잡은 덕분에 2계급 특진을 했고, 덕분에 4레벨이 되었으니.

아버지가 마침 위기에 빠진 사령부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면, 그 죽음에 장렬함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칼리스는 레벨과 관계없이 유산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도 기회가 왔어.'

마침 장교가 된 그녀에게 '그들'이 다가왔다. 야망은 넘쳤으나 위험 속으로 자기 자신을 들이밀 용기가 부족했던 그녀는, 자신을 지옥에 빠뜨리기 위해 그들의 손을 잡았다.

무리한 사건에 투입되었지만, 칼리스 중령은 그녀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공훈을 세웠다. 신년 연설회에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자, 그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령을 달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이 맡긴 새로운 임무.

무저갱 탄탈로스에 침입하여,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

정확히는.

'개의 왕을 확보할 때, 그것을 방해할 요소를 알아보기 위해.'

탄탈로스는 결코 들어가선 안 될 마경이었지만…. 최근에 일어난 탈옥 사건 때문에 위험도가 크게 줄었다. 심지어 먼저 내려보낸 노역자, 군국에선 '리트머스'라 불리는 정찰용 잡범도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따라야 할 명령이긴 했으나, 칼리스 중령이 흔쾌히 수락한 건 그러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들'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리라.

이것을 기회로 여긴 칼리스는 보급감시관에 자원했고, 실수인 척 꾸며 탄탈로스로 떨어졌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나쁜 쪽으로 틀어지고 만다.

마치 그렇게 되리라 정해진 듯이.

장교가 떨어진 직후, 나는 매일 시간을 내어 아지랑 놀아주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묵직한 원반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옛날에는 대충 놀아줘도 됐었는데. 경쟁자가 생기니까 이제 쉴 수가 없네."

3개월 동안 쌓인 호감도는 여전하지만, 요요 꼬리 가벼운 강아지는 인간을 보면 일단 달려들고 보니까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원반을 던졌다. 아지가 뛰었다.

뛰어올라 하나 물고, 벽을 박차 뛰며 하나를 낚아채고, 동시에 여력을 남겨두었던 몸을 쭉 뻗는다. 아지의 몸이 허공에서 퉁 튕겨올랐다. 마치 공중을 밟아 방향을 바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다른 하나의 원반까지 무는 데 성공한 아지는, 땅에 내려앉고는 기쁨에 눈을 빛냈다.

"멍멍멍멍멍멍멍!"

"3원반, 성공!"

"머어어엉!"

어려운 도전과 반복된 시도, 그리고 짜릿한 성공은 어마어마한 보상 심리를 주는 법. 아지는 제 자리에서 몇 번 폴짝이며 기쁨을 만끽했다.

내가 입에서 원반을 빼내자, 아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외쳤다.

"멍! 경쟁, 좋아!"

"뭔 경쟁이야. 네가 아는 경쟁이래 봐야 먹이 경쟁밖에 없잖아."

어려운 말 따라한다고 사람 말이 되는 줄 아나. 뜻을 알고 써야 사람 말이지.

내가 코웃음을 칠 때, 아지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독점, 싫어! 게을러져! 너처럼!"

"…독점?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멍멍! 공! 더!"

"이건 원반이라고…. 그나저나 3원반까지 했으면 이제 뭘 하지. 흠."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손가락을 튕겼다.

어, 잠깐만. 혹시 그 각인가? 드디어 그걸 시도할 때인가?

"야, 아지야. 너 혹시 4원반 생각은 있니?"

"멍? 나, 좋아! 그래도 안 돼!"

던지면 아지야 좋다. 어차피 노는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각이 안 나온다는 뜻.

아지가 공중을 밟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객관적인 자기평가라고 할 수 있다.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는 탓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발판이 되어준다면?"

"멍?"

"그래. 뛰어서 하나, 나 밟고 하나, 벽 차고 하나, 마지막 여력으로 하나. 이렇게 하는 거야!"

"멍! 나, 좋아! 너는?"

"한 번 해보는 거지, 뭐."

지금까지는 아지가 나의 동작을 읽기만 했다면, 4원반부터는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내 위치를 잘 살핀 뒤, 준비가 되었을 때 타이밍에 맞게 나를 밟고 뛰어올라야만 닿을 수 있다.

자, 어디.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다른 쪽 무릎에 팔을 단단히 받쳤다. 아지가 밟아도 몸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씩 던진다. 가까운 것부터 노리는 거야."

"멍!"

"자, 시작!"

휙, 휙, 휙, 휙.

나는 짧은 간격을 두고 네 개의 원반을 연달아 던졌다. 가까운 것부터 멀어지는 것까지 차례대로. 그 뒤, 아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런데 잠깐만. 아지는 개의 왕이지만 지금은 사람 모습이잖아. 그러면 몸무게가 어림잡아.

어라.

"잠깐, 타…."

다 말하기 직전, 아지가 나를 겨냥하며 펄쩍 뛰었고.

마차에 치인 것과 비슷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내가 콘크리트 위를 나뒹구는 모습을 본 티르는 나를 보자마자 타박했다.

"그러니 몸조심을 하였어야지!"

"괜찮아요. 다 나았잖아요?"

나는 팔과 다리를 내보였다. 아까 콘크리트에 쓸리면서 난 상처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짐승의 왕이 가진 힘 중 하나, 핥아서 낫기. 관념의 존재인 짐승의 왕에게는 핥아서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고, 아지는 나에게 그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티르는 어느새 다 아문 상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는 안 드나, 그래도 짐승의 왕이 있어서 다행이로구나. 핥는 것으로…. 상처가 나을 수는 있으니."

"왜 마음에 안 드는데요?"

"어찌 내가 개의 왕이랑 가까이 지낸다는 말이냐. 한때 숙적이었거늘."

"아지는 이번 대의 개의 왕이잖아요. 한창 싸웠을 때와 비교하면 한 몇십 대 차이는 날 텐데."

"그러하더라도, 본질은 같지 않더냐. 꺼림칙함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리고."

툭. 티르가 두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쿡 찔렀다. 새초롬한 시선이 불만스럽게 나를 향했다.

"몇십 대라니. 짓궂구나. 고작 몇백 년 전이거늘."

"몇백에 왜 고작이라는 말이 붙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럴걸요? 개의 왕은 수명이 짧은 편이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과 같이 늙어가지 않느냐. 그러할진대 저토록 팔자 좋은 개의 왕이 어찌 수명이 짧다는 말이냐."

"늑대의 왕이랑 허구한 날 싸우잖아요."

"늑대의 왕?"

"어, 그 이야기 모르세요? 동화책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러자 티르는 걱정도 잠시 잊고는 한껏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핏빛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이야기가 고픈 시조를 위해, 나는 기억 속에 있는 동화를 그대로 읊었다.

개의 왕과 늑대의 왕.

둘은 본래 사이좋은 짐승 형제였다.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두 짐승은 협력하여 사냥감을 몰아넣고는 목덜미를 물어 숨을 끊고는 했다.

사냥감을 몰아넣는 쪽은 주로 작고 날랜 개였고, 사냥감의 목숨을 끊는 건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늑대의 몫이었다. 똑똑하고 날랬으며 호흡이 잘 맞는 둘은 서로를 도와가며 목가적인 사냥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이 사는 곳에 양치기가 찾아왔다. 구름 같은 양 떼를 몰고서.

양치기는 양 먹일 풀을 찾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양치기는, 마침 정찰을 나온 개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거기, 작은 이리야. 들풀이 가득 자란 땅으로 나를 안내해주겠니? 그러면 맛있는 것을 주도록 할게.'

들풀은 개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개는 양치기를 들풀 가득한 중턱으로 안내했다. 널찍한 구릉에 푸른 풀이 가득한 자란 모습을 보자, 양치기는 크게 기뻐했다.

'너는 참 착한 이리구나! 고맙다! 자, 여기 고기 붙은 뼈를 줄게!'

먹지도 못하는 풀숲을 일러주었을 뿐인데 맛있는 뼈를 얻게 된 개. 신이 난 개는 뼈를 물고는, 곧장 늑대에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양 떼를 모는 인간이 이토록 맛있는 고기를 준다고. 자기가 얻어낸 것을 자랑하며 전리품을 나누었다.

늑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신이 나서 달려가, 가장 바깥쪽에서 풀을 뜯던 어린 양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만일 분노한 양치기가 지팡이로 늑대를 때리지 않았다면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등허리를 얻어맞은 늑대는 축 늘어진 양을 입에 물고 냉큼 달아났다.

사냥엔 성공했지만, 개와 늑대는 둘 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둘이 먹기에 어린 양 하나는 너무 작은 탓이다.

개는 고기 붙은 뼈를 그리워했고, 늑대는 묵직한 나무 지팡이를 두려워했다.

늑대는 다음 사냥 때 개가 자신을 돕기를 바랐다. 양 중 가장 커다란 것을 사냥하는 동안, 개보고 양치기의 시선을 끌어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상처가 나아야 한다며, 잡은 어린 양 한 마리를 단숨에 삼켰다.

개는 고기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뼈 한 대만 얻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계획대로 둘은 갈라져서 양 떼를 향해 접근했다. 먼저 시선을 끌어야 할 개의 왕이 양치기의 앞에 나타났을 때였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개를 발견한 양치기는, 딱딱한 나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휘두르는 대신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착한 이리야. 저번에 내 양을 물어간 큰 녀석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렴. 그러면 너에게 고기가 가득 붙은 뼈를 줄게.'

양치기가 주는 건 고기가 가득 붙은 뼈. 늑대가 주는 건 살 한 점 없는 뼈.

잠시 고민하던 개는 양치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는 양치기를 늑대가 오는 쪽으로 이끌었고, 숨어있던 늑대는 흠씬 두들겨 맞고는 초지에서 쫓겨났다.

그날 이후, 개는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늑대는 보름달만 뜨면 그날의 고통과 배신감을 되새기고는 울부짖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개의 왕과 늑대의 왕은 서로 다투게 되었다는 이야기, 모르세요? 늑대의 왕은 그때도 있었을 텐데."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티르는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한층 이야기에 취해 있다가 빠져나온 티르가 시선을 살짝 올리며 옛 기억을 되새겼다.

"늑대…. 아아. 그러하구나. 깜빡하였다. 들개를 이끌고 달려들던 그것."

"그럴 만하죠. 흡혈귀들에게는 개의 왕이나 늑대의 왕이나 똑같았을 테니까요. 인간의 친구인 개든,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늑대든."

"어찌하였든 흥미로운 이야기로구나. 내 오늘 처음 들었다."

"이거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에게는 그러한 동화를 이야기해 줄 이가 곁에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티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내 옆에 그림자가 솟아나더니 고풍스러운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다. 티르는 그곳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되었든, 다치지 말거라. 네가 다치면 누가 나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며, 나의 심장을 뛰게 해준단 말이냐."

"피 조금 난 것 가지고 뭘. 흘린 건 티르 줬다고 생각할게요."

"쓸데없는 소리."

작은 손이 오른팔을 찰싹 때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 뒤, 티르는 그 손으로 내 오른팔을 붙잡고는, 다시 없을 간절함을 담아 나에게 속삭였다.

"너의 피는 맛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몸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어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걱정을 한껏 담아 말하는 티르에게, 나는 알았다며 몇 번이고 안심을 시켜주어야 했다.

EP.92 는 사실 왕따와 같다

『…군국에서 조사대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골렘은 담담하게 말을 끝마쳤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새삼 고개를 갸웃했다. 군국 통신병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개 노역자에 불과한 나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골렘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귀하의 의견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군 당국은 어디까지나 이 상황을 단순 착오로 발생하였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조사대는 그 착오의 발생 원인을 찾기 위함입니다. 또한 귀하에게 이 사실은 전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보 제공자를 위한 간단한 상황설명에 불과합니다.』

"암요."

『…혹여나 강조하지만, 섣부른 짓을 하지 마십시오. 군국은 이번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이번 조사대에는 장성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리스 중령은 군국의 군인.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평가 역시 군국이 할 것입니다. 중령님의 행보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귀하에 이를 바는 아니니, 가만히 있기를 권장합니다.』

알아들었다고 말하는데도 골렘은 나를 향해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쓸데없는 일 싫어하는 군국이 두 번이나 이야기하네.

『귀하가 진정 무저갱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군국의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복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알았다니까, 도대체 왜 가만히 못 두어서 안달이야. 설마?

"혹시 저를 걱정하는 거예요?"

『부정! 어디까지나 상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탈옥할 수 없는 땅에서 탈옥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열 배는 현실적이며 건설적일 테니까요!』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서운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일갈한 골렘은 호흡을 다스리며 말을 이었다.

『…칼리스 중령님께서는 고기 통조림 보급을 요청하셨습니다. 귀하는 요청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이번에는 중령님이 직접 배급하실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본관은 이만 물러갈 테니, 수고하십시오.』

"네. 대위님도 수고하세요."

내 말이 끝난 직후 골렘이 연결을 끊었다. 투욱. 골렘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고, 나는 그 골렘을 식당 한구석에 반듯하게 앉혀놓았다.

몸을 일으킨 나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칼리스 중령은 완전히 고립되었어요. 그녀에겐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죠. 과연 궁지에 몰린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빤히 듣고 있으면서. 대답 안 하면 내가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는 사람 같잖아.

외면하지 못하도록 식당 한쪽 벽을 향해 소리쳤다.

"봐봐요. 골렘 하나 남겨두니까 얼마나 좋아요. 다 때려 부쉈다면 보급요청도 못 했을 거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이제 다 때려부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아시겠어요?"

건너편 벽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은신술이 풀리고, 벽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회귀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와 골렘의 대화를 다 들었음에도 회귀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듯이 대꾸했다.

"…골렘도 부수고, 저것도 죽이면 불안할 것도 없어."

"장성급이 왔다잖아요. 중령을 휘까닥 죽였다가 장성급이 직접 내려오면 어쩌려고요?"

"말이 장성이지, 그들 전부가 강자는 아니야. 육장성이 아니라면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어. 티르칸쟈카가 있으면 훨씬 쉬워질 거고."

오만이 아니었다. 군국의 피라미드 꼭대기, 군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최강의 전력인 장성.

그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닌 육장성이 아니라면 누구든 이길 자신 있다고, 회귀자는 그게 상식인 것처럼 선언한 것이다.

대단하긴 한데, 문제는 따로 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점을 지적했다.

"아시죠? 장성부터는 국가 주요인물이에요. 죽인 순간부터 군국에 찍히고, 타협에 여지가 없는 적대관계에 돌입한다고요."

"너나 나나 이미 찍힌 몸이야. 무저갱에서 제멋대로 살아남은 우리를 가만히 둘 것 같아? 이대로 올라가도 평범한 생활은 꿈에도 못 꿀걸, 뭐가 불안해서 그래?"

쩝. 그건 그렇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공연히 투덜거렸다.

"장성 살해를 태연히 저지를 당신이 불안한데요."

"시끄럽네. 자기에게 칼날이 향해도 태연하던 녀석이."

"포커페이스라고요. 속으로는 얼마나 놀랐는데."

회귀자는 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내 변명을 티끌만큼도 믿어주지 않는 모양새였다.

"너 같은 게 잡범이라고? 그러면 군국은 엊저녁에 망했어."

"아니, 진짠데. 대위님도 중령님도 입을 모아 말하잖아요. 저 잡범이라고."

"굳이 나까지 속이려고 들 필요 없어. 어쩌면 우리는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지와 티르칸쟈카만 생각해도, 이 녀석을 살려야 할 이유가 충분해. 아마 다음 회차에서도 특별한 변수가 아니면 이 녀석을 살려가겠지. 가능하면 이번 회차에 진의를 알고 싶은데.'

말로 해도 믿을 분위기가 아니네.

하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 있을까? 이번 회차는 물론, 다음 회차 생존권까지 획득했는데. 고마워해라, 다음 회차의 나. 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고생했다.

어쨌건 목숨을 건진 셈이니 이만 넘어가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돼."

다만, 마음이 넓은 나와는 달리 성격 깐깐한 회귀자는 마음속 의문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회귀자는 궁금한 점을 나에게 물었다.

"저 중령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어?"

"방금 에이비 대위가 설명했잖아요. 장성이 온다니까요."

"아니, 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중령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어. 중령을 도우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죽이겠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생각도 않은 느낌이야."

가끔 회귀자는 이상한 곳에서 생각이 튄다.

그게 외부장착형 13회차 사고회로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헛다리를 짚는 와중에 한둘은 의외로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곤 한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이라고나 할까.

내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음에도 회귀자는 여전히 날카롭게 나를 캐물었다.

"어째서야? 설마 그쪽이 취향이야?"

"하하.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러면?"

"하아. 그게."

그게 말이야. 내가 틈틈이 장교의 마음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참, 인간의 마음은 재미있더라고.

"궁금하지 않아요, 셰이 씨?"

"뭐가."

장교의 목표는 4레벨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장교가 되었으며, 은밀히 접근한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행보는 순탄했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훈장도 두 개나 받았고, 중령까지 초고속 승진을 이루었다. 제법 유명세도 얻어서 군국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나왔다.

그때, 마침 '만물의 영장'으로부터 떨어진 명령.

실수인 척, 탄탈로스에 잠입하여 정보를 얻어내라.

무저갱 탄탈로스. 그곳은 감히 다가가서는 안 될 마경이었으나…. 탈옥 사건 이후 위험도가 크게 줄었고, 무엇보다 먼저 내려보낸 노역자가 태연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일개 잡범조차 살아남는데, 군국의 엘리트인 그녀가 무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장교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들어왔다.

그러나.

"고립무원의 땅. 타인의 도움을 전혀 기댈 수 없는 무저갱. 중령이면 나름 높은 위치까지 올랐는데, 아무런 지원도 없이 홀로 이곳에 떨어졌어요. 사방에서 닦달하는데 아무것도 해낸 게 없어. 심지어 적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이들에게까지 적대받고 있어요."

위험인물, 셰이는 여전히 날 선 태도를 보인다.

개의 왕은 이미 노역자와 깊은 인연을 쌓아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 노역자를 어떻게 해야겠는데, 사람에게 무관심해야 할 시조가 왠지 노역자를 한껏 감싼다.

장교는 빈틈을 찾기 위해 온종일 나를 감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럴수록 장교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가망이 보이지 않는 임무. 손톱만 물어뜯으며 나오지 않는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고립된 무저갱에서 저절로 방법이 튀어나올 리 없다.

장교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굴러온 돌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 한마디 나눌 사람도 없고, 시간은 얼마나 가는지 모르겠고. 목표 달성은 점점 요원해지는데 끝은 다가오고. 자기 목숨은 날파리와 다를 바 없고."

장교가 틈을 보아 아지에게 접근하더라도, 내가 종을 울리면 아지는 곧장 나에게 달려온다.

건물 안에 있더라도,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를 지날 때면 음산한 시선이 느껴진다. 티르가 그녀를 경계하는 탓이다.

심지어 눈앞의 회귀자는 중령을 볼 때마다 살기를 폴폴 풍긴다. 중령쯤 되면 갈무리하지 않은 살기 정도는 느낄 수 있고,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 죽음을 경험하는 중이다.

"어쩌면 여기서 죽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기억되지도 못하고 희미한 촛불처럼 스러지는 게 아닐까. 계획이 틀어진 그들이 자신을 버리는 게 아닐까 고민되는 지금."

목표는 4레벨 시민.

4레벨이 되려는 이유는, 자기가 가진 것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그러나 정작 그녀에겐 가족도, 배우자도 없다. 여기서 죽었다간 모든 게 물거품이라는 뜻.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그 밑바닥의 상황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과연 삶의 끝에 달한 그녀가, 모순의 끝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게 너무나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려고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회귀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일을 벌였다고? 이만큼 비효율적인 일을?"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어쨌든 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이왕 살리는 김에."

내가 독심술사라서 아는데, 진솔한 대답은 결국 그 상황에 처해야 나온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도 정작 칼날이 눈앞에 다가오면 도망치곤 한다.

분명 내가 읽었을 때는 한 점의 거짓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자기 자신조차 속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 줄 적히는 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장면이 직접 눈앞에 다가올 때, 말로는 모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진심이 진실로 나온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싶을 뿐.

"…정말."

회귀자는 내 말을 차분히 곱씹고는, 의외로 마음에 들어하며 덧붙였다.

"아마 추측하건대. 너는 정말 나쁜 놈이었을 거야."

"잡범이라니까요."

"흥. 그렇겠지. 어쨌든, 네 말과는 별개로 확실히… 시도할 가치는 있어."

'중령은 여자. 그러니까 불사자가 말한 그 교관이 아니야. 아마 끄나풀이겠지. 당장 심문하고 처리하는 것보다, 이대로 놔두는 게 진상을 더 확실하게 캐낼 수는 있어…. 그런 사소한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 말에 설득당한 회귀자는 중령을 향한 살기를 거두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천앵을 다시 머리맡에 올려놓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이런 느긋한 빌드업은 버리는 회차에선 안 하려고 했는데….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계획을 바꾸어볼까.'

그 생각을 읽은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는데, 이거 버리는 회차였냐?

제발 그러지 마. 마음 읽고 있는 독심술사 불안해한다고.

어쨌건.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에 있는 장교를 향해 의문을 던지며.

체크메이트에 달한 장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칼리스 중령은 그녀가 가지고 온 혁대를 풀었다.

과거, 의복 패킷이 상용화되고 약간 지난 뒤. 주 사용처를 잃어버린 가죽은 옷 대신 장신구나 소모품으로 자주 사용되고는 했다.

지갑이나 주머니, 혁대, 가방, 장신구 등등.

사치를 끔찍하게 여기는 군국이나, 나라 곳곳에 존재하던 가죽 재고를 처리하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다. 그것을 다 내버리는 것이 더욱 큰 손실이니까.

따라서 아주 잠깐 가죽 붐이 일었고,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꽤 유행했었다. 반짝하는 사치품이 그렇듯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칼리스 중령의 혁대 역시 수십 개의 바리에이션이 뜨고 진 끝에, 나름 독특한 쓰임새로 살아남은 제품이었다.

왼쪽 허리춤이 기묘하게 부풀어오른 혁대. 칼리스 중령이 그 틈으로 손가락을 걸자, 가죽 틈으로 교묘하게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칼리스 중령은 그곳에서 세 개의 꾸러미를 꺼냈다.

'그분이 건넨 세 개의 꾸러미.'

내용물은 그녀도 모른다. '만물의 영장'은 그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강조했으니까. 그래서 칼리스도 가능하면 아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나는 연락용. 다른 하나는 탈출용.'

연락용은 아직 때가 아니다. 이것은 보류.

탈출용은 아무런 희망도 없을 때, 무저갱에서 탈출해야 할 때 쓰라고 건넨 것이다. 이것 역시 보류….

'굳이 보류해야 할까?'

칼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탈출용 꾸러미에 손을 뻗다,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아직 아니야.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벌써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칼리스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탈출용 주머니를 깊숙이 밀어넣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 이건 조력이 필요할 때.'

무엇이 담긴지는 모른다.

다만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아야 더욱 부풀어오르는 법.

칼리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가죽 꾸러미를 꺼냈다.

군국 깊숙이에 뿌리를 뻗어 놓은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 그들이 남긴 비장의 한 수인 만큼, 판도를 뒤집을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제발. 이 난관을 헤칠 무언가가 담겨있기를…!'

절실한 바람을 담아, 칼리스 중령은 꾸러미를 열었다.

EP.93 내 머릿속의 지우개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모르는 것이 있다.

하나는 답을 모르는 것.

다른 하나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말만 들어서는 두 번째 미지가 훨씬 더 아득해 보이나, 의외로 그건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기억을 되짚어 보자.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 반짝이는 어린 시절을 되새겨보면, 그 시절 분명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찬란한 추억이 있다.

그때의 자신은 세상의 중심이었고, 가장 원대한 꿈의 지배자였으며, 웅장한 서사시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기억 속에 묻힌 사소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것들. 어느 날 아침에 마신 물 한 잔의 차가움이나 햇볕을 한껏 쬔 베갯잇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처럼, 하루를 다채롭게 하면서도 극히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은 수면 아래 침잠하여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누가 언급하기 전까지 되새기려는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 설사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날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짜 맞춘 상상일 뿐.

기억이란, 그토록 무던하면서도 무정한 심연이니.

그러니 그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을 거다.

아무도 짚어주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잠깐. 셰이 씨."

"어?"

"우리 뭔가 까먹고 있는 게 있지 않아요?"

회귀자가 인상을 팍 쓰고는 대꾸했다.

"또 그 화법이야? 똑바로 말 안 해?"

"그 화법이라니? 그게 뭔데요?"

"주어, 술어, 목적어 다 '뭔가'로 퉁치고 의문만 제기하는 그 빌어먹을 화법 말이야!"

뜨끔한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발뺌했다.

"억울하네요. 저도 진짜 생각이 안 나서 이러는 거예요! 최소한 이번엔!"

"자각은 있었구나, 이 자식."

괜히 억울하게 면박을 받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장교가 '그들'에게 받은 꾸러미. 조력자가 필요할 때 열어보라 했던 그곳에는, 부채꼴 모양의 넓적한 이파리와 함께 [잊은 존재를 떠올려라]라고 적혀있었단 말이야.

장교는 아직 떠올리지 못했지만, 문제는 나도 그 잊은 존재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내가 아무리 독심술사라도 뭔지도 모르는 것을 떠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뭔가,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꽤 중요하지만 깜빡한 무언가가.

나는 애매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뭐지? 셰이 씨랑 관련이 있던 건데. 셰이 씨. 당신의 특징을 한 번 설명해주실래요?"

"너 도대체 왜 그래?"

"급해서 그래요. 빨리."

내가 다그치자 회귀자는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내 특징…?"

'회귀…. 이건 말할 수 없고. 기연탐식자, 보물고의 주인. 템빨…. 칫. 왜 떠오르는 게 이따위야?'

자기평가는 좀 솔직하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끙끙거리며 회귀자의 특징을 하나씩 읊었다.

"인간불신, 남자가 좋아. 까칠, 외팔이공장장…."

"죽을래? 떠올리는 게 왜 그 따위야?"

"외팔이공장장? 외팔이공장장. 오른팔 살인마. 찾았다. 오른팔!"

"정말 그거라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라니?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 놀려대는 놈인 줄 아나.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회귀자를 휙 돌아보며 외쳤다.

"오른팔! 오른팔 어딨어요!"

회귀자는 얼굴을 콱 구기며 대답했다.

"네 오른쪽에 있네. 왜, 잘라서 보여줄까?"

"말장난할 때가 아니라! 불사자 라쉬! 그 오른팔! 오른팔 어딨어요?"

"…불사자?"

그제야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차린 회귀자가 기억 한편에서 불사자를 떠올렸다.

저주에 문드러진 오른팔, 산산이 흩어진 살점, 그것을 해주하겠다며 회복약을 만들고는, 거기에 불사자의 오른팔을 담가놓은 일까지.

그러나 회귀자의 기억 속에, 회복된 오른팔을 빼낸 기억은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 회귀자는 회복약에 팔만 담가놓고는 까맣게 잊었으니까!

회귀자가 탄식했다.

"아. 깜빡했다."

"깜빡? 그걸 어떻게 깜빡 잊어버릴 수가 있어요!"

내가 기막혀서 소리치자, 회귀자도 당혹스러운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소극적으로 대꾸했다.

"그, 그게. 치료해주려고 회복약에 담가놓았는데 말이야. 오른팔이 자꾸 펄떡펄떡 날뛰면 깜빡하고 싶어지잖아."

"재주도 좋네요! 그 오른팔 수틀리면 두 손가락으로 걸어와서 툭툭 때리고 그러지 않아요? 어떻게 그걸 깜빡해?"

"아니, 저주가 안 풀렸는데도 자꾸 회복약이 든 수조에서 나오려고 하길래…."

"하길래?"

눈동자만 돌아가는 꼴이 사고 치고 모른 척하는 아지를 닮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사슬에 묶어서 가라앉혀놓았어."

"가라앉혀요?"

나도 안 한 짓을. 행동이 과격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럽겠다.

"뭐, 좋아요. 그럴 수 있다고 쳐요. 그래도 오다가다 봤을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회복약 냄새가 지독해서 구석진 방에 갖다놨거든. 냄새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 방에 결계도 쳐놓고…."

"저기, 그거 저주 해제 맞아요? 그냥 봉인술이잖아요?"

어처구니가 없네. 나도 어지간히 무계획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지만, 회귀자는 있던 계획도 집어던지는 인종이었다.

내가 티르의 심장을 되살리던 사흘 동안, 회귀자는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불사자는 방치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셰이 씨. 혹시 라쉬 씨 싫어해요?"

"어, 사실,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흠.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취향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인가."

"자꾸 그딴 말 강조하지 마! 그냥 깜빡한 것뿐이거든!"

'너무 안 보이는 곳에 가둬 넣긴 했어…. 펄떡거리는 오른팔만 그때 봤던 끔찍한 시체 골렘이 아직도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 그 이후에는 티르칸쟈카의 심장에 대한 일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반성하자. 너무 시야가 좁았어.'

반성을 하기는 하네. 그래도 아직 인간의 마음은 남아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뭐 어떠냐. 사람이 좀 깜빡할 수도 있지. 절대 나도 깜빡해서 그런 건 아니라….

"잠깐! 그보다! 불사자의 팔을 써먹은 건 너잖아! 너도 조금은 기억하고 있어야지!"

…취소다. 이 녀석은 반성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인성파탄자다.

물론 나도 잊어버리긴 했다. 임모탈 라이트 암의 주인으로서 아주 조금, 내 책임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말이야.

"저는 셰이 씨와는 상황이 다르죠."

"무슨 변명을 하려고? 어차피 까먹은 건 똑같잖아!"

"저는 그때 티르의 심장을 살리려다가, 정작 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고 죽을 뻔했는데요? 그 와중에 시커먼 남정네 오른팔까지 기억하라고요?"

"…그게."

"심지어 나는 기억을 잃을 것까지 고려해서 쪽지도 남겼는데. 멀쩡히 제 정신을 갖고 있던 셰이 씨는요?"

"...…."

"할 말이 있으면 해 봐요. 셰이 씨. 오늘 당신의 양심, 그 무게를 재봐야겠네요. 딱 천앵 무게만큼 나올 것 같아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회귀자는 팔짱을 끼곤 쓸데없이 무게를 잡다, 자연스레 몸을 돌려 바깥을 가리켰다.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오른팔은 저쪽 구석에 있는 노역자 숙소에 봉인해두었어. 뭐, 급한 일 있는 건 아니지?"

"한참 늦긴 했지만, 일단 가보죠."

나는 회귀자가 가리키는 대로 향했다.

노역자 숙소에는 수십 개의 몰개성한 문이 복도에 늘어져 있었다. 몇 개 부서져 있기도, 몇 개는 문이 아예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그러한 파괴행위도 별다른 개성이 되지는 못했다. 사방에 폭력의 흔적이 가득했던 탓이다. 이곳 어딘가에 물건을 숨기면 아지 정도 되지 않는 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쪽이야."

회귀자는 그 중 끄트머리 방의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 후끈한 열기가 나를 덮쳤다.

약초의 독한 향이 내 코를 찔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뿌연 연기 너머, 침대 위에 네모난 수조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 그 안을 확인했다.

네모난 수조 속에는 말갛게 끓어오르는 회복약과, 사슬에 묶인 채 푹 가라앉아 있는 불사자의 오른팔이 있었다. 모양새만 보면 고대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회귀자를 돌아보니, 자기도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나는 수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방치한 거예요?"

"…응. 저주만 빼내면 돼서, 내가 건드릴 필요 없으니까."

"보니까 저주는 다 풀린 것 같은데."

"그래… 보이네."

"왜 안 꺼내줬어요?"

"깜빡…했어."

"어휴, 이 빡통."

"뭐?!"

이럴 때는 참 반응이 날카로워. 나는 수조 전체를 친친 동여맨 사슬을 풀어냈다. 쇠사슬을 한 바퀴 한 바퀴 풀어낼 때마다 펄떡거리는 오른팔이 점점 움직임을 더해갔다.

"잠깐만 기다려라, 오른팔아. 내가 너에게 자유를…."

그렇게 풀어내려는 순간, 사슬이 느슨해진 틈을 타 오른팔이 튀어올렸다. 불사자의 오른팔은 잉어처럼 수면을 차며 솟구쳐서는 내 콧잔등을 때렸다.

"꾸엑!"

내가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은 오른팔은 거꾸로 서더니 두 손가락으로 바닥을 달려갔다.

나는 얼얼한 콧잔등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셰이 씨! 잡아요!"

"응?"

그러나 회귀자는 이미 오른팔을 피해 비켜난 상태였다. 눈 깜짝할 사이 오른팔은 방에서 벗어나 복도를 달려가고 말았다.

내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회귀자를 탓했다.

"그걸 보고만 있어요?!"

"좀 징그러워서…. 그나저나 왜? 어차피 저 오른팔은 주인 찾으러 갈 거 아니야. 불사자를 되살릴 생각 아니었어?"

"살릴 생각이었어요! 그녀가 나서기 전에요!"

"응? 무슨 말이야?"

"설명할 시간 없어요! 지금 라쉬 씨의 몸뚱아리는 어디 있죠?"

"교육실 캐비닛 안에."

"왜 또 그런 곳에 넣어놨대! 아무리 봐도 시체를 은닉하려는 모양새잖아!"

나는 즉각 교육실로 달려갔고, 회귀자는 영문도 모른 채 내 뒤를 따랐다. 우리 둘은 오른팔의 손가락자국을 따라 복도를 내달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우리가 교육실에 들어갔을 때 발견한 것은, 마침 꾸러미를 손에 들고 캐비닛 앞에 서 있던 장교와,

삼각치기로 벽을 짚고 하늘을 날아, 불사자에게로 날아가는 오른팔이었다.

"세상에. 오른팔이 하늘을 난다."

저 정도 컨트롤을 가진 오른팔이면 3원반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오른팔이 불사자의 어깻죽지에 딱 달라붙었다. 회귀자의 특제 회복약의 힘을 잔뜩 흡수한 오른팔은 잔뜩 머금은 정기를 불사자에게 전했다.

마치 커다란 주사기를 어깻죽지에 박아넣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퉁퉁 불어 오른 오른팔이 크게 수축할 때마다, 그 안에 흠뻑 담겨있던 정기가 불사자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불사자의 육체가 그 기운을 받아들였고, 정기가 핏줄을 따라 퍼지며 불사자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사자가 눈을 번쩍 떴다.

EP.94 바람을 듣는 이

오랜 잠에서 깬 불사자는 곧장 캐비닛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힘차게 바닥에 착지한 그는 잠시 비틀거렸다. 대충 갖다 붙인 팔과 다리가 아직 다 붙지 않고 흔들거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재생능력을 가진 불사자였고, 마침 정기가 온몸에 충만한 상태였다.

"흡!"

불사자가 힘을 주자, 살짝 뒤틀려있던 팔과 다리가 순식간에 제 위치로 돌아왔다. 몸에 잔뜩 나 있던 생채기가 순식간에 아물었고, 바싹 말라 있던 몸이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단숨에 부풀어 올랐다.

완전히 부활한 불사자는 자기 손발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오! 정기가 충만하군! 어떻게 된 일이지?"

불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 마침 그의 앞에 서 있던 장교가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 말했다.

"탄탈로스 교육대, 라쉬. 맞나?"

불사자가 냉큼 대답했다.

"그렇소! 눈을 뜨자마자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이 나를 반기다니. 지금까지 내 삶이 헛되지 않았구려! 이 또한 대지모신의 안배이리니!"

"…미인?"

"그럼,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미인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말할까!"

불사자의 말은 능청스러웠으나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장교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말장난할 시간 없다. 본관은 탄탈로스의 교관으로 발령받은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며, 이 탄탈로스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교가 꾸러미를 열고는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라쉬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화색이 되었다.

"이건 세계수 잎이 아니오!"

"알아보는군."

짐승에게 왕이 있다면, 풀과 나무엔 세계수가 있다.

그러나 짐승과는 다르게 식물의 왕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상의 지배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승의 영역에 한해서다. 아무리 오만한 인간이라도 감히 인류가 식물까지 지배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식물은 짐승이 어떻게 되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간직했다.

수도 없이 피고 지는 꽃이나 풀에게도 왕은 있으나, 그들의 왕은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식물의 왕은 각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구분해내기 어려우며, 설사 천운이 따라서 발견한다 한들 뽑는 순간 그 명이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나무는 수천 년 동안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나무의 왕도 마찬가지.

나무의 왕은 짧게는 수십,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왔고, 그중에는 너무나 오래 존재하여 소재가 밝혀진 나무의 왕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수라 불렀다.

수천 년 동안 대지의 정기를 한껏 머금은 그것들은 뿌리 한 줄기가 작은 구릉과 같고 이파리 하나가 커다란 부채만 하다고 전해진다. 대지모신과 함께 나고 자란 이 크고 영험한 나무의 왕을, 몇몇 사람들은 신처럼 떠받들고 추앙하고는 했다.

불사자 라쉬도 그중 하나였다.

"알다마다! 우리 부족은 세상 누구보다도 대지모신과 가까운 존재. 정기를 한껏 담은 그것을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영험 있는 은행나무는, 비록 우리 근처에 있진 않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지!"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신기하고 커다란 나무 정도로 인식되고는 했다.

떨어진 이파리 하나를 돈 받고 팔아넘길 수 있는 조금 귀중한 나무로.

장교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겠지?"

"물론 객관적인 가치도 알고 있소! 한 번 사보려고 했는데 더럽게 비싸더군! 노역으로 버는 쥐꼬리만한 돈으로는 택도 없었소! 어쨌든 고맙소. 안 그래도 정기가 부족하여 재생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몸이 전부 나았어!"

불사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세계수의 잎을 건넨 장교는,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

'이상하군. 세계수 잎을 먹이지도 않았는데, 오른팔이 제멋대로 뛰어오더니 기운을 되찾았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잠깐만. 오른팔을 낫게 한 그 회복약, 혹시.

설마하는 심정으로 회귀자를 향해 물었다.

"셰이 씨. 혹시 회복약 재료에…."

"응. 불사자 같은 경우는 대지의 정기가 잘 들어서, 세계수 잎사귀 썼는데?"

태연하게 대답하는 회귀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아. 이럴 때만 씀씀이가 커."

"필요한 최소비용이었어. 누가 팔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바람에, 저주가 심각해서 그 정도 아니고서는 회복 못 시켰어."

"그래요. 다 제 불찰입니다."

쳇. 혀를 찬 나는 모퉁이에 바짝 붙어 조심스레 교육실 안쪽을 훔쳐보았다. 회귀자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중령이 불사자와 만났네. 이것 때문에 나를 불렀던 거야?"

"이미 늦었어요. 지켜보기나 하죠."

회귀자와 내가 열린 문으로 안쪽을 살피는 동안, 장교도 모자챙 아래에서 날카로운 눈동자로 불사자를 평가했다.

2 m는 될 법한 근육질의 거구. 누더기가 된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몸은 구릿빛보다도 어두워서 피부라기보단 금속처럼 보였다. 그의 우락부락한 몸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는데, 아직 세계수 잎사귀를 쓰지 않았음에도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조금 전 뛰어 들어온 그 오른팔은 어찌 된 영문이지…?'

어쨌건 결과가 좋으면 그만. 오른팔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은 장교는 불사자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맨손으로 사람을 찢었다고 했다. 이곳이 무저갱이라 돋보이진 않지만, 한때 광전사의 족속이라 불렸던 불사종족. 그중에서도 '오른팔'이라는,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졌다지…. 충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거다.'

부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사자들의 땅. 그곳을 떠나 세상을 방랑하던 불사자 라쉬는 부국강병한 군국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는 군국과 여러 교섭을 거치고 빡빡한 조건을 수용한 끝에, 임시 시민권을 발급받으면서까지 군국에서 머물렀다.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재고의 여지도 없이 무저갱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군국에게 호의를 가진, 몇 안 되는 이.'

적만 가득한 무저갱. 세상과 고립된 곳에서, 아군이 될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를 발견한 거다.

장교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그 보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다행이야. 혹여나 떠올리지 못했다면…. 그들의 지령은 언제나 이리 애매모호하게 전해져서….'

턱에 손을 댄 채 고민하던 장교는 차가운 계산을 끝마쳤다. 불사자는 세계수 잎사귀를 행복한 듯이 바라보며 잔뜩 기대한 채 말했다.

"정녕 이것을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이오?"

"좋다. 다만, 조건이 있다."

"이야. 이렇게 귀한 선물을! 고맙소!"

"조건이 있다고 했을 텐데?"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 고 판단한 장교는 챙을 눌러쓰며 말했다.

"선물이 아니다. 본관이 귀 교육생을 위해 치른 비용이지. 본관에게도 상당한 출혈이 있었으니, 교육생은 그만큼 나에게…."

"하하! 군국 사람들은 말을 참 딱딱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 선물, 정말 기쁘고 달갑게 받도록 하겠소!"

"교육생. 몇 번이고 말하지만…."

계속 선물이라고 강조하는 불사자를, 장교는 마뜩잖은 시선으로 보았다. 장교는 불사자가 세계수 잎사귀를 선물이라 퉁치고 꿀꺽할 생각이라 여긴 탓이다.

그러나 그건 불사자의 호탕함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아니, 선물이오!"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은 불사자는 다시금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본인에게 엄청 귀한 선물이고, 또한 정기가 부족한 지금 가장 필요했던 양식이오! 이런 선물을 직접 들고는 나를 찾아와서 건넨 것이니. 이 물건은 필시 마음이 담긴 선물일 것이고, 마음이 오갔으니 우리는 곧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뭐?"

군국에서 자라 그러한 말에 익숙지 않은 장교는 뒤늦게 불사자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불사자는 채무 관계를 거절하는 대신 마음의 빚을 지기로 한 것이었다.

채무라면 값을 치르는 것으로 관계가 끝나지만, 친구는 마음이 지기 전까지 시들지 않으니까.

"나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디, 무슨 부탁이 있소, 친구?"

이 상황은 장교에게도 의외였는지, 장교는 잠시 할 말을 잃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몰리고 몰린 몸. 지금 그녀에겐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그럴 의지도 없다.

"…본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교육생이 그것을 도왔으면 한다."

"하하! 친구의 부탁이라면야 얼마든지!"

불사자는 손을 내밀었고, 장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손을 마주 잡았다.

'…무저갱에 갇힌 죄수 따위와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당장 이용하기에는 그편이 낫겠군.'

친구라는 형태이든, 채무 관계이든 상관없다.

목숨이 아까운지 모르는 불사자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장교는 이 관계를 어떻게 부를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손 역시 크군. 손가락만 해도 두 마디가 더 길어….'

악수하는 동안 문득 어울리지 않은 생각을 하던 교관은, 짧게 고개를 젓고는 자신을 다잡았다.

'아니. 단순히 체구를 생각한 것뿐이다. 이 크기라면, 고기 방패로 쓰기엔 딱일 테니까.'

좋아.

슬슬 물러갈 시간이다. 그들로부터 시선을 뗀 나는 회귀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셰이 씨."

그러자 회귀자가 질색하며 뛰어올랐다.

"아, 씨. 깜짝이야. 왜?"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전신의 털을 곤두세운 채 하악질을 하는 회귀자를 향해 물었다.

"같은 남자끼리 왜 그리 놀래요?"

"징그럽잖아! 그냥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속삭이는데!"

"안에 다 들릴 텐데 소리칠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스토킹이 패시브구나. 아주 바람직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저쪽도 슬슬 나올 것 같으니 우리는 도망갈까요?"

"도망? 불사자에게 용건이 있던 거 아니었어?"

"조금 전에 끝났어요."

나는 저쪽을 흘긋 보고는, 소원대로 믿고 의지할 조력자를 손에 넣은 장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원하는 바는 이루었으니까요."

회귀자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대로 가면 좀 개운하지 않은데. 불사자…. 그가 중령에게 붙었다고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야."

"참나.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게."

"뭐?"

"됐어요. 일단 와요!"

슬슬 장교와 불사자가 교육실에서 나올 타이밍이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회귀자를 잡아끌고 밖으로 향했다.

EP.95 모두 거짓말을 한다

당장 뛰쳐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불사자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회귀자는 그들의 동향을 살피겠다며,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스토킹 선언을 하고는 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잠깐 시간이 남게 되었다.

마당 한구석에 앉아 카드 한 벌을 꺼냈다. 엄지와 검지로 덱을 살짝 휘게 눌러 쥐고는 손끝으로 긁었다.

파라락.

그러면 내 오른손에 억압당해있던 카드가 자유를 찾아 뛰쳐나갔다. 파라라락. 차례차례 뛰쳐나가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 장마저 오른손의 폭정에서 벗어나 왼손의 품안에 고이 안겼다.

하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법.

지금까지는 고이 품어주었던 왼손은 이윽고 본색을 드러내어 오른손과 똑같은 괴물이 되었다. 카드 뭉치의 등골이 활처럼 휘었다. 또다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카드 뭉치는, 틈을 봐서 조금 전 떠나온 오른손에게로 되돌아갔다.

내가 그렇게 카드 한 벌을 양손으로 번갈아 움직이는 도중이었다.

"손재주가 제법이구나."

티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새카만 양산을 어깨에 걸치고, 커다란 관 위에 다소곳이 앉은 채, 부드럽게 내 앞에 멈춰선 티르는 가볍게 내려앉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카드를 단숨에 낚아챘다. 나비처럼 팔랑이던 카드는 날개를 접고 내 손안에서 번데기처럼 숨을 죽였다.

"고작 이정도로 제법이요? 죄송한데, 이건 사탕을 훔쳐 먹고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다섯 살짜리 아이를 울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에요. 제 진심을 보이면 까무러칠 수도 있으시겠네요."

능청스런 대꾸에 티르가 말아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었다.

"다 큰 어른이 아이를 왜 울리고 그러느냐."

"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나만 그런가?"

"너도 그러지 말거라."

"정말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속이 다 보이는 뻔한 거짓말로 당장 보이는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이를 보면, 얄미워서라도 그 거짓말을 지적하고 싶지 않아요?"

장난으로 한 물음이었는데도 티르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꼬마 아이가, 되지도 않는 속임수로 속이려고 하였을 때,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진지하게 하나하나 떠올리며 시뮬레이션을 거듭한 티르는 곧 결론을 내렸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와, 정말요?"

"그럼. 아이의 거짓말을 지적해서 얻을 것이라곤 저열한 쾌감뿐 아니겠느냐. 나이를 먹었다면 조금 더 고상하게 행동하여야지."

오호. 저열한 쾌감. 저열한….

저열?

"어라? 그거 혹시 제 성격 나쁘다고 돌려 까시는 건가요?"

"기실, 네 성격이 순한 편은 아니지 않느냐."

티르가 장난스레 말하며 웃었다. 나를 향한 짓궂음이 한껏 담겨있었다.

어쭈, 이제는 농담 삼아 놀릴 정도는 되었단 말이지?

좋아. 어디.

"티르. 우리 내기 하나 하죠."

"내기?"

"네. 제가 카드를 숨길 테니, 티르가 찾아보세요."

덱을 보지도 않고 카드를 뽑아 건넸다. 티르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받아들고는 앞뒷면을 살폈다.

뒷면은 다른 카드와 다를 바 없는 규칙적인 무늬를 가졌다. 모양도 대칭적이라, 뒤집어도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었다. 앞면에는 새빨간 하트가 두 개 그려져 있었으며, 2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혹시 무언가 숨겨져 있을까, 티르는 손가락으로 카드를 문질러보기도 했으나 카드는 멀쩡했다. 티르가 카드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며 말했다.

"무언가 속임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그 카드는 평범해요. 마술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그럴 필요는 없다. 미리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건 나의 능력 부족이니."

과거 지식이 베풀어지지 않는 시절, 그때는 아는 것이 힘이었으며, 모르고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 시대를 살았던 티르는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물론 나도 진심이었다.

"아니요. 최소한 도구에 한해선 공평해야죠. 저만 아는 트릭을 가지고 내기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카드를 다시 나에게 되돌려주며 물었다.

"그래. 내기라면 필시 보상이 있어야겠지. 무엇을 걸고 내기하겠느냐?"

"소원 하나. 어때요?"

"…소원?"

'소원이라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티르의 눈이 피처럼 붉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친 내가 급히 덧붙였다.

"물론 서로 납득 가능한 상식적인 선에서요! 당연하게도!"

"…아아. 그렇겠지. 알겠다."

…다행이다. 왠지 조금 전 티르의 머릿속에 나를 흡혈귀로 만들겠다는 소원이 아른거렸던 것 같은데 말이야.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있는….

어쨌건. 티르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어디, 해보도록 하거라."

"큭큭큭. 좋습니다. 어디, 신세대의 손기술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놀랄 준비나 하시라고요."

"너야말로 내가 너무 쉽게 맞추더라도 상심하지 말거라. 상대가 너무 나빴을 뿐이니."

"그 말, 똑같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사기당한 기분이 들어도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남은 카드 뭉치를 땅에 내려놓고는, 양손을 활짝 펴서 손안에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확인한 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오직 두 손가락만 움직여 하트 둘을 집어 들었다.

"자아. 갑니다."

"그래. 해보거라."

티르의 눈이 한층 붉게 빛났다. 내 사소한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력을 돋운 것이다.

기대에 부응해주지. 나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카드가 빙글빙글 돌면서 왼손과 오른손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술에 취한 나비처럼, 혹은 돌개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카드가 어지러이 움직이는 것을 보던 티르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생각보다, 너무 잘 보이는구나.'

붉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떨리는 게 아니라, 내 카드를 쫓는 것이다. 흔들려도, 갑자기 시야 바깥으로 뻗어나갔다가 돌아와도, 손등 뒤에 숨어 잠깐 보이지 않더라도.

꿰뚫어 보는 듯한 붉은 눈은 내 카드를 시시각각으로 따라왔다.

'분명 현란하기는 하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보이는구나. 그리 빠르지도 않고, 어지럽지만 움직임은 단순하니.'

"…큭!"

나는 초조한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이 긴장으로 떨리며, 중간중간 카드를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다시 잡고는 카드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순간적으로 양손을 교차한 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카드를 손아귀 속에 숨기고는 쭉 내밀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짠! 어디 있게요?"

"아…."

티르는 작게 탄식했다. 붉은 눈동자가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가, 내 왼손을 흘긋거렸다.

그녀는 대단히 곤란한 표정이었는데, 그건 카드를 놓쳐서가 아니라… 도리어 너무 완벽하게 포착하였기 때문이었다.

'휴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부 다 보였다. 양손을 교차하면서 숨기는 척, 왼손 소매에 집어넣는 것을.'

흡혈귀는 눈마저도 혈기로 조종할 수 있다. 혈조술의 보조 아래 빠르게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는, 평범한 눈이라면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버렸을 현란한 움직임마저도 끝까지 추적했다.

티르는 내가 무안해할까 봐 차마 답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력을 돋지 말았어야 했을까. 소원이라는 말에 유혹되어 너무 진지하게 임했구나….'

"크크. 조금 어려웠죠? 괜찮아요. 실망하지 마세요. 노안에는 장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꼽기도 하니, 어디, 세상이 만만찮다는 것을 보여줄까.'

마음을 바꾸는 데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발끈한 티르가 손가락으로 내 왼손을 가리켰다.

"왼손을 꺼내보거라."

"왼손! 왼손이라고 하셨죠? 무르기 없기입니다! 자, 과연! 왼손일까요? 확인 들어갑니다! 짠, 짜라잔, 짜란, 짠."

나는 즉시 왼손을 펼쳤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티르도 예상한 대로,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런! 안타깝네요! 왼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아! 카드는 오른손에 있었나 보네요! 자아. 틀리셨으니 내기는 제가 승리…."

"아니, 왼손 소매 말이다."

"헉!"

티르가 내 소매를 정확히 짚었고,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외, 외, 왼손 소매라니요? 그게 뭐죠?"

"여기, 보이지 않느냐."

티르는 친절하게도 내 왼손을 콱 붙잡고는, 그 팔을 비틀어 소매가 다 보이도록 했다. 소매 저편에는 카드 한 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도박판에서 걸렸다면 곧장 망치를 찾아야 할 만한 상황에서.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봐봐요. 얕은 거짓말. 짚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뭐, 이유는 많다.

세상의 쓴맛을 알려주겠답시고, 아니면 하는 행동이 같잖아서, 혹은 저열한 욕구에 의해, 단순히 손해 보는 게 싫어서.

붙이면 붙이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거짓을 목격하면 밝히고 싶기 마련이다. 그건 누구나 가진 본능에 가깝다.

티르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 그 말을 하려고 내기를 한 것이느냐?"

"비슷해요. 티르, 제가 얼마나 우스웠나요? 빤히 보는데 뻔뻔하게 숨기고, 그래놓고 뻗대며 모르는 척하면. 이리 콱 잡아서 보여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이다. 지금 티르의 행동이 딱 그랬으니까.

티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완전히 당했구나. 허나, 너는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티르에 비하면 아이나 마찬가지죠. 인간의 수명을 아주 넉넉하게 잡아 100살이라고 잡았을 때, 스물넷인 저는 티르칸쟈카 나이 비교대입법을 쓰면 고작 두 살배기 아이에 지나지 않는걸요. 응애."

나를 째릿 노려본 티르는 새침하게 입을 삐죽이고는 내 소매에 들어있던 카드를 빼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확실히, 나도 내 말만큼 고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구나. 인정하마. 어쨌든, 카드를 어디 숨겼는지 발견하였으니 이 내기는 나의 승리…."

그렇게 말하며 티르가 카드를 뒤집었을 때였다.

앞면을 확인한 티르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

새하얀 바탕에 두 개 그려진 하트는 어디 가고, 그곳에는 누군가 새로이 그린 듯한 근엄한 여왕이 꽃을 들고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트 퀸.

그 카드는, 분명 내가 집었던 카드와는 다른 것이었다.

홀린 듯 바라보던 티르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직까지 말아 쥔 오른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 미처 못했던 말, 다시 해볼게요. 오른손에 있었나 보네요! 짜잔!"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나는 오른손을 폈다. 티르가 찾아야 했던 하트 2는 오른손 손아귀 안에 둥그렇게 말려있었다.

당혹스럽게 자기 손과 내 손의 카드를 번갈아보는 티르. 아직까지 혼란을 느끼는 중인 그녀를 향해, 나는 고상한 쾌감을 느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뭐, 그것을 극복해야 마술사라고 불릴 수 있겠지만요."

티르는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 어떻게 한 것이냐?"

"안 가르쳐 줘요. 트릭을 세상에 공개하는 건 마술사가 해선 안 될 일이니까요."

피가 쏠리면 시야가 좁아진다. 이것은 티르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

어디서 올지 모르는 포식자를 발견하기 위해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피식자는, 대신 코앞에 무언가가 다가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목표로 삼은 사냥감 하나를 끝까지 쫓아가기 위해 두 눈을 앞쪽으로 향한 포식자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머리 뒤쪽을 볼 수 없다는 페널티를 안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포식자인 인간. 그런 인간의 피를 먹이로 삼는 포식자 중의 포식자 티르는 두 눈에 혈기를 집중하여 내 카드를 쫓았다. 나조차도 그녀의 눈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할 정도로 그 능력은 뛰어났다.

그래서 처음부터 속였다.

하트 여왕이 친히 그림자의 여왕을 유인하는 사이, 하트 2는 느긋하게 내 손등에 숨어있다가 느지막이 나타났을 뿐이다.

"남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속임수를 간파했다고 뻗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뭐, 이것도 대부분 독심술 덕분이지만, 그거야 뭐.

이미 독심술이 나고 내가 독심술이다. 평생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분리할 수가 있을까.

애초에, 타인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면, 그들이 깊숙이 감추어둔 속임수도 알아차리지도 못하겠지.

"대단…하구나. 솔직히, 아직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분명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거늘."

양손을 꼭 붙잡고 감탄하는 티르. 이곳 사람들은 리액션이 솔직해서 좋다.

우쭐해진 나는 코밑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하하. 제 소원을 어떻게 들어줄까 생각하고 있으세요."

"그런데 말이다, 휴."

"네?"

조심스레 고개를 든 티르는 손에 쥐고 있는 하트 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하트 두 개가 그려진 것은 아니다만…. 이 역시 카드를 숨긴 것은 숨긴 것 아니더냐?"

"어?"

"그렇다면, 내기는 내가 이긴 것이렷다."

"어라?"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카드를 숨길 테니 찾아보라고 하였지, 분명. 이게 두 개가 그려진 카드는 아니나 숨긴 것은 숨긴 것. 그렇다면 나는 숨긴 카드를 찾기는 하였으니. 그렇다면….'

오잉? 그렇네?

"제가 왜 그렇게 말했죠?"

"그것을 왜 나에게 묻는 것이냐?"

그러게. 뭐지?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나?

찬찬히 조건을 상기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어."

"그러면, 네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에이. 그래도 시조의 자존심이 있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으면서 이런 거로 소원을 말하려고요?"

끄덕.

티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티르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뭐, 상관없나. 고상한 척하는 티르가 이상한 소원을 말하진 않겠지. 그러면 바로 컷이다.

그때, 감옥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카드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소원은 나중에 들을게요.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왔네요."

그 직후 감옥에서 불사자와 장교가 나타났다. 불사자는 한끼 거나하게 차려먹고는 배를 쓰다듬는 중이었고, 장교는 그런 불사자를 앞세워서 마당으로 나왔다.

좋아. 칼리스 중령은, 과연 자기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을지.

준비는 끝났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EP.96 불사자와 흡혈귀

불사자는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에 크게 만족했다. 혼자 콩 통조림 한 캔을 다 해치운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마당 쪽으로 향했다.

"이곳 통조림은 더럽게 맛이 없던데, 이걸 이렇게까지 살리다니! 맛있는 재료는 날 것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맛없는 것을 맛있게 바꾸는 것이야말로 실력이자 요리의 진수! 중령은 요리 솜씨도 훌륭하니 좋은 신부가 되겠소!"

그와 나란히 걷고 있던 군국 장교, 칼리스 중령은 그러한 칭찬에도 별로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불만스레 혀를 찬 장교는 차갑게 대꾸했다.

"쯧. 그 논리대로면 통조림 하나로 백 가지 요리를 하는 주임원사는 세기의 신부겠군. 헛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본관의 임무를 돕도록, 교육생."

"백 가지라! 탐이 나는군. 그 주임원사라는 사람도 중령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오?"

"대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다. 올해 손녀를 보았지."

"하하하! 그렇다면 됐소! 나는 중령이 해주는 요리로 만족하도록 하지!"

장교가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로도 다 보일 정도로 얼굴을 구겼다.

"본관이 매일 너를 위해 요리할 거라 여기지 말도록, 교육생. 이번만 특별히 한 일이다."

불사자가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째서!"

"달리 묻고 싶군. 교관인 내가 어째서 교육생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지?"

"겸사겸사할 수 있지 않소! 나는 요리에는 재능이 없는데, 이 나라에는 맛있는 재료가 없소! 미안한 말이오만, 내가 이 나라에 정을 붙이려고 해도 콩 통조림만 떠올리면 진저리가 나서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오! 하지만 중령이 함께라면 조금은 괜찮을 것 같소만!"

이러한 상황이 짜증스러운 듯, 장교가 모자 위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일이나 마쳐라. 그러면 생각해보지."

"알겠소! 어디 보자, 개 아가씨와 친분을 쌓고 싶다고 했던가? 낯가림이 심한 모양이오, 중령!"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하. 알았소. 밥해준다는 거, 친구끼리 약속이니 꼭 지키시오!"

그렇게 둘이 평범하게, 어찌 보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탄탈로스 본관에서 딱 걸어나왔을 때였다.

한껏 수다를 떨다 나온 불사자는 마침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 선생! 오랜만이오… 엇!"

그가 반갑게 다가오려던 그때, 불사자의 오른팔이 제멋대로 펄떡이더니 나를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듯 위협적으로 솟구쳤다.

아직 그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상당히 있었지만, 그 위협적인 태도는 확실히 전해졌다. 나와 그는 물론 티르에게도.

놀란 티르가 눈을 붉게 빛냈다.

"휴!"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수천의 군세가 티르의 의지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무저갱은 해가 들지 않는 공간. 모든 곳은 그림자에 잠겨 있다.

티르의 힘이 사방에 뻗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림자와 연결된 곳이라면, 어둠을 다루는 그녀의 권능이 닿는다.

무저갱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림자가 티르의 병창이며, 병영이었고, 병사였다. 어둠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제히 몰려들었다.

티르가 분노하여 외쳤다.

"토인…! 감히 휴를 해치려 해!"

"잠깐!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오!"

정작 그 몸의 주인인 불사자조차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불사자는 자아가 나뉘어있기라도 한듯 자기 왼팔로 오른팔을 단단히 붙잡고는 말했다.

다름이 아닌, 그 자신의 오른팔을 향해.

"공양(供養)신이여! 어째서 분노하신 것이오? 어? 뭐라고?"

오른팔이 별개의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던 불사자는, 벽처럼 솟아오른 그림자의 군세 너머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 내 오른팔이 선생을 보더니 한 대 후려치고 싶어하는군! 내가 의식이 없는 사이 내 오른팔과 무슨 갈등이라도 빚었소?"

"네?"

대충 생각을 읽어보니, 오른팔이랑 대화 비슷한 것을 한 모양이었다.

저게 의사소통이 되는 거였어? 신기하네.

그나저나, 갈등?

나는 단지 티르를 상대하기 위해 그 오른팔을 걸레처럼 써서 피를 닦아낸 것밖에 없다. 닦다가 더러워지면 긁어내고 다시 쓰고, 가끔은 꼬챙이로 살점을 파헤치고는 사방에 흩뿌리곤 했지.

…만일 오른팔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주먹을 말아 쥘만하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흐렸다.

"아하하.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요."

"내 본래 오른팔을 대지모신에게 공양하여 얻은 이 오른팔은 자비를 상징하는 큰손이오! 그런데 이토록 분노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군!"

"그, 오른팔을 막 휘두르다가 저주가 좀 걸려서…."

"저주? 흠. 그게 끝이 아니라고 하는데? 뭐 오른팔로 요리를 해먹으려고 했거나, 아니면 제물로 바치기라도 한 거요?"

오른팔이 기억력도 좋네. 회귀자보다도 더 잘 기억하는 것 같은데.

오른팔을 속일 자신이 없었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핀레이라는 어떤 미친 흡혈귀가 날뛰는 바람에, 그 오른팔의 힘을 빌렸죠. 피와 어둠을 뭉쳐 만든 사역자를 여럿 처치했어요."

"그 정도면 제물 맞지 않소?"

"아, 그런가?"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웃자, 나를 따라 웃은 불사자가 호탕하게 제안했다.

"좋아! 선생, 한 대만 맞으시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미안. 안 돼요. 잘못 맞으면 죽어서."

"살살 때리겠소! 그러지 않고서야 내 오른팔의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군!"

"오른팔 재량이잖아요? 댁이 때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살살 때려요?"

"그런가? 하하! 그러면 알아서 살살 맞으시오!"

나와 불사자가 하하호호 담소를 나눌 때였다.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티르가 분개하며 외쳤다.

"웃기는 소리."

그녀가 갖는 영향력은 무저갱 그 누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마디에 땅이 울리고, 그림자가 들썩이며, 어둠이 불길하게 흔들린다.

불사자조차도 겁을 집어먹고 입을 텁 다물었을 때, 티르가 무저갱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휴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러한 수단을 택했을 뿐이다! 그러니 탓할 거라면 나를 탓하라, 토인."

그림자 군단이 티르의 앞에서 비켜났다. 똑같은 모양을 빛으로 비춘 듯,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어둠의 군세를 뒤에 남겨둔 티르가 불사자 앞으로 나섰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눈동자가 불사자를 향했다.

"정 누군가를 때리고 싶거든, 나를 때려라. 그것으로 기분이 풀린다면 내가 대신하마. 다만, 휴에게 위해를 끼치고자 한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을 것이다. 그것이 너를 영멸하는 것이라도."

걸어다니는 군세이자, 모든 흡혈귀의 시조. 그림자의 여왕.

그녀의 피는 지배력이 가득 담긴 권능이며, 정기를 흡수해 불사성을 유지하는 토인에게 있어선 재생을 막는 저주나 마찬가지.

전설 속 티르칸쟈카를 앞에 둔 불사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웃었다.

"하하!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였소? 그렇다면 인정이지!"

그 직후.

"여, 연인?"

무저갱을 잠식하려는 듯한 거대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일렁이던 어둠이 잠잠해졌고, 흔들거리던 대지도 숨을 죽였다. 그림자 군세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땅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곳에 남은 건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녀뿐이었다.

무너지는 어둠의 군세 속에서 티르는 불에 덴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며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폈다.

"무, 무슨 헛소리냐. 휴, 휴. 저 경박한 토인을 보아라. 별, 희한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모두가 티르의 행동을 어이없이 지켜볼 동안, 불사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소리쳤다.

"참 귀여운 연인이로군! 좋소! 오른팔과는 내가 따로 연락해서 잘 해결하겠소! 오른팔도 이 정도는 이해할 것이오! 어떻소, 나의 공양신이여?"

그동안 불사자의 턱을 만지작거리던 오른팔이 못마땅한 듯 손가락으로 짧게 동그라미를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튕기듯 날아가서는 어깻죽지 아래에서 침묵했다.

불사자가 개운하게 소리쳤다.

"오른팔도 이해한다고 하오! 운이 좋았군, 선생!"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운은 당신이 좋았죠. 이해 못 했으면 이해할 때까지 티르가 이해심을 물리적으로 주입해주었을 테니까요."

"하하! 틀린 말은 아니로군!"

"뭐, 어쨌든 그렇게 되었어요. 허락도 없이 휘둘러서 미안하다고 오른팔에게 전해주세요."

"사과가 조금 늦은 것 같소만!"

"사과할 대상이 오른팔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직까지 그 정도 분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갖지 못했거든요."

"하하하! 이해하오!"

애초에 불사자는 나를 때릴 생각이 없었다. 진짜 분노했다면 나에게 달려들었겠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 불사자는 그만큼이나 피해에 둔감하다.

칼에 베여도, 꼬챙이에 찔려도. 심지어 팔이 잘려도. 그건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스킨십과 다를 게 없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육체 접촉이라는 점에서.

즉, 그는 누군가 한 대 때리거나 상처를 입혀도 하하 웃으며 가볍게 넘어가는 호인(好人)인 것이다. 그와, 그의 부족이 간직한 명예를 건드리지 않는 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안전하리라.

그러니까 장교를 상대로도 유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내가 깨운 거기도 하다.

"자, 그러면 본인은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소!"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일 잘 되기를 바랄게요."

"그럼 나중에!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시오!"

"그쪽도."

팔을 크게 휘적인 불사자는 나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장교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마당에까지 다 흘러나왔다.

"오. 조금 전, 본인은 진짜 죽을 뻔했소! 아무래도 이쪽으로 지나가기는 곤란해 보이는걸!"

불사자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장교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라쉬. 너는 시조의 단순한 으름장마저도 견뎌내지 못하는 건가?"

"물론이지! 시조는 진짜, 더럽게 강하다오!"

"그게 당당하게 할 말인가!"

'시조나 짐승의 왕처럼, 초월적으로 강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의지가 될 줄 알았건만…!'

당연하다. 회귀자, 짐승의 왕, 흡혈귀의 시조가 있는 땅에서 고작 '불사'라는 특징 하나는 내세우기 뭣한 명함이다. 아니, 애초에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나름의 불멸성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들.

고작 팔이 뜯겨서 방치된 불사자는, 그들을 상대하기엔 좀 끗발이 떨어진다.

물론 불사자는 그 사실을 별로 유감스러워하지 않았다. 자연 재해보다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 친구의 부탁이라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오! 저 아름다운 소녀는 일견 무해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혈귀의 시조! 일개 전사에 불과한 내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

그의 입으로 확언까지 받자, 장교는 부들거리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쉽게 꼬리를 마는 모습을 기대한 게 아니야…! 이딴 게 조력자라고? 이래서는 최소한의 억제력조차 못 돼!'

"뭐, 이 한 몸을 불사르면 조금 간지럽게야 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내 몸은 저주받아 다시는 살아날 수 없겠지! 하하, 가능하면 서로 닿지 않는 게 좋소! 물론 나뿐만 아니라, 중령도 마찬가지오!"

불사자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결국 장교도 감정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됐다. 애초에 시조와는 대립할 생각은 없었어. 가능하면 그 노역자에게도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었고."

"노역자? 혹시 선생을 말하는 거요?"

"선생? 노역자는 노역자일 뿐이지 않나. 그건 무슨 뜻이지?"

"그는 교관이지 않소? 본인을 소개할 때 자신을 교관이라 칭했소.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선생 아니오?"

"그 자식, 교관까지 사칭한 건가…!"

벽너머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장교는 내가 보이지 않음에도 나를 향해 온갖 저주를 쏘아냈다.

'괘씸하지만 시조가 저렇게 싸고도는 이상, 내가 그에게 손댈 방법은 없다. 진정해, 칼리스. 쓸데없는 부분에 심력을 쓰지 말자.'

흡혈귀 방패는 오늘도 든든했다.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장교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는 불사자에게 말했다.

"본관이 말했듯이, 목표는 개의 왕이다. 개의 왕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그 개 아가씨 말이지!"

"그래. 개의 왕이 본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노역자가 개의 왕을 부르면 개의 왕은 곧장 그의 곁으로 달려가버린다. 어디에 있는 관계없이."

"오호! 그런 능력이 선생에게 있소? 꽤 부러운 능력이구려!"

"이건 상당히 중요하다. 만일 개의 왕이 계속 그런 태도라면 계획이 통째로 어그러져."

만물의 영장의 목적은 짐승의 왕을 손에 넣는 것. 그녀가 탄탈로스에 잠입한 이유도, 개의 왕 아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고작 중령에 불과한(어디까지나 탄탈로스 거주민에 비해) 그녀가 첨병으로 온 이유. 그것은 개의 왕을 확보한다는 목표 자체는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충성스러운 개의 왕을 꼬드기기 위해선 눈을 맞추고 말만 할 줄 알면 되었기 때문에, 칼리스 중령은 그것을 한 번 시험해보려고 했다.

그러다 '나'라는 난관과 마주했다.

'우리의 계획에, 개의 왕이 저항한다는 가정은 없었다. 개의 왕은 인간에게 충성스러우며, 특히 군국과 맹약을 나눈 현재 우리가 요구한다면 어쨌든 따라왔을 테니. 하지만…. 만일 그 노역자가 끝까지 우리를 방해한다면, 우리에겐 방법이 없어.'

짐승의 왕을 힘으로 강제로 구속하고 데려간다? 그야말로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그럴 힘이 있으면 왜 짐승의 왕을 이용하려고 드는가? 그냥 그 힘으로 세상을 손에 넣지.

개의 왕을 노리는 이유는, 그만한 힘을 쉽게 다룰 수 있어서.

하지만 세상은 보편적이라, 내가 다루기 쉽다면 타인도 다루기 쉬워하는 법이다.

"그럼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부탁하면 되지 않소? 이러이러해서 개 아가씨가 필요하니, 양보해달라고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게 되었으면 만물의 영장이 비밀결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장교가 입을 다물자, 불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결국 선생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구려! 언제나 느끼지만, 누군가보다 잘나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라오!"

"그는 별것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된 모양인지…. 그에게는 지금…."

시조 티르칸쟈카.

장교는 그녀의 힘을 상기했다.

이 모든 땅을 망라하는 어둠과, 그것을 다스리는 시조의 힘. 그건 정녕 그것만으로도 나라를 물리적으로 기울게 할 수 있는 힘이다.

'일개 노역자… 그를 치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의 뒤에 있을 시조는 결코 협상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조와 싸우는 건….'

장교는 판단을 끝마쳤다. 만물의 영장이 모든 힘을 투사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이 무저갱에 한해선.

'불가능하다. 차라리 해가 뜨는 지상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시조와 맞서 싸우는 것은…자살행위야.'

딱. 딱.

장교의 턱이 떨렸다.

임무는 실패할 것이다.

왜냐면, 내가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종소리에, 그리고 내가 제공하는 오락에 길들여진 아지는, 만물의 영장이 부른다고 쫄래쫄래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배제하기엔, 내 뒤에 있는 시조가 너무 두렵다.

어쩌면,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한다면, 이 일의 난이도를 실감한 만물의 영장은.

'나를 버림말로 삼고…. 이 일에서 손을 뗄 수도.'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소각되기 직전에 놓인 아버지의 유산을 얻어냈다.

만물의 영장과 손을 잡고,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며 그들이 제공한 공훈을 손에 넣었다. 훈장도 두 개나 받았다.

그렇게, 4레벨 시민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칼리스 중령의 인생이.

단 한 번의 불운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장교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정모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이를 악물고는 되뇌었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비록 지금 내가 가진 게…. 못미더운 조력자라고 하더라도.'

굳게 다짐한 장교는 천천히 움직였다.

EP.97 약속과 고집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불사자와 장교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둘은 약간의 탐색 끝에 1층 한구석에서 배를 깔고 졸고 있는 아지를 발견했다. 그것까지는 수월했다.

문제는, 딱 그것만 수월했다는 점이다.

"오오! 개 아가씨!"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인다. 인기척을 느낀 아지가 실눈을 뜨며 자기를 부르는 인간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고는 곧장 으르렁거렸다.

"으르르."

보이는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낯섦조차 아니다. 장교와 처음 만났을 때도 저것에 비하면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정겨웠다.

이 으르렁거림은 오직 불사자를 향한 것. 근원적인 거부감으로 내뱉는 경계의 기색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장교가 불사자를 바라보았다.

"교육생. 설마."

"하하! 생각해보니, 내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이러했소! 아무래도 짐승의 왕은 우리 종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오!"

"으르릉."

토인.

부족 전체를 대지모신께 공양하여, 대지모신과 가장 가까운 몸이 된 불사종족.

그 이름답게, 토인의 살과 피는 흙과 용암을 닮았다. 살갗은 단단하나 뭉친 진흙처럼 뻣뻣하고, 피는 뜨겁게 흐르나 식으면 몸속에서 굳는다. 온누리를 제 육신으로 삼는 대지모신처럼.

그렇기에,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 흡혈귀보다는 덜하겠지만… 아지는 그들에게 친근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괜찮소! 본디 처음 길들이는 짐승은 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마련! 이것을 뛰어넘고 교감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짐승을 길들인 지혜 아니겠소!"

불사자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성큼성큼 아지를 향해 다가갔다.

"개 아가씨! 자, 우리 친분을 다져봅시다!"

"컹."

콰아앙.

아지가 신경질적으로 불사자의 오른팔을 후려쳤다. 흙더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그의 오른팔이 기이한 각도로 뚜둑 꺾였다.

순식간에 역관절의 사나이가 된 불사자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남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서고 나서야 아지는 으르렁거림을 그만두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환한 그를, 장교는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봐."

"하하하하! 이번 짐승은 대단히 까탈스럽군! 유감이오만, 친구!"

불사자가 덜렁이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나는 안 될 것 같소!"

"그러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다!!"

결국 폭발한 중령이 성난 기색으로 불사자에게 다가갔다. 불사자는 어긋난 오른팔을 다시 맞추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하하. 이 부분은 명실상부한 인간인 중령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그래도 개 아가씨는 개니까 중령을 더 잘 따를 것…. 어억!"

딱딱한 군홧발이 그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불사자는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는 허리를 굽혔다.

무능한 이를 질타한 장교는 신음하는 불사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믿을 수가 없군. 이 무능한 자를 위해 세계수의 잎사귀까지 썼다니."

"하하! 할 말이 없소!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부족은 최소한 먹고 튀지는 않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본관의 눈앞에서 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이 무능한 이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조력자의 조력이라고는 곁에서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것이 전부.

언제나 그랬듯이, 이제 임무의 성패는 순전히 장교의 능력에 달렸다.

장교는 그를 지나쳐 아지에게로 향했다.

"비켜라. 내가 하겠다."

"부탁하오! 내가 못다 한 일을 꼭 이루시오!"

응원인지 조롱인지 모를 소리를 뒤로한 채 장교는 아지의 앞까지 다가갔다. 불사자는 냉정하게 쳐낸 아지도 장교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장교는 아지의 앞에서 소리쳤다.

"개의 왕 강아지. 일어나라!"

"멍!"

아지가 벌떡 일어났다. 장교는 그보다 조금 아래에서 생글거리는 아지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라, 개의 왕. 본관은 군국의 명령에 따라 탄탈로스의 총책임자로 부임한 군국의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다."

"멍? 본관? 먹는 거야?"

"…나는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나서야 아지는 장교의 말이 자기소개라는 것을 이해했다. 아지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즐겁게 화답했다.

"멍! 반가워! 나, 강아지야!"

"…도대체 이번 대 개의 왕을 명명한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이름 지은 거지? 골라도 하필 이딴 이름이라니."

불만스레 중얼거린 장교는 다시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는 말했다.

"강아지."

"멍! 내 이름! 나 불렀어?"

"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너에게 요구한다."

"멍…."

요구라는 단어를 듣자 아지는 순식간에 귀와 꼬리를 늘어뜨렸다.

"요구, 싫어. 귀찮아."

"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인간이고, 너는 개의 왕. 너는 나의 말을 따라야 한다."

"멍…."

아지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삐딱하게 섰다. 장교는 이 불량스러운 태도를 탓해야 할지, 아니면 그러면서도 들어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장교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장교가 명령조로 말했다.

"강아지. 본관은, 아니, 나는 너에게 요구한다. 앞으로 내가 너를 부를 시, 너는 나를 곧장 따라와야 할 것이다."

"멍. 알았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장교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지의 대답이 너무 시원스러운 나머지 너무 가볍게 느껴졌던 탓이다.

장교는 확인차 말을 덧붙였다.

"…만일, 다른 인간이 너를 부른다고 하여도, 그것을 무시하고 나의 말을 따르도록."

"멍? 그건 안 돼."

그리고 거절의 뜻 역시도 그만큼 빠르고, 동시에 단호했다.

장교는 이를 악물었다. 이 말인즉슨, 만일 그 노역자가 장교를 방해하고자 마음먹고 방해한다면…. 개의 왕을 결코 탄탈로스 바깥으로 빼낼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장교가 말했다.

"어째서지? 너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터!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듣지 말라고 명령했으니, 맹약에 따라 너는 그들의 말을 무시해야 한다!"

"머엉…."

"똑바로 대답하라. 약속을 지켜!"

"약속, 그런 거 아냐…."

"아니, 너는 따라야 해!"

사람은 마주한 상대의 반응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기 마련이다.

아지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보듯 장교를 바라보았고, 그 차분한 눈동자와 마주한 장교는 자기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교에겐 지금 힘도 없고, 명분도 없다. 가진 건 아주 오래 전, 인간이 개와 나누었던 약속 하나뿐. 정작 정체도 모르는 그것에 기대어 개의 왕보고 명령에 따라달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장교가 처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사이, 아지는 떼를 쓰는 장교를 달래듯이, 혹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 인간의 말 따라. 그건 복종이 아니야. 믿음이야. 오래전 나누었던 약속처럼, 내가 인간을 따르면, 믿고 몸을 맡기면, 그만큼 기대어주리라 했던 소망이야."

"그래! 그러니 너는 나의 말을…!"

"너, 인간. 하지만, 너만 인간은 아니야. 멍."

수없이 많은 인간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누구나 알지만 떠올리기 꺼려하는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 아지는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멍. 너는 내 친구지만, 나, 네 친구 아니야. 너… 나, 싫어하잖아."

장교의 몸이 덜컥였다.

고작 개 따위에게 본심을 들켰다. 심지어, 개의 왕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배려해주기까지 했다.

힘으로도, 성품으로도 패배한 것이다.

그 사실은 장교의 자존심을 갉아먹었다.

만물의 영장은 인간 우월주의자. 수인조차도 인간보다 한 수 아래로 보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증오를 가지고 짐승을 대한다.

그 감정의 원동력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더불어 그날 겪었던 짐승의 흉성.

특히,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짐승에게 잃은 칼리스에겐, 이러한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종류였다.

"닥치고 내 말에 따라!"

장교가 이성을 잃고 소리쳐도 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큼직한 눈망울에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고는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것이 영 거슬렸던 장교가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그딴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짐승 따위가!"

장교가 눈을 돌렸다. 탄탈로스의 수감실, 죄수를 구속하기 위한 도구가 가득한 이곳에는 그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중 장교의 눈에 뜨인 것은 중간이 끊어진 채 바닥에 늘어진 쇠사슬이었다. 냉큼 쇠사슬을 집어 든 장교는, 그것을 위협적으로 당기며 아지에게로 걸어갔다.

장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한 불사자가 그녀를 만류했다.

"어, 중령. 잠시. 그건 좀 심하지 않소? 다시 생각해보는 게…."

"닥쳐, 무능한 게! 네가 제대로만 했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았어!"

불사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영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장교는 쇠사슬로 고리를 만들고는, 여전히 무저항으로 서 있는 아지에게 던졌다.

차라랑.

아지의 목에 쇠사슬로 급조한 고리가 걸쳐졌다. 쇠사슬이 목을 조이는데도 아지는 눈살만 찌푸릴 뿐 반항하지 않았다. 사슬이 아지의 목을 두 바퀴 감을 때까지, 아지는 말없이 장교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인간에게 반항조차 못하는 개 따위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욕을 퍼붓고, 목에 사슬까지 감아놨음에도 장교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를 따랐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임무에 협조적이었으면, 그녀를 순순히 따랐으면, 그녀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게끔 도왔다면.

고작 개 따위가 그녀의 뜻에 반한 게 문제다.

"너 같은 짐승은 목줄을 채우고 끌고 다니는 것으로 족해! 왕이랍시고 인간의 몸뚱어리를 입어봤자, 결국은 짐승에 불과하지! 말로 해결하려는 게 잘못이었어. 처음부터 이랬어야…!"

그렇게 응어리진 기분을 개의 왕에게 쏟아내려던 차.

…천검기.

복도 끝 공간이 일렁거리며, 무저갱에서는 존재할 리 없는 바람이 불었다.

그 뒤를 이은 건,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살기.

곧이어 바람의 칼날이 1층 복도를 질주했다. 널찍한 공간을 가득 메운 채, 사방을 갈아엎으며 장교를 향했다.

정확히는, 사슬을 움켜쥔 장교의 오른팔을 향해.

그 살의를 장교가 알아차렸을 땐, 검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아직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장교가 멍하니 있던 사이.

"중령!"

다급히 뛰어 온 불사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의 칼날이 그를 난자했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커다란 상흔이 그어지고, 뒤따른 충격파가 그의 살가죽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예기를 잃은 바람이 그의 몸을 거세게 후려치고는 고삐 풀린 말처럼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불사자는 작은 칼날로 전신을 난도질당한 모습이 되었다.

아무리 그가 불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눈앞에서 사람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고 평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장교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쉬…!"

그러나 불사자 라쉬는, 끗발이 조금 떨어진다고 하나 팔이 잘려나가도 멀쩡했던 괴물.

퉁, 하고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사자의 몸이 잠깐 휘청거렸으나, 불사자는 곧이어 오른발을 내려찍으며 기합을 내질렀다.

"흡!"

아직 정기가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불사자가 힘을 끌어올리자 그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찢어진 근육이 제 모습을 되찾고 너덜너덜해진 살가죽이 다시 매끈해졌다.

단숨에 몸을 재생시킨 불사자는, 주먹을 꽉 쥐고는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거, 다짜고짜 칼질은 좀 너무하지 않나, 소년?"

회귀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불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눈으로 오로지 아지와 그 목에 걸린 사슬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사슬."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니고,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으나. 그 미성이 귓가에서 말하는 듯 똑똑히 들려왔다.

"내려놔."

회귀자가 절제된 살기를 풍기며 말했다.

EP.98 걸어오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