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다재다능 (3)
* * *
"일단 정산까지 하고 쉬실까요? 우선권이 있으신데, 당연히 이걸 선택하실 듯해서."
전리품 정산 과정에서 마진호가 강후에게 내민 것은 시가 100억 원 상당의 주황색 마석이었다.
에닥스가 드롭한 마석이 주황색 하나, 노란색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물론 우선권을 양보한 그루 길드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상황이기도 했다.
강후는 혼자 100억 원을 챙겼고, 나머지 아홉은 10억 원짜리 마석을 나눠 분배하게 됐으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에닥스를 사냥하고 나서도 이렇게 체력 관리가 잘 된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일단 피스치스 구간에서 진을 다 빼고. 거기에서 피로가 누적된 상태로 여기까지 오죠."
"한 번 더 쉽니까?"
"그건 너무 모양이 빠지니까 에닥스까진 잡습니다. 대신 그러고 나면 무조건 12시간 휴식이죠."
마진호가 뒤에서 쉬고 있는 팀원들을 보며 웃었다.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휴식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모두 넝마가 되어서, 바닥에 드러누워 쉬기 바빴을 타이밍이다.
강후는 에닥스에게서 강탈한 패시브 스킬, 순풍의 속삭임이 가장 큰 만족이었다.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고도 스탯을 영구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메리트다.
나중에는 모든 부위에 아이템을 착용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아이템으로 추가 스탯을 끌어올리는 작업이 매우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그 시점부터 착실하게 레벨업으로 투자해 온 스탯과 이런 영구 스탯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마진호가 물었다.
"이런 식으로 공격대에 용병으로 자주 나오신 건가요?"
"아뇨. 출혈 딜러로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예?"
마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행이라고 하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강후의 움직임이 너무 깔끔했기 때문이다.
"솔플이나 소규모 인원 공략을 자주 해서, 몬스터와 일대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게 크죠."
"아. 공략 인원 자체를 최소화하는 쪽을 선호하시는군요."
"경험치를 너무 많이 나눠 먹게 되면 맛이 없잖아요."
"아, 그건 인정합니다."
마진호가 웃었다.
어쨌든 출혈 유지를 주목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얘기였다.
어떤 쪽으로 생각해도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기는 했다. 강후의 모든 움직임이 너무 깔끔했기에.
"요즘 암살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신강후 님이 완전히 바꿔 주셨습니다."
"좋은 암살자 구하기가 어렵긴 하죠. 센스 있는 힐러 구하기 어렵듯이."
"그러게요. 다들 반신반의했는데, 지금은 아마 신강후 님의 팬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진호가 뒤를 쓱 돌아보자, 다들 강후를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웃기도 하고, 강후에게 힘껏 손을 흔들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칭찬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공격대 대미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좋아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화끈한 맛은 있네요."
"저희 길드 최정예들만 모은 겁니다. 그루 1팀이라고도 부르죠."
"그루 1팀이라...."
"길드 마스터, 부 길드 마스터가 오시면 저는 바로 2팀으로 쫓겨납니다. 하하."
마진호의 말대로 그루 길드의 서열 1위, 2위이자 동시에 친자매이기도 한 두 사람은.
마진호처럼 검을 다룰 줄 아는 검사이자 메인 탱커였다.
그가 거구의 몸과 탄탄한 방어력으로 묵직하게 전장에서 중심을 잡는 스타일이라면.
두 사람은 현란한 스킬 활용과 연계를 바탕으로, 몬스터를 늪처럼 잡아 두는 쪽에 속했다.
도발뿐만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스킬을 활용해 몬스터 무리의 기동성을 크게 낮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둔화 지대를 만든다거나, 몬스터에게 이동 능력 저하 디버프를 거는 식으로.
그녀들을 지칭할 정확한 단어가 없기에, 보통은 별칭으로 '디버퍼 탱커'라고 불렀다.
'만나 보고 싶군.'
특이한 형태 혹은 능력을 가진 헌터는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원작에서 두 자매는 그저 그루 길드의 주인으로서 간단히 언급만 되고 지나갔었기에.
이번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디버퍼 탱커라. 꽤 재밌을 듯했다.
* * *
그 시각.
콰앙!
서로 술잔을 기울이던 형제 중, 동생이 병과 잔을 올려놨던 탁자를 내리쳤다.
강화된 목재로 만든 나무 탁자였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반토막이 났을 것이다.
"왜 이리 흥분을 하고 그래."
"형은 화가 안 나? 이번에 정리된 우리 이클립스 내부 서열도를 보라고. 이게 정상이야?"
"...X발."
애써 내용을 외면하고 있던 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세 살 터울의 친형제인 두 사람의 이름은 최진호, 최진수. 이클립스의 간부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간부도 급이 나뉘는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급이 좀 떨어지는 하급 간부로 분류됐다.
던전 라이센스 관리라는 한직에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
형인 최진호가 서열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위에 있던 진효영이 죽었는데도 우리 인사이동은 왜 적체 상태냐는 말이지...."
"하다못해 추적자 부대 관리라던가, 추적자 5팀이나 6팀장 자리는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둘은 불만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상태였다.
예전에 차소희가 죽었을 때도, 간부 전반의 보직 이동이 있었다. 당연히 한 단계 상승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최진호 형제는 보직 이동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아래에 있었던 간부들이 차소희의 죽음을 계기 삼아 위로 올라갔다.
즉, 형제의 자리를 제치고 사실상 두 계단씩의 서열 상승을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참았다.
대장인 강동현이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아래 등급의 간부로 부리던 헌터들이 이제는 윗선으로 올라가 버린 상황이었다.
"X발. 한 번에 두 명이 뒈져야 우리 자리가 나는 건가?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그냥 대장한테 가서 들이박을까? 우리가 이클립스에 기여한 게 있잖아!"
"됐어. 강동현 대장 앞에 가서 쓴소리하고 살아남은 놈 봤냐?"
"그러면 언제까지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어야 하는데? 형, 우리도 딸린 식구가 있잖아."
최진수가 말한 '식구'는 가족이 아니라, 두 형제가 부리는 부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어쨌든 자기들을 형님이랍시고 따르는 부하들이 있는데, 이래서야 위신도 안 서는 것이다.
잠시간 적막이 흐른 뒤.
입술을 질끈 깨문 최진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수야."
"어?"
"아무래도 우리가 현상금 사냥꾼이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무슨 현상금?"
"요즘 대장 관심이 온통 신강후 그 망할 새끼에게 가 있잖아. 그놈을 죽이면, 포상금에 아이템에 승진까지. 삼위일체야."
"형. 만만한 놈이 아냐. 차소희도 죽고, 진효영도 죽었다고. 우리보다 센 애들이었어."
"멍청아. 그년들은 자기들 잘난 맛에 혼자 움직였잖아. 우리는 다 움직이면 머릿수만 스물이야."
"음...."
"적당히 총알받이를 갖다 쓰면서 우리 주특기를 살리면, 신강후라고 해도 별수 없어."
"애들을 좀 던져주고, 마탄으로 저격하자?"
"그렇지. 암살자가 아무리 맷집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헤드샷 한 방이면 끝이야."
"그래. 쪽수에는 장사 없지. 타이밍은 한 번이면 되고."
최진호, 최진수는 둘 다 거너였다. 정확하게는 반세영처럼 장거리 저격이 전문인 저격수였다.
"그래. 살길을 우리가 뚫는 게 맞지. 매번 떨어질 감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애들 준비시켜. 던전 관리는 신입 한두 명만 붙여놔도 충분할 테니까."
"희생이 좀 있을 텐데 괜찮을까?"
"X신아. 그렇게 부하들 아끼다가 우리까지 도태되면, 그땐 우리도 죽어."
"...빌어먹을."
"준비하자. 신강후 그놈, 자주 출몰하는 곳부터 정보를 수집해 보자고."
그렇게 두 형제가 움직였다.
강동현이 이클립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한 척살 명단은 분명 파급력이 있었다.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최진호 형제였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만은 아니었다.
대장의 총애를 얻고 싶은 이클립스의 헌터에게 척살 대상자는 정말 매력적인 먹잇감인 것이다.
* * *
앞서 미들 보스 몬스터 구간까지 별 탈 없이 진행된 덕분인지.
이후에 메인 보스 몬스터 구간까지도 아무 사고 없이, 원사이드 게임으로 공략이 진행됐다.
얼마나 공략이 잘 풀렸냐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체력, 마력 포션을 한 번도 안 썼을 정도.
매번 가져온 포션은 다 썼었다는 마진호의 말과 달리, 이번에는 포션 가방을 연 적이 없었다.
레벨도 벌써 113이었다.
출혈 셔틀만 했다면 기여도가 낮아 경험치 쪽에서 재미를 거의 못 봤겠지만....
강후는 공략하는 내내 적극적으로 대미지 딜링에 임했고, 그만큼의 결과를 얻었다.
이런 흐름이면 보스 몬스터까지 잡을 경우, 잘하면 레벨 120까지 기대해 봐도 될 상황.
고레벨 던전에서 무려 레벨 10 이상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레벨 던전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으면, 경험치를 티끌만큼도 얻어갈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이 노력의 산물인 만큼, 불로소득으로 얻은 부분은 없다.
"하아.... 이제 가장 지루하고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네요. 글로리아."
마진호가 정면에 있는 보스 몬스터를 가리켰다.
강후도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마진호가 한숨을 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글로리아는 신장이 5m쯤 되는 거인형, 여성형 보스 몬스터였다.
글로리아의 특이한 점은 눈 전체를 안대로 가린 채, 허공에 떠 있다는 점이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진행했었던 사전 브리핑에 따르면,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고는 한다.
타락한 세상을 더 이상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글로리아가 스스로 눈을 파버렸다고 했던가?
어쨌든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글로리아는 세상을 다른 형태로 보게 되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체적으로는 공격 능력이 '전혀' 없는 보스 몬스터였다.
비슷한 케이스를 찾자면.
예전에 강후가 정유리와 함께 공략했었던 보스 몬스터 레간트를 닮았다.
당시에 레간트는 강후의 손길이 닿자마자 소멸됐고, 그때부터 던전의 붕괴가 시작됐었다.
레간트에게는 공격 능력이 없었지만, 던전이 붕괴되는 것이 일종의 공격 방식이었다.
글로리아는 조금 달랐다.
가까이 접근만 하면 손쉽게 죽일 수 있는데,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 영역이 문제였다.
얼마나 문제인가 하면, 까딱 잘못 접근했다가는 즉사 공간에 걸려 죽을 수 있었다.
대미지를 입거나, 부상을 입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즉시 죽는 것이다.
보호 영역 안에 즉사 영역이 수시로 바뀌면서 접근하는 헌터들을 위협하고.
더 나아가 영역 외곽에서 즉사기 형태의 공격이 불규칙한 패턴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것을 마진호는 '살인 광선'이라고 불렀는데, 스치기만 해도 몸이 한 줌의 재가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글로리아 공략은 항상 원거리에서 꾸준히 대미지를 쏟아붓는 형태로 진행했다고 했다.
출혈 유지도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오랜 시간, 스킬만 쏟아부어야 하는 노동에 가까운 작업.
그래서 다들 장기전을 대비해 체력을 보충하는 고열량의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강후만이 아까부터 계속 글로리아와 주변을 살피며, 시선을 온통 집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마진호가 옆에서 말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마진호가 말했다.
"무슨 생각 하고 계신가요? 이 녀석은 출혈 유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강후가 물었다.
"즉사 공간만 돌파하면... 글로리아 자체의 맷집은 정말 약한 편인 거죠?"
그 순간, 마진호는 생각했다.
혹시 이 '미친' 암살자가 예상하지도 못한 색다른 공략 방법을 떠올린 것은 아닌가 하고.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을 해내는 강후이기에 자연스럽게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138화 다재다능 (4)
* * *
약 10분 정도.
집중해서 글로리아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살피던 강후가 드디어 침묵에서 벗어났다.
강후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마진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즉사 영역은 응급 상황 대처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본 겁니다."
"...예?"
"계산이 어느 정도 서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단독으로 트라이해 봐도 됩니까?"
강후의 물음에 마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후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설마 혼자 글로리아를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애초에 그럴 수 없게 설계된 녀석입니다."
"정공법은 원거리에서 계속 스킬 공격을 퍼부으면서 서서히 죽이는 형태잖아요. 그렇죠?"
"맞습니다."
"다만 글로리아 자체의 맷집은 상당히 약한 것으로 보이고요. 둘러싼 주변 방어 기제가 문제지."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면 접근만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싶어서요."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정공법을...."
"편하게 예스, 노만 말씀해 주세요. 혼자 도전해 봐도 됩니까? 안 됩니까?"
강후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마진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잔뜩 찍혀 있었지만.
정작 도전해야 할 당사자는 느낌표가 진하게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뭐가 보이는 걸까?
"아직 저희는 정비 기간이고 하니, 시간이야 많이 남아 있긴 합니다만...."
"그럼 제가 먼저 실례해도?"
"예. 문제없습니다."
파앗!
마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후를 중심으로 출발한 다섯 개의 그림자가 공간을 갈랐다.
프슷!
그중 그림자 하나가 살인 광선을 맞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마진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림자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터.
그것보다 강후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에, 그냥 허세나 좀 떨어본 건가 싶었다.
생각이 있었으면 진즉에 자신이 직접 움직였겠지. 겁이 나니 그림자를 보낸 것일 터다.
한데 바로 그때.
파앗!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에 강후는 가장 가까운 그림자가 있던 위치로 자연스럽게 이동해 있었다.
사아아앗!
이어서 살인 광선이 사방팔방에서 대중없이 영역 안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미리 위치를 조정해 뒀던 그림자와 강후의 본체에는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파앗!
다시 한번, 강후가 다음 위치에 있는 그림자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방금 강후가 있던 자리에 또 한 번의 살인 광선이 훑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저런 식으로 10m, 20m를 단숨에 넘어가면서 패턴에 맞게 위치를 잡는 건가?"
방금까지 꽉 다물어져 있던 마진호의 입이 벌어졌다. 어느새 강후는 거리를 절반이나 좁힌 상태.
그 와중에도 남은 그림자는 부지런히 움직였고, 몇 차례의 살인 광선을 능숙하게 피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강후 역시 본체가 위험에 빠질 만한 타이밍에는 절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사실 살인 광선도 문제지만, 눅눅하고 축축한 지면은 그 위에서의 이동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래서 이동할 경로를 잡는다고 해도, 깔끔하게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발이 밑으로 푹 빠진다거나, 혹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미끄러질 우려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 광선이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바로 저승행인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그런 귀찮은 과정을 그림자를 활용한 위치 전환으로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뭔데, 갑자기?"
"대장,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글로리아에게 가는 약 100m의 직선주로를 대뜸 횡단 중인 강후의 모습에 팀원들도 놀랐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거겠거니 했는데, 자세히 살피니 정말 강후가 글로리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어? 눈에 보는 대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러다가 살인 광선이 스치기만 해도 죽잖아요!"
"다 얘기했다. 그런데도 간 거다."
"아니, 저게... 되나?"
다들 주먹을 꽉 움켜쥐는 모습이었다.
앞서 살인 광선에 희생된 동료들의 최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때도 자기는 안 죽을 자신 있다며 호기롭게 횡단하다가, 비명횡사했던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시체? 수습할 수 있는 흔적 자체가 없었다.
바로 그때.
팟! 팟!
최적의 타이밍을 잡은 강후가 두 번의 그림자 활용으로 순식간에 글로리아 앞까지 도착했다.
안대를 쓴 채, 마치 명상에 잠긴 듯이 서 있는 글로리아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보스 몬스터로 구현이 된 것 같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영원히 잠든 존재.
하지만 그녀를 지켜주는 주변의 수호 영역이 절대 건드릴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강후가 뒤를 돌아보자, 만화처럼 턱이 아래로 쭉 내려간 마진호의 입이 보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고생을 하며 잡아 왔던 글로리아가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상상도 못 해서다.
생각이야 몇 번이고 했었다.
접근하면 정말 쉽게 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하지만 생각이 현실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강후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스킬로 손쉽게.
힘껏 도약 스킬을 전개하며 글로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탄 강후가 단검을 움켜쥐었다.
완전 무방비 상태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글로리아가 예측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기에.
그리고.
푸우우욱!
대참수의 파괴력이 제대로 실린 강후의 단검이 글로리아의 왼쪽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심근을 찢고, 그 안까지 균열을 내버린 단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글로리아의 목숨을 앗아갔다.
[레벨이 대폭 올라 130이 되었습니다.]
[대상으로부터 공명의 시야 스킬을 성공적으로 강탈했습니다.]
"이거지."
짜릿한 레벨업의 쾌감에 강후의 코끝이 벌렁거렸다.
미들 보스 몬스터 에닥스를 잡았을 때, 예상했던 최종 레벨 스코어는 최대로 잡아 120이었다.
한데 경험치를 독식하는 바람에 그 이상으로 레벨이 뛴 것이다.
강후의 기여도 100%. 다른 헌터들의 기여가 티끌만큼도 없었던 완벽한 1인 식사였다.
폭발적인 레벨업.
공명의 시야라는 스킬의 강탈.
호재는 이것만 있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고 숨이 끊어진 글로리아가 한 줌의 재로 산화하면서 남기고 간 것은.
"빨간색 마석이 나왔어요?"
그 정체를 알아본 마진호의 외침대로 빨간색 마석 반 개와 주황색 마석 1개였다.
빨간색 마석은 1개의 기본 단가가 1,000억 원을 호가한다.
즉, 반개라고 해도 시장 가치가 무조건 500억 원은 확정인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
'전리품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하얀 전쟁 덕분에 수지 맞았군.'
매번 심각하게만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하얀 전쟁이었다.
하지만 하얀 전쟁 때문에 생긴 용병 품귀 현상으로 덩달아 출혈 딜러의 가치도 올라갔고.
그 덕분에 출혈 딜러가 꼭 필요했던 공격대 입장에서 전리품 우선권까지 제안을 해야 했다.
사실 주황색 마석 하나만 나왔어도 대박이라고 했을 상황.
하지만 빨간색 마석이 나왔으니 배가 잔뜩 아파질 것은 마진호와 그루 길드 쪽이었다.
물론 정해진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신의의 문제니까. 이래저래 강후만 제대로 이득을 보게 됐다.
글로리아에 대한 경험치 역시 강후를 제외한 나머지는 조금도 얻지 못했다.
* * *
뒷수습을 마무리하고 나온 강후는 바로 빨간색 마석과 의뢰비 정산부터 진행했다.
착수금, 잔금, 그리고 마석 정산까지 전부 합산해서 입금을 받고 나니 잔고가 850억 원이 됐다.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50억 원이 아슬아슬했던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루 길드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빨간색 마석과 함께 드롭된 주황색 마석 1개를 챙기기도 했고.
중간의 일반 몬스터 정리 구간에서 마석 벌이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공격대 전체 정산 금액으로 따진다면, 못해도 200억 원쯤은 챙긴 셈이었다.
개인 분배를 균등하게 해도, 한나절의 공략으로 20억 원 이상은 챙긴 셈이다.
보통 이것이 일반적인 공략 후 분배금 규모였다.
한데 글로리아가 죽으면서 정말 예상치도 않게 빨간색 마석을 드롭해서 얘기가 달라진 것이다.
마진호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글로리아를 잡은 횟수는 직접 센 것만 100번은 넘는다고 했다.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던 것까지 합치면 곱절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빨간색 마석은 반 개가 아니라 티끌만 한 조각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인데, 전리품 우선권을 강후에게 주었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마진호의 배려로 팀 전체 정산에 앞서 우선 정산이 끝난 강후에게 여유가 생겼다.
다들 강후에게 양질의 전리품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빠른 공략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글로리아 건을 제외하면 경험치도 착실하게 챙겼으니, 사실 크게 불만을 가질 것도 없었다.
강후가 마른 목을 시원한 물로 축이며 숨을 돌리는 동안, 글로리아에게서 얻은 스킬을 확인했다.
[공명의 시야]
[스킬 숙련도 : Lv. Max]
[중독이나 스킬 강제로 인한 실명 상태에 걸려도 시각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공명의 시야는 사용자로 하여금 세상을 흑백의 형태로 파악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초당 0.5의 마나를 실명 상태일 경우만 자동 소모하며, 마나가 부족하면 능력이 제한됩니다.]
디테일하게 적혀 있긴 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실명 면역이라는 뜻이었다.
눈이 멀어도 공명을 통해서, 흑백 화면 형태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색감을 잃는 것만 제외하면, 평상시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셈.
'야시가 있으니 밤에도 문제없고. 공명의 시야로 실명인 상황도 대처가 가능하고....'
핸디캡이 이렇게 하나둘씩 지워지고 있다. 자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발걸음이다.
눈은 정말 중요하다.
괜히 눈에 상처를 입은 헌터들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것이 아니다.
전투력만 줄어드는 수준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고, 뜻하지 않게 던전에서 죽는 경우도 흔했다.
왜곡되고 제한된 시야가 그만큼 정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변수에 대한 대응도 느리게 만든다.
상처만으로도 저런데, 실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헌터라면, 그 즉시 적의 노림수에 의한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오늘은 좀 뿌듯하네.'
빈틈을 못 찾았더라면 글로리아 공략은 구경꾼1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텐데.
'그림자 걸음'이라는 효율 좋은 위장, 위치 전환 스킬이 있는 덕분에 큰 이득을 봤다.
새삼 빙의한 이후, 착실하게 강탈해 온 스킬의 가치를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역시 스킬은 다다익선이다.
모아 두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쓸 일이 온다.
그리고 오늘 글로리아에게 얻은 공명의 시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후가 자신의 실명 공격에 눈뜬장님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미래의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카운터펀치를 선사하게 될 테니까.
139화 니키타 보로닌 (1)
* * *
그 이후.
강후는 마진호에게 약속을 받은 대로 던전 '탐사'를 다녀왔다.
임밸런스 포인트에 관련된 던전에서의 짧고도 굵은 여정이었다.
애초에 혼자 공략할 수는 없는 던전이었기에 몬스터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고.
원작의 기억을 따라, 임밸런스 포인트의 과실만 핀셋처럼 뽑아냈다.
'나머지 포인트는 소설 속에서도 던전과 그 특성만 가볍게 언급한 수준이라 막연하긴 하군.'
나머지 포인트에서도 충분히 이득을 볼 순 있지만, 지금처럼 확신할 수는 없을 듯했다.
작은 바구니에 담은 모래 안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어쨌든 덕분에 레벨이 급상승하면서 단숨에 160까지 찍었다.
무려 30이나 올라버린 레벨.
그것 때문인지 갑자기 성좌 메시지와 후원창이 폭발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강후의 행보에 성좌의 관심이 대폭 집중된 것이다.
그것은 메인 성좌인 차원 강탈자, 순흑의 구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늘 강후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대재앙 – 어둠도 마찬가지고.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어냈는지 다들 궁금해했지만, 강후는 그것만큼은 노코멘트 했다.
말 그대로 천기누설이기 때문이다. 말해서 믿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체력으로의 투자는 딱, 200 레벨이 될 때까지만 하는 걸로.'
다시 방향성도 정했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얻는 포인트의 분배를 체력이 아닌 다른 스탯에 해 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성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충분히 신중하게 생각해도 됐다.
강후가 당장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체력 스탯에 꾸준히 투자를 해 온 이유는 하나였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하고 핸디캡에 의해 체력이 계속 깎여나가기 시작할 때.
그 와중에도 최대한으로 몸이 오랜 시간 버텨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장기전이라고 할 만한 전투가 없었고.
있었더라도 솔라키움과 매드 솔라키움의 힘으로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런 낙관적인 상황만 벌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매드 솔라키움도 만병통치약이 아닌 게, 과부하를 유예하는 것이지 해결하지는 않아서다.
매드 솔라키움의 지속시간이 끝난 상태에서 전투가 계속 지속되고 있다면?
그때는 몸에 걸릴 과부하도 문제고, 그동안 유예했던 후폭풍이 미친 듯이 몰려오게 된다.
이때 버텨줄 수 있는 힘이 바로 체력이다. 체력이 없으면 순식간에 탈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올체 암살자라. 내가 생각해도 좀 끔찍한 혼종이기는 하네.'
강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심각한 핸디캡을 갖고 있는 몸의 사정이 만들어낸 특이한 형태의 암살자인 셈이다.
하지만 강후는 자신의 몸에 딸린 저주 혹은 축복이기도 한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레벨 격차가 큰 적을 상대로도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또한 사기에 가까운 스킬 활용을 해올 수 있었다.
마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스킬이 많았어도 몇 개 쓰고 나면 끝났을 것이다.
한편.
강후는 마진호로부터 던전 공략을 한 차례 더 함께해 달라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받았다.
던전이 초소형이기 때문에 공략 시간은 정말 짧게 걸릴 것이라고도 했다.
미들 보스 드롭 아이템, 메인 보스 드롭 아이템에 대한 우선권을 받기로 협의했고.
착수금과 잔금은 따로 받지 않았다. 강후가 의도적으로 마진호에게 남겨 둔 '마음의 채무'였다.
이렇게 살짝 빚을 남겨두면, 나중에 마진호가 강후에게 자의든 타의든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마진호가 그런 성격이라는 점을 강후가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현석처럼 솔직하면서도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라, 절대 신세 진 것을 잊지 않을 터였다.
다음 공략 일정은 내일 정오.
덕분에 하루 남짓의 휴식 시간이 생겼다.
강후는 그루 길드의 배려로 길드 소유의 별장에서 하루를 푹 쉴 수 있게 됐다.
외부인, 심지어 그루 길드 관계자의 출입도 통제하는 완벽하고도 확실한 배려였다.
* * *
쏴아아.
때마침 제주도에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하늘을 빠르게 정화시켰다.
눈보다는 비, 특히 빗소리를 좋아하는 강후는 테라스에 나와 정취를 즐겼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아메리카노까지 곁들이니, 일상 속의 소소한 행복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바로 그때.
[성좌 '황야의 전략가'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드디어 대성전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제 계약자와 영원히 함께할 주 성좌로서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야의 전략가가 오랜만에 말을 걸어왔다.
대성전의 승인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미친 X. 꼴깝을 떨고 있다.]
황야의 전략가에게 적대적인 차원 강탈자가 바로 욕과 독설을 시원하게 박아 넣었다.
황야의 전략가는 상종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라는 듯, 발끈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고위의 격을 가진 성좌로서 체통을 지키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당신답지 않은 언행이야.]
순흑의 구도자는 차원 강탈자의 날 선 반응이 마음에 걸렸는지, 조심스럽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 그렇게 체통을 중요시하는 성좌이셔서 다른 성좌와 눈이 맞아서 살림을 차리셨나?
그게 체통이고 격이라면, 나도 좀 난봉꾼처럼 살아봐야겠는데.]
[으흠....]
차원 강탈자에게 간단(?)히 제압돼 버렸다. 이후 순흑의 구도자의 메시지를 볼 수는 없었다.
차원 강탈자가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계약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감정 쏟아내기에 가까웠을 뿐, 결국 차원 강탈자도 말을 아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훼방을 놓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점점 더 빠르게,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는 강후를 오롯이 혼자 갖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강한 소유욕이었다.
다시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황야의 전략가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네게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긴하게 쓰였으면 한다.
부디 멋지게 성장해다오. 조건 없이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느긋하게 지켜볼 테니.]
"감사합니다."
강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황야의 전략가가 앞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 대성전의 승인을 받은 특별 계약서를 발동시키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약이 이루어졌다. 강후에게 세 번째 메인 성좌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대등하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황야의 전략가의 구애를 받아서 얻게 된, 강후에게는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메인 성좌 계약이었다.
동시에 황야의 전략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성좌 특전 세 개가 활성화됐다.
[첫째. 계약자의 레벨보다 2배 이하의 범위로 들어오는 헌터의 정신계 공격에 대해서는 90% 면역됩니다.
설령 10%의 확률로 대처에 실패하더라도, '혜안'이 발동하여 강제 면역을 발동시킵니다. 단, 1일 동안은 재발동이 불가능합니다.]
'오, 좋은데?'
정신 쪽에 특화된 황야의 전략가답게, 첫 번째 성좌 특전부터 묵직한 것이 들어왔다.
지금까지 편법을 이용해 정신계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예전에 오산 수호의 헌터, 조영재에게 강탈한 선혈의 탐식자 성좌 효과를 쓰는 게 전부였다.
체력을 잃을수록, 정신 공격에 면역이 될 확률이 상승하는 것이 성좌 효과였다.
하지만 조건부인 데다가, 확률이라는 것도 5% 정도의 수준으로 썩 높지 않았다.
한데 이제 황야의 전략가를 통해, 그 수준을 대폭 올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레벨 2배 이하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다.
현재 강후의 레벨이 160이니, 레벨 320의 헌터까지 커버가 된다는 뜻이다.
유청화나 에밀리아 로즈를 상대로 당장은 어렵겠지만.
부지런히 레벨을 올린다면 그녀들도 충분히 대응 가능한 가시권에 넣을 수 있는 구조였다.
[둘째, 원거리형 딜러의 '저격', '정조준', '타깃 지정' 이 활성화됐을 때 사전 인지가 가능합니다.
'직관'이 발동하며, 이것으로 자신이 공격 대상이 되었음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명횡사 방지네. 수준급 저격수, 궁수를 만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경우도 많으니까.'
역시 유용한 능력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생사의 차이라고 할 만큼 갭이 크다.
[셋째, '영혼 파동'을 사용해서 정신적으로 연결된 적 혹은 소환체의 연결 고리를 끊습니다.
마나 250을 소모하면서 정신의 혹사를 유발하지만, 완벽히 적의 상태를 초기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건...."
상당히 매력적인 특전이다.
다만 툴팁의 내용대로 파급력만큼 강후에게 돌아올 후폭풍도 제법 됐다.
강후가 시험 삼아, 영혼 파동을 써 봤다.
계약과 함께 학습되면서 모든 지식이 전수된 성좌의 능력이기에 바로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프스스슷!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투명한 파도가 일렁였다. 마치 뭔가를 열심히 흔들어대는 느낌이었다.
이를 통해서 흑마법사가 강령술 스킬로 불러낸 언데드들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거나.
소환수를 사용하는 헌터에게 확실한 카운터 펀치를 먹일 수 있는 듯했다.
단.
"크윽."
단숨에 마나를 대량 소모하면서 엄청난 과부하가 몸 전체에 유발됐다.
고통을 경감시키는 아이템이 있음에도, 머리가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웠다.
과부하가 적당히 걸리는 수준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게 사용을 고려해야 할 듯했다.
두 번만 연속으로 시전해도, 머리 전체가 버티지 못하고 방전될 것 같은 느낌.
그래도 너무 좋았다.
차원 강탈자와 순흑의 구도자, 황야의 전략가는 각각 특화된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얻은 성좌 능력 전체가 겹치는 부분 없이, 간지러운 부분만 쏙쏙 긁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혼자 다 해 먹는 올라운더를 꿈꾸는 강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배다.
[그렇게 나의 계약자가 좋으냐. 너는 바보다.]
불쑥 다시 나타나서는 깨알같이 황야의 전략가에게 초를 치는 차원 강탈자의 한마디와 함께.
그렇게 강후는 또 한 번의 성장을 남몰래, 조용히 경험하고 있었다.
* * *
그 무렵.
입국 수속을 마친 한 남자 헌터가 제주 공항을 막 나섰다.
깔끔하게 민 머리. 로즈골드 색상의 테로 말끔하게 멋을 낸 안경에 잘 차려입은 수트까지.
차가운 인텔리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는 공항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그루 길드의 마진호였다.
"오셨군요, 니키타 님."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 납품이 잘 이뤄진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불량품은 없으셨습니까?"
"전혀요. 까쉬마르 길드가 던전용 군용품 생산으로는 알아주는 곳이지 않습니까."
"항상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신제품 안내 건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화상으로도 가능하실 텐데. 너무 수고로운 발걸음하신 것은 아닌지요?"
"하하. 사실 별도로 볼일도 좀 있어서 말입니다."
니키타 보로닌.
까쉬마르 길드 간부이자, 동시에 한국 쪽 이슈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다.
한국어는 러시아어만큼이나 능숙해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마진호의 말대로 화상 대화를 주로 진행해 왔던 것이 니키타였는데.
이번에는 굳이 제주도까지 내려와 신제품 홍보를 하겠다는 것이다. 속내가 따로 있는 듯했다.
마진호가 물었다.
"어떤 일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함께하고 계신 신강후 헌터를 만나러 왔습니다. 마스터의 의중이 반영된 중요한 일입니다."
곧바로 이어진 니키타의 대답에서 그의 방문 목적이 선명히 드러났다.
140화 니키타 보로닌 (2)
* * *
별장에서 푹 쉬고 있던 강후에게 마진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로 번호 교환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별장 내에 비치된 직통 전화로 연락이 온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전화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슈가 생긴 모양이었다.
"네, 신강후입니다."
- 마진호입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실까요? 쉬고 계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자고 있던 건 아니라서. 무슨 일이신가요?"
- 신강후 님을 꼭 뵙기를 원하는 손님이 있습니다. 하지만 임의로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기에요.
"저를요?"
- 네, 그렇습니다.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을 알고 있는 지인은 없다. 일일이 알려 주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마진호가 저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외부인이라는 얘긴데,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죠?"
- 니키타 보로닌이라는 분입니다. 까쉬마르 길드 소속의 간부이시고, 한국 쪽 관리자시죠.
"니키타 보로닌...."
아는 이름은 아니다.
원작에서 까쉬마르 길드 얘기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니키타 보로닌이라는 인물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고위 간부는 아닌 모양.
다만 까쉬마르 길드에서 왔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걸렸다.
물론 마진호 같은 사람은 까쉬마르 길드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정화 길드처럼 잘 포장된 그들의 연출된 모습을 보고 있을 테니까. 숨겨진 진실은 모를 터다.
하지만 까쉬마르 길드와 악연이 생긴 강후의 입장에서는 이 만남이 반가울 수는 없었다.
까쉬마르 길드의 산하에 있었던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이 자신에 의해 해체됐기 때문이다.
전종두의 죽음에 대해서야 여러 갈래로 정보가 유출됐을 거고, 얼굴도 알려졌을 터.
그 대상이 자신, 신강후라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터다.
까쉬마르 길드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하다.
여기로 온 것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겠지. 제주 공항에서 정보가 샜을 것이다.
'정식 만남을 요청한 것을 보면 싸울 생각은 아닌 듯하네. 그랬으면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
마진호까지 중개자 역할로 쓰는 것이 일단은 대화에 초점을 맞춘 듯해 보였다.
만나는 보고 싶었다.
어떤 생각으로 찾아온 건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편으로는 까쉬마르 길드가 전종두 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가늠할 수도 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나보죠. 다만 귀찮게 나가고 싶지는 않은데요."
-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직접 니키타 님과 갈 겁니다. 자리도 지켜드릴 거고요.
"그럼 여기로 오시죠."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니키타와의 만남이 이뤄지게 됐다.
까쉬마르 길드에서 온 불청객. 그가 어떤 얘기로 포문을 열지 제법 기대가 됐다.
썩 좋은 얘기는 아니겠지만.
* * *
1시간 후.
별장 외곽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강후와 니키타가 만났다.
그리고 마진호는 본인이 스스로 회의실 경비를 맡기로 했다.
서로 초면인 두 사람이 만나는 만큼 의외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리적인 충돌이라던가, 과격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적당한 사이즈의 원탁을 중심에 두고 마주 앉은 채, 강후와 니키타가 서로를 응시했다.
'레벨 400대는 되겠군.'
니키타가 보유한 성좌의 개수를 보니 어렵지 않게 그의 레벨이 짐작이 됐다.
까쉬마르 길드의 규모를 생각하면 중위급 간부 정도 되는 레벨. 하지만 결코 낮은 레벨은 아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니키타였다.
"오쇼 용병단을 무너뜨리고, 그 잔당까지 소탕한 신강후 님의 행보는 상당한 쾌거입니다."
유체이탈 화법이 이런 걸까.
천연덕스럽게 자기 길드의 산하에 있던 용병단을 박살 낸 것을 칭찬하고 있다니.
강후가 어이없는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현장에 베주미예도 있었고.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까쉬마르 길드의 치맛바람 속에 전종두가 있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텐데요."
강후의 답에 니키타가 웃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글쎄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발뺌을 하겠다?"
"죽은 자의 가치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산 자만은 못 한 법이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었으니 버리고, 새로운 배를 갈아타고 싶다?"
"너무 단순한 말씀이십니다. 저희 까쉬마르 길드는 오래전부터 실력자를 우대해 왔습니다."
"어쭙잖은 칭찬은 됐고.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제대로 말해 보시죠."
"까쉬마르 길드에서 뒤를 확실히 봐 드리겠습니다. 강원도 쪽에 세력 구축을 해 보시는 건?"
"제2의 전종두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개소리군요."
"개소리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저희가 제대로 뒤를 봐주면, 전종두처럼 죽을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진즉에 전종두의 뒤를 그렇게 봐 주지 그랬습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까진 아니어서."
니키타가 담백하게 답했다.
그러자 강후 역시 살짝 격앙되었던 목소리를 낮추고, 원래의 톤으로 차분히 말했다.
"출혈 딜러가 필요하면 얘기하시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제주도에 와 있었으니까. 러시아도 얼마든지 출장 됩니다."
"신강후 님."
"...?"
"범죄를 저지르라는 게 아닙니다. 도태된 헌터에게 새 삶을 주자는 겁니다."
듣고 난 강후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이렇게 포장할 수 있는 걸까.
방금 니키타가 한 말을 네 글자로 줄이면 인신매매였다.
제멋대로 헌터를 갖다가 인체를 파는 일을 마치 새 삶을 주는 것처럼 지껄여대고 있는 것이다.
"그걸 왜 당신네들이 정해?"
"신규 헌터보다 사망, 실종되는 헌터가 더욱 많습니다. 의미 없이 죽는 헌터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의미를 왜 너희들이 부여하냐고."
최소한의 예의로 지켜주던 존대와 존중도 거기서 끝났다.
니키타가 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신념에 차서 내뱉고 있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치를 운운하며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다.
"내가 회색 영역에 있는 것은 맞아. 하지만 인간이길 포기하지는 않았어. 됐어. 돌아가쇼."
"아쉽군요. 얘기가 잘 통할 줄 알았는데요.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게 헌터의 소양 아닙니까?"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니까 안 하겠다는 거야. 언제 뒈질지 모르는 짓을 왜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나도 안타까워. 너희가 이렇게 빡대가리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다른 놈 알아봐. 난 됐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번, 천 번 양보해서 니키타의 제안에 응한다고 치자. 과연 그들의 말대로 될까?
강후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강후의 가치가 없어지면, 그리고 그가 위험에 빠지면? 전종두처럼 또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애초에 이 대화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강후도 알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대화가 끝났다.
니키타도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지하게, 강후랑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양. 그래서 더 무서운 인간이었다.
* * *
니키타와 있었던 일을 그저 기분 나빴었던 해프닝으로 묻어버린 이후.
다음 날 정오에 맞춰 그루 길드와 약속한 두 번째 던전 공략이 이루어졌다.
이동 거리가 상당히 짧은 초소형 던전 공략이었고, 그래서 저녁 무렵에 끝이 났다.
강후의 레벨은 딱 알맞게 떨어지는 165가 됐다. 이제 레벨 200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들 보스, 메인 보스에서 전리품으로 나온 주황색 마석을 1개씩 가졌다.
덕분에 던전 밖으로 나와 이것까지 처분하니 통장 잔고가 1,050억 원이 됐다.
또다시.
2등급 아이템 하나를 너끈하게 살 만한 밑천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보스에게서 제법 쓸만한 스킬도 강탈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민첩 강화 A]
[스킬 숙련도 : Lv. Max]
[패시브 스킬. 상시 민첩 스탯의 효율을 7.5% 늘립니다.]
스탯창에서 스탯이 오르는 개념은 아니지만, 상시 적용되는 버프 스킬처럼 기능했다.
민첩 강화는 A가 가장 낮은 단계의 패시브 스킬이다.
이후, 알파벳이 뒤로 갈수록 오르는 퍼센티지가 증가하는 형태로 이번에 첫 스타트를 뗀 셈이었다.
[불의 상흔]
[스킬 숙련도 : Lv. Max]
[패시브 스킬. 화염 절대 내성을 영구적으로 2.5% 증가시킵니다.]
아울러 불의 상흔 덕분에 화염 절대 내성 수치가 총 10%가 되었다.
일전에 얻었던 7.5%에 더해진 수치.
이제 화염계의 공격에 대해서는 무조건 10%의 대미지를 깎고 받아낼 수 있게 됐다.
나중에 100%가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화염 스킬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를 지나가도, 멀쩡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내성 덕분에 말이다.
뜻하지 않은 제안으로 오게 된 제주도에서 강후는 선물처럼 많은 이득을 챙겼다.
스킬만 네 개를 추가했고. 잔고가 말도 안 될 만큼 대폭 늘었다.
게다가 임밸런스 포인트까지 방문하면서 폭발적인 레벨업을 경험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여정이었다.
강후는 그렇게 즐거운 추억과, 그루 길드에 대한 의미 있는 인연을 남기고는 비행기를 탔다.
니키타와 엮인 일도 있는 마당이라 제주도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 * *
엘리자베스. 빈센트. 에밀리아. 유청화. 케이시. 그리고 타카시의 분신까지.
총 6명이 자리에 모였다.
아직 심판의 던전을 공략 중인 장시환과 채관형은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했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먼저 이야기의 포문을 연 것은 빈센트였다.
초면이자 새 동료인 엘리자베스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인사를 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우리 저스티스에 들어오게 된 엘리자베스다. 듣던 대로 미인이지?"
빈센트가 언급한 '저스티스'. 그것은 바로 열세 개의 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당시는 아직 열세 개의 별 모두가 모인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열세 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식 명칭이 아닌 가칭으로 정한 저스티스(Justice)가 이 모임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열세 개의 별이라는 이름이 확정되는 것은 열세 번째 멤버가 들어오고 난 이후.
아직 저스티스의 인원은 13명이 아니었다. 물론 얼마 남지는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 반갑다.
그때, 가장 먼저 엘리자베스에게 악수를 청한 것은 바로 타카시의 분신이었다.
전통 무사 코스프레를 하고 참여한 타카시의 분신은 입에 달린 스피커로 타카시의 말을 전했다.
"아. 바, 반가워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얼굴을 직접 뵐 수 없는 분이라고요."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분신의 손을 맞잡았다. 체온이라고는 하나도 안 느껴지는 차가운 손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엘리자베스와의 첫인사가 진행되는 동안.
빈센트는 자연스럽게 이번 방문 목적에 대한 운을 뗐다.
"다들 봤지? 히든 스킬의 새 획득자가 나타났어. 나는 한국에서 그 주인이 나타났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전부라서 한국에 온 것은 아니지만, 꼭 풀어내 보고 싶은 궁금증이기도 했다.
빈센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케이시 렉스였다.
자수정처럼 짙게 물든 자줏빛의 눈이 인상적인, 포르투나 길드의 마스터였다.
"남 좋은 꼴은 못 봐서 찾아온 모양이군. 히든 스킬을 그렇게 뺏고 싶은 거냐?"
케이시의 말에 빈센트가 고개를 저었다.
"남이 잘돼서 그런 게 아니고! 히든 스킬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가지는 게 맞아. 운 좋은 어중이떠중이가 쉽게 얻어서는 안 되는 축복이라는 얘기지."
"그러니까 배 아파서 그렇다는 거잖아. 뭘 이리 돌려서 말해? 너답지 않게."
"X발."
케이시의 말이 정답이었다.
141화 울릉도 (1)
* * *
에밀리아가 공들여 만든 요리는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현실적인 이유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타카시의 분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맛있게 먹었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몇 번이고 에밀리아에게 음식을 더 채워 줄 것을 부탁했을 정도.
서로 기 싸움을 할지도 모른다는 다른 구성원의 예상과 달리,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잘 나눴다.
하지만 웃는 얼굴 속에 꼭 선한 마음이 담겨있지는 않을 수도 있는 법.
눈치 빠른 빈센트는 에밀리아와 엘리자베스가 묘한 신경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상대방보다는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특유의 경쟁 심리.
그 심리를 숨기기 위해서 둘은 친근함과 친절함을 연기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또 다른 여성 헌터 중 한 명인 유청화는 이런 신경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빈센트처럼 히든 스킬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유청화가 빈센트에게 말했다.
"빈센트."
"어."
"짚이는 암살자가 있어?"
"한국 쪽은 내가 빠삭하게 아는 것은 아니어서. 혹시 네가 아는 건 없고?"
빈센트의 물음에 유청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잠깐,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기는 했다.
최근 이름을 알게 된 남자, 바로 강후였다.
강동현이 이클립스 공식 홈페이지에 강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올리기 전까지만 해도.
유청화는 강후의 가명도, 본명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정신 스킬을 완벽하게 차단해낸, 솜씨 좋은 암살자 정도로 기억했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척살 명단에 적힌 이름을 보면서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실력이 꽤 있는 암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강동현의 역린을 자극했을 정도면, 얼마나 강후가 약오르게 만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잠재력이 높은 암살자라고 해도, 강후의 수준으로 히든 스킬은 무리였다.
빈센트가 한 말대로 히든 스킬은 '운 좋은 어중이떠중이'가 얻긴 불가능한 스킬이기 때문이다.
강후가 이 세계에 77개 밖에 없는 히든 스킬의 주인이 되기엔 자격이 모자란다는 생각이었다.
"모르겠네."
유청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후는 아니다.
아마 공략대에 다른 솜씨 좋은 암살자가 또 있었겠지. 암살자 네임드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답답함에 빈센트가 볼멘소리를 냈다.
"장시환이랑 채관형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그놈들이 협조해 줘야 찾든지 말든지 하는데."
빈센트는 벌써 몸이 달아 있었다.
지난 살인 이후로 꽤 오래 냉각기를 가진 탓일까?
뜨거운 피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며 들썩이는 압력밥솥처럼 그의 살인 욕구도 연신 꿈틀대고 있었다.
* * *
한편.
강후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불쑥 마스터 K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행선지를 바꾼 상태였다.
이륙 후 정상 고도에 오른 비행기에 안정이 찾아올 무렵.
강후는 마스터 K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 뒀던 것을 듣고 있었다.
이륙 전에 너무 정신없이, 급하게 대화가 진행되었던 탓에 놓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 방출 옵션이 있는 초소형 부적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을 알아냈어.
- 어딥니까? 던전입니까?
- 구매처를 전 세계에 수소문해 봤지만 현재로서는 구할 수 있는 매물이 없더군.
- 다른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 맞아. 재료를 조합해서 만드는 방법이 있어. 무색 부적에 방출의 핵을 합성 세공하는 거지.
- 어떤 것을 구해야 할까요?
- 일단 방출의 핵은 내 부인을 통해서 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무색 부적이 문제인데.
- 네. 말씀해 주십시오.
- 울릉도로 가면 될 것 같아. 김신령이 거기에 있거든. 그 친구에게서 구매할 수 있을 거야.
- 김신령 님이요?
- 그래. 김신령. 만능의 손이라고도 부르는 실력자지. 혹시 알고 있나?
-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만능의 손, 김신령.
50대 후반의 중년 여성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20대 수준인 시술-개조 능력자다.
외모가 젊어 보이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녀가 사람의 얼굴을 쏙 빼닮은 가면을 쓰고 다녀서다.
그런 가면을 제작하는 것 역시 그녀의 실력 중 하나였다.
정말 감쪽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가면으로 위장할 수 없는 부분에는 주름이 제법 잡혀있다.
원작에서 김신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점은.
강후에게 팔을 잃은 울산의 도살자, 공태수가 자신의 왼팔에 마석을 심는 때였다.
그때, 살짝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으로 나오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강후에게 꽤 중요한 이름이 됐다.
- 어쨌든 그 친구가 울릉도에 있는 자기 별장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야. 한 번 찾아가 봐.
- 알겠습니다. 위치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죠.
- 아냐. 형서를 울릉도로 보낼 테니까 녀석의 안내를 받도록 해. 내 추천서도 가지고 갈 거고.
- 아, 그 어린 친구 말입니까?
- 그래. 내가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 놓을 테니, 너무 신경 쓸 건 없고.
- 알겠습니다. 그럼 울릉도 쪽으로 바로 방향을 잡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경은 무슨. 나중에 다 값으로 쳐서 받을 테니까, 돈이나 두둑하게 준비해 놔.
- 물론입니다.
- 아. 그리고... 알지? 김신령은 자기 별장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라는 거.
- 그건 알고 있습니다.
- 그래. 무리하진 말어. 시험에 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그게 관뚜껑을 열고 들어가라는 건 아니니까.
마지막에 K가 남긴 말대로, 김신령은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 주지 않았다.
보통 그녀를 만나려면 아지트처럼 활용하는 별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정문에서부터 별장으로 가는 길이 온갖 미로와 함정으로 도배되어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천억, 아니 1조 원을 줘도 프리패스는 불가능했다. 반드시 그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김신령을 만나려다가 비명횡사한 헌터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시체 수습도 해 주지 않기에, 수습을 하려고 온 동료들이 추가로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무색 부적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다.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무색 부적이라는 명칭이 붙었을까.
아마 그 답은 김신령을 만나야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짝 긴장할 때가 됐다.
강후가 두 눈을 감고, 원작에서 조형된 김신령에 대한 모든 기억과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성격과 특징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기에.
* * *
울릉도에 도착한 것은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강릉에서 3시간 동안 배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내리자마자 지면을 밟는 느낌이 어색했다.
멀미가 심한 사람들은 내려서도 구토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강후는 그런 부분에서는 둔감했다.
'실제로 봤던 것과 똑같네.'
강후가 익숙한 풍경을 보며,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함을 느꼈다.
원작을 쓸 때, 가끔 타지생활을 하고 싶을 때 찾아왔던 곳이 바로 울릉도였기 때문이다.
울릉도 곳곳에 잘 마련되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곤 했었다.
짧아도 1달 이상은 머물렀고, 길게는 1년 이상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때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원작 속 묘사에 착실히 넣어 둔 덕분인지, 세계도 똑같이 구현되어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
강후가 무언가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1L짜리 대용량 아메리카노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
'내 모습... 아닌가?'
그것은 분명히 울릉도에 머물던 시절, 자신이 입었던 옷과 차림새 그리고 행동 그대로였다.
빠르게 그 뒤를 밟아 보았다.
뭘까. 날 닮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헛것이라도 보이는 걸까. 그냥 우연인 걸까?
막 샛길로 접어든 남자의 뒤를 따라붙어 봤지만,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애초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음."
아예 보이지 않는 마당에 어딘가를 특정하고 쫓을 수도 없어 강후가 멈췄다.
묘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빙의하기 전의 삶을 잠시, 추억처럼 떠올리다가 겹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듯했다.
얼마 후.
문형서도 울릉도에 도착하면서, 어색한 상봉이 항구 앞에서 이뤄졌다.
문형서는 강후를 보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딱 봐도 마스터 K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받은 듯한, 아주 공손한 모습이었다.
전과 달리 앞머리도 내리고, 옷도 캐쥬얼하게 입고 온 덕분인지.
문형서는 평소보다 독기가 상당히 빠진, 순한 모습으로 보였다. 정말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배편마다 시간이 다른 건데 늦어서 죄송하긴."
"앞 배편을 타서 미리 와서 주변을 살펴 뒀어야 하는데. 용서하십시오."
"됐고. 안내나 하지."
강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짓으로 문형서에게 앞서나갈 것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초면인 김신령을 만나기 위해 가는 자리인 만큼, 성큼성큼 들떠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문형서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항상 주의를 태만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구석이 있었다.
"무슨 이슈가 있는 거야?"
"음.... 비공식적으로 입수된 정보이기는 합니다만."
"어."
"요 열흘 동안 울릉도에 거주하던 헌터 열 명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모양입니다. 이후에 생활 반응도 전혀 없고요."
문형서의 말에 강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울릉도에는 치안청도 없고, 관리하는 핵심 세력도 없어 사실상 각자도생인 곳이었다.
그래서 변수가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민간인 거주자가 많아, 헌터들끼리는 암묵적으로 유혈 충돌을 자제하는 분위기이기는 했다.
자칫 헌터들 간의 싸움에 휘말려서 민간인들이 죽었다가는 헌터 치안청에서 직접 나서기 때문.
치안청이 나선다는 것은 곧, 정화 길드의 등장을 의미하므로 다들 알아서 '처신'을 잘했다.
그런데 실종 이슈가 있는 것이다.
최근 시기에 집중된 형태로 헌터가 계속 사라지고 있다면, 충동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울릉도에 오픈형 던전이 제법 있다 보니, 헌터들의 출입이 잦기는 할 텐데."
"그래서 다들 조심하는 눈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종 사고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촤악!
문형서가 소형화시켜 두었던 창을 꺼내서는 마력을 불어넣고, 원래의 크기로 팽창시켰다.
강후가 비상용 무기로 갖고 있는 강격의 장창처럼 줄이고 늘리는 것이 가능한 모양.
물론 4등급인 강격의 장창과 비교하면, 훨씬 수준이 높은 형태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2등급의 장창은 되는 듯했다. 문형서 정도의 레벨이라면 어울리는 등급이다.
그때.
"잠깐."
강후가 등 뒤에서 느껴진 이질감에 멈춰 서며, 동시에 문형서를 붙잡아 세웠다.
갑자기 묵직하고도 차가운 한기가 후방에서 훅,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온몸이 굳게 만들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강후가 문형서에게 소리쳤다.
"피해!"
142화 울릉도 (2)
* * *
신속하게 현장을 이탈하는 회피 스킬을 사용한 강후와 달리.
문형서는 반응이 반 박자 정도 늦었다. 대응은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장창을 들어 본능적으로 전방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존재'가 자신을 터치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길."
문형서는 자신이 강후와 같지만 다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분리된 것이다.
같지만 다르다는, 의미가 충돌되는 표현을 쓴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공간 격리를 당할 줄이야."
바로 공간 격리.
그라운드 제로에 '검은 인도자'가 살고 있다면, 그라운드 제로 북쪽에는 '검은 그림자'가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한 쪽에서만 볼 수 있는 몬스터였다.
녀석은 은신도 가능하고, 동시에 형체 분화도 가능한 망령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놈이지만.
그라운드 제로에 서식하는 검은 인도자와는 적대적인 관계라 접근하는 즉시 격퇴당했다.
서로가 영역 싸움이 치열한 데다가, 수적으로 대단히 열세라 검은 인도자에게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그라운드 제로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울릉도에 유입이 된 것이다.
이제야 실종 사건의 전말도 이해가 갔다. 이 녀석의 소행이 분명하다.
아마 실종자들은 이렇게 공간 격리를 당한 것이 아니라, 잡아먹혀 죽었을 것이다.
너무 깔끔하게 다 먹혔기 때문에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일 테고.
"5분...."
문형서가 자신의 상태창에 활성화되어 있는 5분짜리 디버프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공간 격리는 디버프로 분류됐다. 상대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명히 강후가 눈앞에 보이지만,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었다. 마치 연기를 만지는 듯했다.
"망할.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마스터께서 안전하게 모시라고 했는데...."
문형서가 이를 까득 갈았다.
검은 인도자와 달리, 검은 그림자는 상대하기가 훨씬 더 까다로운 녀석이다.
정해진 레벨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레벨 300은 넘어가는 위력적인 녀석이었다.
괜히 헌터들이 손도 못 쓰고 실종을 당한 게 아닌 것이다.
맞상대를 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녀석에게 먹히고 만다.
검은 그림자는 자신이 훨씬 더 레벨이 높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격리시킨 것일 터다.
놈은 영리하고 강하다.
과연 강후가 버틸 수 있을까.
문형서는 부정적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강후는 문형서가 공간 격리 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검은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챘다.
까다로운 적을 일시적으로 전장 이탈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인 공간 격리.
장시환이 주로 쓰는 능력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장시환'만' 갖고 있는 능력은 아니다.
장시환은 이 능력을 이용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까다로운 광역 공격 패턴에 진입할 때.
녀석을 다른 공간으로 보내 버렸다. 그러면 혼자 격리된 공간에서 헛심만 잔뜩 쓰고 돌아온다.
공간 격리는 장시환이 쏠쏠하게 재미를 보는 요소 중에 하나였는데, 그런 이유로 원작에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장시환이 나타났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경우를 생각했고 그게 검은 그림자였다.
[강동의 대현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성좌입니다. 한 명의 대상을 지정하면, 그 대상이 은신했을 경우에도 불투명한 형태로 외형을 파악합니다.]
강후가 '강동의 대현자' 성좌를 이용해서 검은 그림자를 대상으로 지정했다.
일전에 차소희를 죽이고 강탈했던 성좌로, 이럴 때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성좌였다.
덕분에 검은 그림자가 은신으로 모습을 숨겼음에도 이동 경로가 명확하게 보였다.
마치 오래된 트럭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한데 뭉쳐놓은 듯한 형태였다.
바로 그때.
키시시시시!
멀찍이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던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강후를 향해 돌진했다.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건지, 엄청난 속도로 직선 접근했음에도 동력을 잃지 않았다.
[보호 결계]
쿠웅!
"크윽!"
바로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카싱! 카시싱! 카싱!
보호 결계와 맞부딪힌 검은 그림자가 잠깐 사이에 결계에 수많은 상처를 냈다.
할퀴고 지나간 모양대로 결계가 찢어지고 깨졌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기도 했다.
"지랄 같은 놈이네."
강후가 적의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방금은 정말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만약 보호 결계가 없었다면, 저 찢어진 결계의 파편이 자신의 살점이 되었을 테니까.
녀석은 까다롭다.
회피하거나 멀리 있을 때는 연기처럼 변했다가.
공격이 필요할 때만 '실체화'가 되어서 맹공을 쏟아붓는 식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이기적인 대미지 교환을 하고 빠지니까 지랄이라는 욕이 나올 수밖에.
키시시시!
"읏."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다시 돌진해 온다.
상황을 봐서 속주머니에 넣어 둔 솔라키움을 꺼내서 먹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녀석이 쇄도했고.
스카앙!
강후가 다시 보호 결계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냈다.
이번에는 녀석도 출력을 높였는지 방금보다 훨씬 더 쉽게 결계가 깨졌다.
저녁이 된 탓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다. 요청할 수 있더라도 그럴 만한 주체가 없다.
설령 지나가던 헌터가 이 현장을 보더라도 돕기보다는 모른 체하기 바쁠 것이다.
문형서의 공간 격리는 짧게 잡아도 5분.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단순하게 가자.'
명확히 판단을 내렸다.
일단 검은 그림자의 공세를 극한의 방어로 막아내며, 반격의 찬스를 노려보기로.
녀석의 공격 방식과 패턴, 속도에 대한 숙지가 되어야 그다음 플랜도 짤 수가 있다.
지금은 아무리 머리를 잔뜩 굴려 봐도, 예측과 맞지 않으면 쓸모없는 하찮은 전략이 되고 만다.
암살자와 방어는 어떤 형식으로 생각해도 참 앞뒤가 맞지 않는 단어의 조합.
하지만 강후는 자신 있었다. 다 이럴 때 쓰려고 스킬을 열심히 모아 둔 것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그 값을 할 차례다.
* * *
얼마 후.
"실력이 상당한데."
격리된 공간 안에서 강후와 검은 그림자의 교전을 지켜보던 문형서가 감탄했다.
일단 유의미한 반격 없이, 일방적으로 강후가 막아내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후의 대응에 빈틈이 없었다. 문형서가 생각한 그림보다 훨씬 견고했다.
우선 강후의 보호 결계 스킬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암살자가 이런 형태의 설치형, 이동형 방어 스킬을 갖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스킬의 구성과 내구도, 활용도를 본다면 전문 탱커의 스킬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후는 무조건 벽을 세워 막는 정직한 방어로 일관하지도 않았다.
문형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곧바로 현장을 이탈하는 신속 회피 스킬이었다.
회피 스킬이 최대 숙련도를 달성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기본 스킬이기도 하다.
문형서도 레벨 1, 레벨 10에 얻은 기본 스킬이 이제 막 최대 숙련도가 되려는 참이다.
하지만 회피는 암살자의 레벨 40 기본 스킬이다.
일반적인 암살자들의 성장 곡선을 생각하면, 지금 숙련도 최대를 찍는 것이 불가능한 스킬이었다.
그런데 강후는 아주 알차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검은 그림자가 헛심을 많이 썼다.
그림자 걸음을 활용한 위치 전환 역시 마찬가지.
강후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를 요리조리 잘 피해 가며, 위치를 바꿨다.
물론 녀석이 너무 빠른 탓에 바로 위치를 특정 당하고 공격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은 잠깐이라도 확실하게 벌 수 있었고, 그런 만큼 검은 그림자의 힘도 빠졌다.
문형서는 자신이 검은 그림자를 상대했을 때보다 안정성 측면에서는 강후가 훨씬 더 높은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강후는 분명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대응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무 생각 없이 방어만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강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키잇?
전력으로 공격을 퍼붓던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강후의 위치를 놓쳐 버렸다.
"설마?"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상대가 언데드일 경우다.
그렇다면... 강후에게 언데드로 위장할 스킬까지 있다는 걸까?
문형서의 동공에 지진이 발생했다.
* * *
검은 그림자에 대한 계산이 끝났을 때.
강후가 반격의 포문을 열기 위해 사용한 스킬은 바로 사령의 침묵이었다.
[사령의 침묵]
[초당 마나 10을 소모해, 언데드로 위장합니다. 그들 고유의 기운을 풍기므로 들키지 않습니다.]
마나 소모량을 반으로 낮춰주는 '야만의 시대' 스킬이 적용된다고 해도 마나 스탯이 20인 강후의 입장에서는 1초에 보유 마나의 25%가 뭉텅이로 없어지는 상황.
그래서 과부하의 정도도 가파르게 증가하는 스킬이지만, 지금은 전략적 쓰임새가 분명했다.
'역시.'
검은 그림자가 위치를 잃었다.
녀석은 별도로 시야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질감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구조였다.
어차피 눈코입을 정확히 볼 필요가 없고, 형체만 명확하게 살필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바로 기교의 장막을 깔면서, 동시에 분신술로 분신 하나를 그 밖으로 내보냈다.
녀석에게 잠깐 사라졌던 자신의 재등장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분신은 사령의 침묵 스킬의 적용을 받지 않는 만큼, 본래의 강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사이.
[흑월참]
히든 스킬을 준비했다.
지금으로서는 검은 그림자를 말끔하게 끝내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고 전부였다.
이미 특정을 당한 만큼 무시하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도망치더라도 결국 따라잡힐 것이고, 또 공간 격리를 당하거나 전투를 불사해야 할 터.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이었다.
키시시싯! 크싯!
검은 그림자는 역시 강후의 분신을 보고는 이때다 싶어 다시 공세를 높였다.
강후는 흑월참을 시전하기 위해 암흑기를 모으는 와중에도 최대한 분신을 컨트롤했다.
너무 일찍 분신이 당해서 없어져 버리면, 녀석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좋아.'
암흑기가 빠르게 소진되고, 단검에 맺힌 흑월참의 기운이 뜨겁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집중하는 작업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강후가 이를 악물고 해냈다.
사령의 침묵 스킬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인지, 두통도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찾아왔다.
어차피 이 문제는 마나 스탯을 무작정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압도적으로 빠르게 마나를 빨아들이며 생기는 문제니까.
마나의 총량이 문제가 아니라, 마나의 회복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마나 스탯이 높다고 해도, 결국 스킬을 쓰면 마나의 소모는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빈틈을 과민증이 즉각적으로 채우기에 어떤 상황이어도 과부하는 피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됐어.'
흑월참의 기운이 최대로 차올랐다.
암흑기도 바닥을 드러냈고, 검은 그림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분신을 다시 노리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기교의 장막이 만들어낸 은신의 어둠 속에서. 강후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한 방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이잉!
검붉은 검기가 냉랭한 숨소리로 찬 밤하늘을 가르며.
솨아악!
어둠이 만들어낸 저주받은 피조물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영원히 잘리지 않을 것 같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반으로 갈라져 죽은 것이다.
143화 울릉도 (3)
* * *
공간 격리가 풀리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죽은 것을 보며 문형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소름이 돋았다.
강후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너무 빠른 시점에 예상하지 못한 화력을 가진 반격 스킬로 검은 그림자를 끝장내서다.
문형서도 검은 그림자를 저렇게 일격에 죽여본 적은 없었다.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검은 그림자 같은 망령 형태의 몬스터를 한 방에 처치하려면 조건이 정말 까다로웠다.
이를테면 다량의 신성력이나 암흑기를 이용해서 일거에 몰아치는 형태여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즉, 강후가 암흑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레벨 200이 되지 않은, 그것도 암살자가 암흑기까지 다룰 줄 안다는 얘기인가?
괜히 암흑기나 신성력이 제7의 스탯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깨우치기 어렵고, 깨우친다 한들 쓸만한 양을 모으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후는 이미 충분한 양의 암흑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믿기지 않았다.
"천천히 나오지. 상황은 다 끝났으니."
강후가 문형서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웃으며 말을 남겼다.
격리 중인 공간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스킬인가 싶겠지.
한편, 강후는 검은 그림자를 처치하고 획득한 암흑기 스탯을 살피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를 처치하고 임의의 확률로 활성화된 암흑기 스탯 '20'을 얻었습니다.]
'진짜 수지 맞았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암흑기를 한 번에 얻었다. 덕분에 암흑기 스탯이 120이 됐다.
이 스탯이 매우 소중한 이유는 제7의 스탯은 포인트를 투자해서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몬스터 사냥 또는 아이템 획득으로만 올릴 수 있는 스탯이었다.
제7의 스탯이 옵션에 들어가 있는 아이템은 그 수가 매우 적어서, 구하기 너무 어려웠다.
결국 이렇게 검은 인도자나 검은 그림자를 처치해야만 올릴 수 있는 그림.
하지만 그것도 철저하게 확률을 따라가고, 확률 자체도 한 자릿수에 머무는 만큼....
얻을 상황보다 얻지 못할 상황이 더 많았다.
하루 종일 이쪽 계열의 몬스터를 사냥하고 다닌다 치면, 1 정도 오르면 많이 오르는 것일 터.
모든 시간을 암흑기 획득에 집중한다고 했을 때로 잡으면, 약 1달을 아낀 것과 같았다.
단 한 번의 전투로 말이다.
이윽고, 공간 격리가 풀린 문형서가 원래 공간으로 복귀하며 강후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스터 K가 강후를 자신을 대하듯, 잘 지켜주라고 신신당부를 했었기 때문이다.
신보다도 더 신처럼 모시는 마스터의 말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신강후 님. 제 불찰입니다."
바늘로 눈을 찔러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을 것 같은 문형서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 의외였다.
그만큼 K의 당부가 그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뜻도 되겠지.
하지만 강후는 문형서를 탓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검은 그림자의 타깃이 문형서였기 때문에 그가 공간 격리가 된 것일 뿐이다.
반대로 검은 그림자가 집요하게 자신을 타깃으로 삼았으면, 결국 자신이 격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저 녀석의 선택은 복불복이잖아. 누가 선택되어도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해피 엔딩으로 끝났음에 감사하자고. 덕분에 나도 재미를 좀 봤고 말이야."
레벨이 오른 건 아니지만, 상당한 경험치를 한 번에 얻었기에 강후는 만족하고 있었다.
특히 암흑기 스탯의 증가가 반가웠다.
지금도 충분히 강력한 흑월참의 위력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테니까.
문형서는 계속된 사과가 오히려 부담을 줄 수 있겠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멋진 대응이었습니다. 정말 깔끔한 스킬 공격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만큼."
자신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고 싶었다.
이쯤 되자, 첫 만남에서 강후에게 날 선 반응으로 경고했던 자신의 모습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문형서는 강후가 검은 그림자를 죽인 스킬이 절대 평범한 스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스킬에 대해 따로 언급이 없었기도 했고 말이다.
문형서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마스터 K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었다.
하물며 마스터 K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손님이니 비밀을 발설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숨겨 주는 쪽이라면 모를까. 다만 강후에 대한 경외감만큼은 꼭 표시하고 싶었다.
"타이밍이 잘 나왔어."
"아직도 좀 얼떨떨하네요. 그라운드 제로 남쪽에서는 절대 나올 일 없는 녀석인데 말입니다."
"녀석이 직접 내려온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데리고 왔을 수도 있지."
"헌터의 소행이란 말입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냐. 검은 그림자도 지성을 가진 존재니까. 헌터와 어떤 협의가 있었을지도?"
"음...."
"다 추측일 뿐이야. 어쨌든 절대라는 전제는 앞으로 붙이지 않는 게 좋겠어. 100%는 없잖아."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스스로 잘 피드백 해 봐. 다양한 상황을 변수에 둬서 나쁠 건 없잖아?"
"그렇죠."
문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레벨이 훨씬 낮은 사람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듣고 있는 상황이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일견 타당한 말이었으니까.
다행히.
강후의 멋진 대응 덕분에 검은 그림자와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나게 됐다.
문형서는 다짐했다.
강후의 말대로 상식에 따라 판단하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머리에서 지우겠다고.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를 제한하게 만드니까.
그런 의미에서 강후의 이번 대응이 더 멋지게 느껴졌다. 좋은 것을 배웠다.
* * *
이후로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
물론 강후와 문형서 둘 다, 주변 경계에 더 집중하면서 이동한 덕분이기도 했다.
중간에 몇몇 헌터 패거리가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의 영역이라 무시하고 지나갔다. 괜히 정의감을 발휘할 필요는 없다.
어느샌가 도착한 김신령의 별장 앞.
여기는 별장이라는 표현보다 차라리 대저택, 거대 아지트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입구에서 차를 타도, 한참을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왜냐면 정문에서부터 실제 거처로 보이는 건물까지의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이다.
'이미 희생자가 좀 있군.'
강후가 밖에서 슬쩍 내부를 살펴보니, 여기저기서 헌터의 시체가 제법 보였다.
특이하게도 시체가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울타리나 내부 수풀에 특수한 처리가 되어있는 걸까?
평범하지는 않은 것이 죽은 헌터의 시체가 서서히 말라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치 생기를 서서히 빨리면서, 다른 어떤 무언가의 '양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별장 전체의 보안, 감시 시스템의 동력 중 일부가 생체일 수도 있겠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다.
별장 전반의 거대한 공간이 전부 시험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순간이동을 쓰면 되니까.
물론 그렇게 되면 김신령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만큼, 이후의 스텝이 꼬이긴 할 터다.
그때.
문형서가 정문에 있던 방문자용 벨을 눌렀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벨을 누르자마자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지?
"저, 문형서입니다. 마스터 K께서 보내셔서 고객과 함께 왔습니다. 뵐 준비가 끝났습니다."
- 고객 얼굴 좀 봤으면 좋겠는데?
김신령의 목소리와 말투는 듣기에 따라, 재수 없다고 하기 딱 좋은 색깔을 갖고 있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녀에게서만 얻어낼 수 있는 무색 부적이 꼭 필요한 시점이니까.
강후가 화면에 잘 잡힐 수 있는 자리로 위치를 옮기고, 얼굴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바로 반응이 나왔다.
- 오? 잘생겼잖아? 형서야, 이렇게 보니까 네가 오징어가 따로 없는 것 같다.
"...꼭 그런 말씀을 이런 자리에서."
문형서가 난감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김신령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누가 봐도 강후는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가 맞았다. 자신은 평범한 얼굴일 뿐이다.
-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형서, 너는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까 따라서 들어오고.
"네."
- 우리 잘생긴 고객님께서는 제가 정한 룰대로 입장해 주셔야겠네요. 동의하시죠?
"그러죠."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하다가 죽을 것 같으면 언제든 도망쳐도 됩니다. 물론 다시는 얼굴 보지 않을 생각으로요.
"이따가 뵙죠."
강후가 호기롭게 한 마디를 답으로 건넸다.
그녀에 대한 기억과 연구는 어느 정도 끝낸 상태. 밑그림은 충분히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끼이이이....
굳게 닫혀 있는 정문의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어둠이 짙게 깔린, 수풀과 가시덤불로 벽을 세운 미로 지대가 나타났다.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 만큼 까다로워 보이는 '시험'의 시작이었다.
* * *
안내자를 따라, 특수 지하 통로로 이동한 문형서는 바로 김신령을 만날 수 있었다.
김신령과 마스터 K가 서로 친분이 깊었기에 자연스럽게 문형서와도 가까워졌다.
문형서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넨 김신령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고객을 잘 보내지 않는 양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부분이 있으십니다."
"오호... 바깥사람에게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그 양반이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까? 그래야 여기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김신령이 가리킨 위치에는 수십 개의 화면이 모니터를 통해 출력되고 있었다.
전부 그녀의 별장 안에 있는 미로, 함정 지대를 고화질로 보여 주고 있는 화면들이었다.
필요에 따라서 화면을 확대하는 것도 가능했고, 각도를 전환해서 보는 것도 가능했다.
실감 나는 구경을 위해서 설계되었다고 해도 될 만큼, 지켜보기에 특화된 구성이었다.
"오는 길에 검은 그림자를 만났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상황은 그랬죠."
"아? 요 며칠 울릉도 내에서 헌터 실종 사건이 빈번하다더니만, 그놈 소행이었나 보네?"
김신령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수의 헌터가 희생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달리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건 문형서도 마찬가지.
실종되거나 죽는 것이 일상화된 세계라 그런지,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네. 그런데 초기 대응 과정에서 제 미숙함으로 공간 격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저 친구가 검은 그림자를 일대일로 상대했단 말이야? 검은 그림자는? 도망쳤어?"
"아뇨. 죽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공격에,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서 말입니다."
"오호?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네. 그게 가능하더군요."
김신령이 자신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관심이 고조될 때 보이는 특유의 반응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
[도전자, 제1구역 통과.]
모니터에서 강후가 첫 번째 트랩을 돌파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이제 시작이기에 가장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구간. 그래서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벌써 강후가 통과한 것이다.
"이놈 봐라...?"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재밌는 놈이 나타났다.
144화 울릉도 (4)
* * *
'진짜 짓궂네.'
첫 번째 함정을 통과한 강후가 고개를 숙인 채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성공이었다. 원작에서 조형된 김신령의 성격에서 추론한 그림이 맞아떨어졌다.
누가 봐도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시작 구간.
예쁜 꽃들이 가지런히 잘 자라고 있고, 분위기 있는 벤치와 가로등까지 놓인 공간.
그래서 여기는 시작점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위치에 함정이 있었다.
강후가 분신을 안으로 들여보냈더니, 곧바로 마창이 날아든 것이다.
마법 스킬이 부여된 마창이기에 만약 타격당했다면 그대로 인간 꼬치가 되었을 한 방이었다.
김신령이 원작에서 했었던 대사 중에 강후가 늘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하나 있다.
- 내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한 방을 시원하게 먹였을 때야.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는 전략, 전술적인 측면에서 허를 찌르는 것을 매우 즐긴다는 얘기였다.
누가 봐도 입구는 음산하고 어두워 보이는 미로의 초입과는 전혀 다른 밝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강후도 잠깐이지만, 여기는 일종의 대기용 공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신령이 허를 찌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으면 여기서 인생이 끝날 뻔했다.
"흠."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폭이 상당히 좁아지면서 대폭 어두워지는 길이다.
일단 시험의 영역 전체는 모두 미로 형태로 되어 있고.
동시에 벽은 나무와 가시덤불을 엮어서 만든 단단한 구조물 형태로 되어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나무와 가시덤불을 태워 버리면, 벽이 사라지고 지름길이 나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즉사다.
왜냐하면 나무와 가시덤불의 틈새로 수많은 폭발 트랩이 연계되어있기 때문이다.
벽을 뚫어보려다가, 뚫기는커녕 벽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강후는 먼저 움직이기에 앞서서 환영술로 만든 환영을 앞으로 슬쩍 보냈다.
아무리 봐도 뭔가 나올 여지가 없는 길이지만,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것이다.
김신령은 상식을 깨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해 보이는 곳에 반드시 빈틈을 만든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는 별다른 준비를 해 두지 않는다.
허에 허를 찔러서, 상대로 하여금 판단에 혼선을 주는 방식이다. 상당히 고약하다.
이윽고 환영이 길목 안으로 접어드는 순간.
콰드득!
방금까지만 해도 평평한 지면이었던 흙바닥이 흔들리더니, 날카로운 창이 솟구쳐 올랐다.
'잔인하기 짝이 없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지 날카로운 창 몇 개가 올라온 수준이 아니라, 창끝에 독까지 발라져 있었다.
창에 꿰뚫리지 않았어도, 조금만 스쳤으면 바로 중독 상태가 되었을 거란 얘기다.
창이 올라온 상태로 멈춰있다.
회심의 변화구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지나가더라도 별일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강후는 움직이지 않고, 이번에는 그림자 걸음 스킬로 만든 그림자를 보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스우우우웁!
미로의 왼쪽 벽에서 강력한 흡기가 일어나며, 그림자를 쭉 빨아들이더니.
푸슷! 푸슷! 푸스슷!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던, 짧은 창 세 개가 밖으로 나오면서 허공을 찔러댔다.
그림자였기에 허공을 찌른 거지, 사람이 있었다면 등이든 가슴이든 관통당했을 공격이었다.
사탄, 악마.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릴 단어가 쉴새 없이 떠오른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대로 흘러간 것이 없다.
안전해 보이게 포장된 입구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었다.
함정이 하나만 있을 것처럼 연출된 공간에는 함정이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다시 분신을 만들어내, 두 차례의 변수가 있던 공간에 또 보냈다.
그러자.
콰드드득!
이제는 아예 양쪽 벽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중간에 작은 틈조차 남지 않게 맞물려 버렸다.
그랬다.
최종 함정은 양쪽 벽에 짓눌려서 압착으로 몸이 으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최악의 함정이었다.
"독하다, 독해."
강후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쯤이면, 고객 유치가 아니라 살인이 목적인 건가 싶을 정도로 생각이 혼미해진다.
* * *
그 이후.
김신령은 문형서와 함께 모니터를 통해 강후의 대응을 보며, 연신 신기해했다.
나름 머리를 굴려서 짜놓은 트랩을 강후 역시 생각을 하고, 또 비틀어서 대응했던 것이다.
"마냥 신중하다고 하기엔, 과감하게 넘어갈 구간은 또 과감하게 넘어가 버리네."
김신령의 반응에 문형서도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보고 느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겁을 먹은 개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친구는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이 많다 보니까, 변수 대처 능력이 훨씬 뛰어난 것 같아."
"확실히 암살자의 일반적인 스킬 구성과는 전혀 다르죠. 매칭이 잘 안 되는 스킬도 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뭔가 좀 꺼림칙하다 싶으면, 저 슬라임을 쓰는 것도 인상적이네."
화면 속에는 뜬금없이 불쑥 만들어져서는 온갖 공격을 받아내고 전사(?)하는 슬라임도 있었다.
게다가 정말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겠다 싶을 때는 강후가 보호 결계를 둘러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렇다 보니, 판을 꼼꼼하게 짜놓은 김신령의 입장에서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마치 가위바위보에서 자신이 뭘 낼지를 미리 알고서 손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강후의 움직임에 내심 감탄하고 있던 문형서가 슬쩍 운을 뗐다.
"그간 봤던 헌터들과는 좀 다르지 않으십니까?"
"응. 생각을 영리하게 할 줄 아는 아이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설계자인 내 관점으로 보고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가진 스킬 풀이 다양하다 보니까, 이제는 계산이 섰는지 그대로 돌파해 버리네."
"와. 벌써...! 거의 다 들어온 겁니까?"
"그림자 활용 스킬이 진짜 대박이야. 미리 보낸 그림자로 함정을 체크할 수도 있고. 안전하다 싶으면 위치를 바꿔 버리잖아?"
"예. 맞습니다."
연신 계속될 수밖에 없던 칭찬에 괜히 짜증이 났는지, 김신령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미친놈이네, 저 새끼! 무슨 저런 암살자가 다 있어? 어디서 온 놈이야?"
그것은 분명 극찬이었다.
* * *
얼마 후.
김신령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별문제 없이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강후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마주했던 함정과 그 구조를 복기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신령은 괴짜가 맞았다.
진심으로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죽이기 위해서 고민한 흔적이 모든 공간에 담겨 있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억지로 들어와서 죽으라고 한 적은 없다.
여기서 생을 마감한 헌터는 모두 자기 의사로 진입했고, 죽었을 뿐이다.
김신령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죽은 헌터가 문제지.
이윽고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와 함께, 만날 준비를 마친 김신령이 응접실로 왔다.
그 순간, 강후가 어지간해선 잘 안 보이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다.
강후의 반응에 김신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웃어?"
"아무리 솜씨가 뛰어나도 그렇지, 대놓고 유명인의 얼굴을 갖다 쓰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김신령의 얼굴은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의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얼마나 감쪽같이 만들었는지, 얼굴만 보면 엘리자베스라고 착각할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얼굴밖에 커버가 안 되어서 목이나 손의 주름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가면 제작도 그녀의 능력이다. 사실 가면보다 인피면구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예쁜 얼굴 나도 해 보고 싶어서 그런다, 왜?"
김신령의 당당한 반응에 강후도 더 뭐라고 뒷말을 붙이진 않았다. 취향은 존중해 주는 게 맞다.
"이 정도면 시험은 충분히 통과한 겁니까?"
"뭐.... 솔직히 훌륭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아주 깔끔했어."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한 함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신 도전하고 싶진 않네요."
"네 대응을 보면, 미국에 있는 내 별장에 한 번 도전해 봐도 재밌을 듯한데?"
"죽을 짓 두 번은 사양하죠."
"어쨌든 얘기를 들어 보자. 내게 사고 싶은 게 뭐라고?"
"무색 부적입니다."
"무색 부적이 어떤 부적인지는 알아?"
"모릅니다."
강후가 솔직하게 답했다.
굳이 그녀 앞에서 아는 척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오히려 신뢰에만 문제가 생길 뿐이다.
"기존에 옵션이 있는 부적 아이템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든 거야."
"아."
혹시 하는 생각으로 추측은 했지만, 듣고 나니까 훨씬 흥미로운 형태였다.
말로만 들어선 쉽게 가능한 작업처럼 들리지만.
안정성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게 되면 아이템은 분해 과정에서 무조건 가루가 된다.
일부 파손, 능력 상실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이템 세공 실력자도 아이템 분해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
그리고 분해 실력자는 애초부터 전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수가 적었다.
그중 한 명이 김신령인 셈이다.
특히 작아서 더욱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부적까지 분해할 수 있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가격 책정은 일찌감치 해 놨어. 99억 9900만 원. 하지만 특별히 할인해 줄게."
"얼마입니까?"
"공짜."
"음?"
할인을 해 준다는 얘기에 많아야 20% 정도를 생각하고, 80억 원 정도의 결제를 생각했는데.
그녀가 제안한 금액은 공짜. 0원이었다.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네 덕분에 내가 만든 함정의 보완점을 많이 알게 됐거든. 자문료로 이쯤 해 주겠다는 건데?"
"이왕 마음 쓰는 김에...."
"할인 취소하기 전에 닥치고 그냥 이대로 받아. 흥정하려고 하면 입을 못 놀리게 다시 높이겠어."
"감사합니다."
강후가 마음 쓰는 김에 자문료에 더 값을 쳐달라고 하려던 말을 신속하게 취소했다.
김신령이 바로 준비해 온 부적을 쓱 내밀었다.
무색 부적이라는 이름처럼 아무 빛깔이 없는 부적이었다.
아이템 창을 보아도 표시된 이름을 제외하면, 어떤 옵션도 없었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했다.
"후처리는 다 해 놨어. K에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사연이 많은 것 같던데. 고생이 많겠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다 그런 거죠."
"말은 잘하네. 어쨌든 말이야. 오늘 시험에서 보여 준 모습은 참 마음에 들었어. 잘했어."
"칭찬은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하나 제안을 하고 싶은데. 혹시 한 번 들어볼 생각 있어?"
"네. 말씀하시죠."
김신령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 많은 어필이 된 모양이다.
이야기가 개인적인 영역으로 접어들자, 문형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이내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김신령이 바로 운을 뗐다.
"내가 요즘 다루고 있는 암살형 소환수가 있는 데 말이야. 학습을 도와줄 수 있을까?"
"소환계였습니까?"
"응. 내 본질은 소환계야. 부수적으로 다루는 것이 세공과 분해지만."
의외였다.
양립하기 힘든 특성인데 양쪽으로 특화가 된 모양이다. 분명, 보통 능력자는 아니다.
"도와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맨입으로는 어렵죠."
"네가 들고 있는 단검. 보니까 무기 먹이는 옵션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어때? 내가 먹일 수 있는 무기 하나를 대 주지. 이 정도면 흥미가 좀 동하실까?"
단검의 특성을 바로 꿰뚫어 본 김신령이 생각지도 않았던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다.
단검 '타락한 신념'의 '왜곡 각성' 옵션을 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145화 울릉도 (5)
그녀가 옵션을 보지 않고서도 아이템의 특성까지 판단한 마당에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강후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눈에는 보여."
김신령이 짧게 답했다. 그 말로도 대답이 충분하기는 했다.
강후에게 상대 성좌 정보가 보이는 것도 자기 눈에는 보이니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열 명이 넘는 성좌와 계약하고 있는 김신령. 그녀의 레벨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500 이상이다.
그렇다면 세공과 분해에 특화된 그녀가 아이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의문인 것은.
먹일 수 있는 무기는 그만큼 비쌀 텐데, 자신에게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단지 초면에 마음에 들었다고 비싼 무기를 태우기에는 동기가 부족하지 않은가?
아니면 최하급의 아이템을 던져주고 되도 않는 생색이라도 내려는 걸까?
강후의 눈빛이 다른 의미로 깊어지는 것이 보이자, 김신령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필요 없는 쓰레기 아이템이나 던져주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럴 만한 이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 직접 봐봐. 안 그래도 너 같이 의심 많은 놈은 자기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
김신령이 강후에게 단검을 무심히 던졌다. 단검을 받아든 강후는 바로 옵션을 확인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아이템과 다르게 이 아이템은 시작부터 특징점이 있었다.
[평온 - 무기]
[등급 : 7등급]
[해당 무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손상을 입어, 착용 시 기존의 옵션 혜택을 볼 수 없습니다.]
[근력 +35][적용 불가]
경고문이 있었던 것이다.
스탯 옵션이 존재하기는 하나,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
강후가 일시적으로 기존의 단검을 탈착하고, 이 녀석을 착용해 봤으나 스탯의 변화는 없었다.
원작에서도 아이템이 이렇게 되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시환의 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보니, 장시환의 아이템은 저렇게 될 일이 없었다.
그래. 주인공 보정이었다. 아주 작은 손해도 보게 하고 싶지 않은 원작자의 욕심이었다.
어쨌든 지금 눈앞에 파괴된 아이템이 있다. 가치를 상실한 아이템인 셈이다.
"파괴된 아이템이네요."
"맞아. 헌터가 착용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 스탯이 바뀌지 않으니까. 쓰레기가 맞아."
"아...!"
그때, 강후가 번뜩인 생각에 탄성을 터뜨렸다.
착용해서는 의미가 없는 게 맞다. 하지만 '먹이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착용할 경우만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경우는 얘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설정의 맹점이었다.
"이제 이해가 가지? 난 이런 아이템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많이 갖고 있어."
"...."
솔깃해진다.
일반적인 헌터에게야 존재 가치를 상실한 아이템이니 버리거나 싸게 처분했겠지.
하지만 김신령은 모종의 이유로 그런 아이템들을 수집해 왔던 듯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네가 내게 협조를 해 주는 만큼 고등급의 아이템을 공짜로 줄 수도 있어. 0원에 말이야."
"그건 좀 끌리네요."
"그치? 흥미가 동하지?"
"예."
"직접 돈 주고 구매해서 먹이려고 하면 아깝잖아? 하지만 공짜로 먹이는 건 기분이 좋을 거고."
"지금 협조를 원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아냐. 일단 연락처만 서로 교환하자. 필요하면 내가 직접 연락할게."
"저도 일정이 많아서 원하는 시간을 비워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양해가 필요합니다."
"누가 뭐래? 조율해서 만나자는 얘기지. 걱정 마. 갑질하려고 부르겠다는 거 아니니까."
꽤 흥미로운 이슈가 생겼다.
그녀가 어떤 단검 아이템을 주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고등급의 파괴된 아이템을 건네준다면, 그만큼 많은 스탯이 단검에 추가될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제값을 주고 사서 먹이기에는 아까운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
하지만 공짜로 얻어서 먹인다면 강후의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장사였다.
물론 그녀가 어떤 형태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지나치게 호구 잡힌다 싶으면, 판을 깰 생각도 있었다.
끌려가는 관계의 거래는 강후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기에.
그렇게 김신령과의 짧고도 강렬했던 만남은 끝이 났다.
그녀는 거래가 끝나기 무섭게, 별장 지하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에 또 보자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다른 의미로 참 캐릭터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 * *
문형서와는 김신령의 별장을 나와, 시내로 나오자마자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후는 울릉도에 잡아 놓은 안전 호텔에서 잠을 잘 생각이었고, 문형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낙 방문자가 많은 울릉도이다 보니, 조금 위험하긴 해도 밤시간의 배편도 있었다.
물론 만약의 사건 사고를 대비해서 생각보다 큰 배가 움직이기에 뱃삯이 좀 비싸지만 말이다.
전과 다르게 시종일관 정중하고 예의 바르던 문형서는 헤어질 때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오늘 많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신령 님께서도 많이 감탄을 하셨고요."
"그랬군. 그럴 만했지."
강후가 만족스럽게 자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함정 구간을 통과했으니까.
"저도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되더라고요. 나름 영감도 됐습니다."
"그랬다면 나야 기쁜 일이고."
"혹시 괜찮으시면...."
"응."
"다음에 대련을 좀 해 볼 수 있을까요? 암살자 상대법을 좀 다듬고 싶기도 한데."
"나도 창술계를 상대해 본 경험은 적어서. 피차 서로에게 도움 될 대련 같기는 하네."
"예,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좋아. 다음에 마스터 K를 보게 되면, 그때 판을 좀 깔아보자고. 장소는 있지?"
"물론입니다. 대련용 장비도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무색 부적은 제가 인계받았으니, 마스터께서 준비되시면 연락을 직접 주실 겁니다."
"조심해서 가고."
"예.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 수 있도록 마스터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수고해."
그렇게 문형서와도 헤어졌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밤의 기운을 빌려 잠을 청하기에는 정신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별장에서 수많은 함정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바짝 올라온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때.
"오늘은 저거다."
때마침 시야에 들어온 편의점을 본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캔맥주에 버터구이 오징어. 오늘은 왠지 이 조합이 입안에 착 달라붙는 꿀맛이 될 것 같았다.
* * *
1시간 후.
"일본은 아직 스탠바이가 안 됐고. 하얀 전쟁은 지금은 철저하게 간을 보는 게 좋겠고."
호텔에서 혼자만의 야식 타임을 즐긴 강후가 그동안 짜놓은 판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일본행을 빠르게 추진하고 싶지만, 현지 사정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태.
여기는 강후가 서두르고 싶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만큼, 편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하얀 전쟁은 지금은 시작 단계로 너무 과열 상태다.
용병 의뢰의 9할 이상이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집중되고 있는 상황.
한탕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인 것은 맞으나, 재수가 없으면 시작과 동시에 죽기도 딱 좋았다.
애초에 개싸움이 되는 현장에서 날뛰는 것은 강후가 썩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눈먼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죽음도 복불복의 요소가 된다.
"에밀리아를 만나려고 프랑스에 지금 가는 것은 좀 뜬금없고. 체급이 너무 낮지."
프랑스 행도 시기상조.
김수경 용병단이나 그루 길드도 갑자기 스킨십을 늘려가기에는 부담이 좀 있다.
먼저 들이대는 모양새를 보이게 되면, 아무래도 유리한 고점을 선점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박동재. 전세혁. 반세영. 이쪽 라인도 이제 좀 가까워진 느낌에. 이예린, 윤상미, 정유리와도 문제없고."
쓸만한 인맥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그만큼 악연들도 같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원래는 강동현의 이클립스와만 척을 진 사이였지만, 최근에 하나가 더 추가된 상황이다.
바로 러시아의 까쉬마르 길드.
녀석들도 언제,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뒤끝을 보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굽힐 생각은 없다.
"그래. 이현석이 있었지."
그때, 요 근래 접촉이 거의 없어서 후순위로 밀려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이현석.
조카 민수현을 구해주고 그에게서 받은 피의 증표와 개인 번호는 여전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때의 명분이야 티타임이나 한 번 갖자는 것이었지만.
이현석이 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현석의 '심연'이 보유한 던전의 개수나 구성을 본다면, 국내에서 이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시기도 괜찮았다.
오히려 너무 미뤄지면, 민수현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감정이 희석될 수도 있다.
딱 지금이 그 감정을 환기하면서 끌어 올려 주고, 생색을 내기에도 적당한 시점이다.
아울러 최근에 강동현의 척살령 이슈로 이름값도 올랐으니, 자연스럽게 어필도 되는 상황.
"다음은 심연이다."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이제 이현석이 자신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게 할 시간이 된 듯하다.
* * *
그 시각.
이현석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로 정보 확인에 여념이 없었다.
워낙 방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보니, 확인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 부분은 휘하의 정보팀이나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도 되지만....
직접 보고 판단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현석의 성격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현석의 옆자리에는 핑크빛 긴 머리를 대충 묶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민수현이 있었다.
"수현아. 수현아."
"우, 우우웅...? 삼촌, 왜요?"
"이거 봐라.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김대만 이 새끼. 까쉬마르 길드랑 커넥션이 있었단 말이다."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요야! 정화 길드와 까쉬마르 길드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다는 증거지."
"하아암...."
"그래, 네게 말한 것이 실수지. 얼른 들어가 자라. 내일부턴 아예 집에서 푹 쉬고."
"헉, 삼촌!"
아예 집에서 푹 쉬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집에서 쉬는 만큼, 심연 차원에서의 지원과 보조도 같이 쉬겠다는 의미였다. 끊는다는 뜻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분위기를 인지한 민수현이 갑자기 텐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네! 삼촌이 전부터 정화 길드가 까쉬마르 길드랑 접점이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됐다. 들어가라. 이미 내 마음이 짜게 식어 버렸다."
"삼초오오오온!"
"됐고. 일단은... 음?"
그때.
이현석이 책상 서랍 가장 위쪽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넘버링 1번인 번호로 걸려온 전화라는 뜻이다. 즉, 강후의 전화였다.
그간 소식이 뜸하다 싶었는데, 이제야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 든 모양이다.
최근 이클립스에 관련된 강후의 이슈를 알고 있는 이현석이었기에 전화가 더 반가웠다.
심연은 정화 길드만큼이나 이클립스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내어 반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충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대되는 연락.
이현석이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서는 강후의 전화를 받았다.
"이현석입니다. 조카 수현이를 구해 주신 은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시작부터 감사함이 물씬 묻어나는 이현석의 멘트.
전화를 건 강후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통화의 시작이었다.
얘기가 잘 풀릴 듯했다.
146화 심연 (1)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늘 사람이 붐비는 인천 공항은 아침부터 출국과 입국을 준비하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최근 하얀 전쟁이 발발하면서, 외국 용병의 수요도 급증을 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중국, 러시아, 몽골 등지의 용병들도 제법 많이 입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국내 테러를 계획하거나 민간인을 공격하는 행위를 한다면 입국을 엄격히 통제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제약사 간의 전쟁에만 참여하는 전쟁 용병인 탓에 입국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국인이 아닌 모든 승객에 대해서 검문검색을 확실히 하기는 했다.
적어도 이름과 정체를 숨긴다거나, 활동 내역을 감추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외국 용병들도 당당하게 입국하기를 원했지, 밀항이라던가 하는 위험한 수단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인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햇빛이 없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선글라스를 낀 그의 모습에서 허세가 잔뜩 묻어났다.
"X 같은 날씨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어! 여기! 소혁아, 여기다!"
그를 알아본 다른 남자가 손을 힘껏 흔들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러자 잔뜩 찌푸려져 있던 남자의 표정도 풀렸다.
"인호 형. 오랜만이네."
"그래, 소혁아. 중국에서 계속 활동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국내 일정을 잡아서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랄 게 뭐가 있어?"
"국내 활동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서 대장도 너를 중국으로 보냈던 거고."
"태평하게 지낼 수 없는 이유가 생겼잖아."
소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대답에 마중 나온 남자, 김인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수긍하기보다는 살짝 의문이 남는다는 눈치였다.
김인호.
그는 전주권역을 장악하고 있는 범죄 조직, '태양' 소속의 조직원이었다.
강동현의 배다른 형인 대장 강태양의 심복이기도 했으며, 수더분한 성격이라 조율에 능했다.
그래서 오늘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동생을 직접 '모셔가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너와 여동생은 사이가 정말 나빴잖아? 여동생이 이클립스로 가고, 네가 태양에 온 시점에서 아예 갈라선 걸로 아는데."
김인호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랬다. 이 남자의 정체는 차소희의 친오빠인 차소혁이었다.
김인호의 말대로 서로의 생각과 신념이 달라, 활동 조직을 다르게 선택했다.
문제는 이클립스와 태양의 대장이 각각 강동현, 강태양이었던 탓에.
서로 원수처럼 반목하며 으르렁거렸다는 것이다. 둘의 사이는 나쁘다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았다.
세간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서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상대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를 죽인 원수, 천륜을 저버린 패륜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원수 같은 둘의 관계는 휘하의 부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차소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갈라선 게 맞지. 하지만 말이야. 소희를 죽여도 친오빠인 내가 죽이지, 남이 죽이게 할 수는 없어."
"...."
"신강후, 그 새끼는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그게 오빠의 도리야. 놈의 뼈와 피를 갈아서, 소희의 영전에 바치겠어."
까드득.
차소혁이 이를 갈았다.
그의 입국 목적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강후의 죽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국내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 *
정오.
자신이 직접 강후를 맞이하겠다는 민수현의 자원을 뿌리치고.
이현석이 직접 나와 약속 장소에서 강후를 맞이했다.
보안이 생명이다 보니, 중간에 통화로 약속 장소를 네 번이나 바꿨다.
그 과정에서 강후의 뒤에 눈이 붙었는가를 살피겠다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미행은 없었다.
이현석을 만나게 된 장소는 심연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관광호텔 안이었다.
이용 고객의 90% 이상이 심연 소속의 헌터였고, 혜택이 많아 사실상 무료 이용이 가능했다.
이현석을 따라 향하게 된 곳은 호텔 내의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서고, 방음 처리를 활성화하는 시설까지 완벽하게 구동하고 나서야.
이현석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는 보안을 확실히 챙겼다.
"이번에 강동현에 관련된 소식을 봤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다시 보게 됐습니다."
"살려면 싸울 수밖에요."
"이클립스에서 그래도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영악한 여성 조사관을 둘이나 잡으셨고 말입니다."
"딱히 영악한 것은 모르겠더군요. 어쨌든 합당한 결과를 얻어갔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차소희는 과하게 의욕적이었고, 진효영은 스스로의 외모와 실력을 과신했다. 둘 다 하자가 있었다.
"수현이 녀석이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것을 말렸습니다. 괜히 실례하게 되면, 자리의 의미가 퇴색될 듯해서요."
"말괄량이 조카를 두신 모양입니다. 하긴 첫 만남 자체도 평범하진 않았죠."
강후가 민수현을 구해 주러 가게 됐던 계기를 떠올렸다.
흑골단 대장 신준호의 아이템을 훔쳐보겠다고 혼자 김천 해방구에 들어갔던 것이 민수현이다.
이후 똑같은 '바보짓'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던 사고뭉치였다.
"이후로 제가 직접 관리, 감독하면서 녀석의 호기심을 많이 눌러 주고 있죠."
"고생이 많으십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후는 말 속에 담긴 이현석의 조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삼촌이라기보다, 아빠 같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딸 바보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강후는 자연스럽게 이현석에 대한 성좌 스캔도 진행했다.
원작에서 구현되어 있던 세팅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레벨은 620 언저리일 터다.
왜냐면 문유석의 배신으로 이현석이 죽었을 때, 레벨이 딱 620이었기 때문이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수현이를 구해 준 은인에 대한 보답은 제게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보상의 범위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이현석의 모습이 살짝 무서웠다.
100%의 호의가 아니라, 강후의 됨됨이나 생각을 파악하는 시험일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강후는 생각을 한 번 더 비틀었다. 더 간단하면서도 의미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
"해 주실 수 있는 보답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을 돌려 버렸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다.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느냐는 사실 크게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나저러나, 강후가 이현석이 아끼는 조카를 구해 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보상이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는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맞았다.
대답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되어도 같은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이현석이 강후의 말에 바로 망설임 없이 답을 꺼내 놓았다.
"심연 소유의 던전 다섯 곳에 대한 자유로운 공략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허가하는 겁니다."
심연 소유의 던전은 심연의 관리를 받으며, 헌터 치안청의 입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즉, 지금 이현석의 말대로 그에게 전권이 있었다. 그가 보장한다고 하면, 완벽히 보장되는 것.
"다섯 곳을 고를 수 있도록 관련해서 던전 정보를 넘겨주실 수 있습니까?"
"2급 미만의 정보로는 전부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던전 선택이 수월하실 테니까요."
이현석이 강후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1급, 2급 정보는 내부 핵심 공략 및 비밀 루트에 관련된 정보이기에 보호하는 것이 맞다.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할 영역의 정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밀의 영역이다.
이현석이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검지를 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하나 더. 지원팀을 꾸려드릴 수 있습니다. 경험치 독식도 보장합니다."
"전문적으로 육성을 돕는 팀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성장 속도가 아쉬운 유망주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그런 팀이죠."
군벌 심연은 다양한 정예 조직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억이 맞다면, 육성을 지원해 주는 팀의 이름은 '청호대'일 것이다.
그리고 마탄 저격수로 구성된 팀은 '적호대'로 부르고, 암살자로 구성된 팀을 '흑호대'로 부른다.
그들은 각각 혹독한 훈련을 거쳐 최정예가 되며, 이현석의 든든한 핵심 세력이 된다.
"다섯 곳이라...."
"부족한 것 같으십니까?"
"아뇨. 고민을 신중하게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강후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심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배려였다.
애초에 심연 소유의 던전은 외부인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용병도 구하지 않았다.
모든 공략을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하기에 베일에 가려진 정보가 정말 많은 곳이었다.
그런 심연에서 강후를 위해 던전 다섯 개를 내어주고.
거기에 지원팀을 붙여, 원활한 경험치 파밍까지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외에 까다로운 아이템 판매나 혹은 쓸만한 아이템의 구매도 도움을 드릴 수 있고요."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하게 답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외부인에게는 좀처럼 열어 주지 않는 던전을 저에게 배려해 주시는 건데.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신강후 님을 믿는다기보다, 상황을 믿는 거죠. 수현이를 구해주신 것이 거짓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그 상황이 진실이기에 저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과거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 강후 님을 부정하게 되겠죠."
"우문현답이네요."
"현문우답으로 하시죠. 하하."
한마디로 자신에게 신뢰를 보이는 만큼, 혹은 신뢰하지 않는 만큼 대응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은원이 확실한 이현석의 성격에 잘 어울리는 대답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국내에서 성장의 기폭제로 활용할 만한 던전 다섯 곳의 공략 기회를 약속받았다.
심연이 소유한 던전은 대부분이 알짜들이다.
특히 강후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다수인 던전이 꽤 많다는 것이다.
그런 곳들로 리스트 업해서 공략 목록에 넣을 수 있다면, 스킬의 대량 획득도 가능해진다.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
이현석이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강후에게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꾼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깊게, 훅 들어오는 질문이었다.
"혹시... 강후 님은 정화 길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마음 편하게 대답하기에는 듣게 될 사람에게 의미가 크고 무거운 질문이었다.
147화 심연 (2)
* * *
강후의 요청에 대화 장소가 바뀌었다.
두 사람은 넓어도 결국 막힌 공간인 펜트하우스에서 나와 잘 조경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강후는 안에서 유예했던 대답을 밖에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위선이 진실을 집어삼킨 조직을 살갑게 여길 수는 없겠죠."
"좋은 대답이네요."
"세상에 절대선, 절대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차라리 솔직한 악은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말룸 길드 같은 곳 말입니다. 걔네들은 아예 자기들이 악당이라고 하잖습니까."
"이름도 그렇게 지었죠. 말룸이 라틴어로 악을 상징하는 단어였던 가요?"
"그럴 겁니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까쉬마르 길드나 정화 길드처럼 위선을 떠는 게 아니라."
담백하게 대답하는 강후의 말에 특별한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오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현석에게 듣기 좋으라고 해 준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는 없다.
다만.
앞으로의 방향성이 이현석의 지향점과 맞다는 생각은 했다.
이현석의 심연은 단일 조직으로는 국내에서 정화 길드와 '유일'하게 붙어볼 만한 조직이다.
괜히 정화 길드에서 각종 SNS와 언론 매체를 이용해 심연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오산에서 활동하던 바스타드나 평정 같은 조직은 적당히 누명을 씌워 박살을 내버리면 됐지만.
심연은 그게 안 됐다.
게다가 다른 길드 혹은 조직과 연대해서 심연을 견제하기에는 몸집이 컸다.
정화 길드에게 협조적인 단체도 심연 길드와 맞서자는 제안을 하면 물러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화 길드가 위성 길드를 여럿 두고 있듯이, 심연도 위성 조직이 꽤 있었다.
울산에 있는 조직인 '태화강'이 대표적인 예다.
공태수가 부상을 입은 이후, 그들은 주변 세력을 규합해 공태수의 '붉은 피'를 쳤다.
현재 울산의 지배 세력은 더 이상 붉은 피가 아니다. 태화강이었다. 심연의 세력권이 된 셈이다.
강후는 심연의 조직력과 결속력을 무기로 쓰고 싶었다.
그들이 계속 정화 길드의 발목을 잡아 준다면, 열세 개의 별을 견제하는 것도 쉬워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중립보다는 심연에게 한 발을 푹 담그고 있는 정도의 깊이가 좋다.
강후는 딱 그 스탠스에 맞춰 이현석과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세혁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박동재 씨 구출 건도 그렇고. 던전 공략 얘기도 그렇고."
"제 얘기를 하시던가요?"
"요즘 녀석의 주 관심사가 강후 님입니다. 원래 실력 좋은 헌터에게는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
"기분 좋은 얘기네요."
"사실 세혁이가 개인적으로 심연에 강후 님을 영입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었습니다."
"그건."
"압니다. 용병으로 썩기에는 강후 님이 아까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함부로 욕심을 부릴 수는 없죠."
"음."
"왜냐면 그 욕심 하나만으로도 더 많은 포커스를 받게 될 수 있고. 위험에 빠지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현석은 신중했다.
강후는 이현석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좋은 인재를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현석이 말을 덧붙였다.
"저는 강후 님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저도 이현석 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강후의 진심이었다.
이현석에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고독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거대한 세력 하나만 더 있었다면, 현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오히려 정화 길드가 수도권 밖으로 쫓겨나고, 심연이 서울의 주인이 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강후 님 같은 인재가 정화 길드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강후의 단호한 대답에 이현석도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증까지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장시환에게 그들의 은밀하고도 더러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네트워크라고 하시면?"
"장시환, 채관형과 같은 네임드로 구성된 일종의 흑막 같은 조직 말입니다."
"...."
다만 뒤에 덧붙인 말이 강후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현석은 마치 열세 개의 별의 존재를 인지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된 구성원과 원작의 내용 전체를 아는 강후가 아니라면.
지금 시점에 아무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데 이현석은 그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현석은 앞으로 게임 체인저로서 써먹기에 손색이 없겠어.'
강후는 확신했다.
이현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알아내려고 하고 있다.
정화 길드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은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더 차갑고 날카로웠다.
원작에서는 이 시점에 그가 죽어버리는 탓에 심연 전체가 와해되면서 국내 판도가 정리됐지만.
강후의 도움으로 배신자 문유석을 제거하고, 달라진 그의 미래는 분명 드라마틱할 것이다.
제대로 변곡점이 찍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강후에게 아주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다.
"어쨌든 실력은 변변찮지만, 혹시 암살자가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출혈 셔틀, 가능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만 강후 님을 위해서라도 연락은 아껴두고 싶군요."
"편하실 대로."
"던전 관련해서는 수현이 번호를 드릴 테니, 그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무조건 1순위로 처리할 테니, 던전 공략에 차질을 빚을 일은 없으실 겁니다."
"던전 관련 자료도 민수현 님에게 받으면 될까요?"
"예. 녀석에게 꼼꼼하게 준비하라고 일러뒀으니, 제대로 할 겁니다. 강후 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크고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이현석과 심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영향권에 한쪽 발을 힘껏 내디뎠다.
앞으로는 영리한 줄타기를 해야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대놓고 심연의 그늘 아래서 활동하면 정화 길드의 타깃이 되기에 딱 좋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심연과 거리를 두면, 나중에 그들을 유용하게 써먹을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
어떻게 상황을 조율하고 끌고 갈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력에 달린 문제이기에.
강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냉철하고도 정확한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
* * *
그 무렵.
심판의 지옥 1차 공략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위해 던전 밖으로 나온 장시환과 채관형.
두 사람은 앞서 모여 있던 다른 저스티스의 구성원을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인사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빈센트가 화제를 꺼내면서 히든 스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빈센트가 몸이 바짝 달아올라서는 장시환에게 채근하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장시환. 분명히 심판의 지옥을 공략한 암살자 중에 히든 스킬을 얻은 녀석이 있어."
"그렇게 배가 아파?"
"얘기했잖아. 히든 스킬은 부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부리는 거야. 개나 소나 다루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샌드백이 필요한 거면 얘기를 해. 치안청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헌터 범죄자도 꽤 있으니까."
"그런 놈은 맛이 없어, 맛이."
무슨 맛인가 하면, '죽이는' 맛이 없다는 얘기다. 다들 빈센트가 말한 맛의 뜻을 잘 알아들었다.
장시환이 팀 구성에 관한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1팀은 내가 관리를 하고 있었으니 논외. 그리고 7팀까지는 암살자 클래스가 없다."
"이 녀석은 단독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단독이라... 그렇다면 짐작가는 암살자가 있기는 한데."
장시환의 눈이 붉게 빛났다.
채관형은 굳이 피곤하게 저래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빈센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 장시환과 빈센트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잠깐의 생각을 거친 뒤.
"신...."
이름이 확실히 떠오른 장시환이 히든 스킬 획득자로 의심되는 암살자의 성을 읊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충분히, 그리고 몰래 히든 스킬을 획득했다고 의심해도 될 듯했다.
* * *
이현석과 헤어진 후.
강후는 그 길로 리셋이 끝난 자기 소유의 던전이 있는 경주역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혼자서 공략하기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던전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소유인 던전이기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언제든 머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전세혁의 배려로 던전을 상시 살펴주는 관리자도 상주하고 있어, 더욱 안심이 됐다.
물론 관리자가 강후의 던전 하나만을 관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리하는 던전마다 다수의 CCTV를 설치하고, 주변 확인을 수시로 하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했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던전에 들어오면, 적어도 경고용 조명탄 정도는 날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혼자서는 빡세네."
던전의 수준이 제법 높다 보니,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날쌔고 영리하다.
박동재의 버프를 달고 있을 때는 평지를 가볍게 뛰는 느낌이었는데.
혼자 있는 지금은 급경사 지대를 뛰는 느낌이었다. 상대적인 압박감이 느껴졌다.
"버퍼가 괜히 마약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버프 뽕맛을 본 헌터는 쉽게 못 끊으니까."
헛웃음이 나온다.
박동재가 강후의 실력에 감탄하고 강후와의 팀플레이를 갈망하게 된 것만큼.
강후 역시 박동재의 버프를 두른 팀플레이가 그리워지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선 버프 스킬북을 구해다가 꼼수로 학습해서 상시 활용하고 싶을 정도.
하지만 버프 스킬북은 헌터 스킬북 중에서 가장 드롭율도 낮고, 구하기 힘들었다.
아주 하찮은 버프여도 절대 시장에 나오는 일이 없었다.
공식 마켓에서 일 년에 두 권, 세 권 거래되면 진짜 많이 거래됐구나 할 정도다.
심지어 자세히 알아보면 그것도 지인 사이에서 기록을 남기기 위한 거래였을 뿐이었다.
강후가 이 던전을 찾아온 이유는 공략이 목적이 아니었다. 훈련이 주목적이었다.
전세혁처럼 돈으로 떡칠한 훈련장을 차리기에는 아직 돈으로 사고 싶은 아이템이 많았다.
그래서 던전을 개인 훈련장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실전까지 겸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았다.
강후는 온종일 주력 스킬을 다듬는 데 모든 집중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초반에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역시 분신술.
학습 능력까지 탑재된 분신이라 그런지, 훈련하면 할수록 움직임이 다채로워졌다.
종종 직접 분신을 다루지 못하는 공백기가 생길 때도 적절하게 분신이 좋은 움직임을 보여 줬다.
마치 학습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AI를 보는 느낌이었다.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납치 스킬도 훈련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주로 타깃을 끌고 와서 공격할 용도로 많이 썼던 납치 스킬.
하지만 이제는 상대할 적의 수준과 위력이 올라가다 보니, 납치 스킬의 리스크가 매우 커졌다.
자칫 잘못 끌고 왔다가는, 오히려 공격 기회를 제공하는 치명적인 판단이 될 수도 있는 탓이다.
그래서 납치를 주변의 구조물을 끌고 와 시야를 차단하고 방해할 용도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꼭 몬스터나 헌터를 끌고 와야만 스킬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응용은 자유다.
다만 아까부터 여분이 있는 적요석 2개와 맞물려, 자꾸 눈에 밟히는 스킬이 있었다.
요즘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드는 스킬 옵션에 변화를 줄 수 있을 만한 선택지가 떠오른 것이다.
그간 요긴하게 써 왔지만, 화력의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분명히 있는 스킬이었다.
148화 춘천행 (1)
바로 풍뢰진.
예전부터 스킬 업그레이드를 할 기회가 온다고 치면, 1순위로 생각했던 스킬이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강후가 가진 스킬 중에서 유일하게 광역 공격이 가능한 스킬이라서다.
다만 스킬 업그레이드를 할 경우, 어떤 스킬이 될지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루어 짐작은 가능했다.
원작에서 짜두었던 스킬 설정의 흐름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업그레이드된 풍뢰진은 전류 폭풍이 부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메인이 될 가능성이 컸다.
B 게임사의 모 게임에서 '사이오닉 스톰'이라고 부르는 그런 형태의 스킬 말이다.
"확실히 광역 공격 쪽에서 내가 부족하긴 하니까."
냉정하게 스스로를 판단했다.
사실 암살자로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스킬을 가진 자체가 사기지만.
강후의 욕심은 늘 끝이 없었다.
올라운더가 되려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 있게 쓸 만한 스킬 하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거리 공격은 전광비도로 보조가 되고, 근거리 극딜은 대참수가 있다.
정신계 공격은 환각, 얕은 혼돈을 활용할 수 있고 자체 회복 역시 광란적 치유로 가능하다.
여차하면 전종두에게서 강탈한 성좌의 능력 중 하나인 생기 흡수를 쓸 수도 있다.
여기에 출혈 유지는 앞서 그루 길드와의 협력에서 증명했듯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황.
하지만 광역 공격 스킬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풍뢰진이 있기는 하나,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상대를 귀찮게 하는 쪽에 가까웠다.
던전에서도 하급 몬스터가 아니면, 따끔거리기나 할 법한 생채기가 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몰이 사냥을 할 수 있는 그림까지 나오면 완벽한데."
직업적 특성상, 일대 다수의 전투는 암살자가 선호할 성향의 전투는 아니다.
스킬 전반의 메커니즘이 일대일에 치중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후는 쓸만한 광역 스킬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몬스터를 한곳으로 모은 다음, 광역 스킬로 일망타진하는 그림도 가능하다고 봤다.
그루 길드와 진행했던 던전 공략에서 딱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았던가.
강후와 마진호가 몬스터를 좁은 영역으로 모았고, 마법사들이 그 위에 광역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 있는 스킬을 최대한 키워 두는 것도 방법이지. 적요석을 아껴 두길 잘했어."
결심을 끝낸 강후가 풍뢰진을 업그레이드할 준비를 마쳤다.
스킬 강화가 아닌 점이 아주 살짝, 아쉽기는 했다.
던전에서 상당히 희박한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스킬 강화는 곧바로 스킬을 궁극기로 바꿔주니까.
하지만 적요석을 통한 스킬 업그레이드도 이에 준할 만큼의 변화는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여차해서 풍뢰진에 힘을 더 실어 주고 싶으면, 무정의 자객 성좌를 이용할 수도 있고.
방법이 다양한 만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곧바로 적요석 2개의 투자가 이뤄졌다.
두 차례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서인지 두 번째에는 스킬명까지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
[뇌격진]
[스킬 숙련도 : Lv. Max]
[반경 8m 안에서 시전자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강력한 전류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스킬입니다.
33% 확률로 '감전' 효과가 유발되며, 대상의 항마 스탯에 따라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초당 10의 마나를 소모하며, 스킬의 최대 지속 시간은 8초입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0초.]
"뇌격진. 이름 좋네."
풍뢰진이 바람과 전류에 애매하게 발을 걸친 느낌이라면, 뇌격진은 콘셉트가 확실해 보였다.
실제로 타격 범위도 풍뢰진의 반경 5m에서 8m로 늘었다. 지름으로 따지면 6m가 늘어난 셈.
게다가 한 자릿수의 낮은 확률이었던 풍뢰진의 감전과 달리.
뇌격진은 그것보다 훨씬 향상된 감전 확률을 가졌다.
항마 스탯이 낮은 적에게는 추가적인 피해를 유발할 수도 있어, 전략적 옵션도 좋았다.
팀원들이 전류 폭풍에 휘말리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달리 걱정할 것도 없겠지.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강후가 마침 앞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나는 몬스터 무리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몬스터는 정말 좋은 샌드백이다. 거짓된 정보를 주지 않는다.
녀석들에게 뇌격진에 혈화를 연계해서 발동하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풀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몬스터의 수많은 핏방울과 살점이 모든 것을 말해 준 것이다.
광역 공격에 광역 폭발.
둘의 연계는 환상적이었다.
아름다웠다.
* * *
적당히 개인 훈련을 마치고 던전 밖으로 나온 강후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이예린의 연락이었다.
하얀 전쟁 관련 의뢰는 받지 않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둔 상태인데도 전화가 온 것을 보면.
다른 형태의 의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네, 신강후입니다."
- 강후 씨. 살상과 관련이 없는 의뢰가 들어와서 연락드렸어요.
"정말 그런 겁니까?"
- 적어도 제가 생각한 흐름대로만 따라간다면요?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어요.
"조건부인 게 마음에 걸리네요."
- 일단 들어보시겠어요?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돼요.
"들어 보죠."
이예린의 장점은 끊임없이 의뢰를 '판다'는 것이다.
의뢰꾼이 특정 의뢰를 원치 않으면, 이를 우회할 수 있는 형태로 제안을 건넨다.
어떻게든 의뢰를 받게 하는 것이 그녀의 수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대에게 의뢰 수락을 강제한다거나, 떠밀 듯이 던져 주지는 않았다.
- 정문 제약 제 1 연구소에 레드 키를 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레드 키(Red Key)라면.... 보통 대규모 결계를 활성화할 때 쓰는 열쇠를 말하는 걸 텐데요."
- 맞아요. 임의로 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통 세 명의 키(Key) 홀더가 동시에 돌리죠.
"그게 왜?"
- 지금 춘천에 있는 정문 제약의 제1 연구소가 다국적 용병의 맹공을 받고 있어요.
"이유는?"
- 정문 제약에서 조만간 '정문환'의 유통을 결정했다는 것 같아요. 오랜 기간 개발해 온, 부작용이 거의 없는 각성제죠.
"기술을 빼돌리려고 한다."
- 네. 정황상으로 보면 정화 길드가 개입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이슈인데, 너무 조용해요.
이예린의 말대로다.
어쨌든 정문 제약은 대한민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제약사고, 해외 자본 유치도 없는 회사였다.
그간 정화 길드의 행보를 보면, 이런 경우에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개입하곤 했다.
여론 자체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말이다. 실력 있는 국내 제약사를 보호하자는 여론.
그런 여론이 일 때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화 길드가 나서서 영웅 놀음을 하곤 했다.
"뻔하죠. 뒤를 봐주는 거겠지."
- 만약 그런 거라면. 왜 굳이 바깥에서 손을 빌리는 걸까요? 스스로 나설 수도 있잖아요.
"손 더럽히지 않고 과실만 취할 방법이 있다면, 저라도 직접 나서진 않을 것 같네요."
덤덤하게 말했다.
정화 길드의 본색을 꿰뚫고 있는 강후와 다르게, 이예린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못한 듯하다.
강후가 말을 이었다.
"의뢰 내용에 집중해 보죠."
- 키홀더 한 명이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결계 활성화가 안 되는 모양이에요.
"만약 레드 키를 전달한다고 치면. 그때까지 연구소가 버틸 역량은 되는 겁니까?"
- 현재 다국적 용병단의 공격이 멈춘 상태예요. 아마도 입금을 기다리는 거겠죠.
"자본주의 논리 확실하네요."
- 연구소라고 방어 시설이 없는 게 아니니까, 보수 없이 위험 감수도 않겠다는 거겠죠.
"레드 키를 전달하면, 그다음은 연구소도 문제없는 겁니까?"
- 최소 15일은 버틸 수 있도록 설계를 한 모양이에요. 제대로 연구소에 돈을 발라둔 거죠.
"그렇게 돈을 떡칠해놓고는 키홀더 하나가 없어서 발동을 못 시키는 상황이라니...."
- 안전 불감증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네요.
"보수는?"
- 착수 50억, 성공 500억. 그리고 성공 시에 각신환 10개를 약속받았어요.
"각신환을?"
- 네. 어떤 녀석인지는 썰로 돌아다닌 정보를 들어서 아시죠? 카더라가 거의 맞긴 하거든요?
"예. 알긴 압니다만."
강후가 흠칫 놀랐다.
각신환.
정문 제약에서 개발한 알약으로 일시적으로 뇌의 활용도를 극대화해 주는 약이다.
부작용과 후폭풍의 문제로 효과 지속시간은 복용 후 10초로 매우 짧다.
삼키고 안에서 퍼지는 데 소요되는 2, 3초를 빼면 효과를 보는 실제 시간은 7초 남짓.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았고.
정문 제약 내부에서만 극소량으로 취급되는 약이었다. 상용화 전의 임상 실험은 끝난 상태다.
효과는 확실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적의 공격 행위와 움직임에 대한 모든 연산이 가능해지며.
어려운 수학적 문제 해결도 가능하고, 상대적이지만 시간이 매우 느리게 가는 체감도 가능했다.
원작에서 각신환이 상용화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않은 특수 약제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각신환이 무서운 것은 전부 천연 재료를 썼기에 부작용이 적다는 점.
마약류 각성제와 다르게 복용한 후에 감각이나 인지 체계의 교란, 파괴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는 듯했다.
열쇠만 전달하면 되는 문제니, 이예린의 말대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의뢰는 아니다.
강후가 물었다.
"브리핑 바로 가능합니까?"
- 어떻게 할까요? 화상으로 진행하시겠어요?
"아뇨. 체크할 것이 많으니 직접 가죠. 청안 빌딩으로 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후가 바로 순간이동 능력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주변 배경이 순식간에 청안 빌딩을 중심에 둔 풍경으로 바뀌었다.
불과 얼마 전에 진효영을 처단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 * *
통화가 끝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청안 길드에 도착한 강후.
굳이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예린은 잔뜩 놀라고 있었다.
강후가 전화를 할 때 청안 빌딩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빠른 강후의 방문은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는 능력에 의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거리 이동 스킬이 생소할 것은 없지만, 그 스킬을 쓴 사람이 '암살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잠깐 놀란 수준에서 그녀의 생각은 매듭지어졌다.
강후의 스킬 구성은 생각이 열려 있는 이예린도 이해가 안 되는 구성이 워낙 많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강후니까. 저런 스킬이 있는 것도 강후니까 당연하지, 하는 것이다. 일종의 긍정적 체념이었다.
이윽고 브리핑을 위한 회의실로 강후를 직접 안내한 이예린이 의뢰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보상을 보고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브리핑을 들어 보니 확실히 상상 이상이었다.
"다국적 용병단이 주변 경계를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사실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커요."
"앞서 실패한 케이스가 몇 번이라고 했죠?"
"일곱 번이요. 전부 중간쯤에서 저격당해서 죽었죠. 공중 침투를 시도했던 헌터들은 뭐... 바닥을 밟기도 전에 죽었고요."
"매번 의뢰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데, 앞서 죽은 케이스가 많은 의뢰가 꼭 저한테 오는 듯한데?"
"그거야 강후 씨라면 왠지 해낼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래요. 정말이에요."
"커미션을 더 받은 건 아니고?"
"아주 약간? 약간 챙기는 건 맞지만, 그것도 다 강후 씨를 위한 사전 정보 수집에 들어가요!"
"흠. 그건 그렇다 치고."
"에이! 그렇다 치고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어쨌든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저도 의뢰자를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얘기도 했고요."
"지금 이 거리를 무사하게 통과해야 연구소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죠?"
"네, 맞아요. 정말... 길죠."
강후가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위성 지도를 따라 손으로 선을 쭉 그었다.
한참 손가락이 움직여야 할 정도로 이동해야 할 거리가 상당히 길었다.
이 정도면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스킬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용해야 할 듯했다.
극한의 극한.
한계까지 몸을 밀어붙여야 하기에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부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의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의뢰가 될 듯했다.
누군가와 피땀을 뒤섞으며 싸울 전투는 없을 수도 있지만.
한계에 도전하는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149화 춘천행 (2)
* * *
다음 날.
정확하게는 순간이동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왔을 그 무렵.
강후는 춘천 북쪽에 도착해 있었다. 정문 제약의 제1 연구소가 있는 위치였다.
물리적인 거리만 놓고 보면, 그라운드 제로도 생각보다 멀지 않은 위치이기도 했다.
한편 강후가 있는 곳으로부터 500m 정도 북쪽에 위치한 곳부터는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공적인 통제가 아니라, 용병들이 사적으로 진행하는 통제였다.
임의로 세운 팻말도 보였다. 위험 지역이므로 출입을 엄금한다는 내용이었다.
통제를 진행하는 주체로 보이는 이름을 팻말에 적어 넣었는데, 이름이 가관이었다.
[정의수호]
정의. 신물이 나는 단어다.
정의를 자꾸 운운할수록 역설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표적인 곳이 이클립스.
그들의 대표 슬로건은 두 개다.
하나는 익히 잘 알려진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를 쓸모있는 일꾼으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라진 정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이다.
일종의 자격지심이다. 온갖 불의에 손을 대고 있으니, 어떻게든 그 색을 지워보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테러 조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심연이 나았다.
심연의 슬로건은 '진실된 믿음에는 진실로, 그릇된 신념에는 죽음으로'다.
이현석은 정화 길드에 맞선다고 해서 정의를 운운하거나, 강조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연구소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국적 용병대가 세운 팻말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는 박살 난 헌터 치안청의 차도 여럿 보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신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 용병대가 패악질을 부렸음에도 정화 길드나 헌터 뉴스에서 한 마디 없는 것을 보면.
무조건 정화 길드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99.9%라고 자신할 수 있다.
'끝까지 최선은 다 해 봐야지.'
강후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이예린에게 경우에 따라 의뢰를 중간에 포기할 수 있다는 얘기는 미리 해 뒀다.
그렇게 될 경우, 당연히 레드 키도 반납할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물론 실패할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한 보험은 확실하게 들어 둔 상태였다.
'기공수가 문제인데....'
강후는 연구소 주변을 지키는 용병들 중에 중국에서 건너온 '기공수'들을 가장 꺼렸다.
중국 쪽에서 조직적으로 육성된 클래스 중 하나인 기공수.
그들은 공간을 격변시키는 작업에 뛰어난 헌터들이다. 혹은 무형의 기를 다뤄 상대를 공격한다.
변수 창출이 탁월하기에 계산된 플레이를 즐기는 강후로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톡톡. 톡. 톡.
강후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현장 지도를 확인했다.
동선 최종 점검이었다.
눈을 감고, 상황을 그려본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내용은 매우 긴박하게 흘러간다. 여유 있는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한 건 맞지만, 포기하기에는 의뢰 보상으로 걸려 있는 '각신환'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훗날 상용화되면 지금보다 가격이 10배는 더 뛰고, 헌터의 필수품이 된다.
지금 아직 상용화 전 단계일 때 활용할 수 있으면, 이 역시 변수 창출에 도움이 될 터다.
'아무리 돈만 좇는 놈들이라고 해도 목숨 귀한 줄은 알겠지. 그래, 이 루트로 간다.'
최선의 경로를 선택한 강후가 곧바로 횡 이동과 함께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암살자는 어둠 속에 살고, 어둠을 먹고 산다.
날이 어두워진 것은 물론, 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지금이.
접근하기에는 가장 좋을 시간이었다.
여기서 더 늦추기에는 언제 다국적 용병대가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만큼, 서둘러야 했다.
* * *
한편.
제1 연구소를 포위하고 있는 다국적 용병대의 대장들이 한곳에 모여 회합 중이었다.
각자 자기 휘하의 헌터들이 맡은 바와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정보를 교환했다.
"우리 쪽은 기존 포인트는 누락 없이 전부 장악을 끝냈고. 저격수들도 꼼꼼히 배치해 뒀다."
"우리는 외곽 경계를 담당한 만큼,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던 헌터 일곱을 처리해서 정리를 마쳤지."
"클라이언트에 계약 갱신을 요청하고 있고, 한 시간 내로 처리가 될 예정이라고 답변받았다."
"음. 그럼 톱니바퀴는 거의 다 맞아떨어지는 분위기네. 계약 갱신만 되면 서쪽 게이트를 통해서 진입하면 되겠지?"
"그렇겠지. 서쪽 게이트는 이미 많이 무너진 상태니까. 저격수도 그쪽에 많이 붙여 둬서, 허투루 나올 생각도 못 할 거다."
"어차피 내부 정보가 다 폐기되었더라도 상관없어. 사람의 머릿속에도 정보는 있는 거니까."
다수(의) 용병단으로 이뤄진 용병대 전체를 이끌고 있는 남자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그의 이름은 증선락.
레벨 550의 기공수 헌터로 중국의 신수 길드의 간부이기도 했다.
신수 길드는 신투 길드의 위성 길드로 대외적인 이미지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편이었다.
신수 길드는 그간 법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 '악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단죄해 왔다.
민간인을 상대로 폭행을 한 번이라도 한 헌터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잡아서 죽이기도 했고.
중국 내에서 지명수배가 걸린 헌터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잡아서 '처단'하는 길드이기도 했다.
국가의 법 심판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한 규율에 맞춰 임의로 범죄자들을 처리하기에.
호불호의 영역에서 극명한 반응의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물렁한 법 집행에 염증을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의구현'을 반겼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조만간 한국 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될 자료는 정문 제약의 비리와 범죄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제약사에서 손 한번 댄 적 없는 마약 유통과 제작에 대한 혐의도 이미 세밀하게 날조된 상태였다.
판을 다 짜준 마당이니, 최선을 다해 뛰어 놀아 주는 것은 인지상정.
증선락은 클라이언트의 최종 계약 갱신이 이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입금이 끝나면, 정문 제1 연구소는 총공격 대상이 된다.
어지간한 헌터나 관계자는 모두 죽이고, 핵심 인력만 남길 생각이었다.
기억만 살아 있으면 되니, 어설프게 반항한다면 손발을 잘라 버릴 생각도 이미 끝내 뒀다.
바로 그때.
"침입자 발견! 남동쪽 '흑선' 라인으로 들어온 헌터 하나가 빠르게 북서진 중!"
외부에서 접근하는 불청객의 등장을 알리는 경계 보고가 들렸다.
앞서 그렇게 나타났었던 헌터는 하나도 남김없이 저승행 급행열차를 탔건만.
아직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학습되지 않은 얼빠진 헌터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 얼뜨기 같은 놈이 온 모양이군."
다들 경계 보고를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증선락도 마찬가지.
오히려 쏠쏠한 돈벌이의 기회로 여겼다. 헌터는 죽어도, 아이템은 현장에 남기 때문이다.
죽은 헌터의 아이템은 갖는 사람이 임자다. 당연히 여기에 있는 대장들에게 우선권이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괜히 현장 접근을 욕심내다가 죽은 헌터에게서 제법 재미를 본 상태였다.
한데 바로 그때.
"...?"
곳곳에 설치해 둔 CCTV 화면 속의 '침입자'의 움직임을 살피던 증선락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침입자의 위치가 빠르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십수 미터를 단숨에 이동하는 도약 형태의 스킬 활용은 기본이고.
타깃이 될 만한 구조물이 있으면, 바로 횡 이동을 써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횡 이동에 은신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스킬 숙련도 최대를 찍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레벨 200 근방의 숙련된 암살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고.
타앙! 타앙!
시간차를 두고 마탄 저격수들의 저격이 이어졌다.
각각 은폐된 포인트에서 타깃을 노리기에 피하기가 가장 껄끄러운 견제이기도 했다.
실제로 연구소로의 접근을 시도했던 헌터 대부분이 '저격수 저지선'에서 거의 처리됐다.
그만큼 숙련된 저격수의 조용한 저격은 저승사자와 같았다.
오죽하면 헌터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자리 잡은 저격수가 가장 X 같다'는 말도 있을까.
"잠깐. 이거 뭐지?"
증선락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화면 속 침입자가 위치를 빠르게 갱신하며 이동하는 동안.
다들 어어? 하면서 놀라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면서 시간을 보냈다. 두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마탄 저격은 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발도 침입자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빗맞지도 않았다.
심지어 중간 지점에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요량으로 대기시켜 두었던 용병 무리도 피해를 입었다.
저격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물리적으로 침입자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 배치해 두었던 용병들.
하지만 그들은 암살자로 보이는 침입자가 펼친, 말도 안 되는 광역 공격에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갑자기 원형의 마법진 같은 것이 깔리더니, 공중에서 전류 폭풍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증선락도 이게 웬 어이없는 조합인가 싶을 정도의 스킬 연계였다.
장막을 깔고 완벽하게 은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 구조물을 끌고 와 방어벽으로 쓰는 것!
여기에 한술 더 떠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방어 결계까지 만들어내면서, 환영을 부려대기까지!
이 모든 것이 암살자 한 명으로부터 파생된 스킬 조합이었다. 보통 놈이 아닌 듯했다.
"X발, 이거 X 됐다. 예진빈! 길 뚫어! 어서!"
자신이 구축해 놓은 경계선을 과신한 나머지, 허를 제대로 찔려버린 증선락이 소리쳤다.
예진빈은 증선락과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다른 용병대의 대장으로 공간 활용 능력의 보유자였다.
그러자 예진빈이 바로 '초집중' 상태에 들어가서는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길을 열었다.
이 스킬은 외부에서 쓰는 스킬이므로, 강후로부터 반경 15m 안에서 적용되는 다섯 번째 성좌 특전인 공간 이동 스킬 억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증선락이 강후에게서 1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거물 등판이군.'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성좌 정보만 봐도 레벨 500은 훌쩍 넘어갈 실력자가 등장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강후가 계속 도약과 가속을 섞어가며 이동하고 있었기에.
증선락도 후방으로 강하게 기를 방출해내며, 움직임에 속도를 붙였다. 나름의 자체 가속이었다.
'기공수군.'
곧바로 증선락의 본질을 알아봤다. 레벨 높은 기공수라면 일대일로는 아예 상대가 안 된다.
게다가 여기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스킬을 극한까지 끌어다 쓴 덕분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후폭풍을 뒤로 유예하기는 했지만, 몸에 걸린 부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폭주하듯 마나를 끌어다 쓰면서 스킬을 사용한 탓에 몸 전체가 매우 무거워져 있었다.
그때.
스읏.
엄지 지문 쪽에 중지 손톱을 갖다 대는 증선락의 손가락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손가락에 묻은 뭔가를 튕겨 낼 때에나 할 법한, 두 손가락을 원형으로 만드는 동작!
강후가 다음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곧바로 보호 결계를 펼쳤다. 본능적인 방어 연계였다.
그리고.
타아앙!
파칭!
증선락이 손가락으로 튕겨낸 기공탄 한 방에 강후의 보호 결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
웬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150화 춘천행 (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