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게 치솟은 세계수.
엘프들의 신앙의 상징인 이 거대한 나무는 에나멜 대륙 어디에 있든 단번에 눈에 들어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런 초월적인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실재하는 만큼, 당연히 다른 종족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은 각자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정기적인 교류까지 가져왔던지라 서로 간의 거리감도 적은 편이었다.
인간이 주류를 차지한 이온 대륙과는 달리 여러 종족이 각자 모여 국가와 사회를 구성한 이종족들의 낙원.
하지만 모든 종족이 이곳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대표적인 배척받는 종족 중 하나로 뱀파이어가 있었다.
그들은 타인의 피를 갈취해 살아간다는 이질적인 생태 때문에 인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성체가 꺼리는 종족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종족 대이주 당시에도 이온 대륙에 남는 걸 선택했다.
어차피 숨어서 다른 종족에 기생해 살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에게는 이종족들보단 인간이 훨씬 더 매력적인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에 맞먹을 정도로 배척받는 종족이 바로···.
라이칸스로프, 소위 말하는 늑대인간이었다.
"크히히힛~! 이제 시작이다. 아가들아! 킥!"
보름달이 떠오른 밤.
거리가 상당히 가까운 듯, 세계수가 제법 크게 보이는 한 야산에서 경박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크르르—
크워억! 컹—!
야성에 물든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주변에 핏빛 안광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광대 놀음을 시작해볼까? 크르르르—!"
그리고 하이톤이었던 그의 목소리도 말을 이을수록 점점 굵어지더니, 끝에 가선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얼핏 보면 수인(獸人)과 비슷하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다른 존재들.
라이칸스로프는 사냥감의 심장을 뽑아먹는 것으로 잠재력이 성장하는 종족으로, 태생적으로 흑마력을 타고나는··· 실상 반 이상은 마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영향으로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같은 지성체의 심장까지 노리는 흉포성을 가져,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지 못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만약 한스가 지구에서 번천회의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할리도 이들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크학학학—! 자, 평화에 찌든 돼지들의 배를 가르러 가 보자!"
그렇게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는 선두의 괴인을 따라.
무수한 검은 그림자가 어둠을 틈타 에나멜 대륙의 산맥을 가로질렀다.
***
이온 대륙 동부 제피아 공화국.
"준비는 모두··· 끝났는가···?"
"그러하옵니다, 로드.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나이다."
어둠이 가득한 넓은 공동에서 갈라진 노인의 목소리와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천천히 문답을 나누었다.
"어떻게··· 시간에 맞출 수 있었군···."
"이 모든 게 로드께서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옵니다. 보통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진대···."
어둠 속에서 여성의 실루엣이 왜소한 노인의 그림자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상황은··· 알고 있겠지···?"
"네, 유페르쉬와 브로코슬락이 손을 잡고 하위 클랜들을 집어삼켰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놈들은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옵니다."
노인의 느릿한 물음에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이번 일을 위해 정말 오랜···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 왔다.
그 과정에서 로드께서 역천의 서약이라는 해충들과 손을 잡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지 않았던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리수를 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많은 혈맥을 강제로 합병해서 모두 아우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라니, 제가 정말 흡혈왕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얼간이 아니겠사옵니까."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조롱을 일삼는 여성.
왜소한 노인은 그렇게 신랄하게 상대를 깎아내리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오랜 세월 대륙 동부 지역에 잠들어 있던 전설, 오바이포 클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수상한 세력의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빨리빨리 움직여, 이 멍청이들아!"
"커헉! 아, 알겠습니다, 대족장!"
"칫, 혁명가 놈만 아니었으면 일을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대륙 남부의 부족 연합에서는 물론.
"준비는?"
"일단 명하신 대로 끝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공작 각하,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지···."
"허허, 이게 다 우리 제국을 위해서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설마, 자네도 그 천한 핏줄에게 황위가 어울린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아도 환란이 예정된 아우테리카의 사방팔방에서 그동안 미뤄졌던 혼돈의 씨앗이 한꺼번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210
설상가상 (2)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게 불고,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이런 기분일까.
자신의 주변을 빈틈없이 둘러싼 절대적인 안정감과 충족감이 치명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이성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마음만 다잡는다면 충분히 저항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그는 그 매력에 홀랑 넘어가 그대로 그것에 깊이 침잠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저 무의식 속을 부유하고 있을 때···.
"···스 님? 해리스! 괜찮으세요?"
반복되는 외부의 자극에 그의 정신이 서서히 육체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봐요? 전부터 그런 감이 있긴 했지만, 최근 들어 유독 심해진 것 같네요. 좀 위험해 보일 정도로."
"아···."
평소처럼 언덕 위의 나무 그늘에 누워 있던 해리스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 사이로 눈동자만을 굴려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물결치는 듯한 푸른 머리와 호수와 같은 파란 눈동자.
이런저런 일로 자주 어울리다 보니 친해지게 된 엘프 소녀, 샤피론 실베스티였다.
그런데 그가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이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흐흠, 하긴! 하이 엘프로서의 교양을 쌓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물론 저야 어릴 때부터 그에 관한 교육을 받았으니 낙승이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으스대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후후후, 해리스 님도 긴장하시는 게 좋을걸요? 제가 하이 엘프가 되면 금방 역전할 테니까! 이미 몇 번이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쳐서 준비도 완벽하답니다?"
"······."
물론 그녀의 망상은 세계수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공염불일 뿐이었지만, 해리스는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사실, 지금은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았다.
그러나 한창 신나서 조잘대던 그녀는 그의 반응을 뭔가 다르게 받아들인 듯.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살며시 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힘내시라는 그런 뜻인데···. 무, 물론 바닥부터 시작해서 벌써 그렇게까지 성장하신 것도 대단하고요? 어··· 그리고···."
"아핫—."
그 어설픈 위로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자기애가 강한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좀 철이 없을 뿐이지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도.
또 해리스가 먼저 하이 엘프가 되면서 거리감을 느낄 법도 한데,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면서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신선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워낙 빠르게 신분이 변화한 터라 이곳에 친한 이도 거의 없는 그에겐 제법 달가운 인연이었다.
거기다 제법 오래 어울리다 보니 이젠 샤피론을 대하는 것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참이었다.
지금처럼 조금 풀이 죽은 듯한 그녀를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윽—
느릿하게 움직인 해리스의 손이 아공간 마도구를 거쳐, 이내 그녀에게로 뻗어졌다.
그 손에 들린 것은 고소한 향기가 풍기는 봉투 하나.
킁킁—
"앗! 이건 팝콘인가요? 잘 먹겠습니다!"
그 냄새를 맡은 샤피론은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냉큼 그것을 받아 들곤 그의 옆에 주저앉아 봉투를 열었다.
'이젠 별말 없이 잘 먹네.'
팝콘을 입에 넣고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해리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엔 먹을 걸 주면 못내 찝찝하다는 반응을 보이던 그녀였으나,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니 이젠 지금처럼 갑자기 음식을 내밀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지까지 오게 되었다.
이렇게 보니 왠지 길고양이를 간식으로 길들인 것 같았지만···.
'그냥 기분 탓이겠지.'
그는 누운 채로 잠시 샤피론을 응시하다가 억눌린 의지를 끌어올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으음."
어떤 상황에서도 강제로 몸을 움직이게 해주던 통제가 사라지고부턴 몸을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고역이었다.
이젠 이 자연과의 동화에서 오는 나태함을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이겨내야 했으니까.
그래도 전보다 개체에 할당된 정신 능력치 자체가 월등해진 터라, 마음만 먹으면 평소처럼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아까처럼 축축 늘어져 게으름을 부리게 된다는 게 문제일 뿐.
'그런데, 아까 그 느낌은···.'
그렇게 상체를 일으켜 앉은 해리스가 고개를 돌려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외침을 막는 성채처럼 거대한 줄기가 한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그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한창 자연에 깊이 매몰되어 하나가 되었을 때, 어렴풋이 느껴진 무언가는 분명 세계수의 의지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리 선명하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뜻만큼은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아, 귀찮다. 그런데 무시할 수도 없고.'
세계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결국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 안의 자연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우웅—!
한순간 바람이 한 점으로 휘몰아치고, 그곳에서 반투명하면서도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전신에 돌풍을 두른 바람의 상급 정령, 파스칼.
해리스의 세 번째 정령이었다.
"웁늄? ···해리스 님?"
해리스는 파스칼이 조종하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는 샤피론을 내려다보았다.
"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샤피론 양,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해리스는 팝콘 봉지를 껴안은 채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그녀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일단 뭘 하기 전에 다른 하이 엘프들과 대화를 나눠볼 생각으로.
'어? 근데 이거 걷는 것보다 더 편한데? 소환할 때가 좀 귀찮긴 하지만, 일단 유지하는 정도라면···.'
물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건 그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리저리 뒤섞인— 미지와 혼돈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런 주변 환경 따위엔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거니는 한 존재가 있었다.
"여기까진 순조롭군."
이 공간엔 중력도, 대지도, 공기도 없었으며 심지어 방향과 시간마저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그에게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그 사내, 역천의 서약의 창립자이자 인신(人神)의 사도인 혁명가는 사방에 난 균열을 통해 바깥을 관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도록 미리 손을 써두긴 했으나, 그래도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으로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썩 괜찮군. 사냥개도 잡종 사냥을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돌려 기괴한 광채가 어린 눈으로 한 균열을 응시했다.
그곳엔 드높게 치솟은 거대한 나무로 접근하는 시커먼 무리가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세계수는 에나멜 대륙의 기둥이자 뿌리. 그것이 흔들리면 대륙 자체가 흔들린다.'
현실에 강림한 신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나무는 분명 대단한 존재였다.
애초에 제법 큰 섬에 불과했던 땅을 지금의 대륙으로 만든 게 바로 세계수였으니까.
그러나 세계수는 화신을 통해 현세에 뿌리내림으로서 만만치 않은 제약 또한 함께 짊어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과율에 대해서는 다른 신들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이 엘프 후보였던 세실리의 위치를 자신의 종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못했던 것도 그 일환.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세계수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사건이더라도.
'오바이포 쪽도 나쁘지 않군. 갑자기 나타난 하이브리드라는 놈들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대비는 되어 있으니 큰 위협은 되지 않겠지.'
그의 시선이 다른 균열로 향했다.
사실 뱀파이어들에 대해서는 그도 아쉬운 면이 컸다.
비교적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던 라이칸스로프와 달리 그들은 이미 인간 사회에 잘 섞여 있던 데다가, 지도부조차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는 통에 힘이 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도 가장 세력이 강한 유페르쉬에 접근하려 했으나, 하필 그때는 비스크 유페르쉬가 성혈을 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그 젊은 뱀파이어는 한창 과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엔 협력 관계로 묶어 놨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저들끼리 붙어먹었단 말이지?'
혁명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이 세계의 모든 라이칸스로프와 뱀파이어가 마땅히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쯧, 창조주의 사도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한 놈들이."
지금은 당사자들에게조차 잊힌 사실이지만, 사실 그들은 여타 이종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자체 번식이 불가능해서 감염으로만 수를 늘릴 수 있는 종족이 제대로 된 생명체일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인간의 신이 외계(外界)에서 들여온 종자와 인간을 섞어 만든 아인종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사생아라고 할 수 있겠지.
이후 신이 심연으로 추방당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연관성까지 모조리 지워져 버렸지만 말이다.
'···발테온도 생각 외로 잘해주고 있군. 광기를 가져오면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어서 그의 시선이 다른 균열들을 한 차례씩 훑고 지나갔다.
정권 장악이 끝나가는 남부의 부족 연맹은 물론이고, 제국 내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었다.
황태자를 제치고 제1 후계자가 된 황녀를 암살하고자 하는 적대 세력의 암수.
만약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전부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교단이 주도하는 판이 흔들리고, 모두가 협력하는 지금의 풍조가 깨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다 보니 새삼 시작도 못 하고 좌초되었던 이전 계획들이 아쉬워졌으나, 사실 지금 준비된 것들만 하더라도 각 지역을 뒤집어 놓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서로 간에 균열이 생긴다면 뒷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여기서 불사왕까지 날뛰면 금상첨화일진대. 전언은 제대로 전달됐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늦군. 진작 움직일 줄 알았건만.'
그렇게 사방에 늘어선 균열들을 쭉 살펴보고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혁명가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 신경을 집중하며.
경계면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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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알 흘러가는 듯한 노이즈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세상을 구성하는 이들의 사념이자 세계 자체에서 나는 소리.
그러나 아무리 이 공간에서 그의 권능이 강화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엿듣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호오, 그래도 조만간 일이 벌어지겠군. 여기다 조금 더 손을 써 볼까.'
다시 감았던 눈을 뜬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한 손을 옆으로 뻗어— 방금 전까진 그 자리에 없던 무언가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꿈틀— 꿈틀—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는 그것, 광기의 씨앗이 반복적으로 전신을 뒤틀었지만.
혁명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어 그것에게 명령했다.
"———."
그 직후.
쿠구구구—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모종의 에너지에 자극받은 심연 깊은 곳의 무엇인가들이 하나둘 연달아 올라오고.
사방에 뚫린 균열을 통해 퍼져 나간 파장에 대륙의 몬스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광기는 심연의 찌꺼기 중 상당히 격이 낮은 편에 속하긴 하나, 그 덕에 이런 식으로 조작하는 데는 제법 수월한 편이었다.
다루는 걸 포기하고 아예 폭탄처럼 던져놓은 채 결과만 기다려야 하는 죽음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셈.
애초에 광기를 꺼내도록 유도했던 것 또한 그런 전략적인 선택의 일부였다.
"그나저나,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답답하군."
그렇게 모든 후속 조치를 끝낸 혁명가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쪽 일은 썩 괜찮은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 다른 쪽 일은 제법 오래 기다렸는데도 영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아직도 명줄이 붙어있나. 그만한 액운을 가지고도 질기기도 하군. 어디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움직일 텐데.'
이렇게까지 대륙을 뒤집어 놓으면 혼란 속에서 금방 죽어 나갈 줄 알았거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상당히 안전한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 세월 대륙의 고위층들을 훑었는데도 발견할 수 없었던 걸 보면 그리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악운이 너무 강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 처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 대륙을 뒤집다 보면 발견되든, 어디서 죽어 나가든 하겠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
그래도 '후각'이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당장은 없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
대륙 서북부의 대도시 타라크.
"엣츄~! 크흥."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서류 더미를 품에 안은 한 소녀가 코를 한 차례 찡그리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퇴근하고 튀김이나 사 갈까? 라피가 좋아하던데.'
걱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그런 태평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211
설상가상 (3)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교단 측의 좌석에는 성자와 성녀 없이 두 명의 추기경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때를 노린 듯,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될 불사의 군대의 공습에 대응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미 습격과 관련된 국가들에도 경고가 전해져 대대적인 조치에 들어간 상황이었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회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빠르게 귀국할 예정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어제 끝나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이번 사안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느라 시간이 더 소요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결된 것은 많지 않지만.'
회의 내내 별다른 말이 없던 하인즈 2세가 부산스러워진 대회의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애초에 언제 자국이 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뜻 타국을 돕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 방안인 대륙 연합군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논의를 나눈 후이지 않았던가?
더 잦아진 공세에 맞춰 추가로 인원을 차출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사실상 성자 하인리히가 제공하는 예지를 바탕으로 자력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지.'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아제리온 제국과 제피아 공화국은 영토가 넓은 만큼 강자의 수와 군사력, 인프라도 잘 깔려 있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인구수 대비 전투 인력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칼코스 부족 연맹과, 마법이 발달한 데다 마탑의 본부까지 있는 작은 섬나라 위제트 마도국도 걱정이 덜한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영토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서부 4왕국, ···이젠 탈리아를 뺀 3개의 왕국은 상당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기회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브리드의 영향력을 국외로 뻗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으니.
"곤란해 보이는군."
신 탈리아 왕국의 지배자이자 대륙 최대 뱀파이어 세력의 주인.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다만?"
회의가 끝난 후에도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던 왕국의 대표들을 바라보면서.
그 말 한마디에 한창 대화에 집중하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딱히 기세를 내뿜으면서 압박한 것도 아니건만,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저도 모르게 위축된 것이다.
"···도움말입니까? 제안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탈리아 왕국과는···."
그러나 그들도 각국의 대표라는 자리까지 오른 이들.
순식간에 신색을 회복한 샤로티 왕국의 대표가 앞으로 나서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의 조국은 탈리아 왕국과 가장 가까워 견제에도 제일 적극적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커험, 잠깐 기다려 보시지요."
"···맞습니다. 이곳은 대화를 하기 위해 모인 장소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두 왕국 대표들의 만류에 기세가 주춤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 동조해 줄 줄 알았던 이들의 태도에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현실을 깨닫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크흠! 뭐, 일단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야···."
당연하게도, 그들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추후에 뱀파이어들이 부릴 수작에 대해 걱정하기엔, 당장 코앞에 다가온 불사왕의 존재감이 너무 위협적이었으니까.
그들도 지금의 탈리아 왕국이 가진 저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온 대륙의 뱀파이어 대부분이 한 깃발 아래에 모인 클랜 연합.
단순히 그 전력만 따져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게 왕국 하나를 고스란히 집어삼키면서 나올 시너지는 오죽하겠는가.
애초에 그들이 견제를 계속했던 이유도 그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조력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다. 만약 뱀파이어들이 선을 넘는다면 교단은 물론이고 제국과 공화국도 좌시하진 않을 테니.'
그것이 지금 왕국 대표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물론 하인즈 또한, 그들의 그런 생각 정돈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당연하지만 그도 자원봉사 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대륙 연합군 위주로 개입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주변국부터 확실하게 다지면서 뻗어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겠지.'
이미 인접국에 대해선 암중에서 접근하는 중이었으나, 이렇게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넓힐 기회도 버리기 아까운 노릇이지 않나.
'언제까지 탈리아 왕국 안에만 뱀파이어들을 모아둘 생각도 없고.'
애초에 전 대륙에 흩어져서 살아가던 놈들이다.
당장은 필요에 의해 탈리아 왕국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최대한 끌어모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에게 좋을 것도 없었다.
물론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전처럼 다시 대륙의 그림자에 숨어들게 하면 더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굳이 왕국 하나를 삼키며 양지에 나선 의미가 없지 않은가?
'뱀파이어의 양지화를 위해선 외부에서도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할 여건이 갖춰져야지.'
지금 뱀파이어의 인식은 거의 마물과 동급에 가깝지만, 원래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렇게 대외적인 활동과 더불어 음지에서 세력을 뻗치는 작업도 동시에 병행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바깥 사회와 섞여 나간다. 최종적으론 지금 왕국 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타국에서도 피를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하인즈는 자신을 따라온 실무자들이 왕국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원한다면 서부 왕국들에 대한 공세를 더 강화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는 게 그쪽도 편하지 않겠나?
-하인즈 2세 : 생각해 준 건 고맙다만, 아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한니발 스트라우스 : 좋다. 하지만 필요하다 판단되는 순간엔 개입할 것이다. 그것이 이득이니까.
···이렇게 원치 않는 한스의 도움까지 있으니, 왕국 측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도 일이 성사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하인즈의 시선이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공화국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에게 향했다.
뱀파이어의 양지화를 이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긴 하나, 지금 그의 최우선 관심사는 공화국에 숨어 있는 오바이포 클랜이었다.
사실 지금도 흡혈왕을 자칭하고는 있지만, 오바이포 클랜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제대로 된 권좌라고 할 수 없었으니.
놈들까지 확실히 굴복시킨 이후에야 명실상부한 아우테리카의 흡혈왕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괜히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부 조력자는 있는 게 좋을 텐데.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부딪치고 볼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그렇게 그가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
["하이 로드.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뮬로에게서 갑작스러운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하인즈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동부에서 전해진 급보입니다. 오바이포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화국의 의원들과 언론, 상계 등은 물론 군부까지.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각계각층에 동시다발적으로 뻗어진 손길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심어두었던 첩보원 대부분이 제거당했습니다. 이 정보를 간신히 가져왔던 요원도 직후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지요. ···죄송합니다, 하이 로드. 아무래도 추가 정보는 얻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인즈의 시선이 다시 케일라 부통령에게로 향했다.
지금 공화국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별다른 기색 없이 막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기다릴 때가 아닌 모양이군.'
그는 자신의 옆쪽에 있는 탈리아 왕국의 전(前) 대표 브라이트 공작에게 슬쩍 눈짓하곤 그녀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렇지 않아도 뱀파이어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상대였으니, 일단 안면이 있는 상대를 먼저 내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안녕하십니까? 부통령님, 잠깐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브라이트 공작이 케일라 부통령에게 접근했지만···.
"아, 브라이트 공작님.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일이 바빠서 말이지요.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 봐야 하는데, 필요한 이야기는 서면으로 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미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과연 정치인답게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편함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평생을 뱀파이어 밑에서 목숨 건 외줄 타기를 해 온 브라이트 공작의 눈치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싸늘함을 넘어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불쾌감과 혐오.
전에 만났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그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러나 그에겐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아드님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말에, 그녀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이어서 얼굴에 맺혀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걷히고,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길이 브라이트 공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제 조금 대화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예. 공교롭게도, 급한 일이 막 해결된 것 같아서 말이죠. 잠깐은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불편한 회담이 성사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한니발 스트라우스 : 흥미롭군. 에나멜 대륙에 이어서 동부라? 올리비아에게 추가 조사를 지시하도록 하지.
불사왕님의 오지랖 넘치는 간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그쪽에 이용할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렇다면 단순히 모조리 쳐 죽이는 것보단 효율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할 수 있겠지.
그것이 결코 건전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
'이상하네.'
하인즈 2세가 동부의 문제를 알아차린 순간, 에나멜 대륙에 있는 해리스도 사태의 특이성을 깨달았다.
그는 분명 세계수에게 뭔가 이상을 느꼈는데, 다른 하이 엘프들은 그것에 관해서 딱히 계시받은 게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 또한 자연에 과하게 몰입하는 과정에서 꿈결처럼 느껴졌을 뿐, 지금은 이렇다 할 계시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아, 귀찮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또한 세계수의 제사장이자 엘프 사회의 정점인 하이 엘프.
그런 만큼 세계수와 관련된 예감을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을 꺼낸 해리스가 특별 조사대의 책임자가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신입이라고 꽁꽁 싸맬 때는 언제고. 여긴 안전하다 이건가?'
물론 그런 면도 있었으나, 세계수가 그에게만 뭔가 신호를 줬으면 그에 합당한 이유도 있으리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 오늘 바람도 선선하고 좋은데. 나무 아래서 늘어지게 자고 싶다.'
하지만 이미 맡은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었으니, 해리스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일단의 파수꾼들을 이끌고 석연치 않았던 장소로 이동했다.
후우웅—
물론, 이미 편리함을 깨달아버린 그 몸을 들고 나르는 것은 바람의 정령인 파스칼의 몫이었다.
***
정상 회의가 끝나고 가장 먼저 귀국한 것은 대주술사 모르나를 위시한 부족 연맹의 사절단이었다.
하루 종일 굳은 표정이었던 모르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누가 붙잡을세라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이들에겐 어떤 인사도 없이 그대로 교단의 게이트를 통해 남부로 떠났다.
그리고 그 직후.
칼코스 부족 연맹의 공식적인 입장문이 남부에 소재한 유일한 신전을 통해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통보되었으며.
그 중차대한 내용은 곧 아직 성지에 남아있던 각국 대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칼코스가 뭐 어쨌다고요?"
대신전의 숙소에서 게이트 룸으로 향하는 길 한복판.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끝내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던 라일리 황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잘못 들으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황녀님. 저도 같은 심정이거든요."
그에 교단 사람에게 급하게 전달받은 소식을 옮겼을 뿐인 이세아도 난감하다는 듯이 들었던 내용을 다시 읊어 주었다.
-칼코스 부족 연맹은 대륙 연합에서 탈퇴. 이전에 있었던 모든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며, 앞으로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정했다. 이제부터는 신전을 통한 모든 간섭도 불허한다.
이런저런 말을 쳐내고 요점만 말하자면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무슨 배짱으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도 힘들 판에 이게 무슨···!"
다시 그 말을 들은 라일리가 분개하며 외쳤다.
당장 며칠간의 논의에 구멍이 뚫려버렸으니 당연한 일.
또 이런 식의 이탈은 남은 모두의 결속력과 사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왜 지금의 회의가 열렸는가?
서로 잘 맞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양보와 협의를 거쳐 함께 활로를 찾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이 아닌가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슨 선전포고라도 할 게 아니면···."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전쟁과 관련된 주제는 이런 자리에서 쉽게 꺼낼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후우— 일단 돌아가죠. 이미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요. 지금은 교단을 믿어 보는 수밖에요."
당연하지만 교단 측에서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칼코스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꾸준한 접촉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다시 일행을 이끌고 게이트 룸으로 향했다.
우선은 당장 쌓인 일거리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라일리 황녀와 이세아, 헤스페론을 비롯한 제국의 사절단이 서둘러 귀환한 수도 제론 또한.
#212
제론의 고난 (1)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
불과 몇 개월 전에 불사왕의 습격이라는 큰 환란을 겪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그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손상된 건물의 보수는 물론 도로 재정비와 치안 병력 증원까지.
제국은 그날의 자취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노력과 자본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고, 그렇게 제론은 그 일이 있기 전보다 오히려 더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때의 일이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불사왕이 직접 나선 일이었다 하더라도.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황가의 후계자들이 납치당한 사건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그때 잡혀간 황태자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지 않던가.
"어서 오십시오, 황녀님. 제국을 대표하여 나가 계시느라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서부터 황궁까진 저희가 모시도록 하지요."
1차 정상 회의를 마치고 귀환하던 날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번 경호가 그때보다 더욱 철저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었다.
"설마 스타브 경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 아무리 황궁과 거리가 있다지만 그래도 치안이 좋은 제론 내에서 움직이는 일인데."
라일리 황녀가 제론 대신전의 정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이들의 선두에 선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뜻밖이라는 눈을 크게 떴다.
최고의 정예들이 마중 나올 줄은 익히 예상하였으나, 그래도 눈앞의 상대가 직접 여기까지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였으니까.
"저번에도 그렇게 방심하다가 큰일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을 겪고도 대비하지 않으면 무능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제국의 수도에 상주하는 마스터급 기사 중 한 명.
황궁의 경비를 총괄하는 황실 수호대장이었던 것이다.
근위 기사단은 오로지 황제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하는 만큼, 제국 최중요 시설인 황궁의 수비를 책임지는 것은 오로지 황실 수호대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수장이 황궁에서 마차로만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이곳까지 직접 마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설령 이번에 다시 불사왕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황녀님만큼은 무사히 빠져나가실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스타브가 무뚝뚝하게 말을 잇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또한 불사왕이 습격했을 때 직접 맞서 싸웠던 이들 중 하나였을 터인데, 정말 어지간히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 그때 그 엄청 강한 노인과 같이 한스랑 싸웠던 기사였지. 그때 상당히 많이 다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된 건가.'
그들의 대화를 뒤쪽에서 지켜보던 헤스페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때 이후로 몇 개월이 지났으니 그 정도 경지의 기사라면 진즉에 회복하고도 남을 시간이기는 했다.
"프리스틴 자작님? 그렇다고 하네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 스타브의 호언장담을 들은 라일리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뒤쪽에 서 있던 이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이만한 전력이 있는데 제가 무리하게 끼는 것도 비효율적인 일이겠지요."
그에 이세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원래라면 그녀는 지금쯤 용사 파티와 함께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잠깐 합류를 미룬 상태였다.
그래도 그녀의 전략적인 가치를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
'수도에선 공간이동을 할 수 없으니 여기서 황궁까지 따라가면 왕복으로만 서너 시간 남짓. 이미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는데 그렇게까지 한다면···.'
역시 그건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동료들에게도 영 못 할 짓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녀님."
"항상 제국을 대표하는 활약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프리스틴 자작님. 부디 몸조심하세요."
이세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는 라일리와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황녀를 호위하기 위해 나온 이들을 한 차례 훑어보곤, 마지막으로 헤스페론에게 시선을 돌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무력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겠으나, 그래도 그녀를 제외하면 라일리가 가장 믿는 상대였으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에 응답하듯 보인 그의 헤픈 미소에 오히려 불안감이 더 커지긴 했지만.
"그럼 황녀님. 황궁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차에 오르시죠."
그렇게 그녀가 다시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대신전으로 사라지자.
호위대와 사절단은 저마다 말과 마차에 올라타 이동을 시작했다.
'음, 이럴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그리고 헤스페론은 황녀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마차 안에서 가볍게 머리를 긁적였다.
황녀 전용 마차에 특별하지도 않은 신분의 외간 남자가 함께 탈 수는 없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라일리가 좀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가능하기야 했겠지만, 곧 황태녀 책봉을 앞둔 중요한 시기였으니 괜한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은 피하는 게 좋았다.
'뭐, 한스가 습격할 예정도 없으니 큰일이야 없겠지. 만약 일이 터지더라도 극의에 이른 기사 하나랑 상급 이상의 기사 수십에, 황궁 마탑의 마법사들와 온갖 마도구까지 넘쳐나니.'
거기다 어차피 자신이 옆에 있어봤자 특별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벌써 하급을 넘어 중급에 도달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장을 보이는 그였으나, 아직은 여기 있는 기사 하나 상대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나마도 스킬과 스테이터스 덕분에 가능한 거고.'
그는 사절단의 사용인들과 같이 탄 마차 창가에 팔을 기대고,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본체가 기절하기 전에 한동안 고유스킬 강화를 포기하고 스테이터스에 투자했던 만큼, 지금의 그는 모든 면에서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진보한 상태였다.
'투자한 보람이 있게 새로운 스킬들도 생겼고 말이지.'
전신의 근력을 골고루 강화한 끝에 획득한 「괴력」.
순발력과 동체시력 등 감각 계통에서 발현한 「신경과민」.
추리력과 사고력 등 정신 계통을 올리다 생긴 「혜안」.
회복력만을 집중적으로 강화하다 「초회복」을 얻었을 때와는 달리 여러 스테이터스를 복합적으로 올리다 생성된 스킬이어서인지, 하나같이 초기 보정치도 「초회복」을 크게 상회하는 능력들이었다.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제대로 자리 잡은 아바타에겐 없는 것보단 좋은 정도지만, 아직 특별할 것이 없는 입장에선 상당히 유용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능력치에 그것을 보정해주는 스킬이 붙어 더할 나위 없는 시너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도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헤스페론의 초기 스킬이었던 「결속의 끈」이었다.
'정작 소환 마법을 배우지 못해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계약 시 추가 보정을 주는 이 스킬은 라일리 황녀와의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이후로 이렇다 할 쓰임새가 없는 상태였으나.
여기다 그의 정신 능력이 크게 성장하고 「혜안」까지 더해지자 새로운 가능성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각난 김에 연습도 할 겸, 그는 그간 꾸준히 해왔던 대로 다시 「결속의 끈」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미약한 연결을 통해 저 앞쪽 마차에 타고 있는 라일리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좀 더 집중하면 상대의 컨디션이나 기분 상태 같은 것들도 알 수 있긴 한데.'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진짜 변태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이상의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성을 깨달았으니, 이걸 잘만 이용하면 나중에 소환수가 생겼을 때 정말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것 같···.
'음? 뭐지?'
그렇게 막 「결속의 끈」의 연결을 끊으려던 순간.
그 미약한 선을 통해 라일리의 흐릿한 감정 일부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심쩍음.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경계심.
'갑자기?'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걱정은 이렇게 평화로운 귀환길에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아무 근거 없이 저런 불안감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정신을 좀 더 집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앙—!
조금 떨어진 지척에서 강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경계!"
그것에 맞춰 황실 수호대장 스타브의 호령이 울려 퍼지고.
촤앙—!
채채앵!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든 호위대가 순식간에 마차들을 둘러싸 방진을 꾸리고 사방을 경계하며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스타브 경? 무슨 일이죠?"
"아직 원인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황녀님. 그래도 바깥은 위험하니 창문을 닫고 마차 안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헤스페론이 있는 쪽에선 황녀의 마차 뒤꽁무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서 들린 것은 틀림없이 라일리와 스타브의 대화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소란을 무시하고 오히려 「결속의 끈」에 더욱 집중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에게서 불길함에 대한 확신이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느껴지는 감정 일부에 변화가 생겼다.
당황스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반가움.
그리고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은 바로.
헤스페론 자신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저쪽에서도 내 존재가 느껴지나 본데.'
하긴, 생각해보면 애초에 능력 자체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결속력을 강화하는 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희미했을 때야 스킬의 주체인 이쪽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지만, 연결이 강해질수록 그 차이도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걸 이용해서 상호간에 텔레파시가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런 활용 방안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당장 그녀도 이 상황이 상당히 갑작스러울 텐데도,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감정 속에서 다급한 상념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수상하다··· 바깥···? 지금 일어나는 소란을 말하는 건가? ···아니야?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불완전한 연결에 그가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그의 뛰어난 성장력은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고 있었고, 양쪽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연결에 순응하자 「결속의 끈」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쿠웅—! 콰앙—!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연달아 터지는 폭음.
멀리서 어렴풋이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이, 확실히 뭔가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마라! 하필 오늘 이 장소에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일을 벌인 놈들이 황녀님을 노린다는 뜻이다! 이곳으로 접근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라!"
무기를 뽑아 든 스타브가 거칠게 외치며 방진 안으로 들어가, 황녀의 마차와 마법사들이 뭉친 곳에 버티고 섰다.
'잠깐, 지금 의심하는 게 설마···.'
그렇게 몇 가지의 키워드가 주어지자 헤스페론의 사고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의 오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리며 「신경과민」 상태에서 주변의 정보를 삽시간에 빨아들였다.
경지는 고작 중급 마법사였으나, 그의 스펙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들에서 「혜안」이 뭔가 이질적인 정보를 추출해냈다.
'이건 좀··· 찝찝한데.'
미묘한 어긋남.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뒤틀림이 호위대 곳곳에서 느껴졌다.
물론 이 정도 문제는 서로 간에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다면 흔히 발생하는 것이었으니, 당장 뭐라 확언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 당사자들이 제국 최정예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순간적으로 헤스페론의 머릿속에서 경계심이 치솟고, 위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사태를 깨달은 그가 뭔가 행동을 보이기도 전.
상황은 눈 깜짝할 새에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아아악—
사고가 팽창해 천천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의 검광만이 빠르고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았다.
저게 정말 느려진 속도가 맞나 감탄하던 것도 잠시.
콰드득! 콰직!
촤아악—!
그 오러가 스쳐 지나간 곳에서 천천히 붉은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자— 스타브 주위에 살아있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젠장!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질 않아!'
마법사들이 상시 두르고 있던 보호막이나 마도구 따위는 극의의 기사···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스타브가 작정하고 가한 기습 앞에선 무의미할 뿐.
거기다 문제는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수많은 오러가 동시다발적으로 옆에 있던 동료들의···.
아니, 동료였던 자들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있었으니까.
푸욱—
"커헉!"
촤악—!
"큭, 이게 무슨 짓···!"
과연 기사답게 기습을 당하고 버틴 이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빠르게 반응한 이도 있었지만··· 그것은 대세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번 공격으로 상당수가 죽어 나가며 살아남은 이들의 수가 배신한 이들의 수보다 적어진 것은 물론.
"커헉! 대장님, 어째서···!"
"그러게 진작 내 손을 잡지 그랬나."
무엇보다 저쪽엔 황실 수호대장인 스타브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범인 듯한 몇몇을 제외한 모든 마법사를 제거하고, 이어서 제 부하였던 이들의 몸에도 가차 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이건 글렀군. 아바타의 사망은 큰 손실. 너만이라도 빠져나와라. 그간 성장한 「영웅의 발자취」라면 제론의 결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터.
-헤스페론 : 내가 그렇게 가면 라일리는 어떡하고?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지금이라도 불사왕이 짠하고 나타나면···!
-한니발 스트라우스 : 불가.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적어도 한 시간은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속한 사고 속에서, 헤스페론은 계속해서 타개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본체가 정신을 잃은 이상 전송진으로 인한 증원도, 소환 해제를 이용한 긴급 탈출도 불가능.
거기다 일이 흘러가는 꼴을 보니 시간도 촉박하고, 결계로 인해 장소도 폐쇄적이라 다른 아바타의 도움이 원천 차단된 상태였다.
'답이 없다.'
저들이 라일리를 당장 해치지 않을 거라 믿고 혼자 「영웅의 발자취」로 자리를 피하기엔···.
콰드득—!
···지금 공범 마법사와 함께 황녀의 마차에 걸린 결계를 부수고 있는 스타브 놈의 기세가 너무 흉흉했다.
"사, 살려주시오! 뭐든 협조하겠소!"
"히익!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제발···!"
아니, 그보다 당장 그가 있는 마차로 다가오는 기사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봐도 살인멸구할 기세가 가득하지 않은가.
-한니발 스트라우스 : 네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건 무리다. 다시 한번 말하지. 지금이라도 황녀를 버리고 탈출해라.
'아 씁···! 저 도움도 안 되는 놈이···!'
역시, 아무리 봐도 조진 것 같았다.
#213
제론의 고난 (2)
기습에서 살아남아 저항하는 기사들이 아직 조금 남아 있긴 했으나, 그들이 전부 정리되는 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적 일부가 사절단이 탄 마차 문을 하나씩 열어 인정사정없이 학살을 벌이고, 주변 일대엔 마법사들로 인한 추가 결계까지 깔려 「영웅의 발자취」를 사용하지 않고선 도주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황.
그 위기 속에서 헤스페론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팽팽 돌아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사전에 중요 인물에 대해 조사했을 때, 황실 수호대장인 스타브는 분명 중립··· 정확히는 황제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라일리도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젠장, 황궁 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인간이라 정보가 부족해. 아니, 지금 동기는 아무래도 좋아! 뭐라도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지금도 「결속의 끈」을 통해 라일리의 감정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중이었다.
과연 황녀답게 숨겨진 수단이라도 있었는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 실낱같은 기대는 이내 뭔가에 가로막힌 듯 다시 좌절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에 놈이 얘기했던 만반의 대비가 불사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에 대해서였나.'
아무리 수를 찾아봐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형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소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여기서 먼저 단념하고 물러나 버린다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어디 있어!'
이 세상을 뒤에서 조종하는 흑막이나 다름없는 자신인데,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않은가!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지. 마침 가능성이 보인 참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꼭 필요한 게 있었다.
바로 시간.
황녀의 마차에 설치된 결계는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이고, 그가 탄 마차로도 두 명의 기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고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지금도 촉박하게 느껴질 정도.
-한니발 스트라우스 : 쯧, 멍청하고 비효율적이다. 둘 다 죽느니 너 하나만이라도 빠져나오는 편이 이득이지 않은가?
-헤스페론 : 아니, 어차피 난 이제 중급 마법사에 턱걸이한 수준이야.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산은 차기 황위 계승자인 라일리와의 인연이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이해하고는 있으나, 존재를 이루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납득할 수는 없다.
그래서 헤스페론은 아주 친절하게 한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헤스페론 : 그런데 여기서 도망가면 그저 그런 중급 마법사 하나만 남을 뿐이잖아. 그럴 바에야 도박이라도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성공한다면 차기 황제의 최측근이 되는 거라고?
-한니발 스트라우스 : 호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하긴 지금 너 정도 수준이라면 다시 만드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을 터.
-헤스페론 : ···그렇게 단언하면 좀 상처받는데.
-한니발 스트라우스 : 좋다. 시간이 아깝긴 하겠다만 반대급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군.
-하인리히 : 나도 막 전투가 끝났어. 여유가 생겼으니 지금부터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 제발 잘 됐으면 좋겠군. 황녀가 잘못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하인즈 2세 : 흐음,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
-하워드 :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간단하게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렇게 가속한 시간 속의 뇌 내 긴급회의가 끝나고.
상황은 다시 급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
콰앙!
검을 뽑아 들고 사용인들이 탑승한 마차의 문을 열려던 기사가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마차의 문을 박차고 나온 상대가 그를 향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던 것.
하지만 제국의 상급 기사인 그가 대응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반항인가? 귀찮게 하는군."
"프리스틴 자작의 제자다. 마법사니 주의하도록."
"마법사 말입니까? 마법사가 검을···."
하지만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기사가 주의를 주기 무섭게.
그 사내, 헤스페론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광이 번뜩이며 그 속도가 몇 배로 증폭되었다.
"잔재주를! 어림도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기사에겐 가소로운 수준일 뿐이었으니.
그의 전신에서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마찬가지로 찬란한 오러에 휩싸인 검이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법사의 검을 단칼에 두 동강 냈다.
그리고 그에 의기양양해진 그가 무방비해진 상대를 그대로 베어 버리려던 순간···.
콰앙—!
한순간에 번쩍인 검은 마력광과 함께 다시 몇 배로 증폭된 헤스페론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커헉?!"
끼기긱—
격투가용으로 제작된 듯, 너클 부분이 강화된 금속 건틀릿이 기사의 갑옷과 마찰하며 불길한 소리를 퍼트렸다.
"이, 건··· 무슨···!"
거기다 문제는 단순히 타격에 의한 충격만이 아니었다.
주먹에서 발산된 치명적인 저주가 그의 몸을 감싼 오러를 파고들며 움직임을 제한한 것이다.
아마 오러가 아니었으면 이 저주만으로도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에게 살아남을 희망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푸화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선혈이 비산하며, 목을 잃은 기사의 시신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네놈!"
그리고 그와 동시에.
채앵!
동료가 피격당하는 순간 움직였던 다른 기사의 검이 어느새 헤스페론의 손에 생겨난 '칠흑의 검'과 맞물렸다.
물론 막 생명을 수확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검에서도 불길한 흑마력이 풍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처럼.
그에 검을 더욱 강하게 찍어 누른 기사가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설마 흑마법사였나? 거기다 그런 마검은 또 어디서···!"
"큭, 친구한테 빌린 건데!"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그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설령 흑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든, 마검의 힘을 빌려 오러에 대항하려 하든.
챙—! 차앙! 채챙—!
최상급에 달하는 고위 기사 앞에선 그저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아이 수준은 아니군. 분명 마법사라 들었는데, 아까 무투술도 그렇고 이 검술은 또 뭐지? 단순히 신체 능력만으로 반응하는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외도(外道)의 힘을 빌렸다 해도, 일단 어떻게든 그의 공격에 반응해 검을 섞고 있다는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비록 정말 아슬아슬하고 간신히 견디고 있을 뿐이라 하나,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칭찬할 만한 수준.
쩌적—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기사는 자신의 강맹한 오러에 금이 가기 시작한 마검을 바라보며 사납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아무리 흑마력을 가득 품은 기물이라 해도, 경지에 오른 이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격에 수차례나 노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러로 무기를 강화할 수 있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 알량한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마법사 주제에 기사 흉내를 내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그렇게 그는 승리를 확신하며 마검의 균열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재차 검이 맞닿은 순간, 그 틈새에서 팽창하기 시작한 흑마력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엇? ···이건?!"
하지만 뒤늦게 이상을 깨달은 그가 뭘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콰자작!
균열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마검에 걸려 있던 주문에 의해 특정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한 방향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치명적인 흑마력을 가득 품은 채 클레이모어 지뢰처럼 전방을 휩쓰는 수많은 파편.
무기를 맞댄 상대를 확실하게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필살의 마검은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유효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했지만.
털썩!
그만큼 일단 거리 안에 들어온 이를 상대로는 압도적인 효과를 자랑했다.
그것이 설령 최상급에 이르는 기사라고 할지라도.
"하아, 하아— 레벨만 높다고 다가 아니라고. 이게 바로 템빨이란 거다."
헤스페론은 막대한 오러 덕분에 간신히 형체만 갖춘 기사의 시신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마법학개론」을 이용한 보조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격투술」과 「괴력」 등의 스킬을 이용하더라도, 단순히 그의 능력만으로 이 정도 수준의 기사들을 이기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당연히 외적인 보조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한 고등급 아이템 지원이었다.
'그것도 효과 하난 끝내주는 흑마력 위주의 마도구 말이지.'
무려 그 불사왕께서 직접 선별한 데다 손까지 본 후에 보내주신 물건이니 품질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 노릇.
물론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서 아예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었다.
파스슥—
"음."
손잡이만 남았던 일회용 마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검을 쥐었던 오른손으로 지독한 저주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걸쳐진 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신체 능력과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협찬 받은 수많은 장신구에서도 꾸준한 오염이 발생하며 그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뭐, 수명이야 딱히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엄청나게 노려보는군.'
하지만 헤스페론은 목구멍을 넘어오는 피를 꿀꺽 삼키며 끝까지 긴장을 유지했다.
그만한 소란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미 주변에 널린 기사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 쏠린 상태였으니까.
"···저주받은 물건. 진짜 흑마법사였나?"
"아니, 자세히 보니 직접 익힌 것 같진 않은데. 저 마도구들이 원인인 것 같군.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나."
"쿤터는 그렇다 치고, 설마 빌헬름 경마저 당할 줄이야."
아주 잠깐 사이에 기사 하나가 죽고, 그에 곧바로 나선 이도 불의의 일격에 절명했다.
무난히 이기리라 생각하고 지켜만 보던 사이에 동료 둘이 비명횡사했으니, 그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경계심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찌릿찌릿하네.'
물론 당장 나서지만 않고 있을 뿐, 기사들 사이에서 솟구치는 칼날 같은 기세는 언제든 그를 토막 낼 듯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인리히 : 조금 늦었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다. 또 준비되는 대로 추가로 보내주지.
그렇게 서서히 주변을 포위하는 기사들을 경계하고 있을 때.
어느새 헤스페론의 오른손에 쥐어진, 하인리히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성표가 그곳으로 파고드는 저주의 기운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아, 좀 살 것 같네.'
아무리 성표를 통한 간접적인 힘의 행사였다지만 명색이 성자의 신성력이었으니.
그 기운에 슬슬 합공할 준비를 하던 기사들이 움찔하며 다시 표정을 찌푸렸다.
"···엄청난 신성력. 성물인가?"
"빠르게 줄어드는 걸 보니 일시적인 것 같군. 그래도 저 정도 수준이면 최소한 대주교급이 개입한 것 같은데?"
"아까 저주받은 물건도 그렇고, 저런 것까지 가지고 있다고?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본캐의 지원을 받는 부캐입니다. 템빨 달달하네요.'
진지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으면서도 속으로 장난스럽게 대꾸한 헤스페론이었지만, 사실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싸우는 와중에도 머리 한편으론 계속해서 「결속의 끈」에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가 원하는 바에 도달하기엔 살짝 부족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마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저들과 한패로 보이는 소수 빼곤 모조리 몰살당한 상황.
그래도 자신이 난리를 부린 통에 시선이 분산됐는지, 배신하지 않은 기사 무리엔 아직 생존자가 제법 남아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
오싹—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슬쩍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배신자들의 수장인 스타브가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바로 앞에 활짝 열린 마차의 문을 둔 채로.
***
헤스페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스타브는 곧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저런 놈 하나보단 이쪽 일이 더 중요했으니.
잠시 지켜보자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좀 거슬릴 뿐, 경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상대였다.
이젠 부하들도 방심하지 않을 테니 그들 선에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터.
"···스타브 경. 어째서 이런 짓을?"
"죄송하게 됐습니다, 황녀님. 원래 정쟁이란 다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원하는 게 달랐던 거지요."
"제론에서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도 무사할 것 같나요? 황제 폐하께서 이를 절대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길. 이쪽도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건 아니니 말이지요."
스타브는 라일리의 경고에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번 일에 세력이 휘청할 정도의 유무형 자원을 쏟아부은 데다, 직접 동원된 것도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매우 불행하게도, 불사왕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라일리 5황녀는 도주한 포로를 처단하기 위해 쫓아온 불사의 군대에게 당한 것으로 처리될 것이다.
지금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도 그 일환이었으며, 이미 모든 물리적·마법적 증거와 증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나를 포함에 여기 있는 모두도 말이지.'
그는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시간이 없군요. 이만 가셔야 할 때입니다."
황녀에 대한 마지막 예우 차원으로 대화에 응해주긴 했으나, 그들에게도 남은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만큼 더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중앙을 비롯한 각지에서 총력을 다해 시간을 벌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잠깐! 설마 당신은···."
라일리는 어떻게든 말을 걸어 시간을 끌려고 했지만, 스타브는 그것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아공간 마도구에서 짧은 단검 하나를 꺼냈다.
···사실 손잡이가 달려있기에 단검이라 칭할 뿐, 생긴 것만 따져보면 마수의 발톱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참,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리 곱게 죽으시긴 힘들 겁니다. 상당히 고통스러우면서도 처참한 꼴이 되실 테지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는 핏빛의 발톱 단검.
그 또한 흑마력이 가득 담긴, 저주받은 마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친구가 저주받은 물건들을 사용하더군요. 사실 처음부터 그를 불사왕의 끄나풀로 엮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아예 황녀님을 직접 시해한 흉수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의 시선이 아직도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척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놈이 살아남아 있던 소수의 기사들 틈으로 들어가 그들을 지원하며 온갖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신성력이 담긴 물건으로 기사들을 회복시키고, 위급할 때 결계 마도구로 시간을 벌며, 웬 핏빛 구슬을 매개로 발동한 피의 폭풍이 마법사들의 개입을 방해했다.
또 그 와중에 꺼내든 마검을 비롯한 불길한 물건들에 부하들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
"···쯧, 무능한 것들. 저쪽도 제가 직접 손을 써야겠군요. 일이 바쁘니 이만 끝내지요."
그에 미간을 찌푸린 스타브가 가볍게 혀를 차며.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라일리 황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라일리 황녀가 '있던' 곳을 향해.
"···하?"
그렇게 허공을 벤 후, 잠시 굳어있던 스타브가 자신의 감각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한창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 가운데로.
그리고 그곳엔.
"어우 씨, 아슬아슬했네."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헤픈 웃음을 짓는 헤스페론의 품 안에.
라일리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소곳이 안겨 있었다.
#214
제론의 고난 (3)
쿨럭—
코와 입에서 검게 죽은 피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어떻게든 억눌러보려 했지만, 지금의 출혈은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젠장, 이거 이러다 정말 죽겠군.'
밖으로 흘러나온 피는 그저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억지로 무리한 탓에 체내의 마력 회로는 꼬인 것을 넘어 너덜너덜하게 난도질 되었고, 통제가 약해진 틈을 타 범람한 저주가 미친 듯이 날뛰며 그의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나마 하인리히가 준 성표가 있었기에 그 정도지, 그게 아니었다면 겨우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으리라.
또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시간을 맞출 수 있었으니 됐어.'
헤스페론은 목에 걸어 옷 안에 넣어뒀던 목걸이가 부스러져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주르륵—
직후, 그의 오른쪽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서서히 그쪽 시야가 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암전되었다.
'···오른쪽 눈인가.'
여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찰나에 이루어진 극적인 구출.
그 절묘한 타이밍만 따지자면 극한의 상황에서 각성한 주인공이 활약한 클리셰처럼 보일 수 있었으나···.
적어도 지금의 그에 한해서는 그렇게 형편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그래도 눈 하나 정도면 나쁘지 않군. 강제로 능력을 끌어올릴수록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커지는 법이거늘.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할리 : 카핫! 아암, 까짓거 눈이야 새 걸로 하나 달면 되지! 나처럼!
한스가 불사의 군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얻은 흑마도구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물건이 많았다.
정작 그 대부분이 생명력이나 수명 따위의 대가를 요구해 언데드들은 쓸 수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결속의 끈」이 특수스킬「맹약의 사슬」로 진화합니다."
이번에 헤스페론이 사용한 목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그 기물이 부족했던 스킬 성장치 일부를 대신 채워준 덕분에 「결속의 끈」을 진화시켜 계약 대상인 라일리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추가적인 보정에 더해 방금처럼 강제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무생물과도 결속을 맺을 수 있게 스킬의 적용 범위까지 확대됐고.'
물론 막 스킬이 진화한 만큼 그 활용성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봐야겠으나, 어쨌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헤론···?"
그때 그의 귓가로 라일리의 얼떨떨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정신을 차려 보니 외간 남자의 품 안이다.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라일리, 대화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상황이 좀 급하니까."
"···응."
헤스페론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 스타브에게로.
그는 여전히 한 손에 기괴한 단검을 든 채로 고개만 돌려 이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맹약의 사슬」로 라일리와 나를 동기화하고, 「영웅의 발자취」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인데···.'
다만, 막 무리해서 라일리를 소환한 탓인지 「맹약의 사슬」의 연결이 흔들려 다시 정비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본래 실력에 맞지 않는 무리한 스킬 운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귀찮게 하기는···."
아니나 다를까.
스슥—
작게 중얼거리던 스타브의 몸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역시 기다려 줄 리가 없나!'
헤스페론의 정신이 고양됨과 동시에 「신경과민」이 활성화되어 주변 시간이 급격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도 저만한 속도라고?'
그 한없이 늘어지는 세상 속에서 보이는 스타브의 움직임은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느릿느릿 멈춰가는 주변과 달리 혼자 성큼성큼 이쪽으로 접근하는 모습엔 절로 소름이 돋을 지경.
'···요즘 워낙 큰물에서만 놀아서 잘 실감이 가지 않았었는데.'
최근 들어 적이고 아군이고 온통 거물들과만 어울리다 보니 무뎌진 감이 있었으나, 원래 극의라는 경지는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수백 년은 거뜬히 사는 뱀파이어 사회의 3강 브로코슬락 클랜에도 진혈은 로드를 포함해 셋밖에 없었고, 대륙 제일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그 주신교단에서도 수뇌부인 팔라딘과 대주교급에 해당하는 경지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대가 지금 두 눈에 살기를 품고 흉흉하게 이쪽으로 쇄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헤스페론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쪽이 사력을 다해 간신히 뒤로 한 발 물러섰을 땐 이미 저쪽은 거침없이 대여섯 걸음을 내디딘 뒤였다.
비정상적인 스테이터스와 스킬로 겨우 상대를 인지하곤 있다지만, 지금의 강화된 육신조차 극의에 달한 기사의 움직임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큭, 조금만 더!'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동기화 작업 또한 마찬가지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마력이 물리 법칙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에너지라곤 하나, 그것이 지나는 통로는 엄연히 현실의 육체였던 만큼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근접전으론 가망이 없다. 최대한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해.'
결국 헤스페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인즈 2세의 「정제혈정」이 농축된 핏빛 구슬이 무더기로 투하되며 그곳에 각인된 혈마법을 사방으로 뿜어냈고.
하인리히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성표가 상대의 발길을 막기 위한 방벽을 형성했다.
또 거기에 저주받은 물건을 비롯한 온갖 마도구까지 총동원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큭, 번거로운 짓을! 대체 이런 물건들은 어떻게 구한 거지?"
스악—
촤촤악!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의 깜짝 선물 세례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인리히 : 단순히 쾌(快)만이 전부가 아니군. 매개체를 통해 발현한 불완전한 술법의 취약점을 정확히 노리고 있어. 확실히 실력은 지오스 이상이다.
스타브는 짜증 난다는 듯 이를 갈면서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러의 검날로 모든 방해를 분쇄하며 다가왔다.
이젠 정말 지척이라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욱씬
저주받은 물건을 너무 남발한 것 때문일까.
헤스페론의 전신··· 그중에서도 오른손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그는 품 안의 라일리를 끌어안고 다시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뿌드득—
느려진 세상 속에서 놈의 페이스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탓인지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스타브, 네놈! 이 더러운 배신자가 감히 황녀님을!"
"크윽! 어차피 여기서 죽는 거, 이대로 얌전히 당할 것 같으냐!"
그렇게 그가 뒤로 물러난 사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던 몇몇 기사들은 오히려 그 앞을 막아서며 목숨을 도외시하고 스타브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 대세를 거스르기엔 한참 부족한 숫자였지만, 그들 또한 하나같이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
적어도 이 급박한 상황에서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큭, 멍청한 것들. 이젠 이런 놈들 막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나?"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그리고 장렬하게 산화한 기사들이 목숨으로 얻어낸 그 순간은.
헤스페론이 정말 간절히 원하던 찰나였다.
'됐다.'
그는 한쪽만 남은 시선으로 스타브의 칼날에 쓰러지는 최후의 기사를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했다.
"후우— 당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방에서 맹렬히 달려드는 배신자들의 얼굴을 쭉 훑으며 나직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어디 실컷 발버둥 쳐 보라고."
손바닥을 아래로 뒤집어 마지막 선물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영웅의 발자취」를 발동했다.
이후 공간이 일그러지며 흐려지는 시야 너머.
살벌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과 반대로, 스타브가 다급하게 뭔가를 외치며 뒤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드처럼 지나가다가···.
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주변 광경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역시 감각이 좋단 말이야. 뭐, 사실 진짜는 이제부터지만. 라일리가 무사히 탈출한 시점부터 저놈들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
그건 저들뿐만 아니라 이 일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놈들 또한 마찬가지.
수도에 테러를 저지르면서까지 황녀를 제거하려는 무리수가 실패했을 땐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아, 참고로 선물은 정말 별거 없었다.
그저 이전까지 꺼내 놓았던 것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라,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우니 좀 더 신경 써서 준비했을 뿐이니까.
한계까지 꾹꾹 눌러 담은 한스 특제 심연 폭탄을 말이다.
***
대륙 전역에서 일어난 불사의 군대의 대대적인 침공.
그것은 세계 각지에 이전까지의 습격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안겨주고 있었다.
[끼히히힉!]
까드득! 까득—!
[우리와 함께하자!]
"죽을 각오로 막아! 여기가 뚫리면 도시 전체가 위험하다!"
"자, 잠깐. 이거 그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다르잖아!"
"지원은! 지원은 아직인가? 이제 진짜로 무리라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지도부의 안일한 대응에 있었다.
이번 습격의 위험성은 이미 성자 하인리히가 몇 차례씩이나 누누이 강조한 바 있었으나—.
여태까지 '한스'의 온화한 침공에 익숙해진 이들이 기존 대응 수준을 적당히 높이는 정도로 충분할 거라 생각한 게 문제였다.
[아아—! 좋구나! 이 얼마만의 인세란 말인가! 이 감미로운 피와 비명이 날 흥분시키는구나! 좋구나, 좋아. 더— 더 울부짖거라!]
[이 땅에— 끝나지 않는 공포를— 영원한 죽음을—!]
심지어 이번에 쳐들어온 침략자들 사이엔 그동안 불사성에 틀어박혀 있던 고위 언데드들마저 간간이 끼어있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 수준이면 되겠지?'하고 방심하다 상황이 난장판이 되어 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그간 두문불출하던 고위 언데드들이 북부 산맥에 쌓인 병력을 이끌고 대륙 곳곳을 무자비하게 타격하면서, 그에 휩쓸린 민간인들의 피해도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고 있었다.
그간 애매한 평화가 이어지며 살짝 정체되어 있던 시국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사건.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누구보다 확실한 성과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슈욱— 펑!
[크으으—!]
쿠웅!
이번에 새로운 인물을 영입한 용사 파티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상황 종료. 이제 주변에 특별한 적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로 적의 우두머리였던 데스나이트의 핵을 날려버린 녹색 머리의 엘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하이 엘프이자 엘븐 킹덤의 전투 집단인 파수꾼들의 수장으로, 2차 정상 회의 직후 용사 파티에 합류하게 된 리디아 그랜우드였다.
처음엔 곧 은퇴를 앞둔 라포리의 후임으로서 이온 대륙에 온 그녀였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현 상황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파티에 합세하게 되었다.
물론 애초에 전투 인원이었던 그녀가 이온 대륙에 사절로 온 것도 이 혼란스러운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리 뜬금없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로 인해 또다시 은퇴가 뒤로 미뤄져 버린 라포리만 안타까울 뿐.
"성자님? 괜찮으신가요? 아까부터 전투에 집중도 못 하고 뭔가 불편해하시던 것 같던데."
그렇게 파티가 슬슬 뒷정리하고 있을 때,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하인리히에게 다가간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발에 흑안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제국의 대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이었다.
"아, 이세아 님.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막 해결된 참이거든요."
그에 제국 쪽의 상황을 살피던 하인리히는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헤스페론과는 달리 라일리 황녀는 다친 곳도 없이 무사했으니 그녀에게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다.
음모를 꾸민 놈들이 철저하게 통신을 봉쇄한 탓에 아직 제론에서 일어난 변고를 알지 못한 듯했지만, 조만간 그녀에게도 연락이 갈 터.
아마 그땐 그녀도 지금처럼 평온한 모습을 보이진 못하겠지.
"···그런데, 이번엔 평소보다 사상자들의 수가 훨씬 더 많네요. 언데드 전력도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이었고. 이런 규모의 공습이, 전 대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죠?"
"하아— 그렇지요. 아! 저도 이제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걸 도와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인원을 성녀님 혼자 감당하시긴 힘드시겠죠."
"아, 그럼 저도 주변 정리를 도와야겠네요."
이세아는 서둘러 환자들 쪽으로 향하는 하인리히를 뒤로하고 다시 처참하게 망가진 주변을 둘러보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툴크 왕국 최남단의 교역 도시인 사리단, 그중에서도 상인 연합의 본부가 있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긴커녕, 무슨 전쟁터 한복판에 온 것처럼 피폐하기 그지없을 지경이었다.
"···그런가. 이제야 확실히 실감이 가네.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마왕의 침공. 죽음이 가득한 대지. 세계 멸망의 위기.
지금까진 조금 멀게 느껴졌던 그것이 확실하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던 이세아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던 하인리히는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스···.'
사실 자신의 심정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금의 사태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
누가 뭐래도 그는 정의와 빛을 수호하는 이 세계의 용사였으니까.
#215
제론의 고난 (4)
불사성 내부의 거대한 대전.
좌우로 수많은 데스나이트들이 도열한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검은 드레스의 귀부인이 왕좌에 앉은 이를 향해 예를 갖춰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하명하신 대로, 대륙 침공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옵니다···. 여전히 성자의 예지 때문에 기습의 이점은 크지 않사옵니다만···. 이번엔 저들의 준비가 미흡한 틈을 타, 압도적인 전력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요···.]
이어서 그 반투명한 귀부인, 밴시 퀸 올리비아가 이번 작전의 성과를 차근차근 나열했다.
불사왕의 명에 따라 구성된 습격 부대가 십여 곳이 넘는 장소를 일제히 타격했고, 그중 용사 파티가 개입한 곳을 비롯해 몇몇 장소 외엔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언데드 군세는 이후 각국의 토벌대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처음부터 소수의 지휘관을 제외한 병졸들은 모조리 소모품이었으니 딱히 손해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언데드야 이 불사성 근처에서 넘쳐나는 것이었으니까.
[크흣— 수고했다, 올리비아. 감히 이 몸을 상대하면서 그런 안일한 대처라니. 한동안 놀아주었다고 이쪽이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보군.]
그녀의 보고가 마무리되자 해골과 뼈로 이루어진 왕좌에 앉은 한스가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는 성 인근에서 바글바글하게 느껴지는 언데드들을 잠시 가늠하다가 차오르는 아쉬움을 속으로 삼켰다.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았으면 훨씬 효율적으로 대륙을 뒤집을 수 있었을 터인데. 며칠간 준비하고도 십여 곳을 공격하는 게 한계라니.'
당연한 얘기지만, 병력으로 쓸 수 있는 언데드들이 넘쳐난다고 해도 그들을 침략 지점까지 옮기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애초에 그 정도 대규모 군세를 대륙 전역에 파견하는 게 쉬울 리 없지 않은가.
'그나마 이 몸 정도나 되니 가능한 일이지.'
본디 마법사란 존재는 철저한 준비가 갖춰진 환경에서야말로 최고의 능률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흑마법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불사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대에 가득한 죽음의 기운을 촉매로 불사성을 거대한 마법진의 핵으로 삼는다. 거기다 이 몸의 무한에 가까운 흑마력까지 공급된다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성 한 편에 마련된, 언데드에 한해 대규모 운송을 가능하게 하는 포탈이었다.
불사성이 오롯이 그의 의지대로 조작할 수 있는 궁극 마법 '영겁의 미궁'이었기에 가능한 일.
굳이 이 포탈의 단점을 하나 꼽자면, 기본적으로 보내는 쪽에 특화된 일방통행이라는 것이었는데.
어차피 귀환할 수 있는 건 소수의 지휘관 개체뿐이었으니, 그 정도야 리치라도 몇 대동하고 가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또한 전에 명하셨던 조사도 진행하고 있사옵니다만···. 송구스럽게도 남부의 핵심 인사에게 접근하는 것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옵니다···. 다만, 동부에 소재한 오바이포 클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사온데···.]
그는 올리비아의 추가 보고를 들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외부와의 모든 교류를 단절한 남부 부족 연맹.
마치 탈리아 왕국의 경우를 답습하는 것처럼 공화국의 정국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동부의 오바이포.
'놈들이 이 시기에 한꺼번에 움직인 게 우연일 리 없다.'
추가로 이번에 제국에서 있었던 황녀 암살 미수와 해리스가 한창 수사 중인 에나멜 대륙의 이상까지.
하나같이 전부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놈들을 방치하는 쪽과 처리하는 쪽. 어느 쪽이 더 이득일까.'
물론 그는 단순히 놈들이 문제를 일으키기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이 진행 중인 '대륙 침공 계획'으로 막대한 카르마를 벌어들이는 것밖에 없었으니.
'일단 놈들이 있으면 대륙을 무너뜨리는 덴 더 용이하겠지. 단기적으로야 그쪽이 카르마 수급량이 더 클 테지만···. 장기적으론 안방극장의 변수가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는 자신과 연결된 다른 아바타들의 상황을 쭉 훑어보다가 이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래, 아무래도 한 번쯤 직접 나설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앞으로 다가올 대형 사건을 암시하는 한마디를.
***
스타브가 발톱 형상의 단검을 들어 올렸을 때.
'아··· 이렇게 끝인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의외로 라일리가 느낀 죽음의 공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까지 해 온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놓아야 할 인연에 대한 미안함이 더욱 컸으니까.
'세아 언니, 많이 슬퍼하겠지?'
특히 가족 이상의 친분을 다져왔던 이세아를 떠올리자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자신을 위해 줄곧 여러모로 노력해준 그녀에게 보답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하고 이렇게 헤어지게 된다니.
'괜히 복수한다고 무리하지 말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갔으면 좋겠네.'
그다음으로 떠오른 이는 이세아와 같은 지구인인 헤스페론이었다.
사실 그와는 그리 길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일이 터지기 직전부터 그 존재감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혼자서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단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꺼내 배신자들과 싸우는 와중, 점차 강해지는 연결을 통해 어렴풋이 느껴진 그의 감정.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뭔가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었다.
'그냥 혼자라도 도망치라니까···.'
아까부터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외쳤으나 그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하던 일에만 열중할 뿐.
솔직히 잠깐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이젠 정말 끝이었다.
휘익—!
마침내 스타브의 손에 들린 기괴한 단검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으니.
라일리는 차마 그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고···.
동시에 헤스페론과의 '통로'에서 순간적으로 뻗어진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쿨럭—
그 직후, 뭔가 익숙함을 느끼고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담긴 것은.
"어우 씨, 아슬아슬했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감춰지지 않는— 눈부시게까지 느껴지는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
그리고, 라일리가 눈을 번쩍 떴다.
늘 봐 왔던 익숙한 천장.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꿈인가···."
그녀는 부드러운 비단으로 감싸인 이부자리에서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이 사르르 넘어가며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산란시켰다.
"아."
아직도 그때가 생생했다.
하긴, 그때라 해봐야 고작 하루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그녀는 슬쩍 창밖을 바라보곤 서둘러 채비를 갖춰 밖으로 나섰다.
당연하지만, 황녀 습격 사건은 제론에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가져왔다.
웬 피투성이의 사내에게 안긴 그녀가 황궁의 정문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 허가되지 않은 공간 이동에 부리나케 달려온 경비대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미 황태녀 자리까지 내정된 현 황위 제1 계승권자를 암살하기 위해 수도에 테러까지 벌였으니 난리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흉수가 황가의 사람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황실 수호대장이라지 않나?
덕분에 황실 수호대는 대대적인 조사를 위해 업무가 마비되기에 이르렀고, 그 일을 위해 제국 감찰부와 황궁 마탑은 물론 오직 황제만을 위해 움직이는 근위 기사단마저 나섰을 정도였다.
아마 연일 계속되는 불사의 군대의 습격이 아니었다면, 또 그녀가 자신은 무사하다는 전언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세아도 가만있지 않았을 터.
당연히 당사자인 라일리 황녀 또한 그와 관련해 오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오셨습니까, 황녀님."
"간밤에 별일은 없었나요?"
헤스페론이 입원해 있는 황실 병원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그를 바라보며 옆에 선 병원장에게 조용히 물었다.
"몇 차례 고열이 있긴 했으나, 금방 회복되어 지금은 안정을 찾았습니다. 마법사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몸이 단련되어 있더군요. 사실 그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정도로 버티지도 못했을 겁니다."
황궁 외곽에 자리한 이곳은 사후 세계의 대척점이라 불릴 정도의, 그야말로 제국 최고의 의료진들이 한데 모인 초호화 병원이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약을 다룰 수 있는 약사, 외과 시술로 잘린 신체마저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 의사, 포션은 물론 인공 장기 배양마저 가능한 연금술사, 치료 마법만을 전문적으로 익힌 고위 마법사, 심지어 주신교단에서 초빙해 상주하는 주교급 사제까지.
그 성녀가 있는 성지의 로셀리아 대신전 병동과 쌍벽을 이룰 정도란 말까지 돌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으나···.
"꽤 공들여 치료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다만, 앞으로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건 각오를 해야겠지요."
"···장애···라니, 어느 정도의···?"
당연히 이곳에서도 불가능한 건 있었다.
라일리의 떨리는 목소리에 황실 병원장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른쪽 눈은 스스로 제물로 바쳐 힘으로 바꾼 탓에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그만한 수준의 마도구는 대부분 엄중하게 관리될 텐데,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군요."
하다못해 그냥 외상으로 인한 손상이었으면 어떻게 재생 시술을 하든, 아예 새로 배양한 안구를 이식하든 할 텐데.
그 손실이 특정 의식의 대가로 치러진 것이라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오른손 또한··· 심연과 뒤섞여 변질된 저주가 깊게 파고든 탓에 완치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는 있으니, 지금처럼 저주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봉인으로 억누르는 게 최선이지요."
그러나 그는 곧 힘을 과하게 사용한다면 오른손에 봉인된 저주가 다시 날뛸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스테이터스가 강화되었다지만 헤스페론은 고작 갓 하급을 벗어난 마법사였다.
그런 그가 수많은 고위 기사와 맞상대한 건 물론 극의에 달한 기사의 발목까지 잡을 정도였는데, 그만큼 무리한 힘의 행사에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 없었다.
그나마도 하인리히의 신성력이 아니었으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겠지.
"아, 이쪽은 아예 절단한 후 새로운 팔을 이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재활에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부작용 때문에 이전만큼의 힘을 낼 순 없겠습니다만, 앞으로 마법사로만 살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요."
평생 위험한 봉인을 달고 살면서 이전의 힘을 유지하느냐, 전보다 약해진 팔을 새로 다는 대신 아예 화근의 싹을 잘라버리느냐의 양자택일.
라일리는 깊은 잠에 빠진 헤스페론을 떨리는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깨어나면··· 스스로 선택해야겠지.
이 사내의 넘치는 재능을 알고 있는 그녀로선, 지금 상황이 못내 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흠, 이거 너무 무능한 소리만 한 것 같아 송구스럽군요. 그래도 과도한 흑마도구 사용으로 손상된 원기와 생명력은 어떻게든 원상복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귀중한 재료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지만, 황녀님의 생명의 은인이라니 그 정도는 해야겠지요."
그 뒤를 이어 병원장의 감정 없는 말이 추가로 이어졌으나, 라일리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헤스페론만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병원장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신조였지만, 그게 눈치까지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스윽—
그렇게 병원장이 나간 직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한 손을 뻗어, 빼곡하게 룬 문자가 각인된 붕대에 감싸인 그의 오른팔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잠든 것처럼만 보이는 그의 오른쪽 눈가로 향했다.
"···또, 빚을 졌네."
아직 전에 입은 빚도 다 갚지 못했는데.
혼자 도망갈 수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구하겠다고 무리하게 위험한 물건들을 꺼내 쓰던 그였다.
아마 사용자인 본인도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겠지.
'···바보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선택했다.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녀를 구한 걸로 만족한다는 듯 후회 없는 미소를 지으며.
울컥—
라일리는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황급히 그에게서 손을 떼고 숨을 골랐다.
그러고도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섰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렇게 병실 밖으로 나선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고, 마침내 병동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땐 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느껴지는 기세가 풍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됐죠?"
"도주한 스타브 경은 현재 추적 중입니다만,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아 곧 잡히리라 예상됩니다."
"낙오된 자들은 이미 전원 구속을 마쳤으며, 추가로 협력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심문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지기 전, 이상 행동을 보인 이들의 명단을 작성 중입니다. 오늘 내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직이 중얼거린 그녀의 말에, 어느새 하나둘 그림자처럼 뒤에 달라붙은 수행원들이 저마다 몇 마디씩을 덧붙였다.
"특급입니다. 그 배후까지 확실하게. 아시겠죠?"
"네, 모든 인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선제공격을 당해 잔뜩 독이 오른 철혈 황녀가 보복을 위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간 모아왔던 세력의 힘과 제국의 협력까지 한데 끌어모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