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7

#121

소리 없는 전쟁 (3)

현 불사왕 휘하의 간부진 중 가장 바쁜 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누구나가 첫손에 꼽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밴시 퀸 올리비아가 그 주인공이었다.

한스의 첫 명령이었던 역천의 서약을 파헤치는 임무는, 놈들의 세력이 넓게 분포되어있던 만큼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미 파악한 놈들을 흡수하는 작업도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번에 한스로부터 또 새로운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타라크의 한 상인에게 뱀파이어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그 자세한 내막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하아··· 소녀, 이러다 과로사하겠사옵니다···.]

주변에 유령들을 휘감은 채 동굴의 어둠 속에서 부유하던 올리비아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언데드만 할 수 있는 회심의 농담이었으나, 아쉽게도 그녀의 말을 받아줄 수 있는 이는 이 공간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피부도 거칠어진 것 같단 말이지요···. 피부의 적인 햇빛도 최대한 피하고 있사온데···.]

반투명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찬가지로 반투명하고 매끈한 뺨을 쓸어내렸다.

주변의 싸늘한 반응에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한 유머였지만, ···물론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았다.

[후우··· 이 멍청한 것들에게 센스를 기대한 제가 바보지요···.]

불사왕 앞에서야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지만, 오랜 세월 홀로 외롭게 지내온 만큼 혼잣말과 말장난은 이미 습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통하는 이가 없어서야 부질없는 일일 뿐이었으니···.

결국 올리비아는 포기하고 눈을 감은 채 유령들이 가져온 정보의 분석에 들어갔다.

욕망과 집착을 비롯한 사념이 거세된 유령들은 존재감이 극도로 줄어드는 대신 그 자아 또한 흐릿해지기에, 원하는 대로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정리되지 않은, 그저 무분별하게 수집된 정보의 나열에서 필요한 정보를 추출해 조합하는 건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이상하군요···. 타라크의 상인, 휴버트 암살 미수 사건···. 이상한 점투성이옵니다···.]

우선, 그 피해 당사자인 휴버트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피해자부터 타고 올라가는 게 상식인지라, 그의 위치부터 파악할 셈이었는데.

'···상당히 신경 쓴 결계에 숨었나 보군요. 그래도 이 제가 그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건 자존심 상하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원래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던 만큼, 결국 그녀는 휴버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용의자들부터 샅샅이 훑었다.

이후, 다른 일들과 병행하면서도 고작 이틀.

타라크를 중심으로 한 경쟁 상단의 인물들부터 휴버트 상회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귀족, 이권이 얽힌 어둠 속의 조직들까지.

잠도 자지 않고 이어진 강행군 끝에 그녀는 마침내 그들 전부를 탈탈 털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나같이 결백했지만 말이지요···. 심지어 그가 변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

결국 최종적으로 나온 결론은, 휴버트나 그의 상회와 관련된 직접적인 원한 범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의 고생이 헛수고가 된 상황에···.

[으흐흐흑— 귀신이 곡할 노릇이옵나이다···.]

고오오오—!

올리비아의 흐느끼기 시작하자, 대기가 진동하고 주변으로 죽음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영적 방비가 되지 않은 이들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 즉사에 이를 수 있는 끔찍한 힘.

[끄이이익—!]

[으흐으으—]

동굴을 가득 메운 유령들이 그 기운에 몸부림치고 발광하며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태를 야기한 올리비아는 주변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차분히 정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휴버트가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 원인은 외부에 있을 터.

그녀의 다음 타깃은 흉수인 뱀파이어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자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어찌나 철저히 몸을 숨겼는지, 유령들의 뒤늦은 조사만으로는 도저히 놈의 종적을 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사왕께서 맡겨 주신 임무를 이대로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녀는 아예 일대의 모든 뱀파이어를 조사할 작정으로 유령들을 풀어 정보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역천의 서약과 관련된 일도 잠시 뒤로 미뤄둔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뤄진 며칠간의 강박적인 전수 조사 끝에—.

[우후훗··· 아무래도, 이 아이들인 것 같사옵니다만···?]

그녀는 마침내, 탈리아 왕국 라펠라 시에 집결하는 뱀파이어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곳을 지배하는 브로코슬락 클랜과는 전혀 다른 뱀파이어 무리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중이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사온데···. 일단 불사왕께 보고를 먼저 드려야겠···.]

-올리비아 님? 저 드웰입니다만. 언제까지 기다려야겠습니까?

그때, 함께 역천의 서약을 털던 드웰 맥케인으로부터 통신이 전해졌다.

뱀파이어들의 뒤를 파기 위해 잠시 기다리라 했더니, 어떻게 딱 일이 끝난 타이밍에 맞춰 연락해 온 것이다.

[···하아. 정말, 이러다 과로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밴시 퀸 올리비아는 오늘도 평소와 같은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

'다른 뱀파이어 클랜의 침입?'

올리비아에게 일을 맡긴 지 며칠,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철저하게 조사해서 휴버트 암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왔다.

휴버트 상회에서의 마찰이 원인이 아니라, 협력 관계였던 브로코슬락과 관련한 문제라는 것을 파악한 것은 물론이고···.

그 작전을 실행한 것으로 파악되는 클랜이 지금 탈리아 왕국의 라펠라 시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낸 것이다.

'탈라리아를 치기 전, 시선을 외부로 돌릴 셈이었나? 추가로 조사 인원까지 빠져나갔으면 금상첨화였겠군.'

자기들만의 영역에 틀어박힌 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브로코슬락이 간만에 시도한 세력 확장이었다.

당연히 외부에서 보기엔 여러모로 공을 들이고 신경 쓴 계획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수고를 많이 들인 계획이 갑자기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원인을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일 터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본거지를 친다···. 대충 그런 생각인가.'

추가로 놈들이 상당히 서두르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는 올리비아의 첨언이 있었다.

결계 등의 준비 상태를 보면 철저하게 은밀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준비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급히 움직이다 그녀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이제 곧 습격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브로코슬락 쪽에서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문제로군. 하필 마물의 숲 건과 외부 세력 확장 건이 맞물려 보안이 허술해진 틈에···.'

안 그래도 수가 적은 뱀파이어들이 이리저리 인원이 빠지면서 내부 감시망에 구멍이 뚫린 상황.

거기다 아직 전송진의 쿨타임이 이틀가량 남은 상태라, 하인즈 2세가 곧바로 탈라리아로 향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한스가 개입하기는 좀···. 제대로 힘을 쓰면 위치가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져. 단순히 뱀파이어들 간의 분쟁이 아니게 된다.'

아직 불사왕이 직접 전면에 나서기는 시기상조였다.

불사의 군대가 좀 더 악의 세력을 끌어모으고, 대륙 측에선 정상 회의를 끝마쳐 의견을 합치했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늘.

'이번에 침입해 온 놈들, 유페르쉬 클랜으로 추정된다고 했지?'

하긴, 이런 일을 벌일만한 능력이 되는 이들은 그들밖에 없긴 했다.

뱀파이어 클랜의 3강 중 하나인 '브로코슬락'이 서부의 작은 왕국 하나를 손에 넣었다면, 동부 지역의 공화국에는 '오바이포'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3강 중 하나이자 그들 중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클랜이 바로, 중앙의 아제리온 제국에 근거지를 두고 대륙적으로 활동하는 '유페르쉬'였다.

또 그들의 수장은— 아우테리카 뱀파이어들의 정점인 '성혈'이기도 했으니.

'이런 식으로 성혈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성혈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현재 이쪽에서 파악한 성혈은 두 명.

오랜 동면에 들어 언제 깨어날지 기약이 없는 브로코슬락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가 뱀파이어 중 최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만한 일이니 그 비스크 유페르쉬도 직접 나설 테지. 이거 골치 아픈데.'

유페르쉬와 브로코슬락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과거 탈리아 왕국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전 대륙적으로 활동하던 그들과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던가.

왕국 내에 있던 유페르쉬의 뱀파이어들을 몰아내고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 마찰이 생겼지만, 이후 브로코슬락이 대륙 구석에 처박혀 저들끼리 뭉치자 부딪칠 일도 없어졌다고 했건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단 말이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아니면 이쪽의 세력 확장이 거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지금은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했다.

'쯧, 어쩔 수 없군. 감히 휴버트를 건드리고, 기껏 손에 넣은 브로코슬락까지 망치려고 드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이쪽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몬스터를 학살하기 위해 북부 강철의 성채에 머무르던 할리가 몸을 움직이고.

그 인근을 훑으며 캐스팅을 이어가던 한스도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일단 보험은 있어야겠지.'

만약 불사왕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 외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겠지만, 변명거리야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시체가 필요하다든가, 그들을 휘하로 들이고자 한다든가 하면서 입을 좀 털어주면 될 터.

그래도 어지간하면 그가 직접 나설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간을 넘어 탈라리아로 도착한 한스는, 뜻밖의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라?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가 그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으니까.

***

"그래, 나도 상황은 다 알고 왔으니까. 괜히 헛짓거리하다 걸리면 알지?"

"예, 예··· 물론입니다, 할리 님!"

"믿는다?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카하하핫—!"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리의 말에 연신 굽실거리며 대답하는 이의 표정이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화내지 않아도 무섭다'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아마 착각일 것이다.

"내가 지금은 바쁜 일이 좀 있으니까, 당분간은 하워드 말 잘 듣고. 괜히 자기 목숨 몇 개인지 확인하려는 놈들이 나오지 않게 밑에 직원들 관리 잘하라고! 나중에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

"예! 하워드 님을 상회주님의 분신으로 여기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타라크와 강철의 성채는 겨우 하루거리에 있는 만큼, 이미 할리의 활약은 이곳까지 전해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휴버트와 공동 대표나 다름없는 그에 대한 소식을 상회 인물들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

그 압도적인 능력은 물론, 교단의 비호와 아오니아 백작의 러브콜까지 받는 그의 뜻을 거스르는 짓은··· 정말 어지간한 용기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터였다.

'이쪽은 어느 정도 일단락됐고, 그럼 다음은···.'

그렇게 휴버트 상회를 재차 단속한 할리는 곧바로 타라크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움직여야겠군. 며칠의 유예를 얻기는 했지만,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성채로 돌아가야 하니.'

물론 아오니아 백작을 비롯한 성채 측에서 그를 붙잡긴 했다.

그간 할리가 보인 활약상이 워낙 컸던지라, 그의 공백에 대한 걱정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간 쉬지 않고 방어에 나섰는데, 이 정도 시간 정도야 뭐.'

덕분에 이번 일의 수습과 휴식까지 겸해 잠깐 시간을 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아오니아 백작은 휴버트 피습에 관련한 일로 할리가 자리를 비운다고 하자, 직접 타라크 치안대에 명령해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다는 제안까지 할 정도.

휴버트의 부재에 괜한 수작을 부릴 놈들이 있을 수 있으니, 일단 그 제안은 고맙게 받기로 했다.

"엇? 할리 님 아니십니까? 강철의 성채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로?"

"으하하—! 그게 말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타라크의 신전에 도착한 할리는.

그곳의 게이트를 통해 탈리아 왕국의 탈라리아 신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들 간의 분쟁이 예고된 그곳으로.

#122

유페르쉬 클랜 (1)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

"으으—."

최근 이틀간, 브리키의 신경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처럼 브라이트 공작가 귀빈실의 침대에 누워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보내던 순간, 짧게 스쳐 지나간 어느 기척 때문이었다.

'단순히 지나가던 건가? 그냥 우연?'

아주 찰나였지만, 그녀의 초월적인 감각은 그 불길한 무언가를 확실히 포착할 수 있었다.

감지하기 무섭게 금방 사라졌던지라 그저 착각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녀의 직감은 어느 정도 예지와도 맞닿아 있는 일종의 권능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심지어 그때의 느낌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이미 몇 번이나 느껴본 적 있던 기척이지 않았나.

'지금은··· 잘 모르겠네.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당장 문제가 될 것 같진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이전에 몇 번이나 느낀 적이 있던, 불사왕의 '죽음'의 기운이었으니까.

"···음?"

그렇게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멈칫하고, 천천히 한쪽 방향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브리키는···.

다음 순간, 이미 뮬로의 집무실 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쿵쿵쿵—

"뮬로? 잠깐 들어가마."

가볍게 문을 두드린 그녀가 상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브리키 님? ···어서 오십시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화도 내지 못한 뮬로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선 브리키를 보고 마찬가지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뮬로? 지금 바로 전투를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구나."

"무슨 일입니까? 브리키 님이 이렇게 나오실 정도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곧바로 인근의 클랜원들에게 비상 소집을 명했다.

항상 맹할 정도로 태평하던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일 정도면, 터져도 보통 일이 터진 게 아닐 테니까.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렇게 뮬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어느새 다시 표정이 풀린 브리키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예민해져 있다가 갑작스레 느껴진 불안감 때문이라고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물론 그녀의 직감이라는 것 자체가 강한 근거이긴 했지만···.

"에이, 준비하라면 준비할 것이지 잔말이 많구나! 내가 괜한 헛소리를 할까."

결국 그녀는 괜스레 투덜거리며 뮬로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그녀가 바라봤던 방향인 라펠라 시가 위치한 곳에서—.

혈문(血門)이 열리고, 유페르쉬 클랜의 뱀파이어들이 빠르게 집결하고 있었다.

***

"···굉장히 불쾌하군."

처음 라펠라 시로 넘어온 직후 내뱉은 비스크 유페르쉬의 감상이었다.

그 직후부터 그의 찡그린 표정은 풀릴 줄 모르고 있었다.

발밑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느낌에 도무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지?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감각으로도 그 발원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함만 느껴질 뿐, 그가 성혈을 계승한 이후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질감이었다.

'불길함인가? 브로코슬락의 영역에 들어와서? ···이 유페르쉬가 고작 그 정도 상대로?'

그렇게 비스크가 혼자 골몰하고 있을 무렵.

"···로드?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한창 바쁘게 휘하의 뱀파이어들을 확인하던 이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번 작전을 총괄한 클랜의 이인자, 테오도르 유페르쉬와 나머지 세 명의 진혈들이었다.

"아니, 괜찮다. 그보다 준비는 전부 끝났나?"

"예, 그렇습니다. 진혈 넷, 순혈 마흔넷. 전부 최정예들이니 브로코슬락 정도는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오직 순혈 이상으로만 구성된 유페르쉬 클랜의 최정예 부대.

심지어 이들을 이끄는 이는 성혈 비스크 유페르쉬였으니, 이 정도면 탈리아 왕궁도 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당연히 강자들도 분산된 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심하고 있을 브로코슬락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긴말할 것 없겠지.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곧바로 탈라리아로 향하고, 오늘 내로 놈들을 깨끗이 정리한다."

""예!""

비스크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억지로 떨쳐내며 오로지 목표만을 생각했다.

탈라리아에 있을 브로코슬락의 로드를 족치는 것만을.

그리고, 그의 말이 끝마쳐짐과 동시에···.

푸드득—!

파다다닥—

수많은 박쥐 떼가 빠른 속도로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수도 탈라리아와 라펠라 시의 중간 지점, 거기서도 수 킬로미터 상공에 시커먼 인영 하나가 부유하고 있었다.

휘오오—

어둠을 휘감은 채 밤하늘에 묻혀 오연히 지상을 굽어보는 절대자.

불사왕 한스였다.

'움직이기 시작했군.'

브로코슬락 클랜이 암중에서 지배하는 탈리아 왕국은 이쪽에도 여러모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첫 시작을 알린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둘째 치고, 하인즈를 통해 왕국 하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변방의 약소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위상이 있는 만큼 휴버트 등이 자리한 타라크보다 더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사실.

거기다 이제 막 꾸려나가고 있는 정보 조직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니 그 중요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크흣— 이제 시작인가.]

그것이 지금, 마도의 극의에 이른 불사왕께서 몸소 나서서 기척을 감추고 대기하는 이유였다.

위성으로 지상을 감시하듯, 「심연의 눈」으로 아래의 모든 상황을 낱낱이 살펴보면서.

'사실 한스는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 게 좋긴 하지.'

원래라면 이번 일은 순리대로 하인즈 2세만 개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한스와 휘하의 언데드들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하인리히는 성지에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다.

할리는 한창 강철의 성채에서 몬스터들과 드잡이 중이었으며, 해리스는 머나먼 에나멜 대륙에 있으니···.

'아직 초보 장인에 불과한 하워드와 한창 요양 중인 휴버트야 말할 것도 없지.'

거기다 괜히 다른 아바타를 끌어들여 서로 연관성이 생기면 이후 운신의 폭이 줄어들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 그런 문제를 다 떠나서···.

당장 하인즈가 자리를 비운 틈에 집이 털리려 하는데, 가만히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이번에 할리에게 동업자의 피습이라는 인과관계가 생겼으니, 큰 의심을 받지는 않을 거야.'

물론 그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의아해할 이들은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런데···.'

한스의 시선이 탈라리아 방향으로 돌아가고, 그 눈에 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 어디서나 위풍당당한 우리의 야만 전사께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도 경비대에게 붙들려 검문을 받는 중이었다.

그 개성적인 모습에 과하게 반응하는 건 이해한다만,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교단의 소개장이 없었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뻔했네.'

그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타라크에서도 할리를 볼 때마다 위축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말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모두를 위압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에 경계와 검문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는 데에만 지장이 없으면 상관없겠지.'

한스는 그쪽을 가볍게 일별하고는, 다시 브라이트 공작가 쪽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저택에 뱀파이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성혈이 뭔가 눈치챘나?'

처음 이쪽의 기척을 감지한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그 이름값대로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땐 공간을 이동한 직후라 기운을 감추는 게 완벽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알아챈 능력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평소 이상으로 자신을 꽁꽁 감추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승산이 더 올라갔군. 이참에 「정제혈정」으로 강화된 녀석들의 능력을 확인해 볼 수도 있겠어. 다행히 성혈이 있어 어느 정도 균형도 맞춰진 상태니.'

성혈 '브로코슬락'이 언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비스크 유페르쉬에게 대항할 인선이 갖춰졌다.

안 그래도 전력이 열세인 상황인데 이쪽에 성혈마저 없었으면, 「정제혈정」으로 강화되었건 할리가 개입하건 상관없이 무의미하게 썰려 나갔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한스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을 테고.'

어지간하면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만큼, 이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전개라 할 수 있었다.

이어서 한스의 시선이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무리의 박쥐 떼에게로 향했다.

성혈 하나에 진혈 넷, 그리고 마흔이 넘는 순혈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력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오직 그중 하나에게만 못 박혀 있을 뿐이었다.

'···저놈인가.'

그 상대는 성혈도 진혈도 아닌 순혈이었지만, 그에겐 누구보다 특별한 상대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놈이 바로 휴버트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어 죽음 직전에 이르게 만든—.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암살자 뱀파이어였으니까.

지금은 박쥐 상태였지만, 라펠라 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놈은 이미 한스의 눈에 제대로 각인된 상태였다.

이후에 녀석이 어디로 도망치든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크흐흣··· 복수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과실이지. 드디어 뼈에 새긴 원한을 갚아줄 때다. 너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으리라.]

한스의 집요한 시선에 그 박쥐의 날갯짓이 잠시 버벅댄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으니,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

"아— 거 양반들 참 집요하기도 하지. 나처럼 선량한 시민이 어디 있다고 자꾸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수도 경비대에게 풀려난 할리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탈라리아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물론 그의 머리에는 드래곤과의 싸움으로 너덜너덜해진 것 대신 신상으로 맞춘 마수 머리가 얹혀 있었으므로, 그의 손은 질긴 가죽만 긁적일 뿐이었다.

'어이쿠, 힘 조심해야지. 기껏 맞춘 신상인데 하마터면 가죽 찢어먹을 뻔했네.'

할리는 근육이 꿈틀거리는 굵은 팔뚝을 슬그머니 내리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도시답게 딱히 통금 시간도 없어서,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밤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무래도 밤에 마음대로 활동하기엔 통금이 없는 쪽이 더 편하긴 하지.'

그는 느긋하게 새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당연히 그 지나는 사람들 또한, 할리를 구경한 건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야만인인가? 아니, 남부인?"

"와, 나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 처음 봤어."

"무슨 근육이··· 쉿, 이쪽 본다! 눈 마주치지 마!"

이제는 그의 근거지인 타라크에서 볼 수 없던 과거의 풍경이, 이곳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부터 눈살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는 사람들까지.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간만에 겪어보니 신선하군. 내 진심 어린 미소 덕에 이제 타라크에선 어지간하면 이런 일이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런 시선을 거북해했다면 애초에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으흠흠!"

관심종자 할리는 은근슬쩍 벌거벗은 상체 근육과 문신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맨발로 대로를 거닐어 목적지로 향했다.

야심한 밤에 접어들어 서서히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한 시각.

거리의 파락호들조차 슬그머니 몸을 피하는 와중,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평소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꺼림칙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브라이트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123

유페르쉬 클랜 (2)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부하들과 함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비스크 유페르쉬.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 이래서였나?"

이곳으로 오는 내내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계속 찝찝한 상태였건만, 막상 도착해 보니 드디어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브로코슬락··· 그 망령이 용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군. 그것도 하필 지금 이 자리에 있단 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맞닥뜨리고, 그는 그동안 느껴졌던 불쾌감의 원인이 이것 때문이었을 거라 단정 지었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끙끙 앓는 것 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었으니까.

'그래, 상대가 같은 성혈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지근거리에 있는 호적수를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그리 불쾌했던 거야.'

그는 억지로 그렇게 납득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브로코슬락을 없애고 나면 해소할 수 있을 터였다.

"···비스크 님? 설마 저기에 그 '성혈 브로코슬락'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때 가만히 그의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 유페르쉬가 미간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계획을 세울 때 상대 쪽에 성혈이 있을 거라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었기에, 이렇게 되면 작전에 상당한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 과거의 퇴물이 저기에 있긴 하다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던 비스크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썹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듯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지? 이 내가 있는데, 저 망령이 하나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유페르쉬의 정예란 것들이 설마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반응에 테오도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그저 쓸데없는 피해가 커질까 우려되어 드린 말씀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별 피해 없이 상황을 마무리한 후, 탈리아 왕국을 수습하는 작업을 이어가야 했으니까요."

그의 필사적인 변명에 비스크는 고개 숙인 뒤통수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다시 도시로 시선을 돌리며 혀를 찼다.

오는 내내 느껴졌던 불쾌함 때문에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확실히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진혈 둘이 빠졌다고는 하나, 적의 본거지인 저곳에 어떤 방비가 갖춰져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

하물며 전 로드인 뮬로 브로코슬락은 혈마법에 특화된 마법사 타입이 아닌가.

자신의 영역에 틀어박혀 철저하게 대비한 마법사만큼 까다로운 존재는 달리 없었다.

"어쨌든, 저쪽에서도 우리를 알아챈 것 같으니, 바로 진입하도록 하지. 여기서 놈들에게 더 대비할 시간을 줄 수는 없다."

"예!"

태생이 어둠 속의 존재인 뱀파이어에게 이 야밤에 도시로 스며드는 것 정도는 숨 쉬듯 쉬운 일.

오십에 가까운 그림자가 빠르고 은밀하게 성벽을 넘어서 이동했다.

***

"뮬로? 준비는 어떻게 됐니?"

뮬로 브로코슬락의 집무실 소파에 편하게 늘어진 채 홍차를 홀짝이던 브리키가 태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껏 예민한 상태였던 이전과는 달리, 시든 채소와 같은 그 모습은 과연 위기를 경고하러 온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나.

당연히 현명한 뮬로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일단 외부 인력들을 최대한 소집하고 경계를 강화하라 명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대응하는 건 무리가 있어, 일단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유페르쉬가 쳐들어왔구나."

"···예? 유페르쉬 클랜이 말입니까? 갑자기 어째서···?"

"그걸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니? 네가 알고 있어야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건 정말 전조도 없던 일인지라."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꾸를 이어가며 곧바로 저택의 모든 클랜원에게 상황을 전파했다.

전면전이라면 그들도 뭉쳐서 대응해야 각개격파를 피할 수 있을 테니, 휘하의 병력을 모두 한곳에 집결시킬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뮬로는 급히 집무실을 나서 걸음을 옮기며 눈가를 주물렀다.

그의 뒤에는 여전히 브리키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더는 그녀의 태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저택에 상주하던 인간들은 따로 말이 있을 때까지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 명했고, 그를 위한 결계도 설치되어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그보다 지금 문제는, 뱀파이어 클랜 3강의 필두이자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유페르쉬가 쳐들어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제대로 준비하고 왔을 그들에 비해 이쪽의 준비는 미흡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그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아십니까?"

뮬로는 부하들을 집결시킨 대형 연회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브리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쪽의 성혈인 비스크가 뭔가 수를 썼는지, 진혈인 자신의 감각에는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술법 계통인 그는 다른 능력에 비해 감지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기도 했고.

"으그그극— 아, 그거?"

그의 질문에 뒤쪽에서 한껏 기지개를 켜던 브리키가 태연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전까지의 모습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한결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막—."

무언가에 대비해서, 비축한 에너지를 꺼내 예열해두듯이.

"예?"

"—들어왔구나."

파지지직—!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택을 감싼 결계에 구멍이 뚫리고, 수십의 뱀파이어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살기등등하고 적대적인 기척과 함께.

***

"이거 참···. 질기게도 살아있군, 브로코슬락. 슬슬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넌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일관적으로 싸가지가 없니? 전대 녀석도 그렇고, 그게 유페르쉬의 전통인가?"

"생에 미련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내가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지. 그 잘난 클랜도 함께 몰락할 테니 외롭진 않을 거야."

"남의 말 듣지 않는 것도 쏙 빼닮았네. 어쩜 저렇게 재수가 없을까."

마주 본 채 서로 자신의 할 말만 내뱉는 두 성혈.

대형 연회장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이들과 저택 내부에 침입한 이들이 마주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유페르쉬의 목적은 브로코슬락을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이었으니까.

'이거, 상당히 좋지 않은데.'

성혈들이 언쟁을 벌이는 사이, 대치한 두 무리를 비교해 살펴본 뮬로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수 자체는 이쪽이 조금 더 많았다.

아무리 근방에 있는 이들을 급하게 불러들였다지만, 이곳이 본거지인 만큼 이 정도를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질.

'순혈은 열이 좀 넘는 정도고, 나머지는 전부 잔혈이다. 물론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참고로 이곳에 서번트와 슬레이브는 아예 배치하지도 않았다.

신전까지 있는 수도 탈라리아에서 자신의 기운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그 반푼이들을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비스크 유페르쉬는 브리키 님이 상대하신다고 해도, 저긴 진혈만 넷···. 암담하군.'

뮬로는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도 조용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사실 나름 믿고 있는 구석은 있었다.

하인즈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그도 「정제혈정」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전보다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의 심장 박동과 함께, 진화한 흡혈인자에서 뿜어진 끈적한 혈마력이 혈관을 타고 체내를 휘돌았다.

"그래서, 그쪽의 현 로드는 누구지? 어떻게 클랜이 넘어갈 수 있었는지 한번 보고 싶···. 음?"

언쟁을 벌이면서도 브리키와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이어가던 비스크가 뭔가를 눈치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화아악—

저택에 감춰져 있던 피의 문양이 붉게 발광하며 공간을 뒤틀어 놓았다.

안 그래도 컸던 연회장이 확장을 거듭해 어느새 훌륭한 전장이 마련되었다.

더불어 내부의 아군들에게 결계가 힘을 더해주고, 그를 적대하는 이들에게는 디버프를 부여하며 전력의 격차를 줄여주었다.

'집무실에 한정되었던 능력을 저택 전체로 확대할 수 있게 된 건 좋지만··· 이 정도론 안 돼.'

결계 덕에 하위 뱀파이어들이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저쪽의 진혈을 상대하기는 역부족.

이쪽에도 추가 증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결계의 지원을 받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으니.

"나에게 오라. 프리지아—!"

뮬로의 주문이 끝나자, 바로 앞에 피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프리지아가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갖춘 채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설마 이렇게 금방 저들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그녀는 소환되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전투를 준비했다.

마물의 숲과 거리가 워낙 멀어 진혈 둘 모두를 소환하지는 못했지만, 이걸로 균형이 조금은 맞춰졌을 터.

'남은 건, 브리키 님이 비스크를 처치할 때까지 최대한 수비적으로 버티는 것뿐인가.'

물론, 지금 이것도 상대를 이기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결계는 내부에서라면 성혈조차 쉽게 부수지 못할 테니,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을 것···.

"하, 그래. 어느 정도 감안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좀 많이 거슬리는구나."

지근거리에서 들리는 목소리.

생각을 이어가던 뮬로에게 갑작스레 새하얀 한 쌍의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너를 없애면 이 결계도 사라지겠지."

뮬로가 반응하지도 못한 사이, 순식간에 그 앞으로 이동한 비스크가 그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손을 뻗었고—.

"너,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니?"

콰앙—!

커다란 충격파와 함께 그와 브리키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녀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뮬로는 공간을 접어 몸을 피하며 조용히 식은땀을 훔쳤다.

"···그래, 일단 이 망령부터 치워야겠어."

"어휴, 넌 역시 좀 맞아야겠구나."

브리키의 견제 때문에 결계가 발동하던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비스크는 재차 들어온 방해에 짜증스레 이를 갈았고, 그녀 또한 그에 지지 않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양측의 긴장감이 재차 고조되어가던 순간.

콰드득— 콰지직!

갑자기 뮬로의 결계 한쪽에 균열이 발생했다.

"아니, 이게 무슨!"

또다시 당황한 뮬로가 서둘러 공간을 조율하며 눈가를 경련했다.

바깥에서부터 가해진 정체불명의 외력에 결계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 공간이 내부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전보다 훨씬 강해진 자신이 공을 들여 설치한 결계였다.

설령 진혈이 외부에서 공격하더라도 쉽게 부술 수 있는 게 아니건만.

그렇게 뜻밖의 상황에 잠시 주변의 이목이 쏠린 틈에, 날카로운 손톱과 비늘이 돋은 손 한 쌍이 균열 사이로 쑥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곤 미닫이문을 열듯이, 그것을 양옆으로 조심스럽게 벌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서서히 벌어지는 결계의 균열, 그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털이 무성한 짐승의 머리.

"끄응, 이 결계는 생각 못했네. 최대한 살살 찢고 들어온다고 타이밍이 좀 늦었잖아."

짐승 머리가··· 아니, 짐승 형상의 마수 머리를 뒤집어쓴 이가 나직이 투덜거리며 자신의 몸을 균열에서 뽑아냈다.

그의 커다란 근육질 육체가 들어오기 무섭게 결계는 언제 이상이 생겼냐는 듯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그것을 발동한 뮬로마저 당황할 정도로 술법에 무리가 가지 않는 깔끔한 침입이었다.

"뭐야? 저놈은?"

"···야만인? 아니, 저 팔은···?"

벌거벗은 상체에서 꿈틀거리는 근육과 야성적인 문신, 양팔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과 날카로운 손톱까지.

개성적인 외양의 침입자가, 뒤집어쓴 마수 머리 아래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한 쌍의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그는 주변의 시선 또한 자신에게 집중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곤.

"감히 우리 휴버트를 건드린 간 큰 놈들이 누구냐!"

친구의 복수를 하러 온 관종 야만 전사, 할리가 그 자리에서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뿌두둑! 뚜둑—!

동시에 한껏 힘이 들어간 위압적인 육체에서 살벌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벌어질 폭력 사태를 예고하듯이.

"휴버트?"

"아니, 갑자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난입부터 그가 한 말까지, 이 자리에서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손에 꼽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할리의 시선은.

이미 유페르쉬 클랜 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찾았다—."

목표를 발견한 그의 사납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맹수 같은 이빨이 드러나며.

"네놈이구나? 그 연약한 애 뱃속을 고기 수프처럼 휘저어 놓은 녀석이?"

세로로 갈라진 흉악한 동공이.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의 뱀파이어, 클라인에게 정확히 날아가 꽂혔다.

#124

유페르쉬 클랜 (3)

하인즈의 명으로 휴버트 상회와 연계하는 일도 전부 그의 손을 거쳐 간 만큼, 뮬로는 갑자기 난입한 할리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이번에 처음 안 사실도 있었는데···.

'저 팔, 용의 비늘인 것 같은데. 설마 용인(龍人)이었나? 그래서 내 결계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나 보군.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다 상황을 보니 정확히 유페르쉬 클랜을 노리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갑작스러운 강자의 지원은 반겨야 할 일.

그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은 접어두고, 일단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뮬로 외에도 할리의 말을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린 이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암살을 지시한 테오도르 유페르쉬와, 일을 직접 실행한 순혈의 뱀파이어 클라인이었다.

"···클라인."

"헛— 테, 테오도르 님! 전 정말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고 왔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지금 눈앞에 너를 쫓아 온 자가 있는데 발뺌할 셈이냐?"

"그, 그것이···."

정말 평소처럼 철저히 움직였던 클라인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테오도르는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모로 작전이 엇나가 신경에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임무의 뒤처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부하 때문에 일이 더 꼬이게 생기지 않았나.

더 수월한 작전을 위해 벌인 뒷공작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으니, 이후 비스크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벌써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설령 클라인이 발각됐다 해도, 이곳까지 온 건 혈문을 통해서였는데. 대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낸 거지?'

그것도 하필 이 타이밍에 이곳으로 바로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브로코슬락 측에서 뭔가 눈치채고 미리 수를 써 두지 않은 이상은···.

'설마 휴버트를 건드린 건 자충수였나? 그것 때문에 우리 작전이 미리 간파당했다고?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놈들의 대비가 그리 철저하지 않아. 지금도 아직 우리가 우세할 정도니까. 그럼 대체···.'

자연스레 모든 계획을 주도한 테오도르의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할리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뿌드득! 끼기익—!

극한으로 압축된 근육에서 금속성이 새어 나오고, 전신에서 「생체 오러」와 '광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발광하는 각인 위를 검붉은 용의 비늘이 빼곡히 뒤덮기 시작했으며, 파충류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두 눈에선 적광과 녹광이 이글거렸다.

"하아—."

쉬이익—!

날숨에 섞인 새하얀 김이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이미 전투 모드에 들어간 그의 전신 세포도 극한으로 활성화되어, 쉬지 않고 에너지를 소비하며 아지랑이와 함께 수증기를 뿜어냈다.

"크힛··· 크흐하하핫—!"

광기가 육체를 잠식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

쩌렁쩌렁하게 공간을 울리는 그의 광소에 뱀파이어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의 감정에 반응한 주변 마나가 격렬히 요동치며, 대기에 흩뿌려진 광기가 그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실행한 놈과 명령한 놈··· 아니, 그냥 한 패거리인 너희 전부! 우리 휴버트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야만 광전사 할리가 사납게 웃고는, 그대로 유페르쉬 클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잠시 멈추었던 뱀파이어들의 전쟁이.

한 용인이 끼어든 채로 재개되었다.

***

성혈은 아우테리카 뱀파이어의 정점이라고 불리지만 그들의 능력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성혈은 각 혈맥의 시조였으며, 이제 현시대에 남은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맥이 일찍 끊긴 클랜은 약소 세력으로 전락했고 그들이 오래 남아있던 클랜은 현 뱀파이어계의 3강이 되었다.

유페르쉬와 브로코슬락, 그리고 오바이포.

그 중 유페르쉬는 성공적으로 성혈의 세대교체를 끝마친 케이스로, 만약 다른 두 혈맥에서 성혈을 계승시키지 못한다면···.

이후 세대부터는 계속해서 그들의 독주 체재가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파지짓—!

물론, 그건 두 성혈이 정면으로 맞붙게 된 지금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곳에서 패배한 이는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테니까.

그들의 싸움은 한없이 정적(靜的)이며, 또한 동적(動的)이었다.

-비스크가 손을 뻗어 브리키의 목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부터 손을 뻗지 못하도록 어깨를 베어 버렸다.

-그는 어깨가 베이지 않게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이며, 따라붙은 브리키의 다리를 잘라냈다.

-그녀는 진입 타이밍을 한 박자 늦추고, 비스크의 심장에 피의 창을 꽂아 넣었다.

파지짓—!

서로의 의념 속에서 시간 축과 인과(因果)가 뒤엉키고, 기세와 혈마력이 충돌해 인식의 경계에서 쉴 새 없이 스파크가 튀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저 늠름한 청년에게 부하들이 쥐어터지고 있는데, 한 번 가 봐야 하지 않겠니?"

"흥, 그래봤자 그쪽의 졸개들이 너무 부실해서 당장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내 수하들은 유능하니까."

"갑자기 쳐들어온 걸로 우세를 점한 주제에 잘난 척은."

"자신의 빈틈은 감추고, 상대의 허를 찌른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안일하게 대응한 쪽이 잘못이다."

겉으로는 그저 마주 보고 서서 말싸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으나, 그들은 이미 마주한 직후부터 보이지 않는 공방을 치열하게 이어가는 중이었다.

만약 다른 이가 멋모르고 그 영역에 들어선다면, 자신이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고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리라.

-비스크의 공격을 회피한 브리키가 반격해 그의 머리를 부쉈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는 비스크가 들어오는 순간에 맞춰 손을 뻗어 혈마력으로 그를 속박했다.

-그는 들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브리키의 뻗은 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끈—

"읏···?"

갑작스러운 두통에 의념을 전개하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 순간은 아주 찰나였지만, 그들의 싸움에서 그건 아주 치명적이었고···.

파지짓— 촤아악—!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흩뿌려지는 피와 잘려 나가 공중에 떠오른 브리키의 오른팔.

하지만 그런 광경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되감기듯 허공에 비산한 핏물이 단면으로 빨려 들어오고 잘렸던 팔도 자연스럽게 날아와 감쪽같이 접합되었다.

"칫···."

그녀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오른팔을 주물렀다.

당연하지만 겉보기로만 멀쩡할 뿐, 성혈끼리의 싸움에 밀려놓고 아무런 손해가 없을 리 만무했다.

방금 공격을 허용함으로써 그녀는 상당량의 흡혈인자는 물론, 정신력과 생명력을 비롯한 근원에도 제법 큰 타격을 입었다.

아마 그 여파는 앞으로의 싸움에도 제법 많은 영향을 끼치겠지.

"흐··· 브로코슬락, 설마 했더니 역시. 지금 상당히 무리하고 있군?"

그리고 드디어 우세를 점한 비스크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한창때였다면 이 정돈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약점을 간파당한 브리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최대한 오래 버티기 위해 동면을 선택했지만, 이미 수명은 한계에 가까워진 상태.

또 그 동면 또한 비정상적으로 깨어나는 바람에 지금 그녀의 컨디션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여러 악재가 겹쳐 전성기에 비해 역량 자체가 처참할 정도로 깎여나간 상황이었으니···.

장시간 이어진 의념의 싸움에 저도 모르게 빈틈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래도 아직 너 같은 풋내기를 상대하기엔 충분하단다?"

"크흐흐, 죽을 때가 되니 허세만 늘었군. 그런 블러핑이 나에게 통할 것 같나?"

그의 말대로, 부족한 역량을 완숙한 기량으로 메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뮬로의 결계는 성혈인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어 오로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싸워야 했는데, 방금의 실수로 저울추가 크게 기울어 버렸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장담할 수 없겠는데···.'

겉으론 태연한 신색을 유지한 브리키가 내심 식은땀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일 순 없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진 최대한 해보겠다고 다짐하며.

그리고 성혈들의 싸움이 그렇게 겉으로는 지극히 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그 어느 전장보다 격렬하기 그지없는 전장이 있었으니—.

바로 미쳐 날뛰는 할리가 있는 곳이었다.

"크하하핫! 과연 질기구나! 찢는 맛이 있어!"

"크흑,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무리하지 마! 놈이 사용하는 이상한 기운이 재생력을 악화시킨다!"

그를 상대하는 진혈만 무려 셋.

테오도르를 제외한 전부가 그 하나를 막기 위해 달려든 상태였다.

멋모르고 그에게 덤볐던 순혈 몇몇이 속절없이 찢겨나간 후로, 하나둘 붙기 시작한 진혈이 셋이 되어서야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으하핫! 자꾸 어딜 빼는 거냐! 이리 오너라!"

"···젠장!"

되도록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할리를 견제하려던 그들이었으나, 빠른 속도를 가진 그를 상대로 피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가장 내구성과 회복력이 좋다는 이유로 전위를 맡게 된 진혈이 이를 갈며 다시 혈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은 이미 충격을 흡수하는 핏물에 뒤덮인 상태였지만, 이미 몇 번이고 부딪친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으지직—!

"크흡!"

이 모든 방비가 저 무자비한 손아귀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단단하게 경화되어 외부의 충격을 막아주던 피의 갑옷이 깨져나가고, 그 안에 있던 육체도 으스러져 핏물이 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제 그만··· 얌전히 있어라, 이 괴물아!"

그의 몸에서 튀어 오른 핏물이 순식간에 여러 줄기의 넝쿨이 되어, 할리의 몸을 휘감고 주변 공간과 단단히 고정되었다.

'놈의 힘을 생각하면 이것도 오래 가지 못할 테지만···!'

그것이 불과 몇 초일지라도, 그의 동료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뒤져라!"

"······!"

크고 붉은 악마의 손이 그 날카로운 손끝으로 할리의 등을 노리고, 소리 없이 가해진 암수가 예리하게 그의 목을 베었다.

콰지직! 푸확—!

깨져나가는 단단한 용의 비늘과 비산하는 혈액.

진혈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은 그의 몸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등에는 뼈가 드러날 정도의 커다란 상처가 생겼고, 목도 절반가량 잘려 나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일반적인 상대라면··· 아니, 설사 용인이 상대라도 이 정도면 전투력에 상당한 손실이 있을 수밖에 없었건만.

꾸드드득—

「초재생」을 가진 할리의 몸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수복될 뿐이었다.

"···용인이 원래 저렇게 재생력이 빨랐나?"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젠장."

그 모습에 유페르쉬의 진혈들이 숨을 고르며 이를 악물었다.

저 정도 수준의 재생력이면 진혈의 뱀파이어인 그들 이상이었다.

용인이라는 종족이 워낙 희소하기에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저만큼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용인의 피. 한 번 확인해 볼··· 크흡! 퉷! 우욱."

자기 손에 흥건하게 묻은 할리의 피를 핥은 진혈이 인상을 찡그리며 헛구역질했다.

"뭐야, 이게? 용인의 피는 원래 이런가? 이건 몬스터의 피보다 더 더럽잖아!"

쉽게 맛볼 수 없는 용혈이라 기대했건만, 온갖 게 뒤섞이고 변질된 그의 피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차라리 몬스터 피가 더 나은 수준이 아닌가?

"더럽다니! 거 말이 심하구만!"

그 박한 평가에 어느새 회복을 모두 마친 할리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자신처럼 건강하고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물론 에너지 소모가 큰 육체의 특성상 오직 육식만 하긴 하지만···.

'그나저나, 역시 아직 진혈 셋은 좀 까다롭군. 아무리 효율이 올랐다고는 해도 광룡의 심장을 백 프로 소화한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나.'

거기다 유페르쉬의 진혈들은 평균 전투력도 브로코슬락 쪽보다 높은 편이었다.

만약 「정제혈정」으로 강화되지 않았다면 상대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강화된 지금은··· 근소하게 우위를 점할 순 있겠군. 그래도 이 정도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이야. 왜 브로코슬락이 같은 3강이면서 변방에 틀어박혔는지 알겠어.'

그나마도 오랜 작업을 통해 소왕국 하나를 집어삼켜 겨우 체면치레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할리는 가볍게 몸을 풀며 다시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 긴장하며 전투를 준비하는 진혈 셋을 넘어, 다른 전장들까지 확인했다.

그가 다수의 진혈을 붙잡아 준 덕에 나머지 전장은 한결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일대일로 테오도르 유페르쉬와 마주하게 된 프리지아는 이전이었다면 싸움도 되지 않았을 그를 상대로 제법 선방하고 있었고.

뮬로는 휘하의 클랜원들을 이끌고 마흔이 넘는 순혈을 순조롭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들 틈에 그의 첫 목표였던 암살자가 끼어있는 게 보였지만, 일단 복수는 나중으로 미뤄야겠지.

그런데.

'어, 그런데··· 저긴 괜찮은가?'

정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성혈들의 싸움에.

이 전장의 향방을 가를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125

유페르쉬 클랜 (4)

'어어··· 저거 좀 위험한 거 같은데?'

할리는 「광룡의 심장」을 비롯한 용의 특성을 얻게 되며 외부의 기운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뮬로의 결계도 깔끔하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기본적인 감지력도 월등히 증가한 상태였다.

파지직—!

그런데 지금 그 감각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성혈들이 자리한 저 공간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고.

정확히는 브로코슬락으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당연히 그건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이젠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어쩔 수 없군.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겠어.'

뿌드드득—!

무언가를 결심한 즉시, 할리의 육체가 빠르게 변화를 시작했다.

몸이 한층 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것과 반대로, 「육체변이」의 힘으로 물리법칙을 벗어난 근육과 뼈의 밀도는 더욱 압축되었다.

"저 괴물 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데 이상한데? 저거 진짜 용인 맞아?"

그의 주변 마나가 거칠게 날뛰기 시작하자, 대치하던 진혈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주인공의 변신을 기다려주는 악당처럼 선의를 가지고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할리의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었을뿐더러···.

'지금 들어가면··· 곧바로 반격당한다!'

그에게서 퍼져 나오는 흉흉한 기세가 그들의 예민한 본능을 자극해, 그 행동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으으—!"

그간 꾸준히 섭취한 드래곤 고기로 비축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인지 그의 변화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뿌득! 뚜두둑!

그 틀은 분명 용인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지만 세세히 따져보면 명백히 그 틀을 벗어난 혼종.

폭발적인 주력을 위한 변종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부터 시작해, 그간 수집한 온갖 우성 유전자들이 발현되어 있었다.

"···뭐야, 저건?"

"진짜 괴물이었군. 용인이 아니라 키메라 아냐?"

또 외부만큼 내부의 변화도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광기 제어」로 제어된 광기가 「광란의 야수」를 통해 활성화되고, 그것은 「광룡의 심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육체에 잠재된 생체력이 「칼코스식 전투 각인」을 발동하고 「생체 오러」로 변환되었으며, 그것을 에너지 삼아 「보석안 : 강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크으— 광룡을 먹고 나서 이렇게 전력으로 힘을 발휘하는 건 처음인데.'

그런데 다른 건 둘째 치고 에너지 소모가 장난 아니었다.

「육체변이」로 변화하는 데에도 상당량이 소모되었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태워대는 중이었다.

'거기다 과하게 활성화된 세포가 저 혼자 괴사할 정도라 상시 「초재생」을 발동해야 할 정도니. 연비 한 번 최악이군.'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탁월했다.

내부에서부터 끓어올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폭력적인 힘에 자신도 취할 지경이었으니.

이름하여 '완전체 할리'의 등장이었다.

"크후우— 자아, 그럼."

그가 한결 높아진 시야로 주변을 쓸어보았다.

한껏 긴장한 채 그를 노려보는 진혈들.

마주한 그들 사이로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할리의 허벅지 근육이 한껏 부풀고, 금방이라도 쏘아질 듯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파아앙—!

곧바로 땅을 박찬 그가—.

"엇? 갑자기 어딜 가는···."

"마, 막아! 저놈이 비스크 님께로 간다!"

대치한 진혈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성혈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 비스크 유페르쉬가 풀려나면 판이 터진다.'

지금의 우세한 형세는 그가 묶여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최종 승자가 된다면, 그 아래의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저놈의 견제가 최우선, 나머지는 후순위다. 반대로 놈을 처리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하는 데 성공한 그는 곧 성혈들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파지짓—!

그리고 살벌한 마력의 유동과 의념의 폭풍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연신 스파크를 튀기는 그 현장 속으로.

할리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밀어 넣었다.

까가가각—!

빠지직!

영역에 들어선 즉시 으스러지기 시작한 육체.

'큭,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비늘이 갈려 나가고 가죽이 찢어졌으며, 근육이 파열되고 피가 터져 나왔다.

진화의 끝을 추구하는 단단한 신체가 끊임없이 파괴와 수복을 반복하며,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광룡의 심장」과 보석안의 연계로 마력 격류를 헤치고 나간 끝에.

그는 마침내.

"크윽! 뭐냐, 이 미친놈은? 이 멍청한 것들이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여기까지!"

비스크 유페르쉬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크하핫! 그쪽이 이놈들의 우두머리지? 이거 반갑구만!"

할리는 부서지는 자기 몸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그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타라크 시민들의 마음을 연 그 자애로운 미소에, 비스크는 그저 썩은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건 아마 그만큼 그의 마음이 타락했다는 뜻이겠지.

'피해 관계자로서 기껏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건만, 정작 가해 책임자가 저런 태도라니!'

사과는 못 할망정, 저런 반응은 좀 아니지 않은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할리는 이런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 한 대!"

맹렬한 기세를 품은 그의 주먹이 번개처럼 내뻗어졌다.

지근거리에서 시작된 그 정의의 철퇴는 설령 진혈이라도 피할 수 없을 수준이었지만···.

"큭! 이 버러지가 감히!"

콰아앙—!

성혈인 비스크에게는 조금 신경 쓰이는 공격에 불과했다.

회피와 동시에 역으로 가해진 반격으로 대포알처럼 튕겨 나가는 할리.

뒤로 나뒹구는 그의 몸통엔 커다란 맹수가 할퀸 것 같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끄응— 치사하게, 한 대만 맞아주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자신의 가슴팍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성혈인가···. 거기다 놈에게 입은 상처의 재생도 더디고. 이거 정면으로 싸우면 에너지가 아무리 많아도 이기긴 힘들겠는데.'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몸 덕분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성혈이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뭐, 이걸로 처음 목적은 달성했으니 됐지만.'

놈 또한 정신이 팔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파지짓— 촤아악—!

다시 허공을 수놓는 선혈.

"커흡!"

할리에게 반격한 것과 동시에, 브리키의 손에 비스크의 목덜미가 절반가량 뜯겨 나갔다.

그의 상처 또한 빠르게 수복되었지만, 이로써 한쪽으로 기울었던 성혈 간의 균형은 다시 수평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비스크 님—!"

"이, 이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할리의 돌진과 난입부터 비스크의 피격까지.

정상에 가까운 이들의 싸움이었던 만큼, 그 과정이 모두 이어진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한발 늦은 유페르쉬의 진혈들이 이제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착해 할리를 에워쌀 만큼.

자신들이 방심한 틈에 빠져나간 상대 때문에 로드가 중요한 싸움에서 큰 피해를 보았으니, 그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들도 브로코슬락의 성혈에게 몸을 던져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으나···.

"으하핫! 그쪽 대장한텐 인사했으니, 이제 다시 한번 우리끼리 놀아보자고!"

하지만 할리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가 재차 광소를 터트리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

두 클랜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주요 전장은 네 곳이었다.

외부의 개입으로 다시 싸움이 길어지기 시작한 성혈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진혈 셋과 맞붙은 할리.

유페르쉬의 이인자인 테오도르의 발을 붙잡고 있는 프리지아.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싸움이 바로 이곳.

뮬로가 이끄는 하위 뱀파이어와 유페르쉬의 최정예 순혈들이 충돌한 접전지였다.

"크윽, 겨우 잔혈인데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이 결계의 효과인가?"

"그걸 감안해도 말이 안 되잖아! 브로코슬락 놈들 분명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을 텐데?"

마흔이 넘는 순혈들은 안 그래도 전투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유페르쉬 클랜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선발된 이들이었다.

전부 자신의 힘을 완숙하게 다룰 수 있고, 그 이상의 가능성까지 보여준 진짜 강자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비록 진혈 하나가 섞여 있다곤 하나 대부분이 잔혈인 상대에게 속절없이 밀리는 중인 것이다.

하인즈의 「정제혈정」에 대해 모르는 그들로서는 그저 결계의 효과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큭, 뮬로 브로코슬락이 이 정도였다고? 겨우 열이 조금 넘는 순혈과 오십도 안 되는 잔혈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붉은 머리의 뱀파이어, 클라인이 이를 갈며 자신에게 덤벼드는 잔혈의 몸을 베었다.

하지만 잔혈의 수준을 넘어서는 내구성에 상대를 즉사시키지 못했고, 이어진 후속타 또한 옆에서 가해진 방해에 실패해 버렸다.

그 틈에 상처을 입은 잔혈은 급히 후방으로 몸을 피해 빠르게 몸을 재생시키고 다시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런 일이 전장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었으니, 도무지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물며 저쪽엔 마법사인 뮬로가 아군을 보조하며 전장을 조율하고 있기까지 하니···.

지금 그들은 비스크 유페르쉬가 승리하길 기도하며 그저 버티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건, 클라인에게 절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안 돼! 그렇게 되면 설령 이긴다 해도 피해가 너무 커진다. 그럼 나는···.'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온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브로코슬락의 성혈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 따로 책임 소재를 물을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 한창 유페르쉬의 진혈 셋과 뒤엉킨 저 괴물은?

저자가 이 전장으로 난입한 원인을 누가 제공했지?

바로 클라인, 그였다.

'이대로 가면 난 끝이다. 어떻게든 뭔가를 해야 해.'

그저 평소처럼 테오도르의 명을 따랐을 뿐인지라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정확히 자신을 지목한 이상 더는 변명할 수도 없었다.

이미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최대한 형벌을 가볍게 하려면 무슨 수라도 내야 했···.

'어?'

그때, 클라인이 이상을 감지했다.

자신은 틀림없이 전장의 한복판에 있건만, 주변의 적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 것처럼 이쪽을 피해 가고 있었다.

심지어 근방에서 함께 싸우던 동료들도 그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하며 옆을 지나는 적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그저 허공만 스칠 뿐, 다른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

그가 그렇게 자신이 외부와 격리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래, 너구나."

클라인의 귓가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걸고 있었다.

어떠한 기척도, 기운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크윽, 대체 누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젠 몸도 움직여지지 않고,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여전히 주변 이들은 자신을 외면하고 저들끼리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감히···."

싸늘하게 목덜미를 기어오르는 불길함과 미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의문의 목소리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 휴버트를 건드린 놈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휴버트?'

그리고 낯선 이의 입에서 또다시 나온 익숙한 이름에 그가 당황하고 있을 때.

푸욱!

그의 가슴 앞으로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오고.

"커헉—!"

클라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파괴된 심장과 독소처럼 몸 안에 퍼져나가는 상대의 흡혈인자.

그로 인해 혈액 통제권을 빼앗긴 그의 피가, 심장을 꿰뚫은 손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동···족, 포식···!"

피격과 동시에 풀린 마비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클라인이,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피부와 검은 머리, 붉게 빛나는 안광을 가진 뱀파이어.

마주 보고서야 느낄 수 있던 그 기세는, 최소로 잡아도 진혈이었다.

"아···."

서서히 메말라가는 육체를 느끼며 클라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간 아등바등 살아온 인생이 뇌리를 스치고, 후회와 체념 그리고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런 전조 없이 결계 내부에 등장한 상대의 정체, 그가 태연하게 행한 동족 포식, 외부와 차단하고 자신을 제압한 능력 등.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많고 많았지만, 지금 그를 괴롭히는 가장 큰 의문은 오직 하나였다.

"대··· 대체··· 휴버트는, 뭐 하는 인간···."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원흉.

도대체 그 상인 놈이 누구기에, 이런 괴물들이 연달아 찾아온단 말인가!

정체를 숨긴 일국의 왕자라도 되나?

아니, 설령 왕자라도 이만한 수준의 용인과 뱀파이어가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말단부터 서서히 재가 되어가던 육체가 기어이 전신을 뒤덮고.

푸스스—

그렇게 마음을 가득 채운 번뇌와 함께 클라인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마지막 의문조차 끝내 풀지 못한 채.

"휴버트가 뭐 하는 인간이냐라."

하지만 뒤늦게나마 그의 질문에 답해주듯, 의문의 뱀파이어가 낮게 읊조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글쎄, 장차 대륙의 상권을 지배할 인재?"

장난 섞인 말투로, 하인즈 2세가 소리죽여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정말 농담이었다.

아직은.

#126

성혈 (1)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육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문구에 하인즈가 가볍게 턱을 쓰다듬었다.

'이거, 아우테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발동한 것 같은데.'

「혼혈진화」는 다양한 흡혈인자를 수집해 진화를 추구하는 스킬이었던 만큼, 여러 차원의 흡혈귀가 모이는 지구에 특화된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엔 브로코슬락 혈맥 이외의 뱀파이어를 포식한 게 처음이라 발동하긴 했으나, 같은 차원 출신이어서인지 변화는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하인즈까지 돌아온 이상, 이미 상황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당장 유페르쉬의 세력을 흡수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커. 원활한 합병을 위해선 덩치를 조금 줄일 필요가 있겠지.'

물론 「정제혈정」을 통하면 그에게 반항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관리의 용이성을 위해선 브로코슬락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편했다.

'거기다 광룡을 사냥하며 제법 많이 소모했던 혈정도 수급해둬야 하니까. 동족 포식이 손해만은 아니지.'

그리고 그것은 이후 그의 수족이 될 이들의 훌륭한 자양분이 되리라.

진수성찬을 마주한 사람처럼 슬쩍 입맛을 다신 하인즈가 조용히 전장으로 스며들었다.

「은폐」와 「투명화」, 그리고 「피의 신비」까지 이용해 인식을 벗어나 이루어진 작업은 매우 은밀했으며.

유페르쉬 클랜에서 이상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 후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곧 다른 싸움에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프리지아 브로코슬락과 테오도르 유페르쉬의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

콰앙—!

혈마력이 가득 담긴 양산 끝이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고, 그것을 쳐내는 순간 뾰족한 구두를 신은 다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그 공격을 피한 테오도르가 예리한 피의 채찍을 휘둘러 프리지아를 물러서게 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현 진혈 중엔 자신이 최고일 거라 자부했던 만큼, 그는 그녀의 힘이 결계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강해진 것인지 알아볼 충분한 안목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파괴력과 반응 속도, 혈마력의 운용 등을 몇 차례나 직접 겪으며 살펴본 후··· 어렵사리 현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외부 기운의 조력이 있긴 하지만, 이건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모든 면에서 자체적인 역량이 상정했던 것보다 몇 단계는 위다. 브로코슬락 클랜이 이 정도였을 리 없는데.'

브로코슬락의 전 로드인 뮬로도 자신에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아랫급이라 여겼던 프리지아에게 발목을 잡히니 상당히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의 자존심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갑자기 이게 무슨···!'

그동안 잘 버티고 있던 순혈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잠시 시선을 뗀 동안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이미 그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든 채였다.

'대체 언제 이렇게 이렇게까지 밀렸단 말인가?'

처음 계획을 세울 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 이제는 머리까지 아파질 지경이었다.

그 와중 그는 브로코슬락 측의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뮬로의 주도하에 이젠 절반도 남지 않은 유페르쉬의 순혈들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설마 저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이라도 할 셈인가?'

이 암담한 상황에서도 아직 테오도르가 믿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스크 유페르쉬가 성혈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판이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어쩌면 저들도 그때를 대비해 두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하던 순간.

오싹—

갑작스레 느껴진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는 듯한 불길한 감각에.

그는 덤벼들어 오는 프리지아를 억지로 떨쳐내고, 뒤로 물러서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을 경계했다.

"예민하군. 과연, 그리 쉽지는 않다는 건가."

이미 들킨 이상 숨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을까.

그가 경계하던 곳의 허공에서 유령처럼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오도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로드! 드디어 오셨군요!"

프리지아의 반응을 보고 상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현 로드인가?"

뮬로 브로코슬락을 밀어내고 클랜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를 비롯한 기존 세력들까지 모조리 휘하로 흡수한 의문의 능력자.

그제야 그는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흘러간 원인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가 지목한 변화의 원흉, 하인즈 2세 또한 그를 바라보며 이리저리 견적을 재는 중이었다.

'이 자가 테오도르 유페르쉬. 현 유페르쉬 클랜의 이인자라고 했지.'

이미 순혈들을 정리하며 뮬로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이쪽으로 온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저자에 대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의 뮬로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였다.

성혈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밑에서 모든 실무를 총괄하는 존재.

그 말인즉슨, 유페르쉬 클랜을 먹어 치우기 위해선 꼭 회유할 필요가 있는 인재라는 뜻이었다.

'브로코슬락 때는 뮬로가 있으니 일이 상당히 편했단 말이지. 유페르쉬는 규모가 더 크니, 실무 책임자는 꼭 필요하다.'

세력이 커질수록 유능한 부하의 존재는 필수였다.

기껏 조직의 장이 되었는데, 언제까지고 사소한 것까지 직접 챙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내가 브로코슬락 클랜의 로드다."

하인즈가 그를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시킨 일을 모두 마친 뮬로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곧 너의 로드가 될 몸이기도 하지."

"무슨 헛소릴···!"

위에 선 자는 조직의 방향을 올바르게 결정하고, 일 잘하는 부하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왕도(王道).

필요한 인재라면 적이더라도 회유해 등용하는 자비로운 군주였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마음대로는 안 될···."

"뮬로, 프리지아."

""네, 로드!""

"잡아."

물론, 그 회유 과정에 당사자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

자신이 왕이었으니까.

***

할리와 충돌하던 유페르쉬의 진혈 셋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곳곳에서 벌어지던 싸움의 균형이 갑작스레 깨지며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있지 않은가.

"카하핫! 나름 재밌었는데, 아쉽게 됐구만! 이제 우리도 슬슬 끝내자고, 친구들!"

그의 도발 섞인 말에 진혈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대로 가만있다 브로코슬락의 증원이 도착하면 자신들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정말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가자!"

"흡—!"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 중 둘이 동시에 할리에게 달려들었다.

오로지 그의 발을 묶기 위한 필사의 각오로.

하지만 맷집에 가장 자신이 있던 이 하나는 그 싸움에 끼지 않고, 곧바로 성혈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파지직—!

격렬한 스파크와 함께 기운이 요동치는 흉악한 공간.

방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할리조차 저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온몸이 으깨질 정도였다.

아마 그가 저기 들어선다면, 목숨이 위험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전위인 내가 빠진 만큼, 저 괴물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둘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겠지.'

사실상 진혈 셋의 전력이 이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일시적으로 비스크 유페르쉬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고 해도, 이후 할리의 개입으로 다시 판이 뒤집힐 수 있기에 망설이고 있었건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더 이상 반전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니 별수 있겠는가.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그리 마음을 다잡은 그가 전신에 피와 혈마력을 두른 채, 마침내 성혈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는 찰나.

"그건 안 되지."

"···헛?"

오직 앞만 보고 전력으로 내달리던 그의 옆으로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접근했다.

그리고.

콰앙—!

커다란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옆으로 튕겨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네놈은···!"

물론 그를 공격한 누군가는 당연하게도.

등장하자마자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며 싸움판 이곳저곳을 펑펑 터트리고 다니는 균형의 파괴자, 하인즈 2세였다.

"저쪽은 메인 디쉬거든. 아직 뜸 들일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진혈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절망적이다.

순혈들의 대규모 접전은 이미 끝났고, 테오도르 유페르쉬는 놈들에게 제압당한 듯했다.

"크하핫! 어딜 가느냐, 이리 오너라! 딱 한 입만 더 먹어 보자!"

"크헉! 이 미친 괴물 놈이!"

"왜! 너희는 먹어도 되고, 나는 먹으면 안 되냐!"

거기다 그가 빠진 탓에 다른 둘도 괴물에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

저들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판을 반전시켜야 했다.

그렇게 그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보려는데···.

"참, 아무리 생각해도 유페르쉬에 진혈이 너무 많단 말이지. 물론 강한 전력이 늘어나는 건 좋긴 한데, 조금 과한 느낌이 들어. 파벌이라도 생기면 귀찮고."

여전히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직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성혈을 먹기 전에, 진혈 하나 정도는 에피타이저로 괜찮겠지?"

그리고.

섬뜩한 웃음과 함께, 하인즈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

할리의 난입 때문에 낭패를 보긴 했으나, 비스크 유페르쉬는 다시 브리키와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처음부터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던 만큼, 한 차례 공격을 주고받았다 해도 그가 더 유리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전까지의 일.

급박하게 흘러가는 주변 상황에는 그도 쉽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머, 집중력이 좀 흐트러진 것 같네?"

"···닥쳐라."

"언제는 퇴물이니 뭐니 떠들어 댔으면서, 갑자기 입을 꾹 닫으니 적응이 안 되잖아?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브로코슬락···."

연신 꿈틀거리는 눈썹과 뿌득뿌득 갈리는 이빨.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방증이었지만, 여기서 그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덜떨어진 부하 놈들을 구하려 하든, 이 결계를 찢고 자신만이라도 탈출하든.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당한 힘을 써야 할 텐데, 지금 그의 앞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여자는 그런 빈틈을 허용할 위인이 아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역천의 서약을 통해 얻은 정보를 교차 검증하고, 상대의 전력을 최대로 가정해 그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

조금의 피해도 없이 순식간에 끝내고 이 거점을 먹어 치우기 위해서.

'틀림없이 조금 과할 정도로 준비했건만, 지금 상황은 도대체 뭐지?'

비스크는 위기 상황에 평소 이상으로 빨리 돌아가는 머리로 상황을 분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다섯 가지 결론.

첫째, 성혈 브로코슬락이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둘째, 브로코슬락 클랜의 전체적인 수준이 상향평준화 되어 있었다.

셋째, 테오도르의 쓸데없는 작전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이곳에 난입해 왔다.

넷째, 갑자기 등장한 현 브로코슬락 클랜 로드의 무력도 생각 이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도와준다던 역천의 서약 놈들은,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

지금이 그 만약의 사태거늘, 처음 말을 꺼냈던 역천의 서약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자신과 유페르쉬 클랜은 끝장이건만!

'설마 놈들이 우릴 버렸나? 이건 함정이었고? ···이 유페르쉬가, 속은 건가?'

결국 비스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이쪽을 버리고 브로코슬락 클랜을 선택했으리라고.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역천의 서약은 확실히 지원군을 보낸 상태였다.

그것도 이런 사태에 도움이 될 만한 상당히 강력한 정예들을.

하지만 그 원군은 브라이트 공작가는커녕 수도 내부에도 들어설 수 없었는데.

당연히 그 원인 또한—.

[크흐흣!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다니, 수고를 덜었군.]

"크윽! 어째서 이곳에 불사왕이···!"

탈라리아를 주시하고 있던 불사왕 한스의 눈에 그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을 감싼 결계에 갇혀 바닥에서 들끓는 어둠에 휩싸인 채 정신을 잃은 스물이 넘는 무리.

그가 직접 「심연의 눈」까지 사용하며 관심을 두고 있는 이상, 마(魔)에 속한 존재는 그 시선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결국 유페르쉬 클랜이 일을 실패한 원인 중 첫 번째인 브리키의 존재만 제외하면,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모두 한 존재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건 이 세상의 누구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127

성혈 (2)

"······."

"에이, 별 영양가도 없네."

할리가 괜히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꼭 뱀파이어들만 피를 빨라는 법은 없었다.

「폭식」을 가지고 있는 그도 먹는 데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몸.

그래서 진혈을 상대하며 그들의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피도 다량 강탈할 수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영 별로였다.

'하긴, 생각해보니 할리는 이미 뱀파이어의 유전자를 충분히 얻은 상태였지.'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하인즈 2세의 진화한 피를 다량 섭취해, 탄생 초반부터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닌 채로 마수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평범한 뱀파이어의 피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소리.

'진혈이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어쨌든 이 몸하고는 별로 궁합이 좋지 않네. 역시 할리에겐 몬스터 마석이 최고야.'

흡혈인자와 혈마력은 오로지 뱀파이어에게 특화된 힘이다.

그들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육체 대부분을 그와 비슷하게 변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생체력과 「생체 오러」의 효율이 떨어진단 말이지.'

필요한 유전자만 짜깁기해서 성장하는 할리에게, 일정한 틀을 유지해야 하는 뱀파이어의 힘은 제약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더 수월하게 강해질 수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흠, 제법 만족스럽군. 확실히 진혈 정도 되니 뭔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하인즈는 상당히 만족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진혈을 흡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 이상의 진전이 있었으니.

'지구에서 진혈급 흡혈귀들을 포식한 적은 있지만, 뿌리가 같은 차원 출신의 피라 그런지 뭔가 다르긴 하군.'

이 정도면 에피타이저로써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았다.

곧 이어질 메인 디쉬가 기대될 정도.

물론 그 와중에 상당수의 뱀파이어들이 하인즈의 동족 포식 행위를 눈치채긴 했지만···.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감히 누가 하인즈에게 따지고 들 수 있을까.

오히려 불문율이 된 원인인 정신 오염을 이겨냈다는 뜻이니, 그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만 더해질 뿐이었다.

또 그런 감정은 오히려 통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고.

"······."

"흐음—? 새 로드가 어떤 아이일까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구나? 뭐라고 할까, 여러모로 대단하네!"

"칭찬 고맙군. 그쪽은 성혈인 브로코슬락이겠지?"

"브리키라고 불러주겠니? 난 이 이름이 더 마음에 들거든."

"그래, 브리키. 난 하인즈라고 부르면 된다."

"하인즈! 뭔가 맛있을 것 같은 이름이네. 물론 칭찬이란다."

그리고 뜻밖의 반응을 보인 브리키 덕에, 하인즈는 그녀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 교분을 다질 수 있었다.

'클랜을 통째로 빼앗겼으니 하인즈를 보면 적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적대는커녕 호의적인 태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금 처한 상황 탓에 거짓으로 가장한다고 보기엔, 예민한 두 아바타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상대는 수천 년을 산 성혈이니, 일단 경계는 해 둬야겠지.'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파지직—!

하인즈가 슬쩍 시선을 돌려 그녀와 마주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

아까부터 썩은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 중인 백발 백안의 뱀파이어, 비스크 유페르쉬를.

"크하하핫—! 거기 형씨, 안 잡아먹으니까 표정 풀라고? 아, 물론 나만 그렇다는 거야. 옆의 이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만!"

"어머, 아까도 생각했지만 참 듬직한 아이네. 하인즈, 네 친구니?"

"사업상 알게 된 관계지. 일단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아, 난 할리다! 지금은 툴크 왕국 타라크에서 활동하고 있지."

"브리키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다시 왁자지껄 시작된 수다.

연신 스파크를 튀기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브리키와 할리, 하인즈 2세가 한 사람을 둘러싼 채 정겹게 대화를 나누었다.

거기에 소외된 한 사람, 비스크 유페르쉬만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어, 이거 뭔가 한 명을 왕따하고 괴롭히는 포지션 같은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실상 먼저 공격받은 쪽은 이쪽이고 침략자는 저쪽인데도!

"흠,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군. 슬슬 끝낼까?"

"아— 좋지! 나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하니까!"

하인즈가 말하고, 할리가 받았다.

놈의 힘을 좀 빼놓기 위해 압박만 가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냥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나아 보였다.

그렇게··· 부하들이 전부 죽거나 제압되어 외톨이가 된 비스크의 외로운 분투기가 시작되었다.

***

촤아앙—!

피로 만들어진 하인즈의 칼과 비스크의 채찍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흡!"

동시에 하인즈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자상이 번지며 자욱한 피안개가 일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초재생」이 있음에도 극도로 저하된 재생력은 그의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고, 손실된 혈액도 평소처럼 곧바로 회수할 수 없었다.

파지짓— 촤아악—!

그리고 스파크와 함께 비스크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가, 시간을 돌린 듯 다시 날아와 붙었다.

그의 팔이 잘리며 뿜어졌던 핏물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톱니바퀴 모양으로 뭉쳐, 뒤쪽에서 달려들던 할리에게 날아들었다.

맹렬히 회전하는 그것은 벼락 같이 내리꽂혔고.

콰드드득!

도중에 잡아챈 비늘로 뒤덮인 양손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하지만 갈려 나가는 손바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할리는 그것을 힘껏 움켜쥐고는—.

"크하핫!"

그대로 쥐어뜯듯이 양쪽으로 찢어버렸다.

재생력이 저하되어 손이 피투성이인 채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파지직— 푸확!

그리고 또다시 비스크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가 회복되었다.

그때, 유령처럼 접근한 하인즈가 「가속」까지 사용한 쾌속의 일검(一劍)을 날렸다.

그 일격은 갑자기 나타난 피의 장막에 가로막혔으나, 그것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곧바로 따라붙은 할리의 일권(一拳)이 그 중심을 강타해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부서진 장막의 구멍으로 쏘아져 들어가는 하인즈의 피의 칼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연계는, 그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상대하는 비스크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초월적인 반사 신경으로 겨우 그것을 쳐내긴 했으나, 다시 스파크와 함께 그의 오른쪽 눈이 터져 나갔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그랬듯이.

"크아아! 일대일 싸우면 별것도 아닐 버러지들이! 더럽게도 나오는구나!"

"어머나—?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냐고 했던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그분은 집에 가셨나?"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브리키가 생글거리며 재차 속을 뒤집었다.

그가 뭔가를 할 때마다 몸이 파괴와 수복을 반복했고, 그것이 이어질수록 간격은 점차 더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커헉!"

"으하핫! 드디어 한 방!"

할리의 주먹이 그 몸에 닿기 시작하고.

촤아악!

"과연, 몸이 베이는 와중에도 혈액을 전부 회수하다니. 성혈이라 할 만한 혈액 통제력이군. 탐나는데."

하인즈의 칼날이 그의 몸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쯤 되어선 장시간의 싸움에 지친 브리키도 견제 이상은 하지 못했지만, 몇 차례나 타격을 받은 비스크의 상태는 그녀보다 더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끝내 모두가 예상했던 마지막이 다가왔다.

"아, 안돼···. 난 모든 뱀파이어의 왕이 될 몸이다! 여기서 이렇게 스러질 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원통하게 외치는 비스크 유페르쉬와.

"걱정하지 마라. 그 의지, 내가 이어가 주지."

강제로 의지를 빼앗아··· 아니, 승계하려는 하인즈 2세가 마주했고.

"이제 내가 뱀파이어의 왕이다."

콰직!

"크읍!"

기어코 한 쌍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스크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크으··· 오만하구나, 브로코슬락의 로드여. 정당하게 절차를 거쳐 성혈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동족 포식으로 강제로 빼앗겠다고···? 그것도 다른 클랜의 성혈을?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하지만 목을 통해 순식간에 피가 빨려 나가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여유를 가장하며 상대를 조롱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넌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성혈을 이으려 시도했던 무수한 이들처럼!"

이미 반항할 힘도 사라져버린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하인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전대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최대한 위험 요소를 없애고 도전한 비스크 자신도, 수많은 목숨의 위기를 겪고서야 운 좋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정신 오염을 버티고 동족 포식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건 정신 오염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격이 되지 않는 자는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의식이었으니까.

그러니 놈도 얼마 가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져 버릴 것이다.

쭈우웁—

그래야 했다.

···그랬어야 할 텐데?

'왜··· 아직도 멀쩡하지?'

그는 벌써 상당량의 피를 흡혈 당해 점점 눈이 무거워지고 있는데, 아직도 상대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아지경에 빠진 듯 정신없이 그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푸스스—

이윽고, 비스크는 자기 신체의 말단이 서서히 재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신마저 흐릿해져 사고가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아, 아아— 설마. 이놈이, 이 자가··· 정말로 다른 클랜의 성혈을 계승할 수 있다고···?'

그렇게 그는 몸에서 모든 힘이 빨려 나가고, 몽롱해진 정신 상태에서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의지, 내가 이어가 주지. 이제 내가 뱀파이어의 왕이다.

그 말엔 한 치의 허세도 없었다는 것을.

사실 그도 왕을 꿈꾸고 그것을 자칭하기는 했으나, 자신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리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최대로 쳐줘 봐야 억지로 올라선 식민지 총독 정도가 한계겠지.

한데···.

성혈이란 한 혈맥의 시조이자 원형으로, 정당한 절차 없이 찬탈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혈맥의 구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후우— 아, 그리고 유페르쉬 클랜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들도 브로코슬락과 함께, 내 아래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흡혈을 마치고 목덜미에서 입을 뗀 하인즈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로선 조롱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비스크는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다.

'모든 클랜을 하나로 묶어··· 뱀파이어를 일통할 구심점. 우리를 양지로 이끌어 줄, 유일한 왕···.'

그가 그저 막연히 동경하기만 하던, 뱀파이어의 왕으로서 출사표를 던지는 선언으로!

그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는 와중에도 조용히 전율했다.

왠지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허탈함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이젠,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조차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유페르쉬 클랜의 로드, '비스크 유페르쉬'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뭐지? 갑자기 기분 나쁘게 왜 웃는 거야? 아직 뭔가 남은 수작이 있는 건가?'

물론 실컷 저주를 퍼붓던 그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이는 광경은, 그저 하인즈에게 찝찝함만 안겨줄 뿐이었지만.

'뭐, 클랜의 명맥을 유지해준다는 게 기뻤나 보지. 아니면 죽음 직전에 인생무상이라도 깨달았던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그의 눈앞에 떠오른 문구와 함께 몸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상격(上格)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흡혈인자가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페르쉬 클랜의 인자는 습득한 만큼, 흡혈인자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탈피하듯 내재한 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여파는, 이전까지 느꼈던 그 어떤 진화보다 격렬했다.

'크으— 이거, 진짜 「혼혈진화」가 없었으면 어이없이 죽어버렸겠는데?'

흡혈한 피를 통해 전해진 '유페르쉬'의 막대한 업과 격이 그의 몸을 터트릴 듯 팽창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억지로 끌어와 흡혈인자를 진화시키는 양분으로 쓰고 있는 것이 바로 「혼혈진화」.

비스크가 죽기 전에 했던 생각처럼 그가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거나, 특별한 핏줄이라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여러 스킬의 도움으로 억지로 진화를 이어가고 있을 뿐.

하지만, 결국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피의 일족 (진혈眞血)」이 「피의 일족 (성혈聖血)」로 진화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극한으로 진화했던 하인즈 2세의 흡혈인자가 그 한계를 넘어서고.

아우테리카에 새로운 성혈의 뱀파이어가 탄생했다.

#128

성혈 (3)

성혈에 오르는 순간, 하인즈 2세의 감각이 끝을 모르고 확장했다.

공감각에 이르렀던 초월적인 지각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고,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손에 잡힐 듯 다가왔으며—.

격의 상승으로 한껏 고양된 정신이··· 세상에 가득 찬 인과(因果)의 흐름 일부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군··· 이게 그동안 성혈들이 싸웠던 방식인가.'

하인즈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의념을 쏟아붓는다면 그 흐름의 일부 자락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을.

'정신력의 소모가 큰 데다 하인즈의 힘이 닿는 주변 범위에 국한되지만···. 이러면 격하의 존재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겠군.'

상대가 어떤 수단을 쓰기도 전에 이미 '회피'라는 결과가 나온 상태고, 이쪽의 공격은 마음먹는 순간 '적중'이 결정된다.

이런 상대를 대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브리키가 없었으면 할리와 하인즈 둘이 소모전으로 가도 힘들었겠는데···.'

그 둘이 비스크 유페르쉬와 평범한 격돌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녀의 견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결국 비스크보다 격상의 존재인 한스가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운은 아직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은폐」와 「투명화」가 합쳐져 특수스킬「존재부정」으로 진화합니다."

성혈로 격이 상승하면서, 타 차원의 흡혈귀들을 포식하고 「혼혈진화」를 통해 강탈했던 능력 둘이 합쳐져 진화했다.

그것도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스킬로.

'···이것도 성혈의 능력에 영향을 받았구나. 인과를 비틀어 감지당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은신 계열 스킬. 이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해졌다고 보면 되겠군.'

이왕이면 다른 스킬들도 진화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까지 바라는 건 욕심일 터.

하인즈는 몸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수습하며 개체 정보창을 열어보았다.

-개체명 : 하인즈 2세

-종족 : 뱀파이어 (성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피의 일족 (성혈聖血)」, 「혼혈진화」, 「피의 신비」, 「정제혈정」, 「존재부정」, 「가속」, 「초재생」, 「간파」

-특이 사항 : 「혼혈진화」를 이용해 강제로 성혈을 계승하고 진화를 이뤘다. '유페르쉬' 혈맥에 약간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모든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과(因果)의 자락 일부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유페르쉬의 피를 이은 뱀파이어에 대한 지배력.

아무래도 성혈을 포식하면서 그에 대한 영향력도 함께 딸려온 모양이었다.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라 그 권한이 상당히 깎여나갔는지 '약간의'란 수식어가 붙긴 했으나···.

'어차피 「정제혈정」을 이용할 생각이었으니 상관없겠지. 그래도 덕분에 일이 더 편해지겠는데.'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날을 세우는 이보다는, 약간이나마 통제할 수 있는 이가 다루기 편한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마침 브로코슬락과 다르게 유페르쉬는 전 대륙에 퍼져있으니, 그들을 어떻게 흡수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은 참이었건만.

"후."

그렇게 하인즈가 내심 만족의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줄곧 이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브리키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흐흥— 역시 대단하구나? 새로운 성혈이 탄생하는 걸 직접 본 건 처음이야. 그것도 동족 포식을 통해서라니."

그가 비스크 유페르쉬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는 순간에도, 동족 포식을 통해 기어코 성혈에 오를 때도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녀였다.

하인즈가 성혈이 된다면, 상태가 정상이 아닌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대적할 수 없게 되리란 것도 알고 있었을 터인데.

'물론 만약을 대비해 할리가 경계하고 있긴 했지만, 방해하려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냥 지켜만 봤단 말이지.'

이쯤 되면 확실히 적대 의사는 없다고 여겨도 되리라.

어차피 성혈이 된 이상 이제 그녀는 하인즈를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

"그게 내 능력이지. 하지만 브리키, 네 덕이 컸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 빚은 반드시 갚도록 하지."

"으음— 어차피 이쪽도 엮인 상황이었으니 그냥 잠깐 시간만 내주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좀 많거든."

전투 때의 날카로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절인 배추처럼 축축 늘어지는 태도로 느긋하게 답했다.

어차피 그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알아야 했으니, 자리를 만들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지금은···.

"으하하! 이거 참, 진귀한 구경을 했구만. 그런데 복수도 끝냈으니 난 이만 돌아가 볼까 하는데! 하던 일도 팽개치고 왔거든!"

가만히 지켜만 보던 할리가 자연스레 나서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할리와 하인즈의 연계 작전도 성황리에 종료되었으니 이제 파티를 해산할 때였다.

"그래, 할리.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군.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지."

"아, 별거 아니야! 놈들이 먼저 내 친구를 건드렸으니까 말이지. 거기다 그쪽은 우리 휴버트 상회와 한배를 탄 사이가 아닌가! 와하핫!"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휴버트 상회 쪽은 이쪽에서도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다."

"그래주면 고맙고! 그럼 난 이만!"

그렇게 주변에 보여주기 위한 대화가 끝난 직후, 할리는 당당하게 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싸움이 끝나며 뮬로의 결계도 해제되었고, 로드이자 성혈이 된 하인즈가 허락한 마당이었으니 그를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흐음, 이대로 그냥 보내도 괜찮겠니? 첫 등장부터 여러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아이던데···."

이젠 거의 감은 것 같은 눈의 브리키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괜찮다.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으니."

하인즈는 가볍게 그녀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리고 하인즈는 이젠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그녀를 먼저 숙소로 돌려보내고, 전후 뒷정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군.'

전투 직후의 클랜 현황 파악부터 유페르쉬의 잔당 관리, 그리고 이후의 대응까지.

아직 일은 산더미처럼 많이 남아 있었다.

***

한 손에 들린 기다란 양손검과 전신을 감싼 두꺼운 검은 갑주.

그 존재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를 인간이라 여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눈가에서 발광하는 붉은 안광과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흑마력은 둘째 치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되는 짙은 죽음의 기운은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그 존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魔)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그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

"불사의 군대를 이끄는 군단장이잖아···. 그런 괴물이 어떻게 여기에···!"

갑작스러운 결계의 발동으로 외부와 단절되고, 곧바로 습격이 가해졌다.

입구부터 빼곡하게 깔린 방어 설비는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경비로 배치한 키메라와 마개조된 암흑기사들은 잠시도 그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그가 아지트의 중심부까지 순식간에 도달해 버렸으니, 역천의 서약 툴크 왕국 지부의 흑마법사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갑자기 연락이 끊기는 지부가 늘어 교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여기고 있었거늘. 설마 불사의 군대에서 벌인 짓이었나."

이곳 지부를 책임지는 지부장이자, 역천의 서약의 장로 중 하나인 올드만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불사의 군대가 직접 움직였다는 말인즉, 재림한 불사왕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대륙과 불사왕 사이에서 이득만 취할 예정이었던 그들의 계획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이 소식을 전하는 게 최우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걸로 보아 상당히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긴 한데···.'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자신만만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열을 갖추고 전방에 늘어선 암흑기사들과 이미 주문을 준비 중인 흑마법사들.

그 수만 물경 수백이었다.

이곳은 툴크 왕국의 모든 지부를 총괄하는 중앙 본부로, 그간 연락이 끊긴 다른 곳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입구가 돌파당하긴 했으나, 애초에 그곳에 있는 놈들은 시간 벌이용으로 배치한 화살받이에 불과했다.

진짜는 그 시간 동안 철저한 준비를 마친 중앙 본대였으니.

'아무리 카람이 대단하다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지. 설령 하위 언데드를 소환하더라도 거기엔 한계가 있을 터.'

심지어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였으며, 당연히 거점 수비에 도움이 될 만한 마법들이 겹겹이 설치된 장소였다.

아군의 강화와 적군의 약화, 그 외에 온갖 자잘한 흑마법들까지.

[호오— 이건, 생각 이상이군.]

그들과 마주한 카람이 나직이 읊조렸다.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의 영향으로 공포심이 제거되고, 집중력이 한계까지 올라간 이들의 기세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 부대의 모습에 올드만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째서 불사왕이 우리를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신으로 여기까지 쳐들어오다니. 우리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군, 카람! 그대는 그 오만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친 그가 서서히 흑마력을 끌어올려 파괴 마법을 준비했다.

아무리 이쪽의 준비가 철저하다 해도 상대는 역사서에도 나오는 괴물이었으니,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마법을 엮어내기도 전에···.

[그것 보시어요, 카람···. 소녀가 괜히 당신께 지원을 요청한 게 아니랍니다···?]

[흐음, 과연. 왕께서 내린 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군.]

카람의 뒤에서, 또 다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한 형체임에도 확실히 분간되는 검은 베일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여성.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며 삶의 의지를 뒤흔드는 그녀의 정체는···.

"밴시 퀸, 올리비아···!"

올드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람 하나만이라면 모를까, 거기에 불사의 군단 간부 하나가 더 더해지다니?

심지어 그녀는 혼자 온 게 아닌 듯 하나둘 유령체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이곳에 온 간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으으—

삽시간에 주변 바닥이 검게 물들며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그 어둠 속에서.

푸화악—!

달그락— 덜그럭!

끼기기긱!

목 없는 듀라한부터 뼈로 이루어진 스켈레톤 나이트 등, 수많은 언데드가 끝도 없이 기어 나와 순식간에 주변을 가득 메웠다.

[푸흣— 제법 준비하긴 했다만, 네놈들에겐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등장한 드웰이 흑마법사들을 깔아보았다.

놈들의 철저한 생포를 위해 이 자리에 간부만 무려 셋이나 참가한 것이다.

그 압도적인 전력 차에 올드만이 암담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과 밴시 퀸 올리비아, 거기에 더해···.

"···아크리치까지 더해지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참고로 드웰은 언데드 군세를 다루고 전략을 입안하는 데에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앞으로 나서지 않는 특성상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이 몸은 불사왕 님의 충실한 종복, 드웰 맥케인이다! 앞으로 똑똑히 기억해 두도록 해라!]

상대의 반응에 발끈한 그가 당당하게 외쳤지만, 이번 일로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질 일은 없을 테니 무의미한 짓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잠시 후.

그렇게 이면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작은 전쟁이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일 없이 조용히 끝났다.

하지만 싸움 직후의 뒷정리를 하던 올리비아는 일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급히 이동해야만 했으니···.

[소녀, 올리비아···. 왕의 부르심을 받고 왔나이다···.]

불사왕 한스가 직접 그녀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올리비아, 내가 이번에 재밌는 놈들을 주웠는데 말이다.]

한스의 시선이 검은 사슬에 묶인 채 허공에 매달린 이들에게 향했다.

[이번에 탈라리아로 침투하려 했던 역천의 서약 놈들이다. 대충 살펴보니 간부급도 하나 껴 있는 것 같더군.]

역천의 서약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유페르쉬 클랜의 움직임 뒤에 놈들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점조직인 그들이라 해도 이만한 수준의 부대를 소모품처럼 사용할 수는 없을 터.

'여러 다리를 건너 명령이 전해졌다 해도, 올리비아라면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녀의 역추적과 유페르쉬 클랜의 심문 결과가 합쳐진다면, 이번 일을 획책한 놈들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놈들을 조사해서 그 배후의 위치를 캐내라.]

[왕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자타공인 불사의 군단에서 가장 바쁜 이에게 또 하나의 일거리가 전해졌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얼굴로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올리비아.

역시 너무 유능한 것도 생각해볼 일이었다.

#129

막간 (1)

"그러니까, 투레일 상단에서 역청탄의 대금 지급을 미뤄달라고 했다?"

"예, 예···."

"그리고 넌 그걸 고대로 받아들였단 말이고?"

"하, 하지만 그냥 허락한 건 아닙니다! 제대로 연체 기한에 따라 이자도 지급받기로 했고, 이후 거래부터는 이쪽의 비율을 좀 더 높일 수···."

"쓰읍,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이자? 이후 거래?"

휴버트 상회의 상회주 집무실.

작달막한 키의 드워프가 한 상인의 앞에서 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업무 보고를 위해 들어온 몇몇 상인들이 그 추상같은 기세에 눈치만 살피는 와중, 한창 씩씩거리던 하워드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후우, 역청탄이 제련에 필요한 물건이라는 건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쪽 상황이 어떤지도 잘 알 테고."

"···네."

"그걸 아는 인간이! 이 전시에 군수 물자나 다름없는 물건을 넘기면서, 뭐? 이자? 이자아~?"

하지만 그의 차분한 태도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은 무기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고, 역청탄은 양질의 철을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연료였다.

무기의 생산량이 급증한 전시인 지금 판로야 찾으려면 얼마든 찾을 수 있다는 소리.

그런데 대금을 지급받지 못해 자금이 동결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가져온 것이, '통상적인 이자'와 '이후의 기약 없는 양보'라는 말이었으니···.

그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인이라는 놈이 그런 기본적인 걸 몰랐을 리는 없고."

붉어진 얼굴로 분노를 토해내던 하워드가 다시 조용히 읊조리며, 고개만 조아리고 있는 상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저 평범한 드워프 장인에 불과할 터인 하워드의 기세가 조용히 공간을 집어삼키며, 숨쉬기도 힘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휴버트가 자리를 비운 틈에 딴 주머니를 차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아, 아닙니다! 그건 오해십니···!"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자··· 잠시만요! 하워드 님! 잠깐만 제 얘기를···!"

결국 그의 신호를 받고 들어온 경비들이 그 상인을 연행해 가는 것을 끝으로, 집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뭣들 해? 시간 없으니 빨리 다음 사람 보고해!"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 불편한 자리는 마침내 모든 상인의 보고를 들은 하워드가 업무 지시를 내리고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정말 중요한 일 아니면 재량껏 처리하고 추후에 보고하도록!"

그렇게 휴버트 상회 소속의 상인들은 일을 마친 하워드가 사라지고 나서야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아— 꼭 상회주님과 같이 일하는 기분이 드는군."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처음엔 웬 처음 보는 드워프를 상회주 대리랍시고 앉혀 놓았나 싶었는데···."

저마다 수군거리며 자리를 옮기는 휴버트 상회의 상인들.

갑작스러운 사태로 휴버트가 자리를 비우고 하워드가 상회주 대리를 맡게 되었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들은 반발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소한 드워프가 난데없이 머리 꼭대기에 앉게 된 상황이었다.

능력이 증명되지 않은 이가 운영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는데, 지금까지 상회를 일궈왔던 상인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따를 수 있겠는가.

물론, 갑자기 들이닥친 할리의 근육 앞에서 그런 기색을 내비치는 멍청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음··· 그래도 확실히 상회주님과 연락이 되고 있긴 한가 보더군. 업무 지시도 그분이 직접 내렸을 법한 내용들이었고."

"사실 나도 걱정하던 부분이긴 했네. 상회주님이 모습을 감춘 것부터, 전부 무슨 음모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일단 지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아."

공동 대표나 다름없는 할리가 직접 대리로 임명한 만큼 일단 하워드를 따르기는 했으나, 상인들은 그의 행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 이 모든 게 상회를 가로채려는 누군가의 수작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는 상회를 평소처럼 유지하기 위한 노력만 할 뿐, 이권이나 자산을 빼돌리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의 개인 공방에 이런저런 물자들을 공급하는 정도가 다라고 할까.

물론 그건 처음부터 휴버트가 허락했던 사항인 만큼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카올 그 친구, 정말 투레일 상단에게 뒷돈을 받은 건가?"

"끄응— 아직 속단할 단계는 아니지만, 확실히 미심쩍긴 했지."

"참, 겁도 없군."

"그러게나 말일세."

상인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배의 선장이 사라진 상황이었으니 욕심이 나는 건 이해한다만, 그것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말 그대로 겁도 없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그 '할리'가 직접 경고까지 한 마당이지 않은가.

최근 타라크 상계의 우선 목표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강철의 성채로의 보급이었다.

당연히 그쪽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고, 근래 최고의 화제는 단연 그의 괴물 같은 활약이었다.

'거기다 타라크 치안대가 대놓고 상회 주변을 수시로 순찰하며 신경 쓰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여기서 경거망동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

물론 그 카올도 어느 정도 눈치를 보긴 했는지, 직접 자금을 횡령하진 않고 나름의 변명을 준비한 것 같기도 했으나···.

그건 하워드의 말마따나 그를 무시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앵무새처럼 상회주님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단 말이지. 거기다 그 숨 막히는 카리스마까지···. 이거, 나도 뭔가 놓친 게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어.'

결국 진심으로 승복하게 된 상인이 다시 자신의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휴버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하워드의 노력과 할리의 영향력으로 상회는 순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

"에잉, 이거 빨리 휴버트가 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아까워. 하지만 그렇다고 상회에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워드는 연신 투덜거리며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상회의 일을 끝마치고 곧장 향한 곳은 인근에 마련한 개인 공방이었다.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일단 상회의 업무도 병행하고 있긴 하나, 그의 원래 목표는 시차를 활용해 지구의 지식을 최대한 빨리 몸에 때려 박는 것이었다.

물론 지구와의 시차를 생각하면 업무 처리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고,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공방에서 보내고 있긴 하지만···.

기초부터 다져나가는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 아무리 시간 배율이 열 배나 차이 난다고 해도, 단순히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체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같을 리 없으니까.'

그것 때문에 처음 예정했던 매일의 할당량이 상당히 밀린 상태였다.

그걸 메우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엣흠! 그럼 오늘의 작업을 시작해 볼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온 하워드가 가볍게 몸을 풀며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화로로 다가갔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변함없이 열기를 유지하고, 화재 위험에 대한 안전 설비도 되어있는 마법 화로.

돈을 아낌없이 퍼부은 덕에 이 공방 곳곳에는 이런 편의를 위한 마법이 상당히 많이 적용되어있었다.

오직 그가 기술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흠, 온도를 더 올려야겠는데.'

화로를 향해 슬쩍 손을 뻗는 것으로 온도를 체크한 하워드가 능숙한 동작으로 석탄 한 무더기를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높아져 가던 열기는 그가 원하는 최적의 온도에 다다르고서야 서서히 안정되었다.

'딱 적당하군.'

본격적인 실습에 돌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에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인간이랑 감각이 다르긴 하단 말이지. 이렇게 차이가 심하니 장인의 종족이라고 불릴 수밖에.'

인간이었다면 무수한 세월을 통해 경험으로 습득해야 했을 일을, 드워프는 그저 본능으로 행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불의 온도를 소수점 단위로 맞출 수 있었고.

석탄을 손에 쥐고 무게와 입자를 가늠하면, 이것이 불에 들어갔을 때 온도가 얼마나 올라갈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망치를 쥐었을 때 자연스레 느껴지는 최적의 무게 중심과, 손끝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재료의 특성 또한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태생적으로 섬세한 손재주와 강인한 신체까지 갖췄으니, 인간 장인과는 출발선부터가 아득히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선상에서 경쟁하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할 정도로.

'뭐, 이번엔 내가 드워프인 입장이니 다행이지만.'

이런 메리트도 없이 바닥부터 성장해야 했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다시 한번 곡괭이 엘린느와 그것을 기꺼이 내어준 자오닉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으흠흠! 일단 가볍게 철광석 제련부터 시작해야겠군!"

하워드는 공방 한쪽에 쌓여있는 역청탄과 석회석 등의 재료를 챙기며 오늘도 열심히 수련을 이어갔다.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지구에서 전해지는 지식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뇌리에 각인되었고.

사진과 동영상, 문서 등 온갖 매체로 가공된 정보들이 하워드의 손끝에서 재현되며 그의 피와 살이 되었다.

깡—! 까앙—!

그렇게 아직은 관심을 두는 이도 별로 없는 작은 공방에서, 한 사람의 장인이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었다.

***

따뜻한 빛이 주변을 감싸며 침대에 골골거리며 누워있는 휴버트에게 스며들었다.

치유의 힘이 담긴 「아우테리카 성법」이 육신의 회복을 도우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보다 회복이 빠른데? 며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앞으로 하루면 운신할 수 있겠어.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

「즉사 면역」으로 치명상으로 경감된 피해의 호전이 생각보다 빨랐다.

하인리히의 회복 성법과 「초회복」의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

사실 내가 예상 회복 기간을 길게 잡았던 이유에는 이전 하인리히 때의 경험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극한의 단련을 통한 강건한 육체, 신성력과 축복의 보호, 공용 스킬인 「초회복」까지.

이런 극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던 하인리히가 불사왕 한스와의 싸움 직후, 로셀리아 대신전이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정양해야 했다.

자연스레 「초회복」만 제외하면 신체 조건도 떨어지고, 받는 치유 성법의 수준도 떨어지는 휴버트의 회복 기간은 그만큼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인리히의 상대가 무려 불사왕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던 거지.'

같은 치명상이라도 그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극악한 저주에 찌들어 제대로 회복할 수 없었던 하인리히와 달리, 휴버트는 깔끔하게 심장과 내장이 짓뭉개졌던 것뿐이지 않은가?

'아니, 그것 자체는 더 심각한 게 맞긴 한데···. 그래도 「즉사 면역」 덕에 결과적으론 내장이 많이 상한 정도로 그쳤으니까.'

그리고 그런 부상은 「초회복」과 신성 치유의 연계로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다음 전송진의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휴버트를 아우테리카로 보낼 수도 있을 정도로.

"음, 휴버트가 가고 나면 다시 저 지루한 작업을 내가 해야 할 텐데···."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누운 채 손가락만 움직여 태블릿을 조작하는 휴버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것은 하워드에게 야금술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단 읽기만 하면 '이해'는 하워드의 머리가 한다지만, 그 과정 자체가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서 그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작업이 재밌을 턱이 없었다.

'아바타로는 「마인드 허브」로 그런 감정을 여과할 수 있어 기계적인 반복 작업도 상관없지만, 난 그저 순수한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입장이라.'

물론 여러 번의 강화를 통해 내 정신력도 이미 인간을 초월한 상태긴 했으나, 그 사실을 뚜렷이 체감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동시에 움직이는 몸이 여덟 개란 말이지.'

그것도 휴버트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정신력 소모가 극심한 녀석들뿐이었다.

거기다 차원 시차에 대한 적응은 물론, 「마인드 허브」가 주가 된다고는 하지만 정신 오염을 막는 데에도 약간씩은 소모되니.

정신력이란 자원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처지였다.

'역시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에겐 그를 위한 돌파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고유스킬을 강화해 새로운 분신을 만드는 것.

역시 「아바타」가 최고였다.

#130

막간 (2)

"오··· 상당히 아슬아슬했군."

나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앞에 떠오른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1,1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120,122』

하워드가 탄생한 게 고작 며칠 전이건만, 기어코 그사이에 50만이 넘는 카르마를 수급해 강화 조건을 달성했다.

지구의 각성자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속도였으나,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뱀파이어가 소수 종족이라 해도, 그 정점에 군림하는 성혈을 먹어 치운 데다 권좌까지 찬탈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짜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이번 일에 대한 카르마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 벌어들인 수치는 당장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선금일 뿐.

이후 유페르쉬 클랜을 접수하고 세력을 확장시키며 성혈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거기엔 또 별개의 카르마가 지급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젠 한 번 강화하는 데 110만이나 필요하네. 부디 그 값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전송된 각성자가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필요한 포인트가 100만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모으는데 평균적으로 10년가량이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단 한 번의 스킬 강화에 사용하기엔 어이없을 정도로 막대한 수치였다.

'그래도 지금의 나에게 이 정도는 뭐.'

아바타들이 성장해 큰물에서 놀게 되다 보니 이젠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십만 단위로 카르마가 쏟아진다.

이후 본격적인 '안방극장'이 시작되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진 않을 터.

'어차피 지금 전부 써도 금방 다시 모일 텐데, 굳이 아낄 필요도 없지.'

그야말로 부르주아의 사고방식이었다.

온갖 목숨의 위기를 넘기며 근근이 카르마를 수급하는 이들이 알게 되면 아마 뒷목을 잡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 '정신력 강화' 항목도 다시 확인해 봤지만, 그곳에 적힌 필요 카르마 포인트는 무려 64만.

'고유스킬 강화'와는 다르게 스테이터스는 요구량이 두 배씩 증가하다 보니, 그간 틈틈이 한 강화가 고작 여섯 번이었는데도 벌써 저 모양이었다.

'역시 고유스킬을 강화하면서 정신력을 증가시키는 쪽이 훨씬 가성비가 좋아. 큰맘 먹고 32만짜리 정신력 강화를 했을 때도 생각만큼 효율이 안 나와서 후회했었으니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나는 가볍게 심호흡하며, 곧바로 '고유스킬 강화'를 선택했다.

지끈—

그리고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두통이 지나간 후.

눈앞에 시스템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아바타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성장이 한층 가속화됩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아바타 생성 시, 세 개의 무작위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려 110만 포인트를 투자한 결과.

다행히 기대했던 '아바타 개체수 증가'와 '정신력 대폭 증가'는 자연스럽게 딸려왔다.

그 외에 추가로 주어진 것은, 이제는 단골 멘트가 된 '아바타의 잠재력 상승'과 그간 무작위로 주어졌던 스킬에 대한 제한적 선택권이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후우— 쓸 만한 스킬이 하나라도 나왔으면 했는데."

필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점점 더 강한 보정을 부여하는 '스테이터스 강화'와는 달리, '고유스킬 강화'는 한 번 강화하는 데 필요한 수치가 늘어난다고 효과도 그만큼 증가하진 않았다.

50만을 쓰나 100만을 쓰나 똑같은 한 단계 강화일 뿐.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더라도 막상 마주하게 되니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스킬 선택권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그동안 운이 좋았던 거고. ···그래도 다음번엔 정신력 강화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젠 120만으로 증가한 다음 필요 포인트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고유스킬을 이만큼 강화한 이는 자신뿐일 테니 이것도 배부른 투정일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떨쳐버리듯 곧바로 아바타 생성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외모 변경과 능력치 조절을 위해 눈앞에 「커스터마이징」 창이 떠올랐다.

그런데 평소라면 새로운 아바타의 스킬이 명시되어 있어야 할 칸에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어있었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건가.'

초기 스킬은 진로를 정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신중히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바타의 잠재력이 증가한 지금은 관련 스킬이 없어도 제법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으나, 굳이 있는 걸 이용하지 않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주는 대로 받기만 했던 전과는 달리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무작위란 말마따나 제시된 스킬에 일관성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투시」와 「빙결 내성」은 이름만 봐도 알겠는데, 「결속의 끈」은 뭐지?'

다행히 융통성은 있는지 선택 단계에서도 해당 스킬의 간략한 정보는 제공되고 있었다.

「결속의 끈」의 기본 효과는 '계약 시 추가 보정'을 주는 것.

그리고 그 한 줄의 설명만으로도 이 스킬의 정체성을 알 수 있었다.

'정령사인 해리스한테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스킬이네.'

계약 대상과의 친화력과 유대감 등을 강화해주는 '소환'계열이 사용할 법한 능력이었다.

자신에겐 이미 해리스가 있으니 중복되는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소환사라··· 재밌겠는데?'

이 세상엔 소환체가 정령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할리도 북부 산맥에서 역천의 서약의 소환 마법사들과 충돌한 전력이 있지 않았나.

유니콘이나 불사조 같은 환상종부터 악마나 외계 생명체까지, 소환 계통에서도 갈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했다.

'아무리 봐도 「투시」나 「빙결 내성」보다는 이쪽이 더 좋은 것 같네. 사실 새 아바타로는 정통 마법사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방향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

필요하다면 나중에 소환수는 호위용으로 두고 마법사로 전향할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결정이다."

스테이터스 조정까지 전부 끝마친 후, 마침내 새로운 아바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인상과 살짝 처진 눈매, 이지적으로 빛나는 눈빛을 가진 전형적인 모범생 상이었다.

'좋아, 이걸로 한시름 덜었군.'

나는 그 소환 마법사 지망생, '헤스페론'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헤스페론이 가장 먼저 하게 될 일은.

휴버트의 뒤를 이어 하워드에게 전달할 지식을 입력하는 일이었다.

아우테리카에서 그가 성장하기 적합한 자리가 준비되기 전까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