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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대륙 중부에 자리한 아제리온 제국.

수도 제론을 둘러싼 황실 직할령 중 하나인 토베아 시는 수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하나, 나름대로 교통의 요지로써 성세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 하나가 도시의 부촌을 가로질러 한 저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열린 문으로 들어선 마차는 이후의 모든 보안 절차를 생략하고 빠르게 안을 내달렸다.

이윽고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스르륵—

그 안에서, 윤기가 흐르는 긴 분홍색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아름다운 여인이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차분한 발걸음으로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테리. 혹시 앤드류 씨는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요?"

"지금 놀이방에 계십니다. 말씀 전해드릴까요?"

"네, 제가 2층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좀 해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응대한 그녀는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거닐었다.

그렇게 허락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구역에 발을 들이민 순간.

우웅—

묘한 진동음과 함께 특수 결계의 울림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던 자애로운 미소는 순식간에 끈적끈적하고 농염한 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흐음~ 올리비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네? 이건 좀 번거로울지도."

그녀는 슬쩍 복도의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읊조렸다.

언데드들이 준동했을 때부터 이럴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은근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한때 그녀와 함께했던 만큼 그 능력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동료라면 더없이 든든한 존재였지만, 적으로 마주한다면 그 이상으로 꺼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밴시 퀸 올리비아였다.

원래 언데드로서의 유령체들은 특정한 사념의 응집체로, 그 자체적으로 품은 살의 덕분에 어느 수준 이상의 강자라면 감지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통솔하는 유령들은 경우가 다르지. 그녀는 그것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성을 제외한 사념을 일시적으로 제거할 수 있으니.'

특유의 욕망도 살의도 품지 않은 단순한 영체는 감지하는 것 자체가 까다롭다.

물론 그렇게 되면 개체의 사고력과 판별력이 떨어져, 쓸 만한 정보를 추려내는 것조차 힘들게 되겠지만···.

그 또한 올리비아의 장기 중 하나였다.

분홍 머리의 여인이 복도를 지나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은 태생적인 이유로 그들을 감지하는 게 좀 더 수월했으나, 그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뭐, 그래도 인간들도 학습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니까. 전대만큼의 활약은 할 수 없겠지.'

결계에 특별히 신경만 쓴다면 그들의 침입도 막을 수 있을 테니, 이미 불사왕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위층들은 중요 시설마다 따로 조치했을 것이다.

그건 당장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저택 전체에 설치된 결계는 기본이고, 특히 방금 들어선 이 구역에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방범 설비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가.

벌컥—

그녀가 복도 한 편에 있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섰다.

'현 불사왕의 목적도 전대와 같을 테니까, 올리비아도 그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될 거야.'

대륙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불사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본능과도 같았다.

불사왕의 심장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힘을 얻었지만, 오히려 그것에 매몰되어 더 맹목적으로 거대한 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예전과 달라. 각지에 자리 잡은 세력은 물론이고, 교단의 영향력도 훨씬 커졌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 '역천의 서약'이 원하는 바였으며.

그녀가 불사왕의 신호를 무시하고 오히려 더 깊이 숨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또다시 그 불사의 군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걸. 더럽고, 냄새나고, 맛있는 것들도 없고.'

전대에는 지상에 소환되었다가 어쩌다 보니 불사왕에게 종속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지만, 삼백 년이나 지난 마당에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다른 언데드들과 자신은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뭐, 당분간 적당히 사리고 있으면 되겠지. 불사왕께서는 세계를 정복할 구상을 하느라 바쁘실 테니까~? 우리 같은 사회의 기생충들을 신경이나 쓰겠어?"

세상에 퍼진 유령들의 진짜 목적을 모르는 그녀가 그렇게 혼자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리고 있을 무렵.

똑똑—

"시아나 누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탁한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능글맞은 사내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야—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누님!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뺀질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그의 몸에서는 대낮부터 한바탕했는지 술과 향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시아나는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오히려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앤드류 씨~? 할 일은 다 마치고 그렇게 놀고 있는 거겠죠?"

"아··· 그게 말이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서늘한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 금발의 청년, 앤드류 위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브로코슬락 클랜의 수장이 바뀐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정작 그자에 대해서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네요."

"일단 알아낸 것까지만 들어보죠."

"예··· 일단 이름은 하인즈. 무력은 진혈 하나를 별 피해 없이 혼자 제압할 정도, 일반적인 진혈은 넘어섰지만 성혈까진 이르지 않은 것 같고요. 한 달 좀 전에 갑자기 탈라리아에 나타나 순식간에 클랜을 집어삼켜 버렸는데···. 그 이전의 행적은 불명입니다."

브로코슬락 클랜 내부가 「정제혈정」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데다, 이후 하인즈가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를 알아낸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당신, 너무 풀어진 거 아닌가요? 그동안 시간도 충분히 드렸던 것 같은데."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시아나에게는 괜한 엄살로 보일 뿐이었다.

"아— 좀 봐주세요, 누님! 제 능력도 그렇게 편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나마 이번에 능력이 강해지면서 간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아직 진혈을 직접 추적할 정도는 아니란 말입니다!"

이번 심연 개방에 일조하며 카르마를 수급한 그는 「궤적 관측」의 네 번째 강화를 마칠 수 있었다.

'직접 움직인 게 아니라 그런지, 기대했던 것보다 들어온 카르마가 적긴 했다만.'

그래도 이전까지 모았던 것과 합쳐서 고유스킬을 한 단계 강화하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시간과 장소, 또는 주변인을 특정해 진혈급에 이르는 강자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긴 했으나.

'아니, 진혈급 뱀파이어가 태평하게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툭하면 사라지고, 눈 깜짝할 새에 어디 딴 곳에서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다 파악 하냐고!'

그가 하인즈가 탈라리아에 들어선 순간을 파악한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능력은 일종의 CCTV 감식에 가까웠다.

지금도 대륙 전체에 뿌려진 그의 눈이 수십 개고, 조건만 맞는다면 언제든 그 위치를 변경해 과거를 읽어낼 수 있다지만···.

'그걸 일일이 살펴봐야 하는 건 나 하나란 말이지. 아무리 정신력도 강화됐다고는 하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다 분석하고 있어?'

하지만 상급자가 뭐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확실하진 않은데···. 수도 탈라리아에 도착한 방향을 봤을 때, 인근의 라펠라 시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마세요. 괜히 복잡해지기나 하니까."

괜히 한마디 더 했다가 핀잔을 들은 앤드류가 시무룩해지자, 시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전에 한바탕 교단과의 충돌을 겪으며 탈리아 왕국에 심어뒀던 이들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거기다 브로코슬락 클랜이 새로운 체재 아래 더욱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수작을 부리기 더 어려워졌다.

여러모로 그간 준비하던 계획이 비틀린 것은 당연한 사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제 와서 그쪽과 다시 접촉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배제하는 수밖에."

"응?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누님? 뱀파이어들과 동맹 맺은 거 아니었나요?"

"우리가 동맹을 맺은 건 유페르쉬 클랜이니까요. 마침 그들은 지닌 무력에 비해 정치적인 입지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 이참에 브로코슬락을 밀어버리고 그들에게 탈리아 왕국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들은 본거지를 제국에 두고 전 대륙적으로 활동하는 클랜으로, 도시의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전형적인 뱀파이어들이었다.

"음··· 저쪽에도 성혈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괜히 피해가 커지지 않을까요?"

"그래봤자 죽을 날만 기다리며 동면에 든 과거의 망령일 뿐. 거기다 유페르쉬 클랜에는 제대로 성혈을 계승한 비스크 유페르쉬말고도 진혈이 넷이나 더 있으니, 브로코슬락의 성혈이 깨어나기도 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을 테죠."

그렇게 말을 마친 시아나가 자줏빛 눈을 요사하게 빛내며 살짝 눈웃음쳤다.

"뭣하면 우리 쪽에서 살짝 도움을 줘도 되는 일이니까요."

"뭐, 그런 일은 시아나 누님이 알아서 하십쇼. 그럼 전 다시 이전에 하던 대로, 주기적으로 고위층들의 움직임이나 살펴보면 되겠습니까?"

"후후훗,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녀가 모략을 획책하는 흑막처럼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잠시 눈치를 살피던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님? 그··· 뿔, 나왔는데···."

"···아? 이런, 너무 마음이 풀어졌나 보네요. 밖에선 항상 긴장하고 있다 보니까, 이곳에만 오면 이런단 말이죠."

"아하하— 그, 그렇죠. 긴장을 푸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는 게 좋죠."

시아나의 머리에 돋아났던 한 쌍의 날카로운 뿔이 다시 스르륵 줄어들며 사라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노는 것도 적당히 하도록 하세요, 앤드류. 아니면, 제가 같이 놀아 드릴까요?"

"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누님. ···아직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 말한 앤드류 위버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다가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누가 봐도 자신을 무서워하는 모습이었지만, 항상 있었던 일이기에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에 혼자 남은 그녀, 삼백 년도 전에 대륙에 소환되었던 악마족 서큐버스 시아나는—.

유페르쉬 클랜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통신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106

굴러 온 호박 (1)

"···그래서, 이제 어떡하지?"

"흐음···."

할리가 포함된 북부 산맥 파티는 지금, 지하 토굴 속에 몸을 숨기고 위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확실히, 느껴지는 기세가 무시무시할 정도군.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기사 로빈이 그 괴물의 기세를 가늠하고는 침음을 흘렸다.

내부의 모든 기척을 차단하는 결계가 없었으면 이렇게 태평하게 감상을 늘어놓고 있지도 못 했을 터.

"어휴— 횟수 제한 때문에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는 건데. 이번 탐사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뭐,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자오닉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히 토굴 내부를 다듬어 증축해 나갔다.

이렇게 순식간에 저 예민한 괴물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결계를 펼칠 수 있는 마도구가 흔한 물건일 리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그가 지금까지 그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데다, 이번엔 그들 파티도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 이미 그 값은 톡톡히 했다고 봐도 되리라.

"···몸무게가 엄청나. 거기다 이족 보행이고. 오우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덩치가 훨씬 큰 것 같아서 확신이 안 드는군."

"지금은··· 위에 있는 시체들로 식사하는 중인가? 하긴, 저 덩치를 유지하려면 어지간한 먹이론 어림도 없겠어."

"저희가 한 상 거하게 차려준 셈이로군요. 자오닉 님이 보르도를 빨리 묻어 주셔서 다행이네요."

길잡이와 레인저들은 나란히 흙벽에 귀를 대고 놈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일단 싸움을 피하기는 했지만,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할리는—.

'저 곡괭이···.'

이미 위쪽에서 어슬렁거리는 괴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도 자오닉의 손에 들린 채, 소리 없이 지하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는 비범한 곡괭이만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

일행이 드워프 자오닉과 처음 조우했던 날, 할리는 그가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한 것처럼 순식간에 땅을 파고 숨어들어 결계를 발동했던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결계 마도구와 함께 활약했던 물건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는데.'

하지만 자오닉이 자신의 아공간에서 꺼낸 그 곡괭이를 직접 본 순간, 그는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 드워프 자오닉 스틸스톤의 혼과 땀이 서린 저 연장이 바로, 「커스터마이징」의 제물이 될 수 있는 매개체라는 것을!

'세계수의 가지처럼 뭔가 상징적인 물건만 가능할 줄 알았는데, 저런 개인 소지품으로도 되는구나. ···이렇게 되면 계획 변경이다.'

처음엔 일행을 안전한 이곳에 숨겨두고, 혼자서 위에 있는 저 괴물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저걸 손에 넣어야겠어.'

이만한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는가?

이런 건 얻을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얻어둬야 했다.

그런데 그 탐욕 어린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곡괭이를 휘두르며 공간을 증축하던 자오닉이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할 말 있는가?"

"아— 그냥 훌륭한 곡괭이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군. 나도 삽질은 꽤 하는 편인데, 고작 몇 분 만에 이만한 깊이의 굴을 파낼 정도라니. 대단해서 말이야!"

할리의 그 진심이 담긴 칭찬에 살짝 경계가 어렸던 자오닉의 얼굴이 풀어졌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작품이 칭찬받았으니 기쁜 것은 당연하겠지.

"오호, 자네 제법 보는 눈이 있구만! 외모는 누구보다 전사같이 생겼는데, 무기도 아닌 연장을 알아보고 말이야!"

그리 생각했는데,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다들 멋진 무기에만 감탄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 장인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최고의 장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 대장간에서는 망치와 모루도 전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지. 여기엔 이 '엘린느'만 데리고 왔지만···."

할리의 칭찬이 뭔가 그의 스위치를 건드렸는지, 그렇게 한참 동안 곡괭이 '엘린느'에 대한 열변이 이어졌다.

온갖 귀중한 레어 메탈을 조합하고 몇 날 며칠을 두들기고 두들겨, 마침내 드워프의 비의인 '장인의 혼'까지 담아 마도구로 재탄생 시킨 곡괭이.

대지 속성이 가득 깃든 이 연장은 그 어떤 단단한 지반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며.

작업 속도 증가, 진동 및 소음 감소, 체력 보조 등 사용자를 위한 보조 기능도 충실히 갖추고 있었으니—.

가히 곡괭이계의 신병이기(神兵利器)라고 할 수 있었다.

"난 최선을 다한 작품을 만들 때에는 철광석 하나조차 직접 캐서 사용하거든! 광석도 어떻게 캐느냐에 따라 질이 달라지고, 장인의 숨결을 더 잘 받아들일 수···."

그렇게 마치 애인이라도 자랑하듯 한창 엘린느의 대단함을 강조하던 자오닉은 이어서 그 탄생 비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넘어갔다.

북부 산맥의 풍부한 희귀 광물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아오니아 백작령에 정착한 것과, 위험한 장소에서 안정적인 채취를 하기 위한 곡괭이의 필요성까지.

"전대 영주 때 만들어서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우리가 함께한 지 벌써 20년은 넘었구만! 그동안 이 아이와 같이 산맥을 탐험하며 무수히 많은 난관을 헤쳐 왔지. 이번 일처럼 규모가 큰 일은 처음이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과 엘린느는 함께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자오닉이 굳은 의지로 곡괭이를 움켜쥐었다.

'과연··· 그랬군.'

저 곡괭이는 단순히 그가 열정을 가지고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탄생한 후로도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업을 쌓아온, 자오닉의 20년간의 역사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가만히 그의 열변을 경청하던 할리가 그의 뿌듯한 눈길을 따라 엘린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만 그 눈빛은 애정 어린 자오닉과 달리 음습하기 그지없었는데···.

츄릅—

'아, 자꾸 입술이 마르네.'

벌거벗은 몸에 문신이 가득한 근육질 거한이 음흉한 눈으로 입술을 핥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범죄 미수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다들 자기 할 일에 바빴던지라 그것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저마다의 긴장 속에서 숨을 죽이며 휴식을 취하던 것도 잠시.

"어?"

"괴물이···."

위쪽에서 식사를 마친 괴물에게 변화가 생겼다.

만족할 만큼 배를 채웠는지 놈이 그대로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어떡하지? 놈이 방심하고 있을 때 그대로 기습해?"

"이대로 땅굴을 파고 자리를 벗어나는 건 어때요?"

어느 쪽이든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결계는 이동식이 아니었을뿐더러, 놈은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간파하고 공격해 올 테니까.

"언제까지 여기에 죽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놈이 다른 곳으로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저 위쪽에 널린 몬스터 사체가 몇 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놈이 왜 여기 눌러앉았겠어?"

물론 놈의 덩치를 생각해 봤을 때, 그 정도 양으로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놈보다 더 강한 놈들도 나타나게 될 거다."

기다린다고 상황이 마냥 좋아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고뇌에 빠져있을 때, 할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회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능력을 갖춘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쩌면 머리를 맞대면 좋은 방법이 나올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으흠흠!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결국 저 위에 있는 놈이 여기 눌러앉은 게 문제니, 어디 먼 곳으로 유인할 수만 있다면 해결되지 않겠나?"

"그렇기야 한데. 어떻게 그렇게 하냐가 문제지."

"내가 직접 나서지."

할리가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활짝 펴고 앞으로 나섰다.

"놈의 이동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 내가 놈을 도발한 후, 우리가 가야 할 곳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 숨어버리면 간단하지!"

"···할리 네가 직접? 저 괴물의 감지 범위가 범상치 않은 것 같던데, 따돌릴 수 있겠어?"

"파하핫! 걱정하지 마라.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놈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니까!"

그간 함께하며 그의 비범함을 지켜본 일행은 그 말에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할리라면···."

"그래도 괜찮을까? 차라리 다 같이 싸우는 편이···."

한 명에게만 위험을 떠넘긴다는 생각과 그것이 가능할 지에 대한 여부로 일행의 의견이 분분해졌을 때.

그 틈을 노리고 할리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크흠,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놈에게서 완전히 도망가기엔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약간의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그리고 그의 은근한 시선이 자오닉에게 항했다.

정확히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곡괭이, '엘린느'에게였지만.

꿀꺽—

입 안에 고이는 군침을 조심스레 삼키며, 그는 내색하지 않고 자오닉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자오닉, 네가 만든 그 비범한 곡괭이의 굴착 능력이 있다면, 안전하게 일을 마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군!"

"으···으응?! 엘린느를···?"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리자, 무언가 불안을 감지한 자오닉이 화들짝 놀라며 자기 품에 곡괭이를 끌어안았다.

누가 봐도 주기 싫어하는 모습에 할리는 더욱더 강하게 어필했다.

그것의 도움만 있다면 자신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테고, 그럼 모두가 무사히 이 산맥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거 줘!'

강한 의지가 담긴 그의 눈빛에 자오닉이 식은땀을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사···사이즈가 안 맞을 텐데?"

확실히 드워프인 그의 신장은 할리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 신장에 맞춘 곡괭이는 할리에게 호미에 불과할 터.

하지만 할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륙 최강의 곡괭이 엘린느라면 그런 문제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거다. 그리 생각하지 않나?"

"아, 그거야 물론이지! 하, 하지만···."

하지만, 자오닉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모두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할리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간 애지중지해 왔던 연장이기는 하나 장비는 장비일 뿐이었다.

온갖 귀중한 재료를 때려 박고, 꾸준히 관리해 왔다고 해도 장비란 원래 소모품.

거기다 가장 소중한 보물인 대장간 망치도 아니니···.

'아니, 이건 아니지! 미안하다 엘린느···. 차별할 생각은 없었단다. 나에겐 모두가 소중해.'

잠시 혼란에 빠졌던 자오닉은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떨리는 손으로 할리에게 곡괭이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 좀 망가져도 좋으니, 다시 돌려주기만 하면 내가 돌아가서 더 좋은 무기로 보답하지."

"음!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확답은 줄 수 없겠군!"

일반적으로 볼 때, 그는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전투 중에 파손될 수도, 분실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니다. 괜한 말을 했군. 아무리 귀한 장비라고 해도, 자네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 여차할 땐 무리하지 말고 포기해도 괜···괜찮···. 크흡!"

할리가 곡괭이를 받아 들었지만, 자오닉은 애틋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이별뿐이라고.

할리도 처음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곡괭이를 쥔 팔에 힘을 주고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려서 떠오르는 자오닉.

좌우로 흔들자 이리저리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털썩—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내 포기한 그가 손에 힘을 빼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멍하니 할리의 손에 넘어간 곡괭이를 바라보는 얼굴이 마치 애인을 빼앗긴 듯한 표정이라 기분이 찝찝해졌다.

나쁜 놈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 나쁜 놈이 맞긴 하군. 난 이걸 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저렇게 상심한 모습을 보니 다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곡괭이를 옆구리의 벨트에 걸었다.

'미안, 대신 목숨을 구해주잖아? 어차피 내가 없었으면 다 죽었을 테니까, 우리 그걸로 퉁치자.'

애처로운 자오닉의 모습을 보자 잠들었던 광증이 갑자기 들불처럼 솟구쳤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앞에서 곡괭이를 핥고 비웃으면서 내려다보는 건 좀 아니지!'

'광기'의 영향 탓인지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미친 충동이었지만, 그렇게까지 선 넘은 짓을 하면 지금까지 보였던 영웅적인 모습도 확 쓸려나가 버릴 것이다.

그래, 그런 건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겠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런저런 사건이 빵빵 터지며 카르마 포인트가 이미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차올랐다는 것이었으며.

'아주 좋군. 그럼 이름은 뭘로 하지?'

결국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엘린느가··· 아니.

드워프가.

#107

굴러 온 호박 (2)

'오우거랑 비슷하다고 했던가.'

할리가 지상으로 나오기 전,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이들이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괴물을 분석한 결과였다.

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아서 확신하지는 못한다고 했었는데, 그는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놈을 직접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크워어어—!"

오우거는 몬스터들이 넘쳐나는 이곳 북부 산맥에서도 최상위 포식자였다.

평범한 창칼은 박히지도 않는 질긴 가죽, 금속보다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있는 뼈대, 영양만 충분하다면 어지간한 부상은 금방 회복하는 준수한 재생력.

거기다 무기이자 방어구인 어마어마한 밀도의 근육이 빽빽하게 들어찬 데다, 사냥을 용이하게 해주는 예민한 감각까지 더해진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이전에 제법 강한 수준이었던 할리도 오우거를 상대하다 사경을 헤멜 정도였으니.'

유일한 단점이라면, 그 압도적인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사냥하고 먹는 데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었지만···.

몬스터가 풍부한 이 북부 산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콰지지직—!

그리고 지금, 할리는 나무를 부수며 달려드는 오우거와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놈의 붉은 눈동자 두 쌍과 눈이 마주쳤다.

"크후우—!"

"크카카캇!"

그래, 한 쌍이 아니라 두 쌍이었다.

6미터를 넘어서 7미터에 이른 신장과 일반적인 오우거보다 훨씬 비대한 부피를 자랑하는 몸집.

무엇보다, 그 어깨 위에 달린 머리가 두 개였다.

'트윈 헤드 오우거···.'

광기로 붉게 물든 네 개의 눈동자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상어 같은 이빨이 돋은 두 개의 입에서는 이미 타액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상위종일수록 광기의 영향을 받기 쉬울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할리가 그런 것처럼, 몬스터의 몸에 깃든 광기는 포식자에게 흡수되어 계속해서 누적된다.

그런데 대식가로 유명한 오우거가 산맥의 안쪽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몬스터들을 잡아먹어 왔다면···.

'거기다 몸은 하난데 광기에 영향을 받는 머리가 두 개다?'

뇌와 같은 사고(思考) 기관은 몸에 깃든 광기가 표출되는 통로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두 개라면 다른 몬스터보다 두 배의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소리.

물론 그만큼 에너지 소비도 많아지겠지만, 온종일 먹기만 하는 녀석에게는 딱히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키에엑!"

할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를 피해 슬쩍 몸을 비틀며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놈을 유인하기 위해 산맥의 안쪽으로 이동한 지 약 30분, 사방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콰드득— 콰직!

그리고 질주하는 할리를 잡기 위해 달려든 그 자잘한 몬스터들은 그의 뒤를 따라 달려오던 트윈 헤드 오우거의 손에 잡혀 그대로 놈의 입안으로 직행했다.

마라톤 선수가 코스에 놓인 물병을 낚아채듯, 양손을 움직여 부지런히 두 개의 입에 쑤셔 넣고 씹어 삼키는 모습은 마치 경건한 노동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끄이익!"

"쿠헉!"

연신 울려 퍼지는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정말 쉬지 않고 먹어 치우네. 뭐, 이 정도 거리면 되겠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산맥을 내달리던 할리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섰다.

당연하지만 정말로 놈을 따돌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보다 저 몸 하나에 응축된 광기의 양이 더 많은데, 아깝게 그걸 버리고 갈 수는 없지!'

그가 자리에서 멈추자, 트윈 헤드 오우거 뿐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그를 노리고 밀려들기 시작했다.

광기에 온전히 물들지 않은 지성체를 적대하도록 새겨진 본능이 그들을 채찍질 해, 그저 맹목적으로 살의를 드러내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할리는···.

"후우우—."

사고가 급격히 가속하며 느려진 시간 속에서, 서서히 광기를 깨우고 힘을 끌어올렸다.

전신의 세포가 일제히 활성화되자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광란의 야수」를 비롯한 스킬들이 한꺼번에 발동하며 그의 양 눈이 적색과 녹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

그동안도 비전 주술이라는 명목으로 부지런히 마석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저기를 보라.

오직 그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수많은 괴물.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막대한 양의 '광기'까지.

아! 이 얼마나 탐스러운가!

저것들을 전부 먹어 치운다면, 그는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뿌드득! 뿌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신의 근육이 비틀리며 팽창했다.

덩치는 3미터를 넘어서고, 비대해진 양팔에는 칼날 같은 손톱이 길게 뻗어진다.

다리 또한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났다.

엄밀히 따지면, 이전에 펼쳤던 전투 상태는 할리의 전력이 아니었다.

"크핫! 이거, 기분 끝내주는구만! 카하하핫!"

눈, 코, 귀를 비롯한 모든 감각 기관들이 극도로 발달해 주변의 정보를 끌어모으고, 길게 찢어진 입 안에는 어느새 상어 이빨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간 타인의 시선 때문에 마음껏 쓸 수 없었던 「돌연변이」와 「육체변이」를 최대한으로 발휘하자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형태가 되었지만···.

"크카카캇!"

그로 인해 증가한 전투력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휘잉— 휭—

할리의 등에 매달려있던 두 개의 도끼가 파공성을 내며 떨어져 나와 허공을 맴돌았다.

이윽고 왼쪽 눈에서 타오르는 녹색 불꽃이 옮겨붙은 도끼들은, 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대는 놈들을 향해 날을 돌렸다.

"진수성찬이로구나!"

그렇게 그의 몸에서 솟구친 광기가 온몸을 지배해 전투 태세가 갖춰진 순간.

"키엑?"

"쿠워억—?"

몬스터들의 반응이 이상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까지 까뒤집으면서 그를 잡으려 들었건만, 이제는 멈칫하며 주변을 살피는 것이···.

'뭐야? 갑자기 적대감이 사라졌어? ···아니, 설마 같은 몬스터로 보는 건가?'

심지어 지금까지 맹렬히 쫓아오던 트윈 헤드 오우거도 뭔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놈은 같은 몬스터도 거리낌 없이 잡아먹을 만큼 호전적인 성격이었지만, 단순히 한 입 식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나를 쫓아다니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할리는 붉어진 시야와 뇌 속에서 요동치는 광기를 느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광기에 완전히 잡아먹혔다고 인식했나 보군.'

의도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이제 놈들의 먹이 생태계만 피해서 마음대로 몬스터들의 틈을 활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지금은···.

"선빵 필승!"

콰앙—!

그가 바닥을 박차며, 지척까지 다가온 트윈 헤드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크웡—!"

"크카캇!"

가만히 할리를 바라보던 놈도 곧바로 그 공격에 대응했다.

일단 충돌이 발생하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 또한 놈들의 생태였으니까.

그렇게 인간형 야수와 거대한 괴수가 맹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을 때.

"흐음, 과연. 재미있는 곳이군."

할리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장소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케에엑?"

"끄륵—?"

그와 동시에 할리에게 몰려들었다가 어정쩡하게 뭉쳐있던 몬스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거친 수목이 우거진 산림의 한가운데에,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구김살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진 검은 연미복.

시원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창백한 피부, 붉은 눈동자.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드러나는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브로코슬락 클랜의 새로운 로드이자, 탈리아 왕국의 암중 지배자인.

하인즈 2세였다.

"크워어어—!"

사방을 둘러싼 몬스터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하인즈에게 달려들었다.

할리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던 트윈 헤드 오우거의 한쪽 머리도 잠깐 그쪽으로 향할 정도였으니, 그의 등장이 얼마나 놈들의 이목을 끌었는지 알 수 있었다.

"광기에 물들었더라도 생명체는 생명체."

하지만 하인즈는 자신을 에워싼 채 덮쳐오는 몬스터들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그 몸에 피가 흐르는 이상, 의미 없는 발악이다."

춤을 추듯 부드럽게 도는 몸과 함께··· 오른손이 그의 주변으로 원을 그렸다.

그리고.

쉬아악— 푸확!

그 궤적에 걸린 괴물들의 몸뚱이가 그대로 토막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신장이 워낙 제각각인지라 목과 허리, 다리 등 잘린 부위는 제각각이었지만···.

당장 살아남았다고 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곳이 피바다가 되어 버린 이상은.

「피의 신비」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주인의 몸에서 벗어난 알록달록한 피의 통제권이 일제히 하인즈에게 종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철의 의지로 벼려져, 살의를 갖춘 무기가 되었고.

"뀌이익!"

"크헤엑!"

아직 숨이 붙어있던 몬스터들을 유린하며 서서히 그 몸집을 불려 나갔다.

피가 피를 부르고, 그 피는 다시 규모를 키워 더 많은 희생을 야기했다.

"흠···."

압도적인 광경이었건만, 그것을 바라보는 하인즈는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몬스터의 생체력 때문인지 통제가 잘 안돼. 거기다 핏속에 깃든 염(念)은 그리 강하지 않은데,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광기가 좀 거슬리는군.'

숙주가 죽은 순간부터 몸에 깃든 광기는 휘발되기 시작하지만, 갓 죽은 따끈따끈한 몬스터의 피 안엔 아직 상당량의 광기가 잔존해 있었다.

만약 그가 「혼혈진화」로 압도적인 혈액 통제력을 손에 넣지 못했다면 이런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할 수는 없었으리라.

지금의 그는 일정 수준 이하의 생명체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물론 그 말은, 수준 이상의 상대에게는 큰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도 되었지만···.

"크워어···!"

스칵—

"···어억!"

피의 폭풍을 몸으로 뚫고 다가온 트롤의 목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하인즈의 손끝에서 재차 사출된 초고압의 핏줄기가 놈의 뇌와 심장을 동시에 파괴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거기서 거기지. 어디, 이놈들은 어떤 맛인지 잠깐 확인··· 큽, 퉤—!"

그는 슬쩍 사냥한 몬스터의 피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곧바로 뱉어냈다.

광기에 물든 몬스터의 피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뱀파이어는 희생자의 피를 마시는 의식으로 그곳에 담긴 생명력과 마나를 갈취해 힘을 얻는다.

애초에 몬스터의 피는 마나가 변질된 생체력이라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흡수 효율이 좋지 못했는데, 거기에 광기의 오염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쯧, 혹시나 했더니. 어쩔 수 없지."

하인즈는 여전히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꾸준히 학살하며, 피를 조종해 놈들의 심장에서 마석을 뽑아 한곳에 모았다.

휘익— 탁!

그리고 녹색 빛에 휩싸여 자신에게 날아온 곡괭이 '엘린느'를 낚아채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아공간 마도구에 집어넣었다.

이 또한 하인즈가 이곳까지 직접 온 이유 중 하나.

'마침 하인즈는 당장 할 일도 없었으니까.'

정보 수집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했고, 세력을 키우는 것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거기다 할리는 대량 학살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니,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면 곤란할거라 생각해 미리 하인즈를 대기시켜놨던 건데···.

'광기를 완전히 해방하면 몬스터들에게 선공을 받지 않는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래도 곡괭이를 회수하려면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이렇게 마석도 많이 모았으니 상관없겠지.'

하인즈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선을 돌려 할리를 바라보았다.

"크하하핫! 고놈 참 질기구나! 찢는 맛이 있어!"

"끄워어엉—!"

트윈 헤드 오우거는··· 아니, 이제 다시 '싱글 헤드 오우거'가 된 녀석은 자기 신장의 절반도 안 되는 할리에게 전신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야수의 형상이 된 그가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놈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뭐, 사실 할리는 원래 맨손이 더 강하긴 했지.'

잠시 문명사회에 녹아드느라 무기를 애용하긴 했으나, 애초에 그의 주 무기는 괴물 같은 육체 그 자체였다.

푸욱!

마침내.

날카롭게 뻗은 손톱이 오우거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할리는 마석과 함께 그 심장을 통째로 뽑아냈다.

콰직! 콰지직!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씹어 삼키자 지금까지 흡수한 양을 웃도는 광기가 한순간에 몸속을 휘돌았다.

심장이 과하게 뛰고 혈류가 빨라지며, 근육이 팽창하면서 전신에서 열이 뿜어졌지만···.

'뭘 새삼 이제 와서.'

이제는 익숙한 증상일 뿐이었다.

머리를 시끄럽게 울리는 광기의 속삭임을 무시한 할리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공중을 날아다니던 도끼를 잡아 다시 자신의 등에 걸었다.

"으하핫! 땀을 좀 뺐더니 개운하구만! 그럼 간식을 먹어 볼까?"

그는 그대로 자잘한 몬스터들의 마석이 한가득 쌓인 곳 앞에 주저앉아 한 움큼씩 쥐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까득! 까드득!

광기와는 별개로 트윈 헤드 오우거를 통해 육체가 더 강화된 것은 물론 에너지 저장 효율도 상승한 만큼, 미리 잔뜩 채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리가 평화로이 영양제를 섭취하던 순간.

[쿠오오오오——!]

산맥의 안쪽에서, 막대한 기운이 담긴 포효가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어마어마한 파동에 대기가 흔들리고 사방의 마나가 진동했다.

그 소리에 담긴 존재감에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저도 모르게 극도의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건?'

할리와 하인즈 2세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시작된 방향으로 향했다.

기운 자체는 다르지만 최근에 이와 비슷한 울림을 꽤 자주 겪어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한스가, 그의 부하 엔트라시오로부터.

그 말인즉슨, 이 포효의 주인은 바로—.

'드래곤?'

북쪽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이 깨어났다.

#108

굴러 온 호박 (3)

[크워어어어——!]

산맥 안쪽에서 재차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영적인 압력이 담겨 격하의 존재를 억압하는 소리에 할리와 하인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들에게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본능을 자극하는 이 울림이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이 근방에 둥지를 튼 드래곤이 있었나.'

애초에 광활한 북부 산맥의 자락이었으니, 드래곤 한 마리 정도 틀어박혀 있어도 이상할 것 없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가 광기에 이렇게 잡아먹혔다고?'

아까부터 들려오는 놈의 포효 소리가 도저히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언데드인 본 드래곤이 되며 그 소리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겼던 엔트라시오처럼, 지금 놈에게서는 광기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일단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하군.'

몬스터가 광기에 영향을 받기 쉽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은 몬스터보다는 지성체라고 봐야 하는 존재였다.

그것도 아우테리카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최고의 지성과 능력을 갖춘 생명체였는데···.

까드득! 까득!

할리가 부지런히 마석을 씹어 삼키는 와중에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희소하다는 드래곤이 여기에 있었던 데다, 지금 상태까지 좋지 않다는 거지?'

안 그래도 그 개체수가 적었던 그들은 두 차례의 불사왕 사태를 거치며 더욱 수가 줄어, 이제는 거의 멸종 위기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으려는 불사왕은 드래곤에게도 위협적인 적이었고, 당연히 그들은 대륙 연합과 함께 힘을 합쳐 불사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초대 불사왕은 대륙 정복의 최대 걸림돌이 될 드래곤들을 먼저 철저하게 사냥하는 데 주력했다.

설령 다른 전선에서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그들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

그 덕분에 대륙 연합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드래곤들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탄생한 두 번째 불사왕은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후에 이온 대륙에서는 드래곤을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먼 동부 지역에서나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들의 성향을 봐도 쉽게 타락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왜 당장 한스에게 계승된 언데드 드래곤이 엔트라시오 하나밖에 없겠는가.

'그 고고한 자존심 때문에 불사왕에게 잡힐 것 같으면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자폭하는 것은 예사요, 설령 사체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거부 반응이 심해 언데드로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지.'

한스에게 계승된 전대의 정보를 통해 파악한 당사자들의 생생한 정보였다.

심지어 어찌어찌 언데드로 되살렸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한 다른 드래곤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 어떻게든 파괴해 버렸다고 하니.

자신은 물론 동족의 타락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엔트라시오가 한스의 손에 들어온 것만 해도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었어.'

그런데 그런 드래곤이, 대륙 전체에 광범위하게 살포되면서 인간에게도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는 수준의 광기에 잡아먹혀 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사실 어찌 된 일인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크하하핫! 드래곤이라니! 이게 웬 떡이야?"

하인즈가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치켜올렸고, 마석을 전부 먹어 치운 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사실 자세한 내막은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드래곤 고기는 무슨 맛일까!"

신이 난 할리가 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방금 에너지를 빵빵하게 채워서인지 그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용혈이라면 광기만 제거하면 먹을 수 있겠지. 괜찮은 보양식이 되겠군."

그런 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인즈가 가볍게 자신의 연미복을 정리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그의 목적지 또한 포효의 발원지.

드래곤이 있는 곳이었다.

***

-아파, 괴로워, 내가 왜 이런 꼴이, 역시 죽이자!

-그놈 때문이야. 그놈이라니 누구지? 무능한 인간들, 멍청한 엘프들, 냄새나는 드워프들! 또··· 또 있었던 것 같은데?

-다쳤으니 회복해야 해. 회복을 위해선 잘 먹어야지. 그러니까 먹자. 잔뜩 먹자!

[쿠오오오오——!]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레드 드래곤, 헤라토스는 몽롱한 기분으로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니 좀 더 이것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았다.

어째선지 오랜 시간을 정양하며 보내야 했던 몸 상태가 급속도로 회복되어서, 이제는 마음껏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군, 아주 좋아. 생각보다 더 빨리 회복되었어. 역시 이 몸은 위대하다!'

헤라토스는 삼백 년 전 2대 불사왕과의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드래곤이었다.

아직 어려서 참전하지 못했던 초대 때와는 달리, 그가 직접 겪은 전투는 생각보다 더 수월했다.

대륙인들은 물론 드래곤들도 바보가 아니었고, 여러 대비를 통해 전보다 더 효율적인 대처를 했으니 당연한 일.

그러고도 서부 지역이 통째로 넘어가고 제국 하나가 패망하기는 했지만, 초대에 비하면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선방한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활약에 취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여기가 어디··· 아! 내가 만들었던 곳이지. 근데 뭐 때문에 만들었더라?'

결과적으로 불사의 군대와 싸우다 함정에 빠진 헤라토스는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무수한 강자들도 속절없이 죽어가던 대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었지만, 그가 입은 부상은 절대 그렇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거대한 몸 곳곳에 깊은 상처가 생기고, 그곳을 통해 심연을 머금은 죽음의 기운이 파고들었다.

그 어떤 회복 마법도, 성법도 통하지 않는 필사(必死)의 저주에 죽음만 앞두고 있던 헤라토스에게···.

마지막 행운이 찾아왔다.

때마침 몸을 갉아 먹던 저주의 주체인 불사왕이 결사대에 의해 토벌된 것이다.

그로 인해 시시각각 죽음으로 치닫던 그도 기사회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위중한 상태였던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회복을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을 사용했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맞아. 이곳에서 나가려고 했지. 배가 고프니 오랜만에 실컷 먹어야겠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북부 산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안전을 위한 온갖 결계를 설치해 동면 준비에 들어갔다.

드래곤의 동면은 수백 년간 이어지며, 그동안 신체의 성장과 회복력이 극도로 활성화되는 만큼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친 몸으로 그 모든 결계를 설치하는 건 정말 죽을 노릇이었지만, 그동안 아껴왔던 온갖 마도구들과 자기 피까지 매개로 사용해 기어코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마지막 행운이 지나고 그에게 찾아온 불행이 있었으니—.

회복력을 최대한으로 증폭하기 위해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으고, 몬스터를 유인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결계도 함께 설치한 것이었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재차 심연이 열려 세상 전체에 '광기'가 퍼지고, 그의 영역에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의 몸에도 그것이 가득 쌓이게 될 줄은.

당연히 결계에는 온갖 이상 상황에 대한 방비가 갖춰진 상태였지만, 거기에 심연의 광기에 대한 대처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동면에 빠진 그의 몸속에 계속해서 광기가 쌓여가고, 그것은 마침내 그의 뇌리를 완전히 오염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크워어어어——!]

펄럭—! 펄럭—!

자신이 만든 둥지에서 빠져나온 헤라토스가 거칠게 날갯짓했다.

몸은 이미 깔끔하게 회복된 뒤였다.

제법 오랜 시간 동면하기도 했거니와, 그 몸에 축적된 광기의 양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으니까.

'아아— 이 상쾌한 공기. 그런데 조금 아쉽군. 여기에 피 냄새만 조금 더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타는 냄새도 좋고.'

광기에 완전히 잠식당한 그의 사고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온갖 비약을 거쳐 황당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인근에 인간 도시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다 브레스 한 발 쏴 주면 되겠군!'

그럼 타는 냄새와 비명 소리를 한 번에 만끽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먹이들을 생으로 씹다 보면 혈향도 함께 음미할 수 있겠지.

드래곤인 헤라토스는 마나를 흡수하는 것만으로 살 수 있어 무엇을 먹을 필요도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광기에 잠식된 그는 영역 주변에 널려있는 몬스터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인간들이 많이 있을 만한 곳으로 가기 위해 거리를 가늠했다.

'그럼, 가 볼··· 응?'

그 순간.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전신에서 폭발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존재.

'···인간? 아니, 정말 인간 맞나? 거기다 하나 더 있었군.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이건 뱀파이어인가?'

주르륵—

그들을 인식하자 그의 거대한 입에서 군침이 흘러내렸다.

두 눈은 이미 새빨갛게 변해 한 톨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헤라토스는 자신의 상태에 조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단, 전채 요리로 저것들부터 먹어볼까···?'

갑자기 치솟는 식욕에 지배당했을 뿐.

"카하하핫! 진짜 살아있는 드래곤이잖아! 와우, 이런 건 처음인데!"

"완전히 광기에 잡아먹혔군.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는가가 관건인가."

순식간에 헤라토스의 앞에 도달한 유사 인간과 뱀파이어가 차분히 그를 관찰하며 저마다의 평을 내놓았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식자재들이 뭐라 떠들든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

'저 육즙이 많아 보이는 놈부터 먹을까? 씹을 때마다 생명력이 팡팡 터져서 맛있을 것 같은데. 뱀파이어도 제법 별미가 될 것 같고.'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의 뛰어난 머리가 자신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광기에 물들었던 뇌가 재차 논리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왜 자신이 저들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는지.

그 결과.

[크어엉——!]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래! 그냥 둘 다 한꺼번에 먹어버리면 되는 것을!'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본격적인 식사는 인간 도시에서 할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그냥 한입에 털어 넣어 버리고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헤라토스는 한층 강화된 육체 능력으로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고···.

"후웁—!"

후욱— 콰아앙—!

이미 전투 태세였던 할리는 가볍게 그 자리를 피하며,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손으로 그 거대한 머리를 올려 쳐 버렸다.

[끄르륵——?]

갑작스런 충격에 헤라토스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그의 콧잔등에 시커먼 인영이 소리 없이 내려서고.

"실례."

쉬악— 촤악!

그의 양손에서 사출된 날카로운 핏줄기가 순식간에 그 거대한 눈동자를 베어버렸다.

헤라토스가 엄청난 반응속도로 눈꺼풀을 덮었지만, 어디 하인즈의 공격이 그런 얇은 가죽으로 막을 수 있기야 하던가.

눈꺼풀이 베이며 양 눈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분노였을까.

피가 흐르는 눈을 질끈 감은 드래곤의 거친 포효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이 폭발하며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 공격에 잠시 뒤로 물러섰던 하인즈는 재차 놈에게 달려들려다 잠시 멈칫했다.

"···벌써 회복됐군."

어느새 붉게 이글거리는 눈을 뜬 헤라토스의 눈은 상처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채였다.

'눈꺼풀 때문에 공격이 좀 얕게 들어갔다고 느끼긴 했지만.'

놈의 반응 속도와 가죽의 내구성도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다 저런 무지막지한 회복력과 압도적인 거체에서 가해지는 파괴력까지 생각해 보면···.

"카하핫! 이거, 우리 둘이서는 힘들겠는데?"

물론 하인즈와 할리가 놈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신체 스펙도 절대 무시할 수 없거니와, 보아하니 저 드래곤은 광기로 육체 능력이 급증한 대신 마법 능력은 오히려 퇴화한 것 같았으니까.

거기다 드래곤이란 명성에 맞지 않게 지능적인 면은 전혀 없고, 그저 본능에 충실한 거대한 도마뱀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정도 덩치의 도마뱀이 저런 재생력을 가졌으면··· 백날 두들겨봐야 소용없겠군.'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무한의 굴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니, 보유한 에너지에 한계가 있는 이쪽과 다르게 드래곤은 주변 기운을 빨아들여 회복할 수 있으니.'

결국 그들이 물러나는 결말밖에 없을 터.

저 거대한 덩치의 도마뱀을 상대하기에는 그들과 상성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만 있다면 그조차 무시할 수 있겠지만···.

진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와 야만 대전사 할리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안 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정도 수준의 상대를 데려오는 수밖에.

그리고.

허공의 한 지점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뭉쳐 들었다.

고오오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던 어둠은, 이윽고 한 존재를 그곳에 불러내고서야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태양이 버젓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세상의 밝기가 한순간에 내려갔으며.

[크흐흐흣— 광기에 물든 드래곤이라니. 이거 좋은 재료가 될 것 같구나!]

드래곤들을 멸종 위기로 내몬 재앙이.

그곳에 강림했다.

#109

광룡 사냥 (1)

스아아—

막대한 흑마력이 사위를 뒤엎으며 도주를 막기 위한 결계를 형성했다.

이 정도까지 판을 벌여놓고 이제 와서 놈을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검은 기운이 사방을 감싸자, 이제 이 결계 내부에는 오직 그들 넷만이 존재했다.

뿌드드득—!

"크하핫! 일단, 어디 되는대로 해 볼까?"

온몸에서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야수와 같이 몸을 부풀리는 할리.

"흠, 역시 놈의 피를 곧바로 조종하는 건 힘들 것 같군. 미쳤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거겠지."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피를 뽑아 날카롭게 벼리는 하인즈 2세.

[호오? 다른 생명력을 흡수한 흔적이 있구나. 그게 광기의 원인인가? 그래도 드래곤의 정신 방화벽이라면 그 정돈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동면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군.]

음산한 기운을 뿌리며 실험체를 보는 눈으로 차분하게 분석하는 한스.

마지막으로···.

[크르르르—— 부, 불사왕···! 불사왕——!!]

한스의 등장 직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얼어있던 드래곤 헤라토스.

하지만 정지 화면처럼 굳어있던 그가 어느 순간 서서히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에서 이글거리던 붉은 광기의 불꽃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터질 듯이 팽창했다.

휘오오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사방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주변에 광풍이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기류의 변화에 슬쩍 주변을 둘러본 할리는 곧바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기는 그저 여파에 휩쓸린 것뿐이야. ···이동하는 건, 대기에 흩뿌려져 있던 광기로군.'

일대에 퍼진 미세한 광기의 입자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며, 그 중심에 있던 드래곤에게 흡수되었다.

[키야아아아——!]

재차 광기에 찬 포효를 터트리는 헤라토스.

그리고 그 앞에서 대치하던 셋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는 놈의 모습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 좋아, 좋아. 알아서 농축까지 시켜 주다니 횡재했네. 저건 할리도 못 하는 건데.'

평생을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 성장하는 드래곤의 특성 탓인지, 놈은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달리 자의적으로 인근의 광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알아서 보상의 수준을 높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방해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불사왕! 죽인다! 죽여 버리겠다——!]

폭풍이 서서히 잦아들고, 마침내 모든 기운을 수습한 광룡 헤라토스가 한스를 노려보며 분노를 토했다.

놈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비늘은 한층 짙은 핏빛이 되었고, 지금도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육체는 한껏 벌크업되어 내재한 폭력성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광기는 숙주의 이성을 잠식해 강제로 수명과 생명력을 깎아 막대한 힘을 부여한다. 그 주체가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이라면 효과는 말할 것도 없겠지.'

거기다 좀 전의 과정을 통해 놈의 드래곤 하트에 응축된 광기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 여파로 인근 대기에 녹아있던 농도가 현저하게 감소했을 정도니···.

'금방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넓은 범위까지 영향을 미쳤나본데.'

범위가 좁았다면 다른 곳에서 흘러온 광기들이 금세 빈자리를 채웠을 터.

그야말로 광룡(狂龍)이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캬아아아——!]

눈이 뒤집힌 헤라토스가 미사일처럼 한스에게 쇄도했다.

놈의 주변을 감싼 압도적인 마력이 그 움직임을 보조해,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은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흐음, 굉장히 흥분했군. 전대 불사왕에게 원한이 있는 녀석인가?]

물론 그런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어느새 공격 궤도에서 벗어나 옆으로 이동한 한스는, 그 육중한 질량 병기의 여파로 흔들리는 대기를 느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놈을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렴 자신은 드래곤을 수도 없이 사냥한 불사왕의 후예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래, 역시 적당히 하는 게 낫겠군.]

한스가 전력으로 나서면 놈의 육체도 오염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얻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언데드 드래곤 하나뿐이다.

그것도 나쁜 건 아니다만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안이 버젓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면 일단 놈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겠는데.'

마침 지금 상황에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엔트라시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흑마력이 가득 담긴 한 마디.

그와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의 늪이 빠르게 지면을 뒤덮었다.

그리고.

푸확—!

바닥에 깔린 꿀렁이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용의 뼈가 몸을 일으켰다.

[크워어어——!]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긴 포효가 공간을 진동시키자.

[키야아아——!]

광기에 물든 울음이 그 뒤를 이었다.

한 자리에서 엔트라시오와 헤라토스, 타락한 두 드래곤의 시선이 부딪쳤다.

한때는 동족이었으나 이제는 적이 되어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존재.

이후의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오오오——!]

[캬아아아——!]

콰앙—!

곧 거대 괴수 두 마리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아마 생전에 제법 나이가 있는 녀석이었던 듯, 골격 자체는 엔트라시오가 헤라토스보다 3할가량 더 큰 편이었다.

하지만 뼈만 남은 몸으로 오히려 광기로 강화된 육체를 지닌 헤라토스를 근접전만으로 상대하기엔 무리인 게 사실.

거기다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기운도 봉인한 상태였으니, 엔트라시오는 그저 놈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애초에 그걸 원해서 부른 것이었지만.

'과하게 힘을 쓰면 고기나 피가 전부 상할 거 아냐.'

우리 아이들 먹일 영양식인데 유기농은 못 줄지언정, 농약은 최소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스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래곤 두 마리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마법진이 주변 공간을 수놓으며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순식간에 갖가지 신비를 엮어냈다.

'일단 저주류는 빼고 가 볼까.'

중력 사슬, 공간 고정, 충격 흡수 등.

하나같이 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들이었다.

커다란 덩치로 끈질기게 매달려오는 언데드 소환수와, 뭘 하려 할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흑마법사.

잠깐 방심할 때마다 인지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는 암살자와 미친놈처럼 달라붙는 야만 전사까지.

그렇게 다종족 파티의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광룡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콰드득!

광룡의 거대한 아가리가 본 드래곤의 목을 물어뜯었다.

생명력을 대가로 강화된 턱 근육과 날카로운 이빨은 드래곤 하트에서 공급되는 강대한 마력을 담고 있었고···.

콰지직— 콰직!

그 파괴력은 본 드래곤에게 각인된 방어 결계를 꿰뚫고 직접 목뼈에 도달하기에 충분했다.

[쿠오오——!]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엔트라시오의 목뼈.

끊임없이 공급되는 흑마력이 뼈를 강화하며 손상 부위를 실시간으로 수복하고 있었으나, 계속 내버려 두면 목이 완전히 부러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봐야 다시 붙이면 되니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 불사성이야말로 언데드의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

온갖 제약을 붙여 놓는 바람에 광룡에게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엔트라시오는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까다롭네.'

그렇지 않아도 항마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드래곤인데, 저 광룡은 거기서 더 강화돼 한스의 흑마법으로도 오래 붙잡고 있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냥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그 방법을 쓸 수가 없으니···. 딜레마로군.'

역대 불사왕이 드래곤을 쉽게 사냥했던 것도 그들이 다뤘던 죽음의 기운 덕분이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치명적인 그 맹독은 광룡에게도 충분히 유효할 테지만, 엔트라시오에게는 제약을 걸었으면서 정작 자신이 쓸 수는 없는 노릇.

[흐음,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볼까.]

유유자적 싸움을 내려다보던 한스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막대한 마력으로 한순간에 만들어진 수많은 마법진에서 재차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검은 섬광이 광룡의 몸 곳곳을 꿰뚫고,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그 몸을 감전시켰다.

거대한 폭발이 놈의 머리를 뒤흔들고, 단단한 만년빙이 관절 부위를 얼려 버렸다.

그렇게 광룡의 무지막지한 항마력조차 우습게 뚫고 들어오는 마법의 폭풍에 잠시 놈의 주의가 돌아간 순간.

촤악—!

어느새 유령처럼 나타난 하인즈가 길게 뽑아낸 피의 칼날로 놈의 턱 근육을 베어버리고.

"으하하핫!"

순식간에 몸을 기어오른 할리가 그 턱에 자신의 몸뚱이를 미사일처럼 꽂아 넣었다.

[크악——?]

그 틈을 타 광룡의 입에서 목을 빼낸 엔트라시오가 이번엔 자신이 먼저 놈의 목에 이빨을 틀어박았다.

잔뜩 금이 가 있던 목뼈는 이미 수복된 상태.

하지만 그건 턱 근육이 베였던 광룡도 마찬가지였으며, 목을 물린 것 또한 놈에게는 치명상이 아니었다.

'지적 능력이 퇴화해서인지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드래곤이란 종은 원래 의지만으로 마력을 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효율이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한껏 강화된 놈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퍼어엉—!

엔트라시오가 물고 늘어진 목 부근에서 고도로 응집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광룡은 그 여파로 자신의 몸이 상하든 말든 연신 충격파를 터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찌지직, 쫘아악—!

이빨에 걸린 살점이 사정없이 찢어발겨지며 사방으로 혈액이 비산했다.

덕분에 놈은 목을 물린 상황에선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일반적인 생명체였다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렀을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아하니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았지만.

'대신 마력을 원초적으로 쓰는 쪽이 더 발달했군.'

안 그래도 광기로 강해진 신체 능력에 마력까지 퍼부어져 근력, 순발력, 재생력 등이 폭증한 건 기본.

갑옷처럼 몸에 둘러진 마력 방벽, 이빨과 발톱에 어린 공격력 강화, 한 곳에 응집시켜 폭탄처럼 터트리는 충격파까지.

거기다···.

[흐우우웁——]

폭발적인 순발력으로 거리를 벌린 광룡이 한순간에 주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마력이 놈의 목구멍으로 밀집했다.

'브레스···! 빨라!'

순식간에 모여드는 그 파괴적인 마력의 유동은 예상했던 속도를 크게 웃돌았다.

거기다 그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을 지경.

뒤늦게나마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엔트라시오도 급하게 브레스를 준비했다.

양쪽에 급격하게 마력이 몰리기 시작하자, 주변 공기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붉은빛과 검은빛이 부딪쳐 만들어진 거대한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고.

양측에서 쏘아진 용의 숨결이 중간에서 서로의 힘을 갉아 먹은 덕분에, 살짝 주변 지형이 바뀌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한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다시 맞붙어 뒤엉키는 두 드래곤을 바라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의 브레스가 완성되는 속도와 출력이 상정했던 것 이상이었으니까.

결국 한스가 엔트라시오에게 개입해, 힘을 강제로 끌어 올리고 나서야 온전히 상쇄할 수 있었다.

[그놈 참 팔팔하구나. 과할 정도로.]

슬쩍 손을 내저어 광룡의 몸을 검은 사슬로 휘감으면서도 한스는 고민을 거듭했다.

정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그냥 죽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의외로 그 해결책은 한스가 아닌 다른 파티원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

거칠게 요동치는 광룡의 몸뚱이 위를 아무런 기척 없이 거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촤악—!

그가 휘두른 예리한 피의 손톱에 단단한 용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벌어졌던 상처가 급속도로 수복되며 그 자리에 다시 비늘이 자라났다.

"퉤! 역시, 용혈 자체는 좋은데 거기 담긴 광기가 방해되는군."

하인즈는 입에 넣었던 용의 피를 다시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피에 깃든 원주인의 염(念)이 이미 광기에 완전히 짓눌린 상태라 흡혈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놈의 비늘이 워낙 단단한 탓에 전력을 다해야 상처를 입힐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피를 봐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영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뱀파이어와의 상성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이도 있었으니···.

콰지직! 콰득!

"크하핫!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구나! 무한으로 재생하는 고기라니!"

광룡의 가슴팍에 기어올라 비늘을 뜯어내고 그 살점을 물어뜯고 있는 할리였다.

#110

광룡 사냥 (2)

금이 가고 부서지면서도 쉴 새 없이 수복하며 엉겨 붙어 오는 본 드래곤과, 항마력을 뚫고 들어오는 마법을 난사해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불사왕.

날갯죽지 같은 약한 부위를 노려 운신을 방해하는 뱀파이어에,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모를 유사 인간··· 아니, 기생충 한 마리까지.

[키야아아——!]

답답한 상황에서 밀려드는 짜증과 분노에 헤라토스가 다시 전신을 뒤틀며 온몸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고오오—!

거친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적대적인 마력은 가까이 붙어있을수록 파괴적이기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놈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피를 이용해 연신 광룡의 몸을 썰어대던 하인즈는 미련 없이 몸을 빼냈지만···.

"엇차!"

푸욱—!

이 명당자리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할리는 자신을 강제로 밀어내려는 힘에 버티며, 손톱과 발톱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놈의 상처에 박아 넣었다.

뿌드득— 찌직!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압력이 놈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지고.

그간 진화를 거듭해 어지간해선 흠집도 나지 않았던 그의 몸 곳곳이 찢기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재생」으로 회복한다 해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할리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최고의 보양식이 이렇게 코앞에 널려 있는데, 이 정도 상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육체변이」를 최대한으로 발휘해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 뱀처럼 늘어나는 턱, 그 안에 빼곡하게 돋아난 톱니 같은 이빨들까지.

콰직! 콰지직!

할리는 파괴되는 자기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용의 피와 살을 탐했다.

그 극상의 식재료들은 「괴식」의 힘을 빌려 끊임없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그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되어 부서지는 몸을 더욱더 강하게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 행위가 계속해서 반복되자···.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괴식」이 특수스킬「폭식」으로 진화합니다."

마침내 「괴식」스킬이 한계를 넘어 진화에 이르렀다.

'하긴. 용의 피와 살을 그렇게 먹어 치웠는데 당연한 건가.'

스킬을 진화시키기 위해선 숙련도와 별개로 각자가 요구하는 '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광룡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그 살을 산채로 뜯어먹는 건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업적이다.

거기다 할리의 괴물 같은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간 끊임없이 사용한 만큼, 자잘하게 누적된 경험치도 적지 않았을 테고.

마침 광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의 급류가 멈춘 틈을 타 슬쩍 새로 얻은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괴식」은 소화하기 힘든 것들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어, 더 많은 양을 빨리 먹을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가 필수인 그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이번에 진화한 「폭식」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이거, 할리와 시너지가 장난 아니겠는데?'

그는 시선을 내려 상처에서 다시 돋아나기 시작한 광룡의 비늘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뽑아낸 후 살점만을 취했었지만···.

쩌억—

이번엔 그냥 입을 최대한으로 벌리고 그대로 물어뜯었다.

까드득!

원래도 단단했던 용의 비늘이 '광기'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되어, 진혈을 넘어선 하인즈조차 전력을 다해야 부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콰지직! 콰직!

그것은 할리의 이빨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유리처럼 부스러졌다.

입에 넣고 씹는 행위에 한해서 주어지는 「폭식」의 강한 보정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광룡의 일부를 먹어 치우는 것과 동시에, 그 '먹는' 행위를 통해 놈의 신체에 흐르던 무언가도 함께 뜯겨 나왔다.

'이건?'

그것의 효과는 곧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가 물어뜯었던 부위의 재생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으니까.

'이거 굉장한데?'

단순히 이전보다 더 잘 먹게 된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폭식」의 대상에 속한 개념까지 취할 수 있게 된 건가?'

쉽게 말해, 방금 그는 헤라토스의 살점뿐만 아니라 그 부위에 깃든 '재생력'과 '광기'까지 통째로 뜯어먹어 버린 것이었다.

'아직 급이나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효과가 완벽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거기다 그에게 '온전히 먹고 소화 시킨다'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돌연변이」가 새로운 정보를 각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육체변이」를 사용하자—.

그의 한쪽 팔에서 짙은 핏빛의 비늘 하나가 돋아났다.

'···광룡의 비늘.'

원래 뿔을 만들기 위해선 대상의 뿔을, 꼬리를 만들고 싶다면 꼬리를 먹어야 했다.

당연히 비늘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모든 유전자 정보가 깃들어 있는 마석을 한계치까지 섭취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였다면 드래곤 하트를 먹기 전까진 비늘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텐데.'

아무리 「괴식」이 대단하다고 한들 용의 비늘까지 온전히 소화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아직 완전하진 않군. 그래도 비늘 하나에 이 정도면 흡수 효율도 상당히 높아졌는데?'

지금까지도 용의 몸뚱이를 씹어 먹으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 육체를 진화시키고 있었지만, 마석이 아닌 만큼 효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체화한 비늘의 완성도를 보니 흡수율이 몇 배는 더 증가한 것 같았다.

생각이 더 깊게 뻗어나갔다.

할리의 「돌연변이」는 다양한 종의 유전자를 수집해 완전 진화 생물이 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의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이계에 존재하는 용의 피를 이용해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

그리고 이 아우테리카에서 드래곤은 생명체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종족이었다.

심지어 지금 광룡은 '광기'에 침식되어 개체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육체 진화를 이룩한 상태였으니···.

'일단 거기에 딸린 페널티는 차치하더라도 말이지.'

이 몸뚱이도 절대 평범하지 않으니 그 정도는 할리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터.

"쓰읍— 군침이 도는군. 크흐흣!"

당연히 놈의 드래곤 하트를 먹는다고 완전히 용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효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실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광룡의 심장이 할리를 좀 더 완성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줄 거란 사실이었고···.

때마침 그에게 그것을 위한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크하핫! 이놈! 어디 심장이나 한번 보자꾸나!"

흥분한 할리가 다시 광룡의 상처를 물어뜯었다.

「폭식」의 힘으로 턱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빨이 닿는 족족 살점이 떨어져 목구멍으로 넘어와 흡수되었다.

콰득! 콰드득!

그는 굴을 파듯 용의 피와 살을 먹어 치우며 상처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원래라면 상처가 급속도로 재생되면서 외부의 진입을 저지해야 했지만···.

놈의 재생력이 억제된 이상,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캬르륵——?]

한스가 불러낸 검은 사슬에 휘감겨 본 드래곤과 엎치락뒤치락하던 광룡 헤라토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웬 유사 인간이 매달려 벌레처럼 그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자신의 단단한 몸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믿고 적당히 견제만 하고 있었거늘.

그런데.

재차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그의 체내를 흐르던 무언가가 뜯겨져 나갔다.

[키야아아——?!]

상처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현저하게 느려진 재생 속도.

가슴에 매달린 기생충은 조금씩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며 심장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광룡이 거칠게 몸을 뒤틀었지만, 한스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쿠오오오——!]

자신의 가슴살을 후벼 파려는 광룡의 손길을 막기 위해 엔트라시오가 몸을 날려 놈을 끌어안았다.

타락한 두 드래곤의 격렬한 포옹이 이어지는 와중, 본 드래곤의 벌어진 갈비뼈 사이로 할리의 하체가 버둥거리며 놈의 몸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크흐흣— 얌전히 있어라. 금방 끝날 테니까. 이거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 완성되어간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기분이 좋구나.]

지금의 할리를 만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한스가 뿌듯하게 말하며 다시 놈을 억누를 마법을 발동했다.

광기에 물든 드래곤을 산 채로 제압하는 것은 그에게도 제법 버거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보람마저 느끼고 있었다.

[캬아아악——!]

생명의 위기 때문인지, 헤라토스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다시 한번 주변의 광기가 몰려들며 놈의 육체를 더욱 강화시켰다.

뿌드득! 뿌드드득!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거칠게 타오르는 검붉은 마력.

광룡 헤라토스는 자신을 끌어안은 엔트라시오를 깨물고 쥐어뜯으며 전신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 속에 파고든 기생충을 죽이기 위해 신체를 조절해 근육을 조이는 것은 물론, 자기 몸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고 고밀도의 마력을 체내에 직접 투사하기까지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콰아앙! 콰드득!

기생충을 제거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챈 광룡의 반항이 더욱 거세졌다.

엔트라시오는 악착같이 놈에게 매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모든 마력을 방어와 수복에만 쏟아 부었다.

그 때문에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해 점차 부서져 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더 급한 상황인 것은 오히려 헤라토스 쪽이었다.

[흐우우웁——]

어찌나 급했는지, 브레스까지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브레스를 사용할 생각인가? 이젠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군."

놈의 턱 아래에는 이미 하인즈 2세가 대기하고 있었다.

「은폐」와 「투명화」까지 사용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그동안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지. 상대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이대로 끝내면 자존심 상하거든."

그의 손에 쥐어진 커다란 피의 대검이 조용히 일렁였다.

그간 「정제혈정」을 사용하기 위해 모아왔던 여분의 혈액을 모조리 투자한 그 검에는, 「혼혈진화」의 영향으로 한계까지 진화한 하인즈의 흡혈 인자가 가득 담겨있었으며—.

그것은 「피의 신비」의 효과를 극한으로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매개체였다.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군. 그럴 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내버려 둬도 별 상관없다고 여긴 건가.'

놈의 감지력을 생각하면 하인즈의 「은폐」 정도는 조금만 집중하면 간파할 수 있을 텐데.

이 상황에서도 한스와 엔트라시오를 견제하는 모습만 보일 뿐,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후회하게 될 테지만.

핏빛으로 발광하는 그의 눈이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유동하는 마력의 흐름을 「간파」한다.

격의 차이로 광룡의 체내를 온전히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이 정도로 격렬한 마력의 유동이 있다면 그렇게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저기군.'

하인즈가 천천히 왼쪽 허리춤으로 옮긴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은 하인리히가 「종합 무기술」을 통해 배웠던 검술의 준비 자세였다.

'「로지아 성투법」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어차피, 지금 할 일은 그리 대단한 검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

「가속」을 사용해 전력으로 베어낼 뿐.

휘두르는 순간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피의 대검이 날카롭게 공간을 갈라—.

극초음속을 넘어선 그 검 끝이, 아무런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광룡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쉬아아악——!

쿠구구궁—!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을 따라 충격파가 퍼지고.

푸화아악—!

광룡의 그 커다란 목이 절반이나 잘려 나가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허얽——?!]

거기다 그곳을 통해 한창 브레스를 뿜기 위해 밀집시키던 마력까지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안 그래도 치명적이던 상처가 너덜너덜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컥, 크헉——?!]

지금까지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광룡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으니···.

'이 정도 치명상까지 재생하다니. 징그러울 정도군.'

하인즈는 사용한 혈액을 될 수 있는 만큼 회수해 몸 안에 저장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물론 「초재생」이 있는 자신도 저 정도는 가능했지만, 솔직히 저 덩치로 저런 재생력은 반칙이 아닌가.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그래, 이제는 놈이 재생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할리가.

마침내 놈의 심장부를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111

광룡 사냥 (3)

막 광룡의 몸속을 파고들기 시작했을 무렵.

할리는 이 작업이 생각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시간 호흡할 수 없다는 건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이 적대적인 공간 자체가 커다란 난관이었던 것이다.

꾸드드득!

사방에서 그를 조여 오는 근육의 압력을 버티고,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라도 먹는 것을 멈추면 그대로 바깥으로 밀려나 버릴 테니까.

'재생력을 억제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할리가 직접 물어뜯은 부위는 회복 속도가 극도로 저하되어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부위는 사정이 달랐다.

손상 부위를 직접 재생하는 게 힘들어지자, 놈이 멀쩡한 부위를 암세포처럼 증식시키고 밀어내서 빈 곳을 메우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일반적인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광룡이었기에 가능한 일.

물론 일반적인 재생보다 그 속도가 느렸던지라 「폭식」으로 살점을 먹어 치우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몸을 이렇게 마음대로 부풀리고 바꾸는 게 말이 돼? 물리법칙 어디 갔어, 물리법칙!'

할리는 내심 투덜거리며 마음대로 변형시킨 자신의 커다란 입과 톱니 같은 이빨로 계속해서 굴을 파고 들어갔다.

3미터가 넘었던 그의 몸 또한, 수월한 굴착 작업을 위해 최대한도로 압축해 늘씬하게 빠진 상태였다.

그렇게 그가 뻔뻔한 불만을 토해내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던 순간.

쿠구궁—!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충격파가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광룡의 체내에서 직접 발현된 고밀도의 마력 파동이 강한 살의를 머금고 할리의 전신을 으스러뜨리려 하는 것이다.

뿌드득! 뿌득!

전에 바깥에서 버텼을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이번엔 발원지가 그를 둘러싼 사방인 것은 물론, 그 거리도 단순히 가까운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표적을 가리지 않고 주변 공간 또한 괴사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끔찍한 압력은, 그를 한 줌 핏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침입자를 배제하겠다는 그 광룡의 의지에, 할리는···.

으적으적!

열심히 입을 놀리며 몸을 회복시킬 뿐이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끈질기기도 하지.'

바깥에서 겪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었지만, 그가 입은 손상 정도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얼마든 회복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는 소리.

그 원인은 그의 달라진 외견, 정확히는 피부에 있었다.

'광룡의 비늘이 생각보다 더 효과가 좋은데.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상상 이상이야.'

변이한 입과 갈고리 같은 손발톱은 이전 그대로였지만, 추가로 검붉은 비늘이 그의 전신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이젠 차마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습.

진입 전에 다량의 비늘을 섭취한 덕분에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진 것들이었다.

'이게 아니었으면 정말 오래 가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을 것 같은데.'

광룡의 비늘로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분에 지금처럼 뼈가 박살 나고, 핏줄이 터지고, 내장이 으스러지는 정도의 소소한 피해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게 없었으면 회복 속도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빈사 상태로 소환 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지금은 아니지만.'

「폭식」의 효율이 증가해 에너지를 더 빨리 수급할 수 있게 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이제 놈의 '재생력'까지 직접 흡수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최상급 보양식인 용 고기만 있다면, 이 정도 부상은 금방 떨쳐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할리가 열심히 턱을 움직이자, 적대적인 마력에 장시간 노출돼 부서졌던 그의 육체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렇게 파괴와 재생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그것이, 드디어 어느 임계점에 도달했다.

"개체의 회복력이 한계를 초월했습니다. 스킬「재생」이 스킬「초재생」으로 진화합니다."

광룡의 '재생력'을 끊임없이 강탈한 끝에, 마침내 할리의 재생력도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오— 좋아.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드디어!'

「초재생」의 효과는 곧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사방에서 살덩이가 조여 오고, 마력 파동 또한 필사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건 곧 작업 효율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콰드득— 콰득!

부지런히 섭식 행위를 이어가느라 시원한 웃음으로 기쁨을 표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

그리고 좋은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드디어, 도착했다!'

마침내 할리는 마주할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거칠게 맥동하는 '광룡의 심장'을.

사실 놈의 필사적인 방해 때문에 오래 걸렸을 뿐, 그가 이동한 거리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걸린 시간도 10분이 채 안 될 정도였으니까.

'저것이.'

할리는 자기 상체만한 용의 심장을··· 정확히는 그 한쪽에 융합되어 은은한 붉은빛을 내뿜는 결정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바로 드래곤이 가진 힘의 근원이자 최고의 마석이라고까지 불리는 귀물(貴物).

드래곤 하트였다.

그런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저건 매개체로 쓸 수 없겠구나.'

사실 드래곤 하트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확실히 정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할리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는 쪽으로 저울이 기울긴 했으나, 그것을 매개로 탄생할 새로운 아바타도 무척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눈으로 확인하자 그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스킬이 반응하지 않는군. 역시 심연의 광기에 오염된 게 문제인가?'

이 광룡의 드래곤 하트는 「커스터마이징」의 제물로 쓸 수 없다는 것을.

'내부의 마력이 완전히 광기와 뒤엉켜서 변질됐어. 이건 드래곤 하트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광기의 괴물'의 정수라고 봐야 하겠는데.'

거기다 무슨 조화인지, 그것을 중심으로 뿌리가 퍼진 것처럼 놈의 전신에 깃든 광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몬스터들에게선 보지 못한, 훨씬 진보된 방식이었다.

'···과연, 심장을 매개로 전신의 광기를 중앙에서 제어하고 있는 건가?'

역시 드래곤이라고 해야 할까.

광기에 잠식당한 상태에서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나름의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그저 몸 곳곳에 안개처럼 퍼트려 놓은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이 방법이라면 광기를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을 터.

'오호, 이거 꽤 쓸 만해 보이는데?'

그리고 그건 할리에게도 나쁠 것 없는 소식이었다.

어차피 전부 자신의 것이 될 게 아닌가?

사납게 미소 지은 할리가 심장을 향해 기어가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두쿵—! 두쿵—!

위기를 감지했는지 심장이 한층 더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마력과 광기가 한데 섞여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크하하핫! 앙탈 한번 까탈스럽구나! 얌전히 이 몸과 하나가 되어라!"

그는 몸에 가해지는 부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쩍 벌려 변질된 드래곤 하트를 한입에 깨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광룡 헤라토스의 전신에 퍼진 '광기'가···.

「폭식」에 의해 서서히 뿌리 뽑히듯 뜯겨져 나왔다.

***

[크허억——!]

쿠웅—!

목에 입은 치명상을 회복하면서도 연신 발버둥 치던 광룡의 몸이 한순간에 정지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놈의 몸속에 침입한 할리가 그 심장을 먹어 치우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원체 생명력이 강했기에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놈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무력화된 광룡의 옆에.

"호오···. 이거, 지금이라면?"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하인즈가 연신 몸을 꿈틀거리는 놈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놈의 몸에 담긴 광기는 심장과 연결되어 통제되고 있었고, 지금은 할리가 그것을 통해 광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고구마 줄기를 캐듯··· 아니, 기다란 면발을 들이키듯이.

촤악!

하인즈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자, 반항하지도 못하고 누워있던 광룡의 목이 베이며 재차 피가 튀었다.

이전보다 확연히 약해진 방어력에 생각보다 더 깊은 상처가 생겨 버렸다.

"재생력도··· 줄었군. 그것도 상당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급히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하인즈는 조심스럽게 뻗은 손끝에 용혈을 묻힌 후,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흠."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가에 천천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극상의 용혈에 만족한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온 상태였다.

'할리와의 연계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별것 아니지.'

하인즈가 마신 정화된 혈액에는 심장부에서 광기를 제어 중인 할리의 세심한 배려가 담겨있었다.

목의 상처로 가는 혈액을 여러 번 걸러 최대한 깨끗한 피를 공급하도록 손을 쓴 것.

물론 그런 노력에도 광기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퉤."

처음처럼 완전히 광기에 절여있다면 모를까, 이미 진혈을 넘어선 하인즈에게 이 정도는 쉽게 걸러낼 수 있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아··· 아아—!]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고.

이제는 광기에서 벗어난 드래곤 헤라토스가 가는 숨을 몰아쉬며 눈만을 움직여 주변을 훑었다.

[나는 어째서··· 그리고 불사왕이 부활했다고···? 거기다 너희들은 대체···.]

광기에 잠식된 동안의 기억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는지,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연신 횡설수설하는 드래곤.

생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에 보이는 마지막 의문에도 하인즈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 목덜미의 상처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오랜만에 실컷 먹어봐야겠다.'

마침 모아뒀던 혈액도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으니, 이참에 배 터지게 먹어 치울 셈이었다.

피에 한해서라면 그에게 물리적인 한계 따윈 의미가 없었으니까.

[아아···. 불사왕이··· 다시 돌아왔구나. 이제 이 세상은 어떻게 해야···.]

혼자 중얼거리던 헤라토스의 말이 점차 잦아들었다.

죽음을 앞에 둔 그에겐 미안했지만, 여전히 대답을 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쓸데없이 입을 놀리다 나도 모르게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지.'

혹시 모르지 않은가.

죽은 줄 알았던 놈이 다른 몸으로 부활한다거나, 환생한다거나, 과거로 회귀한다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이니.

[···불사왕···.]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헤라토스의 시선이 하늘 위에 떠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스에게 향했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그에게 보내던 레드 드래곤은···.

···눈은 여전히 한스를 응시한 채, 이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불사왕에 대한 걱정인가. 뭔가 한이 많아 보이는데.'

처음 한스를 마주했을 때도 그렇고, 역대 불사왕과 드래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대의 불사왕은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

오히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광룡이 또 다른 대륙의 재앙으로 성장하지 않았겠는가?

[크흐흣, 확실히 광기의 영향인지 뼈가 굉장히 실하군. 이거 좋은 재료가 되겠어.]

그러니까 네 뼈를 좀 가져다 쓰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아, 거기다 피랑 뿔이랑 비늘하고···.'

아무튼, 좋은 일에 사용할 테니 그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

"후우—."

눈을 감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할리.

그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쉴 새 없이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근육이 제멋대로 부풀었다 줄기를 반복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해왔던 진화와는 그 격이 달랐다.

단순히 드래곤의 유전자를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몸에 큰 부담이 되었을 텐데, 광룡에게서 통째로 빼앗은 광기를 고스란히 흡수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으며 한껏 증가했던 양을 아득히 넘어서는 그것은, 드래곤을 잠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할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너무 많아서 통제가 힘들어. ···드래곤 하트에 각인되었던 방법을 써야겠군.'

그는 몸에 가득 들어찬 광기를 가닥가닥 엮어 나갔다.

광룡이 몸 곳곳에 뿌리를 뻗어 광기를 통제했던 것처럼, 할리는 자신의 육체에 세심하게 광기가 지날 회로를 깔았다.

그리고 마침내.

"개체의 종족값이 '용인(혼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특수스킬「광룡의 심장」을 획득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보석안 : 염동」이 특수스킬「보석안 : 강압」으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광기 제어」를 획득합니다."

뿌드득! 뚜득!

쉬이익—!

이미 몇 번이나 겪어왔던 육체의 진화.

그 변화에 맞춰 근육과 뼈 등 할리를 구성하는 요소의 질이··· 아니, 격(格) 자체가 급격히 상승했다.

"하아—."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어둠에서 붉은빛과 초록빛의 안광이 터져 나와 주변을 밝혔고.

세로로 날카롭게 갈라진 두 눈의 동공이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용이 사망한 자리.

그 용의 몸속에서 마침내 새로운 용인(龍人)이 눈을 떴다.

#112

파티 해산 (1)

드래곤의 사체는 단 하나도 버릴 곳이 없는, 그 자체로 귀중한 보물이었다.

재료가 가진 질은 물론이고 막대한 신비까지 품고 있는지라 여러 가지 술법에 애용되는 소재였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드래곤이 거의 멸종 위기인 상태가 아닌가.

그 가치가 가치인 만큼 당연히 살점 한 조각까지 알뜰살뜰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팔 생각은 없지만.'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원래 이런 귀한 물건은 가지고 있다 보면 다 쓸 일이 생기는 법이다.

보관 문제야 마법의 극한을 바라보는 한스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물론 모든 재료를 전부 보관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필요한 건 그냥 곧바로 사용해버렸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드래곤의 피.

용혈(龍血)이었다.

"흠··· 확실히 효과가 좋긴 하군. 요즘 조금 정체되었다 느끼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좋은 피로 몸보신한 하인즈 2세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혼혈진화」는 동족 포식을 했을 때 발동하는 스킬인 만큼 흡혈인자가 크게 진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스템적으로 표기되지 않는 무언가, 하인즈의 격 자체가 드래곤을 흡혈함으로써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뱀파이어의 종족 특성인 「피의 일족 (진혈眞血)」이 성장한 거겠지.'

모든 능력이 전체적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이고 피를 사용하는 기술의 효율도 상당히 증가했다.

아직 성혈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를 흡혈한 경험이 상당한 경험치가 된 것일 터.

"역시 보다 격이 높은 상대를 흡혈하는 것이 성혈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던 건가."

하인즈는 여러 스킬의 영향으로 동급의 뱀파이어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혼혈진화」 덕분에 힘의 근간이 되는 흡혈인자 자체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성장이 정체되어버린 것이다.

'인자의 진화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한데다, 이젠 흡혈을 해도 에너지의 총량만 늘어날 뿐 크게 강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지.'

하긴 요즘 하인즈가 좀 평화롭게 지내긴 했다.

가장 최근인 브로코슬락 클랜과의 싸움에서도 온전히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진혈들을 흡혈하지 않고 전부 포용하지 않았나.

당초의 목적을 위해선 혼자 강한 것보다 쓸 만한 인재가 많은 것이 유리했으니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괜찮은 소득을 얻기도 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텐데 굳이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겠지.'

오늘 정도는 지금의 성과를 마음 편히 즐겨도 괜찮을 것이다.

기분 탓인지 피부도 좋아진 것 같아 가볍게 뺨을 쓸자, 언제나와 같은 매끈한 살결이 느껴졌다.

'···잘 모르겠군.'

그는 슬쩍 손을 내리며 해체되고 있는 드래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신선한 품질 관리를 위해 한스에게 죽음의 기운을 봉인 당한 채 부지런히 움직이는 언데드들.

그 열띤 노동의 현장에서는 작업 내용에 맞지 않게 바닥에 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건 이곳에 있는 진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의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전부 마셔버린 건 아니지만.'

피는 다른 생체 조직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무리해서 전부 빨아들였다간 재료가 상할 우려가 있었다.

어차피 드래곤 한 마리 분량의 피를 전부 먹는 데에만 쓰는 건 욕심이기도 했고.

'아무리 효과가 좋은 용혈이라도 같은 대상의 피는 점점 그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덕분에 다른 용도로 쓸 피도 제법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피란 것은 온갖 술법의 중요 매개체였으니, 이건 추후에 유용하게 쓰이리라.

'예를 들어··· 할리의 각인이라든지.'

보다 상위의 각인에는 그만한 격의 재료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할리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개체명 : 할리

-종족 : 용인(혼종)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돌연변이」, 「육체변이」, 「생체 오러」, 「광란의 야수」, 「폭식」, 「광룡의 심장」, 「광기 제어」, 「보석안 : 강압」, 「초재생」, 「칼코스식 전투 각인」

-특이 사항 : 강대한 유전자 정보가 깃든 '광룡의 심장'을 흡수하며, 신체의 대부분을 용의 소재로 대체해 용인화(龍人化)되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몸 안의 광기를 제어하고 주변의 광기를 흡수한다. '보석안'이 용안(龍眼)과 결합해 자신의 의지를 더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크흐으—."

드래곤이 해체되는 현장의 한쪽 구석.

상처 입은 맹수처럼 몸을 웅크린 할리는 육체를 온전히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종족 자체가 바뀔 정도면··· 그만큼 이번 변화가 컸다는 건가.'

그동안도 할리는 순수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생체 실험으로 탄생한 실험체 출신으로 온갖 마수와 몬스터들의 유전자까지 섞여 있었으니까.

어떤 특정한 종족이라고 정의할 수 없었던 만큼 정보창에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굳이 종족명을 따지자면 '돌연변이'가 가장 적합하겠지.

그런데 그것이 이번에 대부분의 부위를 성능 좋은 드래곤의 유전자로 교체하며, 그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혼종'이라는 표현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잔재들 덕에 붙은 것일 테고.

뿌드득— 뿌득—!

'광기의 심장'을 먹으며 다시 3미터를 넘어섰던 덩치가 조금씩 압축되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빨과 손발톱, 비늘들이 서서히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이전의 할리로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그 과정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해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무렵.

"후우—."

마침내 육체를 온전히 통제하게 된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휘이잉—

그와 동시에 그의 전방에 산들바람이 일며 수풀이 흔들렸다.

'어라?'

압도적인 폐활량과 「광룡의 심장」이 동조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풍속이 그리 빠르진 않았으나 심호흡만으로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과할 정도.

'역시 용의 심장인가. 내부의 기운뿐 아니라 주변의 마나도 행위에 동조해서 움직이는군. 이거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데?'

마법적 능력을 완전히 잃은 대신 마력의 원초적인 사용에 특화된 광룡이었던 만큼, 할리도 그 특성을 고스란히 계승하게 되었다.

용인이 되어서도 마법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대신 주변 마나가 그의 행동을 더욱 강하게 보조하게 된 것이다.

'당분간은 정신력을 좀 더 배분해서 신경 써야겠어. 방심하다간 사고 나겠군.'

폭증한 근력을 제대로 다루기도 힘든 마당에 생긴 새로운 숙제였다.

"으랏차차—! 이거 뻐근하구만! 가는 길에 몸 좀 풀어야겠어! 으하핫!"

상황을 대충 수습한 할리가 쭉쭉 스트레칭하며 활기차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오닉의 곡괭이를 얻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와 버렸는지.'

트윈 헤드 오우거부터 시작한 북부 산맥 질주에서 드래곤을 만나 놈을 처리하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는 모험이었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으니 불만은 없지만.'

정체됐던 하인즈의 성장은 물론이고, 할리는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육체변이」로 최대한 몸을 줄였음에도, 어마어마하게 압축된 육체의 밀도 때문에 그의 몸무게가 톤 단위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의 키가 2.3미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변 기운을 조절해서 몸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훈련을 해야겠어. 이러다간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하겠군.'

지반이 약한 곳이라면 땅도 무너질 수 있었으니 매사 조심해야 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광룡의 심장」이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인 덕분에 에너지 효율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하루 종일 뭔가를 먹어야만 했겠지.

"쩝쩝, 그래도 좀 출출한 것 같은데. 배라도 좀 채워야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먹기만 했던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육체의 변형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만큼, 몸 전체가 바뀌다시피 한 지금은 보유한 양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부족해진 만큼 채워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먹을 것이야 잔뜩 있으니 아낄 것도 없지. 어차피 먹으면 먹을수록 도움이 되는 보양식들인데!'

그의 시선이 이미 도축되어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드래곤 고기로 향했다.

"쓰읍, 꿀꺽."

입가에 흐르는 침을 삼킨 할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해,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열심히 에너지를 몸속에 비축해 나갔다.

***

수많은 언데드가 동원된 만큼, 드래곤의 해체가 전부 마무리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고했다, 말콤.]

고기, 뼈, 장기 등 소재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부산물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

[별말씀을···.]

언데드들을 진두지휘해 도축 작업을 마친 데스 위저드 말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한스는 자연스럽게 드래곤의 뼈가 쌓인 무더기 앞으로 향해 그것을 둘러보았다.

[호오— 과연, 훌륭하군.]

단순히 뼈가 쌓여있는 것뿐인데도 어떤 기세가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다.

광기에 물들며 세포가 과하게 활성화된 영향이 남아있는지, 뼈대도 굵고 단단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소재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드래곤의 강한 사념 때문에 상당히 까다로웠겠지.'

드래곤의 고고한 영성(靈性)은 죽고 나서도 자신을 언데드로 만드는 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업을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오랜 시간 타락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미 광기에 타락해서인지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겠어. 수고를 덜었군.'

가장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갈 부분이 이미 해결되었다.

그야말로 재료 손질과 조리까지 다 되어, 그냥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

'물론 심연의 광기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다른 흑마법사들은 이걸 다루려면 상당히 고생할 테지만···.'

그런 건 같은 심연에서 비롯된 '죽음'을 다루는 한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바로 시작해 볼까.'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금단의 지식」을 이용해 의식을 위한 흑마력 결계를 설치하고, 언데드들을 배치해 간이 제단을 구축했으며, 제물로 사용될 드래곤의 장기 일부까지 가공했다.

의식의 규모에 비해선 상당히 간소한 절차였지만, 불사왕인 그가 평범한 흑마법사와 그 조건이 같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었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언데드가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일정한 진을 구성한 제단의 중심부.

드래곤의 잔해를 마주한 한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나에게 말해 보거라.]

한스가 뼈 무더기를 가볍게 쓰다듬는 것과 동시에, 그의 가슴에 위치한 불사왕의 심장에서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조용히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에 초목이 시들기 시작하고, 어느새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 곳곳에 서리가 맺혔다.

[그래, 헤라토스로구나.]

우우웅—!

막대한 흑마력이 순식간에 사위를 뒤덮으며 제단을 구성한 언데드들과 공명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서히 드래곤의 뼈로 스며들었다.

[나는 사자(死者)의 왕이자 죽음의 지배자이니, 내가 너에게 두 번째 생을 허락하도록 하마.]

생전의 드래곤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언데드화를 선택할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자신을 죽인 이가 노예로 부리려고 종속하고자 하는데.

[너는 다시 이승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약간의 대가가 따르겠지만.]

하지만 이미 사망해 단편적인 사고만 남은 데다 타락까지 거친 사념을 홀리는 것은, 한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다.]

그는 사령술의 극의에 이른 불사왕이었으니까.

후우우웅—!

주변에 가득 들어찬 죽음과 흑마력이 한순간에 드래곤의 잔해로 빨려 들어갔다.

막대한 기운의 유동에 공간이 진동하며, 제단을 구성한 언데드들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거칠게 요동치는 결계 안.

그리고 의식의 여파로 죽어버린 풀과 나무들 틈에서.

[———!]

마침내 새로운 망자가 눈을 떴다.

***

"하하핫! 그럼 이만 가 볼까!"

드래곤 고기가 가득 담긴 아공간 마도구를 챙긴 할리가 일행이 있을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며.

"오랜만에 헤테로시스나 한번 살펴봐야겠군."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던 하인즈 2세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난 후,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된 숲속에 남은 것은···.

[크흐흣—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주변을 좀 둘러볼까? 부디 이 근처엔 쓸 만한 녀석들이 많았으면 좋겠군.]

수많은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불사왕 한스와.

[쿠오오오——!]

[캬아아아——!]

두 마리의 본 드래곤뿐이었다.

#113

파티 해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