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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밖의 행운 (1)

"후우··· 다 끝났나?"

하인리히는 가볍게 검을 털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수준이 수준인 만큼,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자연이 분노한 듯 거세게 몰아치는 번개 폭풍과 대지에서 솟구치는 가시에 죽어 나가는 몬스터들.

빛의 심판이 부정한 존재들을 불태우고, 놈들이 소환한 거대한 악마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마계로 쫓겨났다.

'이게 이 대륙 최상위권의 강자들···.'

물론 이들이 정점인 것은 아니다.

교단에는 공개된 팔라딘만 열 명에 달하고, 전투 사제나 이단심문관 등을 포함하면 이 정도 수준의 강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니까.

하이 엘프도 라포리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 마찬가지고, 그 외에도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엘븐 킹덤에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 대륙을 기준으로 봤을 때지.'

대륙의 넓이를 따져보면, 결코 이들의 경지를 깎아내릴 수 없으리라.

물론 흑마법사들도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준은 아니었지만, 놈들이 맥을 못 춘 데에는 하인리히의 탓이 컸다.

마물을 소환해서 싸우는 게 주특기인 놈들 틈에 갑자기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데, 저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적의 수괴로 보이는 노인이 어찌어찌 거대한 악마를 소환하기는 했으나···.

"커헉—! 교단 놈들이 어떻게 여길··· 컥!"

집중 공격을 받은 악마가 사라짐과 동시에 검은삭월 단장의 검에 유명을 달리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소환계 마법사의 최후였다.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 수고했네. 경 덕에 수월하게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어."

한쪽에서 신성한 불길로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재로 만들던 라티우스 대주교가 인자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 대주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성표는 여기 있습니다."

하인리히가 공손하게 대주교에게 받았던 성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타라크에서 북부 산맥으로 빠르게 날아온 그들.

하지만 하인리히도 목표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으니, 그들을 제대로 안내할 수 없었다.

그는 「축복 : 도약」을 통해 할리가 인지한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을 뿐이었으니.

그래서 나온 방법이, 자신의 신성력을 담은 성표를 하인리히에게 건넨 대주교가 그것을 추적해서 남은 이들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하인리히 때문에 혼란에 빠져, 적들이 외부에서 다가오는 이들에 대한 대비를 미처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생포해서 심문하지는 않으십니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그 배후도 일망타진할 수 있을 텐데."

"이단심문관이 아닌 이상, 악마 추종자를 비롯한 흑마법사들은 마주치는 즉시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네. 놈들은 언제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거든. 또 하나같이 금제가 걸려있기도 하고."

하긴, 워낙 기괴한 수단이 많은 흑마법이니까.

어쩐지 꼼꼼하게 놈들의 시체를 불태운다 싶었다.

"그나저나 저쪽의 엘프 아가씨가 그 하이 엘프 후보인가 보군."

대주교가 한쪽을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작은 엘프와 커다란 야만인이 있는 그곳에, 라포리를 비롯한 엘프 일행이 다가가고 있었다.

"정말 경의 말이 맞았어. 대체 어떻게 안 건가? 성녀님의 말씀이기에 우선 따르기는 했네만···. 정말 별다른 축복도 없이 대상을 찾을 줄이야."

"하하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불현듯 깨달은 거라서요."

"정말 주신께서 굽어살피고 계신가 보군!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렇게 재차 감탄한 대주교가 어느새 다가온 팔라딘들과 함께 잠깐의 기도 시간을 가진 후.

그제야 하인리히는 그들과 함께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덕분에 세실리 양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명예로운 전사로서 위험에 처한 이를 돕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너무 신경 쓰지 마쇼.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핫핫핫"

"과연, 훌륭한 가치관을 가지고 계시군요."

잠깐의 통성명 후에 이어진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라포리는 할리의 외견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이 엘프.

젊게 보인다 해도 그 나이가 절대 적지 않았으니, 할리의 패션도 그 상식선의 매우 모범적인 남부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부족하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시지요."

"이거 참, 곤란하구만! 하핫핫!"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할리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그가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였다.

라포리의 손목에 걸려있던, 가느다란 나무줄기로 알록달록 빛나는 여러 보석들을 엮은 팔찌.

줄기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싱싱한 상태였다.

"라···라포리 님, 그건···!"

라포리의 옆에 있던 남성 엘프가 당황해서 뭐라 하려 했으나, 그는 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휘저었다.

"저희의 근거지는 이곳 대륙이 아닌지라, 당장 보답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단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지요."

그 때문에 나중을 기약할 수도 없었다.

당장 그들도 교단을 도와야 하는 만큼, 언제 에나멜 대륙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알지 못했으니.

"물론 추후에라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최대한 힘이 되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교단과 협의해 두도록 하지요."

다른 대륙이 근거지인 그들이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우선 교단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후에 엘븐 킹덤 차원에서 교단에 대가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저희 교단의 일을 도운 거나 마찬가지기도 하니까요. 제가 잘 처리해 놓겠습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라티우스 대주교가 라포리의 말을 받았다.

할리 덕분에 교단의 일이 편해졌으니 그에 대한 보답도 겸하기로 한 것.

엘븐 킹덤 측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교단의 고위층에 연줄이 있는 할리로서는 당장 손에 들어온 팔찌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챘을까, 라포리는 곧바로 그 팔찌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은 기본에 자연력 증폭, 정령 소환 시 추가 보정까지.

거기다 상징적인 의미로도 이 팔찌 자체가 굉장히 귀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엘프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하긴 하이 엘프가 직접 사용하던 것이니 당연하겠지.'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

라티우스 대주교에게 도움을 받아 목에 채워진 마도구를 해제한 세실리가 깨끗해진 모습으로 할리에게 다가왔다.

그동안의 고생과 전투 중에 튄 피로 지저분해진 걸, 라포리와 함께 온 여성 엘프가 정령을 이용해 씻겨준 것이다.

'흠흠··· 「괴식」 때문에 앞의 가죽에 흘린 피가 좀 많긴 했지···.'

도저히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리 님이 와 주지 않으셨다면, 전 지금쯤 살아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하핫!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세실리.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잠시 할리를 쳐다보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저기··· 할리 님? 잠깐 자리에 앉아 주실래요?"

그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가 밑에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

할리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자, 그제야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을 수 있었다.

"그대에게 대자연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세실리는 너덜너덜해진 검은 표범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화아아—

'음? 이건··· 세계수에서 느껴지던 기운?'

뭔가가 그에게 깃든 것은 분명했지만, 별다른 시스템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이 엘프가 내려줄 수 있는 가호입니다. 그것도 대자연의 가호면 자주 사용할 수 없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지요."

옆에서 라포리가 조용히 첨언했다.

개안하지 않은 상태의 세실리가 하이 엘프의 가호를 사용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아직 완전한 하이 엘프가 아니라 원래의 가호보다는 효과가 좀 떨어져요. 제가 개안하게 되면 제대로 다시 해 드릴게요. 할리 님은 몸을 험하게 다루시는 것 같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말을 들어보니 속성 저항력이 올라가는 종류의 가호라는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할리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뿌듯하게 웃던 세실리.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때까지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할리에게 내밀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기운까지 끌어 써서인지 이젠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세계수의 가지였다.

"그··· 제가 지금 당장 가진 게 없어서요.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릴게요."

세실리는 본인도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기운이 다했다고 해도 세계수는 세계수.

공짜로 주는 걸 마다할 리가 없는 할리가 냉큼 그것을 받아들였다.

"세계수께서 그 가지로 무리하게 힘을 행사하신지라 영맥이 끊어졌지만, 주변 공기를 정화하고 기운을 맑게 해 주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집 안의 화분에 꽂아두고 물만 주시면···, 음···."

다시 라포리가 거들 듯이 옆에서 조언을 건네다가 멈칫했다.

할리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보다가, 다시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도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은, 맹수 머리를 뒤집어쓴 2미터가 넘는 근육질 거구를.

"음, 인정할 만한 상대를 쓰러뜨린 후 그 앞에 묘비 대신 박아 두시면···. 아니면 땔감 대신 사용하면 화력도 강하고 오래갈 겁니다. 사실 드워프들이 욕심내는 이유이기도 한데···."

갑자기 라포리가 혼란이 온 듯 횡설수설했다.

'이 양반 원래 이런 인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할리는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그와, 점점 더 민망해하는 세실리를 도와주기 위해 얼른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이건 지구의 방에 놔두면 되겠지.'

최고의 공기청정기가 될 테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엘프들과의 인사가 일단락되고, 그는 교단의 일원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만큼 엘프들처럼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교단의 인사들도 할리에게 제법 관심을 보였다.

"자네 눈이 굉장히 특이하군. 혼혈인가? 음··· 아니, 실례했네. 괜한 걸 물었군."

그의 왼쪽 눈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무슨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딱히 그 주제로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오호~ 이거 훌륭한 육체로구만. 우리 하인리히 못지않은데? 너 혹시 성기사가 돼서 이단 놈들 골통 부수러 다닐 생각 없나?"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와중 나온 검은삭월 단장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둘이 직접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할리는 야만 전사의 이미지에 맞게 여러 번의 자체 성형을 거친 만큼, 하인리히와는 인상부터가 달랐다.

「초회복」을 이용한 극한의 단련을 통해 육체를 한계까지 강화하고, 마침내 「축복 : 강체」까지 얻은 후에도 하드 트레이닝을 멈추지 않은 하인리히.

지금까지 「괴식」으로 먹어 치운 몬스터만 수십 종, 그중에서도 「돌연변이」와 「육체변이」로 우월한 유전자만을 선별해 이상적인 몸을 만든 할리.

"흐음···."

"호오···."

이렇게 직접 비교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인리히가 갑옷을 입고 있어 좀 더 자세히 살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

"···자네들 뭐 하는가?"

그렇게 자신의 몸에 취해있던 것도 잠시, 라티우스 대주교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너무 심취했군.'

자신도 모르게 몸 이곳저곳에 힘을 주며 근육을 비교하다 흠칫했지만, 팔라딘들은 이쪽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라티우스 대주교님, 저희처럼 몸을 쓰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그럼! 무릇 사내라면 근육이 있어야지! 아, 대주교님보고 뭐라 그러는 건 아닙니다? 크크큭."

주신교단의 성기사는 모두 초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의 신봉자들이었으니까.

***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당분간은 이온 대륙에 머물 것 같으니, 그 기간엔 직접 힘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두 명이 추가된 일행은 바람의 정령을 통해 빠르게 타라크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이어진 할리와의 작별.

"할리 님, 그럼 저는 가 볼게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구요."

"하핫핫! 나야 튼튼함 빼면 시체지! 아가씨도 조심히 가라구!"

그렇게 할리는 타라크 시내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인리히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흠, 저 전사와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보지? 초면일 텐데 서로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군."

"뭔가 좋은 인연이 느껴지는군요. 앞으로 자주 마주칠 것 같습니다."

"호오~ 하인리히 경의 예감이라면 무시할 수 없지. 교단에서도 좀 더 신경 쓰도록 해보겠네. 용병이라고 했으니, 교단 차원에서 용병 길드를 통해 감사를 전하는 것도 괜찮겠군."

'됐다.'

겨우 분위기 좀 잡은 걸로, 신뢰도가 올라간 하인리히의 이름을 팔아 할리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교단의 이름을 등에 업게 되면 앞으로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터.

'이 정도면 얻을만한 건 다 얻은 것 같은데.'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올 때와는 다르게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경로상에 있는 각 신전의 협조를 받고 최대한 당긴 일정.

그렇게 돌아오고 휴식까지 가진 다음 날, 다시 엘프들과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교단 측의 도움으로 큰 문제없이 세실리 양을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경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포리의 감사의 말로 시작된 자리는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이번엔 교단의 용건인, 불사왕을 추적하는 건에 대하여.

"세계수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의 뿌리이십니다."

그는 진지한 어투로 불사왕을 찾을 방도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하이 엘프는 세계수 님의 힘을 빌려, 나무가 존재하는 곳 주변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습니다."

일정 이상의 자연력을 품고 있는 나무들을 매개로 지역을 스캔하는 방법.

물론 한계 또한 명확했다.

나무가 없는 지역은 시도조차 할 수 없고, 한 번에 확인 가능한 범위도 제한적이다.

사전 준비도 까다로워 급히 세실리를 찾을 때는 사용하지 못한 수단이었다.

"이온 대륙 전체를 탐지하려면,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군요."

그나마도 나무가 없는 지역을 제외했을 때의 기간을 추측한 것.

하지만 제약이 큰 만큼 그 효과는 탁월했다.

"놈이 나무가 있는 지역에 숨어 있다면, 장담하는데 절대 탐지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은 대부분 나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

그는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확실히 저 방법으로도 찾지 못하더라도 그 후보 범위를 좁힐 수 있을 테니 좋은 기회였다.

'음, 동굴 주변의 나무들을 미리 싹 밀어버려? 어느 범위까지? 너무 많이 없애면 오히려 눈에 띌 텐데···. 그냥 때를 맞춰 소환 해제해야 하나.'

하인리히는 태연한 표정으로 남몰래 고민했다.

결계를 보강해 두기는 했지만, 저 당당한 태도를 보아하니 살짝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라포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자신만만한 태도에 비해 뭔가 제한 사항이 이것저것 많은 것 같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기운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제가 불사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시간이 좀 더 소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밀집된 흑마력을 추적할 수밖에 없다 보니, 정확도를 위해 기간이 반년까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어지간하면 그 전에 발견할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불사왕의 기운에 대한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그 전에 부디 양해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기는 한데···."

그의 말에 성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 직후.

"···이번 기회에 하인리히 경도 알아두시는 게 좋겠죠. 저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뭔가를 고민하던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린 한 마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얻을 건 다 얻은 줄 알았는데, 진짜는 따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58

뜻밖의 행운 (2)

할리는 엘프들과 헤어진 후, 언제나처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타라크의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정령이라는 거, 굉장히 편한데?'

바람의 정령으로 이동을 보조하는 것은 물론, 물의 정령으로 몸을 씻기는 것까지 가능했으니.

그는 자신의 깨끗해진 몸을 둘러봤다.

타라크로 이동하기 직전에 엘프들에게 받은 서비스.

직접 경험하고 나니 그에 대한 욕심이 더욱 커졌다.

'그런데 장비들이 많이 상했네. 조만간 새 걸로 구해야겠군.'

그 와중에 손상된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단한 흑철강 도끼들은 이가 나간 것은 물론, 실금이 생긴 곳도 있었다.

맹수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는 전투 중 줄이 끊어져 온데간데없었고, 검은 표범 투구는 완전히 누더기가 되었다.

···사실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착용한 장비들도 별로 없었으니.

'그것도 전부 장식용이지. 뭐, 도끼야 이제 제법 쓸 만해졌지만.'

「육체변이」의 특성상 몸에 맞춘 장비를 입을 수 없는 할리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야만 전사 컨셉이 찰떡이었다.

그의 진짜 무기는 괴물 같은 육체 그 자체였으니까.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맨발로 거리를 거닌 그는 시내 한편에 위치한 평범한 주택으로 향했다.

덜컥—

자신의 집인 듯 힘차게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선 할리.

하지만 안에 있던 집주인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를 맞이했다.

할리 이후에 타라크에 전송된 아바타, 휴버트였다.

"와하핫—! 「감정」이 있으니까 바로 물건을 확인할 수도 있고 편하군!"

그의 왼쪽 눈동자에 초록빛이 반짝이고, 들고 있던 물건들이 허공을 날아 자연스럽게 휴버트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눈을 이식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게된 「보석안 : 염동」.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리에게 호환된 덕분인지 그의 생체 에너지로도 발동할 수 있게 된 염동력은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있었다.

이제 그에게도 원거리 공격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기도 했고···.

'몸도 띄울 수 있으니 말이지. 거기다 이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오드아이로 보일 뿐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변이」에 동화된 보석안은 얼핏 보면 평범한 녹색 눈동자로 보였다.

물론 여전히 미묘한 이질감은 남아있지만, 그 정도야 큰 문제도 아니었다.

'온갖 인종과 종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거기다 이 험상궂은 덩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따질 사람도 없을 테고.'

할리가 그렇게 염동력을 시험하는 동안 휴버트는 곧바로 물건들의 감정에 들어갔다.

-뛰어난 거장이 세계수의 가지로 다수의 정령석을 엮어 만든 팔찌. 착용자의 자연력과 정령 소환을 보조함과 동시에,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을 크게 증폭시킨다. 이전 사용자의 영향으로 정령석에 바람과 번개, 대지의 성질이 강해졌다.

-한때 세계수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기운을 무리하게 사용한 나머지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여러 가지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흐음··· 애매하군."

세계수의 가지야 기념품 용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둘째 치고, 팔찌도 사용처가 마땅치 않았다.

물론 라포리는 자신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귀한 걸 내어준 거겠지만···.

'성능 자체는 좋은 것 같은데. 쓸 수 있는 아바타가 없네.'

정령사에게는 최고의 보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정령사가 없었다.

욕심과는 별개로 정령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별로 없었고.

지구의 귀환자 중에서도 정령사는 유난히 적은 편에 속했다.

대자연의 존재인 정령과의 친화력은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자연과 벗 삼아 살아왔다던가, 그쪽 계통의 고유스킬이라도 각성하지 않는 한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리고 내 아바타는 본체와 같은 조건으로 생성된단 말이지.'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오며 인스턴트식품을 입에 달고 살아온 그에게 자연과 친화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증폭'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가진 게 있어야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그에게도 숨겨진 정령 친화력이 있지 않을까?

휴버트는 자기 손목에 슬쩍 팔찌를 끼웠다.

그것이 불편하지 않게 자동으로 사이즈가 조절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손목의 팔찌에 집중하며 자연력을 느끼기 위해 노력했다.

평온해진 마음에 떠오르는 산과 바다를 비롯한 자연의 심상.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휴버트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개뿔,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

···그래도 첫 시도니까, 계속 차고 있다 보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따로 쓸 사람도 없으니 휴버트가 계속 착용하기로 했다.

할리가 가지고 있다간 그 전투 스타일 때문에 언제 망가질지 몰랐으니.

그렇다고 아크리치 한스나 뱀파이어 하인즈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이제 내 기본 수준도 쉽게 비명횡사할 수준은 아니니까. 최소한 휴버트가 기습당하더라도 죽기 직전에 소환 해제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팔찌를 찬 손목은 잘 가리고 다녀야겠지만.

사업을 시작하면 여러모로 노려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 문제도 이번에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은데.'

곧 할리가 주신교단과 인연을 맺은 것이 용병 길드를 통해 알려질 테니, 그와 동업자의 신분으로 사업을 시작하려 했던 휴버트 입장에서는 큰 호재였다.

현대가 아닌 만큼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신경 쓸 점들이 많았다.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자본뿐만 아니라 무력이나 인맥 등이 필수.

그 때문에 할리의 활동 지역인 타라크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그 이름을 빌려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교단과 인연까지 있다? 이건 게임 끝이지.'

일단 교단의 이름으로 정식 공표되면, 그 인연이 크든 작든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부담스러운 인물이 될 터.

그가 함께 참여한 사업을 건드리는 데에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할리가 동업자로서 쏠쏠한 성과를 얻는 동안, 휴버트는 시장 조사를 하며 팔 만한 물건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일단 시작은 후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우테리카에서 후추의 최대 생산지는 대륙 남동부.

타라크는 서북부 지역이니 운송에 따른 가격 차도 가장 크다.

'몬스터 산업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상인들을 비롯한 유동 인구가 많으니 상품만 좋으면 문제없어. 주 소비자가 될 고위층인 마탑 지부가 많기도 하고.'

계획은 모두 세워둔 상황.

"으엇차~! 피곤하구만!"

할리가 집 안의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동안, 휴버트는 이번에 구매한 마도구와 세계수의 가지를 챙겼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

"흐음··· 기념품으론 나쁘지 않네."

나는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말라 죽은 식물이 담긴 화분에, 세계수의 가지를 꽂아 넣었다.

물까지 한 컵 부어주자, 기분 탓인지 벌써부터 뭔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 이건 됐고. 교역품은 하인즈를 통해 혈맹에게 준비시키면 되겠지. 마도구 판매도 그쪽을 통하면 될 테고.'

기껏 쓸 만한 세력을 집어삼켰는데, 이럴 때 쓰지 언제 쓰겠는가.

'헤테로시스를 키우는 건 순조롭고, 브로코슬락 클랜은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겠지.'

틈틈이 벌인 하인즈의 탐색 활동으로, 탈리아 왕국의 뱀파이어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은폐」와 「투명화」로 몸을 숨기고, 「간파」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어이없게도 놈들이 대귀족의 저택을 통째로 본거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귀족이 클랜 로드일지도 모르고.'

상세한 정보를 완벽히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인즈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헤테로시스를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었으니까.

본격적인 클랜 접수 작업은 그 이후 이뤄지게 되리라.

"흠흠··· 자, 그럼···."

이번에 큰 사건을 겪었으니, 카르마를 정산할 차례였다.

'본격적으로 아우테리카 활동을 하기 전에 카르마 포인트가 30만이 좀 넘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있었던 주요 사건.

하인리히가 성기사로 서임 받아 교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한스의 비밀 연구실에서 할리가 완성되고, 마물을 사냥하며 성장해 야만 전사로서 용병이 되었다.

'여기까진 딱히 특별한 일이 없군.'

대부분 개인적으로 성장한 시간에 가까웠으니,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럼 이번에 얻은 카르마의 대부분은 하이 엘프 후보인 세실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거라는 말인데···.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668,189』

'애매하군. 세실리는 아직 후보라 그런가?'

엘븐 킹덤과 하이 엘프 라포리, 주신교단의 성녀를 비롯한 고위층까지 엮인 일치곤 좀 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당장의 카르마가 전부가 아니었지.'

저번에도 경험했듯, 카르마는 그가 끼친 영향이 이후 세계에 변화를 줄 때마다 유동적으로 증가했었다.

그 말은 이후 세실리가 정식으로 하이 엘프가 되고 뭔가 큰일을 할 때마다 그의 카르마에도 영향을 준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번 일에 엮인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

'이젠 상관없겠지. 어차피 조만간 카르마를 폭증시킬 수 있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당장 고유스킬을 강화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의 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

"무례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포리 님."

"아닙니다. 중요한 사안이라는 건 저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교단 측에서 준 도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녀의 사과가 연신 이어졌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라포리가 교단의 '침묵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하이 엘프는 엘븐 킹덤의 수뇌부였기에 이는 외교적 결례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원하게 수락했다.

그만큼 이번에 교단에 진 빚이 컸다고 여긴 것이다.

저벅저벅—

그들은 지금 복잡한 통로를 지나 교단의 심처로 향하는 중이었다.

성녀와 라티우스 대주교, 하이 엘프 라포리.

그리고 이단심문관장과 하인리히까지 다섯 명.

'설마 진짜 나까지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당연히 이제 성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들어올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그의 신성력이 주교급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불사왕의 파편에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도는 대주교급 이상.

그 때문에 라티우스 대주교는 이번에도 우려를 표했지만, 하인리히가 바로 직전에 세운 공이 있어서인지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당시에 대주교 본인도 주신의 인도가 있었다며 크게 감탄하지 않았나.

물론 성녀라고 마음대로 그를 봉인지에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쪽으로."

앞장서서 일행을 이끄는 검은 후드와 사제복을 입은 자.

이곳의 총책임자인 이단심문관장이었다.

이곳은 성녀의 관할이 아니라 그의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의 출입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규율에 철저한 그도,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으니···.

'주신께서 하인리히 경을 불사왕의 대적자로 삼으시려는 것 같아요.'

성녀의 말에는 커다란 무게가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엄청 꼭꼭 숨겨져 있네.'

기존에 알고 방비하던 지하 통로는 시작에 불과했다.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복도, 특정 조건에서만 열리는 비밀의 문, 곳곳에 깔린 성법 함정과 결계까지.

대체 어떻게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었나 의문일 정도로 길고 복잡한 복도가 이어졌다.

'···성법 결계. 그것도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아득한 수준의···.'

그도 「아우테리카 성법」을 습득한 만큼 제법 성법에 조예가 있었지만, 이건 그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정식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벽을 부숴서도, 땅굴을 파서도 도달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

그런 곳의 한가운데에 마지막 '불사왕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교단을 무너뜨리고 차근차근 통로를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겠는데? 그게 가능할 리도 없지만.'

통로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에는 여러 개의 게이트 중 하나를 발동시켜, 단거리 이동을 통해서야 다음 장소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강박적인 보안을 거친 끝에 도달한 장소.

"이곳···."

일행은 마지막 보안을 해제하고 방 내부로 들어서는 이단심문관장의 뒤를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대단하군.'

순백의 방 내부 전체에는 흑마력을 억제하기 위한 금빛 기도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열고 들어왔던 문짝에까지.

그리고 그 중앙에 있었다.

신에게 바치듯 쌓아 올린 제단 위.

주변을 둘러싸듯 세워진 다섯 개의 기둥에 연결된 가느다란 은빛 쇠사슬에 감싸인 그것.

'저게 마지막 불사왕의 파편···.'

하인리히의 코앞에, 그것이 있었다.

#59

뜻밖의 행운 (3)

"이게, 그···."

라포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가 입을 닫았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제단 위의 그것을 바라보았다.

봉인이 몇 겹이나 겹쳐있는데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불길한 아우라.

그 지독한 죽음의 기운에 그것을 보는 이들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그간 두 개의 파편을 흡수하며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기운이었지만, 저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첫 번째 파편은 역천의 서약에서 가지고 있던, 결손이 심해 주변의 정보를 빨아들이던 것.

두 번째 파편은 브로코슬락 클랜에서 가지고 있던, 단단하게 응집돼 굳어있던 것이었는데···.

'저건 별다른 하자가 없어 보이는군.'

거기다 그 크기도 앞선 두 파편을 합친 것만큼 컸다.

물론 정확히 삼등분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라포리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의 몸에서 자연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제단 쪽으로 향해, 봉인 밖으로 삐져나온 죽음의 기운과 접촉했다.

파직—

순식간에 오염되기 시작한 기운.

그는 황급히 연결을 해제하고 식은땀을 훔쳤다.

"크흠,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 다르군요. 단순히 흑마력이 밀집된 것으로만 여기고 탐색을 시작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잊지 않고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그 자리에 선 채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남은 일행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던 와중···.

"하인리히 경."

성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것을 직접 본 소감이 어떠세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파편을 노려보는 그 눈빛은, 그동안 보였던 허술한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뭐랄까···. 그냥 대단하군요. 저런 것을 한 존재가 품게 되니, 대륙의 재앙이 되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품는 게 아니에요. 잡아먹히는 거지."

성녀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정정했다.

"천 년 전, 차원의 가장 밑바닥에 있어야 할 저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작스레 대륙에 등장했어요."

'불사왕의 심장'에 대한 더욱 내밀한 이야기였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쓰레기통, 온갖 부정적인 찌꺼기들이 한 곳에 고인 심연 속에 존재해야 했던 것.

"아마 더 강한 힘을 추구했던 흑마법사의 소행이었겠죠. 심연을 열고 저걸 불러올 정도면 당시에도 대륙 최고 수준은 되었을 텐데···."

"힘에 대한 욕망은 한 번 빠지면 끝이 없으니까요."

성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륙에 존재하게 된 물건이니 이렇게 봉인하는 게 최선이었죠. 돌려보내겠다고 다시 심연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어떤 존재도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저건 차원의 밑바닥에서 오랜 세월 고이고 응축된 '죽음'이라는 개념의 일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마인드 허브」가 대단해 보이네.'

물론 스킬의 위력이 강하다기보다는, 그 발동 구조 덕분이었다.

방사능을 제대로 밀폐하는 시설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곳의 출입구를 관리하는 것에는 수고가 덜 드는 것과 같은 문제.

'외부로 새어 나오는 방사능을 막는 것만으로 「마인드 허브」가 상시 발동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언데드는 정신 공격에 면역이니까, 저번처럼 정신세계에서 직접 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딱히 위험할 일은 없었다.

"솔직히 저도 왜 하인리히 경을 이곳에 데려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또한 주신의 뜻이겠지요.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성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라포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미묘해진 기분으로 슬쩍 천장을 쳐다봤다.

'주신님, 도와주시는 건 좋은데···.'

왠지 짬처리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로 윈윈이니 좋기는 하지만, 뭔가 기분이···.

"···후우,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그때 라포리가 심호흡하며 돌아섰다.

기운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나가도록 하죠."

성녀의 말에 다시 앞장서는 이단심문관장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절차를 역순으로 밟아 나갔다.

그렇게 라포리가 조금 지친 것 외에는 큰 문제 없이 모두가 바깥으로 나온 순간···.

"그럼."

봉인지의 구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들리는 목소리.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단심문관장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로 따져도 팔라딘급일 것이다.

추후 일을 벌일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일 터.

"오늘은 라포리 님이 무리하신 것 같으니, 이만 쉬고 내일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시종일관 조용히 참관하던 라티우스 대주교의 말에 곧바로 자리가 파해졌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라포리를 귀빈 숙소로 안내하고 나서,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됐다.'

봉인지의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뜻하지 않은 행운.

이제 남은 것은 결행일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

[큭큭큭··· 드디어.]

기다려왔던 순간이 찾아왔다.

거기다 지금까지 공들여 하던 연구에 도움이 될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성녀의 추적을 피할 수단을 찾는 것.

'성녀가 추적하는 건 결국 '불사왕의 파편'이란 말이지. 그럼 그것만 감출 수 있다면 해결되는 문제.'

기본 골자는 아공간에 파편을 넣고, 흑마력의 연결만 유지한 채 힘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아 하지 못했던 종속 아공간 연구와,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던 「불사」 스킬을 합쳐 세워진 제법 그럴싸한 계획.

하지만 실험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식으로든 파편을 아공간에 넣을 수 없었으니까.

처음엔 워낙 막대한 에너지가 담겨 있어서 그런가 싶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번에 성녀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파편의 기원에 대해서. 어쩐지 그동안 도무지 아공간에 들어가지 않더라니.'

차원의 심연에서 끌어올려져 세상에 현현한 물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세계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존재를 이용한다면 모를까.'

그래.

이세계에서 온 각성자처럼.

'지금까지 한스가 파편을 가지고 자유롭게 차원을 넘었던 것처럼 말이지.'

한스는 굉장히 특이한 존재였다.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아바타」의 특성 때문에 본체와 연결되어 각성자로 인정받는 상태.

[크하핫! 결국 이 몸뚱이를 이용하면 해결되는 문제렷다!]

차원의 이면을 이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개체에게 종속된 아공간을 생성하는 것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지지직—

공간이 찢어지며 한스의 빈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아까는 없었던 해골 지팡이가 그 손에 들린 채로.

'아직 공간이 만족할 만한 크기는 아니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지.'

그럼 이 종속 아공간을 한스 본인과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조율이 좀 필요하겠군. 종속 아공간의 좌표를 이 몸과 겹치게 설정하고, 경계를 흩트리는 방법으로···.]

이미 가닥은 잡힌 상태였으니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 후에 남은 것은 「불사」로 근원을 추출해 종속 아공간에 담고 연결을 유지하는 것뿐.

흑마력 통로가 연결된 만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지금처럼 몸에 은폐장을 구축하는 정도로 차단할 수 있을 터.

그 정도만 되어도 대륙을 활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그래, 이 연구가 끝나면 마지막 파편을 얻고 난 뒤에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겠지.'

하인리히가 파편이 봉인된 곳의 코앞까지 진입한 이상, 이제 그것은 한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바로 갈 순 없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직접 확인해 본 바로, 마지막 파편의 크기는 한스가 지금까지 흡수한 두 개를 합친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강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

그런 것을 흡수한 직후 바로 기운을 숨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수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고···.

'그런데 교단 측에서 그걸 기다려줄 리 없지.'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고, 파편을 흡수하는 것도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다.

아마 파편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소환 해제로 도망쳐야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만한 흑마력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뿜어낸다면, 가디언들에게 곧바로 위치를 들키고 추적이 시작될 거야.'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잘 숨겨왔지만, 당장 가진 것과 같은 크기의 파편을 흡수한 직후에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계속 불러내지 않을 수도 없고. 설령 본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소환 직후 헤어진다고 해도, 어떤 수단의 추적이 이어질지 몰라.'

안 그래도 번천회와의 갈등이 시작된 직후이지 않은가.

설령 한스와의 접점을 들킨다고 해도 당장 의심받지는 않겠지만, 인제 와서 그런 위험부담을 지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크흐흣— 됐다! 이건 가능하겠어! 카하핫!]

게다가 이제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 실험이 끝난 뒤엔 파편의 기운을 제대로 숨길 수 있게 될 테니까.

***

"라포리 님.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예,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잠깐 지친 것뿐이니까요."

불사왕의 파편을 확인하고 나온 다음 날.

그들은 다시 자리를 가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나눴다.

불사왕을 어떻게 추적할 지에 대해서.

"일단 엘븐 킹덤에서 같이 온 제 일행들이 근처에 의식을 하기 적합한 숲을 찾아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사전 준비를 해두는 중이지요."

"예,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희 측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지원하기도 했지요. 그럼 수색은 언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흠···."

라티우스 대주교의 질문에 라포리는 잠깐 뭔가를 계산하다가 그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

"사전 준비는 이틀 안에 마무리가 될 테니, 본격적인 의식은 사흘 내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교단 측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들도 지속해서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었지만, 딱히 성과가 없었던지라 이번 일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어느 지역부터 수색할지 미리 순서를 정해둬야겠군요."

대륙의 숲을 전부 확인하는 데는 최대 한 달 정도 걸린다지만, 운이 좋다면 훨씬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

촤르륵—

커다란 테이블 위에 대륙 전도가 펼쳐졌다.

나무가 많은 지역에 따로 숫자까지 표시된, 이번 작전을 위해 준비된 지도.

"그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짚어 보죠. 숫자가 큰 부분이 확률이 높다 판단된 곳인가요?"

성녀가 자리에 동석해 있던 검은 사제복의 사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번 작전을 위해 참석한 정보를 담당하는 이단심문관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간 이어졌던 수색 작업의 진척도와 이전까지 이어졌던 놈의 행적을 토대로 확률을 계산했습니다."

눌러쓴 후드와 검은 마스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목소리.

'이단심문관이 제대로 말하는 걸 들은 건 처음이네.'

봉인지를 안내했던 이단심문관장도 단답형으로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하긴 성녀가 직접 질문하기도 했고, 그만큼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터.

성녀의 뒤에 서 있던 하인리히가 지도를 슬쩍 훑었다.

그도 이번 수색 작업에 관심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마물의 숲은··· 응?'

가장 높게 표시된 확률이 50% 전후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다른 지역보다 숫자가 낮은 편이었다.

불사왕의 후예가 가장 먼저 발견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낮은데. 역시 전에 대대적으로 수색한 게 원인이겠지?'

처음으로 한스의 종적이 시작된 곳이었던 만큼, 탈리아의 불사왕 토벌대는 그 부근을 샅샅이 조사한 전적이 있었다.

아마 그 결과가 수치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으음, 그럼 이 지역을 우선으로···."

"일단 여기를 먼저 찾아보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그 숫자를 토대로 의논을 나누고 순서를 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물의 숲은 제법 뒷순위로 밀릴 것 같네. 이 정도면 탐색이 시작되기 전에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겠어.'

수색이 시작될 시간에 따라 행동 방침을 변경할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굉장히 좋았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정도로.

#60

폭풍전야 (1)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

빛 하나 없이 캄캄한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화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간이 되었군."

인기척 하나 나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그 장본인은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화로 쪽으로 다가가 거리를 두고 섰다.

그 순간.

화르륵—

화로에서 보라색 불꽃이 삽시간에 천장에 닿을 듯 솟구치더니, 이내 서서히 모닥불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보랏빛이 감도는 공간에는 어느새 화로를 둘러싼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모두··· 모였나.]

[그래, 이번에 뒤진 얼간이만 빼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림자들.

[뭐가 그리 급해? 서로 안부부터 묻고 천천히 하자고? 키키킥.]

[넌 제발 닥쳐라.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모두 이번 소식은 들었나 보군."

워낙 개성이 강한 이들이 모였다 보니 회의의 진행이 빠르지 않았다.

서로 친목을 다지고자 마련된 자리가 아닌 만큼, 빨리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선 쓸데없는 말은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좋았다.

[아아, 들었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

[크히힛~ 나도 그래. 세계수의 가지까지 가져가 놓고 그렇게 어이없이 뒤질 줄이야. 크킥킥.]

마침내 제대로 진행되는 정기회의.

그들은 지난 일들에 대해 서로 아는 정보들을 교환했다.

"그럼, 교단과 하이 엘프가 어떻게 누라베를 찾아내 습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군."

[하! 세계수가 개입한 게 아니겠나? 그 멍청한 놈이 제물에게 제대로 목줄을 걸지 않았나 보지.]

[흐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노인네, 저한테 봉인구까지 제대로 받아 갔는걸요?]

다시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만큼 바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불사왕의 파편을 독점하겠다고 혼자 지랄하던 마르코스에 이어서, 나름 잘 숨어 지내던 누라베까지. 이거 너무 긴장이 풀어진 거 아니야?]

"그 불사왕과 관련해서 말인데···. 요즘 교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다시 이어지는 정보의 교환.

[그 불사왕의 후예. 우리가 이용할 수는 없을까?]

[크히힛! 마르코스야 이미 뒤져버린 걸 어쩌겠어? 뜻만 맞는다면 손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보랏빛의 공간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의견 제시, 반박, 대안, 합의 등이 한참 동안 오간 후···.

"그 건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럼 다들 그 외의 별다른 안건은 없는 거겠지?"

[그럼요~ 제국은 언제나 평안하답니다.]

[동부도··· 이상 없음···.]

결론이 도출된 동시에, 역천의 서약의 정기회의가 종료되었다.

***

"진소란, 이것들도 전처럼 처리하도록."

하인즈가 여러 업무를 보고 있던 진소란의 사무실에 찾아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비롯한, 하나같이 값비싼 마도구들.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빛냈다.

"와··· 로드, 이런 물건들은 어디서 계속 가져오시는 거예요?"

이미 이전에도 몇 번이나 봤었지만, 그녀는 재차 감탄사를 터트리며 그가 내놓은 물건들을 살폈다.

마도구는 귀환자들만 얻을 수 있다 보니 그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방법이 있지. 그보다 저번에 준비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

"아, 후추요? 일단 사람들 시켜서 전부 다시 포장하고 보관해 놨어요."

역시 부릴 사람이 있으니 편했다.

지시만 내리면 자잘한 문제들은 알아서 처리하니까.

'플라스틱이나 비닐에 담긴 물건들을 그대로 팔 수는 없으니, 번거롭지만 한 번 더 손을 거칠 필요가 있지.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하면 그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구에서 후추는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아우테리카에선 달랐다.

나름 고급 향신료인데다 주 생산지와 거리도 멀어 마진도 만족스러운 수준.

교역의 시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처음엔 지구에서 만들어진 인공 보석 같은 걸 팔아볼까도 생각했는데.'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인공 보석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불순물이 적어 깨끗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세일즈 포인트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구에서 만들어졌다 보니 마법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지.'

아우테리카에서 보석이 비싼 이유는 단순히 미학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법 실험이나 결계, 마도구를 만드는 등 신비를 보조하는데 다양하게 쓰이는 재료로서의 가치가 포함된 것.

그런 상황에 신비에 사용할 수 없는 불량품, 단순히 예쁘기만 한 보석을 팔았다가는 괜한 분란에 휘말릴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는 지금 괜히 시선을 끌어서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지. 그건 나중에 자리를 잡고 나면 프리미엄으로 판매해 보자.'

물론 그 좋은 사업 아이템을 사장하기도 아까웠다.

그런 특이한 특성 또한 개성 있는 차별점으로 둔갑시켜 팔아치우는 게 장사 아닌가.

돈 많은 이들은 오히려 그런 희소성에 가치를 부여해 열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생각을 정리한 하인즈가 주변을 둘러보며 진소란에게 물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확연히 줄어든 인원들.

대충 절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아, 인천 쪽에 잠깐 문제가 생겨서요. 진석 씨가 직접 갔으니까 금방 정리될 거예요."

헤테로시스가 몸집을 키우며 많은 이들이 그 그늘에 새로 합류했다.

기존 강경파는 물론 온건파와 중립파에 속해 있던 이들까지.

그중에는 강경파의 간부였던 진석이라는 감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순종적이란 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으면 혈정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는데.'

지방 쪽을 담당하느라 별장에 오지 않았던 그는, 나중에 하인즈가 직접 찾아갔을 때 곧바로 그 자리에서 꼬리를 말고 충성을 맹세해왔다.

생존 본능에 충실한 그 덕분에 이후 강경파의 흡수가 빨라진 덕도 있어 나름 흡족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알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한 건 여전히 아쉽지만. 놈도 이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이미 한국을 떴다는 의미겠지?'

8레벨의 흡혈귀로 추정되는 기존 강경파의 수장, 알파.

기회가 될 때 처리해 두려고 했는데 놈의 행적은 그날 이후 줄곧 오리무중이었다.

혈맹을 집어삼키면서 그 영향력으로 계속 수색하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정말 로드 덕분에 혈맹의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당연히 그를 주도하는 우리 헤테로시스의 발언권도 점점 커지고 있고요."

하인즈로부터 비롯된 무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한 헤테로시스는 혈맹을 주도해 급격하게 세를 불렸다.

물론 직접적으로 규모를 부풀리면 가디언이나 이능관리국에서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 암중에서 뒷세계의 조직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의 은밀한 작업이었다.

'그때 금괴를 팔았던 놈들도 휘하에 들어왔었지.'

마도구의 판로를 물색하는 데에 제법 쓸 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던가.

확실히 그때 거래할 당시를 떠올려 보면 나름대로 능력 있는 놈들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이사도 가고 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번천회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가 복잡해 사치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될 테니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도 되리라.

'물론 당장은 말고.'

"인천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지?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 내가 직접 가 보지."

최대한 빨리 혈맹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아우테리카를 뒤흔들 빅 이벤트를 코앞에 둔 상태.

이 이벤트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 작전이 시작되고, 하인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

하이 엘프 라포리의 불사왕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우선순위에 따라 그동안 제법 많은 숲을 탐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하나의 후보군을 전부 훑은 후에 마련된 중간 회의에 동석해 진행 상황을 함께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도 이번 작전에 깊게 관련된 만큼, 성기사단의 업무보다 이쪽을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뒤에서 참관하면서 수발을 드는 게 전부지만.'

라포리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조사가 끝난 지역의 서류를 정리했다.

"···흠,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지역들은 전부 훑었는데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니, 자신만만하게 나서 놓고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민망한 듯한 라포리의 말에 성녀와 대주교는 그렇지 않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포리 님이 이렇게 노력해 주시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탐색 순서를 정한 것도 저희 교단 측이었고요."

"사실 숲이 없는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지역을 크게 좁힐 수 있으니, 나쁜 일만은 아니지요."

"덕분에 지금도 교단의 수색대는 숲이 없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으니까요. 효율이 크게 증가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그들의 말대로, 계속해서 운용 중이던 수색 인원은 사막이나 황무지를 비롯한 지역을 위주로 파견되었다.

물론 아직 숲의 탐색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교단 측에선 미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라티우스 대주교는 벽에 걸린 대륙 전도와 우선순위가 정리된 서류를 살폈다.

"그럼 다음 순위의 후보군을 살펴볼까요. 어디 보자··· 이번엔 대충 30% 전후의 지역들이군요."

"하아, 이제 와선 그 확률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요."

"흠흠, 그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성녀님."

"앗! 그렇죠. 그것도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과일 텐데. 제가 너무 무신경했네요."

성녀가 자책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심적으로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부터는 이 지역들을 차례로 훑어보겠습니다."

"아! 잘 부탁드립니다, 라포리 님. 피곤하실 텐데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그렇게 자리가 파해지고, 한스 수색 작전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참관하던 하인리히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드디어 인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탐색이 시작된 지 보름째 되는 날, 대륙 서쪽에 위치한 마물의 숲이 다음 후보군으로 포함되었다.

'그래도 시간에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야.'

방금 막 연구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인리히가 숙소로 향한 것과 같은 시간.

[후흐··· 후흐하하핫—! 드디어 성공했다!]

한 동굴 속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음산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역시, 이 한스 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이런 것쯤은 별것도 아니지.]

불사왕의 후예, 아크리치 한스는 검은 로브의 앞섬을 활짝 열어 갈비뼈를 노출하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새하얀 갈비뼈의 허전한 틈 사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나의 물건.

마치 심장과 같이 주기적으로 맥동하는 검은 보석, '불사왕의 심장'의 파편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으니.

그 모습이 선명하지 않고 불투명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크크큭···. 이 몸을 이용한 위상 아공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이 몸은 더욱 완전에 다가섰으니! 크하하핫!]

그의 존재와 겹친 공간을 생성해 그곳에 「불사」로 추출한 심장을 넣었다.

쉽게 말해 한스의 몸뚱이 자체를 아공간 마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었다면··· 아니, 살아있는 존재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기행.

물론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라 완전한 단절을 포기하고, 공간도 갈비뼈 내부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 문제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의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말이지!'

몸 자체를 유사 아공간으로 만들면서 파편의 제한을 무시했으며, 흑마력을 수급하기 위한 통로도 원활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존재도 쉽게 감출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전체를 노출시키고 있을 때와 통로 하나로만 연결됐을 때, 그것을 숨기는 난이도가 같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불사」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전신이 가루가 되더라도 통로를 통해 공급받은 흑마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공간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일격이나, 그것을 다루는 마법이 필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한스가 그런 공격을 순순히 맞아 줄 리가 없지.'

여러모로 뿌듯한 결과.

마물의 숲에 라포리의 탐색이 시작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61

폭풍전야 (2)

"와하하핫—! 이거 좋구만! 아주 마음에 들어!"

할리는 자신의 새로운 투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뛰어난 실력의 장인이 마수 회색곰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투구. 여유 공간에 흡수재를 채워 넣어, 외부의 충격을 완화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질긴 가죽이 어깨와 등을 덮을 수 있도록 일체형으로 제작되었다.

망가진 검은 표범 투구를 대신해, 세실리를 구하고 도시로 돌아오기 직전에 따로 챙겨 두었던 마수 머리로 특별 제작한 물건이었다.

용병 산업이 발달한 타라크인지라 장인들의 실력도 전체적으로 좋아 상당히 훌륭한 물건이 나왔다.

이것도 휴버트가 발품을 팔아가며 실력 있는 장인을 물색해 의뢰를 넣은 결과.

덤으로 마수 이빨 장신구들도 전부 새로 장만해, 다시 완벽한 야만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였다.

"그나저나 무기는 사용할 사람이 직접 와야 팔겠다니. 장인이라는 양반들은 까다롭단 말이야."

아직 구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할리가 사용할 무기뿐.

휴버트가 대장간 거리를 돌다가 상당히 괜찮은 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만든 장인이 사용할 본인이 직접 오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사실 직접 가는 것 정도야 별것도 아니지. 굉장히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 때문에 할리는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타라크의 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모두가 수군거리면서도 그에게 뭐라 말하지 못하고 시선만 피하는 상황.

하지만 그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켁, 저 촌스러운 꼬락서니는 뭐야? 남부 망신은 저 혼자 다 시키는군."

목소리도 줄이지 않고, 대놓고 들으라는 듯 내뱉은 불평.

할리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시선이 돌아갔다.

'이건 또 색다른 상황인데.'

이 위압적인 모습을 보고도 저런 말이 나오다니.

대체 어떤 용감한 자일까?

할리의 시선이 향한 길옆 쪽에는 세 명의 사내가 모인 채,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평균 이상의 체구와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근육이 박힌, 숙련된 전사라는 느낌을 풍기는 자들이었다.

공통점이라면, 저마다 몸 곳곳에 갖가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

그들은 할리와 눈이 마주치고도 꺼리는 기색 없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자격도 없는 게 전사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 어설픈 낙서는 뭐냐? 각인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본데?"

"진짜 남부인 맞아? 짝짝이 눈도 그렇고. 혼혈인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짜 남부 출신 전사들인 것 같았다.

용병 산업이 발달한 타라크다 보니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이들을 만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리 수집해둔 정보에 따라 최대한 남부인들과 비슷한 인상으로 얼굴형을 바꿨지만, 현지인들이 보기에는 위화감이 느껴졌으리라.

'이럴 때 필요한 건 뻔뻔함이지.'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남자 할리는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몸을 모욕하는 거냐! 나는 한 명의 전사로서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 너희도 남부의 전사 같은데, 이 멋진 모습을 트집 잡는 이유가 뭐지?"

가짜 남부인 의혹은 자연스럽게 넘기고 의상에 대한 문제로 논점을 고정하며, 그는 전사들 앞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덩치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할리 앞에 서니 머리 반개 이상으로 눈높이 차이가 났다.

"하!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남부인들 전체가 싸잡혀 비웃음거리가 된단 말이다!"

"그런 옷은 전통 축제에서나 입으라고. 이런 데서 당당하게 거들먹거리고 다니지 말고!"

"그런 비효율적인 복장으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거 보니 근육만 키운 광대 같은데?"

그들의 복장은 가죽에 부분적으로 금속이 덧대어진 평범한 갑옷으로, 평균적인 용병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실망스럽군. 야만 전사의 낭만이 이미 사라진 시대라니.'

다시 몇 차례의 언쟁이 오갔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럼 이럴 때 해결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지? 하핫핫!"

미리 조사한 남부의 정보 중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전사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맨손 박투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관철한다는 풍습.

무기도, 오러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겨루는 터프한 방식이었다.

"불만이면 입만 나불대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 보라고?"

"각인 하나 없는 팔푼이가···!"

시원하게 날린 도발에 그들 중 하나가 이를 갈았다.

들고 있던 무기를 옆의 동료에게 넘기며 나선 그와 할리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싸움판이 벌어졌다.

"나는 셋이 동시에 덤벼도 상관없는데?"

"전사의 명예를 뭘로 보고!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호오? 그래?"

할리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히며 근육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복장 탓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근육, 그 결의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흠칫!

맞은편에 선 남부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지만, 그도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그의 자신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퍽!

"켁."

"다음—!"

한 명.

"억—!"

"다으음!"

두 명.

콰직!

"크윽··· 너, 남부인이 아니구나! 이 정도 실력으로 전사의 각인 하나 없다니!"

그리고 마지막까지.

애초에 인간인 그들이 육체의 힘만으로 이 몸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주먹은 할리의 단단한 근육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고, 근력의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했으니···.

'사실 처음부터 불공평한 싸움이기는 하지.'

이미 몬스터나 다름없는 그의 육체는 굳이 오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체력으로 상시 강화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이거 오히려 좋은 찬스일지도.'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남부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길 가다가 진짜 남부 출신 전사들을 주운 것이다.

가짜 남부 사나이인 할리와 현지인들의 만남이었다.

'이놈들, 잘만 하면 이용해 먹을 건덕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곧바로 표정을 풀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핫핫핫! 이거, 형제들 실력도 제법이구만!"

"혀···형제?"

"잠깐 의견 차이로 다투었다지만, 같은 피가 흐르는 고향 사람을 이 먼 타지에서 만났는데 이 또한 인연! 이 정도면 형제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핫!"

"그게 무슨 개소···."

"어허!"

쓸데없는 토를 달려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봐 주자,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흐흠! 이미 짐작했겠지만, 사실 나는 온전한 남부 출신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몰골로···."

"쓰읍—!"

자꾸 말꼬리를 잡는 무례한 녀석들과 함께 잠시 몸이 건강해지는 육체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금세 공손해진 이들을 골목으로 데리고 가, 재차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게 다 깊은 이유가 있단 말이지? 이거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그리고 자신의 출신을 합리화하고 그들을 구슬리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슬슬 입을 털며 밑밥을 깔았다.

"우리 아버지는 남부에서도 이름을 날린 전사셨다고 들었어. 아, 누군지는 묻지 마. 나도 그렇게 전해 들었을 뿐이라 자세히는 몰라. 어쨌든···."

뜬금없이 시작된 과거사 고백.

전사들은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한바탕 서열 정리가 끝난 마당이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얌전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남부의 전사가 맞닥뜨린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이야기.

서로에게 최악의 첫인상이었던 타지에서 온 여인, 하지만 인연이 그들을 계속 묶어놓는데···.

가치관의 차이로 발생한 오해와 갈등, 그리고 화해.

여러 사건을 겪고 신분의 차를 넘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으니···.

전사를 마음에 들어 한 부족장의 딸이 그들의 사이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전사는 부족장 딸의 구애를 거절하고 운명의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선택한다.

그에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여인이 그들에게 추격자를 보내게 되고···.

온갖 역경 끝에 그들은 서부의 한 화전민촌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그때 그들 사이에는 이미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상태였으니···.

"그래, 그게 바로 이 몸이었지."

할리가 말을 마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꿀꺽—

"···그, 그래서 어떻게 됐소?"

"거 형씨, 말 끊지 말고 퍼뜩 이야기해 보소."

처음엔 찌푸린 표정으로 억지로 이야기를 듣던 남부의 사나이들은 이미 그의 이야기에 잔뜩 몰입한 상태였다.

'대충 클리셰들을 섞어서 끼워 맞춘 스토리인데. 생각보다 잘 통하네.'

하긴 지구에서나 흔한 소재지, 이곳에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것이다.

거기에 남부는 수많은 부족연합의 집합체인 만큼 뭔가 있을 법한 전개이기도 했고 말이다.

"흠흠···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지. 집요한 악녀, 부족장 딸의 마수가 거기까지 미친 거야. 행복한 삶을 꿈꾸던 세 명의 가족은···."

또 이야기에서 'K-신파'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할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추격자들, 아내와 자식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눈물 나는 사투.

그렇게 도주와 전투를 반복한 끝에 모든 추격자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전사는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품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

전사···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차고 있던 맹수 이빨 장신구를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내가 없으면 이제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한단다. 내가··· 그 목걸이와 함께 끝까지 너를···.'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지는 아버지와, 오열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이에게 계승된 전사의 의지.

이후 더 이상의 추격자는 없었지만, 여인 혼자의 몸으로 아이를 건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아이를 키웠다.

매일 밤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때의 추억을 아이에게 들려주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아.

'어무니! 아부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주 멋진 분이었단다. 그야말로 전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지. 한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반짝이는 눈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는 아버지의 유품인 장신구를 손에 꼭 쥐고 훌륭한 전사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비극.

"···난 그 장신구를 어머니와 함께 묻었다. 그건 평생을 서로 사랑해 왔고,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던 어머니께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그저, 아버지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만으로 족하니까."

그게 남부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다니는 이유라고···.

진중한 목소리로 감정을 잔뜩 담아 말하며 할리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정적과 함께, 길게 이어진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크흡··· 꺼흐흑!"

"형제··· 형제여! 넌 자랑스런 남부의 아들이다!"

"암! 그 의지가 계승되는 한, 이미 훌륭한 한 사람의 남부인이지. 부족한 지식은 우리가, 아버지 대신··· 크흐흡···!"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K-신파'의 매콤한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전사들.

그들은 겨우 진정하는 듯하다가도 할리의 얼굴을 보고는 또다시 한참을 오열했다.

'너무 약발이 셌나? 계속 이러는 것도 곤란한데.'

"핫핫핫!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이 몸은 한 명의 훌륭한 전사가 되었으니까!"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할리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으나···.

"잘···컸구나. 정말 잘 커 주었어."

"암, 각인이 없으면 어때. 저 정도면 이미 훌륭한 전사지!"

왠지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전사들.

상남자들답게 좀 전에 그에게 맞았다는 사실도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인간들 좀 심하게 몰입한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을 아들로 보는 듯한 기색이었다.

많아 봐야 30대로 보이는 젊은 전사들이···.

"흠흠, 어쨌든. 그래서 내가 남부에 대한 환상이 많은데 정작 아는 게 별로 없단 말이지? 아직 준비되지 않아 이곳에 있지만, 언젠가는 마음의 고향인 남부로 향할 생각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남부 전사들이 일제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문제였겠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 형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가 제대로 된 남부의 정신에 대해 알려주지!"

"그래, 아버지가 보셔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게 만들어주마."

'됐다. 현지인 강사들에게 족집게 강의를 받을 수 있겠군.'

대충 입을 털다가 못 믿는다 싶으면 강제로 납득시켜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단순한 친구들이었다.

할리는 뿌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핫핫! 그렇게 해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할리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부하··· 아니,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잠깐씩 '할리의 절친'인 휴버트의 일을 좀 돕게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친구의 친구 또한 친구니까!

'소년 할리의 여정 중 휴버트와의 만남 파트도 생각해 둬야겠군.'

이렇게 타라크의 할리와 사업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휴버트, 지구에서 헤테로시스를 관리하느라 바쁜 하인즈까지.

각자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지금.

남은 두 아바타의 상황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

한스는 몇 개월 동안 머물며 정들었던 실험실을 정리했다.

이제 곧 이 지역에 대한 하이 엘프의 탐색이 시작될 테니까.

미리 주변의 나무를 제거해 둔다든가 타이밍에 맞춰 소환 해제를 하면 탐색을 피할 수 있겠지만, 딱히 그것을 피하기 위한 대비는 하지 않았다.

[크크큭,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그런데 예정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지금쯤엔 뭔가 징조가 나타나야 할 텐데···.

'일정이 틀어진 건가? 다른 곳을 먼저 탐색하고 있다던가.'

어쩌면 동굴의 결계 내부에 있어서 찾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건만,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런 감상을 내뱉기에는 조금 일렀다.

같은 시간.

로셀리아 대신전.

하이 엘프 라포리가 이번 작전의 관계자들을 호출했다.

"찾았습니다."

교단 측 인사들의 눈이 커졌다.

물론 함께 자리해있던 하인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도 별다른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

그 어떤 징조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이미 탐색이 끝났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흥분한 듯한 기색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라포리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륙의 서쪽, 마물의 숲. 그곳에서 불사왕의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드디어 한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62

대신전 습격 사건 (1)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충분한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리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뒀던지라, 여유 전력은 충분합니다. 어차피 이번엔 최정예 인원들만 파견 보낼 예정이기도 했으니까요."

기운이 탐지된 곳은 대륙의 서쪽 끝.

거리가 거리인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낼 수 있는 인원수에는 제한이 있었다.

교단이 냄새를 맡았다는 낌새를 내비쳤다간 놈이 또 언제 어디로 도망갈지 몰라, 전처럼 탈리아 왕국에서 불사왕 토벌대를 소집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일정 수준 이하의 전력은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탈리아 신전에선 성기사단과 대사제 이상의 전투사제만 지원받기로 했다.

"작전에 참여할 팔라딘만 넷, 대주교는 저까지 셋입니다. 이단심문관 측에서도 참여할 예정이지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강자들을 몽땅 한자리에 불러들이는 작전.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상주하던 팔라딘 중에 세 명과 대주교 두 명이 참가하고, 서부에 파견 나가 있던 팔라딘과 대주교 한 명씩도 현장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또 각 성기사단과 전투사제 중에서 선별된 최상위권의 인재들이 함께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제론 대신전에서 피레이 추기경께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대륙에도 몇 없는 대신전의 최고 책임자인 추기경까지 직접 참전을 선언했다.

"음··· 하긴, 그분은 유난히 호전적이셨죠. 성기사 출신이시기도 하고. 첫 토벌전에 참여하지 못한 걸 상당히 아쉬워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마침 시간이 나신 모양입니다. 소수정예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하니 마침 잘되었지요."

로셀리아 대신전에도 두 명의 추기경이 있었지만, 그들은 불사왕과 관련한 문제는 모두 성녀에게 맡기고 대신전과 교단 전체를 운영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흠흠···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성녀님은 안 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라티우스 대주교.

"교황께서 노환으로 몸져누우신 지금, 성녀님께선 주신교단의 상징이십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자리를 지키셔야지요."

"하지만, 추기경님들도 계시는데···."

"안 그래도 대신전의 전력이 상당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이니, 부디 성녀님께서 이곳을 지켜주시지요. 아무리 비밀리에 이뤄지는 작전이라고 해도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여파는 하인리히에게도 그대로 돌아왔다.

"흠···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도 이번엔 성녀님과 함께 대신전을 지키는 게 좋겠네."

"저도 말입니까?"

당연히 지금까지 이번 일에 깊게 개입해 왔던 만큼, 자신도 참여하게 될 줄 알았던 하인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티우스 대주교는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진중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많이 상심하신 것 같으니 곁에서 말동무라도 되어주며 위로해 드렸으면 하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대주교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 될 게야. 추기경께서도 함께 가는 만큼, 놈도 저번처럼 쉽게 도망가지는 못할 터. 아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겠지."

저번에 결계를 치고도 한스를 놓친 전적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는 추기경까지 합세해 더욱 철저하게 대비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게 되겠지. 나 또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고."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런 전장에서 희생되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당장에도 작전에 참여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기는 했으나, 그래봐야 이번에 선별된 성기사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주교는 그의 진짜 가치는 성장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있다고 판단했다.

가파른 성장세를 가지고 주신과 성녀의 관심까지 받는 영웅의 씨앗.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겠지. 우리가 전부 전멸할 가능성을."

이미 충분히 과한 전력을 준비하고는 있으나,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때가 온다면 성녀와 하인리히가 교단의 희망이 될 수 있을 터.

"···알겠습니다. 대주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이해해 주어서. 자네도 지금까지 각오를 다지고 있었을 텐데."

결연한 표정을 짓는 라티우스 대주교의 모습에 하인리히는 그저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음, 그··· 열심이신 모습이 보기 좋네.'

게이트를 통한 전송은 성녀를 비롯해 작전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제들이 총동원되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선별된 소수정예만 파견된다고는 하지만 그 인원이 수십 명이 되다 보니, 그들이 전부 탈리아 신전으로 보내지는 데에는 하루가 더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로는 도착할 수 없는 거리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숨어 있던 곳에서 그리 급하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진 않을 테니까요."

라티우스 대주교는 로셀리아 대신전의 파견 인원을 통솔해 차근차근 일을 진행했다.

우우웅—

마지막 전송 인원이 대기하는 와중, 다시 게이트가 진동하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인원에 포함된 대주교는 고개를 돌려 배웅하러 나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성녀와 하인리히를 포함한 일행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신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그 비장한 뒷모습에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뒤를 부탁한다'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편하게 바깥바람이나 쐬다가 오세요.'

하인리히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우웅—

진동하는 게이트의 푸른 소용돌이.

그렇게 모든 인원이 대륙 서부의 탈리아 신전으로 이동을 마쳤다.

***

[흐흠··· 탈리아 신전에 모인 이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전부 정예인 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탈리아 왕국의 수도부터 마물의 숲의 깊은 곳까지.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한 달은 넘을 테지만, 그들이 또 어떤 축복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당장 하인리히도 「축복 : 도약」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저쪽에서는 이동에 걸리는 기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을 것이다.

아마 탈리아 신전에서 합류하자마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곧바로 출발하겠지.

[이제 슬슬 준비해 볼까.]

한스는 천천히 동굴을 나섰다.

화르륵—

그의 걸음걸이마다 지옥의 불길이 일며 동굴에 남은 모든 것들을 녹여버렸다.

실험 과정에서 발생한 폐기물부터 시작해서, 내부에 남아 있던 온갖 결계의 흔적들까지.

[굳이 다른 정보를 내줄 필요는 없겠지. 크흣···.]

그에 따라 결계들이 무너져 내렸지만, 이미 그의 온몸에는 파편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은폐장이 겹겹이 펼쳐진 상태였다.

'그럼 어느 타이밍에 일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

지금이 로셀리아 대신전의 방비가 가장 허술해진 시점이었다.

그곳이야말로 한스를 잡기 위해 가장 많은 전력이 차출된 곳이었으니까.

'거기다 게이트를 무리하게 가동하느라 사제들도 지친 상태지.'

파편 주위에 펼쳐진 봉인의 수준으로 봤을 때, 그것을 해제하는 것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마 파편을 손에 넣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그때를 대비해 대신전의 전력을 최대한 바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마침 하이 엘프의 탐색이 시작됐으니 시기도 적절했다.

일부러 기세를 드러내 유인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교단 측이 수상하게 여길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준비만을 갖춰둔 채 자연스럽게 발각당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계전송진 쿨타임도 미리 맞춰둔 상태.'

이제 언제든 일을 벌일 수 있었지만, 한스는 그 자리에 선 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를 잡기 위해 파견된 인원이 뒤늦게 연락을 받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크흐흐··· 이제 시작이다.]

달이 높게 떠오른 자정.

숲속을 비추는 달빛에 만물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한스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

"아우테리카 차원으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빛이었다.

눈이 멀게 만들겠다는 듯 사방에서 뿜어지는 압도적인 광량.

[크흐,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대단하군.]

몸에 두른 은폐장이 순식간에 빛에 타들어 가고, 주변에 맴돌던 흑마력들이 신성력과 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거 별로 좋지 않은데.'

온 사방이 한스에게 적대적인 공간이었다.

계속 이 상태라면 파편을 온전히 수습할 수 없었다.

되도록 평화롭게 일을 마치고 떠나려 했지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

한스가 지팡이를 위로 추켜세웠다.

[크하하핫! 모두 부서져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이 한 곳에 밀집되고···.

해골 지팡이 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이 삽시간에 몸집을 키웠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력이 흑마법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이제 한스는 그 정도 방해에 흔들릴 실력이 아니었다.

화르륵— 콰과광!

커다래진 지옥 불꽃이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나눠지더니, 황금빛 문장이 빛나는 사방의 벽면으로 향해 폭발했다.

후두두둑—

벽면의 문장이 떨어져 나가고 녹아내리며, 흑마력을 억누르는 기운이 약해졌다.

'한결 나아졌군.'

애초에 내부에 있는 부정한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봉인지였다.

직접적인 충격에 대한 대비는 덜할 수밖에 없는 노릇.

'한 번 더!'

스으으— 파파팟!

한스의 주변의 땅이 검게 물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의 칼날들이 사방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파손된 문장의 빛이 서서히 흐릿해지며, 그의 몸을 짓누르던 신성력이 약해졌다.

[크흣,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군.]

물론 직접적으로 공격해 오는 힘만 줄었다 뿐이지, 그는 결코 평소와 같은 컨디션이 아니었다.

'대체 몇 개의 신성 결계가 중첩되어 발동된 건지 모르겠네.'

한스의 침입과 동시에 대신전 전체에 설치되어 있던 온갖 종류의 결계가 동시에 발동했다.

'서둘러야겠어. 그래도 진입로가 복잡한 만큼 교단 측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건 좋군.'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중앙의 제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긴 그 와중에도 멀쩡하네.'

한스의 흑마법이 한바탕 주변을 뒤집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단과 그것을 봉인하는 기둥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파지직—!

그의 손길이 파편을 엮은 쇠사슬에 닿자 새하얀 스파크와 함께 불꽃이 일어 그의 팔을 뒤덮었다.

[흠, 그래. 그렇게 쉬울 리 없지.]

한스는 흑마력을 일으켜 손에 달라붙은 불꽃을 털어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군.]

외부의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봉인을 풀고 파편을 회수해야 하니까.

그는 재차 파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사건은 한밤중에 일어났다.

화아악—

대신전 곳곳에 새겨진, 그동안 장식이라고 여겨왔던 문양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고···.

"뭣?!"

"갑자기 이게 무슨!"

경비를 서던 성기사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바닥과 벽면, 천장을 가리지 않고 신성력이 담긴 문장이 떠올랐다.

공간을 단절시키고, 내부의 삿된 기운을 억누르며, 신성력을 가진 이들의 힘을 북돋는 종류의 신성 결계들.

이 순간, 로셀리아 대신전은 하나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침입을 허용한 뒤지만.'

함께 경비를 서던 성기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인리히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태평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는 지금 봉인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야간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대신전을 지키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광휘수호 성기사단의 업무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토벌대에 참가하지 못한 만큼 다른 쪽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이 통로 경비에 지원한 것도 의도한 일.

거기에 그동안 업무를 빠진 것도 있겠다, 그것을 벌충하겠단 핑계로 모두가 꺼리는 야간 경비에 자원해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곳에 있으면 흘러가는 상황을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겠지. 한스가 봉인을 해제하는 동안···.'

그 순간.

[비사—앙—!]

대신전 내부에서 머릿속을 울리는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비상 상황! 전 병력 전투태세! 준비가 갖춰지는 즉시 각자 위치로 집합!]

[성기사단은 단장의 지휘에 따라 이동!]

머릿속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성.

몇 번 본 적도 없던 추기경의 목소리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휘이익—!

그때, 한쪽에서 시커먼 복장을 한 이십여 명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 선두에서 그들을 이끄는 건 저번에 한 번 본 적 있던 이단심문관장이었다.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긴 한데.'

다른 이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관장을 상징하는 배지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이 구역의 통행증이나 마찬가지였다.

통로를 지키던 하인리히와 동료 성기사가 황급히 자리를 비켜서자, 그들은 바람처럼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거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군."

옆에 있던 성기사가 굳은 목소리로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말대로.

로셀리아 대신전 역사상 최초로 허용한 내부 침입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63

대신전 습격 사건 (2)

그간 단 한 번도 허용한 적 없었던 외적의 침입에 로셀리아 대신전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응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곳은 각지에서 인정받은 정예들이 모이는 교단의 성지였으니까.

외곽, 내부 할 것 없이 모든 경계가 강화되었다.

완전 무장한 성전사들과 전투사제들이 대신전 주위에 정렬했고, 소집된 성기사들이 일제히 이동했다.

그리고 성기사단장을 비롯한 강자들에게는 은밀한 지령이 떨어졌다.

즉시 봉인지 앞으로 집결할 것.

그 때문이었다.

하인리히의 눈앞에, 그간 자주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이 한데 모인 진풍경이 펼쳐진 것은.

'그렇게 많이 파견 나갔는데도 아직도 이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니.'

현재 대신전에 남은 이들 중 가장 위에 자리한 이들.

이미 은퇴했던 이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모여 그 인원이 백이 넘었다.

그때 한쪽에서 성녀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통로로 뛰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머리는 부스스하고 복장도 흐트러진 채로.

"바로 이동하죠! 전부 따라오세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곧바로 통로로 달려 들어간 성녀의 뒤를 따라, 대기 중이던 인원들도 서둘러 안쪽으로 향했다.

'이젠 이 통로를 지킬 필요가 없겠지? 전부 따라오라고도 했으니까···.'

눈치를 보던 하인리히도 슬그머니 그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어떻게 된 거죠? 대신전의 방비가 뚫린 건가요? 곧바로 봉인지까지?"

성녀가 자신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달리는 이에게 물었다.

고위 인사로 보이는 여성 이단심문관은 발소리 하나 없이 달리며 그녀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왔다는 어떠한 징조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봉인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봉인지 내부로 곧바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현재로서는 그렇게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대신전의 방어 결계에는 어떠한 공간이동 흔적 또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갑자기 그 자리에 솟아난 것처럼."

"말도 안 돼···. 이곳을 둘러싼 신성 결계가 몇 개인데···! 그걸 무시하고 공간이 뒤틀린 봉인지 내부에 곧바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실제로 발생한 상황이다.

봉인지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소식만 듣고 급하게 달려온 성녀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지만···. 침입자는 설마···."

"···예, 먼저 안으로 향하신 관장님의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이후,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생사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한스···!"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성녀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성녀님,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흥분해선 될 일도 안 된답니다."

"아! 그렇죠. 후우~ 후~."

그녀는 옆에서 함께 이동 중이던 코델리아 추기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각한 분위기의 수뇌부들이었지만, 하인리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다들 달리면서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네.'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성녀와 50대 후반의 여성인 코델리아 추기경은 달리면서도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몸에 흐르는 막대한 신성력이 육체를 보조하기 때문이리라.

"허허헛, 그나저나 주신께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이 성지에서, 대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이단의 침입을 허용하다니···. 허허허···."

허탈한 듯 힘 빠진 웃음을 터트리는 60대 중반의 남성.

사태 발생 초기에 신성력으로 지시를 내렸던 목소리의 주인공, 피온 추기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대륙 서쪽 끝에 있다가 성지의 대신전 내부까지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혹시···."

불사왕의 후예를 찾은 후에도 하이 엘프 라포리의 탐색은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놈이 만약 자리를 옮긴다면 곧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오늘 저녁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위치는 그대로 서쪽의 마물의 숲이었건만, 뜬금없이 이렇게 대륙의 중심부에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공교로운 타이밍에 말이다.

"이번 세대의 불사왕인 한스와의 교전 기록에, 라티우스 대주교님의 공간 차단 결계를 무시하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함께 이동하던 이단심문관이 다시 조용히 첨언했다.

"···그랬었죠. 정말 마물의 숲에 있었는지 지금은 확신할 수 없지만, 대신전의 결계를 무시하고 침입한 것은 사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불사왕도 아닌데 이 정도의 능력이란 건···."

"이번 파편을 빼앗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진정한 대륙의 재앙이 탄생하겠군요."

대화를 주도하던 이들은 물론,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재차 깨달았다.

"···좀 더 서두르죠."

성녀의 후광이 강해지며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주변 이들의 몸에 깃들고, 그들은 한층 더 빠르게 봉인지 내부를 내달렸다.

***

털썩—

마지막으로 남은 이단심문관장이 바닥에 쓰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군.]

한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쓰러진 검은 사제복들 주변에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 잔해가 널려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는 효율이 많이 떨어지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흑마력을 듬뿍 부여했음에도 평소의 절반 이하로 깎여나간 전투력.

부족한 부분은 물량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불리한 공간에서 파편의 봉인을 해제하는 동시에 벌인 전투에는 한스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암살자처럼 순식간에 접근해서 직접 공격해 오는 이단심문관장은 언데드로도 막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봉인은 거의 다 해제됐다. 추가 지원이 오기 전에 작업을 끝낼 수 있겠어.]

[마스···터.]

그때 바닥에서 허리 아래가 사라진 데스 위저드, 말콤이 하나만 남은 손으로 기어 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호? 용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미 죽은 상태이긴 했지만···,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것저것 아낄 상황이 아니라 말콤까지 투입하기는 했는데, 그동안 성장한 녀석은 제법 쓸 만한 부하였으니까.

'저 정도면 충분히 수복할 수 있겠네.'

그것이 또 언데드의 장점 아닌가.

[수고했다. 나중에 고쳐줄 테니, 지금은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

[예···.]

말콤은 곧바로 한스의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놈들도, 수복할 수 있는 놈들은 수거해 와라. 지금은 신경 써 줄 상황이 아니니까.]

달그락— 달칵!

[끄워억—]

주변의 언데드들이 부지런히 잔해를 뒤져 한스의 그림자 속으로 날랐다.

방치된 것들은 도저히 수복 가능성이 없이 완파된 시체들뿐.

한스의 시선이 다시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이단심문관들에게 향했다.

'죽이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손을 써놨으니. 대신전의 결계 덕에 오히려 쓰러뜨리기엔 편했어.'

내부의 신도들을 보호하는 신성 결계 덕분에 과하게 튼튼해진 그들은 어떤 공격에도 즉사만은 하지 않았다.

또 결계가 그렇게 빈사 상태에 빠진 이들의 숨통도 붙여놓는 걸 보고, 그는 마음껏 힘을 투사해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억지로 제압하려고 했으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을 텐데. 그럴 여유도 별로 없었고. 이런 면에선 다행이군.'

뭐, 확인 사살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다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안방극장' 작전은 시작도 할 수 없었다.

파스슥—

그때, 딱 하나 남아있던 제단의 기둥에 금이 가며 그에 연결되어 있던 은빛 사슬이 삭아서 부스러졌다.

그렇게 마지막 봉인이 해제되었다.

[···됐다. 크흐하하핫—!]

파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

한스는 그 기운을 마음껏 음미하며 그것을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신을 침범해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자신과 연결된 통로로 가져갔다.

「불사」로 추출된 근원과 하나였다는 듯 달라붙는 마지막 파편.

하지만 한스의 유사 아공간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속해서 통제되지 않은 흑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대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어느 정도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뿌리가 같은지라 금방 섞이고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흡수했던 파편들과 품은 힘이 비슷해서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었다.

한스는 하인리히를 제외한 모든 정신력 리소스를 쏟아 부어 서서히 심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소환 해제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격렬한 에너지의 유동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으니.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폭증하는 흑마력과 급격히 증가하는 힘에 고양감을 느끼고 있을 때···.

[흐으···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제한 시간이 다가왔다.

콰앙—!

박살 나 있던 문 바깥에서 굵은 광선이 날아와 한스의 방어막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수십 명의 무리.

교단의 정예들이 도착했다.

***

"늦···었나···!"

서둘러 달려온 이들이 제단의 봉인이 파괴된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일단 생존자들부터 구해요!"

성녀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듯 고함을 지르며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이단심문관들이 몸을 날려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데리고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곧이어 사제들이 부상자에게 달라붙어 신성력을 퍼부었고, 성기사들은 어느새 전방에 도열해 불사왕 한스와 그 휘하 언데드들과 대치했다.

"집중해라! 아직 파편의 기운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피온 추기경이 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전투사제들을 이끌고 일제히 기도문을 읊었다.

화아악—

성기사들의 몸에 깃드는 아름다운 빛무리.

온갖 강화 효과는 물론, 원활한 협공을 위해 신성력만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채널이 개통되었다.

성기사들의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가 방패와 전투 망치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장 앞에서 상대할 테니, 경들은 날 보조하는 데에 주력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조니엔 경."]

그는 대신전에 남은 유일한 팔라딘이었으니, 가장 앞장서서 싸울 이로 그 이상의 인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크하핫! 교단의 하수인들아. 이미 늦었다! 불사왕의 심장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으니!]

"현혹되지 마라! 공격!"

전투사제들의 성법이 한스에게 날아들고, 팔라딘 조니엔을 필두로 성기사들이 달려들었다.

물론 그 틈에는 하인리히 또한 끼어있었다.

'아, 시간 끄는 것도 안 통하네.'

어느 정도 파편을 흡수한 만큼 흑마력의 출력은 대폭 상승했다지만, 바로 전투를 벌이기엔 아직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교단 측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시간을 더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아압!"

하인리히의 검에 신성력이 깃들어 찬란한 빛의 검이 생성되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언데드를 베어냈다.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제는 진짜로 맡은 역할에 몰입해야 했으니까.

[키에에엑—!]

달그락, 덜그럭—

한스의 주변에서 계속해서 언데드들이 기어 나와 성기사들의 앞길을 막아섰지만···.

"으랏차—!"

["이놈들 별것도 아니다! 길을 뚫는 데 집중해라!"]

"주신이시여! 그 영광된 빛으로 삿된 것들을 불살라 주소서!"

막강해진 흑마력을 쏟아 부어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에 뒤덮인 성기사들과 후방에서 쏟아지는 전투사제들의 성법 지원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려 버렸다.

'그동안 어떻게 모은 것들인데!'

한스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언데드들을 탈탈 털어냈다.

당장은 물량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었으니.

콰아앙—! 쾅!

다시 성녀에게서 시작된 광선과, 피온 추기경이 불러낸 빛의 망치가 한스의 방어막에 균열을 만들며 폭발했다.

[이 귀찮은 것들!]

한스의 지팡이에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뭉쳐, 거대한 악마의 손으로 변해 그들에게 쏘아졌으나···.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보호해 주소서!"

콰드득!

코델리아 추기경이 만들어낸 푸른 방패에 막혀 사라졌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이었다.

'치사하게 다굴을 치다니!'

방어와 부상자 치료에 전념하는 코델리아 추기경.

성기사들의 보조와 한스를 견제하는데 집중하는 피온 추기경.

그리고 오직 전력으로 한스만 노려 공격해 오는 리에스타 성녀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다른 이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마지막 파편을 얻기 전이었으면 지금쯤 이미 도망가고도 남았겠군.'

그런데도 버틸 수 있는 건, 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확보하는 작업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아압—! 죽어라, 불사왕!"

어느새 언데드들을 돌파한 팔라딘 조니엔이 커다란 망치를 휘둘러왔다.

한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충격파를 발사해 그를 뒤로 튕겨냈다.

하지만 그 순간.

팔라딘을 튕겨낸 아주 잠깐의 틈을 노리고 두 명의 성기사가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와 그에게 짓쳐 들었다.

은신의 성법까지 받아 진행된 은밀한 작전이었다.

타이밍 맞춰 동시에 날아든 온갖 공격 성법들에 그의 방어막에 일시적으로 구멍이 뚫리고, 두 성기사의 양손검과 창이 좌우에서 한스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다.

허를 찔린 일촉즉발의 상황.

[흐···.]

한스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숙이고 오른손에 흑마력에 휩싸인 해골 지팡이를 틀어쥐었다.

카각—

좌측에서 찔러오는 창끝의 궤적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갖다 댄 지팡이로 틀어버렸다.

카앙!

동시에 지팡이를 한 바퀴 빙글 돌려, 우측에서 베어오는 양손검의 검면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이어진 공방.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에는 이미, 한스의 왼손에 완성된 검은 불꽃이 그들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콰아앙—!

"크헉!"

"으윽—!"

["서둘러 이쪽으로!"]

코앞에서 발동된 흑마법에 멀리 나가떨어진 성기사들은 곧바로 후방으로 이송돼 긴급 치료에 들어갔다.

공을 들인 회심의 작전이었건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흐흣! 감히 이 몸을 속이려 들다니, 백 년은 이르다!]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한스.

그에게는 어떤 작전도 통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상황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큭, 놈의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빠릅니다!"]

["무술을 익혔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성기사들의 대처가 한 박자 늦었어."]

지금 이 상황 또한.

하인리히를 통한 실시간 감청으로 교단 측의 모든 작전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그 덕분에···.

'끝났다.'

끝내 파편의 주도권을 틀어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업적 달성!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불사왕'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극복했으며, 지배한 끝에 초월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즉사 면역」을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그렇게 한스는 진짜 불사왕이 되었다.

#64

대신전 습격 사건 (3)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부패한 심장」과 「불사」가 합쳐져 「불사의 심장」으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마력 친화」가 「마력 지배」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심연의 눈」을 획득합니다."

한스의 눈앞에 정신없을 정도로 주르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드디어!'

불사왕의 후예가 아닌, 진정한 3대 불사왕이 되었다.

[크흐, 크흐하하핫핫—!]

한스가 그 자리에서 광소를 터트렸다.

그에게서 폭풍처럼 쏟아지는 흑마력이 웃음소리에 담겨 파도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아··· 정말로 늦어···버렸군요."

성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지금 이곳이야말로 불사왕을 상대하기에 가장 유리한 공간!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마지막까지 싸워라!"]

그런 이들의 머리를 뒤흔드는 피온 추기경의 추상같은 목소리.

그들은 서둘러 정신을 다잡고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이야말로 불사왕이 가장 약한 순간이었다.

막 완성한 직후라 심장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며, 대신전의 신성 결계로 힘에 제약이 걸린 상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면 어쩌면 정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각오로 이를 악물고, 결의를 다졌다.

···물론, 사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라는 것을.

불사왕 한스는, 불리하다 싶으면 결계 따윈 무시하고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갈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교단 측이 흔들림을 다잡는 동안, 한스는 이번에 얻은 것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즉사 면역」이라. 이제 어이없게 비명횡사할 일은 없겠군.'

제일 처음 받았던 특전은 '차원을 넘어선 위업'을 달성한 보상으로 받은 「이계전송진 소환」이었다.

그 덕분에 마음대로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지.

'보상의 수준차가 좀 나는 것 같은데. 물론 즉사를 피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아마 '위업', 즉 '위대한 업적'과 단순한 '업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거저 얻은 거니 불평할 입장은 아니지.'

진화한 스킬들은 이전 스킬이 더욱 강화된 형태였으니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고, 당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에 얻은 새로운 스킬이었다.

「심연의 눈」은 일종의 마안이었다.

할리가 가진 「보석안 : 염동」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흉악한 위력을 가진.

'보는 것만으로 공포, 혼란 등의 정신 공격을 가하고, 자신보다 낮은 수준의 마(魔)에 속한 존재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인가.'

즉, 한스보다 약한 존재라면··· 이제 눈만 마주치는 것만으로 마물, 악마, 흑마법사 상관없이 그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었다.

격차가 클수록 종속이 강해진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이 유용한 능력은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리라.

'얻었으면 한 번 써봐야지.'

곧바로 「심연의 눈」을 발동했다.

한스의 푸른 안광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텅 빈 눈구멍에 어둠이 채워졌다.

두 눈 가득 들어찬,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저건···!"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무저갱 같은 눈이 주변을 훑자···.

"흐읍?"

"아, 아···."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그의 시선이 닿은 이들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화아악—!

그때, 갑작스러운 고성과 함께 교단 무리의 후방에서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곳에는 후광이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성녀가 주변에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전승에 기록된 불사왕의 '심연을 담은 눈'이다! 절대 마주 보지 않도록 피해!"]

["바라봐지는 정도라면 제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눈이 직접 마주쳐서 생기는 정신 오염은 힘들어요!"]

["잠깐 마주친 정도는 어떻게든 치유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면··· 도저히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조심하세요."]

신성력을 통한 추기경들과 성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하인리히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렸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능력인가 본데?'

한스는 다시 천천히 그들을 훑어보았다.

성녀의 신성력 덕분인지 아까처럼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지만, 하나 같이 그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었다.

전투에서 상대방의 눈빛을 읽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한스는 애초에 눈이 없었던지라 해당 사항이 없었다.

직접 눈을 보지 않는다고 생기는 페널티는 딱히 없다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전투력에 악영향을 주겠지.'

썩 만족스러운 능력이었다.

주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魔)의 지배도 그렇고, 전투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바로 떠나기엔 좀 아쉽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니, 좀 더 시험해 볼까?'

불사왕 한스의 첫선이었다.

지금 바로 몸을 빼기엔 좀 모양 빠지지 않는가.

[이 몸은 대륙에 강림한 공포의 화신이자 비극의 징조이니! 절망하거라 교단의 하수인들아. 너희는 실패했다. 그로 인해 죽음이 거리를 뒤덮고 비탄과 원망이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교단의 정예들을 앞에 두고 벌인 당당한 연설.

마지막 파편을 흡수한 탓인지, 한스의 텐션이 평소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사 하나하나의 퀄리티가 놀랍도록 자극적이었으니까.

'주로 내 정신 건강에 말이지. 안 되겠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겠어.'

[자, 어디 한 번 발악해 보거라.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기꺼이 놀아주도록 하지. 크크큭!]

한스의 해골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그 끝에 휘감긴 흑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경계하는 교단 인원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검은 기운은 바닥에 널브러진 언데드들의 잔해에 깃들었다.

달그락—! 후두두둑!

그리고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여러 곳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뭉쳐, 수십 개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완전히 파괴된 언데드들도 재활용할 수 있는 효율성의 극치.

["시체 골렘이다! 일단 물러나서 진형을 재정비한다!"]

불사왕이 되며 새롭게 「금단의 지식」에 추가된 흑마법이었다.

거기에 듬뿍 흑마력을 부여해 주었더니, 개체들 하나하나마다 온몸이 검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럼, 이 차전을 시작해 볼까?]

불사왕 한스의 몸에서 다시 검은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아무리 한스가 심장을 온전히 계승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힘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제대로 된 불사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이곳은 대신전의 중심부였으며, 그와 맞서는 이들 또한 교단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놈이 점점 힘에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시간을 끌면 위험합니다!"]

["아직까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기적이군요. 대신전의 신성 결계 덕이기도 하지만···. 놈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뜻이겠죠?"]

충돌이 계속될수록 교단 측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언데드들과 다르게 살아있는 인간인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칠 수밖에 없는데, 상대인 불사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신성 결계로 약해진 상태가 저 정도라니···."]

이곳이 아닌 바깥에서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해졌다.

["성기사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전열이 무너질 터.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합니다."]

팔라딘 조니엔이 무거운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했다.

마물의 숲으로 파견된 토벌대에 최상위권의 성기사들이 대부분 차출된 것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팔라딘이 그 혼자만 남았기도 했고.

성녀와 추기경들이 불사왕을 상대로 분전하고는 있지만, 전방이 무너지면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 할 것이다.

["이미 몇 차례나 변칙 작전을 시도했는데, 놈의 대응이 너무 빨라. 마치 우리의 생각이라도 읽는 것처럼···."]

["그래도 이대로 가면 전멸입니다. 놈이 방심할 때 어떻게든 타격을 줘야 해요."]

그들의 고뇌에 하인리히는 내심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던 나머지, 그를 통해 미리 파악한 정보로 대응한 게 조금 과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끝내는 게 좋을까?'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하인리히 경?"]

때마침 성녀가 그를 호출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 일개 성기사에 불과한 하인리히에게 그런 부담스러운 일을 맡겨도 될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예,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임무를 받아들였다.

***

교단 측의 공세가 강해졌다.

모든 이들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듯 신성력을 쏟아 부어 불사왕을 몰아붙였다.

장기전을 포기한 듯한 그들의 모습에, 그의 기세도 순간적으로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흐아압—!"

그중에서도 팔라딘 조니엔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해 왔다.

어떻게든 불사왕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겠다는 듯이.

콰지직!

[똑같은 수작이 다시 통할 것 같으냐!]

팔라딘을 튕겨내자마자 연달아 달려드는 성기사들과 은신을 벗고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이단심문관들.

그들은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지금!"]

그때, 불사왕의 머리 위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뭉쳐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그에게 내리꽂혔다.

화아악—

성녀의 전력이 담긴 공격에 그의 주변을 감싸던 방어막이 일거에 녹아내렸고···.

동시에, 빛의 기둥 속에서 작은 섬광이 반짝였다.

막대한 신성력의 폭포 속에 묻힌 작은 흐름.

[뭣?!]

불사왕이 이변을 눈치챈 것은, 이미 검날이 그의 목전까지 다가온 직후였다.

[언제 여기까지!]

채앵!

경악한 그가 흑마력에 휩싸인 지팡이를 휘둘러 검을 쳐냈다.

하지만 그의 무술 실력은 정면으로 성기사의 검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처음처럼 불시에 허를 찌르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미 알고 대비하고 있던 달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수준.

은신의 성법과 「축복 : 도약」을 통해 순식간에 불사왕에게 접근한 하인리히는, 유려하게 검을 휘둘러 상대의 모든 방어를 벗겨냈다.

"하앗—!"

절호의 기회.

신성력이 가득 담겨 빛나는 검이 벼락같이 쏘아지고···.

어느새 펼쳐진 검은 장막에 가로막혔다.

찌지직—!

극한의 집중 속에 느려진 시간 속.

서서히 검은 장막을 찢으며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 속도는 한없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어림없다!]

설상가상으로 불사왕에게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저주의 불꽃이 하인리히의 전신을 뒤덮었다.

"크윽!"

몸에 두른 신성력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그의 온몸이 저주에 침식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지독한 고통과 함께 힘이 빠지고, 감각이 교란된다.

···자신만만하게 나섰건만, 모두의 기대를 짊어진 마지막 작전마저 실패해 버렸다.

이대로는··· 그의 검은 불사왕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니!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코와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검을 쥔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으로 만든,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절대 이대로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하인리히는 이를 악물고 검 끝에 신성력을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최대한 빨리, 어떻게든 이 장막을 넘어 불사왕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그 영겁과도 같던 찰나의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축복 : 광검」를 획득합니다."

순간적으로 하인리히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벽에 막혀있던 신성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세 번째 축복!'

동시에 조건을 달성해 주교급 신성력에 도달했다.

급격히 증가한 신성력에 그의 검에서 뿜어지는 광채가 더욱 강해졌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사용한 「축복 : 광검」의 힘.

검에 담겨 사방으로 퍼지던 빛이 한데 모여 압축되고, 마침내 날카롭게 정련된 검의 날이 만들어졌다.

마치 SF에서 나오는 광선검처럼.

"흐아아압!"

쫘아악—!

내질러진 빛의 검이 한순간에 검은 장막을 갈랐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크헉! 네놈···!]

심장에 박힌 검에서 뿜어져 나온 압축된 신성력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불태웠다.

신성한 불길과 검은 아우라가 뒤섞여 타오르는 불사왕과, 저주의 불꽃과 은은한 광휘가 몸을 뒤덮은 성기사.

그 처절할 정도로 대조적이면서도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모습이 지켜보는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크윽··· 제법이구나. 감히 이 몸에게···!]

퍼어엉—!

그의 몸에서 흑마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기회를 틈타 달려들던 다른 이들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째서인지 하인리히만은 굳건하게 자리에서 버티며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채였다.

[크흐흐··· 너무 방심했군. 그래, 너. 교단의 하수인아. 이름이 무엇이냐?]

3대 불사왕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 처음으로 치명상을 입힌 자.

불사왕은 그 업적을 인정하듯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하인리히··· 랜드가드다! 너를 다시 심연에 처박아 주마, 불사왕!"

[하인리히 랜드가드···. 그 이름 기억하도록 하지.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크하핫!]

장작처럼 타오르는 와중에도, 그의 육체는 신성력과 흑마력이 뒤엉켜 끊임없이 파괴와 수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억해라. 이것은 끝이 아니다. 대륙에 어둠이 드리우는 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딜!"

[그럼, 다음에 보지. 크큭큭···.]

그 말과 함께, 하인리히의 검에 꿰뚫린 채 타오르던 불사왕 한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흑마력에 보호되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지며 신성한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하고, 전장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털썩—

그 순간 들려온, 정적을 깨뜨리는 작은 소음.

"아! 하인리히 경! 빨리 치료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불사왕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한 성기사, 하인리히가 급히 사제들에게 이송되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정화하는 와중에도 침식된 부위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악랄한 저주의 기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경외의 탄성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치료가 온전히 끝나더라도 상당 기간 요양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이 농축된 지독한 저주를 통째로 뒤집어쓴 당사자가 느꼈을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기어코 불사왕을 물리친 그의 정신력 또한.

그렇게 하인리히를 비롯한 부상자들의 치료가 이어지고, 전장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역시, 도망가 버렸네요."

"···그래도 저희 모두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희생이 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허허허··· 그래도 이번에 심장에 타격을 입혔으니, 당분간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저희도 대륙의 힘을 모아 그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이것도 전부 그가 끝까지 힘내 준 덕분이죠."

모두의 시선이 사제들 틈에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하인리히에게 향했다.

그날, 교단은 마지막 파편을 빼앗겨 불사왕의 재림을 막지 못했지만···.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함께, 재앙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만 빼고.

#65

커스터마이징 (1)

웅성웅성—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에서 부상자들이 줄줄이 실려 나와 치료실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

리에스타 성녀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며 노력했건만, 자신이 부족한 까닭에 그 뜻을 이뤄주지 못한 것 같아서.

그때 성녀의 눈이 치료실 한쪽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성기사 한 명에게 향했다.

이미 몇 차례나 되는 정화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몸 곳곳이 검게 변색된 하인리히였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재차 터져 나왔다.

"성녀님,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계셨군요."

"아, 코델리아 추기경님···."

그때 성녀와 마찬가지로 지친 표정의 추기경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녀님도 오늘 무리하셨는데, 이만 쉬셔야지요."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네요."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과도하게 신성력을 사용한 데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남은 여력을 쥐어짜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그녀도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지만···.

이 광경을 보니 도저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요."

"그때라면··· 그렇군요."

코델리아 추기경의 시선이 성녀를 따라 한곳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 경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치료 기간은 좀 길어질 것 같지만요."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성녀도 직접 하인리히를 살펴봤던 만큼, 그가 뒤집어쓴 저주의 기운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극한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종류의 흑마법.

무방비 상태로 직격하면 팔라딘이라도 전투 불능이 되어버릴 수준이었다.

'보통은 신성력을 몸에 둘러 그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하인리히는 그것을 맨몸으로 맞고 견뎠다.

코앞에서 발동된 그 저주의 위험성을 당사자가 몰랐을 리 없건만, 그는 오직 의지만으로 버텨낸 것이다.

방어에 돌릴 한 방울의 신성력까지 전부 검 끝에 담아 의지로 날을 벼렸다.

자신의 안위보단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그 확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집념으로.

임무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그 모습이 미련하면서도, 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을까요? 좀 더··· 제가 노력했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공간 이동 능력, 그것도 원하는 순간에 즉각 발동할 수 있는 축복은 굉장히 희귀한 힘이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도 가진 사람이 하인리히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떠미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희생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불사왕을 처리할 수···.

"성녀님!"

끝없는 자책에 빠진 성녀의 상념을 끊듯이, 코델리아 추기경이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는 저희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성녀님께서 자신을 탓할 여지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성녀의 모습에, 코델리아 추기경은 손녀를 보는 할머니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덕분에 저희는 새로운 영웅을 얻지 않았습니까. 불사왕이 부활한 지금, 그에 대적할 수 있는 영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성기사단장들과 같은 주교급의 신성력을 가진 젊은 성기사.

그 전투 능력도 결코 모자라지 않으니, 그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실력자였다.

"이번 시련은 그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결코 이런 일로 쉽게 무너질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주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웅이니까요."

그 영웅이 더욱 빠르고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 추기경은 그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을 끝맺었다.

'영웅···!'

성녀는 기절한 하인리히를 다시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지금까지 읽어온 이야기책에서도 항상 그랬듯이, 성녀는 영웅의 옆에서 그를 돕는 조력자가 아니었던가.

여태껏 수많은 영웅담을 독파해 온 경험을 돌이켜 봐도, 성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마왕을 때려잡는 내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왕, 용사, 성녀!'

꿈 많은 18세 소녀의 상상이 부풀어 올랐다.

어느새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굳은 결의가 담긴 눈을 반짝거리는 성녀를, 코델리아 추기경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