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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화 [Episode 18] 알박기 (3)

"3팀장이 흡혈귀라고요?"

"그래."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러나.

'재현님의 말이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생존자 집단의 우두머리가 흡혈귀라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뭔가 찝찝한데.'

김건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박새롬이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농담하시는 거예요?"

"아니."

김건의 확고한 대답에 박새롬은 반신반의하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당신 말이니까 믿을게요."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박새롬은 입장을 확실하게 했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죠?"

"만난지 하루도 안 된 내 말을 믿나?"

"당신 능력을 믿는 거죠."

박새롬은 피식 웃으며 첨언 했다.

"일이 잘못돼서 쫓겨나게 되어도 저희 책임져 주실 거잖아요, 그쵸?"

"약속하지."

김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박새롬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원래 안경이라도 꼈었어요?"

"...어떻게 알았지?"

"그야 매번 그렇게 안경을 들어 올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니까 그렇죠."

"...아."

박새롬이 신나서 물어왔다.

"왜 지금은 안 껴요? 라식이라도 했나?"

"...능력을 얻으면서 눈이 좋아졌다."

처음부터 안경을 벗을 정도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까마귀를 부리는 능력을 얻고 난 이후로 눈이 점점 더 좋아지는가 싶더니, 김재현과 종속의 계약을 맺으면서 까망이와 일체화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눈을 얻게 되었다.

평상시에도 월등한 시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전부 재현님 덕분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전까지만 해도 파티 내에서 역할이 명확하지 않아 겉도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척후병이라는 확실한 포지션을 갖게 된 상태였다.

자진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김재현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짜로 어떡해요? 정말로 3팀장이 흡혈귀라면 어떻게든 해야 하잖아요."

김건은 김재현이 지시했던 일을 상기하며 브리핑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놈을 주시하고 있기만 하면 돼."

"흡혈귀인 증거를 먼저 찾아낸 다음에 조진다는 말씀이시군요. 이해했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김재현에게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다들 내일 온다고 했었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후가 되기 전에 이곳에 모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가.'

김건이 보기에는 현재 이곳은 생존자들과 흡혈귀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동건 파티가 개입하게 되면 힘의 균형추는 급격하게 생존자 집단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재현님이 가지고 계신 힘을 활용하면 생존자 집단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이곳에 와서 김재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금 실감하고 있었다.

당장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그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서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집단이 출현하기까지 했다.

'재현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거야.'

한정된 자원과 식량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었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잔혹한 세상이 찾아왔을 것이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지."

박새롬이 물었다.

"큰 거요? 작은 거요?"

"...그건 왜 물어보지?"

"큰 거라면 바깥으로 나가서 해결해야 하거든요. 좋은 장소를 안내해주려고 했죠."

"...작은 거다."

"그렇군요. 나가서 왼쪽 끝으로 가시면 공용 화장실이 나와요. 거기 쓰면 돼요."

그녀의 말을 듣고 찾아간 화장실은 입구에서부터 지린내가 심하게 났다.

눈살을 찌푸린 채로 안으로 들어가니 악취가 더욱 심각해졌다. 지린내뿐만 아니라 똥 냄새가 화장실 전체에 가득했다.

혹시나 싶어 대변기 칸을 열어봤다가 못 볼꼴을 보고야 말았다.

"윽."

수도와 전기가 끊겼으니 이것은 당연한 광경이었다.

그나마 하수구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오물이 역류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똥오줌으로 더럽혀진 화장실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김재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다시 피어올랐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도 전부 재현님 덕분이구나.'

김건은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재현님, 혹시 계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이제 슬슬 재현님에 대한 것을 말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녀는 믿을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 박새롬은 김재현의 힘을 김건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남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는다는 게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부담스러웠다.

'언젠가 사실대로 밝혀야하기도 하고.'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말해주고 싶었다.

[편하신대로 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습게도 다른 생존자 집단의 처참한 생활환경을 보고 있자니 김재현에 대한 충성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김건은 최대한 숨을 참으며 생각했다.

"후우. 그나저나 재현님은 3팀장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지?"

김재현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3팀장의 경우 이곳의 생존자 집단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그를 죽인다면 크게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그놈이 흡혈귀라는 것을 증명한 다음 처리해야 할 텐데....]

어찌 됐든 놈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있었다.

놈의 정체를 까발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재현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다음 날 오후.

하동건을 필두로 모든 파티원이 울산에 도착하였고, 박새롬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탕-!

기지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중급 흡혈귀(Lv. 33)를 사냥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133,423,899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시민 문병호가 '울산 홈플러스'의 우두머리를 해치웠습니다.]

['울산 홈플러스'에 전초기지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됐다.'

예상했던 대로 놈을 죽이자 전초기지 건설 조건을 클리어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민했었다.

보급 3팀의 팀장이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착한 흡혈귀'일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 고민은 문병호가 투명화를 사용하고 놈의 개인실을 확인하면서 날아가 버렸다.

'너무 편안하게 보내줬나.'

놈의 개인실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가 한 구 나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가녀린 목선에 남은 두 개의 구멍은 그녀의 사인이 흡혈로 인한 과다출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 곧바로 문병호에게 사살을 명령했다.

그때 총성을 들은 3팀장의 부하들이 방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병호는 투명화를 유지한 채 구석에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산이 완료되며 3팀장의 시체는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그들이 다음에 할 행동은 뻔했다.

"팀장님! 어디 계십니까?!"

그들은 3팀장을 찾기 위해 방을 뒤졌고, 자연스레 소녀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혀, 형! 여, 여기!"

"뭐야, 왜."

먼저 시체의 상태를 확인한 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 흡혈귀에게 당한 것 같아."

무엇보다 시체의 목에 남아 있는 선명한 이빨 자국이 흡혈귀에게 당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고.

"얘 개 아니야? 얼마 전에 구출됐다가 실종됐던.."

그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지금까지의 정황 증거들이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장님이 흡혈귀였다고..?"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문병호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빠져나왔다.

[수고하셨어요.]

문병호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건설 모드를 활성화시켰다.

서면과 자갈치 시장이 있는 곳의 풍경이 장난감처럼 작게 내려다보였다.

영역 바깥으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이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멀찍이 자그마한 빛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지금 하동건 파티가 머물고 있는 울산의 홈플러스였다.

'전초기지 건설.'

[해당 시설은 건설 기간(7일) 동안 '기사'급 이상의 칭호를 가진 시민 3명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로 설치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효과가 나타났다.

[건설 현장에 '기사'급 이상의 칭호를 가진 시민이 6명 이상 모여 있습니다.]

[건설 효율이 100% 증가합니다.]

[전초기지 시설 건설 완료까지 남은 시간]

-83시간 59분 59초

절반으로 줄어든 시간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덕분에 크리스탈을 아끼겠군.'

처음부터 일주일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즉시 완료'

['전초기지' 시설 건설을 즉시 완료하시겠습니까?]

[해당 시설의 즉시 완료를 위해서는 9개의 크리스탈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 순간.

우우웅-

묘한 감각과 함께.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민권을 부여하시겠습니까?]

홈플러스 전체가 내 영역 아래로 들어왔다.

'빙고'

천여 명의 시민들에 대한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고, 나는 일일이 그것들을 확인했다.

"각성자가 7명. 그리고 흡혈귀가 19명."

이제는 내 영역이 되어버린 홈플러스 전체를 가볍게 훑었다.

시민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어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열아홉 마리의 흡혈귀들이 있는 위치를 모두 파악한 다음.

'가신 소환.'

그들의 근처에 가신들을 소환했다.

하동건 파티를 비롯하여 이준혁 파티에 소속된 가신들, 장성준과 최근에 가신이 된 문지훈과 문상훈 형제들까지.

사실상 사냥팀으로 활동하는 모든 가신들을 흡혈귀들의 옆에 배치했다.

그리고.

번쩍 -

홈플러스에 전력을 공급하여 매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시민권 부여해.'

강제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일반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확인했고, 일부는 멍한 표정으로 불이 켜진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으아아아악!"

흡혈귀들은 곧장 비명을 질러댔다.

능력치 90% 감소.

시민들이 받는 모든 버프 해제.

전신에 지속적인 고통.

이마에 생겨나는 붉은 낙인.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이 흡혈귀가 되는 업적을 달성할 경우 자동으로 주어지는 [흡혈귀] 칭호의 효과였다.

"뭐, 뭐야?"

"왜 그래?! 괜찮아?!"

그들의 근처에 있던 동료들이 그들을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캬아아아!"

제정신이 아닌 흡혈귀들이 곧바로 이를 드러내며 사람들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치는 칭호 효과로 인해 크게 약해진 상태였고, 그 덕분에 가신들이 개입할 틈이 생겼다.

퍼억! 철컥- 푸욱!!

쩌저적-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흡혈귀들이 제압당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몸을 일으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가자."

"응."

철컥-

현관문 건너편에는 불 켜진 방 안을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박새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반갑습니다. 김재현이라고합니다."

085화 [Episode 18] 알박기 (4)

우리는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홈플러스를 장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흡혈귀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과 가신들이 그것들을 손쉽게 제압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가신들의 통제에 따라 홈플러스 건물을 나와 드넓은 사거리에 모였고, 그들의 중심에는 열아홉 마리의 흡혈귀들이 무릎 꿇은 채 짐승처럼 으르 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영역이 구축되지 않은 홈플러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에, 옥상에 올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 상태로 메가폰을 들어 올린 내가 입을 열었다.

[아- 아-]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옥상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이크 테스트를 끝낸 내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메가폰을 통해 내 목소리가 사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흡혈귀들을 향해 있던 나머지 시민들의 시선들도 모두 나를 향했다.

[알아차리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들은 여러분 사이에 숨어든 흡혈귀들입니다.]

실제로 흡혈귀에게 당할 뻔했던 사람과, 근처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이들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기본적으로 흡혈귀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 중 대부분이 가족이나 지인들이 흡혈귀의 손에 죽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흡혈귀들이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옆에서 동료인 척하고 있었다고 하니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 배신자 놈들!"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마!"

"죽여!"

몇몇 이들이 사나운 기세로 흡혈귀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장성준의 염력에 모두 저지당했다.

그동안 숙련도가 대폭 늘어난 A등급 염력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손쉽게 막아냈다.

"김씨가 흡혈귀라고? 진짜야?"

"저 반응을 보면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옆에 있던 사람들을 물려고 했었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어! 저번에.."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열댓 마리의 흡혈귀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생존자 무리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말이라니까! 그땐 내가 착각했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저 자식이 흡혈귀라면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져!"

"...씨-발."

"왜 그래? 너도 짐작가는 게 있는 거야?"

"...혹시 흡혈귀랑 자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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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는 건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증언에 사람들은 흡혈귀들의 정체가 조금씩 더 확고해졌다.

"팀장님은 어디 가셨대?"

"그 소문 들었어? 팀장님도 흡혈귀였대."

"신정민 팀장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모든 사정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셔?"

"몰라. 본부에서 오신 분들 아닌가?"

"하긴. 본부 소속이 아니면 어떻게 저 많은 총을 가지고 있겠어?"

"본부 분들은 엄청나구나. 어떻게 단번에 흡혈귀들을 찝어 낸 거지?"

어느새 사람들의 인식 속에 우리는 종합운동장 그룹 본부 소속이 되어 있었다.

[저들은 영악하게도 앞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을 연기하며 조직에 스며들었고, 뒤로는 본색을 드러내어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분노한 대중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저희는 저들의 죄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벌하기 위해 왔습니다.]

눈치빠른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깨닫고는 흡혈귀들의 처형을 원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들이 주도 아래 흡혈귀들의 죽음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흡혈귀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만큼 감성이 충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많은 죽음을 겪어왔다.

바로 흡혈귀들 때문에 말이다.

'흡혈귀 열아홉 마리, 퇴출.'

굳이 홈플러스 내부가 아닌 바깥에 저들을 끌고 간 이유는 이것이었다.

시민권을 박탈시키자 고통에서 해방된 흡혈귀들이 잠시동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흡혈귀들을 제압하고 있는 가신들을 향해 명령했다.

[처형하세요.]

메가폰을 통과하며 광장 전체로 내 목소리가 전달된 직후.

타앙-!탕-!

총성이 울리고 탄두가 흡혈귀들의 심장을 헤집었다.

[하급 흡혈귀(Lv. 22)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6)를 사냥하셨습니다.]

[중급 흡혈귀(Lv. 31)를 사냥하셨습니다.]

"와아아아!"

흡혈귀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시민 김주원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정국일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임채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사람들의 함성에서는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의 울분과 흡혈귀들을 향한 분노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살짝 미치지 않고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절대자의 눈.'

박새롬과 서예진이 대기하고 있는 방을 바라보면서 스킬을 사용했다.

'텔레포트.'

문병호의 신뢰도가 100이 되며 얻은 텔레포트 스킬은 이렇게 절대자의 눈과 연동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많은 정신력을 요구한다지만, 아직까지 사용하면서 무리가 온 적은 없었다.

"오, 오셨습니까."

박새롬이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저・・・ 그런데 앞으로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외네요."

"네?"

"새롬씨와 처음 만나면 반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박새롬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변명했다.

"그것은... 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긴장을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는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박새롬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의도가 잘못 전달이 된 것 같았다.

오히려 더욱 경직된 분위기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보급 3팀의 본래 업무가 중앙동 그룹과 파견 나간 차리 부대에 물자를 공급하는 거라고 했었나요?"

중앙동 그룹은 태화강 바로 위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강을 건너오려는 흡혈귀들과 매일 혈투를 벌이는 곳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종합운동장 그룹은 전투 부대인 차리를 파견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던 일 계속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필요한만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이곳 보급 3팀의 팀장은 박새롬씨, 당신입니다."

"네, 알겠습니・・・네?"

박새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지금, 뭐라고 하셨?"

"박새롬씨가 이곳의 리더 역할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박새롬은 딸꾹질을 몇 차례 하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시민 박새롬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박새롬은 생각보다 팀장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진 이들도 나왔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박새롬의 뒤에서 내가 지원해 주는 무한한 물자들 때문이었다.

당장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던 팔자에서 오늘은 어떤 것을 먹을까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에게 반감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쨌든 박새롬이 보급 3팀의 팀장 역할을 꾸역꾸역 수행해내는 동안 나와 가신들은 이곳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바빴던 것은 서예진이었다.

그녀가 길들인 생쥐들이 울산 전역에 퍼져 정찰병 역할을 수행했다.

서예진의 감각 공유와 절대자의 눈을 연계하여 생존자 집단이 자리 잡은 태화강 북쪽의 사정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조직의 윗대가리들이 죄다 흡혈귀 투성이라니.'

종합운동장 그룹, 중앙동 그룹, 공업지대 그룹.

이 세 개의 커다란 생존자 집단의 중심에 모두 흡혈귀들이 있었다.

심지어 세 그룹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놈들이 전원 상급 흡혈귀였다.

흡혈귀들이 없는 청정구역은 아파트 단지나 작은 마을 단위로 뭉친 소규모 생존자 그룹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울산 전체가 흡혈귀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생존자 집단과 흡혈귀들이 간신히 힘의 균형을 이루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흡혈귀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로 꼭두각시처럼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마치....'

거대한 사육장.

울산은 현재 흡혈귀들이 운영하는 거대 인간 사육장과도 같았다.

'나름대로 안전한 위치라고 생각했건만.'

이건 적진의 한 가운데에 전초기지를 펼친 것과 다름없었다.

"어떡한다."

원래 계획은 생존자 그룹을 하나로 규합하려고 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물자를 활용하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놈이 눈치채기 전에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발급하여 완벽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전원이 총으로 무장한 전투 부대를 만들어 흡혈귀들과 전쟁을 벌여 나갈 생각이었는데.

"망했군."

시작부터 조졌다.

생존자 집단의 주요 보직이란 곳은 죄다 흡혈귀들이 꿰차고 있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놈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상태에서 내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중 가장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딱 하나.

'깽판을 치는 수밖에'

중급 흡혈귀 정현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제법 고층까지 올라간 이후 비상구 계단 전체를 둘러보며 혹시나 뒤따라온 인간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비상구 계단을 열고 들어갔다.

곧바로 1004호의 앞에 도달한 정현석은 모스 부호를 치듯 리듬감 있게 문을 두드렸다.

툭- 투둑- 툭툭

그리고 잠시 후.

철컥.

"오셨습니까."

"그래."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정현석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자."

앞으로 있을 행위에 몰두해 있었던 그들은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먼지 쌓인 주방을 지나 안방에 도착하자 또 다른 남자가 정현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왔다.

안방은 거실과는 다르게 먼지 한 톨 없이 아주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는 정현석을 비롯한 남자 흡혈귀 세 명 말고도 한 명이 더 존재했다.

세탁까지 마친 것인지 깔끔한 침대 위로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자가 발가벗은 채 놓여 있었다.

정현석은 그녀의 나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윗입술을 핥으며 침대로 다가간 정현석은 여자의 팔에 작은 상처를 낸 다음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대기하고 있는 다른 하급 흡혈귀들을 향해 물었다.

"약은 얼마나 주사한 거지?"

"3회분 주사했습니다."

정현석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몸집이 작은 경우에는 2회만 주사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변명했다.

"160 이하인 경우에만 2회분을 주사하라고..."

"멍청아. 이 여자는 너무 말랐잖아. 알아서 양을 조절했어야지."

"...죄송합니다."

흡혈귀가 된 이후로 혈관에 직접 주사를 놓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약이 주입된 피를 마시는 것이 더욱 황홀했다.

그런데 마약이 너무 짙어지면 피의 맛이 옅어지곤 했기 때문에 불만이었던 것이다.

입맛을 다시던 정현석이 인상을 풀더니 말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정현석이 여자의 목선을 향해 입을 가져가던 그때.

타앙-

별안간 커다란 총성과 함께 옆에서 대기하던 흡혈귀가 쓰러졌다.

"응?"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탕-

두 번째 총성과 함께 다른 하급 흡혈귀마저 쓰러졌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현석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사방을 경계했다.

"뭐, 뭐야?"

그러나.

탕-!

등 뒤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그의 심장이 박살 나 버렸다.

세 마리의 흡혈귀가 모두 쓰러진 이후.

스르륵

허공에서 나타난 문병호가 이불보를 이용해 여자를 감싸고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베란다 창밖을 바라본 순간.

슈슉-

문병호와 여자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방 안에 남아 있던 흡혈귀의 시체 세 구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086화 [Episode 19] 게릴라 전투 (1)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

불빛을 잃어버린 도시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검은 까마귀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갔다.

성인 남자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까마귀가 잠시 쉬어간 건물 옥상에는

찍-

생쥐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내 자그마한 틈새를 발견한 생쥐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 후.

푸쉬이이이-

환풍구 통로를 타고 보라색 독가스가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처럼 일파만파 퍼져나간 독가스는 이내 건물 내부로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건물 내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흡혈귀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준비는 됐나?"

"...최하급 서른 마리.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좋아. 두 시간 뒤에 출격시켜."

태화강 남쪽 구역에 바짝 붙어 위치한 이 건물 안에는 수십 마리의 흡혈귀들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일정한 간격마다 흡혈귀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저어. 그런데 팀장님."

"엉?"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겁니까?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을 계속 고집하시는지.."

팀장이라고 불린 중급 흡혈귀가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담뱃불만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급 흡혈귀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솔직히 다 같이 힘을 합치면 강 건너에 있는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겁니다! 아무리 인간들 손에 총이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몸을 사릴 이유가 어디?!"

열정 넘치는 하급 흡혈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면상에 뿌려진 담배 연기 때문이었다.

"콜록, 콜록!"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중급 흡혈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은 이해해."

중급 흡혈귀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혈액 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겨우 이딴 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지? 강 건너에 싱싱한 인간들이 저렇게 많은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구만."

중급 흡혈귀는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도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그와 똑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도시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부하를 달래주어야겠다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강 건너편에 있는 것들은 중요한 의식을 위한 제물들이다."

"...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하를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기다려라. 곧 다가올 만월의 밤에 피의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그 말씀은!"

"때를 기다리란 소리다."

"알겠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만월의 밤에 총공격을 감행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날 펼쳐지게 될 장면은 전쟁이 아닌 학살의 현장이었으니까.

'그때가 되면...?'

행복한 상상을 펼치고 있던 그 순간.

"음?"

푸쉬이이이-

천장의 환풍구에서 뿜어져 나온 보라색 독가스가 실내를 가득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뒤늦게나마 독가스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담뱃불이 주변을 미약하게나마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중급 흡혈귀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털썩!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그의 앞에서 보고를 올리던 하급 흡혈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중급 흡혈귀는 부리나케 창가를 향해 달려간 다음 그대로 몸을 던졌다.

쨍그랑!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간 중급 흡혈귀의 전신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베여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중급 흡혈귀는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멍하니 자신이 빠져나온 건물을 올려다봤다.

박살 난 창틈으로 보랏빛 연기가 꾸물꾸물 새어 나오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있는 건물만 그런 상태인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물 대여섯 개에서 보랏빛 독가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끄아아악!"

골목에서 흡혈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철컥철컥-!

은빛 갑옷이 그를 추격해 왔다.

"사, 살려줘!"

흡혈귀는 목숨을 구걸했으나.

푸욱!

거침없이 찔러 온 할버드에 심장을 내주어야만 했다.

"커헉!"

즉시 죽음을 맞이한 흡혈귀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질 나쁜 악몽이로군.'

누군가에 의해 사냥당하는 흡혈귀들의 모습이라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피의 축제를 너무 기대한 건가?"

그래서 학살의 현장이 이렇게 꿈으로 형상화된 것일까.

학살당하는 대상이 인간이 아닌 흡혈귀인 것은 무의식이 농간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푸슉!

빛의 화살 하나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한 박자 늦게.

"쿨럭!"

등에서부터 시작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부근까지 옮겨왔다.

"...꿈이 아니라고?"

그가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심장이 박살나고 난 뒤였다.

털썩.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이 뺨에 와닿는 것이 중급 흡혈귀가 생의 끝자락에서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수십 명의 인간을 잡아먹은 괴물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최후였다.

문병호를 이용한 요인 암살.

서예진의 생쥐들과 유혜린의 독가스를 이용한 테러. 하동건 파티와 이준혁 파티 등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

어차피 들킬 거, 처음부터 화려하게 스타트를 끊어버렸다.

[하급 흡혈귀(Lv. 22)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6)를 사냥하셨습니다.]

[중급 흡혈귀(Lv. 31)를 사냥하셨습니다.]

흡혈귀들이 경험치와 정산금으로 바뀌어나가는 알림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곧 그놈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가겠지.'

상황을 인지하면 놈과 상급 흡혈귀들이 움직일 테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놈들에 대한 대비는 확실했으니까.

우선 이틀간의 탐색으로 울산 전역에 퍼져 있는 상급 흡혈귀들의 숫자와 소재를 완벽하게 파악하였다.

'상급 흡혈귀들의 숫자는 총 열하나.'

현재 흡혈귀들의 우두머리와 상급 흡혈귀 총 열두 마리를 실시간으로 감시 중이었다.

"유한길씨. 특이사항 있나요?"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은 채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없습니다. 아직 상황을 전달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최근에 합류한 네츄럴 각성자 유한길.

그가 각성한 능력은 천리안이었으며, 종의 계약을 맺고 가신 등록을 하면서 그 능력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덕분에 울산 전역에 퍼져 있는 상급 흡혈귀들의 소재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한 상태였다.

"특이사항 발생하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상급 흡혈귀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유한길에게 맡기고, 옆에 있던 유혜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쉬셨나요?"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유혜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독가스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곧바로 절대자의 창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내 서예진의 생쥐가 기어 다니고 있는 건물 내부로 이동되었다.

"꺼흑."

한계치까지 혹사당한 유혜린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정신력을 소모하며 선 채로 기절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을 사용해 유혜린을 소파 위에 옮겨놓은 다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녀가 넉다운되며 더 이상의 독가스 공격은 불가능해졌으니 이제 흡혈귀들과 직접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는 가신들을 보조할 준비를 할 차례였다.

"예진아 준비됐어?"

"응."

생쥐를 이용한 정찰 말고도 서예진이 맡고 있는 중요한 역할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창고에 탄두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총질을 하면 유한길의 집중력을 깨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손을 잡고 옥상으로 텔레포트 했다.

'상점 오픈. 총기 구입.'

지이이잉-

M16과 실탄이 허공에 나타났고, 서예진은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여 총알을 장전했다.

철컥

장전을 마친 서예진은 총구를 하늘 위로 향한 상태로 어깨에 견착했다.

그 모습은 잘 훈련된 군인과 다를 것 없었다.

"쏜다?"

"쏴."

그 직후.

투두두두두-

하늘을 향해서 총구가 불을 뿜었고, 30발의 탄두가 창고에 저장되었다.

총열이 뜨겁게 달아오른 총기를 바닥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상점에서 새로운 총기를 구입했고, 서예진은 가득 채운 탄창을 새로 나타난 총기에 장착시

켰다.

"간다."

"응."

투두두두두-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창고 안에 막 쏘아진 탄두 수백 발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총알들은.

푸슉!

[하급 흡혈귀(Lv. 26)를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82,937,011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가신들의 보조에 사용되고 있었다.

서예진이 쏘아낸 탄두를 사용한 사냥이었기에 모든 추가 혜택이 적용된 상태였다.

절대자의 눈으로 가신들의 사각을 살피며 빈틈을 노리는 흡혈귀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때였다.

"재현님. 상급 흡혈귀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한길을 비추고 있던 절대자의 눈에서 위험신호가 들려왔다.

투두두-

열심히 총을 갈겨대는 서예진을 향해 말했다.

"예진아 그만."

"끝났어?"

"상급 흡혈귀가 움직인 모양이야."

옥상에 늘어놓은 총기와 총알을 창고에 넣은 다음 텔레포트를 사용해 유한길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재현님? 특이사항이 발생했습니다. 재현님?"

나를 찾는 유한길을 향해 물었다.

"누가 움직인 거죠?"

"11번 흡혈귀입니다."

우리는 원활한 깽판을 위해 상급 흡혈귀들에게 1번부터 12번까지 번호를 매겨 놓았다.

1번이 흡혈귀의 우두머리였고, 1번에서 멀어질수록 레벨이 낮은 상급 흡혈귀에 해당했다.

그중 11번은 우리가 노리고 있던 놈이었다.

"오빠 말대로 11번이 제일 먼저 움직였네요?"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는데 제일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지."

11번을 끌어내기 위해서 놈이 있는 근처를 작전 구역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상급 흡혈귀 중에서도 적당히 약한 놈.

'그리고'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놈을 끝장내기 위해서 에이스 카드를 준비해 놓았다.

'절대자의 눈.'

가신들을 보조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절대자의 눈 시야를 하나로 만들었다.

시야 너머로 특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씨발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규모 습격입니다. 인간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화가 잔뜩 난 듯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상급 흡혈귀 놈들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지."

바로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

두 번째로 만났던 고인석이라는 놈은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난 뒤 전투력이 급상승했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전투태세가 있는 것이다.

'능력을 발휘할 시간을 주면 안 돼.'

그리고 또 한 가지.

'녀석들에게 위협이 되는 기술은 현재까지 두 가지다.'

하나는 김가영의 빛의 화살이었다.

피어싱 스킬이 담긴 그녀의 빛의 화살은 매번 흡혈귀들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혔다.

그리고.

'하동건의 검은 기운.'

그 순간 11번 흡혈귀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직후.

건물 외벽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하동건이 위에서부터 떨어져내렸다.

쿠웅!

놈의 등 뒤에 착지한 직후.

푸욱!

검은 기운에 휩싸인 하동건의 창이 11번 흡혈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상급 흡혈귀(Lv. 41)를 사냥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2,831,489,221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087화 [Episode 19] 게릴라 전투 (2)

일격에 상급 흡혈귀를 처리한 하동건은 그대로 근처에 있던 나머지 흡혈귀들까지 혼자서 쓸어버렸다.

'돈 쓴 보람이 있네.'

현재 하동건의 레벨은 50이었다.

50레벨이 된 하동건은 흡혈귀들의 상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흡혈귀의 심장 하나가 터져나갔다.

11번 흡혈귀를 보좌하던 놈들답게 중급 흡혈귀 중에서도 나름 고레벨만 모여 있었음에도 그랬다.

[중급 흡혈귀(Lv. 38)를 사냥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882,834,100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상급 흡혈귀 하나와 중급 흡혈귀 다섯 마리를 쓸어버린 하동건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건물 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 한 흡혈귀들이 멍한 얼굴로 하동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11번 흡혈귀와 그를 보좌하는 중급 흡혈귀가 있던 장소에 창을 든 인간 하나가 서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하동건이 처리한 모든 흡혈귀의 사체들은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어 피 한 방을 남기지 못한 상태였다.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냉정함을 잃은 흡혈귀 하나가 주제도 모르고 소리쳤다.

"뭐, 뭐하고 있어! 저놈을 공격해!"

그에 호응하듯 흡혈귀들이 하동건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11번 흡혈귀를 보좌하던 중급 흡혈귀 수준도 못 되는 흡혈귀들이 단체로 달려든다고 해서 하동건에게 해를 끼칠 순 없었다.

하동건의 창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서걱!

[하급 흡혈귀(Lv. 22)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6)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4)를 사냥하셨습니다.]

검은 기운을 머금은 창은, 일격에 세 마리의 심장을 절단해 버렸다.

창날이 흡혈귀들의 몸을 순두부 가르듯 갈라버린 것이다.

"!!"

그 충격적인 광경에 뒤이어 달려들던 흡혈귀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도망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들은 이미 하동건에게 거리를 내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동건이 한 발자국 내딛자 창끝이 자연스레 다음 흡혈귀의 심장 앞으로 다가갔다.

푸욱!

순간적으로 흡혈귀의 심장을 파고든 창날이 놈의 심장을 완벽하게 박살 낸 뒤 돌아왔다.

저벅

그가 다시 한 발 내딛었을 때, 그의 손에 들린 창 또한 앞으로 나아가며 그대로 다른 흡혈귀의 가슴을 갈라냈다.

서걱-

하동건이 움직일 때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흡혈귀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져 갔다.

절대자의 눈으로 그것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하동건은 혼자서 춤을 추고 있는데, 흡혈귀들이 알아서 창날을 향해 달려드는 꼴이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그곳에 있던 흡혈귀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고 난 후였다.

"으윽...."

남아 있는 놈은 맨 처음 흡혈귀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던 놈 하나뿐.

잠시 눈치를 보던 놈은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콰직!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해야만 했다.

하동건이 던진 창이 그의 상반신을 박살 내 버렸기 때문이다.

창은 건물 벽에 작은 크레이터를 형성한 채로 박혀 있었다.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하동건에게 물었다.

[새로 뽑아드릴까요?]

그러자 하동건이 창을 뽑아 들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꽤나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창날은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도 돈값을 하네.'

하동건의 검은 기운이 창의 내구도를 월등하게 올려주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던지기 스킬을 사용해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나면 날이 망가져 쓸 수 없게 되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 하동건이 사용하고 있는 창은 조금 달랐다.

'비싸긴 비싸도 인챈트한 물건이 확실히 효율이 좋단 말이지.'

상점 스킬이 올라가며 생겨난 '인챈트'는 말하자면 계륵 같은 존재였다.

물건에 마법적인 능력을 부여해 주는 기능이었는데 인챈트를 하기 위해서는 50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챈트 공작소를 짓는 것은 물론 인챈트를 할 때에 도 매번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인챈트 기능은 사행성 도박과도 다를 바 없었다.

인챈트를 하게 될 경우 나오는 능력에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가장 낮은 일반 등급부터 고급, 희귀 등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일반 등급의 경우 있으나 없으나 한 능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력을 소량 늘려준다거나 체력을 소량 늘려준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딱히 체감되지 않는 정도였다.

한 번 인챈트 할 때 3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는 주제에 효과가 볼품없는 것이다.

고급부터는 나름 쓸만한 능력들이 있었지만, 300만원이라는 돈을 들일 가치가 있느냐하면은 또 애매했다.

'그래서 몇 번 사용해본 뒤로는 버린 기능이었는데...'

기억에서 잊혀질 때쯤 호기심 많은 시민 중 한 사람이 해당 기능을 사용했고, 그때 처음으로 희귀 등급의 옵션이 나왔다.

옵션의 내용은 '내구도 강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보시다시피 효과가 아주 좋았다.

하동건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단단한 창이 필요했었는데, 조건에 부합하는 옵션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동건이 쓰고 있는 창은 처음으로 희귀 등급 옵션을 뽑은 시민의 물건을 빼앗아 온 게 아니었다.

인챈트가 된 물건에는 한 가지 기가막힌 장점이 있었다.

'바로 상점 등록이 된다는 점이지.'

지금 하동건이 사용하고 있는 창은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이었다.

인챈트 옵션이 부여된 그대로 상점에 등록할 수 있다는 것.

한 번 '희귀 등급'을 뽑으면 상점에 등록하여 무한정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가격도 준수했다.

희귀 등급 옵션이 부여된 창은 오리지널에 비해 3배 비쌌지만, 기능을 생각하면 전혀 비싼 게 아니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슬롯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건 조금 아깝긴 해."

인챈트가 된 물건은 다른 물건과 함께 품목화되지 않는다.

슬롯 하나를 고스란히 내어주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메리트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상점 슬롯은 아직 여유가 있고, 꼭 필요한 옵션일 경우에만 등록하면 될 일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아직 예상에 불과했지만, '희귀 등급'보다 높은 등급이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운이 좋아 잭팟이라도 터진다면 엄청난 기능의 아이템을 양산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재현님. 7번과 9번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유한길이 경고했다.

나는 책상 위에 펼쳐진 울산의 지도를 확인했다.

"7번과 9번이라. 7번은 신경 쓸 필요 없겠네요."

"네?"

7번은 작전 지역과는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은 놈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빠르게 반응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우리 쪽 최고 전력을 보내놨거든요."

당장 자기 진영이 파탄 나고 있었기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신이 아니라서 절대자의 눈으로 상황을 살필 수도 없었고 따로 보조해 줄 수는 없었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어어?"

두 눈을 감고 있던 유한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상급 흡혈귀(Lv. 46)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상급 흡혈귀가 처리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치, 칠번 흡혈귀가 처리되었습니다!"

정산금 없는 대량의 경험치 획득.

혈족이 사냥에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7번 흡혈귀를 처리한 것은 바로 아빠였다.

'좋아'

벌써 열 한 마리의 상급 흡혈귀 중 두 마리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하동건은 내 도움 없이도 혼자서 건물 안에 있는 흡혈귀들을 쓸어버리고, 그곳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확실히 50레벨은 다르군.'

웬만한 상급 흡혈귀보다도 높은 레벨이었다.

게다가 신뢰의 힘이나 남작 칭호와 같은 능력치 증가 버프까지 있으니 그보다 더 수준이 낮은 중하급 흡혈귀들은 하동건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른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하동건 뿐만이 아니었다.

김가영, 강덕수, 오언주 그리고 문병호의 레벨도 모두 50으로 맞춰 준 상태였고, 나머지도 될 수 있는 한 레벨을 올려주었다.

그 결과 가신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전력을 보여주며 흡혈귀들의 전력을 빠르게 박살내고 있었다.

'기대 이상이다.'

작전 구역 내에 갇혀 있던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흡혈귀들을 모조리 해치웠다는 뜻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전 진행 속도가 빨라.'

그리고 상급 흡혈귀들의 반응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느렸다.

최악의 경우 사람들의 구출을 포기하고 가신들만 불러오는 상황까지도 고려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자기들이 공격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덕분에 작전은 성공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면 조금 욕심을 내도 괜찮겠어.'

전체적인 상황을 정리한 나는 소통의 반지를 이용해 가신들에게 명령했다.

[A조와 B조는 생존자들을 다른 분들에게 인계하고 생쥐들의 안내에 따라주세요. 9번 흡혈귀가 접근 중입니다.]

다른 조에 비해 전투력이 강한 A조와 B조를 엮어서 9번을 사냥해볼 생각이었다.

"유한길씨."

"네."

"지금 9번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쯤입니까?"

유한길이 눈을 뜨고 지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이곳에서 출발하여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놈은 정직하게도 작전 지역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찾아갈 필요도 없겠군.'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알아서 대가리를 들이미는 꼴이었다.

"예진아. A조는 여기로, B조는 여기로 안내 부탁해."

"알겠어."

서예진의 생쥐가 가신들과 합류해서 길을 안내할 때쯤이었다.

"재현님. 도착했습니다."

한쪽 구석에 유지시켜두고 있던 절대자의 눈 시야에서 문병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그곳에 의식을 집중하자 아파트 옥상에서 어떤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문병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준비되셨나요?]

"예."

[그럼 바로 시작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문병호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슈슉!

절대자의 눈으로 보이는 시야가 몇 번이나 점멸하며 주변 환경이 뒤바뀌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쯤 반복했을 때.

「상급 흡혈귀(Lv. 50)」

넘버링 4번 흡혈귀이자 생존자 집단 중 하나인 종합운동장 그룹의 리더인 경찰서장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났다.

놈은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평온한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어요?]

이름 모를 여자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은 채로 흡혈 중인 놈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창고 오픈.'

절대자의 창고 레벨 2에서 생기는 현상 유지'라는 기능은 말 그대로 창고에 보관될 당시의 현상을 그대로 유지해준다.

이것은 운동에너지뿐만이 아니라.

'피어싱 화살, 소환.'

김가영의 스킬이 담겨 있는 화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

놈이 흡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으나.

푸슉!

이미 허공에 생성된 빛나는 화살 세 발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커헉!"

[상급 흡혈귀(Lv. 50)를 사냥하셨습니다.]

[초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46,195,742,382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주는 상급 흡혈귀 사냥.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088화 [Episode 19] 게릴라 전투 (3)

A조와 B조로부터 생존자들을 인계받은 C조는 사람들을 데리고 번영교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두두두-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총을 쏴 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다리를 건너오려고 했던 존재는 흡혈귀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지훈과 문상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C조의 리더를 향해 말했다.

"어떡하죠?"

"반응이 너무 거셉니다. 이쪽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러자 C조의 리더, 김민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떡하긴. 뚫어야지."

"네에?"

문지훈과 문상훈 쌍둥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야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쪽의 무장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소총도 충분했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가신들도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흡혈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면서요?"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초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총 맞으면 끝이라고요!"

그리고 맞붙게 된다면 이쪽의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문지훈과 문상훈 형제가 김민호의 능력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처음 보는 건가?"

"네?"

쌍둥이 형제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그때 그렇지 않아도 근육질로 가득 들어차 있던 김민호의 몸이 울긋불긋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피부의 질감이 달라졌다.

마치 단단한 바위와도 같은 기세를 내뿜던 김민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입술마저 단단하게 굳어버린 탓에 발음이 살짝 새고 있었지만, 그 덕에 목소리마저 한층 단단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쿵 쿠웅!

김민호가 전차처럼 다리 너머를 향해 질주했다.

투두두두두-

당연하다는 듯이 총알 세례가 쏟아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팅티팅-

무서운 기세로 쏘아진 집중포화 탄들은 김민호의 가슴 부근에 부딪히고는 힘없이 튕겨 나갈 뿐이었다.

불도저와 같은 기세로 김민호가 밀고 들어오자 슬슬 상대 쪽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흡혈귀들을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퇴각! 퇴각해!"

혼비백산하며 물러나려는 그들을 발견한 김민호가 발을 강하게 굴렀다.

쿠우웅!

아스팔트에 자그마한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김민호의 육중한 몸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콰아아앙!

땅 울림과 함께 저지선을 구축한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김민호가 퇴각 명령을 내리던 사람의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위로 김민호의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종합운동장 그룹의 보급 3팀 소속, 김민호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져 있던 전투조장은 저도 모르게 자기소개를 해버렸다.

김민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 너무나도 친숙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중앙동 그룹 전투 2조 조장, 한강민입니다."

"반갑습니다."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강민을 향해 김민호가 말했다.

"저희는 지금 흡혈귀들 구역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해오는 중입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흡혈귀들의 우두머리, 진조(眞祖).

블라드 체페슈.

흡혈귀들의 군주인 그는 울산에 있는 일반적인 흡혈귀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과는 달리 체페슈는 태생부터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블라드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세계수를 보호하던 장벽을 뚫는 과정에서 숯덩이가 되었던 오른손은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그런데 분명 모든 상처를 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는 듯한 고통이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

그 원인은 자명했다.

방금 사방으로 퍼져나간 에너지.

그것의 에너지가 자신의 오른손을 불태웠던 그것의 파장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이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됐다.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이로써 품위를 지켜야만 했다.

블라드는 손에 힘을 주어 억지로 떨림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힘의 파장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힘은 그곳 그 장소에 갇혀 있어야만 성립이 된다.'

그러니까 그 장막의 주체는 반드시 세계수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근처에서 그 힘이 느껴진단 말이냐.'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그와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가 폭발하듯 사방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흠."

머리로는 지금 당장 에너지 파동을 내뿜은 진원지로 가서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움직이려니 미지의 힘에 대한 공포가 발목을 붙잡 았다.

"박재찬, 이연도, 최정일이 죽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거의 동시에 상급 흡혈귀 세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들의 죽음이 조금 묘했다.

상급 흡혈귀는 블라드가 직접 피의 축복을 내린 것들이었다.

근본이 하찮았던 놈들이기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들이었지만, 어설프게나마 피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놈들로 골랐다.

어디 가서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축복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부산에서 죽었던 정영훈, 고인석과 같았다.

원래라면 상급 흡혈귀가 죽게 되면 그동안 놈이 집어삼킨 생명력으로 인해 증폭된 피의 축복이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어.'

블라드는 이 일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가기 보다 상급 흡혈귀의 존재가 사라진 장소를 먼저 찾아가는 것을 택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포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곧 만월의 밤이 다가온다.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상급 흡혈귀들이 호락호락하게 죽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적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전장에는 피와 죽음이 넘쳐날 테고, 그것은 고스란히 만월의 밤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적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의식의 진행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든 피의 축제를 여는 제물이 되고 말 것이니 상관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축복의 힘이 사라진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다.

그렇게 생각하며 죽은 세 흡혈귀 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

그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깔금하지?'

이상했다.

무려 상급 흡혈귀가 죽은 현장이었다.

당연히 전투의 흔적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건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는 핏자국 하나 없었다.

"핏자국이 없다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릇 전쟁이란 수많은 죽음을 낳고, 땅은 피로 적셔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피비린내와 죽음의 향기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

마치 여기에 모여 있던 흡혈귀들이 단체로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도대체...?"

건물을 모조리 뒤져봤지만, 단 하나의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상급 흡혈귀 이연도와 함께하던 흡혈귀 군단이 모조리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런, 이럴 리가 없다.'

그때였다.

"음?"

또 한 마리의 상급 흡혈귀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죽었다는 뜻이다.

'피 냄새가 난다.'

이 근처에서 실시간으로 피 냄새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는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블라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피 냄새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감각에 대한 정체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뭐?"

그곳에서 인간들이 흡혈귀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빛의 화살이 심장을 꿰뚫고, 은빛 기사들이 할버드를 앞세워 가슴을 찔렀다.

투두두두-

인간들이 쏘아내는 자그마한 쇳덩어리가 흡혈귀들의 심장을 헤집어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인간들이야 원래 세상에서도 존재했었으니까.

그런데.

스르륵

그들의 손에 죽은 흡혈귀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솟구쳐 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던 것도 잠시, 시체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그 흔적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단순히 시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에너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눈에는 보였다.

인간들은 지금 죽은 흡혈귀의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제야 상급 흡혈귀에게서 피의 축복이 되돌아오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갔다.

'...이 힘은, 위험하다.'

당장 저 인간들을 없애버려야 했다.

다행히도, 저들이 보여주는 권능에 비해 지니고 있는 힘은 미천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주마."

그 순간.

스르륵-

"!!??"

그가 움직이려던 찰나, 그곳에 있던 인간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내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하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차갑게 굳어졌다.

"어쩔 수 없군."

아쉽지만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지금 당장 시작하는 수밖에."

"후욱. 후욱."

아슬아슬했다.

하필 레벨업 타이밍에 놈이 움직이기 시작할 줄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레벨업의 고통 속에서 유한길의 목소리를 토대로 A조와 B조 모두에게 가신 소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쨌든 9번 흡혈귀까지 성공적으로 처치했다.

첫 번째 작전 치고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못해도 거의 천 단위의 일반 흡혈귀들과 네 마리의 상급 흡혈귀들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일반 흡혈귀들의 경우 총의 공급만 원활하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상급 흡혈귀를 네 마리나 줄였다는 게 중요했다.

'문제는 이제 놈이 우리를 확실하게 인지했을 거라는 거지.'

이번 게릴라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놈이 우리 쪽 전력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번에 전력이 상당 부분 노출된 만큼 흡혈귀 쪽에서도 대비를 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는 아무런 피해도 없이 이런 전공을 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처럼 과감한 전략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서예진의 능력만 제대로 활용해도 대부분의 흡혈귀들은 쓸어버리는 게 가능했다.

유혜린의 정신력이 회복되면 서예진의 생쥐들을 이용한 테러를 벌이는 한편, 문병호를 이용해서 이곳 생존자 그룹에 종양처럼 퍼져 있는 흡혈귀들을 빠 르게 제거해 나갈 생각이었다.

'우선 태화강 북쪽 지역부터 완전히 먹는다.'

흡혈귀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생존자들이 아닌, 놈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문병호의 능력과 피어싱 화살을 활용한 암살로 상급 흡혈귀를 꾸준히 줄여나가면 된다.'

첫 작전의 전과가 예상치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재, 재현님! 큰일 났습니다!"

세상일이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 법이었다.

유한길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죠?"

"흐, 흡혈귀들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089화 [Episode 20] BLOODY FEST (1)

울산의 생존자들은 한곳에 모여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파트처럼 개인 공간이 보장되어있는 구조가 아니라, 군대처럼 단체 생활을 한다는 의미였다.

단장 울산 종합운동장의 실내체육관에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침낭이나 이불 같은 것들을 구해와서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재난 영화에서나 볼법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 전기, 가스 등이 마비되면서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호범아, 호범아 일어나 봐."

운 좋게 구한 모포를 뒤집어쓰고 체육관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이호범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아, 또 왜?"

이호범을 깨운 것은 그와 동갑내기 여사친인 최도연이었다.

단체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것은 그런 사소한 문제까지 통제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남녀가 뒤섞이며 발생하는 사소한 잡음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생존 과제들을 해결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최도연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화장실 좀 같이 가줘."

"제발 도연아. 화장실 정도는 혼자서 다녀오면 안 돼?"

"에이, 왜 그래. 같이 가줘. 무섭단 말이야."

"하아."

이호범은 한숨을 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변태 소문도 있고, 나도 마침 오줌이 마렵던 참이었으니까.'

최도연이 살랑살랑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호범아."

"가자."

두 사람은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실내체육관 안에 공용 화장실 시설이 갖추어져 있기는 했지만, 수도 시설이 망가진 지금은 당연하게도 사용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대신 나무와 풀이 자라난 화단이 화장실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똥과 오줌이 뒤섞여 악취가 풍겨오고 있었다.

분명 화단 안에 일을 처리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팔트나 길거리 곳곳에 배설물이 방치된 상태였다.

"대충 일보고 빨리 가자."

"...호범아."

"왜?"

"...나 큰 거야."

"아, 씨."

"망 좀 잘 봐줘!"

적당한 나무 뒤에 숨어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이호범은 그나마 오물이 없는 화단을 찾아서 일을 해결했다.

"야! 아직이야?"

"거의 다 됐어!"

큰일을 치르고 온 최도연은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우. 며칠만의 쾌변인지."

"똥쟁아. 뒤처리는 잘했냐?"

"응! 이때를 위해서 물티슈를 챙겨두고 있었거든."

밝게 이야기하던 최도연은 곧장 풀이 죽어서는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

이호범은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평생.'

옛날처럼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날은 영영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일은 없을 테니까.

이호범이 입을 열진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그 의미를 읽어낸 최도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울해."

"그러고 보니 내일 다 같이 물 뜨러 가야 한데. 양이 부족하다고 위에서...."

이호범이 애써 대화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그것도 그리 좋은 주제는 아니었다.

"내일도 힘들겠구나."

"...그렇지."

울산의 생존자들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태화강이라는 커다란 수원이 붙어 있었으니까.

체육관 한쪽에는 숯이나 모래 등을 활용한 정수 시설이 있었는데, 완벽하지는 않아도 강물을 마실 수 있게는 해 주었다.

그렇게 정수가 된 물은 다시 플라스틱 물병에 담겨 종합운동장 그룹 생존자들에게 보급되는 구조였다.

실내체육관에 모여 있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식수를 책임지고 있는 셈이었다.

"있잖아 호범아."

"어?"

"죽고 싶지 않아?"

이호범은 씁쓸한 표정으로 최도연을 바라봤다.

최도연은 계속해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냥 그렇잖아.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남는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죽자."

최도연을 포함해서 이곳에 있는 모두가 크고 작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실제로 이호범과 최도연이 자살한 시체를 본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최도연의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연아...."

이호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최도연이 이호범에게 안겨 왔기 때문이다.

그 품속에서 최도연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네가 대신 나 좀 죽여주면 안 돼?"

"..."

어느새 최도연은 울고 있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제발 나 좀 어떻게 좀 해주라 호범아. 어?"

눈물 젖은 그녀의 호소에 이호범은 잠시 최도연에게 입을 맞추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를 죽이고 그 뒤를 따라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나도 미쳤군.'

눈앞에 있는 최도연만큼이나 자신 또한 미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호범은 그녀를 달래듯 안아주면서도, 자신의 마음속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체육관에서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또 누군가가 발작이라도 일으켰나 했다.

그러나.

"아아악!"

"도망쳐!"

"흐, 흡혈귀다!"

곧이어 체육관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며 그것이 단순한 발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카아아악!"

사람들의 뒤를 이어 괴물이 등장했다.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와 전신이 붉게 물든 그것은 이내 근처에 있던 사람 하나를 붙잡더니 목을 물었다.

"사, 살려...!"

그 모습을 본 이호범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저게 흡혈귀라고?"

이상했다.

이호범은 흡혈귀를 본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부모님을 앗아간 흡혈귀의 존재를 그리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괴물이?'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흡혈귀는 저런 괴물 같은 생김새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면 일반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게 흡혈귀였다.

그런데.

"캬아아아-!"

눈앞에 이는 괴물은 피를 빤다는 것만 같은 다른 존재였다.

커다란 덩치와 새빨간 피부는 악마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촤아아악!

게다가 놈들은 피가 목적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꽤 오랫동안 부모님의 피를 빨던 그 흡혈귀와는 달리 눈앞의 괴물은 목을 물고 있던 것도 잠시, 이내 이빨로 목덜미를 뜯어버리며 곧장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아아악!"

괴물의 손톱과 이빨에 사람들의 여린 신체가 찢겨나갔다.

그것은 피를 마시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괴물의 목적 같아 보였다.

이호범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해!'

조금이라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이호범은 곧장 최도연의 손목을 붙잡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야! 뭐해!"

최도연은 괴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이호범이 이끄는 방향으로 간신히 몇 발자국 따라오는 게 고작이었다.

"야! 정신 차려!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이호범이 다그치자 최도연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 다리가..."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가온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일 뿐이었다.

"젠장!"

이호범은 최도연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크르르륵!"

다른 흡혈귀와 조우했다.

체육관 안에서 나타났던 놈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흡혈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끝났다.'

거대한 괴물의 입이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이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때.

파각!

무언가 폭발했다.

"어억!"

이호범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던 최도연도 바닥에 떨어져 몸을 떨었다.

이호범은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 튄 흡혈귀의 육편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거대한 흡혈귀가 서 있던 그곳에는 상반신이 완전히 사라진 사체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창 한 자루가 아스팔트 바닥에 꽂혀 있었다.

'창...?'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내 어떤 남자가 창을 뽑아냈다.

'...뭐지?'

남자에게서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비단 그가 일격에 괴물을 처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모르고 봤더라도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

평소 눈썰미가 좋던 이호범이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깔끔해.'

떡지지 않은 머리.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옷.

그는 마치 흡혈귀가 나타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나타난 사람처럼 깔끔해 보였다.

마치 따뜻한 물로 매일 샤워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가 주변에 있는 생존자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상한 말을 던졌다.

"생쥐를 발견하면 뒤를 따라가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떠나갔다.

인간의 속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슨 개소리지?'

너무 이상한 말이라 무어라 대꾸도 못 했다.

그런데 그때.

"저, 저기 생쥐다!"

정말로 생쥐가 나타났다.

찍-

그것은 길을 따라 달려나가다가 잠시 멈춰서서는 뒤를 돌아봤다.

그 태도가 마치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했다.

사람들이 모두 멀뚱멀뚱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호범이 최도연을 업고는 생쥐의 뒤에 섰다.

찍-

그가 따라붙는 것을 확인한 생쥐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호범은 생쥐를 뒤따라 달렸고, 이내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이호범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새롭게 합류하는 사람들 중 흡혈귀는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흡혈귀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괴물로 변하여 폭주하는 중이었으니까.

흡혈귀들의 구역이던 태화강 남쪽부터 시작된 광란의 폭주는 이내 다리 건너 생존자들에 섞여 있는 흡혈귀들에게까지 닿았다.

이제는 아예 울산 전역에 있는 흡혈귀들이 모조리 폭주 중이었다.

'시민권 부여해.'

흡혈귀들이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다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적으로 생존자 집단 사이에 숨어든 흡혈귀들을 처리하고,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모두 이곳 홈플러스로 오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벌써 수천 명의 생존자들이 새롭게 합류하고 있었다.

'자리가 부족해.'

울산 전체에 있는 생존자들을 작은 홈플러스에 전부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존자들 일부를 서면으로 보내야만 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절대자의 문 스킬을 사용하는 것.

하지만 절대자의 문은 만능이 아니었다.

열려 있는 동안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는데, 한정된 시간 동안 서면으로 보낼 수 있는 생존자들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언제 어디에서 흡혈귀들의 우두머리가 나타날 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가신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데만 해도 바빴다.

'어쩔 수 없군.'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스킬 포인트를 써야겠어.'

후보는 두 가지.

절대자의 눈과 절대자의 문.

두 가지 중 하나를 골라서 올려야 했다.

'나는....'

[정말로 집구석 절대자의 문 스킬을 올리시겠습니까?]

"...그래."

우웅!

[집구석 절대자의 문 스킬이 Lv. 2가 되었습니다.]

090화 [Episode 20] BLOODY FEST (2)

[동서남북의 4대문이 활성화됩니다.]

'4대문...?'

스킬창을 확인해보니 새롭게 열린 기능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대문 개방]

[서대문 개방]

[남대문 개방]

[북대문 개방]

확인해보니 4대문은 각자 개성 넘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남대문의 기능은 정확히 내가 원하던 종류의 것이었다.

"이거다."

정신력이 들지 않는 데다 대규모 이동이 가능한 기능이었다.

'남대문 개방.'

지이잉-

남대문 개방을 명령하자 전초기지 남쪽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영역 전체가 약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옅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

그리고.

화르르륵!

투명장벽이 있는 공간이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꺄아아악!"

"부, 불이다!"

"피해!"

마침 그곳은 홈플러스 건물의 출입구가 있는 곳이었기에 꽤나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 갑작스러운 불꽃을 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몇 걸음 물러났다.

나는 그 광경을 절대자의 눈을 통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반응이 변했다.

"뭐, 뭐야?"

"어?"

한순간 화려하게 불타오른 공간의 너머로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넋이 나간 채로 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바다?"

부산항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육지 쪽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인 탓에 수평선 대신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지만, 드넓게 펼쳐진 바다에서 풍겨오는 짠 내와 부두에 정착되어있는 배의 모 습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벌써 여기까지 확장된 건가.'

서면에서부터 시작된 집구석 영역은 어느새 감만부두에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이번 레벨업으로 드디어 바다에 닿게 된 것이다.

'본가에 설치된 별채와도 맞닿게 된 건가.'

서면과 남포동의 중심인 부산역에서 본진의 영역과 별채의 영역이 서로 겹쳐지고 있었다.

'이번 레벨업은 그래도 버틸만하다 싶더니, 이것 때문인가?'

만약 정말로 영역이 겹쳐지며 고통이 덜어진 것이라면, 앞으로 한동안은 고통이 경감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두 개의 영역이 완전히 합쳐지기 전까지는 늘어나는 영역이 어느 정도 겹칠 테니까.

'어쨌든 성공이군.'

남대문은 일종의 설치기였다.

영역의 끄트머리인 투명 장막이 있는 곳에만 설치가 가능한 대문이었는데, 한 번 설치를 하면 사흘 동안 유지가 되는 문이었다.

게다가 남대문은 성인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넉넉한 너비와 앞에 서면 압도될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거라면 울산에 있는 시민들이 다 몰려와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지.'

부산에 있는 본진의 드넓은 지역은 수만 명도 우습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니까.

물론 원활한 이동을 위해서 인도자가 필요할 것이다.

[새롬씨.]

홈플러스로 유입되고 있던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던 박새롬은 내 부름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넵!"

[자리가 얼마나 남았나요?]

"그게・・・ 어떻게 수용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 이후가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새롭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남대문을 통해 이동하라고 전해주세요.]

"네? 남대문이요?"

[홈플러스 1층 롯데리아가 있는 곳으로 와주시겠어요?]

"엇, 넵!"

박새롬은 이번에 충성도 기준치를 채우자마자 가신으로 받아들인 뒤, 종속의 계약까지 맺었다.

덕분에 이제는 가신 등록 슬롯이 딱 하나만 남은 상태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름 : 박새롬 (Lv. 40) [+]

칭호: [스물네 번째 종] [자작] [마법사]

신뢰도 : 52 충성도 : 68

각성 능력 : 그림자 이동, 그림자 분신

경험치 분배율: 200% (+200%)

★퀘스트 부여」

네츄럴이었던 박새롬은 자작의 칭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S등급 능력인 그림자 분신까지 새롭게 각성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있었던 그림자 이동 능력의 효율이 몇 배나 좋아진 것은 덤이었다.

스르륵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홈플러스의 남쪽에서 튀어나온 박새롬은 멍하니 남대문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와...."

불꽃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테두리와 그 속에 펼쳐진 다른 공간의 풍경은 넋이 나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싯팔, 개쩐다..."

찰진 욕설과 함께 튀어나온 감탄사를 들으며 박새롬에게 명령했다.

[새로 유입된 사람은 남대문 너머로 안내해주시면 됩니다.]

"앗, 알겠습니다!"

그곳의 안내는 박새롬에게 맡긴 후 소통의 반지를 이용해 김다빈에게 연락했다.

[다빈씨.]

[네, 재현님.]

곧바로 김다빈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말씀하세요.]

[난민들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규모가 어떻게 되나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수만 명까지 예상합니다.]

[······.]

예상치 못한 규모였는지 김다빈의 텔레파시가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내 쪽이었다.

[현재 감만부두 쪽으로 사람들을 보낼 계획입니다. 일단은 근처 아파트에 사람들을 수용해 주세요. 물자와 기본적인 기능은 제가 직접 지원해드리겠습니 다.]

[・・・혹시 혜린이를 지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럴 때마다 김다빈이 유혜린을 찾는 것을 보면, 유혜린은 행정 업무 쪽에서 상당히 유능한 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혜린은 현재 한계치까지 독가스를 분출해 내며 정신력을 모두 소모한 뒤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어쩔 수 없지요. 상황이 끝나면 보고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쉴새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시민권만 부여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김다빈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이제....'

마음 놓고 가신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우선은.'

놈의 위치를 알 필요가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인 서예진을 향해 물었다.

"예진아. 그놈은 아직 그 자리에 있어?"

"으응.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어."

그녀는 현재 생존자들의 안내와 더불어 진조의 위치를 감시하는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상급 흡혈귀들을 포함하여 진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유한길의 역할이었지만, 흡혈귀들의 폭주 이후 유한길의 정신력이 바닥나 버렸다.

그는 현재 모든 정신력을 소모하고 유혜린의 옆에서 기절해 있었다.

'놈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치더라도 다른 상급 흡혈귀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절대자의 눈은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남대문을 만들어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활성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신들 중 그 누구도 상급 흡혈귀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상급 흡혈귀 놈들의 움직임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서예진의 능력은 생존자들을 안내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운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로 위험한 진조를 제외하면 나머지 상급 흡혈귀들의 위치 파악은 포기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된 거지?'

놈들도 일반 흡혈귀들처럼 폭주를 하기 시작한 거라면 티가 났을 것이다.

겨우 일반 흡혈귀들이 날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상이 펼쳐지고 있을 테니까. 요란하게 설쳐댈 테니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지금까지 그런 낌새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상급 흡혈귀 놈들,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냐.'

우선은 문병호를 비추고 있는 절대자의 눈에 집중해 봤다.

문병호에게는 폭주가 일어나는 순간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생존자 그룹에 숨어든 5번 6번 흡혈귀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생존자 집단에 숨어든 상급 흡혈귀들을 처리해버리기 위해서였다.

방심한 상태의 상급 흡혈귀들은 의외로 약했으니까.

그러나.

'없다?'

그곳에 상급 흡혈귀로 추정되는 놈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때였다.

"오빠!"

"응?"

"상급 흡혈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아!"

"뭐라고?"

흡혈귀들이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 상급 흡혈귀들이 태화강 북쪽으로 대거 진입해 들어올 것을 예상했었다.

혼란을 틈타 총공격을 감행하리라 추측하고 그곳에 아빠와 함께 가신들을 배치해 두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강력한 전력을 배치해 둔 덕분에 다리를 건너려는 수많은 폭주 흡혈귀들을 사전 차단할 수 있기는 했지만, 상급 흡혈귀는 한 마리도 처치하지 못한 상황 이었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함정일 가능성은?'

잠시 고민해봤지만, 상대는 이쪽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게릴라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만 봐도 놈들이 우리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자신들이 실시간으로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테지.'

그렇다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설마...'

생존자 집단에 심어 놓은 스파이 흡혈귀들까지 죄다 폭주시켜 만들어낸 혼란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놈들의 진짜 목적은.

'시간을 끄는 건가?'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놈은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지금 폭주하며 날뛰고 있는 흡혈귀들의 모습에서 상급 흡혈귀의 각성 상태가 떠올랐다.

오늘 있었던 게릴라 작전에서 상급 흡혈귀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놈들이 본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전에 죽여버렸기 때문이었다.

'부산까지 찾아왔던 상급 흡혈귀는 하동건 파티와 전투 도중에 갑자기 강해졌었지.'

만일 놈에게도 그것이 비슷하게 적용된다면?

무려 62레벨에 달하는 괴물 흡혈귀가 본신의 힘을 완전히 끌어내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지금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

[김건씨. 지금 당장 다리 쪽으로 움직여 주세요.]

다행히 새롭게 얻은 기능 중에 지금 상황에 사용하기 적절한 기능이 하나 있었다.

'북대문 개방.'

오로지 집구석 영역의 투명장벽에만 설치할 수 있는 남대문과는 달리.

지이잉-

북대문은 절대자의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개방하는 게 가능했다.

촤아아악!

서예진의 생쥐가 있는 곳에서 푸른 물결이 치솟더니.

쩌저저적-

힘차게 솟아오르던 물이 빠르게 얼어붙어 갔다.

그리고.

콰직!

가운데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음?"

그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바로 태화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흡혈귀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이준혁의 모습이었다.

"뭐야? 준혁이 네가 한 거야?"

"아니."

"그럼 뭐야? 저 신입들이 한 거야? 얼음 쓰는 쌍둥이?"

반원 모양의 얼음 테두리 안을 노려보는 그를 향해 내가 말했다.

[준혁씨. 아빠를 모시고 지금 당장 그 문을 건너가 주세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때 이준혁을 향해 폭주한 흡혈귀 하나가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이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퍼억!

흡혈귀의 몸속에 있던 핏물의 이준혁의 의지에 따라 심장을 터뜨렸다.

핏물도 물.

이준혁의 컨트롤 워터 능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것이다.

[중급 흡혈귀(Lv. 32)를 사냥하셨습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집구석 절대자의 지갑에 1,091,123,887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이준혁이 말을 이었다.

"괜찮을까요? 지금 저희가 이곳을 떠나면 흡혈귀 놈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이준혁은 아빠를 비롯해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전투 병력과 함께 북대문을 건너갔다.

그들이 모두 건너갔을 때 쯤.

"도착했습니다."

까마귀 인간의 모습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던 김건이 태화강 다리 위에 도착했다.

태화강을 건너는 다리는 여러 개 있었지만, 생존자들이 사력을 다해 틀어막는 다리는 크게 세 곳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펼친 게릴라 작전으로 인해 두 곳은 흡혈귀들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폭주한 흡혈귀들이 몰려 있는 다리는 딱 한 곳뿐이었다.

그곳을 틀어막고 있던 가신들의 전력이 사라지자 폭주한 흡혈귀들이 미친 듯이 인간 진영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절대자의 문을 사용했다.

'서대문 개방'

서대문의 기능은 조금 특이했다.

우우웅-

그것은 문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나의 닫힌 공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오직 집구석 영역 안에서만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미로.

그것이 서대문의 역할이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시작이 이어진 공간은 어떤 존재를 가두거나 벌을 주기 적합해 보이는 구조였다.

그러나.

'상점 오픈. 바벨 구입.'

나는 조금 다르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서대문으로 만들어진 독립된 공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기가 없는 완벽한 진공이 된 그곳의 입구와 출구는 각각 땅바닥과 하늘에 이어져 있었다.

세로로 길게 만들어진 공간의 맨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이어져 하나의 연속되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면 아파트 단지의 허공에 만들어진 그 공간에 200kg짜리 바벨이 소환되자 곧장 중력 가속도를 받아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하늘에 있는 출구로 다시 나온 바벨의 속도는 계속해서 더 빨라져만 갔다.

'조금만 더.'

공기 저항이 사라진 공간에서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던 그 물건을.

'창고 보관.'

나는 창고 안으로 집어삼켰다.

'겨우 200kg에 불과하니 파괴력이 엄청나진 않겠지만....'

다리 하나 정도를 박살 내기에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다음에는 창고 레벨을 올리던가 해야지 원...'

다음 순간.

김 건이 날아가고 있는 상공에서 그것을 소환했다.

서대문 안에서 중력 가속도를 이용해 그 속도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200kg짜리 바벨이 허공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쐐애애애액!

그것은 대기를 찢으며 길쭉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자그마한 운석이 되어버린 그것이 다리에 충돌하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하급 흡혈귀(Lv. 29)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7)를 사냥하셨습니다.]

[중급 흡혈귀(Lv. 35)를 사냥하셨습니다.]

다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무너졌고, 폭발의 중심지에 있던 흡혈귀들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그 압도적인 파괴의 현장을 목격하며 생각했다.

'이거 잘하면 ・・・'

진조가 있는 건물에 진입하기 전에 먼 저, 저놈부터 떨어뜨려 봐야겠다고.

[이준혁씨. 죄송한데 건물에서 물러나 주세요. 해 볼 게 있습니다.]

091화 [Episode 20] BLOODY FEST (3)

생각했던 것보다 위력이 엄청났다.

이전에 바벨을 사용하던 방식은 갑각류 몬스터의 키틴질 갑옷을 박살 낼 정도였다면, 지금은 차량이 지나다닐 만큼 거대한 다리도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게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난데?'

위력의 비밀은 바로.

'서대문 개방'

절대자의 문 스킬 레벨을 올리며 얻은 4대문 중 서대문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지이잉-

서면에 있는 본진인 집구석 영역의 허공에 새로운 공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서대문의 원래 기능은 미로다.'

닫힌 공간 안의 시작과 끝에는 보이지 않는 서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파트 복도의 공간에 서대문을 활용한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안에 갇힌 사람 입장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도를 헤매게 되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영원의 미로.

그러나 나는 이것을 미로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허공에 생성된 서대문의 구조는 세로로 길쭉한 형태였다.

바닥으로 들어가면 천장에서 다시 떨어져 내리는 구조.

그리고 지금 서대문 안쪽 공간은 내 의지대로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 가능했고, 현재는 모든 공기를 제거한 상태였다.

'바벨 구입.'

창고에 넣을 수 있는 무게인 200kg로 설정한 맞춤형 바벨을 서대문 안에 소환시켰다.

허공에 소환된 바벨은 그대로 중력의 영향을 받아 가속하기 시작했다.

공기의 저항이 없는 진공 속에서 지구의 중력을 받은 200kg의 질량이 소리 없이 가속한다.

서대문 공간의 바닥에 닿은 바벨은 그대로 공간의 제일 위쪽에서 나타나 다시 떨어져 내렸다.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아니, 자유낙하 운동을 계속했다.

'이거라면 놈을 끝장낼 수 있을 거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가속 시킨 그것은 다리를 박살냈던 것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를 지니게 된 상태였다.

이거 한 방이라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즉사하고 말 것이다.

'내가 직접 사냥한 걸로 처리되는 건 아쉽지만..'

괜히 가신들에게만 맡겼다가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빠의 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

현재 아빠를 필두로 한 가신들은 목표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충분한 거리였지만, 지금 이것의 정확한 위력을 나조차도 제대로 알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가신들을 향해 경고했다.

[여러분. 충격에 대비하도록 하세요.]

만약에 충격의 여파가 닿는다고 해도 거금을 들여 최대한 레벨을 올려둔 만큼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북대문을 사용해 아예 멀리 이동시켜주고 싶었지만, 북대문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1시간의 쿨타임이 필요했다.

'시간을 너무 끌 수는 없다.'

언제 진조 녀석의 전투 준비가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준비가 끝나면 놈은 분명 움직일 테고, 그렇게 되면 이 공격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기회는 지금이다.'

수백 미터나 떨어진 상태이니 가신들이 잘 버텨내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김건씨. 부탁드립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이후 김 건에게 목표 건물 상공에 머물 것을 부탁했다.

시야를 공중으로 옮기니 진조와 상급 흡혈귀들이 있는 건물이 장난감처럼 작아져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나마 놈들이 있는 호텔이 다른 건물들에 비해 고층이었기 때문에 상공에서도 특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창고 오픈. 바벨 보관..'

육중한 운동 에너지를 품은 바벨이 절대자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으윽?'

한순간 시야가 새까맣게 점멸했다. 그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정신력의 한계인가.'

어쩌면 질량 말고도 창고 사용에 무언가 제한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단 되기는 했다.'

금방이라도 전원이 꺼질 것 같은 뇌를 정신력으로 붙잡으며 집중했다.

'이 짓도 여러 번 하기는 힘들겠군.'

이보다 더한 위력을 내려면 창고 레벨을 올리던지 해야 할 듯 싶었다.

'무게가 늘어나는 만큼 위력도 증가할 테고.'

다음에 얻는 스킬 포인트는 창고에 투자하는 게 좋겠어.

'으윽.'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더 아파왔다.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폭풍이 머릿속에서 더욱 더 빠르고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오래는 못 버틴다.'

지금 당장 이것을 배출해버리고 싶었다.

'절대자의 눈.'

눈을 통해 하늘에서부터 미세 조정을 거쳤다.

아무래도 높이가 높이다 보니 선천적으로 타고난 내 공간 인지 능력으로도 한계가 있었지만, 절대자의 눈은 단순히 시각적 감각만 보여주는 스킬이 아니 었다.

공간 전체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목표물을 향한 클리크 조정을 보조해 주었고, 절대자의 창고에 보관된 바벨의 운동 방향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그 괴물의 고삐를 풀어주었다.

'바벨 소환.'

허공에 나타난 200kg 질량의 쇳덩이가 머금고 있는 속도는 자그마한 운석과 다를 바 없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화염을 토해내던 그것은 목표했던 건물에 정확히 타격했다.

파괴의 불꽃이 바닥에 닿았을 때.

번쩍 -

어둠 속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울산 도심 중심에 자그마한 불꽃의 덩어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하늘로 치솟았고.

콰과과과과-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서누리는 불안한 얼굴로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흡혈귀들의 정점.

그는 현재 호텔 수영장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언제 채워둔 것인지 그곳은 핏물로 가득했다.

그가 평소 즐기는 핏물 목욕과는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서누리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습니다."

현재 수영장에 모인 상급 흡혈귀는 총 여덟 명.

사실상 살아남은 상급 흡혈귀는 죄다 이곳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버티기 힘들었는지, 그들 중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다들 수영장 안에 들어가 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도, 궁금함을 숨기지 못했다.

모든 흡혈귀들이 일시에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짓이 가능한 것은 눈앞에 있는 남자밖에 없었다.

모든 흡혈귀들의 주인이자, 정점인 남자.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때가 왔다."

그의 말에 상급 흡혈귀들은 눈빛 교환을 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중 정장을 입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물었다.

"때라고 하시면, 피의 축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분명 피의 축제는 다가올 만월의 밤에 시작한다고...."

"사정이 달라졌다."

흡혈귀들의 정점, 블라드 체페슈는 핏물로 가득한 수영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등을 돌리자, 상급 흡혈귀들은 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들을 훑어보며 블라드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방해꾼들이 나타났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놈들에게 박재찬, 이연도, 최정일이 죽었다."

""!!!""

상급 흡혈귀들 모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어도, 설마 죽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영훈과 고인석 또한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2차 충격이 그들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석이가 죽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놈들은 몰라도 고인석이 죽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럴 리가.."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시 한 번 나섰다.

"직접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그의 물음에 블라드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이 몸이 직접 움직일 생각이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상급 흡혈귀들이 저마다 동조해 왔다.

"맡겨 주십시오."

"박살 내 버리겠습니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에 블라드가 그들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이어졌다.

"내게 목숨을 바쳐라."

그때까지만 해도 상급 흡혈귀들은 그것이 마냥 비유적인 표현인줄로만 알았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니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움에 임하라는, 그런 뜻의 말일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러나.

촤아아아-

수영장의 핏물이 그들을 덮쳐왔을 때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뒤늦게 저항하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흡혈귀들의 정점에 있는 남자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했다.

"크아아악!"

수영장에서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서누리는 이미 핏물에 완전히 집어 삼켜진 상태였고, 다른 상급 흡혈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꺼져!"

치이이익-

수영장의 핏물을 향해 자신의 산성 피를 뿌리거나.

"흐읍!"

핏물로 만들어낸 무기로 그것들을 베어내는 등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활용하여 저항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끄아아악!"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핏물의 파도에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상급 흡혈귀들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더니 이내 모든 생명력을 흡수당했다.

종국에는 시체마저 남기지 못한 채 핏물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은 놀랍게도 제일 먼저 핏물에 집어삼켜졌었던 서누리였다.

'으으!'

자신의 날개를 활용해 전신을 둥글게 감싼 그녀는 공포에 휩싸여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서서히 핏물의 파도가 바스러지더니 이내 다시 수영장으로 가라앉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서누리는 혼란에 빠졌다.

'나, 나는 왜... 어째서 살아 있지?'

자신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상급 흡혈귀들조차도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해본 채 흡수당했다.

고작 자신의 핏물 날개로 그 힘을 거역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

"헉!"

서누리는 자신의 턱을 붙잡은 남자의 힘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촤라락!

자신의 눈 속으로 들이닥치는 핏물의 향연을 막아낼 수 없었다.

"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사정 봐주지 않고 핏물을 밀어 넣었다.

이내 고통이 멎었을 때, 그녀의 한쪽 눈은 피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으윽. 으흡."

괴로워하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도시의 상공에서 내 눈이 되어라."

그의 명령에 서누리는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따라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누리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네, 넵.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창문을 부수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에 의지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날갯짓하며 하늘로 올라가던 그 순간.

번쩍 -

갑자기 등 뒤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거의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그녀를 덮쳤다.

서누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