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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2위의 세계 구원 공략서

전자책 발행 / 2021년 5월 16일

지은이 / 리베르

표지일러스트 / 양개

펴낸곳 / (주)필연매니지먼트

ISBN 979-11-6488-606-7[05810]

© 리베르, 2021

이 출판물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할 수 없습니다.

Ep 1. 그 만년 2위

"1등만 하고 살 상이야."

일곱 살 서빈희를 보자마자 그렇게 용하다는 선녀 보살이 대뜸 던진 말이었다.

그에게 관심 두지 않고 알록달록한 법당을 흥미 가득 담긴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서빈희를 지그시 보던 선녀 보살이 빈희의 부친이 내민 사주를 훑었다.

"사주가 좋구먼. 천권성 아래에서 태어났어. 크게 될 놈일세. 존경과 우러름만 받고 살 인생이야."

"하하, 안 그래도 저희 막내 태몽이 용꿈입니다, 용꿈. 커다란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더라고요."

선녀 보살의 말을 듣고 입이 귀에 걸린 부친이 자랑하듯 그의 태몽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꿈에 나온 황룡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비늘이 얼마나 금빛으로 화려하게 빛났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그의 말은 옆에서 그의 옷소매를 힘차게 잡아당기는 태몽의 당사자, 빈희에 의해 끊겼다.

"아빠, 나 밖에 나가 있으면 안 돼? 향냄새 때문에 여기 있기 싫어."

서빈희가 투덜거렸다.

벽 한 면에 그려진 무섭게 생긴 할배들 그림과 짙은 향냄새, 겁재니 식신이니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일곱 살 꼬마에게는 신기함보단 껄끄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를 의미 모를 눈으로 내려다보던 선녀 보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의 날카로운 목소리와는 다른, 낮게 가라앉은 엄숙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빈희의 코에 맴도는 향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막중한 운명을 가졌구나. 한낱 인간이 지기에는 무거운 운명이야."

"안 좋은 거예요?"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서빈희를 향해 선녀 보살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그 운명으로 인해 네 앞길이 평탄하지만은 않겠지만, 막중한 만큼 네게 돌아오는 보상은 클 게다. 더 이상은 못 말해 준다. 천기누설이야."

좋다는 거야, 안 좋다는 거야? 모호한 말에 흥미가 떨어진 서빈희가 하품을 했다.

그냥 언니 따라서 집에 있을 걸 괜히 따라왔어. 그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부친은 빈희의 언니의 사주를 내밀고 있었다. 선녀 보살의 목소리가 다시 카랑카랑하게 돌아왔다.

제게서 거둬진 관심에 지루함을 못 이기고 꾸벅꾸벅 졸던 빈희를 보다 못한 부친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밖에 나가서 놀고 있으라는 부친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막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선녀 보살이 방금처럼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의뭉스러운 경고를 던졌다.

그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향 연기가 전보다 더 짙어 보였다.

"안 뺏기게 조심해. 뺏기는 순간 끝이야, 끝."

"뭐를요?"

"그건 네가 알아야지. 내가 말하면 천기누설이다."

그놈의 천기누설. 아주 치트 키가 따로 없네.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선녀 보살의 엄격한 표정에 입을 비죽인 서빈희는 문을 마저 열고 밖으로 나왔다.

향냄새 없는 바깥 공기가 상쾌했다.

***

그로부터 6년 후,

선녀 보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빈희는 떡하니 1등을 차지했다.

한국 랭킹 1위, 월드 랭킹 2위.

13살의 최연소 각성자.

전 세계를 통틀어 3세대 최초의 S급.

각성하자마자 하마터면 대참사로 이어질 뻔한 몬스터 웨이브를 제압한 희대의 천재.

전 랭킹 1위이자 헌터 협회장 천호(天虎)의 유일한 제자.

막 각성한 서빈희에게 붙은 수식어들은 화려했다.

어디를 가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꼬마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승부욕 넘치고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서빈희한테 랭킹 1위란 그가 얻어 낸 최고의 자리이자 자랑거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에 접속해 랭킹 차트의 1위 자리에 떡하니 있는 그의 헌터명 석 자를 보며 뿌듯해하는 게 그의 일과 중 하나였으니 말 다 했다.

전국 1등 먹었다고 동네 친구들이든 초등학교 친구들이든 아무나 붙잡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닌 지 한 달 후.

"어라, 이상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랭킹 차트에 들어간 그는 1위에 올라가 있는 낯선 이름에 눈을 깜빡였다.

"내 헌터명은 미리내가 아니라 반휘혈인데. 이거 오류 아니야?"

홈페이지 밑에 있는 전화번호로 오류 문의 전화를 걸기 위해 침대에 던져 놓은 핸드폰을 집어 든 그는 가득 쌓인 문자와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비니비니, 괜찮아? 너무 우울해하지는 말구ㅠㅠㅠ] 오후 5:00

[님 이제 1등 아님 ㅅㄱ] 오후 5:01

[2등이래욬ㅋㅋㅋㅋ 콩x호를 이은 콩휘혈ㅋㅋㅋ] 오후 5:05

[이제 자랑 안 들어도 되는 거임? 아싸!] 오후 5:07

[랭킹이야 다시 올리면 되는 거지. 그리고 2등도 나름 높아] 오후 5:10

휙휙 문자를 넘기던 빈희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핸드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핸드폰을 컴퓨터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고 컴퓨터 화면의 랭킹 2위 옆에 적힌 이름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위. 반휘혈

겉옷을 걸친 그는 집을 뛰쳐나와 곧바로 헌터 협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 협회장실 앞에 도착한 빈희는 문을 쾅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사부님! 랭킹 차트 오류 났어요!"

사무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차를 마시며 서류를 보고 있던 헌터 협회 협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타일렀다.

"빈희야,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고...."

"지금 노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차트가 오류 났다니까요? 제가 2등이라고 뜬다고요!"

성질 급한 한국인 아니랄까 봐 사부의 말을 잘라먹고 다급히 외치는 빈희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그의 사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류가 아니라 오늘 오후 네 시에 순위 변동이 있었단다. 초등학교 3학년이더구나. 들은 바로는 성좌 계약으로 각성을 했다던데. 나이도 비슷하니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 빈희야?"

어느새 협회장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서빈희가 사부의 당황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뭐가 비슷해요! 뭐가! 나는 6학년! 걔는 3학년! 하늘과 땅 차인데! 아, 다 필요 없고 내 1위 돌려 내액!"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마구 내리치더니 사무실의 전등이 깜빡거렸다.

완전히 전기가 나간 협회장실을 시작으로 협회 건물뿐 아니라 주변 일대까지 모조리 정전되어 어둠에 잠겼다.

어린애의 투정치고는 스케일이 컸다.

왜인지 모르게 처량하게 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서빈희의 전국 짱 일대기는 그렇게 한 달 천하로 막을 내렸다.

한순간에 최연소 각성자 자리도, 랭킹 1위 자리도 빼앗긴 서빈희는 그렇게 2인자로 전락했다.

비정한 세상은 2등 따위는 기억해 주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스포트라이트가 한순간에 새로이 떠오른 초신성을 향해 옮겨 갔다.

[속보] 한국, 월드 랭킹 1위 보유국으로 등극

[뉴스] 새로운 랭킹 1위는 02년생? 협회 관계자 왈, 그쪽에서 신상 밝히길 원치 않아

승부욕 넘치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고,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꼬맹이한테 남은 건 2등이라는 꼬리표와 악과 깡뿐이었다.

"1등만 기억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 엿이나 처먹어라! 확 망해 버려, x발!"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변동 없는 순위표를 날마다 눈에 담으며 서빈희는 이를 갈았다.

빼앗겼으면 다시 뺏어오면 된다.

이 좌우명을 발판 삼아 서빈희의 악바리 근성이 발동되었다.

***

"어이, 거기 중딩! 지금 누구 마음대로 혼자 와서 균열 선점이야? 여긴 부활 길드에서 찜해 놓은 구역이라고."

"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한테 던전 선점 뺏긴 게 꼬우면 협회장님한테 따지쇼."

14살 때부터 협회장을 빽으로 길드와 맞짱 뜨며 균열 돌면서 능력치를 키웠다.

"사부님, 여기 서명 좀요."

"협회장 자리 물려받을 녀석이 갑자기 길드는 왜 만든다는 게냐?"

"제가 다 계획이 있슴다."

그러고는 헌터 협회 차기 협회장 자리를 스스로 차고 나가서 자기 길드를 만들어 전국 1위, 세계 2위의 규모까지 성장시켰다.

"와, 이게 다 생일 축하 메시지야? 헐, 얘 월랭 10위 카산드라 맞지? 그 유명한 예언가! 블랙펄이랑 리스도 있네. 대박이다. 월드 랭커는 역시 월드 단위로 노는구나."

"내가 좀. 인맥 킹 서빈희라고 불러라."

또 월드 랭킹 모임에 꼬박꼬박 얼굴을 비쳐 글로벌 인맥을 쌓고 대형 길드 길드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내 인맥 역시 탄탄히 다져 놓았다.

그렇게 14년이 지난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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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3 15:46 조회: 349,716

[Best] 빈휘혈 이쯤 되면 애잔하다

작성자: 커먼요

14년 동안 2등 인생 말이 되냐. 눈물 난다, 눈물 나. 콩x호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요즘 초딩들은 콩 밈이 빈휘혈한테서 탄생한 줄 알더라.... 휘혈아, 이거 보고 있으면 순위표 시스템 해킹해서라도 랭킹 1위 좀 해 봐. 내가 짠해서 그래.

댓글(752)

매드덕: 콩 인생 14년이면 진작 발아하고도 남았겠다

└뉴온: 빈휘혈은 발아가 아니라 발효됨ㅋㅋㅋ

└스푼지밥: 14년이면 콩 썩제

더블킬: ??-하늘은 어찌하여 나 반휘혈을 낳고 또 미리내를 낳았는가.

└슝: 하필 동시대에 태어난 천재와 쌉천재

└제바워크: 빈휘혈이 2세대에만 태어났어도 랭1위 먹었을 텐데ㅉ 휘혈이 태어난 타이밍 한번 더럽게 못 맞추누

└오레오레: 미리내는 헌터명도 예쁘네

└익몀: 빈휘혈 의문의 2패

바나니킥: 써방 좀 해라. 빈휘혈 또 검색해서 들어와서 pdf 딴다고 지랄하고 간다고.

└우유조아: 고소 뭐라 함?

└치킨먹고싶다: 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 훼손

└과제ㅈ까: ㅅㅂ 빈휘혈 2천 원 비싸졌누ㅋㅋㅋ

수학의비정석: 다들 빈휘혈 빈휘혈 하는데 빈휘혈이 대체 뭐임? 반휘혈 오타냐?

└노다뷔우스의띠: 빈(bean)휘혈=콩휘혈

└수학의비정석: ㅁㅊ 누가 지었냐 천재넼ㅋㅋㅋㅋ

레먼에이드: 요즘 딩초들 콩x호 모르는 거 실화냐?

└준: 빈휘혈 밈이 너무 강려크해서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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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긴 무슨. 순 돌팔이 아니야?"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20년 전의 기억이라 흐릿했지만, 그 말 한마디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1등만 하고 살 상은 개뿔. 뭐, 존경과 우러름을 받아? 복채가 아깝다."

랭킹 1위는 한 달 만에 뺏기고, 공부를 하도 안 해서 전교 1등과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길드도 월드 2위고, 하다못해 인기투표 1위에서도 번번이 미끄러지는 콩라인 14년 인생 서빈희가 빈휘혈이라고 적힌 댓글을 일일이 pdf 따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싫다.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랭킹 1위를 하든지 해야지."

[당신의 계약성이 그 말 10년째 듣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합니다.]

"더 듣기 싫으면 입 다물고 후원이나 하쇼."

오늘도 서빈희는 콩라인 탈출을 꿈꾼다.

현시점에서 40여 년 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균열이 발생했다.

호기심에 균열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자 각국 정부는 균열에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균열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안심하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게이트가 강제로 개방되었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던 괴수들이 균열에서 쏟아져 나왔다.

던전 브레이크였다. 첫 번째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괴수의 발에 짓밟혀 도시가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사망하였다.

하지만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신의 안배였을까. 괴수에 맞설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유 능력을 가지고 각성한 사람들은 균열에 들어가 괴수와 맞서고 게이트를 닫았다. 이들이 바로 1세대 각성자였다.

1세대들의 노력과 희생을 발판 삼아 세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인류는 던전의 종류와 균열의 정체, 몬스터 웨이브 패턴을 알아내 공략하며 던전 부산물과 공략 보상인 아이템으로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균열은 계속하여 일어났고, 던전 브레이크 역시 계속해서 터졌다. 그에 맞춰 각성자들도 세대가 변할 때마다 꾸준히 늘어났다.

각성하면 각성자는 등급 측정과 신상 등록을 하고 헌터증을 발급받았다.

각성자들에게는 신상 등록과 시민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다만, 신상 보호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본명이 아닌 헌터명을 사용했다.

각성자들의 등급은 S급부터 F급까지 다양했다. 각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측정해 능력 수치를 월드 서버에 올리면 자동으로 월드 랭킹과 국내 랭킹이 등록되는 식이었다.

그중 S급은 한 세대에서 전 세계에 이천 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희귀했다.

등급은 노력하면 바뀔 수 있었지만, A급 이상으로 올라간 이들은 0.0001%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극소수에 속한 사람들은 '성좌', 즉 별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위에서 오직 자신들의 흥미를 채우기 위해 화신을 고르고 후원하는 지고한 상위의 존재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라 함부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S급, 혹은 A급에 흥미를 보였다. 그 이하 등급에 흥미를 보이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1세대는 자신들을 헌터라 칭했다. 헌터 협회를 만들고, 정부와 협상하여 헌터들에 대한 보상과 규제를 조율했다.

그 덕분에 70~90년생인 2세대 때부터는 어느 정도 체제가 잡힐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의 각성자들은 90년생 이후인 3세대로 접어든 상태다.

서빈희는 그중 3세대 헌터다.

천상계라고 불리는 S급.

현 국내 랭킹 2위, 월드 랭킹 4위. 대한민국 최대 규모인 아레스 길드 길드장.

2위라는 랭킹 덕분에 본 헌터명인 반휘혈보다는 빈휘혈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비운의 만년 2위.

언제나 입고 다니는 코트 정장과 서늘한 외모, 오른쪽 눈가의 찢긴 흉터 때문에 조폭설이 끊이질 않는 이.

잊었다 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헌터계의 트러블 메이커.

그리고 그는 1, 2세대들이 혀를 차는 3세대 대표 '요즘 애들' 중 하나였다.

헌터명 이상하게 짓는 '요즘 애들'.

헌터 대우 좋아진 줄 모르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요즘 애들'.

나 때는 성능도 안 좋은 장비에 얼마 없는 정보로 목숨 걸고 들어갔는데 좋은 장비랑 넘쳐 나는 정보로 편하게 균열 공략하면서 그 데이터 다 쌓아 놓은 위 세대 공경은 할 생각을 안 하는 '요즘 애들'.

5.1. 국내 랭커 전투력 순위 [편집]

1위-미리내

2위-반휘혈[15]

3위-천호

...

[15] 미리내와 반휘혈이 맞붙은 적은 한 번도 없으므로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14년 동안 미리내가 반휘혈한테 1위를 내준 적이 없는 것을 보니 반휘혈의 전투력이 미리내에게는 못 미친다고 예측할 수 있다. 애초에 4원소 능력이랑 전기가 승부가 될 리가....

"아, 나무위키 놈들 또 전투력 순위 바꿔 놨네. 당연히 전투력은 내가 1위지. 하여간 할 일도 없는 방구석 여포 새끼들."

1위-반휘혈

2위-미리내

[편집이 완료되었습니다.]

승부욕 넘치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고,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꼬맹이는 나무위키 반휘혈 관련 문서 수정하고 인기투표 조작하는 게 취미요, 사고 치거나 다른 랭커랑 싸움 붙고 뉴스 뜨는 게 특기인 훌륭한 어른으로 자랐다.

이런 인간을 국내 원 톱 길드장으로 데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

***

"해영 씨, 혹시 길드장 봤어?"

부길드장 윤이지의 험악한 표정과 심상치 않은 기세에 눈치를 보던 현장 2팀 팀장이자 아레스 간부 전직 막내 한해영이 지금 당장의 목숨과 미래의 목숨을 저울질했다.

'혹시 부길드장 만나도 나 체육관에 있다고 말하지 마라.'

저를 지긋이 바라보던 맹수 같은 금안을 떠올리자마자 팽팽했던 저울은 슬그머니 미래의 목숨 쪽으로 기울었다.

입을 꾹 다문 해영을 보고 고개를 저은 이지가 이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됐어. 그 녀석 있을 곳이야 뻔하지, 뭐."

그는 이를 갈며 체육관 시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거친 손길로 체육관 문을 열어젖힌 이지는 샌드백을 치고 있는 서빈희를 발견하고 조용히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길드장실에 있다더니 여기에서 뭐 하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빈희가 식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는 길드장실이 체육관이냐? 이참에 그냥 헌터 때려치우고 헬스 트레이너로 전직이나 해라. 아니면 여기로 책상 옮기든가. 할 일이 태산인데 지금 샌드백 치고 있을 때냐?"

"아하하, 농담도. 나 아니면 아레스 길드 누가 이끌어?"

이지의 으르렁거림에 서빈희가 하하 웃으며 이지의 어깨에 팔을 턱 얹었다. 땀으로 끈적한 팔에 이지가 질색하며 그의 팔을 털어 냈다.

"조금만 기다려. 아직 웨이트 안 했어."

현장에서의 전투에 더해 꾸준한 운동으로 키운 근육은 서빈희의 자랑이자 반휘혈 조폭설 지분의 30%를 차지하는 요인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자마자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 12시에 운동을 마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는 그의 일과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운동에 미쳐 있는지 알 수 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른 이지가 덤벨 쪽으로 걸어가는 빈희의 티셔츠 목덜미를 잡아챘다.

"너는 지금 웨이트 한다는 말이 나와?"

"어. 근손실 오잖아."

"근손실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이럴수록 길드엔 재정 손실이 온다, 이 자식아. 근손실 오는 게 싫으면 술 담배부터 끊어!"

"그걸 끊으라고?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여."

"환장하겠네. 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놈이 상사지?"

이지가 해탈한 표정으로 빈희의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꾹 더했다.

끌고 가려는 자와 끌려가지 않으려는 자 간의 팽팽한 기 싸움의 마무리를 찍은 건 헐떡거리며 달려온 서빈희의 보좌관, 한세린이었다.

"길드장님, 혹시 핸드폰 알림 안 보셨어요? 지금 지원 요청 들어왔어요. 신도림역에 게이트 열렸대요. 우리 길드 소속 헌터가 선점했고요."

"배터리 없어서 꺼졌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 스킬 '충전(C)'을 실행합니다. 』

『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

한세린의 설명에 충전을 끝낸 핸드폰 전원을 켜며 서빈희가 물었다.

"균열 레벨은?"

"C요."

레벨 C 정도의 균열이면 굳이 그가 가지 않아도 A급 팀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서빈희가 선호하는 곳은 사무보다는 현장이다.

앉아서 서류를 보는 것보다 마음껏 날뛰며 때려 부수는 게 그의 적성에 훨씬 맞았다.

이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의 사부 역시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안전을 제일 중요시하라 매번 당부하지 않았던가. 마침 몸도 근질거리는데 잘됐다 싶었다.

"내가 직접 가지."

자기 합리화를 마친 서빈희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걷다가 윤이지의 손에 뒷덜미를 잡혔다.

"레벨 C면 나현 언니 팀 보내. 뭐 하러 네가 직접 가? 너는 사무실 가서 일이나 해."

"여기가 내 길드인지, 님 길드인지...."

딱 잘라 말하는 이지에 서류의 산을 벗어날 길이 막힌 서빈희가 투덜거렸다. 그의 말에 이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지금 사직서 내도 돼? 퇴사 사유는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언니,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우리 아레스 길드에 뼈를 묻기로 백년가약 맺은 거 잊었어?"

"뭔 백년가약은 백년가약이야. 우리가 결혼했냐?"

빈희가 급격히 태세 전환을 시도했지만, 단어 선택의 실패로 인해 질색하는 얼굴만이 돌아왔다. 어디에 B급이나 A급 던전 하나 안 터지나? 지루해 죽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는 윤이지의 손에 떠밀려 순순히 탈의실로 향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사무실에서 푸른매실을 들이켜며 설렁설렁 서류를 보고 있는 도중, 조나현의 팀을 현장에 파견한 지 30분 만에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길드장아, 우리 던전 스틸당했는데?

안녕, 균열 공략 보상금. 저 멀리 날아가는 정부 보상금 영수증의 환영을 보니 입맛이 쓰다. 음료를 한 모금 들이마신 그가 물었다.

"스틸한 쪽은 길드?"

-아니. 솔플 같은데.

"하긴, 어떤 길드가 간 크게 우리 길드 선점 던전을 스틸하겠어? 그건 그렇고... 누구야?"

낮게 가라앉은 빈희의 목소리에 짧게 한숨을 쉰 나현이 말을 전했다.

-이번 스틸 건은 우리 측에서 좀 이해해야 할 거 같다. 내부형이야.

그 말에 서빈희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내부형 던전은 짜증 난다. 헌터든 일반인이든 다 같이 갇히다 보니 던전 선점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쪽에서 보스몹 먼저 잡아서 우리 측은 그냥 잔챙이 처리랑 마무리만 맡았다.

"마석은 확보했어?"

-아마 보스몹 잡은 쪽이 가져간 것 같은데. 아, 이제 게이트 닫힌다.

나현의 현장 중계에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지시했다.

"브리핑 귀찮으니까 우리 길드 측에서 닫은 거 아니라고 최대한 주장하고 와. 그럼 수고해, 나현 언니."

-엉. 그런데 이거 실적 쳐주냐?

"수당으로 쳐줄게. 헛걸음했는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전화를 끊은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이런 상도덕도 없는 힘숨찐 새끼들. 아니, 진짜 헌터명 실명제 도입 시급하다니까? 개나 소나 던전 스틸하면 던전 선점법이 왜 있겠냐고."

"내부형 균열 던전 스틸당하는 게 한두 번이냐? 외부형은 잡아도 내부형은 이해해야지. 그리고 헌터명 실명제는 그냥 너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 반휘혈 헌터?"

"허, 나 말고도 반길 사람 몇 명 더 있거든?"

예를 들면 흑염룡이라든가, 긴x키내아내니까건들지마라라든가.

이들은 꾸준히 서빈희와 함께 게임도 캐시 지르면 닉네임 변경권 1회 주는데 왜 현실에선 안 되냐며 헌터명 실명제와 변경권을 주장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냥 생떼였다.

"하여간, 미리내 그놈이 문제야. 다른 헌터들의 본보기가 돼야 할 랭킹 1위가 힘숨찐이나 하고 있으니까 개나 소나 다 힘숨찐 한다고 날뛰잖아. 역시 나같이 착실한 사람이 랭킹 1위를 해야 하는데."

[우리 계약자는 헛소리도 참 잘한다고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혀를 찹니다.]

'걔는 힘숨찐 할 거면 아예 아무것도 안 해서 욕이나 처먹지, 쯧.'

꼭 큰일 터질 때 한 번씩 나타나서 말없이 처리하고 쓱 사라지는 힘숨찐의 정석을 밟고 있는 터라 욕보다는 찬양을 훨씬 더 많이 듣는 현 랭킹 1위, 미리내를 떠올리며 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지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너보다 힘숨찐들이 훨씬 더 착실하게 살아. 적어도 그 사람들은 균열 독점, 탈세, 암거래, 파벌 싸움은 안 하잖아."

"그렇게 번 돈이 다 댁 월급이야. 그리고 이게 다 랭킹 1위 자리를 위해서...."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서빈희에게 이지는 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슬쩍 물었다.

"왜 그렇게 불법까지 저지르면서 랭킹 1위에 집착해?"

"원래 내 자리잖아. 뺏긴 거 찾아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 되찾자, 빈희야."

돌아오는 헛소리에 혀를 찬 이지가 그를 향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충고를 던져 주었다. 물론 서빈희는 익숙하게 먹금 하며 귀를 후볐다.

Ep 2.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군요."

손아귀에 쥔 색색의 꽃 세 송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시나리오는 문제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반대파 성좌들의 눈을 가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면 올림포스의 전쟁신이라든가...."

"오,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저 인간을 꽤 마음에 들어 하니까요.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방해는 하지 않을 겁니다."

성좌 '지혜와 정의의 수호자'가 황금빛 술이 담긴 잔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방해한다 한들 제 선에서도 충분히 차단할 수 있고요."

옆에 있던 다른 성좌가 초조한 표정으로 번개가 마구 내리치는 화면을 보며 물었다.

"여의주를 잃었는데 저 인간이 과연 시나리오에 신경을 쓸까요? 지금도 여의주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경을 쓰도록 만들어야죠. 여의주를 보상으로 내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무기가 시나리오를 완결한다면 운명은 다시 원궤도로 돌아올 터."

"그 망나니 녀석이 벌여 놓은 일 때문에 지금 태초의 균열이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2년, 아니, 이제는 2년조차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지금 돌려진 시간 축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다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샘이랑 신물의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한낱 성좌 하나가 세계의 질서를 흩트려 놓은 겁니까!"

"이미 지나간 일에 화를 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 시간에 어긋난 것을 어서 되돌려 놔야죠."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나긋하게 대꾸했다.

탁자를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던 성좌 '지혜와 정의의 수호자'가 눈을 휘어 웃었다.

"또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지 기대되네요. 영웅을 지켜보는 것은 제 즐거움이죠."

"당신이 생각하는 영웅은 아닐 겁니다, 영웅들의 수호자여."

"아무리 여의주를 빼앗긴 이무기가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저 녀석은 좀... 싹수가 노랗지."

"영웅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성정이 영...."

한마디씩 덧붙여진 말에 잔에 담긴 황금빛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켠 그가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메두사 머리가 박힌 방패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인간보다 더했던 헤라클레스 같은 녀석도 영웅이라고 불리는걸요, 뭐. 그리고 자질은 제 방패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군요."

그의 말에 모인 성좌들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한 성좌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발언했다.

"그 망나니는 어쩌죠. 계약성인 이상 그에게 완벽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게다가 천계 분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둘이 얼마나 끈끈하게 엮인 운명인지."

"읽어 보니 전에도 직접 방해한 적은 없더군요.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목 없는 검은 표지의 책을 들고 있던 성좌가 요요히 미소 지었다.

제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새하얀 깃털을 책갈피 삼아 꽂아 놓은 그가 책을 탁 덮었다.

"천권성에게 알리는 건?"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꼬인 운명의 실이 더 어그러집니다. 스스로 풀도록 둘 수밖에요."

의견 정리가 끝나자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가운데로 손을 뻗었다.

제 손 위로 모인 빛을 내려다보며 그가 선언했다.

"그러면 지금 시나리오를 보내도록 하죠. 안내자는 제가 기꺼이 맡겠습니다."

***

앞서 말했다시피, 성좌는 인간들의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인간과 계약을 맺고 후원하는 지고한 상위의 존재이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이라 그들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장 대중적인 여론은 인간들로 프x세스 메이커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코인으로 후원하며 능력치를 높여 주고, 스킬을 주고,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소소한 도움을 주는 모습이 꼭 모 육성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나.

하지만 서빈희는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후원이랑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있어야지.

남들 다 프x세스 메이커 할 때 그의 성좌는 혼자 소닉 어x벤처 하고 있다.

무슨 의미냐면 맨날 계약자를 굴리고 있다는 소리다. 육성 게임은 개뿔.

'전방에 몬스터 한 마리라며, 이 사기꾼아!'

[내가 몬스터가 있다고 했지 언제 한 마리라고 했냐며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며! 여기는 안전하다며!'

[당신의 계약성이 내가 그런 말도 했느냐며 모르쇠를 시전합니다.]

'내 전격이랑 벼락 스킬 다시 안 돌려놔? 지금 위급 상황인데 왜 스킬을 막고 난리야, 이 미친 별 자식아! 조명이랑 정전기로 보스 몬스터 때려잡으리?'

[인생에는 시련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냐며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습니다.]

'남의 집 성좌는 맨날 후원 팍팍 해 주고 말동무도 해 주고 성위 스킬 페널티도 최소한으로 줄여준다는데 우리 집 성좌는 왜 이 모양일까. 아이고, 성격 이상한 짠돌이 성좌 데리고 있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머리 아프니까 그만 좀 쫑알거리라고 당신의 계약성이 1코인을 후원합니다.]

'님, 계속 이럴 거면 그냥 계약 해지하자고. 이게 계약이냐? 엉? 양심이란 게 님한테는 존재해?'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계약서를 살랑살랑 흔들며 계약서대로 가자고 말합니다.]

[당신을 향해 계약서의 조항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줍니다.]

10년 전 그가 정신없었을 때를 틈타 자기에게 유리하기 그지없는 계약서를 들이밀고 불공정 계약을 맺은 천인공노할 신성의 성좌는 자린고비 뺨치는 짠돌이 기질까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성위 스킬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페널티가 커서 봉인해 놓은 상태.

긁으면 무조건 당첨인 복권이라는 성좌 계약이 오직 그에게만 꽝이었다, 꽝.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고, 오히려 그를 사지로 밀어 넣으며 관조하다가 그가 죽기 일보 직전에야 손을 뻗는 악질 중의 악질.

그러는 주제에 또 계약은 끊지 않으려 든다.

그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하는 건지, 그저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건지, 다른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10년 동안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웬만한 돌발 상황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게 된 그의 처지가 서글펐다.

***

"...그러니까, 땅에 균열이 생겼으면 말을 쳐 해 줘야 할 거 아니냐, 빌어먹을 계약성 놈아."

[계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계약서에 명시된 의무 조항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당신의 계약성이 어깨를 으쓱합니다.]

[그러게 누가 선글라스 쓰고 핸드폰 보면서 걸으랬냐고 코웃음 칩니다.]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엉덩방아 찧는 당신의 모습을 반복 재생 하며 배를 잡고 웃습니다.]

그래, 이를테면 길 걷다가 갑자기 바닥에 생성된 던전을 못 보고 발을 헛디뎌 떨어진 지금처럼.

메시지를 읽으며 무심결에 손에 힘을 주자 테이크아웃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플라스틱 컵이 그의 손아귀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컵에서 커피가 흘러나와 그의 손을 적셨다. 축축한 느낌에 그의 인상 역시 컵처럼 일그러졌다.

구겨진 컵을 휙 내던진 그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싱크홀처럼 땅에 갑작스레 생긴 균열에 굴러떨어진 빈희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어두워?"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부터 벗으라고 충고를 건넵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다며 당신을 한심함 가득 담긴 눈길로 내려다봅니다.]

무시가 잔뜩 담긴 상태 창의 글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벗어도 똑같잖아, 망할 성좌 놈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에 짜증을 내며 빈희가 손을 휘적였다.

『 스킬 '조명(D)'을 실행합니다. 유지 시간: 30분 』

허공에서 튀어나온 빛 덩이들이 흩어져 사방을 밝게 비추었다.

곧, 균열의 형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굴 형태의 균열은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통로가 나 있었다.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띠링-. 알림 소리가 나더니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떴다.

2세대 중기까지는 단말기를 가지고 다녔지만 말기부터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단말기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헌터 전용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헌터 전용 스마트폰은 보통 스마트폰과 다르게 던전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대신 헌터증이 있어야지만 구매할 수 있다.

"안내 문자가 안 뜬 걸 보아 하니 게릴라 게이트인가?"

중얼거리며 #를 터치하자 던전 선점이 완료되며 분석을 마친 던전 정보가 빠르게 떴다.

[던전 선점: 아레스 길드(pm 1:01:16)]

[던전 레벨: C]

[분류: 레이드]

[보스: 변종 외뿔두더지(3급)]

[공략 상태: 0%]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꺼내어 끼며 서빈희는 통로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여덟 개의 통로 중 하나에 보스 몬스터가 있을 터였다.

운 좋게 한 번에 보스 룸으로 가면 레이드 끝이다. 균열은 보스 몬스터의 핵인 마석으로 닫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한 번에 걸리면 오늘 로또나 사 볼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충 필이 오는 곳을 찍으니 망할 계약성이 떡밥을 던졌다.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네 오른쪽 통로로 가라고 충고를 던집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더는 안 낚인다. 하도 낚여 이제는 떡밥에 반응조차 안 하는 물고기가 휙 턴을 돌았다.

코웃음을 친 빈희는 망설임 없이 왼쪽 통로로 들어갔다.

그 당당한 걸음의 기저에는 저 성좌 놈이 보스 룸을 알려 줄 리가 없다는 굳은 믿음이 깔려있었다. 결과는,

『 스킬 '벼락(SS)-낙뢰(2단계)'를 실행합니다. 』

『 몬스터 '외뿔두더지(4급)'를 처치했습니다. 』

아쉽게도 꽝이었다.

제게 이마에 달린 날카로운 뿔을 들이밀며 달려오는 외뿔두더지에게 벼락을 내리쳐 단번에 숨통을 끊은 그가 실망 어린 표정으로 통로를 되돌아 나왔다.

"오늘 로또는 못 사겠군."

머릿속으로 생각해 놨던 숫자 여섯 개를 떠올리며 그가 혀를 찼다.

에이씨, 느낌 좀 괜찮았는데.

통로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그의 계약성이 추천해 준 맞은편 통로를 지긋이 보던 그는 그가 방금 나온 곳의 왼쪽 통로로 들어갔다.

[고생을 사서 한다고 당신의 계약성이 턱을 괴고 당신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봅니다.]

"그렇지, 누굴 탓하겠어. 사기만 치는 못된 짠돌이 성좌랑 계약한 내 죄지."

빈희가 귀를 후비며 빈정거렸다. 여태까지 당한 게 있는데 순순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유난히 크고 사나운 외뿔두더지가 그를 향해 뿔을 휘둘렀다.

난폭하게 달려드는 외뿔두더지를 보며 보스 몬스터인가 하고 좋아하던 그는 뜰 생각을 않는 상태 창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꽝인가 보다.

빈희는 살짝 몸을 틀어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의 뿔을 피했다.

멈추지 못하고 달리다가 벽에 부딪혀 흙벽에 뿔이 단단히 박힌 외뿔두더지가 버둥거렸다.

전기로 몬스터를 지진 그는 묵직한 느낌에 밑을 내려다봤다가 제 바지 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외뿔두더지 새끼를 발견했다. 아직 덜 여문 작은 뿔이 이마에 나 있었다.

"새끼가 있어서 그렇게 사나웠나?"

새끼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린 그는 외뿔두더지가 처음에 막고 있던 굴로 들어갔다. 성체 진돗개만 한 크기의 새끼들 대여섯 마리가 잔뜩 경계하며 그들끼리 뭉쳐 있었다.

빈희가 잡고 있던 외뿔두더지 새끼를 다른 새끼들 사이로 휙 던졌다.

튜토리얼 교육에서도 강조하는 점이긴 하지만, 몬스터 새끼라고 해서 살려 둬서는 안 된다. 몬스터의 성장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새끼 몬스터를 놓아줬다가 몇 시간 후 성체가 된 새끼에게 죽은 한 헌터의 사례는 헌터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 스킬 '벼락(SS)-낙뢰(1단계)'를 실행합니다. 』

"좋은 곳으로 가라."

짧게 명복을 빌어 준 그는 새카맣게 탄 새끼 외뿔두더지 시체들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그다음으로 그가 향한 통로는 처음에 들어갔던 통로의 바로 오른쪽 통로였다. 이번에도 꽝이었다. 다음도 꽝. 그다음도 꽝. 그 옆에도 꽝.

"내가 이래서 이런 통로형 던전이 싫다니까. 무슨 사람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여섯 번째 헛걸음질을 마치고 나오며 빈희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여섯 개의 통로에서 외뿔두더지 잡기를 마친 그는 흙먼지와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볼을 손등으로 쓱 닦고 남은 단 두 개의 통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확률은 2분의 1. 게다가 하나는 믿고 거르는 성좌 픽이다.

그는 성큼성큼 성좌가 추천한 통로의 바로 옆 통로로 걸어갔다.

"...마지막도 꽝."

로또의 마지막 희망이 날아가며 다섯 마리의 외뿔두더지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제일 먼저 그에게 달려드는 외뿔두더지의 옆구리를 발로 힘껏 걷어차며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알려 준 곳이 진짜 보스 룸이었냐고.... 이건 뭐 신종 괴롭힘이냐?"

[그러게 내가 말해 주지 않았냐고, 안 믿고 멍청하게 다 들어가 본 건 너라고 당신의 계약성이 혀를 찹니다.]

"이제껏 님이 한 짓을 생각해 봐라. 내가 믿게 생겼어?"

정면으로 찔러 오는 뿔을 피하며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뿔을 어느새 소환한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무기, 아이기스로 막은 서빈희가 빈정거렸다.

아테나의 방패로 유명한 아이기스는 한가운데에 메두사의 머리가 박혀 있는 방패로, 1급 보스 몬스터이었던 메두사를 잡은 후 받은 신화급 아이템이었다.

딜러 서빈희에게 탱커 겸업까지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효자템이기도 했다.

"한 마리."

『 스킬 '전격(SS)'을 실행합니다. 』

아이기스에 전기를 흐르게 해 뿔을 대고 있던 몬스터를 감전사시킨 빈희가 그의 위를 덮쳐 오는 외뿔두더지를 방패로 후려쳤다.

"두 마리."

저 멀리 나가떨어진 몬스터를 향해 벼락을 내리꽂은 그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세 마리의 외뿔두더지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타 쌍피까진 가능한데 1타 3피는 좀 힘들다, 내가."

『 스킬 '뇌전(S)'을 실행합니다. 』

대각선으로 뻗어져 나간 뇌전이 두 마리를 한 번에 관통했다.

제일 앞에서 달려들다가 그에게 목덜미를 눌려 제압된 나머지 한 마리 역시 그의 스킬에 곧 숨을 거뒀다.

"그러면 정말 마지막 한 마리 잡으러 가 보실까. 3급 정도면 뭐, 30초 컷?"

새카맣게 탄 시체들을 발로 툭툭 차 치운 그는 통로를 나와 마지막 남은 통로인 보스 룸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상대했던 외뿔두더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거대한 외뿔두더지가 보스 룸에 발을 디딘 그를 맞이했다. 균열의 보스 몬스터가 바닥에 쾅쾅 발을 구르며 붉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 던전 보스 몬스터 '변종 외뿔두더지(3급)'가 나타났습니다. 』

이마에 달린 거대한 뿔은 찔리면 즉사 수준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최소 중상이다.

"아까 한 말은 취소. 30초는 좀 힘들고 1분,"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뿔을 내민 변종 외뿔두더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제 배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뿔을 아이기스로 겨우 막은 그는 다리와 방패를 든 손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뿔이 방패를 긁는 소리가 선명했다. 변종 외뿔두더지의 덩치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그의 몸이 방패와 함께 뒤로 조금씩 밀렸다.

이를 악물고 제 쪽으로 강하게 들이밀어지는 뿔을 밀어내던 빈희가 때를 놓치지 않고 스킬을 시전했다.

『 스킬 '벼락(SS)-낙뢰(2단계)'를 실행합니다. 』

천장에서 내리친 낙뢰가 변종 외뿔두더지의 몸통을 관통하고 굉음과 함께 바닥에 충돌했다.

단백질 타는 냄새와 함께 바싹 지져진 몬스터가 축 늘어졌다.

『 던전 보스 몬스터 '변종 외뿔두더지(3급)'를 처치했습니다. 』

『 레이드를 완료합니다. 』

『 보상이 기여도순으로 지급됩니다. 』

『 기여도: 서빈희(100%) 』

『 보상: 경험치(Ex) - 30

외뿔두더지의 뿔(N) - 외뿔두더지의 단단한 뿔이다. 가공하면 괜찮은 무기가 될지도? 』

보스 몬스터의 핵인 마석과 아이템을 주운 서빈희는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대충 던져 넣고 다시 그가 처음에 떨어졌던 중앙 통로로 나왔다.

"더럽게 높네, 귀찮게."

저 위에 있는 게이트를 올려다보고 기어 올라가기 귀찮다고 판단한 그는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문자를 넣었다.

[세린아, 나 좀 데리러 와라]

[여기 위치가] 오후 1:30

[(위치 공유)] 오후 1:31

[한세린- 넵, 곧 갈게요] 오후 1:31

능력이 텔레포트라 금방 올 터였다. 세린이 올 때까지 그는 느긋하게 핸드폰이나 하며 휴식을 취하기를 택했다. 핸드폰이 균열 안에서도 터져서 다행이었다.

메신저에 들어간 그는 오랜만에 활성화된 세계 멸망 팸 채팅 창을 발견했다.

"웬일이래?"

>Local Channel-Global

>세계 멸망 팸☠(잠김)

>>공지 사항: 암호 유출하는 새끼는 사형/eng plz 이지랄 하지 말고 자동 번역 시스템 좀 켜라, 새끼들아

Ren: (사진)

Hiss: 쓰레기 사진은 왜 올려?

Hiss: 너 지금 우리 쓰레기라고 돌려 까냐?

Ren: hey, Hiss. 왜 이렇게 예민해? 혹시 여친에게 차였어?

Hiss: 돌았냐? 또라이 새끼가 진짜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いつき: 그래서 쓰레기 사진은 뭔데?

Ren: 내가 오늘 길바닥에 버린 쓰레기

Ren: 이로써 세계 멸망에 한 걸음 더 다가갔지 ><

Дмитрий: 쓰레기랑 세계 멸망이랑 뭔 상관인데

Ren: 환경 오염☺

Hiss: 아오, 저 또라이 새끼

劉媚娘: 이런 놈들이랑 세계 멸망시키겠다고 모여 있다는 게 참 심란해진다

Дмитрий: 동감

Hiss: 저 또라이 새끼랑 우리를 한데 싸잡지 말아 줄래?

Ren: 맞아 Hiss랑 하나로 묶이다니, 기분 나빠 :(

채팅을 쓱 훑어본 그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유미랑의 말대로 진짜 이런 놈들이랑 세계 멸망시키겠다고 모여 있는 게 참 심란해졌다.

이런 놈들이 계획하는 세계 멸망이 과연 가능하긴 할까.

세계 멸망 팸. 전 세계의 위험 분자 헌터들이 모여 있는 음지의 비밀 모임.

서빈희처럼 헌터명만 대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이들도 있고, 정체를 꼭꼭 숨기고 사는 이들도 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들의 모임이지만, 여느 모임들답게 목적성은 뚜렷하다.

세계 멸망.

이유야 다양하다.

심심해서라는 영국 태생의 모 헌터도 있고, 세상의 불공평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세계가 멸망해야 한다는 과격파 중국의 모 대형 길드장도 있으며,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 거지 같아서라는 대한민국의 모 대표 헌터도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하이 랭커들과 미등록 S급들에게 손을 뻗은 단 한 사람에 의해 모인 세계 멸망 팸은 1년도 되지 않아 금방 망할 거라는 서빈희의 예측과는 다르게 3년 넘게 잘 굴러가는 중이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지금까지 이 모임에서 일으킨 테러 활동이나 세계에 혼란을 일으킬 사건은 딱히 없다.

거물들이 많아 잘못했다간 세간의 시선이 집중될 우려가 있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저 세계를 멸망시킬 시한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일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똑같은 놈들끼리 모여 있다고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킬킬거립니다.]

"뭐래. 내가 이놈들보단 낫지."

반박한 그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폰 화면에서 시선을 뗄 생각을 않는 그의 머리 위로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아, 뭔데."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팍 치켜든 그의 앞에 떠 있던 불투명한 상태 창이 드디어 저를 발견했냐는 듯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상태 창을 마구 띄웠다.

『 당신에게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 히든 시나리오 <세계의 구원자>가 활성화됩니다. 』

『 등급: L 』

『 ⏳Loading... Chapter 1~8을 활성화하는 중입니다. 』

뭐야, 이거. 시큰둥한 눈으로 상태 창의 글자를 쭉 훑다가 보이는 글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L급? 이게 진짜 존재하는 등급이었어?"

제 눈앞에 뜬, 소문은 무성하지만 아무도 본 이는 없는 전설급 등급에 서빈희는 벙쪄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세린에게 다급히 문자를 보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방해받을 수는 없다.

[지금ㅇ.ㄷ지 말고 20분 뒤에오ㅏ] 오후 1:35

그가 오타 가득한 문자를 전송하는 동안 로딩을 마친 시스템이 다시 창을 띄웠다.

『 로딩이 완료되었습니다. 터치하여 내용을 확인하세요. 』

어느 순간부터 짙은 꽃향기가 그의 코를 스쳤다.

그의 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푸른 나비에 멍하니 보고 있던 상태 창에서 시선을 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는 색색의 꽃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꽃밭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꽃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에 꽃잎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그의 앞에 있는 유독 푸르게 빛나는 이름 모를 꽃을 향해 팔을 뻗은 순간,

[여기 있는 꽃들은 함부로 꺾지 말라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경고합니다.]

성좌 상태 창이 나타났다. 빈희가 당황으로 눈을 깜빡이든 말든 상태 창의 글자는 계속해서 새로이 떠올랐다.

[이곳의 꽃들이 인간계로 흘러간다면 무시무시한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 말합니다.]

[인사가 늦었다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인 서천 꽃밭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저승과 이승의 경계면 죽어야 오는 곳 아닌가. 나 죽은 거...?"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아직 안 죽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잠시간 다른 성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선택한 공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어서 히든 시나리오를 받아 보라고 당신을 이끕니다.]

시나리오 창을 터치하자 정보와 줄거리가 나왔다.

『 히든 시나리오: <세계의 구원자> 』

『 시나리오 형태: 증강 현실 』

『 시나리오 줄거리: 불안정한 태초의 균열 때문에 현재 세계는 멸망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균열에 흩어져 있는 7개의 히든 피스를 모아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하시오. 』

줄거리를 훑어본 그의 눈이 짜게 식었다.

이쯤 되면 시나리오 받을 사람 랜덤으로 돌리는 거 아닌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계 멸망 팸 회원, 그중에서도 VIP에게 세계를 구하라고 하는 거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하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보상 목록이 들이밀어졌다.

『 완결 보상: 랭킹 1위, ■話 』

동공에 격렬하게 지진이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실, 실화냐?'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이유의 97%는 망할 그의 랭킹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나름 좋아하던 콩조차도 싫어지게 만든 '그' 등수. 하지만 랭킹 1위를 한다? 그럼 서빈희가 세상을 멸망시킬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저 멀리로 또라이와 멍청이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세상이 제게 간절하게 손을 뻗는 환영이 보였다.

'그래, 저 멍청이 모임 손에 망하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구하고 말지.'

기다려, 세상아. 이 (예비) 랭킹 1위님이 망할 악의 축들의 손에서 구해 줄게. 벌써 마음속에서는 랭킹 1위를 한 세계 멸망 팸 VIP 회원 서빈희가 다짐했다.

"그런데 왜 퀘스트가 아니고 시나리오지?"

그의 의문은 곧 풀렸다.

[네 계약성 놈처럼 지상을 멸망시키길 원하는 이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부득불 시나리오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설명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아직 말해 주기는 시기상조라고 전합니다.]

저와 계약한 모 성좌처럼 잔뜩 비꼬거나 빙빙 돌리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성좌에 서빈희는 감동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받아 본 게 언제였더라.

제 계약성이 지상을 멸망시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들어도 별로 놀랍지가 않다. 하는 꼴 보면 뭔가 그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서빈희가 세계 구원 시나리오를 받은 것을 그의 일상을 지켜보는 계약성이 모를 리가 없다. 분명 엄청나게 방해를 해 댈 텐데.

"아니, 지상을 멸망시키고 싶어 하는 놈 계약자에게 세계 구원을 맡기면 어떡해? 이거 진짜 랜덤이야?"

그의 투덜거림에 잠시간 멈췄던 상태 창이 무서운 속도로 다다닥 떠올랐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가 어디서 버릇없이 반말이냐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못마땅해하는 눈초리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벌써부터 싹수가 노랗다고 혀를 찹니다.]

[네놈이 명계로 왔으면 발설지옥에 당장 처넣었을 것이라 호통을 칩니다.]

"...요?"

서빈희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뒤에 존댓말을 덧붙였다. 글뿐인데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랜덤이 아니라 네게 정당히 주어진 시나리오라고 말합니다.]

다시 온화하게 돌아온 성좌에 그는 뻣뻣하게 굳어 있던 고개를 겨우 삐거덕거리며 끄덕였다. 무슨 야누스냐...?

"제 계약성은 어쩌고요."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큰 방해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상태 창에 서빈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다른 성좌들 눈 가린다면서요. 여기 못 본다면서요.

그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을 인도하는 자는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전달했다.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절할지 선택은 네 의지에 달려 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비틀어진 운명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합니다.]

[자신 역시 그랬듯이 주어진 사명은 힘들지만 보상은 클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들었던 말 같은데.'

말을 듣자 떠오르는 데자뷔에 빈희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아쉽게도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 시나리오를 받으시겠습니까? Yes/No 』

앞에 떠오른 선택지를 그는 진지한 눈으로 응시했다.

균열 돌면서 돈 긁어모으던 평탄한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어렵고 힘든 길이겠지.

아마 왜 받아들였냐고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상인 랭킹 1위는 둘째 치더라도 왜인지 모르게 끌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고민은 짧았다. 천천히 뻗어진 손가락이 Yes를 터치했다.

『 히든 시나리오 <세계의 구원자>를 받으셨습니다. 』

『 제1장의 서막이 열립니다. 』

『 Chapter 1. 原罪 』

1장의 서막이 열림과 동시에 그의 손안으로 깃펜과 종이가 툭 떨어졌다.

뒤집어 보니 종이에는 영어 문장 한 줄만이 쓰여 있었다.

「Q: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A: 」

이건 뭐 불친절해도 너무 불친절했다. 맨땅에 헤딩급이었다. 혹여 또 분노의 야누스가 나올까 봐 그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이게 전부예요? 하다못해 정답 칸에 뭐를 써야 하는지라도 좀 알려 주시는 게...."

[그건 네가 알아 가야 할 것이라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 때는 아버지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천 서역까지 지도도 단서도 없이 무작정 걸어갔는데 요즘 애들은 세상 편해진 줄 모른다고 혀를 쯧쯧 찹니다.]

Latte is horse 나왔죠? 요즘 애들 나왔죠? 세상 편해졌다 나왔죠?

꼰대의 정석 3단계 공격을 받으며 머리를 긁적인 그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왜 단서가 영어인데요?"

[너는 지상에는 한국만 있고 신계는 천계와 명계만 있는 줄 아느냐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한심해하는 눈초리로 묻습니다.]

"아, 네.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에 찌들어서 죄송함다."

서빈희는 삐딱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거참, 너튜브에서 맨날 양키 놈들 eng plz :) 보는 것도 짜증 나는데 한국인이 영어로 된 단서 해석하면서까지 세상 구해야 해?

[저런 녀석에게 그런 운명을 내리다니, 운명을 관장하는 천계 것들이 단체로 망령이라도 났냐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한숨을 내쉽니다.]

그런 운명? 서빈희가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후원 상태 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의 후원이 도착했습니다. 』

『 후원 목록: 성유물

수레멸망악심꽃(L): 심장 부근에 닿으면 생명력을 깎아내리는 꽃이다.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살살이꽃(L): 부상 부위에 올려놓으면 새살을 돋게 하는 꽃이다. 다섯 번 사용할 수 있다.

피살이꽃(L): 과다 출혈 상황에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

세상의 모든 색을 뭉쳐 놓은 것만 같은 불길한 검은색 꽃, 봄을 담은 것 같은 노란색 꽃, 피를 머금은 것만 같은 붉은색 꽃. 세 송이의 꽃이 그의 손에 잡혔다.

수레멸망악심꽃의 설명을 보자마자 그는 꽃을 든 손을 최대한 제 심장 쪽에서 멀찍이 떨어뜨리고 곧바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뭘 이런 걸 다...."

그의 계약성에게서는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던 성유물 후원에 서빈희가 감동 어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반성해라, 망할 계약성 놈아.

[많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고, 꽃은 적절한 상황에 사용하라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당신을 도닥입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라고 전합니다.]

"또 만날 수 있슴까?"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게이트 안에서 부르라고 자상한 미소를 짓습니다.]

만나고 싶으면 게이트 들어와라, 이 말이었다.

"왜 하필 게이트 안인데요?"

[게이트 안이면 인세보다 인과율을 덜 지급해도 된다고 전합니다.]

김x우가 부릅니다. 가성비가 내려와왁!

'아쉬운 건 이쪽이니 어쩔 수 없지.'

혀를 찬 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한다고 성좌 '영혼을 인도하는 자'가 인자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꽃밭이 사라지고 그는 어느새 균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듯 그의 몸에서 꽃향기가 약하게 풍겼다.

상태 창을 열어 확인해 보니 L급 시나리오 역시 존재했다.

"천계에서 만나자고? 나 죽는 날 기대하고 있다는 소린가?"

아무리 여러 방향으로 해석을 해 봐도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 말에 떫은 표정을 지은 그는 핸드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20분 정도는 지나 있을 줄 알았건만 시간은 그가 세린에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던 1시 35분에 멈춰 있었다.

36분으로 바뀌는 숫자를 보며 그는 볼을 긁적였다.

'지금 오라고 말 바꾸면 좀 그렇지...?'

시간 절약을 하느냐, 망할 상사에서 x같은 상사로 업그레이드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시나리오의 첫 장이 천천히 넘어가며, 서빈희의 세계 구원 히든 시나리오가 ■■■ 막을 열었다.

***

그를 까마득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다시 시작됐군. 이번이 마지막인가.

언제나 제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흥미로운 인간.

그를 잠식한 오랜 무료함을 달래 줄 유일한 존재.

제 하나뿐인 계약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턱을 괴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가 짜 놓은 판 안으로 서빈희가 순순히 걸어 들어왔을 때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실망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정녕 불쌍해서 신경을 쓰는 건지, 한때 같은 처지였던 터라 신경 쓰는 건지."

인간,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 저 깐깐하기 그지없는 할망구의 마음속 깊은 곳 추억이라도 건드린 모양이지.

제가 보지 못하게 막아 봤자, 계약 조건에 떡하니 쓰여 있는데 무슨 소용인가.

붉은 피로 지장이 찍힌 계약서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가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였다.

"그래서 계약 조건은 잘 읽어 봐야 한다니까, 서빈희."

어김없이 존재하는 ■■가 이번 회차에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하며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는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이번에는 네가 시나리오의 끝을 볼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서 시나리오를 공략해 봐. 나는 전처럼 관조하기만 할 테니.

"아니, 어쩌다가 이런 데에 빠지셨어요?"

균열 밑으로 내려온 세린이 자기 집 안방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저를 향해 태평하게 손을 흔드는 빈희를 떨떠름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예의상 생략된 '그래도 명색이 S급인데'를 눈치 못 챌 리가 없는 빈희가 대답했다.

"선글라스 쓰고 핸드폰 보면서 걷다가."

S급도 발밑 안 보고 걸으면 땅바닥에 생긴 균열 못 피할 수도 있지.

당당한 그의 표정에 세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이트를 힐끗 올려다봤다. 급경사 미끄럼틀 수준이었다.

'아니, 그 정도 신체 능력 있으시면 충분히 혼자 올라가실 수준인데.'

분명 올라가기 귀찮다고 저를 부른 게 틀림없다. 그래도 이렇게 부려 먹는 만큼 월급은 많이 주는 바람직한 상사다.

"바로 길드장실로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위로 올려 줘. 여기 공기 너무 텁텁해서 바깥 공기 쐬면서 좀 걸어야겠다. 균열 닫히는지도 보고."

빈희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세린이 단번에 능력을 사용해 균열 위로 텔레포트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있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고는 코트 주머니에 넣어 놓은 마석을 꺼내 가볍게 쥐고 손에 힘을 주었다.

『 던전 클리어! 공략이 완료되어 게이트를 닫습니다. 』

『 경험치(Ex) 10이 지급됩니다. 』

마석이 가루가 되어 그의 손안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림과 동시에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던 게이트가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구멍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닥을 한쪽 발로 툭툭 건드려 본 빈희는 게이트가 제대로 닫힌 걸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발을 뗐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부길드장님께는 뭐라고 전해 드릴까요?"

"균열 휘말려서 그거 처리하느라 늦어졌다고 해."

고개를 끄덕인 세린이 곧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길드에서 10분 거리의 산책로를 걸으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 빈희는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를 다시 테이크아웃했다.

카페 앞의 높은 빌딩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로비의 한가운데에는 파이로프 가넷이 알알이 박힌 황금 방패가 유리 상자 안에 놓여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월드 2위였던 아테나 길드를 제치고 아레스 길드가 2위로 등극하자 올림포스의 성좌 '잔혹한 핏빛의 파괴자'가 내려 준 성유물이었다.

이미 그에게는 그 상위 방패인 아이기스가 있던 터라 그냥 전쟁신의 가호를 받은 길드라고 길드 홍보용으로 쓰고 있다.

[저 기분 나쁜 것은 언제까지 저기에 둘 거냐고 당신의 계약성이 투덜거립니다.]

[여기 계약성이 떡하니 있는데 다른 성좌 물건 받아서 보란 듯이 두는 것은 무슨 심보냐고 묻습니다.]

'내가 쓰는 것도 아니고 길드 홍보용 겸 전시용인데 뭔 상관? 그렇게 꼬우면 저거 대신할 성유물 하나 내놓든가.'

그를 알아본 몇몇 길드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짙은 남색 바탕에 은색 뱀 문양이 박힌 카드를 꺼내 출입 통제 시스템 카드 리더기에 찍자 스피드게이트의 유리문이 열렸다.

문양은 각 길드의 상징으로, 아레스의 은색 뱀, 해솔의 학, 오로라의 검은 나비, Revival의 금빛 수레바퀴가 가장 잘 알려진 길드의 문양들이었다.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에 타 카드를 대고 길드장실이 있는 43층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의 군신(軍神)의 이름을 따온 아레스 길드.

미네르바, 팔라스, 글라우코피스 등 아테나의 이름을 따온 길드는 세계에 많았지만, 아레스의 이름을 딴 길드는 오직 그의 길드뿐이다.

사실 그도 아테나의 이름에서 따오려고 하다가 맨날 아테나한테 당하고 2인자 취급 받는 아레스가 왠지 자신과 겹쳐져서 술김과 짠한 마음에 채택한 이름이었다.

성좌 '잔혹한 핏빛의 파괴자'가 알았다면 당장 성유물을 회수해 갔을 뒷이야기였다.

아레스 길드는 현 한국 균열의 25%를 독점하고 S급을 세 명 이상 보유한 대기업형 길드로, 서빈희가 만든 최고의 역작이었다.

물론 월드 랭킹은 2위를 받아 다시 한번 2의 저주를 상기시켜 주긴 했지만.

그의 사부는 헌터 협회 차기 협회장의 자리를 포기하고 길드를 세운다는 그의 선언에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길드 설립 허가서에 서명해 주며 선포했다.

'별 볼 일 없는 길드 세울 바에는 그냥 협회장 자리나 물려받거라.'

'억, 길드 설립의 자유는 어디에 있어요?'

내 사전에 실패란 없다. 서빈희가 별 볼 일 있는 길드를 만들기 위해 택한 건 철저한 사전 조사였다.

1, 2세대에 만들어진 길드는 여러 유형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성공한 건 기업형 길드다.

동호회형 길드? 나중에는 친목질로 인해 비틀리면 x같은 사이가 될 확률이 높다.

소수 정예 길드? 고이고 고여 결국은 고인물만 남을 뿐이다.

용병형 길드? 관리하기 귀찮다.

헌터 협회에 뺀질나게 드나들 때 관찰했던 각 대형 길드들의 특징을 분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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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길드 들어간 헌터님들 잠시만 들어와 보세요^^

작성자: 수련

혹시 회원분들이 소속된 현 길드에 가진 불만 사항이나 요구하고 싶은 개선 사항 있으실까요? 비댓으로 달으셔도 괜찮습니다~^^*

댓글(105)

빅브라더: 다 좋은데 회식 쪼깐 줄였으면 합니다~ 길드 회식이 하도 잦아서 술배 제대로 붙었네요ㅎ

완타: 낚시 동호회 들라고 강요 좀 안 했음 하네요. 장비값으로만 한 달 월급 깨졌읍니다.

└칼릭스: 저는 등산이요. 마눌은 이해 못 해 주고 주말에 나간다고 바가지만 긁내요,,,

힐링꾼: 그런 활동을 하면서 친목을 다져 나가야 길드가 더 끈끈해지는 거랍니다 회원님들^^*

└사막곰: 그거도 옛날이야기고 요즘 젊은 애들은 그런 강요 싫어한다더라고요. 젊은 애들은 아예 참여를 안 한답니다.

└푸른별: 이것이 바로 세대 차이라는 걸까요? 벌써 우리가 꼰대 세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참 씁쓸하네요☹

우주파파: 자녀들 교육비 지원 좀 해 줬으면 좋겠네요~ C급 제조계 헌터 월급으로 두 명 학비 대려니 등골이 휠 것 같습니다....

└지니어스: 동감입니다,, 일반 회사도 학비 지원 80%까지 해 준다 카던데,,,

└진진자라: 현장직이랑 제조직 월급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죠. 현장직은 위험 수당 생명 수당 다 쳐서 월급 나오는 건데 현장직이랑 같은 월급 받으시려고 하는 건 좀 양심 없지 않나요?

└한송이장미꽃: 진진자라 님, 말이 살짝 날카로우신 것 같네요~^^ 살짝 둥글게 말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지리산흑곰: (비밀 댓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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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이디를 빌려서 4050 헌터들 카페에 글을 올려 현 길드들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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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들어가고 싶은 길드 유형(중복 투표 가능)

작성자: z i 존 휘혈

1. 친목 끈끈한 길드(7%)

2. 복지 빵빵한 길드(43%)

3. 식당 밥 맛있는 길드(18%)

4. 연차보다는 성과 우선 길드(32%)

댓글(314)

2164: 왜 월급 빵빵은 없냐 저 모든 걸 이길 월급좌가 없다니

└z i 존 휘혈(작성자): 아 월급 빵빵은 당연한 거고

KL: 일단 친목은 믿거. 어르신들이랑 낚시 등산 가고 싶으면 친목 길드 꼭 들어가라. 대신 님이 막내여서 심부름 뒷정리 다 해야 함.

└듀라한: 회식 때 노래방 따라가서 트로트 박자 맞춰서 탬버린까지 흔들면 갓-벽

다구리: 가족 같은 길드 어쩌고 홍보하는 곳도 걸러라. 가족 같은=월급을 용돈 수준으로 주고, 잔소리는 부모님 수준으로 하고, 가족이니까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면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남 ㅆㄱㄴ

└라면은너구리: 가족 같은 아니죠. 가 족같은 이죠.

└레전설급탱커: 오, 이 녀석 족같은 길드에 크게 덴 모양인데?

레이드뛸딜러구함: 근데 성과 우선이면 진득하게 안 붙어 있을 듯. 연차 쌓여도 월급 안 느는데 딱히?

└로그아웃: 길드 측에서 알아서 조정하겠지

문단들여쓰기좀: 밥 맛있으면 친목질 해도 용서 ㅆㄱㄴ 하루 세끼 먹게 야근까지 가능임

고자리나: ㅅㅂ 작성자 닉네임ㅋㅋㅋ 님 빈휘혈 팬임?

└z i 존 휘혈(작성자): ㅇㅇ 짱팬이다. 꼽냐? 꼽냐고 ㅅㅂ 그리고 빈휘혈이라고 하지 마라

└도레미도: 갑자기 혼자 풀발하넼. 네, 그래 봤자 콩휘혈

└헐이케인: Hoxy... 본인 등판...? 킹리적 갓심 ㅇㅈ?

└라겐카: 휘혈이 여기서 뭐 하누

└뫄뫄: 성지 순례 왔습니다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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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타깃을 3세대 헌터로 잡아, 직접 인터넷과 인별 등 각종 SNS와 매체들을 이용해 투표를 시도하여 제 또래 헌터들의 의견을 긁어모았다.

이 모든 결과를 접목하고 그의 자본과 인맥을 모두 쏟아부어 탄생시킨 모두의 드림 길드가 바로 아레스 길드였다.

또한 하이 랭커이자 여러 의미로의 셀러브리티, 당시 한국 1위 길드였던 해솔 간부진인 어머니와 협회장 사부를 둔 헌터계의 금수저 서빈희가 만든 길드에 시선이 쏠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이랄까.

그렇게 아레스 길드는 단시간에 대형 길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혹자는 그의 성공이 인맥발과 재력발, 명성발이라고 비판하긴 하지만, 뭐 어떻담.

원래 세상은 그 셋으로 굴러가는 법인데.

길드 카르텔에 들어가 균열 독점과 마석 및 아이템 공급권을 확보하는 한편 정보 길드 스카이넷과 공생 관계를 맺고 정보를 손아귀에 쥐며 아레스 길드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히 길드 랭킹 1위를 차지하던 해솔 길드를 끌어내리고 세상에 나온 지 7년 만에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잘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42층에 멈췄다. 문 앞에 있던 이지가 빈희를 발견하고 눈썹을 까딱했다가 아련한 표정의 그를 보고 질색했다.

그의 옆으로 선 이지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과거 회상에 푹 빠져 있었다.

'능력이 물이라고? 혹시 부길드장 하고 싶은 생각 없어?'

'...뭐? 사람 착각한 거 아니야? 나는 랭킹 10위 안에도 못 들어.'

S급 능력자라고 사부와 면담을 마친 윤이지를 나이, 성격, 인성 그 무엇도 모른 채 능력 하나만 알고 붙잡은 게 벌써 7년 전이라니.

'아니. 제대로 찾은 거 맞는데? 그쪽은 물, 나는 전기. 이것보다 더 환상의 궁합이 어디 있어?'

'거절할게. 미안하지만 난 해솔 들어갈 거라서. 뱀 대가리가 되느니 용 꼬리 하자는 파거든.'

'용 대가리 시켜 드림. 딜?'

엘리베이터가 43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갑자기 든 궁금증에 그는 나란히 길드장실로 향하던 이지에게 물었다.

"언니는 나 뭐를 보고 7년 전에 용 대가리 시켜 준다는 제안 받아들인 거야?"

"잘못 보고."

이지가 즉답했다.

Ep 3. 끼리끼리 is science

"그럼 그 인수 합병 건만 다시 검토 부탁해."

"오케이."

이지가 길드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책상에 풀썩 엎드린 빈희는 손만 휘적여 인벤토리에서 시나리오를 받을 때 같이 받았던 단서, 세계 구원의 열쇠나 다름없는 종이를 꺼냈다.

사실 아직도 시나리오를 받은 것이 꿈 같았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증거는 그의 상태 창에 쓰여 있는 [시나리오 진행 중]이라는 글자와 이 단서뿐이었다.

「Q: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A: 」

"이것은 멍청이에 의해 말해지는,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구글 검색도 하기 귀찮았던 빈희는 그가 아는 외국인이 가장 많이 모인 채팅 창에 들어가 당당하게 물었다.

영어는 영어 쓰는 놈들에게 맡기자. 다 같이 사는 세상인데 나만 고생하면 쓰나.

물론 다 같이 세상을 구해도 시나리오 완결 보상을 받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세상 모두가 랭킹 1위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Local Channel-Global

>세계 멸망 팸☠(잠김)

>>공지 사항: 암호 유출하는 새끼는 사형/eng plz 이지랄 하지 말고 자동 번역 시스템 좀 켜라, 새끼들아

서빈희: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서빈희: 뭔지 아는 사람?

Liam: 어, 나 저거 대학 영시 강의에서 배웠는데

Julia: 우리 저거 외워 쓰는 게 시험이었잖아

Ren: Bin, 혹시 바보야? 이 유명한 구절을 모른단 말이야? 영국에서는 모를 수가 없는데?

Hiss: 유명하지, 저거. 한국에서는 이런 것도 안 가르쳐? 대체 정규 교육에서 뭐 배워?

내가 영국 사람이냐? 무시가 팍팍 묻어 나오는 물음에 서빈희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졸지에 나라 욕 먹인 매국노가 된 그는 고등학교 국어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시의 한 구절을 보냈다.

서빈희: 강호(江湖)애 병이 깁퍼 듁님(竹林)의 누엇더니

서빈희: 니들 이거 뭔지 아냐? 한국에서 존나게 유명한 시 한 구절인데 모르는 새끼들은 빡대가리 인증?

Felix: 미랑, 저거 알아?

劉媚娘: 한국어를 내가 어떻게 알아

Hiss: 중국이나 한국이나 같은 동양이잖아?

劉媚娘: 같은 서양이니까 프랑스어 해석해 달라고 들고 오면 주둥아리에 거품 물고 발작할 코쟁이 새끼들이 뚫린 입이라고 막 내뱉네?

세계 멸망 팸의 공(포의)주(둥아리)님 유미랑의 극딜에 서구권 놈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설명만을 늘어놓았다.

Liam: 시 한 구절이야

Hiss: 시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아? 희곡 대사지.

서빈희: 어디 나오는 대사인데

Hiss: http://www.shakespear-online.com/plays/macbeth_5_5.html

Hiss: 원문으로 봐. 이런 건 부분적으로 보면 안 돼.

Ren: 그런데 갑자기 왜? 영시에 관심이라도 생겼어? Bin이랑 진짜 안 어울린다 haha

서빈희: 凸

[잔머리 한번 잘 굴린다고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혀를 찹니다.]

세계 멸망시키려고 모인 놈들이 세계를 구하는 일에 조력을 해 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문장이 적힌 종이를 흔들며 빈희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답을 영어로 써야 해, 아니면 한글로 써야 해?"

***

야근 후의 행복한 퇴근길.

동네에 진입하다가 힐긋 담벼락을 본 서빈희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게이트였다.

마침 그 성좌한테 물어볼 것도 생겼는데 잘됐다 싶었다.

"주차할 데가... 없군. 아, 집 갔다 오기 귀찮은데."

빈희는 투덜거리며 할 수 없이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멈췄다.

그의 뒤에 진입하는 차가 없는지 살펴보고 바로 기어를 중립으로 놓은 그는 차 문을 열고 게이트 쪽으로 뛰어갔다.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 선점: 아레스 길드(pm 10:08:56)]

[던전 레벨: A]

[분류: 레이드]

[보스: 키마이라]

[공략 상태: 0%]

던전 선점을 하면서도 서빈희의 신경은 온통 제 차에 가 있었다. 계속 저기에 세워 뒀다가 차 긁히거나 주차 딱지 붙는 거 아니야?

그가 이렇게 차를 밖에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던전 선점법 때문이다.

던전 선점법.

쉽게 설명하자면 먼저 발 디딘 길드 혹은 솔로 헌터가 던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법이다.

대형 길드들의 독식을 막기 위해 내놓은 법이지만 그들만의 네트워크 때문에 딱히 효과는 없다.

법이 법이다 보니 이것이 악용되는 사례 역시 많이 발생했는데, 그중 하나가 인력을 이용해 선점만 해 놓고 던전 공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건이 붙었다. 던전을 선점한 당사자가 공략에 참여해야 하고, 선점한 지 5분이 지났는데 선점한 이가 던전 내에 없으면 선점이 취소된다.

핸드폰을 들고 빈희는 현재 위치와 그의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대충 집 갔다 오면 5분 넘길 거 같은데.'

잠시간 고민하던 서빈희는 스마트폰을 균열 바닥에 곱게 놓았다.

혹시 모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펜과 포스트잇을 꺼내 [반휘혈 거. 만지면 죽는다.]라고 휘갈겨 써 그 앞 바닥에 붙여 놨다.

사실상 스마트폰으로 사람 위치를 판단하는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든 꼼수였다.

물론 도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가 간 크게 그의 핸드폰을 훔쳐 가겠는가.

씩 웃은 서빈희는 휘파람을 불며 균열을 빠져나갔다.

***

차고에 차를 주차하고 나니 배가 살짝 출출한 게 느껴졌다.

'어차피 폰 균열 안에 두고 왔으니까 5분 넘겨도 되겠지?'

카드 키를 찍고 집으로 들어가 미니 냉장고에서 양갱 하나와 푸른매실 한 캔을 꺼낸 빈희는 푸른매실을 원샷 하고 캔을 가볍게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양갱을 까 베어 물며 집을 나섰다.

균열이 생긴 곳 근처까지 온 그는 균열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 이건 또 뭐야?"

걸음을 빨리해 균열에 도착한 빈희는 빈정거림 섞인 감탄사를 내뱉으며 한 입 남은 양갱을 한껏 멋 부린 곱슬머리에 조준해 던졌다.

라이더 재킷을 입은 남자가 가볍게 피하고는 떨어진 양갱을 보고 질색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빈희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아, x발. 더럽게 어떤 새끼,"

"나다."

빈희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서빈희의 얼굴을 본 남자가 그를 향해 껄렁하게 한 손을 흔들었다.

"어이. 오랜만이다, 빈휘혈?"

빈희 역시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래. 존나게 오랜만이다, 염룡아."

랭킹 9위 흑염룡. 본명 남설후. 용병형 길드 <레이븐>의 길드장이자 한국 3세대 세 번째 S급.

그리고 서빈희의 고등학교 동창 겸 11년 지기 악우이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 하겠다며 당신의 계약성이 팝콘을 꺼내 듭니다.]

[너희 둘이 붙어 있을 때가 제일 재밌다며 눈을 빛냅니다.]

"처먹던 걸 사람 머리에 쳐 던지고 있네. 가정 교육 독학했냐?"

"패드립 한번 신박하게 하네. 울 부모님 멀쩡히 살아 계신다, 새끼야."

11년 지기답게 하하 웃으며 다정하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빈희의 스마트폰을 움켜쥔 설후가 약 올리듯 그의 눈앞에서 그것을 흔들었다.

"분명 던전 선점법은 본인이 균열 안에 있어야 한다고 했지 스마트폰만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안 했는데? 이런 꼼수를 쓰시네. 이런 거에만 머리가 돌아가디?"

"같은 업계끼리 이런 건 유도리 있게 넘어가지, 좀? 그리고 니 머리는 이런 거에도 안 돌아가잖아, 인마."

남설후의 손에서 제 핸드폰을 낚아챈 빈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설후가 팔짱을 끼고 게이트를 향해 턱짓했다.

"법대로 균열 넘기고 빠지시지? 이거 명백히 위법이거든?"

"지랄은. 네가 나한테 위법 운운할 처지냐?"

서빈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문자 한 통으로 레이븐 길드의 온갖 위법 행위를 싹 긁어서 남설후의 얼굴에 던져 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설후가 입술을 짓씹으며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빈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왜? 신고하게? 한번 해 봐. 어떻게 되는지 보게."

"협회에 든든한 빽 있어서 좋겠수다? 빽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설후의 빈정거림에 그가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왜? 너 내 빽으로 길드 카르텔 들어와서 어깨 펴고 다니잖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빈희를 둘러싼 주변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설후가 가볍게 손을 튕기자 그의 바로 옆에서 크게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휘말린 빈희의 머리카락이 살짝 타 부스스해졌다. 폭발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폭환사(爆煥使). 고체, 액체뿐 아니라 기체까지 폭파할 수 있는 그야말로 광범위한 능력.

"와, 니 그 화법 진짜 짜증 나는 거 아냐?"

"설후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 스킬 '뇌전(S)'을 실행합니다. 』

『 스킬 '벼락(SS)-낙뢰(2단계)'를 실행합니다. 』

『 스킬 '뇌전(S)'과 '벼락(SS)'을 대기 모드로 전환합니다. 』

빈희가 탄 옆머리를 쓸어 올림과 동시에 푸른 전기가 창처럼 설후를 노리듯 그의 주변을 빼곡히 감쌌다.

남설후의 위로 시커먼 구름이 모이고, 금방이라도 내리꽂힐 듯 번개가 번쩍였다. 큰 천둥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입꼬리를 비튼 서빈희가 말을 이었다.

"책임질 자신 없으면 선빵 날리지 말라고."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다 태울 일 있냐고 당신의 계약성이 혀를 찹니다.]

"아, 설후 형! 진정 좀 하고 스킬 집어넣어요! 빈희 누님도 마찬가지거든요? 아니, 이 두 명은 왜 만나기만 하면 이러냐고!"

레이븐 부길드장이 급히 둘을 말려 보지만, 눈 돌아간 설후와 빈희한테 그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더 큰 사달이 나기 전에 급하게 이지에게 연락을 한 레이븐의 부길드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

"아이고, 저게 뭔 일이다냐.... 곧 애들도 학원 끝날 시간인데 위험하게시리."

개와 함께 잠시 동네 산책을 나온 아저씨가 담벼락 앞에 모인 흉흉한 분위기의 무리를 보고 혀를 차며 112를 눌렀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지금 조폭이랑 양아치랑 패싸움 난 거 같은데. 아니... 가만있어 봐. 헌턴갑네. 지금 막 능력 쓰고 있어. 아니, 둘 다. 여기 위치가...."

***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 달 만에 보니까 우리 설후 겁대가리가 많이 없어졌,"

"말 끊어서 죄송한데요...."

잔뜩 빈정거리던 서빈희는 그 말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빈희에 눈을 깜빡이던 설후 역시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어깨 너머를 보고는 같이 굳었다.

"경찰 왔어요."

그들의 뒤로 도착한 경찰차와 그곳에서 우르르 내리는 경찰을 발견한 탓이었다.

'...x됐다.'

'...x됐네.'

『 스킬 '뇌전(S)'과 '벼락(SS)'을 취소합니다. 』

빠르게 스킬을 거둔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폭발과 정전기로 인해 부스스해진 머리는 숨길 수 없었다.

"이곳에서 패싸움이 일어났다는 신고 받고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패싸움이 아니라 이분 둘 개싸움인데요. 저희는 분명히 말렸습니다."

괜히 엮이기 싫었던 레이븐 부길드장이 누구보다 빠르게 경찰의 말을 정정했다.

거의 랩이나 다름없는 속도의 말에 잠시간 당황한 경찰이 서빈희와 남설후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여기 있으신 분 모두 서까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 한숨을 내쉰 빈희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헌터 제압용 수갑이 서빈희와 남설후의 손목에 걸렸다. 힘을 강제로 막아 놓는 느낌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오, 이 수갑은 차도 차도 적응이 안 돼."

"아, 진짜 맞짱이라도 떴으면 덜 억울하지...."

"두 분 다 조용히 하세요."

경찰차에 타면서도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붓던 그들은 서로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구기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나온 것만 보면 둘이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인 사이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서빈희와 남설후가 정말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다면 11년 동안 인연이 유지됐을 리가.

그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영혼의 절친이 될 수 있었던 인간들이 영혼의 웬수가 되어 버린 케이스였을 뿐.

***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열여섯 살의 중급식 서빈희.

"비니비니, 그거 들었어? 옆 학교에 랭커 나왔대!"

"그래? 그래 봤자 A급이겠지."

푸른매실 병에 빨대를 꽂아 마시며 빈희가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김태이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소문난 마당발 김태이는 빈희한테 여러 가십들을 전해 주는, 초등학교 때부터의 오랜 친구였다.

빈희가 대꾸하며 자리에 앉자 태이가 그의 책상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노노. S급이래. 심지어 우리랑 동갑에 훈남!"

내내 시큰둥하던 빈희는 S급이라는 단어를 듣자 흥미를 내비쳤다.

"걔 헌터명 뭐야?"

"잠깐만 기다려 봐."

신나서 핸드폰을 꺼내 든 태이가 페이스북에 접속해 타임라인을 휙휙 내렸다. 원하는 게시물을 찾은 그가 빈희에게 화면을 보여 줬다.

"얘가 그 랭커. 잘생겼지?"

"어디? 나도 볼래!"

태이의 말에 서빈희의 주변으로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남설후라는 계정에 올라와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시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는 곱상한 소년.

오른쪽 눈 밑의 눈물점이 인상적이었다. 눈병인지 멋 부림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왼쪽 눈을 가린 안대도.

빈희가 한 줄 감상 평을 내렸다.

"엌. 사막여우 닮았다."

그 말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친구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진 훈남이었는데 네가 사막여우 닮았다고 하니까 갑자기 동물 한 마리 보인다."

"아니, 그런데 빈희 말대로 진짜 닮았어."

사진에 덧붙여진 게시 글을 읽은 빈희가 킬킬거렸다.

"헌터명이 흑염룡이야? 존나 이름 왜 이따위? 와, 안대 봐. 컨셉질 제대로다. 왼쪽 눈에 흑염룡 봉인해 놨나."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아. 우리 비니 헌터명은 반휘혈이잖아."

"아, 나는 초딩 때 지은 거고. 얘는 중딩이잖아. 중2병 씨게 왔네."

"와이셔츠 단추부터 잠그고 말하자, 빈희야."

오늘 새벽에 업데이트된 순위표를 훑어보던 그는 12위에 위치한 남설후의 헌터명을 발견했다.

'내 순위 위협할 수준도 못 되네. 뭐, 1세대들 은퇴하면 10위권 안까지는 들어올 수 있을 듯.'

금세 관심이 시든 빈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밍 좋게 핸드폰에 균열 발생 알림이 도착했다.

"어디 가?"

"균열 처리하러. 담임 오면 문자 좀 때려 줘."

"오키. 올 때 메x나."

"비니비니, 난 초코우유."

"응, 심부름값 만 원."

짧은 만담을 뒤로한 채, 빈희는 한 손을 주머니에 껄렁하게 넣고는 핸드폰 든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섰다.

게이트는 학교 앞에 위치한 빈 가게 건물에 열려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서빈희의 간식을 책임지던 토스트 가게가 있던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 토스트 맛있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 선점을 마친 그는 분석 정보를 쭉 훑었다.

[던전 선점: 헌터 협회(am 8:20:39)]

[던전 레벨: C]

[분류: 타임아웃(제한 시간 20분)]

[보스: 검은맹독나방(3급)]

[공략 상태: 0%]

"타임아웃이야? 와, 여기 와 보길 잘했다. 이 동네에 던브 터질 뻔. 보스 몬스터만 잡고 끝내야겠네."

원래 보스 룸은 제일 안쪽에 있는 게 국룰이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커다란 날개를 펼쳐 그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나방들에 그는 질색하며 스킬을 실행했다.

『 스킬 '전광석화(A)'를 실행합니다. 』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님.'

빈희는 평소처럼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 대신 그들을 피해 보스 룸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빛의 속도로 나방들을 피해 보스 룸에 도착한 그는 방금까지의 거대 나방들은 쨉도 안 되는 거대한 나방을 보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으, 징그러."

누군가가 벌레 얼굴 확대 샷을 눈앞에 들이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급식은 굶을 각이다.

그 정도로 입맛이 뚝 떨어지는 비주얼이었다.

정신 줄을 다시 붙들어 맨 그는 혹여 독을 들이마실까 봐 인벤토리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는 저를 향해 날아오는 보스 몬스터 나방을 피해 몸을 굴렸다.

나방이 날개를 펄럭거릴 때마다 독 가루가 흩날리며 뿌옇게 시야를 방해했다.

그는 몸통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날개를 집중 공격 했다. 뻣뻣한 날개는 몇 번이고 전격을 날려도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나방이 드디어 땅에 툭 쓰러져 꿈틀거렸다.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고 스킬을 장전하는 순간,

펑-! 나방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 던전 보스 몬스터 '검은맹독나방(3급)'을 처치했습니다. 』

『 기여도: 서빈희(60%) 』

『 게이트를 닫아야지 타임아웃 던전이 완료됩니다. 남은 시간: 5분 』

"와... x발. 이런 상도덕 없는 새끼를 봤나."

멍하니 머리가 폭발한 나방과 제 눈앞에 뜨는 상태 창을 보던 그는 뻐근한 뒷목을 부여잡으며 뒤에서 걸어 나오는 막타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서빈희의 금안이 어둠 속에서 희번덕이며 빛나자 그가 주춤했다.

'어떤 간 큰 새낀지 면상이나 한번 보자.'

『 스킬 '조명(D)'을 실행합니다. 』

빛이 비추어지자 막타충의 얼굴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20분 전에 봤던 사진 속 주인공이 현실로 튀어나와 있었다. 눈물점과 안대부터 시건방진 표정까지 똑같았다.

"아니, 사지 멀쩡한 S급 새끼가 남이 선점한 균열 기어들어 와서 막타나 치고 다녀? 느그 학교에서는 도덕을 안 가르치던?"

"어쩌라고. 네가 균열 전세 냈냐?"

"너는 선점의 뜻을 모르냐?"

그에게 지금 이 상황은 정상 참작도 안 되는 중범죄였다.

표정을 험악하게 굳힌 서빈희가 남설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단단히 틀어쥔 멱살에 목이 졸린 남설후도 켁켁거리며 손을 뻗어 힘겹게 서빈희의 멱살을 쥐었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으르렁거리며 주먹을 뒤로 당긴 서빈희가 남설후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은 남설후가 빈희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균형을 잃은 빈희가 휘청이며 그의 위로 쓰러졌다.

곧, 두 명의 S급들은 멀쩡한 능력을 두고 주먹다짐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 제한 시간(20분)이 만료됩니다. 』

『 던전 브레이크가 발동됩니다. 』

동시에 눈앞에 뜬 상태 창에 멱살잡이를 멈춘 두 중딩은 멍청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타임아웃 던전인 걸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동되면 던전 안의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몰려 나가게 된다.

"넌 이제 x됐다. 막타 스틸했으면 네가 다 뒤집어쓸 각오는 해야지."

"선점한 건 너 아니냐? 혼나도 네가 혼나겠지."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보스 룸을 벗어난 그들은 텅 빈 균열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 나방으로 우글우글했던 균열에서는 나방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급히 균열 밖으로 나가 보니 이미 협회 소속 현장 팀이 던전 브레이크를 진압하고 있었다.

"서빈희, 너는 균열 선점해 놓고 뭐 했어?"

"공략했죠. 저 망할 막타충 놈이 막타만 안 훔쳐 갔어도 타임아웃 전에 나왔어요."

"먼저 멱살 잡고 주먹 날린 건 너잖아!"

두 중딩 녀석들의 흙먼지 가득 묻은 교복과 얼굴의 상처를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현장 팀 팀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고는 협회 본부로 둘을 보냈다.

"그렇게 시민들의 안전이 우선이라고 강조했건만, 싸움질하느라 던전 브레이크를 안 막아?"

그곳에서 그들은 협회장의 호통을 들으며 협회장실에 꿇어앉아 꼼짝없이 손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이제 팔 내려도 돼요? 슬슬 팔 저린데."

"저도요."

물론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서빈희와 남설후가 반성을 할 리는 만무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엮이지 말자, 빈휘혈아."

"누가 할 소릴, 중2병 새끼야. 그리고 한 번만 더 빈휘혈이라 부르면 아가리 찢는다."

"지 헌터명이 더 중2병 같으면서 남한테 중2병 이 지랄."

둘은 끝까지 서로에게 엿을 날리며 이죽거렸다. 그 장면을 사부에게 딱 들키고 아직도 반성 덜 했냐고 혼난 건 덤이었다.

이것이 남설후와 서빈희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 후로도 둘은 끊임없이 엮였다.

"내가 먼저 왔거든?"

"웃기지 마. 증거 있냐?"

"또 너냐? 징하네, 진짜. 너 내 스토커냐?"

"누가 할 소린데. 아, 제발 그만 좀 보자, 우리."

"또 너희들이냐?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경찰서가 느이들 집이냐?"

"...."

"...."

결국 서빈희는 최후의 수단을 감행했다. 최대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지원한 것이다.

'제발 스쳐 지나가는 정도라도 얼굴 보지 말자, 남설후야.'

그는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더 이상 어머니 - 그의 어머니의 능력은 신체 강화였다 - 한테 등짝을 맞고 싶지 않았다.

같은 시각, 남설후도 자기 집 책상에서 최대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원서를 쓰며 마찬가지로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등교 첫날,

"비니비니, 왔어?"

"어. 태이 하ㅇ.... 잠깐,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저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건데?!"

1학년 7반 교실에서 서로를 발견한 그들은 동시에 소리 지르며 서로를 향해 삿대질했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신은 죽었단다, 얘들아.

그래도 고등학생이 된 둘은 나름 잘 지냈다. 물론 싸우지 않는 날보다는 싸우는 날이 훨씬 더 많았지만.

"야, 서빈희! 균열 공략하러 가자!"

"혼자 가긴 쫄리디? 균열 레벨 뭐임?"

"B급. 아, 쫄긴 뭘 쫄아."

사이좋게 야자 째고 같이 균열도 공략하러 가고,

"이 새끼 미쳤나 봐. 어떻게 S급 균열을 혼자 공략할 생각을 했냐.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다. 눈깔 상처는 이제 영광의 상처라고 하고 다녀라."

"...그러게 말이다. 내가 잠시 미쳤었다."

"와, 빈희야. 혹시 너 던전에서 눈 말고 머리도 다쳤냐?"

"x발롬이 뒤질라고."

부상당한 친구 병문안도 갔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를 상종 못 할 웬수 새끼에서 봐 줄 만한 웬수 새끼로 점차 위치를 올려 주었다.

그렇게 영혼의 웬수들은 서로와 인연을 끊지 않은 자기 자신의 관대함을 찬양하며 11년 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

다시 현재, 경찰서.

"아실 거 다 아시는 분들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아, 네. 죄송함다."

"진술서 다 썼으니까 이만 가도 되죠?"

똑같이 삐딱한 표정으로 펜을 돌리고 있는 서빈희와 남설후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레이븐 부길드장과 연락받고 뒤늦게 도착한 이지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극한 직업 부길드장이었다.

"진술서 놓고 가시면 됩니다. 센터에서 교육 7시간 받으시고요."

"또? 아니, 인성 교육 말고 좀 다른 신선한 건 없나? 이를테면 던전 공략을 하라든가. 맨날 인성 교육만 쌔빠지게 시키ㄴ, 억!"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교육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빈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한 이지가 그를 잡아끌고 경찰서를 나왔다.

"야, 서빈희, 그냥 다 같이 들어가실?"

"개소리하네. 차라리 단독으로 D급 균열 하나 공략하는 게 더 경험치 많이 받겠다."

설후의 제안에 빈희가 빈정거리며 귀를 후볐다.

지금 내가 세계를 구하려면 성좌랑 균열에서 1대1 면담을 해야 하는데 왜 도와주지를 않냐.

한숨을 쉬며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서빈희에, 혹여 균열을 뺏길세라 남설후와 레이븐 길드원들이 그 뒤를 재빨리 쫓았다.

어부지리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 바람에 엉뚱한 제3자가 덕을 본다는 뜻인데, 이 사자성어가 왜 지금 나오느냐.

[제한 시간이 지나 <아레스 길드>의 던전 선점이 취소됩니다. (pm 10:21:56)]

[이미 선점이 완료된 던전입니다.]

딱 지금 상황이랑 맞는 사자성어기 때문이다.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빈희가 중얼거렸다.

"누가 다시 선점했는데? 아, 진짜 열받네."

"선점됐으니까 이만 가자. 너 오늘도 야근했는데 안 피곤해?"

이지의 설득에도 빈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 나는 던전 스틸한 놈 얼굴 좀 보고 갈 테니까."

"야, 오랜만에 너랑 마음이 좀 맞네. 나도 있을란다. 너희도 먼저 가라."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던전 선점 취소당한 거라 사실상 이쪽 과실이 100%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살기 편한 뇌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결코 자신들의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빈희와 가볍게 하이 파이브를 한 설후가 제 길드원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서슬 퍼렇게 웃으며 그 둘에게 다가온 이지가 둘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스틸은 얼어 죽을 스틸이다, 이 자식들아! 너희가 싸움질만 안 했어도 진작 던전 공략했겠다!"

"누님, 진정하세요!"

레이븐 부길드장이 다급하게 이지를 말렸다.

매가리 없는 표정으로 흔들리던 두 S급의 눈이 가까이서 느껴지는 기척에 한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이지 역시 둘의 멱살을 놓고 몸을 돌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보인 건 짐승의 샛노란 눈이었다. 그들을 향해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거리는 큰 늑대에 그들은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경계 태세를 갖췄다.

짧은 대치를 끊어 낸 것은 어둠 너머에서 들린 한숨 소리였다.

"룬, 이리 와."

나직한 목소리가 늑대를 부르자마자 늑대가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은빛 털이 어두운 던전 안에서도 흐릿하게 빛났다.

던전 몬스터라기에는 상태 창이 뜨지 않았고, 야생 늑대라기에는 지나치게 말을 잘 듣는다.

'소환수인가?'

빈희가 늑대의 정체를 추측하는 동안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사람 일곱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 나와 있는 빈희와 설후를 발견한 사람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중 무리의 중심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늑대를 쓰다듬으며 눈을 접어 웃었다.

"게이트가 시끌시끌하다 했더니, 꽤 거물들이 모여 계셨네요."

듣기 좋은 나긋한 목소리가 던전에 울렸다.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을 지은 설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너 뭐냐?"

"해솔 길드 소속 이든이랍니다. 본명은 비밀이고 나이는 스물아홉, 능력은 소환인 A급 헌터죠. 이 정도면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으실까요?"

남자가 샐쭉 웃었다. 그 인상은 퍽 여우를 닮아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말문이 막힌 설후가 입을 뻐끔거렸다.

'남설후 임자 만났네.'

서빈희는 흥미진진해하는 눈으로 붉은여우와 사막여우의 기 싸움을 관전했다.

'왠지 조금 성좌 놈을 이해할 수 있을 듯. 꿀잼이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그의 계약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도 네가 미친놈 짓 하는 거랑 비교도 안 된다고 성좌 '푸른 밤의 그림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슬슬 지루해지니까 저기 끼어들어서 깽판 좀 쳐 보라고 계약성이 당신의 등을 떠밉니다.]

'어허, 남자들 캣파이트 같은 하찮은 일에 여자가 끼어드는 거 아니다. 아니, 둘 다 여우니까 폭스파이튼가...?'

의외로 먼저 물러난 건 사막여우 남설후였다.

지랄맞은 사막여우가 한 수 접을 정도로 저 붉은여우가 기가 센 건지, 추진력을 얻기 위해 한발 물러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쪽 분들은 어떤 연유로 여기 계시는지? 공략이 완료된 던전이라 뭐 주워 가실 것도 없으실 텐데."

"...글쎄? 던전 뺏긴 것에 대한 화풀이 좀 하려고?"

서빈희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서늘한 온도의 금안이 이든을 평가하듯 훑어 내렸다. 그 건조한 눈빛에도 위험을 느낀 이든의 소환수가 주인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 으르렁거렸다.

한순간에 그를 둘러싼 던전 안의 공기가 뜨거워지고, 푸른 스파크가 이든의 주변에 번쩍거렸다.

위협적인 광경임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걸 보던 이든이 가벼운 손길로 늑대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측에서 오늘 일에 대해서 입을 열면 평판이 떨어지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헹, 코웃음을 친 설후가 빈희의 어깨에 팔을 턱 얹으며 턱을 치올렸다.

"괜찮아. 얘는 어차피 떨어질 평판도 없어. 기사 나 봤자 반휘혈이 반휘혈 했다고 하겠지, 뭐."

"거기서 너는 왜 쏙 빼냐, 인마?"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을 털어 내며 빈희가 짜증을 냈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이든이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2주 후에 해솔 길드 OB 모임이 있답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설후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이든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빈희를 향해 눈짓했다. 어리둥절한 설후와는 다르게 그 의미를 알아들은 서빈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빠질란다. 하, 왜 하필 OB 모임을 이때 해서. 타이밍 한번 죽이네."

혀를 찬 빈희가 한 발짝 물러났다. 의외의 말에 설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빈희를 돌아봤다.

"너 갑자기 왜 그러는데? 뭐, 해솔 길드에 약점이라도 잡혔냐?"

"약점? 약점이야 약점이지."

중얼거리던 빈희가 죽상을 하고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설후야, 어버이날이 다음 달이다."

여전히 설후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독해력이 거의 0에 수렴하는 빡대가리 제 친구를 위해 빈희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해솔 간부였던 울 어머니가 참석을 안 하실 리가 없잖아. OB 모임에서 또 내 이야기가 나오면 어버이날은 내 제삿날이 되겠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내 코트 좀 슬슬 놔주라. 충분히 안심되지?"

혹여 길드장 놈이 튀어 나갈까 봐 그의 코트 자락을 꼭 쥐고 있던 이지가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네 전적이 한두 건이냐?"

코트를 팍 잡아당겨 이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빈희가 이든의 앞으로 다가가 씩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어깨를 움켜쥔 손에 핏줄이 돋았다.

"그쪽 운 한번 좋네. 아, 웬만하면 내 눈에 띄지는 말고. 얼굴 볼 때마다 오늘 나 물 먹인 일이 떠오를 것 같거든? 내가 은원 관계는 확실하게 하자는 주의라."

"그건 조금 어렵겠네요. 이제 자주 얼굴 봐야 할 사이로 발전할 터라서."

어깨에 가해지는 악력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눈을 휘어 웃은 이든이 의미 모를 말을 하며 빈희의 손등을 살짝 쓸었다.

은근한 손길에 빈희는 질색하며 그의 어깨에 올린 손을 바로 뗐다.

[이런 타입은 네 주변에서 처음 본다고 계약성이 흥미 어린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야, 쟤 너한테 작업 거는데?"

"아, 작업이었어? 미안한데 그쪽 제 스타일 아님."

설후의 깐족거림에 빈희가 픽 웃으며 이든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든이 그들보다 2살 위라는 사실은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저보다 40살 위인 어른들에게도 반존대가 디폴트인 서빈희가 2살 위라고 제대로 된 연장자 취급을 해 줄 리가 만무했다.

[성아]

[해솔 길드 이든 좀 조사해 봐라]

[털 수 있는 건 다 털어 봐]

[기한은 이 주일] 오후 11:56

[꼬맹이- 보고 싶은데 내일 오시면 안 돼요?]

[꼬맹이- 내일까지 충분히 끝낼 수 있는데ㅠㅠ] 오후 11:57

[꼬맹이- 혹시 매실장아찌 안 떨어지셨어요?] 오후 11:58

[아직 많다]

[수작 ㄴ] 오후 11:59

느긋하게 제 정보통에게 문자를 보낸 서빈희는 폰 화면을 끄고 이든과 눈을 마주했다.

그의 직감이 저 녀석에게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빈희의 눈빛을 여유롭게 받아친 그가 싱긋 웃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상상은 자유니까요. 그럼 저희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말 참 자기 미소처럼 의뭉스럽게 한다. 남설후같이 단순한 성격이 다루기는 편한데. 빈희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해솔 길드랬지. 그러고 보니 하는 짓이 그 너구리 영감을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음, 꼬리 세 개...? 야, 사막여우, 분발해라."

그들을 지나쳐 게이트 쪽으로 향하는 이든과 해솔 길드 무리의 등을 보며 중얼거리다가 빈희가 옆에 있던 설후의 등을 가볍게 쳤다.

보복으로 설후가 그의 발을 콱 밟았다.

둘 사이에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어렸을 때였으면 장난의 일환으로 넘어갔을 터였다.

그래, 남설후가 밟은 것이 3천만 원짜리 옵션 달린 신발이 아니라 브랜드 운동화였다면.

선명하게 발자국이 찍힌 구두를 한 번 내려다본 서빈희의 얼굴에 지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드디어 제대로 싸우냐고 당신의 계약성이 휘파람을 붑니다.]

['이기는 편 우리 편' 플래카드를 들어 올립니다.]

"넌 오늘 뒤졌다."

빈희가 눈을 살벌하게 번뜩이며 설후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그래, 저놈들이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지. 이지와 레이븐 길드원들은 익숙하게 그 둘을 두고 던전을 벗어났다.

잠시 후, 폭발 소리와 땅을 내리치는 소리가 균열 밖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게이트 밖에서까지 느껴지는 화끈한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간 이든이 게이트에 대고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게이트 닫아야 하니까 적당히 싸우시고 나와 주세요. 제가 좀 피곤해서요."

게이트 안에서 별 또라이 다 본다는 서빈희의 목소리와 닥치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남설후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10분 후,

"야, 내일 같이 센터에 교육받으러 갈래?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낫지 않겠냐?"

"내일? 시간 보고 연락 준다."

한바탕의 싸움 끝에 언제 싸웠냐는 듯 빈희와 설후는 씩 웃으며 약속을 잡았다.

코트에 묻은 재를 털며 빈희는 생각했다.

'시나리오 단서는 다음에 물어봐야지.'

세계 구원은 그렇게 다음으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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