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뭐, 뭐야? 갑자기 왜?"
김상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세아가 오지 않아도 숨겨둔 패는 있었다. 근력을 추가 해주는 도끼와 무패의 반지가 가진 방어막도 남아 있었으니까.
'신아람도 분명히 뭐가 있긴 있을텐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는 신아람. 혹시 숨기고 있는 실력이 있나 궁금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
진세아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우리를 향했다. 그 시선은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말하는 듯 하다.
"고객님, 열쇠. 빨리 열쇠 돌려달라고 합시다."
김상욱이 내 옆으로 다가와선 속삭였다.
뭔가 직접 말하긴 무서운 모양.
미안한데, 현시점의 진세아는 대화가 통화는 상대가 아니다.
야생 동물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그래도 사람이니 말은 알아 들을 거다.
"진세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금왕의 창고로 향할 거다."
"······."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잖아?"
진세아가 잠시 멈칫했다. 한 대 맞고 기절했던 지난 시절의 악몽이 떠오르지만 괜찮다.
여기서 기절했다간 고블린들한테 잡혀 갈게 뻔하다. 진세아는 영웅. 결코 우리를 죽게 놔두진 않는다.
입술을 달싹이려던 진세아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스륵.
바람 한 점 남기지 않고 눈 앞에서 사라졌다.
당연하지만 열쇠를 돌려줄 생각은 없나보다.
"진세아가 허락한 것 같으니 가시죠. 경비가 오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도, 돌아가면 안될까······."
신아람의 약한 소리를 김상욱이 일축했다.
"아가씨, 남자 고객님 말씀이 백 번 맞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아갑니까. 뭐라도 하나 건져야죠."
진세아가 정말로 길을 뚫어준 덕분에 창고까지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바닥에 널부러진 고블린 병사들이 보인다.
"하, SSS급은 다르긴 한가봅니다. 이 무식한 놈들을 뭐 파리 잡듯 잡아버리네."
김상욱이 감탄했다.
여기 요새는 오로지 창고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었다. 창고의 주인인 자볼은 멀리 떨어진 고블린 성에 있을 거다.
'그래도 너무 오래 지체하지 않는게 좋겠지.
황금으로 도배가 된 창고의 문이 보였다.
조금 열려 있었다.
진세아가 열쇠를 사용해 벌써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본래대로라면 각종 마법과 함정이 그 주변을 막고 있었겠지만, 진세아의 손에 의해 전부 해체된 상황.
우리는 손쉽게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우와앗!"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들이 반짝 거리고 있다. 누구나 꿈꾸던 보물창고가 눈 앞에 있다.
"미, 미쳤다. 나는 부자야! 도대체 이걸로 술 몇 병을 사먹을 수 있는거냐."
김상욱이 부리나케 달려가 금화를 퍼담기 시작했다.
"와아."
신아람도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열심히 금화를 인벤토리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솔직히 금화와 보석은 멸망한 세계에서는 쓸모 없다. 먹지도 못하는 금을 어디에 쓰겠는가. 지금 시점에서 시간이 좀만 더 지나도 무가치하게 변한다.
'그래도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일단은 더 중요한 걸 챙겨야했다.
가운데 쌓인 금더미가 전부가 아니다.
창고의 좌우로 펼쳐지는 유리 전시장. 그 내부에 놓인 수많은 아이템들이 진짜다. 나는 왼쪽부터 따라가며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그 중간중간이 텅텅 비어있다.
'진짜 좋은 건 진세아가 전부 가져갔나보네.'
좀만 가치가 있거나, 좋아보이는 건 전부 쓸어가버렸다. 어차피 도둑질로만 살아가는 진세아에게 금화는 가치가 없으니.
무기랑 장비, 장신구 같은 아이템이 몽땅 사라져 있다.
그래도 나는 빠르게 걸어나가며 아이템들을 살폈다. 내가 찾는 건 가져가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내 걸음은 어떤 허름한 장갑 앞에서 멈췄다.
'진짜 있었군.'
『 흉내쟁이의 허름한 장갑(레어) 』
- 효과 : 레어 등급 이하의 스킬을 완벽하게 따라합니다.
- 내구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스킬을 따라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 실제로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멸망한 세계에서의 이야기다.
경험치 10만배를 지닌 내가 사용한다면.
태양의 발걸음이나, 태양류 검술도 쉽게 익힐 수 있게 되는 사기 아이템이 된다.
'좋아.'
그대로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 해당 시공의 특수성으로 인해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
『 귀환 시 소지한 물건 및 아이템이 전부 삭제 됩니다. 』
장갑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튕겨나왔다. 가져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럴 것 같기는 했다만.'
아쉽지만 여기서 활용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을 하고 온 거긴 하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더 가져갈게 있으려나.'
애시당초 내 목적은 이거였다. 진세아가 너무 싹싹 털어가서 쓸만한 게 없다. 금화도 마찬가지로 과거로 들고 돌아가는 건 어려워보이고.
"고객님, 빨리 챙겨! 인벤토리에 전부 담아도 한참 남겠어. 우린 이제 부자라고!"
김상욱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금을 주워 담는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엔 쓸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수납 가방을 꺼내 금화를 담았다.
『 귀환 시 해당 시공에서 습득한 물품은 전부 삭제 됩니다. 』
그런 메시지가 떴지만 일단 넣고 본다.
여기서라도 잘 쓸 수 있으면 됐지.
장갑도 챙겼으니 앞으로 스킬 배우기는 무지 수월할 거다.
그렇게 금화와 보석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데굴.
내 발치로 알 하나가 굴러왔다. 차가운 금속의 외관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 특이한 생김새의 알이었다.
알이 계속해서 내게 툭툭 부딪혀 왔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응?'
그런 알을 쳐다보는 내 눈동자가 확장된다.
'이건······."
나는 바닥에서 알을 집어 들어 올렸다.
『 오르티마 알 (등급 없음) 』
등급 없음이라 진세아가 놓고 갔나 본데. 이 외관도 그렇고, 오르티마라는 이름 또한 나는 알고 있다.
절대로 부화하지 않는 알 오르티마.
백묵이 자볼의 창고를 털고 얼마 안있어 각종 아이템들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이것도 그런 아이템 중의 하나였다.
최후의 5인 중 하나가 이 알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알이 부화하는 일은 없었다.
엄청난 경험치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자신의 성장도 바쁜데, 성능도 모르는 알에 많은 자원을 투자할 순 없었다.
오르티마는 피난길에 잊혀졌고, 그대로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오르티마는 후에 군단장의 손에서 태어난다.
붉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거대한 드래곤은 그야말로 재앙. 날개에 새겨진 문양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오르티마의 정체는 드래곤인가?
그것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르티마의 정체는 환상종 '기린'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이는 펜리르라는 등 여러 소문이 많았다.
어쨌든.
'경험치를 무지하게 먹는 대신 말도 안되는 괴물이란거지.'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필요로 하는 펫.
나에게 있어선 문제가 안된다.
10만배에 달하는 막대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뭐하겠어.'
그러나 가져가도 의미가 없다.
원래의 세계로 데려갈 수가 없으니까.
아쉬운 마음과 함께 바닥에 알을 내려 놓으려는 그때.
파직, 파지직.
'응?'
허공에서 금색 스파크가 번쩍였다.
『 이계 규율이 해당 시공의 특이성을 확인합니다. 』
『 시스템의 인과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
파지직!
다시 한 번 요란한 전격이 뿜어져 나온다.
'큭, 무슨······.'
그러더니, 의외의 결과를 내놓는다.
『 이계 규율 두번째 : 예외 규칙 』
『 이제 해당 시공에서 아이템을 한 가지 가져올 수 있습니다. 』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 입이 벌려졌다.
진짜냐.
50화 황금왕의 보물창고(3)
이계 규율 두번째 '예외 규칙'.
『 해당 시공에서 아이템을 한 가지 가져올 수 있습니다. 』
나는 잠시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봤다.
'뭐야.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인과역전 물약의 효과로 만들어진 장소. 본래대로라면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시스템이 아이템을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겠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이계 규율은 그런 규칙을 무시하고서, 내게 아이템 하나를 가져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나는 냉큼 오르티마 알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어쨌든 준다고 할 때 챙기는 게 맞다.
만들어진 미래라고는 하나 나름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 오르티마 알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고에 온 값어치는 충분히 한다.
본래는 장갑을 노리고 온 거긴하다만.
'과거에선 어떻게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니까.'
그때였다.
땡그랑!
바닥으로 황금빛 열쇠가 굴러 떨어졌다. 진세아가 어디선가 던진 모양. 이제 슬슬 떠나야할 때라는 신호였다.
"슬슬 가지."
아직까지도 정신 없이 금화를 주워 담는 김상욱에게 말했다. 챙길만큼 챙겼는데도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보물들.
그것들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는 김상욱이었다.
"크윽, 이 놈들을 두고 가려니까 눈물이 앞을 가리네."
신아람도 바로 배낭을 메고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들었다.
'이건 나중에 또 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진짜 자볼의 창고는 여전히 열린 적이 없을 거다. 아직은 마계에 있기에 볼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비슷한 일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 언젠가를 위해 나는 열쇠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건 원래 내 거였으니 문제 없이 들어간다.
요새를 빠져나오는 건 간단했다. 고블린 병사들 중에 살아 있는 놈이 없었다.
'전부 죽였나.'
SSS급 헌터 하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이 된다.
그렇다고 느릿하게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지금쯤이면 자볼도 자신의 창고가 털렸다는 걸 알았을 거다. 놈이 고블린 정예 부대를 이끌고 직접 행차하게 되면 곤란해진다.
"저기······!"
신아람이 놀란 목소리와 함께 반대편을 가리켰다. 벌써 자볼이 왔나 당황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요새 너머로 보이는 붉은 회오리.
이질적인 붉은 태풍. 그 내부에선 시시때때로 벼락이 떨어지며 붉은 빛을 발한다.
'저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큼지막하게 보인다. 자연 재해에 버금가는 그 규모에 시선이 끌리는 건 당연했다.
"미, 미친. 광인이잖아. 빨리 갑시다! 이거 괜히 우리까지 휘말리겠어!"
김상욱이 일행을 재촉했다. 태풍의 영향일까 주변으로 바람의 흐름이 느껴졌다.
붉은 태풍의 정체는 광인(狂人).
그도 기인 중 하나였다.
진세아가 그래도 영웅이었다면, 저건 아예 결이 다르다. 마족은 아니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존재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목적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미친 인간.
놈의 얼굴을 본 사람도 거의 없다. 광인이 있는 자리에는 늘 태풍이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그 안으로 진입하는 것조차 보통의 인간에겐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마족들조차 기피할 정도니.
"설마 거점으로 오지는 않겠지?"
불안한 듯 중얼거리는 신아람.
광인의 영역 침입.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었다곤 들었는데. 신경 쓸 필욘 없다. 몇 번 있었던 일이라지만 거기서부터는 영웅의 소관이다.
"속도를 내죠."
저런 괴물을 상대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도망가는 게 최선이다.
* * *
다행히도 태풍의 진행 방향은 우리와 달랐다.
"고객님, 언제든지 마을에 오십쇼! 거하게 쏠테니까."
김상욱은 싱글벙글하며 거점으로 돌아갔다. 나와 신아람은 숲 속의 텐트로 돌아왔다.
"후우, 그래도 다행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돈을 엄청나게 벌었어. 스승님이 보면 엄청 놀라시겠지?"
바닥에 금은보화를 잔뜩 늘어 놓은 신아람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 해냈다는 성취감 가득한 표정이었다.
몇 년만 지나도 전부 쓸모 없는 게 되긴 하겠지만, 당장은 가치가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그 위에 쏟아 부었다.
"이것도 쓰세요."
"후배······."
감동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신아람.
"그보다 보법을 다시 보여줄 수 있으신가요?"
"응?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잠 안 자도 괜찮겠어?"
시간이 꽤 많이 흘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 번이면 됩니다."
나는 자볼의 창고에서 얻은 장갑을 꺼냈다.
『 흉내쟁이의 허름한 장갑(레어) 』
- 효과 : 레어 등급 이하의 스킬을 완벽하게 따라합니다.
- 내구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닳아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아이템이다. 나는 유니콘의 피를 꺼내서 한 방울 뿌렸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잘해야 두 방울 남았을까.
'아깝기는 하지만.'
신태양에게서 배워갈 수 있는 유용한 스킬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 다.
토옥.
붉은 유니콘의 피가 장갑에 스며들었다. 옅은 빛과 함께 장갑은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 흉내쟁이의 완성된 장갑(레어) 』
효과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걸로 내구도 걱정은 끝이다.
"준비 끝났어? 그러면 보여줄게."
신아람이 앞으로 나서서 보법을 시범 보였다. 그녀가 나아가는 길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다음 순간, 나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졌다.
'확실히 좋다.'
내가 가진 일반 보법을 한 단계 뛰어 넘은 형태. 신태양이 만들어낸 독자적인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
신속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효율성까지 갖추고 있다.
"어때?"
"좋네요. 저도 한 번 해볼게요."
나는 곧바로 신아람의 움직임을 따라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머릿 속에 새겨진 움직임을 복사하여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태양의 발걸음은 단순히 몸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력까지 운용하는 기술. 기초 능력 스킬 덕분에 동작은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어도 세세한 마력까지 조절하는 건 역시 어렵다.
하지만 지금 나는 흉내쟁이의 장갑을 끼고 있다.
『 장갑의 효과로 레어 스킬 '태양의 발걸음'을 복사합니다. 』
신아람이 보여 주었던 보법이, 내 발 끝에서 정확하게 재현된다. 구태여 의식하지 않아도 발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원래대로라면 스킬을 흉내내는 것으로 이 아이템의 효과는 끝이다.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 무언가를 체득한단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흉내는 흉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10만배에 달하는 경험으로 치환된다면.
『 스킬 '기초 능력 Lv.11'의 추가효과가 적용됩니다. 』
『 레어 스킬 습득 확률이 올라갑니다. 』
단순한 흉내에 불과했던 행위도 의미를 가지게 된다.
『 스킬을 전수 받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
『 레어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을 획득합니다. 』
스스스······.
내가 지나온 길 위로 따스한 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어느새 나는 신아람의 옆에 있었다.
"어? 됐다! 와, 축하해!"
신아람은 마치 자신의 일인양 기뻐했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대검을 들고 태양의 발걸음을 사용했다. 한 번 스킬로 체득 된 기술은 의식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2'를 획득 합니다. 』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3'을 획득 합니다. 』
"어?"
일반적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니라면, 경험치를 축적하기 힘들지만.
'스킬의 전수자가 옆에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보법을 사용할 때마다 막대한 스킬 경험치가 쏟아진다. 그에 따라 신아람의 눈동자도 커지기 시작했다.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0'을 획득 합니다. 』
『 추가효과 : 특수 상태(은신, 위장 등)에서도 기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스킬을 얻자마자 10레벨을 달성했다. 움직임 자체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기존 보법은 단지 검을 들고 움직인다는 수준이었다면, 이건 아예 날아다니는 수준이다.
'후우.'
다만, 마력을 소모하기에 계속해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
날 줄곧 쳐다보던 신아람이 눈만 간신히 깜빡거린다.
"어떻게 한거야······?"
상당히 놀란 모양.
미안하지만, 그녀의 기분을 고려할 시간이 없었다.
『 남은 시간 : 6일 』
남은 시간 안에 일자베기 12레벨에 도달하려면 쉴 틈이 없다. 시간이 모자라서 스킬을 못 배우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검술을 보여주시죠."
* * *
『 레어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1'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태양류 검술 Lv.11'을 획득합니다. 』
보법과 검술은 모두 11레벨.
신태양이 신아람에게 전수해 놓은 기술들이었다.
『 일반 스킬 '호흡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 효과 : 전투 중 기력 유지력 15% 증가 』
신아람한테서도 스킬 하나를 뜯어냈다.
'검성이 와야, 다른 스킬도 배울텐데.'
문제는 신태양 이 놈이 얼굴을 비출 생각을 안한다는 것.
『 일자베기 Lv.11 [ 14% ] 』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신태양의 말대로 보법과 검술을 익히니, 일자베기의 경험치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죽어라 휘두른 게 이 정도였다.
이 계산대로라면 한 달은 있어야 12레벨 달성이 가능하다.
'젠장, 신태양이 근처에 있어야 경험치가 팍팍 오르는데.'
확실히 전수자가 근처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심하다.
그래도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아, 우리 고객님! 어서 오십쇼! 내 은인이자 하나 밖에 없는 형제. 이지한씨!"
틈틈이 거점에 들러서 김상욱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몸에 보석을 잔뜩 두른 김상욱은 거점에 집까지 구해선 떵떵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뭐가 궁금하신가?"
당장 배신자의 재산을 몰수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지만, 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으면 그만이다.
김상욱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고, 나는 뽑아낼 정보를 전부 뽑아냈다.
'부족했던 정보를 이렇게 메꿀 수 있을 줄이야.'
미래로 오고 나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아직 11레벨을 달성하지 못한 스킬들의 레벨도 올리기 위해서 수련을 지속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슬슬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찰나.
신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하하! 다들 잘 지냈나? 수련은 많이했고? 내 사랑스런 제자들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알면 둘 다 놀라서 기절할 거다."
"스승님······."
신아람은 퀭한 눈으로 스승을 맞이했다. 그녀는 그간 놀라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엥,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설마 후배가 괴롭혔냐?"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근데,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할지."
검집을 뽑아드는 검성을 신아람이 막아섰다.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한가득 쌓인 금화와 보석들이다.
"호오."
흥미로운 표정을 한 신태양이 수염이 난 턱을 매만졌다. 신아람은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보고 했다.
그리 큰 일은 없었다.
줄창 수련만 했거든.
"그리고 요리를 너무 잘하는거에요! 진짜 드셔봐야해요!"
"정말로?"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본다. 여기서 요리를 하다보니 요리 레벨이 11에 도달했다. 이제는 내가 만든 음식에 1%의 능력치 추가 옵션이 붙는다. 맛이 한 단계 진화했음은 당연한 거고.
신아람이 텐트에서 가지고 나온 수프를 맛보는 신태양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수프 네 그릇을 비운 신태양이 말했다.
"너, 왜 여기서 검 배우고 있냐. 빨리 짐싸서 음식점 차려라."
하여간, 신태양이 오면서부터 내 일자베기 수련에 박차가 가해졌다.
『 스킬 '타격 내성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타격 데미지의 10%를 즉시 회복합니다. 』
방식은 지난번과 같았다.
대련이란 명목하에 후드려 맞았다.
"야, 숨 쉬어! 안 그러면 죽는다? 그러고보니 숨 쉬는 거 하니까 떠오르는데, 내가 호흡의 마족을 상대할 때 이야기인데 말이야······."
『 레어 스킬 '태양류 호흡법 Lv.10'을 획득합니다. 』
『 소모되는 기력과 마력이 10% 감소합니다. 』
"하여간 맞을 때도 꾸준히 숨을 마셔줘야 한다 이 말이지. 알겠나?"
신태양 말에 따르면 이걸 꾸준히 하면 마력 관련 스킬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솔직히 쳐맞느라 기억에 잘 안남는다.
이틀째 되는 날.
내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오오, 솔직히 걱정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할 줄이야. 대단하구나 제자야! 이거 스승으로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네. 이야, 대단해. 정말."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획득합니다. 』
끝까지 버텨내면서 검을 휘두른 결과.
일자베기의 레벨이 올랐다.
뒤지게 쳐맞으면서 휘두르다보니 어떻게든 되더라. 덕분에 이것저것 스킬 레벨이 오르기는 했으니 수련 효과는 제대로였다.
검성도 내 성장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오, 좋아. 마지막 미션이다."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신태양이 씩 웃었다.
"나한테 일자베기를 날려라. 그간 두드려 맞느라 고생했을 거 아니냐. 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검성은 두 팔을 벌렸다. 다 헤진 검은 도복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 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날 뭘로보냐. 네 공격은 호신강기까지 갈 것도 없다. 적당히 마력을 두르기만해도 충분히 막지. 네 검이 닿는 일은 없을 거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마."
신태양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휘두릅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진짜 오지게 두들겨 맞았다.
강해지게 해준 건 인정하지만, 이 놈은 적당히를 모른다.
이 울분을 담아서 힘껏 치자.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해당 스킬의 추가 효과가 발휘됩니다. 』
베어내린 공간이 갈라지듯 찢어진다.
『 Lv.12 추가효과 : 마력 무시 』
『 대상의 마력을 무시합니다. 』
상상도 못한 거대한 충격이 검성 신태양을 덮쳤다.
51화 만월의 연금술사(1)
"크허억!"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있던 신태양이 일자베기를 맞고 튕겨 나갔다. 뒤에 있던 나무 두 그루를 부수고 바위에 쳐박히고 나서야 멈췄다.
12레벨 일자베기.
그 추가 효과는 마력 무시였다. 덕분에 신태양의 몸을 두른 마력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일격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이, 이야······. 이 정도 일줄이야."
거꾸로 뒤집힌 신태양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이거 사람한테는 절대 쓰지마라. 절대로."
확실히 SSS급은 사람이 아니다. 일자베기를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피부에 붉은 줄 하나 그어진 게 전부다.
아니지, SSS급에게 이만큼의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걸지도 모른다.
"무, 무슨 일이에요?!"
텐트에 있던 신아람이 뛰쳐나와서 두리번거린다.
"아, 별거 아니니까 다시 들어가."
"예에? 스승님 입에 피나요. 괜찮으세요?"
"응? 쿨럭. 아냐, 아냐. 그럴 리가."
그러면서 슥 뒤돌아선 입가를 닦는다. 의외로 타격이 있었나본데.
물론 일자베기를 시전한 나도 멀쩡하진 않았다.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잖아.'
기존의 일자베기가 기력과 체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면, 12레벨의 일자베기는 마력까지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단 한번 사용했을 뿐인데 마력 고갈 증세가 나타난다.
'하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하니까.'
띠링.
『 귀환 조건 '일자베기의 레벨을 1 올리기 ( 1/1 )'를 달성하셨습니다. 』
『 제한 시간이 전부 소모 되었습니다. 잠시후 귀환합니다. 』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시야가 조금씩 하얗게 물들어 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이 다음 경지는 어떻게 가면 됩니까?"
"이 다음?"
내 말에 검성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기울였다.
"거기서는 창작의 경지만 있을 뿐이야. 일자베기의 확장성은 무한하다. 네가 가진 스킬과 기술을 조합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라. 공간검의 길은 거기에 있다."
13레벨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딴 소리를 한다. 그냥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어차피 가는 마당에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지금 일자베기 레벨이 12인데, 13으로 어떻게 가냐고요."
"으응?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는 신태양.
수련을 받는 동안 넌지시 물어봤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개소리말고 열심히하라는 대답뿐이었다.
마지막이니 뭔가 알려줄까해서 물어봤는데.
'쟤도 모르나본데.'
하얀 빛이 시야 가득 차 오른다. 신태양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모든 풍경이 아득해져 간다.
『 인과역전 재능 획득의 물약(유니크)의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
『 본래의 시공으로 귀환합니다. 』
* * *
잠시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부유감이 들더니, 중력이 거세게 나를 끌어당겼다.
'뭐야?'
그냥 돌아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한 공간에서.
나는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새하얀 세계의 사이로 무언가가 조각조각 떨어져 내린다.
'이건······.'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 하늘.
내가 두고 떠나온 멸망한 세계.
인파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다가오는 마계왕의 군세.
끝을 되새기는 나와 영훈이.
연설을 하던 최후의 5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때 있었던 일들이 영화의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쳐간다.
검은 마력 포탄이 떨어지고.
나는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말로 우연이었던걸까? 하필이면 왜 나였던건가.
지금 생각하면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마력 포탄 보호막을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가.
최후의 5인은 어째서 내 회귀를 막지 못했는가.
내가 회귀한 시점이 나도 모르는 게이트 안이었는가.
그런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뒤로하고.
무너진 세계의 틈.
그 안으로 당황하는 최후의 5인들이 보인다.
- 누가 들어간 거에요?
- 형! 지한이 형! 우리 형 돌려줘요!
나를 찾는 영훈이의 모습도 보인다.
'짜식, 형이라고 부르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모습. 그 모습에 웃음이 난다. 그래도 당하는 게 영훈이 녀석이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그 마지막 장면.
왠지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리더 천성호가 아닌 일반인 하나가 게이트에 삼켜졌다. 그 예상 못한 상황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인 게 당연했다.
그러나 혼자서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사내가 있었다.
최후의 5인 중 한 명.
대마법사 김민수였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손아귀에 남아 있던 검은 기운은 빠르게 흩어졌다.
마기인가? 알 수 없었다.
내 시야에 보이던 장면 또한 새하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민수······.'
정말로 그가 배신자였다는 건가?
그렇게 믿었던 최후의 5인 중 하나마저 우리의 편이 아니었단 말인가?
의문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다시금 몰려오는 부유감.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왜냐.'
시스템은 어째서 내게 이러한 장면을 보여주는 걸까.
내 기억의 일부? 그렇다기엔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담겨 있다.
아직 저 세계는 남아 있는건가?
아니면 지나온 과거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니, 뭐가 됐든 좋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나 확실한 건.
모두 내가 바꿔야 할 미래라는 거다.
* * *
나는 방 위로 굴러 떨어졌다.
『 재능 발화의 장에서 제한시간 내에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보상 '미약한 재능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
툭.
그 위로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짙은 남색을 띄는 퍼즐 조각이었다.
『 미약한 재능의 파편 』
- 소유자의 재능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 파편을 모아 상위 아이템으로 조합할 수 있습니다.
'와, 미친.'
드디어 나왔다. 정말로 재능과 관련한 아이템이었다. 나는 보물 다루듯이 파편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미세한 재능이라지만 내게는 큰 도움이 된다. 워낙에 없는 재능이다보니 이 조그마한 파편이 금조각처럼 느껴질 정도다.
'좋아.'
그때였다.
데구르르.
어디선가 회색빛의 철제 알이 굴러나왔다.
'맞아, 이 녀석도 있었지.'
『 이계 규율의 예외 규칙으로 '오르티마 알'을 가져옵니다. 』
스킬 말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손에 넣은 아이템이다. 알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굴러가서는 이불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저건 게이트 공략 때 데려가서 경험치를 먹이면 되겠고.'
고장나 있던 정보창을 확인해 봐야 했다. 참고로 미래에 있는 동안 줄곧 작동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이쯤 되면 될만한 거 아닌가.
파직.
'음······.'
얕은 스파크에 단념하려던 순간.
'됐다.'
『 < C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 저지( 0 / 1 )
- 클리어 보상 :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5배, 지정 스킬 한계 레벨 1증가 및 각성
기다림 끝에 떠오른 메시지 창이었다.
그 내용을 살피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퀘스트 목표에는 내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프로젝트 : 메이저 게이트.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마계와 우리 세계를 잇는 직통 게이트.'
프로젝트 마기를 통해 이 세계의 대기 환경을 마계와 비슷하게 조성하는데 성공한 마족들은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간다.
프로젝트 마기가 하위 마족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는 상위 마족을 위한 작전.
'하위 마족은 주변에 마기가 없으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 못한다만.'
이번에 처치했던 최하위 마족 우진형 또한 마기의 원천을 잃자 급격하게 힘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상위 마족들은 다르다.'
신체 내부에 축적하고 있는 마기 덕에 환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대신 놈들은 게이트를 넘을 때 마기의 손실이 발생한다.'
이 세계로 넘어 오기 위해 마족들은 두 개의 게이트를 넘어야 한다. 처음은 마계에서 게이트 내부로. 그 다음은 게이트 내부에서 이쪽 세계로.
단번에 이곳으로 넘어올 수는 없다는 거다.
'마계와 이곳을 한 번에 잇는 게이트가 바로 메이저 게이트.'
프로젝트 마기 다음으로 내가 막아야할 마족들의 계획이다.
'이걸 저지하려면 꽤 일이 커지겠는데.'
목표는 프로젝트의 완전 저지.
'백묵의 힘을 빌릴 때가 된건가.'
그러고보니 일어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었는데. 최유정에 관한 것도 아직 마무리 짓지 않았다.
나는 내친김에 스마트폰으로 백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이어진 뒤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 안녕하세요. 이지한씨. 백묵님의 비서 한유린입니다.
백묵이 아니었다.
- 현재 백묵님은 게이트 공략 중이십니다. 갑자기 공략에 참여하시게 되신지라, 이지한씨께 양해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갑작스런 공략? 백묵이 뭘하고 다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마족과 관련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마족인 우진형의 뒷조사를 하면서 그 실마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받아 본 종이에 특별한 내용은 없긴했지만.
-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의뢰하셨던 게이트를 찾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마기의 원천이 숨겨진 장소였다.
'잠깐.'
물론 마기의 원천 3개를 전부 찾으면서 이미 레벨업 퀘스트는 끝났다.
골렘이 있던 D급 게이트에서 하나, 황금왕 자볼에게서 빼앗은 것 하나, 마지막으로 최하위 마족이 가지고 있던 것 하나.
그런데 자볼이 가지고 있던 마기의 원천은 본래 대한민국에서 쓸 게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에 마지막 하나가 남은 이유다.
마기의 원천 하나로는 프로젝트 마기의 제대로 된 진행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제거할 수 있다면 해두는 게 좋다.
'문제는 여기를 지키는 권속이 메이저 게이트와 관련있는 놈이란 거.'
이건 미래에 갔다오며 새롭게 얻은 지식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셈. 때문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게이트 제가 공략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알아두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길드 두 개가 연달아 공략에 실패하면서 현재 '패럿' 길드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협회에서도 주시 하고 있고요. 특수 B급 게이트로 분류되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패럿 길드에 용병으로 참가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공략 일시는 바로 내일입니다.
몇 가지 정보를 더 전해 들은 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또 마족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이번 게이트 공략은 의미가 있다.
'그 권속을 조지면 메이저 게이트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데굴데굴.
나는 아까 전부터 방을 굴러다니는 알을 주워들었다. 동그란 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흔든다.
기분이 좋은건가?
'그래, 이 녀석을 부화시키려면 마수를 잡아서 경험치도 먹여야지.'
태양류 검술과 태양의 발걸음, 일자베기까지 시험해봐야 한다.
이것저것 할 게 많다.
* * *
다음날.
진세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저희 아빠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뵙고 싶대요. 저 아빠 때문에 아직도 병원에 있다니까요! 하여튼 빨리 와서 나 괜찮다고 말 좀 해줘요!!
조만간 하이텍트 사를 방문하게 될 것 같다.
'마침 잘 됐다. 게이트 공략 끝나고 나서 들리는 걸로 하자.'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게이트가 있는 장소까지 나왔다. 이제 돈 걱정 없이 택시를 타고 다니는다는 게 꽤 기쁘다.
아무도 없는 게이트 앞에서 장비들을 장착하는데 장비의 상태가 심각했다.
마족과의 전투로 넝마가 된 장비들.
'한 번 정도는 더 써도 될 것 같다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수리를 했을텐데. 흐름의 마족과 바실리스크 아종에게서 캐낸 마정석도 아직 처리를 못했다.
품질이 최소 B급 이상일텐데.
'재료들은 김건에게 줘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게 해야겠어.'
마족에게서 나온 마정석이니 뭔가 다를 게 나올지도 모른다. 우린 계약으로 맺어진 끈끈한 사이다.
계속 쓸만한 재료를 가져다줘서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기들도 한 번 꺼내 확인했다.
도끼 정령 파괴자, 회수의 창, 대검 마족 학살자.
'근데, 정령 파괴자 능력이 여기서 끝이 아닌 것 같은데······.'
무기 최대 레벨을 달성하고 획득한 부가효과가 근력 최대 레벨 1 추가다. 이름하고 다르다. 분명 더 숨겨진 능력이 있을 거다.
상태를 점검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 지한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
윤서현 헌터였다. 협회에서 파견 된 모양. 마침 잘 됐다. 협회에 관해서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협회에서는 별 말 없습니까?"
"아, 네. 별 반응은 없더라구요. 협회도 길드 눈치를 보느라, 미적지근하게 조사하던데요. 이번 사건은 쉬쉬하면서 넘어가자는 분위기에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거다.
은빛의 날개와 백묵의 영향. 거기에 대기업인 하이테크까지 끼어든 사건이다.
협회 내에도 마족은 존재한다지만, 보아하니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윤서현씨는요?"
내 말에 윤서현이 씩 웃는다.
"저야 뭐, 궁금한 건 이지한씨밖에 없······. 아."
그렇게 말한 윤서현의 얼굴이 점차 새빨게 졌다. 급하게 양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한씨한테 물어 보고 싶단 게 많다는 의미에요. 마족이 뭐냐. 그, 그런 거에요."
"알고 있습니다."
뒤로 돌아서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식히는 윤서현.
"윤지은씨는 괜찮습니까?"
"아, 우리 언니요? 잘은 모르지만 술을 엄청 마시더라구요. 은빛의 날개에 미래가 없다느니 뭐라니 저한테 주정 부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자기네 길드에서 사고가 난 게 많이 충격인가봐요."
그 정도까지인가?
은빛의 날개 사건은 내가 아는 과거에 비하면 굉장히 축소 되었다. 본래 사고로 죽어야 할 헌터들이 전부 살아 나왔다.
원래 사건이 어떻게 해서 묻혔는지가 오히려 궁금할 정도.
하여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바꾼 미래였다. 은빛의 날개가 다시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욱 짧아질 것만큼은 확실하다.
윤서현과 잡담을 조금 나누고 있자니, 이번 게이트를 공략할 길드원들이 도착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였다.
그 중 로브를 걸친 진한 눈썹의 남자가 윤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협회에서 오신다길래 걱정했었는데, 굉장한 미인분이 오실 줄이야. 반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형철입니다."
"아, 예······."
윤서현이 무표정으로 악수를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차가운 인상의 남성이었다.
"패럿 길드장 권시웅입니다."
윤서현에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나를 바라본다.
"그쪽은 용병?"
"예, 맞습니다."
"방해만 안되게 합시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별로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다.
용병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그렇기는 했다. 진짜 실력있는 사람들은 길드에서 활동하거나 영웅이 된다.
능력이 있는데도 굳이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용병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상관은 없다만.'
패럿 길드는 신생 길드기에 백묵과의 커넥션이 없다. 날 꽂아준 용병 사무소가 백묵과 연관이 있을 뿐이다.
근데 어째선지 윤서현이 조금 열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해당 특수 게이트는 두 번 공략에 실패한 상태에요. 협회 규정대로 깐깐하게 확인할테니 공략 잘 부탁드려요."
"예? 너무합니다. 좀 봐주십쇼."
그러는 사이 뒤에 있던 여성 길드원이 눈을 깜빡이며 다가왔다. 익숙한 흑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두, 두 분 다 잘 부탁드려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신아람.
미래에서 내 선배를 자처하던 검성의 제자.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
'이런 곳에 있었구나.'
권시웅과 이철형도 유명한 인물이다.
천재 창술사 권시웅.
만월의 연금술사 이철형.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후에 천재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다. 결국 마족한테 죽기는 하지만 그 능력은 보장되어 있다.
'권시웅은 성격이 더럽다고 했고, 이철형은 엄청난 짠돌이라던가. 뭐, 상관 없다만."
빌런이 아니란 거에 감사할 따름이다.
간만에 뒤통수 걱정없이 공략할 수 있겠구만.
그렇게 게이트로 입장하려고 하는데.
이철형이 우리를 멈춰세웠다.
"잠깐만요. 아직 한 사람이 안 왔는데. 특수 게이트라고 지원금이 나와서 한 사람 더 고용했거든요. 아, 저기 보이네요."
헐레벌떡 뛰어 오는 남자 하나. 어째 또 익숙한 얼굴이다.
"아,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는 달리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온다.
"······."
왜 빌런이 안나오나 했다.
52화 만월의 연금술사(2)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
그의 임무는 마기의 원천을 지키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프로젝트 마기의 실행 전까지 던전에 넣어두기만 하면 됐으니까. 마기의 원천이 존재하는 던전은 붕괴되지 않기도 하고.
근데 그걸 실패했다.
"하,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D급 던전에 숨겨져 있었을 마기의 원천. 던전은 공략 당하고, 마기의 원천의 행방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대체 거기에 있는 골렘을 어떻게 쓰러뜨린거야?'
D급 헌터만 입장 가능하는 제약이 무색하게 던전은 하루만에 클리어 되었다.
기껏 부하들까지 보냈건만, 전부 영웅 협회에 구속되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비, 빌어먹을······.'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후회하면 뭐하나, 이미 김상욱은 팬티 한 장만 걸친채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의 윗선은 마족.
그들은 임무에 실패한 자신에게 가차 없었다. 빌런 조직 흑결의 길드장? 그런 지위조차 마족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기록의 마족이시여, 제발 용서를······!"
마족이 가진 힘은 강대했다. A급 헌터인 자신이 조금의 반항도 못할 정도로 죽도록 맞았으니까.
이 어두운 지하에서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용서······. 그 말을 쉽게 입에 담는구나."
기록의 마족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권속들이 김상욱에게 칼날을 들이댔다.
"크, 크윽······."
김상욱의 눈 앞에서 마력이 담긴 시퍼런 날붙이가 흔들렸다.
기록의 마족.
그간 그의 아래에서 일한 바. 대단하게 여겼던 기록의 마족이 겨우 하위 마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의 힘이 이토록 강력하니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족들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다가오는 미래, 세계의 승자는 그들이 될 터.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도 물건너 갔다. 임무에 실패했으니까.
"형편 없는 놈."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김상욱의 귓가에 한줄기 희망의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기회를 주지. 특별히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대신 이번일이 수틀리면 네 녀석이 의식의 제물이 되어야 할거야."
"가, 감사합니다."
권속들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김상욱의 머리에 뿌렸다. 퉁퉁 부었던 얼굴과 온 몸에 난 시퍼런 멍들이 원상복귀 되어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록의 마족은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김상욱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마족의 권속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을 거다. 놈에게 내 이름을 대고 회수만 해오면 되는 일이지. 잘만 한다면 네 놈의 직위도 돌려주고, 특별한 힘도 하사해주마."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김상욱.
"그리고 게이트를 공략하려는 놈들은 전부 죽여라. 권속과 협력해도 되고."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지막 기회.
김상욱은 그 동앗줄을 붙잡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상욱은 용병으로 게이트 공략에 참가하게 되었다. 자신이 아는 인맥들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이로써 의심 없이 공략대에 숨어들 수 있었다.
* * *
나는 김상욱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현시점에서 김상욱은 빌런이 맞다.
빌런 조직 흑결의 수장이며 마족의 편에 붙은 배신자다. 동시에 A급 헌터이기도 했다.
'근데 왜 김상욱이 직접 나온거지?'
미래의 김상욱에게 들었을 때, 그는 대부분의 일을 흑결의 부하들을 시켰었다고 했었다. 직접 나섰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뭐, 대략 짐작은 간다.
'지난번에 마기의 원천을 못 지킨 죄를 물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의 위에는 기록의 마족이 존재한다. 놈의 명령으로 마지막 원천을 찾으러 온 거겠지.
'김상욱이라.'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미래의 김상욱 덕분에 김상욱에 대한 건 꿰고 있거든. 이번 게이트에 있을 마기의 원천······. 그것과 지식을 결합한다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다.
김상욱을 바라 보는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쳐졌다.
"그러면 모두 왔으니, 들어가시죠."
연금술사 이철형이 패럿 길드의 실질적인 리더인 모양. 그가 게이트 안으로 먼저 발을 내딛었다.
창술사 권시웅, 신아람에 이어 김상욱까지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모두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윤서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김상욱을 조심하죠."
"네? 왜요?"
"그냥 감입니다."
현재 내 랭크는 C급 상위. 김상욱이 A급이란 걸 고려하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감시자가 두 명이 되면 더 편해진다.
"지한씨는 그 감이 너무 잘 들어 맞아서 문제인데······. 일단은 알았어요. 김상욱을 조심해라 이거죠."
윤서현이 중얼거리면서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나도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확인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시야가 잠시 일렁였다.
짙은 나무들이 펼쳐진 숲. 나뭇잎 하나하나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어 꽤 장관이다.
'제약이 없다. 범위가 넓지 않은 제약인가?'
마기의 원천이 있는 게이트이니 제약은 분명히 존재할 터. 지금은 없어도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단 걸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스읍, 하."
연금술사 이철형은 공기 좋은 시골에 온 것처럼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마개를 열었다.
스으으······.
『 동료 이철형이 스킬 '특수 연금술 : 대기 조성 분석'을 발휘합니다. 』
다시금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뱉는다.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확실히 일반 게이트하고는 느낌이 다르군요. 마력 이외에도 특수한 기운이 섞여 있네요. 내부에 존재하는 마수들의 힘도 강해보이고요. 시웅아, 조심해야겠다."
"하, 너나 조심해라. B급 게이트인데 뭘 쫄아."
"그래도 변칙 게이트인데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벌써 앞의 두 길드가 실패했다잖아."
"그 놈들이 실력이 없는 거겠지."
권시웅이 앞으로 나서며 창을 붕붕 휘둘렀다. 내가 이전에 만났던 어중이 떠중이와는 다르게 권시웅의 자신감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근처 정찰부터 하고 온다."
창술 천재 권시웅.
후에 그런 별명이 붙는 창술사다.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당연했다. 그가 빠르게 숲 안으로 사라졌다.
이철형은 권시웅의 그런 태도가 익숙한지 근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보랏빛으로 부글부글 끓는 독샘. 오른쪽에는 기이한 형태의 형광 버섯들이 가득했다.
"크으, 여기 미쳤는데요? 역시 고등급 변칙 게이트일수록 마력 농도가 다르다니까. 자라나는 생물도 차원이 다른 게 맞네요. 오우."
연금술사로서의 피가 끓어오른다는 말을 하더니, 근처에 있는 풀숲으로 다가간다.
"거기 용병분들 이리 좀 와보실래요?"
내가 다가가자 이철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탐욕스런 미소였다.
"여기서 푸른색 띄는 꽃만 따주세요."
"······."
나중에 구두쇠, 짠돌이 같은 별명이 붙은 헌터답다.
"빨리 해주세요. 시간 없거든요. 저는 잠깐 다른 분들이랑 주변 정찰 좀 다녀오겠습니다."
"저 혼자만 땁니까?"
"아, 물론 아니죠. 김상욱씨도요. 용병이면 돈 받는 값을 해야죠."
이철형이 김상욱에게 손짓했다. 쳐다보고 있던 김상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보쇼, 내가 전투하러 왔지 고작 풀떼기나 따려고 온 줄 압니까?"
"못 하겠으면 돌아가시던가요. 어차피 그쪽 없어도 협회 분 포함하면 공략 인수는 맞으니까요."
대놓고 갑질이었다.
이철형이 눈을 찌푸리자, 어쩔 수 없이 김상욱이 수풀 위로 무릎을 꿇었다.
"씨발······."
그리 중얼거리면서 푸른색 꽃을 찾는다. 나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마기의 원천 회수가 간절하기는 한 모양.
나한테 마기의 원천 회수는 2순위다. 프로젝트인 메이저 게이트의 단서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건 간단하다.
이 게이트에 있을 권속을 처리하면 된다.
놈이 마기의 원천이랑 다음 프로젝트 단서까지 전부 들고 있으니까. 일석이조, 일거양득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다.
'근데 뭐, 이런 걸 시키나.'
나는 별 생각 없이 약초를 채취했다.
푸른색 꽃이라. 연금술에 사용되는 건가? 풀밭에 널린 게 푸른색 꽃이었다.
별 생각 없이 꽃을 집어드는데, 메시창이 떠올랐다.
'오.'
『 일반 스킬 '채집 Lv.1'을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채집 Lv.2'를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채집 Lv.3'을 획득합니다. 』
···
..
.
확실히 일반 스킬을 습득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미래에 다녀오면서 받은 미약한 재능 파편의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미세하게 재능이 올랐다지만, 10만배가 되니 체감이 바로 되네. 아니지 칭호 초성장까지 합치면 20만배일 거다.'
이제 일반 스킬은 가볍게 익힐 수 있다.
'생각치도 못하게 스킬을 얻었다.'
채집 스킬 같은 경우는 활용도가 높다. 채집할 수 있는 대상은 음식 재료부터 연금술 재료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걸 위한 채집꾼이 따로 존재할 정도.
'앞으로도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게 좋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꽃을 채집하는데.
"이 파란색 꽃이 중요한거죠? 그러면 저도 도울게요."
"저, 저도요."
윤서현과 신아람이 이쪽으로 가세했다.
"예? 아뇨, 여성분들은 그럴 필요 없는데······."
이철형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권시웅이 멀어진 장소와 여자들을 번갈아봤다.
"그, 그러면 같이 채집하면서 권시웅을 기다리죠. 그게 낫겠네요. 정찰은 그 녀석 전문이니까요."
태세를 바꿔서는 꽃을 뽑으러 온다.
근데.
이미 다 뽑았다.
"뭐, 뭔 손이 그렇게 빨라요?"
"손이 안 보였어요······."
윤서현이 기가 막히단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신아람도 마찬가지였다. 스킬의 위력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그 많은 잡초들 사이에서 푸른꽃만 쏙쏙 뽑아드는 내 손놀림은 내가봐도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하다보니까 되네요."
내 손에는 푸른꽃 한아름이 들려 있었다. 모아놓고 보니 꽤 그럴듯 하다.
『 스킬 '채집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채집한 약초의 효과가 10% 상승합니다. 』
굉장한 추가효과는 덤이다. 참고로 추가 효과는 헌터마다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 채집 스킬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푸른 꽃을 확인하는 이철형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내 손에서 약초를 가져가더니, 군침 가득한 표정으로 약초를 살폈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보존하셨을 줄이야. 이거 재능 있는 거 아닙니까? 채집꾼이 딱 이네요."
"······."
채집꾼에 소질 있다는 소리는 신박하네. 전혀 기쁘지 않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였다.
콰아앙!
숲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 * *
서둘러 달려간 장소에선 권시웅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상대는 도끼를 든 오크 두 마리였다.
콰앙! 콰아앙!
미래의 창술 천재라는 별명답게 화려한 창술이었다. 오크 두 마리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그 화려함에 비해 결정력은 부족했다. 권시웅의 창날은 오크들의 도끼를 쉽사리 뚫고 들어가진 못했다.
그럴만했다.
'마기의 영향을 받은 오크이니.'
이 게이트에 마기의 원천이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크는 B등급 일반 몬스터지만, 마기가 간섭한다면 B등급 상위까지 그 강력함이 치솟는다.
카앙!
오크 한 마리의 도끼질에 권시웅이 밀려났다. 이철형이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이야, 천하의 권시웅이 오크 상대로 고전을 다하십니다? 이거 내가 도와줘야 하나? 약화 포션이라도 던져줘?"
"꺼져, 도움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선 바로 오크들에게로 달려가는 권시웅. 그래도 전투는 권시웅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두 오크의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도와준다니까."
연금술사 이철형이 나이프를 들고 전투에 가세했다. 그의 나이프가 오른편에 서 있던 오크의 허벅지를 찔렀다.
취이익!
권시웅이 짜증난다는 듯 소리쳤다.
"도움 필요 없다니까!"
"그게 아니야, 오크 냄새가 짙어졌다니까. 다른 놈들도 여기로 다가오고 있어. 빨리 처리해야 해."
맞는 말이다. 냄새로 알아챈 건 대단한데.
마찬가지로 내 통찰 스킬도 경각을 울리고 있었다. 숲 너머로 오크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고, 오크가 온다고요? 이거 진짜 큰일이네."
배신자 김상욱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간파 스킬을 안 써도 뻔하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느라 힘들어 보인다.
취익, 취익!
곧장 뒤편에서 오크 세 마리가 나타났다. 나는 대검을 꺼내 들었다.
"세, 세마리나."
신아람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김상욱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하십니까? 빨리 싸우죠."
"윽, 그, 그래. 싸워야지."
내가 뒤쪽에서 응시하고 있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단검을 들어 올린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본모습을 드러내려나. 그래도 우리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긴 버거울테니 섣불리 배신하진 않겠지.
"윤서현 헌터는 뒤에서 보조 부탁드립니다."
"네, 물론이죠. 맡겨만 줘요."
미래에서 배워 온 기술을 써먹어 볼 때가 되었다.
『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11'을 발휘합니다. 』
내 몸에 따스한 빛이 깃드는 순간, 나는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 반응한 오크 하나가 도끼를 들어 올렸지만 한 발 늦었다.
『 스킬 '태양류 검술 Lv.11'을 발휘합니다. 』
서걱—.
내 대검이 오크의 목을 갈랐다. 발을 내딛는 것과 오크의 목을 베어내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데굴.
'응?'
단 한 번의 참격에 오크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데몬헌트도, 일자베기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검격이었는데.
취, 취익······.
그 모습에 당황한 오크 두 마리가 뒷걸음을 친다.
『 스킬 '위압 Lv.11'을 발휘합니다. 』
권시웅이 고전하길래 꽤 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이야. 심지어 아직 일자베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태양류 검술 대단하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니 그 효과가 더 크게 체감된다.
아직 전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대검을 거둬들이고 다른 오크에게로 달려들었다.
취익, 취익!
그 순간, 숲 속에서 오크 세 마리가 더 튀어나왔다. 이걸로 총 다섯 마리가 됐다.
방금 전 상황을 모르는 놈들은 바닥에 쓰러진 동료 하나를 보더니 씩씩거리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나야 좋다.
왠지 질 것 같은 기분이 안든다.
"좋아, 경험치 파티다."
배낭에 넣어둔 오르티마 알이 기쁜 듯이 움직였다.
53화 만월의 연금술사(3)
촤아악!
이지한의 대검이 오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검무.
그 앞에서 오크들은 무력했다.
취익! 취, 취익!
수세에 몰린 오크 하나가 저항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마기가 둘러진 신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스륵.
그러나 이지한은 미끄러지듯 가볍게 피해내고선, 대검으로 오크의 팔을 잘라냈다. 펼쳐지는 일련의 동작들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어우."
그걸 지켜보던 배신자 김상욱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김상욱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지, 뭘 감탄을 하고 있냐.'
현란한 발놀림과 검술에 김상욱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구경해 버렸다.
'젠장, 뭐 저렇게 잘 싸우는거야? 상대는 마기를 두른 오크인데.'
오크가 무엇이던가. 지능은 조금 떨어지지만, 뛰어난 근력과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생물이다.
거기에 마기가 더해졌으니 그 파괴력은 압도적일 수밖에 없어야 하는데······.
눈 앞의 용병 이지한은 신들린 듯한 움직임으로 오크의 도끼를 피하고 있었다. 애초에 맞지를 않으니 오크의 힘이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었다.
'이거 틈이 안 나겠어.'
기록의 마족이 김상욱에게 내린 명령은 공략자 몰살 및 원천 회수.
기회를 봐서 전부 쓸어버리려고 했건만. 저렇게까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움직이기 곤란하다.
이거 일이 어렵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직감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천천히 하자.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
김상욱은 심호흡을 하며 초조한 마음을 다스렸다. 괜히 실수할 바에는 확실하게 권속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는 방법이 더 좋을테니.
그전까지는 조용히 숨죽여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오크 세 마리는 순식간에 쓰러졌다.
"후우."
나는 대검을 땅에 박고 몸을 기댔다. 기가 막힌 기술이지만 체력과 마력 소모가 상당하다.
'수련의 성과가 확실하기는 하구만.'
태양류 검술과 태양의 발걸음.
이 스킬 두 개가 조합되니 오크들은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쓰러졌다. 놈들이 두른 마기가 무색할 정도다.
보법으로 유리한 간격을 만들고, 화려한 검술로 적을 유린한다.
'일자베기와 데몬 헌트는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
태양류 검술이 대단하긴 했다. 검성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검술이기에 현 시점에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으니.
지금의 신태양이 가지고 있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사실상 미래의 기술과 능력.
『 펫 '오르티마 알'이 압도적인 양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오크들에게서 빠져나온 빛이 배낭에 있는 알에게로 스며들었다. 기쁘다는 듯 흔들리는 알. 평상시와 같다.
'그래, 그래. 많이 먹어라.'
어차피 나는 먹지도 못하는 경험치 너라도 받아야지. 인과역전의 상점이 개방되지 않는 탓에 포인트도 획득이 안되고 있다.
오크 세 마리.
칭호 초성장과 특성 무재조정을 합쳐 20만배의 경험치다. 일반적인 펫이었다면 알을 뚫고 나와 벌써 성체가 되었을 양이지만······.
이 놈은 다르다.
'확실히 보통 펫은 아니야.'
영웅들이 가져다 버릴 만했다.
경험치를 20만배로 때려 부었는데도 부화하지 않는 알이라니? 당장에 가져다 버리는 게 당연하다.
'미래의 마수들은 전부 오크들보다 몇배는 강력했을텐데.'
그래도 나중에 신수로 변할 가능성을 품은 귀한 놈.
열심히 먹여 키우는 수밖에.
"······실력이 그 사이에 늘었네요."
뒤에서 보호막을 걸어주던 윤서현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지, 설마 기술을 숨기고 있었다거나? 지금도 뭔가 감춰두고 있는 거 맞죠?"
어느새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있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얼버무리려고 하는데, 앞쪽에서 전투를 끝낸 권시웅과 이철형이 다가왔다.
"말했잖아. 별 거 아니라니까."
"저희는 벌써 오크 두 마리를 쓰러뜨렸습니다. 그쪽은 괜찮으셨나요?"
나름 치열했던 전투를 자랑하려는 건지, 권시웅은 창 끝에 오크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그런 권시웅의 시선이 내가 처리한 세 마리의 오크에게로 향했다.
"그래, 네 명이서 열심히 잡았나보군. 나쁘지 않은 실력이네."
그러면서 피식 웃는다.
"어이, 뭔 소리를 하는거야. 이거 이 친구 혼자서 전부 쓰러뜨린거라고."
뒤에 서 있던 김상욱이 코웃음을 치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이러냐, 이 놈은 또. 아까 등 뒤에서 호시탐탐 나만 쳐다보더만.
권시웅이 못 믿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세 마리를 혼자서? 그 짧은 시간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면서 오크 시체를 뒤적뒤적 거린다. 절단면을 확인하는 모양.
권시웅은 자존심 더럽게 강하기로 유명했다. 등급은 F급부터 시작했지만, 압도적인 재능으로 주변의 헌터들을 모두 제치고 성장해왔다고 들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잘난 줄 알게 된 유형. 실제로 잘난 것도 맞다만.
"······."
오크 사체의 상처를 대조해보던 권시웅이 나를 쳐다봤다. 약간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꽤 하네."
그렇게 중얼거린 권시웅은 숲 너머로 사라졌다. 재밌는 사람이었네.
이철형이 사람 좋은 척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저희도 뒤따라 갑시다. 아, 가면서 소재 채취하는 것도 잊지 말아주세요."
"아니, 씨발. 내가 풀뿌리 캐러 여기에 왔어?"
김상욱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병이면 용병답게. 돈 드린 만큼은 좀 해주세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시던가요. 자, 여성분들은 이쪽으로······."
"······."
김상욱 입을 다물게 하는 걸 보니 이철형도 만만찮은 또라이가 맞다.
"이상한 사람들 진짜 많네요. 걱정마세요. 벌써 많이 체크해 놨어요. 이런 부당 지시는 전부 길드 벌점으로 들어갈 거에요. 지금이야말로 협회의 권력을 휘두를 때죠."
열심히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던 윤서현이 내게 말했다.
"······참 위안이 되네요."
"그럼요. 잠깐, 방금 비꼰거죠?"
이철형을 따라 이동하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어?"
『 마(魔)를 추종하는 자의 영역에 진입하셨습니다. 』
『 열화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간접적인 제약이 발생합니다. 』
권속의 출현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 영향권 내의 생물은 '중독' 상태가 됩니다. 』
『 체력과 마나가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
제약이 발생했다.
* * *
제약이 나타났다.
그 내용은 중독.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작스런 이상 현상에 앞서나갔던 권시웅도 돌아왔다. 실제로 체력과 마나가 시시각각 깎여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숲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제약은 요즘 등장하는 변칙 게이트에서 간혹 발생하는 일이에요. 최근에 변칙 게이트가 많이 나타나는 건 아시죠? 그 중에서도 특히 위험하다는 거에요."
윤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 이어나갔다.
"이게 나타났으면 근처에 더욱 강한 마수가 있다는 의미에요. 아까 상대했던 오크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놈이 있을 거고요."
윤서현은 나를 제외하고 제약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이기도 했다.
"공략을 중지하고 협회에 지원을 요청하죠. 지금 제 말 듣고 계신거죠?"
이철형은 그런 윤서현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바닥에 캠프용 버너를 설치했다. 인벤토리에서 솥을 꺼내서 그 위에 얹었다.
이것저것 들이붓더니, 아까 얻었던 푸른 꽃들을 뿌린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심각한 상황이라니까요."
"에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국자 같은 걸로 솥을 휘휘 젓는다.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뭘 하려는지는 알겠다.
"이번 공략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요. 협회분들까지 부르면 수지가 안맞아요. 여기 있는 마수들 저희가 전부 사냥하고 갈 겁니다."
솥 내부의 액체가 푸른 형광 빛을 띄기 시작했다. 포션의 완성이었다.
이철형은 병을 꺼내더니 국자로 능숙하게 포션을 담았다. 그걸 윤서현에게 내밀었다.
"지속해서 깎이는 체력과 마나? 그 정도론 저희 길드 못 막습니다. 지속 회복 포션이니 한 번 드셔보십쇼. 효과 좋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자자, 일단 드시고 말씀하시죠."
이철형은 이어서 권시웅과 신아람에게도 포션을 나눠줬다.
포션을 받지 못한 김상욱이 성질을 냈다.
"어이, 나한테는 안 줘?"
"예? 가지고 계신거 드셔도 되지 않습니까."
"······에이씨, 치사해서 안 먹는다."
포션을 안 받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자연 회복 스킬이 있어 괜찮다. 이번에 미래에서 배운 호흡법 덕분에 컨디션이 적정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지한씨, 이거 받아요. 패럿 길드원 분들 생각이 어떻든 간에 전 협회에 지원 요청하러 갈게요."
짜증이 난 듯한 윤서현이 내게 포션을 넘겼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저희가 공략을 다 끝낼텐데요.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시죠."
전형적인 자신감 과잉이다.
이철형과 권시웅.
둘 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한 번도 실패를 해본 적이 없을 거다.
윤서현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지한씨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
"전 이 사람들을 따라서 계속 공략할 겁니다. 그래도 지원이 있으면 좋을 겁니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곤란한 사람이 하나 발생한다.
"거, 그냥 빨리 빨리 공략합시다. 다같이 움직이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에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게 낫지 않나?"
바로 김상욱이었다. 그는 땀까지 삐질 흘려가며 윤서현을 설득하려고 했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아뇨, 지원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맞겠네요. 그럼 다녀올게요. 신아람씨는 계속 공략 하실 건가요?"
"네, 일단은요······."
"어, 어이 잠깐만! 쫌!"
필사적인 김상욱을 뒤로하고 윤서현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공간이 일렁이다 이내 잠잠해졌다.
"아쉽긴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끼리라도 빨리 공략하는 게 상책이죠."
이철형은 물약을 다섯병 정도 만들고선 도구들을 정리했다.
"쯧, 쓸데 없이 시간만 지체됐네."
권시웅은 다시 창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제약에도 불과하고 공략은 계속 되었다.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제약이 있다.
지금은 중독의 제약 뿐이지만, 곧 이곳에는 두 개의 제약이 존재하게 될 거다.
아직 마기의 원천이 만들어내는 두번째 제약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은 미래에 영웅이 될만한 새싹이다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인류가 상대할 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결국 그런 건 한 번 굴러봐야 아는 거니까.
- 천재라고 하는 놈들 죄다 온실 속에서 자라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결국 답은 뭐다? 뒤지도록 굴러봐야 정신을 차려. 나도 그랬고.
미래의 검성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 * *
"이 정도야 쉽지. 별 것도 없군. 그 여자는 뭘 그렇게 소란을 피운거지?"
"협회 사람들 까다로운 게 하루이틀 일이겠어."
처음 몇 번의 전투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보스를 찾아 이동하면서 마주치는 오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전투의 빈도가 급격하게 잦아졌다.
"뭐가 이렇게 많아······!"
권속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놈은 우리 위치를 보고 계속해서 오크들을 보내고 있는 거다.
"보스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거야?"
"일단 좀 쉬어도 될까요······?"
다섯 번째 전투를 끝마쳤을 때는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중독의 제약은 계속해서 우리를 갉아 먹고 있었고.
특히 김상욱의 표정이 제일 안 좋았다.
"이제 내 포션도 다 떨어졌는데 그것 좀 주지?"
김상욱이 이철형이 들고 있는 푸른 포션을 가리켰다. 마력과 체력을 동시에 회복 시켜주는 좋은 물약이다.
이철형은 고민하는 척 턱에 손을 얹었다.
"저희도 사용해야 되는 거니 그냥 드릴 순 없겠는데요."
"개소리 작작 좀 하지. 그냥 만들면 되는 거잖아. 여기 널린 게 재료인데."
"하지만 기술은 제 거죠.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고요."
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이철형이 씩 미소를 지었다.
"특별히 개당 5백만 원에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긴 게이트 안이니까 가격이 더 붙는 건 당연하죠. 싫으시면 안 팔겠습니다. 이지한씨도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5백만 원입니다."
이거 누가 빌런인지 모르겠다. 뭐, 이철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돈을 지극히 밝히는 짠돌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김상욱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 씨발, 이지한이라고 했지. 그쪽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저게 말이 되냐고! 인간된 도리로서 저게 할 말이야?"
나한테 호소하기까지 한다.
다 좋은데 니가 할 말은 아니잖아. 이 미친놈아.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것 같아요."
뒤에서 잠자코 있던 신아람까지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순간이었다.
『 마도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이제 포션을 사용한 회복이 불가능해집니다. 』
"뭐, 뭐야?"
"제약이 하나 더······?"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보고 있었나보군.'
권속은 이 근처를 맴돌며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을 거다.
놈은 마기의 원천을 다뤄서 새로운 제약을 생성해냈다.
마족들의 성유물인 마기의 원천은 제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우리가 포션을 통해 제약을 극복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챈 모양.
"이철형. 이게 어떻게 된거냐? 포션이 안 먹히는데."
권시웅이 빈 포션병을 이철형에게 들이밀었다. 이철형도 급하게 꿀꺽꿀꺽 포션을 마셔봤지만 조금도 회복되지 않는다.
"이게 말이 돼······?"
이로써 두 개의 제약이 중첩되었다.
"거, 괜히 잘난 척 하더니 꼴 좋구만."
김상욱이 조소했다.
그들이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나는 캠핑용 버너를 켰다. 지난번에 라면 먹을 때 구매해놨던 거다. 냄비를 올리고서 가지고 있던 생수를 부었다.
"포션 없이 공략하는 건 안 되겠어. 돌아가자."
"지금 이대로면 돌아가다가 죽는다. 보스 머리만 따면 되는 문제 아닌가? 차라리 이 원흉을 제거하는 게 나아."
유감스럽지만 보스를 잡아도 제약은 안 없어진다.
이건 권속의 짓이니까.
그들이 잠시 논의를 거치는 동안.
나는 진지하게 물을 끓였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푸른색 꽃들을 짓이겨서 정성스럽게 뿌렸다.
이철형 덕분에 이게 물약의 재료란 걸 알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길드원들의 실랑이에 지친 신아람이 내게로 슬쩍 다가왔다.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도 연금술 한 번 해보려고요."
"네?"
마지막 꽃잎을 물 위에 넣는 순간.
『 일반 스킬 '기초 연금술 Lv.1'을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기초 연금술 Lv.2'을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기초 연금술 Lv.3'을 획득합니다. 』
···
..
.
『 일반 스킬 '기초 연금술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제작한 포션의 효과가 15% 증가합니다. 』
'성공이다.'
예상했던대로 연금술 스킬이 생겨났다. 채집 스킬과 마찬가지로 일반 스킬은 적절한 상황만 뒷받침 된다면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미래에서 얻은 재능의 파편의 체감이 꽤 크다.
물 위에 떠오른 꽃의 푸른 액상이 물감처럼 퍼져나갔다.
『 스킬 '기초 연금술 Lv.10'을 발휘합니다. 』
『 아이템 '하급 물약'의 제조에 성공하셨습니다. 』
나는 포션을 종이컵에 담아서 신아람에게 건넸다.
"포션은 이미 통하지 않게 된 거 아닌가요?"
"한 번 드셔보세요."
신아람은 의아해하면서도 종이컵에 담긴 포션을 마셨다. 이내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엄청 맛있어요."
아, 요리 스킬 때문인가.
근데 그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다.
종이컵 한 컵을 순식간에 다 비운 신아람이 눈이 더욱 커졌다.
"포션이 효과가 있어요! 어떻게 하신거에요?"
"영업 비밀입니다."
당연하다.
『 칭호 : '마계의 재앙'을 발휘합니다. 』
이 칭호의 효과는 마계에서 데미지를 올려주는 게 끝이 아니다.
『 해당 필드는 마계가 아닙니다. 1번 효과는 발휘되지 않습니다. 』
진짜는 두번째 효과에 있다.
『 마도 - 제약 무시 5%를 발휘합니다. 』
그리하여 내가 만든 포션은 제약을 조금이나마 무시한다. 5%이긴 하지만 중독을 막을 정도는 된다.
"뭐? 포션이 효과가 있다고요? 어디 봅시다."
"뭐야, 그런 게 있었으면 빨리 말했어야지."
뒤에 있던 이철형과 권시웅이 관심을 보였다. 김상욱은 바닥에 기절해 있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더니 결국 쓰러졌다.
"진짜로 이런 허접한 물약이 통한다는 겁니까? 뭐합니까, 빨리 줘봐요."
이철형이 당연한 듯 내게 손을 내민다. 그의 안색도 나빠져 있었다. 중독의 제약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이대로면 지금부터 돌아가도 위험하다.
나는 쓱 그를 올려다봤다.
어차피 내가 할 말은 뻔하다.
"한 컵에 2천만 원."
54화 적혈의 버서커(1)
"한 컵에 2천만원······? 그게 말이 됩니까? 어디서 조잡한 연금술을 배워서 만든 건가본데, 그쪽 포션은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이철형이 기가 차다는 투로 말했다.
"싫으면 버리겠습니다."
나는 냄비의 내용물을 그냥 바닥에 버리려고 했다. 이철형이 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 잠깐. 잠깐만요."
그는 진한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물었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거 확실합니까?"
이미 포션을 마셔 본 신아람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신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이지만 체력이랑 마력이 회복됐어요. 그래도 중독 증상보다는 훨씬 많이 회복되요."
"하, 진짜 이상하네. 왜 내 물약은 안되고 그쪽 물약은 된단 겁니까?"
칭호 '마계의 재앙' 덕분에 나는 제약의 5%를 무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약을 뛰어넘는 물약이 탄생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효과가 있는 물약은 내가 만든 것 뿐이다.
"그래서 안 사실 겁니까?"
그런데 김상욱이 조용하다. 또 돈 받고 파냐면서 노발대발 할 줄 알았는데. 슥하고 옆을 보니 김상욱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기절했나.'
생각보다 한계에 달했던 모양이다. 자존심 챙긴다고 끝까지 버티는 이 놈도 대단하다.
'권속이 자기를 죽일 리 없다고 판단한건가.'
어쨌든 빌런 하나를 처리해야 했는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제약의 단점은 피아구별이 안된다는 거지.
아군은 물론이오, 권속이나 마족조차 제약에서 벗어날 순 없다.
나는 다시 인상을 쓰고 있는 이철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참 나."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뭐라고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나 보다.
보다못한 권시웅이 나섰다.
"그냥 돈 주고 빨리 사. 이런 데서 실랑이 할 시간 없어."
"이딴 포션을 한 컵에 2천만 원이나 주는 게 말이나 되냐?"
마셔보면 생각이 달라질텐데. 그리고 기초 연금술 Lv.10으로 만든 포션인데 이딴 포션이란 말은 너무하지.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본데.'
뭐, 나도 이걸로 장사하려는 생각은 없다. 나는 국자로 냄비 끄트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돈이 부담되신다면 돈 대신에 다른 걸로 받죠. 이철형씨 연금술을 전수 받는 걸로."
"뭐요?"
"이상하게도 제 포션만 효과가 있는 상황이니까요. 이철형씨에게 연금술을 배워서 포션을 제조하면 서로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이철형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가 다시 한마디 꺼내려는 순간 권시웅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야, 빨리 가르쳐주고 공략이나 끝내. 어차피 가르쳐줘 봤자 1레벨일 거 아니야."
그는 공략이 지체 되는 게 영 마음에 안드는 듯 했다. 매서운 그의 말에 이철형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여전히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후우, 좋습니다. 가르쳐드리죠. 대신 포션은 무제한으로 제공해주시는 겁니다?"
"게이트 내에서라면 얼마든지요."
"그리고 하는 김에 저기 쓰러진 분한테도 먹입시다."
"네, 그러죠."
자기 포션 아니라고 김상욱에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모습 참 보기 좋다. 당장 몇 억 버는 것보다 이철형에게 연금술을 배우는 게 이득이다. 나중에 재료가 생기면 언제든지 가져다 팔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전수받은 스킬은 순식간에 스킬 만렙을 찍을 수 있다. 어쩌면 이철형의 포션보다 더 좋은 품질의 포션이 나올지 모른다.
"이거 어디가서 유포하고 다니면 안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알려주시죠."
그렇게 이철형의 연금술 강좌가 시작되기 전, 파티원들은 내가 나눠준 냄비에서 포션을 퍼서 마셨다.
"음?"
별 생각 없이 한 모금 먹은 권시웅이 계속해서 포션이 담긴 종이컵을 들이켰다.
"무슨 포션이 이런 맛이······."
"권, 권시웅님! 천천히 먹어요. 저도······."
긴가민가하던 이철형도 포션을 마시고선 표정이 변한다.
"씁, 그 쪽. 재능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뭘 넣은 겁니까? 약재의 특성상 포션이 맛있기는 어려운데 말입니다."
일반 스킬이긴 하지만 스킬 레벨을 올리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요리와 연금술 스킬 두 개를 만렙 찍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
갑질 다 부려놓고 이제와서 재능 운운하고 있다. 나는 무감하게 말했다.
"연금술이나 알려주시죠."
* * *
만월의 연금술사 이철형.
확실히 그는 천재였다. 그의 포션 방식은 여타 연금술사들과는 달랐다. 특히 다른 점을 꼽자면 마력의 운용.
포션을 만들 때 마력을 사용해 재료의 효과를 더욱 강화시킨다. 좋은 성분은 더 좋게 나쁜 성분은 더 나쁘게.
다행인 점은 가르치는 재주가 뛰어났다는 것. 신태양 같은 감각파가 아닌 철저한 이론파였다.
"재료들이 섞이는 시기와 마력을 불어 넣는 타이밍만 알려드린대로 정확하게만 맞춘다면 될 겁니다. 뭐, 아무리 전수라고는 해도 그렇게 쉽게는 안 될겁니다."
『 레어 스킬 '철형(鐵形) 연금술 Lv.1'을 전수 받으셨습니다. 』
말과 달리 금세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이철형의 세세한 설명 덕이었다. 가르치는 것도 재주라더니 확실히 잘한다.
검성의 설명이랑은 딴판이다.
여기에 내 통찰과 기억 탐색이 더해지니 전수 받는 건 순식간이었다.
근데 스킬 이름은 어떻게 좀 안되는 건가.
'마력을 부여하는 게 좀 귀찮네.'
나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가 없다. 여전히 체인지 웨펀의 부가효과에 의존하고 있다.
"마력 부여 방식이 좀 독특하긴 하지만······. 뭐, 그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무기를 교체했을 때 감도는 마력을 냄비에 가져다대서 해결했다. 조만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스킬을 구해봐야겠다.
"스킬 유출하면 정식으로 고소할겁니다. 만들어서 파는 건 맘대로 상관 않겠지만요. 이제 그쪽이 포션을 만들어 줄 차례입니다."
철두철미하게 계약서까지 꺼내서 사인을 종용했다. 기술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글자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고서 사인을 했다.
어차피 나 혼자 꿀빨거라 유출 걱정 없다. 나는 이철형이 가르쳐 준대로 재료를 넣고 솥을 저었다.
하는 김에 장비까지 빌렸다.
『 스킬 '철형(鐵形) 연금술 Lv.1'을 발휘합니다. 』
『 해당 스킬이 대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
촤르륵.
눈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들.
스킬 레벨업이 연달아 이어지더니 결국 레벨이 10에 도달했다.
『 스킬 '철형(鐵形) 연금술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연금술 위력 25% 증가 』
나는 완성된 포션을 병에 담아 나눠줬다. 내 손에서 탄생한 상급 물약이었다. 찰랑이는 푸른 액체가 희미한 빛으로 반짝인다.
"······이건 내가 만들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이럴 수가 있나."
포션을 받아든 이철형이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재료를 열심히 뿌려서 스킬의 레벨을 올렸다.
『 스킬 '철형(鐵形) 연금술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연금술 위력 25% 증가 ( 총 50% ) 』
미친 추가 효과가 붙었다. 이걸로 내가 만드는 포션은 1.5배의 효과를 가지게 된다. 비단 포션말고도 연금술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이런 게 천재라는 건가···."
혼자서 병을 이리저리 확인하던 이철형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아까 전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는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혹시 저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알지 모르겠지만, 이지한씨는 연금술에 엄청난 재능이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제 연금술이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제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배워보는 건 어떻습니까?"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한다. 나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꺼져······.
짠돌이 이철형 밑에서 쥐어짜이는 건 사양이다.
"거, 그러지마시고······."
전수자 옆이라 냉큼 11레벨을 찍었다. 신태양 때만큼 놀라지는 않는다.
그가 내 경지를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한몫한다. 일자베기랑 달리 11레벨과 10레벨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돈은 섭섭하지 않게 드릴테니까······."
엉겨붙는 이철형을 밀어내고 있을 때였다.
"오크가 나타났어요!"
"취익! 취이익!"
다시금 오크 무리가 진격해왔다. 열 마리 가량 되는 숫자. 나는 서둘러 포션을 나눠주었다.
5%의 제약 무시.
치료 성능은 떨어져도 제약을 상쇄하는 효과는 확실할 거다. 포션을 순식간에 들이켠 권시웅이 창을 들고 앞으로 뛰어 나갔다.
푸욱! 푸욱!
날카로운 창이 오크들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었다. 처음보다 확연하게 좋아진 움직임이었다.
"이 놈들 힘만 강하지 별 거 없네."
과연 천재라는건지, 전투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철형은 품에서 독이 발린 단검을 던져 댔다.
신아람도 오크들의 공격을 정석적으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내가 만든 포션이 있는 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김상욱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은 괜찮네.'
제약 때문에 죽으면 곤란하다. 김상욱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거든. 마냥 편하게는 보내줄 수 없다.
나도 내가 만든 포션을 들이켰다. 기가 막히게 시원한 청량감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어서 체력과 마력이 차올랐다.
취익, 취익!
근데 어째 바닥에 쓰러진 김상욱 주변으로 오크가 많이 몰려든다. 심지어 놈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김상욱을 향해 있었다.
'김상욱을 데려가려는 건가.'
그렇게는 안된다.
나는 곧바로 오크들에게로 뛰어들었다.
촤아악! 촤악!
대검이 오크들을 단숨에 갈라냈다. 지금의 내게 오크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5%의 제약을 무시하는데다가 자연치유 덕분에 체력과 마력을 온존할 수 있었던 탓이다.
태양의 발걸음으로 오크 사이를 파고들어 놈들의 머리를 잘라냈다. 마기를 두르고 있는 상대라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다.
데몬헌트 스킬이 적용된 마족 학살자가 가늘게 떨렸다. 더 많은 마수를 죽이고 싶다는 듯한 느낌이다.
『 오르티마 알의 고동이 강해집니다! 』
'그래, 너도 있었지.'
오크를 잡을 때마다 모든 경험치는 배낭 속 알에게로 흘러들어갔다. 레벨이 따로 표시되진 않아도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흡수하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쿠웅!
그때 도끼가 어깨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방어구 덕분에 피해는 없었지만 방어구의 내구도가 상당히 소모 되었다.
한 대만 더 맞으면 방어구가 깨지게 생겼다.
'더 집중하자.'
아직 권속과의 싸움이 남아 있다. 컨디션 조절은 필수였다.
『 스킬 '태양류 호흡법 Lv.10'을 발휘 합니다. 』
『 소모되는 기력과 마력이 10% 감소합니다. 』
나는 더욱 호흡에 신경쓰며 오크들을 차례차례 베어나갔다. 놈들은 멸망한 세계에서 상대했던 고블린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오크들을 대부분 정리해가던 무렵이었다.
쿠우웅!
숲 한쪽에서 나무 세 그루가 동시에 쓰러졌다. 그 굉음에 파티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서 덩치 큰 오크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얼굴 위로 크게 찢어진 상처를 가진 녀석은 흑색의 도끼를 거머쥔 채 말했다.
"취익, 동포, 학살, 인간 죽인다."
동시에 붉은 눈을 번뜩였다.
"뭐야, 저건. 오크 주제에 말을 하잖아. 웃기군."
권시웅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높은 지능과 인간의 언어는 네임드 마수의 증거다.
'언어가 불완전한 걸 보니, 아직 네임드 마수는 아니지만······.'
마기를 두르고 있으니 분명 그 정도 급에 필적할 거다.
"다들 가만히 있어라. 내 창으로 처리한다."
권시웅이 가장 먼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달려나갔다.
크어어!
오크는 크게 괴성을 내지르더니 검은 도끼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검은 마기와 함께 땅이 솟구쳐 올랐다.
"크아악!"
그 충격파에 권시웅이 휩쓸렸다. 자신만만했던 것 치고는 너무도 간단하게 당했다. 그 일격에 권시웅이 튕겨져 나갔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오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함이다.
근처에 있던 이철형과 신아람이 그를 구하겠다고 달려나갔다.
오크의 도끼에서 검은 마기가 넘실거린다.
놈은 좌에서 우로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놈의 도끼에서 펼쳐진 마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이철형과 신아람이 동시에 튕겨져나갔다.
"커허억."
이철형은 그대로 기절.
"꺄악!"
신아람은 바닥을 서너번 구르고 나무에 부딪히고나서야 멈췄다.
'이런.'
나는 급하게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신아람에게 포션을 줘야 한다. 그래도 미래에서 선배였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직.
메시지창이 내 눈 앞으로 떠올랐다.
『 무재조정과 관련한 시스템이 복구 되었습니다. 』
『 한계돌파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무재조정의 새로운 특수효과가 개방됩니다. 』
'뭐야, 이 타이밍에······.'
『 '무재조정:타재간파(他才看破)'를 획득합니다. 』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해 신아람의 앞으로 다갔다. 꽤 심각한 상처. 급하게 포션을 들이부었다. 아니, 들이부으려고 했다.
우우웅!
갑자기 방출된 붉은 기운이 나를 거세게 밀어냈다. 순간 오크의 마기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신아람의 능력인가?
'크윽, 뭐야?'
스윽.
쓰러져 있던 신아람이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을 들어 올렸다.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검 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검 위로 핏줄처럼 엉겨붙은 붉은 기운이 맥동했다.
'······!'
그런 신아람의 눈에는 황금빛 이채가 서려 있었다.
스륵.
그녀의 흑발을 묶고 있던 끈이 풀리며 머리카락이 둥실 떠올랐다. 붉은 기운이 접근을 거부하듯 그녀의 몸을 감싸고 돈다.
'잠깐, 저 모습은······.'
『 특성 타재간파(他才看破)를 발휘합니다. 』
『 대상의 재능을 파악합니다. 』
이윽고 신아람의 검이 휘둘러졌다.
검 끝에 모여 있던 붉은 기운이 방사되었다. 핏빛 마력이 일대를 불도저처럼 밀어낸다. 한없이 짙고 무거운 기운.
그 충격파에 피부가 떨려 온다.
숲을 빽빽히 채우던 나무와 풀숲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오크들까지 전부 잿더미가 되어 산화했다.
신아람의 마력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풀한포기 남지 않았다.
넝마짝이 된 상처 오크만이 홀로 버티고 서 있을 뿐.
그저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이 괴멸적인 위력이라니.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신아람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째서 검성이 신아람을 제자로 두고 있었는지.
그녀가 왜 유일한 수제자였는지.
모나지 않은 성정임에도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최후의 11인.
파괴와 몰살의 상징.
몸을 불사르는 피의 전사.
난폭하고 잔인한 성정.
『 대상 신아람의 히든 특성 '광화'를 간파합니다. 』
적혈의 버서커(광전사).
유일하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단 한 명의 영웅.
그게 신아람이었을 줄이야.
55화 적혈의 버서커(2)
적혈의 버서커.
그녀는 최후의 11인 중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금빛 이채를 띈 눈과 넘실거리는 흑발.
계속해서 풍겨나오는 붉은색의 짙은 아우라.
언제나 광화(狂化) 상태를 유지하고 다녔기에 본 모습을 볼 틈이 없었던 거다.
취익, 취이익!
다른 방향에 남아 있던 오크들이 신아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맹렬한 충격파가 오크들을 집어 삼켰다. 땅이 뒤집어지며 근처에 있던 나무들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크으윽."
뒤늦게 몰아치는 거센 폭풍에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가오던 오크들은 순식간에 전멸. 그녀가 휘두른 방향에 있는 숲이 휑하니 평지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상처 오크 뿐이었다.
크어어!
흑색 도끼를 거머 쥔 상처 오크는 신아람을 향해 돌진해 왔다.
콰아앙!
마기가 실린 오크의 도끼와 신아람의 검이 격돌했다.
상처 오크은 이를 악물고 도끼를 밀어 붙였지만, 신아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밀어냈다. 이어서 휘두르는 가벼운 연격.
콰앙! 콰앙!
상처 오크가 계속해서 밀려났다. 어찌어찌 공격을 받아내지만 단지 그뿐.
나는 긴장한 채로 신아람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무재조정 : 타재간파'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대상 신아람의 히든 특성을 간파합니다. 』
'타재간파.'
타인의 특성이나 스킬은 쉽게 알 수 없다. 특히 히든 특성 같은 경우 현자의 눈, 진리안, 절대 통찰과 같은 최상위 스킬이 아니면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한 스킬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손에 꼽고.
그것만으로도 타재간파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 SSS급 히든 특성 '광화' 』
『 광화의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 자아를 잃는 대신 모든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상승합니다.
- 지속적으로 체력과 마력이 회복되며 히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보여준다니.'
확실히 유용하다.
'광화 상태에서 신아람은 자아를 잃는다.'
상처 오크와의 전투 또한 본능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신아람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그게 문제였다.
콰아앙!
이윽고 신아람의 검이 상처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마기로 강화된 상처 오크의 신체가 무색하게 가슴팍에는 커다란 구멍 하나가 생겨났다.
상처 오크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네임드 마수를 바라 볼 정도로 강력했으나, 신아람의 광화 앞에선 무력했다.
스윽.
신아람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 섬뜩한 눈빛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나를 향했다.
'설마.'
나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영웅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순간적인 파괴력만큼은 버서커가 가장 강하다고 했다. 전면전이 되면 불리하다.
"······."
다행히 신아람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콰앙!
거센 파공음과 후폭풍이 일대를 뒤덮었다.
'어디로 간 거지?'
신아람이 지나간 숲의 한쪽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 끝에는 부자연스럽게 형성된 동굴 하나가 보였다.
'설마 권속에게로 향한 건가?'
본능적으로 마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향한 것 같다.
나는 기절해 있는 이철형을 끌고 와서 뺨을 툭툭쳤다. 정신을 차린 이철형이 두리번 거렸다.
"오, 오크는? 오크는 어떻게 됐습니까? 저, 저건 어떻게 된겁니까?"
"곧 협회의 지원이 올겁니다."
포션 몇 개를 던져주고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김상욱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기절해 있는 상태다.
'너도 같이 가줘야겠다.'
나는 김상욱을 어깨에 들쳐 엎었다.
휑하니 뚫린 숲 길 사이로 동굴 하나가 보였다.
'이제 권속을 잡는다.'
권속이 가지고 있는 마기의 원천.
메이저 게이트로 향하는 단서.
그것들을 회수해야 했다.
* * *
약 두 시간 전.
게이트 내부의 동굴 안.
녹빛의 구체 속에서 사람의 인영(人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권속 다크 엘프 발렘.
그는 손에 쥔 마기의 원천을 쓰다듬었다. 두루마리의 형태의 마기의 원천. 대한민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마족의 성유물.'
권속에 불과한 자신이 게이트의 마수들을 조종하고, 의도적인 제약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게이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파악할 수 있을 정도.
그 권능에 마치 왕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이상 오래 끌 순 없었다. 보아하니 위화감을 느낀 헌터 하나가 지원을 부르러 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운반책 놈. 왜 당장 안오고 거기서 밍기적대는거야?'
유감스럽게도 발렘은 이 동굴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마기의 원천을 사용해 게이트 내부의 마수들을 제어하는 건 이곳 중심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런데 운반책으로 오기로 한 인간이 쓰러졌다.
광범위하게 살포된 제약. 체력과 마력을 깎아먹는 중독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쯧.'
발렘은 혀를 찼다.
처음부터 헌터들의 처리는 자신에게 맡기고 운반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일단 그 놈부터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겠어.'
발렘은 자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녹색빛의 안개를 들이마셨다. 마기로 만든 회복의 안개였다. 포션이 아니라 마법이니 제약과는 별개로 회복하기엔 딱이었다.
'그런데 이 놈들은 왜 이리 질긴거냐.'
원천 덕분에 게이트 내부의 상황은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자꾸 포션을 마셔대길래 포션 제약까지 걸었건만 놈들은 끝까지 버텼다.
'······저 놈이 만든 포션은 왜 통하는거지?'
뭔가 특수한 힘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놈들은 바퀴 벌레처럼 살아남았다. 쓸데 없이 일이 길어지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한 명.
놈은 마기로 강화된 오크들을 박살을 내버리고 있었다. 두 마리건, 다섯 마리건 놈의 대검에만 걸리면 오크들의 머리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뭐 저런 놈이 있나.'
운반책이 없으면 원천을 게이트 바깥으로 옮길 수 없다. 은신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다크 엘프가 인간들의 세상을 돌아다닐 순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마계를 통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원천의 힘이 소실되고 만다. 그만큼 원천의 운반이란 까다로운 것.
그렇기에 운반책을 어떻게든 이리로 데려와야만 했는데.
'이런 젠장.'
발렘은 결국 아끼던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네임드 마수를 목전에 둔 오크 한 마리. 잘 숨겨 놨다가 부하로 써먹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급해졌다.
예상대로 헌터들을 압박하나 싶었는데.
치명상을 입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헌터 하나가 검을 휘두르자 모든 게 바뀌었다.
'뭐야?'
게이트 내부를 지켜 보고 있던 마법적 시야가 암전 되었다. 그 여자가 방출한 마력 때문이었다.
발렘의 미간이 좁혀졌다.
'빨리 복구해야 한다.'
마기의 원천을 전달한 뒤에는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에 합류해야 했다.
갑자기 방해물이 나타나다니.
발렘은 대수롭지 않게 마기를 게이트 정상화를 시도했다. 그 탓에 누군가가 동굴 앞까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응?"
뒤늦게 발렘이 고개를 들었을 때.
동굴 입구에는 흉흉한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신아람이 서 있었다.
* * *
콰아아앙!
동굴에서 붉은 섬광이 터져나왔다. 연달아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근처의 공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녹빛의 구체가 동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나는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발렘이다.'
미래에서 김상욱으로부터 권속에 대한 정보를 들어 놓은 덕분이었다.
보호막술사 발렘.
그 주인은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담당하고 있는 발전의 마족.
놈은 녹색 보호막을 둘러 체력을 회복과 방어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어서 동굴에서 빛살처럼 쏘아져 나온 붉은 직선이 발렘의 보호막과 충돌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신아람이었다. 그녀는 공중에서 한바퀴 돌더니 발 뒤꿈치로 발렘의 보호막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그대로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발렘의 보호막. 그의 주변으로 한층 진한 마기가 휘몰아쳤다.
"인간! 그 정도론 내 방어막을 뚫을 수 없을 거다!"
발렘의 도발. 신아람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발렘에게로 달려들었다. 미친듯이 쏟아붓는 연격에도 발렘의 보호막은 끄떡 없었다.
'마기의 원천을 들고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강하네.'
다시금 발렘의 주변으로 마기가 모여들더니 검은 레이저가 되어 신아람에게로 쏟아졌다. 그녀는 공격을 전부 감각적으로 회피해냈다.
'이거 내가 도와야겠는데.'
나는 김상욱을 바닥에 내려두고 대검을 들어 올렸다.
신아람과 발렘의 전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어이, 어차피 네 놈의 힘으론 이 방어막을 뚫지 못해! 이쯤에서 서로 포기하고 물러나는 건 어떻겠나?"
발렘은 광화 상태의 신아람에게 열심히 말까지 걸고 있다. 사실상 발렘은 어거지로 속박된 상태였다.
보호막을 운용하는 동안은 움직이지 못한다고 들었다.
"내 말이 이해가 안가는거냐? 내 힘은 무한하다고!"
구체로 몸을 지키고는 있으나 도망갈 방법이 없다. 마기를 쏘아내도 신아람은 전부 피해낸다. 발렘도 나름 수세에 몰린 상황.
'문제는 신아람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거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광화 상태에선 체력과 마력이 빠르게 회복된다. 체력이 70% 이상이 되면 광화가 풀려야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중독의 제약이 적용중이므로.
『 영향권 내의 생물은 '중독' 상태가 됩니다. 』
『 체력과 마나가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오랜 기간 지속 될 것은 자명하다.
'내가 나서야 한다'
일자베기라면 놈의 방어막을 분명히 뚫어낼 수 있을 터. 나는 대검을 들고 신속하게 발렘을 향해 다가갔다.
"윽!"
신아람이 만들어내는 충격파가 경고하듯 나를 거세게 밀어냈다. 그렇다고 어거지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실수로 신아람의 주의를 끌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발렘의 보호막만 없애면 되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는건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무재조정 : 타재간파(他才看破)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잊고 있던 타재간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대상 신아람에 대한 정보가 충분합니다. 』
- SSS급 영웅, 최후의 11인, 적혈의 버서커, 검성의 제자······.
『 재능 개화 난이도가 보정됩니다. 』
내 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들의 향연.
『 대상 신아람의 개화 가능한 재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자아 통제 : A
- 잠재력 개방 : S
- 리미트 해제 : SS
신아람에게 잠들어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내 앞으로 떠올랐다.
'이건······.'
타재간파의 효과가 더 있었을 줄이야.
나는 홀린 듯이 '자아 통제'를 선택했다.
『 재능 '자아통제'를 선택하셨습니다. 』
『 해당 재능의 개화 난이도는 A입니다. 』
지금 광화 상태에 들어간 그녀를 막기엔 더없이 좋은 선택지였다. 이윽고 메시지가 개화의 조건을 출력해 냈다.
『 대상 신아람의 체력을 절반 수준으로 30초 이상 유지할 것 』
『 대상의 현재 체력 : 36% 』
'······.'
평소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난이도.
다만 지금은 상황이 특수했다. 중독 제약 때문에 신아람의 체력이 균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충분히 해볼만 했다.
'해보자.'
나는 아직도 미친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신아람을 향해 다가섰다. 쏟아지는 광풍 속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다행히 내게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들었다. 병에 담긴 푸른색 액체.
『 스킬 '체인지 웨펀 Lv.11'을 발휘합니다. 』
포션도 투척류 무기라고 생각하니, 그 위로 푸른 마력이 깃들었다.
'이걸 최대한 강하게 던진다.'
나는 있는 힘껏 신아람을 향해 포션병을 던졌다.
쇄애액!
『 스킬 '거인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투척 Lv.11'을 발휘합니다. 』
『 스킬 '명중 Lv.11'을 발휘합니다. 』
미래에서 명중 스킬을 11레벨까지 올린 게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직선으로 쏘아진 포션 병이 신아람을 향해 쇄도했다.
"!"
그녀가 날아오는 포션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신아람은 검을 휘둘러서 포션 병을 잘라냈다.
촤악!
그러나 그 내용물은 그대로 신아람을 덮쳤다. 연달아 던져둔 포션이 그대로 그녀에게 직격하며 내용물을 쏟아냈다.
『 대상의 현재 체력 : 49% 』
『 재능 '자아통제' 개화까지 30초 』
"······."
포션 범벅이 된 신아람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멍청한 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만!"
발렘이 구체 속에서 조소했다.
30초.
어떻게든 버텨야했다.
하지만 버티기만한다면 내 승리다.
발렘을 향하던 신아람의 공격이 멎었다. 일순간의 정적.
콰앙!
포탄처럼 쏘아진 신아람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강렬한 마력이 나를 집어 삼킬 듯 몰려 오고 있었다.
온몸이 짓이겨지는 듯한 압박감.
지금 내 수준에서 저걸 몸으로 받아냈다가는 오크들과 같은 꼴이 될 거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한발자국 내디뎠다.
'해보자.'
내게는 미래에서 검성에게 배워 온 일자베기가 있으니까.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추가 효과 : 마력을 무시합니다. 』
허공에 새겨지는 선 하나.
요란스런 파도처럼 몰려오는 붉은 마력을.
고요하게 뻗은 푸른 선이 멈춰 세울 것이다.
일자베기가 만들어낸 선을 중심으로 붉은 마력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마력을 막아내는 건 성공했다.
다음은 신아람의 본체다.
카가각!
내 대검 마족학살자와 신아람의 붉게 달아 오른 검날이 맞부딪혔다. 두 개의 마력이 부딪히며 무수한 불꽃을 쏟아냈다.
고착상태가 되자 순식간에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조건 버텨야 한다.'
나는 호흡을 바로 잡았다.
『 스킬 '태양류 호흡법 Lv.10'을 발휘합니다. 』
『 소모되는 기력과 마력이 10% 감소합니다. 』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신아람이 먼저 검을 거둬들였다. 나는 그것에 맞춰 다시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신아람의 검술은 난잡하고 무질서했다. 정립되지 않은 검술이 그저 내 검을 때리기만 할 뿐이었다.
검술에 있어선 내가 한발자국 앞서 있었다.
'신태양류 검술.'
갈수록 일자베기가 허공에 그려내는 선이 늘어 났다. 나는 붉은 마력을 계속해서 갈라내며 신아람을 조금씩 압박해 나갔다.
상성에서 내가 우위에 있다.
미래에서 맞아가며 배운 스킬들 모두가 발휘되었다. 적혈의 버서커를 내 손으로 밀어내고 있다.
손쉽게 조건을 만족하나 싶었지만.
"윽."
순간적으로 거센 두통과 구토감이 밀려왔다. 마력 고갈의 징조였다. 일자베기의 극심한 마력 소모 때문이었다.
"!"
신아람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왔다.
'젠장.'
그 뜨겁게 달아오른 검날이 내 목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무패의 반지가 가진 특수효과를 발휘했다.
『 무패의 반지 추가 능력 '방어막 Lv.10'을 발휘합니다. 』
콰아아——!
순식간에 균열로 뒤덮힌 보호막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극한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눈 앞으로 여러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은 그저 버틸 뿐이었다.
그리하여 붉은 마력이 폭풍처럼 지나간 자리.
나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살아있기는 했지만 움직일 기력조차 없다.
맷집과 불굴의 의지 스킬 덕분에 간신히 서 있을 뿐이다.
반면 신아람은 건재하다. 여전히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금색으로 물든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자아도 이성도 깃들지 않은 무자비한 본능 그 자체.
파아아—.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금 짙은 마력을 발한다.
피할 수도 없고 견뎌낼 수도 없는 일격이 다시 쏟아지려는 찰나.
"!"
메시지가 떠올랐다.
『 타재간파의 발동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
『 신아람의 재능 '자아 통제'가 개화합니다. 』
검을 내리치려던 신아람의 손이 우뚝 멈춰섰다.
스으으—.
동시에 공허했던 신아람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이지한 용병님?"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어떻게든 해낸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 끝이 아니었다.
"크하하! 괜히 나섰다가 멍청하게 동료에게 죽는 꼴이라니."
너덜너덜해진 나를 바라보며 발렘이 조소했다. 놈은 도망가지 않고 있었다. 대신에 자신의 머리 위로 마기를 압축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사이좋게 죽어라!"
발렘의 머리 위로 모인 새까만 마기의 구체.
그 압축률에 주변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
정통으로 맞았다간 무사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제, 제가 왜 이런 모습인거에요? 그 상처는 혹시 저 때문에······?"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일단은 피하죠."
나는 포션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 대상 신아람의 재능 개화에 성공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
『 타재간파의 보상을 획득합니다. 』
'보상?'
나는 타재간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이건 타인에 재능에 관여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 특수 스킬 '광화(자아통제) Lv.1'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스킬의 유지 시간은 30분 입니다. 』
'미쳤군.'
재능 없는 내게 타인의 재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56화 적혈의 버서커(3)
신아람의 히든 특성 '광화'.
그것은 타재간파에 의해 스킬이 되었다.
'이게 진짜 타재간파의 능력······.'
내 몸에서 솟아 오르는 붉은 기운.
마치 살아 있는 불처럼 타오른다.
광화의 증거였다.
바닥까지 향해 있었던 체력과 마력이 계속해서 차오른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특수 스킬 '광화(자아통제) Lv.2'를 획득합니다. 』
『 특수 스킬 '광화(자아통제) Lv.3'을 획득합니다. 』
『 특수 스킬 '광화(자아통제) Lv.4'를 획득합니다. 』
···
..
.
『 특수 스킬 '광화(자아통제) Lv.10'을 획득합니다. 』
무재조정과 칭호 초성장에 의해 20만배가 된 경험치.
스킬 레벨은 거듭하여 올라 간다.
10레벨에 달하자 전에 없던 해방감이 느껴졌다. 비정상적으로 해방된 힘이 당장이라도 미쳐 날뛸 것만 같았다.
'지속 시간은 30분인가······.'
권속을 쓰러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 그대로 죽어라!"
이상함을 감지한 발렘이 압축된 마기 구체를 쏘아냈다. 주변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강력하게 응축된 마기.
나는 피하는 대신 대검을 손에 쥐고 땅을 박찼다.
콰아앙!
내가 뛰어 오른 장소에서 거센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광화로 인해 상승한 능력치 덕이었다.
하늘 높이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구체를 향해 돌진했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대검 위로 얇은 검은색 코팅이 덧씌워졌다.
『 스킬 '일자 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 추가효과 : 마력 무시 』
두 손에 들린 대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일자베기는 스킬에 따라 그 특성이 변화한다.'
미래에서 검성에게 손수 배워 온 기술이다.
일자베기 하나로는 그저 마력을 무시할 뿐이지만.
그것이 데몬헌트와 합쳐진다면.
『 두 개의 스킬이 특수 조합됩니다. 』
『 일시적인 추가 효과를 획득합니다. 』
새로운 효과를 낳는다.
『 특수 추가효과 : 마기를 무시합니다. 』
밤하늘을 담은 듯 영롱하게 빛나는 검은 궤적이 공간 위에 새겨졌다.
콰아아—!
그것은 발렘이 쏘아낸 마기 덩어리를 반으로 갈라냈다. 두 개로 나뉜 마기 덩어리는 허공으로 무질서하게 흩뿌려졌다.
"뭐, 뭐 이런······."
허무한 표정으로 사라진 마기를 바라보는 발렘. 그러나 녀석에게 방심할 틈은 없었다. 어느샌가 뛰어오른 신아람이 발렘을 방어막째로 바닥에 내리 꽂았다.
콰아앙!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흙먼지와 나무들의 파편.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발렘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은 공격을 의식해서 방어막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녀석은 방어막을 유지한 채로 움직일 수 없다.
레벨 10의 광화.
회복 되는 마력과 체력은 중독의 제약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그건 일자베기의 지독한 마력 소모를 커버하고도 남는 양이다.
나는 천천히 대검을 들어 올렸다.
경악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렘을 향해.
다시 한 번 일자베기를 사용했다.
콰드드득!
"크아아악!"
발렘이 자랑하던 녹빛의 보호막이 일자베기의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마기로 이루어진 단단한 철옹성이 단 하나의 선에 의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발렘은 자랑스런 자신의 보호막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 게이트의 관리자가 처치되었습니다. 』
『 해당 게이트에 존재하는 모든 제약이 사라집니다. 』
* * *
"쓰러뜨린건가요?"
발렘이 죽자, 신아람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직 그녀의 광화는 풀리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흑발과 눈동자의 금빛 이채가 그 증거였다.
차분한 표정이었다. 자아를 되찾아 혼란스러웠을텐데, 금방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한 모양이다.
"······이 녀석은 보스가 아니었나보네요."
신아람은 고개를 들어 숲 반대편을 바라봤다. 특유의 탐지 능력은 그녀 개인의 능력인 듯 했다.
"제가 처리하고 올게요."
그 말과 함께 신아람은 숲 너머로 사라졌다. 전과 같은 무의미한 마력 방출이 없는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내가 아는 성격이랑은 많이 다르네.'
원래 적혈의 버서커는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손에 걸리는 걸 부수고, 목소리도 우렁찼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의 신아람은 오히려 한결 차분해진 느낌.
'타재간파로 재능을 미리 개화 시켜서 그런가.'
어쨌든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었다.
나는 발렘이 죽어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물론 잊지 않고 녀석의 몸에 생긴 마정석을 캐냈다.
『 스킬 '중급 해체 Lv.10'을 발휘합니다. 』
『 '훌륭한 마정석 B++'를 획득합니다. 』
지난번 하위 마족을 잡고 얻은 마정석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품질이다.
마침 잘 됐다.
신아람에게 공격 받았을 때 방어구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 마정석을 아이템 제작자 김건에게 줘서 새 방어구를 만들도록 해야지.
물론 진짜는 따로 있다.
발렘의 옆에 놓여 있는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 마기의 원천 : 낡은 두루마리 』
그 옆에는 검은 톱니바퀴 하나가 놓여 있다.
『 마도 공학 : 게이트 조율 장치 』
이건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에 사용 되는 아이템 중 하나다. 발전의 마족이 만들어낸 마도 공학 아이템.
'이게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로 이어지는 시작점이다.'
발렘이 이걸 들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놈의 주인이 되는 마족이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에 깊숙히 관련된 놈이었으므로.
'마기의 원천을 김상욱에게 건네주고 나서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려던 계획이었겠지.'
톱니바퀴를 주머니에 집어 넣던 그때였다.
"으으윽, 뭐가 어떻게 된거야?"
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상욱이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다시 바닥에 고꾸라졌다.
"끄어억. 모, 몸이 왜 이렇게 아픈거지?"
권속과의 전투의 여파에 휩쓸려서 그럴 거다.
현 시점에서는 빌런이나 다름없는 김상욱.
녀석을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를 내 수족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도끼를 들고 쓰러져 있는 김상욱에게로 다가갔다.
"어, 어이! 무슨 짓이야! 그거 치워!"
"별 거 안하니까, 가만히 있어라."
발버둥치는 김상욱의 팔을 도끼날로 살짝 그었다. 워낙에 체력이 바닥인 상태라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다.
"사, 사람 죽네! 여기 헌터가 사람 죽여!"
엄살은.
놈의 팔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나는 그걸 두루마리 형태를 하고 있는 마기의 원천으로 닦아냈다.
『 '마기의 원천 : 두루마리'의 고유 효과를 사용합니다. 』
스으으—.
두루마리에 닿은 피가 원형의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지난번에 썼던 이계 규율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김상욱을 바라봤다.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 넌 인간을 배신하고, 마족의 밑에 붙어서 빌런 길드를 이끌어 왔을거야."
"뭐, 뭐? 그게 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김상욱.
"뭔 개소리야! 마족이 뭔데?!"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 대상 김상욱의 발언에서 거짓을 간파합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 잘한다. 끝까지 모른 척 하니 동정심도 들지 않는다.
스르륵.
김상욱의 피가 새겨진 두루마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미래의 김상욱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종속의 두루마리.'
권속을 만들 수 있는 마족들에겐 큰 의미가 없는 기능. 그러나 인간이었던 김상욱에게는 굉장히 유용했다고 한다.
나는 미래에서 들었던 김상욱의 말을 떠올렸다.
- 피와 계약 대상에 대한 정보.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마족들의 법도에 따라 대상을 노예로 부릴 수 있죠. 솔직히 그걸로 이득 많이 봤습니다. 보름 제약의 회장. 그 사람도 내 노예였다니까요? 물론 지금은 반성 많이 합니다.
계약에 필요한 건 피와 정보.
그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듯 알려줬다.
- 제 정보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 그냥 궁금하시다고요. 으하하, 우린 황금왕의 보물 창고를 함께 턴 사이 아닙니까. 숨길 것도 없죠.
술에 잔뜩 취한 녀석은 자신의 정보도 술술 말했다. 마기의 원천이 소모된 세계였으니 의심할 턱이 없었다.
『 종속 시킬 대상의 정보를 입력하십시오. 』
붉은 피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제서야 불길함을 느낀 김상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뭐하는 거야?"
지금의 김상욱은 두루마리의 능력을 모르는 모양. 아마 나중에 마족에게서 주워 듣는 거겠지.
나는 김상욱의 정보를 하나씩 말했다.
"이름 김상욱. 성별 남. 아버지 김성연, 어머니 김진주. 3대 독자, 혈액형 A형, 소중히 여기는 것 자기 자신, 어렸을 적의 취미······."
시시콜콜하지만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를 늘어 놓는다. 김상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어떻게, 어떻게 아는거냐? 너 뭐야, 너 뭐냐고 이 새끼야!"
나는 무시하고 정보를 입력했다. 정보가 개인적이고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을수록 계약의 힘은 강해진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두루마리에서 검은 마기가 뭉게 뭉게 피어난다. 내가 입력한 정보가 확실하단 증거였다.
까득.
마지막으로 내 피 한 방울.
파스스······!
"크윽, 대체 뭐하는 새끼야! 뭐, 뭐야? 이거 뭐냐고! 대답해!"
두루마리에서 흘러 나온 검은 기운이 김상욱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쇠사슬의 형태로 빚어진 마기는 김상욱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 마도 계약 : 대상 김상욱에 대한 완전 통제권을 획득합니다. 』
바닥에 쓰러진 김상욱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본다.
그의 역할은 간단하다.
"김상욱, 이제부터 너는 이중첩자다."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
마족의 편에서 여러 악행들을 저질러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인간보다 마족 가까이에 도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버려질 말일지언정.
그는 훌륭한 배신자였다.
그러니 이제는 그 한 몸 바쳐 인류를 위해 일할 차례다.
* * *
"자, 게이트 나가기 전까지 열심히 뽑아라."
나는 김상욱에게 명령했다. 김상욱은 군말 없이 수풀에서 푸른 꽃을 골라 뽑아내기 시작했다.
"맡겨만 주십쇼."
열심히 푸른 꽃을 찾아 헤매는 그.
종속 계약의 힘은 절대적. 주인을 배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게 미래 김상욱의 설명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해 놨다.'
김상욱은 마족들에게 돌아가 스파이 노릇을 할 거다. 놈에게 마기의 원천을 들려 보낼 생각이었다.
김상욱은 기록의 마족에게 인정을 받고 다시 복직할 거다. 김상욱이 내게 종속되는 한 빌런 길드 '흑결'도 내 손아귀에 올라오는 셈이다.
'프로젝트 마기는 김상욱 선에서 막을 수 있게 된다.'
의식의 순간에 결정적인 방해를 하도록 일러뒀다. 들키지 않는 선에서. 그걸로 대한민국의 프로젝트 마기는 완전 저지다.
콰아아앙!
신아람이 향한 방향에서 강렬한 폭음이 들려왔다. 오크들의 보스를 처리하고 있는 거겠지.
마기의 원천의 영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오크들은 강력하겠지만.
신아람에게는 문제 없다.
대한민국 최후의 11인 중 하나가 그녀였으니까.
"허억. 뭡니까?"
푸른 꽃을 뽑던 김상욱이 몸을 움찔 떨었다.
"신경 쓰지 말고 채집해."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도 가만히 있을 게 아니었다.
아직 광화 스킬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흘려보내기도 뭣하니 늘어난 능력치를 이용해서 열심히 채집했다.
이 게이트 내부에서 자생하는 푸른 꽃은 상급 물약의 재료가 된다. 가져다 팔면 큰 이득을 볼 수 있고, 포션 자체로도 앞으로의 전투에 큰 도움이 된다.
『 스킬 '채집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대상에 접촉하지 않아도 채집할 수 있습니다. 』
덤으로 채집의 레벨이 11이 되었다.
'오.'
손을 들어 올리고 한바퀴 쓱 쓸자 손아귀에 푸른 꽃들이 딸려 들어왔다. 기가 막힌 효과였다.
채집 스킬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업적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
『 지대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이계규율이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중독의 권속 '발렘' 처치
- 기록 : 데미지 S, 전투 A, 특수 스킬 S, 영향력 SS······.
- 종합평가 : S+
여전히 과평가 된 업적 정산이었다. 데미지나 전투, 영향력 모두 내 특성 타재간파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이번에는 무슨 칭호를 줄까.'
이계 규율이 준 칭호들을 잘만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마계의 재앙, 초성장. 전부 도움이 됐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메시지창을 바라봤다.
『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이계 규율에 따라 보상을 지급합니다. 』
그리 생각하는 내 앞으로 붉은색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칭호가 아니었다.
'······진짜냐.'
재능이 부족하여 닿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 유니크 스킬을 지급합니다. 』
바로 그 유니크 등급의 스킬이 주어졌다.
57화 적혈의 버서커(4)
유니크(Unique).
일반, 레어 다음으로 존재하는 등급. 아이템에 있어서는 그 희귀도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스킬에서 그 의미는 남달랐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타고난 재능의 영역.
일반이나 레어 등급은 적당한 수준의 헌터라면 누구든지 획득하고 기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유니크 등급만큼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
본인의 재능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스킬조차 얻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내게는 유니크 스킬을 얻을만큼의 재능이 없다.
『 이계 규율이 소유주의 재능을 파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저 몇 번이고 되새기는 사실일 뿐. 재능의 파편을 얻어도 유니크의 영역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단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이계 규율은 그런 한계를 뛰어 넘어 내게 보상을 건넨다.
『 인과적 타당성을 계산하여 유니크 스킬을 지급합니다. 』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 Lv.1'을 획득합니다. 』
『 모든 무기의 숙련도와 위력이 증가합니다. 손에 든 무기의 종류와 관계 없이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샤아아—
허공에서 솟아난 붉은 빛이 내 몸으로 스며 들었다.
'웨펀 마스터.'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내가 처음으로 얻게 된 유니크 스킬이었다. 평생 얻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등급의 스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만족하고 있을 순 없다.'
겨우 유니크에서 멈출 생각은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스킬들을 얻을 것이다. 유니크를 넘어 레전더리까지.
그리고 그 스킬들은 모두 20만배의 경험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효과가 내 생각대로가 맞다면······.'
스킬 효과를 확인하는 내 눈이 커졌다.
'사기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김상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상욱, 가지고 있는 무기 있나?"
"아, 있고 말고요. 공략대를 쓸어 버리려고 비장의 수로 남겨 놓았던 유니크급 단검 '아스람의 이빨' 두 자루입니다. 기가 막힌 놈들입죠."
"······."
유명한 무기였다. 소위 네임드 웨펀이라고 불리는 것들 중 하나였다. 헌터 잡지에서 본 적 있었다.
빌런 조직 우두머리라 그런지 좋은 걸 들고 다닌다.
"잠깐 줘봐."
"여기 있습니다."
김상욱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내게 단검을 내밀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종속의 계약이 대단하긴 하다.
나는 두 자루의 단검을 양 손에 거머쥐었다.
『 스킬 '웨펀 마스터 Lv.1'을 발휘합니다. 』
원래부터 내가 사용하던 주무기인 것처럼 손에 착감긴다.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지까지도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촤악, 촤악, 촤악!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쌍단검을 휘둘렀다. 쌍단검의 장점은 빠른 공격 속도와 높은 순간 딜량.
쿠웅!
난도질 당한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 창들이 눈 앞으로 연달아 떠올랐다.
『 일반 스킬 '쌍검술 Lv.1'을 획득합니다. 』
『 일반 스킬 '쌍검술 Lv.2'를 획득합니다. 』
..
.
『 일반 스킬 '쌍검술 Lv.10'을 획득합니다. 』
『 추가 효과 : 쌍검술의 위력 25% 증가 』
"와우. 대단하십니다."
나를 지켜보던 김상욱이 짝짝짝 박수까지친다.
"억지 리액션 안해도 되는데."
"아뇨, 초보자치고는 훌륭했습니다. 마치 제가 검을 처음 잡았을 때와 같은 재능이 느껴졌달까요."
이 자식 은근히 돌려서 맥이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일반 스킬이다보니 쌍단검을 주무기로 쓰는 김상욱의 눈에는 대단하지 않아보일 수 있다.
그래도.
'굉장한데.'
유니크 스킬 '웨펀 마스터'의 효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손에 잡은 무기를 단번에 익숙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하위 스킬을 획득할 수 있게 해주니.
'웨펀 마스터 자체의 경험치는 안 오르네.'
유니크 등급이라 그런 건가? 이 부분은 실전에서 사용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기능이 하나 남았다. 따지고보면 이게 더 중요하지.'
나는 단검을 김상욱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회수의 창을 꺼내 들었다.
'분명 무기의 종류에 상관 없이 스킬을 쓸 수 있다고 했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나는 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잠시 집중한 뒤 위에서 아래로 지긋이 선을 만들어 냈다.
『 스킬 '일자베기 Lv.12'를 발휘합니다. 』
공간을 가르는 푸른 물줄기가 생겨났다. 급속도로 마력이 빨려 나갔지만, 광화 상태가 유지 되고 있어 괜찮았다.
'진짜 되잖아.'
본래 신태양의 일자베기는 검에 한해서 발휘 가능한 기술이다. 그런데 이제 다른 무기에도 적용이 가능해졌다.
'응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무기가 되겠어.'
부족한 마력에 관해서는 보충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 스킬 '광화(자아통제) Lv.10'의 유지 시간이 끝났습니다. 』
『 스킬 '광화(자아통제)'가 타재간파의 서에 흔적을 남깁니다. 』
일시적으로 획득했던 광화의 유지 시간이 끝났다. 원래는 특성이었던 것을 스킬의 방식으로 이용했던 건데.
'아쉽지만. 흔적으로 남았다고?'
시스템 창에 떠오른 타재간파의 서를 한 번 불러내 봤다. 이름을 속을 되내이니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 타재간파의 서 』
- 광화(자아통제) Lv.10 [ 비활성화 ]
'나중에 다시 사용할 수 있는건가?'
문제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거다. 메시지창의 주변을 건드려봐도 별 다른 설명도 떠오르지 않는다.
타재간파의 능력이니, 타인의 재능을 개화 했을 때 활성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콰아앙!
어디선가 나타난 신아람이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옅은 흙먼지와 풀쪼가리들이 흩날렸다.
스스스······.
허공을 부유하던 신아람의 머리카락이 가라앉고, 눈에 띄고 있던 이채도 줄어들었다. 광화를 해제한 신아람이 내게 말했다.
"보스는 잡았어요. 근데 협회에서 사람들이 지원 온 것 같아요."
내게 상황을 전한 신아람의 시선이 김상욱을 향했다.
"근데 아직도 꽃을 채집하시는 거에요? 이제 안하셔도 돼요······."
"아가씨, 이건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
"그렇다는데 놔두죠."
의문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신아람의 뒤편으로 협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윤서현에 더해 게이트 관리국 팀장 마성철까지.
지원치고는 늦다.
"괘, 괜찮아요?!"
나를 발견한 윤서현이 순간이동으로 바로 다가왔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거에요? 숲이 왜 난장판이 된거에요? 마족이 그렇게 강했어요?"
"마족은 아니고 그 아래에 있는 권속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규모는······."
근처를 둘러보는 윤서현의 눈이 흔들렸다. 버서커 신아람에 의해 반대편이 불도저로 밀어버린 듯 휑한 벌판이었다.
천천히 다가온 마성철이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는 주변 상황을 살피더니, 볼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지한씨, 벌써 두번째 뵙게 됐네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엔 흡족스런 미소를 띄고서.
"역시 굉장하시군요. 숨기고 계신 게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건 제 상상을 뛰어 넘는 범위네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뇨, 이거 전부 신아람씨가 한 겁니다."
"네? 제가요?"
신아람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 그쪽이 놀라면 안되지.
* * *
미국의 S급 게이트.
작열하는 땅.
콰드득.
백묵은 마력이 담긴 발로 보스의 머리를 짓이겼다. 불결하다는 듯 발에 묻은 피를 털어낸 백묵은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을 주워 들었다.
"흐음."
『 마기의 원천 : 아몬의 조각상 』
여지껏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기운 흘러나오는 아이템이었다. 그것을 살피는 백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기라. 그래, 그때도 분명히 이 느낌이었지.'
며칠 전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 시험장을 가득 메웠던 정체 불명의 검은 안개. 그곳에서 느꼈던 불길한 기운이 지금 이 아이템에서 똑같이 느껴졌다.
"그렉스, 어떤가요?"
백묵은 뒤에 서 있던 남성에게 물었다. 각자의 언어가 백묵의 능력에 의해 사념으로 전달되어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미국의 S급 헌터 그렉스.
그는 얼마전 최고 등급의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한 인물이었다. 미국 본토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헌터였다.
"얼마전 변칙 게이트에서 그런 기운을 두른 마수를 상대했었다. 최근 늘어난 변칙 게이트와 연관이 있다고 봐야겠지."
그는 헝겊으로 망치를 슥슥 닦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쵸? 제 생각도 그래요."
백묵은 마기의 원천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그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단순했다.
이번에 공략한 S급 게이트는 그렉스 소유의 변칙 게이트였다. 미국 본토에서 기이한 게이트를 발견했다는 그렉스의 말에 백묵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미국으로 향했다.
"만사제쳐두고 온 보람이 있네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저 타국에서 발생한 변칙 게이트 하나.
흘려보내도 됐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지한······.'
최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백묵 자신이 유일 할 거였다. D급 변칙 게이트, 빌런 최유정에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까지.
일련의 사건들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특히 백묵이 위화감을 느낀 것은 우진형을 조사하면서부터였다. 은날 채용 시험에서 행방 불명 된 남자.
이지한은 채용 시험 전부터 우진형에 대해 조사해 달라 했고, 시험 당일에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우진형은 스스로 검은 안개를 만들어내며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게이트를 만들어 다른 헌터들을 끌어들였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건지.'
이지한.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지 직접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이유가 늘었네요.'
백묵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그때였다.
"잠깐, 하늘을 봐라."
그렉스의 말에 백묵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하늘 위로 검은 마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게이트 구석구석 숨어 있던 마수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 위로 날아 오른다.
이미 보스가 죽고 공략된 게이트였건만.
아무래도 뭔가가 남은 모양이었다.
백묵은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이거 쉽게 나가긴 글렀네요."
"쉽고 어렵고는 문제가 안돼. 죽느냐 사느냐다."
그렉스가 백묵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걸 신호로 뒤쪽에서 쉬고 있던 수 십명의 헌터들이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가자고."
망치를 어깨에 짊어진 그렉스를 필두로 헌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나는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숲 너머로 익숙한 건물들이 보인다.
"아, 오셨습니까."
"······."
패럿 길드의 이철형과 권시웅이 지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철형은 반가운 듯 손을 들지만 권시웅은 영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사실상 패럿 길드는 공략에 실패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천재일수록 벽에 부딪혔을 때 느끼는 좌절감도 큰 법이랬다.
'살아 나온 걸 다행이라 여겨야겠지만.'
나는 뒤에 있는 김상욱을 흘깃 봤다. 원래대로라면 김상욱이 이번 게이트 공략에 참여할 일은 없었다.
자칫하면 김상욱에 의해 파티가 몰살 당할 수도 있었다.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다.'
당연히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미래가 바뀐다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미래로 바꾸어 내면 되는 일.
"그러면 다들 이제 복귀하셔도 돼요."
협회 헌터들은 아직 변칙 게이트를 조사 중에 있다. 윤서현만 나를 따라왔다.
"저희 팀장님이 조사는 나중에 한다고 먼저 복귀하라고 하셨어요.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결과적으로 공략은 성공이니까요."
지원이 늦어진 건 협회의 절차가 복잡해서란다. 원래 그런 조직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때였다.
"저······."
뒤쪽에 서 있던 신아람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선배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까 협회 분한테 들었는데 저보다 훨씬 오래전에 각성하셨다고 들었어요."
"예, 뭐."
미래에서는 신아람이 선배였는데 여기선 반대로 되었다.
"광화 상태에 있을 때, 아무것도 안들리고 무섭기만 했는데······. 지한 선배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렸어요.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됐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말을 건 적은 없지만 타재 간파의 능력이 닿은 모양이다.
"전화번호 주실 수 있나요? 꼭 다시 뵙고 싶어요."
투욱.
별 생각 없이 서 있던 윤서현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 윤서현을 두 눈을 크게 뜬 채 신아람을 바라봤다.
그냥 나한테 배우고 싶다는 거 같은데.
대한민국 최후의 11인 중 한 명인 신아람. 적혈의 버서커로 이름을 날렸던만큼 그녀의 재능은 이미 검증 되어 있다.
본래보다 일찍 자아통제 능력을 개방했으니 앞으로의 성장이 가속화 될 터였다.
나는 그런 신아람의 어깨를 잡았다.
"헉."
왜인지 윤서현이 놀란다. 나는 그대로 신아람을 윤서현과 마주 보게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신아람씨의 재능을 키워 줄 좋은 길드를 알고 있거든요. 그렇죠, 윤서현 헌터?"
"네? 아, 그러고보니 언니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네요. 추천해주신다던 사람이 이 분인 건가요?"
원래는 천성호를 추천해 주려고 했는데 어딨는지를 모르니 나중으로 미루고. 신아람은 그에 못지 않은 능력자다.
"저, 저는 패럿 길드인데요······."
"신아람씨를 감당하려면 은빛의 날개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으, 은빛의 날개요?"
"다리는 놔드렸으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면 될 겁니다."
아무리 천재 둘이 운영하는 길드라곤 하지만, 패럿 길드는 소규모 길드다. 신아람이 성장하기엔 비좁다.
그때 이철형이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드를 옮기란 말을 너무 대놓고 이야기했나.
"혹시 이지한씨가 저희 길드에 오시는 겁니까? 저희 길드에서 연금술의 재능을 한 번 피워보시는 거 어떻습니까?"
"······."
미쳤다고 내가 거길 가겠냐.
다행히 신아람의 이적을 신경 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기절해 있던 탓에 광화를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전 가겠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윤서현 헌터한테 물어봐요."
"자, 잠깐만요······!"
"이리와요. 지한씨 번호가 궁금하다고 했죠? 제가 알고 있긴 하거든요. 근데 그냥은 못 알려드리고요."
왠지 미소와 함께 윤서현이 신아람을 끌고 갔다.
아무쪼록 잘 선택하길 바란다.
* * *
김상욱에겐 앞으로 스파이 역을 하며 해야 할 일을 미리 일러뒀다. 연금술사 이철형이 날 붙잡고 늘어지는 탓에 떼어내느라 고생했지만, 어쨌든 게이트 공략은 마무리 되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빌딩의 대형 전광판에 신태양의 모습이 보였다. 벼락처럼 검을 휘두르자 마수들이 일시에 쓸려 나가는 모습. 누가봐도 감탄을 자아내는 검술이었다.
'잘 성장하고 있나보네.'
신태양은 수호 길드의 지원을 받아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미래의 검성이 될 몸이니 긍정적인 일이다.
지난번 마족과의 싸움에서 한 방에 나가 떨어진 것 때문에 충격 받은 것 같던데.
'타재간파로 신태양이 가진 재능을 더 빨리 개화하게 해줄 수 있으려나.'
나중에 만나면 시험해 보도록 해야겠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프로젝트 메이저 게이트를 저지하는 거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톱니바퀴를 꺼냈다.
『 마도 공학 : 게이트 조율 장치 』
권속 발렘을 잡고 나온 아이템. 이걸 사용하면 놈들의 부품을 숨겨둔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거다.'
메이저 게이트를 저지하기 위해선 책임자인 발전의 마족을 처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 놈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김상욱을 보낸 것이기도 하다.
고민을 거듭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갑자기 등에 맨 배낭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응?'
내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오르티마 알이 부화의 가능성을 알립니다. 』
권속을 처치하고도 반응이 없길래 이번에는 부화하지 않나 싶었는데. 부화까지 시간이 걸리는 거였나.
서둘러 집에 들어 온 나는 배낭을 열어서 알의 상태를 확인했다.
꼭대기 부분부터 진한 금이 뻗어져 있었다. 진작 눈치 챘어야 했는데.
쩌적, 쩌저적!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화의 순간을 지켜봤다.
회귀 전, 마계왕의 군단에 속해 있던 오르티마.
누군가는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그랬으며, 누군가는 청룡이라고도 했다. 여러가지 말이 많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녀석은 최소 신수(神獸) 혹은 환상종에 준하는 존재일 거다.
『 오르티마 알이 부화합니다! 』
58화 환령(1)
오르티마 알이 부화했다. 금속 재질의 껍질이 깨짐과 동시에 새하얀 빛이 방 안을 뒤덮었다.
눈을 차마 뜨기 힘들 정도.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통통.
한 마리의 슬라임이었다. 동글동글한 물방울떡 같은 생김새. 녀석은 부화 한 게 기쁘다는 듯이 몸을 튕겼다.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오르티마의 정체가 슬라임이었다고?'
슬라임은 F급 게이트에서도 보기 드문 최약의 마수다.
평생을 F급 게이트를 전전하던 나도 슬라임만큼은 가볍게 죽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뭔가 다르긴 다른데.'
일반적인 슬라임과 차이점이 있긴 했다. 일반적으로 녹색을 띄는 슬라임과 달리 녀석의 표면은 광택 있는 은색. 그 표면에는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있다.
가만히 있으면 동그란 은 공예품으로 착각할 법도 한 생김새.
그러나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오르티마가 맞다.
'몸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 분명 오르티마가 맞는데.'
내가 아는 미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긴 했다.
드래곤 새끼나 유니콘 같은 환상종일 줄 알았는데.
『 오르티마가 주인을 인식합니다. 』
슬라임은 유연하게 통통 튀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놈은 내 몸을 타고 스르륵 올라왔다. 부화한 게 기쁜지 내 몸에 붙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슬라임이면 전투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경험치를 많이 먹으면 진화하는 건가?"
어렸을 때부터 강한 힘을 발휘하는 개체는 그다지 없다. 주인과 함께 성장해나가면서 강해지는 것이 일반적.
그러면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치를 먹여야 한다는 건가.
어쨌든 이 놈이 미래에 굉장히 강력한 펫이 될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건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니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 오르티마가 손상된 아이템을 인지합니다. 』
게이트 공략 후에 아직 벗지 않은 방어구. 김건이 만들어낸 성장형 방어구였으나, 마족과의 전투에 이어 신아람까지 상대하다보니 넝마조각이나 다름 없었다.
그저 간신히 걸치고만 있는 수준이었는데.
뀨.
오르티마는 열심히 내 몸에 있는 방어구의 잔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자, 잠깐."
당황해서 떼어 놓으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잘도 도망다닌다. 어쩌다 붙잡아도 손 틈사이로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기어코 내 몸에 있는 아이템을 전부 먹어치운 오르티마가 땅 바닥으로 떨어졌다. 녀석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몸을 통통 튕기더니.
자신의 모습을 변화 시키기 시작했다.
불에 달궈진 것처럼 붉게 변한 녀석의 모습이 내가 입고 있던 방어구의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특수한 힘을 사용합니다. 』
가죽에 메탈 재질의 소재를 덧대어 만든 각반과 흉갑 그리고 어깨 보호구까지.
완전히 파괴 되었던 방어구는 어느덧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오, 대단한데.'
나는 그 방어구들을 다시 몸에 착용했다.
'근데, 이러면 오르티마는······.'
그냥 방어구가 된 거잖아.
"괜찮은거야? 공격 당하면 네가 전부 맞을텐데."
내구도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막 부화한 생물이 그렇게까지 단단할 것 같지는 않다.
스르륵.
내 말에 오르티마가 다시 슬라임으로 변해 방바닥으로 내려왔다. 약간 시무룩해진 모습. 그러나 금방 고개를 든 녀석은 내 앞에서 통통 튀었다.
무언가를 조르는 듯한 모습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수의 창을 꺼내서 내려 놓았다.
오르티마는 창을 꿀꺽 삼켰다. 이내 몸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한 자루의 창으로 변했다.
『 형상기억마수 오르티마가 회수의 창을 기억합니다. 』
『 해당 형상은 고유한 레벨을 가집니다. ( 1 / 100 ) 』
나는 회수의 창으로 변한 오르티마를 들어 올렸다.
『 아이템 정보 』
- 이름 : 회수의 창(오르티마) Lv.1
- 등급 : 유니크
- 능력치 : 공격력 45 + 0.3
- 기능 : 회수 Lv.5 관통 Lv.5
회수의 창은 성장형 아이템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템이 성장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르티마의 힘에 의해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래 이런 거였구나.'
미래의 오르티마가 에이션트 드래곤이나 펜리르 같은 신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이 녀석의 능력은 단순히 아이템에 국한 되는 게 아닐 거다.
자신이 포식한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모습을 강화할 수 있는 힘.
그게 오르티마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뭘 먹여볼까."
내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인 마족 학살자를 먹이기 전에.
이것저것 시험해 보는 게 좋겠다.
괜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안되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뀨!
다시 슬라임으로 변한 오르티마가 기쁘다는 듯이 뛰어 올랐다. 다음에는 어떤 아이템을 줄지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찾았다."
나는 주방에서 후라이팬을 들고 왔다.
"······."
어째 급 시무룩해진 것 같다.
* * *
넓게 펼쳐진 지하.
그 내부는 썩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하위 마족의 방치고는 과하단 느낌도 있었으나 방의 주인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존재는 없었다.
기록의 마족.
그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와인잔을 흔들었다.
"훌륭하다. 그래, 큰일을 했구나. 김상욱."
간만에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여기에 있습니다."
김상욱은 낡은 두루마리를 기록의 마족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틀림없는 진짜 마기의 원천이었다.
"드디어 내 손에 넣어보는구나."
이 하나만 있다면 프로젝트 마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수의 제물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 손해는 불사할 수 있었다.
흡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기록의 마족이 김상욱에게 말했다.
"그래, 내부의 인간들은 처리 못했다곤 해도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제 실수로 중독의 마족님의 권속이 죽고 말았습니다."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김상욱. 기록의 마족은 그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괜찮다. 그 정도 실수야 상관 없다."
화가 나서 전부 죽이고 오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김상욱은 빌런이 아니라 평범한 헌터로 남는 게 나았다.
그게 인간들의 정보를 얻기엔 더욱 편했으니까.
그리고 권속 하나 죽는 건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협력관계라지만 따지고보면 자기 권속도 아니었으니까.
"임무를 잘 완수 했으니 약속대로 네게 힘을 하사해주마."
권속으로 삼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인간이 제약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쓸데 없는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다.
지금은 마기를 부여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기록의 마족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림자와 같은 검은 기운이 김상욱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크흑······!"
그 갑작스런 충격에 김상욱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후 김상욱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로 힘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김상욱은 순식간에 마기에 적응한 듯 보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마기를 바라봤다.
기록의 마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인데도 마기와의 적성이 좋군.'
본래 마기란 마족이 다루는 기운. 타 종족이 이를 제대로 다루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일반적이다.
본성이 사악하고, 정제되지 않을 수록 다루기가 쉽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 종족을 져버린 김상욱은 그야말로 마기 체질이었다.
"좋아,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마. 특별히 좋은 걸 알려주마. 이 마기의 원천에는 종속 계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쉽게 말하면 노예를 부릴 수 있는 거다. 프로젝트 마기가 끝나면 네 녀석이 활용하도록 해주지."
"정말 감사합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김상욱의 입가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맺혔다.
"조만간 프로젝트:마기를 시작한다. 그때까지 제물을 모아라."
기록의 마족은 섬뜩한 눈빛으로 자신의 권속들에게 명했다.
"다른 각성자를 잡아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