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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동료 윤서현이 스킬 '공간이동 Lv.3'을 발휘합니다. 』

벌레처럼 우글대는 해골 병사의 군세를 넘어 우리는 단숨에 성 앞에 도달했다. 새삼 공간이동이 사기 기술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와, 언니. 공간이동 직접 해보는 건 처음이에요. 멋져요."

"그래? 고마워. 세아라고 했지?"

여자 둘은 쿵짝이 잘 맞나보다. 나는 마족이 있을 장소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오래된 성채.

벽에는 커다란 금이 가있고, 군데군데 이끼로 가득하다.

"그러면 이제 어쩌죠?"

윤서현, 진세아 그리고 신태양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대충 각자의 역할은 알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신태양의 검술, 윤서현의 공간이동.

"이 꼬맹이는 왜 데려온건데요?"

신태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진세아는 도둑이다."

"앗,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요!"

"미안. 근데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목숨이 걸려 있어서 어쩔 수 없거든. 그리고 이 사람들은 믿을만 해."

이 앞에 있는 건 마족이다.

각자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설명하지 못한 채로 들어갈 수는 없다.

"간략하게 설명할테니 잘 들어."

우리의 목적은 마기의 원천 회수와 마족 처치.

더불어 이 내부에 있는 게 평범한 보스가 아니란 걸 설명했다.

진세아와 신태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그러면 진짜 큰일에 휘말린거잖아요."

"마기라······. 그런 거였군요."

이 정도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만났던 그게 다 마족이란 거에요?"

윤서현의 눈이 커졌다. 이때까지의 일들이 하나로 연결 된 거겠지. 나는 담담히 말했다.

"네, 맞습니다."

다만, 마족의 침략이나 그들의 야욕에 대해서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시기 상조다. 무엇보다 그걸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까.

다들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인 표정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투둑.

성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왔다.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성의 끝자락. 거대한 뱀 하나가 혓바닥을 낼름 거리고 있었다.

스르륵.

거대한 뱀은 성의 첨탑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순식간에 성을 타고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저, 저거······. 바실리스크 아니에요?"

윤서현 말대로 단순한 뱀이 아니었다. 날개는 없지만 드래곤이 가지는 특징을 빼다 박았다.

진짜 바실리스크는 아니다. 그 열화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충분히 강하겠지.

그때였다.

거대 뱀이 아가리를 쭈욱 벌리고, 우리를 향해 미친듯이 돌진해왔다.

"성 안으로 뛰죠."

가능하면 무의미한 전투는 피하는 게 좋다. 마족과의 전투 이전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저걸 제압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고.

"으아아아!"

콰아앙!

진세아가 요란스럽게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진세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이어진 복도다.

나는 일행에게 설명했다.

"이곳에서 마족의 방을 찾아야 합니다. 마기의 원천과 마족 둘 다 그 방에 있을 겁니다."

인류의 배신자였던 김상욱의 말을 떠올렸다.

- 마족의 성. 멸망 직후에 곳곳에서 많이 봤지? 이건 일종의 사령탑인데, 마족이 게이트를 제어하고 마수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장소야.

이 성의 양식 자체는 멸망한 직후에 존재하는 것과 똑같다.

- 상위 마족이면 몰라도 최하위 마족은 그 안에 있는 마력 제어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제어실만 찾아내서 마족을 죽이면 끝. 어때 쉽지?

김상욱은 뻔뻔한 얼굴로 자신이 아는 정보를 늘어놓았다.

- 그래, 우진형 그 놈은 진짜 미친 마족이었지. 최하위 마족 주제에 힘을 얻고 싶어서 그리 큰 사고를 벌였으니까. 근데, 최하위엔 이유가 다 있는 법.

- 멍청하게 제어실에 마기의 원천이랑 틀어박혀 있다가, 다른 마족들에게 제압 당하는 게 그 놈의 최후였단 말이지.

김상욱의 설명에 따르면 최하위 마족인 우진형은 마기의 원천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

본래 가진 마기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

'결론은 제어실만 찾으면 된다는 건데.'

그걸 찾으려면 이 넓은 성을 전부 돌아다녀야 할 판이다.

"스승님, 그 마기의 원천이란 건 결국 응축된 마기인거죠? 그렇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리 말하는 신태양의 주변으로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 동료 신태양이 스킬 '초감각 Lv.7'을 발휘합니다. 』

"일반적인 마력과는 다른 기운이 확실하게 느껴져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자꾸 잊게 되는데 이 녀석은 검성의 자질을 타고났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재능도 일반적인 예측을 뛰어넘는다.

'생각보다 쓸모 있네.'

신태양을 따라 움직이려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고 있던 진세아가 입을 열었다.

"빨리 가요! 저 마수 여기로 들어 올 것 같아요."

"훗, 꼬맹아. 뱀 머리가 입구보다 훨씬 큰데 들어 올 리가 없지 않나?"

신태양이 조소하듯 말했다. 이것 또한 그냥 지나치기 힘든 발언이다. 진세아는 뛰어난 위기감지 스킬이 있다.

나는 일행을 재촉했다.

"아니, 진세아말대로니까. 빨리 뛰어."

"네? 그게 무슨?"

쿠우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뱀이 억지로 성 안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쿠구구구!

복도를 부숴가면서도 억지로 복도를 비집고 돌진해온다. 그 진동에 발 밑이 떨려 온다.

"이런 억지가······."

"그쵸, 내 말이 맞죠?"

"지, 지금부터 달릴게요! 모두 잘 따라오세요!"

신태양이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복잡한 복도에서 좌우로 꺾기를 수십 차례.

바실리스크 아종 녀석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따라왔다. 놈이 한 번 지나간 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한 번이라도 길을 잘못 들면 도망갈 길은 없단 의미.

"제,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거 쫑알쫑알 시끄러워. 맞으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오기나 해!"

투닥거리는 진세아와 신태양을 뒤로하고, 나는 윤서현에게 물었다.

"공간이동은 쿨타임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적어도 15분은 기다려야 돼요. 아, 순간이동, 순간이동도 있어요!"

"그건 몇 명까지 이동할 수 있습니까?"

"두 명이요! 꺄악!"

치이익!

뱀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독액이 바닥을 녹였다. 맞은 사람은 없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꽤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스승님, 저기에요!"

동시에 제어실을 발견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문양으로 덧칠 해진 기이한 문.

신태양이 가장 먼저 앞으로 뛰어나가 문을 밀었다.

덜컹, 덜컹.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단단하게 잠겨 있다.

"큭."

"비켜요!"

진세아가 주머니에서 락픽을 꺼내들었다. 자물쇠나 열쇠구멍을 해제할 때 쓰는 아이템이다.

"내가 열어 볼게요."

달칵, 달칵.

"시간, 시간이 좀만 더······."

단번에 열리지 않는다. 옆에 있던 신태양이 검으로 문을 쳐내지만 꿈쩍도 않는다. 마족 최후의 보루이니, 쉽사리 열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

거대 뱀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순간이동으로도 안 넘어가져요."

윤서현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쿠구구구!

복도를 죄다 부수며 돌진해오는 뱀 대가리. 바실리스크 아종. 놈의 이빨이 독액으로 번뜩였다.

신태양이 검집에 있는 검을 뽑아들려는 찰나.

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여긴 내가 한다."

성 내부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바실리스크 아종의 움직임은 제한되어 있었다.

해볼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동그란 환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 재능환(5년급)을 사용하셨습니다. 』

두번째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고 얻은 아이템.

이걸 쓸 때가 왔다.

『 일시적으로 5년에 한 번 탄생하는 천재의 재능을 부여 받습니다. 』

궁금하기도 했다.

5년급이라곤 해도, 천재는 천재.

줄곧 내게 없었던 그 재능.

그 재능이 경험치 10만배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윽.

나는 인벤토리에서 회수의 창을 꺼내 움켜쥐었다. 제약에 의해 붉게 달아오르는 창. 그것을 뱀의 아가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투화악!

동시에.

『 특성 무재조정(無材調整)을 발휘합니다. 』

무수한 홀로그램 창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43화 마기의 원천 회수(4)

재능 그리고 10만배의 경험치.

그 두 가지가 일으키는 시너지는 폭발적이었다.

『 스킬 '기초 능력 Lv.11'을 발휘합니다. 』

『 일반 및 레어 스킬을 얻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

『 일반 스킬 '투창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 일반 스킬 '명중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 일반 스킬 '판단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투창, 명중, 판단.

순식간에 세 가지 스킬을 얻었다.

화아악!

내 손을 떠나간 창이 허공에서 가속하듯 빨라졌다.

『 레어 스킬 '날카로운 눈 Lv.1'을 획득하셨습니다. 』

『 레어 스킬 '날카로운 눈 Lv.2'을 획득하셨습니다. 』

『 레어 스킬 '날카로운 눈 Lv.3'을 획득하셨습니다. 』

...

..

.

『 레어 스킬 '날카로운 눈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투콰앙!

급기야 창은 휘어지듯 궤적을 바꿔 뱀의 급소가 되는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키에에엑—.

바실리스크 아종이 그 충격에 경직되며 독액을 뿜어냈다. 괴로워하는 놈의 몸부림에 성의 복도가 마구 무너져 내렸다.

"허얼."

"세아야, 빨리 문부터 열자!"

"여, 역시 스승님······."

손 끝에 남은 확실한 여운. 내 입이 슬쩍 벌어진다. 열화판이라고는 하나 그 강력한 바실리스크가 창 한 방에 돌진을 멈췄다.

'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재능환(5년급)의 효과가 적용 중 입니다. 』

'이게 재능의 차이인가.'

전에 없던 압도적인 쾌감.

뭘해도 된다는 전능감이 몸을 훑고 올랐다.

아직 바실리스크 아종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놈의 찢어진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놈은 끈질기게 입가에서 독액을 뿜어냈다.

치이익—.

그러나 윤서현이 걸어준 보호막 '공간격리'를 뚫진 못한다. 아무리 경험치가 10만배라고해도 저 독액을 맨 몸으로 견뎌낼 순 없으니 나이스 어시스트였다.

나는 그 앞에서 대검 마족 학살자를 들어 올렸다. 손에 쥐자마자 제약에 의해 가열되기 시작하는 대검.

문제는 없다.

제약 때문에 3초 이상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기를 바꾸면 그만이다.

『 스킬 '체인지 웨펀 Lv.10'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손에 들린 무기가 한순간 도끼가 되었다가, 다시금 푸른 마력을 두른 대검이 된다. 대검을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 레어 스킬 '거인의 힘 Lv.1'을 획득합니다. 』

『 레어급 기초 스킬(힘)을 획득하셨습니다. 기초 스킬 통합까지 [ 1 / 4 ] 』

마력은 이내 검은 빛을 띄는 막으로 변화한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대검을 들어 크게 내리쳤다.

- 일자베기

쿠우웅!

허공에 그어진 파괴적인 검은 선이 바실리스크 아종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무게가 실린 대검의 날이 단단한 비늘과 머리뼈를 그대로 절단했다.

촤아악!

동시에 독액과 피가 섞인 액체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반으로 나뉜 뱀의 머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아직도 살아 있나. 질기구만.'

그렇게 한숨 돌리는 그 순간이었다.

철컥.

『 동료 진세아가 스킬 '절대 해제 Lv.2'를 발휘합니다. 』

"돼, 됐어요!"

열심히 락픽을 움직이던 진세아가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굳게 닫혀 있던 검은 문의 잠금이 해제 되었다.

절대 해제?

저런 스킬은 도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거냐. 새삼 내 주변에 있는 놈들이 얼마나 천재인지 느껴진다.

저건 5년 정도의 천재성으로 어떻게 되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

『 공간을 가로막고 있던 마(魔)의 장벽이 사라집니다. 』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 안에 마족이 있을겁니다. 다들 대비하죠. 진세아랑 윤서현씨는 후위에서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신태양은 나랑 같이 전위를 보고."

콰앙!

나는 힘껏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세차게 날아오는 검은 탄환들.

카앙, 카앙, 카앙!

앞으로 뛰어든 신태양이 마력을 두른 검으로 모두 걷어냈다. 푸른 빛이 번쩍이고 궤도가 바뀐 마기의 탄환들이 근처의 바닥을 박살냈다.

"크윽."

검을 집어 넣은 신태양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털어냈다. 압축되어 있는 마기의 농도가 차원이 달랐다.

그 신태양이 궤도를 바꾸는 게 고작이었으니.

드러난 거대한 방의 끝, 마기 탄환을 쏘아낸 장본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버러지 놈들이 감히 내 바실리스크를 건드려?"

보랏빛 피부. 날카로운 검은 뿔, 광기에 젖은 붉은 눈.

틀림 없는 마족이다.

바닥에 깔린 닳아빠진 카펫은 마족이 앉아 있는 허름한 왕좌에 닿았다. 그 뒤로 잘 조각된 석상 몇 개가 서 있다.

꼴에 마족이라고 아주 폼을 잡고 앉아 있다.

"전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겠구나."

마족의 노성이 울려퍼졌다. 음색에 섞인 마기 때문인지 공기가 떨려온다. 외형은 상당히 변했지만 입고 있는 옷을 보건데, 저 놈은 우진형이 맞다.

'마기의 원천은 안 보이는군.'

놈은 아끼는 바실리스크가 죽어가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하위 마족이 가진 태생적 한계다.

게이트의 제어권을 유지하려면 놈은 이 방에서 나올 수 없다.

'이 방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텐데.'

마기의 원천도 분명 근처에 뒀겠지.

나는 다짜고짜 마족을 향해 아까 회수했던 창을 던졌다.

『 스킬 '거인의 힘 Lv.10'을 발휘합니다. 』

『 스킬 '투창 Lv.10'을 발휘합니다. 』

더욱 강력해진 스킬들의 도움을 받아 쏘아진 창.

투화악!

주변으로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창은 검은색 궤적을 뿜으며 마족에게로 쇄도했다.

콰앙!

마족은 그 창을 한 손으로 받아냈다. 바실리스크의 돌진을 멈춘 것보다 강한 일격이었건만.

'더럽게 쎄구만.'

바실리스크 같은 마수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뛰어난 신체 능력. 마기의 원천으로 강화 되어 있어서 그런가. 가늠이 안되는 강함이다.

놈은 나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재밌기는 하구나. 인간 주제에 내게 발톱을 들이밀다니. 그래, 네 놈들은 아직 마족이 뭔지도 모르겠지. 갑자기 끌려왔을테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모른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다."

마족은 왕좌에서 내려왔다.

"얌전히 죽어서 내 양분이 되면 좋을 걸. 쓸데없이 설쳐서는 말이야. 무의미한 삶을 멈추고 이 몸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영광을 받아들여라."

놈의 목적은 헌터들을 죽이고 그 힘을 빼앗는 데 있었다.

『 마도(魔道) - 계약에 의거하여 제약이 발생합니다. 』

『 흐름의 마족이 당신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

흐름의 마족이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 몸을 죄어오는 듯한 악의가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일행 모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세아랑 윤서현 헌터. 둘은 제가 마족을 막는 동안, 이 방 안에 있을 마기의 원천을 찾아주세요. 생긴 건 구슬 형태일 겁니다."

"네, 알겠어요."

"찾아볼게요."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스승님, 저는 전투를 돕겠습니다."

"그래."

신태양과 나 둘이서라면 마족을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흐름의 마족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

마족은 돌연 공중에서 나타났다.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뻗은 발차기가 땅을 분쇄했다.

콰아앙!

진세아의 외침 덕분에 피했지만, 그 다음 공격이 문제였다. 마족의 눈에 새겨진 붉은 빛이 잔상을 남기며 뻗어나갔다.

무엇을 했는지 파악할 새도 없이 신태양이 벽에 쳐박혔다.

"크허억!"

신태양이 막아내지 못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신태양의 기교가 천재적으로 뛰어나다곤 하나, 기본적인 능력 차이가 압도적이다.

이어지는 마족의 연속 동작.

콰앙!

내 손에 들린 도끼와 놈의 주먹이 충돌했다. 거센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며 방 내부에 돌풍을 일으켰다.

공격을 받아낸 내가 크게 밀려났다.

'젠장, 더럽게 쎄네.'

『 제약 '고착화 금지' : 동일한 무기 사용에 제한이 생깁니다. 』

내가 들고 있던 도끼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흐름의 마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놈은 잠시 무기나 식히고 있어라. 다른 놈들부터 죽이고 올테니."

놈의 고개가 진세아와 윤서현에게로 향했다. 근데 놈이 모르는 게 있다.

나는 무기가 하나가 아니거든.

『 스킬 '체인지 웨펀 Lv.11'을 획득합니다. 』

『 추가효과 : 일시적으로 무기에 온전한 마력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

인벤토리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순식간에 대검의 형태로 변했다. 나는 있는 힘껏 놈의 목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 스킬 '데몬 헌트 Lv.11'를 발휘합니다. 』

내 스킬과 놈의 마기가 뒤섞여 한차례 폭풍을 만들어냈다.

카가각.

"크으으······. 이 버러지가······."

검날은 놈의 몸에 분명히 닿았다. 보랏빛 피부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러나 치명상으론 이어지지 않았다. 놈의 몸을 두른 마기가 대검을 슬금슬금 밀어낸다.

"건방진 새끼. 생물로서의 격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우우웅.

놈의 주변에서 솟아난 마기가 일시에 나를 덮쳤다. 미사일처럼 폭격하는 마력 구체들.

『 아이템 추가 기능 '보호막 Lv.10'을 발동합니다. 』

나는 무패의 반지의 효과를 발동시켜 버텨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만, 이후로 덮쳐오는 놈의 주먹에 나는 뒤로 밀려났다.

"크윽!"

놈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 차이에서 오는 체술.

놈은 자신의 제약 때문에 무기를 쓰는 걸 포기했다. 그러나 놈의 말대로 생물로서의 격이 다르다.

가진 능력치 자체가 다르다.

콰직, 콰드득, 콰앙!

방어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면, 또한 맷집 스킬이 없었다면 단번에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격들.

'크으윽.'

그 주먹 하나 하나의 타격감이 무겁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무기를 바꿔가며 대항한다. 그야말로 난잡한 개싸움이다.

어차피 이건 나 혼자서라도 해내야만 할 일이었다. 그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차피 이 세계가 망할 거라면.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의 손에 멸망할 세계라면.

나는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거지로 놈의 발차기를 막아내는 순간이었다.

촤르륵!

『 레어 스킬 '불굴의 정신 Lv.1'을 획득하셨습니다. 』

『 레어 스킬 '불굴의 정신 Lv.2'을 획득하셨습니다. 』

『 레어 스킬 '불굴의 정신 Lv.3'을 획득하셨습니다. 』

···

..

.

『 레어 스킬 '불굴의 정신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그래, 이거지.'

아직 재능환의 효과가 한참 남아 있다.

해볼만 했다.

『 일반 스킬 '전투 센스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보이지 않던 놈의 발차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 일반 스킬 '판단 Lv.11'을 획득하셨습니다. 』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주먹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 공격 하나 하나에 대응해 낼 방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마족의 얼굴에 새겨진 여유로운 미소가 점차 무너져 간다.

『 간파, 판단, 인지의 레벨이 11에 도달했습니다. 』

『 해당 스킬들이 통합됩니다. 』

『 통합 스킬 '통찰 Lv.11'을 획득합니다. 』

쉴 틈 없이 몰아치고, 막아내고, 후려친다. 놈의 주먹을 막고 흘리고 걷어낸다.

"무슨······!"

펼쳐지는 난전 속에서 마족 놈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믿을 수가 없단 표정이었다.

완전한 열세가 어느새 대등, 호각을 다툴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내 표정을 읽은 걸까. 놈이 소리쳤다.

"기고만장하구나! 그래 봤자 날 이길 순 없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지? 5분? 참으로 연약한 생물이구나! "

놈의 말이 맞다.

'어떻게든 무언가 수를 내야······.'

그 순간 떠올랐다.

맨 처음 놈에게 창을 던졌을 때.

녀석은 창을 손으로 잡았다.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지만 뭔가가 걸린다.

콰앙!

나는 거리를 벌리고서 창을 던졌다. 동시에 대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확실히 놈의 행동이 이상했다.

창을 손으로 잡아채고선, 대검을 팔로 막았다. 놈의 팔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으윽, 인간 주제에······."

놈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진다.

'어쩌면.'

놈의 움직임에 힌트가 있었다. 내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마족 놈은 내가 그곳으로 향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나는 크게 소리쳤다.

"진세아 왕좌를 훔쳐!"

"크하하! 눈치 챘나? 근데 이러면 어쩔 거냐?"

놈은 날 비웃더니, 다른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력 탄환이 진세아와 윤서현에게로 쇄도했다.

투두두두!

"꺄아악!"

이어지는 진세아의 비명.

보랏빛 불꽃과 함께 탄환이 쏟아진 장소가 초토화 되었다.

"멍청하긴, 이 정도 공격에 죽을 인간들이."

놈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놈을 비웃었다.

"멍청한 건 너다. 잘 봐둬라."

도둑과 공간술사.

그 둘이 만났다.

그게 얼마나 사기 조합인데.

"뭐야, 어떻게?"

윤서현과 진세아는 왕좌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순간이동으로 방 반대편까지 이동한 것이다.

샤아아아—!

곧이어 왕좌가 위치한 장소에서 새하얀 빛이 샘솟아올랐다.

"차, 찾았어요!"

진세아의 손에 들린 검은 보옥 하나.

그걸 바라보는 마족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이럴 리가······. 마기로 봉인 해둔 게 어째서? 고작 인간 따위가 뚫을 수 있는 마기의 농도가 아닐텐데?"

진세아가 일반적인 상대였다면 그 판단은 맞다. 일반적이라면 놈의 마기를 뚫고 마기의 원천을 끄집어 내는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진세아는 환세의 도둑이다. 녀석이 훔치지 못하는 아이템은 없다.

"이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이!"

급박해진 흐름의 마족이 왕좌를 향해 뛰어들었다.

콰아앙!

왕좌가 무너지고, 성의 내벽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충격. 놈은 씩씩 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 동료 윤서현이 스킬 '순간이동 Lv.1'을 발휘합니다. 』

윤서현과 진세아는 이미 내 옆에 있다. 거기에 더해 기절한 신태양까지.

"늦어서 쏘리요."

"충분해."

『 마기의 원천을 회수했습니다. ( 3 / 3 ) 』

『 무재조정 : 한계돌파의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콰드득!

마기의 원천이 내 손아귀에서 간단히 바스라졌다.

"허, 말도 안돼. 말이 안된다고. 내가 저걸 어떻게 가져왔는데······."

허망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흐름의 마족. 놈은 마기의 원천을 잃었다는 충격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C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레벨 잠금이 해제 됩니다. 』

저벅 저벅.

무너져 내린 벽을 넘어서, 쓰러진 바실리스크 아종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움찔움찔 몸을 떨고 있는 바실리스크. 참 질긴 생명력이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덕분에 다시 할 만해졌다.

푸욱.

나는 놈의 목에 대검을 꽂아넣었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 질긴 생명력이다.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툭툭, 대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선 고개를 들었다.

나는 흐름의 마족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제 2차전 시작이다."

동시에 눈부시게 밝은 광휘가 내 주변을 아득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 특성 '무재조정(EX)'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획득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그 찬란한 빛이 비록 내게만 보인다 할지라도.

내 경험치는 10만배다.

44화 마기의 원천 회수(5)

최하위 마족 우진형.

그는 생각했다.

마족이야말로 모든 생물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그러나 마족들 사이에서도 계급은 나뉜다.

그것은 태생.

제약도, 가지고 있는 힘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 때문에 마족들 간에서도 계급과 격차가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최하위 마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우진형은 그런 정해진 룰을 거스르고 싶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출세욕.

강함을 추구하는 마족 본연의 욕구.

'드디어 마기의 원천이 내 손에 들어왔어. 멍청한 윗놈들. 이걸 그냥 숨겨 놓기만 해? 웃기는 소리.'

운반책에 불과하던 그가 마기의 원천을 빼돌린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마족 전체가 이 세계를 뒤덮는다고 해도, 결국엔 강자들의 땅따먹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몸을 고작 운반책으로나 쓰려한 게 실수지. 덕분에 내게 기회가 왔다.'

미천한 최하위 마족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기의 원천을 써서 힘을 끌어 모아야 했다.

그러려면 많은 수의 헌터들이 필요했다.

'헌터들의 목숨은 마기로 전환하기 가장 쉬운 에너지다.'

그리하여 선택한 곳이 채용 시험장이었다. 은빛의 날개 길드에 모이는 헌터들이라면 충분한 질의 영혼을 제공해 줄 거다.

그곳에 존재하는 S급들은 위험하지만, 마기의 원천을 사용해 제약을 만들면 괜찮다.

'B급 이하의 헌터들만 끌어들인다.'

그들을 전부 죽이고 피를 취해서 힘을 모으면 도망은 간단하단 계산이었다.

고루한 윗놈들은 좀처럼 이런 강경책을 내놓을 생각을 못한다.

프로젝트 마기? 웃기고 있다. 어느 세월에?

때문에 이 일은 전부 우진형의 독단.

그러나 마족의 세계에서 힘이란 곧 법칙.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기만 한다면, 그 과정은 상관 없었다.

보란듯이 힘을 모은다면 다른 마족들도 자신을 인정하리라.

'크하하하! 성공이다!'

실제로 우진형은 마기의 원천으로 게이트를 형성하고, 헌터들을 끌이는데까지 성공했다.

이제 마물들을 써서 헌터들을 반쯤 죽인 뒤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인간 네 마리가 모든 걸 휘저어 놓았다. 마기를 짜내서 만든 가짜 바실리스크를 죽이질 않나, 심장부의 문을 따고 들어오지 않나.

'······곧 죽을 놈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상관 없었다.

마족이란 무릇 모든 면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법.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인간들.

문명의 손길을 타지 않은 야생동물처럼. 마족이 가진 힘이 위험하단 감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콰아앙!

어줍잖게 검을 드는 놈을 날려버리고, 놈들의 리더격으로 보이는 인간을 몰아세웠다.

'약하구나, 겨우 이런 실력으로 나와 맞먹으려 들어?'

지금은 최하위에 불과하지만, 미래에 강력한 마족 어쩌면 군단장까지 넘볼 지략과 재능을 가진 이 몸에게?

카각!

'!'

그런 인간의 검이 자신의 몸에 피를 냈다. 놈은 자신의 제약을 뚫고 무기를 바꿔 대항했다.

당황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결국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무기를 바꿔 든다고 해결되는 힘의 차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몸에 상처를 낸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감히!"

그가 진심을 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인형처럼 맥 없이 공격을 받아내는 상대.

역시 마족이 가진 능력 앞에 인간이란 무력한 존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조금씩 조금씩.

공격을 주고 받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지른 주먹이 도끼에 막히더니, 어느 순간 바뀐 대검으로 반격이 날아온다.

마력을 쏘아내도 피하거나 검으로 받아낸다. 그러고보니 꽤 두드려 팼는데도 멀쩡하게 움직인다.

'뭐, 뭐냐. 이 놈······.'

급기야 무슨 짓을 해도 공격이 안 먹힌다. 처음에는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동급의 무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인간에겐 체력적 한계가 존재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기만해도 된다.

'마기의 원천이 내 근처에 있는 한 이 몸이 패배할 일은 없다.'

원천은 마족의 성유물이자 끊임 없이 마(魔)를 뿜어내는 근원이다.

계속해서 마기의 원천의 힘을 사용한다면 지치지 않고 인간들을 쓸어 버릴 수 있으리라.

'그 사실에 눈치 챈 것 같다만. 그래봤자다.'

인간 두 마리가 어설프게 돌아다니며 원천을 찾아 헤메지만,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찾아낸다고 해도 원천은 마기로 철저하게 봉인 해 뒀다.

고작해야 B급일 헌터놈들이, 그 봉인을 뚫고 원천을 꺼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그렇기에 흐름의 마족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 이럴 리가······."

마기의 원천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간 꼬맹이는 마기로 꽁꽁 싸매둔 봉인을 무시하고 마기의 원천을 챙겼다.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도둑 맞았다.

"이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이!"

뒤늦게 달려들어봤지만 놈들은 쥐새끼처럼 달아났다.

'고, 공간 조작인가?'

연달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원천은 빼앗기고, 그 시간동안 인간은 고작 한 놈 쓰러뜨렸을 뿐이고.

이 꼴은 마치 인간들에게 농락당하는 것 같지 않은가.

콰드득!

마기의 원천은 인간 남자의 손에서 부숴졌다. 왕좌를 지킨답시고 달려든 탓에 거리가 벌어져 막을 수도 없었다.

파스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마기의 농도가 옅어지고, 흐름의 마족 눈에 핏대가 섰다.

남자는 이미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바실리스크의 위로 올라갔다.

콰득!

바실리스크의 숨이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허, 그런다고 뭔가가 달라지기라도 할 것 같나?"

인간의 기세가 눈에 띄게 달라진 건 그 순간부터였다.

마기의 원천을 잃은 탓도 있겠지만······.

그러다곤해도 이건.

퍼버버버벅!

너무 강해진 거 아닌가?

인간 남자는 쏘아낸 마력 탄환을 모두 검으로 튕겨내며 달려왔다. 손에 쥔 무기가 순식간에 바뀌고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몸을 덮쳤다.

"커허억!"

처음으로 고통 섞인 신음이 터져나왔다.

이렇게 무력하게 따라잡힌다고?

인간이란 종족이 이렇게 빠른 성장이 가능한 종족이었던가? 아니다. 그럴 리가. 그냥 버러지에 불과할텐데.

왜 저 남자는.

계속해서 강해지는거냐.

흐름의 마족은 마기를 실어 발차기를 날렸다. 그것을 도끼로 막아낸 이지한이 반대편에 쥔 창을 찔러왔다.

푸훅!

창이 흐름 마족의 복부를 꿰뚫었다.

"크아아악!"

마족의 얼굴에 핏대가 붉어지고, 붉은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마기를 끌어 모아, 방어막을 형성해보지만.

도끼가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콰드득!

마기로 만든 보호막이 쩍쩍 갈라지며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콰앙! 콰앙!

도끼를 두 번 휘두르자, 방어막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대체 어떤 생물이 마기를 이다지도 쉽게 뚫는단 말인가.

마족의 붉은 눈에 당황스런 감정이 차올랐다.

절대로 뒤집힐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격차가.

방금 그 순간 뒤집혔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억.

어느새 이지한의 양손에는 대검이 들려 있었다.

서걱—!

날카로운 검날이 번뜩임과 동시에 공간 위로 검은 상처 하나가 생겨났다. 마기를 전부 끌어 모아도 버텨낼 수 없는 파괴력.

마(魔)를 지우는 일격.

흐름의 마족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크아아악!"

마족이 비명을 질렀다.

팔 부분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동시에 강인한 육체를 자랑하던 마족의 팔이 날아갔다.

상상을 뛰어 넘는 절삭력이었다.

대체 무슨 검이 저리도 날카롭단 말인가.

무슨 기술이 저다지도 강력하단 말인가.

"내가, 내가 겨우 인간한테 죽는다고?"

팔을 움켜쥔 마족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작 인간 같은 하위 종족에게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그런 치욕에 반발이라도 하듯, 흐름의 마족은 피를 토할 각오로 남은 한 쪽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서걱—!

다시금 공간 위에 검은 상처가 새겨졌다.

그 상처는 흐름 마족의 목을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럴······."

흐름의 마족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놈의 허탈한 눈빛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돈다.

마기의 원천을 빼앗겼을 때부터 이미 승패는 나 있었다. 원천으로 강화하고 있던 능력치가 전부 낮아졌으니, 레벨업을 거치며 성장한 이지한과의 차이는 더욱더 압도적일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는 빠르게 식어갔다.

"수는 없는데······."

흐름의 마족은 끝까지 이해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했다.

자신이 눈 앞의 인간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켰는지 말이다.

『 게이트의 주인을 처치하셨습니다. 』

* * *

게이트 내부, 남겨진 헌터들이 위치한 장소.

"버텨요! 최대한 버티는 겁니다!"

"으아아!"

"2열 빨리 교대해주세요!"

이곳에서도 필사적인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끊임 없이 밀려드는 해골 병사들. 해골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 많은 수를 막아내는 것만해도 헌터들에겐 벅찼다.

"3열! 3열!"

"부상자는 뒤로 빠져요!"

"크악, 누가 이 놈 좀 떼어줘!"

몬스터의 웨이브를 뚫고 성으로 도달하겠다는 생각은 접은지 오래였다. 그저 살아남고 싶다. 그런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큭, 끝이 없어. 대체······."

B급 헌터 문주명이 이를 악물었다. 입가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

이 지옥이 언제 끝나는가? 거기에 대한 확답도 없었다.

"구조대가 오기는 하는 겁니까?"

"이제, 이젠 못하겠어요."

헌터들 모두가 지칠대로 지친 상황. 제약 때문에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지금. 점차 진형이 붕괴 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봐요!"

그런 이들을 격려하는 문주명.

그러나 격려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진형의 한 쪽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해골들이 물 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덜그럭, 덜그럭!

사방을 가득 메운 뼈 부딪히는 소리. 놈들은 이빨로 헌터들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부숴진 팔 뼈가 헌터의 몸을 파고 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헌터들 때문에 다시금 진형이 흐트러진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문주명은 끝까지 검을 휘두르곤 있었지만, 곧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다.

'틀렸다.'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건지. 그저 은빛의 날개 길드에 들어가고 싶었을 뿐이데.

그 시험에 참가하려던 것 뿐이었는데.

검을 든 그의 손이 힘없이 떨궈지려는 찰나였다.

『 게이트의 주인이 처치되었습니다. 』

『 마도(魔道) : 고착화 금지 제약이 사라집니다. 』

"응?"

제약이 사라졌다는 메시지부터.

『 해당 게이트를 유지하던 마(魔)의 기운이 사라집니다. 』

해골들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기운까지 하늘 위로 흩어진다. 거세게 밀어 붙이던 회색 해골들의 색이 평범하게 바뀌면서 그 힘도 약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거에요?"

퍼억!

이제는 헌터들이 주먹질을 하는 것만으로 나가떨어진다.

문득 맨처음에 따로 움직인 헌터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보스를 물리치기라도 한걸까?

그 많던 해골들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 살았다."

문주명은 밀려오는 안도감과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았다. 다른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행이야······."

"끝난거죠······?"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살았다는 것이었다.

* * *

나는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냈다. 시야가 어지럽다.

『 스킬 '맷집 Lv.11'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스킬 '불굴의 정신 Lv.11'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으윽, 서 있기도 힘들구만.'

스킬이 없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거다.

레벨업과 동시에 능력치가 올랐다.

그 성장치는 자그마치 1.3배.

탄탄하게 쌓아 올려진 능력치가 각종 스킬과 조합되니 그 효과는 마족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체력과 누적된 데미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미 내 몸은 만신창이었다.

"후우······."

이게 최하위 마족이라니.

믿기지가 않는 강함이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뭔가 하나만 부족했더라도, 저기에 누워 있는 건 내가 됐을 거다.

마기의 원천을 제때에 회수하지 못했거나, 방어력이 부족했거나, 마족 학살자가 없었거나 등등.

"이, 이긴거죠?"

윤서현이 조심스레 마족의 시체를 살폈다. 깔끔하게 목이 잘린 마족의 시체가 누워 있다.

"흐아, 진짜 위험했다. 진짜 돕고 싶었는데, 도울 틈이 안 보였어요. 그 마기의 원천이라는 거 사실은 더 빨리 찾고 싶었는데······."

진세아도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쉬운 듯 이야기한다. 이겼으니 상관 없다.

애초에 일행이 없었다면 나도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

마족은 상상 이상의 강적이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미래의 날고 기는 헌터들이 왜 그리 마족에게 그렇게 고전했었는지. 그들로 이뤄진 군단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여 강력했던건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전부 잘했습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쓰러진 신태양 앞으로 다가갔다. 녀석의 뺨을 툭툭 쳤다.

『 스킬 '구조 Lv.10'을 발휘합니다. 』

『 구조한 대상의 체력이 5% 회복됩니다. 』

새하얀 빛이 녀석에게로 흘러들어간다. 이게 구조인가 싶기는 하지만. 효과는 좋았다.

"스, 스승님!"

벌떡 일어난 신태양이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이내 마족이 쓰러진 걸 확인하고선 눈을 깜빡인다.

"다 끝났다. 고생했어."

"끝났다고요? 괘,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데는?"

"풋."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신태양을 진세아가 비웃었다.

윤서현도 기진맥진해보였다. 그녀가 가진 순간이동의 레벨은 1이었다. 마나를 엄청나게 소모했을 거다.

틈틈이 내게 보호막도 걸어줬으니 진짜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겠지.

"다들 응급처치라도하게 포션 받아요."

우리는 윤서현이 인벤토리에서 나눠준 포션을 받아 마셨다.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 스킬 '자연 회복 Lv.11'의 추가효과를 발휘합니다. 』

『 모든 종류의 회복량이 5% 증가합니다. 』

『 레어 스킬 '포션 체질 Lv.1'을 획득합니다. 』

『 모든 포션의 효과가 3% 증가합니다. 』

'오, 나이스.'

아직 재능환의 효과가 남아 있나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어쨌든 죽을 위기를 넘겼고, 덕분에 스킬도 셀 수 없이 얻었다.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쿠구구······!

"성이 무너져요!"

진세아가 호들갑을 피웠다.

성뿐만이 아니다. 이 게이트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거다. 애초에 마족에 의해 인공적으로 생성된 장소였으니까.

윤서현이 싱긋 웃으며 가운데로 향했다.

"괜찮아, 다들 이쪽으로 모여요. 공간이동으로 빠져나갈게요. 쿨타임이 끝났거든요."

"와, 언니 진짜 짱."

"감사합니다. 스승님?"

"잠깐만."

나는 바닥에 쓰러진 마족에게 다가갔다. 놈의 가슴팍에 박힌 검은 보석. 그것을 빼냈다.

『 완벽한 마정석 B++ 』

"무너지겠어요!"

"기다려봐."

챙길 건 챙겨야지. 나는 기어코 바실리스크까지 해체한 뒤, 마정석을 챙겼다. 거대한 놈이었지만 의외로 금방 끝났다.

『 레어 스킬 '중급 해체 Lv.1'을 획득합니다. 』

『 레어 스킬 '중급 해체 Lv.2'를 획득합니다. 』

···

..

.

『 레어 스킬 '중급 해체 Lv.10'을 획득합니다. 』

남아 있는 재능환 덕에 중급 해체 스킬까지 챙겼다.

"이지한씨답네요."

윤서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답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공간이 일렁이면서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맨 처음 시작했던 장소로 돌아왔다.

이곳에 서니 모든 정경이 한 눈에 보인다.

어두운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성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평원을 뒤덮었던 해골들 또한 모두 쓰러져 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문주명 헌터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기다리면 됩니다. 곧 있으면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가슴을 쓰러내린 문주명이 뒤쪽에 있는 헌터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옅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저희도 조금 쉬죠."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까부터 상태창을 확인하란 알림이 계속 울려서 귀가 아팠다.

파지직.

정보창을 열자마자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이제는 이계규율 때문이란 걸 단박에 알아 챌 수 있다.

상태창이 열리기를 기다리다보니, 문득 떠올랐다.

'이계규율에게 받았던 칭호 초성장. 이번 전투에선 그 영향이 확실히 있었다.'

경험치를 두 배로 해준다는 칭호 '초성장'.

이계 규율은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때문에 무재조정의 효과에는 여전히 경험치 10만배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체감상 확실히 경험치 오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실제로는 20만배라는 건가.'

그간의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일반인의 재능이 1이라고 했을 때, 내 재능은 한없이 0에 가깝다.

그런 내가 체감이 될 정도의 성능이 바로 초성장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떤 보상을 줄 것인가.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이계 규율 첫번째 : 업적 기록 』

『 해당 업적을 정산합니다. 』

- 업적명 : 흐름의 마족(최하위) 처치

- 기록 : 성장력 SS++, 데미지 B++, 전투 B++, 격차극복 SS······.

- 종합평가 : SS

『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 해당 기록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

『 해당 업적의 실현 가능성은 0.001% 미만입니다. 』

여전히 무재조정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

그 과도한 평가 속에서.

『 보상을 지급합니다. 』

여지껏 본 적 없는 흑빛의 가루가 쏟아졌다. 까만 밤하늘처럼 검은 입자들이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검정?'

흰색, 파랑, 빨강, 주황. 순서대로 일반, 레어, 유니크, 레전더리. 각각의 색은 아이템의 등급을 의미한다.

그러나, 검은색.

이건 들어본 적조차 없는 등급이다.

『 무성(無星)등급 칭호 '마계의 재앙'을 획득합니다. 』

놀랍게도 이계규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등급을 가져왔다.

45화 재능 발화의 장(1)

『 무성(無星)등급 칭호 : '마계의 재앙(災殃)'을 획득합니다. 』

『 1. 필드 '마계(魔界)'에서 마(魔)속성 대상으로 1000%의 데미지

2. 마도 - 제약 무시 5% 』

"미, 미쳤네."

나도 모르게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혹시 상처가 악화된 거에요?"

윤서현이 걱정스런 눈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두드려 맞아서 그런지 몸 상태가 안 좋기는 한데.

나는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보상 이펙트는 나에게만 보인다. 오해한 윤서현이 인벤토리에서 포션 한 병을 더 내밀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이거 먹어요."

그런 걱정을 할만큼 내 꼴이 엉망이긴 했다. 방어구는 너덜너덜해져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찢어진 옷 군데군데에는 피가 배어 있다.

『 상급 체력 포션 』

고급스런 병에 담긴 붉은 액체. 이거 엄청 비싼 건데. 뭐, 준다고하니 사양하진 않겠다.

"감사합니다."

『 스킬 '포션 체질'이 대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

고급 포션을 마셔서 그런가 스킬 '포션 체질'의 레벨이 쭉쭉 올라간다. 나는 입가를 슥 닦고서 다시 진지한 눈으로 메시지를 살폈다.

'무성 등급 칭호 마계의 재앙.'

무성 등급 같은 건 들어 본 적 없는 단계다.

그건 그렇다쳐도 효과가 의문이다.

'필드 마계?'

이런 식의 설명은 처음이다. 그래도 뉘앙스는 알겠다. 마계에 가야지만 발휘할 수 있는 거란 뜻이겠지.

데미지 10배.

말만 들어도 미친 효과다.

근데, 마계에 갈 일이 있으려나?

여전히 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보상이란 느낌.

그래도 마지막만큼은 의미가 있었다.

'제약 무시 5%.'

불가능한 효과.

현 시대에 이런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나, 스킬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그렇다.

마족의 제약은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법칙이다.

SSS급 영웅도, 심지어는 마족 본인조차 종속되는 규칙.

'그 누구도 제약에서 벗어날 순 없다는 게 정설인데······. '

이 칭호의 효과는 그 법칙을 무시하게 해준단다. 5%지만 앞으로 칭호를 얻어서 늘어날 수도 있단 걸 감안하면.

사기 그 자체다.

이번에 마족 앞에서 신태양이 힘을 못 쓴 것도 제약 때문이었으니까.

쥐고 있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따지고보면 고작 최하위 마족 하나 잡았을 뿐.

더욱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때였다.

스르르······.

『 게이트가 붕괴하여 본래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

주변의 풍경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경기장으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모여 있었다.

"나, 나왔다!"

"헌터들이 돌아왔어!"

"몇 명이야?!"

"부상자는?"

응급 의료진들과 은빛의 날개 관계자들. 양복을 걸친 협회 관계자들도 보인다. 의외로 기자들은 한 명도 없다.

"서현아!"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윤지은 헌터였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동생 윤서현에게 달려갔다.

"왜, 왜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윤지은이 그대로 윤서현을 꽉 껴안았다. 갑자기 끌려 들어 갔다고 했으니, 바깥에서 걱정을 할만도 하다.

옆을 보니 수호 길드 사람들도 전부 달려와서 신태양의 몸을 살핀다.

"야, 임마! 갑자기 뛰어들면 어떡하냐!"

"아니, 괜찮다니까요! 자, 잠깐만요! 스, 스승······. 형님!"

녀석은 강제로 들것에 실려서 끌려나갔다. 신태양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래도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랬다고 착실하게 형님이라 부른다. 그건 기특하네.

"세아야! 다친 데 없니?"

"아, 아빠. 뭐, 별 일 없었어."

마지막으로 진세아까지. 중후한 중년의 남성이 녀석을 꼭 껴안았다. 진세아가 부끄러운 듯 내 눈치를 살핀다.

진세아의 아버지를 확인하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만, 저 사람 하이텍트사 회장이잖아.'

헌터 용품 산업의 최정상에 있는 회사 '하이텍트'. 얼마전 이용했던 트레이닝 센터의 훈련 도구들도 싹 다 하이텍트 제품이었다.

이번 은빛의 날개 채용 시험의 후원사도 하이텍트고.

회장 얼굴 정도는 인터넷에서봐서 알았다지만, 설마 하나 있다는 딸이 진세아일 줄이야.

'알면 알수록 이해가 안가네.'

환세의 도둑 진세아.

미래에서 왜 그러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니, 대강 그려지기는 한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잃을 것도 많은 법이란 건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진세아가 나를 가리켰다.

"저 오빠가 있어서 괜찮았어."

내 얼굴을 확인한 회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회장치고는 상당히 젊지만, 얼굴에서 왠지 모를 관록이 느껴진다.

"고맙네. 하나 뿐인 딸이라······. 이번 시험에 참가한 헌터인 것 같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사례를 싶어서 그러는거니, 사양 말고."

사례라. 딱히 진세아를 구하려고 한 일은 아닌데. 주겠다면 받기야 하겠지만.

"이······."

어라, 그런데.

'으응?'

눈 앞이 점점 어두워진다.

"자네······. 괜찮······."

걱정스런 표정의 회장 얼굴이 보인다. 포션까지 마셨는데 왜 이러는 거야.

마족과의 전투가 그렇게까지 치명상이었나.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은빛의 날개 비공식 채용 시험 도중 일어난 게이트 발생 사고.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협회와 은빛의 날개에서 자체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지만.

사건의 진상에 완벽히 다가가기엔 주어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상을 아는 이들은 존재했다.

당연하게도 마족들이다.

우진형이 마기의 원천을 사용해 이득을 취하려다 실패했다. 그 사실이 하위 마족들 사이에서 알려지고 있었다.

권속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마족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쯧, 천한 출신의 최하위 마족답군. 인간에게 토벌 당해? 마족 이름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언짢은 표정으로 와인을 음미하는 존재.

기록의 마족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프로젝트 마기를 담당하고 있는 하위 마족이기도 했다.

고작 최하위에서 한 단계 높을 뿐이지만 거느리고 있는 권속이나 힘의 차이는 극명했다.

"이걸로 마기의 원천을 두 개나 잃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나?"

본래 국내에 존재해야 할 세 개의 마기의 원천.

하나는 인간에게 맡겼다가 어이없게 던전을 공략 당하면서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최하위 마족에게 운반을 맡겼다가 이 사단이 났다.

사실 빼앗긴 마기의 원천은 하나가 더 있었다. 황금 고블린 자볼이 가지고 있던 마기의 원천. 이는 본래 해외로 반출 될 예정이었기에 지금의 기록의 마족이 알 방도가 없었다.

어쨌든 국내에 남은 건 하나 뿐이다.

"대답해라."

기록의 마족이 내뱉은 노성에 눈 앞의 남자가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거의 알몸의 남자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기, 기회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이었다.

그는 첫번째 마기의 원천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죄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빌런 길드 '흑결'의 길드장이었던 그였으나, 임무에 실패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뻐억.

기록의 마족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상욱의 배를 찼다.

"크허억."

김상욱은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 또한 A급 헌터였지만 하위 마족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했다. 그 주위에 서 있던 다섯의 권속들이 김상욱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기록의 마족의 미간을 좁혔다.

'이제 대한민국에 남은 마기의 원천은 단 하나다.'

대체 왜 이렇게 일이 꼬인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방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족 내에 스파이가 있을 리도 없다. 인간에게 협력하는 마족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러니 정보가 새나간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

'설마 권속 중 하나가?'

그로 인한 이득이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간 100% 죽을텐데, 무슨 이유로 배신을 하겠는가.

'차라리 이 인간 놈에게서 새어나갔다고 보는 게 낫다.'

눈 앞의 김상욱은 나름 정성들여 키운 인간.

흐름의 마족의 눈빛에 김상욱이 몸을 떨었다.

"기록의 마족이시여, 제발 용서를······!"

한참을 김상욱을 내려다보던 기록의 마족이 시선을 올렸다.

'그런 뻔히 들킬 일을 했을 리가.'

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모든 명령을 잘 수행해 온 꼭두각시다. 기록의 마족은 김상욱의 탐욕스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용서라, 그래. 특별히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대신 이번일이 수틀리면 네 녀석이 의식의 제물이 되어야 할거야."

"가, 감사합니다."

하나 남은 마기의 원천으론 프로젝트 마기를 진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충분한 제물과 마기를 불어 넣어 의식을 치르면 어떻게든 비슷하게 흉내낼 순 있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지만, 지금의 기록의 마족에겐 방법이 없었다.

'운이 더럽게 없군. 하필이면 내가 담당한 나라에서 이딴 일이 일어나다니.'

그게 당장의 결론이었으나, 기록의 마족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으니 확인은 해 볼 필요가 있겠지.'

헌터 협회에 심어 놓은 최하위 마족이 존재한다. 그들을 이용하면 꽤 쓸만한 정보를 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쯧, 윗 존재들만 아니었어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텐데.'

기록의 마족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상위 마족들은 모든 일이 조용히 진행되기만을 원하고 있다. 조그마한 나라 하나에서 일어나는 일이 뭐가 중요하냐는 듯한 태도.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의 사활은 그에게 있어 포기할 수 없는 것.

'여차하면 내가 직접 나서서라도 해결해야겠어.'

설사 자신의 행동이 윗존재들의 방향성과 어긋난다고 해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전부 치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기록의 마족이 붉은 눈을 번뜩였다.

* * *

새하얀 천장.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병원 안이었다.

'쓰러졌던건가.'

아무래도 누적된 데미지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치료를 받아서 그런건지, 한숨 잘 자고 일어나서 그런건지 몸이 상쾌하다.

'뭐야, 되게 좋네.'

근데, 이전에 있었던 다인실 병동이 아니다.

고급스런 인테리어의 1인실 VIP룸.

그 한쪽 벽면으로 화환이 보인다.

- 스승님의 무사쾌유를 빕니다. 전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겠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알 것 같았다.

'뭐야, 며칠이나 지난거지?'

근처에 있을 스마트폰을 찾아 뒤적였다. 스마트폰은 서랍 위에 충전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날짜를 확인하니 3일이 지나있었다.

'3일 동안 쓰러져 있었단 말이야?'

자연회복에 포션까지 마셨는데도 이 정도라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상이 심각했었나본데.'

마기에 의해 상당한 내상을 입었던 게 분명하다. 맷집과 불굴의 정신 스킬 덕에 움직일 수 있었던 것 뿐이고.

스마트폰에는 문자가 와 있었다.

- 백묵 : 몸은 괜찮으신가요? 일어나시면 연락주세요. 직접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물론 지난번 최유정 사건에 대해서도 보상하고 싶고요.

그러고보니 우진형의 뒷조사를 부탁했었다. 그가 보내준 서류는 한 번 훑어보고 말았지만, 마족과 관련된 실마리를 조금 잡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쓰러진 것까지 알고 있네. 설마 채용 시험에 왔던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이건 나중에 전화하고.'

- 멋진 세아님 : 오빠, 깨어나면 말해요. 울 아빠가 할 말있대요.

핸드폰을 가져갔을 때, 이름을 이렇게 저장해 놓은 모양. 나는 표시된 이름을 진세아로 바꿔적었다.

- 신태양 : 스승님, 끝까지 옆을 못 지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제 부족함을 크게 느꼈습니다. 한동안······.

이 녀석은 무슨 장문의 문자를 보내놨다. 대충 훑어보니 열심히 수련한다는 의미였다. 마족한테 한 대 맞고 나가떨어졌으니 충격일만도 하다.

그렇게 메시지를 확인하는 도중이었다.

벌컥.

병실의 문이 열렸다.

"어머, 일어나 계셨네요? 몸은 어때요?"

윤지은이었다. 얼굴 위로 퀭한 다크서클이 보인다. 은빛의 날개에서 사건이 터졌으니, 그걸 뒷정리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의사분들도 몸은 회복 됐다고 하더라구요. 당장 퇴원하셔도 괜찮다네요. 다만······."

윤지은이 뒤쪽을 슬쩍 바라봤다.

"협회에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시네요."

"협회면 윤서현 헌터입니까?"

"아뇨, 상황이 꽤 중요해서 관리국 팀장 분이 오셨어요. 잠깐 괜찮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회복 되었는데, 안 될 것도 없다. 그만한 사건이 있었으면 조사는 피할 수 없는 거고.

윤지은 헌터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뒤에 있던 양복 차림의 남성이 뒤따라 들어왔다.

순하게 생긴 인상의 남성.

"처음뵙겠습니다, 헌터 협회 게이트 관리국 마성철 팀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날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건에서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몇가지 확인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마성철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이 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46화 재능 발화의 장(2)

마성철은 한껏 진지한 태도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수첩과 펜.

'이번 사건은 팀장이 나올 정도란 건가.'

협회의 게이트 관리국에서 팀장은 높은 직책이다. 특히 게이트 관리국은 이번 사건과 같은 게이트 내부의 사건을 총괄하는 곳이다.

"우진형이라는 헌터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그곳에서 유일하게 사라진 사람이거든요."

이번 사건에서 죽은 사람은 본래 마족이었던 우진형 뿐이다. 내 손으로 죽였지만, 당연히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번 사건의 내 위치는 어디까지나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다.

그저 최선을 다해 게이트를 공략했을 뿐이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다른 분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여서요. 아마, 운이 없으셨던 거겠죠. 종종 게이트 시작 지점이 다른 경우가 있거든요. 참 안됐습니다."

그리 말하고선 수첩에 뭔가를 끄적였다.

"아, 그리고 혹시 보스를 상대하시면서 뭔가 다른 점은 없었나요?"

"무진장 쎄던데요. 그거 빼곤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마상철은 수첩을 펜으로 툭툭 두드렸다. 고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다들 내 말대로 입단속을 해줬나본데.'

진세아와 윤서현, 신태양에게는 분명히 말해뒀다. 마족에 대한 건 비밀에 해달라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긴 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해줬다.

'언젠가 설명을 하긴 해야 할텐데.'

그 덕인지 마족과 마기의 원천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없다. 새어나가는 것도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왠지 고마운 기분이다.

"크흠. 잠깐 실례."

잠시 헛기침을 한 마상철이 내 쪽으로 다가와서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네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었다.

"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몸조리 잘하시길."

마상철은 나와 윤지은에게 고개를 숙이고선 병실을 나갔다.

"별로 물어보는 건 없네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상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되게 강압적이었는데."

윤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사람은 백묵의 부하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백묵의 측근으로 있던 사람이다.

아무래도 협회의 정보는 저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모양.

'그걸 내게 말해주고 싶었던 건가.'

쪽지에는 호라이즌 길드의 심볼이 적혀 있었다. 협회의 정보도 어느 정도는 백묵에 의해 통제되고 있단 의미다.

'협회에도 마족이 있으니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들어봐야겠지.'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정말로 좀 더 안 쉬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병원비는 저희쪽에서 전부 부담하는 거라 걱정 안하셔도 돼요."

윤지은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호사스런 고급 병실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벌써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 C급 상위가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늘어났다. 가만히 누워 있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커튼을 치고 환자복에서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병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바깥에서 기다리던 윤지은이 봉투를 건넸다.

거기엔 내가 사용하던 장비가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윤지은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진짜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동생한테 들었어요.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이지한씨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는 안 끝날 사건이었다면서요."

그건 맞는 말이다. 원래대로였다면 대부분의 헌터가 게이트 내에서 죽었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희 은빛의 날개 길드에 가입하는 거 어떠세요? 최대한의 지원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할게요."

약간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이번 시험이 비공식적이었다고는 하나, 길드 관계자들이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자리.

은날의 추락은 어쩔 수 없는 일······.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하이텍트의 입김이 불었는지 몰라도 대중한테 퍼지지 않을 정도로 사건은 축소된다.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진 윤지은과는 확실히 반대되는 상황이다.

길드장과의 불화설이 그래서 생겼던 거였나. 나도 멀리서 본 입장이라 자세히는 모른다.

'그래도 사건은 실제로 별 피해 없이 끝났다.'

윤지은의 어깨에 걸리는 부담도 훨씬 줄어들 터.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뇨, 힘들 것 같습니다."

거듭 말했다시피 길드에 소속되는 건 지금의 내겐 별로다.

"아······. 혹시 수호 길드를 노리시는 건가요? 계약 조건은 더 좋게 해드릴 수 있어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당분간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의 제안은 확실히 달콤하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도 충분하다.

대한민국 2위 길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걸로 봐서 계약금도 백억원대는 가뿐히 넘지 않을까.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길드에 들어가지 않을 거다.

길드 속박 되어선 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나는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윤지은에게 말했다.

"대신 사람을 하나 추천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요?"

"네, 그때 가서 직접 확인하시고 선택하시면 됩니다. 아마, 후회 안하실거에요."

후회 안하는 수준이 아닐 거다.

깜짝 놀랄 거다.

내가 추천할 사람은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은 천재거든.

수호 길드를 언급하는 건 신태양 때문이겠지. 신태양이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다. 그걸 알고 수호 길드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는 거고.

'신태양 생각은 조금도 안 날 거다.'

아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조만간 백묵이 찾아낼 그 사람.

천성호.

최후의 5인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고 평가 받는 영웅.

실질적인 대한민국 마지막 리더.

천재라는 수식어조차 그를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 사람을 은날에 추천할 생각이었다.

* * *

나는 집에 돌아왔다.

익숙한 단칸방.

오면서 사온 음식을 바닥에 두었다. 백묵이나 진세아에게 연락하기 전에 확인해 둘 게 있었다.

'이번 전투에선 얻은 게 많다.'

D랭크 40레벨을 벗어나 C랭크 60레벨이 되었다. 1.3배로 올라간 능력치 배율을 합산하면······.

사실상 B랭크 상위의 능력치.

거기에 스킬을 더하면 내 전투력은 폭발적으로 올라간다.

'이번에 얻은 스킬만해도.'

총 여덟 개나 된다.

일반스킬은 투창, 명중, 판단 이렇게 세 가지.

판단은 원래 가지고 있던 간파, 인지 스킬과 합쳐져 '통찰'이 되었다.

『 스킬 정보 』

- 이름 : 통찰 Lv.11

- 효과 : 간파, 인지, 판단의 통합스킬

- 추가 효과 : 다른 존재의 등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등급 확인이라. 좋은 추가효과가 붙었군.'

상대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스킬은 귀중하다. 전투전 상대의 전투력을 파악하고 아니고는 큰 차이니까.

레어스킬은 날카로운 눈, 거인의 힘, 불굴의 정신, 포션 체질, 중급 해체.

다섯 가지를 단번에 손에 넣었다.

재능환이 큰 역할을 했다.

'재능이 있다는 게 이렇게까지 큰 차이일 줄이야.'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구할 수 없으려나. 어쩌면 인과역전의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진짜 보상을 확인해야겠지.'

새로 얻은 스킬 확인을 끝낸 뒤 나는 다른 상태창을 열었다.

이계의 규율이 준 보상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는 특성 '무재조정:한계돌파'에 있다.

『 D등급 한계 돌파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레벨당 능력치 증가량 1.3배

2. 지정 스킬 한계 레벨 2증가

3. 인과역전 상점 NEW 카테고리 개방

4. 특성 무재조정 신(新) 특수효과 개방

쏟아지듯 보여지는 클리어 보상들. 많기도 하다.

첫번째 능력치 증가량 1.3배는 이미 받았다.

『 2. 지정 스킬 한계 레벨 2증가 』

『 퀘스트 클리어 당시 소유하고 있던 스킬에 한해 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

한계 레벨 2증가.

'새로운 스킬을 얻을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단 건가.'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이 일자베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중에서 활용도나 파괴력면에서 이걸 뛰어넘는 건 없다. 레벨을 올리기 쉽다는 것도 한몫한다.

'전수자인 신태양이 근처에 있으면 더 빨리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으니까.'

신태양 녀석이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12레벨, 13레벨을 순수한 내 재능으로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도달하지 못할 경지라는 것도 존재하니.'

순수한 성장의 한계.

나는 그 부분까지 고려해야 했다.

특히 12레벨이나, 13레벨은 본래대로라면 다다를 일 없는 레벨이다. 어쩌면 평생에 걸쳐 수련해도 다다르지 못하는 경지겠지.

'그러니 더더욱 일자베기다.'

나는 일자베기를 선택했다.

『 일자베기의 최대 한계 레벨이 13이 되었습니다. 』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1레벨만으로도 굉장한 위력인데 13레벨에선 도대체 무슨 능력이 튀어나올지. 그걸 확인하는 건 나중의 일이 되겠지만 충분히 기대가 된다.

다음 보상을 받기 위해, 상태창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또 이런다. 이계 규율 때문인가?

'근데 따지고보면 처음에도 이랬지.'

무재조정이란 특성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스템의 오류는 어디 물어볼 곳도 없다.

애초에 시스템이 결함을 가지고 있단 이야기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파지직.

노이즈를 일으키던 상태창이 돌연 메시지를 띄웠다.

밀려 있던 메시지가 한 번에 출력되는 느낌이다.

『 마기의 원천을 전부 회수하셨습니다. 』

『 C등급 최대 레벨 40을 달성하셨습니다. 』

『 기존의 보상을 강화합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

파아아!

홀로그램 창 전체가 빛으로 변하더니 폭죽처럼 퍼져나갔다. 그렇게 뻗어나간 빛의 입자들이 한바탕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현란함에 감탄이 터져 나온다.

'와.'

이내 순식간에 내 앞으로 모여든 빛은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유니크급 아이템.

이제 익숙해져서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렇게 나온 아이템의 형태가 범상치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붉은색 호리병.

꿀꺽.

나는 침을 삼키고서 메시지를 읽었다.

『 인과역전 재능 획득의 물약(유니크)을 획득합니다. 』

'유니크급 재능 획득 물약이라고?'

물약의 효과는 두 번이나 체험 해봤다.

재물과 재능.

그리고 그 두 번 다 효과는 대박이었다. 그때 먹었던 물약의 등급은 전부 일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유니크란다.

두근. 두근.

나도 모르는 사이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정말로 이걸 준다 이 말이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퐁!

호리병의 뚜껑이 제멋대로 열리더니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길쭉하게 늘어진 붉은 빛깔의 액체가 내 몸을 휘감는다.

잠깐 당황했지만, 금방 재능 초월의 영역에 갔었던 것을 떠올렸다. 굳이 저항할 이유가 없다.

"좋아, 와라."

나를 집어 삼킨 붉은 액체.

그에 따라 붉게 물든 단칸방의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한다.

거센 진동이 느껴지며.

세상이 뒤바뀐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무언가가 나를 잡아 끄는 느낌이 났다. 나는 저항 없이 그 힘에 끌려 갔다. 이전과 다르게 난폭하다.

"윽."

중력이 연달아 반전되며 몸의 감각이 뒤틀렸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안전장치가 없는 놀이기구에 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검은 땅 위로 떨어졌다.

* * *

"크으윽······."

이게 무슨 난리냐. 나는 허리를 붙잡고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까지 요란스러운 건지.

"어······."

문득 고개를 드는 내 입이 슬쩍 벌어졌다.

나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 있었다.

붉은 하늘.

그곳을 흘러가는 검은 구름.

저 멀리 보이는 산과 검게 변한 땅들.

'······.'

변해버린 주변을 바라보는 내게 불길한 감정이 엄습했다.

『 해당 아이템이 인과를 역전하여 재능 발화의 장을 열었습니다. 』

『 제한 시간 내에 조건을 만족시켜 보상을 받으십시오. 』

『 일자베기의 레벨을 1 올리기 ( 0 / 1 ) 』

『 제한 시간은 일주일입니다. 』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로.

바위에 앉아 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헤져가는 검은 도복을 걸친 그의 입가에 긴 상처가 보인다.

그가 뒤를 쓱 돌아보며 내게 말한다.

"여어, 제자야. 일어났냐?"

"시, 신태양······."

"응? 뭐라고?"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신태양.

그러나 내가 아는 그 앳된 얼굴이 아니다. 왠지 모를 노련함이 더 해진 얼굴.

그렇다.

여기는 미래였다.

내가 바꿔야했던 미래이자.

버려두고 온 과거.

마족에 의해 망해버린 세계.

나는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47화 재능 발화의 장(3)

"감히 하늘 같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네가 오늘 한 번 제대로 굴러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바위에 걸터 앉은 신태양이 날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섬뜩함이 느껴진다.

상황은 대충 알겠다.

입가에 상처가 난 신태양. 그 피부는 태양에 그을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까무잡잡하다. 게다가 허름한 도복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

이른바 검성의 모습이다.

'설마, 미래로 온 거냐.'

인과역전 재능 획득의 물약(유니크).

납득은 간다.

재능 초월의 공간이란 것도 경험한 마당에 미래로 오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일자베기를 검성한테 직접 배우란 건가.'

확실히 그것만큼 효과가 좋은 건 없겠지. 그렇다곤 해도 갑작스럽다. 하필이면 미래라니.

내가 검성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쭈? 뭐해? 엎드린다 실시."

"잠깐, 지금 제가······. 크헉!"

내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신태양의 발차기가 날 강타했다. 이어지는 무자비한 훈육.

아니 훈육을 빙자한 구타.

퍼버버벅!

"아, 잠깐······."

이 미친놈아.

사람 말은 일단 들어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러나 검성은 내가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검성이 휘두르는 주먹과 발차기가 보이지도 않는다. 이어서 그는 들고 있던 죽도로 매타작을 시작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하여 상대의 경지를 가늠합니다. 』

『 대상과의 격차가 지대하여 등급을 판정할 수 없습니다. 』

당연하겠지. 맞아보니까 확실히 느껴진다.

눈 앞의 검성 신태양은 SSS급.

나와는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오호, 지금 반항하는거냐? 그런 근성 아주 좋아."

퍼억! 퍼억!

벗어나려고 시도 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검성이 휘두르는 죽도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피하려고 해도 귀신 같이 내가 갈 방향으로 죽도가 날아 온다.

허리, 발, 머리, 다리, 팔······.

아주 골고루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맷집과 불굴의 정신 스킬 덕분에 버틸만하다.

조금이나마 수련이 될까해서 반항 해봤지만.

"이야, 오늘은 뭔가 다른데?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크하하, 이 몸의 지도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거냐?"

검성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진하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

나는 완전히 지쳐서 쓰러졌다. 때리려면 때려라. 이제 못 움직이겠다.

"으음, 이 정도면 충분히 반성을 한 것 같으니 용서해줄까. 훈련도 되었겠지."

"큭,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그······. 스승님께서는 이런 방식의 훈육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크하하, 좋은 질문이구나. 당연하지. 스승과의 대련, 그것만큼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일방적인 구타가 어느새 대련으로 포장되어 있다.

오케이, 이해 했다.

똑똑히 기억해놨다가 나도 제자한테 알려줘야겠다.

스승과의 대련. 그것만큼 실력을 높이는 건 없단 말이지. 나도 꼭 써먹어 봐야겠다.

"그런 점에서 넌 행운아다. 내가 과거에 미국에 갔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말이야. 그곳에 살고 있던······."

미래의 검성답게 말이 많다. 검성은 갑자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가 내가 있던 미래는 아닌 것 같다.'

일단 난 검성의 제자였던 적이 없다. 인과역전의 물약 효과인지, 사제 관계라는 설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만.

'그래도 이건 기회다.'

『 일자베기의 레벨을 1 올리기 ( 0 / 1 ) 』

『 제한 시간은 일주일입니다. 』

'미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내가 가진 미래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이었다. 일반인 입장에서 우연히 접한 소문들이 전부. 질 좋은 정보라고 해봤자 뉴스나 인터넷, 잡지를 뒤져 얻었던 것들이다.

'마족을 막을 결정적인 정보를 가져갈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어.'

어디까지나 그게 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어떠냐. 거듭 말하지만, 너한테 검의 재능은 없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네가 사정사정을 해서 제자로 받아준 거긴하다만. 어찌되었든 사제관계. 제자야, 나는 네가 목숨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어느새 검성은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요약하면 검에 재능이 없으니 그만해라. 이 소리다.

근데 그 말은 이미 들었다. 그것도 과거의 검성한테.

"그러면 한 번 보시고 결정하시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이, 괜찮냐? 좀 더 쉬어도 되는데."

내가 벌써 일어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신태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벤토리에서 대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본 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봐봐, 안된다니까. 여기서부터 글렀어. 멸망 이전의 세계라면 몰라도, 지금은 안 돼. 검에게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 어거지로 노력해봤자······."

그러거나 말거나.

숨을 가볍게 들이 마시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으며 좌에서 우로 한 번,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친다.

두 번의 연속된 일자베기.

한없이 푸르른 직선이 공간을 완벽하게 갈라낸다. 그 사이로 불어오는 광풍. 옅게 떨려오는 공기의 흐름.

검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짧아진 말 길이가 검성의 충격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게 턱짓했다.

"따라와라, 특별 훈련이다."

* * *

이상하다.

분명 특별 훈련이라고 했는데.

"크아악!"

날 동굴로 데려가더니, 다시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마음껏 반항해도 된다는 점이 다르긴 했다.

한시간 동안 쳐맞았다.

터억.

죽도를 땅에 꽂은 신태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일자베기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일궈낼 정도인데······."

그는 신기한 존재를 바라보는 듯 나를 유심히 살폈다. 이내 나름대로 납득할만한 답변을 꺼냈다.

"그냥 그런 재능인건가."

『 일반 스킬 '타격 내성 Lv.10'을 획득하셨습니다. 』

『 타격 관련 데미지 10% 감소 』

마족한테 맞을 때도 안 생겼던 타격 내성 스킬을 얻었다.

이 미친 놈······.

나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일자베기의 다음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아까 검성 앞에서 일자베기를 시도 해봤는데 얻은 경험치가 없었다. 아무리 10만배를 해도 '0'은 '0'이다.

지금 일자베기의 레벨은 11.

내가 가야할 레벨은 12.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

쉽게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인과역전의 물약이 날 이곳으로 보내지도 않았겠지.

잠시 고민하던 신태양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 재능이라면 이해가 가는군. 좋아, 일자베기의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검성은 죽도를 들어서 하나의 직선을 만들어냈다.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푸른 선.

별다른 기교는 없지만 가슴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궤적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

"시스템은 우리의 성장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벨로 그 한계를 제한하기도 한다. 지금 네가 넘어서려는 건 그 너머의 영역이다."

그가 다시 죽도를 휘둘렀을 때, 선은 사라지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10레벨 이상.

본래라면 도달할 수 없는 한계.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게 네 재능일지도 모르지. 그렇다곤 해도 두 가지가 선행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

검성은 죽도를 쭉 뻗었다.

"그 첫번째가 보법."

다음 순간, 빛줄기가 동굴 끝까지 이어진다. 다시 한 번 신태양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 선은 더욱 깊고 진해져 있었다.

"두번째는 검술이다."

탁.

죽도를 가볍게 휘둘러 땅을 치자.

거대한 진동이 동굴 내부로 울려퍼진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푸른 선이 새겨진다.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이 일자베기다.'

검성은 가볍게 죽도를 들고 있는 손을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그 순간.

동굴을 가르는 푸른 선이 하나의 물줄기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주변 풍경이 잡아 먹혀 들어간다. 청(靑)의 선이 공간 자체를 집어 삼킨다.

그 결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 자체가 뒤바뀐다.

나와 검성은 더 이상 동굴 안에 있지 않았다. 어두워진 밤 하늘 아래, 솟아오른 나무들로 가득한 숲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신태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방금 보여준 게 공간(空間)검의 기초다. 일자베기를 극한까지 단련하면 이런 잔재주도 부릴 수 있는 거지."

죽도를 들어 올린 검성이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에 푸른 이채가 서려 있다.

『 일자베기의 새로운 경지를 목도합니다. 』

『 스킬 '일자베기 Lv.11'의 경험치가 3% 증가합니다. [ 3% ] 』

'이게 잔재주······?'

굉장하다만,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경지다. 잔재주라니, 스킬의 분화를 이야기하는 건가?

'확실한 건 보법과 검술을 익히라는 것.'

신태양이 직접 고안한 보법과 검술.

일반 단계에 있는 내 스킬들을 한 단계씩 올릴 기회였다.

"뭐, 어느 방향으로 키워나가냐는 네 손에 달린 거지만."

검성은 죽도를 적당히 내팽개치고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성에게 꿀밤을 먹였다.

"아, 아얏!"

흑발의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 꿀밤을 맞은 그녀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매만졌다.

"이 뒤로는 네 선배한테 배워라. 나는 해야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못오니까 말이야. 신아람. 내가 돌아 오기 전까지 이 녀석한테 보법과 검술을 가르쳐라. 오늘 분명하게 알았다. 이 녀석 검에 대한 재능은 더럽게 없는데, 뭔가가 있는 놈이 확실해."

"네? 근데 어디가세요?"

"어디가긴. 마족 놈들 모가지 따러가지. 하여튼, 잘들 수련하고 있어라!"

그러고선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붉어진 달 위로 검성의 어두운 인영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진짜 정신 없네.'

검성은 내가 아는 신태양이랑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

이제 선배라는 사람과 단 둘이 남았다.

"음, 좋아. 드디어 나한테도 제대로 된 후배가 생겼네. 이전에 있던 제자들 전부 관둬서 곤란했는데······. 드디어······."

아, 그렇게 쳐맞으면 관둘만하지.

그녀는 감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신아람.

전체적으로 선해보이는 인상이다. 어딘가 허술해 보이기도 하고. 굉장한 미인이다. 설마 검성의 숨겨둔 연인? 그런 건 아닌가.

'근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애초에 신태양이 수제자를 키웠다는 것도 몰랐다. 신아람은 허둥지둥 텐트에서 검을 들고 나오더니, 배낭을 맸다.

"이지한이라고 그랬지? 난 신아람이야. 얼굴은 봤었지? 마침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까 식량 조달부터 하자. 제 4거점으로 지금 출발하면 해 뜰 때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거점으로 가는 겁니까?"

"응, 보법이나 검술은 가면서 알려줄게."

멸망한 세계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제 4 거점.

현 시점 살아 남은 사람들이 세운 생존 구역 중 하나다. 이때만해도 여러 거점들이 남아 있었다.

정부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 중심점은 소수의 영웅이 담당하고 있다.

'좋아, 과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어.'

나는 신아람을 따라 숲을 나왔다.

그런데,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수는 괜찮은겁니까?"

이 세계의 마수들은 하나 같이 광폭화가 진행된 상태. 마기를 잔뜩 머금어서 새로운 능력을 갖춘 괴수가 되어 있다.

고블린 하나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려오는 경험을 해야했다.

"당연하지. 선배를 뭘로 보는거야? 지금 가는 길에선 고블린만 나와. 내가 보법을 보여줄테니 잘 보고 따라하기만 해."

가슴을 피며 미소 짓는 신아람.

뭐, 검성의 제자이니 확실히 강하기는 하겠다만.

어둠으로 뒤덮인 길이지만 통찰 스킬 덕분에 걸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마수다.

게이트를 관리할 수 없게 된 이 세상에선 마물이 거리를 활보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키륵, 키르륵···.

때문에 고블린들을 마주치기란 어렵지 않다.

"앗, 나타났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고블린 두 마리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과 잘 벼려진 단검.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 대상 '광폭화 고블린'의 등급은 B++입니다. 』

멸망하기 이전의 세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압감이다. 신아람은 배낭을 맨 채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면 잘 보고 따라해. 이 보법은 전수되는 스킬이니까."

『 동료 신아람이 스킬 '태양의 발걸음 Lv.6'을 발휘합니다. 』

이름은 거시기 하다만 효과는 확실했다.

파앗.

일순 주위가 밝아지며 신아람이 고블린의 바로 앞까지 파고들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참격에 고블린이 크게 밀려났다.

옆에 있던 다른 고블린이 단검을 휘둘렀지만, 신아람은 부드러운 발놀림으로 피한 뒤에 일자베기를 시전했다.

그러나 고블린도 만만치 않았다. 단검으로 일자베기를 흘려내고선 신아람에게 달려 들었다.

카앙, 캉!

어두운 밤하늘 아래 신아람과 고블린 두 마리의 공방이 이어졌다. 마력을 두른 검 끝에서 붉은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근데, 어째······.'

아주 이기는 느낌은 아니다. 두 마리를 상대로 근소하게 이기고는 있었으나, 결정타가 없는 느낌.

촤아악!

그래도 어찌어찌 마무리를 지어냈다. 신아람은 다시금 태양의 발걸음을 사용해 뒤로 물러났다. 도망에도 최적화 되어 있는 보법이구만.

그녀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고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후우, 고블린 두 마리를 상대로 싸우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

"한 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방금 전 봤던 신아람의 움직임을 똑같이 재현하려고 노력하면서, 고블린을 향해 달려 나갔다.

통찰 스킬 덕에 움직임을 떠올리는 건 쉽다.

몸이 마음대로 안 따라줄 뿐.

『 스킬 '보법 Lv.11'을 발휘합니다. 』

일반 보법만으로도 상당히 빠르게 고블린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유리한 지점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어.'

일단은 눈 앞의 고블린을 제거하는 것부터다.

나는 견제할 목적으로 가볍게 대검을 휘둘렀다. 멸망한 세계의 고블린들은 마기를 듬뿍 머금은지라 전투력이 B급 헌터를 가볍게 상회한다.

일반 마수를 상대하는 기분으로 상대해선 안된다.

그런데.

"키륵?!"

견제 목적으로 휘두른 대검이 그대로 고블린의 단검을 깨부쉈다. 그러고도 위력이 줄지 않은 대검의 날이 그대로 고블린의 몸을 짓이겨 버렸다.

'뭐야?'

일자베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거지.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키륵, 키르륵.

어둠을 뚫고, 열 쌍의 붉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둠 속에 숨죽이고 매복하고 있었던 고블린들이었다.

달빛에 놈들의 날카로운 단검이 번뜩인다.

어느새 포위 당했다.

"후, 후배! 고블린이 너무 많아. 일단 후퇴해야겠어!"

당황한 신아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이 이렇게 많이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

두 마리도 힘겹게 상대하는 마당에 열 마리는 확실하게 무리였다.

그때였다.

띠링.

한차례 늦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칭호 '마계의 재앙(災殃)'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필드 '마계(魔界)'에서 마(魔)속성 대상으로 1000%의 데미지를 줍니다. 』

『 현재 필드 '마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그러고보니 그랬다.

생소한 개념이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칭호 마계의 재앙.

마계 필드에 있을 때 데미지 10배라는 기가 막힌 효과.

멸망한 세계.

마기로 완전히 뒤덮인 이 미래는.

마계나 다름 없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지만, 나에겐 아직 바꿀 수 있는 미래다.

나는 대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뇨, 그대로 쓸어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48화 황금왕의 보물창고(1)

멸망한 세계에선 고블린 한 마리를 상대로도 방심할 수 없다.

마수의 광폭화.

한낱 잡스러운 몬스터에 불과했던 고블린이 B급 헌터와 맞먹을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건 마수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축복이었다.

반대로 인류에게는 절망스런 일이었다.

키르륵······.

섬뜩한 붉은색 눈을 한 고블린 열 마리가 나와 신아람을 포위했다.

"다, 당장이라도 도망치면······!"

신아람이 인벤토리에서 무슨 구슬 같은 걸 꺼내들었다. 나름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것 같다.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옆에 있는 고블린을 향해 달려 들었다.

『 스킬 '데몬 헌트 Lv.11'을 발휘합니다. 』

체인지 웨펀으로 마력을 끌어 올린 대검.

그 위로 검은 막이 얇게 도포 되었다.

키륵!

고블린들이 내 움직임에 대응해 단검을 치켜 들었다. 옆에 있던 동료 고블린들도 몸을 낮추고 단검을 뻗어 온다.

난잡하지만 어떤 면에선 놈들의 움직임이 나보다 낫다.

그럼에도 내가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건.

『 칭호 '마계의 재앙'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

『 마(魔)속성 대상에게 10배의 데미지를 가합니다. 』

콰드드득!

이계규율에게로부터 얻은 칭호가 사기이기 때문이다.

육중한 대검의 날이 고블린 세 마리를 단숨에 짓이겨 버렸다. 들고 있는 단검을 무시하고 피육을 집어 삼키는 참격.

마족 학살자가 사정없이 놈들의 몸을 갈라버렸다.

『 마(魔)속성 대상을 상대할 때, 마족 학살자의 공격력이 40증가합니다. 』

나는 대검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내고서, 뒤를 돌아봤다.

키, 키륵.

당황한 고블린 놈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나는 위압 스킬을 발휘했다. 마력이 담긴 위압에 고블린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촤아악!

대검으로 두 마리를 한꺼번에 처치했다. 남은 5 마리의 고블린들이 뒤늦게 발악해보지만 소용 없다.

나는 놈들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잘려나가는 고블린들. 그야말로 파괴전차가 된 기분이었다.

'태양의 발걸음을 익혀야 한다.'

놈들을 베어내면서도, 계속해서 신아람이 보여줬던 보법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전투 중에 스킬을 습득할 확률이 높아진단 건 알았으니까.

샤아아.

일순 희미한 빛이 내 발 위에 머무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빛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감을 잡을 것도 같은데.'

촤악!

반으로 나뉜 고블린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쉽지만 마지막 고블린을 잡을 때까지도 스킬은 얻지 못했다.

"와아우."

짝짝.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신아람이 손뼉을 쳤다.

"후, 후배. 굉장한 사람이었구나."

바닥에 널부러진 고블린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러더니 풀 죽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선배라고 우쭐댔네······."

"그래도 제가 후배는 맞습니다. 검성이 가진 보법이랑 검술을 못 익혔으니까요."

"으음, 그런가."

멸망한 세계의 마수들에게 마정석은 없다. 나는 놈들의 시체를 뒤적이다가 물었다.

"이런 습격이 자주 일어납니까?"

"응? 아아, 보통은 이렇게 많이 몰려다니지는 않는데 말이야."

"위험할 뻔 했네요."

내 말을 들은 신아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하, 그건 괜찮아. 연막탄도 있고, 도망치는 건 자신 있거든."

보법 태양의 발걸음을 사용해서 슥슥 뒤로 움직인다.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저러면 나는 못 도망쳤을 것 같은데.

"하여튼, 굉장하다. 이번 일은 스승님한테 꼭 말해 둘게. 너한테 이런 잠재력이 있었다는 건 스승님도 알아야 할 부분이니까."

그러더니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콩콩 친다.

보면 볼수록 멸망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답지 않다. 어디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생각나는 얼굴은 아니다.

"그럼 다시 출발하자."

우리는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팔고 있는 제 4 거점이 목적지였다.

* * *

해는 완전히 저물었지만 아직 거점의 건물 간판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문명의 빛이었다.

발전기를 돌리거나, 마정석을 사용해서 제법 도시의 느낌도 난다. 물론 건물들 대부분이 반쯤 무너져 있거나 금이 가 있어 세기말의 느낌이 섞였다.

아직은 인류가 아직 완벽히 무너지지 않은 시점.

그나마 사람 사는 곳 같다.

"나는 이제 식료품점에 갈 건데. 혹시 따로 들리고 싶은 곳 있어?"

"아, 저는······."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도둑, 도둑이야! 저 년 잡아!"

"저 미친년 진짜!"

후라이팬과 밀대 등의 주방 용품을 든 사람들이 우루루 가게에서 뛰쳐 나왔다. 그런 사람들을 농락하듯 달빛 아래로 검은 인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입에 바게트 빵을 물고 있는 도둑.

그 정체는 진세아였다.

후드를 뒤짚어 쓴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저거 어떻게 안되나?"

"내비둬, 영웅들도 뭐라고 안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

"에이씨, 진짜. 더러워서."

사람들은 궁시렁대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신아람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휴, 아직도 저런 나쁜 사람이 다 있네. 힘든 세상일수록 사람끼리 도와야하는 건데 말이야. 그치?"

맞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진세아에게 도둑질을 당한 적이 있는 피해자로써 백 번 공감한다.

"그래서 난 식료품점에 가려고하는데, 넌 어떻게 할래? 수련한다고 오랫 동안 거점에 못 내려왔잖아."

"그러면 잠깐 사람 하나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안 그래도 말을 하려 그랬는데 선뜻 먼저 말을 꺼내줬다. 거점에 온 이상 나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

'기왕 미래로 온 거 영훈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멸망한 세계에서 동고동락하며 함께 했던 영훈이. 아쉽지만 시기가 맞지 않는다. 영훈이 녀석도 한참 어릴거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제 2 거점에 있다.

여기서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다. 간다고 해도 이동하는 데에만 제한시간을 다 쓸 것 같다.

'할 일을 해야지.'

내가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정보 얻기.

인과역전의 물약 때문에 일시적으로 오게 된 미래라고는 하나, 미래는 미래. 각종 마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내가 갈 장소를 신아람에게 알려주고선, 바로 주점으로 향했다.

기울어져가는 이 세상에도 유흥거리는 존재한다.

이곳은 제 4거점에서 유일한 술집.

딸랑.

삐그덕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 냄새와 음식 냄새가 풍겨온다. 하나 있는 주점 답게 내부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건배! 마셔, 마셔!"

"이번에 제 1거점이 성장의 마족에게 밀렸다던데."

"크으, 빌어먹을. 조만간 4거점도 휩쓸리는 거 아냐?"

"야, 머리 아프게 그런 생각해서 뭐하냐. 일단 마셔."

당장의 아픔이나, 걱정을 잊기 위해 술에 취한 사람들.

그들을 지나치며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한다.

'찾았다.'

내가 찾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니까. 조금만 더 착하게 살걸."

인류의 배신자 김상욱.

그가 여기에 있었다.

"하여간에 그 마족 놈들만 아니었어도······. 젠장. 앞으론 싹 다 잊고, 인류를 위해서만 살거야! 그래, 그게 사람된 도리니까."

맥주잔을 쭈욱 들이키더니, 되도 않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내놓는다.

헌터인 그의 얼굴이 붉어진 걸로 봐서는 꽤 마신 모양.

나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상욱."

"응? 누구신데 내 이름을 부르십니까?"

"뭐야, 아는 사람이야?"

낄낄대며 웃던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도 말을 멈추고 날 쳐다본다. 김상욱은 취한 얼굴로 입을 다셨다.

"쩝,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이 자를 찾아 온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아는 과거대로라면.

이 남자만큼 마족에 대해 잘 아는 놈은 없다.

인류의 배신자인 그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 해냈다. 정보와 능력 덕에 영웅들은 김상욱을 살려 놓고 있다.

개심했다는 걸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않게 살아가는 놈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놈이다. 가끔 거하게 얻어 맞는 일은 있겠지만.

나는 김상욱의 앞에서 무감정하게 말했다.

"속죄하고 싶지 않나."

"속죄? 항상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근데 그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할 필욘 없지 않나?"

김상욱은 가소롭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속죄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진심일 거라곤 생각 안했다.

'그래도 이건 그냥 못 넘길 거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여기서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황금왕의 창고 열쇠 』

녹색 사파이어와 붉은 루비로 치장된 금열쇠.

황금 고블린 자볼을 잡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자볼은 마계에서 이곳으로 창고를 옮겨왔다.'

마족에게서 받은 고블린들의 영지가 대한민국이었으므로. 그런 자볼의 보물창고는 더욱 커져 있다고 들었다. 요새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김상욱의 눈 앞에서 열쇠를 흔들었다.

마족 밑에서 한참을 일했을텐데, 이걸 모르진 않겠지.

"어엉?"

김상욱이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건 진짜다. 열쇠의 정보를 확인하는 그의 눈이 커졌다.

"와, 이거 술이 확 깨네."

그는 얼굴을 확 찌푸리더니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손을 저었다.

"야, 다 꺼져. 다 저리가 봐. 이 고객님이랑 이야기 좀 해봐야겠으니까."

"에이씨,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내일 보던가 하자."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김상욱이 험험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선 양팔을 테이블에 올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고객님?"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 * *

주점에 있는 방을 따로 빌렸다.

이 편이 이야기하기 편할 거라는 김상욱의 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김상욱으로부터 마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국내를 너머 해외에 있는 마기 원천의 위치.

프로젝트 마기의 진행 절차와 의식 장소.

각 마족들의 특징 및 제약에 더해 약점까지.

하여간 많은 정보를 얻었다.

"후아, 말하는 것도 지칩니다, 이거."

김상욱은 내가 알지 못한 다양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찾아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흐음, 그렇다는거지."

"예, 뭐.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반말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스읍,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좋을대로 하십쇼. 근데 이런 정보는 들어서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이미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보아하니 영웅도 아니신 것 같은데."

너한테나 그렇지.

나한테는 아니다.

여기는 미래.

이 시점에선 과거의 일이지만, 나에게 있어선 미래에 대한 정보다. 김상욱이 늘어놓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천금 같은 정보다.

나는 물어볼 수 있는 한 세세하게 물었다. 일단 한 번 들어 놓으면 나중에 기억탐색으로 꺼내볼 수 있으니까.

사실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모자르다. 하루로는 안될 것 같다.

"이 정도면 제가 아는 선에선 몽땅 말씀 드린 것 같네요. 그러면 이제 열쇠를······."

김상욱이 탁자에 놓인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걸 낚아챘다.

"응? 무슨 소리야. 열쇠를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무, 무슨 악당 같은 소리를······. 거,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내 말에 김상욱이 번개 맞은 것 같은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짓는다.

보여주기만했지 내가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하긴, 나한테 이게 있어도 자볼의 창고를 터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볼의 권속들.

일반 고블린보다 몇 배는 강한 놈들이다. 아무리 데미지가 10배라지만, 그런 곳을 함부로 갔다간 개죽음이다.

터억.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열쇠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쯤되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상욱이 팔을 뻗어오는 그때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레 벽이 박살나며 파편이 튀어 올랐다. 건물에 뚫린 벽 틈새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스슥!

반응할 새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눈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

그 결과 테이블에 놓여 있던 열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신묘한 솜씨였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건가.

"내, 내 열쇠에에!"

입을 크게 벌린 김상욱이 울부짖었다. 아직 니 열쇠는 아니었는데.

벽이 뚫리는 큰 소리 때문이었는지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 허억."

무너진 벽을 확인한 주인장의 표정도 무너져내렸다. 김상욱은 날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고객님! 지금 도둑질 당했잖아. 빨리 찾아야 될 거 아닙니까?!"

"일단 이거 놓고 말하지."

"아니, 설마 그 열쇠가 가진 가치를 몰라서 그런거야? 아이, 참내. 답답하네."

나는 김상욱의 손을 살포시 떼어냈다.

진세아가 열쇠를 훔쳐갔다는 건 내 계획대로 되었단 이야기다.

지금 진세아의 랭크는 SSS.

내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능력이다.

지금의 김상욱은 S급은 될텐데 전혀 반응하지 못한 걸 보니, 더더욱 그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그래, 이래야 환세의 도둑 진세아지.'

과거 진세아에게 복수한답시고 정보를 모으러 다녔던 덕에, 나는 대강이나마 진세아의 행동 패턴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신출귀몰한 출현 타이밍.

그때도 그랬다.

간식을 도둑 맞았을 때.

어딘가에 있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나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니 결론이 났다.

진세아는 고성능의 탐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

귀가 엄청나게 밝거나 뭐 그런 사기적인 종류의 스킬일 거다.

'여전히 근처에 있을 줄 알았다.'

김상욱은 빨리 열쇠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난리였다. 나는 그런 그를 진정시켰다.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진세아의 속도는 못 따라잡는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데, 신아람과 마주쳤다. 배낭 가득히 식료품을 채운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한 후배? 지금 어디가?"

"선배도 같이 가시죠. 혹시 돈 필요하지 않나요?"

"있으면 좋기야 한데······."

그때 신아람의 얼굴을 확인한 김상욱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엇, 이 아가씨는 검성의 제자잖아."

잠시 나와 신아람을 번갈아쳐다보던 김상욱이 히죽였다.

"이거 잘 됐습니다. 둘이 일행이라는 거죠? 하여간, 지금 그 미친년 잡으러가야되니까.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게 좋습니다."

"일단 가시죠."

얼떨결에 신아람도 우리의 뒤를 따라온다.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자, 신아람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러면 아까 봤던 그 도둑한테 당한거야?!"

"네, 맞습니다. 그래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진세아는 바로 황금왕의 창고로 향했을테니까요."

내가 아는 진세아는 훔친 아이템을 모으거나, 숨겨두지 않는다. 전부 바로바로 써버린다. 그럴 수 없는 물건은 훔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길 안내는 이 비열하게 생긴 남자가 할 겁니다."

"어이, 고객님. 말이 좀 심하신데. 하여간, 길은 알긴 아니까 잘만 따라오십쇼. 이거 어쩌다보니 바로 창고로 가게 되버렸네."

불평하는 듯 하면서도 김상욱의 입가는 탐욕스런 미소로 번들거렸다.

"참고로 쉽진 않을 겁니다. 위험해져도 난 책임 못져요. 다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잖아요?"

나는 김상욱의 경고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점도 괜찮다.

환세의 도둑 진세아가 가야할 길을 개척해 줄거다.

더불어 창고에 걸린 다양한 마법들도 해제해 줄 거고.

'미친 도둑인 건 맞지만······. 그 덕에 이번엔 도움이 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고블린의 재보가 가득 담긴 창고.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나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거든.

소문에 의하면 참 유용한 물건이 잠들어 있다는데.

기대가 된다.

49화 황금왕의 보물창고(2)

기인(奇人).

세계가 멸망하며 나타난 별난 사람들. 세상이 마족에게 침략 당한 마당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게 독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

사기만으로 살아가거나, 도둑질만으로 산다던가. 혹은 완전히 미쳐버렸다던가. 독특함을 넘어 별종으로 불리는 인간들.

멸망한 세계의 기인이란 그런 존재였다.

환세의 도둑 진세아.

그녀는 기인 중 하나였다.

'그런 진세아가 황금왕의 창고 열쇠를 챙겨갔다.'

진세아에게 식량을 빼앗긴 뒤로 나는 녀석에 대해 꽤 열심히 조사했었다.

게이트와 던전을 공략하지 않고, 보상만을 챙겨 나올 수 있는 능력.

'절대 강탈'

그 사기적인 스킬로 진세아는 영웅들의 아이템 보급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모든 장소를 뚫고 아이템을 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황금왕 자볼의 창고 같은 것이 그러했다.

그곳은 스킬 '절대 해제'로도 뚫을 수 없는 특수한 장소.

'실제로 자볼의 창고를 처음 열게 되는 건 백묵이다.'

백묵은 자볼을 처치하고, 자신이 구성한 각성자들을 투입하여 자볼의 창고를 공략하는데 성공한다.

중요한 건 그때까지 진세아가 자볼의 창고를 털지 않았다는 것.

'자볼의 창고는 열쇠 없이는 공략 못하는 장소란 거지.'

그러한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진세아는 내 이야기에 제대로 낚여들었다.

일이 잘 풀렸다.

진세아가 오지 않았어도 김상욱과 함께 창고에 가긴 했을 거다.

자볼의 창고는 제 4 거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뛰어서 1시간 정도의 거리. 김상욱은 그곳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가는 길에 고블린을 몇 번 마주쳤으나 금세 처리했다.

"오우, 꽤 솜씨가 있으시네. 역시 검성의 제자 두 분. 고객님까지 검성의 제자일 줄은 몰랐지만요."

김상욱이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김상욱에게 창고에 관한 것을 좀 더 질문했다.

내가 원래 있던 시간으로 돌아가도 창고는 남아 있다.

즉, 같은 창고를 두 번 털 수도 있다는 거다.

김상욱은 자랑스럽게 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원래 이런 식으로 지식을 자랑하는 걸 즐기는 놈이다.

"자볼의 창고는 원래 마계에 있었는데, 마족들을 의식해서 이곳으로 옮긴 거랍니다. 나름 공을 세웠다곤 하나 한낱 고블린. 차곡차곡 쌓은 재산을 뺏기고 싶진 않았던 거겠죠."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멸망 직후까지 마족 편에 붙어 있던 배신자 답다.

"근데, 고객님은 대체 어디서 열쇠를 얻으신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아니, 신기해서 그러죠. 자볼 그 놈이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혹시 엄청난 실력자?"

내가 반응이 없자, 어깨를 으쓱한 뒤 김상욱이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습니다. 그 열쇠가 진짜 중요한 거란 겁니다."

다른 마족들도 눈독을 들였다지만, 결국 자볼의 창고는 무사했다. 놈이 고블린의 왕으로 우뚝 서고 나서도 건재한 게 창고였다.

"그런데 그걸 눈 앞에서 도둑 맞았으니, 화가 안 나고 배깁니까?"

"왜 그쪽이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열쇠는 아직 내 거인데."

"에이 또 이러시네, 이것저것 알려주면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거, 최소한 반으로는 나눕시다."

의외로 반으로 나눈다는 양심적인 소리를 한다. 그냥 하는 말인가. 김상욱이 우리랑 동행하는 이유는 혼자선 진세아를 이길 엄두가 안나서겠고.

그때, 김상욱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했다.

"여기서부터는 더 조심해야 할겁니다. 이거 잘못 걸리면 죽는 건 알고 가시 는거죠?"

슥하고 목 긋는 시늉을 한다.

"예에? 주, 죽을 수도 있다고요?"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오던 신아람이 경악하며 날 바라본다. 나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쉽게 얻어지는 건 없는 법이니까요."

"후, 후배님?"

신아람에겐 미안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다.

슬슬 자볼의 창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돌을 쌓아 만든 요새.

창고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곳이라고 한다.

"놈의 성에 비하면 요새는 경비가 허술한 편이기는 합니다. 결국 창고도 열쇠가 없으면 열리지 않다보니까요. 그래도 조심하죠."

우리는 김상욱의 안내를 따라 요새의 뒤편으로 숨어 들어갔다.

"멈춰라! 키륵, 뭐야? 인간이잖아?"

나름대로 잘 잠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블린 경비병이 우리를 발견했다. 역시 이 시점 고블린들의 감각은 뛰어나다.

"키륵,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자볼님의 영역에 발을 들여?"

"심심했는데 잘 걸렸다, 키륵."

전신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고블린 세 마리가 우릴 비웃으며 다가왔다. 놈들의 체격은 성인 남성과 비슷했다.

자볼의 권속으로 힘을 부여 받은 고블린들이었다.

『 스킬 '통찰 Lv.11'을 발휘합니다. 』

『 대상 '고블린 병사'의 등급은 A++ 입니다. 』

A급 상위.

그러나 놈들이 가진 능력은 일반 마수와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다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세계에선 마수 하나 하나가 헌터와 맞먹는다.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김상욱의 얼굴이 굳어졌다. 참고로 그의 등급은 S급 하위.

고블린 병사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고블린들은 우리에게 달려 들었다.

카앙!

체인지 웨펀으로 빠르게 무기를 꺼내 대응했다. 고블린의 검이 내 대검과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호오, 인간치고는 꽤 하는데? 키륵."

확실히 강적이다. 아까까지 상대했던 잔챙이하고는 다르다. 검에 마력까지 두르고 있다. 정녕 고블린이 맞나 싶다.

데미지 10배.

그 덕에 힘싸움에선 내가 이긴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일반 고블린을 상대할 때처럼 압도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체감 되는 건 검술이었다.

내 스킬은 일반 검술 Lv.11.

오히려 검을 맞댈수록 조금씩 밀려난다. 검술의 격차를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나마 검술이 11레벨이라 버틸 수 있는 거다.'

고블린의 검술은 그보다 상위의 것.

카앙, 카앙!

이후로 몇 번은 비슷하게 검을 나누는 듯 했지만, 몇 합을 주고 받자 그 조그마한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일자베기를 사용하면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눈 앞의 적을 처리해도 다른 고블린들이 몰려 올 뿐이다.

"꺄악!"

신아람이 바닥에 넘어지고 나도 뒤로 크게 밀려났다. 고블린 병사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키륵, 우습구만. 뭘 믿고 여기까지 온 거지?"

제일 잘 싸우고 있던 김상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이, 고객님들! 그쯤하고 도망가! 이미 망했으니까!"

"미쳤다고 도망 가게 놔두겠어? 키륵, 멍청한 인간들!"

고블린 한 마리가 검을 치켜들고선 쓰러진 신아람을 향해 뛰어들었다. 놈의 검에 실린 마력이 일렁 거린다.

내가 막으러 뛰어 들려는 찰나.

카아앙!

김상욱이 한 발 먼저 그 앞으로 끼어들었다.

"내 말 안들려? 거 참, 도망가라니까!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김상욱은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스킬 '간파 Lv.11'을 발휘합니다. 』

『 동료 김상욱의 발언이 사실임을 간파합니다. 』

김상욱은 검을 땅 바닥에 던져 버리고선, 양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무차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고블린이 당황하며 물러선다.

'진짜인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김상욱이 순수하게 우리를 도우려고 하는 건가?

그때, 신아람이 일어섰다.

"도망가야 해······."

아쉽지만 그럴 순 없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도망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 후배님?"

당황한 신아람의 눈동자가 사정 없이 흔들린다.

김상욱은 잠깐 고블린 병사들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고블린 병사 셋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연계 플레이를 시작했다.

"크윽!"

놈들 중 하나의 검이 김상욱의 어깨를 스쳤다. 급해진 김상욱이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도망가라니까! 나도 더는 못 버텨!"

연기 끝내주는데.

아니면 정말로 개심이라도 했던 건가? 의외의 면모에 잠시 놀라긴했지만, 이번 주인공은 김상욱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도망가면 안된다.

카앙! 핑그르르.

"크악!"

잘 짜여진 병사들의 연계 플레이에 김상욱은 쥐고 있던 단검 하나를 놓쳤다. 동시에 자세가 무너지며 휘청였다.

검에 마력을 한껏 두른 고블린 세 마리가 일제히 달려든다.

누가보아도 완전한 절체절명의 상황.

내가 다시 검을 드는 순간이었다.

"키륵······?"

"크륵?"

고블린 병사 세 마리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털썩.

그들의 동공이 확장되더니 이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고블린 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당한 것이었다.

S급 하위인 김상욱도 버거운 세 마리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그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눈을 한 진세아였다.

그녀는 명실상부 SSS급 헌터.

'기다리고 있었다.'

환세의 도둑이니 미친년이니 끝까지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최후의 11인이라고 불렸다.

또한 죽을 때까지 영웅이라는 칭호를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진세아는 영웅이었으니까.

그리고 영웅은 위기에 빠진 사람을 절대로 모른척하지 않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