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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마지막 희망

"이지한 아저씨,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의 대사치곤 담담했다.

저 멀리 몰려드는 마족의 군세를 바라보며 김영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따악.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에 주먹을 쥐어 박았다.

"아저씨? 형이라고 부르랬지."

영훈이 녀석이 과장되게 신음하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으, 20살 넘게 차이 나는데 무슨 형이에요. 그리고 뭐 어때요. 이제 다 끝인데."

"적어도 삼촌이라 부르던가. 아저씨가 뭐냐."

그래, 사실 다 끝난 마당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형이라 부르든 아저씨라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20여 년 전에 갑작스레 발생한 게이트와 헌터들.

한때 은총으로까지 여겨졌던 기적들은 결국 인류를 잡아먹는 독이 되었다.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마족들에 의해 인류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천 명가량 되는 인류의 마지막 행렬.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나와 영훈이는 그 행렬 안에 속해 있었다.

일반인의 신분으로 다가오는 군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명확하게 최후를 확인할 수 있다보니 오히려 무감각해지는 기분이다.

영훈이 녀석이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저도 아저씨처럼 헌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 넌 내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냐. 마족 하나 못잡는데 헌터고 나발이고."

나도 헌터였다.

그런데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다가오는 종말이나 바라보고 있다.

20년 동안 고작 F급 헌터였으니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르겠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마족들의 힘을 따라잡기에 내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뿐만이 아니다.

나날이 강해져 가는 적들의 힘을 따라잡는 헌터는 많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하는 마수들의 레벨과 능력이 터무니 없이 높아진 거다.

경험치를 쌓지 못한 헌터들은 그대로 전투에서 멀어졌다.

"아저씨는 재능이 없었잖아요. 저는 모르죠. 헌터로서의 재능을 따지자면 미지수. 혹시 모르죠. 제 각성이 SSS급 헌터여서 마족 군단장들 모가지 따고 다녔을지."

재능이 없단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고.

이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고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따악.

나는 다시 영훈이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아오, 손이 왜 그렇게 매워요? 머리 나빠져요."

"각성도 못한 놈이 그런 소리 하니까 열받아서."

영훈이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극히 재능이 없었다.

재능 없는 걸로 유명할 정도로 무재능이었다.

어차피 어중간한 재능으론 이 망해가는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애매하게 설치던 놈들은 이미 진작에 죽었다.

나는 약해서 살아남은 셈이다.

결국 지금까지 사람들을 이끌어 온 건 5명의 SSS급 헌터다.

최후의 5인.

우리는 존경심을 담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을 수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한 11인쯤 됐었는데 점차 줄어서 그렇게 됐다.

그때였다.

"어, 최후의 5인분들께서 뭔가 발표하려나 본데요?"

영훈이가 사람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행렬 너머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나 봐요."

소란스럽지만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었다.

마족의 군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

그럼에도 질서를 잃지 않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그래왔듯 최후의 5인이 무언가를 해줄 거란 기대.

그게 이유였다.

나는 영훈이에게 미리 말을 꺼냈다.

"초 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아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상황은 최후의 5인이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싸울 사람은 턱없이 적고, 몰려오는 적은 무수히 많다.

영훈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나와 영훈이는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단상이라 부르기도 뭐한 돌 위에서 최후의 5인 중 한 명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사나운 인상의 남성.

그가 바로 인류의 최강으로 불리는 헌터 천성호다.

"이 세계는 끝이다."

그 말과 동시에 곳곳에서 깊은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유감스럽지만 이제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인류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겠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었다. 절망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최후를 선고하는 사람치고는 천성호의 말투와 눈빛이 단호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천성호는 말을 이어갔다.

"······. 그렇지만 포기하지 마라. 아직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으니까."

그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최후의 5인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새하얀 갑주를 걸친 아름다운 여성.

채윤아의 손에는 금색의 모래시계가 들려져 있었다.

스윽.

천성호의 지시에 따라 채윤아가 바닥에 모래시계를 던졌다.

콰직!

큰 소리와 함께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액체처럼 채윤아의 주변을 감싸더니 이내 그 앞에 새하얀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게이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질리도록 보았던 바로 그 게이트였다. 끊임없는 사고를 만들어냈던 바로 그 문제 덩어리.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색이 아닌 흰색이라는 점이었다.

저런 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까?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심해지기 전에 천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얼마 전 우연히 발견한 유일급 아이템을 사용해서 만든 게이트다. 저 흰색 게이트를 통과하는 자는 2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더군. 그 진위 여부는 의심할 바가 없다. 시스템이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마족의 침공이고 뭐고 없던 시절로?

나 또한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다시금 희망을 품기 시작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천성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다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통과해서 과거를 바꿔도, 여기에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도는 해봐야 하겠지만."

복잡한 천성호의 표정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가는 게 가장 좋은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일제히 좌중이 고요해졌다.

그의 고민에 동의하는 듯 침묵이 이어졌다.

스킬로 확성된 그의 목소리는 행렬의 끝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을 거다.

천성호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고 있다.

불확실한 확률을 뚫고 누가 책임지고 이 세계를 바꿀 것인가?

차라리 모두와 함께 끝까지 남아 싸우는 게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영웅 그 자체의 삶을 살아 온 천성호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밖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 답은 뻔했다.

"천성호! 당신밖에 없잖아!"

"당신이 아니면 대체 누가 갈 건데?"

"천성호! 천성호! 제발 과거를 바꿔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군중이 일제히 천성호의 이름을 소리치기 시작했다.

""천성호!""

"천성호!"

나와 영훈이도 무리의 일원으로서 천성호의 이름을 외쳐댔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진 SSS급 헌터 천성호.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그의 무용담을 아는 모두는 이견 없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잠자코 뒤에 있던 다른 최후의 5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미래를 바꿀 건 천성호밖에 없다고요. 이제 너도 인정해야지. 과거로 돌아갈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걸."

최후의 5인 모두 포탈을 통과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서도 그런 결론이 났다는 건 천성호의 인품과 실력이 모두 확실하단 뜻이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조용해진 틈을 타 영훈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니. 부럽긴 하네요."

"20년 전이면 돌아가도 너는 그냥 땅꼬만데? 가서 뭐하게."

"전 어차피 각성도 못 해서 돌아가 봤자겠지만······. 만약 갈 수 있다면 부모님 얼굴이라도 기억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하······."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냐.

녀석이 부모의 얼굴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난리 통에 길바닥을 헤매던 영훈이를 내가 데려다 키웠으니까.

키웠다고 하긴 뭣하고 동고동락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부모님이라.

당연히 궁금하겠지.

나는 녀석의 머리를 쥐어 박······ 지는 않고 쓱쓱 쓰다듬었다.

"다 잘될 거다."

"뭐에요, 징그럽게."

"우리의 영웅이신 천성호가 전부 해결하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변할지 어떻게 아냐. 너도 부모님이랑 행복하게 살고, 나도 따신 밥 먹으면서 행복하게 잘 사는 세계가 될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러는 아저씨는 과거로 안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돌아간다라.

F급 헌터로 각성한 시절부터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

그래도 그리운 건 있다.

"돌아가면 비빔라면부터 끓여먹어야지. 삼겹살 얹어서."

"맨날 그 소리. 그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비빔라면에 담긴 굉장한 미학을 니가 알······. 아니다. 말을 말자. 니가 제대로 먹어봤어야 알지."

하지만 역시 내겐 너무 무겁다.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짐은 너무 크다.

뭐, 어차피 갈 일도 없겠지만.

나는 재능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인류의 미래를 짊어지고 과거로 간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천성호 같이 능력도 되고 인품도 뛰어난 그야말로 주인공 같은 사람이 가는 게 맞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4명이나 되는 SSS급 헌터들의 손이 모두 천성호의 어깨에 올려졌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천성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미래를 바꾸겠다."

짧지만 진심이 묻어 있는 말이었다.

사람들 모두가 숙연해졌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미래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 순간이었다.

무리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게 뭐야?"

"뭔가가 떨어진다!"

"조심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움직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슈우우!

최후의 5인이 사전에 설치한 보호막을 뚫고,

검은 마력의 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온다.

"······?"

보호막 안쪽은 안전하다는 전제가 지금 처음으로 깨어졌다.

사람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멍하니 보고 있을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했다.

"피해야 해!"

"비, 비켜!"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젠장."

불행하게도 검은 덩어리는 내 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인파에 갇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큰일 난 것 같은······"

주변은 일반인뿐.

그래도 나는 헌터다.

스킬도 하나 있다. 근력 Lv1.

이대로 나 혼자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 아저씨?"

"흐읍!"

나는 반사적으로 영훈이를 들쳐업었다.

"뭐하는······!"

그대로 영훈이를 인파를 향해 내던졌다.

아무리 재능 없는 F급 헌터라고 해도 그 힘은 사람 하나를 던지기엔 충분했다.

녀석, 표정이 참 볼만했다.

이거면 됐다.

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바닥에 닿은 검은 마력이 폭발했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천지가 흔들린다.

아니, 흔들리는 건 나뿐인가?

"크으윽..!"

말 못 할 고통도 엄습한다.

물론 고통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나는 폭발과 함께 튕겨져 올라 허공을 날고 있었다.

떨어지기 전에 자세를 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

최대한 충격이 적은 자세를 취하려다 깨달았다.

팔이랑 다리가 한 쪽씩 없었다. 이래선 제대로 된 착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여기까지인가보다.

"아저씨! 아저씨!"

저 멀리 혼비백산한 사람들 속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짖는 영훈이도 보인다.

주마등 같은 건 없었지만,

허공을 날아가는 동안 어쩐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새끼,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마지막에 와서 운이 더럽게도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천성호가 과거로 돌아가 세계를 구한다면.

그렇게 해서 한순간에 미래가 바뀐다면.

내 죽음도.

아니, 멸망한 세계가 찾아오는 일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될지 모른다.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아무도 대비하지 못한 때에 떨어진 마력 포탄 하나.

그 포탄이 만들어 낸 파장은 컸다.

"으아악!"

"사, 살려주세요!"

"누군가 도와줘!"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당황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5인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쳤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어떻게 보호막을 뚫고 마력 포탄이 날아든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호막은 순식간에 재건 되었지만, 소란은 그대로였다.

"모두 진정해라!"

천성호가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런 천성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 왔다.

슈우우!

폭발에 의해 높이 솟아올랐던 무언가가, 누구 하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까지였다면 괜찮았겠지만.

스스슷!

무언가는 정확히 새하얀 포탈을 향해 떨어졌다.

인류가 가야 할 마지막 희망 속으로.

띠링.

시스템이 푸른 메시지창을 띄웠다.

『 유일급 아이템 '회귀 지점'의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 』

『 비틀렸던 시간의 왜곡이 수정됩니다. 』

파앗.

"바, 방금······."

포탈은 무언가를 삼키고선 그대로 사라졌다.

"누가 들어간 거에요?"

최후의 5인 중 하나인 채아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자신까지 다섯.

최후의 5인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적어도 이들 중 한 명은 포탈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 사고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최후의 5인 모두가 벙쪄있는 그때였다.

"형! 지한이 형! 우리 형 돌려줘요!"

웬 청년 하나가 울부짖으며 단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2화 경험치 10만 배(1)

"으윽, 머리야...."

나는 살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 한 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생생한 풀내음, 벌레의 울음소리, 신선한 공기.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오감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더불어 양팔, 양다리 등등이 모두 멀쩡하게 잘 붙어있다.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영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 순간.

나는 하얀 포탈 속으로 떨어졌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회귀 포탈 속으로.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더럽게 없다고 해야 할지.'

목숨을 건진 건 기가 막힌 행운이었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상황이 복잡했다.

본디 SSS급 헌터인 천성호가 들어갔어야 할 곳을 만년 F급 헌터였던 내가 들어갔다.

인류의 존망이 대강 결정됐다.

그것도 상당히 절망스러운 쪽으로.

나는 내가 얼마나 재능 없는 헌터인지 잘 알고 있다.

내가 가느니 차라리 각성도 못한 일반인이 오는 게 나을 정도다.

'돌겠네. 솔직히 불가항력이었다고.'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 온 게 아니다. 나는 피해자다. 난데없이 날아 온 마력 포탄이 나를 맞춘 걸로도 모자라 포탈 속에 밀어 넣었는데 내가 피해자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쩝.'

물론 변명을 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탓하는 사람조차 지금 이 시점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회귀 했으므로.

'그래도 영훈이 녀석은 살리고 와서 다행이네.'

마지막에 녀석이 나를 부르는 걸 확인했다.

그것만큼은 다행이었다.

띠링! 띠링!

갑자기 시스템의 알림이 귓가에 울렸다.

'윽, 갑자기 뭐야?'

귀가 따가울 정도다. 전에 없는 강력한 알림이었다.

『 시스템이 인과의 뒤틀림을 감지했습니다. 』

『 시스템이 해당 개체의 치명적인 결함을 확인합니다. 』

'뭐?'

처음 보는 붉은색 메시지 창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인과의 뒤틀림? 치명적인 결함?

불길한 단어의 조합뿐이었다.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인과 조정 프로토콜 :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실행합니다. 』

『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실행 완료까지 30분 』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도 이해하기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인과 조정 프로토콜은 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또 뭐야?'

시간을 뛰어넘었으니 그만한 제약을 받는단 건가?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까지였다.

'시스템이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인과 조정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이 줄어드는 시간은 또 뭔가. 시스템은 헌터의 능력을 보조해 주는 게 역할 아니었나?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 남은 시간 : 29분 58초 』

"크윽..."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체 모를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마당에 언제까지고 누워 있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하자.'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30분 뒤에 내 존재가 삭제당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건 싫었다.

'일단은······. 상태창.'

지금 내 상황을 살피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 스테이터스 』

이름 : 이지한

나이 : 24

레벨 : 2

등급 : F

특성 : 없음

보유 스킬

- 없음

'회귀하면서 능력치도 과거로 돌아왔나 본데.'

그래봤자 큰 차이는 없었다. Lv1짜리 근력 스킬이 있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회귀 전과 동일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천성호가 왔다면 참 막막했겠어.'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잃어야 하는 것도 많다. 그에 비해 나는 애초에 가진 게 없어서 타격이 적다. 아니지, 미친 재능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략적인 능력이 파악 됐다.

나는 상태창을 닫은 뒤 주위를 살폈다.

"여긴 어디냐..."

주변은 나무와 녹색 식물들로 가득했다.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꽤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있을 법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 경우 답은 하나다.

'게이트 내부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딘지까지는 모르겠다.'

게이트.

몬스터들의 서식처이자 현실과 타차원을 잇는 유일한 구멍. 그 내부의 모습은 다양하다.

특히 숲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게이트는 많다.

'그래도 내가 들어와 있는 게이트이니 위험도는 낮을 거야.'

F급 헌터인 나는 살아생전 강력한 게이트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높아봤자 D 등급 게이트까지만 들어가봤다.

'문제는 F급 게이트만 되어도 나 혼자 나가긴 버겁다는 거다.'

무기라도 있었으면 개겨봤겠지만,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회귀를 대체 어느 시점으로 한 건지.

'아무리 이 시절의 내가 멍청해도 무기도 안 들고 게이트에 들어왔을 리는 없는데.'

주변을 열심히 둘러봐도 무기가 될만한 건 없었다. 애초에 내가 혼자 떨어져 있는 시점부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긴 했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일단은 이거라도.'

스윽.

나는 근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럭저럭 두껍다. 나같이 약한 헌터에게 무기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당장의 목표는 살아서 게이트를 나가는 거다.

그것 말고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전투를 아예 안 하거나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제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게이트이기를...'

나는 최대한 숨죽인 채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이 다 비슷비슷해서인지 게이트의 정체에 대한 윤곽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나아간지 5분쯤 되었을까, 앞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키르륵...!

고블린의 특유의 불쾌한 울음소리였다.

'이런.'

나는 자연스레 나무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긴장감으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걸리면 100% 죽는다.

사지가 갈기 갈기 찢겨서 살해당한다.

숨소리조차 내선 안된다.

그러다 깨달았다.

'고블린의 감각은 B급 헌터에 필적한다······는 건 미래의 상식이었지.'

회귀한 지금의 상식은 아니었다.

마기가 세상을 가득 채운 10년 후부터 몬스터들은 더욱더 흉포해진다. 나 같은 헌터가 손을 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다.

'여기가 과거라면 이 정도로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일평생 약자로 살아온 내 몸에 그런 본능이 새겨져 있는 건 당연하기도 했고.

나는 고블린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흉포화의 증상은 없어. 눈이 붉지도 않고, 들고 다니는 무기의 수준도 조잡하다. 여기는 확실히 과거가 맞아.'

고블린이 손에 들고 있는 거라곤 내가 아까 집어든 것보다 허술한 나뭇가지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무기가 없어도 제압 가능하다.

키륵. 키륵.

어설픈 초보 헌터라면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잡을 필요는 없어.'

나는 내 수준을 잘 알고 있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으면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진흙탕 싸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소란을 듣고 동료가 몰려든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보스 몬스터에게라도 발각된다면 내가 살아나갈 확률은 더더욱 사라진다.

'여기선 잠시 기다리는 게 낫겠어.'

나는 숨죽인 채 고블린의 행동을 기다렸다.

『 남은 시간 : 24분 33초 』

시스템이 표시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으므로, 잠자코 있는 시간이 아깝다.

어중간하게 움직여서 화를 부르는 것보단 낫다.

초조함을 억누르고, 나무 뒤에 숨어 고블린이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렸다.

키륵!

다행히 고블린 녀석은 금방 움직여주었다. 무슨 소리라도 들은 건지 반대편에 관심을 보이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젠장, 돌아와서도 고작 고블린 한 마리한테 쫄아야 한다니.'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스럽지만 이게 현실이다. 무기 없는 F급 헌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다.

'이래서야 나갈 수 있을까?'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며 숲을 나아갔다. 처음에는 금세 게이트에 관련한 기억이 떠오를 줄 알았건만 계속해서 처음 보는 장소 뿐이었다.

'차라리 다른 헌터들을 찾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게이트를 공략할 때는 헌터 여럿이 힘을 합친다.

3명에서 5명가량의 헌터들이 파티를 짜서 들어오는 게 일반적.

특히 나는 절대로 솔로 플레이를 하지 않았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F급 게이트에서 파티를 버리고 가는 일은 없었어.'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건 기억이 잘도 난다.

팀원을 버리거나, 배신하는 행위는 위법이다. 낮은 등급 게이트에서의 평판이 윗 등급 게이트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니 제대로 된 헌터라면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슬슬 흔적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시간이 무한정 있다면 괜찮겠지만 시스템의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었다.

『 남은 시간 : 14분 45초 』

이 시간이 전부 흐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안심할 순 없다.

신속하지만 조용하게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장소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촤아악!

무언가를 베어 넘기는 듯한 소리.

끼에엑! 끼엑! 키에엑!

이어서 고블린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헌터인가?'

누가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비만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F급 게이트의 고블린을 사냥하는 일은 쉽다. 한 번에 여러 마리의 고블린 소리가 들렸으니, 다수의 헌터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헌터들이 자리를 뜨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스릉.

검을 납도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단순한 소리였지만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뼛속 깊숙히 한기가 파고 드는 느낌.

'!'

그 불길함에 나는 입을 다물고 몸을 낮췄다.

슬그머니 다가가 수풀 너머를 확인했다.

"....키륵"

놀랍게도 검을 납도 한 것은 고블린이었다.

보자마자 다른 고블린들과는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푸른 안광을 흘리는 고블린은 허리춤에 자신의 몸집보다 큰 검집 두 개를 매고 있었다.

두근 두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데도 심장이 요동친다.

놈의 주변에는 피와 함께 동강 난 고블린 덩어리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핏 세어도 세 마리가 넘는 양이다.

고블린을 죽인 건 저 녀석의 짓이었다.

'네임드 몬스터······.'

나는 놈을 보자마자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고블린과 다르게 녀석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쌍태도 쿠훌렌.'

차원이 다른 기량으로 헌터들 사이에서 네임드 몬스터라고 불리는 존재. 그 변칙적인 존재는 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저놈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야?'

나는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에게는 멸망한 세계의 생존법이 유효하다.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고, 쥐 죽은 듯 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했는데.

부스럭.

"?!"

바로 옆에서 3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내가 낸 게 아니었다. 어떤 얼간이가 한 짓이었다.

"사, 살았다! 나도, 나도 데려가!"

웬 미친놈이 네임드 몬스터를 향해 소리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어? 뭐, 뭐야······. 왜 저게 여기에······?"

눈 앞의 고블린 쿠훌렌을 확인한 헌터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이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런거였나.'

쿠훌렌은 심심풀이로 동족을 죽인 게 아니었다. 헌터인 척, 다른 고블린을 죽여 숨어 있는 헌터들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다.

감탄스럽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나는 방금 나타난 헌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자식이 차라리 반대편에서 튀어나왔으면 바로 도망가는 건데.'

쿠훌렌보다 저 멍청한 놈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윽.

쿠훌렌이 자신의 검집 위로 앙상한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저 준비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이씨, 젠장!"

이렇게 되면 나도 들킬 게 뻔했다. 곧바로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 헌터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 엇?!"

헌터 녀석은 무게 중심을 잃고 나와 함께 넘어졌다.

스릉.

그리고 간발의 차로 고블린 쿠훌렌의 검이 뽑아졌다.

스슷!

내가 숨어 있던 곳을 포함한 근처에 나무 기둥 위로 희미한 선이 새겨졌다.

쿠우우웅!

"....."

그렇게 새겨진 선을 따라 나무가 쓰러지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헌터 녀석이 멍한 표정으로 나와 잘려진 나무를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만 늦었으면 나와 이 멍청한 녀석이 나무꼴이 됐을 거다.

"넌 누구...?"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바라보는 헌터.

녀석의 갑옷에는 어떤 길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새겨진 이름까지 확인하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빌어먹을...'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헌터의 멱살을 잡고 뺨을 한 대 갈겼다.

"큭, 이게 무슨 짓...."

말대답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나?

필요한 건 전부 확인했다. 더 이상의 친절은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윽박질렀다.

"뒤지기 싫으면 뛰어!"

여기서부터 살아 남는 건 본인 역량이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폐가 찢어져라 달렸다.

괴물 같은 고블린 놈에게서 벗어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나는 이 얼빵한 헌터 녀석을 진짜로 처음 본다.

저 미친 네임드 몬스터랑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도 처음이다.

이 장소도 처음인 게 확실하다.

문제는 그거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내가 회귀한 장소가 어째서 이곳인지를 모르겠다.

3화 경험치 10만 배(2)

"허억, 허억..."

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각종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너무 달려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살아는 있었다.

쿠훌렌 녀석이 더 따라오는 것 같진 않았다.

"허억, 허억."

난 흙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을 쉬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빨리 체력을 회복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몬스터에게 발견되는 건 피해야 했으니까.

바스락.

"!"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개 같은 상황이었다. 당장은 고개를 돌릴 기력도 없다.

"괜찮아요?"

"후우...."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아까 구해줬던 얼간이 헌터였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샌가 따라붙었나보다.

"괜찮은거죠?"

녀석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죽을 둥 살 둥인데 녀석은 편안한 모습이다. 조금 얼굴이 붉어졌을 뿐 숨도 몰아쉬지 않는다.

'이게 헌터로서의 재능 차이인가.'

일반인이 헌터가 되면 각종 스킬을 부여받는다.

이때 얻게 되는 스킬은 단순한 랜덤이 아니다.

개인이 소유한 재능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데, 저 헌터는 원래부터 체력 관련해서 재능이 있었던 인간이었단거겠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옆을 지키고 있던 헌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고생 안 해 본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저기, 뭐하는 분이세요? 왜 이런 곳에..."

"감사인사가 먼저 아닙니까?"

내가 따지듯이 말하자, 녀석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튀어나와서."

"나도 니 놈이 갑자기 죽으러 와서 정말 놀랐습니다."

"뭐, 뭡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새파랗게 어리다. 헌터로서의 경험도 거의 없어보이고. 능력치는 나보다는 좋겠지만···. 네임드 몬스터인 쿠훌렌이 등장한 시점에서 의미가 없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헌터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성격 되게 까칠하시네요. 김종연이라고 해요."

내 이름은 이지한이다.

하지만 통성명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김종연의 갑옷에 있는 문양을 가리켰다.

"진오 길드 맞죠."

"네? 네, 맞아요. 그런데 대체 왜 여기 계신 거에요? 이번 게이트는 분명히 저희 길드가 먼저 선점했는데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20년 후에서 회귀해 왔는데 이런 곳이라니. 살아 생전 온 적도 없는 곳이다.

대답을 않고 있자 김종연이 슬그머니 본인의 희망을 담아 물었다.

"아, 혹시 구조대가 온 건가요?"

"글쎄요, 내가 구조대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구조대를 자처할 만큼의 실력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조금 달렸다고 숨이나 헐떡대는 이런 사람이 구조대일리가 없다.

"아..."

김종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당연하다.

이 녀석을 포함한 진오 길드 사람들 모두가 곤경에 처해 있을 거다.

이 길드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부터 깨달았다.

일명 진오 길드 사건.

F급 게이트에 들어간 초보 길드 전체가 전멸한 사건이다.

내 정체에 대해선 딱히 해줄 말이 없다.

그러니 나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져야겠다.

"지금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진오 길드 사람들은 어디에 있고요?"

내가 아는 과거대로라면,

이 게이트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 *

"그러니까,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검을 든 고블린을 만나서 길드 전체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거죠."

"네, 맞아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진오 길드는 초보자들로 구성된 길드였다.

F급 게이트 하나를 잡아 사냥할 생각에 싱글벙글 모였는데,

왠 고블린 한 마리가 검을 들고 설치지 뭔가.

신기하다 생각하면서 다가갔는데 순식간에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길드원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쳤고 그 결과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시점에선 쿠훌렌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F급 게이트는 게이트 중에선 공략 난이도가 가장 쉬운 곳이다. 경험 없는 초보 헌터들이 방심하는 게 정상일 정도로.

갑자기 쿠훌렌 같은 괴물이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하는 게 당연하다.

"죽은 길드원도 있어요... 누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F급 게이트에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고블린이 있는 거예요?"

김종연이 답답한 마음에 내 옷을 잡고 흔들어댔다.

"일단 이거 놓고, 진정하시죠. 우리 그 정도 사이는 아니잖아요."

"아, 네."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김종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멀쩡한 듯 말하곤 있지만 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내가 이 녀석보다 나은 거라곤 경험밖에 없다.

'쿠훌렌을 피해서 어떻게 출구로 나갈 수 없을까?'

나가기만 한다면 바깥에 게이트의 상황을 전할 수 있다. 내부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도, 그 위험성도 알리면 된다.

"출구가 어느 방향이죠?"

그 정도는 알고 있기를 바란다.

"뭐가 되었든 나가서 구조부터 요청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아까 만났던 고블린 너머에 있어요."

"아하."

빌어먹을 고블린 놈.

영악하기 그지 없었다.

차원이 다른 지능은 네임드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들과 구별되는 부분 중 하나기도 했다.

놈은 게이트와 헌터들의 움직임에 대해 전부 꿰고 있다.

의도적으로 출구 근처를 맴돌며 헌터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도 기다리면 구조가 오겠죠?"

김종연의 간절한 바람에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공략이 예정보다 너무 늦어지면 협회에서 구조대를 파견한다.

이곳에도 조금만 더 있으면 구조대가 파견될 거다.

다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구조대는 쿠훌렌이라는 괴물을 상정하지 못한다. 고블린이 규격외 존재로 성장하다는 가정조차 없다.

그야 여기는 F급 게이트다.

겨우 20년 전인데도 인류는 모르는 게 많다.

게이트의 변칙성에 대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작 변칙적인 개체의 출현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수준이니까.

그냥 이따금 이런 게이트가 나온다는 것만 아는 정도다.

'어차피 구조대도 상황 파악 못하고 쿠훌렌에게 덤벼들다 죽는 건 마찬가지야.'

협회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난 이후 이 게이트는 이례적으로 봉쇄된다. 그러니 구조대에 기댈 순 없었다.

'남은 시간이란 것도 신경 쓰이고 말이야.'

『 남은 시간 4분 23초 』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 내에 게이트를 나간다는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뭐가 되었든 간에 살아 남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무기 남는 거 없습니까?"

"인벤토리에 몇 개 들어 있기는 한데, 상태가 별로에요."

"그거라도 괜찮으니까 주시죠."

"네, 넵."

김종연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응?"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번쩍.

푸른 섬광이 주변을 가른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어?"

애써 살려 놓은 헌터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붉은 피가 한가득 공중으로 쏟아졌다.

보고서도 믿기 힘든 광경.

내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꿀꺽.

나는 침을 삼켰다.

"....!"

불행하게도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출구를 지키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쿠훌렌이 사냥감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키륵."

놈의 서늘한 안광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 * *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 싫어하는 말이다. 애초에 호랑이보다 강하면 끌려갈 일이 없다.

호랑이한테 잡혀가서 겁먹는 건 나같이 약한 사람뿐이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옛 격언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놈이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이미 공격이 시작된 뒤에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타악!

나는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검격이 휘둘러지기 전에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시에 무기도 챙겨야 했다.

나는 바닥을 구르며, 김종연이 들고 있던 철검을 손에 쥐었다.

미리 움직인 게 정답이었다.

한 박자 늦게 쿠훌렌이 보낸 공격의 후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

"?!"

바닥의 흙과 식물이 한바탕 뒤집어지며 솟아올랐다. 피할 길 없는 충격파가 날 덮쳤다.

"크윽!"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상하좌우 분간이 안 간다.

쿠당탕탕.

그대로 몇 바퀴를 굴렀는지 모르겠다. 가까스로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정신은 멀쩡했다.

'살아남으려면 지금 도망가야 한다.'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이건 나한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쿠훌렌의 시야도 마찬가지일 터.

콰아앙! 콰아앙!

몰아치는 검격 속에서 나는 자세를 낮춘 채 뛰었다. 어차피 내 눈에 보이는 검격도 아니다. 흙먼지가 있거나 없거나 동일하다.

'젠장, 하나라도 맞으면 끝이야.'

이 방향이 맞나?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도망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쿠훌렌이 있는 방향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더듬거리며 흙먼지를 벗어나려고 하는 그때였다.

눈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

까앙!

녀석의 검을 막아낸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몸이 잘려 나가는 치명상은 피했지만, 그 충격은 그대로 나를 덮쳐왔다.

우우웅...!

손아귀에서 거센 진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몸이 중력을 거슬렀다.

나는 흙먼지를 뚫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별안간 위와 아래가 반전되더니 갑자기 나타난 땅이 몸을 강타했다.

"커헉!"

바닥에 튕겨져서 그대로 옆에 있던 나무뿌리에 처박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할 능력조차 내겐 없었다.

아니지, 쿠훌렌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건 알겠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젠장...'

쳐 맞는 게 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끄으으..."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일어서야 했다. 포기하긴 뒤져도 싫었다.

손에 들린 검을 들어 올렸다.

'...무기를 놓치면 끝이야.'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비틀대면서도 끝까지 일어섰다.

이미 내 몸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검격을 받았을 때 뼈 몇 개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본래대로라면 쓰러지는 게 당연할 정도.

그럼에도 나는 일어섰다.

"키륵."

어느새 걷힌 흙먼지 사이로 푸른 안광이 드러났다.

고블린 쿠훌렌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약해 빠진 벌레가 꿈틀대는 게 즐겁단 미소다. 빌어먹을.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름대로 세계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몸이다.

아니,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살고 싶었다.

순수하게 살아남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다르게 내 몸은 여기서 끝인 것 같았다.

주르륵.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내장 어디를 크게 다친 것 같다.

서 있을 순 있지만 그게 전부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팽팽하게 이어져 있던 의식의 끈이 느슨해진다.

그렇게 정신을 잃기 직전.

띠링!

『 남은 시간 00분 00초 』

잊고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인과조정 프로토콜 :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실행에 성공했습니다. 』

『 시스템이 대상의 결함을 완전 복구합니다. 』

'아······.'

붉은 메시지가 연달아 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이제 와서 뭐 어쩌라는건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절망스런 최후의 순간.

『 인과의 흐름이 완벽하게 조정됩니다. 』

『 EX급 특성 '무재 조정(無才調整)'을 획득합니다. 』

"······?"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내 앞으로 떠올랐다.

『 이제부터 당신의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4화 경험치 10만 배(3)

『 EX급 특성 '무재 조정'을 획득합니다. 』

『 지금부터 당신의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내가 뭔가 잘못 이해 한 건가?

10배도 아니고 100배, 1000배도 아니다.

10만 배.

정말 내가 제대로 메시지창을 이해 한 걸까?

촤르르륵!

그런 내 생각을 반박이라도 하듯이 순식간에 푸른 메시지창이 내 앞을 가득 채웠다.

『 심각한 데미지를 받으셨습니다. 』

『 스킬 [ 맷집 Lv.1 ] 을 획득합니다. 』

『 해당 스킬에 관한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살아생전 이렇게 많은 양의 메시지를 보는 건 처음이다.

본래라면 평생에 걸쳐도 볼까 말까 한 메시지가.

일순간에 쏟아졌다.

『 스킬 [ 맷집 Lv.2 ] 획득 』

『 스킬 [ 맷집 Lv.3 ] 획득 』

『 스킬 [ 맷집 Lv.4 ] 획득 』

...

『 스킬 [ 맷집 Lv.10 ] 획득. 』

『 '맷집' 스킬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

내 눈이 전에 없이 커졌다.

믿기질 않는다.

평생 동안 내가 획득한 스킬이라곤 '근력 Lv1'이 전부였다. 사실은 그것조차 안간힘을 써서 얻은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단숨에 최고 레벨의 스킬을 습득했다.

『 받는 피해 25% 감소, 피해에 대한 고통 감소 30%, 이제 치명적인 데미지를 받아도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

온몸을 억죄고 있던 고통스런 감각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후들대던 다리가 단단하게 고정되고, 아슬하게 검을 그러쥐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스윽.

나는 입가에 흘러내리던 피를 닦아냈다.

'몸이 움직여진다.'

피해가 전부 없었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고통은 남아있고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여전히 상황은 불리했다.

하지만 발악은 해볼 만한 상태가 됐다.

"키륵?"

내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 걸까.

쿠훌렌 녀석도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철컥.

놈의 검집 두 개가 부딪히며 금속음을 냈다. 그러나 쥐고 있는 건 검은 하나뿐이다. 나를 여전히 얕보고 있단 뜻이다.

'그렇게 나와주면 나야 고맙지.'

목숨을 건 승부에서 자존심이 중요하던가?

그건 고고한 천재들한테나 먹히는 이야기다.

나같이 살아남는 게 전부인 놈한테는 뭐가 되든 상관없다.

적이 방심하고 있다면 오히려 땡큐지.

타악!

땅에서 풀과 흙이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쿠훌렌이 쏘아지듯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아앙!

다시 한 번 녀석의 검을 받아내는 순간.

촤르르르륵!

알림이 미친 듯이 출력된다.

『 스킬 [ 검술 Lv.1 ]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검술 Lv.2 ] 획득 』

『 스킬 [ 검술 Lv.3 ] 획득 』

...

『 스킬 [ 검술 Lv.10 ] 획득. 』

쿠훌렌의 검이 만들어낸 강한 풍압이 몰아치지만, 오히려 기분이 상쾌할 지경이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난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경험치 10만 배.

이 의미는 내 생각보다 넓었다.

레벨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스킬 경험치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검 한 번을 맞댄 걸로 십만 배에 달하는 경험을 축적한다.

『 '검술'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그렇게 쌓인 경험은 형태를 갖추어 스킬이 되고, 레벨이 오른다.

'검을 쥐는 감각 자체가 달라졌어.'

본래라면 절대로 뛰어넘지 못했을 간극이 단숨에 메워졌다.

검을 잡고 있는 손가락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기분이다. 팔꿈치부터 발끝까지 어설프게 위치하던 신체 부위들이 온전한 제자리를 찾았다.

마구잡이로 들어올린 검이 탄탄한 기반을 잡은 검술의 일부가 되었다.

'정말로 해볼 만할지도 몰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모든 게 달랐다.

양측의 검이 힘을 겨루고 있는 가운데, 내가 흘려보내야 할 검의 방향이 물 흐르듯 연상된다.

카가각.

검날이 맞닿은 위치에서 붉은 불똥이 튀어올랐다. 나는 녀석의 검을 흘려내고 있었다.

"크륵······?"

단순히 흘려내는 게 끝이 아니다.

놈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서 땅바닥으로 내리꽂는다면······.

"키륵!"

역시 눈 앞의 적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 의도를 눈치챈 쿠훌렌이 힘을 실어 날 밀쳐냈다. 강한 반동이 밀려왔다.

쿵!

"큭!"

나는 무게중심을 잃고 뒤에 있는 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나를 밀쳐냄과 동시에 뒤로 물러난 쿠훌렌이 검을 고쳐 잡았다.

"키르륵!"

쿠훌렌은 내 모습이 재밌는지 비웃음을 흘렸다.

연달아 공격을 해왔다면 위험한 순간이었다.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집중했다.

'빌어먹을.'

나는 10만 배에 달하는 경험치를 단숨에 얻을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녀석을 잡아 삼켰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눈 앞의 고블린은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아직도 녀석과 나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뭘 해야 놈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지?'

놈이 쌓아 올린 재능을 뛰어넘을 방법은 없는 건가?

'생각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는 것조차 힘겹다.

'우선은 놈의 움직임을 살피자.'

고수의 반열에 오른 존재들은 상대가 움직이기 전부터 그 강함을 읽어낸다고 했다.

실제로 고등급의 헌터들 또한 그러했다. 상대의 수를 읽고, 더 좋은 수로 대처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은 채 대치한다.

나는 놈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눈에 넣을 생각으로 집중했다.

상대의 움직임과 주변의 상황을 인지한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할 터였다.

그러자.

촤르륵!

『 스킬 [ 인지 Lv.1 ]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인지 Lv.2 ] 획득 』

『 스킬 [ 인지 Lv.3 ] 획득 』

....

..

.

『 스킬 [ 인지 Lv.10 ] 획득. 』

『 '인지'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미친...'

놀랍게도 새로운 생각이 또 다른 활로를 열었다.

인지 스킬이 생겨났다.

그것도 1레벨에서 단숨에 10레벨로 점프.

시야 안에 들어오는 정보량의 차원이 달라진다.

본래 인지하지 못했던 상대의 세세한 움직임이 감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감각도 한층 새로워진다.

'이게 인지 스킬의 힘이구나.'

내 뒤에 있는 나무나, 근처를 채우고 있는 식물들의 위치가 정확하게 이해된다. 과장되게 말해서 나뭇잎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기존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쿠훌렌 녀석은 이미 이런 단계쯤은 진작에 뛰어 넘었을 거다.

'이러니까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이길 수가 없지. 보는 세계 자체가 다른데.'

파앗!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쿠훌렌이 쏘아져 온다.

방금 전과 다르게 녀석의 손에 들린 검이 휘둘러지는 공간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궤적이 보인다.'

충분히 막을만한 공격이었다.

발을 땅에 고정한 채, 안정적인 자세로 검을 휘두른다.

스킬을 통해 몸에 익혀진 검술이 자연스레 발현되고 있었다.

그대로 녀석의 검격을 받아냈다.

카앙!

금속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알고, 보고, 느끼고 막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어서 쏟아지는 공격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거대한 벽으로 느껴졌던 쿠훌렌의 검이 이제는 눈에 훤하다.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가고, 이대로라면 뭔가 밀어낼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키륵."

돌연 쿠흘렌이 낮은 울음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녀석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스으윽.

녀석이 쥔 검이 불가해한 움직임을 취했다. 잔상을 흩뿌리며 기이한 선을 그린다. 내가 가진 검술론 이해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

해괴, 독특 그런 단어로밖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기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기이한 궤도로 쿠훌렌 검이 날아왔다.

'이런!'

정확하게 녀석의 검을 향해 칼날을 들이댔음에도, 두 검이 만나는 일 없었다.

쿠훌렌의 칼날은 그대로 내 목을 노리고 날아 들어왔다.

'막기에는 너무 늦어.'

이건 막을 길이 없었다.

막을 길이 없다면.

피하는 수밖에 없다.

'딱 한 걸음만······!'

인지 능력이 전에 없이 높아진 상태였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어설프게 다시 검을 휘둘러 막을 바에는 피하고자 움직여야 했다.

'한 발만······.'

나는 가까스로 반걸음을 뒤로 내디뎠다.

"!"

그러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 스킬 [ 보법 Lv.1 ]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보법 Lv.2 ] 획득 』

....

..

.

『 스킬 [ 보법 Lv.10 ] 획득. 』

『 '보법'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거리가 벌려졌다.

엉겁결에 하기는 했는데 나조차 원리를 모르는 방식이었다.

부웅! 팍.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 쿠훌렌의 검이 바닥에 박혔다. 고개를 든 녀석이 놀랍다는 듯 나를 쏘아본다.

"크륵..."

그 표정에선 비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놈에 대한 건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힘, 체력, 속도... 기본적인 능력치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쿠훌렌을 이기는 일은 없었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말이지.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스슷!

이번에는 쿠훌렌이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서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연격.

불과 몇 분 전까지는 하나를 받아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젠 아니다.

카앙! 카앙! 카앙!

내 모든 신경을 쏟아 부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인지 스킬로 궤도를 읽고 미리 대응하면 부족한 힘과 속도를 보충할 수 있다.

심지어 보법과 함께 사용하니 막을 수 있는 간격에 여유가 생긴다.

'이번에야말로······!'

그리고 그 여유에 내 공격을 욱여넣으면...

촤악!

예상하지 못한 내 공격에 쿠훌렌이 휘청였다. 수차례의 공방 끝에 내 철검이 쿠훌렌에게 닿은 것이다.

"어떠냐."

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녀석을 바라봤다.

쿠훌렌의 볼가로 얇은 상처가 생겨났다. 희미한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정말 얕은 상처였지만, 놈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키륵..."

놈의 눈에 흐르는 푸른 안광이 더욱 진해졌다.

* * *

게이트의 바깥.

헌터 협회 건물에서 헌터 한 명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C급 헌터 윤서현.

그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에 소리쳤다.

"아니, 어떤 바보 같은 놈들이 F급 게이트에서 조난을 당해요? 가봤자 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이 여자가 진오 길드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대였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나오는 대답은 상투적이었다. 시간이 초과 되었으니 무조건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벽이랑 이야기하는 것 같네. 네, 네. 알겠어요. 알았다니까요."

실제로 F급 게이트 내에서 오래 머무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폐쇄적인 게이트 내부인만큼 범법적인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초보 길드는 사소한 사고에도 잘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협회의 관리가 필수적이란 이야기였다.

『 스킬 '공간이동 Lv2'를 사용합니다. 』

쏟아지는 잔소리를 대충 흘려 넘긴 윤서현은 자신의 스킬을 사용해서 공간을 이동했다.

주위가 잠시 일렁이더니 문제가 발생한 F급 게이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협회에서 그리 먼 장소도 아니었다. 한적한 산 부근이었다.

'대체 뭐하고 있길래, F급 게이트에서 시간을 끄는 거야.'

진오 길드라고 했던가.

관련 기록을 확인하니 멀쩡한 길드였다. 문제없이 잘 사냥하는 평범한 초심자 길드였다.

그러니 이런 귀찮은 일은 정말 다른 사람을 시켰으면 좋겠다. 협회 소속 헌터라는 게 그렇다.

'안에서 술판이라도 벌이고 있는 거 아냐? 그런 일이 한두 번이어야지..'

일을 많이 한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길드 소속 헌터들과 비교하면 신세가 많이 처량한 편이 아닐까.

언니 추천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때려쳤을 거다.

그런 불평을 하며 윤서현이 게이트 내부로 진입했다.

"읍."

윤서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움켜쥐었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부터 혈향이 가득했다.

고블린의 시체가 난잡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입구부터 성대하게도 해놓으셨구만."

그중에 사람의 시체가 섞여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소리치면서 나아갔다.

"진오 길드 여러분! 어디 계세요?"

게이트 내부로 더 들어가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근처의 나무들이 전부 베여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장소가 숲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마치 공터처럼 일대가 휑했다.

그제서야 윤서현이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한데...'

심상치 않았다. 보고 받은 게이트의 내부하고는 모습이 너무 달랐다.

'잠깐, 저건...'

푸른 눈을 가진 고블린과 그 앞에 서 있는 남자 헌터.

고블린은 어울리지 않게 긴 검을 들고 있었는데 팔 하나가 없었다.

머리를 크게 다친 건지 눈도 하나뿐이었다.

휘익.

그 고블린이 윤서현을 바라봤다.

"...?"

윤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고작 고블린을 보고 겁먹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고블린이 말을 한 것이다.

"키륵... 내 이름은... 쿠훌렌이다."

거친 쇳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왔다.

윤서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더 기가 막힌 건 고블린과 마주보고 있는 남성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윤서현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블린이 말을 한다고? 그 사나운 고블린이?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고블린이라고 한다면 지성과는 거리가 먼 생물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인간을 습격하는 게 윤서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고블린에 대한 이미지였다.

눈 앞의 고블린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들었다.

고블린은 남자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하... 키륵, 기억해라. 나도 널 기억할 테니."

이어서 고블린은 자신이 들고 있던 검 하나를 높이 치켜 들더니, 바닥으로 세게 내리꽂았다.

콰아앙!

흙먼지가 치솟으며 고블린이 있던 자리를 뒤덮었다.

"!"

남자가 뒤늦게 녀석을 잡으려고 뛰쳐나갔지만, 고블린은 사라진 뒤였다.

윤서현이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저기요, 진오 길드 맞으시죠? 이제 나오셔야 해요."

윤서현은 헌터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몸 이곳저곳에 베인 상처와 흘러내리는 피로 엉망이었다.

남자는 이미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그는 윤서현을 쳐다보다니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내가 당신을 살렸어. 기억하쇼."

"네? 그게 뭔..."

스륵.

남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애초에 서 있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의 상처였다.

"하..."

윤서현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자신이 본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5화 레벨업!(1)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기는······.'

주변은 커튼으로 둘러져 있었다.

촤르륵.

커튼을 걷어내자, 병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또 쓰러졌던 건가.'

복도 밖으로 환자와 간호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상태 창을 불렀다.

『 스테이터스 』

이름 : 이지한

나이 : 24

레벨 : 2

등급 : F

특성 : 무재조정(EX)

보유 스킬

- 검술 Lv.10, 근력 Lv.10, 인지 Lv.10, 보법 Lv.10, 체술 Lv.10, 민첩 Lv.10 그 외 2

'그래,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바라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평생 가질 엄두도 못 냈던 스킬들이 줄지어 서 있다. 네임드 고블린 쿠훌렌과 검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이 스킬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 있는 건 특성이었다.

『 특성 설명 』

이름 : 무재조정(無材調整)

등급 : EX

효과 : 습득하는 경험치가 10000000%가 됩니다.

특수효과 : [ 잠김 ]

별다른 설명은 없고, 경험치가 10만배가 된다는 효과만 적혀 있었다. 특수 효과라는 칸은 눌러도 무반응이었다.

그래도 이걸로 확실해졌다.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손에 넣은 특성이었다.

'이런 행운이 나한테 찾아 올 줄이야······.'

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 이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이건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시스템은 인과조정을 통해서 내게 무재조정(EX)라는 특성을 부여했다.

그 이름도 눈 여겨 볼만하다. 한자를 나름대로 풀어서 생각해보면 쉬웠다.

'내가 극도로 재능이 없었기에 시스템은 내게 사기적인 특성을 부여했다.'

존재하지 않는 재능을 기준에 맞게 정돈 한다.

'만약 천성호가 이곳에 왔다면 시스템은 다른 결과를 내놨을까?'

천성호의 압도적인 재능이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억압 당한다거나.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과거로 온 건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몰랐다.

휙휙.

나는 몸의 이곳저곳을 쓱쓱 움직여봤다.

조금 뻐근하긴 해도 문제 없이 잘 움직여진다. 종합적으로 건강했다.

세세한 기억은 안나지만 쿠훌렌한테 꽤 상처를 많이 입었던 것 같은데.

'치유 헌터가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내 스킬 덕분인건가?'

아니나 다를까 스킬창을 확인하니 새로운 스킬이 생겨있었다.

『 자연 회복 Lv.10 』

『 자연 치유 능력이 초인적으로 향상 됩니다. 』

"오호."

나는 고개를 돌려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상처가 말끔히 다 나아있다. 스킬의 레벨이 최대치가 된 건 덤이었다.

문제는 내가 여기에 얼마나 누워 있었냐는건데.

날짜를 확인할 만한 물건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였다.

"앗! 어떻게 벌써 일어났어요? 의사 말로 일주일은 더 걸릴 거랬는데."

웬 예쁜 여자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뒤졌다.

"누구십니까?"

"게이트에서 봤잖아요!"

여자는 답답한지 품 안을 뒤져더니 명찰을 꺼내 보여줬다.

"헌터 협회 소속 C급 헌터 윤서현이에요. 그쪽이 고블린이랑 싸우다 쓰러진 걸 내가 구했죠."

그제서야 기억났다. 쿠훌렌과의 결투 막바지에 저 여자가 나타났었다. 쿠훌렌은 수적으로 불리해지자 비겁하게 도망갔고.

윤서현의 끝까지 말을 들은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내가 윤서현씨 당신 목숨을 구한거죠."

예전처럼 일이 흘러갔다면 구조대인 윤서현은 죽고, 그 후속으로 투입된 헌터들도 목숨을 잃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윤서현이 알고 있을 리는······.

"뭐, 어느 정도는 인정해요."

있었다. 대충 상황을 아나 보다.

"진오 길드의 생존자분들이 증언해주셨거든요. 그 고블린. 그러니까 이름이 쿠훌렌이랬죠. 그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 저도 알아요."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사정 청취가 끝난 모양이다. 쓸데 없는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서 좋았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이틀이요."

"몇 명 살았습니까?"

"그쪽 제외하고 두 명이요. F급 게이트에 여덟 명이서 들어갔는데 살아남은 게 고작 둘이라니. 웃기죠."

둘밖에 안되는 게 아니다.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는 마굴에서 둘이나 살아남은 거다.

그걸 알 리 없는 윤서현이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왔다.

"그보다 문제는 이지한씨 그쪽이에요. 이지한씨는 진오 길드 소속도 아닌데, 대체 그 자리에 왜 있었던거에요?"

과거로 회귀하는 포탈을 탔더니 게이트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음..."

나는 고민하는 척 눈을 감았다 떴다.

"밤에 산책하다 들어갔나봅니다. 제가 길치거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말이 안된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진오 길드가 선점한 게이트 내부에서 외부인이 나왔다. 이건 범죄랑 연결 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변명거리가 있기는 했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F급 게이트에 들어가서 고블린 몇 마리 잡고 마정석 몇 개 주워서 나올 생각이었고요."

그 말을 들은 윤서현이 나를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인정하니까 오히려 기분이 나쁘네.

나를 잠시 바라보던 윤서현이 입을 열었다.

"뭐, 좋아요. 그렇다고 치죠."

"······."

"보고서에는 벌금 안 물게 잘 적어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에요."

이 여자. 그런 스타일이었다. 깐깐하게 보여도 의외로 설렁설렁.

전생에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잘 모르겠다.

"그러면 또 뭐가 문제입니까."

"······아마 협회에선 이지한씨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책임을 묻지도 않겠죠. 이지한씨가 F급이니까요."

그런거구만.

내가 범죄자 취급 받지 않는 건 그 이유에서였다. 게이트에 들어 간 건 불법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피해자의 증언을 대조한 결과 나는 무해하다고 판단한 모양.

그런데 윤서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억울하지도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이지한씨가 그 고블린을 쫓아냈잖아요. 전 봤어요. 아무리 F급이라고 해도 진짜 쓰러뜨린 건 이지한씨인데. 협회에서 그걸 없던 걸로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녀는 나름 나를 생각해주는 듯하다만.

나는 이 사건과 엮이고 싶지 않다.

'여기선 확실히 해둬야겠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봐요, 윤서현 헌터. 당신이 나한테 빚진 거라는 것만 기억해둬요. 그쪽 말대로 내가 그 고블린을 직접 쓰러뜨렸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협회에 없는 거 압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윤서현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나에 대한 기록은 이미 확인했을 거다. 내가 재능이 없어 몇 년째 F급을 전전하는 헌터라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협회는 기민하고 깨끗한 단체가 아니다. 썩었다고 보는 게 맞다. 제대로 된 곳이었다면 대한민국이 마족들한테 그렇게 쉽게 함락되진 않았겠지.

"하지만······."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던 윤서현이 입을 열었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쪽이 이긴 거잖아요."

속에 있던 말을 다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위기에서 두 명의 헌터를 구한 F급 헌터. 같은 기사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 되고, TV에 특종으로 실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건이잖아요. 분명 유명 길드에서도 스카웃하려고 난리일텐데요."

"······."

할 말을 잃었다. 보기 드문 착한 사람이 여기에 있었네.

하지만 그것과 별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아가씨가 누굴 사지로 몰려고 작정했나.'

나는 이 능력을 가능한 숨기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이 세계는 멸망을 향해 시시각각 나아가고 있다. 벌써 사회에 숨어든 마족도 존재한다.

매체에 나가서 마족들에게 유망주가 여기에 있으니 죽여주십쇼하고 어그로를 끌 생각은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어보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섬주섬.

"지금 뭐해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신경쓰지 마시죠."

협회에서 보내 준 걸로 보이는 위문품들.

냉장고에 있던 주스랑 과일을 한보따리 챙겼다.

바구니에 담지 못하는 건 입 안에 욱여 넣었다.

"!"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10년 만에 먹는 바나나다. 바나나가 이렇게 달콤하다니.

그러고 있는 동안, 윤서현은 나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안가고 뭐하는거람.

나는 윤서현을 쏘아봤다.

"볼 일 다 보셨으면 이제 가주시죠? 옷 갈아입고 퇴원하게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 * *

풀썩.

집이다. 곰팡내가 나는 단칸방이지만.

그리운 곳이었다.

퀴퀴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히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치고 다짜고짜 집으로 돌아왔다.

비용은 협회에서 지불해줘서 다행이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꼬르륵.

"그래, 일단 먹고 시작하자."

과일 몇 개 먹은 걸로는 허기가 가시질 않는다.

비빔라면.

과거로 돌아가면 내가 하고 싶었던 1순위가 바로 이거였다.

영훈이 녀석에게도 말했듯 나는 비빔라면에 진심이었다.

매콤달콤한 화학조미료가 너무나 그리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찬장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네."

라면은 없어도 된다. 나가서 사오면 되니까.

돈만 있으면 된다.

"여기도 없네."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봐도 땡전 한 푼 없었다. 넓지도 않은 집구석을 샅샅히 뒤져봤지만 100원 하나 없었다.

이상하게 지갑이 없었다.

다행히 스마트폰은 집에 그대로 있었다.

이걸로 어떻게 결제 할 수도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아, 시발."

잠금해제 비밀번호를 까먹었다. 20년이나 지났는데 기억하는 게 이상하다. 큰일 났다. 이게 아니면 라면을 사먹을 방법이 없다.

- 30분 후에 다시 시도해주세요.

에라이.

나는 대충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해지니 명확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거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맞나.'

나는 인류를 구할 영웅을 대신해서 회귀했다.

게이트 안에 있을 때는 살아남느라 필사적이었다.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곰곰히 되새기고나니 새삼 상황이 심각하다.

'인류의 운명이 내 손에 달린 거야.'

이 시점에서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그대로 직행 롤러코스터를 타고 멸망이라는 바다에 처박힌다.

대책을 세워야했다.

'...쓸만한 건 그다지 기억이 안나는데.'

본래 회귀 했어야 할 천성호는 굵직한 사건들과 중요한 지점들을 전부 외워놨을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사고로 회귀했다.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큼지막한 사건들은 알지만, 마족들의 침범이 심화 되는 사건이라든지 자세한 건 기억하지 못한다.

어찌어찌 머리를 굴리다보니 신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 오히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해결되는 거 아냐?'

이대로 또다시 20년이란 세월이 흐른다면. 최후의 5인이 또다시 회귀 아이템을 찾아서 사용한다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 될지도.

무책임하긴 하지만 괜히 손댔다가 미래가 뒤틀리는 것보단 나아보인다.

물론 상상만 해봤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저것 걸리는 게 너무 많아.'

그때 그 회귀 아이템이 또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가능하면 무한 회귀가 가능하단 말이다.

또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말아야 하는데 난 이미 과거에 개입해버렸다.

'새로운 특성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게이트에서 죽었겠지.'

[ 무재조정(EX) ]

이 스킬이 내 손에 들어 온 순간부터 과거는 달라지고 있었다.

이제 무작정 기다리면서 누군가가 해주길 기다리고 싶진 않다. 내게도 힘이라고 부를 만한 게 생겼으니까.

'······.'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강해지지 않으면 결국 살아남을 수 없다.

적이 많아도 너무 많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도 한몫한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마족은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며, 사람들을 편으로 끌어 들인다.

'회귀 전, 내게 날아왔던 마력포탄은 분명 보호막을 통과했다.'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던 보호막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인류의 편이 아닌자가 섞여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만약 최후의 5인 중에 배신자가 있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내가 세계를 구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 놈이 또다시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20년 이후의 세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훈이 녀석과 함께 발버둥치며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애초에 그런 일이 없게 하고 싶었다.

그리 결심하자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후,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 있지.'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나이가 한 번 하기로 결정 했다면 망설여선 안되는 법.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상점가로 향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한 작은 서점.

'······책을 읽자.'

쿠훌렌과의 대결을 통해서 깨달은 게 있다.

경험치가 10만배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아무 행동이나 한다고 스킬을 획득하는 게 아니다.

의미 있는 경험을 거쳐야 비로소 스킬이 되고 숙련도가 오른다.

그러니 제대로 된 경험을 만들어내야했다.

스승이 있다면 편했겠지만, 당장은 나 혼자 해내야했다.

나는 서점 내부를 찬찬히 훑어나갔다.

'좋아. 딱 원하던 그림이야.'

동네 서점이지만 책의 분류가 정확하게 되어 있었다.

경제, 역사, 에세이, 소설, 인문, 과학······.

어렵다고하면 역시 과학이다.

나는 서점 한 켠에 마련된 장소로 발을 옮겼다.

우주에 관한 책도 있고, AI에 관해 정리한 책도 있다. 외계인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난해 해보이는 책을 집어들었다.

진짜 어렵다고 한다면 이거밖엔 없지.

- 양자역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철학적 담론

제목부터 아찔하다.

꿀꺽.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선 첫 페이지를 넘겼다.

마음을 다잡고 첫번째 줄부터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이해할 법하다. 세번째 줄을 넘어가자 이후로는 한국어가 맞는지 의심되는 문장 뿐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뭐라는거야.'

고통스럽지만 확실한 경험.

실제로 숨만 쉬고, 가볍게 움직이기만 하는 걸로는 경험을 쌓을 수 없다. 그랬다면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수가 되었겠지.

'책 읽기는 내 뇌에 자극을 주기엔 충분한 행동이다.'

내게 자극을 주고 성장 시킬 수 있는 행동만이 경험이 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한 페이지를 전부 읽었을 때였다.

『 고차원의 지적 활동을 감지합니다. 』

촤르르륵!

『 스킬 [ 지력 Lv.1 ] 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 지력 Lv.10 ] 을 획득합니다. 』

『 '지력'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하고선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해냈다. 예상대로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 정도는 감내할만 했다. 책을 한 장 읽는 것으로 스킬을 습득했으니 남는 장사다.

구팔 칠십이······.

오구 사십오······.

칠칠 사십구······.

'뭔가 달라진건가?'

눈에 보이는 검술이나 근력과 달리 지력에 관해선 체감하기 어려웠다. 나는 지력 스킬의 설명을 읽어봤다.

『 마법 숙련도 25% 상승, 모든 마법의 위력 10% 증가, 마력 10% 증가 』

"....."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는 말은 딱히 없었다.

터억.

나는 책을 덮고서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지능 상승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내가 노리는 건 이게 아니었다.

'내가 진짜 필요한 건 지력 스킬이 아니야.'

지력, 근력, 인지, 체력 같은 스킬들은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스킬이다. 헌터들은 이것들을 기초 스킬이라고 불렀다.

나는 겨우 그런 것도 손에 넣지 못한 모지리였지만, 이젠 다르다.

'기초 스킬을 얻었다면 그 뒤로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재능이 또 다른 재능을 낳게 되는 것이다.

미래로부터 회귀한 내가 가장 먼저 습득할 스킬은 이거였다.

'떠올리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는다.

무의식의 바다에 깊게 잠든 기억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다.

20년 전, 내 의식에서 까맣게 잊혀졌을 녀석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다시 10만배의 경험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 무의식과 맞닿은 기억의 영역에 접근합니다. 』

『 스킬 '인지 Lv.10'이 활성화 됩니다. 』

『 스킬 '지력 Lv.10'이 활성화 됩니다. 』

기억해내자.

멸망하는 세계에서 20년 간 쌓아온 모든 걸.

『 스킬 [ 기억 탐색 Lv.1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기억 탐색 Lv.2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 기억 탐색 Lv.3 ]을 획득합니다. 』

···

..

『 스킬 [ 기억 탐색 Lv.10 ]을 획득합니다. 』

『 스킬 '기억 탐색'의 레벨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

그래 내가 떠올리고 싶은 건 그래 바로 그거다.

『 무의식 속 잠재된 기억을 완벽하게 떠올립니다. 』

나는 충전기에 꽂힌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6화 레벨업!(2)

- 스마트폰의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후, 드디어 풀었다."

나는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액티브 스킬 '기억 탐색'의 효과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스마트폰을 초기화 시켰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보자, 남은 잔고가······."

- 예금 잔액 : 1,130원

형편 없이 적은 금액이었지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다행이다."

비빔라면 하나를 먹을 정도의 돈은 남아 있었다. 궁핍했던 과거의 나에게 많은 걸 바랄 순 없는 법이다. 일단은 만족이다.

스마트폰으로 카드를 완전히 대신 할 수 있단 것도 기억해냈다.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선 동네에 있는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러면 가면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정리해볼까.'

스킬의 힘은 대단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들을 마음대로 꺼낼 수 있다. 시간순으로 살피거나, 내가 느끼는 중요도 순으로 찾아볼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검색보다 편리하다.

'이게 스킬의 힘이구나.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겨우 액티브 스킬 하나 얻었을 뿐인데.'

기억 탐색은 액티브 스킬로 분류된다. 직접 사용한다는 게 다르다.

인지, 지력, 체술, 검술 같은 스킬은 가지고만 있어도 효과가 발휘 되는 패시브 스킬이다.

'내가 액티브 스킬을 가지다니······. 회귀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간단한 액티브 스킬의 효과가 이 정도라면 앞으로 내가 얻게 될 스킬들은 얼마나 더 대단할지. 뭐, 레벨이 단숨에 높아졌으니 체감이 큰 게 당연하기도 했다만.

하여튼 기억 탐색 스킬 덕분에 마트로 향하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세계를 넘보는 마족들을 처단하고, 그 핵심이 되는 계획을 저지하는 거다.'

그 원대한 계획의 첫 발자국은······.

아직 며칠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놈은 아직 이 세계로 넘어오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나는 놈이 넘어오는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성장의 마족. 그놈을 싹부터 잘라버려야겠어.'

지금 당장은 마족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약하지만, 이름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미친듯이 강해지는 놈이다.

'며칠 동안 준비할 게 많겠어.'

약하다곤 해도 마족. 지금 상태로 덤볐다간 아작 날 게 뻔하다.

"이거 한 번 드시고 가세요. 행사 중이에요."

"······."

생각하면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마트의 시식 코너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만두의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괜히 대형 마트로 온 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 돈은 없지만 입은 있다.

콕. 콕. 콕.

이쑤시개로 물만두 세 개를 동시에 집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지나치려 했건만, 몸이 떨리는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제대로 된 음식.

썩은 마수의 고기나, 정체불명의 것들로 이루어진 죽 같은 게 일반적인 식사였음을 감안하면 만두는 천상의 음식이었다.

'해, 행복하다.'

아니지, 벌써 행복해서는 안 된다. 겨우 여기서 멈춰서서는 안된다. 본래의 목적을 잊을 뻔했다.

나는 라면 코너로 향했다.

"으으음."

종류는 정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는 라면들 중에서도 비빔라면.

문제는 비빔라면에도 종류가 여럿이라는 거다.

그야말로 비빔라면의 전국시대다. 찰진 비빔면, 진짜 비빔면, 배랑 홍고추랑 동치미 비빔면도 있다.

하지만 근본은 정해져 있었다.

칠도 비빔면.

내가 생각하는 근본이었다.

'맞아, 역시 칠도비빔면이지.'

역시 근본은 무시할 수 없지. 암.

나는 생각을 멈췄다. 나도 사람인데 뭔가를 먹기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어떤 영웅이든 세계를 구하기 전에 일단 밥부터 먹어야 한다.

그러면 칠도로······.

그렇게 결정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순간인데 방해를 하다니.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발신인을 확인했다.

'윤정수'

대충 짐작은 가는데, 확실하진 않다.

이럴 때 쓰라고 기억 탐색이 있는 거겠지.

『 [ 스킬 기억 탐색 Lv.10 ]으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

"······."

이제야 제대로 기억이 난다. 윤정수는 내가 속한 헌터 사무소의 팀장이었다. F급인데다 재능이 지지리도 없었던 나는 길드가 아닌 사무소에 속해있다.

"여보세요."

- 어이, 땜빵. 주소 부른다. 받아적어. 경기도 일산시······.

나를 땜빵이라 부른 남자는 다짜고짜 주소를 불렀다. 이마저도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출발해.

짜증나는 목소리다. 때론 기억하지 않는 게 좋은 기억도 있나보다.

땜빵.

특정 길드에서 인원이 한 명 모자랄 때 대타를 뛰는 역할이다. 일당으로 바로 지급되니 좋긴하다. 늘 일이 있진 않아서 그렇지.

이게 F급인 내가 헌터로 돈을 벌며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죠."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 다시 내 계좌를 확인했다.

- 예금 잔액 : 1,130원

비빔면 위에 삼겹살을 얹어 먹을 수 있다면.

땜빵 한 번 정도는 뛰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것만 노리는 건 아니었다.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으면 나야 좋다.'

기껏 경험치 10만배가 되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

결심을 마치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려운 건 아니고 윤정수 이 놈이 해결 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아쉬운 감정을 담아 말했다.

"못 갑니다."

- 그게 뭔 개소리야? 너 돈 벌기 싫어? 잘하다 왜 이래?

윤정수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동시에 의아함도 느껴졌다. 이지한 이 놈이 이런 놈이 아닌데? 싶은 느낌.

당연히 다르지. 그 뒤로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데.

'예전의 나였다면, 일을 건네 주는대로 넙죽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당당하게 할 말을 했다.

"택시비 좀 주시죠."

계좌 잔액이 1100원이라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 * *

나는 공짜 택시를 타고 일산에 있는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시험할 장소가 필요하긴 했어.'

게이트는 어떤 공원의 근처에 생성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나를 알아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아, 이제 오면 어쩌자는 거야. 야, 땜빵. 정신 안 차려? 우리가 게이트 공략 시간 넘기면 책임질 거야?"

이제 갓 스무살이 됐을까?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친구다.

그는 세웅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이름은 진세웅. 나는 적당히 목인사를 하면서 다가갔다.

'맞다. 이런 취급이었지.'

억울하진 않다.

F급 중에서도 절망적으로 재능 없는 녀석. 그게 나였다. 이 시절의 난 땜빵으로 들어간 게이트에서도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저벅저벅.

나는 길드장 놈한테 가까이 다가갔다. 놈이 당황하며 슬금슬금 물러난다.

"뭐, 뭔데? 해보자는 거야?"

내가 강하게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양. 아무것도 안했는데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

『 특성 '무재조정(EX)'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 스킬 [ 위압 Lv.1 ] 획득 』

『 스킬 [ 위압 Lv.2 ] 획득 』

『 스킬 [ 위압 Lv.3 ] 획득 』

'오.'

예상치도 못한 소득을 얻었다.

새로운 액티브 스킬 '위압'을 얻은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그 레벨이 Lv.3이 되었다.

『 대상을 위압합니다. 위압 당한 대상의 모든 능력치가 9% 감소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상대이거나 약한 상대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니 진세웅에게 위압이 먹힌 모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되면 이용한다는 게 내 신조다.

"장비 하나만 빌려주시죠."

나는 뻔뻔하게 요구했다. 지난번 게이트에서 주운 검은 미처 챙기지 못했다. 없는 걸 어째.

"······."

위압을 받은 진세웅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를 악물었다. 녀석은 마지못하는 척 손을 저었다.

"대, 대충 아무거나 던져줘. 내가 당장 들어가야 하니까 참는다. 진입할 거니까 다 따라와."

진세웅이 서둘러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이지한 저 놈 오늘 왜 저러냐. 사람이 달라졌는데."

"몰라, 눈빛 장난 아니던데."

"길드장 쫄았나?"

"음, 그런 듯."

눈치를 보며 수군대던 길드원들도 하나둘씩 게이트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세웅 길드의 막내가 무기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이거 쓰세요."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다.

"제가 쓰던 건데 그런대로 괜찮을 거에요. 저는 다른 무기 쓰면 되거든요."

"오, 고맙다."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된 철검이었다. 나는 검을 받아 등에 메고서 게이트 안으로 발을 옮겼다.

우우웅.

특유의 기묘한 느낌과 함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뀐다.

현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공원에서 으스스한 동굴 안으로.

달칵.

막내 녀석이 인벤토리에서 랜턴을 꺼내 불을 켰다. 마정석을 사용한 물건이라 주변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나와 막내 녀석은 본대의 뒤꽁무니를 따라 움직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저희 길드원 한 분이 갑자기 아파서 못 나오신다고 하더라구요. 갑자기요."

그래서 내가 대체 인원으로 투입된 거였구만.

이번에 공략할 게이트는 당연하게도 F급이다.

허접한 F급 게이트도 공략하는데 최소 5명의 사람이 필요하다.

'나야 나쁠 거 없지.'

사람이 모자라면 공략 자체가 금지된다.

그 최소 인원을 맞추려고 녀석들은 날 부른거고.

"길드장 형도 그래서 화났던 걸거에요."

막내 녀석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말해주고 있었다. 착한 녀석이네.

길드장을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생돈 깨지니까 아깝긴 할 거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투욱.

별 건 아니고 죽은 고블린의 시체였다. 시체를 던진 길드원 하나가 부탁했다.

"처리 좀 해줘."

"아, 넵!"

막내 녀석이 잽싸게 받아서 칼로 고블린의 시체를 푹 찍었다.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다음 시체가 날아들었다.

'마정석 캐내기. 길드 막내나, 나 같은 땜빵이 하는 일이었지.'

마정석은 몬스터의 전리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길드의 주 수입원이다.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몬스터의 내부에 숨겨진 조그마한 마정석을 찾아 뽑아내면 된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귀찮은 일이다.

푸욱.

나도 적당히 칼로 고블린 시체의 가슴께를 찔렀다. 이건 그래도 익숙하다. 멸망한 세계에서 마수 사체를 해체하는 일은 꽤 여러 번 해봤으니까.

『 몬스터에게서 전리품을 갈무리합니다. 』

『 특성 '무재조정(EX)'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스킬 [ 해체 Lv.1 ] 획득 』

『 스킬 [ 해체 Lv.2 ] 획득 』

『 스킬 [ 해체 Lv.3 ] 획득 』

···

..

.

『 스킬 [ 해체 Lv.10 ] 획득 』

갑자기 시선이 느껴지길래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힘겹게 칼질을 하고 있던 막내가 입을 벌리고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버, 벌써 끝나셨어요?"

"엥, 아니."

아니라고 말하는 내 손에는 벌써 마정석이 들려 있었다.

"쓰읍, 내 말은 이런 건 별거 아니라는 거지."

"우와아···."

날 바라보는 막내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일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앞에선 사냥을 하고, 뒤에선 해체 작업을 한다.

슥삭슥삭.

단단한 뼈나 질긴 가죽의 위치가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그걸 피해 칼을 대니 귀신 같이 잘려나간다. 그렇게 전부 잘라내니 고블린이 품고 있는 마정석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완벽하게 한 마리 해체하는데 고작 1분.

땜빵 최적화라니.

참 서글픈 재능이다.

옆에 서 있는 막내 녀석은 유심히 내 해체를 지켜보더니, 따라해보려고 시도했다. 낑낑거리며 검을 대지만 마음대로 안되는 모양.

"대체 어떻게 하는거에요?"

"······."

잘.

잘하면 된다.

사실 뭔가 알려주고 싶었다. 근데 나도 방법을 모르겠다.

대충 얼버무리고 있자니 앞쪽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뭔가 진행 속도가 빠른데?"

"나도 느꼈어. 오늘 우리 컨디션이 좋은가봐."

"이대로면 금방 보스까지 가겠다. 빨리 끝내고 회식 조지자."

별 생각 없이 따라가는데 옆에 있던 막내 녀석이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지한 헌터님 덕분일 거에요. 원래 저 때문에 항상 늦어지거든요. 아직 많이 부족해서 마정석을 잘 못찾거든요."

이거야 원.

남자 놈한테 칭찬 받아도 하나도 안기쁘다.

안기쁜데 기분은 좋다.

"······줘봐. 그것까지만 내가 해준다."

* * *

세웅 길드는 나타나는 고블린들을 처리하며 쭉쭉 나아갔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나타나는 고블린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해체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흐음.'

고블린이 늘어나니 괜스레 불안하다.

'쿠훌렌 놈이 갑자기 기어 나오는 건 아니겠지.'

네임드 몬스터들 중 일부는 게이트 사이를 넘어 다닐 수 있다. 쿠훌렌은 그런 종류의 마수였다.

"······늑대가 나타났다! 다들 진형 유지해!"

길드장 진세웅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길드원들과 전투에 들어갔다. 전투는 안정적이라 참견할 여지가 없다.

심하게 안정적이라 고블린 한 마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참 편하기는 하다.

나도 내 목표가 있어서는 한 마리는 잡아가야 하는데.

"해체 부탁드립니다."

"네, 네."

F랑 D급이 모여 있는 초급 길드지만 사냥은 곧잘 했다. 금방금방 사체가 넘어왔다.

나는 늑대를 받아 바로 칼을 쑤셔 넣었다. 늑대 해체도 고블린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쓱싹쓱싹.

넋 놓고 해체하다 정신을 차리니 가죽이랑 이빨까지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와우."

『 훌륭한 해체 능력! 해당 재료의 등급이 향상됩니다. 』

『 아주 완벽히 보존된 늑대 마수의 가죽(F++) 』

『 매우 뛰어난 품질의 늑대 이빨(F++) 』

기가 막힌 수식어가 붙은 재료 아이템이 되었다.

이게 재능이란건가. 그렇다면 내 재능이 두렵다.

'이 정도 품질이면 꽤 가격이 될텐데···.'

세웅 길드 놈들한테 주긴 아깝고 그냥 버리기는 아쉽다.

길드원들은 여전히 전투 중이라 바쁘다.

'으음.'

막내 녀석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다 싶던 막내가 동굴의 어두운 부분을 보며 소리쳤다.

"조, 조심하세요!"

뒤쪽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오, 나이스 타이밍.

획, 획.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재료를 내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걸리면 땜빵 일은 못하겠지만, 난 오늘부로 관둘 거라 괜찮다.

그러고선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봐. 저 녀석 내가 잡아도 될까?"

"네? 진심이세요?"

막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저 녀석 대장 고블린인 것 같은데요······."

고블린 중에서도 대장을 의미하는 검은 문신이 보인다. 그 강함은 일반 고블린의 몇 배를 상회한다고는 한다.

보기 드문 녀석은 아니다. 새웅 길드에서 벌써 몇 마리 눕혀 놨으니까. 다만 막내 혼자서 처리하기엔 역부족인 모양.

하지만 쿠훌렌과 검을 나눠본 나에겐 그냥 고블린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이런 해프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륵, 키르륵."

경험치 10만배짜리 레벨업의 순간이 제발로 찾아왔다.

7화 레벨업!(3)

레벨(LEVEL).

레벨을 올리면 강해진다는 건 상식이다. 게임이나 소설 같은 매체에서도 그럴진대, 현실에 있는 헌터에게는 어떻겠는가.

레벨은 헌터의 기본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동시에 헌터의 등급을 의미한다.

1레벨 F등급에서 시작한 헌터가 20레벨이 되면 D등급이 된다. 참고로 E등급은 없다.

그리고 20레벨이 된 D등급 헌터가 40레벨이 되면 C등급 헌터가 된다.

등급이 오를수록 그 힘의 차이는 압도적으로 커진다.

물론 이 시스템은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과 재능을 모두 이어받은 헌터라면 각성하는 순간 100레벨이 넘는 것도 가능하니까.

그렇게 벌어진 차이는 결코 간단히 따라잡을 수 없다.

'강해진만큼 강한 마수를 잡을 수 있고, 그에 걸맞은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쓸어가니까.'

거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레벨을 쌓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험치다.

강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경험치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경험치를 10만 배로 받는다.

뚜두둑.

나는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장시간 구부정한 자세로 마수를 해체하느라 굳은 몸을 풀어냈다.

스릉.

등에 메고 있던 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위험할 것 같아요. 여기서는 길드원 형들을 부르는 게···."

내가 앞으로 나서자 막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앞에 있는 상대는 그냥 고블린도 아니고 대장 고블린이다.

"키르륵."

녀석은 조잡한 날붙이를 헝겊으로 말아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기분 나쁜 울음소리는 덤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앞에선 전투 중이라 우릴 신경 쓸 틈이 없을 것 같은데."

고개로 슬쩍 뒤쪽을 가리키자, 막내의 시선도 길드원 쪽으로 향했다.

내가 말했던 대로 갑자기 나타난 고블린 떼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무리 고블린이 쉬운 상대라곤 해도 수가 많아지면 방심해선 안 된다.

"일단 내가 처리해 볼 테니까. 위험해 보이면 도와줘."

"그, 그래도······."

단호하게 말하자 막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힘들지 않을까요?"

막내 녀석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내 평판이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 알고 있을 거다.

과거에 들었던 모욕적인 별명들이 떠오른다.

고블린 하나도 못 잡는 병신, 땜빵을 넘어서 구멍, 쓰레기 헌터······.

거듭 말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심각했다.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를 줄 몰랐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어려웠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눈앞의 대장 고블린이 경험치 덩어리로 보인다.'

네임드 몬스터 쿠훌렌과 비교하면 위압감은 없는거나 마찬가지. 긴장되기는커녕 입가에 침이 고일 정도다.

그럼에도 나는 녀석을 마주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 고블린이 혼자 다닐 리가 없단 말이야.'

대장이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정확히는 동네 골목대장이라고 보는 게 맞다. 늘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뒤에 서너 마리의 고블린을 끼고 다니니까.

"키르륵!"

"키륵!"

'역시.'

내 예상대로 어둠 속에서 다섯 마리 정도 되는 고블린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리가 모르는 동굴의 굴을 통해 뒤를 잡은 듯했다. 고블린 치고는 머리를 썼다.

"히, 히익······. 이지한 헌터님. 이제 어쩌죠? 저도 고블린 다섯 마리랑 한 번에 싸운 적은 없는데······."

고블린들을 확인한 막내 녀석이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헌터나 되는 녀석이 엄살이 심하다. 길드에 속해 있으니 능력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일단 이것부터 해볼까.'

나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며 위압 스킬을 발동했다.

『 스킬 '위압 Lv.3'을 사용합니다. 』

『 대상을 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상의 능력치가 9% 감소합니다. 』

그 효과는 확실했다.

"키륵?!"

대장의 뒤에 있던 다섯 마리의 고블린이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부하들을 보며 대장 고블린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키르륵!"

"키륵···."

대장의 호통에 부하들이 마지못해 다가왔다. 스킬의 레벨이 3이라 그런지 대장에게는 효과가 미미한 모양이다.

『 스킬 [ 위압 Lv.3 ] 획득 』

『 스킬 [ 위압 Lv.4 ] 획득 』

『 스킬 [ 위압 Lv.5 ] 획득 』

뭐, 그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스킬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10만배에 달하는 경험치가 누적된다. 순식간에 위압 스킬이 Lv.5가 되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이며 다시 한번 위압 스킬을 발동했다.

『 스킬 [ 위압 Lv.6 ] 획득 』

『 스킬 [ 위압 Lv.7 ] 획득 』

대장의 눈치를 보느라 도망치지 못했던 고블린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털썩. 털썩.

당황한 대장 고블린이 좌우를 번갈아 보지만, 모든 부하들은 모두 기절한 상태다. 놀랍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효과가 굉장한데. 이건 실전에서도 써먹을 여지가 크다. 이러면 잡몹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물론 지금 내 능력치는 각종 스킬들로 강화된 상태. 고블린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강하다. 그래도 기쁜 건 어쩔 수 없다.

고블린 한 마리도 상대하기 꺼려했던 게 바로 며칠 전이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놈들이 기절한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키, 키륵···."

허세를 부리던 대장 고블린의 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갈 때마다 녀석은 저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다.

"그러면 슬슬 하려던 걸 해볼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털썩.

"응?"

내 뒤에 서 있던 막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고 보니 말이 없길래 뭐하나 싶었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뒤통수를 긁었다.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몰랐는데."

뭐, 이미 쓰러졌으니 어쩔 수 없다. 대장 고블린을 처리하고 깨우면 되겠지. 나는 곧장 대장 놈을 향해 달려갔다.

『 스킬 '보법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스킬 '민첩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스으윽!

순식간에 벌어져 있던 거리가 줄어든다.

"키륵?!"

대장 고블린이 날붙이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나는 녀석의 앞에 도달했다. 녀석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빠악!

나는 발로 대장 놈의 배를 차서 밀어냈다. 녀석은 바닥을 몇 번 굴렀지만 바로 자세를 다시 잡았다.

"키르륵!"

분노한 녀석이 곧바로 내게 달려든다. 녀석은 손에 든 날붙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어떤 규칙도 없는 무차별적인 공격.

얼핏보면 위협적이지만.

캉. 캉. 캉.

『 스킬 '검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내 눈에는 조잡한 공격으로밖엔 안 보인다. 나는 검으로 가볍게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쿠훌렌 상대로는 벽을 느꼈던 검술이지만, 이런 고블린을 상대로하니 오히려 내가 압도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키륵······. 키륵······."

정신없이 날붙이를 휘둘러대던 대장 고블린이 헉헉 대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결과였지만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역시 상위 스킬로 넘어가려면 특별한 계기가 필요한 건가?'

내가 습득한 검술, 근력, 인지, 민첩 같은 스킬들은 기본 스킬로 분류된다. 별도로 등급이 매겨져 있지 않다.

반면 '상급 검술', '거인의 힘', '바람의 흐름' 같은 고급 스킬들은 그 효과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전투를 거듭하면 자연스레 상위 스킬을 얻기를 기대했는데.

단순 전투로는 어려운 모양이다.

'젠장, 역시 재능이 문제인 건가.'

나는 혀를 찼다.

10만 배나 되는 경험치.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재능이 내게는 없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십만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재능 있는 사람은 그 반복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반면. 재능 없는 사람에겐 십만 번의 행동이 그저 무의미한 노동에 불과한거다.

'그래,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법이지.'

다른 강력한 헌터들의 무용담을 들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그들은 스킬을 손에 넣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얻는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 경험치는 10만배니까.

아무리 무재능이어도.

사람인 이상 미친 듯이 휘두르다보면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않겠어?

"키륵?!"

내 살기를 느낀 대장 고블린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봐줄 생각은 없다. 나는 온 집중을 검 위로 쏟았다.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시간이 조금이지만 느리게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대장 고블린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 가상의 선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선을 따라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

촤아악!

끝이 아니다. 다음 동작을 위해 재빨리 검을 가져온다. 이번에는 가로로 선을 그어 다시 한 번 벤다.

후두둑.

검을 거두어들이자, 동강동강 나뉜 고블린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모든 집중을 쏟아부은 두 번의 베기였다.

'이걸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뭔가 되겠지.'

아직 위압 스킬을 맞고 누워있는 고블린이 다섯 마리나 있다. 저 녀석들을 베다 보면 얻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스킬에 집중하다 보니 잊고 있었다. 처음부터 고블린을 잡으려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경험치.

이것말고 뭐가 있겠는가.

『 특성 '무재조정(EX)'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획득 경험치가 10만 배가 됩니다. 』

10만배에 달하는 경험치가 내게로 흘러들어 온다.

"!"

나에게만 보이는 희미한 빛이 몸 주변을 감싼다.

그 빛의 강렬함에 나는 눈을 감아야 할 정도였다.

촤르르르륵!

『 레벨업! Lv.4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5가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6이 되었습니다. 』

『 레벨업! Lv.7이 되었습니다. 』

···

..

.

『 레벨업! Lv.20이 되었습니다. 』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많은 메시지가 올라온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와, 미쳤네. 정말.'

정말이지 기가 막힌 레벨 업 속도였다.

레벨 20.

F급 게이트에서 3개월을 보내야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이다. 간혹 대형 길드의 자제이거나, 재벌 3세의 경우에는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일도 있다곤 들었다.

하지만 내가 레벨 20이 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

그것도 고블린에게 여러 실험을 하느라 걸린 시간이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감탄을 너머 경악했을 만큼의 성장 속도다.

'아니지, 아직 끝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들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블린들을 봤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경험치 보따리나 다름 없었다.

앞쪽에서 전투하는 길드원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처리해야지.

서걱, 서걱!

기절한 고블린들을 사냥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 였다. 위압 스킬의 편리함을 느끼며 나는 레벨을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불러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치직······. 치지직······.

불러낸 상태창이 불안정한 노이즈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처음 회귀했을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치직, 치직!

붉은 스파크가 튀는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봤다가 움찔했다. 찌릿한 감각이 몸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레벨업을 너무 많이해서 고장이라도 난건가? 그건 말이 안되는데.

'당장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나.'

나는 감전된 손을 털며, 기절한 막내에게로 다가갔다. 마정석은 챙겨놔도 탐지기에 걸리므로 전부 토해내야 되서 의미가 없다.

툭툭.

"일어나. 몬스터 해체할 시간이다."

"으으······. 네?"

비몽사몽 간에 눈을 뜬 막내가 일어났다.

녀석은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벌컥 벌컥 마시더니, 주위를 보고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

나와 바닥에 널부러진 고블린, 앞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길드원을 순서대로 쳐다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쓰러지기 전의 상황이 기억났나보다.

"대장 고블린, 대장 고블린은 어떻게 된 거에요? 설마 그 녀석도···?"

녀석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대장 고블린은 조각조각나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기는 하다. 나는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대충 말했다.

"앞에서 다 잡아줬어. 해체나 하자."

잠시 굳어 있던 막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요. 전 정말로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으음, 근데 제가 왜 기절했던거죠? 이런 적은 처음인데."

"······. 나가면 보약 한재 지어먹어라."

나는 괜히 찔려서 고블린 사체나 뒤적거렸다. 어차피 내가 고블린들을 전부 쓰러뜨렸다고 해도 믿지도 않을 거다.

"자! 이제 여기서부터 보스의 영역이다. 막내랑 땜빵은 대기하면서 마정석 채취하고 나머지는 들어간다."

그렇게 세웅 길드가 보스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띠링!

'응?'

계속 노이즈를 일으키던 상태창이 복구 되었다.

『 스테이터스 』

이름 : 이지한

나이 : 24

레벨 : 20 [ 잠김 ]

등급 : F

특성 : 무재조정(EX)

보유 스킬

- 검술 Lv.10, 근력 Lv.10, 인지 Lv.10, 보법 Lv.10, 체술 Lv.10, 민첩 Lv.10, 자연 회복 Lv.10, 맷집 Lv.10, 기억 탐색 Lv.10, 지력 Lv.10, 해체 Lv.10, 위압 Lv.7

그런데 레벨 부분이 이상했다. 20이란 숫자 옆에 '잠김'이라는 회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뭐야, 내 레벨이 잠겨있다고? 고블린까지 잡았으니까 20이 넘어가야 정상인데······.'

내 그런 의문에 답하듯 뒤늦게 붉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 F등급의 최대 레벨인 '20' 을 달성하셨습니다. 』

『 특성 '무재조정'에 특수효과가 추가됩니다. 』

이번에도 기존과는 다른 붉은색 메시지 창이었지만, 이미 난 알고 있었다.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중요한 건 내 특성에 특수효과가 추가 되었다는 거지.'

멋대로 내 레벨 업을 막는 게 어딨냐. 시스템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단 무슨 소리를 하나 보자.'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무재조정의 정보를 살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천천히 특수 효과를 읽어나간다.

'이건······.'

장난아닌데.

8화 궁극의 기술(1)

레벨이 잠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 특성 무재조정(EX)에 특수 효과가 추가됩니다. 』

내 밥줄이나 다름없는 특성에 새로운 효과가 늘어난 것이었다.

『 무재조정 : 한계돌파 』

- 등급의 한계에 도달할 때마다 특수한 퀘스트를 받습니다.

- 한계 돌파를 위한 아이템을 보급받습니다.

- 해당 퀘스트는 포기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오르면 특수한 퀘스트를 받는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레벨이 20에서 멈춰 선 이유는 새로 생긴 특성의 효과 때문이었다. 나는 빠르게 아래에 떠오른 텍스트를 읽어나갔다.

『 < F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마족 처치 ( 0 / 1 )

- 클리어 보상 :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1 증가, 레벨 능력치 증가량 1.2배 증가, '인과역전의 상점' 개방

클리어 보상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하······. 이게 맞아?'

경험치 10만배.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축복이라고 느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계돌파의 보상은 내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먼저 레벨당 능력치 1.2배 증가.

단순 계산으로 내가 100 레벨을 올렸을 때 같은 레벨을 올린 다른 헌터들보다 모든 면에서 20% 강해진단 의미다.

다만 아이템이나 스킬을 적용하지 않았을 때 그렇다는 것.

실제로는 아이템과 스킬, 특성 등 능력치에 여러 요소가 작용하니 그 효과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다음은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1증가.

스킬의 최대 레벨을 증가시키는 건 고등급의 아이템을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일부 스킬의 레벨을 올리는 데서 그치는데 이건 모든 스킬에 적용된다.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와, 모든 스킬 최대 레벨이 1씩 증가한다고?'

능력치 증가보다 이게 훨씬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앞으로 내가 얻을 모든 스킬에 적용된다는 점이 굉장하다. 레어, 유니크 심지어는 레전더리 스킬까지 남김없이 모두.

내 성장력과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발판이 된다.

마지막으로 인과역전의 상점인데······.

'이건 얻어봐야 알겠다만.'

회귀전 비슷한 걸 들어 본 적은 있다. 몇몇 헌터들이 가지고 있다던 상점 능력인가? 이름이 범상치 않은 걸로 봐서 평범한 상점은 아니겠지.

'한계돌파 퀘스트가 이번만 있지 않을 테니, 더 기대해도 되겠어.'

특성의 효과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적용된다. 앞으로 등급이 오를 때마다 퀘스트와 보상을 주겠지. 보상이 이것보다 적어질 것 같진 않다.

'아직 얻은 게 아니니까 기뻐하긴 이른가.'

물론 이 모든 건 마족을 처치하는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나는 다른 메시지를 살폈다.

'이건 지금 당장 받는 거겠지.'

한 켠에 떠오른 푸른창을 내 시야 가운데로 끌어왔다.

『 '무재조정:한계돌파'의 효과로 아이템을 보급 받습니다. 』

『 레어급 무기 상자(특수)를 획득하셨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보관됩니다. 』

『 사용하여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

'오······.'

만족스럽다. 이것보다 더 만족스런 보상은 없으리라.

기본적인 무기조차 없어서 빌려쓰던 내게 레어급 무기라니.

일반, 언커먼, 레어, 유니크······.

무기의 등급은 이런 순서대로 등급이 올라간다. 지금 막내에게 빌려서 들고 있는 철검이 일반 등급이니, 레어급 무기는 두 단계나 높은 아이템란 의미.

'가만있어보자, 레어급 무기가 얼마더라.'

최소 천만원이었다. 달려 있는 옵션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니 무기 하나가 소형차 한 대 값인 격. 비싸서 회귀 전의 나는 꿈도 못 꿨던 등급이다.

'이건 집에 가서 열어보는 게 낫겠지.'

나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시스템 창을 닫았다.

치솟아 오르는 입꼬리를 감추느라 힘들다. 이 기쁨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퀘스트를 살폈다. 마수 해체는 멍때리면서도 할 수 있었기에 손이 노는 일은 없었다.

- 목표 : 마족 처치 ( 0 / 1 )

며칠 뒤에 마족 하나를 잡을 예정이었다. 정확히는 사흘 뒤. 성장의 마족이란 놈이 이쪽으로 넘어온다.

언젠가 군단장이 될 만큼 강하지만, 아직은 그 힘이 미약한 마족.

그 시기를 맞춰 놈의 목을 칠 거였다.

'물론 퀘스트를 포기하고, 레벨업을 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만.'

특성의 설명란에는 퀘스트를 포기하고 레벨 잠금을 바로 해제 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단숨에 어마어마한 레벨을 올릴 수 있겠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선택은 안 하지.'

미래를 팔게 된다.

레벨업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레벨을 올린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미래에 마주하게 될 적은 차원이 다르다.

최후의 5인을 포함해 SSS급에 도달한 헌터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인류를 구원하진 못했다.

같은 등급이 되어도 훨씬 강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주 좋아. 의욕이 샘솟는군.'

슥삭, 슥삭.

그런 생각을 하며 눈 앞에 놓인 마지막 고블린을 해체했다. 세웅 길드놈들은 아직도 보스를 잡고 있나?

"보스 클리어했어요~! 들어오셔도 됩니다!"

막내 녀석과 잠시 쉬고 있자니 보스를 처치한 길드원들이 우리를 불렀다.

넓은 공터에 고블린 주술사와 잔챙이 고블린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것들을 전부 해체해서 마정석을 빼내면 이번 공략은 끝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길드원들이 돌에 걸터앉아 땀을 닦고 있었다.

나는 하던 대로 적당히 마수를 해체했다. 가죽을 갈라 마정석이 있는 자리를 찾아냈다. 스킬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왠지 속도가 더 빨라진 느낌.

그런데 쉬고 있던 길드원들의 눈이 커졌다.

"······. 뭐야, 굉장한데."

"사람이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이유가 있었네."

"어쩐지 오늘 속도 평소보다 더 나더라."

감탄인지 빈정인지. 굼벵이한테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정리를 끝내고 진세웅 길드와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마지막 사람까지 빠져나오자 게이트가 스르르 사라졌다.

해의 끄트머리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진세웅이 가볍게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모두 수고했다. 경험치도 많이 얻었고, 평소보다 훨씬 일찍 끝났으니 같이 회식이라도 하자고."

"오오, 좋다! 가자 가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일찍 끝난 건 좋은 일이다.

주섬주섬 얻었던 마정석을 꺼내놓고 있는데 막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무기를 돌려줘야지.

철검을 확인한 막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지한 헌터님,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뭘,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아뇨. 계속 따라 하려고 하다보니까 해체 스킬도 얻었거든요."

고맙다며 억지로 내 손을 잡고 흔든다. 거 잘됐네. 내가 알려준 게 아니라 다 네 재능이다.

"거기 땜빵."

떨떠름하게 있는데, 세웅 길드의 길드장이 나를 불렀다. 험험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트집 잡은 건 미안하다. 계좌에 따로 돈 보냈으니까 확인해봐."

던전을 돌다 보니 머리가 맑아지기라도 했나.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잔액을 확인했다.

- 계좌 잔액 : 351,130 원

겨우 35만원으로 생색을 다 낸다······고 하기엔 지금의 내게는 참 감사한 돈이었다. 이 돈이면 소고기를 사먹어도 된다.

"사무소에는 따로 돈 보내니까, 수고비라고 생각해."

"······."

진세웅은 할 말만 하고 반대편으로 돌아가버렸다.

뭐, 암튼 이득이다.

사무소에서 수수료랑 중개비 명목으로 이것저것 떼면, 내가 원래 받을 돈은 10만원도 안된다. 빌어먹을 놈들.

그걸 따로 챙겨줬으니 나로선 좋은 일.

그리고 늑대 가죽도 꿍쳐놨으니 그것까지 팔면 짭짤할 거다.

"다음에 봬요!"

막내가 내게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이 영훈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 놈 얼굴이 아른거린다.

'근데 영훈이 그 놈은 존댓말은 했어도 예의는 없었지.'

그래도 지금 이 시점에선 가족과 함께 잘살고 있을 거다. 6살? 정도려나? 부모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겠지.

그거면 됐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택시를 잡으려는데, 스마트폰의 알림 울렸다.

- 계좌로 45,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 사무소장 : 택시비는 따로 뺐다.

사무소장의 메시지는 덤이었다.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다 있나. 벼룩의 간을 빼먹어야지.

과거의 나는 어떻게 이런 놈 아래에서 꾸역꾸역 버텼는지 모르겠다.

* * *

돼지고기냐, 소고기냐.

그 두 개의 선택지는 언제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나는 동네 마트의 진열장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두 고기 전부 비빔라면과 잘 어울린다. 쉽사리 결정하기 어렵다.

그때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오전에 만났던 협회 소속의 윤서현 헌터가 서 있었다.

오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트레이닝 복에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린 편안한 차림.

동그란 안경을 걸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

어쩌다 보니 눈이 마주쳤다.

"뭡니까. 협회에서 제 뒷조사라도 하랍니까?"

윤서현이 황당하단 표정을 짓더니 내 말을 받아친다.

"뭐에요. 장 보러 온 사람한테. 그쪽이야말로 나한테 관심 있어요?"

그런데 안경 쓴 얼굴을 보다보니 누군가가 떠오른다. 윤서현이란 이름도 낯설지가 않게 느껴지고. 기억 탐색 스킬로 한 번 기억을 정리했기 때문인가?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기억난다.'

최후의 5인은 원래 11인쯤 됐었다. 그 당시엔 최후니 뭐니 그런 호칭도 없었다.

최성호, 채윤아 같은 인물들은 원래 걸출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도 특출난 활약을 한 인물이 있었다.

무한의 활을 사용하는 궁사. SSS급 헌터 윤지은.

그녀의 활약은 뛰어났는데, 고블린을 증오하기로 유명했다. 소문에는 그녀의 동생이 고블린에게 희생당했다고 했다.

진오 길드 사건에 휘말렸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파편적으로 주워들은 정보를 조합해서 나온 결론.

기억 탐색이 아니었다면 떠올리지도 못했을 거다.

'그래, 아마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은데······.'

내 앞에 있는 윤서현이 무한의 궁사 윤지은의 동생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

확인해 둬서 나쁠 건 없겠지.

"윤서현씨, 언니 있죠. 이름은 윤지은."

"뭐, 맞기는한데······. 저희 언니랑 아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내고나니 할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알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전부다. 그녀는 나를 모른다.

'음.'

뭐라고 둘러대지. 적당히 뱉었다.

"그 분 미인이시잖아요."

"근데 그게 뭐 어쨌는데요."

"닮아서요."

"······."

윤서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뭔가 오해한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참 말주변이 없다.

"뭐, 뭐에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녀의 언니인 윤지은 헌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마족의 목적이 알려지기 전에도 마족 관련 사고에서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던 사람이었다.

그 최후도 마족의 손에 죽었으니, 몇 없는 믿을만한 사람일지도.

'그건 그거고···.'

그러고 보니 며칠 뒤, 성장의 마족을 처리할 때 윤서현의 도움이 있으면 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윤서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빚진 거 갚아야죠. 번호 좀 주시죠."

"네?"

순간 윤서현의 눈이 커졌다.

변칙 게이트에 관한 이야기이니 윤서현의 실적에도 도움이 될 터. 물론 사실상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니 기대하진 않는다.

도와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다.

"전화 번호 있으면 주시죠."

"번호요? 제가 왜요?"

내 말에 윤서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손을 저어 얼굴을 식혔다.

"싫으면 말구요."

"그,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예스 or 노로 끝날 대답을 왜 이리 뜸 들이는 건지. 나한테 윤서현의 도움이 필수적인 건 아니다. 있으면 좋은 정도.

나는 다시 고기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의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

유감스럽게도 둘 다 먹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다.

하나를 정해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냉동 삼겹살은 어떤가.

그 얇게 저민 대패 삼겹살을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려 치익 구워낸다면······.

비빔라면과의 궁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터억.

나는 고민을 마치고 카트를 돌려 냉장보관대로 향했다. 그대로 대패 삽겹살을 집어 들었다.

또 필요한 건 없나.

그렇다. 탄산음료. 빌어먹을. 이걸 까먹을 뻔했네.

그렇게 음료수 코너로 카트를 밀고 가고 있을 때였다.

윤서현이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가까이 와서는 내 손을 움켜 잡았다.

"뭐에요!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내 손에다가 억지로 종이를 쥐여주고선 씩씩거리면서 사라졌다. 종이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

내가 뭐 잘못했나.

* * *

참 길었다.

비빔라면을 입에 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드디어."

어느새 내 앞에는 훌륭하게 조리된 비빔라면과 대패 삼겹살이 있었다.

만들면서 요리 스킬이 생기지 않나 살짝 기대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나름 열심히 만들었는데.

어쨌든 완성은 완성이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어 비빔 라면 집어 들었다. 그것도 잘 구운 대패 삼겹살을 얹어서.

그대로 입 안으로 직행.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인공조미료의 풍부한 감칠맛과 고기의 담백함이 하모니를 이룬다. 멸망한 세계에선 결코 맛볼 수 없던 천상의 맛이다.

'그래, 이 맛이지······.'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로 맛있다.

그렇게 오래 꿈꾸었던 일이 실현되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한때는 그저 바랄 뿐이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길.

세계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마족을 몰아내고 다시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기를.

그렇게 되면 비빔라면 정도는 다시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바랐지만, 인류가 구원되는 일은 없었다.

'진짜 맛있다.'

그러니 이 한 젓가락이 내게는 의미가 깊다.

움직이기 시작한 젓가락은 멈추질 않았다.

와구와구.

나는 정신 없이 고기와 비빔 라면을 먹어치웠다.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부턴 이런 맛있는 음식을 매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행복하다.

이 맛을 영훈이 녀석한테도 한 번 먹여주고 싶었는데. 아쉽다.

배도 불렀겠다, 아침에 가져온 사과를 들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삭.

'그러고보니 오늘 얻은 무기 상자가 있었지.'

나는 게이트에서 보았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 레어급 무기 상자(특수)를 획득하셨습니다.

'인벤토리에 보관된다고 그랬던가.'

손가락으로 정보창을 조작해 인벤토리를 불러온다. 이것도 헌터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 하나다.

인벤토리에서 무기 상자를 선택하고 꺼냈다. 나무로 된 상자였다. 크기가 작아서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사용하는 방법은······."

어떤 무기가 나올지 모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토옥.

가볍게 상자를 톡 건드리자, 가벼운 물결이 일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사용하기를 선택하자 상자에서 푸른 빛이 쏟아졌다.

『 레어급 무기 상자(특수)를 사용합니다. 』

상자에서 나온 푸른 빛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더니 점차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등급은 정해져 있지만 꽤 긴장되는 순간이다.

'어쨌든 당분간 사용할 무기가 되겠지.'

뭐가 나와도 사용하는 건 가능했다. 무재조정 덕분에 뭘 잡든 기본기는 갖출 수 있을테니까.

스스스······.

액체는 천천히 도검의 형상을 이뤄가고 있었다. 칼과 다른 점은 한 쪽 방향으로만 날이 있다는 거다.

『 특수 도검 '영혼 포식자'(레어)를 획득하셨습니다. 』

푸른 손잡이 위로 새하얀 검신이 아찔한 자태를 뽐낸다. 그 위로 은은한 기운이 서려 나오고 있어 한층 유려한 느낌을 들게한다.

이게 겨우 레어 등급이라니.

내 생에 이렇게 좋은 검은 처음 만져본다.

들고 슬쩍 흔들어보니 손에 착 감기는 게 기분 좋다.

'영혼 포식자?'

특이한 이름이니 가진 효과도 독특하지 않을까 싶어 정보창을 띄웠다. 등급이 레어보다는 한 단계 위인 특수레어이기도 했고.

『 아이템 정보 』

- 이름 : 영혼 포식자

- 등급 : 특수 레어

- 능력치 : 공격력 30

- 효과 : 영혼 흡수 시 특수 기능 개방

공격력 30이란 수치는 내가 썼던 철검의 세 배다. 뚫어낼 수 있는 공격 자체가 달라진다. 가져다 대기만 해도 오크의 가죽이 종이처럼 잘릴 거다.

'이러면 내일 할 일이 정해졌다.'

나는 도검을 조심스레 검집에 집어넣었다.

내게 부족한 한걸음.

그건 바로 주력 스킬의 부재였다.

마음 놓고 난사할 수 있는 범용성 좋으면서도 강한 위력을 가진 스킬.

무기가 정해졌으니 이제는 결정할 수 있었다.

'오늘 확실하게 느꼈어. 나혼자 독학으로 배우는 건 불가능하다. 난 재능이 더럽게 없으니까.'

하지만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

혼자서 깨우치는 게 불가능하면, 유능한 선생에게 배우면 되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버스를 타고 움직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다행이었다.

똑똑

"계십니까?"

나는 망해가는 검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오래 방문하지 않은 듯 안 쪽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하다.

훗날 검성이라고 불릴 사람이 여기에 있을테니까.

9화 궁극의 기술(2)

"아무도 안 계세요?"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리고 있는데도 아무런 인기척이 안 느껴졌다.

'분명히 이 검도장이 맞는데.'

주소는 확실히 맞았다. 다시 뒤로 나와 간판을 봐도 확실하다. 나는 신발을 벗어 놓고 검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검성 신태양.

그는 최후의 11인조차 아니었다.

그보다 일찍 죽었다.

으레 뛰어난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신태양은 여러 전설적인 영웅담을 남기고 전장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단칼에 거대한 산을 베었다거나, 하늘을 갈랐다거나.

뻔하지만 희망의 등불이 되는 그런 기적 같은 일들.

대단한 능력과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명했다.

'성격만 어떻게 좀 고쳤어도 끝까지 살아남았을 텐데.'

그 이유는 검성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자랑하기를 즐겨 했다. 수련하기보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업적을 늘어놓기 바빴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인기를 누리는 걸 무엇보다 좋아했다.

강했지만 한없이 교만했다.

언젠가 검성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떠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 자, 모두 잘 받아적었지? 그게 바로 내가 운영하던 검도장의 이름과 주소다. 응?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걸 왜 알려주냐고? 당연한 거 아니냐! 이 몸이 세계를 구하고 나면 성지가 될테니, 미리미리 성지 순례할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어? 으하하!

'······.'

그걸 좋다고 진지하게 따라적던 놈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여간 그게 내가 검성의 주소를 알고 있는 이유였다.

재미 삼아 들었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하아암."

검도장 안으로 들어오니, 그 안에 방이 몇 개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에서 검도복을 입은 사내가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지금은 앳된 얼굴이지만 기억난다. 저 자가 검성 신태양이다.

"응?"

피곤한 듯 눈을 꿈뻑인 신태양은 나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설마, 내 팬입니까? 이것 참······. 아무리 내가 좋아도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

나는 기가 찼다. 지금 시점에서 신태양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니면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

내가 대답을 않고 있자, 신태양은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아, 참. 아직 아니지. 유명 헌터가 되서 성공하는 상상을 너무 오래 했더니 헷갈렸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설마 진짜로 제 팬?"

"······."

할 말을 잃었다.

이 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정신이 아니다.

검성이 이렇게까지 맛이 간 놈일 줄이야.

'돌아갈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꺼내 봐야겠지.

"팬은 아닙니다. 하나 배우고 싶은 게 있—"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신태양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배우고 싶다고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죠. 으하하!"

* * *

사무실은 웬 낙서가 가득한 종이로 한가득이다. 의자, 책상, 바닥 할 거 없이 난리다.

"아, 좀 더럽죠? 한 달 동안 싸인 생각을 하다 니까 이렇게 됐네요. 대충 치우시고 앉으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커피는 드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기다리는 동안 제 수상 경력이라도 보고 계세요."

나는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상이랑 명패가 많기는 한데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다. 온통 종이쪼가리 투성이다. 이 꼬라지를 보니 도장에 쌓인 먼지가 이해가 간다.

'이딴 게 검성이라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부정하고 싶어도 저 사람은 미래에 검성이 될 인물이 맞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아.'

톡.

멋대로 커피를 타 온 신태양이 내 앞에 잔을 내려놨다. 이제야 나한테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다.

"근데 저한테 뭐가 배우고 싶어서 오신거에요? 헌터 등록은 했지만 한 번도 나간 적은 없는데······."

"사실은 저—"

"혹시 내 소문이 전국에 퍼졌나?"

"그—"

"측정시험 때 내가 워낙 화려하게 날뛰긴 했죠. 한동안은 길드에서 연락이 끊임이 없어서······."

이 자식 말할 틈을 안 준다.

사람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이 자식은 좀 많이 때려주고 싶네.

"제가 보통놈이 아닌지라. 으하하! 그래서 무슨 일이시라구요?"

나는 간결하게 용건을 전했다.

"저도 헌터인데, 그쪽이 가지고 있는 스킬 하나를 전수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특정 스킬들은 타인에게 전수가 가능하다. 일개 헌터도 독자적인 경지에 달하면 스킬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대부분 배우는 게 가능했다.

"정확히 어떤 스킬을 말하는 거죠? 가지고 있는 스킬이 한두 개가 아니라."

내게는 안 보이지만 손가락을 휘적여 뭔가를 한참을 넘긴다. 스킬이 얼마나 많은 거야.

"일자 베기. 그 스킬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스킬들은 고가에 거래되거나 비밀리에 전수된다.

하지만 내가 배우려는 스킬 '일자 베기'는 현시점에서 신태양 본인조차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신태양은 미간을 좁히고선 턱을 매만졌다.

"일자베기. 으음, 있죠. 그런데 그건 사정이 있어서 알려주기가 좀······. 다른 거 멋있는 거 많은데 굳이 이게 필요해요?"

"예."

회귀 전, 검성이 된 신태양은 이렇게 말했었다.

- 일자베기. 지금의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검술은 거기서부터 시작됐거든. 단순하고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기술. 근데 어렸을 때는 왜 몰랐을까. 그걸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말이야······. 하여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사신과 만난 이야기를 했던가?

그가 했던 말 중에서 그나마 진심이 묻어나는 이야기였다. 내가 검성에게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내 대답을 들은 신태양이 짖궂은 미소를 씩 짓는다.

"일자베기를 배우고 싶다라······. 근데 맨입으로요?"

그 즉시 결정했다.

오케이. 다른 거 배우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습니다. 그냥 안 배울게요."

"자, 잠깐!"

그냥 가려는데, 신태양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쩐지 간절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제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가시면 섭하죠. 특별히 아무 대가 없이 알리도록 하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신태양이 입가를 슥 닦으며 말했다.

"네, 뭐······."

"일단 도장에 놓인 검부터 들어보시죠."

혼자서 오래 지내다보니 관심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먼지가 쌓인 검도장에 발을 디뎠다.

여기도 벽면에 상이나 단체 사진 같은 게 많이 걸려있다. 그것만 놓고보면 검도장이 망한 게 이상할 정도.

한켠에 놓인 죽도를 잡으려던 때였다.

"아."

신태양이 진지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는데요. 진지하게. 그 쪽 재능이 너무 없어요."

나는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구만.

"검을 잡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척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진심으로 검은 포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전 이런 거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낌새를 보아하니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젠장, 검성이 될 재목쯤 되면 재능이 한눈에 보이는 건가?

"그러면 갈게요. 그냥."

"아, 아니! 잠시만요. 그, 그래도 검은 들어보고 가셔야죠."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하다.

신태양의 애원에 나는 마지못해 죽도 앞으로 다가갔다. 검을 들기 전부터 재능 있냐 없냐가 결정된다니. 참 웃긴 일이다.

그중 마음에 드는 죽도를 집어 들고선 가볍게 위아래로 휘둘렀다.

『 스킬 '검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스킬이 발동되자 그 변화는 나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다. 잊고 있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

움직임에 단호함과 자신감이 깃든다.

후웅.

나는 두어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이 정도면 되려나?

슬쩍 고개를 돌려 신태양을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반응이 이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 * *

미래에 검성이 될 남자.

신태양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 눈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만나러 온 팬.

아직 이름도 묻지 못했지만, 신태양은 그 남자가 죽도를 향해 걸어갈 때만 해도 확신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신태양은 감각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손의 형태, 호흡의 간격, 걸음걸이 등등. 사람이 가진 모든 요소가 검을 다룰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점에서 극명했다.

'재능이 없는 수준을 넘어 검과의 상성이 극악이야. 차라리 다른 무기를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렇기에 검을 관두라고 조언했다.

'사람마다 잘하는 건 다르니까. '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

남자가 검을 쥐자, 자신이 내렸던 모든 판단이 일변했다.

휘익.

형태가 갖춰지고, 호흡이 안정되며 올바른 자세가 만들어진다.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걸 넘어서 단단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검을 잡자마자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높은 레벨의 검술 스킬을 가지고 있는건가?'

하지만 이내 신태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킬의 보정치곤 과했다.

신태양 자신 또한 스킬이 있고 사용하고 있지만, 무지한 영역에 대해서 이만큼의 능력을 부여해주진 않는다.

스킬이 도움을 주는 영역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능에 기반한다.

'흐음.'

그래도 결과가 나왔으니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태양은 이전보단 한결 진지해진 눈으로 말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일자베기는 충분히 알려드릴만 하네요. 그러려면 먼저 보여 드려야겠죠. 도장에서 하기는 그렇고······. 절 따라오시겠어요?"

신태양은 남자를 이끌고 도장 뒤에 있는 숲으로 이동했다. 할아버지께 물려 받은 산인데, 도장에서 할 수 없는 수련을 하는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신태양은 바닥에 널부러진 죽도를 들고선 훈련용 목재 앞에 섰다.

"일자베기······."

그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일자베기는 완성되지 않은 스킬이었다.

그 레벨은 9에 머물러 있었다.

Lv.9라는 수치가 낮은 건 아니었지만, 신태양에게는 무인으로서의 고집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나름 일평생 검을 수련해 온 사람으로써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보여준다는 게 꺼림칙했다.

다만 그런 저항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팬이라고 하니까······. 보여줘도 괜찮으려나.'

어디서 자신의 일자베기를 본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까지 배우고 싶다고 애걸복걸하는데 무시할 순 없었다.

신태양은 그런 생각과 함께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을 내뱉고 걸음을 내딛으면서 단번에 휘두른다. 그의 검이 흔들림 없는 직선을 그려낸다.

파악!

한차례 파공음이 일었다. 동시에 나무토막이 날카로운 절단면과 함께 나뉘어졌다. 죽도로 쳤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과다.

신태양은 머리를 긁적였다. 해놓고도 단순하기 그지 없어서였다.

"이제 한 번 해보세요."

신태양의 말에 남자가 앞으로 나와 나무토막을 노려봤다. 엇비슷하게 자세를 잡고서 검을 내려치지만 나무 토막이 튕겨나갈 뿐이었다.

'역시 소질이 없어. 보고 있기 미안할 정도로.'

검술 자체의 기본기엔 충실하지만, 거기서 벗어나기만하면 모든 게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런 느낌인데요······."

신태양은 다시 한 번 일자베기를 재현했다. 남자도 따라서 검을 내리쳤다. 물론 엉망이었다.

'너무 못하는데.'

신태양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선 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일자베기는 십년 걸려 배우기에는 너무 허접한 기술이다.

이게 뭐라고 배우려는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삼십 분.

"어떻게 설명이 더 안됩니까?"

나름대로 계속해서 시도를 하던 남자가 답답한지 물어왔다. 신태양이 보기에도 답답한데 본인은 어떻겠는가.

자신의 팬만 아니었으면 진작 포기했다.

'쉽게, 더 쉽게 설명하려면···.'

신태양은 머리를 쥐어짜내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검도를 가르쳤던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가 싶었다.

"으음, 들어 올릴 때 검 끝이 하늘과 이어진다 생각하고, 내려칠 때는 땅과 하늘을 이어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선이 일직선이 되어야 하는 거에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적, 휘적.

남자를 지켜보던 신태양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 한 것 같기도 하다.

나름 쉽게 설명한다고 설명한건데, 이걸로 안되면 어떻게 더 해줄 자신이 없었다.

"이쯤하고 내려가죠. 방금 걸로 안되면 어차피 몇 년이 걸려도······."

가르치기를 포기한 신태양이 뒤를 도는 순간이었다.

후웅.

소리가 확연히 달라졌다. 대단한 차이는 아니지만 조금 나아진 정도.

신태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우연이겠지.'

그의 판단으론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그런 자신의 재능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죽도를 휘둘러 나갈 뿐이었다.

다시 다음 휘두르기.

후웅!

'뭐야······.'

남자는 다시 한 번 검을 내리쳤다. 신태양은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분명하게 그 움직임이 달라졌다. 모든 면에서 한층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다음 동작, 또 그 다음 동작.

가능성 없다고 생각했던 동작에 점차 생기가 불어 넣어진다.

그에 따라 신태양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잠깐만, 내가 뭘 보는 거지?'

횟수를 거듭할수록 남자의 일자 베기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가망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검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콰앙!

"······."

이윽고 남자의 검은 신태양 자신이 만들어 낸 일자베기를 정확히 구사해냈다.

신태양은 할 말을 잃었다.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무슨······.'

아무리 간단하고 쉬운 기술이라곤 하지만, 그걸 배우는 것과 완벽하게 해내는 것에는 지대한 차이가 있다.

갓 걸음을 떼기 시작한 아이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것도 어른처럼 완벽하게.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신태양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재능이 남자에게 잠들어 있었다. 그런 일도 있구나. 조금의 깨달음도 얻었다.

신태양은 기쁜 마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가려 했다.

"인정할게요. 제 눈이 완전히 틀렸······."

그 순간이었다.

이미 신태양 자신과 같은 일자 베기를 얻었음에도.

남자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어?'

신태양은 그 자리에 굳어졌다. 숨조차 함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스윽.

남자의 손 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일자베기는 분명히 자신을 뛰어 넘을 거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남자의 검이 눈 앞의 공간을 일자로 갈랐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신태양 자신도 이루지 못한 완벽한 일자베기.

남자는 그것을 해냈다.

"대, 대체 어떻게······?"

신태양은 벌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어야 했다.

하지만 틀림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이 상상으로만 그리던 경지에 도달했다.

그것도 고작 몇십 번의 휘두르기로.

털썩.

신태양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 날 신태양이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졌다.

10화 궁극의 기술(3)

하루 전.

한 아파트의 현관 앞으로 공간이 일렁였다.

윤서현의 스킬인 공간이동이었다.

터억.

공간을 넘어 나타난 윤서현이 양손 가득한 장바구니를 현관에 내려놓았다.

"언니, 나왔어."

"깜짝이야. 공간이동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잖아. 정작 위험할 때 못 쓰는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또, 또. 잔소리······."

윤서현은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장바구니를 들고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뉴스에 집중하던 그녀의 언니 윤지은이 고개를 돌렸다.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후후."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도 윤서현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대로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하고는 묻는다.

"아, 근데 언니. 이지한이라는 사람 알아?"

"응?"

곰곰이 생각해보던 윤지은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데. 아니다, 우리 길드 관계자인가?"

윤지은이 속한 길드 '은빛의 날개'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렇구나."

대답을 들은 윤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으로 향했다. 겉옷을 옷걸이에 거는 와중에도 실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번호가 궁금해서 괜히 언니 핑계를 댄건가?'

윤서현은 혹시나 싶어 스마트폰을 붙잡고 만지작거렸다.

이런 식으로 남자가 번호를 직접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이지한.

이름이 분명 그랬지. 독특한 구석이 있었지만 생긴 건 나름 괜찮았···.

"입이 귀에 걸리겠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아, 아! 딱히?"

갑자기 나타난 언니. 윤서현은 당황해서 스마트폰을 놓칠 뻔 했다. 다행히 몇 번 헛손질을 하다가 떨어지기 전에 받아냈다.

"휴······."

그런 윤서현을 언니인 윤지은이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윤지은의 눈에는 윤서현이 아직도 철 없게만 보였다. 괜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다.

"조심해. 며칠 전에 게이트에서도 큰일 날 뻔했다면서."

"정확히는 날 뻔한 거지. 괜찮았거든? 아무 일도 없었어."

"그때 너 구해준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감사 인사는 무슨! 그게 무슨 구해준 거야. 뭐, 확실히 없었으면 위험했을 순 있겠지. 근데 그게 왜? 언니도 참 이상해······."

하는 말이 완전히 오락가락이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게 보통 수상한 게 아니었다.

윤지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선 캐물었다.

"그 사람이랑 뭔 일 있었구나."

"벼, 별 거 아니야. 그 사람이 나한테 번호를 따갔다고나 할까."

윤지은은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고?"

"아니고! 내가 앤 줄 알아?"

윤지은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윤서현의 손을 붙잡았다.

"난 참 걱정이야. 부모님 돌아가시고 너랑 나밖에 없는데, 우리 하나뿐인 동생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동생에게 협회를 추천한 것도 그녀의 걱정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선에 나서는 길드보다 안전한 업무를 처리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과한 걱정이라니까. 난 내 몸 하나는 알아서 잘 챙기는걸. 잔소리 그만해."

"그래, 그래. 나 내일부터 게이트 공략인 거 알지?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울 거니까, 집 잘 보고 있으란 소리야. 괜히 엉뚱한 일 벌이지 말고."

윤지은이 속해 있는 A랭크 길드 '은빛의 날개'의 주기적인 게이트 공략이었다. 그녀는 경고하듯 동생에게 말했다.

"협회에서도 위험해 보이는 일이 있으면 절대로 나서지 마. 최근 길드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돌아. 게이트가 이전 같지 않다더라. 지난번 사건도 그렇고. 몸조심해."

"언니는 나를 너무 애 취급한다니까."

윤지은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람이랑 잘되면 언니한테도 꼭 소개 시켜줘~."

놀리듯이 말하고선 방 밖으로 사라졌다.

'언니도 참.'

윤서현이 입을 비죽였다. 그것도 잠시 시선이 다시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그래서 연락은 언제 오는 걸까?

* * *

다시 현재.

『 액티브 스킬 '일자 베기(레어)'를 전수 받습니다. 』

『 스킬 [ 일자 베기 Lv.10 ]을 획득합니다. 』

『 '일자 베기' 스킬이 최대 레벨이 도달했습니다. 』

해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내 예상대로 전수를 받는 게 정답이었다.

'나 혼자 하려 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했을거야.'

신태양의 조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 한 가닥을 잡아내자 레벨이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 번 스킬을 익히니, 단숨에 최고 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작이 되는 지점만 찾아내면 마스터는 어렵지 않다. 경험치가 10만 배니까.'

그 감을 잡는 게 어렵지만.

"······고맙습니다. 덕분—"

감사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바닥에 주저 앉은 신태양이 보였다. 그가 엎드려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다.

뭐라는 거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보여주세요······."

복잡한 얼굴의 신태양이 애원했다. 그는 무릎을 붙잡고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자베기를 다시 한번만 보여주세요.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러거든요. 저도 오르지 못한 경지를 어떻게 단 몇 분 만에······. 아니 단 몇 번 만에 나를 뛰어넘은거에요? 나도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 못해서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았던 건데······."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뭔 소린가 싶어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설마······.'

가르쳐 주기 싫단 이유가 일자 베기 스킬을 마스터하지 못해서였구나.

거기까진 나도 몰랐다.

'내가 신태양의 일자 베기를 뛰어넘었다는 거구만.'

귀찮게 됐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정보창을 불렀다.

『 스킬 설명 』

- 이름 : 태양류(流) 일자베기

- 등급 : 레어

- 레벨 : 10

- 설명 : 검사 신태양이 만들어낸 베기술.

- 추가효과

Lv.10 : 비물질을 베어낼 수 있음

'확실히 굉장한 능력이네.'

10레벨 추가 효과를 확인하는 내 입이 슬쩍 벌어진다.

비물질에 영향을 주는 건 검에 마력을 두르는 스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니 가히 사기적인 성능이다.

스킬 하나로 두 개의 효과를 내는 셈이니까.

반투명한 상태창을 너머로 고개 숙인 신태양이 보인다.

"제발, 다시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녀석은 슬픈 표정으로 내게 부탁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갈게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내 옷깃을 잡고 늘어진다. 검성으로서의 체면은 어디에 두고 온건지. 그 하늘을 찌를 듯 높던 자존심은 어디로 간 거냐.

신태양은 아직 현실에서 헌터로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감의 근거가 부족한 건가?

'어쩐다.'

나는 잠시 멈춰서 고민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스킬을 습득하긴 했다. 그 덕에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마족이 출현하는 게이트가 나타날 때까지 아직 하루 정도 여유가 있다.

'신태양의 다른 기술도 습득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 계산을 마친 뒤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른 스킬도 몇 가지 더 알려주시죠. 교환하는 걸로 합시다."

"저, 정말이죠?"

한순간에 신태양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나를 바라봤다.

"근데 아직 이름이 못 물어봤네요. 어떻게 되세요?"

선뜻 이름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검성은 믿을 만한가라는 의문이 떠올라서였다.

'사실 이 만한 인물이 없기는 해.'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이 남자는 마족과 내통한 적은 없다. 오히려 마족의 목을 썰고 다녔으면 몰라도.

기억 전체를 뒤져봐도 그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선 더더욱 믿을 만하다.'

신태양은 아직 헌터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마족과 손을 잡았을 리는 없다. 각종 길드에서도 포섭을 못 한 마당이니까.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지한입니다."

그리고 내가 숨기고 싶은 건 나 자체가 아니다. 내가 가진 '무재조정'이라는 특성이지.

이 특성이 가진 압도적인 능력.

모든 경험치 10만배.

이걸 들켜서 안되는 거다.

간파 당할 가능성은 낮다.

존재한 적도 없는 특성이거니와 EX급 스킬은 탐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를 봐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부럽습니다. 그 굉장하신 재능! 이지한씨는 단순한 팬이 아니셨군요. 아니지, 역시 절 좋아하시는 분들은······."

보라, 재능이라고 하지 않는가.

미래의 검성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놈의 입단속만 적당히 해놓는다면 충분하겠지. 물론 내 이야기가 퍼져나가도 고작 일자베기 정도로 주목 받는 일은 없다.

신태양은 하늘이 무너진 양 행동했지만,

이 세상엔 널린 게 재능이고 스킬이니까.

"스킬을 한 번 불러주시죠. 그중에서 배울만한 걸 골라볼테니까."

"얼마든지요."

그럼 스킬을 몇 개 더 얻어볼까.

* * *

나는 다음날까지 신태양의 검도장에 머물며 스킬을 수련했다.

훈련장 근처의 나무들이 전부 베어나갈 정도로 격렬한 수련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스킬을 하나도 배울 수가 없었다.

일자 베기를 제외한 다른 스킬들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하나 같이 화려하다 못해 경악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들이였다.

뭐, 경화수월? 격참만개? 폭섬? 만월일섬?

눈으로 쫓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신태양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자베기가 특이한 거였어.'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는 성격답게 기술 하나하나가 지극히 화려하고 난해했다. 예술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내게 보여준 얼간이 같은 모습과 달리 그 재능은 천재적이었다.

'더 해봤자 시간 낭비다.'

나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걸 완전히 포기했다.

반면 신태양은 이리저리 검을 대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음, 팬 싸인회가 열리면 가장 먼저 초대해 드릴게요. 당연히 식사도 같이 하시고요."

"······."

대답할 힘도 없다. 그래도 잠시 쉬고 있으니 금세 체력이 차올랐다.

『 스킬 '자연 회복 Lv.10'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지난번에 얻은 자연 회복 스킬의 효과를 톡톡히 본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회복 능력이었다. 상처 치유는 물론 체력까지 회복시켜주니 든든한 느낌.

'일단 감만 잡으면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 건 순식간일 텐데······.'

그 감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무래도 재능이 없다 보니 하위 스킬이 튼튼하게 아래를 받쳐 주지 않으면 상위 스킬로 건너가기 힘든 것 같았다.

'기본 스킬들을 좀 더 모아봐야겠다.'

당장 떠오르는 건 정신력이나 지각력 같은 정신계열 스킬이다. 아예 상위 스킬인 초감각이나 흉내내기 같은 스킬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하게 스킬을 익힐 수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둘 다 얻기가 매우 어려운 스킬이었다.

"읏차."

나는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할만큼 했다.

확신했다. 신태양으로부터 더 뜯어낼 건 없다. 그러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는 걸 어째.

"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 가시게요?"

배웅을 나온 신태양이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쑥쓰러운 듯 말한다.

"검에 관해서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스승님 같은 분이 계셨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은 것 같습니다."

스승? 나는 그 단어를 애써 무시했다. 농담이겠지.

겨우 일자베기 하나 마스터했다고 스승이라 불리기엔 과하다.

"그러니 이제 저도 바깥으로 나가보려고요. 검도장에서 망상만 할 게 아니라 내일부턴 직접 뛰어보려고요. 반드시 세계적인 스타 헌터가 되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검성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간을 앞당겼다.

'원래부터 난 놈이기는 했다만.'

각성 당시 각 길드에서 쇄도하던 러브콜도 신태양이 검도장에 처박혀 있는 사이에 잠잠해졌던 거겠지.

그가 헌터 활동을 시작한다면, 헌터계에는 큰 파장이 일어날 거다.

그건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있어 좋은 일이겠지.

"······그래, 그러던가."

나는 적당히 손을 저으며 멀어졌다.

* * *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용산이었다.

한때 악명 높았던 전자 상가였지만, 지금은 헌터 관련 용품의 성지로 불린다. 물건을 구하기도 쉽고, 팔아넘기기도 안성맞춤이다.

『 아주 완벽히 보존된 늑대 마수의 가죽(F++) 』

『 매우 뛰어난 품질의 늑대 이빨(F++) 』

처억.

인벤토리에서 두 아이템을 꺼내 판매처에 넘겼다.

아이템을 받아 든 매입소 아저씨의 눈썹이 올라갔다.

"호오, 이만큼 품질이 좋은 건 보기 드문데, 해체 스킬이라도 익혔나? 요즘 헌터들은 마수나 죽일 줄 알지, 재료 아이템에는 관심도 없는데 말이야."

아저씨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기사 정신 나간 헌터가 아니고서야 해체 스킬을 10 레벨까지 수련할 헌터가 없긴 하다.

판매상 아저씨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이야, 이 정도로 좋은 재료는 아이템을 제작할 때 추가 효과가 붙거든. 다음에도 재료 팔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오게나. 비싸게 쳐줄테니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올지는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렇게 받은 돈이 65만원.

나름 흡족한 벌이었다. 많이 쳐준 거기도 했다. 아무리 상태가 좋다곤 해도 재료 자체가 F등급이니까.

'그러면 이제 장비를 빌리러 가볼까.'

무기와 스킬은 준비됐다.

부족한 건 방어구다. 고급진 장신구는 없어도 최소한의 방어구는 갖추는 게 좋다.

내가 상대할 성장의 마족이 아직은 약하다곤 하나 방심할 순 없었다. 마족과의 전투는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나는 한 방어구 렌탈샵으로 들어갔다.

딸랑~.

그중에서 가장 허름해 보이는 장비를 골랐다. 돈만 많았어도 옆에 있는 금속 재질의 방어구를 골랐을 거다.

"하루 빌릴 건데, 얼마죠."

"아, 그 방어구는······."

웃으면서 대답하는 직원과 달리 내 표정은 굳어졌다.

젠장, 70만 원이란다. 그래도 어쩌겠나. 거의 전 재산을 지불했다.

'난 이제 거지다.'

보증금을 내면 더 싸게 빌릴 수 있다는데, 돈이 있어야 말이지.

터벅터벅 걸어나온 나는 방어구를 살폈다.

『 질 낮은 가죽 방어구 세트 』

- 부위 : 각반, 견갑, 장갑, 흉갑 (세트)

- 등급 : 일반

- 품질 : F-

- 효과 : 방어력 + 6

'이거라도 있고 없고 차이는 크니까.'

그래도 꽤 만족스럽다. 총 증가하는 방어력은 6.

헌터의 아이템은 신비하게도, 방어구를 장착하지 않은 부위에도 방어력이 적용된다. 이걸로 자잘한 공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걸로 마족 처치를 위한 준비는 끝이 났다.

'윤서현 헌터한테 전화해볼까.'

그녀에게 협력 받지 못한다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처리하고 나오면 된다지만 괜히 걸려서 추궁받으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하필이면 지난번에 게이트에 무단 침입한 전적이 있어서.

윤서현 헌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게이트 관리는 협회 주관이기도 하다. 변칙 게이트에 대한 대응은 실적으로 이어진다. 윤서현 헌터도 기뻐하겠지.

신호음이 가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바로 받았다.

살짝 높은 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여, 여보세요?

"윤서현 헌터 맞습니까? 할 말이 있는데요."

- 네, 하세요.

"변칙 게이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잘 안 들렸나? 이내 약간 분노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 밥이 아니라 게이트다 이거죠.

밥?

"밥은 사주시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만, 게이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변칙 게이트에 관해서요."

- ······?

현 시점, 협회가 변칙 게이트를 알아낼 방법은 거의 없다. 내가 직접 알려주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내일 가야할 변칙 게이트에 대해 설명했다.

"지나가다가 봤는데, 변칙 게이트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기존의 게이트와는 다른 성질, 규칙을 가진 게이트. 최근 들어 변칙 게이트가 늘어나기도 했을 거다.

변칙 게이트는 큰 사고로 이어지는 만큼 협회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을 거다.

- 근데, 그게 변칙 게이트인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별 거 아닙니다. 게이트의 기본 종류는 A형, B형, C형 그 외 5종으로 총 8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A형과 D형에서는 주기적으로 불규칙한 마력이 방출됩니다. 그래서······."

내 설명 공세에 윤서현이 기겁했다. 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이래 보여도 잡지식은 많다.

- 잠깐, 됐어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요.

스마트폰 너머로 윤서현 헌터의 한숨이 살짝 흘러나왔다.

- ······굉장히 고마운 정보네요. 정말, 정말 고맙네요. 좋아요. 마침 동네도 같은데 잘됐네요. 정말 잘됐어. 내일 2시까지 약속한 장소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고맙다는 말과는 반대로 목소리에 가시가 돋혀 있는 듯 한데.

뚝.

뭐, 어떤가. 이렇게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나는 퀘스트 창을 띄웠다.

『 < F등급 > 한계 돌파 퀘스트 』

- 목표 : 마족 처치 ( 0 / 1 )

- 클리어 보상 : 모든 스킬의 최대 레벨 1 증가, 레벨 능력치 증가량 1.2배 증가, '인과역전의 상점' 개방

'마족 처치······.'

마족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시에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내딛어야 하는 첫걸음이었다.

이어서 인벤토리에 있던 도검 영혼 포식자를 꺼내 확인했다. 서늘한 기운이 손을 타고 흐른다.

'준비는 정말 할만큼 했다.'

이제는 마족을 처치하는 일만 남았다.

11화 성장의 마족(1)

다음날 2시.

동네 근처 공원.

나는 벤치에 앉아 윤서현 헌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겸사겸사 스마트폰으로 최신 정보를 확인 중이다.

'아직 이렇다 할만한 일은 없다.'

기업의 길드 인수 소식이나, 어느 연구소의 마공학 신기술 발표 같은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오, S급 헌터 류탁한. 기억 난다. 사생활이 더럽기로 유명했지.'

그 중에서도 인기 있는 건 스타 헌터들의 사생활이었고.

'진오 길드 사건에 대한 기사는 거의 없네.'

불과 며칠 전에 있던 진오 길드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했다. 본래대로라면 구조대까지 집어 삼킨 대형 사건이 나 때문에 상당히 축소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나저나 윤서현 헌터는 언제 오는···.'

생각하기 무섭게 윤서현 헌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차림은 허름한 가죽 방어구를 걸친 나랑은 달리 움직이기 편한 일반 복장이다.

'그냥 왔을 리는 없고, 착장 마법이 인챈트 된 방어구를 끼고 있나 보네.'

아이템의 외형이 노출되지 않게 해주는 착장 마법. 상당한 고가일텐데. 언니가 돈 많은 대형 길드 소속이라 그런가.

순수하게 부럽다. 빨리 이 거지 같은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

나를 발견한 윤서현은 만들어 붙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죄송해요. 조금 늦었죠. 기다렸나요?"

"아뇨,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그······."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을 우물거리다 말았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뇨, 아니에요. 딱히. 그보다 확실한 정보 맞는거죠?"

손사래를 치던 윤서현이 물었다. 실제로 그 의심은 정당하다. 현 시점에서 변칙 게이트를 밝혀 낼 수 있는 기술이나 인물은 흔치 않으니까.

"가서 확인해보면 확실해질 겁니다."

그 이유는 진작에 둘러댔었다. 뭣하면 스킬 핑계를 대면 되고. 그 덕인지 추궁 당하는 일은 없었다.

"······일단 알겠어요. 저희가 갈 게이트는 D등급 게이트고, 현재 로만 길드에서 공략 신청을 해 둔 상태에요. 우리는 거기를 뒤따라가는 거구요.

아무도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게이트에는 대개 주인이 있는 법이었다.

"확인차 움직이지만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면 협회에 지원을 요청할 거에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동할게요."

윤서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변의 경치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잘 조성된 호수 공원의 잔디 위였다.

'공간이동 스킬인가.'

본래는 한참 이동해야 할 거리를 단숨에 넘어왔다. 이 시간에 보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이걸 배울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 오셨나보다."

게이트 근처에서 공략 준비를 하던 길드원 중 하나가 나와 윤서현 헌터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지팡이를 든 여성 헌터였다.

"저는 박현주라고 합니다. 협회에서 나오신 윤서현 헌터님 맞으시죠? 이렇게 미인이 오실 줄은 몰랐는데! 옆에 그 분은······?"

"아, 게이트에 문제가 있을 때 도와주실 분이세요."

"아하. 안녕하세요."

박현주가 나를 향해 인사를 꾸벅한다. 나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뒤이어 로만 길드의 길드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아, 왔나보네."

길드장이라 그런지 입고 있는 방어구부터가 때깔이 좋다.

그가 입고 있는 금속 재질의 갑옷이랑 비교하니 내 허름한 가죽 방어구가 초라해 보인다.

그는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길드장 고성준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간단히 하고 돌아가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서 어딘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진다. 애초에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윤서현 헌터에게 일방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 뒤로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D등급을 공략하는데 필요한 인원은 D등급 헌터 5명이다. 로만 길드는 최소 인원으로 딱 맞춰서 들어가는 셈.

'원래대로라면 이 사람들 모두 죽는 거였겠지.'

괜한 영웅 심리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 게이트에 숨어 있을 마족만 처리하고 가면 장땡이다.

길드장 고성준은 경고하듯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부에서 사냥한 마수들은 전부 저희 길드 소유이니, 함부로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면 사냥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아시겠죠?"

"네, 네. 알겠습니다. 당연하죠."

윤서현이 익숙하다는 듯 사무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목적은 변칙 게이트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 토를 달 것도 없었다.

로만 길드원들이 게이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윤서현이 내게 속삭였다.

"이래서 길드 사람들은 귀찮다니까요. 협회가 적인 줄 알아요."

윤서현 헌터의 입장도 십분 이해한다만, 협회는 이것저것 귀찮게 따지는 게 많아서···. 라는 게 내가 아는 어떤 헌터의 이야기였다. 각자의 입장이 있는 거겠지.

"아, 잠깐만요. 들어가기 전에 측정 좀 할게요."

게이트 앞에 잠시 멈춰선 윤서현이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다. 그 위에 조그마한 장치가 달려있다.

"으음, 별 다른 징후는 없어요. 정말 확실한 거죠?"

마족의 경우엔 일반적인 마력이 아닌 마기를 내뿜는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성질 때문에 지금 장비로는 탐지가 불가능하다.

"못 믿겠으면 돌아가셔도 됩니다."

"······사람 진짜 재밌네요."

애초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윤서현이 나를 믿고 있단 의미긴 하다.

이미 로만 길드원들은 전부 게이트로 진입했다. 나와 윤서현도 뒤따라 게이트로 들어갔다.

우우웅···.

공간이동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이 일변하며 풍경이 뒤바뀐다.

"와, 예뻐라."

"오."

바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새까만 밤하늘 위로 떠오른 보름달과 형광빛으로 가득한 숲.

몽환적인 분위기다.

이런 장소는 나도 처음 본다. 잠시 구경하고 있자니 앞 쪽에서 우리를 불렀다.

"거기 멍하니 서있지 마시고 저희 뒤에 딱 붙어와주세요. 괜히 멀어졌다가 사고라도 나면 곤란하니까요."

고성준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D급 헌터인 고성준이 C급 헌터인 윤서현에게 내려다보듯 말하는 게 참 웃기다.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헌터병이란건가.'

D랭크 길드의 특징이기도 했다.

신생 길드에서 벗어나 길드 운영에 적응된 헌터들. 이들은 F급부터 함께 사냥을 하며 실력을 길러 온 헌터들이다. 이 바닥 돌아가는 원리를 얼추 아는 시기란다.

특징으론 대부분이 자신감에 차있다는 것.

'성장하고 있으니까 지금이 가장 좋을 때인 걸 모르지.'

그들은 F급 게이트에 있던 마수들을 수월하게 사냥하고, 경험치를 쌓아 올라 온 D급 게이트에서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렇게 쭉쭉 강해지다보면 언젠가 자신들도 S급에 도달해 스타 헌터가 될 거란 희망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그러나 현실의 벽을 마주하지 못한 젊은이가 그러하듯 이들의 자신감은 비정상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길드장만큼은 헌터병에 단단히 걸려 있는 모양.

"뭡니까, 할 말 있어요?"

고성준이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훑는다. 오케이, 자신감 이전에 이 새끼는 예의범절을 밥 말아 먹은 게 확실하다.

"없으면 조용히 따라오기나 하세요."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진짜로 저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니까요. 덕분에 협회 때려칠까 생각 중이에요."

윤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악성 민원인 문제는 언제나 심각한 법이니까.

우리는 로만 길드원들과 함께 강을 따라 쭉 나아갔다. 강이 에메랄드 빛으로 빛난다. 상류로 올라가면 보스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게 헌터들 사이에서의 정설이었다.

'마족도 보스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로서도 알맞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

그렇게 잘 가나 싶던 때였다.

"전방에 마수 출현!"

고성준이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로만 길드원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은빛 늑대다! 총 세 마리야! 다들 진형 갖춰! 실드!"

"응, 우선 실드부터 펼칠게!"

"매직 미사일 시전 준비 중!"

길드장의 구호에 맞춰 마법사가 마력 방패를 생성했다.

끼잉!

달려드는 은빛 늑대가 투명한 벽에 가로 막혔을 때, 대기하고 있던 검사가 늑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는다.

타이밍 좋게 화살과 마법이 날아와 마무리를 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런 전투 과정이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실력이 이곳에서도 발휘되고 있었다.

'그래도 꽤 하네.'

흠 잡을 데 없는 사냥이었다. 괜한 자신감은 아니었나보다. 이곳이 평범한 게이트였다면 안정적으로 끝났을 전투였다.

'문제는 여기에 마족이 있다는거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콰드득!

"뭐, 뭐야?!"

다른 은빛 늑대가 발톱으로 실드를 찢어내고 있었다. 한 번 균열이 생기자 실드가 완전히 찢겨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스스스···.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던 방패가 사라지자, 길드원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나마 침착한 길드장이 소리친다.

"아직 괜찮아! 다시 가다듬고, 실드가 다시 생길 때까지 막아낸다!"

그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길드원들이 늑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늑대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살아 남은 늑대 두 마리가 파티 내부로 뛰어들어 진형을 흩트렸다.

"꺄악!"

"이 놈 좀 막아!"

첫 전투부터 진흙탕 싸움이었다.

크르르······.

설상가상으로 심장을 꿰뚫린 줄 알았던 늑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공격이 얕았던 거다.

이들이 약한 게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D급 게이트도 여러번 거친 길드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수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해. D등급 게이트에 맞는 난이도가 아니야.'

마족이 내뿜는 마기는 이 필드 전체로 퍼져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마기를 흡수한 몬스터들은 기존보다 더욱 강해진다. 마족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였다.

"저희도 돕는 게 낫겠죠?"

상황을 지켜보던 윤서현이 내게 물었다.

"글쎄요. 도울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괜히 심술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도 싸울 때가 됐거든.

『 스킬 '인지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푸른 수풀 너머로 흉흉한 맹수의 안광이 빛을 발한다. 그 수는 총 두 마리.

크르르···.

신경을 긁는 낮은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검집에서 '영혼 포식자'를 꺼내들었다. 드디어 사용해 볼 때가 됐다.

윤서현도 상황을 눈치 채고 인벤토리에서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공간이동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설마 했는데 마법 스킬 위주의 헌터인가 본데.'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봐야겠지만. 물리 딜러인 나와의 조합이 나쁘지 않다.

수풀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은빛 늑대 한 마리가 쏘아지듯 달려온다. 녀석의 공격 경로를 예측하는 건 쉬웠다.

『 스킬 '검술 Lv.10'의 효과가 발휘 됩니다. 』

카악!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과 영혼 포식자의 칼날이 부딪혔다. 놈의 앞 발이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선지 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멈춰서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영혼 포식자를 쥔 채 걸음을 내디뎌 밀고 들어갔다.

콰드드드득!

"!"

은빛 늑대의 이빨이 입과 함께 단숨에 갈라졌다. 영혼 포식자의 날카로운 칼날이 그 피육을 잡아먹듯 갈라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내달리며 검을 쭉 내질렀다.

촤아아악!

은빛 늑대가 그대로 이등분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으로 나뉜 놈의 피와 내장이 땅을 적셨다.

이렇게 시원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영혼 포식자의 날카로움이 내 예상 이상이었다.

'미쳤네.'

물론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윤서현 헌터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제가 묶어두고 있어요."

"오."

크르르···.

보랏빛 마법의 사슬이 은빛 늑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하고 있었다. 녀석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댈 뿐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마력 사슬.'

대상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상급 스킬이다.

푸슉!

나는 그대로 다가가서 은빛 늑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영혼 포식자는 부드러운 두부를 자르듯 늑대의 가죽을 꿰뚫었다.

스으으······.

바닥에 쓰러진 두 마리의 늑대로부터 새하얀 기운이 올라오더니, 영혼 포식자로 날아들어왔다.

『 영혼 포식자가 영혼을 섭취합니다. 현재 영혼의 농도 : 13% 』

굉장히 만족스러운 전투였다. 영혼 포식자도 충전되었고.

'100%가 되면 새로운 기능이 열리는 건가.'

영혼 포식자의 공격력만 해도 놀라운데, 추가 기능이 해금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레벨업을 하며 향상된 능력치와 근력 스킬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영혼 포식자가 가진 예기 자체가 뛰어났다.

'은빛 늑대를 이렇게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을 줄이야.'

늑대를 베는 게 고블린을 베는 것보다 쉬웠다.

물론 감탄할 부분은 영혼 포식자만이 아니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윤서현 헌터가 가진 능력도 눈 여겨 볼만했다. 훌륭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마수의 움직임을 봉쇄한 마력 사슬도 훌륭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늑대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기행을 버렸음에도 내 몸은 깨끗했다.

"배리어 타이밍이 좋아서요."

"아, 아하. 뭐, 별 거 아니죠."

윤서현 헌터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배리어를 걸어준 덕이다. 의외로 전투 경험이 많은 모양.

'이러면 성장의 마족을 처리하기가 한결 수월해지겠는데.'

반면에 저 앞에선 난리였다. 다섯 명이서 아직도 은빛 늑대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크으윽! 좀만 버텨! 이제 두 마리 남았어! 마법은?"

"미, 미안! 빗나갔어!"

"일단 주현이부터 지키자! 다들 뒤로······."

그래도 한 마리는 잡은 모양.

두 마리의 늑대들이 번갈아가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로만 길드원은 그 콤비네이션에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와 윤서현을 발견하고선 소리친다. 길드장 고성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안 도와주고 뭐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다.

"돕지 말라면서요. 사냥감 건들지 말라던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상황에 그게 할소리······! 크억!"

타이밍 좋게 늑대가 뛰어들면서 고성준이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하는 수 없단 표정으로 윤서현을 바라봤다.

"도와줄까요?"

윤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12화 성장의 마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