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후안무치
강서는 천천히 땅으로 올라와 나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두 명의 사람이 계숭역과 교랑 앞에 꿇어앉아 구명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숭역과 교랑은 물을 한 움큼 토해내고 힘겹게 눈을 뜰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깨어나자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무슨 연유로 물에 빠졌는지도 모르는 남녀 한 쌍을 무작정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리 강서의 언질을 받은 아만이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아니! 이자는 안국공부의 삼 공자 아닌가? 귀한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보상금을 두둑이 얻을 수 있겠구먼!”
모든 관심이 두 남녀에게 쏠려 있기도 했고, 아만이 원체 키가 크고 남장을 한 상태라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짜 안국공부의 삼 공자라고?”
보상금 얘기에 솔깃해진 사람들이 술렁였다.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보상금이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나는 안국공부의 삼 공자가 아니오!”
죽었다 살아난 계숭역은 기운을 차리자마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하였다.
‘입을 맞추다 호수에 떨어졌다니…….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눈썰미 좋은 이가 계숭역의 옷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 공자가 입고 있는 옷은 고급 비단으로 만든 최상급이 아닌가? 안국공부의 공자가 아니더라도 명문가의 자제임은 분명하지!”
그러자 성질 급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안국공부의 공자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뭐 어렵다고! 안국공부에 사람을 보내 물어보면 그만 아닌가!”
여러 사람이 모이니 일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개중에 몸이 날랜 몇 명과 성질 급한 이가 벌써 안국공부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났다.
* * *
그 시각, 안국공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 계숭역을 찾아보았지만 행방조차 알 수 없었는데, 갑자기 어떤 이가 찾아와 삼 공자가 막우호에 빠졌다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안국공 부인이 너무 놀라 실신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어서 앞장서거라!”
계숭역의 큰형 계숭례(季崇禮)는 소식을 전하러 온 이의 안내를 받아 시종을 이끌고 서둘러 막우호로 향하였다.
안국공부의 소란은 이웃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한 방(*坊: 성의 구역 단위)에 사는 명문가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동정을 살피기까지 했다.
시종들도 꽤나 영민하여 안국공부의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몰래 막우호로 뒤따라가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을 잡고 어찌 된 영문인지 캐묻기도 하였다. 게다가 두 눈으로 직접 온몸이 흠뻑 젖은 계숭역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나니 대강의 사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세상에나! 안국공부의 삼 공자가 외간 여자와 함께 순정하다니!
* * *
안국공 세자 계숭례는 한달음에 막우호에 도착했다. 셋째 아우의 파리한 얼굴과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보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계숭역은 그보다도 열 몇 살이 어린 늦둥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유달리 몸이 약해 온 집안사람들은 그가 깨질세라 부서질세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계숭역이 하늘의 별을 따 달라면 기꺼이 따주었을 정도였다.
계숭례의 시선이 계숭역 품 안의 여인에게로 옮겨졌다.
형의 시선을 느낀 계숭역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여인을 뒤로 감추었다. 그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였다.
계숭례는 황당함에 발을 구르며 말했다.
“셋째야, 정말 어리석구나. 부모님 뵙기에 죄송하지도 않으냐?”
계숭역은 입술을 꾹 다물고 묵묵부답이었지만, 손은 여전히 교랑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순간 많은 이의 시선을 느낀 계숭례는 차갑게 일갈했다.
“되었다, 돌아가서 마저 얘기하자!”
“교랑도 함께 갈 것입니다.”
계숭역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계숭례는 철없는 아우를 노려보다 눈길을 돌렸다. 그는 시종에게 뒷수습을 명한 뒤 계숭역과 교랑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시종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맞잡아 공손히 읍하였다. 그리곤 무리 중 덕망이 높아 보이는 노인에게 백 냥짜리 은표(銀票)를 쥐여 주고 남은 시종들과 함께 서둘러 돌아갔다.
백 냥은 백성들에게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은표를 받은 노인을 구름떼같이 둘러싸고 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 * *
강서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아만은 강서의 검은색 두건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씨,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지전(*紙錢: 종이돈)도 모두 태우고 어서 돌아가자.”
여름의 어귀라고 하지만 한밤중에 얼음장 같은 호수에 들어갔다 왔으니 살랑이는 바람에도 뼛속까지 시린 기분이었다. 강서의 입술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만이 강서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다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혼란을 틈타 조용히 막우호를 빠져나왔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만이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아씨, 삼 공자께서 정말 너무하신 것이 아닙니까! 아씨와 정혼까지 한 마당에 어떻게 외간 여자와 그,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조금의 틈도 없이 바싹 밀착된 입술, 다급한 숨소리…….
호숫가의 그 장면만 생각하면 분노와 배신감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강서는 아만의 말을 듣고도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가 혼인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계숭역이 교랑을 아내로 맞아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한다면, 강서도 그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몰랐다.
역시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쓸 만한 구석 한 군데는 있기 마련이었다.
강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씩씩거리던 아만이 돌연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지전을 준비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두 연놈의 명복을 빌기 딱 맞지 뭡니까!”
강서가 아만을 흘낏 바라보며 말했다.
“지전은 다른 용도가 있었다.”
“어떤 용도요?”
아만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다 마른 머리카락 몇 가닥이 두건 위로 흘러내려 강서의 백옥 같은 얼굴을 간질였다.
강서는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어둠이 더 짙어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관청에서도 원두막에 불이 나게 된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아만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이지 아씨는 생각도 깊으시네요.”
하지만 불현듯 계숭역이 생각나자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삼 공자는 정말 눈뜬장님이고요!”
“되었다. 이제 도착하였으니 그만하렴.”
담벼락의 구멍은 풀로 잘 가려져 있었다. 아만이 풀을 들춰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씨, 먼저 가세요.”
강서는 몸을 숙여 구멍을 빠져나왔다. 몸을 일으키다가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일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이 있었다. 보아하니 그도 구멍에서 막 나온 것 같았다.
뒤따라 나온 아만이 그 모습을 보고 지레 놀라 움찔거렸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짤막한 단말마가 튀어나온 참이었다.
눈앞의 인영이 멈칫하더니 홱 돌아섰다.
“누구냐……!”
강서는 재빠르게 구멍 옆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벽돌을 집어 들고 익숙한 면상을 향해 사정없이 던졌다.
그럼 그렇지, 눈앞의 남자는 그녀의 무능한 오라버니 강담이었다.
강담은 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아만은 강담의 얼굴을 확인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아씨, 지금 이 공자님을 때려눕히신 거예요?”
“괜찮을 거야. 빨리 가자!”
강서가 자신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담은 잠시 정신을 잃은 것 뿐, 조금 있으면 사람이 올 테니 차가운 바닥에 오래 누워 있지도 않을 터였다.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이 켜지고 부산스런 움직임이 느껴졌다.
강서는 아만을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살포시 닫아 둔 중문을 단단히 잠근 뒤 혹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샅샅이 확인하고 나서야 해당거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그녀의 처소는 그 이름처럼 해당화가 만발해 있었다. 붉고 흰 꽃잎 위로 달빛이 서리처럼 내려앉은 풍경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서는 오로지 해당화로만 정원을 가득 채웠다.
혹자는 해당화가 향기가 없는 꽃이라 타박하지만, 강서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해당화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남들보다 몇 배로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어 향이 짙은 꽃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아교, 우리 왔어.”
아만이 경쾌하게 문을 두드렸다.
아교는 대문을 활짝 열어 강서와 아만을 맞이했다. 두 사람 모두 무탈한 모습을 보니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씨, 소인이 더운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먼저 목욕부터 하시지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가 강서를 반겨주었다. 머리와 어깨를 제외한 몸 전체가 욕조로 빨려 들어가듯 잠겨 들었다. 그녀는 적당한 온도의 물이 온몸에 휘감기는 것을 느끼며 전신의 긴장을 천천히 풀어냈다. 다시 태어난 이후 늘 달고 살던 불안감과 고통이 오늘로써 전부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행복밖에 없으리라.
“아씨, 인제 그만 나오셔요. 물이 다 식었습니다.”
아교가 차분히 일렀다.
강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아교의 시중을 받아 가벼운 잠옷을 걸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교는 부드러운 천으로 강서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말려주었다.
폭포수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은 허리춤 가까이 닿아 있었다.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피부, 흑단 같은 머리칼, 연시(軟柹)를 머금은 듯한 입술, 새하얀 이……. 동경 속에 비친 선녀와 같은 미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예전엔 어딘가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던 눈이 어느새 평정을 되찾아 더욱 맑고 깊어지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목욕을 마친 아만이 걸어 나오다가 홀린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아씨, 어쩜 이리 아름다우실까.”
솔직한 그녀의 반응에 강서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이면 계숭역과 교랑의 순정(*殉情: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죽음) 사건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고한 그녀라도 비웃음을 사는 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누가 보아도 좋은 혼사를 치르는 여자에게 아름다움은 그저 죄일 뿐이었다.
“그런데 삼 공자와 그 여인이 오늘 밤 막우호에서 만날지는 어찌 아셨습니까?”
아만이 드디어 가장 궁금했던 것을 속 시원히 물어보았다.
아교도 빗질하던 손을 멈춘 채 그녀의 대답에 온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경 속 소녀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 영창백부에 상화연을 갔을 때, 삼 공자가 사람을 시켜 일러 주었어.”
강서는 되는대로 이유를 지어내었다.
허나 아만은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 공자가 다른 여인과 밀회를 보내는 것을 어찌 아씨에게 알려 주었단 말입니까?
강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단념하라는 뜻이었겠지.”
아만이 갑자기 쾅 하고 화장대를 내려치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이런 후안무치한 놈!”
‘진작 알았다면 꽹과리를 늦게 쳐서라도 물귀신으로 만들었을 텐데!’
강서가 눈을 휘게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게, 정말 후안무치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