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약점
어느덧 소리도 없이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밤의 어둠이 뒤덮인 온부는 여느 때보다 적막하게 느껴졌다.
온여생은 홀로 방 안에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수록 더 무서워 차라리 아들의 처소로 가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아들의 처소는 텅 빈 채 방 안에 불빛 한 점 없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안 돌아왔나…….”
온여생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바로 그때 방 안에서 불이 켜졌다.
어라? 봉이가 안에 있었나?
온여생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대로 잠을 못 잔 덕에 멍한 상태로 별채 대문을 열었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뒤에 있던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온여생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라 돌아서서 문을 열려고 허둥거렸다.
“당숙.”
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온여생은 등골이 뻣뻣해진 채로 힘겹게 뒤를 돌았다. 그러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온여생은 주춤거리며 물러섰고 이내 굳게 잠긴 문이 등에 닿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당숙께선 뭘 그리 겁내십니까?”
온유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온여생은 오들오들 떨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내…… 내가 무슨 겁을 낸다는 것이냐? 그냥 몸이 좀 안 좋을 뿐이다……. 유아 넌 왜 봉이의 처소에 있는 것이냐?”
자신이 그녀가 요괴임을 안다는 티를 내면 안 됐다. 그녀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걸 알면 당장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온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왜 여기 있느냐고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얼마 안 남아서 좀 보러 왔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자빠질 뻔한 온여생은 돌아서서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 날 내보내 줘! 당장 날 내보내 달라고!”
온여생은 완전히 정신을 놓고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질렀다.
싸늘한 손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당숙, 계속 소리를 지르시면 제가 잡아먹을 겁니다.”
온여생은 울음 섞인 고함을 뚝 그치고 코앞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너…… 너는 정말로 요괴인 것이냐!?”
온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숙께선 농담도 잘하시네요. 저같이 예쁜 요괴를 보셨나요?”
온여생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분명해! 이 아이는 요괴야!
요괴는 원래 아름다운 소녀에게 잘 붙는다고 했어! 예쁜 용모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온여생이 겁에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을 보며 온유는 마음이 착잡했다.
전생에 그녀가 극도로 증오하던 당숙의 ‘특별한 점’은 이번 생에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이 되었다.
아버지의 여덟째 사촌 형인 이 당숙은 겁이 많고 특히 귀신을 무서워했다.
전생의 어느 날 밤, 정원에서 산책 중이던 그녀는 술에 취한 채 처소로 돌아가던 당숙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에게 들렸다.
‘이런 큰 정원에 혹시 귀신이라도 숨어 지내는 거 아니야?’
그때 그녀는 깜짝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었다. 무수히 많은 악의 또는 선의를 들어 왔다. 하지만 이 당숙처럼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당숙이 귀신을 무서워한다는 것이 또렷하게 기억났던 것이다.
“당숙, 서쪽 방에 들어가서 얘기 좀 하시죠. 땅바닥은 차갑습니다.”
서쪽 방은 서재로 꾸며져 있었다. 이곳은 평소에 온봉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온여생은 땅바닥에 앉은 채로 온유가 서쪽 방에 들어가는 걸 멍하니 보다가 냉큼 일어나 문을 잡아당겼다.
뜻밖에도 문은 왈칵 열렸다. 그런데 문 뒤에서 창백한 얼굴 하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온여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갈지자로 비틀거리면서 서쪽 방으로 도망쳤다.
온유는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당숙, 거기 앉으세요.”
온여생은 의자 팔걸이를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무너지듯 앉았다. 그는 감히 온유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당숙, 정말 절 무서워하시는군요?”
온여생은 눈을 들어 온유를 보려고 하다가 벌 쐰 놈처럼 급히 시선을 거둔 다음 흐느끼며 말했다.
“유, 유아야……. 도대체 날 어쩌려는 것이냐?”
자기를 잡아먹을 거면 그냥 큰 입을 쫙 벌리고 잡아먹을 것이지, 왜 더 무섭게 시간을 끄는 걸까?
“옛말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으면 귀신이 찾아와도 겁날 일이 없다고 하잖아요?”
온유는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 여유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당숙께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셨나 봐요? 절 무서워하시는 걸 보니까 말이죠.”
모레가 아버지가 일을 벌인 날이니 지금쯤이면 분명 자기 사촌 형에게도 당부를 해 뒀을 것이었다.
“나, 난…….”
온여생이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당숙, 저 좀 보세요.”
온여생은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도저히 그녀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온유가 책상을 내리쳤다.
온여생은 흠칫 놀라 시키는 대로 상대를 바라봤다.
희미한 촛불에 소녀의 표정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도저히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당숙은 우리 어머니를 해칠 생각이죠?”
소녀가 손가락을 흔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빨간 손톱이 촛불 아래 핏빛으로 번뜩였다.
온여생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제 달빛 아래에서 소녀가 나뭇가지에 앉아 먹던 그 손가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난, 난 아무것도…….”
“정말로요?”
온유가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땅만 바라보고 있던 온여생의 시선에 하얀 치맛자락과 빨간 신발이 들어왔다.
속박이라도 걸린 것처럼 굳어서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숙의 마음은 거짓말을 못 하네요.”
온유가 또박또박 말했다.
온여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는 극도의 경악이 드러나 있었다.
온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전생 때 말도 못 했던 데다가 남들이 자신의 이상한 능력을 알까 봐 비밀을 감추고 살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그 능력을 잃고도 그 능력으로 얻은 정보를 활용하여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당숙은 이제 어쩔 셈이신가요?”
온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온여생은 온몸의 털이 곤두선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냐?”
온유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또박또박 말했다.
“당숙이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당숙과 온평 두 사람만 사실대로 솔직히 말해도 외할머니가 화병으로 돌아가실 일은 없을 것이고…… 어머니도 미치는 상황에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솔직한 사람은 없다.
이 생각이 들자 온유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온여생의 눈을 마치 죽은 사람 보듯 바라봤다.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게! 그렇고말고!”
온여생은 온유의 눈빛에 잔뜩 겁을 먹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온유가 다시 의자에 앉아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표정으로 물었다.
“당숙께선 아버지를 찾아가 제가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고 고자질하진 않으셨겠죠?”
온여생은 너무 놀라 얼굴이 납빛으로 변한 채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는 소녀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어!?
“당숙은 자기 사촌 동생을 그렇게 모르시나요?”
소녀는 자신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그런 거 절대 안 믿거든요.”
온여생은 억울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맞아! 아우가 도무지 믿지를 않더라!
“그러니 당숙,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숙이 우리 어머니를 해코지하지만 않으면 저도 당연히 당숙을 찾아갈 일이 없을 거예요.”
온여생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숙은 돌아가 좀 쉬세요.”
온여생은 사면받은 죄인처럼 허둥지둥 일어나 대문 앞까지 뛰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멈추더니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유아야……, 우리 봉이는 어디 있느냐?”
온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비라고 자식 걱정은 하는구나.
“당숙, 걱정할 것 없어요. 오라버니는 무사하답니다.”
“제, 제발 우리 봉이는 살려다오. 그 녀석 피부가 질겨서 맛도 없을 거야…….”
온유가 살포시 웃었다.
“전 먹는 건 별로 가리지 않아요.”
온여생이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날 대신 데려가라. 봉이는 아직 장가도 가지 못했잖니.”
“당숙, 걱정 마세요. 당숙이 우리 어머니를 해치지 않으면 봉이 오라버니도 무사히 회시에 참가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안심한 온여생은 방금 아들을 위해 짜낸 용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회, 회시는 이제 닷새 남았구나…….”
“남은 닷새 동안 어머니를 해칠 생각만 하지 않으면 당숙과 오라버니는 무사할 수 있을 겁니다.”
온유의 입가에 잠깐 비웃음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봉이 오라버니가 장원급제하면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테지요. 아버지보다 더 잘 나갈 거예요. 그럼 당숙도 자연히 호강스럽고 안락한 노후를 즐기는 어르신이 될 수 있겠죠.”
온여생은 멍한 표정을 한 채 허우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별채 대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바람 한 점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온여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온유는 조용해진 방 안에 그대로 잠시 앉아 있다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살며시 낙영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통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아가씨, 그런데 온봉 공자는 아가씨가 숨긴 건가요?”
온유의 머리를 감겨 주던 보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온유는 꽃잎이 떠다니는 김이 모락모락 자욱한 물을 어깨에 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다 자란 어른을 내가 어떻게 숨기겠어?”
보주는 궁금증이 더 커진 듯 물었다.
“그럼 그분은 어디 가신 거죠?”
온유는 눈을 감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친우들과 술 마시고 있겠지, 뭐.”
그녀가 당숙 온여생에게 겁을 준 건 그가 전생에 악행을 도왔기 때문이다. 온봉의 경우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무고한 사람을 벌줄 수는 없었다.
일이 되려면 하늘이 돕는다고, 적절한 때 온봉이 거처로 돌아오지 않아서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
“아가씨, 물이 좀 식었네요. 그만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온유는 커다란 목욕통에서 나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앉자 보주가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짜 주었다.
거울 속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검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어우러진 분위기는 이 화사한 규방과 어울리지 않았다.
온유는 손을 뻗어 거울을 잡고 얼굴 반쪽을 가렸다.
이제 준비는 끝났으니 이틀 뒤 그날을 기다리면 됐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녀는 차라리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생과 같은 결말을 맞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가씨?”
온유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자 보주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온유는 거울에서 손을 떼고 싱긋 웃었다.
“이제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