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2화. 육 씨의 투지

12화. 육 씨의 투지

두 사람은 평안사의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고, 침향과 조 부인의 시녀는 그 뒤를 따랐다. 제완은 육 씨를 치료해달라는 말을 꺼낼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혹여라도 조 부인이 오늘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이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라 오해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만에 하나 그렇게 생각해버린다면, 성의가 너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

“제 고낭.”

그때 조 부인이 돌연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어쩐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오늘 나한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사실 조 부인은 이전에 제가(齊家) 모녀를 보았을 때,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쉬이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래서 제완이 오늘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친근히 말을 건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앗?’

깜짝 놀란 제완은 이내 영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조 부인……. 사실은 나중에 직접 부인을 찾아뵈려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오랜 지병을 앓고 계시는데, 의원들은 모두 약제가 소용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던 중, 부인의 의술이 고명하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인께 저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달라 청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 제완은 부인의 큰 은혜와 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제완은 조 부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마음을 다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조 부인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제완이 자신을 찾은 것이 다른 일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그녀는, 제완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제완을 일으켜 세웠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제 낭자, 얼른 일어나세요.”

“조 부인.”

제완은 승낙이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조 부인을 쳐다보았다.

이에 조 부인이 한 차례 탄식하며 웃어 보였다.

“내가 배운 건 전통적인 의술과는 조금 다릅니다. 금침(金針) 하나로만 치료를 진행하는 것으로, 나 역시도 감히 완쾌될 것이라 보장할 수는 없지요.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내일 내가 낭자의 저택에 가 부인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치료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해보지요.”

모름지기 의술을 펼치는 자들은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가 배운 의술은 스승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함이었으니, 제완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대답에 제완은 감정이 다 격해질 정도로 크게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인.”

조 부인에게 인사한 뒤, 제완은 침향을 데리고 마차로 돌아갔다.

* * *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한 시각으로, 육 씨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제완이 돌아왔다는 하죽의 말을 들은 그녀는 제완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이려 했다.

“어머니, 오늘은 몸이 좀 어떠세요?”

하지만 제완은 진작에 옷을 갈아입고는 하죽이 부르기도 전에 육 씨에게 와 있던 차였다.

“오늘은 기운이 조금 나는구나. 평안사는 잘 다녀왔니?”

검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길게 늘어트린 육 씨의 얼굴에는 혈색이 하나도 없었다. 말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 그것을 듣고 있는 제완의 마음은 너무나도 아려왔다.

지금 육 씨의 몸은 너무 크게 상해 있었다.

“원래는 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바로 돌아오려 했어요. 그런데 금주(锦州)에서 1년에 한 번 있다는 선행일이 이제 막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어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잠시 더 남아있었어요. 참, 어머니, 내일 조 부인께서 오신다고 하셨어요.”

제완은 영하에게서 제비집 죽을 건네받은 뒤 직접 육 씨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조 부인이시라면, 조 태수의 부인이시지 않느냐? 소문으로 듣던, 죽어가던 사람도 회생시키신다는 그 조 부인을 말하는 것이냐?”

육 씨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제 장 의원이 떠난 후, 제완이 조 부인께 병을 봐 달라 청할 것이라며 얘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조 부인은 약을 처방해주는 전문 의원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쉬이 병을 봐 달라며 청을 올릴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제완의 눈동자에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는 침향에게 조 부인께서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려 했었어요. 그런데 오늘 때마침 평안사에서 부인을 만났지 뭐예요. 그래서 부인께 슬쩍 도움을 청하는 말씀을 드려보았는데, 정말 두말없이 승낙하시며 내일 바로 와보시겠다 하셨어요. 어머니, 조 부인은 참으로 호탕하면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분이세요. 유 부인도 조 부인이 다른 사람을 아주 기꺼이 도우려 하는 분이라고 하셨어요.”

육 씨는 가느다란 손을 뻗어 제완의 귀밑머리를 어루만지며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아, 이 어미의 몸 때문에 아무래도 네가 너무 마음을 쓰는 듯하구나. 다른 집 고낭들은 가뿐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오늘은 어떤 모양의 자수를 놓을지, 내일은 또 어떤 곡조를 들을지가 최대의 고민거리인데 말이야. 내가 널 너무 고되게 만든 듯해.”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께서 건강하시기만 하다면, 어떤 힘든 일도 저는 다 해낼 수 있어요. 어머니는 아직 젊으시니, 앓고 계신 이 지병만 완쾌하신다면 백 세까지 장수하시며 딸의 효도도 담뿍 받으실 거라고요.”

고개를 숙인 제완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비쳤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난 우리 완이가 시집 가 아이를 낳는 것이 참으로 보고 싶구나.”

육 씨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육 씨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서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완은 고개를 힘껏 들고, 흔들림 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육 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전 사람의 힘과 의지로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요. 자신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랄 수 있겠어요? 제가 시집 가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 믿으셔야만 해요. 어머니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 저 완이가 아무리 제가의 적녀라는 신분을 가졌다 한들, 반드시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예요.”

육 씨는 제완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어찌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는 말이냐? 완아, 이 어미는 희망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단지…….”

“어머니께서 이곳에 안 계시면, 곧 또 다른 제 부인이 그 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생각을 혹시 해보신 적 있으세요? 또 그 사람이 절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서는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 외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요.”

이 말을 하는 제완의 눈시울이 점점 새빨개졌다. 전생에서 육 씨를 떠나보낸 뒤, 그녀가 제가에서 보냈던 매일이 일 년과도 같았던, 하루하루의 삶들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마음에 복수심을 가득 품은 채로 누구에게도 울분을 터트릴 수 없던 그 심정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제완이 서슬 퍼런 말을 내뱉는 것을 본 육 씨는 정말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 딸이 어떻게 살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몸이 약하다 보니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품지 못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제완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친어미가 없다면, 설령 정실의 아이라 하더라도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제완은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고낭이었다.

“그래, 완아. 너의 말이 백번 옳구나. 내 이렇듯 낙담한 채로 매일 의기소침해 있을 순 없지. 요양이라는 것은 우선 마음을 닦아야 하는 일이거늘, 내 마음조차 다잡지 않은 채로 어찌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느냐? 걱정하지 마라. 어미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다.”

생기를 잃고 무기력했던 육 씨의 눈동자에서 문득 한 줄기의 빛이 보이더니, 그녀는 마침내 다시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제완은 육 씨의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 씨가 강한 투지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몸이 낫지 않을 거란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어머니, 우선은 제비집 죽 좀 먼저 드세요. 저는 내일 조 부인께서 오셔서 틀림없이 어머니를 잘 치료해주실 거라 믿어요.”

제완이 웃으며 말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 부인이 나서면 반드시 육 씨의 몸 상태가 호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어떤 직감과도 같았다.

육 씨가 제비집 죽을 모두 먹자, 제완은 그녀에게 금주성 행선일과 관련된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자, 제완과 두 시녀의 등쌀에 못 이긴 육 씨는 결국 꽃빵 하나와 흰쌀 죽 한 그릇을 더 먹었다.

* * *

제완이 안채에서 나왔을 땐, 마침 정원 곳곳에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제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그 옆에서 초롱불을 든 채로 걷고 있던 침향은 제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발견한 뒤 같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고낭. 소인, 고낭께서 이렇듯 기분 좋아하시는 것은 처음으로 보는 듯합니다.”

“그런가?”

제완은 손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기울여 침향을 흘끗 쳐다봤다.

“그러네……. 아주 오랫동안 오늘처럼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던 것 같아. 한참을 고대하던 일이 꼭 실현될 듯한 희망이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달까?”

“고낭께서 바라시는 일들은 꼭 이뤄질 거예요.”

침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완은 그녀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착한 마음씨를 지닌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성격도 따뜻하기 그지없고, 공손하며 겸허한 여인이니, 틀림없이 하늘이 제완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라 믿었다.

“너도 그럴 거야. 우리 둘 다 원하는 일이 꼭 다 이뤄질 거야.”

제완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자그맣게 읊조렸다.

그러나 침향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정확히 듣지 못했다.

* * *

제완은 거처로 돌아왔을 때, 은행이 문턱에 걸터앉은 채로 바깥 처마에 걸린 등불 아래에서 구럭(*새끼를 드물게 떠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그릇)을 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은행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제완이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정리해 문 뒤쪽으로 밀어 넣었다.

“고낭, 돌아오셨어요?”

은행은 잔걸음으로 제완에게 다가와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침향을 옆으로 슬그머니 밀어냈다.

하지만 은행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눈치챈 침향은 그저 웃어 보이며 제완에게 말했다.

“고낭, 소인은 먼저 가서 고낭께서 목욕하실 따뜻한 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제완도 은행이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침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