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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강한 세력이 일어서다 (2)

19화. 강한 세력이 일어서다 (2)

“북야?”

고약운은 얼른 천북야를 바라봤다. 천북야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애썼지만, 한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이 안 나. 이전의 모든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안 나? 기억 못한다고 해서 네가 저질렀던 잘못까지 잊힐까? 네가 죽인 사람들을 잊은 거냐? 천북야. 난 네가 역사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 여기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네 실력은 강해. 네 기억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일 정도로 엄청나게 강하다고. 아마 네 기억은 네가 봉인했을 거다.”

천북야의 기억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고?

그 말을 듣자 고약운은 충격에 휩싸였다. 자사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천북야의 기억을 봉인한 게 정말로 천북야 자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천북야는 침묵하더니 잠시 후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깜박이다 이내 사라졌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웬 여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눈처럼 흰옷을 입은 채, 구름 속에서 신룡(神龙)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옅은 그림자만이 눈에 들어와 천북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짙은 아픔이었다. 누군가가 쏜 화살이 천북야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북야!”

고약운은 천북야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그가 회상하는 것을 제지했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천북야는 고개를 들어 고약운을 바라봤다.

“약운. 나도 내 과거를 알고 싶어. 기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줘. 갚을 수 없는 심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다 내가 책임져야 해. 기억은 봉인하고 이대로 사는 건…… 겁쟁이에 불과해.”

그 말에 고약운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나도 널 도울게. 자사,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자사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을 도우라고? 어림도 없지.’

“자사!”

고약운은 이런 모습의 자사가 낯설기만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천북야가 그렇게 원망스럽다면…… 자신의 잘못을 기억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천북야에겐 일종의 벌일 거야.”

그 말을 듣고 자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운 네 말이 맞아. 천북야, 내가 지금 너를 죽일 수도 없지만…… 널 잘 살게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아. 모든 기억이 돌아올 수 있게 해주지. 후회와 자책 속에서 영원히 살도록 해. 네 잘못으로 그자가 죽은 걸 기억하라고. 기억만 봉인하면 모든 걸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지? 절대로 그렇게 둘 순 없지.”

천북야는 신단(神坛) 위에 선 자였다. 즉, 신(神)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들을 무시하고 마도(魔道)에 빠질 줄은 몰랐다. 모습이 변해도 뼛속의 영혼은 변할 수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자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약운, 네가 알아둘 게 있어. 저자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너무 믿지 마. 원래는 신이었지만, 지금은 악마에 불과해.”

자사는 말을 마치곤 두 사람 앞에서 사라졌다.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시간이 흐른 뒤 천북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고약운에게 물었다.

“약운아, 날 못 믿는 거야?”

고약운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러운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말로 표현 못 할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아니.”

고약운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나는 자사를 믿어. 그렇지만 내 느낌도 믿어. 이전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든, 내 앞에 있는 건 예전의 네가 아니라 지금의 너야.”

그 말에 천북야가 웃기 시작했다.

그가 웃기 시작하자 그를 제외한 주변 모든 것이 절로 어두워질 정도로, 천북야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나도 널 믿어. 이 세상에서 너만 믿어. 그래서 네가 날 버려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약운아, 언젠가 네가 날 포기하게 되면, 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고약운은 가슴이 떨리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가 아무리 큰 실수를 했다 한들, 자신은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빠르게 달려오는 여로가 보였다. 그는 고약운과 천북야를 발견하곤 기뻐하며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고약운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웃었다.

“라 장군의 무기가 곧 도착할 거예요. 여로. 여기서 기다렸다가 무기를 가져와주세요. 나도 이제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한 달 전 고약운에 의해 연수의 산맥으로 백 명이 파견되었으나, 돌아온 사람은 오십 명에 불과했다.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위험에 부딪혀 탈출하지 못하고, 흉악한 영수의 발밑에 묻혀버렸다.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머지않아 자신들이 대륙을 위협하는 강자가 되리란 것을 말이다.

* * *

고약운은 마당 안에 자리한 사람들을 도도하게 쳐다봤다.

“한 달 동안 견뎌내었군.”

“그렇다.”

심풍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우리가 살아 돌아오면 당신 실력을 보여준다고 했잖나. 한 달 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길 바란다.”

그의 말에 고약운이 웃었다.

“내 실력은 별거 없어. 아직 취기 6급에 불과하거든. 전투력으로 따지면 너희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야.”

심풍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이 계집이 지금 장난하나? 사실이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곧 고약운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한 달 동안의 수련을 통해 조금이라도 실력이 상승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그렇다면 나도 너흴 키울 필요가 없어.”

이 말을 듣자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고약운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한 달의 수련으로 인해 실력이 훨씬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신체와 정신도 강해졌다. 이건 평소 반년을 수련해도 얻지 못할 성과였다.

“지금은 내 실력이 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머지않아 너희들이 연합해도 내게 상대가 안 될 거야. 내가 정성 들여 너희의 실력을 키운 후라도 말이야.”

지금 고약운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지만, 이전의 폐물은 결코 아니었다. 현재 고약운은 또래들보단 월등히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역시 짧은 시간에 이뤄낸 대단한 성과였다.

“너희가 나를 따른다면, 후회는 없을 거야.”

햇빛에 비친 고약운의 수려한 얼굴에 담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너희를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 거야. 비록 오십 명이라 할지라도, 백전백승할 수 있도록 말이지. 난 너희들이 끝까지 견뎌낼 거라 믿어. 그렇게 된다면, 승리는 당연한 결과일 거야.”

햇빛이 드리워지자 더욱 밝게 보이는 고약운의 얼굴에는 확고한 뜻이 내비쳤다.

그녀를 바라보던 심풍은 잠시 멍한 채로 있다가, 곧 결정을 내렸다. 이제 이 결정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내 복수를 함께할 실력이 있다면, 나 심풍 역시 당신의 명령만을 따를 것이다.”

사실 고약운은 오십 명의 사람들 중에서 굳이 심풍을 찾아 그를 향해 말한 것이었다. 그가 이들 중 가장 강하며, 그의 신분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안심해. 내 사람이 된다면 누구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하던 고약운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취기단이야. 복용한다면 너희들의 실력은 더욱 빠르게 성장할 거다.”

“취기단?”

사람들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에 멍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취기단? 설마, 단약입니까?”

여로가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고약운이 들고 있는 병을 쳐다보았다. 그는 긴장되어 누군가 혹여라도 이 말을 들었을까 두려웠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동방세가의 여로는 취기단을 모를 수 없었다.

그 전설 속의 단약을 어떻게 고약운이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백 년 전만 해도 연단사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연단사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며, 동방세가에는 단 두 개의 단약이 있었다. 가주는 상고시대 유적지에서 얻은 단약을 가보로 소중하게 보관 중이었다.

그런데 고약운은 단약을 꺼낸 다음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아가씨는 대체 어떻게?’

여로는 무쇠가 강철이 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듯, 존경과 질투 어린 눈으로 고약운을 살폈다. 사실 그는 그녀가 단약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좀 못마땅했다. 아무리 그녀의 부하가 될 이들이라 해도, 이렇게 후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로, 당신은 이미 단약을 복용할 시기가 지났어요. 무자를 돌파한 이에게 취기단은 아무 효과가 없지요. 그래서 당신의 몫은 준비하지 않은 겁니다. 나중에 내가 무장 고급을 돌파할 단약을 구해다 드리죠.”

여로의 눈빛을 보고, 고약운이 코를 만지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라고?’

여로의 눈이 더 커졌다. 지금 자신의 실력을 무왕으로 끌어올려 주겠다는 말을 한 건가.

‘내가 환청을 들은 거겠지. 그래, 그랬겠지…….’

여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많은 단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희한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장 고급을 돌파하게 할 단약이라니, 그런 기상천외한 단약은 있을 수 없었다.

“아가씨, 아가씨의 호의는 말로만 받겠습니다. 저는 사실 천부적인 재능이 좋지 않았습니다. 소주께선 저를 걱정하셔서, 풍파에서 멀리 떨어져 백신당을 지키게 했지요. 저는 그간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보양하여 천수를 누렸습니다. 저는 제 재능의 한계를 압니다. 아마 평생 돌파할 수 없을 겝니다.”

여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고약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여로, 저를 도와서 이 단약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세요. 이 취기단은 수련자들이 영기를 모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당 한 개씩 복용해야 하고, 효과를 본 뒤에 한 개를 더 복용하면 됩니다.”

‘수련자들이 영기를 모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고약운의 수려한 얼굴을 쳐다봤다.

여로는 그들의 손에 단약이 든 도자기 병을 쥐여 주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단약을 복용한 후, 곧 수련에 돌입했다.

곧이어 영기가 사람들 주변에 모여 녹색 안개를 형성했다. 만약 다른 이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얼마나 짙은 영기가 모여야 이런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순간 모두 긴장의 끈을 조금도 놓지 않고 최대한 집중해서 수련하고 있었다. 외부의 소음이 그들과 차단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