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잠을 이루지 못하다
사방화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발을 젖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손님들을 위한 긴 탁자와 의자, 진귀한 골동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침상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침상에는 심지어 가림막 조차 없었다.
청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 방은 지금껏 사람이 한 번도 살지 않은 것 같았다. 사방화는 또 어디를 살펴봐야 할 지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난로에 불이 없구나. 들어와서 불을 피우거라.”
진강이 방 안에서 명령을 내렸다.
사방화는 빠른 걸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방 중앙에는 난로가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석탄과 목탄, 장작들이 있었다. 방에서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강은 긴 침상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사방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사방화는 그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친왕부의 공자였다. 보통 공자들은 모시는 시녀를 한두 명쯤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는 어찌하여 시중드는 사람도 두지 않고, 이리도 추운 방에서 지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영친 왕비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는 분명 영친 왕비의 친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청언이 매일 방과 정원을 청소하고, 난로를 피우고, 물을 끓이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제 네가 왔으니, 오늘부터 이 방을 청소하는 것은 네 몫이다. 정원 청소는 청언이 계속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어라.”
진강은 옷의 주름을 펴면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점은 꼭 기억하여라.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내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
사방화의 눈이 그를 가만히 훑었다. 알고 보니, 그에게 결벽증이 있는 것 같았다.
“빨리 불을 피우거라.”
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더니, 이내 신발마저 벗고 침상에 가서 누웠다.
사방화는 잠시 자리에 서 있다가, 목탄과 장작을 들고 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난로 불을 피웠다. 잠시 후, 난로 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방안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불꽃도 튀지 않고, 연기도 나지 않는구나. 솜씨가 나쁘지 않다.”
진강이 침상에 누워 칭찬했다.
“청언보다 낫구나. 밖에 주전자가 있으니 난로 위에 올려 두어라. 물이 끓으면 차를 한 잔 내오너라. 찻잎은 서랍장 첫 번째 칸에 들어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가 주전자에 깨끗한 물을 받아왔다. 그녀는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은 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지켜봤다.
“바닥이 차니, 저쪽에 있는 침상에 누워서 기다리거라.”
진강이 말했다. 사방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니, 진강이 몸을 돌려 그녀를 등지고 누워 있었다.
“네가 왕부에 오자마자 추워서 병에 걸리면 내 탓이니, 내 말을 따라라.”
사방화는 잠시 생각한 후, 말없이 일어나 그의 맞은편 침상에 가서 눕고는 바로 눈을 감았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사방화는 일어나 난로 옆으로 갔다. 그녀는 찻잔에 먼저 뜨거운 물을 따라 한 번 씻어 버린 후, 다시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잠시 후, 찻잔에 차가 우러나왔다. 사방화는 잔을 들고 가 진강에게 건넸으나 그는 여전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내 사방화가 침상을 살짝 차며 그를 깨웠다.
진강이 몸을 돌린 그 때, 갑자기 불빛이 그녀를 비췄다. 사방화가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진강이 재빨리 일어나 찻잔을 받은 후,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진강이 아무런 말이 없자 사방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있는 그가 보였다.
“이제 가서 자거라.”
진강이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물러가라 일렀다. 사방화는 자신의 방으로 가 이불을 걷고는,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방 안에서는 진강이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방화는 잠이 오지 않아 침상에 누워 눈만 감은 채 스스로를 탓했다.
‘무명산에서 보낸 8년의 세월 중, 지난 3년간은 나와 견줄 적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갇힌 걸까? 어떻게 남의 집 시녀가 된 거지?’
반 시진 후,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에선 가볍게 숨 쉬는 소리만 들려왔다. 술을 마신 사람들이 잠에 들면 보통 코를 골거나 잠꼬대를 하는데, 진강은 그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성정은 좋지 않았지만, 이런 무방비한 상황에서조차 그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술에 진탕 취한 상황에서도 교육을 잘 받은 명문가의 자제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강은 가끔 예의범절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완전히 무뢰한은 아니었다.
사방화는 최대한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려 노력했다. 그러자 천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깊게 잠이 들었다.
* * *
서쪽 방에 묵고 있는 청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진강 공자가 왜 갑자기 시녀를 들인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극단에서 벙어리 소녀를 데리고 오다니? 또, 며칠 전에는 막북에 가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따라가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자신이 들던 시중도 들지 말라고 하신다. 청언은 점점 더 진강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 * *
한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영친 왕비였다. 영친 왕비는 방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줄곧 옆에 있는 시녀에게 재차 확인했다.
“진강이 그 여자아이를 시녀로 둔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공자님을 따라 낙매거로 갔습니다.”
시녀의 이름은 춘란(春蘭)으로, 영친 왕비가 영친왕부에 시집온 이후부터 계속 그녀를 모셔온 사람이었다. 춘란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인들이 전하길, 이미 낙매거의 불이 꺼져있어 전부 쉬고 계신 것 같다 합니다.”
“진강은 8년 전 집을 나가 이틀 만에 돌아온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옆에서 자신을 모시던 시녀들을 전부 쫓아내고 오직 청언만 남겨두었지. 궁 안, 임 태비마마께서도 진강에게 시녀를 두는 게 어떠할지 슬쩍 말을 건네 보셨는데, 단박에 거절당하셨다. 종실에서 보내온 시녀들도 전부 쫓아내버린 진강이 이번엔 대체 어떤 연유로 시녀를 들인 건지 모르겠구나.”
영친 왕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아이가 진강 공자님의 마음에 든 것이 아닐까요?”
춘란이 말했다.
“왕비마마께서 보실 적에, 그 아이가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습니까?”
“그 아이는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매우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벙어리인 게 마음에 걸린다. 혹, 진강이 정말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나중에 측실(側室)로 삼는다면 어찌해야 할까? 진강은 작위를 받을 사람이다. 한데 어찌 벙어리를 측실로 들이겠느냐?”
영친 왕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왕비마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마세요. 기실 방으로 들인다 하여도, 첩으로 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측실로 삼으신다 한들, 그 아이가 벙어리인 게 어떻습니까? 공자님의 신분이 고귀하신데, 감히 누가 그것을 흠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춘란이 영친 왕비를 위로하며 말했다.
“네 말이 틀리지 않다.”
표정이 밝아진 영친 왕비가 금세 웃음을 머금었다.
“진강은 다른 가문의 영식들과 달리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청음만은 진강의 옆에 있게 됐구나. 허니, 나는 청음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진강은 이미 열여섯이나 됐고, 설이 지나면 이제 열일곱이 된다. 아내를 맞이할 나이이지. 이제는 규방의 일에 대해서 논할 때가 됐다.”
춘란도 웃으며 말했다.
“측실을 들이는 일이라면 진강 공자님의 의견을 들어봐야 합니다. 공자님이 원하신다면 왕비마마께서 아무리 반대 하시어도 뜻을 꺾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공자님이 싫다 하시면 왕비마마께서 아무리 원하셔도 일을 성사시킬 수 없으시겠지요.”
“네 말이 맞다.”
영친 왕비는 웃으며 말했지만, 내심 속이 상하였다.
“옥완(玉婉)을 회임하였을 때, 만약 여식을 낳으면 진강과 혼인시키기로 하였지. 한데 안타깝게도 옥완이 여식을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나 그 일을 언급조차 하기 힘들구나.”
“충용후부의 아가씨는 매일 병상에 누워 있다 합니다. 점점 더 몸이 안 좋아지시나 보더군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말씀하시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왕비마마께서 비록 옥완 마님과 절친한 친우 사이셨다 하지만, 진강 공자님이 몸이 약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셔야 되겠습니까?”
춘란의 말에 영친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춘란은 영친 왕비의 모습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진강 공자님의 혼사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와 영친왕께서 다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저희 영친왕부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겠지만, 충용후부는 다릅니다. 어찌되었든 충용후부의 아가씨께서 몸이 약하시다면, 이 혼사는 쉽게 이루어지진 않을 것입니다.”
영친 왕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 옥완은 내 유일한 벗이었지……. 그만하자! 이 일은 왕야와 다시 상의해 봐야겠다.”
춘란이 웃으면서 왕비를 침상으로 부축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몸이 약하시니, 이 일은 그만 생각하시고 빨리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영친 왕비가 눈을 감고서 춘란에게 말했다.
“날이 어두워 청음의 용모를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니 내일 다시 불러오너라.”
“네.”
이윽고 춘란이 침상의 휘장을 내렸다.
* * *
영친왕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졌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충용후부의 영복당(榮福堂)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사묵함은 충용후부로 돌아온 후, 바삐 걸어 영복당으로 향했다. 충용후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사묵함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충용후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조부님, 이제 어찌 해야 할까요?”
“어찌 하겠느냐? 진강과 그 애의 팔자가 상극인 것을!”
충용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방도를 생각해내야지요. 계속 진강의 시녀로 살게 할 순 없습니다. 누이는 나중에 시집을 가야 하는데, 이 일이 알려지면 어찌 합니까?”
사묵함의 조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흥, 소문이 나면 진강에게 시집을 가야지, 별 수 있겠느냐?”
충용후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 말에 사묵함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