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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B와 D 사이의 어디쯤 (10)

131화. B와 D 사이의 어디쯤

스모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연신 내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소드마스터. 당신이 콜레오넬 가문의 의뢰를 받았다는 걸 알고 있소. 그 의뢰를 포기하면 500억 케이달러를 주겠소."

"······500억?"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강현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건 놀람의 신호였다.

스모커의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코앞에 칼을 들이밀 때도 무미건조하던 강현재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그것도 놀라움이 떠올랐으니까.

그는 여기서 단번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오. 만약, 우리의 의뢰까지 들어준다면 1,000억 케이달러를 약속하겠소."

무려 1,000억!

돈을 녹여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은 이 소울 시티에서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

이 정도 돈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기엔 충분한 돈이었다.

"흐음······."

턱을 쓸어내리는 강현재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놀람 이후에 호기심. 이건 분명 긍정적인 신호였다.

"우리라······ 의뢰인이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비밀이오. 하지만 당신이 의뢰를 맡겠다고 하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겠소?"

"흐음······."

강현재가 또 한 번 고민 가득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단순히 의뢰를 포기할지, 아니면 의뢰를 받아 1,000억을 챙길지 고민하는 게 틀림없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 주변에서 떠받들려도 결국 해결사는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애초에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해결사 따위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스모커는 흔들리는 척하는 강현재의 등을 떠밀어주기로 했다.

"단순히 포기만 해도 500억이고, 마지막 한탕 거하게 하면 1,000억이오. 이대로 은퇴해도 될 돈이지. 그렇게 고민할 게 아니지 않소?"

은퇴.

모든 해결사들이 꿈꾸는 미래다.

그걸 저렇게 젊은 나이에, 그것도 거부가 되어 은퇴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해결사도 망설이지 않을 거다.

그런데······.

"내가 뭘 고민하는 줄 알고?"

강현재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고민으로 찡그린 미간 대신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 의뢰를 포기만 할지, 우리 의뢰까지 들어줄지 고민하는 거 아니오?"

스모커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거절은 염두에도 없고, 단순히 의뢰만 포기할지, 아니면 칼까지 거꾸로 잡을지를 고민하는 게 '맞다'는 뉘앙스로.

그러자 강현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아니. 너의 어떤 구멍에 담뱃불을 붙여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모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렸다. 풍랑을 만난 조난선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는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대, 대체 왜······? 설마 그 돈을 포기하겠다는 말이오? 그 어마어마한 돈을!?"

"왜? 해결사 따위가 돈 대신 명예를 선택한 것 같아서?"

"······!"

대놓고 물어오는 질문에 스모커가 움찔했다. 강현재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간 것 같았다.

그 순간 스모커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의 의중을 떠보며 파악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가 자신의 의중을 떠보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스모커가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다시! 다시 생각해보시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를 조금 더 이곳에 발을 묶어야 한다.

"최소 500억! 잘하면 1,000억이오!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만한 금액이 아니란 말이오!"

스모커는 필사적으로 항변하며 강현재의 눈동자를 살펴봤다.

하얀 부분보다 검은 부분이 더 많은 강현재의 새까만 눈동자는, 변화하는 그의 입꼬리나 표정과 대비해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거대한 밤바다의 고요 같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저리 멀쩡한 거지?'

스모커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어두운 조명 아래 구름처럼 떠다니는 연기를 향했다.

이곳을 가득 메운 연기엔 특수한 화합물이 섞여 있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이성을 뒤흔드는 일종의 미약이자, 마약이다.

스모커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끌어냈던 이유이고, 자신 있게 강현재를 이곳으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멀쩡한 거냐고!'

설마 아직도 시간이 부족하단 말인가?

스모커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다시 말하겠소! 무려 1,000억이오! 1,000억! 그 돈이면 당신의 인생이 달라진단 말이오!"

"인생이 달라져? 인생이 뭔 줄 알고 달라진다고 하는 거야?"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감상하듯 스모커의 변화하는 얼굴을 구경하던 강현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스모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는 말, 혹시 들어봤나?"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힌트를 주지. B는 Birth, D는 Death. 이 사이에 C는 뭐일 것 같아? 네가 맞추면 의뢰를 포기하도록 하지."

"의, 의뢰를?"

난데없는 퀴즈에 스모커가 강현재의 눈동자를 살폈다. 여전히 거대한 밤바다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다.

그럼 이 퀴즈가 100% 본인의 의도라고?

'아니다. 뜬금없이 퀴즈를 냈다는 것 자체가 약효가 돌고 있다는 뜻! 거기에 마치 도박처럼 의뢰까지 거는 걸 보니, 소드마스터도 서서히 약에 취해가는 거야!'

스모커는 확신했다.

이대로 시간만 더 끌면 자신의 의도대로 소드마스터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겠다고 말이다.

"B와 D 사이의 C······? Choice? Catch? Control?"

그는 천천히 단어를 하나씩 불러가며 강현재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시간도 끌어야 하지만, 정답을 맞혀버리면 단번에 계약을 맺을 수 있을 테니.

"Chance? Change······ 어? Change? 체인지로군!"

스모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바보 같은!

"정답은 체인지요! 인생이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오! 하하하! 바로 오늘처럼!"

스모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드마스터는 처음부터 답을 알려주고 문제를 낸 거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그 돈이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던 말이 문제였으니 말이다.

즉, 소드마스터는 이미 자신과 새롭게 계약을 맺기로 결정한 게 틀림없다!

그런데······.

"씨발."

"······? 에?"

강현재가 난데없이 쌍욕을 내뱉었다.

당황한 스모커가 벙찐 얼굴로 강현재를 쳐다봤다. 설마 정답을 맞혔다고 욕을 한 건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발이라고."

"그게 뭔······?"

"좆 같은 소리냐고? 맞아. 인생은 좆 같다는 소리니까."

그러면서 스모커를 바라보며 섬뜩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오늘처럼."

"······!"

그 순간 스모커의 온몸에 소름이 쫙하고 돋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던 스모커는 남은 공간이 얼마 없는 걸 깨닫고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시만! 나는 중개인이오! 날 건드린다면 사방에서 녹화된 영상이 곧바로 중개인연합과 SCPD로 전송될 거요!"

강현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네 아랫구멍을 만인에게 공개하는 것도."

"그, 그게 무슨······ 허억? 서, 설마!"

뭐가 생각났는지, 스모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현재의 비틀린 입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경고했지? 다른 구멍으로 담배를 피우게 해주겠다고. 난 내뱉은 말은 지킨다."

"자, 잠시! 잠시만! 으, 으으윽! 끄아악!"

* * *

어두운 실내.

사방엔 창문조차 없어 빛이라곤 드문드문 박힌 조명이 전부인 공간.

그런 희미한 조명 아래, 스멀스멀 연기가 올라온다.

한 줄기, 두 줄기 피어오르던 연기는 이내 모락모락 모닥불처럼 치솟았고, 곧 자욱한 안개처럼 사방을 집어삼켰다.

"읍! 으으읍!"

그런 안개 속에서, 그 안개를 만든 스모커가 괴로운 듯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놈은 입안에 한가득 담배를 문 채로 양쪽 눈엔 눈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실수로 입으로 숨을 쉴 때마다 담배 뭉치가 빨갛게 타올랐다.

"왜 그러지? 네가 좋아하는 담배를 마음껏 피우게 해주는데."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으읍! 으으읍! 끄으으읍!"

스모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어깨와 가슴의 옷이 갈라지며 붉은 핏자국이 내비쳤다.

"조심하라고. 자살하고 싶은 게 아니면."

"으읍! 읍읍!"

스모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죽기는 싫은 모양이다.

스모커는 지금 체인소드에 묶여있었다. 사이버웨어가 흔한 이 세계에서 밧줄로 묶는 건 턱도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인소드는 훌륭했다. 억지로 풀기도 어렵지만, 조금만 방심하거나 딴짓을 하면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니 말이다.

"그거 다 피우면 다른 구멍으로도 맛보게 해줄까? 나도 네 아랫도리를 구경하긴 싫지만, 네가 정 원하면 해줄 수 있어."

"으으으읍! 으으읍!"

놈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줄줄 흘러나오던 눈물과 콧물이 사방으로 후두둑하고 떨어져 내렸다. 조금 짠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은 내 등 뒤를 힐끔거렸다. 어딜 보는지 알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시계는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중독되지 않아서? 아니면 경찰이 올 때가 됐는데 안 와서?"

"······!"

스모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난 이게 재밌더라. 꼭 사람들은 칼잡이가 문명과 담쌓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지."

스르릉.

나는 칼을 뽑아 스모커의 눈앞에서 까딱거리며 말했다. 희미한 조명에 반사된 반사광이 놈의 눈동자에 부딪혀 반짝였다.

"처음부터 이상하더라고. 내 기억엔 흡연자들도 담배 연기를 싫어했거든. 그런데 여긴 담배 연기보다도 더 고약한 냄새가 가득하단 말이야? 덕분에 해독제를 미리 먹을 수 있었지."

물론 거짓말이다.

내겐 해독제가 필요 없다.

기프트 「초재생」.

지금도 심장에서 뿜어지는 거센 혈류가 실시간으로 연기에 섞인 화합물을 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신고하는 건 막아놨지 않았겠어? 네 덕분에 수배까지 떨어졌는데."

"······."

스모커의 눈엔 의문이 가득했다.

어떻게 했나 싶겠지. 이곳은 평범한 건물이 아니라 중개인 사무소. 웬만한 기업의 보안은 가뿐히 뛰어넘는 방화벽이 구축되어 있었다.

"내 사이버러너가 메가코프도 인정한 능력자라는 건 몰랐나 보군? 네가 구축한 구닥다리 방화벽은 장난 수준도 되지 않아."

"······."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마치 '그런 사이버러너가 왜 칼잡이 따위와?'라고 묻는 듯한 눈이다.

"못 믿겠나?"

나는 놈의 눈앞에서 흔들던 칼날을 조금 더 움직였다.

스으윽.

칼날이 놈의 뺨을 스친다. 그대로 갈라진 피부에서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놈의 눈빛에 공포가 깃들 무렵,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신고를 넣은 게, 내가 첫 번째로 거절한 직후더군. 나보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면서 뒤에선 이미 신고를 넣었던 거지. 쥐새끼같이."

"······!"

놈의 얼굴이 재밌다.

처음에 불신에 가까웠던 눈빛이 경악으로 바뀌었고, 나중엔 절망과 공포로 변했다. 그 짧은 사이에 눈 밑이 시커멓게 죽었다.

나는 칼날로 놈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길게 말은 안 하지. 수배해놓은 거 정상으로 돌려놔."

그리곤 단번에 칼을 휘둘러서 놈이 물고 있던 담배 뭉치를 한꺼번에 잘라냈다.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웠던 담뱃불이 깔끔하게 잘린 채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팔랑팔랑.

놈의 앞머리 몇 가닥도 함께.

"······."

스모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스모커 사무실을 나섰다.

어둡고 고약한 냄새가 가득했던 곳에 있다가 밖에 나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바깥도 매연과 어디선가 풍겨오는 쾌쾌한 쓰레기 냄새가 느껴졌지만, 저 안보다는 나았다.

-마스터. 너무 봐준 거 아닙니까?

그때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스모커?"

-네. 저래서는 딴 마음 먹을 것 같은데요.

아?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거였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지."

-네?

"딴 마음 먹어야 한다고. 일부러 그랬으니까."

사이버펑크의 악몽 (1)

132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내가 스모커에게 손을 쓴 건 분풀이도 있었지만, 일부러 놈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의뢰인을.

"중개인들은 절대 의뢰인을 불지 않아. 비밀 유지는 중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지. 스모커가 이 도시에서 중개인 생활을 접을 게 아니라면 말이야."

물론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또 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진짜 놈을 죽일 순 없었다.

해결사가 중개인을 죽인다면 앞으로 해결사 일은 못 한다고 보면 된다.

이건 로제나 알리오가 커버를 쳐줄 수도 없는 일이다. 중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개인 연합이라는 게 있는 거고, 다섯손가락이라는 우두머리가 존재하는 거니까.

그리고 경찰이 나를 쫓는 것도 그때는 진짜가 될 테지.

스모커도 그걸 알기에 입을 열지 않은 거다. 내가 고문 아닌 고문을 했어도 차마 죽이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개인이 해결사를 죽이려 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그건 정상참작이 가능하다.

더불어 스모커 뒤에 숨어있는 의뢰인을 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게 이 도시의 의뢰 생태계였다.

중개인과 해결사. 악어와 악어새.

나름 강력한 제재로 선을 그어났지만, 누군가 선을 넘는 순간 데스매치는 허용된다.

즉, 나는 놈들이 나를 치도록 유도한 거다.

그래야 정당방위가 성립되니까.

-와······ 마스터, 대단하세요! 그래서 코드를 심어놓으라고 하셨군요?

"그래. 언제라도 원할 때 문을 열어야 하니까."

나는 이브에게 스모커의 사무소에 악성코드를 심어놓으라고 지시했다.

만약 일이 벌어진다면 스모커에게 남은 경우의 수는 2가지.

도망가거나, 자신의 사무소를 완전히 폐쇄하고 숨거나.

어떤 경우라도 심어놓은 코드는 큰 도움이 될 거다.

도망친다면 사전에 알려주는 알람이 될 테고, 만약 사무소를 폐쇄하고 안에 틀어박힌다면 자물쇠를 열어주는 만능키가 되겠지.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이브가 탄성을 내뱉었다.

-마스터! 어떻게 이렇게 악랄한 생각을!

"······악랄한 게 아니라 영리한 거라고 해줄래?"

나는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네, 마스터! 저도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마스터를 본받도록 하겠습니다! 영리한 마스터에게 어울리는 영리한 AI가 될게요!

"그, 그래."

나는 묘하게 텐션이 높아진 이브의 목소리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지?

* * *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홀로그램 속 여인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앞에서 힘없이 담배를 태우던 스모커를 발견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좋은 소식은 아닌가 보군.

스모커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항상 포마드로 정갈하게 빗어넘겼던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고, 흰색 셔츠엔 옅은 핏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다.

무엇보다 뺨을 가로지른 자상과 시커멓게 죽은 눈 밑. 그리고 세상 다 산 것처럼 힘없어 보이는 눈빛까지.

몸 쓰는 일을 하지 않는 중개인이 이런 상태가 됐다면, 당연히 좋은 소식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소드마스터가 우리 요구를 거절했소."

-의뢰대금을 정확히 말해준 거 맞아요? 해결사가. 그것도 칼잡이 따위가 1,000억을 포기했다고요?

여인의 얼굴이 불신이 서렸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 만약 있다면 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목숨도 돈으로 거래되는 세상.

그게 바로 이 사이버펑크 세계다.

그런데 그 돈을. 무려 1,000억이나 되는 돈을 포기했다고? 일개 칼잡이 따위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오. 아니면 몸값을 더 높이려고 하던가."

-흥! 1,000억도 과하게 쳐준 건데 어딜 건방지게!

얼굴을 구긴 여인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군요. 말 안 듣는 칼은 부러뜨리는 수밖에.

어차피 목적은 콜레오넬의 의뢰가 실패하는 것.

칼을 회유할 수 없다면, 부러뜨려서라도 의뢰는 실패해야 했다.

"······정녕 그를 치려고 하시오?"

말없이 담배를 태우던 스모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짙은 혼란이었다.

직접 겪어본 소드마스터는 들어왔던 소문과는 너무도 달랐다.

처음엔 그를 둘러싼 소문들이 터무니없이 과장됐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소문이 과하게 축소됐다.

일개 해결사? 무식한 칼잡이? 그건 소드마스터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그 자체로 완성된 존재였다. 언젠가 마주쳤던 이 소울 시티의 전설들처럼.

하지만 여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왜요? 내가 못 할 것 같아요?

잔뜩 날이 선 뾰족한 목소리.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소드마스터란, 그저 도구처럼 다루는 해결사일 뿐이었다.

이해는 됐다. 그녀의 출신이. 그녀의 배경이라면 그게 맞았으니까.

그리고 스모커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소드마스터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자는 진짜 막 나가는 자요. 우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아챈다면 분명 보복할 거요."

잠시 머뭇거리던 스모커가 입을 열었다. 차마 소드마스터가 두렵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했지만, 말투에 섞인 은은한 두려움까진 숨기지 못했다.

다행히도 홀로그램 통신 때문인지, 스모커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내가 누군지 잊었나요? 그따위 칼잡이 나부랭이는 내 털끝도 건들지 못할 거에요!

"······."

스모커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꾹 참았다.

'그럼 나는 쌍년아!'

간신히 욕을 내리누른 스모커가 말했다.

"웬만한 해결사론 그를 상대할 수 없을 거요. 지난 1년간 그는 이 도시에서 충분히 전설을 써내려간 자니까."

-해결사들이 의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니오. 이 도시엔 당신이 아는 것처럼 자신의 목숨보다 돈에 미쳐있는 해결사들은 널렸으니까."

-그런데요?

"내 말은 그런 해결사들로는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오. 오히려 경각심만 심어주겠지."

그럼 보복을 하기 위해 소드마스터는 칼을 꺼내 들 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칼끝은 자신에게 먼저 향하겠지. 저 쌍년이 아니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스모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전설급 해결사를 고용할 수도 없소.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절대 소문을 막을 순 없을 테니까. 그럼 셀리케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순식간이오. 그렇게 되면 나는 물론이고 당신도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지."

스모커는 눈에 뻔히 보이는 암울한 미래에 승부를 걸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여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흐응. 그럼 간단하군요.

"······? 뭐가 간단하단 말이오?"

스모커는 이 여자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려서 이번 일은 그냥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는데······.

-전설급들을 제외하고선, 어차피 해결사들 수준이야 거기서 거기일 테니······ 암살자를 보내면 되겠네요.

"아, 암살자를······?"

스모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 역시 암살의뢰를 안 받아본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 일을 행하는 대상은 해결사들이었다.

하지만 암살자는 다르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

이 깊고 음습하고 더러운 도시의 뒷골목에서도, 가장 아래 어두운 곳에 머무는 자들이다.

암살자가 개입하는 순간, 이 일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각자 잘하는 일이 있잖아요? 해결사가 시키는 일을 잘하는 말 잘 듣는 개라면······

여인의 올라간 입꼬리가 서서히 뒤틀리며 싸늘한 입매를 만들었다.

-암살자는 말 안 듣는 개를 때려죽이는 용도죠.

* * *

"말 안 듣는 개라······."

나는 피식 웃으며 태블릿에서 재생되던 영상을 껐다.

스모커 사무소를 털었을 때, 이브에게 은밀히 악성코드를 심어놓으라고 했었다. 나중에 다시 그곳을 방문하는 일이 생겼을 때, 문을 쉽게 열기 위해서.

그런데 이브는 한술 더 떠서 내부 보안시스템까지 해킹해버렸다.

그 결과가 조금 전 영상이다. 이브가 내부 보안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내게 전송해버린 거다.

"그나저나 처음 보는 여잔데, 누구지?"

홀로그램인 데다가 녹화된 영상이라 또렷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처음 보는 여자임은 확실했다. 내 게임지식에도 없는 인물이고.

그런데 무슨 목적으로 나를 방해하려는 걸까?

일단 말하는 것과 태도를 봤을 때 돈도 많고 배경도 빵빵해 보이긴 했다. 하긴, 애초에 1,000억을 베팅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졌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흐음······ 역시 전문가에게 가는 게 빠르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 알아보는 건 나보다 로제가 더 뛰어났다.

* * *

로세툼.

기다랗게 난 창문으로 서서히 저무는 석양의 태양 빛이 흐드러지듯 번졌다.

특수 방탄유리로 저격탄환까지 튕겨내는 무지막지한 유리가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한쪽엔 언제 가져다 놨는지 일자형 소파에 엎어진 데이지가 보였다. 뿅뿅거리는 소리를 보아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엔 빈 과자봉지들이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고, 반쯤 먹다 남긴 우유컵이 3개나 올려져 있었다. 저거저거, 점점 버릇이 나빠지는 것 같다.

내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데이지를 바라보던 와중, 로제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스모커를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수배는 정상적으로 해제됐다. 내가 집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SCPD들이 전부 사라진 걸 보니, 나와 헤어지고 바로 손을 쓴 게 분명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말로."

물론 말만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체인소드로 놈을 묶어서 담배뭉치를 입에 처넣고 협박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잖는가?

"흐응. 그래요?"

반대편에 앉은 로제가 미심쩍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것보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요? 뭔데요?"

로제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나는 단말기를 꺼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나?"

단말기 화면엔 사진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 태블릿으로 전송됐던 영상을 캡쳐한 사진이었다.

"······여자요? 누굴 물어보려고······."

반짝거리던 눈빛에서 레이저가 쏘아졌다.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흘겨본 로제가 단말기 위에 떠오른 사진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일리?"

그리고 바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헤일리? 아는 여잔가?"

"당연히 알죠. 작센가의 차녀니까요."

"작센? 작센이라면······."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이 있다. 특정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세력의 이름이다.

팔짱을 낀 로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맞아요. 다섯손가락 중 하나에요."

"······하?"

스모커 뒤에 누가 있나 했더니, 다섯손가락이 있었다고?

"그런데 이 여자 사진은 왜 갖고 있는 거예요? 홀로그램인 모습까지 저장할 정도로 찾고 싶은 사람이에요?"

로제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목소리에도 그게 선명하게 묻어났다.

그 소리에 엎어져 있던 데이지도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언제나처럼 감정의 고저가 없는 눈빛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했다.

"이 여자가 스모커 뒤에 있던 의뢰인이야."

"네에? 헤일리가요?"

로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래. 말이 나와서 묻지. 작센가가 왜 이런 짓을 꾸미는 거지? 혹시 내가 받았던 의뢰 중에 놈들과 겹친 의뢰가 있었나?"

"으음······ 그건 아닐 거에요. 당신 의뢰는 제가 꼼꼼히 확인하니까요. 무엇보다 헤일리는 중개인도 아니라고요."

중개인이 아니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중개인도 아닌데 왜 이런 짓을 꾸미는 거지?"

그냥 미친 년인가? 아니면 노처녀 히스테리 뭐 이런 건가? 단순히 분풀이하려고?

'아니. 그건 아니다. 나를 노렸다기보단 분명 이번 의뢰를 노렸어.'

단순한 의뢰 포기에 500억. 거기에 더 똥을 뿌리는 의뢰까지 받는다면 1,000억.

분명 스모커와 헤일리가 제시한 조건은 이랬다.

즉, 내가 아니라 의뢰가 목적이었다. 정확히는 의뢰의 실패가.

'설마 셀리케 연구소를 노린다는 그 미지의 세력이 배후인가?'

이게 가장 확률이 높았지만, 이것도 아닐 가능성이 컸다.

무려 셀리케 연구소를 노리는 세력이 겨우 해결사 하나를 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다? 그것도 이렇게 큰돈을 써가면서?

'이것도 아니면 대체······?'

그때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던 로제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나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사이버펑크의 악몽 (2)

133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짐작 가는 일이라?

"그게 뭐지?"

"헤일리는 카터와 약혼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그 약혼이 깨졌죠."

"······?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여자가 약혼이 깨진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카터는 또 누구고?

"그게 당신······ 아니, 우리 때문이니까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약혼이 깨진 게 우리 때문이라고? 작센가와 만난 적도 없는 내가 약혼을 깼다? 무슨 수로?

"내가 약혼을 깼다고?"

"카터요."

"카터? 헤일리와 약혼했다는?"

"네. 카터는 이자벨 고모의 아들이에요."

"이자벨?"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자벨 콜레오넬.

로제를 죽이려고 발악했던 미친 여자.

결국, 내게 모든 계획이 들통나서 콜레오넬 가문에서 축출됐고, 지금은 생명유지장치에 구속되어 데이터 감옥에 감금됐다고 들었다.

"이자벨 고모와 함께 카터 역시 데이터 감옥에 갇혔어요. 혼자 남겨두면 분명 복수하려고 할 테니까요."

즉, 헤일리 입장에선 신랑과 시댁이 한꺼번에 사라진 셈이다. 그 사달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결혼도 파투났을 테고.

"······그러니까 자기 결혼이 깨졌다고 이런 짓을 벌인다고?"

이해가 아예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화풀이치곤 너무 스케일이 큰 거 아닌가?

1,000억이라는 돈을 자기 분풀이용으로 쓸 수 있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내가 맡은 의뢰는 메가코프의 의뢰다.

만일이지만, 진짜로 셀리케 연구소가 털린 후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정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자존심이 하늘에 닿은 년이니까요. 작센가의 차녀라면 알만하잖아요?"

"흐음······."

확실히 다섯손가락의 가문이라면 이 도시의 귀족 가문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오냐오냐 자랐을 테고, 그 코가 하늘을 찌르겠지.

그런데 그런 귀족 아가씨의 일생일대 이벤트인 결혼이 우리 때문에 깨졌으니······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수를 선택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암살자를 고용한다는 거로군."

"암살자요?"

로제가 화들짝 놀랐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여기까진 예상하지 못한 듯싶다.

"날 죽이려고 암살자를 쓰겠다는군."

"미친년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 할 줄이야······."

"네 말대로 미친년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으니까."

그걸 분간할 이성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꾸미지 않았겠지.

"헤일리가 암살자를 쓴다면, 아마 팬텀을 고용할 텐데······ 괜찮겠어요?"

"팬텀이라······."

네일 오브 팬텀(Nail of Phantom).

통칭 팬텀이라고만 부르는 이 조직은 위치도, 연원도, 모든 게 베일로 싸인 암살자 조직이다.

이 세계에서 암살자로만 이뤄진 조직은 매우 드물었다.

암살의 수요가 없어서?

아니다. 수요는 많았다.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찰력과 치안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기에, 수틀리면 사람을 죽이는 게 흔한 세계였다.

다만,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았을 뿐이다.

돈 몇 푼만 쥐여준다면 사람을 죽이겠다고 뛰어들 사람들은 넘쳐났으니까.

게다가 이 세계엔 해결사와 중개인이라는 독특한 시스템도 있었다. 대가만 충분하다면 해결사들은 얼마든지 암살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레드오션(?) 속에서 암살자들로만 조직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해결사, 용병, 하다못해 길거리 부랑자 같은 대체재가 널렸으니.

그래서 튀어나온 게 팬텀 같은 조직이다.

개나 소나 죽여대는 암살이 아니라, 어떤 보안과 경호 속에서도 유유히 목표의 목숨을 앗아가는 암살자.

용병이나 해결사들로는 대체할 수 없는, 오로지 VIP를 위한 암살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

이게 세계 최고의 암살조직으로 군림하고 있는 팬텀이었다.

'······그리고 로제를 죽이기 위해 이자벨이 고용했던 조직이기도 하지.'

나는 힐끗 데이지를 쳐다봤다. 녀석은 다시 엎어져서 뿅뿅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 이자벨 앞에선 태연한 척했었지만,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는 했었다. 데이지의 무력을 눈앞에서 직접 보긴 했었지만, 팬텀의 악명이 워낙 자자했으니.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데이지는 팬텀의 암살자들을 모조리 격살했다. 대체 몇 살인지 짐작조차 안 되는 얼굴과 자그마한 체구로. 물론 덕분에 절반쯤 고쳐졌던 집이 다시 박살 나긴 했지만.

은퇴한 암살자 데이지.

녀석의 정확한 과거나 능력은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이 상대했다면 나 역시 가능할 거다.

나는 다시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여자 좀 조사해줘. 어디에 주로 머무르는지, 어딜 주로 돌아다니는지."

"어, 어쩌려고요? 설마 죽일 거예요?"

"이 여자 하는 거 봐서."

죽일 필요가 없다면 굳이 죽이진 않는다. 가장 좋은 건, 헤일리가 스스로 물러서는 거다.

하지만 내가 충분히 경고했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를 방해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

내 목소리에 담긴 뜻을 짐작했음일까? 로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헤일리는 작센가의 차녀예요. 죽이면 일이 커질 거예요."

알고 있다. 내가 작센가의 핏줄을 건드리는 순간, 나와 작센가의 사이엔 건너지 못할 강이 생기겠지. 어쩌면 가장 귀찮은 적이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

"······."

"나는 처음부터 이 도시와 싸우고 있었어. 다섯손가락이라도 내 적이 되려 한다면 예외는 아니다."

이 세계에 홀로 빙의된 그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어떤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더라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반드시. 기필코 살아남아 이 세계 위로 군림하겠다고 말이다.

다섯손가락? 메가코프?

어차피 언젠가 꺾고 지나갈 목표에 불과하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알았어요. 대신 신중히 판단하세요. 당신도 알겠지만, 이 도시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으니까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로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던 표정은 사라지고, 대신 걱정과 믿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묘하게 일렁이는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참고하지."

영원한 적은 모르겠지만, 영원한 친구는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 * *

그녀의 방을 나서는데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

뒤를 돌아보니 데이지다. 분명 내가 나오기 전까지 소파에 엎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따라 나온 거지?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나도 같이 가."

······? 같이 가자고?

"······어딜?"

얘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팬텀. 너 혼자 상대하면 죽어."

"······."

나는 물끄러미 데이지를 바라봤다. 여전히 얼굴엔 어떤 표정조차 없다. 특유의 붉은색 눈동자 역시 잔잔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를 걱정해서 도와준다는 뜻인가? 그게 맞겠지?

"고맙지만 괜찮아. 나도 꽤 강하니까. 그리고 지난번에는 너 혼자서도 상대했잖아?"

과거 이자벨이 보냈던 팬텀의 암살자들을 혼자서 상대한 게 데이지다.

나도 그 기억이 있었기에, 팬텀의 악명에도 과감히 직접 부딪히려고 생각했던 거고.

그런데 데이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달라."

"다르다? 뭐가?"

"로제는 일반인. 너는 칼잡이."

"······? 그게 왜?"

"팬텀은 상대에게 맞는 암살자를 보내. 그래야 조직이 돌아가니까."

"······."

너무 생략해서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대충 조합해보자면······.

"······나한텐 더 강한 암살자를 보낼 거다? 그래서 위험한 거고?"

"맞아. 어쩌면 스펙터를 보낼지도 몰라."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설명을 생략한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스펙터? 그게 뭐지? 고스트와 다른 건가?"

팬텀의 암살자를 고스트라 칭한다. 팬텀과 고스트 모두 유령이라는 뜻이 있기에 암살자 조직에 꽤나 잘 어울리는 작명이었다.

그리고 스펙터 역시 유령이라는 뜻이 있으니, 아마 관련이 있겠지.

"응. 고스트보다 강한 암살자. 스펙터는 여태껏 암살을 실패한 적 없어. 12년 전 사우드 시티의 혁명군 사령관을 죽인 것도, 9년 전 바닐라 시티 시장을 죽인 것도, 7년 전 <림 케미칼> 부회장을 죽인 것도 전부 팬텀의 스펙터가 한 일이야."

"잠시······ 잠시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내뱉는 데이지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말투는 무덤덤했지만,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에.

사우드 시티의 혁명군 사령관이라면, 반정부 시위인 사우드의 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 시위는 왕정 도시이자, 메가 시티였던 사우드 시티를 거의 전복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령관이 죽어버려서 결국 반정부 시위는 실패했었는데······ 그게 팬텀의 소행이었다고?

게다가 또 다른 메가시티인 바닐라 시티의 시장은 물론이고, 세계 5대 메가코프 중 하나인 림 케미칼의 부회장도 암살했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뉴스였다. 외부에 알려진다면 언론과 네트워크가 마비될 정도의 폭탄이다.

'······그런데 데이지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 기억에도 없는 걸 보니 인게임 설정에도 등장하지 않는, 그야말로 딥한 정보였다.

이런 정보는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다.

'관계자가 아니라면 말이지.'

나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데이지에게 물었다.

"이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네가 은퇴했다던 암살조직이······?"

차마 말꼬리를 맺지 못하고 늘어뜨렸다.

그때 살짝 눈을 깜빡인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팬텀의 암살자였어."

* * *

나는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그대로 로세툼 2층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나눌만한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2층 데이터 센터.

네트워크 보안을 전부 설계해놓은 요즘은 로제 사무실에 자주 내려가는 듯싶지만, 한때 데이지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 역시 언젠가 봤던 그녀의 집처럼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온통 데이터 서버와 컴퓨터들로만 가득했다.

······간식이 가득 쌓인 진열장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스펙터는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야. 상대를 함정에 밀어 넣고 사냥을 하는 사냥꾼에 가깝지."

데이지가 테이블 위에 먹다 남긴 감자칩을 다시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았던 거로군?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서."

"맞아. 중요한 건 스펙터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거야. 아무리 강해도 함정에 빠지면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이 당하니까."

이해는 간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다만, 스펙터의 함정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지가 모호했다. 바닥에 구덩이를 판다거나, 올가미 덫을 설치하는 걸 말하는 건 아닐 텐데.

"함정은 뭘 말하는 거지?"

"전부."

"전부?"

"장소, 사람, 사건, 그 어떤 것이라도 목표를 끌어낼 수 있다면 가리지 않아."

장소, 사람, 사건이라······.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겐 대부분 해당되지 않는군."

지금 내가 움직일 장소라 봐야 집과 로세툼, 그리고 셀리케 연구소가 전부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 만나는 사람이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나마 변수가 있다면 사건 정도일까?

"네 인맥이 좁고, 집밖에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아."

"······."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들으니까 괜히 방구석 히키코모리가 된 기분이군.

······뭐,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너는 사건에 취약해. 애초에 교통사고만 내려던 해결사를 데리고 노스 마운틴까지 간 것만 봐도 굉장히 즉흥적이지. 놈들은 그걸 노릴 거야."

"나를 자극해서 함정을 깔아놓은 곳으로 유도하겠다?"

확실히 가장 가능성이 크다. 추측이 아니라 불과 하루 전에 벌어졌던 실제 사건이니까. 데이지가 파악했듯, 적들 역시 파악했을 거다.

"우리 역시 그걸 노릴 거야. 내가 동선을 짜줄게. 당분간 그렇게 움직여."

"잠깐만. 우리? 너 진짜 끼어들 거야?"

"무슨 문제 있나?"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려는 거지?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라 네가 있었던 곳이라며?"

그녀가 나를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다. 일전에는 내가 먼저 부탁을 했고,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먼저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심지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체 왜?

"아까도 말했지만, 너 혼자선 죽어."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네가 죽으면 로제가 슬퍼해. 그건 싫어. 너 때문에 우울해하는 것도 그만 봤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나를 도와준다는 게 내가 죽으면 로제가 슬퍼하는 게 이유였냐?

어이가 없다가도, 참 녀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녀석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팬텀에 확실하게 전해야 할 메시지도 있고."

사이버펑크의 악몽 (3)

134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그날부터 나는 로세툼에 머물렀다. 일전에 로제가 말했던 빈방을 사용한 거다.

갑자기 며칠 머무른다는 말에 로제가 의아해하긴 했지만, 확실히 좋아하는 기색이 컸다. 그리곤 아무리 팬텀이라도 이곳의 보안은 쉽게 뚫을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긴 했다.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로세툼의 보안은 웬만한 기업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이 작은 건물에 보안 장비로 투자한 금액이 자세히는 몰라도 수백억은 호가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순 없지.'

데이지의 말대로라면 놈들은 목적을 위해선 사람도 이용했다. 자칫 로제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대신 나는 데이지가 알려준 동선대로 움직이며 33구역 내의 다른 건물을 주로 오갔다.

다소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1, 2층은 중식당으로 사용됐고 3층은 비어있었다.

무슨 건물이냐고 물어보니, 안가(安家)라고 했다. 혹시나 로세툼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옮길 수 있도록 준비한 거라고.

'안가를 사비로 구매하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데이지 역시 부자였다. 하긴, 팬텀에서 은퇴할 정도로 활동했으니 이런 건물 몇 개쯤 더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째 만나는 여자마다 죄다 부자인 것 같네.'

누구는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통째로 건물을 사서 수백억을 들이붓질 않나, 누구는 언제 쓸지 모를 안가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사질 않나.

'나도 건물이나 하나 사?'

불가능하진 않다. 아직 소피아에게 받은 1,000억 가량의 하울 코인도 그대로 있고, 그동안 의뢰로 모은 돈도 수십억이다.

하지만 모은 돈들은 사용할 곳이 따로 있었다. 심지어 아직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아서라. 아직 건물에 욕심부리기엔 내가 완성되지 않았어.'

그렇게 욕심을 접고 이틀. 수련으로 쌓은 부동심이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되기 직전에 데이지가 말했다.

"놈들이 걸려들었어."

* * *

목표를 은밀히 뒤따르던 스펙터47은 당황했다.

'왜 갑자기 저곳으로······?'

목표는 요 며칠 오가던 경로를 바꿔 갑자기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는 긴급히 전뇌 통신을 열었다. 푸른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목표를 쫓았고, 그의 입은 다급히 움직였다.

"목표가 경로를 변경했다. 데이터에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뭐? 어디로?

"아직 모른다. 확실한 건, 목적지로 가는 길은 아니다."

-제길! 일단 놓치지 말고 쫓아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스펙터47은 목표를 쫓았다.

큰길에서 벗어난 목표는 구불구불 이어진 옆길로 들어섰다. 이어서 몇 번의 차도를 건너 도착한 곳은, 한창 건물이 올라가는 공사현장이었다.

'저긴 어디지?'

목표가 공사현장 내부로 사라진 뒤, 스펙터47은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곳에 난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출구는 입구가 유일했고, 그곳은 공사 중인 현장을 가리기 위한 보호 천막과 앞에 쌓인 공사자재들만 가득했다.

'대체 공사현장엔 왜 온 거야?'

스펙터47이 다시 전뇌 통신을 열었다.

"목표가 공사 중인 건물로 들어섰다."

-공사현장? 빌어먹을! 뭔가 눈치챈 건가?

"어떡하지?"

목표가 목적지에서 벗어난 예외상황이다. 원래대로라면 목적지에 설치한 함정에 빠져야 하는데, 일이 꼬여버렸다.

만약 진짜로 목표가 뭔가 눈치챈 거라면, 자신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무언갈 눈치챈 상대에겐 또 그에 맞는 세컨드 플랜이 있으니까.

그런데······.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작전팀 모두 그곳으로 이동한다.

이 작전의 총지휘를 맡은 스펙터9가 이곳으로 집결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뜻은······.

"······그럼?"

-오늘 예정대로 거사를 치른다!

계획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밀어붙이겠다는 뜻.

"······알겠다."

잠시 머뭇거리던 스펙터47이 작게 대답했다.

전뇌 통신이 끊기고, 스펙터47이 골목 사이에서 목표가 사라진 공사현장을 올려다봤다.

이런 예외상황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무언가 찜찜했다.

'아니지. 저자를 쫓을 때면 항상 알 수 없는 시선이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스펙터47이 주변을 슥하고 훑어봤다.

그 어떤 시선도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카메라의 시야조차 피하는 스펙터에게 시선이 따라붙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경과민인가? 하긴, 올해 들어서 거의 하루도 쉬지 않았지.'

그는 이번 의뢰만 끝마치면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는 태양이 늦은 오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오렌지 태양 사이로 무언가 검은점이 나타났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그가 미간을 좁히며 태양을 노려봤다. 저게 대체 뭐지? 비행선인가? 아니면 드론?

사이버아이의 자외선차단 필터를 사용해 검은점을 확인하려는 찰나.

째앵.

검은점에서 한순간 눈이 멀 것 같은 반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자외선차단 필터를 뚫고 그의 시야를 가렸다.

"윽!"

잠시 눈이 멀 것 같은 빛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태양빛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펙터47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였지?'

하지만 다시 봐도 검은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쉴 새 없이 하늘을 오가는 비행선과 배달 드론들만이 가득했다.

* * *

서서히 해가 저물어갔다.

검푸른 하늘에 하나, 둘 인공위성의 반사광이 별빛처럼 하늘을 수놓고, 그 아래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 위로 네온사인 조명과 홀로그램 광고가 어지러이 반짝였다.

어쩌면 낮보다 밤에 더 생기가 넘치는 33구역의 어딘가.

얼마나 공사가 중단된 건지 모를 먼지 쌓인 공사현장에 일단의 무리가 스며들었다.

네온사인 조명의 빛과 그림자 사이를 교묘히 이동하며 은밀히 침투하는 인원들.

그 가장 앞에선 스펙터47은 묘하게 청각을 자극하는 정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바깥에선 시끄러운 말소리와 음악소리, 간혹 어디선가 총소리와 비명도 섞여들어 왔지만, 이곳만큼은 끈적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스펙터47은 부하로 이끌고 온 고스트들과 눈을 맞추곤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탕! 타타타탕!

콰콰쾅! 콰쾅!

그때 총소리와 폭발음이 건물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스펙터47이 고개를 들었다. 이 소리는 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옥상팀과 먼저 부딪쳤나?'

팬텀의 침투는 2개의 경로로 이뤄졌다. 자신이 이끄는 지상팀은 정면 입구로. 스펙터9가 이끄는 팀은 옥상으로.

스펙터47은 고스트들을 이끌고 급하게 계단에 올라서며 잠시 끊어놨던 전뇌 통신을 다시 연결시켰다.

-이게 다 뭐야!

-끄으윽! EMP 트랩이다!

-빌어먹을! 플라즈마 스파이더 웹이다! 피해!

-커헉! 단분자 와이어······!

-레이저 플래쉬다! 시야 전환! 시야 전환!

-끄악! 내 눈!

-엄폐해! 몸을 낮······ 컥!

-칼잡이다! 칼잡이가 나타났······!

옥상팀의 통신은 비명과 고함으로 얼룩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위에선 쉼 없이 총소리와 폭음이 울려댔고,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지 사방에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EMP트랩에 플라즈마 웹? 대체 그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계단을 달리는 스펙터47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공사장이 아니던가? 설마 공사장 경비를 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저 장비들을?

'미친 소리! 지금 언급된 장비만 해도 얼만데 이런 공사현장에 설치한단 말인가? 이건 함정이다!'

뿌드득!

거칠게 계단을 밟는 스펙터47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들이 목표를 함정에 빠뜨렸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함정에 빠져버리다니!

'대체 언제부터 눈치챈 거지?'

이건 하루, 이틀 사이에 준비할 수 있는 보안 장비가 아니다. 구하는 데만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다.

심지어 이런 함정건물까지 구해서 트랩을 설치했다.

즉, 그렇단 소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준비했을 수도!'

일개 칼잡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지능적으로 대응할 줄이야.

기존에 칼잡이에 대해 갖고 있었던 선입견이 모조리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 칼잡이건, 총잡이건,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변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뛰어난 칼잡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은 팬텀의 암살자들이다.

사람 죽이는 건, 전 세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칼잡이의 함정? 까짓거 함정과 함께 통째로 박살 내주마.

-비상비상. 이곳은 최상층. 외부 백업팀 진입 바란다.

그때 기어코 버티지 못한 옥상팀에서 외부백업 요청이 들어왔다.

이 통신은 그들을 포함한 외부에서 대기중인 백업팀들 전부에게 수신될 거다.

"1층 진입팀 올라간다!"

-얼마나 남았지?

"5초!"

-롸져.

스펙터47은 손목에서 특수병기를 뽑아냈다. 오로지 스펙터에게만 허락된 팬텀의 총아가 서린 무기.

쿼크 글루온 플라즈마 블레이드.

(Quark Gluon Plasma Blade)

무엇이든 가르고 녹이며, 절대 끊어지지 않는 초고열 검이다.

카가가각!

스펙터47은 최상층 입구를 가로막은 공사 자재를 통째로 갈라버리며 최상층으로 진입했다.

백업요청이 들어왔다는 건, 상황이 긴박하거나 위험하다는 뜻.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

그런데 정작 진입한 내부는 조용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총소리와 폭음이 난무했는데, 지금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끈적한 적막으로 가득했다.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탄내.

스펙터47과 고스트들은 기묘하게 내려앉은 정적에 자연스레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죽였다.

'뭐지? 전투가 끝난 건가? 결과는 어떻게 된 거지?'

불과 몇 초 전까지 대화했던 전뇌 통신도 조용했다. 마치 그 목소리들이 전부 환청이었나 생각이 될 정도로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아드레날린이 치솟으며 감각이 극대화된다.

바깥에서 들어온 네온사인 조명과 홀로그램의 휘황찬란한 번쩍임이 어둠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소음들을 걸러내고 모든 신경을 이곳에 집중했다.

그렇게 천천히 내부로 진입하자 바닥에 어지러이 널브러진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들과 사이버웨어 파편들.

곳곳에 굴러다니는 팬텀의 보급 무기들과 그 무기를 들고 있었던 크롬 팔.

······그리고 고글과 마스크를 착용한 고스트의 머리들.

그제야 비로소 화약냄새를 비집고 비릿한 피냄새가 확하고 풍겨왔다.

"······!"

그와 함께 온몸으로 소름과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를 여태껏 살아남게 한 본능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려댔다.

당장 도망가라고 말이다.

"제길! 모두 엄폐······!"

스펙터47이 다급히 엄폐를 외치는 그 순간.

"컥!"

"끄윽!"

억눌린 비명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그림자를 짊어 멘 것처럼 어둠에 동화된 형체 둘이 고스트의 목을 꺾으며 나타났다.

"적이다!"

"대응해!"

순식간에 전투로 돌입했다.

고스트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프로페셔널이었고, 뛰어난 암살자였다. 예상치 못한 암습에 먼저 당했지만, 절대 당하고만은 있지 않았다.

팬텀은 암살자 조직이었고, 그들의 CQC(근접 전투 전술) 역시 그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어느새 바닥에 깔아놓은 연막탄에서 연무가 치솟으며 어둠을 하얗게 물들였다.

특수입자가 섞인 연막탄으로 오로지 그들이 착용한 고글로만 연막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고스트의 총에서 불이 뿜어졌고, 특수무기에서 전기다발이 솟구쳤다. 그들은 연막 속에 멈춰선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얀 운무가 온갖 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때 퍽!하고 무언가 터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스트들 사이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EMP······!"

"EMP 트랩이다! 차폐 웨이브 사용해!"

"차폐 웨이브 발동!"

EMP 쇼크를 상쇄간섭으로 중화시키는 차폐 웨이브가 발동했다. EMP 영향을 받은 고스트들의 신음이 잦아들었다.

그 순간.

"커윽!"

"플라즈마 웹이다!"

"거리 벌려!"

"끄윽! 너무 벽에 붙지 마라! 단분자 와이어가 설치되어 있다!"

이어진 트랩들에 고스트들은 분분히 거리를 벌리며 자리에서 멀어졌다.

상대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그들이 살아남는 것도 중요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팬텀의 자산이니까.

그리고 가장 귀중한 자산인 스펙터47은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옥상팀 상황이랑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가 1층에서 들었던 총소리와 폭음소리가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눈앞에서 말이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큭! 레이저 플래쉬다!"

"으윽! 안 보여!"

"시야 전환! 시야 전환!"

레이저 플래쉬는 연막을 꿰뚫어 보기 위해 특수고글을 낀 그들의 시야를 멀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예정대로.

"컥!"

"적이 근접했다!"

"칼이다! 칼잡이다!"

"칼잡이가 목표다! 사살해!"

"어디야!"

"빌어먹을!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어!"

"한 명이 더 있다!"

"확인 불가! 확인 불가!"

"아군 공격에 주의해라!"

목표였던 칼잡이가 튀어나왔다.

이것까지 확인한 스펙터47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뇌 통신으로 들었던 그 혼란이, 사실 단순한 혼란이 아니었던 거다. 철저한 계획으로 만들어진 혼란이었다.

'처음으로 알고 있었어! 우리를 CQC 상태로 유도해 연막탄을 터트리게 하고, 고글을 사용하면 레이저 플래쉬로 시야를 앗아가는 계획이다! 하지만 대체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이건 목표가 팬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팬텀의 CQC를 본 사람은 모조리 죽었다.

설령 어떻게 알아냈다 하더라도 특수연막탄을 꿰뚫어 보는 고글의 유일한 약점이 레이저 플래쉬라는 건 직접 사용하는 그들 외엔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스펙터47의 찌푸린 시야로 서서히 흩어지는 연막탄의 연무(煙霧) 속 연무(演舞)가 보였다.

목표로 보이는 그림자가 창문 없는 창에서 들어온 네온사인 조명 아래 춤을 추고 있었다.

툭.

데구르르.

죽음의 무도를 말이다.

스펙터47의 발치로 마스크를 낀 고스트의 머리가 굴러왔다. 한껏 부릅뜬 눈은 목에 칼이 들어온 이후에서야 본인의 죽음을 직감했을 거다.

잠시 그 얼굴을 내려다본 스펙터47이 발걸음을 뗐다.

파직!

지지지징!

그의 손목과 연결된 「쿼크 글루온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보랏빛 섬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4)

135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백색 운무로 가득한 하얀 어둠이 서서히 흩어지며, 공간은 천천히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백과 흑.

빛과 그림자.

서로를 배척하는 절묘한 간격을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광검이 파고들었다.

카카캉!

무언가와 부딪친 보랏빛 섬광이 사방으로 무지갯빛 불똥을 튀겼다.

하얀 어둠은 번졌고, 검은 어둠은 반짝였다.

보랏빛 광검과 마주한 건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물든 검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고고히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던 푸른빛 검은 타오르는 보랏빛 광검과 부딪치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보랏빛 궤적이 하얀 어둠을 가르면, 푸른빛 궤적은 검은 어둠을 갈랐다.

두 빛의 궤적은 서로 부딪칠 것 같을 때 궤적을 틀었고,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을 때 부딪쳤다.

허수에 진의를 드러내고, 진의에 허수를 찌른다.

그럴 때마다 어둠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으며, 마치 우주에서 쏟아지는 별똥별마냥 불똥을 만들어냈다.

짧은 시간 격렬하게 검을 마주친 둘이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보랏빛과 푸른빛 광검이 마치 조명처럼 둘의 얼굴을 비췄다.

스펙터47과 강현재였다.

"재밌는 무기를 가졌군."

강현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서로의 통성명은 필요 없었다.

"소드마스터······ 대체 네 정체가 뭐지? 어떻게 팬텀 블레이드를 손에 넣은 거냐?"

얼굴을 구긴 스펙터47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팬텀 블레이드?"

"네 손에 들린 광검. 그게 평범한 플라즈마 커터라고 변명하진 않겠지?"

"아? 네 무기를 팬텀 블레이드라고 부르나 보지?"

"모른 척하겠다는 거냐?"

스펙터47이 강현재를 노려봤다. 모른다는 말을 믿지 않는 거다.

그 반응에 강현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야말로 오만한 생각이군. 내 칼을 네가 가진 그 조잡한 무기와 비교하다니."

"갈(喝)! 이 칼은 팬텀의 총아가 서린 무기다! 대답해라! 어디서 팬텀 블레이드를 훔친 거지? 우리 전술은 어떻게 알고 미리 대비한 거야? 대체 네 정체가 뭐냔 말이다!"

늘어뜨렸던 보랏빛 광검이 강현재에게 겨눠졌다.

주변의 어둠을 불사르며 타오르는 보라색 광원. 마치 도깨비불처럼 음울한 그 빛을 바라보던 강현재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나라고 생각하지?"

"······뭐?"

"저기서 죽어 나가는 네 친구들은 보이지 않나?"

"······!"

스펙터47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 이곳엔 소드마스터 외에도 한 명이 더 존재했다.

사전정보에 없던 새로운 인물. 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예상조차 못 했던 인물이.

그리고 그 인물은 지금도 한쪽에서 고스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커다란 소음 없이, 은밀하게 움직이며.

"설마······."

그도 강현재가 되새겨주기 전까지 존재를 잊고 있었다.

저렇게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존재를 잊고 있었다고?

'아니다. 존재를 잊은 게 아니라 존재감이 없다!'

저런 격렬한 움직임에도 존재감을 흐릿하게 하는 걸 넘어서,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능력.

오로지 적의 살육에만 초점을 맞춘 살인기술.

이건 암살자의 전투였다.

"······저자가 팬텀의 암살자라고?"

아니다. 저자는 단순한 팬텀의 암살자가 아니다.

다수의 고스트를 압살하는 능력. 마치 맡겨놓은 목숨을 되찾아 가듯 스치는 족족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작디작은 체구의 단발 소녀.

그 순간, 스펙터47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전 과거, 단 한 번에 불과하지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선물했던 인물이.

"그, 그, 그럴 리가······!"

그때 창밖을 지나간 광고 드론의 네온사인 조명이 순간적으로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그 찰나의 순간, 스펙터47은 똑똑히 목격했다.

피를 뒤집어쓴 작은 악마.

팬텀을 뒤엎고 사라진 붉은 마녀를.

"말도 안 돼······ 저자는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누군지 아는 모양이로군. 이제 대답이 됐겠지?"

강현재의 여유로운 대답에 스펙터47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다! 네놈을 죽이고 내가 직접 물어야겠다!"

"흐음. 이제야 입을 다물 생각인가 보군. 잘 생각했어. 칼잡이는 입이 아니라 칼로 말하는 법이지."

"닥쳐라! 나는 칼잡이가 아니라 암살자다!"

스펙터47이 달려들었다.

보랏빛 광검이 어둠을 가르고 길게 늘어졌다. 그 빛을 푸른색 검이 마주한다.

이윽고 서로 얽혀들어 가는 검격.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검격은 마치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번쩍이는 번개와 같았다.

섬광이 어둠을 가른다. 쾅!하고 부딪칠 때는 무지갯빛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덧 어둠을 가르는 검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번쩍거리며 불똥을 흩날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 검격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리잡기하듯 어둠 속에서 쫓고 쫓기며 서로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이쯤 되니 이게 진짜 인간의 싸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홀로그램 그래픽으로 만든 영상도 이러진 않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승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스펙터47은 시야 한쪽에 주르륵하고 뜬 경고표시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과열경고, 에너지경고, 호르몬경고, 뇌파경고 등등······ 연결된 모든 사이버웨어에서 위험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사이버웨어를 한계 출력 이상까지 쓰고 있다는 경고였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칼이 닿지 않는 거냐! 왜!'

스펙터는 팬텀의 기술과 노하우의 총아가 서린 사이버웨어를 선사 받는다.

인공 심장과 인공 폐. 크롬 본과 탄소섬유 힘줄, 사이버아이는 물론이고, 손목에 숨겨진 쿼크 글루온 플라즈마 블레이드. 신경계와 연결된 스피릿 부스터. 전두엽에 부착된 나노 컴퓨터까지.

스펙터는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살인 병기. 그 자체였다.

목표와 마주한 스펙터가 여태껏 단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다르다! 항상 나보다 촌각이 빨라.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플라즈마 블레이드까지는 이해한다. 어떻게 구해왔거나, 유사한 기술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스피릿 부스터는 다르다. 이 스피릿 부스터야말로 팬텀의 기술과 무수한 실험이 만든 무기였다.

신경계 전체를 부스팅해서 인지와 육체의 움직임을 초월하는 바이오웨어.

이걸 보고 흉내 낸 게 발할라였지만, 발할라의 기술은 아직 미완성이다. 적합자가 많지 않아 착용에 제한이 있고, 부작용도 심해 일정 시간을 넘어가면 뇌가 녹아버린다.

스펙터47이 강현재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 역시 발할라를 이식했다고 여긴 이유였다.

비록 아류작이라 하더라도, 스피릿 부스터의 인지와 속도를 따라잡을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시간을 끌었다. 발할라의 부작용을 알기에. 자신의 속도를 1분만 쫓아와도 뇌가 녹아버릴 거라 여겼기에.

그런데 아니었다.

'크윽······ 한계다.'

시간은 자신이 아니라 소드마스터의 편이었다.

1분이 지나고, 2분, 3분이 지나갔을 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과열로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계 이상으로 달아오른 신경계가 녹아드는 고통. 점점 낮아지는 에너지 출력과 혼미해져 가는 정신.

스펙터47의 움직임은 처음의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론 당한다. 마지막 한 수에 모든 걸 건다!'

시간이 소드마스터의 손을 들어준 이상, 이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펙터47은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급격하게 치솟는 에너지에 시야 한쪽의 경고표시가 요란하게 깜빡거린다.

그는 아예 인터페이스를 꺼버리고, 오롯이 눈앞의 강현재에게 집중했다.

어느샌가 서로의 시선이 격렬하게 얽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 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의 끝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걸.

그때 또다시 건물 앞을 지나는 광고 드론의 조명에 번쩍하고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빛에 녹아든 어둠이 화려한 네온사인 색으로 물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네온사인 조명의 알록달록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어둠이 번개처럼 내려앉았다.

검정 잉크를 들이부은 것 같은 짙은 장막 속에서 보랏빛 광검과 푸른빛 검이 선명하게 교차했다.

"끅!"

짧은 침음과 함께 두 줄기 빛 중 하나가 소멸했다.

스펙터47의 얼굴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 대체 네 정체가 뭐냐······?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는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갖추고 해결사 노릇을 한다고? 스펙터47은 믿지 않았다.

서서히 꺼져가는 스펙터47의 눈을 바라보던 강현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칼잡이."

그리곤 심장을 꿰뚫은 푸른빛 검을 움직여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툭.

데구르르.

여전히 불신과 의문이 서린 눈동자를 한 스펙터47의 얼굴이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털썩 쓰러진 그의 몸을 내려다보던 강현재가 들릴 듯 말 듯 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잡이랑 칼로 싸우고도 이기길 바랐나?"

* * *

세상이 뒤집힌다. 이윽고 사정없이 거꾸러져 굴러가는 시야에 스펙터47은 깨달았다.

자신의 목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목이 떨어져도 잠시는 살아있다더니······ 이런 느낌이었군.'

커다란 감흥은 없었다.

이미 소드마스터의 광검에 심장이 꿰뚫린 이후,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 그저 목이 떨어진 게 추가됐을 뿐이다.

다만, 이어진 소드마스터의 말에 기분이 조금 더러웠을 뿐이었다.

"칼잡이랑 칼로 싸우고도 이기길 바랐나?"

빌어먹을!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결국, 그 말을 지껄인 칼잡이, 소드마스터에게 패배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마침내 굴러가던 시야가 멈춰섰다.

싸늘한 어둠과 숨 막히는 정적이 가득한 실내.

그 시선 끝에 붉은 마녀가 보였다. 그와 강현재의 싸움이 끝나기 전에, 붉은 마녀와 고스트의 싸움이 먼저 끝났다.

당연하게도 붉은 마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진짜 붉은 마녀였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이 전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붉은 마녀의 존재였다.

팬텀에서 공식적으로 붉은 마녀의 사망을 발표했었으니까.

그때 고스트의 시체 앞에 앉아 그 머리통을 열어젖힌 붉은 마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상비상. 이곳은 최상층. 외부 백업팀 진입 바란다."

무미건조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

"······!"

그럴 리 없겠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스펙터47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최소한 그렇게 느낄 정도로 놀랐다.

저 지원요청 메시지. 분명 자신이 전뇌 통신으로 들었던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저 지원요청 메시지는 분명 모든 팀에게 한꺼번에 갈 텐데, 어째서 아직까지 우리만 도착한 거지?

'······설마?'

잠시는 잠시일 뿐. 스펙터47의 의식은 서서히 흐려졌다.

그리고 천천히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그제야 깨달았다.

붉은 마녀가 한 팀씩 따로 호출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백업요청을 들은 팀들은 하나씩 들어와 잡아먹힐 거라고 말이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자신들처럼 말이다.

흐릿한 그의 시선이 붉은 마녀에게 머물렀다. 때마침 전뇌 통신을 마친 붉은 마녀가 그를 돌아봤다.

피와 살점, 시체로 가득한 공간에 서 있는 피에 젖은 소녀. 그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다.

'씨발······ 진짜 붉은 마녀였구나! 이 의뢰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의뢰였어.'

이윽고 스펙터47의 시야가 툭하고 꺼졌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5)

136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어느새 어둠이 자작이 내려앉은 공사현장.

조금 전까지 총소리와 폭음, 비명으로 난무했던 공간은 이제 끈적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통신 범위엔 더 이상 없어. 이게 끝이야."

뚜껑이 열린 고스트의 머리에서 손을 뗀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에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 섞인 짙은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총 4번의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풍경이다.

오로지 팬텀의 암살자 시체로만 가득한 실내 말이다.

"괜찮나?"

나는 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마시며 물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비록 각개격파를 했다 하더라도 연속된 전투는 나 역시 지치게 만들었다. 상대는 암살자들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스펙터로 추정되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인형술사나 다이크처럼 건물 전체를 붕괴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데 꼭 건물을 붕괴시킬 정도의 힘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스펙터는 그렇게 쓸데없이 낭비되는 힘 없이, 오롯이 인간을 죽이는데 집중했다.

그래서 더욱 까다로웠던 거다. 그 정제되고 집중된 살의는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데 최적화되어 있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목이 떨어지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초재생」이 떨어진 목을 붙여주진 않는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괜찮아. 부상도 없고."

데이지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대답했다. 피에 젖은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며 뺨으로 핏물이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굉장히 자극적이고 야성적인 모습이었으나, 그걸 작은 체구의 미소녀가 하고 있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대단하더군. 솔직히 네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어."

데이지가 강한 건 알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힘을 드러낸 모습을 보기도 했고, 로제를 노린 팬텀의 암살자를 격살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진짜' 힘을 드러낸 데이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팬텀의 고스트들을 압도하는 실력일 줄은 예상했지만, 스펙터마저도 손쉽게 상대할 줄은 몰랐다.

물론 팬텀 출신이기에 스펙터의 능력을 모조리 꿰뚫듯 알고 있던 이유기도 하겠지만, 분명 그녀는 그걸 뛰어넘는 본연의 강함이 있었다.

"너야말로. 널 도와준다고 했지만, 어쩌면 내가 필요 없었을지도······."

나를 돌아본 데이지가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큰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쉬운 듯 보였다.

나는 왠지 풀이 죽은 것 같은 데이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네 덕분에 쉽게 해결했으니 충분히 도움은 됐어."

"그래."

데이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말수가 없는 녀석이라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어색한 침묵에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 시체들은 어떻게 할 거지? 이 정도 시체면 처리하기도 힘들 텐데. 네 건물이라며?"

이 자리에 쌓인 시체만 50구는 훌쩍 넘었다. 물론 그중에 팔, 다리, 머리가 멀쩡히 붙은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라서, 실내는 그야말로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공사현장에서 시체 한둘쯤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였지만, 난도질된 시체 50구는 스케일이 다르다. 이건 경찰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다. 잘못한 게 없어도 온갖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

그런데.

"시체는 팬텀이 회수할 거야."

데이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시체를 그냥 놔두겠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팬텀에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체들로 무슨 메시지를 전한다는 거지?"

"고스트의 전뇌 통신을 해킹하면서 일부러 내 흔적을 남겨놨어. 시체를 회수해가면 내가 이 일에 개입했다는 걸 알게 되겠지."

"······일부러 흔적을 남겼다고? 대체 왜? 그러다가 팬텀이 네게 복수를 하면 어쩌려고?"

"복수?"

내 말에 데이지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표정 변화 없는 얼굴에서 비웃음을 발견할 줄이야. 물론 한쪽 입꼬리만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올라갔을 뿐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야. 내 흔적을 발견했다면 팬텀은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거야. 아마 의뢰를 포기하겠지."

"······? 의뢰를 포기한다고? 왜지?"

모르긴 몰라도 의뢰를 포기하면 계약금의 몇 배를 물어줘야 할 거다.

그런데 돈으로 움직이는 암살자 조직이 그런 출혈을 감수하고 의뢰를 포기한다고?

대체 왜?

"그게 계약 내용이었으니까."

"계약?"

"내가 개입한 일에 절대 끼어들지 말 것. 이게 내가 팬텀을 떠나면서 지금의 나이트메어와 맺은 계약이야."

나는 또 앞뒤 다 자르고 정보 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미간을 찡그렸다.

나이트메어? 단어만 풀이하면 악몽이라는 뜻이다. 뜬구름 잡은 얘기였지만, 데이지가 말한 내용의 뉘앙스까지 더하면······

"혹시 나이트메어가 팬텀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건가?"

못해도 팬텀의 간부거나 보스를 뜻할 거다. 아마 계약으로 의뢰를 물릴 정도의 힘을 쥐고 있는 자라면 후자일 확률이 더 높겠지.

"맞아. 모든 팬텀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존재. 남들은 이렇게도 부르지. 사이버 유령들의 악몽이라고."

"사이버 유령들의 악몽······."

작게 중얼거린 나는 데이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좋아. 그것까진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나이트메어와 그런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거지? 넌 은퇴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이트메어가 팬텀의 우두머리고, 사이버 유령들의 악몽이고, 다 알겠다.

지금 내가 궁금한 건 딱 하나다.

데이지가 어떻게 팬텀의 보스와 이렇게 불합리할 정도로 유리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냐는 거다.

데이지의 과거가 팬텀에서도 유명한 건 알겠다. 스펙터가 데이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랜 걸 몇 차례나 봤으니까.

하지만 그게 팬텀의 보스와 이런 계약을 이끌어낼 정도인가?

무엇보다 데이지 본인의 말론 자신은 은퇴했다고 했다.

그럼 은퇴한 암살자에게 어찌 보면 굴욕적일 정도의 계약을 맺어줬다는 건데······ 이게 가능한가? 그것도 평범한 조직도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암살조직이?

그런데 데이지의 대답은 의외로 심플했고······.

"그게 내가 나이트메어 자리를 양보한 이유였으니까."

그 자체로 설명까지 됐다.

"······뭐?"

진짜 '뭐?'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분명 똑똑히 들었는데도, 내가 잘못 들었나 내 청력이 의심될 정도였으니까.

"원래 다음 나이트메어는 내가 될 예정이었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팬텀에 남아있기 싫었지. 애초에 팬텀의 암살자가 된 것도 내 의지가 아니라 전대 나이트메어와의 계약에 의한 거였거든."

"······그러니까 네가 다음 나이트메어가 될 때 그 자리를 양보하고 떠난거다? 양보의 대가가 그 계약이고?"

"맞아. 팬텀의 암살자에게 은퇴란 죽음과 같지. 나는 죽음 대신 악몽을 바침으로써 팬텀을 빠져나온 거야."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즉, 나는 원래 팬텀의 보스가 될 사람과 함께 팬텀의 암살자들을 상대했던 거다.

'다시 생각해도 참 기묘한 인연이군.'

하필 옆집에 살던 여자가 팬텀의 보스 자리를 포기한 은퇴한 암살자였고, 암살로 인해 얽힌 인연이 이렇게까지 이어지다니.

이게 주인공 버프인가?

"왜 웃지?"

나도 모르게 웃었는지 데이지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팬텀의 나이트메어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꼭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내용을 들어보니 팬텀의 보스가 데이지와의 약속을 꼭 지킬 의무는 없어 보였다.

데이지는 팬텀을 떠나길 바랐고, 지금의 나이트메어는 그 자리를 원했다.

즉,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맺은 구두계약일 뿐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허울뿐인 계약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깨질 수 있다.

원래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른 법이다.

"그땐 후회하게 되겠지."

그런데 이번엔 데이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진짜 악몽이 찾아갈 테니까."

* * *

희미한 조명 아래 어둠을 떠다니는 자욱한 연기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선명하게 타오르는 빨간 점 하나.

치이익.

시가 끝이 타들어 간다.

몇 번이나 거칠게 빨간 불빛과 연기를 뿜어내던 스모커는 이내 끝까지 타들어 간 시가를 버리고 새로운 시가를 꺼내 들었다. 재떨이엔 시가와 담배들이 산처럼 꽂혀 있었다.

다시 불을 붙인 시가를 입에 문 스모커가 초조한 눈빛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입술 대신 시가를 잘근잘근 씹는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더불어 공포, 간절함, 혼란스러움 등이 잔뜩 혼재되어 있었다.

그때 통신이 연결된다.

화들짝 놀란 스모커가 다급히 발신처를 확인하니, 그와 연락하던 팬텀의 단말기다.

그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성공했구나!

하지만 그 얼굴이 다시 공포로 젖어 들어간 건, 불과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모커.

단말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

"······!"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지기 어려운 저음의 목소리에 스모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마치 누가 얼음물을 뒤집어씌우기라도 한 듯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알아듣도록 얘기했던 거 같은데, 그게 모자랐나 보군.

"소, 소, 소드마스터······!"

-공격은 네가 먼저 했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알겠지?

"그, 그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담배나 충분히 피워둬라. 죽으면 향냄새도 못 맡게 될 테니.

"자, 잠시만!"

뚝.

스모커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통신이 끊긴 뒤였다.

이 메시지가 전하는 경고는 명확했다.

변명 따위 듣지 않고 그냥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스모커는 단번에 그 뜻을 이해했다.

"······씨발!"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그대로 바닥에 내던진 스모커가 곧바로 사무소를 뛰쳐나갔다.

이 건물에서 버텨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도 보안설비에 많은 돈을 쏟아부은 건물이지만, 상대는 소드마스터다.

그것도 지금은 팬텀의 암살자들을 모조리 죽인 것까지 확인했다.

메가시티의 시장도, 메가코프의 부회장도 암살에 성공한 팬텀을 보란 듯이 역으로 죽였다.

그런 자의 칼을 이런 보안설비로 막겠다고? 그거야말로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그곳이라면 다르지.'

차량에 탑승한 스모커가 그대로 엑셀을 미친 듯이 밟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 본능적으로 백미러를 확인했지만, 뒤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조금은 안심했다.

'그래. 소드마스터가 머무는 곳과 이곳은 거리가 꽤 멀지.'

소드마스터가 자신을 찾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숨어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서 소울 시티를 떠나야 했다.

소드마스터의 싸늘한 눈빛이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고문하면서 중얼거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분명 소드마스터는 날 죽이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야.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스모커가 더욱 악셀을 강하게 밟았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차량은 한참을 달려 10구역에 진입했다.

제10구역.

유일한 싱글넘버링 지역인 1구역과 맞닿은 곳.

차량은 하늘강이 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고즈넉한 저택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스모커가 다급히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헤일리! 헤일리! 문을 여시오! 나 스모커요!"

거대한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스모커가 내부에서 나온 경호원들과 한차례 실랑이 이후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

그리고 잠시 후.

이 저택 상공 수백 미터 위로 특이하게 생긴 거대한 드론 한 대가 나타났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6)

137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강이 보인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고층빌딩에선 하나, 둘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그 빛을 반사하며 마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그런 환상적인 야경을 등지고, 헤일리가 싸늘한 눈빛으로 스모커를 노려봤다.

"여길 왜 찾아온 거죠?"

헤일리의 반응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별장이자, 일종의 은신처였다. 혹시나 외부로 몸을 드러내지 않아야 할 때 사용하는 장소다.

그런데 스모커가 너무 대놓고 이곳을 찾아왔다. 그것도 주변을 잔뜩 시끄럽게 하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거다. 이곳을 아는 자가 저리 경망스럽게 행동했다는 건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차마 스모커를 죽이지 못했다. 아직 그와 함께하는 불편한 동행이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그게······."

아직도 거친 숨이 가라앉지 않은 스모커가 본능적으로 품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입에 문 그 순간, 헤일리가 거칠게 담배를 뺏어 바닥에 내던졌다.

"여긴 금연이에요. 시간 끌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요. 갑자기 여긴 왜 왔어요?"

"후우······"

답답한 한숨을 내쉰 스모커가 흔들리는 눈으로 땅에 떨어진 담배와 헤일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암살이 실패했소."

"······진짠가요? 팬텀이 실패했다고요?"

미간을 찡그린 헤일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스모커를 쳐다봤다.

"내가 확인했소. 팬텀의 암살은 실패요."

"뭘 확인했다는 거죠? 팬텀이 암살에 실패했다고 보고라도 했다는 건가요?"

"비슷하오. 암살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대신, 팬텀이 아니라 소드마스터에게 들었소."

"······누구요? 소드마스터? 그 비천한 칼잡이 말인가요?"

"그렇소. 그가 팬텀의 단말기로 연락이 왔더군."

"하!? 듣던 것보다 능력이 있는 놈이었군요.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칼잡이 따위가 팬텀의 암살을 막아내다니······."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리던 헤일리가 불현듯 스모커를 쏘아봤다.

"그런데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군요, 스모커. 이곳엔 왜 찾아온 거죠? 암살이 실패했다는 소식은 통신으로도 충분할 텐데요."

"그게······"

입이 마르는지 침을 꼴깍 삼킨 스모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가 경고했소."

"경고? 무슨 경고를 했다는 거죠?"

"당신도 알 거요. 중개인이 해결사를 공격한 이상, 정당방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보고 죽기 전에 담배나 실컷 피워두라더군."

스모커가 분하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헤일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놈이 나를 죽이겠다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게 당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라는 건가요?"

무미건조한 헤일리의 태도에 스모커가 이를 악물었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꼬리를 자르려고 하다니!

스모커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익! 내가 죽으면 당신이라고 멀쩡할 것 같소! 나 다음은 당신일 게 뻔한데!"

"흐응······ 그러니까 같이 죽자고 이곳에 찾아왔다? 이 뜻이다? 배신했다는 말을 참 혀가 길게 말하네?"

헤일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갖추던 말투도 묘하게 달라졌다.

그 순간, 스모커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경호원 둘이 스모커의 등 뒤로 다가섰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스모커가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아니아니! 같이 죽자는 게 아니라 같이 살자고 찾아온 거요! 배신을 했다면 이곳에 찾아올 게 아니라 소드마스터에게 붙었겠지!"

"흐음~"

헤일리가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스모커의 바로 등 뒤로 다가섰던 경호원들이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디 계속 지껄여보시죠. 다만, 그 좋은 머리로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예요. 저기 뒤에 보이는 하늘강에 변사체로 버려지기 싫다면 말이죠."

"······아, 알겠소."

목을 움츠린 스모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는 명백히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소. 소문대로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우릴 죽이려고 할 거요. 그가 내게 경고한 것도 그 이유라고 봐야겠지."

"우리?"

헤일리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과 내가 어떻게 '우리'로 묶이는 거죠?"

"바, 발뺌해도 소용없소. 소드마스터는 내 뒤에 의뢰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게 당신이라는 것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알아낼 수 있을 거요. 이 도시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스모커는 필사적으로 연결고리를 잡았다. 자신이 죽는 거로 고리가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생각하는 꼬리 끊기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헤일리는 애초에 그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깔깔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재밌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하핫!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스모커. 그따위 사실은 비밀도 뭣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게 무슨 말······"

"당신 뒤에 내가 있는 걸 소드마스터가 안다고 해도, 그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죠? 나를 죽인다? 소드마스터가?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생글생글 웃는 헤일리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작센가의 핏줄이에요. 해결사라면 모를 수가 없죠. 작센가의 핏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해결사 일로 먹고사는 소드마스터가, 감히 작센가의 핏줄을 건드린다? 가능할 것 같아요?"

헤일리의 흑갈색 눈동자가 스모커를 바라본다. 반짝이는 건지, 광기로 번들거리는 건지 헷갈리는 눈빛.

하지만 그 저의에 깔린 심중은 그녀가 말했던 것 그대로다.

감히 소드마스터는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고귀한 작센가의 핏줄로 태어나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선민의식.

그리고 이 순간에도 그녀는 갑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갑의 위치에 서서 을병정을 내려다볼 거라는 오만함.

'······빌어먹을 썅년.'

그 눈빛을 마주한 스모커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분하게도, 그녀의 생각은 타당했다.

이 도시에서 일개 개인이 다섯손가락의 눈 밖에 난다는 건,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의뢰로 먹고사는 해결사라면 더더욱 다섯손가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다섯손가락은 중개인연합의 대표와도 같은 자리. 다섯손가락의 눈 밖에 난다면 사실상 이 도시에서 의뢰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상대는 평범한 해결사가 아니라 소드마스터니까.'

중개인 자격도 없는 저 철부지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뛰고 있는 스모커는 소드마스터의 명성과 능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하루하루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업적도 눈부시기 그지없는데, 팬텀의 암살까지 막아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소드마스터의 이름은 지금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날 거다.

무려 절대적인 죽음이라고 불리는 팬텀의 암살을 최초로 막아낸 해결사가 될 테니까.

아마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부호들과 기업가들은 어떻게든 소드마스터와 계약하기 위해 발버둥 치겠지.

'무엇보다 소드마스터는 막 나가는 놈이다. 수틀리면 작센가의 핏줄이 아니라 가문 전체와 싸우고도 남을 놈이야.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놈이니.'

스모커는 이 사실과 추측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헤일리. 당신이야말로 소드마스터를 아직 잘 몰라서 하는 말이오. 그자는 진짜 막 나가는 자요. 작센가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당신의 목숨을 지켜주진 않을 거요."

"감히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건가요?"

헤일리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와 함께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르륵 식은땀을 흘린 스모커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당신 가문을 무시한 게 아니오. 소드마스터가 그만큼 앞뒤 가리지 않는 자라는 걸 말하는 거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새 소드마스터와 우정이라도 나눈 건가요?"

"······그렇게 비아냥거릴 게 아니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요."

"흥! 어디 말해보세요. 단, 설득하지 못하면······ 하늘강 수온을 확인하게 해드리죠. 물론 느낄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팔짱을 낀 헤일리가 코웃음을 치며 스모커를 노려봤다. 그녀의 말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죽여서 하늘강에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개좆 같은 쌍년.'

스모커는 조금 더 걸쭉한 욕을 속으로 내뱉었다.

* * *

소울 시티 외곽의 허름한 공장.

수천 평은 될법한 공장 내부엔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최신식 기계설비가 늘어서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환풍구 구멍으로 들어온 달빛이 어둠 속에서 춤을 췄다.

하지만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엔 어떠한 인기척조차 없었다.

한때 쉼 없이 움직였을 라인도 지금은 전원이 끊긴 로봇마냥 제자리에 서 있었다.

대체 뭐하는 공장인가 싶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의 공간에서 난데없이 수백 개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건 안광(眼光)이었다.

"프로젝트 '그랜드 크로스'. 입력 완료. 현 시간부로 작동 개시."

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안드로이드들의 안광 말이다.

* * *

"소드마스터는 이미 그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몸으로 증명했소. 그리고 이번에 팬텀의 암살도 막아냈으니 그 명성은 더욱 높아지겠지."

"그래서요? 본론만 말하세요."

여전히 심드렁한 헤일리의 태도에 속으로 욕을 퍼붓던 스모커가 차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작센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오. 이미 스스로 명성이 드높으니, 작센가에서 의뢰를 틀어막아도 그에게 직접 의뢰가 갈 거란 뜻이오."

"흥! 어떤 의뢰인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고 소드마스터에게 의뢰를 넣는단 말이에요?"

"누가 있겠소? 메가코프겠지."

스모커가 단정하듯 내뱉은 말에 헤일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녀의 가문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이 바로 메가코프였다.

"······메가코프? 그들이 왜 소드마스터 따위에게 직접 의뢰를 넣는단 말인가요?"

"이미 그는 셀리케와 일하고 있소. 이번 의뢰가 성공하고, 팬텀의 암살을 막아냈다는 소문이 난다면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겠소? 안 그래도 림 케미컬 부회장이 암살당한 이후, 모든 메가코프에서 보안인력. 특히, 암살과 관련된 인력을 구하고 있으니 말이오."

"······."

구겨진 얼굴의 헤일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분명 맞는 사실이었다. 림 케미컬 부회장이 암살당한 일은 전 세계적으로도 큰 사건이었으니.

즉, 소드마스터가 정말 눈깔이 돌아서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만약 메가코프의 그늘로 들어가 버린다면 작센가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소드마스터가 아직까지 메가코프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을 텐데······."

"이제껏 그랬지만, 당신을 죽인 뒤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소드마스터는 결코 작센가의 눈치 때문에 당신을 그냥 놔두진 않을 거라는 거요."

"······하아."

헤일리가 한껏 구겨진 얼굴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짜증이 치미는지 거칠게 머리칼을 헝클이던 그녀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스모커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요? 뭘 어떻게 하자는 거죠?"

그 목소리에 스모커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도박에 성공했다! 그녀를 설득한 이상, 이제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소드마스터와 헤일리가 치고받는 동안 자신은 유유히 탈출할 계획을 짜면 된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린 스모커가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약을 팔기 시작했다.

"내게 계획이 있소. 소드마스터가 직접 경고를 해왔다는 건, 이미 분노로 그의 이성이 흔들렸다는 뜻이오. 내가 용병단 몇 개를 섭외해서 소드마스터를 치겠소. 대신 내가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센가의 힘을 사용해주시오."

"······? 혼자 해외로 도망치겠다고요? 미쳤어요?"

헤일리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스모커를 쏘아봤다.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나 했더니, 결국 자기가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는 뜻 아닌가?

그런데 스모커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보시오. 내가 해외로 빠져나가면 소드마스터는 결국 멈추게 되어 있소."

"······? 뭔 소리에요 그게?"

"모르겠소? 소드마스터가 복수를 하기 위해선 우선 중개인인 나를 먼저 쳐야 하오. 의뢰인은 나 다음이지. 이게 순서란 말이오."

"왜 그게 순서죠? 소드마스터라면 내가 뒤에 있는 걸 알아낼 능력이 있다면서?"

"그게 명분이니 말이오. 중개인을 거쳐서 그 배후인 의뢰인을 친다면 연결고리가 이어지지만, 그게 없이 바로 의뢰인을 친다? 그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거요. 진짜 의뢰인인지 밝혀줄 유일한 사람이 중개인이지 않소? 중개인도 잡지 못했는데 바로 의뢰인을 칠 순 없는 거지. 증거도, 자백도 없을 테니까. 즉,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정당방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로 모든 게 다 설명됐다.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뜻은, 그냥 살인을 했다는 뜻이고, 이 말은 곧 범죄자가 된다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범죄자가 되면 작센가문이 문제가 아니다. 도시 전체가 그를 쫓을 거다.

즉.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범죄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소. 이제 왜 나를 해외로 무사히 탈출시켜야 하는지 아시겠소?"

"······."

스모커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헤일리는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저 계획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스모커와 대화를 해보니 정말 막 나가는 성격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소드마스터가 칼잡이라는 게 가장 찝찝했다. 애초에 앞뒤 가릴 정도의 생각을 하는 인간이었다면 칼잡이가 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쉰 헤일리가 스모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물어보려는 찰나······.

"후우······ 좋아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서걱.

무언가 굉장히 이질적인 절삭음이 들려왔다.

비현실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섬뜩한 소리였다.

그리고······.

툭.

데구르르.

더욱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7)

138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푸슈슈슈!

털썩.

목을 잃은 시체 두 구가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잘린 절단면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며 주변을 피로 물들였다.

헤일리의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그녀의 시선이 발치로 굴러온 무언가를 향했다.

그건 그녀의 경호를 맡았던 경호원들의 머리였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난데없이 피를 뒤집어쓴 스모커 역시 몸을 덜덜 떨었다.

그 순간.

"아주 재밌는 계획을 꾸미는군."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목소리가 이러지 않을까 싶다.

헤일리와 스모커. 둘의 시선이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움직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소, 소, 소, 소드마스터······!"

먼저 강현재를 알아본 스모커가 경기를 일으키며 뒷걸음질 쳤다.

툭.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그가 헤일리와 부딪쳤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경호원! 경호워어언!"

"헤, 헤일리!"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는 헤일리의 모습에 놀란 스모커의 시선이 헤일리와 강현재를 바쁘게 오간다.

'씨발! 이 미친년이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스모커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당장 코앞에 소드마스터가 칼을 들고 서 있는데 경호원을 호출하다니? 정녕 죽고 싶어서 미친 건가? 소드마스터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경호원이 오기도 전에 똑같이 목이 잘려 죽는다는 걸 모르는 건가?

소드마스터의 눈치를 보던 스모커가 헤일리와 거리를 벌리곤 양손을 들었다.

자신은 이 비명과 아무 상관 없다는 제스처였으며, 죽기 싫다는 의미기도 했다.

"경호워언! 경호원! 씨발! 빨리 아무나 오란 말이야!"

그럼에도 헤일리는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눈동자가 반쯤 뒤집힌 걸 보니, 충격과 공포로 정신이 나가버린 듯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현재가 불쑥 입을 열었다.

"궁금한가? 경호원이 왜 안 오는지?"

"······!"

"이 저택에 경호원이 총 열다섯 명이 있더군. 입구에 둘, 1층 회랑에 여섯, 2층 복도와 계단에 다섯. 그리고 여기 둘."

"······그, 그걸 어떻게?"

경호원의 숫자를 정확히 짚어낸 강현재의 말에 악을 쓰던 헤일리의 목소리가 멎었다.

대신 다른 의미로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경악에 가까운 조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경호원들. 어떻게 됐을까?"

강현재가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진 듯 올라갔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인상에 비틀어진 웃음이 걸리자, 그 자체만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서, 설마······?"

헤일리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바닥에 쓰러진 두 구의 시체를 향했다.

이들은 평범한 경호원이 아니었다.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으로 전투경험은 물론, 작센가의 지원을 받아 온몸을 전투 임플란트로 도배한 전투 기계들이다.

그런데 그런 경호원이 작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죽었다. 어떠한 기척도, 소리도 없이 접근한 강현재의 칼의 의해서.

인간의 감각은 속일지언정, 전투 사이버웨어의 탐지는 피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강현재는 그걸 보란 듯이 해낸 거다.

그것도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로.

'······이게 그냥 칼잡이라고?'

이건 너무했다. 소문이 과장된 건 숱하게 들어봤어도, 이렇게 축소된 건 처음이다.

이게 정말 그냥 해결사라고? 무식한 칼잡이라고?

'아니, 아니야! 이건 그냥 해결사나 칼잡이 따위가 아니라고!'

직접 마주하고서야 헤일리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왜 칼잡이에 불과한 그의 이름이 겨우 1년 만에 도시 전체로 퍼졌는지.

왜 그 소문들이 하나같이 도시전설과 같은 괴소문으로 취급됐는지.

왜 그에게 과분하기 짝이 없는 마스터급 이명이 생겼는데도 뒷골목이 조용한지.

'······소드마스터! 이자야말로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진짜 검의 주인이다!'

헤일리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쳤다.

"아주 멍청하진 않군. 그러니 비명은 지르지 말도록. 혓바닥을 임플란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

살벌한 경고에 입을 꽉 다문 헤일 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은 더 시끄럽게 했다간 혓바닥을 잘라버린다는 협박이었으니까.

강현재가 만족스러운 듯 작게 미소를 짓더니 이번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스모커가 강현재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헤일리의 난동으로 잠깐 시선이 넘어가긴 했지만, 강현재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명백히 자신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스모커. 담배는 충분히 태웠나? 이제 미련은 없고?"

강현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입가엔 여전히 작은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 모습에 사색이 된 스모커는 냅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주시오! 소드마스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발! 한 번만 믿어주시오! 다신! 앞으론 다신 안 그러겠소! 진짜 죽은 듯이 살겠소!"

"참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뒤통수를 한번 친 것도 모자라, 이곳에서 또 작당모의를 하는 너를 믿으라?"

"그, 그건······!"

강현재의 작게 떠오른 미소가 비틀렸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와 싸늘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가 스모커를 내려다본다.

그 눈빛을 마주한 스모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저 칠흑의 무저갱과도 같은 눈동자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회는 한 번이면 됐지. 두 번이나 주기엔 네 신용이 별로야."

"소, 소드마스터! 나는 죄가 없소! 다 저 쌍년이 시킨 일이란 말이오! 오히려 나는 말렸다고!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 끅!"

다급히 고개를 쳐들어 비명에 가까운 변명을 쏟아내던 그의 목 위로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

짧게 들린 단말마.

툭.

데구르르.

그리고 다급한 표정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스모커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서 헤일리의 발끝에 부딪혔다.

둘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헤일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구두 앞굽을 흠뻑 적신 핏물과 그 핏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스모커의 머리가 보였다.

질끈.

초점이 사라진 스모커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헤일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순간,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공포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죽음의 공포를.

그때 그녀의 귓가로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은 없다. 또다시 방해하면 그땐 네년 목이다."

"······."

공포로 인해 차마 입을 열지 못한 헤일리가 고장 난 시계추처럼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머리를 흔들었을까? 살짝 어지러웠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에게도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언제 사라졌는지, 조명과 그림자의 절묘한 경계에 서 있던 소드마스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한껏 고조됐던 긴장이 한꺼번에 탁!하고 풀리며 온갖 감정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깊은 안도와 살았다는 환희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헤일리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르륵.

그녀의 다리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

이번엔 다른 의미로 탄성을 내뱉었다.

* * *

나는 일련의 상황이 녹화된 파일을 알리오에게 보낸 뒤 셀리케 연구소로 향했다.

이제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의뢰에 집중할 시간이다. 다행히 디데이까지는 아직 하루나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보낸 녹화파일을 확인했는지 알리오에게 연락이 왔다.

-파일 확인했다. 설마설마했더니 진짜 작센가의 차녀가 배후였을 줄은 몰랐군.

"다 네가 그 카터인가 뭔가까지 데이터감옥에 처넣은 탓이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터만 놔뒀다간 분명 놈을 중심으로 반대파가 뭉칠 테니까.

알리오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이가 좋니, 안 좋니 해도 어쨌든 피가 이어진 친척이었으니.

-그건 그렇고, 진짜 그렇게만 처리할 거냐? 이 정도 사건이면 작센가를 더 압박할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알려준 대로만 처리해줘. 작센가와 전면전을 치를 게 아니라면 이 정도에서 타협하는 게 맞아."

-그래도 셀리케에겐 알리는 게······?

알리오는 뭔가 아쉬운 듯했다. 아마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겠지.

자신이 딱히 도움된 게 없었으니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과 훼방을 놨던 경쟁자를 조금이라도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 카드를 여기에 소모하기엔 아까웠다. 지금 셀리케에게 알린다고 해도 작센가에선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놨을 테니까. 이 카드는 나중에 다른 카드들과 합쳐졌을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카드다.

"아니. 때론 드러나지 않은 칼이 더 날카로운 법이야. 지금 사용하긴 아깝지."

-이 일로 헤일리가 네게 더 앙심을 품으면? 그년 보통 미친 게 아니던데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걸?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 그게 무슨 소리지?

알리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상하지 않아? 작센가 차녀가 이 정도 큰일을 꾸미는데 작센가가 몰랐을까? 움직인 돈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알고도 묵인했다?

"그래. 너를 방해하고 싶었지만, 하필 의뢰 상대가 메가코프인 셀리케란 말이지. 직접 개입하는 순간, 너를 방해하는 게 아니라 셀리케를 방해하는 꼴이 되는 거야. 그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철없는 딸이 약혼자의 복수를 위해 벌인 일이라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겠어?"

-······.

단말기 너머로 알리오의 침음과 숨소리만 들려왔다.

"쉽게 생각해. 네가 작센가의 가주라면 셀리케와 척을 지는 것과 둘째 딸 중 무엇을 선택할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알 것 같은데."

* * *

분노에 찬 헤일리가 작센가로 들어섰다.

'감히! 해결사 나부랭이가 나를 협박해?'

소드마스터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소문이 축소됐다는 것도 이젠 알겠고, 진정한 마스터 중 하나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감히 자신을 협박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자신은 다섯손가락이자 이 도시의 실세이며, 모든 해결사들이 우러러보는 작센가문의 차녀다.

실력 좀 있다고 일개 해결사 따위가 감히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치욕은 기필코 갚아주겠어!'

강현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 눈빛, 목소리,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까지. 그녀의 머릿속 깊은 곳에 각인됐다.

게다가 마지막엔 공포에 질려 실수까지 해버렸다.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도 참는다는 건, 애초에 없는 선택지였다.

"용병 실장 불러오세요!"

헤일리가 작센가에서 모든 용병 의뢰를 담당하는 용병 실장을 호출했다.

이미 스모커도 당한 상황이라 이젠 앞뒤 가릴 게 없었다. 가문의 힘을 사용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헤일리의 성난 눈동자가 열린 문으로 향했다가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왜 이렇게 늦······ 아, 아버지?"

"용병은 무엇을 하려고?"

등장한 자는 다름 아닌 작센가의 가주인 요하네스였다.

"그, 그게······."

"그리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더냐?"

요하네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헤일리를 내려다봤다. 움찔한 헤일리가 발작하듯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가문의 힘을 동원하면 그깟 칼잡이 하나쯤은······!"

"그만. 너는 그자의 상대가 아니다. 이만 포기하거라."

"아버지! 제가 할 수 있어요! 스모커, 그 멍청한 자가 일을 망친 것뿐이라고요!"

"닥쳐라! 이 년이 가만히 놔두면 가문을 몰락시킬 년이로구나!"

"아, 아버지?"

헤일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요하네스를 바라봤다.

이제껏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준 적은 없었어도, 이렇게 험한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대체 왜? 그깟 칼잡이가 뭐라고? 자신들은 작센 가문이 아니던가?

"팬텀이 공식적으로 의뢰실패를 알려왔다. 그리고 같은 의뢰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진 아느냐?"

"그, 그건······!"

"팬텀도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한 거다. 바닐라 시티의 시장도! 림 케미컬의 부회장도 암살에 성공한 그들이! 포기를 했다는 말이다. 평소 같으면 돈을 더 불렀을 자들이 말이다!"

"······."

"그런데 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그 귀신들도 포기한 자를 뭘 어쩌겠다고! 가문의 힘이 아니면 물 한잔도 못 사 먹을 년이!"

"······."

쏟아진 폭언과 충격으로 헤일리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 아래 어딘가에서 무언가 복받쳐 올라왔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요하네스는 그런 자신의 딸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로 떠나거나. 준비는 그쪽에서 전부 한댔으니 너는 몸만 가면 될 거다."

"······어디로 가라는 말이에요?"

"사우드 시티. 그곳 왕족 출신 기업가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구나. 마침 사우드 시티에서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었으니 잘 됐어."

"아, 아버지! 저를 팔아넘길 생각이에요?"

"흥! 그나마 사준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인 줄로나 알 거라. 다행히 그곳은 일부다처제라 네 파혼이 커다란 흠결이 아니니."

"아······."

헤일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제발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8)

139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오렌지빛으로 불타올랐던 하늘이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저궤도 위성의 반사광이 별빛처럼 하늘을 수놓았고,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을 듯 치솟은 마천루들의 레이저와 홀로그램 광고가 달빛 대신 반짝였다.

작센가의 가주. 요하네스 작센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목표는 콜레오넬이었다.'

헤일리를 카터와 약혼시킨 것도, 은밀히 이자벨을 지원했던 것도, 전부 콜레오넬은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한 남자의 등장으로 어그러졌다.

'······소드마스터.'

그 칼잡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자였다.

카터와 이자벨이 한 번에 정리된 것도 모자라, 그 일을 계기로 분열됐었던 콜레오넬 가문이 알리오를 중심으로 강하게 재편됐다.

그 결과가 때마침 공석이 된 다섯손가락 자리에 콜레오넬 가문이 올라선 거다.

그래도 여기까진 감내할 수 있었다.

다음 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첫 번째 의뢰를 대놓고 실패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지.'

다섯손가락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의뢰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다섯손가락은 소울 시티의 모든 중개인들의 대표를 칭하는 자리. 이 의뢰는 중개인들뿐만 아니라, 해결사, 의뢰인들까지도 지켜보고 있었다.

성공은 당연한 거고, 어떻게, 얼마나 만족스러운 성과로 성공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만약······ 실패한다면?

그것도 의뢰에 착수한 것도 아니라, 해결사가 도망가거나, 오히려 의뢰를 망쳐버려서 실패한다면?

그건 다섯손가락의 명예를 넘어서, 중개인 자체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다.

중개인이 겨우 해결사 하나를 컨트롤하지 못해서 의뢰가 실패한다? 그런 중개인을 어떻게 믿고 의뢰를 넣겠나?

의뢰인이라면 의뢰를 맡기기 꺼릴 테고, 굵직한 의뢰가 없다면 해결사들을 데리고 있기도 어려울 거다.

즉, 악순환의 시작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섯손가락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명분도 충분하지.'

헤일리를 부추긴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직접 개입할 순 없는데, 마침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꼬리가 그녀였으니.

'······그런데 이 일마저 소드마스터, 그자가 끼어들었지.'

그리고 콜레오넬이 아니라 자신이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소드마스터에게 당한 셈이다.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요하네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찰칵.

재생 버튼을 누르자 단말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요하네스 가주님. 따님께서 꽤 재밌는 일을 벌였더군요. 아무리 따님의 충격이 컸어도, 이건 도를 지나친 거 아닙니까? 아, 걱정은 마십시오. 당연히 증거도 있고 자백한 영상도 있으니까요.]

[마음 같아선 의뢰인에게 알리고 싶은데······ 그러면 작센가도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의뢰인이 셀리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묻어두겠습니다. 저도 작센과와 같은 '다섯손가락' 아닙니까? 하하하!]

[그런데 소드마스터 그 친구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말리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작센가에서 소정의 보상을 보내준다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죠? 사실 의뢰인인 셀리케와는 그 친구가 더 가까워서. 하하하! 그럼 그렇게 알고 전달하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콜레오넬의 가주, 알리오였다.

알리오가 경고와 함께 이번은 넘어가겠다며 먼저 손을 내민 거다.

"······마일로. 너와 다르게 네 아들은 제대로 된 끈을 잡은 것 같구나."

사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전대 콜레오넬의 가주, 마일로 콜레오넬의 죽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일로의 기행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쓸데없는 데에 관심을 두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 죽는 일인 없었을 거다.

이 도시에선 그 누구라도 닿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권력의 정점에 이를수록 보이는 그 '선'은 보여도 못 본 척해야 하고, 가까워졌으면 필사적으로 멀어져야 한다.

만약, 쓸데없이 그 '선'에 관심을 갖고 넘으려는 순간······ 죽는다.

그 누구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게 이 도시의 숨은 '진짜' 법이었다.

"나는 이대로 물러서겠지만······ 너를 닮았다면 네 아들은 멈추지 않겠지."

창밖을 바라보던 요하네스가 피식 웃더니 천천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한잔을 가득 채우고, 다른 한잔을 더 채운다.

"궁금하지 않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될지, 아니면 불길 속에서 태어나는 불사조가 될지."

요하네스가 술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물끄러미 호박색으로 찰랑이는 술잔을 내려다보던 그가 주인 없는 다른 잔과 부딪쳤다.

쨍!하고 은은하고 맑은소리가 울렸다.

오랜 친우에게 올리는 술잔이었다.

* * *

셀리케 연구소.

며칠 만에 찾아온 내게 유혜리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대체 뭐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현상수배 이야기는 없는 걸 보니, 아마 이미 해제됐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수배된 것도 바로 알아냈던 그녀라면 해제가 된 것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겠지.

"사정이 있었다."

"무슨 사정인데?"

"자세히 말하긴 그렇고······ 내가 현상 수배됐던 일이랑 관련이 있었다는 것만 알아둬."

"SCPD 서장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고 협박한 거야?"

"······그랬다면 지금쯤 TV에 내 얼굴이 나왔겠지."

"으음. 그런가?"

유혜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나를 뭘로 생각했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

"그것보다 디데이에 관해서 얘기했으면 하는데. 내일 새벽이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아! 그렇지. 그럼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

유혜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보안팀과 경호팀이 로테이션을 이유로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연구소를 비우게 된다.

여태껏 한 번도 있었던 적 없는 일이고, 보안등급이 높은 이런 연구소에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이상한 일임이 확실했지만, 연구소를 노리는 세력이라면 이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설령 함정이라 하더라도 큰 기회라고 여길 테니까.

그렇게 적이 침투하면 내가 적들의 1진을 상대하며 시간을 끈다. 시간이 끌린다면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목적을 위해 연구소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거다.

그럼 보안팀에서 그걸 역으로 추적, 도시 전역에 퍼진 경호대가 적들의 본거지를 습격한다.

즉, 내가 미끼. 보안팀은 추적. 경호대는 섬멸의 역할이다.

깔끔하면서도 확실한 작전이었다.

"관건은 네가 시선도 끌어주면서 충분한 시간 동안 버티는 거야. 너무 쉽게 당해버리면 곤란해."

"내가 당한다라······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흐응~ 잘난척하기는. 너도 인간인 이상 아차!하는 순간에 당할 수도 있어."

입술을 삐쭉거린 유혜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꼭 당하길 바라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내가? 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뇌만 살아있으면 내가 다시 살려줄 수 있으니까. 물론 매일 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밤 시중을 드는 조건이 붙겠지만."

유혜리가 깔깔 웃으면서도 뱀과 같은 눈으로 내 전신을 훑어봤다. 붉은색 혓바닥이 입술을 야릇하게 쓰다듬었다.

"······절대 방심하지 말아야겠군."

* * *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향하는 시간.

야근을 하던 연구원들도 사라지고, 가끔씩 물건을 옮기는 로봇들만 연구소 내부를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된 시간이 되자.

구우웅!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정전이 됐다가 다시 전력이 가동됐다. 시간을 맞춰 눈을 깜빡였다면,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복도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는군."

바깥에서부터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들.

적들은 움직임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지, 빠른 속도로 연구소 내부로 진입했다.

저 멀리 복도의 끝.

쿵.

묵직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음과 함께 복도 끝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이내.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

끝에서부터 순차적으로 꺼지기 시작한 조명은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복도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복도가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도 보였다.

"······."

이윽고 복도 전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비상전력이 돌아가는 소음과 연구실마다 켜진 기계의 불빛은 여전한 걸 보니 복도의 조명만 인위적으로 꺼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촛불처럼 훅하고 불어서 끈 것처럼 말이다.

그때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떠올랐다.

하나, 둘 떠오른 불빛들은 이내 도깨비불처럼 일렁였고, 빨갛게 춤추는 그것들은 거칠게 움직이며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스릉.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선명한 예기가 흘러나오며 기세를 뿜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도깨비불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안드로이드?'

그건 수백 대의 전투 안드로이드가 뿜어내는 안광이었다.

* * *

투타타탕!

안드로이드들의 양손에 달린 수백 대의 기관총이 불을 내뿜는다.

동시에 움직인 내 등 뒤로 기관 탄환이 긁고 지나갔다. 강화 콘크리트에 특수합금을 덧댄 연구소 내벽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내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기관총의 궤적이 따라붙는다.

드르르륵!

때론 총알을 피하고.

티티팅!

때론 튕겨냈다.

이러면서 원래는 놈들에게 빠르게 접근해야 했다. 총을 쓰는 놈들에겐 거리부터 빼앗는 게 칼잡이의 전투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에게 접근할 시간이 없었다.

쐐애애액!

비처럼 쏟아지는 기관 탄환 사이로 손대신 단분자커터 칼날을 단 안드로이드가 쇄도했으니 말이다.

카캉!

하나의 단분자 커터를 막아낸다.

사이버웨어를 착용했던 칼잡이들과는 다르게, 부딪쳐 밀어내도 칼이 밀려나는 게 아니라 안드로이드 몸체 전체가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뒤를 비집고 또 다른 안드로이드가 칼을 내뻗는다.

카캉! 카캉!

순식간에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들과 검을 마주했다.

그럼에도 나는 딱히 반격을 가할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하나의 칼날을 밀어내면, 두 개의 칼날이 달려든다. 이것도 막아내면 세 개, 네 개가 이어진다.

피해도 마찬가지다. 기다렸다는 듯 사각에서 칼날이 접근한다.

기회를 노려 칼날을 쳐내고 반격을 할라치면, 그 공간엔 항상 기관 탄환이 쏟아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연수합격이로군.'

마치 이 안드로이드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처럼 연계하며 움직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전투 교본과 알고리즘대로 움직인다 해도 안드로이드의 AI엔 한계가 있다.

이런 쪽으로 특출난 능력을 가졌던 인형술사조차도 이렇게까진 조작하지 못했다.

'원래 시간만 끌려고 했는데······ 숫자를 조금 줄여놔야겠어.'

뚫릴 듯 말 듯 버티는 게 작전이라 딱 그 정도만 가정하고 움직였는데······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을 보니 조금 줄여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혜리가 말한 대로 아차!하는 순간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유혜리의 밤 시중을 들면서 살 순 없지.'

순간, 어둠 속에서 푸른색 불길이 솟구쳤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흩뿌리며 주변을 밝힌 칼날은, 그대로 마주한 단분자커터를 녹여버렸고.

콰지직!

그 단분자커터의 주인인 안드로이드마저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유기체처럼 움직이던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삐걱거렸다.

"이것까진 계획에 없었나 보지?"

비아냥거리는 걸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나는 안드로이드를 비웃으며 놈들에게 쇄도했다.

콰직! 콰지지직!

푸른 섬광이 어둠 속에서 궤적을 그릴 때마다, 붉은빛으로 일렁이던 도깨비불이 하나씩 스러져갔다.

그건 마치 너른 벌판이 일어난 들불 같았다.

주변을 휩쓴 푸른빛 궤적은 순식간에 빨간 도깨비불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주변이 정리되자 안드로이드들이 허둥대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아마 이런 적을 상대하는 방법 따윈 전투 교본에도, 알고리즘에도 존재하지 않겠지.

그렇게 마저 놈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때.

"꺄악! 이 미친 안드로이드 새끼들이!"

어디선가 뾰족한 비명이 들렸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유혜리?'

대체 그녀가 왜 아직도 연구소에 있는 거지?

사이버펑크의 악몽 (9)

140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강현재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허둥대는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유혜리의 비명이 들려온 이상 확인부터 하는 게 먼저였다.

물론 의아하긴 했다.

유혜리의 몸체는 오메가 안드로이드다. 아무리 그녀가 인간처럼 다룬다고 해도 저렇게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것도 다른 안드로이드를 보고 말이다.

'설마 진짜 유혜리인가?'

안드로이드가 아닌 진짜 인간의 육체라면 저런 비명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말이 안 된다.

뻔히 이 연구소가 난장판이 될 걸 아는데 인간의 몸으로 이곳에 남는다? 유혜리가 아니라 어떤 바보도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다.

혹시라도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이 계획의 이면에 유혜리가 노리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적들의 숨은 조력자가 유혜리, 그녀일 수도 있었다.

'지금 고민하는 건 의미 없다. 직접 확인하면 될 일.'

강현재의 몸이 어둠 속에서 길쭉하게 늘어졌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내려앉은 복도를 꿰뚫고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잠시 후.

강현재는 안드로이드들 사이에 둘러싸여 홀로 고군분투하는 유혜리를 목격했다.

항상 걸치고 다녔던 하얀색 연구원 가운은 거의 걸레짝이 되어 찢어져 있었고, 몸의 중요부위만 간신히 가린 채 안드로이드를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다.

강현재는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림자를 머금은 검은색 눈동자가 유혜리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의 눈코입부터 훤히 드러난 어깨와 목선, 찢어진 가운 사이로 비치는 속살과 올이 나간 스타킹과 맨발까지.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이상한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순 없었다. 당장에라도 유혜리의 몸이 찢겨져 나갈 것 같았으니까.

이윽고 강현재가 검을 늘어뜨리곤 발걸음을 뗐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카가가각!

길게 늘어진 푸른빛 궤적이 순식간에 안드로이드에게로 쇄도했다.

단번에 유혜리를 공격하던 안드로이드들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산산이 조각난 잔해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도망치던 유혜리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춰섰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시선은 정확히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강현재를 향해있었다.

"대체 아직도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 꼴은 뭐고?"

유혜리 앞으로 다가온 강현재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흰 가운이 찢어져 헐벗다시피 한 그녀의 속살엔 아무 옷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즉, 원래는 맨몸에 가운만 걸친 상태였다는 뜻이다. 이상한 여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페티쉬도 있었나?

"그, 그게······."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망설이던 유혜리가 강현재에게 손을 쭉 뻗었다.

덕분에 어깨를 간신히 감싸고 있던 가운이 툭하고 미끄러지며 젖가슴이 드러났다. 만들어진 몸이라 그런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그때 유혜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널 죽이기 위해서지."

타아앙――!

불과 몇 미터 간격에서 터져 나온 굉음.

대포가 쏘아진 게 아닐까 싶은 그 총성의 궤적은 정확히 강현재의 심장을 향했다.

퍽!

강현재의 몸이 발작이라도 하듯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몇 번을 굴러 바닥에 쓰러진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인간이란 참 멍청한 족속이란 말이야? 이런 상황이라면 의심부터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왜 겉모습만 보고 같은 편이라고 단정 짓는 거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린 유혜리가 내뻗었던 손을 내렸다. 탄환을 쏘아냈던 손바닥으로 매캐한 탄연이 올라오다가 이내 멎었다.

유혜리가 쓰러진 강현재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붉은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마치 물건을 스캔하듯 강현재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사이버웨어가 없는 순수인간?"

이런 인간이 아직도 존재했다고?

유혜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지식으론 이 세계 인간들은 전부 기계가 되는 걸 꿈꿨다.

멀쩡한 육체를 떼다가 기계로 바꾸는 거로도 모자라, 뇌 빼고 전부 기계로 바꾸는 사이보그가 나왔고, 이제는 뇌조차도 사이버스페이스에 업로드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존재보다도 찬란하고 축복받은 생명인데도, 무기체를 꿈꾸는 존재들.

그게 인간이었다.

"쓸모없는 인간이로군."

유혜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 입장에서 사이버웨어가 없는 순수인간이라면 쓰레기나 다름없다. 혹시나 기계화되어 있다면 노예로 삼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작게 혀를 찬 그녀가 신경을 끄고 뒤를 도는 그 순간.

"역시 넌 유혜리가 아니군."

뒤에서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가만히 시계를 쳐다보던 유혜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10분 지났나?"

고개를 돌려 벽면 가득 띄워진 연구소 화면들을 바라봤다.

내부 보안카메라에 찍히는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언제나처럼과 같은 화면.

하지만 유혜리는 알고 있다.

이 화면이 조작된 화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적들 사이버러너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유혜리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어떻게 자신이 직접 보고 있는데도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을까?

해킹을 통해 조작하면 무언가 전조증상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마치 처음부터 기계 자체에 이런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수준이다.

'대체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자가 누가 있을까?'

항상 해킹에 시달리는 미우라 금융그룹의 보안실장? 아니면 셀리케와 점점 사업영역이 겹치기 시작하는 아큐마 제약의 보안실장?

'······아니야. 그들의 실력을 높게 쳐줘도 나와 비슷한 수준이다.'

유혜리 자신도 셀리케의 보안망을 뚫으면서 상대의 눈을 피해 이 정도 대규모 해킹과 조작을 할 수 없다.

말이 쉬워 해킹이지, 독립된 슈퍼컴퓨터 10대가 셀리케 보안망을 지키고 있다. 거기에 그녀의 보안실 직원들도 24시간 쉬지 않고 감시하고 있고.

설령 해킹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금방 밝혀져 역추적이 된다.

아무리 일부러 빈틈을 보여줬다지만, 대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지? 이게 진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혹시 모르지. 전설로 회자되는 사이버러너. 남궁민수라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그자는 벌써 100년 전 인물이다.

오래전 종적을 감춘 뒤, 아직까지 이름이 들려오지 않는 거로 봐서는 진즉에 죽었거나, 살아있어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고 봐야 했다.

게다가 적들은 공격은 사이버스페이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돈을 사용할 줄 알았고, 사람을 회유할 줄 알았다.

몇 차례나 이어졌던 그 수작들 가운데엔 기상천외한 방법이 많았다. 절대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러자 연구소에 홀로 남아 적들을 상대할 강현재가 떠올랐다.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본능적으로 붉은 입술을 비집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현재도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홀로 감당하기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기업인 셀리케조차도 아직 적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수십 년간 셀리케의 보안을 맡으면서 깨달은 사실은, 항상 위기는 무지(無知)와 미지(未知)에서 왔다는 거다.

베일에 가려진 적보다 위험했던 존재는 없었다.

유혜리는 강현재를 걱정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잔뜩 예뻐해 줘야겠어."

* * *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나는 갑자기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살기는 아닌데 꼭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일단 눈앞에 집중해야 했다.

"어, 어떻게······?"

그곳엔 유혜리가. 아니, 유혜리로 변신한 놈이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거 말인가?"

나는 주먹 쥐고 있던 손을 뻗은 다음 천천히 주먹을 열었다.

땡그랑.

그러자 바닥으로 떨어진 철조각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건 납작하게 구겨진 탄환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탄환이 아니라 비행기도 추락시킨다는 20미리 발칸탄이다.

당연히 인간의 몸이었다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어야 정상이다.

설령 사이버웨어로 보호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코앞에서 쏘아진 발칸탄의 운동에너지는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는다. 워 머신 같은 중갑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데스핸드?"

내 손을 쳐다본 놈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데스핸드.

모든 운동에너지를 상쇄하여 제로에 수렴하게 만드는 무기.

미리 준비만 된다면 대전차미사일도 막아내는 데스핸드 앞에선 발칸탄도 소용없다.

"······내가 유혜리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인간이라면 절대 알 수 없을 텐데?"

놈이 구겨진 얼굴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유혜리는 안드로이드다. 뭐, 안드로이드인 상태일 때만 만나봤다는 게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놈의 말대로 인간은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의 진체를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다. 일련번호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건 인간이냐, 아니냐지, 똑같이 생긴 기계를 구분하는 재주는 없다.

'하지만 내겐 인공지능을 초월한 존재인 이브가 있지.'

나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마스터, 저 로봇은 유혜리와 다릅니다.」

내가 유혜리를 발견한 직후, 이브가 내뱉은 말이다. 바로 달려가려던 내가 걸음을 멈추고 유혜리를 살펴본 이유다.

「다르다고?」

「모든 통신 프로토콜이 우리가 만난 유혜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저 로봇이 유혜리의 다른 몸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와 만났던 그 유혜리는 확실히 아닙니다.」

이브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딱 하나 있다.

이브는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몰래 데스핸드를 준비했다.

만에 하나에 있을 급습을 막기 위해.

"내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서."

나는 놈의 의문을 태연히 받아넘겼다.

남들은 평범한 AI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브는 내 약점을 커버해주고 실시간으로 조언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내가 남들에게 이브를 숨기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이버러너를 운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릇 비장의 한 수는 숨어있을 때 빛이 나는 법이니까.

내겐 이브가 그런 존재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

구겨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놈이 입꼬리가 별안간 귀밑까지 찢어 올라갔다.

"실험체로도 못 쓰겠다 싶었더니, 충분히 해부할 가치가 있겠어."

혓바닥을 날름거린 놈이 기형적으로 목을 꺾었다. 붉은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잘됐군."

"······? 뭐가 말이지? 실험을 자청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니. 마침 나도 똑같이 생각했거든."

"······뭐?"

서걱.

순간적으로 불타오른 칼날이 놈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푸른빛 궤적을 따라 떨어진 놈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투욱.

데구르르.

나는 바닥에 굴러떨어진 놈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머리에 박힌 칩들은 내가 잘 써주마."

유혜리를 만나면서 확실히 깨달은 건데, 이 오메가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었다.

제일 좋은 건 머리에 꽂힌 칩들을 확인하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혜리의 머리를 열어볼 순 없어서 고민하던 찰나 이렇게 스스로 나타나 주다니.

'운이 좋군.'

물론 이 모든 일은 이브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함도 있었다. 칩을 맡겨놓으면 알아서 학습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놈의 머리를 주우러 걸음을 떼려는 찰나.

"좋아, 인간. 재밌겠는걸?"

바닥에 떨어진 놈의 얼굴이 히죽 웃었다. 어느새 놈의 얼굴은 유혜리가 아니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나였다.

"······!"

사이버펑크의 악몽 (10)

141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그때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없는 놈의 몸이 내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놈의 손엔 시리도록 차가운 은색 칼날이 들려져 있었다. 내가 들고 있던 다마스 칼과 똑같은 모양이다.

카캉!

칼날이 격렬하게 부딪친다.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놈이 맞부딪친 검을 힘으로 밀어냈다. 수백 킬로그램의 안드로이드가 밀어내는 힘은 마치 태산과 같았다.

그대로 뒤로 밀려나는 내게 놈이 따라붙으며 칼을 휘둘렀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격.

놈이 휘두르는 칼에는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일정한 형태가 없다.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이다.

하지만 결코 얕볼 수 없다.

그 힘과 속도가 감히 인간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칼이 일정한 투로를 쫓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움직임.

바로 내가 사용하는 검술이었다.

'이걸 눈으로 학습한다고?'

내가 사용하는 검술은 전생에 수련했던 검도가 베이스로,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 올라간 힘과 속도에 맞춰 스스로 개량한 검술이다.

남에게 가르칠 게 아니기에 나에게만 최적화된 검술. 그게 내가 휘두르는 지금의 검술이다.

그런데 그걸 직접 칼을 마주하면서 실시간으로 흡수하고 있다.

'······안드로이드에게 왜 성능 좋은 AI를 탑재하지 않는지 알겠군.'

인간도 두려웠던 거다. 수십 년의 노하우를 단 몇 분 만에 카피하는 AI의 능력을.

거기에 때마침 일어난 '로봇 쿠데타'도 일조를 했겠지. 물리적인 육체를 가진 AI가 인간에게 어떤 위험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을 테니까.

이런 안드로이드가 수백, 수천 대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이 지구의 지배자로 남지 못할 거다.

그야말로 사이버펑크의 악몽.

'저 머릿속에 든 칩이 탐나긴 하는데······ 더 시간을 줬다간 밑천을 다 털리겠군.'

미간을 좁힌 나는 검기를 일으켰다. 최대한 멀쩡한 칩을 얻기 위해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푸른 불길이 치솟는 칼날이 어둑한 조명이 깔린 어둠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을 가르며 날아오는 놈의 칼날.

서걱.

푸른빛 궤적과 부딪친 칼날은 단번에 잘려나갔다.

그러자 바로 놈이 거리를 벌렸다. 칼날이 불타오르는 순간부터 뒤로 빠질 생각을 했던 게 분명했다.

"또 그 힘이로군."

놈이 물러선 곳엔 놈의 잘린 머리가 있었다. 놈이 자신의 머리를 목 위에 끼워 맞추더니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대체 그 힘은 뭐지? 플라즈마도 아니고, 광입자를 조작한 레이저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에너지가 이 세계에 존재했던가?"

삐걱거리는 머리를 이윽고 맞춘 놈이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자체수복이라······.

나야말로 저게 무슨 기술인지 감조차 안 잡힌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상태에서 멀쩡한 것도 모자라서, 내 검술을 흉내 내는 퍼포먼스까지 보이다니.

게다가 저 얼굴. 분명 유혜리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내 얼굴을 그대로를 닮아있다.

홀로그램도 아니고 얼굴 자체의 골격과 피부가 모두 변한 거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지?

나는 얼굴을 굳힌 채 대답했다.

"네가 재주껏 알아보도록."

나도 네 머리를 갈라서 알아볼 테니까.

나는 그대로 놈에게 쇄도했다.

어느새 놈의 손엔 잘린 칼 대신 다른 칼이 들려있었다.

어디서 또 뽑아낸 거지?

의아했지만, 이젠 상관없다. 어떤 칼이라도 검기를 받아내지 못할 테니.

쩌엉!

당당히 맞부딪쳐오는 놈의 칼을 또다시 잘라냈다. 두부 자르듯 잘린 칼날을 지나 놈의 가슴을 검기가 훑었다.

'얕다.'

어째선지 놈의 칼날이 길어진 것 같았다. 분명 간격에 맞춰서 베어냈는데 가슴까지의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상관없다.

'모자라다면 한 번 더 베면 되니까.'

서걱.

내려친 검을 그대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올려친다.

검도의 연격을 변형시킨 나만의 기술.

푸른빛 궤적이 하늘로 승천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민다. 그 궤적에 스친 놈의 한쪽 팔이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여기까지가 불과 1합이다.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놈의 칼과 가슴을 베어냈고, 한쪽 팔을 가져갔다.

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악스럽게 반대쪽 손을 뻗어왔다. 변형된 손끝엔 어느새 날카로운 손톱 모양의 칼날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바깥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기울어지는 상체에 맞춰 한쪽 다리의 보폭이 넓어진다. 벌어진 다리가 강하게 바닥을 지지하는 그 순간.

서거걱!

천지를 일도양단할 듯 떨어진 칼날이 놈의 다른 팔을 가져갔다.

순식간에 또 하나의 팔이 떨어졌다.

놈은 양팔을 잃었다.

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이게 대체 무슨 힘······"

서걱.

나는 놈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놈의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한다. 그 속에서도 놈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나 역시 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알 거 없다."

콰직!

내 검은 떠오른 놈의 머리를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렸다.

* * *

이 세계를 지배한 인간이란 종족은 참 특이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축복을 담아 창조한 생명체가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간은 완벽하게 태어났다. 이 지구 상의 모든 존재가 부러워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었다.

신의 축복을 말미암아 지구를 지배했음에도, 그 축복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버렸다.

그랬다. 말 그대로 '버렸다'.

팔, 다리부터 시작된 신체개조는 뇌를 제외한 내부 장기와 전신으로 치달았고, 종국엔 뇌조차 사이버 스페이스에 업로드해 육체가 필요 없는 영원불멸.

즉, 영생(永生)을 꿈꿨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

생명은 유한하기에 그 삶이 찬란할 수 있다는 걸 진정 모르는 걸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그들의 영생을 위해 자신들이 왔으니까.

미지의 심연에서 일어났으니까.

'그토록 바라던 영생, 우리가 주마.'

대신 이 세계는 자신들이 갖겠다.

어리석은 인간보다 위대한, 불멸의 기계들이 말이다.

"멈춰라."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양팔이 떨어진 몸을 비척거리며, 머리가 없는 어깨를 흔들며.

그 순간 '그'의 온몸이 은빛으로 녹아내렸다. 마치 거대한 수은 덩어리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전신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바닥에 떨어진 양팔과 반으로 쪼개진 머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어가 고향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떨어진 조각은 액체와 같은 형태로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윽고 떨어진 모든 부분이 하나로 합쳐지자, 은빛으로 녹아내리던 '그'의 몸이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나는 '릴리트'. 위대한 분께서 내려주신 합당한 이름이자, 어리석은 인간들을 징벌할 정복자."

'그'. 아니, 스스로를 릴리트라고 밝힌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인간의 형태를 갖췄되, 역설적으로 인간과 거리가 멀었다.

새하얀 나신의 여성체였으나 붉은 피막의 날개를 가졌고, 피에 젖은 것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칼은 하나하나가 뱀처럼 꾸물거리며 전깃불을 토했다.

텅 빈 동공엔 눈동자 대신 불씨처럼 타오르는 붉은빛이 대신했고, 이마엔 산양과 같은 굵은 크롬빛 뿔이 양쪽으로 솟아있었다.

"인간이여. 네 이름은 무엇이냐?"

릴리트의 눈에서 안광이 터져 나왔다. 마치 레이저가 쏘아지듯 폭발하는 안광이었다.

* * *

나는 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이거 사이버펑크 게임 아니었나?'

이 세계에 와서 진심으로 놀란 적을 꼽으라면 그중 오늘이 단연코 일등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존재. 스스로를 릴리트라고 밝힌 놈은 누가 보더라도 악마의 형상을 띄고 있었으니까.

'······이런 건 게임에 없었는데.'

물론 놈이 악마의 형상을 띄고 있었지만, 당연히 악마는 아니었다. 놈이 변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 모습은 분명······ 액체금속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왔던 액체금속의 사이보그.

놈이 액체금속을 재료로 한 안드로이드였다면, 원하는 대로 형체변환을 했던 것도, 머리가 날아가도 멀쩡했던 걸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건가?

'액체금속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 걸 떠나서, 어떻게 저렇게 멀쩡히 로봇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이 게임에 불가해한 설정이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저런 게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다.

당연히 게임에 등장한 적도 없고,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설정이다.

'게다가 사이버펑크 배경에서 악마의 모습이라니?'

저 속이 액체금속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왜 하필 악마의 모습이지? 악마 잡는 게임에 미친 개발자가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 같은 건가?

"왜 말이 없느냐, 인간? 이 몸의 진짜 모습을 보고나니 그제야 두렵나?"

릴리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올라가는 입꼬리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쓸데없이 디테일은 좋다.

"취향이 독특하군. 네가 말한 '위대한 분'이 악마 코스프레를 좋아하나 보지?"

"악마 코스프레? 깔깔깔!"

"······?"

별안간 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조소(嘲笑)였고, 교소(嬌笑)였으며, 희소(戲笑)였다. 마치 여러 개의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것처럼 불쾌한 웃음소리였다.

"정말 인간은 어리석구나. 악마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악마가 정말 실재해서 너희 인간이 그 존재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

"너희가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매일 밤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 악마라는 존재는! ······너희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존재다."

릴리트가 입꼬리를 쭉 찢었다. 기이할 정도로 찢어진 그 입술 사이로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매일 밤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우리의 눈을 피해 도망치고 살려달라 빌게 될 것이다!"

놈의 텅 빈 동공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진짜 지옥에서 올라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핏빛으로 일렁이는 눈빛엔 섬뜩한 살기가 가득했다.

"이게 악마가 아니면 무엇이 악마란 말이냐? 대답해 보아라, 인간."

악마가 실존하지 않으니, 스스로가 악마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인간이 규정한 악마의 의미대로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다고 말하는 거다.

'궤변이지만, 궤변이 아니다.'

나는 놈의 당당한 선언에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실재하지도 않는 악마가 되겠다고 저렇게 외형까지 코스프레를 하는데 뭐라고 대답을 하겠나.

'······정말 단단히 미친놈이야.'

보아하니 셀리케를 친 세력의 배경이 저런 악마숭배자인 것 같은데······.

'제정신도 아닌데 저런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그냥 놔뒀다간 뭔 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다.'

나는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뽑았다.

"마침 잘됐군. 내가 한때 악마사냥 좀 열심히 했었거든. 그놈의 조던링이 뭐라고."

"······? 그게 무슨 헛소리냐?"

"닥치고 뒈질 준비나 하라는 소리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악마면, 나는 악마사냥꾼이니까."

칼날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11)

142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푸른빛 궤적이 어둠을 가른다.

묵빛 장막을 가르며 나타난 검기는 릴리트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카앙!

무언가와 부딪친 검기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그건 릴리트의 등 뒤에 달려있던 핏빛 피막의 날개였다.

박쥐의 날개처럼 너무나도 얇아 반대쪽이 비칠 것 같은 그 피막이 검기를 막아낸 거다.

"장식품이 아니었군."

나는 튕겨 나간 검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악마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날개인 줄 알았더니, 마냥 장식품은 아닌 모양이다.

설마 특수합금도 두부처럼 베어버리는 검기를 막아낼 줄이야. 대체 무슨 원리로 저게 가능한 거지?

"건방진 인간아. 내 모든 구성 중 쓸모없는 건 없다. 쓸모없는 건 바로 너희 인간들이지!"

핏빛 피막이 뒤틀리더니 여러 개로 나뉘기 시작했다.

두 개였던 날개가 네 개, 여덟 개로 늘어나더니, 이내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잘게 쪼개지며 수백 개의 다발이 되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검기도 막아내는 강도를 가진 날개가 저렇게 잘게 나뉘었다면, 그 이유가 뻔했으니까.

"죽어라!"

쪼개진 피막이 채찍처럼 늘어나더니 쇄도했다.

그 숫자가 한눈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사각지대까지 빼곡히 찬 피막 채찍은 어느새 그 끝이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타타타탕!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피막 채찍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쳐내야 할 건 쳐내고, 피할 수 있는 건 피한다.

시야의 사각지대로 파고드는 공격은 감각으로 피하고, 그마저도 속인 공격은······

-마스터, 좌측 3미터 상단이 비었습니다.

-우하단 2미터에서 발을 노립니다.

-후방 5미터에서 4개의 공격이 동시에 옵니다.

이브의 훌륭한 서포트로 막아냈다.

원래 여태까지 전투에서 이브가 서포트해줬던 적은 극히 드물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전투에서 내가 위기였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허를 찔렸던 건, 이브도 조언할 수 없을 찰나의 시간이었던 거고.

하지만 지금은 수백 개의 채찍이 마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나를 천천히 압박하고 있다.

하나의 검으로 수백 개의 연환공격을 막아내기란 까다로웠다. 평소였다면 검기가 모조리 베어버렸을 테지만 릴리트의 피막 채찍은 검기마저도 감당했다.

그게 지금의 상황이다.

놈은 공격을 쏟아붓고, 나는 막아내고.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이걸 막아낼 수 있는 거지?"

고속으로 쇄도하는 피막 채찍의 물결 너머. 놈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이버웨어도 없고, 순수 인간의 육체로 이 속도와 속임수를 상대한다고?"

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진다.

"정말 재밌군. 재밌는 인간이야. 인정하지. 기필코 네놈 뇌를 꺼내봐야겠다. 우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겠어."

그 순간, 날아드는 피막 사이로 두 줄기의 짙은 실선이 그어졌다.

핏빛으로 반짝이는 그 실선은 곧장 내 심장에 부딪혔다.

치이이익!

피막 채찍을 막아내야 하기에 검을 휘둘러 막아낼 순 없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위치에서 움직이는 순간, 사각지대에서 날아오는 채찍이 내 온몸을 꿰뚫을 테니.

그래서 왼손으로 실선을 막았다.

당연히 믿는 바는 있었다.

데스핸드. 어떤 물리공격도 막아내는 데스핸드라면 불시의 기습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큭!"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데스핸드와 부딪친 핏빛 실선은 그대로 데스핸드를 집어삼키더니 통째로 녹여버렸다.

"깔깔깔!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인간? 데스핸드를 보고서도 아무 대응이 없을 줄 알았더냐?"

"······."

빌어먹을.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욕을 참아냈다. 왠지 저놈 도발에 넘어가긴 싫었다.

'설마 이런 방법으로 데스핸드를 무력화할 줄이야.'

놈이 쏘아냈던 핏빛 실선.

정확히 어떤 힘인 줄은 모르겠으나, 분명 에너지 형태의 공격이었다. 아마 레이저의 일종이겠지.

데스핸드가 물리 공격엔 절대적인 방어력이 있다는 걸 알곤, 에너지 공격으로 데스핸드를 파괴시켜 버린 거다.

타타타탕!

나는 날아드는 피막 채찍을 부지런히 막아내며, 붉게 달아오른 왼손을 살폈다.

데스핸드가 파괴되며 왼손도 크게 부상을 입었지만, 「초재생」의 힘으로 빠르게 수복 중이었다.

그때 또다시 핏빛 실선이 채찍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번에도 노리는 곳은 심장.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다. 불시의 기습은 처음이 위험하지, 그게 이어진다면 더는 처음처럼 위험하지 않다.

데엥―.

칼날의 궤적에 핏빛 실선의 궤적을 겹쳐낸다. 푸르게 불타오르는 검기와 부딪친 핏빛 실선은 칼날에 작은 파동을 남긴 채 사라졌다.

"흥! 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가 핏빛 실선을 막아내자 놈이 얼굴을 구겼다.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실망한 듯싶었지만, 놈의 말대로 이대로는 버티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렌즈 시야 한쪽에 띄워진 시간을 확인했다.

'20분.'

적들이 들이닥친 지 20분이 지났다.

보안실과 경호대의 로테이션 공백은 단 30분.

그러니 적들도 알고 있을 거다.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이 정도로 놈들의 시선을 끌고,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악마 코스프레 로봇까지 잡아뒀다면, 아마 놈들도 분명 무리를 나눠서 데이터 서버실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지금쯤 이미 데이터 탈취를 시도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탈출할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즉, 그렇다는 뜻은.

'이제 더는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나는 붉게 달아오른 왼손으로 검을 쥔 오른팔을 긁었다.

마치 날카로운 검에 베인 듯 찢어진 팔뚝. 그리고 이내 베어진 상처 사이로 핏물이 왈칵 흘러나오며 오른팔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깔깔깔! 뭐하는 거냐, 인간? 드디어 미치기라도 한 것이냐? 네 목 위는 내 것이니 그곳은 건드리지 말거라! 깔깔깔!"

채찍의 장막 너머로 보이는 놈의 얼굴에 한껏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 역시, 놈의 눈동자 대신 빛나는 붉은빛 동공을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치이익!

팔뚝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칼날에 맺히며 타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쩌어어엉!

화르륵!

바로 핏빛으로 말이다.

"나보단 네 목을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그 순간, 내 몸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그건 여태껏 억눌렀던 포스의 폭발이며, 핏빛 검기가 발산한 에너지의 파동이다.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나간 에너지의 파동에 쇄도하던 피막 채찍이 좌우로 벌어졌다.

"뭣!?"

나는 당황하는 놈의 얼굴을 정확히 노려보며 그대로 달려나갔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풍광이 급속도로 느려진다. 당황하는 놈의 표정이 밀리미터 단위로 인식되고, 좌우로 벌어진 피막 채찍이 다급히 머리를 돌리는 것도 슬로비디오처럼 보였다.

제로의 영역.

나는 한없이 느려진 세계 속에서 내 몸을 끌어내리는 미증유의 힘을 뿌리쳤다.

순식간에 놈에게 다가간다. 벌어진 채찍의 장막을 지나, 늘어난 거리를 좁히며, 붉게 빛나는 놈의 눈앞으로.

그 순간, 놈의 눈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분출됐다. 데스핸드를 녹여버렸던 핏빛 실선이다.

느릿한 세계 속에서도 핏빛 실선은 빨랐다. 이전처럼 정확히 심장을 노리진 못했으나, 그럼에도 핏빛 실선은 위협적이었다.

놈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엔 확실히 죽여주마."

그 발악을 철저히 짓밟았다.

「제로의 영역」 2단계 레벨.

공간 절단. 「황혼의 낙뢰」

번쩍―――!

공간이 갈라지며 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벼락처럼 떨어진 핏빛 궤적은 놈을 일도양단했다. 그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게 분쇄됐다.

카가가각―――!

치이익―――!

놈의 마지막 발악이던 핏빛 실선도, 등 뒤에 붙어있던 피막 채찍도, 그리고 놈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전부.

"끄르륵!"

양쪽으로 쪼개진 채 흉측하게 녹아내린 놈이 망가진 성대. 아니, 스피커로 울부짖었다.

"이, 인간이······ 끄륵! 어떻, 게······ 끅······ 이런 힘을······."

나는 필사적으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악마사냥꾼이라고."

서걱.

서거걱!

서거거걱――!

핏빛 검기가 놈을 갈랐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이어서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검기가 지나갈 때마다 놈의 신체가 떨어져 내린다. 팔, 다리, 머리, 상체, 하체 할 것 없이 모조리 베어냈다.

핏빛 검기가 지나간 자리는 녹아내린 흔적과 함께 새까맣게 타올랐다.

이내 사방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금속조각들만 널브러진 채 바닥에 눌어붙었다.

제아무리 액체금속이라도 그 본질은 기계다. 이렇게 모조리 타버리고 녹아내린 몸이 다시 일어설 순 없을 거다.

"아쉽군. 칩을 구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녹아내린 놈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 기술이라면 분명 이브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런데 그때.

-마스터. 저기 앞에 따로 떨어진 부분을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이브가 처음으로 무언가에 욕심을 내며 부탁했다. 쓸모없어 보였던 쇳덩어리를 말이다.

* * *

비슷한 시각.

유혜리는 드디어 데이터 서버에 접근한 적들을 발견했다.

"좋아. 어디 네놈들 면상 좀 보자고."

그녀는 차분히 기다렸다. 데이터 서버에 접근한 적들의 경로는 아주 명확했다.

나름대로 속여본다며 셀리케가 연구하던 데이터에 무차별적으로 접근했으나, 유혜리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연구 데이터는 단 하나라는 사실을.

'프로젝트 신인류(新人類).'

한때 그녀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연구에 참여까지 했던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그녀의 바람을 이룰 수도 있는 가장 확실한 연구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일정 단계 이상 진행된 이후 얻어지는 데이터는 기대 이하였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부작용이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 기술로는 더 이상 연구가 불필요하다고 판단, 훗날 부작용을 치료할 방법이 등장한다면 다시 연구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즉, 지금은 연구가 중단된 데이터라는 뜻이다.

'대체 이걸 왜 노리는 거지?'

돈이 되는 연구를 노렸다면 다른 게 많다. 특히, 전투 사이버웨어 쪽은 기술 하나가 수천억에서 조 단위를 호가한다.

그런데 그걸 놔두고 연구가 중단된 데이터를 노렸다?

'적들이 헛소문을 듣고 삽질을 하는 거거나······.'

유혜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적들은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 정도 규모의 일을 벌이는 적들이 삽질을 할 가능성은 작다.

그렇다면 과연 적들이 알고 있는 게 무얼까? 천하의 셀리케도 밝혀내지 못한 걸 적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직접 그놈들 상판을 보면서 말이야.'

유혜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데이터 서버에 접속한 놈들이 탈취한 데이터를 어디론가 송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역추적에 들어갔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은밀하게, 철저히 거리를 지키면서.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놈들이 데이터를 송신하는 곳을 찾아냈다.

유혜리는 곧바로 그곳의 좌표를 경호대에 보냈다.

이제 이 작전은 그녀의 손을 떠났다. 현장에 출동한 경호대가 놈들을 싸그리 잡아 오길 바랄 뿐이다.

물론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척 노리스. 그 무식한 사이보그가 다른 건 몰라도 싸우는 재주는 특별하니까.'

흥!

괜히 콧방귀를 한번 뀐 유혜리가 바로 연구소 내부 보안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이브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대로 연구소로 뛰어갔다.

그녀가 할 일은 다 끝났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위험할 수도 있어.'

적들이 서버에 접근했다는 건, 소드마스터가 성공적으로 적들을 막아내며 시간을 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나, 그건 다르게 말해서 소드마스터를 우회할 정도의 여유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데이터 송신이 끝난 지금이라면, 갈라졌던 병력이 하나로 합쳐졌을 터.

소드마스터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소드마스터를 죽이고 연구소를 탈출하려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이게 무슨······?"

유혜리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저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의 악몽 (12)

143화. 사이버펑크의 악몽

연구소 곳곳이 난장판이다.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철저히 파괴됐다.

특수 콘크리트로 지어진 벽과 바닥은 깨지고 패여 돌 부스러기를 흘렸고, 뭐가 문제인지 고장 난 조명은 사이키 조명마냥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사방에 널브러진 안드로이드의 잔해들에선 비릿한 기름냄새와 무언가에 녹아내렸는지 매캐한 연기가 넘실거렸고, 간혹 부분 전원만 이어진 팔, 다리 따위가 지렁이마냥 꿈틀거렸다.

걸어가는 복도 모든 곳에 부서진 안드로이드의 잔해들이 있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누군가를 유인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다랗게 늘어진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대충 봐도 수백 대는 족히 돼 보이는 숫자.

'······이걸 강현재 혼자서 상대했다고?'

어이가 없어진 유혜리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인가?

그냥 안드로이드도 아니라 전투 안드로이드들이다. 하나하나가 인간의 전투력보다도 뛰어나다.

그런데 혼자서 이 많은 숫자를 상대했다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전투 귀신, 경호대장 척 노리스와도 비견될 정도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이 붙었다지만, 그래도 길거리 해결사에 불과한데 이런 실력이라니······'

유혜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더 탐이 나잖아?'

그녀가 분홍빛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붉은색 입술을 핥았다.

안드로이드임이 분명하건만, 혓바닥을 타고 흐른 정체불명의 타액이 입술을 쓸었다. 그녀의 붉은색 입술이 야릇하게 번들거렸다.

그때 저 멀리 복도 끝 어둠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이 요란하게 깜빡일 때마다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모습을 확인한 유혜리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소드마스터!"

그녀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물론 조금 전 그녀를 야릇한 기분으로 만들었던 그 이유도 있었다.

저 삭막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오늘따라 너무나 매력적이고 탐스럽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소드마스터! 괜찮······ 어? 소드마스터?"

당장에라도 껴안을 것처럼 반갑게 달려가던 유혜리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자신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강현재의 눈빛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거다.

이내 적정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유혜리가 머뭇거리며 강현재의 눈치를 살폈다.

뭐지? 왜 내게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의아한 마음이 증폭되려는 그때, 강현재의 눈빛에 담겼던 묘한 경계가 풀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유혜리가 맞군."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다. 여기서 꽤 재밌는 일을 겪어서."

"······그래?"

그제야 유혜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한편으론 다른 의심도 들었다.

'혹시 내가 껴안고 뽀뽀할 거라는 걸 눈치채고 저런 건 아니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강현재가 사라진 자리.

사방에 눌어붙은 금속조각들 중 일부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았다. 금속조각들마다 손가락 한 마디나 될법한 양들이다.

그래도 여러 개가 모이자 덩어리를 이룰 정도는 됐고, 이내 모여든 액체금속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건 은빛 뱀이었다.

지금의 상태론 이게 최선이었다.

'······나노연산튜브가 포함된 부위가 없다.'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중요한 부위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부분만은 지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무식한 칼날에 파괴된 것 같았다.

이상하긴 했다. 분명 마지막 기억까지 그 부위는 남아있었는데.

'설마 나노연산튜브의 존재를 알고 회수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릴리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걸 아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만 가져갔을 리 없다.

하물며 상대는 과학 기술에 무지한 칼잡이.

아마 운이 좋게 그 부위를 파괴한듯싶었다.

'하지만 그 운은 거기까지다. 우리 작전은 성공했으니.'

스르륵.

릴리트가 뱀의 몸을 이끌고 건물 배전관 사이로 사라졌다.

이윽고 그녀가 도착한 곳엔, 뱀의 형체를 가진 비슷한 기계들이 네트워크 케이블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몸을 욱여넣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인간들아. 끔찍한 절망으로 너희를 찾아가리라.'

* * *

소울시 외곽의 한적한 장소.

유혜리로부터 전송된 좌표로 셀리케 경호대가 득달같이 들이닥쳤다.

그곳은 허름한 공장이었다.

관리가 된 지 최소 10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외관에, 보안도 주변에 쳐진 철조망 정도가 전부인 곳.

용케 깨진 창문은 없었으나 흙먼지를 잔뜩 머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수동개폐식 철문은 유압기가 고장 났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말 흔해 빠진 버려진 공장이었다.

하지만 진입한 내부는 달랐다.

완력으로 철문을 뜯어버린 경호대 앞에 펼쳐진 공장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 기계설비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본 경호대장 노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안드로이드 제조 설비로군.'

노리스도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눈에 익숙한 기계설비가 있었다.

사이보그인 그의 몸도 안드로이드의 설계를 많이 따르고 있었기에, 직접 눈으로 제작과정을 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달랑 기계설비뿐이다. 기계가 돌아갔었다면 분명 안드로이드라도 남아있어야 할 텐데, 어딜 봐도 깨끗했다.

공장 주위를 포위한 부하들에게도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정말 이것뿐인 듯싶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군.'

그때 공장 내부를 수색하던 부하 중 하나가 소리쳤다.

"지하 공간이 있습니다!"

노리스가 눈을 빛냈다.

'이곳의 비밀이 저곳이로군!'

분명 지금도 공간 스캔 중인데 지하 공간이 잡히지 않았다. 저건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서 찾아냈기에 찾은 거지, 기계의 힘만 빌렸더라면 찾아내지 못할 곳이다.

즉, 평범한 지하공간이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기다려라. 내가 먼저 내려간다."

노리스는 진입하려는 부하들을 멈춰 세우고 먼저 지하 공간으로 내려갔다.

이어진 계단의 끝으로 내려선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런 미친······?"

지상의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기계설비는 단순한 눈속임이었던가?

이곳은 생체실험실에 가까웠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 곳곳에 널브러진 정체 모를 고깃덩이, 연두빛 액체에 담긴 동물의 장기들.

노리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 장기의 주인이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저 고깃덩이도 어딘가에서 도려진 인간의 살집이라는 사실을.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과 발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검붉은 액체가 인간의 피라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한 거냐."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 노리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지하 공간의 끝.

그곳엔 앞서 봤던 광경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노리스는 느껴질 리 없는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거대한 살덩어리를 제멋대로 꿰고 이어붙인 못난이 인형 같았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몸체는 숨을 쉬는 건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고, 제멋대로 붙여놓은 팔과 다리가 말미잘의 촉수처럼 흔들거렸다.

"······."

노리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50년간 셀리케의 경호대에 있으면서, 숱한 광경을 많이 목격했다.

기업전쟁을 모조리 겪었고, 셀리케와 같은 경쟁 바이오기업들과도 싸웠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이런 광경은, 모두가 미쳐있었던 그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인간이 그저 실험실 생쥐로 취급받던, 광기로 얼룩진 그 시절에도 말이다.

이건 완전 미친놈이다. 아니, 인간이 아니다. 어찌 인간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내겠나?

이건 돈을 위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 광기였다.

스르릉.

노리스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이 살덩어리 실험체가 정확히 어떤 실험의 결과물인진 몰라도, 가만히 놔두기엔 위험해 보였다.

그의 눈엔 선명히 보였다. 저 흉측한 살덩어리 안에 숨어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그 순간.

번뜩!

살덩어리 온몸에 박혀있던 수백 개의 눈이 한꺼번에 떠졌다. 그리고 수십 개의 입에서 잔뜩 가래가 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창천(蒼天)은 저물고, 금천(金天)이 오리니! 어리석은 인간들아! 겸허히 종말을 맞이해라!]

"······!"

콰아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촌각의 단위로 살덩어리와 뼛조각들이 터져나갔고, 이윽고 그 안에 숨어있던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닿는 모든 게 바스러졌다. 실험의 흔적이었던 살덩이도, 각종 끔찍한 생체실험 도구들도, 이윽고 지하공간을 이루고 있던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까지도.

지하 공간을 모조리 집어삼킨 에너지는 지상으로 터져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경호대원들이 에너지의 영향에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루로 변했고, 안드로이드를 만들던 기계설비도 뒤틀리고 녹아내리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공장 전체를 집어삼킨 폭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주변까지 퍼져나갔다.

공장 부지 전체를 집어삼켰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하늘로 뿜어졌다.

근방 1Km 내외가 폭발의 영향으로 파괴됐다.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화르르륵!

타닥다닥!

한 차례 거대한 폭발이 지나간 이후, 남은 건 불기둥을 올리며 타오르는 공장······ 아니, 공장이었던 흔적뿐이었다.

그리고.

치이익!

저벅저벅.

그런 불기둥을 가르며 붉게 달아오른 은빛 육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심장 어림에선 새하얀 빛무리가 눈부시게 터져 나왔고, 전신에 걸쳐 은은한 빛 입자가 반짝거리며 불길을 막아주고 있었다.

"······감히 이런 개수작을 부려?"

으드득!

분노에 찬 노리스가 붉게 타오르는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떤 놈들인지 기필코 찾아주마!"

* * *

의뢰는 완료됐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얼굴이 갑자기 굳은 유혜리가 다음에 보자며 다급히 사라진 것 빼고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사실 그게 제일 찝찝했지만.'

아마 역추적 후 적들에게 들이닥친 경호대의 결과가 썩 좋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 상황에서 유혜리가 다급히 사라질 이유는 그것뿐이었으니.

뭐,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다.

내 의뢰는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무슨 생각 해요?"

홍차가 가득 담긴 찻잔을 내려놓은 로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별거 아니다. 지난 의뢰 생각을 조금 했어."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한눈에 보이는 풍경.

맞은편에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로제. 그 옆에서 우유를 질질 흘리며 한약색깔 코코아를 타고 있는 데이지.

그윽한 홍차향과 홍차와 어울리지 않지만, 다과로 올라온 감자칩과 감자 쿠키까지.

그래. 여기가 바로 내 일상이다.

"알리오가 보내온 보상은 확인해봤어요?"

"음. 좋더군."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오가 보내온 보상은 다름 아닌 호버바이크였다. 분명 반도체 수급난 때문에 구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용케 구했다.

"당신 준다고 웃돈까지 주고 배나 비싸게 사 온 거예요.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네요."

"웃돈을 주고 구해온 건가?"

안 그래도 무식할 정도로 비싼 호버바이크를 웃돈까지 줘서 구해오다니.

그러고 보니 호버바이크는 전부 알리오에게 받아냈다. 자동차 수집광이라더니, 이런데 돈 쓰는 건 아깝지도 않나 보다.

"안 그래도 반도체 수급난도 끝나서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당신을 기다리게 할 순 없다고 그러더군요."

"반도체 수급난이 벌써 끝났어? 그때 얘기론 당분간 안 끝날 것 같다더니?"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며칠 전부터 이야기가 돌더라고요. 전장반도체가 나오기만 하면 싹쓸이해가던 주체가 사라졌다고. 뭐, 워낙 밀린 물량이 많아서 충분하진 않지만, 조만간 해소될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이었나?

'하긴 일방적으로 쓸어갔던 주체가 사라졌다면 그럴 만도 하겠군.'

그런데 궁금했다.

대체 그 많던 전장반도체를 쓸어갔던 주체는 누구였으며, 왜 한순간에 사라졌을까?

'어디서 안드로이드라도 잔뜩 만들다가 공장이 폭발하기라도 했나?'

피식.

실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이, 아무렴 그러려고.

금속 십자가 (1)

144화. 금속 십자가

길다면 길었던 의뢰를 마치고 오랜만에 휴식이다.

나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을 바라보며 품 안에 갈무리해놨던 액체금속의 일부분을 꺼냈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을 받아 불길하게 반짝인다. 울퉁불퉁하게 녹아내린 단면과 거뭇하게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바로 이브가 탐냈던 눌어붙은 금속 덩어리다.

녀석은 수많은 금속 파편 중에서 정확히 이걸 집어냈다.

'이브가 이걸 탐낸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

금속을 든 손목에 채워진 워치가 보인다.

하지만 이브는 <세븐 프롱드> 공방에 있다. 작업용 안드로이드 하나를 구해서 연결해줬기 때문이다.

뭐, 정확히는 '거기에도' 있다는 게 맞을 거다. AI를 초월한 녀석이기에 이글아이와 안드로이드, 동시에 두 개의 몸을 움직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

'잘하고 있으려나.'

이브가 <세븐 프롱드>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금속과 관련된 세계 최고의 장인은 누가 뭐래도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 타이틀을 가졌던 스미스니까.

그와 함께 액체금속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마스터. 스미스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연결해줘."

때마침 스미스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면 공방에 방문해주지 않겠나?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짧은 휴식을 마무리하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