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베네딕토는 광인 같은 모습으로 교황청 내부를 질주했다.
인류의 신 고르의 안식처이자 모든 왕국 위에 군림하는 성역.
고행자에게 평안을 제공하는 지상 낙원.
바로 지금, 그 교황청에서 인류의 종말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제발 좀 꺼져라!"
베네딕토는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수십 명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고통스러워...."
"크르르.... 다 죽여 버려야 해!"
검을 질질 끌며 괴성을 질러 대는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시간은 부족했고, 당장 그들을 구할 방도는 전무했다.
'결국 성유물을 사용해야 하는 건가....'
신의 권능이 담긴 성유물은 그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지금 베네딕토에게 필요한 기적은 강대한 적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는 품에서 꺼낸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새하얀 액체가 바닥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크기가 비대해진 액체는 마치 업화처럼 타올라 이글거렸다.
베네딕토가 롱소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자, 백색의 불길도 궤적에 따라 움직였다.
성유물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허공을 횡단으로 베었다.
그러자 전속력으로 돌진해 오던 기사들의 피부가 순식간에 타오르더니, 무기와 방어구만 남긴 채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성유물과 기사단이 한꺼번에 산화된 순간이었다.
'최대한 아끼고 싶었건만....'
오로지 신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 베네딕토는 복도를 지나 지하 계단 아래로 달려 나갔다.
이미 그의 체력은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롱소드를 쥔 손아귀만큼은 여전히 단단했다.
신을 구하는 것이 곧 인류를 구하는 것이자, 본인이 지금까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다들 잘 따라오고 있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동료들은 모두 낙오된 모양이었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단독 돌파를 강행해야 했다.
지독한 위기감이 베네딕토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교황청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군.'
지하에 도착한 그를 막아선 것은 수많은 병사들이었다.
희미한 횃불 아래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짐승처럼 짖어 대는 그들을 보며 베네딕토는 내면의 두려움을 진정시켰다.
"내 말이 들리진 않겠지만...."
그리고 헤일처럼 밀려오는 적들 앞에서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제발 좀 꺼져 달란 말이다!"
그의 외침과 함께 후방에서 지원군이 쏟아졌다.
늑대 인간과 고블린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병사들.
과거에는 인류의 주적이었던 괴물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함께 종말을 막아야 하는 동맹.
망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말이 망자와의 전쟁으로 인한 공멸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인류와의 전쟁으로 역사와 문명을 잃어버린 망자들은 지금까지 겪은 슬픔과 분노를 쏟아 내는 것처럼 맹렬히 돌진했다.
선두의 늑대 인간 부대가 빠르게 길을 뚫었고, 그 뒤를 이어 고블린들이 조악한 무기를 휘두르며 난입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종족의 망자들이 피를 흩뿌리며 종말을 막기 위해 발악했다.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고,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비명뿐이었다.
'저 곳까지 어떻게든 도달해야 하는데....'
숨 막히는 난전 속에서 베네딕토는 저 멀리 끝에 위치한 문을 향해 움직였다.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전투에서 피아 식별을 바랄 수 없었기에, 오직 자신의 본능과 감각에 의지해야 했다.
아니나다를까, 병사뿐만 아니라 망자들의 눈 먼 공격도 그에게 쏟아졌다.
체구가 작은 놈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수인처럼 괴력을 가진 놈의 공격은 피하지 않으면 뼈가 으스러질 수준이었다.
'제발 조금만 더!'
마침내 인산인해를 뚫어 낸 베네딕토는 전방의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부딪혔다.
의외로 문은 쉽게 벌컥 열렸다.
애초에 잠겨 있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불가능해 보였던 작전의 최종 단계였다.
이제 남은 일은 인류의 신을 구출하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베네딕토는 얼굴에 잔뜩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만악의 근원을 향해 검을 겨누려고 했다.
"이게... 무슨...?"
하지만 눈을 씻고 둘러봐도 무기를 향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마치 거대한 실험실과 같았다.
주변에는 각종 고대 서적과 약재가 굴러다녔고, 고약한 악취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방 한쪽에 널브러진 신의 사체로 인한 냄새였다.
"고르시여!"
베네딕토는 황급히 인류의 신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고르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어째서...."
피접한 상골, 창백한 피부, 게다가 갈기갈기 찢긴 복부까지.
속이 텅 비어 있는 그의 육체는 마치 장기를 축출당한 노인처럼 보였다.
"이런 미친 짓을 대체 어째서!"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베네딕토는 그의 가슴 속에서 응축되어 있던 고함을 내질렀다.
잔뜩 흥분한 그의 어깨는 요동쳤고, 거친 호흡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신을 잃은 인류는 결국 이성을 잃고 짐승 같은 삶을 살게 될 터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베네딕토는 성직자로서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뿌리부터 썩어 있던 교단과 교황청은 본인들의 이권 다툼에만 정신이 팔린 채였다.
결국 베네딕토는 그들의 거짓말에 속은 채로 죄악과 업보를 쌓아 나갔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손에 피를 잔뜩 묻힌 후였다.
"결국 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만 있다면, 베네딕토는 그 어떤 짓이라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었다.
자신의 영혼을 바쳐야 하더라도.
"베네딕토...."
죽어 가는 신의 음성이 베네딕토의 귀를 울렸다.
고르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것을 보니, 머지않아 숨을 거둘 게 자명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실패하였느냐?"
"송구합니다....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그런 말 말거라. 너는 최선을 다했다."
베네딕토는 차디찬 신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가 명을 다하기 전에, 희망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이 사태의 주범을 밝혀내야 했다.
"고르시여. 알려 주소서.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모르겠구나.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인간도, 망자도 아니다."
예상 외의 답변에 베네딕토는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그러나 촉박한 상황 때문인지 그의 입이 절로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이 모든 간계는 인간도, 망자도 아닌 존재에 의해 일어났다."
"그렇군요.... 혹시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다. 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존재였던 모양이구나. 인간의 껍데기를 쓴 채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지."
베네딕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놈들의 모가지를 으스러뜨리고 싶었다.
"놈들은 죗값을 묻게 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 이제 다 끝났어."
"아닙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베네딕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 성유물을 이용한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끼였다. 하지만 현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악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루에 날마저 무딘 돌덩이, 게다가 그 둘을 묶어 놓은 실마저 엉성했다.
그러나 형편없는 외형의 도끼를 높이 든 베네딕토의 모습에 고르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베네딕토! 그 물건을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네딕토는 고르의 가슴을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고통에 절규하는 신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장대한 인류의 역사, 그 중심에 있던 고르는 한낱 비루한 인간같은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멈춰라! 제발...."
"고통스럽더라도 부디 인내해 주소서."
베네딕토는 좀 더 강하게 도끼를 내려쳤다.
살점이 찢어지고, 역겨운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이상, 그는 담담하게 해내야 했다.
"고르께서 선종하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랬으면 이 성유물조차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부탁이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거라!"
"감히 신성 모독을 범한 죄는 다음 생에 치르겠습니다."
고르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진 와중에도 베네딕토의 팔을 붙잡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바스라질만큼 미약한 악력이었다.
"네가 불경해서, 내가 고통스러워서 널 멈추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 연유가 무엇인지요."
"네가 하려는 짓이... 이 세계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고르의 눈은 간절해 보였다.
필사적으로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 내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네가 저지른 회귀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나도, 망자의 신인 르누스도 장담할 수 없어! 오히려 이 세계를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망가뜨릴 지도 모른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나의 신이시여...."
베네딕토는 남은 힘을 짜내어 강력한 일격을 내려쳤다.
그러자 하늘색 빛이 고르의 가슴팍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우린 더 이상 잃을 게 없지 않습니까?"
이윽고 강렬한 바람이 일어나며 주변의 먼지와 돌덩이들이 휘날렸다.
베네딕토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저항하지 않고 회귀를 기다렸다.
"고르시여.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안 돼.... 멈추어라...!"
"제가 원하는 시점의 과거로 도달하기 전까지는...."
"제발!"
"절대로 죽지 마십시오."
01화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베네딕토는 슬며시 눈을 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이 노곤하고 정신은 몽롱했다.
'절반뿐인 성공인가."
창밖의 황량한 벌판과 건너편의 과묵한 마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원하는 지점까지 회귀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르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는 반대했었고, 자신은 고르를 강제로 희생시킨 입장이었으니까.
'지금 마차는 대성당으로 향하는 것 같군. 마차에 혼자 탑승했다는 건....'
베네딕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과거의 업보를 마주하게 될 예정이었다.
북부 최극단에 위치한 대성당에서의 임무는 단순했다.
최전방에서 망자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무예에 재능이 있는 고아들을 '신살자'로 훈련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여 망자의 신을 암살하는 것.
그러나 실상은 그저 신살자의 체내에 독을 심어 제물로 바치는 수준이었다.
신살에 성공하면 온갖 부와 명예를 주겠다는 거짓말로 그들을 속이며.
'아무래도 쉽지 않겠군....'
결국 진실을 알아 버린 신살자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고작 서른 정도 되는 인원이, 그 열 배나 되는 병사들과 잡부들을 하룻밤 만에 모두 도륙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대성당은 무너지고, 그 틈을 노린 망자의 신은 무난하게 성장하며 인류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종말이 일어난 시발점인 것이었다.
자신이 성직자 생활을 막 시작한 시점이나 그 이전으로 회귀하길 바랐던 베네딕토는 아쉬움에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힘을 기르며 성유물을 모을 수 있다면 일이 훨씬 더 수월할 테니까.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아직 망자와 인류의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대성당도 무너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었다.
"이보게."
베네딕토는 건너편의 마부를 불렀다. 마부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습니까?"
"이번 임무에 데려왔던 신살자. 이름을 혹시 기억하는가?"
마부는 깊게 인상을 쓰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끙끙대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벨...이었던가요? 맞을 겁니다, 아마."
신살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베네딕토는 얼굴을 자신의 두 손에 파묻었다.
마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네딕토는 머릿속이 복잡하여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지 않겠어.'
최악은 아닌 차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서둘러 머릿속으로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이 다음 임무에서 르누스를 처음 만났었지.'
르누스는 망자의 신이지만 베네딕토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심지어 종국에는 인류와 함께 종말에 맞선 존재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싶었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대성당이었다.
'이미 신살자들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걸 깨닫고, 에디트를 중심으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겠지.'
전생의 베네딕토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들과 대립했었다.
그때는 무조건적으로 교단을 섬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그들의 거짓말과 위선을 알아챈 이상, 더는 그들의 명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었다.
'썩어 빠진 그놈들 때문에 결국 종말이 일어났으니.'
교단은 이미 타락한 상태였다.
신에게서 힘을 빼앗고, 그저 본인들의 안위와 권력에 눈이 먼 그 족속들은 그저 처단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종말의 배후자가 교단에 숨어 있는 이상,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섣불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베네딕토는 신살자들의 반란에 동참할 생각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 불과하더라도, 그들이 성장하면 얼마나 큰 전력이 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했으니까.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교황청에 침투하여 체제 전복까지 꾀할 수 있는 능력.
게다가 적에게는 무자비하지만 아군이 된다면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충성심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으니....'
대성당의 시절은 베네딕토가 회귀를 간절히 원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신살자를 직접 제물로 바쳐 왔다는 죄책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
비록 전생의 죄를 씻어 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생에서는 망설임 없이 옳은 일을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상태일 텐데. 이를 어쩐다....'
고민이 깊어지는 와중, 어느새 마차는 대성당에 가까워졌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사이에 다듬어진 좁은 길 덕분에 마차의 덜컹거림도 잦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에 높게 솟은 대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그와 함께 넒은 공간을 차지한 건물의 모습이 장엄함을 뽐냈고,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낡은 벽 위에서는 넝쿨이 낙서처럼 감겨 있었다.
거대한 철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사슬 갑옷 차림의 병사 두 명이 다가왔다.
"잠시 탑승자 확인하겠습니다."
베네딕토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병사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병사는 투구를 벗고 격식에 맞게 고개를 숙였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주임신부님."
"수고하게."
베네딕터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병사에게 담담히 격려를 보냈고, 병사는 손짓으로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임신부라....'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베네딕토는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공식적으로는 주임신부가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으니까.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훈련 중인 신살자들이었다.
그들을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확실히... 심상치 않군.'
조용히 스쳐 지나가려던 베네딕토는 몇몇 신살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공손히 인사하는 듯했으나, 은밀한 귓속말과 눈동자에 비친 경멸감이 은연중에 내비쳤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다음 신살은 약 두 달 뒤.
어떻게 해서든 그 기간 안에 자신을 향한 악의를 해소시키는 게 목표였다.
느닷없이 회귀를 했느니 따위의 푸념이 아닌, 진심이 조금이나마 느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신부님!"
그때, 누군가가 베네딕토를 불러 세웠다.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온갖 고민을 잠시 멈춰 버릴 만큼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수녀님...."
뒤를 돌아보니 라파엘라 수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신살자들보다도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어... 떠나신 지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요?"
"그, 그렇죠.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긴, 신살을 위해 대성당을 떠나면 시간이 평소와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이해는 되네요."
베네딕토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멍하니 응시했다.
라파엘라에 대한 기억을 되짚으니 그는 순간적으로 계책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네. 다만 잠시 가만히 있어 주시겠습니까?"
라파엘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따라 주었다.
그녀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리숙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대성당의 인원은 모두 신살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며 악독하게 괴롭혔다.
신살자들은 이 괴롭힘 또한 훈련의 일환이라는 미명 하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직 라파엘라만이 신살자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아껴 주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반란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살자와 라파엘라는 마치 어머니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
만약 그녀의 도움을 얻는다면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라가 근처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신살자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사라졌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이젠 괜찮습니다. 수녀님 덕분입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요."
"제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니까요."
라파엘라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등을 돌렸다. 그리고 헛기침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사실 주교님이 보내신 거에요. 신부님이 도착하시면 곧바로 데려오라 하시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되셨군요."
"번거롭기는요! 잠시 산책 나오고 좋죠.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조금 아파 보이시기는 한데."
"괜찮습니다. 앞장 서시죠."
그렇게 둘은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베네딕토는 자신도 모르게 내부를 둘러보며 또다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건물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기둥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그 아래 삼층과 이층의 목제 난간은 방금 닦은 것처럼 광택이 났다.
또한 일층의 복도에는 선대 교황들의 초상화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햇볕이 비치는 그림들에서 마치 광배가 빛나는 듯했다.
그래서 베네딕토는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기억나시나요? 예전에도 제가 아프냐고 여쭤 봤는데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종종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문제였죠. 복부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도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아프면 좀 아프다고 하시라고요! 그래야 제대로 치료를 할 거 아니에요? 치료하고 간호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베네딕토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라는 한숨을 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아벨은 편안히 천국에 입성했나요?"
"고르의 품 안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드려서."
갑작스레 숙연해진 분위기.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발소리만 청명하게 울렸다.
"혹시 제가 원망스러우십니까?"
"아니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신부님도 힘드신 거 다 알아요. 그냥...."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던 라파엘라는 우물쭈물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해서 그렇죠. 언제까지 아이들이 희생당해야 하는지...."
그리고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모아 베네딕토에게 간청했다.
"제가 이런 말 했다고 주교님께 이르면 안 돼요!"
"비밀 엄수하겠다고 약속드리죠."
라파엘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며 혹시나 누가 듣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활기찬 모습에 베네딕토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덧붙였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느덧 둘은 예배당 입구 근처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라파엘라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베네딕토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단순한 질문입니다. 갑자기 궁금해서요."
"하지만 신부님은 보통 그런 질문을 하시지 않잖아요."
"이럴 때도 있는 법이죠."
진갈색 바탕의 예배당 문 왼쪽에는 초라한 요람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화려한 관이 새겨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왼쪽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라파엘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네.... 뭐, 바쁘실 테니까요.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라파엘라는 개의치 않는다는 제스처와 함께 목례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베네딕토는 나직이 속삭였다.
"그럴 리가요. 굉장히 큰 역할을 하실 겁니다, 수녀님."
02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네딕토는 장엄함에 압도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많은 장의자였다.
위층의 것들까지 합치면 족히 일백은 넘는 숫자였다.
각 의자들 사이에는 와인색의 양탄자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아마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연단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도로가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대성당의 사람들을 모두 앉히더라도, 절반조차 채우지 못하겠지.'
벽면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서에 적힌 일화나 성인이 그려져 있었고, 연단의 뒤쪽에는 거대한 그림이 존재감을 뽐냈다.
밤하늘 위에서 홀로 반짝이는 빛, 그리고 그 빛 아래서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
왕족은 왕궁에서, 귀족은 연회장에서, 평민은 밀밭에서.
그들은 각자 빛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저 역겨운 그림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작품명도, 그린 화가의 이름마저 미상인 저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천국에 입성하고 싶다면 모두 고르께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르의 대리인 자격을 가진 권력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의 베네딕토는 저 그림을 보며 항상 고민했다.
과연 저것이 진정 인류의 신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자세인가?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지금까지 온 인류가 거짓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성서의 모든 글귀가 거짓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 순수성을 잃고 오염된 성서는 그저 선전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얼마든지 백성들을 착취할 권리를 얻어낸 왕족, 귀족, 그리고 교황청의 성직자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본인들의 권력 다툼뿐이었다.
세상을 좀먹는 저놈들을 처단하지 않는 한, 전생에서 벌어진 비극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배후자.... 놈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그 모든 악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
전생에서 베네딕토가 실패했던 이유는 결국 그 배후자를 잡아내지 못해서였다.
겨우 얻은 두 번째 기회인 만큼,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복수를 해내야만 했다.
"베네딕토 주임신부."
티에고 주교는 맨 앞 열에 앉아 있었다.
마흔을 겨우 넘긴 그는 벌써부터 힘 없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는 깡마른 팔을 휘적거리며 손짓으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뭐,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주교님."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망자들이 금수와 다름없게 변한 것은 과거 인류가 망자의 신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지속적인 신살을 통해 작금의 상황을 유지하여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베네딕토는 방금 임무를 마치고 온 상황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과거 자신의 모습을 재연해 냈다.
"지금쯤이면 망자의 신이 아이의 심장을 섭취했을 겁니다. 그리고 결국 맹독이 퍼져 죽겠죠."
"그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숨을 내쉰 티에고 주교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짓거리도 곧 있으면 끝나겠지."
"내년이면 다른 곳으로 부임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제발 이런 변방 깡촌에서 또다시 썩으라고 하지만 말았으면 좋겠군."
티에고는 대성당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책임은 막중하지만 권력은 전무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기에 대성당의 업무는 거의 베네딕토가 처리해야 했다.
티에고가 하는 것이라곤 그저 베네딕토가 작성한 서류를 확인 후 결제하는 것뿐이었다.
"자네는 계속 대성당에서 근무하고 싶은 건가?"
"그저 맡은 업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티에고는 몹시 피로한 눈으로 베네딕토를 쏘아보았다.
베네딕토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몰래 등 뒤로 숨겨야 했다.
"업무에 충실하고 싶다는 사람이 왜 자꾸 신살자들에 관한 쓸데없는 서류를 올리는 겐가?"
"죄송합니다, 주교님. 하지만...."
"내 말 듣게. 몸이 편하면 잡생각이 많아진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가축들도 채찍을 들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네. 저것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길들여야 하는 것을...."
전생의 베네딕토는 최소한 신살자들이 대성당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번번히 티에고의 반대로 인해 그의 제안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떠나게 되면, 대성당은 자네 책임 하에 놓이겠지. 그런 사람이 사사로운 정 때문에 큰일을 못 해서야 되겠나?"
"잘 해내겠습니다."
"제발 기존 원칙을 바꾸지 말게. 괜히 문제 생기면 나한테까지 책임을 물을 지도 모르니."
베네딕토는 순종적인 미소를 지으며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굳이 지금 그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그의 죄값은 나중에 따로 지불하도록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대체 왜 교황청의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고 이 변방까지 자원한 건가?"
"뜻밖의 질문이시군요."
"그거야 뭐, 자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몰랐으니까."
그의 기분 나쁜 농담을 애써 무시하며, 베네딕토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남부 교단의 손에 길러진 베네딕토는 그들의 무기로 이용되었다.
주요 맡았던 임무는 남부 추기경의 정적 제거.
단순히 암살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작 및 부대 통솔까지 거뜬히 해낼 수 있었기에 교황청의 기사단에 입단 제의까지 받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성직자로서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의심, 그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해치고 있다는 죄책감.
이 두 이유 때문에 그는 기사단 입단을 거부하고, 다른 이에게 추천을 받아 대성당이라는 극비 시설로 자원한 것이었다.
물론 대성당에서까지 사람을 해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이유를 말해 주더라도 네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저 본인의 안위만 신경 쓰는 티에고는 아마 코웃음을 치며 어리석다고 비웃을 터였다.
그렇기에 베네딕토는 대충 변명하기로 했다.
"말실수를 좀 했더니 바로 내치더군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군. 자네 같은 앞뒤 꽉꽉 막힌 인간들이 종종 그런 실수를 하니 말이야. 내가 자네 상관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게."
티에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낄낄대며 베네딕토의 어깨를 쳤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저 기분만 상하게 할 뿐.
베네딕토는 잠깐이나마 티에고를 포섭할 수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목숨은 살려 주는 대신, 정보를 뜯어내거나 첩자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베네딕토는 곧바로 그 아이디어를 폐기했다.
'눈 깜짝할 새 배신하고도 남을 인간이니....'
물론 베네딕토는 가능한 많은 동료와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자를 함부로 들였다간 돌이키기 힘든 손실을 감수해야 할 터였다.
만에 하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부의 군대라도 밀려온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웬만하면 주교급 이상의 성직자들은 애초에 고려도 하지 않는 게 좋겠군.
많은 신살자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은 기본.
거기다가 먼 미래에 큰 전력이 되어 줄 망자들에게도 막대한 손실이 벌어질 게 자명했다.
'그리고 굳이 포섭하지 않더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으니.'
한창 남부에서 활동하던 시절, 베네딕토는 추기경의 정적들에게서 숱한 정보를 빼낸 전력이 있었다.
과연 티에고 따위가 가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는 의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더 보고할 게 없다면 이만 가도 좋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묵례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단순히 주교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티에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
진실로 포섭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디트.
신살자들의 실질적 리더이자 반란을 기획한 장본인이었다.
'아마 그녀를 설득하는 일이 제일 어렵겠어.'
베네딕토는 과거 에디트와 있었던 사건들을 돌이켜 보았다.
한때는 그녀와의 인연을 악연이라 여긴 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일으키는 반란을 막지 못했기에 교단에서 파문까지 당하며 여러가지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둘은 종말을 막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게 되었다.
각자의 등 뒤를 지키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후에야 베네딕토는 비로소 에디트를 이해할 수 있었고, 끝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물론 용서를 받기엔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때,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베네딕토의 옆을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갔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가 잠시 베네딕토의 시야를 가렸다.
"앗! 죄송해요, 신부님!"
라파엘라는 걸음을 황급히 멈추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급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좀 급한 일이 생겨서요."
"일이라면 어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라파엘라는 갑작스레 다가와 베네딕토의 귀에 속삭였다.
"애들 중 한 명이 다쳐서요."
"굳이 귓속말을 하실 필요는 없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어쩌다가 다친 겁니까?"
"마구간 지나다가 말에게 살짝 치였다는데, 조금 이상해요. 상처만 보면 말이 아니라 사람한테 맞은 것 같거든요."
짤막한 설명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마부가 신살자에게 손찌검을 한 모양이었다.
대성당에서 공공연하게 발생하는 일 중 하나였기에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당당하게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혹시 누가 다친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에디트에요."
참으로 공교롭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딕토는 잠시 자리에 그대로 멈춰 상념에 빠졌다.
어쩌면 에디트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수녀님.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 주셔요."
"며칠 뒤, 신살자들에게 응급 치료 수업을 진행하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에디트가 잠시 쉬고 싶다 말하면 그녀를 몰래 보내 주십시오."
라파엘라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승낙했지만, 혼란스러워 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신부님은 평소답지 않으시네요."
"이해합니다. 충분이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라파엘라는 에디트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 또한 신살자들의 처우를 개선시키기 위해 베네딕토가 노력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베네딕토는 어디까지나 대성당의 주임신부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신살자를 해코지할 수도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결코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다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요?"
"정원에서 에디트와 면담을 마친 후, 즉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신부님을 믿어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라파엘라는 또다시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베네딕토 또한 다시 처소로 향했다.
장소와 시간은 어느 정도 정해졌으니, 이제 에디트를 설득할 대사를 궁리할 차례였다.
03화
대성당 외곽에 위치한 정원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품었다.
봄에는 푸른 잔디와 꽃들이 피어나 사방을 초록빛으로 물들였고, 가을에는 돌다리 위의 낙엽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전생에서 베네딕토는 이곳에 종종 홀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망자나 신살 따위의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은 채 편히 쉴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정확히 그 반대의 상황이었지만.
'몸은 편하긴 하지만 머리가 아프군.'
베네딕토는 낮잠을 자는 척하며 정원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오로지 에디트를 낚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미끼로 삼은 셈이었다.
'이제 슬슬 접근해 올 때가 됐을 텐데....'
어떻게 해야 자신이 평생 동안 속고 있었고, 이곳을 떠난 친구들은 모두 살해당했으며, 그다음 살해당할 사람이 자신인 것을 알아챈 사람에게 같은 편이 되어 달라고 설득을 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베네딕토의 머릿속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몰아세웠다.
차라리 망자와의 혈투가 더 쉽게 느껴질 수준이었으니까.
결국 기나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되려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절대 설득이 불가능하겠지.'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인류의 신이 직접 대성당까지 행차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어떤 말로도 그녀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오히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되려 반발심만 더욱 커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만 들인다면....'
베네딕토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신살자들은 자신을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를 붙이며 저주를 하고 있을 거라고.
또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발언과 행동까지 재해석되며 증오가 커질 것도 불 보듯 뻔했다.
'아이들은 내가 그저 밥을 먹는 것만 봐도 짜증이 나겠지. 아벨을 제물로 바치고 온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좀 보라는 식으로.'
배신자, 위선자, 심지어 살인자라며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고 있을 신살자들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재해석에 혼란을 주는 것뿐.'
만일 부정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의 행동과 발언을 그들에게 꾸준히 노출시킨다면 자연스레 그들의 판단은 흔들리게 될 터였다.
그렇게 점차 자신의 이미지를 반전시켜야만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을 듯싶었다.
'물론...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지켜봐야겠지.'
마침 근처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베네딕토는 여전히 낮잠을 자는 척하며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에디트는 지금까지 가르친 신살자 중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맨손 격투에도 능했지만 그녀의 창술은 꽤나 놀라웠다.
자신의 실력을 자연스럽게 숨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에디트의 가장 큰 재능은 영악함일지도 모르겠군.'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에디트는 베네딕토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냥의 적기를 기다리는 독사처럼 대기하던 베네딕토는 순식간에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무슨...!"
"햇볕을 가리는구나."
어깨까지 오는 은빛 머리카락에 전반적으로 앳된 인상착의.
그러나 먹잇감의 목덜미를 서슴없이 물어뜯을 늑대의 눈매를 가진 에디트는 그야말로 새끼 맹수와 같았다.
곧 있으면 성년이 될 그녀는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강점을 활용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연기하며.
"죄송해요 신부님....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과거의 기억 덕에 그녀의 속내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
그러나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자신 또한 매한가지였기에, 베네딕토는 그녀의 연기에 맞춰 주었다.
"미안하구나. 악몽을 꾸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했어."
"신부님도 악몽을 꾸세요?"
에디트는 진심으로 예상외였다는 듯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살자들이 자신에게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베네딕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악몽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대성당의 주임신부도 예외는 아니지."
베네딕토는 풀밭 위에 떨어진 초록빛 사탕을 집었다.
그는 사탕과 에디트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겉으로 보기에도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은 그것의 정체는 독이었다.
인간에게는 무해하지만, 망자의 신에게는 치명적인 그것은 보통 '씨앗'이라 불렸다.
대성당에서는 지금까지 신살자의 식사에 '씨앗'을 섞어 그들의 몸에 차곡차곡 쌓아 왔다.
신살에 이용할 제물로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이미 그 정체를 알아낸 신살자들은 이를 오히려 베네딕토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본인들 대신에 망자의 신에게 제물로 바칠 작정으로.
"이걸 떨어뜨린 모양이구나."
베네딕토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에디트에게 사탕을 돌려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요즘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이 많다던데, 혹시 이 사탕 때문은 아니겠지?"
꽤나 직접적인 질문.
에디트는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니 아무래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실력은 출중했으나 실전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겁나는 게 당연하겠지. 잠자던 짐승에게 목줄을 채우려다 물리기 직전인 꼴이니.'
베네딕토의 첫 번째 목표는 그녀에게 암시를 보내는 것이었다.
에디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자기 멈춰 세운 것도, 식사와 사탕을 언급한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마치 내가 그녀의 반란 계획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해.'
에디트는 주도면밀한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심코 넘길 발언이나 행동까지 분석하는 그녀라면, 완곡적인 표현만으로도 암시를 보내기 충분했다.
하지만 에디트는 아직 고집을 꺾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에 쥔 사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고집에는 근거가 충분했다.
반란 모의는 오직 신살자들끼리만 계획된 것이고, 그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니까.
두려운 마음을 견디며 집요하게 목표를 노리는 정신력은 그녀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강점을 꺾어야만 했다.
"이 사탕은 처음 보는 군. 어디에서 났지?"
"리암이 양조장 근처에서 찾았다고 하더라구요."
"맛은 있더냐?"
"궁금하면 하나 드셔 보세요."
그녀는 또다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맹독 사탕을 권했다.
무심하게 말하는 포인트도 잊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졌던 사탕이라면 사양하마."
"새로 하나 드릴게요."
"됐다. 너희 간식을 무슨 염치로 뺏어 먹겠느냐."
베네딕토는 몸을 숙인 뒤,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게다가, 원료조차 알 수 없는 사탕을 먹었다가 탈이 나면 어쩌려고?"
에디트는 간신히 그녀의 입술의 떨림을 자제한 듯했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베네딕토는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도망쳐야 할지, 변명을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당장 맞서 싸워야 할지. 선택지는 많아도 좋은 결과를 불러올 경우의 수는 없어 보이고.'
그리고 그 다양한 선택지를 강제하고 있는 전제 조건은 그녀의 뇌리에 깊이 박힌 듯했다.
'이젠 에디트도 인정하겠지. 높은 확률로 내가 그녀를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첫 번째 목표는 확실히 달성한 듯했다.
여기까지는 크게 어려울 것 없다고 예상했기에 베네딕토는 안도하지 않았다.
두 번째 목표의 달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이제 베네딕토는 자신이 그녀의 편이라는 암시를 심어야 했다.
"그나저나 그건 묻지 않는구나."
"...뭐를요?"
"무슨 악몽을 꿨는지 말이다."
에디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대화 주제를 바꿀 수 있어 안도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다 듣고 나서도 그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나는 한 마을에 갇혀 있었다. 그 마을의 구성원은 모두가 행복했지."
"악몽처럼 들리진 않는데요."
"단 한 명만 빼고."
베네딕토는 에디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에디트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왜죠?"
"그 마을 모두가 행복했던 이유는, 그 한 명이 모든 고통을 대신 느껴야 했기 때문이지."
"그럼 신부님이 그 고통을 경험하신 건가요?"
"아니. 나는 그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마을의 행복이 유지될 수 있도록."
"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디트.
갈수록 직설적인 그의 발언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듯했다.
지금이 적기임을 알아챈 베네딕토는 쐐기를 박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 따위 마을은 콱 망해버리는 게 낫다고."
"그 말.... 진심이세요, 신부님?"
베네딕토의 말은 사실상 반란에 동조한다는 뜻이었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에디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 강제된 희생으로 쌓은 행복이나 평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대사들은 베네딕토가 미리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거짓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베네딕토는 혹독한 값을 치르고 나서야 강제된 희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씀을 왜 하시는 거죠?"
"네 도움이 필요하다."
베네딕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그를 경계하는 에디트의 망설임이 미약하게나마 전달되었다.
"만일 네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응해 주겠느냐?"
에디트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당장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베네딕토도 그저 말 몇 마디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혼란, 에디트의 고정된 증오와 계획에 큰 변수를 심어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에디트!"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파엘라 수녀였다.
헐레벌떡 뛰어온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에디트에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방금 전까지 에디트와 나누던 심각한 대화 내용과 동떨어진 풍경이었다.
"정원에서 잠깐 산책하라고 했지, 계속 쉬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단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아직도 속이 불편해서요."
라파엘라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열을 쟀다.
평소와 달리 낯빛도 어둡고 잔뜩 긴장한 모습인 에디트는 마치 실제로 아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순히 체한 거라 생각했는데, 걱정되는구나."
"아니에요! 곧 괜찮...."
"괜찮을 리가 없지! 당장 업히렴. 침대로 가자."
라파엘라는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그녀의 등을 콕 찌르며 말없이 그녀를 제지했다.
"수녀님.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에디트?"
에디트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베네딕토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서둘러 달아나듯이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라파엘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이제는 대답해 주셔야죠?"
"대답이요?"
"네! 갑자기 신부님이 변한 이유요!"
라파엘라는 베네딕토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속에 쌓아 둔 궁금증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저 바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은 못 속여요! 평소에 절대로 하지도 않을 행동만 계속 골라서 하고 계시는데, 대체 무슨 상황인 건가요?"
"수녀님, 잠시만 진정을...."
"제가 어떻게 진정하나요!"
"우선 제자리에 멈춰 주시겠습니까? 어지럽군요."
"신부님과 아이들이 관련된 문제인데...."
다시 생겨난 짧은 침묵. 베네딕토는 사려 깊은 그녀의 말에 감사함을 느꼈다.
또한, 그녀를 선택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으며....
"신살자들과 함께 대성당에서 반란을 일으킬 예정입니다."
"...예?"
그녀가 절대 진정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04화
어느덧 회귀한 지 약 두 달이 된 시점.
베네딕토와 신살자의 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베네딕토를 어려워했고, 베네딕토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굳이 친절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갑작스레 다가가려 하면 오히려 멀어질 테니.'
하지만 그 애매한 관계도 이제는 끝날 예정이었다.
지금 그는 예지몽을 꾸고 있었으니까.
'이제 우리 모두 선택을 내려야겠지.'
대성당 숙소에 있어야 할 그는 어둑한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북부 최극단 너머에 존재하는 잉태의 숲.
망자들의 영역이자 그들의 신이 태어나는 장소였다.
간혹 남쪽의 시인들은 신의 탄생이라는 소재에 대해 화려한 묘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전생에서 얻은 정보 덕분에 그 실상을 알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평범한 출산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망자의 신이 그러했고, 인류의 신 고르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꾸는 예지몽이라 그런지 느낌이 이상하군.'
망자의 신이 출현할 때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그에 관련한 예지몽을 꾸게 된다.
이를 통해 망자의 신에 대한 정보를 획득 후, 신살을 진행해 온 것이다.
대성당 자체가 거대한 성유물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래 예지'라는 기능은 오직 망자의 신 출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사실상 대성당은 그저 커다란 봉화 수준의 성유물인 셈이었다.
'슬슬 움직여야겠어.'
베네딕토는 차분하게 잉태의 숲 깊숙이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많은 망자의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망자들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전방을 향해 질주했다.
수인, 트롤, 그리고 고블린.
현재 대성당에 알려진 망자의 종류는 이 셋이 전부였다.
이 땅을 인간들이 아닌 망자들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보다 더 다양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멸종되거나 사라진 탓이었다.
'이게 신을 잃은 자들의 말로구나.'
야만의 상태이던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이룩한 망자와의 전쟁에서 이겼는지, 그리고 무슨 수로 신살에 성공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기록은 조작되었으니까.
그나마 확실한 사실은 인류가 뒤늦게 신을 탄생시켰다는 것, 그리고 신의 힘을 이용했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너희의 잘못은 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지.'
신이라는 존재는 해당 종족의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았다.
만일 그 그릇이 깨지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종족의 이성과 감정이 무너져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전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머릿속에 맴돌던 베네딕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수많은 목숨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지며 죽음으로 가득했던 교황청의 피비린내는 그의 코끝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인류를 지키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일 테니까.'
어느덧 베네딕토는 높은 언덕에 서서 협소한 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우울한 회색 모래 한가운데에 거대한 바오밥나무 밑동만 남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한 풍경이었다.
그 밑동 위에는 늙은 트롤 주술사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며 연설을 진행중이었다.
보통의 망자들은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지만, 간혹 특수한 놈들은 잊혀진 고대의 언어를 사용했다.
인간인 베네딕토는 놈이 어떤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쇠했음에도 강단 있는 목소리와 몸짓은 마치 성전을 선포하는 교황처럼 신성하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어느덧 놈의 목소리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울부짖던 망자들도 차츰 침묵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뵙게 되는군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베네딕토는 크게 심호흡하며 이번 생의 첫 대면을 준비했다.
이윽고 주술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고, 그 뒤에 있던 존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금발의 머리, 새하얀 피부, 그리고 눈 밑의 붉은 물방울무늬.
인간을 닮았지만 보다 더 상위의 존재처럼 품위를 갖춘 그녀는 양 손을 곱게 모은 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떨어진 베네딕토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서 오시지요, 망자의 신 르누스시여.'
* * *
티에고 주교의 집무실은 널찍했다.
양 벽엔 성서를 비롯한 여러 고서들이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바탕에 금빛 수가 놓여 있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서류가 수북이 쌓인 책상 뒤쪽에는 기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나 티에고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당장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수준이었다.
"베네딕토....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 주겠나?"
"예지몽을 꿨습니다. 망자의 신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현재 대성당에서 예지몽을 꿀 수 있을 만큼 자질을 갖춘 성직자는 베네딕토가 유일했다.
대성당을 총괄하는 티에고 주교가 아닌 주임신부인 베네딕토만이 예지몽을 꿀 수 없다는 건 대성당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하면서도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티에고는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달라는 듯이 처량한 눈빛을 쏘아 댔다.
"분명 지난 번에 자네가 직접 신살자 한 놈을 제물로 바쳤을 텐데?"
"예, 아벨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본 망자의 신은 다른 놈이었습니다."
한 종족의 신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단에서 파견한 이단 심문관들이 잡신들을 퇴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테니까.
다만 망자 또한 여러 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새로 탄생할 때마다 곧바로 신살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다른 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약 3년 전에 파문된 신부, 사라카가 담당했던 놈이더군요."
"망할. 그 개자식은 끝까지 내 발목을 붙잡는군."
"신살자와 함께 행방불명되었던 그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티에고는 입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피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물부리에 균열이 날 정도로 잘근잘근 씹어 대고 있었다.
"그 새끼 때문에 나까지 파문당할 뻔했지.... 자네는 후임자를 받지 못하게 됐고."
화가 잔뜩 난 티에고와 달리 베네딕토는 그에게 유감스러운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회귀까지 했는데도 그를 만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는 유일한 베네딕토의 친구 같은 사내였으니까.
"베네딕토. 내 말 잘 듣게. 이대로 있다간 우리 모두 끝장이야."
"망자의 신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겠죠.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합니다."
"그딴 게 무슨 소용인가! 그 전에 교단이 우릴 끝장낼 거라는 말일세! 모든 책임을 우리가 떠맡게 되겠지."
역시 본인의 안위만 챙기는 졸장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망자의 신이 살아 있었다면 찬리노아 성에서 몰랐을 리 없는데 말입니다."
"추기경은 그런 사소한 사실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제발 상황 파악 좀 제대로 하게!"
이제는 손까지 벌벌 떠는 주교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물론 수백 년 동안 아무 문제 없었던 대성당에서 처음으로 중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니, 저런 한심한 반응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긴 했다.
베네딕토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떻게 이런 수준의 사내가 주교의 자리에 올랐냐는 점이었다.
"지금 망자의 신은 유아기를 넘어 유년기까지 성장한 모습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최소한의 조치는 취했다는 인상을 남겨야겠지."
결국 빠각 소리와 함께 파이프 담배는 주교의 입에서 탈출하듯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에고는 굳은 결심을 한 눈빛으로 베네딕토에게 명령했다.
"임무 수행 준비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세 시간이면 될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주겠네. 적당한 신살자 하나 골라서 데려가게."
또 결국은 베네딕토에게 의지하는 티에고였다.
심지어 명령도 특별할 게 전혀 없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신살자를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베네딕토는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주교를 자극했다.
다행히도 주교는 즉각 반응했다.
"만일 이 임무도 실패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망자의 신은 이미 유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전처럼 제물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적어도 시간은 벌 것 아닌가! 그사이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면...."
"만약 도주하실 생각이시라면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주교님."
정확하게 정곡을 찔린 티에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종이를 힘껏 구긴 뒤 베네딕토를 향해 던졌다.
주교로서의 위압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겐가? 우리가 여기서 더 뭘 할 수 있다고! 이대로 있다간 교단에게 문책을 당해 죽든가, 망자 놈들에게 찢겨 죽을 텐데!"
티에고는 평소보다도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는 겁에 질린 채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베네딕토가 지금껏 주교의 말에 순종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주교가 정신적으로 취약해진 지금이야말로 그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도주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뭐? 그 방법이 뭔가?"
"교단이 문제 삼지 않도록 깔끔히 해결해 버리면 됩니다."
"그럴 방법이 없으니 이러는 거 아닌가!"
"방법은 있습니다."
그는 주교의 책상에 가까이 다가가며 진실된 신도의 모습을 연기했다.
"저희가 가진 최고의 방패는 신살자이지요. 그들을 모두 완전 무장시켜야 합니다."
베네딕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교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살자는 양날의 검인 존재이니까.
"베네딕토. 자네가 대성당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로 생긴 상흔 중 절반은 망자에게서 얻은 것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신살자에게 당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겠군."
"때로는 망자의 공격보다 신살자의 기습이 위협적이었죠."
제아무리 오랜 시간 훈련받은, 살생에 능한 신살자도 결국은 청년에 불과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전투 속에서 생존의 본능에 사로잡힌 청년들은 종종 도망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살자 홀로 보내는 것이 아닌, 베네딕토같은 성직자가 함께 파견되는 것이었다.
신살자가 망자의 신에게 '확실히' 전달되어 제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의 목표였으니까.
"나는 그 새끼들을 믿을 수 없어. 만약 놈들이 도망이라도 친다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가 더 생길지도 몰라."
"아니면 신살자가 정말로 신살을 해 버릴 수도 있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베네딕토는 책상을 돌아 티에고의 옆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결사의 의지를 보였다.
"믿어 주십시오. 제가 직접 가르친 놈들입니다."
"자네답지 않아. 자네는 위험을 감수하는 성격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망자들은 북부 전체를 유린할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아무리 멀리 도망간다 한들, 북부 추기경 예하의 눈을 벗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신살자 놈들이 단체로 도주라도 한다면? 자네 생각대로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제 판단은 정확합니다. 저희는 가진 모든 패를 남김없이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죠."
"나는.... 잘 모르겠네...."
티에고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는 여전히 책임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운 것이었다.
'더는 대화로 설득할 수 없겠군.'
그렇기에 베네딕토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티에고의 뺨을 내려쳤다.
"티에고 주교. 자네는 알 테지. 내가 이 대성당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두고도 이 따위 결정을 내린 자네를 보니 그간 쌓인 악감정을 감출 수가 없군."
티에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베네딕토를 쳐다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정지한 듯했다.
정말이지 묵은 체증이 내려갈 만큼 만족스러운 타격감에 베네딕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이,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자네는 내 앞에서 도주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 망자의 신을 막아야 한다는 대성당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그리고 주교의 뺨을 한대 더 시원하게 내려쳤다.
"억!"
"그러니 자네를 여기서 즉결처분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말이네. 뺨 몇 대 때린 게 대수인가?"
"이, 이게 무슨.... 자네가 무슨 권한으로...."
"지금 우리는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지. 추기경 예하께서 이미 목이 잘린 자네의 권한 타령 같은 사소한 문제를 신경 쓰실 것 같지는 않네만."
베네딕토는 검집에 손을 올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티에고 주교, 살고 싶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 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말이야."
티에고는 소인배에 불과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베네딕토의 실력을 잘 알았기에, 눈치를 보며 별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자네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거겠지. 다 이해해. 자네는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물론 베네딕토는 당장 티에고의 목을 베어 신살자들에게 화친의 선물로 건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대성당 주교의 수급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자네 말 대로 우선 신살자 한 명을 망자의 신에게 바치도록 하지. 신살자 전원을 무장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예, 예...."
"하지만 내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 말대로 하지 않았거나 대성당에서 이탈한 상태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베네딕토는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티에고의 목젖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툭툭 건드렸다.
"온 대륙을 추적해서라도 네놈이 그토록 좋아하는 추기경 앞에 반드시 데려다 줄 테니까."
티에고는 말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그저 겁먹은 눈동자와 함께 고개를 연신 끄덕거릴 뿐이었으니까.
베네딕토는 과거의 악연을 떠올리며 그를 더욱 괴롭히고 싶었지만 일단은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신살자들에게 말 좀 전해 주게."
"...뭐라고 전하면 되... 겠습니까?"
"주임신부가 너희를 위해 기회를 준 것이라고."
티에고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확률은 낮았다.
베네딕토가 어떻게 남부에서 명성을 쌓았는지 알고 있는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군 주교를 그대로 둔 채, 베네딕토는 저벅저벅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신살자들은 훨씬 수월하게 반란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은 자신임을 알게 될 예정이었다.
공을 들여 준비한 계획인 만큼,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 일정은 에디트와 임무를 떠나는 것.
정원에서 그녀에게 건넸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시간이었다.
05화
평소 대성당의 새벽은 이렇지 않았다.
모두를 다급히 깨우려는 듯한 시끄러운 종소리 대신, 새벽 미사의 성가대 찬송이 은은하게 울려야 했다.
전투를 대비하는 수많은 사람들 대신, 경계 근무를 마치고 터벅터벅 숙소로 들어가는 소수의 병사들만 돌아다녀야 했다.
'불안해하지 말자. 계획대로 진행만 하면 되니까.'
에디트는 곤히 잠든 척하며 몸에 힘을 쫙 뺐다.
그리고 끙끙대며 자신을 업은 채 달리는 라파엘라의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대성당에서 거의 유일하게 따스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존재.
가끔은 부모 같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존재.
'수녀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
라파엘라만큼은 절대로 해치지 말자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한 상황이니 그녀는 안전할 터였다.
하지만 반란 이후, 그녀의 따스함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라파엘라 수녀님! 출발해야 합니다!"
저 멀리서 베네딕토 주임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구보다 많은 신살자를 죽인, 그렇기에 반드시 죽여야 할, 하지만 감히 맞서기는 어려운 강대한 원수.
에디트는 그를 죽이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질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다.
훈련을 받을 때면 망자가 아닌 오직 베네딕토를 살해하겠다는 일념하에 임했고, 꾸준히 그를 관찰하며 미세한 약점이나 습관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해 왔다.
'나는 절대 당신을 믿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정원에서 들은 베네딕토의 발언은 신살자들 사이에서도 첨예한 토론을 일으켰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였으니까.
만약에 주임신부가 정말로 아군이 된다면, 반란은 거의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베네딕토와 맞서길 두려워하는 인원이 상당수였고, 그와 굳이 대립하고 싶어하는 자는 극소수였다.
'당신을 죽이지 못하면, 반란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에디트는 그 극소수에 속했다.
그녀는 부상을 입는 것도, 죽음에 이르는 것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해요 신부님! 오늘따라 이상하게 에디트가 잠이 많네요!"
"제가 태우겠습니다."
굳은 살이 잔뜩 박힌 베네딕토의 거친 손이 에디트를 번쩍 들며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목에 날붙이를 꽂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주임신부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차분하게 적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굳이 비몽사몽 거리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 또한 그를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신부님, 말씀 잘 듣고,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에디트의 입에 빵을 물린 라파엘라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수녀님도 다치지 마세요.'
속마음을 전달할 수 없었던 에디트는 그저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베네딕토를 망자들에게 제물로 던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와중, 바로 옆에서 라파엘라와 베네딕토가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부님...."
"저와 정원에서 나누었던 대화, 기억하십니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에디트마저 집중해야 간신히 들릴 수준으로 조용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모르는 척 연기한 것도 힘들었다구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수녀님뿐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베네딕토에게 사탕을 먹이려 시도한 날, 둘이서 모종의 밀담을 나눈 모양이었다.
"에디트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거죠?"
"고르께 맹세합니다.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올 겁니다."
라파엘라가 굳이 저렇게 말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반란 계획을 베네딕토가 귀띔해 준 것 같았다.
임무에 나간 신살자가 모두 제물로 바쳐진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리 없으니까.
'일단은 우호적인 분위기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많은 목숨이 달린 건인 만큼, 그 어떠한 변수도 쉽게 허용할 수 없었다.
"신부님도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맹세는 무효예요."
"명심하겠습니다, 수녀님."
"너무 굳은 표정 짓지 마세요. 무서우니까."
잠깐의 침묵 후, 마차가 가볍게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 * *
크게 좌우로 손을 흔드는 라파엘라가 멀어질 무렵, 태양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내리쬐는 여명을 받으며 그 웅장한 자태를 보이기 시작하는 대성당의 모습을 베네딕토는 두 눈에 똑똑히 담아 두었다.
오늘 이후로 완전한 대성당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전생에서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당했었지.'
베네딕토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든 척하는 어린 혁명가를 응시했다.
기이할 정도로 일정하게 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거사를 앞두고 긴장을 풀려 하는 듯했다.
'이번 생에서 네가 내릴 선택이 궁금하구나.'
과거 에디트의 행적은 명료했다.
신살 임무가 시작되기 전, 주임신부에게 '씨앗'으로 만든 사탕을 먹인다.
잉태의 숲에서 주임신부의 무기를 빼앗고 무력화를 시켜 자신을 대신할 제물로 만든다.
대성당으로 돌아온 뒤 반란을 시작한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에디트는 성공한 것이다.
"전초 기지로... 가면 됩니까?"
건너편의 마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또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있으니, 빨리 잉태의 숲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대성당에서 이탈하여 저 멀리 남쪽으로 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베네딕토는 그의 희망 사항을 꺾어야 했다.
"아니, 잉태의 숲 근처까지 직행하게."
"예, 예? 잉태의 숲까지요? 거긴 위험하지 않습니까? 왜 굳이...."
"당장."
불안과 불만이 가득 섞인 채로 궁시렁거리던 마부는 이내 고삐를 틀어 포장된 길을 벗어났다.
결국 마차는 보다 덜컹거리기 시작했고, 잠든 척하기 난감해진 에디트는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왜 전초 기지로 가지 않는 건가요?"
"상황이 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해 주마."
에디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순응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래의 계획이 틀어져 아쉬워하는 암살자의 것과 비슷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의식됐는지, 에디트는 순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잠결에 들었는데, 혹시 수녀님과 무슨 이야기 하셨나요?"
"어른들 이야기를 엿들으면 안 되지. 내용을 물어보는 건 더더욱 안 되고."
"죄송해요.... 하지만 오늘 아니면 언제 이런 걸 여쭤볼 수 있겠어요?"
에디트의 영악함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에 바닥으로 떨구는 시선 처리까지 완벽했다.
안타깝게도 베네딕토는 그 영악함을 이미 경험한 상태였지만.
"특별한 건 아니다. 너도 잘 아는 이야기기도 하고."
"뭔 데 그러세요?"
"혹시 신살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떨 것 같냐 여쭤보았지."
마차가 멈추고, 그대로 표정이 굳은 에디트는 침묵했다.
직설적인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뭐 하나? 계속 가지."
"저, 저기, 신부님? 저 쬐그만 것이 바, 방금 반란...이라고...."
"이 마차에는 남의 말을 엿듣는 사람밖에 없나?"
"이러실 게 아니라 당장 제압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당장 대성당으로 마차를...."
"오래 살고 싶으면 잉태의 숲으로 마차나 몰게.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 말고, 들은 척도 하지 말게나. 그게 싫으면 지금 말하게. 나도 마차를 몰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얼굴이 파랗게 질린 마부는 다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는 건너편에 앉아 이쪽을 힐끔거리는 마부의 눈치를 살피더니 애써 태연한 척했다.
"신기하네요. 신부님도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든 농담으로 포장하려 한 에디트의 어깨는 뻣뻣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굳이 '시답잖은' 이라는 강한 어조의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내면의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란다. 가끔은 농담도 하며 살지."
"방금 하신 말씀이 제일 웃긴 농담처럼 들리네요."
"칭찬으로 들으마."
"아무튼, 수녀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진심 어린 호기심이 묻어 나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신살자를 대하는 라파엘라의 마음은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시더구나."
"뻔하네요.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우리를 설득하겠다고 하셨겠죠. 수녀님만큼 순한 분도 없으실 거예요."
"비슷하지만, 틀렸다."
"그러면 뭔데요?"
"그녀는 곧바로 너희의 편에 서겠다고 하셨다."
에디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그저 기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대신 무고한 사람들은 다치지 않게 피신시키고 싶다 하시더군."
"대성당에 무고한 사람 따위는 없을 텐데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들이 너희를 괴롭히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예를 들면, 저 사람처럼요?"
"내, 내가 언제...."
"신부님이 못 들은 척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죽고 싶으세요?"
더 이상 에디트는 마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차가운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신부님은 어쩌실 건데요?"
"이미 내 대답은 알고 있을 텐데?"
"신부님이 거짓말쟁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어느덧 그들은 잉태의 숲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베네딕토는 태연하게 마차에서 내리며 짐칸에 놓은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에디트는 반대편 문을 통해 내리면서도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둘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는 마부는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는 이만 대성당으로 복귀하겠습니다."
베네딕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놓아주려 했다.
물론 허락한다고 떠날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테지만.
"고삐에서 손 떼. 잘라 버리기 전에."
"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제발 보내 다오...."
"손 떼라고 했다."
허리 뒤쪽에서 투척용 단검을 꺼내든 에디트는 마부에게 짙은 살기를 뿜어 댔다.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었던 그녀는 내면에 숨기고 있던 분노를 마침내 해방한 것이다.
검날의 방향을 베네딕토로 옮긴 에디트는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예요? 신부님께 밀고할 쥐새끼는 한 마리도 없었을 텐데?"
"상황이 진정되면 다 알려 주마. 하지만 우선은 협조해 다오. 시간이 없어."
"마찬가지에요. 빨리 대성당으로 돌아가서 수확해야 할 모가지가 너무 많거든요."
살벌한 그녀의 언사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는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최소한 그녀는 거짓 없이 정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 은근슬쩍 마음을 떠보기 위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한번 크게 부딪히는 편이 훨씬 편했다.
"수녀님은 알고 계신 거죠? 저희 반란 계획."
"그래. 내가 말씀드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 편이니까."
"두 달 전쯤에 아벨 담그신 분이 할 말은 아닐 텐데?"
맞는 말이었다.
하필 베네딕토의 회귀는 아벨을 제물로 바친 직후였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베네딕토는 침묵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 제가 대체 왜 신부님과 협력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 주세요. 아니, 딱 한 가지 이유만 대 봐요."
애초에 에디트의 분노는 그 어떤 말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그 어떤 명분보다도 정당하고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가혹한 현실을 겪어온 존재이니까.
그렇기에 용서를 구하거나 헛된 약속을 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너희가 협력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모두를 막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와 맞서 승리를 쟁취한 후,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도발적인 답변을 내놓은 것이었다.
"절 막겠다구요?"
에디트는 잠시 고민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음에도.
"막으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마부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컥... 큽...."
마부는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광경을 보며 에디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막지 못하셨네요?"
06화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익숙한 고함 소리가 에디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녀는 남들 몰래 한숨을 푹 내쉰 뒤,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마부에게 달려갔다.
"부르셨나요?"
"너, 훈련 끝났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뭐야?"
"일단 세수부터...."
마부는 가차 없이 에디트의 뺨을 내리쳤다.
"같잖은 농담은 집어치워."
"죄송합니다...."
"다시 묻지. 네 년이 해야 하는 게 뭐라고?"
마부의 따귀 따위는 아프지 않았다.
매일 죽어라 훈련을 하는데, 그깟 따귀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정말로 에디트를 아프게 하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비롯한 신살자들을 이따위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마구간 청소입니다! 새로 건초도 갈아줘야 하고, 사료도 줘야 합니다!"
마부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자신에게 떠넘기기 일수였다.
하지만 에디트는 그저 웃으며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똑바로 좀 하자.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죄송합니다!"
"이것도 다 너네 도와주려고 하는 거잖아. 정신 훈련의 일종이라고."
에디트가 느끼기에는 그저 게으르고 추악한 인간이 지껄이는 개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신살자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이런 취급을 받게 둘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웃으며 마부의 말에 잠자코 따랐다.
'네놈은 내가 죽일 거다....'
에디트는 하루라도 빨리 임무에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가 온다면, 모든 것이 뒤바뀔 테니까.
* * *
"막지 않은 것일 뿐이다."
베네딕토는 천천히 걸음을 마부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세를 숙이며 단검이 꽂힌 위치를 자세히 확인하였다.
죽어 가고 있는 마부의 경련 때문에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정 중앙에 단단히 박힌 것은 틀림없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잘나신 대성당의 주임신부님."
"이 자는 죽어 마땅한 자 아니더냐?"
"그렇죠.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단검을 빼낸 베네딕토는 뜨끈한 피에 절여진 단검을 마부의 옷깃에 닦았다.
"실력이 훌륭하구나. 지금까지 숨기느라 힘들었겠어."
"힘들 건 없었어요. 다만 아쉽네요. 신부님의 피가 솟구칠 만한 깜짝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의 적개심은 강해졌다.
서슴없이 드러나는 그녀의 살의는 냉철함을 잃어 갔고, 그 빈 자리를 뜨거운 분노로 대체했다.
"에디트. 그렇게까지 날 죽이고 싶은 게냐?"
"죽이고 싶기는 하죠. 하지만 죽이지는 않을 거에요."
에디트는 시선을 베네딕토에게 고정했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면 여분의 단검을 던질 기세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차분히 이동하여 자신의 무기를 짐칸에서 꺼냈다.
"수년 동안 신부님은 저희를 제물로 바치셨죠. 그러니 신부님도 똑같이 당해 봐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이 미터가 넘는 나무 자루에 삼십 센티미터 정도의 날이 물려있는 평범한 창.
그러나 에디트가 쥐고 있는 이상, 그 평범한 창은 상식 이상의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변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희는 대성당을 조지고 싶은 거지, 종말을 일으키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난 아직 네 사탕을 먹지도 않았다."
"제가 먹여 드릴게요. 걱정도 많으시네."
에디트는 자세를 낮추며 창날을 베네딕토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나무 자루의 끝에서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정적이고 위협적인, 훈련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베네딕토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는 칼집에서 롱소드를 꺼낸 후, 손잡이를 허리춤 대각선에 놓았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다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하는 법이니까."
"명줄이 짧아질 분이 혓바닥은 길군요."
둘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심장 박동은 귓가를 울릴 만큼 커져 갔고, 무기를 쥔 손에는 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파고들 만한 약점을 분석하던 둘은,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전진했다.
'거리를 좁혀야 해!'
선공은 에디트의 몫이었다.
그녀는 긴 사정거리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주임신부의 흉부를 겨냥한 빠르고 단순한 찌르기는 사슬갑옷마저 꿰뚫을 기세였다.
손아귀에 거센 힘을 준 베네딕토는 공격을 쳐내며 보다 근접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다가오진 말아 주실래요?"
그러나 에디트는 쉽게 거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걸음을 뒤로 옮기며 끝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실수로 신부님을 죽여 버리면 제물로 못 써먹잖아요."
"오만하구나. 유효타 한 번 먹이지 못한 주제에."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에디트는 입을 가볍게 놀리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죽음의 위험을 감수한 채 제일 막중한 임무에 스스로 나온 자의 기백이 흘러나왔다.
'네가 자꾸 나를 도발하는 이유를 잘 알겠구나.'
에디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본래 계획대로 예상치 못한 기습을 가했다면 그녀는 필히 승리했으리라.
'당장 내게 먹힐 만한 전략을 떠올릴 수 없으니....'
물론 에디트의 공격은 여전히 정교했다.
그녀는 탁월한 실력으로 생명체의 급소를 어떻게 노려야 하는지 잘 알았고,
전투의 흐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세밀한 결단을 통해 적극적인 공세를 이어 나갔다.
'심리전이라도 걸기 위해 과한 도발을 자꾸 남발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였다.
물론 당장 지금의 무력으로도 성유물도 없이 홀로 수십의 망자를 상대할 수는 있겠지만, 전생에서 그녀가 보였던 실력에 비하면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심리전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베네딕토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에디트 또한 그를 쫓는 대신 호흡을 고르며 경계했다.
"숨이 좀 차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신부님은 곧 숨이 멎으시겠죠."
"과연 그럴까?"
"수녀님께 하신 약속 다 들었어요. 저를 상처 하나 없이 돌려보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난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다."
"신부님이 센 거야 잘 알지만 제 손목이라도 자르지 않는 이상, 쉽게 제압할 수 없으실 걸요?"
에디트의 그 말에 베네딕토는 계획이 떠올랐다.
자신이 힌트를 남발한 것도 모르는 에디트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그를 협박했다.
"신부님이 쓰레기는 맞지만 설마 라파엘라 수녀님께도 헛소리를 할 것 같진 않네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느냐."
베네딕토는 착용하고 있던 장갑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동일하게 생긴 장갑을 품에서 꺼냈다.
"나는 지금부터 딱 다섯 번만 너를 공격하겠다. 만일 내가 다섯 번 안에 너를 상처 없이 제압한다면, 내게 진심으로 협력해 주었으면 한다."
"만일 실패하시면요?"
"내 목숨은 네 것이다. 어떤 처분이라도 순순히 따르마."
에디트는 굳이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정상적인 대결로는 이길 수 없으니 그녀로서는 최선의 절충안을 받은 셈이었다.
"네 번으로 해 줘요."
"다섯 번이면 충분하지 않느냐?"
"네 번."
"...좋다."
"무르기 없어요. 나중에 딴 말도 하시면 안 돼요. 추한 유언을 남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죠."
베네딕토는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그렇게 잠깐의 대치 동안, 에디트는 보다 더 결연한 표정으로 창대를 다잡았다.
본인이 질 거라는 걱정은 애써 덮은 채로.
'미안하구나. 이렇게라도 너를 꺾어야 해서.'
베네딕토는 순식간에 뛰쳐나가며 검날을 수직으로 세웠다.
에디트는 그의 얼굴을 향해 창날을 찌르며 그를 저지하려는 듯했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히며 가벼운 소음을 냈다.
'힘을 얕게 실었구나.'
생각이 닿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베네딕토는 하단으로 이어지는 공격을 강하게 쳐냈다.
전생부터 지켜본 그녀의 공격 패턴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예측이었다.
"이런 미친...!"
빠르게 접근해 오는 베네딕토의 기세에 눌린 에디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훈련 덕분에 습관처럼 몸에 베인 다음 동작들이 그녀의 공격을 이어 나가게 했다.
하지만 상대의 옷깃도 스치지 못하는 공허한 발버둥의 연속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의 창끝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에디트. 내가 항상 조언하지 않았더냐."
사실 베네딕토는 정면 대결이라면 얼마든지 에디트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다만 그녀의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적절한 기회를 엿본 것일 뿐이었다.
"창 끝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창대를 움켜쥐는 데 성공한 베네딕토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상대와의 힘의 격차를 파악한 에디트는 망설임 없이 무기를 놓은 뒤, 품에서 단검을 꺼내 과감히 달려들었다.
"좋은 판단이다."
에디트는 역수로 쥔 단검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반응하기 힘들 속도였다.
"하지만 내 예상을 벗어나진 못했구나."
찰나의 순간, 베네딕토는 에디트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다리를 걷어차며 균형을 무너뜨렸다.
에디트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결국 체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단검을 쥔 그녀의 손은 여전히 붙잡힌 상태였다.
"제 손으로 절 죽이시려는 건가요?"
"그러고 싶지는 않다만."
"그럼 놔주세요. 항복할게요."
갑작스레 고분고분해진 그녀의 태도를 보며 베네딕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자 에디트는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불평했다.
"너무 세게 붙잡으신 거 아니에요? 사심이 들어간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구나."
지금까지 뱉어 낸 악담이 무색할 정도로 에디트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결투가 아닌 대련을 끝낸 사람처럼 아쉬워하는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베네딕토는 골치가 아팠다.
'그래. 넌 언제나 지독하고 집요한 아이였지.'
만일 그녀가 여전히 분노하며 살기를 뿜었더라면, 베네딕토는 오히려 안심했을 예정이었다.
어찌되었든 진심 어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속내를 숨기고 친근하게 접근한다면, 베네딕토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에디트의 본심을 시험해 봐야 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면 되나요?"
"우린 잉태의 숲으로 진입할 거다."
에디트는 멈칫하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대놓고 보냈다.
"어... 혹시 절 제물로...?"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해라. 네 말대로 종말을 막긴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희 둘이서요? 어떻게요?"
"자세한 계획은 가는 길에 설명해 주마."
에디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긁어 댔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에는 대성당의 신살자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반란은 언제부터 진행할 예정이지?"
"원래는 신부님 제압한 다음에 대성당으로 복귀하자마자 개시하기로 했어요. 만약 제가 너무 늦으면 내일 새벽 직전에 강행하고요."
"대안까지 마련해 놓았구나."
"리암 아이디어예요. 그 말을 한 직후에 재수 없는 소리 말라고 신시아에게 얻어맞긴 했지만요."
"그럼 최대한 오늘 자정까지는 도착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서둘러야겠어."
베네딕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마차의 짐칸을 향했다.
일부러 무방비한 모습을 연출한 그는 부디 에디트가 헛된 마음을 품지 않길 바랐다.
좋게 타이를 수 없는 상대임을 알면서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짐칸의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음 가운데, 은밀한 발걸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베네딕토는 마부의 숨통을 끊어 놓았던 그 단검을 집었다.
'악의는 없다. 미안하구나.'
그는 들리지 않을 심심한 사과를 에디트에게 건넸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그는 뒤돌아 단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윽...."
에디트의 첫 번째 반응은 당혹감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맞닥뜨렸을 당혹감에 익숙해지지 못한 그녀는 정확히 두 걸음 뒷걸음질했다.
"으아아악-!"
두 번째 반응은 고통이었다.
에디트는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며 괴성을 질러 댔다.
베네딕토는 무심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손을 확인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단검을 역수로 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편 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자루 안에 담았다.
만일 그녀의 거짓 연기를 믿었다면, 바닥에 널브러진 건 에디트의 손목이 아닌 자신의 머리였으리라.
"네 말이 맞구나, 에디트."
"베네딕토-! 이 개자식아!"
"결국 네 손목을 자르게 하다니."
07화
잉태의 숲.
망자의 신이 탄생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어딘가 비틀린 인상을 주는 고목들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를 사방을 뻗었고, 햇볕조차 들지 않는 이 공간에서 인간의 손길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베네딕토와 에디트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터벅터벅 나아갔다.
"상처는 괜찮으냐?"
"...괜찮겠어요?"
"...미안하구나."
에디트는 꾹꾹 압축한 분노와 황당함을 머금은 눈초리를 쏘아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이 존재했던 그녀의 오른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심했군....'
베네딕토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뒤늦은 후회를 중얼거렸다.
본래 그는 손목을 통으로 잘라 낼 생각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에디트를 공격할 때 무의식적으로 힘을 너무 많이 실은 탓에 깔끔히 절단해 버린 것이었다.
'이러다 적개심만 더 키우는 게 아닐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신속히 응급 처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팔목이 잘린 에디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졸도했다.
그 덕분에 베네딕토는 특별한 저항 없이 그녀의 손목을 지혈할 수 있었다.
부디 깨어났을 때는 고통이 덜하기를 바라며.
정신을 차린 에디트는 예상보다 훨씬 협조적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대신, 베네딕토를 순순히 따라왔다.
자신을 살려 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인 듯했다.
하지만 십대 특유의 빈정거리는 태도는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이었다.
"에디트. 만약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면 말해다오."
"왜요? 버리고 가려고요?"
"치료의 권능이 담긴 성유물이나 신의 기적을 이용해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코웃음을 친 에디트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신부님. 죄송한데, 그런 재수 없는 말씀 마세요."
"너를 업은 후 신속하게 이동할 의향이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잘도 그러시겠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하지만 네가 갑자기 덤벼들어서 어쩔 수가...."
"솔직히 신부님 실력이면 적당히 제압 가능하시잖아요?"
"그렇지.... 미안하구나."
그렇게 또 침묵의 시간이 돌아오게 되었다.
베네딕토는 주변을 경계하며 앞장섰고, 에디트는 힘겹게 고통을 참아 가며 그를 따랐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과한 처분을 받게 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내기를 어긴 건 에디트지만....'
베네딕토는 에디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가깝다고 느꼈다.
물론 협조가 필요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충분히 그녀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네게도 나름의 대의가 있고, 희생을 자처한 셈이니까.'
심지어 거짓말에 속아 지금껏 희생당해 온 신살자들을 생각한다면, 고작 내기에 승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걱정 말거라. 내 맹세는 아직 유효하다."
"뭐,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가게 해 준다는 말이요?"
에디트는 자신의 텅 빈 오른 손목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왼손에 쥐고 있는 자루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자의 숲에 성유물이라도 숨겨 놓으신 게 아니라면 힘들 것 같은데요."
"딱히 숨겨 놓은 성유물은 없구나."
물론 베네딕토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에디트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 어떤 역경도 견디겠다 다짐한 고행자처럼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 때문인 건지, 아니면 책임감 때문인 건지.'
베네딕토는 에디트의 강인함이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충분히 신살자를 이끌 만한 리더이자, 저항의 상징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대견스러운 만큼 안타깝기도 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에디트는 벌써부터 과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우린 어떻게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하구나.'
에디트가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베네딕토는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문장을 애써 삼켜야만 했다.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쭤 보는 건데...."
에디트는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처량하게 물었다.
"정말로 저희와 뜻을 같이할 생각이신 건가요?"
"믿기 힘들다는 것 안다."
"믿는 것은 둘째치고, 아예 이해할 수가 없네요."
대체 어떻게 반란을 눈치채신 건지.
게다가 왜 우릴 막지 않고 동참하겠다는 건지.
그러면 아벨은 왜 제물로 바치신 건지.
혼란으로 가득 찬 에디트의 상념이 눈에 빤히 보이는 듯했다.
"대성당으로 돌아간 후에, 다 설명해 주겠다."
"억울하고 궁금해서라도 이 악물고 버틸 거에요."
하지만 에디트는 지금이 생애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베네딕토는 이제 그녀가 유언을 건넬 차례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만약 제가 죽는다면.... 라파엘라 수녀님께 말 좀 전해 주세요. 애들 잘 부탁드린다고."
아련함이 묻어나는 담담한 부탁.
어쩌면 망자의 숲에 진입한 이후로 그녀가 건넨 냉소적인 말들은, 모두 저 부탁을 부담 없이 건네기 위함이었으리라.
"네가 직접 전하거라."
"그러고 싶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요."
"음...."
"신부님도 고작 사람일 뿐이잖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한낱 사람."
맞는 말이었다.
베네딕토는 한낱 사람일 뿐이었다.
비록 전생에서 발생했던 모든 비극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을 정확히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 약속하마."
베네딕토는 에디트의 각오를 존중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제자였고, 전생에서는 최악의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그녀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퍽이나 믿음직스럽네요."
"다행이구나."
"죄송한데, 비아냥댄 거예요. 당분간 신부님을 지켜볼...."
에디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베네딕토의 눈치를 살폈다.
"에디트. 너도 감지했느냐?"
"네, 땅이 점점 울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둘의 시선은 잉태의 숲 중심부로 향했다.
아직 창공에 떠 있을 태양이 무색할 정도로 어두운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점점 커져갔다.
"원래 잉태의 숲에서 지진도 일어나는 건가요?"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구나."
에디트는 그를 잠깐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정말로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당장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거목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상대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에디트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저게... 뭐예요?"
"저것도 망자다."
"미친.... 저렇게 큰 망자도 있어요? 교육 시간에 가르쳐 주신 모습이랑 너무 딴판인데?"
둘에게 다가오는 망자는 최소 사 미터는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나마 속도는 느릿한 편이었지만, 만에 하나 스치는 공격이라도 받았다가는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위압감을 뽐냈다.
"그래. 사실 망자의 종류는 셋이 아니라 총 일곱이다."
"그걸 이제야 말해 주면 어떡해!"
망자의 특징은 모든 개체가 회색 피부에 노란 눈동자, 그리고 푸른 피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전생에서 알아낸 사실이지만, 이는 제대로 성장한 신의 부재로 인해 본래의 색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저를 제물로 바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대안이 있는 거죠? 저는 도망치면 되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디트는 창을 전방으로 향했다.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투지는 여전했다.
"싸울 수 있겠느냐?"
"개죽음당할 거면 차라리 발악이라도 해 보죠, 뭐."
베네딕토는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당시에도 그는 에디트와 함께 잉태의 숲에서 거인과 마주쳤었다.
보통 망자들은 맹목적인 살의로 달려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거인은 특이하게도 전투 대신 어눌한 말투로 소통을 하려 했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던 상황이라 판단한 베네딕토는 잠시 놈을 관찰하려 했다.
'하지만 전생의 에디트는 망설임 없이 놈의 목구멍에 창을 꽂았었지.'
아찔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베네딕토는 에디트를 막아섰다.
"뒤로 물러나거라."
"혼자서 어쩌시려구요?"
베네딕토는 천천히 다가가 에디트의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에디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움찔댔지만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이 상태에서 과격하게 움직였다가는 또다시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재수없는 소리 좀 그만...."
"그러니 내 뒤에 있거라. 절대 앞으로 나서서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
베네딕토는 그녀의 오른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하던 창을 다시 하늘로 향하게 했다.
베네딕토의 진의를 알아챈 에디트는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복잡한 심경이 그녀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짜증날 정도로 분하네요."
"이해한다."
베네딕토는 검집에서 롱소드를 빼어 들고 거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물론 거인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또한 에디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연출이기도 했다.
'어째 갈수록 거짓말만 느는 것 같군.'
어느덧 거인은 베네딕토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베네딕토는 손잡이를 허리 부근에 둔 채, 비스듬하게 날 끝을 올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거인은 팔과 손가락을 쭉 펴더니 대화를 시도하였다.
"안... 돼...."
심해에 가라앉은 뱃머리처럼 무겁고 기괴한 음성.
하지만 놈은 정확히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였다.
베네딕토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넣었다.
"아무래도 싸울 의사가 없는 듯하구나."
그는 고개를 돌려 에디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에디트는 충격에 휩싸여 잔뜩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신... 부님...? 이게 대체...?"
전생의 업적이 무색해질 정도로 가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상식을 뒤엎는 현상을 눈 앞에서 목격한 셈이니까.
"아무래도 놈은 우리를 데려가려 하는 것 같구나."
"대체 누구한테요?"
"사람도 아니고, 망자도 아니겠지."
애매모호한 답변에 혼란을 느끼던 에디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결국 조금씩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신부님."
"왜 그러느냐."
"혹시 망자의 신이랑 내통하신 건가요?"
하늘을 향하던 에디트의 창날이 조금씩 밑으로 기울며 베네딕토를 겨냥하려 했다.
또다시 그녀의 경계심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기 전에 베네딕토는 재빨리 수습해야 했다.
"아니다."
"망자의 신이나 다른 괴물을 숭배하는 또라이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나는 대성당의 주임신부이다. 그럴 리 없지 않느냐."
하지만 에디트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그렇다고 느닷없이 자신이 과거로부터 회귀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던 베네딕토는 그저 아니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혹시 절 제물로...."
"그 또한 아니다. 그 부분은 몇 번이고 설명하지 않았더냐?"
"거짓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고 그게 참말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거인은 둘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이 쿵쿵대며 잉태의 숲 내부로 걸음을 돌렸다.
저 덩치를 놓칠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놈을 따라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에디트. 부탁이 하나 있다."
"뭔데요."
사뭇 진지해진 베네딕토의 분위기에 에디트도 덩달아 그의 말에 경청했다.
"만약 내가 맹세를 성공적으로 지켜낸다면... 내게 협력해 줄 것을 약속할 수 있겠느냐?"
에디트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연기를 할지, 아니면 내면의 솔직한 생각을 전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베네딕토는 묵묵히 기다리며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머지않아 그녀는 절충안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았다.
"협력을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인데, 제가 신부님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선 종말은 막긴 해야 하니... 노력해 볼게요."
"고맙다. 나도 노력해 보마."
하지만 당장의 베네딕토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08화
베네딕토와 에디트가 잉태의 숲 중심부로 가까워진 만큼, 태양은 서쪽 지평선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공간은 점점 칠흑에 가까워져 내딛는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에디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띌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고, 입술은 점점 푸른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신부님.... 너무 어지러워요."
"아무래도 피를 너무 흘린 것 같구나."
"그것도 그건데, 땅이 하도 울리니까 죽겠네요."
둘을 안내하던 거인은 여전히 일정한 걸음거리로 쿵쿵대며 나아갔다.
베네딕토도 속이 거북한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은 에디트의 앞에서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그렇죠. 아직 뒤지지는 않았으니까."
"드디어 놈이 멈추기도 했고."
거인의 드넓은 등 너머로 커다란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대성당의 제일 드높은 첨탑보다도 높이 솟은 고목은 그야말로 성채와 같았다.
왕, 혹은 그보다 상위의 존재가 머물러야 마땅할 장엄함에 에디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를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에디트의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거인은 거목의 꼭대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가 보구나."
"죽었다 깨어나도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죽지는 말거라."
"퍽이나 사려 깊은 말씀이네요."
둘은 거목에 가까이 접근했다.
자세히 보니 두툼한 나뭇가지가 마치 나선형 계단처럼 뻗어 있었다.
"다른 가지들도 비슷한 수준이라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말 하기에는 이미 늦은 건 알지만, 함정이면 어떡해요?"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느냐?"
에디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멀리서 불어온 가을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 놨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대신, 몸을 움츠리며 추위에 떨었다.
"업혀라."
"아직 걸을 수 있어요. 대성당에서 받던 훈련에 비하면 이 정도 계단이야 뭐."
"그때는 양손이 있었잖느냐? 피도 적당히 흘렸었고."
베네딕토 농담이라도 건네어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에디트는 생에 처음으로 망자의 신을 만나기 직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듯했다.
"설마 그거 농담이었어요? 사람 손을 잘라 놓고, 그걸 농담으로 써먹으신다고요?"
"...그럴 리가."
"예? 아니라고요? 그럼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요?"
"...네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업히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꿈틀거리는 에디트의 입꼬리를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한숨을 푹 쉬더니 베네딕토의 등에 순순히 업혔다.
"라파엘라 수녀님도 거부할 수준의 농담이네요."
"동의한다."
"거짓말은 그렇게 잘하면서 농담은 왜 그 모양이세요?"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베네딕토는 농담을 나눌 만한 상대가 딱히 없었다.
그나마 가까웠다고 할 만한 이는 오직 사라카뿐.
하지만 그는 우정을 길게 쌓기도 전에 실종되었으니, 사실상 베네딕토는 언제나 혼자였다.
적과 아군으로만 사람을 구분했기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농담이나 미소는 익숙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임무를 떠나던 때, 라파엘라마저 표정이 무섭다고 했을까?
미소였는데.
"아무래도 친구가 없다 보니 그런 것 같구나."
"그런 감성적인 말씀 마세요.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격이 그래서 친구가 없는 거니까요."
에디트의 진심 어린 일침에 베네딕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신살자들에게 엄격하고 냉혹하게 대했던 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기에 그녀의 일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에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에디트. 두렵지 않느냐?"
"뭐가요?"
"우린 이제 곧 망자의 신을 만날 예정이다."
"두려웠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오묘한 답변이었다.
베네딕토는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그녀의 말을 재차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생각의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에디트는 침묵을 깨고 부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실패가 두려운 거거든요."
"실패가 두렵다라...."
"하지만 신부님이 저희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는다고도 하셨고, 신살도 신부님이 어떻게든 마무리해 주실 테니까."
에디트는 애써 여유로운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녀는 '실패하지 않는다'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다.
본인의 생존보다도 임무의 성공을 우선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신살자로서 갖춰야 할 좋은 자세였다.
"그리고 신부님 말대로,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요."
"그렇지."
"두려움에 먹힐 바에야 겁 없이 대가리 박아야죠...."
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녀의 목소리에서 차마 감추지 못한 망설임이 엿보였다.
베네딕토는 굳이 그녀의 약점을 들추는 대신,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계단은 누가 만든 걸까요? 꼭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된 것 같잖아요."
"망자의 신이 능력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망자에게 작업을 시켰을 수도 있고."
"일하는 김에 난간도 좀 만들지. 낙사하기 딱 좋네요."
에디트의 실없는 소리에 베네딕토는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면 그녀에게서 농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트. 혹시 돌아가면...."
"신부님 숙여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고목 상층부에서 작고 날카로운 물체가 빠르게 쏘아졌다.
화살이라고 부르기엔 조잡한 수준이었지만, 그 위력은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베네딕토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꽉 잡아라!"
계속해서 쇄도하는 공격에 베네딕토는 최대한 신속히 계단을 오르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는 등에 업힌 에디트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은 이미 땀으로 절여진 상태.
결국 에디트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게 되었다.
"신부님-!"
그녀가 허공으로 내던져지기 직전, 베네딕토는 가까스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본인 또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게 되었다.
"조금만 버텨!"
계단의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린 베네딕토는 완력으로 에디트를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땀에 푹 절은 그녀의 손이 또다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몸통을 노리던 공격은 이제 에디트를 노리고 있었다.
"그냥 손 놔요!"
"그럴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는 살아야 종말을 막죠!"
베네딕토는 회귀 후 처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전생에서는 벌어진 적 없었던 사건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형국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내려야 할 결정은 무거웠다.
'부디 우리를 인도해 주소서.'
베네딕토는 간결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신에게 올렸다.
그리고는 계단을 붙잡던 손을 놓고, 두 팔로 에디트를 감쌌다.
"뭐 하는 거예요!"
"기도."
베네딕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지옥의 구덩이로 빨려 가는 것처럼 거센 칼바람이 그의 뺨을 스쳐갔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