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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마저 해야지? >

루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리피트는 혀를 찼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도망칠 줄은 몰랐다.

'...내가 잘 못 본 건가.'

조금 더 기개가 있을 줄 알았다. 크로이드의 혈족이 적을 놔두고 도망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남을 이유도 없었다.

자신이 멋대로 기대를 했을 뿐이었다.

그리피트는 루이의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루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앞의 적들.

망자.

그들 대부분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가르친 이들도 있었다.

'...신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구원해주소서.'

그리피트는 살면서 신을 찾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피트의 검이 망자들의 머리를 쪼갰다. 그러나 금세 새로운 이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스승님! 이대로라면 끝이 없습니다!"

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가 된 이후로 처음 보는 다급한 표정이었다.

옆에 있는 테일러도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자의 말대로 적들은 끝이 없었다.

숲에서 보지 못했던 시체들까지 있었다.

게르 산맥에 도달하기 전에 루이가 죽인 이들이었다.

'이렇게 많았던가.'

그리피트는 루이를 떠올리며 침음성을 뱉었다.

그리고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살점이 사라지고 뼈만 남아서 움직이는 시체들은 언제 죽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하나하나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인간과 달리 팔다리가 잘린다고 죽는 이들이 아니었다. 머리를 노려야 했다.

인간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자신은 아직 괜찮지만 다른 이들은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망자들과 같은 꼴이 될 거다.

'방법은···.'

그리피트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소년.

모든 일의 원인은 저 소년이었다.

저 소년을 처리하면 시체들도 멈출 거다. 단순한 예측에 불과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거웨인. 공자님을 지키거라."

제자는 그리피트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스승인 그리피트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제자의 굳은 표정을 본 그리피트의 눈빛이 변했다.

테일러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모든 기사를 위한 일이었다.

그리피트가 발을 내딛는 순간 벼락이 내리쳤다.

콰지지직.

한 번이 아니었다. 쉬지 않고 내리치는 벼락.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피트는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리치는 벼락에 망자들이 흩날렸다.

육체를 통째로 태울만한 가공할만한 위력.

휘두르는 검 하나하나에 에테르가 담겨 있었다.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그가 숨을 내쉬는 이상 에테르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그리피트의 신형이 소년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소년을 향해 쏟아지는 한 줄기 벼락!

그런 그리피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휘었다.

콰지지지직!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연기와 함께 주변이 타올랐다. 벼락은 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주위에 있던 망자들까지 집어삼켰다.

전력을 담은 일격.

그러나 정작 그리피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왜? 일대일이라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어?"

연기 너머로 들리는 태연한 목소리.

끼릭, 끼릭.

그리피트의 검이 조금씩 올라왔다. 그리피트의 표정이 안 좋았던 건 이 때문이었다.

'...검이, 막혔어.'

바람에 연기가 옅어지면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피트의 검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소년의 손이었다.

맨손.

그러나 일반적인 맨손이 아니었다. 마치 짐승의 손처럼 털과 발톱이 올라와 있었다.

그를 알아챈 그리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곧 그리피트가 뒤로 신형을 날렸다.

콰직.

방금까지 있던 자리가 부서졌다. 자그마한 주먹에 땅이 뒤흔들린 것이었다.

주먹을 휘두른 손 역시 짐승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정말로 인간이 아니군."

기이한 건 피부색만이 아니었다. 그리피트의 말에 소년이 싱긋 웃었다.

자라났던 털들이 점점 빠지면서 원래의 손으로 돌아왔다.

툭, 투툭.

바닥에 떨어지는 검은 피.

소년은 자신의 상처를 혀로 핥았다.

"대단하네. 몸이 멀쩡했으면 이쪽이 위험했겠어."

상처는 제법 깊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웃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본 그리피트는 침음성을 흘렸다.

방금 일격으로 서로의 기량을 확인했다.

전력을 다한 일격을 손으로 받아냈다.

멀쩡한 상태여도 상대하기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깨까지 다친 상태였다.

소년의 시선이 그리피트를 향했다.

"내 몸에 상처를 입힌 건 괘씸하지만···."

그리피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그렇다고 너 같은 귀중한 재료를 망가트릴 순 없지."

히죽. 소년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짐승의 이빨. 괴기한 광경에 그리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그리피트를 향해 쏘아졌다.

"음!"

침음성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쾅!

충격에 그리피트의 신형이 밀려났다.

철컥.

검은 갑옷을 입은 망자. 그러나 지금까지 상대했던 망자들과는 달랐다.

검을 거두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가를 떠올리게 하는 짙은 한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아끼는 녀석 중 하나야."

소년이 자랑스럽게 말하며 다른 망자들을 턱짓했다.

"저 녀석들과 다르게 직접 손 본 녀석이니 재밌을 거야."

그리피트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끼는 녀석 중 하나라면 이곳에 다른 것도 있는 건가."

소년의 눈이 다시 한번 휘었다.

"글쎄?"

장난기 가득한 웃음. 그 웃음을 본 그리피트는 혀를 찼다.

'또 있군.'

그것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짐작하기 쉬웠다.

테일러와 자신의 제자. 눈앞의 소년은 그리피트를 보고 귀중한 재료라고 칭했다.

소년이 원하는 것은 기사의 육신이었다.

보다 강한 기사.

'...거웨인.'

자신의 제자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스터의 육체는 크로이드의 핏줄보다 매력적일 거다.

'이 자 역시 마스터였겠지.'

검은 기사. 그의 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에서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에테르. 이질적이게 바뀌긴 했으나 그 힘의 기원은 에테르가 분명했다.

그리피트의 예상은 맞았다.

소년이 마스터를 노리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에테르는 인간만 다룰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니게 되면 에테르 역시 다룰 수 없다.

그러나 마스터는 달랐다.

마스터의 육체. 그 자체가 에테르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인간이 아니기에 에테르를 다룰 순 없지만, 그 힘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오싹한 기운.

검은 연기를 바라보는 그리피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서둘러야겠군."

이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서둘러서 소년을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그리피트의 살기에도 소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 다리는 잘라도 돼. 머리랑 심장은 건들지 마."

"..."

즐거워했다.

소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검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검은 기사와 그리피트가 격돌했다.

* * *

마스터 거웨인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혼자라면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테일러.

크로이드의 혈족. 동료들의 희생은 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 스승님인 그리피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 순 없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테일러까지 데리고 도망치기는 힘들었다.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테일러였다. 그리피트의 빈자리는 컸다.

"공자님, 조금만 힘내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테일러가 검을 휘둘렀다. 그 역시 크로이드의 핏줄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테일러는 꺼져가던 전의를 일으켰다.

검을 휘두르는 테일러를 보며 거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스승님.'

그리피트가 빨리 일을 해결하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거웨인은 달려드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지지직.

일격에 적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어서 새로운 적을 향해 휘두르려고 했으나···.

쿵!

검이 막혔다.

"...!"

거웨인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그의 검을 막을 수 있는 망자는 없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힘은 우연이 아니었다.

검은 투구.

거웨인이 가장 먼저 본 것은 그것이었다.

투구 안, 눈이 있어야 할 곳에 깊은 어둠이 존재했다.

'이 녀석은···.'

다르다. 다른 이들과 무언가가 달랐다.

소름 끼치는 감각.

이어서 녀석의 검이 날아왔다.

쾅!

검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망자의 것도, 기사의 것도 아니었다.

'마스터.'

검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들. 마스터가 흔한 건 아니었으나 크로이드 분파끼리는 서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마스터와의 전투 경험은 드물지 않았다.

"공자님, 조심하십···!"

쾅! 콰강!

거웨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일반적인 마스터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지친 거웨인과 달리 검은 기사는 생자가 아니어서 지칠 줄 몰랐다.

그와 비교하면 거웨인은 긴 전투로 지친 상태였다.

"큭."

거웨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주변에 있던 망자들이 충격에 부서졌지만 검은 기사는 개의치 않았다.

반대로 두 마스터의 싸움에 휘말린 테일러는 위태로워 보였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타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스터에 이르지 못한 테일러가 견딜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거웨인도 그를 알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떨어지면 테일러는 적들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젠장.'

그야말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 주변에 다른 기사라도 있었다면 맡겼을 거다.

그러나 남은 기사들 역시 힘든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쪽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서둘러 검은 기사를 쓰러트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상처는 나중에 치료해도 되었다.

크로이드 가문의 힘이라면 고위 성직자의 성수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먼저 살려야 했다.

하지만···.

"크으!"

그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검은 기사의 검은 매서웠다.

투구 안의 얼굴이 궁금할 정도였다.

필시 생전에 이름이 있던 기사가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테일러를 지키는 걸 떠나서 자신의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거웨인은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자신이 가진 불씨를 남김없이 태워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쳐가는 거웨인과 달리 검은 기사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그때.

"..."

잠깐이지만 검은 기사의 움직임이 멈췄었다. 아주 잠깐.

검은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뼈와 살이 찢기는 소리.

누군가 망자들을 쓰러트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원인가!'

거웨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스승인 그리피트를 제외하면 이만한 폭발력을 낼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소식을 듣고 다른 검파에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거웨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버티면···.'

거웨인의 검이 속도를 냈다.

그리고 소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콰직!

검 하나가 검은 기사의 투구를 꿰뚫었다.

싱거운 결말.

거웨인을 상대하고 있었기에 뒤에서 다가오는 검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밀리고 있었다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마스터를 앞에 두고 한 눈을 팔 순 없었다.

"도와줘서 고맙···."

그러나 거웨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멋대로 내 사냥감에 손대지 마."

검은 투구 너머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 거웨인이 아는 목소리였다.

루이스 크로이드.

크로이드 가문의 삼공자.

그가 사나운 눈빛으로 검은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비틀자 검은 기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툭, 바닥에 쓰러지는 검은 기사.

그를 보며 루이는 가슴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쿵!

거대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밧줄이 아니라 가죽을 엮은 것이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빨?'

거대한 이빨.

거웨인은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망자들이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이빨을 두려워하듯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망자들은 대부분 기사였다.

다른 망자들은 걸음조차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저걸 구하러 갔던 건가.'

그러나 거웨인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불처럼 뜨거운 눈빛이 거웨인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웨인과 테일러.

눈빛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자,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맹수처럼 사나운 미소에 거웨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루이의 손에는 두 개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 아직 일러. >

루이는 용의 이빨을 내려놓고 천천히 적들을 돌아보았다.

마치 벽에 막힌 듯 망자들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성 때문인가?'

아니면 용 자체의 특성인가.

생각지도 못한 효과였다. 덕분에 쉽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몸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오히려 밤하라의 가호로 전보다 좋은 느낌이었다.

아르미테의 가호 때문에 생긴 어지러움도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주변에는 주인을 잃은 검들도 굴러다녔다.

루이에게 있어서 최상의 상황.

하지만 루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이 죽었어.'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망자들이라면 넘쳤지만, 루이에겐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거친 기운.

'하나는 그리피트, 다른 쪽은 이 녀석과 동류겠군.'

바닥을 굴러다니는 검은 기사.

처음 봤을 때의 스산한 기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세는 느껴지지 않지만, 마인 역시 저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지금의 루이로서는 마인을 상대하기 부족했다.

강림 하나만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8607:24:04]

루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천 사백.

'충분해.'

아니, 충분하고도 남았다. 루이의 시선이 거웨인에게 향했다.

* * *

루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하던 거웨인은 곧 냉정이 되찾았다.

'...지금 상황이 나아.'

망자들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 루이를 상대하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거웨인이 뒤를 보았다.

망자들의 숫자가 준 덕분에 테일러가 숨을 돌리고 있었다.

숫자도 이쪽이 많았다.

'아까는 방심했기 때문이야.'

체력이 떨어지긴 했으나 에테르는 건재했다.

지금은 루이 하나만 신경 쓰면 되었다.

지친 건 루이나 거웨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러한 거웨인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콰가강!

"...!"

루이의 일격을 받은 거웨인의 신형이 뒤로 밀렸다.

"...검이 튼튼하네."

금이 간 검을 보며 루이가 혀를 찼다.

명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제법 비싼 검을 쓰고 있던 게 분명했다.

루이는 금이 간 검을 휘둘렀다.

쾅! 콰강! 쾅!

그때마다 거웨인의 신형이 흔들렸다.

'무슨···.'

루이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검은 기사를 넘어서고 있었다.

괴력.

마스터에 이르지 못한 이가 가질만한 힘이 아니었다.

루이가 마스터를 죽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가 방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겪어보니 아니었다.

'마스터에 근접해 있어.'

아니, 육체 능력 하나만은 마스터를 뛰어넘었다.

게다가 전력도 아니었다.

검을 나눌수록 검에 실린 힘과 속도가 강해졌다.

반대로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검날의 금 역시 점점 벌어졌다.

그리고···.

"다시 갈 거야."

아까의 기술.

거웨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는 거웨인은 벼락을 일으켰다.

파지직!

그와 함께 루이의 검도 울음을 토했다.

지이이이잉.

검날의 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벼락과 검이 격돌했다.

새하얀 빛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뒤늦게 폭음이 뒤따랐다.

둘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뒤로 밀려난 거웨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의 파편이 복부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상태는 루이가 더 심했다.

벌겋게 익은 살.

루이는 자신의 어깨에 박힌 파편을 빼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친 호흡을 뱉어내는 거웨인과 달리 루이의 호흡은 평온했다.

고통 때문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하룻밤 동안 전투를 이어간 이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대체···.'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동안의 전투 시간을 생각하면 거웨인보다 루이가 더 지쳐있어야 했다.

거웨인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과 루이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거웨인에게는 잠깐일지 몰라도 루이에게는 몸을 회복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거웨인을 향했다.

"너···."

루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힘들어 보이네?"

"..."

거웨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루이는 그를 보며 황금검을 들어 올렸다. 황금검에 푸른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그렇다. 지금까지 루이는 전력조차 아니었다.

거웨인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 * *

푸른 빛이 번쩍일 때마다 땅이 뒤흔들렸다.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쳤다.

마스터와 일반 기사의 전투. 누가 봐도 결과는 당연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거웨인은 루이의 공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루이는 자신의 살이 타는 걸 개의치 않았다.

테일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틈이 생기면 공격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나 둘 사이를 끼어들 수 없었다.

마스터에 오른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컸다.

루이가 이상한 것이었다.

테일러로서는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끼긱, 끼기기긱.

루이의 검을 막은 거웨인의 무릎이 굽혀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루이의 검이 서서히 거웨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거웨인이 검으로 밀어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검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툭, 하고 거웨인의 왼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윽!"

겨우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으나 이미 휘두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어서 황금빛이 번뜩이더니 거웨인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마, 말도 안 돼···."

테일러는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잊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는 테일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테일러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망자.

-...! ...!

테일러가 화들짝 놀라서 검을 들어 올렸으나 망자의 검이 더 빨랐다.

그때, 빛이 번쩍이더니 망자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루이였다.

테일러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째서 자신을 도와준 건가. 루이를 의심하던 그의 눈빛에 한 줄기 희망이 떠올랐다.

과거 루이의 심성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루, 루이 고맙···. 컥."

테일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이의 검이 가슴에 박혔다.

루이는 굳은 테일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긴."

"너, 어···."

그게 테일러의 마지막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테일러가 루이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이 역시 굳이 테일러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루이는 쓰러진 테일러의 목을 잘라냈다.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망자로 변하지 않게 처리한 것이었다.

둘이 합해서 400시간이 조금 안 되었다.

만족스러운 수치. 루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장을 살폈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열이 넘었다.

'충분하군.'

역시 레기온의 기사들이었다.

다른 기사들과 달랐다. 실력도 의지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포기하는 이들이 없었다.

루이는 용의 이빨을 다시 몸에 묶었다. 사냥할 시간이었다.

루이는 망자들을 사이를 가르며 다음 먹잇감을 향해 움직였다.

[8984:31:23]

*

[9127:24:03]

*

[9279:16:41]

*

*

*

[9793:02:21]

시간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레기온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상위의 기사란 소리였다.

달콤한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

"...너, 뭐야."

기사를 베었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소년의 모습을 한 마인이 보였다.

'...들켰나.'

루이는 담담히 검을 거뒀다. 용의 이빨은 싸움이 시작될 때 이미 옆에 놔둔 상태였다.

이런 소란을 일으켰는데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이상했다.

소년이 시선이 쓰러진 기사에게 향했다.

목이 잘린 기사.

이제까지 죽인 기사들 모두가 이렇게 목이 잘렸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빠드득.

입안에서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뭔데, 감히···. 감히, 내 장난감을!"

소년에게서 무서운 기세가 일어났다.

죽은 기사들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검은 기사를 향한 것인가.

아니, 둘 다였다.

그러한 소년을 보며 루이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난 가치가 없나 보군.'

소년이 원하는 건 마스터였다. 어찌 보면 루이는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루이가 가진 힘은 망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망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와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루이만이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다른 이가 그러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년이 루이를 놔둔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검은 기사와 마스터를 잃었다.

루이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뭐?"

"이것들은 원래 내 사냥감이야. 방해한 건 너잖아."

이건 원래 자신의 싸움이었다. 끼어든 건 소년 쪽이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불평하는 건가.

"그리고 너도 날 노리던 거 아니야?"

아까 소년의 말을 떠올리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레기온의 기사들은 소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루이뿐이었다.

당연히 소년이 온 이유 역시 자신일 거다.

루이의 말에 소년의 머리가 내려갔다.

마치 망가진 기계처럼 떨리는 머리.

곧 떨림이 멈췄다. 서서히 올라오는 얼굴.

장난기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공허하게 보였다.

"그래, 너구나. 너였어. 네가 그 용병이야."

조세핀을 죽인 자. 어째서 잊었던 건가.

수많은 시체를 본 순간 기뻐서 잊고 있었다.

그제야 소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용의 이빨.

그를 확인한 소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빌어먹을 도마뱀들이랑 무슨 사이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소년은 이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지금의 루이에게도 희미하지만 그들의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증오스러운 종족.

루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말로 궁금하군."

진심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래, 지금 장난감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소년이 공허하게 말했다.

공기가 바뀌었다. 루이는 그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툭, 투둑.

루이의 귓가에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하늘은 어느 때 보다 맑았다.

빗방울 소리는 소년의 몸에서 나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문제구나."

우리에게.

스산한 목소리가 루이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고고고고고.

곧 한기와 함께 공기가 떨려왔다.

"...!"

루이는 반사적으로 신형을 날렸다.

콰직!

살가죽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몸이 팽창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

그리고 소년이 서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괴수가 서 있었다.

길게 튀어나온 입과 그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높게 솟아있는 세 개의 뿔, 몸을 덮고 있는 검은 털.

고릴라와 늑대를 뒤섞은 느낌이었다.

마수처럼 보였으나 괴물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지성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페이즈 투인가.'

루이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면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조세핀과 달랐다.

손을 쓸 새도 없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그리고 기세 역시 조세핀과 달랐다. 오싹한 기세.

곧 보라색 눈동자가 루이를 향해 번뜩였다.

거대한 앞발이 날아왔다.

쾅!

땅이 뒤집히는 충격. 루이는 공격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가죽이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얕아.'

뼈조차 닿지 못했다. 이어서 날카로운 발톱이 루이가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깊게 파인 흔적.

'한 번이라도 맞으면 위험하겠어.'

다행이라면 속도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밤의 숲에서 만났던 사내와는 달랐다.

그러나 속도를 제외하면···.

콰가가강!

땅이 터져나갔다. 마인의 일격에 주변에 있던 망자들도 휩쓸렸다.

파괴력 하나는 전에 만났던 마인을 넘어섰다.

마인의 말대로 시체들은 장난감에 불과했다.

게다가···.

"...회복력도 좋군."

루이가 상처 냈던 부위가 회복되고 있었다.

이능. 적의 능력은 사자소생만이 아니었다.

루이의 회복력에 근접했다.

이대로라면 불리한 건 루이였다.

'강림은···. 아직 일러.'

고민은 짧았다. 루이는 마인을 뒤로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마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쾅! 쾅!

루이를 뒤쫓는 마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뒤흔들렸다.

< 이제, 보인다. >

뒤에서 살기가 느껴지자마자 바닥을 굴렀다.

루이의 위를 지나가는 돌풍.

콰가가강!

루이는 일어나자마자 반대쪽으로 뛰어올랐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뒤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방금까지 루이가 있던 자리에 앞발이 내리꽂혔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

일격, 일격이 필살에 가까웠다.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각오해야만 했다.

루이는 좌우로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갔다.

'...스릴 넘치는군.'

망자들을 상대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놔두면 알아서 마인의 공격에 휩쓸려버렸다.

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망자들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만일 아르미테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망자뿐만 아니라 루이 본인도 진작에 휩쓸렸을 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집중하면 할수록 고통은 심해졌다.

'그보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던 기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모두 죽은 건가?

'그리피트에게 가야 하나.'

다행히도 그의 기척은 아직 느껴졌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겠지.'

그때, 루이의 귓가에 전기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

그러나 루이는 놓치지 않았다. 몸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어깨를 스치면서 살 한 움큼이 떨어져 나갔다.

"...큭."

충격에 넘어질 뻔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걸음을 내딛던 루이는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어깨를 보며 혀를 찼다.

만일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몸 전체가 끌려갔을 거다.

용의 이빨을 가지고 오기 위해 갑옷을 분해한 덕분이었다.

'스쳐도 이만큼인가···.'

겉모습만 괴물 같은 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집중한 탓인가 어지러움이 올라왔으나 억눌렀다.

혀끝이 썼다.

[크워어어어어어어!]

마인이 다시 한번 포효했다. 제 뜻대로 되지 않기에 화가 난 것이었다.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었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루이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어지는 공격!

콰가가강!

루이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공격은 피했으나 땅의 충격까지 피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강림을 써야 하나.'

이대로라면 루이도 위험했다. 마인은 거웨인과 전투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피하는 것만으로도 심력 소모가 컸다. 괴물 같은 정신력을 가진 루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마인의 체력은 루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이를 압도할 정도였다.

루이가 고민하는 사이 원하던 목표가 보였다.

기사 하나가 검을 휘두르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인을.

기사의 입이 벌어졌다. 절망이 올라오고 있었다.

루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촤악!

기사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9967:21:31]

숫자가 바뀌었다.

'이제 하나.'

루이는 다시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둘.

'좋아.'

루이의 신형이 쏘아졌다. 졸지에 목표를 잃은 망자들의 검이 루이를 향했으나 루이는 멈추지 않았다.

망자들을 일일이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갑옷도 없기에 온몸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그 순간, 기사들이 보였다.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콰지직!

"큭."

뒤에서 충격이 덮쳤다. 기사들을 보느라 반응이 늦었다.

땅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루이는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 상태였으나 억지로 나아갔다.

멈춘 순간 죽는 것이었다.

이어서 루이가 있던 자리에 앞발이 내리꽂혔다. 루이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반응이 느려졌어.'

어쩔 수 없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사들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대, 대체 저건···."

"...둘."

루이의 검이 기사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리고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옆에 있는 기사를 향했다.

그 순간.

콰직!

거대한 그림자가 떨어졌다.

형태도 없이 사라진 기사. 루이의 뒤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네 놈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루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이와 시선이 마주친 마인이 사납게 웃었다.

마인은 단순히 루이를 뒤쫓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짐승처럼 생겼지만, 짐승이 아니었다.

인간만큼이나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존재였다.

[보아하니 네 녀석도 이 녀석들이 필요한 것 같구나.]

마인은 아까 루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냥감.

거대한 눈동자라 루이를 향해 번뜩였다.

[네 녀석이 잽싸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뿐이다. 루이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마인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목적은 이 녀석들이었어."

[음?]

마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아직 살아남은 인간들이 있으니 끝까지 부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인을 바라보는 루이의 시선은 담담했다.

어깨와 등은 뼈가 드러나 있었고 숨은 거칠어져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중상에 가까운 부상이었지만 루이는 몸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루이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마인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아쉽게 됐어. 내 목적은 방금 이뤘거든."

[10129:02:05]

만 시간이 찼다. 옆에 있던 기사는 덤에 불과했다.

루이의 말에 마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루이는 그런 마인을 보고 있지 않았다.

상점창.

만 시간이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지하에서 올라오는 내내 그를 고민했다.

장비와 소모품.

이건 논외였다. 만 시간을 써서 상점을 연다고 해도 물건을 살 시간이 없으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안에는 무엇이 있을지도 몰랐다.

불확실한 것에 시간을 쓸 순 없었다.

남은 건 3단계의 가호.

라움, 메르실라, 카스.

답은 정해졌다.

"메르실라의 가호."

사실 이 싸움이 있기 전까지는 라움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인을 상대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3단계로 올라가서 근력이 강해진다고 해서 마인을 이길 수 있을까?

이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루이는 자신의 가진 힘을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지난 전투로 깨닫게 되었다.

아르미테의 감각은 양날의 검이었다.

체력 소모도 심할뿐더러 과한 감각은 오히려 전투를 방해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루이는 강제로 그것을 제어하려고 했었다.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감각이 필요했다.

마인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

'아니, 지지 않을 방법.'

루이는 지금의 최선을 택했다.

* * *

신들의 공간.

이면 세상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아니, 공간은 똑같았다.

숲속에 있는 넓은 호수.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러나 그 주인만은 이전과 달랐다.

그림자가 아니었다.

푸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호수에 비친 비늘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뱀의 몸 위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 두른 얇은 천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천 사이로 보이는 육체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그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위압감이 루이를 짓눌렀다.

숨이 턱 막히는 거대한 존재감. 너무나 거대해서 루이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여인의 눈동자가 루이를 향했다.

여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

[처음은 당연히 그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

달콤하고도 요염한 목소리에 루이의 눈을 크게 떴다.

[예상이 빗나갔지만, 기분은 좋구나.]

확실했다. 여인, 메르실라는 루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루이의 입이 열렸다.

"...! ...!"

그러나 루이의 목소리는 허공에 소리 없이 흩어졌다.

그 모습에 메르실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직 이르단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동시에 그녀의 형체가 흐릿해졌다가 나타났다.

그녀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짧은 탄성을 뱉어냈다.

[...할 이야기는 많은데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구나. 네가 나를 찾아준 건 기쁘나 너를 위해서라면 그녀를 먼저 찾으렴. 그녀는 너의···.]

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렴, 나의, 우리의 ...야.]

그녀의 하얀 손이 루이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와 함께 루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 * *

긴 숨을 내쉬자 굳어있던 몸이 풀렸다. 몸을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방금 건···.'

메르실라, 그녀였다. 가호를 올릴 때마다 신의 존재를 느꼈지만 이처럼 말을 걸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일반적인 소통.

그러나 그녀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다르다는 소리지.'

루이에게 있어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루이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처음 말한 그.

'라움.'

그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 그녀.

이 역시 짐작이 갔다.

'밤하라.'

용의 여신.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뜨거운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놈···. 그건···.]

푸른 빛으로 빛나는 루이의 몸.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피부 역시 탄탄해지고 윤기가 흘러나왔다.

'이정도면 강제 회복과 비슷하군.'

무려 일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거칠었던 호흡도 안정되었다. 온몸을 가득 채운 고양감.

메르실라. 그녀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네놈이 어떻게···.]

신성. 그것은 기사가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신에게 봉사하는 이들에게만이 주어진 선물.

루이는 무의식적으로 막고 있던 벽을 허물었다.

-...! ...!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바람 소리마저 크게 들려왔다.

처음 아르미테의 가호를 받았을 때 느꼈던 감각.

머리가 지끈거렸다.

본래라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감각.

날개가 없는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처럼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어지러움에 속이 들끓었다.

루이의 세상이 강제로 확장되는 느낌. 루이가 인지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예민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아르미테의 권능.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이것이 진짜 아르미테의 힘이었다.

허락되지 않은 힘을 쓰는 부하를 회복력이 메꾼다.

루이는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128시간이라···."

정확히는 128시간 하고도 57분.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해보자고."

마인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이 번뜩였다.

* * *

도망치는 건 끝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마인을 향해 달려갔다.

마인은 그런 루이를 바라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바뀌는 건 없어.'

루이의 기세는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마스터에 이르지 못한 육신은 너무나 나약했다.

마인은 루이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쾅!

역시나 마인의 공격에 루이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인은 그런 루이를 비웃었다.

근력도 속도도 변하는 게 없었다.

잠깐이나마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다시 한번 앞발을 휘둘렀다.

콰가가강!

땅이 뒤흔들렸다. 폭발에 휘말린 루이가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다!]

마인의 발톱이 사정없이 땅을 할퀴었다.

쾅! 콰가강!

정신없이 쏘아지는 공격들.

"...아니."

시끄러운 폭음 때문에 마인은 루이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공격을 피하는 루이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이제···."

날아오는 파편을 보며 몸을 비튼다.

충격에 올라오는 땅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보인다."

마인의 움직임이.

아니, 보는 게 아니었다.

바람을 통해 전해오는 녀석의 숨결, 근육의 소리, 그리고 피부에 닿는 시선까지.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청각, 촉각.

그 모든 게 마인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루이의 검이 마인의 팔을 파고들었다.

< 그쪽도 명줄이 기네. >

쿵!

공명.

파고들었던 검이 폭발하면서 마인의 가죽이 들썩였다.

마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험악하게 변했다.

루이를 향해 앞발을 내리쳤으나 이미 루이는 자리를 피한 뒤였다.

사실 루이의 속도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마인의 공격은 루이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차이는 단순했다.

마인이 움직이기도 전에 반응하고 있었다.

단순한 예측을 벗어났다.

[벌레 같은 놈이!]

마인의 공격에 땅이 들썩거렸다.

[네놈의 공격 따위 간지럽지도 않다!]

마인의 포호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루이도 고작 몇 번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방금 공격으로 찢어졌던 가죽이 아물고 있는 게 보였다.

루이를 상대했던 적들도 이러한 느낌이었을까?

바닥을 구르며 새로운 검을 집었다.

바닥에는 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망자들,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던 갑옷과 무기까지.

날카로운 쇠에 등가죽이 쓸리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루이의 신경은 온통 마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고 다시 검을 찔러넣었다.

쾅!

그러나 이번에는 검이 터지지 않았다.

'큭, 단단해!'

당연히 충격 역시 전보다 적었다. 마인의 발톱이 루이를 휩쓸었다.

급히 몸을 비틀었으나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투두두둑.

피가 바닥을 적셨다.

'젠장!'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공명의 단점이었다.

애당초 공명은 에테르 공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술이지, 검을 폭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검이 공명의 힘을 버티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상관없었지만, 지금 바닥에 늘어진 검들은 일반적인 검의 수준을 넘어섰다.

변수가 많았다.

두 번, 많으면 세 번까지 견디는 검도 있었다.

루이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는 마인의 팔에 박힌 검을 외면하고 새로운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등.

쿠궁!

등가죽이 들썩였다.

'제대로 들어갔어!'

루이는 손잡이만 남은 검을 던져버렸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

분노한 마인의 발톱이 매섭게 쏘아졌다.

[쥐새끼 같은 놈!]

루인은 잔뜩 화가 오른 마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레야, 쥐야? 하나만 해."

아까와 달리 이번 혼잣말은 마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인간 주제에! 네 녀석을 잘근잘근 씹어주마!]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마인의 공격이 한층 더 격해졌다. 이미 주변은 폐허처럼 변했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물론이고 망자들도 접근하기 힘들었다.

루이의 움직임은 마치 곡예를 보는 듯했다.

이리저리 오가면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가고 있었다. 물론, 공격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충격만으로도 피해는 쌓여가고 있었다.

게다가 공명을 쓰다가 파편이 튈 때도 있었다.

[122:21:02]

전투는 밤이 되어도 이어졌다. 태양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나 둘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마인과 전투를 시작하고 여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쾅!

이번에는 루이의 검이 마인의 허벅지에 박혔다.

이번 검 역시 터지지 않았다.

마인은 그런 루이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인간 녀석! 내 말을 잊은 건가!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다!]

루이는 마인의 공격을 피하면서 검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인은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검을 발톱으로 긁어냈다.

살가죽도 같이 찢어졌으나 개의치 않아 했다.

[이딴 상처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인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루이가 공격했던 상처들은 이미 아물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가슴의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가고 있었다.

다른 곳 역시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장작 여섯 시간의 전투.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과연, 그럴까?'

루인은 새로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마인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마인은 다시 한번 포효하며 발톱을 휘둘렀다.

그런 마인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시 이어지는 전투.

그리고 마인이 이상을 깨달은 건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루이를 향해 휘두르던 발이 떨려왔다.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루이는 놓치지 않았다.

마인이 눈동자가 자신의 팔로 향했다.

[네, 놈···.]

지금까지와 다르게 마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루이는 그런 마인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제 깨달았어?"

깨닫는 게 늦었다. 루이가 한 짓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아니었다.

확실히 마인의 회복력은 대단했다.

깊은 상처라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회복했다.

'하지만 몸에 남은 파편은 다르지.'

상처가 회복되었다고 해서 파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검의 파편은 그대로 마인의 몸에 남아 있었다.

마인에게 있어서 아주 작은 파편.

가시가 박힌 듯 거슬릴 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파편이 많아지면 어떨까?

몸 안에 수많은 가시가 박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인이 움직일 때마다 그 가시들이 안에서 살과 근육을 찢어버릴 것이다.

결코, 전처럼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굳어있는 마인을 향해 루이가 입을 열었다.

"나도 말했지?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해보자고."

푸른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마인을 향했다. 어두운 밤에도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마인의 몸집.

그건 장점이기도 했으나 단점이기도 했다.

상성이 나빴다. 아마 마인이 가진 능력이 다른 것이었다면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거다.

지금의 마인은 루이보다 강했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힘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속도 역시 한 발자국 앞서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전에 만났던 마인이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겠지.'

루이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싸움의 승산은 충분하다고.

"자, 너의 회복 능력과 나의 회복 능력. 어느 쪽이 위일까?"

루이는 마인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는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그런 루이를 바라보는 마인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마인의 눈에 이제까지 없었던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제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 것이었다.

* * *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두웠던 게르 산맥도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되찾은 건 그 색뿐일 뿐. 형태는 과거와 달랐다.

엉망으로 변한 산, 그 위에 한 짐승과 인간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화와 달리 약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이는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114:02:35]

마인과 싸움을 재개하고 열다섯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기사들과의 전투까지 생각하면 무려 이틀을 쉬지 않고 싸운 것이었다.

진작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루이는 검을 치켜세웠다.

이제 남은 검도 보이지 않았다. 검 자루만이 주변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반대로 마인의 얼굴은 전보다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슬슬 지친 거 같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루이를 향해 앞발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나 전과 같은 파괴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일 때마다 몸 곳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벌레가 갉아먹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

마인의 몸 안에 파편들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마인의 공격이 거셀수록 소리는 더욱 커졌다. 마인의 몸에 박힌 검의 숫자만 해도 두 자리가 훌쩍 넘었다.

[크워어어어!]

마인이 포효하며 자신의 가슴을 긁어내렸다. 성난 발톱이 살갗을 헤집었다. 따끔거리는 파편을 끄집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작은 파편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너무 늦었다.

'하려면 전에 해야 했어.'

고작 가슴을 할퀸 정도로 파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파편이 마인의 몸속에 박혀 있었다.

[네, 네 놈···.]

분노한 눈동자가 루이를 향했다. 거친 숨결.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증오가 느껴졌다.

루이는 그런 마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그만 끝내자."

아까부터 마인의 회복력이 더뎌진 게 느껴졌다. 한 번에 회복할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 선 것이었다.

마인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루이의 신형이 마인을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마인의 앞발도 루이를 향했다. 그러나 전과 같은 기세는 실리지 않았다. 루이는 공격을 피하고 팔 위로 올라섰다.

높게 치켜든 검이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파지지직.

에테르가 검날을 따라 피어올랐다.

콰가가가강!

마인의 목 뒤에 벼락이 떨어졌다.

[크워어어어어! 감히!]

마인의 발톱이 자신의 목을 할퀴었다. 몸이 이 지경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인은 눈동자는 오로지 루이만을 쫓고 있었다.

이는 루이로서도 다행이었다.

마인이 도망치고자 마음먹었다면 루이도 쫓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마인은 투사이며 맹수였다.

도망가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루이는 뼈가 드러난 목덜미를 보며 혀를 찼다.

'얕았어.'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거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공격을 피하며 반대 팔 위로 올라섰다.

콰지지직!

다시 한번 떨어지는 벼락.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정도로는 부족해.'

뼈는 살보다 단단했다.

이대로라면 치명상을 입히기는 힘들었다. 더 길게 끌 수는 없었다.

곧 루이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라움의 권능.

위기를 감지했는지 마인은 몸을 비틀며 앞발을 휘둘렀다. 목덜미를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 그러나 루이의 움직임은 그보다 빨랐다.

날아오는 발톱 사이를 지나서 목을 향했다.

발톱에 허벅지가 긁히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붉은 빛이 번뜩였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붉은 벼락.

그야말로 신벌에 가까웠다.

몸을 부르르 떨던 마인이 서서히 쓰러졌다.

힘을 잃은 루이의 몸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라움의 힘이 빠져나가자마자 그동안의 피로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뒤늦게 황금검도 바닥에 떨어졌으나 검신이 반으로 부러진 상태였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쿨럭!"

바닥에 피와 토사물이 쏟아졌다. 메르실라의 권능은 루이를 회복하는 것이지 충격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도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

그러나 루이의 입은 웃고 있었다.

[113:31:08]

*

[591:12:33]

노력한 만큼 그 열매도 달콤했기에.

무려 500시간에 가까웠다. 적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게 해주는 수치였다.

바닥에 쓰러진 루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

하늘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지 청명하기만 했다.

그때, 예민해진 루이의 청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숨소리.

루이는 반이 부러진 황금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리고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의 주인은 살아남은 기사였다.

아니, 살아남았다고 말하기에는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의식조차 없었다.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

루이는 그의 목에 반쪽짜리 검을 꽂았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살아있는 이들을 찾아서.

그러나 한참을 찾아도 기사와 같은 이는 없었다.

이만큼이나 격렬했던 전투였다. 아직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다.

게다가 시체가 너무 많았다. 망자들까지 뒤섞여서 생존자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다니던 루이는 결국, 또 다른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쪽도 명줄이 기네."

루이의 말에 생존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셨소, 이까. 공, 자."

마스터 그리피트. 희미하게 웃는 그의 복부에는 거대한 검이 박혀 있었다.

< 물건부터 확인해볼까요? >

그리피트의 앞에는 검은 기사의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루이는 검은 기사의 몸을 확인했다.

'찌른 직후에 베었군.'

정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리한 것이었다.

'아니, 승리라고 볼 순 없지.'

다른 이라면 죽었을 거다. 마스터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었다.

인간과 다른 육체.

그렇다고 해도 그저 생명을 연장한 선에 그쳤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미 죽음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리피트의 입이 열렸다.

"대, 대단한 실, 력이구려. 공자. 자, 잘못 본 건, 이, 늙은이였소."

그리피트가 둘의 싸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피트가 멀쩡했다면 검은 기사 정도는 쉽게 이겼을 거다.

그러나 마인은 달랐다.

마인의 존재감은 분명 그리피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피트의 말에 루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피트는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공자, 대적하려고 하지, 마시오."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크로이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흐릿했던 그리피트의 시선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공자, 가 강해졌다지만, 크로이드, 의 힘은 더욱 크오."

루이는 그런 그리피트를 보다가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떠올랐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루이는 붉은 길을 그리며 굴러다니는 머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

단 한 번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이 세상에 알려진 그들의 힘은 과소평가 된 것이었다.

루이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루이는 그리피트가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죽는 순간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기사였다.

루이는 그리피트의 검을 허리에 갈무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용의 이빨.

그리고···.

죽은 마인을 보았다. 거대한 머리. 정확히는 머리에 달린 뿔에 시선이 갔다.

"놔두고 가기에는 아깝지."

발톱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마수보다 강도가 높았다.

아니, 마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루이는 죽은 마인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 * *

크로이드 가문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동쪽에서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전멸이라고?"

대부인의 물음에 가신이 고개를 숙였다.

"...예."

직접 들은 그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다른 이들은 어떠할까.

"현장에서 거대 마수로 보이는 사체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수의 머리와 발톱이 모조리 뽑힌 상태였으나 가죽과 뼈의 강도를 보면 최상급 이상이라고 판단된다고 합니다. 전문가들 말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마수라고···."

전문가라면 마수 상인들과 장인들이었다.

그런 마수의 머리와 발톱이 없다. 누군가가 먼저 가져갔다는 소리였다.

가신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가신은 차분하게 자신이 들은 사실을 보고했다.

주변에 늘어져 있던 시체들.

심지어 언제 죽었는지 짐작하기도 힘든 시체들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조사 나간 이들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남은 시체들은 대부분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테일러 공자님과 마스터 그리피트의 시신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신의 말에 남은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테일러뿐만 아니라 마스터 그리피트까지 있었다.

"둘 다 사인은 검상입니다."

"...!"

"...!"

마수의 짓이 아니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로이드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누굴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번 일의 원흉이나 다름이 없었다.

루이스 크로이드.

머뭇거리던 가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시체들의 상태를 생각하면 마수에게 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듭니다. 공자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황금검도 현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시체들이 너무 많아서 구분조차 힘든 상태였다. 검이라도 멀쩡하면 시신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겠지만 멀쩡한 검도 드물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루이가 그러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컸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크로이드 가문의 일을 벗어났다. 이번 일에는 황실과 다른 가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레기온 검파의 몰락.

그건 크로이드의 힘 일부가 잘려나갔다는 소리였다.

견고했던 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건 크로이드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었다.

"알아내라."

크로이드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전과는 달랐다.

크로이드 공작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또 누가 개입했는지. 모조리 찾아내."

크로이드 공작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 실린 분노를 느끼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

떨어진 명예를 되살려야 했다. 누군가 마수의 신체를 가져갔다.

그렇다면 현장을 봤을 가능성도 컸다.

이번 일에 관여한 이들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분파가 아니라 크로이드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단호한 크로이드 공작의 말에 가신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수배령은 어떻게 할까요?"

루이스 크로이드. 이제 다른 세력들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대로 유지해."

크로이드 공작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이드 공작은 루이스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은 것이었다.

* * *

모리아.

제국 북부에 있는 중소도시 중 하나로써 경비가 삼엄했다. 그러나 그림자 하나가 엄중한 경계를 피해서 담을 넘고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 낡고 더러운 후드였으나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거리에 부랑자들은 흔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내의 정체는 루이였다.

루이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최대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시체에서 벗겨낸 것이었다.

그랬던 루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모리아를 찾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기 있군.'

마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루이의 눈이 반짝였다.

터그레이 상회.

북부에서 활동하는 대상회.

작은 마을이라면 모를까, 이정도 규모의 마을에는 지부가 있는 게 당연했다.

루이가 상회 안으로 들어가자 시선이 몰렸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직원 하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웃고 있으나 경계심이 짙었다.

당연했다. 지금 루이의 꼴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직원의 눈빛은 거지를 보는 게 아니었다.

'자세가 잡혔군.'

직원뿐만 아니었다. 나름 감추려고 하고 있었지만, 루이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사방에서 경계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루이가 그들을 눈치챈 것처럼 기사들 역시 루이가 부랑자가 아니란 걸 알아챘다.

기사들.

터그레이 상회의 본모습을 아는 루이로서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루이는 품에서 전패를 꺼냈다.

전패를 확인한 직원의 표정이 변했다. 직원이 전패의 가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전패가 있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금액을 꺼내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루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었다.

루이는 직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필로스님과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

직원이 표정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 * *

직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허락을 구한 후 떠나갔다.

그런 직원이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루이는 안쪽으로 안내받았다.

복도를 지나 어떠한 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벽장을 밀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나왔다.

'대단하네.'

밖에서 봤을 때는 이런 공간이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지하에 있는 작은 방.

그곳에는 의자와 탁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루이는 탁상 위에 올려진 작은 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구.

터그레이 상회 정도 되는 곳이라면 수정구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루이가 의자에 앉자 통신구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통신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요, 용병님.]

용병이란 호칭에 루이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어진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해도 만능은 아닙니다. 서로 조심하는 게 좋죠. 기대가 크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거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나 루이의 정체를 알아챈 게 분명했다. 필로스는 웃음을 흘렸다.

[용병님께서 너무 유명해져서 본회에서도 어떻게 대우를 해야 할지 곤란할 정도입니다.]

웃고 있었으나 질책도 담겨 있었다.

어느 정도의 유명세는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것을 넘어섰다.

루이를 이용하려면 크로이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정보라···. 어떤 것이죠?]

"체네비라 소네티. 이 단어를 조사해 줬으면 합니다."

루이의 말에 통신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곧 필로스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분이군요. 아시겠지만 제 정보는 비싸답니다.]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정확한 정보만 가져다주십시오."

루이는 담담히 말했다. 루이의 말에 통신구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고객님이군요. 최대한 빠르게 찾아보겠습니다.]

호언장담. 그러나 루이는 의심하지 않았다.

암상. 그들이 찾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찾기 힘들 거다.

그리고 돈이라면 철광을 통해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루이의 용건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쪽에도 마수 장인이 있습니까?"

순간, 통신구가 침묵했다.

[...장인이라. 설마 요즘 시끄러운 그것 때문입니까?]

필로스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그것. 게르 산맥에서 발견된 마수에 대해서는 벌써 소문이 돌고 있었다.

루이는 그런 필로스의 기대에 대답했다.

"예, 남은 것도 같이 처분하려고 합니다."

[...!]

루이의 말에 필로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환호성에 가까웠다. 지금 대륙에 있는 마수 상인들의 관심사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최고의 장인을 준비하죠. 나흘, 아니. 사흘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루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통신구의 불이 사라졌다.

항상 여유가 넘치던 필로스를 생각하면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죽은 마인의 가치가 높다는 소리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루이는 모리아를 다시 찾았다.

필로스가 말한 사흘.

그건 장인을 수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으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루이님."

약속한 날짜가 돼서 다시 찾은 터그레이 상회에는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로스.

그가 루이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그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루이는 필로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보이는군.'

필로스의 경지가.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필로스는 암상에 있던 기사들처럼 자신의 에테르를 숨기는 데 능숙했다.

아니, 그들보다 더.

전에는 단순한 감이었으나 이제는 에테르가 느껴졌다.

그만큼 루이가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로스가 강하다는 것이기도 하지.'

아직도 정확한 경지를 가늠할 수 없다.

적어도 그리피트에 준하는 기사였다. 그 뜻은 필로스가 마스터란 소리였다.

나이를 구분하기 힘든 외견도 이해가 되었다.

필로스 역시 루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성장이 빨라.'

자신의 예상을 넘어섰다.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감탄은 짧았다.

"그럼 어디 물건부터 확인해볼까요?"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상인이었다. 루이의 성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옛 시대로 회귀. >

루이는 필로스와 함께 마을 밖으로 나왔다.

들어올 때는 담을 타고 들어왔으나 나갈 때는 당당히 정문을 이용했다.

모리아가 경계가 삼엄하다고는 하나 나가는 이들까지 검문하지는 않았다.

모리아 마을 뒤편에 있는 작은 산.

마인의 머리는 무게도 무게지만 부피가 커서 옮기기 쉽지 않았으나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이 잘 닦인 덕분에 사람들은 길 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길을 벗어나서 산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없었다.

루이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마인의 머리를 본 필로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상태가 좋군요."

목 부위가 잘려있었으나 머리 자체는 손상된 곳이 없었다.

루이는 이리저리 머리를 살피는 필로스를 기다렸다.

필로스는 눈꺼풀을 열어보기도 하고 이빨을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머리를 살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필로스가 진정되자 루이가 입을 열었다.

"이 뿔로 검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루이는 세 개의 뿔 중, 가운데 있는 뿔을 가리켰다.

가장 높게 솟은 뿔.

그를 보며 필로스는 턱을 매만졌다.

뿔의 크기를 생각하면 검 한 자루는 우스웠다. 뿔 하나만으로도 대여섯 자루는 충분히 나오고도 남았다.

그러나 필로스는 오기 전과 달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몇몇 장인들을 섭외하긴 했으나 그들로도 부족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일류의 장인이었다.

그만큼 물건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었다.

실패라도 하면 물건이 상할 수도 있었다.

"나머지 판매는 필로스님께 맡기겠습니다."

루이는 그리 말하면서 옆에 있는 발톱들을 가리켰다. 머리와 발톱 스무 개.

그를 본 필로스의 눈이 반짝였다.

"...안 되면 되게 해야죠. 대륙 전체를 뒤져서라도 최고의 검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최상급을 넘어선 마수의 사체.

마스터들도 탐낼만한 물건이었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필로스의 확답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긴 해도 상인으로서는 믿을 수 있는 이였다.

그리고 비싸다고 해도 나머지 부위를 팔면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하나 더."

루이는 몸을 일으켰다. 사실 마인의 뿔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진짜 용무는 따로 있었다.

루이는 수풀 사이에 숨겨놓았던 것을 꺼냈다.

"그건···. 이빨입니까?"

마인의 것은 아니었다. 마인의 머리에는 이빨이 온전했다.

마인의 것보다 거대한 이빨. 그 주인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빨을 살피던 필로스의 눈이 떨려왔다.

"...마수가 아니다?"

역시나 필로스는 바로 알아보았다. 마수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필로스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다.

"용의 이빨입니다. 이걸로도 검을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용, 이라고요?"

드래곤.

필로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용. 암상에서 일하고 있기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신화 속에 나오는 생물. 그러나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과거에도 용의 일부라고 해서 거래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전부가 마수였다.

몇몇 학자들이 과거에 대륙에는 인간 말고도 다른 종족들도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나 허황한 소리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야.'

필로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수와 다른 존재의 것이다.

진짜 용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분명했다.

"가능하겠습니까?"

아까와 같은 물음. 그러나 그 무게는 전혀 달랐다.

루이의 무심한 시선이 필로스를 향해 있었다.

그런 루이를 바라보던 필로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볼 때마다 정말 놀랍군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안 되도 되게 만들겠다고."

웃고 있었으나 그 눈빛은 강렬했다.

"저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건 암상의 명예도 달려있었다. 돈만 준다면 세상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다.

암상의 자부심이었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로스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이정도 크기라면 검을 만들고도 남겠군요."

은근한 목소리.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 상인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열 자루도 거뜬하게 나올 거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남은 부분은 보관해주십시오."

함부로 팔아도 될 물건이 아니었다. 루이는 망자들을 떠올렸다.

망자들은 용의 이빨을 두려워했다.

'망자만이 아닐 거야.'

빌어먹을 도마뱀. 마인은 그리 말했다.

마인과 마수들에게도 효력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효력이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필요한 것이었다.

'벌써 세 번째야.'

앞으로 더 부딪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필로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들에게 효과가 있다면 무기로 쓰는 게 나았다.

필로스는 루이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아쉬워.'

용의 이빨을 보니 마수보다 그쪽이 더 탐났다.

그렇다고 해도 용의 이빨을 가로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필로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최상급 이상의 마수.

그리고 용의 이빨.

이 두 가지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우연으로 넘길 수는 없었다.

'또 나올지도 모르지.'

루이의 가치가 높아졌다. 고작 눈앞의 이익을 위해 그와의 관계가 틀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루이는 크로이드의 핏줄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필로스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니, 성장하지 못하면 꺾일 것이다.

주변 환경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욕심을 내는 건, 그 뒤로도 충분해.'

만약에 꺾인다면 그뿐이었다. 필로스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이제 용무는 끝난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던 루이가 멈칫했다.

'...설마, 또 무언가 있는 건가?'

이제는 기대를 넘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이가 입을 열었다.

"혹시 검술이나 기술도 판매합니까?"

다행히도 정상적인 문의였다. 필로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팔대 검파의 검술이라도 구해드리죠."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팔대 검파는 필요 없었다.

지금 루이에게 필요한 건 하나였다.

"에테르를 숨기는 기술을 사고 싶습니다."

"...호오."

뒤늦게 필로스의 탄성이 들려왔다. 생각지도 못한 의뢰였으나 루이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몇 가지가 있죠.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 겁니까?"

루이는 필로스를 보고 있었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루이가 원하는 건 필로스가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루이의 시선에 필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숨긴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비슷한 수준이나 가능합니다."

실력 차이가 뚜렷하면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지금 루이보다 강한 이들이라고 하면 마스터들뿐이었다.

'...마스터가 흔하지 않지.'

루이가 이상한 것이었다. 평범하게 지낸다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따로 교관을 불러드리죠."

필로스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직접 배우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루이도 잘 알고 있었다.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필로스가 루이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들어왔던 의뢰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루이님, 혹시 황실에 아는 이가 있습니까?"

"황실, 말입니까?"

루이는 의아해했다. 짐작 가는 게 없었다.

황실에서 정보 길드를 통해서 루이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황도 내에 암상의 영향력이 사라져서 누가 요청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 루이의 반응에 필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 일 때문에 중앙에서도 루이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실에서 관심을 가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제국 전역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크로이드가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분간 산에서 사냥이라도 해야겠군.'

정보를 조사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가만히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배령 때문에 도축 일도 힘들어졌다.

루이로서는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크로이드와 싸움을 이어가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러나···.

'퀘스트가 우선이야.'

먼저 강해져야 했다.

앞으로의 일정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싸움을 걸 필요는 없었다.

"그럼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터그레이 상회 말고 암상으로 직접 찾아주십시오. 아무래도 상회 쪽은 외부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해서···."

"아."

멋쩍게 웃는 필로스를 보며 루이가 탄성을 뱉었다.

있었다.

시간을 벌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이···.

"교관 역시 그쪽으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필로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불꽃.

불꽃 너머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러나 그림자의 주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머핀이 죽었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허탈함과 충격이 담겨 있었다.

다른 이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조세핀이 죽었을 때와는 달랐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녀를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핀은 달랐다.

[...그 녀석이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에 있는 몇몇은 머핀보다 강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머핀의 체력과 회복력은 그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당연히 머핀의 중요성도 조세핀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퀘인,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네 녀석이 아니었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이리될 줄은 몰랐는데.]

사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이었다.

귀찮기에 일을 넘겼을 뿐이었다.

[루이스 크로이드라···.]

노인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이제는 이들 모두에게 선명하게 각인된 이름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

지금 이 때문에 크로이드가 동부 전체를 들쑤시고 있었다.

잠든 사자가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머핀이 해오던 일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피오르, 봉인을 푸는 건 얼마나 진행되었지?]

[이제 겨우 반이야. 머핀이 죽어서 더 늦어지겠지.]

곳곳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세트리아 왕국 때와 달랐다.

크로이드가 움직인다면 황실도 관심을 가질 거다.

그 뜻은 인간들 전체가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았다.

[퀘인, 파편은 몇 개나 회수했지?]

가운데 있던 중년인 입을 열었다.

[일곱 개야.]

사내의 말에 중년인은 고개를 주억였다.

[파편을 사용한다.]

예상보다 이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몇 개나 사용할 생각이야? 한 둘 정도로는 안 될 텐데?]

여성의 말에 중년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부. 일곱 개 전부를 제국에 쓰겠다.]

[...]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몇은 아직 걱정되는지 탄식을 뱉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기이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기다리던 일이었다.

[곧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 아니, 옛 시대로 회귀할 때가 다가왔다.

보라색 불꽃이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 버림받은 자. >

소모른. 제국 북부에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중 하나.

그곳에도 어둠은 존재했다. 암상의 지부장은 눈앞에 있는 이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탁상 위에는 머리 하나가 예쁘게 포장되어 놓여 있었다.

"...빠, 빠르시군요."

"다음."

"예?"

"다음."

"..."

자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에 지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 자를 보내온 자신의 동기를 욕했다.

다른 지부의 지부장.

'그 새끼가 실력자를 보내준다고 했을 때, 의심해야 했는데···.'

그쪽도 인원이 부족할 텐데 굳이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걸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쪽 지부가 한 달 사이에 실적이 몰라보게 증가한 것도 한몫했다.

지부장은 눈앞의 암살자를 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

이런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자. 처음만 해도 골치 아픈 의뢰를 해결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래, 실력은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지.'

성실하기까지 했다. 그 두 가지만 놓고 보면 좋은 인재였다.

문제는 둘 다 너무 과하다는 것이었다.

"다음."

"..."

고저 없는 암살자의 말에 지부장은 몸을 떨었다.

탁상 위에 올려진 머리만 해도 세 시간 전에 받아간 의뢰였다.

무려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오늘만 셋.

어제는 다섯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기사도 있었다.

의뢰를 하나 해결할 때마다 같은 말만 했다.

'이 새끼는 잠도 안 자나?'

이 조그마한 마을에 이틀 사이에 여덟 명이나 죽었다.

말이 안 나올 리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에 지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암살 의뢰는 없습니다."

"소개."

길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는 건가. 지부장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그러나 눈앞의 암살자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소개라면, 다른 지부를 말하는 겁니까?"

끄덕. 위아래로 움직이는 머리를 보며 지부장은 암살자의 기행이 처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살인광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살인광이라면 오히려 의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살인 자체에 쾌락을 느끼기에 그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암살자는 달랐다.

'어쩌면 그 녀석도 피해자일 수도 있겠네.'

지부장은 자신의 동기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이 대가는 톡톡히 받아낼 것이다.

그렇게 동기를 욕하면서도 자신 역시 어떤 지부로 넘겨야 하나 생각에 잠겼다.

곧 몇 개의 지부를 추린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지부장의 말이 끊겼다.

"...무슨 일이야?"

"본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과 함께 있다는 걸 부하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거나···.

'이 자에 관한 거겠지.'

지부장의 시선이 암살자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눈앞의 암살자는 암상에서 정식으로 교육받은 암살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고객. 즉, 외부인이었다.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부하가 서신 하나를 가져왔다.

역시나 서신의 내용은 암살자에 관한 게 맞았다.

지부장은 서신에 적힌 거물의 이름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필로스 이사님께서 모리아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의뢰하신 정보를 찾았다고···."

지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암살자의 눈에서 빛이 쏟아졌다.

그걸 보며 지부장은 숨을 삼켰다.

'역시 보통 고객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다면 필로스가 직접 연락해올 리도 없었다.

지부장의 자세가 저절로 공손해졌다.

그러나 암살자는 이미 지부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신.

이제 암살행을 끝낼 때가 온 것이었다.

외부에서 온 암살자, 루이는 눈이 어둠 속에서 빛을 흘렸다.

* * *

루이는 서신을 받자마자 모리아로 향했다.

의뢰하고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952:12:03]

교관에게서 기술을 배운 시간이 열흘. 그동안 쓴 시간을 암살을 통해서 복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복구일뿐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그걸 생각하며 모리아에 도착하자 필로스가 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님, 오랜만입니다."

싱긋 웃는 필로스. 그의 가면은 여전했다.

루이는 빈손의 필로스를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검은 아직인 거 같군.'

당연했다. 한 달이라면 장인을 찾는 것만으로도 벅찰 거다. 필로스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아무래도 서신을 통해서 드리는 것보다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왔습니다."

필로스는 거기까지 말한 후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체네비라 소네티. 참으로 흥미롭더군요. 먼저 체네비라라는 단어는 신학에서도 나왔습니다."

신학? 루이가 의아해하자 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신어. 그곳에서는 버림받은 자. 정확히는 신에게 버림받은 이를 말하더군요. 하지만 루이님께서 찾는 부분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조금 더 조사해봤습니다. 그리고···."

필로스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조금 과장되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체네비라 소네티란 인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물. 루이의 눈이 반짝였다.

사람이었던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루이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녀는 삼백 년 전 사람입니다. 숲의 마녀. 당시에 그녀를 그리 부르더군요."

삼백 년. 그럼 이미 죽었다는 소리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

제국의 황제 역시 고작 백 살이 넘었을 뿐이었다.

"마녀라면?"

이 시대에는 마법사가 있다. 마녀란 호칭은 익숙하지 않았다.

"예, 그래서 저도 그 부분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결국, 별호만 알아낸 건가.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암상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실망이었다.

그러나 필로스는 그런 루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제가 흥미롭다고 한 건 그 부분입니다. 보통 그만한 별호로 불렸다면 그에 관한 정보가 남기 마련입니다. 조금 더 조사해보니 어찌 된 일인지 알겠더군요."

루이의 시선이 필로스의 입으로 향했다. 필로스는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루이의 시선을 즐겼다.

"이십여 년 전. 황실에서 모조리 회수해갔습니다."

"...!"

이십여 년 전이면 바로 얼마 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 황제의 지시였다.

"삼백 년 전 시대의 인물을, 이십여 년 전에 회수한 겁니다.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필로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루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흥미로움. 그 이상이었다.

필로스는 루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알아낸 부분은 거기까지입니다."

아무리 암상이라도 황실 내의 일까지 알아낼 수 없었다.

고작 한 달 사이에 이정도를 알아낸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황실에서 자료를 가져갔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폐기했거나···."

"...황실에서 직접 보관하거나."

루이의 말에 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황도에 가야 했다.

크로이드 가문이 있는 황도에.

필로스는 슬며시 루이를 표정을 살폈다.

"직접 가실 생각입니까?"

"예."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검을 받으려면 위치를 알려야 했다.

루이의 말에 필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언제나 제 예상을 넘는 분이시군요."

지금 혈혈단신으로 황도로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

"은신술을 배운 시간에 비교하면 능숙해지시긴 했으나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희도 도움을 드리기 힘듭니다."

다른 곳과 달랐다. 황도는 암상이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방법은 있었다. 담담한 루이의 반응에 필로스는 의아해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묘한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불가능한 일을 처리해온 루이였다. 이번에도 어쩐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필로스가 입을 열었다.

"혹여, 황도에 들어오신다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루이의 시선이 필로스에게 향했다.

부탁. 아니, 의뢰였다. 루이의 눈빛이 변했다.

'지난번에 말했던 건가.'

이와 같은 일을 위해 실력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필로스가 말을 이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큰 싸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때가 되면 저 역시 같이 움직일 생각입니다."

필로스 역시 황도로 향하겠다는 뜻이었다.

필로스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에 가면 사정이 어찌 변할지 몰랐다. 아니, 들어갈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필로스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언급했다는 건···.

'황도 안에 무슨 일이 있군.'

암상 자체가 움직일만한 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도 암상과 친분을 유지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예, 그럼 루이님. 황도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필로스는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

홀로 남은 루이는 생각에 잠겼다.

체네비라 소네티.

버림받은 자.

필로스는 상관없을 거라고 했지만 루이의 생각은 달랐다.

퀘스트는 신과 관련이 있었다.

'체네비라는 성이 아닐 거야.'

신에게 버림받은 자, 소네티.

그 이름 자체가 호칭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황실에 들어가는지였다. 황도는 다른 마을처럼 담을 넘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마법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마스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담을 넘는 순간 그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짜 신분을 만든다고 해도 금세 들킬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정도 계획이 잡혀 있었다.

오로지 루이만이 가능한 일.

하지만 바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필요해.'

황도까지 가는 시간도 생각해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다시 암살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루이는 다시 소모른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모른에 도착한 루이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익숙한 느낌. 루이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의 앞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앞만 밤이 찾아온 것처럼 한기가 불어오고 있었다.

어둠 너머로 느껴지는 적의.

그리고 짐승의 울부짖음.

그건 갓 태어난 짐승들의 외침이었다. 환희의 함성. 어둠에서 넘어온 피 냄새가 루이의 코끝을 찔렀다.

"어째서···."

소모른.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루이가 알던 소모른은 없었다.

형태는 그대로였으나 그곳의 주인은 이제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 루이를 맞이한 건 마수의 땅이었다.

때마침, 어둠 너머로 기어 나온 마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르르르르르."

이를 드러내는 마수의 입에는 새빨간 핏물이 묻어있었다.

루이는 마수를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루이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이곳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일곱 개.

제국 전역에 새롭게 생긴 마수의 땅의 숫자였다.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

마수의 땅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늘거나 주는 게 아니었다.

이는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재해.

제국 전체가 혼란에 잠겼다.

< 그분의 인도. >

갑작스럽게 제국 전역에 나타난 마수의 땅.

혼란스러운 건 황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부의 하나, 북에 하나, 남에 둘, 동에도 둘. 그리고 중앙에 셋인가···."

삼황자는 턱을 괴었다. 과거 그의 스승들, 마탑주들이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말했을 뿐이었다.

이처럼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상황은 마탑주들의 예상보다 심각했다.

그 때문에 삼황자의 계획도 전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삼황자는 지도를 피고 새롭게 나타난 마수의 땅을 표시했다.

기존에 있던 곳이 둘.

남부와 동부였다.

지리적으로 봤을 때는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삼황자는 뒤에 서 있는 여기사를 돌아보았다.

"...진, 우연이라고 생각해?"

"..."

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삼황자가 무엇을 봤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힘의 균형.

가장 힘이 미약한 서부에 하나.

힘은 강대하지만, 마론 공화국과의 분쟁 때문에 정신이 없는 북부에도 하나.

그리고 가장 힘이 집중되어있는 중앙에 셋.

마치, 제국의 사정의 꿰뚫어 보는 듯한 배치였다.

그것도 전조도 없이 동시에 생겨났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멍청한 거지.'

그러나 삼황자가 의아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황자의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높게 솟아오른 성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심장이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황자가 보고 있는 건 왕궁의 외견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이였다.

그곳의 주인.

'...대체 무슨 생각이지?'

혼란스러운 제국과 달리 한 곳은 너무나 조용했다.

바로 황제였다.

황제에게서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마탑주들처럼 예측하였던 게 아니었다.

'...확신하고 있는듯했어.'

삼황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삼황자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삼황자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다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혈육이라고 정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소문이 도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마스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의 황제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삼황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삼황자는 마수의 땅 자체가 봉인지란 걸 알고 있었다.

이계와의 통로를 봉인한 것.

황실에서만 내려오는 문헌에도 남아 있었다. 황실뿐만 아니라 신전에서도 비슷한 문헌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봉인했다고만 했지 그게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어.'

자신도 직접 확인했다. 마수의 땅에서 느껴졌던 건 확실히 무언가를 봉인한 흔적이었다. 삼황자 뿐만 아니라 과거의 마탑주들과 신전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다른 세계와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통로를 마음대로 열 수 있다면 봉인은 필요 없겠지.'

새롭게 생긴 마수의 땅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전에 있던 마수의 땅들과 달리 봉인이 없을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삼황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대체.

"...원래 있던 마수의 땅에는 무엇이 봉인되어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

그 봉인이 흔들리고 있었다.

삼황자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건 불안감에 가까웠다.

* * *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가 안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마수사냥꾼들과 마수 상인.

그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과거까지 제국은 마수의 땅의 통제가 심했다.

그러나 이번에 늘어난 땅 때문에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수사냥꾼들과 상인들이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 역시 그들을 받아들이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과거에 제국에서 쫓겨났던 범죄자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혼란은 더 큰 혼란을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반기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검이 마수의 머리를 갈랐다.

[2512:12:02]

*

[2561:03:12]

루이는 시간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겨우 오십 시간인가.'

예전이라면 이것만으로 기뻐했을 테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너무나 부족했다.

특히나 레기온의 기사들과 싸움을 겪었기에 갈증은 더욱 심했다.

'아니야.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욕심을 부리는 순간 실수를 하게 된다.

지금 상황은 루이에게 나쁘지 않았다.

쉽게 시간 수급이 가능한 상황.

루이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유 있지는 않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는 많은 시간을 확보했다.

'그럼 먼저···.'

루이는 메르실라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네가 나를 찾아준 건 기쁘나 너를 위해서라면 그녀를 먼저 찾으렴···.]

그녀는 밤하라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단순히 벽화와 용의 이빨을 주기 위해 그곳으로 이끌지는 않았을 거다.

'무언가 있어.'

메르실라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조언했을 리가 없었다.

루이는 검을 집어넣고 상점을 불렀다.

눈앞에 가득 채우는 글자들.

망설임은 없었다.

"밤하라의 가호."

그와 함께 루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거대한 동굴.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마치 밤하늘처럼 보였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

그러나 루이는 동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곳과 비슷해.'

밤하라의 신전. 어쩌면 그곳은 이곳을 본떠서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루이의 시선이 동굴의 주인에게 향했다.

아직 2단계라 그녀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존재감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비늘. 등을 덮은 거대한 날개.

날카로운 발톱과 긴 꼬리.

흉포한 외견과 달리 두 눈은 아득하리만큼 높은 지성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루이를 향했다.

그러나 루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야.'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번 만남으로 무언가를 얻기 힘들었다.

루이에게 필요한 건 작은 단서였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

커다란 입을 열던 밤하라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루이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루이는 마지막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어딘가를 바라보던 밤하라.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명백했다.

분노와 적의.

그건 누구에게 향한 것인가.

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더 늘었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삼 단계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건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루이가 죽인 마수들이 늘어져 있었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는 과거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트로이센 제국의 황도.

아무리 제국이 혼란스럽다고는 하나 쉽게 들어가지 못할 거다.

이정도로 제국이 쓰러질 리가 없었다.

'...내키진 않지만.'

미뤄왔던 방법을 쓸 때가 되었다.

* * *

마론 공화국과 제국의 분쟁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론 공화국이라 부르지만, 제국에선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을 야만족이라 불렀다.

그들 자체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것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공화국의 형태로 변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공화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체계가 잡힌 나라는 아니었다.

사실, 제국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미약한 세력이었다.

제국 역시 그들을 몇 번이나 토벌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실패했다.

마론 공화국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부분 사막으로 이뤄진 척박한 환경.

그렇기에 그들에겐 땅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제국이 공격하면 망설임 없이 도망친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도시였으며 곧 왕성이기도 했다.

그러니 제국으로서도 쉽사리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제국이 마음먹고자 하면 토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힘을 쏟을 만큼의 가치가 없었다.

과거에도 몇 번이나 토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 때문에 관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시 새로운 야만족들이 나타날 뿐이었다.

원래 야만족 모두가 그곳에서 살던 이들이 아니었다.

일부는 그럴지 몰라도 제국이나 다른 왕국에서 떠난 이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집단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야만족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에서도 북부를 토벌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거대한 장벽을 쌓아서 넘어오는 이들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장벽을 지키는 이들이 베헤모스 가문이었다.

철벽의 베헤모스.

팔대 검파 중 하나이며 지키는 것에 특화된 검파였다.

북부는 그들의 지배 아래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성황 하는 곳도 있었다.

바로 메르실라의 신전이었다.

주신 샤롯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평등했다.

그러나 신전과 신도들은 달랐다.

메르실라는 대륙 전체에 알려진 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신의 본신전은 황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메르실라는 이곳 북부에 있었다.

어쩌면 전쟁에서 라움보다 많이 찾는 신이 그녀일 수도 있었다.

재생과 번식.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번식의 신답게 성행위에 대해 너그러운 신전 중 하나였다.

게다가 메르실라의 축복을 받으면 아름다워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창녀 중에 메르실라를 믿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이곳 본신전은 아니었지만 조그마한 신전 중에는 창관의 일을 하는 곳도 있었다.

둘 다, 전쟁에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메르실라를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다.

창녀를 손가락질해도 감히 메르실라를 언급하지는 못한다.

천벌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신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었다. 그 역할은 신성한 것이었다.

함부로 모욕했다가는 각 신전의 이단심문관들이 나설 것이다.

실제 암살자들은 죽음의 신인 루퍼스를 모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자비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음탕한 귀족들에게 메르실라는 좋은 변명 거리였다.

당연히 기부도 많이 들어온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메르실라의 본신전.

대륙에 퍼져있는 메르실라 신전의 중심이었다.

당연히 그 주변에는 수많은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메르실라의 신전답게 병사들의 얼굴도 미남이 많았다.

그런 신전을 향해 한 사내가 걸어갔다. 깊게 눌러쓴 후드는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옷차림 역시 낡고 헤져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

병사들은 경계 섞인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곧 사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누굽니까? 얼굴을 드러내십시오."

날카로운 물음에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병사들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머뭇거리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병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부랑자가 아니라 정신에 이상이 생긴 이인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분이 이곳으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그분?"

의아하던 병사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신을 모욕해. 그때, 사내가 두 손을 올렸다.

척.

병사들이 창을 겨눴다. 사내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행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내의 양손에 올라오는 푸른 빛.

그건 병사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메르실라의 신성.

사내는 놀란 병사를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 그분의 인도에 따랐을 뿐입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담담히 울렸다.

< 마리쉘 주교. >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

메르실라 신전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주교 마리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무슨···."

믿기 지가 않았다. 대주교나 성녀조차도 계시만 들을 뿐이지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부랑자가 나타나서 신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쳐냈을 거다.

그러나 사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메르실라의 신성을 보였다.

"...거짓이 아니더나?"

주교 마리쉘의 물음에 사제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예, 직접 확인해보았으나 그분의 힘이 맞습니다. 적어도 추기경급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허."

추기경.

대주교와 주교, 성녀를 제외하고는 가장 권위가 높은 성직자였다. 메르실라 신전 내에서도 스물여덟 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눈앞의 사제만 해도 차기 대사제 후보로 손꼽힐 정도로 독실한 이였다.

그가 메르실라의 신성을 잘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사제가 마리쉘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뭐지?"

생각해보면 사내의 존재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쉘은 사제를 돌아보았다.

"신성을 다룰 수 있으나 다른 이를 치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제의 말에 마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야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지 않느냐?"

메르실라의 상징은 재생과 번식.

그렇다고 해서 성기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샤롯이나 라움의 성기사들만큼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내의 체격을 생각하면 사제보다 성기사에 가까웠다.

아니, 사제가 보았던 어느 성기사 보다 몸이 단단해 보였다. 그만큼 수행이 높다는 뜻이었다.

마리쉘의 말에 사제는 입을 닫았다.

성기사들 역시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 자신의 회복에 능력이 집중되어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를 치료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사제들에 비교해서 효율이 나쁠 뿐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타인의 치료가 아예 불가능했다. 그러나 기억 자체가 없으니 신성을 다루는 법을 잊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일 사내가 거짓을 고했다면 신성이 먼저 반응할 거다.

신성력은 재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독실한가. 그것이 신성력의 척도였다.

당연히 사내가 메르실라를 걸고 거짓말을 했다면 신성을 잃었을 거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신성력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사내도 독실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가 거짓을 고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리쉘은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대주교와 성녀가 자리를 비웠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 때문에 황도로 향한 것이었다.

메르실라뿐만 아니었다.

다른 신전의 대주교들 역시 황도에 있었다.

샤롯의 신전에.

마리쉘의 시선이 사제를 향했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단 접객실에 모셨습니다."

마리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하여 메르실라의 신성을 가진 이를 소홀하게 대접할 순 없었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너는 각 신전에 그와 같은 성기사가 있었는지 연락해보아라. 그리고 황도에 계신 대주교님께도 서신을 보내거라."

"예, 주교님."

사제가 마리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리쉘은 그런 사제를 뒤로하고 접객실로 향했다.

* * *

사내, 루이는 담담히 주변을 살폈다.

신전의 접객실. 신전이 아니라 귀족의 저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화려했다.

앉아있는 의자 역시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폭신했다.

그러나 루이가 살피는 건 접객실의 외견이 아니었다.

'일반 병사가 둘, 다른 둘은 성기사인가?'

루이도 성기사를 직접 겪는 건 처음이었다.

신성, 에테르가 아닌 힘. 신기한 감각이었다.

'일단 들어오는 건 성공했군.'

루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신성을 썼다.

마스터가 있었다면 들켰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신전은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다.

루이를 확인하는데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진 않을 거다.

'문제는 어떻게 황도로 가냐인데.'

이들을 통해서 성직자란 신분을 얻고 황도로 향해야 했다.

기사가 에테르로 자신을 증명하듯 성직자는 신성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직자로 인정받고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고 해도 황도에 들어가긴 쉽지 않았다.

변명을 생각해야 했다.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메르실라의 힘.

곧이어서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사제복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아까 보았던 사제들과 달리 화려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소. 주교 마리쉘이오."

"..."

주교. 예상보다 더 높은 신분이었다.

루이는 입을 닫았다. 반사적으로 이름을 말할 뻔한 것을 억누른 것이었다.

마리쉘은 그런 루이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아직 의심하는군.'

일반 사제들과 달랐다.

신성. 그것만으로는 신뢰를 주기 어려웠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소이까?"

"예."

마리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힘이 느껴졌다.

압박감.

"혹여, 그분의 모습도 보셨소이까?"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루이를 쏘아붙였다.

"보긴 했으나 어두워서 형태를 알아보긴 힘들었습니다."

루이는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번에는 마리쉘이 입을 다물었다. 루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이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진짜 신의 모습을 알고 있다면 반응하겠지.'

메르실라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건 신전 쪽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메르실라의 모습과 진짜 메르실라는 달랐다.

루이를 바라보는 마리쉘의 눈빛이 변했다.

마리쉘은 주교답게 메르실라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까?"

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처음이 분명, 깨어나라, 였지?'

마지막에 만났을 땐 밤하라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확신을 주려면 결정적인 것이 필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갔다.

마인.

"으음, 어둠이 곧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루이의 말에 마리쉘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당혹스러움.

'정답이군.'

루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메르실라의 주교 정도 된다면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루이의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루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노래하듯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느 때에도, 어디에서도 존재하리라."

"...오, 메르실라시여."

마리쉘이 짧게 읊조렸다. 그리고 루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완전히 변했다.

마족, 그들과의 전쟁.

이를 아는 건 소수였다.

황실과 마탑, 그리고 몇몇 가문.

신전에서도 고위 성직자들밖에 모르는 내용이었다.

한낱 부랑자가 알만한 게 아니었다.

루이는 마인을 흉낸 것에 불과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마리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정말, 계시를 받은 건가!'

마리쉘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루이는 생각에 잠긴 마리쉘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나 마리쉘의 입이 열렸다.

"...다른 건,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없었다. 방금 그 말도 쥐어짠 것이었다.

사실 루이도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마리쉘의 반응을 보면 이제 루이를 믿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사실 마리쉘이 이 문제를 판단할 필요는 없었다.

루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장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메르실라.

황도에 있는 성녀라면 그녀에게 답을 구하는 게 가능했다.

루이도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자신이 본 메르실라라면 루이를 내치지는 않을 거다.

"일단 숙소를 내줄 테니 그곳에 머물게나. 우리 역시 그분의 뜻을 헤아릴 시간이 필요하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루이는 신전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 * *

그 뒤로 사흘이 지났다. 그러나 마리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게 된 루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끔 신전을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바로 여사제들 때문이었다.

루이가 산책할 때마다 여사제들이 눈짓을 보내왔다.

그 눈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루이가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간혹 남자 사제도 껴있던 것 같았다.

'...역시 메르실라인가.'

미남미녀들이 많은 메르실라였지만 루이의 외견도 그들과 비교해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사제들과 달리 몸도 탄탄하니 사제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성기사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따로 머무는 구역이 있었다.

실제로 신전 으슥한 곳에서 행위를 즐기는 사제들도 적지 않았다.

단순히 성행위에 너그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메르실라의 신성은 성욕을 증가시켜.'

루이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수행이 깊다면 다르지만, 일반 사제들에게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의 몸이 반응할 때도 적지 않았다.

마스터에 근접하고 카스의 가호까지 받은 루이가 그럴 정도이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루이는 줄어든 시간을 보며 혀를 찼다. 대주교나 성녀에게 확인을 받았다면 연락이 왔을 거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루이도 함부로 떠날 순 없었다.

이곳에 온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너머에는 먹잇감들이 굴러다녔다.

그걸 참는 건 힘들었다.

'위험하긴 하겠지만···.'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제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여사제 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물어왔다. 이미 신전 내에 루이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매혹적인 웃음.

"혹시 마리쉘 주교님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사실 루이의 경우가 특별했던 것이지 주교란 자리는 가볍지 않았다.

일반 사제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이라고 해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사제장님께 말씀드려볼게요."

"감사합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말과 달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들뜬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아뇨. 혹시 괜찮으시면 밤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사제는 은근한 목소리와 함께 루이의 팔뚝을 매만졌다.

루이는 사제가 말하는 대화는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란 걸 알아챘다.

"...밤에는 제가 명상을 해야 해서."

"그럼 낮이라도 상관없는데."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눈빛만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제안은 고마우나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다음 기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돌려서 말하긴 했으나 명백한 거절. 그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예, 그럼 다음에 봬요."

웃으며 떠나가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밤의 숲에서 보았던 마수의 눈빛과 비슷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루이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다.

"..."

눈이 마주치자 복도에 있던 사제가 싱긋 웃었다.

루이는 사제를 외면하고 객실로 돌아갔다.

이곳은 어떤 의미로 정글과도 같았다.

* * *

주교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사제 하나가 루이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사제들과 달리 욕망을 제어할 줄 알았다.

십분. 루이에게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밖으로 나가보고 싶습니다."

루이의 말에 마리쉘의 표정이 변했다.

< 그들은 인간이었다. >

마리쉘의 표정. 그건 놀라움도 아니라 당혹스러움이었다.

마리쉘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외출이라면 나를 부르지 않아도 되오. 내 다른 이들에게 말해 놓겠소."

신전에 있어서 답답했던 것인가. 마리쉘은 굳이 막을 생각도 없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마리쉘의 시선이 루이를 향했다.

"이 주변에 도적들이 자주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

마론 공화국. 아니, 야만족들.

장벽이 있다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장벽을 피해서 넘어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을 약탈하고 돌아간다.

루이의 말에 마리쉘의 표정이 변했다.

루이는 말을 이었다.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음!"

마리쉘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이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마리쉘은 루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가?

첫 만남 이후로 본 적은 없었지만 보고는 계속 받고 있었다.

루이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루이를 사제들과 가까운 곳에 보낸 것도 그러한 의도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마리쉘이 직접 붙인 이들도 있었다.

한 번쯤은 유혹에 넘어가도 좋았을 텐데 루이에게 그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지가 굳건한 건가?'

몸을 봐도 수행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마리쉘은 모르고 있지만, 루이는 마리쉘이 감시로 붙인 이들을 이미 파악한 뒤였다.

루이는 마스터에 이르진 못했지만, 감각은 마스터만큼이나 뛰어났다. 아무리 고위 성직자라고 해도 성기사들도 아닌 일반 사제들이 그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시간이 줄어드는데 한가롭게 유희를 즐길 수는 없었다.

마리쉘은 턱을 쓸어내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이까? 지금은 기억을 찾는 게 우선이오."

야만족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야만족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들과 부딪힐 거다.

베헤모스.

메르실라는 다른 신전들과 달리 기사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신전에 비교해서였다.

같은 북부에 있기에 돕기도 하지만 이익 때문에 경쟁하기도 했다.

아직 대주교와 성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루이의 존재를 섣불리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셨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분의 뜻을 찾는 것도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게다가 지금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경건하게 말하는 루이를 보며 마리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말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신의 뜻을 찾는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마리쉘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루이를 보았다.

'진짜 그리 생각하는 건가?'

말만 들어보면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루이의 속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결국, 마리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성기사 하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자인가.'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루이도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정도도 감지덕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루이는 사람들이 고통받든 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부디, 많이 넘어와 있으면 좋겠군.'

속마음을 숨긴 루이는 마리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뿌연 향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약.

그 아래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들이 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모든 걸 잊고 오로지 서로의 몸을 탐하고만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여인 하나가 불쑥 일어났다.

아름다운 몸.

마치 신이 빚은듯한 완벽한 몸이었다. 그녀의 몸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몸과 달리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다.

여인은 살덩이들을 피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인이 방을 나오자 한 중년인이 옷을 걸쳐줬다.

"고생하셨습니다. 성녀님."

여인의 시선이 중년인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행위의 여운이 남아 있는지 홍조가 떠올랐다.

초점조차 잡히지 않은 눈동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중년인은 차분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여인의 눈동자는 한참을 헤매다가 제 색을 찾아갔다.

"...아, 추기경님···."

곧 몽롱했던 표정이 풀리면서 올라왔던 홍조도 차분해졌다. 그녀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를 본 추기경의 얼굴에도 걱정이 떠올랐다.

"설마, 계시를 받지 못하신 겁니까?"

"...아뇨, 아니에요. 계시는 받았어요."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흘간 이어진 의식.

그녀의 신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녀는 자신이 들었던 말씀을 떠올렸다.

신의 말씀은 인간의 것과 달랐다. 당연히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나의···."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신께서 하신 말씀은 좀 더 포괄적이었다.

"그는 우리의 전사다. 분명, 그리 말씀하셨어요."

추기경은 감탄을 뱉었다.

"사실이었군요."

직접 들었지만 믿기 지가 않았다. 그러나 성녀의 표정은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였다.

추기경은 아직 미약의 효과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녀는 생각에 잠겼다.

메르실라.

그녀는 자비롭고 상냥했다. 그녀와 만날 때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뚜렷한 의지를 보낸 적은 없었다.

'...우리의···.'

그녀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야 했다.

그 사실이 불쾌했다. 이것이 질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계속 생각해봤자, 자신만 추해질 뿐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사.'

전사는 싸우는 자였다. 그녀가 친히 전사를 보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어쩌면 지금 일어나는 일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성녀가 추기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주교님께서는 어디 계시지요?"

"아직 회의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또 인가요?

샤롯의 신전이란 소리였다. 성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황도에 모인 대주교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전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사실을 추기경이 알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성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추기경을 보았다.

"내가 그분을 직접 보아야겠어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 황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뇨."

굳이 자신이 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대주교도 그를 봐야 할 것이다.

"마리쉘 주교님께 연락해서 그분을 이곳으로 모셔와 주세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신의 전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성녀였다.

물론, 질투가 나서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 황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추기경이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 눈짓했다. 여사제 둘이 나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아무리 성녀라지만 사흘 동안 미약을 마셨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성녀가 자리를 떠나가자 다른 사제들이 다가왔다.

"저들은 어찌할까요?"

방에 남은 이들. 이번 일을 위해 고용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니,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뇌 속까지 미약이 스며들었다. 멀쩡한 인간이 사흘 동안 식사도, 잠도 자지 않으면서 성행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미약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이 눈이 풀렸음은 물론이고 의식조차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흔들 뿐이었다.

"처리해."

"예,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나간다고 해도 제대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러나 만약의 일이 있었다.

저들은 성녀의 은혜를 입었다.

번식.

그 이명대로 임신할 가능성도 컸다. 아니, 십중팔구 여자들 모두가 아이를 잉태했을 거다.

몰래 데려오긴 했으나 영원한 비밀이란 건 없었다.

신전이 데려간 이들이 모두 임신을 하면 신전을 의심하는 이도 생길 거다.

이런 일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다.

성녀는 성스러운 존재여야만 한다. 아무리 메르실라의 성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는 지우는 게 낫지.'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추문보다는 차라리 악평이 나았다.

모두가 죽는다면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추기경은 안에 있는 이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수건으로 입을 가린 사제들이 방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 * *

수많은 신과 신전들이 존재했지만 대신전이란 호칭을 쓸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주신 샤롯의 대신전.

그곳의 회의장에는 열 명 남짓한 이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름 있는 신전의 대주교들.

아니, 단순히 이름이 있기에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과거가 이어져 있었다.

이미 인간들은 잊어버린 아득한 시대의 조각.

각 신전에서도 오로지 대주교만 알고 있었다.

대주교에서 대주교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그렇기에 세월이 지날수록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진실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였다.

"마탑에서도 연락이 왔소이다. 새롭게 열린 땅에서는 봉인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구려."

노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은 없었다.

이는 예상했던 것이었다.

"비록 문이 열렸지만, 그들은 넘어오지 못할 것이요."

옛 존재들.

지금 넘어온 마수들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들이 우려하는 건 다른 존재들이었다.

"신성한 계약 말인가."

누군가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안도했다.

그때, 가운데 앉아있던 또 다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샤롯의 대주교.

"어디에서나 예외는 있는 법이오."

대주교의 시선이 다른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무언가를 떠올린 것이었다.

"...숲의 마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몇몇이 침음성을 흘렸다.

"벌써 천 년 전이요. 방법을 찾았어도 이상할 게 없소."

"어쩌면 이미 들어왔을 수도 있소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리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혼란은 이미 시작되었소."

메르실라의 대주교.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나타나게 된다면 진실도 알려질 거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일어나는 일과 비교도 되지 않는 재앙이 불어닥칠 거다.

마인과 마수.

마족이라 부르는 존재들.

그들은 시작일뿐이었다. 황실이나 마탑은 다르겠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옛 존재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오."

메르실라의 대주교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자신의 신을 경배한다.

언제든 신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떠나가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신은 오로지 인간들의 것이어야만 해.'

이들이 모인 이유는 그 하나 때문이었다.

대주교들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 베헤모스. >

메르실라 성기사 바흐만은 지금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원인은 다름이 아닌 자신의 호위 대상이자 감시 대상 때문이었다.

신원불명자.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전 내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만 해도 놀랐었다.

생각보다 몸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와는 달랐다. 신성력이 높으면 몸에도 영향이 생기긴 하지만 에테르처럼 급격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각 신의 권능을 이어받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몸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놀람은 전투가 시작되자 더욱 커졌다.

'...상급 이상이군.'

적어도 자신보다 아래는 아니었다.

호위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기억이 없다는 게 믿기 지가 않았다.

신성력도 추기경급이라고 하니 최상급에 가까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점차 바흐만의 놀라움도 사라져갔다.

대신 그 자리를 당혹감이 대신하게 되었다.

바흐만은 적의 머리를 베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메르실라의 성기사가 맞는가?'

적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목줄을 끊어놓는 집요함은 아르미테의 기사들을 닮았다.

게다가 싸우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라움의 기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애당초 압도적인 회복력과 체력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메르실라의 성기사와 궤를 달리했다.

'지치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맞는 거 같은데···.'

제대로 자지도 않고 북부를 헤집었다. 상급 기사인 바흐만조차 피로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는 멀쩡했다.

죽이는 것에 집착하는 걸 보면 루퍼스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도 놓친 적이 없나 살피고 있지 않은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리쉘 주교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 나선 건 아니었다.

지금도 적을 다 죽인 후에나 사람들을 살폈다.

진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도망치는 적들 대신 다친 이들을 돌봤을 거다.

'그래도 처음에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몇 번 하더니 들켰다는 걸 알아챘는지 뻔뻔하게 나왔다.

지금도 다친 이를 보더니 바흐만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서 치료하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본분을 잊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바흐만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친 이들에게 향했다.

신성력.

상처가 치유되자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메르실라의 신전에 찾아온다고 해도 이와 같은 은혜는 받지 못할 거다.

신전은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치료를 받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내야 했다.

저들에게 있어서는 둘이 있다는 게 행운이나 다름이 없었다.

바흐만은 사람들의 치료를 마치고 루이에게 다가갔다.

루이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뒤였다.

"다음은 어딥니까?"

"..."

뻔뻔스러운 태도에 바흐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마을이 마지막입니다."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곳은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너무 멀리 나왔다. 슬슬 신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바흐만 그러한 설명을 하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다행이군요."

순간, 바흐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행이라고?'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바흐만은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루이 덕분에 메르실라 신전의 명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신전에 돌아가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이였다.

그때, 루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무엇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이들이 보였다.

'기사들.'

뒤에는 거대한 짐승의 사체가 끌려오고 있었다.

마수.

기사들의 가슴에는 장벽과 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검이 기이할 정도로 거대했다. 검이라기보다 둔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베헤모스의 기사들이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북부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만나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기사들 역시 이쪽을 발견했는지 속도를 줄였다.

바흐만이 먼저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그대들에게 풍요의 축복을."

바흐만의 인사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 기사였다.

"그대에게 광명을. 메르실라의 성기사분이시군요.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웃으며 말하는 것과 달리 눈빛은 날카로웠다.

사제가 아니라 성기사가 신전을 나서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바흐만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요즘 주변이 어수선해서 잠깐 나와봤습니다."

바흐만의 말에 기사의 시선이 시체들로 향했다. 약탈자들.

마수의 땅이 생기면서 북부가 흔들리자 마론 공화국의 도발도 늘어갔다.

바흐만의 말에서는 오류를 찾지 못했다.

곧 기사의 시선이 시체들 옆에 있는 루이에게 향했다.

"저분께서는?"

"신전의 손님입니다. 다른 신전에서 나오셨죠. 주변 안내도 해드릴 겸 같이 나왔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기사는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를 보며 바흐만도 미소지었다.

"저희보다는 여러분께서 더 고생이 많으신데요."

바흐만의 시선이 기사들 뒤에 있는 마수의 사체로 향했다.

기사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런 바흐만 곁으로 루이가 다가왔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사들을 살폈다.

'저들이···.'

철벽의 베헤모스.

팔대 검파 중 하나.

루이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명성만큼 기세도 남달랐다.

체격 역시 크로이드보다 장대했다.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사들은 천천히 루이와 바흐만의 곁을 지나갔다.

그때, 루이는 젊은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테일러보다 강하군.'

불과 몇 달 전에 만났다면 긴장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루이는 달랐다.

마스터들과의 전투, 그리고 마인.

과거의 루이와는 달랐다.

마스터도 아니라면 상대가 아니었다.

곧 루이는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루이와 바흐만이 지나가고 뒤늦게 젊은 기사가 돌아보았다.

젊은 기사의 말이 멈추자 자연스레 다른 기사들 역시 말을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의 물음에 젊은 기사는 대답하지 않고 루이와 바흐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루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방금.'

젊은 기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내, 루이에게서 에테르를 느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에테르가 느껴지지 않았다.

젊은 기사의 시선이 동료들에게 향했다.

"혹시 뒤에 있던 이에게서 무언가 느끼지 못했습니까?"

동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젊은 기사는 의심을 거뒀다.

'착각인가 보군.'

다른 신전에서 나왔다면 그 역시 성기사일 거다.

성기사는 에테르를 다룰 수 없었다. 젊은 기사는 다시 말을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일행들도 하나둘 젊은 기사를 뒤따랐다.

"아버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젊은 기사의 물음에 아까 앞으로 나섰던 중년 기사가 답했다.

"가문에 손님이 왔으니 환영회를 연다고 합니다."

"손님이라면···."

곧 젊은 기사는 고개를 주억였다.

짐작이 갔다. 벌써 반년 전에 가문을 찾아온 이들.

"...그들이 돌아왔나 보군요."

그때도 이처럼 환영회를 열었다. 베헤모스 직계를 부를 정도로 성대한 환영이었다.

그들을 용병단이라고 소개했으나 믿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는 아니었어.'

그러나 결코, 그들을 얕잡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수장이 아버지의 친우여서가 아니었다.

몇몇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베헤모스의 기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젊은 기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나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환영회가 끝나자마자 장벽 너머로 떠났다.

순찰 임무를 떠난 자신을 급하게 부를 정도라면 그들밖에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정체를 알겠군.'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심 궁금했었다.

젊은 기사. 로버트 베헤모스는 조용히 속도를 올렸다.

그런 로버트의 머릿속에는 두 성기사에 관한 건 남아 있지 않았다.

* * *

베헤모스의 성주.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베헤모스의 성주는 거인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 장대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시간 맞춰 잘 왔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겠군."

그의 앞에는 피가 빠져서 창백해진 머리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마론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이였다.

"그래 봤자 잠깐이지. 공화국으로 변했어도 그들은 바뀌지 않아."

금세 새로운 수장을 세울 것이다. 아니면 과거처럼 부족이 나뉠지도 몰랐다.

"그걸로 충분하네."

지금 당장은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겨눌 거다.

성주의 말에 앞에 있던 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역시 성주만큼이나 장대한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라니 안의 상황이 좋지 않나 보군."

"들었는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족이라고 해도 멍청하진 않지."

힘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제국을 괴롭히지 않았을 거다. 그들 역시 제국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안다면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겠군."

노인은 성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의 치세는 길었다. 그 과정이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다른 왕국들이 불만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제국의 혼란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회이기도 했다.

"길포드, 자네도 이제 돌아오는 게 어떤가?"

"일 없네."

성주의 말에 노인, 길포드는 차갑게 거절했다.

성주는 혀를 찼으나 더 권유하지 않았다. 길포드가 황도에서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거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자네 같은 이를 놓치다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 정도만 하게. 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용병의 삶.

나쁘지 않았다. 아니, 과거에도 기사로 인정받지 못하던 길포드였기에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황실이라는 족쇄가 없기에 편했다.

길포드는 성주를 보았다.

길포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자네도 조심하게. 심상치가 않아."

"전에 이야기했던 걸 말하는 건가?"

길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형 마수. 어쩌면 그것이 전조였을지도 모른다.

마론 공화국에서 이번 일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떠올렸다. 길포드가 여정을 서둘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성주 역시 심각한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알고 있네. 안 그래도 그에 대해 조사를 해봤어. 황실이나 크로이드에서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거 같긴 한데···."

꽁꽁, 숨기고 있었다. 길포드도 쉽게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하니 자네가 돌아가면 좋을 텐데···."

투덜거리던 성주는 길포드의 사나운 눈빛을 받고 입을 닫았다.

한 마디만 더하면 눈빛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올 기세였다.

'주먹만은 아니겠군.'

길포드 옆에 있는 거대한 망치를 보았다.

해머. 무식한 크기였다. 쓰던 무기를 버렸다고 해서 이번에 새로 가문의 대장장이를 시켜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야기가 끝나고 건네줄걸.'

성주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성주는 길포드의 성질을 잘 알았다.

젊었을 적 매일 같이 싸웠었다. 자신은 가주가 되면서 체면을 차리게 되었으나 길포드는 아니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바뀔 성격이 아니었다.

"전과 다를 건 없지.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번처럼 나서겠네."

"...그만큼의 대가를 받고?"

"당연하지."

자신들은 용병이었다. 용병은 대가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베헤모스의 재산이 거덜 나겠군."

길포드가 이끄는 용병단은 어느 용병단보다 비쌌다.

아니, 다른 곳에 가면 그만큼을 받지 못한다.

성주는 그들의 가치를 알기에 그만한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황실 기사단.

그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살떨지 말게. 이정도로 거덜 날 것 같았으면 진작에 망했어."

황도에서 떨어져 있다고 해도 후작 가문이었다.

게다가 팔대 검호 중 하나.

그동안 쌓아 올린 사업도 한 둘이 아니었다. 이정도로 무너지진 않는다.

성주는 길포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부탁이란 건 뭔가?"

성주의 말에 길포드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풀리지 않는 난제를 떠올리는 것처럼 심각해졌다.

"내 부하 녀석에게 검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검이라. 검술을 말하는 건 아니겠고."

검술이라면 길포드의 실력도 낮지 않다. 아니, 길포드의 부하 중에는 베헤모스의 기사들보다 검을 잘 다루는 이도 있었다.

에테르의 발현이 없기에 검술만으로 이제까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러니 베헤모스까지 와서 검술을 배울 일은 없었다.

길포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발현. 에테르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면 하네."

예상했던 것이었다. 길포드의 곁에 발현할 수 있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페닐.

그러나 페닐이 다루는 에테르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부하 중에 세례를 받은 녀석이 있나 보군."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성주의 말을 들은 길포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이상해졌다.

"...아니네."

"음?"

"세례를 받지 않았어."

"뭐? 그럼···."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발현을 했어."

"...!"

성주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 잡아서 데려와. >

침묵은 길었다. 침묵의 끝에 성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잘 못 안 거 아닌가? 아니면 그 아이가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

보통 5세가 넘으면 에테르의 통로가 닫힌다.

그렇기에 5세 전에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간혹 6, 7세까지 늦게 닫히는 이들이 있는데,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조차 일부만 열렸을 뿐 다른 이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통로가 닫히면 받아들이는 양이 다를뿐더러 쌓아 올린 에테르를 외부로 발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성주의 의심은 타당했다.

어릴 적 세례를 받고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길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출신도 그러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직접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

"자네···."

성주는 놀란 눈으로 길포드를 보았다. 길포드가 한 말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단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최초의 에테르 연공법을 만든 이.

기사들의 우상이자 시초.

트로이센 대제.

담담한 길포드를 본 성주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 * *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루이는 마리쉘의 부름을 받았다.

황도에서 답변이 돌아온 것이었다.

마리쉘은 자신의 앞에 있는 루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루이는 일이 잘 못 되었나 걱정이 올라왔다.

"...신께서 그대가 자신의 전사라고 하셨소."

"..."

루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메르실라는 루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리쉘은 루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도 믿기 지가 않았다. 특히나 바흐만의 보고를 받고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성녀가 직접 들었다는데 부정할 순 없었다.

마리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 역시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단추는 끼웠다.'

이제 자신의 신분은 메르실라 신전에서 해 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레 황도로 들어갈 수 있는지였다.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니 황도로 향할 명분도 없었다.

'다시 한번 그녀 핑계를 대야 하나?'

메르실라.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꺼려지는 건 사실이었다. 지금 루이는 그녀의 호의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까지 호의를 보이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다가가서는 안 되었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그녀에게 기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한 고민을 하던 루이는 마리쉘의 시선을 느끼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언가 말씀하셨습니까?"

루이의 질문에 마리쉘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께서 그대를 보고자 하셨소."

"음."

성녀. 루이는 그 위치가 어떤지 모르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필요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일 뿐, 평생을 성기사로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럴 마음도 없을뿐더러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귀찮음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지.'

각오했던 일이었다.

다시 주변 순회를 하면서 시간을 벌면 되었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쉘이 머뭇거렸다.

"...사실 그분께서 당장 이곳으로 오실 수는 없소. 그래서 직접 황도로 가서 뵙는···."

"오!"

갑작스러운 탄성에 마리쉘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리쉘의 의아한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오?"

"오, 당연히 제가 직접 가야죠. 성녀님을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된 일입니다."

태연하게 말하는 루이를 보며 마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루이의 말은 타당했다.

일반인이 성녀를 볼 수 있다고 하면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뭘까.'

루이를 볼 때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제 신분이 불분명한데 황도에 갈 수 있겠습니까?"

루이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신분패를 잃어버리면 부랑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타지에서 신분패를 잃어버린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보증할 수 있는 연고지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그대의 신분은 신전에서 보증할 것이오."

예상했던 답변이 나왔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신전의 보증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거다.

머뭇거리던 마리쉘은 말을 보탰다.

"...성녀님께서 그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오."

정중하게. 이걸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만큼 루이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혹여나 루이가 자신의 대접이 소홀하다고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럼요."

루이는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만난 적이 없지만, 성녀가 너무나 고마웠다.

신분도 구해주고 명분도 만들어줬다.

루이에게 있어서는 이 이상의 결과는 없었다.

그렇게 마리쉘과 이야기를 나눈 루이는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이제, 황도로 갈 수 있겠구나.'

크로이드. 과거와 마주할 시간이 다가왔다.

루이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다 루이를 발견하고 다가오려고 했던 사제들이 흠칫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기세에 눌린 것이었다.

루이는 미처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오래된 의뢰도 떠올렸다.

이제는 없어진 검.

그렇다고 해서 은원도 같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받은 건 잊지 않는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또 무언가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던 루이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짧은 만남. 그러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황도로 오면 찾으라고 했던가···.'

그리 말하면서 금화를 건넸다. 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아직 남아 있었나?"

루이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동안 험한 일이 많아서 잃어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 당시에는 황도로 향할 생각도 없었다.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만날 필요는 없겠지.'

루이는 어느새 보이기 시작한 숙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이틀 뒤.

루이는 신전을 나섰다. 그런 루이의 곁에는 두 명의 성기사와 사제 하나가 따라붙었다.

그중 하나는 루이도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복잡한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는 메르실라의 상급 성기사 바흐만이었다.

이번에는 감시가 아니라 진짜 호위였다.

바흐만이 나서서 남은 이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중급 기사인 제프입니다."

잘생기고 젊은 기사가 루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쪽은 사제인···."

"세실이에요."

옆에 있던 여사제가 루이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전에 마리쉘에게 연락할 때 부탁했던 여사제였다. 본신전에서 있는 만큼 일반 사제 중에서도 특출난 이였다.

성기사 둘과 사제 하나.

게다가 한 명을 제외하면 루이와 안면이 있는 이들로 구성했다.

신전에서 얼마나 루이를 신경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루이에게 있어서는 쓸데없는 배려였다.

'바흐만 하나로도 충분한데···.'

보는 눈이 많으면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한 바흐만과 달리 제프는 깐깐해 보였다.

게다가 제프와 세실의 외모는 범상치 않았다.

물론, 바흐만도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중후한 느낌이었다. 그에 비교해 이들은 화려했다.

같이 다니면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쪽이 나은가.'

이목을 끌면 오히려 의심을 피할 수도 있었다. 루이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았다.

순백의 갑옷에 푸른 물결이 그려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겉모습은 바흐만과 제프, 둘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누가 봐도 메르실라의 성기사로 보였다.

"그럼, 출발하시죠."

바흐만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말에 올랐다.

* * *

쨍!

유리잔이 부서지면서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다급히 조각들을 치웠다.

그러나 정작 유리잔을 던진 중년 사내는 그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또, 모였다고?"

"예, 대주교님."

고위 사제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중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주교. 그러나 중년 사내의 몸은 사제가 아니라 전사에 가까웠다. 우락부락한 몸집.

그리고 성격조차 사제보다 전사에 가까웠다.

"...이것들을 나를 가지고 놀아?"

대주교끼리의 회합은 이미 끝났다. 문제는 회합이 끝나고 자신들끼리 따로 모인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했으나 황도에서 자신들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 사실은 곧장 사내의 귀에도 들었다.

샤롯을 제외하면 제국 내에서 자신들보다 큰 신전은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그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당했다. 굴욕적이었다.

옛 기억.

아무리 거대한 세력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정통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정석적인 방법으로 대주교의 자리를 양도받은 게 아니었다.

힘.

강압적인 수단으로 대주교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렇기에 전대 대주교에게 이에 대해서 전해 받은 적은 없었다.

'아니, 영감탱이도 몰랐을 거야.'

하극상.

이러한 일이 자신 하나만은 아니었다.

본래라면 신성을 잃을 만큼의 중죄였다. 대주교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신 그 자체에 반기를 드는 것과 같았다.

신성모독.

하지만 사내의 교단에서만은 달랐다.

그들의 신은 투쟁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투쟁으로 자리를 쟁취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내는 투쟁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정당함은 사내가 가진 신성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아직도 신은 사내를 외면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사실,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 분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저들에게 나타낼 순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지만 샤롯의 대주교에게는 조심스러워야 했다.

제국 내에서 두 번째라고 해도 첫 번째인 샤롯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주신이지 않은가.

그 오만한 황제조차 그들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자신들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참고 있는 것이었다.

고위 사제는 사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사내의 분노가 가라앉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북쪽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북쪽?"

"예. 보고에 의하면 신의 전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제야 사내도 관심을 보였다. 사내는 더 말해보라고 턱짓했다.

"예, 메르실라께서 직접 계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거 확실한 정보야?"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전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곳은 없었다. 자신의 신을 부정하는 순간 자격도 잃게 된다.

당연히 세작이 있을 수가 없었다.

"신전과 거래하는 상인이 직접 확인한 거랍니다."

"상인이라면···."

사내의 표정이 미심쩍어졌다. 상인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그리고 상인의 말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 상인의 아들이 저희 신전의 사제입니다. 이번 일도 그 사제를 통해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그러자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사제의 아버지.

아버지도 자신들의 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전사라는 녀석은 어딨는데?"

"얼마 전까지 메르실라 신전에 머무르다가 호위와 함께 떠났다고 합니다."

"호오."

호위까지 붙었다면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방향을 보아 이곳 황도로 향했다고."

사내는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신전과 달리 그들에게는 성녀가 없었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직접 계시를 내리지 않는다. 모든 신이 친절한 건 아니었다.

"...신의 전사라."

사내는 그 말을 되새겼다.

필시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의 전사란 호칭은 메르실라에게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요 몇 년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메르실라였다.

여기에서 신의 전사가 등장한다면 자신들의 자리까지 위협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그자가 진짜 신의 전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자신의 귀까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성기사들을 보내서 없애."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워야 했다. 그리 말한 사내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사내는 턱을 쓸어내렸다. 만일 진짜 신의 전사라면?

"잡아서 데려와."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신의 전사. 그 이름은 자신들에게 어울렸다.

< 유령 기사. >

루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입맛을 다셨다. 저 멀리 길을 잃고 내려온 멧돼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말들을 보고 화들짝 놀란 멧돼지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검으로 손이 가는 걸 억지로 억눌렀다.

옆에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적어도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얌전하게 있어야 했다.

'도착해서는···.'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루이도 아직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다.

루이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다른 이들도 루이의 정체를 알아챌 게 뻔했다.

그렇다면 메르실라 신전에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신전을 떠나서 메르실라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마음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이가 피식 웃었다.

'...나도 사정이 좋아지긴 했나 보군.'

경솔한 생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가?

아니었다. 적들은 여전히 강했으며 그들과 비교하면 자신은 약자였다.

약자가 살아남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다.

배려는 강자만의 권리였다.

[1742:21:48]

루이는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자신에게 배려는 사치였다.

루이는 옆에 있는 이들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세실이 싱긋 웃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서와는 달리 수작을 걸어오진 않았다.

성직자로서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바흐만에게 지시를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루이로서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여자와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허락하면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날카로웠던 정신이 무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이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과거, 그러한 용병을 수없이 보았다.

현실을 외면하고 술과 여자에게 기대게 되어버린다.

루이도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틈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루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두에 있던 바흐만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반나절 정도 더 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오늘은 늦더라도 마을까지 이동한 후에 쉬겠습니다."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반나절. 도착하면 한밤중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길에서 노숙하는 것보다는 짧더라도 편한 곳에서 쉬는 게 나았다.

바흐만의 말에 일행들은 속도를 올렸다.

바흐만의 말대로 밤이 되자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일행들의 표정은 굳었다.

"...인기척이 없군요."

밤에 마을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일행들이 마을 앞에 당도할 때까지도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불빛만 있을 뿐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숲속에 온 듯한 고요함.

그러나 숲속과 달리 기분 나쁜 고요함이었다.

일행들은 천천히 목책을 지나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달그닥, 달그닥.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세실이 차분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첫인상이 나빠서 그렇지 그녀 역시 뛰어난 사제였다.

밤이 늦었고 작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이상했다.

"마수?"

마수가 나타나서 대피라도 한 것인가?

그리 생각한 제프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마수라면 싸움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을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당연히 도적의 습격도 아니었다.

이곳은 북부에서도 안쪽이었다. 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대체, 다들 어디를 간 거지?"

"어디를 간 게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루이가 차가운 눈빛으로 마을을 살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떠난 게 아니었다.

루이의 시선이 일행들에게 향했다.

"모두 죽은 겁니다."

"...!"

"...!"

그제야 일행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부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는 루이가 잘 아는 냄새였다.

죽음.

루이는 마을을 잠식하고 있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 * *

흩어져서 마을을 수색했다. 역시나 루이가 말한 대로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둘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죽어있었다.

"대체 어떻게···."

시신들이 중앙에 모이자 바흐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인은 불명.

따로 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리하다가 죽은 이도 있었고 자다가 죽은 이도 있었다.

공통점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독이라도 쓴 걸까요?"

"...독도 내성에 따라 차이가 나네."

이처럼 한 번에 죽지는 않는다. 게다가 죽은 이들은 고통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물며 마을 전체를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은 난 모른다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일행들과 함께 시신을 살피던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경직 강도를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사정을 알 수 없긴 루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루이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바흐만이 루이를 보며 물었으나 루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방금···.'

시선이 느껴졌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자신의 감각을 무시하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 뿌연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루이의 신형이 어둠을 향해 쏘아졌다.

"저, 저기···!"

세실이 루이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어둠 속에 몸을 던진 뒤였다.

남은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루이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니 이름은 어쩔 수 없긴 했으나 따로 호칭도 정하지 않은 건 문제였다.

당연히 부를 수단도 없었다.

"...쫓아가 보지."

바흐만에 말에 둘은 고개를 주억였다.

* * *

루이는 어둠 속을 달렸다.

어둠 속에서도 루이의 눈동자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루이의 시야 한 편에 희미한 그림자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기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이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망자들.

그들 역시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 소리나 뼈가 부딪히는 소리로 알아챘을 뿐이었다.

'이 녀석은 그조차도 없는 것 같지만.'

마치 유령 같았다.

거기까지 떠올린 루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체가 움직이는데 귀신이라고 없을까.

알 수 없는 존재를 따라서 모퉁이를 돈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쾅!

루이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불의의 습격, 그 짧은 시간에 검을 뽑아서 막아낸 것이었다.

루이는 자신에게 무기를 휘두른 이를 보았다.

"...역시."

반투명한 그림자. 안개처럼 보였으나 뚜렷한 형체를 지니고 있었다.

투구를 눌러쓴 기사.

몸집이 크지 않아서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갑옷 역시 투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검도 투명했는데 갑옷과 달리 왜곡이 심했다.

루이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신전에서 빌려준 검.

검날의 끝에서 새하얀 서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얼음이군.'

그제야 투명한 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검뿐만이 아니라 유령 기사에서도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가 검을 들어 올리자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소리는 없었다. 그저 수많은 그림자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흐릿해서 얼굴은 알 수 없었으나 체형이 제각각이었다.

등이 굽은 노인도 있을뿐더러 허리까지 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도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봤다.

'...마을 사람들이야.'

루이를 바라보던 유령 기사가 검을 거뒀다. 서서히 뒷걸음치는 기사. 그를 본 루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기사를 향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옆에 있던 그림자들이 덮쳐왔다.

루이는 그들에게 검을 휘두르고 기사를 쫓으려고 했으나···.

사아아아아아.

루이의 검은 그들의 몸을 그냥 지나쳤다.

반대로 그들의 몸에 닿은 부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결국, 몰아치는 한기에 루이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루이의 앞을 막아서는 유령들.

루이는 힐끔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벤 거 같았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루이는 다시 유령들을 노려보았다.

루이를 향해 몸을 던지는 유령들.

"역시 유령은 유령이란 건가."

일반적인 공격은 먹히지 않는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러나 루이에게는 전에 있던 세상의 지식이 있었다.

유령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것은.

'신성력.'

루이의 검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라움의 신성력.

루이는 붉게 빛나는 검을 적들을 향해 휘둘렀다.

쓰와아아아아아아.

기괴한 비명과 함께 흩어지는 유령들.

정답이었다.

달려들던 유령들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도 들어맞았다.

'...젠장, 시간이 안 올라.'

저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예상했던 것이었다.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루이는 라움의 힘을 거뒀다.

"...이게 무슨."

바흐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일행들이 따라붙은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도 유령들이 보였다.

이 세계에도 영혼은 존재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상에 떠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처럼 뚜렷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유령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했다.

"조심하세요. 닿는 것만으로 냉기가 올라옵니다. 일반적인 공격은 무시되고 신성력을 담은 공격만이 적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루이는 빠르고 간결하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자신도 메르실라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검에는 써본 적이 없지만.'

메르실라의 신성을 다루는 것에는 익숙했다. 오히려 라움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루이가 집중하자 검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됐군.'

루이가 유령들을 향해 신형을 던졌다.

쏴아아아.

마치 유리가 깨지듯이 부서지는 유령들.

그를 본 바흐만과 제프 역시 검에 집중했다.

그들도 신성력을 이런 식으로 써본 적은 처음이었다.

애당초 메르실라의 권능에는 치유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이 상태로 적을 상대할 리가 없었다.

그때, 유령들이 일행들을 향해서도 달려들었다.

"세실, 물러나시오!"

바흐만의 외침에 세실은 뒤로 물러나서 기도문을 외웠다.

그녀의 곁에도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바흐만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했다. 이 짧은 순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챈 것이었다.

유령들도 그녀 곁으로 쉽사리 접근 못 하는 게 보였다.

바흐만은 그녀에 대한 걱정을 집어넣고 달려드는 유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유령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를 제외한 공격력은 낮았다.

놀람이 가라앉고 주변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루이가 입을 열였다.

"그럼 여긴 맡기겠습니다."

"...!"

일행들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아까 유령 기사가 떠난 방향이었다.

유령 기사를 뒤쫓으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루이의 뒷모습을 보며 바흐만은 혀를 찼다.

그러나 이렇게 루이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 세실을 보았다. 그녀는 기도를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눈빛. 아직 여유가 있었다.

"제프."

"예."

바흐만의 부름을 받은 제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이를 뒤쫓았다.

< 그럴 필요 없어. >

마을을 빠져나와 언덕을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이미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이의 우려와 달리 얼마 가지 않아서 유령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은 언덕 위.

유령 기사가 휘황하게 떠오른 달빛 아래서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린 건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 떠오른 유령 기사의 모습은 달빛과 어우러져 고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루이는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도망치려는 기색이 없기 때문이었다.

루이가 언덕 위에 올라서자 유령 기사도 루이를 바라보았다.

유령 기사의 시선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가가니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까와 분위기가 달라.'

무언가가 바뀌었다.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유령 기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한기 역시 전보다 강렬했다.

지금 유령 기사가 내뿜는 기세는 과거에 만났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힐끗, 루이는 유령 기사의 발밑을 보았다.

풀뿐만이 아니라 땅마저도 얼어 있었다.

[너로구나.]

투구 아래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

그 말을 들은 루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유령 기사는 처음부터 루이를 유인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마을에 저지른 짓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넌, 누구지?"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유령 기사에게서 흘러나오는 한기가 옅어졌다.

루이가 처음 만났던 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뒤늦게 검을 들어 올리는 유령 기사를 보며 루이는 혀를 찼다.

'그저 나를 확인하려고 했던 건가.'

그러한 루이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유령 기사가 루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냉기가 흘러나오는 얼음 검.

그걸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루이가 발을 내디뎠다.

콰득.

산산이 부서지는 얼음 검. 루이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령 기사의 머리를 갈랐다.

챙!

유령 기사의 몸도 허공으로 흩어졌다.

"...너 정도로는 날 이기지 못해."

마스터도 아닌 일반 기사. 높게 평가해도 마수의 숲에 있던 기사들 수준이었다.

루이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건 그녀도 알 거야.'

유령 기사는 그저 전달자에 불과했다.

루이는 변하지 않는 시간을 보며 혀를 찼다.

그녀의 정체는 짐작이 갔다.

마인.

아니, 확신에 가까웠다. 아까 유령 기사에게서 게르 산맥에서 만났던 마인과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왔었다.

그러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때의 마인과는 달랐다. 루이를 살필 뿐 적대하는 기색은 없었다.

루이는 새하얀 김을 내뱉었다.

유령 기사는 사라졌으나 바닥에 그가 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멍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프가 보였다.

그가 이곳까지 따라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대체···."

그도 보았다. 유령 기사와 대화하는 루이를.

멀리 있어서 소리마저 듣지 못했으나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루이는 그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었다.

루이는 검을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로 돌아갑시다."

제프는 입술을 깨물고는 루이를 뒤따랐다.

* * *

어둠 속에서 여성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죽었어."

놀라움은 없었다.

이미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고 고운 손가락을 의자 손잡이에 부딪혔다.

딱, 딱.

소리를 따라 의자 끝에 하얀 서리가 올라왔다.

원래라면 이처럼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유령들을 통해 조세핀과 머핀을 죽인 이가 누군지 확인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작은 호기심.

그러나 상대를 보자 생각이 변했다.

마을에 있던 유령들은 그녀의 눈이며 귀였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모두 그녀에게 들어왔다.

"...라움, 그리고 메르실라인가?"

두 가지 신성을 다뤘다.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인간이 두 가지 신성을 다룬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어떤 종족도 불가능했다.

신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것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다. 신도를 공유하는 일 따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우연히 방해한 건 아니란 건가."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흐음. 재미있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흥미로움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둘이 아니라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라움과 메르실라.

과거 그들은 자신들과 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아직도 인간의 편에 서서 자신들을 적대할까?

의자를 두드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생각이 변했다.

'굳이 녀석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영원한 아군도 없을뿐더러 영원한 적도 없다.

그건 자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살결만큼이나 새하얀 드레스. 등과 어깨가 훤히 드러난 드레스였다.

드레스의 끝이 바닥에 끌렸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어둠이 일렁였다.

반투명한 그림자들.

수많은 유령이 자신들의 주인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유령들 사이를 걸어갔다.

* * *

일행들은 아무도 없는 마을에서 이틀이나 더 보냈다.

뒤처리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시체만 남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물론이고 일행 모두가 신을 모시는 이들이었다.

시체 정도로 겁을 먹거나 하진 않았다.

연락을 받고 온 조사관과 병사들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일 이야기를 꺼낸 이들이 메르실라 신전의 성직자들이 아니었다면 일행들을 연행했을 거다.

직접 겪은 일행들도 믿기 힘든데 그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렇게 마을의 정리가 끝난 후에나 일행들은 떠날 수 있었다.

마을을 떠나는 일행들은 말이 없었다.

저마다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는 건 루이였다.

제프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과 달리 루이는 침착하게 적들을 상대했다.

'신성력에 대한 것도 그렇지.'

만약 자신들끼리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다.

이쯤 되니 그들도 루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루이를 믿지 못하는가.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 땅에 무언가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 선택받았을 수도 있어.'

이번 일도 루이를 노린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흐만은 고개를 주억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주에게 마을의 일을 알리면서 황도에도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서신만으로는 상황을 알리기 힘들었다.

"...이제부터 황도까지 서두릅시다."

바흐만의 말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 역시 불만이 없었다. 알아서 일정을 서둘러준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루이는 신전의 손님이기에 배려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밤마다 말들에게 회복까지 써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지치지 않는 체력.

그것이야말로 메르실라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행들의 강행군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루이가 일행들을 불러세웠기 때문이었다.

"잠시."

루이의 신호에 말들이 멈춰섰다.

"무슨 일입니까?"

바흐만이 물으면서 주변을 확인했다. 혹시나 지난번처럼 유령이 나올까 걱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유령들이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

바흐만의 물음에 루이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포위당했습니다."

루이의 말에 바흐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포위라니. 아무리 서둘렀다지만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루이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역시나 자신이 경계를 소홀히 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적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것이었다.

바흐만은 놀란 눈으로 루이를 돌아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멀리 있는 이들을.

바흐만이 느끼지 못한 걸 먼저 느꼈다. 그만큼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바흐만의 반응에 제프 역시 긴장한 눈빛으로 검을 뽑았다.

바흐만과 달리 제프는 아직 적들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힐끗 루이를 바라보았다.

'감각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강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상급 기사인 바흐만도 알아채지 못한 걸 먼저 알아챈 것이었다. 쉽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루이는 차분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기사가 아니야.'

만일 기사들이었다면 좀 더 빨리 알아챘을 거다.

실책이었다. 포위한 이들의 기세가 흉흉하게 일어났다.

'누구지?'

짐작 가는 이들이 없었다.

기사도 아니면서 이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들의 존재가 싫진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을의 일과 줄어드는 시간 때문에 답답했던 루이였다.

그런 와중에 적들의 등장은 반길만한 일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일행들이 멈추자 포위한 이들이 거리를 좁혔다.

그들의 정체에 바흐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붉은 사제복 위에 걸친 갑옷. 대검과 메이스. 보기에도 험악해 보이는 무기를 든 이들.

기사라기 보다 전사에 가까웠다.

바로 라움의 성기사들이었다.

세간에서는 광전사로 이름이 높은 이들이었다.

평소 라움과 메르실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 좋은 뜻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일행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라움이 무슨 일로 우리의 앞길을 막으시오?"

바흐만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중년 성기사가 바흐만의 말을 무시한 채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세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곧 성기사의 시선이 바흐만과 루이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어떤 놈이 신의 전사지?"

"...!"

바흐만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나 애써 놀라움을 억눌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고 왔어. 너희의 신전에 신의 전사란 녀석이 나타났다며? 그놈 낯짝 좀 봐야겠어."

신을 모시는 이답지 않은 거친 말투였다.

성직자라기보다 용병에 가까웠다. 행동뿐만 아니라 이마에 나 있는 상처도 한몫했다.

성기사의 말에 바흐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사제들이 메르실라를 배신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루이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졌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적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여정은 정상적인 일이 하나도 없군.'

하지만 바흐만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소이다. 우리는 대주교님의 명을 따르고 있을 뿐이오. 이번 일을 라움 신전의 뜻이라 봐도 되겠소이까?"

정확히는 대주교가 아니라 성녀였으나 바흐만은 일부러 대주교의 권위를 빌렸다.

성녀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자리라면 대주교는 대륙에 있는 모든 메르실라 신전의 통솔자였다.

그런 바흐만의 말에 성기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그대들의 신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당신."

바흐만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는 메르실라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성기사의 표정은 태연했다.

라움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신전끼리의 분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라움이 여기까지 세를 키울 수 있던 것은 다른 신전의 영향력을 빼앗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들 역시 분쟁이 과하지 않는 이상 간섭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전면전이 된다면 신들이 개입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성기사의 사나운 시선이 일행들을 훑었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모조리 끌고 가면 되니."

그리고는 바흐만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사지 멀쩡히 돌아가고 싶다면 반항하지 마."

라움의 성기사.

전쟁의 신. 그의 이름답게 그들의 위명은 대륙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메르실라의 성기사에 비교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적어도 최상급.'

바흐만은 상대의 기량을 잃어냈다. 상급으로 보이는 이들도 몇 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순순히 따른다고 해도 정말로 살려 보내줄까?

아니었다.

'...그라도 도망칠 수 있게 해야 해.'

여기서 그를 라움의 신전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앞에서 있던 일을 겪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바흐만이 각오를 다지려는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성기사들과 일행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 잠깐."

제프가 루이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루이는 이미 성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 루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가 찾는 건 나니깐."

성기사들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 너희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