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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세 번째 결투가 끝났다.

루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한 쪽 손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피가 바닥에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루이 경."

부인이 그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부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네 번째 기사···."

존 남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기사가 나섰다.

처음 루이와 눈이 마주쳤던 중년 기사였다.

루이의 앞에 선 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알아보는 건가."

모를 수가 없었다. 앞의 기사들과 달리 중년 기사는 자신을 소개했다.

"몽모르도의 반흐라네."

"...용병 루이입니다."

창처럼 긴 검. 과거 만났던 베일로가 쓰던 검과 비슷했다.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내가 나온 건 몽모르도 검파의 뜻이 아니라네."

"..."

몽모르도와 상관없이 칼튼 백작의 기사로서 이 자리에 섰다는 뜻이었다.

반흐는 얼마 전에 칼튼 백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대답 없는 루이를 보며 반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원한을 떠나서 서로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상처가 중한 것 같은데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물러나게."

루이는 반흐를 바라보았다.

거친 숨결과 달리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를 보며 반흐는 검을 들어 올렸다.

곧 둘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파지지직.

돌풍이 불어왔다. 이미 몇 번이나 봤던 공격이었다.

'이 자···.'

베일로보다 약했다. 반흐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일 루이에게 복수하고자 했다면 베일로보다 강한 이를 보냈을 거다.

둘의 검이 몇 번이나 격돌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반흐는 이상한 걸 깨달았다.

루이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으나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검을 부딪칠 때마다 힘이 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곧 깨달았다. 비틀거리는 몸과 달리 루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호수처럼 잔잔했다.

'나에게 맞춰서 힘을 조절하고 있는 건가!'

반흐는 실소를 흘렸다. 모두가 속고 있었다.

상처가 중하다고?

아니, 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깟 상처는 루이에게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래, 몽모르도의 가시가 평범한 이에게 죽을 리 없지.'

가시의 기사 베일로.

그는 몽모르도의 자랑이었다. 그도 이런 기사에게 죽었다면 만족했을 거다.

반흐는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이를 보며 끝을 예감했다.

* * *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군.'

존 남작도 감탄했다. 처음 루이의 상태를 봤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한계 같군.'

루이는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하나 남은 기사가 존 남작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시선에 존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서는 기사.

"루이 경이라고 했나. 계속하겠는가?"

존 남작은 루이를 보며 물었다. 존 남작이 기사를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루이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주변에 구경하던 이들도 어느새 마음속으로 루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예, 하겠습니다."

루이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존 남작은 그런 루이를 말릴 수 없었다.

중재자는 어디까지나 공정해야 했다.

최후의 결투.

두 기사가 서로 마주 보았다.

관중들도 숨을 삼키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튼 백작의 기사는 루이를 보며 혀를 찼다.

"정말 눈물겹군. 그녀가 자네의 정인이라도 되는가?"

"..."

비아냥거림. 그러나 루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기사는 루이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네를 죽일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아는 게 좋겠지. 칼튼 기사단 소속 파울러라네."

"..."

이번에도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파울러는 피식 웃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사실 파울러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나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울러는 칼튼 기사단에서도 실력이 있는 기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칼튼 백작이 그만큼 이번 결투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존 남작의 신호가 떨어졌다.

루이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파울러.

"...드네."

작은 목소리. 루이에게 다가가던 파울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둘의 거리는 검만 휘둘러도 닿을 정도였다.

"뭐라고 했나?"

"...는 거 힘들다고."

이번에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파울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루이의 몸이 검을 지지대 삼아 파울러를 향해 넘어졌다.

"...!"

"연기하는 거 힘들다고."

작은 속삭임. 파울러가 급히 검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루이가 빨랐다.

파울러의 손을 움켜쥔 루이.

파울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에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파울러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푹!

파울러의 검이 루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무슨···!"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

그때 루이의 차가운 시선이 파울러에게 향했다.

그제야 파울러도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 일부러···!"

하지만 파울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루이의 단검이 파울러의 목을 뚫고 있었다.

< 의원을 불러와. >

루이는 꺼져가는 파울러의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힘든 건 연기만이 아니었다. 싸우는 내내 빨리 회복되는 상처 때문에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루이가 옆구리를 잡고 있었던 건 피를 지혈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회복되는 상처를 억지로 벌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이상을 깨달을 거다.

털썩.

둘의 신형이 쓰러졌다.

이 모든 게 잠깐 사이에 이뤄진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루이가 검을 내던지고 자살 공격을 한 것처럼 보였다.

동귀어진.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루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루이의 배에는 검이 꽂혀 있었고 손에는 피가 묻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루이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칼튼 백작.

그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이제 시작이야.'

고작 영지전을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게 아니었다.

칼튼 백작을 바라보던 루이는 다시 쓰러졌다. 이번 건 연기가 아니었다. 그런 루이를 향해 부인과 존 남작이 뛰어왔다.

"루이 경!"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루이를 부축했다. 그리고 존 남작은 차분하게 루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급소는 빗겼습니다."

운이 좋았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 많이 흘리긴 했으나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죽은 파울러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확히 목을 노렸다.

'대단해.'

감탄은 짧았다. 자신의 의무를 끝내야 했다.

"신성한 전투는 날슨 남작의 승리입니다. 오원 자작 측은 약속한 기한까지 배상금을 지급하시길 바랍니다."

존 남작의 선언. 그러나 오원 자작은 멍하니 루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원 자작?"

"아, 예···. 아, 알겠습니다."

존 남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칼튼 백작.

칼튼 백작의 눈은 쓰러진 루이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영지전이 막을 내렸다.

* * *

루이는 저택까지 마차에 실려 왔다. 저택에 도착한 루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군.'

루이라도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사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루이가 검에 찔리는 장면을 모두가 확인했다.

이제 금세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런 루이의 옆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부인이 있었다.

한센이 떠나가고 루이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루이가 쓰러지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진심으로 루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루이는 혀끝이 썼다.

부인을 속이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번 일 역시 날슨 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저택은 여전히 조용했다.

전과 달리 승리의 기쁨도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저택 내부와는 달리 밖은 사정이 달랐다.

그날 영지전을 보았던 이들은 입을 모아서 루이를 칭찬했다.

이 시대에 진정한 기사. 아니, 영웅이었다.

무너져가는 가문.

홀로 아이를 지키려는 어머니. 그들을 위해 나선 한 기사.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작은 가문이 두 번이나 공격을 막아냈다.

서부에서 황금의 기사와 날슨 가문을 노래하지 않는 음유시인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부인과 루이의 외모가 출중한 게 한몫했다.

그렇기에 칼튼 백작으로서도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의 눈이 향해 있었다. 게다가 영지전이 끝나자마자 또 문제가 생기면 황실뿐만 아니라 신전에서도 관심을 가질 게 분명했다.

아무리 서부의 맹주라 불리는 칼튼 백작이라도 그 둘을 무시할 순 없었다.

서부에 고위 귀족 가문이 없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는 것이었다.

결국, 칼튼 백작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모든 거래처가 끊겼다고요?"

"예."

왓슨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제 막 철광이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데 상단과 계약한 거래처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정말로 너무하네요."

왓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는 화를 낼 여력도 없었다.

한 둘이라면 모를까, 모든 거래처가 계약을 끊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외압이었다.

칼튼 백작.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이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왓슨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이제 움직이셔도 괜찮은 겁니까?"

루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하루에서 붕대를 몇 번씩이나 갈고 있었다.

흘린 피의 양만 해도 엄청났다.

저택에 일하는 하인들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중상.

루이를 보던 왓슨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왓슨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겠어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처가 막히면서 돈줄도 막혔다. 이대로라면 철광이 작동하기 전에 먼저 상단이 파산할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왓슨이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상단주께서 최선을 다하셨다는 걸 알고 있어요."

부인은 고개 숙인 왓슨을 일으켜 세웠다.

사실 거래처가 끊긴 건 영지전이 끝나고 바로였다.

그러나 부인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상단의 존속마저 위험하게 되었다.

왓슨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사과하고 떠나갔다.

결국, 철광이 다시 멈췄다.

영지전에 승리했지만 변한 건 없었다. 날슨은 여전히 약자였고 칼튼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이대로라면 또···.'

어두운 얼굴의 부인을 보며 루이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예?"

"저쪽도 전처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에요."

루이의 말에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는 그런 부인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니.'

자신이 그리 만들 것이었다.

칼튼 백작을 떠올리는 루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곧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온 루이가 부인을 보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몸이 나을 때까지 별관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부인의 눈이 커졌다.

말이 별관이지 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조용히 수련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식사도 육포와 물을 챙겨 가서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루이의 말에 부인은 입을 오므렸다. 하인도 보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치료는···."

"일주일에 한 번씩으로 하죠."

그 말에 부인이 안도했다. 사실 이건 루이가 부탁할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의원에게 진찰받고 식사도 받아간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루이는 숙소를 별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별관에 홀로 남은 루이는 붕대를 풀었다.

푸른 신성과 함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메르실라의 신성.

사실 지금 상처도 아침에 만든 것이었다.

피가 많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일주일이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루이는 창 너머로 보이는 달을 보며 미소지었다.

* * *

칼튼 백작의 심기는 불편했다. 연합은 칼튼 백작이 주축이었지만 모두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멘소나 자작의 추락.

이어서 오원 자작까지 막대한 배상금을 껴안았다.

힘이 약해진 두 자작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생겼다.

그러나 이는 귀족의 생리였다.

귀족의 삶은 경쟁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형제들을 경계해야 했다.

약해진 적은 물어뜯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칼튼 백작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숙이고 있지만 칼튼 백작이 약해지면 언제라도 달려들 것이었다.

한쪽이라면 모를까 양쪽이 둘 다 빠져나가니 연합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문의 영향도 컸다.

고작 남작 가문.

칼튼 백작의 위세를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골치가 아프군.'

칼튼 백작은 이마를 쓸었다. 이번 일의 원흉을 떠올렸다.

날슨 남작.

그 조그마한 가문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곧 처리해야지.'

지금은 주변의 눈 때문에 철광을 압박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다.

자신의 위엄과도 연관이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는 짐승을 살려두면 다른 짐승들도 이빨을 드러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 잠시뿐이야.'

어차피 지금의 날슨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미 저택 주변에 사람들을 심어놓고 있었다.

용병은 제대로 거동조차 불편한 상태였다. 지금은 창고와 같은 곳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배, 백작님!"

갑작스러운 소리에 칼튼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밑에 있던 집사였다.

집사를 향해 호통치려던 칼튼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집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집사의 성정을 떠올리면 이렇게 예의 없이 들이닥치지 않았을 거다.

"...무슨 일이냐."

"노튼에 있는 사업장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노튼에는 제법 큰 규모의 주조장이 있었다.

칼튼 백작의 돈줄 중 하나였다. 칼튼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윌리엄은 대체 무엇을 하고!"

주조장을 책임지고 있는 기사였다. 윌리엄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머물고 있었다.

집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호, 호위를 맡고 계셨던 기사분들과 병사들도 모두 죽었다고···. 그중에는 윌리엄 경도···."

"...!"

칼튼 백작은 숨을 삼켰다. 믿기 지가 않는 소식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칼튼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집사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그, 그리고 윈스턴 남작의 목장 역시···."

윈스턴 남작의 목장은 노튼 근처였다. 윈스턴 남작은 자신의 가신 중 하나였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제야 칼튼 백작은 이번 일이 예삿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한순간, 날슨 남작의 용병이 떠올랐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찾아라! 다른 귀족들에게도 요청해! 모든 병력을 써서라도 찾아!"

꽈드득. 칼튼 백작의 손이 분노로 떨려왔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습격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 * *

습격은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칼튼 백작뿐만 아니라 연합 전체를 노리고 있었다.

기사를 늘리건, 병사를 늘리건 소용이 없었다.

적은, 혹은 적들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사업장까지 불을 지른 후에 사라졌다.

그중 가장 손해를 입은 건 역시나 칼튼 백작이었다.

그러니 연합도 눈치를 챘다.

이번 일의 원인이 누구인지.

꽈드득.

칼튼 백작은 자신에게 따지고 갔던 귀족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평소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치던 놈들이···!"

가문의 사업장까지 당하자 그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모여서 자신에게 이를 드러냈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목을 쳐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직도! 아직 못 잡았느냐!"

칼튼 백작의 외침에 밖에 있던 집사가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추격에 능한 용병들까지 고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적의 정체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칼튼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녀석은?"

"그 녀석이라 하면···."

"용병 녀석 말이다."

날슨 가문에 머무는 용병. 칼튼 백작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계속 감시하고 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합니다. 용병의 말도 마구간을 떠난 적이 없답니다. 저택을 오가는 의원에게도 확인했으나 상처가 심해서 지금은 걷는 것조차 버거울 거라고···."

칼튼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검에 찔리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보며 웃던 용병의 모습.

"의원을 불러와."

"예?"

"용병을 치료하는 의원을 불러오라고. 내 직접 물어보겠다."

백작의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음처럼 들렸다.

"아, 알겠습니다."

집사는 화급히 고개를 숙인 후 허겁지겁 물러났다.

< 백작가의 기사는 다르네. >

이틀 뒤.

날슨 저택에서 루이를 치료하는 의원은 칼튼 백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의원은 두려운 얼굴로 머리를 땅에 가져갔다.

지금은 연합이 무너지고 있다지만 칼튼 백작의 악명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 상처가 어떻다고?"

칼튼 백작의 물음에 의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굴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최근 이를 물으러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조, 조금씩 차도를 보, 보이지만 아, 아직 운신이 자유로울 정도는 아닙니다."

의원의 말에 칼튼 백작의 눈썹이 휘었다.

"그자는 기사이다. 너도 기사의 체력은 범인의 것과 다르다는 걸 알 것이다."

"예, 예."

의원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칼튼 백작은 그런 의원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다. 정말로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냐?"

싸늘한 목소리. 의원의 몸이 찬바람이라도 맞은 듯 떨려왔다.

"예. 그, 그렇습니다. 거, 걷는 정도는 가능하나 뜀박질까지는 상처가 벌어질 수 있어서 힘듭니다."

의원의 말에 칼튼 백작은 입을 닫았다.

역시나 자신의 착각이었다.

"나가보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의원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을 나서는 의원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느꼈던 이상을 떠올렸다.

하나는 치료할 때마다 상처 부위가 조금씩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치 방금 생긴 상처처럼 피의 색이 선명했다.

상처가 오래되면 상처 부위에 피가 굳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의원은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확실하지 않은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그만한 기사를 치료해 본 적도 처음이었다.

칼튼 백작의 말대로 기사의 몸은 일반인과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의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굳게 닫힌 저택.

제 발로 저곳에 다시 들어가긴 싫었다.

의원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 * *

의원이 떠난 자리. 칼튼 백작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마지막 의혹도 사라졌다.

이제 정말로 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봐라."

지금까지와 달리 힘이 없는 목소리. 칼튼 백작의 물음에 집사가 달려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칼튼 백작은 그런 집사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황도로 보낼 서신을 준비해라."

집사의 눈이 커졌다. 칼튼 백작의 한 말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중앙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럼 칼튼 백작의 정치 생명에 타격이 컸다.

귀족이 자기 일도 처리 못 해서 나라의 힘을 빌린다. 다른 귀족들이 비웃을 게 뻔했다.

칼튼 백작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은 이미 칼튼 백작이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칼튼 백작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 * *

칼튼 백작이 황도에 조사관을 요청했다. 이를 들은 다른 귀족들은 비웃었다.

칼튼 백작의 권세도 끝나간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늙은 여우도 정말로 이젠 늙었군.'

영원한 권력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피해를 본 귀족들은 칼튼 백작의 결단을 환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사업장이 불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에서 조사관 둘이 파견 나왔다.

습격당한 장소를 둘러본 후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날슨 저택이었다.

"...습격자에 대해서 정말로 모르십니까?"

"예, 모릅니다."

부인의 말에 조사관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로브를 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손에는 작은 구슬이 하나 있었는데 대상자의 감정에 따라서 색이 변하는 장치였다.

색이 흔들리고 있으나 뚜렷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조사관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면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조사관은 저택을 훑었다. 아직도 불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멘소나 자작과 오원 자작에게서 받은 배상금으로 고치고는 있으나 진행이 더뎠다.

칼튼 백작이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저택에 들어오려는 기술자가 적기 때문이었다.

아직 지난 습격의 아픔을 씻어내지 못했다.

조사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분이 머물고 계시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목적은 그쪽이었다. 조사를 요청한 칼튼 백작도 이쪽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기, 기사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세요! 저희를 도와줬을 뿐입니다!"

다급한 부인의 말에 조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조사라고 생각하십시오."

그제야 부인이 진정했다. 조사관은 그런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둘을 별관으로 안내했다.

별관을 열자마자 지독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중앙에 한 사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이 자인가.'

황금의 기사. 조사관은 한쪽에 놓인 붕대들을 보았다.

엄청난 양. 그게 아니라 앉아 있는 사내 역시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붉게 젖은 붕대. 안을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붕대 너머로도 상처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저 꼴로 전투를 하진 못할 거다.

조사관은 천천히 방을 살폈다.

'에테르의 흔적은···. 없군.'

방뿐만 아니라 저택 밖도 마찬가지였다. 에테르를 쓴 적이 있다면 흔적이 남았을 거다.

그을린 자국, 특히나 상처가 있을 경우에는 피 역시 증발하기에 숨기기 힘들었다.

그제야 사내가 눈을 떴다.

"수련 중에 죄송합니다. 제국 감찰부에서 나온 조사관입니다."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당연하였다.

감찰부에 소속된 이들의 신상은 기밀이었다.

"꼴이 이래서 일어나지 못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조사관이 말하면서 마법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법사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곧 구슬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제야 조사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습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듣기는 했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조사관은 고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구슬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범인에 대해서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최근 이곳을 나가신 적은?"

"없습니다."

조사관의 시선이 마법사에게 향했다.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사관과 마법사는 별관을 나섰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곳은 아닌가 보군."

역시 칼튼 백작의 착각이었다. 마스터도 아닌 이상 저 상태로 싸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날슨 저택에서 멀어지자 마법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조사관의 시선이 마법사에게 향했다.

"무엇이지요?"

"아까 그 용병, 감정의 변화가 너무 없었습니다."

잔잔한 파동도 없었다. 마법사의 말에 조사관의 눈썹이 휘었다.

"마법이 실패한 건?"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반발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제야 조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부상을 하고도 명상을 하던 이입니다. 그만한 수행이 되었겠죠."

조사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수행이 깊다고 해서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마법은 반응했다.

조사관은 그런 마법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범인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만일 에테르를 써서 움직였다면 흔적이 남았을 거다.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에테르 없이 그 거리를 오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저택에는 그런 기색도 없었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날슨 저택은 지워졌다.

* * *

조사관들이 떠나가고 부인 역시 간단한 안부를 건넨 후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걸릴 뻔했군."

몸을 일으키는 루이의 밑에 단검이 있었다. 피가 묻은 단검.

엉덩이로 깔고 앉았던 것이었다.

한쪽에는 미처 닫지 못한 창문이 보였다.

적들을 사냥하다가 조사관들이 저택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조사관이 무엇을 찾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에테르의 흔적.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루이는 에테르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쓸 필요가 없었다.

라움의 가호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마법사가 같이 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었다.

마법사가 자신의 머리에 무언가 했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어.'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무사히 넘어갔다.

카스 덕분이었다.

루이는 몰랐지만, 마법을 막은 게 아니었다. 걸렸다. 그러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방어가 아닌 면역.

이제 곧 저들의 귀에도 습격 소식이 들어갈 것이었다.

그렇다면 루이에 대한 용의는 완전히 벗겨질 것이었다.

"슬슬 끝낼 때가 됐네."

조사관까지 나선 이상, 길게 끌 수는 없었다.

루이의 몸이 푸르게 빛났다. 상처 부위에 비늘이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이해 보였는데 이제는 익숙했다.

메르실라의 가호 2단계.

효과는 확실했다.

라움의 체력과 메르실라의 회복력이 합쳐지면서 루이의 몸은 한층 더 변화했다.

며칠을 자지 않고 달려도 지치지 않을 정도.

"그럼, 마무리하러 가볼까?"

루이는 창문을 보며 새하얗게 웃었다.

* * *

[...체프먼에서 지지를 철회하였습니다.]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칼튼 백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백작도 제가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백작 덕분에 저도 상황이 곤란합니다.]

"...면목이 없소이다."

그야말로 모든 게 무너졌다. 체프먼이 원한 건 서부의 맹주였지 힘을 잃은 백작이 아니었다.

[면목이 없다. 고작 그런 말로 끝낼 생각은 아니시겠죠?]

사내의 말에 칼튼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굴욕이었다.

'돈놀이나 하는 천한 상인 놈 주제에!'

그러나 그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칼튼 백작 연합이 운영하던 사업 대부분은 그가 지원해준 것이었다.

게다가 중앙 귀족과 연결해준 것도 그였다.

귀족들만 상대하는 상인. 아니, 칼튼 백작은 그가 귀족이거나 귀족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칼튼 백작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체프먼을 움직인 건 확실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기다리면 다시···."

[시간은 금과 같습니다. 물론, 저와 백작의 관계이니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시길. 시간이 지날수록 금의 무게 역시 올라간다는 걸.]

그걸 끝으로 통신구는 빛을 잃었다.

"빌어먹을!"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이제는 동업 관계가 아니라 채무 관계가 된 것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된 것인가.

"...그래, 그것 때문이야."

철광. 모든 것의 시작은 그것 때문이었다.

이미 어제 왔다 간 조사관이 이번 일의 범인과 그들은 관계가 없다고 말했지만 칼튼 백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들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할 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을 떠올리니 칼튼 백작의 목이 말라왔다.

"물을! 물을 가져오너라!"

칼튼 백작의 외침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칼튼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는 하인들도 말썽이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그제야 이상한 걸 느꼈다. 오늘따라 저택이 유난히 조용했다.

"집사!"

끼이익.

그때 방문이 열렸다. 그를 보며 칼튼 백작은 안도했다. 그러나 들어온 이는 칼튼 백작이 기다리던 이와 달랐다.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는 머리.

"...!"

자신의 발 밑까지 굴러온 머리를 본 칼튼 백작은 숨을 삼켰다.

"역시 백작가의 기사는 다르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칼튼 백작은 눈은 잘린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의 주인은 칼튼 기사단의 단장었다.

서서히 올라가는 시선.

그 끝에 있는 건 황금색 검의 손잡이를 장난스럽게 두드리는 사내였다.

< 반갑지? >

칼튼 백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네, 네놈은···."

"반갑지?"

루이는 웃으며 칼튼 백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다 상처 부위가 아려왔다.

전에 찔린 곳이 아니었다. 어깨.

기사단장과 싸우면서 얻은 상처였다.

무려 80시간. 백작의 기사가 이럴 텐데 후작, 공작의 기사들은 어떨까?

비록 칼튼 백작이 서부의 맹주라고 불리지만 중앙에 있는 귀족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칼튼 백작의 눈은 루이를 향해 있지 않았다.

루이의 복부. 칼튼 백작이 무엇을 찾는지 알아챈 루이는 피식 웃었다.

"아, 이거?"

옷을 들어 올린다. 거기에는 상처 대신 탄탄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성수라도 얻은 건가? 아니었다. 일반 성수로 치료될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날슨 가문에 그만한 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루이가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영지전을 지원하고 나서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면 진작에 치료했을 거다.

멘소나 자작과 오원 자작에게 배상금을 내는 걸 최대한 늦추라고 지시한 게 칼튼 백작이었다.

그 때문에 조금씩만 갚아나가고 있었다.

배상금을 모두 내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칼튼 백작을 보며 루이는 미소지었다.

"이런 거야."

자신의 어깨. 기사단장에게 당한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

믿기지 않는 광경. 루이는 그런 칼튼 백작에게 다가갔다.

"궁금한 건 풀렸어?"

스르릉. 검이 뽑혀 나왔다. 동시에 루이의 눈빛도 차가워졌다.

"그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역시 내가 맞았···."

툭, 칼튼 백작의 머리가 떨어졌다.

루이의 시선이 시간을 향했다.

[1211:12:31]

*

[1226:21:07]

메르실라의 가호를 올린 후에도 천 시간이 생겼다.

네 자리의 숫자를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무려 한 달. 루이가 죽인 기사들의 숫자만해도 어마어마했다.

루이는 몸을 돌렸다. 곧 조사관이 들이닥칠 것이었다.

그 전에 자리를 떠나야 했다.

"덕분에 잘 쓸게."

시간뿐만 아니었다. 백작 저택에 오면서 루이가 타고 있는 말과 같은 품종의 말들을 보았다.

트월엄에게 말을 선물한 건 칼튼 백작이었다.

루이는 그렇게 칼튼 백작의 저택을 떠나갔다.

* * *

칼튼 백작의 죽음. 그건 서부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조사관은 다시 한번 날슨 저택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형식적인 방문이었다.

루이만 확인하고는 떠나갔다.

역시나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루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서부에서는 루이는 영웅 그 자체였다.

당연히 연합도 무너졌다. 남아 있는 이들은 칼튼 백작을 누가 죽였는지보다 칼튼 백작이 남기고 간 것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칼과 창만 안 들었지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정작 루이는 날슨 저택에서 쉬고 있었다.

할 일은 끝났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상처가 심한 상태로 바로 떠나면 이상하기 때문이었다.

칼튼 백작이 사라진 날슨 저택은 평화로웠다.

다른 귀족들도 날슨 저택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칼튼 백작이 가진 걸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주인 없는 돈. 줍는 자가 임자였다.

"토호 상단은 파산했다고 하네요."

부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토호 상단이 무너진 게 자신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토호 상단주인 왓슨은 도망쳐서 행방이 묘연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너무 과분했어.'

애당초 철광은 토호 상단처럼 작은 상단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욕심을 부렸다.

왓슨이 선한 이란 걸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선의만으로 날슨을 도왔을까?

'아니야.'

그렇다면 진작에 도왔을 거다. 기회를 노리지 않았겠지.

위험을 감수할 만큼 과실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이 토호 상단을 무너트렸다.

'그게 아니라면 직원들을 놔두고 도망치진 않았겠지.'

진짜 선인이라면 책임을 졌을 거다. 이처럼 무책임하게 도망치진 않았을 거다.

부인은 남은 직원들에게 조금씩이나마 보상을 약속했다.

이로써 부인도 도리를 다한 것이었다.

루이는 그런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단은 새롭게 찾으면 됩니다. 굳이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상단을 알아보면 됩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 상회라면 모를까.

작은 상단이 움직일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 부인의 옆에는 아이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충격이 가셨는지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하인이 다가왔다.

루이가 처음 만났던 하인. 습격에도 운 좋게 살아남았었다.

"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부인이 의아해했다. 지금 상황에 찾아올만한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 기사님의 소, 손님입니다."

이번에는 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오랜만입니다. 경!"

루이를 보며 환하게 웃는 이.

루이가 알고 있는 이였다.

밤의 숲에서 만났던 상인, 필로스였다.

"상처가 심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필로스의 웃음에 루이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루이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봤다. 필로스는 루이의 상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호흡. 그리고 자세.

필로스의 시선에 루이는 검을 잡을 뻔했다.

필로스의 시선은 상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전사.

'...대단하군.'

제국에서 나온 조사관 역시 기사였으나 조사관보다 눈썰미가 좋았다.

"아, 이건 병문안 선물입니다."

필로스가 건넨 건 하나의 병이었다. 푸른 액체가 든 병.

루이는 병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메르실라의 성수군요."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필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추기경급의 축복이 담긴 것입니다."

옆에 있던 부인이 놀란 눈으로 병을 보았다. 추기경급의 축복. 병의 가치를 알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루이와 필로스는 아니었다.

마수사냥꾼과 마수를 거래하는 상인.

이들에게 있어서 구하기 힘든 물건은 아니었다.

루이는 병을 받지 않았다. 대신 필로스의 눈을 보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루이의 말에 필로스가 싱긋, 웃었다.

"마침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도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필로스가 도와줄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때, 필로스가 루이와 부인을 돌아보며 웃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터그레이 상회의 필로스라고 합니다."

"..."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는 필로스.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 필로스는 호른 상회 소속이었다.

그리고 호른 상회는 그때 처음 들었지만 터그레이는 아니었다.

제국 북부에 활동하는 대상회.

필로스를 바라보는 루이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 * *

날슨 가문은 터그레이 상회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철광뿐만 아니라 날슨 가문의 호위도 상회에서 당분간 맡아준다고 했다.

터그레이 상회는 토호 상단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 귀족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터그레이 상회가 이만한 일에 관여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계약이 끝나고 루이는 필로스와 독대를 했다.

"못 보던 사이에 피부가 좋아졌군요?"

필로스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메르실라의 가호가 2단계로 오르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피부에 잡티가 사라지고 윤기가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얼굴선도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졌다.

루이가 여자라면 반겼겠지만, 남자인 루이는 이 변화가 탐탁지 않았다.

루이는 필로스의 질문을 못 들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정체가 뭡니까?"

루이의 물음에 필로스는 미소지었다.

가면과 같은 미소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 정체는 말씀드렸습니다. 터그레이 상회의 직원. 아, 물론 호른 상회의 직원이기도 합니다."

루이를 속인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호른 상회가 터그레이 상회의 일부였나?'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굳이 이름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터그레이의 이름을 쓰는 게 이득이었다. 게다가 필로스는 평범한 직원도 아니었다.

평범한 직원이라면 홀로 계약까지 성사시킬 수 없다.

신전을 통해 터그레이 상회에 직접 확인한 결과 터그레이 상회 역시 필로스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반 직원이 이러한 권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이사라고 했지.'

이사도 직원은 직원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필로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요. 사실 또 다른 직업도 있긴 합니다."

"..."

"아마 루이님도 잘 알고 계신 곳일 겁니다."

그리 말한 필로스는 루이를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암상."

"...!"

루이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필로스는 상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호른과 터그레이는 단순히 위장에 불과했다.

"...암상에서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루이의 말에 필로스는 잠시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루이는 저런 모습 역시 거짓이란 걸 알아챘다.

"일종의 투자라고 하죠. 암상은 모든 걸 다룹니다. 그중에는 사람 역시 포함되어 있죠."

필로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사람 좋은 인상. 그러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알고 왔군.'

세트리아의 일을 알고 있었다. 증거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는 팔짱을 꼈다.

"미래가 창창한 인력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는 나쁠 게 없죠."

"필요하면 이용도 하고?"

"이용이란 말을 표현이 야만스럽네요. 협력이라고 하죠. 저희는 고객들에게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일을 찾아드릴 뿐."

고객들. 이런 일이 한 번은 아니란 뜻이었다.

필로스는 손가락을 깍지끼고는 루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 루이님이 하시는 일과 별 차이는 없습니다."

용병.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성이 없다면 용병이나 암살자나 비슷했다.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군요. 루이님의 취향을 알고 있으니."

"..."

지금 루이는 서부에서 영웅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루이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주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트리아에서는 반대였다.

영혼수확자, 시체성애자. 두려움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루이의 실력도 알았다. 마수사냥꾼.

루이가 고작 백작가 기사들에게 당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물론, 당장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투자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아직 루이가 자격이 부족하다는 뜻도 되었다.

일반 암살자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암살자 정도는 암상이 자력으로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암상이 원하는 고객은 그런 수준으로 부족했다.

그리고 암상 역시 루이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놓고 관찰하겠다는 뜻이군.'

루이의 시선에 필로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비밀은 지켜드립니다.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안 되니깐요."

도움까지 주겠다는 건가?

루이의 시선에 필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상은 그럴만한 인맥과 힘이 있었다. 귀족들처럼 양지로 움직이진 못하지만 음지에서라면 큰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제 저희의 선의를 받아주시겠습니까?"

필로스의 말에 루이는 탁상 위에 있던 성수를 잡았다.

한번 거절했던 물건.

그를 본 필로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고객님.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 하겠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에게 있어서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거래라고 했지만 서로 이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루이는 성수를 보았다.

이것이 있으면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변명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부인도 성수를 받는 걸 보았으니 의심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협의를 끝낸 루이가 필로스를 보았다.

"숨긴 직업은 그것뿐입니까?"

루이의 물음에 필로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몇 가지 더 있긴 합니다만···."

역시였다. 항상 가면을 쓰고 있는 필로스였다.

그가 너무 쉽게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다.

'그 뜻은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이지.'

루이의 시선에 필로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5000골드 정도면 한 가지 정도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골드로는 부족해서."

"..."

"알려드릴까요?"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대단한 양반이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궁금하면 오백 원. 문뜩 그런 말이 떠올랐다.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골드로 살 수 있는 정보라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진짜 중요한 정보를 그리 쉽게 알려줄 리가 없었다.

역시나 루이의 대꾸에 필로스는 아쉬움을 삼켰다.

< 초대장. >

저택을 나서는 필로스는 미소지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의심이었으나 이제는 확신으로 변했다.

칼튼 백작 일도 루이가 저지른 짓이었다.

'조세핀에 이어서 칼튼 백작인가.'

평범한 행보는 아니었다.

'그 성도 우연이 아닐 수가 있겠군.'

크로이드.

원래라면 직접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얼마 전부터 황도와 연락이 끊어졌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다른 간부가 사람을 보냈지만 암상은 평소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휘하는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암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책임자들만 사라진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암상 역시 깨닫는 게 늦어졌다.

누군가 배신을 했거나···.

'암상 그 자체를 강탈했어.'

차라리 배신이 나았다. 암상이 습격받은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죽이는 것보다 빼앗는 게 더 어렵다.

그것도 소리소문없이.

황도에 이상을 깨달은 이가 몇이나 될까.

필로스조차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때문에 암상은 지금 날카로운 상태였다.

당연히 검이 많이 필요한 상태.

그것이 필로스를 움직이게 했다.

"...황금의 기사라."

필로스는 그와의 거래할 날이 더 빨리 올 것만 같았다.

* * *

칼튼 백작의 죽음은 황도에도 알려졌다.

황도의 귀족들 역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거, 생각지도 못했군."

어둠 속에서 서신을 읽는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돈만 날렸어."

빚을 받아야 할 이가 사라졌다. 돈이야 넘쳤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이번 일로 일정이 늦어지게 되었다.

"이래서 인간은 믿을 수 없어."

사내는 혀를 차고 서신을 마저 읽어내려갔다.

이번 칼튼 백작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결국, 조사관들도 범인은 찾지 못했다. 사내로서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투자금이 그냥 사라졌다.

분노를 넘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서신을 몇 번이나 읽은 사내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이놈이 의심스럽군."

날슨 저택을 도왔던 용병.

황금의 기사.

조사관은 무죄하다고 말했지만 의심스러운 자는 그뿐이었다.

사내는 다음 장을 읽었다.

거기에는 사내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세트리아에서 온 용병?"

용병의 이름이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내는 기억을 더듬었다.

"음? 잠깐만."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그놈이잖아."

사내의 입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세핀, 그 멍청한 년을 죽인 놈."

얼마 전 다른 동료에게 연락이 왔었다.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무시했었다.

그러면 이해가 되었다. 조세핀을 죽인 용병이라면 칼튼 백작을 없애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용병이 의심스럽다고 말했을 뿐이었지 직접 죽였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까지 생각하면 확실했다.

사내는 혀를 찼다.

"헤레나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내는 턱을 쓸어내렸다.

벌레 한 마리가 물을 더럽히고 있었다.

아직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또 방해한다면?

"확인해보면 되겠지."

자신이 신경 쓸 가치가 있는지.

사내는 상 위에 있는 끈을 흔들었다. 밖에서 종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인이 달려왔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하인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이마에는 흉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노예. 노예는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서 마스터 게오르를 불러오도록."

이런 일에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맡기는 게 나았다.

"예."

사내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노예를 보며 혀를 찼다.

"저년도 이제 질려가는군."

새로운 애완동물을 구할 때가 되었다.

* * *

같은 시간, 체프먼 저택에 있던 에반 역시 소식을 받았다.

"생각보다 잘 해냈군."

"무슨 소식입니까?"

에반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죠세프에게 서신을 건넸다.

칼튼 백작의 일이 적힌 서신이었다.

서신을 읽은 죠세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용병이 해냈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습니까?"

전에도 느꼈는데 용병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일 가능성도 있었다.

죠세프의 말에 에반은 미소지었다.

"칼튼 백작의 기사들과 본가의 기사들을 비교하면 어떤가?"

에반의 물음에 죠세프는 고개를 저었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입니다."

죠세프의 말에 에반은 웃음을 터트렸다.

체프먼 가문은 팔대 검파 중 하나였다.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에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에반은 서신을 가리켰다.

"그런데 어떻게 백작의 기사들이 그를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

에반의 말에 죠세프는 서신을 다시 읽었다.

에반은 루이를 체프먼의 기사들이나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기사 한 명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죠세프는 부정하지 않았다. 에반의 전력을 열 번 이상 막아낸 이였다.

체프먼의 기사 중에 그의 전력을 한 번이라 받아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마스터들을 제외하면 손에 꼽을 거다.

그런 이가 백작의 기사들에게 중상을 입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그래, 다른 이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야."

에반은 그리 말하고는 서신을 받아서 접었다.

"보다시피 멋지게 성공했군."

이 사실을 제국에 알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죠세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죠세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범한 기사는 아니군요."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에반은 즐거운 듯 웃었다. 마스터에 도달할 인재.

에반은 그리 평했다.

"저택을 떠났다고 하던데 황도로 왔으면 좋겠군."

얼마나 성장했는지 다시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그런 에반을 바라보던 죠세프는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초대장?"

에반은 의아해했다. 솔직히 에반에게 도착하는 초대장만 해도 한 달에 백여 개가 넘었다.

그중에는 고위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죠세프가 직접 가지고 오지 않았다.

에반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받았다.

가장 처음 보인 건 황실의 문장.

"이건···."

"삼황자로부터 초대장입니다."

에반이 죠세프를 돌아보았다.

"삼황자라면?"

"생각하시는 그분이 맞습니다."

에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삼황자는 여러 가지로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어릴 적, 마스터에게 두 번이나 세례를 받았음에도 에테르를 느끼지 못했다.

천하에 다시 없을 둔재.

황가의 치욕.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그 평가는 뒤집혔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오대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

그리고 다섯 탑주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

제국의 마탑은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다섯 탑주에 인정받은 것이었다.

전례가 없던 일. 황자라서 혜택을 준 게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가치를 증명했다.

에반이 검의 천재로 명성이 높다면 마법에서는 삼황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이가 단순히 이야기나 나누자고 부르진 않았을 거다.

"슬슬 움직이려는 건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더니 이제야 움직이고 있었다.

'하긴, 너무 조용하긴 했지.'

에반은 초대장을 흔들었다. 한가하게 용병을 관찰할 때가 아니었다.

에반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일 이 초대를 받게 되면 다른 황자들이 에반을 견제할 게 분명했다.

"이게 득이 되려나, 실이 되려나."

에반의 혼잣말에도 죠세프는 아무런 조언도 할 수 없었다.

* * *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루이는 말의 고삐를 잡아 속도를 늦췄다.

길이 번잡하기 때문이었다.

날슨 저택을 떠나고 오 일이나 지났다.

루이는 자신의 검에 묶인 손수건을 보았다.

노란색 손수건.

부인이 준 것이었다. 기사에게 건네는 손수건. 루이는 손수건을 건네는 부인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모른 척 나섰다.

부인 역시 그런 루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서로가 길이 다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루이의 앞날을 기도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받은 건 그거 하나가 아니었다.

상단에서 사용하는 전패.

그러나 전패에는 루이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금액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필로스가 준 것이었다.

"철광 지분의 반은 루이님의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터그레이 상회나 다른 협력 상회에 전패를 보여주면 자유롭게 돈을 꺼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선불도 가능합니다."

싱긋 웃던 필로스. 만일 루이가 철광의 가치보다 많은 돈을 꺼내 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

잠깐 의아해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필로스에겐 그 돈을 회수할 능력이 있었다.

사실 루이는 전패보다 황금을 선호했다.

물론, 금을 탐하는 게 아니라 금을 보고 몰려드는 이들을 탐할 뿐이었다.

그러나 제국에서는 효과가 떨어졌다.

게다가···.

"황금검? 저자가 그자인가 보군."

"생긴건 그리 강해 보이지 않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역시나 소문은 말보다 빨랐다.

'명성이 올라가는 것도 문제군.'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돈을 보고 습격해오는 이들도 줄었다.

그러나 안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네가 황금의 기사냐?"

마을을 걷자 젊은 기사가 루이의 앞길을 막았다. 기사의 얼굴에는 가소로움이 가득했다.

가끔 이런 이들이 있었다.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해서. 아니면, 루이의 명성을 탐해서.

이유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난 오르앙 가문의 그웰이다. 결투를 신청한다."

루이는 젊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건 나쁘지 않네.'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이들이 늘어났다. 서부를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제국 서부와 맞닿아있는 건 세트리아 왕국이었다.

약소국가.

당연히 지키는 병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제에 명성을 얻고 있으니 아니꼬울 것이다.

사실 도적들보다는 이런 이들이 영양가가 높았다.

"...난 생사결 아니면 안 하는데."

루이의 말에 젊은 기사는 피식 웃었다.

"알고 있다. 난 네 놈의 팔만 가져가지."

젊은 기사가 호기롭게 외쳤다. 승리는 당연하다는 자신감이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 자리에 나왔을 거다.

"그렇다면야···."

루이는 기사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닥에는 머리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루이는 시체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많은 이들이 먼저 기사가 대결을 신청하는 걸 보았다.

그렇기에 루이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었다.

기사의 가문이나 검파에서도 나설 수 없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간혹 억지를 부리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루이에겐 나쁘지 않았다.

과거라면 좀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칼튼 백작의 일로 황도에도 루이에 대해 알려질 거다.

이런 상황에서는 숨기기보다 빠르게 강해지는 것이 나았다.

가호는 하나 올린다고 일만큼 증가하는 게 아니었다.

'비슷한 성향이라면 효과가 더욱 커.'

이번 일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올려야 하는 가호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된다.

게다가 강해진 건 육체만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싸움으로 에테르도 성장하고 있었다.

루이도 지금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가늠이 안 되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내려온 루이는 따뜻한 음식과 함께 술잔을 홀짝였다.

'내일부터는 일정을 서둘러야겠어.'

곧 중부였다.

게르 산맥까지 반을 온 것이었다.

더는 말이 없어도 되었다. 말을 끌고 다니는 건 짐 때문이었으나 이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효과가 미비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홀로 움직여서 빨리 게르 산맥에 도달하는 게 나았다.

그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루이의 귀에 들려왔다.

"그거 들었어?"

"아, 옆 영지에 크로이드의 공자가 왔다는 거?"

"그래. 그거 때문에 환영회를 한다고 난리잖아."

고기를 뜯던 루이의 손이 멈췄다.

< 싸움은 이제부터야. >

루이는 주점에서 떠들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 입에서 나온 한 단어.

크로이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잠시 망설이던 루이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금화 하나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누가 온 겁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사람들은 당혹해했다. 그때, 누군가가 루이를 알아보고 숙덕거렸다.

황금의 기사. 그 단어가 루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오자마자 기사 하나를 베었다.

소문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누구라뇨?"

"몇 번째 공자입니까?"

루이의 물음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알아? 아니.

눈빛을 주고받는 사람들.

"자, 잘 모르겠습니다."

크로이드란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귀족도 아니면서 크로이드 가문의 자식이 몇이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었다.

다들 살기 바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셋째나 넷째겠군.'

그 위에 둘이라면 공자가 아니라 다른 이명으로 불렸을 거다.

'홀로 나온 건가?'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표정도 굳었다.

그들의 눈에 슬며시 두려움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기사가 인상을 썼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루이는 곧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

이미 듣고 싶은 정보는 얻었다. 루이는 자리를 빠져나와 숙소로 올라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소로 돌아온 루이는 생각에 잠겼다.

'피해야 할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맞닥뜨려야 해.'

오히려 늦었다. 이제는 그들의 귀에 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칼튼 백작의 일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숨어서 다닐 순 없었다.

옆 영지까지는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만일 셋째나 넷째라면 지금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좋은 기회였다.

루이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 *

루이는 새벽이 되자마자 길을 나섰다.

말 역시 그의 옆을 따랐다. 이 마을은 말을 팔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길은 붉게 물들어갔다.

붉은 길을 따라 걷던 루이의 걸음이 멈췄다.

'...미행.'

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상대는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풀어헤친 머리. 흉부와 어깨를 가린 철갑. 나머지는 가죽 갑옷이었다.

허리춤에 검 한 자루를 걸친 사내.

이마에서 뺨까지 내려오는 상처가 어둠 속에서 꿈틀 걸렸다.

사내의 눈은 루이를 향해 있었다.

"...명성을 탐할 자로는 안 보이는데. 은원인가?"

"난 그저 칼일 뿐이다."

탁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휘두르는 이가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은 바람이 찬지 사내의 몸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만큼 열기가 뜨겁단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루이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강해.'

지금까지 상대한 이들과 달랐다. 루이로서는 사내의 에테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니, 에테르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압도적인 분위기는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에반.

루이는 그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마스터인가?"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답이 되었다.

루이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조양에 루이의 검 역시 붉은 빛을 띠었다.

"누가 시켰는지는 말해주지 않겠지?"

루이의 물음에도 역시나 답이 없었다.

감히 마스터를 한낱 암수로 쓸 수 있는 자. 루이의 머릿속에 크로이드가 떠올랐으나 곧 지워졌다.

'아니야.'

만일 크로이드가 움직였다면 칼이 아니라 칼을 휘두르는 이가 직접 이 자리에 왔을 거다.

'칼튼 백작, 아니면 조세핀···.'

그 둘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이 있다면 죽일 뿐.

지금까지와 변하는 건 없었다. 루이의 눈빛이 바뀌자 사내 역시 검을 뽑았다.

길고 얇은 검. 검 면에는 깨진 유리처럼 금이 가 있었다.

햇살이 사내의 검날에 부서졌다.

"...게오르다."

게오르는 그리 말하고 앞발을 내디뎠다.

'온다.'

쾅!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이어서 날아오는 검.

검날이 루이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숙인 루이의 머리를 향해 무릎이 날아온다. 루이는 팔꿈치로 쳐냈다.

쿵!

서로의 신형이 밀려났다.

'이 자···.'

특이한 검을 쓸 때부터 느꼈지만 정통 검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루이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실전으로 쌓아 올린 검술.

루이를 바라보는 게오르의 눈에도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찌릿찌릿.

손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 살피는 건 끝났다.

방금 공격으로 서로의 기량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위가 정해진 것이었다.

게오르의 몸에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루이를 향해 쏘아졌다.

'큭.'

빠르다.

쾅!

루이는 옆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냈다.

그 순간 게오르의 검이 뱀처럼 휘었다.

'무슨!'

루이의 검을 타고 목을 노렸다.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

판단은 빨랐다. 쥐고 있는 검을 놓고 등 뒤의 검을 뽑았다.

텅!

반쯤 뽑힌 검이 게오르의 검을 쳐냈다.

그러나 튕겨 나간 검이 루이의 어깨를 꿰뚫었다.

루이는 어깨를 찌른 검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나아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건 게오르의 머리.

게오르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촤르르르.

길게 늘어졌던 검도 제 모습을 찾아갔다. 루이는 상처 부위를 바라보았다.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대신 연기와 함께 악취가 올라왔다.

에테르에 익어버린 것이었다.

"...재미있는 걸 쓰네."

루이는 게오르의 검을 바라보았다.

특이한 문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검날을 이어 붙인 것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철이 아니었다.

'마수의 뼈.'

마수의 이능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몸을 늘릴 수 있는 마수도 존재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테르로 검의 길이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루이가 알게 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스터라고 다 같은 마스터가 아닌가 보네."

루이의 말에 게오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루이의 상처라면 이제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게오르를 바라보는 루이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쪽은 어느 정도야?"

"...무슨 소리지?"

"마스터 중에서 얼마나 강하냐고."

"...!"

게오르의 눈이 떨려왔다. 루이의 물음 때문이 아니었다.

어깨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넌···."

말을 하려던 게오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검을 들었다. 역시나 마스터 정도 되면 이런 일에 동요하지 않는다.

루이는 그런 게오르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강해. 분명 강하지만···.'

에반과 싸울 때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닿을 수 없는 경지.

선택받은 이들만 오를 수 있는 자리.

에반에게 느낀 건 절대자의 존재감이었다.

그러나 게오르는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강해지면 닿을 수 있어.'

지금보다 빨라지고.

지금보다 힘이 세지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루이는 이제야 자신의 강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었다.

지금 루이와 게오르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하지만 가능성을 엿봤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게오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루이의 물음의 뜻을 이해했다.

수많은 전장을 넘어서 마스터에 오른 게오르였다.

루이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도전해 온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 누구도 저러한 눈빛을 하지 못했다.

저 눈빛은 도전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찬탈자.

비록 자신이 계약에 따라서 이 자리에 왔다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까지 무시당할 순 없었다.

"건방진!"

파지지직.

선명한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차가웠던 공기가 한 번에 데워졌다.

일반 기사와 마스터를 나누는 기준.

그건 바로 에테르다.

기사는 몸에 에테르를 쌓아서 사용한다. 그러나 마스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 자체가 에테르이기 때문이었다.

즉, 한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에테르화.

마스터에 오른 이들에게 있어서 에테르는 더는 소모용이 아니었다.

하나의 현상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마스터에 오른 이들은 노화가 느려진다. 보통 인간의 두세 배를 사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제국에 마스터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과거의 별들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별들이 떠오른다.

* * *

루이는 게오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명.

콰가가강!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폭발을 뚫고 날아오는 검 한 자루.

촤르르르.

루이는 몸을 비틀어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게오르의 검은 그런 루이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한 듯 움직였다.

푹!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살 한 점이 그대로 뜯겨나갔다.

그러나 루이는 눈 한번 깜짝 안 했다.

날슨 저택에 있으면서 일주일마다 자신의 배를 갈랐던 루이였다.

이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새로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콰가가가강!

검이 또 한 번 폭발했다.

검의 파편이 루이의 뺨과 팔을 스치고 갔다. 허공에 튀어 오른 핏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만큼 게오르의 에테르는 강렬했다.

'이것이 마스터인가.'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게오르의 검은 탐욕스럽게 루이를 노리고 있었다.

루이는 자신의 팔을 베어내고도 만족스럽지 못한지 꿈틀거리는 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촤르르.

검이 다시 한번 빨려 들어간다.

무기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검으로. 때로는 채찍으로.

그 때문에 상대의 움직임을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게오르의 모습이 보였다.

가슴 부위에 박힌 파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거기뿐만이 아니었다.

에테르 때문에 가려졌지만, 곳곳에서 피가 타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공명을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 에반, 그 인간이 괴물이었지.'

근거리에서 폭발하는 공격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이 얽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그 사이 루이의 상처가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를 깨달은 게오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디 언제까지 회복할 수 있는지 보겠다."

게오르의 신형이 다시 한번 쏘아졌다.

촤라라라.

사각지대에서 꺾여 들어오는 검. 루이는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컥!"

게오르의 발이 날라왔다. 너무 검만 신경 쓰느라 생긴 허점.

에테르를 두른 발길질은 해머로 두드린 것과 같았다.

뒤로 밀려나는 루이의 등을 검이 찌르고 들어왔다.

'젠장.'

등이 화끈거렸다. 순식간에 익어가는 살.

급히 검을 쳐냈으나 상처가 컸다.

그리고 게오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미처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루이를 압박했다.

쾅! 콰강!

서로의 검이 격돌했다.

그때마다 상처 부위까지 충격이 전달되었다.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힘의 우위가 뚜렷했다. 그런 상태에서 상처까지 입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푹!

"커헉!"

게오르의 검이 루이의 복부를 찌르고 들어갔다.

촤르륵.

살아있는 것처럼 복부를 헤집는 검.

피와 장기가 타면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루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뒤늦게 게오르의 검이 빠져나왔다.

"쿨럭!"

피를 쏟는 루이. 바닥에 쏟아지는 피는 검은 색이었다.

내장까지 익어버린 것이었다.

게오르는 그런 루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인정하지. 너는 이 자리에 도달할만한 재능을 가졌다."

마스터. 그곳에 닿을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다.

어떤 이의 세례를 받냐에 따라서 기사의 성장도 결정된다.

마스터에 오른 자들은 대부분 어릴 적 마스터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였다.

그렇게 선택받은 이들 중에서도 재능이 있어야 했다.

아니, 재능뿐만이 아니었다.

천운.

루이는 그 천운을 타고났다.

하지만···.

"일찍 나를 만나게 된 걸 원망하거라."

오늘, 루이의 삶은 끝날 것이다.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거야."

"음?"

게오르의 눈썹이 휘었다. 지금 루이는 말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루이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누구, 멋대로 끝이래···."

이번에는 좀 더 확실히 들렸다.

툭.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푸른 살가죽.

그건 시작이었다.

투둑, 투두둑.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서서히 올라오는 머리.

게오르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싸움은 이제부터야."

루이의 동공이 뱀처럼 길게 찢어졌다.

< 오랜만이구나. >

[사용자의 몸에 메르실라의 힘이 깃듭니다.]

[982:12:02]

눈앞에 떠오른 창을 보며 루이는 몸을 일으켰다. 루이가 있던 자리에 허물이 떨어졌다.

한 겹.

두 겹.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루이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신의 권능.

사람들이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도박에 성공했군.'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이 걸렸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야.'

루이는 게오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게오르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루이의 회복력은 인간이라 보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죽는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었다. 품에 넣어놓은 성수.

그조차도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추기경급의 성수가 그러하다면 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 능력을 떠나서 생존이란 상황에서는 라움보다 나았다.

더군다나 성수도 아낄 수 있었다.

만일 라움이 걸렸다면 이번 전투를 이길 수는 있어도 루이 역시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루이는 순식간에 떨어지는 시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안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간다."

루이의 신형이 게오르를 향해 쏘아졌다.

푹!

게오르의 검이 루이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러나 루이는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돌진하여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강!

"무슨···!"

당혹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새로운 검을 뽑아 들고 휘둘렀다.

검의 파편이 지나간 발목에 새하얀 뼈가 보였으나 두 걸음 만에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회복력.

이어서 다시 검이 날아왔다. 게오르의 검이 루이의 배를 뚫었다. 아까 당했던 상처 부위.

루이는 검을 뽑기는커녕 한 손으로 붙잡았다.

끼기긱.

루이의 손에 잡힌 검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손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루이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반대 손으로 검을 찔렀다.

공명.

아까보다 더욱 가까웠다. 이건 피할 수 없었다.

콰가가강!

"크헉."

게오르가 뒤로 물러났다. 그의 상반신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러나 루이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루이. 그도 잠시.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의 에테르. 게오르에게 접근하는 것만으로 살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배가 찢어져서 안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상황.

하지만 곧 비늘이 상처 부위를 덮고 있었다.

"괴물인가."

게오르의 입에서 곤혹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게오르의 검술의 특징은 변칙성이었다.

변칙적인 공격.

그러나 루이는 방어를 포기했다.

자신의 피해를 무시하고 오로지 공격만 하고 있었다.

이러면 결국, 서로의 살을 깎아 먹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에게는 괴물 같은 회복력이 있었다.

상성이 나빴다.

만일 게오르가 방어나 속도에 특화된 마스터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다.

몸을 일으킨 루이가 다시 게오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 광경에 게오르의 눈썹이 떨려왔다.

아무리 회복력이 빠르다고 해도 고통까지 안 느껴지진 않을 거다. 지금의 루이는 인간으로서 어딘가 이상했다.

살과 장기가 타고 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악몽.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 * *

게오르는 모르겠지만 루이에겐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768:22:12]

쾅! 콰강!

[737:01:54]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는 숫자. 1단계와는 달랐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귓가에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뱀에 가까웠다.

루이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카스의 가호 덕분이었다.

'역시 정답이었어.'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속삭임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고통 때문에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이는 게오르를 향해 검을 찌르며 다시 한번 공명을 발동시켰다.

콰가강!

"...!"

검의 파편이 배를 지나쳤다.

고통에 루이의 눈이 일그러졌다. 손바닥만 한 쇠가 몸 안을 헤집는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루이가 상처 입는 만큼 상대방 역시 상처 입고 있었다.

무식한 싸움 방식.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는 게오르.

전과 같은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는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치이익.

살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열기 때문에 눈이 시큰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였다.

게오르가 마스터에 오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전장을 겪었을까?

알 수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도 많았을 거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각오가 틀려.'

순간순간 필요할 때 발을 내딛는 용기?

이쪽은 매 순간 죽음을 보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하루하루 죽음에 쫓기는 기분을 알까?

모른다. 미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다.

루이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푸욱.

게오르의 검이 루이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루이의 검은 게오르의 가슴에 박혔다.

루이를 바라보는 게오르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져갔다.

루이를 감싸고 있던 푸른 빛도 희미해졌다.

[강림을 종료합니다.]

루이는 무심한 시선으로 검을 비틀었다.

쓰러지는 게오르.

루이의 몸에 박힌 검도 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659:21:03]

*

[871:05:41]

이백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조세핀이 삼백 시간이었던 생각하면 그보다 약했다.

"...내가 손해네."

이번 전투로 백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나 말과 달리 루이는 웃고 있었다.

마스터.

그 벽을 넘어선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강림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가능성은 열렸다.

루이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며 실소를 흘렸다.

당연했다.

주변 나무와 땅이 녹아내렸다.

이런 상태에서 말이 얌전히 기다리길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루이는 품을 뒤졌다.

반쯤 타버린 주머니가 나왔다. 안에 있던 금화들도 녹아내렸다.

멀쩡한 건 루이의 신분패와 필로스가 건네준 전패, 그리고 성수가 전부였다.

셋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서 녹지 않은 것이었다.

"...진짜, 필요한 것만 남았군."

말에 실려 있던 검들을 잃은 건 아쉬웠다.

그러나 검이라면 또 구하면 되었다.

루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게오르의 검을 집었다.

마스터의 검. 튼튼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죽은 게오르에게서 검집까지 빼서 허리춤에 걸었다.

그리고는 게오르를 보았다.

'좋은 상대였어.'

마스터.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었다.

덕분에 망설임도 사라졌다.

루이는 원래 목적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거휀 영지.

크로이드의 혈족이 방문한 곳이었다.

* * *

환영회는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그만큼 귀한 손님이란 뜻이었다.

영주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손님을 접대했다.

혹여나 이번 기회로 자신도 중앙에 진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허황한 꿈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손님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지겹군."

춤을 추는 무희들을 보며 젊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니셀 크로이드.

현 크로이드 가문의 삼남.

영주에게는 가문의 재산까지 끌어모은 축제일지 모르겠지만 니셀 크로이드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영지에게서 받았던 환대를 생각하면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니 별다른 감흥조차 없었다.

크로이드 가문의 위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아까까지 옆에 떠들고 있었던 영주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니셀이었다.

"이런 건 다른 기사 녀석들을 보내도 되잖아. 한가한 녀석들도 많은데."

니셀의 불평에 옆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는 크로이드 혈족만이 가질 수 있는 정당한 권리입니다."

순례. 크로이드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의 자식들에게 세례를 내려주는 것이었다.

기사의 말에 니셀은 피식 웃었다.

"이번에 내가 세례를 내린 이들 중 몇이나 쓸만한 기사가 될 거 같아?"

"..."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니셀이 말한 쓸만한 기사는 크로이드의 기사 수준이었다.

니셀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안 그랬으면 딴 녀석들이 대신 왔겠지."

니셀의 형들이나 누나.

크로이드 가문을 위한 일.

그러나 크로이드 검파와는 별개였다. 크로이드 검파에 들 수 있는 건 재능이 있는 이들.

이들은 분파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그저 크로이드의 직계가 세례를 내려줬다는 사실 하나로 평생을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만일 이들의 가문이 무에 재능이 있었다면 크로이드의 마스터들이 직접 세례를 내리고 제자로 거뒀을 거다.

무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가치가 높다면 자신이 아니라 형제들이 나섰을 거다.

간혹 가문을 떠나서 재능이 있는 이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니셀이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서열이 가장 낮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니셀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그 녀석이 있었다면.'

니셀은 곧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니셀은 헛웃음을 흘렸다.

"피곤하긴 하나 보네. 그딴 녀석을···."

니셀의 입이 닫혔다.

'방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기사의 감각은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니셀님?"

"..."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니셀을 보며 기사가 의아해했다.

그러나 니셀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니셀.

그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찼다.

쿵!

"꺄악!"

갑작스레 몸을 던진 니셀 때문에 무희들이 놀라서 주저앉았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도 숨을 삼키고 니셀을 바라보았다.

음악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니셀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광장 너머에 보이는 숲.

니셀의 신형이 다시 한번 쏘아졌다.

기사는 머뭇거리더니 그런 니셀의 뒤를 쫓았다.

* * *

사나운 눈초리로 숲을 살핀다. 어둠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어디냐.'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자신을 보며 웃는 얼굴.

나이를 먹긴 했으나 과거와 변하지 않았다.

"니셀님. 무슨 일입니까?"

다가온 기사가 되물었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의 니셀을 보며 기사 역시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니셀이 아무 이유도 없이 뛰쳐나갈 리가 없었다.

숲은 고요했다.

멀리 광장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니셀이 때문에 멈췄던 연주가 재개된 것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살핀 후에나 니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제야 기사는 말을 붙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니셀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기분이 잡쳤어. 영주한테 모두 돌려보내라고 해."

축제는 끝났다.

니셀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니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광장으로 향하려던 둘의 걸음이 멈췄다.

숲의 끝에 서 있는 그림자 하나.

기사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어.'

그림자를 인식한 후에나 누가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허리춤에 걸친 황금빛 검집이 반짝거렸다.

"...누구냐."

기사가 검을 뽑아서 겨눴다.

터벅, 터벅.

그림자는 천천히 둘에게로 걸어왔다.

달빛이 들어오면서 그림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은 기사가 알고 있는 누구와 닮았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지 않은 건 기사의 수행이 가볍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기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

기사의 놀람과 함께 니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루이스 크로이드. >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네, 놈. 살아있던 것, 이냐?"

니셀의 말이 딱딱 끊겼다. 그러나 놀람은 잠시였다.

곧 이어서 분노로 니셀의 눈이 떨려왔다.

"감히 더러운 핏줄 주제에 누구보고 동생이라 하는 것이냐."

니셀의 호통. 생각했던 반응이라 루이는 웃음이 나왔다.

"더러운 핏줄이라. 내 어머니를 말하는 건가?"

"또 누가 있겠느냐. 네 놈 어미는 우리 가문의 수치이다."

니셀의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과거 루이가 받아왔던 시선이었다.

"창부 같은 년. 그딴 년이 크로이드의 이름을 쓰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루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네 아버지의 결정을 잘못이라고 하는 건가?"

"뭣···."

니셀이 입을 다물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옆에 있는 기사.

크로이드의 기사가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가주의 권위를 무시하는 꼴이었다.

루이는 그런 니셀을 비웃었다.

"변한 게 없군. 그렇다면 내 어머니를 질시한 네 놈의 어미는 무엇이 되는 거지?"

"너, 이 새끼···."

빠드득. 니셀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니셀의 성격은 여전했다. 강자에게는 굽히고 약자에게는 이를 드러낸다.

옆에 있던 기사는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루이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삼부인의···.'

루이는 니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나도 너를 동생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아."

그저 니셀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루이는 이 크로이드란 성을 싫어했다.

루이의 도발에 니셀은 애써 미소지었다.

"가문에 있을 때는 내 눈도 쳐다보지 못하던 병신 주제에. 이제는 살만해졌다는 거냐?"

니셀의 독설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

이제는 달라졌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했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형제들은 이제 없었다.

"내 너를 직접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잘됐네. 건방진 눈깔을 뽑아주마!"

니셀의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니셀님!"

기사가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니셀의 신형이 루이를 향해 쏘아졌다.

쿠르르르.

니셀의 검이 울음을 토했다.

천둥의 울음소리.

니셀은 뒤늦게 검을 뽑는 루이를 비웃었다.

크로이드 검파.

그 특징은 간단했다. 다른 이들이 에테르를 검술에 맞게 개량할 때 크로이드는 에테르 본연의 성질에 집중했다.

에테르가 가진 힘의 극대화.

모든 검로는 그에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크로이드의 검을 벼락이라고 불렀다.

새하얀 벼락이 떨어졌다.

콰지지지지직!

벼락은 순식간에 루이의 몸을 집어삼켰다.

"멍청한 새끼. 떨어져 있더니 기본적인 것도 잊은 거냐?"

크로이드의 기사를 상대할 때는 정면을 피해야 했다.

연기 사이로 올라오는 탄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았다.

연기가 점차 옅어지면서 루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쯤 탄 얼굴.

그러나 시선만은 니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 그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목소리가 울렸다.

치직, 칙.

몸에 남은 에테르가 허공에 사라져갔다. 몸 곳곳에는 아직도 악취와 함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살이 타는 고통. 그러나 루이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거라면 게오르, 그자의 것이 더 뜨겁겠어."

"너···."

니셀이 얼굴이 굳었다.

타버린 피부가 벗겨지면서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최강의 검 중 하나라는 크로이드.

상대는 그중에서도 직계 혈족이었다.

루이는 실망감마저 들었다. 니셀에 대한 실망감이 아니었다.

이런 이들을 두려워했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푹!

"큭!"

니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니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배에 꽂혀있는 검 한 자루.

자신의 검을 막고 있는 검과는 다른 검이었다.

그제야 니셀은 루이가 자신의 공격을 한 손만으로 막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떻···. 게."

너 따위가.

니셀의 눈이 떨려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라. 곧 네 어미와 형제들도 보내줄 테니."

차가운 속삭임.

그와 함께 니셀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니셀님!"

파지지직.

옆에서 다시 한번 벼락이 내려쳤다.

그러나 그 벼락은 니셀의 것보다 작고 나약했다.

루이는 공격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루이는 니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단지 크로이드의 수준이 어떤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쾅!

검끼리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기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이 튀었다.

그를 보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크로이드의 기사.

니셀이 멍청한 것이었다. 니셀의 시간만 해도 150시간에 가까웠다.

142시간.

객관적으로 보면 칼튼 기사단장보다 높았다.

그만한 실력이 있는데도 이리 쉽게 죽은 것이었다.

방심이란 말로 끝낼 순 없었다.

루이를 과거의 루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약자.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약자는 그들이었다.

"커헉."

루이의 검이 기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968:11:02]

*

[1059:04:22]

루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을 보았다.

아직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팔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따끔거렸다.

메르실라의 가호로는 전부 회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며칠은 가겠군.'

그러나 나흘은 넘지 않을 거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회복력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죽은 니셀을 향했다. 마스터의 시간이 200이었던 걸 생각하면 적정한 수치였다.

그러나 크로이드의 직계인 걸 생각하면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이만한 이를 죽여도 겨우 6일을 벌 수 있을 뿐이었다.

만일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패치가 필요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현재 크로이드 검파에 소속된 마스터만 해도 다섯이었다.

비록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에 근접한 기사들은 더욱 많았다.

과거 마스터에 오른 이들이 나가서 세운 분파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그들의 제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루이를 노릴 것이었다.

이제는 시간이 아니라 칼을 조심해야 했다.

'이제부터 바빠지겠군.'

그들을 상대하려면 힘을 더 키워야 했다.

밤하라의 신전.

게르 산맥까지 서둘러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그때, 밖에 소란스러워졌다.

광장에 있던 기사들이 니셀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이만큼 시끄러웠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 하나가 루이를 발견했다.

"누, 누굽니까? 고, 공자님?"

루이는 그를 무시하고 니셀과 기사의 검을 챙겨 떠나갔다.

멀어지는 루이의 허리춤에는 황금빛이 반짝였다.

* * *

크로이드 공작가.

황가를 제외하고 가장 고귀한 핏줄 중 하나.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공작가에 도착한 두 개의 시신 때문이었다.

"니, 니셀···."

이부인은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슬퍼하는 건 그녀뿐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눈에는 슬픔 대신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분노.

가족의 정 따위는 없었다. 형제들은 모두 경쟁 상대였다.

단지, 크로이드 가문을 건든 이에 대한 분노였다.

공작가의 권위는 일국의 왕과 같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공작가는 세 명의 처를 둘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첩이나 정부를 여럿 두기는 하지만 처는 하나뿐이었다.

크로이드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자들.

이처럼 처를 셋이나 둘 수 있는 건 왕가뿐이었다.

물론, 대륙의 주인인 황제에게는 그러한 제한이 없었다.

이것만 보아도 공작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크로이드 공작가에는 또 다른 이명이 있었다.

제국제일검가.

"깔끔한 솜씨군. 탄 흔적이 없어."

시신을 살핀 사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상처 부위와 달리 시신의 옷은 시커멓게 그을렸다.

니셀은 에테르를 썼다. 그러나 상대는···.

"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실력이 차이가 났다는 소리야."

"마스터나 그에 근접한 기사겠어."

여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여성은 니셀과 같은 어머니를 뒀다.

그런데도 니셀의 죽음보다는 상대에 대해 흥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발현을 하지 못할 수도 있지."

또 다른 사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장 젊은 사내였다.

죽은 니셀과 비슷한 나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강해진 이들을 알고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뿐 그럴 확률이 적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를 특정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 그랬지?"

사내의 물음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그렇다. 시신이 이곳까지 도달할 동안 상대를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기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세트리아에서 온 귀족 출신의 용병입니다. 서부에서는 황금의 기사라 불리고 있습니다."

"세트리아?"

"변방의 귀족 따위가 감히···."

이부인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곧 분노로 변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용병 따위가 어떻게, 아니, 왜 니셀을 죽인 거지?"

사내의 물음. 차가운 목소리에 기사는 몸을 떨었다.

세트리아의 귀족이란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기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용병의 이름은 루이스. 루이스 크로이드라고 합니다."

"...!"

"...!"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익숙한 이름.

그러나 이제는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흥미롭군."

이제껏 지켜만 보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사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이었으나 실제 살아온 세월은 두 배에 가까웠다.

크로이드 가문의 주인이자 크로이드 검파의 수장.

그러나 세상에는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마스터 크로이드.

바로 크로이드 공작이었다.

"참으로 흥미로워."

크로이드 공작의 시선이 이부인에게 향했다. 방금까지 분노하던 이부인이 입을 닫았다.

이부인의 눈에 깃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크로이드 공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어온 크로이드 공작이 니셀의 시신을 훑었다.

"자신을 과신했군. 어리석은 죽음이야."

크로이드 공작은 시신을 보고 한 번에 상황을 짐작했다.

먼저 복부. 근거리에서 찌른 후 머리를 잘랐다. 제대로 검을 휘두른 건 한 번뿐.

크로이드 공작의 눈에 경멸이 떠올랐다.

자신의 자식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 크로이드 공작의 시선에 다른 이들은 숨을 삼켰다.

"크로이드란 이름을 쓰는 이상 책임은 져야지. 설령 그 아이가 맞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 아이.

크로이드 공작의 호칭에 이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니셀이 살아있을 때도 한 번도 그러한 호칭으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아니,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이드 공작이 루이스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소리였다.

어쨌거나 지금의 루이스는 외인이었다.

그렇다면 크로이드에게 검을 겨눈 대가를 받아야 했다.

크로이드 공작의 시선이 사내에게 닿았다.

니셀과 비슷한 또래.

사남 테일러이었다.

비록 니셀보다 한 살 어렸지만, 능력은 니셀보다 뛰어났다.

"할 수 있겠느냐?"

"예."

테일러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멍청한 니셀과는 달랐다. 이는 테일러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크로이드의 혈족의 운명이었다.

끊임없는 경쟁.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크로이드 공작은 그런 테일러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크로이드 공작은 그렇게 죽은 니셀에게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자리를 떠나갔다.

< 이제는 가능해. >

그날부터 루이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제국을 횡단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빠른 회복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달리고 한 마을에 도착했다.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신분패를 꺼내는 루이. 신분패를 확인한 경비병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마을과는 달랐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루이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루이의 이름이 알려졌다.

크로이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비병은 신분패를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

경비병을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루이가 경비의 목을 쳤기 때문이었다.

이미 니셀을 죽였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크로이드를 적대한다는 것은 제국을 적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옆에 있던 경비병도 놀라서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창이 닿기도 전에 경비병의 머리가 떨어졌다.

"꺄아악!"

"사, 살인이야!"

주변에 있던 상인과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루이는 그들을 무시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그리고 태연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댕- 댕-

뒤늦게 침입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달려왔을 때, 루이는 이미 마을을 떠난 뒤였다.

* * *

마을을 빠져나온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 마을은 끝이군.'

이제부터는 마을을 들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중부를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말을 타면 십여 일이 넘게 걸릴 거리를 단 사흘 만에 돌파한 것이었다.

아마 크로이드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에테르에 한계가 있었다.

마스터도 아닌 이상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적은 크로이드뿐만이 아니었다.

황도에서 멀어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루이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마을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게 분명했다.

크로이드의 상징인 번개와 사자의 문양.

그곳에서 사자 대신 늑대의 형상이 박혀 있었다.

크로이드 분파인 레기온의 상징이었다.

크로이드 분파 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세력이기도 했다. 저들이 나타났다는 건 다른 분파에게도 연락이 닿았다는 소리였다.

'행동 한 번 빠르네.'

처벅.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걸을 때마다 무거운 쇳소리가 울렸다.

깊게 눌러쓴 투구.

"루이스 크로이드. 우리가 받은 명령은 자네를 붙잡고 있으란 것뿐이네. 순순히 남겠다고 말하면 거친 행동은 하지 않겠네."

기사의 말에 루이는 주변을 살폈다.

기사는 모두 열둘. 그중 둘은 마스터에 근접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아니지.'

루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932:12:04]

루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마침 좋은 먹잇감들이 왔다.

"그런데 어쩌나."

"음?"

"너희가 그럴 맘이어도 난 그럴 생각이 없는데."

루이의 말에 투구 안쪽에서 침음성이 들렸다.

"이건 자네가 크로이드의 핏줄이기에 배려하는 것이네. 우리는 그저 선발대야. 지금도 본파뿐만 아니라 다른 검파에서도 이곳을 향해 오고 있네. 자네는 절대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해."

투구 안의 목소리는 점잖게 루이를 타일렀다.

루이의 몸에 흐르는 크로이드의 피. 그것만으로 경배를 받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건 루이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였다.

"도망?"

루이는 그 말을 비웃었다.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들었네. 도망치긴 누가 도망친단 말이야."

루이의 검이 뽑혀 나왔다.

스르릉.

황금빛 검. 이제는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너희를 보낼 생각이 없다고."

"...!"

과거의 루이라면 이들 전체를 상대하기 힘들었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

"...아르미테의 가호."

루이가 선택한 네 번째 신.

어쩌면 루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신이기도 했다.

사냥과 수확의 신.

사냥꾼들과 숲지기들의 신이기도 했다.

동시에 루이의 시선이 어둠에 잠겼다.

새롭게 나타난 건 숲이었다. 그 숲 안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그리고 한 손에는 긴 활이 들려있었다. 비록 그림자만 보였지만 그마저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샤르르르.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들이 노래했다.

감미로운 노랫소리. 싱그러운 풀 내음도 같이 불어왔다.

바람과 함께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여인의 귀가 보였다.

유난히 긴 귀.

인간과 비슷했으나 역시나 인간이 아니었다.

여인의 시선이 루이에게 닿았다.

[숲의 축복을.]

여인의 속삭임과 함께 루이의 세계도 돌아왔다.

[932:11:52]

*

[432:11:51]

사각, 사각.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루이는 한순간 자신이 아직도 그 세계에 머물러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감각이···.'

예민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이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간지럽게 느껴졌다.

'적응하는데, 좀 걸리겠군.'

차라리 고통이 나았다. 이런 기분은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감각이 예민해졌다면···.'

고통 또한 더 강하게 느낄 게 분명했다. 그건 좋지 못했다.

루이는 곧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눈앞의 적이 먼저였다.

적들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루이의 신형이 순식간에 적들 앞에 나타났다.

"...!"

"...!"

투구 너머로 놀란 눈들이 보였다. 루이는 에테르도 쓰지 않았다.

가벼워진 몸. 전과 다른 속도.

루이는 새롭게 얻은 신의 힘을 실감하고 미소지었다.

방금까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해.'

루이의 검이 사납게 번뜩였다.

* * *

루이의 소식을 받은 건 크로이드 가문만이 아니었다.

황도에 있는 사내는 실소를 흘렸다.

"게오르가 죽어?"

다음에 써진 내용을 생각하면 게오르의 죽음은 사소한 것이었다. 자신만 해도 게오르를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었다.

사내에게 게오르는 그저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니셀 크로이드의 죽음.

크로이드 가문의 삼남.

"...아니, 삼남은 이 녀석이지."

사내는 루이의 이름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 조사로 알게 되었다.

과거 죽었다고 알려진 이. 그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사내에게 있어서 크로이드의 가정사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칼튼 백작을 죽였을 때만 해도 일의 방해가 될 거 같아서 게오르를 보냈다.

그러나 게오르마저 죽었으니 자신이 손을 써야 했다.

문제는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크로이드가 녀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을 썼다가 자칫하면 이쪽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아직 크로이드를 자극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게다가 마지막에 날아온 보고도 한몫했다.

중부의 끝자락.

황도로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손을 썼는데 그대로 지나쳤다.

아니, 속도를 생각하면 더욱 놀라웠다.

'그냥 지나칠 생각인가 본데.'

사내는 턱을 긁적였다. 곧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핀 녀석에게 넘기자. 어차피 이제 그 녀석의 영역이니."

이미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신중한 녀석이니 알아서 잘 처신할 거다.

지금은 황도 일만으로도 벅찼다.

이 한 녀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할 일은 끝내야지."

사내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에는 벌벌 떨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새롭게 구한 노예.

그 옆에는 전에 있던 피투성이가 된 고깃덩이가 쓰러져 있었다.

바로 전에 있던 노예였다.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아 숨만 겨우 붙어있었다.

"가서 밥을 불러와."

"예, 예."

노예는 떨리는 몸을 붙잡고 간신히 대답했다.

노예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의 가슴에도 노예와 같은 인장이 박혀 있었다. 사내 역시 노예였다.

"저년이랑 게오르의 딸년. 둘 다 먹이로 던져줘."

"알겠습니다."

노예는 고개를 숙이고 고깃덩이를 끌고 나갔다.

일을 끝내지 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했다.

이곳에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 * *

트로이센 제국의 황궁.

이 대륙의 주인과 황족들이 살아가는 작은 세상.

그중 삼황자의 거처에 손님이 찾아왔다.

"다과회라고 들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분위기와 다르군요."

에반 체프먼.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삼황자가 머무는 궁에 있는 작은 정원.

그곳에 있는 이는 셋뿐이었다.

에반의 말에 궁의 주인이 미소지었다.

"알겠지만 내 인맥이 그리 깊진 않네. 게다가 같이 어울리려면 자네의 수준에 맞는 이들을 불러야 하는데, 쉽지 않아."

맞는 말이었다. 에반과 궁의 주인. 이 둘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나이까지 생각하면 손에 꼽았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복잡한 자리보다는 이게 낫습니다."

사람들이 없다는 뜻은 그만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이 주변에는 하인조차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황자 전하."

에반의 물음에 궁의 주인.

삼황자 테슈타롯테 아시할 트로이센은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삼황자는 천천히 한 모금을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자네는 듣던 것과 다르게 직설적인 성격이군."

"그곳에서는 그리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

에반은 그리 말하고는 삼황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결례였다. 그러나 삼황자는 개의치 않았다.

"황자 전하께서는 그러한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틀렸다면 사과드리죠."

"아니, 맞네."

삼황자는 즐거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밖에서 사귄 친구를 떠올랐다.

삼황자의 입이 열렸다.

"그럼 나도 편하게 말하겠네."

"예."

"이제 옛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때야."

"...!"

에반의 눈이 떨려왔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긴 했어도 삼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자칫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삼황자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삼황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듣던 것보다 대단한 양반이네.'

에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발할 생각이었으나 도발 당한 건 자신이었다.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방금 한 마디로 물러날 기회를 놓쳤다.

"체프먼 가문에게 삼황자님을 지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난 체프먼 가문이 아니라 자네에게 말하고 있네. 에반 경."

"같은 뜻입니다."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차기 체프먼의 가주는 에반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에반이 체프먼이고 체프먼이 에반이었다.

그런 에반의 반응에 삼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 체프먼의 당주는 젊지."

이제 쉰이 넘었다.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스터는 평범한 인간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삼황자의 말에 에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에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씀을···!"

"언제 자네의 시대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삼황자가 에반의 말을 잘랐다. 삼황자의 차가운 눈이 에반을 향했다.

"자네의 뜻과 체프먼 후작의 뜻이 맞지 않는다는 건 잘 아네."

현 체프먼 가주는 무인이기보다 귀족에 가까웠다.

같은 말이지만 의미하는 건 달랐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도 체프먼은 크로이드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을 걸세."

삼황자의 말에 에반의 입이 닫혔다.

< 부작용. >

무거운 침묵이 정원을 감쌌다.

그러나 삼황자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아마 자네가 당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격차가 더 벌어지겠지."

"..."

삼황자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이는 에반도 전부터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크로이드의 율법은 하나였다.

가장 강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죽여도 찬양받는다.

그것이 크로이드가 최강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와 비교하면 체프먼은 어떤가.

무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크로이드가 비정상이야.'

이 때문에 크로이드는 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삼황자의 말대로 체프먼의 가주는 젊었다.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크로이드 가주를 생각하면 향후 반세기 동안, 에반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설령 에반이 가주보다 강해져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혼자로 어떻게 하기에는 체프먼의 벽은 컸다.

그리고 현 가주는 체프먼으로서의 미래보다는 현재의 이득을 원할 거다.

자신의 안위.

당연히 크로이드의 자리를 넘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거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에반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를 보며 삼황자는 미소지었다.

이제 진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이었다.

"삼황자님을 지지하면 크로이드를 넘게 해준다는 말입니까?"

"그건 자네의 역할이지. 나는 단지 자네에게 기회를 줄 뿐이야."

다른 이가 말했다면 비웃었을 거다. 감히 누구에게 기회를 준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을 꺼낸 이가 황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삼황자가 황제에 올랐을 때.

"기회라. 이미 황자님의 옆은 다른 이가 있지 않습니까?"

에반의 시선이 삼황자 뒤에 있는 여성에게 향했다.

은색 갑주에 하얀 망토를 두른 여성. 빛나는 망토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의 가슴에는 은색 독수리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제국 내에서 저 문양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녀야말로 삼황자의 최측근이었다.

진 세이비어.

남부를 통솔하는 세이비어 후작가의 영애.

에반의 말에 삼황자의 시선이 진에게 향했다.

"세이비어 가문은 중앙에 뜻이 없습니다. 할아버님뿐만 아니라 아버님 역시 같은 생각이십니다."

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진의 말에 삼황자는 그것 바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지. 물론 그 때문에 더욱 그들을 믿을 수 있지만."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세이비어 가주들을 떠올리면 이상할 건 없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다.

고위 귀족이면서 은둔자처럼 지냈다. 만일 그들이 명성을 탐했다면 팔대 검파는 구대 검파로 바뀌었을 거다.

지금까지처럼 도움을 주되 중앙에 뜻이 없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에반은 삼황자의 속뜻을 읽었다.

'체프먼은. 아니, 날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군.'

신뢰할 수 있는 이가 아닌 거래할 수 있는 이.

그러나 에반도 그런 관계가 편했다.

서로 주고받을 게 있는 한 배신하지 않는다.

에반이 생각에 잠겼다.

차기 황제로는 일황자가 유력했다.

그러나 크로이드가 일황자를 지지하는 건 유명했다. 이런 상황에 체프먼이 지지를 선언하더라도 큰 이득은 가져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당대 체프먼 가주의 성향을 떠올리면 모험을 피할 것이었다.

에반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먹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군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락이었다. 그 말에 삼황자는 싱긋 웃었다.

봄처럼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이제부터 친우로 자네를 대하겠네. 만일 자네의 눈에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네."

에반은 삼황자를 보았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으면서 언제든지 떠나라니. 행동과 말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삼황자의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고작 자네 하나 품지 못해서야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지."

"...!"

이 순간, 에반은 진심으로 삼황자에게 감탄했다.

'...세상은 넓군.'

또래 중에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삼황자의 포부는 자신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으니 앉지. 진, 너도 앉아."

친구로 대한다고 했다. 친구를 만나는데, 호위는 필요 없었다.

에반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머뭇거리던 진도 뒤따라 앉았다.

에반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지금으로서는 크로이드를 경계할 수 없습니다."

체프먼 전체가 나서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체프먼의 가주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에반이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삼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네. 지금 중요한 건, 로일 형님이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 일황자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리암 형님이지."

이황자 리암투스 파브리에 트로이센.

이황자에 대해 떠올린 에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리암의 재능은 평범했다. 황족들에게 평범하다는 것은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마스터에게 세례를 받고 검술을 배운다.

아니, 검술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유명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다른 황자, 황녀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했다.

에반의 표정을 읽은 삼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모르고 있군. 최근 리암 형님에게 후원자가 생겼어."

"후원자, 말입니까?"

황자나 황녀는 저마다 후원자들이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황자가 평범한 후원자를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상인으로 보이는 이네. 그가 형님께 붙은 이후로 귀족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

소문도 없이 천천히.

상인, 그 말에 에반의 표정이 변했다.

삼황자가 그런 에반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짚이는 게 있나 보군."

얼마 전 아버지인 체프먼 가주와 만났던 이. 칼튼 백작을 이어준 이였다.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 꺼림칙한 기분은 잊을 수가 없었다.

삼황자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람을 풀었는데도 아직 정체를 잡지 못했지."

삼황자조차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

그런 이가 체프먼 후작가까지 연이 닿았다. 그렇다면 다른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보다 일이 심각했다. 에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그 뒤로 에반과 삼황자는 긴 이야기를 나눴다.

에반은 저녁이 돼서야 돌아갔다. 지금쯤이면 다른 황자들이나 황녀들도 이 사실을 깨달았을 거다. 그러나 둘은 개의치 않았다.

손을 잡았으니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나았다.

삼황자는 에반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에반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성급하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황제는 건재했다. 후계자 경쟁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황자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스승님들. 마탑주들의 의뢰로 떠났던 여정.

'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마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마수의 땅은 단순히 마수가 태어나는 땅이 아니었다.

일종의 문이었다. 그걸 봉인한 것이 마수의 땅.

그 봉인이 풀려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진, 큰 전쟁이 날 거야."

삼황자의 말에 진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 역시 삼황자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진의 가문인 세이비어는 남쪽 마수의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잊힌 대전쟁.

삼황자는 황가에 봉인되어있던 구절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느 때에도, 어디에서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항상 그들을 경계해야 했다.

과거 이 대륙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혼란이 찾아오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했다.

삼황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달려드는 적을 베어 넘긴다.

호흡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

'...부작용이 있었어.'

아르미테의 가호. 효과는 확실했다.

라움의 가호와 잘 어울리는 힘. 그러나 단점도 확실했다.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심했다.

만일 라움의 체력과 메르실라의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거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감수할만한 힘이었다.

파지직.

허공으로 뻗어가는 에테르의 줄기마저도 보였다.

정신을 집중하자 세상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루이는 날아오는 검을 피하고 기사의 머리에 검을 꽂았다.

"크륵!"

기사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지막 기사. 루이는 죽은 이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단기전에서는 라움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우웩."

루이는 쓰러진 기사 위에 토를 쏟았다.

가뜩이나 예민한데 전투를 하면서 집중한 탓에 속이 뒤집혔다.

전투 이외의 측면에서는 최악의 가호였다.

"...얘는 이단계까지 못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일단계도 이정도인데 이단계는 어떨까?

루이는 죽은 기사의 허리춤을 보았다가 토사물이 튄 걸 보고 혀를 찼다.

어차피 죽은 이들은 많았다. 당연히 검도 널렸다. 굳이 이 검까지 챙길 필요는 없었다.

루이는 비틀거리며 죽은 이들에게서 검을 회수했다.

이제 동부에 들어섰다.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게르 산맥이 나올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게르 산맥이 가까워질수록 적들의 공격도 점점 거세졌다.

벌써 루이에게 죽은 기사의 숫자도 세 자리에 육박했다.

공격이 거세질 만했다.

이번만 해도 습격자 중 하나는 마스터였다.

그리고 마스터의 공격이 이번 한 번만도 아니었다.

무려 네 번째.

그러나 강림을 쓴 건 두 번뿐이었다.

아르미테의 가호 덕분에 강림 없이도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 것이었다.

'아니, 아직 이른가.'

그 두 번 역시 중상을 입었었다.

메르실라의 가호뿐이었다면 죽었을 거다. 이제는 육체적인 강함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루이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치료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정화의 신 파프네.

메르실라 때문에 잘 알려진 신은 아니었다. 회복 효과 역시 메르실라의 반 정도였다.

그러나 파프네가 특출난 것이 있었다.

바로 해독.

독이나 저주에 관해서는 메르실라를 뛰어넘었다.

사실 기사에게 독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밤의 숲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테르를 없애는 독.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루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2632:02:31]

파프네까지 올리고도 저만큼의 시간이 남았다.

만일 중간마다 강림을 쓰지 않았다면 더 남았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을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과욕이었다. 아직 아르미테의 힘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에테르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은 가진 것을 다듬어야 할 시간이었다.

게다가 3단계의 가호를 생각하면 멋대로 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호가 많다고 좋은 게 아니야.'

다행히 지금까지는 카스나 파프네가 걸리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몰랐다.

그렇다고 단순히 강림의 확률 때문에 필요 없는 신들까지 가호를 올릴 수 없었다. 이번 아르미테의 일도 그렇다.

신의 힘은 만능이 아니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 줄 몰랐다.

게다가 시간은 자신의 생명이었다. 쉽사리 낭비할 순 없었다.

나중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루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이제 사냥꾼은 나야. >

루이가 떠난 자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 명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참상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테일러 크로이드와 그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크로이드의 기사들이었다.

기사 하나가 죽은 이들을 살폈다.

싸늘한 시체들.

그러나 아직 부패하지 않았다.

"이틀에서 삼일 정도 지났습니다."

"다 왔군."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여기까지 따라잡았다.

많은 이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좋아. 마저 뒤쫓는다."

테일러가 호기롭게 말했으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까지입니다. 공자님."

중년 기사의 말에 테일러의 눈살을 찌푸려졌다. 그러나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옆에 있는 기사와 다르게 중년 기사는 아버지인 크로이드 공작이 붙인 이였다.

로드안 경.

테일러의 보좌가 아닌 감시역이었다.

"지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경, 무슨 뜻입니까?"

테일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 녀석보다 못하다는 겁니까?"

"..."

로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로드안은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

"저자는 갸롯의 마스터입니다. 작년 주군의 생신 때 본 적이 있지요."

갸롯 역시 크로이드의 분파였다. 테일러 역시 이름을 알고 있었다.

테일러의 입이 닫혔다.

분파라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지금의 테일러가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나뿐이라면 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스터의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마스터 그리피트께서 제자들과 함께 오시고 계십니다. 그들과 함께 움직이시지요."

"...!"

마스터 그리피트.

레기온 검파의 마스터. 마스터 중에서도 명성이 높은 이였다.

"대체, 언제부터···."

"..."

로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본 테일러의 얼굴이 구겨졌다. 전부터 오고 있었단 소리였다.

그런 테일러를 향해 로드안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임무의 성공에만 집중하십시오."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야 했다. 상대는 이미 테일러가 어찌해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조용히 해결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컸다.

"...알겠습니다."

테일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뿐이었다.

마스터 그리피드가 움직였다는 소리는 아버지인 크로이드 공작의 허가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그랬을 리가 없어.'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거다. 과거 루이스를 기억한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약할 리가 없잖아.'

크로이드의 실패작.

주먹을 쥔 테일러의 손이 떨려왔다.

로드안은 그런 테일러를 봤음에도 모른 척 넘어갔다.

그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위대한 크로이드. 루이스 역시 그 피를 이었다.

나약하던 루이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했다.

'곧 알 수 있겠지.'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검파에서 루이스의 발목을 붙잡을 거다.

* * *

높게 솟아오른 산들. 그 끝은 하늘에 걸려 있었고 구름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높은 산들 사이로 작은 산들이 연이어서 늘어져 있었다.

게르 산맥.

제국 동부와 북부에 길게 뻗어있는 이 산맥은 제국 내에서 가장 험난한 산맥이었다.

루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르 산맥을 보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저 안에서 신전 하나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루이는 심장이 가쁘게 뛰는 걸 느꼈다.

'이건···.'

처음 오는 길, 처음 보는 광경.

그러나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운 느낌. 아니, 기분만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거 같아.'

본능이 이끌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신의 힘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른다.

기묘한 감각이었으나 루이는 그걸 배척하지 않았다.

본능에 맡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산을 오르던 루이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산 아래는 조용했다.

산 어디에도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적들의 습격이 줄어들었다.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겠지.'

때를.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하지는 않을 거다. 쫓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씩 숨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적들의 공격도 매서워질 거다.

루이는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산을 올랐다.

때로는 절벽을, 때로는 강을.

오로지 자신의 감만을 의지한 채 산을 건넜다. 애당초 게르 산맥에는 길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도중에 다른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안정감. 그리고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러나 전에 느낀 것과 달리 이것의 정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르미테?'

그녀의 힘이 느껴졌다.

사냥과 수확의 신.

사냥꾼들과 숲지기들의 신. 루이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숲의 축복을···. 이었나.'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이 넘겼으나 무언가 영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산 역시 어찌 보면 숲에 가까웠다.

'하지만 왜 지금?'

숲에서 싸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이러한 감각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곧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는 이해했었는가. 이 시스템 자체가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루이는 걸음을 멈추고 미리 어제 먹던 고기를 꺼냈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숲의 분위기가 변했어.'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풀벌레 소리나 작은 소동물들도 모습을 감췄다. 마치 겁이라도 먹은 듯.

루이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슬슬, 오겠군.'

이제는 딱딱해진 고기를 뜯는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 * *

산을 타던 루이는 폭포 앞에서 멈춰 섰다.

촤라라라.

폭포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폭포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루이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포위되었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루이의 이동 경로를 집어보면 목적지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루이의 발을 붙잡고 있는 동안 미리 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날 유인한 거지.'

뒤쫓던 이들. 그들이 루이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루이는 검을 잡았다.

루이가 매복을 알아채자 숨어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거운 철갑 대신 가죽 갑옷을 걸친 사내들.

그들을 보자 루이는 기사들이 단순히 자신을 쫓기만 한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아챘다.

철갑이 몸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알자 몸을 가볍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속도도 빨라지겠지.'

저들은 루이의 싸움 방식을 알고 있었다. 피해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충 살펴도 스무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가 기사. 심지어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이 나섰음에도 지켜보던 시선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폭포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과 검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형형색색의 빛을 뿜었다.

그도 잠시.

기사들의 검에 푸른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그들 모두가 일류의 기사들.

사방에서 올라오는 푸른 뇌전은 아름다울 정도였다.

'장관이네.'

저들의 에테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대화는 없었다.

기사들은 일제히 루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파지직, 파직!

사방에서 뻗어오는 뇌전. 폭포 때문에 시끄러운 와중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루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를 보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때.

"산개해!"

루이가 검을 찔러넣으려는 찰나 앞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옆에서 날아오는 검들.

루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휘둘렀다.

쾅!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루이에게 검을 휘둘렀던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뒤.

루이는 손목을 비틀어서 검을 막아냈다.

검 끝을 타고 충격이 올라왔다.

'이 자들···.'

루이에게도 익숙한 싸움 방식이었다. 마수 사냥꾼들이 사냥하는 방식.

그러나 루이는 마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대형 마수보다 소형에 특화된 느낌이었다.

'아니야. 마수가 아니야.'

마스터와의 싸움. 이들은 그것이 익숙했다.

정면을 피하고 측면을 공격한다.

지금까지 루이가 상대했던 기사들은 늘 강자의 위치에서 싸워왔다. 이처럼 약자의 전투를 걸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일류의 기사들이 말이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실력 좋은 기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하고 싸움을 걸어오고 있었다.

팟!

어깨의 갑옷이 뜯겨나가면 피가 튀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검 때문에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루이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으며 혀를 찼다.

'장소가 안 좋아.'

너무 뚫려 있었다. 이곳에서는 루이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루이의 시선이 폭포 너머로 향했다. 나무가 우거진 곳.

저곳이라면 움직임이 제한될 것이다.

루이는 적의 기사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공명.

콰가가강!

검이 울음을 토하더니 폭발했다.

"컥!"

기사가 비명과 함께 물러났다. 그 순간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번뜩이는 빛줄기.

그와 함께 기사의 머리가 떠올랐다.

루이는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기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도 잠깐···.

"막아라!"

"길을 열지 마!"

루이는 어느새 자신의 앞을 막아선 기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아까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아니, 아직 진짜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 쉽게 가진 않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뚫릴 때까지 두드릴 뿐이었다.

루이의 검이 다시 한번 울음을 토했다.

* * *

쾅! 콰가강!

검이 폭발할 때마다 기사들이 쓰러졌다. 알아도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그러나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들은 사자가 아니라 악어였다.

한 번 문 먹이는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설령 다리가 찢겨나가도 턱은 벌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노리는 검을 막으면 다른 검이 허벅지를 베었다.

팔을 막으면 등을 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의 몸은 상처투성이로 변해갔다.

루이는 상처 부위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불로 지진듯한 고통.

'빌어먹을!'

그 전과는 고통의 강도가 달랐다. 가뜩이나 예민한 감각이 전투 때문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세포 하나하나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

루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루이가 버티면 버틸수록 상처는 늘어갔다. 루이의 회복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제 회복을 쓰면 회복이 되겠지만 당분간 회복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시기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거의 다 왔어.'

이제 수풀이 얼마 남지 않았다. 루이는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빈 검집을 느끼고는 혀를 찼다.

검이 없었다.

남은 건 두 자루뿐.

크로이드 가문에서 가져왔던 검과 황금검.

판단은 빨랐다.

크로이드의 검을 들어 올렸다.

공명.

지이이이잉.

검이 울음을 토하고 앞에 있던 기사가 튕겨 나갔다.

들고 있던 검은 금이 갔을 뿐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나 일반 검과 강도가 달랐다.

루이는 다시 발을 내디디면서 검을 찔러넣었다.

전보다 강하게.

콰가가가강!

충격과 함께 앞이 뚫렸다. 금이 갔던 터라 파괴력이 더욱 컸다.

하지만 루이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는 손가락을 넣어 상처를 확인했다.

고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장기는 다치지 않았어.'

그러면 아직 더 싸울 수 있었다.

루이는 뚫린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기사들의 검들이 루이를 뒤따랐다. 루이는 검을 쳐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손을 향해 날아오는 검.

"...!"

루이는 뻗었던 손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들.'

루이의 얼굴에 낭패가 떠올랐다. 이들의 목적은 루이를 막아서는 것만이 아니었다.

"검을 집게 하지 마라!"

루이의 예상대로 뒤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루이의 검을 소비시키는 것. 즉석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루이 앞에 나섰을 때부터 그럴 목적이었다.

루이는 혀를 차며 수풀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바스락, 바스락.

사방에서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를 쫓아 오는 기사들.

그 소리를 들으며 루이는 숨을 골랐다.

몸 역시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루이는 자신을 쫓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저들이 유인했다면 이제는 자신이 유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처럼 트인 공간이라면 자신이 불리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라.'

숲은 루이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이제까지 루이가 사냥감이었다면···.

"이제 사냥꾼은 나야."

루이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나무 위로 올랐다.

< 엘리사. >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가벼운 몸짓.

루이는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오갔다.

"무슨!"

"노, 놓치지 마라!"

다른 기사들 역시 뛰어서 나무 위까지 올라오는 건 가능했으나 루이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질량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루이는 그들을 숲 안으로 이끌었다.

더 깊게.

그들의 예상과 달리 루이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숲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들은 깨달았다.

이제 자신들이 사냥감이란 사실을.

나무 위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검을 막긴 했으나 루이의 무릎이 얼굴을 가격했다.

"커헉!"

머리가 으깨진 기사가 쓰러졌다. 검을 집으려던 루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멩이를 보며 혀를 찼다.

검이 아니기에 에테르가 실리진 않았지만, 기사가 전력으로 던진 돌이었다. 위력을 무시할 순 없었다.

'끝까지 검은 주지 않겠다는 거네.'

상관없었다.

뒤늦게 기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루이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그 뒤로도 사냥은 계속되었다.

"홀로 다니지 마라!"

"둘 이상 움직여!"

이 자리에 일대일로 루이에게서 이길 수 있는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자리면 모를까, 여럿이서 다니긴 쉽지 않았다.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기사들 역시 전투에 관해서는 전문가였다.

숲에서 전투를 상정하여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규격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열일곱 시간.

숲속으로 들어온 스물일곱 명의 기사가 전멸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또 한 번의 승리.

그러나 루이는 기뻐할 순 없었다.

숲에 들어온 기사들은 제물이었다.

루이를 지치게 하기 위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도 루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진짜들이 나왔군.'

루이의 시선이 돌아갔다.

숲속으로 걸어오는 사내. 루이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테일러."

루이는 그 이름을 뱉었다. 그러나 루이의 시선은 테일러 옆을 향했다.

레기온의 문장을 달고 있는 사내.

마스터였다.

'저자만이 아니야.'

그 외에도 크로이드의 기사도 있었다. 과거 본 적이 있는 얼굴.

그러나 루이가 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어.'

전투가 끝나갈 때부터 숲을 감싸고 있는 존재감은 다른 이의 것이었다.

또 한 명의 마스터가 있다.

그것도 눈앞에 있는 마스터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자.

루이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런 루이의 앞에 테일러가 섰다.

"인정하지. 넌 내가 알던 그 병신 새끼가 아니야."

그제야 루이의 시선이 테일러를 향했다. 루이를 바라보는 테일러의 눈빛은 적의로 번들거렸다.

질시, 그리고 분노.

과거 테일러에게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지금까지 테일러가 루이를 생각하는 감정은 하나뿐이었다.

경멸.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테일러는 어리석지 않았다. 루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기에 분노하는 것이었다.

"왜 돌아왔지? 그냥 세트리아의 귀족으로 살지 그랬어?"

"..."

루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루이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고 호흡도 거칠었다.

무려 열일곱 시간을 쉬지 않고 싸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서 있었다면 이런 꼴은 안 당했잖아."

자신도 이런 기분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다.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인간이 자신보다 뛰어났다.

굴욕적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루이라고 불린다고? 넌 아직도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가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줄여 부르기에는 루이나 루이스나 마찬가지였다.

루이를 바라보는 테일러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지. 아니야.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한 게 아니야. 그녀를 잊지 못한 거구나."

"..."

"가문 내에서 널 루이라고 부르는 이는 그녀뿐이었어. 비루하게 죽어버린 네 어미."

테일러가 히죽 웃었다.

테일러가 하는 짓은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루이에게 실력에서 졌다는 분노를 다른 것으로 풀려고 있었다.

루이는 그런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테일러와 달리 루이는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차분했다.

"...맞아."

"어?"

"네 말이 맞다고."

루이의 말에 테일러가 어벙해졌다. 루이가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루이는 가명을 쓰지 않는다. 위험하긴 했으나 새로운 신분을 구할 수도 있었다.

아니, 공주에게 부탁하면 개명도 가능했다. 부탁이 싫다면 필로스에게 거래를 해도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과거 그녀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아직 이세계에서 넘어온 민혁의 자아가 남아 있었을 때.

* * *

지금은 기억나지 않은 과거.

민혁은 루이스 크로이드의 몸에서 환생했다. 또 한 번의 기회.

그러나 현실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당시에 루이는 광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민혁이 깨어난 루이스 크로이드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숨만 부지한 상태. 한 달이나 의식이 없다가 민혁으로 깨어난 것이었다.

습격으로 생긴 상처도 낫지 않았지만, 한 달간 제대로 식사도 못 한 탓에 몸도 최악이었다.

낯선 세상.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의들. 크로이드의 가문에게 가족이란 따뜻한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하루하루 사라져가는 민혁으로서의 기억. 그리고 두서없이 떠오르는 루이스 크로이드의 기억들.

자신이 점점 자신이 아니게 되는 감각.

그리고 시시각각 줄어드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루이를 힘들게 했다. 그런 상황에 제정신을 가지는 게 이상했다.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는지 모른다.

그때, 루이를 옆에서 지탱해준 것이 그녀였다.

엘리사.

루이스 크로이드의 어머니.

그녀에 대해 루이가 알고 있는 건 적었다.

이국의 귀족.

첩이 아니라 처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상당한 신분이 분명했다.

정략결혼.

귀족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루이가 알고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민혁 이전의 루이스 크로이드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당시에 루이가 기억하는 그녀는 병색이 완연했다.

그 몸으로 항상 루이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을 대신하여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 때로는 가혹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

당시에는 그녀가 귀족의 체면 때문에 닦달한다고 의심하기도 했었다.

기억이 혼란스럽고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끝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져도 루이가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루이를 다그친 것이었다.

그녀의 정성 덕분에 루이는 안정을 찾아갔다.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죄책감도 커졌다. 자신은 루이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 년.

민혁과 루이스의 자아가 완성되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루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끝까지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유언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유일했던 버팀목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얼마 뒤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도련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하인 하나가 루이를 찾아왔다.

[...무슨 약입니까?]

루이의 물음에 하인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루이를 의심하진 않았다. 루이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어머니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늘 드시던 약입니다. 그전까지는 삼부인께서 직접 가져가셨습니다.]

그녀는 루이에게 약 따위 주지 않았다.

미심쩍은 루이는 약을 마시지 않고 저택에서 키우던 새에게 몰래 먹였다. 그리고 새는 삼 일도 버티지 못했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원래 병약하지 않았다.

하인을 통해 알아보니 그녀가 몸이 안 좋아진 건 원래 주인, 루이스 크로이드가 습격을 받은 이후였다.

의원이 지어준 약은 약이 아니었다. 독이었다.

그를 알고 그녀는 직접 마신 것이었다.

만일 독을 알아챘다는 걸 알면 다른 방법으로 손을 쓸 수 있기에 자신이 마셔서 의심을 지운 것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몰랐겠지만, 나중에는 그들도 알고 있었을 거다.

루이의 몸이 회복될수록 그녀의 몸이 안 좋아졌기에.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루이가 죽는 것보다 삼부인이 죽는 게 낫기에 놔둔 걸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살리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택한 것이었다.

루이는 누가 손을 썼는지도 짐작이 갔다.

이부인.

[네 녀석의 머리카락은 더러운 네놈 어미년을 닮았구나.]

루이가 독약을 마시지 않자 그녀가 찾아왔었다.

아니, 크로이드 공작과 대부인도 이를 알고 있었을 거다.

크로이드 내에서 그 둘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크로이드 공작은 냉정한 인간이었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자식이라도 내쳤다.

습격을 받고 광인으로 살았던 루이는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리고 대부인 역시 후계자에서 멀어진 루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부인만은 달랐다.

그러나 루이는 그들을 원망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처럼 자신도 죽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경고가 있던 날, 밤에 습격이 있었다.

크로이드 저택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넘어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습격이 있는 동안 저택은 조용하기만 했다.

내부의 소행이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

루이는 그 날, 저택을 도망치면서 맹세했다.

그녀의 뜻대로 살아남겠다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 * *

루이스 크로이드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그녀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루이는 가명이 아니었다. 루이는 그녀가 그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루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이제는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더 있었다.

그녀를 죽인 자들과 그것을 묵인한 자들.

그리고 그에 연관된 모든 이들.

'모조리···.'

루이의 섬찟한 시선을 받은 테일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리고 곧 뒤에 있는 기사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

"...위령제를 열어야지."

성대하고 화려하게.

"뭐?"

테일러가 되물었지만, 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묻힌 곳, 크로이드에서 그녀를 위한 위령제를 열어줄 것이다. 크로이드를 불태워서 그녀를 위로해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도 이제는 가능성이 열렸다.

"어디서 잡기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네 녀석의 이상한 기술도 그걸로 끝이다."

테일러의 시선이 루이의 검을 향했다. 마지막 기사를 죽이고 빼앗은 검.

루이가 얻을 수 있었던 검은 이뿐이었다.

"이상한 기술이라."

루이는 피식, 웃고는 검을 버렸다. 그리고 황금검을 고쳐잡았다.

동시에 루이의 몸에 푸른 빛이 올라왔다.

메르실라의 권능.

빠른 속도로 아무는 상처. 거칠었던 숨소리 역시 안정되어 갔다. 벗겨진 껍질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부서졌다.

테일러의 눈이 커졌다.

루이가 중간에 강제 회복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이 한순간을 위해.

"나한테 있는 게 그것뿐이라고 생각해?"

"...!"

파지직.

루이의 검에 푸른 뇌전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의 전투.

루이가 쓴 에테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공명을 제외하면 순수한 육체만으로 싸웠다.

루이 역시 크로이드였다.

비록 기억이 온전치 못하지만, 루이스 크로이드는 크로이드의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부족한 기억은 지금까지의 전투로 채울 수 있었다.

본파와 분파.

이들 모두가 뿌리는 같았다.

루이의 신형이 테일러를 향해 쏘아졌다.

"공자님!"

옆에 있던 마스터가 앞으로 나섰다.

콰지지지지직!

벼락이 내리쳤다. 마스터의 몸이 충격에 튕겨 나갔다.

"컥!"

루이는 그냥 싸우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적들 모두가 루이에겐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본래 루이가 가졌어야 할 것.

크로이드의 검.

"...!"

테일러의 눈이 떨려오는 게 보였다. 루이에게 이만한 여력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멀리 튕겨 나갔던 마스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역시나 마스터. 루이도 그가 이걸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테일러 앞에 당도한 뒤였다.

"이번에는 좀 새로울 거야."

공명에는 하지 못했지만, 벼락이라면 가능했다.

루이의 검을 감싸고 있던 에테르가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라움의 권능.

그리고 붉은 벼락이 지상에 강림했다.

콰가가가가가강!

땅이 뒤흔들리는 충격. 숲이 비명을 질렀다.

루이는 뿌옇게 올라온 흙먼지를 응시하면 미소지었다.

"역시 나오셨네?"

"음···!"

흙먼지 너머로 보이는 노인. 아까부터 숲을 감싸고 있던 존재감의 주인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 다 왔어. >

모를 수가 없었다.

오싹한 기세. 웃는 루이와 달리 노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마스터 그리피트!"

테일러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루이는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회색 늑대 그리피트.

레기온의 검호.

곧 빛이 번뜩이며 루이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웃을 수 있었다.

'성공했군.'

노인의 어깨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루이의 공격은 테일러를 향한 게 아니었다.

노인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전력을 다한 루이의 일격.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준비도 없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이가 공격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그러나 루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대가 크로이드나 분파의 마스터라면···.

'크로이드의 핏줄을 구하기 위해 나서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지금까지 루이가 신경 쓰고 있었던 건 테일러나 옆에 있던 마스터가 아니었다.

오로지 저 하나뿐이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마스터가 달려와서 그리피트를 부축했다. 그러나 그리피트는 그런 제자를 밀어냈다.

대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대단하구려. 삼공자."

"...!"

"...!"

동시에 다른 이들의 경악이 들려왔다. 삼공자. 지금까지 삼공자는 죽은 니셀이었다. 그리피트가 루이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피트도 루이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말렸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한 수로 루이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대공자에 비할 재목이야.'

곧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는 크로이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루이는 홀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리피트는 루이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과 같은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리해서 기술을 쓴 것이었다.

도박에 가까운 행위.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다.

강할 뿐만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했다.

루이를 바라보는 그리피트의 눈빛이 변했다.

* * *

그리피트의 시선에 루이는 쓴웃음을 삼켰다.

'역시 알아보는군.'

속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라움의 힘을 쓴 부작용이었다. 강제 회복을 하면 자연 회복이 더뎌지는 것처럼 라움의 힘 역시 무한한 건 아니었다.

탈력감.

짙은 상실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저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루이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가호를 받기 전. 아니, 그때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성장한 건 가호만이 아니었다. 에테르가 늘어난 만큼 루이의 육체 역시 성장했다.

그러나 마스터 둘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그중 하나는 유명한 회색 늑대였다.

'앞으로가 문제이군.'

덕분에 적의 전력을 깎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루이의 시선이 시간을 향했다.

[6123:02:31]

놀라운 수치. 루이가 처음 눈을 떴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숫자였다.

'두 번 정도는 사용해도 되겠어.'

잘못 걸리더라도 취소하고 다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강림이 끝나고 바로 강림을 쓸 수 있는지.

아니면 시간제한이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전에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으나 이 하나를 확인하고자 쓸 수는 없었다.

루이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잡았다.

그런 루이를 보며 그리피트가 입을 열었다.

"삼공자,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소이까?"

"...!"

루이의 눈이 커졌다. 그만큼 그리피트의 말은 의외였다.

그러나 루이보다 놀란 이가 있었다.

"마스터 그리피트? 대체 무슨 말씀을···."

테일러였다. 그러나 그리피트는 테일러를 보지 않았다.

"지금 가서 사과한다면 공작님께서도 삼공자를 내치지 않으실 것이오. 이 늙은이도 돕겠소이다."

그리피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과거와는 달랐다.

루이는 스스로 강함을 증명했다.

형제 살해? 크로이드에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의 크로이드 공작 역시 형제들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

그리피트의 말에 테일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이가 돌아오면 자신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집어치워."

루이는 검을 들어 올렸다.

언젠가 크로이드로 돌아갈 거다. 그러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지 가문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루이의 말에 그리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예상했었다. 단지 루이의 재능이 아까워서 권유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손을 쓸 수밖에 없겠구려."

그와 함께 공기가 변했다.

한쪽 어깨를 다쳤다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오싹한 살기에 루이는 침음성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리피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굳은 얼굴로 루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뭐지?'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생각보다 더 심한 건가?

"...구경만 하시지 마시고 그만 나오시오."

"늙은 인간이 제법이네."

"...!"

"...!"

갑작스러운 소리에 루이는 숨을 삼켰다.

대체 언제? 고개를 돌리자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소년.

외모 자체는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피부만은 이질적이었다.

보랏빛.

루이는 소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뭐 하는 놈이냐!"

"글쎄?"

기사의 호통에도 소년의 표정은 태연스러웠다. 다른 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소년의 기세를 읽은 건, 단 셋뿐이었다.

두 마스터. 그리피트와 그의 제자.

그리고 비슷한 존재를 만난 적이 있는 루이.

기사 하나가 나서려고 하자 그리피트가 제지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보통 소년이 아니다."

그리피트의 말에 남은 기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피트가 허언을 할 리가 없었다.

그리피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를 본 기사들 역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 녀석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네. 쓸만한 장난감이 이리도 많을 줄이야."

장난감? 소년의 시선은 일행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시체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곧 소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한기가 몰아쳤다.

'무언가 변했어.'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셋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공기가. 아니, 숲 자체가 바뀌었다.

방금까지 있던 곳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루이는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밤의 숲.'

마수의 땅.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이러한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작은 소리. 그러나 듣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상위의 기사였다.

그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아까 들었던 소리는 쇠와 가죽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은 기사들은 아연해 졌다.

"대체 무슨···."

"이게···."

기사들. 그림자의 정체는 자신의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동료란 건 과거형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기사 중에는 팔다리가 없거나 내장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죽은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들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요즘 장난감이 부족했는데···."

소년의 시선이 시체들에서 살아있는 이들로 향했다.

"이렇게 알아서 굴러올 줄이야."

히죽, 웃는 소년. 소년의 눈동자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 그와 함께 시체들도 일제히 몸을 돌렸다.

먼저 반응한 건 그리피트였다.

"모두 공격에 대비해라!"

그리피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체들이 달려왔다.

- ...! ...!

시체들이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동료를 지켰던 검들이 이제는 동료들에게 향했다.

루이 역시 시체를 향해 역시 검을 휘둘렀다.

망자들과 생자들이 격돌했다.

되살아난 이들은 생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느낄 줄 몰랐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잘려도 움직인다.

"어, 어떻게···!"

"...현혹 마법?"

기사들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망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망자들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그야말로 무적의 군단.

"정신 차려라!"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피트였다.

"머리를 노려라!"

그리피트의 외침에 기사들의 표정도 바뀌었다.

'머리?'

루이의 시선이 적들로 향했다. 되살아난 이들 중에 머리가 잘린 이는 없었다.

루이가 죽인 이들 중에는 머리가 잘린 이들도 제법 되었다.

직접 죽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루이는 시체의 공격을 피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머리가 잘린 시체가 쓰러졌다.

그리피트의 말대로 쓰러진 시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확인했음에도 루이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아니, 전보다 더 굳었다.

루이의 시선은 적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시간이···."

허공을 살피던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늘지 않아?'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우연이 아니었다. 다른 시체를 베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깨달은 루이는 혀를 찼다.

이들은 이미 죽은 이들이기에 시간이 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테르를 베어도, 마법을 베어도 시간은 늘지 않는다.

루이로서는 최악의 적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소년에게 향했다. 소년은 루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명의 마스터.

아니, 정확히는 그리피트였다.

새로운 장난감이란 그리피트와 그 제자였다.

테일러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크로이드의 혈족이라고 해도 아직 애송이었다. 형들과 누나와 달리 진짜 전장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전장의 경험이 있다고 해도 망자들을 보면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그들을 살피던 루이의 눈빛이 변했다.

그들 역시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숲에서 죽은 이들뿐만 아니라 폭포에서 죽은 이들도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루이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얼마 남지 않았어.'

기사들과 싸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본능.

그리고 그러한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거의 다 왔다.

판단은 빨랐다.

루이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적들을 베며 빠르게 나아갔다.

"삼공자!"

그리피트가 그런 루이의 행동을 알아챘지만, 제지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피하면 테일러가 위험했다.

게다가 정작 그리피트를 바라보던 소년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아니, 소년 역시 루이를 확인했으나 곧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라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더 탐나는 먹잇감 때문인가.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쫓는 집요한 시선에 그리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루이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강제 회복으로 체력이 돌아왔다고 해도 라움의 힘을 잃은 상태였다.

날카로운 검들이 그의 육체를 할퀴었다.

다행이라면 망자들은 에테르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가.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질 순 없었다.

루이는 허벅지의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큭."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와 함께 희미해지던 정신도 돌아왔다.

'빌, 어먹을!'

루이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런 루이의 눈에 한 굴이 보였다. 루이의 몸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굴.

안은 어두워서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 없었다.

루이는 그 굴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곳으로 가는 길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루이는 미련 없이 굴을 향해 몸을 던졌다.

< 밤하라. >

어둠이 루이의 몸을 집어삼켰다.

루이는 이리저리 구르면서 아래로 추락했다. 안전장치도 없이 구멍으로 뛰어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쿵!

바닥에 떨어진 뒤에도 몇 번이나 구른 후에나 멈출 수 있었다. 루이는 온몸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침음성을 흘렸다.

'팔이 부러졌나···.'

생각보다 깊게 내려왔다. 그리고 곧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굴렀다.

쿵!

다시 한번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

망자.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루이는 옆에 떨어진 검을 집어서 망자의 머리를 잘라냈다.

망자가 쓰러진 이후에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힐끗 위를 올려보니 작은 쇳소리만 들렸다. 따라오려던 망자가 끼인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으니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는 이가 없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루이는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좁은 굴과는 다르게 아래는 큰 동공이 있었다. 게다가 벽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주변을 구분하기 어렵지 않았다.

루이는 벽을 만져보았다. 흘러나오던 불빛은 루이의 손에 닿자 흩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살아있는 반딧불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빛은 생물이 아니었다.

마력도 에테르도 아닌 무언가.

루이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

루이는 빛을 따라서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가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팔뿐이 아니었네.'

다리의 상태도 엉망이었다. 아직 회복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계속된 전투에 피로도 누적이 된 상태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사실 루이가 아니라 다른 이라면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루이는 자신의 품을 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깨지지 않았군."

대단한 내구력이었다.

작은 병에 든 메르실라의 성수. 사실 아끼려고 아꼈다기보다는 그동안 쓸 일이 없었다는 게 맞았다.

루이는 성수의 뚜껑을 열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 모금.

적은 양의 성수가 목 너머로 넘어가자 몸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루이에게는 친숙한 힘.

메르실라였다. 루이는 회복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회복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효과였다.

여분의 생명.

그리 평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완전히 낫기에는 양이 부족했으나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루이는 다리를 확인하고 빈 병을 다시 품에 넣었다.

이만큼 튼튼한 병이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거다.

그리고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루이가 있던 장소도 넓었으나 안으로 향할수록 더 큰 공간이 나타났다.

루이는 이 공간이 자연적인 공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신이 직접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게 가능할까?

'놀랍군.'

게르 산맥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루이의 심장도 점점 빨라졌다.

기쁨인가, 그리움인가.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루이는 이러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신들의 장난인가?

루이는 불쾌감을 느끼기도 전에 탄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기둥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거대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석상.

석상의 정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높게 솟은 날개, 날카로운 발톱.

그건 짐승의 석상이었다.

하지만 짐승에게 머리는 없었다.

길게 솟은 목 표면이 거칠었다. 누군가가 잘라버린 것이었다.

'대체 누가···.'

그리고 루이는 이 석상의 주인을 알 것만 같았다.

밤하라.

종족을 잃은 신이자 최초의 악신.

이곳이야말로 그녀의 신전이었다.

다른 신들도 그러하듯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루이는 이러한 짐승에 대해 알고 있었다. 루이스 크로이드가 아닌 민혁의 세상.

"...용."

드래곤. 이 시대에는 듣지 못했지만, 과거 루이가 살던 세상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생물.

석상은 그것을 닮아 있었다.

단순한 조각임에도 압도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석상을 본 순간 루이를 어지럽게 하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루이는 석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작은 키가 아니었으나 석상의 발목에도 미치지 않았다.

그만큼 거대한 석상.

루이의 손이 석상에 닿자 석상에서도 벽에 있던 것과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점점 강해졌고 그에 호응하듯 벽들의 빛도 짙어졌다.

그리고 벽들의 빛이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벽화?'

이를 벽화라고 할 수 있는가.

홀로그램에 가까웠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림들.

그건 하나의 전장이었다.

뿔이 달린 짐승들과 사람들.

루이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수와 마인.

그들과 맞서 싸우는 건 여러 종족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용들. 가장 적은 수였지만 누구보다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뒤를 도끼와 창을 든 종족이 뒤따랐다.

'라움.'

그들의 모습은 루이가 보았던 라움과 비슷했다. 라움뿐만이 아니었다.

'메르실라.'

뱀의 하반신을 가진 종족들이 창을 휘둘렀고.

'아르미테.'

귀가 긴 종족들이 활을 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알 수 없는 빛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난쟁이도 있었으며 거인도 있었다. 그 외에 알 수 없는 종족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인간이군."

갑옷을 입고 검을 들고 있는 이들. 그들이 다른 종족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검에서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테르.

이들 모두가 마수와 마인에게 대적하고 있었다.

대전쟁.

이 벽화는 하나의 시대를 그려낸 것이었다.

이제는 잊힌 신화 중 하나.

그들 모두가 서로의 시체를 밟고 서 있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마수와 마인에게 향했다.

마족들.

'과거 인간은 이들과 싸운 적이 있어.'

루이는 과거 만났던 마인의 말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가서 전해라. 어둠은 곧 돌아온다고. 너희 인간들은 다시 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또 경배하게 될 것이다.'

마인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었다. 인간은 그들을 잊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그 말을 떠올린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륙에 벌어진 이 현상들은 이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의문점은 더욱 커졌다.

루이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인간과 함께 있는 이종족들.

'그렇다면 저들은 어디에 간 거지?'

루이는 이 세계에 다른 종족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 여정을 하면서 신화를 공부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신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다른 종족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더군다나 이처럼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다면 기록 하나 없는 게 이상했다.

답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사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인간일 가능성이 크지.'

루이의 시선이 인간에게 향했다.

지금 대륙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루이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루이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째서 이걸 보여줬나. 그 하나뿐이었다.

시스템은 이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인도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벽화를 바라보고 있자 빛이 다시 옅어졌다.

정확히는 벽에서 떨어져나온 빛이 어딘가로 향했다.

루이는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석상의 뒤편.

빛이 모이는 건 그곳이었다.

장식처럼 보이는 것.

"뿔?"

언뜻 보기에는 마수의 뿔처럼 보였다. 그러나 금세 알 수 있었다.

"...아니야. 이빨."

용의 송곳니. 루이가 송곳니에 손을 얹자 세상이 바뀌었다.

전에도 느꼈던 감각.

가호를 받을 때와 같았다.

장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동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넓은 동굴.

그 안에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그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용.

신화 속의 생물.

용이 고개를 돌려 루이를 바라보았다. 루이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다른 신들과는 달랐다. 다른 신들은 감정을, 그들의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루이가 짐작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그리고 곧 세상이 다시 변화했다.

[메인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6116:53:22]

*

[8616:53:21]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열렸습니다.]

눈앞에 익숙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루이의 몸도 변화했다.

시스템은 시간만 준 게 아니었다.

라움과 아르미테처럼 뚜렷한 변화는 없었으나 알 수 있었다.

밤하라의 가호.

루이는 상점을 열었다.

[밤하라의 가호 – 1000T]

역시나 밤하라의 가호가 올라있었다.

"...전에 올렸으면 이 단계가 될 수도 있던 건가?"

루이는 입맛을 다셨다. 아쉽긴 하나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밤하라가 어떤 신인지도 몰랐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게다가 이 역시 단순한 예측이었다. 의외로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

루이는 자신이 만났던 밤하라를 떠올렸다.

'무언가 달라···.'

그녀의 눈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이곳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보상은 시간과 가호···."

루이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저거군."

용의 이빨.

어쩌면 다른 둘보다 이것 하나가 더 값어치가 높을지도 몰랐다.

마수의 뿔과 뼈를 다루는 장인도 있었다.

찾아보면 이것도 다룰 수 있는 장인도 있을 거다.

생각을 정리한 루이는 퀘스트를 열었다.

가장 중요한 게 이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퀘스트를 읽은 루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체네비라 소네티를 찾아가시오.]

[보상 – 10000T, ???]

"...뭐?"

루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줄.

"...적어도 그게 무엇인지는 말해줘야 하잖아."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친절함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이건 너무 심했다.

밤하라의 경우에는 신전이란 힌트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체네비라 소네티가 인명인지, 지명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위치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불친절했다.

그러나 보상은 매력적이었다.

만 시간.

무려 네 배나 올랐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또 저거군.'

???

그러나 이번에 얻은 것들을 생각하면 해야 할 가치는 충분했다.

[8616:51:47]

곧 만 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면 가호 하나를 3단계로 올리거나 장비 상점, 혹은 소모품 상점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위에는 먹잇감들이 충분했다.

기사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슬슬 돌아오는군.'

라움과 메르실라의 힘.

더군다나 새로운 힘까지 얻었다.

밤하라. 그녀의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려 용이었다.

평범한 능력은 아닐 거다.

"문제는 어떻게 저 위로 올라가냐, 인데···."

올려다본 천장은 마치 밤하늘처럼 끝이 없었다.

게다가 몸만 올라갈 수도 없었다.

용의 이빨. 여기까지 와서 그걸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해보자."

루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은 충분했다. 전장이 다시 루이를 부르고 있었다.

< 마저 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