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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384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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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라면 검으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초조함이 올라왔다.

[884:11:21]

숲의 사냥과 베일리 덕분에 천 시간이 넘었으나 이제 다시 팔백대로 내려왔다.

이대로라면 가호를 얻기는커녕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예상은 했었지만···.'

더 빡빡했다. 왕국과 달리 영지전도 드물었다.

루이는 수통으로 목을 축였다.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가장 좋은 건 마수인데.'

제국에서 마수를 잡을 수 있는 곳은 셋.

그러나 그곳은 나라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허가받기 힘들뿐더러 허가를 받더라도 세금을 내야 했다.

물론, 루이에게 세금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가문에서도 알게 되겠지.'

크로이드.

마수의 땅처럼 마수 사냥꾼들 역시 제국에서 관리한다.

루이에 대한 정보가 흘러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당장 가문과 부딪히는 건 자살행위였다. 가호를 올려서 좀 더 강해져야 했다.

그 외의 전장이라고 하면 북부 전선.

마론 공화국과의 경계였다.

"...거기까지 가느니 게르 산맥에 바로 가는 게 나아."

북부 전선은 게르 산맥보다 멀리 있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버리는 꼴이었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 뒤에 놓인 짐들이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심지어 제국은 치안도 좋았다.

지금까지 습격받은 게 다섯 번이 안 되었다. 왕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골치가 아프군."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마을마다 머물면서 도축을 하는 수밖에 없나."

규모가 큰 마을을 중간중간마다 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루이는 머릿속으로 제국의 지도를 떠올렸다. 제국을 떠난 지 시간이 제법 지난 탓인가, 기억이 희미했다.

'다음 마을에서 지도를 구해보, 음?'

루이의 걸음이 멈췄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오싹, 순간적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

앞에 무언가 있다.

루이가 앞을 응시하고 있자 인기척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네. 꽝은 아니었어."

쾌활한 목소리. 한 사내가 루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걸음이었으나 루이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베인다.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니, 혼자가 아니야.'

감각을 넓히자 또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대를 차고 있는 중년 기사. 한쪽 눈이 루이를 향해 있었다.

상당한 실력자.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내만은 못했다. 루이가 중년 기사로부터 눈을 떼자 사내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죠세프 경, 보았나?"

사내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나를 두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있다니."

사내의 목소리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루이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압박감.

'길포드 이상이야.'

세트리아 왕도에서 만났던 조세핀도 이렇지 않았다.

'어디서 이딴 괴물이.'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루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황금의 기사라더니. 알만하군."

사내의 시선은 루이의 허리춤에 있는 황금검을 향했다가 말 뒤에 놓인 짐을 향했다.

이런 압박감 속에서 루이의 말은 평온했다. 늑대만 나와도 긴장하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가 긴장한 것은 선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무의 경계.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루이는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황금의 기사.

낯선 단어였다. 아니, 트월엄에서 용병들이 그리 부르긴 했다.

'누구지?'

그러한 물음이 루이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나 루이의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

묵묵히 검 손잡이로 손이 향하자 사내가 미소지었다.

루이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눈빛이었다.

"그렇지. 무릇 기사라면 검으로 인사를 나누는 법."

사내는 느릿느릿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루이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빌어먹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루이의 눈이 번뜩였다.

사내의 검이 뽑히기도 전에 루이는 땅을 박찼다.

기습. 그러나 사내 뒤에 있던 기사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 정도로는 사내에게 닿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이를 보며 사내 역시 미소지었다.

쾅!

공기가 터져나갔다.

"오, 굉장한 힘이야."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사내의 눈이 휘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런 사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스르릉.

등 뒤에 있던 검이 뽑혀 나왔다.

"음?"

사내를 향해 날아가는 두 번째 검.

사내는 이 역시 가볍게 막아냈다.

그 순간.

콰가가가강!

공기가 떨리더니 곧 검이 폭발했다.

'맞았나? 아니야···.'

흙먼지를 뚫고 검이 날아왔다. 공기가 갈라지면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멀쩡한 모습.

아니, 어깨 부분이 살짝 찢어졌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날아오는 파편을 전부 피하거나 쳐낸 것이었다.

"이번 건 좀 놀랍군."

사내의 검이 루이를 뒤쫓았다. 바람을 가르며 공격이 이어졌다.

깔끔한 공격.

검술의 교본을 보는 것처럼 깨끗했다.

루이 역시 이렇게 정석적인 검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강했다.

'젠장.'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견고한 성을 보는 듯했다.

루이의 손이 다시 뒤로 향했다.

그러자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다시 한번!

지이이잉.

이번에는 좀 더 강했다.

검이 비명을 토하더니 폭발했다.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이는 흙먼지 사이로 걸어 나오는 사내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폭발.

그 파편을 눈으로 좇을 수 있다고?

이런 이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걸어 나온 사내는 전과 달리 루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미간을 모은 채 방금 공격을 떠올리고 있었다.

"외부의 충격과 함께 순간적으로 에테르를 쏘아내서 파괴력을 극대화 시켰군."

"...!"

루이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단 두 번 만에 루이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 알아낸 것이었다.

놀란 루이의 시선에 사내가 미소지었다.

"대단한 기술이야. 설령 원리를 안다고 해도 따라 하긴 힘들겠어."

사내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만이 아니었다.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재밌는 걸 보여줬으니 그만한 대접을 해야지."

사내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검에서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건 루이가 알던 어떤 에테르와도 달랐다.

소리 없이, 조용히 피어오르는 에테르.

실처럼 피어오른 에테르가 검을 따라 넘실거렸다.

동시에 주변도 적막에 잠겼다.

"조심하게."

사내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별처럼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

"이번에는 전과 다를 거야."

그리고 사내의 신형이 루이에게 쏘아졌다.

사내에게선 루이나 길포드와 같은 파괴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발걸음 소리,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온다.'

에테르를 휘감은 검이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는 몸을 비틀어 피하고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빨라!'

옆에서 날아오는 공격. 루이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텅.

검의 충격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뒤로 밀려나는 루이를 뒤따라 검이 날아왔다.

그제야 루이는 깨달았다.

'...아니야.'

사내가 빨라진 게 아니었다. 루이의 눈이 사내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내가 느려졌어.'

숨이 턱턱 막혀왔다. 마치 늪에 빠진 느낌.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내에게서 떨어질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사내는 그런 루이를 쫓지 않았다.

반대로 기대 섞인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기술을 평해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루이는 이와 같은 검을 알고 있었다.

"...체프먼."

루이의 말에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 알아보는 건가?"

안개의 검.

체프먼의 검은 공간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파편을 막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내의 미소에 루이는 욕을 삼켰다.

낭패였다.

체프먼은 크로이드와 함께 팔대 검파 중 하나였다. 몽모르도에 비교할 게 아니었다.

루이는 사내의 검을 보았다.

지금도 검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가 공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체프먼의 검술은 팔대 검파 중 누구보다 정석적이었다.

다른 검파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었다. 그리고 특색에 맞춰서 기술을 갈고 닦는다.

그러나 체프먼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성을 강화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로 상대의 약화.

검에서 흘러나온 에테르는 상대를 옭아맨다.

그것이 바로 영역이었다.

극한에 이른 에테르 제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계는 있어.'

어디까지나 매개체는 검이었다. 검을 없애거나 검에서 떨어지면 효과를 잃는다.

그러나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어째서 체프먼이.'

설마 이리도 빨리 팔대 검파를 만날 줄 몰랐다.

루이는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길을 찾는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체프먼과 부딪혀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그걸 놔둘 리가 없었다.

사내가 루이를 보며 웃었다.

"서로의 기술을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기가 루이를 짓눌렀다.

'...여기까지 닿는다고?'

주변이 흐릿해졌다. 실처럼 가는 에테르가 주변을 덮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체프먼의 검을 안개라고 부른다.

루이가 알기로 체프먼의 안개는 이러한 게 아니었다.

모든 에테르가 그러하듯, 직접 닿는 거리.

즉, 근접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루이와 사내의 거리는 열 걸음 이상 차이가 났다.

사내는 이 공간을 전부 제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미친.'

괴물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내가 루이를 향해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곧 사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루이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올렸다.

곧 충격이 루이의 검을 때렸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안개가 소리마저 집어삼킨 것이었다.

오로지 눈과 감으로 쫓아야 했다.

이어서 날아오는 공격.

바닥을 구른다. 그조차도 무거웠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검이 눈앞에 있었다.

'큭.'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른다.

눈과 사고는 상대의 움직임을 쫓았으나 몸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함과 함께 체력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늪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짧은 시간에 루이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루이는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다시 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쿵!

순간적으로 안개가 찢어지며 파편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검의 파편은 루이의 허벅지만 찢고는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파편이 날아간 자리, 이미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는 안개.

루이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남은 검은 두 개. 황금 검과 크로이드의 검이었다.

여분의 검은 말과 함께 있었다.

'...써야 하는 건가.'

루이의 시선이 시간으로 향했다.

강림.

아직 불안정했다. 카스 1단계로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강림을 썼다가 카스가 나와도 시간을 버리는 꼴이었다.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검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고민하던 루이의 눈빛이 변했다.

그 순간.

루이를 압박하고 있던 안개가 사라졌다.

척, 사내의 검이 검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루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사내가 미소지었다.

"인사는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군."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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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384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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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사? 분명 그런 소리를 했었다.

멋대로 공격하고는 멋대로 그만둔다?

루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슨 생각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지."

"뭐?"

루이의 대꾸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 물론 자네를 말하는 건 아니네. 자네는 마음에 들어."

그리 말한 사내가 미소지었다.

"누구의 손에 놀아나는 게 싫을 뿐이네."

사내의 말에 루이는 깨달았다. 애당초 사내는 루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만일 루이의 실력이 보잘것없었다면 죽였을 거다.

그러나 루이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애초부터 흥미가 생겨서 왔을 뿐이지."

백작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를 들어주는 건 사내의 선택이었다.

지금의 루이는 이용 가치가 충분했다.

사내의 말에 루이도 검을 거뒀다.

지금 상황에서 계속 싸워봤자 루이의 손해였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어.'

사내는 그런 루이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칼튼 백작. 그 이름을 아는가?"

사내의 물음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칼튼 백작.

며칠 전 주점에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칼튼이란 성은 그때 처음 들었다. 크로이드와 연관된 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트월엄.

루이의 표정을 읽은 사내는 고개를 주억였다.

"짐작 가는 게 있나 보군. 나를 움직인 건 그자라네."

루이는 사내를 보았다.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러나 사내는 그런 루이의 시선을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덕분에 즐거웠네. 다음에 만날 때는 숨기고 있던 발톱을 볼 수 있길 기대하지."

사내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방금까지 싸운 게 무색할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루이는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숨기고 있던 발톱.

사내가 강림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알아봤군.'

어쩌면 사내가 싸움을 멈춘 건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나는군."

사내의 정체도 짐작이 갔다. 과거 체프먼에 천재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역대 체프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

저 나이에 저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문은 얼마 전, 왕국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에반 체프먼.

제국의 최연소 마스터. 가장 어린 나이로 절대자에 오른 이이자 체프먼 가문의 후계자.

그와 검을 섞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더 강해져야 했다.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제국에는 저런 이들이 많았다. 아니, 앞으로 루이가 맞설 이들은 저런 이들이었다.

마스터. 검의 종사.

절대자라 불리는 이들.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왕국에서처럼 살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생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에반은 그에 대한 답을 줬다.

"...칼튼 백작."

마치, 이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서 자리를 만든 것 같았다.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먼저 이빨을 드러낸 건 저쪽이었다.

'그렇다면 보답을 해야지.'

루이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과 함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 * *

죠세프는 자신의 호위 대상을 바라보았다.

사실 마스터에게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죠세프의 역할은 조언자에 가까웠다.

죠세프는 에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숨겨진 발톱.'

죠세프가 보기에는 루이는 필사적이었다. 에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그것이 무언가를 숨긴 거라고?

에반이 루이에게 보인 것은 호의였다.

"그자를 그리 높게 평가할 이유가 있습니까?"

죠세프의 물음에 에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경. 경은 내 영역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에반의 안개.

에반의 물음에 죠세프는 생각에 잠겼다.

그저 가만히 있는 거라면 상관없었다. 그러나 에반이 말하는 게 그것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스물아홉. 아니, 스물일곱 정도군요."

안개 속에서 에반의 전력을 얼마나 받아낼 수 있는가.

"그래, 경조차 서른 번이 넘지 않지. 하지만 그자는 열다섯 번이나 견뎠지. 재능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개는 단순히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의 체력, 에테르.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루이는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도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아니, 쓰러질 때마다 더욱 타올랐다.

죠세프의 하나 남은 눈이 커졌다.

죠세프는 에반이 다른 이를 칭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재능이 있다는 말을.

그제야 루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확실히···.'

에반과 같이 다니면서 눈높이가 높아졌다.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리고 풀로 가린다고 해서 뿌리까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지."

의미심장한 말. 에반은 루이의 검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검을 섞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루이의 검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너무 많이 변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죠세프가 의아해했으나 에반은 답을 주지 않았다.

이 일은 자신만의 즐거움이었다.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익은 열매였다.

그러나 더 성장하고 발톱을 자유롭게 드러냈을 때, 재밌는 싸움이 될 것이었다.

"그보다, 백작에 대해서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칼튼 백작은 체프먼의 가주가 하려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이였다.

죠세프의 물음에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고작 기사 하나 때문에 무너질 인간이라면 아버님께서 잘 못 보신 것이지."

말과 달리 에반은 문제가 생기길 바라는 눈치였다.

죠세프는 침음성을 흘렸다. 다른 이가 들으면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맞는 말이었다.

고작 기사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체프먼과 함께 할 자격이 없었다.

가주인 체프먼 공작도 칼튼 백작을 다시 보게 될 것이었다.

일이 틀어지면 단순히 칼튼 백작으로 끝나진 않을 거다.

칼튼 백작을 소개한 다른 이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자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야.'

한 남자를 떠올렸다.

칼튼 백작을 이어준 자. 에반은 그 말을 삼켰다.

에반을 바라보던 죠세프는 입을 다물었다.

걱정,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자신이 모셔야 할 주인, 체프먼의 어린 마스터는 스스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가주의 그림자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몸값은 비싸다네. 감히 나를 이용하려 했다면 그만한 대가를 내야지."

늙은 여우. 서부에서 왕처럼 지낸다고 하지만 에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체프먼 가문의 후계자로 살아가는 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고작 백작 따위의 손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에반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확인해본다고 했었다.

확인한 상대를 어찌하겠다는 약조는 한 적이 없었다.

에반의 말에 죠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마스터의 일보는 다른 이들의 걸음과는 달랐다.

* * *

날슨 자작 부인.

이제는 날슨 남작 대리인이 된 그녀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영지 내에서 철광이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뛸 듯이 기뻐했다.

먼저 떠난 남편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철광은 오히려 재앙이었다.

힘이 없는 날슨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재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슨의 가신이 멘소나 자작을 모욕했다고 영지전을 신청했다.

그 가신의 이름은 그녀조차 낯선 이름이었다. 얼마 지나고 나서야 남편이 있을 때 문제를 일으켜서 쫓겨난 이들 중 하나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그자를 찾아봤지만, 행적을 감춘 뒤였다.

영지전에 패배하면 막대한 배상을 해야 했다.

날슨 가문에 그만한 자산은 하나뿐이었다.

새로 발견한 철광. 처음부터 철광을 노리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녀는 중앙에 몇 번이나 이번 일의 부당함에 대해서 서신을 올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힘없는 날슨 가문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지전의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든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을 지켜내야 해.'

정식으로 남작의 위를 받을 수 있는 건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오세요."

그녀의 말에 문 안으로 들어온 건 늙은 기사였다.

남편의 아버지. 즉, 그녀의 시아버지부터 모셔온 가신.

그녀는 그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했다.

야생의 말처럼 당당하고 사나운 기사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러한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가주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한센 경. 전처럼 부인으로 충분해요."

"그럴 순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한센의 고지식함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한센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더욱 쉽게 무너졌을 거다.

그와 함께 의아함도 떠올랐다.

"집사는 어쩌고 경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

한센은 입을 닫았다. 그를 보며 그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떠났군요."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아 있던 집사는 의리를 다했다.

이미 품삯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다. 충의로 남아달라고 할 순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는 아이를 놔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올려진 건,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뿐.

빵 역시 너무 구웠는지 겉이 탔다.

그녀의 시선이 한센에게 향했다.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는 한센.

집사가 떠난 마당에 누가 식사를 준비하겠는가.

당연하였다. 평생 기사로 살아온 이가 제대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녁부터는 제가 준비하죠."

"그럴 순 없습니다. 날슨의 명예를 생각하십시오."

한센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거에요."

한센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남은 하인들도 내보내죠."

"가주님!"

한센의 노성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잘못이에요. 원래는 더 일찍 해야 했는데···."

그녀는 처연하게 웃었다. 지금의 날슨 가문은 영지전을 위한 병사는 물론이고 하인조차 거두기 힘들었다.

한센의 고개가 떨어졌다.

빠르르, 떨리는 한센의 손.

그녀는 그것을 보았음에도 모른 척 수프를 떠먹었다.

간도 안 되어 있는 밍밍한 수프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맛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음식.

과거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사내가 들어왔다.

몇 안 남은 하인 중 하나였다. 한센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하인은 움찔 몸을 떨었다.

"식,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손, 손님이 차, 찾아왔습니다."

"손님?"

말을 더듬는 건 한센 때문이 아니었다. 하인의 말버릇이었다.

한센은 눈살을 찌푸렸고 그녀 역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의 날슨을 찾아올 이가 누가 있겠는가.

과거 친했던 귀족들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인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용, 용병입니다. 이번 여, 영지전을 돕기 위해 차, 찾아왔다고."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녀와 달리 한센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썩은 시체에서 살점이라도 빼앗아가려는 사기꾼인가.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다.

"용병이라면 몇 급이죠?"

"그, 그거까진 잘···. 하, 하지만 비싸 보이는 검을 차, 차고 있었습니다!"

비싸 보이는 검.

둘의 시선이 바뀌자 하인이 말을 보탰다.

"그, 그것도 많이요!"

"..."

"...일단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녀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냅킨 역시 누렇게 변하고 냄새가 올라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하인은 낯선 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황금빛 검집이었다.

하인의 말처럼 여러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기이한 모습에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식사 중이라 이런 곳에서 맞이하게 되었네요."

"상관없습니다. 이 시간에 찾아온 제 잘못도 있지요."

손님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용병 루이라고 합니다."

귀족인 그녀가 감탄할 정도로 깔끔한 인사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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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3847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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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다면 구하면 됩니다.

루이의 시선에 부인의 시선이 한센에게 향했다.

루이에 관해서 묻는 것이었다.

한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경지는 모르지만, 갑옷 사이로 보이는 몸은 단련을 소홀히 한 몸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검들도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립을 감싼 천과 가죽의 상태를 보아도 얼마나 많은 전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실력은 있는 이였다.

그런 한센을 본 부인의 시선이 밝아졌다.

"용병이라고 하셨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급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3급입니다. 세트리아에서는 2급이었습니다."

루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패를 건넸다.

3급의 용병. 즉시 전력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세트리아."

그 말에 부인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출신 때문이 아니었다. 루이가 타지에서 왔기에 이곳 사정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날슨을 돕겠는가.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정은 알고 있습니다. 멘소나 자작 뒤에 칼튼 백작이 있다는 것까지요."

루이의 말에 부인의 눈이 커졌다.

"그걸 알면서 오신 건가요?"

"예."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더욱 의아해했다.

"어째서···."

"칼튼 백작에겐 받은 게 있어서."

숨겨봤자 나중에 알게 될 이야기였다. 그럴 바에는 먼저 드러내고 신뢰를 얻는 게 나았다.

당돌한 루이의 말에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부인을 대신하여 한센이 나섰다.

"괜찮다면 신분패를 볼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아무나 믿을 순 없네."

"이해합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분패를 꺼냈다.

루이의 손 위에 올리자 신분패가 반응했다. 그를 본 한센이 침음성을 흘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는 신분패를 볼 수 없었기에 한센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로이드 자작, 무례를 용서하시길."

"괜찮습니다. 그냥 용병으로 대해주시면 됩니다."

한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비록 타국의 귀족이었으나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자작. 가벼운 위치가 아니었다.

"그럼 기사로 대해주십시오. 그 이상은 제가 불편합니다."

"그럴 수는···."

"한센 경."

부인이 한센을 제지했다. 늙은 기사는 자신이 모시는 분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본인이 불편하다고 하니 고집을 피울 순 없는 것이었다.

부인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그제야 루이가 예법에 밝은 게 이해가 되었다.

크로이드란 말에 잠시 다른 이들을 생각했지만 세트리아에서 왔다면 연관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작 정도의 명문가라면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저도 경이라 부르면 될까요?"

"편한 대로 부르시길."

루이는 호칭에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사정을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몇 번을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경께서 도와주신다고 해도 저희 가문에서는 영지전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영지전은 물론이고 당장 먹을 식량도 위험했다.

필시 눈앞의 루이 역시 칼튼과 은원 관계인 게 분명했다.

칼튼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날슨 가문이었다.

부인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고 이 자리에 온 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루이가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부인의 말에 루이는 시선을 돌렸다.

루이가 들어온 길.

"이제 가져와 주시면 됩니다."

"아, 예!"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를 안내했던 이였다.

부인은 놀랐으나 한센은 하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담담했다.

그러나 루이의 말에도 하인은 들어오지 못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부인이 의아해할 때, 루이가 직접 움직였다.

문밖에 맡겨놨던 거대한 짐.

하인은 들지도 못했던 거대한 짐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짐을 식탁 위에 쏟아냈다.

촤르르, 찬란하게 반짝이는 황금빛.

수많은 황금과 보석들.

심지어 식탁에 다 올라가지 않아서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했다.

"...!"

"...!"

일행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식탁 위에 놓은 황금들은 루이가 들고 있던 검만큼이나 빛났다.

커진 눈들은 쉽사리 작아질 줄 몰랐다. 그중에는 하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져온 하인도 짐 안에 황금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이, 이게···."

부인이 말을 더듬었다. 한센 역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루이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부족하다면 구하면 됩니다."

루이는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영지전을 돕겠다고 말했었다.

홀로 싸움을 할 수는 없다. 그럼 혼자가 아니면 되었다.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같은 편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용병이란 제도가 있기에.

병사가 없다면 사면 되었다.

황금의 기사.

루이는 새로운 이명에 맞게 황금을 휘두를 줄 알았다.

* * *

황금과 보석.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빼앗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귀족인 부인으로서도 처음 보는 양이었다.

작은 영지 정도는 몇 년을 지탱할 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부인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걸 저희를 위해 쓰겠다는 말씀입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부인의 물음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광산 개발. 광산이 제 역할을 해내기 시작하면 이 정도의 금은 벌 수 있었다.

루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실력 있는 용병들을 구하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센이나 하인과 달리 루이나 부인은 냉정했다.

상대는 멘소나 자작이 아니었다. 칼튼 백작을 필두로 한 연합체였다. 그들의 병력을 상대하려면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작은 영지의 몇 년 치 예산?

칼튼 백작이라면 그 정도는 우스웠다. 영지전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수년 치 예산이 날아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루이가 없었을 때 이야기였다.

"숫자를 맞추는데 의미를 두십시오."

전쟁이란 머리싸움이었다. 지혜가 아닌 머릿수.

얼마나 많은 병사를 데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는가.

"그럼 기사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광오한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만한 재물을 넘기면서 헛소리할 리는 없었다.

기사가 아니라 병사들을 구하는 것이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히려 상대보다 질 좋은 병사들을 구할 수 있었다.

애당초 쓰러져가는 가문을 상대하는데 과한 병력을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중요한 건 상대가 영지전 전날까지 이 사실을 몰라야 합니다."

미리 알게 되면 대비할 게 분명했다.

루이의 시선이 하인에게 향했다.

그 뜻을 알아챈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믿을 수 있습니다."

하인은 감격한 얼굴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과 함께한 하인이었다.

돈도 받지 못하면서 가문에 남아준 이다. 이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는가.

그녀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일이 잘못되면 자신은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사정이 안 좋은 건 날슨이었다. 그녀가 알아서 처신할 것이었다.

"일은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지요. 이번 영지전에서 이기면 철광의 지분 반을 경께 드리겠습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그러나 한센도 말리지 않았다.

루이가 없다면 시작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루이가 다른 기사들을 압도할 수 있다면 루이의 지분이 섞인 것이 안전하기도 했다.

부인은 말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인장을 찍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니 용병을 구하는 건 저 하나만으로 부족할 겁니다."

움직임이 크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많은 용병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전과 달리 빛나고 있었다.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어머니며 가문의 주인이기도 했다.

"한센 경."

"...예, 가주님."

"루이 경을 도와주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녀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이. 가문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기사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은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떠났으니 한센 경이 제 옆에 없어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제외한 다른 하인들은 가문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이번 일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다.

남은 이들 모두가 이 상황이 올 때까지 의리를 지킨 이들이었다. 하인들을 의심하긴 싫지만 앞으로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리고 어차피 하려던 일이었다.

영지전이 끝나고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데려오면 되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입니다. 영지전 전까지 필요한 병력을 모아야 합니다."

루이의 말에 부인과 한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센는 굳은 얼굴로 하인을 보았다.

"가주님과 도련님을 잘 모셔라."

"명심하겠습니다."

하인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엄마?"

갑작스러운 소리에 일행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문 너머에 작은 아이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식탁 위에 놓인 금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반짝반짝."

엄마를 찾던 것도 잊고 멍하니 금들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그런 자식을 안아 올렸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던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야말로 날슨의 미래였다.

식탁 위에 있던 금과 보석을 한센과 나눈 루이는 날슨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영지전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 * *

싸늘한 바람이 언덕을 훑고 지나갔다.

"이번 신성한 전투의 중재를 맡은 보만 남작입니다. 전투의 방식은 총력전. 한쪽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승리하게 됩니다."

중년인이 담담히 규율을 뱉어냈다.

"전투는 이곳 평야에서만 진행되며 상대방 영주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금합니다."

고작 남작. 그러나 이곳에 중년인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제국에서 파견한 집행자이며 샤롯 신전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샤롯의 성기사.

그런 이에게 남작이란 작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제국에서 형식적으로 내려준 작위에 불과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전능하신 샤롯과 위대한 폐하의 뜻과 같습니다. 모두 맹세하시겠습니까?"

만일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신전과 황실을 적대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보만의 시선이 멘소나 자작에게 향했다. 자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멘소나는 맹세합니다."

비릿한 미소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너머에는 병사들이 들어 올린 깃발이 보였다.

반대로 부인의 곁에는 하인 하나와 어린아이뿐이었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 날슨은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만이 부인을 바라보았다.

"남작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부인의 말에 멘소나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보만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중심에 오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약속한 시각이 되지 않았으니 기다리겠습니다."

그에 멘소나 자작이 발끈했다.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전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보만의 말에 멘소나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해봤자 보만의 심기만 어지럽힐 뿐이었다.

'빌어먹을 신전.'

아무리 칼튼 백작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신전과 적대해서 좋을 게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보만은 그런 부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시까지입니다. 태양이 중앙에 닿는 순간 시작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 넘어.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멘소나 자작은 화를 억눌렀다.

'그래, 잠시뿐이야.'

어차피 기다려도 변하는 건 없었다. 멘소나 자작은 물러나서 팔짱을 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언덕 너머를 보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언덕 너머로 기다리던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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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3848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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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한 곳이 아니었다. 미리 맞춘 듯이 양쪽에서 군대가 나타났다.

그를 본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어!'

부인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반대로 멘소나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떻게···.'

그들만이 아니었다.

"자, 자작님!"

고개를 돌리니 저택에 있어야 할 하인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달려오던 하인이 멘소나 자작의 시선에 걸음을 멈췄다. 뒤늦게 저들의 소식을 가져 온 게 분명했다.

날슨 가문에 저만한 여력이 있던 건가.

두 부대는 일정한 거리를 놔두고 멈춰섰다.

그리고는 부대를 이끌고 온 둘이 중앙을 향해 걸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주님."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한센 경. 루이 경."

부인은 한센과 루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방금까지 성난 파도처럼 흔들렸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안정되었다.

멘소나 자작은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한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날슨의 마지막 남은 기사. 그러나 루이는 처음 보는 이였다.

'이런 이가 있었던가?'

무장만 보면 기사보다 용병에 가까웠다. 루이는 자신을 살피는 멘소나 자작의 시선에 입꼬리를 올렸다.

의미심장한 웃음.

멘소나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았다. 둘이 데려온 이들의 복장이 제각각이었다.

용병들.

'누군가에게 돈이라도 빌린 건가.'

이미 제국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 부인에게 선뜻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는 것치고는 미색이 훌륭하지.'

그녀를 노리고 돈을 빌려줘도 이상할 게 없었다.

멘소나 자작의 시선이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적진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위협적인 이들이 없다는 소리였다.

용병들 사이에 세례를 받은 이들도 있겠지만 기사들의 수는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아니, 병사들의 숫자도 많았다.

'그래, 마음껏 발버둥 쳐봐라.'

멘소나 자작은 안도하고 있는 부인을 비웃었다.

그때, 보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보만은 부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날슨 남작 대리인. 맹세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신성한 전투가 성립되었습니다. 양 진형은 서로 물러서고 제 신호를 기다려주십시오."

일행들을 노려보던 멘소나 자작이 먼저 움직였다.

"가자!"

멘소나 자작의 명에 따라 기사들이 뒤따랐다.

"저희도 갑시다."

부인이 말하자 루이와 한센이 그녀를 뒤따랐다. 하인은 다급히 아이를 챙겼다.

용병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의 인원이 움직이는데 소문이 안날 수가 없었다. 루이와 한센은 일부러 영지에서 떨어진 지부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소문이 나는 걸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이 시간에 도착한 것이었다.

물론, 멘소나 자작이 방심하고 있던 탓도 컸다.

용병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용병 중에는 이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 영지전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들도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간혹 이처럼 보안을 요하는 일들도 있었다. 좀 더 많은 돈을 내는 대신 길드에게 익명을 부탁할 수도 있었다.

귀족 중에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기 싫어서 기사 대신 용병을 고용해서 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용병들은 많은 돈을 약속받고 따라오긴 했으나 상황이 안 좋은 게 눈에 보였다.

일단 기사의 숫자가 차이가 났다.

기사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인력이었다.

용병들은 서로를 보며 쑥덕거렸다.

발을 빼고 있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물러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인과 한센 역시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이 흔들리면 용병들도 흔들릴 것이었다.

그리고 루이는 그런 그들을 다독이지 않았다.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저절로 알게 될 이야기였다.

백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빨랐다.

루이의 시선이 적진을 향했다.

'연합이라고 했던가?'

멘소나 자작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가문의 기사들도 보였다.

그들을 보며 루이는 입술을 핥았다.

'성찬이군.'

성스러운 전투. 그에 어울리는 만찬이었다.

허기진 루이의 배를 채우기 충분했다. 루이는 말 위에 올라탔다.

무거운 짐을 벗게 된 말은 힘껏 투레질했다.

루인은 그런 말의 목을 쓸어내렸다.

명마의 핏줄.

루이의 말은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맘껏 뛰어다닐 걸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루이는 피식 웃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야 중간에 있던 보만이 검을 뽑았다.

동시에 평야를 가득 채우는 찬란한 빛. 이는 루이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신성력.

그러나 루이가 알던 신성력과는 달랐다.

주신 샤롯.

그의 힘이었다.

빛이 사라지자마자 루이는 말의 옆구리를 때렸다.

동시에 말이 땅을 박찼다.

두두두두두.

평야를 돌진하는 말. 이제까지의 설움을 갚아주기라도 하듯 빠르게 나아갔다.

부인과 한센이 다급히 루이를 불러세웠으나 이미 평야 중심에 도달한 뒤였다.

그때까지도 보만은 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걱정하는 일은 쓸데없었다. 신전에서 파견한 성기사.

비록 그에게는 에테르가 없을지언정 신성력이 있었다.

짧은 순간, 루이와 보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루이는 보만을 지나쳐 적진을 향했다.

그와 함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황금검은 보만의 신성력보다는 못하지만, 확실하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적진에서 뒤늦게 출발한 기사들이 루이를 향했다.

네 기수.

그들은 홀로 나타난 루이를 비웃었다. 루이가 자신을 과신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루이가 다가오자 속도를 높였다.

루이는 그들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콰가가강!

폭발과 함께 기사 둘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

"...!"

남은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뒤따라오던 한센 역시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아군들뿐만 아니라 적군들마저 숨을 삼키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루이는 말머리를 돌려 남은 기사들을 향했다.

"조심해!"

한 기사가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루이의 검이 기사의 목을 갈랐다.

다급히 다가오던 기사의 말이 멈춰섰다.

루이의 말이 발길질했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피식 웃으며 말의 옆구리를 쳤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 정도의 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곧 말이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위에 있던 기사 역시 검을 들어 올렸다.

기수와 말.

둘 다 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세는 이미 넘어갔다.

루이의 검이 번뜩였다. 기사와 함께 말이 반으로 갈라졌다.

한 번조차 제대로 막지 못한 것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루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적진을 보았다.

적들은 멈춘 상태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전장을 지배하는 건 누구인가.

모를 수가 없었다.

"안 와?"

루이는 황금검을 어깨에 걸쳤다. 수많은 시선이 루이만을 쫓고 있었다.

그 속에서 루이는 미소지었다.

"그럼 내가 가지."

말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이 경을 뒤따라라!"

한센의 외침에 아군들이 움직였다.

"돌격!"

"오오오!"

용병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일제히 땅을 박찼다.

"가자!"

전쟁에 익숙한 용병들이었다.

방금 격돌로 분위기가 넘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길 수 있는 싸움.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오늘 한번 제대로 벌어보자!"

"날슨을 위하여!"

"루이 경을 위하여!"

아군의 기세가 살아나자 반대로 적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사들은 그런 병사들을 다독였다.

"숫자는 우리가 많다!"

"어차피 기사는 하나뿐이야!"

기사들의 외침에 병사들도 사기를 회복했다. 그들은 무기를 움켜쥐었다.

서부의 패자는 자신들이었다.

용병들에게 질 순 없었다.

"명예를 위하여!"

기사의 선창에 병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가문을 외쳤다.

고고고고.

두 세력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콰가가가강.

세력이 부딪히면서 비명과 함성이 뒤섞였다.

* * *

전쟁터를 종횡하는 황금빛. 루이를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제국과 신전의 대리인으로 참가한 보만은 감탄했다.

마치 전신인 라움을 보는 듯했다.

그만큼 거침이 없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팔대 검파 이외에 저 나이에 저만한 실력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자신은 미래의 마스터를 보고 있는지 몰랐다.

감탄할 만큼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보만보다 놀란 이가 있었다.

바로 멘소나 자작.

황금빛을 휘두르는 루이를 보고 떠올릴 수 있었다.

"...황금의 기사."

어째서 모르겠는가. 저런 기사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가 여기 있는가. 그는 에반과 만났어야 했다.

그가 에반을 이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가 아무리 대단하지만, 마스터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멘소나 자작은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칼튼 백작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

칼튼 백작이 얼마나 냉정한지 옆에 있던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때, 루이와 멘소나 자작이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는 루이.

그제야 아까도 저러한 미소를 지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고 있어.'

에반이 이야기한 게 분명했다. 지금도 자신을 바라보며 기사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섬찟한 광경.

루이가 직접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몸을 떨었다.

아니, 자신을 볼 때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 눈.

수많은 기사를 봤지만, 루이와 같은 이는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어.'

멘소나 자작은 그제야 걱정이 되었다.

* * *

또 한 명의 머리를 베어 넘겼다.

[1243:12:33]

숫자를 보니 저절로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기사뿐만 아니었다.

병사들 역시 열 시간에 가까웠다.

심지어 넘는 이들도 있었다.

정예병.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달랐다.

'좋아.'

병사들이 이정도인데 기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루이는 오랜만에 포식했다.

게다가 이번 전투로 끝나지 않을 거다. 루이의 시선이 멘소나 자작에게 향했다.

얼굴에 욕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루이에 대한 적의도.

루이는 귀족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았다.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날슨을 상대하기 위해서 온 병력이었다.

'남은 병력이 더 많다는 이야기지.'

명분은 이쪽이 가져갔다. 오늘처럼 영지전을 걸지는 못해도 무언가 수작질을 부릴 것이었다.

'당분간 시간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루이로서는 멘소나 자작이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멘소나 자작만 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게 당연했다.

'일단 이번 전투부터야.'

루이의 눈이 번뜩였다. 아직 적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항복할 줄 몰랐다.

그전에 최대한 먹어야 했다.

파지직.

루이의 검에서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루이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 * *

그러나 다행히도 루이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멘소나 자작은 끝까지 백기를 들지 않았다.

마지막 기사의 목이 베인 후,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보만이 개입했다.

"...멘소나 측이 전투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전투를 중지합니다. 신성한 전투의 승자는 날슨입니다."

"말도 안 돼!"

날카로운 외침. 멘소나 자작이었다.

자작의 새하얀 수염이 떨려왔다. 그리고 수염만큼이나 얼굴 역시 창백해졌다.

"이건 잘못됐어!"

그는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도중에 중지하지도 못했다. 만일 조금만 냉정했다면 이 사태가 오기 전에 막았을 거다.

그런 멘소나 자작을 바라보는 보만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멘소나 측에서는 이 판단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당연하···!"

자신도 모르게 외치려던 멘소나 자작은 보만의 눈과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이성이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서 보만의 판단에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황실과 신전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흥분해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멘소나 자작의 고개가 내려갔다. 꼬리를 내린 것이었다.

그제야 보만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사전에 약속된 기한까지 날슨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십시오. 이에 대해서는 황실과 신전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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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38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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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죠.

보만의 말에 부인과 한센의 표정이 밝아졌다.

부인은 환성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아냈다. 그리고 한센 역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센은 전투의 여파로 오른발을 절뚝거렸다.

늙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센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막대한 배상금. 멘소나가 철광을 빼앗기 위해서 과하게 측정했던 배상금이 그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철광을 지키는 것만 생각했지 배상금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던 일행들이었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하였다.

보만은 대답하지 않은 멘소나 자작을 바라보았다.

결국, 무겁게 닫혀 있던 멘소나 자작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멘소나 자작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애당초 배상금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멘소나 자작이었다.

그러나 배상금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기사와 병사들.

이번 전투에 쓰인 기사와 병사들은 멘소나 자작의 것이 아니었다.

빌려온 것.

빌려준 이들에게도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과연 칼튼 백작이 자신을 감싸줄까?

지금까지의 칼튼 백작을 떠올리면 자신을 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 한순간 막대한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멘소나 자작은 털썩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보만은 그런 멘소나 자작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날슨 일행들과 떠나는 루이.

"...황금의 기사인가."

새로운 강자.

그 이름이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 * *

날슨 저택은 축제 분위기였다. 멘소나에게 받을 배상금이면 빚을 갚고도 남았다.

게다가 날슨에게는 철광도 있었다.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떠난 하인들도 다시 불러야겠어요."

"제, 제가 여, 연락하겠습니다."

부인도 한센도, 그리고 하인까지 모두가 즐거워했다.

"이게 다 루이 경 덕분입니다."

"예,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루이는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

지금은 승리를 즐겨야 할 때였다. 루이는 고개를 주억이며 같이 축배를 들었다.

싸구려 포도주였으나 모두에게는 그 어떤 고급술보다 달콤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모두의 흥분이 가라앉자 루이가 입을 열었다.

"진짜 위험한 건 이제부터입니다."

접객실에서 루이가 입을 열었다.

"경, 그게 무슨 소리죠?"

갑작스러운 루이의 말에 부인이 의아해했다. 그러나 한센은 루이의 뜻을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친해졌는지 루이의 무릎 위에서 놀던 아이가 부인의 눈총에 일어났다.

"도, 도련님. 저, 저랑 산책하죠."

하인이 아이를 다독여 떠났고 루이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광산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요."

칼튼 백작의 명성은 부인도 잘 알았다. 탐욕스러운 괴물.

그런 이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루이는 그런 부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앙심을 품고 더 지독하게 나올 겁니다."

"더 지독하게라면···."

"정공법이 안 되었으니 다른 방법을 쓰겠지요."

그제야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루이는 그런 부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입니다."

담담한 루이의 말이 접객실에 울려 퍼졌다.

* * *

"죄, 죄송합니다!"

멘소나 자작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가 찢어지면서 피가 튀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이마의 고통의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멘소나 자작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

바로 칼튼 백작이었다.

"흐음, 죄송이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멘소나 자작의 몸이 떨려왔다.

"내가 아무래도 자작을 과대평가한 것 같구려."

"부, 부디 용서를."

애처롭게 떠는 멘소나 자작을 보던 칼튼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멘소나 자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시게.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어찌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까와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칼튼 백작의 목소리에 멘소나 자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멘소나 자작을 보며 칼튼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힘이 들었을 테니 당분간 쉬고 있게."

멘소나 자작이 맡고 있던 일들을 놓으란 소리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만 들어가 보게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멘소나 자작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때, 칼튼 백작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 한 가지 더."

"...예?"

멘소나 자작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 멘소나 자작을 보며 칼튼 백작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 일로 다른 귀족들의 심기가 불편할 테니 자네가 잘 다독여주게."

"..."

멘소나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뜻을 모를 멘소나 자작이 아니었다.

자신은 관여하지 않을 테니 다른 귀족들에게 알아서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이번 일은 칼튼 백작의 명령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멘소나 자작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멘소나 자작이 사라지자 웃고 있던 칼튼 백작의 얼굴이 다시 차가워졌다.

"...멍청한 놈."

방금 나간 멘소나 자작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버리기에는 아직 쓸모가 많았다. 멘소나 자작처럼 충성스러운 개는 몇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칼튼 백작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날슨이라."

이번 일은 칼튼 백작의 예상 밖이었다. 설마 날슨이 이길 줄은 몰랐다.

날슨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지만 칼튼 백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좋게 가려고 했더니 이렇게 이빨을 드러내는군."

이 정도 이빨은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감히 자신에게 대항했다. 이 사실이 거슬렸다.

이대로 몸을 숙였다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었을 거다.

칼튼 백작으로서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채찍을 들어야지."

칼튼 백작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1621:20:12]

루이는 시간을 노려보았다. 이번 전투로 제법 많은 시간을 벌었다.

목표한 시간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대로 고민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

루이의 눈동자에 결의가 떠올랐다. 동시에 속으로 상점을 불렀다.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글자.

"...카스의 가호."

루이의 세계가 변했다.

좁던 방은 사라지고 숲이 나타났다.

그리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들.

그 앞에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는 형태를 구분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

무릎을 끌어 앉고 있는 어린아이의 형상이었다.

이마에 있는 눈을 제외하면 인간과 같은 형상이었다.

곧 카스의 눈들이 루이를 향했다.

[...]

이번에는 전처럼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루이를 바라보던 눈 주변에 주름이 생겼다.

그와 함께 루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루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방으로 돌아온 루이는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카스의 마지막 모습.

그건···.

"눈을 찡그린 건가?"

보기 싫은 무언가를 봤다는 듯.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착각이 아니었다.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효과는 있었다. 처음에는 이마만 빛났던 것이 지금은 머리 전체가 빛나고 있었다.

별을 닮은 빛.

동시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머릿속을 물로 씻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자신의 내면이 한층 단단해진 감각.

그 감각을 느끼며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지.'

루이는 신을 신봉하진 않았다. 그런데 신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져다주길 바랄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

기브 앤 테이크.

딱 그 정도 거리가 좋았다.

[621:19:57]

시간을 확인한 루이가 고개를 주억였다.

"다음은 메르실라인가···."

메르실라의 가호.

그 외에도 몇 가지 신을 선정했다. 처음만 해도 앞이 막막했으나 이제는 길이 보였다.

* * *

멘소나 자작으로부터 배상금 일부가 들어와서 저택을 떠나갔던 하인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날슨 남작령에 머물고 있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싸움이 벌어지면 하인들이 위험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저택은 다시 활기를 찾아갔고 부인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상단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버님, 선대 날슨 자작님과 거래하던 상단이에요."

선대는 부인의 남편이었지만 루이는 알아들었다.

부인의 소개에 한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토호 상단의 왓슨이라고 합니다."

토호 상단의 주인인 왓슨은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중년인이었다.

"...용병, 루이입니다."

루이는 어째서 왓슨을 자신에게 소개해주는지 의아했지만, 일단은 인사를 받았다.

부인은 기뻐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철광 개발을 이분들이 맡아주기로 했어요."

"광산을 다뤘던 경험은 적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루이는 그제야 왓슨이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광산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영주가 모든 걸 처리할 수 없었다.

기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단이나 상회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의 시선이 부인에게 향했다.

자신들은 아직 위험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루이의 시선에 입을 연 건 부인이 아니라 옆에 있던 왓슨이었다.

"사정은 부인께 들었습니다. 사실 저희 상단은 돌아가신 날슨 자작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백작이 무서워서 나서지 못했지만···."

왓슨은 염치가 없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흔쾌히 나서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답니다."

그제야 루이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영지전에서 이긴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왓슨을 욕할 순 없었다.

지금 이렇게 나선 것만으로도 큰 모험이었다.

'물론 그만큼 이익도 크겠지.'

철광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단 역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튼, 철광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왓슨은 호기롭게 외쳤다. 부인은 그런 왓슨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토호 상단이 움직였다.

기술자들을 데리고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처음 루이의 말을 듣고 걱정하던 부인과 한센도 점차 시간이 지나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한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려했던 소식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습격이요?"

"예. 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붕대를 두른 왓슨이 뒷말을 삼켰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왔군.'

루이는 이번 일이 시작이란 걸 깨달았다.

"습격한 이들은 누굽니까?"

"병사들이 와서 확인했지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신분을 알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근처 난민들인 것 같다고···."

난민이 도적으로 변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난민일 리가 없었다.

아무리 작은 상단이라고 해도 상단은 상단이었다.

호위 하나 없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이번 일은 위험을 알고 일을 진행했다. 평소보다 호위를 늘렸을 거다.

호위를 뚫고 기술자들을 죽였다.

왓슨은 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만 믿어달라고 말했는데···."

"아니에요."

부인은 고개 숙인 왓슨을 토닥였다.

그러나 접객실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곧 왓슨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다시 기술자를 모아보겠습니다."

왓슨의 말에 부인은 입을 오므렸다.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해요."

칼튼 백작의 짓이라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필시, 계속해서 방해해올 것이었다. 날슨이 철광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하지만···!"

왓슨의 외침에 부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왓슨 상단주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제가 가죠."

루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접객실에 있던 일행들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 경?"

"제가 철광을 지키겠습니다."

루이의 말에 일행들이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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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의 의도.(무료 마지막)

루이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부인은 놀란 눈으로 루이를 보았다.

"경께 그런 일까지 부탁드릴 수는···."

철광은 이곳으로부터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저택에 머무르면서 오고 갈 수는 없었다.

즉, 철광에서 경비를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다른 호위들도 있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로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걸 기다렸다.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알아서 사람을 보내줄 테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일행들에게 말할 순 없었다.

"부인, 전 용병입니다."

루이의 말에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한센 역시 곤란한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용병이기 이전에 기사이며 귀족이었다.

어느 귀족이 노숙하면서 경비를 서겠는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왓슨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역시 루이의 소문은 들었다.

황금의 기사.

루이가 도와준다면 철광은 안전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루이 경! 제가 편히 지낼 수 있게 준비해놓겠습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왓슨이 루이의 손을 붙잡았다.

루이를 보는 부인과 한센의 눈빛이 변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신들을 돕는 건가. 사실 루이 정도 실력자면 저택에 머물러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직접 금을 써서 병력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에도 솔선수범하여 나선다.

날슨 남작가에게 있어서는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이번 일은 제 일이기도 합니다."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말하는 루이.

한센은 잠깐이지만 루이가 부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부인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에 그러한 기색은 없었다.

루이가 날슨 가문의 일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나서주는 것이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영웅이로구나!'

이 세상에 아직 기사도는 남아 있었다.

같은 걸 생각했는지 루이를 바라보는 부인의 눈빛도 촉촉해졌다.

훈훈해진 분위기에 왓슨이 입을 열었다.

"전 그럼 새로운 기술자들을 구해보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부인은 그런 왓슨의 손을 붙잡았다. 부인의 시선을 받은 왓슨은 굳은 얼굴로 접객실을 나섰다.

왓슨이 떠나가자 루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철광뿐만 아니라 이곳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루이의 말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이 안전했던 건 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가 떠나면 저택도 위험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 달랐다.

"용병을 고용해야겠군요."

부인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이를 구해야 합니다."

"길드에 직접 의뢰해야겠습니다."

한센이었다. 역시나 경험이 많은 탓에 루이가 말하고자 하는 걸 알아챘다.

길드의 보증이 붙은 용병들.

"예, 비싸더라도 확실하게 하는 게 낫습니다."

"알겠어요."

루이의 말에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만한 돈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들어올 것이었다.

멘소나 자작이 땅과 사업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한센은 굳은 얼굴로 용병 길드로 향했다.

한쪽 발이 불편했으나 그 역시 기사였다.

능숙하게 말을 탔다.

그리고 남은 루이는 저택 뒤에 있는 산을 오가며 사냥을 했다.

부인과 하인들은 루이가 수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센 역시 젊었을 때는 종종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감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루이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산을 오가는 루이의 얼굴은 탐탁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조해.'

조그마한 산에 큰 짐승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늑대가 전부였다.

그것들로는 루이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인내했다.

곧 열매가 열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센이 떠난 지 사흘이 지나갔고 한센은 열 명의 용병들과 돌아왔다.

"용병 길드의 보증서입니다."

한센은 부인과 루이를 보자마자 종이를 건넸다.

루이는 한센이 내민 종이를 살폈다. 길드의 직인이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루이가 가입한 용병 길드였다.

데리고 온 용병들도 모두 3급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그중 셋에게는 에테르가 느껴졌다.

세례를 받은 이란 뜻이었다. 루이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장발을 지끈 묶은 중년 용병.

'2급 용병은 저자이군.'

중년 용병과 루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일한 2급 용병.

실력자였다. 위급할 때, 이들이라면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신분 확인도 모두 마쳤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보고를 올리는 한센을 보고 의아해하긴 했으나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의 보증만 믿지 않고 따로 확인을 거쳤단 뜻이었다.

용병들은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루이를 관찰했다.

루이는 자신을 살피는 용병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도 황금의 기사에 대해서는 들은 게 분명했다.

용병 일을 하려면 소문에 민감해야 했다.

'이정도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루이의 예상은 맞았다.

경험이 많은 용병답게 알아서 일을 나눴다.

그리고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이 왓슨이 찾아왔다.

철광으로 떠날 준비가 된 것이었다.

* * *

달그락, 달그락.

달릴 때마다 마차가 흔들렸다. 영지와 달리 광산까지 길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차 안에 있던 왓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사님도 같이 타고 가시지."

"전 이게 편합니다."

말 위에 올라있는 루이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있는데 굳이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다.

왓슨도 그런 루이를 보며 더 권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긴 했으나 싫다는 것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어제 사람을 보내보니 다행히 쓰던 장비들은 무사하다고 하더군요."

루이는 왓슨의 말을 들으며 이동했다.

물론, 큰 관심은 없었다.

사실 루이는 광산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광산을 노리고 모여드는 하이에나들이었다.

"...역시 움직임이 빠르네."

"예?"

갑작스러운 말에 왓슨이 의아해했다. 루이는 왓슨을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준비하세요. 습격입니다."

산을 바라보는 루이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루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그러나 루이의 경고 덕분에 호위들은 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질주하는 한 마리의 말.

루이의 말이 가파른 산길을 평지처럼 달려갔다.

곧 빛이 번뜩였다.

비명과 함께 사람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시체에는 머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말과 그 주인은 산을 누비며 습격자들을 응징했다.

호위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루이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이들까지 쫓아가면서 숨을 끊었다.

"...엄청나군."

왓슨이 감탄했다. 황금의 기사.

그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불안해하던 기술자들도 안심할 수 있었다.

저런 기사가 옆에 있는데 두려울 리가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왓슨은 마차에서 내려서 루이를 맞이했다. 왓슨의 손에는 물에 젖은 천이 들려있었다.

"감사합니다."

루이는 천을 받아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기뻐하는 왓슨과 달리 루이는 표정은 밝지 않았다.

'너무 적어.'

루이의 성에 안 찬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정도라면 루이 없이 호위만으로도 충분했다.

적들이 루이가 합류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과가 뻔했다.

'간을 보는 건가?'

이번 습격으로 적들이 얻어갈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철광에 도착하고 얼마 뒤, 적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중 작전이었군."

하인이 가져온 소식.

일행들이 습격당했을 때, 저택에도 습격이 있었다고 했다.

"피해는?"

"용병 두 분이 다치긴 했으나 큰 상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용병들이 없었다면 일이 커졌을 거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용병들이 일을 잘 해주고 있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왓슨이 안도했다. 루이는 그런 왓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인이 돌아가고 루이는 왓슨을 보며 말했다.

"전 한 번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그런 일은 다른 이를 보내셔도···."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사실은 정찰하면서 사냥이라도 해보려는 의도였지만 그를 모르는 왓슨은 감탄했다.

'역시 다른 기사와는 다르구나!'

사실 이곳까지 따라온 게 대단한 일이었다.

왓슨이 철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지시한 건 장비의 확인도, 철광의 확인도 아니었다.

바로 루이의 숙소였다.

본인은 마차에서 머물 생각으로 기술사들을 닦달해서 숙소를 만들고 있었다.

왓슨의 시선은 그렇게 루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그로부터 두 번의 습격이 더 있었다.

루이는 마지막 습격자의 목을 베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 보내주는 건 좋은데···."

무언가 찜찜했다. 다행히도 저택의 습격은 한 번으로 그쳤다.

그리고 다른 두 번의 습격 역시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를 지치게 하려는 것인가?'

짧은 사이에 세 번이나 보낸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다른 호위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기사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초인.

체력도, 회복력도 인간의 틀을 넘어서게 된다.

루이는 산 위에서 철광을 내려다보았다.

작업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상단에서 광부들도 고용하기 시작했다.

루이와 호위들 덕분에 기술자들은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루이는 찝찝한 기분을 삼키고는 숙소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또 한 번의 습격이 있고 난 다음에야 진짜 노리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쪽이 함정이었어.'

루이를 잡아놓기 위한 함정. 적들이 진짜 노리는 건 다른 것이었다.

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님, 오늘도 고생하셨···."

"상단주님, 저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까?"

왓슨의 말을 자르고 루이가 입을 열었다. 루이의 말에 왓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안 왔습니다. 오늘따라 늦네요."

왓슨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반나절마다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미 도착할 시간.

"젠장."

루이는 욕설을 내뱉었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계속해서 먹잇감을 던져주는 바람에 방심하고 있었다.

'저택의 습격은 의도된 것이었어.'

이중 작전이 아니었다. 삼중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신뢰를 얻기 위한 장치. 용병 길드의 보증.

그것을 너무 믿고 있었다.

애초부터 습격 자체가 거짓이었다.

날슨을 노리는 칼은 처음부터 안에 있었다.

'길드 자체가 속였을 리는 없어.'

용병 길드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고작 백작의 부탁 때문에 자신들의 신용을 낮출 리가 없었다.

하나, 아니면 둘.

용병 개인에게 손을 쓴 것이었다. 적들은 날슨이 용병을 찾을 거라는 것을 예상했었다.

아니, 날슨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루이의 머릿속에 용병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님?"

루이의 얼굴이 굳자 왓슨이 의아해했다. 루이은 그런 왓슨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택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루이의 표정을 본 왓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이해할 수 없지만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호위도 더 늘렸으니 괜찮을 겁니다."

광부들이 들어오면서 호위의 수도 늘렸다. 그들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광부들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왓슨의 말에 루이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무 늦어.'

말을 타고 가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루이는 말을 고삐를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파지직.

발끝부터 올라오는 에테르.

쾅!

곧 루이의 신형이 대포처럼 쏘아졌다.

< 돌아가서 이야기하죠.(유료 시작) >

날슨 저택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사방에서 하인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고 한센은 그 광경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너무 원망하지 마쇼. 이쪽도 살려고 하는 거니."

장발의 용병. 그의 몸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 피의 주인은 다른 용병들이었다.

배신.

용병 길드가 보증을 선 용병이 고용주를 배신했다.

이 일은 가볍지 않았다. 앞으로 용병 일을 하지 못할뿐더러 다른 용병들에게 평생 쫓겨 다닐 것이었다.

그러나 용병이 그걸 감수할 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뜻도 되었다.

쾅!

밖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한센과 용병의 시선이 옮겨갔다.

"...성질 한 번 급하네."

용병이 투덜거렸다. 저택이 불타자마자 진짜 습격자들이 움직인 것이었다. 들려오는 비명은 그들의 짓이었다.

한센은 뒤에서 떨고 있는 부인과 아이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안 좋았다.

그런 한센을 보며 용병이 입을 열었다.

"아이만 넘기쇼. 그럼 저들에게 두 분의 목숨은 넘어가달라고 부탁해볼 테니."

용병의 말에 아이는 제 어미의 옷깃을 붙잡았다.

남작의 작위는 단승이었다.

부인이 직접 작위를 받지 않고 어린 자식에게 넘긴 것도 그 이유였다.

아이가 죽으면 이제 날슨 가문은 사라지게 된다.

작위도 없는 평민이 광산을 독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때, 한센이 그런 부인과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한센을 보며 용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감, 아무리 영감이 기사라지만 그 꼴로 무얼 하겠다고."

절뚝거리는 다리. 과거 영지전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용병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부인과 한센이 자신에게 잘 해줬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그러나 한센은 그런 용병을 보지 않았다.

"가주님.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도련님과 도망치십시오."

"한센 경···."

"광산이 있는 곳으로 향하십시오."

루이가 있는 곳. 그곳만이 안전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소."

한 명은 평생 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라서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거요. 저 짝들에게 걸리면 부인도 무사하지 못하오."

용병이 밖을 턱짓했다.

한센도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날슨의 희망을 버릴 순 없었다.

'연락을 보내지 못했어. 지금쯤이면 루이 경도 이상을 깨달았을 거야.'

예측이 아니었다. 그저 한센의 바람이었다.

한센도 부인과 아이가 철광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간에 루이를 만나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 하나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십시오!"

한센은 머뭇거리고 있는 부인을 향해 외쳤다.

한센의 외침에 부인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떠나면 이제는 한센과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면 한센의 각오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한센 경."

부인의 목이 메왔다. 한센은 그런 부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저 역시 그동안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어리게만 느껴졌던 그녀가 어느덧 일가의 주인이 되었다.

늙은 기사는 그녀를 모신 걸 후회하지 않았다.

늙은 기사는 그렇게 자신의 주인을 떠나보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용병을 보았다.

"...기다려줘서 고맙네."

용병이 아니었다면 이런 시간조차 얻지 못했을 거다. 한센의 말에 용병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라고 좋아서 하는 짓은 아니라서."

배려는 여기까지였다. 이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였다가는 자신이 위험했다.

용병이 검을 들어 올렸다.

선명하게 피어나는 에테르.

그리고 늙은 기사 역시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곧 둘의 신형이 격돌했다.

* * *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상처 입고 늙은 기사. 그리고 비록 용병이지만 세례를 받고 전쟁터를 오갔던 사내.

용병은 늙은 기사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핏물이 바닥을 적셨으나 늙은 기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용병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넌···."

"그 용병이군."

침입자들은 용병을 알아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용병. 그리고 쓰러져 있는 기사.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목표는 어디에 있지?"

그러나 침입자들에게 있어서 용병과 기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쪽으로 도망쳤소."

용병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한쪽을 가리켰다.

"철광이군."

침입자는 바로 알아봤다.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후 침입자들이 떠나갔다.

부인과 아이의 뒤를 쫓으려는 것이었다.

용병은 그런 침입자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부인과 아이를 응원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싸늘한 시체.

"...노인네가 힘도 좋아."

상처가 아려왔다. 그러나 곧 늙은 기사의 얼굴을 확인한 용병은 실소를 흘렸다.

늙은 기사는 웃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웃고 있던 것이었다.

늙은 기사가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과거의 추억이라도 떠올렸겠지.'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던 것은 있었다.

후회 없는 삶.

진정으로 모시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이보다 기사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부럽구먼."

용병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목줄이 묶인 개였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주인을 향해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낭만은 사치였다.

* * *

부인은 아이를 안고 달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멈추지 않았다.

발목까지 오던 옷은 이미 흙과 피로 더러워졌고 숨 역시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계는 진작에 도달했다.

"어, 엄마."

아이는 그런 부인을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비록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려움이 아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울음은 부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해.'

설령 자신의 발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생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했다.

오로지 그 하나가 부인을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그런 부인의 노력에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달그닥, 달그닥.

말이 부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애당초 에테르가 없는 보통 인간이 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심지어 부인은 아이까지 업고 있었다.

말 위에 있던 침입자는 부인을 보며 감탄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란 건가."

상처를 보면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 꼴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그사이 다른 말들도 부인의 곁에 도달했다.

침입자는 부인을 보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석양 사이로 검날이 반짝였다.

"외롭지 않게 같이 보내주지."

침입자의 말에 부인은 눈을 감았다. 아이를 쥐고 있는 손이 떨려왔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기력도 없었다.

침입자는 말에서 내려서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때.

쿵.

작은 진동.

침입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진?'

아니었다. 느낌이 달랐다.

쿵!

다시 한번 땅이 울렸다. 이번에는 전보다 확실하게.

먼저 반응한 건 말들이었다.

"휘이이잉!"

말들이 일제히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 때문에 다른 침입자들도 말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질린 말들.

침입자들은 당혹해하면서 말을 다독였다.

침입자들은 모두 에테르를 익힌 기사들이었다.

짐승에 불과한 말의 감각이 기사들보다 좋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말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의 몸속에 새겨진 본능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쾅!

갑작스러운 충격에 침입자들의 눈빛이 변했다.

"...!"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건 지진 따위가 아니었다.

"온다!"

빠르게 접근하는 무언가.

침입자들이 무기를 뽑았다. 그리고 숲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콰직!

하늘에서 그림자가 떨어지면 아래 있던 기사의 몸이 으깨졌다.

"뭣···!"

"...!"

한순간에 일어난 일.

그리고 침입자들은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림자를.

사나운 기세가 침입자들을 압박했다.

* * *

"루이 경!"

울먹이는 부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항상 부인의 곁을 지키던 한센이 보이지 않았다. 루이는 부인의 상태를 보고 사정을 짐작했다.

'이미 늦었나.'

루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루이의 시선이 적들을 향했다.

자신을 보며 경계하는 적들.

역시나 지금까지의 침입자들과는 달랐다.

일정 수준에 오른 기사들.

침입자들 역시 루이의 정체를 눈치챘다. 허리춤에 걸린 검을모를 수가 없었다.

"황금의 기사!"

"모두 조심해라!"

일제히 검이 겨눴다. 루이는 그런 침입자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기사들은 그런 루이에게 대항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영지전에서도 홀로 기사들을 상대했던 루이였다.

침입자 중에는 그들보다 나은 이들도 있었지만, 루이에게는 어느 쪽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동료들이 죽어 나가자 남은 이들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무심한 시선으로 검을 휘두르는 루이는 악몽 그 자체였다.

강자였던 이들이 진정한 포식자를 만나서 약자로 떨어진 것이었다.

* * *

뒤늦게 나타난 용병 역시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모자.

루이를 보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영감, 좋겠수다. 영감이 한 짓이 헛짓이 아니었나 보오."

용병은 실소를 흘렸다. 용병은 루이를 봤을 때 뛰어난 기사라고 생각했다. 소문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광경은 용병의 예상을 벗어났다.

어째서 늙은 기사가 희망을 버리지 못했는지 알만했다.

'쉽지 않겠네.'

용병은 자신에게 목줄을 채운 이를 떠올렸다. 그자는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모든 침입자가 죽었다.

눈앞의 기사는 바람 따위로 쓰러질만한 기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태풍이 불어와야 했다.

용병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늙은 기사와 같은 만족스러움이 아니라 남은 이들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 * *

루이는 쓰러지는 용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봤던 용병.

한눈에 배신자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루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포기한 건가?'

침입자들이 죽는 걸 보고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루이는 곧 용병에 대해서는 잊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저는 괜찮지만 한센 경과 다른 이들이···."

저택에 남은 이들을 떠올렸는지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눈물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루이는 그런 부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죠."

"예."

루인은 부인을 부축했다. 몸을 일으키던 부인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루이 경, 상처가···."

그제야 루이는 옆구리를 보았다. 붉게 젖어있는 옷.

'싸우다 스쳤나 보네.'

눈으로 보니 따끔함이 올라왔다.

루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정도 상처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았다.

루이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회복될 것이었다.

루이보다 부인의 상처가 더 심했다.

"괜찮···."

걱정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저으려던 루이가 입을 닫았다.

'잠깐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어쩌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죠."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부인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 보증의 대가. >

저택의 꼴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남은 적들은 없었다. 부인을 쫓아오던 이들이 전부였다.

살아남은 하인들을 도와 시신을 수습하던 루이는 복도 구석에 있는 한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웃고 있는 한센.

싸우다 죽은 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체가 가지런했다.

'누군가가 정리를 해줬어.'

대체 누가? 알 수 없었다.

루이는 그를 보며 짧게 조의를 표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적들을 너무 얕잡아봤다.

'그래, 이곳은 왕국이 아니야.'

왕국의 게으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제국의 귀족은 그들보다 집요하고 더욱 탐욕스러웠다.

왕국에서는 귀족들이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대놓고 움직였다. 그러나 제국은 아니었다.

루이는 엉망이 된 저택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했다.

저택의 정리가 끝나자 장례식이 열렸다.

한센도 그렇지만 하인 대부분이 가족이 없었다.

그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날슨 저택에 남은 사람들뿐이었다.

"...루이 경.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삼 일간 치러진 장례식.

몰골이 피폐해진 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모든 걸 포기하면 어찌하나 걱정했던 루이의 우려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전보다 사나웠다.

이제 한센이 죽고 그녀에게 남은 건 아들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갚아줘야죠."

루이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

한센은 그녀에게 가족과도 같았다. 가족의 복수는 정당한 권리였다.

그러나 일이 쉽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침입자들에게서는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저 정도의 기사들이 흔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없다는 소리였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칼튼 백작과의 연관성도 증명할 수 없었다.

'이럴 때를 위해서 따로 키운 것이겠지.'

조사를 위해 병사들이 왔었지만 그들의 대답도 전과 같았다.

세트리아에서 넘어온 난민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트리아의 난민이 그만한 실력자들이라면 세트리아가 저런 꼴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루이에겐 방법이 있었다.

"먼저 보증의 대가를 받아야죠."

루이가 차갑게 말했다.

이번 일의 원인을 제공한 곳.

"용병 길드를 찾아가겠습니다."

보증을 잘 못 서면 어찌 된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모든 건 거기부터였다.

몸을 일으키던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옆구리에서 고통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인이 그런 루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용병 길드 다르한의 지부장은 자신을 찾아온 이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검을 착용한 기사.

허리춤에 황금검이 눈에 띄었다.

이를 보고서도 누군지 모른다면 지부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최근에 가장 시끄러운 기사이자 용병 길드에 속한 용병이기도 했다.

황금의 기사, 루이는 지부장 앞에서 서신 하나를 흔들며 말했다.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그건 저희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용병들이 아니라 한 명이었지만 루이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저들은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병 길드의 지부장 정도 되면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용병에게는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터지자마자 서둘러서 조사했다.

눈앞 용병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신분도 만만치 않았다.

'세트리아의 자작.'

타국의 귀족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용병으로서 귀족까지 오른 이였다.

세트리아에서의 이명은 영혼수확자.

또 다른 이름은 시체성애자였다.

그를 보면 눈앞 용병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권위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무, 물론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보상이라···."

루이는 눈으로 계약서를 읽었다. 용병 길드의 보증이 있는 용병이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면 두 배의 위약금.

의뢰자를 공격하게 되면 열 배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자신감에 그만한 금액이 측정된 것이었다.

이처럼 배신자가 몇인지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열 명의 고용비의 열 배를 주어야 한다.

물론, 용병 길드에게 있어서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고용인 귀족.

용병이 귀족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지전이나 다른 귀족의 의뢰로 공격하는 거면 모를까, 의뢰주를 직접 공격하는 거면 문제가 컸다.

이번 일이 퍼지면 보증 자체에 신뢰가 떨어진다.

용병 길드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보상은 당연한 겁니다. 이번 일은 정식으로 황실에 문의하겠습니다."

지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론을 시키겠단 소리였다.

'씨발.'

용병 길드가 용병을 보증하듯이 용병 길드는 황실에서 허가를 내준다.

황실의 보증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실의 명예를 더럽힌 꼴이었다.

이번 일이 본부에 들어가면 지부장의 인생도 끝이었다. 본부에서는 그런 용병을 보증해준 지부장을 문책할 것이었다.

지부장은 서부에서나 힘이 있지 본부에서 볼 때는 일반 용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루이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물론, 저 역시 길드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지부장의 눈이 떠졌다. 지부장은 놀란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루이는 지부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면 저희도 조용히 넘어갈 생각입니다."

루이의 말은 지부장에게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무, 무엇입니까? 필요하신 걸 말씀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지부장의 말에 루이는 미소지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만 인정해주시면 됩니다."

지부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지부장을 보며 루이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심문할 때 용병 길드가 같이 참관했다."

"...!"

"그리 말해주시면 됩니다."

지부장의 눈이 커졌다. 루이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일입니다. 직접 나설 필요도 없고 서신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그, 그건."

지부장은 어리석지 않았다.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했다.

루이는 이번 일을 무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과거 멘소나 자작이 날슨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물론, 강요는 아닙니다. 거절하신다면 저는 이번 일을 황실에 물으면 될 뿐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지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응한다면 칼튼 백작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서부의 맹주.

그러나 거절하면 용병 길드에 먹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역시 끝난다.

망설이는 지부장을 향해 루이가 입을 열었다.

"대신 반란을 일으킨 용병이 셋뿐이었다고 진술하죠."

"..."

루이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셋만이라면 지부 자금과 사비로 어느 정도 충당이 가능했다.

윗선에 이야기가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지만 적어도 문책당하는 일은 줄어들 거다.

"...알겠습니다."

지부장의 말에 루이는 미소지었다.

* * *

루이는 지부장의 서신을 가지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루이가 돌아갔을 때도 저택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다. 며칠이 지났다고 잊힐 리가 없었다.

아이 충격이 심했는지 역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부인은 루이가 가져온 서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저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영지전을 걸 생각입니다."

루이의 말에 부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괜찮을까요?"

부인은 부정적이었다. 영지전이 잡히고 얼마나 많은 서신을 보냈던가. 그런데 답변이 온 건 없었다.

그녀의 말에 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희가 직접 보내면 무시당하겠죠. 저들은 중앙에 선이 닿아있습니다."

루이는 전에 만났던 에반을 떠올렸다.

그와 칼튼 백작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반이 이름을 기억할만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체프먼의 후계자이자 마스터. 그가 아무나 만나진 않을 거다.

루이의 말에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앙이 무시할 수 없는 이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부인의 시선이 루이에게 닿았다.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진작에 연락했을 거다.

루이는 부인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있습니다. 칼튼 백작의 힘이 듣지 않고 중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자. 더군다나 이번 일과 연관이 있는 자입니다. 아니,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이죠."

루이의 말에 부인의 눈이 커졌다.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예, 보만 남작에게 서신을 보낼 겁니다."

제국과 신전에서 보낸 중재자. 그러나 황실이 아니라 신전 사람이었다.

중앙 귀족들도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뒤에는 신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보만 남작을 기억했다.

영지전에서도 중립을 지키던 자.

당연했다. 그는 칼튼 백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칼튼 백작을 직접 노릴 수는 없습니다. 보만 남작이 요청하더라도 윗선에서 자를 가능성이 큽니다."

영지전이라고 하면 비슷한 수준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제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계급 차이가 심하면 부당함을 참아야 했다.

"그럼?"

"저흰 칼튼 백작의 다리를 노릴 겁니다."

팔은 지난번에 잘라냈다.

멘소나 자작. 지금 멘소나 자작의 자리를 대신하는 자.

"오원 자작."

칼튼 백작이라고 해서 직접 모든 귀족을 제어하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그 안에도 파벌이 있었다.

멘소나 자작과 오원 자작이 그 파벌들을 이끄는 이였다.

여기서 오원 자작까지 쳐내면 칼튼 백작으로서는 팔과 다리를 잃은 꼴이었다.

부인은 감탄했다. 부인이었다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영지전을 할 여력이···."

"그것 역시 방법이 있습니다."

영지전은 총력전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루이의 뜻을 깨달은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루이의 옆구리.

지난번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고 있었다.

방금 생긴 상처처럼 아직도 피 냄새가 짙었다.

그런 부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의 눈빛이 작게 빛났다.

이번 영지전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루이은 오원 자작 하나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 * *

멘소나 자작이 물러나면서 단번에 칼튼 백작 연합의 이인자로 올라선 오원 자작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황실에서 오원 자작에게 서신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지전?"

그것도 기사전이었다.

다섯 명의 기사를 차례대로 내보내서 마지막까지 남은 쪽이 승리하는 방식.

오원 자작은 눈을 껌뻑였다.

최근 영지전이 신청될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오원 자작은 서신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날슨 남작이라."

아는 이름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멘소나 자작이 날아가지 않았던가.

지금도 돈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영지전을 걸면 멘소나 자작에게 걸어야 했다. 이번 영지전이 끝나고 날슨 가문을 향해 일을 벌이고 있는 건 알았다.

'멘소나의 파벌 중 하나겠지.'

칼튼 백작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원 자작은 서신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그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자신한테 씌운 것이었다. 용병 길드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오원 자작은 실소를 흘렸다.

자신들이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그걸 역으로 당한 것이었다.

"이딴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이쪽까지 똥이 튀는구나."

오원 자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

< 최후의 결투. >

서신을 읽은 칼튼 백작의 시선은 차가웠다.

오원 자작은 그런 칼튼 백작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곧 칼튼 백작이 서신에서 눈을 뗐다.

"...제법이야."

설마 그쪽에서 먼저 반격을 할 줄은 몰랐다.

이쯤되니 칼튼 백작도 날슨 가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르세 자작."

"예, 백작님."

칼튼 백작의 물음에 염소와 닮은 중년인이 뛰어왔다.

멘소나 자작 대신 파벌을 이끄는 이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획한 이이기도 했다.

칼튼 백작 앞에 선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일이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런 일이 생겼다.

그러나 호르세 자작의 걱정과 달리 칼튼 백작은 호르세 자작을 책망하지 않았다.

이정도 수완이 있다면 호르세 자작의 일이 실패하는 게 당연했다.

"날슨 가문에 대해서 말해보게."

역사를 묻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상태.

호르세 자작은 급히 몸을 숙였다.

"예. 하인 몇이 남아 있으나 제대로 된 병력도 없습니다. 한센이란 기사 역시 이번 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칼튼 백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건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한센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일이 실패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튼 백작의 시선에 호르세 자작이 몸을 떨었다.

"무, 문제는 루이란 용병입니다. 이 자가 실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제야 칼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세, 세트리아에서 건너온 용병인데. 아직 그쪽의 정보까지는 얻지 못했습니다. 드, 듣기로는 귀족 출신이라고."

"귀족?"

이 말에 칼튼 백작이 반응했다.

"확실한가?"

"조, 조사해보겠습니다."

그저 소문이란 뜻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는 소리였다. 칼튼 백작의 시선이 다시 차가워지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 이번 일로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저, 저택 내에 의원이 오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호오."

이건 쓸만한 정보였다. 칼튼 백작의 반응에 호르세 자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튼 백작의 시선이 다시 오원 자작에게 향했다.

오원 자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할까요? 중앙에 요청해볼까요?"

영지전이 부당하다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기한은 아직 남아 있었다. 중앙에서 움직이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튼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대로 놔두게."

그리고는 턱을 괴었다.

"오원 자작."

"예, 백작님."

오원 자작이 고개를 숙이자 칼튼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영지전. 기사 셋은 내가 빌려주겠네. 자작은 둘만 준비하게나."

오원 자작의 눈이 커졌다. 백작의 기사를 빌려주겠단 소리였다. 내심 걱정했던 오원 자작이기에 기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백작가의 기사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처까지 입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칼튼 백작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이번 영지전에는 나도 참관하지."

"구, 굳이 그러실 필요가···."

오원 자작의 말에 칼튼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두 번이나 자신을 방해한 인물이 어떤 자인지.

칼튼 백작의 말에 오원 자작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영지전의 날이 다가왔다.

* * *

이번에 내려온 중재인은 보만 남작이 아니었다.

공정성을 위해 다른 이를 보낸 것이었다.

"이번 신성한 전투의 중재를 맡은 존 남작입니다. 진행 방식은 기사전. 양측에서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나와 차례대로 대결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최후에 남은 기사가 있는 진형이 승리하게 됩니다.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보만 남작과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눈빛은 차가웠다.

루이는 적들을 살폈다.

오원 자작과 함께 있는 기사들.

그중 하나의 무기가 익숙한 것이었다.

특이한 형태.

때마침 기사도 루이를 보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쳤다.

중년의 기사.

먼저 시선을 뗀 건 기사였다. 루이도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멀리 앉아 있는 한 명의 노인.

사실 기사들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기사들처럼 강대한 에테르는 없었지만, 이 자리의 누구보다 강렬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루이는 노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나섰군.'

칼튼 백작이 분명했다.

그 외에도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총력전과 달리 기사전은 다른 이들에게도 볼거리였다.

"이 전투의 결과는 전능하신 샤롯과 위대한 폐하의 뜻과 같습니다. 모두 맹세하시겠습니까?"

존 남작의 말에 먼저 오원 자작이 나섰다.

"오원 자작. 맹세합니다."

"날슨 남작 대리인, 맹세합니다."

부인 역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부인의 말에 존 남작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날슨 남작 쪽 기사는 한 분입니까?"

"예."

부인이 다시 답하자 존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이 차례대로 나온다고 해서 다섯 모두를 채울 필요는 없었다.

"그럼 신성한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기사부터 나와주십시오."

존 남작의 말에 루이가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달리 황금검 한 자루만 허리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루이 경."

걱정스러운 기색의 부인.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이를 보며 부인 역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부디 무운을."

부인의 기도를 들으며 루이는 나아갔다.

처음 나온 기사는 오원 자작의 기사였다.

기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기사의 눈을 피하긴 어려웠다.

'부상이 정말이었군.'

둘이 마주 보자 존 남작이 신호를 보냈다.

그와 함께 서로를 향해 검을 뽑았다.

쾅! 콰강!

서로의 검이 뒤엉켰다.

열 합이나 버텼을까? 루이의 검이 기사의 목에 꽂혔다.

짧은 순간에 끝난 경기.

그러나 누구도 당혹해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첫 번째 기사는 버리는 카드였다.

지금 루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싸움이 끝난 루이는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그를 본 기사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첫 번째 대결은 날슨 남작의 승리입니다. 다음 기사, 나와주십시오."

두 번째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이 역시 오원 자작의 기사였다.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었다.

존 남작의 신호와 함께 둘의 신형이 격돌했다.

처음 전투보다 격렬했다.

그러나 결과는 첫 번째와 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두 명의 기사를 잃은 오원 자작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이 역시 예상한 것이었다.

"세 번째 기사, 나와주십시오."

존 남작의 말에 기사가 오원 자작이 아니라 칼튼 백작을 돌아보았다.

칼튼 백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곧 둘의 검이 부딪혔다.

'듣던 것보다 실력이 낮아.'

소문이 부풀려진 게 아니었다. 그만큼 상처가 중하다는 뜻이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증거였다.

'아쉽군.'

상처 입은 몸으로 자작가 기사 둘을 쓰러트렸다. 인재였다.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탐을 냈을 거다.

그러나 이미 틀어졌다.

'싹은 잘라버려야지.'

칼튼 백작은 후환을 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루이를 바라보는 칼튼 백작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