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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기사들은 루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루이가 지닌 에테르는 위협적이긴 하나 숫자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둘, 높게 잡으면 셋 정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깨달았다.

'보이지, 않았어?'

루이의 움직임. 심지어 기사 둘을 공격할 때는 에테르조차 쓰지 않았다.

순수한 육체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압도한 것이었다.

특히나 맥스월의 호위로 따라왔던 기사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모시는 이가 죽었다.

기사로서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적들에게서 시저로 옮겨갔다.

"공주님 잘 챙기십시오. 그녀가 죽으면 끝입니다."

루이의 말에 시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다시 적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저 녀석들은 내 것입니다."

동시에 루이의 신형이 쏘아졌다.

"죽여라!"

파지직.

사방에서 에테르가 치솟았다. 주인이 죽은 이상 루이의 목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기사들이 검을 들고 루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이는 기사 하나를 베어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30시간 후반에서 40시간 초반인가?'

마수의 숲에서는 40시간 아래가 없었다.

심지어 50시간이 넘는 적들도 많았다.

그걸 생각하면 차이는 명백했다.

'이들로는 내게 닿을 수 없어.'

게다가 루이는 그때보다 더욱 강해졌다.

루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기사의 머리가 떠올랐다.

그런 루이의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맥스월이 데려온 중년 기사. 루이는 모르고 있었으나 맥스월의 성과 같은 이름인 디메인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디메인 가문의 상징.

"네놈이!"

파지직.

다른 이들보다 선명한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쾅!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땅이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루이의 검이 막힌 것이었다.

"오."

루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법 쓸만한 녀석도 있었네.'

루이는 입술을 핥았다. 동시에 루이의 검에도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

힘으로 밀린다. 서서히 꺾이는 자신의 팔을 보며 단장의 눈동자 역시 떨려왔다.

그때, 옆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 경! 조심하시오!"

시저의 목소리. 그러나 루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날아오는 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공명.

콰직!

주먹은 검을 부수고 다가온 기사의 머리까지 박살을 냈다.

"놈!"

분노한 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단장도 깨달았다.

부하가 죽는 순간에도 검에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한 손을 놨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전력이 아니었단 소리였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루이가 검 손잡이를 잡았다.

끼긱, 끼기긱.

검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는 당한다!

단장이 몸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루이는 그걸 지켜만 볼 생각은 없었다.

파지직!

다시 한번 전류가 번뜩였다.

"...머리를 베려고 했는데."

"크윽."

뒤로 물러난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바닥에는 손이 떨어졌다. 쥐고 있는 검과 함께.

"..."

맥스월이 죽었을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대전에 내려앉았다.

맥스월의 경우 방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왕실 기사단장보다 강하다고 말해지는 디메인 기사단장이 제대로 힘도 못 쓰고 패퇴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람은 공주와 시저보다는 덜 했다.

공주가 루이를 고용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저 역시 루이를 추천했으나 이렇게나 강할 줄은 몰랐다.

맥스월이 데려온 기사들이 뒷걸음쳤다.

단장마저 팔이 잘렸다.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란 걸 알아챈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전 중앙.

"공주가 제법 쓸만한 말을 구해왔구나."

조세핀이 고혹적인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당혹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대범한 건가? 아니면···.'

자신이 있던가.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었다.

일국을 뒤흔드는 여인이었다. 이만한 일로 무너지진 않을 거다.

조세핀이 허공을 손짓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하일과 바론이 검을 뽑았다.

"미하일 기사단은 반역자들을 토벌해라!"

"바론 기사단이여. 적을 베어라!"

둘의 명에 기사단들이 움직였다.

"왕실 기사단은 왕실의 기강을 세워라!"

남아있던 왕실 기사들 역시 단장의 말에 움직였다.

그렇다. 진짜 전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시저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루이 경을 도와라! 왕국을 위해!"

"왕국을 위해!"

말하면서 시저와 엠마는 공주의 곁에 남았다.

루이의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주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

검을 든 둘의 눈동자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 * *

기사들이 뒤엉켰다. 동시에 사방에서 빛이 번뜩였다.

에테르와 에테르의 격돌.

초인들의 전투. 얼마 남지 않은 근위병들은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파직, 파지직.

피 냄새와 함께 탄내가 올라왔다.

튀어 오른 핏방울이 에테르에 닿아서 증발하고 있었다.

격전의 중심. 그곳에 루이가 있었다.

쾅! 콰강!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의 몸이 튕겨 나갔다.

"침착하게 대응해라!"

"기사들보다 저 용병을 노려라!"

"어차피 저놈도 인간이야! 곧 지칠 것이야!"

사방에서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루이는 들려오는 외침을 보며 미소지었다.

'지칠 거라고?'

라움의 가호 2단계에 오른 루이의 체력은 인간의 틀을 벗어났다.

게다가 공명을 익히면서 에테르의 수발 역시 전과 비교할 수 없게 늘었다.

파지직.

에테르와 에테르가 부딪히면서 전류가 올라왔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루이의 검을 감싸고 있던 에테르는 사라졌다.

다른 이들 같으면 에테르를 끌어 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루이와 같은 기교는 불가능했다.

애당초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사들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건 결정적인 순간만이었다.

고작 그 정도.

아니면 기사끼리의 대련.

그러나 그 역시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끝난다.

장시간 싸울 일이 없었다.

"아쉽게도···."

루이의 주먹이 적의 머리를 가격했다.

쾅!

에테르가 담기지 않은 일격.

에테르를 몸에 보호하고 있음에도 일격에 허물어졌다.

이어서 검이 지나가고 목이 떠올랐다.

루이는 허공에 뿌려지는 핏물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익숙하거든."

장시간의 전투야말로 루이의 특기 아니던가.

자신을 지치게 하려면 고작 하룻밤으로는 부족했다.

에테르 역시 공명을 남발하지 않으면 하루 정도는 거뜬했다.

또 하나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대전은 이미 기사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바닥에 흐르는 핏물 때문에 붉은 수증기가 올라왔다.

"물러나라."

붉은 안개를 뚫고 검 하나가 쏘아졌다.

아니, 둘.

루이는 날아오는 검들을 쳐냈다.

'무거워.'

전과 달랐다. 앞을 보니 두 기사가 서 있었다.

각각 미하일과 바론 기사단의 단장들.

자존심 높은 그들이 손을 합친 것이었다.

그만큼 루이가 위협적이란 소리였다.

기사들을 더 잃을 순 없었다.

루이는 짧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일찍 나섰군.'

좀 더 숫자를 줄였어야 했다. 루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게다가 디메인 기사단장도 마무리를 못 했다.

누가 채가기 전에 끝을 봐야 했다.

루이가 둘을 향해 땅을 박찼다.

쾅! 쾅! 쾅!

셋의 신형이 뒤엉켰다.

단장급이라서 그런지 다른 일반 기사와는 달랐다.

날카로운 검이 루이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 어설펐던 합도 점점 맞아가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안 되겠네.'

루이는 혀를 차고는 검을 하나 더 꺼냈다.

"...!"

"...무슨."

적들의 표정이 변했다. 상대가 둘이라 검도 둘로 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행동이 꼬여서 전보다 못한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렇다.

'나를,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건가!'

미하일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바론 단장은 달리 생각했다.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상대가 알아서 자멸하고 있었다.

루이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애당초 루이는 검으로 상대하기 위해 꺼낸 게 아니었다.

새로 뽑은 검이 미하일 단장을 노렸다.

미하일 단장은 굳은 얼굴로 검을 쳐내려고 했다.

그 순간.

검이 울음을 토했다.

지이이잉.

"뭣···!"

콰가가강!

검이 터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루이가 예비 검을 네 개나 들고 다니는 이유.

그건 소모품이기 때문이었다.

'큭.'

루이는 자신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 파편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안 좋군.'

어디로 튈지 몰랐다. 손잡이가 있는 방향은 보호지만 나머지는 무방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이에겐 방법이 있었다.

허벅지에 푸른 빛이 흘러나오면서 상처가 아물었다.

메르실라의 신성.

그동안의 훈련 덕분에 쓸만하게 변했다.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강제 회복.

이후에는 한동안 전체적인 회복력이 줄어드는 단점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크, 허!"

검날이 복부에 박힌 미하일 단장이 괴로운 숨을 토했다.

루이는 단장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는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57시간.'

단장조차 60시간이 안 되었다.

새삼스레 70시간이 넘었던 존스가 얼마나 괴물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감상은 짧았다.

아직 적은 남아있었다.

그것도 먹음직스러운 적이.

"..."

바론 단장. 그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의 폭발.

그리고 회복까지. 가까이 있었기에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파편의 흔적이었다.

"대, 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겠지. 루이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전과 같은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상식과 어긋난 일을 당하면 동요하게 된다.

머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수 사냥꾼들이 이상한 거지.'

이능을 가진 마수를 사냥하다 보면 상식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언제 어떠한 공격이 어떤 식으로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손쉽게 바론 단장의 목까지 잘라냈다.

[792:11:09]

"좋아."

늘어난 시간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시 천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이번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루이는 다음 먹잇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디메인 단장. 그는 구겨진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의 신형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마, 막아!"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두 단장이 죽은 이상 루이를 막을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앞으로 나섰던 기사들의 머리와 팔이 허공에 떠올랐다.

루이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결국, 루이는 디메인 단장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네놈,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

푹.

"그러니깐 말이 많다고."

루이는 느릿느릿 검을 뽑았다. 이걸로 세 기사단의 우두머리가 죽었다.

남은 기사의 수는 적들이 더 많았지만, 전세는 일행들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었다.

적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조세핀.'

그녀가 루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매혹적인 미소.

그녀가 지금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대단한 기사구나. 이 왕국에 그대와 같은 이가 남아있었다니."

그녀의 목소리에 전투가 멈췄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루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루이라고 했던가? 나에게 오라. 공주가 무얼 약속했든 그 이상을 주마."

"..."

멀리서 말하고 있으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왔다.

달콤한 목소리.

터벅, 터벅. 루이가 걸음을 옮겼다.

이상을 깨달은 건 공주와 엠마뿐이었다.

"루이경!"

공주의 외침에도 루이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풀린 눈으로 조세핀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법?'

이것이었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들을 현혹한 건 이것이었다.

"그래, 작위를 원한다면 공작위를 내리지. 명예를 원한다면 왕실 기사단장도 되게 해주마.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그러던 루이의 걸음이 멈췄다.

"음?"

조세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이어진 루이의 행동은 조세핀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짝.

조용한 대전에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뺨을 때린 루이가 조세핀을 노려봤다.

조세핀의 놀란 눈이 루이를 향했다.

"...너, 방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루이의 목소리가 딱딱 끊어졌다.

기분 나쁜 느낌.

아직도 그녀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과거 신에게 잠식되어 갈 때 느낀 감정과 같았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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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딱 어울리네.

웃고 있던 조세핀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그것도 잠시, 루이를 바라보는 조세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호오, 한낱 인간이 매혹을 견딘 건가? 더욱 탐나는구나."

조세핀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매혹.

역시나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루이가 조세핀의 매혹을 견딜 수 있던 건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다.

강림 때 들었던 신의 속삭임.

그들의 속삭임은 이처럼 꺼림칙하진 않았다.

그리고 루이는 조세핀보다 매혹적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메르실라.

아무리 조세핀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녀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아름다움.

그녀와의 만남이 루이의 정신을 굳건하게 만들어줬다.

"어떤가? 내 것이 되지 않겠느냐?"

"네 것이라면 옆에 꼭두각시를 말하는 건가?"

루이는 왕을 턱짓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왕의 시선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세핀은 루이의 물음에 미소지었다.

"너와 같은 아이를 이것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

조세핀이 왕의 뺨을 쓸어내렸다.

"네가 원한다면 이 나라도 줄 수 있단다."

"...!"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을 유혹해서 나라를 흔들고 있는 악녀라고?'

아니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이 나라 따위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말을 뱉을 리가 없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저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순간, 빛이 번뜩였다.

"...대화 중에 칼을 쓰다니. 예의가 없는 아이구나."

조세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벽에는 어느새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역시.'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루이는 조세핀의 미간을 노렸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단검을 피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라면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제안은 거절하지.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줄 수 없어."

루이의 말에 조세핀은 의아해했다. 조세핀의 시선이 공주에게 향했다.

"내가 줄 수 없는 건 공주 역시 줄 수 없단다."

"아니."

루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조세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공주가 약속한 건 너의 목이거든."

"...!"

듣고 있던 공주가 화들짝 놀라 루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왕족을 제외하면 누굴 죽여도 상관하지 않겠다.

어차피 조세핀을 죽이러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 대상이 누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곧 조세핀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를 들은 공주와 엠마는 몸을 떨었다.

"...귀엽다고 봐주니 인간 따위가 기어오르는구나. 너 같은 아이에겐 예의를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어."

조세핀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척, 척.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루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였다.

"루, 루이 경."

그중에는 왕자들과 시저도 포함되었다.

기사 하나가 루이에게 달려들었다.

아까까지 같은 편에서 싸우던 왕실 기사였다.

그러나.

촤악!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루이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목을 쳐냈다.

"이딴 수작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동료라고 해서 망설일 것 같았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다.

루이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기사를 베던 루이의 시선이 조세핀에게 향했다.

"넌, 진작에 다른 이들을 조종할 수 있었으면서 그러지 않았지."

작은 유희? 아니었다.

"꼭두각시로 변한 녀석들은 간단한 명령밖에 수행하지 못해. 아니야?"

루이가 또 하나의 기사를 베어 넘겼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꼭두각시로 만들고 기사들은 그냥 놔뒀다.

루이의 시선이 공주와 엠마에게 향했다.

"그리고 여자한테도 안 먹히는 것 같군. 의외로 허점이 많네?"

"..."

조세핀의 시선이 루이에게 닿았다. 루이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꼭두각시로 변한 이들은 루이가 아니라 엠마의 적수도 되지 못했다.

이런 적들은 허수아비를 쓰러트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

루이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도중에 왕자가 나타났으나 걷어찼다.

정신을 잃고 바닥을 구르는 왕자.

죽이지만 않았지 공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걸 본 조세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네놈···."

그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잔재주 하나 알아냈다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리고 대전의 계단을 내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변했다.

"내 직접 너를 징벌해주마."

보랏빛 피부에 검은 눈동자.

머리카락 역시 흑발에서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루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인간이 아닌 것처럼 칭할 때부터 느낌이 왔다.

'...역시, 그 녀석과 같았어.'

마수의 숲에서 만났던 사내.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변하자 찌릿찌릿 몸에 털이 일어섰다.

그만큼 흉포한 기세.

"무슨?"

"괴, 괴물···."

"서, 설마 왕비?"

"공주님의 말씀이 사실이었던가!"

그녀가 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변하지 않는 건 왕과 세 왕자. 그리고 미하일, 바론. 두 후작뿐이었다.

'사람마다 정도가 다른가 보네.'

매혹에 오래 노출될수록 단단하게 엮이는 것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깨어난 기사들은 물론이고 공주마저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그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의 기세에 버틸 뿐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분명 조세핀은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 녀석만큼 절망적이지 않아.'

압도적인 공포. 절대적인 힘의 우위.

사내에게서 느꼈던 기세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같은 종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건 아니지.'

루이는 검을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다!'

사내뿐만 아니라 숲의 주인. 그 녀석에게서 느낀 기세가 더 무시무시했다.

루이의 신형이 조세핀을 향해 쏘아졌다.

* * *

쾅!

검과 조세핀의 손이 부딪혔다.

"너···."

끼릭, 끼리릭.

길어진 손톱이 루이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가 루이를 향했다. 그녀의 손이 바람을 갈랐다.

"큭!"

튕겨 나가는 몸. 가슴이 갈라지면서 피가 튀었다.

그녀의 손톱 앞에서 갑옷은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의 그림자가 뒤따랐다.

'빨라.'

그러나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이는 날아오는 손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팟!

다시 한번 피가 튀었다.

'아직도 느려.'

그녀의 속도에 못 따라가고 있었다.

밤의 숲에서 나온 뒤 실력이 무뎌졌다. 루이는 짧게 혀를 찼다.

밤의 숲을 나와서 상대했던 이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훈련으로 감각을 유지한다고 해도 실전만큼 좋은 건 없었다.

촤악!

살점이 찢어졌으나 루이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루이가 그녀의 공격을 막기 시작한 것이었다.

루이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집중.

동시에 루이의 눈이 반짝였다.

쾅! 콰강! 쾅!

검과 손톱이 부딪힐 때마다 대전이 뒤흔들렸다.

쉴 새 없이 빠르게 오가는 공방.

대전에 있는 이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와는 달라.'

그와는 달리 조세핀이 육체에 특화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도 조세핀처럼 다른 능력이 있지만 쓰지 않고 그렇게 강했던 건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조세핀은 그보다 약했다.

루이의 눈빛을 읽은 조세핀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 누구를 생각하는 것이냐?"

루이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눈치가 빠르군.'

전투 중에 루이의 생각을 읽어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조세핀의 분노는 루이의 예상보다 컸다.

"이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존재를 떠올린다고?!"

"...!"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루이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손이 날아왔다.

콰강!

튕겨 나가는 몸. 대전 끝에 있던 루이의 몸이 중앙까지 밀려났다.

'전력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다. 무언가 달랐다.

"...몸이 변하고 있어?"

조세핀의 몸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팔 역시 길어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었다.

루이는 중앙에 떨어진 검을 집었다. 죽은 기사의 검.

그리고는 조세핀을 향해 달려갔다.

"...난 변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줄 만큼 신사적이지 못하다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조세핀은 자신과 가까워진 루이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길고 위협적이었다.

"...변신 중에는 공격 못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바닥을 구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이미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루이가 있는 자리를 향해 다른 손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팔을 향해 가져온 검을 찔러넣었다.

공명.

지이이이잉.

검이 울음을 토했다.

전보다 강하게.

그리고 팔과 검이 부딪혔다.

콰가가강!

충격에 루이의 몸이 밀려났다. 루이는 어깨에 박힌 파편을 뽑아내고는 앞을 보았다.

자욱하게 올라온 흙먼지.

곧 먼지를 뚫고 팔이 채찍처럼 날아왔다.

"젠장."

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튕겨 나갔다.

쾅!

루이의 몸이 천장에 처박혔다가 떨어졌다.

루이는 목을 타고 올라온 핏물을 뱉어냈다.

'내상을 입었어.'

루이는 자신이 뱉어낸 피의 색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터벅, 터벅.

흙먼지를 가르고 나타난 조세핀.

그녀는 인간형 마수란 호칭이 잘 어울렸다.

길어진 두 팔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 높이 올라온 뿔.

하지만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눈 한쪽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긴 손으로 자신의 눈을 부여잡았다.

하나 남게 된 눈동자가 루이에게 향했다.

"감히! 감히! 감히! 날,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상처보다 모습이 변한 것에 대해 더 분노한 모습이었다.

루이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변하더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변한 게 아니었다.

"그게 본 모습인가? 너랑 딱 어울리네."

희대의 악녀.

루이의 말에 조세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곱게 죽이진 않으마! 네 놈의 살 한 점, 한 점을 씹어 삼킬 것이다! 살아있는 상태로 자신의 살이 갈가리 찢기는 것이 어떠한 기분인지 느끼게 해주마!"

조세핀이 루이를 향해 일갈했다.

그런 조세핀을 바라보는 루이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조세핀을 도발한 것과 달리 루이의 속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저건 힘들겠군.'

조세핀의 기질이 변했다. 전과 같은 생물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조세핀의 신형이 쏘아졌다.

쾅!

조세핀이 떨어진 자리에 균열이 생겼다.

이어서 날아오는 공격.

팔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역시 뱀처럼 루이의 몸을 휘감으려 들었다.

루이는 머리카락을 피하며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파지직.

그러나 그조차도 그녀의 공격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쾅! 쾅!

루이의 신형이 계속해서 밀려났다. 그때마다 상처 부위가 벌어졌다. 아까 강제 회복을 썼기에 자연 치유가 더딘 것이었다.

게다가 내상까지 입었다.

이대로 싸우는 건 힘들었다.

'페이즈 2라는 건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844:09:23]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지금 도망쳐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도망치게 놔두진 않겠지.'

왕국과 공주의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의 적.

조세핀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거다.

방법이라면 있었다.

앞으로 160시간.

기사 다섯에서 여섯을 죽이면 벌 수 있었다. 그걸로 메르실라의 가호를 올리면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걸로 이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가호도 한계는 있었다. 이 괴물과 싸우려면 한두 번의 회복 정도로는 불가능했다.

답은 강림뿐이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라움은 위험해.'

2단계의 가호. 그것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실라가 걸린다면 공명으로 싸울 수 있었다.

널린 게 검이었다.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강림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제한이 없었다.

오십 프로의 확률.

'운에 인생을 맡기는 건 내키지 않지만.'

살길이 있는데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 설령 라움이 걸리더라도 싸움을 빠르게 끝내면 돼.'

과거의 경험상 정신 간섭은 시간이 지체될수록 강해졌다.

초반만이라면 견딜 수 있을 거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강림."

순간 주변이 어둠에 물들었다.

뒤바뀐 세계. 그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루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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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38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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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군.(내용 일부 수정)

귓가에 울리는 북소리.

라움.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루이는 숨을 삼켰다.

라움의 시선은 전과 달랐다.

안타까움, 그리고 질책.

[...이곳은 네겐 아직 이르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힘은 재앙을 부르지.]

라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전과 달리 또렷하고 강렬하게.

그와 함께 루이의 정신도 아득해졌다.

* * *

폐에 공기가 들어가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지끈거리는 머리.

온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기억 역시 누군가가 칼로 난도질한 것처럼 끊겼다.

"대체···."

공기를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노인처럼 탁한 목소리.

그런 루이의 눈앞을 채우는 글자들이 있었다.

[99:58:02]

[강림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피만큼 선명하고 붉은 글자.

"루이 경!"

"일어났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공주와 시저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루이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강림을 썼어. 그리고···.'

라움과 만났다. 가호를 받을 때와는 달랐다.

라움의 말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경고.

"경은 죽을 뻔했네. 공주님께서 성수를 가지고 계셨길 다행이야."

시저가 루이를 보며 말했다.

성수. 메르실라의 성수가 분명했다.

왕족이 가진 성수였으니 고위 성직자의 신성이 담겼을 거다.

"조, 조세핀은?"

루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시저가 그런 루이를 부축했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네."

그제야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철이 부딪히는 소리와 괴성.

그곳에는 한쪽 팔이 잘린 조세핀이 있었다. 머리 역시 이리저리 뜯겨서 엉망이었다.

상처 입고 날뛰는 맹수. 딱 그러한 모습이었다.

그런 조세핀을 막아선 건 대전에 있던 기사들이었다.

왕실 기사, 디메인, 미하일, 바론.

모든 기사가 나서서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 광경에 루이의 입가가 비틀렸다.

"자네 덕분이네."

모두가 보았다.

붉은 신성에 휘감긴 루이의 모습을.

신위. 그야말로 신화 속에 나오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괴물의 팔과 뿔을 잘랐으며 머리카락을 뜯어냈다.

라움의 전사.

몸이 꿰뚫리고 살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움직이는 광전사.

그 덕분에 다른 이들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쪽은 신의 전사.

왕비라고 생각했던 이는 보기 혐오스러운 괴물.

남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자네는 충분히 보여줬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게."

옆에 있던 공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하나밖에 없는 성수를 넘긴 것이었다.

"...야."

"음?"

루이의 목소리에 둘의 고개가 움직였다.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좀 더 확실하게 말을 뱉었다.

"...내 거야."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루, 루이 경?"

"저건, 내 거야."

루이의 눈동자는 오로지 조세핀만 담고 있었다.

충분히 보여줬다고? 이젠 쉬라고?

집어치워라.

루이는 기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싸운 게 아니었다.

왕국의 운명? 기사들의 명예?

그딴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그제야 싸우던 기사들도 루이의 존재를 눈치챘다.

루이의 눈빛은 그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사나웠다.

[99:57:52]

오랜만에 보는 붉은 색 숫자.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처절했던 그 순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겠다고 맹세했던 날.

무려 칠백 오십 시간이 날아갔다.

자신의 시간과 바꿔서 만든 기회였다.

그걸 다른 녀석들이 먹겠다고?

"꺼져. 저 녀석은 내 먹잇감이야."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순 없었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대전에서 그걸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막는다면 그 녀석도 죽인다."

루이의 사나운 기세가 조세핀뿐만 아니라 기사들에게도 향했다.

* * *

루이의 선언에 기사들이 뒷걸음쳤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루이였으나 기백만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렬했다.

날카로운 검.

지금의 루이는 마치 검과 같았다.

걸으면서 뜨겁게 달궈졌던 루이의 머리도 식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메르실라의 신성이 돌아왔다.

거기다가 루이의 몸에 남아있는 성수의 힘. 둘이 합쳐지면서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루이가 조세핀의 앞에 당도했을 때에는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싸울 수 있을 만큼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는 검을 뽑았다.

기사들이 물러나자 조세핀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괴물처럼 흉포했던 눈동자에 지성이 떠올랐다.

"...그 몸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짐승의 울음과 같았다.

날카롭고 소름이 끼쳤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팔을 잃고 머리카락도 잃었다. 온몸 곳곳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루이처럼 회복 능력은 없던 것이었다.

상처의 중함을 따지자면 조세핀이 더 심했다.

"오만하구나."

"아니."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것을 다른 녀석들에게 넘겨줄 수 없을 뿐이야."

루이의 눈에는 조세핀이 담겨 있었다. 루이의 말에 조세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과욕이구나! 탐욕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지!"

조세핀의 눈에도 루이와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탐욕.

"아쉽구나. 아쉬워."

조세핀의 말에 루이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이의 신형이 조세핀을 향해 쏘아졌다.

* * *

쾅! 콰강!

땅이 흔들린다.

상처 입었다고 해도 맹수는 맹수였다. 하나 남은 팔은 아직도 사나웠다.

그러나 맹수는 조세핀만이 아니었다.

콰가가가강!

검이 터지면서 조세핀의 팔이 밀려났다.

루이의 신형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뺨에는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검의 파편이 루이의 뺨을 할퀴고 지나간 것이었다. 자칫하면 머리가 뚫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

그러나 루이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날아오는 팔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공명.

콰가가강!

루이와 조세핀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바닥에 떨어진 루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들었다.

이곳에 널린 게 검이었다.

굳이 멀리 찾을 필요는 없었다.

터벅, 터벅.

걸음을 옮기려던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내리니 루이가 걸어온 길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이는 들고 있던 검 하나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쓰러졌던 조세핀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자신의 팔을 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조세핀이 땅을 박찼다.

루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조세핀을 보고 지팡이로 쓰던 검을 들었다.

쾅!

루이가 있던 자리에 조세핀의 팔이 떨어지면서 돌이 튀어 올랐다.

공격을 피한 루이가 팔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고 하자 머리카락이 루이를 향해 찔러왔다.

루이는 몸을 비틀어 비도를 던졌다.

하나 남은 그녀의 눈.

그러나 비도는 머리카락을 뚫고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아래에 있던 팔이 루이를 노렸다.

'한 번 더.'

루이는 뼈가 드러난 부위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콰가가강!

"크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거대한 팔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팔을 잃은 조세핀이 뒷걸음쳤다.

그리고 루이는 마지막 남은 검을 뽑았다.

조세핀의 머리카락이 날뛰었지만, 루이의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루이는 조세핀의 눈을 보며 배에 검을 꽂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세핀은 자신의 배를 뚫고 들어오는 검을 보며 몸을 떨었다.

"아, 안 돼. 이럴 순···."

검 손잡이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후 입을 열었다.

"공명."

쿵!

이번에는 전과 같은 충격은 없었다. 대신 조세핀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리고 조세핀이 쓰러졌다.

싸움이 끝났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아직도 죽지 않은 건가?"

그의 시선은 조세핀을 보고 있지 않았다.

허공을 보던 루이가 배에 박힌 검을 뽑는다.

검날은 부러져서 손바닥만 해졌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조세핀의 몸을 잡아당긴다. 그때, 조세핀의 눈이 떠졌다.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놀랐으나 루이는 아니었다.

"내게 죽은 척은 의미가 없어."

"네, 네놈!"

조세핀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공포였다. 머리카락이 루이의 목을 졸랐으나 루이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검을 조세핀의 목에 꽂았다.

"그륵, 그르륵."

목과 입에서 피가 올라왔다. 루이의 목을 조르고 있던 머리카락도 서서히 힘을 잃었다.

루이는 박힌 검을 비틀었다.

[98:51:24]

*

[412:38:41]

300시간. 그제야 루이는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 경!"

공주의 다급한 목소리.

루이의 몸이 허물어졌다.

"모두, 루이 경을 지켜라!"

"경계!"

쓰러지는 루이의 귓가에 여러 외침이 들려왔다.

* * *

루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건 화려한 천장이었다.

"기사님, 일어나셨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낯선 여인이 보였다. 옷차림을 보면 시녀가 분명했지만, 옷의 재질이나 몸가짐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럼 공주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여인은 그리 말하고는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제야 루이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왕궁.

왕궁에서 일하는 시녀라면 이해가 되었다.

시녀가 떠난 자리. 루이는 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운이 좋았어.'

그리 평할 수밖에 없었다.

강림. 라움의 도움 덕분인지 강림이 종료되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신성에 잡아먹혔을 거다.

다음에 또 이러리란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조세핀이 보여준 기술도 생소한 것이었다.

'...마법은 아니었지.'

마력이 주체이긴 하나 마법과는 달랐다.

마치, 마수의 이능처럼.

'한심하군.'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모두 셋.

"루이 경,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공주의 목소리.

"...들어오세요."

루이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렸다. 셋은 모두 루이가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공주와 엠마, 그리고 시저.

공주는 루이에게 다가오다가 중간에 멈춰섰다.

루이가 의아해할 때, 공주가 고개를 숙였다.

"세트리아의 피를 이은 이 중 하나로서 왕국의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왕국의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왕국의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엠마와 시저 역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군주에게나 보내는 경배였다.

루이는 멋쩍게 손을 내저었다.

"그저 대가를 위해 싸웠을 뿐입니다."

설마 왕족에게 이러한 인사를 받을 줄 몰랐다.

솔직히 중간부터 공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공주는 루이의 말에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공주의 얼굴은 전보다 야위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루이는 공주를 보며 물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된 겁니까?"

공주는 입을 여는 대신 시저를 바라보았다. 시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줬다.

혹시 몰라서 시저와 남은 기사들이 경계를 섰지만 적들은 싸울 의사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왕과 왕자들까지 정신을 차리면서 싸움이 일단락되었다.

그런 전투를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루이를 보던 공주가 미소지었다.

"기대하세요. 단순한 인사로 끝낼 생각은 없답니다. 이번 일은 왕가의 위엄과도 관계가 되어 있어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녀.

루이는 다음날,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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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382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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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악신.

"...왕국의 위엄과 기강을 바로 세웠기에 루이스 크로이드에게 자작의 작위와 함께 영지를 부여한다."

왕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전투의 여파로 여기저기 부서지고 모인 이들도 왕궁 내에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전부였으나 엄숙함이 감돌았다.

약식의 수여식.

루이는 세트리아의 귀족이 된 것이었다.

선언을 마친 왕은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다른 세 왕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나마 둘째 왕자만이 조금 나아 보였다.

제국에 있다가 왕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 년이란 시간을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로 지냈다.

후유증이 없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왕은 나이도 있기에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주가 차기 왕위 계승자로 유력해졌지.'

제국과 달리 세트리아는 여성이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세트리아의 초대 왕이 여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여식이 끝난 루이는 공주에게 말해서 영지를 반납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예."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지를 받아봤자 짐만 될 뿐이었다.

'영지를 찾아갈 시간도 없어.'

작위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세트리아 영지 내에서 기사를 죽여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다.

남작과 달리 자작은 세습이 가능한 작위였다.

남들이라면 귀족이 된 것만으로도 기뻐하겠지만 루이에게 있어서는 살인면허. 딱, 그 정도 감각이었다.

"아, 그리고 전해줄 게 하나 더 있어요."

공주가 엠마를 눈짓하자 엠마가 패 하나를 건넸다.

"이건···."

용병패. 2급의 용병패였다.

이번 업적을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왕국 내에 1급 용병은 열이 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거대 용병 단체의 수장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루이도 일류 용병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어제, 용병 길드에서 왔다가 갔어요."

좋은 일이었으나 그만큼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진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귀족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용병패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루이는 공주를 보며 입을 꺼냈다.

"혹시 신학자를 알고 계십니까?"

이제 왕국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루이의 물음에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가 왕국도서관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라움의 신성. 게다가 에테르.

그에 관한 것임이 분명했다.

'정말로 신의 전사라도 되는 건가.'

엠마와 시저의 눈빛도 변했다. 오해였으나 그리 생각하는 것이 루이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따로 신학자를 찾을 필요는 없어요."

공주의 말에 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찾을 필요가 없다니. 셋 중 하나가 신학자라도 되는 건가?

공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립도서관. 그곳의 도서관장께서 왕국 제일의 신학자십니다."

왕립도서관.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었다.

* * *

이번이 두 번째.

왕립도서관에 다가가자 경비병이 막아섰다.

그러나 전과는 달랐다.

루이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공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허가서.

"들어가십시오."

경비병들이 창을 거뒀다. 신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왕족의 직인은 마법으로 만들어져서 위조할 수 없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왕도 내에서 왕족의 직인을 위조할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쉽게 길을 열어주니 허무할 정도였다.

루이는 경비병을 지나쳐 왕립도서관 안으로 향했다.

문에 손을 대자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서는 책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둥근 벽들 사이로 가득 놓여 있는 책들.

종이뿐만 아니라 목판이나 석판도 보였다.

도서관이라기보다 박물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루이가 있던 가문에서는 책은 흔했다.

지구에서의 경험도 있었기에 이 세계 역시 흔하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식의 독점.

이 세계에서는 힘이 없으면 지식조차 얻을 수 없었다.

불합리한 세상.

바로 루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기도 했다.

루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루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너무 많아.'

이 안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기란 길바닥에서 보석을 찾는 것과 같았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이로구나."

갑작스러운 소리에 루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발, 그와 맞추기라도 한 듯 새하얀 백의.

루이의 시선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목적은 다르지만, 이곳에 처음 들어온 이들의 반응은 같지. 책들의 방대함에 놀라서 움직이지 못한다."

책들이 이만큼 모인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책의 가치를 아는 이라면 압도당할 것이다.

"하지만 자네는 다르군. 경험이 있는 건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가? 책에 관심이 없다면 이곳에 오진 않았을터."

루이는 짧게 생각했다. 확실히 놀라운 광경이긴 했다.

그러나 지구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양과 질, 어느 쪽도 지구가 우세했다.

"...전자일 겁니다."

"호오."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루이는 그런 노인을 향해 자세를 바로 했다.

"제렘님 맞으십니까?"

"맞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 말고도 도서관을 오가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노인이 가진 분위기는 독보적이었다.

왕립도서관장 제렘.

루이는 품에서 또 한 장의 서신을 꺼냈다.

허가서와 함께 받은 것.

바로 공주의 추천장이었다.

서신을 읽은 제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루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뀌었다.

"왕실을 구한 은인이라. 이거 내 예상보다 귀인이셨군. 며칠 전에 소란스러웠던 건 이 때문이었나."

제렘의 태도는 마치 어떤 일 때문에 소란스러운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왕도뿐만 아니라 왕국 전역이 이 때문에 떠들썩했다.

"...모르셨습니까?"

루이의 물음에 제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세상은 이곳이 전부라네. 굳이 밖의 일을 알 필요는 없지."

밖의 일. 그 말에 루이는 제렘이 어떠한 성격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정상은 아니군.'

루이가 할 소린 아니었지만, 확실히 제렘은 독특한 성격이었다.

"그래, 우리 공주님께서 신경 써달라고 했으니 잘 해줘야지. 무슨 일로 이곳에 찾았는가?"

우리 공주님. 그 말을 할 때, 제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친손주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같았다.

'공주 역시 제렘을 소개할 때, 자랑스럽게 말했지.'

이를 보며 루이는 둘 사이가 돈독함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밤하라라는 신을 아십니까?"

"...호,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군."

루이의 물음에 한 박자 늦게 제렘이 답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가?"

"..."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시스템이 알려줬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런 루이의 반응을 본 제렘은 웃음을 흘렸다.

"밤하라, 그녀는 제국과 신전에서 악신으로 규정한 신 중 하나이지."

"신전이라면?"

"샤롯."

제렘이 짧게 대답했다. 주신 샤롯의 신전.

대륙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전이었다.

"그에 관한 서적은 모두 회수되거나 불태워졌다네. 이곳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 아마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신학자도 몇 없을 것이야."

왕립도서관. 여기도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루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제렘은 그녀라고 말했다. 밤하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의 시선에 제렘은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대답도 듣지 않고 휘적휘적 나아가는 걸음. 루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제렘의 뒤를 따랐다.

둘이 도착한 것은 대도서관 한 편에 놓인 작은 방이었다.

루이는 이곳이 제렘이 생활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제렘이 허언을 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제렘의 세상은 이 좁은 도서관이 전부였다.

'아니, 좁진 않은가?'

밖으로 나갈 수만 없을 뿐이지 왕립도서관은 규모가 컸다.

"차 한 잔, 하겠는가?"

루이에게 물었으나 이미 두 잔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제렘은 찻잔을 루이의 앞에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난 그 악신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네. 인간의 오만을 나타내주지."

"예?"

뜬금없는 소리에 루이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러나 제렘은 개의치 않았다.

"자네는 악신을 누가 정했다고 생각하는가?"

"...신 아닙니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이 세계에는 신이 존재한다. 신탁도 내리고 힘도 빌려준다.

그렇기에 신이 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렘은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그들에게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네. 단지 적과 아군이 있을 뿐이지."

제렘의 말은 언젠가 루이가 했던 말과 같았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선하길 바라지."

그렇기에 진실을 숨기고 역사를 수정한다.

자신들의 신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인간의 가치로 제단 하려는 것부터가 잘못이라네. 오로지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오만."

제렘의 말에는 짙은 회한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밤하라, 종족을 잃은 신. 그녀는 대전쟁 이후, 처음으로 샤롯에게 반기를 들었던 신이었으며 제국과 신전에서 처음으로 악신으로 규정했던 이이네."

최초의 악신. 모든 것의 시작.

"그리고 가장 먼저 역사 속에서 지워진 신이기도 하지."

제렘은 담담히 사실을 고했다.

루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방에는 찻잔에서 흘러나온 김만이 허공을 떠돌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루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악신은 있지 않습니까?"

신전에서 악신으로 정한 신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루이의 물음에 제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인간의 기준에서 명백하게 악에 가깝기 때문이라네."

제렘이 오만하다고 말했던 이유.

"그럼···."

무언가를 떠올린 루이의 표정이 변했다.

루이의 물음에 제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에서 지워진 신들은 인간의 기준에서 선에 적합하다는 소리지."

"..."

그들에 대해 알려지면 샤롯이 했던 악행도 알려질 수 밖에 없다. 그 때문에 지워졌다는 소리였다.

샤롯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었다.

"나 역시 샤롯이 그녀에게 어떠한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하네."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루이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종족을 잃은 신.

그 말을 꺼낸 건 제렘이었다. 필시, 사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루이는 묻지 않았다. 도움을 주는 마당에 그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그런 이야기는 루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루이의 물음에 제렘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둘의 눈이 서로 부딪혔다.

"...게르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걸 본 적이 있네."

게르 산맥.

익숙한 이름에 루이는 침음성을 흘렸다.

제국 북동쪽에 있는 산맥이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제국을 가로질러야 했다.

게다가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게르 산맥 전체를 뒤지려면 얼마나 걸리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지.'

사내와 조세핀. 앞으로 그런 이들이 얼마나 나올지 몰랐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 했다.

"대답은 되었나?"

제렘의 물음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정신에 관련된 신을 알고 계십니까?"

"음?"

용무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기억해 낸 것이었다.

제렘이 의아해하는 걸 보며 루이는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 내성이나 유혹을 견디는데 특화된 신이 있을까요?"

"...자네는 특이한 방식으로 신을 찾는군."

정신 내성, 유혹 면역.

게임과도 같은 설명이었으나 그를 알 리가 없는 제렘은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카스.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데. 그들의 신도들은 깊은 산속에서 정신을 수양한다고 들었네. 다른 신들과 달리 육체보단 정신에 중점을 든다고 들었어. 정신을 갈고 닦으면서 신과 가까워지는 게 그들의 교리이네. 하지만 워낙 조용한 이들이라 신전을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어."

오히려 악신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외에 잘 알려진 신은···."

제렘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루이가 그런 제렘을 제지했다.

"아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가 바로 루이가 찾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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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를 찾아서 죽여주게.

루이의 표정이 환해지자 제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알 수 없군.'

루이의 질문 자체가 제렘의 예측을 벗어났다. 그 때문에 루이란 인물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루이는 제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렘과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홀로 찾거나 다른 신학자를 만났다면 이처럼 쉽게 정보를 얻지 못했을 거다.

다른 신들에 대해서는 책을 찾아보면 되었다.

밤하라처럼 특별한 신들이 아닌 이상 구하기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잘 알려진 신일수록 능력을 특정하기 쉬웠다.

널리 퍼져있는 신전이라면 사제나 성기사의 능력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지.'

게다가 많은 신을 알 필요가 없었다. 루이에게 필요한 몇 명의 신으로 충분했다.

시간을 남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굳이 제렘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제렘은 그런 루이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공주님을 도와준 것으로 사례는 충분하네."

그렇게 떠나려던 루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제렘이 그런 루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또 무슨 볼일이 있는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제렘의 말에 루이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조세핀. 그녀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알지. 그녀를 모르는 이는 왕국에 없을 걸세."

제렘의 대답에 루이는 한동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말없이 얽혔다.

먼저 눈을 뗀 건 루이였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왕립도서관을 나섰다.

루이가 떠난 자리.

제렘은 루이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눈치챘었다.

"생각보다 감이 좋은 청년이군."

제렘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왜 모르겠는가.

루이의 눈빛은 무심했지만, 더 아프게 다가왔다.

"차라리 질책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을."

제렘은 신학자이기 이전에 마법사였다. 이 사실을 아는 건 왕뿐이었다.

'아니, 조세핀. 그녀도 알고 있겠지.'

루이는 그를 알아챈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제렘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직 이 도서관이 제렘의 세상이었다.

죽을 때까지 이 도서관을 나서지 말 것.

그것이 제렘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도서관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함도 있었지만 제렘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었다.

스스로 이 도서관에 봉인한 것이었다.

황제의 명도 있었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공주의 상황을 알면서도 도울 수 없었다.

제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선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었겠지."

신에게 신성으로 맞서는 것처럼. 그것에게 마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씁쓸함이 담긴 제렘의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갔다.

* * *

피의 숙청.

세트리아에 일어났던 혈사를 그리 말했다.

첩 조세핀이 왕위를 욕심내어서 기사들을 끌어들였다.

진실을 아는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왕족들이 몇 년 동안 조세핀에게 지배당했다?

이 일이 밖에 세어나가면 왕가의 위엄이 상할 뿐만 아니라 세티리아 자체가 흔들릴 것이다.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 세트리아였다.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국왕은 이번 일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왕가에 비협조적인 귀족 일파를 조세핀의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발표하고 토벌을 한다고 공표한 것이었다.

왕가뿐이라면 큰 힘이 안 되겠지만 조세핀의 충신이라고 알려진 두 후작이 왕가의 편에 서면서 이야기가 커졌다.

다행히 조세핀의 악행이 유명했기에 백성들은 쉽게 믿었다.

몇몇 귀족들이나 식자들은 의아해하긴 했으나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없었다. 자칫하면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반란자들의 토벌이 끝날 동안 왕국 내에서 연회를 금지했다.

본격적으로 귀족들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나 국왕이 되는 건 아니네.'

그 소식을 들은 루이는 감탄했다.

루이의 기억 속에 남은 왕의 모습은 힘없이 주저앉은 중년인이었다. 그랬던 이가 이처럼 과감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루이는 상념을 지우고 눈앞의 돼지를 잡았다.

오늘도 시간을 벌려면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왕도 내에서 연회가 열리지 않게 되었지만, 도축장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그동안 사치를 만끽하던 귀족들이었다.

왕실의 눈치를 봐서 연회를 열진 않았지만 먹는 것까지는 바꾸지 못했다.

지금도 귀족 저택에는 수많은 고기가 들어가고 또 버려지고 있었다.

"루이!"

멀리서 루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도축장의 주인이 루이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자네, 손님이 왔어!"

그 말에 루이는 피 묻은 칼을 내려놓았다.

'손님?'

자신을 찾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루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은 루이가 다가오자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기사를 대동한 것이 보통 신분이 아닌 거 같은데. 자네, 혹시 누군가에 밉보인 건 아니지? 그렇다면 도망쳤다고 말해주겠네."

그동안 정이라도 든 것인가, 주인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루이는 주인의 말에 누가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일하다 알게 된 분입니다."

루이의 대답에 주인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자네처럼 성실한 이가 사고를 칠 리가 없겠지.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귀족 가문에서 찾아도 이상할 게 없어."

웃음을 터트린 주인은 루이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도축장 안으로 걸어갔다.

루이는 그런 주인을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도축장 밖에서 루이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예상대로의 인물들이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이곳에 있었군요."

남장한 공주가 놀란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왕국을 구한 영웅. 그가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까.

그녀 뒤에는 갑옷을 입은 엠마가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나 기사요. 하는 모습이었다.

"꼴이 이래서 예를 드리지 못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루이는 피가 묻은 자신의 앞치마를 눈짓했다. 그러자 공주가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전보다 밝아진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그럴 것 같았으면 이렇게 변장을 하지도 않았겠죠."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루이의 방이었으면 앉으라고 하겠는데 이곳에는 마땅히 앉을 곳도 없었다.

일하다가 쉴 때 앉는 바위가 있긴 하나 흙으로 더러워져서 공주가 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지 반납, 허가가 내려졌어요."

공주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공주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왕이 직접 내린 영지였다. 루이 멋대로 처분할 순 없었다.

"대신 아바마마께서 다른 보상을 내리셨어요."

공주는 그리 말하면서 엠마에게 눈짓했다. 루이는 그제야 엠마가 들고 있는 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천에 둘러싸여 있는 것.

형태만 보고서 물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이에요. 아바마마께서 왕위를 계승할 때 제국에서 받은 검이죠."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눈이 부셨다. 황금색의 새가 그려진 검집.

공주는 루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화려하죠?"

조금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걸 들고 전쟁터로 향하지는 않을 거다.

적들에게 노려질 게 뻔했다.

"아바마마께서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말라고 명하셨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미안한지 공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왕명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루이 역시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눈에 띄고 딱 좋았다. 이걸 들고 다니면 저절로 도적이 꼬일 것이다.

루이의 말에 공주가 환하게 웃었다.

"제국에서 보내온 거긴 하나 황제가 직접 내린 건 아니에요.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공주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직접 내렸다면 이처럼 선물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루이는 검을 받아서 다시 천으로 감쌌다.

"국왕, 아니. 전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주십시오."

이제는 이 나라의 귀족이기도 하니 호칭에 주의해야 했다.

공주는 그런 루이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말씀드린 건 생각해보셨나요?"

왕실 기사단.

이번 일로 시저가 단장직에 오르고 부단장 자리가 비게 되었다.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한 곳에 묶이는 걸 싫어해서."

루이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영지를 거절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었다.

"아쉽네요. 다음에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세요.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드릴게요."

공주의 말에 루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주의 눈빛에 호의 이상의 감정이 섞인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한 곳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감사하나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루이는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선을 긋는 루이의 말에 공주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뒤에 있던 엠마가 루이를 노려봤다.

말이라도 생각해보겠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는가.

그러나 루이는 엠마의 시선에 굴하지 않았다.

이런 건 확실하게 끝내는 게 나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일국의 공주였다.

루이와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렇게 공주는 실망한 채로 떠나갔다.

루이는 그런 공주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곳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곧 약속한 한 달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정확히 한 달이 지나고 약재상에 찾아가자 청년이 루이를 반겼다.

"오셨군요. 할아버지는 와 계셔요."

소리가 들렸는지 로힐이 걸어 나왔다.

"시간은 정확하군."

나무로 된 의족과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딱딱 소리를 냈다.

로힐은 자신의 손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존 영감에게 가보거라. 시킬 게 있다고 하더구나."

"아, 예. 알겠어요."

청년은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루이는 그런 청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청년이 무엇 때문에 아쉬워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떠나가자 로힐은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검은 저기 선반 위에 있다. 확인하거라."

로힐은 지팡이로 한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투박한 검집이 보였다. 루이가 맡긴 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루이는 의아해하면서도 검을 꺼내보았다.

스르릉.

겉모습과 달리 부드럽게 뽑히는 검.

예기가 흘러나왔다.

'...새 검 같군.'

그러나 자신의 검이 맞았다. 검날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고치면서 다른 부분도 손 봤다. 이제 검의 출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검집과 손잡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힐의 말대로였다. 루이도 뽑기 전까지 같은 검이란 걸 알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의심했던 게 미안할 만큼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루이의 말에 로힐은 웃음을 흘렸다.

"만족스러우면 이제 보수를 이야기할 차례군."

전에 말했던 의뢰. 루이는 시선이 로힐을 향했다.

루이의 눈빛에 로힐은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상처가 가득한 손은 장인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 볼 것 없네. 강요하는 건 아니야."

로힐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제국으로 넘어갈 일이 있으면 한 사람을 찾아주게."

제국. 그 말에 루이는 입맛이 써졌다.

'밤하라에 이어서인가.'

마치 운명이 자신을 제국으로 이끄는 것처럼 느껴졌다.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자네의 검을 만든 장인일 테니."

"...!"

루이의 눈이 커졌다. 로힐은 루이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름은 에일 브라운. 크로이드 검파의 장인이며 내 다리를 이리 만든 이이네. 그리고 아까 그 녀석의 아비이기도 하지."

로힐의 말에 루이는 숨을 삼켰다.

그제야 로힐이 루이의 검을 알아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필로스는 이를 알고 소개해 준 것인가?'

아니, 억측이었다.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자네가 내게 온 것도 운명이겠지. 죽기 전에 지난 잘못을 바로잡으라는 신의 뜻이야."

로힐은 씁쓸하게 말했다.

루이는 로힐이 일부러 청년을 내보냈다는 걸 알아챘다.

가족을 만나서 안부를 전해달라는 따뜻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로힐의 눈이 루이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자를 찾아서 죽여주게."

작지만 단호하게. 루이를 향해 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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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3826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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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시키세요.

로힐의 목소리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루이는 로힐의 눈을 보았다.

"...그분의 아버지라면."

"그래, 내 딸의 남편이었지."

딸의 남편. 사위가 아니라 둘러서 말했다.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랬으니 죽여달라고 부탁했겠지.'

사위는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족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말하진 않았을 거다.

루이는 로힐의 발을 힐끗거렸다.

사위가 장인의 발을 자른 것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네. 상황이 어려우면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네."

상황이 어려우면 하지 말라니 의뢰치고는 무언가 어설펐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크로이드 검파의 장인이었다.

루이는 크로이드 가문에 있었기에 그들의 위세를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여덟 개의 검파 중 하나이고 무려 다섯 명의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크로이드에서 갈라진 분파까지 생각하면 제국 내에도 손에 꼽히는 대세력이었다.

그곳의 장인을 노리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루이는 로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시도도 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때는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이지."

로힐은 그리 말하며 초연하게 웃었다.

그제야 루이는 알 수 있었다.

로힐에게 에일이 죽고 안 죽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에게 일을 부탁함으로 자신의 과거를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만족.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각오를 하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죽이죠."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국으로 넘어가면 크로이드와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이지.'

제국 내에서 언제까지 그들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루이는 검을 들고 약재상을 나섰다.

로힐이 선반 위에 올려진 금화들을 발견하고 실소를 흘린 건 루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돌아온 청년이 좋아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루이는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했다.

이제 왕도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루이는 바닥에 놓인 자신의 검들을 보았다.

두 자루의 검.

조세핀과의 싸움으로 가진 검들이 부러졌으나 새로운 검이 생겼다.

그러나 이 검들로는 공명을 쓸 순 없다.

'아깝지.'

명검. 그것도 일국의 왕에게 선물할만한 검이었다.

물론, 다른 검과 달리 한 번 만에 부서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굳이 이 검을 쓸 필요는 없었다.

'다른 검들을 구해야겠군.'

소모용. 어차피 돈은 많았다.

이번 일로 상금도 나와서 가지고 다니기 불편할 정도였다.

웬만한 영지의 일 년 수익 이상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621:29:33]

루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검을 기다리면서 도축을 한 덕분에 시간이 늘긴 했다.

그러나 제국을 넘기에는 부족했다.

'중간에 동부를 지나긴 하지만···.'

이제 봄이 지나고 곧 여름이 찾아올 거다.

다시 전쟁이 활발해지겠지만 왕도의 일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 없었다.

동부에 영지전이 잦은 이유는 왕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국에 넘어간 이후도 생각해야 했다.

'당분간 강림은 쓸 수 없어.'

루이는 상점창을 꺼냈다.

[카스의 가호 – 500T]

적어도 카스의 가호가 2단계에 오를 때까진 쓰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천 오백 시간 이상이 필요했다.

이번 전투 때 이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까지 날아갔다.

'덤으로 시간도.'

700시간. 아직도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한계를 넘는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결국, 그 감당은 루이의 육체가 해야 했다.

리바운드.

그걸 생각하면 메르실라의 가호 역시 올려야 했다.

'아니면 다른 신이라도.'

회복에 관련된 신이 메르실라 하나뿐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신이나 올리자니 강림의 메리트가 사라진다.

'...골치 아프네.'

차라리 게임처럼 능력치를 올리는 게 편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강해지자고 살아갈 시간마저 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왕도 서쪽 구역의 골목.

간판도 없는 술집에 후드를 눌러쓴 이가 나타났다.

술집에는 손님은 두 명뿐이었다. 후드를 쓴 이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던지지 않고 주인에게 향했다.

주인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으나 주점의 주인보다는 용병처럼 보였다.

손님을 바라보는 눈빛 역시 불친절했다.

그러나 이곳 서쪽 구역에서는 당연하였다.

"주문은?"

"술을 사러 온 게 아닙니다."

후드 밑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내의 것이었다.

사내의 말에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주점이요. 여자를 찾으려면 건너편에 있는 창관으로···."

"목숨을 사러 왔습니다."

주인의 말을 자르고 사내가 말했다.

그 말에 손님들의 눈빛도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곳이 돈만 주면 뭐든 파는 곳, 아닙니까?"

주점의 분위기가 변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가 말을 이었다.

암상. 사내의 말에 주인의 표정도 바뀌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내를 훑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슬쩍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주인이 선반을 밀자 안쪽에는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숨겨진 방. 사내는 주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목숨을 사러 왔다면 암살 의뢰겠군."

안으로 들어오자 주인의 말투도 바뀌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대했다.

"어디서 이곳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야."

주인은 밖을 턱짓했다. 밖에 있는 이들은 이곳에서 고용한 이들이었다. 사람이 없었길 망정이지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사내가 대꾸하지 않자 주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상은?"

"루이스 크로이드 2급 용병."

사내의 말에 주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 그러나 정보를 업으로 먹고살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영혼수확자.

용병은 8급까지 있었다.

7, 8급은 전력 외.

심부름꾼이나 다름이 없었다.

6급이 일반 용병, 4급만 되어도 숙련된 용병이었다.

1급 용병은 왕국 내에서도 열이 넘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2급은 용병으로는 일류 중에서도 초일류라는 소리였다.

물론, 1급 위로 특급도 있지만 세트리아 왕국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최근에 일어났던 일에 연관된 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자는 이제 귀족이야."

자작의 작위에 올랐다. 크로이드 가문의 가주. 영지도 없고 혼자인 이를 가주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왕이 직접 내린 작위였다.

평민이 땅을 샀다고 영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땅이 없다고 작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땅은 사고 팔 수 있지만 작위는 왕이 내리는 것이었다.

실제 기사 중에는 영지 없이 작위를 가진 이들이 제법 되었다.

주인의 말에 사내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촤르르.

쏟아지는 금화. 어둡던 방이 환하게 빛날 정도였다.

"그래서 불가능합니까?"

사내의 말에 주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림잡아도 백 개는 넘어 보였다.

특급 의뢰.

"...대가만 충분하다면 임금의 목이라도 따다 드려야지."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주인은 금화를 쓸어 담으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금화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뭐 하는 분이신가?"

"알아야 합니까?"

차가운 대꾸에 주인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지. 우리가 보는 건 물건에 합당한 금액인가, 아닌가. 그뿐이지."

의뢰자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암상의 규율이었다.

사내는 주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볼 일을 맞췄으니 떠나려는 것이었다. 그런 사내를 주인이 붙잡았다.

"아, 말하는 건 잊었는데. 대상이 왕국을 벗어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물론, 그렇다고 돈은 돌려줄 수 없네."

"...알고 있습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사내가 주점 밖으로 나가서 사라진 걸 확인하자 주인이 표정이 변했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의 물음에 안쪽 벽이 움직였다.

드르륵.

창문처럼 열리는 벽. 숨겨진 방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던 것이었다. 마법으로 처리된 이중벽이었다.

벽 너머에 있는 건 젊은 여성이었다.

"일단, 진행 시키세요."

루이스 크로이드. 그에 대해서는 암상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입에서 나온 하나의 이름 때문이었다.

이번 일이 터졌을 때 용병 길드에 루이스 크로이드의 정보를 흘린 것도 그녀가 지시한 것이었다.

원래라면 4급 용병을 용병 길드가 보증하는 일은 없다.

뒤에서 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시를 내릴 때만 해도 설마 그가 이렇게까지 활약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사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내 선을 넘었어.'

그렇다면 위에 물어봐야 했다.

자신의 상사이자 루이스 크로이드가 언급한 장본인에게.

여인, 라이아는 얼마 전 만났던 용병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니 강이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그의 신도들은 신의 기적을 찬양하며···."

깊은 숲속, 모닥불 앞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멈췄다.

"아니, 완력으로 강을 가른 거야? 아니면 물을 제어한 거야? 그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물을 막은 건가?"

책을 읽고 있던 건 루이였다. 루이는 읽던 것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완력으로 강을 가르는 일. 그것이라면 마스터들도 가능했다.

당장 루이만 해도 작은 냇물 정도는 가를 수 있었다.

문제는 길이 생기는 게 아니라 박살이 나겠지만···.

"이따위로 쓰면 내가 어떻게 알아."

루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던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등을 긋고는 깃털 끝을 그쪽에 찍었다.

"얘는 보류."

신의 이름에 세모를 그렸다. 다른 이가 보면 식겁하겠지만 루이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잉크도 아끼고 수련도 되었다.

일거양득.

루이가 읽고 있는 책은 귀족 아이들을 위한 신화 책이었다.

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책.

지구로 생각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슷했다.

물론, 안에 써진 내용을 다 믿을 순 없지만, 루이에게 필요한 건 신의 이적이었다.

어설프게 보여도 나름 체계적이었다.

신이 여럿인 만큼 각 신의 영역이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전쟁의 신인 라움이 전쟁에 필요한 식량이 부족하여 밭에 축복을 내렸다고 적으면 풍요의 신인 메르실라를 모시는 신전에서 반발하게 되어 있었다.

식량은 메르실라의 영역이었다.

물론 깊이 들어가면 곡물의 신이 따로 있지만, 루이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런 책에서도 서로의 영역은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투 부분이었다.

자세히 적으면 신의 위엄에 손상이 가기라도 하는 것인가, 책에는 흔한 묘사조차 없었다.

'그래도 몇 개는 건졌네.'

나머지는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시간을 써서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제국에는 수많은 신전이 모여 있었다. 돈만 준다면 이적 정도는 보여줄 수 있었다.

루이는 책장을 덮었다. 루이의 시선이 모닥불 너머로 향했다.

일렁이는 어둠.

'손님이군.'

루이의 검을 노리는 건가? 아니면 마을에서 실수를 가장하여 보여줬던 금화? 그것도 아니면···.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밤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지.'

안 좋은 목적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들은 더더욱.

제국에 닿기 전에 카스를 2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였다.

루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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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3828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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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는 있는 건가?

타닥, 타닥.

어둠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나, 둘. 시간을 두고 여러 개의 불꽃이 차례대로 올라왔다.

불꽃이라고 하여도 일반적인 불꽃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불꽃.

불꽃 너머로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

그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뭐야? 바쁜데 왜 자꾸 불러?]

[...다음 집회까지는 시간이 남지 않았나?]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 다음으로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일반적인 목소리와 달리 울림에 가까웠다.

다른 이들도 말을 하진 않지만, 이 상황이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였다.

불꽃에 중심에 앉아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조세핀이 죽었다."

유일하게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 존재하는 자. 중년 사내의 목소리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건 처음 입을 열었던 여성이었다.

[내가 그러니깐 말했잖아. 격 떨어지니 잡종을 끼워주는 게 아니라고.]

거기에는 죽은 이에 대해서 조의나 안타까움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다.

여성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딴 일 하나 못 처리하다니.]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혀를 찼다.

반응은 달랐지만,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피오르, 네가 얼마 전 그곳에 갔다 오지 않았어? 뭔가 없었어?]

[...아무리 작아도 왕국이야. 옆 동네 산책갔다 온 것처럼 말하지 말래? 누가 닦달해서 걔 얼굴도 못 봤어.]

[그래서 내 책임이라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여성이었다.

여성의 말에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 성깔부터 어떻게 해. 왜 이렇게 만날 때마다 화가 나 있어?]

만날 때 마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늘 분노와 짜증에 잠겨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리 말한 청년은 다른 그림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설령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굳이 만나진 않겠지. 우리가 그렇게 친하게 지낼 사이는 아니잖아?]

청년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지만 얼마 전까지 그들의 세상에서는 서로 경쟁자이기도 했다.

하물며 조세핀은 이들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지도 못했다.

[세트리아는 어떻게 하지?]

[그깟 변방 왕국, 놔두면 되지 않아? 솔직히 그깟 왕국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나서도 처리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중요하지 않기에 조세핀에게 맡긴 것이었다.

이들이 이번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기도 했다.

[우리의 존재가 알려졌을 수도 있어.]

[어차피 알려질 거 아니야? 저 멍청한 녀석도 이름만 안 밝혔지 다 떠들고 다녔잖아.]

[...그 멍청한 녀석이란 게 나인가?]

[몰라서 물어?]

청년은 켕기는 게 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인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드러날 때가 아니다."

대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까진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수준.

그때, 이야기를 지켜보던 또 다른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를 죽인 건 누구지?]

부드러운 음성. 그러나 그 안에는 설한과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물음.

혼혈이라고 해도 자신들과 같은 피를 이은 이였다.

"왕실 기사단과 용병이 했다더군."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왕실 기사단?]

피식, 누군가가 웃음을 흘렸다. 그들 중에 조세핀을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자가 있었다면 진작에 쓰러트렸을 거다.

[그렇다면 그 용병이겠군.]

[적어도 그녀의 매혹을 견딜 수 있는 실력자겠어.]

[그게 뭐가 어렵다고. 게다가 여자일 수도 있잖아.]

조세핀의 이능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그림자들의 시선이 중년인에게 향했다.

중년인은 그들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다.

다른 이들도 중년인을 책망하진 않았다. 자신이었어도 같았을 테니. 그들에게 있어서 조세핀은 딱 그 정도의 가치였다.

그러니 그녀를 죽인 용병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한 존재만은 예외였다.

[용병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나?]

차가운 목소리. 조세핀을 누가 죽였는지 물었던 여인이었다.

[그럴 필요가 있어? 마스터도 아니고 고작 용병이야.]

처음 나섰던 여인이 날카롭게 쏘았다. 그러나 여인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조세핀을 죽였다지만 용병에 불과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마스터들조차 눈 아래로 보고 있었다.

여인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여인의 말투가 저럴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신중을 기해서 나쁠 건 없지. 알아보겠다."

중년인은 그리 말하며 그림자들을 보았다.

그 시선에 청년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끝? 그래도 분위기상 무언가 말해야 하지 않아? 곧 다가올 어둠을 위해서라던지. 어둠의 재래를···. 어? 다 나갔네.]

어느새 불꽃은 청년 하나만 남고 사라진 상태였다.

[...다들 낭만이 없어. 낭만이.]

청년도 한숨을 내쉬고 사라졌다.

곧 어둠이 그곳을 잠식했다.

* * *

루이는 쓰러진 습격자의 목을 자르고 땀을 닦았다.

"오늘도 만족스럽군."

루이는 한 해의 수확물을 확인하는 농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이번은 도적이 아니라 암살자였다.

[871:32:21]

루이가 암살자를 죽일 때마다 그들의 공격은 더욱 은밀하고 집요해졌다.

지난번부터는 암살자들도 에테르까지 뿜었다.

기사. 그것도 왕실 기사단 수준을 넘어섰다.

'다음에는 기사들로 이루어진 암살대가 올 수도 있겠는걸.'

암살자와의 싸움은 루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일반적인 기사나 용병과는 궤를 달리했다.

'게다가 에테르를 숨기는 방법도 능해.'

암살자만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해 보이던 주점 주인이 갑자기 에테르를 두른 식칼로 덤벼들 때는 루이라도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루이는 시체를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씨가 꺼져서 식어가는 고기 한 점을 베어 문 루이는 바로 뱉어냈다.

"...젠장."

혀가 얼얼했다. 급히 메르실라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그제야 입안이 진정되었다.

루이는 들고 있던 고기를 바닥에 던지고 혀를 찼다.

"대체 언제···."

독. 에테르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강렬한 독이었다.

일반인이라면 닿는 것만으로 치명상일 것이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단번에 식욕이 날아갔다.

"이건 불편하네."

그러나 시간이 들어오는 걸 생각하면 감수해야만 했다.

루이는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시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할 거 빨리하는 게 낫겠지.'

카스의 가호. 어딘가 익숙한 이름.

가호를 올리더라도 300시간이 남는다. 빠듯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점을 떠올리자 수많은 글자가 떠올랐다.

"카스의 가호."

[871:30:57]

*

[371:30:56]

동시에 세상이 변했다.

라움이나 메르실라와 같은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고요한 밤.

루이가 있던 장소와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별들은 저마다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중심에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세 개의 눈.

이마가 있을 자리에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별을 닮은 거대한 눈.

세 개의 눈이 루이를 향했다.

[...]

곧 눈이 감기더니 루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끝?"

다른 두 신과 비교하면 너무나 허무한 광경이었다. 먼저 만났던 두 신도 성향은 달랐지만,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스는 달랐다.

'왠지, 못마땅해하는 거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신이 루이에게 호의를 보내진 않을 거다.

"그런데 효과는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한 루이는 상점을 열었다.

[카스의 가호 – 1000T]

시간이 오른 것을 보아서 가호는 작동했다.

'그렇겠지. 설마 이런 걸 떼어먹겠어?'

무언가 극적인 상황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너무 밋밋했다. 이마 부위가 잠깐 빛난 것을 제외하면 변화가 없었다.

몸을 움직였으나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좀 시원해진 것 같긴 한데?"

루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확인해볼 수단이 없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강림을 쓰면 미친 짓이었다.

결국, 제렘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강림에 걸리면 안 되겠군."

육체적으로 변화가 없다는 뜻은 위험한 상황에 쓸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삼 분의 일.

그중의 하나는 꽝이었다.

루이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썼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일분일초. 루이에게 있어서 헛되이 쓸 순 없었다.

루이는 묻은 흙을 털어내고 앞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곧 왕국 동부였다.

* * *

세트리아 왕국 북서부.

한 사내 앞으로 전서구가 날아왔다.

사내는 젊어 보이긴 했으나 나이를 특정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법이 발달 된 이 시대에 통신구가 아니라 전서구로 서신이 날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보안 면에서는 통신구보다 나았다.

서신을 읽은 사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군요."

어딘가 즐거움마저 섞여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필로스.

필로스가 보고 있는 건 한 용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필로스조차 서신을 받기 전까지 잊고 있었던 이름. 당연했다.

필로스가 본 용병의 실력으로는 이만한 일을 일으킬 수 없었다.

필로스가 관심을 가진 건 용병이 아니라 길포드였다.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

암상에서 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이였다.

나머지도 대단한 실력자란 건 맞았지만, 필로스의 눈에 차지는 않았다.

"제가 잘 못 본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눈을 속일 정도의 실력자였다. 둘 다 즐거운 일이었다.

루이스 크로이드. 독특한 성이었기에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트리아를 구한 영웅.

영혼수확자란 이명에 걸맞은 행보였다.

서신에는 루이스 크로이드가 어떤 식으로 조세핀을 제압했는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성 안에 있던 이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지.'

단순히 조세핀을 죽인 거라면 입단속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용병이라도 있었다면 물어보겠지만, 그 자리에는 왕족과 기사, 그리고 루이스 크로이드밖에 없었다.

콧대 높은 기사들의 입을 여는 건 쉽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 수 있었다.

돈과 힘, 둘 다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떻게, 가 아니었다.

누가 했는지. 답이 나왔는데 과정을 알기 위해서 사람을 쓸 필요는 없었다.

"동부로 향하고 있다면 목적지는 제국이려나···."

동부의 전장에서 놀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애당초 이런 작은 왕국에 머물 실력자가 아니었다.

마수 사냥꾼.

'그들은 예외이지.'

대륙 내에서 마수 사냥꾼이 활약할 수 있는 장소는 세트리아 말고도 있었지만 이처럼 규제가 없는 곳은 유일했다.

필로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눈이 있었다.

지금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위압감을 흘리고 있었다.

필로스는 이 눈의 주인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숲의 주인.

길포드와 일행들. 아니, 철사자 기사단은 숲의 주인을 건네고 떠나갔다. 그들이 어디로 떠났는지는 짐작이 갔다.

제국.

덕분에 매출의 반 이상이 줄었다.

물론, 숲의 주인 하나만으로는 손해를 메꾸고도 남았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였다.

주인이 없는 땅.

새로운 주인 되기 위해서 마수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 영향이 숲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은 사냥꾼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필로스가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푼돈을 위해 움직일 순 없었다.

"제국이라···."

흥미가 생겼다. 멀리서 황금의 냄새가 올라오는 듯했다.

필로스는 서신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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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383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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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월엄 자작.

검을 비틀자 뼈가 끊어지는 느낌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쿵.

거대한 마수가 쓰러졌다. 곰 형태의 마수.

동시에 눈앞의 숫자가 올라갔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족함이 차올랐다.

잠시 시간을 응시하던 루이는 마수의 뿔과 발톱을 잘라냈다. 가장 돈이 되는 부위였다.

루이의 손길은 능숙했다.

마수 사냥꾼 중에서도 도축은 루이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벌써 두 번째네."

왕도에서 한 번. 이곳에서 한 번.

둘 다 마수의 땅과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길에 마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무언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하지.'

사내와 조세핀. 그걸 보고서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멍청한 것이었다.

어쩌면 루이의 시스템도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왕도라면 모를까, 기사가 없는 시골에 마수가 나타나면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왕국 내에서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가 흔할 리가 없었다.

'난리가 나겠군.'

세트리아 왕국만이 아니었다. 제국을 제외하면 대륙 전체가 비명을 지를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에게 있어서 나쁜 일은 아니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루이에겐 유리했다.

이렇게 시간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마수가 더 많아지길 바랄 정도였다.

루이는 말을 찾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보인다 싶더니 저 멀리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몸통 일부가 검게 그을렸다. 루이가 쳐낸 마수의 공격에 맞은 것이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놨던 게 실수였다.

"...다음 마을에 들려야겠군."

아직 시간이 남아서 다음 마을은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상태라면 일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동부는 북부와 달리 풍요롭다.

당연히 말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루이는 잠시 마수와 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슬슬 점심때가 되었으니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식사를 마치고 마을로 향했다.

가볍게 걷는 것처럼 보였으나 일반인이 뜀박질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몸통만 한 짐을 지고 있었지만, 루이에게 있어서는 큰 부담은 아니었다.

무겁지 않고 단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마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루이가 도착한 곳은 대도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경비병이 루이를 막아섰다.

"잠깐, 용병이냐?"

대뜸 튀어나오는 반말에 루이는 피식 웃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 마을의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

루이의 태도가 의외였는지 경비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다른 경비병도 슬그머니 창에 손을 얹었다.

위협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웠다.

루이는 경비병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들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앞에 지나가는 이들을 보면 검문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루이만 불러세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상하다면 신분패를 요구했겠지.'

이처럼 용병이냐고 묻진 않았을 거다.

경비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턱을 치켰다.

"몇 급이지?"

"2급."

"..."

경비병이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2급 용병 중에는 세례를 받은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루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더욱 컸다.

호기롭게 반말을 했는데 상대가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딱 그러한 반응이었다.

말도 없이 짐 한가득 싸 들고 다녔으니 얕잡아 본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경비병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을 안을 살폈다.

길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게다가 젊은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군.'

짧은 순간, 루이는 상황을 파악했다. 루이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경비병에게 향했다.

"가자."

"어? 예?"

"용병을 찾는 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한데···."

경비병이 말끝을 흘렸다. 존대도 반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 그러나 루이는 개의치 않았다.

'뜻하지 않게 기회를 얻었네.'

역시나 동부. 루이는 경비병을 향해 안내하라고 턱짓했다.

경비병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앞장을 섰다.

보이지 않는 남자들. 잔뜩 날이 서 있는 경비병들. 어두운 마을 분위기. 그리고 용병을 찾는 영주.

바로 전쟁의 냄새였다.

* * *

경비병이 루이를 데려간 곳은 영주의 앞이 아니었다.

'당연한 건가.'

영주가 아무나 만나지는 않을 거다.

루이는 자신을 맞이하는 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2급 용병이라. 확인할 수 있나?"

기사의 말에 루이는 용병패를 꺼냈다. 3급 용병부터는 용병패의 색부터 달랐다.

기사는 루이의 용병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익숙한데···.'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2급 용병이라면 명성도 높았다.

지나가다가 이름을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루이스란 이름도 드물지는 않았다.

기사는 용병패를 돌려줬다.

"되었네. 모처럼 쓸만한 이가 왔군."

"영지전입니까?"

직접적인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2급 용병은 단지 강하기만 해서는 될 수 없었다. 그만큼의 의뢰를 수행해야 했다.

당연히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가라면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걸세. 어떤가?"

"하겠습니다."

루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기회를 마다할 루이가 아니었다.

그런 루이의 반응에 놀란 건 기사였다.

"...화끈한 친구군."

보통 이런 경우에는 상황을 묻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정확한 보수를 묻거나.

그러나 루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겠다는 거겠지.'

충분한 보수를 받을 만큼 활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용병들은 보수에 민감했다.

그저 그런 용병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활약한 용병을 대접하지 않는다면 다른 용병들도 피하게 되어 있었다.

2급 정도 되는 용병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루이스라고 했나? 마음에 들어."

기사는 웃으며 루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사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어깨를 두드리는 상대가 자신이 모시는 영주와 같은 작위의 귀족이란 것을.

루이 역시 기사를 보며 웃어주었다.

"이런, 아직 숙소도 못 잡았겠군."

기사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부터 끌려왔으니 당연했다. 기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제 알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생색을 내는 것이었다. 급이 낮은 용병이라면 이런 소리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내일 다시 이곳으로 오게. 정식으로 계약을 해야지."

"알겠습니다."

루이는 그렇게 기사와 헤어졌다.

* * *

다음 날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때도 영주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해도 루이가 할 일은 없었다.

부르면 나가서 싸운다.

그것이 전부였다. 루이는 전투를 기다리면서 다른 용병들을 통해 상황을 알아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쟁을 서두르더군."

"맞아. 그리 급한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여기뿐만이 아니던데? 옆 영지도 얼마 전에 휴전을 맺었잖아."

그들은 술 한잔에 쉽게 입을 열었다.

굳이 비밀로 할 일은 아니었다. 곧 같이 싸울 동료이기도 했다.

루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정을 짐작했다.

용병들과 달리 귀족들은 중앙에 대해서 들은 게 분명했다.

왕실이 움직이기 전에 끝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상이 맞았어.'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는 왕국 내에서 가장 풍족한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분쟁도 많았다. 없는 이들이 더 치열할 것 같지만 반대였다.

전쟁을 하려면 돈이 든다.

막상 이겨도 손해가 크다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동부에 전쟁이 잦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전쟁에 이기면 전쟁에 쓰인 자금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이곳의 귀족들은 영지전 한두 번으로 자산이 부족해질 일은 없었다.

제국과 가까이 있기에 중앙 귀족들보다 부유한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실력 있는 용병이나 기사들도 모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왕실이 중앙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눈을 돌릴 건 뻔했다.

영주들의 마음이 급해진 것도 이해가 되었다.

루이가 영주를 본 건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난 후였다.

'생각보다 빠르군.'

서두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루이는 단상 위에 있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가는 눈에 뾰족한 턱.

영지의 주인인 트윌엄 자작이었다.

지금까지 루이가 만났던 귀족들과 달리 배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왕국에선 놀라운 일이었다.

트월엄 자작을 바라보던 루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트월엄 자작 뒤에 있는 사내.

순백의 갑옷을 입은 사내가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십 후반의 사내. 짙은 갈색 머리카락인 인상적이었다.

루이와 눈이 마주치자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법이군.'

루이는 사내의 입 모양을 읽었다.

다른 기사들도 있었지만, 유독 사내만이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

루이도 사내를 보고 의아해했다.

'자작 밑에 있을 만한 기사는 아닌데?'

실력자였다.

에테르의 양만 보면 시저와 비슷했다.

왕실 기사단장. 심지어 나이도 시저보다 적었다.

동부의 기사들은 북부의 기사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도 사내 정도 되는 기사가 흔할 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영주의 연설이 끝났다.

그제야 사내도 루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대들에게 무운을!"

영주의 외침에 병사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나아갔다.

선두에 선 병사들의 걸음은 딱딱 맞아떨어졌다.

중간부터 징집병들이었기에 줄 맞추는 게 고작이었으나 그래도 제대로 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차마 강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이 되어 있었다.

북부와는 달랐다.

용병들 역시 말을 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사들의 숫자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루이도 검 손잡이를 쓸어내렸다.

'기대되는군.'

아군이 이 정도인데 적군이 어설플 리가 없었다.

손바닥도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차이가 심하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

굴종. 그렇지 않다는 건 저쪽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기에 전쟁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금으로 번쩍이는 검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나아가던 병사들조차 한 번씩 돌아볼 정도였다.

심지어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이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더 잘 보이도록 천으로 검집을 닦아냈다.

부디 적군의 눈에도 잘 보이길 바라면서.

그리고 멀리 적군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루이는 자신의 예상이 맞은 걸 기뻐했다.

'이쪽이 우세한 게 아쉬워.'

기사의 숫자는 아군이 더 많았다.

이 시대의 전투는 대부분 회전이었다. 국가 간의 전쟁은 다를 수가 있겠지만 루이가 경험한 전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따로 전략도 필요 없었다. 얼마나 많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는가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

두 군이 서로 마주 보며 멈춰섰다.

적군에서 기사들을 확인한 용병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마 적군은 반대일 것이다.

스르릉.

선두에 선 기사가 검을 뽑았다.

루이와 이야기를 나눴던 기사였다. 트월엄 기사단장.

귀족이 이런 전장에 나설 일은 없었다.

영주를 대신하여 그가 전투를 이끄는 것이었다.

"돌격!"

"와아아!"

기사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적군의 수장 역시 검을 겨눴다.

"...! ...!"

기사의 외침에 적군 역시 진격하였다.

루이 역시 달려가면서 뒤늦게 검을 뽑았다.

찬란한 황금빛에 순간적으로 적들의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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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두두두두두두.

두 진형이 가까워질수록 땅의 진동도 커졌다.

곧 두 진형이 격돌했다.

콰가가강!

첫 시작은 기사들.

이어서 용병과 병사들이 뒤섞였다.

병사들의 기합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방에선 에테르가 번뜩이고 그에 휩쓸린 병사들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용기는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고 한계에 도달하자 곧 분노와 광기로 변해갔다.

"죽엇!"

"씨발! 뒈져!"

사방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은 금세 피로 물들었고 쓰러진 이들은 다른 이들의 발판이 되었다.

그중에는 살아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발밑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전쟁터에서 생명의 무게는 이처럼 가벼웠다.

그런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바로 루이.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황금빛이 번뜩였다.

아군조차 순간적으로 지휘관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사실 그동안 루이는 이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미끼용.

그걸로 이 검의 가치는 충분했다. 다른 검들이 있는데 굳이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눈도 아프고.'

검의 반짝임은 루이에게도 거슬릴 정도였다.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검날조차 황금색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황금 검은 자신의 존재감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파지직.

황금 검에 에테르가 휘감자 찬란함이 더욱 짙어졌다.

'효과는 좋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사를 보며 루이는 미소지었다.

기사들보다 루이가 거슬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기사 하나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두두두두.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신형을 날린다.

기사의 검 끝에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말 속도와 합쳐져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피하지 않았다.

달려오는 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반으로 잘린 기사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서 말 역시 상반신이 반으로 쪼개졌다.

말째로 베어낸 것이었다.

쿵.

기사의 몸이 떨어졌다.

순간, 전장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고 싸우던 기사들의 시선이 루이를 향했다.

루이가 보여준 신위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루이 주변만 큰 원이 생겼다.

병사들이 루이를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그러나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다면 누구도 기사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쾅!

둥근 원 일부가 터져나갔다.

그곳에 휩쓸린 병사들의 살점이 튀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는 병사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대로 루이를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루이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전투는 이제부터였다.

* * *

적들을 끊임없이 베어 넘긴다.

그러는 사이 전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그리고.

삐이이이!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퇴각을 알리는 소리.

호각을 들은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도망친다.

아군들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리했다.

아군 병사들의 얼굴에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함께 기쁨이 떠올렸다.

"오오, 황금의 기사."

누군가가 루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주점에서 술잔을 나눴던 용병이 있었다.

"요상한 검을 봤을 땐 뭔 놈인가 싶었는데. 대단하네."

다른 용병들도 루이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친근감이 묻어났다. 이곳은 북부와 달랐다.

세례를 받은 용병이 드물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이를 질투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강한 용병이 있으면 생존확률이 높아졌다.

"혼자 다니는 건가? 하긴, 그 실력이면 굳이 용병단에 들 필요는 없겠지. 기분이다. 오늘 술은 내가 쏘지."

용병의 말에 다른 용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용병들의 환호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터벅, 터벅.

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월엄 기사단장.

그가 다가오자 용병들은 자리를 피해줬다.

"실력이 대단하군. 용병으로 있기 아까울 정도야."

트월엄 기사단장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말하자니 루이보다 활약하지 못한 다른 기사들을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그런 루이의 반응에 미소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그리 말하고 말을 돌렸다.

기사단장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도?'

묘한 말투였다. 전쟁은 방금 끝나지 않았던가.

'적들은 당장 전투를 할 여력이 없을 텐데?'

기사단장의 말뜻은 곧 알 수 있었다.

"모두 전열을 정비해라! 적들을 뒤쫓는다!"

기사단장의 말이 전장에 울렸다. 이어서 기사들도 병사들을 몰았다.

"빨리빨리 움직여!"

"전열을 정비해!"

기사들의 고함에 놀란 병사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스러운 건 용병들이었다.

"쫓는다고?"

적들은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다. 적들을 공격하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그 뒤를 쫓는다는 건 시가전을 한다는 의미였다.

영지전이긴 하지만 시가전을 하는 일은 없었다.

영지전은 어디까지나 대화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적 영지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달랐다.

북부에서도 서로의 진영을 습격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전투를 위해 만든 진영이었다.

영지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영지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끝장을 보겠다는 뜻.

협상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왕실이나 주변 귀족들에게서 제재가 내려오는 건 당연했다.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챈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병사들이 출발했다.

머뭇거리던 용병들도 일단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씨발, 느낌이 싸한데?"

용병 하나가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느낌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계약을 파기할 순 없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용병들에게 향했다.

"가보면 알겠지."

"...그래, 일단 따라가자."

용병들은 입을 다물고 행렬을 뒤따랐다.

루이 역시 기사들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 *

영지가 가까워질수록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병사들 역시 전과 다르게 기세등등했다. 승리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광기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저들 중에 이상을 깨달은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전쟁에 익숙한 용병들은 달랐다.

영주성이 보이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좋은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주성 밖에 있던 주민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군대를 보며 성안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 위에 병사들의 모습이 하나, 둘 나타났다.

공성전을 준비하는 모습.

"씨발."

용병 하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루이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영주. 단상 위에서 보았던 기사도 있었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전쟁 때 보지 못했던 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뭔가 있어.'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때, 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두려움에 떠는 적들을 보아라! 우리는 승리했으며 다시 승리할 것이다! 공을 세우는 이에게는 그만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기사단장의 말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그들에게 이성이란 남아 있지 않았다.

"안에서 얻는 모든 것이 온전히 너의 것이 될 것이며, 영주를 잡는 이에겐 황금을 내릴 것이다!"

"와아아아아!"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당장이라도 명이 떨어진다면 달려갈 기세였다. 그러나 용병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 영지에 약탈을 허용했다. 이것도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영주를 잡으면 황금을 내린다고?

저런 말에 현혹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지만 귀족이 호위 하나 없을 리가 없었다.

병사들이 잡을 순 없었다.

게다가 영주는 귀족이었다. 아무리 명령이 있었다지만 평민이 귀족을 해치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니."

"엿 됐네."

병사들의 사기가 절정에 달하자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돌격!"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그에 맞춰서 성 위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기사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정도의 성벽은 기사들에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애당초 적들이 공성전을 대비했을 리가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용병들에게 다가왔다.

병사들과 달리 용병들은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기사단장 역시 그 이유를 알기에 닦달하지 않았다.

"강요하진 않겠다. 이번 일을 받으면 약속한 대금의 두 배를 주지. 아니라면 위약금을 물고 물러나거라."

용병들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여기서 물러나면 돈을 뱉어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말이 권유지 강요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할 순 없었다.

상대는 기사였다. 그것도 귀족 대신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

문제를 일으켜서 좋은 건 없었다.

"...전 빠지겠습니다."

그때, 용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용기를 내었다.

"저도 빠지겠습니다."

"그래, 몇 푼 벌자고 용병을 그만둘 순 없지."

기사단장은 그런 용병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승세는 기울었다.

지금 상황에서 용병들이 빠진다고 해서 바뀔 건 없었다.

곧 용병들이 떠나고 삼 분의 일만 남게 되었다.

기사단장의 시선이 남은 용병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루이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남았군."

기사단장의 말에 루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이는 다른 이들과 상황이 달랐다. 트월엄과 같은 작위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처벌받을 일은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제국으로 넘어가니 상관없긴 하지.'

루이에겐 용병의 명예나 돈이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돈이라면 지금도 차고 넘쳤다.

기사단장은 남은 용병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대금 이외에도 보상이 있을 거다."

그리 말하고는 마지막으로 루이를 보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기사단장이 남긴 말은 루이를 향한 것처럼 들렸다.

떠나가는 기사단장을 보던 용병 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어찌하긴 어찌해. 돈 벌어야지."

이곳에 남기로 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용병들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루이 역시 걸으면서 기사단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따라오는 기사들과 기사단장을 번갈아 보던 루이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알 수 없는 미소였다.

* * *

성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시체가 즐비했다.

용병들이 손을 보탤 필요도 없었다.

전쟁에 익숙한 용병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트월엄은 불문율을 어겼다. 몇몇 용병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를 찾던 루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기 있군.'

영주의 것으로 보이는 저택 앞에 기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트월엄 자작도 있었다.

루이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트월엄. 네놈!"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염이 희끗희끗하게 난 노인이었다. 노인의 주변에는 몸을 떨고 있는 여인과 아이가 보였다.

'딸과 손녀인가?'

어쩌면 아내와 딸일 수도 있었다.

몇 안 남은 기사들이 노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병력에 포위되어 있었다.

"로엘드 자작. 오랜만이외다."

트월엄은 태연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런 트월엄의 모습에 로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이딴 짓을 하고도 넘어갈 줄 아는가! 내 왕실에 이번 일에 대해 상세히 보고를 올릴 것이다!"

로엘드의 말에 트월엄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염을 매만졌다.

"왕실이라. 그토록 욕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왕실을 찾는 것이오?"

비웃음. 로엘드의 수염이 떨려왔다.

"게다가 그깟 왕실에 무슨 힘이 있겠소이까?"

"뭣···."

로엘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던 로엘드의 시선이 트월엄 뒤에 있는 기사에게 향했다.

낯선 사내.

"...네놈! 배신했구나!"

그제야 로엘드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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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군.

얼마 전 로엘드에게 들어왔던 제안.

그걸 떠올린 로엘드는 트월엄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럽게 트집을 잡아서 영지전을 걸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꿍꿍이가 있던 것이었다.

트월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길래 줄은 잘 서야 하오. 선의를 거절하니 이렇게 돌아오는 것 아니오? 뭐, 자작 덕분에 기회가 왔으니 감사하게 생각하외다."

"감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로엘드의 반응에 트월엄은 실소를 흘렸다.

"자작이야말로 이상하오. 왕실이 우리에게 무얼 해줬다고 충의를 지키시오?"

"제국이라고 다를 것 같으냐! 황제는 네놈 같은 걸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누가 배신자를 신뢰하겠는가!"

"어차피 오르지 못할 거라면 큰물에서 노는 게 맞지 않겠소?"

거기까지 들은 루이도 상황을 눈치챘다.

로엘드 영지는 제국과 맞닿아있었다. 왕국에 제국을 이어주는 길목.

영지와 함께 제국으로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같은 왕국 내에서 땅을 거래할 순 있지만, 타국에 넘길 순 없었다. 국제 문제로 발전하기 때문이었다.

'넘어간다고 해도 세트리아에서 목소리를 높이긴 힘들지.'

상대는 무려 제국이었다.

게다가 시기도 절묘했다.

세트리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움직인 것이었다.

세트리아 왕국의 귀족보다 제국이 세트리아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세트리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엘드 영지가 넘어가면 동부가 반으로 갈라지는 꼴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기사들에게 향했다.

'제국에서 온 놈들이군.'

기사를 봤을 때 느꼈던 꺼림칙함은 그 때문이었다.

'황제가 지시했을 리는 없어.'

고작 변방의 조그마한 땅이었다. 황제가 이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땅을 원했다면 당당히 내놓으라고 하거나 전쟁을 일으켰을 거다. 이렇게 쪼잔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국 변방에 있던 귀족, 혹은 귀족들이 일을 꾸민 것이었다.

그들도 비옥한 땅이 탐이 났던 것이었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지.'

그제야 기사단장이 말했던 보상도 짐작이 갔다.

'제국의 기사라도 되게 해준다는 건가.'

실소가 흘러나왔다.

트월엄은 로엘드를 보며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로엘드 영지는 다른 분께서 잘 보살필 테니. 아아, 아내분과 따님도 내 친히 책임지겠소."

트월엄이 로엘드의 아내와 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둘의 몸이 떨려왔다.

음흉한 시선.

그 눈빛이 담긴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트월엄···!"

분노한 로엘드의 외침이 퍼져갔다.

트월엄은 그런 로엘드를 무시하고 눈짓했다.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로엘드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도 굳은 얼굴로 검을 움켜잡았다.

선두에 나선 건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로엘드를 지키는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주군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받아주겠다."

"...닥쳐라. 배신자 놈."

기사단장의 말에 기사 하나가 차갑게 대꾸했다.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뽑았다.

애당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용병과 달랐다.

"그럼 죽어야지."

기사단장의 검이 기사들을 향했다.

그 순간 빛이 번뜩였다.

텅!

기사단장은 자신에게 날아온 단검을 쳐냈다.

"...무슨 짓이지?"

기사단장의 시선이 돌아갔다. 루이가 그런 기사단장을 보며 히죽 웃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루이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다른 기사들 역시 검을 뽑아서 루이를 경계했다.

루이의 신위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트월엄 옆에 있던 사내만이 묘한 웃음과 함께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을 어기겠다는 소리냐?"

"계약은 그쪽이 먼저 어겼지."

세트리아 용병 길드에 속한 용병은 왕실에 적대할 수 없다.

이번 일은 참가한 용병들만이 아니라 용병 길드에도 피해가 갈 수 있는 문제였다.

어느새 루이의 곁에 용병들이 다가왔다.

"우리도 마찬가지요."

"아무리 막 나가는 인생이지만 나라를 팔순 없지."

그들 역시 상황을 눈치챈 것이었다.

귀족끼리 싸움이 아니라 국가가 끼어있으면 사정이 달랐다.

자칫하면 용병 길드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현상금까지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런 용병들을 바라보던 기사단장의 시선이 다시 루이에게 향했다.

기사단장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국에 정착할 기회였다. 그걸 걷어찬다고?

의아함은 곧 분노로 변했다.

"실력이 있다고 대우해주니 기고만장하구나! 용병 주제에 충의라도 말할 셈인가!"

루이는 기사단장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충의라기보다 받은 게 있어서. 의리라고나 할까?"

기사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사단장을 대신하여 트월엄이 나섰다.

"용병 주제에 건방지구나. 감히 귀족들의 행사에 끼어들어?"

노도와 같은 기세에 용병들은 움찔, 뒤로 물러났다.

객관적으로 보면 트월엄이 용병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만, 귀족이란 이름은 다른 이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아, 그거 말인데."

루이는 품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신분패. 그러나 용병패와는 달랐다.

"...!"

"무슨!"

바닥에 떨어진 신분패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쪽도 나름 귀족이라. 상관없진 않아."

세트리아의 귀족. 지금 있는 둘과 같은 작위였다.

"게다가 이 검 역시 우리 전하께서 주신 거거든."

루이가 황금 검 손잡이를 툭툭 쳤다.

평범하지 않은 검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평민이 아니라 왕국의 귀족. 그렇다면 이번 일에 관여할 명분은 충분했다.

"...루이스. 네 놈이 그 용병이었구나."

기사단장과 달리 트월엄은 루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루이의 선언에 용병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루이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방패막이가 생긴 것이었다.

루이는 기사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앞에 말한 건 다 핑계고. 사실은 이쪽보다···."

루이의 시선이 로엘드를 향했다가 트월엄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기사들.

"...그쪽이 좀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거든."

알 수 없는 말에 트월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트월엄의 반응을 본 기사단장이 몸을 돌렸다.

"저놈들을 먼저 죽여라!"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그들을 보며 루이는 미소지었다.

역시나 남길 잘했다.

* * *

황금 검을 집어넣고 다른 검을 뽑았다.

이 상황에서 굳이 황금 검을 쓸 필요는 없었다.

'관심은 충분하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루이는 다가오는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사가 검을 막아섰으나 루이의 힘을 견디긴 힘들었다.

콰직.

막았던 검이 그대로 살을 파고들었다. 제 검에 목이 베인 것이었다.

괴력. 그리고 날아오는 검을 비틀어 피했다.

루이에게 있어서 이들의 공격은 너무나 단조로워 보였다.

과거 동부에 왔었을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루이가 성장한 것이었다.

검이 번뜩이고 또 하나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순식간에 두 명의 기사를 베고 새로운 상대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조심해라! 보통 놈이 아니다!"

기사단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건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봤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기사단장도 그를 알기에 스스로 나서지 않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루이의 눈빛은 적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맹수가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

그들이 어디에서 이런 눈빛을 마주한 적이 있겠는가.

"에잇!"

기사 하나가 입술을 깨물고는 달려나갔다.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에테르.

그러나.

"커헉!"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이쯤 되니 다른 기사들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트월엄 자작에 대한 충의?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경, 언제까지 구경만 하실 겁니까?"

트월엄은 자신의 뒤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와 있는 게 아니던가. 트월엄의 물음에 사내가 미소지었다.

"안 그래도 슬슬 나서려 했소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쳐났다.

잠깐 사이에 죽은 기사들이 몇이던가. 트월엄은 속에서 화가 올라왔으나 애써 억눌렀다.

지금 상황에서 사내의 심기를 더럽힐 순 없었다.

* * *

루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사내를 따라 길이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납셨군.'

루이 역시 피가 묻은 검을 털어내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짝, 짝, 짝.

사내는 느릿느릿 손뼉을 쳤다.

"이런 시골에도 자네와 같은 인재가 있었다니. 감격스럽군."

사내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오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나로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어."

"...무슨 소리지?"

"자네와는 한 번 검을 나누고 싶었거든. 이처럼 기회가 생기니 얼마나 좋은가."

사내의 말에 루이는 혀를 찼다.

사내가 이번 일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저 사내에게는 트월엄의 기사가 얼마나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루이 앞에 선 사내는 검을 뽑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모시는 주군은 밝힐 수 없지만."

루이에게 겨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져간다.

'뭐 하자는 거야?'

사내의 태도에 루이가 의아해했다. 그런 루이를 보며 사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몽모르도 검파의 빈센트라고 하네. 우리가 검을 나누기에는 장소가 변변찮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내, 빈센트는 담담히 고했다. 그리고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다음은 네 차례다. 그런 눈빛이었다.

정작 루이는···.

'와, 소름.'

저도 모르게 팔을 매만졌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옛날 흑역사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와 닿았다.

'제국이 가까워진 걸 실감하는군.'

그렇다. 기사란 저런 존재였다. 왕국의 기사들은 제국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부드러운 수준이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집단.

그런 주제에 자신들은 고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빈센트의 시선에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 떠돌이 용병이다."

시선에 못 이겨서 입을 열긴 했으나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 기억하겠다."

그제야 검을 겨누는 빈센트.

동시에 그의 몸이 가속했다.

파지지직.

루이는 혀를 차며 검을 쳐냈다.

'...무겁군.'

루이를 스쳐 지나간 빈센트가 다시 검을 세웠다.

빈센트가 지나간 자리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호오, 이걸 막은 건가? 어디 이것도 막아보아라."

다시 한번 에테르가 빈센트의 몸을 휘감았다.

파지지지직!

빈센트의 검은 일반적인 검과 달랐다. 마치, 창을 마주한 느낌.

몽모르도 검파의 특징이었다.

직선적이며 저돌적이었다.

콰가강!

루이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에테르를 이용한 초가속. 검 끝에 공격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이라면 위협적인 공격일 거다.

'그만큼 약점도 뚜렷하지.'

발끝부터 서서히 에테르가 올라왔다.

그런 루이를 향해 빈센트의 공격이 쏘아졌다.

그리고···.

콰가가강!

"커헉!"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빈센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옆이 비었어."

상대가 빈센트보다 빠르다면 쉽게 무너진다.

"무, 무슨."

루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빈센트에게 걸어갔다.

애당초 몽모르도 검파의 기술이 대단하다면 루이가 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빈센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머, 멈춰라. 나를 죽이면···."

빈센트의 머리가 떠올랐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 그러나 그를 지켜보던 이들은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루이는 굴러다니는 머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죽이면 뭐?"

말하려면 빨리 말하지.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죽은 이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한 놈은 끝냈고."

루이의 혼잣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주변이 고요했다.

제국에서 내려온 기사.

설마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트월엄과 기사단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루이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비명들.

이곳의 상황을 모르는 병사들은 약탈을 이어가고 있었다.

"풍년이군."

시간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방금까지 같이 싸우던 동료였으나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깨닫고 도망치기 전에 수확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루이의 검이 기사단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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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383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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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꾸나.

쾅! 콰강!

둘의 신형이 뒤엉켰다.

짧은 순간 둘의 표정은 상반되게 변하였다.

담담한 루이와 달리 기사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이 닿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힘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었다.

용병들도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병 중에는 에테르를 다루는 기사도 있었지만, 숫자가 너무 적었다.

루이는 힐끗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쁘니 빨리 끝내야겠군."

"...!"

루이의 혼잣말을 들은 기사단장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그러나 루이는 용병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혹여나 기사들이 용병에게 당할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니 노는 건 여기까지야."

루이의 몸에 푸른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파지지직.

지금까지와 달랐다. 기세도, 속도도.

기사단장은 루이의 검을 막을 수도 없었다.

아니, 설령 막았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거다.

격이 달랐다. 동부가 아무리 부유하고 기사들이 많다지만 고작 자작이었다. 후작들이 데리고 있던 기사들과 비교할 순 없었다.

그들조차 루이의 상대는 아니었다.

"컥!"

기사단장의 머리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기사들을 향해 신형을 던졌다.

콰가강!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폭풍처럼 적들을 휩쓸고 있었다. 기사들이 분투하였으나 그들의 검이 루이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 모습에 용병 하나가 뒤늦게 루이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영혼수확자."

북부의 소문을 들은 용병이었다.

지금 루이의 모습은 이명과 잘 어울렸다.

사신. 그야말로 적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전사였다.

기사들을 베던 루이의 시선이 용병들에게 향했다.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병사들을."

"예, 예!"

화들짝 놀란 용병들이 움직였다.

"가자!"

마을로 향하는 용병들의 얼굴에 감동이 차올랐다.

솔직히 기사들을 상대하는 건 용병들로서도 벅찼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목숨은 아까웠다. 루이가 그걸 알고 배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오해이긴 했으나 용병들이 알 리가 없었다.

'실력만큼이나 인성도 높군.'

저러니 용병으로서 귀족이 된 것이었다. 용병들의 마음속에 루이란 이름이 깊게 새겨졌다.

홀로 남게 된 루이는 기사들을 보았다.

루이를 포위하고 있는 기사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맹수를 둘러싼 들개들. 딱 그러한 느낌이었다.

이 자리를 지배하는 게 누구인지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이제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겠네."

아까까지만 해도 한 놈이라도 죽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루이의 사나운 웃음을 본 기사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 * *

전장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루이가 도망친 기사까지 추격하여 죽인 후 돌아왔을 때, 루이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용병들의 눈빛에는 존경이 가득했고 로엘드의 기사나 병사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깃들었다.

집요한 추격.

도망치는 이들까지 모조리 참수하던 루이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루이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은 용병들만은 달리 생각했다.

'그렇지. 후환을 남기면 안 되지.'

일반 병사도 아니라 기사였다. 살려둬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용병들과 달리 루이를 좋게 보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크로이드 자작. 감사하오! 내 이야기로만 듣던 영웅을 직접 본 기분이외다!"

누가 보면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났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루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엘드의 기사를 가장 많이 죽인 건 빈센트도, 트월엄 기사단장도 아니었다.

바로 루이었다.

'...트월엄의 기사를 죽인 것도 나지.'

홀로 양쪽 진형에 피해를 줬다.

그걸 생각했을 때 오히려 욕이나 듣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물론, 루이의 신위를 보고서 앞에서 욕할 용기는 없겠지만 로엘드의 환영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기사들의 죽음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욱 와 닿은 것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안에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전쟁은 끝났지만, 영지는 아직 수습조차 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신음이 들려왔지만 로엘드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말하면서 자신의 젊은 아내를 향해 눈짓했다.

눈치가 빠른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루이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 로엘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제 자랑은 아니지만 미인이외다. 그러니 저 녀석도 탐을 냈겠지."

죽은 트월엄을 바라보는 로엘드의 시선은 차가웠다.

곧 로엘드는 웃으며 루이를 바라보았다.

"딸 아이도 아내를 닮아 미인이 될 거라오."

말하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그제야 아까 주고받던 눈빛을 이해했다.

딸을 치장하라는 소리였다.

'속이 보이는군.'

젊은 나이에 자작. 뛰어난 무력. 게다가 홀몸이었다.

이만한 사윗감은 없었다.

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 막 열셋 정도. 높게 잡아야 다섯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하였다.

자신의 자식들까지도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물론, 루이에게는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권유는 감사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말하면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트월엄 자작이 고용한 이들이었다.

고용주가 죽었다면 마땅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짐도 영주성에 맡겨놨지.'

가지러 가야 했다. 이번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보석과 금화는 챙겨 왔지만, 나머지 검들과 뿔은 영주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루이의 말에 로엘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소이다. 일이 끝나면 로엘드에 다시 들려주시오."

"알겠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으로 향하려면 로엘드를 지나야 했지만 영주성에 들릴 생각은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니.'

그때,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루이스 자작님 이제 어찌할까요?"

용병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막상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뒷감당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의뢰비 역시 사라졌다.

"지금은 용병으로 있는 거라 굳이 자작이라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경이라 부르겠습니다."

루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전처럼 대해도 상관없었으나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더 불편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용병 길드에 서신을 넣겠습니다. 그리고 의뢰 대금 역시 영주성에서 알아서 챙겨 가면 될 겁니다."

루이는 말하면서 로엘드를 바라보았다.

로엘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름을 보태겠네."

두 귀족이 공증하였다면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용병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아서 챙겨 가라는 말은 약속한 대금보다 많이 가져갈 수 있다는 뜻도 되었다.

어차피 루이나 로엘드의 돈도 아니었다.

남아 있는 트월엄의 가족들이 반발하겠지만 그 자리에 루이보다 작위가 높은 이는 없었다.

'계급이 깡패지.'

애당초 자작의 자식이 작위를 계승하려면 왕실의 허가가 필요했다.

왕국을 배신하려고 했었는데 작위를 계승시킬 리가 없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루이는 피식 웃고는 말에 올랐다.

갈색의 명마. 검붉은 빛 갈기가 인상적이었다.

트월엄 자작이 타고 왔던 말이었다.

루이는 모르고 있었으나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제국의 귀족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힘차게 투레질을 하는 말을 보며 루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이와 용병들은 영주성에 도착했다.

다행히 루이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도망쳤네."

트월엄 자작의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는 하인들의 말에 용병들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닿자마자 떠난 게 분명했다.

그들 역시 트월엄 자작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하긴.'

일이 끝나자마자 제국의 귀족에게 영지를 떠넘기고 제국으로 넘어가려고 했으니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을 거다.

하인들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루이는 하인을 보며 말했다.

"창고는 어디지?"

당연한 소리였지만 곡물 창고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급하게 떠났다면 제대로 물건도 챙기지 못했을 거다.

"하, 하지만."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머뭇거리는 하인들을 향해 신분패를 꺼냈다.

하인의 눈이 커지자 용병들이 나섰다.

"자작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느냐! 어서 빨리 대답하거라!"

"아니면 너희도 왕국을 배반하려고 하는 것이냐!"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게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순식간에 하인들을 압박하자 하인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그런! 아닙니다!"

"이, 이쪽입니다."

황급히 앞장서는 황급히 앞장서는 하인들을 보며 용병 하나가 씩 웃었다.

"가시지요. 루이님."

오면서 루이가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단 걸 알기에 친근함이 묻어났다.

그걸 떠나서 용병으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루이를 바라보는 용병들의 눈빛에는 존경스러움도 담겨 있었다.

루이는 피식 웃더니 하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급하게 도망가느라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

용병들은 창고부터 시작해서 영주와 가족들의 방을 차례대로 뒤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막무가내로 챙긴 건 아니었다. 루이가 먼저 집는 걸 기다린 후에나 자신들의 몫을 챙겼다.

배려였다.

사실상 루이는 재물에 큰 욕심이 없었다.

남은 걸 확인해도 루이가 가진 짐보다 값비싼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권리를 챙길 뿐이었다.

게다가 루이가 챙기지 않으면 용병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루이는 값비싼 것보다 눈에 띄는 것들로 집었다.

그걸 본 용병들 역시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챙겼다.

물론, 그것만으로 의뢰비의 몇 배는 벌었을 거다.

"너희들도 적당히 챙겨서 떠나라."

루이가 하인들을 보며 말했다. 하인들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자신들마저 챙길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한 명이 움직이자 우르르 몰려갔다.

어차피 남은 건 로엘드가 챙겨 갈 것이었다.

게다가 하인들이 챙겨봤자 얼마나 챙기겠는가.

물론, 욕심을 부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과분한 탐욕은 재앙을 부르지.'

많은 걸 챙기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런 이들은 다른 이들의 목표가 될 뿐이었다.

'그것도 제 팔자이니.'

루이가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럼 저희도 가보겠습니다."

"루이 경, 부디 보중하십시오!"

용병들이 루이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태도였다.

그렇게 용병들도 자리를 떠나가고 루이도 다시 로엘드를 향했다.

도중에 용병 길드에게 보낼 서신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도까지 서신을 보내려면 돈이 제법 들었지만, 루이에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로엘드에 도착하자 루이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영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을을 수습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다급히 말했다. 마을 한 편에는 아직도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일정을 서두르고 있으니 조용히 지나가겠네."

루이의 말에 병사들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더라도 영주의 귀에 들어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지나갔다고 하면 실망하거나 말리지 못한 병사를 책망하겠지.

하지만 루이는 병사들을 위해서 영주성에서 하룻밤을 보낼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야영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

루이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가자꾸나."

전쟁의 여파로 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말은 거리낌 없이 마을을 가로질렀다.

이제 제국이 바로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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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383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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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동무.

달그닥, 달그닥.

말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떠오르는 태양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장벽들.

그동안 보았던 성벽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웅장했고 또 위협적이었다.

바로 제국의 경계였다.

장벽 위에서는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똑같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의 움직임은 절도가 흘러넘쳤다.

제국의 가장 한적한 외곽이었으나 병사들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예병이라고 말하기 부족함이 없었다.

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국 트로이센.

대륙을 지배하는 패자이자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세력.

장벽을 바라보던 루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943:12:51]

트월엄 덕분에 천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목적한 시간에는 한참 못 미쳤다.

"적어도 천 오백은 모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카스를 2단계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 상태라면 천이 넘어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지.'

원래라면 주변을 돌면서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트월엄과 로엘드의 일이 퍼졌는지 왕국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 영주들이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루이도 바로 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참가하긴 힘들었겠지.'

이름이 너무 알려졌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귀족인 루이를 고용하려는 자는 몇 없었다.

적어도 루이보다 높은 귀족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동부에 그런 귀족이 몇이나 되겠는가.

루이는 퀘스트를 확인했다.

[메인 퀘스트]

[밤하라의 신전을 찾아가시오.]

[보상 – 2500T, ???]

메인이라면 서브도 있을 것이다. 루이는 물음표 부분을 노려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탓인지 별들이 많았다.

"일단 장단에 맞춰주겠는데, 그만큼 가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흐릿해져 가는 별을 바라보며 루이는 말을 이었다.

"대가가 시원찮으면 다음에도 또 따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힘의 대가?

그건 시간으로 주고 있었다.

시한부의 삶.

루이로서도 제국으로 넘어가는 건 모험이었다.

루이가 제국을 떠난 건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아니, 도망친 거지.'

루이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강해졌다지만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이곳 세트리아 왕국과 달랐다.

루이는 굳은 얼굴로 말의 고삐를 당겼다.

오랜만의 귀환이었다.

* * *

제국 앞에는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제국으로 넘어가려는 난민들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왕국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일반 난민이 시민권을 받기 힘들다.

시민권이 없는 이들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제국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루이는 그들을 지나쳐 검문소로 향했다.

"멈추시오."

그리고 검문소 앞에 도달했을 때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힐끗, 주변을 살핀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도 있군.'

게다가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일반 병사와 무장부터 달랐다.

레인저. 제국 레인저들의 명성은 높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병사는 루이의 말에 놓인 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난민들처럼 짐이 많았지만 타고 있는 말이나 무장을 보면 난민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특히나 허리춤에 찬 황금 검이 한몫했다.

루이는 품에서 귀족의 신분패를 꺼냈다.

"제국으로 넘어가려고 하오."

자작의 작위. 그러나 신분패를 받아든 병사에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왕국의 작위는 제국 내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루이를 살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행. 가는 김에 이것도 처분하려고 하오."

루이는 말 뒤편을 가리켰다.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루이가 거절하면 제국으로 가는 문도 닫힐 것이었다.

병사가 뒤에 눈짓하자 다른 병사 둘이 다가와서 짐을 열었다.

짐 안을 확인한 병사가 놀란 눈으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마수의 사체.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왕국의 귀족보다 마수를 사냥할 수 있는 기사. 제국에게는 후자가 더 중요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선임 병사가 뒤로 물러났다.

졸지에 병사들과 남게 된 루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사실 마수의 사체가 없었다면 더욱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얼마 뒤.

병사와 함께 한 노인이 나타났다. 병사들처럼 군복에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기사군.'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

아까 느꼈던 에테르 중 하나는 이 노인의 것이었다.

노인의 눈빛에 루이는 살짝 기세를 풀었다.

노인이 무엇을 확인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의 기세를 느낀 노인의 눈빛이 변하였다.

"이곳을 담당하는 테슬로라고 하오."

"루이스입니다."

루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관문이 아니었다.

하나의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곳의 성주가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작 왕국의 자작 때문에 성주가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마수를 잡았다기에 확인을 하려는 것이었다.

루이의 인사에 테슬로가 미소지었다.

"신분은 확인했소이다. 보아하니 말썽을 부릴 분처럼은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르니 말해두겠소."

테슬로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국은 왕국과 다르오. 왕국 내에서처럼 행동한다면 누구도 귀하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네가 가진 작위는 제국 내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테슬로는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귀족이라면 발끈할만한 일이었다.

루이의 태도에 테슬로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루이는 왕국의 다른 귀족과는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귀족이었으나 루이의 출신은 제국이었다. 제국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테슬로가 눈짓하자 병사 하나가 신분패를 돌려줬다. 그리고 낯선 패도 하나.

"임시 신분패이오. 기한은 한 달. 그전에 로헨이나 다닝에 들려서 정식으로 발급받으시오. 기한이 지난다면 귀하의 신분을 인정받긴 힘들 것이오."

테슬로는 말하면서 난민들을 눈짓했다.

만일 기한이 지난다면 저 난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작위뿐만 아니라 신분 역시 왕국의 것은 소용이 없었다.

로헨이나 다닝은 이곳에서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도시들이었다.

일부러 가까운 도시들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루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명심하지요."

시원하게 대답하는 루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테슬로가 웃음을 흘렸다.

"한 가지 충고하자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성을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쓸데없는 소란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쓸데없는 소란.

루이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크로이드. 이 성은 왕국과 달리 제국 내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루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이가 인사를 건네자 테슬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병사가 다가왔다.

"나가는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이곳부터는 직접 걸으셔야 합니다."

말을 타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루이는 순순히 그들을 따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성벽 위의 화살은 루이를 겨누고 있었다.

혹여나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시위를 떠날 것이다.

'여전히 살벌하군.'

루이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의를 느끼며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꼬박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최소였다.

성주가 직접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마수의 일이 심각해졌다는 뜻이었다.

* * *

성벽을 지나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성벽 뒤로 정리된 길이 이어졌다. 마차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 게다가 길 중간에는 각각 도시를 가리키는 표지판도 보였다.

이곳이 제국에서도 가장 외곽 중 하나란 걸 떠올리면 놀라운 일이었다.

왕국에는 없던 친절이었다.

그러나 이는 왕국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왕국에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일곱 개의 나라.

해상왕국 호페스와 마론 공화국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왕국은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다.

상국.

즉, 제국의 화려함에는 다른 다섯 왕국의 땀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

재물뿐만 아니었다.

뛰어난 기사나 장인을 비롯한 인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트로이센으로부터 시작된다.

제국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제국은 항상 최초이자 최고여야만 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다섯 왕국이 희생되고 있었다.

왕국의 귀족 중에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영광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이 대륙에서 제국의 영향력은 강대했다.

루이는 고삐를 당겼다. 길 위를 걸어가던 말이 방향을 바꿨다.

길을 벗어나는 말.

루이는 굳이 길을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길을 만든 이유는 빠르게 가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오가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은 짐승이 접근하기 힘들었다.

인간이 그들에게 위협을 받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위협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루이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루이는 굳이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제국을 처음 방문한 다른 이들과 달리···.

'근처에 산이 하나 있었지.'

이곳은 루이에게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과거에도 왔던 길.

"이틀 정도는 거기서 보내야겠어."

아직 기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시간은 벌 수 있을 때 벌어두는 게 좋았다.

그렇게 루이의 말이 정돈되지 않은 길을 나아갔다.

* * *

이틀. 먹는 것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사냥에 몰두했다.

아니, 사냥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사냥이라고 하면 목적이 있겠지만 루이가 한 건 살육에 불과했다.

가죽도 뼈도 노리지 않았다.

그저 온 산을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것들을 학살했다.

그렇게 번 시간이 고작 150시간.

날아간 48시간을 생각하면 고작 100시간을 벌었을 뿐이었다.

'효율이 낮아.'

역시나 마수를 제외하면 인간이 가장 나았다.

루이는 다시 보이기 시작한 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루이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나타난 길은 루이가 기억한 길과 달랐다.

거대한 무언가가 할퀸 흔적.

루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루이는 차분한 눈길로 흔적을 살폈다.

'최근이야.'

하루나 이틀 정도. 그걸 깨달은 루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러한 흔적을 남길만한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마수군."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루이 역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말을 탄 중년인이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수염. 허리는 꼿꼿하게 서 있었으며 쇠와 가죽으로 만든 경갑.

그러나 루이의 눈길을 끈 건 다른 부분이었다.

허리춤에 있는 검. 검집 안에 들었으나 독특한 모양이었다.

크기를 생각하면 롱소드인데 끝이 너무 좁았다. 게다가 손잡이 부분 역시 팔을 감싸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저 모습이라면 검을 휘둘러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누가 보면 멋을 부린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으나 루이는 아니었다.

'실력자.'

루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말 위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것만 보아도 중년인의 수준을 짐작하기 쉬웠다.

"마수가 이런 곳까지 나오고. 세상이 정말로 어찌 되려고 하는지. 안 그런가?"

중년 기사는 혀를 차더니 루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 복장, 세트리아에서 온 여행자인가?"

"...예."

중년 기사가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오, 방향을 보면 다닝으로 가려는 것이겠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중년 기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 되었군. 나 역시 다닝으로 가고 있네. 가는 동안 말동무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루이와 중년 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루이의 시선에 중년 기사는 미소지었다.

"그리 경계할 것 없네. 제국을 떠난 적이 없어서 이국의 소식이 궁금할 뿐이야. 단순한 호기심이지."

싱그러운 미소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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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3839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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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로.

"나는 베일로라고 하네."

"루이, 용병입니다."

"용병이라!"

루이의 말에 베일로는 탄성을 뱉었다.

잠시 루이를 바라보던 베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베일로라고 소개한 기사는 유쾌한 성격이었다.

루이가 용병임을 알았음에도 무시하는 기색도, 거리낌도 없었다. 다른 기사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궁금한 것도 많았다.

함께 다니면서 귀찮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베일로는 단순히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했던 질문들은 말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왜 낯선 이한테 동행을 부탁했는지 알만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걸 좋아하면 홀로 다니는 건 고욕이었을 거다.

그런 베일로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건 밤의 숲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만났던 마수들.

"허, 그런 마수도 있는 건가!"

베일로의 눈이 반짝였다. 고풍스러운 외견과 다르게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다시 입을 열려던 루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멀리 도시가 보였다.

"다닝이군요."

베일로는 아쉬움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 다닝에서는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신분패만 얻고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베일로의 질문에 루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래 머물러도 좋을 게 없었다. 루이의 말에 베일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시끄러운 나에게 어울려주느라 고생 많았네."

어쩐지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뒤로 베일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닝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루이 역시 그런 베일로를 지켜볼 뿐 말을 건네지 않았다.

* * *

다닝에 도착한 루이는 바로 관청으로 향했다.

임시 신분패를 정식 신분패로 바꾸기 위해였다. 제국에서 활동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루이를 맞이한 건 병사도, 기사도 아니었다.

"이곳 위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잠시 따끔할 겁니다."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 루이는 시키는 대로 작은 구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여성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루이는 그것이 주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이란 이적을 일으키기 위한 시동장치.

곧 여성의 말처럼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바늘로 찌르는 느낌.

곧 구슬이 붉은빛을 띠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이 입을 열었다.

"되었습니다."

여인은 네모난 은패를 건넸다.

제국의 신분패였다.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진 신분패를 루이의 손에 올리니 글자가 변했다.

마법.

[루이스 크로이드(세트리아 자작)]

뒷면에는 다닝과 낯선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담당자인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마법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패는 오로지 당신의 피에만 반응합니다. 잃어버리면 본국에서는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는 그런 루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제국에 온 이들은 신분패를 보고 놀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백작, 후작. 할 것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달랐다.

'전에 와 본 적이 있나 보군.'

마법사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감사합니다."

목적을 마친 루이는 자리를 떠났고 마법사는 곧 루이에 대해서 잊었다.

* * *

관청을 나선 루이가 향한 곳은 제국의 용병 길드였다.

'도시에 온 김에 한 번에 처리하는 게 낫지.'

모든 도시에서 신분패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도시에 용병 길드 지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닝은 제국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도시였다. 당연히 용병 길드의 지부도 있었다.

제국에는 용병 길드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어느 길드에 가입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땅이 넓기에 나뉘었을 뿐 대부분 협력하고 있었다.

아니, 제국 내뿐만이 아니었다.

"세트리아에서 오셨군요. 3급 용병패로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젊은 남성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왕국의 용병패 역시 제국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같은 급은 힘들지만 한 단계 낮은 급의 용병으로 등록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루이는 별다른 시험도 없이 제국의 용병이 될 수 있었다.

용병패까지 얻은 루이는 가지고 온 마수의 부산물까지 처리하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지치는군.'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았다. 반나절 사이에 다닝 한 바퀴를 돌았다.

마수의 부산물과 트월엄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제대로 흥정조차 하지 않고 넘겼다.

남은 건 검들과 보석뿐.

잠시 그를 바라보던 루이는 눈을 감았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쉬어야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루이는 새벽이 되자마자 다닝을 나섰다.

터벅, 터벅.

아직 이른 시간. 루이와 말발굽 소리만이 새벽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서 걷던 루이가 멈춰 섰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루이의 말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알고 있었는가?"

멋쩍게 웃으며 나타난 이는 어제 헤어졌던 베일로였다.

"언제부터였지?"

베일로의 물음에 루이는 검을 턱짓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베일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처음부터였어."

특이한 형태의 검. 그리고 루이는 특이한 기술을 쓰던 이를 알고 있었다.

"속여서 미안하군. 하지만 자네와 있던 시간이 즐거웠던 건 사실이라네. 단지 자네가 어떤 이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이해합니다."

루이의 말에 베일로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피고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몽모르도 검파의 베일로라고 하네."

몽모르도. 얼마 전 죽인 빈센트가 속한 검파였다.

'그 녀석이 말하려던 건 이건가.'

베일로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 정도 되는 기사가 이런 변방에.

그것도 홀로 다니는 일은 드물었다.

임무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루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검파를 말한다는 건 검파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는 뜻도 되었다.

루이도 검파에서 무언가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 아이의 성정은 잘 알고 있었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

베일로는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악감정은 없어. 그저 같은 검파의 소속으로서. 그 아이의 사형으로서 의무를 다할 뿐이야."

스르릉, 검이 뽑혀 나왔다. 역시나 루이의 예상대로였다.

검이라기보다 거대한 바늘처럼 보였다. 손잡이 역시 손목을 넘어서 팔을 덮었다.

오로지 찌르기에 특화된 검.

루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베일로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는 동안 베일로는 한 번도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같이 오지도 않았을 거다.

루이도 검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경이 마지막입니까?"

더 추격은 없는 건가. 루이의 물음에 베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걸세. 본파에 나보다 강한 이는 있지만 다들 엉덩이가 무거워서."

베일로는 웃으며 말했다.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원래라면 다른 이가 오기로 되어 있지만 내가 자원했다네. 이 몸 하나로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은원 관계는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었다. 만일 다른 이가 루이를 죽이면 상관없지만 반대의 경우 은원은 더욱 깊어진다.

몽모르도 검파의 실력자.

베일로를 죽일 정도라면 검파에서도 쉽사리 사람을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아이와 인연이 있는 것도 있지. 음?"

말을 이어가던 베일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설마 아쉬워하는 건가?"

"..."

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루이의 반응에 베일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아이도 정말 대단한 이와 엮였군."

이제 서로 나눌 말은 없었다. 루이를 바라보는 베일로의 눈빛이 변했다.

그와 함께 기세도 변했다.

쏘아지는 검.

그야말로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쾅! 쾅! 쾅!

잠깐 사이에 세 번이나 찔러 들어왔다.

신속이라 말하기 부족함이 없는 속도였다. 그러나 루이는 차분하게 막아섰다.

이건 간을 보는 것에 불과했다.

'진짜는 다음이야.'

역시나 빠르게 다가온 만큼 물러나는 속도도 빨랐다.

검 끝이 루이를 향한다.

검이 아니라 창끝을 향한 느낌. 곧 베일로의 발끝에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온다!'

파지지지직!

폭음과 함께 에테르가 바람을 찢어발겼다.

베일로가 지나간 자리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흔적.

"..."

루이는 혀를 찼다. 간신히 피했으나 어깨가 아려왔다. 공격을 피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충격파.

'빨라.'

그리고 강했다. 빈센트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시 가겠네."

베일로가 자세를 잡았다.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베일로의 몸을 휘감았다.

루이는 차분한 눈길로 베일로를 보았다.

확실히 상대는 빠르고 강했다.

그러나 공격이 어디로 올지 안다면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베일로의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이가 몸을 비틀었다.

'보였다!'

루이는 검을 찔러넣었다. 루이의 검은 베일로의 옆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팟!

피가 튀었다.

그러나 물러난 것은 루이였다. 루이는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옷이 찢어진 자리에 긴 혈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살이 타는 냄새도 함께 올라왔다.

"그 아이의 것이 몽모르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베일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와 베일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베일로는 루이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의 가시는 아직 꽃피지도 못했을 뿐이야."

루이의 시선이 베일로의 검을 향했다.

'저것이군.'

비밀은 검 손잡이였다. 팔을 감싸고 있는 형태.

자세히 보니 여러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건 팔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루이가 한눈에 알아봤던 약점.

그걸 몽모르도 검파가 모를 리가 없었다. 보완한 것이었다.

'아니, 보완이 아니야.'

장점을 더 극대화 시켰다. 베일로에게서 흘러나온 에테르가 검 손잡이를 통해서 몸 전체를 휘감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옆에서 오는 공격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더 빠른 가속이 가능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 제국 팔대 검파 중 하나는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했다.

철벽의 베헤모스.

검에 에테르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갑옷처럼 두른다.

그들과 비교하면 몽모르도가 특별한 게 아니었다.

루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끊임없이 회전하는 에테르는 그만큼 까다로웠다.

'...그렇다면 정면이군.'

쓰던 검을 집어넣고 새로운 검을 꺼냈다.

그걸 본 베일리의 눈썹이 휘었다.

지금까지 루이가 쓰던 검은 명검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새롭게 꺼낸 검은 그렇지 않았다.

신출내기 기사들이나 쓸법한 검. 루이 정도의 실력자가 검의 가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루이의 눈빛은 포기한 자와는 달랐다. 오히려 전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베일리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강렬했다.

루이가 빈센트의 옆을 노렸던 건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이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루이의 눈빛에 푸른 섬광이 떠올랐다.

에테르.

그런 루이의 모습에 베일리 역시 자세를 잡았다.

루이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부딪히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

"..."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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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384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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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여우.

번뜩임.

찰나의 순간,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음.

콰가가강!

뒤늦게 들려오는 소리에 땅이 뒤흔들렸다.

한순간의 격돌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루이는 부러진 자신의 검을 내려보았다. 손목이 뒤틀리고 어깨가 기이한 각도로 늘어져 있었다.

'빗맞았는데도 이 정도인가.'

뚝, 뚝.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루이와 다르게 베일리의 검은 멀쩡했다.

애당초 경도가 달랐다.

찌르기에서 베일리의 검을 당해낼 수 있는 검은 몇 없었다.

베일리는 루이를 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결국, 이리되는 것인가."

자조적인 웃음. 그리고 핏물을 내뿜었다.

투두둑.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쿨럭, 멋진 검이야···. 이름이 있는가?"

"공명이라고 지었습니다."

루이의 말에 베일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의 복부에는 잘린 검이 꽂혀 있었다.

"공명이라. 이름, 은 너무 진중하군."

파괴적인 검과 맞지 않았다. 말할 때마다 복부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베일리는 루이와 만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루이는 터벅, 터벅 베일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베일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바닥에 쓰러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베일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루이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꼬리의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본파에서, 사람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했었, 지?"

베일리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루이도 굳이 그런 베일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유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베일리는 그만한 기사였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일리의 입이 열렸다.

"본파는 그렇, 겠지만, 그 아이가 모시는 주인은, 다를 걸세."

올라오는 피가 많아질수록 베일리의 목소리는 딱딱 끊겼다.

빈센트의 주인.

트월엄 자작의 일을 지시한 이였다.

"조심, 하게. 그분은, 욕심, 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높거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베일리는 눈을 감았다.

"그만, 보내주, 게. 그 아이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눠야 겠, 어."

빈센트. 다른 사제들도 있었지만,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몰락한 귀족 출신.

'아니야.'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속죄였다.

그 아이가 곤란한 상황이었을 때, 자신은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잘못 삼킨 생선 가시처럼.

만일 그때 자신이 손을 뻗어줬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 아이의 주인은···.'

눈을 감고 있는 베일리의 눈썹이 떨려왔다.

그래서 이번에 직접 나선 것이었다.

루이는 눈을 감고 있는 베일리를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부러진 검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이었다.

예기가 날카롭게 올라왔다.

스스슥.

바람 소리와 함께 베일리의 머리가 떨어졌다.

깔끔한 일검.

아마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다.

툭, 쓰러지는 베일리를 뒤로 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72시간.

밤의 숲에서 만났던 사냥꾼들의 수장. 존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인간이라 욕할지 모르겠지만 루이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루이는 쓰러진 베일리를 향해 검을 세웠다.

검례.

루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루이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죽은 이를 위한 시간은 이걸로 충분했다.

루이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죽여야 했다.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었다.

북동쪽으로 향하는 루이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 * *

칼튼 백작.

제국 서부의 귀족들을 통솔하는 자였다. 가진 작위보다 높은 명성과 힘을 가진 이였다.

권위만 보면 후작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를 향해 중년 귀족 하나가 다가왔다.

"백작님."

칼튼 백작의 시선이 귀족에게 향했다.

멘소나 자작.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몽모르도에서 보낸 이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몽모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서부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검파 중 하나.

그리고 전에 백작이 데리고 있던 기사의 출신이기도 했다.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린 이. 그렇기에 타지로 보냈던 것이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기사.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어차피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는가."

칼튼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름도 잊은 이의 복수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감히 칼튼의 행사를 방해한 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몽모르도 검파에 이번 일을 흘린 것도 칼튼이었다.

자신의 손을 쓰지 않고 처리할 생각이었다.

칼튼의 눈치를 보던 멘소나 자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실패한 이가 베일리 경이라고 합니다."

"...베일리 경이라면."

"가시의 기사입니다."

몽모르도뿐만 아니라 서부 내에서 유명한 기사였다.

수염을 쓸어내리던 칼튼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헛기침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세."

그리고는 몸을 돌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모셔놓고 실례했습니다."

칼튼의 옆에는 삼십 대 초반의 사내와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잘생긴 사내와 외눈의 기사.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닙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마스터 체프먼."

칼튼의 호칭에 사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싸늘한 말투에 칼튼의 눈이 떨려왔다. 그러나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디 용서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자꾸 실수하는군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럼 어찌 부르면···."

"공자나 경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지금의 저는 아무런 작위도 없는 이이니."

"예, 공자. 그럼, 사업 이야기를 다시 하죠."

늙은 여우.

역시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색을 회복한 칼튼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 * *

긴 회의가 끝나고 에반은 칼튼 백작성을 빠져나왔다.

에반이 말 위에 오르자 그를 수행하던 외눈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눈에 보이는 수작질입니다."

"알고 있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칼튼 백작은 에반이 있는 걸 알고 그러한 화두를 꺼낸 것이었다.

에반이 흥미를 보일 것을 알기에.

"늙은 여우. 대단한 이이지. 설마 이 나를 칼잡이로 쓸 생각을 하다니."

평범한 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것이었다.

기사는 하나 남은 눈을 찡그렸다.

불쾌했다. 만일 에반이 말리지 않았다면 단번에 목을 쳤을 것이다.

마스터.

그 하나만으로 사내는 존경을 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사내는 다른 마스터와 달랐다.

체프먼. 그 이름을 이어갈 자였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어찌 저런 자를 쓰려고 하시는지."

기사의 눈에 경멸이 떠올랐다. 기사가 본 칼튼 백작은 여우란 말도 과분했다.

"사람은 저마다 쓰임이 있는 걸세. 아버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면 에반과 말조차 섞기 힘든 위치였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움직이지 않았는가."

백작 주제에 에반을 움직이게 했다. 체프먼의 마스터를. 그것만으로 능력은 증명된 것이었다.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의 눈동자에 희미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중앙에서 떨어진 탓인가, 마스터란 칭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린 에반은 즐거운 듯이 미소지었다.

"황금의 기사라."

서쪽에서 온 손님.

"부디 기대한 만큼의 실력이었다면 좋겠군."

이곳에서 받았던 불쾌감을 씻어버릴 수 있게.

* * *

시끄러운 주점. 제국이나 왕궁이나 주점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술에 취한 취객들이 떠들고 있었고 그런 취객들을 노리고 아가씨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들었는가? 멘소나에서 영지전을 신청했다고 하네."

"멘소나라면···."

"칼튼 백작의 오른팔이지."

"에잉."

그 말에 중년인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칼튼이란 이름만으로 입맛이 써졌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요즘 좀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또 어디래?"

"날슨 남작이라네."

"날슨이면···."

"그 있잖아. 몇 년 전에 급사한 귀족."

"아···!"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 원래 자작 아니었나?"

"남편이 죽고 가세가 기울었으니 어쩔 수 없지."

제국에 영지를 지탱할 자금을 빌리는 대신 작위를 반납한 것이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남작이었던 남편이 죽고 자식도 어리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망해가는 영지였다. 별 볼 일 없는 영지에 영지전을 걸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먼저 입을 열었던 사내가 몸을 숙였다.

자연스레 다른 이들도 사내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글쎄, 이번에 그쪽 영지에서 철광이 발견되었데."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은 혀를 찼다.

"말로는 그 집 가신이 멘소나 가문을 모욕했다고는 하는데."

핑계였다. 필시 가신에게 돈을 주고 그리 시켰을 거다.

"에이, 더러운 새끼들."

"뭐, 우리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무너진 가문이었지만 자신들과 비교할 순 없었다.

귀족 아니던가.

"혹시, 그 이야기 자세히 좀 들을 수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바로 루이였다.

간단한 식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었는데 흥미로운 소리가 들려서 다가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낯선 루이를 경계했다. 루이는 이런 이들의 경계심을 푸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술값은 제가 내지요. 시키고 싶으시면 더 시켜도 됩니다."

루이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경계심 역시 옅어졌다.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주며 물었다.

"용병이요?"

"예. 떠돌이죠."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는 말을 꺼낸 사내를 보며 물었다.

"영지전을 열려면 나라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국의 귀족은 멋대로 영지전을 벌일 수 없었다.

나라가 중재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면 허가를 내려줄 리가 없었다.

루이의 물음에 몇몇 사람들이 혀를 찼다.

"다 부질없는 거지."

"부질없다니요?"

"이번 일을 벌이는 건 멘소나 자작이 아니라 칼튼 백작이오."

옆 사람이 대신 말을 이었다.

칼튼 백작.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백작이라면 높은 직위였지만 제국 전체를 보면 아니었다.

"외지 사람이라서 잘 모르나 본데, 이 주변은 칼튼이 왕이나 다름이 없어. 중앙에도 연줄이 닿아 있어서 영지전 정도야 쉽지."

루이는 팔짱을 꼈다. 중앙에 연줄이 닿았다면 고위 귀족이 분명했다.

그들을 등에 업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일을 찾는 것 같은데,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오."

누군가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영지전이지. 멘소나 자작이 용병을 고용하진 않을 거요."

병력은 충분했다. 멘소나 자작이 나섰지만 칼튼 백작을 중심으로 한 연맹에서 병사들을 빌려줄 것이었다.

반대로···.

"그렇다고 날슨 쪽에서는 병사를 고용할 여유도 없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래라면 영지전이 불가능한 일. 그리고 이러한 일이 처음이 아니란 것이었다.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네.'

말만 영지전이지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아무리 루이라도 혼자서 전쟁을 할 순 없었다.

차라리 허가를 받고 마수의 땅에 들어가는 게 나았다.

루이는 아쉬움을 달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