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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어!"

길포드의 외침이 들리자 사냥꾼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를 밀어닥치는 검은 무리.

길포드는 그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가가강!

포탄이 터져나갔다. 들어오던 개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길이 만들어졌다.

전에도 보았던 것이었지만 이번 놀람은 더욱 컸다.

'아직도 저런 여력이 남아있다는 거지?'

라움의 가호를 받은 루이조차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포드의 몸이 개미들을 향해 쏘아졌다.

쾅!

길포드의 몸에 부딪힌 개미들이 위로 튕겨 올랐다.

어느새 멀어진 길포드. 이대로라면 놓칠지도 몰랐다.

셋은 다급히 길포드의 뒤를 쫓았다.

"난 전투조도 아닌데."

옆에서 뛰던 데이빗이 울상을 지었다. 사냥꾼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데이빗은 전투보다 정찰 임무를 많이 맡고 있었다.

루이도 그러한 사실에 의아해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포드가 데이빗을 뽑은 이유를 깨달았다.

'빨라!'

개미들을 뚫고 지나간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페닐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데이빗만이 길포드를 쫓을 수 있었다.

쾅! 콰강!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길이 열린다. 그러나 개미들도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길을 메꾼다.

루이와 데이빗 그때마다 몰려드는 개미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사사삭, 사사삭.

사방이 거멓다. 번들거리는 껍질과 소음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여기서 찾겠다고?'

이제는 일행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앞으로 향하던 길포드의 걸음이 멈췄다.

뒤따라오던 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포기한 건가?'

그러나 루이와 데이빗은 아니었다. 둘이 아는 길포드는 결코,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길포드가 멈춘 이유는···.

'찾았다!'

갑작스레 몸을 꺾는 길포드의 눈이 번뜩였다. 루이도 휘두르는 검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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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379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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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너지.

길포드의 후각이 없어도 루이는 이 방향이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스슥, 사사사삭.

개미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격렬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앞으로 보내면 안 된다.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앞으로 잘 때마다 나오겠군."

데이빗이 질린 눈으로 개미들을 노려봤다. 그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꿈이라도 꾸고 싶으면 빨리 움직여."

앞서가던 길포드가 한마디 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루이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하얀 엉덩이?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유난히 거대하고 하얀 엉덩이를 흔들며 도망치는 무언가.

"길포드님!"

"나도 봤다!"

쾅!

길포드의 주먹이 개미들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자리를 메꿨다.

'이대로라면 놓쳐.'

루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길포드님."

"알았다. 다시 한번···."

"절 위로 던져주세요."

"뭐?"

길포드가 주먹을 휘두르며 루이를 돌아보았다.

녀석의 옆에도 개미는 있었다. 홀로 개미들 사이에 들어간다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루이의 눈빛을 본 길포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친놈!"

길포드는 고개를 돌렸다.

"데이빗. 전방을 맡아라."

"예? 자, 잠깐···. 으헉!"

데이빗은 길포드가 물러나자마자 몰려드는 개미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 사이 길포드가 루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녀석이 있는 방향으로는 던질 수 없다. 그건 알고 있지?"

개미들은 이미 하나의 벽이었다. 벽이 낮았다면 진작에 위로 다녔을 거다.

던질 수 있는 방향은 오로지 위.

루이도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높이 던져주세요. 제가 알아서 갈 테니."

"좋아. 꽉 잡아."

꽉 잡긴 무엇을 꽉 잡으란 말인가.

그러나 그를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루이의 몸이 떠올랐다.

'잠깐! 너무 높···.'

순식간에 일행들이 있던 자리가 아득하게 보였다.

그러나 불평할 순 없었다. 최대한 높게 던져달라고 한 건 자신 아닌가.

멀리 싸우고 있는 일행들도 보였다. 다행히도 아직 무사했다.

루이는 시선을 돌려 목표를 찾았다.

'응? 방금?'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루이가 자신이 방금 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미들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는 거대 개미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냐!'

생각보다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다.

루이는 품에서 비도를 꺼냈다. 그리고 개미를 향해 던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비도를 던진다.

푹, 푹, 푹!

"...! ...!"

비도가 개미의 몸에 박히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도에 걸린 실을 잡아당겼다.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거대한 개미의 몸이 들썩였다. 충격 때문에 비도 몇 개가 떨어져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루이의 몸은 개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개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옆에 있던 개미들이 루이를 발견하고 분주해졌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루이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실을 잡던 손을 놓고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개미의 등에 꽂아 넣었다.

쿵!

충격에 개미의 몸이 찌그러졌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는 머리에도 주먹을 휘둘렀다.

공명.

콰직!

거대 개미의 머리가 터지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됐어.'

눈앞에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루이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개미들을 향해 겨눴다.

지금 루이는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격이었다.

그러나 개미들은 루이를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까까지 시끄럽게 들리던 소리도 멈춰 있었다.

마치 전력이 떨어진 기계처럼.

'성공한 건가?'

쾅! 콰강!

루이가 개미들을 살피는 사이 개미의 벽을 뚫고 길포드가 나타났다.

길포드는 죽은 거대 개미를 보더니 이를 드러냈다.

"해냈군!"

"...그럼 이긴 건가?"

데이빗이 얼떨떨한 얼굴로 개미들을 보았다.

그도 잠깐. 개미를 살피던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다시 움직여요!"

더듬이가 조금씩 움직이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루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개미들이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을 잡으면 끝난다며!"

신경질적인 존스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길포드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녀석을 잡으면 끝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무슨 개소리야? 벌써 치매라도 왔어? 아까 네가 분명···!"

"녀석이 아니라. 녀석들 맞죠?"

존스의 말을 자르고 루이가 입을 열었다. 길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루이는 존스를 무시하고 길포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위에 올라갔을 때 이 녀석과 비슷한 녀석이 서쪽에도 있는 걸 봤어요."

"맞다. 전쟁을 나서는데 지휘관을 한 녀석만 데려갈 리는 없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기에 다른 지휘관이 필요한 것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녀석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 지휘권이 넘어가는 공백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장. 이 녀석들, 아까보다 움직임이?"

데이빗이 개미들을 보며 말했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만큼 무리하고 있다는 거지."

한 녀석이 지휘할 수 있는 군체를 넘어섰다. 상황이 이러자 불만을 표하던 존스도 입을 다물었다.

길포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향을 봤다니 다행이군. 이번에는 좀 쉽겠어."

길포드는 개미를 죽이며 루이를 보았다.

"아까 그거. 한 번 더 할 수 있지?"

루이는 회수한 비도를 생각했다. 원래는 일곱 개였으나 회수한 건 넷뿐이었다.

나머지 셋은 실이 끊어져서 찾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네 개나 되찾은 게 기적이었다.

'넷으로 충분해.'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포드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 끝이 보이는군. 빠르게 돌파한다!"

* * *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41시간이라. 짭짤하네.'

거대 개미. 지휘관인 만큼 일반 개미보다 많이 줬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진짜 끝난 건가?"

뒤늦게 나타난 데이빗이 멈춰 있는 개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루이는 저 말이 불길하게 들렸다.

아까도 저 말이 있고 나서 개미들이 움직였다.

'설마.'

고개를 돌려 개미를 보았다.

꿈틀. 멈춰 있던 개미의 더듬이가 움직였다.

"씨발."

저도 모르게 욕을 뱉어낸 루이는 검을 들어 올렸다.

"두 마리가 끝이 아니란 건가?"

존스의 허탈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때만큼은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니, 달라."

길포드가 차분한 눈으로 개미들을 보았다. 개미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일행들이 아니었다.

"물러나고, 있어?"

개미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사냥꾼이 승리한 것이었다.

그제야 일행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이제 가서 좀 씻어···."

"모두 숙여!"

콰직.

일행들은 길포드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몸을 숙인 일행들 위로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사자의 형태를 한 마수.

녀석이 개미들을 한입에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광경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야."

콰드득, 콰득.

딱딱한 개미들이 입안에서 부서지면서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으나 개의치 않아 했다.

녀석뿐만 아니었다. 다른 마수들도 나타나서 개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상급 마수? 씨발, 나올 거면 한 번에 나오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고 있었겠지."

존스의 불평에 길포드가 대꾸했다.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마수라고 해도 모두 같은 종인 건 아니었다.

마수들의 싸움은 다른 마수들에게 있어서 기회이기도 했다.

상처 입은 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렇기에 멀리서 싸우는 걸 지켜본 것이었다.

몇몇 마수들이 일행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크헝!"

길포드는 달려드는 마수를 걷어찼다.

"일행들과 합류한다! 모여 있으면 녀석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해."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개미들과 이들은 달랐다.

숫자는 적었지만, 개체 하나하나가 무시하기 힘들었다.

평상시였다면 큰 문제는 없었겠지만 지금 일행들의 체력은 바닥이었다.

녀석들을 떨쳐내기 쉽지 않았다.

철인처럼 보이던 길포드 역시 주먹에 힘이 실리지 않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금세 쓰러트렸을 적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젠장.'

루이도 마수를 상대하면 입술을 깨물었다. 에테르가 바닥이었다.

"루이!"

"...!"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루이를 밀었다. 동시에 루이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채찍이 지나갔다.

"데이빗?"

루이는 자신을 밀친 이를 보았다. 데이빗의 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뒤에서 날아온 공격.

고개를 돌리자 존스과 눈이 마주쳤다.

후미에 그가 있었다. 그런 그가 공격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큭, 빌어, 먹을. 끝 났, 다고 생각했, 는데."

데이빗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루이는 다급히 데이빗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장기는 다치지 않았어.'

"루, 루이. 부, 부탁 하나만 할게. 내 고향에 가서 제니퍼에게 사랑했···."

"안 죽으니깐 조용히 해요."

옷을 찢어져 상처를 압박했다.

"그리 말, 하지 않아도 돼. 내,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짧은 시간이, 였지만 고마웠···."

"진짜 안 죽어요. 다행히 위험한 곳은 피했어요."

루이의 말에 데이빗이 눈을 껌뻑였다.

"...진짜? 죽을 것같이 아픈데?"

미심쩍은 시선.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떠들다 상처가 벌어지면 그때는 위험할 수도 있어요."

루이의 말에 데이빗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은 이미 틀렸어. 괜한 희망 주지 말고 빨리 와서 도와."

존스의 앞에는 두 마리의 마수가 있었다. 홀로 상대하기 벅찬 것이었다.

채찍처럼 늘어진 마수의 꼬리.

고개를 돌리자 길포드가 보였다. 그 역시 세 마리의 마수에 둘러쌓여 있어서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괜찮, 아. 가. 죽지 않을 거라며?"

데이빗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상황에서 홀로 남겨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존스에게 향했다.

"잘 생각했어. 희생은, 컥···."

존스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루이를 보았다.

"너···."

존스의 배에는 루이의 검이 꽂혀 있었다.

"...무슨, 짓이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수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공격을 알면서 말하지 않았는지 진짜로 몰랐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게 잘못이지.'

신뢰할 수 없다. 그는 같이 사선을 넘는 동안 믿음을 주지 못했다.

"고, 작 둘이 무얼 하겠다고? 다 같이 죽, 겠다는 거냐?"

존스는 루이를 비웃었다. 이미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한 명은 환자라 싸울 수 없다. 자신이 죽으면 루이와 길포드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루이는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도 못 피할 만큼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런데 화를 못 이겨 자신마저 죽인다고?

멍청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루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그리고 마침 조금이 모자랐거든."

무엇이?

존스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루이가 검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커헉!"

존스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존스의 머리를 쳐냈다.

그리고 시야 한 편에 보이는 글자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971:20:12]

*

[1043:11:31]

사냥꾼들의 수장다웠다.

루이가 존스을 죽인 건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을 택했을 뿐.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너지.'

자신을 도운 데이빗. 그리고 수상한 존스. 누굴 선택할지는 뻔했다.

"...이건 좀 나중에 올리려고 했는데."

[라움의 가호 – 1000T]

지난 경험 때문에 함부로 올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강림이란 수단을 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미래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라움의 가호."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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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379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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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북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철과 피의 냄새.

이제는 루이에게 고향처럼 친근한 전쟁터였다.

그 중심에 거인이 서 있었다.

지난번에는 그림자만 보았을 뿐인데 이번에는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갑옷을 입은 녹색의 전사.

녹색 갑옷이 아니었다. 갑옷 자체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가죽과 철을 엮어서 만든 원시적인 형태의 갑옷에 가까웠다.

루이가 본 것은 그의 피부색이었다.

그리고 턱에서부터 시작된 송곳니는 투구를 쓴 것처럼 머리 위로 뻗어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가 루이를 응시했다.

형체가 보이는 만큼 전보다 존재감도 강렬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이 뜨거워졌다.

[...싸워라. 그리고 정복해라.]

전에도 들었던 말. 그러나 새롭게 다가왔다.

루이는 거인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와 함께 루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 * *

붉은 아지랑이가 루이의 몸에서 올라왔다.

아지랑이는 전보다 진하고 뚜렷했다.

근육이 팽창하면서 꺼져가는 체력 역시 나아졌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조금 나아진 정도였다.

애당초 힘이 강해진다고 해서 피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루이의 몸은 진작에 한계에 도달했었다.

가호로 얻을 수 있는 체력은 고작 한 줌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 줌은 분명, 전과는 달랐다.

휘익.

지켜보고 있던 마수 하나가 꼬리를 휘둘렀다.

루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꼬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당겼다.

"그르르르."

마수의 몸이 딸려왔다. 이빨을 세웠으나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버티려고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루이가 가까워지자 발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루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은 몸짓.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다.

콰득.

루이에게 맞은 머리가 돌아가면서 목이 꺾였다.

맞은 부위는 움푹 들어가서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격에 죽은 것이었다.

동족이 잡혀가는 걸 보고 달려들려고 했던 마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루이는 천천히 마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 제대로 붙어보자."

이미 루이는 조금 전과 다른 생물체였다.

루이의 사나운 시선에 마수가 뒷걸음쳤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인간이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루이는 마수가 도망치도록 놔뒀다.

어차피 마수는 많았다. 한 마리 정도는 놓쳐도 상관없었다.

지금도 마수가 떠나자마자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다.

전보다 거대한 놈.

루이는 녀석을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검을 쓰지 않는 이유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늘어난 근력 덕분에 지금 쓰는 검조차 가볍게 느껴졌으나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몰랐다.

그렇게 마수가 루이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쿵!

땅이 울렸다.

'지진?'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쿵!

다시 땅이 울렸다. 이번에는 전보다 강렬했다.

쿵! 쿵! 쿵!

루이는 그제야 이것이 발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곰 형태의 마수.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포효했다.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마수들조차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었다.

"...저건, 대체···."

"이 숲의 주인이다."

"길포드님."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길포드가 옆에 서 있었다.

마수가 멈춘 틈을 타서 옆으로 온 것이었다.

둘은 새롭게 등장한 마수를 보았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흘러나왔고 등은 거북이처럼 얼음으로 된 껍질을 두르고 있었다.

한쪽 눈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움푹 들어가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녀석의 반대쪽 눈이 일그러졌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모습. 그리고 녀석의 고개가 한군데서 멈춰섰다.

"...쟤, 왠지 이쪽을 보고 있는 거 같은데요?"

착각인가? 착각이길 바랐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시선이 착각일 리가 없었다.

"나를 보는 것이다."

"예?"

루이의 시선이 길포드에게 향했다. 길포드는 습관처럼 바지에 손을 넣었다가 담배가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한 겁니까?"

아니라면 저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볼 리가 없었다.

"저 녀석의 왼쪽 눈. 내가 저리 만든 것이지."

"...!"

길포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친구라도 만난 듯한 살가움이었다.

상처에서 고통이 올라오기라도 한 듯 녀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녀석은 두 앞발로 땅을 찍었다.

콰가강!

땅이 갈라지면서 서리가 내리 앉았다.

그곳에 있던 마수들의 육편이 얼음 조각처럼 튕겨 나갔다.

마수들은 녀석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감히 공격하는 녀석은 없었다.

마수들이 이를 드러낸 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녀석이 마수들을 쏘아보자 하나둘 꼬리를 내리며 물러갔다.

녀석은 물러가는 마수들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길포드.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녀석은 몸을 돌려서 자신이 온 자리로 돌아갔다.

쿵! 쿵! 쿵!

멀어져가는 마수의 모습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와씨,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아무리 가호를 받았다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옆에 있는 길포드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

녀석의 등장은 길포드조차 간담이 서늘해지게 했다.

길포드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왜 그냥 갔을까요?"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길포드는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이를 도와준다?

상상하기 힘들었다.

길포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나와의 결착을 이런 식으로 보기는 싫은 거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루이는 더 묻지 않았다. 길포드의 표정 역시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수들이 사라지자 루이는 데이빗에게 돌아갔다.

정신을 잃은 데이빗을 보고 놀라긴 했으나 가슴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절한 거다."

장기는 상하지 않았으나 피를 많이 흘렸다.

그동안의 피로가 겹쳐져서 기절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메르실라의 가호가 있으니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신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힘이었다.

데이빗의 상태를 확인한 루이와 길포드의 시선이 죽은 존스에게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이번이 일이 아니었어도 기회가 있었으면 죽였을 거다.

존스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를 놔두는 건 위험했다.

루이가 생각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가호를 쓸 필요도 없었지.'

2단계로 올리는 건 좀 더 신중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고생했다."

길포드는 존스의 시체를 봤음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체에 난 상처가 마수의 짓이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체를 숲 너머로 던졌다.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숲 너머에 던져졌으면 마수들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그렇게 남쪽 마을과 서쪽 마을의 전쟁은 끝이 났다.

* * *

서쪽 마을 사냥꾼들은 돌아가지 않고 남쪽 마을에 머물렀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회복될 때까지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차라리 합류하는 게 낫지 않나 싶지만 그건 어렵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서쪽 마을 사람들은 남쪽 마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길포드도 자신의 뜻을 어기는 이들을 놔둘 성격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회복만 하고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남쪽 마을 사냥꾼들은 몸을 회복하면서 동료의 시체를 거두러 다녔다.

벨을 비롯한 지원조 몇몇이 마을에 남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쪽 마을 역시 피해가 컸다.

이제부터 부족한 인원으로 다시 마을을 꾸려가야 했다.

그렇게 양쪽 마을이 바쁜 와중에 루이 역시 몸을 회복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루이의 고민은 다른 사냥꾼들과 달랐다.

정확히는 마을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메인 퀘스트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광경이었다.

'달성되었다고? 언제?'

의문의 사내? 2단계 가호? 숲의 주인? 그도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의 전투?

차라리 바로바로 나왔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거다. 그러나 자고 일어났을 때 이러한 일이 생겼다.

집히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기다렸던 일이었다. 이제 시스템의 목적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루이는 메인 퀘스트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루이의 입에서 나온 건 감탄도 경악도 아니었다.

"설마 이게 끝?"

허탈함. 루이는 허무한 심정으로 창을 확인했다.

[밤하라의 신전을 찾아가시오.]

[보상 – 2500T, ???]

적어도 위치까지는 아니어도 이유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나?

심지어 보상 하나는 적히지도 않았다. 불친절함의 끝.

'게임이 이따위였으면 유저들한테 욕먹고 끝났어.'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2500시간.

전 같았으면 기뻐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라움의 가호 – 10000T]

오백에서 천으로 그리고 다시 일만.

'상식적으로 전이 두 배였으니 다음은 2천, 높게 잡아도 5천 아니야?'

중간 단계는 어디 가고 일만으로 뛰었는가. 이걸 보니 2500시간도 크게 느껴 지지가 않았다.

'배가 부른 거지.'

6, 7시간을 악착같이 벌던 게 얼마 전이었다.

밤의 숲의 와서 시간관념이 이상해졌다. 루이는 잡념을 날리고 퀘스트에 대해 생각했다.

밤하라의 신전.

'신전이니 신이겠지.'

상점에 확인하니 그런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는 들어본 적 없기에 주변에 물어보기로 했다.

"밤하라? 내가 전에 갔던 창관이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

데이빗의 의견은 가볍게 무시하고 가장 잘 알만한 이를 찾아갔다.

"밤하라란 신 말입니까? 들어본 적 없군요."

페닐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고대 신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대 신이요?"

"예. 주신 샤롯께서 질서를 세우기 이전 신들입니다."

"그런 거라면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신학자에게 묻거나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포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신학자.

왕국에서 그들의 존재는 희귀했다. 게다가 자존심 높은 그들이 루이와 같은 용병을 만나줄 리가 없었다.

"직접 알아보려면···."

"도서관. 고대 신에 관한 책은 대부분 금기되어 있지. 그에 관련된 서적이 있을 만한 곳은 왕국 내에서 한 곳뿐일 거다."

일반 도서관에서는 정보를 얻기 힘들단 소리였다.

루이의 시선이 향하자 길포드가 말을 이었다.

"왕립도서관."

루이는 그 단어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왕립도서관은 왕도에 있었다.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왕도로 향해야 했다.

'어차피 검도 수리해야 해.'

가만히 생각하던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샤롯의 이름은 왜 없지?'

주신 샤롯. 그의 이름은 루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점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신들은 있는데 그 이름만 없는 게 이상했다.

'단순히 주신이라서 빠진 건가?'

가장 위대한 신. 아니면 이 시스템을 만든 이가 샤롯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루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는 둘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길포드와 페닐은 숙소로 돌아가는 루이를 보았다.

루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에테르를 쓰면서 신성을 다룬다. 그런 이가 낯선 신의 이름을 꺼낸 것이었다.

심지어는 꺼낸 본인조차 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그러한 신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루이가 숲에 오기 전에 알았을 리도 없었다. 그랬다면 진작에 물어봤을 거다. 굳이 전쟁이 끝나고 바쁜 시기에 물으러 오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루이는 대체 어디서 그 신의 이름을 들었을까?

아니, 어째서 그 이름이 신이라고 확신하는 걸까?

그러나 둘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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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군.

그 뒤로는 루이는 평소처럼 사냥에 집중했다.

아니, 전보다 열중했다.

막 병상에서 일어난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히 움직였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여야 했다.

왕도로 떠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가호로 강해진 육체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쳐서 느끼지 못했었으나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라고 해서 꼭 두 배가 되는 건 아니었다.

'두 배 이상이야.'

달려오는 마수의 머리를 붙잡았다. 소의 형태의 마수.

기기긱, 기긱.

뒤로 밀려나던 루이의 몸이 어느 순간 멈췄다. 놀란 마수의 눈이 루이를 향했다.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했는지 뒤로 도망치려는 마수의 머리에 루이의 손날이 내리찍었다.

쾅!

"꾸엑!"

단말마와 함께 허물어지는 마수. 루이는 쓰러진 마수를 바라보았다.

덩치만 보면 루이의 세 배를 넘어섰다.

과거, 일 년 전의 루이였다면 에테르를 쓰더라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든 적.

그러나 이제는 에테르의 도움 없이 육체만으로 압도했다.

여기에 에테르를 쓰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공명도 있었다.

"...진짜로 괴물이잖아."

비싼 값을 했다.

그러나 자만하진 않았다. 의문의 사내. 그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길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더 강해져야 했다.

"일단 몸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해."

개미굴 밖에 있는 마수들로는 알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개미굴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깬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개미굴 밖에 있으면서 마수보다 더 마수 같은 이.

"한 판 붙죠."

"호오?"

루이의 말에 길포드가 사나운 미소를 드러냈다.

* * *

"결국, 한 번도 못 이겼네."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이야?

마을을 나서는 루이는 투덜거렸다.

마수와의 전투로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길포드에게는 닿지 않았다.

떠나기 전날까지도 붙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루이는 자신을 배웅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마을을 떠났다.

페닐과 데이빗, 그리고 벨까지. 그 외에도 수많은 사냥꾼이 있었으나 길포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벨이 남겠다고 한 것은 루이로서도 의외였다. 그동안 벨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

'걔도 성장한 거겠지.'

이제는 제법 사냥꾼다워졌다. 이제 노예였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숲 밖을 향하는 루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처음 숲에 들어왔을 때와는 감회가 달랐다.

마수는 이제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우끼끼."

"우우!"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너희구나."

루이는 반가운 얼굴로 숲 너머를 보았다.

강철 원숭이. 녀석들도 루이를 기억하는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멀리서 루이를 향해 돌이 날아왔다. 공격이 아니라 인사에 가까웠다.

"나도 만나서 기쁘다."

루이는 돌을 쳐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과거의 빚을 갚아줄 때다.

이제는 녀석들이 두렵지 않았다. 개미들과 싸웠을 때를 생각하면 녀석들의 공격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루이는 강철 원숭이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루이가 떠나자 길포드가 나타났다.

길포드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걸 보여주기 싫어서 배웅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페닐이 그런 길포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길래 피하시지. 굳이 상대하신다고."

루이의 마지막 공격.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포드는 피하지 않았다.

"사내란 때로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길포드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런 길포드를 바라보는 페닐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나 길포드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넘어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이의 육체를 과소평가했다.

아니, 에테르뿐만 아니라 다른 힘도 섞인 것 같았다.

'어쩌면 길포드식 강권술은 녀석의 손에서 완성될지 모르겠군.'

아쉬우면서도 대견스러웠다. 길포드는 루이가 이미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기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장한 건 루이뿐만이 아니었다.

길포드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정말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예."

벨. 무서운 속도로 사냥꾼들의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아니, 습득이란 말로 부족했다. 흡수.

루이의 성장은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늘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성장해 있었다.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검술이나 싸움의 방식 모든 면에서 규격을 벗어났다.

이상한 놈. 길포드는 루이를 그리 칭했다.

그러나 벨은 정직했다.

단지 그 속도가 남들과 다를 뿐이었다.

남들은 하나에서 둘을 배울 시간에 벨은 이미 십에 도달해 있었다.

천재라는 말은 벨과 같은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아이가 세례를 받았다면 왕국에서 검호가 나왔을 텐데.'

마스터.

괜찮다는 벨은 자신의 말과 달리 떠난 루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리 녀석을 신경 쓰는 것이냐?"

단순히 생명의 은인이기에 집착하는 것과 달랐다.

벨도 자신이 왜 그런지 몰랐다. 그저 처음 봤을 때부터 따라가야 한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본능을 넘어선 무언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충동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민하던 벨은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루이가 처음 만났을 때 건넨 물음. 자신은 그것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 답을 말할 것이다.

이조차도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벨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자신은 루이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마수나 짐승과는 다르다.

악의를 보인다고 해서 모두 죽여야 할까?

자신이 답을 찾는다면 루이 역시 그 답에 대해서 회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강해져야 했다.

벨의 눈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 *

숲을 나온 루이의 꼴은 엉망이었다. 온몸에 마수의 피가 묻어있었고 옷 역시 성한 곳이 없었다.

이는 당연했다.

필로스를 통해서 여분의 옷을 받긴 했으나 전쟁 때문에 부족해졌다.

그 때문에 사냥꾼들은 찢어진 부분을 다른 천으로 엮거나 가죽을 덧씌워서 다녔다.

숲 내에서는 상관없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었다. 밤의 숲에서는 모두가 루이처럼 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상 행동까지 했다.

바로 자해였다.

비도로 자신의 팔을 긋는다.

그리고는 상처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 반응한다."

천천히 회복되던 것이 어느 순간 파란빛을 띠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곧 파란 빛이 사라졌다. 상처 부위는 반이나 아물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전보다 회복이 더뎌졌다.

"역시 조절할 수 있는 거네."

아직 요령을 알지 못할 뿐이었다. 루이가 이 같은 시도를 하는 이유는 길포드와 마지막 싸움 때문이었다.

공명.

그때 에테르에 희미하지만, 붉은빛이 섞여 있었다.

라움의 신성.

우연. 그러나 의지로 신성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는 단서를 얻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또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루이는 회복되고 있는 팔 위에 또 하나의 상처를 냈다.

반대 팔 역시 같은 크기의 상처를 내고는 눈을 감았다.

한쪽 팔에만 집중.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상처의 회복 속도를 비교해보려고 했으나 푸른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는 우연에 가까웠다.

"뭐, 시간은 많으니."

왕도로 향하는 동안 틈틈이 하면 되었다. 어쨌든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루이는 피가 묻은 단검을 대충 닦아냈다.

"가까운 용병 길드가 어디였더라."

분명 이곳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었던 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전에 먼저 말부터 구해야겠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와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루이는 기쁜 마음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그리고 틈틈히 자해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에 도착해 경비에게 붙잡히고 나서야 자신의 꼴이 이상하다는 걸 자각했다.

* * *

루이가 떠난 사냥꾼 마을은 한적했다.

종이 울리면 사냥에 나가고 돌아오면 다 같이 식사를 한다.

평소와 같은 일상.

그런 마을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직 약속한 시각은 남았을 텐데?"

"오늘은 상인이 아니라 길 안내자로 왔을 뿐입니다."

길포드의 물음에 상인 필로스가 미소지었다.

안내자. 그 말에 길포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필로스가 옆으로 피하자 뒤에 있던 이가 앞으로 나섰다.

중년인. 제국식 관복을 입은 사내였다.

중년인은 길포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찾느라 고생했소. 길포드 단장."

"..."

중년인의 말에 길포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중년인은 그런 길포드의 변화를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 무시하는지 말을 이어갔다.

"아, 이런. 실례했군. 먼저 내 소개를 해야지. 본관은 제국 감찰단 소속 페르니라고 하오. 직책은 기밀이니 말할 수 없고 편히 페르니 자작이라 부르면 된다오."

제국 감찰단.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길포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런 외딴곳에 있을 줄이야. 감찰단도 찾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는군. 안 그렇소? 황실 소속 기사단 중 유일하게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자···."

"..."

황실 소속 기사단은 넷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금사자, 백사자, 흑사자, 적사자.

"알려지지 않은 다섯 번째 기사단,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 길포드 맥과이어. 아아, 실수. 모두가 세례를 받지 못한 건 아니었구려."

중년인의 시선이 길포드 옆에 있는 페닐에게 향했다.

"경을 잊었군."

철사자 기사단의 부단장 페닐. 그는 차가운 시선을 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사자 기사단의 존재는 기밀이었다.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 그들은 본래 기사보다 약하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다. 선택받지 못한 이는 기사를 넘을 수 없다. 아니, 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간혹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나타났다.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 기사들보다 강한 이들.

지금까지 제국은 그들을 모두 지웠으나 전대 황제는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철사자 기사단이었다.

색을 부여받지 못한 유일한 기사단.

페닐 역시 돌연변이. 본래라면 지워졌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개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황제의 개. 그와 같은 말에도 중년인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제국에 이변이 생겼소이다. 마수들이 나타나고 있소."

"마수들?"

중년인의 말에 길포드가 반응했다. 전에 있었던 사내를 떠올린 것이었다.

"그렇소. 마수의 땅에 대한 통제는 완벽하오. 그런데도 마수가 제국의 땅에 나오기 시작했소이다."

마수의 땅에서 흘러나온 마수가 아니다.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오. 이를 어찌 알았는지 최근 크로미아 왕국에서 도발을 해왔다오."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중년인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폐하께서는 단장님을 다시 찾으셨소. 이제, 그만 쉬시고 복귀하시지요."

"복귀라. 웃기는군."

"...!"

길포드는 중년인을 비웃었다.

"무능력자가 황실 기사단에 앉아 있는 건 황실의 품위를 해친다며 내쫓은 건 너희 황제다."

"무슨···!"

너희 황제.

중년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길포드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너희처럼 개장수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새끼인 줄 아는 건가?"

"말조심해라! 감히 무능력자 따위가 황제 폐하를 모욕하다니! 내 그대를 배려해줬더니 어디까지 기어오를 생각인가!"

분노한 중년이 일갈하자 옆에 있던 필로스가 아차,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길포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말조심하라, 인가? 너야말로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고 있나?"

"뭣···!"

길포드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싸늘한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감찰단이 능력 없는 이를 뽑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냥꾼들이 보였다.

아니, 철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직 형제들을 잃은 슬픔도 가시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대장을 모욕한 것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거칠고 사나웠다.

길포드나 페닐이 아니었다면 당장 무기를 뽑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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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얽히네.

중년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중년인 역시 귀족이기 이전에 세례를 받은 기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수들의 피로 단련된 사냥꾼들의 살기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지, 지금 폐하께서 보내신 사신을 겁박하려는 건가!"

제국의 감찰단이 아니라 황제의 사신을 강조했다. 그만큼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이었다.

길포드 옆에 있던 페닐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밤의 숲입니다. 사람 몇 정도는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지요."

"...!"

필로스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안내만 했을 뿐입니다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필로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뒤를 향해 눈짓했다.

착, 호위로 따라왔던 기사들이 검에 손을 얹었다.

상황이 이리되니 중년인도 이들이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다, 단장. 내가 실례를 했소.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시오."

중년인이 길포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길포드는 그런 중년인을 보며 코웃음 쳤다.

"가서 네 주인께 전해라. 일 없다고."

길포드의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굴욕이었다. 그러나 길포드를 향해 다시 소리칠 용기는 없었다.

"...똑똑히, 전하겠소."

그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오해 없기를."

필로스도 둘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중년인을 뒤따랐다.

중년인은 모르고 있을 거다. 호위들이 검에 손을 올린 이유는 중년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년인을 베기 위해서라는 걸.

만일 중년인이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면 사냥꾼들이 아니라 호위들의 손에 죽었을 거다.

여기는 마수의 땅이었고.

이 안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 * *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떠나가는 일행들을 보며 페닐이 물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죽일까요?"

데이빗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표정은 딱딱했다.

그러나 길포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마찬가지다."

지금 저자를 죽여봤자 다른 이를 보내올 뿐이었다.

차라리 확실하게 말해두는 게 나았다.

길포드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스물여섯인가. 많이도 줄었군."

사냥꾼의 수는 그보다 많았다. 길포드가 말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길포드와 함께 숲에 온 기사들.

철사자 기사단의 동료.

올 때는 오십이 넘었으나 이제는 반으로 줄었다.

"후회하진 않습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페닐이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데이빗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녀석들도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다른 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길포드를 따라서 제국을 떠난 걸 후회하는 이는 없었다. 죽은 이들도 만일 이 자리에 있다면 같은 대답을 했을 거다.

길포드 덕분에 사람처럼 살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이미 모두 죽었을 운명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동료도 생겼잖습니까?"

사냥꾼들. 길포드가 부하로 거둔 사냥꾼들은 이미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지. 네 녀석들을 빼놓으면 섭섭하겠구나."

길포드는 사냥꾼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친 후에 페닐을 보았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긴 했지."

페닐의 눈이 커졌다.

"돌아가시는 겁니까?"

페닐의 물음에 길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밑으로 갈 생각은 없다. 제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직접 확인해볼 생각이다."

그리 말한 길포드의 눈빛이 바뀌었다.

"페닐, 갑옷을 준비해라."

"...!"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방금 한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예, 단장님."

페닐이 길포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장이 아니라 단장.

철사자 기사단의 부활이었다.

부하들을 보던 길포드의 시선이 숲 너머로 향했다.

숲의 중심.

떠나기 전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 * *

루이는 자신을 막아선 경비병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꼴이 심하긴 하지.'

입은 옷에는 마수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있었다. 게다가 오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한 덕분에 팔에도 피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허리춤에는 두 개의 검. 등에는 세 개. 그중 하나는 부서진 것이었으나 검집 안에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봇짐에는 마수의 뼈와 뿔이 삐져나와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 그 자체였다.

"용병 루이입니다."

루이는 용병패를 던졌다. 그러나 용병패를 확인했음에도 경비들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루이의 실력이라면 이들을 뚫고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빠른 방법이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리고 에테르를 끌어 올린다.

파직, 파지직.

"기사?!"

루이의 손을 감싼 푸른 전류를 본 경비병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제 루이가 용병패를 들고 있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아까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이 세계에서 에테르는 상징이며 권위이기도 했다.

감히 기사의 앞길을 막았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상대가 기사라면 마을 전체가 덤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도시면 모를까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통행권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사냥을 해서 꼴이 말이 아니니 갈아입을 옷과 씻을 곳이 필요합니다."

루이는 그리 말하면서 품에서 금화 두 개를 경비에게 건넸다.

이 꼴로 마을에 들어가면 소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금화 두 개면 경비병이 몇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루이의 옷값을 제외하더라도 이득이었다.

금화를 받은 경비병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경비병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근무지 이탈이었으나 기사란 이름 앞에서는 모든 게 용서가 되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경비병을 보며 루이는 세상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 * *

루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놀라긴 했으나 경비병이 같이 있었기에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는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씻고 경비병이 준비해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비병이 사온 옷은 루이가 평소에 입던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급 재질이었다.

"이제야 사람 같네."

루이는 낡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밤의 숲에 있다 보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그럼 먼저 정보를 얻어야겠군."

내일이면 용병 길드가 있는 마을에 도착한다. 그 전에 알아봐야 할 게 있었다.

루이는 여관을 나섰다.

"테른 용병단? 그 이름도 오랜만이군."

늙은 용병 하나가 루이가 사준 술을 들이켰다. 늙은 용병만이 아니었다. 테이블에는 여러 용병이 모여 앉아 있었다.

다들 루이에게 술을 얻어먹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물론, 이 중에 제대로 된 용병은 없었다.

"거긴 망했어. 영지전에 잘 못 휘말렸다고 했었나?"

"어이, 영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욕심에 눈이 멀어서 부하들 버리려다가 역으로 당한 거잖아."

용병들의 말을 듣고 루이는 안심했다. 용병들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보다 기사 양반이 용병은 왜 찾으시오?"

마을에 밤의 숲에서 나온 기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었다.

용병의 물음에 루이는 말없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용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말하기 싫으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른 용병들도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기사. 그것도 마수를 사냥할 정도의 기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루이 역시 같은 용병이었으나 이들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경비병들도 루이가 보여줬던 용병패는 잊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어도 지금의 루이의 옷차림은 용병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던 정보는 얻었다.

"주인장. 이쪽에 술 한 잔씩 더 돌려주게."

금화 한 닢. 그를 본 용병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기사 나으리! 통이 큽니다."

"왕국에 영광을!"

루이는 금세 시끌벅적해지는 용병들을 무시하고 주점을 나왔다.

* * *

다음 날, 루이는 일찍 마을을 나섰다.

왔을 때와 달리 늙은 나귀와 함께였다.

말이 없어서 대신 나귀를 산 것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음."

루이는 마을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결국, 루이가 나귀에게서 내린 후에나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짐꾼이군.'

루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속도도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적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용병 길드의 지부가 있는 곳까진 멀지 않았다.

그곳에서 말을 새로 구하면 되었다.

사실상 말보다 루이가 빨랐지만 계속해서 짐을 들고 다닐 순 없었다.

짐 내에는 루이가 잡은 마수뿐만 아니라 사냥꾼들이 건네준 것도 있었다.

금화와 보석을 받긴 했으나 그거로는 부족하여, 그동안 루이가 값비싸고 부피가 적은 부위들을 챙겨 준 것이었다.

왕국 내에서 이를 처분할 수 있는 곳은 왕도뿐이었다.

계속 들고 다닐 수도 없으니 왕도까지는 말이 필요했다.

'검만 아니면 버렸을 텐데.'

검을 고치는데 얼마나 들지 모르니 챙겨 가야 했다.

루이는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단검을 꺼냈다.

'조금만 더 하면 감이 잡힐 거 같은데.'

한 손으로는 자해하고 반대 손으로는 어김없이 동물을 사냥했다. 그렇게 루이는 다음 마을로 향했다.

* * *

용병 길드는 왕국 곳곳에 있었다.

물론, 본부는 왕도에 있고 나머지는 지부에 불과했다.

제국에는 용병 길드도 여러 개가 있지만, 왕국은 하나였다.

그렇기에 헷갈릴 수도 없었다.

"루이스 크로이드, 4급 용병. 확인되었네."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 몇 년 전만 해도 혹여나 자신을 알아볼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이제는 담담했다.

왕국 내에서는 크로이드란 성은 흔했다.

지부장은 안경을 올려 쓰며 루이를 바라보았다.

"영혼수확자, 생각보다 어렸군. 안 보인다 싶더니 마수를 잡으러 갔다 온 건가?"

거기까지 말한 지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뭐, 사정은 짐작하지만."

테른 용병단. 그러나 지부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수많은 용병단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게 이쪽 세상이었다.

"보자. 4급이 된 지 이 년이 지났군. 의뢰 평가도 좋아. 하긴, 실력이 실력이니 나쁠 수가 없지."

지부장은 웃음을 흘리고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승급 자격이 되었으니 본부에 한 번 들리게. 시험이 있긴 하지만 자네라면 문제도 아닐 거야."

홀로 기사 넷을 죽였다. 그중 셋은 한 번에 상대했다.

사실상 1급 이상이 주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4급까지는 지부에서 자체적으로 올려줄 수 있지만 3급부터는 본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굳이 들릴 생각은 없었다.

직접 용병단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4급이면 충분했다. 용병단에 들어가는 조건은 급수가 아니라 실력과 명성이었다.

"아, 그리고···."

지부장이 방을 나서려는 루이를 붙잡았다.

루이가 돌아보자 지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를 찾는 이들이 있었네."

지부장은 그걸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루이도 짐작이 되었다.

가문은 아니었다.

십 년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사람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필시 루이에 대해서는 잊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영주.'

테른은 죽었지만, 영주는 남아있었다.

루이가 저지른 일 때문에 피해를 봤을 거다.

"감사합니다."

루이는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다. 지부장으로서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친절히 경고해준 것이었다.

작은 지부였지만 아무나 지부장이 되진 않는다. 그런 이가 끝난 일을 구태여 꺼내진 않았을 거다.

'아직도 찾고 있다는 소리지.'

루이는 검집을 두드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숲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또 얽히네."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였다. 루이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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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38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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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복장에 신경 쓰게나.

늙은 나귀가 한가로이 발걸음을 옮긴다.

루이도 이제는 나귀의 걸음에 익숙해졌다. 아니,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자해도, 사냥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따라오는군.'

지난 마을을 나섰을 때부터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영주가 보낸 이는 아니었다.

루이가 용병 길드에 들리고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영주가 움직이기에는 너무 일렀다.

'짐, 아니면 검이겠지.'

검을 다섯 자루씩이나 들고 다니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숲에서 지내면서 더러워지긴 했으나 고급스러움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상 검보다 짐에 든 것이 더 가치가 있었으나 이를 알아보는 이는 흔치 않았다.

'알아봤다면 감히 습격하겠다는 생각도 안 하지.'

감히 마수 사냥꾼을 습격하려는 용병은 적어도 이곳 북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짐이 번거롭긴 했으나 왕도에서 검을 수리하려면 필요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말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결국, 못 구했지만.'

설마 용병 길드가 있던 마을에도 말이 없을 줄은 몰랐다.

지금 있는 나귀보다 젊은 나귀는 있었지만,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번 습격이 처음은 아니었다.

재물은 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루이는 이런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다음 마을에서는 검집을 좀 닦아야겠어.'

더 잘 보이도록 광을 내야겠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이들이 달려들 거다.

고급스러운 루이의 새 옷도 한몫했다. 옷차림만 보면 용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검만 찼을 뿐, 돈 많은 상인 정도로 보였다.

밤의 숲에서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먹잇감을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아무리 벌어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 습격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신중했다.

뒤만 밟을 뿐 쉽사리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날이 밝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습격하기 좋게 해줘야지.'

루이는 으슥한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야 루이도 뒤처리가 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가 숲길로 그들을 유인하자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나 루이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젊은 사내. 숲속에는 선객이 있던 것이었다.

사내의 시선이 루이를 뒤따라온 이들을 향했다.

네 명의 용병.

길에서 만난 용병이 도적으로 변하는 일은 흔했다.

모닥불 위에서 쉬고 있던 사내는 용병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로만, 그 녀석이 보낸 건가? 아니면 주점에서 시비를 걸던 놈의 동료들인가?"

"..."

용병들은 눈을 껌뻑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로만이나 시비 걸던 놈 따위는 몰랐다.

사내는 그런 용병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다. 다 알고 있으니."

알긴 뭘 안단 말인가. 루이는 사내를 살폈다.

'에테르.'

그러나 너무나 미약했다. 세례를 받았으나 제대로 검을 익혔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자세부터가 엉망이었다.

겉멋이 잔뜩 들어갔다.

그 증거로 사내는 루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어느 귀족 자제가 모험가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가죽옷에 흉갑. 허리춤에는 수통.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험가나 용병의 모습이었다.

문제라면 그 모든 게 새것이었다.

'용병이라면 저렇게 맞춰 입진 않지.'

루이는 검에 손을 올렸다.

목격자가 생겼지만 상관없었다. 일을 처리하고 떠나려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순수히 물러가면 용서해주지."

누구 멋대로 물러가란 말인가. 루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용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용병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용병들 역시 루이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한 가지 루이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목격자까지 처리할 생각이었다.

사내는 그런 용병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안 그래도 요즘 피를 보지 못해 아쉬웠어."

섬찟한 미소. 그에 용병들의 걸음이 멈췄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었다.

루이 역시 음산한 목소리에 사내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난 한번 검을 뽑으면 피를 볼 때까지 멈추지 않아. 왜 그런지 아나?"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사내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살아있는 걸 증오하기 때문이지. 시체야말로 가장 완벽한 생물이야."

시체는 생물이 아닐뿐더러 생물 자체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루이는 그러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를 바라보는 루이의 시선이 변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그냥 미친놈인가?'

그러나 사내의 말을 들은 용병들의 표정이 변했다.

"넌···."

사내의 정체를 짐작한 것이었다. 루이는 용병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신출내기인 줄 알았는데 용병들이 알아본 것이었다.

'오, 생각 외로 유명한 놈인가?'

북부의 용병 중에 저런 미친놈이 있었다면 루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필시, 루이가 숲에 들어가고 이름을 알린 게 분명했다.

루이의 눈에는 어설프게 보였지만, 에테르가 있다면 북부에서 이름을 알리기 어렵지 않을 거다.

"시체성애자!"

"...!"

루이의 눈이 커졌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말하는 건가 싶었는데 용병들의 시선은 사내를 향해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그 이름을 싫어한다는 걸 알 텐데?"

"영혼수확자···."

"루이···."

용병 하나가 신음처럼 그 이름을 뱉었다. 기사 셋을 홀로 쓰러트린 건 북부 용병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내는 그 말에 회답하듯 손을 올렸다.

치지직.

작고 희미한 전류가 올라왔다. 물론, 루이가 보기에는 그랬을 뿐, 용병들은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상황에 루이도 도망치는 용병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사내는 용병들이 사라진 걸 확인하더니 루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 때문에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렸군. 미안하네."

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뿐더러 휘말린 건 사내였다.

루이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명성이 높아지면 간혹 이러한 일이 생긴다고 들었지만, 루이가 겪을 줄은 몰랐다.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 루이의 존재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기사들을 죽여서 여론이 바뀌었으나 아직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루이는 사칭한 사내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간 용병들에게 분노가 더 컸다.

'저딴 게 나라고?'

어딜 봐서? 루이는 맹세코, 저딴 말을 뱉은 적이 없었다.

듣기만 해도 오글거렸다.

그러나 용병들은 그 작은 단서만으로 루이란 걸 알아챘다.

즉, 다른 이들이 루이를 생각하는 이미지가 저렇단 뜻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루이를 더욱 짜증이 났다.

루이의 반응을 오해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피를 좋아하지만, 아무나 죽이진 않아."

그리고는 루이를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테슈아의 웃음이 자연스러움이라면 사내의 웃음은 인위적이었다.

'죽일까? 그래, 죽이자.'

잠깐 사이 루이는 결정했다. 에테르를 가지고 있으면 용병보다는 가치가 높을 거다.

그러나 루이는 검을 잡지 않았다.

'잠깐만···.'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루이는 순간의 번뜩임을 정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거 잘하면 이용할 수 있겠는데?'

루이는 가짜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용병님. 혹시 의뢰도 받으십니까?"

말을 하려던 가짜 루이가 입을 닫았다. 그제야 루이의 복장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다섯 자루의 검.

루이는 가짜 루이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난 그딴 돈으로 움직이는···."

하나 더. 가짜 루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짜 루이가 머뭇거리자 루이는 금화 하나를 더 꺼냈다.

"흠흠. 돈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자네의 사정이 딱해 보이니 이야기나 들어보지."

그렇게 둘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가짜 루이가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난 루이라네. 편하게 루이라고 부르게."

가짜 루이의 말에 루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 데이빗이라고 합니다."

가짜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데이빗. 삶의 선배로서 한 가지 충고 하나 해주겠네."

충고? 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짜 루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새 옷을 사 입은 걸 보니 이번에 가문을 나온 거 같은데. 무기가 많다고 해서 강해 보이는 게 아니라네. 진짜 용병은 한 자루의 검만으로도 충분하지."

"..."

"그리고 그런 고급옷을 입으면 누구라도 초짜라고 생각할 거야. 어엿한 용병이 되고 싶으면 좀 더 복장에 신경 쓰게나."

옷부터 신발까지. 새 옷을 입은 건 루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경비병이 가져다준 고급 옷이었다. 그제야 가짜 루이가 루이를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새끼···.'

자신을 바라보는 가짜 루이의 시선을 보고 확신했다.

자신의 동류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 자신의 후배.

제 딴에는 멋진 조언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검집을 툭툭 치면서 히죽 웃는 가짜 루이.

루이는 저걸 그냥 죽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똑똑똑.

조용한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앤더슨입니다."

"들어오게."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갑옷을 입은 기사. 그는 자신의 영주를 보았다.

거대한 풍채. 영주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못 보던 사이에 더 쪘군.'

이제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영지전에 승리했지만, 영주민들에게 바뀐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남자들이 줄어서 더욱 가혹해졌다. 나이가 어린 여자들마저 농사일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노예들이 늘어나긴 했으나 전쟁으로 희생된 영지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얻은 승리의 보상은 오로지 영주만을 배부르게 했다.

기사는 속으로 혀를 찼으나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겉모습은 어쨌든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었으며 막대한 돈을 주는 고용자이기도 했다.

"오오, 앤더슨 경. 무슨 일인가?"

"말씀하신 용병, 찾았다고 합니다."

"용병?"

영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곧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베오르 기사 놈들을 죽인 용병 말인가?"

"예."

앤더슨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막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제법 늦었군."

영주는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떨리는 볼살만큼이나 욕심이 가득했다.

"가서 데려오게."

"오지 않으면 어찌할까요?"

앤더슨의 물음에 영주는 혀를 찼다. 고작 용병 나부랭이가 귀족의 부름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세례를 받은 기사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지. 녀석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죽이란 소리였다.

다 이긴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 보상금이 반으로 줄었다. 그렇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었으나 영주의 머릿속에 그런 것이 들어있을 리가 없었다.

용병만 아니었다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영주는 나가려던 앤더슨을 불러세웠다.

"베오르의 기사들을 죽인 놈이야. 혼자 움직이지 말고 다른 기사들과 함께 가게나."

"...알겠습니다."

앤더슨는 고개를 숙였다. 어찌 보면 앤더슨을 모욕할 수 있는 행위였으나 맞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기사 셋을 한 번에 상대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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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38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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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루이 맞지?

스테판은 왕국 중부 귀족 출신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루이를 사칭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와 싸우고 가출한 후 용병이 되고자 했다. 어릴 적 일었던 모험 책에서처럼 멋진 모험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귀족 따위는 안 받아."

"샌님은 딴 데 알아보게."

그 누구도 스테판을 용병단에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옷을 갈아입어도 귀신같이 알아봤다.

'...역시, 고귀함은 숨길 수 없는 건가.'

옷 따위로 가려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테판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바닥부터 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양을 되찾아달라고? 다친 나무꾼 대신 나무를 해오라고? 내가 이딴 걸 하려고 용병이 된 줄 알아?"

이곳의 용병들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세상은 넓고 즐길 건 많았다. 좁은 영지에서만 지내던 스테판에게는 이 세상은 신비함으로 가득 찼다.

스테판이 세상을 즐기는 동안 들고 왔던 돈은 점점 사라져갔다.

그렇게 북부까지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 기회를 얻었다.

호위 업무를 하던 도중에 늑대의 습격이 있었다. 스테판이 나서기도 전에 정리가 되었으나 일행 중 하나가 스테판의 검에 피어난 에테르를 본 것이었다.

"...기사? 기사가 어째서 용병을···."

"설마 루이?"

누군가의 한 마디에 주변 시선들이 바뀌었다.

자신을 짐처럼 바라보던 이들의 눈빛에 두려움과 경외가 섞였다.

스테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스테판은 그때까지 루이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렇게 스테판은 영혼수확자가 되었다. 동료들은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하기 시작했고 호위 대상인 귀족 아가씨는 스테판을 유혹해오기까지 했다.

비록, 사칭하긴 했으나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세례를 받은 기사였고 루이란 자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이제야 자신을 알아봐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험 책에서 읽었던 용병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니, 시작되려고 했었다.

"...그럴 줄 알았는데."

스테판은 자신의 동행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의뢰자. 호위 대상이었다.

스테판은 한눈에 데이빗이 자신과 같은 이라고 알아봤다.

데이빗이 입은 옷은 평민이 입을 수 없는 재질이었다. 게다가 들고 있는 검들 역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어리숙해 보이는 게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그렇기에 호위를 허락한 것이었다.

물론, 금화도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부분이었다.

가문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데이빗은 돈이 많았다.

마을에 들리면 데이빗이 술과 밥을 사줬다.

심지어 스테판을 소개하며 술집에 있는 이들에게 한턱 내주기도 했다. 스테판도 과거에 했던 행위이기 때문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젊은 날에 치기. 그리 생각했다.

스테판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게다가 자기 돈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칭송했다.

데이빗으로서는 기분 나쁠 만한 일이었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데이빗에게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스테판 역시 익숙해져서 데이빗의 돈을 자신의 것처럼 휘둘렀다.

'나보다 좋은 집안 출신인 거 아니야?'

살짝 위축되기는 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스테판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회했다.

데이빗은 어딘가 이상했다.

먹을 것에 대해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먼저, 길을 걷다 야생동물만 보면 입맛을 다셨다. 심지어 무언가를 먹고 있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사냥을 하면 항상 덩치가 큰 놈만 노렸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에게 탐욕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스테판은 그 날을 잊지 못했다.

잠이 들었다가 비릿한 냄새에 깨어났다.

그리고 보았다.

데이빗이 자신의 손을 단검으로 찌르는 광경을.

그때의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스테판은 데이빗을 관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데이빗의 이상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스테판이 잠이 들 때쯤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팔을 찌르고 있었다.

'씨발, 저 새끼 뭐야? 언제부터? 설마 첫날부터?'

그 후부터 스테판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테판은 의뢰고 뭐고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귀족 사회에 살면 잔혹한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무언가 달랐다. 무심한 표정으로 묵묵히 자신의 팔을 찌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처럼.

스테판이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용병으로서 신뢰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돈 때문이 아니야.'

귀족인 자신이 고작 금화 세 개 때문에 망설일 리가 없었다.

어차피 약속한 장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견디면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빗이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다.

이런 숲속에서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러나 스테판은 묻지 않았다.

아니, 차가운 눈빛에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이빗이 돌아왔다.

짙은 피 냄새와 함께.

'뭔데? 무슨 일인데?'

스테판은 두 다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극한의 인내심으로 검을 뽑지 않았다.

차마 의뢰자에게 검을 휘두를 순 없었다.

'요즘 내가 늦게 자서 그런 건가?'

늦게 자는 바람에 자해를 못 하니 욕구가 쌓였던 것이었다.

결국, 못 참고···.

'그래, 그래서였어.'

소름이 올라왔다. 자신은 대체 어떤 인간과 함께 있는 건가.

데이빗이 스테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간을 지체해서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은데요?"

목소리 톤이 높아졌으나 스테판은 자각하지 못했다.

* * *

데이빗. 아니, 루이는 스테판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순간부터 스테판이 존댓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곧 헤어질 사람이었다.

'역시나 왔군.'

루이는 방금 죽인 기사들을 떠올렸다.

무려 셋씩이나 왔다.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헛돈 쓴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제법 많은 금화를 쓰긴 했으나 루이가 가진 것과 비교하면 티도 안 날 정도였다.

스테판은 좋은 미끼였다. 적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그리고 미끼로 끝낼 생각도 없었다.

루이는 귀족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 높은 이들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다.

기사들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더 많은 이들을 보낼 것이다.

'차근차근 잡아 먹어주마.'

그리고 마지막은 영주였다.

루이라고 해도 귀족을 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래는 경고로 끝낼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루이는 스테판을 보며 미소지었다.

루이와 눈이 마주친 스테판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루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 * *

또 한 번의 습격.

그 이후로는 잠잠해졌다. 루이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기사를 여섯이나 잃었으니 신중해질 만했다.

모르긴 몰라도 영주의 마음은 지금 타들어 가고 있을 거다.

두 번째 습격 때는 병사마저 보냈으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게다가 왔던 기사들은 전에 왔던 기사들보다 강한 이들로 보냈다.

하지만 루이에겐 의미가 없었다. 북부에서 잘나가는 기사라고 해봤자 고만고만할 뿐이었다.

'이걸로 끝낼 순 없지.'

그렇게 루이는 영주성에 도달했다.

"고생했습니다. 이건 수고비입니다."

루이는 스테판에게 금화 두 개를 건넸다. 의뢰비는 이미 선금으로 냈다.

이는 의뢰비 이외의 보상이었다.

스테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스테판은 금화 두 개를 낚아채고 도망치듯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루이는 그런 스테판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 잘 해준 거 같은데.'

이상한 놈이었다. 감이 좋은 건가? 그러나 꿈에도 모를 것이다. 루이가 준 금화 두 개가 그의 인생 값이란 걸.

루이는 스테판이 영주성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옆으로 돌아갔다.

담 넘기.

정문을 통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성안에 기사는 루이의 손에 죽었다. 설령 남은 기사가 있더라도 그들 실력으로 루이를 알아챌 순 없었다.

그렇게 담을 넘은 루이는 스테판의 행적을 뒤쫓았다.

그리고 스테판이 숙소를 잡은 것까지 확인한 후에 움직였다.

루이가 향하는 곳은 영주의 방이었다.

* * *

쾅! 쨍그랑!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컵과 장신구들이 부서졌다.

밖에 있던 하인들은 몸을 움츠렸다.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기사들이 사라진 이후 매일 같이 들려오는 소리였다.

심지어 식사를 가져다준 시녀 하나는 버릇없는 눈초리로 보았다고 몰매를 맞은 후 쫓겨났다.

화풀이.

그렇기에 하인들은 불똥이 튈세라 숨을 죽이고 영주의 집무실에서 멀어졌다.

덕분에 침입자가 침입하기 쉬워졌다.

끼이익.

"누가 멋대로 열래?!"

문이 열리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 안에 있던 영주였다.

그러나 영주는 이어서 들려야 할 사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의아해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낯선 이였다.

"...넌, 누구냐?"

"네가 찾던 사람."

낯선 이의 말에 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장난질이냐!"

"왜 그래? 나를 부르기 위해 기사를 여섯이나 보냈으면서?"

"...뭣?"

그제야 영주의 움직임이 멈췄다. 영주의 시선이 떨려왔다.

"네놈이···."

루이는 영주의 반응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영주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사, 사람을 부를 것이다."

"불러봐."

부른다고 달라질까? 루이는 기사였다.

그를 알기에 영주도 소리치지 않는 것이었다. 자칫해서 루이를 자극하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경비들이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영주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태도를 바로 했다.

"무언가 오해를 했나 보군."

"오해라."

루이는 피식, 웃었다.

"난 자네를 초대했을 뿐이야. 기사들의 행동이 과했다면 이해해주게. 그들은 충심 때문에 내 의도를 곡해한 것이야."

충심. 이딴 시골 영지에 그런 게 있을까?

이곳에 흘러들어온 기사들은 주군을 찾지 못했거나 영지에서 쫓겨난 이들이 대부분일 거다.

터벅, 터벅.

루이는 영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루이의 반응에 영주의 몸이 떨려왔다.

영주는 급히 일어나려고 했으나 의자가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나, 나는 이 왕국의 귀족이다. 나를 건들면 기사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영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귀족의 권위는 무엇보다 우선시 된다. 그 틀이 무너지면 왕국, 나아가 이 세상의 근간이 부서지기 때문이었다.

매일 같이 싸우던 귀족들도 자신의 권위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힘을 합친다.

그러나.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야."

루이는 검을 들어 올렸다. 본래 루이가 가지고 있던 검이 아니라 밖에 장식되어 있던 검 중 하나였다.

"나, 나는 너 따위가 함부로 대할, 컥."

"말이 참 많네."

루이는 목이 잘린 영주를 보며 혀를 찼다.

갑작스럽게 영주가 죽으면 사인을 조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와 마찰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범인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 * *

쿵, 쿵, 쿵!

갑작스러운 소란에 스테판은 눈을 떴다.

어젯밤 너무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돈이 들어온 덕분에 오랜만에 즐길 수 있었다.

"근데 왜 이리 시끄러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어!"

쾅!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무장한 경비.

심지어 용병들도 섞여 있었다.

"상대는 기사다. 조심해!"

갑작스러운 소란에 스테판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용병 루이 맞지?"

한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스테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

"저자가 맞습니다! 어제 술집에서 똑똑히 들었어요."

같이 온 용병이었다. 그리고 방을 살핀 중년인은 침음성을 뱉었다.

피가 묻은 검.

중년인을 따라 시선을 돌린 스테판은 숨을 삼켰다.

저 검이 언제부터 있던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못 보던 장비까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죽은 기사들의 장비였으나 스테판이 알 리가 없었다.

"너를 귀족 살해죄로 압송한다. 반항한다면 왕국 내 모든 기사와 용병이 너를 쫓을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

얼마 뒤, 스테판은 처형당했다.

사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왔던 길에 영주가 보낸 기사들의 시체도 확인되었다.

워낙 시끄럽게 다녔기에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영주는 왜 죽인 거래?"

"몰라. 그딴 놈 생각을 내가 어찌 알아?"

"기사를 보내서 화가 난 거 아니야?"

"걔한테 보낸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영주를 죽여?"

"게다가 알고보니 진짜 귀족이었다며?"

잡힌 후에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그러나 용병을 사칭했던 이다. 쉽사리 믿을 리가 없었다.

"뭐, 흉내를 내다가 보니 지가 진짜로 영혼수확자가 된 줄 알았나 보지."

술집 한편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던 루이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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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380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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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기적을 부른다.

영주도 해결하고 사칭범도 징벌한 루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왕도로 향했다.

사실 자세히 조사하면 스테판이 기사를 죽일만한 실력이 아니란 게 밝혀지겠지만 증거도 있는 마당에 그리 깊숙하게 조사할 리가 없었다.

이곳은 세트리아 왕국이기 때문이었다.

세트리아의 왕은 여색에 빠져서 국정을 소홀히 했다.

왕의 첩.

조세핀.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다른 관료들과 함께 왕의 눈과 귀를 막았다.

한낱 첩이 왕국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왕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삼국지에서 십상시가 그러했듯 관료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왕국 곳곳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아니, 삼국지보다 더 심했다.

루이가 세트리아 왕국에 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삼국지처럼 군웅들이 일어서는 일이 없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왕족이 힘을 잃을수록 귀족들의 영향력은 강해진다.

조세핀 역시 자신을 따르는 귀족을 대우해줬다.

이 세상은 지구와 달랐다.

군중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에테르를 독점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넘지 못한다.

그렇게 세트리아 왕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국지색.'

한 여인의 미모가 나라를 무너트린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은 루이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루이의 말에 나귀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잘 가라고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신기하게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거 같았다.

루이의 옆에는 마을에서 사 온 말이 있었다.

루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나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 늙은 나귀가 자연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겠지만 나귀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루이로서는 배려해준 것이었다.

루이는 나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고개를 돌렸다.

"가자."

루이가 말 위에 오르자 말이 투레질했다.

영주의 일을 해결하느라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나 필요한 시간이었다.

'왕도에서 볼 일을 마치면 전쟁터를 알아봐야겠어.'

숲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바로 가기는 힘들었다.

루이는 왕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왕도에 가까워질수록 마을의 숫자도 많았다. 전처럼 야생동물도 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루이는 먹는 것도 말 위에서 해결하면서 왕도로 향했다.

그리고 왕도가 가까워질 때쯤 소란을 알아챘다.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전투?'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왕국이 엉망이라지만 왕도가 코 앞이었다.

"...이 정도로 막 나가진 않을 텐데."

왕도 자체는 조세핀이 장악하고 있을 터.

그러나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전투가 아니었다.

길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이형의 존재였다.

날카로운 발톱, 길게 흩날리는 갈기. 얼굴은 늑대와 비슷했으나 두 발로 서 있었다.

"마수? 마수가 어째서?"

그냥 마수가 아니라 상급 마수였다. 이 근처에는 마수의 땅도 없었다.

마수의 땅에서 이곳까지 왔다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저렇게 한 마리만 있을 리도 없지.'

뜬금없이 솟아난 것이었다.

길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왕도가 가까운 탓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다.

몇몇이 마수를 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젠장, 저딴 걸 어떻게 이겨."

기사 하나가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루이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사를 보다가 검을 뽑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물은 사양할 필요는 없지."

이런 곳에서 마수를 볼 줄은 몰랐다. 소란을 듣고 왕도에서 기사들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이럇!"

말이 땅을 박찼다. 비싼 값을 했다.

그리고 마수가 가까워졌을 때 루이는 말에서 뛰어올랐다.

마수 역시 루이를 발견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소로운 인간을 비웃었다.

그리고 앞발을 휘둘렀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에 연약한 인간이 갈가리 찢겨나갈 걸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

잘려나간 건 마수의 손이었다.

"크허허허!"

마수의 입에서 비명이 떠져 나갔다. 반대로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 싸울 줄 몰라.'

분노한 마수가 입에서 한기를 뿜어냈다.

힘과 능력은 상급 마수와 같았지만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숲에 있던 마수들과는 달랐다.

'그래, 마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능력 자체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위협적이지만 루이에겐 아니었다.

루이는 한기를 피하고 녀석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수의 몸이 기울었다.

그제야 마수는 눈앞의 인간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크릉."

뒷걸음치는 마수를 보며 루이의 눈이 빛났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도망치게 놔둘 순 없지."

루이의 몸에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루이의 몸이 가속했다.

마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번뜩이는 빛이었다.

쿵.

마수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뒤늦게 육중한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상급 마수치고는 싱겁네.'

차라리 밤의 숲 중급 마수들이 더 잘 싸웠다. 그러나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밤의 숲 상급 마수들보다는 낮았지만, 중급 마수들보다는 많은 시간을 줬다.

루이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넣었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흙먼지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죽은 마수를 확인하고 루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어째서 마수가 왕도에···. 자네가 잡은 건가?"

"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기사 역시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다.

"고생했군. 집무관에게 이야기하면 보상금을 내줄 걸세."

기사는 그리 말하며 옆을 보았다. 그러자 기사들과 함께 온 이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호른 상회의 라이아라고 합니다."

루이를 보며 싱긋 웃는 여인. 그녀를 보며 루이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여인이 나서자 기사들은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온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상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도 많았다.

이런 참상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루이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 왕국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귀찮게 하지 않는 건 마음에 드네.'

루이는 이런 왕국이 싫지 않았다. 라이아는 루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왕국과의 계약에 따라 마수의 처리는 저희 호른 상회에서···."

"잠깐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라이아는 고개를 돌렸다. 루이 역시 라이아와 함께 시선을 옮겼다.

'저자는···.'

루이의 옆을 지나쳤던 기사였다.

그의 뒤에는 부상자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대부분 기사나 용병이었다.

"우리에게도 마수에 대해 권리가 있소. 우리가 다 잡은 걸 저자가 마무리했을 뿐이오!"

뒤에 있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에 라이아는 볼을 긁적였다.

마수는 돈이 된다. 이런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

"거짓말!"

그때,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어린 소녀.

"저 사람이 우리 아빠를 밀치고 도망쳤어요!"

울먹이는 소녀의 앞에는 죽은 남자가 있었다. 도망치기 위해 남자를 방패로 쓴 것이었다.

"맞소! 뒤에 있는 이들도 싸우다 안 될 것 같으니 도망친 이들이오!"

소녀의 용기에 힘을 얻었는지 옆에 있던 이들도 말을 보탰다.

그러자 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닥쳐라! 감히 평민 따위가 기사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기사의 일갈에 시끄럽던 현장이 조용해졌다.

소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소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서 입을 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애가 어려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까 소리쳤던 이들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확인해보죠."

라이아의 말에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 역시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확인이라니. 내 명예가 그를 증명할 거다."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명예가 땅에 떨어졌군. 저자의 명예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값어치가 없을 것이다.

"저희 상회 규정상 당사자의 말만 믿고 진행할 순 없습니다."

그리 말한 라이아는 루이를 보았다. 루이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로스와 같은 상회. 그렇다면 적어도 실력이 없진 않을 거다.

라이아가 마수의 사체 옆에 섰다.

"여기에 검을 휘둘러보시죠.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기사가 머뭇거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용병들이 호기롭게 나섰다.

"그까짓 것 뭐가 어렵다고!"

루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검을 휘두른 건 저 녀석뿐이네.'

기사. 홀로 와도 되었을 텐데 다른 기사와 용병들을 끌고 온 이유였다.

용병 하나가 무기를 휘둘렀다.

텅!

그러나 마수의 가죽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무슨."

"에잇, 나약한 새끼가. 피해 봐."

다른 용병이 나섰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검은 마수의 가죽을 뚫을 수 없었다. 라이아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래도 소유권을 주장할 거냐는 눈빛이었다.

용병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사들도 나섰지만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실력이 있었다면 도망치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런 추잡스러운 짓도 하지 않았겠지.

결국, 마지막에 남게 된 건 처음 나섰던 기사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기사는 헛기침하더니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타고 올라가는 에테르.

기사는 기도라도 하듯 검에 집중했다. 몸에 남아있는 에테르를 모조리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저런다고 달라질까?'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한순간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오."

루이는 탄성을 뱉었다. 달라졌다. 조금이지만 마수의 가죽에 상처가 생긴 것이었다.

기사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믿음이 기적을 부르기도 하네.'

그러나 작은 상처 가지고 도움이 되었다고 증명하긴 어려웠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기사가 입을 열었다.

"아, 아까 전투 때문에 피곤해서 그렇소. 다음에 다시 한다면···."

기사의 변명을 듣던 라이아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휘둘렀다.

가벼운 몸짓.

그러나 단단하던 마수의 가죽이 종이처럼 갈라졌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용병들과 기사들의 고개가 더더욱 내려갔다.

하지만 먼저 나선 기사만은 루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루이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장난 말고 지분을 증명하고 싶다면 제대로 해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이미 끝나가는 마당에 무엇을 한단 말인가.

루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입을 열었다.

"결투. 기사에게 이보다 확실한 건 없지요. 깔끔하게 이긴 사람이 모든 걸 가집시다. 아, 이쪽은 다 같이 덤벼도 상관없습니다."

루이로서도 그쪽이 편했다. 아니, 그래 주길 바랐다.

애당초 이곳에 보는 사람이 없거나 왕도 근처가 아니었다면 이리 묻지도 않았을 거다.

'들어가기도 전에 문제를 피울 순 없지.'

이 때문에 쫓겨나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용병과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같이 덤비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앞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기사는 눈치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모았겠지.'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 자신들이 상대조차 못 했던 마수를 손쉽게 사냥했다.

마수와 루이. 누가 더 위험한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루이는 그들의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라이아를 보았다.

"호른 상회에서 오셨다고 하면 필로스님을 아십니까?"

"필로스 이사님, 말씀입니까?"

리이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놀란 건 라이아만이 아니었다. 루이 역시 라이아의 말에 놀랐다.

'평범한 상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사였나···.'

그러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신다니 잘 되었군요."

루이는 뒤를 돌아 자신의 말에 향했다. 그리고는 말에 걸어뒀던 짐을 꺼내왔다.

"이것들도 같이 처분하고 싶습니다."

"이건···."

짐에 넣어져 있던 물건들을 본 라이아의 표정이 변했다.

"...상급 마수의 뿔과 뼈, 아니, 최상급도 있군요. 그래서 이사님을···."

라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떠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와 용병들도 깨달았다.

마수 사냥꾼.

마수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

그들은 루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단 사실에 안도했다.

마수 사냥꾼을 천하다고 욕할지언정 그들의 실력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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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380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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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용병 나부랭이죠.

마수의 사체는 상회 사람들이 와서 거둬 갔다.

라이아는 그를 확인하고는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집계가 끝나면 찾아가겠습니다."

어디로 찾아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왕도 내에 있다면 어디에 있던지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떼먹진 않겠지.'

호른 상회란 이름은 필로스에게 처음 들었다. 그러나 왕국의 기사들과 함께 올 정도이니 신용이 높을 거다.

'마수를 전문으로 다루는 상회인가?'

그렇다면 루이가 들어보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루이가 왕도에서 여관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이아가 찾아왔다.

"금화로 드리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일부를 제외하면 보석으로 준비했습니다."

묵직한 주머니. 대체 얼마나 되길래 저런 말을 할까?

주머니 안을 본 루이는 휘황찬란한 보석들 때문에 짧은 침음성을 흘렸다.

루이로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거금이었다.

'평생 돈 때문에 걱정할 리는 없겠군.'

어째서 용병들이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마수를 잡으러 오는지 알 수 있었다.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루이님."

라이아는 싱긋 웃으며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런 라이아를 바라보면 루이는 자신이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대단하네.'

필로스가 그러하듯 라이아도 평범하지 않았다.

'아니, 호른 상회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지.'

루이는 그 이름을 머릿속 깊이 새겨넣었다. 짐을 정리하고 밖에서 대충 요기를 때운 루이는 왕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루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도서관에 출입하려면 왕족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도서관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루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무슨 도서관 하나 들어가는데 왕족이 필요하단 말인가.

왕립도서관은 만능처럼 쓰이던 에테르가 먹히지 않았다.

루이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책은 에테르와 마찬가지로 기득권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지식이 쓰인 책은 저잣거리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학문은 일반인들이 얻기 힘들었다.

루이는 슬그머니 도서관을 살폈다.

정문을 제외하면 딱히 벽이나 경비도 없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리 쉬울 리가 없지.'

자세히 살피니 공간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마법.

'왕국은 왕국이란 건가.'

마법에 대해서는 루이도 문외한이었다. 섣불리 넘을 수는 없었다.

루이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신학자를 찾아야겠어.'

전이었다면 쉽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리 자존심이 높다고 해도 황금을 거절하긴 힘들지.'

그들의 자존심을 굽힐 만큼의 돈이 생겼다.

어차피 돈은 또 벌면 되었다. 루이에게 있어서 돈은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

왕족과 신학자. 어느 쪽이 만나기 쉬운지는 뻔했다.

도서관에 들어가고자 왕족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만나주지도 않겠지.'

왕족이란 게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었다.

루이는 왕립도서관을 나서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왕도 서쪽 구역.

중심부를 벗어나자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루이가 여관을 잡은 동쪽도 이렇지는 않았다. 계급에 따라서 구역을 나눈 것이었다.

그리고 루이는 원하던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약재상.

간판도 없었지만, 약재를 팔고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다.

"실례합니다."

"예, 잠시만요."

루이의 목소리에 안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 나온 건 막 소년의 티를 벗어난 청년이었다.

청년은 검을 차고 있는 루이의 모습에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무슨 일이신가요? 찾으시는 약초라도 있으신가요?"

청년의 물음에 루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애써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검을 고치러 왔습니다만···."

루이의 말에 청년 역시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저희는 약재상이라···. 대장간이라면 다른 구역에 있습니다."

청년의 반응은 당연했다. 오히려 약재상에서 검을 찾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청년의 말에 루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로힐이란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로힐은 저희 할아버지인데···."

"들어오라고 해라."

"아, 할아버지."

안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의아해하면서도 루이를 안으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노인의 팔은 망치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앙상했다. 그리고 왼발은 정강이 밑으로 의족이 달려있었다.

'이 자가 정말로 장인이 맞나?'

루이는 로힐의 모습에 놀라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비록 늙고 말랐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로힐의 눈동자는 범인이 가질 수 것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들었나?"

"상인한테 들었습니다."

루이의 말에 로힐은 혀를 찼다.

"정보상 놈들이군."

정보상? 정보를 거래하기도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 줘 봐."

"예?"

"고칠 검. 다섯 자루 전부 할 건 아닐 거 아니야?"

"고쳐주시는 겁니까?"

"그건 검을 보고 결정하지."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집을 풀었다.

로힐이 검을 살폈다. 부러진 검날은 아직도 예기를 품고 있었다.

"이 검도 오랜만이군."

오랜만? 루이가 의아해하자 로힐은 검날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크로이드 검파의 녀석이냐?"

"...!"

루이는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힐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문양을 지웠군. 검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파문은 아닐 테고 도망친 건가?"

도망치면 어차피 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냐의 문제였다. 루이는 검파가 아니라 직계 가문이었으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어디 가서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가문과 연관된 사람인가? 루이의 물음에 로힐은 피식 웃었다.

"크로이드와 연은 없지만, 이 검을 만든 녀석과 잘 아는 사이지."

크로이드가 고용한 장인. 그제야 루이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루이의 얼굴에 기대감이 섞였다.

검만 보고 가문을 알아낸 장인. 눈썰미는 진짜였다.

"그럼?"

"이 검은 여기서 고칠 수 없다. 깨끗하게 잘라먹었구나."

루이는 실망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려고 했다.

그런 루이를 보며 로힐이 혀를 찼다.

"누가 고칠 수 없다고 했느냐. 여기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

"이 녀석을 고치려면 여기 설비만으로는 힘들다. 하지만 다저스에 가면 그만한 설비가 있지."

다저스는 왕도에서 사흘이나 떨어진 마을이었다.

루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로힐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그럼 이 녀석을 고쳐주면 넌 무엇을 주겠느냐?"

"돈이라면 내겠습니다."

루이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로이아가 가져다준 주머니였다.

묵직한 주머니를 본 청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로힐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딴 돈은 필요 없다."

"...할아버지?"

조심스러운 청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입만 뻐끔뻐끔하는 것이 루이만 이 자리에 없었다면 소리쳤을 것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내야 하지. 돈은 네게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으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에 루이를 파악할 줄은 몰랐다.

'까다로운 상대군.'

루이는 로힐이란 노인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무엇을 원하십니까?"

"의뢰를 하나 하지."

로힐은 루이를 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의뢰?'

루이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용병이기도 했다. 대가를 의뢰로 받는 건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뢰입니까?"

"그건 검이 완성되면 말해주마."

"..."

내용을 모르는 의뢰. 이보다 위험한 건 없었다.

로힐은 루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찌하겠느냐?"

"...하겠습니다."

루이의 대답에 로힐은 웃음을 흘렸다. 루이가 이리 대답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웃음이었다.

"한 달 뒤에 다시 오거라."

"한 달···."

루이는 그 말에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러나 루이에게 있어서 검은 필요한 것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을 투자할 만했다.

'도축장이라도 가야겠군.'

왕도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벌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청년의 시선이 주머니를 따라 움직였으나 루이도 로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이 정리되자 로힐이 아쉬워하는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가게를 잘 보아라."

"예? 아, 예."

청년도 루이와 로힐이 나눈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인 로힐이 대장장이였다는 사실이 놀랍긴 했으나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루이는 그렇게 약재상을 나섰다.

그리고 서쪽 구역을 벗어나려던 루이의 앞을 막은 이가 있었다.

"또 만났군."

가슴에 왕국을 상징하는 새 문양이 반짝였다.

낮에 마수를 잡았을 때 찾아왔던 왕국의 기사였다.

중년의 기사는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찾는 분이 계시니 따라오게."

다짜고짜 명령을 내리는 기사. 루이는 힐끗 옆을 보았다.

중년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도 둘이나 있었다.

북부에 있던 기사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몸에서는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귀찮아 보이는데.'

루이는 한숨을 내쉬고 중년 기사를 뒤따랐다.

기사들이 향한 곳은 왕도의 외곽이었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은 골목.

루이는 이들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쪽으로 데려온 건가 싶었지만 기사들은 루이를 경계할 뿐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밖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건 둘, 나머지는 숨어있군.'

위에 둘, 아래 셋.

기사의 숫자. 기사들은 어떠한 건물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

루이는 자신을 찾는 이가 건물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데려온 기사들까지 합치면 열 명이나 되었다.

"들어오게."

중년 기사는 거리낌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둘은 문 옆에서 호위를 섰다.

루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은데?'

영화를 보면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끝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상대는 왕국 기사들을 사적으로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중년 기사의 뒤를 따랐다.

안에는 중년 기사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하나는 기사군.'

아름다운 여기사. 그리고 그녀가 호위하는 이도 여기사만큼이나 아름답게 생긴 소년이었다.

미남과 미남을 호위하는 여기사.

'어디선가 봤던 패턴이네.'

그러나 테슈아와 진과는 달랐다.

여기사의 실력은 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결정적으로···.

'소년이 아니야?'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저 경. 감사해요."

"아닙니다."

중년 기사, 시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루이는 불길한 예감이 올라왔다.

시저의 태도가 정중해도 너무 정중했다.

"경이 낮에 마수를 잡았다는 기사분인가요?"

가는 목소리. 그러나 나이를 생각하면 변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예상이 맞았군.'

눈앞에 소년은 여자였다. 정확히는 남장한 소녀.

정체를 숨기고 나타난 남장 소녀.

그를 모시는 왕국의 기사들.

삼엄한 호위. 여기까지 봤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루이는 사람을 잘 못 봤다고 말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는 다 알고 부른 것이 분명했다.

"...경은 아닙니다. 한낱 용병 나부랭이죠."

루이의 말에 시저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가 멀어졌다.

소녀는 어머, 하고 탄성을 뱉고는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수를 잡을만한 실력자라는 건 맞겠네요."

싱긋 웃은 소녀는 루이를 향해 한 발자국 걸어왔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셀리오르 다우니 세트리아라고 합니다."

"씨발."

소녀의 소개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어였기에 알아듣는 이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용병 루이가 고귀한 핏줄을 뵈옵니다."

시저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가 몸을 숙였다.

다른 이들이 놀랄 정도로 깔끔한 예법이었다.

소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병은 당연하고 기사들이라고 해도 귀족의 자제가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예법을 잘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루이는 이들의 반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세트리아. 왕국과 같은 성을 쓰는 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이 나라의 왕족.

즉, 눈앞의 소녀는 세트리아 왕국의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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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380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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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적 표현입니까? 직접적 표현입니까?

루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똥 밟았군.'

누군가는 왕족을 보는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거다.

존귀한 존재. 이 세상에서 신 다음으로 성스러운 이들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왕족과 얽히면 좋은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공주의 명이 있고 나서야 루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공주가 자신을 부를 만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주는 루이를 살필 뿐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결국, 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귀하신 분께서 미천한 용병에게 무슨 용무입니까?"

루이의 말에 여기사와 시저가 반응했다. 왕족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입을 여는 건 예법에 어긋났다.

방금 루이의 모습을 보면 예의를 모르는 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알면서도 한 것이었다.

여기사가 나서려는 찰나에 소녀가 손을 들었다.

"그대는 조세핀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예."

모를 리가 없었다. 왕국의 첩. 현 왕실의 실세였다.

공주가 나서서 왕국의 첩을 언급했다.

루이의 대답에 공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공주가 입을 열려는 찰나 루이가 선수를 쳤다.

"왕실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엮이게 되어 있었다.

"감히."

여기사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으나 시저는 아니었다.

루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변했다.

'영리하군.'

오히려 루이의 처신을 칭찬했다. 미리 선을 그은 것이었다.

공주의 말문이 막혔다.

설마 자신이 앞에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주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는 공주의 눈빛에 공주가 온실에서 귀하게 자라기만 한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경께서도 이 나라의 기사인 이상 자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공주의 말에 루이는 미소지었다.

"그래서입니다. 저는 기사가 아니라 떠돌이 용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출신 역시 이 나라가 아닙니다."

"..."

왕국인이 아니다. 공주가 눈을 껌뻑였다.

공주의 시선이 시저에게 향했다. 시저 역시 곤혹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곧 공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일단 물러나자는 뜻이었다. 정보가 부족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전 아무것도 못 본 거로 할 테니 염려하시지 마시길."

루이는 그리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미천한 이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루이가 방을 나섰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루이는 도망치듯 건물과 멀어진 후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엿 될 뻔했군."

공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용병인 루이까지 부를 정도면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심지어 이 나라의 기사라는 이유로 묶으려고 했다.

저것이 왕족의 사고관이었다.

기사들은 나라와 왕족에게 충성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기사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기사들과 달랐다.

"제국 출신인 게 다행이군."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안심하긴 너무 일렀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 * *

다음 날.

여관에서 일어나니 문 앞에 종이들이 쌓여있는 게 보였다.

이곳에서 종이는 흔한 게 아니었다.

'뭐지?'

의아해하고 있자 마침 복도를 정리하고 있던 일꾼 청년이 입을 열었다.

"기사님 앞으로 온 초대장들입니다."

그제야 루이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았다.

루이가 마수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왕도에 퍼진 게 분명했다.

평화로운 왕도에서는 신선한 자극이었겠지.

못 먹는 감이라도 찔러본다는 심정으로 연락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마수를 죽일만한 기사는 흔한 게 아니었다.

루이는 누구 밑에서 일할 수도 없을뿐더러 귀족들의 광대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간단한 요깃거리 좀 올려주실 수 있나요?"

루이는 은화 몇 개를 꺼내서 일꾼에게 건넸다.

루이의 말에 일꾼의 눈이 커졌다. 설마 기사씩이나 되는 분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해올 줄은 몰랐다.

"물론이죠!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일꾼이 떠나가자 루이는 편지들을 가지고 방에 돌아왔다.

대부분이 남작이나 자작이었다.

'하긴, 고위 귀족이 마수 하나 잡았다고 움직일 리는 없지.'

어제 공주를 만난 게 이상한 것이었다. 루이는 편지들을 한쪽 구석에 던져놨다.

고위 귀족이 끼어있다면 곤란하겠지만 남작이나 자작 정도면 무시해도 되었다.

'식사하고 신학자를 알아봐야겠군.'

루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식사가 벌써 온 건가?'

생각보다 일렀다. 그러나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발걸음 소리는 셋이었다.

그중 하나는 에테르. 기사의 기척이었다.

똑똑.

"기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노크와 함께 일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이곳에서 루이를 찾을 만한 이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불안한데.'

그렇다고, 밖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루이는 방문을 열었다.

"루이스 경, 간밤에는 편히 주무셨습니까?"

싱긋 웃는 소년. 그리고 뒤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여기사.

루이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공주였다. 게다가 어제와 달리 루이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공."

일꾼을 신경 써서 호칭을 달리했다. 공주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식사는 어찌할까요?"

일꾼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위로 올려도 되는지 묻는 것이었다.

일꾼의 물음에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내려가서 먹겠습니다."

일꾼이 물러나고 공주와 호위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라. 제가 방해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방해가 맞다. 그러나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루이는 고개를 저으며 안에 있던 의자를 건넸다. 의자는 하나였기에 루이와 호위는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경,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더군요. 영혼수확자라고 불린다면서요?"

공주의 말에 루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루이로 불러주십시오. 그보다 귀하신 분께서 이렇게 자주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루이의 물음에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라면 안 되죠. 하지만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사정이란 건 조세핀과 연관된 게 분명했다.

"조사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전 믿을 수 있는 이가 아닙니다."

"아뇨. 용병 길드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용병이라고 말하더군요. 특히나 전쟁에 관해서는 일반 기사보다 낫다는 평이었습니다. 게다가 호른 상회 역시 경의 신분을 증명해줬습니다."

"..."

루이는 입을 다물었다. 용병 길드가 루이를 그리 평가하는지 몰랐다.

'고작 4급 용병을 그리 말했다고?'

루이는 흔하디흔한 용병 중 하나일 뿐이었다.

기사들을 죽인 일로 유명해졌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북부에서의 일이었다. 왕도에서 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용병 길드라고 해도 쉽사리 용병을 보증하진 않았다.

게다가 호른 상회는 여기서 또 왜 나온단 말인가?

공주의 말투를 보면 용병 길드보다 호른 상회를 더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사실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전 기사 루이 경이 아니라 용병 루이 경에게 의뢰하고자 합니다."

용병 길드가 보증한 이상 제국인이란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용병 길드에게서 지명권을 받아왔어요."

지명권. 길드가 위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길드에 속한 용병들에게 강제적인 의뢰를 내릴 수 있는 수단.

모든 용병에게 단 한 번의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한 보수를 주는 건 당연했다.

애당초 지명권을 사용하는 대상은 1급 이상의 용병들이었다.

4급 용병에게 쓸만한 일이 아니었다.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이도 준비하셨군요."

"무엄한!"

"엠마 경."

루이의 대꾸에 여기사가 발끈하였으나 공주가 제지했다.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루이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루이 역시 짧은 사이에 공주를 파악했다. 이런 것으로 루이를 책망할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의 행동에도 공주는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루이를 보고 웃고 있었다.

"대체 왜 저 같은 용병 나부랭이를 신경 쓰시는 겁니까?"

"시저 경께서 경을 뛰어난 기사라고 말씀하셨어요. 왕실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거라고."

루이는 어제 봤던 중년 기사를 떠올렸다. 실력이 뛰어난 만큼 눈썰미도 좋았다.

'젠장, 그 양반이었네.'

그제야 사정이 이해가 되었다.

중년 기사의 눈은 정확했다. 루이의 실력 전부를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에테르와 단련 정도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루이가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왕실 기사단의 수준이 낮은 것도 있었다.

'제국이었다면 사정이 달랐겠지.'

루이는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하자면 왕실 기사단으로는 제국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마스터. 왕국에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마수의 땅에 있던 사냥꾼들이 더 뛰어났다.

그들 중에는 제국에서 넘어 온 이들도 많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루이에게는 왕실 기사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들어주시겠나요?"

"말씀해보시죠. 어떤 일인지."

루이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조세핀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고 하셨죠? 그러나 당신이. 세상이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가짜에요."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가 아는 조세핀을 떠올렸다.

왕을 유혹해서 왕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악녀.

그녀의 소문은 수도 없이 많았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녀들의 목을 베기도 하고 예쁜 소녀를 보고 질시해서 소녀의 얼굴에 칼질을 하기도 했다는 등.

사실 정황을 알 수도 없는 끔찍한 소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짜라고?

"...소문과 달리 사실은 착하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공주가 처음으로 정색했다. 공주뿐만 아니라 여기사 역시 무서운 눈으로 루이를 노려봤다.

'역시 그런가.'

저기서 더 심하다는 건가?

루이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뭐가 가짜라는 겁니까?"

루이의 물음에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에요."

루이는 눈을 껌뻑였다. 그만큼 당혹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루이는 팔짱을 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오고 나서 아바마마께서 변하셨어요. 아니, 아바마마뿐만이 아니에요. 오라버니들 역시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죠."

오라버니들. 루이가 기억하기로 이 왕국에는 세 명의 왕자가 있었다.

"제국에서 수학하던 둘째 오라버니도 아바마마를 설득해보겠다고 내려왔지만, 그녀를 만나고 나서 똑같이 변했어요. 심지어 저와 전날 나눴던 약속도 기억하지 못했답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여인에게 반하여 가족을 배반하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루이의 표정을 읽었는지 공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결정적으로, 전 봤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녀가 사내들을 불러서 잡아먹는 광경을."

"..."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여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마 공주에게 되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잡아먹는다는 게 은유적 표현입니까? 직접적 표현입니까?"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여기사는 바로 알아들었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둘 다입니다. 실제로 요 몇 년간, 왕도 내에 십 세에서 이십 세 사이, 남자의 실종이 잦아졌습니다."

인육. 그제야 루이가 한 말을 이해했는지 공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람을 잡아먹을 때 봤던 모습은 제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어요. 보랏빛 피부에 뱀처럼 긴 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었죠."

루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랏빛 피부. 순간, 밤의 숲에서 보았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런 존재가 또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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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8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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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군.

직접 보지 않았으니 확신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러나 이상하긴 했다. 왕의 첩이란 이가 사내들을 방에 부르는 것이었다.

왕이 조세핀을 좋아한다면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루이는 공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왕국을, 아바마마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없애야 해요. 이미 뜻이 맞는 이들과 움직이고 있죠. 맥스월 후작 역시 저를 돕기로 했어요."

거사.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맥스월은 과거 왕국의 실세 중 하나였다. 지금은 조세핀에 의해 밀려났지만, 그의 명성도 작지 않았다.

그까지 관여했다면 단순히 철모르는 왕족의 놀이 정도가 아니었다.

조세핀, 그녀가 인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왕국이 썩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눈을 피해서 기사나 용병들을 모았고 날짜도 잡혔어요."

그런 와중에 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루이의 등장은 왕족인 그녀를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저는 경에게 이번 일을 도와달라고 의뢰하고 싶군요."

"...맥스월 후작도 나섰다면 저는 필요 없는 게 아닐까요?"

그만한 귀족이 움직였다면 사람을 모으긴 어렵지 않을 거다.

루이의 물음에 여기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분노. 루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또 무언가 있는 건가?'

공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이 중하기에 그와 손을 잡았지만 전 그자를 믿을 수가 없어요."

조세핀 때문에 권력에서 멀어졌다. 맥스월은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다.

목적이 같기에 손을 잡았지만, 아군이라 보기 힘들단 소리였다.

'골치가 아프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조세핀이나 맥스월 후작과 연관되지 않은 이. 외지인이 아닌 이상 힘든 이야기였다.

거짓을 말해도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내가 맥스월에게 이르면 이번 일도 위태로워지지.'

그녀는 그런 위험성을 각오하고 나선 것이었다.

한 번 본 루이를 무엇을 믿고?

용병 길드? 아니면 호른 상회?

고민하는 루이를 보며 공주가 입을 열었다.

"일을 마치면 보상 외에도 도서관에 출입을 허가해줄게요."

루이의 시선이 공주에게 향했다.

벌써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까지 알아낸 것이었다.

귀찮은 일이었다.

거절하고 용병 길드를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용병패를 받을 수 없을 거야.'

4급에 오르는 데도 몇 년이 걸렸다. 게다가 외국인인 루이가 쉽사리 용병패를 얻을 수 있던 것은 제국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어중이 떠중이나 용병이 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본명으로 등록하지도 않았겠지.'

사람들은 용병 길드의 이름을 믿고 용병을 고용한다.

용병 길드는 용병들이 했던 의뢰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신뢰도를 매긴다.

길드의 지명권을 무시하고 왕족의 명까지 거절한 이를 다시 용병으로 받아줄까?

용병 길드가 왕국 내에 있는 이상 왕실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설령 용병이 된다고 해도 작은 용병단이라면 모를까, 이름 있는 곳은 신분이 불투명한 이를 받아주지 않을 거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돈이 있기에 위조 신분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위험할뿐더러 지출이 심했다.

'그리고 너무 알려졌어.'

이번 일로 용병 길드에서도 루이를 주목하고 있을 거다.

반대로 이득도 명확했다.

수많은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동부에 가더라도 이런 기회는 없을 거다.

게다가 왕족의 호의까지 살 수 있었다.

신분 사회에서 왕족에게 호의를 입힌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덤으로 용병 길드의 족쇄까지 떼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조세핀, 그녀이네.'

공주의 말이 걸리긴 했으나 조세핀이 그자와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정리가 끝난 루이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면 같이 하겠습니다."

루이의 말에 공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적이라면 누굴, 어떻게 죽이든지 불문에 부칠 것. 설령 그것이 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뒷말이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이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전쟁터에서 귀족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설령 적군이라 해도 귀족을 죽여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러한 변수를 놔두고 싶지 않았다.

'전쟁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항복한 이가 뒤를 돌았을 때, 칼을 찌를 수도 있었다.

"전 포로를 남길 생각이 없습니다."

적의를 보이면 죽인다. 루이의 말에 공주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평민이 귀족을 죽이면 중죄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이름을 걸겠습니다."

"공주님?!"

화들짝 놀란 여기사가 공주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공주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족이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누굴 죽이든 경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겁니다."

공주의 말에 루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장부야.'

루이는 전쟁 용병이었다. 전쟁터야말로 그의 일터였다.

그것이 왕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부디 기사가 많았으면 좋겠군.'

밤의 숲을 겪은 루이는 더는 병사들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 * *

결행일은 생각보다 빨랐다.

바로 사흘 뒤.

애당초 루이를 상정하고 일을 진행한 게 아니었다. 일이 시작되기 전에 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루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쁘진 않지.'

빨리 일을 처리할수록 루이에겐 좋았다.

[581:22:13]

일을 기다리다가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리고 루이 역시 남은 시간 동안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짐 녀석의 밑에서 일했었다고? 이쪽 일을 할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데?"

근육질의 중년인.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떡이 져 있었고 앞치마에는 말라붙은 피와 살점이 붙어있었다.

"하긴, 실력은 확인해보면 되지. 따라와."

루이는 중년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왕도의 서쪽에서 가장 외곽.

그곳에는 가축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웠다.

"한 번 이 녀석을 잡아봐."

중년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소 앞에 서더니 칼을 건넸다.

"도축을 해봤다면 알겠지만 한 번에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몸이 경직되어서 고기의 질이 나빠져."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다.

칼이 번뜩이고 소가 천천히 쓰러졌다. 소는 죽는 순간까지 칼이 지나간 걸 알지 못했을 거다.

깔끔한 솜씨에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능숙하게 해체를 했다.

"...진짜 짐 밑에 있었다고? 짐 녀석보다 나은데?"

당연했다. 세례를 받은 기사를 일반인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중년인은 루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이곳은 언제나 손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루이만큼의 실력자는 귀중했다.

중년인이 루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사도 대도시긴 하지만 여기 왕도와 비교할 순 없어. 이쪽은 하루에 들어오는 물량만 수백 단위야."

소뿐만이 아니었다. 닭이나 양 등.

수많은 가축이 주변 마을에서 들어온다.

게다가 최근에는 귀족들의 연회가 잦아지면서 더욱 바빠졌다.

기뻐하는 중년인을 보며 루이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한 달만 한다고?"

"예, 그리고···."

"사흘 뒤에 이삼일 정도 못 나온다고? 괜찮아, 괜찮아. 일이 있으면 그럴 수 있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딴 생각으로 무슨 일을 구하는 거냐고 떨떠름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루이를 바라보는 중년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길을 걷다가 보석이라도 발견한 눈빛이었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일 할 수 있는 거지?"

중년인의 물음에 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그렇게 일을 구했다.

* * *

사흘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루이는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공주와 호위인 엠마뿐만 아니라 시저와 다른 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공주만이 루이를 반길 뿐 루이를 바라보는 다른 기사들에 불만이 섞여 있었다.

당연했다. 루이를 고용했다는 건 자신들만으로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잘 지내셨나요?"

"예. 덕분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합류했다.

시저가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짙군."

"도축 일을 하다 보니 씻어도 사라지지 않네요."

루이의 말에 공주와 엠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루이의 행적을 보고 받은 시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사들이 루이를 아니꼽게 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루이가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시저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중요한 건 루이의 행실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시저 경."

공주의 말에 시저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사전에 설명했다시피 우린 맥스월 후작과 함께 왕궁까지 빠르게 돌파한다. 다른 이들은 용병들과 함께 일이 끝날 때까지 길을 막을 것이다."

시저의 말에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원래라면 루이 역시 용병이기에 후위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루이 정도 되는 실력자를 후위에 남기는 건 낭비였다.

시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이들은 우리의 동료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적이라고 생각하고 망설이지 마라."

시저의 말에 기사들은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는 한 번뿐이었다.

뜻에 따르지 않으면 베어야 했다.

"명심하도록. 왕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툭, 툭.

기사들은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슴에 새겨진 신조.

세트리아의 상징이자 그들의 명예이기도 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이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선 것이었다.

설명이 끝난 그들은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 있는 건 왕궁이었다.

* * *

왕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저자가 맥스월이군.'

외견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지만, 공주가 믿을 수 없다고 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긴 콧수염과 높게 세운 옷깃. 곧 전투가 벌어질 텐데 옷부터 차려입었다.

두 눈에는 탐욕스러움이 흘러나왔다.

전형적인 왕국 귀족의 모습이었다.

맥스월이 데리고 온 기사들의 숫자는 일행들보다 많았다.

"오랜만이오. 공주."

맥스월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꼿꼿하게 서 있는 허리를 보며 일행들의 표정이 굳었다. 맥스월뿐만 아니라 뒤의 기사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왕족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주는 태연하게 인사를 받았다.

"후작도 오랜만이군요."

"공주는 점점 아름다워지시는구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말투였다.

일국의 공주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공주를 바라보는 눈빛 역시 존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품평하듯이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시저의 얼굴이 굳었다.

공주는 앞으로 나서려는 시저를 제지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호오, 루이는 짧게 탄성을 뱉었다.

루이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세핀과 맥스월의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라서 찾았을 거라는 루이의 예상이 빗나갔다.

'이래서 나한테 온 거구나.'

맥스월은 왕실의 권위를, 공주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왕국 사정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기사들 역시 왕실 기사들을 비웃고 있었다.

공주는 용병 길드나 호른 상회를 믿어서 루이를 고용한 게 아니었다.

떠돌이 용병조차도 필요할 정도로 절박했던 것이었다.

왕도 내에서 조세핀과 맥스월 후작의 눈을 피해서 사람을 구하기는 힘들었다.

'후작의 기사들이 왕실 기사와 비슷한 수준이니 그럴만하겠군.'

오히려 시저를 제외하면 후작 쪽이 나은 편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왕실 기사단은 왕국 내에서 가장 뛰어나고 명예로운 기사들이어야 했다.

그것이 일개 후작의 기사들보다 못하다는 건 굴욕이었다.

하지만 루이의 눈에는 둘 다 비슷해 보였다.

자신들이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밤의 숲에 데려가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일주일을 버티지 못할 거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모였으나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럼 공주, 제가 에스코트하겠소이다."

맥스월과 기사들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동료가 아닌 여인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루이는 공주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 공주의 상태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뒤따랐다.

아니, 공주를 위해 모욕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개판이군.'

그 광경을 보며 루이는 이번 임무가 순탄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지금이라도 떠나야 하나?'

사공이 많은데 배가 제대로 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판단하긴 일렀다.

어차피 루이가 할 일은 같았다.

적이 있다면 베는 것. 루이는 이번 일이 잘못되었을 때 도망칠 능력이 있었다.

'그때는 왕국을 떠나야겠지만.'

루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일행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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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381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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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난 건가?

어둠이 내려앉은 왕성.

맥스월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맥스월 후작. 좀 더 조심히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저의 물음에 맥스월은 실소를 흘렸다.

"걱정하지 말게. 번을 서고 있는 이들은 이미 매수를 했어. 경도 부단장씩이나 되었으면서 담이 좁군."

"..."

맥스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외성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일행들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있었다.

"...와우."

루이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맥스월의 수완을 칭찬해야 하는 건가, 이리 쉽게 매수당하는 왕국의 경비들에 놀라야 하는 건가.

루이의 감탄사에 옆에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에게는 외부인에게 이런 광경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다. 그러나 차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세트리아 왕국의 상황은 루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일행들이 외성을 향하자 멀리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나 외성을 막는 게 보였다.

따로 고용했다던 용병과 기사들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맥스월에게 향했다.

아무리 사람들을 매수했다지만 이런 소란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틀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빠르게 치고 올라가서 처리하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해도 맥스월의 행동은 의문스러웠다.

고작 며칠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이번 일은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준비했다고 하는데 너무나 엉성했다.

이럴 것 같았으면 그만한 시간은 필요 없었을 거다.

'뭐, 그만큼 사람을 모으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지.'

왕국의 실세를 쳐내는 일이었다.

루이는 맥스월에게서 시선을 떼고 시저를 보았다.

'부단장이었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해간다고 해서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곧 내성이 보이자 루이는 상념을 날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내성을 지키고 있던 건 병사들이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왕실 기사가 둘.

"부단장님?"

"길을 열어라."

그들의 눈이 시저에게서 공주에게로, 다시 맥스월과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옮겨갔다.

"대체 무슨···."

"왕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악녀를 처벌하러 간다. 그러니 길을 열어라. 아니라면···."

시저가 검에 손을 얹었다. 동시에 뒤에 있던 기사들의 눈빛도 변했다.

왕실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악녀. 그것이 누굴 말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이 머뭇거리자 시저가 검을 뽑았다.

"강제로 열겠다."

시저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자신의 동료였음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시저는 죽어가는 기사들을 놔두고 내성 문을 열었다.

일반인은 미는 것조차 힘든 무게였으나 거리낌이 없었다.

끼이이익.

육중한 문이 강제로 열리기 시작했다.

"역시 시저 경이군."

맥스월이 지나가면서 시저를 칭찬했다. 그러나 부하를 죽인 시저의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맥스월의 말 역시 비아냥에 가까웠다.

"...들어간다."

시저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움직였다. 공주는 그런 시저의 등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리고 루이는···.

'아까워.'

죽은 기사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둘을 합치면 사흘을 벌 수 있었다.

루이가 나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루이의 눈이 안으로 향했다.

'오는군.'

격한 에테르의 움직임. 이를 깨달은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 *

기사들의 몸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적들.

기사들뿐만 아니라 근위병들도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중 몇은 시저와 동료를 보고 합류하기도 했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그쪽이 아니오."

맥스월이 조세핀의 방을 향하려던 시저를 불러세웠다.

이 난리에도 맥스월의 옷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왕실 기사단 부단장인 시저가 길을 착각할 리가 없었다.

시저의 시선에 맥스월이 수염을 꼬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대전에 있소. 내 이미 그녀의 옆에 눈을 심어놨지."

"...대전, 말입니까?"

이 시간에 대전에 있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시저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맥스월은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습격을 깨닫고 도망친 것이겠지."

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이야기였다. 맥스월이 데려온 기사들도 왕실 기사들과 싸웠다.

배신할 것이라면 같이 피를 흘리진 않았을 거다.

"대전으로 향한다!"

시저의 말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루이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런 맥스월을 바라보았다.

'공기가 바뀌었어.'

아까부터 느껴졌던 꺼림칙한 기분. 그것이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루이를 잠식하듯.

루이는 과거에도 이런 경험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

맥스월과 기사들을 살핀 루이는 마지막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대전으로 향하는 일행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습격 역시 그쳤다.

맥스월 말대로 조세핀이 대전으로 도망쳤다면 남은 병력도 그곳에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컸다.

대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를 본 일행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열린 문 사이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지만 일행들의 눈에는 어둠보다 더 검게 보였다.

"갑시다."

앞으로 나선 건 공주였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앞장을 섰다. 공주가 먼저 움직이자 다른 이들도 뒤따랐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오늘 밤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아바마마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왕국을 되살려야 해.'

공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일행들이 대전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건 예상을 벗어난 광경이었다.

"...미하일 기사단?"

"바론 기사단도 있군."

시저가 침음성을 흘렸다. 긴 대전. 왕실 기사단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는 장소. 그 중앙에 낯선 이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는 루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마수를 잡았을 때 시비가 붙었던 기사.

그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공주의 눈빛이 떨려왔다. 미하일 후작과 바론 백작.

그러나 공주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 너머에 왕좌에 앉아 있는 이.

이 나라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왕의 무릎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비단처럼 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닿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고혹적인 눈동자.

루이는 그녀가 조세핀이란 걸 알아챘다.

가히, 한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건 잘생긴 미남자 셋이었다.

'저들이 왕자들인가?'

루이는 공주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을 비롯한 셋의 눈동자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마네킹처럼 보였다.

조세핀은 왕의 턱을 쓸어넘기며 공주를 바라보았다.

"어서 오렴. 셀리오르."

"...제 이름은 당신 따위가 입에 담아도 되는 게 아닙니다."

공주가 조세핀을 노려봤다.

왕의 귀염을 받는다고 하여도 조세핀은 첩에 불과했다.

정실이자 이 나라의 왕비는 작년에 돌아가신 공주의 어머니였다.

왕실 규정상 왕비가 상을 당했을 경유, 삼 년 동안 새로운 왕비를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떠난 왕비에 대한 예의였다.

당연히 조세핀이 공주를 향해 하대해서는 안 된다.

공주의 반응에 조세핀은 피식 웃고는 맥스월을 바라보았다.

"신 맥스월, 위대한 세트리아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왕을 향해 무릎 꿇고 있지만, 그 대상이 조세핀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맥스월 후작!"

분노한 시저의 눈이 맥스월을 향했다. 그러나 맥스월은 태연했다.

설마 권력에 욕심이 많은 맥스월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조세핀에 편에 설 줄 몰랐다.

"공주의 제안. 그건 공주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오. 확실한 미래가 있는데 굳이 불확실한 미래에 인생을 걸 필요는 없지."

"...!"

공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공주의 제안을 듣고 조세핀에게 같은 제안을 보낸 것이었다.

"공주, 배움이 부족했소. 귀족이란 이득만 된다면 어제까지 적이었던 이들과도 웃을 수 있지. 설령 그것이 내 가족을 죽인 이라고 해도 말이오."

맥스월의 말에 공주의 몸이 떨려왔다.

"그럼 어째서, 어째서 여기까지···."

공주를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많았다.

맥스월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맥스월은 공주의 물음에 콧수염을 매만졌다.

"어째서라니.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오?"

맥스월의 시선이 왕과 조세핀에게 향했다.

조세핀은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역. 아비를 죽이고 왕좌를 탐하려고 했던 공주. 이 정도면 공주를 폐위하기에 충분한 명분 아니겠소?"

"...!"

그제야 맥스월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명분도 없이 공주를 내칠 수는 없었다.

그것이 피의 권리였다.

이번 일은 왕에게, 아니, 조세핀에게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럼 모든 것이···."

조세핀의 손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아,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밖에 있는 이들은 진짜로 공주께 감명받은 이들이니."

"..."

맥스월이 공주를 보고 웃었다.

조세핀이 왕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리고 조세핀의 말이 끝나자 왕이 입을 열었다.

"세트리아의 공주 셀리오르 다우니 세트리아를 반역죄로 폐위한다."

"왕비시여."

맥스월이 조세핀을 불렀다. 그의 호칭에 공주의 눈동자가 떨려왔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세핀은 맥스월의 부름에 고개를 주억였다.

"약속은 지키지요. 맥스월 공작. 이제 공주는 그대의 것입니다."

"...!"

자격도 없는 이들이 서로를 왕비, 공작이라 칭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지만 중요한 건 왕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의 자리는 왕이라도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 말은 이미 제국과도 이야기가 되었단 뜻이었다.

"맥스월! 네 놈!"

분노한 시저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시저 역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시저는 맥스월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엠마, 드월슨. 공주님을 모시고 이 자리를 벗어나라."

엠마와 한 기사의 고개가 무겁게 움직였다.

시저는 공주를 위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뒤따라온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주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끝났다.

"공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엠마가 공주를 불렀다. 시저 역시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포기한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살아계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공주의 눈빛이 돌아왔다. 그러나 맥스월은 그런 시저를 비웃었다.

"이미 군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공주 홀로 그들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맥스월의 말에 아무도 대꾸할 수 없었다.

이미 적들은 만만의 준비를 끝 맞췄다. 함정에 걸린 건 자신들이었다.

그러나 침묵을 깬 건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대충 이야기는 끝난 건가?"

루이. 그가 기지개를 켜며 앞으로 나섰다.

기다림이 너무 길었다.

"루이경?"

공주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그러나 루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넌, 그 용병이구나."

맥스월 역시 루이에 대해서 보고 받은 게 분명했다.

"너 따위 용병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맥스월의 일갈에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조세핀이 있는 방향을 살폈다.

'미하일과 바론이랬나?'

기사들을 이끄는 귀족.

그들의 눈동자 역시 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최면이나 마법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주체인 조세핀을 처리하면 풀릴 것이다.

'최악은 면했네.'

루이는 이들 누구도 믿지 않았다. 루이가 상정한 최악은 시저마저 배신했을 경우였다.

그렇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이제 구분이 끝난 것 같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루이의 신형이 사라졌다.

"...막아!"

맥스월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그러나 맥스월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이미 기사 둘의 목이 허공에 떠오른 뒤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루이는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적이 될지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파지직.

섬광이 번뜩이고 맥스월의 머리 역시 허공에 떠올랐다.

모두가 놀라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툭.

맥스월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척! 척!

기사들이 검을 뽑아 루이를 겨눴다.

"...에게, 겨우 일곱 시간?"

기사들 사이에서 루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평민 수준. 그조차도 세례를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평민 이하였다.

직위와 시간은 관계가 없었다.

루이는 바닥에 떨어진 맥스월의 머리를 가볍게 찼다.

데구루루, 피를 뿌리며 굴러가는 머리.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시작하자고. 언제까지 떠들고만 있을 거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보고 있자니 허기가 졌다.

사나운 맹수가 적들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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