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 * *

적들의 위협은 거셌다.

돌만으로 부족했는지 직접 앞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루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주먹을 피하고 검을 휘두른다.

"우끼끼!"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녀석을 본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얕았어.'

그러나 한 녀석을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루이는 몸을 비틀어 옆을 향해 비도를 던졌다.

퍽!

어느새 다가온 녀석의 머리에 비도가 꽂혔다.

루이는 쓰러지는 녀석을 걷어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날아오는 주먹.

짧게 혀를 찬 루이는 검을 들어 올려 주먹을 막았다.

쾅!

"큭!"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속이 진탕되었다. 라움의 가호가 있음에도 녀석들의 괴력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멈추는 순간 녀석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난 먹는 쪽이지 먹히는 쪽이 아니야.'

파직, 파지직.

루이의 몸에서 에테르가 피어올랐다.

녀석들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녀석들도 이 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루이의 검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이번에는 전과 다른 힘과 속도를 싣고서.

콰강!

한 녀석의 상반신이 날아갔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베고 또 벤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른다. 피 냄새가 마약처럼 루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적의 공세가 약해졌다.

의식이 돌아온 루이는 주변을 살폈다.

'벗어난 건가?'

주변에 녀석들이 남아있었으나 전만큼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남은 녀석들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루이는 자신에게 남은 에테르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간당간당한 수준.

그러나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다.

[533:10:41]

이번 전투로 10일 이상을 벌었다.

이 정도면 강림을 써도 될 만큼의 시간은 충분했다.

'별로 쓰고 싶진 않지만.'

그때의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루이님!"

옆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년.

살아있던 건가? 소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찢어져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루이는 자신의 꼴도 소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움도 잠깐, 다급해 보이는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루이는 급히 몸을 굴렸다.

그리고 루이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뀌에에에에엑!"

쿵! 쿵!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지진이 일어났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는 날뛰던 원숭이들을 짓밟더니 얼굴을 파묻었다.

"무슨···."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그림자의 정체가 거대한 멧돼지라는 깨달았다.

집채만 한 멧돼지.

루이보다 거대한 머리는 쓰러진 원숭이들를 우걱우걱 집어삼키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돌을 던지건 주먹으로 내리치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원숭이들을 먹어치울 뿐이었다.

'저건 또 뭐야.'

곧 주변에는 뼈를 씹는 소리만이 울렸다. 원숭이들도 자신들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자 동족을 버리고 도망쳤다.

상처 입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들만이 의미도 없는 반항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쓰러진 원숭이들을 먹어치운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

녀석의 눈을 마주한 루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아직 굶주려 있었다. 루이를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원숭이들을 짓밟던 모습을 떠올리면 도망치는 건 힘들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었다.

싸워야 했다.

'...잡을 수 있을까?'

강림을 쓴다고 해도 저걸 쓰러트릴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의심하는 순간 칼은 무뎌진다.

잡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잡아야 한다.

파지직.

남은 에테르를 끌어모았다.

녀석은 뒷발로 땅을 긁어내더니 입김을 뱉었다.

그리고는 화살처럼 쏘아졌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속도였다.

루이는 욕을 삼키고 검을 올렸다.

그때.

"애송이, 머리 숙여라."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순간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

그냥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을 감싸고 있는 푸른 빛은 루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화살은 멧돼지의 머리에 적중했다. 달려오던 녀석의 몸이 주춤한다. 그러나 화살 하나로 녀석을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진짜 공격은 따로 있었다.

루이 옆으로 바람이 들이닥쳤다.

거한.

윗옷을 벗은 거한이 멧돼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에 있는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런 거한을 따라서 희미한 연기가 올라왔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멧돼지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멧돼지는 눈앞에 보이는 하찮은 생물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후에 일어난 일은 놀라운 것이었다.

거한은 멧돼지의 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가강!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멧돼지의 육중한 상체가 위로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쿵!

상체가 땅에 처박히면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루이는 방금 본 광경에 침음성을 흘렸다.

'피곤해서 환상이라도 보이는 건가.'

맨주먹이었다.

에테르도 두르지 않은 맨주먹. 멧돼지는 기절이라도 했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멧돼지를 확인한 거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루이는 그제야 근육 사이로 새겨진 흉터들을 보았다.

수많은 흉터가 갑옷처럼 몸을 뒤덮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한의 정체는 노인이었다.

담배를 문 노인은 루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요즘 숲이 시끄럽던 건 네 녀석 짓이냐?"

담배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루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뒤에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멧돼지가 깨어나는 것이었다.

노인은 혀를 차고 몸을 돌렸다.

"페닐."

노인의 말에 화답하듯 화살이 날아왔다.

루이가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화살을 감싸고 있는 건 에테르였다.

기사들이 활을 경시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몸에 닿는 것만 에테르를 담을 수 있었다. 몸에서 떨어진 순간 에테르는 사라진다.

게다가 눈앞의 노인은 에테르도 없이 괴력을 선보였다.

루이가 가진 상식이 눈앞에서 무너졌다.

"어떻게···."

루이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노인이 피식 웃었다.

"네 녀석이 못한다고 해서 다른 녀석들까지 그렇다는 건 오만이지."

맞는 말이었다. 당장 루이만 해도 에테르를 쓰면서 신성력을 다뤘다.

루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자 노인은 의외란 듯이 루이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깨어 있는 녀석이군.'

기사답지 않았다. 곧 노인의 시선이 멧돼지에게 향했다.

화살은 아까보다 깊게 들어갔다.

그러나 녀석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노인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작해."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밧줄이 날아왔다.

날아온 밧줄이 멧돼지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멧돼지는 발버둥 쳤지만, 밧줄은 더욱 조여올 뿐이었다.

"안쪽에 있는 성질 더러운 녀석의 힘줄로 만든 밧줄이니 끊기 힘들 거다."

쿵!

결국에는 멧돼지는 밧줄에 묶인 채 땅바닥을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멧돼지 위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기도 복장도 제각각이었다.

"가죽은 상하지 않게 해."

"예."

노인은 담배를 버리더니 발로 지져서 불을 껐다.

그리고는 루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고맙군. 워낙 신출귀몰한 녀석이라 찾기 힘들었는데 덕분에 쉽게 잡았어."

루이는 노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노인이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사냥 나왔다가 루이를 발견하고 미끼로 쓴 것이었다. 물론 원숭이들의 영역에서부터 지켜본 건 아니었다. 루이가 멧돼지에 영역에 왔기에 이들의 눈에도 든 것이었다.

루이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이들이란 걸 깨달았다.

마수 사냥꾼.

보통이라면 이런 말을 들으면 분노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아니었다. 루이는 노인의 말에 미소지었다.

"...고맙다면 식사 정도는 내줄 수 있겠군요."

"음?"

노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노인이 돌아봤을 때 루이는 이미 기절한 후였다.

진작에 한계를 넘었다. 싸움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의식도 날아간 것이었다. 노인은 그런 루이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노인도 루이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자신이 먼저 고맙다고 했으니 은을 입은 건 맞았다.

노인이 루이를 살피는 사이 소년이 루이의 앞을 막아섰다.

루이가 기절한 걸 알아채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단순한 짐꾼이 아니었나?"

노인은 자신에게 향한 단검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소년 역시 한계에 부딪힌 게 보였다. 그런데도 노인의 앞에 선 것이었다.

노인은 루이의 싸움을 지켜봤다.

그때의 루이는 소년을 잊은 것처럼 싸웠다. 일행이라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루이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 역시 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깊은 사이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 소년의 행동을 보면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곧 소년의 뒤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활을 차고 있는 사내.

"...!"

소년이 놀라서 뒤돌아보려고 했으나 사내의 행동이 빨랐다.

툭.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소년.

"어찌할까요?"

페닐이라 불린 사내는 노인을 보며 물었다.

"그래, 도움은 도움이니 일단 챙겨라."

"예."

페닐이 소년을 어깨에 짊어지고 루이를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보면서 노인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기사 같지 않은 기사 놈이랑 짐꾼 같지 않은 짐꾼이라.'

재미있군. 노인은 불을 붙이며 미소지었다.

#

# 14 - 3773751

#

상식적으로.

잠에서 깬 루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아침까지 술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머리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이 아팠다.

"...아니, 두드려 맞은 건 맞나?"

전투를 떠올리면 오히려 멀쩡한 게 이상했다.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낡은 천막. 지금 상황과 맞물려 그리운 향수까지 불러일으켰다.

천막을 열고 나가자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두막과 천막들이 늘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모닥불과 램프들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하나의 마을.

루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숲을 나왔나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마을 너머로는 여전히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밤낮이 없기에 시간조차 알 수 없었지만, 루이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491:13:22]

시야 한 편에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이틀 정도인가.'

마지막에 보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얼추 계산이 나왔다.

루이는 입맛을 다셨다.

멧돼지.

마지막 봤던 장면을 떠올렸더니 그 녀석이 생각났다.

그 녀석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다. 욕심을 부려봤자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뿐이었다.

'그래, 가늘고 길게 살자. 길게.'

아직 새로운 삶을 즐기지도 못했다. 욕심이 자신의 목을 조이는 모습을 많이 봤다.

"일어났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주름. 이마에 난 흉터와 담배.

루이가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노인이었다.

'굉장하군.'

루이는 노인의 몸에 감탄했다. 온몸을 가득 메운 흉터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노인의 몸은 잘 깎은 조각 같았다. 루이도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그 경지를 넘어섰다.

"따라와라. 밥을 대접해주지."

노인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 나서는 몸을 돌렸다.

루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루이는 쓴웃음과 함께 노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이 향한 곳은 마을 외곽에 있는 공터였다.

유난히 거대한 모닥불이 놓여 있었고 모닥불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는 고기가 익고 있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고기.

"저건···."

"아, 그 녀석이지."

노인은 고개를 주억였다. 굳이 노인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것도 일부야. 이틀을 먹어도 다 먹지 못했지. 음, 왜 그러지?"

"...아닙니다."

애써 잊으려고 했더니 눈앞에 나타났다.

루이는 쓰린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고기를 보니 아쉬움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그런 루이를 오해했는지 노인은 수염을 긁적였다.

"걱정하지 마라. 이 숲에서는 마수의 고기가 잘 상하지 않아. 며칠 정도는 놔둬도 문제없다. 대신, 밖에서 가져온 녀석들은 빨리 상하지."

노인의 말에 루이는 상해서 버렸던 말린 버섯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빨리 상해서 의아해했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노인이 모닥불을 향해 다가가자 앉아 있던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 마을의 중심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루이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한쪽에서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쟨···."

마수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그런 루이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독초로 중화시켰지."

독초? 루이 눈동자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노인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소한 부작용은 있겠지만 죽지는 않아. 이곳에 살려면 필요한 일이지."

그 부작용의 의미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고기를 집어 먹던 소년이 일어나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우에에엑."

작은 소리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얼마 뒤, 파랗게 질린 소년이 돌아왔다.

소년 옆에 있던 사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기를 건넸고 소년은 그걸 받아서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번 하다 보면 내성이 생겨서 괜찮아질 거야. 그래도 싹수가 보여. 다 큰 녀석들도 첫날은 두 번 이상 먹기 힘들거든."

그런데 소년은 벌써 몇 시간 동안 저 짓을 반복했다고 한다.

노인이 말하면서 루이에게 고기를 건넸다.

루이에게 저러한 과정은 필요 없었다. 에테르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 싸웠던 전갈의 독처럼 독성이 강한 건 어려워도 마수의 육체에 쌓인 독성 정도는 자체적으로 소화 시킬 수 있었다.

루이는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고기의 맛은 생각과 달랐다.

"밖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쁘진 않지?"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오기 전에 들렸던 여관의 식사보다 나았다. 루이의 반응에 노인은 피식 웃었다.

"마수 중에서도 뿔돼지 녀석은 특별하거든."

뿔돼지. 루이가 봤던 멧돼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높게 솟은 어금니와 이마의 뿔을 생각하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거면 대접은 충분한 거 같고 이야기를 들어볼까?"

노인이 턱을 괴었다. 노인의 시선에 루이는 먹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검로를 보면 정통 검파에서 기초를 다진 것 같은데 움직임은 용병에 가까워. 그렇다고 재물을 밝히는 것 같지도 않고···."

소년이 가지고 있던 배낭. 그 안에 든 물건의 값어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돈을 밝힌다면 이곳에 오지 않고 대도시로 가서 검들을 파는 게 나았다.

"아무리 봐도 이런 곳까지 굴러들어올 인간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일로 왔지?"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 그러나 루이는 그 안에 담긴 광포함을 느꼈다. 이글거리는 화산과도 같은 기세가 루이에게 쏘아졌다. 루이는 노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과장도 거짓도 더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했다.

루이의 말에 노인의 눈이 커지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우문현답이로구나! 당연히 마수의 숲에 마수를 잡으러 왔겠지."

루이를 압박하고 있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노인은 느릿느릿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는 죄를 짓고 도망친 놈들도,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온 놈들도, 그저 한탕 벌기 위해 몸을 던진 놈도 있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지. 마수를 사냥하는 것."

노인의 시선이 다시 루이에게 향했다.

노인에게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루이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오로지 그뿐이지."

루이는 깨달았다. 아까 자신을 압박했던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무엇을 확인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자신이 노인의 시험에 통과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네 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밖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수의 숲에서는 네 녀석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뒈지기 싫으면 떠나는 게 나을 거다."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경고, 어쩌면 조언이기도 했다.

이 말을 해주기 위해 루이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런 노인의 뒤로 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 겁니다."

"음?"

떠나려던 노인이 다시 몸을 돌렸다. 노인을 향한 루이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 살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루이의 말에 담긴 의지를 노인이 못 느꼈을 리는 없었다.

그건 자신에게 향한 각오이기도 했다.

루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남들은 죽지 못해서 오는 곳을 살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이냐?"

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은 얼굴이 그의 대답을 대신하였다.

노인은 실소를 흘렸다.

"멋대로 하여라. 자살하든 도망치든 네 녀석의 선택이니. 아직 몸이 낫지 않았을 테니 쉬다가 떠나거라."

이 마을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루이의 말에 노인이 팔짱을 꼈다.

"숲에 있는 동안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머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숲을 살아가려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루이의 말에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마을이 아니다. 원한다고 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니지."

맞다. 마을이라기도 보다 군대 야영지에 가까웠다.

"이곳에 머물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말하지만 밖에서 쓰는 것들은 이곳에서 쓸모가 없어. 네 녀석은 뭘 줄 수 있지?"

"전리품."

"음?"

노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용병들이 말하는 전리품은 일반적인 의미와 달랐다. 루이는 좀 더 확실한 의미를 담아 입을 열었다.

"제가 앞으로 사냥할 마수들을 넘기겠습니다."

루이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냥하고 얻은 보상을 모두 주겠다는 소리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사냥꾼들조차 놀란 눈으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마을에 머물고자 했으나 루이처럼 말한 이는 없었다.

노인의 눈에 흥미가 떠올랐다.

'사냥꾼도, 용병도 아니지.'

그렇다고 기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수확하고 용병은 대가를 위해, 기사는 명예와 충심을 위해 싸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루이의 발언은 그 어느 것에도 들지 않았다.

"너, 이름은?"

"루이입니다."

루이의 대답에 노인은 실소를 흘렸다.

성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벌이가 시원찮으면 쫓겨날 것이다."

승낙이었다. 노인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검을 놓는 순간 자신의 생명도 사라질 것이다.

루이의 눈빛을 읽은 노인은 시선을 돌렸다.

"데이빗."

"예, 대장."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식구다. 이곳의 규율을 가르쳐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데이빗이라 불린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 * *

규율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마을 안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지켜야 할 건 하나야. 길포드 대장. 그의 뜻이 모든 것이지."

데이빗은 마을을 안내하면서 담담히 고했다.

데이빗의 말에 노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길포드.

"나머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돼. 상식적으로."

데이빗은 그리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 말에 루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포괄적이네요."

상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었다. 루이의 대꾸에 데이빗이 웃었다.

"이게 의외로 그렇지가 않더라고. 한두 번 맞다 보면 아, 내가 이 짓을 하면 맞겠구나. 하는 느낌이 와."

"..."

그런 걸 상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물론 맞아도 모르는 녀석들도 있었지."

데이빗은 그리 말하고는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녀석들은 지금쯤 마수에게 먹히는 게 차라리 좋았을 걸, 이라고 후회할 거야."

어디에서 후회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하기 쉬웠다. 다른 무엇보다 무서운 경고였다.

"마을에 대해서는 대충 설명이 끝났으니 다른 걸 알려주지."

데이빗의 걸음이 멈췄다. 뒤따라가던 루이 역시 걸음을 멈췄다.

데이빗은 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숲에 대해서."

데이빗의 말에 루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루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

# 15 - 3775699

#

싸움을 더럽게 못 하는구나.

데이빗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동물의 가죽. 자세히 보면 가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숲의 지도였다.

"이곳이 우리가 있는 곳이야."

데이빗은 숲 한쪽을 가리켰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부분.

"숲 안쪽으로 갈수록 강한 마수가 자리 잡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데이빗의 물음에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테슈아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오,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네. 가끔 숲에 대해 조사도 안 하고 무작정 들어오는 녀석들도 있어서."

마음 한쪽이 찔렸으나 태연스럽게 넘겼다.

"강한 마수란 건 꼭 하나의 개체가 아니야. 너도 겪어봤으니 알겠지?"

데이빗의 말에 루이는 원숭이들을 떠올렸다.

"그래, 강철 원숭이. 그렇지만 이놈들과 비교하면 녀석들은 귀여운 수준이야."

데이빗은 그리 말하며 지도를 가리켰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부분.

숲 중심을 감싸고 있는 선처럼 보였다.

"개미굴."

데이빗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안으로는 들어가지 마. 정확히는 이놈들이 기준점이야."

데이빗의 손이 선 안쪽을 두드렸다.

"개미들보다 강한 포식자들과."

그리고는 바깥쪽을 가리켰다.

"그렇지 못한 녀석들. 그전에도 안으로 넘어간 녀석들은 많았지만 한 사람을 제외하면 살아남은 이는 없어."

한 사람? 루이의 물음에 데이빗은 고개를 주억였다.

"길포드 대장."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미굴이 한계점이었다.

곧 데이빗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뭐, 밖에 있는 녀석 중에도 주의할만한 녀석들이 몇 있는데 그건 차근차근 알아가도 돼."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루이를 본 데이빗이 웃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네. 오래 살 수 있겠어. 맞다.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네."

데이빗이 손뼉을 쳤다.

"숲 안에 있는 마을은 이곳만이 아니야. 두 개가 더 있어."

이번에는 좀 놀랐다. 지금 마을도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두 개나 더 있는 건가?

루이의 생각을 읽었는지 데이빗은 고개를 주억였다.

"마수의 시체는 돈이 되거든."

기사들의 무구를 만들 때도, 마법사의 연구용으로도. 심지어 괴식가들에게도 인기였다.

"다른 나라는 규제가 심해. 이곳 같은데는 드물어."

루이의 데이빗의 말을 이해했다. 이 나라는 마수의 땅을 버려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에서도 흘러들어온다는 뜻이었다.

"한 마디로 경쟁자이지. 그리고 이곳에서 경쟁자란 마수보다 위험한 존재야."

데이빗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역시 마수를 잡는 사냥꾼이었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올라왔다.

"만나면 그쪽이 먼저 손을 쓰기 전에 죽여. 그게 힘들다면 도망치고."

대화는 생각하지도 말라.

루이의 데이빗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루이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데이빗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지도를 털어냈다.

"아아, 그리고 사냥할 때는 되도록 팀으로 움직이는 걸 추천해. 그래야 시체라도 묻어주지. 마수의 먹이로 전락하는 것보단 낫잖아?"

데이빗은 루이를 보며 웃었다. 나름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듣는 이로서는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마수의 숲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