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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한부 기사가 되었다_금의행 1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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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375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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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기회.

푹, 푹, 푹.

살을 파고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확인 사살.

사내의 동료들은 그런 사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제 할 일을 했다.

시체를 뒤지는 일.

남들이 욕할지 모르지만, 이는 용병의 정당한 권리였다.

전리품.

그런 동료들조차 사내와 같은 일을 하는 이는 없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사내는 금품 따위를 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영혼수확자라는 이명이 붙었다.

"...이 짓을 왜 하냐고?"

루이라 불리는 사내는 시체의 목을 찌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던 민혁이 루이스 크로이드가 된 지도 십 년이 흘렀다.

십 년이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전에 있던 세상에 대한 지식은 남아있지만 정작, 민혁의 기억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지금은 지식 덕분에 환생했다는 자각만 남았을 뿐이었다.

루이도 한때 모험을 꿈꾼 적이 있었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922:22:06]

루이의 시야 한쪽에는 숫자가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숫자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루이뿐이었다.

숫자는 지금도 쉴 새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922:22:01]

[922:22:00]

*

[922:21:59]

시간. 바로 루이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루이가 전쟁터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날짜로 환산하면 33일. 고작해야 한 달하고도 조금이었다.

푹.

"큭."

검을 찌르자 쓰러진 이의 몸이 떨려왔다.

살아있던 것이었다.

[931:01:44]

동시에 떨어졌던 숫자가 다시 올랐다. 아홉 시간 남짓.

그러나 일반 병사치고는 많은 숫자였다.

그렇다. 이 숫자는 생명을 흡수하고 있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살아있는 거라면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아니, 먹고 있는 건 나지.'

어찌 되었든 이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삶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또 한 번의 기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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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375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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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이들이 있습니다.

숙소 앞 공터에 모인 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축제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죽은 이들 중에는 친한 이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용병 일을 하면서 동료가 죽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에 무덤덤해진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이 아니라 북부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테른 용병단이었다.

용병 중에는 베테랑이란 뜻이었다.

루이 역시 그런 용병 중 하나였다.

"...부족해."

"뭐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루이의 말에 옆에 있던 용병이 되물었다.

게일.

용병단 내에서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게일 이외에는 루이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루이는 게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마 루이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게일마저도 루이를 꺼리게 되었을 거다.

게일은 그런 루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다른 용병들 틈에 끼어들어서 술잔을 나눴다.

그렇게 게일이 떠나가자 루이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전투가, 죽음이 부족해.'

루이가 살인에 미쳐서 그러한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곧 겨울이 온다. 북부의 겨울은 혹독했다.

당연히 전쟁도 없었다.

겨울을 버틸 시간.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던 루이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탐탁지 않았다.

'이게 다 그 노친네 때문이야.'

테른. 용병단의 단주였다.

나무꾼 테른. 거대한 도끼로 사람을 장작 패듯이 죽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건 옛말이었다.

지금은 늙은 호랑이에 불과했다.

용병이 몸을 사리는 순간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었다.

'작년에 동부로 떠났어야 했어.'

작년 이맘때는 테른 용병단도 동부로 향하고 있었다.

용병단의 이름은 북부에서나 먹히지 동부에서는 촌놈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쟁 자체가 안 되었다. 당연히 손해만 본 테른 용병단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완전 나가리인데.'

겨울 동안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낼 생각이었다.

휴식기.

대다수의 용병은 반길지 모르겠지만, 루이는 그럴 수 없었다.

죽음이 턱 끝까지 치고 들어왔다.

루이는 입안에 든 육포를 이빨로 끊어냈다.

씁쓸한 맛이 입안 가득 올라왔다.

'하긴, 너무 오래 있었지.'

테른 용병단에 속하고 삼 년.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

끼이익.

그때, 낡은 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저분한 수염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질 몸. 등에는 어린아이 몸통만 한 도끼가 매어져 있었다.

테른이었다. 그 뒤로 호위대가 뒤따랐다.

무려 일곱.

용병 주제에 무슨 호위대냐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용병단은 하나의 군벌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원래부터 저만큼을 데리고 다녔던 건 아니었다.

작년 동부에 다녀온 이후 숫자를 늘렸다.

'동부의 용병단을 따라 하는 건지. 아니면 늙어서 겁이 많아진 건지.'

둘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테른이 나타나자 용병들이 고개를 숙였다.

동부에서는 촌놈 취급받는다지만, 북부에서는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루이 역시 테른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테른은 그런 루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가 호의가 아니란 걸 이 자리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곧 테른은 루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다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루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테른이 합류하고 공터가 소란스러워지자 루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나서 숙소로 향했다.

게일만 그런 루이에게 잠시 시선을 보냈을 뿐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테른은 처음부터 루이를 탐탁지 않아 했다.

아니, 테른뿐만이 아니었다.

용병 대부분은 루이를 싫어한다.

이유는 하나였다.

루이의 출신.

루이가 그들이 가지지 못한 걸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루이의 능력은 쓸모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병단에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이 변했다.

루이가 점점 명성을 쌓자 테른의 질시는 더욱 노골적이게 변했다.

루이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딴 조그마한 용병단 따위 누가 탐낸다고.'

루이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이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받아드리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어째 사방이 적이구먼."

적의는 익숙했다.

어딜 가도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용병이든, 아니면 그의 가문이든.

그렇기에 칠 년 전에도 가문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도 그가 있을 곳은 없었다.

이 세계가 그의 세계가 아니어서일까?

"별 상관은 없지만."

루이는 언제나처럼 검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루이를 깨운 건 북소리였다.

루이는 익숙하게 검을 들고 나섰다. 다른 용병들도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아침부터···."

용병들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 막 전투가 끝났다.

다음 전투는 이삼일 후라고 생각하고 밤늦게까지 마신 것이었다.

그리고 루이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제 여력이 없을 텐데?'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기껏해야 한 번, 많아야 두 번의 전투면 영지전이 끝난다.

그런 상황에서 이 같은 기습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마지막 발악인가?'

멀리 연기가 피어오는 게 보였다.

용병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가까웠다.

본진이 있는 곳. 기습이라면 적절했다. 오랜 전투로 경계가 약해졌다.

게다가 기사들은 다른 곳에 머문 상태.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주변을 살피던 도중 뒤늦게 나오던 테른을 발견했다.

호위에 둘러싸인 테른은 느긋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이는 혀를 차고는 연기가 올라오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 * *

루이는 달려드는 적병을 베어냈다.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베고 찌르고 또 벤다.

루이의 행동은 짧고 간결했다.

사람을 베어 넘기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 전장이었다.

전쟁터에서 보낸 시간은 루이의 인간성을 깎아내기 충분했다.

루이에게 있어서 적들은 자신의 생을 연장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루이는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과 달리 상황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루이는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가 없어.'

침입자들 사이에는 기사들이 없었다.

심지어 병사들 역시 제대로 된 무장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급히 불려온 이들.

벌써 몇 번이나 싸운 이들이었으나 정도가 심했다.

루이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던지기군.'

기사들과 달리 이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

기습이 성공하면 좋은 것이었고 설령 실패해도 손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영주가 이들을 끌고 올 때는 재물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으면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이 말은 상대 영주 역시 전쟁이 끝났다는 걸 이해했다는 소리였다.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이는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전쟁이란 광기에 집어 삼켜져서 앞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와 분노. 열기 때문에 제대로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꼬드기는 일은 쉬웠다.

필시 재물이나 지위라도 약속했겠지.

불쌍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루이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주는 건 잘 받아먹어야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루이의 검이 사납게 번뜩였다.

배고픈 이리는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움직였다.

* * *

기습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제압되었다.

싱거운 전투였다. 테른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영주에게 불려 갔다.

"...부르셨습니까?"

"오오! 오늘도 고생했네."

영주는 그러한 테른을 반갑게 맞이했다.

튀어나온 배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 영주를 보며 테른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

그저 가진 피 덕분에 저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내색할 수 없었다. 저런 놈이라고 해도 영주는 영주였다.

옆에 기사 둘이 날카로운 눈으로 테른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베오르 놈들에게 서한이 도착했네."

베오르라면 지금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 적이었다.

테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던 것이었다.

"그럼 계약을···?"

해지하겠냐는 물음에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불렀네. 이놈들이 거래를 제안했어. 항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투를 하자고 했네."

테른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의 말을 이해했다.

"쓸모없는 지출을 줄이자는 이야기군요."

"역시 이야기가 잘 통하군."

영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이번 기습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었다.

'많이도 끌어모았군.'

테른은 혀를 찼다. 귀족들이 전쟁을 어찌 생각하는지 잘 알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이들에겐 그저 놀이에 불과했다. 영지민은 가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처리 방식은 귀족들이 자주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테른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명령만 하면 되었다.

영주는 그런 테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말을 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네."

"그러면···?"

"이번 전투로 베오르의 기사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진 모양이야."

"..."

"떨어진 사기를 높여주고 싶어 하더군."

테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주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의 분노를 잠재울 제물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테른 용병단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이는 자신을, 테른 용병단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테른의 분노를 깨달았는지 기사들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영주는 그런 기사들을 제지했다.

"언제까지 떠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이번 일로 자네들을 높이 사서 계약을 맺으려 하네. 안 그래도 병사들이 많이 죽어서 보충을 해야 하네. 자네들 정도라면 믿을 수 있겠지."

단기 계약이 아니라 정식으로 영지에서 계약을 맺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네의 자식까지 용병 짓을 하게 할 순 없지 않은가?"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었다.

테른의 눈빛에 힘이 빠졌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제 어렵겠지만 자식은 기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지."

이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귀족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다.

기사 역시 어릴 적에 정해지지만 선택받을 수 있었다.

테른이 고민에 빠지자 영주가 말을 보탰다.

"전부를 희생하라는 게 아니네. 그렇다면 영지는 누가 지키겠는가? 조금만 보내면 되네."

영주의 말에 테른의 눈빛이 변했다.

"...그렇다면 싱싱한 녀석들로 보내야겠군요."

허락이었다. 테른의 말에 영주는 방긋 웃었다.

"그렇지. 기사들도 베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테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이들이 있습니다."

테른의 머릿속에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눈엣가시 같은 녀석. 그 녀석을 비롯해 평소 자신에게 불만이 있던 이들을 떠올렸다. 이번 일로 같이 치워버릴 수 있다면 테른에게도 이득이었다.

"역시 화통한 친구야! 내 자네를 잘 봤군."

영주는 웃으며 테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이는 테른이 더 많았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이제 테른은 영주의 부하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테른 역시 묵묵히 고개를 숙여 새로운 주인에게 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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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375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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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쎄한데?

전투가 수습되고 하루가 지났을 때 테른이 루이를 불렀다.

"...뭡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에 뒤에 있던 호위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테른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되었네."

테른은 태연스러운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웃으며 지낼 사이는 아니지."

용병단장이 일개 용병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테른이나 루이나 개의치 않아 했다.

"내가 네 녀석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건 잘 알 거다."

이어지는 말에 루이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알아서 나가라는 건가?'

루이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테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 녀석의 실력은 쓸모가 많지."

루이가 들어오고 테른 용병단의 명성은 더욱 커졌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너를 일개 용병 단원으로 놔둘 수도 없어."

루이의 명성은 너무 커졌다.

루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테른의 말을 되새겼다.

테른이 어떠한 의도로 말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테른은 그런 루이를 보다가 말을 돌렸다.

"어젯밤 영주가 나를 찾았다. 영주는 이번 일을 갚아주기를 원하더군."

테른은 지저분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에 루이는 속으로 혀를 찼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테른의 이런 대화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테른을 무식한 싸움꾼이라고 생각하지만, 루이는 아니었다.

자신을 곰이라고 속이는 여우였다.

"기습입니까?"

"당한 건 갚아줘야 한다더군."

이미 승패가 기운 전투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자존심을 떠올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인의 시각이라면 쓸데없는 전투는 피하기 마련이었으나 이들에게 그런 감각은 없었다.

애당초 전쟁이 난다고 해서 귀족이 다치는 일은 없다.

귀족의 신변은 서로가 보장해주고 있었다.

암묵적인 룰.

손해 보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재산. 그러니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둘로 나누기로 했다. 본대는 기사들과 함께 적들을 유인할 것이야. 실제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남은 이들이···."

"적의 야영장을 급습하려는 계획이군요."

루이가 테른의 말을 끊었다. 테른은 자신의 말이 끊겼음에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가 좋군."

전쟁은 머리가 나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루이처럼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용병도 드물었다.

사실상 본대가 움직이면 적들도 움직이게 되었다.

야영장이라고 해도 식량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빈집털이네.'

루이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야말로 분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여튼 귀족 놈들은···.'

취향이 고약했다.

"대신 야영장에서 나온 물건은 마음대로 하라더군."

테른의 말에도 루이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본래 값비싼 물건은 몸에 지니기 마련이었다.

야영장에 남아있는 물건이라면 들고 다닐 수 없는 물건이 대부분일 것이다.

가지고 오는 것도 일이었다.

게다가 루이에게 중요한 건 재물이 아니었다.

재물을 탐했다면 용병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루이가 거절하려고 했으나 테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하면 부대장 자리를 주지."

테른 용병단에는 네 명의 부대장이 있었다.

각기 삼십에서 오십 명의 용병을 통솔하는 자리.

당연히 그 위치가 낮지 않다. 테른 다음가는 권력이었다.

"독립적으로 의뢰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도 주마."

"...!"

놀라운 일이었다. 호위들이 테른을 되돌아봤을 정도였다.

그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어차피 네 녀석도 내 밑에서 움직이는 게 마음에 안 들겠지. 네 녀석이 명예나 재물을 탐했다면 진작에 다른 곳에 갔을 거야. 네 녀석이 필요한 건 테른 용병단이 쌓아 올린 이름이겠지."

용병이 된다고 바로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신용.

작은 일부터 신뢰를 쌓아가야 했다. 테른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다.

루이가 원하는 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용병단이었다.

테른의 제안은 루이의 목적과 부합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제가 해낸 의뢰들 역시 테른 용병단의 이름으로 올라가겠군요."

테른은 부정하지 않았다. 테른 용병단 소속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영지전에 참여할 수도 없었을 거다.

루이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홀로 전장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네 녀석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이미 다른 대장들과도 이야기가 끝났다."

테른 용병단 소속 용병들은 베터랑이었다. 어중이떠중이와 달랐다.

그런 이들을 루이의 부하로 주겠다는 소리였다.

테른으로서도 눈에 거슬리는 루이를 치워버리고 루이의 능력을 자신의 명성으로 쌓을 수 있었다.

루이 역시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다른 용병단으로 옮길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루이의 대답에 테른은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루이 대장."

테른과 악수하고 나온 루이는 혀를 찼다.

"...뭔가 느낌이 쎄한데?"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그렇지만 거절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루이는 그렇게 숙소로 향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부대에서 용병들이 차출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장."

새롭게 합류된 용병들은 루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루이는 용병들을 살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 자리에 온 용병 대부분이 신입이거나 부대에서 문제가 있던 용병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도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루이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드물게 홀가분해 보이는 이들도 보였는데 부대장들과 마찰이 있던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게일의 얼굴도 보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성격을 떠나서 실력은 진짜였다.

신입이라고 해도 다들 작은 용병단에서 굴러먹다 온 이들이었다.

루이는 그렇게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주가 붙여준 병사들도 합류했다.

병사들의 상태를 본 루이는 혀를 찼다.

용병들은 약과였다.

'심각하군.'

지난번 침입자들을 욕할 게 아니었다. 말이 병사지 무기를 든 농민이나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는 농기구를 들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용병들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큰 전투도 없을뿐더러 이번에는 병사들도 약탈도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용병들 눈치는 보겠지만 식량만 챙겨와도 큰 이득이었다.

이런 일에 제대로 된 병사를 투입할 리가 없었다.

'어차피 일회용이야.'

용병들과 달랐다. 당장 임무만 끝나면 볼 일이 없는 이들.

'그렇다고 이대로 데려갈 순 없지.'

이 상태라면 임무를 수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루이는 용병들에게 눈짓했다. 루이의 신호를 알아들은 용병들이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굼벵이들아! 빨랑빨랑 움직여!"

"넌 저쪽! 그쪽 말고 저쪽이라고, 새끼야!"

"넌 무기 어쨌어? 어? 놀러 왔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용병들의 닦달에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굼뜨거나 망설이면 가차 없이 욕설과 폭력이 날아왔다.

시간이 지나자 그럴듯하게 대형을 갖췄다.

전쟁터에서 오래 살아남은 용병들은 쓸만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기사가 없는 영주의 경우 용병들에게 전쟁을 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북소리가 울렸다.

전과 달리 느리고 강하게.

본대가 출진하는 것이었다.

루이의 시선이 용병들에게 향했다.

"출발한다."

"예, 대장!"

용병들의 구호에 맞춰 병사들이 움직였다.

병사들의 눈빛에 공포가 가득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용병들은 이제 적군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 * *

본대는 화려하고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적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였다.

효과는 탁월했다. 덕분에 일행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산을 넘어 적의 야영지 부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수많은 천막.

군데군데 연기는 올라오고 있었으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함.

언덕 위에 올라선 용병들이 당장이라도 달려가려고 했으나 루이가 제지했다.

루이는 앞을 보며 턱짓했다.

정찰.

그러자 용병들도 몸을 숙였다. 쉬운 임무이긴 했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이어지는 루이의 신호에 용병은 병사 하나를 끌고 왔다.

소년병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본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녀석 없어?"

"이놈이 가장 빠르답니다."

소년을 데려온 용병이 말했다. 용병의 시선을 받은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하, 할 수 있습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었다.

루이의 허락에 소년은 언덕길을 내려갔다.

소년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번 일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잠시, 발을 헛디뎌 고꾸라지는 소년을 보며 뒤에서 한숨을 흘러나왔다.

"저 병신새끼가."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행들이 있는 곳을 힐끗거리고는 다시 달려갔다.

루이는 소년이 떠난 자리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해내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다른 이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설령 붙잡혀서 들키더라도 이쪽에서는 적들의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적이 얼마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루이의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루이의 걱정과 달리 소년은 무사히 돌아왔다.

"사, 사람들이 있어요."

하얗게 질린 소년은 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당연했다. 출진했다고 해도 야영장을 관리하는 이는 남겨놓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마, 많진 않아요."

소년의 대답에 용병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떤 기준으로 많지 않다는 것인가. 소년을 닦달하려는 용병들을 제지한 루이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사는?"

"자, 잘 모르겠···. 없던 거 같아요!"

모르겠다고 말하려던 소년은 용병들의 시선에 급히 말을 바꿨다.

"고생했어. 가 봐."

루이가 가라고 손짓하자 소년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제가 다시 다녀올까요?"

용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소년을 추천한 용병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소년은 미끼였다.

'기사가 있었다면 알아챘겠지.'

기사까지 갈 필요도 없이 경계만 세워도 소년에 대해 알아챌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야영장을 정리할 인원만 놔두고 전투에 나선 게 분명했다.

'내 생각이 과했나 보네.'

루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약탈의 시간이 다가왔다.

용병들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 * *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전투가 아니었다. 사냥.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남아있는 이들은 제대로 무기조차 휘두르지 못했다.

"주, 죽어!"

루이는 창날을 들고 달려오는 병사를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창은 녹이 슬고 무뎌져서 제대로 베어 지기나 할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쥐고 있는 손 또한 엉성했다.

"그렇게 쥐면 너 손 나가."

상대를 찌른 순간 자신의 손도 쓸려 내려갈 것이었다.

창날이 엉망인데 창대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다, 닥쳐!"

"사람이 친절하게 알려줘도···."

루이는 창날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후에나 검을 들어 올렸다.

챙!

"큭!"

창날이 튕겨 올라가면서 병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루이의 예상대로 손바닥이 찢어진 것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병사는 곧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온 루이를 보며 굳었다.

"봐, 내 말이 맞지?"

"사, 살려···."

"빌 거면 진작에 빌었어야지."

물론, 빈다고 해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만일 루이가 약했다면 반대의 상황이 되었겠지.

루이의 검이 병사의 머릴 갈랐다.

털씩.

루이는 쓰러진 병사를 뒤로하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아직 검을 집어넣기에는 일렀다.

루이뿐만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장을 살피고 자리를 옮기려던 루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

착각이 아니었다.

작은 진동.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감이 좋은 용병 몇몇도 이를 눈치챘다.

군이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이건 사람이 내는 진동이 아니었다.

말.

역시나 시간이 지나자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용병이 알아챌 정도였다.

"...설마?"

루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장에서 이러한 존재하는 하나뿐이었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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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375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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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들도 똑같은 사람이야.

멈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움직임이었다.

"히이잉!"

콰가강!

말의 울음과 함께 용병 하나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젠장!"

그를 보며 루이는 욕설을 뱉었다.

"벌레 같은 새끼들이 여기 다 모였구먼."

회색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탄 이가 주변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어서 다른 말들도 뒤따랐다.

모두 일 곱기.

기사가 일곱이었다. 그걸 확인한 용병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대로 적 병사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기, 기사님들이야!"

"이제 살았어!"

용병들이 아무리 전투에 전문가라고는 하나 기사들은 격이 달랐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기사들 옆에 있어야 자신들이 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파지직.

기사 하나가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사의 검에 감도는 푸른 전류.

에테르였다.

기사들의 전유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힘. 지구식으로 말하자면 기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기사들은 단순히 말을 타며 검을 잘 다루는 이들이 아니다.

초인.

에테르를 다뤄서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벗어난 괴물들.

그것이 기사였다.

에테르의 휩쓸린 병사들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다른 병사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살과 피를 태우는 냄새가 퍼져갔다.

병사들은 기사들이 자신들을 구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선두에 선 기사가 용병들을 보았다.

다른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지 용병들을 살피던 기사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네가 영혼수확자란 웃기지도 않는 별명을 가진 녀석이구나."

기사는 정확하게 루이를 지목했다.

잘난 기사들이 용병의 이명까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북부에서 잘나간다고 해도 한낱 용병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루이를 알고 있었다.

그를 보며 루이는 모든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배신.

지난번에 적군이 그러했듯 자신들 역시 던져진 것이었다.

기사들의 제물로.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테른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분노와 달리 루이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다행이라면 이 자리에 온 건 기사들뿐이었다.

아니, 기사들로 충분하겠지.

기사는 대답하지 않는 루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맞아? 아니야?"

"..."

"베보면 알겠지."

발로 말의 옆구리를 친다. 그와 함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에테르를 두른 검이 루이를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루이의 몸에 푸른 전류가 일어났다.

"뭣···!"

기사의 검을 피하고 말을 향해 발길질했다.

콰직!

"히잉!"

비명과 함께 말의 몸이 기이하게 꺾였다. 절명한 것이었다.

괴력이란 말로 부족했다. 그야말로 이능.

동시에 말에 올라가 있던 기사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검까지 놓친 기사는 다급히 검을 잡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루이가 검날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째서 용병 따위가···."

"내 이름은 알아도 이건 못 들었나 봐?"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루이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의 몸을 감싸고 있는 건 에테르였다.

기사의 것보다 훨씬 선명한 에테르.

용병도 에테르를 익힐 수 있었다. 용병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마찬가지였다.

에테르 수련법은 암상에서도 거래가 되고 있었다. 중급 이상은 국가나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힘들겠지만, 그 밑으로는 돈만 많다면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기사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계가 뚜렷했다.

세례.

에테르 수련법을 제대로 익히려면 아주 어릴 적에, 에테르를 받아드리는 길이 닫히기 전에 다른 기사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게 없다면 에테르를 다룰 순 있어도 이처럼 발현시킬 순 없다.

세례가 가능한 건 평균적으로 다섯 살 이전까지.

게다가 아무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례를 해줄 수 있는 기사들도 한정되어 있었다.

마스터라 불리는 이들.

그리고 마스터들도 함부로 세례를 해주지 않았다. 자신들 분파의 혈족이나 모시는 귀족의 자제들만 가능하도록 규정을 정했다.

그렇게 숫자를 한정시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오고 있던 것이었다.

당연히 에테르를 발현시켰다는 건 루이의 출신이 귀족이거나 마스터가 있는 분파의 혈족이라는 의미였다.

루이는 기사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다른 기사들 역시 놀란 탓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검을 뽑았다.

그러나 루이는 기사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999:15:33]

눈앞에 보이는 숫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기사라 다르군."

보기만 해도 포만감이 올라왔다.

단번에 30시간 가까이 늘었다. 4, 5시간을 올려주는 병사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루이의 시선이 기사들에게 향했다.

기사들의 등장으로 뒤바뀌었던 흐름이 돌아오고 있었다.

용병들 역시 루이의 존재 덕분에 자신감을 얻었다.

루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직접 대결은 피하고 말부터 노려! 네다섯에서 한 놈씩 노리면 충분해!"

그리고는 기사들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잊지 마. 저놈들도 똑같은 사람이야."

루이가 머리를 걷어찼다. 굴러가는 머리를 보자 용병들의 눈에도 희망이 떠올랐다.

이미 도망치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전의를 일으키는 용병들을 보며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얻은 전리품은 우리 거야.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지."

기사의 물품은 비쌌다.

무장이건 검이건 에테르의 전도율을 높이기 위해서 백금이나 마수의 뼈를 섞어서 만든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기사들이 죽어도 가문으로 돌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영주가 이곳에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자신들의 것이라고 못 밖은 상태였다.

게다가 용병들 역시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지 않았다.

영주와 용병단이 자신들을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영주를 배려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용병단으로 돌아가도 입막음 당할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사가 가진 갑옷 하나라면 건지면 평생 먹고살 돈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사 나리들의 주머니는 얼마나 두둑한지 확인해보자고."

"예, 대장!"

루이의 말에 용병들이 달려들었다.

* * *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용병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같잖은 존재들이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방심하지 말게나."

노기사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찢어져서 움직였다.

한곳에 모여 있는 건 말이라는 이점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따로 움직이는 게 나았다.

기사들이 움직이자 노기사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죽은 기사는 가문의 기사들 중에서도 강자에 속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그런 기사를 단번에 쓰러트렸다.

'영혼수확자라 했던가.'

처음 별명을 들었을 때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별명과 달리 루이의 실력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노기사는 루이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 * *

루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노인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두 번째부터는 경계하는군.'

호기롭게 외쳤던 것과 달리 루이의 심정은 복잡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용병들이 숫자가 많다지만 기사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한 둘 정도는 잡겠지.

그러나 그뿐이었다.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기사뿐이었다.

시간을 끌면 홀로 넷 이상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루이라고 해도 버거운 일이었다.

'가장 좋은 건 저 기사를 쓰러트리고 말을 얻는 거야.'

그리고 도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용병단의 실패를 홀로 뒤집어써야 했다.

운이 좋으면 동부에서 그치겠지만, 심할 경우 왕국 내에서의 용병 일이 막힐지도 몰랐다.

먼저 용병단이 배신했다는 증언을 해줄 이들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유리했다.

'일단 눈앞의 적부터 처리한다.'

천천히 다가오던 노기사가 속도를 높였다.

루이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지는 검!

쾅!

루이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루이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의 속도와 더불어 높이 이점도 있었다.

노기사의 검이 루이를 뒤따랐다.

루이는 뒷걸음치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쏘아지는 빗줄기.

'암기?!'

노기사는 상체를 뒤로 뺐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반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의 목표는 애초부터 노기사가 아니었다.

루이가 날린 비도가 말의 투구에 부딪혔다.

창!

눈앞에 불똥이 튀어 오르자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노기사가 말을 다독이려고 했으나 루이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뛰어올라 노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루이의 공격을 막았지만, 균형을 잃은 노기사는 말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놀란 말은 그대로 뛰어갔다.

루이는 말이 떠난 방향을 머릿속에 넣으며 노기사를 보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노기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남에게 충고할 게 아니었군."

앞서 당하는 걸 보았는데도 똑같이 말을 잃었다. 방심이란 말로 끝날 게 아니었다.

웃으며 한 말과 달리 루이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비도.

기사가 익힐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는 기사에 준하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용병처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용병이지.'

루이는 기사의 명예도 전투의 예의도 없다.

아직 젊은 기사들이라면 루이를 비웃겠지만 노기사는 아니었다. 노기사는 이 싸움이 힘들어질 거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노기사를 향해 루이가 신형을 날렸다.

노기사의 검은 투핸드 소드.

일반적인 양손검과 다르게 마상에 적합하게 날을 늘린 검이었다. 보통이라면 제대로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에테르로 얻은 괴력은 이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대인전에 적합하지 않지.'

노기사와 달리 루이의 검은 바스타드 소드였다.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다양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루이는 노기사의 검을 쳐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침음성을 흘린 노기사는 크로스가드, 검손잡이날로 제지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윽고, 루이의 얼굴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푸르게 번뜩이는 눈동자.

루이의 검 끝이 노기사의 목을 향했다.

"음!"

노기사가 마지막을 직감한 순간.

루이의 검이 멈췄다.

루이는 혀를 차고 뒤로 물러났다.

의아해하는 노기사 앞에 화살이 지나갔다.

"젝슨 경!"

두두두두.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를 본 노기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 * *

루이는 연속해서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벌써 온 건가?'

만일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노기사는 죽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루이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다.

'활을 사용하는 이도 있었군.'

루이는 피로 물든 갑옷을 입은 기사를 보았다.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젊은 기사.

왕국의 기사들은 오로지 검만을 신봉하고 활을 잡기 취급한다. 그러나 젊은 기사의 활 솜씨는 한두 번 연습한 게 아니었다.

노기사만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는데 젊은 기사의 가세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판단은 빨랐다.

젊은 기사가 노기사를 부축하는 사이 루이는 신형을 날렸다.

"엇!"

노기사와 젊은 기사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쉭.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화살!

머릿속으로 그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루이는 쓰러지듯이 바닥을 굴렀다.

그런 루이의 위로 화살 하나가 지나갔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등이 따끔했다.

이어서 튕겨 나가듯이 몸이 쏘아졌다.

뒤에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기사가 말에 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이미 많은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속도를 높인다.

'이쪽에 말이 있을 거야.'

노기사의 말.

무작정 도망친 게 아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말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말에 가까워진 순간.

"쥐새끼 놈! 놓치지 않는다!"

앞쪽에서 검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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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375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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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라.

급히 몸을 틀었으나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큭."

루이의 몸이 튕겨 나갔다. 짧은 순간, 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루이의 몸이 반으로 잘렸을 거다.

'한 명이 더 있던 건가!'

루이를 막아선 건 찌그러진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활을 쏘는 기사와 달리 그에겐 말이 없었다.

한쪽 팔 역시 불편해 보였다. 자세히 살피니 상처 때문에 왼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용병들이 분투가 눈에 그려졌다.

"빌어먹을 잡것들이."

기사는 분노한 눈빛으로 루이를 노려봤다. 그리고 루이의 움직임이 멈춘 사이 뒤따라오던 말도 멈췄다.

젊은 기사.

아마도 노기사 역시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최악이군.'

이대로라면 도망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외팔 기사와 젊은 기사를 경계하며 루이는 뒷걸음쳤다.

그런 루이의 발에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한 감촉.

고개를 숙이자 잘린 팔이 보였다.

"대, 대···. 장"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희미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팔의 주인이 보였다.

"씨팔."

루이는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게일.

사지가 잘린 채 몸만 꿈틀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이형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전쟁에 익숙한 루이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전투로 이런 꼴이 되었을 리는 없었다. 기사에게 분풀이를 당한 것이었다.

"부, 부탁. 해."

게일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루이는 케일의 부탁이 뭔지 알아챘다.

루이가 검을 들어 올리자 케일이 눈을 감았다.

마지막을 기다리는 모습.

푹.

케일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갔다.

영혼수확자. 그 이명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너희 같은 개새끼들도 의리라는 게 있는 거냐? 눈물겹군."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루이가 외팔 기사를 쏘아보았다. 외팔 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루이를 향해 뛰어들려고 하던 외팔 기사를 제지한 건 옆에 있던 젊은 기사였다.

파직, 파지직.

루이의 주변에 푸른 전격이 튀어 오른다. 다가가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렬했다.

에테르. 그를 본 외팔 기사도 이성을 되찾았다.

루이는 둘을 향해 검을 겨눴다.

'아, 기분이 더럽네.'

짜증이 올라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용병들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던 루이였다.

이성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죽는다.

설령 운 좋게 둘을 이기더라도 다른 이들이 올 것이다.

루이 역시 게일과 같은 꼴이 되겠지.

"...진짜 좆같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런 일로 목숨을 버릴 순 없었다.

그래, 도망친다.

도망치겠지만.

'적어도 저 새끼 목은 따고 간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루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긴장하고 있던 둘은 루이를 보며 의아해했다.

'포기한 건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 꾸민다는 게 타당했다.

젊은 기사와 달리 외팔 기사는 루이가 슬픔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라. 곧 그 녀석들 곁으로 보내줄 테니."

그러나 둘의 예상과 달리 루이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1003:20:12]

[축하합니다. 1000T을 달성하여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상점을 열 수 있습니다.]

[500T를 사용하여 상점을 열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글자.

100시간 밑으로 내려갔을 때 떠올랐던 경고 이후로 처음 겪는 변화였다.

'어째서 지금?'

1000T. 1000시간이란 뜻일 거다.

튜토리얼. 루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루이가 되고 나서 칠 년이 흐른 이제야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이전에 천을 넘은 적이 없었나.'

생각해보니 900을 넘은 적은 많아도 네 자릿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

루이의 말에 눈앞에 수많은 글자가 떠올랐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앞을 가득 채운 글자들.

[라플레인의 가호 – 500T]

[파르테우스의 가호 – 500T]

[메르실라의 가호 – 500T]

*

*

*

[소모품 상점 – 10000T]

[장비 상점 – 10000T]

[503:20:09]

그러나 느긋하게 살필 여유는 없었다.

루이를 향해 검이 날아왔다.

젊은 기사였다. 루이가 움직이지 않자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루이는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쾅!

충격이 루이의 몸을 덮쳤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젊은 기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쪽 팔로 휘두르는 검이었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파직.

검이 부딪히면서 전류가 튀어 올랐다.

이어지는 공격!

루이는 연신 뒷걸음쳤다.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흐름을 놓쳤다.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해보자.'

루이의 눈이 빠르게 허공을 훑었다.

알 수 없는 단어들. 그중 익숙한 것들도 있었다.

바로 이 세계의 신들의 이름이었다.

루이가 모르는 이름들 역시 비슷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루이는 뒤에 써진 가격, 대가를 보고 어째서 1000시간에 메시지가 떴는지 알 수 있었다.

상점을 여는데 500, 물건을 사는데 500.

즉, 천이라는 숫자는 이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다.

루이는 글자에서 시선을 뗐다.

답은 이미 정했다. 처음 그 이름을 발견했을 때부터 마음을 정했다.

"라움의 가호."

라움. 전쟁의 신이자 투쟁의 신.

용병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였다.

루이에게 가장 익숙한 신.

"...이 상황에서 신을 찾는 건가? 신앙심이 투철하군."

사정을 모르는 외팔 기사는 루이를 비웃었다. 루이는 그런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고. 해당 제품을 구매하실 경우 사용자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최소한의 시간을 남겨놓길 권장 드립니다.]

[정말로 구매하시겠습니까?]

루이 역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제부터는 믿어 보려고."

기사를 향해 한 말이 아니었다.

루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상이 일변했다.

광활한 초원.

피 냄새와 함께 철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갔다.

전쟁의 냄새.

멀리서는 함성과 함께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쿵, 쿵, 쿵.

북소리에 맞춰서 땅이 진동한다.

그와 함께 루이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그리고.

초원 가운데 그림자가 있었다.

거인의 그림자.

그림자는 몸을 돌려 루이를 바라보았다.

언뜻 머리에 작은 뿔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송곳니였다.

하늘까지 뻗은 송곳니.

그림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이는 한눈에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전쟁의 신 라움.

루이는 라움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용병 중에는 라움 신전의 교리를 품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금발에 녹안, 건장한 체격의 중년 전사. 루이가 알고 있는 라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라움은 그것과 달랐다. 같은 것이라고는 라움이 들고 있는 거대한 검뿐이었다.

그림자는 루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싸워라. 그리고 정복해라.]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루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뭣?"

기사의 경악성이 들렸다.

루이의 몸에 피어오르는 붉은 아지랑이는 에테르와 다른 힘이었다. 붉은 아지랑이는 곧 루이의 몸으로 사라졌지만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

신성력.

사제들이나 성기사들이 쓰는 힘.

그러나 기사가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에테르를 가진 이들은 신성력을 다룰 수 없다.

불변의 진리.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눈앞에서 부정당했다.

"넬 경 조심···!"

젊은 기사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콰강!

루이에게 부딪힌 외팔 기사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떠오르는 기사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03:20:01]

[첫 구매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특전이 주어집니다.]

[특전 – 강림]

[일정 시간 동안 가호받은 신의 힘을 무작위로 강림시킬 수 있습니다.]

[주의 – 인과를 벗어난 힘입니다. 현실보다 빠르게 시간이 소비됩니다. (가호가 중첩될수록 소비가 빨라집니다.)]

루이는 눈앞에 보이는 글자를 지웠다.

'달성 특전이라니. 게임이 따로 없군.'

강림. 시간이 빠르게 단다고 했는데 얼마나 달지도 몰랐다.

게다가 무작위라면 양날의 검이었다.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루이가 가호를 받은 신은 하나뿐이었다.

휘익!

옆에서 검이 날아왔다.

젊은 기사.

루이는 피하지 않았다.

"큭."

젊은 기사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뒷걸음치는 기사.

기사의 눈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힘에서 밀린 것이었다. 지금의 루이는 방금 전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젊은 기사를 바라보는 루이의 눈이 번뜩였다.

쾅!

루이의 발길질에 젊은 기사의 몸이 튕겨 나갔다.

온몸에 힘이 넘친다.

한순간 몸이 부푼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근육의 질이 변화했다. 가호를 받기 전의 루이와 지금의 루이는 다른 종이었다.

루이는 젊은 기사를 몰아쳤다.

쾅! 콰강!

루이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젊은 기사의 몸도 뒤흔들렸다.

압도적. 그렇게 루이가 젊은 기사를 몰아세울 때 옆에서 검이 날아왔다.

외팔 기사.

그러나 루이는 그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비틀어서 검을 피하고는 검을 든 외팔 기사의 팔을 움켜잡았다.

"...!"

고통에 외팔 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이는 그런 기사의 팔을 당겼다.

그리고.

쾅!

이마로 외팔 기사의 머리를 들이박았다.

피가 튀면서 외팔 기사의 몸이 늘어졌다.

하지만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팔을 당긴다.

"흡!"

그 순간 검 하나가 외팔 기사와 루이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양손검.

노기사가 도착한 것이었다.

"둘 다 괜찮나?"

"젝슨 경!"

젊은 기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외팔 기사 역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경, 감사합니다."

노기사는 외팔 기사의 팔을 보았다.

루이가 얼마나 꽉 쥐었는지 오른팔 역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싸울 수 있겠는가?"

"충분합니다."

외팔 기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노기사라면 쉬게 했겠지만, 지금은 손 하나가 아쉬웠다.

'기세가 또 바뀌었어.'

루이에게서 에테르 말고 다른 힘이 느껴졌다. 아까까지가 잘 버린 검과 같았다면 지금은 사나운 맹수처럼 느껴졌다.

셋은 신중하게 진형을 잡았다.

루이는 그런 셋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투···.'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루이는 셋을 향해 검을 겨눴다.

언제부턴가 싸우는 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은 셋이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단번에 끝낸다.'

파지직.

푸른 전류가 루이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했다.

"강림."

루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상이 다시 한번 일변했다.

[사용자의 몸에 라움의 힘이 깃듭니다.]

글자를 읽을 필요도 없었다.

루이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신 라움.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루이를 향해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함께 루이의 몸이 붉게 물들었다.

"미친···."

루이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몸에 차오르는 힘 때문이 아니었다.

숫자가 한 번에 10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열 배.

어쩌면 그 이상!

순식간에 시간이 깎이고 있었다.

예상을 넘어섰다.

그만큼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질감의 정체도 깨달았다.

전투에 대한 갈망. 목마름.

가호의 영향을 받는 건 육체만이 아니었다.

'기분이 더러워.'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느낌이었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라움의 성기사들.

사람들은 그들을 광전사라고 불렀다.

그만큼 저돌적이고 광포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03:14:11]

잠깐 사이에 오 분이 사라졌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되었다.

루이는 셋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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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375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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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면상을 봐야지.

바람을 가르며 쏘아지는 검.

노기사가 루이의 앞을 막아섰다.

파지직!

전류가 튄다.

에테르와 에테르의 격돌.

"커헉!"

노기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노기사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지금의 루이는 전과 다른 생물이었다.

[02:57:42]

다시 휘두른 검을 젊은 기사가 막아섰다.

눈앞에 푸른 전류가 튀어 올랐다.

[02:55:21]

외팔의 기사의 검이 루이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쉽게 막혔다.

[02:53:39]

*

*

[02:31:27]

쾅! 콰강!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숫자도 빠른 속도로 줄어갔다.

그럴수록 루이의 움직임은 과격해졌다.

인간을 초월한 힘.

먼저 떨어진 건 외팔 기사였다.

"크윽!"

비명과 함께 그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상처 입은 팔이 계속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집요하게 노린 탓도 있었다.

루이의 검이 물러나는 외팔 기사를 쫓았다.

그리고 그런 루이를 막기 위해 젊은 기사가 움직였다.

"멈추게! 젝슨 경!"

노기사의 외침이 뒤늦게 들려왔다. 그러나 젊은 기사의 몸은 아마 루이의 앞을 막아선 후였다.

그런 젊은 기사를 보며 루이는 미소지었다.

'걸렸군.'

처음부터 외팔 기사는 미끼에 불과했다.

검이 방향을 바꿔 젊은 기사를 노렸다. 젊은 기사는 자신의 검으로 검을 막았지만,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주먹까지는 막지 못했다.

뇌기를 감싼 주먹이 젊은 기사의 복부에 꽂혔다.

쾅!

"커헉!"

이어서 루이의 무릎이 젊은 기사의 머릴 가격했다.

콰직.

젊은 기사의 신형이 뒤로 넘어갔다.

[01:59:11]

*

[30:58:23]

생사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차오르는 숫자를 보며 루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먼저 하나."

파직, 파지직.

붉은 아지랑이와 뒤섞여서 붉은 전류가 흘러나왔다.

소음처럼 루이를 괴롭혔던 충동은 이제는 뚜렷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싸워라.

루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검을 올렸다.

'아직 부족해.'

그러니 다음은 너희다.

루이의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번뜩였다.

루이의 신형이 노기사를 향해 쏘아졌다.

* * *

[91:20:32]

마지막 적이 쓰러지고 나서야 루이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루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빌어먹을."

루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강림은 유용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컸다.

"이건 시간이 문제가 아니잖아."

시간이 여유가 있다고 해서 오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에게 잡아먹힌다.

점점 자신이 아니게 되는 느낌.

조금만 늦었으면 루이의 정신이 먼저 망가졌을 거다.

루이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싸움 소리는 멈춰 있었다.

삐-

호각 소리.

퇴각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군이 아니었다.

'아까 느꼈던 시선인가?'

전투 중 멀리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기사 중 하나였을 거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는 두 개. 다른 기사 한 명은 용병들이 처리했다는 뜻이었다.

* * *

전투가 끝나자 생존자들이 하나둘 루이의 곁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왔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기사들의 시체를 보고 흠칫 굳었다.

놀람은 곧 루이에 대한 경탄으로 바뀌었다.

생존자 중에는 적 병사들도 섞여 있었지만, 용병들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병사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테른 그 영감이 우릴 팔아넘긴 거라고!"

용병의 물음에 다른 용병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라고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여기 있는 인원은 각 대장들에게 차출당했다.

즉, 대장들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런 젠장!"

용병 하나가 애꿎은 흙을 걷어찼다. 다른 용병들은 그런 용병을 나무라지 않았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심정은 비슷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젊은 용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최근에 합류한 용병이었다.

"용병 길드에 알려야지."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테른이라고 이 같은 일이 용병단에게 있어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실패한 걸 알면 필시 입막음을 하려 들 것이다.

용병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곧 용병들의 투지가 살아났다.

"...그래, 쉽게 죽을 순 없지."

이 자리에 있는 용병들 역시 수많은 위기를 넘어서 살아남았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쪽에는 대장이 있잖습니까?"

홀로 기사를 넷이나 쓰러트렸다. 전성기의 테른조차 하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그러나 용병들의 시선을 받은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용병 길드엔 안 가."

용병들이 의아해했다.

"그럼?"

"잘난 면상을 봐야지. 얼마나 대단한 걸 약속받았길래 이딴 짓까지 했는지."

"...!"

용병들이 놀란 눈으로 루이를 보았다.

루이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무모한 짓이었다. 테른이 있는 곳에는 용병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영주와 그의 기사들, 병사들이 있었다.

무모하다고 해서 물러난다면 얕잡아 보이게 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잡아 먹힌다.'

루이가 겪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무력하게 도망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칠 년 전. 가문을 떠났을 때.

그러나 이제는 칠 년 전과 달랐다. 루이에겐 힘이 생겼다.

루이의 눈에 시퍼런 살기가 번들거리자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 그렇군요."

"여, 역시 대단합니다."

누구 하나 루이와 함께한다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루이도 예상했던 것이었다.

설령 돕는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번 경우에는 홀로 움직이는 게 편했다.

"나중에 일이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마, 맞아. 대장이라면 같이 일하기 나쁘지 않지."

"대장이 용병단을 만들면 함께 할 겁니다."

용병들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하나둘 떠나갔다. 강한 동료와 일하면 그만큼 생존확률이 높아간다.

루이의 실력 정도 되는 이는 주변에서 찾기 힘들었다.

용병들도 루이가 다음에 향하려는 곳을 알았다면 저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용병들이 떠나가자 병사들도 눈치를 보며 흩어졌다. 용병들과 달리 가족이 있기에 병사들은 함부로 영지를 떠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떠나가자 루이도 걸음을 옮겼다.

강해진 만큼 대가도 컸다.

'이대로라면 동부에 가는 건 힘들어.'

동부까지 도달하려면 중간에 마을이라도 습격해야 했다.

당연히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서쪽.'

이곳은 왕국의 최북단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건 하나였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숲.

일명 밤의 숲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바로 마수들의 땅.

막다른 길에 몰린 용병들이 최후에 찾는 장소.

용병들에게는 용병의 무덤이란 말이 더 익숙했다.

'마수도 생명이야.'

그렇다면 흡수할 수 있을 거다. 막다른 길에 몰린 건 루이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 전에 이 녀석에 대해 알아야겠지."

루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 * *

산속에 몸을 숨긴 루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점."

루이의 말에 떠오르는 수많은 글자.

[라플레인의 가호 – 500T]

[파르테우스의 가호 – 500T]

[메르실라의 가호 – 500T]

*

*

*

[소모품 상점 – 10000T]

[장비 상점 – 10000T]

루이는 딱딱한 육포를 씹으며 천천히 상점창을 살폈다.

그중 루이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라움의 가호 – 1000T]

다른 것과 달리 숫자가 바뀌었다.

'역시 중복이 가능하네.'

강림에 나왔던 주의 사항을 봤을 때부터 짐작했던 것이었다.

필요한 시간이 무려 두 배가 올랐다. 이다음은 얼마나 오를지 짐작도 안 갔다.

라움의 가호를 받고 근력이 강해졌다.

'메르실라는 회복력이겠군.'

풍요의 여신.

재생과 번식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제들은 치료술로 명성이 높았다.

이 역시 용병에게 친근한 이름이었다.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사제들이 메르실라의 사제들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게임이네."

루이는 실소를 흘렸다.

한 번으로 이만큼 강해졌는데 중복으로 가호를 받으면 얼마나 강해질까?

그러나 단순히 육체만 강화된 게 아니었다.

라움의 가호를 받으면 사고도 변화한다.

지금이야 잠깐이지만 가호가 중첩되면 변화도 심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올릴 수도 없었다.

"번식이니 성욕이라도 오르는 건가?"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메르실라의 사제들은 성에 대해 관대해서 용병들과 관계를 맺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다른 종파에서는 창녀라고 손가락질당하기도 한다.

물론 용병들에게 있어서는 여신 그 자체였다.

그것이 교리가 아니라 신의 영향을 받은 거라면?

"...끔찍하군."

능력이 탐난다고 해서 함부로 올릴 수도 없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림.

루이에게 있어서 구명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전투와 상관없는 가호가 늘어난다면 위험부담도 커지게 되었다.

"졸지에 신학을 공부하게 생겼네."

루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쓸었다.

능력과 부작용을 예측하려면 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루이의 시선이 가장 밑으로 향했다.

[소모품 상점 – 10000T]

[장비 상점 – 10000T]

어마어마한 숫자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만 시간이라니.'

모을 수나 있을까?

신들의 가호를 파는데 장비가 평범한 장비일 리가 없다.

필시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문제는 나에게 왜 이러한 능력을 주었냐는 건데."

루이의 혼잣말이 허공에 퍼졌다.

지난 칠 년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만일 원하는 게 있다면 알려 줬어야 했다.

'튜토리얼, 특전, 상점.'

루이는 그 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주변을 살폈다.

이미 몇 번이나 둘러봤기에 아무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이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퀘스트?"

조심스러운 한 마디.

곧 자괴감이 물밑 듯이 밀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역시 괜한···. 어?"

나왔다.

루이는 눈앞에 뜬 창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메인 퀘스트]

[아직 조건이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두 줄.

"정말로 떴네?"

스스로 보고서도 믿기 지가 않았다.

루이는 왜 진작에 시도해보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했다.

'그래, 이세계에 떨어졌다고 퀘스트나 상태창부터 외치는 건 정상이 아니지.'

분명 생전에 게임이나 영화에 빠져 살았을 거다.

보통이라면 현실에 적응하기 바쁘다.

그리고 당장 루이만 해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면 며칠이 우울했을 거다.

흑역사.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지.

루이는 팔짱을 꼈다.

"그래, 목적이 있다는 거지?"

어딘가 쓰기 위해 루이를 살려준 것이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이유 없는 호의만큼이나 꺼림칙한 것은 없었다.

루이는 퀘스트 창을 지웠다.

조건이 달성되지 않았다는 뜻은 언젠가 열린다는 뜻이었다.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

기브 앤 테이크.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를 건 없었다.

대가를 받고 그에 마땅한 일을 하면 되었다.

그렇게 밤과 함께 루이의 생각도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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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3759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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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챙이는 빠져.

청천벽력이란 말은 지금과 같을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실패했습니까?"

테른의 말에 영주는 얼굴을 구겼다.

"그래! 그 때문에 베오르 놈들이 우릴 의심하고 있어! 일부러 기사를 보내 자신들을 엿 먹인 게 아니냐고!"

그들의 의심은 타당했다.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협상에 차질이 생겼다.

전쟁에 이겼어도 이를 이유로 배상금을 낮추려고 할 게 분명했다.

기사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기사 다섯의 죽음.

종전 협상까지 끝났을 때 이런 일이 생긴 게 알려지면 귀족 사회에서도 손가락질할 거다.

영주의 분노는 테른에게 향했다.

"멍청하긴! 일을 어찌한 거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에 알렸어야지!"

영주의 분노는 이번 일의 실패 때문이 아니었다.

적의 기사를 셋이나 죽인 인재.

그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그깟 욕이야 먹으면 된다.

주변 귀족 중에 떳떳한 이는 없었다.

당장은 시끄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일도 제대로 못 해?!"

테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처음부터 꼬였다.

당장 저 입을 막아버리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영주가 다른 말을 할까 봐 이미 계약서까지 쓴 뒤였다.

"가! 가서 이번 일을 해결하거나 그 녀석을 데려와!"

그 녀석은 루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테른이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꺼져!"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테른을 기사들이 비웃고 있었다.

테른은 그를 봤음에도 모른 척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영주의 방에서 멀어진 테른이 소리쳤다. 지나가던 하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으나 험악한 인상의 테른을 보고는 못 본 척 지나갔다.

평소라면 영주의 눈치를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영주 저택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다가왔다.

호위는 저택까지 들어갈 수 없기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괜찮은 거로 보이나?"

날카로운 말투에 호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테른은 호위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자신을 옆에서 보호해주는 이였다.

감정을 상하게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미안하네. 잠시 격해졌어."

"이해합니다."

테른은 호위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나?"

"계속 흔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의 흔적도 뒤섞여서 쉽지 않습니다."

테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용병들을 반이나 풀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다.

실책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감시를 붙였을 거다.

애당초 실패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가 일곱이었다.

테른도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사 새끼들이 용병한테 지고 도망쳐?'

만일 술집에서 누가 그딴 소리를 했으면 웃어줄 것이다.

루이가 기사만큼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합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었다. 병사들을 통해서 증언까지 얻었다.

생각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루이가 실력을 숨겼다.'

곧 테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거야.'

작년 동부의 전장에서 루이가 기사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아무리 시골 영지라지만 기사는 기사였다.

"젠장."

테른이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용병단장이라고 해도 전쟁 배상금은 규모가 달랐다.

애당초 배상금을 낼 돈이 있었다면 이러고 살지도 않았을 거다.

방법은 루이를 잡아서 영주에게 넘기는 것밖에 없었다.

"남은 애들도 다 투입 시켜. 정보 길드에도 연락해보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반드시 찾아내."

"예."

테른의 말에 호위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일행들은 야영장에 도착했다.

테른은 여느 때와는 달리 조용한 야영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경계를 서는 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테른의 기색을 읽었는지 호위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모양입니다. 주의 시키겠습니다."

테른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놔둬."

루이의 일이 남아있긴 하지만 전쟁은 끝났다. 너무 압박하면 반발할 것이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테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장님?"

"조용히."

테른은 호위를 제지했다. 그런 태도에 의아해하던 호위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피 냄새!'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향은 호위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스르릉.

호위들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았다. 테른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주를 만나러 가느라 도끼를 숙소에 놔두고 온 것이었다.

결국, 호위에게서 작은 단검을 건네받고 걸음을 옮겼다.

야영지 안으로 향할수록 피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이 정도면···.'

테른은 애써 생각을 지웠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그리고 야영지 중앙에 갔을 때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시체의 산.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피 냄새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늦었어?"

시체의 위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내는 테른의 그토록 찾았던 이였다.

* * *

"루이!"

테른의 노성에 루이는 미소지었다. 생각했던 반응이었다.

"네놈이···!"

루이가 깔고 앉은 시체들은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이었다.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는다.

돈만 준다면 언제라도 칼을 돌릴 이들이었다.

용병이 지켜야 할 의리는 계약서뿐이었다.

'후환은 남기지 않는 게 좋지.'

실제로 루이가 나타났을 때는 당황했지만 공격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만일 힘이 없었다면 쓰러진 건 루이가 되었을 거다.

"날 찾았던 거 아니야? 이렇게 직접 와줬으니 좀 더 기뻐하라고."

루이의 말에 테른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네 놈···."

테른의 물음에 루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선물은 잘 받았어."

차라리 부대로 움직이는 게 나았다. 루이도 사람이었다. 싸우다 보면 지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용병들은 부대를 쪼개서 루이를 찾아 나섰다.

'좋은 먹잇감이지.'

기사만큼은 아니었지만, 병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양가가 높았다. 덕분에 쏠쏠하게 벌 수 있었다.

루이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웃으며 지낼 사이는 아니잖아?"

전에 테른이 루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루이는 옆에 있던 물체를 집어서 테른에게 던졌다.

호위들이 급히 테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물체는 테른을 노린 게 아니었다.

쾅!

바닥에 떨어진 건 도끼였다.

테른의 애병.

자신의 도끼를 바라보던 테른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무슨 수작이냐?"

"집어. 저승에 가서 무기가 없어서 졌다고 원망하지 말고."

"...!"

시체의 산에서 내려온 루이는 검을 뽑았다.

루이의 검에 묻은 피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테른은 인상을 찌푸릴 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안 오면 이쪽이 가지."

루이가 땅을 박찼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피하십시오!"

호위들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루이를 막을 수 없었다.

호위라고 해봤자 대장들보다 실력이 좋을 순 없었다.

검이 번뜩인다 싶더니 호위 하나의 머리가 떠올랐다.

"고작 열네 시간인가?"

하루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중얼거림.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루이의 몸에서 전류가 일어났다.

"잔챙이는 빠져."

"...!"

파지직.

달려들었던 호위들이 일제히 튕겨 나갔다.

비명과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올라왔다.

그제야 테른도 자신의 도끼를 잡았다.

부웅.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갈랐다.

다른 용병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세.

루이는 날아오는 도끼를 피하며 미소지었다. 몸에 두르고 있던 에테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루이가 테른에게 도끼를 건넨 건 자만심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가호를 받은 자신의 육체.

이를 확인하기에는 다른 이들은 너무 약했다.

쾅!

검과 도끼가 부딪쳤다.

검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몸이 삐걱거렸다.

이어서 이격이 날아왔다.

거대한 도끼를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콰강!

처음보다 더 강한 충격이 밀려왔다.

'버텼어.'

루이의 눈이 번뜩였다.

테른 역시 에테르 연공법을 익혔다.

비록 세례를 받지 못해 발현할 수는 없지만, 에테르가 깃든 테른의 괴력은 인간의 것을 넘어섰다.

그렇지 않다면 이만한 명성을 쌓지도 못했을 거다.

늙었다고 해서 나무꾼이란 이명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테른의 공격을 에테르 없이 받아냈다.

"빌어먹을 애새끼가···!"

테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루이가 자신을 상대로 장난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에테르를 조정했다.

그리 판단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한 테른의 움직임이 더욱 과격해졌다.

그러나 루이 역시 사실을 정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힘은 충분해. 그렇다면···.'

내구성. 몸이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나 알아볼 차례였다.

루이의 검이 테른을 향해 쏘아졌다.

* * *

콰강!

도끼가 떨어질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때로는 양손으로, 때로는 한 손으로. 테른은 거대한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러나 놀라운 건 루이였다.

처음에는 테른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 벅차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바뀌었다.

도끼를 휘두르는 테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와 달리 루이의 표정은 처음과 같았다.

그리고 이젠 반격까지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테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호위들은 테른을 돕고 싶었으나 돕다가 테른의 공격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루이는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적응했다.

'굉장하군.'

에테르는 무한하지 않았다. 에테르를 머금고 성장한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 흉기에 가깝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그런데도 발현하진 않았다지만 에테르를 다루는 테른을 압도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루이의 눈빛이 변했다.

'너무 시간을 끌었어.'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러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건 기사뿐이었다.

파직, 파지직.

루이의 몸에 푸른 전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아오는 도끼를 향해 검을 뻗었다.

"...!"

푸르게 빛나는 검이 도끼날을 가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테른의 눈이 떨려왔다.

그러나 루이의 검은 도끼를 자른 거로 모자라 테른의 몸까지 반으로 갈랐다.

이제까지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허무한 결말이었다.

'23시간.'

명성에 걸맞은 보상이었다.

그리고 먹잇감이라면 아직 남아있었다.

루이의 시선이 주인을 잃은 호위들에게 향했다.

* * *

달그닥, 달그닥.

시체 더미 앞에서 말이 멈춰섰다.

말 위에 올라탄 기사는 시체들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발 늦었군."

생존자는 없었다.

그을린 흔적. 에테르가 분명했다.

근방에 다른 기사가 들렸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물며 소리소문없이 다가와서 용병들만 죽였다면 영주가 찾던 용병일 가능성이 컸다.

"복수인가?"

쉽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기사는 혀를 찼다.

용병 따위 얼마가 죽든 상관 안 했다.

영주 역시 대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만한 실력자와 사이가 틀어진 건 아쉬운 일이었다.

용병 주제에 감히 영주와 척을 지진 않겠지만 다른 영지로 떠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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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376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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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리석어.

[311:13:14]

루이는 말 위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이번 전쟁 때 벌어들인 시간과 비슷했다.

죽인 수는 병사들의 반도 안 되었다.

그만큼 용병들의 가치가 높다는 소리였다.

"그래 봤자 열흘 정도지만."

겨우 숲에 닿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

루이는 입맛을 다셨다. 테른을 죽였지만 시원하기는커녕 찝찝함만 더욱 커졌다.

복수를 후회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주가 걸려."

그를 놔두고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이를 지목한 건 테른이겠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건 영주였다.

그렇다고 해서 영주 저택에 쳐들어갈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한낱 용병을 죽이는 것과 귀족에게 칼을 겨누는 건 다른 문제였다.

루이는 용기와 어리석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운이 좋은 줄 알아. 다음에 왔을 때는 이렇게 가지 않을 테니."

받은 건 잊지 않는다.

루이는 혼잣말을 남기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렇게 영지를 떠나갔다.

* * *

타닥, 타닥.

적막 사이로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모닥불 위에 놓인 건 가죽이 벗겨진 짐승이었다. 누린내가 올라왔지만, 루이에겐 익숙했다.

후추는커녕 소금이라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제는 과거에 먹었던 음식들의 맛도 기억나지 않았다.

고기가 익어가면서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이 짐승의 가치는 네 시간.

나약한 병사 하나와 같다는 뜻이었다.

이리 생각하면 인간의 가치 또한 덧없이 느껴졌다.

그렇게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던 루이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스락, 바스락.

숲 너머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짐승인가 싶었지만, 짐승치고는 움직임이 유난스러웠다.

곧 수풀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제 열다섯이나 여섯쯤 되었을까?

이 세계의 기준으로 막 성인이 된 소년이었다.

그는 안도하다가 루이를 확인하고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이런 숲에서 낯선 이와 만났을 때 보이는 반응과는 달랐다.

루이는 소년을 살폈다.

찢어진 옷에 바닥을 굴렀는지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가 가득했다. 게다가 호흡도 어지러웠다. 누가 봐도 쫓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빛을 보고 쫓아온 거네.'

잠깐 탈영병인가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영지전 때문에 탈영병이 많지만, 소년의 옷차림은 전투에 끌려갔다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탈영병이라면 창이나 칼 정도는 들고 있을 거다.

곧 루이는 답을 알 수 있었다.

'농노이군.'

국가에서 노예 판매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허울뿐이었다.

아직도 노예 제도가 만연했다. 아마도 영지전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쳤을 거다.

소년은 루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도, 도와주세요!"

루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여섯 명의 사내들.

사내들을 본 소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내들 역시 루이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경계했다.

병사들에게라도 쫓기나 싶었는데 일반 평민들이었다.

농노의 주인은 대부분 귀족이었다. 저들은 농노를 관리하던 이들이 분명했다.

귀족의 재산을 잃어버리는 건 중죄였다.

병사들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끼리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

"내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그렇게 말한 루이는 관심 없다는 듯이 고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루이의 말에 소년은 두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사내들은 루이를 경계하면서도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예 새끼가! 감히 도망을 쳐?"

사내 하나가 소년의 뺨을 때렸다.

짝!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도망쳤다면 자신들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당했을 거다.

소년도 모든 걸 포기했는지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사내 하나가 조심스레 고기를 뜯고 있는 루이를 턱짓했다.

정확히는 루이의 옆에 있는 봇짐이었다.

봇짐 사이로 검집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기사들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루이가 재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눈앞에 황금이 떨어졌는데 외면하진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재물은 필요했다.

특히나 백금이나 마수의 뿔을 섞어서 만든 무구는 비쌌다.

번거롭더라도 챙겨놓는 게 나았다.

사내들은 그 검이 기사의 검이란 걸 몰랐지만 예사 물건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

비싼 무구를 일부러 투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당연히 기사들의 검집에는 화려한 장식이 세공되어 있었다.

소년을 끌고 가려던 사내들의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때, 루이가 뜯어먹던 고기를 내려놨다.

"참으로 어리석어."

루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각자 제 할 일만 하면 될 거 가지고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쳐. 안 그래?"

루이의 차가운 시선이 사내들을 향했다.

그제야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무, 무슨 소리요."

"잘 알잖아?"

스르릉.

모닥불에서 튄 불꽃이 검날에 닿아 으스러졌다.

한순간 밤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한기가 흘러나왔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오, 오해요. 우린 이대로 갈 겁니다."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루이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이다. 조용히 갈 테니···."

그러나 사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번뜩인다 싶더니 사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쓰러진 사내의 머리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이대로 갈 거였으면 상의를 하지 말았어야지."

"...!"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내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악은 곧 분노로 변했다.

"도노반!"

아무리 농노를 찾으러 왔다지만 이러한 숲속에 맨몸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사내들은 농기구나 방망이를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는 피식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휘익.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의 머리가 떠올랐다.

루이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였다.

다섯 사내가 죽을 때까지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루이는 죽은 사내의 옷을 찢어서 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어, 어째서···."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루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바짝 굳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어째서 구해줬는지 묻는 건가?

루이는 손을 내저었다. 소년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자들이 욕심을 부렸기에 죽은 것이었다.

만일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떠났으면 죽이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년의 말은 루이의 예상을 벗어났다.

"어째서, 죽인 거예요?"

"응?"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당신 정도 되는 실력이라면 죽이지 않아도···."

루이는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보았다.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 아닌가?"

루이의 말에 소년은 입을 닫았다. 루이를 두려워하고 있으나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루이의 시선에 결국, 소년의 입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루이는 그러한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선했다. 이 시대에 농노는 가축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장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이가 사람다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아까의 질문을 돌려주지. 왜 죽이면 안 되지? 저들은 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 그렇다고 해도 죽일 필요는···."

루이는 팔짱을 꼈다.

"내가 저들을 그냥 보냈다가 더 많은 사람을 끌고 와서 내 재물을 탐하면? 아니면 죽이지 않고 경고로 팔 한쪽을 잘랐다고 해보자. 그러면 저들이 고마워할까?"

아니었다. 오히려 원한을 갖겠지.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땅히 꺼낼 말이 없던 것이었다.

'이게 한계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이가 루이에게 논리로 이길 수 없었다.

흥미가 떨어진 루이는 팔짱을 풀었다.

타기 시작한 고기가 눈에 보였으나 입맛이 떨어졌다.

아무리 죽음에 익숙하다고 해도 시체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싶진 않았다.

루이는 흙으로 모닥불을 덮고 말 위에 올랐다.

먹기 위해서 사냥한 게 아니라 사냥을 했기에 먹으려 했던 것이었다.

다음 마을까지 멀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식사하는 게 나았다.

말이 움직인다.

소년이 다급히 뒤따라오는 게 보였으나 루이는 신경을 껐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멀쩡한 건물은 없었고 길 또한 제대로 정비조차 되지 않았다.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더욱 척박해 보였다.

버려진 마을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는데 이 세상에서는 저런 마을이 흔했다.

마을 곳곳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그를 증명했다.

귀족이 있는 마을이 아니라면 대부분 저런 상태였다.

물론, 그중에는 짐승이나 야적에게 습격받아 버려진 마을도 많았다.

그러니 사람이 살고 제대로 기능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마을 안으로 향하자 겉과 달리 제법 활기찼다.

루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장한 외부인을 경계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을 외곽에 있는 건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주점 같지만, 별관 하나를 숙박 시설로 이용하고 있었다.

"운이 좋네."

생각보다 그럴듯한 외견에 루이의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시골에서 이만한 숙소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창고나 천막 정도면 다행이었다.

끼익.

기름칠이 안 된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온기와 함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낯선 이를 살피더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무장한 이들이 보였는데 루이와 같은 용병들로 보였다.

그들을 보니 마을 사람들의 경계가 옅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외지에 할만한 일이 있나?'

루이는 의아해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모든 용병이 루이처럼 전쟁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들이 드문 편이었다.

루이가 적당한 자리에 앉자 주인이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이군. 식사만 할 건가?"

"하룻밤 머물다 갈 겁니다."

루이의 말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숙박은 선불이라네."

식사는 따로 계산하라는 소리였다. 루이는 품에서 은화를 꺼내서 건넸다.

주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구운 것이었지만 풀을 넣어서 누린내를 없앤 것이었다.

건물의 외견만큼이나 음식도 그럴듯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자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후드를 쓴 사내가 사람들 앞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이 피어오를 때마다 환성을 내질렀다.

'시끄러운 이유는 저것이었나?'

마법사.

아니, 마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재주였다. 그것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주인도 일을 하면서 연신 마법사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이런 시골에서 마법사를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연한 반응이었다.

루이는 피식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런 루이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자네는 마법이 신기하지 않나?"

사내 하나가 허락도 없이 루이의 앞에 앉았다. 루이는 사내를 보았다.

이십 대 중후반의 사내는 루이가 보기에도 잘 생겼었다.

루이는 사내가 마법사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쎄."

루이의 대답에 사내의 눈이 빛났다.

"자네는 다른 마법사를 본 적이 있군."

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확실히 루이는 사내의 말대로 마법사를 본 적이 있었다.

저런 광대 같은 이가 아니라 진짜 마법사를.

사내는 의자를 끌어다가 제대로 앉았다.

"난 테슈아라고 하네. 아, 합석해도 괜찮겠지? 대신 밥은 내가 사지."

이미 앉아놓고 뒤늦게 허락을 구했다. 루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사내가 싱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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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376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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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슈아

웃고 있는 사내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잘 생겼군.'

게다가 그걸 이용할 줄 알았다.

테슈아는 루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테슈아의 시선을 읽은 루이가 입을 열었다.

"루이."

테슈아의 눈이 커졌다.

"영혼수확자?"

루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분명했다. 북부의 용병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테니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 일이 알려지면 더 유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부르더군."

"그 유명한 시체성애자라고?"

"...그렇게도 부르지."

루이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시체성애자는 루이와 적대했던 이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영혼수확자라는 이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나 시체성애자보단 나았다.

"내가 대단한 분을 만났군."

테슈아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는 루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다른 마법사를 만나도 이상할 게 없지."

마법사라고 해서 모두가 연구실에 머무는 건 아니었다. 드물지만 전쟁터를 종군하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만났던 마법사들은 죄다 사기꾼이었어."

테슈아는 그리 불평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저기서 마법을 쓰는 이도 제대로 된 마법사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테슈아의 반응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친한 마법사가 있나?'

아니, 제대로 된 마법사를 본 적이 있다면 테슈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진짜 마법사는 존재만으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마법사를 노려보던 테슈아가 웃으며 루이를 보았다.

"그보다 자네는 전쟁터만 찾는다고 들었는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인가?"

루이는 대답하지 않고 테슈아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아니야.'

단련한 흔적은 있지만, 에테르는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는 곧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자. 내 별호를 듣고서 아무렇지 않게 넘겼어.'

보통 루이의 정체를 알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이었다.

경멸. 혹은 경계.

그러나 테슈아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가 느꼈던 이질감은 테슈아의 반응 때문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제국인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루이의 말에 테슈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숨어서 보는 이도 나오라고 해."

테슈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그도 잠시. 테슈아는 루이를 보며 미소지었다.

루이가 아니라 여성을 향했다면 오해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루이는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소문은 과소평가 되었군. 들었지, 진?"

"...감이 좋군요."

가는 여성의 목소리. 어느새 그림자 하나가 테슈아의 뒤에 서 있었다.

테슈아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

루이는 진이라 불리는 여성을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음에도 갑작스레 나타난 여성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역시.'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기사. 그것도 왕국에서 만났던 어떤 기사보다 강했다.

루이의 눈빛이 깊어졌다.

루이 역시 라움의 가호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그만큼 여성과 루이의 역량 차이가 뚜렷했다.

테슈아는 진이라 불린 여성을 돌아보았다.

"진, 내 왕국어가 이상해?"

진은 고개를 저었다. 테슈아의 왕국어는 완벽했다. 그런 진의 반응에 테슈아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안 거지?"

"억양."

말투나 단어가 아니었다. 제국어와 왕국어는 비슷한 단어가 많았다.

문법 역시 비슷했다. 당연히 억양이 차이가 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루이는 저러한 억양을 쓰는 이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알려진 제국어가 아닌 고대 제국어를 배운 이들.

바로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어릴 적부터 고대 제국어를 배운다.

그게 아니라면 어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즉, 테슈아는 고대 제국어를 배운 고위 귀족이나 학자 출신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테슈아는 학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젊어 보였다.

루이의 말을 들은 테슈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당연합니다. 제국인 중에서도 이를 구별해 내는 이는 드물 겁니다."

루이가 이상한 거다. 진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루이가 이를 구별해 낼 수 있었던 건 과거 전생에서의 지식 때문이었다.

전생은 이곳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수많은 언어를 교류하고 또 학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국의 귀족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루이의 질문에 테슈아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하면 믿지 않겠지?"

당연한 소리였다. 말을 꺼낸 루이는 진을 경계했지만, 다행히도 진은 그저 담담히 루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수의 땅을 보러 왔다네."

테슈아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수의 땅.

밤의 숲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수는 어디에서도 존재했다. 당연히 제국에서도 볼 수 있었다.

루이의 의문을 이해했는지 테슈아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마수가 나오는 지역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네. 거기에 개인적인 사정도 있지."

테슈아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처럼 놔두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수의 숲을 관리할 여력이 안 되었다.

그렇기에 용병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테슈아의 출신이 정말로 제국 귀족이라면 마수가 나오는 지역에 가게 놔두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마수를 보기 위해 왕국까지 건너온 건 과했다.

테슈아는 루이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로 대답은 되었나? 이제 루이, 자네가 대답할 차례야."

처음과 달리 말투가 친근해졌다. 오히려 비밀을 공유해서 홀가분해 보이는 눈치였다.

루이는 그런 테슈아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목적지를 숨기는 게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루이의 기색을 알아챈 테슈아의 눈이 반짝였다.

"밤의 숲이로군!"

"..."

루이 정도 되는 용병이 잔심부름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리는 없었다. 방향을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그럼 숲까지 동행하면 되겠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지 않았다. 루이가 거절해도 따라올 기색이었다.

루이가 입을 열려던 찰나에 진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루이 경. 저분도 경의 일행입니까?"

기사가 아니라 경의 칭호를 붙일 필요가 없었지만, 루이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호칭이야 멋대로 부르면 되었다.

그보다 진이 말한 내용이 신경 쓰였다.

진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소년은 루이를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누가 봐도 일행을 찾았을 때의 얼굴이었다.

* * *

진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반가워하던 기색과 달리 소년은 루이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두리번거리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수상하다고 광고를 하는군.'

루이는 그런 소년을 보며 혀를 찼다. 저런 꼴이라면 곧 붙잡힐 거다.

다행이라면 주인을 비롯해 주점에 있는 이들이 마법사를 구경하느라 소년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이만 일어나지."

루이는 품에서 은화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루이가 먹은 것을 계산하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내가 낸다고 했는데···."

"빚지는 건 싫어해서."

빚이 생기면 갚아야 했다. 루이의 말에 테슈아도 더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서 동행은 허락하는 건가?"

루이가 테슈아를 바라보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테슈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따라올 거면 멋대로 해. 이쪽은 알아서 움직일 거니깐."

퉁명스러웠으나 루이의 대답은 허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갔다면 계속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 루이의 말에 테슈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일정을 방해하진 않을 거야."

루이는 그런 테슈아의 말에 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를 구경하고 있던 주인은 아쉬워하면서도 루이를 방으로 안내했다.

* * *

다음날 루이는 낯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전날 말했던 것처럼 따라오면 제지하지 않겠지만 굳이 테슈아를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일찍 아침을 먹으러 내려왔으나 밑에는 테슈아가 먼저 앉아 있었다.

그리고 테슈아의 옆에는 소년이 있었다.

"...보기보다 자애로운 성격이군."

소년은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다가 루이의 눈치를 봤다.

돈 한 푼 없던 소년이었다. 진작에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직 남아있는 걸 보면 테슈아가 소년의 방을 잡아준 게 분명했다.

테슈아는 루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탄성을 뱉으며 루이를 바라보았다.

"보기보다라니. 내가 자네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궁금하군."

"..."

루이의 시선이 테슈아에게 향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테슈아. 누가 봐도 선하고 잘생긴 청년. 그러나 루이가 보고 있는 건 테슈아의 외견이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

그건 선한 이가 가질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곧 둘의 시선이 떨어졌다. 주인이 다가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먹을 것을 내오고 곡물 말린 것이나 육포가 있다면 따로 준비해주십시오."

육포와 말린 채소는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가게의 주인답게 바로 알아들었다.

"말린 버섯도 있는데 같이 넣어드릴까요? 물에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말에 루이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테슈아가 앉은 자리와 떨어진 곳이었다.

그걸 본 테슈아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모처럼이니 같이 먹어도 되는데. 이제부터 같은 일행 아닌가?"

"..."

루이가 대꾸하지 않자 테슈아가 미소지었다.

"그래, 차차 친해지면 되겠지."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소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루이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부터 말이 많은 건가?'

첫인상과 느낌이 달랐다.

루이에겐 저런 관심은 낯선 것이었다.

테슈아. 수상한 이였다.

호위 기사까지 있을 정도면 제국의 귀족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게선 에테르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면 에테르도 배울 것이었다.

왕국과 달리 제국에서는 검술 역시 귀족의 덕목이었다.

'그래서 더 수상하지.'

루이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동행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루이는 때마침 나온 수프를 입에 가져갔다.

* * *

루이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

그렇게 여관을 나서자 테슈아와 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소년 역시.

"데려갈 생각인가?"

일행들은 놀러 가는 게 아니었다.

밤의 숲. 마수의 땅으로 가는 것이었다.

용병들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 데려가는 건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이의 물음에 테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데려가는 게 아니라네. 자네를 따라가는 거지."

무슨 소리를.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테슈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테슈아의 옆에 서 있는 소년의 태도가 이상했다.

아침만 해도 단지 낯설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감이 좋은 녀석이군.'

소년은 테슈아를 경계하고 있었다. 본능으로 알아챈 것이었다.

옆에 있는 인간은 위험하다는 걸.

반대로 루이는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 생각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하지만 루이 역시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손을 쓸 것이다.

"다들 나의 선의를 알아주지 않는군. 슬픈 일이야."

테슈아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루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가만히 놔둬도 자네를 쫓아갈 테니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지."

루이는 그런 테슈아를 보다가 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진이 있는 이상 자신의 방해는 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설령 방해된다고 하면 그때 가서 치워도 충분했다.

그렇게 루이는 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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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376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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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내 거야.

휘익.

비도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푹.

날아간 비도는 토끼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도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주인에게 돌아왔다.

비도의 주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비도를 갈무리했다.

자세히 보면 비도의 끝에 실이 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감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일행들을 감쌌다.

결국, 테슈아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우리에게 화를 내는 건가?"

루이는 테슈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귀찮긴 했으나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화가 날 것 같았으면 허락하지도 않았을 거다. 담담하게 말하는 루이를 보며 테슈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럼 루퍼스의 신도인가?"

"그게 누군데?"

"죽음의 신."

테슈아의 말에 루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루퍼스라. 확실히 명단에 있던 이름이네.'

뜻하지 않게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테슈아의 표정은 더욱 기괴해졌다.

루퍼스의 이름도 모르는 이가 신도일 리는 없었다.

차라리 루퍼스의 신도면 나았다.

그들의 교리는 죽음으로서 완전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살생을 구원이라 믿는 이들이었다.

악신. 제국에서 금기한 종교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가?"

테슈아의 의문은 타당했다. 일행이 출발한 후부터 루이는 주변을 경계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조금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주변에 나타난 짐승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있었다.

늑대나 들개와 같은 위협적인 짐승들은 물론이고 토끼나 사슴 같은 소동물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말의 속도는 그대로였다. 그저 농부가 한 해의 곡물을 수확하듯 움직이는 걸 죽이고 있었다.

지금 말하는 도중에도 비도가 날아갔다.

이번에는 비도의 끝에 쥐가 걸려있었다.

"설마 살아있는 걸 보면 화가 치밀어오르기라도 하는 건가?"

테슈아의 물음에 루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테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테슈아도 알고 있었다.

루이의 눈빛은 차분했다.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었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둘러대는 것이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간혹 감을 무뎌지지 않게 하려고 동물을 베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루이는 과했다.

소년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진은 루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테슈아는 진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귀찮은 일을 덜었다고 좋아하고 있군.'

단순히 사냥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고기를 다듬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자네, 용병이 아니라 도축장에서 일하다 왔나?"

테슈아가 무심코 그리 물어볼 정도였다.

그만큼 루이의 솜씨는 깔끔하고 정교했다.

여러 마을을 다녔지만, 루이만큼 솜씨 좋은 장인도 드물었다.

'정말로 알 수 없군.'

루이를 바라보는 테슈아의 눈이 반짝였다.

테슈아가 보기에 루이의 존재 자체가 의문이었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루이 덕분에 굶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테슈아는 모르겠지만 그가 건넨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루이는 용병일을 하기 전에는 도축장에서 일했었다.

심지어 용병 된 이후에도 종종 일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단 못하지만 짐승도 시간을 준다.

특히나 대도시의 경우에는 전쟁터에 나간 것만큼의 시간을 벌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기사 출신인 루이가 그런 천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다시 입을 열려고 하던 테슈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진?"

"전투입니다."

테슈아가 말하기도 전에 진은 검을 뽑은 상태였다.

루이는 둘의 행동에 의아하다가 뒤늦게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비명.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한순간에 일행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진 앞에 타고 있던 소년도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도중 루이는 테슈아를 얼굴을 살폈다.

'나보다 먼저 알아챘어.'

진과 비슷한 속도였다. 심지어 루이가 앞에 있던 상황이었다.

루이는 애써 상념을 지우고 앞으로 나갔다.

굽이진 언덕을 지나자 큰 공터가 나왔다.

전투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건···."

"안 보인다 싶더니 먼저 간 것이었나."

가장 먼저 보인 건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건 겁먹은 사내.

여관에서 마법을 보여줬던 이였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건 짐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기괴했다.

생김새는 늑대를 닮았으나 덩치는 소보다 컸고 이마에는 뿔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짐승들은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지금까지 많은 짐승을 사냥했지만 저런 놈들은 처음이었다.

이곳의 짐승은 지구와 비슷하거나 같았다. 그런데 저놈들은 달랐다.

"숲이 가까워진 것 같군요."

진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행들은 진작에 숲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마을을 제외하면 숲과 산의 구분이 힘들었다.

그러나 진이 말한 건 평범한 숲이 아니었다.

밤의 숲.

즉, 저것들은 마수라 불리는 존재였다.

용병들이 순식간에 쓰러진다. 정작 마법사는 공포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테슈아가 말에서 내렸다.

"자네가 오면서 음식을 대접해줬으니 이건 내가 처리하지."

"무슨?"

루이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는 테슈아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진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 멈췄다.

진은 테슈아의 호위였다.

그런데 뽑았던 검마저 집어넣은 상태였다.

마수들 역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테슈아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수 중 한 마리가 테슈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말에 타고 있던 소년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흉포했다.

그러나 정작 앞에 있던 테슈아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거기, 사기꾼 친구."

심지어는 앞에 떨고 있는 사내를 부르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서는 죽게 놔두고 싶지만, 이번만은 도와주지. 그러니 잘 봐."

테슈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진짜 마법이란 것을."

그 모습을 본 루이는 침음성을 흘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테슈아를 향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보랏빛 바람.

에테르와 다른 힘.

세상에서는 이를 마력이라고 칭했다.

테슈아가 걸친 옷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차고 있던 장신구가 빛을 내고 있었다.

테슈아의 시선이 사내에게서 마수에게로 옮겨갔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낀 건가.

마수가 테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테슈아는 그런 마수를 보며 미소지었다.

"불에 자신 있는 것 같은데···."

손끝을 마수에게 향한다. 마수는 이미 테슈아 앞에 도달했다.

"어디 한 번, 이 불도 버텨보아라."

작은 손짓.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콰가가강!

달려오던 마수가 튕겨 나갔다.

동시에 거대한 불꽃이 마수를 집어삼켰다. 그와 함께 마수의 몸은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마수를 집어삼킨 불꽃은 뱀처럼 다른 먹잇감을 찾아 움직였다.

살아남은 용병들과 사내를 놔두고 마수들만 먹어 삼키고 있었다.

곧 마지막 마수까지 태워버린 불꽃은 사라졌다.

테슈아는 떨고 있는 사내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떤가? 자네가 알고 있는 마법과 비슷한가?"

테슈아의 시선은 루이를 향해 있었다.

"...아니, 더 대단하군."

루이의 말에 테슈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상한 걸 깨달았다.

놀라고 감탄해야 할 루이의 표정이 떨떠름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

루이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자 테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좋은 기회를 놓쳤어.'

루이는 재밖에 남지 않은 마수를 보며 혀를 찼다.

테슈아의 실력은 놀라웠다. 루이도 과거에 저만한 마법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테슈아처럼 바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지긋한 마법사가 오랫동안 주문을 외운 후에나 가능한 이적이었다.

그러나 테슈아는 그 모든 걸 한순간에 끝냈다.

심지어 주문조차 외우지 못했다.

무영창.

테슈아의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루이로서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몸에 차고 있는 수많은 아티펙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또한 테슈아의 능력이었다.

사실상 테슈아 자체만으로 호위가 필요 없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루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재가 되어버린 마수들.

마수가 숲 밖에도 다닌다는 건 의외였지만, 마수의 생명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였다.

만일 불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길을 돌려야 했다.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런 루이의 반응에 테슈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김이 새는군."

좀 더 놀라는 걸 바랬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런 테슈아를 향해 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풀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아차, 한 마리 더 남아있던 건가?"

오랜만의 전투가 감이 무뎌졌다. 테슈아가 손을 올리려는 순간, 빛이 번뜩였다.

비도.

비도는 마수의 가죽에 작은 상처를 남긴 채 튕겨 나갔다.

애초부터 마수를 잡기 위해 던진 게 아니었다.

"저놈은 내 거야."

그리고 비도의 주인이 쏘아졌다. 건들지 말라고 엄포까지 놓으며.

"어? 어, 그렇게 하시게."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야 비도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자신의 사냥감이라고 표시한 건가?'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테슈아의 시선이 마수와 싸우고 있는 루이에게 향했다.

* * *

뜨거운 열기가 루이의 몸을 덮쳤다.

그러나 루이가 몸에 두르고 있는 에테르를 뚫지 못했다.

루이는 불을 뿜어내느라 벌리고 있는 입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그 순간 마수가 움직였다.

텅!

불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마수가 앞발로 검을 쳐낸 것이었다.

루이는 손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침음성을 흘렸다.

'단단해.'

마치 기사와 검을 부딪친 거 같았다.

그리고 날카롭다.

불이 주력 무기가 아니었다. 진짜는 이쪽이었다. 테슈아가 순식간에 죽였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그래, 쉽지 않다는 거지?'

쉽다면 용병의 무덤이란 소리도 나오지 않았을 거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쏘아진다.

몸은 거대하지만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재빨랐다.

파지직.

루이는 에테르를 끌어올렸다.

쾅!

이번에는 마수의 몸이 밀려났다. 녀석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루이는 알고 있었다.

'영리한 놈이야.'

루이가 발을 내딛는 순간 꼬리가 날아왔다. 꼬리의 끝은 바늘처럼 뾰족했다.

지금까지 감추고 있던 것이었다.

동족들이 사냥당할 때도 몸을 숨기고 있던 것까지 떠올리면 이 녀석들의 지능은 인간만큼이나 좋았다.

'하지만···.'

루이의 경험은 이 정도에 흔들릴 정도로 얕지 않았다.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꼬리를 피하면서 털을 부여잡았다.

루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찍어누른 후 몸에 올라탄 후 양팔로 녀석의 목을 조였다.

[...! ...!]

그제야 녀석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루이를 떨구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채찍처럼 휘둘렀던 꼬리는 제 등까지 닿지 않았다.

쾅! 콰강!

루이를 업은 녀석이 나무와 돌을 부수고 다녔다.

그러나 녀석 발버둥 칠수록 조임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루이는 녀석이 쓰러지고 나서도 한참이 있다가 손을 풀었다.

영리한 녀석이었다. 죽은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는 루이를 향해 테슈아가 다가왔다.

"자네, 괜찮나? 마수를 이런 식으로 잡다니···. 대단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였군!"

상상도 못 했다. 테슈아뿐만 아니라 진의 눈에도 드물게 감정이 떠올랐다.

어떤 기사도 루이처럼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루이는 그 둘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마수의 시체를 바라보던 루이의 입이 열렸다.

"테슈아. 다른 마수들을 봤다고 했지?"

"그렇지."

"이 녀석은 어느 정도야?"

루이의 물음에 테슈아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수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지. 영역에서 버티지 못하고 쫓겨난 녀석들일 걸세."

"그래?"

테슈아는 루이의 이상을 깨달았다.

"...자네?"

루이는 웃고 있었다. 눈동자 역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오로지 루이에게만 보이는 글자.

[290:11:04]

무려 사십 시간이 넘게 올랐다.

마수는···.

지금까지 루이가 경험했던 어떤 생명보다 가치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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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3767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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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을 바꾸겠어.

안 된다. 너무 흥분했다.

'이것도 가호 때문인가?'

루이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올라왔던 투기가 가라앉는다.

마음을 진정시킨 루이는 죽은 마수를 살폈다.

날카로운 이빨들과 거대한 뿔.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어찌하겠는가?"

테슈아가 루이에게 물었다.

마수의 시체는 돈이 된다. 다른 마수들은 테슈아가 태웠지만 이건 오로지 루이가 잡은 것이었다.

권리 또한 루이에게 있었다.

"이 녀석, 먹을만해?"

루이의 말에 테슈아의 표정이 변했다. 특히나 옆에 있던 소년은 경멸하는 눈빛마저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마수의 고기는 일반 짐승과 다를 게 없다네. 특별히 맛있지도, 없지도 않아."

테슈아의 말에 소년이 놀랐다. 먹어보지 않은 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제국에서는 마수 고기가 드물지 않았다.

비싸므로 평민들은 접하기 힘들지만, 귀족이라면 달랐다.

테슈아의 말에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이 먹을 게 아니라면 짐이었다.

이제부터 마수의 숲으로 들어간다.

마수는 지겹도록 나올 것이다. 그때마다 가죽을 벗길 수는 없었다.

루이는 마수에 대한 미련을 접고 남은 이들을 보았다.

시체는 모두 셋.

그중 둘은 새까맣게 타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살아남은 건 마법사와 용병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지?"

얼이 빠진 마법사를 대신하여 용병에게 물었다.

이곳까지 왔다는 건 목적지가 같다는 뜻이었다.

밤의 숲.

이곳 또한 제대로 된 길은 아닐뿐더러 그저 서쪽으로 향한다면 돌아서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겠다고 목숨을 버리는 멍청이들은 없었다.

루이의 물음에 용병은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우린 호위로 따라왔을 뿐이오."

용병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여관에 있던 이들 중 하나였다.

"호위?"

루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뜻을 용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마수에서 호위하겠는가.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소. 어차피 자신이 해결할 테니 자신이 마법을 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용병은 말하면서 다시 마법사를 노려봤다.

"어리석군."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슈아가 실소를 흘렸다.

누가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그러나 일을 받아들인 건 용병들이었다. 뒷감당 역시 용병들이 해야만 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과 달리 마법사는 아주 사기꾼은 아니었다.

마수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마법을 썼다.

문제는 마법사가 할 줄 아는 마법이 불을 다루는 것뿐이었다.

마법사의 마법은 마수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운이 나빴다. 차라리 다른 마수였다면 조금은 나았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일반 용병 기준이었다.

이들 수준으로 마수를 상대하기에는 어려웠다.

루이의 시선이 마법사에게 향했다.

"그럼 그쪽은?"

마법사는 루이의 물음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수의 땅에 가면 마력이 늘어난다고 들어서···."

루이는 눈을 껌뻑였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루이의 시선이 뒤에 있는 테슈아에게 향했다.

"아직도 저런 헛된 소문을 믿는 이가 있다니. 당연히 거짓이라네. 그렇다면 마탑이나 마법 길드는 마수의 땅에 있겠지."

테슈아는 차갑게 일갈했다. 맞는 말이었다.

마력에 효과가 있다면 마탑이 먼저 나섰을 거다. 그 말에 마법사의 고개가 떨어졌다.

어째서 그러한 소문이 났는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마수의 이능은 마력에서 나온다.

루이는 죽은 마수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넘겨줄 테니 돌아가."

용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만큼 마수의 가치는 높았다. 마법사는 루이의 말에 머뭇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마저 죽은 이상 혼자 나설 수도 없었다.

게다가 마수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참고로 말하지만, 마수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마력이 강해지지 않네."

테슈아의 말에 마수를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는 움찔 몸을 떨었다.

먹으려고 했던 건가.

하지만 테슈아를 바라보는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테슈아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테슈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겠다면 말리진 않겠네."

이야기가 정리되자 일행들은 다시 말에 올랐다.

* * *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루이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조언해준 거지?"

마수 고기를 먹는 것.

테슈아가 조언해줬지만 들을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

테슈아는 루이의 물음에 미소지었다.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라네. 마수의 피는 독이지."

"독?"

"그렇네. 그렇기에 제국에서도 허가받은 이만 다룰 수 있지. 물론, 자네나 나와 같은 이에게 상관없는 이야기라네."

마력과 에테르.

종류는 다르지만 둘 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독에 대한 면역력이 강해진다.

테슈아는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상류층에 유행했던 것이야. 선택받은 자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 그쪽에서 좋아할 만한 이야기지."

루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의 귀족들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애당초 머리가 있으면 알 수 있는 거라네. 마수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먹는다? 그렇다면 기사들은?"

에테르.

루이가 아는 이 세계라면 강해지기 위해 식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해봤을 수도 있겠군.'

그보다 더한 짓도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조언을 무시하고 먹는다면 뒷감당 역시 그가 해야겠지."

마법사가 가진 마력으로는 마수의 독을 견딜 수 없다.

마법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을 깬 건 루이였다.

"동행의 조건을 바꾸겠어."

테슈아와 진의 시선이 루이에게 향했다.

조건을 바꾼다고 하였으나 애당초 조건이란 것도 없었다.

둘의 시선을 받으며 루이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마수가 나오면 내가 상대한다."

루이의 선언에 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그런 걸 조건으로 달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곧 테슈아가 미소지었다.

"이제야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 알겠군."

간혹 있었다. 전투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자들.

강해지기 위해서. 전투의 전율을 느끼기 위해서. 목적은 다르지만, 방법은 같았다.

그렇다면 루이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살육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것이었다.

진도 의외란 듯이 루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그녀도 기사. 위를 향하려고 하는 일들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을 내뱉은 루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음, 생각해보니 상대하는 거까진 괜찮겠어."

앞으로 어떤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혼자서 상대하는 건 과욕이었다.

게다가 이 둘 정도 되는 인력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놀리는 건 오히려 낭비였다.

"싸워도 돼. 대신 마무리는 내가 한다. 이게 조건이야."

이게 어려우면 따로 다녀야 한다. 루이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루이의 말을 들은 둘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나도 아까 했던 말을 정정하지. 역시 자네를 모르겠어."

테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의 눈빛 역시 다시 차가워졌다.

* * *

황당한 선언 이후 루이의 행동이 변했다.

여전히 사냥은 했지만, 토끼나 쥐 같은 작은 동물은 못 본 척 넘어가는 너그러움을 보여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심하게."

"알아!"

루이는 날아드는 꼬리를 피했다.

독침이 달린 꼬리. 바로 전갈이었다.

'마수라며!'

벌레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만큼 루이의 삶은 여유롭지 못했다.

꼬리를 피하자 거대한 앞발이 루이를 노렸다.

탕!

검으로 쳐냈으나 앞발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했다.

'껍질을 노리는 건 어려워.'

에테르를 남발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껍질과 껍질을 잇는 이음세.

루이는 공격을 피하며 단검을 던졌다.

루이의 손을 떠난 단검은 껍질과 다르게 너무나 쉽게 파고들었다.

전에 싸웠던 늑대의 가죽보다 약했다.

'그렇다면!'

루이의 신형이 쏘아졌다.

노리는 건 앞발.

마수는 약점이 들켰다는 걸 깨닫자 몸을 움츠렸다.

파지직.

마수의 몸에 피어오르는 노란 전기.

그를 본 루이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거라면 이쪽도 익숙하다고."

파직, 파지직.

푸른 전류가 루이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마수가 두르고 있던 전류가 힘을 잃었다.

기사에게 전격 마법은 쓰지 않는다.

이건 마법사에겐 상식이었다.

에테르는 어떤 전류보다 강했다.

루이의 검이 마수의 앞발을 파고들었다.

끼릭.

이음세 사이에 낀 검이 비명을 질렀지만, 루이를 막을 순 없었다.

허공으로 떠오른 앞발.

이어서 꼬리가 루이의 머리를 노렸다.

꼬리의 끝이 녹색 빛을 번들거렸다.

스치기만 해도 고약한 냄새와 함께 어깨의 갑옷이 타들어 갔다.

맹독.

만일 살에 닿으면 녹아내릴 정도였다. 에테르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한 맹독이 눈앞을 지나갔는데 물러서기는커녕 루이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끝이다.'

위기는 곧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꼬리를 피하자 적의 머리가 훤히 보였다. 루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미소지었다.

"아무리 단단해도 눈까지 단단할 순 없지?"

검은 눈동자에는 웃고 있는 루이의 얼굴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푹!

검이 눈을 뚫고 들어갔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마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직이야."

눈만 찔렸을 뿐 아직 힘은 그대로였다. 루이는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더 깊숙이.

검신이 반이나 파고들자 손을 비틀었다.

휘젓기.

마수의 움직임이 전보다 강렬해졌다. 동시에 눈에서 꾸역꾸역 핏물이 넘쳐흘렀다.

"젠장."

루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마수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땅을 녹이고 있었다.

꼬리와 마찬가지로 독이었다.

꿈틀거리던 마수가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었다.

36시간.

뿔이 있는 늑대보단 힘겨운 싸움이었으나 시스템은 그보다 가치가 낮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루이는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는 자신의 검을 보며 혀를 찼다.

다행이라면 어깨와 달리 녹아내리지 않고 있었다.

루이는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검을 뽑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렸으나 녹아내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검을 살피고 있더니 진이 다가왔다.

"좋은 검이군요."

진의 말에 테슈아의 시선도 향했다. 진이 좋은 검이라고 말할 정도면 명검 수준이었다.

"좋은 검이지."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과 달리 루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가문의 검.

진은 루이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루이는 검에 묻은 독을 털어내고 테슈아를 보았다.

"원래 마수란 게 이렇게 자주 나오는 건가?"

아직 밤의 숲에는 도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세 번째 전투였다.

간혹 마수가 마을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마수가 영역 밖을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밤의 숲이 가까워졌다고 해도 심하군.'

이 정도라면 소문이 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루이의 물음에 테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수가 영역 밖을 떠나는 일은 드무네. 간혹 영역에서 쫓겨나는 녀석들이 있지만 이처럼 많지는 않아."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루이는 테슈아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테슈아가 이곳에 온 이유와 관련이 있나 보군.'

드물다고 했으나 테슈아는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다.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루이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궁금해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루이의 시선이 숲 너머로 향했다.

아직 낮임에도 그쪽만 유난히 어두웠다.

마치 그곳만 빛이 들지 않은 것처럼.

태양이 비추지 않는 땅.

밤의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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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3769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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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숲.

말 위에 있던 소년이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을 떨었다.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잘 가던 말들도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다독여봐도 뒷걸음만 칠뿐이었다. 본능이 앞으로 나가길 거부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행들은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다."

테슈아는 고삐와 안장을 풀고는 말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말은 투레질하더니 그대로 도망쳤다.

"괜찮겠어?"

루이가 데리고 있는 말과는 달랐다.

순백의 발. 한눈에 봐도 귀한 품종이 분명했다.

"안에서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묶어둘 순 없지 않은가."

그랬다가는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루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안장을 걷어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을 욕심내도 의미가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말은 테슈아와 진의 말이 그랬듯이 숲 너머로 떠나갔다.

일행들은 말 안장에 걸쳐놨던 짐들을 어깨에 메고 몸을 돌렸다.

숲이 끝나는 자리.

아니, 숲이 시작되는 자리.

그 경계가 뚜렷했다.

마치 세계가 나눠진 것처럼 색이 달랐다. 푸르름이 사라지고 회색의 숲이 보였다.

마수의 땅.

저주받은 대지.

테슈아가 소년을 돌아보았다.

"떠나려면 지금뿐이야."

테슈아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러나 얼마나 긴장했는지 짐을 메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루이는 둘의 대화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마수의 숲에 들어선 루이는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몇 걸음만 옮겼을 뿐인데 밤이 찾아왔다.

어둠이 일행들을 감쌌다.

"마력이지."

공기가 무겁다. 테슈아의 말에 루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마력이라고?'

마력은 루이도 느껴보았다. 과거에도, 최근 테슈아에게도.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아니었다.

"마력이라고 다 같은 성질은 아니네."

테슈아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공기가 움직였다. 마치 뱀이 기어가듯 테슈아의 손을 쓸어갔다.

"이건 부의 마력. 흔히 어둠의 마력이라 부르는 것이라네."

테슈아의 목소리가 조용히 숲속을 퍼져나갔다.

* * *

마수의 숲이라고 해서 마수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숲 내에서 나름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풀과 나무, 그리고 벌레들뿐만 아니라 작은 동물도 있었다.

'아니, 이것도 마수라고 해야 하나?'

루이는 날아오는 벌레를 쳐냈다.

펑!

따끔한 고통과 함께 벌레가 터져나갔다.

마치 폭탄과도 같았다.

그렇다. 이곳은 밖과는 다른 세계였다.

그렇다고 해서 쉬지 않고 싸우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밤의 숲이라고 해도 각자의 영역이 나눠 있었다.

그 틈새가 바로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경계에 도달한 일행들은 간단한 야영 준비와 함께 잡은 마수의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놨다.

누린내와 함께 기름이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었다.

옆에는 마수를 먹지 못하는 소년을 위해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저 곡물을 간 가루와 육포 한 덩어리를 넣은 것뿐이었지만 매일 나무뿌리나 먹던 소년에게는 이조차도 감사했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어가자 테슈아가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우린 안쪽으로 향할 걸세. 자네는 어찌하겠는가?"

테슈아의 물음. 그들은 심심해서 루이와 동행한 게 아니었다.

목적이 있던 것이었다. 루이는 고개를 주억였다.

"난 이 근처에 남겠어."

슬슬 마수들이 버거워지고 있었다. 테슈아의 말에 따르면 숲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더 강한 마수들이 나온다고 했다.

루이는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과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말이지.'

루이는 속마음을 삼켰다. 루이에게는 성장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렇군."

테슈아는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나 그도 루이가 이럴 선택을 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일행들의 시선이 한 곳에 향했다.

소년.

소년은 일행들의 시선에 머뭇거리다가 루이를 힐끗거렸다.

"너도 봤겠지만 난 너를 챙길 여유는 없어."

설령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소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루이로서는 소년이 어째서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결정되었군."

테슈아는 고깃덩이를 집었다. 어느샌가 고기가 익어 있었다.

일행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고기로 향했다.

그렇게 일행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 * *

내일이라고 말했지만 해가 뜨지 않는 숲이라서 낮과 밤의 개념이 희박했다.

수면 역시 나눠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한 일행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테슈아는 일행들과 헤어지기 전 입을 열었다.

"이 숲에 사는 건 마수뿐만이 아니라네."

다른 식물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용병, 아니지. 그들을 용병이라 칭하기는 어렵겠군."

테슈아는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사냥꾼들. 마수를 전문으로 하는 사냥꾼들 역시 이 숲에 있다네."

용병의 무덤. 그러나 모든 용병이 죽었을 리는 없다.

드물긴 했으나 루이처럼 기사 출신의 용병도 존재했다.

하물며 마수들을 노리는 게 용병들뿐일 리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역을 가지고 있지."

테슈아의 말에 루이의 눈이 빛났다.

이곳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마수들 영역의 경계에서 쉴 수 있었던 건 테슈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에겐 그들의 영역을 파악하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루이도 사람인 인상 계속 싸우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테슈아는 이곳에 머무르려면 그들을 찾으라고 조언해주는 것이었다.

"고맙군."

"친구끼리 이 정도는 당연한 걸세."

테슈아가 싱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옆에 있던 소년이 멍하니 바라볼 정도의 위력.

그러나 루이는 담담했다.

'언제부터 친구였지···.'

묻고 싶었지만 귀찮아질 것 같아서 참았다. 테슈아가 해준 조언을 생각하면 이쯤은 그냥 넘어가도 되었다.

"그럼 볼일이 끝나면 찾아가겠네. 그때까지 무사하게나."

테슈아는 루이의 어깨를 두드리고 진과 함께 몸을 돌렸다.

이 넓은 숲에서 어떻게 찾아오는지 따위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테슈아라면 찾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루이는 옆에 놓인 배낭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단검. 단검이라고 했지만 이십 센티는 넘어 보였다.

기사가 가지고 있던 장비 중 하나였다.

루이의 시선이 소년에게 향했다. 소년은 전과 다르게 이제는 루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난 짐을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어."

루이는 단검과 함께 자신의 배낭을 소년에게 건넸다.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지켜. 밥값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든 버리고 갈 거야."

경고가 아니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루이의 말에 소년은 자신의 손에 놓인 단검을 바라보았다.

기사가 쓰던 한손검도 있었지만, 소년이 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거라면 단검이 나았다.

게다가 기사의 단검 역시 백금이나 마수의 뼈를 섞어서 만든다.

마수에게도 효과가 있을 거다.

소년은 단검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얼굴에는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루이는 소년의 얼굴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

* * *

루이와 헤어진 테슈아와 진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일행들과 있을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

심지어 말을 탔을 때보다 빨랐다.

마수들이 그런 둘을 향해 덮쳐왔지만, 진의 검 앞에 쓰러질 뿐이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마수의 목을 베고 돌아온 진의 말에 테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루이말이지?"

"예, 테슈아님께서 누군가에게 그러한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이네요. 어울리지 않는 방법까지 쓰시면서."

스쳐 가는 인연. 그러나 테슈아는 다시 보자는 말까지 남겼다.

그 특별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진의 말에 테슈아는 미소지었다.

진의 눈은 정확했다. 애초부터 소년을 도와준 이유는 루이 때문이었다.

오로지 루이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귀찮음을 감수한 것이었다.

"진은 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나이에 비교하면 훌륭한 실력입니다. 실전 경험도 많지요. 그러나 그 정도의 인물은 제국에도 있습니다."

드물긴 했으나 없는 게 아니었다.

당장 진만 해도 루이와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력은 달랐다.

아마 루이가 진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도달하지 못하겠지.

"그건 기사로서의 루이지?"

테슈아의 말에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슈아는 웃으며 얼마 전까지 동행했던 루이를 떠올렸다.

같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루이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억양만 듣고 제국 출신인 걸 알아봤어."

"확실히 놀라운 일입니다."

진도 그때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테슈아를 노리는 암살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 뜻은 그도 고대 제국어를 배웠다는 소리지. 다른 언어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깊게."

"...!"

진의 눈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맞는 말이었다.

배우지 않는 언어를 알 수는 없었다.

고대 제국어를 배우는 이들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학자들. 그러나 루이는 학자와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경험을 보면 학문을 좋아할 만한 성향도 아니었다.

'신학에는 관심이 있어 보였지만···.'

같이 다니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테슈아가 말하고 루이가 대꾸하는 식이었다.

진은 유난히 말이 많았던 테슈아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제국식이군요."

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반검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 되는 검이면 장인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익숙해서 놓치고 있었다. 루이의 검은 왕국과는 양식이 달랐다.

'아니, 그 정도의 검을 만들 줄 아는 건 제국뿐이야.'

왕국에 있던 뛰어난 장인들은 이미 제국이 거둬들였다.

"그는 제국 출신이군요."

"그래, 그것도 상당한 가문일 거야."

그제야 진에게서도 흥미가 떠올랐다. 제국의 유명 가문은 진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들이 가진 검술의 특징까지.

그러나 루이가 가진 검술의 기원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너무 많이 변질되었어.'

실전을 겪으면서 루이에게 맞게 진화했다.

테슈아를 바라보는 진의 눈빛이 변했다.

'역시···.'

범인과는 사고가 달랐다. 이 짧은 순간에 그만큼 파악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테슈아가 진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테슈아가 루이에게 흥미를 느낀 건 고대 제국어를 알아봤을 때가 아니었다.

첫 만남.

'사제를 만났을 때 같았지.'

신의 의지가 깃든 고위 사제. 그에게서 받았던 느낌을 받았다.

마법을 익히려면 감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테슈아의 감은 날카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이적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만나온 그 어떤 마법사도 테슈아만큼이나 감이 좋지 못했다.

그런 테슈아가 루이를 봤을 때 사제라고 착각했다.

이후에는 그러한 느낌이 사라졌지만, 루이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며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루이가 보이는 이상한 행동들.

테슈아가 가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언가 있어.'

테슈아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만일 테슈아가 루이에 대해 전부 파악했다면 흥미를 잃었을 거다.

그러나 테슈아가 파악한 부분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일부를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전보다 의문점이 많아졌다.

탐구심이야말로 마법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답을 구하고 진리를 찾는 것이야말로 마법사의 기쁨.

그런 마법사에게 있어서 루이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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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챙겨라.

"씨발."

인정한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루이는 날아오는 돌을 피하며 자책했다.

테슈아 일행들과 헤어지고 십 여일. 그동안 제대로 잔 적은 손에 꼽았다.

특히나 요 며칠은 눈을 붙이기는커녕 무언가를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 원인이 저것이었다.

"우! 우!"

"우끼!"

"...원숭이야? 고릴라야? 한 가지만 하라고."

루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이 날아왔다.

쾅!

방금까지 루이가 있던 자리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말이 돌이지 크기는 바위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어느 생물이든 자신을 욕하는 건 알아듣는 것 같다.

원숭이와 고릴라 사이의 어딘가.

유난히 큰 손은 강철처럼 번들거렸다.

겉보기만 그러한 게 아니라 진짜 강철이었다.

두 손은 강철로 되어있으며 고릴라와 같은 괴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들은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사냥.

그렇다. 지금 루이는 사냥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엿 같네.'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락할 줄은 몰랐다.

하나하나의 힘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집단은 달랐다.

루이의 손에 동료가 죽은 이후로는 접근하지 않고 이렇게 괴롭히기만 하고 있었다.

루이가 지칠 때까지.

루이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배낭을 들쳐멘 소년이 필사적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가득했다.

사실 소년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루이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남고 있었다.

만일 소년이 아니었다면 루이도 진작에 배낭을 버렸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은 밥값은 하고 있었다.

루이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고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라는 거지.'

녀석들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건 루이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루이가 쓰러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루이도 쫓기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어.'

처음에는 몰랐지만 계속 쫓기다 보니 녀석들이 유도하는 게 보였다.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루이의 눈빛이 변했다.

밖에 뭐가 있을진 모르지만,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기동성, 집단적인 움직임.

녀석들과는 상성이 안 맞았다.

루이는 돌을 피하며 녀석들을 살폈다.

'이럴 땐, 가장 위험해 보이는 곳이 정답이지.'

루이의 눈에 녀석들이 뭉쳐있는 게 보였다.

"야."

소년은 루이가 돌아보고 나서야 자신을 불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저길 돌파할 거야."

루이가 턱짓하는 방향을 본 소년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메고 있던 배낭을 다시 한번 조였다.

"힘들면 배낭은 버려도 돼."

"...해보겠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배낭에는 검만 든 게 아니었다.

곡식 말린 것과 육포, 침낭과도 같은 생활에 필요한 것도 들었다.

직접 싸우지 못하는 마당에 이조차도 해내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루이의 말대로 짐이 될 뿐이었다.

소년의 말에 루이도 더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녀석들에게 향했다.

'에테르는 아직 여유가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남발할 수는 없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강림이란 수단이 남아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법이었다.

루이는 적들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