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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굴러 온 호박 (3)

[크워어어어——!]

산맥 안쪽에서 재차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영적인 압력이 담겨 격하의 존재를 억압하는 소리에 할리와 하인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들에게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본능을 자극하는 이 울림이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이 근방에 둥지를 튼 드래곤이 있었나.'

애초에 광활한 북부 산맥의 자락이었으니, 드래곤 한 마리 정도 틀어박혀 있어도 이상할 것 없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가 광기에 이렇게 잡아먹혔다고?'

아까부터 들려오는 놈의 포효 소리가 도저히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언데드인 본 드래곤이 되며 그 소리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겼던 엔트라시오처럼, 지금 놈에게서는 광기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일단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하군.'

몬스터가 광기에 영향을 받기 쉽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은 몬스터보다는 지성체라고 봐야 하는 존재였다.

그것도 아우테리카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최고의 지성과 능력을 갖춘 생명체였는데···.

까드득! 까득!

할리가 부지런히 마석을 씹어 삼키는 와중에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희소하다는 드래곤이 여기에 있었던 데다, 지금 상태까지 좋지 않다는 거지?'

안 그래도 그 개체수가 적었던 그들은 두 차례의 불사왕 사태를 거치며 더욱 수가 줄어, 이제는 거의 멸종 위기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으려는 불사왕은 드래곤에게도 위협적인 적이었고, 당연히 그들은 대륙 연합과 함께 힘을 합쳐 불사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초대 불사왕은 대륙 정복의 최대 걸림돌이 될 드래곤들을 먼저 철저하게 사냥하는 데 주력했다.

설령 다른 전선에서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그들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

그 덕분에 대륙 연합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드래곤들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탄생한 두 번째 불사왕은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후에 이온 대륙에서는 드래곤을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먼 동부 지역에서나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들의 성향을 봐도 쉽게 타락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왜 당장 한스에게 계승된 언데드 드래곤이 엔트라시오 하나밖에 없겠는가.

'그 고고한 자존심 때문에 불사왕에게 잡힐 것 같으면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자폭하는 것은 예사요, 설령 사체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거부 반응이 심해 언데드로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지.'

한스에게 계승된 전대의 정보를 통해 파악한 당사자들의 생생한 정보였다.

심지어 어찌어찌 언데드로 되살렸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한 다른 드래곤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 어떻게든 파괴해 버렸다고 하니.

자신은 물론 동족의 타락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엔트라시오가 한스의 손에 들어온 것만 해도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었어.'

그런데 그런 드래곤이, 대륙 전체에 광범위하게 살포되면서 인간에게도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는 수준의 광기에 잡아먹혀 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사실 어찌 된 일인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크하하핫! 드래곤이라니! 이게 웬 떡이야?"

하인즈가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치켜올렸고, 마석을 전부 먹어 치운 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사실 자세한 내막은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드래곤 고기는 무슨 맛일까!"

신이 난 할리가 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방금 에너지를 빵빵하게 채워서인지 그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용혈이라면 광기만 제거하면 먹을 수 있겠지. 괜찮은 보양식이 되겠군."

그런 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인즈가 가볍게 자신의 연미복을 정리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그의 목적지 또한 포효의 발원지.

드래곤이 있는 곳이었다.

***

-아파, 괴로워, 내가 왜 이런 꼴이, 역시 죽이자!

-그놈 때문이야. 그놈이라니 누구지? 무능한 인간들, 멍청한 엘프들, 냄새나는 드워프들! 또··· 또 있었던 것 같은데?

-다쳤으니 회복해야 해. 회복을 위해선 잘 먹어야지. 그러니까 먹자. 잔뜩 먹자!

[쿠오오오오——!]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레드 드래곤, 헤라토스는 몽롱한 기분으로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니 좀 더 이것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았다.

어째선지 오랜 시간을 정양하며 보내야 했던 몸 상태가 급속도로 회복되어서, 이제는 마음껏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군, 아주 좋아. 생각보다 더 빨리 회복되었어. 역시 이 몸은 위대하다!'

헤라토스는 삼백 년 전 2대 불사왕과의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드래곤이었다.

아직 어려서 참전하지 못했던 초대 때와는 달리, 그가 직접 겪은 전투는 생각보다 더 수월했다.

대륙인들은 물론 드래곤들도 바보가 아니었고, 여러 대비를 통해 전보다 더 효율적인 대처를 했으니 당연한 일.

그러고도 서부 지역이 통째로 넘어가고 제국 하나가 패망하기는 했지만, 초대에 비하면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선방한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활약에 취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여기가 어디··· 아! 내가 만들었던 곳이지. 근데 뭐 때문에 만들었더라?'

결과적으로 불사의 군대와 싸우다 함정에 빠진 헤라토스는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무수한 강자들도 속절없이 죽어가던 대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었지만, 그가 입은 부상은 절대 그렇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거대한 몸 곳곳에 깊은 상처가 생기고, 그곳을 통해 심연을 머금은 죽음의 기운이 파고들었다.

그 어떤 회복 마법도, 성법도 통하지 않는 필사(必死)의 저주에 죽음만 앞두고 있던 헤라토스에게···.

마지막 행운이 찾아왔다.

때마침 몸을 갉아 먹던 저주의 주체인 불사왕이 결사대에 의해 토벌된 것이다.

그로 인해 시시각각 죽음으로 치닫던 그도 기사회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위중한 상태였던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회복을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을 사용했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맞아. 이곳에서 나가려고 했지. 배가 고프니 오랜만에 실컷 먹어야겠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북부 산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안전을 위한 온갖 결계를 설치해 동면 준비에 들어갔다.

드래곤의 동면은 수백 년간 이어지며, 그동안 신체의 성장과 회복력이 극도로 활성화되는 만큼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친 몸으로 그 모든 결계를 설치하는 건 정말 죽을 노릇이었지만, 그동안 아껴왔던 온갖 마도구들과 자기 피까지 매개로 사용해 기어코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마지막 행운이 지나고 그에게 찾아온 불행이 있었으니—.

회복력을 최대한으로 증폭하기 위해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으고, 몬스터를 유인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결계도 함께 설치한 것이었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재차 심연이 열려 세상 전체에 '광기'가 퍼지고, 그의 영역에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의 몸에도 그것이 가득 쌓이게 될 줄은.

당연히 결계에는 온갖 이상 상황에 대한 방비가 갖춰진 상태였지만, 거기에 심연의 광기에 대한 대처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동면에 빠진 그의 몸속에 계속해서 광기가 쌓여가고, 그것은 마침내 그의 뇌리를 완전히 오염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크워어어어——!]

펄럭—! 펄럭—!

자신이 만든 둥지에서 빠져나온 헤라토스가 거칠게 날갯짓했다.

몸은 이미 깔끔하게 회복된 뒤였다.

제법 오랜 시간 동면하기도 했거니와, 그 몸에 축적된 광기의 양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으니까.

'아아— 이 상쾌한 공기. 그런데 조금 아쉽군. 여기에 피 냄새만 조금 더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타는 냄새도 좋고.'

광기에 완전히 잠식당한 그의 사고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온갖 비약을 거쳐 황당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인근에 인간 도시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다 브레스 한 발 쏴 주면 되겠군!'

그럼 타는 냄새와 비명 소리를 한 번에 만끽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먹이들을 생으로 씹다 보면 혈향도 함께 음미할 수 있겠지.

드래곤인 헤라토스는 마나를 흡수하는 것만으로 살 수 있어 무엇을 먹을 필요도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광기에 잠식된 그는 영역 주변에 널려있는 몬스터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인간들이 많이 있을 만한 곳으로 가기 위해 거리를 가늠했다.

'그럼, 가 볼··· 응?'

그 순간.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전신에서 폭발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존재.

'···인간? 아니, 정말 인간 맞나? 거기다 하나 더 있었군.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이건 뱀파이어인가?'

주르륵—

그들을 인식하자 그의 거대한 입에서 군침이 흘러내렸다.

두 눈은 이미 새빨갛게 변해 한 톨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헤라토스는 자신의 상태에 조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단, 전채 요리로 저것들부터 먹어볼까···?'

갑자기 치솟는 식욕에 지배당했을 뿐.

"카하하핫! 진짜 살아있는 드래곤이잖아! 와우, 이런 건 처음인데!"

"완전히 광기에 잡아먹혔군.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는가가 관건인가."

순식간에 헤라토스의 앞에 도달한 유사 인간과 뱀파이어가 차분히 그를 관찰하며 저마다의 평을 내놓았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식자재들이 뭐라 떠들든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

'저 육즙이 많아 보이는 놈부터 먹을까? 씹을 때마다 생명력이 팡팡 터져서 맛있을 것 같은데. 뱀파이어도 제법 별미가 될 것 같고.'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의 뛰어난 머리가 자신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광기에 물들었던 뇌가 재차 논리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왜 자신이 저들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는지.

그 결과.

[크어엉——!]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래! 그냥 둘 다 한꺼번에 먹어버리면 되는 것을!'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본격적인 식사는 인간 도시에서 할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그냥 한입에 털어 넣어 버리고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헤라토스는 한층 강화된 육체 능력으로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고···.

"후웁—!"

후욱— 콰아앙—!

이미 전투 태세였던 할리는 가볍게 그 자리를 피하며,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손으로 그 거대한 머리를 올려 쳐 버렸다.

[끄르륵——?]

갑작스런 충격에 헤라토스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그의 콧잔등에 시커먼 인영이 소리 없이 내려서고.

"실례."

쉬악— 촤악!

그의 양손에서 사출된 날카로운 핏줄기가 순식간에 그 거대한 눈동자를 베어버렸다.

헤라토스가 엄청난 반응속도로 눈꺼풀을 덮었지만, 어디 하인즈의 공격이 그런 얇은 가죽으로 막을 수 있기야 하던가.

눈꺼풀이 베이며 양 눈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분노였을까.

피가 흐르는 눈을 질끈 감은 드래곤의 거친 포효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이 폭발하며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 공격에 잠시 뒤로 물러섰던 하인즈는 재차 놈에게 달려들려다 잠시 멈칫했다.

"···벌써 회복됐군."

어느새 붉게 이글거리는 눈을 뜬 헤라토스의 눈은 상처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채였다.

'눈꺼풀 때문에 공격이 좀 얕게 들어갔다고 느끼긴 했지만.'

놈의 반응 속도와 가죽의 내구성도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다 저런 무지막지한 회복력과 압도적인 거체에서 가해지는 파괴력까지 생각해 보면···.

"카하핫! 이거, 우리 둘이서는 힘들겠는데?"

물론 하인즈와 할리가 놈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신체 스펙도 절대 무시할 수 없거니와, 보아하니 저 드래곤은 광기로 육체 능력이 급증한 대신 마법 능력은 오히려 퇴화한 것 같았으니까.

거기다 드래곤이란 명성에 맞지 않게 지능적인 면은 전혀 없고, 그저 본능에 충실한 거대한 도마뱀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정도 덩치의 도마뱀이 저런 재생력을 가졌으면··· 백날 두들겨봐야 소용없겠군.'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무한의 굴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니, 보유한 에너지에 한계가 있는 이쪽과 다르게 드래곤은 주변 기운을 빨아들여 회복할 수 있으니.'

결국 그들이 물러나는 결말밖에 없을 터.

저 거대한 덩치의 도마뱀을 상대하기에는 그들과 상성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만 있다면 그조차 무시할 수 있겠지만···.

진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와 야만 대전사 할리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안 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정도 수준의 상대를 데려오는 수밖에.

그리고.

허공의 한 지점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뭉쳐 들었다.

고오오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던 어둠은, 이윽고 한 존재를 그곳에 불러내고서야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태양이 버젓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세상의 밝기가 한순간에 내려갔으며.

[크흐흐흣— 광기에 물든 드래곤이라니. 이거 좋은 재료가 될 것 같구나!]

드래곤들을 멸종 위기로 내몬 재앙이.

그곳에 강림했다.

#109

광룡 사냥 (1)

스아아—

막대한 흑마력이 사위를 뒤엎으며 도주를 막기 위한 결계를 형성했다.

이 정도까지 판을 벌여놓고 이제 와서 놈을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검은 기운이 사방을 감싸자, 이제 이 결계 내부에는 오직 그들 넷만이 존재했다.

뿌드드득—!

"크하핫! 일단, 어디 되는대로 해 볼까?"

온몸에서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야수와 같이 몸을 부풀리는 할리.

"흠, 역시 놈의 피를 곧바로 조종하는 건 힘들 것 같군. 미쳤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거겠지."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피를 뽑아 날카롭게 벼리는 하인즈 2세.

[호오? 다른 생명력을 흡수한 흔적이 있구나. 그게 광기의 원인인가? 그래도 드래곤의 정신 방화벽이라면 그 정돈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동면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군.]

음산한 기운을 뿌리며 실험체를 보는 눈으로 차분하게 분석하는 한스.

마지막으로···.

[크르르르—— 부, 불사왕···! 불사왕——!!]

한스의 등장 직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얼어있던 드래곤 헤라토스.

하지만 정지 화면처럼 굳어있던 그가 어느 순간 서서히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에서 이글거리던 붉은 광기의 불꽃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터질 듯이 팽창했다.

휘오오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사방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주변에 광풍이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기류의 변화에 슬쩍 주변을 둘러본 할리는 곧바로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기는 그저 여파에 휩쓸린 것뿐이야. ···이동하는 건, 대기에 흩뿌려져 있던 광기로군.'

일대에 퍼진 미세한 광기의 입자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며, 그 중심에 있던 드래곤에게 흡수되었다.

[키야아아아——!]

재차 광기에 찬 포효를 터트리는 헤라토스.

그리고 그 앞에서 대치하던 셋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는 놈의 모습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 좋아, 좋아. 알아서 농축까지 시켜 주다니 횡재했네. 저건 할리도 못 하는 건데.'

평생을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 성장하는 드래곤의 특성 탓인지, 놈은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달리 자의적으로 인근의 광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알아서 보상의 수준을 높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방해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불사왕! 죽인다! 죽여 버리겠다——!]

폭풍이 서서히 잦아들고, 마침내 모든 기운을 수습한 광룡 헤라토스가 한스를 노려보며 분노를 토했다.

놈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비늘은 한층 짙은 핏빛이 되었고, 지금도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육체는 한껏 벌크업되어 내재한 폭력성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광기는 숙주의 이성을 잠식해 강제로 수명과 생명력을 깎아 막대한 힘을 부여한다. 그 주체가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이라면 효과는 말할 것도 없겠지.'

거기다 좀 전의 과정을 통해 놈의 드래곤 하트에 응축된 광기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 여파로 인근 대기에 녹아있던 농도가 현저하게 감소했을 정도니···.

'금방 회복되지 않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넓은 범위까지 영향을 미쳤나본데.'

범위가 좁았다면 다른 곳에서 흘러온 광기들이 금세 빈자리를 채웠을 터.

그야말로 광룡(狂龍)이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캬아아아——!]

눈이 뒤집힌 헤라토스가 미사일처럼 한스에게 쇄도했다.

놈의 주변을 감싼 압도적인 마력이 그 움직임을 보조해,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은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흐음, 굉장히 흥분했군. 전대 불사왕에게 원한이 있는 녀석인가?]

물론 그런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어느새 공격 궤도에서 벗어나 옆으로 이동한 한스는, 그 육중한 질량 병기의 여파로 흔들리는 대기를 느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놈을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렴 자신은 드래곤을 수도 없이 사냥한 불사왕의 후예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래, 역시 적당히 하는 게 낫겠군.]

한스가 전력으로 나서면 놈의 육체도 오염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얻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언데드 드래곤 하나뿐이다.

그것도 나쁜 건 아니다만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안이 버젓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면 일단 놈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겠는데.'

마침 지금 상황에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엔트라시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흑마력이 가득 담긴 한 마디.

그와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의 늪이 빠르게 지면을 뒤덮었다.

그리고.

푸확—!

바닥에 깔린 꿀렁이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용의 뼈가 몸을 일으켰다.

[크워어어——!]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긴 포효가 공간을 진동시키자.

[키야아아——!]

광기에 물든 울음이 그 뒤를 이었다.

한 자리에서 엔트라시오와 헤라토스, 타락한 두 드래곤의 시선이 부딪쳤다.

한때는 동족이었으나 이제는 적이 되어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존재.

이후의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오오오——!]

[캬아아아——!]

콰앙—!

곧 거대 괴수 두 마리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아마 생전에 제법 나이가 있는 녀석이었던 듯, 골격 자체는 엔트라시오가 헤라토스보다 3할가량 더 큰 편이었다.

하지만 뼈만 남은 몸으로 오히려 광기로 강화된 육체를 지닌 헤라토스를 근접전만으로 상대하기엔 무리인 게 사실.

거기다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기운도 봉인한 상태였으니, 엔트라시오는 그저 놈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애초에 그걸 원해서 부른 것이었지만.

'과하게 힘을 쓰면 고기나 피가 전부 상할 거 아냐.'

우리 아이들 먹일 영양식인데 유기농은 못 줄지언정, 농약은 최소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스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래곤 두 마리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마법진이 주변 공간을 수놓으며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순식간에 갖가지 신비를 엮어냈다.

'일단 저주류는 빼고 가 볼까.'

중력 사슬, 공간 고정, 충격 흡수 등.

하나같이 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들이었다.

커다란 덩치로 끈질기게 매달려오는 언데드 소환수와, 뭘 하려 할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흑마법사.

잠깐 방심할 때마다 인지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는 암살자와 미친놈처럼 달라붙는 야만 전사까지.

그렇게 다종족 파티의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광룡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콰드득!

광룡의 거대한 아가리가 본 드래곤의 목을 물어뜯었다.

생명력을 대가로 강화된 턱 근육과 날카로운 이빨은 드래곤 하트에서 공급되는 강대한 마력을 담고 있었고···.

콰지직— 콰직!

그 파괴력은 본 드래곤에게 각인된 방어 결계를 꿰뚫고 직접 목뼈에 도달하기에 충분했다.

[쿠오오——!]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엔트라시오의 목뼈.

끊임없이 공급되는 흑마력이 뼈를 강화하며 손상 부위를 실시간으로 수복하고 있었으나, 계속 내버려 두면 목이 완전히 부러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봐야 다시 붙이면 되니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 불사성이야말로 언데드의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

온갖 제약을 붙여 놓는 바람에 광룡에게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엔트라시오는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까다롭네.'

그렇지 않아도 항마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드래곤인데, 저 광룡은 거기서 더 강화돼 한스의 흑마법으로도 오래 붙잡고 있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냥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그 방법을 쓸 수가 없으니···. 딜레마로군.'

역대 불사왕이 드래곤을 쉽게 사냥했던 것도 그들이 다뤘던 죽음의 기운 덕분이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치명적인 그 맹독은 광룡에게도 충분히 유효할 테지만, 엔트라시오에게는 제약을 걸었으면서 정작 자신이 쓸 수는 없는 노릇.

[흐음,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볼까.]

유유자적 싸움을 내려다보던 한스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막대한 마력으로 한순간에 만들어진 수많은 마법진에서 재차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검은 섬광이 광룡의 몸 곳곳을 꿰뚫고,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그 몸을 감전시켰다.

거대한 폭발이 놈의 머리를 뒤흔들고, 단단한 만년빙이 관절 부위를 얼려 버렸다.

그렇게 광룡의 무지막지한 항마력조차 우습게 뚫고 들어오는 마법의 폭풍에 잠시 놈의 주의가 돌아간 순간.

촤악—!

어느새 유령처럼 나타난 하인즈가 길게 뽑아낸 피의 칼날로 놈의 턱 근육을 베어버리고.

"으하하핫!"

순식간에 몸을 기어오른 할리가 그 턱에 자신의 몸뚱이를 미사일처럼 꽂아 넣었다.

[크악——?]

그 틈을 타 광룡의 입에서 목을 빼낸 엔트라시오가 이번엔 자신이 먼저 놈의 목에 이빨을 틀어박았다.

잔뜩 금이 가 있던 목뼈는 이미 수복된 상태.

하지만 그건 턱 근육이 베였던 광룡도 마찬가지였으며, 목을 물린 것 또한 놈에게는 치명상이 아니었다.

'지적 능력이 퇴화해서인지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드래곤이란 종은 원래 의지만으로 마력을 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효율이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한껏 강화된 놈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퍼어엉—!

엔트라시오가 물고 늘어진 목 부근에서 고도로 응집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광룡은 그 여파로 자신의 몸이 상하든 말든 연신 충격파를 터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찌지직, 쫘아악—!

이빨에 걸린 살점이 사정없이 찢어발겨지며 사방으로 혈액이 비산했다.

덕분에 놈은 목을 물린 상황에선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일반적인 생명체였다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렀을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아하니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았지만.

'대신 마력을 원초적으로 쓰는 쪽이 더 발달했군.'

안 그래도 광기로 강해진 신체 능력에 마력까지 퍼부어져 근력, 순발력, 재생력 등이 폭증한 건 기본.

갑옷처럼 몸에 둘러진 마력 방벽, 이빨과 발톱에 어린 공격력 강화, 한 곳에 응집시켜 폭탄처럼 터트리는 충격파까지.

거기다···.

[흐우우웁——]

폭발적인 순발력으로 거리를 벌린 광룡이 한순간에 주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마력이 놈의 목구멍으로 밀집했다.

'브레스···! 빨라!'

순식간에 모여드는 그 파괴적인 마력의 유동은 예상했던 속도를 크게 웃돌았다.

거기다 그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을 지경.

뒤늦게나마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엔트라시오도 급하게 브레스를 준비했다.

양쪽에 급격하게 마력이 몰리기 시작하자, 주변 공기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붉은빛과 검은빛이 부딪쳐 만들어진 거대한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고.

양측에서 쏘아진 용의 숨결이 중간에서 서로의 힘을 갉아 먹은 덕분에, 살짝 주변 지형이 바뀌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한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다시 맞붙어 뒤엉키는 두 드래곤을 바라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의 브레스가 완성되는 속도와 출력이 상정했던 것 이상이었으니까.

결국 한스가 엔트라시오에게 개입해, 힘을 강제로 끌어 올리고 나서야 온전히 상쇄할 수 있었다.

[그놈 참 팔팔하구나. 과할 정도로.]

슬쩍 손을 내저어 광룡의 몸을 검은 사슬로 휘감으면서도 한스는 고민을 거듭했다.

정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그냥 죽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의외로 그 해결책은 한스가 아닌 다른 파티원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

거칠게 요동치는 광룡의 몸뚱이 위를 아무런 기척 없이 거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촤악—!

그가 휘두른 예리한 피의 손톱에 단단한 용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벌어졌던 상처가 급속도로 수복되며 그 자리에 다시 비늘이 자라났다.

"퉤! 역시, 용혈 자체는 좋은데 거기 담긴 광기가 방해되는군."

하인즈는 입에 넣었던 용의 피를 다시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피에 깃든 원주인의 염(念)이 이미 광기에 완전히 짓눌린 상태라 흡혈 의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놈의 비늘이 워낙 단단한 탓에 전력을 다해야 상처를 입힐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피를 봐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으니 영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뱀파이어와의 상성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이도 있었으니···.

콰지직! 콰득!

"크하핫!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구나! 무한으로 재생하는 고기라니!"

광룡의 가슴팍에 기어올라 비늘을 뜯어내고 그 살점을 물어뜯고 있는 할리였다.

#110

광룡 사냥 (2)

금이 가고 부서지면서도 쉴 새 없이 수복하며 엉겨 붙어 오는 본 드래곤과, 항마력을 뚫고 들어오는 마법을 난사해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불사왕.

날갯죽지 같은 약한 부위를 노려 운신을 방해하는 뱀파이어에,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모를 유사 인간··· 아니, 기생충 한 마리까지.

[키야아아——!]

답답한 상황에서 밀려드는 짜증과 분노에 헤라토스가 다시 전신을 뒤틀며 온몸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고오오—!

거친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적대적인 마력은 가까이 붙어있을수록 파괴적이기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놈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피를 이용해 연신 광룡의 몸을 썰어대던 하인즈는 미련 없이 몸을 빼냈지만···.

"엇차!"

푸욱—!

이 명당자리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할리는 자신을 강제로 밀어내려는 힘에 버티며, 손톱과 발톱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놈의 상처에 박아 넣었다.

뿌드득— 찌직!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압력이 놈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지고.

그간 진화를 거듭해 어지간해선 흠집도 나지 않았던 그의 몸 곳곳이 찢기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재생」으로 회복한다 해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할리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최고의 보양식이 이렇게 코앞에 널려 있는데, 이 정도 상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육체변이」를 최대한으로 발휘해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 뱀처럼 늘어나는 턱, 그 안에 빼곡하게 돋아난 톱니 같은 이빨들까지.

콰직! 콰지직!

할리는 파괴되는 자기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용의 피와 살을 탐했다.

그 극상의 식재료들은 「괴식」의 힘을 빌려 끊임없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그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되어 부서지는 몸을 더욱더 강하게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 행위가 계속해서 반복되자···.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괴식」이 특수스킬「폭식」으로 진화합니다."

마침내 「괴식」스킬이 한계를 넘어 진화에 이르렀다.

'하긴. 용의 피와 살을 그렇게 먹어 치웠는데 당연한 건가.'

스킬을 진화시키기 위해선 숙련도와 별개로 각자가 요구하는 '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광룡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그 살을 산채로 뜯어먹는 건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업적이다.

거기다 할리의 괴물 같은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간 끊임없이 사용한 만큼, 자잘하게 누적된 경험치도 적지 않았을 테고.

마침 광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의 급류가 멈춘 틈을 타 슬쩍 새로 얻은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괴식」은 소화하기 힘든 것들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어, 더 많은 양을 빨리 먹을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가 필수인 그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이번에 진화한 「폭식」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이거, 할리와 시너지가 장난 아니겠는데?'

그는 시선을 내려 상처에서 다시 돋아나기 시작한 광룡의 비늘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뽑아낸 후 살점만을 취했었지만···.

쩌억—

이번엔 그냥 입을 최대한으로 벌리고 그대로 물어뜯었다.

까드득!

원래도 단단했던 용의 비늘이 '광기'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되어, 진혈을 넘어선 하인즈조차 전력을 다해야 부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콰지직! 콰직!

그것은 할리의 이빨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유리처럼 부스러졌다.

입에 넣고 씹는 행위에 한해서 주어지는 「폭식」의 강한 보정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광룡의 일부를 먹어 치우는 것과 동시에, 그 '먹는' 행위를 통해 놈의 신체에 흐르던 무언가도 함께 뜯겨 나왔다.

'이건?'

그것의 효과는 곧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가 물어뜯었던 부위의 재생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으니까.

'이거 굉장한데?'

단순히 이전보다 더 잘 먹게 된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폭식」의 대상에 속한 개념까지 취할 수 있게 된 건가?'

쉽게 말해, 방금 그는 헤라토스의 살점뿐만 아니라 그 부위에 깃든 '재생력'과 '광기'까지 통째로 뜯어먹어 버린 것이었다.

'아직 급이나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효과가 완벽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거기다 그에게 '온전히 먹고 소화 시킨다'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돌연변이」가 새로운 정보를 각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육체변이」를 사용하자—.

그의 한쪽 팔에서 짙은 핏빛의 비늘 하나가 돋아났다.

'···광룡의 비늘.'

원래 뿔을 만들기 위해선 대상의 뿔을, 꼬리를 만들고 싶다면 꼬리를 먹어야 했다.

당연히 비늘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모든 유전자 정보가 깃들어 있는 마석을 한계치까지 섭취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였다면 드래곤 하트를 먹기 전까진 비늘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텐데.'

아무리 「괴식」이 대단하다고 한들 용의 비늘까지 온전히 소화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아직 완전하진 않군. 그래도 비늘 하나에 이 정도면 흡수 효율도 상당히 높아졌는데?'

지금까지도 용의 몸뚱이를 씹어 먹으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 육체를 진화시키고 있었지만, 마석이 아닌 만큼 효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체화한 비늘의 완성도를 보니 흡수율이 몇 배는 더 증가한 것 같았다.

생각이 더 깊게 뻗어나갔다.

할리의 「돌연변이」는 다양한 종의 유전자를 수집해 완전 진화 생물이 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의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이계에 존재하는 용의 피를 이용해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

그리고 이 아우테리카에서 드래곤은 생명체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종족이었다.

심지어 지금 광룡은 '광기'에 침식되어 개체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육체 진화를 이룩한 상태였으니···.

'일단 거기에 딸린 페널티는 차치하더라도 말이지.'

이 몸뚱이도 절대 평범하지 않으니 그 정도는 할리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터.

"쓰읍— 군침이 도는군. 크흐흣!"

당연히 놈의 드래곤 하트를 먹는다고 완전히 용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효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실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광룡의 심장이 할리를 좀 더 완성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줄 거란 사실이었고···.

때마침 그에게 그것을 위한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크하핫! 이놈! 어디 심장이나 한번 보자꾸나!"

흥분한 할리가 다시 광룡의 상처를 물어뜯었다.

「폭식」의 힘으로 턱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빨이 닿는 족족 살점이 떨어져 목구멍으로 넘어와 흡수되었다.

콰득! 콰드득!

그는 굴을 파듯 용의 피와 살을 먹어 치우며 상처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원래라면 상처가 급속도로 재생되면서 외부의 진입을 저지해야 했지만···.

놈의 재생력이 억제된 이상,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캬르륵——?]

한스가 불러낸 검은 사슬에 휘감겨 본 드래곤과 엎치락뒤치락하던 광룡 헤라토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웬 유사 인간이 매달려 벌레처럼 그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자신의 단단한 몸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믿고 적당히 견제만 하고 있었거늘.

그런데.

재차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그의 체내를 흐르던 무언가가 뜯겨져 나갔다.

[키야아아——?!]

상처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현저하게 느려진 재생 속도.

가슴에 매달린 기생충은 조금씩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며 심장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광룡이 거칠게 몸을 뒤틀었지만, 한스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쿠오오오——!]

자신의 가슴살을 후벼 파려는 광룡의 손길을 막기 위해 엔트라시오가 몸을 날려 놈을 끌어안았다.

타락한 두 드래곤의 격렬한 포옹이 이어지는 와중, 본 드래곤의 벌어진 갈비뼈 사이로 할리의 하체가 버둥거리며 놈의 몸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크흐흣— 얌전히 있어라. 금방 끝날 테니까. 이거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 완성되어간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기분이 좋구나.]

지금의 할리를 만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한스가 뿌듯하게 말하며 다시 놈을 억누를 마법을 발동했다.

광기에 물든 드래곤을 산 채로 제압하는 것은 그에게도 제법 버거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보람마저 느끼고 있었다.

[캬아아악——!]

생명의 위기 때문인지, 헤라토스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다시 한번 주변의 광기가 몰려들며 놈의 육체를 더욱 강화시켰다.

뿌드득! 뿌드드득!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거칠게 타오르는 검붉은 마력.

광룡 헤라토스는 자신을 끌어안은 엔트라시오를 깨물고 쥐어뜯으며 전신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 속에 파고든 기생충을 죽이기 위해 신체를 조절해 근육을 조이는 것은 물론, 자기 몸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고 고밀도의 마력을 체내에 직접 투사하기까지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콰아앙! 콰드득!

기생충을 제거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챈 광룡의 반항이 더욱 거세졌다.

엔트라시오는 악착같이 놈에게 매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모든 마력을 방어와 수복에만 쏟아 부었다.

그 때문에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해 점차 부서져 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더 급한 상황인 것은 오히려 헤라토스 쪽이었다.

[흐우우웁——]

어찌나 급했는지, 브레스까지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브레스를 사용할 생각인가? 이젠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군."

놈의 턱 아래에는 이미 하인즈 2세가 대기하고 있었다.

「은폐」와 「투명화」까지 사용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그동안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지. 상대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이대로 끝내면 자존심 상하거든."

그의 손에 쥐어진 커다란 피의 대검이 조용히 일렁였다.

그간 「정제혈정」을 사용하기 위해 모아왔던 여분의 혈액을 모조리 투자한 그 검에는, 「혼혈진화」의 영향으로 한계까지 진화한 하인즈의 흡혈 인자가 가득 담겨있었으며—.

그것은 「피의 신비」의 효과를 극한으로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매개체였다.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군. 그럴 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내버려 둬도 별 상관없다고 여긴 건가.'

놈의 감지력을 생각하면 하인즈의 「은폐」 정도는 조금만 집중하면 간파할 수 있을 텐데.

이 상황에서도 한스와 엔트라시오를 견제하는 모습만 보일 뿐,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후회하게 될 테지만.

핏빛으로 발광하는 그의 눈이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유동하는 마력의 흐름을 「간파」한다.

격의 차이로 광룡의 체내를 온전히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이 정도로 격렬한 마력의 유동이 있다면 그렇게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저기군.'

하인즈가 천천히 왼쪽 허리춤으로 옮긴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은 하인리히가 「종합 무기술」을 통해 배웠던 검술의 준비 자세였다.

'「로지아 성투법」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어차피, 지금 할 일은 그리 대단한 검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

「가속」을 사용해 전력으로 베어낼 뿐.

휘두르는 순간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피의 대검이 날카롭게 공간을 갈라—.

극초음속을 넘어선 그 검 끝이, 아무런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광룡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쉬아아악——!

쿠구구궁—!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을 따라 충격파가 퍼지고.

푸화아악—!

광룡의 그 커다란 목이 절반이나 잘려 나가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허얽——?!]

거기다 그곳을 통해 한창 브레스를 뿜기 위해 밀집시키던 마력까지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안 그래도 치명적이던 상처가 너덜너덜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컥, 크헉——?!]

지금까지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광룡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으니···.

'이 정도 치명상까지 재생하다니. 징그러울 정도군.'

하인즈는 사용한 혈액을 될 수 있는 만큼 회수해 몸 안에 저장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물론 「초재생」이 있는 자신도 저 정도는 가능했지만, 솔직히 저 덩치로 저런 재생력은 반칙이 아닌가.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그래, 이제는 놈이 재생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할리가.

마침내 놈의 심장부를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111

광룡 사냥 (3)

막 광룡의 몸속을 파고들기 시작했을 무렵.

할리는 이 작업이 생각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시간 호흡할 수 없다는 건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이 적대적인 공간 자체가 커다란 난관이었던 것이다.

꾸드드득!

사방에서 그를 조여 오는 근육의 압력을 버티고,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라도 먹는 것을 멈추면 그대로 바깥으로 밀려나 버릴 테니까.

'재생력을 억제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할리가 직접 물어뜯은 부위는 회복 속도가 극도로 저하되어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부위는 사정이 달랐다.

손상 부위를 직접 재생하는 게 힘들어지자, 놈이 멀쩡한 부위를 암세포처럼 증식시키고 밀어내서 빈 곳을 메우려 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일반적인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광룡이었기에 가능한 일.

물론 일반적인 재생보다 그 속도가 느렸던지라 「폭식」으로 살점을 먹어 치우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몸을 이렇게 마음대로 부풀리고 바꾸는 게 말이 돼? 물리법칙 어디 갔어, 물리법칙!'

할리는 내심 투덜거리며 마음대로 변형시킨 자신의 커다란 입과 톱니 같은 이빨로 계속해서 굴을 파고 들어갔다.

3미터가 넘었던 그의 몸 또한, 수월한 굴착 작업을 위해 최대한도로 압축해 늘씬하게 빠진 상태였다.

그렇게 그가 뻔뻔한 불만을 토해내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던 순간.

쿠구궁—!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충격파가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광룡의 체내에서 직접 발현된 고밀도의 마력 파동이 강한 살의를 머금고 할리의 전신을 으스러뜨리려 하는 것이다.

뿌드득! 뿌득!

전에 바깥에서 버텼을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이번엔 발원지가 그를 둘러싼 사방인 것은 물론, 그 거리도 단순히 가까운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표적을 가리지 않고 주변 공간 또한 괴사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끔찍한 압력은, 그를 한 줌 핏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침입자를 배제하겠다는 그 광룡의 의지에, 할리는···.

으적으적!

열심히 입을 놀리며 몸을 회복시킬 뿐이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끈질기기도 하지.'

바깥에서 겪었을 때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었지만, 그가 입은 손상 정도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얼마든 회복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는 소리.

그 원인은 그의 달라진 외견, 정확히는 피부에 있었다.

'광룡의 비늘이 생각보다 더 효과가 좋은데.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상상 이상이야.'

변이한 입과 갈고리 같은 손발톱은 이전 그대로였지만, 추가로 검붉은 비늘이 그의 전신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이젠 차마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습.

진입 전에 다량의 비늘을 섭취한 덕분에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더 완성도가 높아진 것들이었다.

'이게 아니었으면 정말 오래 가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을 것 같은데.'

광룡의 비늘로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분에 지금처럼 뼈가 박살 나고, 핏줄이 터지고, 내장이 으스러지는 정도의 소소한 피해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게 없었으면 회복 속도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빈사 상태로 소환 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지금은 아니지만.'

「폭식」의 효율이 증가해 에너지를 더 빨리 수급할 수 있게 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이제 놈의 '재생력'까지 직접 흡수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최상급 보양식인 용 고기만 있다면, 이 정도 부상은 금방 떨쳐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할리가 열심히 턱을 움직이자, 적대적인 마력에 장시간 노출돼 부서졌던 그의 육체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렇게 파괴와 재생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그것이, 드디어 어느 임계점에 도달했다.

"개체의 회복력이 한계를 초월했습니다. 스킬「재생」이 스킬「초재생」으로 진화합니다."

광룡의 '재생력'을 끊임없이 강탈한 끝에, 마침내 할리의 재생력도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오— 좋아.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드디어!'

「초재생」의 효과는 곧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사방에서 살덩이가 조여 오고, 마력 파동 또한 필사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건 곧 작업 효율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콰드득— 콰득!

부지런히 섭식 행위를 이어가느라 시원한 웃음으로 기쁨을 표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

그리고 좋은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드디어, 도착했다!'

마침내 할리는 마주할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거칠게 맥동하는 '광룡의 심장'을.

사실 놈의 필사적인 방해 때문에 오래 걸렸을 뿐, 그가 이동한 거리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걸린 시간도 10분이 채 안 될 정도였으니까.

'저것이.'

할리는 자기 상체만한 용의 심장을··· 정확히는 그 한쪽에 융합되어 은은한 붉은빛을 내뿜는 결정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바로 드래곤이 가진 힘의 근원이자 최고의 마석이라고까지 불리는 귀물(貴物).

드래곤 하트였다.

그런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저건 매개체로 쓸 수 없겠구나.'

사실 드래곤 하트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확실히 정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할리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는 쪽으로 저울이 기울긴 했으나, 그것을 매개로 탄생할 새로운 아바타도 무척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눈으로 확인하자 그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스킬이 반응하지 않는군. 역시 심연의 광기에 오염된 게 문제인가?'

이 광룡의 드래곤 하트는 「커스터마이징」의 제물로 쓸 수 없다는 것을.

'내부의 마력이 완전히 광기와 뒤엉켜서 변질됐어. 이건 드래곤 하트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광기의 괴물'의 정수라고 봐야 하겠는데.'

거기다 무슨 조화인지, 그것을 중심으로 뿌리가 퍼진 것처럼 놈의 전신에 깃든 광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몬스터들에게선 보지 못한, 훨씬 진보된 방식이었다.

'···과연, 심장을 매개로 전신의 광기를 중앙에서 제어하고 있는 건가?'

역시 드래곤이라고 해야 할까.

광기에 잠식당한 상태에서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나름의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그저 몸 곳곳에 안개처럼 퍼트려 놓은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이 방법이라면 광기를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을 터.

'오호, 이거 꽤 쓸 만해 보이는데?'

그리고 그건 할리에게도 나쁠 것 없는 소식이었다.

어차피 전부 자신의 것이 될 게 아닌가?

사납게 미소 지은 할리가 심장을 향해 기어가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두쿵—! 두쿵—!

위기를 감지했는지 심장이 한층 더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마력과 광기가 한데 섞여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크하하핫! 앙탈 한번 까탈스럽구나! 얌전히 이 몸과 하나가 되어라!"

그는 몸에 가해지는 부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쩍 벌려 변질된 드래곤 하트를 한입에 깨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광룡 헤라토스의 전신에 퍼진 '광기'가···.

「폭식」에 의해 서서히 뿌리 뽑히듯 뜯겨져 나왔다.

***

[크허억——!]

쿠웅—!

목에 입은 치명상을 회복하면서도 연신 발버둥 치던 광룡의 몸이 한순간에 정지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놈의 몸속에 침입한 할리가 그 심장을 먹어 치우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원체 생명력이 강했기에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놈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무력화된 광룡의 옆에.

"호오···. 이거, 지금이라면?"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하인즈가 연신 몸을 꿈틀거리는 놈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놈의 몸에 담긴 광기는 심장과 연결되어 통제되고 있었고, 지금은 할리가 그것을 통해 광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고구마 줄기를 캐듯··· 아니, 기다란 면발을 들이키듯이.

촤악!

하인즈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자, 반항하지도 못하고 누워있던 광룡의 목이 베이며 재차 피가 튀었다.

이전보다 확연히 약해진 방어력에 생각보다 더 깊은 상처가 생겨 버렸다.

"재생력도··· 줄었군. 그것도 상당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급히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하인즈는 조심스럽게 뻗은 손끝에 용혈을 묻힌 후, 그대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흠."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가에 천천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극상의 용혈에 만족한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온 상태였다.

'할리와의 연계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별것 아니지.'

하인즈가 마신 정화된 혈액에는 심장부에서 광기를 제어 중인 할리의 세심한 배려가 담겨있었다.

목의 상처로 가는 혈액을 여러 번 걸러 최대한 깨끗한 피를 공급하도록 손을 쓴 것.

물론 그런 노력에도 광기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퉤."

처음처럼 완전히 광기에 절여있다면 모를까, 이미 진혈을 넘어선 하인즈에게 이 정도는 쉽게 걸러낼 수 있는 불순물에 불과했다.

[아··· 아아—!]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지고.

이제는 광기에서 벗어난 드래곤 헤라토스가 가는 숨을 몰아쉬며 눈만을 움직여 주변을 훑었다.

[나는 어째서··· 그리고 불사왕이 부활했다고···? 거기다 너희들은 대체···.]

광기에 잠식된 동안의 기억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는지,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연신 횡설수설하는 드래곤.

생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에 보이는 마지막 의문에도 하인즈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 목덜미의 상처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오랜만에 실컷 먹어봐야겠다.'

마침 모아뒀던 혈액도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으니, 이참에 배 터지게 먹어 치울 셈이었다.

피에 한해서라면 그에게 물리적인 한계 따윈 의미가 없었으니까.

[아아···. 불사왕이··· 다시 돌아왔구나. 이제 이 세상은 어떻게 해야···.]

혼자 중얼거리던 헤라토스의 말이 점차 잦아들었다.

죽음을 앞에 둔 그에겐 미안했지만, 여전히 대답을 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쓸데없이 입을 놀리다 나도 모르게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까,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지.'

혹시 모르지 않은가.

죽은 줄 알았던 놈이 다른 몸으로 부활한다거나, 환생한다거나, 과거로 회귀한다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이니.

[···불사왕···.]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헤라토스의 시선이 하늘 위에 떠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스에게 향했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그에게 보내던 레드 드래곤은···.

···눈은 여전히 한스를 응시한 채, 이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불사왕에 대한 걱정인가. 뭔가 한이 많아 보이는데.'

처음 한스를 마주했을 때도 그렇고, 역대 불사왕과 드래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대의 불사왕은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으니까,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

오히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으면 광룡이 또 다른 대륙의 재앙으로 성장하지 않았겠는가?

[크흐흣, 확실히 광기의 영향인지 뼈가 굉장히 실하군. 이거 좋은 재료가 되겠어.]

그러니까 네 뼈를 좀 가져다 쓰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아, 거기다 피랑 뿔이랑 비늘하고···.'

아무튼, 좋은 일에 사용할 테니 그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

"후우—."

눈을 감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할리.

그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쉴 새 없이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근육이 제멋대로 부풀었다 줄기를 반복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해왔던 진화와는 그 격이 달랐다.

단순히 드래곤의 유전자를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몸에 큰 부담이 되었을 텐데, 광룡에게서 통째로 빼앗은 광기를 고스란히 흡수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으며 한껏 증가했던 양을 아득히 넘어서는 그것은, 드래곤을 잠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할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너무 많아서 통제가 힘들어. ···드래곤 하트에 각인되었던 방법을 써야겠군.'

그는 몸에 가득 들어찬 광기를 가닥가닥 엮어 나갔다.

광룡이 몸 곳곳에 뿌리를 뻗어 광기를 통제했던 것처럼, 할리는 자신의 육체에 세심하게 광기가 지날 회로를 깔았다.

그리고 마침내.

"개체의 종족값이 '용인(혼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특수스킬「광룡의 심장」을 획득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보석안 : 염동」이 특수스킬「보석안 : 강압」으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광기 제어」를 획득합니다."

뿌드득! 뚜득!

쉬이익—!

이미 몇 번이나 겪어왔던 육체의 진화.

그 변화에 맞춰 근육과 뼈 등 할리를 구성하는 요소의 질이··· 아니, 격(格) 자체가 급격히 상승했다.

"하아—."

그가 천천히 눈을 뜨자, 어둠에서 붉은빛과 초록빛의 안광이 터져 나와 주변을 밝혔고.

세로로 날카롭게 갈라진 두 눈의 동공이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용이 사망한 자리.

그 용의 몸속에서 마침내 새로운 용인(龍人)이 눈을 떴다.

#112

파티 해산 (1)

드래곤의 사체는 단 하나도 버릴 곳이 없는, 그 자체로 귀중한 보물이었다.

재료가 가진 질은 물론이고 막대한 신비까지 품고 있는지라 여러 가지 술법에 애용되는 소재였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드래곤이 거의 멸종 위기인 상태가 아닌가.

그 가치가 가치인 만큼 당연히 살점 한 조각까지 알뜰살뜰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팔 생각은 없지만.'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원래 이런 귀한 물건은 가지고 있다 보면 다 쓸 일이 생기는 법이다.

보관 문제야 마법의 극한을 바라보는 한스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물론 모든 재료를 전부 보관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필요한 건 그냥 곧바로 사용해버렸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드래곤의 피.

용혈(龍血)이었다.

"흠··· 확실히 효과가 좋긴 하군. 요즘 조금 정체되었다 느끼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좋은 피로 몸보신한 하인즈 2세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혼혈진화」는 동족 포식을 했을 때 발동하는 스킬인 만큼 흡혈인자가 크게 진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스템적으로 표기되지 않는 무언가, 하인즈의 격 자체가 드래곤을 흡혈함으로써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뱀파이어의 종족 특성인 「피의 일족 (진혈眞血)」이 성장한 거겠지.'

모든 능력이 전체적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이고 피를 사용하는 기술의 효율도 상당히 증가했다.

아직 성혈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를 흡혈한 경험이 상당한 경험치가 된 것일 터.

"역시 보다 격이 높은 상대를 흡혈하는 것이 성혈이 되기 위한 조건이었던 건가."

하인즈는 여러 스킬의 영향으로 동급의 뱀파이어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혼혈진화」 덕분에 힘의 근간이 되는 흡혈인자 자체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성장이 정체되어버린 것이다.

'인자의 진화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한데다, 이젠 흡혈을 해도 에너지의 총량만 늘어날 뿐 크게 강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지.'

하긴 요즘 하인즈가 좀 평화롭게 지내긴 했다.

가장 최근인 브로코슬락 클랜과의 싸움에서도 온전히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진혈들을 흡혈하지 않고 전부 포용하지 않았나.

당초의 목적을 위해선 혼자 강한 것보다 쓸 만한 인재가 많은 것이 유리했으니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괜찮은 소득을 얻기도 했고.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텐데 굳이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겠지.'

오늘 정도는 지금의 성과를 마음 편히 즐겨도 괜찮을 것이다.

기분 탓인지 피부도 좋아진 것 같아 가볍게 뺨을 쓸자, 언제나와 같은 매끈한 살결이 느껴졌다.

'···잘 모르겠군.'

그는 슬쩍 손을 내리며 해체되고 있는 드래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신선한 품질 관리를 위해 한스에게 죽음의 기운을 봉인 당한 채 부지런히 움직이는 언데드들.

그 열띤 노동의 현장에서는 작업 내용에 맞지 않게 바닥에 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건 이곳에 있는 진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의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전부 마셔버린 건 아니지만.'

피는 다른 생체 조직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무리해서 전부 빨아들였다간 재료가 상할 우려가 있었다.

어차피 드래곤 한 마리 분량의 피를 전부 먹는 데에만 쓰는 건 욕심이기도 했고.

'아무리 효과가 좋은 용혈이라도 같은 대상의 피는 점점 그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덕분에 다른 용도로 쓸 피도 제법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피란 것은 온갖 술법의 중요 매개체였으니, 이건 추후에 유용하게 쓰이리라.

'예를 들어··· 할리의 각인이라든지.'

보다 상위의 각인에는 그만한 격의 재료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할리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할리

-종족 : 용인(혼종)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돌연변이」, 「육체변이」, 「생체 오러」, 「광란의 야수」, 「폭식」, 「광룡의 심장」, 「광기 제어」, 「보석안 : 강압」, 「초재생」, 「칼코스식 전투 각인」

-특이 사항 : 강대한 유전자 정보가 깃든 '광룡의 심장'을 흡수하며, 신체의 대부분을 용의 소재로 대체해 용인화(龍人化)되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몸 안의 광기를 제어하고 주변의 광기를 흡수한다. '보석안'이 용안(龍眼)과 결합해 자신의 의지를 더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크흐으—."

드래곤이 해체되는 현장의 한쪽 구석.

상처 입은 맹수처럼 몸을 웅크린 할리는 육체를 온전히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종족 자체가 바뀔 정도면··· 그만큼 이번 변화가 컸다는 건가.'

그동안도 할리는 순수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생체 실험으로 탄생한 실험체 출신으로 온갖 마수와 몬스터들의 유전자까지 섞여 있었으니까.

어떤 특정한 종족이라고 정의할 수 없었던 만큼 정보창에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굳이 종족명을 따지자면 '돌연변이'가 가장 적합하겠지.

그런데 그것이 이번에 대부분의 부위를 성능 좋은 드래곤의 유전자로 교체하며, 그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혼종'이라는 표현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잔재들 덕에 붙은 것일 테고.

뿌드득— 뿌득—!

'광기의 심장'을 먹으며 다시 3미터를 넘어섰던 덩치가 조금씩 압축되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빨과 손발톱, 비늘들이 서서히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이전의 할리로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그 과정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해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무렵.

"후우—."

마침내 육체를 온전히 통제하게 된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휘이잉—

그와 동시에 그의 전방에 산들바람이 일며 수풀이 흔들렸다.

'어라?'

압도적인 폐활량과 「광룡의 심장」이 동조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풍속이 그리 빠르진 않았으나 심호흡만으로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과할 정도.

'역시 용의 심장인가. 내부의 기운뿐 아니라 주변의 마나도 행위에 동조해서 움직이는군. 이거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데?'

마법적 능력을 완전히 잃은 대신 마력의 원초적인 사용에 특화된 광룡이었던 만큼, 할리도 그 특성을 고스란히 계승하게 되었다.

용인이 되어서도 마법을 사용할 순 없었지만, 대신 주변 마나가 그의 행동을 더욱 강하게 보조하게 된 것이다.

'당분간은 정신력을 좀 더 배분해서 신경 써야겠어. 방심하다간 사고 나겠군.'

폭증한 근력을 제대로 다루기도 힘든 마당에 생긴 새로운 숙제였다.

"으랏차차—! 이거 뻐근하구만! 가는 길에 몸 좀 풀어야겠어! 으하핫!"

상황을 대충 수습한 할리가 쭉쭉 스트레칭하며 활기차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오닉의 곡괭이를 얻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와 버렸는지.'

트윈 헤드 오우거부터 시작한 북부 산맥 질주에서 드래곤을 만나 놈을 처리하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는 모험이었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으니 불만은 없지만.'

정체됐던 하인즈의 성장은 물론이고, 할리는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육체변이」로 최대한 몸을 줄였음에도, 어마어마하게 압축된 육체의 밀도 때문에 그의 몸무게가 톤 단위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의 키가 2.3미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변 기운을 조절해서 몸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훈련을 해야겠어. 이러다간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하겠군.'

지반이 약한 곳이라면 땅도 무너질 수 있었으니 매사 조심해야 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광룡의 심장」이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인 덕분에 에너지 효율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하루 종일 뭔가를 먹어야만 했겠지.

"쩝쩝, 그래도 좀 출출한 것 같은데. 배라도 좀 채워야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먹기만 했던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육체의 변형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만큼, 몸 전체가 바뀌다시피 한 지금은 보유한 양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부족해진 만큼 채워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먹을 것이야 잔뜩 있으니 아낄 것도 없지. 어차피 먹으면 먹을수록 도움이 되는 보양식들인데!'

그의 시선이 이미 도축되어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드래곤 고기로 향했다.

"쓰읍, 꿀꺽."

입가에 흐르는 침을 삼킨 할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해,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열심히 에너지를 몸속에 비축해 나갔다.

***

수많은 언데드가 동원된 만큼, 드래곤의 해체가 전부 마무리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고했다, 말콤.]

고기, 뼈, 장기 등 소재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부산물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

[별말씀을···.]

언데드들을 진두지휘해 도축 작업을 마친 데스 위저드 말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한스는 자연스럽게 드래곤의 뼈가 쌓인 무더기 앞으로 향해 그것을 둘러보았다.

[호오— 과연, 훌륭하군.]

단순히 뼈가 쌓여있는 것뿐인데도 어떤 기세가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다.

광기에 물들며 세포가 과하게 활성화된 영향이 남아있는지, 뼈대도 굵고 단단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소재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드래곤의 강한 사념 때문에 상당히 까다로웠겠지.'

드래곤의 고고한 영성(靈性)은 죽고 나서도 자신을 언데드로 만드는 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업을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오랜 시간 타락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미 광기에 타락해서인지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겠어. 수고를 덜었군.'

가장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갈 부분이 이미 해결되었다.

그야말로 재료 손질과 조리까지 다 되어, 그냥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

'물론 심연의 광기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다른 흑마법사들은 이걸 다루려면 상당히 고생할 테지만···.'

그런 건 같은 심연에서 비롯된 '죽음'을 다루는 한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바로 시작해 볼까.'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금단의 지식」을 이용해 의식을 위한 흑마력 결계를 설치하고, 언데드들을 배치해 간이 제단을 구축했으며, 제물로 사용될 드래곤의 장기 일부까지 가공했다.

의식의 규모에 비해선 상당히 간소한 절차였지만, 불사왕인 그가 평범한 흑마법사와 그 조건이 같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었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언데드가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일정한 진을 구성한 제단의 중심부.

드래곤의 잔해를 마주한 한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나에게 말해 보거라.]

한스가 뼈 무더기를 가볍게 쓰다듬는 것과 동시에, 그의 가슴에 위치한 불사왕의 심장에서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조용히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죽음에 초목이 시들기 시작하고, 어느새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 곳곳에 서리가 맺혔다.

[그래, 헤라토스로구나.]

우우웅—!

막대한 흑마력이 순식간에 사위를 뒤덮으며 제단을 구성한 언데드들과 공명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서히 드래곤의 뼈로 스며들었다.

[나는 사자(死者)의 왕이자 죽음의 지배자이니, 내가 너에게 두 번째 생을 허락하도록 하마.]

생전의 드래곤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언데드화를 선택할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자신을 죽인 이가 노예로 부리려고 종속하고자 하는데.

[너는 다시 이승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약간의 대가가 따르겠지만.]

하지만 이미 사망해 단편적인 사고만 남은 데다 타락까지 거친 사념을 홀리는 것은, 한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다.]

그는 사령술의 극의에 이른 불사왕이었으니까.

후우우웅—!

주변에 가득 들어찬 죽음과 흑마력이 한순간에 드래곤의 잔해로 빨려 들어갔다.

막대한 기운의 유동에 공간이 진동하며, 제단을 구성한 언데드들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거칠게 요동치는 결계 안.

그리고 의식의 여파로 죽어버린 풀과 나무들 틈에서.

[———!]

마침내 새로운 망자가 눈을 떴다.

***

"하하핫! 그럼 이만 가 볼까!"

드래곤 고기가 가득 담긴 아공간 마도구를 챙긴 할리가 일행이 있을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며.

"오랜만에 헤테로시스나 한번 살펴봐야겠군."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던 하인즈 2세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난 후,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된 숲속에 남은 것은···.

[크흐흣—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주변을 좀 둘러볼까? 부디 이 근처엔 쓸 만한 녀석들이 많았으면 좋겠군.]

수많은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인 불사왕 한스와.

[쿠오오오——!]

[캬아아아——!]

두 마리의 본 드래곤뿐이었다.

#113

파티 해산 (2)

할리는 빠른 속도로 숲을 내달렸다.

올 때와는 달리 덤벼드는 몬스터 하나 없이 쾌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산행이었으니···.

근방의 몬스터들을 한바탕 사냥한 뒤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압도적인 광기가 놈들에게 동질감을 심어준 것이다.

"음! 이거 마음에 드는데!"

으적으적—

달리는 와중에도 열심히 입을 우물거리는 할리.

용인이 되며 저장 용량도 크게 증가했으니, 이참에 아예 에너지를 가득 채워둘 생각으로 고기를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지금 그가 양손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거의 다 도착했군.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먹을까?"

어느새 입 앞에 떠 있던 고기를 전부 먹어 치운 할리가 입맛을 다시며 아공간 마도구에서 고기 한 덩이를 더 꺼냈다.

그 직후, 그의 왼쪽 눈에 녹색 섬광이 스치고.

커다란 고깃덩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 허공에 고정되었다.

여기까진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 능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치이익—

드래곤 고기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더니 곧 노릇노릇하게 익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진화한 「보석안 : 강압」은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라, 주변 마나와 동조하는 「광룡의 심장」과 연계해 현상을 강제하는 힘이었다.

"으하핫—! 역시 문명인이라면 고기를 익혀 먹어야지! 아주 꿀맛이구만!"

야만 전사 할리가 흡족하게 웃으며 다시 입 앞 공간에 고정된 고기를 먹어 치웠다.

'역시 여러모로 편하단 말이야.'

의지만으로 발동할 수 있고 출력도 마음대로 높일 수 있는 능력.

하지만 물론 이것에도 단점은 있었다.

마법처럼 세련된 방법이 아니라 발휘할 수 있는 현상도 단조로울뿐더러, 무엇보다 에너지 효율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즉, 지금 할리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해서 고기를 굽는 중이었다.

'···그래도 익숙해지려면 자주 쓰는 수밖에 없지. 앞으로 효율을 개선하면 좀 더 나아질 테니.'

또 당장 에너지 수급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생명력이 가득 담긴 드래곤 고기다 보니 깃든 에너지도 풍부했으니까.

그렇게 새로 꺼낸 고기도 다 먹어 치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드래곤과의 싸움으로 모든 장비가 너덜너덜해진 할리가, 마침내 헤어졌던 일행들과 재회했다.

***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과 그 한가운데에 세워진 3층 주택.

서울 교외 지역에 자리한 이곳이 바로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공간도 넓고 방도 많아서 각 방마다 필요한 갖가지 설비들을 채워놓았다.

운동 기구들과 오락 시설 등,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충분한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이제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 있긴 한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쪽이 더 편하단 말이야.'

그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영향일까.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로망을 가득 담아, 아지트를 꾸미듯 집을 단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해리스로 「개체 투영」을 써서 자연력을 이용하면 정원 관리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겠지.'

이 정도 자연을 다루는 것은 엘프인 해리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정원이 아무리 넓더라도 문제없었다.

교외 지역인 만큼 공기도 도심만큼 나쁘지 않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 방범 장치들도 잔뜩 설치해 놔야겠다. 할 수 있는 만큼 전부 깔아 놔야지.'

물론 거기엔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결계들도 포함되었다.

한스, 하인즈 2세, 하인리히 등 다양한 능력자들의 힘을 빌릴 수 있는데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중에서 필요한 것들만 적당히 골라서 써먹으면 되겠지.

"읏차."

나는 지하 창고 방에서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다가 허리를 펴고 한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간 설비를 갖춘다고 준비 기간이 길었던지라, 입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창 바쁜 참이었지만···.

지금은 잠시 할 일이 생겼다.

스슥—

그때, 적막 속에 홀로 있던 내 앞에 한 인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과 창백한 피부에 검은 연미복을 입은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

막 이세계에서 귀환한 흡혈귀, 하인즈 2세였다.

"······."

하인즈는 자신의 아공간 팔찌에서 드워프 자오닉의 애착 곡괭이, '엘린느'를 꺼내 이쪽으로 건넸다.

나는 별말 없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며 천천히 살펴봤다.

푸른 광택이 맴도는 금속에 자잘한 흠집이 셀 수도 없이 난 그것은 오랜 세월 애용해 왔다는 말처럼 사용감이 물씬 느껴지긴 했지만, 그간 관리를 잘했는지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잘 관리된 골동품 같다고나 할까.

'자오닉한테는 미안하네. 그래도 뭐, 목숨값이라고 생각해야지.'

때마침 아우테리카 쪽에서는 할리가 일행들과 막 합류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본 자오닉이 다급하게 곡괭이를 찾다가, 기어코 털썩 주저앉는 걸 보고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그 대신 할리 덕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장간에 있는 장비들보다는 애착이 조금 덜한 것 같던데, 자신이 없었으면 그것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을 테니 이 정도면 서로 윈윈이었다.

"흠흠···."

애써 자기합리화를 마친 나는 그쪽 상황을 은근히 외면하며 가볍게 헛기침했다.

'어디 보자, 하인즈는 이쪽 일을 좀 돕게 한 다음 헤테로시스로 보내면 될 테고.'

하인즈는 이미 조용히 밖으로 나가, 정원 주변에 「피의 신비」와 「은폐」를 이용한 결계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쓸데없이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간 괜한 관심을 끌 수 있었으니, 철저하게 은밀성을 강조해 보안을 강화했다.

'한스의 본 드래곤도 별문제는 없고.'

원래 본 드래곤에는 그 핵이 되어줄 드래곤 하트가 필요한지라 조금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는데, 역시 우리의 한스 님께 불가능이란 없었다.

「불사의 심장」,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심연의 눈」, 「마력 지배」···.

가진 모든 스킬이 흑마법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만큼, 그가 진심으로 나서면 사령술을 조금 비트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추출한 근원에서 원격으로 흑마력을 전송하는 리치의 방법에서 착안해서, 아예 자신과 본 드래곤 헤라토스를 좀 더 긴밀하게 연결해 버렸다.

드래곤 하트 대신 자기가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도록.

쉽게 말해 한스 자체가 헤라토스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대신 둘이 멀리 떨어질 수 없게 돼서 단독으로 움직이기는 힘들어졌지만, 그런 경우는 다른 녀석들을 보내면 되니 딱히 상관없겠지.'

엔트라시오 대신 헤라토스를 한스의 전용 자가용으로 사용하면 될 터였다.

"그럼, 정산을 시작해 볼까!"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유스킬을 강화해 보유 아바타 숫자를 늘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카르마가 필요했는데, 그 부분에 관해선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간 굵직한 일들이 꽤나 많았으니까.

'마지막으로 「개체 투영」을 얻고 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우선 해리스는 성공적으로 엘븐 킹덤에 변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그가 축제에서 선보인 새로운 음악과 악기는 그동안 은연중에 타성에 젖어 있던 엘프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 하나가 파문을 만들어 내듯, 그 영향은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며 그들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카르마가 되어 돌아왔다.

'아직은 소소한 수준이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거라는 게 고무적이야.'

그리고 하인리히는 시련을 통해 성검의 주인이 되고, 대축복을 받아 성자로 인정받았다.

대륙 최대 세력 중 하나인 주신교단의 성자라는 것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큰 사건인 만큼, 이 또한 큰 업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또 한스는 심연이 열린 후에 주신교단과 충돌하며 다시 자기 이름을 각인시켰고···. 이후 대륙에 나타나기 시작한 불사왕의 유산을 수습했지.'

거기다 이로 인한 혼란도 한스의 탓으로 알려졌을 테니, 그 영향력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가장 최근 일로는 할리의 북부 원정과 드래곤 헤라토스 사냥이 있었다.

당연히 광룡 정도 되는 존재를 사냥하는 것 또한 상당한 업적이 되었을 터.

'그래서, 그동안 모인 카르마는···!'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1,0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608,961』

"오!"

「개체 투영」을 얻은 지 지구 시간으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건만, 무려 백만이 넘는 카르마가 증가했다.

'역시 머릿수는 많고 볼 일이라니까.'

여럿이 이곳저곳에서 큰 사건을 펑펑 터트리고 다니니, 그 모으기 어렵다는 카르마를 이렇게 쉽게 쓸어 담고 있지 않은가.

'어휴, 몸 하나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간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몸이 일곱 개인 나도 아직 많이 부족했으니, 하루빨리 몸을 열 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이상이면 더 좋고.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여덟 번째 몸이 될 열쇠였다.

나는 곡괭이, 엘린느를 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물건을 사용해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수 있다고, 「커스터마이징」이 거세게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설마 이번에도 '아바타 개체 수 증가'가 안 나오진 않겠지."

물론 저번에 얻은 「개체 투영」도 괜찮은 능력이었지만, 이번에도 아바타가 늘어나지 않으면 심히 유감일 것 같았다.

그걸 누군가에게 표현할 방법은 없겠지만.

"그럼··· 강화."

그렇게, 무려 100만 포인트짜리 강화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아바타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개체의 학습 능력이 더욱 향상됩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아바타 클라우드」를 획득합니다."

두통과 함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아바타의 개체 수 증가는···.

"됐다!"

그 정보가 머리 한 편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든 사용해 새로운 분신을 만들 수 있노라고.

그와 더불어 정신력과 사고력 등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아바타 수가 하나 더 늘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전보다 각 개체에 배분되는 정신력의 양이 더 많아질 것 같았다.

'음, 여기까진 괜찮군. 그럼 추가로 얻은 것들은···.'

원하던 결과를 얻자 이제 내 관심은 시스템 메시지에 떠올랐던 내용으로 향했다.

아바타의 잠재력 증가야 이제 와서 뭐라 할 수준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분신이랑 내가 싸우면 백이면 백 내가 지겠지.'

별다른 전투력이 없는 휴버트와 비교해도 그랬다.

물론 「개체 투영」이 있는 만큼 본체의 강화보다는 아바타의 성장을 우선하는 게 맞긴 한데···.

'에이, 뭘 이제 와서 새삼. 내가 아바타보다 강한 경우가 얼마나 있었다고.'

기껏해야 이계 진입 초반의 아바타 생성 직후 정도였을까.

이제는 그 아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정상을 향해 가는 만큼, 감히 비교할 주제도 되지 못했다.

'그보다 새로 얻은 스킬이나 확인해 볼까? 「아바타 클라우드」라.'

클라우드(Cloud)는 인터넷을 통해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름을 따온 듯한 「아바타 클라우드」는···.

소규모의 공용 아공간을 통해, 아바타끼리 거리 제한 없이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오!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강화 효과 한번 확실하다니까.'

이 능력이 있다면 지금처럼 일일이 아바타끼리 대면해서 물건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이제 드디어 하인리히가 가지고 있던 아크리치 드웰의 근원을 한스에게 줄 수 있겠네.'

기껏 선물을 준비했거늘, 서로의 입장차가 있는 만큼 둘은 서로 만나기 쉽지 않았다.

전송진에 쿨타임이 있는 만큼 마음대로 쓸 수도 없어서, 다른 아바타를 심부름꾼으로 쓰기에도 애매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딱 적절한 능력이 나왔네.'

또 어지간한 물건은 상인 휴버트를 통해 바로바로 공급받을 수도 있을 테니, 이제는 어디 오지에 떨어지더라도 안심이었다!

'하인즈를 통해서 지구 물건을 휴버트에게 얼마나 보낼 수 있는 지도 실험해 봐야겠군. 전송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는 있을 테니까.'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강화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직 메인이벤트 하나가 남은 상태였지만.

나는 곧바로 곡괭이를 들고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했다.

이제 진짜 드워프를 만들 차례였다.

#114

하워드

"으흠, 으흠. 아아—!"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중저음.

떡 벌어진 어깨에 옹골지게 들어찬 근육, 부리부리한 눈매와 윤기가 흐르는 수염까지.

"에잉— 이거 눈높이가 낮은 것이 영 적응이 안 되는구만!"

거기다 가슴팍에 겨우 닿는 작은 신장이 더해진, 그야말로 완벽한 드워프 한 명이 이곳에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 새로 생성한 나의 아바타였다.

'「커스터마이징」으로 최대한 키를 늘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대충 짐작하긴 했지만 직접 되어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

사실 종족으로써의 한계 때문인지 키의 최대치에도 한계가 있어, 늘린 키도 거기서 거기였다.

나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눈앞의 드워프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하워드

-종족 : 드워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장인정신」

-특이 사항 : 한성현의 여덟 번째 아바타. 매개체로 장인의 애장품 곡괭이가 사용되어 드워프로 탄생했다. 「장인정신」의 영향으로 제작과 관련된 행위에 추가 보정이 가해진다.

불사왕 한스, 뱀파이어 하인즈 2세, 성자 하인리히, 용인 할리, 상인 휴버트, 엘프 해리스에 이은 드워프 하워드!

사망한 원조 하인즈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일곱 번째인 아바타였다.

"좋아, 딱 생각대로군. 처음 주어지는 스킬도 원하던 종류로 붙었고."

역시 「커스터마이징」으로 생성된 개체는 그와 관련된 종족 특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하워드는 전투 쪽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필요한 물건을 바로바로 맞춤 제작해 줄 수 있는 데다, 실력까지 뛰어난 장인은 구하기도 힘들지.'

굳이 병장기류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는 장인의 수준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인 법이었다.

아바타인 하워드는 「장인정신」뿐만이 아니라 성장 속도와 학습 능력 증가 버프까지 받고 있으니, 그 수준도 빠르게 발전할 터.

상인 휴버트가 필요한 물건은 곧바로 조달해 줄 수도 있으니 최고의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한 가지 난관이 남아 있었는데···.

'엘프 해리스 때와 마찬가지로 제반 지식이 전무하다는 게 문제야.'

오히려 그때보다 더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기술이라는 것은 대를 이어 계승되며 발전하고 보완되는 것.

아무리 손재주가 뛰어나고 재능이 있다고 해도 독학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할리의 인맥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

할리와 자오닉은 생사를 함께한 사이니 그 정도 부탁 정도는 들어주지 않을까?

거기다 그 자신은 모를 테지만, 그와 하워드는 결코 남이 아니지 않은가!

엄밀히 따지면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손자라고 해야겠군.'

모종의 이유로 헤어진 딸(엘린느)이 먼 타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아들(하워드)이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비극적 서사 한 편이 뚝딱 완성되었다.

'정작 자오닉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온 대륙에서는 이종족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만큼, 그들은 같은 동족끼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돕는 경향이 있었다.

제대로 기술을 배우지도 못한 어린 떠돌이 드워프 행세를 하면 그도 쉽게 내치지는 않으리라.

'물론 지금 당장은 곤란할 것 같긴 한데.'

아직 한창 어수선한 상황인 만큼, 일단 북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으허헛— 그럼, 지구의 기술부터 배워볼까?"

하워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 보다는, 일단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을 습득해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

'정령술과는 경우가 달라. 대장 기술은 지구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

물론 두 세계의 법칙이 다른 만큼 심화로 넘어가면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겠으나,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지구의 기술은 대부분 기계를 이용하긴 하지만 거기에 접목된 원리를 파악하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나중에 각 세계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뭔가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지. 지구는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까 이쪽 먼저 준비해야겠어.'

재료 공학, 그중에서도 금속 가공에 관한 야금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자료를 조사해 하워드가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분류하고, 단계별로 나눠서 정리하는 걸 어느 세월에 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진소란.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한 가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좀 있는데."

정원에서 보안을 강화하는 작업을 마친 하인즈가 대포폰을 꺼내 들어 헤테로시스의 관리자, 진소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럴 때 부하들을 써먹지 언제 써먹겠어?'

혈맹에는 전투에 적성이 있는 흡혈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무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고, 조직의 덩치가 커진 만큼 양지에서 고용된 일반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 돈이라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대학 교수든 전문 기술자든 전부 섭외해서···."

그것이 논문이든, 동영상 자료든, 누군가의 노하우든···.

나는 그저 명령만 내려놓고, 아랫사람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서 정리한 결과를 받아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타라크에 공방을 하나 마련해야겠어. 시간을 아끼려면 실습은 아우테리카에서 하는 수밖에.'

내가 지구에서 할 일은 그저 자료를 보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건 「장인정신」을 가진 드워프, 하워드의 몫.

'온갖 보정을 받는 만큼 독학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를 수 있겠지. 그 수준을 넘어서면 지구에서 장인들을 초빙해 직접 배울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세계에서 온 장인들도.'

다른 차원 출신의 장인들은 지구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쌓아온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체계로 발달한 기술은 그 나름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 테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의 어둠 속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한 '혈맹'은.

조건에 맞는 이들의 정보를 입수하고, 대가를 지불해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

***

로셀리아 대신전.

"흐아아··· 피곤해 죽을 것 같아요···."

하인리히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찾아온 리에스타 성녀가 체통 없이 테이블에 엎드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말과는 달리 매끈한 피부와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자랑하는 외견은 피곤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그건 강대한 신성력과 축복의 영향일 뿐.

그녀는 수면과 식사 등,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보내고 있었다.

평소의 허술한 행동과 대비되는 그 책임감 있고 철두철미한 모습에 성녀를 다시 보게 될 정도였다.

"으앙—! 티온이랑 뮤랑 셀리가 보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도! 벌써 못 본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다들 잘 있을까요?"

···물론 틈만 나면 보이는 이런 언행들 때문에 그런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참고로 티온과 뮤는 지렁이, 셀리는 무당벌레였다.

어떻게 각 개체를 구별하는지, 그 작은 것들을 넓은 화단에서 무슨 수로 찾아내서 관찰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거기다 이렇게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자연의 섭리로 죽더라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녀는 벌레들에게 축복과 신성력을 쏟아 부어 최상의 컨디션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은 주지만···.

설령 눈앞에서 천적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처럼.

"잠깐 시간 내서 화단에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시간을 그리 잡아먹지도 않을 텐데요."

"으··· 아뇨. 한 번 보면 몇 시간이고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기 전에는 화단에 가지 않겠다고 저 자신과 약속했는걸요! 그리고 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성녀가 맡은 일은 대륙 정상 회의를 위한 사전 조율이었다.

각 세력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탈리아 왕국에서는 브라이트 공작이 직접 올 거라고 했으니까. 제국에서는 황태자가 움직일 거라 했던가? 여러모로 까다로울 수밖에 없겠군.'

그런 대외적인 업무는 오랜 시간 성녀로 지내며 이름이 알려진 그녀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하인리히가 성자로 인정받았다고는 하지만 교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전면에 나서기는 살짝 이름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서 성기사 출신인 그는 성기사단과 성전사대를 비롯한 무력 부문의 업무를 맡아, 배우면서 일을 처리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불사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굉장히 중요했던 만큼, 그 업무 강도는 성녀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 연계할 업무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아, 하인리히 님도 그 소식 전해 들으셨죠?"

평소처럼 말을 잇던 성녀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며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의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툴크 왕국 쪽의 서북부 산맥에 관한 건 말씀이시군요."

"네. 몬스터의 남하로 한창 난리인 산맥 쪽에 강대한 마력의 충돌이 감지되었어요. 물론, 불사왕의 흑마력도 함께요."

그도 사전에 전해 들었던 정보였다.

한스도 나름 결계까지 치며 신경을 썼지만, 광룡과의 격렬한 전투는 그 정도 급조한 결계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성녀의 감지는 유독 특출났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아마,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겠죠."

금빛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가 하인리히에게 조용히 말했다.

"드래곤 사냥이."

역대 불사왕들은 대륙 정복의 가장 큰 방해물을 드래곤이라 판단하고 그들을 척살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덕분에 지금 드래곤은 멸종 위기에까지 몰릴 정도였고, 남은 이들은 조용히 몸을 숨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들을 움직여 세상의 혼란을 부추김과 동시에 드래곤을 배제하기 위한 움직임까지. 이젠 정말 시간이 촉박한데, 이 와중에도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니···!"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가는 성녀.

일을 진행하는 와중 받은 스트레스가 어지간히 컸던 것 같다.

'음, 드래곤을 사냥한 게 맞긴 하지만.'

그리고 하인리히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하면서도 내심 얼떨떨한 기분을 억눌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아무래도 전과가 있다 보니.'

누굴 탓하랴, 지금까지 보여준 게 전부 그런 모습이었는데.

부모님에게 고자질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성토는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이들로 시작된 그 불평은 이내 모든 사태의 원인인 불사왕에게까지 번져, 고상한 어휘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그리고 성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대륙의 절대 악이자 세계를 좀먹는 기생충, 모든 부정의 근원이며 배덕의 상징인 불사왕 한스는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이냐···.

바로.

성자 하인리히가 보낸 선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개봉하고 있었다.

***

[과연, 굉장히 유용하군. 이렇게 편하게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한스는 음산한 웃음과 함께 한 손에 들린 새하얀 결정을 바라보았다.

고체화된 신성력에 감싸인 그것은, 하인리히가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해 보내준 아크리치 드웰 맥케인의 근원이었다.

'사실 카람이나 올리비아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녀석은 아니지만, 이놈도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이란 말이지.'

무력이 부족해 불사의 군단 내에서 50위권의 서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제법 유능한 참모진 중의 하나였다.

2대 불사왕의 지낭(智囊)이었던 엘더 아크리치(Elder Arch-Lich)가 마지막 전투에서 소멸한 지금, 어찌 보면 가장 똑똑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했던 행동들을 보면 영 미덥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본 건 성검이 구현한 시련에서의 모습뿐이지 않은가.

아무리 성검이라도 단순히 그가 가진 힘이라면 모를까, 성향이나 사고방식 등을 완벽하게 재현하진 못했을 것이다.

'뭐, 나야 부려 먹을 녀석이 유능할수록 좋으니까.'

한스가 한 손에 들린 결정을 향해 자신의 흑마력을 쏟아 부었다.

쩌적—!

순식간에 균열이 생기며 갈라진 신성력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발광하고는, 이내 서서히 검은 기운에 잡아먹혀 사라졌으며···.

우우웅—!

직후, 잠잠하던 아크리치의 근원이 서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흐흣! 자, 일어나거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리고 막대한 흑마력을 가진 한스에게.

드웰이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15

귀로(歸路)

공중에 떠오른 시커먼 덩어리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척추와 갈비뼈를 시작으로 증식을 거듭한 골격은 팔과 다리, 두개골까지 만들고서야 멈추었고.

이내 깊게 파인 시커먼 눈구멍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흐으으—]

화르륵—!

뼈밖에 없는 몸에서 타오르듯 피어오르는 짙은 흑마력.

아크리치 드웰 맥케인이 온전히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근원만 남아있다면 흑마력만으로도 이렇게 빨리 재생할 수 있다니. 언제 봐도 사기라니까.'

그 모습을 보며 한스가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드웰이 곧바로 그를 향해 엎드리며 감격 어린 탄성을 토해냈다.

[오오— 불사왕이시여! 저는 틀림없이 용사에게 당한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은, 신체를 잃고 근원만 남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용사의 신성력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불사왕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용사가 바로 나를 소멸시키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신전 깊은 곳에 봉인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텐데.'

그때 이후로 시간은 얼마나 지났고, 그가 어떻게 자신을 구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드웰 맥케인.]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앞에 불사왕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우웅—

그렇게 호명되는 이름과 함께 계약이 새로 덧씌워지고.

[아아— 이 드웰 맥케인, 불사왕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삼백 년 전에 이어서, 이곳에서 다시금 새로운 주종관계가 체결되었다.

그렇게 아크리치가 의욕에 불타고 있을 때, 그들의 옆에 흐릿한 인영이 일렁이더니 이내 한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베일이 달린 모자와 상복과도 같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밴시 퀸, 올리비아였다.

[소녀, 올리비아···. 왕을 배알하옵나이다···.]

[그래, 올리비아. 갑자기 무슨 일이냐?]

[왕께서 내리신 명에 대한···, 중간보고를 드리고자 찾아왔나이다···.]

그가 올리비아에게 내린 주문은, '역천의 서약'에 대한 정보를 캘 수 있는 만큼 전부 캐 오라는 것이었다.

할리가 북부 산맥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린 명령이었으니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호오— 벌써?]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보고.

그녀는 일차적으로 서부 지역 전체를 영역으로 두고 샅샅이 훑어나갔다.

바로 조사할 수 있는 곳은 물론이고, 결계로 차단된 곳은 드나드는 인물들을 감시하여 그 연결 고리를 추적하는 데 열중했다.

그로 인해 알아낸 놈들의 아지트만 벌써 몇 곳이었고,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늘어날 전망이었다.

[현재, 중앙의 제국 일부까지 조사 영역을 확대하였고···. 중요 거점으로 의심 가는 장소를 발견해··· 예의 주시하는 중이옵나이다···.]

벌써 중앙 지역까지 진출하다니.

역시, 무섭도록 유능하기 그지없었다.

[크흐흣— 좋구나, 좋아. 수고했다 올리비아.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소녀··· 왕을 위해, 이 한 몸 분골쇄신하겠나이다···.]

한스의 치하에 올리비아가 공손히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

[올리비아 님께는 뼈도 몸도 없는데, 어떻게 분골쇄신(粉骨碎身)을···.]

[드웰.]

[···네! 불사왕이시여, 하명하소서!]

그녀의 등장에 어느새 잊혀졌던 드웰이 구석에서 낮게 구시렁거리다, 한스에게 호명받고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곧바로 네가 해 줄 일이 생겼구나. 당분간 올리비아와 함께 움직여 그녀를 도와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역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많으니 일이 편해졌다.

시키기만 해도 어지간한 일들은 알아서 다 처리할 수 있으니.

[올리비아, 드웰과 같이 놈들을 복종시켜라. 필요하다면 카람을 데리고 가도 좋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적재적소, 방비가 강한 곳이면 더 강한 부하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뚫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곳은, 재림한 불사왕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

"뒤져라!"

콰직—!

할리의 커다란 주먹이 몬스터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일상적인 풍경.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주치는 몬스터들의 수는 더욱 늘어났지만, 일행에게 더 이상의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단 한 사람으로 인한 변화였다.

"으하하하—! 전부 덤벼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은 기묘한 파동을 머금고 주변으로 퍼져나가···.

"크워어—!"

"끼에에엑!"

몬스터들을 자극해 놈들의 주의를 온통 할리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그에게 덤벼든 몬스터들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퍼억!

푸화악—!

비산하는 신체의 일부와 주변을 물들이는 혈액.

놈들은 문자 그대로 갈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전에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요."

"음, 그렇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마법사 파비엘라와 기사 로빈을 시작으로, 광범위하게 어그로를 끌고 있는 탱커의 존재 덕분에 한결 편하게 버티던 일행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거기다 그들과 싸우던 몬스터들도 할리가 한 번씩 광소를 터트릴 때마다 그쪽으로 주의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 그 틈을 타 처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면, 아는 놈들에게 확실히 말해둬야겠어. 뒤지기 싫으면 저 인간 건들지 말라고."

"···대놓고 말은 안 하더라도 은근히 멸시하는 이들도 제법 됐었지. 나도 지인들에게 경고해 둬야겠네. 줄초상 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괴물처럼 날뛰고는 있었지만, 할리의 외견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우람하고 폭력적인 근육과 사나운 웃음을 머금은 야만 전사 그대로.

하지만 그 결과는 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의 주먹질은 아무렇지 않게 몬스터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렸고, 손끝은 질긴 몸을 우습게 파고들었다.

빠르고 육중한 몸놀림은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부딪힌 놈들이 튕겨져 나갈 정도였으며, 그의 조각 같은 근육은 어떤 외부의 충격에도 손상 하나 없이 굳건했다.

"그런데 정말 도끼는 쓰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요."

"영 성에 차질 않는다는데 어쩌겠어. 어디 소수 교단의 몽크(Monk)들이 저렇게 싸운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하다만, 저건 뭐랄까··· 무술이라기보단···."

"야성적이네요."

작게 수군거리는 레인저 한스와 찰튼.

그렇게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 혼자 그런 모습을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끄응."

바로 드워프 자오닉 스틸스톤이었다.

이윽고 한바탕의 싸움이 일단락되어 다시 자리를 옮기는 와중, 그가 참지 못하고 할리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이봐, 할리! 내 자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최근 할리를 보며 느꼈던 위화감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강하면서 어째서 엘린느를 지키지 못했느냐는, 일견 타당한 의문.

그리고 그런 의혹은 이미 그가 예상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럴 거면 힘을 얻은 의미가 없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변명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흠흠, 아아— 그렇군.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내 과거와 연관이 있는 문제여서 말이지."

"···과거?"

할리가 헛기침하며 자오닉을 비롯한 일행을 가볍게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도 별다른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지만, 은근히 관심 있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떠나기 전까지 보이던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간 서둘러 이동하느라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던 만큼, 그들도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오닉에게 하워드를 부탁할 생각인데, 이렇게 사소한 문제로 괜히 마음에 의혹을 남겨둘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 여기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좋은 관계를 맺어둔다고 해서 나쁜 일은 없을 터.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시점에서 새로이 써 내려가고 있는 위대한 서사시, '할리의 대모험' 7막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놈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 혼자 몸을 빼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무섭게 뒤를 쫓아오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비롯한 온갖 괴물들.

할리는 위기 속에서도 엘린느의 도움으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경이 된 북부 산맥 한복판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숨 돌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런, 또 몬스터들이 다가오는군.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앗, 아아—!"

"···그렇지.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하도록."

그렇게 몇 차례의 전투와 휴식 그리고 이동이 계속되었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차분히 나아간 그들이 산맥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조금씩 진행되던 할리의 이야기도 서서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이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에게 날아온 총알을 막고 부서져 버린 물건처럼,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을 대신 받고 산산이 박살 난 곡괭이, 엘린느.

그리고 그 희생 덕에 기사회생한 할리는 마침내 자각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 피에 잠재되어있던 무언가를. 그리고 그게 내가 실험을 당했던 이유이자, 동시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지."

이해를 돕기 위해 '할리의 대모험' 앞부분의 이야기도 함께 풀어놓았다.

사악한 흑마법사 한스에게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4막 3장의 내용도 포함해서.

물론 느긋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상당히 축약된 내용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예상외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저 배경 설정이 덧붙여졌을 뿐인데,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강하고 유능하지만 괴짜 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는 또라이에서, 여러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세상에 저항하는 전사를 보는 시선이랄까.

'역시 캐릭터성의 완성은 스토리인가.'

단순히 독창적인 외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겪은 어려움은 시련이 되고, 발버둥은 삶에 대한 투쟁이 된다.

그 안에서 개성이 살아나 더욱 생동감이 생기고, 그것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웅담'의 시작이었다.

"그··· 그래서?"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에 몰입한 자오닉.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일행의 반응 속에서 할리는 담담하게 설정··· 아니, 이야기의 마무리를 늘어놓았다.

"그래, 내 핏속에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엘린느가 만들어준 마지막 기회 덕분에, 그것을 각성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할리가 한쪽 팔을 내밀며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팔뚝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은 그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용인이라니···. 드래곤도 보기 힘들어진 마당에."

"선대 중에 용인이 섞여 있었나 보네요. 아마 삼백 년 전 대전쟁의 여파로 제대로 전승이 되지 않은 거겠죠. 그 때문에 피 안에 잠재된 힘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고."

마법사 파비엘라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서 설정을 보완해주었다.

'오? 그거 좋군, 채택이다.'

역시 똑똑한 친구라 아는 게 많은 만큼, 자신의 지식에 기반한 정보로 납득한 모양이다.

"위기에서 각성한 용의 피라니. 그야말로 영웅담의 한 장면이네요."

"어쩐지 비범하다 했지.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구만?"

그제야 할리의 강함에 대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거기다 그런 마지막이었다면, 엘린느도 기꺼운 마음으로··· 크흡."

자오닉이 장렬하게 희생한 곡괭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홀로 눈물지었다.

그리고 할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아무래도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지어낸 이야기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

소설가나 극작가가 될 수도 있는 재능이지만, 그것을 악용하면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보통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휴, 그런 놈들 때문에 나처럼 선량한 사람도 피해를 본다니까.'

자신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남을 속이는 사기꾼과는 달리, 세계의 평화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같은 취급을 하는 건 굉장히 불쾌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이제 다 왔다. 저기만 넘으면 강철의 성채가 보일 거야."

많고 많은 사건을 겪고, 일행은 마침내 산맥을 벗어나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

"으음, 예상은 했지만."

언제나 굳건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강철'의 이명까지 받았던 그 높고 단단한 성채가, 곳곳이 부서지고 피와 시체로 뒤덮인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지 곳곳에서 분주히 전장을 정리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몬스터들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일단 빨리 가도록 하지."

일행을 이끄는 책임자인 로빈의 말에 일행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서둘러 강철의 성채로 향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116

전조 (1)

"아니, 자세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니까! 대체 지도만 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그동안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니 내가 아주 만만하게 보였나 본데, 이거 언제 한번 확실히···."

똑똑—

연신 불평을 토하던 금발의 남자, 앤드류 위버가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흠흠, 들어와."

그의 허락과 함께 조용히 열리는 문.

발소리 하나 없이 안으로 들어온 메이드 한 명이 테이블 위에 차와 다과를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을 마친 그녀가 문밖으로 나서기 전, 앤드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시아나 아가씨가 지금 저택에 계시나?"

"아뇨. 아직 아가씨께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음, 그렇군. 아무것도 아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네."

공손히 인사를 마치고 물러가는 메이드를 일별한 그는 다과를 입에 넣고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짜증이 한 차례 식고 나자,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한숨만 새어 나왔다.

'쯧, 그래도 일단 해 봐야겠지.'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뭘 어쩌겠는가.

그에게 내려온 주문은 「궤적 관측」으로 얼마 전 서북부 산맥에서 일어난 강대한 마력의 충돌에 관해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내 능력은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그런 편리한 게 아니라고!'

인적이 없는 건 물론이고 자세한 정보도 없는 지역이라, 그에게 주어진 건 지도에 찍힌 위치 달랑 하나.

참고할 자료로 자연 식생이나 기후, 몬스터 서식지 등의 내용이 있긴 했으나, 그런 포괄적인 정보는 위치를 특정하는 데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이나 장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차선은 서면으로라도 최대한 상세한 정보를 숙지하는 것이었는데···.

'사진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현장 스케치라도 주고 일을 시키던가.'

거기다 일을 벌인 상대가 불사왕으로 추정된다면, 격의 차이로 그를 볼 수 없는 자신은 별 쓸모가 없었다.

'물론 그것까지 감안하고 내게 일을 시킨 거겠지만.'

일단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능력 덕분에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니까.

앤드류는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자신의 고유스킬, 「궤적 관측」을 발동했다.

곧바로 사건 현장을 확인할 수는 없었던지라, 일단 자료가 많은 초입부를 훑고 서서히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와중.

'어라? 이 난리 통에 산맥 안으로 들어가는 놈들이 있네?'

비슷한 시기에 의뢰를 받고 북쪽으로 향하는 할리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것도 잠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것도 곧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변해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 정보 없는 관측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수준이 더 높아진다면 모를까, 지금 그의 능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마력 충돌의 현장 지역을 파악하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에이, 괜히 헛고생만 했네. 괜히 나한테 지랄하는 거 아니겠··· 응?'

그렇게 앤드류가 「궤적 관측」을 종료하려던 찰나.

그의 시야에 산맥 안으로 들어섰던 이들이 귀환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것까진 이상할 게 없었으나···.

'뭐야? 뭔데 이렇게 흐릿해?'

갈 때와는 달리,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은 명확히 관측되지 않았다.

아예 볼 수 없는 불사왕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건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던 진혈의 뱀파이어보다 더한 수준.

일행 중 누구에게 시선을 집중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이즈가 생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뭔가 변화가 생겼군.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앤드류는 그들이 영주의 의뢰를 받아, 산맥에 고립된 드워프를 구하는 의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드워프에게 뭔가가 있나? 아니면 그건 위장 의뢰고 숨겨진 다른 속셈이 있었다거나?'

어쨌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당초의 목표였던 정보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뭔가 미심쩍은 정황을 발견한 그는 희희낙락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뭔가 소득을 얻기는 했으니, 이제 위에도 할 말은 생겼다.

"좋았어! 이 정도면 오늘은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계속하면 되겠지."

이제 거리낄 게 없어진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저택을 나서 준비된 마차를 타고 유흥가로 향했다.

저택에서 노는 것도 좋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집안에서만 생활한단 말인가?

'일만 제대로 하면 딱히 터치하지도 않으니, 이만큼 좋은 직장이 또 없단 말이지.'

거기다 풍족한 자금 지원도 있으니, 근무 만족도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건과 같이 무리한 일을 시키지만 않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앤드류 위버가 편한 마음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때.

스으으—

아무런 기척 없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형체 없는 무언가는 어떠한 집념도, 욕망도 없이 흐릿한 자아만 지닌 채로.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빠르군."

헤테로시스의 사무실에 온 하인즈는 마우스의 휠을 내리며 혀를 내둘렀다.

일단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나온 일차분이긴 했지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준비했다고 하기엔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간만에 내려온 로드의 특명이었으니까요. 혈맹까지 닦달해서 저희 클랜의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감탄에 진소란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일을 위해 취미로 계속하던 개인 방송까지 쉬면서 달려든 만큼, 그의 놀란 모습이 만족스럽기만 했다.

하인즈는 가볍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금속의 특성부터 시작한 이론 부분과 망치를 쥐는 법부터 시작하는 실전 부분까지.

사진과 동영상까지 첨부된 그 자료는 제대로 숙지만 한다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대장장이 입문서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확실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기초인데다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지만, 이런 전문적인 지식을 일반인이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스승 없이 이론만으로 독학해야 한다면 오죽하랴.

이 부분을 온전히 체득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테지만···.

드워프 하워드는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었다.

하인즈가 읽었을 때는 그저 정보의 나열일 뿐이었던 내용들이, 하워드의 뇌리를 통해 순식간에 분석되었다.

여러 금속의 성질, 불의 온도를 조절하는 법, 첨가하는 재료의 특성과 각 과정의 원리 등···.

이론이 본능에 새겨지고, 동영상 속의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빨리 직접 실험해보고 싶은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하워드의 손이 근질거렸다.

아무리 그가 대단해도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지라, 이해한 내용을 직접 시행해 몸에 맞춰 온전히 체득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전송진을 이미 사용했으니까, 쿨타임이 끝날 때까지 휴버트가 공방을 준비해 두면 되겠네.'

타라크에 제법 커다란 상회를 이끌게 된 휴버트에게 하워드 전용 공방을 준비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인즈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아, 그러고 보니 로드께 보고드릴 일이 하나 더 있었어요!"

그의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진소란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이전에 말씀하셨던 조직, 번천회를 계속해서 추적 중이었는데···. 몇몇 세력에서 놈들과 접촉한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이세계와의 시차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만, 놈들이 한국 활동을 중지한 지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슬슬 간을 보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당장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는지 가벼운 접촉 수준이라, 일단 상황을 주시하며 동태를 살피는 중입니다."

"흠··· 그래, 잘했다. 앞으로도 직접 나서진 말고, 일단 계속 상황을 파악하는 데만 신경 쓰도록."

"네, 알겠습니다!"

번천회.

당연히 놈들을 잊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세력을 꾸리고 힘을 기르는 게 전부 놈들을 말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실 어지간한 놈들이면 한스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긴 한데.'

번천회의 세력은 이미 개인의 무력으로 어떻게 할 수준을 넘어선 데다, 워낙 철저하게 숨어있어 찾는 것도 까다로웠다.

또 한스는 그 기운의 특성상 함부로 나섰다가 엉뚱한 상대를 적으로 만들 우려도 있었으니···.

'괜히 급하게 나설 필요는 없겠지. 확실하게 하자, 확실하게. 놈들에 대해 좀 더 파악한 후, 철저하게 숨통을 끊는다.'

시간의 우위는 이쪽에 있었다.

자신이 힘을 기르고 있던 약 10개월 동안···.

지구는 이제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으니까.

***

"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

왕국의 제일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트 공작가의 정문에서는 한창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검은 머리의 여인이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려다 경비병에게 제지당한 것이 원인이었다.

"뮬로를 찾아왔단다."

"여기는 브라이트 공작님의 저택입니다. 혹시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니신지···?"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쩔쩔매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평소였다면 거친 말과 함께 가차 없이 쫓아냈겠지만, 그녀에게 감도는 왠지 모를 분위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위축이 된 것이다.

"···그, 혹시 약속은 하셨습니까?"

"음··· 아니? 그냥 왔는데."

경비병이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고자 땀을 뻘뻘 흘리며 대응했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그저 맹하니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거 곤란하네—. 괜히 소란을 피우면 미안하고."

뜻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일단 안쪽에 말씀은 전해보겠습니다.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나? '브리키'라고 하면 알 거란다."

결국 그는 안쪽에 판단을 떠넘기기로 했다.

만약 정말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면 집사에게 한 소리 듣고 그의 평가도 깎이겠지만, 대단한 사람인데 홀대했다면 물리적으로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매우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녀의 말이 안쪽에 전해지자, 집사 한 명이 직접 문 앞으로 나와 상대를 확인한 것이다.

"흐음, 이 아이도 마찬가지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택에서 나온 창백한 안색의 집사를 마주하자마자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손히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하는 집사.

물론 그렇게 그들이 향한 곳은 일반적인 손님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온갖 결계와 보안 장치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 복도를 걸으며 '브리키'는 자신을 안내하는 이, 순혈의 뱀파이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몇 번이고 마주했던 변질된 피가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특이하단 말이야. 근본이 바뀐 건 아닌데,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너무 많아.'

이미 도중에 잔혈 하나를 잡아다 피 냄새도 맡아 보고, 살짝 맛을 보기도 하며 여러 가지로 확인해 봤지만···.

도무지 그 변화의 연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당사자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자신조차 파악할 수 없는 요소로 인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원본보다 훨씬 진보한 '진화'.

그래서 그녀가 친히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로드라면 이 원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똑똑—

"뮬로 님, 모셔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저택의 심처에서 마침내 그들은 서로 마주할 수 있었다.

클랜의 전(前) 로드, 뮬로 브로코슬락과.

"오랜만이구나, 뮬로."

"어서 오십시오, 브로코슬락 님."

클랜의 시조, 성혈(聖血) '브로코슬락'이.

그녀가 드디어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

#117

전조 (2)

"죄송합니다. 프리지아가 마침 자리를 비웠던지라. 그녀가 있었으면 괜히 번거롭지 않게 바로 오실 수 있었을 텐데요."

"응—? 그건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별일도 아니고."

뮬로는 브리키를 집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안내하고, 느긋하게 그녀가 좋아하는 홍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태도는 겉모습일 뿐,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상태였다.

'예정된 방문일까지 최소 20년은 넘게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다니.'

거기다 하필 하인즈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싸운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결계 내부라고 하더라도, 혼자 그녀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사실 싸우고 싶지도 않고.'

지금은 하인즈에게 종속된 몸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셔왔던 존재가 아닌가.

실질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이 이은 혈맥의 시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뮬로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사방을 뒤덮은 혈마법 결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성스럽게 탄 홍차를 브리키의 앞으로 내놓자.

후루룹—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받아 홀짝이며 뮬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너도 마찬가지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당연히 변질된··· 아니, 더욱 진화한 피에 관해서 하는 말일 터.

혈맥의 시조인 '브로코슬락'에게 피의 성질을 파악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구나. 분명히 내 피를 이은 건 맞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게. 혈통은 그저 그 자체만으로 오롯하다고 생각했거늘···."

그것이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상식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정면으로 반박의 증거가 들이밀어진 것이다.

"브로코슬락 님, 그러니까···."

"브리키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난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아, 네. 브리키 님."

"그래, 그쪽이 훨씬 귀엽잖니. 역시 처음부터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아. 좀 더 깜찍한 이름으로 지을 것을."

갑자기 화제를 바꿔 혼자 투덜거리는 브리키의 말에 뮬로는 혼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마터면 깜찍한 성을 가지게 될 뻔하지 않았나.

그는 지금의 성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디 있니?"

혼자 투덜거리던 그녀가 다시 뮬로를 향해 태평하게 물었다.

언제 들어도 두서없는 화법이었지만, 이미 그에 적응돼있던 뮬로는 곧바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흐음—."

그의 대답에 브리키는 별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궁금하네, 대체 어떤 아이기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처음엔 클랜로드인 뮬로를 찾아오면 궁금증이 해소될 줄 알았건만, 정작 마주해보니 그도 누군가에게 종속된 처지에 불과했다.

'성혈인 나의 지배권을 빼앗아서 말이지.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애초에 권력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만큼, 자신의 권위를 침탈당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의 주모자에 대한 호기심만 더욱 강해졌을 뿐.

'진화를 통한 혈맥의 강화, 보다 우월한 피의 전승. 이거라면 뱀파이어들이 양지로 나아갈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바로 그것이 그녀가 어떻게든 후계를 남기기 위해 오랜 세월을 버텨온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잠든 사이에 그 가능성이 성큼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네가 타준 홍차를 마시니 기분이 좋구나, 뮬로."

"감사합니다, 브리키 님."

"참, 나 머물 곳이 없는데. 당분간 여기서 신세를 좀 져도 될까?"

"···물론입니다. 편하게 지내실 방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뮬로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골머리를 싸맸다.

그녀의 태도를 보니 딱히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하인즈가 돌아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관련 방침을 전해 들은 것도 없고, 따로 먼저 연락을 취할 수단도 없으니···.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멋대로 판단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결국 하인즈가 돌아올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빼앗긴 집에 찾아온 전 주인이 태평하게 눌러앉았다.

***

툴크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강철의 성채는 오늘도 연일 몰아치는 몬스터들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이미 아오니아 백작령의 군대는 끌어올 수 있을 만큼 끌어온 지 오래였고,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도 속속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이곳이 밀린다면 왕국의 북부 전체가 쑥대밭이 될 것이 뻔했으니,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각 영지에서 파견된 병력과 막대한 보수를 노리고 찾아온 용병,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한 주신교단의 사제와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세상에··· 저게 말이 되나?"

"···말이 되는 것 같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는 화려한 마법을 난사하는 마법사도, 신의 자비를 구현하는 사제도 아니었다.

"타라크에서 유명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였다니."

"···우리 대장이 언제 한 번 저 인간 박살 내겠다 벼르고 있었는데. 아직 안 덤빈 게 다행이군. 목숨이 남아나지 않았겠어."

몬스터의 무리 속에 파고들어 싸우는 한 명의 전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그냥 전사라고 치부하기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용모가 범상치 않았는데···.

오크를 압도하는 덩치와 근육, 상체는 벌거벗은 채 투구 대신 마수 머리를 뒤집어썼으며.

전신에는 온갖 형상의 문신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눈에서는 적광과 녹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크하하핫—!"

무엇보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학살을 벌이는 그 모습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몬스터들보다 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성벽에서 내려가 저기에 정면으로 덤벼들 때는 웬 자살 희망자인가 싶었는데···."

그는 정면에서 얼마나 많은 놈들이 달려들든, 어떤 대형종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온몸을 사용해 적들을 박살 낼 뿐.

한 손에 들린 커다란 도끼가 장식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콰앙—!

"쿠웨엑!"

"끄익—!"

힘이 어찌나 센지, 그저 들이박기만 해도 몬스터들이 마차에 치인 인형처럼 튕겨 나간다.

귀찮게 엉겨 붙는 걸 걷어차자, 공이라도 찬 것처럼 허공을 날아 다른 놈들과 부딪혀 우르르 넘어졌다.

맨손으로 질긴 가죽을 찢고, 그 주먹은 놈들의 두개골을 우습게 부숴버렸다.

"이젠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는데···."

"···그러게. 저게 인간의 전투 방식이 맞나?"

그렇게 성벽 위에서 항전하는 이들이 저도 모르게 힐끔거리는 대상, 할리는 싸움 와중에도 부지런히 전장을 살피는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는 단순히 관심을 받기 위해 이곳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찾았다! 이번엔 변종 미노타우로스인가.'

검은 광택이 빛나는 금속성의 가죽과 날카로운 두 쌍의 뿔을 가진 소머리 괴물.

광기를 정도 이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과시하듯, 그 두 눈은 흉포한 붉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놈을 발견한 할리가 곧바로 그쪽으로 내달렸다.

콰직! 쾅! 콰드득—!

"크이익!"

"케흑!"

그 와중에 무수한 교통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뺑소니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으하하하! 이리 오너라, 이놈!

북부 산맥의 몬스터들은 먹이 사슬의 위에 있을수록 그간 쌓아온 광기의 양이 큰 폭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어느 임계점을 넘었을 때, 과하게 활성화된 생체력은 변이를 거치게 되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광기에 물든 변종 몬스터인 것이다.

'즉, 저놈들은 하나같이 풍부한 광기를 품고 있는 영양식이라는 거지! 거기다 저마다 특출하게 진화한 유전 형질도 있으니.'

물론 모든 면에서 고루 발달한 용의 인자가 있기는 하지만, 각 분야에 특화된 유전자는 또 각자의 쓰임이 있는 법.

그것이 할리가 직접 전장을 돌아다니며 놈들을 사냥하는 이유였다.

"쿠워어어—!"

그가 몬스터들을 몸으로 치고, 밀고, 걷어차며 마침내 미노타우로스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마침 놈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의 위용을 보고 경계하는 기색이긴 했으나, 그간 산맥에서 포식자로 군림하던 놈이었던 만큼 위축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

콰앙—!

그저, 곧바로 땅을 박차며 네 개의 뿔을 그에게 내밀고 돌진해 왔을 뿐.

4미터가 넘는 미노타우로스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순식간에 접근했다.

물론 그의 반응속도라면 쉽게 회피할 수 있겠지만.

"오냐! 어디 한 번 붙어보자!"

상남자 할리는 회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뿌드드득— 콰앙!

그의 허벅지 근육이 한순간에 부풀어 오르며, 더욱 무겁게 바닥을 딛고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만큼 둘 사이가 급속도로 좁혀졌다.

"후읍—."

충돌 직전, 할리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오른손을 틀어쥐었다.

장전된 화살처럼 살짝 뒤로 당겨지는 오른 주먹.

그리고 초고밀로도 압축된 그의 근육에서···.

끼긱— 끼기긱!

이제는 사람의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체의 몸에서 난다기보단, 공사장의 대형 건설 장비에서나 날 법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동시에 그의 팔을 검붉은 비늘이 뒤덮었다.

직후.

"카하하핫—!"

"쿠워어어—!"

콰아앙——!

미노타우로스의 두꺼운 두개골과 할리의 오른손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우우웅—!

한순간 일어난 충격파에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으로, 충돌 지점부터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밀려난 할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앞에 머리를 내민 채 멈춰선 미노타우로스도 함께.

그리고 놈은···.

쿠웅!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후우— 이거 참. 생각보다 많이 밀려났군."

아무리 그의 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해도, 4미터가 넘는 괴물과의 질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무거운 게 빠르게 다가오기까지 하니 정면으로 부딪치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놈은 머리가 박살 난 채 그대로 즉사해 버렸지만.

할리는 검붉은 비늘에 뒤덮인 오른팔을 가볍게 털다가 놈의 가슴 부위에 그 팔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단단하고 질긴 가죽이 그 몸뚱이를 보호했지만, 「생체 오러」와 광기를 비롯한 기운을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승전의 의식을 치르듯 미노타우로스의 마석을 뽑아내 먹어 치웠다.

'역시 이쪽이 효과가 좋단 말이지.'

「광기 제어」가 체내로 들어온 기운을 휘어잡고 순식간에 통제에 넣었다.

서서히 주변의 광기를 흡수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율이었다.

그리고 새로 얻은 유전자도 제법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

질주에 특화된 하체 근육의 일부는 곧바로 접목해 써먹어도 될 정도였으니.

"으핫! 그럼, 계속 가 보자고!"

그는 순식간에 뽑아낸 변종 미노타우로스의 뿔 4개를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해 휴버트에게 전송하며 다시 전장을 질주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느긋하게 파밍을 할 수는 없었지만, 좋아 보이는 핵심 소재들 정도는 틈틈이 챙기는 중이었다.

'나중에 이걸로 하워드가 장비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창고 관리를 맡은 상인 휴버트가 잠시 발이 묶이긴 했지만, 어차피 최근에는 공방 개설 건 말고는 딱히 급한 용무도 없었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리가 위험한 고위 몬스터들을 노리고 사냥을 이어가자, 성채 수비를 맡은 이들은 한결 편하게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 그는 다른 강자들과 달리 체력이 무한하기라도 한 듯 쉬지 않고 출전 중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할리가 성채로 돌아갔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의 감탄과 공포를 비롯한 경외에 찬 시선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막 전투를 끝낸지라 광기의 여파가 남아 흉흉한 그의 눈빛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온통 피범벅이 되어 김을 풀풀 풍기는 모습에 쉽게 접근할 이는 없었을 것이다.

"오! 할리! 이번에도 한 건 했구만! 수고했네!"

물론, 이미 그런 모습에 적응된 일행은 별개였다.

함께 북부 산맥을 빠져나오며 친분이 쌓였던 드워프가 그에게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 강철의 성채에 주둔 중인 아오니아 백작가와 접촉하는 것으로 의뢰는 종료되었었다.

이후 할리는 자연스럽게 몬스터를 막는 데에 참여했고, 자오닉은 무구를 정비하는 쪽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아, 이번엔 전해줄 말이 좀 있어서 왔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내가 말을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말이야."

뒷머리를 긁적인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꺼낸 용건은, 누군가가 할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언이었다.

"일단 전투를 마친 직후이니 지금은 쉬고, 나중에 편할 때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물론 그가 직접 심부름을 올 만한 상대가 별것도 아닌 인물일 리 없었다.

타르민 아오니아.

처음 자오닉의 구출을 의뢰했던, 이곳 아오니아 백작령의 영주였으니까.

#118

전조 (3)

"여—! 할리!"

할리가 숙소에서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신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털보와 덩치, 칼자국의 남부 전사 삼인방이었다.

"이야— 이전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더 괴물이 된 것 같아?"

"타라크에서 온 용병 놈들도 그것 땜에 다들 쫄았잖어. 알게 모르게 뒷담 까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덕분에 칼코스의 각인을 우습게보던 놈들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얼마나 통쾌하던지."

역시 할리는 남부의 자랑이다, 진정한 전사의 귀감이다 등···.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를 둘러싸고 칭찬 세례를 퍼붓는 삼인방의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하하하! 고마워 친구들! 그런데 얼마 전까진 여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결국 할리는 그들의 말을 끊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가 구출 임무를 위해 북부 산맥에 머문 기간이 제법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제야 강철의 성채로 도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동안은 성채 뒤쪽에 저지선을 구축하는 데에 동원됐었지. 이번에 영주가 직접 이곳으로 오면서 우리도 같이 따라왔지만."

"여기가 요충지기는 해도 한 놈도 빠짐없이 막을 수는 없잖어. 새어 나가는 놈들도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지형 특성상 가장 최전선의 강철의 성채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몬스터들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내고는 있지만···.

그 넓은 산맥에서 밀려오는 놈들을 성 하나로 전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이번 사태에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산맥과 경계를 마주한 부분이 아오니아 백작령밖에 없는 툴크 왕국이라 이 정도지, 북부 산맥의 중앙부 전체가 영역과 맞닿은 아제리온 제국은 지금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대응에 나설 정도였다.

할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실컷 떠들다,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지휘부가 있는 중심부로 향했다.

'지금은 딱히 피곤하지도 않으니, 그냥 바로 영주를 보러 가면 되겠지.'

해야 할 일은 생각났을 때 바로바로 끝내두는 게 좋았다.

편할 때 오라고 했어도, 아마 그쪽에서도 그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데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는 또다시 구면인 상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할리 씨. 오늘 활약도 대단하셨다 들었습니다. 하긴, 할리 씨라면 당연한 일이겠죠."

함께 구출 임무에 파견되었던, 지금은 이 근방의 경비를 책임지게 된 레인저 찰튼이었다.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그는 군 소속이어서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눌 수 있었다.

"한스는 아직도 군 의무실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습니다. 포션이 있었다지만 부상이 심한 상태로 무리해서 움직여 회복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레인저 한스도 일단은 큰 후유증은 없이 복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한스'의 이름을 잇는 자로서 그 정도는 이겨내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보르도는···. 가져온 유품으로 부대에서 합동 장례를 치렀습니다. 저희가 산맥에 다녀온 동안, 부대의 피해도 상당했던 것 같더군요."

그리고 이후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그의 고향으로 유품을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보르도는 할리와는 별로 인연이 없던 이였지만, 자신이 함께한 여정에서 사망한 만큼 신경 쓰이던 것도 사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아, 제가 괜히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지휘부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찰튼은 안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그에게 경례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사라졌다.

'음, 뭔가 오늘따라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설마 또 있진 않겠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건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이 강철의 성채에서 만날 수 있는 지인이라고 해 봐야, 함께 산맥 내부로 향했던 용병들밖에 더 있는가.

그리고 이미 그들과는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일찍 왔군. 안쪽으로 안내하지."

하지만 그런 판단은 너무 섣부른 감이 있었으니.

'아, 이 양반을 잊고 있었군.'

그를 맞이한 것은 함께 의뢰를 수행했던 기사, 로빈이었다.

산행을 떠났을 때의 가죽 갑옷이 아닌 멀끔한 금속 장비로 완전히 무장한 것을 보니, 확실히 기사는 기사였구나 싶었다.

"기사 나리, 그간 잘 지냈나 봐?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진 것 같아."

"착각이다. 그래도 여기선 잘 씻을 수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편하게 쉴 시간도 없군. 그 고생을 하고 왔는데 곧바로 근무 투입이라니···."

함께 고생하며 친해진 만큼 그들의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가 편하게 근황을 주고받을 자리가 아니었던 만큼, 그런 대화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단 영주님께 네 성격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태도 같은 건 좀 더 신경 써 주면 좋겠군."

"응? 내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나?"

뻔뻔하게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할리.

물론 그 개성적인 몰골 때문에 괴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한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예의 하면 이 몸이 아닌가? 난 새치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라고!"

물론 본의 아니게 앞 사람에게 양보받는 일이 매우 잦기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자발적인 배려였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함부로 폭력을 쓰지도 않고 말이지!"

초창기에는 도시에서 할리가 지나갈 때마다 혀를 차며 뒷담을 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에 그가 내세운 방안은, 따뜻하게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할리의 뛰어난 오감으로 뒷담을 파악할 때마다, 그저 두 눈을 마주하며 건치를 드러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줄 뿐.

절대 폭력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효과는 놀라웠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이후엔 그런 경우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물론 눈이 마주치니까 오히려 시비를 거는 인간들도 늘었지만,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걸린 시비를 피하는 건 상남자 할리가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먼저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면 예의범절의 화신이라고 봐도 될 터였다.

"···그래. 그래도 세운 공이 있으니 괜찮겠지. ···실력도 있으니까."

그 당당한 주장에 압도된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할리는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다.

"오! 자네가 할리로군,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이 근방의 지배자인, 타르민 아오니아 백작을.

"자오닉과 로빈에게 자네 칭찬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과연 직접 보는 건 확실히 다르더군."

이제 서른 후반에 접어든 영주는 할리의 개성적인 차림을 보고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지만, 이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에게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하핫! 이거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가를 받고 움직인 것뿐인데. 으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영주의 미간이 재차 꿈틀거렸다.

영주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로빈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존댓말을 쓴 것만으로 그에겐 충분히 노력한 것이었으니까.

'아, 이게 할리식 예의라고. 그래도 로빈의 얼굴을 봐서 최대한 양보한 건데!'

그런 할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주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흠흠, 어쨌든. 의뢰 건도 그렇고, 이번에도 큰 활약을 해 주고 있으니 한 번 얼굴이라도 직접 보려고 불렀네. 뭔가 추가 보상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말이야."

그러면서 그가 선심 쓴다는 듯 넌지시 제시한 보상은 영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기사 작위라니, 물론 할리의 무력을 보면 영입하려 드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그게 보상으로 선심 쓰듯 내줄 한 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증명해 온 그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자유롭고 거친 야생의 광전사, 할리는 이런 문제에선 굉장히 단호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런 것보다, 그냥 현물로 주시는 게 어떤지?"

"그··· 그런 거? 현물?"

"그, 왜. 커다랗고 튼튼한 양손 도끼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쓰는 녀석은 영 부실해서 말이오!"

"······."

말을 하다 보니 말투의 급이 슬쩍 떨어졌지만, 떨떠름한 표정의 영주는 그걸 따질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로빈은 그저 해탈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고.

"네··· 네놈! 감히 영주님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거기다 이 무슨 무례한!"

하지만 영주의 다른 기사들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응접실에 들어올 때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노려보고 있던 기사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무기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물론 할리는 그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우테리카에 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나.'

이제 짬이 찰 만큼 찬 그가, 이곳의 생리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귀족이라는 권력층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됐다. 모두 물러나."

"하, 하지만 영주님···!"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나!"

영주의 일갈에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빠지는 기사들.

'지금 같은 난세에는 오로지 힘만이 전부. 그리고 할리는 그것을 넘치도록 증명했다.'

하물며 그는 지금 북부 산맥에서 범람하는 몬스터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강자였다.

한 번의 거절 정도는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

원래 좋은 인재를 얻기 위해선 삼고초려는 기본으로 고려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 도끼라고 했지? 아예 자오닉을 통해 맞춤으로 하나 만들어 주지. 자네도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영주처럼.

"으하하! 감사합니다, 영주님. 역시 큰 영지를 다스리는 분답게 통이 아주 크시군요!"

"그렇지, 내가 또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네. 하하하!"

그래, 어딜 날로 먹으려고 드나.

편의도 좀 봐주고, 선물 공세 좀 하고, 여러 차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어야만 인재를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무조건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세상사 완벽한 게 어디 있나, 다 그런 거지.

그렇게 할리는 서북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영향력과 명성을 떨쳐 나가고 있었다.

***

"로드, 모든 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역천의 서약 쪽에서 인계받은 정보도 교차 검증을 끝냈습니다."

"그래? 정보에 이상은 없나?"

"네! 현재, 광기 사태로 마물의 숲을 방어하기 위해 진혈 둘이 자리를 옮긴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지금 수도 탈라리아에 남은 진혈은 많아 봐야 둘, 브로코슬락의 전 로드와 현 로드뿐입니다."

"흐음···. 그 조심성 많은 뮬로의 판단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범하군. 새 로드의 의향인가?"

수하의 보고를 듣던 이가 잠시 입가를 매만지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정면으로 맞부딪쳐도 이길 자신이 있는데, 진혈 둘까지 자리를 비웠다라···. 이거 일이 너무 쉬워지겠는데?'

전력 차는 압도적.

브로코슬락을 집어삼킨 현 로드의 수준은 잘 모르겠지만, 성혈이 아닌 건 확실하다.

"뭐, 좋아. 그래도 일은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겠지. 다른 진혈들을 소집하고, 전투 부대를 준비시켜라."

백발에 하얀 눈동자를 가진 사내, 비스크 유페르쉬가 자신의 앞에 조아린 수하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우리는 탈라리아로 간다."

명실상부 대륙 최강의 뱀파이어 집단, 유페르쉬 클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19

소리 없는 전쟁 (1)

에나멜 대륙, 엘븐 킹덤의 수도 드라샤.

여기, 대자연과 교감하며 하나가 된 이가 있었다.

'아— 바람 좋고, 햇빛 좋고, 그늘도 좋고. 이게 힐링이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대자로 드러누워 멍하니 있는 모습.

겉보기에는 그저 게으른 백수처럼 보였지만, 그것 또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일체화하는 수련의 일부였다.

'움직이기 귀찮네. 역시 가끔은 이런 시간도 있어 줘야 한다니까. 사람에게 여가 시간이 괜히 필요한 게 아니야.'

···조금 사심이 깃들어있긴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자연 친화력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으니 수련이라는 말도 절대 틀린 건 아니었다.

그렇게 고요 속에 물아일체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엘프, 해리스는 나무로 만들어진 길쭉한 무언가를 품 안에 꼭 껴안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흐아아··· 좋구나···."

그저 끌어안고만 있어도 뭔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며 몸이 노곤하게 늘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자연에 과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물건과 함께하니 그게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정도였다.

'세계수가 직접 하사한 가지로 만든 거니까 말이지.'

라포리를 통해 가공을 부탁한 그 가지가 마침내 늘씬하게 빠진 활이 되어 해리스에게 돌아온 것이다.

활줄을 풀어둔지라 그저 굴곡 있는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단순히 가지고만 있어도 소유주의 여러 능력을 증폭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중에 자연 친화력이 포함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평화롭네. 심연이 열린 이온 대륙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에나멜 대륙은 평상시와 그리 다를 게 없단 말이지.'

거기다 세계수의 영향 덕분인지 광기의 영향도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평상시 전력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

그야말로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음?'

그때, 한동안 빈둥거리던 그의 감각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연과 하나 되어 한껏 예민해진 기감은 상대를 곧장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에 해리스는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에게 용건이 있는지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이는 그도 아주 잘 아는 상대였다.

"흐아암— 데시벨."

우우웅—

해리스의 부름에 중급으로 성장한 소리의 정령, '데시벨'이 안락한 휴식을 위해 주변에 펼쳤던 방음 장막을 해제했다.

동시에 고요한 세상에 서서히 소리가 입혀지고···.

~♪

멀리서 신나는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새 드라샤에 한창 유행처럼 번진 경쾌한 음악.

해리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유입된 새로운 문화의 여파가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한동안 실컷 늘어져 있었더니 나태함에 대한 욕구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을 무렵, 마침내 씩씩한 걸음으로 다가온 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으니—.

"···그, 오랜만이네요? 항상 이곳에 있는 것 같던데,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당당한 태도와 대비되는 쭈뼛거리는 인사를 건넨 이는 바로 푸른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엘프 여성, 샤피론 실베스티였다.

'오랜만이라니. 당장 오늘 아침에도 마주하지 않았나?'

그녀와는 축제에서의 공연 이후, 생각 이상의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됐다고 할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해리스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라이벌을 대하는 것처럼 변한 탓이 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한동안은 몰래 따라다니며 이쪽을 관찰할 정도였지.'

그것도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모범생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뭔가를 메모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본인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자연 친화력이 극도로 상승한 그의 감지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또 무슨 용무가 생겼나 보군.'

첫 마디 이후로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살피는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샤피론 양. 이쪽이 마음이 편해서 말이지요. 자연과의 교감이 더 잘되기도 하고."

"그, 그렇죠. 교감, 중요하죠···."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동조하는 샤피론은 이젠 양손까지 마주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혹시 무슨 용무가 있나요?"

"아!"

이쪽이 먼저 말을 꺼내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본론을 입에 담았다.

"그, 저희가 이번에 대륙 정상 회의 사절단에 포함되었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조금 하고 싶은데···."

이온 대륙에 있는 주신교단의 성지,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대륙 정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에나멜 대륙의 나라들도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사절단의 수행 인원으로 해리스와 샤피론이 함께 포함된 것이다.

"준비요?"

"으··· 아, 아무래도 다른 대륙이고 하다 보니 여기랑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엘븐 킹덤의 얼굴이 될 저희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는 날엔 국제 문제로까지 비약될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원래 이온 대륙 출신이었던 데다, 최근에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을 받고 정령들이 모두 중급으로 진화한 해리스.

마찬가지로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으며, 드라샤 아카데미 최고의 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외부 경험이 전무한 온실 속 화초 샤피론.

능력 자체는 수행원으로 삼기에 부족하지 않은 둘이었던 만큼, 이번에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취지로 둘 다 사절단 멤버에 포함된 상태였다.

"당신은 이온 대륙 출신이니까···. 잠깐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물론! 맨입으로 부탁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제대로 대가도 준비했으니까요!"

민망한 표정의 그녀가 해리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하긴 최근엔 나아졌다고 해도 전까지 해왔던 행실이 있는데,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상당히 부끄러웠으리라.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지내왔던 엘븐 킹덤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긴장되기도 하고, 어떻게든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지.'

하물며 이번 사절단의 책임자는 그녀의 아버지, 라포리 그랜우드이지 않은가.

'저번 임무가 마지막 대외 임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또 이렇게 되었네.'

하긴 지금 정세에 쉽게 은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새로 하이 엘프가 된 세실리는 아직 한창 교육 중이고, 다른 이들도 각자 맡은 일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온 대륙에 대한 경험이 제일 많은 이가 라포리였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마주한 사안이 워낙 위중했으니까.

물론 그의 사정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희는 같은 일행이니, 그런 문제라면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그래서 그 대가가 뭔가요?"

돕는 건 돕는 거고,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하는 법이었다.

***

"음— 좋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군!"

넓은 작업 공간을 가득 채운 최신식 설비들.

신식이라 해봤자 자동화 설비 하나 없는 수작업 공간이었지만, 그것도 모두 가장 비싼 물건들로 도배하면 때깔 자체가 다른 법이었다.

며칠 전에 이세계로 전송된 드워프, 하워드는 공방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버트가 미리 공방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가 직접 공간에 자리하며 느껴지는 감상은 또 달랐던지라···.

그렇게 이리저리 손을 보길 며칠, 마침내 만족스러운 공간이 완성되었다.

'드워프의 종족 특성 때문인지, 「장인정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더 추가로 건들 부분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족스러워한다니 다행이군. 하워드."

"그래, 이 정도면 최상의 작업 환경이군! 역시 함께하기로 한 보람이 있어!"

휴버트와 하워드가 정겹게 대화하며 악수했다.

당연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한 요식행위였다.

이 자리에는 휴버트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세 명의 호위들뿐만 아니라, 상회 직원 몇몇도 파견 나와 있었으니까.

'앞으로 일의 편의를 위해서는 하워드를 우리 상회 소속이라고 못 박아 두는 게 좋겠지.'

필요한 재료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휴버트가 심부름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간단한 일은 부하 직원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해두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또 나중엔 자오닉에게도 찾아갈 생각인데, 드워프라고 언제까지고 숨기고만 있을 수도 없지. 차라리 대놓고 상회 차원에서 보호하는 게 안전할 거야.'

이미 휴버트 상회는 타라크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동업자인 할리의 위상은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거기다 주신교단과의 친분이라는 보험까지 남아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지간한 이들은 건드릴 생각도 못 할 터.

'아주 좋군. 이제 지구의 지식을 체화하기만 하면 되겠어.'

그리고 종족과 「장인정신」의 시너지 덕인지 이론적인 부분은 이미 전부 하워드의 머릿속에 있었으니, 남은 것은 실전을 통해 그것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하워드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 다 구해주도록.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나 할리를 대하듯 해라."

"예! 알겠습니다, 상회주님!"

공방 건물을 관리하고 경비를 맡을 이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들도 나름 엄선한 인재들로 구성한 만큼, 어지간한 일들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하워드."

"아— 맡겨두라고.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다시 하워드와 인사를 나눈 휴버트는 공방을 나서 타라크의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워드의 공방 건을 마무리 지으며 한결 여유가 생겼지만, 상인에게 휴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바타들의 보급과 잡일까지 도맡은 그였지만, 주 업무는 상회를 키우는 일이었던 만큼 항상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브로코슬락 클랜과 연계하면서 일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지.'

다른 조직의 뒷공작을 방어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뱀파이어들만 한 인재가 없었다.

덕분에 상회가 커지는 데 한층 탄력을 받았으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밥값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휴버트가 호위들을 거느리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찰나.

그의 본능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휴버트는 곧장 그 자리에서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물건을 쌓아놓고 파는 상인과 무장하고 돌아다니는 용병,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평소와 같은 풍경.

딱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평소와는 뭔가가 달랐다.

보이진 않으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회주님···?"

휴버트가 갑자기 멈춰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자, 조용히 뒤를 따르던 네 명의 호위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점점 가속하기 시작하는 사고 속에서, 전신을 뒤덮은 위화감은 점차 커져만 갔고···.

그 이성을 무시한 본능의 경고에.

그는 마침내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명?'

아주 자연스럽게, 세 명의 호위들 틈에 누군가가 끼어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붉은 눈과 붉은 머리라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이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바로 옆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실력이 있는 호위들조차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그리고 휴버트는 본능적으로 그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뱀파이어?'

아마 하인즈 2세의 영향 탓이었으리라.

위화감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이제 와서 눈치채 봐야 이미 늦었지만.

"아···? 쿨럭···!"

휴버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자기 몸에서 일어난 변화였음에도 뒤늦게서야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인지할 수 없는 공격에, 심장을 포함한 내부가 완전히 파괴당했다는 것을.

"상회주님!"

"뭐야? 갑자기 왜!"

그가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호위들이 그를 붙잡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휴버트의 시야에, 그 자리에 있던 정체불명의 뱀파이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뭐지? 어째서 뱀파이어가 나를···?'

가속한 사고 덕에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일이 벌어진 건 찰나에 불과했다.

거기다 기본 생명력이 원체 강했기에 지금 몇 초나마 버티고 있을 뿐, 이건 하인리히의 신성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그를 지탱하던 생명의 끈이 끊어지던 순간.

"일격으로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사 면역」이 발동하여 피해를 치명상으로 경감합니다."

"이후, 하루 동안 「즉사 면역」이 봉인됩니다."

휴버트가 기사회생했다.

#120

소리 없는 전쟁 (2)

"크헉···!"

흐릿해져 가던 의식이 급격히 깨어났다.

으깨졌던 폐가 재생하며 숨통이 터져 나오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며 혈액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치명적인 부상이 「초회복」으로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왔다.

'···정말 죽다 살았네···!'

한스가 '불사왕' 업적을 달성하며 얻었던 특전, 「즉사 면역」이 없었으면 진짜로 죽을 뻔했다.

하지만 워낙 심각한 상태였던지라 완전히 회복되기까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완전히 곤죽이 되었던 장기가 시간을 되감듯 형체를 갖춘 건 좋지만, 그 상태가 그리 멀쩡하진 않았던 것이다.

"상회주님! 여기 포션입니다!"

"바로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만 버티십쇼!"

그를 둘러싸고 정신없이 입 안에 비상용 포션을 쑤셔 넣는 용병들을 보며, 휴버트는 사고를 가속하며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흉수는 뱀파이어, 하지만 내가 처음 보는 이였다.'

거기다 모두의 이목을 숨기고 그에게 암습을 가할 정도로 그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용병들의 호위는 물론이고, 브로코슬락의 감시망도 무시하고 들어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휴버트의 감지력이 그리 좋지 않아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순 없었지만, 이게 가능하려면 최소로 잡아도 순혈이어야 하겠지.'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인 데다, 암살에 특화된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급 인력이 고작 평범한 상인 나부랭이인 휴버트를 노렸다고?'

팽팽 돌아가는 뇌리에서 이 일을 사주했을 만한 후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최근 사세를 확장하며 마찰을 빚은 경쟁 상단부터, 호시탐탐 상회를 노리던 귀족, 그에게 짓눌려 이만 갈던 뒷골목의 조직들까지.

···너무 많아서 딱히 누구를 특정할 수 없었다.

최대한 떳떳하게 사업을 키웠다 자부하고 있지만, 이득이 걸린 일의 특성상 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뱀파이어지? 그냥 우연인가? ···젠장, 정보가 너무 부족해.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란 점부터 파고들어야 할 것 같은데.'

설마 브로코슬락 측에서 뒤통수를 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제혈정」으로 하인즈 2세에게 종속된 그들이, 휴버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란 명령을 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하인즈를 통해서 클랜을 움직이는 게 가장 효과적인데, 하필 이때 자리를 비워서···. 거기다 이미 하워드를 보내면서 전송진도 쿨타임에 들어간 상태고.'

아쉽게도 일을 쉽게 해결하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쿨럭! 잠깐···."

휴버트는 자신에게 포션을 먹이고 급히 신전으로 이송하려는 호위들을 제지하고, 일방적으로 용건을 전달했다.

당분간은 안전한 곳에 숨어 몸을 회복시키고 돌아오겠노라고.

'놈이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끝장내려 들 거야.'

당장은 그를 처리했다 확신하고 자리를 떠났지만, 언제 그자가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이젠 「즉사 면역」을 기대할 수도 없는 만큼 최대한 빨리 이곳을 피하는 게 상책.

"···하워드랑은 개인적으로 연락할 방도가 있으니까, 그동안은 그를 통해···. 후우, 업무 사항을 전달하겠다. 상회에도 그렇게 전파하도록···."

"예, 예? 아니, 어떻게 몸을 숨기시겠다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대충 상황 전달을 마쳤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휴버트는 곧바로 '소환 해제'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물론 그 용병들을 믿을 수 있겠냐는 문제가 있기는 했으나, 당장 그런 부분까지 걱정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부 전사 삼인방에게 추천받은 인재들이니까,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사람 속은 모르는 거지만···.'

그때는 할리와 브로코슬락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될 일이었다.

"하아, 그나저나 이게 갑자기 웬 날벼락이야."

우우웅—

방안을 밝히는 환한 빛무리가 바닥에 드러누운 이의 몸으로 스며들어 갔다.

나는 지금 「개체 투영」으로 하인리히가 되어, 지구에 다시 소환한 휴버트에게 신성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즉사 면역」 덕분에 목숨을 건지긴 했는데···.'

그것도 간신히 숨만 붙여둘 정도해 불과했던지라 금방 나아지긴 힘들어 보였다.

아무리 하인리히가 성자로 인정받았다지만, 그 능력은 오직 전투 쪽에 치중되어 있을 뿐.

그에겐 치유와 회복에 관련된 축복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신성력을 무식하게 때려 박으니 「아우테리카 성법」만으로도 제법 효과가 있긴 하군.'

거기다 공통 스킬인 「초회복」도 있는 만큼, 며칠 푹 정양하면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만.

'일이 귀찮게 됐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상회가 관련된 건지, 뱀파이어가 관련된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할리가 관련된 건지 정보가 없어 판단할 수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정보 조직을 키우려 했던 것인데, 하인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후우— 뭐, 이미 일이 일어난 건 어쩔 수 없고. 중요한 건 이후 대처지."

다행히도 이쪽엔 또 다른 정보 조직이 있었다.

이런 일에 사용하기엔 조금 성격이 맞지 않긴 하지만···.

'에이, 애초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성향이 살짝 다르긴 한데, 대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만 해줘도 충분하니까.'

인간 사이의 암투나 정치적 수작을 파악하는 데는 살짝 취약하긴 하나, 어떤 면에선 그 이상으로 뛰어난 면모가 있는 정보원들이었다.

'바로 착수할 수 있도록 명령해 두자.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렇게 불사왕 한스 휘하, 불사의 군단 정보부장 올리비아와 수많은 유령이.

일개 상인 암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비릿한 피비린내가 나는 공간 속.

백발 백안의 뱀파이어, 비스크 유페르쉬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소집에 따라 전투원들이 모이고 있고, 탈리아 왕국까지의 경로에 다수의 혈문(血門)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의 물음에 어둠 속의 그림자가 조용히 응답했다.

혈문은 유페르쉬 클랜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간이 공간이동 게이트로, 그들이 전 대륙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고유 혈마법이었다.

그 이동 거리가 멀지 않고 설치하는 데 다량의 혈액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사용할 때의 편의성에 비하면 그 정도 제약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탈라리아로 직행하면 간파될 우려가 있어, 우선 며칠 거리의 라펠라 시로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물론, 저희라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수도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좋군."

비스크가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툴크 왕국의 타라크에서도 일을 마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음? 거기에 뭐가 있었나?"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탈리아 왕국의 브로코슬락을 도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고 했건만, 왜 갑자기 그쪽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브로코슬락이 그쪽으로 발을 뻗을 생각인지, 타라크의 상단 하나와 연계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놈들의 주의를 밖으로 돌리고자, 그 상단의 책임자를 암살하겠다는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만···."

"아아— 그랬지. 별것도 아닌 거라서 잊고 있었군."

비스크가 그제야 수긍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에게 인간 하나의 생사는 딱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사소한 문제였던 만큼, 그 태도도 가볍기 그지없었다.

"마침 근방에 있던 클라인이 그 상단주와 함께 브로코슬락의 뱀파이어 몇을 함께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직접 나선 만큼, 흔적이 남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클라인, 기억나는군. 확실히 순혈치고는 제법 쓸 만한 녀석이었지. 조용하고 확실히 처리하는 데는 그 아이만 한 인재가 없다지?"

"그렇습니다. 현 순혈 중 진혈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재입니다."

"그래, 그럼 뭐 알아서 잘했겠지. 사실 그쪽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이미 클랜의 무력만으로도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비스크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었다.

사실 이번 일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아랫것들을 보고 별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혼자서도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 자신하고 있었다.

그저 최종 목표가 상대를 없애는 게 끝이 아니기에 계획대로 기다리고 있을 뿐.

"그래서, 준비는 언제 끝날 것 같나?"

"최대한 은밀히 작업을 마치기 위해, 앞으로 일주일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

"길어. 더 줄여."

"···소집은 좀 더 독촉해 충분히 기간을 줄일 수 있지만, 혈문을 설치하는 작업은 자칫 서둘렀다간 발각될 우려가···."

"일주일이면— 이틀 정도는 줄일 수 있겠지. 5일 내로 끝내."

"···예, 로드. 명을 따르겠습니다."

부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비스크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그림자는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성혈의 명이 떨어진 이상, 그저 그대로 행할 뿐이었다.

"놈과 마주할 때가 기대되는군. 대체 어떻게 했기에 클랜의 지배권이 넘어갈 수 있었을까? 같은 혈통이긴 할 텐데···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

이제 며칠 후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비스크 유페르쉬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그래~ 어휴, 어린 아가씨가 똑 부러지기도 하지. 우리 아들도 보고 배웠으면 좋겠네. 오호호~"

웃으며 식료품점을 떠나는 아주머니를 배웅하며, 디아나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날도 저물어 이제 슬슬 장사를 마감해야 할 때였다.

"오늘도 수고했다, 디아나. 굳이 돕지 않아도 되는데, 공부하느라 바쁘지 않니?"

"아니에요, 작은아버지. 이렇게 직접 일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걸요. 선생님도 책으로만 배우는 건 죽은 지식이라고 말씀하셨고요!"

하인즈와 인연을 맺고 아잔투에서 라펠라까지 함께 왔던 소녀, 디아나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교습소에서 글자와 셈법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그곳에서 연을 맺은 강사에게 개인적으로 회계와 상법(商法)을 배우는 중이었다.

물론 교육비용이 제법 많이 들기는 했지만, 하인즈가 따로 챙겨준 돈이 워낙 두둑했던지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전부 아저씨 덕분이니까, 뭐라도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지만 하인즈에게 디아나가 도움이 될 만한 분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신체 조건도 열악하고 별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기껏해야 머리를 쓰는 일이 전부였는데, 다행히 그녀는 그쪽에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교육을 맡은 강사도 그녀의 뛰어난 오성에 몇 번이나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을 정도였으니까.

'돈을 관리하는 사람 중 유능한 이는 많지만, 유능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적은 법!'

그녀는 하인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떤 분야든 재무 담당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게 꼭 필요한 인재가 될 수 있겠지.

그렇게 디아나가 씩씩한 포부를 되새기며 매장을 정리하던 순간이었다.

킁킁—

어디에선가, 그녀의 코를 찌르는 냄새가 흘러들었다.

'또···.'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맡아보는 피 냄새.

전에도 제법 자주 느끼긴 했지만, 요즈음 그 빈도가 부쩍 늘었다.

'거기다, 요즘 맡아지는 냄새는 뭔가 다른 것 같아.'

그간 익숙해진 흡혈귀가 아닌, 생소한 흡혈귀 냄새가 점점 늘고 있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디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 아론과 라피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소리 없는 전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121

소리 없는 전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