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패왕 (2)
아이작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칼루리엔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 하트를 꺼내라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다른 생물들과 달리 그걸 꺼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걸 아는 정도?"
[...드래곤 하트는 심장 같은 게 아니다.]
칼루리엔이 으르렁거리며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장자로 태어났다. 아직 신적인 존재들이 옹알이를 할 때조차 우리 종족은 이 세상을 밟고 다녔지. 이 땅이 들끓는 용암에 불과할 때에도,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혹한기에도 우리는 살아있었다.]
아이작은 박수를 쳐야 할 타이밍인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비아냥 이상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자랑스러운 말과 달리, 드래곤은 이제 멸종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드래곤 하트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신적인 존재로 태어날 수 있었던 근원이다. 우리가 숨만 쉬어도 드래곤 하트 안에 힘이 축적되지. 이 안에는 나의 영혼이 담겨있다.]
"그래서 꺼내야 하는 거다. 칼루리엔."
아이작은 반쯤은 협박조로 들리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뽑아가면 너는 확실하게 죽어. 천사가 된 이상 영원히 죽지는 않겠지만 너의 그 소중한 드래곤 하트가 없다면 힘이 예전 같진 않겠지. 부활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다고 네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여기 두고 갈 수도 없다. 당장 회복한 다음 우리를 죽이러 올지도 모르니까."
당장 칼루리엔을 제압한 것은 오월의 검까지 도와 이루어 낸 기적에 가까운 업적이다.
아이작은 또 한 번 칼루리엔과 맞선다는 도박수를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제압했을 때 반드시 발목을 끊어놔야 했다. 드래곤 하트는 일종의 인질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네가 스스로 뽑으면 죽지 않는다."
칼루리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작을 응시했다. 여전히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발언처럼 들렸지만, 아이작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깨달은 것이다.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오월의 검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엄연히 말하자면 오월의 검은 너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엘릴을 해방시키는 거였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엘릴 해방만 이루어진다면 네가 죽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게다가 어차피 되살아날 놈, 죽여봤자 무슨 쓸모가 있나?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내게 '잠시 빌려'준다면 의미가 있지."
[의미?]
"너는 내 곁에서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는지 볼 수 있을 거다."
대전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엘릴 왕국과 신앙의 멸망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면 더더욱.
칼루리엔은 잠시 침묵하다가 정신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웃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군.]
아이작이 지향하는 목표가 빛의 법전이나 엘릴과는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떠오르는 인물의 곁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힘을 빌려주는 것도 방법이다.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 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주변에 경고해야 하니까.
칼루리엔은 아이작이 기어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뭐든 할 존재임을 느꼈다.
[좋다. 네게 내 심장을 맡기지.]
***
칼루리엔으로부터 드래곤 하트를 양도받은 뒤, 아이작은 니믈롯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향했다.
오월의 검과 한참 걸려서 걸었던 때와 달리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휙휙 풍경이 바뀌더니, 어느 순간 밤낮은 물론 계절까지 바뀌어 있었다.
도착한 곳은 풍광이 아름다운 호수 변의 한 언덕이었다. 호수 변에는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고, 기러기 떼가 무리 지어 날아다녔다.
아이작은 풍경을 보다가 기시감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성지 엘리온인가?"
니믈롯은 힐긋 돌아보았지만 아이작의 말을 들은 에델레드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예? 전혀 다른 곳 아닌가요? 주변을 둘러싼 호수도 없고, 석창의 장벽도 없는데요."
엘리온 성채 앞에서 몇 주 가까이 싸웠으니 에델레드도 엘리온 주변 지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엘리온이라고 특정 지을 만한 자연 지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지형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나무가 같습니다. 가을이기도 하구요."
아이작은 언덕 위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성지 엘리온과 달리 동백꽃이 없었고, 안개도 없었으니까.
에델레드는 여전히 이해 못 한 표정이었지만 니믈롯이 입을 열었다.
"눈썰미가 좋군. 성배기사."
"뭐... 엘릴을 만나 뵈러 가는 길이니까요."
니믈롯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덕을 올라갔다.
"그래. 오직 이 시간, 이 장소 외에는 어디서도 엘릴을 알현할 수 없다. 칼루리엔이 이 시공간에 모셔 두었지."
마침내 언덕 위에 도착하자 아이작은 가슴을 억누르는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아이작은 오직 이 언덕만 유달리 공기와 신성력의 밀도가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 위의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에델레드는 그 검을 예의주시하다가 경악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검 카훌린! 카훌린입니까? 성배기사 '재투성이'가 회수에 성공해 반납했다는 그 성물? 엘릴께서 직접 거두어 가시고, 재투성이를 네 번째 명천사로 임명하셨다는 그?"
지금은 사장된 지위지만 성배기사에도 장엄하고 긴 역사가 있다.
한때 수많은 성배기사들이 엘릴의 잃어버린 성물들을 찾아 대륙을 돌아다녔다. 그중 한 성배기사는 엄청난 모험 끝에 엘릴의 잃어버린 성검 중 하나를 발견해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원래 성검을 소유하고 있던 빛의 법전 광신도들이 그를 붙잡아 화형대 위에 세웠다. 성배기사는 불타는 와중에도 자신이 회수한 성검의 위치를 털어놓지 않았다. 결국 그의 희생에 감명받은 엘릴이 직접 그 땅에 현신해 그의 타고 남은 재를 모아 네 번째 명천사로 만들었다.
그가 엘릴의 네 번째이자 가장 어린 명천사 '재투성이'였으며, 엘릴이 직접 회수한 성검이 바로 눈앞에 꽂혀 있는 카훌린이었다.
사실 아이작도 재투성이처럼 분열예식을 반납하면서 엘릴을 불러내려 했다. 오월의 검이 끼어들면서 완전히 바뀌어 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재투성이는 이번 칼루리엔 토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아무래도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인가. 지금은 이미 동부에 있으려나?'
명천사 재투성이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처럼 지상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일종의 엘릴 교단 비밀 요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처럼 음흉하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니다. 근 백 년 동안 신탁을 받지 못했을 테니 늘 하던 것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생전 그랬던 것처럼 성물을 수집하거나 나쁜 놈들을 토벌하기.
천사가 이런 짓을 하고 다니면 당하는 자들 입장에서는 재앙일 것이다.
인간들과 자주 엮이면서도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기진 못했지만, 엘릴 신앙으로 플레이할 경우 자주 조력자로서 마주할 수 있는 천사였다.
***
니믈롯은 카훌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엘릴께서 가장 아끼시던 성검 카훌린이다. 지금은 감옥의 자물쇠로 쓰고 있지만."
강력한 성검이란 즉 강력한 성물이다.
그중에서도 엘릴이 가장 아끼던 검인 카훌린이 엘릴을 봉인하는 촉매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니믈롯은 아이작에게 자리를 양보하듯 옆으로 비켜섰다. 아이작은 앞으로 나서며 품속에서 푸른 빛의 보석을 꺼냈다.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였다.
[카훌린에 나를 가까이 가져다 대라.]
드래곤 하트에서 은은하게 칼루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 하트 안에는 칼루리엔의 영혼이 담겨 있었다. 그의 성육신은 회복을 위한 긴 동면에 들어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아이작이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를 카훌린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일렁이는 빛이 검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작은 그가 아주 강대하고 복잡한 봉인을 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백, 몇천 겹의 봉인과 환상, 구속, 암시, 세뇌의 마법들이 카훌린을 매개로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하나하나 풀릴 때마다 아이작은 가슴을 옥죄던 답답한 기분이 점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언덕 위의 기이할 정도로 높은 공기밀도와 신성력은 전부 이 봉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쩍, 쩌억.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무너져 내리듯 바람이 풀어왔다.
호수 변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자 모두들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오직 니믈롯만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패왕을 배알합니다."
***
아이작이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기대했던 엘릴이 아닌 사자 모양 투구를 쓴 거대한 기사였다. 그는 니믈롯의 말에도 대답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양손검으로 땅을 짚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엘릴의 세 번째 명천사, 사자기사....'
게임 설정상 신들을 제외하고 일대일 전투 면에서는 최강의 존재다.
패왕 엘릴의 경호기사라는 호칭이 괜히 얻어지는 호칭은 아니니까. 니믈롯은 그런 그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니믈롯? 무슨 일이지?"
그때 사자 기사 옆으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성지 엘리온에서 봤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호리호리한 장신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엘프 남성.
엘릴이었다.
패왕이라는 호칭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존재감에 조용한 이미지였다. 오히려 사자기사의 기세가 더 강렬해 묻혀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에델레드가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따지고 보면 이교도인 아이작과 헤사벨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존중하는 마음으로 에델레드를 따라 예의를 표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엘릴이 자신을 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아이작이 이 공간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그의 모든 것은 샅샅이 들춰져 엘릴의 모든 감각에 사로잡혔다. 발밑의 풀 한 포기, 바람 한 줄기, 피부에 스며드는 햇빛까지, 모두 엘릴의 감각기관이나 다름없었다.
"신기한 손님들도 함께 왔군. 라라비아, 일어나봐. 손님이 왔어."
엘릴의 곁에는 한 여자가 자고 있었다. 둘 다 한가롭게 가을볕을 즐기며 낮잠을 자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지 않고 잠투정을 하며 뒤척였다.
엘릴은 미안한 표정으로 하며 아이작 일행을 보았다.
"미안하군. 라라비아는 피곤한 듯하니 나와 이야기하지."
엘릴은 싱긋 웃으며 아이작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작은 그의 태도가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엘릴은 백 년 가까이 봉인 당했던 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 있고 상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엘릴 신도들에게 보이던 엄격한 모습과 다른 것은 사석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칼루리엔이 걱정하던 것처럼 자기 파멸적인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
엘릴은 일행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칼루리엔은? 늘 함께 왔었잖아."
아이작은 문득 니믈롯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강렬한 긴장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니믈롯은 엘릴의 스승이며 칼루리엔과 함께 거의 동시에 명천사가 된 존재다. 그런 그녀가 엘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엘릴 자체보다는 엘릴에게 할 고백 때문이었다.
엘릴의 시선이 문득 바닥에 꽂혀 있던 카훌린에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니믈롯의 입이 열렸다.
"칼루리엔은 더 이상 봉인을 유지할 수 없다 했습니다."
니믈롯의 말을 들은 순간 아이작은 무언가 강하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엘릴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
엘릴의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는 방금 전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느낌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고목이 쓰러지기 직전에 지르는 찢어지는 비명을 닮아 있었다.
아이작은 칼루리엔이 엘릴을 가둘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칼루리엔은 힘으로 엘릴을 봉인한 게 아니었다. 그를 무한히 반복되는 달콤한 환상과 행복 속에 가둬 스스로 나오고 싶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엘릴은 그 낙원의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있었다.
즉, 엘릴은 자발적으로 칼루리엔의 봉인에 있기를 선택했었다.
이제 연극이 끝났으니, 엘릴이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그의 낙원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211화. 패왕 (3)
쩌억. 아이작은 말 그대로 세상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꼈다.
말 그대로, 그의 시야가 닿는 모든 것들이 조각나며 균열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간도, 공간도, 생명과 무생물 구분 없이 모두 조각나며 흩어졌다. 부서지지 않는 것들은 오직 하나하나의 단일 개체 뿐.
아이작은 세상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반짝이며 부서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 아이작은 그 파편 하나하나에 엘릴이 개입했던 모든 시간선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엘릴의 천국이 왜 크리스탈 전장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싸움에도 수백 가지 과정과 수천 가지 결과라는 경우의 수가 있다.
싸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빛나는 크리스탈이다.
엘릴의 기사들은 어떤 때는 승리하고 어떤 때는 패배하면서 아름다운 다면체로 빛났다.
승리도 패배도 모두 아름다웠다. 엘릴은 전부 귀하게 품었다.
크리스탈 다면체들이 통곡하는 고아와 과부의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모든 조각들이 전부 추락한 순간 아이작은 홀로 빛도, 땅도, 하늘도 없는 시커먼 어둠 속에 내팽개쳐졌다. 아찔한 추락을 예상했지만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그를 끌어당길 중력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숨을 쉴 수는 있군.'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불을 피워올렸다. 광원이 생기면서 주변이 밝아졌지만, 니믈롯은 물론 에델레드도, 헤사벨도 보이지 않았다.
우르반수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상해 보자면 그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예 다른 시공간으로 가 버렸을 확률이 높으니. 아이작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지 생각하다가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곧 아이작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이러다 미쳐버리겠는데.'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공간은 10분과 100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작은 자신이 아주 잠깐 기다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1시간이 지났는지, 하루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정신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 순간 아이작은 존재를 느꼈다.
말 그대로 존재였다. 온 사방, 아니, 모든 시공간에서 엘릴의 존재를 느꼈다. 그것은 근처에 엘릴이 가까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사를 마주할 때 그 존재감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신은 달랐다. 아이작은 엘릴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문득 수많은 크리스탈 조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기설기 맞춰진 크리스탈은 모자이크를 이루면서 순식간에 어떤 시공간을 만들어 냈다.
***
아이작은 바람 부는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엘릴의 등이 보였다. 엘릴은 나무 곁에서 바람결을 따라 출렁이는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화창한 가을, 작은 언덕, 커다란 상수리나무.
동백은 없지만 자신이 우르반수스에 진입하기 전에 본 풍경과 똑같다. 그제야 아이작은 지금이 어느 순간인지 알 수 있었다.
엘릴이 승천하던 바로 그날의 순간이다.
무희가 그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훔쳐 간 날.
엘릴은 기대고 있던 상수리나무에서 어깨를 떼고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무기질적인 눈동자였다.
그것은 엘릴이라기보다 엘릴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조각상 같았다.
물론 생명으로서의 필요한 모든 것, 그러니까 호흡이나 작은 떨림, 미묘한 불균형 같은 것은 존재했다. 하지만 눈앞의 엘릴은 그마저도 정교하게 따라 하는 무언가 같았다.
아이작은 품속에서 분열 예식을 꺼낸 후, 한쪽 무릎을 꿇어 부복했다.
"패왕께 성물을 바칩니다. 마침내 돌아온 성검 가르갈디아를 부디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엘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작을 묵묵히 방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아이작에게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원래 엘릴은 분열 예식이 돌아오면 바로 받아들인 뒤 회수자를 치하한다.
그러나 그의 붉은 예식을 집어 간 사람은 다름 아닌 한 여인이었다.
라라비아, 엘릴의 곁에 있던 여인이자 엘릴의 딸이었다.
그녀는 손목에는 향로를 걸고, 한 손에는 단검을 쥐고 다가가 등 뒤로 숨겼다. 엘릴은 그 모습을 분명히 보았지만 마치 못 본 것처럼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모든 것이 마치 연극처럼 일어났다.
엘릴은 환영하듯 두 팔을 벌렸다. 라라비아는 엘릴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하고 끌어안았다. 분열 예식이 갑자기 엘릴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신이 피를 흘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세상이 숨을 죽였다. 혈향이 가득 번졌다. 갑자기 온 세상에 석양이 찾아온 것처럼 사방이 붉어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란을 피우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 바다가 범람하고 강물이 역류했다. 땅이 눈을 가리며 가라앉았다. 일대에, 순식간에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그때 라라비아가 향로를 흔들어 연기를 피우고, 손가락을 입에 올렸다.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세상은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고요해지고, 하늘은 원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화창한 가을볕 아래, 라라비아는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는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서 조용한 도살 작업을 이어 나갔다.
엘릴의 몸이 허물어지자 라라비아는 그를 품에 안고 상수리나무에 기대 눕혔다. 그녀의 몸은 엘릴의 피로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라라비아는 그 정도 피로 만족하지 않는 듯, 상처를 더욱 크게 벌려 찾던 것을 손에 넣었다.
신의 심장이다.
도려내어 뗀 뒤에도 펄떡거리는 엘릴의 심장은 여전히 더운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성배, 영원한 활력, 필멸자의 몸으로 최강에 도달했던 자의 심장이다. 라라비아의 몸이 온통 심장이 뿜어내는 피로 젖었다.
엘릴의 몸은 이때 이미 죽어 승천했다. 라라비아 또한 이 의식의 대가로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라라비아는 눈물 한 방울 흘리거나 슬퍼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희열이나 쾌감을 느끼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녀는 담담히 엘릴의 뺨에 한 번 더 입맞춤을 하고는, 무언가를 속삭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애당초 라라비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체라도 들을세라, 그저 입 모양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곤 분열 예식으로 자신의 손가락 끝을 베었다.
손가락에 피가 맺히자 그녀는 그 핏방울로 엘릴의 입술을 칠했다.
이내 라라비아는 엘릴의 가슴을 가른 단검과, 그의 심장과, 범행 도구로 쓰인 향로를 들고 달아났다. 목격자라고는 수목과 바람, 그리고 유령들밖에 없는 현장에서.
그녀의 발자국마다 핏방울이 떨어지면서 동백꽃이 피어났다.
***
쩍. 순간 다시 시공간이 허물어지고, 아이작은 원래 있던 시커먼 공간으로 튕겨 나왔다. 아이작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두통마저 느꼈다.
아이작은 방금 그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엘릴의 승천은... 엘릴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나?'
그야 어느 정도 의심은 있었다. 지상 최강자, 살아 있는 몸으로 드래곤도 패고 천사도 패고 신도 패던 말도 안 되는 존재를 고작 무희가 어떻게 심장을 도려낸단 말인가.
엘릴이 동의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과연 엘릴이 이 승천에 '정말로' 동의했는지 의문이었다.
음모와 공작, 암살은 무희의 영역이다.
아이작은 애당초 엘릴이 승천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 라라비아의 음모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최강의 존재의 심장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최강의 존재뿐이다. 혹은 그가 심장을 허락해도 좋은 사람이거나.
라라비아는 어떻게 엘릴을 잘 속여서 심장을 뽑아가도 좋게끔 허락받은 걸지도 모른다.
'...이건 너무 갔군. 진상이 사실 뭐였더라도 상관없지.'
어차피 수백 년 전 일이다. 라라비아가 엘릴의 심장을 뽑기 위해 가스라이팅을 했건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돌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무희의 입장을 들어 보면 뭔가 더 알 수 있을 텐데 방금 본 회상에서 나온 무희는 말 한마디, 감정 표현 하나 없었다. 무희는 이미 아홉 신앙 중 하나인, 승천한 존재이니 진짜 영혼이 아닌 그저 엘릴의 우르반수스가 흉내 내어 만들어 낸 환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아이작의 손에 분열 예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이작은 엘릴이 이 회상을 보여 준 것이 일종의 분열 예식 회수 의식의 한 부분 정도라고 생각했다.
해당 성물에 얽힌 비화와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
지금까진 없었던 일이지만 직접 신에게 바치는 EX급 성물인 만큼 그럴 수 있었다.
역시나 곧 엘릴의 존재감이 다시 드리워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타고 남은 재 냄새가 풍겨 왔다.
붉은 돌로 이루어진 요새였다.
아이작은 이곳이 어딘가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주베르크였다. 브란트 공작가의 근거지이자, 한때는 엘릴의 수도였던 곳. 그러나 구조만 비슷할 뿐, 내부는 이국적인 가구와 커튼, 카펫들이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곳곳이 무너지고 비에 젖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루주베르크의 화려한 모습을 기억하는 아이작은 이 광경이 생소했다. 마치 함락당한 요새, 아니, 함락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고 버려진 폐허 같은 꼴이었다. 뿌연 먹구름 아래 부슬비가 내리면서 구멍 난 천장으로 비가 들이쳤다.
"가까이 오라."
아이작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텅 빈 홀의 가장 상석, 돌무더기 같은 상석에 엘릴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 역시도 이 폐허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영광을 잊은 채 버려진 잔해 같은 모습이었다.
"귀공의 전과는 다른 자들을 통해 들었다."
여전히 무기질적인 눈동자에 만들어 낸 조각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작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이미 에델레드와 헤사벨과도 모종의 대화를 나눴거나, 혹은 기억을 훑어냈음을 알았다.
엘릴은 텅 빈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비록 이교도이나, 그대가 기사다운 기사, 전사다운 전사였음을 알겠다. 보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바를 말하라."
***
아이작은 소원을 말하라는 엘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원은커녕 가서 밥 먹고 한숨 푹 자라고 말하고 싶은 몰골이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엘릴이 정말로 배고프고 지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주리고 지친 것은 따로 있었다.
아이작은 엘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며 말했다.
"성물이 합당한 주인에게 돌아갔으니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이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갖은 보물과 성물을 다 토해 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이작이 진짜 노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사도, 신도들도, 듣는 귀와 보는 눈도 없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였다.
"다만 바라건대 부디 빛의 질서를 지키는 깃발 아래, 엘릴의 전사들이 검을 빌려준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엘릴이 아직 지상에 관심을 끊기 전, 그는 백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여명군 참전에 동의했다.
빛의 법전과 칼을 맞대기도 했지만, 원한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투쟁과 영광이 목적일 뿐, 빛의 법전이 세운 질서를 적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이작은 다시 한번 여명군 참전을 말하고 있었다.
에델레드의 동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엘릴 왕국 안에 여명군 참전을 원치 않는 자들이 있다면 신탁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없다. 이것은 왕국의 통합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에델레드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여명군이라."
엘릴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왜 우리가 여명군에 참전해야 하지?"
아이작은 중요한 순간이, 그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왔음에도 아이작은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이야기는 무수하게 많은 사상자를 만든다. 이 세상을 그저 게임이라 여기는 아이작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희생과 슬픔을 낳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대답하기 전에 약간의 사죄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엘릴 왕국에 기사들이 돌아올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의 대답에 엘릴의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기사가 돌아온다라, 마치 내 왕국에 기사 따윈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외람되지만, 엘릴이시여."
아이작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엘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기사 따윈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는 이미 진창에 떨어진 넝마를 쥐고 싸워대는 참담한 빈민 소굴에 불과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엘릴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212화. 패왕 (4)
엘릴은 여명군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서 '왜 참전해야 하냐'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의 속내를 떠보고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이작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미 엘릴 왕국의 기사도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외국에서 온 일개 이단 성기사가 각지의 내로라하는 검객들을 모두 격파하고 다녔습니다. 엘릴의 왕은 그 외지의 이단 성기사가 가르쳐준 검술을 배웠고, 성지수호자 역시 그에게 패배했습니다."
엘릴 면전에서 네가 남긴 신앙, 왕국, 유산 전부 망했다고 쏘아붙이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자신이 하는 행동에 자신이 있었다.
엘릴은 이런 걸로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저것'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맡은 업이라도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까? 엘릴 왕은 마녀의 난동조차 제압하지 못했고, 반란 세력에 끌려다녔으며, 성지수호자는 불사 교단에게 침식당하고 있었고, 당신의 천사들은 감히 언데드의 침입을 허락했습니다."
아이작은 속으로 에델레드와 리안나에게 사과했지만 필요한 말들이었다.
엘릴이 다시 지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과연 이것이 기사의 나라 엘릴이 맞습니까? 그저 당신의 이름을 참칭하는 군벌들의 모임이 아닙니까?"
"너의 말이 옳다."
엘릴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사를 자처하는 자들이 전쟁터에서 가장 먼 섬에서 자기들끼리 한 줌 명예를 이리떼마냥 물고 뜯는다. 엘릴 왕국에 더 이상 기사는 없다. 칼 든 무뢰배들만이 있을 뿐."
엘릴은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왕국의 꼴은 온전한가? 과거의 영광된 고토를 전부 잃어버렸는데도 그들은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 빛의 법전의 질서를 따르고자 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왕국은 왜 존속하는가? 적을 물리칠 전쟁조차 수행하지 않는다면?"
"실로 그렇습니다."
"천사들조차 마찬가지다. 천사들은 내가 벌일 전쟁의 재개가 두려워 나를 현혹하는 시간에 가두었다. 아니, 가장 한심한 것은 나지. 근친상간을 벌인 도망자에, 패배한 무장, 배신당한 왕, 현실을 외면하는 신이 나다. 한심한 나라에 어울리는 한심한 왕이다."
엘릴의 서늘한 넋두리에 아이작은 침을 삼켰다.
칼루리엔은 엘릴의 자기혐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가두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엘릴은 바로 정확히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엘릴에게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엘릴은 승천한 순간 승리와 영광, 용기, 명예를 노래하는 기사들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자신에게 그의 신앙과 교리에 부합하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의 군대는 여명군으로부터 가장 멀고 안전한 섬나라에 처박혀 있고,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기 바쁘며, 엘릴 왕은 제대로 된 카리스마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고, 그의 가장 영광된 소드마스터들은 이교도 성기사에게 연전연패다.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공간에 있지.'
그렇다면 이곳은 엘릴을 위해 마련된 지옥일 것이다.
신이 거하는 곳이 꼭 천국이란 법은 없다. 엘릴은 이 지옥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실패와 후회, 지나간 영광을 핥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옥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쟁.
엘릴은 번뜩이는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용기를 찾는 자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명예를 찾는 자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전장이, 영광을 구하는 자는 영광을 가지고 돌아올 장소가 필요하다."
그의 눈이 기이한 열망과 욕망으로 흔들렸다.
"기사가 기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쟁터가 필요하다."
***
터벅.
엘릴은 돌 무더기 잔해에서 걸어 내려왔다.
아이작의 눈에 엘릴은 그저 전쟁에 미친 전쟁광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평생 정복과 힘만을 추구하던 패왕에게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것도 이상하다. 하물며 그의 신앙과 신도들이 패배로 얼룩져 있다면 더더욱.
"네가 나와 동류라는 것은 이미 진작에 알아보았다."
동류라니. 아이작은 자신에게 딸을 탐하는 근친상간 성벽 따윈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엘릴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진심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믿지도 않고, 신념조차 네 도구에 불과하다. 사랑도, 충성도, 마찬가지다. 너는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실제로 성지 수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엘릴 왕국을 전쟁터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의 인간관계와 여정, 신념, 신앙, 모두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아이작은 엘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승리는 아니다. 아이작은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물론 승리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엘릴이 '목표' 달성을 위해 뭐든지 다 버릴 수 있는 존재라면 아이작과 동류라느니 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다면 엘릴의 승리 선언이 '라그나로크'일 수가 없다.
전쟁은 과정이지 목표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엘릴은 모든 것을 향한 대전쟁을 '승리 선언'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나는 전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엘릴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의 신도들이 전사답게, 전쟁터에서 명예와 영광을 부르짖다가 전장의 진창에 널브러졌으면 좋겠다. 마침내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부 다 죽어버린다 해도 나는 기쁠 것이다. 그들은 영광으로 가득 찬 전장에 마침내 입성할 것이니."
자신의 신앙을 혐오하는 신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눈앞의 엘릴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엘릴 왕국이 '진정한 전쟁터'에서 가장 먼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 신도들이 싸움을 거부하는 것, 진보를 멈추고 구식의 안락한 삶만을 고집하는 것.
모든 것이 엘릴에게는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불사 교단이 언데드로 소생 의식을 치렀을 때 받아들이고 부활한 건가?'
아이작이 불사 교단으로 플레이했을 때에는 엘릴을 언데드로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엘릴의 부활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릴의 기사 빌론 게오르크의 요청이었기에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엘릴 왕국을 전쟁터로 몰아붙이고 싶어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릴을 감금하고 있던 칼루리엔이 엘릴 왕국을 지키고 있었던 셈이니 아이러니했다.
아이작은 한 번 더 엘릴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엘릴은 아이작의 코앞에 서서 속삭였다.
"그리고 그 전쟁을 네가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
아이작은 자신을 적대하지도, 경계하지도 않는 엘릴을 보면서 기이함을 느꼈다.
물론 엘릴이 자신의 혈통과 신앙에 대해 모를 리가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기이할 정도의 호감을 보일 이유가 없다.
엘릴에게는 이름 없는 혼돈 또한 격파해야 할 적일 테니까.
"...제가 네필림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게 뭐? 나도 네필림을 낳았다. 그 죄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빛의 법전으로부터 벗어나야 했지."
"제 신앙은 문제가 안 됩니까?"
"내가 아는 한 혼돈은 이미 죽어 이름조차 잊혔다. 혼돈이 인제 와서 망각의 숲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어. 무슨 수를 써서 그 너머에서 촉수를 뻗어 빛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해도, 그 또한 영광을 위한 전장이 아닌가?"
즉, 어쩌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다시 튀어나온다 해도 자신이 나서서 잘라 낼 것이라는 패기, 혹은 광기였다.
아이작은 엘릴만 이런 건지 다른 신들도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엘릴은 아이작에게 열렬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미래, 대전쟁의 무대를 아이작이 이끌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승리를 거두려면 단순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엘릴은 눈을 번뜩이다가 아이작의 눈가를 손으로 슬쩍 매만졌다.
"네게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마...."
***
루주베르크의 성의 시간이 갑자기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너진 벽은 복구되고, 불탄 재는 커튼과 카펫으로 돌아왔으며, 젖었던 돌들은 다시 말랐다. 아이작은 어느 순간 석양빛이 강하게 드리운 홀에 도착해 있었다.
방 중앙에는 성인 남성 여섯 명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테이블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한눈에 보기도 어려울 만큼 커다란 대륙 전도(全圖)가 펼쳐져 있었다. 엘릴 왕국군과 그에 맞서는 다른 군의 배치를 보여주는 그 배치도는 가늠할 수 있는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엘릴 왕국이 아직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 하지만 그 영토가 야금야금 빼앗기던 어떤 수백 년 전 과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적어도 5, 600년 전의 과거였다.
"울텐하임 쪽 전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그때 누군가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얼굴, 엘릴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작이 뭐라 할 말을 찾는 사이 그의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최악이군요. 바덴 장군이 전사했고, 울텐하임 수비군은 전면 항복했습니다."
그것은 아이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이 로브를 입고 있으며, 지팡이와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아이작은 칼루리엔이었다.
엘릴이 입을 열었다.
"또 우르반수스 때문에 개변이 일어난 건가?"
엘릴의 말에 아이작, 아니, 칼루리엔은 침통한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바덴 장군과 그의 군대는 도저히 패배할 수가 없는 전력이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걸 보면...."
우르반수스로 인한 개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아문달라스는 사후세계가 과거 모든 시간의 총합이라고 했고, 거기서 정정된 과거는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적들은 이를 아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고, 엘릴은 그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둘은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빛의 법전임을 상징하는 백색의 말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고, 세상의 화로 교단을 표시하는 주홍색, 소금 의회의 청색, 올칸 규율의 연녹색, 그리고 온갖 색들이 엘릴 왕국의 녹색 말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엘릴 왕국을 침략하는 신앙은 빛의 법전이었다. 엘릴과 빛의 법전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흑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엘릴도 반역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면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엘릴은 우르반수스를 이용하지 않는 거지?'
칼루리엔이 입을 열었다.
"빛의 법전에서 새롭게 명명된 천사, ■■■■가 크게 활약하는 것 같습니다. 우르반수스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을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아이작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빛의 법전의 천사 이름이 불린 순간 이명과 함께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아이작은 이것이 단순히 특이한 이름이 아니라 우르반수스에서조차 지워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저 천사는 지금 타천사가 된 어떤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신에 의해 이름 지어지는 것이 영광된 일이듯, 이름이 지워지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수모이자 절망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말소 되기 전까지 저 천사는 엘릴 왕국을 몰아붙이는데 상당한 업적을 세운 것 같았다.
엘릴은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도를 본다고 말들의 배치가 달라지진 않았다.
엘릴 왕국군이 크게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엘릴 왕국 영토를 표시하는 지역은 대륙 절반 가까이 있었으나, 왕국군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울텐하임을 빼앗기면서 엘릴은 루주베르크에서조차 물러나야 할 상황이었다.
"알데온으로 우선 넘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알데온? 그 섬 말인가?"
이 당시 알데온은 엘릴 왕국의 중심이라기보다 변방에 위치한 촌구석 섬에 불과했다. 다만 풍광이 아름다워 엘릴은 그곳을 곧잘 휴양지로 쓰곤 했다.
"빛의 법전의 권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소금 의회의 영역까지 넘어와 행패를 부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일단...."
"도망치라는 거군. 아니, 그럴 바에야 승천을 하겠다."
엘릴이 갑자기 꺼낸 말에 칼루리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칼루리엔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승천 의식에 대해 알려준 것이 바로 칼루리엔이었으니까.
엘릴은 칼루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사, 왕국 전역에서 내 불패의 군대가 터무니없는 실수와 오판으로 전멸당하고 있다. 심지어 나와 니믈롯이 직접 출전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도 돌아와 보면 패배한 걸로 되어있어. 이 말도 안 되는 사기행각이 가능한 건 빛의 법전이 역사를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거기에 다른 신들도 동조하고 있고!"
엘릴은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승천을 해야겠어. 그래야 등대지기가 수작질 부리는 걸 막을 수 있다. 우리도 우르반수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해!"
"폐하,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육신은 죽겠지. 하지만 신에게 육신이 대수인가?"
"폐하께서는 아홉 신앙에 편입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다!"
칼루리엔은 신음하듯 말했다.
"살아있는 존재는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고, 실수도 할 수 있고 고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천한 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홉 신앙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질서이자 관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번에 이미 했던 이야기로군. 그래. 내가 그 절대적인 질서가 되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질서, 사상, 신념, 도덕, 윤리... 모두 영원불멸하는 진리가 되어 남는다는 겁니다. 폐하께서는 고민도 실수도 없는 존재가 되실 겁니다. 만약 그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 나타나면 끊임없이 정정하기 위해 세상을 누르려 들 겁니다."
칼루리엔의 말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이었다.
당장 승천한 신이 되어서 빛의 법전으로부터 승리하고 싶은 엘릴에게는 와닿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칼루리엔도 이 이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엘릴은 지금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혁명가인 셈이다. 혁명가는 세력도 강하고 주변으로부터 숭배도 받는다. 하지만 승천한다는 것은 혁명가의 죽음으로 이념을 완성시키는 것과 같다. 종종 사람들은 이념과 혁명가를 동일시하지만 둘은 다르다.
혁명가는 변절할 수 있지만 이념은 바뀌지 않는다.
승천한 신은 사유하고 고민하는 생물이 아니다.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하게 된다.
절대 변하지도 설득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개념으로.
213화. 칼끝 너머에 (1)
"귀 기울여주십시오, 폐하. 물론 폐하께서 위대한 질서의 한 축이 되고 싶으시다면 저는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단순히 공주님을 보호하고 싶으신 거라면, 차라리 멀리 도망치십시오."
칼루리엔의 말은 간절했다.
엘릴은 빛의 법전을 배교하고 나와 신이 되는 의식을 치렀지만, 아직 그는 그저 고대신과 비슷한 '숭배받는 강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진정한 신이 되려면 승천 의식을 치러 사후세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배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엘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칼루리엔은 엘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엘릴이 빛의 법전을 배교하고 신이 되었던 것은 딸을 보호하고 당당한 승리를 거두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라라비아를 보호하려면 도망이 아니라 승리가 필요해. 칼루리엔."
그러나 엘릴은 전사였다.
그는 지금까지 칼과 땀, 피로 모든 것을 일궈 냈다.
엘릴은 불타는 눈으로 칼루리엔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열망, 패전에 대한 설욕 같은 기사도적 욕망이 가득했다.
정복자이자 승리자였던 그는 자신이 이런 '잔수작'에 패배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는 나와 직접 전장에서 마주치게 될 거다. 그러면 누가 진짜 전사인지 알겠지."
***
아이작이 시선을 돌렸을 때 다시 그는 폐허가 된 루주베르크로 돌아와 있었다.
"보았느냐? 이것이 엘릴이다."
엘릴은 텅 빈 폐허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가정을 보호하는 아버지, 비겁자의 수단에 맞서는 기사,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하지 않는 전사다."
'지금 자랑하는 건가?'
하지만 아이작은 곧 엘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릴이라는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그저 엘릴이 세운 관념과 규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눈앞의 엘릴, 아이작이 본 엘릴은 엘릴 신앙이 구현한 이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칼루리엔이 말했던 '질서에 편입'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리라.
엘릴은 이 승천의 대가로 빛의 법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까?
지금 엘릴 왕국의 영토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르반수스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도 그의 최선은 무희를 보호한 게 전부였을 것이다.
아이작은 엘릴이 보여 준 것을 통해 진정한 신이 되려면 육신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과, 신적인 존재들은 설득이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후자가 더 걱정되었다.
비인격신은 몰라도 인격신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면 정신병에 걸려서 자살하려 드는 일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생각해 보면 엘릴은 자살조차 불가능하다.
승천한 신이 된 순간부터 그는 그저 자신의 주관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밀고 가는 질서가 되고 마니까.
그 질서는 지금 투쟁을 원한다. 다만 그 결과가 파멸로 이어질 뿐.
엘릴은 자신의 기억을 보여 준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신앙과의 싸움은 결국 우르반수스에서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너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엘릴의 경고에 아이작은 불사 교단의 신을 떠올렸다.
'잠깐, 그러면 불사황제 베셰크는 어떻게 된 거지?'
그걸 '살아 있는 몸'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불사교단의 신이자 지배자인 베셰크는 육체를 가지고 지상을 거니는 신이다.
사후세계를 아예 지상으로 끌어내린 이상, 우르반수스의 권능을 베셰크도 그대로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엄연한 아홉 신앙인만큼,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후세계의 수정에 휘둘릴 정도는 아니라고 봐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치명적인 사실이군.'
이미 소금 의회의 우르반수스에서 아문달라스를 통해 깨달은 내용이었다. 우르반수스를 통해 역사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 왜곡이 이루어지면 현실 역시 개변된다는 것.
즉,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이들은 진정한 신과의 싸움에서 죽어도 이길 수 없다.
아홉 신앙과 싸워서 맞설 수 있는 것은 아홉 신앙에 속한 이들뿐이다.
이들만이 역사 개변을 막을 수 있으니까.
빛의 법전이 그토록 제거하려 했지만 붉은 성배 클럽이 아직 건재하고, 불사 교단이 세상을 양분할 정도로 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과연 대항할 수 있을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도 일단 아홉 신앙에 속한 이상 대항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우르반수스를 넘나들며 활약해야 하는 것은 결국 천사인데, 이름 없는 혼돈의 우르반수스는... 그런 게 존재하는지나 의문이고, 있다 하더라도 개막장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개입하지 않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엘릴이나 붉은 성배 클럽에 손을 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엘릴은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고, 붉은 성배 클럽은 이러나저러나 비밀 동맹 관계다. 소금 의회를 당장 움직일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그건 차라리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게 나아 보였다.
이렇든 저렇든 친구는 많은 편이 좋다.
그러려면 결국 아이작이 쓸모 있는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미래를 들여다보고 역사를 개변시키는 신앙들이 그를 죽이려 들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자신들의 미래에 쓸모 있기 때문에.
아이작은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각 신앙 제각각의 승리 선언에 자신이 한몫하게 되리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신들 사이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존재였다.
"이해했습니다. 엘릴."
그리고 아이작은 이용할 수 있다면 신조차도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린 소원을 지금 빌고 싶습니다."
아이작은 엘릴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먼저 그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릴은 이미 설득당할 준비, 아니 상대가 원치 않는다 해도 강압적으로 몰아붙일 준비가 만반이었다.
그는 전쟁을 원한다. 영광과 명예와 용기를 구할 수 있는 전장을 원하니까.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전쟁을 만들고자 했던 자다.
아이작 정도라면 그가 바라는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 주는 존재이자 대리인으로 충분했다.
"소원?"
엘릴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여명군 참전이 소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릴께서는 이미 여명군 참전을 간절히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엘릴의 소원이지, 제 소원이 아니지요. 오히려 제가 당신께 전쟁을 들고 왔으니 치하받아 마땅합니다."
엘릴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이런 에고 높은 강자는 오히려 자신 앞에서 당당한 존재를 좋아한다. 아마 그의 동료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이작은 무희가 어떤 성격이었을지도 내심 알 것 같았다.
"좋다. 소원을 말해봐라."
그리고 아이작은 엘릴이 더 만족할 소원을 알고 있었다.
"대련 한판 부탁합니다."
***
엘릴은 아이작의 요청을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무신 엘릴과의 대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그는 비웃지도, 웃어넘기지도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쩌면 여명군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런 것 또한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기사스러운 욕망에 맞춰 주는 것을.
하지만 아이작에게 이는 철저한 계산과 이득을 따져 고른 결정이었다.
'이기는 건 기대도 안 한다.'
만약 엘릴의 실력이 전해지는 전승의 반만큼이라도 사실이라면 자신은 칼도 꺼내기 전에 죽을 것이다. 심지어 엘릴은 승천하여 전성기의 육신을 구현할 수 있고, 여전히 검술의 이상향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이나 부상 따위는 그에게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싸울 가치가 있었다.
'엘릴의 검술을 반의반만이라도 훔쳐 배울 수 있다면, 성물이나 축복 따위보다 백배는 이득이야.'
엘릴은 아이작의 맞은편에 섰다.
장소는 여전히 폐허가 된 루주베르크. 하지만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대련에는 지장이 없었다.
"먼저 규칙을 설명하마."
엘릴은 칼 한 자루를 주워 들며 말했다.
아이작은 규칙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보통 대련의 규칙은 상대방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한다. 하지만 엘릴이 아이작을 죽일 정도로 실력이 어설플 것 같지는 않았고, 아이작 또한 엘릴을 다치게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선 나는 기적을 쓰지 않겠다. 기척을 지워서 눈앞에서 사라지지도 않을 거다. 충격파를 일으켜서 건물을 무너뜨리지도 않을 거고, 공기를 터뜨려서 네 고막을 찢어 균형감각을 허물어뜨리지도 않을 거다. 살기로 네 심장을 멎게 하지도 않을 거다. 검기도 쓰지 않을 거고, 상급 검술을 쓰지도 않을 거다. 오직 힘과 속도만으로 널 상대하겠다."
"...제게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는 않을 테고, 엘릴께서만 그러신다는 거지요?"
"그래."
"그건 보통 제약이나 페널티라고 부릅니다만... 일단 감사합니다."
스스로 페널티를 안겠다는데 아이작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훔쳐 배우고 싶은 건 엘릴의 검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릴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은 제 마음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상급 검술은 쓰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이작은 자신이 검술로 천사를 꺾을 수준은 아니더라도 버티는 수준은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엘릴이 아무리 전성기에 잘나갔어도 검기나 상급 검술도 쓰지 않고 그럴 수 있을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엘릴은 그냥 필멸자가 아니라 태생부터 비현실적인 무언가였을 거다.
"그건 너 하기에 달렸지."
엘릴은 대답을 내놓은 뒤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순간 아이작은 일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폐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저물어 가던 석양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고, 공기조차 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얼어붙었다. 단지 분위기를 잡는 것만으로도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기세에 아이작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게... 엘릴!'
엘릴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결투가 그러하듯 대련 역시 신성한 것이다. 엘릴은 자신이 내놓은 제약 외에는 모든 노력을 다해 아이작을 꺾을 생각이었다.
엘릴이 발걸음을 뗐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순간 아이작은 목을 강하게 틀었다.
촤악. 아이작은 가까스로 강압적인 기세에서 빠져나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목은 이미 엘릴의 검 끝에 강하게 긁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작은 서둘러 뒤로 물러나 상처를 지혈했다.
엘릴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나."
'예상은 했지만 보이지도 않는군.'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엘릴은 그의 목에 구멍을 내려고 하진 않았다. 그저 검 끝을 가져다 댔을 뿐이지만, 아이작이 급히 움직이면서 상처가 커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엘릴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덴 성공한 것 같았다.
"그래도 반응하다니 대단하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툴렀다. 대련을 시작한 순간 검기를 피워올리고 기적으로 온몸을 무장했어야지. 내게 선공을 양보할 게 아니라 먼저 달려들었어야 했다. 소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다 소환해라. 너는 혼돈의 권속 아닌가. 부정하고 삿된 수단을 써도 좋다.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뭐든 다 동원해라."
진작에 그랬다면 방금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작은 엘릴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 후 여파가 두려워서 차마 꺼내지 못했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아이작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이작의 기세가 변화하기 시작하자 엘릴은 다시 차분하게 맞은 편에 섰다. 이번에는 아이작이 먼저 공격해 오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상대가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오만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지금, 오늘, 여기서 엘릴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싸우지 않는 한 그는 엘릴에게서 티끌만 한 가르침도 얻어 갈 수 없을 것이다.
배움도 교훈도 자격 있는 자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이작의 눈이 강렬한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촉수가 스멀거리며 그의 몸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신을 죽인다.'
214화. 칼끝 너머에 (2)
아이작은 가장 먼저 혼돈의 눈을 사용했다.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촉수가 스멀거리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샅샅이 알아내려 할 때 외에는 이 정도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어지럽군.'
혼돈의 눈으로 엘릴을 보고서야 아이작은 그가 했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혼돈의 눈으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릴에 대한 정보는 티끌만큼도 알아낼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다. 엘릴은 수만 가지 동작으로 아이작을 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이 장소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아이작은 자신이 공격을 퍼부어 봤자 스치지조차 못 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신감은 교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내가 평범한 소드마스터처럼 싸울 때 이야기지....'
아이작은 여전히 혼돈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냈을 때 자신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모른다. 혼돈의 힘을 빌리면 빌릴수록 자신이 원래의 자신에서 멀어진다는 걸 알기에 삼가 왔음이다.
오늘은 어쩌면 그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최대로 피워올렸다. 그의 검기와 융합된 열기가 불길한 기세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이내 한 호흡을 들이마신 뒤, 땅을 박찼다.
쾅. 충격파에 바닥의 화강암 돌판이 갈라졌다. 검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온 검기가 벽과 바닥에 기괴한 흔적을 남기며 질주했다.
스가가가각, 쾅!
아이작이 단숨에 엘릴의 몸을 횡으로 갈랐다. 그러나 엘릴은 검을 보지도 않고 한쪽 손으로 검을 받아 냈다. 그는 그저 아이작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검기를 평범한 검으로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엘릴은 그게 가능했다.
그의 검 끝은 정확히 루앗딘 열쇠의 힐트 부분을 찍어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검이어도 가장 힘이 약하게 실리는 부분이 있고 강하게 실리는 부분이 있다. 약해지는 부분은 손잡이와 가까운 부분이고, 강해지는 부분은 검 끝이다. 검기를 쓰더라도 힘의 배분은 달라지지 않는다.
엘릴은 그 실낱같은 짧은 순간 가장 정확한 지점으로 받아낸 것이다.
'차라리 검기를 써라, 미친놈아...!'
이해한 것과 따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아이작은 죽었다 깨어나도 엘릴의 저 기술은 배울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아이작은 재차 공격을 이어 나갔다. 엘릴의 반격을 염두에 두었기에 최대한 주의하면서 공격했지만, 매번 엘릴의 검 끝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 끝이 상하지도 않는 것은 이상했다.
"...그거 평범한 검 아니죠?"
"성검 알레발이다."
"성검 알레발?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이름 없음'이라는 뜻이다."
온갖 기적이나 검술, 검기는 쓰지 않겠다고 하고 성물은 쓴다고?
아이작은 그 사실을 지적할까 하다가 자기가 너무 비참해 보여서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엘릴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쥔 순간 무슨 검이든 성검이 된다. 허나 서사가 붙지 않으면 그냥 평범한 검보단 나은 수준이니 신경 쓰지 마라."
그냥 아무거나 주워 든 칼이 맞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엘릴이 주워 든 순간 뭐든지 다 성검이 되어 버린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천사도 아니고 신이 쓴 무기다. 성검이 되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릴이 검기를 쓰지 않은 것도 맞으며 검에서 특별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작은 납득하고 재차 공격을 이어 나갔다.
까가가각, 쾅, 쾅, 콰득!
아이작의 공격은 거칠고 난폭했지만, 이는 어떻게든 엘릴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다.
엘릴에게는 아이작의 수작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진짜' 빈틈이 아닌 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때문에 아이작은 검기로 엘릴의 검을 난폭하게 잡아 물어뜯어 그의 움직임을 뒤흔들어 놓았다.
몇 번 공방을 반복하고서야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통해 그의 움직임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기계장치처럼 극단적인 효율성과 능률을 추구하고 있었다. 단 한 줄의 근육 가닥조차 명백한 목적성을 가지고 수축과 이완을 수행했다.
기능미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움직임.
'이놈은 그냥 태생부터 괴물이었나?'
아이작은 여전히 흉내도 내기 힘든 엘릴의 묘기에 아찔해졌지만, 공세를 이어 갔다. 엘릴은 검기를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힘의 강약이 교차하는 정확한 지점을 타격하는 데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검이 부러진다.
아이작은 그걸 노렸다.
'...솔직히 엘릴이 맨손이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콰드드드득!
그리고 아이작은 네 번째 공방이 교차했을 때 엘릴과 검날을 맞대는 데 성공했다. 검날이 맞닿은 순간 엘릴이 든 검의 이가 빠지면서 균열이 생겼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시켰다.
콰두두두두! 순간적으로 아이작의 기세가 폭발하면서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짐승이 덮치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 냈다. 여덟 개의 촉수를 가진 괴수는 단숨에 엘릴을 씹어 삼켰다.
쩍, 쩍, 쩌억!
그러나 엘릴은 검을 휘둘러 아이작이 휘두르는 검술의 궤적 일부를 툭툭 건드렸다.
'여덟 갈래'는 순식간에 흐름을 잃고 깨져 버렸다.
검기로 만들어 낸 짐승의 형상은 허망하게 사라지고 아이작의 균형이 무너졌다. 엘릴은 산보하듯 다가와 검날을 아이작의 목에 가져다 댔다.
"둘."
엘릴이 속삭였다. 그가 몇 번이나 봐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작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다음 공격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이작의 그림자 밑에서 심연의 손아귀가 솟구쳤다.
엘릴의 발 바로 아래서 튀어나온 심연의 손아귀는 단숨에 그를 물어 찢으려 요동쳤다. 그러나 아이작은 통각 공유를 통해 그것이 사냥감을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베이거나 상처 난 적 없었던 심연의 손아귀가 세로로 쪼개지며 그 내장과 속살을 드러냈다. 심연의 손아귀는 녹아내리듯 빠르게 저 너머의 색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엘릴은 심연의 손아귀에 삼켜지지도 않았다. 튀어나오는 순간 빠르게 물러나 검을 내리그었을 뿐이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엘릴은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반토막 났다. 아이작이 힘겹게 균열을 만들어 냈던 부분이 부러진 것이다.
"제법이군."
아이작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엘릴은 아이작의 목숨을 두 번 가져가긴 했지만 아이작은 엘릴의 성검 알레발을 부러뜨렸다. 신의 검을 부러뜨리다니, 고무적인 성과다.
하지만 엘릴은 새로운 검을 줍는 대신, 부러진 검날을 주워 들었다.
그리곤 쌍검 자세를 취했다. 알레발이었던 것은 이제 알과 레발이 되어있었다.
"난이도를 조금 더 높여 보지."
저런 어처구니없는 무기로 지금보다 더?
아이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입꼬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의 눈이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럼 저도 난이도를 높여 보죠."
아이작의 왼손이 비로소 꿈틀대며 형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아이작은 처음부터 엘릴을 '난이도 낮음'으로 상대한 적 없었다.
지금까지 왼손의 촉수를 쓰지 않은 이유는 검을 쥐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낯선 형상인 상태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촉수는 어디까지나 돌발적인 상황에서 변칙적으로 사용할 때 쓸 만한 도구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실험적인 시도를 해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할 상대였다.
탕. 아이작은 다시 엘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정면이 아닌 옆으로 돌면서 그의 빈틈을 찾았다. 엘릴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아이작의 공격을 받아치고 있다. 정교한 동작 수행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화려하고 변화가 큰 기술이 필요하다.
콰득, 콰득, 콰득! 촉수가 루앗딘 열쇠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엘릴이 심연의 손아귀를 잘라 버리는 것을 본 이상 함부로 촉수를 휘두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대신 그는 촉수를 통해 강화되는 악력과 유연한 움직임을 이용하기로 했다.
왼손과 완전히 융합되다시피 한 루앗딘 열쇠의 힐트가 보이지도 않았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지금!'
엘릴이 자신의 몸 주변을 도는 아이작을 마주보기 위해 발을 뗀 순간, 아이작은 바로 벽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그가 달리는 자리마다 남겨진 심연의 색채가 터져 나오며 엘릴을 덮쳤다.
치명적인 위력은 가할 수 없지만 시야를 가리기에 적당할 정도로.
아이작은 촉수에 휘감긴 루앗딘 열쇠를 휘둘러 리안나의 상급 검술을 흉내 냈다. 루미아드 없이 그녀의 검술을 완전히 흉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검술에 담긴 화려한 궤적의 변화는 촉수의 유연함으로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었다.
까가가각! 엘리온 검술을 사용하자 먹물처럼 퍼져 나간 저 너머의 색채 속에서 엘릴을 향해 수십 마리의 짐승들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엘릴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게 아이작의 검술을 방해해 파훼하려 했다.
그때 아이작의 눈이 번뜩였다. 혼돈의 눈으로 엘릴의 감정을 흔들기 위해 그의 감정 속으로 한껏 파고들려 했다.
"...!"
하지만 그 안에 느껴지는 것은 단 하나의 생각. 투쟁뿐이었다.
그에겐 끌어낼 만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쾅!
마침내 엘릴의 검과 아이작의 검이 충돌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검은 아까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엘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촉수로 만들어 낸 말도 안 되는 괴력과 유연함이 엘릴의 공격을 흡수해 흘려보냈다. 엘릴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하나하나 받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빗방울을 하나하나 받아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지만, 엘릴에게는 산책하는 것처럼 간단해 보였다.
"셋."
저 너머의 색채 속에 몸을 숨기고 몰아붙이는 것은 분명 아이작이고, 엘릴은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것은 아이작이었다.
숨이 격하게 차오르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서서히 공복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넷."
그 사이 아이작의 목숨이 두 번 더 빼앗겼다.
하지만 아이작은 쉬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방심이라도 생기면 꺾을 수 있다.
아이작은 이미 '깨진 크리스탈 비석 조각'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잔수작도 안 통하는 상대다.'
깨진 크리스탈 비석 조각이 비추는 전투의 미래는 아이작의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뇌가 타들어 갈 것 같은 고도의 집중 속에서 아이작은 세상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엘릴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도 단 한 번의 실수,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정면 대결에서 반응을 끌어내야 해!'
아이작은 엘릴을 죽인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지만, 승리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심이 엘릴의 어떤 감정이나 반응을 유발할 때, 마침내 승리가 찾아올 것이다. 오직 그 일념으로 아이작은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가능성을 끌어냈다.
픽, 주륵... 깨진 크리스탈 비석으로 끌어올린 고도의 집중력과 혼돈의 눈으로 엘릴의 의도와 동작을 파악하자,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피눈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이작은 피눈물이 나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눈물이 시야를 가리기 전에 촉수들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구현한 상급 검술 또한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여덟 갈래와 익사자의 손, 아발란체 검술, 로튼해머 검술, 시드리크, 알데온 기사단, 엘리온 기사단의 검술까지. 아이작이 보고 듣고 삼켜 버린 검술들이 정교하게 구현되며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그의 신체 중에 혹사당하지 않는 부위가 없었다.
동시에 비로소 아이작은 엘릴의 동작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그의 근육이, 뼈가, 혈류가, 신경이 혹사 속에 비명 지르며 강제로 기계장치처럼 끼워 맞춰졌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쥐어 터뜨릴 것 같은 폭력적인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그의 몸은 터져 나가고 있었다.
루앗딘 열쇠를 쥔 촉수조차 압력을 견디지 못해 터지고 갈라지며 피를 흘렸다. 그러나 아이작은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밀어붙였다. 스스로의 검기에 휘말려 몸 곳곳이 갈라지고 터지고 있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집중했다.
그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소용돌이가 되어 아가리를 벌리고 엘릴을 삼키려 들고 있었다.
쉭, 아이작이 흘린 피는 마치 증기처럼 안개가 되어 흩뿌려졌다.
피 안개는 저 너머의 색채와 뒤섞여 그야말로 괴수, 혼돈이 잉태하고 낳은 괴수가 되어 칼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재앙의 짐승.
이제는 저 너머의 색채와 아이작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엘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엘릴은 바닥을 빠르게 밟으면서 아이작의 검술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공격과 방어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투쟁심.
하지만 엘릴은 그것이 자포자기가 아닌 확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 투쟁심에 전율했다.
오래된 감정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투쟁심이었다.
"다섯."
엘릴의 칼이 또 한번 아이작의 심장 근처를 그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자신이 이대로 심장을 찔렀어도 아이작이 멈췄을지 의심스러웠다.
아이작의 저 투쟁심이라면 분명 심장을 내주고도 자신의 몸을 내려쳤을 것이다. 그리고 엘릴은 점점 아이작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사소한 의심.
그걸 끌어내는 걸로 아이작은 충분했다.
엘릴에게 이 싸움에서 자신의 승률이 100%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만 한다면.
그제야 엘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작은 자신의 목숨조차 걸고 모든 것을 내던지듯 싸우면서도, 엘릴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었다.
검기를 쓰라고, 네 검술을 보여 달라고.
네가 가진 것을 내 앞에 내놓으라고.
아이작은 그 와중에도 맹렬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엘릴의 동작 하나하나를 훑고 포식하듯이 배움으로써, 그는 검기가 자신의 뜻대로 형상화되는 것을 느꼈다. 아니, 검기가 그를 인도하고 이끌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작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검기란 건, 설마....'
그리고 아이작이 어떤 한계를 초월한 순간, 그는 온갖 검술을 쏟아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모든 기적과 성물, 축복, 기적을 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의 동작뿐이었다.
그는 정확하게 엘릴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215화. 칼끝 너머에 (3)
굉음과 함께 엘릴의 검이 아이작의 검과 정확하게 부딪쳤다.
아무리 엘릴이라도 평범한 검으로는 버틸 수 없는 일격.
엘릴이 들고 있던, 이미 반토막 난 부서지기 직전의 검에서 휘황찬란한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미 부러지고 녹슬고 이 나간 검이지만, 그 순간만은 이 세상 모든 검의 이상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성검, 아니, 그 무엇보다 가장 완벽한 형태의 무기.
그리고 그것을 쥔 역사에 다시 없을 완벽한 기사.
"대단하군."
찰나의 순간 아이작은 엘릴이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것을 들었다.
엘릴은 우르반수스의 시간을 멈춰 둔 채 아이작에게 말하고 있었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 다시 흐르면서, 엘릴이 남긴 말이 들려왔다.
"...너는 내 검을 볼 자격이 있다."
찬란한 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아이작은 엘릴의 배려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었다. 엘릴의 검기가 어떤 한계를 초월하며 가속했다.
밀려난 공기들이 서로 충돌하며 뜨거운 열을 방출했다. 원자핵들이 칼날과 충돌하면서 플라즈마 버블이 발생하고, 눈부시게 밝은 빛들이 터져 나왔다.
이 시점에서 칼날의 구성 성분은 공기 분자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미 융합되었다가 폭발하기 시작한 그것은 칼날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분해하고 집어삼켰다. 소리조차 따라갈 수 없는 폭발의 여파가 루주베르크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증발시켰다.
말 그대로 찰나.
1초를 수천, 수만 번 쪼개도 나오지 않는 찰나의 순간 벌어진, 그저 정직한 횡 베기 동작.
이것이 엘릴의 검기이자 엘릴의 검술이었다.
***
콰르르르르르....
아이작은 바닥에 누운 채 먹구름 낀 하늘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루주베르크가 있던 장소라곤 믿을 수 없는 시커먼 황무지가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바위가 지글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고, 일부는 유리화되어 번들거렸다.
갑작스럽게 비구름이 밀려와 주변에 폭우를 쏟아냈다. 엄청난 열기가 만들어낸 대류열과 수증기가 만나 쏟아내는 폭우였다.
'엘릴이 강하다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아이작도 핵폭발의 원리는 안다. 그리고 어떤 물체든 광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래서 어떤 물체도 광속에 이를 수 없다는 것도.
엘릴은 그 기본 원칙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래서야 물리학의 신인 빛의 법전이 울어도 할 말이 없다.
아이작은 자신이 이세계에 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살아생전 엘릴은 이미 바닥에서 주워 든 검 한 자루로 핵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엘릴과 싸워서 패퇴시킨 신들도 미친놈들이다. 역사 개변이 불가능했으면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아이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이 폭발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엘릴이 그의 시간을 고정시켜 두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에서 괴리된 아이작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엘릴은 녹아내린 바위 파편 위에 앉아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이루고도 처량하게 비를 맞는 모습이 묘하게 엘릴다워서 어울렸다.
아이작이 가까이 다가가자 엘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졌다."
'엘릴 정도 되니까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말도 뻔뻔하게 할 수 있군.'
엘릴은 아이작을 다섯 번 죽일 수 있었고, 검기를 발동한 순간에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백번도 더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도 엘릴 못지않게 당당하고 뻔뻔한 사람이었다.
"제가 이겼군요."
어쨌든 스스로에게 제약을 준 것은 엘릴이다. 엘릴 스스로가 그 제약을 어겼으니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라고.
엘릴은 아이작의 대답이 재밌는 듯 낮게 웃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하지만 내가 졌다고 인정한 건 검기나 검술을 써서가 아니라 너를 얕봐서였다. 검객은 상대를 얕본 순간 지는 거지. 나는 사실 네 번째 이후로 검기를 쓰지 않는 한 너를 죽일 수 없었다."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엘릴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다섯 번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막거나 피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엘릴의 검을 이해할 때까지 훔쳐보기 위해서였다.
엘릴은 아이작을 '다섯 번이나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섯 번이나 죽이고서야'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너는 목숨을 내던진 듯이 싸우면서 나를 훔쳐보았지. 내 검술, 내 동작, 내가 숨 쉬고 걷고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마 이미 라라비아보다도 네가 나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그래도 연인이자 딸과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엘릴은 정말 순수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걸 다섯 번째서야 깨달았다. 이 짧은 대련을 하는 동안, 이미 너는 내가 검기를 쓰지 않는 한 죽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그제야 이 싸움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지.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명백하게 방심했으니, 내가 졌다고 할 수 있다."
그걸 다섯 번째에 알아차린 엘릴도 괴물이었다. 아이작은 사실 반쯤은 진심으로 그렇게 싸우고 있었으니까.
엘릴에게서 패배 선언을 받아냈다고 기뻐하진 않았다. 사실상 엘릴은 양손을 묶고 눈을 가린 채 외발 깽깽이로 외나무다리에서 칼을 입에 물고 싸운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아이작은 결국 엘릴을 꺾지 못했다.
엘릴이 처음부터 검기를 썼다면 아이작이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검술의 정수를 훔쳐보긴 했지만, 그 검술 역시 루미아드를 쓰던 리안나처럼 따라 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응용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명백히, 아이작은 엘릴과의 싸움으로 분명한 성장을 거두었다. 그게 살아생전 천사를 때려잡고 다니던 엘릴로부터 배운 경험이었기 때문에 더욱 값졌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작은 이 전투를 통해 어쩌면 검기에 관한, 두려울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많은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만,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라.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
때마침 엘릴이 말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전투 도중 깨달은 바를 묻기로 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것?"
아이작은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단순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신들의 비밀에 얽힐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역시 검기는 엘릴의 기적이 아닌 겁니까?"
검기는 명백하게 이 세계에서 이질적인 힘이다.
단순히 상급 검술만 하더라도 신의 기적 없이 '물리법칙에 어긋난' 기이한 현상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 심지어 검기는 그걸 넘어서 타인의 눈에 보이고 물리력까지 가진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에는 검기와 비슷한 것이 이미 존재한다. 심지어 훨씬 더 쉽고 간단한 조건으로 발동하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아이작의 말에 엘릴은 크게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거기까지 도달했다니, 역시 탐나는 자로군."
엘릴은 몸을 돌려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맞다. 검기는 나의 기적이 아니다. 내가 신이 되기 전에도 검기는 존재했고, 내가 신이 될 수 있었던 능력의 기반이 되었다. 누가 내려준 것도 아니지. 네 말대로 검기는 엘릴의 기적이 아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아이작은 엘릴의 말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다른 신앙에도 뛰어난 전사들이 많다. 칼센만 해도 리안나나 시드리크보다 대단한 검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검기를 깨우쳤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다른 신앙인들은 왜 검기를 갖지 못하는 겁니까?"
"다른 모든 신들은 검기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엘릴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의 검기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면서 아이작과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황무지의 틈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직 나, 엘릴만이 신도들에게 검기를 갖도록 허락했다."
균열마다 새싹과 꽃, 줄기가 움트고 자라났다. 사람을 죽이는 검기에 생명이 싹트는 것은 기이한 광경이었으나, 엘릴에게는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아이작은 검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검기란 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기적입니까?"
엘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겼다.
"승리의 대가로, 네게 이 세상의 비밀을 알려주마."
이내 그는 세상과 생명과 의지에 관한 비밀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
당신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온종일 그것만 생각하며, 그것에 대한 열정적인 애정과 신념을 드러낸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작이 원래 살던 세상에서는 그런다고 세상이 보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보답한다.
이 세상에는 충분히 간절하면 보답해 주는 힘이 있다.
원래 이 힘에는 온갖 이름이 붙여졌지만, 지금은 한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신성력이라고.
"그리고 아직 지성체들의 지혜가 미개하고, 하루 이틀 뒤의 일도 가늠하기 어려워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그 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끌어모으기 시작한 존재들이 있었다."
개인이 개인에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봤자, 그 힘은 개인 하나에게만 미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 스물, 아니, 백, 천의 단위에 이르러 수많은 자들이 한 사람을 향해 신성력을 집중시킨다면?
그것은 수천수만의 힘을 한 몸에 품은 괴물이 된다.
"이들을 초창기에 태어난 신들, 고대신이라 부른다."
질병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는 탐욕, 거대하고 두려운 자연에 대한 경외, 앞날을 가늠하기 힘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신들은 온갖 것에서 숭배를 끌어모았다.
신들은 지성체들이 공포와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었다. 지성체들은 이제 신들의 힘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에 시달리면 역병신에게 기도하고, 농사를 잘하고 싶으면 풍요신에게 기도하면 되니까.
그들은 그 힘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들에게 기댔다.
가장 강력한 것은 '내일도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안전에 대한 기원이었다.
해가 지면 다시 떠오르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씨를 뿌리면 싹이 트는 질서에 대한 바람.
당연한 여겨지는 이치지만 바로 그 당연함에서 오는 안정에 대한 염원.
모든 이들, 심지어 고대신들조차도 바라는 '질서'는 가장 강력한 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신앙은 '당연함' 때문에 모호하고 제대로 된 이름 없이 소수의 신도만을 거느릴 뿐이었다. 사막의 양치기들만이 믿던 소박한 신앙은, 루앗딘이라는 예언자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빛의 법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루앗딘은 빛의 법전이 속삭인 지혜를 통해 지금까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세계에 등불을 비춰 찾아냈다. 내일의 영속함을 바라는 힘, 사후에도 모든 것이 온전하길 바라는 염원... 바로 우르반수스다."
모든 생명은 삶을 간절히 원하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세상이 계속 이어지고, 영원하길 바란다.
이 염원이 우르반수스라는 사후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루앗딘은 이 사후세계를 '발견'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은 무한한 힘이며 변화이다. 신은 고작해야 그 힘을 착취하는 늙은 도둑놈들에 불과해. 나도 마찬가지고."
엘릴은 냉소적으로 말했지만 아이작은 사실 도둑놈은 너무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엘릴이 강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대륙을 통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힘을 충분히 끌어모은다면 엘릴 같은 괴물도 탄생시킬 수 있고, 우르반수스 같은 공간조차 만들 수 있다. 기원을 잊어버렸을 뿐, 신들이란 존재는 결국 인간들의 간절함이 스스로 만들어 낸 극복의 역사다.
"하지만 지성체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열망을 가진 자들이 있다."
만약 한 사람이 열 명, 스무 명만큼의 기원을 품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걸 넘어서 혼자서 대군을 썰고 괴물들을 죽이고 천사도 꺾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믿는 확신과 실력, 힘이 있다면.
"그런 자들에게는 자신의 손이 닿는 거리만큼의 '기적'이 허락되지."
스스로가 스스로를 신앙하여 신으로 만드는 힘.
"그것이 검기다."
216화. 대전사 (1)
얼마만큼의 자기 확신과 자신만의 세계가 있어야 그런 게 가능할까.
평범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보통 전사들이 검기를 각성하더군. 이 힘을 검기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마 단련과 실력이 쌓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커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엘릴은 거기서 단서를 덧붙였다.
"다만 검을 쓰는 자만이 발현하라는 법은 없다. 강렬한 자기 확신과 믿음, 열망이 있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때는 검기가 아니라 기적 같은 형태로 나타나겠지. 탁월한 예술가의 남다른 기운이나 사람을 홀리는 마력 같은 것. 나는 그들 또한 나름의 '검기'를 각성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업적을 세우거나 스스로 기적을 발휘한 위인들.
신들은 이들을 눈여겨보고 이름을 지어 천사로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강력한 경쟁자 후보를 알아보고 위협이 되기 전에 자신과 같은 편으로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신에게 거역할 것이 명백한데도 명천사로 만들어진 존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이, 혹은 다른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신께서 도와주셨다! 천사께서 임하셨다!' 개소리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람의 염원과 노력에 세상이 응답해준 것이다."
신이 내린 기적은 우발적이고 어떤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상당수의 기적들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릴은 스스로 단련하는 자에게 무조건 기적을 준다.
그게 정신 나간 폭력배라 할지라도.
"나는 검기가 전사로서 스스로 충분한 자기 확신과 경지에 다다랐다는 증거로 보기 때문에 금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신들은 다르지. 그들은 검기를 허용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막아야 하지. 그러나 그 힘이 억눌린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곤 한다. 기적이나 신체 변형 같은 것으로."
성체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작은 불현듯 발트제메르 황제가 20살에 성체를 발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머리에 빛나는 사슴뿔이 돋아난 시기. 그는 그 힘으로 내전을 끝내고 교단과 귀족정을 묶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 빛의 법전이 내린 성체가 아니었다면?'
아니, 아이작은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검기에 대한 비밀을 들은 것만으로도 아이작은 머릿속이 가득 찼다.
'신이라는 건 리바이어던 같은 거군.'
홉스는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리 일부를 포기해 국가에 양보하고 묶었다고 말했다. 국가는 이 괴물 같은 힘으로 개인이 도저히 할 수 없는 힘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신이란 인격이 있는 국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 탁월한 개인은 국가를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이고, 기적을 품은 자들, 성체보유자들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기적을 내리는 작은 신이기도 하지."
엘릴의 대답을 듣고서야 아이작은 빌론이 검기를 각성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엘릴 신도였기 때문에 검기 발현이 억압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늙고서야 검기를 각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가 확고한 자기 확신과 긍정,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비록 비틀리고 일그러진 세계라 해도.
하지만 알프레드나 비오가 그러했듯, 그 비틀린 세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서 계속 압박이 들어올 테니까.
소드마스터들이 사회에서 겉돌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리안나 역시 게오르크 기사들과는 다른 세계가 있었고, 에델레드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믿는 아이작 역시도.
***
신과 이 세상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자 아이작은 새삼 두려워졌다.
결국 신들이란 인류 집단 무의식의 어떤 특정한 부분들이 돌출되어 만들어 낸 편집증적인 부분이었다.
인류의 정신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 만들어 낸 신일지도 모른다. 자기 파괴적인 욕망에서 만들어진 신이 자살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아이작은 그 권속이고.
엘릴은 느슨하게 웃으면서 아이작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 딸을 닮았군."
아이작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평범한 아버지가 하면 애정 어린 말일 텐데도.
하지만 네필림인 아이작의 외모가 같은 네필림인 라라비아와 닮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작이 정신없이 도망가기 전에 다행히 엘릴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귀공의 부친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었겠지. 왜 귀공을 낳고 내팽개쳤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 귀공을 탐내지 않을 신은 없을 테니."
아이작은 역시 도망가야 하나 생각할 때, 엘릴이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가져온 검, 분열 예식이었다. 엘릴이 굳이 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분열 예식을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이 검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며 아이작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엘릴을 바라보았다.
"그 검의 주인은 따로 있다. 너는 가르갈디아를 내가 아닌 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분열 예식에 다른 주인이 있다면 한 사람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작은 엘릴이 왜 게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차이점을 깨달았다.
'보통 분열 예식은 붉은 성배, 그러니까 엘릴의 심장과 함께 반납되지. 그때 붉은 성배 클럽은 파탄 난 후다. 이미 엔딩이나 다름없는 시점이니 굳이 돌려줄 이유가 없겠지.'
아이작은 자신의 성배기사로서의 여정이 또 한 번 길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무희에게 돌려줄 때까지 다시 분열 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성지를 향한 여정을 떠나려면 왈라이카 왕국에도 들러야 했다.
하지만 엘릴은 아이작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려면 그냥 맡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낀 듯했다. 그는 다시 또 허공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성검, 카훌린이었다.
"무릎 꿇어라."
아이작은 홀린 듯이 엘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엘릴에게 복종하지도, 그를 신앙하지도 않았지만, 어딘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압력이 그를 잡아 눌렀다. 하지만 그것이 굴욕적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엘릴의 신적인 지위를 새삼 깨달았다.
"귀공은 나의 신성한 임무를 받은 전사다. 그에 합당한 권위를 부여하지."
이 공간, 이 천국에서 엘릴은 절대적인 질서다. 아이작은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행복했다. 엘릴의 천국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기사들이 행복해하는 것처럼.
엘릴은 아이작의 오른쪽 어깨를 카훌린으로 툭툭 두드렸다.
"귀공을 엘릴의 대전사(代戰士)로 임명한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엘릴의 대전사라는 말에 아이작이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함부로 저질러선 안 될 무례였지만 혼돈의 힘이 엘릴의 압박마저 깨뜨리고 일으켜 세울 만큼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맹포하게 분노하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내가 엘릴의 대전사라고?'
원래 에델레드가 맡아야 할 지위다.
대전사는 엘릴의 지상에 현신한 엘릴과 같은 지위를 받게 된다. 대개 성전을 선포한 엘릴의 왕에게만 부여되며, 경우에 따라 왕보다 높은 권위를 자랑했다.
엘릴 왕국 통합에 필요한 권위를 가진 직위인 만큼 당연히 에델레드가 받아야 했다.
심지어 아이작은 빛의 법전에서 임명된 부활의 성자이며, 소금 의회의 꿈꾸는 자, 이름 없는 혼돈의 대리인, 나아가서는 발트제메르 황제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여기서 엘릴의 대전사 지위까지 내려지면 얼마나 난장판이 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잠깐, 저는...."
"가만히 있어라."
엘리은 카훌린으로 아이작의 왼쪽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강력한 압력이 칼을 내리는 것을 방해했다.
엘릴의 힘마저 역행할 정도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저항과 엘릴의 억지 사이에 낀 채 눌려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엘릴은 눈을 부릅뜨고 카훌린에서 검기를 피워올렸다. 찬란한 섬광이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고 오직 검이 나아갈 길만을 밝혔다.
그리고 이곳은 엘릴의 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엘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카훌린의 칼날이 마침내 아이작의 목에 닿았다. 원래 두세 번 툭툭 두드려야 했지만 엘릴은 그 스치듯 닿은 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검을 떼어냈다.
"이제 그대는 엘릴의 대전사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이 '엘릴 처치'를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니, 빡쳐도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얼마나 대단한 보상을 줄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자살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엘릴이라면 자신이 자살하고 싶어도 못 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의 의견 따위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벌어진 일에 그는 할 말을 잃고 씨근거렸지만, 이제 와서 물리는 것도 우습고 물릴 것 같지도 않았다. 엘릴은 카훌린을 거꾸로 쥐어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귀공과 나의 맹약의 상징, 귀공이 나의 대전사라는 상징이다. 이 검을 들고 내 기사들을 이끌어 전장에 나가라."
아이작이 카훌린을 받아 들자, 엘릴은 불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적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들도 전장에서 영광된 죽음을 맞이하게 인도하라. 내 신도들에게 다시 한번 전쟁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어라."
"하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지만 대전사라면 이 정도는 용서해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칼루리엔."
엘릴은 카훌린에 박혀있는 드래곤하트에게도 속삭였다.
"네 유배는 성배기사의 임무가 끝나는 순간까지다. 그때까지 부러지든, 살아남든,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바람이 몰아닥쳐 왔다.
무수한 낙엽들이 순식간에 아이작의 눈과 몸을 휘감았다.
***
눈을 뜨니 밤이었다.
새벽 별이 밤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높은 상수리나무와 가을의 풍경, 아스라이 핀 동백꽃이 여전히 놓여 있었다. 아이작은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엘릴이 잠들 듯 죽어 쓰러진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에델레드와 헤사벨도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작은 그들 역시 곧 깨어나리라고 예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엘릴과 대화를 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의 손에는 성검 카훌린이 쥐어져 있었다.
[성검 카훌린(EX)]
[엘릴이 직접 전장에서 휘두른 실전용 검. 세상에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그 어떤 일에도 부러지거나 날이 상하지 않는다. 하루 세 번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가속시킬 수 있다. 엘릴의 대전사가 아닌 사람이 손에 쥐면 스스로의 목을 찌른다.]
'어디 잠깐 깜빡 놓고 가면 큰일 날 물건이군.'
자해 옵션은 들어 보지 못한 효과였다. 아마 엘릴이 특별히 추가한 옵션 같았다.
가속 효과와 튼튼함이라는, 성검 치고는 소박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루앗딘 열쇠조차 언제 깨질지 모르는 물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최상급이었다. 게다가 이 검의 진정한 가치는 적과 맞부딪칠 때 드러나지 않는다.
엘릴의 기사들더러 '전부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따를 만한 권위가 이 칼의 진짜 가치였다.
억지로 엘릴의 대전사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사실 아이작이 손해 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성검 카훌린을 받고, 분열 예식도 돌려받았다.
'너무 좋아서 문제지.'
217화. 대전사 (2)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는 권위인 카훌린마저 손에 있으니 게르토니아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척 새 칼이라고 할까?'
성검을 든 엘릴의 대전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칼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엘릴의 대전사가 되어 버릴 거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이작은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다독였다. 분명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아이작은 카훌린에 박힌 보석,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를 들여다보며 말을 걸었다.
"유배자 칼루리엔. 지상의 공기는 어떻습니까?"
칼루리엔의 드래곤하트가 웅웅대며 빛을 반짝였다. 그의 사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칼루리엔 역시도 지금 이 상황을 어처구니없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도 네가 의도한 것이었나?]
"댁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카훌린을 들고 가게 될 줄은 몰랐지요. 이건 받는 사람도 부담되는 선물입니다."
거기다 돌려주려던 분열 예식까지 다시 들고나왔다. 지금까지 엘릴의 성검을 두 개나 들고 다닌 사람이 엘릴 말고 또 있었을까 싶었다.
[그분을 탓할 수는 없겠군. 한동안 웅크리고 계셨으니 이제 반발하여 튀어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승리와 영광과 용기를 부르짖던 분께서 이 오지의 섬에 틀어박혀 계셨으니 얼마나 굶주려 계시겠느냐.]
칼루리엔은 엘릴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면서도 착잡한 감정을 지우기 힘들어했다.
엘릴의 명령이란 결국 엘릴 교단이 엘릴의 신도답지 못하게 행동할 바에는 차라리 전장에 나가서 다 죽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천사들 역시도 이제 엘릴의 의도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카훌린에 달린 자살 옵션은 어쩌면 엘릴의 의지가 담긴 명령일지도 모른다.
'이거 나중에 내가 말 안 들으면 대전사 자격 박탈하고 목을 찌르게 만들려는 수작 아니야?'
아이작은 새삼 엘릴의 의도를 의심해 보았지만, 여명군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아이작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릴을 섬으로 추방할 때 왜 다른 교단들까지 그렇게 협력했던 겁니까? 빛의 법전이야 당연하다지만 소금 의회랑 세상의 화로, 심지어 올칸 규율까지 보이던데."
올칸 규율이 지금 흑제국에 소속된 무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엘릴이 그 시대의 '공적'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불사교단 이상으로.
물론 엘릴이 보여 주던 위업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엘릴이 딱히 어떤 민족이 태어나기도 전에 대량 학살한다거나 죽은 신을 언데드로 되살리거나 인류의 1/3쯤 멸종시킨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칼루리엔의 대답은 담담했다.
[원래부터 신들은 엘릴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이유를 듣기도 전에 이미 알 것 같았다.
엘릴은 그때 아홉 신앙이 아니면서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한 고대신 비슷한 존재였다. 그러면서 신의 비밀을 너무 쉽게 떠들어댄다. 신들도 입 가벼운 신을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칼루리엔이 밝힌 이유는 의외의 것이었다.
[원래 신성한 존재들은 네필림을 낳은 자에게 관대하지 않으니.]
음음, 역시 네필림은 죄악이지...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네필림을 낳은 자요? 네필림이 아니라?"
[네필림? 신들도 네필림 자체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죄악의 결과물일 뿐, 죄인은 아니니까. 하지만 네필림을 낳는 행위는 신성을 품은 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다. 들키면 어떤 신앙이라도 반드시 타천(墮天)시킬 만큼.]
타천사, 즉, 이름을 빼앗고 천사의 지위도 빼앗으며 존재한 적 없던 자로 만든다는 뜻이다. 타천사가 흔하진 않지만 이사크레아 영지에 출몰할 정도로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천사가 되었다가 날개를 빼앗긴 자가 무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많은 타천사들의 원래 이름은 알 수 없다.
분명 역사를 풍미했을 대단한 위인들이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엘릴에게 임신한 아내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던 것도 그것 때문인가? 무희가 네필림이라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런데 왜 네필림을 낳는 걸 죄악으로 여기지?'
아이작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신들에게 크게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에 대해 생각하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릴은 네필림인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배교하고, 신이 되이 되어야 했고, 딸에게 심장까지 내어 주었다. 그렇다면 아이작의 부모 역시 무언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번식하고 생육하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다. 신의 입장에서도 키우는 가축이 더 크고 번성하는 것은 기쁠 일이다. 하지만 왜 그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통제하는 것일까?
아이작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려던 찰나, 갑자기 카훌린을 들고 있던 팔이 툭 떨어졌다.
"응?"
카훌린을 다시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서야 엄청난 공복감이 찾아왔다.
엘릴과의 싸움으로 지금까지 포식했던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왜 이제서야?'
[몸에 깃들었던 우르반수스의 신성력이 주변의 압력에 맞춰서 빠져나간 모양이군.]
칼루리엔이 아이작의 상태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말했다.
[힘이 충만하게 들어차 있다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뿐이다. 죽을 위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아, 이런.'
하지만 칼루리엔이 말하는 대상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지, 네필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휘청거리다가 주저앉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온갖 축복으로 신체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해 왔지만 '죽은 신의 내장'이 공복으로 으르렁거리자 갑옷을 입고서는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심지어 경량화 축복까지 걸린 갑옷이었는데도. 열심히 키운 근육과 체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낑낑대며 갑옷을 겨우 벗어 던지다가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저혈압과 저혈당이 동시에 온 것처럼 눈이 자꾸만 감겼다.
'...복귀는 헤사벨과 에델레드에게 맡겨야겠군.'
***
아이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과 익숙한 헤사벨이 보였다. 이제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뜰 때마다 천장의 무늬처럼 붙어 있는 헤사벨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헤사벨은 아이작이 눈을 뜬 것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재빨리 천장에서 내려왔다.
"괜찮으세요, 아이작 님?"
헤사벨의 등 뒤에는 여전히 붉은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그걸 유연하게 접어, 마치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덕분에 특이한 깃털로 치장한 로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괜찮다. 여기는 어디지?"
"엘리온 성채요. 그 어린이 왕이 아이작 님을 업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다리가 질질 끌려서 제가 업고 왔어요. 리안나 게오르크는 물론이고 알데온 기사단도 우리 보호를 선언했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리안나? 되살아난 모양이군?"
"예! 그쪽도 우리랑 같은 날 깨어났다고 하더군요. 수정에서 나오자마자 성지로 사람을 보내서 우리를 안내해 줬어요. 하마터면 아이작 님을 엘리온 성채까지 업고 갈 뻔했지 뭐예요? 그런데 우리가 며칠이나 우르반수스에 있었는지 아세요?"
아이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았다. 분명 들어갈 때만 해도 늦봄이었는데 지금은 완연한 여름처럼 보였다.
"48일?"
"오, 어떻게 아셨어요?"
소금 의회에서 달우물 의식을 통해 우르반수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에도 48일이 지났었다.
48일이라는 숫자에 뭔가 의미가 있거나, 그 이상 머무는 것은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우르반수스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숫자를 채워야 돌아올 수 있다거나.
아이작은 일어나려다가 극심한 공복감에 몸을 숙였다.
죽은 신의 내장이 빨리 뭔가를 넣지 않으면 아이작이 수년간 애써 길러 놓은 근육들을 모조리 잡아먹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숟가락 들 힘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식은땀이 솟을 지경이었다.
'네필림은 다들 원래 이 상태인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수도원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아이작은 지금 과하게 오버튜닝한 엔진 같은 상태였다. 연료가 충분하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 주지만, 부족하다면 평범한 엔진만도 못한 셈이다.
"...헤사벨, 미안하지만."
"아, 예! 그럴 줄 알고 준비해 왔어요!"
헤사벨은 이미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아이작의 공복 상태에 대처한 적 있었다. 아이작은 이미 자신의 옆에 돼지 통구이 한 마리가 식은 채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맛을 따질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엄지를 치켜올리고, 돼지를 향해 포크 대신 왼손을 내밀었다.
***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상태를 모면하고 나자 아이작은 자신의 상황과 득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얻은 것은 카훌린과 엘릴의 대전사 지위, 칼루리엔의 드래곤 하트다. 잃은 것은 그동안 배 속에 채워 넣었던 고기들. 덕분에 임시 특전은 모조리 날아갔다. 부패한 천사의 시독을 잃은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쓸 만큼 쓰긴 했다.
이제 엘릴의 대전사 지위를 획득한 아이작은 사실상 상징적 권위 면에서는 국왕인 에델레드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엘릴의 기사들이 에델레드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말을 듣거나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 이름 없는 혼돈은 확실하게 빡쳤지만, 빛의 법전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오월의 검, 잠깐 좀 나와보시죠."
아이작은 잠시 사라진 오월의 검이 이제 다시 회복해 모습을 드러내길 기대하며 불러보았다. 하지만 오월의 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이작은 고민하다가 파수자의 등대를 켜 보았다. 온화한 빛이 퍼져나가며 질서를 고정시켰다. 그제야 비로소 무언가 반응이 나타났다.
아이작의 눈앞에 작은 날개 형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 주변에는 낡고 이 빠진 검 두 자루가 수직으로 선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 작고 아담한 불꽃이 오월의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월의 검, 괜찮으십니까?"
[그래, 살아있다. 주변 꼴을 보아하니 엘릴을 만나고 돌아온 모양이군.]
"실패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모든 것은 등대지기가 세운 대계대로 흘러간다. 실패할 리가 없지.]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덧붙였다.
[그리고 네 실력과 재주를 볼 때, 겨우 칼루리엔 정도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옥에서도 기어 올라올 방법을 잔꾀를 내는 녀석이니.]
아이작은 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쨌든 엘릴은 이미 만났고, 이제 우르반수스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좀 난처한 일이 생겨서 그쪽 의견을 물으러 왔습니다."
오월의 검은 작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검.]
그때 오월의 검이 아이작의 한 손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은 아이작의 무릎 위에 놓인 카훌린을 향해 있었다.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카훌린에 박힌 드래곤 하트의 정체를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성검 카훌린이군. 엘릴의 봉인 촉매로 사용되던 것인가?]
"음, 네."
오월의 검은 드래곤 하트를 지적하는 대신 자기 할 말만 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이거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래곤 하트에서 칼루리엔의 기척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엘릴이 제게 이 검을 주면서 저를 대전사로 임명했습니다. 제 의사 따위는 묻지도 않더군요."
[대전사로?]
오월의 검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 축하한다.]
"문제가 되진 않는 모양이군요?"
[1차 여명군 당시에 나도 임명된 적 있었다.]
"...의외로 여러 명 뽑나 봐요?"
[아니. 한 번에 한 명만 뽑는다. 하지만 대전사는 수명이 짧으니까 큰 전쟁이 나면 동시대에 여러 명이 나올 수 있긴 하지. 나도 결국 죽고서야 대전사의 책임을 내려놓았으니.]
엘릴은 다른 종교건 뭐건 잘 싸우고 자기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면 대전사로 임명하는 모양이다. 결국 대전사라 함은 신이 내린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자니,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엘릴이 침묵한 근 백 년 이래 대전사의 지위를 받은 것은 아이작이 유일할 것이란 점은 확실했다.
[그리고 성검까지 받는 경우는 처음 보았군. 보통 지위만을 받았을 뿐이니. 어쩌면 엘릴 또한 너를 특별 대우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작은 엘릴의 특별 대우란 것이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에 그냥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18화. 대전사 (3)
"...아무튼 엘릴의 대전사가 된 것을 빛의 법전 교단에서 문제 삼지 않을 거라면 상관없습니다."
무슨 일 생긴다면 오월의 검이 변호해 주든가 하겠지 싶었다. 설마 이렇게 부려 먹고 모른 척하려고.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오월의 검이 건재해야 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는 권위를 보여 주기가 어렵다.
"몸의 회복은 어떠십니까? 우르반수스로 돌아가서 회복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너를 내 지평좌표계로 고정해 둔 동안 회복에 몰두하느라 지상에 돌아온 줄도 몰랐군.]
지평좌표계가 뭐?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자신에게 빌붙어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오월의 검은 파수자의 등대 불빛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졸린 듯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우르반수스로 일단 돌아가겠다. 교단에 와서 보고하거든 내가 같은 시일에 신탁을 내려 인정할 테니 그렇게....]
화르르륵. 오월의 검은 말을 제대로 마치지도 않고 사라졌다.
불씨가 타올라 솟구치다가 태양빛 사이로 녹아내리듯이.
***
오월의 검마저 돌려보낸 후, 아이작은 나갈 준비를 했다.
물론 돼지 한 마리 정도로는 아이작의 신체 상태를 커버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극심한 저효율 가성비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아마 이 상태에서는 에델레드와 싸워도 질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애써 몸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뭔가를 포식하려면 서둘러 직접 사냥을 나가는 편이 안전하기도 했고, 우르반수스에서 있었던 일을 엘릴의 귀족들에게 설명하기도 해야 했으니까.
'지금 게르토니아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을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오래 걸렸어.'
물론 그 대가로 '엘릴의 대전사'라는 막강한 권한을 얻었지만 이제 곧 여명군이 코앞이었다. 아이작은 하루라도 서둘러 바다를 넘어야 했다.
"성배기사."
아이작이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에델레드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에델레드는 이전에 비해 뭔가 강인하고 선이 굵어진 느낌이었다. 칼드부흐를 사용하지 않아도 우르반수스에서 있었던 일이 그에게 큰 변화를 준 것 같았다.
"괜찮소?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성배기사!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지금 뼈만 남아서 다 죽어가는 꼴인데?"
로잘린드조차도 경악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할머니 같은 대사라고 생각했지만 뒤이어 다가오는 모르스와 레이나, 델프릭 등등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작이 나오기 전에 분명 거울을 확인했을 때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그들은 자신의 몰골이 피골이 상접한 해골 같은 꼴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제 상태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아무래도 이 근육 기사들에게는 우르반수스에서 신과 나눈 비밀스러운 대화보다는 근손실이 더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아이작도 배가 고파 더 설득할 힘도 없었기 때문에 선선히 응했다.
아이작은 반쯤 연회장으로 끌려가 식탁 상석에 앉아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구운 돼지고기와 절인 연어, 훈제 양고기 등등을 받아먹었다. 아이작은 입안에 억지로 욱여넣은 살코기를 씹으려 애쓰며 '촉수로 먹었으면 씹을 필요도 없고 순식간인데'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점점 인간성을 잃어 가는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에델레드 폐하와는 이미 대화를 나누신 모양이군요?"
아이작은 귀족들의 관심이 자신에게만 쏠린 것을 보고 물었다.
에델레드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와 헤사벨 경이 먼저 깨어나 리안나 장군을 만난 덕분에 먼저 이야기하게 되었소. 패왕을 배알하다니, 내 평생 그런 모험을 겪을 줄은...."
에델레드는 여전히 감격이 잊히지 않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기사 혐오자인 에델레드조차도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엘릴과의 만남이 어지간히 감격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자신과 다른 엘릴을 만났나 싶어서 의아해졌다.
'나는 엘릴에 대한 혐오감만 더 커졌는데.'
자기 신도들이 몰살당했으면 하는 신이라니, 아이작이 생각하기에는 별로 숭배할 가치가 없다.
혹시나 싶어서 아이작은 에델레드에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었다.
역시나 에델레드가 엘릴과 나눈 대화는 간단한 공치사와 치하의 말, 그리고 엘릴 왕국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간략한 요약 요청의 질문 정도였다. 그리고 아이작에 대한 질문도.
'헤사벨, 너는 어땠나?'
붉은 성배에 관해 질문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작은 은밀하게 물었다.
헤사벨의 대답도 비슷했다.
'대충 제 외모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용기를 칭찬하시고, 왈라이카 왕국의 근황 정도만 묻던데요. 무희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또 안 물으시고. 아, 아이작 님에 대해서도 물었네요.'
에델레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걸로 분명히 엘릴이 지상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음을 느꼈다.
엘릴이 지상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확실히 큰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리안나 장군은? 리안나 장군도 우르반수스에 갔었을 텐데."
리안나 이야기에 기사들이 침묵에 빠졌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눈짓을 교환하다가 모르스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리안나 장군은 아이작 님과 에델레드 폐하, 그리고 헤사벨 경이 엘릴을 배알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감히 성배기사의 임무 수행을 방해한 죄를 청하기 위해 금식기도에 들어간다더군요."
"배교자 칼루리엔의 농단에 속아 동포들에게 칼을 겨누었으니 금식기도가 아니라 유배나 사형에 처해야지요!"
레이나 힐드가 분개한 듯 소리쳤다. 아이작은 그녀가 리안나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것과 별개로 특정한 단어가 신경 쓰였다.
'배교자 칼루리엔? 벌써 칼루리엔이 엘릴을 격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표했나?'
명천사가 엘릴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은 배교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기에 여파를 고려해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격리는 엘릴 스스로가 받아들였던 봉인 아닌가.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배교자 칼루리엔이 봉인당한 지가 수백 년인데, 그새 봉인을 뚫고 성지수호자들을 현혹해 해방될 기회를 노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너무 리안나 장군을 탓하지 말게."
모르스가 레이나가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자제시켰다. 아이작은 그 말로 이들에게 '의식 개변'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우르반수스에서 있었던 일이 어느새 이들의 상식이 된 것이다.
엘릴의 지혜를 상징하던 칼루리엔은 이제 배교자이자 봉인당한 사악한 마법사가 되었다.
그는 엘릴을 현혹하여 빛의 법전과 전쟁을 일으켰지만, 수백 년 전 바다를 건너온 '어느 이름 없는 성기사'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봉인 당했다. 덕분에 엘릴은 빛의 법전과 화해하고 지금처럼 친근한 이웃으로 남게 되었다... 라는 것이 개변된 역사였다.
순식간에 '어느 이름 없는 성기사'가 되어 버린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면서도 소름 끼치는지 알 수 있었다. 한때 등대지기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던 마법사가 한순간에 배교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카훌린에 박혀 있는 칼루리엔은 대충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아무 말 없었다.
우르반수스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이런 오명을 쓰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작은 별생각 없이 이 바뀐 '상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득 자신이 루주베르크에서 엘릴과 한바탕했던 사실이 떠올라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때 엘릴은 루주베르크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루주베르크도 역사에서 지워진 거 아냐? 그럼 브란트 공작가도 사라지고, 이솔데도?'
"루주베르크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이작은 다급해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르스가 의아한 듯 보았다.
"예? 브란트 공작령 말씀이십니까? 아아, 성배기사 님의 처가 말씀이시군요. 안 그래도 귀환이 늦는 것이 걱정된 건지 몇 차례 연락선을 보내왔었습니다. 성지 엘리온에 들어갔다고 하니 납득하고 돌아갔지요."
태연하게 나온 말에 아이작은 안도했다.
다행히 그 사건은 '정식 역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루주베르크가 사라지는 것은 보통 대사건이 아니다. 엘릴이 그렇게 역사를 손쉽게 바꿀 수 있었다면 진작에 승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배기사님도 엘릴을 만나 뵈었지요? 어떠셨습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기사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작은 엘릴이 당신들더러 전부 전장에 나가서 죽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이 좋아할 이야깃거리는 한가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째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아마도 무게감이 다를 것이다.
아이작은 허리춤에 걸려 있던 카훌린을 꺼내 검집 채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엘릴께서 쓰시고 재투성이가 회수해 온 성검, 카훌린입니다."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아이작은 자신의 변변찮은 설명보다 그 의미에 집중하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엘릴께서 제게 카훌린을 넘기시며 대전사로 임명하셨습니다."
식당 안이 폭발하듯 경악과 찬사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
아이작이 엘릴의 대전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방에 틀어박혔던 리안나조차도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함께 우르반수스에 있었던 리안나는 역사 개변에 영향을 받지 않아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카훌린이라구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손에 쥐지는 마십시오. 대전사가 아닌 자가 쥐면 목을 찌른다고 경고받았습니다."
굳이 사형수를 데려와서 시험해 보자는 사람은 없었다. 명망 높은 성배기사를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자격 없는 자에게 성검을 쥐게 하는 것 자체가 큰 죄였다.
리안나는 엘릴을 직접 만나 증표까지 들고 온 아이작을 가로막았던 자신을 한층 더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대의를 그르칠 뻔했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아직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기회가 있었다.
"...엘릴께서 당신에게 대전사라는 큰 지위를 맡기셨다면 그만큼 큰 책임을 맡기셨겠지요. 엘릴의 뜻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임무를 맡기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돌려 말할 것도, 설득할 것도 없다. 명징한 상징이 있는 한 그저 전달할 뿐이다.
"엘릴께서는 여명군 참전을 원하십니다."
기사들의 신이 성기사에게 칼을 쥐여 주었다.
그것만큼 정확한 상징이 있을까.
나가서 다 죽어 버리라는 명령은 생략했지만, 아이작은 그런 사회성 부족한 발언으로 초를 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엘릴이 여명군 참전을 명령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엘리온 성채 전부에 퍼져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이미 엘리온 성채에는 알데온 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귀족들과 게오르크 일족, 로잘린드 솔트아인까지 전부 모여 있어서 사실상 엘릴 왕국 총집회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여기에 천사 하나라도 떨어져서 썰어대면 엘릴 왕국 수뇌부가 싹 다 날아가겠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지만, 의견을 규합하기 이만큼 좋은 무대도 없었다.
"여명군입니까."
리안나는 다소 떨떠름한 어투로 말했다.
당연하지만 여명군 참전을 바라지 않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엘릴 신도라고 다들 못 죽어서 안달 난 전쟁광들은 아니다. 광신도가 아닌 바에야 자기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안다.
"내키지 않는 듯하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리안나는 어느 쪽이냐면, 사실 영광스러운 전쟁이라면 기꺼이 참전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떨떠름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그의 숙부가 여명군 참전 이후 변절한 모습을 본 데다, 그가 아는 귀족들 중 참전을 원치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젊은 기사들은 벌써 다가오는 대전쟁에 흥분하고 있었지만, 늙은 기사들은 여명군 참전을 위해 엘릴 왕국이 희생하고 감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주름살을 접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로잘린드 솔트아인도 탐탁잖아하는 쪽이었다.
"에델레드 폐하. 폐하께서는 솔트아인의 자치와 독립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여명군 참전 역시 솔트아인의 자주적인 의견을 존중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내전을 끝내기 무섭게 바로 독립적인 의견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치는 에델레드가 약속한 바였으니까. 하지만 설마 대전사라는 지위와 카훌린을 들고 왔는데도 바로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물론 저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로잘린드뿐이었다.
에델레드 역시 곤란한 듯 말했다.
"로잘린드 부인. 물론 약속한 대로 솔트아인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부인도 보셨겠지만, 불사 교단의 위협은 이 먼 섬이라고 피해 가지 않습니다. 놈들이 우리 기사들을 데스나이트로 만들고, 참람하게도 엘릴을 언데드로 되살리겠다고 한 것을 못 들으셨습니까?"
"저 역시 놈들을 봤고 또 싸웠습니다. 하지만 폐하, 불사 교단이 엘릴 왕국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여명군에 참전했던 기사들이 변질되어 돌아온 탓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릇된 것을 배운 자들이 오염되어 왕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아이작은 로잘린드가 원래 저렇게 교조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이었나 생각했다. 그때 문득 로잘린드가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슬쩍 몇몇 귀족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아이작은 그 귀족들이 내심 그녀의 편을 들던, 중립파 귀족들임을 알아보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로잘린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 악마의 변호사를 자처하는 거였군.'
어찌 됐든 여명군 때문에 엘릴 왕국이 갈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 로잘린드는 반 여명군파를 대신해 분명하게 의견을 정리한 다음 통일할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좋소.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로잘린드는 한참 말싸움을 벌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짓했다.
"결투로 승부를 결정합시다. 이게 정말 엘릴의 뜻이라면 결투에서 다시 한번 그 의도를 보여주실 거요."
"결투?"
"그렇소. 우리는 리안나 게오르크를 대전사로 선택하겠소."
아무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반대파의 최강자다. 어쨌든 죄인의 위치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조용히 있던 리안나는 갑작스러운 결투를 위한 대전사로 선택되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라면 반 여명군파 귀족들도 수긍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배기사를...."
"아니, 카훌린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는 빛의 법전 신도요. 이것은 우리 엘릴 교단 안에서 결정해야 하는바."
로잘린드는 에델레드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에델레드 폐하께서 결투의 상대로 나서주길 바랍니다."
219화. 대전사 (4)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모두가 로잘린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명군을 이끌 대전사로 뽑혔으니 당연히 결투에 나서게 될 줄 알았던 아이작도 놀라서 로잘린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정말로 여명군을 반대하는 건가?'
솔트아인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고립주의적 귀족들은 솔트아인을 편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로잘린드가 일부러 에델레드를 곤경에 내몰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아이작이 반대 의견을 밝히기 위해 일어나려 했을 때, 에델레드가 입을 열었다.
"하,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또 한 번 경악했다.
물론 에델레드는 우르반수스에 진입했다가 나오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성장했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하지만 그곳에서 보여 주었던 힘은 우르반수스의 충만한 신성력 때문에 보여 줄 수 있었던 일시적인 성장이다. 그 경험을 충분히 녹여 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폐하, 칼드부흐로 만들어낸 검기는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부작용까지 고려하면...."
"아니오, 성배기사. 할 수 있소. 할 수 있을 것 같소."
어째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에델레드는 당당하게 일어섰다.
난처해 보이는 것은 리안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죄인으로서 에델레드와 맞서고 싶지도, 여명군에 반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 싸우거나 일부러 져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반발이 클 것이다.
에델레드는 앞으로 여명군을 총지휘할 지휘관으로서 분명한 역량을 보여 주어야 했고, 리안나는 반대파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 줘야만 하는 상황.
아이작은 이 골치 아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로잘린드 부인은 대체....'
그러나 로잘린드는 팔짱을 낀 채 좌중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돈의 눈이라도 써서 알아내 볼까 했다. 하지만 일단 에델레드를 믿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만약 에델레드가 패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엘릴의 대전사로서 억지를 쓰면 일부나마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기일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시작하지요."
에델레드는 바로 칼을 들고 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리안나도 잠시 망설이다가 나왔다. 그녀의 상처는 수정에 갇혀 있는 동안 전부 회복된 상태였다.
둘은 약속한 듯 성검이 아닌 가검을 들었다. 좌중이 모인 상태에서 성검을 휘두르면 휘말리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델레드가 칼드부흐의 힘조차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길지 알 수 없었다.
'리안나가 경험도, 실력도, 힘도 훨씬 더 강하다. 에델레드가 당장 검기를 사용한다 해도 풋내기 수준이고, 내 검술도 다 익히지 못했어. 이길 방법이 없는데?'
리안나가 앞에 선 에델레드에게 말했다.
"그럼, 폐하.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리안나는 가볍게 검을 흩뿌리고는, 단숨에 에델레드를 향해 돌진했다.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빠른 속도.
그녀는 단숨에 세 방향에서 에델레드를 찌르는 공격으로 시작했다. 루미아드가 없어도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에델레드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소드마스터의 검기 앞에서 당당하게 칼을 휘두르는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의 검에선 검기도, 탁월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작이 에델레드의 일방적인 패배를 예감한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리안나의 몸이 튕겨 나갔다. 달려든 속도보다 튕겨 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아이작조차 한순간 시야에서 놓쳤을 정도였다. 리안나는 벽에 부딪힐 뻔했다가 가까스로 검을 땅에 꽂으면서 멈춰 섰다. 돌바닥이 검에 패여 긴 상흔이 남았다.
경악 어린 시선이 에델레드에게 향했다.
에델레드는 눈을 부릅뜬 채 긴 숨을 토해 냈다. 순간 주변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심장이 멎는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에델레드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서고, 입에서는 유황불이 끓는 듯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천사!'
아이작은 에델레드의 몸을 장악한 천사가 '사자 기사'임을 알아보았다. 저 무시무시한 중압감과 힘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에델레드, 아니 그의 몸을 장악한 사자 기사는 좌중을 슥 둘러보았다.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말을 할 수도,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
사자 기사는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
"이게 엘릴의 뜻이다."
순간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귀족, 기사,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꿇지 않으면 다리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서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아이작과 에델레드의 몸을 장악한 사자 기사뿐이었다.
사자 기사는 불타는 눈으로 시선을 돌려 잠시 아이작을 응시하다가 사라졌다.
에델레드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부복한 사람들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사자 기사가 몸을 장악한 동안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듯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로잘린드가 앞으로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엘릴의 결정이 내려졌소. 이견이 있는 자가 있다면 결투장에 서시오."
물론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
"결투 재판에 신이 임해 바른 결정을 끌어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이런 무식한 방법일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우연이나 용기를 북돋는 방식으로 한쪽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닙니까?"
결정이 내려졌으니 이제 움직일 뿐이다. 귀족들은 여명군 파병이라는 거사가 결정된 뒤, 보낼 물자와 병사, 기사들 등 영지의 역량을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다.
아이작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투' 결과에 대해 로잘린드에게 투덜거렸다.
로잘린드는 씩 웃을 뿐이었다.
"신의 섭리는 신묘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냥 승부 조작 아닌가 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확실한 결과다.
"로잘린드 부인께서는 결투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아셨습니까?"
"설마. 하지만 어렸을 때 결투 재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아직 신탁이 끊어지기 전의 시절을 기억하시던 어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제 엘릴께서 침묵을 그만두시고 지상에 신경 쓰시기로 하셨다면, 목격자들의 재담이 아니라 직접 의지를 보이시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노인들의 지식과 경험은 신묘하다.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도 이 세계에 대해 얕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자신은 에델레드와 리안나가 싸울 때 '객관적'으로 둘의 역량을 비교해 승률을 가늠했다. 하지만 충실한 신도 입장에서는 엘릴의 의지만 확실하다면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델레드가 아니라 돌멩이를 갖다 놨어도 리안나가 졌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에델레드에게 권위를 더해 주기에는 이만한 이벤트도 없었다. 에델레드는 당분간 '사자 기사가 임한 왕'이라는 타이틀로 귀족들을 휘어잡을 것이다. 물론 덕분에 리안나는 배가 뚫렸던 상처가 또 터지고 손가락까지 네 개나 부러졌지만.
하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결과에 만족한 듯했다.
에델레드는 리안나에게 사과하면서 직접 상처를 돌봐주고 있었다.
리안나에게는 아직 에델레드가 동생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한 방에 날려 버리던 모습에서 뭔가 기사다운 매력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성배기사가 가져온 물건도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소. 그게 아니었다면 심정적으로 따르기 어려웠겠지."
로잘린드가 말한 '물건'은 과거 이사크레아 영지에 리치 알 두아자드가 불러낸 듀라한이 가지고 있던 검의 손잡이였다. 엘릴 출신의 명망 높은 기사였던 그는 시신이 도굴되어 듀라한이 되어 떠돌다가 아이작 손에 '성불' 당했다. 그가 남긴 손잡이에는 엘릴에서 꽤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반 여명군파, 그리고 고립주의파 귀족들은 자신들이 전쟁을 멀리하는 것과 별개로 전쟁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는 것과, 이미 수많은 조상들이 도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그들이 서둘러 영지로 돌아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많은 가문들이 화장을 하긴 하지만, 그때그때 유언에 따라 납골당이나 묘를 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마 이미 적지 않은 기사들의 시신이 도굴당했을 겁니다. 고작 시신 몇 구 훔치자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불사 교단의 해악이 여기까지 미칠 줄 누가 알았겠소.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확실하게 원정 분위기에 불이 붙겠지...."
엘릴의 '결정'이 내려졌으니 당연히 귀족들은 여명군에 참전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마지못해 따를지도 모르고, 적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이 가져온 도굴당한 부장품 덕분에 그들 역시 동감할 만한 확실한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 성배기사가 가장 고생했으니 이걸 넘겨드릴까 합니다."
로잘린드는 아이작에게 상자 하나를 꺼내 넘겼다. 상자를 열어 보자 새까만 장갑이 보였다.
"이건... 빌론이 끼고 있던 장갑 아닙니까?"
루미아드의 냉기는 물론이고 아이작의 검기까지도 막아 냈던 장갑이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빌론과 그의 기사들은 모조리 수거되어 불에 태워졌다고 했다. 불사교단의 언데드들을 죽이는 방법은 오직 불로 태우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영혼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번거로운 정화 의식으로 쫓아내기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전리품은 남은 것이다.
"그렇소. 듣자 하니 '죽은 자의 손'이라고 불린다더군. 유용한 성물인 것은 확실한데, 이교도의 성물임이 확실하니 아무도 안 가지려고 해서 내가 보관하고 있었소. 하지만 성배기사라면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작은 장갑을 꺼내 살펴보았다.
[죽은 자의 손(S)]
[죽은 자의 원혼이 생자를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 갈 때 쥐는 손아귀를 본떠 만든 장갑. 이미 죽은 것이기에 모든 것에 내성이 있으며, 영혼에 직접 손댈 수 있다.]
'나쁘지 않군.'
공격력이 강해지고 있는 데 반해 아이작의 내구력(?)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아이작이 '안 맞으면 된다'는 고인물 같은 마인드와 '살아만 있으면 복구 가능'이라는 안일함 사이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기조차도 막아 내는 방어구라면 최상급이었다. 불길한 기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주저 없이 장갑을 손에 끼웠다. 성기사 갑옷처럼 이것도 철컥거리며 내부가 아이작의 손에 딱 맞게 변화했다. 손보다 1.5배 정도 크긴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아귀힘이 강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왼손 장갑은 촉수가 어련히 알아서 뚫어주겠지. 아니면 헤사벨한테 줘도 되고....'
아이작은 뜻밖의 수확에 만족했다.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군요."
"...전부터 남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이교도의 성물이라도 쓰는 데 주저함이 없군요?"
"신의 뜻을 실행하는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이 잡으라 명령하신 쥐만 잘 잡으면 되지요."
아이작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로잘린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웃었다.
"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여명군 참전도 결정됐으니, 당분간 이쪽은 바쁠 것 같군요. 성배기사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황제 폐하께 돌아가 하달하신 임무를 성공했다고 보고드려야지요."
아이작이 받은 명령은 엘릴 왕국의 여명군 참전을 끌어내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해 엘릴의 대전사라는 지위까지 받아낼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엘릴 왕국이 준비하고 넘어오기까지 굳이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이제 다시 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이작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가기 전에 배를 좀 채우고 갈까 합니다."
***
아이작은 에델레드와 그의 기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엘리온 성채를 떠났다. 다시 보게 된다면 대륙에서, 여명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에델레드는 항구까지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아이작은 사양했다. 지금부터 에델레드가 해야 할 일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해서 엘릴의 진노를 살 필요도 없을뿐더러, 아이작은 그들을 떼어놓고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아이작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에이단과 소금 의회의 배까지 동원해 이동했다. 북해의 바람은 혹독하기 때문에 노련한 소금 의회 선원들조차 접근하기 힘들어했지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가까스로 해안가까지 배를 몰고 가던 에이단이 외쳤다.
높은 산 위에 반쯤 무너진 탑이 보였다.
아이작이 향한 곳은 엘릴 왕국의 북쪽 끝.
칼루리엔의 비밀 실험실이자 마법사의 탑이 있던 윈터콜이었다.
220화. 마법사의 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