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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화

숲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

화르르-.

어둑한 하늘을 밝히며, 숲 너머에 주황빛이 너울거렸다.

"루 솔라 맙소사…. 어쩐지 탄내가 난다 싶더니."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던 자경단원이 읊조렸다.

여기서 보일 정도라면, 저 너머는 불바다일 것이 틀림없었다.

"칼잡이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 단장?"

애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무에 기대선 희끗희끗한 수염의 자경 단장이 미간을 구겼다.

"칼 찬 주문쟁이인 모양이지. 내가 직접 봤는데, 못 믿는 거냐?"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눈빛.

애꾸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혹시나 해서지. 혹시나."

그와 달리 단장은 저 먼 제국군 출신이었다. 비록 탈영병이었지만, 칼솜씨만큼은 진짜였다.

"저, 단장. 그런 거면 말야."

그 옆에서 숲을 살피던 덩치 큰 대머리가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자경 단원이었다.

"계획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마법사는 좀 꺼림칙한데…."

"내 말이 그거야, 단장. 저긴 아무리 봐도 코볼트 산채가 있는 방향 같다구."

애꾸가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혼자 산채를 다 태워 버릴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냥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

단장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그가 욕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기가 났는지, 애꾸가 덧붙였다.

"부업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헤헤…. 가진 것도 별로 없어 보였다면서."

"…후우."

단장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 한심한 족속들을 데리고 자경단을 결성한 건, 코볼트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위험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코볼트. 그 작은 마물들은 웬만해선 숲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데다, 한두 마리만 칼로 쑤셔도 도망치기 바쁠 정도로 겁이 많았으니까.

그 대가로 술과 음식이 무한정 공짜였으니 할 만한 장사였다.

게다가 부업도 쏠쏠했다.

종종 떠돌이 용병들이 산채를 없애준답시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코볼트는 보금자리가 위험할 때만큼은 눈이 돌아 버렸으니까.

말 그대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진짜 마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장은 단원들과 함께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만신창이로 도망 나오는 용병들을 털어먹는 걸 부업으로 삼았다.

시체는 숲에 던져 두면 코볼트들이 해체하니 뒤처리도 편했다.

설사 허탕을 치더라도, 낮에 시체를 수색하러 다니면 그만이었다.

코볼트는 고기에만 관심이 있지, 소지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계획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저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단장의 한마디에 대머리와 애꾸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게 정말 코볼트 산채가 타는 거라면 부업이 대수냐? 내일부터 본업이 없어지게 생겼는데."

"...!"

"...!"

애꾸가 눈을 치켜떴다.

대머리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찬 단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 주문쟁이의 입을 막아야 하는 거다. 일단은 마을 놈들이 산채가 없어진 걸 몰라야지."

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킨 대머리가 물었다.

"계속 속일 순… 없지 않을까?"

"내일 산채를 소탕하러 출정하면 돼. 그리고 전리품만 챙겨서 돌아온다. 저 주문쟁이 덕분에 수월했다고 하면 누가 알겠어?"

"...!"

"...!"

두 부하의 눈이 다시 커졌다.

단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우린 계속 마을의 자경단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으로 임명될지도 모르지."

"역시 단장…."

애꾸가 감탄한 듯 읊조렸다.

함께 감탄한 것도 잠시.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그것도 적색 마법사를…."

대머리가 뒤늦게 또 중얼댔다.

"그러니까 지금인 거다, 이 겁만 많은 대머리야. 마법이 어디 무한정 쓸 수 있는 기적이냐?"

단장이 혀를 차며 말을 잘랐다.

"저 정도 불길이면 산채를 정리하느라 힘을 다 썼을 거다. 마력을 회복하지도 못했을 거고. 지금은 빌어먹을 마력의 황혼기니까. 마력 없는 마법사는 애보다 무력하지."

그가 엄지로 목을 쓱 그었다.

"칼로 대충 쑤시기만 하면 돼. 전쟁터에서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주문쟁이를 여럿 봤다고."

"만약 마력이 남아 있으면…?"

"적색 마법은 주문을 외우는 데 오래 걸려. 그러니까 눈치가 이상하면 바로 칼부터 던질 거다."

비로소 대머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단장."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다.

단장은 여차하면 두 부하를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가 마법사에게 칼침을 놓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검술을 더 믿었다.

"걱정 마라."

속내를 감춘 채, 단장은 대머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런 변방까지 대단한 마법사가 올 리가 없잖냐. 진짜배기들은 죄다 탑에 틀어박혔다던데. 그러니까 하던 대로만 하면…."

문득, 단장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어둠 속을 노려본 그가 몸을 낮췄다.

"쉿. 온다."

"...!"

대머리와 애꾸가 화들짝 놀라 길 좌우로 몸을 숙였다.

저벅- 저벅-.

절뚝대는 느린 발소리.

"더럽게 무겁네, 시발…."

구시렁대는 목소리까지 이어졌다.

피 냄새와 탄내, 땀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파고들었다.

단장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재와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낮에 입고 있던 후드는 물론, 검 역시 차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한쪽 다리도 절뚝였다.

대신 품에 뭔가를 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마에 뿔이 돋은 머리통이었다.

단장이 알던 것보다 몇 배는 큰 코볼트의 머리였다.

'저 주문쟁이 새끼가 정말 코볼트 산채를 작살 냈군. 미친….'

단장은 그것이 코볼트 족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했다.

'역시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는 놈이었어.'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마법사가 적당히 가까워질 때를 기다린 그가,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머리와 애꾸가 소리 없이 일어섰다.

둘 다 검을 뽑아 든 채였다.

어둠 속에서도 검광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젠 들켜도 상관없었다.

고작해야 여섯 일곱 걸음 거리.

도약 한 번이면 코앞까지 달려들어 칼을 쑤셔 넣을 수 있으리라.

성공을 확신한 단장이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멈추는 게 좋을 거야."

검 자루를 쥐며 그가 말했다.

마법사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어휴…."

그가 한숨을 내쉬는 찰나, 단장이 재빨리 덧붙였다.

"입도 벙긋하지 마. 그리고 그거."

그가 마법사가 안고 있는 족장의 머리통을 턱짓했다.

"그대로 바닥에 내려놔.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지."

"...."

잠깐의 적막.

이윽고 피식, 코웃음 친 마법사가 내뱉었다.

"원하는 대로."

그가 머리통을 쥔 손을 놓았다.

족장의 머리가 떨어지면서, 마법사의 손아귀가 드러났다.

새파란 마력이 일렁이는.

"...!"

어느새? 눈을 치켜뜬 단장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쏴!"

쉬쉭!

마법사의 등 뒤에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후방에 매복 중이던 또 다른 부하가 석궁을 쏜 것이다.

쉬학-!

마법사의 등 뒤에서 잿빛 아지랑이가 일렁인 건 거의 동시였다.

"아악!"

대머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에게 박혀야 할 볼트가 그의 허벅지에 꽂혀 있었다.

"으, 으아아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애꾸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바로 그 뒤를 따라 단장도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푸확-!

탄내가 뒤섞인 바람이 그의 몸을 돌연 밀쳐낸 건 그 직후였다.

볼트를 휘게 했던 그 바람 장막.

장막의 효과는 아주 짧았다.

짝!

하지만 마법사가 양손을 맞부딪힐 시간을 만들기엔 충분했다.

슈화악-

새파란 냉기가 마법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파문에 휩쓸린 것들이 삽시에 얼어붙었고.

"...!"

그걸 코앞에서 맞은 애꾸는 그대로 마법사를 지나쳐 고꾸라졌다.

꽈직-

바닥에 쓰러지는 그의 몸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뒤에 있었던 단장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 아으…."

전신에 지독한 동상을 입었지만, 살아는 있었으니까.

범위가 넓은 마법은 아니었다.

"...."

서릿발 사이에 쓰러진 그를 힐끗 내려다본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다시 붉은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주먹만 한 작은 불꽃 일곱 개가 그의 주위로 피어올랐다.

마법사는 그중 여섯 개를 차례로 뒤를 향해 발사했다.

펑, 펑, 펑, 펑, 펑, 펑-!

제대로 조준된 것도 아니었지만.

"아아악-!"

마구잡이로 폭발하면서, 매복하던 자경단원까지 휘말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사, 살려-!"

퍼엉! 화르르-!

마지막 불꽃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대머리를 머리부터 불태웠다.

덕분에 주위가 밝아졌다.

단장은 몸을 떨면서도 마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그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불과 얼음을, 동시에…?"

그가 제국군 출신이었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마법사를 흔하게 봤으니까.

그들은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을 전문적으로 익혔다.

지식에 대해 아주 예민했고, 다른 계통의 마법사와는 절대로 주문을 교류하지 않았다.

지식과 주문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제국에서는 당연한 통념이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바닥에 떨어진 단장의 검을 주워들면서 마법사가 읊조렸다.

"내가 망캐니까 그렇지."

짜증까지 섞인 어조.

"망캐…?"

단장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콰직.

마법사가 검으로 그의 목을 사정없이 내리쳤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마법사가 다시 한번 한숨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단장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

곧 그의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살짝 언 입구를 억지로 연 마법사가 짧게 혀를 찼다.

"검이 쓸만해서 기대했더니."

고작 동전 몇 개.

대장이 이 정도라면 부하들도 별 볼 일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대머리와 애꾸의 주머니까지 꼼꼼히 뒤졌다.

홀쭉한 주머니 몇 개를 더 챙긴 그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문득, 마법사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이젠 이래도 떨리지도 않네."

씁쓸하게 읊조린 그가 코볼트 족장의 머리를 다시 주워들었다.

"앗, 차거."

족장의 머리도 꽁꽁 얼어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마법사는 단장의 것이었던 검을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절뚝거리면서.

시체들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버려둔 채였다.

***

끼익- 쾅!

주점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웅성대던 주점 내부의 소음이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주정뱅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

그저 멍하니 눈을 끔뻑댈 뿐.

남자가 지옥에서 돌아온 듯한 행색이었을 뿐만 아니라, 품에 끔찍하게 생긴 커다란 머리통까지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얼굴에는 최후의 순간에 느꼈을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벅저벅.

시선을 무시한 채 장내로 들어선 남자가 카운터로 향했다.

쾅!

그리고는 마물의 머리통을 그 위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꾸벅꾸벅 졸던 근육질의 주점 주인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건…? 오. 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족장의 머리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산채를 없앴군. 기대도 안 했는데. 고맙소."

그의 인사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콰직!

카운터 위에 검이 박혔다.

"...?"

미간을 찌푸리던 주인의 시선이, 이윽고 검으로 향했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자경단을 만났군."

누구의 검인지를 알아본 것이다.

"그래."

남자가 비로소 짤막하게 답했다.

주인이 덧붙였다.

"다 죽었소?"

"그래."

대답한 남자가 주인을 응시했다.

장내의 침묵이 한결 무거워졌다.

자신보다 왜소한 남자의 시선임에도, 주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남자가 물었다.

주인은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그 안에 고인 살의 역시, 차분하지만 진득했다.

"…잘하셨소."

그 시선을 간신히 받아내며, 주인이 내뱉었다.

"그 개자식들. 하는 것도 없으면서 술과 고기만 축냈지. 안 그래?"

몇몇 술꾼들이 재빨리 화답했다.

"그래! 말이 자경단이지, 도적이나 다름없었지. 잘 죽었다, 건달 새끼들!"

"마을의 근심거리가 두 개나 동시에 없어졌군!"

동시에 간절한 어필이기도 했다.

자신들은 결백하다는.

코볼트 산채를 홀로 몰살시키고 자경단까지 다 죽인 남자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중에는 없었다.

"…그렇군."

이윽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다시 뽑으며 그가 말했다.

"의뢰의 대가는 잊지 않았겠지?"

주인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우리 주점에서의 숙식은 평생 무료요. 원한다면 사례비도 거둬서 드릴 수도 있고. 살기 팍팍해서 많진 않겠지만."

"그건 됐어. 편히 자고 싶거든."

검을 대충 허리춤에 회수한 남자가 덧붙였다.

"뜨거운 목욕물이나 준비해 줘. 지금 바로."

"알겠소. 얼마나 드릴까?"

주인이 조마조마한 표정의 여급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물었다.

몸을 돌리며 남자가 대꾸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남자가 절뚝대며 계단을 올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이 문득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물은 적이 없는데. 댁은 이름이 뭐요?"

대답은 이번에도 짧았다.

"이안."

***

"이 모가지는 벽에 걸어 놓자고! 으하하, 더럽게도 못생겼군."

"네놈이랑 닮았는데? 혹시 네 조상 중에 코볼트가 있는 거 아냐?"

"뭐라고, 이 새끼야?"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욕조에 앉은 이안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몸 곳곳을 박박 문지르는 중이었다.

벌써 세 번째 목욕물에, 웬만한 오물은 다 닦아냈건만.

찝찝함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다못해 오이 비누라도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중얼댄 이안이 문득 실소했다.

"소원이 없긴 개뿔, 시발…."

가장 큰 소원은 따로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이안은 욕조에 털썩 드러누웠다.

거미줄이 가득한 천장을 응시하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애초에, 불법 다운로드 같은 걸 받는 게 아니었어."

그가 이 위생 관념도 인권도 없는 세계에 떨어진 건, 1년쯤 전의 일이었다.

#002화

본래의 그는 특별할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나마 생긴 취미도 게임이었다.

그것도 RPG 위주의 싱글 게임.

온라인 게임은 그 세계에서조차 자본과 재능의 격차를 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도 자주 들락거리게 됐다.

소위 고인 물들의 영상이나 공략 글도 재미있었지만.

종종 불법 복제한 게임의 다운로드 링크도 올라왔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행동인 건 알았다.

하지만 박봉은 자기 합리화에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러니까 그가 '이젠 못 구하는 희귀 게임 DLC, 모드 풀 패키지. 선착순.'이란 게시물을 클릭한 건,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아퀼로니아.

배신과 타락. 반역과 음모로 점철된 세미 오픈 월드 다크 판타지.>

소개 글은 꽤 그의 흥미를 끌었다.

게임 스크린 샷도 그럴듯했고.

다만 이제는 제작사의 사정으로 판매하지 않는 게임이었다.

게시글이 삭제된 건, 그가 다운로드 링크를 누른 직후였다.

그는 자신이 선착순의 주인공이 된 것에 뿌듯해하며, 게임을 곧바로 실행시켰다.

주말을 불태워 엔딩을 보리라고 결심하면서.

아퀼로니아에서 유저가 선택 가능한 클래스는 5가지였다.

기사. 야만 전사. 마법사. 수색병. 수행 사제.

설치 중에 나온 팁에 따르면, 보스전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서버에 등록된 다른 유저 캐릭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버 접속은 되지 않았다.

불법 복제판이어서인지, 애초에 서버가 없어진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는 마법사를 선택했다.

원거리 딜러인 데다, 초보자가 선택하기에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다.

고유 특성은 육감과 집중력.

난이도는 자존심상 보통.

외형은 기본. 이름은 랜덤.

장차 그의 육신이 될 캐릭터 이안 호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공략부터 찾아봤어야 했는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이미 늦은 후회였다.

당시의 그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게임에 몰두했었으니까.

아퀼로니아는 전반적으로 꽤 훌륭한 게임이었다.

그래픽은 조금 낡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거슬리지 않았고.

무척 다양한 스킬 트리를 바탕으로 한 전투도 손맛이 살아 있었다.

세미 오픈 월드인 만큼 특정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데다, 서브 퀘스트나 컷 신을 건너뛸 수도 있어서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크 판타지다운 음울한 결과를 보여 주는 수많은 선택지가 그를 즐겁게 했다.

물론 게임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아이템은 클래스의 제약 대신 착용 능력치의 제약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옵션도 중구난방이었다.

스킬 트리의 방대함에 비해 스킬 포인트는 상당히 부족했다.

특히 보스전을 비롯한 네임드 몹과의 전투는 상당히 어려웠다.

그는 그때그때 필요한 능력치와 상황에 맞는 스킬을 적당히 선택해 가며 게임을 진행했다.

한계에 봉착한 건, 게임의 종반부에 접어든 4챕터에서였다.

3챕터부터 난이도가 체감될 정도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일반 몬스터들도 상대하기 버거워진 것이다.

잠깐의 레벨업 노가다로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는 결국 공략 글을 검색했다.

다행히도 오래전, 어떤 고인 물이 전문가 수준으로 정리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논문 수준의 긴 글이었기에, 그는 필요한 부분만 찾아가며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상황이 얼마나 총체적 난국인지를 차근차근 알게 되었다.

일단은 고유 특성부터가 그랬다.

육감과 집중력은 원거리 전투에는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시너지를 가진 특성이었다.

원소 친화력이나 마력 혈맥, 통찰력, 병렬 사고, 하다못해 행운이나 반사신경 따위가 더 도움이 됐다.

게다가 그의 캐릭터는 능력치도 동 레벨 마법사보다 떨어졌다.

특히 지능과 정신력이 그랬다.

그만큼 힘과 민첩성, 체력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홀로 적을 상대하기 위한 장비를 착용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컨트롤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여러 속성에 손대는 게 아니라 한 길만 파야 했고.

보조 역할인 비전(祕傳)과 공통 스킬은 최소한으로만 익혀야 했다.

스킬 포인트는 그만큼 귀중했다.

워낙 마력과 돈이 부족한 데다, 종종 극단적인 저항력을 가진 보스들이 튀어나왔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건 아이템 파밍과 적의 저항력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정석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퀘스트와 선택지였다.

추가 스탯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주는 필수 서브 퀘스트를, 그는 너무 많이 놓치거나 건너뛰었다.

게다가 일부러 최악의 선택지들을 고른 탓에, 그에게 도움을 줘야 할 주요 캐릭터들도 너무 많이 죽거나 타락해 버렸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의 캐릭터인 이안 호프는 망캐였다.

그것도 총체적 망캐.

심지어 어느 것 하나 돌이킬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말이 끝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캐릭터를 다시 키우자.

이번엔 공략을 참고해서 제대로.

더 쉬운 직업을 선택해서.

그러나 캐릭터 슬롯은 하나뿐이었고, 추가 개방에는 유료 결제가 필요했다.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는 결국 캐릭터 삭제를 선택했다.

에러 창이 뜬 건 그 직후였다.

<삭제가 거부되었습니다.>

불가능도 아니고, 거부라고?

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다른 팝업 창이 연달아 이어졌다.

<◆◇◐◑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들이 세계의 결말을 원합니다.>

<◆◇◐◑들이….>

그 후로 그가 기억하는 건, 눈부시게 점멸하는 모니터뿐이었다.

그가 살던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낯선 늪지대 한복판에 누워 있었으니까.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보았던 튜토리얼 퀘스트 창과 함께.

"...!"

인기척에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반응했다.

욕조 옆에 기대 놓은 검을 집어 들어 침입자에게 겨눈 것이다.

"꺄악…!"

억눌린 비명이 이어졌다.

손에 물 양동이를 든 여급이었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이 그녀의 다리에 철렁대며 튀었다.

"무, 물. 갈아 드리려고…."

목에 드리운 칼날에,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안은 여급의 겁에 질린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정말 사람이 맞을까.

단지 아주 정교한 그래픽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이 세계는 본래 게임이었으니까.

"…그렇군. 오해했다."

이안은 검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비로소 물통을 내려놓은 여급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은 이번에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설사 저게 가짜일지라도,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순 없으리라고.

애초부터 이렇게 진짜 같은 가짜라면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욕조 물, 빼 드릴게요."

다시 일어선 여급이 욕조 쪽으로 몸을 숙였다.

퐁, 욕조 발치의 마개가 열렸다.

그녀의 벌겋게 변한 다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다리에 튄 뜨거운 물 탓이리라.

이안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은 미안했다. 본능적이었어. 자주 습격당했거든."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은 여급이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험한 일을 많이 겪으셨나 봐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눈을 떴던 늪지대가 절로 떠올랐다.

병자. 난민. 도망친 죄인과 강도, 빌어먹을 마물까지 튀어나오던 광활한 늪지대.

한때 자신이 10분 만에 클리어했던 그 튜토리얼 지역에서, 그는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임은 현실이 되었고.

그가 클리어한 시나리오들은 초기화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가 게임 캐릭터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물 한 통 더 받아 올게요. …이번엔 칼 겨누지 마세요."

덧붙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난 과거를 헤집는 중이었다.

바퀴벌레도 무서워하던 일반인을, 살인조차 망설이지 않는 암흑시대의 마법사로 바꿔놓은 기억들.

만약 그가 캐릭터의 능력치와 스킬을 그대로 가지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이안은 문득 의문을 곱씹었다.

왜 레벨과 스킬만 그대로였을까.

시간대, 퀘스트, 아이템까지.

모든 게 초기화됐는데.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가 맥없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한 누군가의 안배라는 것이었다.

그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들의, 뭐같이 고마운 안배.

'그냥 포인트로 줬으면 더 고마울 뻔했지만 말이지.'

문제는, 그렇다 해서 핵심이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안 호프가 망캐라는 핵심.

지금은 촌구석 놈들과의 격차가 워낙 커서, 별다른 장비 없이도 죄다 죽이고 다니고 있지만.

결국엔 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할 상태가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 촌구석에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까.

일어나게 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리라.

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 대륙을 떠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흐름이었다.

만약 손을 놓고 있으면, 그 흐름에 떠밀려 반드시 죽게 되겠지.

심지어 이 세계는 게임일 때보다 넓어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적들도 더 많고, 더 강해졌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마을과 사람, 괴물들도 존재했다.

그러니 한계가 오는 시점 역시 더 빨라질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확신하고 있었다.

4챕터가 아니라 3챕터. 빠르면 2챕터 후반부쯤이 한계이리라고.

'이건 뭐 시한부 인생도 아니고.'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그의 레벨은 지난 1년간 단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

오른 경험치는 고작 몇 퍼센트.

그나마도 퀘스트를 완료하고 보상으로 얻은 경험치였다.

아마 상대한 적들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일 터였다.

코볼트나, 아까 그 자경단처럼.

물론 그렇다 해서, 상황이 마냥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토리가 초기화됐으니까.'

추가 능력치와 스킬 포인트를 주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던 선택지도, 바꿔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이미 얻었던 포인트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1챕터 초반부인 지금까지 얻은 게 총 3포인트…. 나쁘지 않아.'

물론 공략에서 봤던 최상의 마법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할 터다.

하지만 그럭저럭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드는 건, 충분히 희망이 있었다.

제일 좋은 건 지금의 격차를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거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이안은 물이 다 빠진 욕조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부어오른 발목을.

'…마음대로만 될 리가 없지.'

코볼트 족장이 내던진 도끼가 문제였다.

휘몰아치는 방벽 스킬 덕에 도끼는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놀라면서 발을 접질렸다.

원래의 코볼트 족장에게는 없었던 패턴이었기 때문이었다.

"없었던 패턴은 무슨…."

이안은 비웃듯 읊조렸다.

그 많은 일을 겪어 놓고도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다니.

고작 발목을 접지른 것으로 이런 큰 교훈을 얻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높은 체력 수치 덕분에, 이 정도는 하룻밤이면 회복될 테니까.

끼이-.

그때 문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칼 안 들었다."

이안이 말하자, 그제야 여급이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펄펄 끓는 물이 든 양동이를 손에 든 채였다.

이것들은 날 삶아 버릴 셈인가.

"늦어서 죄송해요. 용사님."

여급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용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마을을 구해 주셨잖아요."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마을은 결국엔 불탈 운명이다.

"물이나 넣어. 헛소리 말고."

이안은 혀를 차며 턱짓했다.

여급이 먼저 가져다 놓은 양동이를 들었다.

"…너무 뜨거우면 말씀하세요."

그녀가 천천히 물을 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그러면서도 그를 슬쩍슬쩍 힐끗거리면서.

자세히 보니 볼이 설핏 붉었다.

아, 내 벗은 몸 때문이군.

이안은 그제야 자각했다.

어느새 이 암흑시대에 너무 적응해 버린 모양이었다.

"허튼 상상 하지 마라."

"네, 네? 제가 뭘요?"

여급이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말 그대로야. 허튼 상상 말라고."

이 세계 기준으로야 성인 취급이겠지만, 그의 눈에 이 주근깨 많은 여급은 너무 어렸다.

열다섯, 많아야 여섯쯤 되었을까?

이런 여자애에게 부성애 이상의 어떤 감정을 가지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였다.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거짓말도 못 하는군.

하긴. 술 냄새 풍기는 이빨 빠진 놈들만 봤을 테니, 이런 몸은 신기하겠지.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힘과 체력 능력치 덕분에, 그는 마법사임에도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혀 있었다.

현실에서도 없었던 식스팩이 여기선 초콜릿처럼 선명했다.

지능과 정신력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다각적으로 사고하게 됐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멘탈이 흔들리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망캐 수준의 능력치 분배인데도 이 정도인데.

능력치를 제대로 찍었다면 득도한 선지자 수준이었으리라.

"그만. 물 넘치겠다."

이안이 마침내 손을 들었다.

가만히 두면 물을 한 양동이 더 부을 기세이던 여급이 아쉬운 듯 일어섰다.

"물, 더 끓일까요?"

그녀가 슬며시 물었다.

"물은 이제 됐어. 식사나 준비해. 한 시간 내로 나갈 테니까."

"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서는 무슨.

"없어. 나가."

단호한 축객령에 여급이 입술을 비죽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묘하게 도전적인 눈빛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은 채였다.

"별…."

헛웃음을 짓는 이안의 귓가로, 다시 왁자지껄한 주정뱅이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무렴, 차라리 이 소음보단 여급에게 아무 말이나 재잘대 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았을지도.

이안은 욕조에 턱 끝까지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3레벨의 명상을 활성화하면서.

이것도 본래는, 딱 1레벨까지만 올려야 하는 비전 스킬이었다.

***

다음 날.

이안은 주점 주인과 마을 청년 몇을 이끌고 코볼트 산채를 다시 찾았다.

수레도 한 대 동행한 채였다.

"개판이구만…. 불붙은 기름이라도 뿌리고 다니셨소?"

산채는 어젯밤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숯덩이가 된 시체들과 잿더미.

타다 만 목책과 움막의 잔해들.

"이게 도대체 몇 마리야? 나라라도 만들 생각이었나?"

"그래도 영주님은 관심도 없겠지. 전쟁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영주나 자경단이나. 칵, 퉤. 다시 생각해도 시원하네. 잘 뒈졌다, 날강도 새끼들."

"시체에 침만 뱉지 말고 자근자근 밟아 주기도 할 걸 그랬어."

떠들어 대던 마을 청년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안이 그들을 돌아본 까닭이다.

그가 만들어 낸 광경을 직접 봐서인지, 청년들은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말했듯이 너희가 할 건 간단해."

이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구석구석 뒤져서, 쓸 만한 건 모조리 챙겨라."

#003화

그가 이들을 데려온 것은 산채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전리품 수색은 게임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마물도 인간도 더는 되살아나거나 재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고.

그건 전리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혼자서 이 넓은 산채를 뒤지는 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물론 이 촌놈들을 믿지는 않았다.

"너희 마을에 필요한 물품이나,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잔돈까지 챙기지 말라고 하지는 않겠다."

이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청년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기억하듯이.

"하지만 귀해 보이는 물건은 빠뜨리지 말고 내게 가져와라. 귀한 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는 물건이라면 특히 더."

이안이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자경 단장의 검을 슬쩍 어루만졌다.

"참고로 난 호의를 배신으로 갚는 걸 가장 경멸해. 같은 공기를 마시기조차 싫을 만큼."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아예 빈말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침을 꼴깍대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알아들었나?"

"예, 옛!"

"알겠습니다!"

청년들이 일제히 외쳤다.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해산."

청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면서.

"보물에만 정신 팔리지 말고, 칼들 잘 쥐고 다녀라. 아직 살아 있는 놈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잔소리를 덧붙이며, 주점 주인이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주인장."

그를 이안이 불러 세웠다.

"말씀하시오."

"댁은 나랑 움직이지."

"뭐, 그럽시다."

주점 주인이 선선히 다가왔다.

근육 대신 지방이 많이 붙긴 했지만, 다시 봐도 우람한 몸이었다.

기사나 야만 전사를 선택했다면 저런 몸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그럼 얕보고 습격하는 놈들이 훨씬 적었을지도.'

"힘쓸 일이 필요하신 모양이군."

주인장이 말했다.

이안은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귀중품 찾는 솜씨도 저 촌놈들보단 좀 더 있을 것 같고."

"무슨 의미요? 그건."

"군 출신 아닌가? 약탈에는 도가 텄을 것 같은데."

주인장이 피식댔다.

"정확히는 벨 론데의 정규군 출신이지. 눈썰미가 좋으시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주점은 게임일 때부터 퀘스트를 위해 자주 방문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주점의 주인은 건달 아니면 군인 출신이었다.

애초에 그런 자들이 아니면 주점을 운영할 엄두도 낼 수 없으리라.

이 주인장은 말년 병장 같은 태도였으니, 후자라고 생각했을 뿐.

간단한 추리였다.

"다 왔군."

이안은 산채의 심부로 들어섰다.

산채 가장 끝, 그가 코볼트 족장의 목을 잘라 버린 공터였다.

"저게 그 족장 놈이오?"

주점 주인이 한복판을 가리켰다.

커다란 전투 도끼.

그리고 머리를 잃은 검회색 몸체.

그 앞에 버려진 이가 다 나간 검은 이안이 쓰던 것이었다.

"그래. 이놈부터 뒤질 거다."

그 앞에 선 이안이 내뱉었다.

주점 주인이 탄성을 흘렸다.

"코볼트 족장을 본 게 처음은 아닌데, 이렇게 큰 건 처음이군. 어쩐지 머리통도 크더라니."

코볼트 족장의 덩치는 주점 주인에 못지않게 거대했다.

보통 코볼트는 어린아이 정도의 체구였으니 비정상적인 발육이었다.

심지어 갑옷을 입었고 장신구 비슷한 것까지 줄줄이 걸고 있었다.

갑옷이라 봐야 가죽을 덧댄 것에, 장신구는 짐승의 송곳니나 발톱 따위를 엮은 게 대부분이었지만.

"얼굴을 봐서 알겠지만, 젊은 놈이었다. 앞으로 더 커졌겠지."

말하며 이안이 몸을 숙였다.

"전혀 모르겠던데. 무튼, 이보다 더 커졌다면 끔찍해질 뻔했소."

"그래. 마을로 쳐들어왔겠지. 당신들은 거의 다 죽었을 테고."

"뭐, 분명 그랬겠지만. 본 것처럼 단언하시는군."

"자경단이 너무 형편없었거든."

사실은 게임에서 본 광경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되면서 달라진 건 시간의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1년이 넘어서야 이곳에 왔지만, 게임에서 들렀을 때보다는 아직도 한참 이른 시점이었다.

게임에서 봤던 코볼트 산채는 부족 단위가 되어 숲을 지배하고, 마을을 위협하고 있었으니까.

이 코볼트 족장도 그때는 다른 족장을 거느린 대족장이었다.

그리되기 전에 소탕한 만큼 꽤 수월했지만, 보상 경험치는 훨씬 적었다.

'전리품까지 구려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안은 족장의 장신구들을 하나씩 뜯어내 살폈다.

"…있군."

이내 그의 눈이 빛났다.

다행히 전리품은 그대로였다.

"뭐가 있단 말이오?"

멀거니 쪼그려 앉아 있던 주점 주인이 물었다.

이안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귀중품."

"나한테는 빨간 눈깔 모양의 기분 나쁜 돌로밖엔 안 보이는데."

"정확히 봤어."

이안은 혈안석 목걸이를 찼다.

힘과 체력을 1씩, 거기에 정신력을 3이나 올려주는 희귀 장신구.

족장이 다른 코볼트보다 훨씬 냉정했던 건 반 정도는 이 목걸이 덕분인 셈이었다.

꺼림칙한 눈빛으로 목걸이를 바라보던 주점 주인이 말했다.

"안목이 남다르신 모양이군. 내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소만."

"이제부터 있다. 이놈의 갑옷을 벗겨."

"…결국은 힘쓰는 거군. 알겠소."

주점이 족장 사체를 일으켰다.

그는 더럽게 무겁네, 하고 읊조리면서도 익숙하게 누더기 같은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안은 갑옷에 손을 얹었다.

정보를 확인 가능한 장비이긴 했지만, 성능이 뛰어나진 않았다.

수선하기도 어려워 보였고.

"갑옷은 댁이 가져. 딱 맞겠군."

"그래도 되겠소? 주점 장식품이 하나 늘었군. 고맙소."

마구잡이로 엉킨 매듭을 푸는 주인장의 손길에 흥이 실렸다.

이안이 덧붙였다.

"그리고 저 도끼도."

"…괜찮겠소? 내 눈엔 이것들이 그 목걸이보다 귀해 보이는데."

전혀 아니었다. 저 전투 도끼는 겉만 멀쩡해 보일 뿐, 몇 번만 부딪혀도 부서질 상태였다.

"착각하지 마. 공짜는 아니니까."

속내를 감춘 채, 이안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주점 주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마을에 머물 동안, 댁이 일거리를 내게 가져다줘야겠어."

"코볼트 소탕 같은 의뢰 말이오?"

"그래. 크든 작든 상관없어. 보상만 확실한 거면."

이게 주점 주인을 따로 부른 진짜 목적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공략 글에서 필수 서브 퀘스트 목록을 보긴 했었지만, 전체를 다 본 건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졌어도, 보지 못한 것까지 알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모든 퀘스트를 찾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일거리가 알아서 찾아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중에 퀘스트도 섞여 있겠지.

최소한 단서라도.

누더기 갑옷과 부서지기 직전의 도끼 하나가 그 대가라면,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마을 청년들이 챙겨갈 전리품도 같은 맥락이었다.

"의외로군."

잠시 이안을 바라보던 주점 주인이 내뱉었다.

조금은 감탄한 어조.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왜, 계속 음식만 축낼 줄 알았나? 그 자경단처럼."

"그런다 해도 막진 못했겠지만. 그보단 금방 떠날 줄 알았소. 당신 같은 인물이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만 있을 리가 없으니까."

"떠날 거야. 볼일이 끝나면."

망캐가 아니었다면 모를까.

이안은 최대한 많은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나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게임에서 경험한 스토리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알겠소. 기꺼이. 고양이를 찾아 달라거나 하는 시시한 것만 빼고는 다 대령해 드리지."

"그런 것도 괜찮아. 죽여서 들고 가도 된다면."

주인장이 웃으며 갑옷을 벗겼다.

갑옷을 정리하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이제 제 물건이다, 이거지.

이안은 속으로 피식대며 족장의 맨몸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이내 족장의 가슴 한복판에 고정됐다.

"역시, 있군."

족장의 가슴 한복판에는 꽤 커다란 검은 구슬이 박혀 있었다.

구슬 주위로 돋은 굵직한 핏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게 족장에게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리품이었다.

"이건 또 뭐요? 저주받은 구슬?"

주점 주인이 다시 한번 읊조렸다.

이안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맙소사. 루 솔라여…."

주인장이 눈을 감으며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단검."

이안이 손을 뻗었다.

주인장은 똥 씹은 표정으로 자신의 단검을 뽑아 건넸다.

이안은 단검을 망설임 없이 족장의 가슴팍에 찔러 넣고 구슬을 파냈다.

피를 머금고도 윤이 반질반질 도는 묵직한 검은 구슬.

그 안에서 불길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시선을 돌리며 주인장이 물었다.

"무슨 저주가 서린 거요?"

"오염된 마력이 들어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족장 놈이 흑마법이라도 부렸다는 말이오?"

"이걸 박아 넣은 놈이 썼겠지. 이건 놈의 단말이기도 하거든. 때가 되면 힘을 준 존재에게 복종하게 됐을 거다."

족장이 죽은 지금은 오염된 마력이 응집된 정수일 뿐이겠지만.

주인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말은 그럼, 이것들이 창궐하길 바란 자가 있다는 거요?"

"그래."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딴 짓을.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흑마법사라도 되는 건가…."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끝난 일이니 신경 꺼."

게다가 그 흑마법사 놈은 어차피 언젠가 내 손에 죽을 운명이니까.

이안은 속으로 읊조리며 정수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

오염된 상급 마력의 정수.

이건 만약 그가 흑마법사였다면 당장 쓸 수 있었을 귀물이었다.

아퀼로니아의 모든 캐릭터는 '타락'을 선택할 수 있었다.

첫 번째 DLC, 일종의 확장팩에 추가된 콘텐츠였다.

기사는 암흑 기사로. 야만 전사는 광전사로. 마법사는 흑마법사로. 수색병은 암살자로. 수행 사제는 고대 신관으로.

공략본에 따르면 스킬은 물론 선택지와 퀘스트도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타락은 지금도 가능했다.

이안이 선택하지 않은 건, 타락을 선택한 순간 레벨이 초기화되기 때문이었다.

그 후의 스킬 트리를 모르는 것도 한몫했고.

주요 캐릭터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없었으니, 이유는 차고 넘쳤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 정수를 정화하면 그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사용하든, 이걸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든. 그의 목숨을 최소 한 번 이상은 구하리라.

'아겔 란에 이걸 정화할 능력이 있는 사제가 누가 있더라.'

이안은 정수를 품에 넣었다.

정확히는 넣는 척하며 아공간으로 이동시켰다.

게임에서 기본 12칸으로 제공되던 소지품 창은, 이제는 작은 아공간으로 바뀌었다.

작은 건 똑같아서 병장기 같은 건 몇 개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도둑맞을 일 따윈 절대 없는 개인 금고였다.

"이놈에게 볼일은 끝난 것 같군."

이안은 단검을 건네며 일어섰다.

찜찜한 표정으로 단검을 받아 든 주점 주인이 물었다.

"그럼 다음 볼일은 어디요?"

이안이 공터 뒤편, 그나마 제대로 형태를 갖춘 오두막을 가리켰다.

"이젠 이놈의 집을 털어야지."

주점 주인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그가 냉큼 앞장섰다.

"어서 갑시다. 코볼트 족장은 뭘 쟁여놓고 사는지 궁금하군."

그보단 이번엔 무슨 콩고물이 떨어질지가 궁금한 거겠지.

이안은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

마을 청년들이 모은 전리품은 수레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고철. 통나무. 못 쓰게 된 병장기부터,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코볼트 사체까지.

대부분은 이안 혼자 왔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잡동사니였다.

이안은 그중에서 가장 알짜배기만 골라 가졌다.

몇 개의 마석과 은화.

다 합해도 한 줌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진 않군."

하나하나가 잡동사니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시간도 노력도 들이지 않은 소득으로는 과할 정도로.

족장의 오두막에서 찾아낸 마석도 있었으니, 종합해 보면 성공적인 수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확인할 건 해야겠지.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일렬로 선 마을 청년들.

하나같이 주머니가 불룩했다.

'열심히도 챙겼군.'

이안은 속으로 읊조리며 그들을 차근차근 훑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청년들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이안의 눈이 섬뜩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전, 마력 탐지 스킬이었다.

단 1레벨에 불과했지만, 마력이 담긴 무언가를 식별하는 역할로는 충분했다.

"...."

지금처럼.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볼록한 주머니 속에서 일렁이는 녹색 빛이 그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저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력이 깃든 물건인 건 확실했다.

그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멍청해 보이는 얼굴에 유독 파리한 안색을 가진 촌놈이었다.

분노보다는 씁쓸함이 앞섰다.

그렇게 경고를 해 줬건만.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예, 예…?"

청년이 입술을 떨며 되물었다.

잘못한 걸 알긴 하는 모양이지.

감상은 짧았다.

이안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결국은 피를 봐야 교훈을 얻는다는 게, 이 암흑시대 머저리들 대부분이 가진 공통점이었으니까.

"주머니에 든 걸 다 꺼내라."

이안을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에 그제야 긴장이 서렸다.

모두의 시선이 입술을 덜덜 떨고 있는 청년에게로 쏠렸다.

청년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그게, 대체 무슨…."

이안은 다시 말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곧바로 목을 날리려던 그 순간.

"...?"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청년의 주머니에서 마력이 더 짙은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면서 녀석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마력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안은 다시 눈동자를 움직여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리한 안색. 떨리는 입술. 초점을 잃은 눈동자.

"…처음부터 대화가 통할 상태가 아니었군."

"그, 그게. 그게 무슨. 그, 그극-."

청년의 목소리가 쇠를 긁듯 기괴해졌다.

그의 치켜뜬 두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물씬 피어올랐다.

"히, 히익!"

"이런 미친…! 존슨?!"

주위의 청년들이 화들짝 물러서며 경악성을 토해냈다.

까득, 까드득-.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청년의 팔과 어깨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변이 과정처럼 보였다.

'더럽게 징그럽네.'

물론 그 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쉬학-!

잠시 멈췄던 이안의 검이 다시 번뜩이며 호선을 그렸다.

검이 청년의 목을 자르려는 순간.

카득.

역방향으로 꺾인 청년의 손이 그대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손을 반 이상 파고들었지만, 청년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히죽 웃기까지 했다.

보랏빛 마력이 출렁이는 눈동자가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질이 급하구나. 목부터 날리려 하다니."

쇳소리 섞인 이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기껏해야 악령에 씌거나 저주에 잡아먹힌 건 줄 알았더니.

"불청객이 있었군."

#004화

"불청객이라고? 내가?"

남자가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고막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

"어이가 없구나. 내가 직접 씨를 뿌린 밭을 다 망쳐 놓은 주제에."

아, 그러셔?

그제야 이안의 표정이 풀어졌다.

"거참 아쉬우시겠어. 흑마법사."

"놀라지도 않는구나. 아, 그래. 내 씨앗을 숨긴 게 네놈이군!"

오염된 정수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흑마법사의 단말이기도 했으니까.

이안이 아공간에 넣으면서 연결이 끊어졌을 테니 부랴부랴 손을 쓴 모양이었다.

투자한 마력이 아깝긴 하겠지.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래. 내가 잘 써 주지."

"주둥이가 건방진 놈이군."

뿌득, 뿌드득-!

남자의 몸이 다시 변이를 시작했다. 꺾이고 부풀어 오르는 몸.

쩌저적!

손아귀에 쥐고 있던 이안의 검이 반으로 부러졌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겨우 얻은 쓸 만한 칼이었는데.

"네놈이 누굴 상대로 혓바닥을 놀린 건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나는-."

퍼엉!

말하던 얼굴이 폭발에 휩싸였다.

이안이 내던진 화염구였다.

한 발이 끝이 아니었다.

퍼엉! 퍼엉! 퍼엉!

이안은 주먹만 한 화염구를 연달아 내던졌다.

불길 세례는 놈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털썩. 화르르-!

채 변이를 끝마치지도 못하고, 결국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숯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도, 움푹 파인 눈구멍 속에는 보랏빛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증오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네놈! 적색 나부랭이였구나! 차라리 잘 됐군! 내 반드시 네놈을 다시 찾을 것이니. 잊지 마라! 네 하찮은 영혼을 영원히 고통받게 할 이 몸은 바로-!"

콰직!

반 토막 난 검이 숯덩어리의 목을 내리찍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가 허망하게 턱을 달각거렸다.

"사령… 술사…."

잦아드는 목소리와 함께,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주절주절 말이 많아."

피차 죽고 죽일 사이에 통성명은.

혀를 찬 이안은 가늘게 경련하고 있는 몸통으로 다가갔다.

몸을 숙인 그가 검을 들었다.

콰직! 콰직!

검이 까맣게 탄 살을 마구 헤집었다.

이윽고 이안이 벌어진 살점 사이로 손을 욱여넣었다.

그의 손아귀에 검은 구슬이 딸려 나왔다.

족장의 것보다 작은 정수.

사이한 보랏빛 마력이 넘실댔다.

"하나가 아니었다니. …하긴."

생각해 보면 게임에선 대족장이 거느리던 족장들이 있었다.

그게 끝내 이름을 밝히지 못한 흑마법사가 준비한 안배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저, 저건?!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온 건 그 직후였다.

멀찌감치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마을 청년들 쪽이었다.

"히이익!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굴러나온 촌놈 하나가 허둥지둥 바지를 벗었다.

"...?"

갑자기 일어난 촌극에 이안마저 어리둥절하는 사이.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리!"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녀석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걸 꺼내서 달랑거린 것만으로도 이미 죽을죄다. 알아듣게 말해."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남자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벗어 놓은 바지를 가리켰다.

"제, 제 주머니에. 그것과 똑같은 구슬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이안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벗어 놓은 바지로 다가간 그는, 칼로 바지 주머니를 대충 헤집었다.

온갖 잡동사니 사이로 정수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루 솔라께 매, 맹세코 소인은 몰랐습니다. 그저 특이한 구슬인 줄 알고, 여동생, 여동생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

"닥쳐.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이안이 정수를 주우며 내뱉자 남자의 입이 단숨에 닫혔다.

이안은 정수를 손가락 사이에 굴리며 청년들을 돌아보았다.

"또 자수할 놈 없나?"

"…어, 없습니다."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리."

청년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머저리들이라도,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요. 만약 그렇다면 그땐 내가 대신 골통을 깨 드리겠소."

넌지시 덧붙이며 주점 주인장이 걸어 나왔다.

족장의 갑옷을 대충 걸치고, 어깨에는 도끼를 짊어진 채였다.

"그래. 꼭 그러게 만들어 주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고개를 끄덕인 주인장이 엎드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만 질질 짜고 더러운 엉덩이 치워라. 가서 네놈이 직접 존슨의 시체나 수습해."

놈의 맨 엉덩이를 뻥 차버린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적색 마법사셨소? 칼을 차고 다녀서 당연히 검사라고 생각했소만."

"그래서 달라질 게 있나?"

이안이 정수를 갈무리하며 물었다.

암흑시대의 인간들은 마법사를 두려워하면서도 얕잡아보는 모순적인 경향이 있었다.

차라리 검사나 몰락 기사로 여겨지는 게 편했다.

"없소. 댁이 가지고 다니는 게 날이 바짝 선 강철 마법 봉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그 생각 변하지 마. 그리고 돌아가면 댁이 저 머저리들과 합의해."

몸을 돌리며, 이안이 부러진 칼을 흔들었다.

"저놈들이 약속을 어긴 덕분에 내 강철 마법 봉이 또 부러졌으니까. 새로 한 자루 만들어 내야지."

주인장이 졌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가 이안의 등에 대고 덧붙였다.

"그런데 괜찮겠소? 흑마법사의 원한을 단단히 산 것 같은데."

"신경 꺼."

이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댁은 나랑 한 약속만 지키면 돼."

***

주점 주인은 약속을 잘 지켰다.

마을로 돌아온 이튿날부터 의뢰를 알선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검과 갑옷을 만들어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은 평범했지만, 갑옷은 코볼트 족장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주점 주인의 아이디어였다.

지금처럼 맨몸인 것보단 낫겠지 싶어 받았는데, 알고 보니 정보를 확인 가능한 장비였다.

게임에도 존재하던 아이템이란 뜻이었다.

고급 등급에 불과하긴 했지만, 현시점에선 충분히 쓸 만했다.

"그럴듯하군. 어딜 봐도 마법사 같진 않소."

주점 주인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댁은 입을 조심할 필요가 있어."

"걱정 마시오. 당신이 마법사인 걸 알리기 싫어하는 것 같아, 머저리 놈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그깟 약속을 지킬 리가."

"지킬 거요. 녀석들은 댁한테 단단히 겁을 먹었거든. 아마 지금도 댁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벌벌 떨고 있을걸."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안을 마법사라 부르는 의뢰인은 아무도 없었다.

용사님이나 기사님, 마을의 구원자 같은 낯뜨거운 호칭으로 부르긴 했지만.

어쨌든, 주점 주인장을 영업 사원으로 둔 아이디어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묵는 주점에는 의뢰인의 발길이 하루가 멀다고 이어졌다.

작게는 밭을 매일 밤 헤집어 놓는 멧돼지를 죽여 달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마을 우물에서 기어 나오는 물귀신을 처리해 달라는 것까지.

코딱지만 한 마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뢰가 이어졌다.

물론 대부분은 퀘스트 창이 뜨지 않는 시시껄렁한 의뢰였다.

하지만 이안은 딱히 거절하지 않고 의뢰를 해결해 나갔다.

한 번도 실패하는 일 없이.

"후우."

세안을 끝낸 이안은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널찍한 방의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혹시 간밤에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적인 눈짓이었다.

물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흐음."

문득, 그는 이제 방의 풍경이 상당히 눈에 익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생활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으니까.

그사이, 주점에서 가장 좋은 방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볕이 잘 들고, 가장 큰 데다 깨끗한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그래 봐야 그의 눈에는 싸구려 여인숙보다도 못했지만.

"…나중엔 이때가 좋았다 싶겠지."

이안은 낮게 읊조리며 방을 나섰다.

"일어나셨어요, 해결사님?"

그가 계단을 내려가자, 홀을 청소하던 여급이 반색했다.

해결사는 이안에게 붙은 새 별칭 중 그나마 덜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래. 아침 식사 준비해 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해결사님이 좋아하시는 고기와 달걀로 준비할게요."

여급이 걸레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마을에서 이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너무 격 없이 굴어 귀찮을 지경이었다.

이안은 자리에 앉으며 덧붙였다.

"그러다 주인장에게 또 한 소리 듣는다."

"뭐 어때요? 해결사님 덕분에 짭짤하게 챙기는데. 이해해야지."

여급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안이 이 주점에서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주인장은 의뢰를 알선하는 대신, 의뢰인에게 소개비를 받았다.

양심껏 잔돈만 챙기는 정도여서 이안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물어오기도 했고.

"그럼 맥주도 한 잔 가져와라."

이안은 선선히 덧붙였다.

네, 하고 대답한 여급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이안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읊조렸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의뢰가 급격히 줄고 있다.

마을을 떠날 순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그럼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노숙과 이동을 반복하게 되리라.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화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건, 천천히 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생각해 보면 최근 일주일가량은 뭔가를 죽인 적도 없었다.

피를 본 일이라고는 의뢰비를 떼먹으려는 자의 손목을 자른 것과 여급을 희롱하던 자의 손가락을 하나 잘라낸 정도가 전부였다.

"확인만 다 끝나면…."

그의 앞에 턱 하니 접시가 놓였다.

달걀과 으깬 감자, 구운 고기.

아침으론 좀 과했지만, 이안은 냉큼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어쨌거나 이 세계에서는 드물게도 음식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맥주가 가득 담긴 술잔을 놓으며 여급이 건너편에 앉았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생각."

이안의 대꾸에 여급이 입술을 비죽였다.

목을 축인 이안이 덧붙였다.

"주인장은 언제 나갔지?"

"한 시간 전쯤에요. 지금쯤 뭐 시킬 일 없냐고 사람들 귀찮게 하고 있지 않겠어요?"

여급이 쯧쯧 혀를 찼다.

"본인이 더 재미가 붙어선. 어젠 코볼트 잔당이라도 튀어나왔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더라니까요."

"그렇군."

이안은 고기를 우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제 정말 일거리가 떨어졌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요즘처럼 마을이 평화로운 건 처음이에요. 얼마나 좋은지."

여급이 양손으로 턱을 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다 해결사님 덕분이에요."

"그래 봐야 잠깐이야."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문제는 금방 다시 생길 거다."

"확신… 하시네요."

"뻔하니까."

암흑시대. 제대로 된 방어 병력도 없는 마을.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안이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사이, 여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안 돼."

"해결사님은, 왜 마법사인 걸 밝히지 않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안 된다니까.

이안은 혀를 차며 여급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해맑은 눈.

그는 결국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귀찮아지니까. 게다가 난 주문쟁이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이 마법사들은 오만한 데다 음흉하고, 이기적이라서요?"

"뭐… 비슷하지."

이안은 문득, 늪지대에서 처음 마주쳤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나마 지성인다웠던 노인.

동행하며 이안이 여러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그는, 그 비법을 궁금해했다.

이안은 친절하게 답해 줬다.

당신은 할 수 없을 거라고.

물론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직접 비밀을 알아내려 했다.

이안의 머리 뚜껑을 열어서.

물론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노인은 목이 잘렸고.

이안은 교훈을 얻었다.

웬만하면 마법사와 엮이지 말자는.

이건 게임이었을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부분 중 하나였다.

그때의 마법사 NPC들은 같은 학파가 아니라며 배척하거나 경계할지언정, 뇌를 헤집어 보겠다며 달려들진 않았었으니까.

"그럼 해결사님은 뭘 좋아하세요?"

여급이 이어 물었다.

이안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뇌리로 온갖 것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이 세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음식들의 느끼함을 씻어 줄 콜라라든가. 제기랄.

이안은 혀를 차고는 내뱉었다.

"보물. 그리고 돈."

"허…."

여급이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그게 전부예요?"

여급이 다시 물었지만, 그는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기를 꾸역꾸역 씹을 뿐.

이안이 접시 위의 음식들을 거의 해치웠을 때쯤.

"…어, 일어나 계셨소?"

주점 주인이 돌아왔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그가 문고리를 쥔 채 머뭇거렸다.

이안은 결국 혀를 찼다.

"뭔데? 말해. 뜸 들이지 말고."

주인장이 볼을 긁적였다.

"그, 댁을 찾아온 사람이 있수."

"의뢰?"

"그건 잘 모르겠소만, 일단-."

주인장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

문을 연 건 가죽 갑옷 차림에 살가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청년이 문을 활짝 열었다.

그제야 청년의 뒤에 선 이의 모습이 보였다.

판금 갑옷을 걸친 자였다.

그것도 맨살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제대로 된 전신 갑옷이었다.

독수리나 매의 부리를 연상케 하는 투구가 얼굴도 완전히 가렸다.

허리에 찬 검의 자루 끝에는 무게추 대신 사슴뿔 형태의 장식이 돋아있었다.

아겔 란의 상징.

종합해 보면, 그를 찾아온 손님은 아겔 란 왕국의 정예 기사였다.

이런 촌구석에 있을 리 없는.

하지만 그게 이안이 고개를 갸웃한 이유는 아니었다.

'묘하게 낯이 익은데…?'

저 전신 갑옷의 형태를,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었기 때문이었다.

#005화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청년과 기사가 장내로 완전히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고, 순간적으로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크흠.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상황 설명은 해야 할 것 같소."

적막을 깬 건 주점 주인이었다.

"처음엔 기사 나리께서 숙소를 찾으시는 줄 알고, 안내만 할 생각이었소. 한데 종자께서 인근에 특별한 문제는 없냐 물으시더군. 해서, 나는 우리 마을에는 훌륭한 해결사가 있어서-."

"요점만 말해. 간단하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주인장이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댁과 대화를 나누길 원하셨소. 원칙대로 정중하게 거절했소만. 소란을 피우지 않으리라 약조하시기에 일단 모시고는 온 거요."

"그렇군."

날 찾은 이유는 모른단 거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의 걱정과 달리, 이안은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 세계의 기사는 언제든 합법적인 살인마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사의 살인은 적당한 이유만 붙이면 무죄가 됐다.

그래서 기사는 대부분 오만하고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규율과 예의범절, 기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인정하는 상대 앞에서만 통용되는 얘기였다.

그러니 주점 주인이 일단 거절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는 건, 나름의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그보단, 기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이안의 머릿속을 간질였다.

분명히 게임에서 본 것 같은데.

이안이 기억을 다시 헤집는 그때.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종자가 앞으로 나섰다.

목을 가다듬으며 한쪽 무릎을 가볍게 굽힌 그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남부 국경의 집행자이며 아겔 란의 보검. 메브 리우렐 경입니다."

양손으로 기사를 떠받들듯 말한 종자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나리를 대신해 인사를 전합니다. 반갑습니다. 해결사."

시대극을 방불케 하는 과장된 인사였지만, 이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라앉은 눈으로 메브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제기랄. 정말이군.'

비로소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를 어디서 보았었는지.

'메브. 피 흘리는 복수자.'

그는 아퀼로니아의 첫 번째 챕터에서 가장 어려웠던 중간 보스였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을 줄이야. 그러니 바로 못 알아볼 수밖에.'

다만 이안이 기억하는 메브는, 지금의 고귀하고 위엄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온통 찌그러지고 균열이 간 갑옷은 붉게 물들었고, 그 사이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아겔 란의 국왕을 죽이기 위해, 단신으로 왕성의 전 병력을 상대했으니까.

심지어 그들을 거의 몰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암살 시도가 성공하기 전에 그의 앞을 막아선 건,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캐릭터였던 이안이었다.

메브는 엄청나게 강했다.

첫 번째 챕터의 보스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검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음에도 공격 한 번 한 번이 치명적이고 패턴도 다양했다.

이안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시간이 그의 편이었던 덕분이었다.

앞서 말했듯, 메브는 이미 빈사 상태에 가까웠으니까.

시작부터 반 이하였던 그의 생명력은, 이안이 공격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는 더 빠르게.

이안은 그의 공격을 피하는 데 주력했고, 끝내 메브는 쓰러졌다.

거의 들리지도 않는 외마디 속삭임만을 남긴 채.

하지만 지금 눈앞의 메브는 그때처럼 타락하지도, 치명상을 입지도 않은 말끔한 상태였다.

게다가 벌써 만나게 되다니.

'상황이 게임과 다르게 돌아가는 건가. 그건 좋지 않은데.'

다만 이안은 놀랐을지언정 긴장하지는 않았다.

자신 역시 그때의 저레벨 마법사가 아니었고, 상대는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설사 싸우게 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전투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이안은 비로소 필립을 바라보았다.

"이안 호프다. 보다시피 용병이고."

"호프 나리시군요."

필립이 조금은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깜빡하지 않는 이안의 배포에 놀란 모양이었다.

높은 정신력은 이런 순간에도 표정 관리와 냉정한 사고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그래서. 내겐 무슨 용무시지?"

이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것이…."

필립이 주점 주인장과 여급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 올라가 있겠소."

그제야 주인장이 여급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불안한 듯, 이안을 힐끔대면서.

발소리가 사라지자 필립이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알았으니 용무부터 말해."

"나리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필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듣자 하니 홀로 코볼트 산채를 전멸시키셨다던데, 사실입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주점의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박제된 코볼트 족장의 머리와 갑옷, 도끼가 걸려 있었다.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대단하시군요. 국경의 최정예 병사들조차 단신으로는 산채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을 텐데요."

필립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보였다.

아부가 자연스러운 놈이군.

이안은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그게 묻고 싶었던 질문인가? 내가 정말 코볼트 산채를 쓸어 버린 건지가?"

"물론 아닙니다. 올바른 분께 질문을 드리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뿐.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혹시…."

필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코볼트 산채에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셨습니까?"

"특이점?"

"보통의 코볼트에게선 볼 수 없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를테면 흑마법의 징후라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불온한 것들 말이지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메브가 흑마법사를 찾고 있다니.

또다시 예상외의 전개였다.

게임에선 연관성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놓친 서브 퀘스트가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드는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해졌다.

"글쎄…."

대화의 키는 그가 쥐고 있다는 것.

이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뭔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런 정보를 넘겨줘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처음으로 필립의 미소가 굳어졌다.

"왕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나는 아겔 란의 주민이 아니야. 용병이지. 용병은 대가 없는 부탁은 받지 않는다."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왕국의 안위를 두고 거래를 하시려는 겁니까?"

"내가 가진 걸 두고 거래를 제안하는 거지. 이왕이면."

태연하게 대꾸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결정권 있는 기사 나리와 직접. 종자와의 계약으론 아무런 보증도 받지 못할 테니까."

"이런 무례한…!"

필립이 화를 내려는 찰나, 메브가 한쪽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투구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필립."

이안의 눈썹이 다시 꿈틀댔다.

'목소리가…?'

"종자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지. 용병."

메브가 앞으로 나서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 아래로 붉은 머리칼이 어깨 언저리까지 흘러내렸다.

녹색 눈이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나는 처음 보는 이 앞에선 말을 아끼는 편이다. 해서 필립이 대신 말하고 있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셨군. 이해했소."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은 무덤덤했지만, 실제로 그는 꽤 놀란 상태였다.

'정말 여자였다니.'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메브가 여성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턱에 패인 흉터조차 잘 어울리는.

물론 게임에 여기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몸의 굴곡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중갑옷은 입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메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도 없었다.

기억나는 건 지친 숨소리와 마지막 속삭임뿐.

그리고 그 후의….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안의 상념을 깨며, 식탁 위에 투구를 내려놓은 메브가 건너편에 앉았다.

"거래를 제안한다는 건, 네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진지한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며 메브가 물었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보뿐만 아니라 물증도 가지고 있지."

"물증…?"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던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에 대한 값은 치르지."

그녀가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받아든 메브가 망설임 없이 금화 하나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심지어 가장 가치가 높은 제국 금화였다.

'다짜고짜 제국 금화라.'

이안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코볼트 산채를 의도적으로 키우려는 자가 있었소. 저 족장은 그자의 마력을 받아먹고 성장한 것이지."

메브의 시선이 족장의 머리로 향했다.

"마력을 받아먹었다?"

"그렇소. 가슴팍에 오염된 마력이 담긴 정수를 품고 있었거든."

이안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아공간에서 정수를 꺼냈다.

족장의 가슴에 박혀 있던 진짜 상급 정수가 아닌, 마을 머저리들이 빼돌렸던 작은 정수였다.

"바로 이거요. 흑마법사의 단말."

"...!"

메브의 눈이 커졌다.

정수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메브가 말했다.

"확실히 불길함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그게 흑마법사의 단말이라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내가 그놈을 만났으니까. 놈은 이 단말로 촌놈 하나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지."

메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 물건을 맨손으로 쥐고 있다니. 배포가 상당하군."

이안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깟 마법에 당할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진위를 판단하듯 이안을 응시하던 메브가 이윽고 읊조렸다.

"버논의 말이 사실이었군. 믿을 수 없었는데. 정말 왕국에 어둠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니…."

이안은 그녀의 에메랄드 같은 눈에 일렁이는 불안함을 눈치챘다.

메브가 덧붙였다.

"더 아는 사실이 있나? 놈을 만났다면, 단서를 남겼을 텐데."

"나를 반드시 찾아내 죽일 거라더군. 내가 놈의 계획을 다 망쳐 놓은 데다 모욕까지 했으니까."

사실은 놈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도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금화 한 닢에 팔아먹기엔 귀한 정보였다.

어차피 전리품을 나눌 생각도 없었고.

"그런가. 큰 도움이 됐다. 처음으로 실체를 확인했으니. 이제 추적할 일만 남았군."

"시간이 여유롭진 않습니다, 나리."

뒤에 선 필립이 조심스레 말했다.

"정해진 일자에 왕성에 도착하려면, 최대로 잡아도 일주일 이상 수색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단서가 생겼으니 최선은 다해 봐야지. 정 안 되면 도착한 후에 재상께 청을 올릴 생각이다. 이제는 증거도 증인도 있으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메브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부탁을 더 하고 싶은데."

"말씀하시오."

"그 단말을 내게 줄 수 있겠나?"

"합당한 가격을 제시한다면야. 알다시피, 이건 마력을 정화하면 비싸게 팔 수 있는 보물이오."

이안의 방식이 익숙해진 듯, 메브가 돈주머니를 식탁 위에 놓았다.

"지금 내가 가진 돈 전부다. 다 합치면 제국 금화 열 개 정도 되겠지. 이만하면 값은 될 것 같은데."

상당한 거금이었다.

어차피 이안에겐 같은 정수와 상급 정수가 하나씩 더 있으니, 하나 정도는 돈으로 바꿔도 상관없었다.

"나쁘진 않군. 알겠소."

이안이 돈주머니를 들었다.

정수를 받아 든 메브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생각보다 훨씬 불길하군."

금화만 아공간에 옮긴 이안이 빈 주머니를 내밀었다.

"조심하시오. 그놈이 당신의 눈을 통해 엿볼 수도 있으니."

"환영할 일이다. 내가 반대로 놈의 은신처를 알아낼 것이니."

정수를 주머니에 넣으며 덤덤하게 말한 메브가, 다시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 더. 가능하다면, 너도 나와 함께 가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창이었다.

이안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목표는 간단했다.

메브와 동행하며 흑마법사를 죽이는 것.

물론 제약도 있었다.

기한은 그녀가 왕성에 입성하기 전까지.

보상은 무려 스킬 포인트 한 개.

추측대로 이안이 놓친 서브 퀘스트였던 것이다.

'게임에선 내가 늦었었던 거군. 관심도 없었거나.'

메브의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왕성으로 향하는 동안 홀로 계속 조사를 이어갔을 터였다.

이 퀘스트는 그사이에 그녀와 마주쳐야 얻을 수 있었으리라.

이안이 퀘스트를 수락하는 사이.

"현재로선 네가 유일한 증인이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목격자가 있을지 모르나, 단신으로 코볼트 산채를 무찌른 실력 있는 용병의 말이 더 신뢰를 받겠지."

이안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흑마법사의 원한을 샀으니, 놈이 날 죽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걸 기대할 수도 있겠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진 않겠다."

"솔직하시군. 하지만…."

이안은 표정을 유지하며 양손을 깍지 끼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용병이오. 나와 동행하려면 계약을 맺어야 하지."

퀘스트와는 별개로, 무료 봉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널 고용하란 말이냐?"

"그렇소."

필립이 질렸다는 듯 탄식했다.

"루 솔라 맙소사. 왜 흑마법사의 원한을 샀는지 알 것 같군요. 이미 두둑하게 챙기고 또 돈 얘기라니."

"넌 공정한 거래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필립. 게다가."

핀잔을 준 이안이 의미심장하게 메브를 마주 보았다.

"날 고용하면 놈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소. 물론 성공 시의 추가 보수를 걸어야겠지만."

"흑마법사를…? 혹시, 놈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는 않소만. 알아낼 수 있을 거요. 그게 내 직업이니까."

이안의 장담에 메브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마을의 해결사라더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일주일쯤 여유가 있으시댔지. 그 시간 내에 흑마법사 놈의 은신처를 찾아내면 추가 보수를 받겠소."

"찾아내지 못한다면?"

"조용히 왕성까지 동행하지. 그땐 나를 고용한 보수만 받겠소. 나리가 손해 볼 일은 없는 계약이지. 둘보단 셋이 낫지 않겠소?"

"흐음…."

메브가 침음했다.

필립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주목했다.

"왕성에 도착해 증언하면, 오늘과 같은 양의 금화를 더 주지."

이어진 대답에 필립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를 바라보며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흑마법사를 찾는다면?"

"어떤 추가 보수를 원하지?"

"글쎄…. 좋아. 나리께서 양보하셨으니, 나도 하나 양보하지."

이안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추가 보수는 놈의 목숨이 끊어진 후에 제안하겠소. 합리적으로."

"…네 합리성은 자신에게 상당히 관대한 것 같던데."

물론 그랬다.

이안은 메브에겐 흑마법사의 시체만 양보하고, 전리품은 전부 요구할 생각이었다.

제안을 거절하고 계약을 파기한다면, 여기사와 종자의 소지품도 전리품이 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적이 될 자였고.

그땐 퀘스트도 완료되었을 테니까.

이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걱정하시는 걸 보니, 나리께서도 내가 놈을 찾아내리라 생각하시는 것 같군."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용병, 이안 호프. 그대를 고용하겠다. 계약은 나, 메브 리우렐의 이름으로 보증하지."

일어선 메브가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그녀의 장갑을 맞잡았다.

"계약은 성립되었소."

"자신감만큼 실력도 있길 바란다. 물론, 신의도."

덧붙인 메브가 손을 놓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준비하고 오겠소. 식사라도 하고 계시오. 여급을 내려보낼 테니."

그가 계단으로 향하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리. 저자를 믿으십니까? 걱정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버논 때문이 아니야. 가능성을 높이고 싶을 뿐이지. 정수가 단단히 오염되어 있었어. 이런 걸 만들어 낼 흑마법사라면 분명 왕국에 심대한 피해를 줄 거다. 전쟁을 앞둔 지금, 그런 위험 요소까지 남겨둘 순 없지."

대단한 충신 나셨군.

계단을 오르며, 이안은 문득 메브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그녀에게선, 왕을 죽이려 성을 피바다로 만든 복수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이유가 있겠지. 모든 타락이 그렇듯이.'

이안은 이내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퀘스트에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일주일은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에 들어가기에 앞서, 밑 작업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006화

"팔을 돌려 보시오."

주점 2층, 이안의 여관방.

가죽 견갑을 이안의 어깨에 단단히 고정한 주인장이 말했다.

이안은 순순히 팔을 움직였다.

"좋군."

견갑은 이안의 어깨에 딱 맞는 데다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

가죽끈의 구속감도 견고했다.

"제일 귀찮은 부분은 끝났군."

읊조린 주인장이 이번에는 갑옷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에게 준비를 도와달라 부탁했다.

이제부턴 갑옷을 옷처럼 입고 다녀야 하니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그게 주인장을 붙잡은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바로 떠나려는 거요?"

이안이 입을 열기 전, 주인장이 먼저 물었다.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의뢰를 받았으니까."

"거,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여기서 더 할 일도 없잖아. 그럼 떠나야지."

주인장이 입맛을 다셨다.

징그럽게 아쉬워하고 난리야.

"됐고, 소문 얘기나 해 줘."

"어떤 소문 말이오?"

"흉흉한 것들. 자주 떠들잖아."

이게 이안의 진짜 목적이었다.

주점은 방랑자와 외지인, 입 가벼운 주정뱅이들 덕에 온갖 소문이 모이는 장소였으니까.

목적지를 설정할 근거가 될 가장 간편한 수단이었다.

일종의 표적 수사인 셈.

"그런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검은 벽의 저주가 역병처럼 번지고 있잖소. 어떤 걸 원하시오? 인육만 먹는 늑대 무리? 지하 수로에 사는 눈 넷 달린 악어? 심지어 머리 없는 기수와 피를 먹고 사는 요정도 있다던데."

왕국의 소문만 해도 이 정도였다.

심지어 이안은 모든 소문이 진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암흑시대가 얼마나 난장판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장소에 대한 건 없나?"

"장소라…. 벽에서 피가 흐르는 성에 대한 소문도 있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동굴. 들어간 자는 있지만 나온 자는 없는 숲-"

이안의 눈썹이 꿈틀댔다.

기다리던 이야기였다.

"그게 좋겠군. 무덤 숲이라던가?"

"맞소. 이름에 비해 사연은 별거 없지만."

콱, 갑옷 옆구리의 끈을 조인 주인장이 손을 탁탁 털었다.

"술자리엔 잘 끼지도 않으시더니. 용케도 아시는군."

"댁이 내가 아래층에서 나눈 얘길 들은 거랑 똑같아. 불만이면 바닥 공사를 다시 하든가."

피식댄 주인장이 각반을 들고 이안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 숲엔 지하 무덤이 있소. 듣기론 고대 요정들이 지은 거라던데, 아무튼. 마족 놈들과 전쟁을 치르던 시절부터 전사한 병사들을 안치하곤 했다더군. 사방에 시체가 굴러다니게 두느니, 지하에 던져 버린 거요."

이안은 게임에서 본 무덤 숲을 떠올렸다.

꽤 신빙성 있는 비화였다.

"그래서?"

"평민들도 덩달아 거기 시체를 묻었소. 지하에 던지든, 숲에 파묻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안개가 자욱해졌다더군."

각반을 이안의 바지 정강이에 잘 맞춘 주인장이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들어간 자들이 돌아오지 않게 된 거요. 이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더군. 그게 끝이오."

"그걸 해결하려는 자는 없었나?"

"건질 게 있어야지. 거긴 도굴꾼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이오. 안 가면 그만인데 굳이."

"하긴."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서 관심을 가진 거다."

필요한 근거는 다 모였다.

주인장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저 기사 나리를 모시고 거기로 가시려는 거요? 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흑마법사가 뼈의 낙원에서 혼자만의 파티를 즐기고 있지.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촌 동네에 뭐가 있어 봤자지. 일단 가장 유력해 보이는 곳부터 가려는 거다. 얼마나 걸리지?"

"걸어가면 일주일쯤? 늦어도 열흘 안엔 도착할 거요. 말을 타면 더 빠를 거고. 이름과 위치 정도는 토박이면 거의 알고 있으니, 찾기 어렵지도 않을 테고."

"그렇군…."

일주일, 늦으면 열흘이라.

게임이었을 때는 고작해야 십 분 거리였던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주인장이 일어섰다.

"뭐 더 여쭙고 싶은 게 있으시오? 도울 거라든가."

"없어. 수고했다. 마지막까지 신세 지는군."

이안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검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주인장이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빨리 방이 비게 될 줄은 몰랐소."

"눌러앉을 생각 없다고 했잖아."

"그랬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거요."

거, 새끼. 더럽게 아쉽나 보네.

이안이 피식 웃는 사이, 방을 돌아보던 주인장이 넌지시 물었다.

"얼마나 갈 것 같소? 이 평화."

이안이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얼마 안 갈 거다."

"역시 그렇지…?"

"마물은 다시 생겨날 거고."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덧붙였다.

"전쟁도, 일어나게 될 거다."

"...."

주인장의 숨소리가 순간 멎었다.

한때는 근육으로 가득했을, 하지만 이제는 두툼한 지방이 덮인 어깨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전쟁을 경험한 자의 흔한 반응.

"타인에게 네 미래를 맡기지 마. 나 같은 용병에겐 특히 더."

이안은 그 어깨를 툭 치고는 덧붙였다.

"네 조카는 네가 지켜야지."

"…그래야지. 댁이 준 갑옷과 도끼를 써야 할 날이 있겠군."

주인장이 한숨 쉬듯 말했다.

막막한 미래를 초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기도, 마지막 결심을 다지는 노병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건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린 이안이, 문고리를 쥐며 물었다.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내려가시오. 대충 방 정리만 하고 따라갈 테니."

"그래. 늦으면 떠나고 없을 거다."

이안은 밖으로 나가며 덧붙였다.

"도끼는 신경 좀 써야 할 거야. 몇 번 못 쓸 물건이니까."

탁. 문이 닫혔다.

주인장이 설핏 웃음 지었다.

"그래서 선심을 썼던 거구만. 어쩐지. 그나저나."

그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살을 좀 빼야겠군. 전쟁이라…."

곱씹듯 읊조리는 그의 눈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난 한 달여의 기억이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는 듯이.

***

"오오…."

이안을 발견한 필립이 탄성을 흘렸다.

"멋지십니다, 나리."

아깐 불만 가득한 표정이더니.

이안이 올라가 있는 동안, 어떤 내적 타협을 마친 모양이었다.

"흐음."

필립과 마주 앉아 있던 메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회색 가죽 갑옷을 착용한 이안은 꽤 그럴듯한 용병처럼 보였다.

허리춤에 찬 검집은 낡아 있었지만, 검은 새것이라 더 신뢰감을 주었다.

검을 여럿 바꿀 동안에도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색이 특이한데. 무슨 가죽이지?"

"코볼트 족장."

"코볼트는 보통 갈색일 텐데. 오염된 마력에 물들어 그리된 건가."

"그럼 저 갑옷에도 오염된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 아닙니까?"

필립이 언제 감탄했냐는 듯 꺼림칙한 표정이 되어 덧붙였다.

이안은 피식 웃고는 답했다.

"기사가 되려는 자가 겁이 많군."

"겁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도요!"

필립이 펄쩍 뛰었다.

이안이 건너편의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마저 식사하시오. 갈 길이 머니 속이 든든해야지."

메브와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포크와 스푼을 들었다.

빵, 고기, 스튜. 이 주점에서 먹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식단이었다.

"목적지는 정하셨습니까?"

몇 분 지나지 않아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일단은. 우선-."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문득 그의 곁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주근깨 가득한 흰 얼굴.

여급이었다.

"뭐냐?"

이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뭐가."

"떠나신다는 거요. 이분들과."

"맞아."

"식사가 끝나면, 바로요?"

"그래."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게 용병의 삶이란 거지."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조금씩 떨리던 여급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잦아들었다.

"...."

이안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필립과 메브도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여급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까닭이었다.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여급은 눈물을 훔치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허…."

이안은 뒤늦게 헛웃음을 흘렸다.

정이 좀 든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울 것까지야.

입맛을 다시며 주방을 돌아보던 그는, 이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뭐냐."

좋은 구경을 했다는 미소를 짓고 있던 필립이 말했다.

"능력 있으십니다. 나리.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어렵다던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런 반응이 아니던데요? 저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이안이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필립이 예, 예, 그러시겠죠,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 코를 잘라 버리면 저런 표정을 못 짓겠지.

이안이 속으로 결심하는 사이.

"무슨 일이 없었단 거요?"

주점 주인장이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이안은 당장 입을 열 듯한 필립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메브가 덧붙였다.

바라던 바였다.

"우선은 무덤 숲으로 가 볼 생각이오."

"무덤 숲이요…?"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흉흉한 소문이 돈다더군."

"왕성으로 가는 경로에 있으니 들르는 게 어렵진 않겠지만. 더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 주면 좋겠군."

메브의 진지한 태도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 놈은 어딘가에 은거지를 두고 있을 거요. 그놈 말로는 '씨앗'을 곳곳에 뿌려 뒀으니 수확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건 나도 예상한 부분이다."

"그러니 놈이 숨어 있을 만한 후보지를 고른 거요."

"하지만 거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묘비 없는 무덤과 유골만 가득한 곳으로 아는데요."

필립이 말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가 좋아할 환경이지. 게다가 건질 게 없으니 굳이 찾아올 자도 없을 테고. 숲 밖으로 문제가 번지는 것도 아니니 주목받을 일도 없어. 이만하면 근거는 충분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왕국 한복판에…."

필립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읊조렸다.

"원래 촛불 바로 아래가 가장 어두운 법이라지 않소."

주점 주인장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이안을 슬쩍 턱짓하며 그가 덧붙였다.

"해결사 양반이 친절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틀리는 걸 본 적이 없소. 적어도 손해는 안 볼 겁니다."

"그러다 허탕이면 어쩌려고."

이안이 핀잔을 줬다.

주인장이 웃음 지었다.

"뭐, 어쨌든 저주받은 숲이 사라지긴 하는 거잖소."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일리가 있군. 알았다. 용병의 뜻에 따르지."

"이안. 용병이 아니라 이안이라 부르시오, 리우렐 경."

이안이 덧붙였다.

메브가 선선히 답했다.

"그러지. 이안."

필립만이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소중한 일주일 중 최소한 하루 이상을 낭비하겠군요."

"무서우면 그렇다고 해. 숲 밖에서 기다리게 해 줄 테니."

이안이 덧붙인 말에 필립의 눈이 커졌다.

"무섭다뇨! 제가 앞장설 겁니다!"

이안이 피식 웃었다.

"알았다. 꼭 그렇게 해 주지."

메브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로 출발하지. 식사는 맛있었다. 주인장."

필립이 냉큼 일어나 짐을 챙겼다.

메브에게 고개를 까딱인 주인장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잘 가시오. 살아서 또 봅시다."

"볼 일 없을 거야. 죽었든 살았든."

"거참, 마지막까지 매몰차시군."

"쓸데없는 희망은 명줄을 단축할 뿐이야."

이안은 입맛을 다시는 주인장을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문을 열려는 찰나.

"잠깐만요!"

여급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이안의 미간이 결국 좁아졌다.

어디까지 질척댈 생각이지.

그가 짜증스레 고개를 돌리자, 여급이 천으로 꽁꽁 싸맨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해결사님."

"이게 뭔데?"

"햄이랑 치즈 같은 것들을 좀 쌌어요. 여정 동안 드시라고요."

"...."

보따리를 이안의 손에 쥐여 주며, 여급이 덧붙였다.

"조심하세요. 해결사님. 아셨죠?"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본 이안은 비로소 머쓱하게 대꾸했다.

"그래. 누가 헛짓을 하거든, 뭐든 들고 목을 찔러라. 눈도 좋고."

여급이 웃음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주점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쁘지 않은 이별이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칠 찰나.

"나리, 보셨습니까?"

뒤따라 나온 필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급의 눈빛이 정말이지, 애절하기 그지없는-."

이안의 걸음이 절로 멈췄다.

"리우렐 경, 부탁이 있는데."

그가 메브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음장처럼 가라앉은 눈빛.

"종자의 혀를 잘라도 되겠나? 없는 편이 여정에 도움 될 것 같은데."

필립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건 절대 안 돼."

투구를 갖춰 쓴 메브가 이안의 곁을 스쳐 가며 덧붙였다.

"하지만 언젠가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부탁하도록 하지."

필립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리,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나리? 농담이라고 해 주셔야죠?"

"기꺼이 해 주지. 무료로."

"하하. 두 분 다 농담이 짓궂으십니다. 그, 그럼, 저는 맡겨 둔 말을 찾으러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목각인형처럼 삐그덕거린 필립이 허둥지둥 메브의 뒤를 따랐다.

이안은 보따리를 아공간에 넣으며 읊조렸다.

"말이라…."

승마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말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나 귀한 탈것이지, 그에겐 탈수록 괴롭고 손도 많이 가는 애물단지였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시간과 체력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입맛을 다신 이안은 이윽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구간지기의 의뢰를 받은 적도 있으니, 말 한 마리쯤은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007화

밤하늘엔 평소처럼 먹구름이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관도 위.

이안은 눅진한 어둠 속으로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그의 앞에는 마찬가지로 말을 탄 메브와 필립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안은 굳이 나란히 말을 몰지도, 대화를 나누려 애쓰지도 않았다.

적이 될지 모르는 자들과 굳이 감정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실제로 마을을 떠난 뒤 그가 내뱉은 말은 열 마디도 되지 않았다.

그건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안이 본 기사 중에서 손꼽히게 진중했다.

"이상하게 요즘은 맑은 날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리?"

그나마 필립이 아니었다면, 일행은 말 그대로 침묵의 행군을 하게 됐을 터였다.

이안과 메브는 거의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필립은 익숙하다는 듯 떠들어 댔다.

"이것도 검은 벽의 광기가 아겔 란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증거인 걸까요. 아니면 마력의 황혼기가 기후에도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아우우-

화답하듯 울려 퍼진 희미한 늑대 울음소리에 필립이 덧붙였다.

"…좀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해가 떨어지니 늑대들이 기운이 나는 모양입니다."

"필립."

그때 이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내심 대꾸해 주길 기다렸던 듯,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예, 나리?"

"저 숲. 얼마나 크지?"

이안이 저만치 앞에 펼쳐진 어두컴컴한 숲을 가리켰다.

녹음과는 거리가 먼, 버석버석한 나무가 가득 이어진 숲이었다.

그 한복판으로 난 길은 던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처럼 보였다.

"가로지르려면 한나절이 조금 넘게 걸릴 겁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통과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노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소, 경?"

"그렇게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메브가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투구는 지금처럼 안면 가리개만 위로 젖힐 수도 있었다.

"숲 중간쯤까지 가면 여행객들이 노숙하는 개울가가 있을 텐데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숲에 늑대 무리가 있다. 제 발로 잠을 설치러 들어가고 싶진 않아."

"아하. 그런 깊으신 뜻이."

늑대라는 말에 단박에 수긍한 필립이 앞서 나갔다.

"모닥불을 피워 놓겠습니다!"

필립은 숲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 부산스럽게 짐을 풀었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광고라도 하듯 소란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얼빠진 놈을 잘도 데리고 다니시는군."

말에서 내린 메브가 대꾸했다.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몇 년 후면 훌륭히 제 몫을 하게 될 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지.

이안은 속으로 읊조리며 말에서 내렸다.

푸르르.

말이 지친 듯 투레질을 했다.

마구간지기에게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얻은 늙은 말이었다.

어차피 오래 살려 두지 못할 테니, 좋은 말을 탈 이유가 없었다.

'승차감도 구리고.'

이안은 가랑이에서 전해지는 욱신거림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마 승마술이 몸에 익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서 있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이건 그가 검을 자연스럽게 휘두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본래의 세계에서 배운 적도 없건만, 기마술 역시 몸에 새겨져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공용 스킬 덕분이리라.

물론 검을 휘두를 줄만 알듯, 말 역시 탈 줄만 아는 정도였다.

기마에 능숙한 이들은 말 위에서도 묘기에 가깝게 움직인다지만, 이안과는 먼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말 좀 편하게 타자고 기마술 레벨을 올릴 순 없지.'

"준비 다 됐습니다, 나리."

이안이 메브의 말 옆에 자신의 말을 묶어 두는 사이, 필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어느새 그럴듯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잠자리까지 정리해 둔 상태였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죽을 준비하는 손길도 능숙했다.

이안은 모닥불 옆에 걸터앉았다.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는 불길. 울퉁불퉁한 바닥. 늑대 울음소리.

비로소 한동안의 안락한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자연스럽게 주점 2층의 낡아빠진 방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지. 벌써 그립잖아.'

피식 웃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보따리를 꺼내 들었다.

필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오. 드디어 그 연모의 마음이 담긴 보따리가 열리는군요. 여급의 표정을 떠올려 보면 분명히-."

"죽만 먹고 싶다는 얘길 길게 하는군."

"…나눠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멈칫한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시선도 주지 않고 답했다.

"네가 닥치면."

필립의 입이 단숨에 닫혔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이안이 든 보따리에 고정된 채였다.

느긋하게 보따리를 벗기던 이안의 손길이 이내 멈췄다.

필립은 초조하게 혀로 입술을 적시다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 절 놀리려고 그러시는 건-."

"입 닥쳐."

이안이 내뱉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필립은, 뒤늦게 어조가 달라졌음을 느끼고는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모닥불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필립의 눈에는, 어둠에 잠긴 숲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사이.

"식사는 물 건너갔군…."

이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대며 보따리를 다시 품에 넣었다.

"대체 뭘 보신 겁니까?"

비로소 필립이 물었다.

"불청객이군."

대답한 건 메브였다.

그녀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청객이라니 그게 무슨…."

읊조리며 다시 숲을 돌아본 필립이, 비로소 굳어졌다.

어느새 숲의 어둠 너머에 수십 개의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요한 살기를 머금고 이쪽을 노려보는, 노랗고 붉은 눈동자들.

"...!"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필립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겁 많긴."

이안이 나지막이 핀잔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필립이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겁을 먹…."

그의 말꼬리가 이내 흐려졌다.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이안은 어느새 일어서 검까지 뽑아 든 채였다.

얼굴에도 약간의 짜증이 묻어날 뿐, 긴장한 기색조차 없었다.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어 보이나?"

필립이 입만 달싹이는 사이, 메브가 담담하게 물었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의 시선이 숲의 안광들을 차분하게 훑었다.

"죽여 보면 알게 되지 않겠소?"

"옳은 말이군."

멍하니 듣고 있던 필립이 물었다.

"그, 저것들은, 뭡니까?"

이안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아우우-! 아우-!

늑대 울음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치기 시작했으니까.

정신을 옥죄는 듯한 메아리.

보통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히히힝!

저만치에 묶어 둔 이안의 말이 발작하듯 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울음소리에 필립이 굳어 있는 사이.

"구경만 하다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정신 차려라."

이안이 다시 한번 그를 일깨웠다.

필립은 가까스로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전,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물었다.

메브가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말을 지켜라. 필립."

"예! …그런데, 저 혼자서요?"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메브가 덧붙였다.

"이안. 너도 물러나 말을 지켜라."

"거절하겠소. 경이 가시오."

"뭐라고…?"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당황한 시선.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 차림으로 늑대들을 쫓아다닐 순 없잖소. 자리를 지키며 싸우는 건 경이 더 제격일 것 같은데."

"그럼 차라리 같이 물러나지. 만에 하나라도 널 잃을 순 없어."

"말을 잃는 건 괜찮고? 그래 봐야 몇 미터 거리요. 차라리 경이 내 뒤를 봐주는 쪽이 속 편하지."

"하지만-."

메브가 반문하려는 찰나, 메아리치던 울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가득하던 안광이 일제히 사라졌다.

"나만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오. 따라주시오. 손해 볼 일 없으니."

이안의 단호한 말에, 메브는 결국 몸을 돌렸다.

"…죽지 마라."

개뿔. 너나 죽지 마라.

이안이 나지막이 혀를 차는 사이.

파스스스- 파스스스-.

기묘한 소리가 이어졌다.

바닥에 낮게 깔린 어둠이 물결치며 밀려드는 소리였다.

"더럽게 많네…."

이안은 검을 고쳐 쥐며 읊조렸다.

그의 눈에는 밀려드는 검은 물결의 실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질주하는 수십 마리의 늑대들.

한 마리 한 마리의 덩치만큼이나 비정상적인 숫자였다.

다만, 이안은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게임에서도 경험한 적 있었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무리의 규모도 위압감도 훨씬 컸지만.

'우두머리를 찾아야 한다는 건 똑같겠지.'

그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지척까지 다가온 물결 한 가닥이 돌연 솟구치더니, 흉포한 노란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뾰족한 이빨이 솟은 커다란 아가리가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콰직.

검이 아가리 한복판에 박혔다.

이안은 침착하게 앞으로 다가서며, 검을 내질렀다.

달려들던 추진력까지 더해져, 검 끝이 늑대의 목덜미를 꿰뚫고 삐죽 튀어나왔다.

이안은 축 처지는 늑대와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자세를 낮춘 그가 검을 뽑으려는 찰나, 좌우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쇄도했다.

순간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쉬학-!

그의 주위로 일순간 터져 나온 돌풍이 늑대들의 궤도를 꺾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퍼억!

그대로 검을 뽑은 이안이 곁을 스쳐 가는 늑대 한 마리의 몸통을 그대로 올려쳤다.

이안은 곧바로 자세를 다잡았다.

그의 뒤편에 착지한 다른 한 마리가 곧바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달려들고 있었다.

카득!

이번에는 늑대의 미간이 꿰뚫렸다.

이안은 놈의 돌진력에 또다시 주르륵 밀려나면서 이를 갈았다.

'시발, 그냥 다 태워 버릴까.'

육신이 있는 것들에겐 불이 가장 손쉬운 상대법이었다.

하물며 늑대 무리 정도는, 화염 걸음 마법을 펼치며 뛰어다니기만 해도 전멸시킬 수 있을 터였다.

코볼트 산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메브와 필립에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니까.

그뿐 아니라 남은 여정 내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과 제안을 해 댈 것 역시 분명했다.

'…이까짓 개새끼들 잡자고 그 귀찮은 꼴을 볼 순 없지.'

이안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잿빛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하위 회색 마법은 대부분 효과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검을 잘 다루는 용병 흉내를 내기에 딱 적합하단 뜻이었다.

실제로도 아겔 란에서 처음 들른 도시의 주민들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쉬학-!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장막이 그의 주변을 감쌌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솨아아-!

그의 옷깃과 머리칼이 산들바람이 불듯 가볍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람 칼날. 바람을 머금은 동안은 움직임에 추진력을 더해 주고, 원하면 언제든 예리한 칼날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었다.

칼날의 사거리가 아주 짧아서, 게임에서는 달릴 때나 쓰던 마법이었지만.

검을 주 무기로 쓰는 지금은, 그것조차 장점이었다.

이안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세 마리의 늑대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검이 번쩍이며 호선을 그렸다.

서걱- 카득!

검날이 닿기 직전에 바람 칼날이 맨 앞의 아가리를 그대로 도려내 버렸고, 다음 놈의 머리통도 반으로 쪼개 버렸다.

쉬학-

장막이 남은 한 마리를 막아섰다. 허공에서 균형을 잃은 늑대가 그대로 이안에게 부딪혔다.

어깨로 받아내며 뒤로 밀려난 이안은, 드러난 놈의 목덜미를 검으로 내리쳤다.

캬우우-!

그 틈을 타 또다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솟구쳤다.

이안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콰직!

눈앞에서 떨어져 내린 새파란 검광이 늑대의 몸을 말 그대로 반 토막으로 썰어 버렸다.

터져 나온 핏물이 이안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갑옷이 새빨갛게 물든 메브가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었다.

싸우고 뒹굴다 보니 그녀의 근처까지 밀려난 것이다.

푸르게 빛나는 그녀의 검과, 갑옷 곳곳에 박힌 마석이 번뜩이며 주위를 밝혔다.

피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주위에는 몸이 으깨지거나 두 동강이 난 늑대 사체가 몇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 선 메브는, 게임 속 피 흘리는 복수자를 절로 떠올리게 했다.

'타락하지 않아도 존나게 세다, 이거지.'

"확실히 보통 늑대는 아니군."

이안이 얼굴을 닦으며 일어서는 사이, 메브가 덧붙였다.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

"내가 봐도 그렇소."

이안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내달리는 늑대들의 잔상과 안광의 궤적으로 어지러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족 여럿을 잃어서인지, 늑대들도 더는 무작정 덤벼들지 않았다.

대신 놈들은 기습을 선택했다.

주위를 빙빙 돌다 사각을 노리며 달려든 늑대들은, 번번이 이안과 메브의 검에 피를 흩뿌렸다.

메브는 자신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며 전투를 주도했다.

아무리 마력을 머금었다 하나 결국 본질은 덩치 큰 늑대.

이빨과 발톱으로는 갑옷을 뚫을 수 없으니, 방어를 소홀히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무게와 속도를 이용해 충돌하면 꽤나 충격을 줄 수 있겠지만.

메브는 그마저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거나 흘려냈다.

그야말로 기사다운 실력이었지만.

이안이 보기에 그녀는, 자신의 전력을 반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사도의 권능은 아직 내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심지어 필립도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말 세 마리의 고삐를 다 움켜쥔 채, 다른 손에 든 원형 방패로 달려드는 늑대들을 쳐내며 시선을 끌어 준 것이다.

뒤처리는 메브의 몫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군. 둘 다.'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런 만큼 주어진 시간이 더 빨리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늑대 무리는 야성의 광기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우두머리의 지배하에 놓여 있을 뿐이었으니까.

게임에서의 우두머리는 무리의 숫자가 일정 이하로 줄어들면 도망쳐 버리는 약삭빠른 놈이었다.

동시에 한 번 눈여겨본 사냥감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는 집요한 놈이기도 했다.

그 점은 현실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오늘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피곤한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변변찮은 전리품도 주지 않는 늑대 무리를 다시 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마력 탐지.

거기에 전투로 달궈진 신경이 그의 특성인 육감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그 결과, 육안으로 볼 수 없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늑대 무리에 흐르는 살기와 광기.

파도치는 자줏빛 마력의 물결.

시간이 발맞춰 느려졌다.

높은 정신력과 지능 수치, 특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고도의 집중력이었다.

다만 이안 자신의 움직임 역시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둔해졌다.

육신의 능력이 사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움직임은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뿐.

몽환적이기까지 한 풍경을 이안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훑었다.

한순간, 그의 시선이 숲의 한 지점에 고정됐다.

'…찾았다.'

늑대 무리를 지배하는 마력 파장의 근원지였다.

이안은 무릎을 굽히며 내뱉었다.

"말을 잘 지키고 있으시오."

"...?"

"우두머리의 목을 따 올 테니."

그가 땅을 박찼다.

#008화

"그게 무슨…. 이안?!"

고개를 돌린 메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안이 이미 저만치까지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멈춰! 돌아와!"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도, 이안은 늑대의 물결 한복판에 망설임 없이 휩쓸렸다.

"저런 미친 짓을…!"

그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돌발행동에 필립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질주하던 늑대 한 마리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뒤이어 피가 솟구쳤다.

이안이 아니라, 늑대의 목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피 분수였다.

검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늑대의 머리통이 아가리를 쩍 벌린 그대로 잘려나간 것이다.

늑대 몸통이 바닥을 나뒹굴기도 전에 또 다른 늑대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이안이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

메브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허공에서 이안의 몸이 한 차례 더 솟구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달려드는 늑대들을 뛰어넘은 이안이 땅을 한 바퀴 구르고는 그대로 다시 달려나갔다.

처음과 다를 바 없이 빠른 속도.

심지어 그의 모습이 늑대들의 잔상에 흐릿하게 가려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포위망을 뚫어 버린 것이다.

늑대 몇 마리가 그 뒤로 따라붙었지만, 놀랍게도 이안이 멀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 보였다.

"...."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메브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서걱-!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습하던 늑대가 반으로 나뉘었다.

"어쩔까요, 나리! 쫓아가야 합니까?"

마찬가지로 방패로 늑대를 밀어내던 필립이 외쳤다.

메브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이안은 숲의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를 쫓던 늑대 몇의 뒷모습만이 아른거리다가, 곧 그마저도 흐릿하게 사라졌다.

문득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안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던.

어둠을 응시하며 메브가 내뱉었다.

"아니. 자리를 지켜라. 필립."

"그럼 좀 도와주십시오, 나리! 이러다 저 정말 죽는다고요!"

필립의 비명에 메브는 검을 고쳐 쥐며 몸을 돌렸다.

그 때문에 메브는, 숲의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자줏빛 안광이 직선을 그리며 멀어지는 광경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이안은 사냥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맹수를 만났을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것.

맹수의 본능을 자극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접근하는 대상은 경계하지만, 도망치는 대상은 사냥감으로 인식하는 게 그것들의 본능이었다.

우두머리의 위치를 알면서도 무작정 내달린 건 그래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의 감각이 경고를 보냈다.

'온다.'

그의 귓가로 늑대들의 것이 아닌 헐떡이는 숨소리가 스쳤다.

흥분과 분노가 뒤섞인 숨소리였다.

이안은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그를 추격하던 늑대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원하던 반응이었다.

서걱, 콰직! 케헹-!

늑대들이 순식간에 도륙됐다.

이안은 보란 듯 검에 묻은 피를 흩뿌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따라붙은 숨결에 으르렁대는 소리가 더해졌다.

이안은 단숨에 멈춰 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자줏빛 안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거대한 송곳니.

"열 받냐?"

"크헝!"

놈이 울부짖으며 도약했다.

허공에 자줏빛 발톱 자국이 새겨지더니 그대로 이안에게 쏟아졌다.

카드득!

여러 차례 그를 구했던 휘몰아치는 방벽이 맥없이 찢겨 나갔다.

새파래진 눈동자로 그 광경을 응시하던 이안이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 맺힌 마력이 시리도록 푸르게 번쩍였다.

쩌저적-!

손바닥 앞에 순식간에 돋아난 얼음 방패가 이안의 몸을 가렸다.

청색 마법, 서리 방패였다.

방패 표면에는 성게 같은 얼음 가시가 삐죽삐죽 돋아 있었다.

콰드득-!

보랏빛 발톱은 방패에 가로막혔다. 방패 너머로 안광을 마주 본 이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반갑다, 똥개야."

"크허-!"

쾅-!

거대한 송곳니들이 돋은 아가리가 벌어진 직후, 방패가 폭발했다.

얼음 파편이 그대로 놈에게 비산했다. 두꺼운 가죽을 찢어발기지는 못했지만, 생채기를 남기며 튕겨내기엔 충분했다.

콰당탕,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놈은 땅에서 세 번 튕기기도 전에 자세를 다잡았다.

촤아악-!

땅에 기다란 발톱 자국이 새겨졌다. 바닥에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 그르렁대며 놈이 몸을 일으켰다.

이안은 비로소 놈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고릴라와 늑대를 합쳐 놓은 듯한, 2m가 훌쩍 넘는 거구였다.

다리보다 긴 팔은 이안의 허리만큼 두꺼웠고, 그 끝에 칼날 같은 발톱이 번뜩였다.

자줏빛 안광이 일렁이는 얼굴은 인간과 늑대를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섞은 것처럼 보였다.

콧잔등부터 가시처럼 돋은 검은 털이 숨소리에 맞춰 들썩댔다.

그때 이안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그는 자세를 다잡으며 읊조렸다.

"예상은 했지만, 더 징그러워졌구나. 안돌프."

저주받은 안돌프. 서브 퀘스트의 이름이자 늑대 인간의 이름이었다.

"크워어어어어-!"

안돌프가 울부짖었다.

이안의 눈에,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자줏빛 마력이 또렷하게 보였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포효.

하지만 그뿐이었다.

게임에서는 캐릭터를 공포 상태로 몰아넣던 하울링은, 지금의 이안에겐 소음에 불과했다.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을 깨달았는지, 안돌프가 다시 땅을 박차며 솟구쳤다.

자줏빛 발톱이 어둠에 기다란 호선을 새기며 뻗어 나왔다.

대비하고 있던 이안에게는 너무 뻔한 공격이었다.

콰드득!

이안이 등지고 있던 나무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발톱이 내리찍은 땅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솟구쳤다.

그 사이로, 잿빛 안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사선으로 두 걸음 물러선 것만으로 공격을 피한 이안이었다.

곧이어, 흙먼지를 뚫고 돌풍이 휘몰아쳤다.

카드득-!

안돌프의 내뻗은 팔뚝에 이안이 내리친 검이 깊숙이 박혔다.

바람 칼날로도 놈의 팔뚝을 완전히 자를 수는 없었다.

"키아아아악!"

이안이 혀를 차는 사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내며 안돌프가 반대편 팔을 치켜들었다.

자줏빛 발톱이 쏟아지기 직전.

쿠릉-!

폭음과 함께 안돌프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놈의 팔뚝에 박힌 검에서 무형의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회색 마법인 진공 폭발이었다.

다른 하위 회색 마법이 그렇듯 사거리가 아주 짧았지만, 파괴력만큼은 확실했다.

살점이 피 보라를 이루며 튕겨 나갔다.

"키에에에에엑-!"

반대편 팔로 간신히 몸을 받친 안돌프가 울부짖었다.

너덜너덜하게 잘려 나간 오른팔에서 검은 피가 펌프질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직!

놈이 자신의 팔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땅을 디딘 왼팔에도 이안의 검이 틀어박혔다.

그리고 다시 폭발.

"캬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양팔을 잃은 안돌프가 피 보라 사이로 허물어졌다.

바람 칼날의 효과가 끝나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된 이안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시발."

그의 인상이 구겨진 건, 피와 살점을 뒤집어썼기 때문이 아니다.

검이 또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마을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꼴이 나다니.

"키에에엑…!"

그사이,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 대던 안돌프가 문득 몸을 웅크렸다.

전신의 털이 삐죽삐죽 솟았다.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벌써?"

콰아아아아-!

이안이 반사적으로 서리 방패를 생성한 것과 거의 동시에, 안돌프의 몸에서 자주색 폭발이 일어났다.

그 어떤 기교도 없는 순수한 마력의 폭발이었다.

방패 뒤에 간신히 몸을 숨긴 이안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두 다리만으로 몸을 일으킨 안돌프가 훌쩍 뛰어올랐다.

정확히 이안의 반대쪽으로.

양팔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방울진 궤적을 그렸다.

퍼억!

그 궤적은 안돌프가 뭔가에 부딪히면서 끊어졌다.

얼음 장벽이었다.

장벽은 땅에 추락하는 안돌프를 따라 무너져 내렸다.

쩌저저저저적-.

무너진 장벽은 벌집 같은 육각형을 그리며 다시금 얼어붙었다.

안돌프가 고개를 털며 일어섰을 때는, 얼음 창살이 삐죽삐죽 돋은 감옥에 갇힌 후였다.

"키아아아아!"

안돌프가 울부짖으며 몸을 날렸지만, 얼음 감옥은 크게 흔들렸을 뿐 깨지지 않았다.

"다른 듯 같은 패턴이네…."

그 너머로, 손을 앞으로 내뻗은 이안이 천천히 일어섰다.

게임에서의 안돌프도 생명력을 일정량 소모하면 도주했었다.

심지어 머리를 날려 버려도 도망쳤고, 절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늑대 무리를 고스란히 이끌고.

그러니까 놈을 죽이려면,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먼저 다 잘라내는 게 순서였다.

혹은 지금처럼 얼음 감옥 같은 이동 방해 스킬을 사용하거나.

하지만 팔 두 개가 날아가자마자 도주를 택하리란 건 이안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게임에선 팔다리가 다 잘려도, 도주할 만큼 생명력이 소모되진 않았었으니까.

다만 이안은 마력 폭발이, 안돌프가 사지가 다 잘려 나가거나 도주하기 직전에만 하는 행동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폭발에 휩쓸리면서도 얼음 감옥 마법을 사용했는데,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놓친 줄 알고 개 놀랐잖아, 새꺄."

피와 먼지 섞인 침을 탁 뱉은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일렁였다.

손아귀의 마력이 푸른색에서 회색으로 물들었다.

뒤이어 주위의 흙먼지와 피 안개가 이안의 손아귀로 회오리치며 빨려 들어갔다.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맹렬하게 회전하는 돌개바람.

치칙, 치치칙-!

그 사이로 새파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안돌프가 얼음 감옥에 돌진했다.

쾅, 쩌적, 쩌저적-!

마력 공급이 끊긴 감옥에 조금씩 균열이 일더니, 이윽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장창-!

안돌프가 얼음을 깨부수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치치치칙-!

놈을 마중 나온 건, 새파란 뇌전을 가득 머금은 회오리바람이었다.

얼음 감옥이 마법을 완성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 준 것이다.

파치치치칫-!

번개 돌풍이 안돌프를 휩쓸었다.

순간 시각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안돌프의 전신 털이 곤두서고, 활처럼 몸을 휜 놈의 주위로 실오라기 같은 전격이 번쩍거렸다.

"끄, 아아…."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안돌프의 입에서 한 줄기 연기가 치솟았다.

털썩.

놈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슈확-!

그 코앞으로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이 쇄도했다.

그가 안돌프의 복부를 향해 쫙 펼친 손바닥을 뻗었다.

손바닥 위에는 바람의 칼날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손바닥이 안돌프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부왁-!

다음 순간, 안돌프의 뱃속에서 진공 폭발이 일었다.

가죽 북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안돌프가 뒤로 넘어졌다.

쩍 벌어진 복부에서 내장과 핏덩이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이안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가라앉은 눈빛으로 안돌프를 살폈다.

마력을 연달아 퍼부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언제라도 다시 마법을 펼칠 준비를 한 채였다.

이제는 게임과 달리 생명력 바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늑대 인간의 질긴 생명력이라면 이런 처참한 상태에서도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푸스슥-.

꺼질 듯 휘청대던 안돌프의 자줏빛 안광이 흐려진 건 그 직후였다.

전신에서 자줏빛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흩어졌다.

까득, 까드득-.

뒤이어 놈의 몸이 경련하며 뒤틀리고 꺾이기 시작했다.

"후…."

이안은 비로소 치켜든 팔을 늘어뜨리며 주저앉았다.

꾸득, 까드득-.

놈의 덩치가 조금씩 작아졌다.

저주받은 짐승 같던 놈의 머리도 조금은 인간의 형태에 가까워졌다.

야성만이 가득하던 눈동자에 희미한 이성의 빛이 되돌아왔다.

"고…."

놈의 턱 끝이 달싹였다.

"고맙… 소."

"그럼 네 저주의 단서나 줘 봐. 전리품이나. 인사로 퉁 치지 말고."

이안은 손에 엉겨 붙은 피와 내장 조각을 놈의 털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안돌프가 어떤 저주를 받은 건지는 이안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지나친 서브 퀘스트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안돌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늙은… 사슴…."

"사슴, 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슴을 잘못 처먹은 거야 뭐야."

물론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수확이 없진 않았다.

저주받은 안돌프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보상으로 체력 능력치가 하나 올라갔으니까.

이제 지능과 정신력 이외의 능력치에 포인트를 투자할 생각이 없었으니, 아주 귀중한 보상이었다.

"이만하면… 마법으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안은 안돌프의 시신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색 마법을 썼더라면 훨씬 손쉽게 이겼겠지만, 그랬다간 숯덩어리를 들고 돌아갔을 터였다.

귀찮은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안은 반 토막이 난 검을 고쳐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안돌프의 가슴팍에 한쪽 무릎을 걸쳤다.

이어 사람이 되다만 얼굴을 붙잡고는 옆으로 돌렸다.

시체를 다 들고 갈 순 없으니 머리만 잘라 가려는 거였다.

툭.

안돌프의 벌어진 입에서 뭔가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구슬이었다. 자줏빛이 감도는.

"이놈도 정수가 있었다고…?"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구슬을 집어 들었다.

응축된 저주의 정수.

그가 가진 정수와는 다른 속성의 오염된 마력이 담겨 있었다.

"…게임에선 못 봤던 것 같은데."

심지어 이건 바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곧바로 광기의 저주에 휘말리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이것도 정화할 수 있겠지."

이안은 정수를 아공간에 넣었다.

메브에게 팔아치운 정수의 빈자리가 메워졌다.

이제 사제만 찾으면 되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검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바람 칼날의 도움까지 받았다.

이윽고 머리를 완전히 분리한 그는 검을 툭 던지며 허리를 들었다.

두통과 허기가 뒤늦게 밀려왔다.

"치맥하고 꿀잠 자고 싶다…."

나지막이 읊조리며, 그는 안돌프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긴 밤이었지만, 아직도 아침까지는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009화

타탁, 타탁-.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필립이 살려낸 모닥불이었다.

일렁이는 불빛이 주위의 풍경을 흐릿하게 그려냈다.

수많은 늑대 시체가 잘리고 토막 나 내장과 뒤엉켜 널브러진, 악몽에나 나올 법한 장면.

하지만 그 한복판의 메브는 석상처럼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은 초조한 눈빛으로.

다행히, 적막은 길지 않았다.

"이안? 너냐?"

불현듯 미간을 꿈틀댄 메브가 어둠을 노려보며 물었다.

"...!"

장작을 뒤집던 필립도 득달같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너머에서, 터덜터덜 다가오는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맞소. 무사하시군."

느릿한 대답이 뒤를 이었다.

기다리던 입장에서는 부아가 치밀 만큼 나른한 목소리였다.

메브가 걸음을 옮겼다.

"너, 아까 그게 대체 무슨-"

"늑대들은 모두 물러났소?"

이안이 말을 자르자, 메브는 결국 미간을 구겼다.

길게 숨을 고른 그녀가 내뱉었다.

"그래. 네가 숲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지더군. 그보다,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그녀는 이번에도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이안의 몰골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설명할 것도 없소."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대꾸했다.

"그 말 그대로였으니까."

그가 손에 든 것을 휙, 모닥불 쪽으로 던졌다.

흐릿한 포물선이 모닥불 근처에 떨어져, 쪼그려 앉은 필립의 곁으로 굴러갔다.

혀를 축 내밀고 있는 안돌프의 머리통이었다.

"루 솔라 맙소사!"

사람도 늑대도 아닌 끔찍한 생김새에, 필립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이게 뭡니까?!"

"늑대 인간. 그놈이 늑대들을 끌고 다녔던 거다."

대답한 이안이 멈춰 섰다.

안돌프의 머리를 응시하던 메브가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몰골이 말이 아니시군."

"...."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안은 피와 살점의 바다에서 헤엄이라도 치다 온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동시에, 그가 지독한 사투를 벌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 어두운 숲속에서, 홀로.

"어떻게 안 거지? 이런 괴물이 늑대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걸."

그래서 메브는 이안의 말을 지적하는 대신, 본론으로 돌아갔다.

"몰랐소."

"뭐…?"

"대신, 소문은 들었지. 사람만 사냥하는 늑대 무리가 있다는 소문. 경은 들은 적 없소?"

"…없다."

고작 소문을 믿고 그랬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소문만 믿고 움직이는 건 지금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눈빛까지 감출 순 없었다.

이안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소문에도 진실이 섞여 있게 마련이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이 똥개들은 규모만 크지, 딱히 대단한 게 없더군. 그래서 우두머리를 족쳐야겠다고 판단한 거요. 이런 괴물인 건, 만나고서야 알았지."

사소한 변수였다는 듯한 말투.

그러나 메브에겐 절대 허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정말 홀로 늑대 인간을 죽이고 돌아왔으니까.

"...."

거기까지 생각한 메브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홀로 코볼트 산채를 전멸시켰다는 말이 과장된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자가 정말로 흑마법사를 찾아내지 않을까.

하지만.

"무모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군."

메브의 목소리는 여전히 엄중했다.

"늑대 인간보다 더한 괴물이었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나와 함께 움직였어야 했어."

개인적인 바람과는 별개로, 이안은 절대 죽어선 안 됐다.

그는 반드시 살아서 자신과 함께 왕성까지 도착해야 했으니까.

그러려면 이런 돌발행동은 다시는 없어야 할 터였다.

"흐음. 글쎄…."

턱을 긁적인 이안이 그녀를 슬쩍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 차림으론 놈을 추격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셨을 것 같소만."

…이 작자가?

메브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난 네 생각보다 훨씬 빨라. 이런 차림으로도."

물론 그러시겠지, 하고 대꾸한 이안이 덧붙였다.

"놈이 위협을 느꼈을 거란 얘기요. 내가 혼자 움직였으니 덤빈 거지, 아니었다면 도망쳤을 거요. 그럼 놓쳤을 테고, 언제 다시 우리 뒤를 쫓을지 모르지. 위협을 살려 보낼 순 없잖소."

"그 역시, 추측이군."

"그럼 저놈이 왜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겠소? 언제든 튈 준비를 한 거요. 보기보다 강한 놈은 아니란 뜻이지. 그래서 혼자 간 거요. 이만하면 이해가 되셨소?"

메브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안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은 이해하지만, 나야말로 무엇보다 목숨이 소중하오. 누굴 위해 목숨을 던질 정도로 충직하거나 고결하지도 않고. 그런 건 경 같은 기사의 덕목이지. 나 같은 일개 용병이 아니라."

"...."

메브는 결국, 말싸움으로는 이안을 절대 이길 수 없으리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으로 따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금 이안 스스로가, 본인은 충직하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선언까지 한 참이었으니까.

거의 모든 용병이 그렇긴 했지만, 그걸 이렇게 당당하게 내뱉는 건 이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기사인 그녀의 면전에서는 더더욱.

빈말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안은 고작 하루 만에 여러모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으니까.

메브가 검을 들면, 그는 필시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리라.

둘 다,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한 메브는, 이윽고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결정을 내렸다.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계획이 생기면 미리 알려 줬으면 좋겠군. 혼자 알지 말고."

그저 정중하게 부탁하기로.

이 돈을 밝히고 무례한 용병에게 휘둘릴 앞날이 염려됐지만, 이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뜻밖인 건 이안의 반응이었다.

"알겠소. 그러도록 하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더 덧붙이는 말도 없이.

오히려 머쓱해진 메브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

상대를 너무 불신한 건 나일지도.

그녀가 헛기침을 삼키느라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나리. 그럼 식사하시면서, 이 괴물 놈과의 영웅적인 전투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는 안돌프의 머리통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눈만큼은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피식 웃은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필립."

"…아직 할 일이 남으신 겁니까?"

"여기서 뭘 먹고 싶진 않거든. 자고 싶진 더더욱 않고."

당연하다는 듯 말한 이안이 턱짓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아."

필립도 납득한 표정이 됐다.

주위에 늑대 사체가 가득했으니까.

살풍경한 광경인 건 물론이고 피 냄새와 구린내까지 풍겼다.

"숲 중앙에 개울가가 있댔지. 거기에 다시 자리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경?"

이안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그리하지."

"말을 가져와라. 필립."

이안이 턱짓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예. 나리."

필립 본인은 물론 메브조차 이상함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필립은 묶여 있는 세 마리의 말 쪽으로 달려갔다.

목과 머리에 마갑을 씌운 두 전마는 그렇다 쳐도, 이안의 늙은 말까지 기어코 지켜낸 것이다.

이안이 보기엔 오늘 일어난 일 중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이었다.

필립이 고삐를 쥐자, 말들이 흥분한 듯 투레질을 했다.

"아니, 이놈들이 뒤늦게 겁을 먹었나? 순순히 오렴. 착하지?"

필립이 고삐를 끌어당겼다.

필립과 메브의 말은 그나마 순순히 따라왔지만, 이안의 말은 앞발까지 들썩거리며 질질 끌려왔다.

그렇게 몇 걸음쯤 다가왔을까.

키히힝-!

콧김을 뿜던 이안의 말이 기어코 옆으로 고꾸라졌다.

"어랍쇼…?"

필립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이안과 메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어, 나리. 그게…."

말의 상태를 살핀 필립이 머뭇대며 말했다.

"죽… 었는데요?"

"...."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메브도 당황한 표정이 되어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눈을 끔뻑이며 돌연사한 말을 바라보던 이안은, 문득 깨달았다.

'이거, 내가 뒤집어쓴 피 때문인 것 같은데.'

가뜩이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이안이 늑대 인간의 피 냄새를 펄펄 풍겨 대니 늙은 말로서는 버티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안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가. 허어. 그, 나리. 죄송합니다. 제가 뭔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나라를 잃은 듯한 필립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어떻게 지켜낸 녀석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조심했어야지, 필립. 주위에 늑대 사체가 이렇게나 가득하거늘."

엄하게 꾸짖은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유감이군. 말값은 치르겠다."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이해하겠소. 애초에 저 녀석이 살아남은 것부터가 기적이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나리. 너그러우시군요."

필립이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 정수리를 향해, 이안의 느긋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걸어서 이동하고 싶진 않군."

"예…?"

필립이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피곤하거든."

덧붙인 이안이 그를 지그시 마주 보았다.

얼떨떨했던 것도 잠시.

말들과 이안을 번갈아 본 필립이, 망연자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제가 걸어야지요. 예…."

***

두어 시간 뒤.

일행은 숲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개울가에 짐을 풀었다.

필립이 모닥불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안은 느긋하게 말에서 내렸다.

필립의 말은, 이안이 타던 늙은 말보다 훨씬 쾌적했다.

그가 내리자 안장 옆에 묶인 안돌프의 머리통이 달랑거렸다.

필립의 작품이었다.

이걸 대체 왜 들고 온 건가 싶었지만, 이안은 이내 냇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머리통 따위가 아니었다.

"종아리까진 오겠는데…."

세수나 겨우 할 줄 알았더니.

제법 강 흉내는 내는 개울이었다.

근처의 바위에 대충 걸터앉은 이안은 갑옷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메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보다시피. 갑옷을 벗고 있소만."

"그러다 또 습격당하면 어쩌려고."

"오는 길에 못 느끼셨소? 아마 숲엔 사슴 한 마리도 없을 거요."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늑대 인간이 숲을 점령했었잖소. 죄다 도망쳤겠지."

설사 뭐가 있대도, 난 무조건 씻어야겠거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다시 갑옷과 견갑의 고정끈을 풀어나갔다.

땀과 피가 뒤엉켜 온몸이 죄다 끈적거렸다.

"아하. 그래…. 그렇겠군."

메브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나리, 지금 씻으시려고요?"

어느새 불을 피우고 자리까지 펼쳐 놓은 필립이 물었다.

이안은 셔츠와 엉겨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갑옷을 억지로 떼어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시군요…."

말꼬리를 흐린 필립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냈다.

갑옷을 내려놓은 이안이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내 그는 못 이긴 척, 아공간에서 보따리를 꺼내 펼쳤다.

꾹꾹 눌러 담은 훈제 햄과 치즈, 밀 빵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필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따리를 내려놓은 이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반만 덜어내서 준비해라. 내일도 먹을 거니까."

"예! 바로 드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 전에 손부터 씻어. 음식이 준비되면 내 갑옷도 닦아 두고."

"물론이죠!"

필립이 후다닥 개울가로 달려갔다.

참 다루기 쉬운 놈이란 말이야.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각반으로 손을 가져가던 이안이,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소. 옷을 벗을 거요. 몸까지 씻을 생각이거든."

"안 보면 그만이니 상관없다."

태연히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자연스럽게 투구를 벗었다.

이어 양손의 강철 장갑을 차례로 벗고, 팔꿈치 갑주 사이로 손을 넣었다.

철컥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견갑 아래로도 손을 넣어 몇 번 만지자, 팔꿈치와 팔 윗부분을 보호하던 갑주가 툭 떨어졌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견갑까지 탈착하기 시작한 메브를 돌아보며, 이안이 말했다.

"잘 때도 입으실 줄 알았더니."

"나도 몸을 씻을 생각이니까."

메브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지금 말씀이시오?"

메브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럴 생각인데. 문제 있나?"

…그럼 없겠냐?

드물게도, 이안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010화

"…나랑 같이 씻으셔야 할 텐데."

이내 표정을 수습한 그가 말했다.

메브가 시선을 거두며 대꾸했다.

"안 보면 그만이니 상관없다."

이걸 이렇게 다시 써먹다니.

"그럴 자신이 없다는 얘기였소만."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 메브가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이안이 처음으로 본 미소였다.

전투에 이어 설전까지 벌이고 나니 한결 그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나도 피곤하다. 시간을 아껴야지. 내일도 갈 길이 머니까."

덧붙인 메브가 태연하게 반대쪽 팔꿈치 갑주를 벗기 시작했다.

"그야… 그러시겠지만."

입맛을 다신 이안도 이윽고 각반 끈을 마저 풀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갑옷을 차곡차곡 벗는 소리만 이어졌다.

"아, 나리도 씻으시려는 겁니까?"

이윽고 필립이 돌아왔다.

손과 팔을 깨끗하게 씻고, 물에 푹 적신 헝겊까지 들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다가와 메브가 벗은 흉갑을 받아들었다.

"항상 고맙구나, 필립."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나리."

필립은 흉갑을 고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열망에 찬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후다닥 가죽 갑옷 앞으로 다가온 필립이, 옆에 놓인 보따리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덧붙였다.

"다 닦으면, 기름도 바를까요?"

"그래라."

아주 심복이 따로 없군.

코웃음을 삼킨 이안이 일어섰다.

붉게 물든 누비옷 차림이 된 메브도 뒤따라 일어섰다.

갑옷을 벗은 그녀는 이안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작았다.

"저 위쪽이 물길이 조금 더 넓어 보였습니다. 씻으시기에 더 편하실 겁니다, 나리."

갑옷을 들며 필립이 덧붙였다.

그 역시 메브만큼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알았다. 다녀오마. 가지, 이안."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정말 여긴 다 이런 식인 거군.

이 세계에 다 적응한 줄 알았건만.

오랜만에 현대인다운 당황을 느끼며, 이안은 걸음을 옮겼다.

필립의 말대로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자 개울의 폭이 넓어졌다.

먹구름 사이로 얼핏 드러난 달빛이 물결 표면에 잘게 바스러졌다.

이 세계에서 보기 드문, 정적이면서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이쯤에서 네가 먼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묵묵히 걷던 메브가 문득 말했다.

이안은 콧잔등을 긁적이곤 멈춰 섰다.

"알겠소."

"난 조금 더 상류로 가지."

메브가 그대로 멀어졌다.

…바바리맨이 된 기분인데.

이안은 입맛을 다시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냇물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물은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중심부는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깊어서, 이안은 아예 무릎을 꿇고 몸을 담갔다.

온몸의 끈적함과 찜찜함이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참방.

곧 또 다른 물소리가 이어졌다.

메브가 들어온 것이리라.

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내가 이걸 의식해서 어쩔 건데.

이안은 얼굴에 찬물을 한 번 끼얹고는 묵묵히 몸을 씻었다.

물소리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까 묻지 못한 게 있는데."

불쑥, 메브가 입을 열었다.

이안이 어깨와 가슴을 지나, 허리에 묻은 핏물을 닦을 때쯤이었다.

"말씀하시오."

"다친 곳은 없나?"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피식 웃은 이안이 대꾸했다.

"없소. 경은?"

"나도 없다. 대단하군. 늑대 인간과 싸웠으면서 상처 하나 없다니."

"운이 좋았소."

"그럴 리가. 네가 싸우는 것을 봤다. 뭐랄까…."

잠시 말을 고른 메브가 덧붙였다.

"독특하더군. 정해진 형식이 없다고 해야 할까. 기사인 나보다도 실전적이었어."

"근본이 없다는 말씀을 어렵게 하시는군."

대수롭지 않게 한 대답에, 메브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나야말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오. 근본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거든."

등 뒤에서 짧은 숨소리가 스쳤다.

"농담이 재미있군. 아까부터."

농담 아닌데.

"필립을 부리는 태도도 그렇고. 넌 분명 보통 용병은 아니다, 이안. …하긴. 요즘은 귀족 출신 자유민이 아예 드문 일은 아니지."

등을 닦던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귀족 출신…?"

"용병 흉내를 내도, 품고 있는 지혜나 말에 묻어나는 식견까지 숨길 순 없는 법이지."

이건 또 뭔 헛소리야.

"나는 길바닥 출신이 맞소만."

이안의 대답에, 다시 한번 희미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그것이 메브가 웃음 지을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이젠 내가 농담이냐고 묻고 싶군.

이안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메브가 그런 오해를 한 이유도 물론 이해는 되었다.

어려운 단어는커녕,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인 세계였다.

현대인인 이안은 상대적으로 박식해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선, 그것만으로도 고귀한 혈통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지식과 교양은 귀족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메브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 하나쯤은 있는 법일 테니."

"경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소?"

이안이 불쑥 되물었다.

정말 궁금하기보단, 이러다간 오해가 끝도 없을 것 같아 던진 질문이었다.

역시나, 메브의 말이 끊어졌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이안이 마저 씻으려는 찰나.

"…없다고 하진 못하겠군."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리우렐 가의 여인이 아니라, 티르 엔의 사도이자 왕국의 검으로 살아가기로 한 몸이니까."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안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말문이 제대로 트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궁금하지도 않은 사연 따위를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묻지 못한 말이 있는데."

이안은 다시 말끝을 잡아챘다.

"티르 엔은, 어떤 신이시오?"

이왕 물꼬가 트인 김에 품고 있던 의문이나 풀고자 한 것이다.

메브는 티르 엔의 사도였으니까.

사도는 신의 축복을 받아 권능의 편린을 휘두르는 자를 뜻했다.

당연히 그녀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권능일 터.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니, 제대로 알아두려는 것이었다.

쉽게 상대할 방법까지 찾아낸다면 더 좋고.

질 것 같지 않다고 해서, 굳이 정공법만 택할 필요는 없었다.

"진심으로 묻는 건가?"

메브가 되물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들과 친한 편은 아니라서.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지만, 그뿐이오."

아퀼로니아의 세계관에는 신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플레이어가 직접 찾아보지 않는다면, 굳이 신의 이름과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티르 엔도 그랬다.

종종 그 이름을 부르짖거나 기도문을 읊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마법사인 이안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고, 퀘스트나 스토리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이름도 아니었다.

"…하긴. 그래. 편히 모실 수 있는 분은 아니시지. 티르 엔은 단죄의 신이시다. 저 빛나는 루 솔라의 차녀이며 죄업을 참하는 검이시지."

메브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해서 그분의 사도인 나는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을 말할 수 없으며, 죄를 외면할 수도 없다. 신의 총애를 잃는다면 축복도 사라질 테니."

"참 힘드시겠소. 이런 시대에."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게다가 첫 번째 이름이 그렇다면, 다른 이름은 더 대단하시겠군."

"이명 말인가? 물론이다."

메브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배신과 타락이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 만큼, 아퀼로니아의 세계에 절대적인 것은 없었다.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빛의 신인 루 솔라의 다른 이름이 맹신인 것처럼.

이안이 물었다.

"무엇이오?"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복수."

"...!"

"죄를 잘라냄은 결국 누군가의 복수를 대신함이요, 때로는 그 자체로 복수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 단죄의 다른 이름은 복수인 것이다. 정당한 복수는 티르 엔의 수호를 받지."

"그렇군…."

읊조리는 이안의 눈이 일렁였다.

비로소 게임 속 피 흘리는 복수자의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죄의 사도가 복수의 사도가 되었던 거였어.'

사도의 권능을 약하게 만든다면 그녀를 상대하기 훨씬 편해지리란 의미였다.

성기사는 사기적인 전투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았다.

심지어 그 약점도 방금 본인이 스스로 밝힌 참이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이안은 곧바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 후에 등장한 복수자의 원한도, 티르 엔의 권능이었던 건가.'

피 흘리는 복수자는 일회성 중간 보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복수자의 원한이라는 이름의 망령으로 재등장하여, 1챕터의 최종 보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하는 역할까지 했다.

망령은 곧바로 소멸했지만, 보스는 그로 인해 체력과 모든 능력치가 반 이하로 떨어졌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도 꽤나 상대하기 어려웠지만.

'망령 없이 싸우면 더 어렵겠지.'

이안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선택지 같은 건, 그다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군.'

어쩌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결론을 내렸을 때였다.

"너는 어떤 신을 모시지?"

메브가 문득 덧붙였다.

이안은 벌떡 일어서며 내뱉었다.

"아무도."

"모시는 신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소. 앞으로도 없을 거요."

어쩌면, 아니 아마도. 나를 이 세계로 끌고 온 건 그것들일 테니까.

한때는 데이터 조각에 불과했을 것들이 어쩌다 실존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모든 불행의 원흉일 확률이 가장 높은 이상, 상전으로 모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또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이안은 대답 없이 물가로 나갔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그의 귓가로, 메브의 담담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분명, 이 순간에도 너를 지켜보는 신이 있을 것이다. 이안. 어쩌면 이미 탐내고 계실지도 모르지."

이안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흩어지는 먹구름 사이로 달과 별이 반짝였다.

그를 지켜보는 것처럼.

그 한복판을 향해 중지를 치켜들며, 이안이 말했다.

"출출하군. 식사나 하러 갑시다."

***

아침이 오자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하늘을 덮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곯아떨어졌던 필립은, 다음 날이 되어서도 기어코 늑대 인간 타령을 해 댔다.

숲을 지나는 동안 따로 할 일도 없었기에, 몇 시간쯤 타령이 이어지자 이안은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그래 봐야 늑대 인간이 덤볐고 칼로 썰어버렸다 수준의 담백한 이야기였지만.

"나리는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는 법이 없으시군요. 이걸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필립에게는 다르게 와닿은 모양이었다.

"나리께서 코볼트 부족을 정벌하신 것 역시, 실제보다 훨씬 축소된 소문이었으리란 사실을요."

"부족이 아니라 일개 산채였다. 정벌이 아니라 전투였고."

이안이 정정했지만, 앞장서 걷는 필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늑대 인간이라니. 그 정도 되는 마물을 실제로 본 건 처음입니다. 아, 물론 머리뿐이지만요."

뭐 대단한 마물이라고.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마물은 남부에도 많을 텐데."

"아뇨. 국경 지대에는 거의 없습니다. 남부 요새 주둔군이 주기적으로 소탕해서 씨를 말렸거든요. 해적질이나 하던 놈들이 나라를 세웠답시고 틈만 나면 쳐들어오는데, 마물까지 등지고 싸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필립이 덧붙였다.

"제가 남부로 간 건 거의 6, 7년 전입니다. 그땐 꽤 평화로웠죠. 그래서 왕국에 마물이 창궐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도, 별로 와닿지 않았었습니다."

"이젠 충분히 와닿겠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입니다. 여정 내내 마주친 적이 거의 없거든요."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의 없다고…?"

"예. 백작령에 들어서고도 꽤 평화로웠으니까요. 사람들은 힘들어 보였지만, 그야 전쟁을 대비하면서 남부도 비슷했고. 진짜 마물다운 마물을 본 건 저 늑대 인간이 처음입니다."

"...."

그럴 리가.

이안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그가 아겔 란에 발을 들인 후 마주친 마물의 숫자만 해도 기백은 족히 될 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임의 설정이었다지만, 마물이 이렇게 많은데도 나라가 유지된다는 사실에 몇 번이나 놀랐었는데.

"사실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메브가 말했다.

"필립이 흑마법사의 존재를 믿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루몬 백작령에 들어서고 나서도, 우리가 마주친 마물은 고블린이나 코볼트 몇 마리가 전부였어."

얼마나 운이 좋아야 그럴 수 있지.

눈을 끔뻑이던 이안은,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다시 필립을 돌아보았다.

"남쪽에서 백작령까지 올라왔다면, 계속 관도를 따라 이동한 거냐?"

필립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발크 성에서부터 크고 작은 마을을 거치며 이동했습니다."

"하."

비로소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늪지대에서 나와 도착한 도시가 발크시였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용병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도 거기서부터였다.

이 세계의 다른 영주들이 그렇듯, 루몬 백작 역시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영주가 있음에도 도시의 치안은 개판이었다.

이안은 돈을 받으며 도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관도를 따라서 다음 마을을 찾아 이동했다.

이후로도 거쳐 가는 마을과 관도의 마물을 죽여 없앴으니, 우연히 같은 경로로 이동한 메브와 필립의 여정까지 평화로워진 것이다.

"내가 꽃길을 깔아 줬던 거군…."

읊조린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숲의 가장자리가 보였다.

필립이 물었다.

"꽃길이라니요?"

"네 좋은 날은 끝났단 거야. 필립."

시선도 돌리지 않고 대꾸한 이안이, 앞서나가며 덧붙였다.

"왕국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개판이니까."

"...?"

필립이 그 말의 뜻을 깨달은 것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011화

숲을 벗어난 일행은 관도를 따라 이어진 언덕을 올랐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건,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였다.

"루 솔라여…."

필립이 탄식했다.

언덕 아래, 잿더미가 된 마을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렇게 바로 개판이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다시 말을 몰며 읊조렸다.

그의 시선이 마을을 훑었다.

불타거나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들.

끽해야 백여 명쯤 살았을,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도적 떼가 습격했던 걸까요. 어쩌면 저희가 마주친 늑대 무리가 범인 일지도요."

필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늑대가 불을 지르지는 않았겠지."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역시, 도적들의 소행으로 보시는 겁니까?"

"글쎄…."

"만약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안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메브가 불쑥 끼어들었다.

"백성들의 터전을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다니."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새삼스럽게 열 내고 난리야.

슬쩍 돌아본 이안은, 그녀가 정말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녀는 진심으로 정의와 명예를 추구하는 성기사가 아닌가.

이 암흑시대에서 그건 결국, 온갖 더러운 상황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처럼.

아마 게임에서도 이딴 일들에 시간을 허비하다가 끝내 흑마법사를 찾지 못했던 거겠지.

그런 속내와는 달리, 이안은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잔 말씀이시오?"

내심 그도 뭔가 퀘스트가 있지 않을까 싶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나서는 걸 말릴 이유는 없었다. 시간 낭비를 걱정할 이유는 더더욱.

"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메브가 고개를 끄덕인 찰나였다.

"재고해 주십시오. 나리."

필립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메브가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하였느냐, 필립?"

"이 마을에 일어난 비극은 저 역시 몹시 애석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왕국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안의 눈썹이 절로 내려앉았다.

이 새낀 꼭 잘 나가다가 이딴 식으로 한 번씩 찬물을 끼얹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만약 나리께서 왕국에 깃든 어둠을 거둬내지 못하신다면, 다음엔 마을 하나가 아니라 왕국 전체가 잿더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필립은 두 사람의 시선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꿋꿋이 할 말을 끝냈다.

"…옳은 말이다, 필립."

이윽고 메브가 대꾸했다.

이안이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하나 이런 참상을 지나치는 것은, 왕국의 기사이자 티르 엔의 사도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을로 시선을 돌린 메브의 목소리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이안의 미간이 다시 매끈해졌다.

역시 명예를 아는 기사로군.

반대로 말문이 막힌 필립이, 고개를 숙였다.

"나리의 뜻이 그러시다면…. 다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곧 해가 질 겁니다."

"알았다. 네 충언은 명심하지."

이안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시간은 걱정하지 마시오."

"...?"

필립과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필립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의 서늘한 눈빛에 필립이 움찔할 찰나, 메브가 물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는 건가?"

"특별한 방법이랄 것도 없소."

이안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꾸하며 손을 뻗었다.

"직접 들으면 될 것 같으니."

"직접…?"

메브의 시선이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잿더미 너머.

마을 반대편의 관도 인근이었다.

황량한 땅과 비슷한 색의 칙칙한 형체들이 꾸물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안의 말대로, 사람이었다.

"저걸 발견하다니."

메브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태연하게 형체들을 응시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무장한 네 놈이오. 셋이 땅을 파고, 한 놈은 길가에 있군. 옆에 뭔가 늘어놨소. 시체 같군."

충분히 수상한 상황.

메브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신을 묻으려는 거군. 그럼 저놈들이 범인인가?"

"그건 모르겠소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일단 붙잡아서 적당히 주물러 주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있을 거요."

"…알았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심문은 네게 맡기지."

그녀가 고삐를 후려치며 달려 나갔다.

"뭐, 그러겠소."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멀어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필립의 정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리는 항상 계획이 있으시군요. 제가 또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 덕분에 이 새끼와의 오붓한 시간도 만들어졌군.

이안은 다시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처럼 서늘한 눈빛에 필립의 어깨가 굳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말할 때 자꾸 끼어들다간, 목 위도 짧아지게 될 거야. 필립."

필립이 입술을 애써 말아 올렸다.

"하하, 또 그런 무서운 농담을…."

"혀부터 짧게 만들어 줄까?"

필립의 입이 단숨에 닫혔다.

이안이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먼저 간다. 따라와라."

"…바로 쫓아가시려고요?"

"내가 늦으면, 저것들 전부 리우렐 경에게 죽을 것 같거든."

암흑시대의 머저리들은 대부분, 명줄을 재촉하는 능력만큼은 기가 막히게 타고났으니까.

"그럼 저도 함께 타고 가는 건-."

이안은 더 듣지 않고 달려 나갔다.

***

세 남자는 역할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은 낡은 삽으로 땅을 팠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단검으로 보조했다. 마지막 한 명은 옆에 있는 구덩이를 발로 밟아 다듬고 있었다.

역할은 달랐지만, 인상만큼은 하나같이 구긴 채였다.

"제대로 좀 해라, 새끼들아."

그들의 의욕 없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지막 남자가 결국 내뱉었다.

무리의 대장이기도 한 그의 이름은 미구엘.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한쪽 얼굴에 곰이 후려친 듯한 흉터가 있는 자였다.

그는 어깨에 걸친 석궁을 까딱대며 구덩이 옆에 늘어놓은 시신을 돌아보았다.

"겨우 무덤 여섯 개 파는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빨리 좀 끝내라. 곧 해도 떨어지는데."

"...."

남자들의 얼굴이 더욱더 구겨졌지만, 아무도 반박하진 않았다.

구덩이 중 하나는 미구엘이 혼자서 판 것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완벽하게.

"그렇다고 대충하진 마라. 말했지? 어제 꿈자리가 별로였다고."

이어진 잔소리에 남자들이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반 달라진 것 없는 모습들을 지켜보며 미구엘은 혀를 찼다.

부하들이 속으로 그깟 꿈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하고 투덜대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실력도 경험도 없는 애송이들이라는 증거였다.

칼 밥을 오래 먹은 자들은 사소한 미신과 징조를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물론 그가 유독 더 그런 것들을 믿는 편인 건 사실이었지만.

"저런 팔푼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내 팔자도 참 더럽…."

읊조리던 미구엘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그의 귀가 뒤이어 쫑긋댔다.

말발굽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미구엘은 석궁을 움켜쥐면서, 소리가 들려온 마을 쪽을 돌아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소리의 정체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맹렬하게 내달리는 전마. 그 위에 탄 번쩍이는 전신 갑옷. 그리고 푸른 마력이 아른거리는 보검까지.

모든 게 눈에 띄었으니까.

"저런 미친…."

미구엘의 입에서 결국 탄식이 흘렀다.

"왜, 또. 제대로 하고 있잖수."

"우리한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어…?"

땅을 파던 부하들도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저거, 저거, 설마?"

"기사라고…? 갑자기 왜?"

그들 역시 얼빠진 표정이 됐다.

손에 푸른 빛을 움켜쥔 기사가 노을을 등지고 달려오는 광경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래도 좆된 것 같은데."

그나마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건 미구엘이었다.

그는 곧바로 석궁을 앞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다들 활이든 뭐든 들어. 어서!"

"그,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대장? 튀어야지!"

"무슨 수로? 개소리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새끼들아!"

그제야 부하들도 엉거주춤 각자의 석궁과 활을 들었다.

"말을 겨눠! 그리고 절대 쏘지 마! 내가 쏘라고 하기 전까진 절대로!"

미구엘은 손을 벌벌 떠는 그들에게 윽박질렀다.

그들이 자세를 잡자마자, 기사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라!"

여자 목소리라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미구엘은 기사 쪽을 돌아보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쇼! 그러지 않으신다면 저희도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 기사의 성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칭 기사 나부랭이들이 워낙 많아 그렇지, 제대로 서임을 받은 진짜 기사는 건달이나 용병에겐 천재지변 같은 존재였다.

기사의 자비는 일반 백성들에게나 그나마 유효하지, 그들에겐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미구엘이 봤을 때, 저자는 진짜 기사가 틀림없었다.

싸운다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

그렇다고 무작정 튈 수도 없었다.

말을 따돌리는 건 둘째 치고, 도망친다면 뒤가 구리다고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게 잿더미가 된 마을의 시체 더미 옆에서라면 더더욱.

"멈춰 주십시오! 저희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된통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면, 일단 무조건 당당해 보여야 했다.

여기까진 의도대로 되고 있었지만.

"히, 히익…!"

문제는 다른 쪽에서 일어났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기 시작하자,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부하가 생기고 만 것이다.

피잉-!

익숙한 소리가 이어졌다.

석궁이 발사되는 소리.

"...?!"

이런 미친?

미구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의 시선이 발사된 볼트를 쫓았다. 그 와중에도 어이없을 만큼 정확하게 말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더 어이없게도, 기사는 그 작고 빠른 볼트를 검으로 쳐냈다.

파직-!

그것도 아주 손쉽게.

"뭐, 뭐 저런 괴물이…!"

석궁을 쏜 놈이 경악하고는, 석궁을 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난 튀겠어! 이건 미친 짓이야!"

내달리는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구엘이 고개를 돌렸다.

"당장 멈춰, 이 멍청한 새-!"

그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

번쩍- 푸확-!

뒤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섬광이 도망치는 놈의 등을 휩쓸고 사라졌다.

남은 건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솟구치는 잘린 상체.

털썩.

그리고 그 와중에도 두어 걸음을 더 달리고서야 허물어진 하반신뿐이었다.

남은 두 부하가 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는 가운데.

"망했군, 시부럴…."

입을 뻐끔거리던 미구엘이 이윽고 나직이 읊조렸다.

죽은 놈을 애도할 마음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살려내서 직접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령을 무시하고 공격한 것도 모자라, 동료를 버리고 튀려고까지 하다니.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라!"

추상같은 일갈이 귀를 때렸다.

"제기랄."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항복뿐이었다.

미구엘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만약 이래도 안 멈춘다면….'

그가 티 나지 않게 발목을 어루만졌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그에게도 살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고 기사를 죽일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도망칠 수는 있으리라.

미구엘은 숨죽인 채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의 돌진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미구엘의 앞에서 완전히 멈춰 선 것이다.

한고비는 넘은 셈이건만.

"...."

그는 여전히 안도의 한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여전히 기사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으니까.

머리 위에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목을 간질이는 한기.

"추, 충분히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나리."

미구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희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전부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죠."

"네 발언은 잠시 후에 듣겠다."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너희를 심문할 전문가가 도착할 테니."

미구엘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저, 전문가라고 하셨습니까?!"

새 머리 투구 너머에서 서늘한 살의가 내리꽂혔다.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

"넵…!"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미구엘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스치자 미구엘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문의 전문가는 고문의 전문가라는 뜻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없던 사실도 있게 만들어 낼 테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남은 평생을 불구로 살게 되리라.

'확 질러? 지금이라도…?'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미구엘의 뇌리로 어젯밤의 꿈이 스쳤다.

뒤를 쫓아오던 사신. 도망친 끝에 마주한 망자의 강. 그리고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떠 있던 배 한 척.

'어떻게 해야 탈 수 있지? 질러? 참아? 제기랄, 루 로지스여.'

미구엘이 갈등하는 사이, 말발굽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미구엘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혈통 좋은 전마에 탄 저승사자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검회색 각반과 가죽 갑옷을 지나, 마침내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 이안…?"

미구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안 호프?! 댁이오?"

"...."

남자,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미구엘에게로 향했다.

시선을 교환했지만 그뿐. 가볍게 한쪽 눈썹만 씰룩댄 그가, 대답도 없이 메브의 곁에 말을 멈췄다.

"나, 나요! 미구엘! 사냥꾼 미구엘! 용병 말이오!"

미구엘이 허둥지둥 덧붙였다.

"발크시에서 자주 봤었잖소. 특히 주점에서 말이오!"

이쯤 되자 기사, 메브의 시선도 이안 쪽으로 돌아갔다.

"아는 자인가?"

그녀가 물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얼굴 정도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아, 알아보셨다니 다행이오."

미구엘은 개의치 않았다.

'사신이 아니라, 배였구나!'

자신의 생사가 이안의 결정에 달렸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미구엘은 그를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시비를 걸거나 등쳐먹으려 잔머리를 굴리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더욱.

"기사 나리께서 말씀하신 전문가가 댁이 맞소?"

미구엘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마도."

"차라리 잘되었군."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결연한 눈빛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든 묻는 대로 답하겠소. 진위는 댁이 판단해 주시오. 댁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잖소."

"호오…?"

이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실제로도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친한 척하며 비벼대면 손톱부터 하나씩 뽑을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납죽 엎드릴 줄이야.

하긴, 전에도 눈치가 없진 않았지.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린 이안이 물었다.

"마을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01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