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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니맵의 끝자락.

그러니까 대략 2km는 떨어져 있는 장소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휘유... 아저씨, 진짜 직업이 집사예요?"

이하린이 그 광경에 감탄하며 조종실을 향해 걸어온다.

"...Buttler, 그 집사 맞죠? 막 이상한 한자 섞어서 다른 의미가 된 게 아니고?"

다가오는 이하린에게 나 또한 질문이 있어 대답과 함께 질문을 건넸다.

"집사 맞다. 그보다 대체 그 고치는 뭐냐?"

"조건부 무적 상태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이에요."

암살자로 각성한 이하린 개인의 능력이 아닌 아이템이라는 다소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획득처는?"

주시자의 눈과 싸울 때 사용했으니, 이하린이 저 아이템을 얻은 지는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을 것이고.

"각성 선착순 보상이요."

예상했던대로 그녀는 첫 각성 때 이 아이템을 얻었다고 한다.

"고블린 한 마리였는데, 포탈이 열리자마자 놀라서 뭘 집어던졌더니 죽어서 나오더라구요. 그러자마자 눈앞에 뭔 각성 클래스 메시지가 나왔는데 마찬가지로 놀라서 맨 위에 있는 걸 외쳤어요."

것도 엄청난 운이 따라준 덕에 1등 각성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상황변화로 놀란 몸이 빠르게 반응한 것이었으니 마냥 운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마는 처음부터 다섯 마리의 고블린과 싸운 내 입장에서 보자면 '운빨 하나는 타고 났네'가 내 감상이다.

"2, 3등도 보상이 있을까?"

"흐음, 1등 보상이라 나왔으니까 아마 있지 않을까요?"

그런 운 좋은 놈들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내 우려대로 운빨 좀 따라주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 같다.

노력으로 얻는 랭킹 보상이 있으니 운으로 얻는 선착순 보상도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심 운빨이라는 것에 부러움이 들기는 한다.

"쿨타임은 7일인데 아이템 내구도 같은 건 없어요."

고치 내부에서는 무적.

24시간 지속 후 자동 해제.

파괴불가라는 특성까지.

최초의 각성 보상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딴 사기템이 말이 되나?"

"안 믿기죠? 저도 처음에 이준 씨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이야 저래서 집사구나 싶지만요."

갑작스레 끼어든 강소현의 말과 함께 대화는 끝났다.

멍하게 있자기에는 아직 미니맵 끝자락에는 푸른색 점이 남아 있다. 그것에 의식을 집중했다.

피유우우우우웅-!!!

피유우우우우웅-!!!

물론 의식만 집중한 건 아니고, 미사일 포대에서 열두 발의 미사일을 더 쏘면서 집중했다.

콰아아앙-!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미니맵에는 더 이상 푸른 점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든다.

쿠구구구궁-!

그래서 요새의 축소화를 풀고, 시야를 넓혔다.

고정 포탑에 올라타 푸른점이 있던 지점으로 안력을 집중했다.

탁 트인 시야.

요새 주변의 땅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렸고, 저 멀리 미사일이 만들어낸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칙, 치익-

미군이 전쟁을 할 때는 미사일로 황무지를 만들고 시작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아버렸다.

"쓰으읍."

사방을 깔끔하게 밀어버리는 위력에서도 살아남은 푸른 점 두 개가 있길래, 한 번 더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 점은 사라졌지만, 내 직감이 이상함을 포착해 버렸다.

"후우..."

아니나 다를까.

평지가 된 땅 위를 세 남자가 꽁지 빠지게 달리고 있었다.

아니지, 하나는 끌고 가고 있으니 두 남자라고 해야 되려나?

미사일을 한 번 더 쏘는 사이에, 범위 밖으로 튀어버린 것 같은데.

나름 비장의 수라고 생각했는데, 저걸 살아남다니.

"와. 저걸 살아남았네요."

내 옆의 고정 포탑.

그곳에 올라온 강소현이 말했다.

"블링크로 저곳까지 갈 수 있습니까?"

"아, 이거 사거리가 10m밖에 안돼요."

블링크는 불가.

미사일의 사거리도 닿지 않는다.

위이이이잉―

"강소현 씨도 같이 쏘시죠."

믿을 구석은 고정 포탑 하나뿐.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탓-!!

"2.5km 정도 돼 보이는데. 맞긴 맞네요."

피가 튀었다.

강소현도 나도 포탑 사용법만큼은 충분히 단련되었으니까.

그새 500m를 이동한 식인종의 보스.

2.5km라는 아득히 먼 거리지만, 주변에 엄폐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어찌저찌 맞혀낼 수 있었다.

여기서 로라가 힘을 보태준다면 좋겠다마는 아직 로라는 잠들어 있는 상태다.

기적이라 불러도 될법한 일을 일으켰으니, 이 이상 무리는 시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쉽게 됐군요."

맞히긴 맞혔다만, 저들은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찌 된 놈들인지.

유도탄 미사일 24발.

고정 포탑의 포화까지 견뎌내고 저걸 살아갈 줄이야.

또각, 또각.

어차피 내가 용산에 자리 잡은 이상 저들과는 계속 마주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회는 또 오겠지.

"다들 괜찮으십니까?"

가볍게 시작했지만 한없이 무겁게 끝난 레이드.

이제는 함께했던 자들의 안위를 묻고 성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 * *

강소현, 이하린, 장진아, 윤설, 윤솔, 박정수.

요새의 마당에는 도합 6명의 사람이 모려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시자의 눈'을 레이드의 성과를 공유했다.

시작은 놈을 잡고 나타났던 시스템 메시지였다.

「주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최초의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직접 놈을 사냥했던 나와 강소현, 이하린에게 적용되었다.

「최초로 레벨 10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이 세계에 기록됩니다.」

「신성의 조각이 로라에게 깃듭니다.」

「인벤토리에 마지막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당연히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들이었고.

"아저씨, 같이 잡았는데 우리는 왜 인벤토리 보상도 없고, 위업도 없어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Å」- 사용 불가

애초에 인벤토리 보상만큼은 나도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사용 불가에 뭔지 알아먹을 수도 없는 글자들이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느낌상, 돌아가는 상황상,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가 이뤄진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 10레벨을 달성해야만 주는 것 같은데?"

"그렇겠군요."

강소현이 제법 신빙성 있는 추측을 내놓았다.

「직업 전용 퀘스트 – 10레벨까지 고양이를 지켜라.」

「보상: 신성의 조각이 고양이에게 깃든다.」

내게 주어졌던 전용 퀘스트는 사라졌고, 로라에게는 신성의 조각이 깃들었다.

다른 것들은 다 확인했고.

인벤토리에 주어진 '마지막 보상'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는데, 뭐, 보상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어.

"이쯤 되니 이런 시스템의 보조가 어떤 의미로는 제약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드는 생각이 있어 물었는데.

"아, 그건 이준 씨가 이상한 능력을 얻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네요...."

"아저씨, 다른 사람들은 저런 거랑 싸울 생각 자체를 안 한다니까요!"

딱히 공감을 받지는 못했다.

'주시자의 눈'을 잡고 고작 2레벨밖에 안 오른 게 말이 안 된다고 느꼈고, 보호조치가 사라져야 빛을 보는 보상도 이상하게 느껴져서 말했을 뿐이건만....

"조, 좀비 웨이브는 왜 안 올까요?"

요새 위에 있는 사람은 7명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좀비 웨이브가 다가오지 않는다.

요새가 10m 위에 있어서 라기에는 전에는 웨이브가 왔었고, 아마도 주시자의 눈을 잡아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용산구청이나 가시죠."

인원을 나눌 필요도 없으니, 다같이 요새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나름 요새가 훌륭한 협상 수단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으니까.

"협상? 물자 교환하시려구요? 이제 남은 것도 얼마 없는데...."

물론, 무력을 통한 협상을 말하는 거다.

"... 아, 이걸로 위협하면야 뭐든 잘 통하지 않을까 싶네요."

* * *

쿠우웅-!

「위업」

「1. 이준(李俊) '주시자의 눈'을 사냥해 최초의 각성자가 되다.」

"아저씨 랭크보드 옆에 위업 게시판 나온 거 봤어요?"

"봤다."

이 망할 놈의 시스템은 개인정보 보호법 따위는 적용되지 않는다.

본명에 것도 한자까지 처박아 넣은 것을 보면 그렇다.

어쨌든, 저 위업을 해석하자면, 기존의 우리가 각성이라고 여기던 것이 진짜 각성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된다.

"10렙부터가 진짜 각성 취급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이 정보를 공유해줬고, 별다른 정보도 없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위업 보상 – 숨겨진 조건 달성 시 개방」

물론 내게는 주어진 것이 더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진짜 숨겨져 있어서 나도 뭔지 모르겠거든.

뭔놈에 감춰진 것들이 이리 많은지...

쿠우웅-!

이태원 대로변부터 용산구청까지는 차로는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쿠우웅-!

뭐, 시속 30km로 이동하는 요새로도 비슷하고.

"아저씨, 우리는 다시 돌아오는 거죠?"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170:13」

약, 7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용산구청에서 정보 수집에 3일, 돌아가서 고블린 왕국을 처리하는 데 4일.

"흐음, 이준 씨, 나름 여유롭게 일정을 잡으셨네요."

동료들과 적당한 시간분배를 마쳤고, 이제 코너만 돌면 용산구청이 보일 것이다.

쿠우웅-!

"슬슬 준비하시죠."

용산구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저씨, 왜 멈추세요?"

"다들 구청 좀 보시죠. 저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나는 멀쩡한 구청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또각, 또각.

감시 카메라로 보이는 모습으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포탑 위에 올라가서 맨눈으로도 확인했다.

구청의 반은 사라져있지만, 나머지 반은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유리창조차 깨지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멀쩡한 반쪽의 너머로는 거대한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텐트, 천막, 판잣집 같은 것들이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전기? 이준 씨, 저거 형광등 불빛 맞죠?"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구청의 모든 층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소현이 백색 마탑에서 듣기로는 '안전지대'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저건 숫제 별천지 이세계가 아닌가?

"대충 세도 2,000명은 넘어 보여요. 싸울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하아... 대체 제가 뭘로 보입니까?"

"거대 괴물과의 전투를 즐기는 미친놈?"

즐기지는 않았다만.

딱히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질 않는다.

"저들이 식인종이 아닌 이상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쵸?"

게다가 사람 수도 상상을 초월하게 많았다.

기껏해야 수백명일 줄 알았건만, 수천 명이 있다니.

그말인즉슨.

용산구청에는 수천 명을 먹여 살릴 식량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기이한 용산구청의 모습에 다들 할 말을 잃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요새를 마저 용산구청 쪽으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다들 전투 준비하시죠."

구청 방향해서 약 30여 개의 푸른색 점이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만일을 대비해 포탑을 가동하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삐이익!

-삐이이익-!

얼마 안가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들리십니까?

그리고 확성기 소리도.

-용산 경찰서장, 임민재입니다!

"경찰...서장?"

"아저씨, 경찰서장이 어떻게 살아있죠?"

그러게 말이다.

경찰서는 아포칼립스의 시작과 동시에 박살났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피난, 대피, 혹은 물자 지원을 위해 오셨다면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규칙에 의거해 10분간 무대응이면 저희도 무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용산구청 생존자 캠프 규칙에 의거해 10분 이내 목적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무력을 동원한 강제 퇴거 조치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망한 세상 속에서도 깐깐하게 매뉴얼을 따지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 경찰이 맞기는 한 모양이다.

뭐, 법령 대신 자체 규칙에 따른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만.

또각, 또각.

일단 저들도 대화를 원하는 것 같으니.

"주차 가능합니까?"

담장 위로 올라가 물었다.

#42. 별천지 이세계 (2)

"레이먼드, 오늘도 사냥?"

몬스터 킬 랭킹 2위.

레이먼드 레밍턴은 텍사스에서 이름난 사냥꾼이다.

본직이 사냥꾼은 아니지만, 미친듯이 몬스터 사냥을 다닌 탓에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텍사스 코야노사(Coyanosa).

페코스 카운티에 편입되지 못한, 사막에 지어진 작은 마을이 레이먼드 레밍턴의 주요 활동 무대다.

사막 마을이라 본래 문명이랄 것도 없이 황폐한 곳이였지만, 아포칼립스가 찾아온 이후로는 텍사스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되었다.

"저새끼는 안전지대 냅두고 맨날 사냥이냐."

퀘스트로 주어진 몬스터 웨이브는 일어나지만, 좀비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

안전지대.

텍사스 코야노사(Coyanosa)는 그런 장소가 되었다.

집집마다 적게는 수 키로에서 수십 키로까지 떨어져 있고 대부분이 단독주택인 텍사스의 특성상, 생존자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중, 으뜸가는 생존자는 레이먼드 레밍턴이다.

카우보이 모자.

징박힌 바지.

거친 수염.

히이이이잉-!

그가 말 위에 올라탄다.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폭력적으로 생겼지만, 말은 말이다.

철컥-

그 위에서 장총을 장전하는 레이먼드.

파앗-!

「몬스터 킬」

1등: 이준(218,876) - 대한민국

2등: 레이먼드 레밍턴(35,998) - 미국

"젠장, 어떻게 해도 따라잡지 못하는 건가. 갑자기 10만이 늘어있다니...."

서부 무법시대를 꿈꾸던 청년은 중년이 되었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아포칼립스가 찾아온 뒤로 배나온 중년 아저씨는 다시금 카우보이의 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타앙-!

무법의 시대가 찾아왔건만, 만년 2등의 자리에 머무르게 된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서러웠다.

"그래도 그 게이트만 어떻게 해본다면 또 모르지."

아직 그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파앗-!

「위업」

「1. 이준(李俊) '주시자의 눈'을 사냥해 최초의 각성자가 되다.」

"또 그가 이렇게 앞서나가는가...."

레이먼드 레밍턴.

그의 경쟁상대는 이준이다.

이준은 레이먼드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지만, 레이먼드는 이준을 따라잡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개같군. -퉤엣."

히이이이잉-

폭력적인 말이 레이먼드의 분노에 교감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고블린 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 * *

"...."

담장 위에 올라선 나.

그리고 그 아래에는 용상 경찰서 서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가 멍하게 서 있었다.

요새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는 그.

"주, 주차 말씀이십니까?"

한참 뜸을 들이고는 한다는 말이 내 말의 되풀이였다.

세상이 망하고 나서도 관공서 일처리가 답답한 것은 변함이 없었다.

"위, 윗선에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일부 인력을 우리를 감시시키기 위해 대기하게 만들고 그는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이상해졌네요."

"뭐가요?"

"아니, 움직이는 요새를 끌고 주차를 묻는 이준 씨나, 그걸 확인하겠다고 구청으로 달려가는 경찰서장이나, 다 이상하다고요."

음....

적이 될 수도 있는 경찰관들.

그들이 달려오자마자 거대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멘 강소현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내가 아무리 미쳤어도 강소현만큼은 절대 안 미쳤다.

"눈빛이...."

"크흠, 그래도 이곳에 경찰서장의 윗선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 않습니까?"

강소현의 독심술.

그것이 발동하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오!! 아저씨 예리한데요?"

그리고 이하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들었으니, 이하린에게 몇 가지 부탁을 좀 했다.

"저길 훔쳐보고 오라고요?"

'암살자 협회'의 초청으로 '암살자'로 전직한 이하린.

그녀에게는 은신이라는 스킬이 있으며, 그것은 미니맵에서조차 이하린을 안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그, 그거 유지 시간이 5분인데."

번개가 튀는 신발.

저 안의 상황이 어떤지 미리 확인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아저씨,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라고 말은 하지만 이하린의 몸은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장 해제가 불가능하시다면 구청의 영역 내부로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주차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 * *

이동식 요새.

작아지게 만드는 축소화 기능도 있지만, 외부인의 접촉을 막는다거나 내부 인원을 관리하는 등의 기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말인즉슨.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내 집을 지키는 집사로서 내가 남고는 싶다마는, 안전지대의 내부 상황을 제대로 보고 싶었기에 망설이고 있었다.

"제가 남을게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소현이 말했다.

"영감들이 뭘 배우라 그래서."

또 그 무뢰배들을 만나러 간다는 말인가....

것도 차원의 틈새까지 가서.

그러면 남는 의미가 있나?

"아, 차원의 틈새로는 지금은 못 넘어가요. 약간, 이 상태창에 간섭해서 소통하는 방식인데. 힘을 키우라나 뭐라나."

뭐, 그렇다고 하니 요새는 강소현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

"이거 가져가세요."

그녀가 꼬질꼬질한 양피지 한 장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내게 건낸다.

"...."

때가 잔뜩 묻고 낡고 삭은 양피지.

"조금 더럽죠? 그, 마탑 영감들이 쓰던 거라."

차마 저걸 만질 수가 없었다.

"로라 목걸이는 지금은 못 쓸 거 아니에요? 이거 텔포 스크롤이에요."

강소현 그녀의 말이 맞다.

나도 안다.

하지만 차마 저것을 만지기가 힘들다.

장갑.

장갑이 필요하다.

아니, 하다못해 손수건이라도.

"자요."

강소현이 또 하나의 물건을 내게 건넨다.

그것은 새하얀 손수건.

"감사합니다."

손수건을 받아 들고 꼬질꼬질한 양피지를 집었다.

순간, '저 손수건도 양피지를 만진 손으로 잡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마는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백색 마탑의 텔레포트 스크롤」

「지정 대상의 근처로 이동한다.」

이세계 사람들이 쓰던 물건도 아이템 판정이 되는 모양이다.

저렇게 상세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면.

요새 수비를 강소현에게 맡긴 후, 바바리안들과 강소현은 작별인사의 시간을 가졌다.

와락-!

"어, 언니!!! 또 봐요!"

"어, 어... 그래. 또 보자."

바바리안 부족들이 강소현을 한 번씩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린다.

거, 영원히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저리 오바들을 하는지... .

또각, 또각.

"이준 씨, 요새는 맡겨 둬요. 위급하면 통신기 쓰시는 거 잊지 말고요."

내가 요새를 나가게 되는 입장이라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대사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산구청, 안전지대로 향했다.

"저 이상한 집은 이 이상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이동식 요새입니다만."

경찰관의 무례한 발언을 정정해준 뒤 우리는 안전구역 내부에서의 우리의 신분을 정했다.

바바리안 부족민들은 '피난민' 신분으로.

나는 '교류를 위한 방문객' 신분으로.

"잠시 대기 부탁드립니다."

경찰 서장이 우리를 안내한 장소는 반토막난 용산구청의 입구에 쳐진 천막이었다.

커다란 투명 천막.

그 안에는 정복을 입은 경찰 둘이 서 있었고, 천막의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우리를 감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로로롱~ 고로롱~』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는지 로라가 어깨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앉아서 고개는 살짝 든 상태로 존다.

소위 '식빵 굽는 자세'라고 부르는데, 고양이에게 남은 야생의 습성 중 하나다.

언제든지 자다가도 도망갈 수 있게끔 그렇게 자게 진화했다는데....

내가 볼 때는 '그냥 귀여워 보이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강소현이 해준 말도 그렇고.

유튜브에서 봤던 것들도 그렇고.

로라를 키워 보니까, 고양이의 야생성 이런 것들에 공감이 가지 않는달까.

"아, 이준 씨, 로라도 데려오셨네요."

말없이 서 있던 내게 장진아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걸 물어보십니까."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집사가 있는 곳에 고양이가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고양이가 없는 곳에 집사가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바바리안 부족들과 잡답을 조금 나누는 사이 반토막난 용산구청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건물이 가로로 반쯤 사라져 있었기에 창문 외의 무너진 단면에서도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와, 저 사람은 옷이 뭐 저렇냐."

바바리안의 직업 전용 의상은 표범무니 가죽 조각이다. 좋게 봐도 야만족 혹은 원시인 같은 모습.

"정장도 아니고 뭔 저런 이상한 옷을 입었대."

"큭큭, 나비넥타이까지 있네."

허나,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더 많았다.

집사복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미복 혹은 정장에 속하는 나름의 현대적인 의복이다.

대체 왜 저 가죽때기보다 내게 이목이 가는 건지....

"직업 맞추기 콜?"

심지어 내 직업을 가지고 내기까지 벌여대니.

"오천 포인트 건다. 나는 집사."

"아, 나도 집사라 하려 했는데."

그래도 이게 집사 같아 보이긴 하는 모양이네.

어딘지 모르게 안도감이 든다.

이것 또한 전직하고 생긴 이상한 본능 탓일 테지만, 애써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구경하는 놈들은 건물 위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경찰서장이 친히 마중까지 나와서 그런지, 지상에서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가 가까운 만큼 섣불리 입을 놀리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30분의 대기.

그 후의 호출.

긴 절차와 복잡한 과정으로 보아 하건대 구청 안의 실권자는 정치인 혹은 공무원일 가능성이 높다.

"로라, 알지?"

『냐아!』

금빛 신성, 시체 거인에게 나온 액체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사람이 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로라에게 언질을 건넸다.

아무리 봐도 이만한 규모의 시설이 고장 '구청장' 따위의 직급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거든.

것도 멸망한 세계에서 말이야.

* * *

또각, 또각.

파앗-!

「위업보상 – 숨겨진 조건 달성 시 개방」

「숨겨진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안전지대.

용산구청 입구의 경계를 넘자마자 나타난 메시지.

위업 보상의 숨겨진 조건이 달성되었다는 의미인데, 조건 달성만 되고 딱히 별다른 건 나타나지 않았다.

뭐, 기다리다 보면 나오겠지.

시스템 메시지가 언제는 친절한 적이 있었나.

"타시죠."

나를 안내해준 경찰서장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며 말했다.

띠잉-!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멈춰서 버렸다.

"...전기가 어떻게?"

용산구청에서는 진짜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것도 엘리베이터가 운용될 정도로.

"자세한 얘기는 구청장님께 들으십시오."

2층.

3층.

4층.

그리고.

띠잉-!

5층.

"용산구청장, 이준모입니다."

자신을 용산구청장이라고 소개한 사내.

머리의 정중앙은 반짝이는 대머리였으며, 구렛나루 라인으로는 머리가 제법 나 있었다.

즉, 일전의 강소현의 추측대로 '탈모'는 각성으로도 치료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로라 아버지, 이준입니다."

앞에 '용산구청장'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일종의 과시이기도 하다.

제법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 느껴졌으니.

그러니 나도, '집사'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나를 소개했다.

"...그 고양이 이름인가요?"

"그 고양이가 아니고 로라입니다만."

"아, 네."

어딘지 모르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강소현이 있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크흠, 대체 여기는 뭡니까?"

잡담을 나누기도 귀찮아서 그냥 본론을 꺼내 버렸다.

"아... 그쵸. 빨리 본론부터 얘기하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시작된 용산구청장과의 1:1 면담.

직업이 직업이라 그런지 제법 핵심만을 관통하는 실속 있는 대화였다.

"뭐, 구청에서 한 잔 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용산구청장은 우연찮게 안전지대에서 아포칼립스를 맞았다.

"전기는 어떻게 통하는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그저, 안전지대는 세상이 망하기 전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지."

물, 전기, 가스.

기존 건물에 있던 설비들은 모두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이곳의 관리자라, 추방 권한이 있습니다."

구청장은 '전사'로 전직했으나, 안전지대의 관리자라는 특이한 능력을 얻어서 굳이 갑옷과 검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상태창에 나온 버튼 한 번이면 원하는 사람을 추방할 수 있다니.

허공에 손가락을 왜 대고 있나 했더니, 여차하면 나를 추방시키려는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래도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조금 싸워 봤습니다. 뭘 해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몬스터 웨이브에서 나오는 고블린.

놈들은 안전지대의 경계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단다.

"그래도 수가 쌓이니 제법 징그럽더군요. 그 때 경찰서장 그 친구가 참 많은 도움이 됐죠."

경찰서장은 우연찮게 용산구청장과 함께 이곳에서 같이 한잔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 구청장이 경찰서장을 불러서 구청에서 한잔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지....

세상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기자들이 제법 좋아했을 법한 얘기다.

"그래서 제가 치안 관리자로 지정을 했습니다."

즉, 이곳은 현대 사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권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구청에서 한잔 했다는 구청창.

그리고 그런 구청장에게 잘 보이려 왔던 경찰서장.

때마침 운 좋게 안전지대로 지정된 용산구청.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전사'는 구라고 '행운의 여신의 총애를 받는 자'로 전직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순순히 해주는 게 수상해서 그 이유를 물어 봤는데.

"그야, 뭐, 추방된 사람들이나 이곳 사람들한테 얘기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라는 대답이 나왔다.

너무나도 무방비한 모습.

아무래도 우리가 밖에서 개고생하는 사이, 저들은 안전지대에서 꿀만 빨고 있었던 게 맞는 것 같다.

좀비 웨이브도 없었고.

"아, 없진 않았죠. 그놈들이 몰려다니는 건 봤으니까요. 그래도 절대 안전지대 안으로는 안 들어오더군요."

몬스터 웨이브의 고블린들을 죽인 방식도 꿀 그 자체였다.

"그냥 안전지대의 경계선 너머로 고블린들이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일방적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관공서 건물은 고블린이나 괴물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건 없었습니까?"

듣다 보니 기분이 안 좋다.

"아, 엄청 큰 거인이 왔었죠. 건물 반쪽이 박살난 것도 그래서 그럽니다. 안전지대 안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요."

은근하게 '우리는 개 꿀 빨았는데?'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것 같아서.

뭐,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이런 얘기들을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어쨌든 들을 건 다 들었으니, 이제 내가 말할 차례.

뭘, 먼저 말하는 재주는 없어서, 깔끔하게 그에게 이유를 먼저 물어 봤다.

전문용어로는 '선제시'.

저렇게 설명을 해 준 것은 내게 무언가를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아, 별건 아니고 요즘 이곳 치안이 안 좋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저희 구청에 식인종들도 조금 숨어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내부 정리를 좀 할까 하는데,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외부인.

이동하는 요새라는 거점이 있으며.

어차피 얻을 것만 얻으면 나갈 사람.

구청장이 밖에서 온 사람들을 일일이 면담했던 이유다.

그리고....

「숨겨진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불법 점유 중인 세력을 몰아내고 적법한 안전지대의 주인임을 증명하세요.」

「영역을 선포하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때마침 해금된 위업 보상이 나타났다.

보상이라기에는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만.

#43. 별천지 이세계 (3)

우연찮게 구청에서 한잔 걸치다가, 우연찮게 안전지대로 지정되고, 우연찮게 안전지대의 관리자가 되었다는 구청장.

"...그, 사실 이준 씨의 전투 과정은 다 들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사이에 도로를 건너 용산구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이준 씨가 식인종들 수백을 잡으셨다고."

그들의 목격담을 토대로 구청장은 정보를 얻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정보를 가지고 내게 구청 내부 정리를 부탁하는 것 같고.

"그리고 뭔 괴물을 잡았다는 말도 있었는데 혹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들으신 그대롭니다."

이 틈에 뭔가 정보를 얻어 볼 생각인 것 같은데, 쉽게 내 패를 보여줄 수는 없으니 대충 뭉뚱그려 대답했다.

아직 나는 이곳이 어떤지 알지 못하니까.

"아, 예. 밖에서 오신 분들은 다들 자신에 대한 것들을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으니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

밖과 안.

구청장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이분법적인 사고가 이뤄지고 있었다.

안전지대 수장의 머리가 저 꼴인 걸 보면, 내부의 상황도 비슷하겠지.

"그래서 대가는 뭡니까?"

다짜고짜 내부 정리를 도와달라는 구청장에게 보상을 물어봤는데―

"세상이 복원된 후, 이 일대의 땅을 드리죠."

병신 같은 것을 보상이랍시고 내놓았다.

진짜 미친 새낀가?

"...어째 밖에서 오신 분들은 다들 이렇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네요."

"대체 세상을 어찌 복원하겠다는 말입니까?"

"안전지대를 거점으로 조금씩 영역을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그 뭐 조건이 있긴 한데, 안전지대는 그 영역을 넓힐 수 있습니다."

완전히 미친 새끼는 아니었고, 나름에 합당한 근거가 있긴 했다만.

"다른 건 없습니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안전지대가 넓어져 봐야 얼마나 살만하겠는가?

대충 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용산구청의 미니맵은 숫제 파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부 사정을 더 봐야 알겠지마는 현재로서는 복원된 세상의 땅이 내 요새보다 가치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식량 그리고 의복은 어떠신지...."

전용 방어구가 있는데, 뭔 놈에 옷을 주겠다고.

"식량으로만 하죠."

그래도 완전 맛이 간 건 아니었는지, 그가 다음으로 제시한 것들은 나름 합리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나쳤다.

첫 제안이 미친만큼 두 번째 제안도 미쳤다.

그 방향은 조금 달랐지만.

쌀 20kg 20포대.

구청에 보관 중인 채소류 모종 200개.

각종 가구들까지.

"식량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닙니까?"

가구는 그렇다치는데, 내부 정리를 돕는 것치고는 보상이 너무 많아 보여서 그에게 물었고.

"아, 식량은 충분합니다."

라는 대답을 들었다.

원래부터 구청이 식량을 비축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준다니까 받기로 했다.

"선금 반, 먼저 가져가겠습니다."

"...아, 네. 확실히 찾아만 주신다면야."

* * *

『키야오오-!!』

요새에 도착하자, 로라가 거센 함성을 내뱉었고.

휘오오오오-

내 몸을 금빛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갔다.

"끕...."

그리고 내 몸에서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미친."

고작 대화 몇 마디 했다고 그새 뭘 당한 모양이다.

용산 구청장이라는 직급 따위와는 상관없이 멸망한 세상의 사람들은 죄다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다짜고짜 선빵을 친단 말인가?

"이준 씨, 벌써 돌아왔... 와, 그새 그런 걸 다 얻어오셨네요."

20kg짜리 쌀 포대 20개.

초인이 된 인간에게는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이다.

그리고 구청장이 내게 준 것은 쌀이 아니었다.

쿠웅-!

"미친. 저거 다 구더긴데요?"

분명 쌀인 것을 확인했건만, 안에 있는 것이 구더기라니.

구청장의 각성 능력은 아마도 세뇌나 환각과 같은 계열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것도 위력이 제법 강할 것이고.

무려 나 이준을 속인 것이니.

화르르륵-!

구청장이 준 물자를 소각로에 태우는 사이, 옆에서 강소현이 말을 건넸다.

"도와줄게요. 아니, 하린이 다녀갔는데, 그 안이 그렇게 이상해요?"

스킬의 쿨타임을 채울 겸 요새에 들렀던 이하린이 강소현에게 재미난 얘기를 많이 해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그녀에게 그곳의 얘기를 간략하게나마 들려주었다.

"구청장이 저곳의 수장이고, 경찰서장에 정복을 입은 경찰들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뜸 선빵을 맞고 온 셈이고요."

"흐음- 거기 되게 이상하네요."

잔뜩 들떠서 모닝스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면, 조금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강소현도 내게 할 말이 있어보여서 그녀를 바라봤는데, 먼저 다녀갔다는 이하린의 얘기를 시작했다.

이하린이 아직 보고할 단계는 아니라서 내게 말은 아꼈다는데.

"뭐, 오셨으니 듣고 가셔요."

철저한 계급사회.

그것이 이하린이 본 용산구청의 내부 상황이었다.

"뭔, 노역장 같은 것도 있다는데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조금 더 조사해 본다네요."

멀쩡한 정장을 입은 용산구청장.

멀쩡한 정복을 걸친 경찰서장.

그리고 멀쩡하지 않은 내부의 상황.

"감사합니다."

만일 내부의 상황이 온전한 의미로 멀쩡했다면, 굳이 내가 안전지대를 취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짜고짜 세뇌를 걸고 나를 농락하려 든 것과, 이하린이 대충 훑어본 것들만 봐도 구청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로라에게 언질을 줘 미리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일이 났을 수도 있었고.

"위험할텐데, 거길 또 가게요?"

일단 뭘 알아야 대책을 세우지 않겠어?

로라가 있는 한 세뇌 따위로 내가 어떻게 될 리는 없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강소현 씨."

"아, 네. 맡겨만 두세요."

강소현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한 뒤 나는 다시 용산구청으로 향했다.

또각, 또각.

감시라도 하려는지 경찰 몇 명이 요새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 신발에 무슨 효과가 있나요?"

구청으로 가는 길, 경찰관 한 명이 내게 물었고,

"취향입니다만."

나는 얼버무렸다.

또각, 또각.

전용 방어구의 효과임을 알리는 것보다는 고풍스러운 취미 생활이 되는 것이 더 나으니까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효과는 없어 보인다.

"어디까지가 진짠지 알 수가 없네."

멀찍이서 중얼거리는 경찰관.

저놈은 거짓말 탐지기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상시 귀를 열고 다니는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달까?

또각, 또각.

용산구청의 무너진 반쪽.

다시금 안전지대의 입구를 넘자마자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불법 점유 중인 세력을 몰아내고 적법한 안전지대의 주인임을 증명하세요.」

「영역을 선포하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마치 강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구청장이 순순히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아마 퀘스트 창 자체는 나에게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말인즉슨.

나는 용산구청장 및 그 휘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다. 놈들이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세상의 구원자는 못 되도 인간을 저버린 것들을 내버려둘 생각은 없다.

마중 나오기로 한 경찰서장을 기다리는 사이.

-치지직.

-청장님,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남자가 정말 그 정돕니까?

마석 통신기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하린이다.

-석구야,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너도 쭉쭉 진급해야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죄송합니다.

-민재 눈이 틀린 적 있냐? 저놈도 잘 구슬려서 우리 쪽으로 만들어야지.

정보1. 경찰서장 임민재는 사람을 분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보2. 용산구청장은 세뇌 능력이 있다.

-차라리 먹는 건 어떠실지?

-아니야, 민재 말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댄다. 구슬리고 잘 써먹다가 백치가 되면 그때 먹어도 된다.

정보3. 저 새끼들은 식인종이다.

하는 말을 보아하니 무슨 조폭보다도 더한 것 같고.

-이번 달 산출량은 좀 어때?

-영 시원찮은데요, 이번에 온 피난민들을 좀 그쪽으로 돌릴까요?

-내가 어르신들께 한 번 여쭤볼게. 당장은 내버려 둬.

정보4. 뭔가를 캐고 있으며, 이하린이 말한 노역이 바로 저것인 것 같다.

정보5. 이곳에는 구청장보다 윗사람이 존재한다.

-치지직.

-툭, 툭.

마이크를 두 번 치는 것은 스킬 쿨타임 때문에 자리를 뜬다는 의미다.

시간이 없으니 나도 슬슬 움직여야 한다.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156:38」

주어진 퀘스트의 규모는 크지만, 내가 이곳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은 50시간 언저리밖에 없다.

고블린 왕국까지 처리하려면 시간이 모자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금 구경 좀 하겠습니다."

또각, 또각.

"어어? 이준 님, 청장님 허가 없이는―"

처억-!

멸망 전 188cm 키는 살면서 제법 불편한 점이 많았다.

층고가 낮은 데를 다니기도 어렵고 전등 같은 것에 머리가 걸리기 일수였으며, 운전석이나 비행기 좌석에서도 제법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포칼립스가 온 뒤에는 큰 키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뭐요?"

바짝 앞에 붙어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 아닙니다. 둘러보시는 정도라면...."

이렇게 꼬리를 말아 버리니까.

뭐, 여기서 역으로 세게 나온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볼만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또각, 또각.

우선 구청 내부부터 둘러보기 위해 1층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관공서의 1층이라는 특성상, 층고가 높고 탁 트여 있었다. 넓고 큰 만큼 지금에 와서는 수많은 거주지들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밖에 깔린 텐트나 판잣집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파티션으로 분류된 거주지다.

약간 고시원 같은 느낌이랄까?

뭐, 내 집에 비한다면 조악하기 그지없다만, 그래도 아포칼립스가 온 이래로 내가 본 사람들 중 이들이 가장 사람답게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또각, 또각.

거대 천막이 가리고 있는 구청 뒤편의 공터.

이하린이 엿들은 대화를 유추해 본 결과 그곳에 광산 비스끄므리한 것이 있고, 거기서 강제노역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구청 앞에는 텐트, 천막, 판자촌이 깔려 있고 그곳도 안전지대의 일부다.

그리고 그곳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의 거주지고.

외부자의 거주구역 옆에는 10m 높이의 천막이 벽처럼 처져 있었다.

마치 뭔가를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곳은 구청장님 허가증 없이는 진입하실 수 없습니다."

아직, 나는 저 천막 너머를 볼 수 없다.

대신 구청의 2층부터 둘러보려 했다.

"구청장님이 안내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기 전 한 사내가 내게 붙었다.

[민원실 팀장 - 안경준]

가슴에 달린 이름표가 눈에 들어온다.

"1층은 그래서 별게 없습니다."

1층은 구청 근처에 있다가 얻어 걸린 사람들의 구역이다. 별다른 지위 없이 운만으로 구청에 살 권리를 허가받은 사람들이 1층 거주민이다.

"이곳은 또르지오 아파트 거주민들 구역입니다."

2층은 또르지오 아파트, 또편한 세상 아파트 등 이 일대의 비싼 아파트 거주민들이 묵는 장소라고 한다.

미리 언질이라도 해놨는지, 실제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3층 4층 부터는 직업, 자산 순위, 혹은 일대의 영향력이 크신 분들 위주로 거주 구역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라는 설명을 들으며 재력가, 사업가들이 자리 잡고 있는 4층까지 도착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새끼들은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은 멸망 전의 직업이다.

'자산'은 멸망 전의 자산이다.

백평도 훌쩍 넘는 넓은 4층에는 고작 10가구만이 지내고 있었다.

"아, 그분들은 위층에서 여가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4층에 자리 잡은 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구청 8층 스포츠 센터에서 스크린 골프를 치고 있다고 한다.

안전구역의 세상은 아포칼립스 이전과 크게 달라져 있지는 않았다.

또각, 또각.

구청은 엄청 크다.

반만 남아 있어도 마음먹고 피난민을 수용했다면, 2,000여 명은 자고도 남을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구청 안에는 대충 봐도 50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불법 점유 중인 세력을 몰아내고 적법한 안전지대의 주인임을 증명하세요.」

「영역을 선포하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기존의 세력을 몰아내라는 퀘스트를 어찌 깨야하나 고민이 많았었는데, 내부의 상황을 보고 나니 대충 감이 잡혔다.

1. 전쟁 선포 후 요새로 다 죽인다.

이 경우에는 무고한 일반인들도 대거 사망할 가능성이 생긴다.

2. 시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2일이 조금 넘는 시간.

시간적으로 내가 빠듯해질 가능성이 높다.

3. 구청장만 암살한다.

이건 하린이 얘기를 들어봐야 알 것 같으니.

일단, 그의 윗선과 이곳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구청장을 만나봐야 할 것 같다.

당장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으니까.

또각, 또각.

조금 더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창문으로 다가갔고 나를 안내하던 놈이 이를 저지했다.

"어어? 창가는 안 된다고...."

"슬립."

허공에 고양이가 잠자는 그림의 문양이 떠올랐다.

강소현에게 배웠던 기초공용 마법 '슬립'이다.

털썩-

그리고 나를 가이드하던 공무원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상대적으로 강하면 잘 안 먹힌다는데, 안전구역에서 꿀만 빨던 놈이라 그런지 단박에 잠들어버렸다.

지이익-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간 뒤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친 새끼들."

창밖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44. 별천지 이세계 (4)

용산구청.

안전지대로 지정된 이곳은 첫 인상만큼은 흡사 별천지 이세계를 떠올릴 만큼 이상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반쪽이지만, 완벽하게 멀쩡한 모습을 유지한 건물.

전기도 통하고 물도 나오며, 밖에까지도 넓게 안전구역이 있어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판잣집, 천막, 텐트 등 모양은 각기 달라도 자신만의 구역을 배정받기까지 했으니.

나름대로 제대로 된 생존자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멀쩡했던 외관과는 달리 그 속은 곪아 썩어가고 있다.

단순 세뇌로 유지하고 있었다기에는 그 규모도 너무 컸으며, 그 실상도 너무나도 잔인했다.

"빨리 옮겨!!!"

4층까지가 내가 허가받은 장소다.

그리고 4층에서는 밖의 '외부자 거주구역'을 가리고 있던 천막의 너머가 보인다.

자세히는 아니여도 대략적인 초입부만은 볼 수 있었는데....

짜악-!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그 안의 광경이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천막 너머에는 토굴 입구 같은 것이 하나 있었고, 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이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토굴 입구에서 반짝이는 머리가 보인다.

구청장이다.

분명 조금 전 이하린이 염탐할 때만 해도 구청장은 5층에 있었다.

운영되는 엘리베이터는 두 대.

내 눈이 저 반짝이는 머리를 못 봤을 리는 없다.

그 말은 건물 내부에 바깥과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출량은?"

토굴 입구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구청장이 옆의 경찰복을 입은 사내에게 물었다.

거리도 멀고 건물 안에 있어서 희미하게 들렸지만, 대충 들어도 저들의 대화가 정상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일꾼들이 영 힘을 못 씁니다."

"채찍 더 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을 경계하던 경찰들이 돌을 나르는 일반 사람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짜악-!

미친놈들.

흡사 중세시대 노예들의 강제노역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세련된 디자인의 10층짜리 용산구청.

정복과 양복으로 차려입은 안전지대의 관리자들.

그러고 4층에 달린 넓은 통유리창.

짜악-!

아포칼립스 이후에도 남아있는 현대 문물.

그 너머에는 잔혹한 폭력만이 가득 차 있었다.

짜악-!

채찍이 휘둘러진다.

"끄으...."

짧은 신음과 함께 한 여자가 돌무더기를 옮기다 쓰러진다.

털썩.

"청장님, 약발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데려가."

뭔진 몰라도 저곳에 숨겨진 것이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다.

채찍질, 노역하는 사람들의 관리를 이곳의 머리들이 직접 하고 있는 꼴이니.

지이이익-

여자가 질질 끌리며 천막 너머로 사라진다.

여자가 사라지고 얼마 안 가 토굴 입구에서 어린아이가 하나 나왔다.

"너, 너무 힘들어요."

열살 남짓한 삐쩍 마른 아이의 등에는 성인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자루가 있었다.

스윽-

구청장이 옆에 선 경찰에게 턱짓을 하자.

짜악-!

매서운 채찍이 내리쳐졌다.

아이를 때리다니.

이런 미친놈들을 다 봤나.

"끄으...."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내 뒤에서는 마법으로 기절시켰던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또각, 또각.

멍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당장, 이곳을 때려 부술 수는 없으니, 대신 화풀이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 대체 무슨 일이...."

"다짜고짜 잠드시고는 그걸 왜 제게 물어보십니까?"

쓰러진 그의 바로 앞에 붙어 말했을 뿐인데.

"아, 예.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를 해왔다.

이래저래 언쟁이 오가고 스트레스 해소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곧바로 겁먹은 채 꼬리를 말아 버린 안내인.

흐음….

아무리 키가 크다 해도, 내 어깨에는 아주아주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있으며 옷차림은 멋지긴 해도 약간 과한 느낌의 집사복이다.

즉, 딱히 위협을 느낄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 키 때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위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든다.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파고들 생각은 없다만, 머릿속에 기억은 해 두기로 했다.

"구청은 10층인데, 지금 있는 4층보다 더 위로는 못 갑니까?"

여전히 멀뚱멀뚱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안내자, 뭔가 느슨해져 보이는 그에게 질문을 했다.

"아, 예. 5층에는 아이들과 구청장실이 있고, 그 위는 어르신들의 구역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과 달리 순순히 대답을 해줬다.

그 내용이 조금 문제다만.

보통 어르신이라하면 노인을 뜻하는 말이다.

허나, 내 귀에 저 '어르신'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다.

아마도, '어르신'이라 불릴만한 높은 사람을 뜻하는 말일 테지.

"슬슬 청장님이 돌아오실 때라, 내려가 보시는 게 어떠시련지요?"

세뇌 능력이 있는 구청장과의 독대.

첫 대면과는 그 느낌이 달랐지만, 나름 대비를 해뒀으니 그대로 강행했다.

띠잉-!

구청장을 만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이동했고.

"허허. 이준 씨, 뭔 마중을 다 나오셨습니까?"

그리고 만나자마자 청장실이 있는 5층으로 가기 위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띠잉-

"내리시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가 악수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그냥 받았다.

처억-

조금 전까지 강제 노역을 하던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라 지시하던 사람인데, 지금의 모습만 보면 그런 것들이 마치 꿈만 같아 보인다.

"이준 씨는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어깨에 있는 고양이도 참 아름답고요."

그리고 구청장은 보기보다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제 딸래미가 좀 귀엽습니다."

"허허, 딸이라. 좋은 말입니다."

또각, 또각.

"헌데, 그 구두는 대체 무슨 신발이길래 이리 청아한 소리를 자아냅니까?"

"아, 이게 집사 전용 구두입니다."

구청장의 안목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조금 느슨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만.

"허허, 직업이 집사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구청장의 너스레 떠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자, 앉으시죠."

"청장실은 원래 최상층에 있지 않습니까?"

5층 회의실.

내가 구청장과 면담하던 장소다.

"아, 10층은 식당이고 청장실은 9층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양보했습니다."

"어르신이 누굽니까?"

"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보살펴줄 사람이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그 나이에 맞는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들이지요."

아까부터 의문이 들던 '어르신'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그가 납득이 갈 만한 대답을 해주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보호할 줄 안다라.

구청장은 벗겨진 머리와는 달리 제법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허나, 밖에서 본 노역만큼은 이해가 안 갔기에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진상 규명이라... 정치인에게는 늘상 따라다니는 말이지요."

라는 말로 구청장은 그 상황을 해명하기 시작했다.

"규칙도, 법도 없는 세상입니다. 범죄자들에게 본보기는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아이도 있던데."

"아, 혹시 촉법 소년이라고 아십니까?"

강력 범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멋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

그게 내가 봤던 아이였다고 한다.

"아이들도 각성을 했습니다. 장정 너덧은 쉽게 죽일 수 있는 그런 힘을 얻었지요. 이준 씨가 보셨던 그 아이는 사람 넷을 죽였습니다. 하아...."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의 생각에 완전히 납득해버렸다.

"...계도. 그게 가능한 세상이었다면, 저도 이런 방식은 쓰지 않았을 겁니다. 이준 씨도 아시다시피 세상 꼴이 이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다른 방식은―"

"사람 넷을 죽인 아이를 어디 풀어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처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렇게라도 붙잡아 놔야죠."

하긴, 각성한 살인귀를 어찌 풀어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한 구역의 수장이, 것도 본래 정치를 하던 사람이 아이를 처형시키는 것도 웃기는 꼴이고.

"알겠습니다."

그에 대한 의혹이 풀렸다.

그런 내게 구청장이 내게 하나의 임무를 주었다.

"요새, 그것을 자세히 보고 싶은데 이곳까지 가지고 올 수 있을까요?"

바로, 요새의 관람.

"그 웅장한 요새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내 집, 위대한 내 요새를 보고 싶다니 그 정도쯤은 흔쾌히 들어줄 의향이 있다.

뭐,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또각, 또각.

청장실을 나와 요새로 가는 길.

이번에는 감시를 위해 따라붙은 인원이 없었다.

『캬아오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로라의 금빛 물결이 내 몸을 뒤덮었다.

"끄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캬아오오-!!!!』

"로, 로라야, 진정해-!"

파바바박-!

처음 있는 일이다.

로라가 내게 다짜고짜 냥냥 펀치를 갈기는 것은.

세뇌 때문이겠지.

로라가 해결해줄 수 있기에 세뇌를 감안하고 그를 또다시 독대한 것인데, 미친놈답게 바로 내게 세뇌를 걸어 버렸다.

허나, 처음과는 세뇌의 수준 자체가 달랐다.

퍼억-!

"-끄윽."

세뇌가 풀리면서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는데 로라의 강력한 일격이 더해지자, 흡사 망치로 머리를 내려친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냐아!!!!』

"고맙다. 미안하다."

조금 무리수를 뒀는데, 로라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키야오오오-!!!!』

어깨에서 내게 부비며 애교만을 보여주던 로라가 이렇게까지 분노한 것은 처음 본다.

잔뜩 확장된 동공.

똑바르게 빠짝 서 있는 귀.

씰룩거리는 엉덩이.

이것은 고양이가 사냥을 하기 직전에 취하는 자세다.

똑똑한 로라가 나를 사냥감으로 봤을 리는 없으니, 저것은 내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캬오!!!』

로라가 내게 달려들었다.

퍼버버버벅-!!!

머리에 매달린 로라가 솜방망이로 내 볼을 내리친다.

이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세뇌를 감수한 것인데, 그것이 내 반려묘에게는 상당히 스트레스가 된 모양이다.

"미안하다."

투욱-

로라가 다시 어깨로 내려왔다.

아니, 떨어졌다.

힘없이 축 늘어져서는 고개를 획 돌리고 있다.

또각, 또각.

일단 걷자.

그리고 생각하자.

다른 사람이 세뇌에 걸리는 것을 볼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하린이 염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강소현과 같은 다른 사람을 실험체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가 직접 위험을 감수했다.

이동식 요새와 이 멸망한 세계를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솔선수범 위험을 감수했을 뿐이다.

『냐아!』

그래도 로라는 그게 싫다고 한다.

"앞으로는 주의할게."

나또한 로라가 무리하는 것은 싫기 때문에,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한다.

또각, 또각.

요새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라의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다.

『고로로롱~ 고로롱.』

잔뜩 화를 내고는 토라져 있더니.

지금은 또 골골쏭을 부르며 잠에 빠져 들었으니까.

'집사'는 관리하는 사람이지 관리 받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일을 도모할 때는 조금 더 신중함을 기하자는 다짐을 하며 요새 위로 올라갔다.

철그럭-

"일로 와 봐요."

요새에 올라서자마자 모닝스타를 든 강소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다.

뚜벅, 뚜벅.

"미, 미쳤습니까?"

"생각보다 별로 안 아파요."

그녀의 주위로 순백색 빛이 맴돌고 있다.

흡사 여신이 재림했을 것만 같은 빛이지만, 그 빛의 실상은 흉악한 모닝스타를 든 강소현이었다.

"영감들이 이준 씨 오면, 새로 배운 마법으로 한대 패주래서."

"...그 염탐꾼들. 진정하시죠, 강소현 씨. 로라가 정신 차리게 해줬습니다. 애초에 다 알고 간 거라."

강소현과 대치한 상태에서 구청 내부에서 있던 일을 설명해줬다.

"진짜 세뇌였구나... 이게 정화마법인데, 상태이상이나 정신적 효과를 지닌 것들을 풀어주는 마법이에요. 원래 정신 상태에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한 대만 맞아 보시죠?"

그렇게 말한 강소현이 미련을 못 버린 채 모닝스타와 내 머리통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고 있었고.

"와, 아저씨 말하는 게 뭔가 이상해 보였는데 그게 세뇌당한 걸 줄은 몰랐어요."

타이밍 좋게 이하린이 나타났다.

그 덕분에 강소현도 미련을 버리고 모닝스타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바보인 척 연기하는 줄만 알았는데.... 아니지, 연기는 맞구나. 일부로 걸린 거니까. 그래도 몸 좀 사리는 게 어때요? 아저씨가 어떻게 되면 요새가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하준이도 아직 안돌아 왔는데."

그걸 보고만 있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다만.

쟤도 제정신은 아니란 말이지.

"아, 아니... 아저씨가 하는 건 뭔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죠."

그리고 이어지는 이하린에 말에는 다른 세뇌자에 대한 얘기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바보가 되서 따라다니던데, 아저씨만큼은 왔다 갔다 하게 유도하고 그런 것 같은데요? 굳이 1층부터 다시 간 것도 그렇고요."

내 생각과 같이 이하린도 세뇌의 방식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상한 점이 하나 남아 있다.

"그걸 다 보고 있었다고?"

아니, 구청 내부를 감시하라 보내놨더니 숫제 나를 감시한 꼴 아닌가?

"...남는 시간에 본 거죠. 호위도 할 겸."

뭐 이리 염탐꾼들이 많은지 모르겠네.

각종 협회에 마탑에 이제는 이하린까지....

"바바리안들은 어땠습니까?"

시간을 끌 여유는 없으니, 다시금 구청 내부의 상황 브리핑을 들었다.

"아, 그분들은 아직 구청장 못 만났어요. 무슨 임시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데요."

우리가 주시자의 눈과 싸우는 사이 길을 건너간 것이 약 500여 명.

전부 지정 대기장소에 있고, 아직 구청장과의 만남은 없었다고 한다.

-띠딕.

"별일 없습니까?"

그렇다고 하니, 나와 함께 안전구역으로 들어왔던 부족장 장진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치지직.

-여기 이상합니다.

-사람고기를 고른 사람을 색출하겠다는 빌미로 밖에도 못 나가게 하는데요?

"몇 명이나 있습니까?"

-사람요? 대충 500명은 되어 보이는데.

이하린의 보고와 비슷한 숫자다.

장진아는 안전지대 경계면에 만들어진 '선별 구역'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직 구청에 발을 들이지 못한 사람들 수백이 자리하고 있고.

좋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아서 내 생각을 전했고.

-미, 미쳤어요? 반란군을 조직하라뇨.

세뇌, 강제 노역, 위층에 있는 정체 모를 놈들에 대한 것들까지 설명해주자.

-아...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곧장 장진아가 이를 수락했다.

이제 걱정 하나는 덜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아, 5층 위로는 절대 못 올라가게 만들어 놨어요. 무슨 트랩 같은 게 막 깔려 있더라구요."

그래도....

세뇌.

일단 내가 선빵을 맞은 것 아닌가?

그리고 나는 다짜고짜 선빵을 맞고서 참아줄만한 위인은 못 된다.

게다가 구청장이 내게 부탁한 것도 있지 않나?

-그 웅장한 요새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내 요새를 잘 몰라서 그런 건지, 이걸 자신의 영역으로 들일 생각을 하는 구청장.

아무리 생각해도 놈의 지능 수준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구청으로 갑시다."

이제는 내가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칠 차례다.

#45. 별천지 이세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