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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아이, 씨발! 이번에도 개패잖아!"

"푸하하하! 땄다! 땄어!"

"후우... 야! 진짜 내가 돈 가져올 테니까, 다들 가지 말고 기다려!"

"아니... 이거 맞아? 부, 분명히 내가 이기는 판이었는데?"

"아이, 딱 한 판만 더 하자, 딱 한 판만! 응? 부탁할게!"

"여기 도박하는 사람 어디 갔나? 언제까지 기다려? 날 새겠네!"

"야, 너! 술 한 병만 더 가져와라. 여기 돈 받아가고!"

실로 장관이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어 보이는 도박장 내부.

한데 그 큰 공간에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환희, 비명, 탄식...

도박에 미친 인간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 채워진 공간.

덥고 습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로 꽉 찬 그곳에, 마침내 발을 디뎠다.

"... 미친, 규모 진짜 엄청나네."

혀를 내두른 겔베르트의 감탄에 동의한다는 듯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도 처음 여기 왔을 때 엄청 놀랐습니다. 도박장을 처음 와본 것은 아닌데... 확실히 여기는 남다르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엥? 처음은 아니다? 아드리안, 너 살던 리트렌에도 도박장이 있었냐? 거기를 갔었어?"

겔베르트의 질문을 받은 아드리안이 어렸을 적 기억을 끄집어내어 대답한다.

"예, 있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큰 규모는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테이블 대여섯 개 깔아놓은 정도의 작은 규모였죠. 제가 도박을 하러 간 건 아니고, 빈민가 살던 시절에 술 심부름하느라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어우, 우리 아드리안 열심히 살았네."

"예, 뭐... 가진 것 없이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아야죠. 덕분에 지금 출세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그래, 고생 많았다. 아주 자랑스러워!"

한편, 나는 눈 앞에 펼쳐진 도박장의 풍경을 바라보며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 이거, 완전 제대로잖아?'

안으로 들어와 확인한 도박장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마구잡이로 판을 깔아놓고 아무렇게나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체계와 질서가 있다.

이 업장을 테오릭이 만들었다고?

'... 원작 소설에선 그냥 힘만 센 깡패 새끼였는데? 이런 재주가 있다고?'

그렇게, 내가 도박장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품던 그 순간...

콰앙!!!

"야이 씨... 이거 사기 아냐? 이 씨발 놈들이 누굴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여기 책임자 어딨어? 책임자 나오라 그... 크억!"

도박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난동을 피우던 취객 하나가 도박장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밖으로 끌려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술 먹고 행패 부리는 놈 갖다 치우는 일이야 다른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 후의 대처가 나를 놀라게 했다.

"본의 아니게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손님들께 불쾌감을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사죄의 의미로 술 한 잔씩 올리겠습니다."

깔끔하게 옷을 빼입은 사내 한 명이 나와 방금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이가 있던 테이블에 고개 숙여 사과 말을 전하고 술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 뭐야, 저 시대를 뛰어넘는 서비스 수준은?'

지난 생애 마카오나 라스베이거스의 고급 카지노 업장에서나 볼법한 광경을 이 퀴퀴한 냄새 나는 판타지 세상의 도박장에서 보게 될 줄이야...

"공자님, 뭘 그렇게 신기한 듯이 보십니까?"

"저기, 옷 깔끔하게 차려입은 저 직원을 보고 있었어."

"누구... 아, 저 사람."

내가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알은 체를 했다.

"뭐야, 누군지 알아?"

"예, 압니다. 저 사람, 꽤 유명하더라고요."

"누군데?"

"이 도박장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직원들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마스터라고 부르더군요. 페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인데... 장사 수완이 대단하답니다. 이 도박장의 규모가 이렇게 커진 것도, 저 사내의 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흠..."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나를 보던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페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까요?"

역시 아드리안, 이 눈치 빠른 녀석.

"그래, 부탁 좀 하자."

"알겠습니다."

"나랑 겔베르트는 여기서 분위기 좀 볼 테니까, 넌 따로 움직여. 이따 저녁에 숙소에서 보자. 항상 몸조심하고."

"예, 공자님.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아드리안에게 임무를 주어 떠나보낸 뒤, 나는 겔베르트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좀 유명해져 봅시다."

"유명? 갑자기 무슨 말씀을... 아!"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겔베르트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

"돈 따자는 얘기시군요? 좋습니다, 공자님께 왕년에 날리던 도박사의 실력을 한 번 보여드리죠. 자, 가시죠!"

***

자신이 왕년에 도박장에서 꽤 날리던 실력이었다며 호언장담했던 겔베르트.

하지만 테이블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수중의 돈을 다 잃어버렸고, 결국 개털(?)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고야 말았다.

"쓰읍, 이상하다. 분명 잘 했었는데... 패가 되게 안 붙네?"

"어휴, 왕년에 잘 나가던 것만 생각하시면 어떡해요? 지나간 세월이 얼마인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옛날에 하던 가락이 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겁니다. 도박을 검술이라고 생각해봐요, 몇 년 동안 연습 한 번 안 했던 사람이 갑자기 검 잡는다고 예전 실력이 나오겠어요?"

"쓰읍,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겔베르트였다.

"이번엔 제가 해볼게요."

"공자님께서요?"

자신이 일어난 자리에 내가 털썩 엉덩이 대고 앉자, 겔베르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실 줄은 아시죠?"

"당연히 알죠. 이거 예전에 저한테 가르쳐 주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아, 맞다. 그랬었죠."

내가 겔베르트를 대장이라 부르고 그가 나를 막내라고 부르던 시절, 그에게 카드 게임을 배운 적이 있었다.

사실, 게임의 룰 자체가 내가 아는 카드 게임들과 거의 같았기에 굳이 배울 것도 없었지만, 그때는 잘 모르는 척 분위기를 맞춰 줬었다.

한 마디로 '접대 카드'를 친 거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엔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실력을 온전히 다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야, 완전 땅 짚고 헤엄치기네.'

거듭 흡수한 히든 피스의 영향으로 인간의 기준을 까마득히 초월해버린 나의 시력(視力)은, 다른 이들의 눈동자에 반사된 카드의 모양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즉, 상대방의 패를 다 읽고 카드를 친다는 얘기.

이러면, 질 수가 없지.

"자아... 어디, 재미있게 놀아봅시다."

해맑은 웃음을 피워올리며, 나는 도박장 직원이 나누어준 내 카드 패를 집어 올렸다.

***

"마스터, 그놈이 또 왔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 페드로가 인상을 찌푸린다.

"또?"

"예. 이제 막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이런 시발..."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긴 페드로가 직원에게 묻는다.

"그 새끼가 지금까지 따간 돈이 얼마야?"

"지난 3일 동안 모두 칠백사십 골드입니다."

"칠백사십이라..."

금액을 듣고 나니 더욱 눈앞이 아찔하다.

대충 계산해봐도 지난 3일간 도박장에서 가져갔어야 할 수익 그 이상을 저 정체 모를 금발 머리 놈이 챙겨간 것이다.

'테오릭 이 새끼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텐데...'

매주 금요일마다 도박장에 찾아와 돈을 챙겨가는 테오릭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섬뜩해진다.

벌써 일주일 수익의 절반가량이 날아가 버린 상황.

이 정도면 싫은 소리 좀 듣는 정도로는 끝날 일이 아니었다.

"... 저 새끼, 살살 달래서 내 방으로 올려보네. 도박장 마스터가 좋은 술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말해서."

"예, 알겠습니다."

대체 어디서 온 뭐 하는 놈인지, 술 한 잔 따라주며 알아볼 참이다.

'만약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면...'

그렇다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깔끔하게 놈의 모가지 따 버리고, 잃었던 돈을 다시 챙긴다.

만약에 어디 대단한 귀족 가문의 자식이라면?

그럼 그거대로 좋은 일이다.

테오릭에게 내밀 그럴듯한 변명이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시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어서... 후우..."

테오릭에게 목줄을 잡혀 개처럼 부려지는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한숨을 내쉬는 페드로였다.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3)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3)

"아이고, 또 이겼네?"

내가 앉은 자리 앞에 구릿빛 육각 모양의 금속패가 수북이 쌓인다.

이곳 도박장에서 돈 대신 쓰이는, 일종의 '카지노 칩' 같은 물건이다.

재질은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Bronze).

이 청동패 하나가 이곳 도박장에선 5골드의 가치를 지닌다.

즉, 지난 생의 화폐 가치로 따진다면, 하나당 5백만 원이라는 얘기다.

"아니, 어떻게..."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로 교체된 우리 테이블의 도박장 직원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이곳 도박장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일해온 그였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그것도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많은 돈을 잃어본 건 처음일 것이다.

"참나, 이거 판이 너무 쉬우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가 없는데... 설렁설렁 봐주면서 하려고 해도 상대가 너무 형편이 없네. 에이!"

지난 며칠간, 나는 의도적으로 무례한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했다.

싸가지 없는 말투에 싸가지 없는 행동.

그야말로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한, 안하무인의 자세였다.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새끼야, 빨리 패 안 돌려?"

"예? 어... 예."

그렇게, 내 기세에 완전히 짓눌린 얼굴을 한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판을 위해 카드를 섞기 시작하는데...

"저, 손님."

"...?"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도박장 직원 한 사람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인상이 험하고, 한 덩치 하는 걸 보니 궂은일을 처리하는 쪽인 듯싶다.

"뭐야?"

나를 대신해 나선 겔베르트가 그에게 용건을 묻는다.

레벨 55, 숨기려고 노력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강자(强者)의 기운이 느껴진 것일까?

겔베르트의 시선을 받은 도박장 직원이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 저... 저희 마스터께서 손님을 뵙고자 청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을지..."

"마스터?"

도박장 직원의 말을 들은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 걸렸어!'

지난 사흘 내내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줄기차게 돈을 따낸 보람이 있다.

하지만 냉큼 따라가면 없어 보이는 법!

"에이, 지금 막 기세 탔는데... 여기서 일어서면 난 뭐가 되나? 내가 딸 돈은 누가 보상해주는 건데?"

아직 패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음 판에 걸린 돈도 당연히 내 것이라는 듯한 태도.

실로 뻔뻔한 모습이었지만, 지난 사흘 내내 도박장에서 보여준 나의 압도적인 실력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그, 하지만 저희 마스터께서..."

"아이씨, 마스터가 뭐 돼? 그래 봤자 한낱 도박장 주인 나부랭이가 누굴 오라 가라야? 낯짝도 안 비치고 건방지게..."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선 내가 나를 데려가려 찾아온 직원에게 다가섰다.

짜악!

"억-!"

내게 뺨을 맞은 직원의 고개가 옆으로 홱 소리가 나게 돌아가고, 살짝 휘청거린 직원이 겨우겨우 몸의 중심을 되찾는다.

'... 이거 봐라?'

나는 그런 직원의 반응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혹시나 내 정체를 의심할까 싶어 완전히 힘을 빼고 뺨을 때렸다.

한데 그런 허술한 손찌검을 맞고도 직원은 엄청 센 한 방을 맞았다는 듯 턱을 돌리고,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하, 이 새끼들... 재밌네.'

나는 그런 직원의 행동이 나 같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반응이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챘다.

그 마스터라는 놈에 대한 나의 흥미도가 조금 더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야, 앞장서라. 그 마스터라는 놈, 가서 뭔 얘기 하는지 들어나 보자."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

"죄송하지만, 경호원께선 옆방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도박장 직원의 뒤를 따라 도착한 마스터의 방.

문을 열기 전, 우리를 안내해온 직원이 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려는 겔베르트를 제지하며 말했다.

"뭐? 아니, 씨... 뭔 개소리야 그게?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 도련님 혼자..."

"난 괜찮아. 혼자 들어갈게."

"하지만, 도련님!"

자신의 역할에 깊게 몰입한 겔베르트가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어이구, 누가 보면 진짜 부잣집 도련님 모시는 경호원인줄 알겠네.

'... 뭐, 따지고 보면 차기 영주님 모시는 기사의 신분이니, 그게 그건가?'

아무튼, 나는 강하게 만류하는 겔베르트의 가슴팍을 손을 툭 밀치며 시건방진 말투로 답했다.

"괜찮다니까? 그냥 옆방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이깟 도박꾼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야, 문 열어."

"예, 손님."

똑똑똑-

"마스터,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실내가 보인다.

생각보다 넓은 방의 크기.

그 너른 공간에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이 하나 놓여있고, 그 옆으로 손님을 위한 접객용 의자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아, 오셨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책상에 일어서는 한 사내.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어쩐지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음...'

이유를 알았다.

눈빛 때문이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저 강렬한 눈빛!

뭔가 도박장을 운영하는 인간이라 그런가, 살짝 맛이 간(?) 눈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 눈빛이 살아있네.'

그렇다고 막 엄청 순수하고 맑은 눈빛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보단 또렷하고 강렬한 눈빛 가운데 위험한 느낌이 풍긴다고나 할까.

그 눈빛이, 짧은 순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 처리가 어지간한 사람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빨랐는데...

이걸 어쩌나.

나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거든.

'눈깔 돌리는 거 다 보인다 이 새끼야.'

내가 걸친 옷과 신발, 허리춤에 매인 검을 살피며 있는 집 자식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일 테지.

"안녕하십니까, 이곳 업장을 책임지고 있는 페드로라고 합니다."

"어, 반갑네. 난 데릭 발만. 안할트의 유서 깊은 명문가, 발만 가의 둘째 아들이지."

페드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가짜 이름을 댔다.

"발만 가(家)라..."

내 입에서 나온 가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린 페드로로 금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러시군요. 이토록 훌륭한 카드 솜씨를 지니신 발만 가의 공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나도 영광이오. 이렇게 마스터의 초대를 받게 된 건 오랜만이라... 나쁜 기분은 아니군."

"제가 직접 내려가서 모셔 왔어야 하는 건데, 급한 일이 있어서 이리 결례를 범했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흠..."

일단은 놈이 권하는 대로 접객용 의자에 앉았다.

내가 오기 전 미리 가져다 둔 것인지,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와 간단한 과일들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어떤 취향이신지 몰라서, 일단은 차를 준비를 해봤습니다. 며칠 동안 손님께서 저희 업장을 이용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술을 전혀 안 하시더군요."

"카드 칠 때 술 마시면 쓰나. 술 먹으면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안 돼."

"오, 역시... 고수는 다르십니다."

그렇게 페드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멀리 사라졌던 누군가의 기운이 다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똑똑똑-

"어,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도박장 직원이 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뒤 페드로에게 다가선다.

그리곤 페드로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다.

하지만...

'다 들린다, 이 새끼야.'

제 딴에는 절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마음먹고 집중했을 때 나의 청력(聽力)은 멀리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하여간, 그 압도적인 청력을 이용해 엿들은 놈의 귓속말은...

'... 안할트 영지에 발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문은 없습니다.'

당연히 없겠지.

내가 만들어낸 이름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얘기를 들은 페드로의 반응.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았다, 그럼... 준비한 대로 진행하라고 해."

"... 알겠습니다."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사라지는 부하.

그리고 잠시 후,

와장창! 콰당!!! 콰아앙!!!

[아악!]

[으아아악!]

[시발... 커흑!!!]

[이런 개... 악!]

문밖에서 들려오는 무자비한 소음과 비명들.

바로 페드로의 부하들이 옆방에 있는 나의 경호원, 겔베르트를 덮치는 소리였다.

'어이구, 미친놈들... 차라리 몬스터 둥지에 가서 대가리를 들이밀어라.'

하지만, 겔베르트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에겐 저 소란의 결과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앉아 있는 놈의 장단을 맞춰줘야 했기에, 당황하는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뭐야? 이, 이거... 무슨 소리야?"

"아, 당황할 거 없어. 가만히 앉아 있어."

나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보이는 페드로.

이어 그는 바짝 앞으로 당겨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꿔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고, 다리 꼬았다.

"야, 꼬맹아. 너희 집 어디에 있어?"

"뭐?"

"발만 가문인가 발가락 가문인가 하는 너희 집, 어디에 있냐고."

"이, 이놈이 지금... 어디 감히!"

스르릉-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단검 하나를 허리춤에서 꺼내든 페드로가 그 칼날 끝을 나에게로 향하며 말한다.

"목소리 높이지 마, 이 사기꾼 새끼야.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

"안할트의 유서 깊은 명문가? 하,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도박쟁이 새끼 주제에 씨알도 안 먹힐 구라를..."

"아니, 그걸 어떻게..."

"야, 됐고. 시간 없으니까 본론만 얘기하자. 네가 사흘 동안 따낸 돈, 그것만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 놔. 그럼 네가 신분 사칭하고 사기 도박한 거, 그건 용서해 줄게."

"사기 도박이라니! 난 정말 실력대로 친 거야!"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페드로의 얼굴 가득 짜증이 떠오른다.

"하아... 하여간 뻔뻔한 새끼들. 꼭 말로 하면 안 듣고 맞아야 말을 듣지?"

"뭐, 뭐하려고..."

"뭐하긴 새끼야, 네 버르장머리 고쳐줄..."

바로 그 순간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들어와."

당연히 문을 두드린 이가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한 페드로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고, 곧 문이 열렸는데...

"... 정리 끝났습니다. 문밖에 있을 테니,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뭣...?!"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페드로의 부하가 아닌 다른 이였고, 나는 그제야 얼간이 같았던 표정을 풀고, 원래의 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수고했어요, 겔베르트."

"별말씀을. 그럼..."

끼익, 철컥-

다시 문이 닫히고,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페드로에게...

퍼어억-!!!

"크헉!"

시원한 발차기를 먹여주었다.

와장창!!!

붕 떠서 날아간 페드로의 몸이 자신의 책상 위 집기들을 때려 부수며 바닥으로 처박힌다.

"어흐윽... 크윽!"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꽤 아픈, 그러나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세심하게 힘을 조절해 먹인 일격이었다.

"커어억!!! 꺽..."

순간적으로 숨이 막힌 페드로가 꺽꺽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이 새끼, 맷집이 왜 이렇게 약해?

"엄살이 심하네... 야, 너처럼 허약해도 '밤의 형제단'에서 받아주냐?"

"으으... 으..."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니, 지금은 말하지 마. 일단 몇 대 더 맞고, 이따가 얘기하자."

"어으, 어..."

퍼퍼퍽!!!

격렬하고 진솔한, 몸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4)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군."

나를 상대로 감히 칼을 들이밀었던 페드로를 상대로 한창 정신 및 육체 교육(?)을 실시하다가, 문득 내 정체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으, 어... 테, 테오리.. 기... 너를... 가만... 가만 두지... 아늘..."

내게 얻어터져 퉁퉁 부은 얼굴로 뭐라 중얼거리는 페드로.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들리진 않지만, 대충 '테오릭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뭐 이런 말을 하는 거 아닐까?

어디, 내가 누군지 듣고도 그 소리가 나오나 두고 보자.

"내 이름은 데미언 카릴베르크다."

"...?"

뭐 어쩌라는 표정이네.

아, 맞다. 이 새끼 지금 맞아서 정신이 없지.

그럼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줘야지.

"얼마 전 돌아가신 카릴베르크 가문의 전대 가주이시자, 다닐렌츠의 온당한 지배자이신 구스타브 남작님의 양자(養子)로서 곧 그분의 작위와 영주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이지."

"...?!!!"

페드로의 눈이 점점 커진다.

"아니..."

이어 크게 벌어진 그의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던 것도 잠시.

철퍼덕! 쿵!

그제야 나의 정체를 명확히 알게 된 페드로가 그 즉시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라, 라, 라폰테인의 페드로가 온당하신 다닐렌츠의 지배자, 영주님의 핏줄을 뵙습니다!!!"

"어,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드는 반응이 나오는구나."

원래 내가 이렇게 신분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 한다.

"페드로 라폰테인... 카르셀의 유서 깊은 상계 가문인 라폰테인 가(家)의 셋째 아들로, 어렸을 적부터 도박장을 들락거리는 기행 끝에 가주인 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고 들었다. 맞나?"

"... 예, 예! 그렇습니다!"

나의 정체를 깨닫고 순한 양이 된 페드로.

조금은 어눌했던 발음도 명확하게 돌아오고, 아까 전과 비교해 훨씬 공손하고 협조적인 태도였다.

그렇지, 이렇게 나와야지.

똑똑한 놈이라 그런지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르다.

마음에 드네.

"아니... 아무리 가주의 눈 밖에 났다고 해도 자네는 카르셀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자식 아닌가? 어쩌다 테오릭 같은 자, 아니, 그런 개새끼 밑에서 일하게 된 거지?"

"그, 그게..."

내 입에서 테오릭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페드로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테오릭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듯한 모습.

그런 페드로에게, 나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페드로 라폰테인."

"예... 예, 공자님."

"내가 왜 이곳에 왔을 것 같으냐?"

"예...?"

바르르 떨리는 페드로의 눈동자.

지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테오릭을 죽이러 왔다."

"...!"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나는 의도적으로 눈빛에 막대한 살기를 담아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에게, 진짜 두려워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큽...!"

내게서 뿜어지는 살기를 느낀 페드로가 감히 더 버텨내지 못하고 다급하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살기(殺氣)란 말 그대로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의 발현.

흉악한 몬스터들조차 겁을 먹고 피해버릴 정도의 농밀한 살기를 훈련받은 기사도 아닌 페드로가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묻겠다, 페드로 라폰테인. 어째서 테오릭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대답 내용에 따라 그의 생사가 갈릴 것이다.

페드로는 분명 쓸모가 많은 인재이지만, 나의 신념을 꺾을 정도로 대단하진 않다.

만약 이놈이 테오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신 상태를 지닌 놈이라면...

'고민할 거 있나, 바로 대가리를 깨버려야지.'

어차피 테오릭에게 붙어 수족 노릇을 한 놈들은 죄다 죽여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살려서 두고두고 써먹을 생각이다.

"저, 그게...!"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린 페드로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날, 테오릭의 부하들이 저를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제안이라?"

"예. 테오릭의 조직, 그러니까 '밤의 형제단'으로 들어와 자신들의 도박장을 운영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않으면?"

"... 저희 가문,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깡패 놈들의 일 처리 방식 아닌가?

가족을 볼모로 잡아서 협박하는, 아주 비열하고 간악한 방식이었다.

"차라리 저한테 협박을 했으면 어떻게든 버티던, 맞서 싸우던 했을 텐데, 죄 없는 가족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 카르셀 경비대나 시장 측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나의 질문을 받은 페드로가 고개를 흔든다.

"어차피 다 한통속이 된 지 오래입니다. 시장과 경비대장을 비롯해 카르셀의 고위직들이 테오릭의 돈을 받아먹으며 놈들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이런 개새끼들이..."

으지직-!

나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더니, 단단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팔걸이가 종이쪼가리처럼 짓이겨지며 음산한 비명을 토해냈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괴력!

그 모습을 본 페드로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인다.

"아니... 대체 어, 어떻게..."

"아, 내가 힘이 좀 세서. 아무튼, 하던 얘기나 계속하지. 후우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깊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쉰 후, 나는 페드로와의 대화를 재개했다.

"결국 저는 테오릭의 밑으로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도박장을 세워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입니다."

"근데, 네 얘기를 듣다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테오릭은 이 카르셀 바닥의 그 많은 도박쟁이 중에 왜 하필 너를 찾아와서 그런 제안을 한 거지?"

"음, 그게... 사실 제가 가문에서 쫓겨난 뒤 먹고 살길이 막막해 시내에 작은 도박장 하나를 차려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하는 게 그거인지라...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되었는데, 그걸 보고 저를 데려다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 듣고 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다른 건 몰라도 도박장의 체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진짜배기인 페드로였다.

나도 처음 이 도박장에 왔을 때 지난 생의 마카오와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렸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이 바닥에 소문이 났겠지. 페드로라는 놈이 있는데, 이 자식이 아주 도박장 운영하는 솜씨가 기가 막히다고.'

그 능력을 탐낸 테오릭은 자연스럽게 페드로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 폭력과 협박으로 말이다.

"테오릭은 언제 도박장에 오지?"

"매주 목요일 오전, 도박장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들러 일주일 치 수익을 가져갑니다."

"목요일이라면..."

"예, 맞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듣고 눈을 빛내는 나를 보며, 페드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내일입니다."

***

다음날_

"뭐야, 페드로 이 새끼는 어디 갔어?"

매번 도박장 수익금을 걷으러 올 때마다 마중을 나와 있던 페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버럭 성질을 내는 사내.

테오릭 베케르트.

카르셀의 밤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조직, '밤의 형제단'을 이끄는 인물.

번쩍이는 민머리에 우람한 체구를 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쓰자, 그 느낌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게... 어제 새벽 퇴근하시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치셨습니다."

테오릭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이곳 도박장의 중간 관리자였다.

평소 도박장의 운영과 관련된 회의를 할 때마다 페드로가 데리고 다니던 인물이었기에, 테오릭 역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 시발... 병신 같은 놈이. 이제 하다하다 제집 안방에서도 자빠져? 페드로 그 새끼, 어제 술 처먹었냐?"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순간적으로 삐끗했던 것 같습니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돈은?"

그래도 도박장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부하가 얼굴을 못 비칠 정도로 다쳤다는데, 그저 돈에만 관심을 두는 테오릭.

그가 평소 페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예, 장부랑 같이 사무실에 준비해뒀습니다. 들어가시죠."

끼이익-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특수 제작한 도박장의 두꺼운 철문이 천천히 열린다.

이어 테오릭과 그를 경호하기 위해 따라붙은 부하들, 총 일곱 명의 인원이 그 열린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뭐야, 왜 이렇게 썰렁해?"

건물 안으로 들어선 테오릭이 텅 비어 있는 도박장 내부를 보고 말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손님들이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영업 시작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청소를 하든, 장비 점검을 하든 뭐라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야 할 시간 아닌가?

"죄다 페드로 그 새끼 병문안이라도 간 거냐? 이 미친 놈들이 장사할 생각은 안하고... 다 어디갔냐고!"

"어이, 주군께서 다들 어디 갔냐고 물으신다. 빨리 대답을..."

테오릭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도박장 직원을 닦달하려던 경호원.

허나, 그들의 뒤를 따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왔어야 할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갔..."

끼이익- 쾅!

바로 그때, 그들이 지나온 도박장의 출입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어 들려오는 차가운 금속음.

철그렁, 철컥! 철커덕!

그것이 도박장 출입문 손잡이에 쇠사슬을 거는 소리라는 걸, 건물 안쪽에 있는 테오릭과 부하들은 알 길이 없었다.

"이 시발... 뭐야 이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만, 그런 것치고 테오릭의 표정은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테오릭 본인의 실력도 상당하거니와, 자신이 경호원으로 부리는 부하들의 수준 또한 막강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여섯 명의 부하 중엔 기사급 실력자도 둘씩이나 됐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저 멀리 키르헨에 있을 다닐렌츠의 군무관, 기사 발터 브라운이 직접 온다고 하더라도 문제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 이 새끼... 결국은 주인을 물겠다 이거지?"

드르륵-

부하들이 잠긴 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갈 궁리를 하는 동안, 가까운 곳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은 테오릭.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페드로를 어떻게 더 괴로운 방법으로 죽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네가 테오릭이냐."

"...?"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았다면, 페드로를 죽일 방법을 고민하던 그 시간에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묻잖아, 네가 테오릭이냐고."

갑자기 도박장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그는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시발... 페드로 이 새끼, 아주 재미난 짓거리를 해놨네?"

"아가야, 되도 않는 재롱떨지 말고 이리 와서 무릎 꿇어라. 하하하!"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살짝 당황했지만, 상대가 혼자인 데다가 새파랗게 어려 보인다는 점이 테오릭과 부하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잠시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툭툭 농담과 조롱을 던지는 경호원들.

그러나,

슁- 스각!!!

고요했던 실내에 별안간 불어닥친 한 자락의 돌풍.

푸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가장 앞쪽에 서 있던 경호원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며 시뻘건 피를 뿌렸다.

"씨발! 뭐야?!"

"이 개새끼가...!!!"

"어, 어떻게...?!"

어느새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검 한 자루가 금발 미청년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경호원들이 허겁지겁 테오릭을 둘러싸며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방금의 한 수를 보고 깨달았다.

'...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이다!'

검을 휘둘러 동료의 목을 날리는 것은 고사하고 처음에 검을 뽑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 얘기는 무엇인가.

눈앞의 금발 사내가,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 누가 보낸 거냐. 너 정도 실력자가 페드로 따위의 명령을 듣고 있을 리가 없다."

충격에 휩싸인 모두를 대신해 테오릭이 던진 질문.

그에 대한 상대의 대답은...

"보내긴 누가 보내. 내가 직접 내 발로 온 거다."

"... 뭐?"

알 수 없는 대답을 들려주어 테오릭을 당황케 한 금발의 미청년.

이어,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도시 카르셀에서 암약하며 준엄한 왕국의 법도를 어지럽힌 괴뢰 조직, '밤의 형제단'의 수괴 테오릭 베케르트.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무슨 소릴..."

휘잉, 촤락-!

테오릭이 뭐라 하건, 들고 있던 검을 한 차례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나직하게 말한다.

거절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를 지닌 선언이었다.

"다닐렌츠의 차기 영주이자 기사, 데미언 카릴베르크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형을 집행한다."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5)

쉬이잉- 카카캉!!!

거의 동시에 들려온 세 번의 파열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두른 나의 검이 테오릭의 경호원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강하게 후려치는 소리였다.

단숨에 목을 날려 끝내버릴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놈들은 테오릭의 곁에 붙어 카르셀 주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어 온 기생충 같은 자들.

맨 처음 걸린 놈은 기선 제압을 위해 단칼에 목을 쳤다지만, 나머지 놈들에게까지 편안한 죽음을 선사할 만큼 내가 착한 성격은 아니다.

"어윽!"

"큭!"

"아흑!"

탱그렁-! 태엥!

검을 쥔 손목과 팔에 감히 버텨낼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경호원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린다.

뒤이어 그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 달려든 나의 발차기와 주먹이 놈들의 얼굴 한가운데 적중한다.

퍼억! 퍽! 뻐걱!

"아악!"

"크허억!"

"커흑!"

내 주먹에 맞아 안면이 으스러지고, 한쪽 눈알이 터지고, 턱이 으깨진 세 명의 경호원이 피를 토해내며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죽진 않았지만, 죽을 만큼 아플 것이다.

또한, 남은 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되겠지.

그동안 놈들이 테오릭의 곁에서 기생하며 쌓아온 업보의 결과였다.

"어, 어떻게?!"

"이게 무슨... 미친!"

순식간의 네 명의 동료(앞서 나의 검에 목이 날아간 녀석까지 합쳐서)가 전투 불능상태가 된 것을 본 남은 두 경호원이 기겁하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방금 내가 쓰러뜨린 세 녀석의 합공 실력은 영지의 이름난 기사라 할지라도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어린아이 손목을 꺾듯 너무나 간단하게 그 셋을 쓰러뜨렸다.

코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두 경호원은 그동안 경험한 적 없는 거대한 공포가 자신들의 목줄을 죄는 것을 느꼈다.

'못 이겨, 저건 괴물이야! 절대 못 이겨!'

'씨발! 그냥 도망칠까?!'

하지만, 그들은 사방이 막힌 도박장에 갇힌 신세.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손발을 묶고, 호흡을 흐트러뜨렸다.

제대로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싸울 의지가 꺾여버린 것이다.

"이 썅! 막아! 막으라고!!!"

처음의 여유는 어디 갔는지, 너무 놀라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테오릭이 남아 있는 두 명의 경호원을 험한 말로 닦달했다.

하지만 명령에도 불구하고 경호원들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자, 급기야 놈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야이, 씨발!!! 안 싸우면 내가 죽인다! 내가 뒤에서 찌를 거야 이 개새끼들아!!!"

눈깔이 뒤집혀 악을 쓰는 테오릭의 기세에 밀려난 경호원 하나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 기합을 넣으며 나에게 덤벼들었다.

"흐아아아아아!!!"

굳이 상태창을 띄워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상대의 몸놀림을 확인하는 것으로 대강 그 수준과 경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기사급이다.'

진짜 기사는 아닐 테니, 기사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갖춘, 떠돌이 용병쯤 되겠지.

아니면 진짜 기사가 맞는데, 영지에서 큰 사고를 치고 쫓겨나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먹고살던 방랑 기사 놈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이가 귀족도 아니고 한낱 폭력 조직의 두목 경호를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 도시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테오릭의 재력이 그 흔하지 않은 경우를 가능케 했을 터다.

'하, 아드리안보다도 실력이 한 끗발은 높아 보이는 놈을 둘씩이나 데리고 다니다니...'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고 느낀 놀라움.

물론, 거기까지였다.

놀란 것은 놀란 거고,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기사 급의 움직임이건 나발이건, 어차피 나에겐 하품 나올 정도로 느려터진 하수의 몸짓일 뿐이었으니까.

"뒈져라, 이 괴물 새끼야!"

쉬이이잉-!!!

놈이 내 얼굴을 노리고 수평으로 휘두른 검을 고개만 까딱 움직여 가볍게 피해낸다.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상대의 검.

실로 위험천만한 장면이었지만, 상대의 검이 절대로 나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런 씨발!"

상대의 검이 소득 없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버릇처럼 욕을 뱉어낸 상대가 급하게 휘둘렀던 검을 회수하고 그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는데...

콰지직!!!

순식간에 상대의 정면으로 접근한 내가 검 손잡이 끝으로 놈의 머리통을 찍어버렸다.

제 손에 잡힌 검을 회수하는 것보다도 빠른, 가히 번개 같은 속도였다.

"컥!"

털썩!

검 손잡이의 끝부분, 이른바 폼멜(Pommel)이라 불리는 둥근 쇳덩이에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상대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다.

맞는 순간 눈이 뒤집히고, 검 손잡이에 얻어맞은 부분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움푹 들어간 것이, 머리통 내부가 곤죽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제, 남은 테오릭의 경호원은 단 한 명뿐이다.

"이런 씨발...! 이런 좆 같은 괴물 새끼!!!"

굳게 믿고 있던 여섯 명의 경호원 중 무려 다섯 명이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반송장이 되어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을 목격한 테오릭이 혼비백산해 출입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야, 시발!!! 문 열어! 문 열라고오!!! 으아아아아아!!!"

쾅! 쾅! 콰앙! 쾅!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해본다.

하지만 그래 봤자 테오릭의 손과 발만 아플 뿐, 굳게 닫힌 도박장의 철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으으, 으으! 씨바아알!"

태에에엥! 촤악! 푸화악!!!

테오릭이 밖으로 나가보겠다고 두꺼운 철문을 상대로 되지도 않는 용을 쓰고 있는 동안, 나는 마지막 경호원의 공격을 가볍게 쳐낸 후 역습을 펼쳐 놈의 오른팔을 팔꿈치 밑으로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아아아악!!!"

팔이 잘린 경호원이 남아 있는 왼손으로 잘린 오른팔을 붙잡으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동안 테오릭과 함께 카르셀의 수많은 주민들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때리고, 갈취했던 놈들이다.

동정의 마음 따윈, 털끝만큼도 들지 않는다.

"시끄럽다, 이 새끼야."

휭- 퍼억!

"커억!"

깔끔한 뒤돌려 차기 한 방으로 비명을 지르던 경호원의 머리를 걷어차 잠재운 후, 나의 시선은 홀로 남은 테오릭에게로 향했다.

"... 테오릭 베케르트."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테오릭.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열심히 철문을 두드린 건지, 슬쩍 살핀 그의 오른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뻔히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철문을 열어보겠다며 주먹으로 부리나케 두드린 결과였다.

"아이고,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그게 주먹으로 친다고 열리겠냐?"

"시발... 씨바알! 으으으...!"

자신을 조롱하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테오릭이다.

"페, 페드로는 어떻게 되었지? 그놈도 죽였나?"

"아, 여기 도박장 주인? 잘 있어. 앞으로 내 밑에서 열심히 일하기로 했지.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말야."

저벅-

테오릭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내가 대답했다.

터턱-

내가 다가간 걸음만큼 뒤로 물러선 테오릭의 등이 차가운 철문에 부딪힌다.

이어 '꿀꺽'하고 소리가 들릴 만큼 바짝 긴장한 테오릭이 입술을 달싹이며 내게 뭐라 말을 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이 새끼, 뭔 얘기를 하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이내 놈의 입에서 '카르셀의 왕'이라 불리는 거물이 했다기엔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호, 혹시..."

"...?"

"나, 나도, 항복하면 살려줄 건가? 아니... 저도 살려주실 겁니까? 페드로 그놈처럼? 저도 보기보다 쓸모가 많은 놈입니다!"

"하..."

놈이 보여주는 비루한 짓거리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안 쓰던 존댓말을 쓰며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 하긴, 이 새끼 원래 이런 놈이었지?'

원작 소설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밤의 형제단'의 아지트 노릇을 하는 고성(古城)에 틀어박혀 다닐렌츠의 군무관 발터 브라운이 이끄는 영지군을 상대로 한참을 농성하던 테오릭.

놈은 전투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비밀리에 협상을 걸어왔다.

자신과 밤의 형제단이 지금껏 이곳저곳에 몰래 숨겨둔 모든 돈을 내어놓고, 십 년간 영주의 밑에서 열심히 싸우겠다나 뭐라나.

하지만 새로이 다닐렌츠의 영주 자리에 오른 '니나 카릴베르크' 남작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반역자 테오릭의 죽음'이었기에 토벌군 사령관인 발터는 그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놈은 부하들과 함께 붙잡혀 카르셀 광장 한가운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 놈은 원작 소설 속에서 군무관 발터를 상대로 꺼냈던 그 제안을 나를 상대로 똑같이 시도하고 있었다.

"제, 제가 숨겨둔 돈이 많습니다! 분명 공자님께서 영주에 취임하신 후 영지를 다스리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리고... 제가 이래 봬도 검을 좀 씁니다! 그 검을, 공자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공자님의 명령만을 받는 충실한 사냥개가 되겠습니..."

테오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휘웅- 휘웅- 휘웅- 콰지직!!!

순식간에 내 손을 떠나 날아간 손도끼 한 자루가 테오릭의 왼쪽 쇄골을 깨부수며 몸에 틀어박혔다.

"끄아아아아아악!!!"

죽는다고 소리치는 테오릭.

하지만, 그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간 두 번째 손도끼가 오른쪽 골반 부근에 꽂힌다.

콰직! 푸휴흇!!!

골반 쪽에 꽂힌 도끼가 내장을 찍은 것인지, 붉은 피에 찢기고 깨어진 내장 조각이 섞여 흘러나온다.

"아아아악! 이 씨발! 이 개새끼야아아아!!!"

몸에 도끼 두 자루를 꽂은 테오릭이 악을 쓰며 발광했다.

이 새끼가 근데 몸에 칼... 아니, 도끼 좀 맞았다고 존댓말 때려치우고 바로 쌍욕을 갈기네?

그 모습이 괘씸해서, 남아 있는 마지막 도끼 한 자루까지 알뜰하게 먹여주었다.

휘웅- 휘웅- 으직!!!

"크아아아악!!!"

마지막 도끼가 꽂힌 자리는 다름 아닌 왼쪽 무릎이었는데, 도끼날이 무릎뼈를 깨부순 탓에 테오릭은 더는 서 있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콰앙!

"으아아... 으흐흐흑!!!"

몸에 세 자루의 손도끼를 꽂은 채로 쓰러져 버둥거리는 테오릭.

오늘 아침 일어나 부하들과 함께 도박장에 돈을 수금하러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돈 받아 챙길 목적으로 들렀던 도박장이, 그의 무덤이 되는 이런 상황 말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혓바닥을 나불거리나? 감히 너 따위가, 지금 나한테 협상을 걸고 조건을 내밀어?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대는 테오릭에게 다가가, 그의 골반에 꽂혀 있는 손도끼의 머리 부분을 지그시 밟아주었다.

'으지직'하는 음산한 소리와 함께 테오릭의 몸에 꽂혀 절반 정도 드러나 있던 도끼날이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몸속으로 틀어박혔다.

"끄허으어으윽...!"

어마어마한 통증에 하얗게 눈이 뒤집히는 테오릭.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극심한 출혈로 정신을 잃어가는 그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네가 밤의 형제단 아지트로 쓰고 있는 고성(古城)의 지하 감옥, 제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의 벽 안쪽."

"...?!"

"거기에 지금껏 모은 돈과 보물을 숨겨 놓은 거, 잘 알고 있다."

"끄흐윽... 그, 그걸 어떻게..."

"그 돈, 내가 가져다가 잘 쓰마."

"어떻게... 어떻게에...!!"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테오릭이 뭐라 더 말을 하려했지만...

휘우웅- 촤악!!!

인정사정없이 내리친 나의 검에, 놈의 머리가 깨끗하게 떨어졌다.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6)

한 사내가 카르셀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데 그의 손에 들린 한 가지 물건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잿빛의 싸구려 천으로 만든 큼직한 보자기.

보자기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그 보자기의 아래쪽이 무언가에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게 문제였다.

붉은색의, 아니 그보다 더 진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보자기.

그 모습을 본 사람들 모두가 수군거렸다.

"... 뭐야 저거?!"

"피... 피 같은데?"

"에이 설마! 진짜 피일까?"

"피 맞는 거 같아! 색깔이 너무..."

"그, 그럼 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건 뭔데?"

"혹시 사람 시체 같은..."

"아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냥 고기겠지! 돼지고기나 사슴고기 같은 거!"

"근데, 저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인데 저런 걸 들고 다니지?"

"칼 차고 다니는 거 보니 용병 같은 거겠지."

"자자, 신경끕시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큰일 치르지 말고!"

놀라고 당황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내.

그런 그의 곁에 어느새 다가온 잘생긴 얼굴의 청년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한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자님."

"고생은 뭘. 그나저나 얘기는 다 해놨나?"

"예, 지금 다들 공자님을 뵙기 위해 모여서 준비 중입니다."

"네 얼굴 알아보던? 웬 미친놈이 와서 시장 만나겠다고 행패 부리는 줄 안 거 아냐?"

"하하, 저도 좀 그런 상황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었습니다. 시장도 제 얼굴 바로 알아봤고요."

"다행이네. 그럼 어디로 가면 되지?"

"카르셀 시청입니다. 그나저나, 손에 들고 계신 건 혹시..."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시장한테 선물로 주려고. 좋아할까 모르겠네?"

"뭐,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잊지 못할 선물은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 얼른 움직이자. 다들 기다린다며."

"예, 공자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잘생긴 얼굴의 청년, 아드리안.

그 뒤를 따라 '공자님' 데미언 카릴베르크가 카르셀 시청으로 향했다.

***

"오, 오셨습니다!!!"

"어디? 어디!"

"저기 오신다!"

아드리안의 뒤를 따라 카르셀 시청 정문을 들어서니, 건물 입구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고, 공자님!!!"

그 무리 중에서도 가장 앞에서 사색이 되어 뛰어오고 있는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이곳 카르셀의 시장, 오토 벨스였다.

"카르셀의 시장직을 맡고 있는 오토 벨스, 다닐렌츠의 온당하신 지배자, 카릴베르크 가문의 후계자이신 데미언 공자님을 뵈옵니다!"

흙바닥에 철퍽, 소리가 나게 엎드린 카르셀의 시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인사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뒤이어 시장을 따라 나온 시청의 직원들과 경비대원,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에서 구경하던 카르셀의 주민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려 내게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낯선 광경이었지만, 앞으로 다닐렌츠의 영주이자 귀족으로 살아가려면 적응해야 하겠지.

"다들 일어나시오. 그 옷에 묻은 것들도 좀 털고."

"예, 공자님. 감사합니다."

주섬주섬,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몸을 바로 세운 카르셀의 시장, 오토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여기 아드리안 경에게 공자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쩐 일로 이 먼 길을 다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을 주셨다면 제가 사람을 보내서 진작 맞이했을 텐데요!"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얼굴을 똑똑히 알아본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셀의 시장은 불과 몇 주 전 있었던 나의 아버지이자 다닐렌츠의 전(前) 영주, 구스타브 남작의 장례식에 찾아와 나와 직접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뭐, 영지 시찰 나왔습니다. 정식으로 취임한 후에 나오면 이래저래 복잡할 것 같아서."

"아, 영지 시찰... 그, 그러셨군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반쯤 벗어진 시장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의 어느 벼슬아치가 윗사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환영하겠는가?

더욱이 나는 그냥 윗사람도 아니고 영지 내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절대자, 영주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으니 저토록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심지어, 내 눈앞에서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비고 있는 카르셀의 시장은 여러모로 구린 데가 많은 인간이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근데, 공자님 손에 들고 계신 건..."

"아, 이거 말입니까? 시장님 뵈러 오늘 길에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선물 하나 준비했습니다. 자, 받으시죠."

"예? 아, 예에..."

슬쩍 보기에도 불길한, 핏빛으로 물든 보자기를 건네받는 시장.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지금 느끼는 그의 심정으로 알려주고 있다.

"뭐하십니까? 열어보세요."

"예? 어... 음..."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을 주저하던 시장이 천천히 보자기를 풀어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흐이이익!!!"

보자기에 싸여 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한 시장이 뒤로 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허으윽!"

"저, 저게 뭐야?"

"꺄아아악!"

"사람 머리잖아!"

그랬다.

내가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시장에게 건넨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통이었던 것.

"고, 공자님! 이게 대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내게 묻는 시장에게,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모르는 얼굴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장은 아실 줄 알았는데?"

"그, 그게 무슨..."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잘린 머리통을 다시 한번 살피는 시장.

그런 그의 시선이, 이내 경악으로 바뀐다.

".... 테, 테오릭 베케르트?"

그리고 시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주변의 모두가 펄쩍 뛰듯 놀란다.

"테오릭? 시장님 지금... 테오릭이라고 하셨습니까?"

"뭐야, 테오릭이면... 밤의 형제단의 두목?"

"아니, 어떻게..."

"공자님께서 테오릭의 목을 베어오신 건가?"

"정말이야? 정말 테오릭이야?"

"와아! 공자님이 테오릭을 죽였다! 만세에에에!!!"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오릭의 죽음을 인지하고 시작된 환호성은 사방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만세에!!! 테오릭이 죽었다!!!"

"잘 죽었다, 저 개자식!!!"

"데미언 공자님께서 카르셀의 악당을 처치하셨다!!!"

"다닐렌츠 만세!!! 카르셀 만세!!! 데미언 공자님 만세!!!"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열심히 내 이름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자식, 선동(?) 잘하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아주었다.

이곳 카르셀을 포함한 다닐렌츠 전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사나이에게 어울리는, 자신만만하고 늠름한 미소와 함께였다.

***

"공자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오오오오!!!"

카르셀 시청에 도착한 뒤 고작 두 시간 만에, 나는 시장을 포함해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카르셀 시의 주요 인물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두 사람의 목을 날려버렸다.

참고로 목이 날아간 둘은 도시 방위를 위해 키르헨에서 오래전 파견된 영지군의 지휘관들이었는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뻗대다가 그 같은 최후를 맞았다.

수년간 카르셀에만 머문 탓에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진 놈인지 몰랐던 게 놈들의 명을 재촉했다.

그다음으로 내 앞에 불려온 이는 카르셀의 경비대장.

이놈 역시 '밤의 형제단'과 결탁해 놈들의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고 수도 없이 많은 뇌물을 받아먹은 자였다.

"아닙니다! 오, 오해십니다. 공자님! 저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처절한 해명과 눈물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카르셀의 경비대장이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내 앞에선 통하지 않는 변명이었다.

"그동안 카르셀에서 온갖 부정하고 불법적인 사업을 벌여왔던 괴뢰 조직 '밤의 형제단'의 수괴, 테오릭 베케르트와 결탁하여 영지민들의 고혈을 빨아온 네 놈의 더러운 짓거리를 모두 알고 있다. 여기, 이 장부에 네 이름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알고 있느냐?"

내 손에 들린 것은 카르셀 도박장의 마스터였던 페드로에게서 얻은 뇌물 장부.

그 내용을 눈으로 확인한 경비대장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새하얗게 변한다.

"아, 아닛?! 이게 왜... 그, 공자님! 공자니임! 제 얘기를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저는 그저 카르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그 더러운 입 닥쳐라, 이놈!!!"

퍼어억! 콰장창창!!!

"크허억!!!"

내게 배를 걷어차인 경비대장의 몸이 붕 떠서 날아가 시장실 구석에 놓여 있던 집기들을 부수고 바닥으로 처박힌다.

생각 같아선 단박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카르셀의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 발에서 살짝 힘을 뺐다.

물론, 그래 봤자 경비대장의 비루한 실력 따위로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커흑... 끄르륵!"

내게 걷어차여 단박에 내장이 깨지고, 입과 코로 피를 토해내며 정신을 잃은 경비대장.

시장실 구석에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분노한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던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쪽에 서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저놈도 지하 감옥에 처박아라. 그리고 치료사를 불러 목숨만 붙여 놓으라 이르도록. 저놈 역시 카르셀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나의 분노를 느낀 경비대원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방금까지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이의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사방이 피범벅이 된 시장실 밖으로 사라진다.

이로써, 시청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수가 여섯 명으로 늘었다.

앞서 목이 날아간 두 놈을 합하면 카르셀 수뇌부에 총 여덟 명의 빈 자리가 생긴 셈.

그 많은 놈이 죄다 테오릭이 갖다 바친 구린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후우우... 예상은 했다만,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전대 영주님 때엔 카르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이번에 공자님께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셨으니,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 그래야지."

아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그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아드리안."

"예, 공자님."

"너에게 카르셀의 임시 경비대장 권한을 주겠다. 여기, 장부에 등장하는 나머지 인원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라. 놈들이 눈치채고 도망치기 전에 서두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자님. 단 한 놈도 빠짐없이 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바로 밤의 형제단 놈들의 성으로 가겠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혼자 가시는 겁니까?"

내가 홀로 밤의 형제단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아드리안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 지금쯤이면 테오릭이 죽었다는 소식이 놈들에게도 전해졌을 거다. 여기서 시간을 더 줬다간 놈들이 도망치거나 성에 모여서 제대로 농성할 준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전에 들이쳐야지."

"그건 그렇지만..."

내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부하로서 응당 주군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아드리안.

그런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페드로를 통해 장부도 손에 넣었으니, 살살 달래가면서 놈들이랑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으득,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놈들 싹 다... 지옥으로 보내고 돌아오마."

다닐렌츠 남부 평정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