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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하루살이

어제 동생이 죽었다.

아니, 어쩌면 내일.

Episode. 0

작은 손의 기도

#1

Chapter. 1 사계(四季) (1)

마왕의 공포가 아이들을 잠재우는 이야기가 되고 전사가 돈에 팔리는 시대.

파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하얀 절벽 위.

한 남자가 낡은 묘비를 마주하며, 코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다를 참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늘 바라보시니 어떠십니까. 안 질리십니까, 작은 어머니."

철렁-.

황금빛 술이 넘실거린다.

꺼낸 건 라벨조차 지워진 제국의 오래된 증류주였다.

그는 상처 가득한 엄지로 뽕-하고 뚜껑을 따곤.

주르르륵-.

묘비 위로 술을 부었다.

글자가 새겨진 곳으로 더 많은 술이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사과파이를 만들던 아르나 에셀레드를 위하여.」

빈 병 너머.

사내의 보랏빛 눈이 비친다.

평화로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쟁의 눈이었다.

"아벨 녀석이 마왕의 목을 땄답니다. 아, 마왕 새끼도 저승에 갔으니 이미 들으셨겠군요."

후우웅-.

순간 거친 바닷바람이 불었고.

-카인 공자님, 입!

바다를 등진 남자.

카인 에셀레드.

그는 바람결에 들리는 것 같은 아르나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포기하십쇼. 최전선에서 굴러먹다 보니까 귀족다운 말은 다 까먹었습니다."

우웅-.

다시금 부는 바람.

답은 없었다.

"제가 쫓겨난 후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영락없이 뒈질 줄 알았던 제가 여길 돌아올 정도로요."

카인의 외양은 누가 봐도 닳고 닳은 전사의 그것이었다.

최대한 몸을 가리고 체온을 지키는 가죽 코트.

그 안쪽에는 일부러 여러 겹을 덧댄 옷과 중요 부위를 지키는 철판들이 붙어 있다.

게다가 카인의 등에는 그의 키만 한 대검이 매달려 있었다.

"마왕이 죽으니까 몬스터의 씨가 말랐습니다. 덕분에 칼 닦을 일이 없어졌죠."

마왕이 세계의 동쪽에 자리하던 시절.

카인과 같은 전사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마왕이 죽고 도래한 평화의 시대.

그들은 달라져야 했다.

"다들 이 평화를 좋아하던데 전 평화가 더 어렵더군요. 차라리 몬스터 대가리만 썰면 되던 그 옛날이 조금은 그립습니다."

마왕과 몬스터가 없으면 인류의 적은 사라지는가?

아니다.

이제 인류의 적은 인류 자신이었다.

세계를 위해 싸우던 전사들은 이제 몇 푼의 금화를 위해 칼을 휘두른다.

명예와 영광은 스러지고.

남은 건 생존과 금화뿐.

한때 '불굴'이라 불리던 전사는 퀘스트샵을 전전하며 집 나간 고양이만 찾아 주고 있는 시대였으니까.

물론 카인에겐 다른 놈들보다 '불굴'의 삶이 더 나아 보였다.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건 말해 봤자 재미도 없으실 테니, 제일 궁금하실 아벨 이야기나 해 드리죠."

용사 아벨.

그리고 카인 에셀레드의 이복형제인 아벨 에셀레드.

"녀석이 이젠 황제가 된답니다."

후우우웅-!

바닷바람이 거세게 분다.

카인은 이 바람만큼 아르나가 놀랐으려나 하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철혈황녀랑 사랑에 빠져서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파다합니다. 며느리가 황녀일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아르나, 아벨, 카인이 같이 지내던 시기는 이런 농담을 할 수 있을 때도 아니었다.

아르나는 늘 아팠고.

아벨은 늘 싸워야 했으며.

카인은 늘 패배하던 그 시절.

그땐 절대 할 수 없었을 대화를 이어 갔다.

"소문처럼 사랑은 당연히 아닐 테고, 황제는 남자만 된다니 기왕이면 용사를 데릴사위 삼아서 힘과 정통성을 다 챙기겠다는 황녀의 수작이겠죠."

우우우우-.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 소리가 야유처럼 들려왔다.

카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답을 바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기에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 그녀를 되새기며 계속했다.

"그 순진한 아벨이 여우같은 황녀와 잘 살지 걱정되시나 봅니다."

카인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묘비의 건너편.

아무것도 없는 초록의 초원.

"안 그러냐, 아벨?"

하지만 카인의 눈은 그 외의 것을 바라봤다.

스으으으-.

세상이 일렁인다.

투명하게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을 벼린 듯한 갈색의 눈.

단정하게 한 줄로 묶은 갈색의 머리.

짧고 상처들이 파먹은 검은 머리에 맹수와 같은 자색 눈을 지닌 카인과는 딴판인 남자.

"알고 계셨습니까?"

착하고 곱상하게 생겼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무시하진 못하리라.

"앞에 뻔히 보이는데 못 찾는 등신도 있나?"

"마왕만 알아보던데요."

최강의 '용사'.

용사 아벨 에셀레드.

그를 향해 카인은 말했다.

"니 주위엔 등신들만 있나 보네."

아벨은 묘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탁-, 탁-.

아벨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빛 레이피어가 발걸음에 맞춰 경쾌한 박자를 일으킨다.

카인은 턱짓했다.

"성검?"

스릉-.

아벨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땅에 붙박여 하늘을 지탱하는 지엄하고 성스러운 검.

신이 인간계에 남긴 <사계절의 신기> 중 하나.

성검 '여름'.

수만의 적을 베고 마왕의 목까지 벤 검치곤 너무나 얇았다. 날도 세워지지 않아 쇠막대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번 쥐어 보시겠습니까?"

아벨은 날을 쥐며 손잡이를 내밀었다. 카인은 기가 찬 듯 손을 내저었다.

"자격 없는 자가 쥐면 불타 죽는 거 다 안다."

"죽지는 않습니다. 죽지는."

그 미묘한 말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살벌한 건지는 성검 '여름'과 아벨만이 알 뿐이었다.

착-.

그는 성검을 집어넣곤 카인과 나란히 섰다. 그러곤 친모인 아르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님. 형님이 또 술을 드렸군요."

"...마음에 안 들면 내 목도 썰든가."

아벨은 묘비로 손을 뻗었다.

고랑에 맺힌 술을 손으로 쓸어선 맛보았다.

"어릴 땐 형님이 참 싫었습니다. 원래도 좋을 구석이 없는 인간이긴 했는데, 가장 싫은 건 아픈 어머니에게 자꾸 독한 술을 드려서였죠."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살갑게 말하던 사이였다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더라."

아벨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저희는 너무 멀리 돌아왔죠."

상처만이 가득한 마음이 비치는 씁쓸한 미소였다.

그 속에 담긴 둘의 과거는 역겨운 음모와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이었기에 둘은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원한도 삭이고, 거칠었던 삶은 과거를 아름답게 덧칠하기도 하는 법.

아벨은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것들을 입에 담았다.

"이젠 압니다. 그때의 빌어먹을 형님이 안 계셨으면 어머니가 더더욱 고통에 떨면서 돌아가셨을 걸요."

아르나는 늘 아팠다.

아벨을 낳는 대가로 마녀의 저주에 걸렸었으니까.

그녀를 살리려면 성국의 성녀나 추기경의 축복이 필요했지만, 이런 시골까지 그런 자들이 올 리는 당연히 없었고.

아르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약은 술뿐.

고통이라도 무디게 하기 위해 카인은 몰래몰래 독주를 가져다주곤 했었다.

저주에 대해 자세히 모르던 아벨은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냈었다.

"저희도 한잔하죠."

"...?"

우웅-.

아벨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면서 그의 팔꿈치까지 사라졌다.

용사의 권능 중 하나, [인벤토리].

철렁-.

그 속에서 아벨이 꺼낸 건 카인이 묘비를 적시던 술이었다.

다만, 카인의 것과는 달리 「크로이츠 제국 111년산 레드브레스」라는 라벨이 단정히 붙어 있었다.

카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술이라면 학을 떼던 아벨이 [인벤토리]에 술을 들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자라랑-.

아벨은 이번엔 고급스러운 유리잔 두 개를 꺼내선.

휘익-.

하나를 카인에게 던졌다.

탁-.

카인은 자연스럽게 잔을 받아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술병을 딴 후 조르르- 자신과 카인의 잔에 금빛 술을 따랐다.

"십오 년 만입니다. 이렇게 마주하는 게."

"그때가 어제 같은 데 벌써 그렇게...."

카인은 고개를 내렸다.

현 용사이자 차기 황제가 따라 준 술이 손에 들려 있는 게 영 어색했다.

순간, 카인은 고개를 번뜩 들어선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냐."

십오 년간 왕래가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카인은 아벨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아벨은 별 대답 없이 잔을 쑤욱 내밀며 웃었다.

"일단 마시죠."

카인은.

짠-!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치곤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카인은 소매로 입가를 쓸었다.

뜨거운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오르며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반면 아벨은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어릴 땐 그렇게 싫어하더니. 엄청 잘 마시네."

"성검의 주인이 되면 독과 저주에 면역이 됩니다. 술도 맛만 느끼죠."

"안 취할 거면 술은 왜 마셔."

"인생이 너무 쓰니까 술이 참 달아서요."

카인은 황당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 중지를 들어 올렸다.

"어디서 겉멋 든 애들이나 할 소릴. 술 마시고 그런 소리 하는 건 다 등신들이야."

"형님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카인은 손가락을 스르륵 접었다. 바다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등신이 나였군."

상처 가득한 카인의 얼굴도 새빨갛게 만들 정도의 부끄러운 과거였다.

"등신 형님."

"이 새끼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후우우-.

다시금 바람이 분다.

이번엔 오열 같기도, 절규 같기도 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아벨의 갈색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카인은 자신과 아벨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용사님을? 뭔 수로?"

"최전선, 절대방위선."

"...."

최전선이 언급되는 순간 가벼운 분위기의 카인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무수한 고난을 넘었던 전사 카인이 있었다.

"가면의 설원공, '카인 로드이스트'라면 할 만할 겁니다."

"애먼 사람 잡지 마. 대륙에서 카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만 줄 세워도 성국 한 바퀴는 돌릴 거다."

아벨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면서 자신의 갈색 눈을 가리켰다.

"[인벤토리]처럼 용사의 권능 중엔 [스테이터스]라는 게 있습니다. 상대의 이름이나 직업, 속내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를 보죠."

끝까지 잡아떼려 했다.

그러나 용사의 권능으로 봤다 하니 뭔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두 이복형제 사이에 내려앉는 순간.

휘익-.

아벨은 유리잔처럼 성검 '여름'을 내던졌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쳐 내고자 했다.

하지만.

['여름'이 '카인 에셀레드'에게 귀속됩니다.]

중간 과정도 없이 성검은 카인의 손에 들려선 울었다. 이제야 올바른 자리를 찾았다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아벨은 만족스레 웃었다.

"역시."

"역시는 개뿔. 이거 뭔데?"

카인은 그 유명한 성검이 착 달라붙은 게 어색할 따름이었다.

아벨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는 가짜 용사고."

휘익-.

그러곤 카인과 성검을 번갈아 가리켰다.

"형님이 진짜라는 겁니다. 게다가 등 뒤에 그건 마검 '겨울'이지 않습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세상에 어느 가짜가 마왕을 죽여. 가짜래도 그 정도면 진짜지."

아벨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까.

"형님, 가짜는 가짜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억지로 진짜가 되려고 하면...."

펄럭-.

아벨은 입고 있던 제복의 가슴팍을 열었다.

선명하게 그어진 상처들과 단단한 근육질의 몸의 가운데, 은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전신으로 가느다란 실을 뻗고 있었다.

스읏-.

게다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벨의 심장을 파먹을 거미 떼 같았다.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을 주는 모습.

세상의 밑바닥을 보았다 자부하던 카인조차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 잘난 성검이라면 술이든 저주든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나?"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파고드는 은빛을 손가락으로 스윽 만지며 말했다.

"이래 봬도 성국에서 새겨 준 '축복'입니다."

"그러면 추기경이나 성녀를 싹 다 죽이자고 해야지, 왜 널 죽-."

아벨은 카인의 말을 잘랐다.

"형님은 지난 삶이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

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가에서 불명예스럽게 누명을 쓰고 쫓겨나고.

대륙으로 밀항해서 밑바닥을 전전하며 무수한 피와 죽음을 맞이했고, 용병으로 온갖 더러운 걸 마주했다.

그리고 최전선.

사연 없는 놈 없고, 살아 있는 놈 없는 곳답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눈물이 말라 버렸다.

모든 삶이 후회였다.

"그 삶이 누군가의 음모였다면요?"

"...!"

"전 후회합니다."

아벨에게 용사로서의 삶은 늘 후회고 절망이었다.

"돌이키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용사 따위 되고 싶지도 않고요. 이 모든 게 가능한 건 진짜인 형님뿐입니다."

"애들이나 할 소리-."

아벨은 어처구니없어하는 카인의 말을 끊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형님이 도와주셔야만 가능하지만요."

아벨은 하얗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서 제 뜻대로 해 달라는 신호였다.

탁-.

카인은 곧장 그의 손을 후려 쳤다.

푹.

그러곤 성검을 옆에 꽂은 후 묘비 앞에 주저앉으며 빈 잔을 내밀었다.

"더 따라봐."

"예?"

"왜 그딴 미친 소리를 하는지 길게 들어 보자."

아벨의 두 눈엔 습기가 어렸다.

"들어 주실 겁니까?"

"들어 보고."

남보다 못했던 둘이.

하나는 용사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전사였던 둘이.

처음으로 형제가 되는 순간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형제일 순간이었다.

#2 Ep.0-1

사계(四季) (2)

한 달 후, 라테라노 성국.

수도 헤네랄리페는 꽃과 환호로 가득했다.

"용사님, 만세!"

퍼버버벙-.

마법으로 만들어진 꽃잎들이 무한히 흩날리고 세기의 결혼식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골목은 꽉꽉 들어찼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마왕을 죽인 아벨을 향한 감사의 외침이었다.

"평화를 위하여!"

그런 용사가 크로이츠 제국을 다시 일으킨 철혈황녀와 결혼한다니 세상이 들썩이고도 남았다.

"저기다-!"

누군가의 외침.

끼기기기긱-.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여덟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가 위용을 자랑했다.

다그닥, 다닥.

결혼식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가장 앞엔 아벨이 서 있었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했다.

"용사님, 저희 어머님을 낫게 해 주세요."

"마왕을 죽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용사에게 닿기를.

그들의 절망을 아벨이 풀어 주길.

금빛의 관을 쓰고 백색의 정복을 멀끔히 입은 아벨은 그런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모두가 아벨을 향해 기도한다면, 아벨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황녀는 맨 뒤에 있으니 상관없고.'

카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벨의 손 역시 애처롭게 기도하는 손으로 보였다.

몇 번을 고민하고,

몇 번을 생각해도.

아벨의 기도하는 손을 잡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결말이겠지만.

팟-!

그는 달렸다.

사람들의 어깨를 밟으며 새처럼 날았고 모습이 드러나는 건 금방이었다.

순간,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결혼식 날 절 죽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날 절벽에서 들은 아벨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축복'을 받고서부터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삶을 대신 살아 주는 느낌이었죠.

아벨은 마지막까지 '아벨 에셀레드'로 살기를 바랐다.

이 축복이 자신의 몸을 차지해 버리면 늦는다.

그렇기에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온전한 자신으로, '아벨 에셀레드'로 죽기를 바랐다.

-마왕을 죽인 후부턴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잠깐씩 사라지던 기억이 며칠 단위로 길어졌죠.

그건 카인이 칼을 들 이유로 충분했다.

"아-벨-!"

그의 손엔 거대한 백색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성검과 쌍을 이루는 마검 '겨울'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백색의 뇌전이 몰아친다.

짓쳐 드는 카인이 마치 하얀 폭풍처럼 보일 정도로.

콰가가강-.

그 힘에 아벨을 지키던 수백의 기사들이 잡초처럼 뽑혀 날아갔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단숨에 정리했고 아벨까지 남은 건 넷.

용사 아벨과 함께 마왕을 죽인 그의 동료들이었다.

-기억이 없어질 때마다 동료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제의 저는 어땠냐고요. 하지만 답은 늘 같았습니다.

"막아-!"

"미친놈이 감히 용사님의 결혼을 망쳐?"

날아드는 욕설에도 카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아벨의 동료가 아니었으니까.

-'똑같다'. 분명 저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같다고만 말했습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절 속이는 건지....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카인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처럼 [스테이터스]로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면 안 되냐고 반문했었다.

그러자 아벨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 순간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권능은 처음으로 거짓을 보여 줬죠.

아벨은 모든 걸 잃었다.

동료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용사의 권능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 순간.

-형님이 떠올랐습니다.

용사가 되기 전, 헤어진 카인은 다르리라.

진짜 자신을 알아보리라.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카인을 찾은 아벨은 두 주먹을 쥐며 환호성을 간신히 참아 냈었다.

찾지 못할 줄 알았던 '겨울'이 카인의 등에 있었으니까.

아벨은 운명이라는 걸 느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형님.

쿠드드드득-.

카인이 땅을 디뎠다.

발뒤축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헤네랄리페의 바닥이 바스러졌다.

쉐에에엣-!

발을 굴렀다.

세계의 풍경이 이지러진다.

찰나라는 시간조차 카인의 질주를 표현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마왕과 싸웠던 넷 역시 놓칠 정도였다.

오직 하나.

아벨만이 똑바로 바라보았고.

스윽-.

성검을 슬쩍 기울였다.

순식간에 아벨의 앞에 나타난 카인은 그 틈에 성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순간 두 형제는 상대의 눈에 비친 각자의 얼굴을 보았다.

"나 같은 놈한테 뒷일을 맡긴 게 후회되지 않냐?"

카인의 한탄과

"오히려 좋습니다."

아벨의 기쁜 미소가 교차했다.

즈즈즈즛-.

그는 곧장 성검을 뽑아선 아벨의 가슴에 꽂았다.

뼈를 부수고 피륙을 가르는 감각이 카인의 손에 선명했고.

두-근.

천천히 느려지는 아벨의 심박이 성검을 타고 전해졌다.

"죽여-!"

"막아라!"

"용사님을 살려야 한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다.

둘을 향해 달려오는 수천수만의 외침이 찔러든다.

그러나 물속을 나아가는 화살처럼 모든 걸 계획대로 짜 맞춘 두 형제에게 닿기엔 느렸다.

후우우우웅-.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용사의 권능으로 상처가 아물려는 아벨의 가슴에 백색의 '겨울'을.

푸쉬시시싯!

마저 찔러 넣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아벨의 얼굴에선 혈색이 사라졌다.

반면 카인의 얼굴에선 빨간 핏물이 뚝뚝 흘렀다.

"그렇게... 슬퍼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원만큼 창백해진 아벨.

죽어 가는 눈.

그럼에도 아벨은 흐려지는 눈의 초점을 어떻게든 맞추며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카인의 눈물을 닦았다.

"모든 건 계획대로입니다...."

두 개의 신기에 관통당한 은빛의 무언가가 미친 듯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자 아벨의 가슴팍에 박힌 성검 '여름'이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옆의 마검 '겨울' 역시 부르르 떨었다.

"역시 신기가 직접 꽂히니 '축복'이 잠잠해지는군요."

아벨은 제 일을 남 일처럼 태연히 말했다.

카인은 이 모든 걸 계획한 그가 안타까웠다.

황녀와의 결혼은 역시 사랑은 아니었다. 당연히 황제가 되고 싶던 것도 아니었고.

아벨의 머리 위에 놓인 금빛의 관.

성국에서 계승되는 성류관 '가을'.

이 정도의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 아벨이 쓸 일이 없는 물건이기에 그는 결혼을 승낙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아벨, '봄'은 어디에 있지? 아무리 봐도 없어. 이러면 그냥 개죽음일 뿐이야!"

마지막 신기, '봄'.

둘의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마지막 신기였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성검이니 마검이니 정체라도 알려져 있었지만, '봄'은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기록조차 극히 드물었다.

카인이 그런 '봄'을 어떻게 찾냐고 했을 때, 아벨은 자신 있다고 했다.

"제겐 봄이 보입니다."

지금처럼.

그는 피투성이의 가느다란 검지를 들어선 카인의 가슴을 톡톡 쳤다.

['카인 에셀레드'에게서 '봄'이 시작됩니다.]

[<사계절의 신기>가 모두 모였습니다.]

[『사계』가 피어납니다.]

쿠구구구구구구-.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몸이 아니라 혼이 느끼는 떨림.

카인은 따스한 무언가가 흘러들어 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봄'이...?"

동시에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도 모르던 걸 아벨이 알고 있던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봄이라는 놈이 원래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도 없죠."

"마지막까지 지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신났구나?"

아벨은 웃음 지었다.

용사의 미소가 아니라 어릴 적 형님을 바라보던 소년의 미소였다.

꽈아아악-.

그러곤 마지막 힘을 불태우며 카인의 코트 깃을 붙잡았다.

아벨의 갈색 눈동자가 카인의 고독한 눈을 마주했다.

"다시 시작하는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사계』가 '용사'의 소망을 듣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 주세요, 형님."

투웅.

그 순간 아벨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더는 아벨이 아닌 한 구의 시체가 힘없이 떨어졌다.

"못난 놈-!"

카인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온몸이 뜨겁고 눈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우-.

먼 곳에서부터 절규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온다.

카인은 그 속에서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절대 잊지 않겠다, 용사 아벨 에셀레드!"

우--- 우----.

카인을 잡기 위해 달려오던 자들이 사라진다.

하늘의 푸름도.

피의 붉음도.

칼의 은빛까지도.

모든 색이 카인에게 빨려 들어가며 흑백만 남은 세계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경계마저 흐려지더니 회색으로 뭉쳐서는 별도 달도 없는 허무의 세상이 되었다.

[회귀를 시작합니다.]

모든 게 사라진 세상, 카인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철로 만든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액자가 앞에 나타났다.

그곳엔 방금 카인이 아벨을 성검과 마검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네가 바라던 기적이더냐, 아벨. 기적이라는 놈 참 못생겼구나."

주마등을 보듯 액자 속 그림은 카인의 과거로 향했다.

+

「한 달 전, 에셀레드 해안절벽.

아벨이 길고 긴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다.

"<사계절의 신기>를 모두 모으면 소원을 이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빌 겁니다."」

+

하지만 아벨은 돌아갈 수 없었다.

몸과 정신을 파먹는 은빛의 '축복' 때문이라고 했었다.

카인은 그림을 계속 바라보았고 액자는 그가 지나쳤던 후회들을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

「최전선의 전사들이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걸 바라만 볼 때.」

「스승님의 마검 '겨울'을 들어야 했을 때.」

「대륙을 전전하던 용병이었을 때.」

「에셀레드 백작가에서 쫓겨날 때.」

「작은어머니 아르나가 아무리 독주를 마셔도 고통스러워 할 때.」

「바다와 싸우곤 시체로 돌아온 노기사의 손을 꼭 잡고 울음을 참을 때.」

+

"내 삶도 참 등신 같았군."

무엇 하나 순탄치 않았고, 어느 하나 카인의 것은 없었다.

하나 있다면 상대를 죽이는 검뿐.

다시금 그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급스러운 귀족의 방이었다.

한가운데의 큰 의자엔 흑발에 보랏빛 눈을 지닌 카인이 앉아 있었고.

초조한 듯 눈이 떨린다.

잊었던 기억.

카인은 어릴 적의 자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노기사는 어린 카인의 손을 따스하게 잡으며 말했다.

"아벨 공자님과의 결투가 두려우십니까."

"...."

카인은 호기로운 말도, 떨리는 속내도 말하지 못했다. 노기사는 안타까운 듯 손을 꽉 쥐었다.

"제 고향에선 '흔들리는 건 바다가 아니라 마음이다'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밴더빌트가 언제나 도와드리겠습니다."」

+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잃고서야 알게 되는 게 있다.

대개 그런 것들의 이름은 후회였고, 밴더빌트라는 이름이기도 했다.

"나만 포기하지 않았다면-!"

저 이후의 미래를 안다.

연무장에서 아벨과 싸워 처참히 패배한다.

백작가를 노리던 적들은 후계자인 카인이 이복동생인 아벨에게 졌다는 걸 이용하며 가문을 흔들었다.

아르나는 고통 속에 죽었고.

백작이 돌아오지 못한 백작가는 결국 멸문했으며, 아벨은 성검을 쥐곤 성국으로 끌려가 용사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배신과 죽음.

마지막으로 카인은 과거를 바라보게 되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가 없던 삶.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때를 보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때.

[분기점을 확인했습니다.]

카인과 액자만이 존재하던 세계가 금빛의 직선으로 갈라지고.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백색의 뇌전이 몰아쳤다.

사라졌던 사계절의 색이 제자리에 깃든다.

동시에 카인의 신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카인은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모든 신경이 불타오르고.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쪼그라들고.

세상의 모든 고통이 엄습했다.

[회귀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카인의 세계가 바뀌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3

Chapter. 1 열일곱의 봄 (1)

「우리의 신은 울보였다.

녀석의 눈물로 만들어진 <사계절의 신기>가 모인다면 어쩌면 다시 웃을지도 모르지....

- 어느 마술사왕의 술주정」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이 창밖으로 비치고 붉은 벨벳 커튼이 그마저도 가린다.

한쪽엔 북방 엘프의 숲에서만 나는 목재로 만든 책장들이 늘어서 있고, 책들이 이빨처럼 꽂혀 있었다.

가운데 놓인 유난히도 큰 의자엔 검은 머리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벨 공자님은 좋은 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로스 후작가를 생각한다면 아마 오늘 결투는...."

계속 소년에게 말을 걸던 노기사는 입을 닫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기사는 소년의 손을 잡으며 온기를 전했다.

"공자님, 아벨 공자님과의 결투가 두려우십니까."

"...."

소년의 보랏빛 눈이 떨렸다.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무게가 소년의 머리를 짓눌렀기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노기사는 소년의 손을 꽉 잡으며 힘을 주고자 했다.

"제 고향에선 '흔들리는 건 바다가 아니라-."

파지지지지지직-!

순간 소년의 전신에서 백색의 뇌전이 치솟아 올랐다.

밴더빌트는 흠칫 놀랐지만, 더더욱 손을 꽉 잡았다.

나쁜 마법이라면 본인이 감당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마음이지. 그걸 알게 될 때까지 먼 길을 돌아야 했어."

뭔가 달라졌다.

"카인 공자님?"

뇌전이 사라지자 방금까지 초조해하고 떨던 소년은 더는 없었다.

에셀레드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

카인 에셀레드.

카인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밴더빌트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밴더빌트."

노기사는 머뭇거리면서도 카인을 경계했다.

기묘한 뇌전이 번뜩이고 달라진 카인이 의심스러웠으니까.

밴더빌트는 대검이 매달려 있는 등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카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지키려고 하고, 지금은 죽이려고?"

"그...."

노기사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카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방의 취향은 친부의 것이다.

기억에 남아 있던 광경 그대로였지만, 너무 긴 시간을 돌아온 나머지 어색하게 이곳저곳을 만졌다.

밴더빌트의 눈에 긴 여행을 거치고 돌아온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답답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평범하네."

카인은 책장을 손으로 쓸었다.

가시 하나 배기지 않는 게 잘 손질된 책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카인은 이 북방 엘프나무의 가치를 알았기에 이렇게 낭비한 게 아까웠지만, 이 방의 주인을 떠올리면 당연해 보였다.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카인과 아벨의 아버지이자, 에셀레드 백작가의 가주.

에드먼드의 집무실은 그의 전리품들을 전시해 둔 곳이었다.

이 나무는 엘프의 숲 원정에서 이기고 왔다는 증표였으며, 커튼은 상인 연합 <델프트>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걸 상징했다.

"던전은?"

앞뒤 없는 카인의 물음이었지만, 노기사 밴더빌트는 곧장 알아먹고 대답했다.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정말 계속 싸우고 계신 건가."

"...에드먼드 백작님이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왕국 최강의 검호니까요."

밴더빌트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달라진 카인이 어색할 뿐, 그가 충성을 다할 대상이 아닌 건 아니었으니까.

"다시 열리지 않는 건 후작들의 말처럼 오류일 수도 있고."

던전은 들어간 자가 살아 있는 한 다른 자가 더 들어오는 걸 막는 성질이 있었다.

그걸 '닫았다'라고 대개 표현했다.

"일반적으론 그렇습니다."

에드먼드의 집무실을 카인이 쓰고 있다는 뜻은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

에드먼드 백작은 후작들의 정치질에 홀로 던전에 들어갔고 1년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던전에는 식량이 존재치 않으니 후작들은 그가 진즉 죽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왕국 최강의 검호가 사라진 자리를 지키는 건 아직 어린 카인뿐.

그들은 자연스레 에셀레드 백작령을 향해 마수를 뻗었다.

만만했으니까.

"밴더빌트."

"예."

"오늘 내가 아벨과 싸워서 이길 것 같은가? 질 것 같은가?"

카인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밴더빌트는 지금껏 카인을 의심하던 것도 까먹은 듯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패배하실 겁니다."

"너무 대답이 냉정한데?"

"북방에 계시던 아벨 공자님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로스의 '검은여우 필립'입니다. 그 교활한 놈이 이번 결투에도 분명 무슨 수를 썼을 겁니다."

"그럼 결투하러 나가면 안 되겠네."

농담 섞인 카인의 말.

"솔직히 그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밴더빌트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꼭 말을 해야만 전해지는 건 아니다.

카인은 그의 속내를 읽고는 입을 열었다.

"에셀레드의 후계자라는 놈이 동생과의 결투도 피하면 누가 날 따르겠어. 결국 로스 후작가의 영향력만 커지겠지."

"예. 그렇습니다."

털썩-.

카인은 에드먼드 백작이 앉던 푹신한 1인용 소파에 앉은 후, 깍지를 꼈다.

"아주 판을 잘 짰어. 도주하면 겁쟁이 후계자, 패배하면 백작가를 잇기엔 무능력한 후계자."

밴더빌트는 한참을 고만하다 넌지시 말했다.

"대리기사전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카인은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려는 밴더빌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전엔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저 응원만 하던 밴더빌트가 부족하긴 하지만 다른 의견도 꺼냈다.

카인은 지금부터 할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도주하는 것보단 낫지만 나 대신에 싸울 기사도 없잖아."

쿵-.

밴더빌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성한 그의 백발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이트 밴더빌트, 공자님의 칼입니다."

"그대가 유일한 내 칼이지.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라 어머님의 기사라서 문제지만."

한때는 밴더빌트의 충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등을 돌려도 오직 그만이 자신을 지켜 주려 했었던 걸 기억하기에 카인의 말엔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노기사와 어린 후계자가 바라보는 순간.

쾅쾅쾅-!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결투 시작인데, 빨리 나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밴더빌트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면서 분노를 토했다.

"감히, 공자님께 무슨 망발이냐!"

끼익-.

문이 열리고 보이는 건 세 명의 기사였다. 그들은 왼팔에 주황색 천을 묶고 있었다.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증표였다.

"역시 질질 짜고 있을 줄 알았어. 이 조그만 영지에서 뭘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다 늙은 영감하고 속닥속닥."

"제이든 네놈! 로스 후작이 네 뒤에 있다고 이리 오만한 게냐."

밴더빌트는 번쩍 일어서면서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온 세 명의 기사 중 가장 앞에 있던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이젠 후작님의 기사인데 전처럼 고개 숙일 필요는 없잖아?"

밴더빌트는 곧장 대검을 빼려 했다.

그러나 제이든은 오히려 목을 길게 빼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감당할 수 있으면 베시든가."

주황색은 로스 후작의 색이었다.

그리고 주황색 끈을 묶는 기사들은 후작의 기사들인 <로스 데 캐롯>뿐.

즉, 후작을 대신하여 영지에 온 자들인 만큼 당당했다.

더군다나 에셀레드의 기사도 아닌 밴더빌트가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맞지 않았다.

"밴더빌트, 참아."

"...!"

카인은 나지막이 명령했다.

그 모습에 제이든을 비롯한 다른 두 기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똑똑하십니다. 카인 도련님."

"그래. 에셀레드보다 그쪽이 더 나은가?"

카인은 배신자 제이든에게 물었고 그는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후작님은 능력에 따라서 대우해 주시니까요."

"네가 에셀레드의 무고한 영지민을 함부로 죽여서 쫓겨났던 것도 아시고?"

"...."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과의 싸움을 피하던 카인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밴더빌트."

"예."

"시체 잘 처리할 수 있지?"

"...예?"

뜬금없는 카인의 말에 밴더빌트는 의문을 표했다.

제이든을 비롯한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스릉-.

카인은 의자 옆에 세워뒀던 자신의 레이피어를 뽑았다.

제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뭐 찌르기라도 하시려-."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푸욱-.

순식간에 제이든의 사각에서 날아든 카인의 세검이 그의 목에 틀어박혔으니까.

"끄-어억."

날을 타고 제이든의 피가 흐른다.

카인은 어떤 감정도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제이든의 숨통을 끊으며 그의 가슴을 밟고 뛰어올랐다.

제이든의 뒤에 있던 기사 둘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멈칫했고.

푸우욱-.

단숨에 제이든의 목에서 세검을 뽑아낸 카인은 바로 왼쪽 기사의 벌어진 입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둘."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에 둘이 죽고 남은 하나는.

스릉-!

본능적으로 칼을 뽑았다.

본래 타 영지의 기사는 가문의 내실에 들어설 때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이들이 에셀레드를 무시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약해졌고, 힘이 없다 한들 수천의 낮과 수천의 밤에 싸워 왔던 카인이 돌아왔다.

당연히 그의 검이 좀 더 빨랐다.

푹.

세 번째 기사가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발등에 세검이 꽂혔다.

"카-인!"

그는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칼을 들었다.

하지만 빈 저택에 올 사람은 없었고, 바닥에 꿰인 발에 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카인은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뛰어올랐다. 그의 머리를 두 무릎으로 단단히 잡고 대답해 줬다.

"그래."

부드드득-.

그러곤 한 바퀴 돌렸다.

"유언치곤 짧네."

쿠웅-.

세 번째 시체가 철푸덕 쓰러졌다. 카인은 그들의 팔에 묶였던 주황색 끈을 풀었다.

얼굴과 옷에 튄 피를 닦으면서 밴더빌트를 돌아봤다.

"할 수 있지?"

"고, 공자님?"

노기사는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아무리 이들이 약한 축이라고 해도 나름 <로스 데 캐롯>의 평기사다.

하나면 몰라도 셋은 명백히 카인의 역량으론 이길 수 없는 전력.

그런데 이겼다.

오러로 짓누른 것도 아니고 빈틈을 노리고 가장 단순하게 움직이며 하나하나 순식간에 죽였다.

카인은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볍게 웃었다.

"뭐 이런 걸로 놀라. 이제 시작인데."

"이게요?"

콰릉-!

먹구름 낀 밖에서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집무실은 번뜩였고.

"에셀레드는 내 땅이다."

그 순간 카인의 눈이 번쩍였다.

밴더빌트는 나름 경험이 많은 기사였지만, 한순간 카인의 기백에 밀렸다.

"감히 내 땅에서 지들 멋대로 판을 벌려?"

게다가 더욱 무서운 건.

카인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

상대를 죽이겠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밴더빌트는 본능적으로 침을 삼키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저는 어머니를 살릴 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필립 부단장의 말을 따랐죠.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날 절벽에서 들었던 아벨의 말이 떠오른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저 멀리 보이는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음모의 장소.

그리고 몰락의 시작.

"밴더빌트, 내겐 도주와 패배 말고 다른 선택지도 있다."

콰가가강-!

다시 한번 내리치는 번개.

그 속에서 카인은 섬뜩하게 웃었다.

"승리. 그리고 죽음."

평균 생존 72시간의 최전선.

그곳에서 십 년 가까이 싸워 왔던 전사의 웃음이었다.

#4 Ep.Ⅰ-1

열일곱의 봄 (2)

솨아아아아-.

굵은 비가 내린다.

저 멀리 수평선이 지글지글하는 걸 보니 저녁까지 내릴 비였다.

카인은 가벼운 차림으로 왼 허리춤엔 세검만 장비한 채 빗속을 걸었다.

밴더빌트는 그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

성내의 사람들은 카인의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빗속을 걸어가는 고독한 후계자.

오늘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가 안다.

로스 후작가에서 갑자기 에드먼드의 아들이라고 북방전선에서 데려온 아벨과 싸우는 날이며 카인이 패배할 날이라는 걸.

아벨이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엄청난 재능을 지녔는지 소문이 돌긴 충분했다.

-이게 진짜 백작님의 아들이지!

-아벨은 천재야. 검의 천재!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희대의 천재.

아벨에게 검을 가르친 기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왕국 최강의 검 에드먼드를 이길 자는 미래의 아벨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반면 적장자였던 카인에 대한 평가는 애매했다.

-카인 공자님도, 나쁘진 않지만....

-괜찮긴 하신데, 좀....

웬만한 기사들보단 카인이 나았지만, 비교 대상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재능을 지닌 아벨.

당연히 에셀레드 백작령을 이을 후계자로서 카인의 위치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외가에서도 인연을 끊은 모양이시고.

게다가 카인의 어머니 클로에의 라마이닝 백작가에서도 선을 긋기 시작했다.

카인에게 남은 건 한 자루의 검과 노기사 한 명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걸 꾸민 게 바로 로스 후작가였다.

그들은 일부러 아벨과 아르나를 데리고 와서 여론을 흔들고 오늘의 결투를 만들었다.

-에셀레드의 후계자시니 친히 동생분께 검을 가르쳐 주시죠, 카인 공자님.

가는 눈웃음을 잘 짓는 <로스 데 캐롯>의 부단장 검은 여우 필립은 교활했다.

어차피 아벨에게도 에드먼드의 피가 흐르는데, 굳이 약한 카인이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가.

향후 찬란하게 성장할 아벨을 추대해서 에드먼드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어떤가.

로스 후작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내세웠다.

그의 작전이 무엇인지 뻔히 알았지만 당해야 했다.

카인에겐 힘이 없었으니까.

"오우거에 둘러싸인 기분이야."

카인은 가까워진 기사들의 연무장을 보며 말했다.

밴더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강했다면...."

카인이 후계자로서 에셀레드를 이끌기 위해선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열일곱이고 아벨이 열다섯이라지만 검으로는 아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쿠르르르릉-.

구름 사이로 번개가 노니면서 천지를 울리는 순간.

"괜찮아. 오우거는 내가 잘 잡거든."

카인이 연무장에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인사도 하지 않는다.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 그를 거부했고, 로스의 기사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벅-.

카인이 제자리에 섰다.

계속 들어올 줄 알았던 그가 멈추자 몇몇 기사들이 의아해했다.

"클로이드."

카인은 나지막이 에셀레드의 기사단장 클로이드를 불렀다.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장년의 기사, 클로이드가 앞으로 카인의 앞으로 나와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다음은 없어."

"...?"

클로이드는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카인을 바라보았다.

묘했다.

분명 생김새는 그가 알던 카인이었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알맹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고, 공자님."

게다가 늘 무표정하게 카인을 지키던 나이트 밴더빌트가 무언가 알아먹은 듯 놀란다.

카인은 손을 들어 노기사를 막곤 클로이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에셀레드의 기사가 감히 주인을 고르려 해?"

"...!"

"그것도 이 땅을 노리고 들어온 외적들을?"

화아아아아아아-!

한 순간.

카인이 지니고 있던 살기의 일부분이 풀려 나가며 그를 덮쳤다.

클로이드는 이 세상에 자신과 카인만이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서 카인은 구름을 뚫을 정도로 거대한 거인이었고, 단숨에 찍어 죽일 수 있지만 친절히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클로이드 단장의 본능이 맹렬히 울었다.

죽는다.

카인을 거스르면 죽음뿐이다.

기사로서 살아온 모든 세월이 그에게 경고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가슴은 카인의 의지를 읽어 냈으니까.

"그건-."

급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다시 말하지. 다음은 없어."

카인은 그의 말을 자르며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클로이드는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간신히 고개만 돌려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르다. 너무 달라...!'

클로이드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비가 내려서가 아니라 이전의 카인과는 전혀 달라진 그를 보았으니까.

'궁지에 몰려서 바뀌신 건가, 원래부터 저런 모습이 있으셨던 건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카인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던 자신의 모호한 태도는 오늘로써 끝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런 카인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다.

전장의 에드먼드와 너무나 닮았으니까.

"결투 전에 너무 기강을 잡으시는 거 아닙니까?"

기사들이 갈라진다.

한쪽에 몰린 주황색 띠를 감은 기사들 사이에서 느끼한 목소리가 울렸다.

"필립 로스 프랜시스."

털이 수북한 여우.

'로스'의 이름을 가운데 이름으로 쓰는 게 허락된 기사 중의 기사.

에셀레드 백작령에 있는 모든 <로스 데 캐롯>을 지휘하는 부기사단장이기도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가소롭다는 미소였다.

"하긴 오늘 아벨 님께 패배하면 못하실 테니 실컷 해 두셔야겠죠."

짝-, 짝-.

카인은 돌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박수가 빗방울을 뚫고 필립의 귓가를 찔렀다.

"대단해."

필립이 비릿한 미소를 지우며 반문했다.

"...무슨 의미입니까."

카인은 대답보다 먼저 연무장을 쓱 돌려보았다.

양측의 기사들이 모두 참관하고, 가운데에는 갑옷을 입고 세검을 든 아벨이 서 있었다.

그런 아벨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경은 검은 여우라는 별명처럼 기사보다는 관료나 참모가 더 어울리는 것 같더군. 에셀레드를 흔들기엔 완벽한 계책이었어."

"이젠 가면을 쓰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카인은 필립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클로이드는 다음이 없지만, 그대는 지금이 없거든."

필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로이드가 카인과 대화 중 움찔 했던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달라지셨군요."

필립이 만든 상황에 무력하게 끌려만 다니던 카인은 사라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빨을 드러낸 어린 맹수였다.

"달라져야만 네가 짜 둔 판을 엎을 수 있을 테니."

"뭐, 늦었지만 응원하겠습니다. 결과가 바뀌진 않겠지만요."

그는 아벨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벨의 천재적인 재능에 자신이 가르친 검이면 오늘의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벨의 목줄도 쥐고 있으니 필립은 오늘 승리의 쐐기를 카인의 가슴에 박기로 했다.

앞으로 에셀레드 백작령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글쎄."

카인은 묘한 웃음을 남기고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아, 그리고 고마워, 필립."

"...?"

"날 마중 보낸 기사들 말이야. 덕분에 몸이 좀 풀렸어."

필립은 그 순간 시린 겨울바람이 등허리로 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솨아아아아아아-.

점점 더 거칠어지는 비.

카인은 그를 뒤로하고 연무장 가운데로 움직였다.

-과거로 돌아가시면 부탁드립니다. 이용만 당하던 어리석은 저를 혼내주시고.

콰가가가강!

번개가 더욱 강해진다.

명멸하는 빛 속에서 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세검을 뽑았다.

카인보다 조금 더 작은 체구의 아벨 역시.

스릉-.

같이 뽑았다.

이번 결투의 심판인 클로이드는 급하게 다가와서 둘의 가운데 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형님.

클로이드가 시작을 외쳤지만 카인과 아벨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들의 정수리부터 턱을 타고 속절없이 흐를 때.

"아벨."

카인이 그를 불렀다.

아벨은 짧게 끄덕였다.

"이 꽉 깨물어. 혼 좀 내줘야겠으니까."

카인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예."

게다가 아벨의 순순한 대답.

에셀레드 백작령의 미래를 걸고 싸우는 이복형제간의 결투보다는 형제간의 지도대련에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후우웅-.

바람이 분다.

늘 옅은 짠내가 감도는 에셀레드 해안의 바닷바람.

미래의 카인이 십오 년 만에 맡았던 바람과 같은 냄새였다.

둘의 결투가 당장이라도 시작되려는 때, 카인의 눈엔 다시금 낡은 액자가 반투명하게 보였다.

+

『멸망의 대적자 Ⅰ』

'카인 에셀레드'의 회귀로 세계선이 나뉘었습니다. 운명의 분기점을 바꿔 새로운 세계선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세계선 고정도 : 0%

클리어 조건 : 아벨의 패배

성공 시 : 『사계』 일부 해금, 세계선 고정도 상승

실패 시 : 회귀 취소.

+

시간을 뒤로 돌려 다시 얻은 삶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선전 포고.

퀘스트샵의 의뢰서와 비슷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기적에는 대가가 필요한 모양이야.'

하지만 그에겐 익숙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늘 대가가 필요했으니까.

"어디다가 한눈을 파십니까."

아벨은 미묘하게 어긋나 있던 카인의 시선을 꼬집었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래도 돼."

뻔뻔한 대꾸에 아벨의 말문이 막혔다.

지켜보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연무장의 흙이 비에 젖어 가고, 아벨의 세검을 타고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달려드는 대신 자신의 검의 끝과 끝을 잡고는.

파창-!

무릎으로 찍어 반 토막을 낸 후 뒤로 던져 버렸다.

아벨은 동요하지 않고 구석을 턱짓했다.

구석엔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연습용으로 쓰는 세검이 몰려 있었으니까.

"칼을 가져오십시오."

"필요 없다. 넌 이 주먹이면 충분해."

아벨은 인상을 썼다.

천재답게 그는 카인의 무력을 알 수 있었다.

검을 든다면 그래도 조금은 싸울 수 있겠지만, 맨손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말했다.

"칼을 들지 않으시면 너무 금방 끝날 겁니다."

"그래, 금방 끝나겠지."

카인의 묘한 말.

아벨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좋습니다."

필립은 자신에게 더 유리해진 상황이라 웃었으며, 클로이드는 카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고뇌했다.

저벅. 저벅.

주위가 어떻든 둘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틈을 노리는 두 마리의 맹수 같았다.

카인은 걸음만으로도 아벨의 수준을 눈치챘다.

'너무 정석적이야.'

딱딱한 말투도 검을 든 것도 카인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뻔한 모습.

슷-.

일부러 팔을 내렸다.

경험으로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빈틈이었다.

아벨의 눈이 반짝였다.

동시에 세검의 끝이 흔들렸다.

'지금!'

아벨이 찔러 들어오려고 움찔한 그 찰나.

카인은 온몸을 쥐어짰다.

뼈가 휘어질 정도로 근육이 꽉 조여지며 고통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팟-!

카인은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한 번의 질주로 수백의 기사를 날려 버렸던 카인다운 속도였고, 아벨의 눈이 갈피를 잃었다.

놓쳤다.

어디로 간 건지 고개를 돌리려 했다.

우웅-.

그 순간, 전투본능이 맹렬히 울었다.

아벨은 직감적으로 옆으로 피했다.

시-잇!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카인의 오른 주먹이 지나갔다.

파스스슷-.

그친 풍압만으로도 갈색 머리 몇 가닥이 잘렸다.

압도적인 위력.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주먹에 아벨의 몸은 얼어 버렸고, 머리는 카인이 왜 충분하다 했는지 알아 버렸다.

"배가 비었네."

빗방울의 틈으로 카인의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바보가 아닌 카인은.

까아아아앙-!

그대로 아벨의 복부 갑옷을 후려쳤다.

#5 Ep.Ⅰ-1

열일곱의 봄 (3)

아벨의 갑옷이 주먹 모양으로 우그러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충격을 상쇄했지만.

"커헉-."

이미 타격은 전해졌다.

숨통을 꽉 조이는 고통에 허리가 절로 굽는다.

카인은 그런 아벨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지는 가짜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확실히 용사가 될 만해.'

방금 주먹이면 웬만한 용병이라도 한 방에 정신을 잃었을 텐데, 그걸 고작 열다섯의 아벨이 버텨 냈다.

전투 센스나, 맷집이나 제 나이를 아득하게 초월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

아벨을 봤던 모든 자들이 의심 없이 왜 용사라 찬미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 대 영."

첫 승리는 카인의 몫이었다.

끄덕.

아벨은 수긍했다.

카인이 주먹이 아니라 검을 들고 있었으면 방금의 기습에 죽었을 테니까.

"평소 하던 대로만 해!"

필립이 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아벨을 키워 낸 건 이러나저러나 필립 로스 프랜시스.

에셀레드가 품지 못했던 아벨을 데리고 온 만큼 그는 자격이 있었다.

"...예."

아벨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과거의 카인은 아벨이 왜 그렇게까지 필립의 말을 잘 듣는지 관심도 없었다.

-북방의 엘프들은 개새끼입니다.

그 아벨이 욕부터 하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 왕국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엘프의 숲.

아벨과 아르나는 그곳에서 왔다.

-그때 필립이 찾아왔죠. 인간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고, 어머니의 저주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요.

본래 아벨은 생명을 해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폭력 역시 싫어했다.

하지만 검을 들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어머니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그렇기에 지금의 아벨은 필립의 말을 믿고 온 힘을 다했지만.

-성검 '여름'을 쥐고 성국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던 필립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미래의 아벨은 필립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복수할 힘을 얻었을 땐 이미 필립이 죽은 후였다.

카인은 그런 필립과 아벨을 번갈아 보며 씁쓸히 웃었다.

과거의 자신이 몰랐던 게 꽤 많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에.

필립의 눈치를 보는 아벨을 향해 말했다.

"어따 한눈을 팔아."

카인은 다시금 주먹을 들었다.

바꿀 것이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사는 세계를 바꾸리라!

"그런 적... 없습니다."

아벨은 힘겹게 부정했다.

복부의 고통이 여전히 숨통을 조이기도 했으며, 아무 잘못도 없는 카인에게 상처를 내야 한다는 가책이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벨은 이를 악물며 세검을 들었다.

"이젠 봐드리지 않-."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하는 말을.

쉐에에엣-!

카인이 달려들며 끊었다.

엄한 필립의 눈빛을 보며 아벨은 전의를 다졌다.

이젠 막다른 길이었다.

카인이 다칠까 쉽게 뻗지 못하던 세검을 이제야 시원히 뻗어 내기 시작했다.

싯-! 시싯-!

빗방울을 가르며 날아드는 찌르기.

유려하게 휘감아 치는 베기.

사각을 파고드는 다음 수!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반짝였다.

'가르쳐도 하필 엔 자우어를 가르쳤군.'

세검은 본래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용병들이 쓰는 세검이 악랄한데, 필립이 가르친 건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는 엔 자우어였다.

용병으로 전전했던 카인은 그의 칼끝을 보자마자 단숨에 알아봤다.

'필립 이놈이 끝까지 초를 치려 했어.'

반면 에셀레드의 검술, '아르드바르'는 공명정대하게 나아가는 특징이 있었다.

'엔 자우어'의 습관이 들면 익힐 수 없을 정도로.

쉬익-.

아벨이 뻗어 내는 궤적마다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절실함이 묻어난다.

카인은 바람에 눕는 갈대처럼 그의 절실함을 피했고.

툿-.

피할 수 없는 건 주먹으로 후려쳤다.

간단하지만 기존의 카인이라면 절대 반응할 수 없던 움직임과 과감함이었다.

"쯧."

필립은 이렇게까지 카인이 분전할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얼굴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카인이 너무 달라졌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애써 아벨 쪽으로 기울게 했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잇-.

핏방울이 튄다.

아벨의 궤적에 담긴 것이 절실함이라면.

투웅!

세검을 쳐 내는 주먹에서.

검이 스친 볼과 팔에서.

비산하는 핏방울은 카인의 절규였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나아가는 자, 카인 에셀레드.

지금의 카인과 저 처절한 주먹을 느낀다면 그리고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어 본 적 있는 남자라면 가슴 뜨거워질 싸움이었다.

티이잉-!

카인의 주먹에 아벨의 세검이 부러졌다.

콰르르르릉-!

저 멀리 바다를 때리는 번개.

함께 대기를 찢어발기는 천둥.

카인과 아벨.

아니, 두 형제는.

지금이 싸움의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으아아아-!"

아벨은 울부짖었다.

몰려오는 패배의 직감.

필립에게 반드시 약을 받아서 하얗게 마르는 어머니를 살려야 하기에.

자신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듯 날아오는 카인의 주먹을 향해 부러진 세검을 내질렀다.

즈즈즛-.

세검이 카인의 어깨를 파고든다.

여린 살갗.

튀는 피.

걸리는 뼈.

그 모든 것이 아벨의 손에 생생히 느껴졌다.

그 낯선 감각에 아벨은 얼어붙었다.

하하호호 끝나는 대련이라면 몰라도 서로의 삶이 걸린 전투에선 실수였다.

"아직인데?"

야수는 상처를 입었다고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카인은 최악의 마수였다.

보랏빛 눈이 아벨의 코앞에서 타오르며 아직 어린 용사를 비웃었다.

"끝이 나야 끝이지."

파앙-!

빗줄기를 가르며 카인의 주먹이 그의 턱을 향해 치솟았다.

휭.

아벨의 전투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주먹을 피해 냈다.

카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역시, 미친 재능.'

저런 녀석에게 성검까지 주어졌으니 마왕의 목을 베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아직... 어리다!'

하늘로 치솟은 카인의 주먹.

예상이라도 한 듯 칼날처럼 쫙 펴졌고, 반대 손으론 그대로 굳어 버린 아벨의 멱살을 잡아챘다.

시이잇-.

그의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떨어진다!

아무리 아벨이 천재라도, 이 거리를 피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누군가 끼어드는 건 가능했다.

퍼어어어억.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

카인의 손날을 잡은 건 굳은살이 가득한 필립의 손이었다.

그는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의 승부는 이미 났습니다, 카인 도련님."

오늘은 패배할지라도.

아벨의 재능은 진짜니 더는 소모시키지 않고 다음을 노리겠다는 의도가 물씬 풍겼다.

"아니."

카인은 아벨의 멱살을 한 번 더 잡아끌며 말했다.

"이제 이 대 영이다."

끝까지 끝을 내지 않겠다는 카인의 단단한 의지.

필립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손이 얼얼하다.

게다가 카인의 머리가 생각보다 잘 돌아가고.

배짱이 두둑하다.

카인에 대한 평가를 상향하며 입을 열었다.

"더 싸우면 자칫 한 쪽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혹시 이 기회에 아벨을 죽이려고 하시는 건지요?"

카인은 추잡한 술수를 거는 그를 향해 짧게 대답했다.

"지랄."

이렇게까지 받아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로스 후작의 사냥개 주제 감히 에셀레드의 이름을 입에 담아?"

후작을 대리해서 백작령에 온 그를 사냥개라 낮잡아 부르는 순간, 필립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말씀이 지나치십-."

"지나치긴. 아벨이 엔 자우어를 쓰더라. 혹시라도 아벨이 가문을 이으려고 해도 에셀레드의 검술을 못 익히게 하려고 한 거잖아."

물론 아벨 정도의 재능이 있고, 지금 수준이라면 에셀레드의 검을 익힐 순 있을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웅성웅성.

에셀레드의 기사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벨의 검 끝이 예사롭지 않은 건 모두 알아봤지만, 설마 그게 말로만 듣던 대륙의 엔 자우어인지는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의 서쪽 너머 섬나라, 아이리안 왕국.

아이리안에서도 한참 구석에 박힌 에셀레드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필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선의였습니다."

"선의는 개뿔. 구린 냄새 풀풀 풍기는 니들의 이익이겠지."

카인이 이렇게까지 대차게 나오자 필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반응만을 바라보는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부하들.

여기서 밀리면 지금껏 작업해 둔 것들이 무너지리라.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곤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 에셀레드까지 오는 길이 지루해서 아무거나 한두 수 알려 준 겁니다."

"그뿐일까?"

카인은 반쯤 기절한 아벨을 한쪽 팔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녀석이 내게 결투를 신청하게 만든 것도 너잖아."

이전의 카인이라면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카인은 옳지 않은 걸 틀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칼을 뽑았으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최전선의 전사가 카인이었으니까.

"...!"

카인이 어디까지 가려는지 가늠되지 않는다.

필립의 머리가 순간 복잡해졌다.

그러나 순하게 눈만 끔뻑이는 에셀레드의 기사들을 둘러보다 피식 웃었다.

제법 따끔하게 찔러 왔지만, 결국 카인은 혼자.

"아까 말씀하셨죠, 제게 참모가 어울릴 거라고요.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기사인 줄 아십니까?"

시골 영지의 위태로운 후계자, 카인.

그가 막 나온다고 로스 후작가의 기사인 자신이 수그러들 이유는 없었다.

화아아아-!

순간, 필립의 예리한 살기가 카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쭙잖은 평기사가 아니라 확실하게 엑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발하는 살기였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어쩌실 겁니까."

노기사 밴더빌트는 바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탁.

그러나 클로이드 단장이 분노한 노기사의 어깨를 잡아 멈췄다.

야수처럼 뒤돌아보는 밴더빌트를 향해 그가 말했다.

"당신은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십니다."

"그 잘난 에셀레드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가!"

"그건...."

클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도 눈을 피했다.

"백작님이 돌아온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가?"

"...!"

카인의 노기사 밴더빌트가 클로이드의 연약한 마음을 찔렀다.

"당장이 없으면 미래도 없는 것을 왜 몰라!"

"백작님의 마지막 명령은 '대기하라'였습니다."

밴더빌트는 속이 끓는 듯 가슴을 쳤다.

에드먼드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을 때야, 이들의 활약은 꽤나 대단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자 이들은 우두머리를 잃은 소 떼에 불과했다.

개개인이 강하다지만, 움직이지 않으려는 자들은 무해하다.

필립은 그 모습을 턱짓했다.

"카인 도련님, 저게 당신의 현실입니다."

그의 살기가 한층 더 강해진다.

전신을 짓누르는 그의 기세에 카인의 발이 물러진 흙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인은 꼿꼿이 허리를 폈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눈으로 필립을 마주했다.

필립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숙이십시오. 아니면 저들에게 도와달라 겁쟁이처럼 징징거리십시오. 그러면 저도 물러나지요."

다소 강압적인 방법이었으나, 어떻게든 필립은 카인의 위신을 깎아 내고자 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후계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자.

힘없이 말만 앞서는 어리석은 자.

씨익-.

필립은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생각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차선은 되리라.

하지만 카인은 숙이거나 도와달라 말하지 않고.

"아벨."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아직도 멱살 잡혀 있던 아벨을 불렀다.

스윽-.

아벨은 조심스레 고갤 들었다.

"마녀의 저주에 약 따위는 없다. 성국의 도움을 받거나 마녀를 족치는 수밖에 없어."

순간 아벨의 눈이 커졌고.

아벨의 후견인으로서 나서던 필립의 동공이 떨렸다.

"필, 필립 경은 축성한 이슬을 마신다면 가능하다고-."

"마녀가 뒷집 개 이름도 아니고 고작 성수 원샷으로 잘도 풀리겠다."

아벨은 떨리는 눈으로 필립을 돌아봤다.

지금까지처럼 아벨을 속이기엔 너무 많은 눈이 있는 상황.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틈에 카인의 입이 열렸다.

"내 동생, 아벨 에셀레드."

"...!"

아벨은 놀랐다.

이복동생이며 그간 카인이 그를 인정하지 않아 이름 뒤에 가문을 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카인이 직접 부른 이상 아벨은 이제부터 '아벨 에셀레드'였다.

카인은 그를 향해 물었다.

"승패는?"

승리는 강한 자의 것.

그리고 패배는 용감한 자의 것.

아벨은 인정받은 에셀레드로서 대답했다.

"제 패배입니다."

[『멸망의 대적자 Ⅰ』을 성공하였습니다.]

#6 Ep.Ⅰ-1

열일곱의 봄 (4)

「승리와 패배가 뒤바뀌자 5%만큼 세상이 바뀌었다. 그렇게 내일이 5%만큼 달라졌다.

- 이름 없을 기록자」

[세계선 고정도 : ▲ 5% ]

[『사계』의 봉우리 하나가 피어납니다.]

['겨울'이 일어납니다.]

파지지지직-.

처음 '겨울'을 쥐었을 때처럼 척추를 타고 뇌전이 끓어 넘친다.

순백의 설원을 내달리는 벼락.

'겨울'의 주인에게 허락된 절대의 뇌전!

가까이 있는 필립이나 아벨 둘 다 카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쯧쯧."

필립은 아벨을 향해 혀를 찼다.

자신이 짜 둔 판을 패배를 인정하면서 엎어 버렸으니까.

"내가 분명 거짓말을 하긴 했지."

카인은 멱살을 풀었고, 아벨은 마주 섰다.

휙-.

아벨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필립은 당당하게 턱을 들며 말했다.

"어차피 마녀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살 수 없어. 네 어머니는 죽었다고 치고 냉정히 생각해 봐라."

아벨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는 게 모양새였다.

"엘프의 숲에서 고통 받던 너희 모자에게 손을 내민 건 로스 후작님이다. 조금만 더 시키는 대로 하면 넌 평생 얻지 못했을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닥쳐-!"

아벨은 소리 질렀다.

그에겐 부도 권력도 필요 없었다.

자신을 낳고 키우기 위해 마녀의 저주를 감수하고 엘프들의 박대에서도 버텨 낸 어머니, 아르나만이 아벨의 모든 세상이니까.

설득이 실패했다.

필립은 고개를 젓곤 평상시 생각을 툭-하고 뱉었다.

"이래서 천한 피는...."

그 순간.

"로스의 여우 새끼가 감히."

카인은 당장이라도 씹어 버릴 듯 필립을 향해 욕설을 뱉었다.

필립은 눈을 크게 뜨며 카인 쪽으로 고갤 돌렸다.

화아아아아-.

동시에 지금껏 연무장을 짓누르던 필립의 기세가 밀려난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카인의 것.

"분수를 모르고 내 동생을 천하다 모욕하는구나."

카인의 보랏빛 눈에서 거칠 것 없는 뇌전이 번뜩였고 필립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쿠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린다.

아니, 카인의 신경과 근육의 모조리 불사르며 달리는 '겨울'의 포효였다!

필립과 카인.

둘이 일으킨 기세에 빗줄기조차 휘기 시작했다.

필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러라고...!"

엑스퍼트 나이트.

인간의 한계선 너머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

기사 하면 떠오르는 '전장의 도살자'는 엑스퍼트부터 시작이었다.

그런 엑스퍼트는 오러를 피울 수 있냐 없냐로 구분되는데....

지금.

카인의 전신에서 순백의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다. 카인 역시 엑스퍼트 나이트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상상도 못 했던 일에 필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카인의 전신에서 불꽃처럼 피어난 오러는 그대로였다.

"안 됩니다, 카인 도련님!"

클로이드 단장은 외쳤다.

카인이 오러를 각성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늘 카인이 달라진 이유도, 다른 행동을 하던 것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갓 각성한 초보.

진즉 엑스퍼트에 올라 숙련된 필립은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참으셔야 합니다!"

카인은 클로이드를 손가락으로 한 번 가리켰다. 그 후 목을 써는 수신호를 하며 말했다.

"다음은 없다고 했어."

"필립은 공자님께서 이길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여야지. 안 그런가, 그중 한 사람?"

"그, 그건...."

클로이드는 차마 더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인의 번뜩이는 보랏빛 시선이 에셀레드의 기사들을 한 번씩 훑는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그리고 생각해라, 에셀레드의 기사들이여. 기사가 언제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했지?"

"...!"

"언제부터 싸울 자리를 고르기 시작한 거냐?"

묘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에드먼드가 사라진 후 시골 중의 시골인 에셀레드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던 기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그들이 하나둘 움직이려 할 때, 카인은 말을 이었다.

"괜히 감동했다며 고개 들지 마. 이제야 그러면 이 여우 새끼랑 함께 너희들도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공자님!"

클로이드 단장은 험한 카인의 말에 놀라서 말했다.

"클로이드. 지금이 그다음이야. 당신도 죄인이니까 닥치고 있어."

필립은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일단은 관망하다 카인의 속내를 알 것 같아 한마디를 보탰다.

"무능이라는 죄입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해 하는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달리.

"적이 더 잘 아네, 더 잘 알아."

필립이 먼저 눈치를 챘으니까.

카인과의 거리는 일곱 걸음.

그는 스윽 다리를 벌렸다.

거리를 재며 몸의 중심을 낮추고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그 에드먼드의 아들이 너무 무르다 했는데, 역시... 제법 날카로운 이빨도 숨기고 계셨군요."

필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클로이드 단장처럼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누구나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법이니까. 내 칼은 좀 큰 거고."

과거의 자신은 필립의 말대로 물렀었다.

상황이 계속 안 좋게 흘러갔지만,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에셀레드의 기사들이라면 가장 중요할 때 나서줄 거라 기대했다.

아니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닳고 닳은 카인은 분명히 안다.

'내겐 밴더빌트뿐.'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정의보단 안온한 현재를 택했다.

철저하게 버려졌던 카인은 이젠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움직였다.

"후후,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스릉-.

필립은 그의 세검을 뽑았다.

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그를 감싸던 주홍색의 오러가 조금씩 검으로 움직였다.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거 원래의 목표는 달성해야겠습니다."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물러서라, 아벨."

둘의 가운데에 자리한 아벨은 이제 방해였다.

카인은 귀찮다는 듯 클로이드에게 아벨을 데려가라 수신호를 보냈다.

"공자님!"

클로이드는 재차 카인을 만류했다.

하지만 카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 뒤에 있는 유일한 자신의 기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늙어 버린 기사.

전성기는 진작 지나 죽음만을 앞둔 그였지만, 늙은 만큼 오래 타오르는 불꽃을 가슴에 품은 기사!

"나이트 밴더빌트!"

카인이 부른 순간.

수십 년간 가슴속에 타오르던 그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예스, 마이 로드!"

"칼."

후두두둑-.

빗줄기가 굵어진다.

노기사는 흔들림 없이 비를 뚫고 2m에 달하는 대검을 뽑아선 양손으로 받쳐 들고 카인에게 다가갔다.

쿵.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모든 충성을 다 받치는 대상을 향한 제물.

"들기나 하시겠습니까."

필립은 그런 그들을 비웃었다.

늙었다지만 밴더빌트의 체구는 에셀레드의 사람 중 가장 우람했다.

카인 역시 세검술을 주로 익힌 만큼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어이, 여우 새끼."

'겨울'이 일어난다.

뇌전이 시시각각 카인의 몸을 불태우고 재생시킨다.

어떻게 보면 끔찍한 고문이지만, <사계절의 신기>의 주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시련.

카인은 고통 속에서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잘난 혀 잘리기 싫으면 이 악물어."

카인은 한 손으로 노기사의 대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콰강-!

뇌전은 뇌전으로.

그 순간 번개가 대검을 내리쳤다.

크고 무겁지만 균형이 좋아서 낭비되는 힘이 없다. 그런 밴더빌트의 대검이 손에 착- 하고 감겼다.

'노기사와 평생을 함께한 검.'

누군가의 온 생애가 담겨 있다는 것만큼 빛나는 건 없는 법이니까.

꽈아아악-.

그리고 카인은 두 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더는 잃지 않겠다.'

잃고 빼앗기고 후회했던 카인은 이젠 없다.

무수한 후회를 짊어진 한 명의 전사가 대검을 들었다.

쿠르르릉-.

한층 더 요란해진 바다의 날씨.

바닷가 절벽에 만들어진 연무장이 그런 날씨에 직면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천둥번개가 귀청을 때리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필립과 카인의 싸움에 방해될까 봐 아벨이 클로이드를 물리고 스스로 물러섰을 뿐.

쿠쿵-!

번개가 내리꽂힌다.

필립의 이마를 타고 쉴 새 없이 빗방울이 흘렀다.

내심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흐르는 것 중 몇은 차게 식은 땀.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카인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괴물.

카인을 마주하고서야 아벨이 분전을 치렀다는 걸 느꼈다.

카인의 등 뒤, 무한히 펼쳐진 바다.

지금 필립은 시골 영지의 어린 후계자가 아니라 무궁한 바다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휘오오오오-!

폭풍우에 바닷바람이 좀 더 매서워졌다.

그럼에도 둘은 꼼짝하지 않았다.

마주하는 둘 사이에 일어나는 치열한 공방을 아는 기사들은 각자의 주먹을 꽉 쥐었다.

"주둥이 놀리던 필립 경은 어디 갔나?"

먼저 대치를 깬 건 카인이었다.

스윽-.

가볍게 한 발을 내밀었다.

다닥-.

반면 필립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

기세 싸움의 승자가 누군지 명명백백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필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열일곱밖에 안 먹은 카인이 자신을 이렇게 압박할지는 방금까지도 예상치 못했다.

"도발이 훌륭합니다."

"그래? 근데 필립 경은 이런 단순한 거에 넘어오는 등신은 아니지?"

카인은 그를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군기가 바짝 들어 나서지 않던 <로스 데 캐롯>의 다른 기사들이 더 열 받을 정도로.

"부단장님, 시골쥐 놈한테 엑스퍼트가 뭔지 가르쳐 주십쇼!"

카인을 향한 모욕.

"세상 높은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 쓴맛 한 번 보여 주십쇼!"

에셀레드 전체를 깔보는 그들의 태도.

동시에 카인은 입맛이 썼다.

'기사들의 정신 수준은 확실히 로스 후작가가 낫다.'

저들도 기사인 만큼 자신들이 뱉는 말이 지독히 무례하고 용납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필립의 승리를 만들고 후작가의 이득을 위해 그런 선 따위는 가볍게 넘는다.

자중만 할 줄 아는 에셀레드와는 급이 달랐다.

결국 에드먼드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강했어.'

왕국 최강의 검호.

대륙으로 넘어가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힐 최고의 기사.

에셀레드 기사단은 에드먼드라는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칼을 빼 본 적 없는 자들에게 명령하던 에드먼드가 사라졌으니 이런 물렁한 모습이 오히려 어울리리라.

그리고 지금.

그런 에셀레드에 카인이 돌아왔다.

"뚫린 입이라고 건방지네?"

사위가 고요해진다.

피와 파도 그리고 천둥만이 소리를 낼 때 카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에셀레드의 땅에서 그따위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머리가 붙어 있길 바라지 마라."

차디찬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두는 카인의 적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가깝게는 아벨이고 필립이라지만, 멀게는 <로스 데 캐롯>의 모두이자 눈을 감은 에셀레드의 모두.

이 연무장에 카인의 편은 딱 한 명, 노기사 밴더빌트뿐이었다.

"적지로 홀로 쳐들어오셨군요."

필립은 카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상향했다.

적들만 있는 곳으로 스스로 걸어온 소년의 심경은 그라도 쉬이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대가 마중까지 해 줬으니 와야지."

"...!"

필립은 카인이 처음 말했던 마중 보냈던 기사들이 이제야 떠올랐다.

다만 이번 작전지가 에셀레드 영지인 만큼 에셀레드 출신의 평기사 셋을 기용했었다.

본래라면 절대 뽑지 않을 하잘것없는 쓰레기들.

이러나저러나 명령을 맡겼으니 딱 그만큼의 신경만 쓰였다.

그런데 같이 오지 않았다.

늦게라도 와야 하거늘, 지금까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필립은 섬뜩한 직감이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인이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건....

"글쎄. 좋은 곳으로 먼저 가더라고."

"...설마?"

필립은 알 것 같았다.

콰가가가강-!

백색의 번개불빛 속에서 카인은 살기가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줬다.

"우리 필립 경도 곧 갈 곳이고."

#7 Ep.Ⅰ-1

열일곱의 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