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화]
쏴아아아아!
사리의 비행 마차는 어느덧 나바로 국경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나바로의 동쪽에 위치한 이웃 국가 카이돈.
나바로와의 사이는… 좋지도 나쁘 지도 않다.
제국의 침공 당시에는 서로 동맹을 맺 은 적도 있지만, 공동의 적이 없는 지금 은 그저 무난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그럼에도 국경 지대는 삼엄하다.
곳곳에 초소가 세워져 있고 경계 근무 중인 병사들의 모습도.
그들은 지상은 물론, 마법 장비로 하늘까지 감시하고 있었다.
"사리, 더 위로 올라가야겠어."
-어디까지?
"우리가 점으로도 안 보이게?"
-알았어, 주인님!
각국은 비행 마법으로 넘어오는 적 과 첩자들을 가장 경계한다.
그래서 하늘길로 국경을 넘는 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3서클 수준, 기본적인 비행 마법으 로는 눈 좋은 병사들의 육안에도 걸 릴 정도.
4서클급, 고도와 속도를 더 높인다 고 해도 마탑에서 만든 관측 장비에 걸리고 만다.
5서클 상위 수준쯤 되면 무난히 뚫을 수 있지만… 그 속도면 숨도 쉬기 어 려운 강풍을 맞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에른은.
'너무 쉽군.'
고도를 높이고 마차 문을 닫는 것 으로 해결했다.
곧 국경을 지나 카이돈에 이르렀다.
방금 막 나바로에서 영웅급 기사 하나가 나라를 빠져나갔는데, 그리고 카이돈으로 밀입국했는데.
양국의 국경 경비대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 정도 차이지.'
대륙은 0계로 분류되는 곳이고 자 신은 2계까지 올라온 교류자다.
'지금은 3계를 바라보고 있고. 세븐 아이즈가 생각보다 강력하다고? 그 래 봤자다.'
에른은 시에라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해도 소용없구나. 결국 가는 거야?"
"왜, 못 가게 막으려고?"
"네가 결심한 걸 누가 뒤집을 수
있겠어. 그리고 막는다고 막아질 것 같지도 않고. "
"잘 아네. "
"이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음'?"
"무작정 덤벼들지 말고, 최대한 신중 하게 행동해 줘.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우리한테는 기회가 있어. 정 안 될 거 같으면 후퇴하는 거야. 알았지?"
"...…봐서. "
"봐서가 아니야! 그리고, 세븐 아이 즈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 "
"하나만 한다면서."
"야! 네가 신물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아. 근데… 너만 신물의 소유자 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
"아무리 대마법사들이 총출동했다 곤 해도…. 레바단도 우리와 동급이 야.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신물이 라.
시에라는 에른이 가진 차원거래 물
품들을 신물이라고 불렀다.
마도기갑도 그렇고, 사리의 변신에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았던 것은 라제칸의 유품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기 때문.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교류자인 걸 은근 티내고 다니셨던 것 같다.
물론 시에라쯤 되니까 알아봤던 것 일 수도 있지만.
'세븐 아이즈도 이계의 물품을 가지 고 있다… 어디서 난 거지?'
혹시 이 세계에도 교류자가?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1342호 지구의 교류자가 채널에서 활 동했더라면 어떻게든 알아봤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섭리의 눈]을 사용하곤 하는 에른이라서.
며칠이나 몇 주면 몰라도 2년이나 같은 채널에 있으면 한 번쯤은 마주 칠 수밖에 없다.
'활동이 끊긴 상태이거나 3계 이상 에서 활동하는 중이라?'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놈들은 의문의 교류자가 남긴 물건
이나 돌려쓰는 정도일 거니까.
에른의 인벤토리에 라제칸의 유품 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류 창고를 꽉꽉 채운 물품들은 전부 스스로 마련한 것.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사들일 수 있는 것.
시에라가 제대로 맞춘 부분은 사리 에 대한 것뿐이었다.
사리는 할아버지가 남긴 '불가살이 의 알'에서 태어난 녀석이니까.
'아무튼, 그렇다 이거지? 나도 더
대비를 해야겠는데.'
*
카이돈에 진입한 뒤로도 동쪽으로, 또 동쪽으로 이동.
에른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수 도 실라이엔까지 들어왔다.
테아로스 상공에서도 그렇게 날아 다녔는데도 걸린 적이 없으니.
실라이엔이라고 해서 다를 거 있겠 나… 했는데 정말 그랬다.
제국은 왕궁은 물론, 제도 전체에 대공 감시망을 구성해 불청객들을 완전히 차단한다.
그런데 이런 철두철미함은 대륙에 서 제국만이 가능한 역량.
왕국들은 여력이 없어 국경과 해안 감시에만 몰두하는 수밖에 없다.
"사리야, 이제 내리자."
_응!
짧은 여행이 끝났고 착륙의 순간이 왔다.
퍼엉
사리가 변신을 풀자 에른은 허공섭 물로 사리를 끌어들여 품에 안고는.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으로 착지를 준비… 하지는 않고.
'이런 높이면 초고수도 다리 부러지 지. 뭐하러.'
슈아아아-!
마도기갑, 레그 파츠를 꺼내 낙하 속도를 줄이고, 지상과 가까워질 무 렵 비행과 투명 마법을 발동.
착!
실라이엔의 뒷골목에 무사히 떨어
졌다.
"스파이 활동이라는 것도 별거 아 니군."
"꾸와앙!"
새로운 도시, 새로운 풍경에 사리는 꽤나 신이 난 듯 보였다.
"미안해서 어떡하냐. 앞으로 지루한 일만 잔뜩일 텐데."
"...뀨엥?!"
테아로스의 마탑은 제14 마탑이다.
여기서 '14'는 건국황제가 열네 번 째로 공사를 지시했다는 뜻.
실라이엔에는 황령이 조금 더 일찍 도착해 대륙에서 열한 번째로 마탑 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제11 마탑.
이곳의 마탑주는 데미우스 셀도르다.
그는 7서클 대마법사이며 대륙 7대 마법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물 급 마법사.
그런 동시에.
'세븐 아이즈의 회원이기도 하지.'
목적지를 실라이엔으로 정한 이유 이기도 하다.
에른은 역용술을 발휘, 여태까지와 는 다른 얼굴로 바꾸고는, 마탑이 한 눈에 보이는 근처 여관에 투숙했다.
"...이 사람이 데미우스야."
시에라가 주고 떠난 영상 수정구.
에른은 원탁에 앉은 노인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 누구?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적 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돼."
-적…! 적을 무찌르자!
사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갸르릉
거렸다.
적의를 보여도 귀엽기만 하지만, 얕 보고 비웃다가는 변신 후를 보고 웃 음이 싹 달아날 수가 있다.
에른은 사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말 했다.
"저래 보여도 은근 무서운 사람이 야. 시에라하고 동급."
"뀨에엥?"
"그러니까 맞서려고 하지는 말고. 밀착 감시만."
에른은 인벤토리에서 2계의 감시용
아티팩트들을 꺼냈다.
투명화, 영상 녹화, 고배율의 마법 확 대경, 마나 은폐 기능이 있는 장비들.
전부 사리가 먹을 수 있는 금속 재 질로 되어 있다.
"브란티움은 아니지만… 다 먹을 수 있지?"
-응?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주인님?
사리가 확대경을 와삭 베어 물었다.
하긴, 생전 먹이를 사양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이다.
요즘엔 브란티움 위주로 급여해서 입
맛이 까다로워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먹을 거라면 여전히 다 좋은 모양.
"그럼 부탁한다."
- 응응!
그때부터 지루하고 무료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감시라는 게 원래 재미없는 일이기 는 하지만, 데미우스의 일상이 너무 틀에 박힌 듯이 단조로워서.
사리가 찍어 온 영상을 보면,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마탑에 틀어박혀 보내는 듯했다.
가끔 햇빛을 쬐러 밖에 나오긴 하 는데, 마탑 근처를 벗어난다거나 하 지는 않고.
'외유도 안 나가나? 그렇다고 마탑으 로 쳐들어가는 건 완전 무리수인데.'
마탑에서 대마법사는 그야말로 무 적이다.
마나 폭포가 근처에 있으면 평소보 다 더 강력한 마법을, 제약 없이 난 사할 수 있는 데다가.
곳곳에 설치해 둔 대 침입자용 트 랩고}, 쟁여 둔 장비와 물품들.
또한 마탑에 상주하는 수백 명의 마법사가 전부 마탑주의 제자라는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시에라는 어느 정도 옳았다.
단신으로 마탑과 세븐 아이즈 전체 를 동시에 상대할 수 없는 현실은 에른도 인정하는 바이니까.
기약 없는 기다림까진 아니어도 어 느 정도는.
'분하지만, 지금은 이 방식이 최선이야.' 영상을 분석하지 않을 때는 차원거
래에 몰두했다.
에른은 필사적이었다.
샤일로크에 복수를 마치고 수백만
코인을 벌어들인 뒤로는.
그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조
금 안일해졌다.
이만큼 했으면 할 만큼 한 거 아니 냐고.
거의 다 이루었으니 이제 [영웅의 실 종]만 막아내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그런데 막아내지 못했다.
보기 좋게.
이건 뭐… 눈치조차 못 챘다.
'심마를 치료해 드리고 마음을 놓은 게 실책이었어. 따지고 보면 그거 때 문에 세븐 아이즈가 움직인 건데. 난 아무것도 모르고!'
에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분노, 그리고 자책감이다.
세븐 아이즈,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최대한 가라 앉히고 더욱 더 신중해져야 했다.
감정을 앞세웠다간 일이 악화될지도 모르니.
이제는 거래 등급을 올려야 할 분 명한 이유가 생겼다.
-알파스캔 : 그래서, 결론이 뭐에요?
-에른 : 그 공방 사람들,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해. 4세대 기술.
-알파스캔 :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에른 : 결국 내 투자를 받기로 했 잖아. 4세대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비 전과 행동력에 감복했다면서.
-알파스캔 : 그런 정도로 칭찬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무튼, 거기까지 업데이트해 주시긴 했지요. 진전이 있었나요?
-에른 : 제아무리 기밀이라도 투자 자한테는 보여 줘야 하는 법이지. 돈 받고 싶으면.
-알파스캔 : 그 기밀이라는 게?
에른의 말을 들은 알파스캔이 순간 움찔했다.
-알파스캔 : 헛! >놀라움
거짓된 감정, 과장된 리액션으로 진 의를 감출 줄 아는 알파스캔이다.
그러니까 모니터 요원 하고 있는 거 겠지.
그런데 놀란 반응이 [마음의 소리] 에 잡힐 정도면.
-에른 : 근데 그 사람들한테 4세대 기술 있으면 어쩌려고? 뭐, 투자라도 하려고?
-알파스캔 : 그건 말씀드릴 수 없 습니다. 어찌 됐든…. 임무를 완수하 셨으니 보상을 드리죠.
[알파스캔님으로부터 18000QP를 받 았습니다.]
[다음 거래 등급까지 남은 QP
(50000/50000).]
이렇게 등급 업 조건 중 하나를 달 성.
-알파스캔 : 또 뵙죠. 그럼.
'당연히 투자가 아니고 방해겠지.'
좋은 감정으로 접근하는 거였으면 애초에 자기한테 정탐을 시킬 리가.
미리 말해두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 메시지를 또 보냈다.
-곧 저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거야. 은신처는 마련해 뒀겠지? 뭐가 됐 든… 몸들 잘 건사해라.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른이 차 원거래를 중지했다.
"...규에엥!"
사리가 왔다.
-주인님! 그거야, 그거!
"음?"
-우리 적! 적이 멀리 떠난대!
사리가 녹화해 온 영상을 보여 줬다.
제자와 함께 산책 중인 데미우스.
그는 곧 있을 사냥 여행의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묻고 있었다.
"...…버지아 숲입니다. 하프란 백작 령에 있는 사냥터인데. 백작께서는 언제든 환영이라고 하더군요. 오시면 꼭 연락 주시라고… 같이 필드 뛰면 서 접대하고 싶으시다고. "
"아첨, 아부… 거슬리는 소리 들으 려고 사냥 나가는 게 아니다. 잡념을 다스리기 위해서이지. 알랑대는 놈 옆에 끼면 잡념만 더 생긴다. "
위엄 있는 목소리에 제자가 쩔쩔매 며 답한다.
"아… 예엣! 그러면 백작께선 오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
"그래. 언제 출발이지?"
"사흘 뒤가 어떠신지요?"
"괜찮군."
*
데미우스의 유일한 취미는 사냥이었다.
전혀 마법사답지 않은 활동이지만, 원래 취미라는 게 그런 법이다.
거구의 남자가 뜨개질에 빠지기도 하고, 깡마른 여자가 마상시합의 스 릴에 눈뜨기도 하는 법.
데미우스에게는, 복잡한 고민 대신 사냥감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순간 이 꽤나 소중했다.
"어엇?"
풀숲을 본 데미우스의 눈에 놀라움
이 떠올랐다.
방금 본 것....
"유, 유니콘?"
흐릿하게 지나갔지만 분명했다.
미간 사이에 달린 날카로운 뿔.
'일각수! 환상의 동물 유니콘이 실 재했단 말인가?'
거기다 흔히들 말하는 백마가 아닌 붉은 말이라 더 희귀했다.
"이런 천운을 놓칠 수 없지! 어서 가자, 이랴!"
데미우스가 채찍질을 했다.
"히히히힝!"
그가 탄 말이 콧김을 뿜으며 내달 리자 흥분감이 솟구쳐 올랐다.
내가 유니콘을 사냥하게 되다니!
숲 안쪽의 공터.
아무것도 모르고 한가로이 풀만 뜯 는 녀석을 보니 더 확신이 들었다.
'마법을 쓸까? 아니다. 활로 잡아야 인정이지.'
그래도 스트렝스 마법은 잊지 않았다.
이거까지 마법으로 치면 사냥을 다 닐 수가 없어서.
나이에 맞지 않는 괴력이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긴다.
쐐에 에액!
시위를 떠난 화살이 유니콘의 옆구 리로 날아갔다.
'됐어!'
데미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텅!
"음?"
'콱!'도 '푹!'도 아니고 텅?!
몸에 맞고 튕겨져 나온 화살이 옆 에 떨어졌다.
누가 간지럽히냐는 듯이 고개를 슥 돌리는 유니콘.
"...환상종이라서 화살이 안 듣는 건가? 아니, 환상종이고 뭐고 말이 안 되는데?"
푸욱!
문득, 복부에서 차가운 이물감이 느 껴 졌다.
"어, 어...?"
살면서 처음 느낀 생경한 감각에 데미우스가 몸을 떨었다.
"무… 이건 무슨...?"
곧이어 마주쳐 오는 황금빛 눈동자.
"관점을 바꿔 보면 말이 되지. 사냥 감은 너였다는 거."
에른이 씩 웃으며 데미우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174 화]
"커... 커억! 어, 어째서?"
말에서 끌어 내려진 데미우스가 눈 을 부릅떴다.
이렇게 혼자서 사냥터를 누비곤 하 는 취미에 대해서 제자들이 우려를 표하곤 했었다.
"이 나라엔 전설급 기사도 없다. 대 체 누가 있어 날 해한단 말이냐?"
들을 때마다 당연히 코웃음 치면서 일축해 버리지만… 솔직히 유니콘에
한눈 팔린 것은 실수한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무슨 엘프의 숲도 아니고 백작령 사냥터에 유니콘이라니… 돌이켜 생 각해 보면 멍청했다.
'기습당해도 싸지. 누굴 탓하겠나. 근데 왜 방어 마법이 작동을 안 한 거냐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째서 라."
에른은 기묘한 눈빛을 보내며 데미 우스를 뚫어져라 봤다.
그 진한 호박색 눈동자에 이 남자 의 얼굴을 가득 담으려는 듯이.
"어째서 마법이 안 써지냐고? 왜 먹통 된 건지 궁금해?"
끄덕끄덕.
에른은 데미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얼굴에 핀 검버섯과 자글자글한 주름.
생김새는 그저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미인크림만 꾸준히 발랐어도 10년 은 젊어 보였을 텐데."
그러나 이 노인은 은퇴한 뒷방 늙 은이가 아니다.
마탑에 소속된 수백의 마법사 사단 을 거느린 카이돈 마법계의 정점.
또한,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는 명 목하에,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저질러 온 [세븐 아이즈]의 일인, 대륙의 흑 막, [영웅의 증발]의 배후....
이런 수식어는 얼마든지 가져다 붙 일 수 있다.
"진짜 궁금한 거지?"
"무… 무론!
"그럼 잠깐만?"
에른은 데미우스의 배에 박힌 단검 을 빼내고.
"크헉!"
촤악! 촥!
발뒤꿈치의 근육을 잘랐다.
이것으로 행동불가.
"크아아악!"
데미우스가 흰자를 드러내며 고통 에 찬 비명을 토했다.
"왜… 왜.…"?"
"확실히 하는 게 좋잖아."
"나, 난 마법산데?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어, 물론 사적인 감정도 들어 있어."
에른은 그를 발치에 둔 채, 품에서 정육면체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미끈한 금색 큐브.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크 기다.
달칵.
에른이 버튼을 누르자 큐브에서 나온 장판처럼 깔린 붉은 빛이 표시되었다.
집터 정도는 족히 될 듯한 넓이.
"뭐, 뭐냐… 이건?"
"들어봤나? 안티매직 필드? 그걸 만들어 내는 장치지."
"개소리!"
이딴 장난감이 모든 마법을 무효화 하는 안티매직 필드를 만들어 낸다 고?
데미우스는 결코 그것일 리 없는 이유를 몇 가지라도 댈 수 있었다.
"은신 마법 쓰고 있었잖아!"
"그거 마법 아니고 은신술이지."
"...나, 날 바보로 아냐? 그런 은 신술이 어딨어?"
여긴 공터다.
나무나 수풀 같은 은폐물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기 중에 녹아든 것처럼 숨어 있 으려면 마법 밖에는 없다.
" 있는데."
9성의 무영잠행술이었다.
물론 마법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거야 동의하지만, 엄연히 마법이 아 닌 무공.
그래서 안티매직 필드 위에서도 펼 칠 수 있는 것이다.
"a..."
-Q" .
에른은 말없이 단검에 오러를 덧씌 워 데미우스에게 보여줬다.
"...오러 유저? 마법사가 아니라 이건가? 그렇다고 그게 마법이 아닌 건 아니다. 내 이목을 속일 정도면… 어디서 만든 스크롤이지?"
'이 인간은 의심 많아서 대마법사 됐나?'
에른은 데미우스의 품을 뒤져 마법
스크롤을 찾아냈다.
그리고.
부욱!
"이래도?"
스크롤이 찢어졌는데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는다.
"아...
"본인도 맞는 거 알고 있으면서 뭘."
데미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유일한 가능성은.
"..신물이라면! 젠장, 신물이구
나! 어떻게 신물을 가지고 있는 거 지? 너, 정체가 뭐냐!"
이 정도 넓이의 안티매직 필드는 대마법사인 자신도 만들 수 없다.
설명이 되려면 저 큐브가 '신물'이 라는 것밖에는.
아금마의 큐브'라고 하더군. 토 나올 정도로 비싸지만…. 효과는 제대로지."
데미우스가 머리를 굴렸다.
"아… 아르엘도가 보낸 거냐?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아르엘도!"
에른의 눈이 빛났다.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왔지. 우 리, 거래하는 게 어때?"
"마나에 맹세하자. 어기면 심장이 터져 죽기로. 내가 세 가지를 물어보 려고 하는데… 성실히 대답하면 안 티매직 필드를 치워 주지."
"미, 미쳤냐?"
"싫음 말고."
푹!
에른은 데미우스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커흑!"
데미우스가 눈을 치떴다.
뭐 이런 돌은 놈이....
그런데 더 돌은 것 같은 일이 벌어 졌다.
꼼짝 없이 즉사할 줄 알았는데 여 전히 고통은 선명하기만 했고….
'마, 마나가 흘어진다...? 이것도 신물?'
심장을 빗겨 찔러 안 죽은 거고 단 검에 산공독이 발려 있을 뿐이지만,
데미우스에게는 놀라 팔짝 뛸 만한 일은 맞았다.
"어때, 평생 쌓은 공력이 사라지는 느낌은? 궁금하네."
"미, 미친놈! 네가 무슨 짓을 저지 른 건지 알이-! 내 심장의 서클은 마 법계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걸 망가 뜨린 거라고!"
"...너무 나르시시즘 아닌가? 뭐, 그게 맞다 쳐도 세븐 아이즈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
데미우스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깨닫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할게, 할게! 마나의 맹세!"
두 사람은 에른이 제안한 그대로 마나에 대고 맹세했다.
거짓 없이 진실만을 말하기로, 그렇 게 한다면 약속을 지키기로.
에른의 첫 번째 질문.
"레퀴엠의 위치가 어디지?"
K | 9)
데미우스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질문에나 대답해."
꿀꺽.
데미우스가 침을 삼켰다.
"...나, 난 모르지."
"정, 정말이야! 아, 아르엘도까지 아는 거 보니까 어느 정도는 파악하 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럼 알 거 아니 야! 레퀴엠의 위치는 아르엘도, 그리 고 몇몇 오래된 회원들만 아는 사실 이야."
"얼마나 오래됐는데?"
"한 30년쯤."
"넌 몇 년 차지?"
"이것도 질문에 포함되는 건가? 억!"
에른이 데미우스의 콧잔등을 후려 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상식적으로 생 각해."
"나, 난 20년...
"그런데도 안 알려준다고?"
데미우스도 모른다면 시에라가 레 퀴엠의 위치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 이지 싶다.
"...거기가 원래 그런 곳이다. 원
탁 놓고 우린 동등하다고 주입을 시 키지. 근데 실제로는 아르엘도가 뜻 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에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미우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는 않다.
그랬다면 심장이 터져 죽었어야 하 겠지.
아쉬운 일이다.
놈을 족쳐서 레퀴엠의 위치를 알아 내려고 했는데.
"두 번째 질문. 세븐 아이즈가 보유 한 신물들에 대해서 말해라. 어떤 것 들이 있는지, 레바단을 어떻게 그렇 게 쉽게 납치한 건지."
"...레바단? 나바로에서 왔나? 헛, 그러고 보니...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두 사람은.
현재 에른은 역용술을 유지하지 않 은 상태.
데미우스가 의심할 법도 했다.
"누가 너보고 질문하라고 했지?"
그의 가슴에 박힌 단검을 비틀자.
"캬악! 아, 아공간 창출기를 사용한
거다!"
"공, 공간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 어 내는 신물이지. 잠입하고 가동한 다음, 포탈을 생성해 주면 1대 7의 싸움인 데다가…. 격렬한 전투가 일 어나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으니 까. 그야말로 증발한 것처럼.... 크 흡!"
"6서클 마법사 말로는 마법의 흔적 이 없다던데?"
"믿어라. 우린 다 7서클이다. 이 짓 만 수십 년을 해 왔는데 아무도 우리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고. 너 말고 는… 대체 넌 뭐지?"
에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거 말고 다른 신물은?"
데미우스는 아는 대로 말했다.
"이, 이게 내가 아는 전부야. 난 핵 심 멤버까진 아니라서."
"알았어. 세 번째 질문."
마지막 질문을 들은 데미우스가 눈 을 휘둥그레 떴다.
복부와 가슴이 뚷리고 아킬레스건 이 잘려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고통은 잠시 치워두고 의도를 헤아 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굴리며.
"...뭐, 그 정도? 거기까지고, 딱 히 더 없는 거 같다…."
에른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도움이 되는군. 이거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켜야겠는데."
〈금마의 큐브〉를 조작하자 붉은 바 닥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피 융.
그리고 빛이 사라졌다.
"해, 해제된 건가… 안티매직 필드?"
"내 심장 멀쩡하잖아. 그럼 해제된 게 맞겠지."
"됐어.…"!"
"되긴 뭐가 돼? 안티매직 필드 풀려 봐야 어차피 마법 못 쓰면서… 엇!"
지잉
데미우스가 떨리는 손을 뻗으니 그 의 몸 앞에서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리고.
화르르르륵!
초고열의 화염이 강력한 불길을 만 들어 내며 에른은 물론, 그 주위로 번져 나갔다.
"멍청한 놈! 괜히 대마법사인 줄 아 느냐? 서클이 손상돼도 몸에 새겨 둔 방어 마법이라는 게 있다!"
이 한 수를 위해 마나에 맹세했다.
7서클 화염 마법 인페르노.
"바삭하게 구워주마! 아니지… 이 불은 뼛가루도 안 남기고 모조리 태
워 버리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화르르르....
호언장담한 것과는 반대로, 놈을 뒤 덮은 화염이 잦아들어 가고 있었다.
"어... 어떻게 지옥의 화염이?"
말이 되나.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지옥불이 무슨 오줌발에 맞은 모닥불마냥 꺼 져 버린다는 게.
"지옥의 화염도 태울 게 있어야 타 오를 수 있는 법이지?"
꿀렁꿀렁.
놈의 전신을 감싼, 머리와 얼굴까지 다 덮는 검은 망토.
겉감이 검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것도 신물인가?"
" 빙고."
오늘 첫 개시한 키포의 전투망토였다.
에른은 고개를 쳐들고, '공허 모드' 를 유지한 채로 데미우스에게 달려들 었다.
"오, 오지 마!"
번쩍!
방어 마법 가동, 뇌전이 채찍처럼 정면을 후려쳐 왔다.
에른은 망토로 앞을 가로막아 전류 를 아공간으로 보내 버리곤.
턱!
다시 데미우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잠, 잠깐만…!"
말이 이어지기 전에.
우드득!
데미우스의 목이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다.
대마법사의 최후치고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전투망토도 나쁘지 않네. 공허모드를 안 켜면 패션으로밖에 안 보이니까."
마도기갑으로 상대하려고 했다면 반 응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파이어볼 수준이면 살짝 맞아도 됐 겠지만, 방금 같은 건… 호신강기를 펼쳐서 막았어도 꽤 골치 아팠을 터.
'6000코인 쓴 보람이 있군.'
"히히힝!"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도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리가 상황이 정리된 것을 보고는 곁으로 다가왔다.
에른은 유니콘 형태인 녀석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미끼 역할 잘 해줬어. 화살 맞은 데는?"
-응? 무슨 화살?
"...맞은 줄도 몰랐던 거냐? 앗."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에른은 얼른 호흡을 다스리며 주위
를 둘러봤다.
그를 덮었던 인페르노는 아공간으로 넘어가 자취를 감춰 버렸지만, 잔불 은 순식간에 번져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진짜 지옥불이긴 하네. 이거 끌 수 있나?"
[컨트롤 웨데 마법으로 폭우를 퍼 붓지 않는 한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현재 수준에서는 발동할 수 없는 마법.
에른은 데미우스의 몸을 뒤져 필요
한 물건을 챙기고는 그를 불길에 던 져 버렸다.
"뼛가루도 안 남는다고 했으니까, 충분하겠지."
사리를 품에 넣고 사냥터를 빠져나 가자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불길이 번지는 것을 목격한 모양.
그들은 에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대체 안쪽에서 무슨 일이?"
"그게 중요해? 옥체가 무사하신 지 부터 확인해!"
"괜찮으세요, 스승님?"
공중에서 내려온 마법사들이 일제 히 물어 왔다.
"나… 나는...
에른이 고개를 들었다.
데미우스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는 에른의 얼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데미우 스의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축 처진 입에서 가래 끓는 듯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습격이 있었다…. 그래도 난…. 무 사하다."
"습격이라니! 대체 어떤 놈들입니 까, 스승님...!"
[175 화]
군사부일체라는 말.
군주=스승=부모.
동격으로 놓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스승은 제자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 사한다.
기술자, 예술가 같은 직업군은 물론, 기사들 역시 사제지간을 중요하게 생 각하고.
비전절기라도 전수 받았을 경우엔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그런데 이게 가장 심한 분야가 마법 계다.
마법사가 도제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는 것은, 캔달의 연구실만 가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런데 14마탑의 6서클 대표 마법 사인, 캔달 리스케르 또한 이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었다.
스승인 7서클 대마법사 시에라 앞에 서는 그저 '범재'이고 약간 쓸 만한 '제자1'에 불과할 뿐.
기사로 치면 영웅급인데도 전혀 대 우를 못 받는 것에 에른은 어리둥절
할 때가 많았다.
'...근데 그게 엄청 풀어 준 편이 었군.'
시에라가 제자들을 막 대한다면 데 미우스는 노예 부리듯 했던 것 같다.
마법사들은 에른이 언급한 가짜 암 살자들을 찾기 위해 사냥터를 이 잡 듯이 뒤졌지만, 당연히 어떠한 단서 도 찾아내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사전에 충 분히 수색했어야 했는데! 이런 어처 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하고...
털썩!
제자 하나가 무릎을 꿇자 눈치 보던 다른 제자들도 뒤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송, 송구스럽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 저는...
지잉.
낯익은 얼굴, 낯빛이 사색으로 변한 마법사가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그는 서늘한 푸른빛을 홀리는 마법 검, [샤프 매직 소드]를 소환하곤 눈 을 질끈 감았다.
"죄값을 치르겠습… 마땅히 책임지 겠습니다!"
그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그런데 더 미친 것 같은 건, 다른 마법사들의 태도였다.
놀라는 기색도.
말리려는 기색도 없고.
그저 머리를 숙여 스승이 노여움을 풀기만을 바랄 뿐인데.
쏴악!
검날이 그의 왼쪽 어깻죽지로 향한 다.
마법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찰나 뒤에 사방으로 튀어 댈 피를 예상하고.
그러나.
턱!
데미우스의 제자, 아가논이 눈을 떴 다.
"헉!"
팔에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고통.
하지만 종류와 위치가 다르다.
어깨의 절단감이 아닌 그보다 더 아 래쪽이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
팔뚝을 붙잡은 스승의 무연한 눈빛 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눈빛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 던가?'
잘은 기억 안 나지만, 흐릿하고 탁 했던 거 같은데.
확신은 못 하겠다.
제대로 눈을 쳐다본 적이 없어서.
"이게 자해로 해결될 일이더냐?"
"그, 그것이...
아가논은 물론, 다른 제자들의 눈도 동시에 커졌다.
다들 아가논의 결단에 혀를 내두르 던 참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터럭 하나 상하는 꼴 을 못 보는 사람.
외관만 봐선 별로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지만, 긁힌 데라도 있다가
아가논은 이번 사냥 여행을 계획한 제자였다.
왼팔을 날리는 걸로 용서받을 수 있 다면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혹 스승의 마음이 누그러진다면 회 복 마법을 허용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왼팔로도 안 되면 목숨을 내놓으라 는 건가...?'
제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승이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되도 않는 절단쇼 할 시간
에 배후나 찾도록 해라. 다들 일어나 고."
"예, 예...
제자들은 얼떨떨한 표정.
'정말 이걸로 끝내 주시는 건가?'
'어쩐 일이지?'
'스승님이 이상하다...?'
분위기가 괴상해졌다.
어째 그냥 왼팔 자르도록 뒀어야 했 나 싶은데....
그래도 제자들은 이상함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뿐이었다.
스승의 얼굴, 걸친 붉은 로브만 봐 도 절로 복종심이 드는 까닭에.
'제자들 교육 하나는 철저히도 시켰군.'
물론 그만큼 에른의 변신이 완벽에 가깝기도 했다.
역용술로 데미우스의 얼굴을, 마법 렌즈로 갈색 눈동자까지 구현.
구매해 둔〈변성술(4성)〉로 가래 끓 는 듯한 목소리를,〈축골공(6성)〉으로 는 비슷한 체형을 만들어 냈으니까.
그나마 하나 허술한 게 있다면 변성
술이 겨우 4성이라는 점.
데미우스의 목소리를 완전히 똑같이 는 따라 하지 못했고 특징만 잡는 정 도에 그쳐서.
'목소리 톤이 평소와는 약간 다르신 것 같은데…?'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감히 스승을 의심하지 못했다.
11마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무혈입성이지.'
에른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탑주실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역시 통한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쉬워도 너무 쉬워서 놀랐다.
이게 바로 이계 기술의 사기성!
마법사들은 [폴리모프] 류의 변신 마법을 극도로 경계한다.
5서클만 되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행세할 수 있으니까.
신분 세탁은 물론, 꼭두각시를 세울 수도 있고, 첩자 활동에 이용한다면 정보 수집 난이도가 확 내려간다.
해서 폴리모프를 탐지하는 마법은 폴리모프 이상으로 발달해 있었다.
마탑 출입구에 설치된 폴리모프 스 캐너.
5서클 수준인 에른이 데미우스로 폴 리모프했다면 빼박 들통났을 터이나.
띠리링-
역용술과 축골공은 마법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1계에는 인피면구는 물론이고 역용 술도 간파하는 수법이 있다지만...
여긴 무림계가 이니다.
에른이 데미우스가 되어 마음껏 활 개 칠 수 있는 이유였다.
"뀨엥!"
사리가 탑주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신기한 듯 작은 머리를 내밀고 주위 를 두리번거리며.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인 거야, 주인 님?
"그건 아니고. 임시로 머무는 거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아버지? 주인님?
"그… 렇지? 주인님."
-나도 도울래! 구해야지! 주인님의 주인님!
"계속 잘 도와주고 있었는데. 음, 잠 깐만."
에른은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편지 를 휘갈겨 쓴 다음, 사리의 입에 물 려 주었다.
"이러면 불편한가?"
"끼 잉!"
-입 아파....
펑!
사리가 한번 재주를 넘으니 등 부분 에 날개가 돋아나고 발목 부근에는 작은 상자 같은 게 생겨났다.
편지를 네 번 접어 넣으니 딱 들어 가는 크기.
"그 모습으로 나바로까지 날아갈 수 있겠어? 여기서 다른 형태로 변신했 다간 편지 떨어뜨릴 거 같은데."
-주인님, 너무해! 날 뭘로 보고!
"아니, 음… 가능하면 다행이고."
폴짝.
사리가 창틀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갔다 올게, 주인님!
파닥파닥!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으로 멀어져 갔다.
점으로도 안 보일 크기가 되어 사라 지는 걸 보면 충분히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사리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겠군.'
턱을 괴고 앉아 있으려니 잠시 뒤, 가까워져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흠, 흠… 들어와라."
데미우스의 목소리로 대답.
문을 열고 들어온 제자는 아가논이었다.
그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냐?"
"불민한 제자가 감히 단견을 말씀드 려 볼까 합니다."
"무슨?"
"배후 말입니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서."
«..2"
에른의 얼굴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호기심으로 읽은 것인지.
아가논이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하프란 백작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인간이 왜?"
하프란 백작은 사냥터의 주인이다.
데미우스가 만들어 낸 [인페르노] 때문에 버지아 숲이 잿더미가 됐는데 도 찍소리 못한 이번 사건의 최대 피
해자.
에른은 책상에 놓인 금화 자루를 턱 짓으로 가리켰다.
"사냥터 관리를 제대로 못 해 송구 스럽다고 5000골드까지 내놓지 않았 나."
"왜일까요, 켕기는 게 있어서가 아 닐지.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자기 사냥터로 꼭 오시라고, 오시라고…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요."
'마탑주한테 로비할 게 있었나 보지. 그 리고 위로금이라고 내민 건… 데미우스 이 인간이 그쪽들 대하는 것만 봐도/
가장 가까운 제자들한테도 공포의 대상인데, 일개 백작이면 혼비백산할 터이다.
어떻게든 불똥 튀지 않게 하려고 금 고 털어서 내민 속내가 뻔히 보였다.
"하프란 백작은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
"아르엘도다."
"예...?"
"날 노린 놈."
"그, 그런…. 아르엘도님께서 왜 스 승님을?"
아가논의 입이 벌어졌다.
놀랄 만도 했다.
아르엘도는 대륙에서 가장 이미지 좋은 마법사이니까.
대외적인 행보만 보면 그야말로 인 격자 중의 인격자.
"아르엘도가 선행을 베풀고 다닌다고 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아선 안 도fl. 놈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다."
"설, 설마요."
"흐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절, 절대 아닙니다! 어찌 스승님의 말씀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 사실, 당분 간은 너만 알고 있거라."
"네... 넵!"
아가논의 눈이 감격으로 젖었다.
왼팔이 잘리는 걸 제지한 것만 해도 스승님답지 않은 배려.
이런 내막까지 알려주는 걸 보면 내 심 자신을 후계자로 점찍기라도 한 거 아닐까?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칫국을 아주 사발로 퍼먹고 있군.' 김칫국도 사발도 뭔지 잘 모르지만. 설레발 엄청 떤다는 뜻이라는 건 안다.
"...이만 가보거라. 피곤하다."
"예, 옛."
"오늘은 쉴 테니까 스케줄 있으면
전부 취소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아가논은 마탑주가 되는 망상이라도
하고 있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탑주
실을 나갔다.
"자, 그럼… 사리 기다리는 동안 탈 탈 털어 보실까."
우선 하프란 백작이 준 5000골드부 터 인벤토리에 넣었다.
따지고 보면 뇌물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어차피 데미우스가 받은 거 니까.
'이걸로 500코인.'
서랍을 뒤지자 골드며, 보석, 매직 아이템 등이 쏟아져 나왔다.
에른은 차원거래를 활성화하고, 간만 에 [환전]으로 차원저울을 불러냈다.
와르르르.
동그란 접시 위에 쏟아붓자 바늘이 돌면서 환전액을 표시했다.
[예상 환전액 : 3000코인]
"흐음."
[환전]은 거래소 배만 불려주는 행 위다.
3000코인으로 책정된다면 채널에서 판매했을 시에는 5000코인은 족히 나올 터.
에른은 이 물품들도 전부 인벤토리 에 넣었다.
"5만 골드라…. 너무 적어."
마탑주는 명칭은 그래도 실제 마탑 의 소유주는 아니다.
마탑에 소속된 모든 마법사들의 스 승격이자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5만 골드 축재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시에라와 같이 살면서, 거래를 트면 서 보고 들은 게 있는데....
'마탑의 주인은 못 돼도 마탑에서 가 장, 그리고 수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에른은 눈을 감고 검지 손가락에 낀 반지를 어루만졌다.
지잉.
순간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거기군.'
넓은 탑주실 한쪽에 비밀 금고가 숨 겨져 있다.
겉보기로는 다른 가구들과 똑같아 보이지만.
철커덕.
데미우스의 반지를 가져다 대자 비 밀문이 열리면서 금고가 모습을 드러 냈다.
금고 역시.
덜컥!
'반지 하나면 프리패스군. 이러면 이 중으로 보안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잡생각도 잠시, 금고문을 열자 찬란 한 광채가 에른의 눈을 간지럽혔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이래야 마탑주 클라스에 맞지. 비
싼 건 다 여기다 몰아 놨구만...
금고 안의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 고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차원거 래를 재개했다.
이것들도 환전액을 체크해 봐야겠다 는 생각.
수천이 아니라 수만 코인도 나올 수 있겠다 싶은데.
삐 빅.
그때, 익숙한 알람음과 함께 메시지 가 떠올랐다.
'거래 문의인가?'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건강 히 잘 계셨는지요?
'웬 안부 메시지?'
별일 아니니 당장은 금고 터는 게 우선.
무시하고 넘어가려던 에른의 시선이 문득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메시지의 가장 왼쪽, 닉네임란.
에른이 눈을 비볐다.
몇 번을 보아도 그가 맞았다.
-옥면금룡 조검휘 : 불쑥 연락 드려 서 죄송합니다만… 연락할 곳이 에른 님 밖에 없군요....
'...2년 만에 어쩐 일로?'
[176 화]
옥면금룡 조검휘.
그는 제5무림계의 이름난 후기지수다.
무림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대들보로 평가받는 몸.
그런데 조검휘를 가장 유명하게 만 든 것은 무공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였다.
옥면.
옥과 같은 얼굴.
1계에서 미청년에게 붙여 주는 최 고의 찬사다.
거래소에서도 확실히 수려하다고 하 니 잘생긴 거야 더 말할 필요 없겠고.
금룡은.
5무림계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부호 이자 만금상회의 주인인 금왕 조근남.
그의 손자라 붙은 별명인데.
조검휘는 금왕의 유일한 혈육이다.
결국에는 조근남의 유산을 물려받 게 될 것이어서.
그리하여 옥면금룡.
뿐만 이니라 겸손하고, 매너 좋고, 연애 관계도 깔끔하고....
'거기다 엄청난 효자 아닌가? 부모님 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왔다고 하니.'
도대체 모자란 게 뭐가 있는가 싶다.
'전생의 나하고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 지금은 얼추 따라잡았으려나?'
옥면... 은 조검휘의 얼굴을 본 건 아니지만 이쪽도 안 밀린다고 자부 하고, 금력은 안타깝지만 만금상회에 비비긴 어렵다고 본다.
[보유 코인 : 2065467]
이 정도로 한 세계에서 금왕 소리 를 들을 수 있을까?
계좌에 든 코인에, 인벤토리의 물품 들,〈에른 상회〉의 보유 골드까지 합산한다 해도.
아직 자이온 대륙 최고 부호 타이 틀도 어렵다고 본다.
하물며 금왕의 재력임에야.
허나, 금수저 물고 태어난 조검휘와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의 차이.
자수성가 보정 들어가면 밀릴 것은 없다고 본다.
문제는 무공.
조검휘는 초절정고수, 에른은 절정 고수라.
물론 이쪽은 5서클도 있고, 사령술 과 각종 잡기들로 무장했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살짝 밀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 정도로 빼어난 인물이다.
조검 휘는.
에른과는 꽤 호의적인 관계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 사이였다.
그런데 한때 친하긴 했어도 2년은 긴 시간이다.
또한 에른이 그의 가장 친인도 아 닐 텐데 이런 말을 해 온다는 게 이 상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연락할 곳이 에른님 밖에 없군요....
약간의 반가움과 꽤 많은 의아함을
가진 채,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에른 : 2년 동안 어디서 뭘 하 고…?
-옥면금룡 조검휘 :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고통에 찬
-에른: ...?
-에른 : 이런 질문해도 될지 모르 겠지만, 복수는 어떻게?
-옥면금룡 조검휘 : 복수라… 복수 말입니까. >떨림
조검휘와 조근남, 이 두 사람은 에른 못지않게 복수에 한이 맺힌 이들이었다.
에른과는 조금 성질이 달라서, 이쪽 이 타오르는 분노를 계속해서 쏟아 내 왔다면 그들은 십수 년을 와신상 담하며 그 속에 독을 품어 왔다.
'보양인'과 '내공 공장'의 종지부를 찍게 하고, 거래소 차원의 내공 규제 가 시작된 원인이기도 한.
난주혈사의 주범 3인.
백가협녀 이난희, 철혈귀검 정호근, 그리고 또 한 명, 의문의 흉수.
에른이 기억하기로 조검휘는 이난희 를 죽이고 정호근까지 처치하면서 어 느 정도 복수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 고 있었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고 거의 2년 가까이 홀러서.
복수를 완수한 이상, 차원거래도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접속이 뜸 해진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가능성은.
-에른 : 설마, 찾아낸 건가? 마지
막 흉수?
-옥면금룡 조검휘 : 역시 눈치가…. 그대로시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철혈귀검을 고 문해 흉수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놈의 성명은 이한수.
-에른 : 특이한 이름이군.
-옥면금룡 조검휘 : 흔한 이름입니 다... 여기서는.
-에른 : 아, 그래....
-옥면금룡 조검휘 : 어찌나 흔한지
동명이인인 고수들이 여럿 있을 정 도이지요.
-에른 : 흠.
-옥면금룡 조검휘 : 이계인이라 이 런 반응이신 겁니다. 5무림계인이었 다면 이렇게 되물었을 테지요.
-옥면금룡 조검휘 : 어떤 이한수, 설마 그 이한수…? 불운하게도 그 이한수가 마지막 흉수가 맞더군요. 아니길 바랐건만....
-에른 : 그 이한수라면?
-옥면금룡 조검휘 : (흑도제일인,
천살마룡 이한수.
난주혈사의 소득으로 만족하고 새 로운 삶을 살기로 한 이난희와 정호 근과는 달리 계속해서 혈사를 일으 켜 댄 탐욕스럽고 잔악한 놈…
끝도 없는 내공 덕에 초고수가 되 었고, 흑살문을 장악한 뒤론 막대한 코인 이득을 바탕으로 흑도 최대 문 파로 성장시키기까지.)
'훠우.'
보통 놈이 아닌 거 같은데?
하필 이런 거물이 마지막 복수 대 상이라니.
조검휘도 상당히 운이 없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는… 신화경 의 고수입니다.
-에른 : 쉽지 않겠군. 준비를 철저 히 해야 되겠어.
-에른 : 내가 뭐 도와줄 일이라도?
-옥면금룡 조검휘 : 하하… 저도 에른님처럼 냉철한 판단력이 있었다 면 좋았으련만. >자조
-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저 말입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검휘가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그는 예전과 같은 옥면이 아니었다.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망가진 얼굴.
그 앞에 활짝 펼쳐진, 붉은빛을 내
뿜는 차원거래서 아래.
붉은빛보다 진한 핏빛이 사방에 뿌 려져 있었다.
조검휘의 오른팔은 온데간데없어 텅 빈 소매가 펄럭였고 왼팔은 뭉개 져 본래의 형체를 잃은 채였다.
그리고 가슴과 아랫배에 난 두 개 의 구멍에선…. 숨 쉴 때마다 울컥울 컥 핏물이 밀고 나왔다.
-에른 : ...아니지?
-옥면금룡 조검휘 : 맞아요.
-에른 : 잠, 잠깐!
[옥면금룡 조검휘님에게 '생활단' 1 개를 보냅니다.]
"에른 : 이거 복용해. 얼마나 다쳤 는진 모르겠지만 살 수 있어.
생활단은 1계에서 죽활단보다 한 급 높게 쳐 주는 최고의 회복제다.
죽활단도 충분히 사기인데, 이 생활 단이란 놈은 효능이 어찌나 뛰어난지 삼도천 건너고 있는 사람도 강제로 뭍으로 끌어올려 되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달리 부르는 명칭이 대라신선.
[세븐 아이즈]와의 전쟁을 준비하면 서 구매한 물품인데, 이런 식으로 처 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에른 : 역천단도 줄 테니까. 내공 필요한 상황일 텐데. 이거 한 3, 4갑 자 정도는 바로 채워 주거든?
-옥면금룡 조검휘 : 소용없습니다. 단전이 박살났거든요. >체념
-에른 : 어, 어쩌다?
-옥면금룡 조검휘 : 이한수 밑에서
2년을 일했습니다. 신뢰를 쌓다 보면 기회가 생길 줄 알았는데…. 놈은 애 초부터 알고 있었더군요. 복수하기 위해 들어왔다는 걸.
-옥면금룡 조검휘 : (알고도 내버 려 뒀지… 온갖 더러운 일을 다 시 키면서 내가 움직일 때까지 모른 척. 놈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심계다.)
-에른 : 지금 그게 중요해? 생활단 이나 복용하라니까?
[옥면금룡 조검휘님께서 '생활단' 1 개를 보냈습니다.]
되돌아온 생활단.
-에른 : 미쳤나?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옥면금룡 조검휘 : 아까워서 그럽 니다. 생활단이 얼마나 비싼 물품인 진 저도 압니다.
-에른 : 돌겠네…. 나 코인 많아. 그리고 그쪽도 부자잖아. 정 뭐하면 나중에 갚든지.
-옥면금룡 조검휘 : 이런 걸로 옥 신각신할 시간 없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에른님께 부탁하 고 싶은 것은…. 우선 받아 주십시오.
[옥면금룡 조검휘님으로부터 12000 코인을 받았습니다.]
-에른 : ...뭐 하자는 거지?
12000코인이 들어왔는데도 횡재라 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외에도 조검휘가 보낸 것은 무 공과 지식.
〈천유신공(9성)〉
〈유성 비류검 (9성)〉
〈천공보(9성)〉
〈오기조원 완성(아이템)〉
〈검강 응용, 그리고 그 너머의 경
지까지 (지식)〉
〈신화경의 실마리(지식)〉
모두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에른이 채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
던 초절정무공들.
그리고 그 이상의 깨달음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에른 : 왜 보낸 거야? 평생 갈고 닦은 무공이잖아!
-옥면금룡 조검휘 : 죄송함니다. 에른님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요.
-옥면금룡 조검휘 : 이한수의 부하 들이 제 뒤를 쫓고 있습니다. 아마 길어야 이 각 정도일 겁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무공을 가진
채로 죽으면 놈에게 복수할 가능성 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겠지요. 그 러니 부탁드립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몇 년, 몇십 년이 걸려도 좋습니다. 무공을 받아 주시고, 제 의지를 이어 주십시오.
조검휘가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에른은 이딴 소리를 계속 보고 싶 지가 않았다.
화도 났다.
-에른 : 미친 소리는 그만 하고! 나한 테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어. 투명 마법 하고 비행 마법도 있고. 얼마든지 빠져 나올 수 있다니까? 회복약 받고. 제발!
-옥면금룡 조검휘 : 아뇨. 이 몸으 로 복수는 불가능합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복수마저 불가 능하다면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 하겠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지난 2년은…. 그 끔찍한 세월은, 대체 뭘 위한 시 간이었단 말인가.)
-옥면금룡 조검휘 : 부탁드립니다. 놈
을, 천살가룡 이한수를 죽여주십시오.
에른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에른 : 나는 0계인이야. 어떻게 놈을 죽일 수 있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방법이 있을 겁니다. 에른님이라면.
-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결국 복수에 성공하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2계의 원수 말입니다.
'...내 메시지를 읽었군.'
에른은 조검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여태껏 만난 숱한 교류자들 중에서 친구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조 검휘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쪽도 고대하던 복수를 완 수했음을, 그러니 너 또한 성공하길 바란다는 뜻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조검휘가 씹는 바람에 모처럼의 우정이 이렇게 끝나는가 보다 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 메시지를 보고 제 일처럼 기뻤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교류자라는 걸 절대 들키면 안 돼서, 채널에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해서, 연락은 못 드렸지만요. 쿨럭!
-에른 : 그 원수는 평범한 마법사 에 불과했어. 그런데도 정말 어려웠 지. 근데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신화 경의 무인을 어떻게?
-에른 : 도와주고 싶어도….
-옥면금룡 조검휘 : ...역시 무리 한 부탁이겠지요.
-옥면금룡 조검휘 : 그러면,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건 간단 한 겁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아이템과 지식 들을 가지고 계시다가 조부님과 연 락이 닿으면 전해 주십시오.
-에른 :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수고비… 라고 나 할까요? 그 위쪽의 초절정무공들
은, 에른님께 드리는 걸로 하지요.
-에른 : ???
세상에 그런 정신 나간 수고비가 어디 있나.
겨우 물품 전해 주는 대가로 초절 정 무공을 준다고?
-에른 : 그건… 받을 수 없어.
-옥면금룡 조검휘 : 아닙니다. 어 차피 놈을 죽이려면 신화경이 아니 고선 안 됩니다. 초절정무공은 별 의
미가 없어요.
-옥면금룡 조검휘 : 시간이 부족해 가진 무공을 다 추출해 드리지 못하 는 게 죄송할 따름이죠.
-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대신, 이거 하 나만 약조해 주십시오. 꼭 전달해 주 기로.
-옥면금룡 조검휘 : 뭐… 흡수하셔 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꼭 이한수를 죽여 주셔야 합니다.
—에른 : 약속하지.
-옥면금룡 조검휘 : 믿겠습니다.
조검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차원 거래를 종료했다.
최후의 순간은 혼자 보내는 게 좋 겠다면서.
에른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조검휘도 별로 바뀐 게 없군." 자신이었으면 이런 중대한 약속을
절대 맨입으로 하지 않았을 터이다.
차원계약서를 쓰거나 마나의 맹세 를 시키거나. 다른 안전장치를 모색 하거나.
헌데 이상한 일이었다.
별다른 제약이 없다는 점이 더 족 쇄처럼 느껴진다.
'이거까지 손대는 건 너무 최악이겠 지. 내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 무리 그래도...
에른은 조검휘가 허락한 부분, 천유 신공부터 천공보까지, 흡수량을 3% 씩으로 설정하고 [흡수]를 시작했다.
초절정무공은 심오한 깨달음을 담 은 초대용량의 무공.
3%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완벽히 흡수하려면 몇 주, 아니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
최대한 코인 이득을 보려면 지금 가진 절정무공들을 [추출]한 뒤에 흡 수를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지. 무공 공백기에 세븐 아이즈와 맞부딪치면 그걸로 끝장이다.'
초절정무공을 얻은 것만으로도 너
무 큰 성과.
자잘한 이득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조검휘 덕분에 새로운 경지로 나아 갈 수 있게 됐군.'
그런데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에른은 눈을 감고 조용히 그의 명 복을 빌었다.
상실감을 달래기 우]해.
[177 화]
"꺄웅!"
정적을 깨는 울음소리.
사리가 돌아왔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 중이던 에른이 붉은 눈을 떴다.
['천유신공(9성) 3%' 흡수 진행,
41%- 42%....]
『유성비류검(9성) 3%' 흡수 진행,
54%… 55%....]
『천공보(9성) 3%' 흡수 진행, 6
3%..' 64%..]
'이 속도면 두 달은 더 걸리겠군.'
조검휘와 작별 인사를 나눈 지도 만 하루가 지났다.
[내 머릿속의 스펀지] 특전으로 흡 수 속도가 300% 빨라진 상태인데도 이런데, 특전이 없었더라면 흡수에만 반년은 족히 걸렸을 터이다.
'초절정이 이 정도 수준이면 신화경
은 대체?'
그리고 더 고차원의 지식은?
[흡수]도, 차원거래서도 만능은 아 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드로얀 루페브르가 들었더 라면 60년 수련해 전설급에 오른 난 뭐냐고 분기탱천해 날뛸 일이지만….
어찌 됐건 새삼 깨닫게 됐다.
차원거래서의 초월적인 정보 전송 능력에도 상한선이 존재한다는 것.
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되는 구간은 초절정무공급의 지식부터라
는 것.
-나 왔어, 주인님!
사리가 에른의 어깨로 올라와 곧게 뻗은 목에 머리를 부볐다.
"어떻게 됐어?"
-시키는 대로 다 했어! 잘했지!
"그래, 잘했다."
손가락 두 개로 사리의 턱 아래 흰 털을 문질거리자.
사리가 기분 좋은 듯이 갸릉거린다.
"...누나들은?"
-멀리서만 봤는데! 아직 집에 있던 걸!
"다들 영지를 너무 오래 비우는 데.... 돌아갈 때 되지 않았나."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고 돌아간다 고 하긴 했어!
"그래 준다면 다행이지. 편지는?"
-응! 그거! 무사히 전해 줬어!
"그럼 준비를 해야겠군."
뚜둑! 뚜두두둑!
축골공을 사용하자 곧은 목이 굽고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와! 주인님 변신 멋있어!
"...변신은 변신이긴 하지만. 이게 멋있니?"
- 응응!
데미우스로 변한 에른이 로브에 달 린 후드를 눌러쓰고 탑주실을 나왔다.
제자들이 따라붙는 것을 물리치고 사리와 단둘이 향한 곳은 실라이엔 의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주점.
구석 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 고 있는데.
덜컥.
문이 열리고 웬 미녀 한 명이 주점 으로 들어왔다.
더럽고 낡은 내부가 갑자기 환해지 는 듯한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
찰랑거리는 붉은 머릿결은 주단 같 고 훤칠하면서도 날씬한 몸매는 헐 렁한 로브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야, 야! 봤어, 저 여자?"
"뭘...? 헉!"
주정뱅이들이 수군댔다.
몇몇은 취기가 확 달아나는지 벌컥 벌컥 술을 들이켜기도 했다.
"흐음."
여자가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진하고 와인 3:1 비율로 섞은 거. 흔들지 말고 저어서."
" 예?"
"하긴 이런 데서 팔 리가 없지. 맥 주나 줘."
"예, 옛...!"
고압적인 태도에 위축된 종업원이 쩔쩔맸다.
여자는 맥주잔을 받아 들고, 에른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왜 하필 이런 데서 만나자는 건데?"
"싸구려 주점에서 칵테일 찾는 성 격이니까. 누가 시에라 펠가스가 이 런 데서 접선할 거라고 생각하겠어."
"말조심해."
시에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흘끔거리는 놈들이 몇 있었지만,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에른이 피식 웃었다.
"변장을 해도… 그렇게 튀게 하면 서 뭘 쫄고 그러나."
"이게 내 원칙이야. 변신을 해도 기 왕이면 예쁜 얼굴로! 그리고 너야 들 켜도 상관없겠지. 근데 난 카이돈에 밀입국해 온 거거든? 이거 걸리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하 여간 데미우스, 지 생각만 하지."
"뭐, 그런 성격인 거 같긴 하더라."
시에라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뭐라는 건지. 근데 웬 청승? 답지 않게 우울해 보이는데?"
"친구가 죽어서."
무거운 대답.
시에라는 조금도 애도하지 않았다.
"그 나이면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 데 뭘 그래? 에른은?"
시에라가 다시 주점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에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 이지 않는다.
"얘는.... 자기 때문에 모인 건데 제 일 늦게 나타나는 건 뭐야?"
"냅둬.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보지."
"언제부터 에른 편이었다고 싸고 돌 긴.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거냐? 셋이서 동맹을 맺자니?"
"글쎄...."
주름진 입가가 씩 올라갔다.
이쯤 했으면 검증은 충분히 되었다 고 본다.
"6서클들도 눈치 못 채던데. 대마법 사라고 다를 건 없군."
"시에라는 분석안이 있는데도 모르
잖아? 그럼 뭐, 아르엘도라고 해도 다를 게 있나 싶은데."
"너..?"
빙긋 웃는 데미우스.
시에라는 이 웃음이 어딘가 익숙하 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래 끓는 목소리가 차츰 미성으로 변해 간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이거."
"...정, 정말 너야?"
보랏빛이 번득였다.
그녀의 촉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에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분석안은 정반대의 사실만을 표시했다.
[마나의 흐름… 감지되지 않음.]
[신체 변형… 감지되지 않음.]
[얼굴, 체형… 본연의 것.]
"어,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친구가 죽었다는 건, 그건 무슨 말
이야?"
"그런 게 있어."
시에라가 손을 뻗어 에른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쩌다가?"
"뭐야, 이 온도 차는."
"넌 데미우스가 아니니까. 친구들도 멀쩡히 살아 있을 나이고. 괜찮아?"
"별로 괜찮진 않지만, 이겨 내야지."
에른은 그녀와 헤어진 뒤,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데미우스의 죽음, 그리고 지금은 11마탑의 탑주실에서 기거하고 있다 는 사실도.
"이러면 어때? 6대 2가 5대 2로 줄 었는데? 많이 할 만해졌지?"
"아니, 전혀."
시에라가 고개를 저었다.
"난 데미우스가 가세해서 5대 3 구 도가 된 줄로 알았어. 뭐 그것도 여 전히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이 건... 내 생각보다 더 불리한데."
"5대 3인 건 맞아."
쑥!
로브 틈새로 사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도울 거야!
"으응… 그래, 퍽도 도움이 되겠다."
"시에라."
"사리 무시하지 마. 충분히 한 몫 할 수 있는 전력이야."
"알아. 아는데 대마법사들에 비하면."
"아니."
에른은 진지했다.
"사리가 딱히 밀릴 건 없다고 봐.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고. 그리고, 나도 최소 2인분은 할 수 있어."
"뭐야, 그 못 믿겠다는 표정은?"
"당연히 못 믿지. 데미우스 잡고 기 세등등해진 거야? 기습으로 죽인 거 라면서."
"그러긴 했지."
"전설급이 된다면 혹시 모를까. 지 금은 안 돼."
"전설급이 된다면… 이라."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그 혹시가 혹시가 아니라면?"
탁!
시에라가 맥주잔을 세게 내려놓자 주점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녀의 박력에 화들짝 놀란 주정뱅 이들.
시에라는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닦고 옆자리로 왔다.
훅 다가오는 알코올과 향수 냄새.
"...농담이지?"
"아니, 사실인데."
"정말 전설급이 됐다고? 열일곱에?"
"두 달 지나면 열여덟인데."
"파이어볼이나 파이어볼트나. 정말 전설급이야?"
"아직은 아니고."
그러면 그렇지.
말이 되냔 말이다.
시에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뭘 좋아하고 그래? 두 달만 있으 면 될 수 있어."
"실마리를 잡았거든."
실은 지금도 가열차게 흡수되고 있 는 중이다.
전설급에 준하는 옥면금룡 조검휘 의 무공들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열여덟에 전 설급은 건국황제가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해!"
"열일곱에 영웅급은 뭐 페이웨어라 고 달성했었나?"
그건 그렇긴 하다.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시에라를 바라보며.
에른이 계획을 설명했다.
"...어때?"
"그 말대로라면, 해볼 만은 하네.
단, 전설급에 올랐을 때만이야."
시에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를 리가 있나. 무슨 헛바람이 들 어선.'
저 나이에 영웅급인 것도 경악할 성과이긴 하지만, 아직은 그녀보다
아래 단계라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었다.
성장이 빠른 것과 최대 포텐셜이 높은 것은 또 다른 얘기니까.
'나도 나름 내세울 만한 천재라고 생각해 왔는데.'
뱃속에서부터 마법사로 키워진 그 녀다.
펠가스 가의 비밀병기.
탯줄을 끊기도 전에 심어진 분석안.
그런데도 대마법사가 되기까지는 반백 년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정도로 어렵다.
전설급과 7서클은.
레바단이 [세븐 아이즈]의 표적이 된 것도 40대에 전설급이 되어서니까.
'에른이 정말 전설급이 된다면… 그 건 정말 괴물급 천재.'
고작 신화급의 잠재력이 아닌.
[인간의 人]대]에는 단 한 번도 없었 던 초월급의 재능.
시에라는 자기가 에른의 전설급 도 약을 바라는 건지, 아닌 건지 스스로 도 잘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음, 근데 그 계획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하나 있어."
"어떤?"
"겉모습은 감쪽같아. 정말 데미우스 하고 똑같은데. 신기하게 폴리모프인 것도 아니고…. 근데 본부에 깔린 방 어 마법은, 얼굴로 회원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서 안 통할 거야."
"알아. 마나 회로를 스캔한다며?"
"...어떻게 그걸?"
"데미우스가 알려 줬지."
버지아 숲에서, 데미우스와의 3문 3답.
마지막 질문이 그것이었다.
"...…난 앞으로 데미우스, 그러니까 네가 되어 행세하려고 한다. 절대 들 키지 않으려면 뭘 알아야 하지?"
u,.
이미 마나에 맹세를 한 뒤라, 데미 우스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탑주실의 물건 들을 건드려도 각종 보안 마법이 발 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인간 마나 회로 패턴도. 이거
알면 속일 수 있지 않을까? 도와줄 수 있어?"
"가능할 것 같은데…. 확신을 가지 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실 험도 해 보}야 하고."
" 얼마나?"
"한 두 달...?"
"잘됐군."
공교롭게도.
에른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데미우스의 얼굴이라 심술궂어 보 이는 웃음.
"그러면, 서로한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한 뒤에 만나는 걸로?"
"...진심인 거지? 계속 마탑에 있 을 거야?"
"물론, 그리고 물론. 데미우스는 살 아 있는 편이 좋아. 죽은 사실이 알 려지면 다들 최대한의 방어 태세를 갖출 테니까. 그럼...
에른이 위스키를 원샷하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두 달 뒤에 보자."
♦
[세븐 아이즈]의 정례 회의가 열렸다.
원탁에 둘러앉은 마법사들이 각자 관리 중인 천재들의 경과를 보고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라우크.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에서 가장 먼 저 세워진 제1마탑의 마탑주이자 아 르엘도와 함께 가장 발언권이 센 회 원이었다.
"뭐… 난, 별거 없고. 카디스가 요 즘 미친 듯이 수련한다는 거 정도?"
카디스는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이다.
전설급들 중에서 가장 젊어 세븐 아이즈가 항상 주시하는 인물이었다.
"...그 친구,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왜 그런대?"
"레바단이 동급으로 올라왔잖아. 위 기감 느낄 만도 하지."
"레바단이 실종된 걸 모르나?"
"나바로에서 쉬쉬하고 있으니까. 스틸가드에서도 필사적으로 숨기는 거 같던데?"
아르엘도가 정리했다.
"지금은 그저 수련 중일 뿐이라는 거지? 별다른 건 없고?"
"그렇지, 뭐."
"특이 사항이 발견되면 알려주게. 설 마 팔이 안으로 굽는 일은 없겠지?"
클라우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스는 본국의 소중한 자산이지
만... 회칙이 우선이지. 그럴 일 없어."
"그럼 다음으로…."
드베인과 제이엔, 카일로스.
그리고 시에라까지.
각국의 대마법사들이 정보를 공유
했다.
마지막으로, 데미우스 차례가 되었다.
다섯 명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남은 한 명, 시에라는 그 다섯 명을 살피고 있고.
꽤 긴 시간 침묵을 지키는 데미우스.
아르엘도가 물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
데미우스가 입을 열었다.
"죽일 놈들이 너무 많아서. 누구부 터 죽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몇 명이나 되는데?"
" 다섯."
세븐 아이즈 회원들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카이돈에 천재들이 그렇게 많았던가?"
"거기 전설급도 없잖아. 어린 천재
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기라도 했 다는 거야?"
"그래도 다섯은 전례 없는 일인데?"
"아."
데미우스가 깨달은 듯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까 넷이지. 하나는 죽 이면 안 되는구나."
"넷이라고 해도 많지. 답답하네… 이름들이 어떻게 되는데?"
드베인이 던진 질문.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음, 너로 정했다."
뎅겅!
번득이는 검광과 함께 회원들은 도 저히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함께.
제3마탑의 수장.
7서클 대마법사 드베인의 목이 몸 에서 분리되어 날아가는 것을.
"미친! 데미우스!"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그리고 이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
"잠깐...! 마법이 안 써지는데?!" 푸아아악!
[178 화]
[세븐 아이즈]의 본거지는 대륙의 최북부, 극지방에 위치했다.
고개를 들면 북극점도 바라볼 수 있 는 거리.
숨을 쉬면 숨결조차 얼어 버리는, 극 한의 추위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웃통을 벗고 다니 는 극지방의 원주민들도 이 지역은 얼어붙을 것 같이 춥다는 이유로 얼 씬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살인적인 한기를 견딜 수 있 는 생명체는 북극곰이나 예티, 아이 스 오거 정도일까?
그런데 그런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 온다 해도 본거지에는 접근조차 불가 능했다.
탑 근처에 설치된 수백 개의 방어 마법들.
전방위 감시 및 방어 시스템이 탑을 지키고 있다.
이 역시 신물.
이름도 멋있는〈신의 방패〉가, 놈들이
몇 걸음 들어오기도 전에 마법진을 발 동해 죄다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기에
신의 방패가 수호하는.
〈심판의 탑〉.
[세븐 아이즈] 회원들은 그들의 비 밀 본부를 이렇게 불렀고 이는 만장 일치로 정해진 바라고 했다.
창립 이후 여러 번의 물갈이가 있었 지만, 새로 들어온 회원들도 다 이 이름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회원들은 천재들의 수준을
평가한다.
그들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 능성이 있는 [천재급] 이상인지, 별다 른 영향 없을 아랫급인지.
천재급으로 확정되면 다양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 그 천재를 소리소문없 이 사라지게 할 것인지.
어떻게 이 세계로부터 '배제'시킬 것 인지.
레바단 건처럼 회원 전부가 움직이 는 케이스도 있지만, 대부분은 둘셋
만 나서도 해결되는 일이 많았다.
이때 회원들이 느끼는 것은 심판자 가 된 듯한 우월감이다.
또한 흑막 뒤에 숨어 이 세계를 주 무른다는 전능감.
그렇기에 심판의 탑인 것.
그런 과정 중, 회원들은 극도로 안 전했다.
대마법사인 자신들도 뚫을 자신이 없는〈신의 방패〉.
누가 북극에 이런 비밀 기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며, 안다 해도 손쓸
방법이 없다.
더없이 안전하고 더없이 전능하다.
...그렇게 확신해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그런데 바로 지금.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여겨 왔던 불 상사, 아니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참 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촤아아악!
클라우크의 눈이 번쩍 떠졌다.
파지지 직!
사방으로 튀는 피가 들끓는 뇌전에 의해 증발해 버리는 신기한 광경.
아까는 경황이 없어 뭔가 했는데 다 시 보니 확실했다.
'전격계 마법검! 어떻게 숨겨온 거 지? 아공간 마법?'
아공간이라면 말이 되지만.
의문이 또 생겨났다.
'마법이 안 써지는데 어떻게 아공간 을? 꺼내는 걸 보지도 못했어. 전부 데미우스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상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터억
원탁 위에 카일로스의 목이 떨어졌다.
'.…"7마탑주!,
클라우크가 한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헛숨을 내뱉었다.
하필 카일로스가 검에 썰려 죽다니.
그는 실드 마법의 최고 권위자다.
7마탑의 카일로스 사단이 발표한 실 드 이론은 전투 마법사들의 대 기사 단 전술을 한층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드베인도 그렇고 카일로스도 그렇고 어떻게 이런 허망한 죽음이 있을 수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광경임에도 믿 어지지가 않았다.
"데미우스!"
9마탑주, 제이엔이 부르짖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 줄 알아? 대 마법사 둘이 죽었어! 그 검 내려놔!"
"내가 왜'?"
에른이 씩 웃으며 제이엔과 눈을 마 주쳤다.
"선택장애 해결해 줘서 고맙군. 다
음은 너다."
"미, 미친!"
다가가려는 찰나, 눈앞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지이이잉!
광선이 지나간 자리가 까맣게 타들 어 갔다.
흄칫하며 한 발짝 물러나는데, 압도 적인 기척과 함께 강철 거인 하나가 제이엔의 앞을 가로막아 왔다.
'...그 아이언 골렘이란 건가?'
듣던 대로 거대하고 위협적이기는 했다.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크 고, 덩치는… 전설 속의 거인족이 연 상될 정도다.
'근데 겨우 하나로?'
그때.
쿠 쿠 쿠 쿠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출입구 에서 강철 거인들이 몰려들어 왔다.
"죽기 싫으면 이쪽으로!"
어느새 골렘 뒤에 숨은 아르엘도가
회원들에게 손짓했다.
클라우크와 제이엔, 말없이 있던 시 에라까지.
아르엘도가 선 곳으로 모였다.
"...다행이군. 놈.의 마법 봉쇄가 마력핵에는 영향을 못 미치는 모양이 지. 그랬으면."
시에라가 문장을 완성했다.
"꼼짝없이 다 죽었겠지."
제이엔이 넋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우리가 뭐, 데미우스한테 잘못한 거
있나? 왜 미쳐서 날뛰는 거냐고…."
"있긴 뭐가 있어?"
가볍게 일축해 버리는 클라우크.
"20년 넘게 신입 취급하면서 놀려먹 긴 했지. 근데 그거 가지고 목 뎅겅 뎅겅 날려 대는 게 보통이면 이미 가 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졌어!"
그렇다면 대체 왜?
의문을 품는 제이엔과 클라우크를 보며 아르엘도가 혀를 찼다.
"아직도 저게 데미우스로 보이나?"
"데미우스의 탈을 쓴 놈일 뿐이지. 봐. 마법검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만 으로 방어 골렘 다섯 기를 상대할 수 있겠어?"
아르엘도의 지적이 타당했다.
데미우스의 전후좌우를 둘러싼 강철 거인들.
골렘들이 강철 주먹을 휘두르고 내 리쳐 대고.
원거리에서는 레이저로 지원.
그런데 파육음 대신 들리는 것은.
쾅, 쾅, 콰아앙!
왜인지 모를 폭발음.
치이이익! 하고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야 마땅한데, 그 대신에.
빠지지 직!
스파크가 튄다.
제이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드 마법? 데미우스는 마법 쓸 수 있는 건가?"
"그랬으면 공격 마법 쓰겠지. 실드 만 치고 있겠어?"
"하긴. 뭐지, 그럼?"
아르엘도의 눈이 가라앉았다.
"...오러 실드."
" 영웅급!"
클라우크의 눈이 커졌다.
만약 저 놈'이 데미우스로 폴리모프 한 거라면 여섯 대마법사 중 최소 하 나라도 간파했을 것이다.
해서.
'...정말 데미우스가 아니라고? 뭐, 데미우스가 8서클이라도 된다는 거야? 안 믿기는데.'
이렇게 생각했지만, 오러 실드를 만
들어 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데미우스가 남몰래 수련해 영웅급에 올랐을 가능성은 0에 수렴히니까!
"영웅급이 마법검을 들어도 방어 골 렘 다섯이면 힘들지. 신물 덕에 목숨 건지는군."
저 골렘들도 신물이다.
대륙의 기술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뛰어난 움직임과 규격 외의 출력.
오러 실드를 둘러서 어떻게든 버티고 는 있지만 골렘들이 가둬 놓고 패다 보면 언젠가는 맞아 죽고 말 것이다.
그럴까?"
시에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정말 영웅급에 불과하다면 그 말이 맞겠지만.'
며칠 전.
약속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
시에라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난 뚫었어. 회로만 조금 변형하면 방 어 시스템이 널 데미우스로 인식할 거
야. 그럼 아무 탈 없이 탑 안까지 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거지."
"확실해?"
"물론이지. 내가 널 죽게 하겠어? 나 한테는 가장 강력한 비밀 병기인데."
"그 비밀 병기, 폐기되는 일만큼은 피했으면 좋겠군."
"말했던 전설급은? 표정 어두운 거 보니까… 잘 되진 않은 거 같은데?"
"그래 보여?"
"당연히, 그리고 상식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보지만. 그래도 너니까 물어
보기라도 하는 거야."
"내 대답은...
화아아앗!
에른이 검을 꺼내 들고 보여준 오러 블레이드.
시에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틸가드는 다시 전설급을 보유하게 되었네…. 아니, 어쩌면 둘씩이나.'
그때 본 아득한 빛깔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 이곳 심판 의 탑 회의실에서 다시금 재현되었다.
북극의 오로라가 연상되는, 너르고 도 창연한 푸른 검강.
그래서 붙은 초식명.
쇄혼경천검, 제사초.
'...창파.'
번- 쩍!
콰가가가강!
뇌성과 폭발이 이어졌다.
창파에 직격당한 방어 골렘 한 기가 작동을 정지했다.
5대 1에서 4대 1로.
겨우 첫 반격이었다.
단번에 숫자를 줄였고, 기세를 이어 가야 할 때다.
에른은 뇌정검을 휘둘러 뒤로 덮쳐 드는 골렘 세 기에 강기를 쏘고는 한 걸음으로 도약해 미친 듯이 칼질했다.
어우러진 뇌기와 강기.
'골렘을 정지시키려면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했던가.'
놈에게 동력을 공급하는 마력핵을 찾아 파괴해야 한다.
에른은 아이언 골렘의 머리와 목 부
위를 찌르고, 긋고, 몸을 숙여 쇠기둥 같은 양팔을 피하고….
콰콰콰쾅!
또다시 강기를 뿌려 뒤를 노리는 골 렘들의 접근을 차단시키고는.
가슴, 배, 옆구리, 다리 부분… 닥치 는 대로 휘몰아쳐 갔다.
그러다 보니 수확이 있었다.
쿠우웅….
마력핵이 상한 모양이었다.
정면에 선 골렘이 두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작동을 정지했다.
'..뭔 마력핵을 무릎 뒤에. 이게
무슨 꿀팁? 그냥 창파나 계속 쓸걸.'
더 어렵게 처치한 거 아니냐고.
뭐라 말을 해 보라는 듯 시에라를 쳐 다보니 그녀가 겸연쩍은지 몰래 윙크 했다.
반면 다른 세 대마법사는.
"오러 방출…!"
"저, 저거 전설급이잖아!"
"...일단 장소를 옮기지."
아르엘도가 손짓하자 시에라가 물었다.
"어디로? 방어 골렘도 둘이나 상했 고… 괜히 나가려고 했다간 등에 오 러 블레이드 박힐 거 같은데?"
"그럼, 손가락 빨다가 다 죽자는 거야?"
"뭐라도 해야 하는 게 맞지. 아르엘 도 말대로 하자."
"누군가는 희생해야 할 텐데?"
그 말에, 클라우크와 제이엔의 목에 선 핏대가 가라앉았다.
"으음… 그, 그건...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대의에는 공감하나 자기만은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다.
"...제비뽑기할까?"
아르엘도가 코웃음을 쳤다.
"뽑힌다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일 것도 아니지 않나? 됐고…. 다 살 수 있다. 하수인들이여! 놈을 막아라, 그 리고 정렬하라!"
지잉! 지이이잉!
척, 척!
명령을 들은 아이언 골렘들이 눈에 서 레이저를 쏴 대며 일렬로 섰다.
자연스럽게 에른과 대마법사들 사이
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거의 철벽이군. 시간 좀 벌 수 있겠어."
"뭘 하려는 건데?"
아르엘도가 품에서 작은 원통형 물 체를 꺼냈다.
"아공간 창출기?"
"...아공간을 만들자고? 그게 가 능해?"
"방어 골렘이 움직일 수 있다면 같 은 원리로 이것도 사용 가능해. 놈은 아무래도 마나의 흐름만 묶어둔 것
같거든. 봐라."
아르엘도가 버튼을 누르자 허공에 빛나는 구체 같은 것이 생성되었다.
"...정말이네?"
"근데 아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놈이 9서클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아 공간 전체의 마나 흐름을 봉쇄할 순 없어. 공간을 넓히면, 마법사용이 가 능해질 거다."
말하는 동안, 구체는 차츰 그 크기 를 키워 갔다.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군.'
에른은 창파를 난사하며 골렘들을 정지시키는 데에 열중했다.
작동 중인 아이언 골렘.
두 기, 한 기.
이윽고 구체가 최고 크기로 커졌고.
쿠구구궁!
마지막 남은 골렘의 마력핵이 파괴 되는 순간.
파앗-!
눈부신 빛이 회의실을 뒤덮었다.
잠시 뒤.
에른과 대마법사들, 그리고 작동을 멈 춘 아이언 골렘 다섯 기는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아공간 위에 서 있었다.
위도 아래도 구분되지 않는 비현실 적인 장소.
그러나 엄연히 바닥과 허공이 있고,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에른이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아버지가 당한 그곳?'
마법사들이 하나 타깃 정해서 다구리
놓기에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째 드림 머신하고도 비슷하군.'
어느새 공중에 뜬 채, 거리를 훨씬 벌린 대마법사들이 이쪽을 내려다보 고 있었다.
아르엘도의 추측대로, [금마의 큐브] 의 범위에서 벗어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제이엔이 텔레파시를 보내 왔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뭔데!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무슨 자격으로 우리 조직을 만신창
이로 만든 거냐고...
[179 화]
"자격이라."
에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마법사들에게 전음을 날려 보냈다.
한 번에 네 사람에게.
시에라한테는 딱히 할 말 없지만,
특별히 끼워 줬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내공의 수
발이 더욱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가르고 합치고… 풀어낸 여러 갈래
의 내공.
전부 동시에, 완벽히 통제할 수 있 게 되었으니.
그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만 가능한 다중 전음.
텔레파시와는 다른 언어 전이 기술 이 [세븐 아이즈] 회원들의 귓가로 파 고들었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지금까지 내던 데미우스의 목소리가
아닌 청년의 맑고 깨끗한 음성.
클라우크가 텔레파시로 회원들에게 물었다.
-마법인가? 마검사.K 저거?
아르엘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럴 리가. 서클과 마나 하트를 동 시에 키우는 건 비효율적이다. 목소 리가 꽤나 젊은데…. 서클에 방해받 고도 전설급이 되려면 곧 죽어도 안 이상한 나이여야 맞지.'
그도 텔레파시로 대답했다.
-매직 아이템이라도 있는가 보지.
-그런가?
제이엔은 대화에 끼지 않고 에른에 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자격? 뭔 놈의 자격! 너 때문에 우 리의 대의가!
"이번에는 대의군."
에른은 품에서〈금마의 큐브〉를 꺼 냈다.
반질반질한 금색 큐브.
버튼을 누르자 달칵하고 뚜껑이 열리 면서 안에 든 마나석들이 튀어나왔다.
영롱한 최상급 마나석 세 개.
〈금마의 큐브〉는 사기적인 아이템임 은 틀림없다.
8서클급이 심혈을 기울여야 펼칠 수 있는 안티매직 필드를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생성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꽤나 넓은 범위로.
2계에서는 대처법이 나와 있다고는 하지만, 차원거래 물품을 '신물'로 여 기는 이 세계.
될성부른 싹은 [세븐 아이즈]가 죄 다 짓밟아 놔서 8서클도 없는 자이온 대륙에선.
펼쳐졌다 하면 서클 보유자는 일단 유언부터 남기고 봐야 하는.
그야말로 대 마법사전 사기템이다.
그래서 좋다. 다 좋은데….
하나 크나큰 단점이.
'이거 쓸 때마다 바닥에 코인을 뿌 리고 다니는 격이지.'
안티매직 필드를 펼칠 때마다 최상 급 마나석 3개가 소모된다.
[흐름 파악]이 알려주는 최상급 마 나석의 평균 거래가는 500코인.
회의실에서 벌써 1500코인이 증발 했고, 새 마나석으로 갈아 끼웠으니 종 3000코인이 살살 녹게 생겼다.
물론 대마법사들 손발 꽁꽁 묶어두 고 둘이나 목 날릴 수 있었던 걸 감 안하면 엄청 싸게 먹힌 거지만.
준비 과정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에른은 인벤토리에서 최상급 마력 촉매제를 꺼내 손에 한 움큼 쥐었다.
솔솔.
상자 안에 뿌린 촉매제의 양은 대략
30g.
최상급 마력 촉매제는 g당 200코인 이라는 미친 가격을 자랑했다.
'그러니까 총 7500코인짜리 필드인 셈 이지. 코인으로 깐 필드나 마찬가지군.'
대마법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큐브를 조립하고 있네?
-마법도 잘 써지는데 그냥 합공해서 죽일까?
-아니, 놈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배후도.
딸깍!
조립을 마친 에른이 제이엔을 보았다.
아까부터 그를 죽이고 싶었는데 자 꾸 어이없는 소리를 해 대니.
스멀스멀 살의가 올라왔다.
에른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의라면 세계의 균형을 지켜야 한 다는?
-그렇다! 우리는 대륙의 황혼을 막는 운명의 파수꾼! 너 따위가 뭘 안다고!
'황혼? 파수꾼? 농담 아니면 이거 소름 돋는데….'
가끔 이런 오그라드는 표현을 쓰는 컨 셉충 교류자들이 채널에서 보이곤 했다.
-베리베리 : 차원거래서는 악마의 책! 거래소가 전 차원을 지배하기 위 해 배포한 것이니. 분별력 있는 자라 면 속지 말지어다! 당장 악마의 책을 불태우고, 전능하신 요사리우스님을 따르라!
-메르시 : 김코인이라는 이름 있는 거 알아? 내가 만든 가상인물인데 신 기해….
그런데 컨셉도 아닌 현실에서 보게 되다니.
에른은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래. 난 대의가 뭔지 모른다. 세 계의 균형? 웃기지 말라고 흐fl.
세계 따위.
제이엔의 말이 혹 사실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난….
무슨 거창한 이상을 품고 17년 전으 로 돌아온 게 아니니까.
온몸이 썰리는 고문을 당하며 되뇌
고 또 되뇌었던 다짐은.
-내 삶의 균형이나 지키면 그만이다!
지잉.
마법진이 떠오르는 걸 보자마자〈금
마의 큐브〉의 작동 버튼을 눌렀다.
번쩍!
에른의 몸이 사라졌다가 제이엔의 코 앞에 나타나자 클라우크가 놀라 외쳤다.
"텔레포트...? 마검사 맞잖아!"
-아니, 저건 블링크지.
시에라의 지적.
"어쨌거나! 스크롤을 찢은 것도 아 니고… 미친! 요즘 시대에 마검사를 하는 놈.이 있어?"
그것도 그냥 마검사가 아닌 전설급 기사이고.
블링크는 비교적 근거리만 이동할 수 있어 텔레포트에 비하면 한 급 떨
어지지만.
방금처럼 순간적으로 발동하려면 5 서클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6서클 마법사.
"뭐… 이딴...!"
당황한 제이엔이 얼른 서클을 회전 시켜 [앱솔루트 실드]를 시전하려고 했으나 마법진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는 숨 쉬듯 쓸 수 있었던 마법 인데.
아르엘도가 시에라와 클라우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금이다! 폭격해!
-그럼 제이엔도 죽을 텐데?
-이미 죽은 목숨이야, 빨리!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번뜩이는 뇌 정검의 검광이 제이엔의 목을 찔러 가고 있었다.
푸왁!
새하얀 아공간.
떨어지는 피가 그 어느 때보다 선연 하다.
일합에 벌써 세 명째 대마법사를 처 치한 에른이 제이엔의 목, 그리고 그 의 시체와 함께 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놈도 마법 못 쓴다! 얼른!
-그래, 죽이자!
제이엔까지 당하니 이제는 여유 부 릴 때가 아니었다.
원리를 알 수 없는 마법 봉쇄를 사 용하는 6서클-전설급 마검사.
3대 1일 때 처치해야지, 여기서 한 명이라도 더 당하다간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몰살'이라는.
'절대 안 돼!'
클라우크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클을 회전시켰다.
지잉! 지잉
그리고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그가 아 는 모든 살인적인 마법을 발동해 댔다.
70년쯤 전인가.
그도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소년 시
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마탑에 들어와 미친 듯 이 마법에 몰두했던 때.
좌표 설정을 제대로 못 해서 벽에 백묵으로 과녁을 그리고, 수도 없이 [매직 미사일]을 쏴댔던 도제 시절이 떠올랐다.
아니, 그때보다 더 절박하다.
출세가 아닌 생존을 위한 몸부림.
지잉! 지잉! 지잉
클라우크뿐 아니라 이제는 반도 안 남은 회원들이 온갖 7서클 마법을 난
사해 댔다.
[헬 파이에, [라이트닝 스피에, [소 닉 버스트], [썬더 스톰]….
군대라도 몰살시킬 수 있는 치명적 인 공격 마법들이 에른이 선 곳으로 쏟아졌다.
'죽었어도 골백번은 죽었겠군.'
클라우크는 안심했다.
마법 봉쇄를 사용한 게 놈에게는 독 이 되었다.
그걸로 제이엔을 쉽게 죽였을진 몰 라도.
'전투에선 승리했어도 전쟁에선 진 격이지. 블링크가 막힌 순간, 결판이 난 거야.'
3인의 대마법사가 쏟아내는 화력은 전설급의 오러 실드로도 감당할 수 없는바.
아마 지금쯤이면 갈기갈기 찢겨 시 체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우크가 비웃음을 지으며 서클 회전을 멈췄다.
-난 여기까지. 흥분해서 너무 갈겨
댔더니 마력이 바닥났어.
-그래? 그럼 잘 됐네.
- 음?
클라우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 는 순간.
푸욱!
황금색 빛줄기가 그의 왼쪽 가슴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단말마와 함께.
심장이 터지면서 그가 평생 쌓은 7 개의 마나 서클 또한 물거품처럼 사 라져 버렸고.
물론, 그보다 소중한 목숨 또한 간 수할 수 없게 되었다.
철퍽!
추락한 클라우크가 아공간 바닥에 처박히자 마법을 멈춘 아르엘도의 얼 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노로 떨리는 흰 수염.
그가 소리쳤다.
"...너였구나, 시에라! 역시 네가
배신자일 줄 알았어!"
"그럼 나지 누구겠어?"
이제 아르엘도만 남았다.
[세븐 아이즈]를 궤멸시킨다는 게 불가능한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투 아이즈, 아니 이제는 원 아이즈 가 되었으니.
드디어 시에라의 입가에 빙그레 미 소가 떠올랐다.
"스승님을 그렇게 만든 걸, 내가 잊 을 줄 알았어?"
"뭐, 클라우크도 끝까지 의심할 만 은 했지. 30년 넘게 2인자만 했으면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재끼고 싶을 거 잖아? 뒷구멍에서 회원들 포섭하고 있던 거, 알았잖아?"
아르엘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일부러 클라우크를 남겨 둔 거였군."
"뭐, 우선순위를 정해 두긴 했지. 머 릿수를 최대한 줄일 것, 그러면서도 세븐 아이즈 쪽이 여전히 유리하다고 착각하게 만들 것. 그래야 끝까지 항 전할 테니까."
"...어디서 저런 놈을 구해 온 거냐.
저 실력에, 널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2"
시에라가 풋 웃었다.
"저 아이가 날 위해 목숨을? 절대 그럴 일 없을걸?"
시에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르엘 도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7서클 마법 세례가 쏟아졌음에도 여 전히 새하얗기만 한 바닥.
거기에, 백지 위에 떨어진 얼룩 같 은 검은색이 보였다.
물결치는 듯한, 생동하는 칠흑.
"...저건?"
펄럭!
'공허 모드'를 종료하고 키포의 전투망 토에서 벗어난 에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르륵.
'착의 모드'로 전환하자 바닥에 쓸리 던 망토가 몸에 딱 맞는 크기로 줄어 들었다.
그와 함께.
뚜둑, 뚜두두둑!
축골공을 풀고 허리를 편 얼굴에서 차츰 주름이 사라져 갔다.
아공간만큼 하얀 머리카락은 순금을 녹여 코팅한 듯한 황금색으로 변해 갔고.
"공허 모드 끝났으면 죽을 뻔했네. 노인네들 오래 살아서 그런가 마력량 이 아주."
고개를 쳐든 에른.
그의 환한 웃음을 본 아르엘도가 누 군가를 떠올렸다.
'...레바단 스틸가드?'
닮기도 닮았고 무엇보다 낯이 익었다.
분명 영상 자료로 본 적이 있는 얼굴.
"에, 에른 스틸가드?!"
"어때, 이래도 내가 자격이 없나?"
"...하필 희생자 가족이군. 하긴, 신물을 사용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후우…."
아르엘도가 한숨을 내뱉는다.
노기에 찬 시선이 시에라를 노려봤다.
"이제 열여덟이던가? 보여준 신위를 보면 괴물급인데…. 무슨 정신머리로 괴물급을 숨겨두고 있었던 거냐! 그 정도로 분별없는 줄은 몰랐다. 시에 라 펠가스!"
"분별 같은 소리 하네."
시에라가 되받아쳤다.
"오늘을 위해 지난 30년을 견뎌 왔 어. 분별력이 없었으면 넌 진작 내 손에 죽었거든?"
"시에라, 시에라…. 어린 광녀야. 정 말 내 심정이 참담하구나."
아르엘도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꾸짖었다.
"나라고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수 십 년 동안 천재들을 암살하고 있었 겠나. 대륙의 대들보로 성장해 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후배들을 세계 에서 배제해야만 하는 내 심정을! 손 톱만큼이라도 헤아리려고 해 봤어?"
"이건 누군가는 짊어져야 하는 일이 다. 그래서 대의인 거지. 그런데 고작 사랑 때문에 대의를 그르쳐?"
"개소리 좀 그만하지? 뭔 대의? 다 들 레퀴엠 때문에 이 짓 하고 있는 거 다 알아!"
"...그것도 오해다."
아르엘도의 눈에 그늘이 졌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시에라. 영 원히 회에 충성하기로 마나에 맹세하 고 에른 스틸가드를 죽이는 데에 협 조해. 그러면 여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지. 다들 죽었으니 레퀴엠에 널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군."
"저기? 대화중에 미안한데."
에른이 손을 들었다.
아르엘도가 텔레파시로 물었다.
- 뭐냐.
"잘 이해가 안 가서. 그쪽 목숨은 우리가 쥐고 있거든? 근데 왜 인심 쓰듯이 그러는 거야?"
-실은 그 반대니까. 대답해라 시에라.
누가 봐도 아르엘도가 줄행랑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7대 대마법사 중에서 가장 연 장자인 동시에 최고 실력자이고 전생 에는 마법 대결에서 시에라를 패퇴시 킨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쪽은 에른, 시에라 연합 인데?
시에라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반대 상황이었어도 그럴 일 없으니 까 꿈 깨시지."
-안타깝게 됐군. 회원들 여섯을 언 제 또 모으나....
철컥! 철컥!
금속질이 아르엘도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얼굴, 몸체, 팔과 다리....
"아, 아니. 이건?"
에른과 시에라, 두 사람의 눈이 동 시에 커졌다.
준엄한 아르엘도의 음성.
-후회해도 소용없다. 배반자와 균형 을 위협하는 자에게 신의 철퇴가 내 려지리니…!
제이엔보다 더한 오그라드는 단어 선택인데도.
비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콰아아아아!
최고 출력을 전개하며 시에라를 덮 쳐 가는 아르엘도.
분명했다.
그가 착용한 것은.
'어, 어떻게 마도기갑을? 그, 그것
도... 4세대?'
[180 화]
4세대 마도기갑.
전생의 에른은 기갑러가 아니었는데도,
과거의 주류였던 3세대에서 4세대로 대세가 넘어가면서, 2계에 어떤 변화 가 일어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급격하고, 전방위적인… 그야말로 대격변!'
후래곤 공방의 엔지니어들도 비슷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로니 : 제… 제 생각이요…? 갑자 기 그건 왜...?
-에른 : 편하게 말해. 뭐라고 안 하 니까.
-로니 : 그, 그냥 형들한테 물어보시 는 게…. 내 의견이 뭐라구요.
-에른 : 뭔 과묵한 천재, 이런 컨셉 인가? 로니 스토크, 너한테 묻고 있는 거야. 마나 리액터의 개념을 생각해 낸 게 너라면서? 듣고 싶다. 천재가 바라보는 미래상.
-로니 : 아… 음. 마나 리액터의 개 발이 완료되고 상용화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로니 : 7], 기존의 체제는 모두 무너 지게 될 거예요. 마나석 상인들은 지금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될 거고.
-로니 : 독점 기술로 이득을 취해 온... 루, 루아네시아도! 더 이상의 패 권은 없어요. >희번덕
이 말을 듣고서야, 그들과 함께 가야 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나 리액터는 마나석을 원료로 작동 하는 에너지 생성기.
지금까지 0〜2계인들의 마나석 활용 은 원시적인 수준일 뿐이었다.
마나석에 깃든 마나를 꺼내 쓰는 정 도에 불과했는데.
마나 리액터의 개발과 함께 2계는 또 한 번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했다.
'...근데 아직 개발 초기인 게 어떻 게 저기에?'
쿠와아아아-
허공을 찢으며 시에라에게 접근해 가 는 아르엘도.
그가 착용한 기종을 알 수 없는 금색
마도기갑, 바디 파츠의 동그란 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는, 저 장치는.
4세대를 상징하는 마도기갑의 새로 운 동력원, 마나 리액터와 너무도 똑 같았다.
'...우연히 생김새가 같은 거겠지? 장식이거나 뭐 그 비슷한 걸 거야.'
거대한 마나의 요동.
투명한 커버 안쪽에서 흔들리는 광채 는 마나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마나 리액터 밖에는 없지만.
에른은 믿지 못했다.
시공간과 동떨어져도 너무도 동떨어 져 있는 차원거래 물품.
그게 아르엘도의 손에 있다니.
"역시 비장의 신물을 숨겨 두고 있었 군. 누가 음흉한 노인네 아니랄까 보}."
시에라가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그녀는 2년 전, 에른과 생사를 건 싸 움을 벌이면서 마도기갑을 상대해 본 적이 있다.
'쇠로 된 갑옷이 날아다니는데… 상 식 밖의 기동력. 급 차이를 뛰어넘게 해 주는 출력에다, 디스펠 기능까지.'
처음 당해보면 당황할 만하다.
중분히.
그때 이쪽은 서클 하나가 묶인 상태 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7서클의 노하우와 스펠 캐 스팅 실력은 어디 가는 게 아니어서, 영웅급도, 6서클 마법사도 그녀에게는 한 끼 식사일 뿐이었다.
각성급-5서클 수준이면?
길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로도 안 본다.
'근데 각성급이었던 에른한테 졌지….
7서클을 개방한 뒤로도. 그게 꼭 마법 갑옷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신물 중에 서도 사기적인 성능인 건 분명해.'
하지만 두 번째로 상대하는 지금은 그때와는 처지가 다르다.
맞서는 마음가짐도.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알려주는.
더욱 정확해진 눈도.
[비행체 접근 중… 마법 갑옷의 일종 으로 추정.]
[초대량 에너지 감지!]
[중돌까지 10초, 9초…!]
[추천 마법 리스트...』
아래쪽 시야.
분석안이 남은 시간 동안 캐스팅할 수 있는 마법들을 쫙 뽑아 표시해 줬다.
시에라에는 축복이자 저주인 분석안.
나자마자 펠가스 가의 실험체가 되 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어두운 면 을 보고 자랐다.
분석안이 고스란히 알려 주었기 때문 에....
열 살 즈음에는 감정이 메마르고 공 감 능력이 완전히 마모되어 지금과 같 은 성격이 형성되었다.
허나, 분석안의 도움을 받아 빠른 성 취를 보았고 덕분에 뛰어난 마법사가 된 것만은 사실.
결과적으로 현재는 마법명문 펠가스의 최고 어른, 마탑의 수장이 된 그녀다.
'이 눈이 없었다면… 스승님을 만나지 도, 또 오늘 같은 날도 오지 않았겠지.'
이런 게 삶의 아이러니 아닐지.
시에라는 알 수 없는 고양감과 벅찬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두뇌가 최고 속도로 회전한다.
서클에서 빠져나온 마력 또한 마나 회로를 불태울 듯이 달려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고 빠르게.
지 잉.
신기록이었다.
겨우 6초!
그녀가 7서클 공격 마법, [메가 쇼크웨 이브]를 캐스팅한 데에 든 시간이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
으 으 으 으J으 I
—1—I~I~ro.
충격파가 아르엘도의 전신을 덮쳐 갔다.
갑옷이 아무리 튼튼해도 그 안은 뼈 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일 뿐이다.
충격파가 갑옷 틈새로 흘러 들어간다 면 아르엘도의 늙은 몸은 견디지 못하 고 곤죽이 되어버릴 게 자명한 일.
그러나.
".…"치잇!"
금빛 마도기갑을 감싸는 푸른 배리어 를 본 시에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빛깔을 보면 [포스 배리에가 확실했다.
아르엘도는 약간 맛이 간 거 같아 보이기는 해도, 엄연한 대마법사.
접근 전에 시에라가 마법을 펼칠 것 을 모를 리 없는데.
'하필 충격파 흡수에 가장 좋은 포스 배리어를? 거기까지 내다본 건가?'
숱한 방어 마법이 존재함에도 포스 배리어를 선택한 아르엘도.
대륙 스케일로 노는 비밀 결사의 수 장쯤 되면 이 정도 수싸움은 기본인 건지도?
콰지지지직-!
충격파는 아르엘도의 접근 속도를 약 간 느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시에라는 턴이 넘어간 것을 느끼고 [텔레포트]를 캐스팅했다.
지 잉.
거리를 벌리려는 그때.
".…"어딜!"
코앞으로 다가온 아르엘도가 황금색 팔을 내밀었다.
지이이잉....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시에라의 몸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앗!"
에른은 블링크를 사용해 시에라의 앞 으로 이동해 가려고 했으나〈금마의 큐브〉를 손에 쥐고 있어서.
안티매직 필드 때문에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젠장!"
막 내공을 끌어올리는데.
텔레파시인가?
귓가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
시에라가 빙긋 웃으며 에른을 곁눈질 했다.
지잉, 지잉!
그녀의 몸 주위에서 마법진이 여러 개 떠올랐다.
해주 방지 수식이 적용된 각종 방어 마법.
그녀가 피부와 소지품 등에 새겨 놓 은 안전장치들이었다.
그런데.
파삭'! 파사'사'...)
아르엘도가 손을 내뻗을 때마다 마법 진이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안 돼!"
에른은 필사적으로 경공을 전개해 봤 지만, 전설급의 움직임으로도 절대적 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퍼억!
결국, 강철 건틀릿에 복부를 얻어맞은
시에라가 끈 떨어진 연처럼 떨어져 내렸다.
추락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두 눈 가득 불신의 빛과.
왜인지 아직 입가에 남은 가벼운 미소.
살짝 벌어지는 입 모양.
'에… 른….'
이윽고.
철퍼덕!
아공간 바닥으로 떨어진 시에라는 죽
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간, 에른의 뇌리에서 뭔가가 끊어 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성의 끈, 혹은 분노 조절을 담당하 는 뇌 부위?
뭐가 됐든 상관없다.
에른이 허리띠를 풀어 헤치자 펑 하 는 소리와 함께 사리가 튀어나왔다.
"뀨엥...."
"시에라를 부탁한다."
생활단을 하나 꺼내 사리의 입에 물 려 주고.
위를 보았다.
-시에라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야.
-뭐 잘못 먹었나?
-그나마 깔끔하게 이 세상을 떠나려 면 그 길 밖에는 없거든!
- 망상은.
도약해 오는 에른을 보고 아르엘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젖 먹던 힘을 다한다 한들 내 발끝 에라도 닿겠느냐. 소용없는 짓인 것을.
철컥! 철커덕!
새빨간 마도기갑이 에른의 온몸을 감 쌌다.
도약력이 다하기도 전에 붉은 레그 파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슈아아악-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새하얀 아공간의 상공.
마주 보는 금빛 갑주와 피처럼 붉은 마도기갑.
아르엘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 갑옷까지 가지고 있었던 건가?"
그가 에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도대체 라제칸은, 아니 스틸가드는 뭐 하는 가문이지? 그 신물들은 다 어디서 난 거냐?
쐬아아아!
에른은 대답하지 않고 아르엘도에게 로 짓쳐 들어갔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342호 지구에서는 처음 있는 일.
마도기갑과 마도기갑이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한 충돌음에 이은.
쾅 쾅! 쾅 쾅
콰가가가강! 콰쾅!
쿠웅-! 꽝!
무수한 함의 교환.
아르엘도가 자신을 신의 사자라고 참 칭할 법도 했다.
도시의 상공에서 방금 같은 경합이 벌 어졌더라면 백성들은 신의 진노가 내리 는 줄로만 알고 엎드려 빌었을 것이다.
'...이래서야 부정할 수가 없겠군.'
미친 듯이 휘몰아쳐 간 에른이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에게 극도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판 자체는.
에른이 착용한 3세대〈헬파이어〉는 각종 폭발 마법이 내장된, 다인전에 특
화된 전투 병기다.
〈금마의 큐브〉때문에 그 부분은 살 리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아르엘도도 7서클 마법이 막힌 걸 감안하면 자기 가 더 이득이라고 본다.
화아아아앗!
이쪽은 강기까지 끌어다 쓰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어설픈 아르엘도의 손짓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 꽉 깨물고 받아쳐야 하는 출력 차이.
'족족 디스펠할 때부터 쎄하긴 했는 데...
S등급 마도기갑, 최상급 출력인『2800 kj 라인에 속한〈헬파이어〉가 이렇게 쉽게 밀린다는 건.
달칵.
헤드 파츠를 연 에른이 아르엘도에게 물었다.
-그러는 넌 뭔데? 어떻게 4세대 마 도기갑을 갖고 있는 거냐?
-마도기갑? 스틸가드에선 그렇게 부 르나 보군.
'마도기갑을 몰라? 이 인간, 교류자 가 아닌가?'
에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순간적으로 마도기갑을 불러낸 것을 보고 아르엘도가 채널 활동을 그만둔 교류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벤토리가 아니라 아공간 주머니에 서 꺼낸 건가?'
물론 아르엘도가 모른 척 한 것이 아니었을 때의 얘기다.
-위대하신 그분께선,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하시고 회의 배신자를 처단할 신물을 내려 주셨지…. 그러니, 그나마 이름을 붙이자면 위저드 슬레이어라고 해야 맞을 거다!
- 그분?
대답 대신 황금 주먹이 눈앞으로 날 아왔다.
철컥!
에른은 얼른 헤드를 닫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무익하다! 오러 실드 따위, 신의 힘 앞에선 결국 분쇄되고 말지니…!
-글쎄… 뒤나 조심하시지?
...?
터엉!
아르엘도의 목이 앞으로 훅 꺾였다.
완벽한 공중 옆차기!
어느샌가 나타난 은빛 마도기갑이 그 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크윽! 뭐, 뭐냐!
머릿속에서 수백 개의 종이 울리는 것 같고, 레그 파츠에서 뿜어져 나오 는 열기에 데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당황한 아르엘도가 아래를 내려다보 는데, 시에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럼 누구지?
아공간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다섯.
그중에 둘은 죽어서 남은 세 사람이 다인데?
아르엘도의 황금색 마도기갑과 대비 되는 은색 갑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텔레파시는.
-뀨에에엥!
-웬...?
-한 방 제대로 먹였어, 사리야.
-나 잘했어? 와와!
마도기갑으로 변신한 사리였다.
사리에게 먹인 것은 A+등급,〈어스 브레이커〉.
출력은「2500k』로, 상급에 속하는 라인이다.
지난 두 달은, 조검휘의 초절정무공, 그리고 6서클을 흡수하기 위한 기간이 었지만.
사리를 대마법사 상대로도 1인분 할 수 있도록 끌어올리는 데 쓴 시간이기 도 했다.
자유자재로 변신과 인간 형태를 갖추
고 하는 전투에 숙달하게 하는.
싸움이 2대 1 구도로 흐르자 아르엘 도가 눈에 띄게 불리해졌다.
-못 이길 거 같으니까 머릿수로 밀 어? 비겁한 놈!
노기에 찬 목소리가 귓가를 찌르지만 에른에겐 타격이 전혀 없다.
-음? 틈만 나면 1대 7로 몰매 놓는 놈이 하는 말이라서 안 들리는데?
-닥쳐라!
-더 비겁한 거 보여 줄까? 사리야?
-응! 주인님!
-잠깐만 시간 벌어 줘.
덜컥!
사리가 아르엘도의 앞을 가로막자 에른은 각 파츠의 동력부를 열고 허공섭 물로 빛바랜 최상급 마나석을 새것으 로 갈아 끼웠다.
슈웅... 척, 척, 척, 척!
헤드, 바디, 레그와 암 파츠.
풀파워를 회복하기까지 겨우 4초!
'저, 저건 한 차원 높은 신물인가? 어떻게 저럴 수가?'
다시 전투에 합류한 에른은 아까보다 더 쌩쌩했다.
아르엘도로선 어이가 없을 지경.
가슴 쪽을 내려다보니 마나 리액터의 광채가 깜빡거렸다.
디스펠을 난사하고, 계속해서 높은 출력으로 전투를 지속해 댔으니 슬슬 동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하는 수 없다. 내 마지막 사명….'
결국 이렇게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면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죽으리라.
아르엘도가 이를 악물었다.
최고 출력을 전개, 사리를 튕겨 낸 금색 마도기갑이 에른을 덮쳐 갔다.
엄청난 속도.
"어...
반응은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건 피하기 어렵겠는데.'
화르륵.
마지막 순간, 헤드 안쪽에서 푸른빛 이 튀었다.
콰앙-!
빠가가각!
[인테리어가 손상되었습니다.]
[인벤토리에 물품을 보관할 수 없습
니다.]
[수리가 필요합니다.]
갑자기 에른 앞에 불쑥 나타난 거대
한 철문.
그 두꺼운 철벽을 들이받아 반 토막을 낸 아르엘도는 정신을 잃고 추락했다.
철그럭!
"휴...
에른은 헤드를 열고 식은땀을 닦았다.
그 찰나에 인벤토리를 불러 막을 생 각을 떠올렸기에 망정이지, 못 했으면 같이 저기에 처박혀 있을 뻔했다.
그것도 아래쪽에 깔린 채로.
'이게 4세대의 힘인가. 최후의 발악 도 요란하군.'
바닥으로 내려가자 생활단을 먹고 회 생한 시에라가 에른에게로 달려왔다.
"방,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몸은, 괜찮아?"
"나야 괜찮지. 시에라는? 옷이 완전 엉망인데."
"겉보기만 그래. 족제비하고 입맞춤 해서 찝찝하긴 하지만… 약효가 아주 죻아. 회복 마법 안 써도 되겠어."
"그럼 아르엘도부터 처리하자."
에른은 널브러진 아르엘도를 발로 툭
툭 건드렸다.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기절한 게 확 실한 모양.
"하긴, 그 속도로 벽에 박으면 나라 고 해도 못 버티지. 음?"
아르엘도를 들어 올린 에른이 묵직함 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몸무게가 나가나?"
외관만 보면 바싹 마른 고목나무 같 은데.
"200kg은 그냥 넘겠군."
내장지방이 많다고 쳐도 이건 너무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마도기갑의 무게라는 건데.
브란티움은 초경량 금속이라 그렇게 까지 나갈 리가 없다.
에른이 사리를 불렀다.
"이 인간이 입은 거, 조금만 먹어 볼래?"
"규에엥?"
와작와작.
"어때, 무슨 맛이지?"
-음…. 오랜만에 먹는 깊은 맛! 현철 이네!
금속에 대한 거라면, 사리의 판정이 가장 정확하다.
에른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동력원은 4세대인데 정작 기갑 재질 은 3세대만도 못하다고? 뭐가 이래?'
[181 화]
-뉴미 지트론 : 보내주신 마도기갑 분석해 봤습니다만.
-뉴미 지트론 : 이런 고물은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건지?
뉴미 지트론, 이 친구.
상당히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손님으로 처음 찾아갔을 때도 후래 곤 공방에서 혼자 반말 툭툭 던지곤 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
[닉네임 : 뉴미 지트론
종족 : 하이엘프
접속 장소 : 2계, 마도왕국 아샨티아.
거래 등급 : Level 2
혼의 위상 : 마도공학의 달인
보유 코인 : 13577
거래소 리포트 - 본명은 엘라딘 미
흐랴니온. 아샨티아의 최상위 지배
계급인 '하산나' 일족이다. 이 일족은
혈통적으로 정령과의 친화력을 타고 나 모두가 뛰어난 정령사로 성장한다.
엘라딘 또한 그러했으나, 어릴 때부 터 자연보다는 인간 세계의 물건들, 특히 기계에 관심을 갖는 특이한 성 향을 보였다.
관심은 실천으로 이어져 독학으로 기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불의 정령으로 담금질을, 물의 정령을 수 랭쿨러로 사용하는 기행을 저지르기 까지.
그의 일탈은 곧 들통 나 하산나 일 족의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
그러니, 차원거래를 알게 된 뒤로는 마도기갑에 푹 빠져 골수 기갑러가 되어 버린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일족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정령사 대신 마도기갑 엔지니어의 길을 택한 하산나의 이단아.
200세가 넘어 성년이 되자 가문을 떠나기로 결심, 분배받은 재산으로 개인 공방을 차렸고, 4세대 마도기갑 개발을 위해 후래곤 공방과 차원간 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천 년을 넘게 사는 하이엘프 종족
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다 선반말을 까는 훌륭한 인성의 소 유자다.
그래도 실력 있는 엔지니어임은 분 명하기에 중요한 일을 맡길 생각이 라면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200살 넘은 하이엘프 엔지니어라니.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경로 우대 차원에서 봐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에른이 경고해준 덕에 목숨
을 구한 이후로.
뉴미 지트론은 꽤나 깍듯해졌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확실히 약발 이 세다.
이런 부탁도 귀찮은 내색 없이 들 어주는 걸 보면.
-에른 : 고물? 그 정도 물건인가?
-뉴미 지트론 : 박물관에 전시된 걸 들고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인데.
-에른 : 박물관?
-뉴미 지트론 : 마도기갑 박물관.
-뉴미 지트론 : 현대전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도기갑이지만, 초기 모델은 이렇게나 원시적이었다〜 이런 입간 판 하나 세워 두면 딱이겠네.
-에른 : 알아듣게 말을 해 주지.
-뉴미 지트론 : 엄청 후지다는 겁 니다. 주력 재질로 현철을 쓴 게 대 체 언젯적이지?
-에른 : 튼튼하잖아. 현철. 튼튼한 걸로만 비교하면 브란티움보다 나으 면 나았지, 떨어지지 않을 텐데.
-뉴미 지트론 : 마도기갑은 기동성 이 생명. 현철이 튼튼하긴 해도 질량 대비 강도가 영 별로라. 가장 먼저 기갑계에서 퇴출된 재료거든요.
'그건 마나 리액터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 아닌가?'
브란티움을 쓰지 않아도, 그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며 3세대 S급 기체를 웃도는 움직임을 보인 아르엘도의 마도기 갑이다.
물론 4세대 엔진에 브란티움까지 썼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차원거래의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 은 0계에서 마도기갑 대전이 일어날 거란 생각을 누가 하겠나.
오히려 브란티움을 쓰는 게 낭비일 수 있었다.
-에른 : 현철을 쓴 게 원시적이란 말까지 들을 정돈가?
-뉴미 지트론 : 재질도 재질인데, 전체적으로 다 너무 초창기 스타일 이에요.
-뉴미 지트론 : 헤드는 한번 쓰면
벗을 때까지 얼굴을 드러낼 수가 없 고, 전황분석 시스템… 을 바라는 건 과욕이지 음. 근데 기본적으로 갖춰 야 할 디스플레이 기능도 없어요.
-뉴미 지트론 : 헤드만 해도 그렇 고, 바디 파츠에선….
좔좔좔좔
누가 마도기갑에 꽂혀서 탄탄대로 를 포기한 인간, 아니 하이엘프 아니 랄까 봐, 수도꼭지 틀어 놓은 것처럼 지식을 쏟아내고 있다.
'내 주위엔 왜 이런 모순적인 놈들 밖에 없는 거지?'
샤펠이 연상된다.
기사명가의 마법천재….
엘프라면 숲의 평화를 지키는 종족일 텐데, 금속제 전쟁 도구에 꽂히다니.
이쪽은 샤펠 그 이상이다.
-에른 : 아무튼 결론은, 1세대 중 에서도 초기 모델이라는 거네?
-뉴미 지트론 : 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1세대도 못 될걸요?
-뉴미 지트론 : 모든 동력을 바디 파츠에서 끌어다 쓰는 식으로 돼 있 는데, 그렇다고 경량화 마법이 새겨 진 것도 아니고.
-뉴미 지트론 : 이거 움직이긴 하 는 겁니까? 공중에 뜨기도 전에 바 닥에 내리꽂힐 거 같은데.
'움직이긴 하냐고? 아주 쌩쌩 잘 날 았지.'
7서클 대마법사인 시에라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고,
2800k의〈헬파이어〉를 상대로도 전 혀 안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그게 다…."
차원거래를 종료한 에른이 손바닥 위를 보았다.
아까부터 들고 있던, 아르엘도의 마 도기갑에서 분리해 낸 마나 리액터.
지금은 빛을 잃고 꺼져 있지만, 마 나석만 교체해 주면 다시 제대로 작 동할 터였다.
'어쨌든, 4세대 마도기갑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건가. 그럼 이 마나 리
액터는 뭐지?'
고민 끝에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화르르.
에른의 왼쪽 눈에서 흰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나와라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부르자 더욱 커진 금속 질 문이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설원까지 나와서 불러냈기에 망정 이지 탑 안에서 최대 크기로 소환했 으면 천장을 뚫고 나왔을 뻔했다.
[인벤토리 Lv. 9]
-저장 용량 (48269/1000000)
-인테리어: 티타늄 함금, 4문형 도 어(크기 조절 가능, 강화 및 자가수 복 마법 적용), 소형부터 대형까지 다양하게 적재 가능한 중대형 창고, 온도 조절 기능, 냉장 및 냉동 창고 보유, 소형 격납고 보유, 2층 구조.
8레벨이었을 때보다 확연히 좋아진 게 눈에 보인다.
물론 여기에도 거래소의 철학은 적
용되어서, 좋아진 그 이상으로 코인 을 빨아 갔지만.
'스펙업 비용 5만 코인. 이게 날강 도지 뭐냐?'
여기에 쓴 덕분에 보유 코인은 197만 으로 줄어들어, 200만이 깨져 버렸다.
하지만 그닥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테리어 수리 비용으로 1만 코인이 필요합니다. 지불하시 겠습니까? Y/N]
보자마자 바로.
'NO!'
...를 선택했던 에른이었다.
철문이 대신 토막 나 준 덕분에 아 르엘도의 발악을 막을 수 있었고, 그 대가로 1만 코인이라면 뭐… 충분히 낼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업그레이드 비용이 5만인데 굳이 1만을 허공에 날릴 이유가?
에른은 이게 거래소의 상술인 줄 알면서도 수리 대신 인벤토리 레벨 업을 선택했다.
'뭐… 나머지 4만은 곧장 회수되는 금액이지.'
그리고 이 인테리어라는 게, 교류자 인 게 들켜도 되는 상황이라면 정말 사기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별도의 캐스팅 없이도 불러낼 수 있는 방어벽.
안티 매직필드가 적용되는 도중에 도 방해받지 않는 것은 덤이다.
[레벨을 올리시겠습니까? 필요 코 인 700000.]
뒤에 붙은 0이 5개가 아닌 4개였으 면 홀린 듯이 10레벨까지 올렸을지 도 모른다.
슈앗.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가 볍게 뛰어오른 에른이 열린 문 안쪽 으로 몸을 던졌다.
8레벨 인벤토리보다 훨씬 넓고 쾌 적해진 실내.
격납고 쪽으로 시선을 보내니 내부 를 꽉 채운 아이언 골렘 다섯 기가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게 보 였다.
기존 인벤토리에는 보관할 수 없는 거체를 가진 놈들이었는데, 격납고가 생기면서 보관 및 판매가 가능해졌다.
-양안 레이저를 탑재한 아이언 골 렘(파손됨) : 제작한 지 수백 년은 지난 듯한 아이언 골렘. 그럼에도 관 리가 잘 되어 있어 마력핵만 교체하 면 무난히 재작동이 가능하다.
[현재 채널의 '양안 레이저를 탑재 한 아이언 골렘'의 거래량은 없음.]
[현재 채널의 '양안 레이저를 탑재 한 아이언 골렘'의 평균 거래가는 알 수 없음.]
[흐름 파악]으로 보아도 가격을 알 수 없는 놈들이지만.
충분히 4만 코인, 아니 여기에 수리 비까지 더한다고 해도 그 이상의 값 어치를 할 거라고 본다.
'한 셋만 모여도 영웅급은 상대할 수 있을 텐데. 다섯이면 진짜 든든하지.'
아마 [세븐 아이즈]를 해체 시켜 얻
은 최고의 소득이 아닐까 싶다.
물론 물질적인 것에만 한해 그렇고. 손에 든 이것도 빼야 한다.
아이언 골렘에 한눈 팔 때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마나 리액터가 창고 안으
로 들어왔다.
인벤토리에 새로 추가된 물품.
그 아이템 설명은.
-(등급) : 레벨 제한! 거래 등급이 부족해 확인할 수 없습니다.
"흠."
에른의 눈이 진지해졌다.
'레벨 2한테는 알려줄 수 없다는 건가.'
하지만 괜찮다.
비밀스러운 블랙마킹도 꿰뚫어 보 는 [섭리의 눈]이 있으니까.
-마나 리액터 (B등급) : 마나석을 연료로 사용, 안셀로 반응을 일으켜 수십에서 수백 배 증폭된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장치다.
'역시 마나 리액터가 맞아. 다른 기 술력은 1세대 수준도 안 되지만 동 력원만큼은 진짜다.'
...파이오니어 협정에 의해 교류 금지된 물품이므로 해당 채널에서의 거래를 엄금함.
'헛!'
에른은 마지막 문장을 보자마자 창 고에서 뛰어내렸다.
'들키진 않았겠지...?'
손에 여전히 마나 리액터가 들려 있 는 걸 보면 놈들이 인벤토리까지 통 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에른이 이렇게까지 조심하는 이유 가 있다.
모니터 요원 '알파스캔'이 에른을 후래곤 공방에 잠입시킨 까닭.
'4세대 마도기갑의 출현을 경계하는 세력이 있다. 알파스캔은 그 세력과 관련이 있고.'
비밀리에 4세대 개발 중인 공방에
끄나풀들을 침투 시켜 정말 가능성 있는 곳은 제거해 버린다.
에른이 알파스캔에게 알려준 것은 후래곤 공방이 휴대 가능한 '마나석 고속 충전기'의 개발을 거의 완료해 가고 있다는 거짓 정보였다.
알파스캔은 그 대가로 에른에게 막 대한 QP를 주었고....
'2계 용병들이 후래곤, 암오캣, 로 니, 뉴미 지트론의 거처를 급습했지.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에른이 경고해 주지 않았더라면 다 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에른이 몰고 온 재난 이기는 한데… 놈들이 엔지니어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이상,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 재난이기는 했다.
덕분에 연구 자료들도 전부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고.
해서 엘라딘도 에른에게 구명지은 을 입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배후로 가장 유력한 건...
심판의 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 각에 잠겼다.
'역시 루아네시아 제국이겠지. 4세
대로 넘어가면 기존의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될 테니. 그나저나…. 파이 오니어 협정? 안셀로 반응? 이것들 은 또 뭐지?'
파이오니어 협정은 난생처음 듣는 용어가 확실한 반면.
안셀로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안셀로, 안셀로… 괴인 안셀로? 아… 라이트닝 안마기 개발한 공학자?"
별 희한한 발명품들을 만들어 내서 마도공학계의 괴인이라 불린 사람이 라고 했던.
그 안셀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머릿속이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해 졌다.
그런데.
왜인지 에른의 입꼬리는 점차 올라 가고 있었다.
'뭐가 됐든…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고,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변화를 꾀하고 있지. 그 4세대로 가 는 문고리를 내가 잡고 있다!'
마나 리액터.
이 작고 동그란 물체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놓여 있다.
자기 손바닥 위에.
*
"한참 찾았잖아!"
심판의 탑으로 들어가자 시에라가 흥분한 낯빛으로 맞이했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아,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밖에."
"설원에 나갔던 거야? 머리카락 언 거 봐."
시에라가 다가와서 에른의 어깨에 살포시 쌓인 눈가루를 털어 주었다.
"그런데 날 왜 찾았는… 혹시?"
"그래."
깜박이는 보랏빛 눈동자.
시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엘도가 입을 열었어. 너하고 대화하고 싶대."
놈을 살려 둔 유일한 이유. 레퀴엠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182 화]
심판의 탑 회의실.
[세븐 아이즈]를 상징하는 원탁은 사라지고 없다.
...에른이 가지고 나가서 검강으 로 수십 토막을 내 버린 탓이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토막들에 시에라가 [인페르노]를 내 려서 이제 원탁의 흔적은 검게 남은 한 줌의 재 말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흠."
넓은 회의실 한가운데.
머리를 쳐들어야만 시야에 들어오 는 높이에.
인간의 형상이 아닌 아르엘도가 공 중에 떠 있었다.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법한 처 참한 몰골.
자이온에서 가장 추앙받는 대마법 사, 아르엘도 레한다르가 이런 꼴로 붙잡혀 있을 것이라고.
대륙의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것인가.
꽈악, 꾸우욱.
꿈틀대는 가시줄기가 그의 사지와 목을 옭아매고 있다.
가시줄기의 반대편 끝은 천장과 바 닥에 고정되어 있어 아르엘도를 옴 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가시줄기는 촉수처럼 탄성 이 있어 주기적으로 풀어주고 조여 들기를 반복했다.
마침.
쫘아 o]악!
가시줄기가 수축하자 오체분시 될 것만 같은 극통이 아르엘도를 엄습 했다.
"크아악! 말한다고 했잖아! 이게 뭐 하는…!"
"아, 미안. 깜빡했네."
시에라가 손을 내젓자 지잉하는 소 리와 함께 치유 마법이 펼쳐졌다.
우둑, 우두둑!
아르엘도의 탈구된 관절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찢어진 근육이 수복된다.
그럼에도 끔찍한 고통은 남았다.
"...광녀!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 들켰나?"
시에라가 혀를 쏙 내밀었다.
"넌 더 당해야 해."
"이... 이런다고 원하는 걸 얻을 성 싶으냐? 반발심만 더 생기는군."
"허세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에 종 속되어 있고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 지. 이미 밑바닥을 보이는 거 같은 데? 그러니까 백기 든 거겠고."
"허허."
아르엘도가 히쭉 웃었다.
잇몸에서 철철 흘러내린 피가 치아 틈새를 적셨다.
"그 말은 맞지만, 정념이 이성을 지 배하는 것도 인간이지. 솔직히… 내 가 입 다문 채로 죽으면 넌 영원히 고통에 빠질 것 아니냐? 원귀가 되 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만족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아르엘도.
이 꼴이 되어서도, 심장의 서클이 적출당해 평범한 노인이 되었는데도 상황을 장악하는 존재감이 있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누가 마 법사 아니랄까 봐."
에른이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갔다.
"아르엘도."
"아, 에른 왔나? 우리 괴물급."
"그놈의 '배제' 놀이는 언제까지 할 건지. 다 끝났다는 걸 모르나?"
"아니.…"!"
아르엘도가 목소리를 높였다.
"넌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어! 세븐 아이즈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조직 이 아니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른.
그가 시에라를 보았다.
"이제부턴 내가 맡아서 할게."
시에라가 무조건 입 열게 할 수 있 다고 의욕적으로 나오길래 일단 맡 기긴 했는데.
'고독이었으면 진작에 다 실토했겠지.'
벌써 만 하루가 지났다.
에른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이 가시줄기 고문이 비주얼적으론
살벌할지 몰라도 중추신경을 직접 자극하는 고독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효과가 떨어질 터.
"그, 그럴래…?"
시에라도 한 발 물러났다.
그때.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아르엘도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레퀴엠의 위치를 알려 주지."
갑자기?
이럴 거면 왜 신경전을 벌인 건지?
에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맨입으로 알려주진 않을 테고. 원 하는 게 뭐냐."
"글쎄, 뭘 것 같나?"
"더러운 꼴 더 안 보고 죽게 해 주 는 거?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 줄 수 있지."
"웃기는군."
아르엘도가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에른 스틸가드."
"뭐."
"전설급 기사이며 6서클 마법사, 그 리고 라제칸의 뒤를 이은 다음 대 신물의 소유자…. 나이는 열여덟."
"어쩌라고."
"솔직히 말이 되나? 라제칸보다 더 한 놈이야. 넌 괴물급, 아니 그 이상 이 분명하다."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니 머리 숙여 부탁한다. 이런 꼴이라 머리를 숙일 순 없지만… 자 살해 줘."
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동의어로는 자결, 자진, 자재 등이 있다.
그걸 말한 거 맞는 거지?
확실히 들었지만 너무 뜬금없는 맥 락이어서 귀를 의심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넌 모른다…. 네가 대륙에 어떤 영 향을 끼칠 것인지. 지금이야 라제칸 에는 비할 수 없지만 10년, 그리고
20년 뒤에는 어떨까."
"또 그 소리."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세계의 균형' 타령이었다.
에른이 피식 비웃는다.
"말 나온 김에 따져 보자. 내 조부, 라제칸 스틸가드가 세계의 균형을 무너 뜨렸으면 얼마나 무너뜨렸다고? 차라리 균형을 지켰다고 해야 하지 않나?"
시에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신화급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았으면 제국의 확장을 저지할 수
없었겠지. 혼자서 제국의 남부 전선 을 감당했으니까."
"할아버지가 활약하지 않으셨으면 아르엘도… 그쪽 조국 리아케인도 나바로랑 사이좋게 제국에 흡수되었 을 텐데?"
"라제칸 스틸가드가 대륙에 끼친 영향? 물론 크지. 근데 그게 나쁜 영 향력이야? 이해가 안 되네."
백번 양보하고 억지로 역지사지까 지 해 준다면.
제국인 입장에선 라제칸에 치를 떨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교육받아 왔을 테니까.
위대한 제국의 정복 전쟁을 막은 적국의 장수.
만약 [세븐 아이즈]의 수장이 제국 마탑주인 클라우크였고, 소속 회원들 도 다 제국의 마법사였다면 의아해 할 것은 없었다.
신화급 돌연변이가 나타나면 제국 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라제칸을 통해 학습했고.
제국인들이 제국의 이득을 위해 행동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놈들이 하는 짓이 정당하고, 정당하 지 않고를 떠나 납득은 된다는 뜻이 다.
꿀 먹은 벙어리?
아까부터 말이 없던 아르엘도가 붉 은 치아를 드러냈다.
"완전히 착각하고 있군. 세븐 아이 즈에 대해서."
"국제정세, 대륙의 패권, 힘의 균 형… 이까짓 것들이 뭐라고. 우리의 이상은 더 높은 곳에 있다. 바로, 공 동선."
" 뭔'?"
"인간과 아인종, 몬스터, 동식물… 모든 생명체의 터전인 대륙 그 자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함은 안타깝지만, 죽어 줬으면 한다. 자이 온을 위해서."
'종일 고문당하더니 정신줄을 놔 버 렸나?'
그런데 아르엘도의 눈빛은 진지하
기만 했다.
그는 진정으로 이쪽이 자살하길 바 라고 있었다.
'이 인간… 진심인가?'
1분이라도 더 살아 있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는데.
에른의 자결만이 마지막 남은 자신 의 소명이라고.
끝없는 고통에 처하더라도 꼭 이루 어야 한다고.
자기가 가진 최고의 협상 카드를 그딴 데에 쓰겠다는 건… 대체 얼마
나 미쳐야 가능한 생각인 건지.
형형한 안광을 발하는 아르엘도는 미치광이 치고는 침착해 보였다.
"음…. 그 표정은, 자살할 거 같지 는 않군. 이해한다. 나라도 믿지 않 을 것 같으니까."
아르엘도가 푹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날이 오는군…. 이 세계에는, 신적인 존재들이 거한다. 극소수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그 이름을 감 히 입에 올릴 수 없는 위대한 분 드.."
아르엘도의 얼굴에 잔떨림이 일었다.
경외와 숭배의 감정.
반면 전혀 미동도 없는 에른의 표정.
"신이 존재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각지에 신전이 있고 신관이 신성력 을 행사하는데."
"그들과는 다르다! 가뭄에 콩 나듯 이 사소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있 긴 하지만, 그들은 원칙적으로 인간 들을 방관하는 신. 하지만 그분들 은...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존재들이다!"
문득, 싸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밖은 설원이어도 탑은 난방 시스템 이 잘 되어 있어서 오히려 훈훈한데.
"잠깐, 그래서 신물이라고 부르
"그래. 세븐 아이즈는 그분들의 의 지를 받드는 조직. 위대하신 분들은 인간들이 신좌를 넘보는 것을 용납 하지 않으신다."
"그냥 개소리야. 금시초문인데."
시에라가 말을 잘랐다.
"온종일 생각한 게 고작 이거라니. 아르엘도… 나이 먹고 뇌가 굳었구 나? 그딴 소리를 믿으라고?"
"잠깐."
에른이 시에라를 제지했다.
"전부 거짓말인 건 아닌 것 같아."
" 뭐?"
차원거래 물품이 이 세계에 도는 것도 그렇고, 개발도 안 된 마나 리 액터가 존재하는 것도.
누군가는 교류자여야 할 테니까.
분명 배후는 존재한다!
"누구지? 뭐 하는 놈들이냐? 신물 을 제공하고 세븐 아이즈를, 아니 널 부린 놈들."
"그분들은 인간이 아니다… 또 초 월급이 나온다면, 그분들은 대륙을 멸망시킬 것… 크억!"
"그러니까 그분들이 누구냐고? 정 체를, 이름을 대!"
아르엘도가 입을 벙긋거리는데 목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희끄무레한 손 모양.
알 수 없는 투명한 것이 아르엘도 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
"뭐지? 영혼체?"
시에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저건 마나야!"
"크… 카악!"
아르엘도의 얼굴이 해골처럼 앙상 해져 갔다.
아무래도 저 기운이 그의 생명력을
쥐어짜내는 것 같았다.
시에라가 급히 [리커버리]를 사용해 보지만 별로 호전되는 기색이 없었다.
"소, 소용없어! 봤지?"
아르엘도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비밀을 누설한 대가다. 몸에 남은 마나가 한 올도 없는데도 맹세의 대 가를 치른다. 불가능이라는 게 없는 분들이야."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신기하긴 하군."
"그러니 자결해라. 마나에 맹세해!
레퀴엠에 들어가 레바단을 꺼낸 다음 자살하기로. 나와 한 약속을 어기 면 그 즉시 죽기로."
"그러지."
에른이 대답하자 아르엘도의 얼굴 이 환해졌다.
"정, 정말이냐?"
"무슨 소리야? 절대 안 돼...!"
시에라의 눈이 커졌다.
"나, 에른 스틸가드…."
"그만둬!"
에른이 우울한 낯빛으로 시에라와 눈을 마주쳤다.
-시간이 없어. 아르엘도가 죽으면 끝이니.... 난 아버지를 구해야 하고 너도 소중한 사람을 구해야 하잖아. 말리지 마.
"어, 언제부터 그렇게 희생적인 성 격이었다고!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시에라가 얼른 마법을 사용했다.
무음지대를 만드는 [사일런스].
그러나 에른은 마법진이 떠오르기 도 전에 디스펠러를 꺼내 마법을 취 소 시켜 버렸다.
"...합의한 대로 이행하기로 마나 에 맹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심 장의 마나가 폭발해 죽는 걸로 하 지."
"아… 안 돼!"
시에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안 되긴, 잘했다!"
"레퀴엠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가까이로."
아르엘도 쪽으로 다가가자 그가 레 퀴엠의 우]치, 그리고 안전하게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줬다.
여기에 더해.
"...이것도 맹세에 추가되는 거 다."
"그것까지? 그러지 뭐."
"대의에 동참해 줘서 고맙군. 자이 온은 네 희생을 기억할 거다!"
"...희생?"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에 어폐가 있네. 이따위 희생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그리고, 내가 왜 죽어?"
"아버지를 구하고 나도 살 거야."
동시에 커지는 시에라와 아르엘도 의 눈.
아르엘도가 말을 더듬었다.
"죽, 죽지 왜 안 죽어? 어떻게든 죽 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맹세인데."
레퀴엠을 가도 죽고 가지 않아도
죽는다.
그 조건이기에 레퀴엠의 위치를 알 려 준 것이다.
에른이 빙긋 웃었다.
"그건 내가 교류자가 아니었을 때 얘기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평범한 문 크기로 축소된 인벤토리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이, 이건?"
"어제 봤었지? 박살 나서 새 걸로 바꿨어."
에른은 인벤토리로 들어가서 괴상 하게 생긴 인형 하나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악마 인형?"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에른 혼자 신난 가운데.
"자이온에서는 마나의 맹세만큼 무 거운 약속이 없지. 근데 다른 세계 사람들은 이걸 크게 생각 안 하더군. 왜 그런가 했더니… 다 회피하는 법 이 있더라고? 이름하여 대속인형!"
-대속인형(3등급) :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내뱉은 말은 얼마든지 철회 가능! 저주와 맹세, 언약의 대가를 대신 치러 주는 인형 이다. 불쌍함을 느끼지 않도록 특별 히 못난 생김새로 제작되었다.
"마나의 맹세는 이거면 충분히 방 어된다고 하더군. 세븐 아이즈 상대 로 필요할 일이 있겠지 싶었는데, 오 늘에야 써먹게 되네."
"시에라, 잘 들어. 레퀴엠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게. 알타 섬에 위치한 파테스 산. 웃기지? 하필 대륙 최남 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퍼엉!
대속인형이 폭발했다.
얼른 호신강기를 끌어올린 에른은 멀쩡했고.
"마, 말도 안 돼!"
"이게 다 뭐야...?"
상황 파악이 안 된 시에라에게.
"저 교활한 늙은이가 레퀴엠 위치 는 나 혼자 알아야만 한다고 맹세에 끼워 넣었거든. 봤지? 나 안 죽는 거. 덕분에 검증 완료."
"미… 미친...! 이럴 수는!"
아르엘도의 얼굴이 새까맣게 물들 어 갔다.
마나로 이루어진 손아귀가 점점 그 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탓이다.
"...너, 네가 한 짓 때문에 자이온 은 멸망하고 말 거다."
"걱정 마. 네가 말하는 그분들은 신
이 아니니까. 아마 그냥 교류자? 애 초에, 인간을 견제하는 게 신은 무슨 신이야?"
죽어가는 아르엘도를 보며 에른이 이죽거렸다.
"끽해봐야 채널에서 찌질대는 놈들이겠지. 하나도 안 무섭거든?"
*
아르엘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에른의 죽음을 확정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 맞긴 했던 듯.
정말 그가 말한 곳에 레퀴엠이 있었다.
수백 개는 될 듯한 수많은 유리관.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아내는 데에는.
치이이익!
컨트롤 패드를 누르자 노즐에서 희 뿌연 냉기가 분출되면서 뚜껑이 열 렸다.
알몸 상태인 레바단.
털썩!
몸을 휘감은 튜브를 떼자 자연스레 앞으로 쓰러진다.
에른은 어깨로 그를 받아내곤, 키포 의 망토를 둘러 주었다.
"...괜찮으세요, 아버지?"
가볍게 내력을 불어 넣고 아버지의 마나 로드를 일주하자 맥박이 뛰고 숨결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에... 에른이냐?"
[183 화]
이런 부자 상봉이 또 있을까.
여기까지 온 과정도 과정이거니와, 장소부터가 범상치 않다.
아버지가 갇힌 장소 레퀴엠.
그곳은 바위산을 뚫고 안을 파내 만 든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런 스케일이 가능하긴 한 건 가…'?'
처음 완벽히 차폐된 문을 열고 들어 왔을 때, 에른은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레퀴엠에 보관된 것은 일정 간격으로 정렬된 수백 개의 유리관.
그리고 그 안에 보관된 사람들.
지금도 고개를 돌리면 벌거벗은 몸으 로 유리관에 고정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늙었군.'
절대 다수가 노인.
덕분에 아버지를 금방 찾을 수 있었지 만, 몇 번을 봐도 기이한 풍경이었다.
"...여기가?"
레바단이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본다.
" 대체…."
"전 알아보시는 거죠?"
"그럼. 막내 아니냐."
레바단은 막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 굴이었다.
아버지가 실종된 지 벌써 석 달 가 까이 되었으니, 그동안 이 안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면.
'시에라 말로는, 영생관이라고 했던가?'
이 안에 있으면 노화도, 병의 진행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레퀴엠은 감옥이되, 감옥이 아닌 곳.
영생관에 보관된 노인들은 전직 [세 븐 아이즈] 회원들이다.
그들은 회에 봉사한 대가로 영생을 보장받았지만… 회원들을 영생시킬 방 법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영광의 순 간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고.
다들 젊은 몸과 죽지 않는 육신을 입은 채, 다시 태어나는 그 날을 기다 리며 영원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에게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뒤.
"...다 기억이 나."
마나호흡으로 맑은 정신을 회복한 레 바단.
그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난 분명 대마법사들의 합공에 당했 는데! 어떻게 네가 여기에?"
"네. 모두 일곱 명이었죠? 그래서 자 기들을 세븐 아이즈라고 부른다더군요,"
에른은 그들이 지난 세월, 대륙에서 암약하며 천재들의 등장을 막아 왔다 는 등의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레바단이 무거운 얼굴로 끄덕거렸다.
"분명…. 미심쩍은 실종 사건들이 있 기는 했다. 그들이었구나! 그런데 일곱 이나 되는 대마법사로부터 어떻게 날?"
씨 익.
에른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대륙 최남단, 알타 섬까지 이동해 오 는 여정.
'뭐... 텔레포트로 금방 왔지만.'
그래도 파테스 산에서는 꽤 시간이 걸렸다.
시에라가 산 전체를 스캔하는 동안 곁에서 기다려야 했으니.
사실 여정이랄 것도 없었다만, 오는 내내 꼭 하고 싶었다.
이 말을.
"아버지를 납치한 놈들… 놈들은 전 부 대가를 치렀어요."
지난 석 달여.
영웅의 증발을 막지 못해 자책하며 지샌 밤이 몇 날인가.
이건 자기가 꼭 대단한 효자라서, 아 버지와 너무 애틋해서… 그런 이유에 서는 아니었다.
물론 이번 생은 전생보다 훨씬 개선 된 부자지간이기는 하다.
하지만 같이 보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이 감정을 오로지 효심으로만 여기기가.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실 수를 만회할 자격이 생긴다면….'
수백 번을 빌어도 미동조차 없었던 소 원의 책갈피가, 이 각오에는 반응했다.
그렇게 17년을 거슬러 와 놓고, 보기 좋게 실패해 버린다면… 에른은 자신 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대가… 라면?"
"다 죽었어요."
"대마법사들 전부?"
"네.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 는 말인지.
안도감이 에른의 전신을 감싸 온다.
"이리 와 봐라. 한번 안아 보자."
" 예?"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믿어 지지 않는구나."
덥석.
"뀨웅?"
영생관 위를 돌이다니던 사리가 에른 위로 뛰어내리곤 그의 목 뒤를 껴안았다.
"뀨에엥…."
쫑긋 선 귀, 쭉 벌어진 입.
사리도 거의 석 달 만에 보이는 행
복한 표정이었다.
"음, 이 친구는?"
몸을 떼 낸 레바단이 의아한 듯 사 리를 보았다.
아들과 친밀한 관계라는 거야 알고 있지만,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위험했을 텐데."
"위험이요? 사리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걸요."
"뀨엥!"
에른은 레바단에게, 사리가 라제칸이 남긴 유품이며 다재다능한 이계의 변
신수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레바단이 앗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 검고 커다란 알에서 태어난 게?"
"사리가 도와줘서 아르엘도를 잡을 수 있었고… 데미우스를 추적할 수 있 었어요."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남기신 안배 인 건가."
레바단의 눈이 깊어졌다.
'할아버지도 그게 불가살이 알이라는 건 모르셨을 것 같은데요.'
에른은 맥스급 [섭리의 눈]이 있어 블 랙마킹을 뚫고 정체를 알아봤던 거고.
4계인으로부터 괴수황제 그랑뷔트의 저서를 구매한 덕에 사리를 부화시키 고 이렇게 잘 키울 수 있었던 거라.
'이걸로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예전처 럼 존경하게 된다면야.'
입 다물고 있을 가치가 있다.
그렇게 감격의 부자 상봉을 마친 가 운데.
두 사람의 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바단이네? 너도 쉽게 찾았구나? 하긴."
시에라와 그 옆에 나란히 선 남자.
그는 다소 끼는 듯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에라의 것인 듯.
"...시에라 펠가스!"
얼굴을 확인한 레바단이 에른의 앞을 가로막으며 금빛 오러를 생성했다.
"왜, 왜 그래?"
"잔당이 남아 있었구나!"
레바단이 공격 태세를 갖추는 걸 본 남자가 시에라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두꺼운 배리어를 형성했다.
"내가 상대하지."
"스승님, 잠깐만요. 레바단? 그때는 미 안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 고... 난 가만히 있었잖아. 이렇게 공격 적으로 나올 것까진 없는 거 같은데?"
"그걸로 면피가 된다고 생각하나? 마탑주가 한 짓은!"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데요."
에른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생각해 보니 시에라가 어째서 세븐 아 이즈에 몸담고 있었는지, 그녀가 이번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 시에라는 세븐 아이즈의 붕 괴에 일조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시에 라? 아버지께선 사정을 모르셔서 그래. 세븐 아이즈 회원인 줄로만 아시니까."
"아."
에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싸울 이 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레바단이 오러를 거두자 남자도 배리 어를 디스펠했다.
눈빛을 교환하는 레바단과 남자.
문득, 레바단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 다.
"마탑주의 스승이라면… 혹시 베모스 님이십니까?"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때문에 레바단 보다 20살은 더 많아 보이는데.
"...나를 아는가?"
전대의 14마탑주 베모스.
시에라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퀴엠 에서 구해내고자 했던 그녀의 스승.
그가 바로 이 사람이다.
레바단이 대답했다.
"어릴 때지만 뵌 적도 있습니다. 레 바단 스틸가드라고 합니다."
"스틸가드? 라제칸 경과는 어떻게 되지?"
시에라가 속삭였다.
"장남이에요."
"아… 라제칸 경은?"
레바단이 고개를 떨궜다.
"...돌아가셨습니다."
"어, 언제? 그것도 세븐 이이즈의 소 행인가?"
"아닙니다. 평온한 임종을 맞이하셨 습니다. 11년 전 일이지요."
"하긴, 세븐 아이즈가 아무리 막 나 가도 신화급은 감히 못 건드리지. 자 기 몸 엄청 아껴대는 늙은이들인데, 모험수 둘 리가 없어."
베모스가 냉소하며 바로 옆 영생관에 든 대마법사를 흘끗 보았다.
"하여간 노욕들도...
"실험 도중 사고에 휘말려 아공간에
갇히셨다고 들었습니다. 다 세븐 아이 즈가 지어낸 낭설이었나 보군요."
"낭설은 낭설이지.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미안하네. 스틸가드까지 희생양이 될 줄이야."
"베모스 님께서 죄송하실 일은 아니 죠."
"아니."
베모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늘진 그의 얼굴.
"나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 으니까."
그의 시선이 에른에게로 옮겨 갔다.
"자네가 날 구해줬다지?"
"뭐...
에른은 베모스가 표하는 감사의 예를 떨떠름한 듯 받아들였다.
구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시에라는 베모스를 구하기 위해 노력 했고 이쪽은 아버지를.
서로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으니 그걸로 된 거다.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겠네. 자 네한테 큰 빚을 졌군."
"아뇨, 음…."
부담스러운 눈빛에 에른이 화제를 돌 렸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 요? 무작정 꺼내줄 수는 없고."
여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대부분이 전대의 대마법사들이니… 세븐 아이즈를 재건하겠다고 난리 치 면 감당 안 되지."
시에라가 툭 던졌다.
"그럼 폭발 마법이라도 갈겨서 죄다 매장해 버릴까?"
베모스가 허허 웃었다.
"넌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난 반대다. 레퀴엠에 갇힌 전부가 세븐 아이즈 멤버라고만은 볼 수 없고…."
"레바단 때문에요? 레바단은 예외 중의 예외에요. 내 자리를 내주기로 해서 죽지 않고 여기에 갇히게 된 거 니까."
"그래도 전부 죽이는 건 좀 그렇다."
"왜요, 스승님? 되살아나면 대륙을 어지럽힐 놈들인데요. 미리 싹을 잘라 두는 게."
"영생관에 보관된 모두가 그 '대의' 에 공감하진 않았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동참해야만 했던 회원도 있지 않 았겠느냐. 나나 너처럼. 우리는 이들 을 단죄할 자격이 없어."
베모스가 에른과 레바단을 보았다.
"하지만 저 두 사람에게는 있지. 어 떻게 했으면 하나?"
« O "
어려운 질문이다.
레바단은 침묵을 지켰다.
대신 에른은.
"죽이죠?"
"뭐?"
너무도 쉽게 나온 대답에 베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친구는 도덕적 딜레마라는 개념 이 없는 건가?'
"알아요. 왜 망설이시는 건지. 근데 아르엘도나, 클라우크 같은 주동자들 은, 솔직히 죽어도 싸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그걸 알아낼 방법 이."
" 있어요."
*
치이이 익.
노즐에서 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전전대의 4마탑주, 브릭센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
거렸다.
"여기가..?"
"깨어났는가. 회원이여."
"음, 머리가 띵하군."
"컨센트레이션을 걸어 주지."
지잉.
"...한결 낫군."
브릭센이 머리를 들었다.
눌러 쓴 로브에 지팡이.
숨 쉬듯 마법을 사용하는 캐스팅 실 력도 그렇고.
자신과 같은 대마법사임이 분명하리라.
"내가 깨어났다는 건…."
브릭센의 만면에 희열이 떠올랐다.
"불로불사의 술이 완성되었다는 건가?"
"그렇소."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 이거 정말 괜찮은 투자였는걸? 새로운 몸은 언제 입게 되지?"
"곧. 허나 조건이 있소."
"불로불사의 몸을 갖게 되는 대신 10년 동안 세븐 아이즈 활동에 참여 해야 하오."
"그 귀찮은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왜?"
"...요즘 인력난이라. 어떻게 할 거 요? 지금 몸이 딱 하나 남아 있소. 거부 하면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게 될 거요"
"그, 그럼 나는?"
"다시 영면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브릭센이 다급히 소리쳤다.
"할래! 할래, 그럼! 10년이야 눈 딱 감고 보내면 뭐 별거 아니지."
"진심이오? 천재들을 감시하고 또 배제시켜야 하는데."
"이봐, 후배. 그거 내 전공이야. 지금 까지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니까?"
"...죄책감은?"
"그딴 게 어딨나. 불로불사가 걸렸는데."
"그렇다는군."
베모스가 뒤로 물러나자 브릭센의 얼 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목 위로 떨어지는 푸른 강기.
뎅겅!
베모스가 말한 대로 브릭센은 영면으 로 돌아가게 되었다.
영생관이 아닌, 진정한 영면으로.
굳은 표정으로 죽은 이를 내려다보는 베모스.
뇌정검을 거둔 에른이 그에게 물었다.
"왜요? 혹시 아는 사람?"
"모르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인 게 씁쓸해서 말일세."
벌써 십여 명의 대마법사가 죽었지만 이 테스트의 1단계도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
거짓된 죄책감을 감지하기 위해 2계
에서 거짓말 탐지기까지 구매해 왔는 데 아무래도 괜히 산 것 같다.
"저쪽 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효율을 높이기 위해 네 사람은 팀을 나누었다.
이쪽은 베모스와 에른, 저쪽은 시에 라와 레바단.
이쪽이고 저쪽이고 다들 죽어 나가기 만 하는 걸 보면....
"탐욕스러운 인간들만 세븐 아이즈가 되는 건지, 세븐 아이즈가 되면 다 그 렇게 되는 건지 이젠 헷갈리는데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이거 시에라 말대로 했어야 하나…." 그런데 다음 영생관.
안에 든 생명체를 본 에른의 눈이 커졌다.
"이 사람 엄청 젊은데요? 게다가 귀
가 뾰족해요. 아니, 사람이 아닌데?"
베모스가 유리 안쪽을 보았다.
엘 프?"
[184 화]
자이온 대륙의 지적 생명체.
인간만이 그 타이틀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인간은 대륙에서 들러리에 불 과했으며.
생존을 위해 다른 종족의 눈치를 살 펴야 하는 때가 있었고….
하지만 어떤 순간이 기점이 되었다.
변화의 깃발을 들어 올린 사람은 건 국황제 페이웨어 랑드라이즈.
그가 [인간의 시대]를 선언하고 제국 을 창건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엘프 맞네. 요즘 친구들은 엘 프도 잘 모르려나?"
베모스의 의문에 에른이 기억을 더 듬었다.
이번 생은 물론이고 전생도.
"알긴 알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 에요. 베모스 님은?"
"난 몇 번 보긴 했지. 마탑으로 물물 교환 하러 오는 엘프들이 몇 있어서."
"...물물교환이요?"
"아, 인간이 엘프에게서 처음 마법 을 배워 왔다는 말도 있잖은가. 아무 래도 마법사들은 엘프 종족하고 엮일 일이 좀 있다네. 왜, 놀랐나?"
"조금요."
다른 포인트에서 놀란 거지만.
'화폐 경제가 발달한 지금 시대에 물물교환?'
굉장히 고루한 종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엘프가 마법과 올드함으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숲과 평화의 종족인 동시에.
'아름다움의 종족.'
에른은 영생관에 갇힌 엘프를 보면 서 베모스에게 물었다.
"...세븐 아이즈 중에 엘프도 있었 나요? 꼴에 엄선해서 회원 받아들이 지 않던가? 마탑주만 가입할 수 있잖 아요."
"그렇지?"
"그럼 엘프 마탑주가 있었던 건가?"
"아니, 그런 적은 없었네."
"하긴…. 마탑은 인간의 시대에 세
워졌고, 엘프는 그 이전 시대에 날리
던 종족이니까."
에른이 의아해했다.
"그렇다면, 세븐 아이즈와는 무슨 관계일까요?"
"그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베모스라고 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생관의 컨트롤 패드를 조작하는 데... 거기에 적힌 이름은.
'아리엘.'
과연 엘프다운 이름이었다.
애초에 대륙인들이 숲의 종족을 엘 프라고 부르게 된 이유도 이름에 죄 다 엘이 들어가서다.
치이이익.
튜브가 떨어지자 아리엘의 몸이 앞 으로 기울어졌다.
"이보게, 흠흠."
베모스는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귀찮아서… 는 아닌 것 같고.
낯부끄러운지 벌겋게 된 얼굴을 옆 으로 돌리고 있다.
에른은 어쩔 수 없이 아리엘을 받았다.
온몸 가득 휘감아 오는 부드러운 감촉.
'음.'
유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왜 엘프를 미의 아이콘으로 여겨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 종족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신 체 비울고} 조각 같은 몸매.
원래는 탐스러웠을 은발은 영생관에 오래 갇혀서인지 윤기를 잃었고 피부 도 좀 상한 듯하지만.
그래도 조막만 한 얼굴 안에 든 이
목구비는 창조주가 심혈을 기울여 만 든 것처럼 완벽했다.
'남자였으면 나도 좀 위기감 느꼈겠 는데.'
그야말로 결점 없는 외모다.
에른도 나름 일국을 대표하는 미소 년이라고 자부하긴 하지만 이건… 관 리와 노력으로도 커버가 안 되는 종 간 격차, 유전자에 새겨진 선천성에.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스르륵 눈꺼풀이 열리고 정말로, 반
짝이는 은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인간?"
아리엘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몸, 그리고 에른, 다시 자기 몸.
"음... 이게 그러니까."
오해는 물론이고 오해xlOO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쓰러질 거 같아서 잡아 준 건데. 나 아니었으면 앞니 다 나가고 코까 지 부러졌어."
" 알아.
"이제 혼자서도 설 수 있으니까 좀 놔 줄래?"
"그러지."
아리엘이 양팔을 들어서 묶인 머리 카락을 풀어 헤치니 찰랑하고 내려온 긴 은발이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가 렸다.
"영생관을 연 게 너희들이니?"
'역시 엘프라 뭔가 다른가?'
아버지도 그랬고, 다른 대마법사들도 한동안 현실에 적응 못 해서 완전히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녀는 이런 과정이 필요 없는 듯 보인다.
"기억이 바로 이어지는 건가?"
"어, 음... 신기하군."
베모스도 놀라워하는데, 아리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조금씩 단락이 있기는 한데 거의 다 기억나."
그렇다면 굳이 [컨센트레이션]을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에른이 물었다.
"아리엘… 아리엘 맞지? 우리는 세 븐 아이즈다."
그 말에, 베모스가 눈짓한다.
'엘프를 죽이자고?'
전음으로 대답하는 에른.
-세븐 아이즈의 철학을 공유한다면 죽여야죠. 회원이 아니더라도, 조력자 였을 수도 있잖아요?
-자네 열여덟이라고 했지?
—네.
-참 나이답지 않게 살벌해서 대단하 군… 내가 그 나이일 때는 완전히 우 유부단 그 자체였는데.
- 뭐….
-하긴, 독심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그래, 죽어 마땅하 다면 엘프라도 죽여야지.
-결론만 같으면 됐죠. 손은 제가 쓸 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 미신이긴 하지 만... 엘프를 죽이면 마력이 약해진다 고들 해서.
-저도 마법사는 마법산데요.
-음...?
뇌리에서 뇌리로 오가는 대화를 아 는지 모르는지.
아리엘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븐 아이즈? 그게 뭔데?"
"우리들은 자이온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조직. 정도를 벗어난 천재들을 세계에서 배제시키는…."
에른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아리
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젠 그걸 인간들한테 외주 줬어? 어이가 없네!"
스슷!
순간 아리엘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놀 라운 속도로 에른에게로 쇄도해 왔다.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도 그렇고, 신체 회복력도 인간의 것이 아니다.
대마법사들은 이보다 더 시간을 줘 도 몸을 가누기는커녕 혀도 제대로 안 풀려서 어버버 하기만 했는데.
스읏.
아리엘의 양손에 초승달 같이 생긴 무언가가 형성되었다.
은빛을 발하는 미지의 기운을 양손 에 잡고.
전력으로 휘둘러 왔다.
'오러는 아닌데?'
뭔진 몰라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에른도 양손에 강기를 씌우고 그녀 와 맞섰다.
퍼엉! 펑! 펑!
은빛 초승달은 무리 없이 권강을 견 뎌 낸다.
'달이라… 그렇다면 나도 달로.'
월영장!
에른이 쌍장을 내지르니.
콰콰콰콰!
전신을 뒤덮을 듯한 거대한 장력이 폭포수처럼 아리엘을 덮쳐 갔다.
"핫!"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리엘이 옆으 로 몸을 던지면서 손을 뻗었다.
솟아오른 은색 장벽이 월영장을 가 로막는다.
파사사삭!
버티지 못하고 금세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도움이 되었다.
그 잠깐의 여유가 그녀를 장력의 영 향력에서 벗어나게 해 줘서.
물음표를 띄우는 베모스.
"분명 마법진이 안 떠올랐는데...?"
순식간에 공수가 전환되었다.
에른이 뇌정검을 꺼내 여러 차례 찔 러 가자 아리엘이 계속해서 손을 뻗 었다.
쨍강! 쨍강! 쨍그랑!
그럴 때마다 은빛 방어막이 뇌정검 을 막아 보지만 번번이 깨지고 만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푸른 강기.
일반 강기까지는 어떻게 비벼도 전 설급의 징표인 강기 변형까지는 막아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꺅!"
아리엘이 뒤로 넘어졌다.
"엘프야말로 균형의 종족 아니냐. 세 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협조하라."
"개소리 집어쳐! 그딴 게 균형이면 데이탄 반도에 운석을 떨어뜨리는 것
도 균형 유지지."
...2"
"데이탄 반도 때문에 자이온이 좌우 비대칭인 거 알아? 균형이 그렇게 좋 으면 그 땅덩이나 없애러 가라고!"
"음, 논리왕이군."
파지 직.
에른이 미소를 지으며 뇌정검을 검 집에 넣었다.
그리고 베모스를 보았다.
"이만하면 검증된 거 같죠?"
삐빅!
베모스의 손에 든 거짓말 탐지기도 경쾌한 소리를 내고 있다.
"진심 98%라는데?"
"영 뻘짓만 한 건 아니게 됐네요."
"...왜 그만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아리엘.
에른은 그녀를 일으켜 주러 가다 가… 허리 아래로 이어지는 굴곡을 보고 몸을 돌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민망한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차원거래를 활성화하고.
'어디보자… 의복이.'
인벤토리에는 매직 아이템과 마도기 갑, 회복약 같은 전투 물품 외에도 생필품도 많이 들어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쟁여둔 것이다.
여성용은 따로 없지만, 대강 걸치면 그만인 로브 종류는 쌓여 있어서.
에른은 그중에서 한 벌을 꺼내 아리 엘에게 건넸다.
"입어."
"뭐, 뭐 하자는 거지?"
"우리 세븐 아이즈 아니니까. 아리 엘, 그쪽이 세븐 아이즈 편인지를 테 스트해 본 거야."
아리엘은 순순히 로브를 걸치면서도 불신의 눈빛을 보인다.
"..그 말을 믿으라고?"
"주위를 봐라."
열린 영생관마다 근처에 목 없는 대 마법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동료들을 데리러 온 거라면 저 꼴 로 만들진 않았겠지?"
아리엘은 에른을 지나쳐 가서 시체 들을 살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잘린 목 을 만지는 광경이 사뭇 괴기스럽기까 지 하다.
"인간, 인간… 정말 다 인간이네. 왜 영생관에 인간들만?"
"인간의 수명은 그쪽 종족에 비하면 반딧불이나 마찬가지니까. 영생을 약 속받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 하더군."
"잠, 잠깐!"
아리엘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반균형주의자?"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세븐 아이 즈에 반대한다는 개념이라면 비슷하 다고 할 수 있겠네."
"죽은 노인들은 전부 그… 세븐 아 이즈라는 거고?"
"상황 파악이 빠르군."
"학... 하악!"
그녀가 가쁜 숨을 쉬었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영생관이 전부 반균형주의자들에 의 해 열린 거라면!"
주저앉은 아리엘이 양손으로 양팔을 감쌌다.
"왜 그래?"
"관리자…! 관리자가 온다! 여기 있 으면 위험해!"
그녀가 하도 난리 치는 바람에 레퀴 엠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 여자? 귀만 뾰족해 갖곤."
시에라가 더 뾰족한 눈초리로 아리
엘을 흘겨봤다.
에른의 대답.
"들어 보니까 레퀴엠에 100년 넘게 갇혀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보다는 더 많이 알지 않을까?"
"그새 친해져서 편드는 거야?"
"아니, 편드는 게 아니고."
에른은 아르엘도가 주장한 배후 '그 분들'을 신경 쓰지만, 시에라는 달리 생각한다.
"다른 누가 있는 것 같기는 해. 그 특이한 맹세의 대가만 봐도. 그런데
정말 세븐 아이즈를 조직하고 아르엘 도에게 사명을 심어 준 배후가 존재 한다면, 나타났어도 진작 나타났어야 하지 않을까?"
"...관리자들은 쉽게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아. 앗!"
아리엘이 하늘을 가리켰다.
알타 섬 상공.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청 년 하나가.
허공에 뜬 채로, 산 중턱에 나온 일행
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모스 트라이던, 레바단 스틸가드, 그리고 아리엘…. 다들 성향이 빤하 군. 그렇다는 건.
남자의 붉은 시선이 시에라를 정조 준한다.
-시에라 펠가스가 배신자였군? 이거 참. 이래서 인간들이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섬 전체를 울리는 음성.
뭐, 목소리야 증폭 마법 먹이면 되 는 거고 저렇게 떠 있는 것도 5서클 만 되어도 다 가능한 거지만.
등장한 타이밍이나 말하는 것이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풍겨 져 나오는 위압감도.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임은 분명했다.
아리엘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다 틀렸어 이제…."
사시나무가 따로 없는 게,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레바단이 그녀에게 묻는다.
"저 남자가 누구길래 그러는 겁니까?"
"잘은 몰라.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 해…. 관리자는 8서클이라는 거."
8서클 마법사?
네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던 아리엘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다들 얼굴 가득 놀라운 빛을 띄우기 는 했다.
그런데 공포가 전염될 줄 알았는 데… 두려움에 잠식되어 전의를 상실
할 줄 알았는데.
'왜들이렇게 태평하지?'
에른이 다가와서 물었다.
"혹시 동료는?"
"관리자는 항상 혼자 활동해."
"그럼 뭐, 다행이네."
"...아, 아니! 8서클 마법사라니까?"
"알았어. 8서클."
에른이 가까이 온 김에 아리엘의 어
깨를 보듬어 주었다.
떨리는 등을 토닥이며.
"진정해. 우리 정도면 대륙 최강 파티 거든? 자뻑이 아니라 사실이 그래. 8서 클 하나까진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아리엘은 혼란스러워졌다.
'인간이란 종족은 허세가 심하다더 니….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데 빤히 바라본 황금빛 눈동자는.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은, 완벽한 평정 상태.
기시감까지 느껴진다.
'이 소년…. 진심이야!'
[185 화]
대륙 최강.
어지간히 목 뻣뻣한 수재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오만방자의 아이콘들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수식어다.
대륙은 넓고 천재는 해변의 모래알 처럼 널려 있으니까.
노련한 기사들이 어깨에 힘 빡 들어 간 기사 지망생들에게 충고랍시고 해 주는 말.
'본인이 재능 있다고 생각하나? 동
네에서 칼싸움으로 이름 날린 정도로, 돈 내고 배운 스승한테 칭찬 좀 들은 걸로?'
'큰물에 나가면, 기사 아카데미에만 가 봐도. 그 야물딱진 에고가 산산조 각날 거다.'
'근데 알고 보니 천재는 천재였어? 수석 입학에 졸업도 카르 숨? 혹시 하늘이 내린 인물인지도?'
'절대 이니지. 조금만 기다려 봐. 기 사단 신고식. 신입 자존심 깨뜨려 주 려는 선배들이 번호표 받아 놓고 기 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런 멘토링.
혹은 될성부른 떡잎 짓밟기?
뭐가 됐든.
그러한 말들에 기죽지 않고 끊임없 이 스스로의 재능을 입증한 무인이 있었다.
제국 기사단의 전설, 크라페 후작.
최근 100년 내 가장 압도적이었던 제국 최강자다.
검을 쥔 순간부터 특별했고, 특별함 을 잃지 않아 위대했던.
"기사단 선배들이 나보다 훨씬 약한데?"
"영웅급도 별거 없군."
"전설급? 10년 먼저 올라갔다고 해서 10년 치만큼 더 센 것도 아니더라고."
제국 최강에 등극한 이후, 5년.
그는 자신이 대륙 최강임을 자부했다.
"날 이길 사람, 내가 못 이길 사 람…. 이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은 겸 손, 겸허, 낮게 임하는 자세.
"아, 이 바닥 겸손해야 한다고? 겸손은 약자의 안전장치일 뿐이지. 나? 대륙 최 강자. 그러니 굽힐 필요 따위 없음."
재수 없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 르는 것도 아니다.
보통은 잘 성사되지도 않지만, 대개 무승부가 나곤 하는 전설급 대결에서 압도적인 실적을 쌓은 크라페 후작이 니까.
7전 7승!
[인간의 시대]에는 전무무후한 전적 이었다.
그런데.
대륙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고….
남부 전선의 선봉장으로 나선 크라
페 후작.
수만의 군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8연 승을 자신했던 전설급 대결의 결과는.
"헉, 헉…. 이, 이건 무슨 수수께끼 같은 검술이냐? 너, 정체가 뭐야!"
"...라제칸 스틸가드라고 하오."
"완... 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디 서 이런 놈이...
"그대의 위명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 뛰어난 기사인데, 아깝게 되 었군."
"전시가 이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푸악
라제칸 스틸가드는 무자비한 일검으 로 크라페 후작의 목을 날려 버렸고.
이 대결은 수수께끼의 검술, 라제칸 을 상징하는 '미스터리 블레이드'의 이름을 알린 첫 사건이 되었다.
또한, 웬만해선 겸손하게 사는 게 안 전하다는 인생의 교훈도 남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최강인 게 분명해?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
"크라페 후작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보라. 그대의 목을 날려 줄 누군 가가 대륙 어딘가에 존재할 테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