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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가 던전에 진입한 지 불과 30분이 지난 시각.

"뭐, 뭐라고요?"

납득할 수 없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던전 입구가 사라졌습니다! 카메라에도 확인이 안 되고 이능파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입구가 사라졌다니."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편 팀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갑자기 던전이 닫혔다는 소립니까?"

편 팀장은 그 물음에 차마 대답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대신 침을 꿀꺽 삼키며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토벌이 완료되기도 전에 던전이 닫히는 경우?

그딴 게 있을 리 없다.

전생에서조차 그런 변수는 들어본 적도 없다.

'대체 무슨....'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멀쩡히 작전 중이던 던전이 갑자기 사라지리라는 걸.

아니, 지금은 일단 그런 것보다....

"토벌대는요. 토벌대랑 통신은 됩니까?"

"아까부터 먹통입니다. 일단 시도는 해 보고 있는데...."

쿵―!

책상이 크게 흔들렸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지휘실 전체가 싸늘해졌다. 하지만 분위기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통신까지 끊겼다면 확실하다.

던전이 정말로 닫힌 것이다.

100명이 넘는 토벌대가 투입된 던전이.

'시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던전에 갇히게 되면 아무리 보스를 토벌해도 해당 던전이 재출현하기 전까진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그건 헌터의 재량, 지휘관의 역량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던전이 재출현할 때까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다만 내 기억상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출현하는 수중 던전은....

'...1년 뒤.'

수중 던전에서 100명이 넘는 토벌대가 1년을 버틸 수 있을 확률?

시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100명이 넘는 인원이 전멸. 그것도 내 작전에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책상을 붙잡고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당황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전멸이라니, 내 작전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시발,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어.'

애초에 기억에 없던 던전이 갑자기 출현한 것부터가 미심쩍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지금,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예고 없는 던전의 출현.

일어나선 안 될 토벌 중 던전 폐쇄.

일반적으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두 번이나 벌어졌다. 이게 과연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누군가 던전을 임의로 컨트롤하고 있다고밖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짓이 가능한 건 한 군데뿐.

국제 협회.

'괴담이 아니었나....'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만약 정말 그들이 벌인 짓이라면, 이건 우리한테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대체 왜?'

국제 협회가 굳이 던전을 조작하면서까지 한국 협회에 이런 짓을 벌이려는 건가.

인수합병을 거절한 것에 대해 본보기?

아니면 미국 지부 비리를 터트린 것에 대한 보복?

그것도 아니면....

설마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하려고?

'이 미친 새끼들이,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따위 개수작을....'

이가 바득 갈렸다.

하지만 분노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어쨌든 누군가가 차원석을 이용해 던전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 국제 협회가 벌인 짓이라고 한다면....

아직 방법은 있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이아영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토벌대가 입고 있는 골리앗 슈트 말입니다. 수중에서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이 최대 얼마입니까."

「상황에 따라 다른데.... 그건 왜요?」

"대답이나 먼저 해주십쇼."

급한 나머지 신경질이 반쯤 섞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이아영 실장은 어딘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곧바로 진지한 목소리 대답했다.

「평균적으론 4시간. 하지만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더 줄어들어요. 그땐 2시간도 간당간당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저, 혹시 무슨 일 있는...!」

무어라 묻는 말이 들려왔지만,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최장 4시간, 최소 2시간.

지금 상황에 전투를 벌이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그렇다면 작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그 안에 차원석을 다시 가동시킬 수 있다면 전멸은 막을 수 있다.

그러니 일단 어떻게든 국제 협회와 연락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협박이든 회유든 아니면 거래를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던전을 다시 열게끔 만들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차 좀 빌리겠습니다."

"예? 어, 어디 가십니까? 보, 본부장님? 본부장님!!"

편 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임시 지휘실을 뛰쳐나왔다.

곧바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할까 말까 순간 망설였지만, 이런 상황에 고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 무슨 일이냐. 작전은 잘 되고 있어?」

박인범 협회장.

그동안 문젯거리가 그의 귀로 들어가는 건 피하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이젠 어쩔 수 없다.

명백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었으니.

"지금 당장 이사회 소집해주십시오."

「...뭔 일 났냐?」

"예."

깊게 숨을 들이쉬길 한 차례.

"국제 협회랑 한 판 붙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해두마.」

협회장은 이유 따윈 묻지 않았다.

더 말할 것 없이 바로 전화를 끊고는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다행히 미리 주변을 통제해둔 덕에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부아아앙―.

터질 듯한 엔진음.

급한 마음에 더욱 가속하며 빠른 속도로 대교 위를 가로지르던 그 순간.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차가 하늘로 솟구쳤다.

의식이 날아갈 듯한 충격.

차 안에서 몸이 붕 떠오른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발.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강렬한 데자뷔였다.

***

인사동 근처 어느 식당.

한유빈과 한상혁 그리고 문소연은 오전 작업을 끝낸 후 점심 식사를 위해 그곳을 찾았다.

팀이 나눠진 세 명이 이렇게 모이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간 워낙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더없이 바빴다.

"그래도 이젠 꽤 여유로워졌죠?"

테이블에 착석한 직후, 문소연이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슬슬 그 사람도 자리를 잡은 거지."

한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한상혁이 맞장구를 쳤다.

"진짜 생각할수록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반년 전만 해도 청소팀 막내였던 놈이 작전 본부장이라니 참."

"왜? 배 아파?"

"지랄. 질투도 나랑 비슷한 놈이어야 나지, 너무 넘사라서 부럽지도 않아."

한상혁이 쿡쿡 웃었다.

"이번 작전도 문제없이 잘 끝나겠죠?"

"말해 뭐해. 그 사람이 총 책임자인데. 걱정하는 시간이 아깝지."

한유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이래저래 맘에 안 드는 부분은 있어도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레드 등급의 수중 던전.

처음 그 작전에 대해 들었을 때 한유빈은 자진해서 참가를 희망했다.

결과적으론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당시엔 그의 판단에 토를 달 이유가 없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봐주는 거 없이 본인이 먼저 나설 생각이었다.

뭐,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역시나 순조로운 모양이지만.

하긴 그 사람 작전에 문제가 생길 리 없지.

한유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유빈 언니… 저번에 얘기해줬던 거, 그거 진짜예요?"

그때, 문소연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한유빈은 영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괴담 말이에요. 국제 협회의 어떤 조직이 본인들한테 위협이 되는 이들은 가차 없이 죽인다는...."

"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가 퍽 귀여웠는지, 한유빈이 쿡쿡 웃었다.

세상에, 설마하니 한밤의 이야깃거리로 해줬던 말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괴담은 그냥 괴담이지. 원래 알려진 게 많이 없는 조직은 그런 게 있잖아."

"그, 그렇죠? 하하하....'

"왜? 국제 협회에 노려질까 봐 무서워?"

"에이, 제가 뭐라고.... 저보단 준우 씨가 걱정이죠."

음, 괴담이 진짜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한유빈은 속으로 동의했다.

일을 벌이는 스케일이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분명 습격을 몇 번이고 당하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다.

"뭐,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한텐 의미 없을 거야."

"네? 왜요?"

"나도 자세한 이유는 못 들었는데… 그 사람, 평상시에도 방어 스킬을 켜고 다닌다더라고? 한 번 당해 본 입장에서 안심할 수가 없다나 뭐라나."

꽤나 아리송한 이야기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유빈은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뭐, 그 사람이 어디 쉽게 당할 사람도 아니잖아? 그 사람은 죽을까 봐 걱정인 게 아니라 오히려 누구 한 명 죽일까 걱정이지."

한유빈은 반쯤 진담이었지만, 나머지 두 명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쿵, 콰광―!

하늘로 솟구쳤던 차가 다시금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어우, 머리야."

트럭 운전석에 앉은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양민호가 이마를 툭툭 쳤다.

아닌 게 아니라, 꽤 어마어마한 충돌이었다.

자신에게 미리 시전해둔 '로우 패닉'이라는 방어 스킬조차 모든 충격을 흡수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뭐, 본인이 이 정도라면 저놈은 도리가 없겠지.

"흐음...."

양민호는 핸들에 턱을 괸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반파된 승용차에선 역시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허무감이 몰려왔다.

저렇게 뒤질 거였으면서 그땐 왜 그렇게 허세를 떨었는지.

조금이나 뭐라도 있는 건가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양민호는 쯧, 혀를 차곤 트럭에서 내렸다.

위에 보고하기 위해선 어쨌든 확인은 해야 했으니. 물론 확인하나 마나이겠지만.

"어디 보자...."

승용차로 다가가 박살이 난 창문에 고개를 집어넣으려 했다.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그때 예상치도 못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양민호는 총알처럼 튕겨져 나가 허공을 날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리 난간에 부딪혔다.

"하, 하하...."

양민호는 몸을 추스르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의 시선이 반파된 승용차로 향했다.

콰직―!

"시발, 진짜 바빠 뒤지겠는데."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차 문을 박차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머리를 부여잡은 채 휘청거리는 남자.

김준우 본부장.

양민호는 진심으로 놀랐다.

저놈이 이능력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능력자도 기본적으론 인간이다.

그들이 강자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능력 때문이지, 신체 자체가 특별하거나 불멸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때문에 스킬이나 장비로 무장하지 않는 한 이능력자 또한 일반 사람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헌터들 또한 기습엔 쉽게 노출되는 것이고, 현장직은 그 틈을 노려 작업을 한다.

양민호 또한 여태껏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어느 헌터가 일상에서 스킬을 켜놓고 다니겠는가.

늘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 자신이 습격당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텐데.

하물며 저 새끼는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트럭을 들이받았다.

맨몸으로 버틸 수 있는 충격이 아니다.

분명히 그럴 터였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양민호는 김준우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김준우는 이내 상태가 회복된 건지, 어깨와 목을 빙빙 돌리며 뼈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양민호에게 정확히 날아들었다.

"야."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 살벌한 기세에 양민호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너, 내 눈에 한 번 더 띄면 죽여 버린댔지."

김준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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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가 사라진 던전.

어찌 된 상황인지 알 리가 없는 토벌대는 통신이 연결될 때까지 일단 잠자코 기다릴 생각이었다.

물론, 던전은 그들의 생각대로 내버려두지 않았지만.

[습득 스킬 : 발무]

촤악―.

"빌어먹을...."

검을 휘두르던 김민주가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좁은 통로.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토벌대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조금 전 진동으로 던전 내부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모조리 쏟아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습득 스킬 : 블리자드 라이즈]

[습득 스킬 : 아토믹 스피어]

쾅, 콰광―!!

토벌대의 스킬들이 정신없이 난무했다.

하지만 화력이 충분하진 못했다. 공간이 워낙 좁았기에 자칫 아군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보스 때까지 아껴두려고 했는데....'

상황을 바라보던 김민주가 혀를 찼다.

이내 크게 심호흡하며 눈을 감길 잠시.

[고유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김민주의 몸이 푸른빛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집중하며 흐름을 느끼던 그녀가 이윽고 검을 빼 들었다.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스윽―.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진 단 두 번의 검격.

투두두둑―.

눈앞에 있던 몬스터의 목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후우...."

김민주는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본 태세인 '육관음'에서 각기 다른 6개의 태세를 연계할 수 있는 각성 스킬.

그만큼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고,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가는 스킬이었다.

보스를 만나기 전까진 최대한 아껴둘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다시금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던전.

다들 긴장이 풀린 건지 자세를 축 늘어트렸다.

"긴장 놓지 마!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평소답지 않게 바짝 날이 선 그녀의 목소리에 작전팀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김민주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등 뒤는 막다른 길.

좁은 통로 때문에 전투도 쉽지 않은 데다가, 계속해서 물밀듯 쏟아지는 몬스터까지.

모든 상황이 최악이다.

무엇보다 점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남은 산소는 25%.

'고작해야 한 시간....'

이대론 안 된다.

"해봐야겠네."

김민주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예?"

"뭐, 뭘 말입니까."

"보스 토벌 말이야. 시도라도 해 보겠다고."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통신도 끊기고, 출구도 막혔는데 너무 무모한...."

"알아."

김민주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너희들은 여기 남아 있어. 만약에라도 출구가 열리면 바로 나갈 수 있게."

"그 말씀은...."

"나 혼자 간다."

단호한 목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결코 농담으로 생각할 순 없었다.

작전팀 소속의 헌터 한 명이 그녀를 잽싸게 말렸다.

"아, 안 됩니다! 레드 등급이잖습니까! 혼자선 자살행위입니다! 차라리 다 같이 가는 게...."

"다 같이 갔는데도 실패하면? 그땐 어떻게 할래?"

김민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도박할 필욘 없잖아."

"...."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막무가내 같은 모습에서 김준우 본부장이 겹쳐 보인 까닭이었다.

작전팀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더는 그녀를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어떤 두 명은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요."

아레스 길드의 차석현 대표 그리고 아프로디테 길드의 유지우 대표가 김민주 옆으로 다가왔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여기 있어도 딱히 살 것 같진 않은데. 하하하!"

"차라리 보스 얼굴이라도 보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요?"

차석현과 유지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김민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 역시 말린다고 말을 들을 상대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 모양이었다.

이윽고 세 명의 헌터가 선두로 나섰다.

그리고 때맞춰 전방에선 몬스터가 또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뚫어야겠죠?"

"제가 하겠습니다."

차석현이 즉답하며 전방으로 조그마한 로봇 강아지를 던졌다.

메카닉 클래스의 전용 무기.

스킬에 따라 온갖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는 트랜스 폼 웨폰이었다.

[고유 스킬 : 스팀펑크]

차석현이 스킬을 시전하는 순간, 로봇 강아지가 진화하기 시작하더니.

[트랜스 폼 : 펑크 독]

이윽고 개 형태의 커다란 증기 로봇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차석현은 익숙하게 등에 올라타곤 두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꽉 잡으시죠."

모두가 착석을 완료한 직후.

개의 입에서 증기가 터져 나오길 한 차례.

파앙―!

로봇은 가공할 속도로 통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인천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교 위.

아직도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미리 주변을 통제한 덕에 아무도 없었다.

딱 한 새끼.

정면에 있는 양민호를 제외하곤.

'저 새끼는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거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길 잠시, 나는 먼저 시계를 살폈다.

한 시간.

토벌대의 산소가 버텨주기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국제 협회와 딜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한다.

저 새끼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든, 여기서 시간을 더 낭비할 순 없다.

"내가 지금 좀 급해. 가게 내버려두면 오늘은 특별히 살려줄 수도 있어."

최대한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저도 나름 일하는 중이라서."

"누가 나 죽이라고 의뢰라도 했나 보네."

"알 만하신 분이 그런 걸 물어보네요. 이 바닥 밥그릇 지키려면 비밀 엄수가 생명인데."

"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곤 반파된 차에서 떨어져 나온 와이퍼를 주워들었다.

"청소부답게 쓰레기 하나 치우고 가지 뭐."

"우연이네요. 저도 별명이 청소부인데."

양민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양민호와 같이 작전을 진행해 본 적은 없다.

솔직히 그가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하는지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나마 아는 거라곤 클래스가 마법사라는 것뿐.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저격수 클래스와 성격이 비슷하다.

한곳에 머문 채로 원거리에서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는 포지션.

스킬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동시에, 어떻게 운용하냐에 따라 타 클래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물론, 스킬을 시전할 수 없는 거리까지 파고든다면 모두 무용지물이지만.

나는 와이퍼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이내 짧게 호흡하길 한 차례.

[습득 스킬 : 극초식 어검술]

"검사…?"

양민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팟―.

나는 양민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와이퍼가 시퍼런 궤적을 그리며 그의 목으로 날아갔다.

캉―!

생각지 못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방어막?'

아니 뭔 마법사가 이딴 최상급 방어 스킬을....

"상성이 너무 좋네요."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

동시에 내 옆구리로 레프트 훅이 날아들었다.

피해야 하나, 생각이 드는 그때.

그의 손에 장착된 글러브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쾅―!!

마법 스킬이 초근거리에서 직접 복부를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뒤로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윽...."

[습득 스킬 : 로우 실드]

[시전자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일부 방어합니다]

항시 켜두고 다니는 방어 스킬이 발동됐지만 모든 대미지를 막아주진 못했다.

이 정도면 아까 트럭이 들이받는 것보다 더 강한 충격이었다.

"후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다시 양민호를 바라봤다.

"전투 마법사였네?"

"...."

어떻게 알았냐는 듯 흠칫한다.

뭐, 흔하지 않은 고유 클래스니까 그럴 만도 하지.

전투 마법사 클래스.

일반적으로 원거리에서 광역 스킬을 시전하는 마법사와 달리, 신체에 스킬을 담아 육탄전을 벌이는 고유 클래스.

온갖 마법 스킬을 초근접 거리에서 터트리는 만큼,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법사 클래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없애버린 클래스.

당연히 순수하게 신체 능력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검사 스킬로는 상성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원거리 포지션으로 나설 수도 없다.

괜히 파고들 틈만 만들어 줄 뿐일 테니.

"쯧, 귀찮게."

다시금 와이퍼를 주워들었다.

***

양민호는 조금 전 공격으로 확신했다.

저 청소부 새끼,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다.

평범한 검사 클래스가 고유 스킬로 가지고 있을 법한 스킬을 습득 스킬로 쓰는 것부터 그랬다.

'무엇보다 내 클래스를 한 번에 알아본 것도 그렇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

어디서 주워 먹던 놈인지는 몰라도, 국내 랭킹 1위인 자신을 이길 순 없다.

보아하니 저놈의 클래스는 검사.

같은 근접 포지션이라면 지는 걸 생각하는 게 더 힘들다.

게다가 방금 공격을 당하고도 다시 무기를 주워드는 걸 보면 눈썰미는 있을지언정 전투 경험은 전무한 놈이다.

양민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상황이 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양민호는 오히려 순수하게 기뻤다.

일이 아닌, 사적으로 만나고 싶었던 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업무가 되어 버린 이상 심심하게 죽일 수밖에 없던 게 퍽 아쉬웠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얼마든지 사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빨리 끝낼 생각은 없다.

최대한 가지고 놀다가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것까지 봐야 수지가 맞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탓―!

김준우가 또다시 정면으로 돌격해왔다.

무기를 치켜들며 시전한 스킬은 '어검술'.

스윽―.

똑같은 패턴, 느려터진 공격.

'멍청하기 짝이 없네.'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아까처럼 막아 내고 바로 카운터를....

쩌적―.

'...!'

양민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수프림 미러에 금이 갈 정도의 충격.

처음 공격과는 확연히 다른 대미지다.

'설마 내 앞에서 힘 조절을 한 건가?'

양민호는 이를 으득 씹었다.

그리곤 곧바로 몸을 틀어 백스핀 엘보우. 동시에 직접 턱을 강타한 스킬.

[습득 스킬 : 라이트닝 블로우]

콰앙―!

제대로 들어갔다.

저건 못 일어난....

"아오, 턱 빠질 뻔했네."

"...."

뭐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또 일어나는 건가.

전혀 대미지를 받지 않았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건 그냥 허세를 부리는 거다.

양민호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편 김준우는 또다시 와이퍼를 치켜세웠고.

"뭐해, 막아."

탓―.

[습득 스킬 : 극초식 어검술]

벌써 세 번째 똑같은 패턴.

양민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마 맷집만 믿고 밀어붙이는 건가?

역시 출신은 어쩔 수 없는―.

쾅―!!!

"...?"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준우가 또다시 같은 스킬로 무기를 휘두른 직후, 양민호가 딱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하늘이 보인 것이다.

'뭐야…?'

양민호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몇 초가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이번에 나가떨어진 건 김준우가 아닌, 본인이라는 것을.

"하, 하하하...."

자동으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

"당신… 대체 뭡니까?"

양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여유도 없이, 그의 머릿속엔 온갖 잡념이 가득했다.

지금 검사한테 공격을 받았다고?

그것도 청소부 출신 검사한테?

국내 랭킹 1위인 내가?!

양민호는 안쪽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야, 이 개새―."

[습득 스킬 : 극초식 어검술]

보이지도 않았다.

또다시 시야가 하늘로 이동했고, 동시에 전신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꿈이라도 꾸는 듯한 느낌.

툭―.

이윽고 그의 몸뚱이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억!"

입에서 핏덩이가 쏟아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힘겹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김준우와 눈이 마주쳤다.

"꽤 버티네. 요령으로 국내 2위 먹은 건 아닌가 봐."

"2, 2위가 아니라… 1위...."

"아니. 넌 2위가 맞아."

김준우가 미소를 지었다.

"뭐 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살벌한 눈빛.

아니, 이번엔 진심으로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다시 막아봐."

그가 다시 와이퍼를 치켜세우는 순간.

[습득 스킬 : 한계돌파]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일시적으로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자, 잠...."

[습득 스킬 : 극초식 어검술]

양민호는 죽음을 직감했다.

072

072

텅 빈 대교 위.

"그러니까!"

그곳엔 내 목소리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왜! 바쁜 사람 붙잡고! 지랄이야! 지랄은!"

퍽, 퍽―

퍽, 퍽, 퍽―

나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양민호를 와이퍼로 개 패듯 패는 중이었다. 저항도 못 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패는 광경이라니.

누가 보면 내가 악당인 줄 알겠네.

"그, 그...."

"어어? 팔 내려. 뼈 나간다?"

"그만...."

"그만? 지가 먼저 들이받아 놓고 이제 와서 그만? 지랄을 해요 아주."

퍽, 퍽―.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주길 잠시, 이내 내 팔이 아파 올 지경이 돼서야 매질을 멈췄다.

보아하니 양민호는 이미 기절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와이퍼를 내려놓았다.

당연하겠지만, 명색이 국내 1위 랭킹 헌터가 와이퍼로 몇 대 때려줬다고 정신을 잃은 건 아니다.

이미 마지막 공격 때 입은 대미지로 한계였을 테니.

"X밥 새끼가...."

쯧, 혀를 차며 그를 내려다봤다.

사실 트럭에 받힌 직후엔 진심으로 열이 뻗쳐올랐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애초에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사적인 감정으로 행동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닐뿐더러, 자칫 일을 벌였다간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딱 죽기 직전까지만 패주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 새끼가 어디까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내가 알 게 뭔가.

때문에 여러 번에 나눠서 조금씩 힘 조절을 해야 했다.

'그나마 실력 있는 놈이라 다행이지.'

생각보다 잘 버텼다.

뭐, 정작 본인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이지만.

"어디 보자...."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차는 개 박살이 났고, 생각보다 시간도 너무 오래 끌었고. 아무래도 본부까지 갈 시간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젠 딱히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연결책이 제 발로 찾아와 준 셈이니까.

짝―.

"야."

기절한 양민호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다행히 바로 의식을 찾았다.

그가 희미하게 눈을 뜨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전화해."

나는 그 앞에 핸드폰을 툭 던졌다.

"...?"

"너한테 의뢰한 클라이언트한테 전화하라고."

"흐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어디서 모른 척이야, 뒈지려고. 야 이 새끼야. 그럼 이 타이밍에 니가 날 죽이려고 한 게 우연이라는 거냐?"

말도 안 되지.

누군가 던전을 조작하고 있는 이 상황에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날 습격한다?

이게 어떻게 우연이겠는가.

내가 걸림돌이 될 것 같으니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거면 몰라도.

던전을 조작하고 있는 누군가.

그리고 날 습격한 양민호.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빨리 전화 걸어. 어떤 새끼가 이딴 일을 꾸몄는지 목소리나 좀 들어보자."

"전화하는 건 상관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거기랑 엮이면 당신 절대 곱게는 못 죽...."

짝―.

"말이 너무 많다."

"...."

두들겨 패서라도 확인을 해야지.

양민호는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연결음.

「잘 처리했어요?」

수화기 너머로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근데 목소리가 어째 익숙한데....'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어. 잘 처리했어."

「...!」

"니들 정체가 뭐야. 진짜 국제 협회 소속이냐?"

발랄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한껏 긴장된 침묵이 반대편에서 느껴졌다.

참 나, 이제 와서 무슨.

"원하는 게 뭔지 말을 해봐. 이유도 없이 이딴 짓을 벌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

"...그래. 묵비권 좋지."

팍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 벽이랑 말하는 것도 아니고.

기대도 안 했지만, 좋게 대화로 푸는 건 단념해야 할 듯했다.

다시 와이퍼를 들었다.

콱―!

"끄아아악!!"

양민호의 허벅지에 내리꽂았다.

"이 새끼가 입을 여는 게 빠를까, 아님 네가 대답하는 게 빠를까."

「....」

와, 이래도 말을 안 해?

아니, 이럴 거면 전화는 왜 붙들고 있는 거래.

"흐음...."

어쩔 수 없지.

먼저 이쪽 패를 보여 줄 수밖에.

"알았어, 그럼 나 혼자 얘기할게. 그쪽은 그냥 듣기만 해."

나는 양민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테니까.

"자, 내 추측은 이래. 누군가 차원석을 이용해서 던전을 임의로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국제 협회, 혹은 그와 관련이 깊은 어느 조직이다."

「....」

"그런데 그 조직이 대체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벌일까.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밖에 안 떠오르더라."

잠시 말을 끊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니들, 시간석 노리고 있지?"

「...상상력이 꽤나 풍부하시네요.」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계속 들어.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뱅크 아이템은 협회 간 양도가 불가능. 그런 물건을 얻으려면 무력을 써서 뺏어가거나 협회를 통째로 인수하는 방법밖에 없지. 하지만 무력을 썼다간 니들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야."

핸드폰을 바꿔 쥐며 말을 이었다.

"우리를 상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것을 위해 던전을 열어 우리 소속 헌터를 대거 처리하려고 했다. 어때. 그럴싸해?"

「...당신, 대체 뭐야.」

"오늘따라 그 소리 되게 많이 듣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 시발, 누군지도 모르면서 죽이려고 한 거야?"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순간 진심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화를 내봤자 뭐하겠는가.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튼, 그건 둘째 치고... 좋은 말로 할 때 던전 다시 열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그쪽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푸욱―.

"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

"너, 이 새끼 입에서 니들 정체가 안 나올 거란 자신 있어?"

「....」

"던전만 다시 열어.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해 줄 테니까. 만약 10분 내로 열지 않으면...."

다시금 분노를 삭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찾아간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전할 건 모두 전했다.

이 정도면 내 진심이 전해졌으리라 믿으며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

"니들 혹시 괴담에 나오는 걔네들이냐? 거슬리는 놈들 다 죽여 버린다는 국제 협회 산하 비밀 조직...."

뚝―.

"...."

거 대답 한 번 친절하네.

"흐흐, 흐흐흐...."

"이런 상황에서도 잘도 웃네. 아직 덜 맞았나 봐?"

"당신 지금 누굴 건드린 건지나 알아요?"

고통에 버둥거리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민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당신 주변까지 전부 좆 된 거야."

"...."

나는 양민호의 등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여전히 나자빠져 있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조금이라도 엮인 순간 당신은 이미 끝난...."

"상관없어."

"...?"

"내가 몇 달 전부터 존나게 찾고 있던 새끼가 있었거든? 근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요즘엔 아예 잊고 있었단 말이야?"

핸드폰을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찾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PB코퍼레이션,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늘 엄숙했던 평소와 다르게 꽤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니, 어수선하다기보단 단체로 패닉 상태였다. 그 어느 누구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까닭이었다.

"일단 위치 추적 못 하게 방해전파부터 흘려!"

"이미 번호가 노출됐습니다!"

"당장 USIM 폐기하고, 데이터 전부 리셋해!"

"저, 팀장님?"

그때 팀원 중 한 명이 클로이에게 다가왔다.

"이, 이제 어떡합니까? 번호가 노출된 건 그렇다 쳐도, 현장직이 붙잡힌 이상 정체를 발설할 가능성이...."

그에 대해서는 클로이 또한 쉬이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사실 던전이 닫히자마자 김준우가 국제 협회를 의심하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그의 정보력과 판단력이라면 다른 사람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단번에 파악해낼 테니까.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취하긴 했을 거다.

다만 연락을 해도 국제 협회 본부에 하겠지, 설마 여길 직통으로 뚫을 줄이야.

"양민호, 이 머저리가 진짜...."

클로이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한 나라의 랭킹 1위라는 놈이 청소부 하나 처리 못 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PB코퍼레이션의 제1 수칙인 보안까지 무너뜨리다니.

절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겠지.

'일단 그건 둘째 치고....'

클로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 새끼의 처분이 아니다.

김준우 본부장이 알아버렸다.

추측이라고 지껄인 것들이 죄다 적중했다.

설마 우리 조직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거기까진 아니다. 굳이 괴담 속 조직이냐고 확인한 거로 봐선.

그러니 늘 그렇듯 입 꾹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양민호가 그놈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녀석이 PB코퍼레이션에 대해 한 마디라도 지껄이는 순간, 대표 아래에 모든 직원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처음 '괴담'을 퍼트린 놈 때문에 실제로 PB코퍼레이션의 모든 직원이 물갈이됐었던 걸 생각하면 더욱이 그렇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김준우를 무시하고 시간석 회수를 속행하느냐.

아니면 이제라도 작전을 취소하고 보안을 유지하느냐.

클로이는 남은 4분 안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찾아오겠다는 말은 단순히 허세를 부린 걸 수도 있다. 아니, 허세가 아니라도 진짜 자신들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양민호도 나름 밸런스 조정팀 소속이다. 어쭙잖은 고문에 입을 열 놈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당연히 무시했을 것이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쾅―!

"빌어먹을!"

그녀 앞에 있던 책상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온갖 욕설을 내뱉길 잠시.

"...거기 너."

그녀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팀원을 불렀다.

"지금 당장 밸런스 조정팀한테 연락해서 김준우 서울 본부장 1순위 타깃으로 올리라고 하세요. 그 인간 주변 감시 레벨도 같이."

"주변이라고 하시면 어디까지...."

"싹 다! 작전팀이든 청소팀이든, 그 인간이랑 엮인 것 같으면 전부 감시 들어가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클로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어렵게 떼며 말했다.

"...차원석, 다시 가동하세요."

073

073

수중 던전 어딘가 어두컴컴한 통로.

산소가 10%쯤 남았을 무렵, 김민주와 차석현 그리고 유지우는 간신히 보스를 찾을 수 있었다.

그르르르―.

커다란 공간.

그 안에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는 거대한 생물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씨...."

눈앞의 생물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차석현 길드장이었다.

눈에 전부 담기지도 않는 크기였다.

30m? 아니, 50m쯤?

수만 개의 비늘로 덮여 있는 길쭉한 몸뚱이.

사람 엿 대 명은 한 번에 꿀꺽할 수 있을 크기의 대가리와 서슬 퍼런 눈.

몸 전체에 돋아난 거대한 가시들은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보였다.

"...돌아갈까?"

유지우 또한 그 압도적인 모습에 당황한 미소를 지었다.

차석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저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 들지 않았다면 말이지.

"산소가 얼마 없어요. 최대한 빨리 진행할게요."

"자, 잠...."

차석현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보스를 향해 무덤덤하게 다가가는 그녀의 등에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단 세 명으로 레드 등급의 보스를 토벌한다?

누구라도 코웃음을 칠 이야기다.

하물며 국내 랭킹 2위인 자신이 봐도 그렇다.

가망?

애초에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턱없이 부족한 전력에 산소도 모자라다.

심지어 보스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다.

그저 절망적인 상항.

이 상황에서 저 여자는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가망 수준이 아니지.

지금 저 여자는 확신하고 있다.

100% 토벌할 수 있다고.

'저 인간도 정상은 아니네....'

듣자 하니 그 본부장과 사제관계라 했던가?

참으로 그 선생에 그 제자군.

차석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에휴, 모르겠다."

그는 결국 옅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품 안에서 자신이 가져온 수십 개의 로봇 강아지를 모두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스팀 펑크 - 각성]

단신으로도 웬만한 길드급 전력을 낼 수 있는 메카닉 클래스의 스킬이자 차석현의 트레이드마크.

[혁명 군단]

철컥, 철컥―.

로봇 강아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수십 개의 커다란 증기 골렘들.

차석현을 국내 랭킹 2위로 만들어 준 그의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고에 있는 탄환 싹 다 가져올걸."

유지우는 아쉬움을 삼키며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철컥―.

본인의 스킬에서 따온 특수 제작 저격총, 아르테미스.

곧바로 자세를 낮춰 은은하게 빛나는 총구를 보스를 향해 정확히 겨냥했다.

"후우...."

김민주가 깊게 심호흡했다.

이빨을 드러낸 이무기 앞에서 검을 고쳐 쥐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전신을 따라 오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순간.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그녀의 붉게 물든 눈빛이 번뜩였다.

***

처음부터 예상했듯, 쉽지 않았다.

카아아악―!

전신이 뒤틀리는 듯한 포효.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정신을 잃을지도 몰랐다.

보스가 움직일 때마다 던전 전체가 흔들렸고, 휘두르는 꼬리와 달려드는 머리에 한 번이라도 맞았다간 그대로 절명할 수준이었다.

지이잉―.

"피, 피해요!!"

콰과광―!!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위력의 저 브레스.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 사지 중 몇 개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김민주는 공간 전체를 활용해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붉은 안광이 채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진한 잔상을 남겼다.

물론 피하기만 할 순 없었다.

무리해서라도 파고들어야 했다.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길 한 차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스윽―.

이무기의 턱밑까지 단숨에 파고들어, 정확히 목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캬아아아아―!

하지만 그 거대한 놈을 한 번에 베어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베긴커녕 검이 비늘에 깊게 박혀버렸다.

순간 당황한 김민주가 주춤하던 찰나, 이무기의 입이 그녀의 코앞에서 쩍 벌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탄환 - 보름]

[장전 확인]

탕―!

유지우의 탄환이 이무기의 왼쪽 눈을 정확히 관통했다.

끼에에에―!!

이무기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김민주는 그 틈에 비늘에서 검을 뽑아냈다.

[혁명 군단 - 집중포화]

탕탕탕탕―.

쾅, 콰광―!

직후 증기 골렘들의 총탄과 대포가 사정없이 빗발쳤다.

하지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순 없었다. 그저 보스의 시선을 끌고 김민주가 공격할 틈을 벌어줄 뿐.

유지우의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씩 박히는 강력한 탄환은 매번 조금씩 틈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김민주의 검은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흩날렸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경험과 감각. 오로지 그 두 가지에 의존하여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나갔다.

그렇게 이어진 수십 번의 공격.

어느덧 바닷속은 보스가 흘린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허억, 허억...."

김민주는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모든 전력을 쏟아 낸 만큼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능하다.

이대로라면 정말 토벌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젠장, 시야가....'

산소가 거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몸을 가누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고 있다.

더는 오래 끌 수 없다.

이번 공격으로 끝을 봐야 한다.

"유지우 대표님."

김민주가 가쁘게 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네."

"5초 정도만 틈을 만들어 주세요."

"...5초면 가지고 있는 탄환 다 때려 박아야 해요."

"그렇게 해주세요."

"...알았어요."

"차석현 대표님은 저 비늘 좀 벗겨주세요. 가능하시겠죠?"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지금 있는 로봇들을 전부 폭파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더 이상 전투를 할 수가...."

"괜찮습니다."

김민주가 검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끝장낼 거니까."

정적이 흐르는 보스 방.

수십 번의 공격에도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보스가 다시금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 각성]

유지우가 탄띠에 있던 탄환을 모조리 총기에 쑤셔 넣었다.

[탄환 - 초과]

[과다 장전]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픽―.

카아아아악―!!

소리 없이 발사된 탄환이 이무기의 머리에 명중했다.

[혁명 군단 - 거사]

철컥, 철컥―.

틈을 놓치지 않고 증기 골렘 전원이 보스에게 달라붙었다. 이내 붉게 발열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로봇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동시에 김민주는 눈을 감았다.

[천수관음 - 각성]

유지우는 모든 탄환을 소모했고, 차석현의 트랜스 폼 웨폰도 모조리 터져 나갔다.

[육관음중외(六觀音中外)]

[접신 - 관세음(觀世音)]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여기서 끝내지 못하면... 죽는다.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쿠구구구―.

줄곧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던 기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동시에 주변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차석현과 유지우는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김민주의 모습은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검을 쥐고 발을 뗀 그 순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푹 쏠렸다.

턱, 무릎이 땅에 처박혔다.

산소는 이미 진작에 바닥이었다.

그런데도 집중하느라 너무 많은 호흡을 소비했다.

'제발, 움직여…!'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지만.

털썩―

결국, 그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그 순간, 헬멧에선 두 명이 소리치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

눈앞엔 어느새 달려든 이무기의 거대한 이빨이 보였다.

'...끝났네.'

그렇게 의식을 잃어가는 김민주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습득 스킬 : 전능]

순백의 거대한 창이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은 끊겼다.

쿵―.

동시에 거대한 머리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김준우의 입가에서 공기 방울이 뽀르륵, 새어 나왔다.

슈트도 없는 맨몸.

말도 안 되는 위력의 일격.

차석현과 유지우는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한국 협회, 여의도 행정 본부.

멍청하게도 협회장을 통해 이사회를 소집시켜놨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한창 현장 정리를 하던 중에 문득 그 약속이 떠올랐고, 이내 곧바로 여의도로 달려왔지만....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헐레벌떡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동시에 이사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중 단연 으뜸은 이두식 기획본부장이었다.

"야, 임마! 바쁜 사람들 불러 놓고 몇 시간을 늦는 거야?!"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이라도 하던...."

하지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너 왜 이렇게 흠뻑 젖었어? 밖에 비와?"

"아뇨. 수영을 좀 하고 와서."

"...?"

그의 눈썹이 물결쳤다.

"얼굴은 또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냐?"

"뭐…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상석에 앉아 있는 박인범 협회장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넸다.

그러자 협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작전은 어떻게 됐나."

"토벌은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단 세 명이 보스를 잡았더군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이사들 또한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김민주 팀장을 제외하곤 부상자도 없습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고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협회장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론을 얘기해봐. 국제 협회랑 한바탕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주변 분위기를 살피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에서 제 부하들이 국제 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뭐?"

"제 생각으로는 한국 협회를 상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회의실이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협회장을 포함해 모든 이사가 입을 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국제 협회와 연관된 다른 조직 같은데, 자세한 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

말끝을 흐리곤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어쨌든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위험하긴 했지만, 다행히 저희도 피해를 입진 않았고요. 덕분에 그들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습니다. 그건 다시 말해 또 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죠."

그것도 훨씬 치밀하게 준비해서 말이지.

"...확실한 건가? 우리를 공격한 게 국제 협회라는 거."

"유감스럽게도 증거는 없습니다."

"심증뿐이라는 거군."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어떻게든 이후를 대비해야 할 겁니다. 다만...."

"지금 우리 상황으론 국제 협회까지 견제할 여건이 안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와 협력업체 체결을 맺었다고 해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작전 전력일 뿐, 그 외적으론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미 우리는 국제 협회의 타깃이 됐다.

시간석을 가지고 있는 한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걸 알면서도 당해줄 만큼 호구 새끼는 아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없다.

그놈들의 목적을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맞받아칠 준비를 해야 한다.

"앞으로의 공격에 대응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몸집을 더욱 키워야겠지만... 이 작은 땅덩어리 안에선 아무리 몸집을 키워봤자 한계가 있겠죠."

"그렇긴 하지. 독립 협회 중에선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해도 결국엔 독립 협회니까."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몸집을 키우겠다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협회장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해둔 바를 입에 담았다.

"해외로 나가야죠."

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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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사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들이었고, 그건 협회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외로 나간다는 건 그러니까...."

이윽고 협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독립협회를 인수해서 지부로 두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

기가 차다는 듯 탄식이 돌아왔다.

사실 지금 상황엔 선택지가 별로 없다.

국제 협회에 선제공격을 가하든가.

아니면 최대한 많은 아군을 만들어 방어망을 굳히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오늘같이 공격을 당하든 말든 그냥 멍청하게 가만히 있든가.

현실적으로 선제공격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멍청하게 두들겨 맞는 건 내가 용납을 못 한다.

그럼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최대한 많은 아군을 만들어 대비한다.

나는 그걸 국내에서 해외로 확장했을 뿐이다.

우리가 다른 독립협회를 인수해서 해외에 지부를 둔다면 국제 협회를 견제할 수단이 생긴다.

우리를 건드리면 다른 협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심어주는 셈이니.

뭐, 물론.

"자, 잠깐만요! 독립협회인 저희가 해외에 지부를 두는 건 명백히 국제 협회에 대한 도발입니다!"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이건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적으로 돌리는 겁니다!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김우배 이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변을 토로했다.

"저희가 다른 독립협회를 인수하기 시작하면 국제 협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한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협회장님!"

그 뒤를 이어 다른 이사들 또한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한편 협회장은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퍽 답답했던 건지, 김우배 이사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애초에 말입니다. 국제 협회가 저희를 공격했다는 소리를 정말로 믿으시는 겁니까? 증거도 없이 심증뿐이지 않습니까!"

"...."

"협회장님! 고민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번 사안은 도를 넘었습니다. 해외 진출은 절대 안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부 출신의 헛소리를...."

"뭐?"

순간 협회장의 시퍼런 눈빛이 김우배 이사를 관통했다.

강 건너 불구경 중인 나조차도 흠칫하게 만드는 위압감이었다.

"지금 네놈을 그 자리에 올린 게 저 청소부 출신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그, 그건...."

말끝을 흐리는 김우배 이사.

그리곤 어째 내 눈치를 살핀다.

"아, 아무리 그래도 국제 협회에 대놓고 도발하는 건 너무 위험...."

"김준우 본부장."

협회장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자르며 나를 불렀다.

"예."

"이사들 말이 맞아. 자네의 심증만으로 국제 협회를 적으로 돌리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 하물며 해외 진출은 더욱이 그렇고. 자칫하다간 역풍을 맞아 우리 쪽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어."

날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꽤나 날카로웠다.

그걸 내가 모를까.

나 또한 웬만해선 국제 협회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기구를 건드려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무엇보다 내 목표가 국제 협회 사무총장인 이상,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나로서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앞에서 대놓고 개수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그걸 모를 리 없는 자네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는 건... 그럼에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예."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아."

이내 협회장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협회가 날아가든 말든 그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어디 자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혀, 협회장님!"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하실 문제가…!"

"난 처음부터 그 새끼들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서 한국 협회도 독립으로 세운 거고. 근데 시벌, 이젠 하다 하다 그놈들 때문에 내 부하들이 싹 다 뒈질 뻔했다는데...."

그의 시선이 이사들에게로 향했다.

"국제 협회고 나발이고, 가만히 있는 게 병신 아니냐?"

"...."

"...."

이사들은 협회장의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을 아꼈다.

"해외 지부든 뭐든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 우릴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라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곤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이번 건을 맡아주실 분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제가 진행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협회장님과 약속했던 날짜가 다 돼서."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본심은 전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약속했던 한 달도 거의 끝나간다.

며칠 남지도 않은 기간 동안 일을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을 테니, 당연히 다른 사람이 맡는 게....

"에이, 그래도 말 꺼낸 사람이 하는 게 맞지."

이두식 이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예? 아, 아니 저는...."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작전 본부장이 맡는 게 맞지. 설마 일만 저지르고 내뺄 생각은 아니지?"

"저도 동의합니다."

"아, 아니 그러니까 퇴사 날짜가...."

이두식 이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말게. 그 정도야 협회장님이 융통성 있게 처리해주실 테니. 그렇지 않습니까, 협회장님?"

협회장이 날 지그시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씨익 웃는다.

"암, 어디 가서 꼰대 소리 안 들으려면 이런 건 또 융통성 있게 해줘야지."

"...."

"그런 고로 한 달만 더 해라."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입을 꽉 다물어야 했다.

***

서울 본부, 작전 본부장실.

"빌어먹을 놈들...."

한숨을 팍 쉬며 의자에 몸을 던졌다.

동시에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결국, 내 퇴사는 한 달 뒤로 미뤄졌다.

'시발, 진짜....'

거 나간다 그럴 때 곱게 좀 보내줄 것이지, 대체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생각인가.

나는 깍지를 끼곤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말을 꺼내놓고 정작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한 건 물론 귀찮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 내 상황으로선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괴담 속에만 존재하던 조직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황상 전생에서 날 죽인 것도 그놈들이겠지.

사무총장은 사무총장이고, 어쨌든 날 이렇게 만든 국제 협회 놈들에게 복수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 뭔지,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상, 내 쪽에서 그들을 먼저 찾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쪽에서 나를 찾아오는 거면 몰라도.

습격도 실패했고 덩달아 정체까지 노출되지 않았던가. 그들로선 언젠가 반드시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애초에 그러라고 양민호를 풀어줬다.

어쩌면 전생에서 내 머리에 '타이탄'을 박아 넣었던 그 새끼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뭐, 그놈이 직접 행차해준다면 나야 너무 고맙겠지만....

'그것도 나 혼자 있을 때 얘기고.'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 100여 명의 헌터를 죽이려고 했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나만 노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에게 접근하기 위해 내 부하들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럴까 봐 내가 습격당했다는 사실도 함구했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다른 놈들은 그 조직에 대해선 모르고 있는 편이 신상에도 좋을 테니.

헌터 등록은 생각할 것도 없이 기각. 괜히 저쪽에 정보만 주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 내가 계속 협회에 남아 있는 한 반드시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그건 작전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도 마찬가지겠지.

최악의 경우, 정말로 누군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에휴.... 김준우 많이 죽었네. 나랑 상관도 없는 놈들 걱정을 다 해주고.'

어쨌든 이번 일만 끝나면 협회를 나와 혼자 움직일 생각이다.

협회장도 그런 낌새를 어렴풋이 눈치챈 건지, 이번 건만 잘 처리하면 퇴사해도 된다고 했다.

덧붙여 나갈 땐 나가더라도 교범 하나는 만들어두고 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말이지.

뭐, 그렇게 나오면 나로서도 더는 거절할 순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처음 한 번만 진행하면 보내준다는 거니까.

'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년에 무슨 해외 출장이냐....'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신 구시렁대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본부장님?"

신수지 보좌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탁하셨던 베트남 독립협회 현황 분석 자료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서류를 건네주며 물었다.

"출국은 언제 하실 건가요?"

"이번 주 안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모레쯤으로 비행기표 예약해두겠습니다. 아, 혹시 동행하실 분이 있나요?"

"생각해보고 오늘 안으로 다시 말씀드리죠."

"네. 아, 그리고...."

신수지 보좌관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방금 외상 병동에서 연락이 왔는데, 김민주 팀장이 의식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가보지 않으셔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거의 죽을 뻔하셨는데 한 번은...."

"안 죽었잖습니까. 그럼 됐죠."

"...."

자꾸만 정수리에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드니 그녀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에휴... 그렇게 보지 마십쇼."

나는 서류를 턱, 덮으며 말했다.

"이미 갔다 왔으니까."

***

헌터지원팀, 중증 부상 관리 병동.

방금 막 의식을 찾은 김민주는 꽤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무릎 위에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바구니 안엔 대충 접은 쪽지까지 들어 있었다.

김민주는 주변을 먼저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레 쪽지를 펼쳤다.

[산재로 얼마를 빨아먹는 거냐. 한 번만 더 다치면 진짜 해고다.]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누군지 이름이 적혀 있진 않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미 알 것 같은데.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이야, 우리 팀장님 멀쩡하시네!"

"언니! 괜찮아요?!"

"거 좀 들어갑시다! 왜 문에서 길을 막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청소팀의 한상혁과 문소연. 그리고 같이 토벌을 진행했던 차석현과 유지우 길드장까지.

병실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언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벌써 몇 번째에요, 이게!"

"쉬엄쉬엄 하십쇼, 누님! 은퇴 후도 생각하셔야지. 젊을 때 몸 망가지면 나중에 고생하신다니까?"

문소연과 한상혁이 말했다.

김민주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결국 제대로 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마지막에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병실이 아니라 영안실에 있었겠지.

아직도 한참 멀었다.

대체 언제까지 도움을 받을 건가.

그 분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근데… 팀장님 진짜 A랭크 맞습니까?"

차석현이 넌지시 물었다.

"예, 예?"

"그 왜, 토벌 때 말입니다. 팀장님 거의 S랭크에 가까운 전투력이었습니다. 이거 랭킹 시스템에 오류 있는 거 아닙니까?"

"산소만 부족하지 않았다면 민주 씨가 토벌했을 거예요."

유지우 길드장이 거들었다.

"내 말이! 본부장님이 도중에 끼어들어서 그렇지, 실질적으론 팀장님이 토벌한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본부장님이요...?"

"아, 예 뭐."

차석현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우리가 한창 전투 중일 때 던전이 열렸다나 봅니다. 그때 대원들한테 우리가 토벌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본부장님이 바로 달려온 거라던데."

김민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토벌 끝나고 본부장님이 묻더군요. 이거 누가 지시한 거냐고. 그래서 김 팀장님이 지시한 거라고 했죠."

"...뭐라 하시던가요?"

"잘했다고 전해달래요."

유지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병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김민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떠세요."

신수지 보좌관이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기대했던 이가 아니었기에, 김민주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고 있자니 신수지 보좌관이 무언가를 건넸다.

비행기표였다.

"이건...."

"이번에 본부장님이 해외 출장을 나가시거든요. 출국은 내일모레. 미리 짐 싸놓으시라고 전해달래요."

갑작스런 이야기에 김민주는 퍽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하고 황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확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 한유빈 팀장도 같이 갈 거예요. 참고해주세요."

"...."

물론 좋은 감정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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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PB코퍼레이션 본부,

이른 아침 사무실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

그곳엔 에마 대표를 비롯해 각 팀의 팀장들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클로이 팀장은 이미 한참 전에 보고를 마쳤지만, 사무실엔 여전히 침묵만이 흘렀다.

팀장들은 계속해서 에마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조직의 실세라 불리는 밸런스 조정팀의 마르크 팀장도 이번만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조차도 대표가 저렇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숨쉬기조차 힘들던 침묵을 깨고, 에마 대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서울 작전 본부장한테 노출됐다?"

"죄송합...."

[습득 스킬 : 핑거 피스톨]

탕―.

에마 대표의 검지에서 총성이 울렸다.

리펄서 빔이 클로이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지만, 클로이는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물론 다리에 힘이 풀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클로이는 이를 악물며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난 말이에요. 내 신뢰를 저버리는 놈들을 제일 싫어해"

모두가 바짝 긴장한 가운데, 에마 대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클로이 팀장은 내 신뢰가 별로 대수롭지 않았나 봐? 난 나름대로 클로이 팀장을 믿고 맡긴 건데. 어떻게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죄송합니다."

클로이 팀장이 피가 질질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대답했다.

"후...."

에마 대표가 이마를 짚으며 길게 숨을 늘어뜨렸다.

도저히 화를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석 회수는 또다시 실패.

괜히 합법적으로 나가겠다고 추진한 적대적 인수합병은 결국 그 청소부 놈한테 꼬리가 잡혔고, 한국 랭킹 1위라고 떵떵거리던 양민호는 개박살이 났다.

그 결과, 조직의 존재까지 노출되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에마 대표는 감도 잡지 못했다.

'사무총장님이 아시면 모가지 몇 개는 내놔야겠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본인이 먼저 알게 된 건 클로이 팀장한테도 다행인 일이었다. 이 보고가 사무총장 귀에 들어갔다면 어깨에 구멍만 나는 거로는 안 끝났을 테니까.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떡하겠어요. 앞으로 잘해야지 뭐."

에마 대표는 이마를 꾹꾹 눌러대던 끝에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때 밸런스 조정팀장, 마르크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저희에 대해서 알아버린 이상 그 청소부 놈은 되도록 빨리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처리는 개뿔. 보기 좋게 실패해놓고 그런 말이 또 나와요?"

"이번 건은 클로이 팀장이 제 일도 아니면서 욕심을 부리다가 화를 입은 겁니다. 원래 밸런스 조정 업무라는 게 현장직에 일을 맡긴다고 다 되는 게 아닌데 말이죠."

"그 말은, 당신이 진행했으면 달랐을 거라는 소린가요?"

"예."

마르크 팀장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눈빛에서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에마 대표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됐어요. 지금은 때가 아니야."

"…예?"

"그놈도 생각이 있으면 우리한테 습격당했다는 걸 이미 주변에 다 알리지 않았겠어요."

"설마 그 말을 믿는 놈이 있겠습니까."

"없겠죠. 근데 그놈이 진짜 죽어버리면 그땐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을걸?"

에마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에, 마르크 팀장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지금 움직이는 건 우리 정체에 확신만 실어줄 뿐이에요. 뭐,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자세한 정보까진 새어 나가지 않은 것 같고. 지금은 일단 숨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 그럼 시간석은 어떻게...."

이번엔 토벌권 회수팀장, 케인이 물었다.

"그러게요. 계속 내버려둘 수도 없고...."

에마 대표는 미간을 좁혔다.

"일단은 둡시다. 꼬리가 드러난 이상 더 움직이기도 좀 그러니까요. 아이템 회수 건은 잠깐 내려놓고, 독립협회 흡수 건부터 먼저 진행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견은 없었다.

조금 돌아가는 거긴 해도 지금 상황에선 그게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으니.

어쨌든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팀장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클로이 또한 힘겹게 사무실을 나섰다.

대표 홀로 남은 사무실.

멍한 시선으로 텅 빈 책상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문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청소부 출신의 아시안 한 명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심히 어처구니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명색이 국제 협회 소속의 비밀 기구가 청소부 한 명에 놀아나는 꼴이라니.

에휴.

에마 대표가 옅은 한숨을 뱉으며 쓰게 웃었다.

"청소팀을 다 없애버려야 하나."

그녀가 턱을 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지원팀, 헌터관리실.

"한국 협회 이름으로 해외 진출을 한다라...."

이사회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이아영 실장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동맹 협약이 아니라 아예 독립협회들을 인수하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잘만 하면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2의 국제 협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 실패하면 우린 전부 백수 신세가 되겠네요."

"네. 퇴직금은 꿈도 못 꾸겠죠."

파하, 웃음을 터트린다.

"뭐, 당신다운 스케일이네요. 전 마음에 들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자리는 알아보고 계십쇼."

"에이, 저 백수 되면 당신이 책임지겠죠. 뭐."

"...."

"...농담이니까 표정 풀어요."

나도 모르게 정색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 협회의 영광스러운 첫 번째 지부가 될 곳은 어디예요?"

이내 이아영 실장이 다리를 꼬며 물었다.

"베트남입니다."

"음, 괜찮네요. 그쪽은 협회가 설립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아직 작전 인프라도 미흡하다고 하니… 조건만 잘 맞춰주면 해볼 만하겠어요."

"뭐, 조건이라고 해봤자 결국 돈일 텐데, 사실 남아 있는 예산이 얼마 없습니다. 제가 이번 작전에 다 때려 박는 바람에."

"...."

가만히 눈을 끔뻑인다.

지금 뭘 들은 건가 싶은 표정.

"그, 그럼 뭘 어떻게 인수하겠다는 거예요?"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이아영 실장이 기가 차다는 듯 눈을 일자로 뜨고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괜히 또 잔소리가 날아올까 싶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일단은 가서 생각해봐야죠. 어차피 전 이번 베트남 건만 진행하고 퇴사할 건데, 또 예산을 끌어다 쓰는 건 너무 염치없기도 하고요."

"…포문만 트겠다는 거예요?"

"예. 나머진 제 후임께서 잘해주겠죠."

"글쎄요. 누가 해도 당신만큼은 못할 것 같은데."

쓸데없이 고평가네.

제정신만 박혀 있다면 원숭이를 데려다 앉혀놔도 그만인 자리인데 뭘.

"그나저나... 그러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월급날은 겁나 안 오면서 꼭 이럴 땐 시간이 빨리 가더라."

어째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노골적으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

덕분에 분위기가 퍽 어색해졌다.

숨이 턱턱 막혔기에,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 아무튼… 이아영 씨는 저 나가기 전에 시간석 연구나 성과를 좀 내주시죠. 나갈 땐 나가더라도 얘기는 좀 들어보고 싶으니까."

"…엥? 자, 잠깐!"

이아영 실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리곤 웬 헛소리를 내뱉었다.

"...뭔 소립니까. 갈 사람 이미 다 정해졌는데."

"뭐, 뭐라고요? 아니, 이런 사업에 날 안 데려가는 게 말이 돼?! 내가 그동안 사무적으로 도와준 게 얼만데!"

맞는 말이긴 하다.

협회 돌아가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이다. 당연히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인 것도 사실.

이아영 실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긴 했지만....

"그쪽은 연구 때문에 바쁘지 않습니까. 괜히 부담 주는 거 같아서 뺐습니다."

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연구 결과는 받아봐야 하니까. 괜히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

"그걸 변명이라고.... 그래서 누구랑 가는데요?"

"김민주 팀장이요."

"참 나, 그분은 안 바쁘대?"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잖습니까. 요즘 좀 무리하기도 했고. 휴가 보내준다는 생각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어차피 일은 내가 다 하게 될 테니."

이아영 실장이 작게 신음했다.

그리곤 날 노려보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가요?"

"한유빈 팀장도 같이 갑니다. 왜요?"

"그럼 됐어요."

"...."

"가요, 이제."

이젠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아니, 그렇게 가고 싶으면 본인 돈 내고 가든가.'

원래부터 정상이 아닌 건 알았는데, 어째 더 맛탱이가 갔네.

나는 혀를 차며 관리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조금 전 이아영 실장이 했던 말을 되짚었다.

'제2의 국제 협회라....'

나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부담이 너무 컸다.

전 세계 협회의 절반을 쥐고 있는 국제 협회를 무너뜨린다는 건, 다시 말해 전 세계 절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뜻이니까.

물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국제 협회를 세우고, 거기에 사무총장으로 오르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만. 업보라는 놈이 그걸 인정해줄지도 미지수고.

뭣보다 그렇게까지 가는 건 너무 귀찮고.

지금은 그저 해외 지부 몇 개만 견제 수단으로 만들어두는 게 가장 베스트다.

그놈들이 선을 넘지만 않으면 말이지.

'그나저나 정말 예산이 문제네....'

당연하겠지만, 협회 하나를 인수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중고 거래도 아닌데, 뻔뻔하게 이 금액에 맞춰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그때.

"어?

"엥?"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쳤다.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니까요.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설마 본부장 됐다고 이제 우리랑 안 놀아주는 거냐."

사실 대규모 인터셉트 때 한 번 봤으니 오랜만이라고 해봤자 2주밖에 안 됐지만, 그럼에도 문소연과 한상혁은 호들갑을 떨었다.

"좀 많이 바빴습니다. 쉴 틈이 없네요."

"역시 그렇죠?"

"그럼 그냥 때려치우고 다시 청소팀으로 오는 건 어때?"

한상혁의 농담에 문소연도 그거 좋네, 하며 쿡쿡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어떻게, 요즘 작업은 할 만하십니까?"

"말해 뭐 하겠어요. 인원도 빵빵하고 장비도 좋고. 게다가 다른 팀 분들도 많이 신경 써주시고 있고요. 이것보다 좋을 수가 없죠."

"무엇보다 요게 많이 올랐잖냐."

한상혁이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그리며 말했다.

"솔직히 이 일 하면서 이 정도까지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다 누구 덕이겠어요. 히히"

한상혁은 내 앞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나 또한 주먹을 맞대주자 씨익 웃었다.

"그럼 저흰 다음 작업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가끔 청소팀 회식할 때 놀러 와라. 물론 법카 들고!"

이내 그들은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둘이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진 직후, 내 표정이 잠시 굳었다.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기를 두들겨봤다.

'에휴, 됐다....'

이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뭘 그렇게까지 하냐.

076

076

한창 베트남으로 향하고 있는 비행기 안.

"하암...."

나는 비즈니스석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해댔다.

신수지 보좌관이 이번 주 업무는 끝내놓고 가라고 닦달하는 바람에 어제 밤을 꼬박 새운 터라 졸려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륙할 때부터 같은 서류를 몇 번이나 읽는 중이라 눈도 점점 피로해졌다.

하지만 서류 검토를 멈출 순 없었다.

부족한 예산에 더해 부가적으로 제시할 만한 부분을 찾아 현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꾸 터져 나오는 하품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지만.

"흐아아암...."

"아, 그렇게 피곤하면 좀 주무시든가! 거 되게 거슬리네, 정말!"

앞자리에 있던 한유빈이 나를 획 돌아보며 투덜댔다.

아까부터 꽤나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럴 시간 없습니다. 몸만 간다고 협상이 알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계속 서류만 들여다본다고 뭐가 나와요? 거 보니까 별로 중요한 정보도 없더만."

"정보가 나 중요하다고 말이라도 한답니까? 찾아봐야 뭐라도 보이든 말든 하죠. 예산이 턱도 없이 모자라서 이렇게라도 안 하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겁니다."

"...참 나."

더는 할 말이 없는지 한유빈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를 지켜보던 김민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뭐 좀 찾으셨어요?"

"글쎄.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네. 적은 투자로 핵심적인 도움을 줄 만한 게 필요한데… 두 가지 모두를 만족하는 게 영 없어. 하나 같이 스케일이 너무 크거나, 아니면 핵심적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그냥 작전팀 지원 정도만 해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쪽엔 헌터도 많이 없다면서요."

그새를 못 참고 한유빈이 또 끼어들었다.

"그건 좀 힘듭니다."

"왜요?"

"베트남 협회엔 지원팀이 없거든요."

한유빈은 작게 아, 소리를 냈다.

"최첨단 장비와 연구시설로 떡칠을 해야 하는 팀을 만들기엔 이래저래 여건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뭐, 나라마다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요."

"흠… 뭐, 지원팀이 없으면 작전팀을 함부로 지원해주긴 좀 그렇긴 하네요. 그렇다고 지원팀까지 파견하기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거고."

"...."

대답 대신 퍽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한유빈을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봐요?"

"아뇨 뭐. 그래도 나름 작전팀장 출신이긴 하구나 싶어서."

"허...."

한유빈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민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생각보다 인프라가 더 빈약합니다. 대충 몇 가지 생각나는 건 있는데… 서류로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고. 나머진 도착해서 알아보도록 하죠."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이 흐르고,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노이바이 공항.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후끈한 공기가 곧바로 전신을 덮쳤다.

호객꾼과 관광객이 뒤섞여 꽤나 정신없는 입국장 앞에 있던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한국 협회에서 온 분들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후인입니다. 베트남 협회 통제팀."

어색하긴 해도 꽤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였다. 보아하니 마중 나온다던 현지 협회 직원인 듯했다.

"반갑습니다. 한국 협회 서울 본부 소속 김준우입니다. 한국말을 꽤 잘하시는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독학했어요."

자신을 후인이라 소개한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원활한 대화를 나누기엔 조금 힘들어 보여 영어로 해도 괜찮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언어를 바꿔주었다.

간단히 악수를 나누고 그는 우리를 자신의 차로 안내했다.

"본부까지 거리가 좀 있어요. 오시느라 피곤했을 테니 한숨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워줄게요."

"괜찮습니다. 가면서 거리 구경도 좀 할 겸."

"하하, 그래요."

후인은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시동을 걸었다.

하노이 시내로 들어섰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곳곳에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들이었다.

물론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듯했지만 어째 제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도시를 빠져나오고 나서부턴 더욱 심해졌다.

마치 전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멀쩡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쑥대밭이 된 곳도 있었다.

이곳은 도시와 다르게 복구 작업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듯, 무너진 잔해를 그대로 방치한 채였다.

"하하. 이래서 잠자는 걸 추천한 거예요."

후인이 멋쩍게 웃었다.

난 대답을 아꼈다.

그의 심정이 퍽 이해가 됐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러 온 손님에게 보여줄 만한 광경은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뭐, 짐작하시는 대로."

후인이 쓰게 웃었다.

"50년 전에, 그러니까… 처음 '까일로'가 열린 날 말이에요."

"까일로?"

"구멍. 베트남에선 옛날에 던전을 그렇게 불렀어요."

50년 전.

혜성, '시니아'가 지구와 충돌하면서 차원이 열리기 시작한 그 날.

당연하겠지만 전 세계가 아수라장이었던 그 당시에, 이능력이니 차원이니 하는 것들이 정립되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에서야 던전이란 단어로 통일됐지만, 그땐 뭐… 한국에서도 각자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다고 한다.

빵꾸, 땅굴, 아가리 등등.

그런 거에 비하면 구멍은 꽤나 정직한 단어였다.

"그때 우린 첫 대응이 늦었어요."

후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능력자가 없었던 겁니까?"

"놉. 이능력자는 있었는데, 던전을 제때 찾을 수가 없었죠. 베트남은 전체 면적의 4분의 3이 산이거든요."

"공감합니다. 한국도 비슷한 조건이라 초기에 토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죠."

"그래도 한국은 면적도 그리 넓지 않고 정보 산업도 상당히 발달해 있었잖아요?"

"...."

확실히 그랬다.

베트남과 비슷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교적 빨리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던 건, 그 두 가지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던전 출현 위치를 얼마나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위치까지 얼마나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가 토벌 인프라가 얼마나 잘 구축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고, 한국 협회는 운이 좋게도 이 두 가지를 초기에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 후안의 말대로라면 베트남 협회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결국, 많은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했고, 그때의 결과가 이 모습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지금이라고 딱히 다른 건 없어요. 50년 전에 입은 피해도 다 복구하지 못했는데, 던전은 계속해서 출현하니까요."

후인의 목소리가 퍽 진지해졌다.

"도로가 완전히 끊겼는데 산속에서 던전이 출현하면 도로가 다시 정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그럼 그사이에 또 몬스터가 탈출해서 피해가 생기고. 그럼 다음 토벌에 또 늦어지고. 악순환이죠."

50년이 지났음에도 작전 인프라 발전이 더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부족한 예산 대신 협회 발전에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주려던 나에겐 더없이 나쁜 소식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엇을 지원해주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판국이다.

'이거 생각보다 골치 아프네.'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작전 인프라도 부족하고 헌터 수도 부족하고. 남들 다 있는 지원팀은 없고. 그렇다고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고. 아주 죽을 맛이라니까요."

후인이 쿡쿡 웃는다.

"그 정도면 차라리 국제 협회에 매각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

계속 미소 짓고 있던 후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뭐… 사정이 있어서요."

"하다못해 지원 요청이라도 해보지 그랬습니까."

"1년 전쯤에 말이에요...."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은 그가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푸룽 산에서 레드 등급 던전이 출현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작전팀 소속 헌터 36명이 보스 방에 갇히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 여력으론 도저히 구출 작전을 할 수가 없었죠."

"아!"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아차 싶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때 국제 협회랑 주변 굵직한 협회에 모두 지원 요청을 한 적이 있었어요."

후인이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 한국 협회에도."

"...."

애써 모르는 척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회귀 전이긴 해도 알고 있는 일이긴 했으니까.

당시 협회장이 내게 구출 작전 파견을 제안했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우리 작전도 바쁘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얻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국제 협회에서 나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번에는 아마 서민철, 혹은 이수용 팀장이 거절했겠지. 아마 나와 똑같이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 죽었어요. 단 한 개 협회도 안 도와줬거든요."

다른 협회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말이다.

냉정하게 보면 그게 생리지만, 피해 당사자 앞이라면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기쁩니다. 우리 협회를 인수하겠다는 손님이 나타났잖아요!"

"...."

너무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하는 통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주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시벌, 그냥 잠이나 처잘걸....'

쯧, 혀를 차길 한 차례.

나는 피하듯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일어나요, 친구들. 다 왔어!"

우리를 깨우는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피곤하긴 했는지 거의 몇 시간 기절한 느낌이다.

"하아암...."

크게 하품을 하며 차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건 주변의 빽빽한 나무들뿐이었다.

"열대 지방 아니랄까 봐 숲도 울창...."

잠깐.

숲?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금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울창한 나무들뿐.

본부로 보이는 건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후인 씨?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봐도 여긴 그냥 산속인데...."

"도착한 거 맞아요."

"예?"

무슨 말인가 싶던 그때,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김민주가 내게 바짝 몸을 붙여왔다.

우린 어두컴컴한 숲속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긴장을 유지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차 커졌다.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수십 명의 무장 집단이었다.

김민주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에휴, 시발."

자동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진심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뒤통수 제대로 맞은 것 같다."

귀찮게 돌아가네, 진짜.

077

077

숲속에서 튀어나온 수십 명의 무장 세력은 무기를 겨눈 채 우리를 천천히 에워쌌다.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날카로운 분위기다.

"하암… 다 온 거예요?"

그때 분위기와 동떨어진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한 명이 모자란다 싶었다.

이제야 잠에서 깬 한유빈이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렸다.

"...뭐야?"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한유빈은 퍽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뭔 일이에요? 사고라도 났어요?"

"네. 저 친구들이 우리한테 볼일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볼일요?"

"보면 모르겠습니까. 강도질이나 납치거나 뭐, 그런 거겠죠."

"...?"

그리고 돌연 풋, 웃음을 터트린다.

"지금 자다 깼다고 나 놀리는 거예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우리를 납치해?"

"...."

"...."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어넘기려던 한유빈은 무표정한 우리의 얼굴을 보자 이내 입꼬리를 내렸다.

"...진짠가 보네."

뒤늦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만, 그래서 더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물론 나만큼이야 하겠느냐만.

"베트남이 원래 이렇게 깡이 좋은 나라였나...."

"뭐,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김민주가 물었다.

한유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팔 한쪽씩 부러뜨려 놓으면 보내주지 않을까 싶은데."

"...거 사람이 왜 이렇게 폭력적입니까."

"그럼 뭐, 그냥 고이 잡혀주자고요?"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지 않냐는 겁니다."

"그랬으면 이미 저 일어나기 전에 해결했겠죠! 저 봐, 저놈들 무장한 거. 저게 대화하려는 놈들의 태도예요?!"

"...."

아주 한 마디를 안 지네.

"그래도 남의 나라까지 와서 폭력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련하시겠어."

한유빈이 볼멘소리를 내는 사이 김민주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아까 차에서 잠깐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이야기라도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이야기 들은 다음에 처리하자는 거죠?"

"아뇨. 대화를 좀 해보자는 뜻인데."

"으, 그놈의 얼어 죽을 대화! 이럴 거면 아예 다 같이 카페를 가던가!"

"어쩔 수 없잖아요. 전 무기도 두고 왔는걸요."

한유빈은 어지간히 답답한 듯 씩씩거렸고, 김민주는 그런 그녀를 설득하기에 바빴다.

'긴장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네.'

이게 어딜 봐서 피랍된 놈들의 태도인가.

'하긴… 작전팀장 출신만 세 명인데 긴장되는 게 더 이상한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후인이 입을 열었다.

"해칠 생각은 없어요. 그냥 할 얘기가 좀 있습니다."

"...거 되게 설득력 있는 말이군요."

적개심이나 숨기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행색을 보아하니 결코 민간인은 아니다.

클래스 전용 무기를 끼고 있는 거로 봐선 모두 헌터라는 뜻이겠지.

설마 협회 소속 작전팀? 아니면 민간 길드?

그것도 아니면 이능력 카르텔?

'뭐, 어느 쪽이든 좋은 볼일은 아닌 것 같네.'

자연히 실소가 배어 나왔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설마 1년 전에 우리가 지원 요청 거절했다고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후인은 고개를 저었다.

"돈. 우린 돈이 필요합니다."

"...너무 정직해서 오히려 당황스럽네."

그냥 양아치들이었나.

나는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린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못 믿겠으면 지갑 확인해 보시든가."

"당신들은 없어도 한국 협회에는 있겠죠."

"...아, 그러니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설마 우리를 인질로 한국 협회에 몸값을 요구하시겠다?"

"네."

"후인, 그거 국제 범죄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다?"

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어련하겠는가.

나쁜 놈들도 지 딴엔 다들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물론 그래 봤자 다 변명....

"우린 계속 토벌을 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토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토벌이라뇨. 그럼 당신들 정말로 작전팀 소속의...."

수십 명의 인원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계속 토벌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어서 우리를 납치했다...?"

"맞아요."

"허, 이런 미친."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그렇지, 한 국가의 협회가 작전비를 이런 식으로 충당한다니.

나로서도 평생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당신도 오면서 봤잖아요. 지금 우린 장비도, 인원도, 인프라도, 정보도 매우 열약해요."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이유였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해서 이처럼 극단적으로 나가도 되는 걸까.

무슨 내전 중인 곳도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베트남 협회가 어려운 건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 거 아닙니까? 우리가 공식적으로 인수해서, 인원이고 장비고 제대로 지원하면 해결할 문제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죠."

"아뇨. 당신들은 우리 협회를 인수하지 못합니다."

"...예?"

후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씁쓸하면서도 암울한 미소다.

"우리 협회, 이미 예전에 해체됐어요."

가히 충격적인 말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최근 자료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물론 서류상으론 그렇습니다. 뭐… 정부 지원금 명목이라고 해두죠. 어쨌든 지금은 실질적으론 해체 상태예요."

"잠깐. 그러니까 결국 해체됐어도 지원금은 나온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 지원금은 어디로 가길래 작전비가 없다는 겁니까."

"어디겠어요."

후인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당사자인 후인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1년 전에, 그러니까 레드 등급 던전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안 그래도 어려웠던 협회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어요. 어쩔 수 없이 협회장이 국제 협회에 매각을 추진했습니다. 다행히 합의는 원만했어요. 인수합병 직전까지 갔으니까요."

"...결과적으론 불발 났다는 겁니까?"

"네. 당에서 막았거든요."

"...?"

눈이 동그래졌다.

"정부가 막았다고요? 국제 협회와 인수합병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협회가 커질 텐데, 어째서."

"국제 협회에 인수되면 정부 지원금이 안 나오잖아요."

"...."

그거참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네.

"그 후로는 계속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직원들이 대거 퇴사하면서 결국 이런 상태까지 왔어요. 아까 말했듯이 협회는 윗분들이 지원금을 받아먹기 위한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죠."

"이런 시발...."

머리를 턱 짚었다.

"뭐, 상황이 이런데도 당에서는 계속 토벌 명령 떨어지지, 작전에 쓸 비용은 없지.... 뭐 어쩌겠어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작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가 커지는 건 싫지만 토벌은 진행해야 하는 정부.

토벌은 진행해야 하지만 지원은 받지 못하는 작전팀.

모순 그 자체인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겠지.

그래, 이제야 납득이 간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해 줄 수는 없지만.

'뭐, 그건 일단 둘째 치고.'

나는 길게 한숨을 늘어뜨렸다.

인수가 쉬울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만, 설마하니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협회일 줄이야.

"완전히 허탕이네. 왠지 제대로 될 것 같진 않더니만."

"...."

한유빈이 빈정거렸고, 김민주도 안타까움에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상황만 놓고 보면 자연히 골머리가 아픈 상황이지만....

"아뇨. 차라리 잘 됐습니다."

"네?"

"응?"

두 사람이 뭘 잘못 들었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괜히 이것저것 조건 따지면서 협상하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낫죠. 무엇보다 인수할 협회가 없으면 인수 비용도 필요 없다는 소리 아닙니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돈 대신 해결해야 할 부분이 생각보다 훨씬 귀찮긴 하지만.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하죠. 우리 입장에서도 현지 헌터랑 사이가 틀어지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니."

"그러죠, 뭐...."

김민주는 납득한 것 같지만, 한유빈은 영 떨떠름한 태도였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난 후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사정이 딱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범죄를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

"그래도 뭐, 나쁜 마음먹고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저희가 특별히 도와드리죠."

"도와준다고요? 뭘 어떻게?"

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베트남 협회, 우리가 다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냥은 아니다.

"대신 한국 협회 지부로 편성된다는 조건으로. 어떻습니까? 이거 정말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인데."

"...."

"...."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당황한 표정이었다. 대답을 아낀 채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내 후인이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애초에 당신들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당의 허가가 없으면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협회를 다시 세우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뭐, 그거야 설득하면 되죠."

"...엄청 쉽게 말씀하시네요."

내 대답이 그리 웃긴 건가.

현지 헌터들이 무기를 거두며 웃었다.

서로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농담한 거라 생각한 건가. 진심인데.

"그래요. 설득하면 된다라...."

후인이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말은 누가 못해요."

"...?"

"포박해서 기지로 데려가."

"야, 이 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십 명의 헌터가 우리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

한국 협회 여의도 행정본부, 협회장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부터 계속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두식 이사가 물었다.

박인범 협회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또?"

"해외 지부 추진 말입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저도 불안하긴 합니다."

으음, 협회장이 작게 신음했다. 그리곤 등받이에 몸을 쭉 기댔다.

"쯧, 낸들 안 그러겠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공중분해 될 텐데. 나도 기껏 복귀해서 한 달 만에 실업자 되긴 싫다."

"그럼 굳이 진행할 필요는 없지 않았습니까."

"김준우, 그놈 말이 썩 틀린 것도 아니잖냐. 국제 협회가 진짜로 우릴 노리고 있다면 이 방법이 최선이야."

"그건 그렇지만… 리스크를 무시할 수도 없잖습니까. 무엇보다 첫 타자가 베트남 협회인 것도 좀 불안합니다. 그쪽이랑은 일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이좋은 협회들 내버려두고 왜 굳이 거길 선택한 건지 이해가 잘...."

"됐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뭘."

협회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두식 이사로서는 퍽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역시 불안하다면 굳이 그 자리에서 허가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고 하며 시간을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급하게 김준우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물론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협회장의 미소가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놈이 실패할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안 하시는 거군요."

"그래. 그놈은 한다면 하는 놈이야."

"너무 맹목적이신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근데 뭐… 딱히 나만 그런 것도 아니잖냐?"

이두식 이사는 피식 웃음을 뱉었다.

어쨌든 본인도 그 자리에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던가.

그 기저에 김준우니까, 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또한 협회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긴장감이 너무 없으십니다."

"너만 하겄냐."

소소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던 그때,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협회장은 웃음기를 지우곤 수화기를 들었다.

"예, 이능차원관리 협회장 박인범입니다."

"…예?"

"아 그렇습니까...."

"아뇨, 관심 없습니다."

"예예~ 잘 알았으니까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뭐야 이 새끼들은...."

"누굽니까?"

"우리 애들을 납치했는데 살리고 싶으면 돈 달라네?"

"예? 누굴 납치했다는 겁니까? 아, 아니 그 전에 그런 전화를 그냥 끊어버려도 되는 겁니까?!"

"지들이 납치한 게 김준우 일행이라는데?"

"...?"

이두식 이사의 반응이 곧바로 차갑게 식었다.

"보이스 피싱이군요."

"내 말이."

하암, 협회장은 입을 쩍 벌리며 크게 하품했다.

078

078

깊은 산속에 위치한 베트남 작전팀 헌터들의 임시 기지.

기지라고 해봤자 통나무와 야자수 잎으로 대충 얽어 만든 천막이 모여 있는 캠프에 가까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작전지휘실 안에서 응우옌 작전 1팀장은 수화기를 붙잡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끊었는데요?"

"뭐라는데?"

"관심 없다고...."

후인의 눈썹이 물결쳤다.

본인 직원들을 납치했다는데 관심이 없다고?

"혹시... 잘못 데려온 건 아니겠죠."

응우옌 작전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들어볼 생각조차 안 할 정도면 그놈들, 협회 사람 아닌 거 아닙니까?"

"우리를 떠보려는 걸까요."

"아니면 정말 납치되든 말든 관심이 없는 걸 수도...."

팀원들 또한 의문을 쏟아냈다.

그들로서도 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사실 지금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건 후인 본인이었다.

사람을 잘못 데려온 건 아니다. 분명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까.

'근데 저건 대체 뭔....'

후인이 손톱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놈들, 아까부터 전혀 긴장감이 없다.

수십 명의 무장 헌터가 무기를 겨누고 있었음에도 겁을 먹긴커녕 지들끼리 떠들며 하품이나 쩍쩍 해대지 않았던가.

게다가 직원이 납치됐음에도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협회장.

'아, 설마....'

협회에서 가장 말단들을 보낸 건가?

후인의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된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말단들이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말단이라 협회장의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빌어먹을 한국 놈들....'

은근히 무시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협회끼리의 인수합병 건에 이런 말단 새끼들을 보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쪽에서 계속 저런 반응이면 저놈들을 납치한 의미가...."

응우옌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연 그때, 후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하자 후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 나다.」

국제 협회와의 인수를 막은 장본인이자, 정부 지원금을 모조리 꿀꺽하고 있는 당 군부 내 거물급 인사.

비엣 총정치국장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남부 쪽에 옐로우 등급 던전 하나 출현했다더라. 그쪽 추정 수익이 더 높으니까 그거 먼저 진행해.」

"저번 마피랭 협곡에 출현한 그린 등급 던전이 벌써 한 달째 방치되고 있습니다. 몬스터 탈출 시점까지 아슬아슬하니 그쪽을 먼저...."

「너 지금 내 말에 토 다는 거냐?」

비엣 국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무엇보다 지금 여건으로 옐로우 등급은 무리입니다. 최소한 지원금이라도 더 내려주시던가...."

「하여간 시발 이 쓸모없는 새끼들은 허구한 날 돈타령이야. 야, 이 새끼야. 다른 나라 협회는 땡전 한 푼 없어도 잘만 토벌해. 능력이 없으면 목숨이라도 갖다 바치던가.」

"...."

「더 말대꾸하지 말고 내가 말한 데 먼저 토벌해. 니들 죽으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무능력한 새끼들, 비엣 국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후인은 핸드폰을 내려놓곤 이를 갈았다.

늘 이런 식이다.

오로지 수익에만 혈안이 된 놈이었기에, 지금처럼 며칠간 준비한 작전도 전화 한 통으로 엎어진 것이 부지기수다.

물론 이쪽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시였다.

현재 후인이 책임지고 있는 팀은 고작 작전팀 두 개. 그마저도 각각 2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제팀은 본인 한 명이고 청소팀은 단 세 명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린 등급 던전 하나 제대로 토벌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다.

그런데 옐로우 등급을 토벌하라고?

이건 정말로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

후인의 주먹이 떨렸다.

때려치우자는 생각은 하루에도 백 번은 더 한다.

당장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대우를 받을 바엔, 차라리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지금 방치되고 있는 던전만 해도 100개가 훌쩍 넘는다.

그나마 지역 곳곳에 자신들과 같은 비공식 작전 세력이 있으니 어떻게든 급한 불은 끄는 중이었지만, 그마저 손을 놓는다면 그땐 정말로 끝이다.

나라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겠지.

그래, 너무 X같은 일이긴 해도... 자신들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후인 또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비엣의 말처럼 본인들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데.

그러니 협회를 다시 세운다느니, 그런 가당치도 않은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지금은 그저 눈앞의 일이나 신경 쓰는 수밖에 없다.

"팀원들한테 전해. 작전 변경한다."

마침내 후인이 결정을 내렸다.

"작전 변경이라뇨…?"

"비엣의 명령이야. 옐로우 등급 먼저 토벌하란다."

"예, 예?!"

응우옌 팀장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아시잖습니까! 지금 예산으로는 방어 장비 하나 못 갖춥니다! 이대론 입구에서 전멸이에요!"

"나도 알아."

후인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몸값을 받아내야지."

후인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인질을 가둬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단히 각오한 눈빛이었다.

***

우리가 갇힌 곳은 베트남 전통 가옥, 냐산과 비슷한 형태의 공간이었다.

손목에 두꺼운 수갑을 채워 놓긴 했지만, 그것 말곤 딱히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지금쯤 협회랑 열심히 협상 중인 것 같고....'

나는 가만히 다른 두 녀석을 바라봤다.

김민주는 가만히 앉아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한유빈은 아까부터 쉬지 않고 하품을 해대는 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긴장감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근데 말이에요."

그때, 한유빈이 넌지시 물었다.

"이럴 거면 그냥 베트남은 포기하고 다른 협회 알아보는 게 낫지 않아요? 굳이 이런 고생까지 하면서 여길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베트남 협회는 포기할 수 없어요. 제가 왜 여길 첫 번째로 골랐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싱가포르, 태국 등등. 주변 모든 국가가 국제 협회 소속입니다. 그 사이에서 베트남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독립협회죠."

뭐… 지금은 그마저도 해체됐지만.

어쨌든.

"아시다시피 국제 협회 지부는 던전 토벌 시 일정 비율의 부속품과 아이템을 본부로 납품해야 합니다. 그런데 항공편으로는 운반하지 못하죠. 비행기로 아이템을 운반하게 되면 미세한 이능파 때문에 기체 결함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나름 국제 협회 지부 출신이었거든요?"

한유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결국 동남아시아의 지부들은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육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 유일한 루트가 베트남 북쪽에 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협회는 그러한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주변과 비교하면 너무 약소 협회였으니 눈치가 보였던 거겠지.

"지금까지는 베트남 협회가 힘도 없으니 기존 통관비만 받고 육로를 열어준 것 같은데, 바보 같은 짓이죠."

"아, 설마...."

한유빈이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운송 루트를 차지할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여기에 지부를 세워야 하고요."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국제 협회에서 개지랄을 할 텐데요."

"애초에 그게 목적입니다. 견제할 수단을 만드는 거."

"...."

"그리고 뭐, 그놈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아이템을 포기할 순 없을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통관비를 올리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애초에 그건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우린 그저 지부와 본부 간 중간 운송책을 직접 맡는 겁니다. 각국에서 반입된 아이템을 분류해서 대륙으로 반출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국제 협회 지부에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돈으로 수고를 더는 셈이니까.

물론 그 자체가 굉장히 거슬리긴 하겠지만.

"이제 곧 동남아시아의 모든 아이템과 부속물이 베트남으로 모여들게 될 겁니다."

"허브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냥 허브가 아니죠."

고작 그 정도만 생각했다면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려 하겠는가.

"베트남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허브가 될 겁니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비전을 생각한다면 베트남 협회는 포기할 수가 없죠."

"말씀은 알겠는데...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계획이에요? 저쪽은 아예 우리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데."

"...흠."

작게 신음했다.

확실히 그렇다.

정부가 끼어 있다곤 해도, 사실 그쪽은 협상이든 설득이든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다.

문제는 여기 있는 놈들이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든, 베트남 협회의 유일한 잔존 세력인 저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협력은커녕 아예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조차 없으니.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지레 못을 박아 버린 것 같은데....

'쯧, 나름 협회 출신이라는 놈들이 뭐 이리 겁이 많아.'

어떻게 해야 이놈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덜컹―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끌었다.

"와...."

김민주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선생님이 멱살 잡히는 걸 다 보네요."

"신종 자살법인가?"

그리곤 저들끼리 배시시 웃는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딱 봐도 협상이 생각대로 안 된 모양이다.

강하게 나서겠다, 이거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협상이 결렬되면 당신들만 다 뒈지는 거야. 대가리 구멍 나기 싫으면 어떻게든 본부에 연락해서 돈 받아내!"

"글쎄요. 그 노인네 죽어도 안 믿을 텐데. 뭐, 아마 몇 번을 연락해도 똑같을 겁니다."

차라리 내가 사고 쳐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면 믿을지 모르겠는데.

"제가 확신하는데, 당신은 한국 협회로부터 단 한 푼도 받아낼 수 없을 겁니다."

"아니."

후인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받아낼 거야."

불쑥 단검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하.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 이상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대화가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팀장님!!"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뭐야?"

"작전 취소하신 그린 등급 던전 말입니다....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했답니다."

"...빌어먹을."

후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위치는."

"마피랭 협곡에서 감지된 게 30분 전이고, 지금 민가로 향하고 있답니다."

후인이 얼굴이 사색이 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임은 분명하다.

시가지에 던전이 출현했다거나, 아니면 몬스터가 탈출했다거나.

단검을 쥔 손이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이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그는 칼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가능한 인원 모두 소집해. 당장 출동한다!"

"무슨 일입니까?"

"넌 알 거 없어."

"몬스터라도 탈출한 겁니까?"

내 말을 무시하고 막 나가려던 그가 미간을 확 좁히며 돌아본다.

"...그렇다고 하면 당신이 뭘 어쩌게."

"맞나 보네."

내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아까 보니까 작전팀이라고 해봤자 3, 40명밖에 안 되던데, 그 인원으로 탈출 몬스터 토벌 가능하시겠습니까. 시민들 대피에, 구출에… 턱없이 모자랄 것 같은데."

"...지금 놀리는 거야?"

"설마요."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길게 말도 안 했다.

"도와드릴까 해서 말하는 겁니다."

"하...."

후안이 헛웃음을 뱉었다.

"말단들 주제에 누가 누굴 도와. 틈타서 도망가려는 거 모를 줄 알고?"

말단?

누가?

...뭐 그건 일단 둘째 치고.

"우리도 협회 사람입니다. 시민들이 위험에 처한 걸 알고도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놈들은 아닙니다. 그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당을 설득하겠다, 협회를 세워주겠다, 토벌을 도와주겠다... 말하는 거만 보면 뭐 못 하는 게 없군."

"...."

"허세는 작작 부리고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

후인은 그렇게 이곳을 떠났다.

정말이지, 이런저런 의미로 답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떨 거 같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김민주와 한유빈을 향해 물었다.

"저 인원으로 탈출 몬스터 토벌? 전멸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어려울 것 같긴 해요. 장비도 꽤 낡아 보였고요."

한유빈과 김민주는 같은 의견이었다.

"이래저래 곤란하군요."

"뭐가요?"

"기존 작전팀이 전멸해버리면 우리가 지부를 세워도 작전팀을 처음부터 새로 꾸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채용부터 교육까지 다 맡아야 할 겁니다."

"...."

"...."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그럼 뭐, 고민할 것도 없네요."

한유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주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캉―.

힘쓸 것도 없다는 듯, 손목에 걸려 있던 수갑을 너무나 쉽게 끊어버렸다.

"가요. 일 늘어나기 전에."

그녀들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079

079

퍼지기 직전의 봉고차로 비포장도로를 달리길 몇 시간.

두 개의 작전팀이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던 후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빌어먹을...."

현장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미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집과 도로는 이미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주변엔 아직도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가득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이들과 부모를 잃고 길 한복판에서 울어대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가신 놈이네....'

후인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두들 버그 스콜피온.

전갈의 외형을 한 개미귀신.

그간 모은 정보에 의하면 땅속에 숨어 사냥의 기회를 노리는 놈이었다.

언제 어디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이상, 두 작전팀을 모두 전투에 투입한다고 해도 토벌까진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사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겠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2팀은 시민들 먼저 안전한 장소로 유도해! 인원이 많이 부족하니까 시민들한테도 도움 요청하고!"

"네!"

"1팀은 나랑 같이 몬스터를 찾는다."

두 개 작전팀이 각자의 위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후인 또한 서둘러 탐지기를 꺼내 들었다.

20년도 더 된 고물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이능파를 감지해 몬스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장비였다.

뚜뚜뚜―.

이내 탐지기에 북쪽으로 30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반응이 잡혔다.

"좋아. 구출 지역이랑 가깝진 않아. 일단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구구구구―.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설마 몬스터?!"

당황하는 목소리들.

하지만 후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탐지기엔 분명...."

다시 탐지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던 찰나.

콰광―!!

거대한 전갈이 땅 위로 솟구쳤다.

"...제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네."

예상과 다른 몬스터의 출현.

물론 당황하고 있을 틈 따윈 없었다.

"몬스터 출현! 몬스터 출현!"

"빨리 포지션 잡아! 근접은 몰려 있지 말고 최대한 흩어져!!"

응우옌 팀장이 서둘러 지휘권을 잡았다.

"공격해! 스킬 죄다 때려 부어!"

[고유 스킬 : 디스트로이어]

[고유 스킬 : 핑거 피스톨]

쾅―.

콰과광―!

두 개 작전팀의 총공격이 이어졌지만 단단한 갑피 때문에 대미지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팀장님! 화력이 모자랍니다!"

"우리 인원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닥치고 계속 공격해! 근접 포지션은 다가오지 못하게 계속 거리를 벌리고!"

응우옌 팀장이 소리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땅 위로 나온 몬스터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아무리 전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멀뚱히 서 있는 몬스터조차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게 계속 공격해! 한 번 들어가면 언제 또 나올지 몰라!!"

황급히 몸을 숨기는 몬스터를 향해 온갖 스킬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화력이 부족했다.

몬스터는 결국 모습을 감췄다.

"...."

"...."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연신 주변을 살폈다.

언제 어디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니 긴장을 놓아선 안 됐다.

응우옌 팀장이 후인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대론 무립니다. 일단 후퇴했다가 다른 세력과 합류한 뒤에 다시...."

"후퇴는 안 돼. 그사이에 또 뭔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럼, 여기서 다 죽자는 겁니까?! 일단 우리가 살아야 계속 토벌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후인이 이를 갈았다.

응우옌 팀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후퇴를 불허한 게 아니다.

시민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상황에서 후퇴까지 해버리면, 정말로 자신들이 아무 힘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여기서 후퇴를 하면 다른 마을은 어쩌라는 것인가.

"...하는 데까지는 한다."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땐 어쩔 수 없지."

응우옌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최종 결정권은 후인에게 있으니, 좋든 싫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구구구구―

이내 다시금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온다. 다들 준비해."

응우옌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가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표정은 하나 같이 무언가를 각오한 듯했다.

모두가 긴장을 유지하는 중이었지만 몬스터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스스스스―.

갑자기 땅이 꺼지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뭐, 뭐야?"

"안에서 모래를 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구멍 근처로는 가지...."

작전팀이 밟고 있는 모래가 크게 원을 그리며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흡사 땅 위에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 이런 시발… 빨리 다 밖으로 나와!"

후인은 아차 싶어 재빨리 소리쳤다.

작전팀 또한 서둘러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솨아아아―!

"어, 어…?"

"티, 팀장님…!"

"으아아악!!"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맹렬하게 회전했다.

"사, 살려…!"

"우으으읍…!!"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모래 속에 파묻혔다. 동시에 빠른 속도로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뭐 하고 있어! 잡아!!"

곧바로 후인이 달려들어 손을 뻗었다.

"쯔엉! 판! 정신 차리고 손잡아!!"

죽어라 목청을 높였지만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이미 완전히 패닉에 빠진 팀원들에게 그럴만한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우읍읍...."

"웁...."

"...."

모랫구멍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모두 모래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후인은 패닉에 빠져 완전히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몬스터를 대체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이성적인 판단마저 흐려지던 그때였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쾅―!!!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며 구멍을 직격했다.

키에에에에―!

땅속에서 울려 퍼진 괴성.

그와 함께 소용돌이 또한 회전을 멈췄다.

덕분에 모래 속에 파묻혔던 인원들도 다시금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그야, 기지에 포박되어 있어야 할 두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너, 너희들이 어떻게...."

후인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뭐, 뭐야. 같은 놈들 맞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의 눈빛에서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전의 긴장감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따지자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에 조금 더 가까운 분위기.

"에휴. 내 이럴 줄 알았지."

때마침 익숙한 음성이 낮게 깔렸다.

후인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게 뭔 헛짓들입니까. 다들 죽으려고 환장을 하셨나."

김준우가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다른 것보다 짜증이 앞섰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멍청한 작전을 하는 머저리가 있을 줄이야....

"왜 후퇴하지 않았습니까. 영웅 행세라도 하고 싶었습니까?"

위급 상황 시, 무조건 후퇴.

토벌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다.

만약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목숨을 던지는 건, 영웅이 아니라 그냥 머저리일 뿐이다.

"이런 여건으론 토벌할 수 없다는 걸 아셨을 텐데. 아니면 뭐,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하셨나?"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애초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토벌할 수 있는 몬스터는 없어."

후인은 이내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하긴, 좋은 나라에서 지원 빵빵하게 받아온 놈들이 뭘 알겠어."

"그래서 그냥 죽을 생각으로 무조건 들이받으려 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무식한 건지, 순수한 건지...."

"뭐, 뭐?"

"던전 밥 먹는 인원은 사망하면 안 됩니다. 작전팀이든 통제팀이든, 하물며 청소팀이든. 이건 기본 아닙니까? 가뜩이나 토벌 인원도 없는 마당에 당신들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면 남은 던전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능력이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능력이 없어서 죽을 각오로 싸운다고? 개소리 집어치우십시오. 진짜로 능력이 없는 놈은, 죽을 각오 없이는 고작 그린 등급 몬스터 하나 토벌 못 하게 만든 당신들 윗대가리겠죠."

"...."

후인의 입이 억, 하고 굳었다.

어째 충격을 받은 얼굴.

있는 그대로 말했는데 뭘 그리 놀라는지 모르겠다.

"착각하지 마십쇼. 당신들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능력 있는 우두머리가 없는 거죠. 지금 상황을 보세요. 작전팀의 상황도, 여건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토벌 지시나 내리니 이 꼴이 나는 거 아닙니까."

"...."

후인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이제야 도와주겠다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말을 믿지 않은 게 아니다.

이놈들은 그냥 현실에 절망하면서 자신감을 잃었던 거다.

구구구구―.

그때였다.

땅이 다시 흔들리며 모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인원을 파악했다.

'근접 8명에 원거리 11명… 아까 보니 마법사 클래스들 스킬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또, 또 온다! 다들 빨리 피해…!"

"아뇨. 피하지 말고 공격하십쇼. 땅에다가 공격을 가하면 몬스터가 튀어나올 겁니다."

"뭐?"

"땅에다가 스킬 죄다 때려 박으라고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설전을 벌일 시간은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때는 누가 와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번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 말대로 하십쇼."

"...시발."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헌터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땅을 향해 일제히 스킬을 쏟아부었다.

쿵―!

땅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스킬을 버티지 못하고 몬스터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

"이제 공격하시면 됩니다."

헌터들의 스킬이 이번엔 몬스터를 향했다.

나와 김민주 그리고 한유빈은 그들의 공격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이 기회에 전력을 파악해두고 싶었다.

뭐, 사실 안 봐도 뻔하긴 한데.

'쯧, 역시 화력이 약하긴 하네.'

그나마 제일 높은 놈이 B랭크 턱걸이 같고, 나머진 죄다 C, D 랭크뿐.

"저런 전력으로 여태까지 용케 토벌했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김민주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본인들이 해봐야죠."

전갈형 몬스터는 단단한 갑피 덕에 기본적인 방어력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공격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땅에 숨어 공격하는 거지만, 그것조차 막힌다면 이처럼 모든 공격에 취약해진다.

아무리 장비와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몬스터다.

키에에에―

몸뚱이가 훤히 노출된 채로 고스란히 공격을 받아내던 몬스터가 이내 괴성을 질렀다.

위험을 감지하고 다시 땅속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허사였다. 땅에다가 스킬을 퍼부어놓은 덕에 모래가 돌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으니까.

"다들 집중하세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차별적으로 달려들 겁니다."

"원거리 포지션은 조금 더 흩어지십쇼. 괜히 휘말리지 말고. 어차피 메인 공격은 근접 분들이 해야 합니다. 서포트 한다고 생각하세요."

"거기 검사 클래스! 몸통은 백날 쳐봤자 흠집도 못 냅니다! 대가리를 노려요, 대가리를!"

"거의 다 왔습니다. 마법사 클래스 분들은 땅에 숨지 못하게 계속 스킬 흘려주시고요. 사제분들은 디버프 스킬로 최대한 몬스터의 움직임을 묶어 주십쇼."

"좋습니다. 다들 그렇게만 하세요."

이후로도 세세한 조정을 하면서 충분히 거리를 두고 몬스터를 공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과가 보이자 헌터들의 움직임이 점점 좋아졌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허억, 허억...."

"큭, 크어...."

쿵―

거친 숨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육중한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쓰러졌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렸다.

저희끼리 부둥켜안고 고함을 지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고작 그린 등급 몬스터 한 마리 잡고 저렇게 난리를 피우는 게 난 그다지 이해가 가진 않지만....

뭐, 본인들이 기쁘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들 사이에 있는 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젠 제 말을 들어볼 마음이 좀 생겼습니까?"

"...."

그는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080

080

협회를 다시 세워주겠다, 협력해달라.

그 한 마디에 후인은 정말이지 한참을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재고를 한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자신 있어?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하는 수준일 텐데."

"예상한 바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질문은 제가 아니라 본인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후인을 슬쩍 흘겼다.

"후인 씨가 꼼짝 못 하는 그 윗분을 등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등지는 것뿐이면 다행이지, 때에 따라선 척을 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후인 씨는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조금이라도 망설여지면 관두시지요. 괜히 나중에 가서 이건 안 된다, 저건 못 한다, 방해하지 마시고."

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알았어."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믿어 볼게."

"에이, 그게 아니죠."

나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뭐, 뭐가?"

"그게 어딜 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태돕니까. 부탁할 땐 정중히 하셔야죠. 이게 어디 나만 좋자고 하는 일도 아니고."

"...."

잠시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주먹 쥔 손이 부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도 잠시, 이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부, 부탁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일단."

나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 윗대가리라는 사람부터 만나보죠."

"...네? 바로 말입니까."

"안 됩니까?"

"아니, 뭐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럼 됐습니다. 저흰 현장 처리하고 있을 테니 그동안 후인 씨가 연락을 좀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등을 돌렸다.

괜히 또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

며칠 후, 하노이 시내의 어느 레스토랑.

우린 후인을 통해 꽤나 어렵사리 비엣 총정치국장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나와 김민주, 한유빈은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후인 또한 함께였다.

비엣, 총정치국장.

국방부 지휘 조직 중 하나인 총정치부의 수장으로 군부 내의 많은 실권을 쥐고 있는 자.

듣자 하니 곧 국방장관이 될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던전이 열린 그 날부터 당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고 했으니, 베트남에서의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긴, 그 정도 힘이 있으니까 협회를 통째로 날려 먹고도 잘살고 있는 거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연신 다리를 떨었다.

김민주와 한유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거물을 만나리란 생각에 긴장한 건 아니다.

"배짱이 대단하네. 감히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기본적인 예의가 없네요."

"거물은 맞아도 안 아픈가?"

두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은 제쳐두고라도 벌써 30분이 지났다.

약속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늘의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역시 글렀나.

그냥 일어나야 하나 싶던 그때였다.

레스토랑의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아이고, 미안해라. 내가 좀 늦었네."

키가 작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자가 실실 쪼개며 다가왔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눈에 봐도 그가 비엣 총정치국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해서 말이지, 클클.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아니긴요. 충분히 오래 기다렸습니다."

"...흠?"

잘못 들은 건가 싶은 표정.

덩달아 그의 경호원인지 수행비서인지 모를 이들이 경계심을 내비쳤다.

이를 무시하고 난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협회 소속 김준우라고 합니다."

"같은 소속에 김민주입니다."

"한유빈입니다."

차례로 악수를 건넸다.

비엣은 그런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생각보다 젊군. 신입들인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습니다."

"한 번 만나자길래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가 했더니, 이런 핏덩이들일 줄이야."

그는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젠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감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는?"

"일단 앉으시죠."

비엣이 큼, 헛기침을 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내 웨이터가 다가왔고, 비엣 국장은 커피를 주문했다.

그의 옷부터 액세서리까지 한눈에 봐도 꽤나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옆에 앉은 후인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 괴리감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올 뻔했다.

"이제 말해봐."

"저희 한국 협회는 베트남 협회와의 인수합병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음…?"

당황스러운 낯빛.

당연한 반응이다.

인수고 나발이고 협회가 남아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으니.

"그...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협회가 상황이 좀 어려워서...."

"돌려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베트남 협회는 현재 실질적인 해체 상태이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지원금을 국장님께서 전부 받아 가고 있다는 것도 포함해서요."

"...."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후인에게 향했다.

후인은 제 발 저린 얼굴로 연신 다리를 떨어댔다.

비엣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걸 빌미로 날 협박해 협회를 얻어내겠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협박이라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유치한 방법을 쓰겠는가.

"인수합병 결의서에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서류로만 존재하는 협회인데,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싫다면?"

"사인만 해주신다면 지금 챙기시는 지원금에서 정확히 10배를 더 받아 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싫으십니까?"

"뭐...?"

그의 동공이 순간 흔들린다.

"10배?

"예."

"일시불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매달 10배입니다."

"...!"

벌써부터 그의 눈에서 숫자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서류 처리만 해주신다면 지원금의 10배를 매달 꼬박꼬박 챙겨드리겠습니다. 뭐, 사실 말이 10배지, 계약상으론 앞으로 진행할 사업의 50%를 드릴 생각이니 그보단 더 될 겁니다."

"큼… 설마 아무것도 없이 믿어달라는 건 아니겠고."

"물론입니다."

준비했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지부 개발을 비롯, 허브 사업에 대한 첨부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비엣 국장은 꽤나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토벌 시장에 관해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는 그에겐 생각도 못 해본 사업이었을 것이다.

"주변 협회들의 부산물을 우리 쪽에서 출하한다라... 뭐,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윽고 준비했던 설명이 끝나자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패를 너무 많이 까는 거 아닌가? 이 말만 듣고 내가 직접 추진할 수도 있잖나."

"이 정도는 까야 국장님도 마음을 여시지 않겠습니까. 뭐, 그리고...."

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감히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걸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베트남엔 없습니다."

"...하. 하하."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직접 협회를 다시 세워주고, 허브를 만들어서 매달 용돈까지 챙겨주겠다. 단, 한국 협회에 인수되는 조건으로.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정확하십니다."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군."

지랄, 나쁘지 않긴.

속으론 좋아 죽으려고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사인 말고 내가 또 해줘야 할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사업 추진은 우리 방식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오히려 더 좋군. 내가 신경을 안 써도 된다는 소리니."

"더불어… 토벌 수익금도 당분간은 건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뭐?"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토벌 수익금은 작전 능력에 비례해서 가져가는 게 원칙 아닌가?"

"...?"

설마 지금 본인이 처먹는 수익금이 합당하다는 소린가?

시발 염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예, 뭐…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작전에 더 많은 기여한 사람,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높은 비율을 가져가는 게 합당하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소리다. 원칙이 제대로 돌아가면 문제야 없지만, 현재 이곳 꼴을 보면 기가 차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뭐, 그게 다 누구 때문이겠는가.

"그래서 국장님은 건들지 말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허! 이런 미친놈이...."

"국장님."

나는 두 손을 포개어 입에 가져다 대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국장님 배를 불려 드리려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아닙니다."

"...뭐?"

"이건 거래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거래 말입니다. 다른 머저리들처럼 국장님에게 이쁨 좀 받으려고 아낌없이 퍼주려는 걸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

"아, 물론 친구 정도는 되어드릴 수 있겠군요. 이 거래가 서로에게 좋게 진행되는 한 말이죠. 그러니 제가 떠먹여 드리는 것만 드십시오. 더 욕심내다가 돈도, 친구도 모두 잃는 수가 있습니다."

"...하하하."

겨우 정신을 차린 비엣이 턱을 긁적거린다.

"이봐, 여긴 한국이 아니야. 여기서 나와 척을 지면 누가 더 손해일지는 너무 뻔하지 않나?"

"동감입니다. 누가 손해를 볼지는 안 봐도 뻔하죠."

뭐, 보아하니 서로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비엣을 응시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묘한 분위기 속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내 비엣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뭐, 배포는 있군. 겁만 많은 누구랑은 다르게."

그는 슬쩍 후인을 흘겼다.

"그래. 알았다. 앞으로 수익금은 일절 건들지 않겠네. 대신 자네도 약속한 건 지켜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현 베트남 협회를 담보로 허브 건설 사업에 투자한다는 계약서였다.

당장 인수합병 결의를 할 것도 없이, 사업이 엎어지지만 않는다면 자연스레 베트남 협회가 우리 손에 넘어오게 된다.

비엣은 계약서를 몇 번이나 훑어본 후에야 서명을 갈겼다.

"이제 계획이나 좀 들어보지.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하려는 건가."

"처음 베트남에 와서 보니 기초 인프라조차 미흡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중 가장 큰 문제인 던전 위치 정보와 이동 시간. 일단은 그 두 개를 먼저 잡을 생각입니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청소팀을 꾸릴 생각입니다."

***

"저, 그런데 기초 인프라는 어떻게 보완하실 생각이에요? 구체적인 목표라도 있어요?"

비엣이 돌아간 직후, 한유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체적이랄 게 있습니까. 결국, 도로 까는 거죠.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도로를 까는 건 저도 동의하긴 하는데... 그 비용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닐 텐데."

"인수 비용 아꼈잖습니까. 그걸 써야죠."

"얼마나요?"

"전액."

"...."

한유빈은 질겁하는 표정이었다.

예산이 모자라다, 부족하다 했지만 그럼에도 수백억은 되는 돈이다.

그런 금액을 잘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기초 인프라에 모조리 때려 박겠다니 그럴 만도 하지.

"물론 그거로도 모자랄 겁니다.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야겠죠. 뭐, 그건...."

말끝을 흐리며 후인을 슬쩍 바라봤다.

"후인 씨가 맡아주십시오."

"예?"

"오늘 제가 했던 대로만 설득하실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자가 붙을 겁니다. 뭐, 기업이면 더 좋고요."

"...."

그는 대답을 아꼈다.

"왜, 자신 없으십니까? 못하겠으면 안 하셔도...."

"...아니요. 해보겠습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김민주는 현지 작전팀 데리고 급한 토벌부터 진행해줘. 시간 남을 때마다 작전 기획 교육도 좀 해주고."

"네."

"한유빈 씨는 괜찮은 놈들로 모아서 청소팀을 좀 꾸려주십쇼. 최소 10개 팀은 돼야 합니다. 당연히 기본적인 교육도 병행해주시고요."

"알았어요."

"아까 말한 대로 후인 씨는 투자자 서치하시고, 저는 건설사부터 좀 알아보겠습니다."

바빠지겠군.

열심히 일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긴 한데.

"뭣들 하십니까. 알아들었으면 바로 움직이세요."

남은 커피를 목구멍에 털어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081

081

사업 추진 일주일째.

당연히 베트남 전역에 도로를 연결하는 건 비용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무리가 있었다.

우선 출현 비중이 높은 지역 몇 곳을 공략했다.

최대한 기존 도로를 정비하고 중요 포인트에 헬리포트를 설치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든 던전 출현을 제보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주째부턴 점점 작전 체계가 잡혀갔다.

김민주가 꽤나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그만큼의 효과는 있었다.

그사이 한유빈이 맡은 청소팀 확대 건 또한 조금씩 이득을 보고 있었다.

애초에 다른 팀이 아닌 청소팀을 먼저 확대한 건, 효과적으로 몬스터 부산물을 회수해서 토벌 수익을 최대한으로 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예산이 늘어감에 따라 사업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자연히 투자자들이 몰리는 계기가 되었다.

3주째.

우리가 처음 투자했던 예산에서 15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나는 그 돈으로 지원팀을 신설했다.

물론 필요한 인원과 장비는 한국 협회에 지원을 요청했고, 협회장은 곧바로 이아영 실장을 파견했다.

10개의 청소팀이 하루에 회수하는 부산물만 해도 수십 개에 달했기에, 지원팀은 신설되자마자 순식간에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지원팀의 확대는 곧 작전팀의 확대로 이어졌다.

훨씬 좋은 장비와 질 높은 케어를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효율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게 모든 팀에게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하루에 토벌할 수 있는 던전 수도 계속해서 늘어났고, 한유빈은 그에 맞춰 청소팀을 더욱 확대해야 했다.

그럴수록 회수하는 부산물의 양도 늘어가자 지원팀의 규모도 커졌다.

당연히 작전팀의 업무 효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본연의 협회로서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 무렵.

비로소 한국 협회 베트남 지부, 하노이 작전본부가 세워졌다.

뭐, 하노이 외곽에 방치되어 있던 폐건물을 매입해 대충 수리해서 쓰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드디어 어엿한 독립협회로서의 기본은 갖추게 되었다.

물론 개선해 나가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뭐,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다.

이 이상은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겠지.

"...이번 주부턴 베트남 전역에서 걸쳐 토벌이 가능해질 것 같아요. 다른 팀도 이젠 저희 도움 없이도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고요."

본부기획실 책상 앞에 앉은 김민주가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끄으으… 이제 좀 여유로워지겠네."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한 달 동안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요 일주일간은 깨어 있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뭐,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유빈도 두 발로 뛰어다니며 청소팀원을 구인했고, 김민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토벌에 나갔으니....

'진짜 개고생했네.'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잘 돼서 다행이에요.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겨우 구색이나마 갖춘 거야. 앞으로가 중요하지. 허브 쪽은 어떻게 됐어?"

"물류 센터는 짓는 중이고, 유통 사업을 맡아줄 기업도 입찰을 따놨어요. 주변 협회들과는 후인 씨가 대충 협상을 해놨고요. 뭐… 당연히 별로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여태껏 공짜로 쓰던 길을, 갑자기 돈을 받겠다고 하면 그럴 만도 하지. 또 괜히 자신들을 견제하는 것 같아서 기분도 나쁠 거고."

"그게 목적이라면서요?"

"뭐, 그렇지."

드디어 국제 협회에 대항할 무기를 하나 쥔 셈이다.

이젠 우리가 지부를 세웠다고, 대놓고 압박을 주기엔 부담을 느낄 것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허브 유통비를 올리기라도 하면 결국 손해 보는 건 본인들일 테니까.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동시에, 함부로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약점을 쥐는 것.

이 두 가지가 베트남 사업을 추진한 진짜 목적이었으니, 우리로선 할 일은 모두 마친 셈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도 되겠다."

"아, 이아영 실장님은 방금 귀국하셨대요."

"왜 벌써? 아니, 말도 안 하고?"

"워낙 본부 일도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선생님한테 인사는 드렸다던데요?"

"...?"

"그런데 귓등으로도 안 들으셨다고...."

아, 설마 그제 새벽에 와서 한 말이 그거였나? 일하느라 듣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만 하긴 했는데....

"아무튼, 단단히 삐졌다고 전해달래요."

"...애도 아니고."

푸, 숨을 뱉었다.

"어쨌든 우리도 슬슬 마무리하자."

몸을 일으켰다.

"국장한테 연락 넣어줘. 매각 결의서랑 용돈 받으실 계좌 챙겨서 나오라고."

"네."

이제 막바지다.

깔끔하게 받을 건 받고, 줄 건 줘야겠지.

그것만 마치면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협회, 베트남 지부.

하노이 작전본부, 작전통제실.

신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장비 앞에서 후인은 무척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것도 없이 천막 치고 토벌하던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장비는 하나도 없었고 그린 등급 몬스터 토벌 작전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당연히 지원금은 기대도 못 했고 연봉은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마저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팀장님, 이번 주 작전 8개 팀 기획서입니다. 확인 후 일정 조정 부탁드립니다."

"아, 응. 이리 줘."

응우옌 작전 1팀장이 서류를 들고 후인을 찾았다.

"음, 작전 4팀은 엊그제 토벌 나갔으니까 최대한 후순위로 넣어줘. 2팀, 7팀 우선으로 투입하고. 청소팀 작업은?"

"차질 없습니다. 지금 사이클이면 지체 없이 다음 작전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원팀한테 지속적으로 상태 보고해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후인은 다시금 의자에 등을 기댔다.

8개의 작전팀.

7개의 청소팀.

그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지원팀.

거기에 아직 규모는 작지만, 경리부, 사업부, 기획부까지.

현재 협회의 직원은 모두 합쳐 200여 명.

정말로 어엿한 협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네요."

응우옌 팀장 또한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맨땅에 협회를 세워버리다니."

"그래, 그것도 한 달 만에...."

지금의 상황이 믿기 힘든 건 후인 통제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처음에 협회를 세워주겠다고 했을 때, 그냥 자본만 미친 듯이 때려 붓겠거니 싶었다.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반듯한 건물 하나 세워두고 다 됐다며 손을 떼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후인의 걱정은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준우는 가장 발목을 잡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본인들의 여건과 상황에 맞춰 작전 체계를 조정했고. 이미 썩어 문드러져 가망이 없을 거라 여겼던 협회에 자정작용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청소팀을 우선 확대하는 방침으로 모든 팀을 키워나가는 방법은 본인으로선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협회 내의 모든 팀과 팀원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무기를 쥐여준 게 아닌, 무기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베트남 지부의 많은 이들이 협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끼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입장으로선 가히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말단을 보낸 줄 알았더니 구세주를 보냈군."

후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김준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스스로를 증명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걸 실제로 겪어보니, 그동안 대체 어떤 머저리를 지도자로 모셔온 건지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아랫사람을 부려먹으려면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응우옌 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정도면 아랫사람이 아니라 노예 생활을 하라고 해도 할 거 같은데."

"쓰읍… 전 그건 좀."

클클, 응우옌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이제 돌아간다니까 뭔가 아쉽네."

문득 그들과의 첫 만남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들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다니.

그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던가.

"그래도 지부장은 김이 남아서 맡아주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더라."

"예? 그럼 지부장은 누가 맡는 겁니까."

후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뜻을 단번에 이해한 응우옌 팀장이 쿡쿡 웃었다.

"출세하셨네요."

"출세는 무슨....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거지."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때였다.

쿵―

사무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비엣 총정치국장이었다.

예고 없던 국장의 방문에 응우옌 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후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야, 요즘 좀 살 만한가 봐? 얼굴이 쫙 폈네."

"어쩐 일이십니까?"

"참 나, 이제 한국 지부 소속이라고 위아래도 없어졌나 보네."

비엣 국장은 인사조차 하지 않는 후인이 굉장히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이내 옆에 있던 응우옌을 향해 턱짓했다.

자리를 비키라는 뜻이다.

응우옌이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크흠."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한 비엣 국장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후인은 아무 말 없이 봉투를 열어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이, 이게 뭡니까...?"

"자세하게 알 건 없고, 김의 사무실에 몰래 가져다 놔."

"그게 무슨...."

서류의 내용 그리고 비엣의 말을 이해한 후인은 경악했다.

"이제 와서 욕심을 내시겠다는 겁니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일을 성공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어려울 거 없잖아. 그리고 너한테 피해 가는 것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봐, 후인."

비엣 국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잘 생각해. 여긴 베트남이고, 아직까지 베트남에선 내 말을 거스를 수 있는 놈은 없어. 그리고 너도 그중 하나고."

"...."

"그놈들 돌아가면 한국 협회랑 나, 둘 중 누가 더 너랑 가까울 것 같냐. 의자가 좀 바뀌니까 네가 뭐라도 좀 된 거 같지? 천만에. 네가 어느 자리에 앉아 있건, 결국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한 넌 절대 나랑 떨어질 수 없어."

"...."

"아무리 협회가 커지고 네 자리가 올라가도, 네 모가지는 변함없이 내가 쥐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비엣은 상체를 숙여 후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그렇게만 해주면 네 자리, 안 뺏는다고 약속하마."

이윽고 후인의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082

082

후인에게 서류를 던져주고 하노이로 돌아가는 차 안.

"저...."

룸미러로 비엣 총정치국장의 동태를 살피던 수행비서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그놈들, 꽤나 똑똑한 놈들 같은데… 적으로 두는 것보단 아군으로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비엣이 눈을 부릅뜨자 수행비서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 북쪽에 짓고 있는 허브 말이다."

비엣은 그간 조사했던 걸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좀 알아보니까, 녀석이 진행하고 있는 허브의 연간 기대 수익이 이것저것 다 빼고 1억 달러라 하더라. 그럼 달로만 따져도 830만 달러 가까이 되지."

"김이 약속한 건 그 중 50프로지 않습니까? 월 400만 달러면 꽤 큰...."

"큰돈이지. 큰돈이긴 한데."

비엣이 룸미러를 통해 비서와 눈을 맞췄다.

"너라면 1억 달러를 다 먹을 수 있는데, 그 50%에 만족할 수 있겠나."

"...."

"공사 한 번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통째로 내게 굴러들어온다. 그걸 굳이 나눠 먹을 이유가 없지."

수행비서는 공사라는 단어에 조금 전 후인에게 던져주었던 서류가 떠올랐다.

당원들 사이에서 괴담처럼 퍼져 농담으로 쓰이는 '공사 서류'가 그것이었다.

확실히 그 서류 한 장이면 기존의 계약을 뒤집어엎고 한국 놈들에게서 협회의 지분을 모조리 뺏어오는 게 가능하다.

수년간 비엣을 보좌한 경험상, 그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액이 걸린 문제라면 더더욱.

다만 걱정되는 건 그 서류를 왜 하필 후인에게 맡겼냐 하는 부분이다.

서류의 내용을 먼저 알려줘 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후인 그놈이 과연 시키는 대로 할까요. 보아하니 이미 김한테 물든 것 같던데…. 서류를 그냥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예…?"

"솔직히 말해서, 난 후인 그 새끼가 마음에 들어. 교육은 잘 됐는데 겁이 많아서 허튼 생각을 잘 못 하거든. 개를 키울 때도 그런 놈들이 제일 다루기 편한 거 알지?"

수행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개가 지금은 다른 주인한테 붙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놈한테 직접 일을 맡긴 거야. 겁 많은 개를 다시 불러오려면 몽둥이만 한 게 없거든."

그제야 수행비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경고...입니까?"

"그래. 그놈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서류를 눈앞에서 본 이상 본인도 알겠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엔 그 서류가 자기에게 올 거라는 것쯤은."

"...."

수행비서는 저도 모르게 등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비엣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김준우한테 물들었다고 해도 본인 목숨이 걸렸으면 말이 달라지지.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내부 분열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놈은 김준우 일행이 돌아가고 난 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비엣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이제 선택지가 없어. 김준우를 본인 손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김준우 대신 본인이 죽든지. 그런데 뭐 상식적으로...."

"그놈이 후자를 선택할 리가 없죠."

"내 말이."

클클클.

차 안에 비엣의 낮은 웃음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

하노이 작전본부, 작전기획실.

비엣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닿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후인이 의문의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원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방법은 없었다.

"베트남 지부 인프라 구축 및 현지 헌터 육성을 통한 일당 체재 견제 안건."

"...예?"

"그런 제목의 서류입니다. 밑에 당신 서명까지 돼 있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결재된 서류라는 거죠."

"...."

당최 뭔 개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런 문서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서명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일당 체재 견제 안건이라....'

그게 공산국가인 베트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따위 문서를 대체 어디서… 아니 그것보다, 이 문서 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후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찌 됐든 이런 서류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비엣 국장이 와서 전해줬습니다. 이걸 당신 사무실에 숨겨 놓으라고요."

"아...."

머릿속에서 대충 아귀가 맞춰졌다.

덕분에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내일쯤 사무실로 공안이 들이닥칠 겁니다. 만약 그들이 이 서류를 발견하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내란죄로 잡혀 들어가게 되겠군요."

"당신과 당신 동료 모두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마 모든 사업이 드랍 될 겁니다. 세 분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건 덤이고요."

"우리를 스파이로 몰아서 인수합병을 백지화시키고 협회 지분을 통째로 꿀꺽하겠다?"

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가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시발, 그렇게 경고했는데 결국 욕심을 부리네...."

"솔직히 상정하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쓰읍, 그건 그렇긴 한데."

뭐, 믿을 놈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작정하고 공사를 칠 줄이야.

그래서 우리 연락을 그렇게 안 받은 건가.

우리와 연락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개새끼인가.

나는 이를 으득 씹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걸 왜 당신한테 맡긴 겁니까? 지금처럼 다 불어버리면 결국 그쪽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설마 이걸 생각 못 했을 리는 없을 거고."

"생각 못 했을 겁니다."

"…예?"

"이걸 저한테 맡긴 건, 저한테도 같은 경고를 날린 겁니다. 다시 본인한테 붙지 않으면 다음엔 내 차례라는 경고. 정치국장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던 저로선 그 경고를 무시할 만큼 담이 좋지도 않고요."

"...."

"솔직히 말하면... 예, 저도 고민했습니다."

이야기와는 다르게 후인의 표정은 여전히 퍽 담담했다.

"그런데 왜 결국 저한테...?"

"우리한텐 능력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알아요. 제가 좀 감성적이죠. 하하하."

"별...."

기가 차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구슬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에 자기 목숨을 건다니.

한 달 전엔 이렇게까지 또라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제가 이 서류를 처분해버리면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네."

"그렇다고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다 차려진 밥상이 그놈한테 넘어갈 거고?"

"더불어 세 분 모두, 한 30년은 베트남 감옥에서 보내셔야 할 겁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떡합니까. 그럼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한 의미가 없습니다."

"하아.... 저한테 너무 어려운 일을 떠넘기시는 거 아닙니까."

"전 오죽하겠습니까.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제 목숨을 맡겼는데."

하여간 말은.

'이제 어쩐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서류를 내버려두는 건 생각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서류를 처분하자니 후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후인은 마치 본인의 목숨만 걸린 것처럼 말했지만 꼭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다.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건 협회 소속의 모두를 날려버릴 생각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어떻게 뽑아서 교육한 직원들인데 그걸 모두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그냥 지금 당장 한국으로 튀어?

아니, 그런다고 뭐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

'시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지 협회를 밥 말아 먹은 거로도 모자라,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 사업에 손을 대다니.

그것도 이딴 개수작까지 부리면서.

주제를 넘어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선 당장에 쳐들어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여긴 한국이 아니다.

그쪽에서 칼을 갈고 나온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엣은 한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를 상대로 무력을 쓰는 건 전쟁이나 다름이 없고, 어쭙잖게 대항했다간 역풍만 맞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엔.

"...후인 씨."

나는 심호흡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혹시 제가 저번에 한 말 기억하십니까? 당신 보스, 때에 따라선 적으로 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

뭔가 느낀 듯 그는 몸이 굳혔다.

"이번 사업은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다면...."

나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부욱―

그의 면전에서 서류를 반으로 찢었다.

***

이후로는 뭐, 예상했던 대로였다.

날이 밝자마자 공안들이 본부로 들이닥쳤고, 모든 사무실을 쥐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들은 내가 있던 작전기획실에서 서류를 발견했다.

그들로선 모두 계획된 일이었겠지만, 한 가지 계획 밖의 일이 일어났다.

서류 반쪽이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하필 없어진 부분이 문서 하단의 서명란이었다.

누가 이 문서를 결재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사라졌기에, 그들은 나를 연행하긴 했지만, 구치소가 아닌 취조실로 끌고 갔다.

어떻게든 내 자백을 받아낼 심산인 듯했다.

텅 빈 취조실에서 수갑을 찬 채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비엣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당신이 결재한 거 맞지?"

그리곤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참 뻔뻔하기도 하셔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글쎄요. 전 처음 봅니다."

"그런데 왜 이게 네 사무실에서 나왔지?"

"글쎄요."

순순히 원하는 대답을 할 생각은 없다.

답을 정해 놓은 질문에 나는 계속 똑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몇 분이 흐르자 비엣은 슬슬 싫증이 나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내 녹음기의 버튼을 끄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서명란만 없으면 너랑 후인 모두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거 큰 착각이야."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똑같은 서류 한 장 더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웃어?"

"착각하고 계시는 건 국장님 같습니다."

그리곤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려는 거죠."

"뭐?"

"저희 한국 협회는, 이 순간 부로 베트남 협회 인수를 포기하겠습니다. 물론 이에 따른 그 어떤 위약금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비엣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뭐 하자는 거야."

"들으신 그대롭니다. 협회랑 허브, 통째로 넘겨드리겠다고요. 그걸 원하신 거 아닙니까?"

비엣이 하, 헛웃음을 뱉는다.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건 아니고?"

"뭐, 썩 틀린 말은 아니군요. 어쨌든 협회를 넘겨줄 테니 우리를 풀어주고 현지 직원들 또한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뜻이니."

"시발, 성인군자 납셨군."

"그렇게 봐주신다니 영광이군요."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번거롭게 할 거 없이 원하는 걸 드린다는 것이니, 나쁜 건 아닐 텐데요."

어깨를 으쓱이자 비엣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옆에 있던 공안을 향해 턱짓했다.

"...가서 계약서 가져와."

머지않아 눈앞에 서류 한 장이 놓였다.

베트남 협회와 북부 허브에 대한 최고 운영책임권을 인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본 후 망설임 없이 서명을 갈겼다.

"이제 베트남 협회 최고 책임자십니다."

"음"

"그럼 이제 약속대로...."

그때였다.

철컥―.

비엣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장전했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린다.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스타일이라."

"...."

정말이지 신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쾅―

"구, 국장님! 큰일 났습니다!!"

공안 한 명이 취조실 문을 벌컥 열며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아뇨! 훨씬 급한 일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비엣이 총을 거두며 물었다.

"뭔 일인데."

"그게… 국제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순간, 비엣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뭐?"

동시에 나는 미소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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