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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046

예상대로 토벌은 순조롭지 못했다.

두 번째 보스, '아틀란틱 골렘'까지 토벌한 직후.

모든 토벌대원이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다는 듯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던전 전체가 푸른빛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토벌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외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휘어지길 잠시.

우리는 던전 입구에 되돌아와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루프…?"

한상혁과 문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프 1회.

나는 곧바로 마커를 꺼내 초입 통로에 그렇게 적었다.

이제야 본격적인 루프 던전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엔 전투 방식을 바꿔 토벌을 진행했다.

결과는 또다시 루프.

세 번째엔 물리 스킬이 아닌 마법 스킬로 전투를 진행했다.

네 번째엔 시간제한을 두고 진행했다.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보스 방 진입 루트를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

횟수는 점차 늘어갔지만, 토벌 조건은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그렇게 던전이 11번째 루프 되었을 시점.

"끄윽, 끄으…!"

"하아하아...."

"허억, 허억...."

본부팀 헌터들의 넘어갈 듯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단순히 피로가 누적된 게 아니다.

이대로 영영 던전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계속해서 같은 짓을 반복해서 생긴 착란.

정신적인 한계가 온 것이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청소팀은 물론이고 더 경험이 많은 파견팀 또한 애써 내색하진 않았지만, 슬슬 지쳐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중에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건 나와 김민주 그리고 한유빈뿐.

'더 이상은 안 되겠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토벌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선 최대한 루프를 반복하면서 두 보스의 전투 패턴을 완전히 익혀두는 게 중요했다. 때문에 웬만해선 저들끼리 해결하도록 두고 싶었지만....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사고만 날 뿐이다.

"김민주."

나지막이 부르자 바로 나에게 달려온다.

"어떻게 되고 있어."

"좋지 않아요. 마땅한 단서도 못 찾았고.... 아무래도 몇 번은 더 반복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다들 많이 지쳐 있고요."

흠, 일부러 심각한 척 신음했다.

"전투 변수는 체크해봤고?"

"네.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해봤어요."

"특수 공간은?"

"없었어요."

"몬스터 분석은 완료했고?"

"네. 첫 번째 보스가 방어형의 푸른빛을 내뿜는 골렘, 두 번째 보스는 공격형의 붉은빛을 내뿜는 골렘이에요. 이외에는 딱히 특별한 건 없었어요."

김민주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토벌 직후 특이사항은?"

"토벌 직후요…? 루프가 되는 순간 던전에 푸른빛이 번쩍인 걸 빼면 딱히...."

그 순간, 김민주가 아,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보니까 토벌 직후에 붉은빛을 내뿜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왜 그럴 거 같아?"

"...."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던 끝에, 넌지시 입을 열었다.

"매번 퍼시픽 골렘을 처음으로 토벌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민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이번엔 첫 번째를 건너뛰고 바로 두 번째로… 아니, 아니지. 두 보스가 서로 다른 빛을 내뿜는 것에 이유가 있다면 어느 한쪽을 먼저 쓰러트리는 것은 의미가 없고...."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단서를 짜맞춰 가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레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 동시에 토벌을 진행하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답이었다.

물론 대답은 안 했지만.

"고마워요, 선생님!"

하지만 스스로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부리나케 토벌대로 달려가더니 그들에게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토벌대는 그녀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동시에 토벌하려면 팀을 두 개로 나눠야 할 텐데요."

"옐로우 등급이라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전투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작전을 위한 구체적인 의견이 오고 갔다.

"본부팀, 파견팀으로 나눠서 동시에 토벌을 진행하면 됩니다. 같은 몬스터를 10번이나 반복했으니, 전투 패턴은 충분히 익혔을 테니까요."

"패턴을 익혔다고 해도 전력이 안 됩니다. 지금 파견팀도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라...."

"전력도 충분할 겁니다."

김민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우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마 저 녀석… 나보고 토벌을 해달라는 건....

"한유빈 씨가 있으니까요."

....

"그, 그건 그렇지만… 지금 그녀는 헌터 자격이 정지됐습니다."

"그리고 청소부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것도 좀...."

"아, 잘 모르셨나 보군요."

김민주가 싱긋 웃었다.

"한국의 청소팀은 토벌 지원도 업무에 포함됩니다."

"...?"

"...?"

다들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던 그때.

"하하하! 좋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죠."

제이슨 팀장이 상황을 정리하며 나섰다.

"그럼 첫 번째 보스는 본부팀과 클로이, 청소팀장. 두 번째 보스는 파견팀과 청소팀 그리고 한이 가겠습니다."

"한유빈 씨를 파견팀으로 넣으시겠다고요? 차라리 제가 파견팀으로...."

김민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유빈과 파견팀 사이에 있었던 불화를 알기에 그가 제안한 구성이 꺼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제이슨은 넉살 좋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도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좋을 테니까요. 물론 한만 괜찮다면."

모두의 시선이 한유빈으로 향한다.

"뭐… 저도 상관없어요."

한유빈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보죠."

김민주 또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주춤했던 토벌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제이슨이 애써 미소를 참는 듯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11번째로 찾은 첫 번째 보스 방.

이미 파견팀은 재빨리 그곳을 가로질러 두 번째 보스에게 향한 뒤였다.

그그그―.

이윽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퍼시픽 골렘.

"괜찮을까요?"

하지만 김민주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뭐가?"

"유빈 씨랑 파견팀을 붙여 놓은 거요."

"에이.... 설마 뭔 일 나겠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이 지원실장을 바라봤다.

내심 맞장구쳐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러면 나도 괜히 불안해지는데.

"이미 지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전투에만 집중해. 알고 있지? 거의 너 혼자 싸워야 한다는 거."

"...네."

슬쩍 고개를 돌려 본부 팀원들을 살폈다.

그들 또한 전투태세를 갖췄지만, 누가 봐도 겨우 흉내만 내는 모양새다.

지친 저들에게 이전과 같은 전투를 기대할 순 없다.

현재 상태로는 탱킹과 카운터 그리고 버프만 제때 줘도 1인분이다.

나머진 모두 김민주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뭐, 여차하면 내가 도와주면 되니까.

"파견팀, 준비되셨습니까?"

이윽고 김민주가 무전을 날렸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럼 제가 카운트를 셀 테니, 최대한 맞춰서 토벌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스릉, 김민주가 검을 꺼내든 그 순간 골렘이 달려들었다. 김민주 또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광―!

11번째 토벌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보스 방 구석으로 이동했다.

뭐, 대충 보고 있다가 위험할 때나 나서줄 요량으로 턱을 괴고 전투를 관람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내 고개가 점점 꼿꼿해졌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디언 클래스! 최대한 몬스터를 오른쪽으로 몰아줘!"

"네, 네!"

"마법사들은 잘 보고 있다가 큰 동작이 보이면 스킬 몇 번 꽂아주고! 카운터만 쳐줘도 스턴 유도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근접 포지션들은 괜히 앞으로 나갔다가 어그로 끌리지 말고 뒤에 박혀 있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타앗―.

전투 흐름, 공격 방식, 팀을 지휘하는 방법.

그녀가 하고 있는 모든 게 전생의 나와 상당히 비슷했던 까닭이었다. 심지어는 말투까지.

'저 녀석....'

반 토막 난 전력, 전투 인원 부족, 누적된 피로.

11번이나 반복했다곤 해도 좋지 않은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김민주의 검은 공기마저 가를 기세였다.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 정확히 관절부에 꽂아 넣는 정확도.

무엇보다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력.

'...성장했네.'

김민주는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지만, 딸아이 학예회를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전투를 구경하기도 잠시.

지이잉―.

이윽고 골렘의 몸통에서 푸른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본부팀, 레드존 진입했습니다!"

「여기도 방금 진입했습니다! 카운트 시작해주세요!」

"다섯 신호에 공격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그 순간이었다.

"…야, 야! 피해!!"

"...!"

정면에서 기습적으로 날아든 공격.

하지만 체력이 많이 소모된 탓인지, 김민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쿠웅―!!

그 무지막지한 공격에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김민주 팀장님!!"

"민주 언니!"

"끄윽…!"

왼쪽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고통을 호소한다.

골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스킬 발동]

[습득 스킬 : 업화]

쾅―!!

내 손에 날아간 검은 화염이 골렘의 팔에 직격했다.

강력한 폭발과 함께 골렘이 균형을 잃고 잠시 주춤했다.

"서, 선생님…?"

김민주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떠들 시간 없어. 빨리 일어나서 마무리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김민주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것도 잠시.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공격 태세를 갖췄다.

"…넷."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다섯."

[천수관음 - 각성]

[고유 클래스 : 검제]

스릉―.

시퍼런 검의 궤적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보스 방 전체를 반으로 가르는 일격.

그 무지막지한 공격은 단단한 외갑을 뚫고, 골렘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

"...."

숨 막히는 정적.

쿠웅―.

이윽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골렘이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던전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루프가 끝난 것이다.

와아아아―.

함성이 들려오고 나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김민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슬쩍 그녀의 어깨를 살폈다.

상태가 썩 좋진 않았다.

골절 내지는 탈골.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일으켰다.

"괜찮냐?"

"...죽을 것 같진 않아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참 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저 깡다구는 예나 지금이나....

"그나저나 너 고유 스킬 각성은 언제 했냐?"

고유 스킬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릴 경우 발생하는 고유 스킬 각성.

각성을 끌어낸 이들은 그 순간부터 고유 클래스를 부여받는다.

A랭크 사이에서도 고유 클래스를 부여받은 놈들은 몇 없을 텐데....

"아… 며칠 안 됐어요."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바로 랭크 심사 신청했어야지. A랭크는 그냥 받았겠다!"

"선생님한테 먼저 보여드리려고요."

"...."

지랄 났다, 지랄 났어.

숙제 검사받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됐다, 정리하고 나가기나 하자."

"네."

김민주가 세상 밝게 웃는다.

그리곤 이내 무전기를 들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부상자 있으면 보고해주시고, 특이사항 없으면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

근데 어째서인지 무전기는 묵묵부답이었다.

"파견팀? 파견팀, 응답 바랍니다."

「....」

지직거리는 전파음만 들려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무전기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다.

"…너희들도 무전 해봐."

김민주의 목소리가 굳어갔다.

"저희 무전도 안 받습니다."

"뭔 일 생긴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토벌은 됐는데 이제 와서…?"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 먼저 상황을 판단한 건 클로이였다.

"그 인간, 진짜로 일을 벌인 걸 수도… 빌어먹을, 설마설마했는데...."

"무슨 소리예요, 그게. 무슨 일을 벌여요?"

나는 목소리를 키운 김민주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일단 본부팀이랑 나가서 치료부터 받아. 내가 가볼 테니까."

"아, 아뇨. 저도 가는 게... 끄앗!!"

김민주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자, 곧바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 상태로 어딜 따라오려고."

"하지만...."

"나가, 인마."

시간도 없고, 괜히 짐만 될 뿐이다.

딱 잘라 말하자 그제야 김민주도 한풀 꺾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팀 장비를 뒤적거리던 끝에, 며칠 전 새로 산 빗자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두 번째 보스 방으로 향했다.

[습득 스킬 : 레플리카]

[타인의 고유 스킬을 1분간 복제합니다.]

머릿속으로 1분 타이머를 맞췄다.

047

047

두 번째 보스 방.

토벌이 끝난 직후, 던전이 보라색 빛으로 휘감기고 있던 그때.

콰직―.

파견팀 전원이 무전기를 박살 냈다.

"...뭡니까?"

이상한 낌새에 한유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후우, 제이슨은 이제야 후련하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파일."

"...뭐?"

"작전 파일 말이야. 네가 들고 튄 거. 그거 어디 있나?"

한유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무슨 작전 파일?"

"시간도 없는데 두 번 묻게 하고 있어, 시발."

"그러니까 대체 뭔 개소리냐고. 알아듣게 말해."

제이슨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기대도 안 했어."

빠르게 단념했다.

그녀가 모르쇠로 나오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순순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파일을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왜 굳이 던전까지 끌어들였겠는가.

파일이고 나발이고...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잡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견팀이 한유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희들, 진짜 처돌았구나?"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뻐억―!

한 방에 턱이 돌아간 파견팀 헌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유빈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파견팀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허세는 시발. 오래 쓰지도 못하는 스킬, 방금 전투 지원하느라 이미 한계잖아."

"...."

한유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버서커 클래스의 고유 스킬은 짧은 순간 어마어마한 힘을 얻는 만큼, 빠르게 체력을 갉아먹는다.

'시발....'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붉은 기운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간 없어. 본부팀 놈들 오기 전에 끝내."

파견팀 전원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다른 스킬을 발동할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한유빈은 무기력하게 제압당했다.

"야, 야. 한유빈!! 뭐해 병신아!"

"유빈 씨!!"

한상혁과 문소연이 소리치자, 그들에게도 가차 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놈들은 어떡할까요?"

"뭘 어떡해, 다 없애."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투.

한유빈은 코웃음을 쳤다.

"...진짜 단단히 미쳤네. 작전 중에 아군을 공격한다고? 아무리 국제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이게 커버가 될 거 같아?"

"내가 죽였는지 아니면 전투 중에 사망했는지 알 게 뭐야. 죽은 놈은 말을 못 하는데."

그리고 제이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청소부 몇 명 죽는다고 해서 협회가 신경이나 쓸 것 같나?"

"...."

한유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제이슨은 이내 들고 있던 단검으로 그녀를 향해 단번에 내리꽂았다.

서걱―.

땅바닥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어?"

공허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갈 곳을 잃은 눈동자.

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제이슨의 손이었다.

"지랄들을 하고 앉았네."

그때, 어떤 남성이 빗자루에 묻은 피를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다 된 작전에 똥을 뿌리려고."

[레플리카 -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버러지 새끼들이."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줄곧 있는 둥 없는 둥 따라다니던 청소부가 서 있었다.

***

부리나케 달려온 두 번째 보스 방.

"끄, 끄아아아악!!!"

제이슨은 휑한 팔뚝을 붙잡곤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뭐야!"

"빗자루...?"

"지금 빗자루로 손목을 자른 거야?!"

동시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주, 준우 씨?!"

"김준우, 너...."

문소연과 한상혁도 적잖이 충격인 듯했다.

[제한 시간 초과]

[레플리카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늦지는 않았나 보네.'

빗자루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파견팀을 살폈다.

상황을 보자.

작전 자체는 전생 때와 다를 것 없이 진행됐다.

남은 변수는 그래 봤자 파견팀이 몰래 시간석을 빼돌리려는 것뿐.

지금처럼 아군을 공격하는 일은 전생에서도 없었던 상황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

나는 슬쩍 한유빈을 흘겼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이유야 뻔하네, 뭐.'

꼴을 보아하니 이미 몇 대 얻어터진 모양이다.

어째 불안 불안하더라니.

설마 공식 작전에서 이런 개수작을 벌일 줄이야.

나는 숨을 팍 내쉬며 제이슨 앞으로 다가갔다.

"두 분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작전 중에 아군을 공격하는 건 대체 무슨 경웁니까?"

"너, 너 이 새끼...!"

"그래서 우발적인 겁니까, 아니면 계획된 겁니까?"

"...!"

내가 묻자 제이슨의 눈이 떨려왔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모양이다.

"일단 자세한 건 나가서 얘기하죠.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셔야 할 겁...."

[고유 스킬 : 세틀라이트 스피어]

파앙―!

돌연 푸른빛의 거대한 레이저가 나를 향해 발사됐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뽐내는 '메카닉 클래스'의 고유 스킬.

급히 허리를 틀어 피하지 않았으면 큰 부상을 당했을 거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매너 없게...."

스킬이 날아든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 급한 거 보니까 여기서부턴 계획에 없었나 보네."

파견팀의 얼굴에 긴장감과 당혹감이 드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공격 태세를 놓지 않고 있다.

그 어중간한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이제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그래 봤자 청소부들이잖아!! 그냥 다 죽여!!"

"하, 하지만 숫자가 생각보다 너무 많은...."

"어차피 두세 명 죽어봤자 신경도 안 써!"

[습득 스킬 : 마나 불릿]

[습득 스킬 : 콜링 스펠]

[습득 스킬 : 헬 파이어]

담담하게 듣고 있자니, 곧바로 마법사 클래스의 스킬들이 날아들었다.

"에휴."

[스킬 발동]

[습득 스킬 : 업화]

검은 화염이 피어오르며 벽을 만들었다.

퍼버버벙―!

스킬들은 그 벽을 뚫지 못한 채 죄다 터져나갔다.

"뭐… 동의합니다. 동양에 있는 작은 독립 협회 소속 청소부 몇 명 죽었다고 국제 협회가 눈이나 깜빡하겠습니까."

저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뭔 목적인지는 몰라도 꽤나 공들인 계획 같은데, 웬 청소부 한 명 때문에 죄다 그르치게 생겼으니.

[시전자를 향한 공격 감지]

[현 시간부로 전투태세에 돌입합니다]

"근데 왜 그걸 내 작전에서 하려는 겁니까, 시발놈들아."

하지만 그건 너네들 사정이고.

속에서 열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새끼들은 전생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자꾸 내 앞길을 막는 건가.

그래도 최대한 좋게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나로서도 도리가 없다.

"두 발로 걸어 나가진 못할 거야. 각오들 하고 덤벼."

나는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스킬 발동]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타앗―.

자세를 낮춰 두 다리에 힘을 싣길 한 차례.

파견팀을 향해 도약했다.

***

김준우가 파견팀과 격돌한 그 순간이었다.

"유, 유빈 씨!"

"야! 한유빈! 뭐 하고 있어!"

문소연과 한상혁이 목소리를 키웠다.

"지원을 요청해야 해요! 이러다가 준우 씨 죽는다고요!"

"아니면 너라도 가서 돕던가!! 지금 저 새끼, 너 때문에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여?!"

한유빈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본인도 그러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무전기는 이미 다 박살이 났고, 자신은 한계였으니.

'그렇다고 진짜 나 때문에 저렇게까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만 떠올리던 그때.

"걱정 마세요. 제가 무전을 했으니 곧 지원이 올 겁니다."

뒤에서 한 여성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 클로이…?"

"쉿."

뒤를 돌아보니 파견팀 지원실장이었다.

보아하니 김준우를 몰래 따라온 모양이었다.

"모쪼록 저 사람이 그때까지만 버텨주길 바라봐야죠."

한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김준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자신을 압도하기까지 한 남자가 아니던가.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다, 한유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왜 피하기만 하는 거야....'

그럼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호기롭던 태도와 다르게 그는 보스 방을 빠르게 누비며 스킬을 피하기만 할 뿐,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설마 그땐 내 착각이었나, 그런 의심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섀도우 라이트닝]

쾅!!

김준우의 방향을 예측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티, 팀장님!!"

한유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팀장…!"

"아,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하십쇼."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는지, 김준우는 먼지 속에서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메카닉, 마법사, 네크로맨서... 사제도 몇 명 있고."

고개를 뚜둑거리며 중얼거렸다.

"B급 12명에 C급 5명, D급 2명… 다들 경험도 좀 있고 스킬 연계도 꽤 좋은 조합인데, 어째 죄다 원거리 포지션이네."

"...!"

"...!"

파견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정예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핵심이 빠진 거 같은데. 예산이 좀 모자랐나 봅니다?"

"시발, 청소부 주제에 뭘 안다고 나불대!"

"스킬 몇 개 피했다고 진심으로 이길 줄 아는 건...."

"닥치고 들어. 선배로서 조언해주는 거니까."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인간, 지금 뭘 하는 건가?

"아무튼, 그렇게 원거리 포지션으로만 배치하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그저 그런 근접 포지션 한 명만 있어도 뒤지게 얻어맞기 딱 좋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한유빈에게로 향했다.

"예를 들면 버서커 클래스 같은 거."

동시에 한유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저 인간....

시간을 끌면 다시 내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풉!"

그때, 파견팀의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하하!"

"당신 설마 한을 기다리는 거야?"

"광폭화 계열 스킬은 한 번 소모하면 족히 몇 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역시 청소부는 청소부였네. 괜히 쫄았잖아."

파견팀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웃음꽃을 피웠다.

"그럼, 그럼~. 저 녀석이 회복하려면 최소 몇 시간은 걸리지."

김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습득 스킬 : 레플리카]

[타인의 고유 스킬을 1분간 복제합니다]

"내 스킬 쿨타임은 10분이지만."

[레플리카 -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구구구구―.

공간이 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류.

'내, 내 스킬?!'

한유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덩달아 파견팀의 낯빛에도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거, 걱정 마! 파고들지만 못 하게 하면―."

뻐억―

파견팀의 누군가가 말하는 동시에 턱이 돌아갔다.

모두가 얼어붙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퍽, 빠악―.

뻑―.

뻐억―.

이후로는 처참한 광경만이 이어졌다.

[습득 스킬 : 원 카운터]

[약점 공격 시, 대미지 3,000% 증가]

뚜둑, 뻐억―.

한 방에 한 놈씩.

맨주먹으로 가격하는 것임에도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습득 패시브 : 과다출혈]

[체력이 소모될수록 모든 스텟이 대폭 증가합니다.]

[레플리카 - 하이패닉 버서커로 인한 체력 소모가 스텟 버프로 변환됩니다.]

뻐억, 뻑―.

[습득 스킬 : 폴리모프]

[최근 처치한 몬스터로 폴리모프 합니다.]

[최근 처치 몬스터 - 퍼시픽 골렘]

쿵―!

콰과광―.

몇 개의 스킬이 겹쳐진 건지, 김준우의 움직임은 가히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한유빈은 그 일방적인 폭행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강력한 고유 스킬을 복제한다고 해도 해당 클래스와 스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쉽사리 운용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 남자는 스킬 운용부터 연계, 응용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어쩌면 전 세계 버서커 클래스 1위인 자신보다 더.

무엇보다 스킬 쿨타임을 기다리는 동안 상대의 클래스와 포지션을 전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완벽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것도 19명의 공격을 모두 피하면서.

대체 어떻게 돼먹은 판단력인가.

'여태까지 봤던 것도 과소평가였다는 거야...?'

완벽에 가까운 기획력.

청소부 신분으로 본부를 장악한 리더십.

압도적인 힘.

그 순간, 한유빈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때 작전 지휘를 맡은 게 자신이 아니라 저 사람이었다면.

만약 그때 미국 지부에서 저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만약 그날, 그 순간, 저 사람이 있었다면....

니콜은 살 수 있었을까?

"후우...."

때마침, 김준우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끄으으…!"

"으어어...."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은 이미 종료된 후였다.

김준우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천천히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힉! 히이익…!"

귀신이라도 본 듯 땅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준우는 바닥에 버려져 있던 빗자루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자, 잠깐! 잠깐!!"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제이슨.

"나, 날 죽이려고? 청소부가 미국 지부 통제팀장을 죽이겠다고?! 그러면 국제 협회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내가 죽였는지, 작전 중에 사망했는지 알 게 뭡니까?"

김준우의 서슬 퍼런 시선이 제이슨을 관통했다.

"죽으면 말을 못 하시는데."

그렇게 빗자루를 높이 들어 올린 순간.

"자, 잠깐만요!"

이번엔 한유빈이 소리쳤다.

"뭡니까? 또."

"이제 그만 해요. 더 이상 하면 팀장님도 위험해요. 아시잖아요. 저 인간 국제 협회 소속인 거...."

김준우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그만하고 빨리 나가기나...."

뚝―.

"끄아아아악!!!"

한유빈의 말을 끊고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준우가 제이슨의 다리를 발로 밟아 부러뜨린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더 이상은 안 된다고요!! 그 사람은 국제 협회...!"

"그런데요?"

"...…네?"

"국제 협회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김준우는 그렇게 말하며 반대쪽 다리에 발을 올려놓았다.

"본보기를 보여줄 거면 말입니다. 두 번 다시 기어오를 생각조차 못 하게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게 누군지는 상관없죠."

"자, 잠…!"

뚝―.

048

048

탁탁―.

두 손을 털며 주변을 살폈다.

몬스터고 인간이고 모두 리타이어 상태.

아무래도 대충 마무리가 된 듯했다.

"그럼… 이제 남은 정산을 해볼까."

"아, 아직도 뭐가 남았어요...?"

한유빈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물었다.

거의 울기 직전 목소리였다.

대답 대신 클로이 지원실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주십쇼."

"...예?"

"시간석 말입니다. 또 몰래 가져갈 생각 말고 이리 주시라고요"

"어, 어떻게… 아니, 것보다 또?"

"...아."

젠장, 이놈의 입.

"크흠. 아무튼, 시간석만 넘겨주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른 척해드리겠습니다. 뭐, 피차 좋을 거 없잖습니까? 배분만 제대로 하고 조용히 갈 길 갑시다."

나는 제이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파일인지 뭔지도 책임지고 폐기해드리겠습니다."

"...끄으."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참… 거짓말 아닙니다."

그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어찌어찌 말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이슨 팀장님."

다시 묻자, 제이슨의 시선이 클로이에게 향했다.

"끄으윽…!"

"네, 네?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으으, 끄으으!"

고개가 세차게 움직인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결국, 클로이는 주머니에서 시간석을 꺼내 들었다.

은은한 노란빛을 내뿜는 주먹만 한 돌멩이.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간석을 넘겼다.

"그럼… 이제 여기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문소연과 한상혁, 한유빈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 나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확실히 싸움은 나랑 맞지 않는다.

몬스터는 몰라도 같은 사람 간의 싸움은 그다지 뒷맛이 좋지 않단 말이지.

"그래서… 그 파일이란 게 대체 뭡니까? 뭐길래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요?"

아까부터 줄곧 죽을상을 하고 있는 한유빈을 향해 쏘아붙였다.

한유빈이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미국 지부에 있었을 때 일이 좀 있었어요."

"아, 친구분이 사고당했다던 그…?"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작전에서 충분히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이 됐다는 정황이 담겨 있는 파일이에요."

"...."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이야기였네.

그러니까 난 지금… 친구의 복수를 위한 증거물을 대신 폐기해주겠다고 약속한 건가?

'...너무 쓰레긴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자 한유빈이 오히려 피식 웃는다.

그리곤 목에 걸린 펜던트를 벗어 열어젖혔다. 안엔 20대 여성의 사진과 마이크로 SD 칩이 들어있었다.

한유빈은 마이크로 칩을 내게 건넸다.

"괜찮은 겁니까?"

내가 묻자 한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거 그림의 떡이에요."

"예?"

"그걸 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겠어요.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닌데. 한국 오자마자 언론사에도 연락해보고, 기자들한테도 부탁해봤는데… 다 잘 안 됐어요."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국제 협회 소속, 미국 지부의 비리가 담긴 파일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백악관의 비리를 한국 언론이 터트리는 꼴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떠맡을 놈이 어디 있겠는가.

"국제 협회를 건드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이해는 해요."

"그런 소문도 있었죠."

"국제 협회 지부 사이에선 꽤 유명한 괴담이니까요. 헌터들의 밸런스를 조절하는 팀이 있어서 국제 협회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미리 제거한다― 뭐, 그런 거죠."

어디에나 괴담은 있기 마련이다.

국제 협회 지부는 그 크기나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수많은 소문이 돈다.

뭐 그중 9할은 확인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뭐, 아무튼… 제이슨이 멍청했죠. 굳이 찾으러 안 와도 무용지물인 파일이었는데."

그러곤 털어내듯 쿡쿡 웃는다.

"그럼,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전 이제 필요 없으니까,"

사실 이 파일에 담긴 게 뭔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딱히 관심 없다.

미국 지부의 비리든 뭐든, 내 알 바도 아니고.

단지, 내 관심은... 어쨌든 이게 미국 지부에 엿을 먹일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뿐이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형님?! 와, 진짜 오랜만입니다! 뭐하고 지내셨어요!」

여전히 소란스러운 목소리.

다름 아닌 중심일보 사회부 기자, 구상찬이다.

"그냥 그렇지 뭐. 넌 잘 지냈냐?"

「저도 그래요. 기삿거리가 없어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뭐, 딱히 사고도 안 일어나고. 하핫!」

"굶진 않아도 되겠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찾았거든."

「...예?」

"근데 이게 잘못 먹었다간 크게 체할 수도 있어. 어떻게, 네가 해볼래?"

쿵, 소리가 들려왔다.

「시벌! 당연하죠!! 지금 만날까요?! 형님 지금 어디세요!」

...미친놈.

생각은 하고 대답하는 걸까?

대충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티, 팀장님…? 왜...."

"예전에 미국 지부한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비만 오면 머리가 얼얼합니다."

나는 칩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당한 건 갚아줘야죠."

전생의 복수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한유빈을 슬쩍 흘겼다.

복잡한 표정.

슬픈 건지, 기쁜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나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분 말입니다."

"…네?"

"한 번 찾아뵙고 오십쇼. 박 과장님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듣자 하니 장례식에도 참석 못 했다면서요."

"...."

어찌 됐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은 건 당사자들이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

***

파일 하나에서 시작된 파문은 일파만파 커졌다.

이전, 한유빈이 맡았던 작전이 재조명되면서 다시금 수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제이슨 통제팀장은 작전 비리 및 던전 수익금 횡령으로 지부에서 대차게 잘려 나갔고, 동시에 작전 중 내분 혐의로 실형 판결을 받았다.

파견팀에 소속되어 있던 19명 또한 같은 혐의로 전원 헌터 자격이 정지됐다.

또한, 각국의 정부는 해당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고, 자국 헌터 협회를 대상으로 국정감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모든 게 국제 협회 측에서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구상찬 기자 덕이 컸다.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언론사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지.

결국, 개인계정으로 기사를 쓰고, 개인 영상 채널에 업로드하고, 발로 뛰며 보도해줄 곳을 찾았다고 하니.... 뭐, 공론화를 거의 혼자 성공시킨 셈이었다.

-또??

-또 청소팀???

-미국 지부 비리를 한국 청소팀이 터트렸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ㅅㅂ 이 미치광이 팀은 업무가 대체 뭐야?

-이것이 K-청소팀이다.

-요즘엔 청소팀이 또 뭔 지랄했는지 보는 재미로 산다.

-ㄹㅇㅋㅋ 너무 기다려지잖아.

-근데 미국 지부는 국제 협회 아님?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내가 미국 지부면 저런 미친놈들은 절대 안 건드림ㅋㅋㅋㅋㅋㅋ

덕분에 인터넷은 벌써 며칠째 청소팀에 관한 얘기뿐이다.

인터넷뿐이랴.

[국내 지부, 너도나도 청소팀 키우기에 혈안.]

[평균 연봉 6천만 원의 떠오르는 유망 직종, 던전 청소부!]

[2, 30대 직업 선호도. 1위 공무원, 2위가 던전 청소부?]

[대표적인 3D 직업 중 하나였던 던전 청소부, 유망직종이 된 이유는?]

나라 꼴이 희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한 변화가 순수하게 기뻤다.

[해금 조건 달성]

[던전 청소부 평균 연봉 6천만 원 이상]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던전 청소팀 입사 경쟁 10:1 이상]

[습득 스킬 : 이계 소환]

[던전 청소부, 20대 층 해당 직업 선호도 5위 달성]

[습득 스킬 : 형상 - 우리엘]

[검사 클래스에 도달했습니다]

[소환사 클래스에 도달했습니다]

[사제 클래스에 도달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것도 잠시, 시스템 창을 닫으며 문 앞에 섰다.

똑똑―.

이능차원관리 협회, 서울 본부.

헌터지원팀, 중증 부상 관리 병동 302호.

"오셨어요?"

병실에 들어서자 김민주가 나를 반겼다.

작전팀장이 병원 신세라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몸은 좀 어때?"

1층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 세트를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수술 경과도 좋고요."

"참 나, 그러게 왜 무리를 해. 토벌 너만 하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선생님 도움을 받을 순 없잖아요."

씨익 웃는다.

아니, 이렇게 다치는 게 더 귀찮거든?

"그래서… 청문회는 어떻게 됐어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민주가 물었다.

자기 몸 관리나 신경 쓰지 뭘 그리 걱정하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잘 처리될 거 같아. 내가 공격한 것도 정당방위로 인정됐고. 내분 유발자잖냐. 때에 따라선 사살도 가능한데 뭐 이 정도야...."

"다행이네요."

김민주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뭐… 이미 제압을 한 뒤에 다리를 부러뜨려버린 건 과잉 대응이라는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어째선지 결과적으론 조용히 넘어갔다.

아무래도 윗선에서 손을 쓴 것 같은데, 나한테 얘기도 없이 처리한 거로 봐선 이아영 쪽 라인이 분명했다.

"아무튼, 이번엔 국제 협회조차 빼도 박도 못하게 됐어. 오늘 아침에 기자회견 열어서 서울 본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더라."

덩달아 청소팀에 대한 보상도 언급했다.

1년 동안 예산 지원과 필요할 때 언제든 인력을 파견해줄 것을 약속했고, 각자에게 꽤나 짭짤한 보상금이 전달됐다.

내부적으로는 청소 3팀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다. 그래서 당분간의 토벌 일정도 모두 스탑.

이건 편 팀장과 박 과장, 콜라보의 결과물이었다.

이렇듯, 작전에 참가하지 않은 인원들도 모두 발 벗고 나서서 수습을 도와주는 중이었다.

"뭐, 마음은 고마운데 이미 일은 터졌으니… 우리만 나가리네."

"그러게요. 최대한 문제 안 생기게 하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쯧, 어쩔 수 없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중요한 건 이다음이 문제였으니까.

처음으로 맡은 작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다른 작전팀장들은 이때다 싶어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뭐… 짐을 미리 싸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유빈 씨는요?"

김민주가 슬쩍 물었다.

"알면서 물어. 휴가 갔잖아."

"그건 알죠. 딱히 별말 없었나 해서요."

흠.

"고맙대."

던전 앞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경쟁자가 늘었네요."

"...?"

뭐라는 거야, 이건 또.

"그래도 휴가 보내준 건 좀 의외네요. 솔직히 바로 다음 작업시킬 줄 알았는데."

"아껴 써야지. 능력 있는 녀석이니까. 걔 없으면 일은 누가 하냐."

"...네. 그렇죠."

어째 미묘한 표정이다.

내가 뭐 잘못 말한 거라도 있나?

"뭐,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품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김민주의 무릎 위에 툭 내려놓았다.

"…뭐, 뭐예요?"

"설마 그 몸으로 일할 생각은 아니지?"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민주는 이내 눈이 동그래졌다.

"자, 잠깐만요 선생님…! 이, 이 정도 부상 별거 아니에요! 일하는 데 지장 없는...."

"뭐라는 거야. 조용히 하고 서류나 확인해봐."

김민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근데 이 장면 어째 낮이 익은데.

"이, 이거…?"

"산재 영수증이야. 조만간 월급 계좌로 들어갈 거니까 액수나 확인해 둬."

"...."

"그리고… 작전팀에는 병가 처리해뒀으니까, 괜히 일하겠다고 나서지 말고 니 몸이나 신경 써. 시간 나면 랭크 심사도 신청해두고."

아무 말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고 낫자마자 바로 복귀해. 팀장 없으면 일은 누가 할래?"

"...그럴게요."

어째 말하고 나니 머쓱하다.

왜 하필 쓸데없이 회귀 전 기억이 떠올라 가지고....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것 같잖아.

어색한 분위기 속,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이아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아뇨, 지금 병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쯧, 혀를 차며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깊은 한숨을 쏟아내니, 김민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별건 아니고… 이두식 이사가 좀 보잔다."

짜증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올 게 온 건가 싶었다.

049

049

여의도, 이능차원관리협회 행정본부.

"그래서…."

이아영과 함께 건물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사님이 저한테 무슨 볼일이랍니까?"

"저도 몰라요. 남자들끼리 할 얘기라고 저한텐 말도 안 해줘요. 하여간, 언제 적 사람인지...."

이아영은 영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물론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으니까.

그때, 이아영이 걸음을 늦추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좀 의외였어요. 그렇게 무력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잖아요."

"필요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그러다 당신까지 위험했으면 어쩌려구?"

"살아 있잖습니까. 그럼 된 거 아닙니까."

"허...."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는다.

나는 슬쩍 흘기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무력을 쓴 게."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의외였다고 했지. 뭐,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어떤 미친놈이 국제 협회 지부랑 맞붙으려고 하겠어요. 후환이 무서워서라도 피하고 말지."

"그랬으면 한두 명쯤은 죽었을 겁니다."

"알아요. 그래서 한 말이에요."

무슨 말인가 싶어 한쪽 눈썹을 올리자, 이아영이 걸음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앞뒤 안 가리고 나서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피식 미소를 짓는다.

"아무튼, 둘이 잘 이야기해봐요. 나중에 저한테도 좀 들려주시고요. 궁금하니까."

어느덧 도착한 집무실 앞.

그녀가 대신 노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덜컥―.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이두식 이사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게. 편하게 앉아."

접견용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집무실 크기도 그렇고, 소파 크기도 그렇고 과연 직책에 어울리는 스케일이다.

"사무실 한번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결국 내가 먼저 부르게 되는구먼."

"죄송합니다. 워낙 일이 바빴던 터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왕이면 끝까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본심이지만 굳이 밝힐 건 없겠지.

"하하하! 많이 바빴던 모양이더군. 음료수라도 마시겠나? 마땅한 건 없는데...."

"아,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뭐."

이두식이 이내 맞은편에 앉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지며 그의 얼굴에도 살짝 그늘이 졌다.

"일이 생각보다 컸어."

미소를 띠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국제 협회에서 압박이라도 들어왔습니까?"

"아직은."

"아직이라면...."

"앞으로 그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야. 이사회에선 국제 협회와 척을 지기 전에 자네를 어떻게든 쳐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뭐, 일단은 어떻게든 막긴 했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아직 일러. 분명 또 얘기가 나올 거거든. 뭐, 사실 대외적으로 보면 그게 맞긴 해."

이두식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사실 이사회에서 한 달 전부터 추진하던 안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국제 협회랑 관련이 있어. 이사회 전체가 매달려서 국제 협회랑 딜 하는 상황에서 자네가 역린을 건드려버렸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겠군요."

"그 정도겠나. 아주 갈아 마실 기세지."

물론 모르는 건 아니다.

이번 일은 명백히 미국 지부의 잘못이었고, 거기에 대응한 것뿐이지만... 그거야 법적 사정이고. 조직 간의 관계라는 게 또 그렇지가 않으니.

"나도 자네랑 상황은 비슷해. 이번 일로 자네 커버 쳐주다가 이사회에서 완전히 눈 밖에 났거든. 가뜩이나 난 추진하고 있던 안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또 개혁이니 뭐니 해서 다들 안 좋게 보고 있던 마당에 잘 됐다 싶겠지. 아, 혹시 이 얘기 한 적 있나?"

"얘기하신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

그는 팔짱을 끼곤 코로 숨을 길게 내뿜었다.

"아무튼, 그런 실정이야. 나는 나대로 입장이 난처해졌고, 자네도 앞으로 골치 좀 썩을 거야. 다음 분기에 감사 일정 잡힌 거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뭐,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가 되는 게 감사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연 공감의 의미였다.

회귀 전에서도 감사로 없는 문제를 만들어 보낸 놈들이 수두룩하다. 지금이라고 뭐 다를까.

다만 그땐 내가 보내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보내질 입장이라는 차이일 뿐.

"그동안은 몸집을 키우는 데 집중했지만 이젠 그것만으론 부족해. 나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이제는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해."

이두식이 이윽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속으로 피식 웃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 나오는 건가. 이왕이면 좀 더 숨기고 있으면 좋을 텐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두식 이사는 계속 이야기를 진행했다.

"협조해 준다면 자네 협회 생활, 내가 보장해 줌세. 혹시 본부장 자리에 관심 있나?"

"하하. 전 팀장으로도 과분합니다."

이두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자네라고 해도 쉽게 생각할 게 아니네. 말했듯이, 자네는 지금 적이 많아. 이번 일로 그 적이 본부 내에만 있을 거란 보장도 없어졌고. 혼자 감당할 순 없을 게야."

"그래 봤자 일개 청소부입니다. 고작 저 한 명 때문에 그 잘나신 윗분들이 힘 뺄 것 같진 않은데요."

"하하하! 무슨 소린가."

미소를 머금고 말을 잇는다.

"일개 청소부 한 명 내치는데, 무슨 힘이 그렇게 들겠어."

순간 내 눈썹이 꿈틀했다.

"…협박입니까?"

"설마.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솔직히 말하면 나도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려워. 명분도 없이 계속 자네를 감싸고돌다간 언제 모가지가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거든."

그는 후,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 아까 말했던 이사회 안건 최종 결의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거야. 모두 일개 청소부인 자네를 노리고 있으니까."

"...."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날 도와준 건 분명 고마운 일이다.

아마 그 도움이 없었으면 일개 청소부인 내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도와줬으니, 이젠 성의를 보여달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일견 협박처럼 보여도 이 정도면 신사적인 축에 속한다. 상대보다 우위에 서면 더없이 추악해진 건 한계가 없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부탁인지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거 아니야. 그냥 협회장님한테 가서 복귀해달라고 설득만 해주면 돼."

"...?"

"알다시피 3년째 종적을 감추고 계시잖나. 이사회에서도 위치를 아는 이가 없고. 하지만 자네라면 알고 있겠지? 그러니 한 번 만나 뵙고 설득을 좀 해주게."

그걸 왜 나에게 부탁하는 거지?

당혹감에 초점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걸 왜 저한테...?"

"음? 그럼 협회장님 전속한테 부탁하지, 누구한테 하겠나."

"...?"

아.

이마를 턱 짚었다.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진짜로 믿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 아니 잠깐.

'그래서 이수용이랑 서민철 태도가 고분고분했던 건가.'

정말로 내가 협회장 라인인 줄 알고?

아니 무슨 일개 청소부를 협회장이랑 엮는 거야. 상상력이 풍부하다 못해 망상을 펼치고 있네.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쩌다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협회장님이랑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뭐?!"

그의 엉덩이가 펄쩍 뛴다.

"저, 정말인가? 정말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이두식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실망하신 모양이군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놀랐네. 그래.... 그렇다면 더 이상 부탁할 수가 없겠군."

이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혹시 지금 한 얘기, 나 외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아뇨. 지금 처음 얘기한 겁니다. 해명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내버려둬."

이두식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른 놈이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으니."

이후, 이두식은 혼자 생각할 게 있는지 곧바로 나를 내보냈다.

***

통제팀, 작전 회의실.

"그렇게 해서 다음 작전도 김준우 팀장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이의 있으신 분 있습니까?"

편창현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적이 흘렀다.

"없습니다."

모두를 대신해 대답한 사람은 작전 5팀장이었다.

이전처럼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불만은커녕 다들 안도하는 중이었다.

토벌 중 내분. 미국 지부 비리. 국제 협회와의 충돌.

게다가 확실하진 않지만, 이번 사건 자체가 한유빈에게 보복하기 위해 계획된 일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만약 이번 작전에 멋모르고 꼈다면, 책임을 모조리 떠맡을 뻔했다는 사실에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이번 주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아무도 딴죽을 거는 이가 없으니 회의 또한 금방 끝나버렸다.

팀장들은 하나 같이 죽을상을 한 채로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두가 빠져나간 빈 회의실.

"에휴...."

편 팀장의 한숨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회의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황동휘 대리가 물었다.

"또 왜 그러십니까. 일도 잘 마무리됐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앞으로가."

황동휘 대리는 그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듣자 하니 이번 일 때문에 이사회가 발칵 뒤집혔단다. 덕분에 김준우 팀장은 이사회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고."

"에이, 난 또 뭐라고… 일하다 보면 누구랑 척 지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김 팀장 문제는 김 팀장이 알아서 해결하겠죠."

"야, 이 생각 없는 놈아. 김준우가 찍혔는데 우리라고 무사하겠냐? 아니, 우리뿐만이겠어. 작전 2팀에 지원팀에, 재수 없으면 그놈들 싹 다 줄줄이 엮일 수도 있어."

황동휘 대리는 그제야 웃음기를 지웠다.

"아, 아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 팀장이잖습니까. 협회장 끈을 쥐고 있는데 설마 뭔 일이야 나겠습니까?"

"그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편창현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진짜로 끈을 쥐고 있다면 말이지...."

"...예?"

"하아. 이거 어디 가서 절대 얘기하지 마라."

편창현은 주변을 살피곤 목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말을 이었다.

"이번 채용 심사 때, 고은영 이사랑 송철식 이사와 이야기를 좀 나눈 적이 있는데.... 김준우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대."

"...."

잠깐의 침묵.

황동휘 대리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곤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냥 그 두 분이 모르고 있는 거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은영이랑 송철식이다. 이두식 다음으로 협회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인데 이름도 못 들어본 게 말이 돼? 김준우가 그 정도 위치면 임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졌을 텐데?"

"직속이겠죠. 협회장님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기엔 인사 기록에 협회장님이랑 접점이 있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 청소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헌터로 활동한 기록도 없고."

끝내 황동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편창현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김준우, 그 사람...."

그 순간 편 팀장은 헉, 소리와 함께 숨이 거꾸로 넘어갔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바로 앞에 이수용 팀장이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수용은 오히려 그의 반응이 의아한 듯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편창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 왜...."

"파일을 두고 가서요."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탁자에 올려진 파일을 챙겨선 별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시발,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편창현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050

050

서울 본부, 본부장실.

"...."

며칠간 지부장들을 만나느라 자리를 비웠던 서민철 본부장은 그간 밀린 결재 서류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며칠 전,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며칠간의 전국 투어 뺨치는 출장.

거기에 한술 더 떠선 복귀하자마자 청소팀이 미국 지부 비리를 터트렸다는, 웬 말 같지도 않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는 다음 분기에 외부 감사까지 잡혔단다.

당장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만 놓고 보면 서민철의 머리카락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서민철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었다.

"김준우가 협회장 라인이 아니다?"

"예."

앞에 선 이수용 팀장이 즉답했다.

그는 서민철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본부장실을 찾았다.

서민철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싶었지만, 그가 전해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이었다.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냐?"

서민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수용이 가져온 서류를 책상 위에 턱, 올려놓았다.

"뭐야 이게."

"인사기록표, 등본, 가족관계증명서, 졸업증명서, 기타 등등. 혹시 몰라서 길드 정보상한테 부탁을 좀 했습니다."

서민철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

생각 이상으로 이수용이 내민 자료는 확실했다.

무엇보다 길드 정보상을 통해 얻은 자료인 만큼 상당한 돈을 들였을 테지. 물론 불법에 가까운 방법이지만, 내용만큼은 확실할 거다.

"보시면 알겠지만, 너무 깨끗합니다. 출신, 학력, 가족 관계.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협회장님이랑 접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수용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심증이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김준우, 능력이 뛰어난 놈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협회장님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거라고 하기엔 협회장님이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랬다.

비밀리에 진행한다고 해도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상대는 무려 협회를 좌지우지하는 협회장이 아닌가.

이야기를 듣던 서민철이 등을 뒤로 푹 기댔다.

그간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해왔던 걸까.

오해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일개 청소부에게 이렇게까지 놀아날 줄이야.

허무함과 자괴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민철은 이내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한 달 전쯤에, 총회에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아냐?"

"네?"

"한국 협회, 국제 협회에 매각하는 게 어떻겠냐더라."

"...."

이수용의 뇌가 순간 멈췄다.

그리곤 뒤늦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 매각이요?! 국제협회랑 인수합병 된다는 말입니까?"

"뭐, 독립 협회 중에선 우리가 제일 크기도 하고, 또 헌터 수준도 좋으니까 해볼 만하지 않겠냐더라. 아무튼, 그거 때문에 좀 바빴어. 전국 임원들 만나서 동의서 받아내느라."

"이거... 정말 성사되면 진짜 엄청난 거 아닙니까?"

"그렇지. 임원들은 어차피 퇴직 앞둔 놈들이 대부분인데, 한몫 두둑이 챙겨서 나갈 수도 있고. 뭐, 운 좋으면 국제 협회 소속으로 남을 수도 있고."

국제 협회와 인수합병이라니. 이건 헌터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좋은 기회였다. 손 안 대고 국제 헌터가 되는 셈이니까.

그건 비단 헌터뿐만 아니라, 서민철을 포함한 임원들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그럼에도 서민철의 표정은 심란했다.

"문제는 협회장, 이 꼰대 새끼가 이두식 이사한테 전권을 넘기고 잠수를 탔다는 거야. 결국, 최종 사인은 이두식이 해야 한다는 소린데...."

"쯧, 해줄 리가 없죠. 그 인간이."

안 봐도 뻔하다.

본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놈인데, 협회가 다른 놈 손에 넘어가는 걸 원할 리가 없지.

"그래서 이두식은 일단 재끼고 국제 협회랑 딜을 하고 있었어. 국제 협회랑 협의해놓으면 이두식 이사를 압박할 수 있을 테니까. 뭐, 듣자 하니 최근까지 잘 진행되고 있던 모양이야. 김준우, 그 새끼가 미국 지부를 건드리기 전까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수용의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국제 협회는 이번 일 터지고 연락조차 잘 안 되는 모양이더군. 덕분에 이사들 뿔이 단단히 났어. 어떻게 온 기회인데, 청소부 한 명 때문에 전부 나가리 되게 생겼으니."

이사회의 분노는 자연스레 서민철에게로 향했다.

본부 소속 직원을 관리하지 못한 건 결국 서민철의 책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만약 이 건이 엎어지게 되면 서민철의 미래는 딱 두 가지였다.

이름뿐인 본부장으로 남아, 본부의 총알받이가 되거나.

아니면 울릉도 지부로 날아가거나.

-그 청소부 새끼 어떻게 처리 못 하면 진짜로 그렇게 될지도 몰라.

어젯밤, 송철식 이사는 현 상황을 전해주며 그렇게 못을 박았다.

서민철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이수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협회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으면 진행을 했겠냐?"

"그...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협회장님 몰래 협회를 매각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해. 전권을 가진 이두식이 최종 결의에 사인만 하면. 뭐, 그 전에 퇴출당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럼 꼭 이두식 이사가 아니라도, 협회장님이 다시 복귀하면 언제든 엎어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참 나, 너 그 인간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서민철의 물음에 이수용의 대답이 뚝 멈췄다.

그리곤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뿐만 아니라 임원들도 몰라. 이번에 출장 갔다 오면서 슬쩍 물어봤는데, 진짜 아는 놈이 한 명도 없어. 3년 동안 속세와 연이란 연은 모조리 끊은 인간이 이제 와서 왜 복귀를 하겠냐."

"에이 설마 한 명도 모르려고요. 심복이라도 몰래 심어놨겠죠."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더욱 김준우가 협회장 라인이라고 확신한 거고. 시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정황이 맞아떨어졌으니까."

서민철이 책상에 두 팔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라는 걸 알았지."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번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칼이 들어왔다.

자, 그럼 이 칼을 이제 어떻게 써야 할까.

서민철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설프게 휘둘렀다간 도리어 베인다.

확실하게 그 새끼의 맥을 끊을 방법.

"...수용아."

생각을 마친 서민철이 지그시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네?"

"뭐, 건덕지 잡을 거 없냐?"

"김준우요? 글쎄요. 워낙 철두철미한 놈이라. 무엇보다 최근 실적도 너무 좋아서 건드릴 게 딱히...."

"아니, 그 새끼 말고."

서민철의 눈이 이수용을 향했다.

"그 주변 말이야."

"뭐...."

이수용은 머리를 긁적이길 한 차례.

"없겠습니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서민철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송철식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

「뭐야.」

곧이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사님. 혹시 다음 분기에 잡혀 있던 감사, 조금 앞당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갑자기.」

"방법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정적이 이어졌다.

그것도 잠시, 송철식 이사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한 거냐.」

"예. 다만, 이쪽을 처리한다고 해도 이두식 이사가 문제입니다. 요즘 자꾸 김준우를 감싸고도는 게 영 불안합니다."

「아, 그건 걱정 마. 어차피 그 인간 지금 하루살이 목숨이라 인수합병 결의 전까진 꼼짝도 못 해. 뭐, 이후로도 무사할지는 모르겠군. 우리 나름 준비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전화기 너머로 끌끌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서민철은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송철식은, 협회장의 전권을 가진 이두식 이사의 퇴출을 예고한 거나 다름없었으니.

'젠장,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지는데.'

서민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민철아. 나뿐만 아니라 이사회 통째로 너만 믿고 있다. 알지?」

"...그럼요."

「그래. 밀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어디 한 번 해봐.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이사회 의자 하나 비워 놓을 테니.」

서민철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

꿀맛 같은 휴가가 끝나고, 청소팀이 다시 업무에 투입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린 등급, 건물형 던전.

나를 포함한 청소 3팀은 여느 때와 같이 청소 직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아, 이거 좀 늦어질 것 같은데?"

해체 작업 중이던 한상혁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보스 방에 약품을 뿌리고 있던 문소연도 바로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건물형 던전이라서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면적도 넓고...."

"우리 다음 작업 어디지?"

"삼성동에 네이비 동굴형 던전이에요."

"엥? 삼성동이면 지금 가도 늦잖아? 김 팀장!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면 작업 밀려!"

"...기다려봐."

해체한 몬스터 조각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여간 말하는 말본새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잠시 망설여졌다.

그런 일도 있고 했는데 또 너무 굴리는 게 아닌가, 약간 신경이 쓰였다.

물론 그 걱정도 잠시뿐이었다.

「네, 팀장님」

"한유빈 씨. 지금 저희 쪽 작업이 지체되고 있어서 그런데, 혹시 삼성동에...."

「작업이요?」

"네. 가능하시겠습니까?"

「알겠어요. 대충 마무리하고 금방 갈게요.」

"...."

뭐지?

「혹시 더 시킬 거 있어요?」

"...아뇨."

「그럼 먼저 끊을게요. 이따 끝나면 지원이나 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확인했다.

"번호는 맞는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지?

미국 다녀오더니 머리에 구멍이라도 났나?

어리둥절하게 꺼진 핸드폰을 보고 있자, 한상혁이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 쟤 휴가 갔다 온 후로 좀 이상해졌어. 툭하면 네 얘기만 한다니까? 돌아버리겠다니까 진짜."

"...내 얘기를 왜 해."

"나야 모르지! 어제도 휴가 잘 갔다 왔다고 전화를 할까, 문자를 할까, 혼자 존나 구시렁대고! 뭔 선물은 또 그렇게 사 왔는지. 내 건 하나도 없으면서."

결과적으로 나한텐 선물은커녕 전화도 문자도 안 왔다.

"...유빈 언니랑 서열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네요."

쟨 또 왜 난데없이 맞짱 예고를 하는 건데.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일을 그만두어야지 원....'

일이 고되긴 한 모양인지, 멀쩡했던 놈들이 점점 맛탱이가 가고 있다.

고개를 가로젓길 한 차례, 신경 끄고 작업이나 하려던 그때였다.

이아영에게서 문자가 날아들었다.

「긴급뉴스! 최근에 이사회에서 국제 협회랑 인수합병 준비 중이었다는 거 알아요? 저도 방금 얼핏 들은 건데, 이번 일로 차질이 생겨서 이사회에서 서민철 본부장한테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모양이에요.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요!」

'인수합병?'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었다.

그래, 딱 이맘때다.

영리 목적의 기업이 아니기에, 돈벌이가 아쉬웠던 이사회가 협회장이 잠수를 탄 틈에 협회를 홀랑 넘겨버리려고 했던 게.

-이사회에서 안건이 하나 나왔는데, 그게 국제 협회랑 관련이 있어.

'추진하고 있는 안건이란 게 이거였군.'

나는 쓰게 웃었다.

회귀 전, 당시 전권을 가지고 있던 이두식 이사가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인수는 결렬.

그때는 나 또한 인수합병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손 안 대고 국제 헌터가 될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그걸 독단으로 막은 이두식이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결국, 완전히 눈 밖에 난 이두식은 몇 년 후에 추진한 본부 개편에서 던전 매매 비리 건을 뒤집어쓰고 이사회에 퇴출당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민철이 올라갔지.

똑같이 흘러가는군.

이두식 이사의 수명이 그때보다 훨씬 빨리 닳았다는 것만 빼면.

'이래서 협회장을 복귀시켜달라고 한 모양이구만.'

이대로라면 자기 선에서 매각을 막을 수 없을 테니, 협회장이 직접 나서줬으면 하는 거겠지.

뭐, 그렇다면 이두식이 더는 나를 감싸고 돌 수 없다는 말도 썩 틀린 건 아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인수합병 결의서를 구경해보기도 전에 사정없이 물어뜯길 테니.

물론 지금 단계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다. 전과 달리 난 일개 청소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윗분들 일은 윗분들이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작업을 마무리하고, 던전을 나왔을 때였다.

"청소 3팀에 김준우 팀장 맞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 무표정한 얼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인상이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최준혁 감사팀장입니다."

미간이 확 좁혀졌다.

감사?

분명 다음 분기라고 했는데?

"일정이 좀 당겨졌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전혀 답을 주지 못하는 대답.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제야 이놈이 누군지 떠올랐다.

"아무튼,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

불길하네, 젠장.

051

051

갑작스럽게 감사팀이 들이닥친 건 비단 청소 3팀뿐만이 아니었다.

작전 2팀 사무실.

"살벌하네요...."

홍지연 헌터가 숨을 죽이며 말했다.

감사팀은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는 물론 서류, 문서, 영수증, 글씨가 적혀 있다 하면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까지 죄다 쓸어가는 중이었다.

김민주와 그녀의 팀원들은 사무실 구석에서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거의 사무실을 통째로 뜯어갈 기센데요? 원래 이렇게 빡세게 한답니까?"

"아니. 이번이 유독 심하네."

김민주는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문제 될 거야 없다고 자신했기에, 갑작스런 방문에도 흔쾌히 자리를 비워준 것인데....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괜히 불안해진다. 마치 뭘 숨기고 있는지 다 알고 왔다는 느낌이랄까.

김민주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김민주 팀장님?"

그때, 감사팀 소속의 한 여성이 그녀를 찾았다.

김민주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잠깐 밖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김민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성을 따라 사무실 복도로 나왔지만, 여성은 김민주를 마주한 채 아무 말 없이 서류철을 훑어볼 뿐이었다.

결국, 긴장을 이기지 못한 김민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실 게 뭔가요."

"요 몇 달간 작전 기획서, 본인이 직접 작성한 거 맞습니까?"

"...네?"

감사팀 여성이 김민주와 눈을 맞췄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거 맞냐고 물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김민주의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거짓말은 아니다. 본인이 작성한 거긴 했으니까.

"제가 듣기론 다른 사람이 조언을 해줬다고 하던데요?"

"말 그대로 조언이었습니다. 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곳저곳 많이 물어보러 다녔습니다."

"이곳저곳 다녔다고 하기엔, 다른 팀장들은 김민주 씨에게 조언을 해준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

"무엇보다 기획들이 다 비슷비슷하고.... 김민주 씨. 대리 기획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여성은 흠,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서류를 펄럭인다.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여기 보니까… 저번 합동작전 때 리더를 맡으셨네요?"

"네."

"팀장 단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이런 큰 작전에 리더를 맡으셨네요."

"작전 팀장님들이 해당 작전 보이콧을 선언하셨습니다."

"보이콧?"

여성이 되물어보긴 했지만, 별로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요?"

"그야...."

김민주는 아차 싶었다.

여기서 김준우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정을 기획, 관리한 것에 팀장들이 불만이 가졌다고 얘기해버리면 대리 기획 의혹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김민주는 눈을 피하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여성은 모호한 반응이었다.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네요. '김준우 청소부가 독단적으로 본부의 일정을 기획, 관리한 것에 항의하려 했다'라고."

"...."

김민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김민주 씨, 평소에 김준우 청소부와 친분이 있었습니까?"

"...."

분명 질문이었지만,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확실하다.

이 새끼들, 답을 정해놓고 왔다.

'이게 어떻게 감사야....'

김민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에 또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김민주가 끝내 대답을 아끼자, 여성은 서류철을 덮으며 대화를 마쳤다. 그리곤 먼저 자리를 피해 사무실로 들어섰다.

홀로 남은 복도.

김민주는 뒤늦게 이번 감사의 목적을 깨달았다.

합동작전 건으로 이사회에서 김준우를 벼르고 있다는 건 이아영 부실장의 긴급 뉴스 문자 덕에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갑작스런 감사.

그리고 답을 정해놓은 질문들.

'우리뿐만이 아니겠지....'

김민주는 누군가 휘두른 이 칼이 어디로 향할지 조심스레 예측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예측은 거의 모두 맞아떨어졌다.

같은 시각 본부, 청소팀 사무실.

말끔하게 머리를 넘겨 올린 남자가 박근태 과장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훑어보니까, 청소팀 일정은 과장님이 짠 게 아니더군요."

"예. 청소팀 일정은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근태 과장은 평소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목소리였다.

"누굽니까, 그게."

"…김준우 팀장입니다."

"흠, 알겠습니다. 이번에 청소 6팀이 신설됐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청소팀이면서 토벌 지원도 나가고 말이죠."

"맞습니다. 거의 모든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팀입니다."

"그럼 이 팀은 작전 팀장이 관리합니까, 아니면 박 과장님이 관리합니까?"

"...김준우 팀장이 관리합니다."

"청소팀 월말 보고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

박 과장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월말 보고 또한 김준우의 첨삭이 있어야 가능했으니까.

이내 남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 과장님."

"...예."

남자는 박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과장님은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협회에서 10년을 보낸 박 과장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칼을 쥐었다는 것을.

지원팀, 헌터 관리실.

이아영 부실장은 팔짱을 낀 채, 감사팀 직원의 말을 차분히 듣는 중이었다.

"그럼 무기 제작 후에 남은 재료는 왜 처분 안 하신 거죠? 규정상 보관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감사팀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이아영은 딱히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원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능 무기 재료가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건지 아세요? 남은 걸 다 버리면 긴급 상황일 땐 어떡하라고요?"

"그래서, 남은 재료가 필요할 만큼의 긴급 상황이 있었습니까?"

"...아뇨."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필요하지도 않은 재료를 규정까지 어겨가며 보관했다는 거군요."

이아영은 기가 찼다.

"일단 알겠습니다. 근데 저번 정산 시즌 때 작전 2팀에 A+급 장비를 전부 몰아줬다던데, 그건 왜 그러신 거죠?"

"경쟁이었으니까요."

"경쟁은 작전팀끼리 하는 거 아닙니까? 왜 중립을 지켜야 하는 지원팀이 거기에 꼈죠?"

"...."

천하의 이아영도 이 물음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작전 2팀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종 정산에서 2위를 했다더군요. 만약 지원팀에서 장비를 몰아주지 않았으면 그런 실적이 가능했을까요?"

"...뭘 말하고 싶으신 거죠?"

"부정 실적이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구나.

이아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실소를 내뱉었다.

통제팀, 작전 지휘실.

사무실 전체를 휘감은 정적.

그 싸늘한 분위기 속, 편창현 팀장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뭐… 더 볼 것도 없네요."

감사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청소부한테 총 책임을 맡기신 겁니까?"

"...."

편 팀장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게다가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 작전이 2팀 중심....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과정은 확실히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

"알겠습니다. 조만간 연락이 갈 겁니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감사팀 직원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황동휘 대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팀장님! 헌터지원실에 청소팀, 작전 2팀까지 싹 다 털렸답니다! 이거 진짜 뭔 일 나는 거 아닙니까?!"

뭔 일은... 젠장, 이미 뭔 일 나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서민철, 이 새끼… 진짜 작정하고 칼을 갈았네.'

편 팀장은 이를 으득 씹었다.

"우리 쪽에선 뭐 얘기 나온 거 없냐? 김준우 팀장은?"

"그게… 김 팀장이 지금 연락이 안 됩니다."

편 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두식 이사는? 그 인간이 그나마 우리 뒷배 봐주던 양반인데, 설마 가만히 있진 않겠지."

황동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이사님이 움직여줄까요."

"아, 젠장. 인수 건 때문에?"

"네. 그렇지 않아도 적이 많은 양반이잖습니까. 그 양반도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겠죠."

"그러니까 지금… 김준우 팀장은 연락 두절에 이두식 이사는 손을 놨다?"

편 팀장의 말에 사무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이거 우리… X 된 거 아니냐?"

그곳에 있던 모두의 낯빛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

벌써 2시간째.

최준혁 감사팀장은 나를 사무실에 불러 놓고 서류를 넘겨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분위기만 보면 취조라 해도 믿을 정도.

-일개 청소부 한 명 내치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나?

이두식 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일개 청소부 한 명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어지간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그런 것치곤 나한테서 건덕지를 잡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는 건 이번 감사 타깃은 내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실소가 새어 나왔다.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주변을 건든다라.'

고개를 들어 최준혁을 슬쩍 흘겼다.

아마 지금쯤 나한테 붙어 있는 녀석들을 신명 나게 털고 있을 것이다.

내 핸드폰은 가져간 것도 필시 다른 팀과 연락을 끊으려는 수작이겠지.

내겐 불안감을 심어주고, 주변 놈들에겐 불신을 심어주기 위해.

'그런 상황에서 몇 시간 동안 침묵하기란 쉽지 않지. 새끼… 제대로 배웠네.'

모든 것이 단절된 상황에서 침묵이 이어지면, 사람은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뭘 잘못했나?

혹시 이 사람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다른 팀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설마 나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생각이 많아지면 불안이 커진다.

게다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이.

불안은 곧 스스로에게 버티지 못할 중압감을 안겨주고, 그 중압감에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사람은 상대가 가장 원하는 대답을 스스로 내놓는다.

[제가 전부 책임질 테니 이제 그만해주십시오.]

최준혁은 지금,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미동은커녕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는 채로.

확실히 똑똑한 녀석이다.

하지만 내 입가에선 여전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내 전문분야거든.

'가소로운 새끼.'

내가 전생에서 이 방법으로 몇 명의 모가지를 날렸다고 생각하는가.

그걸 나한테 쓰겠다고?

어디 같잖은 새끼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있는가.

"감사팀도 참 골치 아프겠습니다."

장장 두 시간 만에 내가 첫 마디를 뗐다.

하지만 최준혁은 슬쩍 흘겨보기만 할 뿐,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다음 분기 예정이라고 해서 좀 널널하게 준비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몇 달이나 일정이 당겨지질 않나. 저 같았으면 위에다가 한소리 했을 겁니다."

"...."

"그래도 확실히 엘리트는 엘리트인가 봅니다.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깊숙하게 들어오시는 걸 보면."

"...."

찰나의 순간, 최준혁의 눈빛이 변했다.

나는 틈을 놓칠세라, 말뚝을 박아 넣었다.

"마치 타깃이랑 준비물을 누가 준비해주기라도 한 것마냥."

"...김준우 씨. 말조심하셔야 합니다."

서슬 퍼런 눈빛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누가 봐도 한마디만 더 하면 각오하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절대 깨선 안 될 침묵이 지금 깨졌다는 것.

"하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설마 협회 감사팀이라는 곳이 그렇게 공정성 없는 곳이겠습니까."

"...."

최준혁은 다시 입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나저나 이사회에서도 머리 아픈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들이라 스트레스를 조심하셔야 할 텐데. 송철식 이사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송철식 이사 사모님 생신이라던데… 생각해두신 선물이라도 있습니까?"

"...."

"제가 듣기론 샴페인을 좋아하신다고 하던데, 괜찮으시면 제가 추천이라도...."

"말조심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하, 알겠습니다. 조용히 하도록 하죠."

나는 등을 툭 기대며 입을 닫았다.

끝났다.

이제부턴 내가 침묵을 지킬수록, 생각에 잠기는 건 최준식이다.

-저 새끼 뭐지?

-설마 다 알고 있나?

-아니야, 일개 청소부 새끼가 알고 있을 리가. 분명 그냥 던진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송철식 이사를 딱 집어서 물어본 거지?

그리곤 더 나아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커지고, 이성이 마비되면서 상대가 가장 원하는 대답을 스스로 내놓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 가보십시오."

바로 이렇게.

"그럼, 수고하십쇼."

활짝 미소를 지었다.

빼앗겼던 핸드폰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052

052

"대체 연락도 안 받고 어디 있었어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이아영이 후다닥 달려왔다.

"감사팀장이랑 있었습니다. 연락받을 상황도 아니었고요."

"아 씨… 결국 당신한테도 갔네요. 무슨 얘기 했어요? 설마 책임지겠다고 한 건 아니죠?"

"걱정 마십쇼. 이래 봬도 꽤 이기적인 놈이라. 다른 팀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아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지 않아요. 아니… 최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잘릴 정도는 아니라는 거?"

"듣던 중 나쁜 소식이군요. 잘릴 정도가 아니라는 건, 자르지 않는 선에서 두고두고 괴롭히겠다는 뜻이니까."

이아영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아마 이번이 끝이 아닐 겁니다. 틈만 나면 들이닥쳐서 피를 말리겠죠."

"대체 왜....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뻔하잖습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 때문에 동료가 괴로워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제 발로 나가길 바라는 거죠."

"...방법이 없는 건가요."

"제가 나가면 됩니다."

"아, 진짜!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아영.

아니, 방법이 없냐고 하길래 알려준 건데 왜 성질인가.

"그냥 서로 원만하게 끝낼 방법이요!"

"없습니다. 최소한 제 선에서는"

이아영이 머리를 헝클었다.

"저나 민주 씨는 그나마 괜찮아요. 솔직히 여기 나가서 길드로 가도 그만이고, 길드가 아니어도 받아주는데 많아요.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콱 잠겼다.

"청소팀은 협회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잖아요."

기어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 성격에 차라리 해고된다면 중지를 바짝 치켜들고 웃으며 걸어 나갈 거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문제가 생긴 이상, 이아영은 그럴 수 없다. 더 소극적이게 되고, 더 약해지고, 더 위축될 것이다.

지금처럼.

'꼴값은 유전인가?'

가만히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처럼 당사자의 주변을 건드리는 건, 내가 전생에서 수도 없이 쓴 방법이다.

단순히 당사자를 내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본보기로도 좋고, 주변에 경각심을 심어주기에도 좋거든.

그런데.

'막상 내가 당하니까 기분이 참… 뭣 같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이 와 있었지만, 일단은 전부 무시하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이사님. 김준우입니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나! 그보다 아무래도 서민철 귀에 들어간 모양이야! 지금 본부가 난리도 아니라고! 일단은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볼 테니까....」

"아뇨. 내버려두셔도 됩니다. 더 이상 이사님이 개입하면 인수결의서 받아보시기도 전에 날아가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그냥 이대로 당하고 있겠다고?」

"이사님."

나는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칼을 쥐여 드리면, 휘두르실 수 있겠습니까?"

「....」

핸드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연하다마다.」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이아영을 바라보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건지 어렴풋이 눈치챈 듯, 어느샌가 눈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미소가 나왔다.

"이아영 씨. 혹시 지금부터 시간 좀 되십니까?"

"...네, 네? 그건 왜요?"

"어디 좀 같이 가줬으면 해서."

눈썹이 물결친다.

마치 '지금 이 상황에?'라고 묻는 표정이다.

"감사팀도 물러갔고… 시간이야 있긴 한데요."

"그럼 일단 옷부터 좀 차려입으시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

서울에서 차를 타고 두 시간 반.

강원도 산길의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굳이 이아영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가 아직 차가 없었으니까.

"아, 진짜 불편해 죽겠네!"

짜증에 찬 목소리가 운전석에서 들려왔다.

이아영은 원피스가 운전에 영 거슬리는지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게 왜 그런 옷을 입었습니까."

"차려입으라면서요! 이런 첩첩산중으로 올 줄 알았으면 안 입었지!"

운전하느라 예민해진 모양인지 버럭 소리친다.

"그런데 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말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모르는 게 낫습니다. 슬슬 도착했군요. 여기서부턴 걸어가죠."

차가 멈추자 나는 준비해둔 쇼핑백을 챙겼다. 그러자 이아영이 슬쩍 물었다.

"그건?"

"라면입니다."

"...? 라면은 왜요?"

"빈손으로 가긴 좀 그래서."

"아니… 어디 가는지는 모르겠는데, 선물로 라면은 좀 그렇지 않나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지었다.

"따라나 오시죠. 발 조심하시고."

도로에서 벗어나 길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산속을 걷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이윽고 완전히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

저 멀리 불이 켜진 오두막이 나타났다.

그 앞에 도착한 우리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묵묵부답.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

쾅―!

"꺄, 꺄아악!!"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웬 노인이 달려들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내 목에 무기부터 가져다 댔다.

"...너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안녕하십니까."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노인의 눈빛은 실로 살벌했다.

그 모습에 다른 것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노인네 여전하네.'

"처음 뵙겠습니다. 서울 본부 소속 김준우 팀장입니다. 협회장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혀, 협…!"

이아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나와 노인을 한 번씩 번갈아 봤다.

박인범 협회장.

50년 전, 던전이 처음으로 출현하기 시작하던 그 시절.

협회고 길드고 아무것도 없던 그때, 5명의 동료와 함께 전설을 써 내려간 장본인.

이후 혈혈단신으로 지금의 협회를 만든 자.

이능차원관리 협회의 우두머리.

이 머리 벗겨진 노인네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죽고 싶지 않으면 썩 돌아가. 어디 가서 입도 뻥끗하지 말고."

박인범 협회장은 내 반응이 재미가 없는지 김이 팍 샌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나는 거기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라면 사 왔습니다."

"...뭐?"

"매운맛입니다."

"...."

이아영은 얼이 나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대체 뭔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

"...오래 걸리냐?"

"30분이면 됩니다."

"들어와."

오두막의 문이 활짝 열렸다.

협회장은 우리를 거실로 안내한 뒤, 라면을 받아들곤 주방으로 향했다.

"제가 끓이겠습니다."

"됐어. 남이 끓여주는 거 먹을 바엔 부숴 먹고 말지."

예의상 해본 말이었다.

전생에서도 라면은 꼭 직접 끓여 먹곤 했으니까.

그렇게 협회장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바짝 굳어 있던 이아영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다, 당신 뭐예요?! 협회장 라인 아니라면서! 여긴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 오두방정 떨 일입니까."

"당연하죠! 이사회에서도 협회장님 위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요! 심지어 이사인 아빠도 모르는데!"

이아영이 목소리를 낮춰 따졌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줘야 하나 싶던 그때.

탁―.

라면을 끓여온 협회장이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렸다.

그리곤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들어."

"잘 먹겠습니다."

"...자, 잘 먹겠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식사 시간.

다들 아무 말 없이 면을 호록거리고 있던 그때, 협회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50년 전에 말이야. 동료들이랑 목숨 걸고 토벌 다닐 땐 한 달 내내 이것만 먹은 것 같아. 여기 온 이후론 사 먹으려면 읍내까지 가야 하는데… 다리가 이러니."

50년 전의 어느 던전, 대부분의 동료를 잃었던 토벌에서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고 했다.

걷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았냐?"

협회장이 나를 흘기며 물었다.

"이두식 이사님이 귀띔해주셨습니다. 라면을 좋아하신다고...."

"아니. 내가 여기 있는 거."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노인네의 눈빛이라곤 믿기지 않는 카리스마였다.

"말씀드릴 순 있는데… 믿지 않으실 겁니다."

"너 말고 또 아는 놈은."

"없습니다."

이내 그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서울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김준우입니다."

"청소…?"

"예."

"허, 시발!"

진심으로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하긴, 청소부한테 위치를 들키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

"옆에는?"

"지, 지원실에 이아영 부실장입니다."

"이아영이면… 이두식이 딸내미?"

"네, 네."

이아영이 바짝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나한테 할 말이 뭐야."

협회장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은 맞췄다.

"이사회에서 국제 협회와 인수합병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근데."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알게 뭐냐는 듯한 말투였다.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협회장님이 세운 협회 아닙니까. 제삼자 손에 넘어가는 건...."

"흥. 날 찾아온 놈이라 뭐라도 좀 아는 놈인 줄 알았는데."

협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난 이제 협회가 똥통으로 가든 말든 상관없어."

"...."

"50년 전에 말이다. 내가 한창 활동할 때는, 작전팀이고 뭐고 그딴 건 없었어. 체계? 정보? 그딴 게 어디 있어. 일단 던전 들어가서 살면 다행이고 죽으면 끝이었지."

전생에서 협회장과 술을 마실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다.

횟수로 따지면 이번이 121번째.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토벌할 수 있도록 기반을 잡은 게 지금의 협회가 됐다.' 이었다.

"그렇게 고생 고생을 해서 만들어 놨더니, 이젠 배들이 불렀지. 자리싸움에 돈 싸움에 씨벌. 기도 안 차."

협회장이 쓰게 웃었다.

"아무튼, 난 이제 니들끼리 뭔 짓을 하든 관심 없으니까, 할 얘기 끝났으면 이제 가봐."

앉은 채로 손사래를 쳤다.

물론 순순히 따를 내가 아니다.

"그럼 협회장 자리를 넘기시죠?"

"...?"

그 한 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 그랬냐?"

"관심도 없으시다면서 협회장 자리는 왜 고수하고 계신 겁니까. 그냥 적절한 사람한테 넘기고 노후 편하게 보내시면 될 텐데. 자리 욕심은 나고, 일은 하기 싫고. 뭐 그런 겁니까?"

"주, 준우 씨...? 혹시 돌았어요…?"

이아영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니가 미쳤구나? 청소부라고 앞뒤 가릴 것 없다, 이거야?"

"미친 건 제가 아니라 협회겠죠. 협회의 1순위가 뭡니까. 시민의 안전 그리고 토벌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협회를 보십시오. 시민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놈들은 눈엣가시가 되고, 수단 방법 없이 줄타기 하고 있는 놈들은 실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 꼴을 보시고도 제가 미쳤다는 말이 나오십니까?"

살다 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그래도 뭐… 협회장을 설득하려면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협회장님이 정녕 바라는 게 이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더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다시 찾아오지도 않겠습니다. 그런데 아니잖습니까. 굳이 그 무거운 왕관을 아직까지 쓰고 계신 이유가 뭡니까. 나중에라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 아닙니까?"

"...."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시죠. 정말 협회에 관심이 없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복귀하셔서 협회장 퇴임 절차 진행하시던가요."

준비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잠자코 듣고 있던 협회장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 서렸던 독기가 빠져나갔다.

남은 건 그저 노쇠하고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난 이제 늙고 지쳤어.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인데, 이사회는 호시탐탐 내 자리를 넘보고 있고. 거기에 껴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믿을 만한 놈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협회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숨겼다.

한평생 던전에서 살아온 그는, 조직과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 결정에 있어 주변의 입김을 따르려 했고, 그렇기에 항상 믿을 만한 놈을 옆에 두고 조언을 받아왔다.

회귀 전에는 그게 나였고.

덕분에 내 입맛대로 협회를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것도 다 옛날얘기지.

"믿을 만한 분이 왜 없습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뭐, 너라고 하려고? 깡은 인정하는데...."

"저 말고요, 이두식 이사 말입니다."

말을 하기 무섭게 이아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오히려 협회장은 담담한 반응이었다.

"이두식 이사 편에 서신다면 협회는 다시 협회장님 손에 들어올 겁니다. 애초에 협회장님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전권을 넘기신 거 아닙니까?"

"…아직도 지가 고등학생인 줄 아는 철없는 놈이야. 이사회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건 걱정 마십시오. 손만 보태주시면 이두식 이사가 알아서 해줄 테니."

이두식이 힘을 갖게 되면 바로 추진할 안건이 있지 않은가.

'본부 개혁....'

조금만 밀어준다면 협회장이 원하는 걸 모두 이뤄줄 것이다.

"박인범 협회장님. 이두식 이사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게 협회를 제자리로 돌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과거, 이두식 이사를 쳐내라고 입김을 넣었던 내가, 이젠 그에게 손을 건네라고 하고 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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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장은 머리가 복잡해진 듯했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내 눈을 노려보고 있길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말씀드렸잖습니까. 일개 청소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개 청소부가 이사회도 모르는 내 위치를 알고 찾아와선, 이두식이랑 손을 잡고 이사회를 쓸어내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바로 이해하셨습니다."

협회장이 헛웃음을 뱉으며 이마를 턱 짚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잠깐. 너 혹시 이번에 그 미국 지부 비리를 터트렸다던 그놈이냐?"

"소식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허! 그 미친놈이 너라고?"

협회장은 숨이 넘어가라 웃어댔다.

그러길 잠시, 이내 다시 내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엔 어느샌가 생기가 돌아온 뒤였다.

"그래, 내가 이두식 손을 잡는다고 치자. 그럼 너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지? 이두식이 본부장 자리라도 준대?"

"설마요."

"하하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청소부한테 본부장 자리를...."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

"딱히 저에게 직접적인 이득은 없습니다. 다만 이후를 생각했을 때, 이두식 이사가 협회에 남아 있는 게 저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후…?"

"예."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

굳이 숨길 것도 없었기에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조만간 협회에서 퇴사할 생각입니다."

"...."

협회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동시에 내 옆에서 무어라 격한 반응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왜지? 뭐, 이사회한테 압박이라도 당하고 있나?"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이유는 아닙니다. 뭐… 일개 청소부의 퇴사 사유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할 말은 다 끝났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는 게냐?"

"30분 됐습니다. 이제 가야죠."

"괜찮겠나. 난 아직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기다린다고 대답해주실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허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건네곤 곧바로 오두막에서 나왔다. 이아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아영의 주먹이 어깨로 퍽, 날아들었다.

"...뭡니까."

"그거 진짜예요? 당신 나간다는 거?!"

격양된 목소리에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이 뒤따랐다.

"...예, 뭐."

"왜요?! 대체 왜?! 설마 이번 일 때문에 책임감 느껴서?!"

"전혀 상관없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책임 타령이야.

"남아 있어 봤자 더는 얻을 것도 없을 것 같고… 얻는 것 없이 남아 있기엔 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진짜 제멋대로네요. 당신이 나가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요?"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이아영이 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없으면 협회 생활 못 한답니까? 다 실력 좋은 녀석들이니 본인들이 알아서 잘하겠죠."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아영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심심해지겠네요."

퍽 공허한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

김준우와 이아영이 돌아가고, 협회장은 다시 홀로 남았다.

표정은 심란했지만, 마음속은 이전과 달리 꽤나 요동치고 있는 상태였다.

자리를 비운 지 거의 3년이 넘어가지만, 청소부가 어떤 위치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없어선 안 되는 직군. 하지만 연봉도, 대우도, 그리고 인식도 밑바닥.

그런데 이사회도 모르는 위치를 알아내고, 대놓고 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신문을 통해 보통이 아닌 청소부가 있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분명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저런 놈이 있었단 말이지.'

협회장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무엇보다 한평생을 던전에 바쳐온 그로선 알 수 있다.

그 청소부 놈, 강하다.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헌터들보다 더.

국내 협회는 고사하고,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결코 꿀리지 않을 놈이다.

"아깝군."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다면 내 옆에 뒀을 텐데.

선반 위에 있던 작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30년 전,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뭉친 5인의 동료이자 그의 아내.

"죽지 말라고 만든 협회인데, 다들 죽자고 싸우고 있구려."

내려놓고 사색에 잠겼다.

작전팀의 비정상적인 권력. 임원들 사이의 사내 정치.

그것들에 진절머리가 나 모든 걸 내려놓고 은둔한 지 3년.

그 청소부의 말대로 이젠 협회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3년이면 오래 쉬었지.'

다시 협회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

서울 본부, 본부장실.

감사 이틀째, 작전 2팀을 포함해 김준우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팀은 어제에 이어서 말 그대로 먼지까지 털리는 중이었다.

서민철에겐 눈엣가시였던 놈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이 있었다.

김준우가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듣자 하니 어제 오후, 최준혁 감사팀장과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단다. 그리곤 벌써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끝났다고 봐야겠죠?"

이수용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서민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지, 이제 겨우 하루 지났는데. 독한 놈이니까 계속 버티려 할 수도 있고. 앞으로가 중요해, 앞으로가."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이미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였다.

"일단은 계속 이렇게 나가보자고. 뭐… 확실히 지금 반응으로 봐선 결과가 좋을 것 같긴 한데."

"알겠습니다."

이수용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벌써 김준우에 관한 이야기로 모든 작전팀이 시끌벅적했다.

물론 그 반응은 팀마다 제각각이었다.

본인의 팀을 포함해, 김준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팀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김준우에게 붙으려고 간을 재고 있던 5팀과 8팀은 옆 동네 불구경하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김준우와 가장 가까웠던 2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단 이러한 반응은 작전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다.

통제팀, 지원팀, 청소팀, 기타 행정 부서와 인사팀까지 조금이라도 김준우와 연관이 있었던 곳은 불안에 떠는 중이었으니.

이수용은 진심으로 뿌듯했다.

본인이 한 거라곤 고작 돈 몇 푼 주고 김준우 신상을 털어온 것뿐인데, 협회 전체가 들썩이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고 말이지.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책상 위, 내선 전화가 울렸다.

서민철 본부장이 잠깐 호흡을 고른 후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서민철, 이 자식! 아직 안 죽었구먼! 믿고 있었다, 새끼야!」

우렁찬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사무실 전체를 울렸다.

다름 아닌 송철식 이사였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김준우 그 새끼는 아직도 소식 없고?」

"네. 이대로 줄행랑쳐버리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뭐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합니다. 주변은 머지않아 그놈 곁에서 다 떨어져 나갈 거고. 참고 버틴다 해도 앞으로는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겁니다. 뭐, 그마저도 한 달 버티면 용한 거겠지만요."

「크하하하! 이제 다시 진행해도 되겠구먼! 다 네 덕분이다!」

"다 이사님이 힘 써주신 덕분이죠."

입에 발린 대답이었지만, 송철식은 그마저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이두식 이사뿐입니다. 인수합병 사인, 받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쓰읍, 흠....」

갑자기 깊은 한숨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뭔가 일이 꼬인 건가 싶던 찰나, 송철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이사회가 소집됐다. 안건으로는 이두식 이사 퇴임에 대한 건이 올라왔고.」

"...."

서민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올 게 온 거다.

"퇴임 사유는요. 무슨 건덕지라도 잡은 겁니까?"

「아니. 그런 것보단 임기 만료야.」

"임기 만료... 말입니까?"

잘못 들었나 싶어 서민철이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협회장이 모종의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시, 전권을 위임받은 이사는 협회장이 복귀하거나 퇴임하기 전까지 임기가 자동으로 연장된다.

'그런데 전권을 위임받은 이두식의 임기가 만료된다니....'

그게 가능한 경우는 많지 않다.

협회장이 다시 복귀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퇴임 절차를 밟았거나.

하지만 그랬다면 협회장이 어떤 형태로든 본부에 얼굴을 들이밀었겠지.

아직 그러지 않은 거로 봐선, 결론은 하나다.

"설마... 협회장님을 해임하시려는 겁니까?"

「맞아.」

"...역시 그렇군요."

서민철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협회장이 36개월 이상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앞으로도 수행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이사회는 투표를 통해 협회장을 강제 해임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임을 진행하다니....

「솔직히 그렇잖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사실상 협회에서 손을 뗐다고 보는 수밖에.」

'하, 협회장 가는 길에 이두식을 길동무로 보내겠다고?'

서민철이 처음에 생각했던 수준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다. 그땐 그냥 김준우만 내치면 다 끝날 줄 알았으니.

"그, 그나저나 투표가 과반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아직 협회장을 기다리고 있는 이사들도 꽤 될 텐데요."

「말했잖나.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이것저것 좀 쥐여주고 싹 확답받아 놨다.」

서민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와 동시에 고양감이 끓어올랐다.

그래, 시발.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아무튼,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만 해, 서민철이. 아니… 이젠 서 이사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하하...."

수화기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길 잠시, 서민철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 이사님.... 혹시 본부장 자리는 생각해두신 인사가 있습니까?"

「음? 아직 거기까진 염두 안 해뒀는데. 왜, 괜찮은 놈이라도 있나?」

"괜찮으시다면 이수용 팀장은 어떻습니까. 나름 1팀에서 꽤 좋은 실적을 보이던 놈입니다. 제 뒤를 맡기기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서민철이 앞에 서 있는 이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수용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럼에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하하하! 난 또 누구라고.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이만 끊지. 나도 아직 이것저것 할 게 좀 남았거든.」

"네,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짧은 통화를 끝내고, 서민철은 고개를 뒤로 푹 젖혔다.

한 번에 너무 엄청난 얘기를 들은 통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후… 시발.'

김준우는 곧 나가게 될 것이다. 버틴다고 해도 더 이상 그를 도와줄 동료는 없다.

인수합병 결의서에 최종 결정권을 가진 이두식 이사는 이제 나가리 됐다.

거기에 묶어 협회장 해임 안건도 올라왔고, 투표도 과반을 확보했다.

끝났다.

이젠 송철식이 협회의 새로운 실세가 되었다.

서민철은 이 거대한 변화가 불안하면서도 한 편으론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 새로운 라인에 자신이 껴있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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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핸드폰에선 벌써 몇 번째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

한유빈은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제 오후, 갑자기 감사팀이 들이닥치고부터 김준우가 연락이 안 된다.

평소에도 업무 외 연락을 하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먼저 거는 연락을 안 받지는 않았다.

한유빈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저… 팀장님."

그때 청소 6팀원, 양재원이 조심스레 불렀다.

청소 6팀이 만들어질 때 통제팀에서 인사이동 한 놈이었다.

"이제 신경 끄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뭘?"

"김 팀장 말입니다. 팀원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이랑 엮이지 않는 게...."

양재원은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한유빈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감사 때문에?"

"감사뿐만이겠습니까. 앞으론 온갖 것들을 다 걸고넘어질 텐데요."

"솔직히 모르겠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워?"

"팀장님. 저희 대부분이 통제팀에 작전팀 출신들입니다. 청소팀 입지가 올라가는 거 보고 넘어온 놈들인데… 이러다간 옛날 청소팀으로 돌아가는 것도 한순간이지 않겠습니까."

한유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저건 그냥 달면 먹고 쓰면 뱉겠다는 말밖엔 안 됐으니.

하지만 한유빈이 더욱 실망한 건, 그런 입장이 비단 양재원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죠. 이대론 끝도 없습니다."

"작전 2팀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김준우랑 제일 가까운 팀이었다는 이유로 아주 개판이 났답니다."

"솔직히 우리한테까지 번지기 전에 발 빼고 싶습니다."

양재원을 따라 팀원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다른 팀도 아닌, 본인의 팀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에 한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팀원들을 한 명씩 훑어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소팀 입지는 너희가 올렸냐?"

"...."

"남이 차려준 식탁에 숟가락만 올릴 땐 마냥 좋다고 있다가, 이제 와서 식탁 엎어질 것 같으니 내빼자고?"

입을 닫은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팀장님."

다시금 양재원이 입을 열었다.

"이기적이라고 하셔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던전도 아니고 회사입니다. 저희부터 살고 봐야죠."

"...."

"그리고 설령 우리가 끝까지 김 팀장과 간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어떨 거 같습니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알았어. 엮이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 근데... 난 아니야."

애초에 그럴 성격이었으면 미국 지부에서 그리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이제 와서 좀 어려워졌다고 등 돌리라고?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는 못 해."

"티, 팀장님!"

"걱정 마. 우리 팀에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질 거니까. 너희들한테는 불똥 안 튀게 할게."

청소 6팀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달간 그녀를 봐왔지만,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

출근 후, 다른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작업이 몰아쳤다.

한상혁과 문소연은 일부러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대해주는 건지, 아니면 이놈들도 그냥 잘 모르는 건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무엇보다 괜히 이런저런 소리 듣기 싫어서 다른 놈들의 연락도 받지 않고 있으니, 어제 그렇게 폭풍이 몰아쳤음에도 나야 지금 본부 상황이 어떤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볼일이 있어 본부에 직접 와보니, 생각보다 분위기가 더 심상치 않았다.

"제정신인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본부에 기어들어 온다고?"

"쯧, 미친놈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네 팀도 털렸냐?"

"어. 저번에 작전 지원 한 번 나가줬다고."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씹는 놈들은 그나마 보기가 편하다.

내가 불편한 건, 모른 척해야 할지 아는 척해야 할지 몰라 어설프게 눈치를 살피는 놈들이었다.

작전 2팀원들이 그랬다.

"아… 오, 오셨습니까?"

"그, 그럼 저흰 토벌이 있어서 이만...."

"아 저도 통제팀에 볼일이 있어서, 하하."

작전 2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팀원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엮이고 싶진 않은데 도움받은 건 있으니 어정쩡하게 행동하는 모양새였다.

뭐, 이해한다.

사실 저게 당연한 반응이지.

누구 때문에 개판이 됐는데 아직도 붙어먹으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놈이다.

"자냐?"

"아… 오셨어요?"

책상에 엎드려 있던 김민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굉장히 피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잔 듯했다.

"감사팀은?"

"오전에 왔다가 갔어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화났냐?"

"조금요."

"나 때문에?"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선생님한테 화를 내요. 선생님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글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텅 비어 버린 사무실을 슥 훑었다.

"그래서 화가 나는 거예요."

김민주가 쓰게 웃었다.

"선생님이 총대 메고 우리 챙겨줄 때는 본부 실세니 뭐니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기 바빴으면서, 위에서 압박 들어오자마자 피해 다니는 건 대체...."

뭐라는 건가.

누가 누굴 챙겨줬다고?

얘도 참 어지간히 하네.

"뭐, 너무 그러지 마라. 그게 당연한 거야. 당장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냐."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좀 더 처신을 잘했으면 이렇게까진 안 됐을 거예요."

참 나. 나는 실소를 뱉었다.

이 녀석은 다 좋은데, 너무 감성적이라니까.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잠이나 더 자. 아니면 이거나 읽어보던가."

"…이건?"

"내년도까지 출현하는 옐로우 등급 이상 던전 정보랑 작전 기획 요약한 거다. 뭐, 이제 내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선물이라고 생각해."

눈을 끔뻑거린다.

그러다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서, 선생님...?"

"그리고 청소 3팀이 다시 편성될 거야. 뭐, 그건 박 과장님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넌 그렇게만 알고 있어."

"자, 잠깐만요! 선생님 설마…!"

"이제 본부의 주축이 바뀔 거야."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부적으로 좀 흉흉해질 텐데… 괜히 누구 도와준답시고 끼려고 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

"...."

황망한 표정.

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핸드폰은 폼이에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이아영 부실장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등장할 때마다 참 시끄러운 사람이다.

"뭡니까?"

"이사회가 소집됐어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합니까?"

어깨를 으쓱이자 이아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회장 해임 안건이 상정됐대요."

"...?"

협회장 해임 안건?

'아… 설마?'

그런 건가.

그렇게 나가겠다는 건가.

협회장을 해임하고 이두식 이사의 임기를 강제로 끝내버리겠다?

아무리 봐도 서민철 아이디어는 아닌데.

뒤에 있는 송철식 이사가 낸 계획이겠네.

의외로 준비성이 철저한 놈이라 이미 투표도 과반을 확보했을 거고....

"어, 어떻게 하죠? 이대로 협회장님이 해임되면...."

"뭐, 늦지 않길 바라봐야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

급히 소집된 이사회.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임원들과 사외이사는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곳엔 서민철도 참석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이사회에선 협회장 해임 안건과 그에 따른 이두식 이사의 퇴임 안건을 상정하겠습니다."

장대현 의장이 입을 열었다.

"박인범 협회장은 현재 36개월 이상 직무를 이어가지 않고 있으며, 그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 연락을 취할 방법조차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는 읽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따라서 이사회는 박인범 협회장은 앞으로도 직무를 수행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박인범 협회 해임 찬반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앞줄부터 한 분씩 나와서 기표함에 넣어주십시오."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시작된 투표.

이두식 이사는 주변 눈치를 슥 살폈다.

아무리 협회장이 오래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그를 지지하는 이사들은 분명히 남아 있다. 개중엔 협회 초창기부터 협회장과 함께해온 이들도 있고.

그런 이들이 협회장의 해임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해임된다고 해도, 본인들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테니까.

혹시 몰라, 이두식은 해임 안건이 상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대부분 연락을 피하거나 겨우 연락이 됐다고 해도 이사회 얘기만 나오면 말을 돌렸다.

그쯤 되니 이두식 이사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송철식, 그 자식이 뭔 짓을 했구먼....'

회유했든, 협박했든 말이지.

이렇게 된 이상 투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협회장이 해임되면 이두식도 더는 이사회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차기 협회장은 아마도 송철식이 될 확률이 높겠지.

'주축이 바뀌겠군.'

이두식이 쓰게 웃었다.

투표는 10분도 채 안 되어 종료되었다.

그렇게 곧바로 투표 집계가 진행되고 있던 그때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두식 이사님."

귀를 의심하는 인사가 들려왔다.

이두식이 고개를 돌려보니 서민철이었다.

"...그래. 자네도 수고 많았네."

"너무 낙심하지 마십쇼. 이사회에서 나가신다고 해도 협회에는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 하하하!"

당돌한 새끼. 벌써부터 내 위로 올라갔다는 건가.

이두식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서민철이, 자네 혹시… 오징어 좋아하나?"

"예?"

"내가 아는 가게 중에 오징어로 유명한 집이 있는데… 내 조만간 예약 잡아 놓겠네."

서민철의 미간이 좁혀졌다.

뜬금없이 오징어 맛집이라니. 어디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할 만한 사이였던가.

갑자기 단상이 부산스러워졌다.

집계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럼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내 장대현 의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찬성 32표, 반대...."

"잠시만."

그때 이두식 이사가 난데없이 손을 들었다.

"...예?"

"질문이 하나 있는데,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장대현 의장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예, 예. 하십시오."

"만약 박인범 협회장이 앞으로 직무를 수행할 의지가 있다는 게 증명되면 어떻게 됩니까?"

세미나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대부분이 비웃음 소리였다.

"뭐, 규정상 그렇게 되면 해임은 불가능하겠지만…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이미 투표 집계도 끝났는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락도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수로 그걸 증명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괜히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 끌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갈 때 되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건가?"

"클클클."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이두식 이사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때.

벌컥―.

굳게 닫혀 있던 세미나실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미나실로 들어온 불청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연락이 된 거야?! 대체 누가 부른 거야!!"

"너냐? 이두식, 네가 불렀어?!"

모든 임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세미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점점 과열되어 가던 그때였다.

"조용."

간담이 서늘해지는 불청객의 목소리가 세미나실에 낮게 깔렸다.

"다들 오래간만이네, 그래."

3년 넘게 연락이 두절 됐던 박인범 협회장이, 지금 막 협회에 복귀했다.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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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임원이 아연실색했다.

"하여간 목청들은 아직도 그대로네."

박인범 협회장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주위를 쭉 둘러본 그는 이두식 이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이두식이. 살 좀 빠졌나?"

"…예. 덕분에요."

박인범 협회장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두식 이사는 애써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그조차도 협회장이 직접 행차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까닭이었다.

칼을 쥐여준다곤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협회장을 불러올 줄이야.

'김준우, 이놈 자식이… 라인 아니라고 잡아뗄 땐 언제고....'

이두식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가 없는 동안 어지간히도 개판이 됐네, 그래."

이윽고 박인범 협회장이 절뚝거리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빌어먹던 놈들 주워다가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이젠 안방 비웠다고 바로 주인 행세하려 들고 말이야."

"...."

"...."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였다.

"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실 일이 아닙니다, 협회장님. 저흰 엄연히 규정에 따라 진행했을 뿐입니다!"

보다 못한 송철식 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박인범 협회장이 지팡이를 치켜들며 그를 가리켰다.

"규정은 염병. 해임 당사자한테 통보하고 안건을 올리는 게 순서 아니냐?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억지 부리지 마십쇼! 3년이 넘도록 어디 계시는지 아무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되는데 어떻게 통보를 합니까!"

"아무도 몰랐다…?"

"예!"

송철식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박인범 협회장은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 청소부 놈은 어떻게 찾아왔는데?"

"...청소부?"

"처, 청소부라뇨?"

박인범이 말하자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

그런 와중에 서민철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최근 4개월 동안 '그 청소부 놈' 소리만 수백 번을 들은 서민철은 그것이 누굴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마...!'

서민철은 손톱을 깨물었다.

이수용이 김준우의 정보를 캐온 이후로도 혹시나 싶어 몇 번을 더 조사했다.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로 협회장과의 어떤 접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런 접점도 없는 놈이 어떻게 임원들도 모르는 협회장을 찾아간 건가.

서민철은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때, 이두식 이사가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협회장님과 연락 가능한 수단이 있었음에도 해임 통보 없이 안건을 올렸다는 뜻입니까?"

"그...런 것 같군요."

장대현 의장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투표 결과도 나왔잖습니까! 끝난 안건이니 빨리 결의하고 다음 거로 넘어가시죠!"

송철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장대현 의장이 박인범 협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당연한 소리지만, 투표 집계가 완료된 직후부터 이미 협회장은 해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결의를 밀어붙이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연락할 수단이 있었음에도 통보 절차를 무시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안건을 철회할 수 있다.

물론 그 판단을 내리는 건 오롯이 장대현 의장의 몫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선택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기에, 장대현 의장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을 못 내리는 건 비단 장대현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임원들 또한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협회장이 딱 맞게 등장했다는 건, 그와 내통하는 인물이 본부 내에 숨어 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협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또한 알고 있다는 소리겠지.

어쩌면 그 인물과 손을 잡고 일부러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본 것일 수도 있었다.

자신과 협회의 적을 가려내기 위해서.

'송철식, 그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모든 임원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미나실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밀고 나갈지, 아니면 이제라도 노선을 틀어야 할지.

"하, 하하. 상정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그때, 임원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 거참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떡합니까. 난 당연히 통보 드린 줄 알았는데."

"이거 이러면 찬성 안 했지!"

"규정 위반 안건이잖습니까. 그냥 없던 거로 하시죠?"

뒤를 따라 몇 명이 황급히 노선을 바꿨다.

"잠깐만요! 통보 절차 생략했다고 정식 안건을 철회하자고요?"

"우리 쪽에서도 어떻게든 연락이 닿도록 노력했습니다! 반년 전엔 전담팀까지 만들어진 거 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의장님! 일단 계속 진행하세요!"

하지만 반대쪽도 만만치 않았다.

장대현 의장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의사봉을 만지작거리며 선택을 머뭇거리고 있자니, 송철식 이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도 양심이 있으시면 이러면 안 됩니다! 3년 넘게 잠적해 계시다가 해임 안건 올라오니까, 이제 와서 복귀하시겠다니요!"

그 말에는 찬성파, 반대파 할 것 없이 모두가 속으로 동조했다.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난무하던 세미나실이 침묵에 잠겼다.

박인범 협회장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내가 왜 잠수를 탔는지, 왜 복귀를 한 건지는 니들이 알 거 없고."

하지만 그는 모두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장대현이,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

협회장이 떠보듯 의장에게 의사를 물었다.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카리스마 앞에 기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건을… 철회하겠습니다."

땅땅땅―

의사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인범 협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공식적으로 복귀도 했으니, 이제 내 얘기 좀 해도 되지? 많은 거 필요 없고, 니들은 딱 하나만 알면 돼."

협회장은 임원들을 주욱 훑었다.

"이제 팀은 안중에도 없이 돈만 축내는 버러지들은 내 협회에 필요 없다는 거."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고로 난 오늘부로 기획본부를 만들어서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는...."

이윽고 박인범 협회장의 시선이 한 명에게 꽂혔다.

"어때, 이두식이. 할 수 있겠냐?"

"꼭 그런 건 저한테 맡기십니다."

"인마. 내가 복귀한 이상 넌 퇴임 확정이야. 이런 거라도 해야지 협회에 붙어 있지!"

이두식 이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세미나실에 있는 모든 임원은 직감했다.

자신들의 턱밑까지 칼이 들어왔음을.

***

이사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나를 포함한 청소 3팀은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본부 내 구내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식당 입구 앞에서 한 직원이 우리를 막아섰다. 그리곤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요?"

"구내식당 이용 안 되신다고요."

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문소연과 한상혁 또한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위에서 방침이 내려왔어요."

"어디 위에서요."

"말하면 아세요?"

직원은 대꾸조차 귀찮다는 투였다.

보아하니 내가 아무 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싹 퍼진 모양이었다.

뭐, 예상한 바이긴 했는데....

기분이 참 뭣 같네.

"가요, 준우 씨. 나가서 먹으면 되죠."

"그래. 솔직히 구내식당 밥 졸라 별로였어."

가만히 직원을 노려보고 있자 문소연과 한상혁이 나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이사회가 끝날 때까진 문제를 일으킬 수도 없었기에 단념하고 등을 돌린 그때.

"에헤이. 다 같이 일하는 입장에 그러면 쓰나."

식당 안에서 이수용 팀장이 나타났다.

"괜찮아. 들어와, 들어와. 어차피 이 시간엔 밖에서 먹을 데도 없잖아."

그리곤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예, 뭐."

저의를 이해할 수 없는 호의였지만… 나는 이내 별다른 대꾸 없이 식당으로 들어섰고, 문소연과 한상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점심 시간대 구내식당은 거의 만석이었다. 물론 그중에 청소팀은 없었다.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식판을 가지고 이수용과 마주 앉았다.

"그래서, 대체 위에서 무슨 공지가 내려온 겁니까?"

"아까 들은 그대로지. 이제 청소팀은 구내식당 이용이 안 돼."

"어째서죠?"

"다른 팀에서 클레임이 좀 들어왔거든. 냄새나고 더럽다고. 뭐… 솔직히 하루 종일 몬스터 사체 만지고 오는데 좀 그렇잖나."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헌터는 몬스터 안 만지나?

"그리고 앞으로 작전 2팀의 작전은 우리가 맡을 거야."

"…왜죠?"

"왜긴 왜야. 대리 기획 적발됐잖나. 아마 팀장도 바뀌겠지."

"제가 알기론 기획 자체는 김민주가 쓴 게 맞을 텐데요. 조언 정도야 받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감사팀 가서 따져."

이수용이 젓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자네… 김민주만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나머지도 마찬가지거든. 청소팀도 인원 감축 예정됐고.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자네가 협회에 남아 있는 동안에 별로 좋은 꼴 못 볼 거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나가지?"

이내 이수용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었다.

"끈도 없는 새끼가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설쳤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저기요! 지금 그게 무슨…!"

"야."

문소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이수용이 정색하며 눈을 번뜩였다.

"지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라려? 요 며칠 오냐오냐해주니까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동시에 구내식당에 있던 모든 헌터의 시선이 쏠렸다.

"어디 한 마디만 더 끼어들어 봐. 평생, 이 바닥에서 일 못 하게 해줄 테니까."

"...."

문소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을 피하자 이수용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청소부면 청소나 할 것이지."

이수용은 자신의 식판을 툭 밀쳤고, 음식물이 바닥에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 의미로 여기 청소하고...."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지?"

그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수용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수용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한 노인네가 서 있었다.

"혀, 협...."

이수용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한편 박인범 협회장은 관심도 없는 듯, 그를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며칠 전 봤던 후줄근한 옷가지 대신,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늦지 않게 도착하셨나 보군요."

"뭐, 덕분에. 방금 막 총회 끝나고 시간 남아서 잠깐 들렸다."

"서울까지 올라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그냥 들어가서 쉬시지 뭘 여기까지 오십니까. 몸도 편치 않으신 분이."

"여기까지 온 김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그랬지. 그런데 뭐… 오길 잘한 것 같군. 덕분에 이런 같잖은 꼴도 보고."

협회장의 시선이 이수용에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이수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 오늘 해임 안건이 통과됐을 텐데요? 이제 협회장도 뭣도 아니면서 괜한 간섭 마십시오!"

"소식이 늦구먼. 하긴, 그러니 이딴 애새끼들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지."

"협회와 상관도 없는 사람이 어디서...!"

짝―.

협회장의 손등이 이수용의 뺨을 스쳤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나 또한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어이, 이수용이."

협회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라려?"

"...."

이수용은 황급히 눈을 피했다.

박인범 협회장은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가만히 싸 물고 찌그러져 있어라. 협회에 엉덩이라도 붙이고 싶으면."

"...."

꼬리 내린 이수용을 뒤로하고 협회장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군. 아무리 봐도 자네가 이런 대우를 받을 인물은 아닌데."

"과찬이십니다."

"또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널리고 널린 게 헌터니, 몇 명 자른다고 문제 될 것도 없고."

그의 시선이 주변을 향하자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다.

협회장과 당당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놈은 최소한 이 자리엔 없었다.

"그럼 얼굴도 봤겠다, 이만 간다. 나중에 시간 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지."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이상하네… 묘하게 친근하단 말이야."

박인범 협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넌 바닥에 흘린 거 닦고 가라."

그렇게 박인범 협회장이 돌아가자 구내식당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수용을 포함한 그곳에 있던 모든 헌터는 사고가 정지한 듯 보였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협회의 주축이 바뀌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거겠지.

056

056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서민철이 나를 호출했다.

뭐, 총회도 끝난 마당에 나를 찾는 이유야 뻔했다.

"내, 내가 미안하네."

공들인 개수작이 허사로 돌아갔으니... 남은 건 당연히 구걸뿐이겠지.

"송철식 그 인간이 압력을 넣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네. 정말이야, 믿어주게!"

"그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그, 그렇지? 자네는 날 믿는 거지? 그럼 협회장님에게도 부디...."

"스읍, 거기까지는 제 역할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서민철 본부장은 터덜터덜 걸어 나와 기어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참 나...."

그 광경에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 본부의 우두머리였던 그였다.

제아무리 고랭크 헌터라고 해도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고, 그 또한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었다.

그랬던 자가 이렇게까지 한심해질 수 있다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발 한 번만 봐주게!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송철식 그 새끼, 지금까지 해쳐 먹은 거 1원짜리 한 장 안 빼놓고 다 말해줄 수 있네!"

"서민철 본부장님."

자세를 낮춰 그와 눈을 맞췄다.

"제가 그거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

서민철의 눈가가 떨려왔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사실 그동안 편의를 봐주신 게 있으니 저도 좋게좋게 넘어가고 싶은데… 아쉽게도 전 그냥 일개 청소부라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말 말게! 자네가 어떻게 일개 청소부인가. 내 자네만큼 유능한 사람을 못 봤네!"

"그 말씀, 너무하지 않습니까? 여태껏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유능하다고?"

서민철은 말문이 턱 막힌 듯했다.

"그러게, 그냥 가만히 앉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왜 건드리십니까?"

"...."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등을 돌려 그대로 사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비굴하기 짝이 없는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미소를 머금은 채 사무실을 나섰다.

***

김준우가 돌아가고 홀로 남은 사무실.

서민철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덕분에 서류 종이가 그의 손에서 마구 구겨졌다.

주체할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던 그때.

똑똑―.

이수용이 들어왔다.

"부르셨...."

"야, 이 개새끼야!!"

이수용은 발을 들여놓자마자 날아드는 서류 뭉텅이를 그대로 뒤집어써야 했다.

"협회장 라인 아니라매! 접점이 있을 수가 없다며!!"

손에 잡히는 걸 모조리 집어 던지고도 서민철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제,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런 인적사항에 협회장이랑 연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하잖습니까!"

"그런데 시발, 김준우가 어떻게 알고 협회장을 불러들여? 이사회도 모르는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찾아갔냐고!"

"그, 그건...."

"찾아간 것뿐이야? 협회에 관심조차 없던 그 철밥통 꼰대 새끼가 복귀했어! 거기에 개혁까지 추진시켰다고! 이게 보통 연으로 가능한 일이냐? 어?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봐!!"

"...."

이수용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사이에 협회장과 연이 생긴 건가?

아니. 서민철 말대로 협회 내사에 개입하도록 설득할 정도면 결과적으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다.

게다가 구내식당에서 봤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연이 있는 수준을 넘어 마치 십년지기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젠장, 대체 정체가 뭐야....'

이수용은 억울함을 속으로 삭였다.

사실 그의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잘못되긴커녕, 100% 정확한 정보였다.

그저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지금 몇 명 모가지가 잘려 나가게 생겼는데!"

서민철이 길길이 날뛰던 그때였다.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동시에 서민철의 표정이 굳었다.

망설이던 끝에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

「야 이 새끼야!! 너 뭐야! 너 뭐냐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민철의 얼굴이 자동으로 구겨졌다.

「김준우는 니놈이 알아서 한다면서! 이거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 그게, 저도 이수용 이놈 말만 믿고 진행했는데...."

「니가 누구 말을 믿든 내 알 바 아니고! 알아서 하겠다는 놈이 이사회 도중에 협회장이 쳐들어올 때까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다른 임원들 지금 거품 물고 난리 났어!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제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합니까! 협회장이랑 엮어서 이두식 보내려고 했던 건 이사님 아닙니까!"

「너, 너 이 새끼…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치는 거냐?!」

"큰소리 안 치게 생겼습니까? 이제 와서 저한테 떠넘기시려는 거,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너 이 새끼야. 그동안 악성 재고 던전, 길드에 팔아버리고 서류엔 작전 1팀 실적으로 돌려놓은 거, 그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어디 내가 입 한 번 열어봐?!」

"지금 저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래, 협박한다! 진짜 모가지 날아가기 싫으면 김준우한테 매달려서라도 어떻게든 무마시켜!」

뚝―.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리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매달려서라도 무마시키라고?

그게 통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는가.

서민철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용아."

"...네."

"덕분에 네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다."

"화살이 왜 또 저한테 옵니까."

"니가... 김준우가 협회장 라인이 아니라는 그딴 헛소리만 안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안 됐으니까!"

이수용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민철을 바라봤다.

그러자 서민철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 본부장은 물 건너갔다."

이수용은 코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 또한 매우 화가 났겠지만, 서민철에겐 안중에도 없는 일이었다.

"나가."

"...."

"나가, 이 시발!"

이수용은 별다른 반응 없이 사무실을 떠났다.

"송철식 이 개새끼가 진짜...."

눈에 만연했던 분노는 어느샌가 살기로 변해있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서민철이 이를 으득 씹었다.

***

"저 개새끼가...."

복도로 나온 이수용 또한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또한 열이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비를 털어서 김준우의 정보를 캔 건 모두 서민철을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의 라인을 위해서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지만.

어쨌든 처음에 정보를 물고 왔을 땐 평생 챙겨줄 것처럼 반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니까 곧바로 책임 전가라니.

'원래 저런 새끼인 줄은 알았지만....'

임동빈이 작전 2팀장에서 날아간 것만 봐도 그렇다.

임동빈뿐이랴.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꼬리를 자르던 놈이다.

그저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을 뿐이다.

"후우...."

머리가 지끈거렸다.

협회장이 복귀한 순간부터 이미 협회의 주축은 바뀌었다.

송철식을 비롯한 밑의 인사들은 벼랑 끝에 내몰렸고, 서민철은 조만간 자신을 손절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저 새끼들 밑에 있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오히려 남아 있다간 사정없이 물어뜯기고 팽이나 당할 신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는 게 병신이지.'

그래, 이판사판이다.

물리기 전에 물어야 한다.

***

작전 2팀 사무실.

청소 3팀원과 김민주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상황을 정리했다.

솔직히 이두식이 칼을 쥐었다고 해서 협회에 큰 파장이 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협회장이 등장하긴 했어도 이미 너무 많은 임원이 등을 돌렸으니 말이다.

만약 그들이 합심해서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면 협회장의 복귀는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갈 것이고, 이두식 또한 빛 좋은 개살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들이 개혁에 실패한다고 해도 나와는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나야 서민철한테 한 방 먹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거기에 더해 협회장 라인이라는 오해까지 다시 심어줬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이능차원협회, 속속히 터지는 비리 의혹들!]

[송철식 이사의 부정 매수! 상상을 초월하는 로비 금액에 시민들 진심 어린 분노.]

[서민철 본부장, 불법 던전 매매에 실적 조작까지?]

[연이은 비리 폭로전! 그 시작은 누구인가?]

['협회 게이트'에 연루된 임원들만 14명. 검찰 조사 착수]

[네티즌, '미국 지부 비리? 남 말할 처지 아냐', 박인범 협회장 曰, '이번 기회로 협회 개혁 필요성 통감해']

['끝까지 책임지고 건강한 협회를 만들겠다', 기획본부장으로 임명된 이두식 이사의, 단독 인터뷰]

…왜 갑자기 지들끼리 물어뜯고 있는 거지?

└ 바람 잘 날 없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야야! 쟤네 싸운다!

└ 개꿀잼이네 진짴ㅋㅋㅋㅋㅋㅋㅋ

└ 병신들아 웃음이 나오냐? 저거 다 니들 세금 꿀꺽했다는 소리잖아.

└ 팩트)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백수라 세금 안 냄

└ 학생,,, 글 내려,,,,^^@

└ 아니, 그래서 갑자기 폭로전은 왜 터진 거임?? 대체 누가 터트린 거??

└ 이런 거 터트릴 만한 놈이 '그' 말고 더 있음?

└ ㄹㅇㅋㅋㅋㅋㅋ 누가 봐도 '그'자너~

└ 킹리적 갓심… ㅇㅈ합니다…

내 이름은 왜 또 묵음이 된 거지?

언론에 퍼진 수십 가지 비리 건은 사실 전생에서 모두 이두식 이사에게 덮어 씌워진 의혹이었다.

그게 모두 까발려졌다는 건, 결국 전생에서처럼 이두식이 누명을 쓰고 해임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겠지.

어째 전생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군.

"이젠 진짜 좀 무서워지려 그런다. 너 진짜 뭐냐?"

한상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놈의 겸손...."

한상혁이 치를 떨었지만, 진심으로 억울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고마워요, 준우 씨."

"아니, 딱히 감사를 받을 만한 건...."

이어서 문소연도 한술 더 뜨며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고 있자니 어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뒤에서 김민주가 어딘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표정이 왜 그래?"

"딱히 아무렇지 않은데요."

볼멘소리와 함께 고개를 휙 돌린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만 모였나.

내가 빨리 나가든가 해야지 원.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이놈들은 농땡이나 피우고 있네?"

이번에 새로이 임명된 기획본부장, 이두식 이사였다.

"저희야 불구경하는 신세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이두식이 괘씸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는 어느 순간 나에게 말을 놓았다.

이제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라고나 할까.

"그건 그렇고, 잠깐 시간 좀 되냐."

"예, 뭐 시간은 되는데… 무슨 일입니까?"

"별건 아니고, 협회장님이 점심 먹자고 부르시네."

"아, 마침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그리곤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야, 야, 너...!"

"주, 준우 씨?"

한상혁과 문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봉투에 사직서라는 세 글자가 궁서체로 크게 쓰여 있었다.

057

057

본부 앞 사거리.

좁은 골목에 있는 낡은 국밥집은 협회장의 단골 가게였다.

"빌어먹을 또 여기군."

"음? 여기 와봤었나?"

"...아뇨. 처음입니다."

여길 와봤냐니.

회귀 전에도 1년 중 300일 정도는 왔었는데 말이지.

이젠 국밥 냄새만 맡아도 올라올 지경이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게로 들어섰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협회장이 손을 흔들었다.

"메뉴는 내가 대충 알아서 시켰다. 불만 없지?"

"언제는 제가 정하게 해주셨습니까?"

이두식 이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자네는 여기 처음 와보지? 여기 돼지국밥이 아주 괜찮아."

"하하… 기대되네요."

나는 쓰게 웃었다.

우리가 앉자마자 곧바로 밑반찬이 나왔고, 협회장이 젓가락 들 때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특별히 절 부르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네겐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싶어서 말이지."

협회장 대신 이두식 이사가 대답했다.

"이미 기사로 봐서 알겠지만 송철식 이사부터 해서 서민철, 이수용 등을 포함한 일파가 서로를 물어뜯고 있어."

"물리기 전에 물겠다는 심보 같더군요."

"그래. 솔직히 협회장님이 복귀하고 기획본부를 만든다고 해도 이미 등 돌린 임원들을 상대하긴 벅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스스로 자멸해줄 줄이야."

이두식 이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너, 설마 여기까지 예상한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다. 솔직히 좀 억울하다.

"송철식 이사는 이번 일로 이사회에서 해임됐어. 서민철은 아마 울릉도로 날아갈 것 같고, 이수용은 어떻게 할지 아직 고민 중이야."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정말로 본부가 뒤집히긴 했군.

"마지막으로 추진하고 있던 인수합병은 백지화됐어."

"그거야 안 봐도 뻔하죠. 국제 협회에선 아무 얘기 없었습니까?"

"딱히. 뭐, 처음부터 중요하게 생각 안 한 걸 수도 있고."

이두식 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실소를 뱉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바쁘시겠습니다."

"말도 마라. 요 며칠 마누라 얼굴도 못 봤어."

"할 일이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말하는 것하고는."

이두식 이사는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곤 말을 이었다.

"뭐, 네 말도 맞다. 일주일 전만 해도 바람 앞 촛불 신세였는데 일 많다고 징징거릴 건 아니지. 아무튼, 이번에 네게 크게 빚을 졌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받겠습니다."

이두식이 호탕하게 웃었다.

때맞춰 국밥 세 그릇이 나왔다.

"그래서.... 네가 말한 대로 복귀도 했고 본부개혁도 추진했다."

각자 양념을 맞추고 있던 그때, 이번엔 박인범 협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앞으로 뭘 하면 되나."

"하하, 그걸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전부 자네가 짠 판이잖나. 자네한테 안 물어보면 누구한테 물어보겠어?"

흠, 옅게 숨을 쉬었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게 아니라?"

"가끔은 바람에 맡기는 것도 방법이죠. 급하게 나가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자세하게 말해봐."

협회장은 한 숟갈도 뜨지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 기획본부가 생기면서 작전 재정관리를 비롯해서 작전본부의 행정처리를 도맡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작전본부를 견제할 수단이 생긴 겁니다. 거기에 송철식 이사를 비롯한 작전본부에 굵직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사들이 대거 잘려 나갔으니, 작전본부 소속의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있겠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두식 이사까지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욕심을 부리면 다음에는 임원들이 아니라 헌터들과 싸워야 할 겁니다. 물론 지금 본부 소속 헌터들 중에서도 연봉 대비 실력이 뒤떨어지는 놈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그건 차차 해결할 문제고. 어쨌든 헌터는 협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지 않습니까. 그들과 척을 지는 건 여러모로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일을 하는 것일 뿐이고 적을 만드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라는 소리지?"

"정확합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조언해주고 있는 거지.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데.

"알았네. 공적인 조언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사적인 조언을 좀 해보게."

"...사적인 조언이요?"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해보라는 소리야."

"아...."

국밥을 휘적거리던 끝에 입을 열었다.

"뭐, 딱히 제가 원하는 건 없고… 청소팀 연봉이나 좀 올려주시죠."

"...하!"

"놀라실 거 없습니다. 원체 저런 놈입니다."

이두식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확실히 재밌는 놈이긴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복귀할 걸 그랬어."

협회장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그래서 말인데, 자네… 혹시 본부장 해볼 생각 없나?"

"거절하겠습니다."

"...."

듣자마자 단호히 대답한 탓인지 두 남자 모두 순간 표정이 굳었다.

"…어째서? 내 여태 본 놈들 중 본부장 자리에 자네만큼 어울리는 놈이 없는데."

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안주머니에서 준비해둔 사직서를 꺼내 내밀었다.

"이런 자리에서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찾아뵐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말입니다."

"...."

사직서를 받아든 협회장의 표정이 퍽 진지해졌고, 이두식 이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진심인가?"

"일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혹시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건가? 내 적극적으로 반영해줄 수 있네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인 목표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국밥을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인수합병도 물 건너간 지금, 국제 협회와는 완전히 척을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에서 협회에 남아 있어봤자 몇 년이 지나도 국제 협회엔 얼씬도 못 하겠지.

다행히 스킬 해금도 적당히 됐겠다, 마지막으로 청소팀 연봉 인상까지 약속받았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국제 협회에 입성할 준비를 해야겠지.

"그래, 정말 아깝긴 하지만… 뭐,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협회장은 단념한 듯 봉투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남은 한 달 동안이라도 잘 부탁하네."

"네, 알겠습... 예?"

"사표 내면 당장 그만둘 수 있을 줄 알았나? 그거 근로기준법 위반이야."

협회장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 악수를 건넸다.

"아무튼, 한 달 임시지만 잘할 거라 믿네. 김준우 작전본부장."

이런 염병할....

***

늦은 점심을 먹고 복귀하자, 사무실은 한바탕 난리가 난 뒤였다.

"팀장님, 퇴사한다는 거 진짜예요?!"

"아니죠, 준우 씨? 설마 진짜 퇴사할 거 아니죠?!"

"야! 너 아무리 독고다이라고 해도 말도 안 하고 이러기냐?!"

문소연과 한상혁은 물론이고, 언제 소식을 전해 들은 건지 한유빈까지 와선 득달같이 잔소리를 쏟아냈다.

"설마 우리 때문에 책임지고 사퇴한다, 뭐 그런 거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십쇼."

단호하게 말했지만, 한유빈의 표정은 꽤나 복잡했다.

그러고 있자니, 이번엔 한상혁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홀랑 나가버리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뭘 어떻게 해. 내가 뭐 보모야?"

"협회 최고 실세가 나가버리면 본부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겠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왜."

"그런 게 있어...."

씁쓸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팍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초상이라도 난 줄 알겠네.

"...퇴사일이 정확히 언제예요."

그때, 한유빈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한 달 뒤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정리는 하고 나갈 수 있어서."

"뭐, 빨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빨아먹고 나가야죠."

그렇게 말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강제로 맡았는데 뭐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하잖아.

***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산하 기구, '퍼펙트 밸런스 코퍼레이션(Perfect Balance Corporation)'

통칭, PB 코퍼레이션.

늦은 밤이었음에도 그곳 회의실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PB 코퍼레이션의 부서별 팀장들이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은 채였다.

커다란 화이트보드 앞에 모인 직원들은 언뜻 보기엔 평범한 회사원들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구이기에 이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국제 협회 사무총장을 제외한다면 각 지부의 최고 책임자 정도였으니.

"그래서...."

그때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중년 남성― 헌터 밸런스 조정팀의 마르크 팀장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석 회수도 실패, 인수합병도 불발이 났다?"

"그렇습니다."

화이트보드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던 젊은 여성―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가 대답했다.

그녀의 공식적인 소속은 미국 지부였지만, 동시에 PB 코퍼레이션 소속이기도 했다.

미국 지부에서 이를 아는 사람은 최소한 그녀의 주변엔 없었다. 전 통제팀장이었던 제이슨을 포함해서.

"그러니까 합동 작전 때 어떻게든 회수했어야지. 대체 왜 실패한 거야?"

"본부팀 중 한 명이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섣불리 움직이다간 들킬 우려가 있었기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무실 전체가 술렁였다.

"눈치를 챘다니, 우리 정체를? 아니면 시간석을 노리고 있다는 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눈치챈 놈은 누군데."

"서울 본부 소속의 청소부입니다."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 지금껏 살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일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군."

"청소부가 우리 업무를 망쳤다니, 참 나."

원탁에 앉은 이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때 마르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인수합병은 왜 불발 난 거야. 듣자 하니 거의 합의 직전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인수합병은 한국 협회 쪽에서 먼저 제안한 거라면서."

"한국 협회장이 복귀하는 바람에 반대 세력이 위로 올라섰다고 하더군."

비쩍 마른 남성― 국제 토벌권 회수팀의 케인 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독립협회 인수 및 토벌권 회수 건은 그의 담당이었던 까닭이었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보고에 따르면 그 세력을 부추긴 것도 그 청소부라고 하더군."

표정들이 모두 진지해졌다.

마냥 비웃어댈 만한 사항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PB 코퍼레이션.

사무총장이 전 세계의 모든 협회와 토벌권 그리고 모든 헌터들을 국제 협회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만들어진 비공식 산하 기구.

이들의 주 업무는 부서별로 국제 협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 제거, 뱅크 아이템 회수, 독립협회 흡수 등으로 다양했다.

지금 이들이 논의하는 안건은 단연 뱅크 아이템 회수 건이었다.

그 시작은 한국과의 합동 작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본래 임무는 시간석 회수였지만, 결과적으론 김준우의 견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협회 간 양도 및 거래가 불가능한 아이템이었기에 이미 한국 협회로 흘러 들어간 시간석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선, 한국 협회를 통째로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한국 협회에서 먼저 인수합병 제의가 왔을 땐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조심스레 합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 협회 측에서 먼저 거절 연락이 온 건 그들로선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 협회의 세력이 개편되면서 그 청소부가 작전본부장에 임명됐다고 합니다."

"청소부가 작전본부장으로 올라갔다라… 그자에 대한 정보는?"

"마땅히 알려진 게 없습니다. 학력, 출신, 경력 모두 평범합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특이 사항?"

"네. 그 청소부,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전투력을 갖고 있습니다. 웬만한 헌터보다 압도적인 실력입니다. 직접 목격한 바로는 결코 한두 번 경험해본 실력이 아닙니다."

마르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웬만한 헌터보다 강한 청소부?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헌터 랭크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나?"

"확인해본 바론 없습니다."

"그러니까… 등록도 안 된 이능력자가 청소부로 활동하고 있다?"

"네."

"이레귤러란 소리네?"

마르크의 얼굴에 살기가 드리웠다.

국제 협회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 및 이레귤러를 처리하는 게 바로 그의 업무였으니.

그리고 그때.

팔짱을 낀 채 잠자코 브리핑을 듣던 중년 여성이 흠, 하고 기척을 냈다.

PB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에마였다.

그녀는 품격이 느껴지는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레귤러가 시간석까지 꿀꺽했다.... 이거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요."

클로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긴장을 지우곤 입을 열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보려 합니다. 어차피 합법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루트가 막힌 이상,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선은 넘었으니까요."

클로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일단 다시 한번 접촉해보겠습니다."

"계획은 있나요."

"예."

클로이는 잠시 말을 끊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원석을 쓸 생각입니다."

차원석이라는 말에 에마 대표의 눈썹이 물결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사무총장님한텐 내가 보고할 테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에마 대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뒤, 마르크 팀장이 한숨을 팍 내쉬었다. 동시에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무언가로 향했다.

"하여간 이 새끼 한 명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본 건지, 쯧… 나 먼저 갈 테니까 퇴근하는 김에 이것도 좀 처리해."

"네.

마르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무언가를 발로 툭툭 쳤다.

다름 아닌 숨이 끊어진 제이슨 전 통제팀장이었다.

058

058

한국 협회에 난데없는 폭풍이 불어 닥친 지도 몇 주가 지났지만, 그 여파는 식을 줄 몰랐다.

가장 큰 이슈는 크고 작은 비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진 폭로전.

'협회 게이트'가 기어이 정치권을 건드리기에 이르렀다.

지부장 몇 명이 시의원 후보와 결탁해서 시내의 던전 토벌량을 임의로 조정했다나 뭐라나.

'뭐,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보수 진영의 선거철 무기로 던전이 쓰인 건 꽤나 유서 깊은 일이었다. 걸린 게 이번이 처음일 뿐이지.

덕분에 모든 지부에 검찰 조사가 들어가고, 국정감사에 청문회에 아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새로 발족한 기획본부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다.

물론 그러나저러나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것보단 작전본부 내부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았으니까.

당연히 이번 사건으로 작전본부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이두식 이사가 예고했던 바와 같이 서민철 본부장은 울릉도 지부로 날아갔다.

서민철은 헌터 출신이 아니었으니, 만약 해고라도 당했다면 어디 중소기업 팀장으로 들어가 아쉬운 소리 들으면서 말년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협회에 남게 된 거니 본인에겐 다행인 셈이겠지.

그 뒤를 이어 이수용은 충남 아산 지부로 인사발령이 났다.

이번 게이트의 시발점 중 한 명이었던 것 치고는 꽤나 가벼운 처분이었다.

본인도 그걸 아는 모양인지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헌터들 사이에도 대대적인 인사발령이 진행됐고, 새롭게 조직된 작전 1팀에 김민주가 팀장으로 배정됐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B급 헌터였던 녀석이 이젠 한국 협회 최고 정예팀의 팀장이 되었다.

더불어 최근 진행된 랭크 심사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하며 한국에서 네 번째 A랭크 헌터가 되었다. 국내 랭킹 4위였다.

한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야단법석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하긴, 딱히 랭크에 신경 쓸 타입은 아니지.'

무엇보다 고작 A랭크에서 끝날 녀석도 아니고.

한편 청소팀은 입사 희망자가 꾸준히 상승하더니 이젠 공채까지 진행하게 됐다.

그 결과, 청소팀은 총 10팀까지 신설되었다.

문소연과 한상혁은 각각 7팀, 8팀의 팀장직을 제안받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둘 다 거절했다.

지원팀에선 강현숙 실장이 게이트에 휘말려 날아가고, 이아영이 실권을 쥐었다.

통제팀은 게이트에 연루된 인원 몇몇이 교체된 것 외엔 큰 변화는 없었다.

굵직한 것만 열거해도 이 정도다.

그야말로 격변기라 부를 만한 지금 시기. 이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퇴사하는 것도 빡세네...."

누군 입사하고자 지옥 같은 경쟁을 뚫으려고 아등바등하는데, 누군 나가질 못해서 전전긍긍이라니.

사무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책상 위엔 아직도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였다.

그 옆에 놓인 자개 명패엔 '대한민국 이능차원 협회, 작전본부장'이라는, 쓸데없이 긴 직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참 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대체 어느 조직이 한 달 후에 퇴사할 놈을 본부장 자리에 앉힌단 말인가.

혹시나 싶어 한 달 뒤에 정말 퇴사할 수 있는 건지 재차 확인하니, 협회장은 웃으며 '별일 없으면' 이라 말했다.

별일 없으면...이라.

그럼 반대로 별일이 있으면 사표 수리를 안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자칫하다간 국제 협회엔 얼씬도 못 하고 쓸데없이 직책만 높은 이 자리에서 몇 년을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5년 밖에 없는데 그런 의미 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무사고 전역.

아니, 무사고 퇴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한 달 만큼은 조용히 보내야 한다.

일주일간은, 조용히 앉아서 일만 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착란이 생길 정도로.

오죽하면 청소일이 그리워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빌어먹을....'

물론 이번에 본부장이 돼서 이득을 본 것도 분명 있다.

[해금 조건 달성]

[던전 청소부 평균 연봉 1억 원 이상]

[습득 스킬 : 타천사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던전 청소팀 입사 경쟁률 30:1 이상]

[습득 스킬 : 한계돌파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던전 청소부, 20대 층 직업 선호도 2위 달성]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던전 청소부 정규직 전환율 50% 이상]

[습득 스킬 : 롤링 페이퍼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기타 등등....

거의 대부분 스킬을 해금할 수 있었다.

사실 해금되었다고 하기보단, 내가 전부 인위적으로 달성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이제 나름 본부장의 위치다.

작전, 통제, 지원, 청소, 4개 조직을 모두 관리할 수 있는 작전본부장.

청소팀 키우기 조건 따위, 손가락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현재 비공식 S랭크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비공식 국내 랭킹 1위, 세계 랭킹 37위에 도달했습니다]

시스템 창의 그 문구를 보며, 슬슬 랭크 등록을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애초에 스킬을 해금시켜 다시 헌터가 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뭐, 활동 범위를 생각하면 오히려 등록을 안 하는 편이 나을 수도....'

그렇게 따지면 또 이제 와서 헌터가 되는 게 무슨 이득이 있나 싶다.

좋든 싫든 토벌에만 귀속되는 헌터와 달리,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잠시 개인적인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본부장님."

"예. 들어오십쇼."

노크와 함께 한 여성이 사무실로 들어와 가볍게 묵례했다.

이번 내 승진과 더불어 새롭게 배정된 신수지 보좌관이었다.

"다음 달 작전 10개 팀 토벌 기획안입니다. 오늘 내로 결재해주셔야 통제팀에서 일정 잡고 정보수집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재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지도 않고 사인을 휘갈겼다.

"다 됐습니다."

"...."

뭐 하는 인간이지, 싶은 표정.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 달 기획안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이번 달만 버티면 끝인데.

"또 보고할 거 있습니까?"

"...네. 이번에 지원팀에서 아이템 연구시설 증축 건의가 올라왔습니다. 저번 합동 작전에서 획득한 시간석 있지 않습니까? 그걸 연구하고 싶은데 여건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기획서는?"

"메일로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곧바로 메일을 확인해서 첨부파일을 열었다.

PPT로 작성된 기획서엔 필요 장비와 인원, 예산이 꽤나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딱 봐도 이아영 실장의 솜씨였다.

대충 읽어보고 있던 그때, 신수지 보좌관이 설명을 덧붙였다.

"연구시설이 만들어지면 장기적으로는 분명 이득이긴 합니다만, 추정 예산만 500억이 넘습니다. 아무래도 기각하는 편이...."

"지금 작전본부 쪽 예산,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대략 820억 정도 남아 있습니다."

"추진하세요."

"네, 네?! 그러면 당장 다음 달에 작전 예산부터 위험할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추진하세요."

이번엔 미친 건가, 싶은 표정.

물론 내가 이 정도로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번에 통제팀 장비도 싹 교체합시다. 통신도 자꾸 끊기고, 가끔 던전 매핑도 오류가 나는 걸 보니까 바꿀 때가 됐어요."

"아, 네… 남아 있는 예산에서 최대한...."

"그럴 거 없이 다음 분기 예산 미리 땡겨 받아서 진행합시다. 협회장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네."

"그리고 청소팀 장비만 너무 아날로그 하지 않습니까?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방호복에 빗자루 들고 일을 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청소팀한테 하이테크 슈트 하나씩 지원해주세요."

"...."

잠시 이어진 정적.

이후 신수지 보좌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실을 나섰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푹 기대며 한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잠시 한숨 돌리려던 그때, 다시금 사무실 문이 열렸다.

"어떻게, 본부장 일은 할 만하십니까?"

이번엔 편창현 통제팀장이었다.

"예, 뭐. 그럭저럭."

"하하! 그런 것치곤 표정이 썩 좋진 않으신데요."

"위에서 멋대로 앉힌 거니까요."

편창현 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서, 여기까진 직접 어떤 일이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네, 뭐… 문제라면 문제죠."

"무슨 일인데요."

"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내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대론 위험합니다."

"예…?"

"이래저래 작전팀이 개편됐다곤 하지만, 이번 게이트 영향으로 헌터들이 너무 많이 빠져나갔어요. 지금 인원으로는 당장 다음 주 작전부터 문제가 생길 정도입니다."

이번 일로 작전팀에 빈자리가 꽤 생겼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다지 심각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라떼는 말이야~ 10명으로 레드 던전도 토벌하고 그랬는데 말이지.

"저희 쪽에서 분석을 해보니, 안정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최소 32명을 더 채워 넣어야 합니다."

"널리고 널린 게 헌터인데 문제 있겠습니까."

"그 헌터들이 협회로 안 오려고 하니 문제죠."

"...그렇습니까?"

"이번 게이트 사건으로 협회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져서 말이죠. 들어와도 눈칫밥인데,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흐음...."

하여튼, 배들이 불렀군.

"일단 신입 받긴 글렀습니다. 당장 해볼 수 있는 건 길드나 프리랜서를 스카우트하는 것 정도겠군요. 당장 내일부터 진행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급한 사항입니까? 작전을 아예 못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어찌어찌 돌아갈 수준이긴 합니다만, 저번에 보고 드렸다시피 이번에 인천항 부근에서 이능파가 감지됐잖습니까."

"...?"

전혀 들은 기억이 없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때 보고서에 결재까지 해주셨는데."

"아, 아아... 납니다. 네, 확실히 그랬었죠."

젠장, 다음부턴 읽어는 봐야겠군.

"아무래도 저희 쪽 판단으로는 수중 던전으로 예상됩니다."

"수중 던전이요?"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수중 던전.

바닷속에 생기는 던전. 기본적으로 수중 전투가 가능한 헌터들만이 토벌대로 선출되지만, 수중 호흡 관련 스킬을 가진 헌터는 많이 없는 게 현실이다.

토벌 후에도 잔존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2차 피해도 많이 발생한다.

그런 던전이 출현 예정이라면 확실히 인원을 채우는 게 급한 일인 건 맞다만....

'그런데 수중 던전이 이맘때 열렸었나…?'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던 그때.

편창현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수중 던전을 대비해서라도 인원을 보충해야 합니다. 일단 저희 팀에서 괜찮은 길드랑 컨택을 해볼 테니...."

"아뇨.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일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중요한 일이잖습니까. 이런 건 본부장이 직접 해야죠."

편창현 팀장이 작게 감탄했다.

물론 그거야 표면적인 이유고, 본심은 조금 달랐다.

최소한 스카우트를 진행하는 동안엔 다른 일은 안 해도 되잖아?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느니 차라리 밖에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낫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걱정 마십쇼."

편창현 팀장은 그렇게 거듭 감사를 전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난 의자에 등을 푹 기대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그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까닭이었다.

'수중 던전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맘때 수중 던전이 열린 기억은 없다.

물론 협회 사정이나 대외적인 부분은 전생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던전 출현만큼은 전생과 100% 일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없던 수중 던전이 생긴 거지.

나는 연신 턱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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