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4

***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성물 - 롱기누스]

푸른빛의 창.

그 어떤 방어막도 뚫어 버리는 성창을 들고 웨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슈우욱―!

그 순간, 최대한 근거리에서 있는 힘껏 창을 내던졌다.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쉘터]

하지만 투명한 벽이 웨슬리 사무총장을 감쌌다.

스윽―.

내 창은 마치 허공을 가르듯, 웨슬리 사무총장을 그대로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지이잉―.

"...!"

내 머리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곧장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었다.

"시발…!"

나는 곧바로 목이 부서져라 고개를 꺾었다.

가까스로 머리가 날아가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흩날린 머리카락 몇 개가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이다.

내 공격은 아예 닿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빌어먹을....'

천지창조.

원형의 이능력을 이용하여 이공간을 창조하는 스킬이자, 활용도가 가히 어마어마한 능력.

내 공격 자체를 이공간으로 보내 버릴 수도, 아니면 본인을 다른 공간으로 감싸 공격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다.

아무리 화력이 좋은 스킬과 방어막을 뚫는 스킬을 때려 부어도 의미가 없다.

그 어떤 스킬도 아예 다른 공간에 있는 대상을 공격할 순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간이 생성될 때 몇 초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

즉, 웨슬리가 생성하는 공간을 움직임으로 피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움직이면 날 직접적으로 공격할 순 없겠지만....'

결국, 소모전으로 가면 스킬 유지에 한계가 있는 내가 불리하다.

하지만,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어쩔 수 없지.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타앗―!

나는 다시 한번 속도를 올려 웨슬리 사무총장을 향해 돌진했다.

"…실성한 건가요?"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지이이잉―.

그 순간, 또다시 내 머리 위의 공간이 휘어졌다.

재빨리 머리를 꺾으며 피했다.

공간이 생성되는 순간에 맞춰 스킬을 발동시켰다.

[습득 스킬 : 업화]

쿠구구―!

쾅―!

"...큭!"

아니나 다를까 공격이 적중했다.

여태껏 손끝 하나 닿지 못했던 그에게 고작 하급 스킬이 정확히 직격한 것이다.

이를 확인한 나는 이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다.

내 예상대로....

한 번에 생성할 수 있는 공간에 한계가 있다.

"보아하니 만들 수 있는 공간은 한 번에 두 개가 전부인 것 같군요."

"...!"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래.

말이 안 되지.

우리가 가진 힘은 그저 이능력의 원형.

획일화된 스킬이 아닌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다는 것뿐.

결코, 절대적이고 무한한 힘이 아니다.

무한한 공간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힘?

그런 게 있을 리가.

"몇 번 공격을 맞대본 거로 그걸 파악하시다니... 역시 대단하시네요."

말과 다르게 명백히 조롱하는 투였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드러난 걸 무마하기 위해 애써 여유로운 척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 공간을 만드는 데 하나를 쓰셨고, 절 공격하기 위해선 남은 하나를 남겨놔야 하니...."

"...."

[소환 : 군단]

[원형 소환 : 대원수 - 바엘]

[원형 소환 : 정복자 - 아가레스]

[원형 소환 : 지배자 - 가미긴]

[...]

[대악마 총 72, 마물 총 124,240마리가 소환되었습니다.]

그그그그극―.

키에에에엑―!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고유 클래스 : 절대군주]

모습을 드러낸 내 모든 전력.

수십만 마리의 마물이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가 현역 때는 레드 등급 던전 토벌에만 참여했어요."

"...?"

웨슬리 사무총장은 어째선지 미소를 지으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투를 벌일 필요도 없었죠. 그냥 보스 몬스터를 다른 공간으로 보내 버리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뭐… 그렇게 토벌한 몬스터만 300마리쯤 될 겁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 다 어디 있을 것 같나요?"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유 스킬 : 천지창조]

[공간 해제]

[A-1 : 골드버그]

[A-2 : 고대병기 - 카미라]

[A-3 : 팬텀 소드]

[...]

[ZZA- 10 : 킬러 킹]

[총 337개 공간이 해제되었습니다.]

구구구구구―!

수백 마리의 몬스터.

역대 레드 등급 던전의 보스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 공간을 두 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저것들을 가두고 남은 공간이 두 개밖에 없었던 겁니다."

"...."

338마리의 레드 등급 몬스터.

그리고 봉인이 해제된 340개의 공간.

그 절망적인 풍경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웨슬리 사무총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미안한 생각은 안 들어요?"

그가 나에게 물었다.

"제가 미안해야 합니까?"

"당신이 방해만 안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시민들의 희생도 없었을 테죠."

"이 모든 게 저 때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아닌가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말을 이었다.

"당신만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

"오늘 당신은 여기서 죽을 거고, WDSO는 해체될 것입니다. 당연히 베를린 침공은 막을 수 없을 거고요. 그렇게 당신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도 그제야 알게 되겠죠."

그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두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그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를 흘렸다.

"한때는 당신을 존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

"토벌 시스템을 만들고, 조직을 꾸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늘 최전선에서 싸웠으니까요."

여태껏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말.

그리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는 그 말을,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천천히 전했다.

"헌터는 자신보다 약한 놈을 절대 자신보다 앞에 세워선 안 됩니다. 가장 강한 놈이 가장 위에 있어야 하고, 가장 앞에 있어야 하죠."

"...."

"뭐, 권력욕에 찌든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힘을 가지고 계셨는데도 그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그 책임을 남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걸 보니까...."

나는 크게 숨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냥 찌질한 겁쟁이였군요."

"...."

그 말이 확실히 직격타였는지 웨슬리 사무총장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동감입니다."

이내 우리 둘 사이에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전쟁 속 또 다른 전쟁.

다른 이들은 상상조차 못 할 그 거대한 전력들이 마주한 순간.

구구구구구―.

키에에에에―!!

두 사람의 전력이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293

293

이공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군단 간의 전쟁.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치열한 전장을 우두커니 선 채 바라봤다.

모든 공간을 해제하고,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풀려난 이상 직접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김준우는 아니었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습득 스킬 : 전능]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엔젤 링]

쾅, 콰광―!!

콰과과광―!!

본인이 직접 군단을 이끌고 있다.

수십만 마리의 마물들을 선두에서 이끌며 수백 마리가 넘는 레드 등급 몬스터 무리를 돌파하고 있다.

수십 개의 스킬을 쏟아부으면서 실시간으로 토벌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유 스킬 : 천지창조]

[고유 공간을 생성합니다.]

[x32]

슥―!

스스스스슥―!

웨슬리 사무총장이 생성하는 공간을 모조리 피해 가면서.

'몇 번 부딪혀 본 걸로 벌써 저 정도로 감을 잡았다고…?'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저건 말도 안 된다.

도저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천지창조.

이능력의 원형을 다루는 힘이자, 이공간을 생성하는 스킬.

다른 헌터들처럼 화려하고 강력한 공격 스킬은 결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몇몇 개의 습득 스킬을 제외하면 공격 스킬은 전무한 셈이다.

그마저 있는 습득 스킬도 B랭크 수준.

하지만 그게 결코 약점이 되진 못했다.

공간을 다룬다는 건 곧,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방패였으니까.

피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는 공격.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웨슬리 사무총장은 진심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고유 스킬 : 천지창조]

[고유 공간을 생성합니다.]

[x128]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스스스스슥―!

벌써 몇 번이나 직접 김준우를 노렸지만, 단 하나의 공간도 닿지 못했다.

물론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머리, 팔, 다리.

한 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대로 신체가 떨어져 나갈 테니까.

분명 그 또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겠지.

다만....

그럼에도 집중을 잃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공간을 직감만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수백 마리의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면서.

'저게 정말 가능하다는 건가…?'

웨슬리 사무총장은 눈앞의 현실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자신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고?

새파랗게 젊은 동양의 청소부 출신이?

"...하!"

웨슬리 사무총장은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과는 크게 다른 상황에 당황한 것이 아닌 여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희열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동안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있어 토벌은 그 어떤 성취감과 만족감도 주지 못했다.

일부는 몬스터와의 목숨을 건 전투에서 희열을 느낀다던데, 자신은 그런 감각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토벌은 생사가 오가는 전투가 아닌 그저 귀찮은 업무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취감도 없으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자신의 역할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 국제협회를 설립할 땐, 진심으로 시민의 안전과 세계 질서를 위한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런 성취도 없는 업무는 생각보다 빠르게 질렸고, 결국 그는 본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일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앞에 마침내 성취를 느낄 만한 놈이 나타난 것이다.

김준우.

완성된 괴물이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강자.

만약 저런 헌터가 국제협회 소속이었다면....

'PB 코퍼레이션 따윈 필요하지도 않았겠군.'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역사에 두 번 없을 저놈을 죽인다면 정말이지 최고의 성취감을 느낄 테니까.

고양감에 차오르며, 이내 진지하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더는 직접 공격하는 게 무의미하겠군....'

웨슬리 사무총장은 마물과 몬스터들 사이를 누비는 김준우를 자세히 살폈다.

김준우는 이제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생기는 이질적인 변화를 느끼고 피할 수 있다.

그 감각을 익힌 이상, 그를 직접 공격하는 건 오히려 틈만 보여주는 꼴이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도 정면으로 나서는 수밖에.

그렇게 그 또한 전장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때였다.

"이제 절 공격하는 건 포기하신 겁니까?"

"...!"

김준우가 훅 튀어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고유 스킬 : 마왕]

[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슈우우욱―!

그 순간 거대한 검이 웨슬리의 바로 눈앞에서 날아들었다.

"칫…!"

[고유 스킬 : 천지창조]

[고유 공간을 생성합니다.]

캉―!

웨슬리는 황급히 그의 검을 향해 스킬을 시전했고, 동시에 김준우의 검이 두 동강 났다.

하지만.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슥―!

스스스슥―!!

김준우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부러진 검으로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부었다.

"젠장…!"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캉, 카강―!

웨슬리 사무총장은 처음으로 고유 스킬 외에 다른 스킬을 시전했다.

공간을 생성하기 위해선 정확한 좌표와 최소한의 연산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계속 몰아붙이면 대응할 수가 없다.

스킬을 시전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건가.

'빌어먹을....'

이건 불리하다.

순수 화력으로 따지면 저자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없다.

어떻게든 저놈의 움직임을 봉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고유 스킬 : 마왕 - 절대 강자]

[시전자는 차원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쾅, 콰광―!

쿠구궁―!

"...?"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어째선지 공격이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철저한 계산 하에 날카롭고 정확하게 움직이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격.

마치 버서커 클래스처럼 자신의 안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극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뭐야...?!'

저건 김준우의 스타일이 아니다.

언뜻 강력한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압도적인 경험과 센스에 기반을 둔 계산이 숨어 있다.

포지션과 클래스.

공격 타이밍.

회피 방법.

상대의 작은 습관 하나까지.

그 모든 것을 몇 번의 합으로 파악하고, 모든 요소를 분석해서 상대할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지금은....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스킬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 스킬 : ????]

쾅, 콰광―!

쿠구구구구―!!

콰과광―!!

아무런 계산도 없이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있다.

마치 파괴 본능만 남은 괴물처럼.

'잠깐, 설마…!'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김준우가 갑자기 이렇게 나올 만한 이유가 없다.

침착함을 잃으면 위험해지는 건 본인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나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뿐.

한계가 온 것이다.

'그럼 그렇지....'

웨슬리 사무총장은 미소를 숨겼다.

저 정도의 힘을 벌써 몇 분째 끌어다 쓰는데 정신이 버틸 리가 없지.

오히려 잘 됐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서 폭주를 유도한다면....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슈욱―!

"...!"

그 순간 갑자기 훅 다가온 김준우의 얼굴.

그제야 비로소 그의 상태를 완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기류에 잠식된 동공.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얼굴.

확실하다.

이 자식… 이미 폭주 상태로 접어들었다.

슈우욱―!

쾅―!!

카가가강―!

이윽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공격.

웨슬리는 황급히 손을 들었다.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쉘터]

지이이잉―.

가까스로 자신을 다른 공간에 가뒀지만.

콰직―!

"...!!"

쾅―!!

"크윽…!"

김준우의 공격이 쉘터를 뚫고 웨슬리에게 직격했다.

처음으로 허용한 직격타에 웨슬리는 뒤로 크게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말도 안 돼....'

쉘터는 그저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다.

자신을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켜 모든 공격에서 잠시 피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격이 직격했다는 건....

'공간을 초월했다고…?'

상식적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인간이 공간을 초월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설사 각성한 자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명히 쉘터를 무시하고 공격을 날렸다.

그렇다면 대체 지금의 저놈은....

무엇이란 말인가.

[고유 스킬 : 마왕 - 계승]

[이 시간부로 시전자가 차원의 힘과 동화됩니다.]

구구구구구―!!

이윽고, 김준우에게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검은 기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본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래.

한계가 온 김준우를 더 밀어붙여서 폭주 상태를 유도하려는 생각은 좋았다.

그런데… 그다음은?

모든 힘을 해방하고 공간마저 초월한 김준우를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건가?

"...하, 하하."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전혀 다른 기류.

결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분위기.

추측조차 할 수 없는 힘.

마왕.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존재를 목도한 순간.

"시발...."

자신이 재앙을 깨워버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끼기기기긱―!

김준우의 기류가 모든 걸 메우고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공간 해제]

캉―!

김준우와 웨슬리가 있던 고유 공간이 해제됐다.

김준우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린 것이다.

"나왔다!!"

"다들 포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전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스팔트에 널브러진 시신들.

채 반의반도 남지 않은 자신의 병력.

그리고... 마치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밖에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WDSO의 모든 병력.

모든 상황이 그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능석인가…?'

웨슬리 사무총장은 쓰러져 있는 부하들의 몸에 난 총상을 보며 추측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설마....'

클로이가 가공한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가 혀를 차길 한 차례.

"서, 선생님…?"

"대체 뭐가 어떻게...."

두 여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김준우의 상태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팀장님 상태가 좀 이상한데...."

"설마 폭주 상태인 건…!"

그녀들뿐만 아니라 모든 WDSO의 인원이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황스럽기는 웨슬리 또한 매한가지였다.

'후우....'

이미 전쟁의 기세는 기울었다.

자신의 병력은 대부분 전투 불능 상태이고, 김준우를 가두는 것 또한 실패했다.

게다가 폭주 상태에 진입한 괴물.

"...."

더 이상의 승산은 없다.

여기서 물러나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순 없지."

웨슬리 사무총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여기서 물러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여기까지 온 이상 뒤는 없다.

그러니....

[고유 스킬 : 천지창조 - 각성]

죽든 살든,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구구구구구―!!

이내 웨슬리와 김준우가 내뿜는 검은 기류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렇게 도로 위에 찾아온 암흑 속.

"...."

"...."

김준우와 웨슬리는 서로를 마주한 채 잠시 대치를 이어갔다.

김준우 또한 아무리 폭주 상태라고 해도 본능이 알고 있었다.

이제부턴 한 번의 움직임이 생사를 가른다는 것을.

천천히 서로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그때.

「사무총장님…!」

웨슬리의 무전기가 울렸다.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하나의 소식을 전달했다.

"뭐…?"

웨슬리 사무총장이 눈이 동그래졌다.

"...."

그리곤 눈앞의 괴물을 마주한 채 머리를 굴리길 잠시.

"...잔존 병력, 전원 후퇴한다."

갑작스러운 명령이 떨어졌다.

294

294

이미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이아영 본부장과 클로이가 가공해준 반능석 덕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남아 있는 병력 또한 이미 전의를 잃은 채였다.

WDSO 병력은 어느새 전투를 멈추고 검은 기류가 뒤섞인 구체를 천천히 포위했다.

공간이 해제되는 순간, 웨슬리를 공격하기 위해 미리 진을 쳐둔 것이다.

하지만.

"서, 선생님…?"

이윽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나자 김민주는 원래의 계획을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그그그그그―.

마치 용암이 끓듯, 펄펄 새어 나오는 검은 기류.

그 기류에 잠식된 눈.

허공을 응시하는 초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확실하다.

폭주 상태다.

"티, 팀장님 상태가...."

"본부장님, 팀장님이 왜 이럽니까…?"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다른 WDSO 직원들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퍽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떨어져."

김민주가 말했다.

"네, 네?"

"당장 떨어지라고! 가까이 가지 마!"

이미 김준우의 폭주를 한 번 경험해본 그녀로선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위험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재앙.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났다.

"...."

폭주한 김준우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잔존 병력, 전원 후퇴한다."

그때였다.

김준우와 대치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갑작스럽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은 등을 돌렸다.

김민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후퇴한다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전세가 기울어서?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한 공습을 포기하는 건 최악의 선택일 텐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전쟁을 일으켜 놓고 저들끼리만 순순히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딜 내빼려고?"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한유빈 또한 같은 생각인 듯했다.

타앗―!

그렇게 두 명의 전사가 그들을 쫓으려던 그때.

"…정말 괜찮겠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걸' 내버려 두고 우릴 쫓아도?"

"...!"

"...!"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김준우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공허한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내버려 두고 웨슬리를 쫓았다가, 그가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두 여성이 이를 으득 씹으며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찰나.

"다음에 또 보죠."

웨슬리 사무총장은 작별인사를 흘리며 등을 돌렸다.

두 여성은 멀어지는 국제협회 병력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한유빈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물론 김민주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폭주 상태를 되돌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스스로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무력으로 의식을 잠재우는 것.

하지만 현재로선 어느 쪽도 확실한 방법이 아니다.

애초에 평소 상태의 김준우조차 상대가 안 된다.

하물며 폭주 상태라면... 그를 무력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뭐예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다급하게 현장으로 달려오며 상황을 물었다.

"웨슬리랑 전투 중에 폭주한 거 같아요."

"막아야 하는데, 솔직히 좀 무섭네...."

김민주와 한유빈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김준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누가 봐도 폭주 상태였지만, 어째선지 아까부터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 듯, 김민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번처럼 자의로 이성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볼까요?"

"그땐 던전 안이어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하지만 한유빈은 의견이 다른 듯했다.

그녀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도박을 하기엔 너무 위험해요."

이곳은 고립된 던전이 아닌 도로 한복판이다.

현지 작전팀과 군인들을 비롯해서 WDSO의 모든 병력이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까지는 불과 3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자칫 그가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김민주가 물었지만 한유빈은 대답을 아꼈다.

그녀 또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던 그때.

"뭘 고민하고 있어요!"

이아영이 소리쳤다.

"병력 대기! 남은 반능석, 전부 장전하세요!"

그래.

반능석이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호에 맞춰서 일제히 사격하세요!"

"주, 죽으면 어떡합니까?"

"그런 거로 죽을 인간 아니니까 본인들 걱정이나 하세요!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요! 죽고 싶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네, 네."

이아영이 고개를 돌려 두 여성을 바라봤다.

"만약 반응이 있으면 민주 씨랑 유빈 씨가 나서서 최대한 움직임을 막아주세요."

김민주와 한유빈이 동시에 끄덕였다.

그렇게 준비가 된 순간, 전원 김준우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사격 개시!"

두두두두두―!

수천 발의 총알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하나 이상의 뱅크 아이템 효과를 받고 있습니다.]

[무효화됩니다.]

텅―!

텅텅텅텅텅―!!

검은 기류를 뚫지 못한 채 모조리 튕겨 나갔다.

"효, 효과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반능석마저 통하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무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는 건가.

김민주가 검을 꾸욱 움켜잡았다.

옆에 있던 한유빈 또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때.

쿵―!

그들 앞에 누군가 뚝 떨어졌다.

당황하기도 잠시.

"다, 당신…?"

"그쪽이 여길 어떻게 알고…?"

정체를 확인한 김민주와 한유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연락을 하도 안 받아서 말이지.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다름 아닌.

"설마하니 전쟁을 벌이고 있을 줄이야."

현 세계 랭킹 1위.

노아 웨스턴우드였다.

"올 거면 좀 일찍 오지."

"난 뭐 노는 줄 아나? 나름대로 바빴어. 무엇보다 김준우가 부탁한 일도 처리해야 했고."

한유빈이 볼멘소리를 내자, 노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급히 보고해야 할 게 있어서 연락한 건데... 설마 이런 상태일 줄이야."

"보고라뇨?"

김민주의 물음에 노아의 표정이 퍽 진지해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덴이 발견됐다."

"...네, 네?"

"뭐, 뭐라고?!"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러시아 우랄산맥 근처에서 기준을 초과하는 이능파가 포착됐어. 일단 확인을 위해서 급하게 내 길드원들 파견했다. 아마 확실할 거야."

"잠깐. 러시아라니?"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줄곧 잠자코 있던 클로이였다.

하지만 노아는 다른 것보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게 더 놀란 듯 보였다.

"네가 여기 왜 있지?"

"이직했어요.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그래서, 러시아에서 발견됐다는 게 사실이에요? 재출현에 오차가 있다고는 해도 지구 반대편에서 출현하는 경우는 못 들어봤는데?"

"낸들 알아? 난 그냥 정보를 입수한 것뿐이다."

"진짜 에덴이 맞긴 한 거예요? 기준 초과 이능파는 몇몇 레드 던전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기준치에 3,000배에 달하는 이능파였어."

"...!"

클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그게 던전이라면 지구는 끝이라고 봐야지."

"...."

"문제는 그런 것보다...."

노아가 말했다.

"이 정보가 국제협회 귀에도 들어갔다는 거다."

"...!"

"...!"

이번엔 김민주와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웨슬리 사무총장이 후퇴한 이유가…?"

김민주가 중얼거리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마주치겠지. 물론 꽤 괜찮은 놈들이 있지만, 내 길드만으로는 힘들어. 당장 찾으러 가야 하는데...."

노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순 없겠군."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하긴."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제정신 차리게 해줘야지."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그가 스킬을 쓰는 순간.

"아직 싸울 수 있는 놈들은 힘 좀 보태주던가."

그곳에 있던 모두가 굳은 얼굴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다시금 가다듬어진 전열.

"...."

"...."

모두의 얼굴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구구구구―.

그 순간, 김준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는 단 한 명뿐.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중압감이 맴돌았다.

콰직―.

김준우가 바닥에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를 밟았다.

"...?"

"...?"

어째선지 움직임을 멈추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발끝을 바라봤다.

***

얼마나 의식을 잃었을까.

[히든 스킬 : 업보]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아니, 눈을 뜬 게 아니라 의식 저편 어딘가인 듯한 기분이었다.

[스킬 해제 조건 :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달성]

[현재 직책 : 공식 국제 토벌 기구 WDSO 대한민국 기획본부 소속, 청소 3팀장]

[현재 스킬 해금률 : 100.0%]

[현재 클래스 : 절대군주]

[현재 비공식 랭크 : SSS]

[현재 비공식 랭킹 : 국내 1위, 세계 1위]

[제한 시간 : 2년 9개월 13일 9시간 34초]

이윽고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중간보고를 하듯 천천히 진행 상황을 전달하길 잠시.

[현 시간 기준, 목표 달성 확률]

[0.0%]

'...?'

굉장히 당황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대, 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어 가만히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 지금 내가 팀장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일부러 직급을 낮춘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사무총장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확률이....

[현재 완전한 폭주 상태로 확인되었습니다.]

[자의로 극복 가능한 수치를 넘어섰으므로, 폭주 상태를 해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

그런가.

폭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건가.

'쯧....'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혀를 차길 한 차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히 이렇게 될 줄 알았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회귀 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의식을 찾을 수도 없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떠돌아야 하는 건가?

[현재 상태는 시스템상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결과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검색합니다.]

[...]

[검색 완료]

[(1) 개의 해결 방법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시스템을 가동하기 위해 시전자의 히스토리를 확인합니다.]

'...?'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온 그 순간.

지이이잉―.

'뭐, 뭐야…?'

갑자기 눈앞에서 회귀 이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회귀 후 당황하던 모습.

첫 출근.

문소연을 업고 지원팀으로 달려가던 때.

베트남 출장.

협회 퇴사.

카르마 코퍼레이션 설립.

국제협회와의 충돌.

WDSO 설립.

그리고 방금 웨슬리 사무총장과의 전투까지.

지난 3년간의 모든 일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멍하니 감상에 빠져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

[히스토리 확인 완료]

[1개의 해결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 만족하였습니다.]

다시금 음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뭐라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뉘앙스를 보아하니 희망이 있는 듯 보였다.

부푼 기대를 품고 결과를 기다리길 잠시.

[습득 패시브 : 결벽증]

'뭐야 이건....'

회귀 직후, 마치 내 처지를 조롱하듯 던져준 아무 쓸모 없는 스킬이 눈앞에 떠올랐다.

뭐 어쩌라는 건가 싶던 그때.

[각성 조건 달성]

['강자의 책임' 자격 획득]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암흑 공간이 사라지며,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내 잠시 흐려져 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

어째선지 몬스터의 사체를 밟고 있는 내 발이 보였다.

295

295

환한 빛이 쏟아지는 그곳.

최종 방어선, 국제협회와의 전장.

그곳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주변을 둘러봤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WDSO 소속 직원들.

그리고 김민주와 한유빈, 이아영.

그들을 마주하자 비로소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털썩―.

곧장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서, 선생님!"

"괜찮은 거야?!"

"정신이 들어요?!"

곧바로 달려오는 김민주와 한유빈 그리고 이아영 본부장.

"괜찮습니다.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요."

나는 그들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폭주 상태였던 거 기억나세요?"

"또 자의로 이성을 찾은 거예요?!"

"아니,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또 폭주해요?!"

"...."

이내 쏟아지는 질문들과 잔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해주기엔 무척이나 피곤했기에 그녀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자의로 이성을 찾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 내 의식 속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폭주 상태에 돌입했다는 자각조차 못 했다.

당연히 절대 자의로 이성을 찾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저 스킬을 습득하자마자 돌아왔다.

'대체 저게 무슨 스킬이길래....'

의문과 함께 눈앞에 떠오른 정보창 하나.

[해당 패시브의 효과로 인해, 귀하의 고유 스킬이 변경됩니다.]

[귀하의 고유 클래스를 초기화합니다.]

[초기화하는 동안 귀하가 시전 중인 모든 스킬이 해제됩니다.]

초기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가....'

하지만 대체 왜 갑자기 저런 스킬을 획득한 것인가.

'강자의 자격'이라는 달성 조건은 대체 뭐고, 저 패시브는 대체 무슨 효과를 지닌 스킬인가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고유 스킬이 무엇으로 변경됐다는 건가.

클래스가 초기화됐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도 잠시.

'...됐다.'

나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터라, 더 이상 머리를 굴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래 뭐… 일단은 돌아왔다는 게 중요하지.

남은 의문은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웨슬리는…?"

이내 본부장들을 향해 물었다.

어째선지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민주가 대답했다.

"후퇴했어요."

"후퇴…?"

이제 와서?

설마 내가 폭주한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뭐, 만약 그렇다면....

"이겼네."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말했다.

"나 좀 일으켜줘. 일단 호텔에 가서 좀 쉬고 싶으니까."

"...."

"...."

손을 뻗었음에도 어째 아무도 움직이질 않는다.

그 대신 다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왜들 그래."

"선생님, 사실 지금...."

김민주가 입을 열던 그때.

"미안하지만, 쉴 시간은 없을 것 같군."

"...뭐야?"

노아?

저놈이 여긴 왜?

"네가 부탁했던 일, 결과가 나왔다."

"...."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굴리길 잠시.

"잠깐, 설마…!"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부탁했던 거라면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에덴 수색.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는 건....

"발견된 겁니까?"

"...."

노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협회 놈들에게도 소식이 들어갔어. 아마 그들이 후퇴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빌어먹을, 왜 하필 이럴 때...."

폭주 상태일 때 이 소식을 듣다니.

"확인 결과 러시아 우랄산맥 근처다. 지금 당장 이동한다면...."

"안 늦겠습니까?"

"...."

내 물음에 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장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에덴.

전 세계에 이상 현상을 일으킨 원인이자, 50년 전 충돌한 시니아 혜성의 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설로만 존재했지만.

4년 전, 한 미국 지부 소속의 청소팀에 의해 실체가 확인된 물질.

모든 이능력과 차원 그리고 던전을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

그게 국제협회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때부턴 뱅크 아이템이고 뭐고 의미가 없어진다.

그야말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해질 테니까.

세계를 통제하려는 국제협회의 계획에 마침표를 찍어줄 물건이, 기어이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베를린 공습 따윈 그에 비하면 의미 없는 짓에 불과하겠지.

'젠장....'

국제협회 놈들이 바로 이동했다면, 지금으로선 한발 늦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운이 좋아 늦지 않는다고 해도 마찰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다시 전투를 벌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가진 못해도 최소한 막을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막다니? 어떻게...."

노아의 물음에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최근 통화기록의 한 번호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이윽고.

"장관님, 김준우입니다."

「어어, 또 무슨 일인가.」

러시아 국방부 장관.

블라디미르 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 하니 모나한 장관, 해임됐다던데. 전시 상황에서 국방부 장관이 해임되다니, 이런 불명예가 없겠어.」

"독일 정부가 빠른 판단을 내려준 덕입니다."

「그래, 뭐. 덕분에 나야 쥐새끼 한 마리 잡았고 혐의도 벗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

그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또 할 말이 남아 있는 건가?」

"...."

나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블라디미르 장관이 크게 웃었다.

「애초에 자네가 부탁했던 조건은 오히려 나에게만 좋은 조건이었잖나. 이제 와서 부탁 하나쯤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그럼...."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랄산맥 근처에 출현한 던전, 전부 봉쇄해주십시오."

「...음?」

"병력도 배치해주시고, 가능하다면 이능파 차단기도 설치해주십시오. 그 누구도 던전에 다가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둘러대야 하나,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우랄산맥 근처 어느 던전에서 무언가가 발견됐습니다."

최대한 사실을 기반으로 전달했다.

"국제협회가 그걸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 손에 들어가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될 겁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당장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슨 물건이길래?」

"그건...."

나는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에덴이라고 말하기가 영 껄끄러운 까닭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조력자 관계로 볼 수 있지만, 블라디미르 장관은 애초에 욕심이 많은 인간이다.

아무렇지 않게 독일 국방부 장관과 무기 밀매를 이어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에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어간다면... 귀찮아질 게 뻔하다.

국제협회만으로도 귀찮은데, 러시아와도 마찰이 생길 여지를 만드는 건 좋지 않다.

그러니.

"새로운 뱅크 아이템인 거로 확인됩니다."

여기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뱅크 아이템이라니… 대체 어떤?」

"정확한 건 조사 중에 있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그래, 뭐. 알겠네. 나한테 좋은 정보를 줬는데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우랄산맥 인근 100km 지역까지 모든 던전을 봉쇄하겠네.」

"저희도 바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만약 국제협회가 발견되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알겠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겠죠."

"그 전에 막으러 가야지."

노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죠. 그렇긴 한데...."

나는 떨떠름한 투로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일단 던전을 봉쇄하긴 했지만, 에덴을 지키기 위해선 결국 또다시 국제협회와의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내 상태는....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해당 패시브의 효과로 인해, 귀하의 고유 스킬이 변경되었습니다.]

[귀하의 고유 클래스가 초기화되었습니다.]

나조차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이 상태로 연달아 전투를 벌이는 건 도박행위다.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도, 에덴 탈환에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 끝이다.

'쯧....'

지금으로선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최소한 보험을 들어놓을 수 있다면....

'잠깐....'

보험?

"…이렇게 합시다."

머릿속에 무언가 스친 직후, 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노아 씨가 러시아로 가십시오."

"뭐? 그럼, 너는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내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저흰 프랑스로 가겠습니다."

"...뭐?"

"네, 네?!"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프, 프랑스라뇨? 거긴 국제협회의 본거지인데요?!"

"나한테 무모하다고 뭐라 할 게 아닌데? 제 발로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너무 위험해요, 선생님!"

이아영 본부장과 한유빈 그리고 김민주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설마 당신...."

클로이만이 내 의도를 바로 파악한 듯했다.

"본부를 노리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모두의 눈이 번뜩였다.

"국제협회는, 아니 웨슬리 사무총장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른 걸 다 실패하더라도 에덴만 손에 넣는다면 만회할 수 있겠죠."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덴을 확보하려고 할 겁니다. 모든 병력, 모든 장비,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라도 말이죠."

그리고 그렇다는 건....

"본부가 완전히 비어있을 거라는 소립니다. 그러니 우린 그 틈을 타서...."

나는 클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석과 차원석. 남은 뱅크 아이템을 모두 회수할 생각입니다."

***

"...."

웨슬리 사무총장은 줄곧 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금 전, 김준우와 대치하던 상황이 계속해서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폭주 상태의 김준우.

그와 마주한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본능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애써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은 원초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와 계속해서 대치를 이어간 건, 김준우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라기보단... 그저 발이 떨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빌어먹을....'

그 사실이 웨슬리 사무총장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계속해서 그 일을 곱씹고 있던 그때였다.

"사무총장님, 준비됐습니다."

한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요."

그 말과 함께 걸음을 옮긴 곳에는 보랏빛을 내뿜고 있는 차원석이 있었다.

차원석 게이트.

던전을 생성, 소멸하는 것에서 나아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차원 텔레포트.

그것이 처음으로 가동된 것이다.

'....'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빛을 바라보며 여전히 침묵했다.

이제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에마 대표도, PB 코퍼레이션도.

케이트도, 작전 팀장들도.

이젠 오로지 혼자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지.'

애초에 그들 모두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

에덴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깟 장기말쯤이야 몇천 개, 몇만 개가 부서져도 상관없다.

"갑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지이이잉―.

보랏빛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웨슬리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협회의 남은 병력이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296

296

"뭐, 뭐라고…?"

WDSO 대한민국 본부.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박인범 사무총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에덴이… 발견됐다고…?"

동시에 귀를 의심케 하는 그 갑작스러운 소식에 박인범 사무총장의 눈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베를린 공습을 막고 있던 거 아니었어? 갑자기 에덴이 발견됐다니!"

「이전부터 노아 길드에 요청해서 계속해서 에덴 수색을 진행했었는데... 전투 중 러시아 쪽에서 기준치를 크게 초과하는 이능파가 감지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박인범 사무총장과 다르게, 김준우는 꽤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설마 지금 싸우다 말고 러시아로 달려가고 있냐?"

「국제협회도 해당 정보를 입수한 모양입니다. 전투가 거의 마무리 되던 찰나, 먼저 후퇴를 하더군요. 지금은 상황 종료돼서 현지 협회로 복귀한 상태입니다.」

"하아...."

박인범 사무총장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에덴을 찾는 건 그에게도 1순위 목표였다.

청소 3팀 또한 그것을 위한 편성이었고, 처음부터 보다 자유롭게 해외 지부를 오갈 수 있도록 계획된 프로젝트였다.

김준우 또한 여러 가지 명분으로 각국의 협회를 오가며 에덴을 수색하는 것이 첫 번째 역할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타이밍에 발견될 줄이라고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지.

박인범 사무총장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자세한 위치는?"

「현재 러시아 우랄산맥 근처 던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늦지 않게 갈 수 있겠냐?"

「혹시 몰라서 블라디미르 장관님한테 봉쇄 요청을 해뒀습니다. 그리고 노아 길드가 곧바로 이동할 예정이어서 어떻게든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박인범 사무총장이 답답한 마음에 말끝을 흐리길 한 차례.

"애들은 괜찮냐?"

이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뭐… 클로이 씨가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문제없고요.」

"자네는?"

「…예?」

순간 당황한 목소리.

"자네는 어떻냐고."

「....」

김준우가 뜸 들이길 잠시.

「잘… 모르겠습니다.」

"...?"

모호한 대답을 던졌다.

괜찮으면 괜찮은 거고 안 괜찮으면 안 괜찮은 거지, 잘 모르겠다는 건 또 뭔가.

「일단 다친 곳은 없습니다만, 나중에 좀 더 확인해봐야 할 부분이 생겨서....」

추가적 설명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전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렴풋이 추측했지만, 구태여 물어보진 않았다.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니.

"자네도 바로 러시아로 갈 생각인가? 몸 상태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면서 곧바로 작전 수행을 하려는 건 좀 위험...."

「아뇨. 저는 러시아로 가지 않습니다.」

"뭐…?"

「저희는 국제협회의 모든 전력이 이동한 틈을 타서 그들의 본부를 칠 생각입니다.」

"...!"

그 말에 박인범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목표는 HQ 점령을 통한 지휘체계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남은 뱅크 아이템 전량 회수입니다.」

"위, 위험하지 않겠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건가?"

「혹시라도 에덴 확보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입니다.」

"...."

박인범 사무총장이 대답을 아꼈다.

고작 몇 시간이 지났다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공습을 막기 위해 전투를 벌이던 게 불과 30분 전인데 갑자기 에덴이 출현했다고 하질 않나, 국제협회 본부를 공격하겠다고 하질 않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솔직히 거기서 모든 결판이 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또 원점이군."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에덴이 발견되지 않았어도 국제협회는 후퇴했을 테니까요.」

"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김준우는 설명 대신 계속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로서는 마지막 기회가 온 것뿐입니다. 만약 이것마저 막힌다면....」

"...드디어 끝나는 건가?"

「예.」

그가 사뭇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제협회를 무너뜨리는 것, 나아가… 이능차원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

박인범 사무총장은 생각이 깊어졌다.

이능차원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자명했다.

던전도, 몬스터도 그리고 헌터도 없던 시절.

평화롭진 않았어도, 최소한 괴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다른 나라들이 협력해줄지 모르겠군. 토벌이 산업으로 자리 잡힌 이상 탐탁지 않아 하는 세력도 분명 있을 텐데."

「뭐, 그거야 나중에 고민해도 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김준우가 피식 실소를 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사무총장님.」

"...."

박인범 사무총장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부탁한다."

「…예.」

그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박인범 사무총장은 깊은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끝이라....'

생사를 넘나들던, 그리고 누군가의 생사를 두 눈으로 지켜 봐왔던 수십 년간의 시간을 천천히 곱씹었다.

***

독일 베를린 협회, 헌터 지원실.

전투가 끝난 직후, WDSO의 모든 인원이 모인 자리.

"사제 클래스 분들 모여주세요! 포션이랑 회복 아이템 재고 전부 가져와 주시고요!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은 지원팀 직원들 좀 도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아영 본부장은 그곳에서 부상자 파악 및 간단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충 큰 틀은 이렇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와 김민주, 한유빈 본부장과 노아는 그 옆에서 구체적으로 작전을 검토 중이었다.

"아무리 모든 전력이 이동했다고 해도, 최소한의 병력은 남아 있을 거예요."

간단한 작전 브리핑을 마치자 김민주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최고 전력은 아니겠지만. 우리도 곧바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인원은 많지 않고요."

"흐음."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우리끼리 할 수밖에 없겠네."

그렇게 말하며 김민주와 한유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준비되는 대로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작전 인원은 저랑 김민주, 한유빈 씨, 이아영 씨. 그리고...."

나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클로이 씨까지 가주셔야겠습니다."

"...?"

그와 동시에 클로이의 눈썹이 파도쳤다.

"뭔 소리야. 내가 왜 같이 가요. 나도 부상자인데?"

상당히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나도 큰 부상이 있는 사람을 작전에 참여시키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뱅크 아이템을 회수해야 하는데, 당연히 해당 분야 전문가가 동행해야죠. 무엇보다 본부 내 연구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클로이 씨뿐이잖습니까. 저희가 보호해드릴 테니, 회수만 도와주십시오."

"...."

클로이가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노려본다.

어째 쉽게 넘어올 것 같지 않아 나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어찌 됐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두 조직 중 하나는 무너지겠죠."

"...."

"저흰 이왕이면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클로이 씨가 도와준다면 확률을 올릴 수 있을 거 같군요."

"하아...."

그녀가 한숨을 팍 내쉬길 한 차례.

"이 팔로는 가봤자 방해만 될 것 같아서 그래요."

"...."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이번만큼은 퍽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순식간에 숙연해진 분위기.

그녀의 반쪽짜리 오른팔을 가만히 힐끔거리고 있던 그때.

"거 핑계도 많네. 어차피 우리 회사 들어올 때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인데, 그냥 가면 안 돼요?"

이아영 본부장이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와 동시에 싸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혹시 또다시 싸움이라도 날까, 우리가 곧바로 제지하려 했지만.

철컥―.

이아영 본부장은 아무렇지 않게 클로이의 오른팔에 무언가를 장착했다.

"생체 디바이스 의수예요. 일단 있는 재료로 급하게 만든 거라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당장 쓸 만은 할 거예요."

"...?"

저건 언제 또 만들었대?

아니 그것보다....

둘이 원래 친했나…?

"뭐해요? 움직여 봐요."

"...."

끼릭, 끼릭―.

클로이 또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물에 할 말을 잃은 듯, 벙찐 표정으로 고분고분 말에 따랐다.

생체 디바이스 의수.

부상을 당한 헌터들에게 자주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여기서 그 짧은 시간에 뚝딱 만들어낼 줄이야.

"쓰읍, 관절 가동 범위가 생각보다 좁네. 뭐, 나중에 본부로 돌아가면 제대로 만들어줄 테니까, 일단은 불편해도 참아요."

"...."

클로이는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건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뭘 봐요. 구경났어요?"

뒤늦게 우리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꽤나 멋쩍은 듯 쏘아댔다.

그리고 그때.

"...더럽게 못 만들었네."

비로소 클로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들었으면 이것보다 백배는 나았을 텐데."

"뭐, 뭐라고요?! 아니 지금 그쪽 생각해서 만들어줬는데…!"

"고마워요."

툭 던지듯 날린 감사 인사.

클로이가 작게 미소를 짓자 이아영 본부장 또한 코웃음 치길 한 차례, 이내 따라 미소를 지었다.

'....'

물론 나는 아직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됐지만.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다시금 클로이를 향해 물었다.

"...알았어요. 갈게요."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쯧, 진작에 그럴 것이지.

"자,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노아 씨도 와주십시오."

모두를 불러 모은 후, 한 번 더 작전을 확인했다.

"저희는 차원석과 시간석을 회수하는 게 첫 번째 목표고, 여유가 된다면 지휘 시스템을 파괴할 생각입니다."

"네."

"알았어요."

"노아 씨는 곧바로 러시아로 이동해서 에덴 던전 파악해주시고요. 확인되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시겠지만, 국제협회가 전투로 인해 아무리 전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최대한 전투는 피하시고 에덴 던전을 찾지 못하도록 교란만 해주십시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설명은 대충 끝난 것 같았기에 나는 허리를 펴며 물었다.

"그럼… 질문 있습니까?"

"저...."

그러자 한유빈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이제 와서 물어보기 좀 그렇긴 한데…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결국, 국제협회 손에 에덴이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아, 그건...."

무어라 설명을 해줘야 할지 잠시 뜸을 들이고 있던 그때.

"에덴은 통제 아이템이 아니에요."

클로이가 대신 입을 열었다.

"뱅크 아이템이 이능차원 현상을 부분별로 통제할 수 있는 리모컨이라고 한다면, 에덴은 전원 버튼이죠."

"...?"

"...?"

그 이야기를 한 번에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리송한 반응에 클로이가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과거, 수많은 과학자가 이 괴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었어요."

이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명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유력한 가설 하나가 등장했어요. 어떤 특수한 물질이 끊임없이 이능파를 내뿜어서 지구상에 던전을 출현시키고 이능력자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냐는 가설이었죠."

"아, 설마 그게...."

"네. 그게 바로 시니아의 핵, 에덴이에요."

김민주의 물음에 클로이가 즉답했다.

"가설에 따르면 에덴은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이능차원 현상을 유지하는 전력이자 전원인 셈이죠. 에덴을 파괴한다면 이 현상도 없어질 거라 보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에덴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죠. 그리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절대 에덴을 파괴할 리는 없을 거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에겐 국제협회를 무너뜨리고 이능차원 현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지만, 국제협회엔 의미가 다릅니다. 갖고 있다고 해서 쓸 일은 없지만,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는 애물단지 정도죠."

나는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번씩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에덴을 손에 넣는다고 한들, 결국 국제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선 뱅크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뱅크 아이템 없이 에덴을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죠. 그래서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려는 겁니다."

"...."

"...."

그제야 이해가 간 듯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더 할 말 없으시면 다들 장비 챙기고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비로소.

"끝을 보러 갑시다."

마지막 작전이 개시됐다.

297

297

우랄산맥 인근, 어느 숲속.

웨슬리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협회의 대다수 직원이 커다란 침엽수들이 늘어져 있는 그 숲속을 탐색하던 중.

"이능파가 더 이상 안 잡힙니다."

본부 통제팀 소속의 한 직원이 기기를 확인하다가 입을 열었다.

"파장이 고의적으로 방해를 받고 있는 거로 봐선... 아무래도 누군가 차단기를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단기라뇨. 대체 누가...."

"개인이 한 짓은 아닌 것 같고, 러시아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근방 모든 던전을 봉쇄한 게 아닐까 싶은데...."

"...."

직원의 말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 협회는 전 세계 모든 협회 중에서 가장 폐쇄적인 곳으로 악명이 높다.

토벌 활동, 헌터 인원, 장비 보유 현황.

그 모든 것들을 외부에 절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근 가장 큰 이유는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이 낮은 협회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협회는 국가의 명성에 맞지 않게, 인프라와 인력 퀄리티가 상당히 떨어진다.

개발도상국 협회와 비교해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

'뭐, 개인 조직이 힘을 갖는 걸 극도로 기피하는 나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다만....'

아무튼, 유일하게 토벌을 헌터와 군인이 함께 진행하는 나라인 만큼, 그들의 토벌 기술력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탐지 기술이 없어서 국제협회에 대신 이능파 탐지를 맡기는 것만 봐도 그렇다.

'덕분에 가장 먼저 에덴을 찾았지만....'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서 이능파 차단을 했다고?

그놈들한테 그럴 만한 기술이 있었나?

아니 그것보다....

제대로 된 탐지 기술도 없는 러시아 협회 놈들이 갑자기 이능파를 차단할 이유가 있나?

그놈들은 에덴이고 나발이고, 뭐가 발견되었는지조차 모를 텐데?

웨슬리 사무총장은 입술을 씹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째 찝찝하군요."

"다른 놈들 귀에도 들어간 게 아닐까요. 가령, 김준우에게도 소식이 전달됐다거나...."

그러자 통제팀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준우가 직접 러시아에 연락을 취해서 봉쇄 요청을 했다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러시아가 직접 이능파를 차단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흐음."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의 말을 끊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독으로 봉쇄를 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았거나, 혹은 에덴에 대해 알게 됐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어느 쪽이건....

'경쟁자가 붙겠군.'

그렇게 턱을 쓰다듬길 잠시.

"이능파 감지 없이 찾는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물었다.

"이능파 차단에 지역 봉쇄까지 이뤄졌다면, 직접 수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 지역에 있는 모든 던전에 진입해서 확인하려면...."

"여길 다 뒤지려면 한 달은 걸리겠군요."

"...네."

피식, 실소를 뱉었다.

무슨 바보짓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단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계속 수색을 진행하기도 무리가 있습니다. 일부러 봉쇄한 거라면 경계를 하고 있을 테고. 그러다가 만약 러시아 협회에 발각된다면...."

"꽤 귀찮아지겠군요."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물론 다른 방법은 있다.

러시아 협회를 공격해서 이능파 차단기를 파괴한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랬다간 러시아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겠지.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상태로 가능할지 모르겠군....'

숨길 것도 없이, 현재 국제협회의 전력은 기존 대비 80%가량이 손실된 상태다.

물론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은 본인 선에서 어떻게든 되겠지만, 100% 성공하리라곤 장담할 수 없다.

'포획해뒀던 몬스터도 김준우랑 싸우면서 전부 잃은 상태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니 어찌 됐건 최대한 전투를 피해야 한다.

"사, 사무총장님!"

그때, 인근 수색을 나갔던 작전팀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뭡니까?"

"그, 근처에 대규모 병력이 있습니다!"

"...네?"

벌써 발각된 건가?

"이능력자인 건 확실한데, 보아하니 러시아 협회 놈들은 아닙니다."

"그럼…?"

"길드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노아 웨스턴우드도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정황상 노아 길드인 것 같습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놈이 어떻게 알고 움직인 거지?

아니, 그것보다.

'그놈이 움직였다는 건....'

김준우도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이렇게 빨리 지역을 봉쇄한 것도 설명이 된다.

'빌어먹을....'

어떻게 폭주 상태에서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복병이다.

전투를 최대한 피해야 하는 상황에 세계 1위 길드와 마주친다면 그보다 최악의 경우는 없다.

낭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준비하고 올걸.

'급한 마음에 일단 이동한 건데....'

이렇게 되면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통제팀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고, 다시금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쾅―!!

갑작스레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쾅, 콰광―!!

몇 차례나 이어지길 잠시.

먼 곳에서 거대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격인가…?'

설마 우리를 찾아내려고?

점차 번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지만.

"사무총장님!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더 이상 여유는 없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화마에 이를 으득 씹길 한 차례.

"일단은… 후퇴합시다."

결국, 한 보 후퇴를 결정했다.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다.

차단된 이능파, 봉쇄된 구역.

근방에 깔린 노아 길드.

게다가 이유 모를 화재까지.

지금 당장은 계속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새로운 뱅크 아이템이라...."

러시아 국회.

블라디미르 장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채였다.

사실 러시아가 토벌 산업에 크게 힘쓰고 있지 않다는 건, 그 또한 잘 알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부산물 무역이니, 토벌 지원 사업이니, 온갖 것들을 벌여놓고 있을 때, 러시아만큼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여긴 개인이 힘을 가져선 안 되는 탓이었다.

다행히도 지리적인 이유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출현 던전 수도 많지 않고… 그마저도 몇 명의 이능력자와 군인들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이따금 어려운 던전이 출현할 때가 있긴 했지만, 그땐 외부 협회에 도움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는 셈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토벌 산업에 힘을 쓰지 않은 게 묘수가 되었다.

토벌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기에 국제협회에 약점을 잡히지도 않았으니까.

우리에게서 얻을 게 없다면, 굳이 우리를 통제할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역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토벌 산업에서 자유로운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뱅크 아이템이니, 국제협회의 통제니 하는 것들에 대해 딱히 관심도 없었는데....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블라디미르 장관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앞에 서 있던 러시아 협회의 수장, 드미트리 협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새로운 뱅크 아이템이 뭔지는 몰라도, 국제협회와 WDSO가 모두 움직일 정도의 아이템이라는 건데...."

이내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우리에게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그렇습니까?"

드미트리 협회장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어떤 아이템인지 아직 확인 안 되나?"

"알아보고는 있지만, 협회 내 탐지 분석 기술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이능파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흐음."

블라디미르 장관이 혀를 쯧, 차길 한 차례.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가 먼저 찾는 게 어떤가?"

"예, 예…? 그, 그랬다간 WDSO와 척을 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WDSO는 국제협회가 손에 넣지 못하게 봉쇄해달라고 요청했지, 우리보고 건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어."

"...."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같은 거 아닌가. 우리가 먼저 입수한다면 국제협회를 막을 수 있는 거니까."

누가 들어도 궤변이었지만, 드미트리 협회장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알았으면 수색 시작해."

일방적으로 떨어진 명령.

"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문제 있나?"

"그게 지금 봉쇄 구역에 국제협회도 와 있을지 모르고. 무엇보다 노아 길드가 경계하는 중이라 들키지 않고 수색하는 건 불가능한...."

"아, 그렇겠군."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다 내쫓으면 되지."

그가 말했다.

"내쫓겠다는 건…?"

"봉쇄 구역 근방 싹 다 태워버려."

"...."

드미트리 협회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

"아닙니다."

이곳은 러시아다.

유일하게 정부에 속한 협회.

한낱 협회장 따위가 국방부 장관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

독일 협회에서 지원해준 헬기가 이윽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직후.

"이거...."

김민주는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꽤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게.

"생각보다 멀쩡한데요?"

쿠데타가 일어나고, 중앙 정부가 함락된 나라치곤 놀랍도록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게요? 뭔가 세기말 느낌일 거 같았는데."

이아영 또한 의외로 깔끔한 도시 모습에 퍽 놀란 눈치였다.

물론 나와 한유빈은 이미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으니,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지만.

"국제협회의 목표는 토벌 산업을 통제하는 거지, 독재자가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때, 클로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특히나 웨슬리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남자예요.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정부 인사들은 대부분 살려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그렇다고 해도 시민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나름 혁명의 나라인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죠. 억압하고 통제한다면 모를까, 딱히 이전과 바뀐 것도 없고. 듣자 하니 웨슬리가 집권하고 나서부턴 복지가 늘어나서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허.

나라 꼴 잘 돌아가는구먼.

"아무튼, 여기도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요. 그러니까 괜히 작전 수행한다고 너무 뒤집어엎진 마세요."

"노력해보죠."

"본부는 이쪽이에요."

내 대답을 듣긴 한 건지, 곧바로 등을 돌리며 먼저 걸음을 옮긴다.

우린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한참을 이동했다.

이윽고 국회의사당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주변부터 빠르게 살폈다.

일단 바깥에 보이는 경비는 없지만, 건물 안쪽은 장담할 수 없다.

자리를 비운 동안 국내 토벌을 수행할 최소한의 전력은 남겨놓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작전팀이라면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위장 신분으로 잠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김민주와 한유빈을 바라봤다.

그녀들 또한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내 시선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긴장한 표정으로 공격 태세를 마친 그때.

따르릉―.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확인하니, 다름 아닌 노아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봉쇄 구역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예?"

그와 동시에 전달된 뜬금없는 소식.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 같아! 모든 병력 철수 명령 떨어졌고, 당국 측에서 화재 진압 먼저 진행하겠다더군.」

"설마 국제협회 놈들이…?"

「아니, 이 정도 불길이면 놈들도 휘말릴 거야. 만약 그놈들도 구역에 도착해 있다면 결국 몸을 피해야 할 텐데, 굳이 불을 지를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제삼자가 끼었어.」

그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빨리 뱅크 아이템 회수해서 합류해. 이거 자칫하다간 에덴 구경도 못 해보고 쫓겨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이아영 본부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누군가 젯밥에 눈독을 들인 모양입니다."

주제넘게 말이지.

"서두릅시다. 지금 바로 합류해서 에덴을 찾지 못하면 러시아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네."

"알았어요."

그렇게 나와 김민주, 한유빈은 천천히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쾅―!

전 파리 국회의사당.

현 국제 헌터 협회 본부의 문을 박살 내며 안으로 진입했다.

298

298

프랑스 파리.

전 국회의사당, 현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쾅―!

급하게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곳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

"...?"

건물 안을 오가던 직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어느 누가 달려들지 몰라,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들과 대치하고 있자.

"거 살살 좀 다닙시다."

"문 다 부서지겠네."

"여기 혼자 씁니까?"

꽤나 냉담한 반응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한마디씩 주의를 준 그들은 이내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금 본인들의 일에 열중했다.

"...뭐야?"

"…이게 끝이에요?"

한유빈과 김민주는 그 모습이 퍽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모르는 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내부를 보며 그런 의문을 갖고 있자니.

"이 시간이면 잔존 작전팀도 전부 출동 나가서 아무도 없어요. 있어봤자 행정부 직원 몇 명인데… 이 사람들은 어차피 당신들 얼굴 모르니까, 그냥 들어와도 돼요."

"...."

"...."

클로이가 먼저 걸음을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꽤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진입했는데, 설마하니 아무도 우리가 누군지 모를 줄이야....

'이건 뭐, 견학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벙쪄 있던 그때.

"뭐해요. 안 따라와요?"

마치 제집 드나들 듯, 한 치의 경계도 없이 걸어가던 클로이가 답답한 듯 말했다.

우린 멋쩍은 얼굴로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연구실로 향하는 동안 몇 명의 본부 직원과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놀랍도록 무관심한 반응,

우리를 막아서는 경비는커녕 우리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조차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렇게 우린 아무런 방해도 없이 연구실 앞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 처음으로 그 앞에서 걸음이 막혔다.

"여기 문 어떻게 엽니까…?"

다름 아닌, 한눈에 봐도 꽤나 두꺼운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하긴… 뱅크 아이템 연구실인데 이 정도 보안은 해뒀겠죠."

"부수는 게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여기까지 문제없이 왔는데, 이제 와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아영과 한유빈 그리고 김민주가 한마디씩 덧붙였다.

전 PB 코퍼레이션 소속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흐음....'

굳게 잠긴 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삐빅―.

클로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분증을 인식시켰다.

철컹―!

"오, 이게 아직 되네?"

"...?"

"...?"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컨트롤 센터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어이가 없네.

퇴사한 사람의 정보를 아직 안 지웠을 줄이야.

'완전 개판이구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고개를 가로젓길 잠시, 우리는 이내 천천히 연구실로 들어섰다.

섹터별로 나눠진 공간.

온갖 장비와 기계들이 즐비한 그곳.

클로이가 의자에 몸을 던지더니 세상 편한 자세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저기 A-3 구역에 있는 게 시간석이고, A-4구역에 있는 게 차원석이에요. 전용 케이스는 저기 세부 장비 보관실에 있으니까 잘 확인해보고 담아요."

"...."

"...."

우리는 또다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너무나 쉽게 뱅크 아이템과 마주했다.

'작전 회의랍시고 호들갑 떤 게 쪽팔릴 정도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오자.

"그러게, 굳이 나 안 데려와도 된다고 했잖아요."

클로이가 단번에 내 표정을 읽은 듯 볼멘소리를 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허술할 줄은 몰랐습니다."

"특정 몇몇 팀만 제외하면 나머진 사실 다른 조직이랑 똑같아요.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허...."

"시간 없다면서요. 빨리 챙기고 빠져나가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뱅크 아이템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저기요."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거… 원래 저래요?"

그녀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이이잉―.

A-4 구역에 보관되어 있던 차원석이 밝은 보랏빛을 내뿜으며 발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거 왜 저럽니까?"

"혹시 터지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나와 김민주 그리고 한유빈 또한 알 수 없는 현상에 한마디씩을 던졌다.

하지만 이 컨트롤 센터의 전 총책임자였던 클로이는 가만히 그 빛을 쳐다보고 있길 잠시.

"수, 숨어요!"

갑자기 크게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네?"

"뭔 소립니까, 갑자기?!"

"닥치고 빨리 숨으라고!!"

무척이나 다급해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 우리는 이유를 물을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 각자 연구소 구석구석에 몸을 숨긴 직후였다.

파앗―!

차원석의 강렬한 빛과 함께 수십 명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이내 그 실루엣을 확인하고 자동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시발, X 됐네....'

그도 그럴 게 컨트롤 센터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

웨슬리 사무총장이었다.

'대체 왜 벌써....'

왜 벌써 복귀한 것인가.

나는 이를 으득 씹으며 몸을 숨긴 채 그를 노려봤다.

듣자 하니 봉쇄 구역에 큰불이 났다고 했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후퇴한 건가?

아니면 벌써 에덴을 입수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우리가 본부에 침입했다는 걸 눈치챈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우리가 궁지에 몰렸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 순간.

저벅, 저벅―.

"...!"

웨슬리 사무총장의 발걸음이 내가 숨어 있는 책상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

"쯧...."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웨슬리 사무총장은 차원석 게이트를 통해 본부로 복귀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설마하니 그렇게 비장하게 출발해놓고 이토록 허무하게 돌아오게 될 줄이야.

이러면 베를린 공습까지 포기하고 후퇴한 게 우스운 꼴이 되지 않는가.

'하아....'

물론, 그 상황에선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능파 차단에, 구역 전체에 깔린 노아 길드.

게다가 원인 모를 갑작스러운 산불까지.

수색도 불가능한 마당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다시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김준우, 그놈도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건데....'

노아 길드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김준우도 에덴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만약 WDSO 귀에 이번 일이 들어갔다면 그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놈들 또한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덴을 회수하려고 하겠지.

'설마 불을 지른 것도 그놈 짓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길 잠시.

웨슬리 사무총장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를 해당 구역에서 후퇴시키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을 수도 있지만....

고작 그것만을 위해 우랄산맥에 불을 지르는 걸 러시아 정부에서 허가해 줄 리가 없다.

러시아는 국제협회가 유일하게 약점을 잡을 수 없는 국가다.

토벌 산업에 그 어떤 투자도,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국가이기에, 토벌 산업을 미끼로 통제할 수 없는 나라.

그런 이들이 국제협회를 막기 위해 멀쩡한 산맥을 모조리 태워 먹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그들이 우리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산불은 우리를 막기 위해 벌인 짓이 아니다.

아니, 우리를 막으려고 한다기보다....

'아예 구역 내 모든 병력을 후퇴시키려고…?'

만약 그렇다면 산불을 낸 범인은 김준우가 아니라 제삼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재 정황상 제삼자라 하면....

'...귀찮은 놈들이 끼어들었군.'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렇게 중얼거리길 한 차례.

"뭐… 산불이 꺼지기 전까지는 어차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테니 급할 건 없겠죠."

함께 복귀한 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좀 더 정보를 모아봅시다. 위성으로 해당 구역 던전 위치 전부 파악하고, 위험도 순으로 분류해서 의심 던전 리스트 뽑아 보세요."

"네."

"불길이 사그라지면… 바로 다시 이동할 겁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에덴을 찾아내세요."

그의 말에 직원들은 대답 대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불 진화에 빠르면 3일.

늦으면 일주일.

그 안에 어떻게든 유력 던전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산불이 꺼지자마자 누구보다 빨리 회수해서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다.

'....'

그럼에도 웨슬리 사무총장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국제협회는 현재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WDSO의 지부를 공격해서 그들을 산산조각 내는 것도 실패.

PB 코퍼레이션은 반강제로 해체됐고, 덕분에 자신의 손발이 돼줄 이들을 모두 잃었다.

무엇보다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했던 베를린 공습도 물 건너갔고, 그 결과 국제협회는 너무나 많은 전력의 손실을 보았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에덴을 입수해야 한다.

마지막 기회이자, 최후의 선택,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모든 게 끝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컨트롤 센터를 벗어나려던 그때.

"...?"

웨슬리 사무총장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센터 내부를 둘러봤다.

무언가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까닭이었다.

센터 내부를 한참이나 살폈지만, 수상한 점은 없었다.

'....'

하지만 복도를 가로질러 집무실로 향하던 와중에도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멈출 줄 몰랐다.

결국, 그는 발걸음을 멈췄고 이내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사, 사무총장님…?"

"여, 여기까진 어쩐 일로...."

사내 업무 데이터를 보관하고 처리하는 정보 기록실이었다.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출입 기록 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네, 네…? 아, 무, 물론입니다!"

갑작스러운 사무총장의 방문에 직원들이 크게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그들은 곧바로 모니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 별 특이 사항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직원 한 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의심스러운 출입이나, 강제로 문을 연 흔적도 없습니까?"

"네, 네… 애초에 그런 출입이 있었으면 저희가 먼저 알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출입 기록이 두 번밖에 없어서 확인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작게 대답했다.

역시 기우였나?

예민해져 있었나 보군, 그런 생각과 함께 등을 돌리던 그 순간.

"...잠깐."

그가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출입 기록이 두 번이라고요…?"

"아, 네."

직원의 확답에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한 번은 누군지 알고 있다.

오늘 오전, 컨트롤 센터에서 러시아로 이동했으니 당연히 본인이겠지.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누굽니까…?"

"어...."

직원이 모니터를 확인하길 잠시.

"클로이 팀장님이시네요. 뭐, 센터 총책임자시니까 볼 일이 있었던 모양...."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의 그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사고가 정지된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내.

쾅―!

웨슬리 사무총장은 모든 벽을 박살 낼 기세로 기록실을 뛰쳐나갔다.

299

299

「봉쇄 구역 수색 결과, 화재 발생 후 모든 병력이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러시아, 국회.

블라디미르에게 드미트리 협회장이 그 소식을 전했다.

"그래, 잘 됐군."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화재 진압은 3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사이에는 아무래도 저희 또한 수색이 힘들 것 같습니다.」

"뭐…?"

블라디미르 장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수색을 못 한다니? 화재가 진압되면 또다시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모여들 텐데, 그 안에 못 찾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불길이 너무 거세서 방화복을 입고 수색을 하더라도 채 10분도 못 버틸 텐데....」

"위험한 거 누가 몰라? 산 하나 태워 먹은 값은 해야 될 거 아닌가! 모두가 후퇴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먼저 그 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

드미트리 협회장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의 허리라고 불리는 우랄산맥에 불을 지른 이유가 무엇인가.

남의 나라에서 보물찾기나 하고 있는 놈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그 틈에 아이템을 손에 넣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화재가 진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극약 처방을 내린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수색을 진행해야 하지만....

'하아....'

블라디미르 장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아직 불길이 거센데 무턱대고 인력을 보낸다고 해서 반드시 찾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이능파 차단을 해제하자니, 다른 놈들이 먼저 정보를 입수할 게 뻔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른 놈들이 모여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아이템을 찾을 수 있을까.

블라디미르 장관은 전화기를 붙잡은 채 한참을 고민했지만....

영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러시아 협회의 기술력으로는 국제협회와 WDSO보다 아이템을 빨리 찾을 수 없다.

이대로 불길이 진압되면 또다시 모여들 테고, 누가 먼저 손에 넣든 간에 러시아는 구경도 못 해보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는 수밖에."

「그게 무슨....」

핸드폰 너머에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드미트리 협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자회견 열자고."

블라디미르 장관이 지시를 내렸다.

"러시아 내에서 국제협회와 WDSO 간의 마찰이 일어나, 산불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

드미트리 협회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양측 모두 러시아 내에서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군사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내 드미트리 협회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오히려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저희가 더 불리한 게....」

"아니."

하지만 블라디미르 장관은 고개를 저으며 즉답했다.

"국제협회와 WDSO가 정면으로 맞붙은 지 이제 겨우 하루 지났다. 전력 손실도 만만치 않을 거고, 다시 전투를 벌일 만큼 회복하지도 못했을 거야."

「....」

"보나마나 둘 다 전투는 피하고 싶겠지.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일반 군사력이라고 해도 무시할 순 없어."

블라디미르 장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기자회견 후에 두 조직에도 다시 한번 확실히 전달해."

이내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시간부로 러시아 안에선 개미 새끼 한 마리 가져갈 수 없다고."

결국, 두 조직 모두와 척을 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블라디미르 장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우랄산맥에 있다는 아이템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봤자 최상급 부산물이거나, 장비 재료겠지만....'

그건 애초에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템이 국제협회와 WDSO 모두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물건이라는 것만으로도 손에 넣을 가치는 충분하다.

협상, 거래.

혹은 협박.

그 아이템을 직접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현재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나라는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국제협회와 WDSO.

두 조직이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만약 이 아이템으로 두 조직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면....

'각하께서 좋아하시겠군.'

그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다.

***

쾅―!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웨슬리 사무총장은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곧바로 센터 내부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밑.

장비함 안.

모든 섹터 구석구석까지 뒤졌지만....

"시발!!"

아무도 없다.

자신이 방금 출입기록을 확인했을 때까진 빠져나간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오는 사이에 빠져나간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오면서 마주치지 못했으니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

지금 당장 수색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대체 그년이 여긴 왜 온 거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웨슬리 사무총장의 머릿속을 스쳤다.

클로이.

전 PB 코퍼레이션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나름 국제협회의 핵심 인력이었지만.

WDSO와의 마찰에서 양상이 불리해지니, 박쥐같이 WDSO로 갈아탔다.

그런 인간이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본부로 다시 기어들어 왔을까?

뭐, 두고 간 물건을 가지러 온 건 아닐 테고.

'....'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정리하던 그 순간.

"...설마."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웨슬리 사무총장은 곧바로 A-3 구역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텅 비어 있는 뱅크 아이템 보관 체임버.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발, 시발!!"

쾅―!!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자 순간 검은 기류가 터져 나오며 센터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 사무총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뒤늦게 웨슬리 사무총장을 따라온 직원들이 물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체임버가 왜 비어 있어?"

직원들 또한 뱅크 아이템이 있어야 할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본부 봉쇄하세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낮은 음성이 깔렸다.

"이 시간부로 본부 밖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나갑니다. 그리고 기록실 내 모든 CCTV 확인하고, 구역별로 병력 배치해서 침입자 수색 진행하세요."

"지금 그만한 인력이..."

"시발, 당장 움직이라고!!"

그의 고함과 함께 또다시 터져 나오는 검은 기류.

화들짝 놀란 직원들은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센터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다시금 홀로 남은 컨트롤 센터.

"...."

웨슬리 사무총장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확실하다.

WDSO 또한 에덴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국제협회가 에덴을 찾기 위해 러시아로 이동할 거라는 걸 알고 그 틈을 타서 본부를 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지금이라면 뱅크 아이템을 탈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에덴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해당 장소가 아닌 적진으로 향하는 과감한 판단.

정확히 빈틈을 노린 작전.

허를 찌르는 계획.

틀림없다.

김준우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

독일에서 끝을 보지 못했다고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이야.

하지만 그 또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빨리 복귀할 거라고는 말이지....'

본인이 컨트롤 센터를 나가서 출입기록을 확인하는 사이에 뱅크 아이템을 들고 사라졌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본부로 복귀하던 그 시점에는 센터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급한 건 그들이다.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 적진 한복판.

국제협회의 본부다.

결코, 무사히 빠져나가진 못할 것이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센터를 빠져나갔다.

***

"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센터를 빠져나와 미친 듯이 복도를 질주하고 있던 그때, 김민주가 물었다.

"낸들 알아?"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앞뒤 없이 달릴 뿐이었으니까.

그런 내 손에는 차원석과 시간석이 담긴 두 개의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렇게 빨리 복귀하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그가 나간 틈을 타서 가까스로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문제는 빠져나갈 수 있냐는 건데....'

또 아까처럼 철판 깔고 정문으로 돌파해볼까.

아니, 지금 상황에 그건 너무 도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던 그때.

「컨트롤 센터 내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모든 직원은 의심 인원 발견 시 즉시 보고 바랍니다.」

복도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기어이 들통 난 것이다.

'몰래 빠져나가긴 글렀군.'

건물을 부수고 도망쳐야 하나 싶던 그때.

"지하에 피난용 비상구가 있어요."

앞서가던 클로이가 말했다.

"봉쇄하기 전에 도착하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어요.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것보단 그게 낫겠죠."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이내 그녀가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상구 앞에 다다른 그때.

"빌어먹을...."

"하아...."

코너에 몸을 숨긴 채 비상구 앞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집중해. 놈들은 숙련된 헌터들이야."

"알겠습니다."

"발견 즉시 발포하고, 경계 늦추지 마."

병력이 벌써 비상구 앞에 포진해 있었다.

"…이제 어떡하죠?"

"몇 명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죠?"

이아영 본부장이 숨을 죽인 채 묻자, 한유빈이 의견을 내놓았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확인되는 인원은 5명.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나는 김민주와 한유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길 한 차례, 모두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돌아가요."

그때, 클로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몇 명이나 된다고…!"

"여기엔 이전에 만들어둔 반능석 장비가 아직 남아 있어요."

클로이가 한유빈의 말을 끊으며 즉답했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달려드는 순간 스킬을 차단당할 테고, 그러면 전투가 가능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클로이는 나를 바라봤다.

"혼자서 상대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4명과 뱅크 아이템을 지키면서?"

"...."

날 뭐로 보는 건가.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내가 예전 상태라면 말이지.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해당 패시브의 효과로 인해, 귀하의 고유 스킬이 변경되었습니다.]

[귀하의 고유 클래스가 초기화되었습니다.]

현재 내 상태는 고유 스킬과 고유 클래스가 모두 초기화된 상태.

어떤 스킬인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나조차 모르는데 과연 전투를 벌이는 게 옳은 선택일까.

'만약 공격 스킬이 아니라면....'

그땐 더는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 국제협회의 본부다.

적진 한복판에서 도박을 할 순 없다.

"…돌아갑시다."

결국, 나 또한 클로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내가 지시를 내린 이상, 이의를 제기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다시금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그 순간.

"1층, 2층 다 확인했어?"

"네, 확인했습니다. CCTV에도 잡히지 않은 걸 보면 내부 상황을 잘 아는 놈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새끼야. 1, 2층 다 확인했으면 남은 건 지하밖에 없잖아."

뒤에서 다른 병력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김민주와 한유빈은 곧바로 공격 태세를 갖췄고, 이아영과 클로이는 그들 뒤로 몸을 숨겼다.

이대로는 포위당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거지.

머리가 점점 하얘지던 그 순간.

"...."

구석에 있는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방법이 있을 것 같군요."

구석에 있던 던전 청소용 도구들을 손에 들었다.

300

300

"아직도 연락 없나?"

WDSO 서울 본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박인범 사무총장이 꽤나 초조한 표정으로 이두식 이사에게 물었다.

"물어본 지 1분도 안 되셨습니다. 조금만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기다려보죠."

"크흠...."

이두식 이사는 담담한 반응이었지만, 박인범 사무총장은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국제협회 본부 잠입.

그 작전 개시 연락을 받은 지 벌써 3시간이 지났다.

물론 금방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제는 슬슬 마무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보다 더 오래 걸린다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으니까.

계속 지체된다면 그만큼 성공과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빌어먹을...."

"걱정이 과하십니다. 김준우 그놈이 있는데, 뭔 일이 있어도 알아서 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또 마음처럼 되나."

쯧, 혀를 차길 한 차례.

고개를 돌려 이두식 이사를 바라봤다.

"그런데 너야말로 괜찮냐. 하나뿐인 딸내미가 적진 한복판에 가 있는데...."

"...."

그러자 담담했던 그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영이 엄마가 작전 중 사망했을 때, 얘가 고작 8살이었습니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가… 제가 아직 통제팀장이었을 때였죠, 아마. 혹시 기억나십니까?"

"당연하다마다. 애초에 아라를 작전팀장으로 임명한 게 나였는데."

박인범 사무총장이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

홍아라.

전 작전 1팀장이었던 인물이자, 이두식 이사의 아내.

그리고 이아영 본부장의 친모이다.

"그땐 아영이가 어리기도 했고…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조금 크니까 지 엄마 죽은 게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뭐… 썩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야, 인마. 그땐 멀쩡한 탐지 장비 하나 없던 때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 누구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겐 그랬겠죠."

박인범 사무총장조차 처음 듣는 무거운 목소리.

이두식 이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협회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땐,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엄마가 그곳에서 일하다 죽었는데, 자식이 거길 들어가겠다고 하는 게...."

"그렇긴 하지."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에 대한 질타에 가깝더군요. 저는 실패했지만, 본인은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협회를 바꾸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박인범 사무총장은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뭐… 회사 생활이라는 게 다짐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실제로 들어와서 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랐겠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위에서는 허구한 날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으니."

"...어째 찔리는구먼."

"나름 이사인 애비는 입으로만 개혁하겠다, 지껄이고 있고… 정작 몇 년이 지나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인지 그 녀석도 슬슬 질려가던 것 같더군요."

"원래 강한 사람일수록 쉽게 무너지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 조직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 찰나에, 그 녀석이 나타난 겁니다."

그 순간, 이두식 이사의 눈빛이 변했다.

"그 녀석이 나타나고, 절대 바뀔 것 같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바뀌어 갔죠."

"그렇게 들으니 그놈이 꼭 영웅 같군."

"실제로 아영이에게 그놈은 영웅이나 다름이 없었을 겁니다."

이두식 이사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녀석과 함께 큰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본인이 그리던 조직이 되게끔,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걸고 있죠. 저도, 형님도 실패했던 일을 그 녀석이 해내고 있는데...."

이내 이두식 이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녀석을 말리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박인범 사무총장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그래, 맞는 말이야."

이내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진 않나? 자네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전 다시 돌아가도 못 할 겁니다."

"겸손은...."

"그리고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녀석들은 저희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고, 그 녀석들이 하지 못하는 일은 또 그다음 녀석들이 해내겠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크하하! 철부지 고등학생인 줄 알았는데… 너도 나이를 먹긴 했군."

"형님만큼은 아니지만요."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어째선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사무총장님!"

직원 한 명이 다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으니.

"지금 러시아 정부에서 성명을 발표했는데…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이 대뜸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국방부 장관이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러시아 내에서 벌어진 두 세력의 마찰로 인해 우랄산맥에 화재가 발생했고, 수천 명의 시민이 대피한 상황입니다.」

"...?"

"...?"

상당히 의미심장한 발언.

두 남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런고로 현 러시아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국제 헌터 협회와 WDSO, 두 조직 모두 러시아에서 영구히 떠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블라디미르 장관에게서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 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블라디미르 국방부 장관.

신뢰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이득이 있었기에 몇 년째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

그가 기어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박인범 사무총장의 주먹에 힘이 꾹 들어갔다.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대, 대체 왜 갑자기 이런…?"

"뻔하지 않겠어. 양측이 혈안이 돼서 찾는 아이템이니, 본인들도 탐이 났겠지."

박인범 사무총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에덴 회수는 어려워지겠는데...."

"...."

그 말에 이두식 이사가 생각에 잠기길 잠시.

"잠깐…!"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철수 권고가 내려졌다는 건… 국제협회도 본부로 복귀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를 텐데...."

그리곤 퍽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설마… 발각된 건 아니겠죠…?"

"...."

박인범 사무총장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3시간째 연락이 두절된 녀석들.

갑자기 떨어진 철수 권고.

만약 그 녀석들이 아직 본부에 남아 있다면....

"일 났군...."

두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지하.

앞에는 기존 병력이 비상구를 지키고 있고, 뒤에서는 추가 병력이 다가오고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

'...온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퍽―!

"윽…!"

"뭐, 뭐야!"

우린 고의로 그들 중 한 명과 부딪쳤다.

"아, 죄, 죄송합니다!"

"괘, 괜찮으세요?"

그와 동시에 나와 클로이는 고개를 바짝 숙인 채 곧바로 계속해서 사과를 던졌다.

그러자.

"우욱…!"

"이 냄새는 뭐야…?"

그들은 코를 부여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몸에 사체 찌꺼기와 오물들이 잔뜩 묻어 있었으니.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닦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걸레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걸레 또한 오물로 얼룩덜룩한 상태였고, 그것을 본 직원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리를 뒀다.

"아, 씨… 더럽게, 시발. 됐으니까 치워!"

"니들 뭐야?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하지만 이미 기분이 팍 상한 듯 계속해서 다그치는 이들.

그들은 그제야 우리의 행색을 살폈다.

"뭐야, 청소팀이었어?"

"쯧...."

우리의 복장을 확인하곤 혀를 차며 말했다.

그들이 착각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청소복을 입고, 모자까지 푹 눌러쓴 채였으니까.

비상구가 위치한 본부 지하.

바로 청소팀의 사무실이자 휴게실 그리고 청소 도구 보관실이었다.

그곳에서 장비를 발견한 우리는 급하게 청소팀으로 변장했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오물까지 뒤집어썼다.

그들은 우리가 누군지 보다, 그저 이 더러운 것에서 어떻게 피할까에만 신경이 팔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청소팀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지금 긴급 상황인 거 몰라?"

"하여간, 기생충 같은 것들. 하는 것도 없으면서 농땡이나 치고 있네."

"...."

저 개소리를 견디는 것뿐.

'그런데 어째....'

꽤 익숙한 대사인데.

"시발 됐다. 다 꺼져."

머지않아 그 말이 떨어졌다.

우린 애써 미소를 감추며 그들을 지나치던 그 순간.

"뭐야, 무슨 일이야?"

"...!"

소란을 들은 건지 비상구를 지키던 기존 병력이 다가왔다.

"아, 청소팀 놈들이 실수를 해서."

"쯧, 더럽게...."

추가 병력은 대놓고 우리를 씹어댔고, 그 순간.

"청소팀…?"

기존 병력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가 올 때 청소팀이 있었나?"

"...."

"...."

그 한마디에 모든 병력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리고 이내.

"야, 니들 일로 와봐."

결국, 그들이 다시 우리를 불렀다.

'빌어먹을....'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 이를 으득 씹었다.

"뭐 하고 있어. 이리 와보라니까?"

"...."

"...."

그들이 재촉했지만, 우린 서로 눈치를 보며 잠자코 서 있었다.

튀어야 하나.

아니면 공격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묘한 긴장감이 맴돌던 그 순간.

"아 씨, 이 새끼들 여기 있었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하곤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이 새끼들아! 소집 명령 떨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기에 짱박혀 있어!"

"...?"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우리를 아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뭐야. 당신 팀이야?"

"어, 엇, 안녕하십니까."

병력과 그 남자는 서로 아는 사이인 듯,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내 남자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다들 여기 계신... 아, 혹시 이놈들이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

"...."

남자의 물음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길 잠시.

"됐어, 신경 꺼."

"당장 데리고 꺼져."

그들이 손사래를 치며 먼저 등을 돌렸다.

우린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후우...."

"하...."

그들에게서 멀어지자마자 누구랄 것 없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보아하니 우리를 본인 팀원이라고 착각한 것 같은데....'

나는 앞장서서 걷고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어찌 됐건 덕분에 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십년감수 했네."

그 순간, 클로이가 그 남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배님 부탁인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자.

"왜요. 이러라고 저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요?"

클로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본부로 들어가는데, 이런 준비 하나 안 해뒀을까 봐요? 이래 봬도 본부 안에 아직 제 말이면 껌뻑 죽는 놈들 널렸어요."

"...."

홈그라운드라 이건가.

"이쪽은 헌터 관리실장, 데이브. 제 직속 후배예요. 진입하기 전에 연락해서 CCTV 기록 삭제랑 동선 확보 좀 부탁해놨죠."

이내 소개받은 데이브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거리길 한 차례.

"이제 저만 따라오세요. 본부 밖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데이브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퍽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아직 본부 소속이신데, 우리를 도왔다가 들키면...."

"하하하! 사실 저희도 비슷합니다."

"...예?"

내 물음에 그가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작전팀 외엔 상황이 다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툭하면 무시당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욕이나 먹죠. 특히나 통제권을 잡은 이후로는 더 심해졌고요."

"...."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기회가 안 돼서 그러지 못하는 것뿐이죠. 그러니 그냥 버티고 있는 겁니다."

데이브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청소부 출신으로 대표 자리까지 올라서, 모든 직원을 끔찍하게 아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들으면...."

이윽고 직원들이 쫙 깔린 로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팬이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들 모두가 슬쩍 자리를 비키며 문 앞까지 길을 터주었다.

"...."

"...."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뭇거리고 있자니.

"이 짓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곳엔 늘 옳은 일을 하려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죠."

데이브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곤 내가 들고 있는 케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옳은 일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뒤쪽에서 병력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나가십시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고, 우린 곧바로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곳에 있던 직원들이 우리의 뒤를 막아섰다.

우린 그들의 도움으로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서, 곧장 건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본부에서 멀어지던 그 순간.

쾅―!!

본부 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301

301

"…뭡니까?"

국제 헌터 협회 본부, 1층 로비.

지원팀과 청소팀, 그들을 비롯한 다른 행정 부서 직원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제가 소집 명령을 내린 건 작전팀만일 텐데… 왜 다들 여기 모여 계시죠?"

"...."

"...."

웨슬리 사무총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어쩐지 CCTV에도 안 잡히더라니...."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길 잠시.

직원들을 향해 조금은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불만이셨습니까?"

"...."

"말씀해보세요. WDSO 놈들이 본부 한복판에 잠입해서 뱅크 아이템을 빼 나가는데도, 입 싹 닫고 모른 척해준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직원들은 이번에도 서로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아낄 뿐, 선뜻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조직 내 차별, 상식 밖의 예산, 임금 삭감 등등… 굳이 말하자면 많습니다."

지원팀 소속, 데이브 헌터관리실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작전팀이랑 동급으로 안 대해줬다고 지금 이 사달을 벌인 겁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자격도 없이 권리만 탐하는 것 같은데… 사실 그런 것보다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진짜 이유?"

웨슬리 사무총장이 되묻자, 데이브가 잠시 숨을 고르길 한 차례.

"저희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

최근, 국제협회에서 일하면서 늘 가지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저희는 현재 국제사회 전체를 등졌습니다. 그리고 작전팀과 고위 간부들은 그 리스크를 짊어진 만큼, 얻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일반 직원들은… 테러리스트라는 명함만 갖게 됐을 뿐입니다."

테러리스트.

그 단어에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고충이 있는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한 조직의 책임자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이제라도 여러분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만...."

이윽고 그의 눈빛이 번뜩이길 한 차례.

"그런다고 해서 이미 적들 손에 들어간 뱅크 아이템이 돌아올 것 같진 않군요."

"...예?"

"...?"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은 뒤에 있던 병력을 향해 손짓했다.

쾅―!!

그의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웨슬리 사무총장을 포함한 국제협회의 모든 병력은, 직원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그 불길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다.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인 양.

"사무총장님."

그때, 작전팀 소속의 한 병력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민 태블릿 PC.

그곳에는 러시아 국방부 장관 블라디미르가 공식 입장 표명을 전하는 중이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두 조직 간의 마찰.

그 사이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본 당국.

입장 표명을 가장한 개소리 콘테스트의 끝은 곧 러시아 입국 금지 요청으로 마무리되었다.

"하하...."

이윽고 블라디미르 장관이 물러나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이내, 한참을 실성한 사람마냥 웃어대기 시작했다.

사실상 말이 요청이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요...."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기어이 우리 걸 다 뺏어 가시겠다?"

그의 눈에 핏대가 섰다.

김준우.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다.

모든 일의 시작인 동시에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일어날 일 또한 김준우의 책임이다.

"듣자 하니 우리가 테러리스트라는데...."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은 병력을 향해 입을 열었고.

"잃을 게 없는 테러리스트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여줘야겠습니다."

공허한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분노에 점철된 표정.

그 사이로 소름 끼치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

국제협회 본부를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선 직후.

본부 건물에서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 순간,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니....

"뭐야...?"

"가, 갑자기 무슨...."

건물 1층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서, 선생님…?"

"이, 이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김민주와 한유빈이 나를 바라보며 동시에 물었다.

우리를 도와준 본부 소속 직원들.

우리가 빠져나간 직후 발생한 폭발.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죽었거나.

혹은 죽기 직전이거나.

어느 쪽이건 우리를 도와준 대가로는 너무 큰 책임이다.

그들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건 도의적으로 못 할 짓인 건 안다만....

"계속 갑시다."

"네, 네?"

"그게 무슨...."

"뭐가 더 중요한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단호하게 말하자, 두 여자는 순간 발끈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절대 도의를 저버릴 녀석들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우린 지금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적진 한복판에서 겨우 빠져나왔을뿐더러, 이번 작전은 실패하면 단순히 아쉬운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뱅크 아이템을 회수해야 한다.

"헬기 도착까지 5분 남았습니다. 지금 돌아가면 작전은커녕 우리까지 위험해집니다."

"하, 하지만 그래도 저희를 도와줬는데…!"

"김민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던전 안에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전멸로 이어질 수도 있어. 너도 알잖아."

"하지만… 여긴 던전이 아니잖아요."

"그래, 아니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던전보다 더 한 곳이지."

"...."

"...."

두 여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나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듯,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뒤로는 모두가 말을 아낀 채 계속해서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이윽고 약속한 포인트에 도착한 순간.

두두두두두―.

때맞춰 헬기가 도착했다.

우린 여전히 침묵한 채 헬기에 올라탔고, 헬기는 곧바로 파리 상공을 비행했다.

헬기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모두가 애써 입을 다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예, 사무총장님."

박인범 사무총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됐냐?」

"회수 성공했습니다."

「피해는?」

"저희는 괜찮습니다."

「…저희는?」

그가 되물었다.

"국제협회 본부 내에 저희를 도와준 직원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바로 들킨 것 같습니다."

「....」

그 또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듯, 말을 아끼길 잠시.

「...수고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한마디를 전했다.

"뱅크 아이템은 이아영 씨 편으로 본부로 보내겠습니다. 나머진 바로 러시아로 합류해서 에덴 수색 진행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러시아에서 방금 우랄산맥 산불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을 발표했는데, 우리와 국제협회 간의 마찰로 인한 피해라고 하더군.」

"말도 안 됩니다. 두 조직 모두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대놓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 같은데, 저희도 바로 기자회견 열어서…!"

「그럴 수가 없어.」

박인범 사무총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그곳에 있었던 건 우리가 아니라, 노아 길드였잖나.」

"...!"

「WDSO가 공식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라서 입장이 난처해졌어.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대답을 아낀 채 입술을 잘근 씹어대길 한 차례.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겠답니까?"

「WDSO랑 국제협회, 모두에게 러시아 접근 금지 요청을 내렸다.」

"하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튼, 자네도 그렇고 국제협회도 이젠 러시아에 발끝도 못 들이밀게 됐어. 보아하니 노아 길드도 벌써 후퇴한 것 같고… 그러니 일단은 자네도 본부로 복귀해.」

"...알겠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대답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잠시 두 손을 포개고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어찌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뱅크 아이템은 무사히 입수했고, 우리도 그렇지만 국제협회 또한 에덴을 쉽사리 회수하지 못하게 됐다.

물론 과정적으로는 계획에서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본다면 모든 게 성공적이다.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에덴을 국제협회가 갖지 못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국제협회를 견제할 수 있지, 제삼자 손에 들어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제삼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나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뭔가?」

핸드폰 너머에서 짤막하고 건조한 대답이 들려왔다.

"안 받으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연락을 피하진 않으시는군요."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장관이었다.

"공식 입장에 대해선 전해 들었습니다. 갑자기 접근 금지 요청을 내리셨다고."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

아예 뻔뻔하게 나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나름 믿고 부탁드린 건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듣자 하니 세간에선 자네를 건드리면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된다던데… 보복할 생각인가?」

"설마요. 저도 나름 계산기 두드려보고 움직입니다. 뭐라도 얻을 게 있어야 보복도 하는 법이죠. 그런 부분에서 러시아는 딱히 건드릴 이유가 없군요."

「....」

그건 곧, 당신들은 건드릴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장관도 그 뜻을 알아차린 듯, 불편한 티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왜 연락했나? 신의를 저버렸다고 책망이라도 하려고? 탓할 거면....」

"아뇨. 그 반대입니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뭐?」

"장관님은 지금, 국제협회의 역린을 건드리셨습니다."

「....」

"지금 러시아에 있는 그 아이템… 우리는 그걸 무엇을 위해, 어떻게 다뤄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 아이템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면 국제협회는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삼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말이 달라지죠. 러시아는 그 아이템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

"그 아이템은 러시아에 그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어마어마한 손해를 안겨다 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부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저조차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 말 없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나는 묵묵부답인 핸드폰을 꾹 붙잡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까마득한 파리의 상공.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국제협회 본부.

그곳에선 여전히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꽤나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302

302

대한민국 WDSO 서울 본부 산하, 아이템 제작 연구소.

통칭 이클립스.

김준우를 비롯한 모든 인원이 본부로 복귀한 지도 하루가 지났다.

그사이 모두가 격렬했던 전투를 잊고 짧은 휴식을 가졌지만, 이아영 본부장과 클로이는 그러지 못했다.

회수한 뱅크 아이템 관리를 위해 이클립스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이게 다 모여 있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체임버별로 뱅크 아이템 보관을 완료한 직후.

이아영 본부장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석, 차원석, 반능석, 이능석.

이능차원을 각 분야별로 컨트롤 할 수 있는 4개의 뱅크 아이템이 기어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아영 본부장이 뱅크 아이템이 담긴 유리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클로이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애도 아니고, 돌멩이 몇 개에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 돌멩이 전문가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

툭 뱉은 말에 곧바로 되돌아오는 화살.

클로이는 말문이 막힌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알고는 있죠? 거래, 양도 불가인 뱅크 아이템이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게 개판이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감격스러운 건가?"

"감격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이래저래 이상한 기분이네요."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퍽 답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로이의 말대로, 뱅크 아이템이 이곳에 있다는 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컸다.

그만큼 질서와 규칙이 무너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이 상황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아영 본부장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때였다.

"본부 일은 유감이에요."

클로이에게 어렵사리 그 말을 전했다.

"준우 씨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상황이 워낙...."

"그쪽이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요."

클로이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거기 있다 보면 동료를 잃는 일이야 부지기수였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 번씩은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거고요."

"...."

"그러니까 아마 데이브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였어도 그 상황에선 김준우랑 똑같이 했을 거고."

"…그런가요."

"만약 돌아간다고 했으면 내가 말릴 생각이었으니까."

이아영 본부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후배,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담담한 반응.

이아영 본부장은 그녀에게 측은함을 넘어 동정심까지 느껴졌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그녀가 인간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슬픈 감정마저 사라질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그렇게 눈치를 보며 클로이를 힐끔거리고 있던 그때.

"그나저나… 김준우는 어디 있대? 복귀하고 나서부터 쭉 안 보이던데."

클로이가 시선을 의식한 건지, 대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청소팀 사무실에 있어요."

"…? 거기서 뭐 하는데요."

"몰라요."

클로이는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냥 있어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소 작업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걱정돼서 찾아가도 아무 말도 없고...."

"파리 일 때문에 그런가…?"

"준우 씨도 이래저래 복잡한 거겠죠, 뭐."

"흐음…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클로이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아영 본부장은 그런 사람으로 안 보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늘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선택을 하는 사람.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가끔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사람.

클로이는 늘 적으로 김준우를 만났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아영 본부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지난 3년간 그를 지켜본 결과, 그는 누구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을까 겁을 내는 게 아닌, 주변 사람이 죽을까 겁을 내는 사람.

그래서 늘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서려고 하는 사람.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오히려 스스로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파리에서 그런 일을 겪고도 괜찮을 리가 없지.'

이아영 본부장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여기 계셨군요."

이클립스 뱅크 아이템 관리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준우 씨?"

"뭐야, 마침 그쪽 얘기하고 있었는데."

김준우.

꼬박 하루를 사무실에 박혀 있던 그가 직접 발걸음 한 것이다.

"여긴 웬일이에요? 일 다 끝나셨으면 집에 가서 좀 쉬시지."

"뭐, 다른 게 아니라...."

김준우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내.

"혹시… 우리도 차원석으로 던전 생성 가능합니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요?"

"개인적으로 확인할 것도 있고… 미리 훈련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네…?"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당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아무튼, 가능합니까?"

"가능이야… 하죠."

"그럼 하나 열어 주십쇼. 레드 등급으로."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

이아영 본부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혼자 들어갈 생각은 아니죠?"

"...."

역시나.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혼자는 절대 안 돼요!"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예요?! 임의로 생성한 던전은 이능파가 불안정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운이 나쁘면 규격 외 몬스터가 등장할 수도 있어요!"

"...."

"훈련이라면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던전 생성은 절대…!"

이아영 본부장이 연신 목소리를 높이며 김준우를 설득하던 그 순간.

"...."

문득 김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그녀는 갑자기 설득을 포기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와 동시에 김준우는 말을 보태지 않고, 감사를 전한 후 곧바로 이클립스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김준우가 사라지자.

"미쳤어요? 그걸 왜 허가해줘요? 여긴 이능파 조정 장비도 없어서 자칫하다간 던전 채로 붕괴해버릴 수도 있는데?"

클로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곧바로 이아영 본부장을 질책했다.

"아무리 저 사람 말이라면 끔뻑 죽어도 그렇지, 이런 것까지 허가해주면 어떡해요? 이건 그냥 죽으라는...."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대꾸를 했을 그녀가 어째선지 계속 입을 닫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클로이가 슬쩍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이아영 본부장은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얼굴이 바짝 굳어 있었다.

"…뭐야. 왜 그래요?"

"...."

"저기요. 정신 차려요. 대체 왜 그러냐니까?"

"...처음 봐요."

그제야 이아영 본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준우 씨가 저렇게 화난 거."

***

WDSO 서울 본부.

작전 본부실.

"...."

"...."

김민주와 한유빈은 마주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듯, 꽤나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만 이어지던 그때.

"...조용하네요."

김민주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말을 안 하니까 조용하죠."

"아니 우리 말고요."

김민주가 시선을 천장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여긴 너무 조용하다고요.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

한유빈 또한 김민주를 따라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폭풍전야... 뭐, 그런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길 한 차례, 이내 김민주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요. 뱅크 아이템도 입수했고, 에덴이 국제협회에 들어가는 것도 막았으니 어떻게 보면 잘 된 거긴 한데...."

"에덴이 제삼자에게 들어가는 건 잘된 일이 아니잖아요."

한유빈이 말하자, 김민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까."

"국제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그거야 뭐...."

김민주가 말끝을 흐렸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내 김민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러시아를 먼저 어떻게 할 거예요. 공격을 하든지, 거래를 하든지. 뱅크 아이템까지 빼앗긴 마당에 에덴은 마지막 남은 보루니까요."

"그럼 우리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이사회에서 러시아랑 대화해보려고 여러모로 노력 중이에요. 이두식 이사님이랑 사무총장님도 그렇고요. 근데 뭐...."

김민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잃을 게 없으니 더더욱 극단적으로 나올지도 몰라요."

"그럼 차라리 저희가 먼저 공격하는 게 낫지 않아요? 독일 전투로 전력도 많이 소모됐을 텐데, 그놈들이 준비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면...."

"지금은 힘들어요."

김민주가 한유빈의 말을 끊으며 즉답했다.

"국제협회보단 아니지만, 우리 병력도 피해를 많이 입었어요. 지금 바로 전투를 나설 여력도 안 되고요."

"그럼 우리라도...."

"가능하겠어요?"

김민주가 묻자, 한유빈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고작 몇 명으로 국제협회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잔챙이들은 몰라도 웨슬리 사무총장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김준우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도 준비할 게 있다고 부재중이잖아요."

"...하아. "

본부에 복귀한 이후로 뭘 하는 건지, 도통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준비를 하는 거래요?"

"저도 잘은... 훈련이라고밖에는 말씀 안 해주셨어요."

"훈련?"

그 말에 한유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인간이 훈련이 필요한가…?"

"그러게요."

김민주도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선생님이 준비될 때까진 우리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쯧… 가만히 있으면 괜히 더 불안하기만 한데."

"누가 아니래요."

그 말과 함께 또다시 사무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두 본부장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적막 속에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본부장님."

갑작스레 편창현 통제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 생겼나요?"

"저, 지금 강원도 쪽에서 던전 출현이 감지됐는데...."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감지된 이능파가 레드 등급을 한참 초과했습니다."

"네, 네…?"

"뭐?!"

그 보고에 김민주와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민주가 곧바로 벌떡 일어나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봉쇄 명령 내리고, 작전팀 대기시키세요!"

"저 그게...."

하지만 편 팀장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가 말을 이었다.

"바로 확인해보니... 김 팀장님이 벌써 진입하셨답니다."

"...!"

"...!"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짝 굳었다.

303

303

강원도, 영월.

도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야산.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던전 앞에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능파 파장은 안정적인데, 강도가 레드 등급을 한참 초과했어요. 이 정도면 오메가 급에 근접한 수치에요.」

그리고 그때, 이아영 본부장에게서 무전이 울렸다.

오메가 급.

실질적 토벌 불가 판정을 받은 던전에만 붙는 명칭.

서울 리젠 던전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피해를 안긴 등급이다.

당연히 혼자 오메가 급 던전을 토벌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고유 스킬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뭐, 근접이라는 건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위험한 건 변함이 없다.

아무리 훈련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죽음을 각오할 이유까진 없지.

"3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바로 작전팀 투입해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준우 씨.」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진입하려던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사뭇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부탁이니까…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던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렁거리는 입구를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온 기괴한 조각상과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

마치 고대 사원을 연상케 하는 풍경.

'차원형 던전이군....'

현실과 다른 공간에 생성되는 던전.

그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오묘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 그곳은 온갖 이끼와 덩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피라미드 사원이 보였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곧장 그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원형의 공간과 함께 커다란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일 던전인가…?'

하나의 던전에 오직 한 마리의 몬스터만 존재하는 단일 던전.

이 공간을 보아하니 다른 몬스터는 없는 듯했다.

한 마리만 상대하면 되기에 언뜻 쉬워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보스 몬스터가 상식 밖의 힘을 지닌 경우가 대다수다.

협회에서도 단일 던전에 더 많은 준비와 신경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일반 던전보다 사망률이 거의 두 배나 높다.

'쯧, 어려워지겠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스스스스―.

커다란 제단 앞으로 안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곳으로 응축되던 안개는 점점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다.

이윽고, 단검을 쥐고 있는 거대한 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대 문명의 복식을 갖춘 제사장의 모습.

온몸이 피로 얼룩진 그가 나를 발견한 순간.

카아아아아―!!

"...!"

전신이 오싹해지는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몬스터의 이름도, 정보도 모른다.

던전 내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순간이라도 집중을 잃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이런 곳에 굳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온 이유는 딱 하나.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해당 패시브의 효과로 인해, 귀하의 고유 스킬이 변경되었습니다.]

[귀하의 고유 클래스가 초기화되었습니다.]

[고유 스킬 : 황제]

[고유 클래스 : 성군]

오로지 나에 대해 알기 위해서.

"후우...."

정신 똑바로 차리자.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리길 잠시.

타앗―!

더 이상 생각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제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

러시아, 우랄산맥 인근.

화마에 의해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숲속.

"출입 가능한 던전부터 샅샅이 수색해! 하나도 빼놓지 말고!"

러시아 협회의 모든 인원이 모여든 그곳에서 드미트리 협회장이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아무렇게나 막 들어가지 말고 A-1 구역이랑 A-2 구역은 1팀이 맡고, 북부 지역은 2팀이, 나머지 구역은 3팀이 맡아!"

"아, 알겠습니다."

"네!"

모여든 인원들의 우렁찬 대답.

하지만 드미트리 협회장은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3일 안에 끝내야 하니까 빨리빨리 하자고."

드미트리 협회장은 그 지시를 마지막으로, 임시 작전지휘실로 걸음을 옮겼다.

현장 근처에 설치된 작은 컨테이너.

작전지휘실이라기보단 당직실에 가까운 그곳에 들어서자 이고르 통제팀장이 곧바로 술잔을 대령했다.

"쯧,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드미트리 협회장은 쭉 술을 넘기곤 꽤나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러시아 협회는 독립협회인 동시에 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협회로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몇몇 독재국가, 그리고 북한 정도.

그리고 러시아 협회가 속한 정부 기관은 다름 아닌 국방부였다.

당연히 그들의 최고 책임자 또한 드미트리 협회장이 아닌, 블라디미르 장관인 셈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협회에 지원은 고사하고 신경조차 안 쓰더니....'

막상 필요해지니까 제 마음대로 부려먹으려는 꼴이 영 못마땅했다.

게다가 전 병력을 투입하라니.

작전팀이 무슨 군대인 줄 아는 건가.

'애초에 전 병력이라고 해봤자 100명도 안 되는 인원인데....'

오죽하면 협회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작전 지휘를 하고 있겠는가.

개발도상국 협회 상황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 못마땅한 드미트리 협회장은 혀를 차며 목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이쪽 바닥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평소에 위험한 작전이 있다고 지원 좀 해달라고하면 들은 체도 안 하시더니."

이고르 통제팀장 또한 한마디를 거들었다.

"WDSO랑 국제협회가 그 아이템을 두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니까, 이제 와서 욕심이 난 거지 뭐. 먼저 아이템을 손에 넣으면 양쪽 모두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이제 와서 토벌 조직을 견제하고 싶으면, 애초부터 지원해줬으면 되는걸...."

"알잖아. 여긴 러시아야."

드미트리 협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이 힘을 갖는 건 피하고 싶지만, 국가가 힘을 갖는 건 마다할 수 없겠지."

그러자 이고르 통제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문득 깨달은 드미트리 협회장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아이템이길래 WDSO랑 국제협회에서 그렇게 혈안이 됐던 걸까."

"그게… WDSO에선 새로운 뱅크 아이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거에 대해서 팀원들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이고르 통제팀장은 이내 주변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무리 봐도 뱅크 아이템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그 말에 드미트리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해보십시오. 뱅크 아이템은 실질적으로 거래 및 양도가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두 조직이 손에 넣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저희 소유입니다."

"난 또 뭐라고… 야, 지금 상황을 좀 봐라. 국제협회를 예전 같은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며칠 전엔 독일 공습도 감행한 놈들이야. 그깟 원칙 하나 어기는 것쯤이야 우습지도 않을걸."

"국제협회는 그렇겠죠. 하지만… WDSO는 아니지 않습니까."

"...?"

그 순간, 드미트리 협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고르 통제팀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WDSO는 국제협회를 대신해서 나름 공식적인 국제기구로 인정받은 조직인데, 단지 국제협회를 견제하려는 이유 때문에 원칙을 어길 놈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

드미트리 협회장이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도 그럴 게,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리 봐도 뱅크 아이템은 아닌 것 같고... 다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거라니?"

"뱅크 아이템은 아니지만 특별한 규정도 없고, 무엇보다 WDSO랑 국제협회가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손에 넣으려고 하는 물건이라면...."

이고르 팀장이 뜸을 들이길 잠시.

"에덴이 아닐까 하고...."

"...!"

드미트리 협회장이 크게 움찔했다.

그 또한 에덴에 대해선 알고 있다.

아니, 아무리 모양뿐인 협회장이라고 해도 그걸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냥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실존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그게 러시아에서 발견됐다고?

'....'

드미트리 협회장은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다른 걸 떠나서, 에덴이라는 말에 갑자기 불안해진 까닭이었다.

현재 국제협회는 전 세계를 통제하려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국제 사회와 대립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일에 대해 공습까지 감행했다.

그런 이들에게 에덴이 어떤 의미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완벽한 통제를 위한 마지막 조건.

만약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게 정말 에덴이라면... 접근 금지 요청만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설령 우리가 먼저 손에 넣는다고 한들 쓰지도 못할 물건일뿐더러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약 정말 에덴이라면....

'WDSO가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이야....'

빌어먹을.

과연 이걸 찾는 게 맞는 건가…?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드미트리 협회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 장관님."

「뭔가.」

블라디미르 국방부 장관.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수색… 중단하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또.」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뭐가?」

드미트리 협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 러시아에서 발견된 것이 에덴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고, 그저 통제팀장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이었으니.

그런 걸 말해봤자 믿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그의 성격이라면 더 좋아할 수도 있었다.

드미트리 협회장은 다른 이유를 들어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국제협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저희가 다룰 수 있는 물건인지도 확실치 않고. 그냥 WDSO에 넘겨주시는 게...."

「드미트리.」

"예…?"

그러자, 핸드폰 너머에서 작은 실소가 들려오길 한 차례.

「혹시 죽고 싶나?」

"...."

드미트리 협회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난 자네 의견을 물은 게 아니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지.」

"...."

「한마디만 더 해봐. 광장에 네놈 모가지를 걸어줄 테니.」

드미트리 협회장은 이를 꾹 깨물었다.

적어도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저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드미트리 협회장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안 돼....'

드미트리 협회장은 여전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 정말 에덴이라면 우리가 찾는 순간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국제협회는 이제 더 이상 시민의 안전을 위한 조직이 아니다.

통제와 지배.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악무도한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지금 에덴을 찾고 있는 건, 그들에게 수고를 덜어주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독단적으로 수색 중지 명령을 내려야 하나?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 광장에 목이 걸릴 수도....

'시발....'

무엇 하나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상황.

드미트리 협회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리고 그때.

「혀, 협회장님!」

무전기에서 작전 1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데?"

드미트리 협회장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차, 찾은 것 같습니다…!」

"...!"

이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지만, 그것도 잠시.

드미트리 협회장은 애써 이성을 부여잡고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일단 다른 팀한테는 말하지 말고, 최대한 숨겨서 빠져나와."

「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냥 그렇게 해! 던전 빠져나오는 대로 나한테 가져오고!"

「아, 알겠습....」

그리고 그 순간.

쾅―!!

무전기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야, 야… 방금 뭐야! 괜찮은 거야?! 시발, 대답해!!"

「....」

드미트리 협회장은 곧바로 무전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조금씩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오던 그때.

「협회장님이십니까?」

한 남자의 목소리가 작전 1팀장을 대신해서 들려왔다.

304

304

우랄산맥 인근, 숲속.

화재가 덮친 그곳 어딘가에 위치한 네이비 등급의 동굴형 던전.

「야, 야… 방금 뭐야! 괜찮은 거야?! 시발, 대답해!!」

보스방 바닥에 떨어진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남자가 이내 무전기를 주워들었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이십니까?"

그가 목소리를 내자, 순간 응답이 끊겼다.

남자는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갑자기 왜 말씀이 없으신가요?"

「다, 당신....」

드미트리 러시아 협회장.

그의 목소리에선 당혹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어, 어떻게 벌써....」

"이 정도야 어렵지 않죠."

「저희 팀원들을 어떻게 한 겁니까…?」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슬쩍 흘겼다.

그리고는.

"죽은 것 같군요."

담담히 그 말을 내뱉었다.

「이, 이건 엄연히 침략 행위입니다! 공식적인 접근 금지 요청에, 군사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는데…!」

"하십시오."

남자가 드미트리 협회장의 말을 자르며 즉답했다.

"군사든, 핵무기든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흰 이제 노선을 바꾸기로 했으니."

「뭐, 뭐라고요…?」

"김준우가 살아 있는 한… 아무래도 제 목표를 이루기는 힘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전부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드미트리 협회장이 물었지만, 남자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말을 해준다고 해도 조금 있으면 다 의미가 없어질 터였으니.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에덴은 WDSO가 저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텐데… 이렇게 그놈들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

이후 드미트리 협회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무어라 소리쳤다.

욕설 같기도, 혹은 애원 같기도 했지만, 남자는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뒷정리는 잘하고 갈 테니."

남자는 대동한 병력을 향해 손짓했다.

쾅―!

쾅, 콰과광―!!

던전 밖에서 차례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현장에 포진한 러시아 협회 소속 전원을 상대로 무차별 폭격이 진행된 것이다.

남자가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도 더 이상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무전기를 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주변에 널린 시신들을 바라봤다.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웨슬리 다비드.

그의 굳은 표정에선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선을 바꾼다는 건, 다시 말해 국제사회를 통제하는 것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협회도, 작전팀도, 길드도 없던 그 시대.

그 어떤 체계도 존재하지 않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다.

모두가 국제협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것을 위해서는 딱 한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모든 토벌 조직을 파괴하는 것.

"...."

웨슬리 사무총장은 말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은은한 녹색으로 빛나는 돌멩이 앞에 멈춰 섰다.

에덴.

시니아의 핵이자, 이 모든 현상의 원인.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 순간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

―――!

강원도 야산에 출현한 근 오메가급 차원형 던전.

고대 사원을 연상케 하는 그곳에서 제사장이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주문을 읊는 순간.

콰직―!!

거대한 번개가 내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타이밍.

나는 서둘러 방어막을 둘렀지만.

쾅―!!!

"큭…!"

나도 모르게 한쪽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째 위력이 심상치 않다.

이 수준이라면 막기보단 피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사원 내부는 자유롭게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넓지 않다.

막무가내로 피하다간 움직임을 읽혀 그대로 코너에 몰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피하는 것보다 최대한 막아봐야겠군.

물론.

카아아아아아―!!

숙, 수욱―!

캉―!

마법과 칼.

두 가지를 한 번에 다루며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놈을 막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빌어먹을....'

일단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딘가 어색하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

검은 기류를 통한 공격과 방어, 이동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던 그 감각이 아니다.

마왕.

내 고유 스킬이자, 나를 세계 최초 SSS랭크로 만들어준 스킬.

이능력의 원형으로서, 검은 기류를 이용하여 온갖 스킬과 고유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

평생을 써온 그 스킬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그것도 추측조차 할 수 없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스킬로.

무엇보다 전신을 감돌던 원형의 힘도 사라졌다.

아마 이대로 국제협회와 다시 전투를 벌인다면 그땐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굳이 사지로 기어들어 온 것이다.

어떻게든 내 스킬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한 번....'

내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때마침 제사장이 단검을 들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새로운 스킬을 시전했다.

[고유 스킬 : 황제]

[발동 조건 확인 중]

그런데....

[발동 조건이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해당 스킬을 시전할 수 없습니다.]

"...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시전 불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순간 얼이 나간 사이.

서걱―!

"크윽!!"

결국, 제사장의 공격을 그대로 허용했다.

어깨에서부터 쭉 이어진 상처.

출혈량을 보니 꽤 깊은 모양이다.

'빌어먹을, 발동 조건이라니....'

고유 스킬에 그딴 게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대체 어떤 조건이 필요하길래....

[해당 고유 스킬을 발동하기 위해선 주변에 아군이 존재해야 합니다.]

[현재 확인된 아군 - 0명]

'시발 뭐야....'

아군이 없으면 발동이 안 된다고?

뭐 이딴 스킬이 다 있어?

'그럼… 혼자서는 절대 못 싸운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낭패다.

아니....

X됐다.

던전에 진입한 지 고작 30분.

지원 병력을 약속한 시각까지 2시간 30분이나 남았다.

고유 스킬도 없이 저걸 2시간 반 동안 상대할 수 있나…?

'...가능할 리가.'

시발.

그냥 사무실에 짱박혀 있을걸.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제사장이 또다시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쿵―!

쿵, 쿵, 쿵―!

하늘에서 수십 개의 붉은색 기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탓, 타앗―!

곧바로 몸을 움직여 내리꽂히는 기둥들을 가까스로 피해 다녔지만, 할 수 있는 건 딱 그것뿐이었다.

상대를 어떻게 쓰러뜨려야 할지.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제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다.

그저 지금 당장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칠 뿐.

공격 방법도, 대책도 아무것도 세울 수가 없다.

이전 같았으면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시간을 끌며 상대의 정보를 수집한다면 가망이 있었다.

아니, 확신이 있었다.

무조건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시간을 끌고, 아무리 정보를 수집해도 그것을 이행할 힘이 없다.

지금 당장 공격을 피하고, 죽을힘을 다해 몸을 움직여도 딱 그것뿐.

이대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상대를 쓰러뜨릴 일말의 가망조차 없다.

'빌어먹을....'

무력한 허탈감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이런 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었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그 끔찍한 현실에, 순간 이성마저 놓칠 뻔했다.

나는 늘 강자였다.

늘 누구보다 위에 있었고, 현장에서의 모든 판단과 선택권은 늘 내게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맡은 작전에서는 사망사고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내 팀은 작전 성공률 100%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달성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같은 업적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온갖 타이틀과 랭크, 스킬… 그 어느 것도 잃어선 안 됐다.

나는 늘 강자여야 했으니까.

늘 누구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고, 내가 모든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게 누군가에겐 불만이고, 누군가에겐 갑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불만을 품을지언정, 최소한 죽지 않게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래, 뭐가 됐건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회귀 직후에는 어떻게든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세계 랭킹 1위의 김준우로 돌아가서 내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현재 따윈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이곳이 정말 내 과거인지, 혹은 다른 세상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내가 돌아간다면 다 사라질 이들이 아닌가.

그런 곳보단 내 현실이 더 중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이곳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정말 의도치 않게....

그 결과 나에겐 수많은 권한과 책임, 영향력이 생겼고, 내 밑에는 또다시 수많은 이들이 날 바라보게 되었다.

만약 위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다.

뭐하러 귀찮게 목숨 걸고 위험한 짓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결국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 이상, 못 본 척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곳에서도 강자여야 한다.

근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렇게 폼 잡고 들어왔는데 죽어버리면, 쪽팔려서 성불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시발, 스킬 좀…!'

이가 부서져라 으득 씹어대던 그때였다.

[고유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스킬 해금 조건 - 강자의 책임]

[패시브 발동]

다시금 시스템 음성이 들려왔다.

[귀하를 신뢰하는 이들을 모두 아군으로 지정합니다.]

[아군 숫자 추산 중]

[총 아군 113,203명]

"어…?"

[고유 스킬 : 황제]

[발동 조건 확인 중]

[현재 확인된 아군 - 113,203명]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내 검은 기류 대신 밝은 황금빛이 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 황제]

[스킬 발동]

[확인된 아군 한 명당 모든 스테이터스가 10 증가합니다.]

[시전자가 사망하지 않는 한, 아군 또한 사망하지 않습니다.]

[아군의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머리 위에 황금색 왕관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 창.

[고유 클래스 : 성군]

그걸 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스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카아아아악―!

위협을 느낀 건지, 제사장이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무어라 소리쳤다.

쿵―!

거대한 검을 든 순백의 무언가가 내 앞에 강림했다.

몬스터나 생명체가 아닌, 초월적인 무언가.

이윽고 제사장의 손짓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나를 향해 그 거대한 검을 치켜들자.

쾅―!!!

거대한 섬광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공격에도 나는 그저 가만히 두 손을 쥐었다가 펴길 몇 차례.

'....'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고유 스킬 : 황제 - 대관식]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파앙―!

그 음침했던 공간에 쏟아지는 밝고 환한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제사장과 그 초월적인 존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305

305

"뭐라고…?"

러시아 국회.

블라디미르 국방부 장관에게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현장에서 수색 중이던 협회 인원이 모두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현재 드미트리 협회장을 포함해서 약 100명가량의 작전팀 전원이 연락 두절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연락이 끊기다니! 마지막으로 연락된 건 언젠데!"

"수색 시작 13시간쯤 지났을 때입니다. 어제 오전 8시부터 수색을 시작했으니...."

보고를 하던 보좌관과 블라디미르 장관이 누구랄 것 없이 동시에 시계를 바라봤다.

현재 시각은 수색 시작 후 하루가 지난 오전 8시.

그럼 벌써 연락이 끊긴 지 10시간 가까이 됐다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

블라디미르 장관이 꽤나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협회 통제팀에서 위치 추적 가능하잖아. 확인해 봤나?"

"아시지 않습니까. 협회 내에 제대로 작동하는 탐지기기는 없다는 거."

"...."

잠시 잊고 있던 사실에 블라디미르 장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설마 드미트리 그 새끼, 아이템 챙겨서 도망친 건 아니겠지? 위치 추적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하, 어쩐지 계속 불안하다고 밑밥을 깔더니만....

블라디미르 장관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상상조차 못 한 채.

"일단 현장으로 가서 찾아보게. 도망쳤으면 흔적이라도 남아 있겠지."

"알겠습니다."

"단서 나오는 대로 나한테 보고하고. 뭐… 만약 잡으면 생포해오고. 처분은 내가 직접 할 테니까."

그렇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보좌관에게 지시를 내린 순간.

쾅―!!!

갑자기 건물 밖에서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사무실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

블라디미르 장관은 곧바로 일어나서 창밖을 살폈다.

"...뭐, 뭐야?!"

저 멀리 커다란 화염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이 어딘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방향이면... 협회 아닌가."

"마, 맞는 것 같습니다."

보좌관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도심과 시민들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됐길래....

벌건 대낮에 모스크바 한복판에 있는 협회가 공격을 받은 것인가.

순간 블라디미르 장관의 눈앞이 까마득해진 그때.

'이제부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저조차 예상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했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김준우.

접근 금지 요청 직후 연락해온 그가 던진 그 한마디.

"...."

블라디미르 장관은 아비규환이 된 도심을 보고 나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

"아영 씨!!"

WDSO 대한민국 본부.

산하 연구소 이클립스, 뱅크 아이템 보관 구역.

갑자기 들이닥친 김민주 본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아영을 찾았다.

바싹 굳은 표정에서부터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이아영 본부장 또한 곧바로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국제협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

"...!"

그 대답에 이아영은 물론, 클로이 또한 눈이 동그래졌다.

"우, 움직이기 시작했다뇨. 러시아를 공격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러시아뿐만이 아니에요."

"...네?"

"러시아 협회를 비롯해서 유럽과 중동 협회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어요."

순간에 정적이 흘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차별 공격이라면… 설마...."

"네."

이아영의 물음에 김민주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통제하는 것을 포기한 거예요. 그 대신...."

"전부 파괴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네."

클로이가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럼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

"...."

김민주와 이아영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곧 마음을 가다듬은 이아영이 클로이에게 물었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 세계 협회를 전부 파괴한다니.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올 이유가...."

"국제협회는 뱅크 아이템을 모조리 빼앗긴 순간부터 궁지에 몰린 셈이에요. 잃을 게 없어진 마당에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클로이가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이젠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전 세계 협회가 모두 무너지거나 혹은 본인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래도 뱅크 아이템은 우리가 가지고 있잖아요!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그걸 생각 안 하고 움직일 리가…!"

"상관없어진 거죠."

클로이가 대답했다.

이아영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우리가 뱅크 아이템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나온다는 건....

"국제협회가 먼저 에덴을 손에 넣은 거예요."

"...."

"...."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아무튼 국제협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빨리 병력 준비해서 막아야 해요."

김민주가 말을 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선생님 호출해주세요."

"...."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연락해서 복귀해달라고…!"

"지금은 안 돼요."

이아영 본부장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능파가 오메가 등급에 가까울 만큼 강력한 던전이에요. 그 안에서는 무전은 물론이고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요."

"그, 그게 무슨...."

"준우 씨가 던전 진입 후 3시간 안에 연락이 없으면 그때 추가 병력을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때까지는 연락이 불가능해요."

이아영은 그렇게 말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30분 남았어요."

"기다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병력 투입해서 어떻게든 데려와야 해요!"

김민주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하지만 이아영과 클로이는 여전히 답답한 반응이었다.

그러자.

"저라도 가볼게요. 던전 위치라도 알려줘요!"

결국, 김민주가 참다못해 나섰다.

"제가 직접 가서 데려올 테니까."

"자, 잠깐만요!"

"괜히 들어갔다가 오히려 김준우랑 당신,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이아영과 클로이는 온갖 말로 그녀를 설득했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민주는 자신의 장비를 챙기곤 곧바로 이클립스를 벗어나려고 했다.

"...됐어. 인마."

하지만 곧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맞은편에서 만신창이가 된 누군가가 연구소로 들어왔다.

"서, 선생님…?"

"토, 토벌한 거예요…?"

"뭐야, 정말로?"

이아영과 클로이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김준우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 모여 있는 거 보니… 어째 좋지 않은 상황 같은데?"

"국제협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각국 협회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그렇군."

김준우는 그 짧은 설명으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지금 당장 모든 병력 대기시켜주십시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훈련은 끝났으니까."

그 말과 함께 먼저 이클립스를 나섰다.

***

WDSO 서울 본부.

사무총장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바로 병력을 파견해드리겠습니다!"

"예예,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일단 방어에만 신경 쓰고 계시면, 저희가 곧바로 가겠습니다!"

박인범 사무총장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었다.

국제협회의 무차별 공습 소식이 전달되자마자 각국의 모든 협회장이 WDSO에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

박인범 사무총장은 물밀 듯 밀려드는 그들의 연락에 일일이 응답해주느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혀, 형님!"

한창 바쁜 가운데, 이두식 이사가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소식을 전했다.

"중앙아프리카 통합 협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

가히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중앙 아프키라 통합 협회.

WDSO의 직속 지부이자, 핵심 부산물 생산 지역.

그곳이 함락됐다는 건… 이제부터 WDSO는 부산물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뿐만 아니라, 프렉탈 같은 최고급 부산물이 국제협회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일부러 그걸 노리고 먼저 친 거군....'

박인범 협회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독일 공습 실패로 인해 상당히 큰 전략적 손실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앞뒤 없이 달려든 게 아니었다.

부족한 전력과 장비를 보충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인 것이다.

"러시아, 동유럽과 중동 아시아 대부분의 협회가 이미 함락됐습니다! 각국이 군사 대응에 나서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는데… 국제협회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그마저도 힘든 것 같습니다."

"빌어 처먹을...."

박인범 협회장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 틈을 타서 테러 단체와 반정부 단체들 또한 들고 일어난 것 같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전역에 선전포고가 내려졌다고 하고...."

"...."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국제협회가 정확하게 원했던 상황이겠지.

막아야 한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전 세계가 돌이킬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질 것이다.

이전에 없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김준우는… 지금 어디 있나?"

"막 파견 준비 마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제협회의 움직임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어디로 먼저 가야 할지...."

"...."

박인범 사무총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유럽은 넘어갔다.

지리적으로 봤을 때 그다음은 아시아로 진출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똑똑한 놈이다.

언뜻 이성을 잃고 눈에 보이는 대로 모조리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러시아를 가장 먼저 공격함으로써, 에덴을 손에 넣었다.

그다음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을 공격해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중앙아프리카를 통해 부산물 확보, 중동 아시아를 통해 국제적인 혼란을 일으켰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차례로 공격하고 있어....'

그렇다면 다음은....

"아시아가 아니야."

"...네?"

박인범 사무총장이 이두식 이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중일을 포함해서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전부 WDSO의 본진이나 마찬가지야. 현재 시점에서 그곳을 공격하는 건 국제협회에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 그럼...."

"확실히 공습을 성공시킬 수 있는 곳이면서, 단숨에 전세를 끌고 올 수 있는 곳."

박인범 사무총장이 눈을 위로 치켜들어 이두식 이사와 눈을 맞췄다.

"미국."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음 공습 지역은 미국이다."

"...."

이두식 이사는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파견하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곧장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박인범 사무총장의 전화기는 쉼 없이 울려댔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모두 무시했다.

국제협회의 무차별적인 공격.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발발하고 있는 각국의 전쟁.

기어이 넘어가 버린 에덴.

'시발....'

두 손을 꽉 포개었다.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설립되었던 국제협회.

그들을 따라 세워진 각국의 수많은 독립 협회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의 안중에는 시민들의 안전 따윈 사라졌다.

그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통제와 권력뿐.

'서로 살리려고 만든 협회가, 이젠 서로 죽자고 싸우고 있구먼....'

박인범 사무총장은 이전에도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서로를 밟고 올라가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

던전이 나타나고, 몬스터가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인간들끼리의 싸움.

기어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06